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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릴 테이프 탄생 80주년 기념 음반 (Soul Of Analog 80th Anniversary Reel-To-Reel Audio Tape Recor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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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릴 테이프 탄생 80주년 기념 음반 (Soul Of Analog 80th Anniversary Reel-To-Reel Audio Tape Recording)

[ High Definition Mastering ]
Joan Baez, Harry Belafonte, Judy Collins, Ulla Meinecke, Muddy Waters 노래 외 10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ABC Record / ABC Record | 2018년 09월 19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24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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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릴 테이프 탄생 80주년 기념 음반 (Soul Of Analog 80th Anniversary Reel-To-Reel Audio Tape Recording)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8년 09월 19일
제조국 홍콩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
  • 01 Farewell, Angelina - Joan Baez
  • 02 Sylvie Performer - Harry Belafonte
  • 03 Take Five - Dave Brubeck
  • 04 Moon River - Earl Grant
  • 05 Autumn Leaves - Ozzie Bailey
  • 06 Goodbye Pork Pie Hat - Charles Mingus
  • 07 The Shadow of Your Smile - Illinois Jacquet
  • 08 The Moon is a Harsh Mistress - Judy Collins
  • 09 No More Blues - Dizzy Gillespie
  • 10 Greensleeves - Chet Atkins
  • 11 Die T?nzerin - Ulla Meinecke
  • 12 My Home is in the Delta - Muddy Waters
  • 13 Unfinished Jump - Corky Siegel
  • 14 Chimba Chica - Jaime Torres
  • 15 The Young Person’s Guide to The Orchestra - Antal Dorati

아티스트 소개 (15명)

노래 : Joan Baez (조안 바에즈 ,Joan Chandos Baez)
포크뮤직은 의식과 관계하는 음악이다. 누군가 그것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면 그것은 포크뮤직이라 말할 수 없다. 1960년대의 포크 뮤직이 저항과 리얼리즘의 성격을 갖추어 청년들의 절대적 호응을 받게 된 데는 ‘남과 여’ 한 쌍의 힘이 컸다. 두 사람은 포크의 콤비로서 당시 젊은이들의 의식, 시각, 욕구 등에 양심적 가치가 우선할 수 있도록 기여했다. 또한 ‘노래란 선율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가사 또한 살아 숨쉬어야... 포크뮤직은 의식과 관계하는 음악이다. 누군가 그것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면 그것은 포크뮤직이라 말할 수 없다. 1960년대의 포크 뮤직이 저항과 리얼리즘의 성격을 갖추어 청년들의 절대적 호응을 받게 된 데는 ‘남과 여’ 한 쌍의 힘이 컸다. 두 사람은 포크의 콤비로서 당시 젊은이들의 의식, 시각, 욕구 등에 양심적 가치가 우선할 수 있도록 기여했다. 또한 ‘노래란 선율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가사 또한 살아 숨쉬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 것도 두 사람의 공이었다. 남자는 밥 딜런이요, 여자는 존 바에즈였다. 존 바에즈는 포크 프로테스트 시대에 딜런의 여성 대응자(對應者)라는 위치 하나만으로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이처럼 딜런과 ‘평등’을 누렸을 뿐 아니라 어떤 측면에서는 딜런보다 더 오래 간직했다. 딜런은 케네디 대통령 암살 후 정치성으로부터 멀어져갔지만 바에즈는 끝까지 시대의 변화에 타협하지 않고 현실적 테마의 노래를 불렀다. 그래서 노선조정 이후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던 딜런과 달리 그의 여성 파트너는 레코드 회사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등 제도권의 박해공작에 시달렸다. 또 하나 바에즈가 ‘비교 우위’를 점하는 부분은 포크의 대중화와 관련하여 바에즈가 딜런보다 시간상 한 발 앞섰다는 사실이다. 딜런이 1959년 미네소타 대학 주변의 다방에서 통기타를 치고 있을 때 바에즈는 제1회 뉴 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출연, 1만 3천 명의 관객 앞에서 노래했다. 딜런이 첫 앨범을 발표하여 신고식을 마친 1962년에 바에즈는 이미 스타로 떠올라 < 타임 >지의 커버스토리에까지 등장했다. 따라서 ‘포크 대중화의 선두주자’는 딜런이 아니라 엄연히 존 바에즈였다. 이를테면 그가 딜런의 선배인 셈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그를 ‘딜런의 여성 대응자’라 일컫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딜런 우월주의(?) 혹은 습관적인 성차별이 깔려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존 바에즈는 실로 약자(弱者)를 위한 여교사와 같았다. 그는 늘 힘없는 사람과 상처받는 사람 편에 서서 노래했다. 세상살이에 뒤쳐지고 외롭고 망가진 사람들을 위해 통기타를 울렸고 미국내의 약자 가운데 한 계층을 이루고 있는 가난한 이주민의 정서를 노래에 자주 실었다. 모든 ‘어둠의 자식들’이 존 바에즈의 진정한 벗이었다. 국내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 존 바에즈의 올타임 리퀘스트들인 ‘세상의 가련한 길손’, ‘도나도나’, ‘솔밭 사이에 강물은 흐르고’ 등이 깊은 애조를 띠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약자의 편에서 노래를 하니 그 가락이 슬플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리고 바에즈는 그들을 달랜 것만이 아니라 잊혀진 자유, 잃어버린 권리를 쟁취하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시장으로 가는 짐차 위의 슬픈 눈망울의 송아지 한 마리, 그 위로 제비 한 마리가 날고 있네... 농부가 말했지. 불평일랑 하지 마. 누가 멍에를 쓰라고 했니. 넌 왜 제비처럼 자랑스레 자유로이 날 수 있는 날개가 없니... 송아지는 쉽게 갇혀 도살되지. 이유도 모른 채. 하지만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제비처럼 날아다니는 법을 배우지’ ‘도나 도나(Donna Donna)’ 존 바에즈는 나아가 이런 소외받는 계층 위에 군림하는 미국 정부, 그러면서도 전쟁만을 밝히는 미국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너무 이상한 꿈(Strangest dream)’과 같은 반전가요를 잇따라 발표했고 심지어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듯한 과격한 노래까지 불러 주위를 깜짝 놀라게도 했다. 정치색이 짙은 노래를 지향한 맹렬 여성의 이미지는 이미 출생 순간부터 고리가 맺어진 운명이었다. 존 바에즈는 1941년 멕시코가 모국인 아버지, 스코틀랜드와 아이랜드 피가 섞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했다. 그의 피부는 검었다. 백인 지배의 세상이었으니 어렸을 적부터 인종차별에 직면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 인구 8백 명인 뉴욕의 조그만 클레어렌스센터 마을에서 본낸 소녀시절에 대한 짧은 술회는 모든 것을 말해준다.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한 우리는 니그로였다.” 그의 부친은 핵물리학자였다. 그래서 방위산업체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곤 했지만 원폭의 가공할 위력을 알고 있는지라 번번히 거절했다고 하다. 존 바에즈의 아버지는 뼈대있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돈보다는 인류애’를 선택하는 이러한 줏대는 고스란히 딸에게 대물림한다. 딸은 민중적, 반(反)상업적 성격을 특질로 하는 포크 음악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집에서 들은 음악은 바하, 비발디, 모차르트였고, 여고시절에는 교내합창단(캘리포니아 팔로 알토 소재의 학교)에서 노래를 불러 다분히 ‘클래식적인’ 분위기였지만 마음은 통기타에 끌렸다. 졸업 직전 주머니를 털어 시어즈 로벅 기타를 구입한 그는 모친의 영향으로 보스톤 대학의 연극과에 입학하긴 했지만, 학업에는 뜻이 없었고 포크의 전당인 하바드 스퀘어 주변의 다방을 드나들곤 했다. 그는 한때 1년 공연 개런티로 10만 달러 이상을 주겠다는 프로모터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한 바 있다. 그는 “포크 뮤직은 의식과 관계하는 음악이다. 누군가 그것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포크 뮤직으로 말할 수 없다”며 거부 이유를 밝혔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존 바에즈는 이 세상이 부자와 빈자로 뚜렷이 이분되어 있음을 일찍이 간파했다. 초기 노랫말을 보면 약자의 교사답게 ‘가난’이라는 어휘가 무수하게 등장한다. ‘난 가난한 소녀야. 운명이 변변치 못하지. 날 항상 쫓아다니는 짐마차꾼의 아이가 있지. 그 앤 밤낮으로 날 유혹하지... 우리 부모는 그를 좋아하지 않아. 가난하기 때문이래. 따를 가치가 없다는 거야. 그는 생계를 위해 일하고 그 돈은 자기 것인데.’ ‘짐마차꾼 아이(Wagoner`s Lad)’ ‘삶이 돈으로 살 수 있는 거라면 아마 부자는 살고 가난한 자는 죽어야 할거야. 신이여, 나의 시련을 끝내주소서.’ ‘나의 시련(All My Trials)’ 미리 지적했듯 존 바에즈는 1950년대 말 보스톤으로 이사와 하바드 스퀘어 일대에서 활약하면서 수면위 급부상의 기틀을 다진다. 이윽고 1959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포크가수들의 등용문 역할을 했는데 얼마전 이를 담은 음반이 국내에 소개되었다)에 출연, 1만3천 명 청중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게 된다. 당시 < 뉴욕 타임즈 > 기자 로버트 셀톤이 그 관객들 가운데 끼어 있었고 그는 바에즈의 노래를 듣고 난 뒤 ‘스타가 탄생했다’는 기사를 썼다. 셀튼 기자는 그녀를 ‘전율을 자아내는 풍부한 비브라토와 열정적이고 잘 통제된 전달능력을 소지한 젊은 소프라노’라고 극찬했다. 1962년 < 타임 >지는 그를 커버스토리로 다루면서 ‘존 바에즈는 현 포크진영의 신인 가운데 가장 재능있는 가수’라고 언급했다. 그 해 그녀는 3장의 음반을 발표하면서 선풍적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포크 무대에서 자신의 ‘남성 대응자’인 밥 딜런과 조우하여 함께 뉴 포트 포크페스티벌 무대에 서는 등 콤비플레이를 전개, 주목을 끌기도 했다. 존 바에즈는 관념적 지성을 배격하고 실천적 가치를 최고로 삼고 사고를 행동에 직결시키려는 자세로 살아갔다. 단호하고 대담하기만 했던 그의 행적을 약식으로 정리해 본다. *1963년 8월 : 흑백 차별 폐지와 인종평등을 기치로 내건 워싱턴 대행진에 참여 *1964년 4월 : 자신에게 부과된 1963년 소득세의 60%에 대해서는 납세를 거부한다고 국세청에 통보(그 60%가 국방비로 지출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1964년 11월 : 국세청은 1963년 소득세의 납부 거부에 대해 5만1백82달러의 벌금을 부과(1965년 12월에는 1964년 소득세를 납부하지 않은 데 대해 3만7천달러의 벌금을 부과했고 1966년 12월에도 전년도 소득세를 내지 않아 세액이 75%증가했다고 통보. 2년 연속 그의 납세거부 이유는 ‘월남전 분위기 고조’였다) *1965년 4월 : 백악관 정문에서 반전 시위 *1966년 12월 : 1964년 데스로 죄수들에게 내려진 사형선고 감형을 촉구하는 크리스마스 기도회에 참석 *1967년 9월 : 징병거부자를 대상으로 입대영장 반송 운동을 조직화하는데 가담(5백명이 실행) *1967년 10월 :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육군 검사대에서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연좌 농성. 해산하지 않고 도로를 점령, 통행을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3명 모두 10일간 수감(집안 전체가 운동권이다!) *1968년 3월 : 징병거부 운동의 지도자인 데이비드 해리스와 연대, 여학생들에게 ‘No라고 말하는 남학생들한테 Yes’할 것을 촉구 반전과 인종평등을 위한 것이라면 뭐든지 다했다. 연좌 농성, 프리덤 라이드, 데모, 시가행진 등 모든 형식의 ‘저항’에 적극 참여했으며, 그런 것들이 순회공연을 대신했고 또 그런 것들이 순회공연 내용이기도 했다. 심지어 1965년에는 캘리포니아의 카멜 밸리에 있던 교사(校舍)를 개조해 ‘비폭력 연구사무소’(그 모토는 비폭력은 반드시 폭력을 이긴다)를 개설하기까지 했다. 이곳에서 수강생들은 『간디와 핵시대』와 같은 평화 관련 서적을 탐독했고 평화에 대한 세미나와 강의를 들었다. 강사는 물론 존 바에즈! 그런데 카벨 밸리의 일부 주민들은 연구소 회원과 수강생들이 ‘아름다운’ 자기네 영토에 침투,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즉각 연구소 활동을 중지하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순진한 마을 사람들 눈에는 이들이 히피, 그리고 자유연애를 부르짖는 ‘위험 인물’로 비쳐졌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의 클레임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연구소는 상당 기간활동을 지속했다. 마을주민뿐 아니라 미국 정부도 존 바에즈를 ‘통기타치는 파괴분자’쯤으로 간주했고 ‘페스트’같은 존재로 치부했다. 그가 대학생들에게는 ‘명성’일지 몰라도 정부에게는 ‘악명’이었다. 여러 차례 정부 관계자들이 직, 간접적으로 ‘유감’을 표해왔지만, 그는 이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현장을 뛴 동지이자 운동권의 지휘자인 데이비드 해리스와 1968년 결혼했다. 개혁과 투쟁을 결혼생활에 까지 이어간 이런 여성이 어찌 제도권의 협박에 흔들렸으랴. 우리에게 존 바에즈는 밥 딜런과의 로맨스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사실 그녀는 딜런을 진정으로 사랑했고 딜런도 그를 모델로 한 ‘조안나의 비전(Vision of Johanna)’ 등의 곡을 써 간접적으로 애정을 표시하기도 했지만 이 부분은 입장의 동일함(기간이 짧았지만)에 의한 동지애로 평가해야 할 줄로 여긴다.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갈 사항이 있다면 밥 딜런은 포크록이라는 장르를 개척하는 등 록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거인으로 추대되는 반면 막상 존 바에즈는 음악적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록 평론가들 중에 그의 작품을 걸작으로 꼽는 사람은 없다. 아마도 그가 직접 곡을 쓰지 못했다는 실력 폄하와 포크는 했지만 너무나 고운 목소리를 지녔다는 거부감이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딜런도 언젠가 “존 바에즈의 목소리는 포크하기에 너무 아름다워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 미성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실상 음반 판매면에서는 딜런을 앞서나갔고, 특히 포크의 프로테스트적 성격을 오래 견지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비평계가 조금은 잔인했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1970년대 이후 존 바에즈에게 정치색은 즐어들고 대신 사회사업가적 면모가 나타난다. 음악에도 변화가 일어나 전속 레코드사가 뱅가드에서 A&M으로 바뀌면서 통기타의 자연음으로부터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로 탈바꿈, 딜런의 전철을 밟는다. 이렇듯 변화가 깃들고 존 바에즈라는 이름 자체가 갖는 신비력이 떨어지고 있던 1971년에 이르러서야 ‘올드 딕스를 내몰았던 밤(The Night They Drove Old Dixie Down)’이라는 곡이 처음으로 빌보드 싱글차트 10위권에 진입했으니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1980년대에 그는 팝 음악의 공식 무대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지만(메이저 레코드사들의 기피 때문이다) 간간이 군비축소, 인종 차별 폐지, 자연보호 등 현실문제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비록 반전가요나 이념송을 내놓지는 않았지만, 입장선회로 빠지지 않았으며 50대인 지금도 여전히 인기를 지향하는 상업가요를 배격하고 있다. 현재의 모습이 어떠하든 실로 ‘1960년대의 존 바에즈’는 기념비적이다. 대중음악의 역사를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현실 반영과 저항의 올곧은 태도로 무대 또는 장외활동에 임했던 여가수는 그 외에 찾기 어려운 까닭이다. 1963년 존 바에즈는 잡지 < 룩 >에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나는 낙태로 아이를 죽이는 행위, 인종차별로 정신을 말살시키는 행위 등과 같은 실제사건에 강한 관심을 갖고 있다. 난 노래하길 좋아하고 신소리를 하자면 사람들은 내 노래 듣기를 좋아한다. 난 이 두 가지 측면을 결코 분리시킬 수가 없다. 그것들이 나의 모든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현실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고 있다. 노래에 대한 애정도 계속되고 있다. 두 부분 아니 그의 모든 부분은 그가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그 순간까지 변함없을 것이다. 1992년 말 존 바에즈는 버진 레코드사에서 앨범 < 나를 되돌려주오(Play Me Backwards) >를 발표했다. 그의 28번째 음반이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종식된 후, 일렉트릭 블루스 시대의 개막을 알린 ‘블루스의 큰 별’ 가운데 하나로 흔히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머디 워터스(Muddy Waters)를 손꼽는다. 즉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 중반까지 시카고 블루스 신을 개척한 인물로, 남부 델타 블루스에 뿌리를 둔 파격적이고 공격적인 슬라이드 기타 주법과 그가 토해내는 한풀이 식의 노래는 당시 혁명을 불러왔다. 수면 도중 심장마비 증세로... 제 2차 세계 대전이 종식된 후, 일렉트릭 블루스 시대의 개막을 알린 ‘블루스의 큰 별’ 가운데 하나로 흔히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머디 워터스(Muddy Waters)를 손꼽는다. 즉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 중반까지 시카고 블루스 신을 개척한 인물로, 남부 델타 블루스에 뿌리를 둔 파격적이고 공격적인 슬라이드 기타 주법과 그가 토해내는 한풀이 식의 노래는 당시 혁명을 불러왔다. 수면 도중 심장마비 증세로 1983년 4월 30일, 6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는 누구보다 블루스의 개념을 명확하게 정립시킨 ‘블루스 거목’으로 기억된다. 그에게 영향 받은 이들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입이 아플 정도로 머디 워터스는 훗날 후배 블루스맨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꾼다. 머디 워터스의 초기 레코딩에서 밴드의 이름을 따온 롤링 스톤스 뿐만 아니라 척 베리, 밥 딜런, 지미 헨드릭스, 제프 벡, 존 메이올, 버디 가이, 에릭 클랩튼, 피터 그린, 자니 윈터 등은 머디의 계승자들. 일례로 머디 워터스의 골든 레퍼토리를 장식하는 ‘Standing around crying’, ‘Rollin’ and tumblin’, ‘Hoochie coochie man’, ‘Honey bee’ 등은 당대 걸출한 뮤지션들을 블루스의 세계로 인도했다. 때문에 블루스 역사는 그를 두고 ‘일렉트릭 블루스의 왕(The King of Electric Blues)’이라 칭송한다. 1915년 4월, 매킨리 모건필드(McKinley Morganfield)라는 본명으로 남부 미시시피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머디 워터스의 이름은 정작 별명에서 유래되었다. 어릴 적부터 진흙탕에서 기타 치며 뛰어 놀길 좋아하던 그의 성향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우스개 소리로 그의 얼굴 생김새만 봐도 금새 진흙이 연상될 정도. 일찌감치 ‘델타 블루스의 거성’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과 선 하우스(Son House)의 레코딩에서 자극 받아 자신만의 연주 스타일을 구축한 그는 1943년 시카고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인 연주 여행을 떠난다. 1948년 곡 ‘I can’t be satisfied’, ‘I feel like going home’을 시작으로 1951년과 1956년 사이에 머디는 ‘Hoochie coochie man’, ‘Just make love to me’, ‘Still a fool’ 등 14개의 히트 송을 배출하게 된다. 머디 워터스를 논할 때 그의 음악을 빛내준 < 체스 > 레코드사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그가 무려 30년 간 < 체스 >와 파트너십을 지속시켰고, 그곳에서 다수 앨범을 내고 연주 인생을 꽃피우기 때문이다. 로큰롤 명인 척 베리(Chuck Berry)와 보 디들리(Bo Diddley) 등도 거기 출신. 그 후 < 콜롬비아 >에서 발표한 1977년 앨범 < Hard Again >은 후반기 대표작이다. 머디의 음악 생애는 사후 4년 뒤인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적되면서 전설로 남았다. 모던 블루스의 왕좌에 오른 비비 킹(B. B. King) 마저도 그를 존경했고, 에릭 클랩튼은 1994년 음반 < From The Cradle >을 그에게 헌사했다. 2004년 3월 < 롤링스톤 >지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로큰롤 명인 50인’ 순위에는 17위로 랭크돼 그 존재 가치를 더했다. 이제는 그의 이름을 딴 블루스 가게마저 생길 정도로 머디 워터스의 존재는 20세기 대중음악 역사를 빛낸 ‘블루스의 아이콘’으로 통한다.
노래 : Jaime Torres (제이미 토레스)
연주 : Dave Brubeck (데이브 브루벡)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작곡가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작곡가
연주 : Earl Grant (얼 그랜트 (오르간, 피아노))
재즈계의 ’보스’(Boss) 찰스 밍거스(Charles Mingus)는 전방위 재즈 뮤지션이었다. 비밥을 시작으로 모던재즈와 실험적인 빅밴드까지 관통하는 그의 연주 여정은 일반적인 베이스 연주인의 영역을 넘는 것이었다. 비밥 혁명의 주역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찰스 밍거스는 그의 전성기인 1950-60년대 중반까지 힘 있고 박진감 넘치는 베이스 플레이어로, ’ Good-bye pork pie hat’ (1959... 재즈계의 ’보스’(Boss) 찰스 밍거스(Charles Mingus)는 전방위 재즈 뮤지션이었다. 비밥을 시작으로 모던재즈와 실험적인 빅밴드까지 관통하는 그의 연주 여정은 일반적인 베이스 연주인의 영역을 넘는 것이었다. 비밥 혁명의 주역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찰스 밍거스는 그의 전성기인 1950-60년대 중반까지 힘 있고 박진감 넘치는 베이스 플레이어로, ’ Good-bye pork pie hat’ (1959)를 위시해 수많은 재즈 연주를 작곡한 작곡자로, 소울 빅밴드(Soul Big Band)의 리더로서 스윙에 한정되지 않는 한층 복잡다단한 현대적인 재즈 오케스트라를 확립한 음악 감독이었다. 이런 음악적 열정과 더불어 밍거스는 그가 활동하던 당시인 1950-60년대 재즈 음악계에서 당시로선 보기 드문 흑인 실력자였다. 흑인 재즈 뮤지션으론 처음으로 1952년, 드러머 맥스 로취와 자신의 음반사인 ‘Debut’을 창립했고, 빅밴드를 이끌던 1960년엔 ’재즈 아티스트 길드’(Jazz Artist Guild)란 조직을 창립시키며 뉴욕 클럽 지역에서 활동하던 흑인 재즈 뮤지션들과 연대해 클럽 주인들의 부당한 대우에 적극 대응하기도 했다. 흡사 보스를 연상시키는 그의 외모처럼 그의 인생은 가히 보스다웠다. 인종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던 밍거스는 1961년 미국 뉴욕 카네기 홀 앞에서 맥스 로취를 비롯한 흑인 뮤지션들을 주축으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동하기도 했다. 이러다보니 백인들 사이에선 그는 경계해야할 흑인 뮤지션 블랙리스트에 단연 선두를 자리 잡았고, 재즈 뮤지션들도 흡사 ‘재즈 정치인’과 같은 그의 음악외적인 활동에 대해 못마땅해 한다. 기인에 가까울 정도의 이런 그의 급진적인 행동은 음악으로도 표출된다. 대표적으로 늘 거론되는 < Mingus Ah-um > (1959) 의 수록곡 ’Fables of Fabus’에서 ‘Fabus’는 당시 ’리틀 룩 사건’이란 인종차별 사건으로 악명 높았던 아칸사스 주의 주지사의 이름을 써 풍자적인 연주로 표현했고, ’Oh Lord, Don’t Let Them Drop That Atomic Bomb on Me’ 와 ’Remember Rockefeller at Attica’ (1974) 역시 제목이 암시하듯 흑인의 입장에서 느끼는 억압의 굴레를 파격적인 연주로 한풀이하고 있다. 흡사 지사와도 같은 이런 밍거스의 모습은 하지만 그가 창조해 낸 풍성한 연주 세계에 비할 바 아니다. 스윙과 비밥을 근간으로 한 그의 연주세계는 하드밥과 가스펠, 소울의 영향이 짙게 깔린 소울 빅밴드 연주를 창조해냈다.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으로 대변되는 전통적인 빅밴드의 차원을 넘어서 밍거스는 10인조미만의 소 편성으로도 얼마든지 충만한 사운드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증명했다. 멤버들의 솔로 기량을 앞세우기 보단 작, 편자의 의해 악보에 근거한 밍거스 빅밴드의 사운드는 빅밴드가 스윙을 벗어나 프리/아방가르드에까지 영역을 넓힐 수 있게 된다. 밍거스가 씨를 뿌린 소울 빅밴드의 유산은 훗날 프로그레시브 빅밴드란 스타일로 이어지며 베이시스트 찰리 헤이든, 베이시스트 데이브 홀랜드, 피아니스트겸 작곡가 칼라 블레이와 같은 수많은 추종자들을 양산하며 현대 빅밴드의 선구자와 같은 위상을 점유한다. 1922년 미국 아리조나주에서 태어난 찰스 밍거스는 L.A 지역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면서 교회를 출석하면서 어께너머로 피아노, 트럼본, 첼로 등 다양한 악기를 섭렵했다. 고등학교 시절 지역을 방문한 듀크 엘링턴 빅밴드 연주를 관람한 밍거스는 재즈에 매료됐고 특히 밴드의 베이스 주자였던 지미 블랜튼(Jimmy Blanton)의 연주에 큰 감동을 받고 베이스 연주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베이스에 빠른 두각을 보인 밍거스는 1940년, 이런 저런 밴드를 거쳐며 본격적으로 베이스 연주인으로 나선다. 키드 오리(Kid Ory),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라이오넬 햄프튼(Lionel Hampton) 밴드에선 초기 뉴 올리언즈와 스윙을 연주했고 40년대 중반부턴 뉴욕 52번가에서 바야흐로 막 물이 오르던 비밥 열풍에 동참하며 찰리 파커와 버드 파웰 밴드에서 베이스를 연주한다. 1950년대 초, 걸출한 흑인 재즈 뮤지션들이 대다수 슬럼프에 빠져있던 것과 달리 밍거스는 기타리스트 탈 팔로우, 테너 색소폰니스트 스탄 게츠 등 백인 뮤지션들과 협연을 했고, 이런 기회를 통해 주류 재즈 무대에 지속적으로 자신을 알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리고 1953년엔 ‘비밥의 종언’이라고까지 불리는 명연 < Live at Massey Hall > 을 비밥의 동료였던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맥스 로취, 버드 파웰과 함께 ‘더 퀸텟’이란 밴드 멤버 자격으로 녹음해 자신이 설립하게 될 레이블 데뷔를 통해 발표한다. 이렇게 화려한 사이드 맨 시절을 통해 얻은 자신감으로 밍거스는 1952년, 드러머 맥스 로취와 의기투합해 자신의 레이블인 ‘Debut’을 창립한다. 여기에 1953년부턴 정기적으로 클럽을 빌려 작곡한 연주를 발표하는 식의 재즈 컴포저스 워크숍(Jazz composer’s Workshop)이란 행사를 개최했다. 재즈 워크숍은 흑인 연주인들 사이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호레이스 실버, 델로니어스 몽크, 아트 블레이키, 맥스 로취와 같은 하드밥의 주역들이 그의 워크숍에 동참한다. 음악인답지 않은 그의 비즈니스적인 면모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비밥에서부터 실험적인 사운드까지 폭넓게 아우른 그의 음반사업은 그러나 경영 악화로 결국 1955년 그가 설립한 Debut 레코드는 문을 닫고 만다. 음반사업을 정리한 밍거스는 어트랜틱을 통해 첫 리더작 < Pithecanthropus Erectus : 직립 원인 > (1956)을 발표한다. 새로 조직한 퀸텟 ‘재즈 워크숍’의 첫 작품이기도 한 앨범에서 타이틀 곡 ‘직립원인’은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게 된 위대한 인간이 어떻게 타락해 가는가를 변화무쌍하고 익살스런 편곡으로 그려낸다. 심오하기까지 한 블루스와 가스펠의 연주 영역을 제시한 ‘직립원인’을 계기로 찰스밍거스 재즈 워크숍은 향후 10년간 ‘흑인에 흑인을 위한 흑인의 빅밴드’라 할 소울 재즈 빅밴드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어틀랜틱 레코드를 통해 밍거스는 특유의 당차고 힘 있는 재즈 앙상블로 명반행진을 이어간다. 시종일관 우렁찬 혼 섹션으로 위풍당당한 재즈 앙상블을 소화한 ‘Haitian Fight song’ (1957), 박수소리와 때창, 고함소리를 활용해 흑인 교회 수요 예배의 전경을 이색적으로 표현한 ’Wednesday night prayer meeting’ (1959)을 연이어 발표한다. 베이스 주자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피아노 연주자이기도 했던 밍거스의 유일한 피아노 연주 앨범 < Oh Yeah! > (1962) 또한 어틀랜틱 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명연이다. 이런 가운데 그의 재즈 워크숍은 5인조에서 7인조라는 확장된 편성되고 그의 밴드 연주에서 편곡은 더욱 중요한 구심점이 되어간다. 그의 또 다른 수작으로 추앙되는 ‘밍거스 아 움’ < Mingus Ah-Um >(1959) 도 바로 새로 정비된 7인조 편성으로 녹음됐다. 메이저 레이블 콜럼비아를 통해 발표된 < 밍거스 아 움 >은 향후 트럼펫터 마일스 데이비스와 명콤비로 활동하게 된 프로듀서 테오 마세로(Teo Macero)가 프로듀싱했다. 앨범에선 재즈 명 스탠더드 ‘Goodbye pork pie hat’를 히트시켰고 당시 막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인종차별 문제를 건드린 ’Fables of Fabus’ 또한 주목받았다. 60년대 접어들면서 그의 밴드 재즈 워크숍은 11인조라는, 가히 빅밴드다운 위용으로 변모했다. 오넷 콜먼(Ornette Coleman)이란 프리 재즈 전도사의 등장으로 재즈뮤지션, 그중에서도 흑인들도 프리 적인 사운드에 차츰 심취해갔고 밍거스 또한 이런 사운드에 관심을 갖게 된다. 임펄스(Impulse!) 레이블을 시작으로 한껏 볼륨을 높인 밍거스의 재즈 워크숍엔 당시 한창 줏가를 올리던 프리-아방가르드 사운드의 주역들이 포진돼 있었다. 만능 리더주자 에릭 돌피(Eric Dolphy)를 위시해 롤랜드 커크(Rolnad Kirk), 잭키 맥린(Jackie Mclean)와 같은 명연주인들이 그의 밴드를 거쳐갔다. 기존 그의 발표한 곡들과 스탠더드를 11인조 앙상블로 리메이크해 녹음한 < Mingus,Mingus,Mingus,Mingus,Mingus > (1963)를 시작으로 같은 해 발표된 < The black saint & the sinner lady > 로 밍거스는 또 한번의 일가를 이뤄낸다. 앨범서 밍거스의 밴드는 연주의 자유로운 즉흥성을 배가시키며 멤버 개개인 자발적인 사운드가 충돌하면서 빚어지는 불협의 매력을 제시했다. 이름 하여 총체적 즉흥(Collective Improvisation)을 통해 재즈 빅밴드가 한층 모던한 사운드로 탈바꿈해 가는 순간이었다. 물론 당시 오넷 콜먼의 프리 재즈처럼 불협으로 일관하는 무형식의 난해한 사운드가 아닌, 불협과 앙상블을 오가며 기승전결의 형식미가 돋보이는 프리 사운드였다. 음악적으로 한창 정점에 달달한 찰스 밍거스는 그러나 이때를 기점으로 차츰 쇄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음악 외적으로 ‘아티스트 길드’를 조직해 흑인 재즈 뮤지션의 권리 보장에 앞장섰지만 그의 의도처럼 상황은 개선되지 않고 있었다. 여기에 출간하기로 했던 자서전의 계약이 무산으로 돌아갔고, 무리한 밴드 운영으로 인해 빚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여기에 거래 은행의 도산과 신경쇄약까지 이어져 밍거스는 60년대가 끝나갈 시점까지 이렇다 할 후속 작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돈이 필요해 다시 음반 작업에 나선 밍거스는 역작 < 밍거스 아 움 >의 제작자 테오 마세로를 찾아간다. 그리고 테오와 다시 손을 잡고 찰스 밍거스는 콜럼비아에서 발표한 < Let my children here music > (1971)으로 다시 한번 혁신적인 사운드를 일궈낸다. 클래식 오케스트라에 버금가는 풍성한 관악기편곡이 돋보인 앨범서 ’Adagio ma non troppo’로 주목받는다. 문제되던 재정문제도 해결 돼 그가 창립했던 Debut 레코드를 판타지 레이블에서 인수해 밍거스는 다시 창작의 안정적인 기반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말년에 접어든 1974년, 초기 퀸텟 사운드로 돌아간 밍거스는 대니 리치몬드(드럼), 돈 풀렌(피아노), 잭 왈라스(트럼펫), 조지 아담스(색소폰)처럼 당시 신예 뮤지션들을 불러 모아 < Changes 1&2 > 를 발표한다. 치밀한 계산과 프리적인 연주가 강화된 작곡은 그의 후기 명연으로 기록된다. 영화음악에도 관여해 밍거스는 < Cumbia & Jazz Fusion > 의 스코아를 맡으며 창작열을 불태웠다. 이런 열화와 같은 노익장에도 불구, 1977년 밍거스는 파킨스씨 병을 얻고 만다. 휠체어 신세가 된 밍거스는 이듬해부턴 사지가 마비돼 더 이상 베이스 연주를 할 수 없게 된다. 사망 1년 전인 1978년, 그의 마지막 프로젝트가 예비 돼 있었는데, 그 주역은 찰스 밍거스와 포크 가수 조니 미첼이었다. 당시 재즈 퓨젼의 물결에 동참하고 있던 조니 미첼은 평소 밍거스의 자유분방하고 호방한 사운드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던 차에 밍거스의 육성을 담아 자신의 독집 앨범에 담게 된다. 1979년 1월 밍거스는 파란만장한 재즈 일대기에 종지부를 찍으며 57세 나이로 숨을 거둔다. 같은 해 그의 음악성에 깊은 오마주를 담은 조니 미첼의 < Mingus > 가 발표됐고 밍거스의 분신과도 같은 스탠더드 ‘Goodbye pork pie hat’은 망자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며 조니 미첼의 체념하는 듯한 목소리로 울려 퍼졌다. 재즈 음악 이상의 족적을 남긴 찰스 밍거스를 기념하기 위해 미망인 슈 밍거스(Sue Mingus)는 그가 남기고 간 전 재산을 투자해 밍거스 재단을 설립한다. 그가 불철주야 매달렸던 재즈 뮤지션들의 저변확대에 기여한 재단은 차츰 규모가 커져 1991년엔 밍거스의 음악을 사랑하는 젊은 재즈 뮤지션들이 모여 밍거스 빅밴드(Mingus Big band)를 창립하기에 이른다. 랜디 브레커, 케니 드류, 잭 왈라스 등 재즈계에 내노라 할 실력파 뮤지션들이 포진된 밍거스 빅밴드는 1993년 첫 앨범 < Nostagia in time sqaure > 를 발표하고 현재까지도 전 세계를 무대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통해 밍거스의 유산을 이어가고 있다.
연주 : Illinois Jacquet (일리노이 자켓 )
재즈 테너 색소폰 연주자 재즈 테너 색소폰 연주자
비밥의 선구자 찰리 파커(이하 버드)와 디지 길레스피(이하 디지)는 바늘과 실처럼 항상 따라다니는 존재였다. 엄청난 스피드의 솔로와 한번에 2개 이상의 음을 동시에 내는 찰리 파커의 연주 재능은 비밥의 혁명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찰리 파커의 이런 재능을 먼저 알아본 것은 바로 그의 동반자이자 라이벌이었던 트럼펫 주자 디지 길레스피였다. 디지는 항상 버드의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곤 했다. 그러나 이런 연유에서 ... 비밥의 선구자 찰리 파커(이하 버드)와 디지 길레스피(이하 디지)는 바늘과 실처럼 항상 따라다니는 존재였다. 엄청난 스피드의 솔로와 한번에 2개 이상의 음을 동시에 내는 찰리 파커의 연주 재능은 비밥의 혁명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찰리 파커의 이런 재능을 먼저 알아본 것은 바로 그의 동반자이자 라이벌이었던 트럼펫 주자 디지 길레스피였다. 디지는 항상 버드의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곤 했다. 그러나 이런 연유에서 그는 항상 ‘버드 다음’이라는 식으로 ‘2인자’ 취급을 받곤 했다. 하지만 버드의 음악성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던 사람은 디지였고, 그것을 가능케 해준 사람도 바로 디지였다. (그리고 그들이 창조해낸 새로운 재즈 음악 ‘비밥’의 명칭 역시 디지가 고안했다.) 실제로 디지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찰리 파커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얘기할 정도로 버드에게 선사한 디지의 공헌은 막대했다. 눈칫밥을 먹어가며 독학으로 재즈를 익힌 버드와는 달리 디지는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에서 클래식을 전공했다.(물론 중간에 뛰쳐나온다.) 음악적인 지식이 전무했던 찰리 파커는 193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저곳을 배회하던 떠돌이 음악인 신세였고, 디지는 이미 그 실력을 인정받아 1937년부터 테디 힐 오케스트라의 트럼펫 주자였다. 하지만 1941년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서의 이들 둘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디지는 버드가 지닌 천재성에 매료 되 그와 의기투합한다. 버드가 연주해서 유명해진 ‘Groovin’ high’, ’Salt peanuts’, ’Hot house’, ’Shaw ’nuff’등은 모두 디지가 작곡했다. 1945년부터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를 무대로 활동한 이들 콤비는 버드가 곡의 영감과 아이디어를 제공하면 디지가 그것을 흡수해 곡을 쓰는 방식이었다. 독보적인 음악성을 지닌 찰리 파커의 악상은 이렇듯 디지의 체계적인 음악지식에 의해 악보로 재현되었기에 우리가 지금 버드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는 셈이다. 디지가 재즈사에 남긴 공헌은 버드와의 콤비 플레이 이상이다. 1947년 버드와 함께 한 퀸텟 활동을 접고 초유의 비밥 빅밴드(Bebop Big Band)를 결성해,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시도한다. 이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그가 고안한 ‘쿠밥’(Cubop)이라는 장르인데, 쿠바 출신의 타악기 연주 대가 차노 포조(Chano Pozo)를 초청해 비밥과 아프로 큐반 리듬의 온전한 결합을 시도하며 재즈 내에서 본격적인 ’퓨전‘을 실험한 최초의 인물로 디지는 기억되다. 재즈의 명 스탠다드로 자리 매김 한 대표 곡 ’A night in tunisia’, Cubana bop’과 같은 곡은 아프로 큐반 재즈의 원형을 제시했다. 또한 그의 빅 밴드에서 활동하던 밀트 잭슨, 제임스 무디, 유셉 라티프, J.J 존스과 같은 50-60년대 ‘모던 재즈 쿼텟’(Modern Jazz Quartet)이란 이름으로 모인 걸출한 뮤지션들을 배출했고, 그의 트럼펫 연주는 이후 팻츠 나바로, 클리포드 브라운 그리고 마일스 데이비스의 연주에 영향을 끼치며 비밥이 한층 그 흑인성을 더하며 하드 밥 (Hard Bop)으로 진화 해 가는데 기여한다. 1917년 노스 캘롤라이나 주 출신인 디지는 12세때부터 트럼펫을 손에 잡고 이후 대학에서 정규 음악교육을 받지만, 뮤지션이 되기 위해 자퇴한다. 30년대 스윙시대를 빛냈던 트럼펫 주자 로이 엘드리지(Roy Eldridge)의 영향을 받은 그는 1937년 테디 힐 오케스트라를 시작으로 프로로 데뷔한다. 이후 1939-1941년까지 캡 캘로웨이(Cab Calloway) 빅 밴드에서 활동하지만 리더와의 사소한 다툼으로 이윽고 해고된다. 이윽고 그의 첫 음악동지 테디 힐이 세운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 입성, 버드를 비롯한 비밥의 명인들과 음악적 교분을 나누며 1941-1943년까지 엘라 핏 제럴드, 베니 카터, 콜맨 홉킨스의 레코딩 세션에 참여하며 비밥의 혁명을 준비한다. 1942년 얼 하인즈 빅밴드에 합류하며 디지는 버드와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되었고 이때 밴드의 보컬주자 빌 엑스타인의 보컬로 그의 대표작 ‘A night in tunisia’(1943)을 발표한다. 1945-1947년까지 버드와 함께 퀸텟을 조직, 비밥을 세상에 알렸고, 1947년부터 자신의 비밥 빅밴드를 이끌면서 아프로 큐반 음악을 재즈에 소개한다. 1950년엔 버드와 다시 만나며 < Bird & Diz >를 버브 레이블에서 공개했고, 이후 1950년대 내내 버브사를 통해 자신의 연주에 큰 영향을 준 로이 엘드리지와 함께 한< Dizzy Gillespie & Roy Eldridge >(1954), 10년 동안의 빅 밴드 활동을 중간 결산하는 라이브 명반 < At Newport >(1957)을 발표한다.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버드와는 달리 디지는 이후 60년대부터 죽을 때까지 지속적인 활동을 보이는데, 자신의 빅 밴드를 해체시키고 소규모 밴드 중심으로 활동한 그는 레오 라이트(Leo Wright), 라로 쉬프린(Lalo Schifrin), 제임스 무디(James Moody), 케니 바론(Kenny Barron)과 같은 60년대 스타급 재즈 뮤지션들과 교류했고, 70년대 초엔 재즈 자이언츠(Jazz Giants)라는 프로잭트 밴드를 결성, 델로니우스 몽크 ,소니 스티츠, 아트 블래이키와 같은 40-50년대 비밥 명인들과 재결합을 시도한다. 이후 재즈 계에서 그의 영향력은 차츰 줄어 들어갔지만, 후배 재즈 뮤지션들은 그의 업적을 칭송하며 80년대까지 그와 함께 연주를 같이 한다. 그는 최근 개봉했던 영화 ‘리빙 하바나’를 통해 소개된 아르투로 산도발(트럼펫)과 파키토 리베라(색스폰)와 같은 쿠바 출신의 뮤지션들을 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맡았다. 그의 정력적인 활동은 죽기 1년 전인 1992년까지 지속되었다. 디지는 비슷한 시기 자웅을 겨뤘던 버드와 같은 천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흑인이라는 운명’에 자신을 파괴했던 버드와는 달리 그는 자신을 아낄 줄 알았고, 오랜 기다림 끝에 대중적인 인기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버드와 함께 ‘비밥의 산파자’라는 영예와 더불어 많은 후배 뮤지션들을 키워내며 재즈 사에서 버드에 못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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