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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뷰 레이블 LP 모음집 (Bellevue The Perfect Vinyl Collection) [8LP]

[ 박스세트 ]
Elvis Presley, Bob Dylan, Everly Brothers, Helen Shapiro, The Shirelles 노래 외 52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Bellevue | 2018년 11월 22일 리뷰 총점6.0 정보 더 보기/감추기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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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뷰 레이블 LP 모음집 (Bellevue The Perfect Vinyl Collection) [8LP]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8년 11월 22일

관련분류

디스크

Soul Classics
  • A1 When A Man Loves A Woman - Percy Sledge
  • A2 I Got A Woman - Ray Charles
  • A3 You Send Me - Sam Cooke
  • A4 Save The Last Dance For Me - The Drifters
  • A5 Duke Of Earl - Gene Chandler
  • A6 Ain'T No Sunshine - Al Jarreau
  • A7 Release Me - Little Esther Phillips
  • A8 You Got What It Takes - Marv Jonnson
  • B1 Stand By Me - Ben E. King
  • B2 Part 1 - The Isley Brothers
  • B3 Ready Or Not Here I Come (Can'T Hide From Love) - The Delfonics
  • B4 Please, Please, Please - James Brown
  • B5 Do You Love Me - The Contours
  • B6 I Know (You Don'T Love Me No More) - Barbara George
  • B7 Kiss And Say Goodbye - The Manhattans
  • B8 Always & Forever - Heatwave
Blues Masters
  • A1 Boom Boom - John Lee Hooker
  • A2 Smokestack Lighting - Howlin' Wolf
  • A3 Ain't That Lovin' You Baby - Jimmy Reed
  • A4 Every Day I Have The Blues - B.B. King
  • A5 Key To The Highway - Big Bill Broonzy
  • A6 I'm Tore Down - Freddy King*
  • A7 Fattening Frogs For Snakes - Sonny Boy Williamson
  • A8 Misery Blues - Champion Jack Dupree
  • B1 Hoochie Coochie Man - Muddy Waters
  • B2 Dust My Blues - Elmore James
  • B3 Ain't Nobody's Business - Jimmy Witherspoon
  • B4 My Babe - Little Walter
  • B5 Blues 'Round My Door - Lonnie Johnson
  • B6 I Can't Quit You Baby - Otis Rush
  • B7 Dyna-Flow - Albert King

아티스트 소개 (57명)

노래 : Elvis Presley (엘비스 프레슬리)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오늘날 폴과 비틀스를 있게 한, 단 한사람의 영향을 꼽는다면 위 해설처럼 단연 트럭운전사출신 엘비스 프레슬리다. 존 레논은 이를 결정적 한마디로 축약한다. “엘비스가 나타날 때까지 내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무 것도 없다(Nothing affects me until Elvis)." 존과 폴이 만나서 처음 마음먹은 것은 사실 엘비스의 음악을 더 강하게 표출해내는 것일 뿐이었다. 그들을 통해서 로큰롤의 진정한 역사는 ‘시대의 풍운아’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개막되었다는 사실이 다시금 확인된다. 물론 역사가에 따라 로큰롤의 효시를 행크 발라드(Hank Ballard)나 빌 헤일리(Bill Haley) 또는 척 베리(Chuck Berry)로 꼽기도 한다. ‘Work with me, Annie’ ‘Crazy man crazy’ ‘Maybellene’ 등과 같은 이들의 대표곡들이 시기적으로 먼저 구동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 다수 대중들은 여전히 로큰롤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엘비스가 나와서야 비로소 그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빌보드지의 결론. ‘1953년 록음악이 시작되었다고 하나 정작 차트나 방송에서 그 시대를 풍미하기 시작한 것은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싱글 ‘Heartbreak hotel’이 연속 8주 넘버원에 머물면서부터였다.’ 초기 로큰롤은 척 베리나 버디 할리와 같은 탁월한 ‘작가’를 소유했다. 리틀 리처드나 제리 리 루이스라는 출중한 ‘배우’ 그리고 조 터너, 보 디들리와 같은 ‘음악감독’들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로큰롤은 강풍을 휘몰아칠 역동적 ‘스타’가 필요했다. 그가 엘비스였다. 그 시대는 흑인의 리듬 앤 블루스를 소화해줄 백인가수를 요구했고 엘비스는 백인대중들로부터 ‘저 친구는 백인이면서 왜 검둥이노래를 부르는 거야?’라는 의아함을 일으킬 만큼 탁월한 흑인감성의 보유자였다. 이러한 시의성은 그러나 일반의 인식처럼 56년 RCA 소속의 엘비스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었고 이미 54년 선 레코드사의 엘비스로서 확립된 것이었다. 샘 필립스 사장의 전설적인 선 시절에 엘비스는 ‘That`s all right’, ‘Blue moon of Kentucky’ 와 ‘Mystery train’ 등을 부르면서 컨트리와 R&B를 크로스오버화한 신종의 로커빌리를 선보이면서 벌써 ‘웨스턴 밥의 왕’으로 불렸다. 이 때 이미 순회공연에서 팝 음악사상 초유의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다. 『뉴스위크』는 ‘금세기 백년간의 스타’ 특집기사를 다루며 그의 등장을 ‘20세기의 사건’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당시 엘비스 백업 밴드에서 드럼을 쳤던 D.J. 폰타나는 54년 상황을 다음처럼 술회한다. “엘비스 무대가 끝나고 나면 노래를 따라해 줄 관객들은 다 빠져버려 아무도 없었지요. 애들은 백 스테이지에서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습니다. 내 생각에 그 애들은 아마 우리 연주는 듣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오로지 ‘처음으로 흔드는 가수’ 엘비스를 보고자 하는 것이었죠.” 로컬 무대에서 전국 네트워크 TV로 진출하면서 마침내 ‘엘비스마니아’는 폭발했다. 미국의 3대 전국 공중파 방송 ABC CBS NBC의 체제가 정립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그는 텔레비전시대의 영웅으로서 ‘라디오스타를 죽이는’ 새로운 미디어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타미와 지미) 도시 브라더스의 CBS < 스테이지 쇼 >, NBC의 < 밀턴 벌 쇼 >와 < 스티브 알렌 쇼 > 그리고 저 유명한 CBS의 < 에드 셜리번 쇼 >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벌써 음악의 영상시대를 주도했다. 음악이 음반으로만 소구하던 시대는 ‘섹시 가이’ 엘비스의 출현으로 끝났다. ‘보는 음악’ 시대를 주도한 최초의 인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엘비스였다. 스탠다드 팝의 파수꾼 프랭크 시내트라도 자기 TV 쇼의 떨어지는 시청률을 참다못해 ‘음악의 공적(公敵)’이라고 성토해마지 않았던 엘비스를 출연시켜야 했다. TV 뿐만 아니라 영화 최초의 로큰롤 스타도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 러브 미 텐더 > < 러빙 유 > < G.I. 블루스 > < 블루 하와이 > 등 31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그는 관객들에게 로큰롤의 열정과 록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의 호소력을 제공했다. 음반 텔레비전 그리고 영화라는 ‘삼국통일’에 성공하며 천하를 제패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이 아래로 보일 정도의 막강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77년 사망하면서 그의 캐리어가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그는 무려 2억5천만장의 앨범을 팔았다. 이 기록에 가장 접근한 인물은 비틀스가 아닌 2억장의 빙 크로스비(캐롤 ‘White Christmas’가 결정적이다)며 프랭크 시내트라는 겨우 4천만장에 불과했다. ‘1인 기업’ 엘비스는 막대한 돈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인 핑크를 포함한 갖가지 칼라의 자동차 캐딜락을 구입했고 멤피스에 4만 달러 짜리 목장 그리고 10만 달러로 저택 그레이스랜드를 샀다. 전용 비행기는 물론 텔레비전 세트 그리고 첨단기계들도 마련했다. 물론 지금이야 흔해 빠진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특히 엘비스와 같은 하층계급 청년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부의 상징들이었다. 동시대 그리고 후배가수들이 일개가수에서 기업으로 융기한 엘비스를 통해 신분상승과 스타덤 획득 욕구를 품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엘비스처럼 슈퍼스타이면서 동시에 부자가 되고 싶어했다. 버디 할리는 엘비스를 빅 스타로서 존경했고 밥 딜런의 음악동기는 엘비스보다 큰(bigger than Elvis)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톰 존스는 아예 영국의 제록스판 엘비스였다. 엘비스처럼 구레나룻을 길렀던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직접 그를 만나기 위해 그레이스랜드 담을 넘다가 제지당했고 그룹 퀸은 엘비스를 안중에 두고 50년대 로큰롤풍의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를 만들었다(로저 테일러의 증언 “처음으로 텔레캐스터와 부기 앰프를 쓴 다소 빈약한 사운드였다. 분명 엘비스를 염두에 두고 만든 곡이었다.”). 마크 알몬드(Mark Almond)의 명쾌한 한마디를 들어보자. “그는 왕이다. 그밖에 다른 코멘트는 일체 필요없다!” 하지만 60년 전역 이후 엘비스는 달라졌다. 매니저였던 톰 파커 퇴역대령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음악방향이 빗나간 것이었다. 예의 로큰롤 넘버와는 거리가 먼 It`s now or never나 Surrender와 같은 감상적인 이탈리아 민요를 영역해 불렀다. 변화(아니면 변신?)의 징조는 프랭크 시내트라 쇼에 출연했을 때 뚜렷이 나타났다. 이 쇼에서 엘비스는 스탠다드 가수의 상징인 턱시도 정장을 했으며 호스트 프랭크 시내트라와 서로의 대표적 히트곡인 ‘Witchcraft’와 ‘Love me tender’를 바꿔 불렀다. 이 시점을 계기로 엘비스가 로큰롤을 버리고 스탠더드 팝 가수로 돌아서 청춘진영을 배신했다는 주장이 고개를 비집는다. 명백한 훼절이라고 단정해도 선뜻 반대논리를 펴기 어렵다. 그러나 친(親)엘비스 측은 그로써 그가 로큰롤 가수에서 ‘국민가수’로 승격하는 의미 있는 업적을 남기게 됐다고 반박한다. 로큰롤만의 논리로 음악을 풀고 엘비스를 규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어떻게 가치판단을 하느냐는 것은 관련자의 이데올로기나 각 시대의 성격에 따를 수밖에 없다. 변절이든 성숙이든 이 점만은 분명하다. 엘비스의 보컬이 초기의 로큰롤가수로 한정되었을 때 과연 후대에의 보컬 영향력을 소지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의 가창력은 음역, 에너지, 통제력, 피치 등 모든 면에서 압권으로 평가되어왔다.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었지만 ‘멀티칼라’인 그의 보이스에는 자니 레이의 급격한 변색, 두왑 그룹인 잉크스파츠(Inkspots) 빌 케니의 테너, 딘 마틴의 솜사탕 그리고 마리오 란자의 풍미가 동거했다. 그러면서도 로이 오비슨과 같은 유니크한 개성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스탠더드 발라드를 소화함으로 해서 우리들은 ‘Are you lonesome tonight’, ‘Suspicion’, ‘In the ghetto’, ‘The wonder of you’, ‘Fool’, ‘My boy’ 등의 팝 고전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명백한 역사의 유산이다. 그가 없었다면 성악가나 스탠더드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만을 접했을 것이고 로큰롤 싱어가 선사하는 발라드의 진미(珍味)를 영원히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공존공영 가능성을 그처럼 실감나게 시범한 가수도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이미 흑인감성의 전달로 로큰롤이 ‘흑백의 퓨전’임을 목소리 하나로 입증한 그는 이어서 역시 매직 보컬로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제휴를 일궈내는 업적을 남겼다. 어쩌면 우리가 70년대 록과 메탈 분야에서 형식을 확립한 이른바 ‘록발라드’라는 것도 그 원조는 엘비스일지도 모른다. 엘비스는 목소리를 통해 대중의 공감대를 전달한 몇 안 되는 가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건조한 보이스와는 거리가 먼, ‘이끼가 잔뜩 낀’ 풍부한 목소리였다. 아마 신나는 로큰롤 ‘Burning love’ 한 곡으로도 충분히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후대 음악팬들이 그의 노래를 듣고 더러 ‘느끼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후반기의 노래 가운데는 그런 요소를 풍기는 곡이 있었다. 하지만 엘비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거기서 느끼함이 아닌 되레 ‘풍성한 감성’을 수혈 받곤 한다. 미트 로프(Meat Loaf)는 말한다. “엘비스는 노래하는 것 무엇이든지 감정적으로 가사로 스피릿을 감상자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희구했던 명성과 부를 얻고 난 뒤 아쉽게도 그것들의 노예가 되는 비극적인 위인이기도 했다. 아무 데도 나갈 수가 없었고 편안히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도 불가능했다. 60년대나 70년대 로커였다면 이런 사실상의 ‘수감생활’을 극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래적 반항아’가 아니었다. 스타덤의 고독과 소외에 차츰 무너져간 그의 말년을 잘 나타내주는 일화는 무수히 많다. 70년대 들어서 조울증이 불거진 그는 때로 격렬해져 텔레비전 세트나 당구대, 주크박스, 자동차 등 가장집기를 부수는 발작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언젠가 D.J. 폰타나와 그의 아내 앞에서 엘비스는 자신의 감정상태를 이렇게 토로했다. “당신들은 운이 좋은 겁니다. 난 엘비스인게 너무 지겨워요! 뭘 해야될 지를 모르겠어요. 뭔가 딴 일을 했으면 제발 한이 없겠어요.” 고고음악의 대명사인 자니 리버스의 해석. “엘비스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었지요. 그래야만 했을 겁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그 밖의 다른 일이란 없었지요.” 엘비스만큼 화려한 명성과 처절한 고독이라는 양극단을 겪은(아니면 겪기로 강제된)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영욕의 교차요, 희비의 쌍곡선이다. 그래서 그를 통해 우리는 슈퍼스타덤의 빛 외에 냉혹함과 잔인성이라는 그림자를 동시 확인한다. 그의 사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심장마비로 발표되었지만 사후 마약중독 비만증 그리고 자살 등 정황에 근거한 갖가지 설들이 난무했다. 이는 그의 후반기 삶이 얼마나 철저히 비공개로 갇혀 있었는지를 반증한다. 스스로 창조한 혁명에 쓰러진 순종파 가수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비평에 의해 그의 역사적 위상이 훼손되는 일은 없다. 여전히 그는 만인이 공감하는 ‘킹 오브 로큰롤’이며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금세기 최고 가수’다. 비틀스가 그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한마디로 모든 엘비스의 가치는 입증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오류로 더러 지적되지만 비평가 고(故) 레스터 뱅스(Lester Bangs)의 엘비스 예찬은 되새길 가치가 있다. “우리는 엘비스에게 해준 것과 같은 동의를 앞으로 어떤 누구에게도 해주지 않을 것이다!”
노래 : Bob Dylan (밥 딜런 ,Robert Allen Zimmerman)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eatles) 그리고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와 함께 최정상의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이들 ‘전설의 빅 4’ 가운데에서도 딜런이 남긴 궤적은 차별화 아닌 특화(特化)되어 역사를 장식한다.

얼핏 그의 위상은 ‘실적주의’로 따질 때 매우 허약해 보인다. 엘비스, 비틀스, 롤링 스톤즈는 그 화려한 전설에 걸맞게 무수한 히트곡을 쏟아냈다. 넘버 원 히트곡만 치더라도 엘비스는 18곡(통산 2위), 비틀스는 20곡(1위), 스톤즈는 8곡(11위)이나 된다. 하지만 딜런은 그 흔한 차트 1위곡 하나가 없다. ‘Like a rolling stone’과 ‘Rainy day woman #12 & 35’ 등 두 곡이 2위에 오른 것이 고작이다. 차트 톱 10을 기록한 곡을 다 합쳐봐야 4곡에 불과할 뿐이다. 그에게 대중성이란 어휘는 어울리지 않는다. 상업적이란 말과는 아예 인연이 없다. 이렇듯 실적이 미미한 데도 록의 역사는 마치 신주 모시듯 그를 전설적 존재로 떠받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는 차트 정복 외에도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비록 그 가지는 다를지언정 ‘록의 스타일 확립’ 이라는 몸체는 유사하다는 것이다.

비틀스는 록의 예술적 지반을 확대했고, 스톤즈는 록에 헌신하며 형식미를 완성했고, 엘비스는 록의 정체성을 부여했다고들 한다. 분명히 딜런도 몸체에 자리한다. 깃털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타(他) 3인의 몸체가 외양이라면 그는 ‘내면’ 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노랫말이요, 메시지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음악은 사운드와 형식만으로 이미 메시지가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로큰롤이 폭발하여 확산되던 시점인 1950년대, 즉 엘비스가 활약하던 당시에 로큰롤은 메시지가 없었다. 1960년대 들어서 비틀스가 미국을 급습해 록의 르네상스를 일궈내고 있던 때까지도 록은 의미있는 가사와 격리된 상태였다. 그래서 의식계층으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그 때 밥 딜런이 있었다. 비틀스는 누구보다 먼저 딜런의 위력을 절감했다. 그의 포크 사운드와 메시지를 귀담아 듣고 그것을 자신들의 음악에 적극 수용한다. 1965년말 < Rubber Soul > 앨범의 수록곡인 ‘In my life’, ‘Girl’, ‘Norwegian wood’ 등에서 ‘톤 다운’ 을 드러내며 메시지를 잠복시킨 것은 전적으로 딜런의 영향 때문이었다.

밥 딜런은 실로 대중 음악의 지성사(知性史)를 이룬다. 타임(Time)지의 제이 칵스는 1989년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존 업다이크의 소설과 밥 딜런의 앨범 가운데 어느 것이 미국인들의 삶에 보다 자극을 주었는가? 존 업다이크 쪽에 표를 던진 사람이라면 이 기사를 여기까지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가사는 그러나 때론 메시지의 파악이 어려운 ‘난해한 현대시’ 와 같다. 밑줄 긋고 열심히 분석해도 도대체 명쾌하지가 않다. 1960년대 중반 < Another side of Bob Dylan >, < Bring it all black home >, < Highway 61 revisited >가 연속 발표되었을 때, 미국 각 대학의 영문과에 ‘밥 딜런 시분석’ 강좌 개설이 유행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팝팬들에게 딜런이 상대적으로 소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에게도 이 정도인데 영어의 벽에 막혀 있는 우리가 어찌 그를 쉽게 수용할 수 있었겠는가. 때문인지 음반마저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초기곡으로 알려진 것은 그나마 메시지가 확연한 ‘Blowin’ in the wind’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1970년대 중반의 금지곡 태풍으로 반전(反戰) 노래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방송과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 외 우리 팝 인구에 회자된 노래로 ‘One more cup of coffee’나 ‘Knockin’ on heaven’s door’가 있다. 그러나 그의 대표곡 반열에도 오르지 못하는 ‘One more cup of coffee’가 통한 것은 단지 낭만적 제목과 함께 친숙한 선율 때문이었을 뿐, 딜런의 음악 세계에 대한 천착의 결과물은 전혀 아니었다. ‘Knockin’ on heaven’s door’ 인기의 영예도 실은 건스 앤 로지스가 더 누렸다.

극소수의 곡을 제외하고 밥 딜런은 우리에게 인기가 없었다.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에 비한다면 엄청난 ‘부당 대우’였다. 언어 장벽과 무관한 음악 스타일 측면에서도 우리의 ‘홀대’ 는 마찬가지였다. 멜로디가 그럴싸한 곡이 있더라도 풍기는 내음이 지극히 ‘미국적’ 이었기에 우리의 청취 감성은 딜런을 꺼리곤 했다. 그의 음악 세계라 할 포크, 컨트리, 블루스는 미국 전통과 긴밀한 함수 관계를 지닌다. 선율과 사운드의 영국적인 맛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그의 음악에 잠기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사이에 우린 어느덧 딜런과 크게 멀어져버렸다. 록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꼭 딜런에서 막힌다. 신세대 가운데 더러는 우리의 팝 수용 문화에서 딜런 공백이 가져온 취약성을 맹렬히 질타하기도 한다. 우리 기준에서의 ‘팝 음악 여과’는 바람직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의역은 정확한 직역이 기초돼야 올바르다. 미국의 해석을 전제한 뒤라야 우리식 필터링의 의의가 배가된다.

그 직역의 첫 번째 대상이 바로 밥 딜런이다. 밥 딜런이 미국의 현대 음악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그의 음악몸체가 곧 시대와 세대의 흐름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딜런의 음악이 변화하는 과정과 그것을 있게 한 배경, 또한 그것을 주도해간 그의 자세는 ‘음악외적 환경’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먼저 포크 록(Folk-Rock)이다. 그가 1960년대 초반 저항적인 모던 포크로 베이비 붐 세대를 견인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통기타만으로 연주되는 단순한 구조이지만 그것의 포획력은 비틀스가 사정권에 들어올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비틀스가 베이비 붐 세대를 발현시켰다면 그는 그들의 의식화를 유도했다. 그러나 딜런은 케네디의 피살에 자극받으면서 스스로 ‘위기감’ 을 불어넣는다. 이미 비틀스가 세대의 청취 볼륨을 증폭시킨 마당에 포크의 음량 가지고 과연 세대를 관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71년 그는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그들(비틀스)은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코드는 정말 도에 지나친 것이었지만 하모니가 그것을 타당하게끔 했다. 그러나 맹세하건데 난 정말 그들에게 빠졌다. 모두들 그들이 어린 10대를 위한 광대이며 곧 사라질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내겐 명확했다. 그들이 지속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난 그들이 음악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머리 속에는 비틀스가 전부였다.” 그는 일렉트릭 기타를 잡아야 했다. 그것이 포크 록이었다. 포크의 순정파들로부터 배신자라는 질타는 불 보듯 뻔했다. 그가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알 쿠퍼(Al Kooper), 마이크 블룸필드(Mike Boomfield)가 참여한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Butterfield Blues Band)와 함께 전기 기타 연주를 했을 때 관중들은 “이건 포크 공연이야 나가!”라고 야유하며 돌과 계란 세례를 퍼부었다. 무대에서 내쫓긴 그는 통기타를 들고 되돌아왔지만 의미심장한 ‘It’s all over now’, ‘Baby blue’를 부르며 포크 관객들에게 아듀를 고했다. 껄끄러운 통과의례를 거친 뒤 밥 딜런의 포크 록은 ’Like a rolling stone’의 빅히트와 함께 만개했다. 이젠 막을 자도 없어졌다. 포크 록은 당시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존 레논과 밥 딜런을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 그룹 버즈(Byrds)는 ‘Mr. Tambourine man’으로 인기 가도를 질주했다. 그러나 그 곡은 딜런의 작품이었다.

버즈 뿐만 아니라 당시 포크 록계열 뮤지션치고 딜런의 곡을 손대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단숨에 포크 록은 1960년대 록의 주류로 부상했다. 1960년대 중.후반을 강타한 싸이키델릭 록(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도 실상 포크 록에 영향받은 흐름이었다. 그럼 어째서 포크 록은 1960년대 청춘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의식을 대변할 수 있었을까? 비틀스가 딜런에게 배우고, 딜런이 비틀스로부터 영감을 얻은 ‘포크와 록의 결합’ 은 시대성 견인을 가능케 한 절묘한 무브먼트였다. 록은 생태적으로 거리의 청춘에 의해 확립된 ‘하위문화적 표현’이다. 따라서 하이 클래스나 인텔리겐차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다. 또한 포크는 저항성을 견지하는 민중 음악이지만 음악의 주체나 주소비자층은 학생과 지식인 세력이다. 성질상 엇비슷하면서도 걸어온 길이나 ‘계급성’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밥 딜런이 포크 오리지널로부터 급격히 퇴각하여 록으로 전향한 것은 단지 추세의 편승이 아닌 완전함을 향한 ‘하층문화의 긴급 수혈’로 보인다. 이를테면 ‘위’의 고매한 문제의식과 ‘아래’의 근원적 반항을 한고리로 엮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항 영역의 지반 확대와 수요자의 확충을 기할 가능성은 올라가게 된다.

지식인만이 아닌 1960년대 젊은이들의 ‘계층포괄적 무브먼트’ 는 포크 록과 이 점에 있어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1960년대 중후반을 물들인 ‘히피보헤미안’ 물결도 딜런과 떼어낼 수 없는 흐름. 1960년대 록 역사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부분이다. ‘Like a rolling stone’은 포크 지식인의 소리라기보다 보헤미안적 정서의 노출로 파악해야 한다. 당시 딜런은 가치의 상대성을 신뢰하고 제도에 흡수되기룰 거부하는 이른바 비트(Beat) 사상에 빠져 있었다. 그가 진보적 시인인 알렌 긴스버그(Allen Ginsberg)와 교류하며 ‘개인 혁명’에 골똘해 있을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다. 비트는 이후 히피의 융기에 주요 인자가 되는데, 1960년대 중반 딜런의 음악을 가로지르는 것이 바로 이 ‘히피 보헤미안 정서’라 할 수 있다. 스스로 록 세계로 옮아가고 방랑적 지향을 설파한 것은 기존과 기성의 틀 깨기에 목말라 있던 베이비 붐 세대들에게 영도자가 제공한 ‘산교육’과 다름없었다. 따라서 밥 딜런은 그에게 등을 돌린 포크 근본주의자들의 수보다 휠씬 더 많은 록팬을 거뜬히 확보하게 된다. 음악적으로 딜런의 창작성이 이 때만큼 가공의 위력을 떨친 적도 없다. < Highway 61 Revisited >와 < Blonde On Blonde > 앨범은 포크의 엄숙주의에서 해방되어 록과의 결합으로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포획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음악은 ‘남을 위해’ 이데올로기에 봉사한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즐거움이 가져온 산물이기도 했다. 그가 포크의 프로테스트로부터 이탈한 것은 바로 ‘자유’와 등식화되는 ‘예술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는 저항성 대신 예술성을 얻었다. 개인적 경사도 겹쳤다. 사적으로 사라 로운즈와의 결혼은 그의 창작력 한층 북돋아주었으며 그 충만한 행복감은 그대로 < Blonde On Blonde > 앨범에 나타났다. 이 앨범의 탁월한 질감은 상당부분 사라와의 결혼이 낳은 것이라는 게 평자들의 일치된 시각이다. 나중 사라와의 파경 또한 그에게 또 하나의 명반 < Blood On The Tracks >를 안겨준다. 히피의 낭만적인 집단주의와 곧바로 이어진 이피(Yippie)의 전투성이 극에 달할 무렵 그가 뉴욕의 외곽 빅 핑크(Big Pink) 지하실에서 한가로이 더 밴드(The Band)의 멤버들과 자유 세션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가 가져온 행보이기도 했지만 그가 의도적으로 은둔을 택한 것은 분명했다. 세상이 소란함으로 가득할 때 그는 정반대로 정적을 취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물꼬를 터준 미국 사회의 격랑이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을 것으로 예측했는지도 모른다. 세대의 공동체 지향은 지극히 ‘비이성적’으로 비춰졌을 테고 오히려 그는 그럴수록 자신에게 돌아와 근본을 탐구하는 것이 올바른 행위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한 심저(心底)가 < John wesley Harding >과 < Nashiville Skyline >의 골간에 자리한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뜻밖에’ 재래식 컨트리 음악을 선보였다. 두 앨범은 모두 내쉬빌에서 녹음되었고 < Nashiville Skyline >의 경우 딜런은 컨트리 음악의 거성 자니 캐시(Johnny Cash)와 듀오로 ‘Girl from the north country’에서 다정히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이 앨범에서 톱 10 히트곡 ‘Lay lady lay’가 나왔다. 이 곡을 비롯해 대부분의 수록곡에서 딜런의 보컬은 예의 날카로움이 거세된 채 한결 부드러워졌고 가사도 접근이 비교적 용이해지는 등 멜로딕한 무드가 전체를 지배했다. 다시 세상은 소용돌이에서 호수의 조용함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1970년대 초반의 분위기였다. 딜런이 씨앗을 뿌린 ‘컨트리 록’ 은 1970년대 내내 주요 장르 중 하나로 맹위를 떨쳤다.

딜런은 언제나 흐름의 주역이었다. 나중 음반화된 더 밴드와의 세션 앨범 < Basement Tapes >가 록 역사에서 ‘특혜’를 받는 것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970년대 들어서 그는 ‘대중적’ 관점에서 뿌리에 대한 천착에 박차를 가했다. 예전에 그는 ‘좋은 사람만 따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이 많이 따를수록 좋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그가 1970년 < Self Portrait > 앨범에서 ‘Moon river’를 포함한 팝 스탠다드 넘버들을 노래한 것은 이러한 사고와 맥락이 닿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눈을 흘겼다. 레코드 월드(Record World)지는 이 앨범을 두고 “혁명은 끝났다. 밥 딜런이 ‘미스터 존스’에게 ‘Blue moon’을 불러주고 있다”며 혹평했다.(미스터 존스는 딜런이 < Highway 61 Revisited >의 ‘Ballad of thin man’에서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 존스 씨?”라고 했던 가공의 인물로 ‘제도권 인사’를 상징한다.) 빌보드 차트3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처럼 평단의 이해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 Self Portrait >앨범을 상업적 표현으로 볼 수는 없다. 비판의 칼을 휘두르는 비평가들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근본을 탐구하는 방법론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딜런이 1970년대 후반부에 기독교에 귀의한 것도 비슷한 문맥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사실 신(神)에의 의지가 엿보인 < Show Train Coming >, < Saved >, < Shot Of Love > 등 3장의 종교풍 음반은 ‘사고의 깊이’가 두드러졌지만 ‘변신’이라는 부정적 의미에 가치가 함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1970년대 딜런을 ‘혼미의 거듭’으로 규정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그것을 뒤집어보면 그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에 충실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아티스트의 본령이다. 밥 딜런은 언제나 음악을 통해 세상과 삶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고자 했다.

1980년대의 밥 딜런은 1970년대의 습기를 벗고 ‘열기’를 회복한다. 정치적 시각도 이입한 < Infidels >, < Empire Burlesque > 그리고 1989년에 나온 < Oh Mercy >는 이전의 앨범들과 명백한 분리선을 긋는다. 날카로운 보컬은 오히려 1960년대의 모습에 더 가깝다. 그는 1980년대 중반 라이브 에이드(Live Aid),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아티스트의 모임(Sun City) 등 일련의 자선행사에 얼굴을 내밀어 저항 전선에 복귀했다. 한 무대에서 그는 U2의 보노(Bono)와 함께 ‘Blowin’ in the wind’를 부르기도 했다. 딜런의 1980년대 앨범들에는 당시의 보수적이고 위압적 풍토를 거부하는 저항성이 숨쉰다. 그는 시대의 주류 한복판에는 없었지만 ‘시대의 공기’와 늘 함께 호흡했다. 그 공기를 어떤 때는 앞장 서 조성하고 어떤 때는 그것을 피해갔다. 밥 딜런의 한 면만을 바라보게 되면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그가 서 있던 ‘양쪽’ 자리를 다 관찰해야만 그 ‘드라마틱한 록 역사의 굴곡’ 을 읽을 수 있다. 록의 역사는 실로 위와 아래, 진보와 보수, 주류와 비주류, 기존과 대안이 끊임없이 부침을 되풀이 해왔다. 밥 딜런이 밟아온 길은 그것의 축소판이었다. 그러나 어떤 시점에서라도 - 가령 프로테스트의 깃발을 울렸을 때나, 대중성에 기웃거렸을 때나 - 딜런이 주변의 압박에 수동적으로 임한 적은 없다. 남이 시켜서 일렉트릭의 세계로 떠밀려 간 것이 아니었고, 의도적으로 신비를 축적하기 위해 은둔했던 것도 아니다. 그의 터전은 언제나 자신의 의지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비평가들이 밥 딜런을 전설로 숭앙하는 것은 그가 대중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문 ‘음악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음악인의 최고 영예인 ‘아티스트’란 소리를 들어 마땅했다. 그는 록에 언어를 불어넣었다. 포크와 컨트리를 록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시대와 맞서기도 했고 자신의 예술성에 천착하기도 했다. 그러한 업적과 성과의 편린들이 모여 그의 ‘광활한 아티스트의 세계를 축조하고 있다. 밥 딜런은 역사의 수혜와 위협 속에서 ‘인간’을 살려냈다. 음악인으로서 인간의 몸체는 다름 아닌 자유일 것이다. 밥 딜런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노래 : Everly Brothers (에벌리 브라더스)
컨트리 음악 성향의 로커빌리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황금 형제듀엣. 형 돈 에벌리(Don Everly)는 1937년 켄터키주 브라우니 출생이고, 동생 필 에벌리(Phil Everly)는 1939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가수였던 부모와 함께 어릴 적부터 노래했고 컨트리의 본고장 내시빌에서 기타의 대가 쳇 애트킨스(Chet Atkins)에 초청되어 1955년에 첫 레코딩을 했다. 2년 뒤 소규모 음반사 케이던스와 계... 컨트리 음악 성향의 로커빌리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황금 형제듀엣. 형 돈 에벌리(Don Everly)는 1937년 켄터키주 브라우니 출생이고, 동생 필 에벌리(Phil Everly)는 1939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가수였던 부모와 함께 어릴 적부터 노래했고 컨트리의 본고장 내시빌에서 기타의 대가 쳇 애트킨스(Chet Atkins)에 초청되어 1955년에 첫 레코딩을 했다. 2년 뒤 소규모 음반사 케이던스와 계약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Bye bye love’, ‘All I have to do is dream’, ‘Bird dog’, ‘Cathy’s clown’ 등 빅 히트송이 줄을 이었다. 낭만적인 멜로디를 전하는 두 형제의 하모니가 압권. 1960년대의 사이먼 & 가펑클(Simon & Garfunkel) 등 많은 듀엣 팀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한 뱃속에서 태어난 형제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둘 사이가 나빠서 1973년에 해산했고 10년이 흐른 1983년에 재결합했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아 ‘Let it be me’, ‘Crying in the rain’ 등이 널리 애청되었다.
멤버 : Shirley Owens (later Shirley Alston Reeves), Doris Coley (later Doris Kenner-Jackson), Addie "Micki" Harris (later Addie Harris McPherson), and Beverly Lee 멤버 : Shirley Owens (later Shirley Alston Reeves), Doris Coley (later Doris Kenner-Jackson), Addie "Micki" Harris (later Addie Harris McPherson), and Beverly Lee
노래 : Roy Orbison (로이 오비슨 )
로이 오비슨(Roy "Kelton" Orbison)은 1936년 텍사스주 버논(Vernon)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기타를 연주했던 그는 10대에 ’윙크 웨스터너스(Wink Westerners)’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인기를 얻는 등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그룹명을 텐 킹스(The Ten Kings)로 바꾸고 버디 할리(Buddy Holly)의 프로듀서였던 노만 페티(Norman Pe... 로이 오비슨(Roy "Kelton" Orbison)은 1936년 텍사스주 버논(Vernon)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기타를 연주했던 그는 10대에 ’윙크 웨스터너스(Wink Westerners)’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인기를 얻는 등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그룹명을 텐 킹스(The Ten Kings)로 바꾸고 버디 할리(Buddy Holly)의 프로듀서였던 노만 페티(Norman Petty)와 함께 작업하며 첫 히트곡인 ‘Ooby dooby’를 발표한다. 하지만 1950년대 그의 주요 관심사는 작곡에 있었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인정받고 싶었던 그는 자작곡인 로크롤 넘버 ‘Only the lonely’를 당시 최고의 자리에 올라있었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와 에버리 브러더스(Everly Brothers)에게 권했지만 거절을 당하자 “내가 직접 노래하겠다”며 직접 이 곡을 녹음한다. 우수 가득하면서도 고음에서 불안한 듯한 독특한 목소리와 발군의 곡 제조로 록 역사에 길이 남게되는 로이 오비슨의 본격 가수인생은 이렇게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다. 흥겨운 후렴 구를 가지고 있었던 ’Only the lonely’는 스피드와 파워가 특징이던 당시의 로큰롤과 분리 선을 그으며 인기를 누린다. 이 곡은 1960년 전미차트 2위에 올랐고 영국 차트에선 정상을 차지했다. 이후 그의 인기는 눈부셨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훌륭한 멜로디와 서정적인 보컬은 여타 음악과는 완전 차별되면서, 1960년대 중반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히트행진을 이어간다. 1961년 ’Running scared’가 미국차트 정상을 밟았고 1964년에는 ‘Pretty woman’가 비틀매니아에 굴하지 않고 다시 차트정상에 올랐다. 1960년 ‘Blue angel’을 비롯해 1961년 ’Crying(2위)’, 1962년 ‘Dream baby’, 1963년 ‘In dreams’, ‘Mean woman blues’, 1964년 ‘It’s over(9위, 영국1위)’ 등은 모두 톱10에 진입했다. 하지만 그의 인기는 음악 외적인 면 때문에 제동이 걸려야 했다. 1966년 그의 아내 클라우데트(Claudette)가 자신의 오토바이 뒤에서 떨어져 죽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맞았고, 그 슬픔이 잊혀질 새도 없이 이듬해에는 집에 불이 나 두 아들이 화재로 죽게된다. 이 사건들이 일어난 이후 그에게는 ‘비운의 스타’라는 호칭이 계속해서 따라다니게 되다. 큰 슬픔을 여러 차례 겪은 후 활동은 암흑기에 접어들어 싱글 하나 제대로 히트하지 못했고, 라이브 공연도 가지지 않았다. 1960년대 초반을 풍미한 가수로 사라져가던 그였지만 전성기가 오로지 1960년대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우수한 곡들은 후대의 많은 아티스트들에 의해 다시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976년 그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영국 차트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1977년 린다 론스태드(Linda Ronstadt)가 ‘Blue bayou’를 리메이크해 오리지널 뮤지션으로 재조명되는 순간을 맞았다. 결국 1980년대 시작과 함께 재기한다. 그 해 늦은 봄 에밀루 해리스(Emmylou Harris)와 함께 영화 주제곡인 ‘That lovin’ you feelin’ again(55위)’를 부르며 가수활동을 재개하게 됐고 옛 명성에 걸맞게 해리스와 함께 그래미상을 거머쥔다. 오랜 공백을 깨고 재기한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힘을 실어주는데, 1980년 수잔 잭스(Susan Jacks)가 그의 곡 ‘Evergreen’을 리메이크했으며, 1981년 돈 맥클린(Don McLean)이 그의 곡 ’Crying’(88년 K.D. Lang과 듀엣으로 다시 불러 영화 ’하이딩 아웃(Hiding out)’에 삽입되었다.)을 불러 빅히트를 기록했다. 1985년에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영화 < 블루 벨벳 >(Blue velvet)에 ‘In dreams’를 삽입한 것도 로이 오비슨 재림(再臨)을 도왔다.(’In dreams’는 국내에서도 영화 음악으로 사랑 받으며 친숙한 곡으로 자리해있다.) 후배들의 협조로 그는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추대되는 영광을 누리기에 이른다. 자신감을 회복한 그는 거물들의 프로젝트 그룹인 트래블링 윌베리스(Traveling Wilburys)에 가담하게 된다. 이 그룹의 멤버는 한 명만으로도 영광스러울만한 이름인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밥 딜런(Bob Dylan), 톰 페티(Tom Petty) 그리고 이엘오(ELO)의 리더 제프 린(Jeff Lynne)으로 짜여졌고 데뷔 앨범 < Mystery Girl >에는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 유투(U2)가 참여했다. 하지만 ‘비운의 스타’ 로이 오비슨은 자신의 별명대로(?) 이 역작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988년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 Mystery Girl >은 1989년 그의 사후에 발매되었고, 비운의 스토리와 앨범 참여 면면들의 명성이 겹치면서 그의 앨범 중 가장 성공한 앨범이 된다. 이 가운데 싱글 ‘You got it’은 차트9위에 올라 정확히 25년 만에 톱10을 기록했다. 하지만 사후에도 그의 노래는 영화 삽입과 후배 아티스트들의 리메이크를 통해 부활을 계속했다. 1991년 넘버원 히트곡인 ’Pretty woman’이 동명영화에 삽입되어 오비슨 열풍을 야기했고, 같은 해 그와 함께 노래했던 동료, 후배 가수들이 그와 함께 불렀던 곡들을 모아 < A Black And White Night Live >라는 앨범을 발표했으며, 이 앨범으로 사후에 그래미상 최우수 남성 보컬상을 수상하는 이색적인 사건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영화 보이즈 온더 사이드(Boys on the Side)에 ‘You got it’이 보니 레이트(Bonnie Raitt)에 의해 리메이크 되어 히트했다. 로이 오비슨은 최고의 전성기였던 1950년대 엘비스라는 거대한 존재로 인해 정상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고, 1960년대 역시 비틀즈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날개를 펴야 할 1970년대는 자신 앞에 닥친 비극으로 좌절해야 했으며, 후배들의 도움으로 화려하게 일어선 1980년대는 어이없는 죽음으로 사라져야 했다. 비운으로 점철된 음악역정이었으나 팝 역사는 그 비운을 환대로 바꿔 기록했다. 끊임없는 역사적 재조명은 시공을 막론하고 그의 노래가 애청되는 길을 터 주었다.
노래 : Del Shannon (델 섀넌,Charles Weedon Westover)
락앤롤, 컨트리 가수 락앤롤, 컨트리 가수
노래 : Dion (디온,Dion DiMucci)
노래 : Cliff Richard (클리프 리차드)
1969년 10월 16일부터 18일. 이 3일은 우리나라의 척박했던 공연 문화와 사회 전반에 걸쳐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된 사건의 시간적 배경이다. ‘오빠부대’의 원조이며 팝 스타로서는 처음으로 국내에서 자발적인 팬클럽이 탄생했던 클리프 리차드(Cliff Richard)의 3회에 걸친 내한 공연, 그것은 집단적인 행동과 조용한 환호성(지금은 아니지만)의 이율배반적인 분위기로 특징지어지는 한국 공연 문화의 시발점이 ... 1969년 10월 16일부터 18일. 이 3일은 우리나라의 척박했던 공연 문화와 사회 전반에 걸쳐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된 사건의 시간적 배경이다. ‘오빠부대’의 원조이며 팝 스타로서는 처음으로 국내에서 자발적인 팬클럽이 탄생했던 클리프 리차드(Cliff Richard)의 3회에 걸친 내한 공연, 그것은 집단적인 행동과 조용한 환호성(지금은 아니지만)의 이율배반적인 분위기로 특징지어지는 한국 공연 문화의 시발점이 되는 계기였다. 시민회관에서 1회, 이대 강당에서 2회의 공연을 가졌던 클리프 라치드의 무대는 콘서트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던 당시로서는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청소년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어두운 교복과 청순한 단발머리를 한 여고생들의 클리프 리차드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헌신적인 몰입은 ‘울다가 지쳐 기절까지’라는 과장된 신문 기사로 옮겨지면서 공연장의 열기는 기성 세대들에게 일종의 집단적 히스테리이자 광적인 소란으로 비쳐지며 젊은이들에 대한 불안과 불만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클리프 리차드는 4박 5일 동안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만나는 팬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주최측에서 마련한 파티 비용을 본인이 직접 내는 것은 물론 구세군 교회에 가서 불우이웃성금을 내는 선행으로 일간지 사회면을 훈훈하게 장식해 팬들의 비난을 희석시켜 주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클리프 리차드는 우리나라에서 대중 음악 역사에 있어 전환점을 제시했던 슈퍼스타였다. 1940년 10월 14일 인도의 럭크나우에서 해리 로저 웹(Harry Roger Webb)의 본명으로 태어난 클리프 리차드는 엘비스 프레슬리로부터 영향을 받아 1957년부터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흑인 감성이 풍부했던 엘비스와는 달리 경쾌하고 팝 적인 느낌이 짙은 음악으로 ‘영국의 로큰롤 황제’로 등극했다. 1963년 비틀스(Beatles)와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가 등장하기 전까지 클리프 리차드는 브리티시 록의 ‘절대 강자’였으며 그의 음악 세계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성지(聖地)였다. 1958년 ‘Move it’으로 시작한 히트 퍼레이드는 1960년대 후반까지 40곡 이상을 영국 인기 차트에 등록시키며 경이로운 행진을 기록했다. 당시 그의 백 밴드 드리프터스(Drifters)는 미국의 리듬 앤 블루스 보컬 그룹(‘Stand by me’를 부른 Ben E. King이 멤버였던)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섀도우스(Shadows)로 바꾸었다. 그의 인기가 치솟자 영화 관계자들은 < Serious Charge >, < Summer Holiday >, < The Young Ones >처럼 젊은이들을 소재로 한 상업적인 영화에 출연시켜 비상(飛上)하는 클리프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국내에서도 ‘Living doll’, ‘Visions’, ‘Constantly’, ‘Summer holiday’, ‘Congratulations’, 그리고 그 유명한 ‘The young ones’등이 확실하게 인기를 주도했다. 하지만 이것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한정된 반숙(半熟)의 인기였다. 대서양 건너편 미국에서는 물이 끓지도 않았다. ‘Living doll(30위)’과 ‘Lucky lips(62위)’, ‘It’s all in the game(25위)’, ‘Bachelor boy(99위)’, ‘I’m the only one(92위)’, 그리고 생일 축하 곡으로 세계를 평정한 ‘Congratulations(99위)’ 만이 1960년대 동안 빌보드 싱글 차트에 올랐을 뿐이다. 데뷔곡 ‘Move it’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노래들은 너무 소녀 취향이었으며 시기상으로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라는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뮤지션들 사이에서 샌드위치 마크를 당했기 때문에 틈새 시장을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내한 공연을 가졌던 1960년대 후반에 그의 지지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1960년대 미국 음악계를 침공한 브리티시 인베이션의 명단에서 제외되었던 클리프 리차드는 미국 진출의 꿈을 접었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에 자신의 백 보컬리스트 출신의 올리비아 뉴튼 존(Olivia Newton John)이 미국에서 대대적인 성공하자 이것에 고무된 클리프는 미국 진출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서서히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미국인의 구미에 맞는 노래들로 북미 시장을 두드렸다. 1976년에 공개된 디스코 풍의 ‘Devil woman(6위)’이 처음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탑 텐에 올랐고 1980년대 초반까지 ‘We don’t talk anymore(7위)’, ‘Carrie(34위)’, ‘Dreaming(10위)’, ‘Little in love(17위)’, ‘Daddy’s home(23위)’, 그리고 자신보다 더 유명해진 올리비아 뉴튼 존과 호흡을 맞춘 영화 < 제너두 >의 삽입곡 ‘Suddenly(20위)’ 같은 성인 취향의 팝 사운드로 두 번째 전성기를 일구었다. 이제는 아주머니들이 된 예전의 소녀 팬들을 위해 현재까지 공연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클리프 리차드는 1995년 영국 왕실로부터 대중 음악계에 미친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 작위를 수여 받았다. 국내에서는 지난 1998년에 개봉된 임창정, 고소영이 주연한 영화 <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의 마지막 장면에 ‘Early in the morning’이 삽입되어 다시 한번 클리프 리차드 신드롬을 재연했다. 차이코프스키가 “예술 작품이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소망과 힘이다”라고 했듯이 클리프 리차드의 노래는 우리 부모님 세대가 살아야 했던 어려웠던 시절의 좌절과 아픔을 낭만과 추억으로 승화시킨 희망의 원동력이었다.
‘You mean everything to me’, ‘Oh! Carol’, 그리고 ‘One way ticket’으로 국내 팝 음악의 수용 역사에 하나의 획을 그은 닐 세다카(Neil Sedaka)는 한 번도 어려운 전성 시대를 두 번이나 경험했다. 첫 번째 전성기는‘Oh! Carol(16위)’과 ‘You mean everything to me(17위)’, ‘Calendar girl(4위)’, ‘Little dev... ‘You mean everything to me’, ‘Oh! Carol’, 그리고 ‘One way ticket’으로 국내 팝 음악의 수용 역사에 하나의 획을 그은 닐 세다카(Neil Sedaka)는 한 번도 어려운 전성 시대를 두 번이나 경험했다. 첫 번째 전성기는‘Oh! Carol(16위)’과 ‘You mean everything to me(17위)’, ‘Calendar girl(4위)’, ‘Little devil(11위)’, ‘Bad girl(33위)’, ‘Breaking up is hard to do(1위)’, ‘Stairway to heaven(9위-레드 제플린의 노래와는 동명이곡)’, ‘Happy birthday, sweet sixteen(6위)’, ‘Next door to an angel(5위)’처럼 청소년기의 감수성을 읊은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였고, 두 번째 융성기는 엘튼 존(Elton John)을 비롯한 여러 친구들의 도움으로 ‘Laughter in the rain(1위)’, ‘Bad blood(1위)’, 그리고 캡틴 & 테닐(Captain & Tennile)이 커버해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는 물론 그래미에서 올해의 레코드 트로피를 거머쥐게 한 ‘Love will keep us together’같은 성인 취향의 팝록으로 재기에 성공한 1970년대 중반이었다. 세계 금융의 중심이 뉴욕의 월스트리트인 것처럼 영국 뮤지션들이 미국을 침공하기 이전인 1960년대 초반까지 미국 대중 음악의 황금기를 일군 심장부도 뉴욕에 위치한 브릴 빌딩가(街)였다. 바로 이곳에서 일류 작곡가들이 만든 명곡들이 가지를 뻗고 이파리를 피워 1960년대 음악을 꽃피게 했다. 캐롤 킹(Carole King), 버트 바카라크(Burt Bacharach), 레이버 & 스톨러(Leiber & Stoller), 베리 만 & 신시아 웨일(Barry Mann & Cynthia Weil), 닐 세다카 등은 당시 프리미엄급 작곡가였고, 이 중에서 캐롤 킹과 닐 세다카는 가수로 전업해 팝음악 계에 지워지지 않는 업적을 남겼다.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다루며 음악적인 능력을 키워 온 닐 세다카는 1939년 3월 13일 뉴욕의 브룩클린에서 태어났고 모든 음악인들의 선망의 대상인 줄리아드 음악 대학에 입학하면서 그 천재성을 입증하기 시작했다. 이 젊은 작곡가의 첫 번째 작품은 카니 프란시스(Connie Francis)의 ‘Stupid Cupid(17위)’였다. 이 곡의 히트로 각 음반사들이 눈독을 들인 닐은 1950년대 후반 RCA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가수로서의 캐리어도 쌓기 시작했다. 여자 친구였던 캐롤 킹에게 바치는 ‘Oh! Carol’과 ‘You mean everything to me’는 특히 우리 나라에서 국가 대표 급 팝송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Breaking up is hard to do’는 1962년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하면서 절정의 인기를 실감했지만 대서양을 건너온 영국 뮤지션들의 융단 폭격 때문에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위축된 활동을 보여주었다. 이 천재 아티스트는 1970년대에 들어서자 ‘I’m not in love’로 알려진 10CC의 멤버 그래함 굴드만(Graham Gouldman - 1980년대 앤드루 골드와 함께 Wax 결성)이나 엘튼 존(Elton John) 등의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Laughter in the rain’, ‘Bad blood’, ‘Love will keep us together’는 정상을 호령했고, 14년 전에 1위의 고지를 차지했던 ‘Breaking up is hard to do’는 새로운 생명력을 수혈받아 9위를 차지함으로서 다시 한번 팝음악의 고전임을 공인 받았다. 그래도 뭐니뭐니해도 국내에서는 현재 자동차 CF의 배경 음악으로 쓰여 TV 방송을 타고 있는 ‘Oh! Carol’과 ‘You mean everything to me’그리고 1980년대 초반 유로 디스코 밴드 이럽션(Eruption)이 재해석한 ‘One way ticket’이다. 1990년대 이후부터는 새로운 음반 작업보다는 예전의 히트곡들을 컴필레이션으로 짜집기하거나 자신의 곡들을 새로운 스타일로 재해석한 커버 버전 형식의 음반을 발매함으로서 예전의 영광을 답습하고 있지만 그가 여전히 위대한 가수 겸 작곡가라는 이 ’평가 불변의 법칙’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나는 내가 세상을 떠날 때, 어떤 누구도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비탄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는 사람들이 즐거워하기를 원한다. 왜냐면 나는 집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쳤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떠난다.” 미시시피 델타 블루스의 전설 존 리 후커(John Lee Hooker)가 지난 2001년 6월 21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83세. 그는 거칠고 투박한 보컬과... “나는 내가 세상을 떠날 때, 어떤 누구도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비탄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는 사람들이 즐거워하기를 원한다. 왜냐면 나는 집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쳤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떠난다.”
미시시피 델타 블루스의 전설 존 리 후커(John Lee Hooker)가 지난 2001년 6월 21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83세. 그는 거칠고 투박한 보컬과 대쪽같이 올곧은 기타로 대변되는 블루스의 원형을 1948년 첫 싱글 ‘Boogie chillen’부터 시작하여 한차례의 변화도 없이 반세기 넘게 줄곧 지켜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비트를 자유자재로 세분화하여 만들어 내는 독창적인 부기 그루브는 그를 ‘부기의 왕(King Of The Boogie)’의 지위에 올려놓았고, 슬프고 애절한 델타 목화밭의 노동요는 그를 ‘진정한 블루스맨’으로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생전에 그가 남긴 100장이 넘는 방대한 디스코그라피와 ‘Boogie chillen’, ‘Boom boom’, ‘I’m in the mood’, ‘Crawling king snake’ 등의 불멸의 고전 등에서 쉽게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다. 그만큼 그에게 블루스는 생명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고달팠던 삶의 궤적이었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항상 어루만지면 위안을 주던 유일한 친구였다. 존 리 후커는 1917년 8월 22일 미국 남부 미시시피의 클라크스데일(Clarksdale)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십대 시절 양아버지인 윌 무어(Will Moore)에게 기타를 배우며 흑인들의 고통과 설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노예나 다름없었던 비참한 소작농 삶을 벗어나고자 열 네 살 되던 해에 군대에 입영한 것을 시작으로, 테네시 주 멤피스에서의 극장 안내원, 오하이오 주의 신시내티에서의 공장 노동자, 그리고 모타운 디트로이트에서의 자동차 공장 경비원에 이르기까지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1930년대와 1940년대 미국을 횡단하며 갖은 고생을 겪었다. 물론 그 시기에 그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며 델타 블루스의 명맥을 이어갔는데, 점차 대도시로 이동해가면서 기타를 낡고 허름한 어쿠스틱에서 세련되고 큰 소리를 내는 일렉트릭 블루스로 바꿨다. 기타를 교체한 이유는 바쁘게 돌아가는 큰 도시의 생활을 음악으로 반영하는 과정에서 생긴 자연스런 현상이기도 했지만,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는 고출력의 앰프로 무장한 전기 기타가 필수였다. 이런 후커의 이동 경로와 음악적 변화는 그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미시시피 지역의 블루스 뮤지션들과 흑인들에게 이미 이뤄졌던 사항이었다.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델타 지역의 목화밭에 목화를 해치는 병충해가 강타하면서 많은 흑인들이 일자리를 잃어 시카고를 중심으로 한 동북부 지역으로 대거 이동하였던 것이다. 시카고가 일렉트릭 블루스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43년 디트로이트에 정착하여 가스펠 싱어와 블루스 연주자로 경력을 쌓아가던 그는 1948년 주술적인 측면이 강하게 느껴지는 ‘Boogie chillen’을 내놓으며 본격적인 뮤지션의 길을 걸었다. ‘Boogie chillen’은 존 리 후커의 원시적인 보컬과 강한 기타 연주에 힘입어 레이스(Race) 시장(후일 R&B로 바뀜)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며 미 전역에서 5년 동안 100만장이 넘게 팔려나갔다. 부기의 왕은 이 당시에 비비 킹(B.B King), 엘모어 제임스(Elmore James) 등이 속해있던 LA의 < 모던 레코드(Modern Records) >와 계약을 체결했다. < 모던 레코드 >는 비하리(Bihari) 형제들이 세운 음반사로 하울링 울프(Howlin’ Wolf), 리틀 월터(Little Walter), 머디 워터스(Muddy Waters)등이 몸담고 있던 시카고의 < 체스 레코드(Chess Records) >와 함께 리듬 앤 블루스의 양대 산맥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1949년부터 1954까지 존 리 후커는 < 모던 레코드 > 산하의 < Acorn Regal >, < Gotham >, < Staff >, < Chart > 등을 포함한 21개의 군소 레이블에서 델타 존(Delta John), 자니 리(Johnny Lee), 자니 윌리엄스(Johnny Williams), 부기 맨(The boogie Man), 존 리 부커(John Lee Booker) 등의 예명으로 70 여장의 싱글을 발표하며 < 모던 레코드 >의 간판스타로 떠올랐다. 도어스(Doors)가 리메이크한 1949년 작품 ‘Crawling king snake’, 1951년 리듬 앤 블루스 차트를 주름잡은 ‘I’m in the mood 등이 주요 히트곡들이다. 1950대 중반 로큰롤의 탄생과 함께 존 리 후커는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1959년 < Folk Blues >를 시발점으로, 1960년 < That’s My Story >, < I’m John Lee Hooker >, < Travelin’ >, 1962년 < Burnin’ > 등을 연속해서 발표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특히 < Burnin’ >에 수록된 ‘Boom boom’은 미국 전역에서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그는 1960년대 초반부터 미국의 음악 시장이 낙관적인 서핑 뮤직과 스탠더드 팝으로 기울면서 점차 잊혀져 갔다. 그를 포함해서 로큰롤의 광풍에 한 축을 담당했던 흑인 블루스 뮤지션들이 암흑의 시기로 접어든 것이다. 고국 미국에서 후커를 기억 속에서 지우고 있을 때, 한편 대서양 건너편의 영국에서는 그의 음악을 연구하고 들으며 새롭게 재창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964년 애니멀스(Animals)가 후커의 ‘Boom boom’과 ‘Dimples’를 재해석한 것이 좋은 증거이다. 이는 1960년대 후반 영국에 불어닥친 블루스 리바이벌 붐으로 이어져 존 리 후커를 부활시켰다. 1967년 영국으로 건너간 후커는 < ABC > 레코드사와 앨범 계약을 체결하고, 같은 해 < It Serves You Right To Suffer >, 1년 뒤인 1968년에는 < Urban Blues >, 그리고 1969년에는 < Simply The Truth > 등을 내놓으며 블루스 거장의 면모를 과시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미국으로 금의환향하여 1971년 부기록 밴드 캔디드 히트(Canned Heat)와 공동으로 더블 앨범 < Hooker ’N’ Heat >(73위)발표했고, 그해 말에는 밴 모리슨(Van Morrison)이 피처링한 음반 < Never Get Out Of These Blues Alive >(130위)를 공개하는 등 예전처럼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70년대 싱어 송 라이터 시대의 개막은 또 다시 존 리 후커를 지하세계로 몰아 넣었다. 블루스맨은 부정기적으로 앨범을 발표하면서 시름을 달랬고, 1980년 영화 < 블루스 브라더스(The Blues Brothers) >에 카메오로 출연하여 잠깐 대중들의 뇌리에 자신의 존재를 환기시켰을 뿐 20년 가까이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불어닥친 2차 블루스 리바이벌 열풍은 존 리 후커를 과거에서 현재로 화려하게 컴백시켰다. 후커는 자신의 음악인생 40주년이 되는 1989년에 발표한 앨범 < The Healer >(미국 62위, 영국 63위)에 수록된 보니 레이트(Bonnie Raitt)와의 듀엣곡 ‘I’m in the mood’로 그래미 시상식에서 ‘베스트 트래디셔널 블루스 레코딩’ 부분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특히 재기작 < The Healer >는 보니 레이트를 비롯하여 로버트 크레이(Robert Cray), 카를로스 산타나(Carlos Santana), 로스 로보스(Los Lobos) 등 쟁쟁한 후배뮤지션들이 참여하여 부기의 왕에게 힘을 실어줬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이때부터 존 리 후커에 대한 음악계의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졌는데, 조 카커(Joe cocker), 알버트 콜린스(Albert Collins), 라이 쿠더(Ry Cooder), 보 디들리(Bo Diddley), 자니 윈터(Johnny Winter) 등이 출연한 1990년 10월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존 리 후커 트리뷰트’ 콘서트, 1991년 1월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헌액 등이 그것이다. 후커 역시 고희가 넘은 고령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 Mr. Lucky >(1990년), < Boom Boom >(1992년), < Chill Out >(1995년), < Don’t Look Back >(1997년) 등을 내놓으며 꺼지지 않는 불꽃임을 만방에 과시했다. 존 리 후커는 2001년 6월 21일 세월의 흐름을 거역하지 못하고 영면했다. 그와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였던 비비 킹은 “나는 매우 좋은 친구를 잃었고, 세상은 위대한 예술가를 잃었다”며 슬퍼했고, 유투(U2)의 보노는 “그의 죽음은 비극이라며”말을 잊지 못했다. 흑인의 고통을 대변했던 블루스, 그 고통의 음악을 껴안았던 존 리 후커. 그는 이제 고통이 없는 낙원을 찾아 머나먼 여행을 떠났다. 편히 잠드소서.
노래 : B.B. King (비비 킹 ,Riley B. King)
명실상부한 블루스 기타의 왕자이자, 블루스와 로큰롤 역사의 산증인. U2와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등 후배 유명 로커들과 공연을 자주 탓에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하울링 울프(Howlin’ Wolf), 엘모어 제임스(Elmore James) 등 동시대 블루스맨 중에서도 대중적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이기도 하다. 기타 줄을 들어올리는 그의 벤딩 주법과 탁월한 가창은 흑인 블루스의... 명실상부한 블루스 기타의 왕자이자, 블루스와 로큰롤 역사의 산증인. U2와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등 후배 유명 로커들과 공연을 자주 탓에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하울링 울프(Howlin’ Wolf), 엘모어 제임스(Elmore James) 등 동시대 블루스맨 중에서도 대중적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이기도 하다. 기타 줄을 들어올리는 그의 벤딩 주법과 탁월한 가창은 흑인 블루스의 한과 고통을 그대로 전달한다. 미시시피 아이티 베나에서 1925년에 라일리 비 킹(Riley B. King)을 본명으로 태어났고 1946년에 멤피스로 올라왔다. 선배 흑인 기타리스트 티 본 워커(T. Bone Walker)의 영향을 받은 그는 자신의 기타를 ‘루실’로 명명한 1949년에 첫 레코드를 취입했다. 이듬해 비하리 형제가 설립한 음반사 RPM과 계약을 체결한 뒤 1952년 ‘Three o’clock blues’, 1954년 ‘You upset me, baby’를 히트시켰다. 1951년부터 1992년까지 리듬 앤 블루스 히트 차트에 올린 곡만도 무려 75곡. 1960년대 말 블루스 리바이벌 시기에 백인 뮤지션들에 의해 재조명되면서 유명해졌고 1969년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Thrill is gone’은 그의 대표작으로 남아있다. 1987년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받았고, 역시 같은 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적되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종식된 후, 일렉트릭 블루스 시대의 개막을 알린 ‘블루스의 큰 별’ 가운데 하나로 흔히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머디 워터스(Muddy Waters)를 손꼽는다. 즉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 중반까지 시카고 블루스 신을 개척한 인물로, 남부 델타 블루스에 뿌리를 둔 파격적이고 공격적인 슬라이드 기타 주법과 그가 토해내는 한풀이 식의 노래는 당시 혁명을 불러왔다. 수면 도중 심장마비 증세로... 제 2차 세계 대전이 종식된 후, 일렉트릭 블루스 시대의 개막을 알린 ‘블루스의 큰 별’ 가운데 하나로 흔히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머디 워터스(Muddy Waters)를 손꼽는다. 즉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 중반까지 시카고 블루스 신을 개척한 인물로, 남부 델타 블루스에 뿌리를 둔 파격적이고 공격적인 슬라이드 기타 주법과 그가 토해내는 한풀이 식의 노래는 당시 혁명을 불러왔다. 수면 도중 심장마비 증세로 1983년 4월 30일, 6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는 누구보다 블루스의 개념을 명확하게 정립시킨 ‘블루스 거목’으로 기억된다. 그에게 영향 받은 이들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입이 아플 정도로 머디 워터스는 훗날 후배 블루스맨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꾼다. 머디 워터스의 초기 레코딩에서 밴드의 이름을 따온 롤링 스톤스 뿐만 아니라 척 베리, 밥 딜런, 지미 헨드릭스, 제프 벡, 존 메이올, 버디 가이, 에릭 클랩튼, 피터 그린, 자니 윈터 등은 머디의 계승자들. 일례로 머디 워터스의 골든 레퍼토리를 장식하는 ‘Standing around crying’, ‘Rollin’ and tumblin’, ‘Hoochie coochie man’, ‘Honey bee’ 등은 당대 걸출한 뮤지션들을 블루스의 세계로 인도했다. 때문에 블루스 역사는 그를 두고 ‘일렉트릭 블루스의 왕(The King of Electric Blues)’이라 칭송한다. 1915년 4월, 매킨리 모건필드(McKinley Morganfield)라는 본명으로 남부 미시시피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머디 워터스의 이름은 정작 별명에서 유래되었다. 어릴 적부터 진흙탕에서 기타 치며 뛰어 놀길 좋아하던 그의 성향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우스개 소리로 그의 얼굴 생김새만 봐도 금새 진흙이 연상될 정도. 일찌감치 ‘델타 블루스의 거성’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과 선 하우스(Son House)의 레코딩에서 자극 받아 자신만의 연주 스타일을 구축한 그는 1943년 시카고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인 연주 여행을 떠난다. 1948년 곡 ‘I can’t be satisfied’, ‘I feel like going home’을 시작으로 1951년과 1956년 사이에 머디는 ‘Hoochie coochie man’, ‘Just make love to me’, ‘Still a fool’ 등 14개의 히트 송을 배출하게 된다. 머디 워터스를 논할 때 그의 음악을 빛내준 < 체스 > 레코드사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그가 무려 30년 간 < 체스 >와 파트너십을 지속시켰고, 그곳에서 다수 앨범을 내고 연주 인생을 꽃피우기 때문이다. 로큰롤 명인 척 베리(Chuck Berry)와 보 디들리(Bo Diddley) 등도 거기 출신. 그 후 < 콜롬비아 >에서 발표한 1977년 앨범 < Hard Again >은 후반기 대표작이다. 머디의 음악 생애는 사후 4년 뒤인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적되면서 전설로 남았다. 모던 블루스의 왕좌에 오른 비비 킹(B. B. King) 마저도 그를 존경했고, 에릭 클랩튼은 1994년 음반 < From The Cradle >을 그에게 헌사했다. 2004년 3월 < 롤링스톤 >지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로큰롤 명인 50인’ 순위에는 17위로 랭크돼 그 존재 가치를 더했다. 이제는 그의 이름을 딴 블루스 가게마저 생길 정도로 머디 워터스의 존재는 20세기 대중음악 역사를 빛낸 ‘블루스의 아이콘’으로 통한다.
노래 : Elmore James (엘모어 제임스,Elmore James & The Broomdusters)
‘일렉트릭 시카고 블루스의 위대한 거인’으로 회자되는 인물로 슬라이드 기타 주법이 남달리 출중했던 흑인 블루스맨 엘모어 제임스. 그는 머디 워터스, 하울링 울프, 존 리 후커, 비비 킹과 함께 ‘일렉트릭 블루스 시대를 개척한 빅 5’로 거론된다. 1950년대 블루스 문화를 꽃피웠고, 1960년대 블루스 리바이벌 붐이 막 불타오르기 시작할 무렵까지 모던 블루스 콤보의 형식미를 완성시킨 전설적인 블루스 기타리스트다.... ‘일렉트릭 시카고 블루스의 위대한 거인’으로 회자되는 인물로 슬라이드 기타 주법이 남달리 출중했던 흑인 블루스맨 엘모어 제임스. 그는 머디 워터스, 하울링 울프, 존 리 후커, 비비 킹과 함께 ‘일렉트릭 블루스 시대를 개척한 빅 5’로 거론된다. 1950년대 블루스 문화를 꽃피웠고, 1960년대 블루스 리바이벌 붐이 막 불타오르기 시작할 무렵까지 모던 블루스 콤보의 형식미를 완성시킨 전설적인 블루스 기타리스트다. 미시시피 델타 블루스에 뿌리를 둔 엘모어 제임스의 보컬 테크닉과 연주 문법은 1960년대 블루스 리바이벌 운동이 폭발함과 동시에 수면 위로 부상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과거 암울한 그의 음악 생애에 종지부를 찍고 햇살을 맛보기 바로 직전이던 1963년 5월 24일, 시카고에 위치한 녹음실로 가던 도중 심장병에 걸려 결국 45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머디 워터스나 하울링 울프 등 시카고 블루스 동료들에게 그 영광을 되돌려주며 그 자신은 먼저 천국으로 떠난 것이다. 본명이 엘모어 브룩스(Elmore Brooks)인 그는 1918년 1월 27일 워싱턴주 리치랜드라는 곳에서 태어났고, 열 살 때는 기타에 눈을 뜨면서 손수 기타를 만들었다. 10대 시절에는 로버트 존슨과 함께 미시시피 델타 지역에서 순회 공연을 가진 적이 있다. 그의 레코딩 캐리어는 1951년 8월 5일 트럼펫(Trumpet) 스튜디오에서 ‘Dust my broom’을 녹음하면서 시작된다. 비비 킹과 척 베리, 리틀 리처드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후대 여러 뮤지션들에 의해 재해석된 ‘Dust my broom’은 그의 시그니처 송으로 지금껏 기억되고 있다. 원래 로버트 존슨의 ‘I believe I’ll dust my broom’을 각색한 곡으로 이 곡을 접해보면 엘모어 제임스 특유의 블루스 향기를 체득할 수 있다. 역시 그의 고전으로 남아있는 ‘Sky is crying’, ‘Look at the tears’, ‘Roll down the street’, ‘It hurts me too’ 등도 마찬가지. 이후 12년 동안 백 밴드 브룸더스터스(The Broomdusters)를 이끌고 모던(Modern), 체스(Chess), 치프(Chief), 파이어(Fire), 퓨리(Fury), 인조이(Enjoy) 레코드사에서 100곡 이상을 녹음했다. 불행하게도 1929년부터 1952년까지 정확히 23년 간 그의 기타와 노래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활동 시기에 머디 워터스, 하울링 울프와 달리 명성을 얻는데는 실패했으나, 훗날 가장 영향력 있는 블루스 기타리스트로 그의 업적은 로큰롤 역사에 등재되었다. 1992년 엘모어 제임스가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적될 당시 블루스 뮤지션 로비 로버트슨(Robbie Robertson)은 다음과 같은 말로 고인이 된 그에게 존경을 표했다 “나는 엘모어 제임스와 같은 사운드를 내기 위해서 하루에 12시간 동안 기타를 쳤다. 그것도 매일같이, 손가락이 찢어져 피가 날 때까지 쳤다.”
블루스 기타 연주자, 가수. 블루스 기타 연주자, 가수.
노래 : Percy Sledge (퍼시 슬레이지)
블루스, 소울 가수 블루스, 소울 가수
노래 : Sam Cooke (샘 쿡 ,Dale Cook)
소울음악을 거론함에 있어 샘 쿡의 위상은 매우 지대하다. 그는 흑백통합의 광맥이었으며 연주자로서뿐 아니라 레코드비즈니스를 아울러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했다. 예술가이자 사업가로서 자신이 갈 인생길을 현명하게 개척해 갔던 것. 그만큼 당대 음악계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위치는 물론 음반과 출판사를 소유하고 운영할 정도로 그의 관록은 실로 대단했다. 쿡은 그러한 가운데 사회문제에도 ... 소울음악을 거론함에 있어 샘 쿡의 위상은 매우 지대하다. 그는 흑백통합의 광맥이었으며 연주자로서뿐 아니라 레코드비즈니스를 아울러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했다. 예술가이자 사업가로서 자신이 갈 인생길을 현명하게 개척해 갔던 것. 그만큼 당대 음악계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위치는 물론 음반과 출판사를 소유하고 운영할 정도로 그의 관록은 실로 대단했다. 쿡은 그러한 가운데 사회문제에도 적극 동참했다. 인종차별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던 당시 흑인들의 인권보장을 위한 공민권운동에 열정을 불태운 그는 노래를 통해 흑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그러한 그의 의욕적 활동에 흑인들 모두 지지를 보냈다. 사회활동가로서의 지지도는 장차 그에게 돌아올 사회적 지위와 명성에 다름 아니었다. 흑인과 백인의 인종적 갈등의 조정자로서 그리고 기성과 청춘의 세대적 통합자로서 그의 호소력은 당대의 다른 아티스트들을 모두 아우른 것이었다. 1931년 1월에 태어난 그는 목사인 아버지의 교회합창단에서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시카고로 이주한 후 삼형제와 함께 그룹 활동을 하기도 했던 그는 대중음악의 흐름 또한 놓치지 않았다. 틴 하이웨이 큐씨스(Teen Hightway QCs)라는 성가대의 멤버였던 그는 1950년, 전국적 가스펠그룹 소울 스터러스(Soul Stirrers)에 합류했다. 6년여의 활동기간 중 ‘그의 옷자락을 만질 수만 있다면’(Touch the hem of his garment), ’당신에게 더 가까이‘(Nearer to thee), ’내겐 천국 이었어’(That’s heaven to me)와 같은 노래를 통해 흑인사회의 스타로 부상한 그는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종교와 흑인계를 넘어 더 많은 청중들에게 다가가는 게 그의 목표였기 때문. 소울 스터러스와 결별한 그는 1956년, 싱글 ‘사랑스러운’(Lovable)을 발표하며 진정한 자아 정체성 탐구를 위한 새로운 첫발을 내디뎠다. 1950년대 가장 많이 팔린 싱글 중 하나가 된 이 곡과 함께 팝과 알앤비 차트 정상을 차지한 ’You send me’는 2백만 장 이상이 팔려나갔다. 가스펠과 팝 R&B 요소가 응집력 있게 혼합된 노래는 당시로선 선구적인 소울 음반이었다. 그는 또한 로맨틱한 발라드와 틴 팝 싱글들을 연이어 발표하며 지속적인 인기를 확보했다. ‘감상적 이유 때문에’(For sentimental reasons), ’모두 차 차 차를 좋아해‘(Everybody loves to cha cha cha), ’겨우 16세‘(Only sixteen),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What a Wonderful world)를 비롯해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yday)에게 바치는 헌정앨범 < Tribute to the Lady >에 실린 노래들까지 당대를 대표할만한 주목을 끌었다. 하지만 소속사인 킨 레이블에서의 한계를 느낀 그는 메이저 레이블로의 이적을 계획, 콜롬비아(Columbia), 데카(Decca)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3대 레이블 중 하나인 RCA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했다. 음반뿐 아니라 출판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해 왔던 그는 출판사 칵스 뮤직(Kags Music)과 레코드레이블 SAR을 설립해 뮤직비즈니스에 본격 착수했다. RCA에 둥지를 튼 쿡은 차트 2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한 싱글 ’한 사슬에 묶인 옥외 노동죄수들‘(Chain gang, 1960년 싱글2위)로 팝과 소울에 새 지평을 열었으며 블루스적인 로맨틱 ‘슬픈 분위기(Sad mood, 1960년 싱글29위), 목가적 로맨틱 소울 ’큐피드‘(Cupid, 1960년 싱글17위), 보통의 댄스넘버 ‘밤새도록 트위스트를 춰요’(Twistin’ the night away, 1962년 싱글9위), ’나의 집으로 그걸 가져오세요‘(Bring it on home to me, 1962년 싱글13위)’와 같이 다채로운 음악요소와 사회적 인식을 한데 엮어낸 곡들을 내며 왕성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 곡들을 포함, 무려 13곡의 히트넘버가 2년간 차트를 장식했다. 틴에이저와 기성세대 그리고 흑인 전 세대에 걸쳐 폭넓은 팬층을 확보한 그는 특히 백인 청취자들에게 더욱 강하게 다가가고자 했다. 흑인뮤지션에게 주로 굳게 닫혀있던 문을 열고자 했던 것. 1957년 초 뉴욕 코파(Copa)에서 연주를 통해 이를 실현코자 했던 그의 시도는 그러나 실패로 돌아왔다. 경험미숙이 문제였다. 1964년 그는 그러나 당당하게 클럽으로 컴백해 라이브실황을 녹음했고 그해 가장 정교한 앨범 중 하나로 꼽히는 수확을 올렸다. 중년과 백인중산층만을 위한 무대가 됐다는 주위의 냉정한 평가가 뒤따르긴 했지만. 1963년 중반 쿡은 마이애미의 할렘 스퀘어 클럽에서의 공연과 실황을 담은 음반으로 자신의 진가를 확증했다. 흑인청취자들과 함께한 그는 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열창하며 황홀한 연주무대를 통해 쇼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멜로디와 직설적인 소울 감성이 적절히 어우러진 라이브 레퍼토리들은 그야말로 베스트 오브 베스트였다. 라이브의 황제로 우뚝 선 순간이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1963년 중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닥쳤다. 그의 어린 아들이 익사한 것. 쿡은 그해 말까지 깊은 시름에 잠겨 공식적인 음악활동을 중단했다. 그 기간 동안 그러나 그는 비즈니스 매니저 앨런 클라인(Allen Klein)과 함께 재정적으로 그리고 음악활동을 위한 독립의 발판을 견고히 다졌다. 1963년 11월 초 마침내 그의 레코드들에 대한 최종 소유권을 확보했고 지휘감독권도 성취했다. 그가 다시 음반작업에 들어갈 즈음은 1960년대 초의 저항음악적 흥분과 열기가 한창 고조되고 있을 때였다. 쿡은 흑인들을 포함해 차별받는 소수자들의 치료제와 같이 작용한 밥 딜런(Bob Dylan)의 노래 ‘Blowin’ in the wind’에 크게 감화되었다. 피터, 폴&메리도 그 한복판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커다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의식있는 아티스트들의 이러한 사회적 변화의 움직임에 그도 두팔 걷어부치고 나섰다. 샘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변화(의 시기)는 올 겁니다’(A change is gonna come)가 이때 나왔다. 공민권투쟁의 산물로 나온 가장 위대한 노래중 하나. 가스펠부터 팝까지 다양한 음악성향 안에서 탄생한 이 곡은 그의 가장 위대하고도 우아한 예술적 찬양가였다. 이 시기동안 그는 또한 싱글 ’Shake’ 를 통해 더 진보한 댄스 본위의 소울사운드를 들려주었다. 이 두 노래는 쿡의 음악여정에 새로운 가속을 알리는 것이었다. 또 다른 전성기를 알리는 장이 열리는 듯 했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의 꿈과 희망은 한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1964년 11월 11일 이른 오후, 로스앤젤레스의 저급한 모텔에서 쿡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 언쟁에 휘말려 모텔매니저의 총탄을 맞고 싸늘히 식어갔다. 정확한 사인은 규명되지 않고 미궁으로 남았다. 쿡의 죽음으로 흑인 사회는 충격에 휩싸였다. 애도의 물결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965년에 발매된 싱글 ‘A change is gonna come‘과 < Sam Cooke At The Copa > 앨범이 그랬듯 싱글 ‘Shake’는 유작으로 사후 탑 텐 히트를 기록했다.
초기 모타운의 대표주자였던 소울 그룹 초기 모타운의 대표주자였던 소울 그룹
멤버 : 윌리엄 하트(William Hart), 윌버트 하트(Wilbert Hart), 랜디 케인(Randy Cain) 멤버 : 윌리엄 하트(William Hart), 윌버트 하트(Wilbert Hart), 랜디 케인(Randy Cain)
노래 : Ben E. King (벤 이 킹,Benjamin Earl King)
스캣(scat) 보컬의 매력이 느껴지는 팝-재즈 보컬주자 알 자로(Al Jearreau)는 1980년대 활동한 보컬리스트 바비 맥퍼린(Bobby Mcferrin)과 함께 현역 남성 재즈 보컬의 선두에 위치한 인물이다. 그는 그래미상에서 팝, 재즈, R&B 보컬부문을 고루 수상하며 ’보컬 연주의 그랜드 슬램’이라는 보기 드문 기록을 남겼다. 1940년 3월 12일 위스콘신주 밀워키 출생인 알 자로는 목사였던 아버지... 스캣(scat) 보컬의 매력이 느껴지는 팝-재즈 보컬주자 알 자로(Al Jearreau)는 1980년대 활동한 보컬리스트 바비 맥퍼린(Bobby Mcferrin)과 함께 현역 남성 재즈 보컬의 선두에 위치한 인물이다. 그는 그래미상에서 팝, 재즈, R&B 보컬부문을 고루 수상하며 ’보컬 연주의 그랜드 슬램’이라는 보기 드문 기록을 남겼다. 1940년 3월 12일 위스콘신주 밀워키 출생인 알 자로는 목사였던 아버지 덕택에 4세 때부터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스펠과 R&B 음악에 영향을 받았던 그는 재즈 보컬인 형 에밀의 영향을 받아 재즈를 음악의 목표로 삼게 된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 아이오와 대학에서 석사를 마친 다음해인 1966년부터 낮에는 카운슬러로, 밤에는 재즈 가수 겸 작곡가로 활동한다. 1968년 전업 가수를 선언, 그로부터 7년 간 업소를 돌아다니며 무명 음악인 시절을 보내게 된다. 1970년 초까지만 해도 정통 재즈보다는 헤비 메탈이나 재즈 퓨전 같은 꽉 찬 사운드에 대중정서가 쏠려있었던 만큼 목소리로만 승부하는 재즈 보컬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오랜 무명생활동안 자신만의 스캣 스타일을 개발하기 위해 내공을 다지며 때를 기다렸고, 마침내 1975년 워너 브라더스사의 사장 모 오스틴에 의해 발굴된다. 리프라이즈(Reprise)레이블을 통해 선보인 그의 데뷔작 < We Got By >(1975)은 뒤에 재즈 기타리스트 조지 벤슨의 < Breezin’ >(1976)에 참여했던 명 프로듀서 토미 리푸마(Tommy Lipuma)가 프로듀싱을 맡는다. 자작곡으로만 채워진 앨범에서 그는 1940-50년대 비밥 재즈 보컬 주자를 연상시키는 한층 다져진 보컬 기량을 십분 발휘한다. 재즈 록이 강세를 띈 미국보다 유럽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던 알 자로는 두 번째 앨범 발표에 앞서 가진 유럽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친다. 유럽에서 얻은 찬사는 이듬해 1976년 독일음악 아카데미가 수여하는 최우수 신인가수상 수상으로 이어진다. 탁월한 스캣 기량이 잘 응축된 ’Agua de beber’가 수록된 2집 < Glow >(1976)를 발표, 독일 베를린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하며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미국에서의 반응은 여전히 저조했다. 재즈 피아니스트 데이브 브루벡(Dave Brubeck)의 명곡 ’Take five’를 자신의 보컬 연주로 리메이크해 히트시킨 1977년 유럽 라이브 실황 더블 앨범 < Look to the rainbow >와 1978년 앨범 < All fly home >으로 알 자로는 78, 79년 연속으로 그래미 어워드 베스트 재즈, 팝 보컬 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는다. 1980년 5월 발표한 < This Time >은 빌보드 앨범 차트 27위에 오르며 첫 골드를 기록, 그가 서서히 미국 대중들에게 호감을 얻기 시작한다. 재즈 피아니스트 칙 코리아의 스탠다드 ’Spain’을 보컬로 리메이크 해 좋은 반응을 얻었고, 경쾌한 ’Never give up’ 역시 관심을 끌었다. 1981년 6집 < Breakin’ Away >는 앨범 차트 9위를 기록하며 바야흐로 그의 전성시대를 예고했다. 수록곡 중 감미로운 러브 발라드 ’We are in This love together’와 독특한 스캣 사운드로 국내 퓨전 보컬 그룹 ’낮선 사람들’의 목소리에 영감을 준 펑키한 넘버 ’Roof garden’이 인기를 얻는다. 플래티넘을 기록한 이 앨범의 성공에 이어 7집 < Jarreau >(1983)도 앨범차트 13위에 올라 물오른 인기를 실감한다. 그의 콘서트 주요 레파토리로 등장하는 수록곡 ’Mornin’과 ’Boogie Down’은 한층 경쾌하고 펑키한 매력을 통해 발산하며 그만의 사운드를 정립한다. 자신의 앨범 작업 외에 다방면으로 음악 활동을 펼친 그는 데이빗 샌본, 밥 제임스의 듀엣 작 < Double Vision >(1986)에서 객원 싱어로 참여 ’Since I feel for you’의 리드 보컬로 참여하며 앨범의 완성도를 높였고, 영화 배우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으로 등장한 TV 외화 물 < Moonlighting >(블루문 특급)의 주제가 ’Moonlighting’(1987)을 불러 화제를 모았다. 1988년 싱글 ’So good’ 발표 이후 4년 정도의 공백기를 가진 그는 1992년 재즈와 R&B를 솜씨 있게 절충한 < Heaven & Earth >를 발표, 타이틀곡을 비롯, 마일스 데이비스의 ’Blue in Green’을 보컬로 소화해 호평을 받으며, 다시 1993년 그래미상 R&B 부문을 획득한다. 이듬해 발표된 라이브 음반 < Try a little tenderness >(1994)는 재즈 베이스주자 마커스 밀러(Marcus Miller)가 프로듀스하고 조 샘플, 폴리노 다 코스타, 에릭 게일, 필립 세시와 같은 호화 세션진이 연주로 참여하며 그의 보컬에 생기를 보탠다. 엘튼 존의 히트곡 ’Your song’을 비롯, 재즈의 고전인 조지 거쉰의 ’Summertime’을 새롭게 리메이크해 수록한 앨범은 기존에 추구해왔던 팝 성향의 재즈 보컬과 정통 재즈 보컬의 느낌을 고루 담아냈다. 2곡의 신곡을 담은 그의 첫 베스트 앨범 < Best Of Al Jarreau >(1996)을 끝으로 워너브라더사를 떠난 알 자로는 다시 4년여의 공백기를 가진 뒤 2000년, 재즈 레이블 GRP를 통해 < Tomorrow Today >를 발표, 여전히 부드럽고 감칠맛 나는 보컬 연주를 들려줬다.
멤버 : 로한 데라노 터니(Rohan Delano Turney, 보컬), 피터 라마(Peter Lamarr, 보컬), 빅터 비노에(Victor Bynoe, 보컬), 패트릭 알란(Patrick Alan, 보컬) 멤버 : 로한 데라노 터니(Rohan Delano Turney, 보컬), 피터 라마(Peter Lamarr, 보컬), 빅터 비노에(Victor Bynoe, 보컬), 패트릭 알란(Patrick Alan, 보컬)
노래 : James Brown (제임스 브라운,James Joseph Brown Jr.)
‘펑크(Funk)의 선구자’, 혹은 ‘소울의 대부’ 등의 화려한 수식어로 지금까지도 후배 뮤지션들에게 존경받고 있는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은 1960, 70년대에 걸친 시기에 전성기를 구가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흑인 소울 싱어다. 가스펠에 뿌리를 둔 음악적 자양분을 바탕으로 그는 결국 소울에서 리듬 앤 블루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장르 해석을 이끌며 ‘아메리칸 블랙 뮤직’의 혁명을 몰고 온 인물로... ‘펑크(Funk)의 선구자’, 혹은 ‘소울의 대부’ 등의 화려한 수식어로 지금까지도 후배 뮤지션들에게 존경받고 있는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은 1960, 70년대에 걸친 시기에 전성기를 구가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흑인 소울 싱어다. 가스펠에 뿌리를 둔 음악적 자양분을 바탕으로 그는 결국 소울에서 리듬 앤 블루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장르 해석을 이끌며 ‘아메리칸 블랙 뮤직’의 혁명을 몰고 온 인물로 평가받기도 했다. 소위 ‘Mr. 다이너마이트’라고 불려질 정도로 폭발적인 보이스를 지녔던 브라운은 자신의 매력이라 할만한 흡입력 강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펑키(Funky), 소울, R&B 같은 흑인장르를 토해내며 수많은 음반을 레코딩했고, 정열적인 무대매너를 앞세워 왕성한 음악활동을 보여줬다. 특히 라이브 공연에서 그의 재능은 개성 넘치는 플레이의 광분과 더불어 운동선수와도 흡사한 스태미나와 순간적인 타이밍에서 놀라운 기량을 선보였다. 게다가 그가 온몸으로 절규하듯 내지르는 울분과 광기에 가까운 몸짓은 그 당시 미국사회에서 굴욕적인 삶을 살아가던 흑인들에게는 커다란 위안이었고, 또한 백인들마저도 그 열정에 매료되어 감탄과 박수를 보낼 지경이었다. 흑인들의 핏속에 흐르고 있는 자유에 대한 갈망 역시 그의 음악에서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다. 싱어 송 라이터와 프로듀서로서의 능력을 동시에 겸비할 정도로 뛰어난 음악성을 지녔던 그의 존재는 엇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레이 찰스(Ray Charles)나 샘 쿡(Sam Cooke)과 같은 소울 싱어들과 라이벌로 비견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장르를 일궈냈던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이나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과도 비교 대상이었지만, 그 분야에서 일찌감치 여타 아티스트보다 펑크(Funk)를 먼저 시도했던 인물로 지금까지도 널리 팝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1933년 미국 남부의 시골태생으로 어린 시절 빈민가에서 성장한 제임스 브라운은 파워풀하며 깊이 있는 자신의 목소리가 주위에 알려지면서 금새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브라운은 1940년대 중반 소울 싱어 바비 버드(Bobby Byrd)의 도움을 받아 그와 함께 가스펠 그룹에서 노래를 하면서 본격적인 음악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제임스 브라운은 1956년 ‘Please, please, please’(5위)를 발표하면서 공식적인 첫 데뷔를 장식했다. 이 싱글은 미국과 영국에서 호평을 얻어냈고, 1959년에 발매된 두 번째 싱글 ‘Try me’(48위)의 성공으로 브라운은 히트퍼레이드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1960년대로 넘어오면서 브라운은 자신의 끼가 묻어난 개성 넘치는 스타일을 선보이며 싱글 ‘Think’(33위), ‘Night train’(35위), Prisoner of love(18위), ‘Out of sight’(24위), ‘I got you (I feel good)’(3위) 등을 히트시켰으며 공연 실황을 담아낸 < Live At The Apollo >(1963)을 통해서 브라운은 음악 인생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지금까지도 그의 최고 작품으로 손꼽히는 이 라이브 앨범과 1965년에 발매된 < Papa’s Got A Brand New Bag >의 연이은 상업적 성공으로 브라운은 백인들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깊이 각인시켜주는 계기를 만들었다. 계속해서 그는 1969년 < Say It Loud I’m Black I’m Proud >를 발표하며 일련의 기간동안 흑인 음악계 최고의 슈퍼스타덤에 올랐다. “나는 흑인이고, 흑인으로 태어난 것이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이렇게 외쳐대는 이 작품에서 브라운은 연인을 떠나보내는 심경을 애절하게 표현한 ‘Goodbye my love’(9위)와 소울 필이 가득한 ‘Licking stick’(2위) 등 그만의 열정이 녹아든 곡들을 수록하며 소울 싱어로서의 명성을 이어나갔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브라운은 당시 라이브로 녹음한 더블 앨범 < Sex Machine >(1970)을 발표했고, 국내 CF에 쓰여지면서 너무나도 유명해진 ‘It’s a man’s man’s man’s world’ 같은 곡을 배출해냈다. 또한 이듬해부터 < Hot Pants >(1971), < Get on the Good Foot >(1972)등이 계속해서 히트했고, 골드를 기록한 음반 < The Payback >(1973), < Hell >(1974)을 발표하며 의욕적인 음악활동을 계속해나갔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이후부터 브라운은 뮤지션으로서 퇴보의 길을 걷게된다. 그간 조금씩 쌓여갔던 개인적인 재정난과 마약문제로 결국 감옥투옥 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그 이후로 브라운은 별다른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Living in america’(4위)를 히트시킨 < Gravity >(1986)와 2년 뒤 < I’m Real >(1988)을 발표하며 1980년대 말까지 음악활동의 명맥을 이어갔다. 제임스 브라운의 음악은 후대에 와서 랩/힙합 뮤지션들의 앨범에 종종 샘플로 쓰여지면서 다시금 재평가 받기에 이르렀고, 현재 팝 계에서는 예전보다 훨씬 더 영향력 있는 뮤지션으로 남아있다.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록음악과 흑인음악에 걸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가장 중요한 뮤지션중의 한 명으로 손꼽을 만큼 음악을 통해서 분출하고자 했던 그의 혁명과도 같았던 메시지는 강렬했다.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브라운은 이런저런 가정적 불화와 개인적 사생활의 비극까지 겹치면서 음악활동 또한 저조한 결과만을 가져왔다. 1990년대에는 힙합 비트를 시도한 < Universal James >(1992)를 발표했고, 새롭게 자신의 부활을 알리려고 시도했던 < I’m Back >(1998)같은 음반을 발표해 음악계에 다시 돌아왔음을 선언했지만 대중들에게 별다른 호응은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음악으로 인생의 모든 것을 바쳤던 제임스 브라운. 이제 후배 뮤지션들에 의해서 그의 존재는 지금까지도 격상되고 있다.
노래 : Isley Brothers (아이슬리 브라더스)
흑인 소울, 리듬 앤 블루스 그룹 아이슬리 브라더스(The Isley Brothers)의 힘은 끈질긴 생명력이다. 4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한결같은 음악여정을 걸어왔다는 점이 이를 강하게 시사한다. 보컬 팀워크와 하모니를 전면에 내세운 이들은 로맨틱한 R&B 발라드와 가스펠, 소울, 펑크(Funk)에 이르는 흑인 장르를 대중적으로 소개하는데 가장 중심에 섰던 형제그룹이다.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결성된 ... 흑인 소울, 리듬 앤 블루스 그룹 아이슬리 브라더스(The Isley Brothers)의 힘은 끈질긴 생명력이다. 4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한결같은 음악여정을 걸어왔다는 점이 이를 강하게 시사한다. 보컬 팀워크와 하모니를 전면에 내세운 이들은 로맨틱한 R&B 발라드와 가스펠, 소울, 펑크(Funk)에 이르는 흑인 장르를 대중적으로 소개하는데 가장 중심에 섰던 형제그룹이다.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결성된 아이슬리 브라더스는 원래 팀의 정신적 지주이자 리드 싱어인 로날드 아이슬리(Ronald Isley)를 중심으로 루돌프(Rudolph), 오켈리(O’Kelly), 베론(Vernon)의 가스펠 쿼텟(quartet)으로 구성된 보컬 밴드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1955년 자전거 사고로 베론이 사망하자 아이슬리 형제는 트리오 라인업으로 팝 계의 첫 출발을 내디뎠다. 데뷔 초기 고향을 등지고 뉴욕으로 이주해 두-왑(doo-wop) 레코드를 녹음하며 활동에 포문을 연 그룹은 1959년 가스펠 송 ‘Shout’가 팝 차트에서 톱 40의 놀랄만한 성과를 올리면서 서서히 이름을 알렸다. 1962년 R&B싱글 차트 2위를 기록한 ‘Twist and shout’(비틀즈가 커버한 곡), 1966년 스매시 히트 싱글 ‘This old heart of mine (Is weak for you)’(팝 차트 12위, 이듬해 영국차트 3위) 등이 성공가도의 대표적인 열쇠였다. 이후 그룹은 수많은 음반을 레코딩하면서 소울과 R&B뿐만 아니라 펑크와 록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을 넓혀나갔다.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는 바로 그룹의 혁명을 이끈 시기였다. 그 출발선상에 자리한 1969년 작품 < It’s Our Thing >(R&B앨범 차트 2위)부터 그룹은 줄 곳 히트 퍼레이드를 이어나갔다. 결국 1970년에 발표한 < Get Into Something >에서 R&B차트 톱 30에 랭크된 곡을 무려 여섯 곡이나 배출해내는 저력을 과시했고, 1971년 < Givin’ It Back >을 발표해 밥 딜런(Bob Dylan), 제임스 테일러(James Taylor), 스페판 스틸스(Stephen Stills), 빌 위더스(Bill Withers), 닐영(Neil Young)의 곡들을 리메이크하며 주류 음악시장의 성공 궤도에 안착하기 시작했다. 아이슬리 형제가 인기그룹으로 급부상한 1973년작 < 3 + 3 >(팝 앨범 차트 8위)은 제 2세대 아이슬리 브라더스를 형성한 시기였다. 지미 헨드릭스로부터 영향 받은 기타리스트 어니 아이슬리(Ernie Isley)와 베이스, 퍼커션 주자 마빈 아이슬리(Marvin Isley), 사촌 형제인 크리스 자스퍼(Chris Jasper)가 이 앨범부터 그룹에 새롭게 가입. 이때부터 아이슬리 브라더스는 6인 체제로 전성기가 끝날 무렵까지 10년 동안 멤버교체 없이 ‘가문의 영광’을 지속해나갔다. 결국 이들은 발표하는 앨범마다 골드와 플래티넘을 달성하며 장기간 대중들과 함께 호흡했다. 그룹의 진가가 발휘된 1975년 걸작 < The Heat Is On >는 아이슬리에게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라는 영광을 수여한 금자탑이었다. 더불어 1978년작 < Showdown >(팝 앨범 차트 4위)에 수록되어 R&B싱글 차트 1위를 기록한 ‘Take me to the next phase (Part 1)’의 빅 히트로 1970년대에 접어들어 그룹은 가장 화려한 시기를 맞이한다. 1976년 < Harvest for the World >(9위), 1977년 < Go for Your Guns >(6위), 1978년 < Showdown >(4위) 등의 발표하는 음반마다 그룹은 매번 R&B앨범 차트 정상을 점령했고, 여러 싱글 히트곡들로 R&B차트를 힘차게 꿰찼다. 흑인음악계의 많은 후배들이 아이슬리 브라더스를 존경하게된 결정적 배경이 바로 이 당시 축적되었다. 10여 년 간 지속적인 성공가도를 달린 그룹은 1983년 < Between the Sheets > 이후 점차 하락세에 접어들며 침체기를 맞이한다. 어스 윈 앤 파이어(Earth, Wind & Fire), 쿨 앤 더 갱(Kool & The Gang) 같은 펑키(Funky) 사운드가 조금씩 무기력해질 시점에서 로맨틱 발라드 곡조로 일대 사운드의 변화를 꽤했다. 하지만 결과는 예전만큼 순탄하지 않았다. 결국 1986년 심장마비로 오켈리가 세상을 떠난 뒤 아이슬리 브라더스는 흑인 여성아티스트 안젤라 윈부시(Angela Winbush)를 작업 동료로 맞이해 그룹 재건에 나섰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팀을 떠났던 마빈, 어니와 재결합한 그룹은 그간 30년이 넘는 꾸준한 음악활동에 대한 공적을 인정받아 1992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4년 뒤 1996년 < Mission to Please >(R&B앨범 차트 2위)는 R&B 크루너 키스 스웨트(Keith Sweat), 알 켈리(R. Kelly) 같은 후배 뮤지션들이 참여해 젊은 감각으로 앨범의 빛을 더해주었다. 현재 그룹은 로날드와 어니의 듀오 체제를 구축해 기나긴 음악여정을 꾸준히 이어오며 2001년 < Eternal >(3위)을 발표해 다시금 팝 팬들에게 회자되기도 했다. 그룹은 2003년 발매 첫 주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등극한 < Body Kiss >로 거의 30년 만에 차트 1위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동시대 여러 아티스트들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운명을 달리하거나 팀의 해체를 맛보았지만 이들은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 흑인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노장의 투혼을 아직도 십분 발휘하고 있다. 지나간 세월이 대가를 인정하는 법이다.
노래 : Esther Phillips (에스더 필립스,Esther Mae Jones)
R&B, 블루스, 소울, 재즈 가수 R&B, 블루스, 소울, 재즈 가수
1926년 미국 세인트 루이스(St. Louis)에서 태어난 척 베리(Chuck Berry)는 록앤롤(Rock & Roll)의 태동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뮤지션이다. 그는 흑인이면서도 컨추리풍의 곡들을 멋지게 써내며 흑인음악이었던 ’리듬 앤 블루스(Rhythm & Blues)’와 백인음악이었던 ’컨츄리 앤 웨스턴(Country & Western)’을 ’록앤롤’이는 하나의 장르로 통합시켰다. 당시 이름... 1926년 미국 세인트 루이스(St. Louis)에서 태어난 척 베리(Chuck Berry)는 록앤롤(Rock & Roll)의 태동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뮤지션이다. 그는 흑인이면서도 컨추리풍의 곡들을 멋지게 써내며 흑인음악이었던 ’리듬 앤 블루스(Rhythm & Blues)’와 백인음악이었던 ’컨츄리 앤 웨스턴(Country & Western)’을 ’록앤롤’이는 하나의 장르로 통합시켰다. 당시 이름만 존재할 뿐 실제적인 형식이 갖추어지지 않았던 록앤롤이라는 장르가 척베리에 의해 정립되면서 이후 1950-1960년대 수많은 록앤롤 밴드들이 출연하게 되었던 것이다. 10살 때부터 기타를 치며 음악에 재능을 보였던 그였지만 그의 20대는 미국의 1940-1950년대를 살았던 다른 흑인들처럼 흑인 노동자의 삶에 머물러 있었다. 음악에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그룹을 결성한 척 베리는 클럽에서 보컬 및 기타리스트로서 활동하며 대중들에게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1951년부터 1955년까지 클럽에서 알앤비와 록앤롤이 혼합된 사운드에 스탠다드풍의 보컬을 섞어 들려주며 인기를 높여가던 그는 1955년 정식으로 데뷔한다. 체스터 레코드사의 레너드 체스 사장은 그의 노래 ’Ida May’를 듣고 그 새로운 음악 스타일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곡명을 ’Maybellene’으로 바꾼 후 레코드로 정식 발매했다. 이 곡은 미국 알앤비 차트 정상에 오르고 전미 싱글차트 5위에 오르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고, 1960년까지 척 베리는 절정의 인기를 누리게 된다. ’Roll over Beethoven’(후에 비틀즈에 의해 리메이크 되어졌다.), ’School days’, ’Johnny b. goode’(영화 ’백투더 퓨처’에서 파티 장면에 주인공이 직접 연주하는 것으로 삽입되어지기도 했던 이 곡은 4박의 개념을 깨는 폴리 리듬을 도입하여 록 기타주법의 길을 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Little Queenie’, ’Sweet little sixteen’, ’Surfin’ U.S.A.’(비치보이스에 의해 리메이크 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등이 연속해서 히트했다. 1961년 최고의 인기와 음악적 명성을 누리던 그는 ’미성년자 추행’ 혐의로 20개월 간 복역하는 어이없는 일을 겪게 된다. 개인적인 실수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인기는 떨어지게 되고 복역 이후 좋은 곡들을 많이 작곡하며 차트에도 여러 곡들을 올려놓지만 1960년대 쏟아져 나온 수많은 록앤롤 밴드들에게 록의 주도권을 내어주어야만 했다. 이후 1972년 < The London Chuck Berry Sessions >에서 ’My ding-a-ling’을 히트시키는 데 그쳤지만 록 음악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과 업적은 인기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위대한 것이었다. ’척 베리가 있었기에 비틀즈가 존재했다’는 후대의 평가에서 짐작할 수 있듯 록음악 역사의 첫 장을 장식하고 있는 그의 위상과 업적은 수 많은 시간이 흘러도 변함 없을 것이다.
노래 : Jerry Lee Lewis (제리 리 루이스)
노래 : Eddie Cochran (에디 코크란,Ray Edward Cochran)
미네소타주(州) 앨버트 리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레이 에드워드 코크런(Ray Edward Cockran)이다. 1950년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주로 옮겼으며 1954년에는 행크 코크런(Hank Cochran)과 함께 코크런 브라더스(the Cochran Brothers)를 결성하여 컨트리뮤직을 주로 불렀다. 1956년에 처음으로 로큰롤곡인 《스키니 짐 Skinny Jim》을 녹음하였으며 이후 《더 걸 캔트 헬프... 미네소타주(州) 앨버트 리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레이 에드워드 코크런(Ray Edward Cockran)이다. 1950년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주로 옮겼으며 1954년에는 행크 코크런(Hank Cochran)과 함께 코크런 브라더스(the Cochran Brothers)를 결성하여 컨트리뮤직을 주로 불렀다. 1956년에 처음으로 로큰롤곡인 《스키니 짐 Skinny Jim》을 녹음하였으며 이후 《더 걸 캔트 헬프 잇 The Girl Can't Help It》(1956), 《언테임드 유스 Untamed Youth》(1957), 《고 자니 고 Go Johnny Go》(1959) 등의 영화에 출연하여 인기를 얻었다.

첫 히트곡인 《시틴 인 더 발코니 Sittin' in the Balcony》(1957)에 이어 힘찬 어쿠스틱 기타 연주를 담은 《서머타임 블루스 Summertime Blues》(1958)와 《크몬 에버리바디 C'mon Everybody》(1958)는 초기 록의 완벽한 본보기로 꼽힌다.

인기가 절정이던 1960년 영국 순회공연 도중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유일한 앨범인 《싱인 투 마이 베이비 Singin' to My Baby》는 그가 죽기 몇달 전에 녹음한 것으로 그 속에 수록된 《스리 스텝스 투 헤븐 Three Steps to Heaven》은 그가 죽은 뒤 영국에서 인기순위 1위에 올랐다.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 '공연자(performers)' 부문에 올랐다.
미국의 로큰롤 가수 겸 기타리스트. 척 베리(Chuck Berry), 리틀 리처드(Little Richard) 등과 함께 1950년대 로큰롤 전성기를 이끌었다. 원초적인 아프리카 리듬에서 가져온 이른바 ‘보 디들리 비트’로 유명하다. <보 디들리(Bo Diddley)>(1955), <크래킹 업(Crackin Up)>(1959), <로드 러너(Road Runner)>(1960) 등이 대표곡으로 꼽힌다. 미국의 로큰롤 가수 겸 기타리스트. 척 베리(Chuck Berry), 리틀 리처드(Little Richard) 등과 함께 1950년대 로큰롤 전성기를 이끌었다. 원초적인 아프리카 리듬에서 가져온 이른바 ‘보 디들리 비트’로 유명하다. <보 디들리(Bo Diddley)>(1955), <크래킹 업(Crackin Up)>(1959), <로드 러너(Road Runner)>(1960) 등이 대표곡으로 꼽힌다.
모든 사람들은 기나긴 인생을 항해하면서 좋든 싫든 호사다마(好事多魔)와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순간을 맞는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못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것을 슬기롭고 현명하게 대처해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절호의 기회로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It’s a heartache’와 ’Total eclipse of the heart’, ’Holding out for... 모든 사람들은 기나긴 인생을 항해하면서 좋든 싫든 호사다마(好事多魔)와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순간을 맞는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못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것을 슬기롭고 현명하게 대처해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절호의 기회로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It’s a heartache’와 ’Total eclipse of the heart’, ’Holding out for a hero’ 등으로 우리나라에서 꾸준한 리퀘스트를 받는 보니 타일러(Bonnie Tyler)는 자신에게 주어진 불리한 여건을 자신만의 장점으로 승화시킨 불사조 같은 인물이다. 1970년대 중반 목에 생긴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이후 허스키한 음색을 소유하게 된 보니 타일러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Bette Davis eyes’로 유명한 킴 칸스(Kim Carnes)와 함께 대표적인 ’여성판 로드 스튜어트’로서 당대를 풍미했다. 1953년 6월 8일 영국 연방인 웨일즈에서 게이너 홉킨스(Gaynor Hopkins)라는 본명으로 태어난 그녀의 음악은 1970년대와 1980년대가 확연하게 구별된다. ’It’s a heartache’로 대표되는 어쿠스틱 스타일이 두드러진 성인 취향의 팝이 그녀의 1970년대를 정의했다면, 미트 로프(Meat Loaf)의 음반 제작으로 유명한 작곡자 겸 제작자인 짐 스타인만(Jim Steinman)과 손잡은 1980년대 이후부터는 오페라 형식의 웅장하고 화려한 곡들이 그녀의 후반기를 책임졌다. 1978년, 빌보드 싱글 차트 3위를 기록한 타일러의 ’It’s a heartache’는 국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80년대 보니 타일러의 음악과는 달리 경쾌한 전형적 어덜트 컨템포러리 스타일인 이 곡은 그녀의 두 번째 정규 앨범의 타이틀 트랙이었다. 이후 전자 음원이 없는 포크와 컨트리 성향의 음반을 공개했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80년대 초반에 음반사를 RCA에서 콜롬비아로 옮겨 회심의 역작을 구상하면서 제2의 도약을 준비한다. 1983년 세상에 공개된 < Faster Than The Speed Of Night >은 보니 타일러에게 새로운 음악 인생을 열어 준 걸작 앨범이다. 그녀를 대표하는 ’Total eclipse of the heart’는 1983년 10월 무려 4주 동안이나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뒤이어 후속곡 ’Take me back’도 46위를 기록하면서 1984년에 거행된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가장 유력한 여자 가수상 후보로 예견되었으나 그녀는 ’Flashdance.....what a feeling’의 주인공 아이린 카라(Irene Cara)에게 영광의 트로피를 양보(?)했다. ’Total eclipse of the heart’가 한 달 동안 싱글 차트 1위를 지키고 있을 때 바로 그 밑에서 3주간이나 2위를 지킨 노래도 짐 스타인만이 작곡하고 프로듀싱 한 에어 서플라이(Air Supply)의 ’Making love out of nothing at all’이었다. 그 정도로 당시 짐 스타인만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만큼 기세가 등등했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에 2년이 더 지난 1995년에는 여성 댄스 팝 가수 니키 프렌치(Nicki French)가 ’Total eclipse of the heart’를 댄스 스타일로 커버해 다시 한번 싱글 차트 2위의 자리에 올려놓음으로써 이 곡이 전천후 명곡임을 재확인시켰다. 1984년, 미 전역을 춤바다의 물결로 침몰시킨 영화 < 푸트루스 >의 사운드트랙에는 강력한 보컬과 드럼 연주가 휘몰아치는 ’Holding out for a hero(34위)’가 수록되어 그녀의 지속적인 인기를 유지시켜 주었고, 1920년대 SF 영화를 복원해 1984년에 재개봉한 < 메트로폴리스 >에 삽입된 ’Here she comes(76위)’ 같은 영화 수록곡들을 취입하면서 비교적 여유 있는 한 해를 보냈다. 1986년에는 < Secret Dreams & Forbidden Fire >로 다시 한번 도약을 시도했지만 3년 전과 같은 센세이셔널한 결과를 재현하는데는 실패했다. 이전의 앨범 < Faster Than The Speed Of Night >처럼 짐 스타인만 식의 장대한 스케일이 반복되었으며 대부분 곡들의 길이도 5분대를 훌쩍 뛰어 넘었기 때문에 싱글로 커트 하기엔 약간 무리가 따랐다. 팝 메탈의 기폭제 역할을 한 본 조비(Bon Jovi)의 ’You give love a bad name’(1986년 11월 1위)과 비슷한 멜로디를 가진 ’If you were a woman (And I was a man)’만이 1986년 77위를 끝으로 추락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이 곡은 1990년대 초반에 국내 자동차 광고의 배경 음악으로 쓰인바 있어 우리 귀에 그다지 낯설지 않다. 1970년대 후반 ’It’s a heartache’의 대대적인 인기로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국제 가요제에도 참가해 그 특유의 거친 허스키 음색을 직접 들려준 이 금발의 미녀는 천재 아티스트 마이크 올드필드(Mike Oldfield)의 1987년 음반 < Islands >에 게스트 보컬로 초청되어 그녀만의 보컬 전율을 다시 한번 과시하기도 했다. 보니 타일러는 1990년대 후반까지 꾸준하게 신보를 발표했지만 그 작품들은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한 채 금새 잊혀졌다. 하지만 ‘It’s a heartache’와 ‘Total eclipse of the heart’의 메아리는 아직까지 우리의 뇌리에 남아 그녀의 노래들처럼 격정적인 환희와 감동을 전한다.
1980년대 후반 국내의 음료수 CF에 등장해서 서툰 한국말과 앙증맞은 표정으로 "흔드러 주쎄여"를 외쳤던 10대 소녀 티파니(Tiffany)를 기억하시는지? 당시 라디오와 음반뿐 아니라 TV에서도 그녀의 깜찍한 모습을 볼 수 있었던 티파니 팬들은 더 이상 바랄게 없었다(비록 잠깐 이었지만). 티파니(Tiffany)는 1980년대 후반 데비 깁슨(Debbie Gibson)과 틴아이돌 라이벌을 형성해 현재의 브리트... 1980년대 후반 국내의 음료수 CF에 등장해서 서툰 한국말과 앙증맞은 표정으로 "흔드러 주쎄여"를 외쳤던 10대 소녀 티파니(Tiffany)를 기억하시는지? 당시 라디오와 음반뿐 아니라 TV에서도 그녀의 깜찍한 모습을 볼 수 있었던 티파니 팬들은 더 이상 바랄게 없었다(비록 잠깐 이었지만). 티파니(Tiffany)는 1980년대 후반 데비 깁슨(Debbie Gibson)과 틴아이돌 라이벌을 형성해 현재의 브리트니 스피어스(Britney Spears)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Christina Aguilera)처럼 경쟁 관계의 모델이 되는 선배이다. 1971년 10월 2일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티파니는 10대 초반부터 노래 실력을 인정받아 크고 작은 프로그램에 열심히 얼굴을 내밀어 저변 확대를 꽤했다. 1980년대 중반 매니저 조지 토빈(George Tobin)과 계약을 맺고 본격적으로 대중 음악계에 뛰어든 빨간 머리 티파니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대형 쇼핑몰을 중심으로 펼치는 ’게릴라성 콘서트’를 숙주로 삼아 자신의 몸을 부풀렸다. 이 16살 발랄한 소녀의 인기몰이의 시작은 이렇듯 치고 빠지는 가벼운 전술이었지만 그 결과는 거대했다. 4년 만에 신보를 발표한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과 두 번째 앨범으로 완전히 팝의 여왕으로 자리를 굳힌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의 틈새를 파고든 티파니의 동명 타이틀 데뷔 앨범 < Tiffany >는 두 곡의 넘버원 싱글 ’I think we’re alone now’와 발라드 ’Could’ve been’ 외에도 ’I saw him standing there(7위)’와 ’Feeling s of forever(50위)’를 토해내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I think we’re alone now’는 토미 제임스 & 숀델스(Tomy James & The Shondells)의 원곡 이었으며 ’I saw him standing there’는 비틀즈의 ’I saw her standing there’를 제목만 살짝 바꿔 커버한 것이다. 순식간에 6백만 장이나 팔린 < Tiffany >는 앨범 차트 정상에 올랐다. 허지만 티파니는 음반사에 의해 움직이는 노래 잘하는 ’바비 인형’이었다. 곡을 직접 만들지 못했던 그녀는 아티스트로서의 모든 영광을 싱어 송라이터인 데비 깁슨에게 넘겨줘야 했다. 그녀의 대중적 지지는 곧 조루현상을 보였다. 1988년 연말에 발표된 2집 < Hold An Old Friend’s Hand >에선 발라드 ’All this time(6위)’과 국내 라디오 신청 엽서를 많이 받은 ’Radio romance(35위)’가 전작의 히트를 이어갔지만 티파니 인기의 추락 속도는 그녀의 육체적인 성장 속도만큼 빨랐다. 때마침 수입 문제로 야기된 어머니와의 법정 다툼은 그녀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면에서도 감점을 받았다. 돈 때문에 친어머니와 싸우다니! 1989년 부산과 수원에서 가진 두 차례의 내한 공연을 통해 공연에 목말랐던 지방의 팝 팬들에게 촉촉한 단비 역할을 한 티파니는 이전 음반들과는 달리 펑키(funky)한 쪽으로 선회한 3집 < New Inside >로 1990년대의 포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티파니의 ’새로운 내면’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혼 이후에 공개한 1993년의 < Dreams Never Die >도 같은 결과를 양산했다. 그해 겨울 < Dreams Never Die >의 프로모션을 위해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했지만 그 반응은 4년 전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싱어 송라이터로 변신한 티파니가 < The Colour Of Silence >라는 성인 취향의 모던록으로 돌아온 것은 2000년, 그러나 금의환향(錦衣還鄕)은 아니었다. 조용하고 차분한 복귀였다. 2002년에는 성인 잡지 < 플레이보이 >에 모델로 등장해 예전의 청순한 이미지를 기억하고 있는 대중들에게 충격파를 던지기도 했다. 주근깨 얼굴에 빨간 머리의 소녀가 애교스럽게 "흔들어 주세요"라고 외친 지 13년. 그 아가씨는 이제 한 아이의 어머니이자 한 남자의 부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지금 성숙한 자세로 이렇게 말한다. "기억해 주세요"
멤버: 릴리안 로페즈, 스티븐 콜라조, 로미나 존슨, 앤 피터스, 애니스 피터스 멤버: 릴리안 로페즈, 스티븐 콜라조, 로미나 존슨, 앤 피터스, 애니스 피터스
멤버 :Jimmy Ellis, Harold Doc Wade, Stanley Wade, Earl Young 멤버 :Jimmy Ellis, Harold Doc Wade, Stanley Wade, Earl Young
노래 : Gloria Gaynor (글로리아 게이너)
1998년에 개봉된 < 러시 아워 >는 아시아의 별 성룡(Jackie Chan)을 세계적인 코믹 액션 스타로 등극시켰다.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못할 것 같은 진지한 홍콩 형사 성룡과 구렁이처럼 능글맞은 흑인 형사 크리스 카터(Chris Carter)의 좌충우돌 스토리는 우리에게 많은 재미를 선사했다. 영화 중반부 길가에 차를 세운 홍콩 경찰은 “War is absolutely nothing”이라며 노래를 부르자... 1998년에 개봉된 < 러시 아워 >는 아시아의 별 성룡(Jackie Chan)을 세계적인 코믹 액션 스타로 등극시켰다.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못할 것 같은 진지한 홍콩 형사 성룡과 구렁이처럼 능글맞은 흑인 형사 크리스 카터(Chris Carter)의 좌충우돌 스토리는 우리에게 많은 재미를 선사했다. 영화 중반부 길가에 차를 세운 홍콩 경찰은 “War is absolutely nothing”이라며 노래를 부르자 듣다 못한 흑인 형사가 한 수 가르친다며 노래와 함께 댄싱을 보여준다. 그러나 민망하게도 크리스 카터의 ‘가무’도 잭키 찬의 그것보다 나을 것은 없었다. 이들이 신나게 불러재낀 노래는 1970년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했던 소울 싱어 에드윈 스타(Edwin Starr)의 ‘War’다. 그는 1960년대 후반 모타운 레코드에서 가장 전도 유망한 소울 싱어였고 그의 샤우팅 창법은 ‘소울 음악의 대부’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에 비견될 정도로 폭발적이고 거칠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혼란스럽고 어수선했던 1960년대말의 시대상을 대변하기 위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가사를 사포처럼 다듬어지지 않은 목소리에 담아 냈다. 1942년 1월 21일, 컨트리의 고향인 테네시주 내쉬빌에서 태어난 에드윈 스타는 10대 시절인 1950년대 후반부터 보컬 그룹을 결성해 활동했으며 1965년부터 홀로 서기를 감행한다. 흑인 음악의 히트 공장이었던 모타운 레코드가 그가 소속돼 있던 릭 틱 레코드를 1960년대 후반에 인수하자 이 소울 싱어는 자연스레 모타운의 식솔이 됐지만 이곳에서의 활동은 ‘War’가 수록된 음반 < War & Peace >를 제외하면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 사실 ‘War’의 프로듀서 겸 작곡가 노만 휫필드(Norman Whitfield)는 ‘My girl’의 주인공 템테이션(Temptation)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잘 알려진 대로 모타운의 대표 베리 고디의 가수에 대한 장악력은 거의 간섭이나 집착이었다. 그것에 반발해 분연히 일어선 마빈 게이는 < What''s Going On? >을 통해 모타운 제국으로부터 아티스트의 자유를 획득했고,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도 베리 고디로부터 음악적인 독립과 함께 정당한 금전적인 이익도 보장받았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로부터 자극을 받은 그는 1975년 모타운의 고향 디트로이트를 등지고 소규모 레이블들을 전전하면서 1979년에는 ‘Contact’와 ‘H.A.P.P.Y. Radio >같은 디스코 트랙도 소화한다. 1980년대 이후로는 주로 영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영국 록의 자긍심 폴 웰러(Paul Weller)가 펑크 밴드 더 잼(The Jam)을 해산하고 만든 뉴웨이브 밴드 스타일 카운실(Style Council)과 함께 파업 중인 영국 광부들을 지지하는 곡을 취입하는 등 계속해서 시사적인 관점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1960년대말에서 1970년대 초반 사이 에드윈 스타는 베트남 전을 반대하는 ‘War’를 비롯해, ‘Stop the war now’같은 일련의 곡들로 반전 주의와 사회 참여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자신이 직접 노래들을 작곡했다. 이것을 통해 마빈 게이나 스티비 원더처럼 진정한 아티스트로 인정받길 원했지만 우리는 ‘War’로 정의되는 에드윈 스타의 정형화된 형상만 기억하고 있다.
멤버 : 아이크 터너(Ike Turner), 티나 터너(Tina Turner) 멤버 : 아이크 터너(Ike Turner), 티나 터너(Tina Turner)
기타리스트 기타리스트
기타/키보드/피아노 연주자, 보컬 기타/키보드/피아노 연주자, 보컬
밴드 : Edison Lighthouse (에디슨 라이트하우스)
밴드 : Gibson Brothers (깁슨 브라더스,Alex Gibson, Chris Gibson, Patrick Gibson)
서인도 제도의 카리브해에 있는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섬 출신으로, 프랑스를 주무대로 활동한 남성 3인조 라틴풍 디스코 패밀리 그룹. 리더 보컬이자 퍼커션 연주자 크리스, 보컬겸 드러머 패트릭, 보컬과 키보드 연주를 맡은 알렉스 3형제로 구성되었다. ‘76년 파리에서 첫 싱글 "Come to America"로 데뷔했으며, 특히 ‘78년에 레코딩된 싱글 "Cuba"는 디스코 비트와 전염성 있는 베이스 라인, 생동감 있... 서인도 제도의 카리브해에 있는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섬 출신으로, 프랑스를 주무대로 활동한 남성 3인조 라틴풍 디스코 패밀리 그룹. 리더 보컬이자 퍼커션 연주자 크리스, 보컬겸 드러머 패트릭, 보컬과 키보드 연주를 맡은 알렉스 3형제로 구성되었다. ‘76년 파리에서 첫 싱글 "Come to America"로 데뷔했으며, 특히 ‘78년에 레코딩된 싱글 "Cuba"는 디스코 비트와 전염성 있는 베이스 라인, 생동감 있는 라틴 퍼커션, 소울풀한 창법과 외기 쉽고 귀를 사로잡는 멜로디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깁슨 브라더스의 최고 히트곡중 하나로 유럽의 16개국에서 당당 차트 1위에 오르는 빅히트와 함께 400만장이상 판매되었다.
출연 : Irene Cara (아이린 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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