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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모음집 (Movie Hits) [LP]

포레스트 검프, 내일을 향해 쏴라,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 외

Elvis Presley, B. J. Thomas, Little Richard, Brenda Lee, Marilyn Monroe 노래 외 9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Bellevue / Bellevue | 2018년 10월 04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270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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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모음집 (Movie Hits) [LP]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8년 10월 04일
제조국 EU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
  • A1 Hound Dog (Forrest Gump) - Elvis Presley
  • A2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 (Butch Cassidy & The Sundance Kid) - Bj Thomas
  • A3 Tutti Frutti (Cocktail) - Little Richard
  • A4 I'M Sorry (Casino) - Brenda Lee
  • A5 Let'S Make Love (Let'S Make Love) - Marilyn Monroe & Frankie Vaughan
  • A6 America (West Side Story) - Rita Moreno
  • A7 The Young Ones (The Young Ones) - Cliff Richard & The Shadows
  • B1 Never Ending Story (Never Ending Story) - Limahl
  • B2 Nothing'S Gonna Stop Us Now (Manneguin) - Starship
  • B3 Come And Get Your Love(Guardians Of The Galaxy) - Redbone
  • B4 Pick Up The Pieces (Bridget Jones) - Average White Band
  • B5 Baby Blue (The Departed) - Badfinger

상세 이미지

상세 이미지 1

아티스트 소개 (14명)

노래 : Elvis Presley (엘비스 프레슬리)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오늘날 폴과 비틀스를 있게 한, 단 한사람의 영향을 꼽는다면 위 해설처럼 단연 트럭운전사출신 엘비스 프레슬리다. 존 레논은 이를 결정적 한마디로 축약한다. “엘비스가 나타날 때까지 내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무 것도 없다(Nothing affects me until Elvis)." 존과 폴이 만나서 처음 마음먹은 것은 사실 엘비스의 음악을 더 강하게 표출해내는 것일 뿐이었다. 그들을 통해서 로큰롤의 진정한 역사는 ‘시대의 풍운아’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개막되었다는 사실이 다시금 확인된다. 물론 역사가에 따라 로큰롤의 효시를 행크 발라드(Hank Ballard)나 빌 헤일리(Bill Haley) 또는 척 베리(Chuck Berry)로 꼽기도 한다. ‘Work with me, Annie’ ‘Crazy man crazy’ ‘Maybellene’ 등과 같은 이들의 대표곡들이 시기적으로 먼저 구동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 다수 대중들은 여전히 로큰롤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엘비스가 나와서야 비로소 그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빌보드지의 결론. ‘1953년 록음악이 시작되었다고 하나 정작 차트나 방송에서 그 시대를 풍미하기 시작한 것은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싱글 ‘Heartbreak hotel’이 연속 8주 넘버원에 머물면서부터였다.’ 초기 로큰롤은 척 베리나 버디 할리와 같은 탁월한 ‘작가’를 소유했다. 리틀 리처드나 제리 리 루이스라는 출중한 ‘배우’ 그리고 조 터너, 보 디들리와 같은 ‘음악감독’들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로큰롤은 강풍을 휘몰아칠 역동적 ‘스타’가 필요했다. 그가 엘비스였다. 그 시대는 흑인의 리듬 앤 블루스를 소화해줄 백인가수를 요구했고 엘비스는 백인대중들로부터 ‘저 친구는 백인이면서 왜 검둥이노래를 부르는 거야?’라는 의아함을 일으킬 만큼 탁월한 흑인감성의 보유자였다. 이러한 시의성은 그러나 일반의 인식처럼 56년 RCA 소속의 엘비스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었고 이미 54년 선 레코드사의 엘비스로서 확립된 것이었다. 샘 필립스 사장의 전설적인 선 시절에 엘비스는 ‘That`s all right’, ‘Blue moon of Kentucky’ 와 ‘Mystery train’ 등을 부르면서 컨트리와 R&B를 크로스오버화한 신종의 로커빌리를 선보이면서 벌써 ‘웨스턴 밥의 왕’으로 불렸다. 이 때 이미 순회공연에서 팝 음악사상 초유의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다. 『뉴스위크』는 ‘금세기 백년간의 스타’ 특집기사를 다루며 그의 등장을 ‘20세기의 사건’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당시 엘비스 백업 밴드에서 드럼을 쳤던 D.J. 폰타나는 54년 상황을 다음처럼 술회한다. “엘비스 무대가 끝나고 나면 노래를 따라해 줄 관객들은 다 빠져버려 아무도 없었지요. 애들은 백 스테이지에서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습니다. 내 생각에 그 애들은 아마 우리 연주는 듣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오로지 ‘처음으로 흔드는 가수’ 엘비스를 보고자 하는 것이었죠.” 로컬 무대에서 전국 네트워크 TV로 진출하면서 마침내 ‘엘비스마니아’는 폭발했다. 미국의 3대 전국 공중파 방송 ABC CBS NBC의 체제가 정립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그는 텔레비전시대의 영웅으로서 ‘라디오스타를 죽이는’ 새로운 미디어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타미와 지미) 도시 브라더스의 CBS < 스테이지 쇼 >, NBC의 < 밀턴 벌 쇼 >와 < 스티브 알렌 쇼 > 그리고 저 유명한 CBS의 < 에드 셜리번 쇼 >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벌써 음악의 영상시대를 주도했다. 음악이 음반으로만 소구하던 시대는 ‘섹시 가이’ 엘비스의 출현으로 끝났다. ‘보는 음악’ 시대를 주도한 최초의 인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엘비스였다. 스탠다드 팝의 파수꾼 프랭크 시내트라도 자기 TV 쇼의 떨어지는 시청률을 참다못해 ‘음악의 공적(公敵)’이라고 성토해마지 않았던 엘비스를 출연시켜야 했다. TV 뿐만 아니라 영화 최초의 로큰롤 스타도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 러브 미 텐더 > < 러빙 유 > < G.I. 블루스 > < 블루 하와이 > 등 31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그는 관객들에게 로큰롤의 열정과 록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의 호소력을 제공했다. 음반 텔레비전 그리고 영화라는 ‘삼국통일’에 성공하며 천하를 제패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이 아래로 보일 정도의 막강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77년 사망하면서 그의 캐리어가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그는 무려 2억5천만장의 앨범을 팔았다. 이 기록에 가장 접근한 인물은 비틀스가 아닌 2억장의 빙 크로스비(캐롤 ‘White Christmas’가 결정적이다)며 프랭크 시내트라는 겨우 4천만장에 불과했다. ‘1인 기업’ 엘비스는 막대한 돈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인 핑크를 포함한 갖가지 칼라의 자동차 캐딜락을 구입했고 멤피스에 4만 달러 짜리 목장 그리고 10만 달러로 저택 그레이스랜드를 샀다. 전용 비행기는 물론 텔레비전 세트 그리고 첨단기계들도 마련했다. 물론 지금이야 흔해 빠진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특히 엘비스와 같은 하층계급 청년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부의 상징들이었다. 동시대 그리고 후배가수들이 일개가수에서 기업으로 융기한 엘비스를 통해 신분상승과 스타덤 획득 욕구를 품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엘비스처럼 슈퍼스타이면서 동시에 부자가 되고 싶어했다. 버디 할리는 엘비스를 빅 스타로서 존경했고 밥 딜런의 음악동기는 엘비스보다 큰(bigger than Elvis)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톰 존스는 아예 영국의 제록스판 엘비스였다. 엘비스처럼 구레나룻을 길렀던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직접 그를 만나기 위해 그레이스랜드 담을 넘다가 제지당했고 그룹 퀸은 엘비스를 안중에 두고 50년대 로큰롤풍의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를 만들었다(로저 테일러의 증언 “처음으로 텔레캐스터와 부기 앰프를 쓴 다소 빈약한 사운드였다. 분명 엘비스를 염두에 두고 만든 곡이었다.”). 마크 알몬드(Mark Almond)의 명쾌한 한마디를 들어보자. “그는 왕이다. 그밖에 다른 코멘트는 일체 필요없다!” 하지만 60년 전역 이후 엘비스는 달라졌다. 매니저였던 톰 파커 퇴역대령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음악방향이 빗나간 것이었다. 예의 로큰롤 넘버와는 거리가 먼 It`s now or never나 Surrender와 같은 감상적인 이탈리아 민요를 영역해 불렀다. 변화(아니면 변신?)의 징조는 프랭크 시내트라 쇼에 출연했을 때 뚜렷이 나타났다. 이 쇼에서 엘비스는 스탠다드 가수의 상징인 턱시도 정장을 했으며 호스트 프랭크 시내트라와 서로의 대표적 히트곡인 ‘Witchcraft’와 ‘Love me tender’를 바꿔 불렀다. 이 시점을 계기로 엘비스가 로큰롤을 버리고 스탠더드 팝 가수로 돌아서 청춘진영을 배신했다는 주장이 고개를 비집는다. 명백한 훼절이라고 단정해도 선뜻 반대논리를 펴기 어렵다. 그러나 친(親)엘비스 측은 그로써 그가 로큰롤 가수에서 ‘국민가수’로 승격하는 의미 있는 업적을 남기게 됐다고 반박한다. 로큰롤만의 논리로 음악을 풀고 엘비스를 규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어떻게 가치판단을 하느냐는 것은 관련자의 이데올로기나 각 시대의 성격에 따를 수밖에 없다. 변절이든 성숙이든 이 점만은 분명하다. 엘비스의 보컬이 초기의 로큰롤가수로 한정되었을 때 과연 후대에의 보컬 영향력을 소지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의 가창력은 음역, 에너지, 통제력, 피치 등 모든 면에서 압권으로 평가되어왔다.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었지만 ‘멀티칼라’인 그의 보이스에는 자니 레이의 급격한 변색, 두왑 그룹인 잉크스파츠(Inkspots) 빌 케니의 테너, 딘 마틴의 솜사탕 그리고 마리오 란자의 풍미가 동거했다. 그러면서도 로이 오비슨과 같은 유니크한 개성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스탠더드 발라드를 소화함으로 해서 우리들은 ‘Are you lonesome tonight’, ‘Suspicion’, ‘In the ghetto’, ‘The wonder of you’, ‘Fool’, ‘My boy’ 등의 팝 고전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명백한 역사의 유산이다. 그가 없었다면 성악가나 스탠더드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만을 접했을 것이고 로큰롤 싱어가 선사하는 발라드의 진미(珍味)를 영원히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공존공영 가능성을 그처럼 실감나게 시범한 가수도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이미 흑인감성의 전달로 로큰롤이 ‘흑백의 퓨전’임을 목소리 하나로 입증한 그는 이어서 역시 매직 보컬로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제휴를 일궈내는 업적을 남겼다. 어쩌면 우리가 70년대 록과 메탈 분야에서 형식을 확립한 이른바 ‘록발라드’라는 것도 그 원조는 엘비스일지도 모른다. 엘비스는 목소리를 통해 대중의 공감대를 전달한 몇 안 되는 가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건조한 보이스와는 거리가 먼, ‘이끼가 잔뜩 낀’ 풍부한 목소리였다. 아마 신나는 로큰롤 ‘Burning love’ 한 곡으로도 충분히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후대 음악팬들이 그의 노래를 듣고 더러 ‘느끼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후반기의 노래 가운데는 그런 요소를 풍기는 곡이 있었다. 하지만 엘비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거기서 느끼함이 아닌 되레 ‘풍성한 감성’을 수혈 받곤 한다. 미트 로프(Meat Loaf)는 말한다. “엘비스는 노래하는 것 무엇이든지 감정적으로 가사로 스피릿을 감상자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희구했던 명성과 부를 얻고 난 뒤 아쉽게도 그것들의 노예가 되는 비극적인 위인이기도 했다. 아무 데도 나갈 수가 없었고 편안히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도 불가능했다. 60년대나 70년대 로커였다면 이런 사실상의 ‘수감생활’을 극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래적 반항아’가 아니었다. 스타덤의 고독과 소외에 차츰 무너져간 그의 말년을 잘 나타내주는 일화는 무수히 많다. 70년대 들어서 조울증이 불거진 그는 때로 격렬해져 텔레비전 세트나 당구대, 주크박스, 자동차 등 가장집기를 부수는 발작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언젠가 D.J. 폰타나와 그의 아내 앞에서 엘비스는 자신의 감정상태를 이렇게 토로했다. “당신들은 운이 좋은 겁니다. 난 엘비스인게 너무 지겨워요! 뭘 해야될 지를 모르겠어요. 뭔가 딴 일을 했으면 제발 한이 없겠어요.” 고고음악의 대명사인 자니 리버스의 해석. “엘비스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었지요. 그래야만 했을 겁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그 밖의 다른 일이란 없었지요.” 엘비스만큼 화려한 명성과 처절한 고독이라는 양극단을 겪은(아니면 겪기로 강제된)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영욕의 교차요, 희비의 쌍곡선이다. 그래서 그를 통해 우리는 슈퍼스타덤의 빛 외에 냉혹함과 잔인성이라는 그림자를 동시 확인한다. 그의 사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심장마비로 발표되었지만 사후 마약중독 비만증 그리고 자살 등 정황에 근거한 갖가지 설들이 난무했다. 이는 그의 후반기 삶이 얼마나 철저히 비공개로 갇혀 있었는지를 반증한다. 스스로 창조한 혁명에 쓰러진 순종파 가수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비평에 의해 그의 역사적 위상이 훼손되는 일은 없다. 여전히 그는 만인이 공감하는 ‘킹 오브 로큰롤’이며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금세기 최고 가수’다. 비틀스가 그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한마디로 모든 엘비스의 가치는 입증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오류로 더러 지적되지만 비평가 고(故) 레스터 뱅스(Lester Bangs)의 엘비스 예찬은 되새길 가치가 있다. “우리는 엘비스에게 해준 것과 같은 동의를 앞으로 어떤 누구에게도 해주지 않을 것이다!”
노래 : B. J. Thomas (B. J. 토마스,Billy Joe Thomas)
노래 : Cliff Richard (클리프 리차드)
1969년 10월 16일부터 18일. 이 3일은 우리나라의 척박했던 공연 문화와 사회 전반에 걸쳐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된 사건의 시간적 배경이다. ‘오빠부대’의 원조이며 팝 스타로서는 처음으로 국내에서 자발적인 팬클럽이 탄생했던 클리프 리차드(Cliff Richard)의 3회에 걸친 내한 공연, 그것은 집단적인 행동과 조용한 환호성(지금은 아니지만)의 이율배반적인 분위기로 특징지어지는 한국 공연 문화의 시발점이 ... 1969년 10월 16일부터 18일. 이 3일은 우리나라의 척박했던 공연 문화와 사회 전반에 걸쳐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된 사건의 시간적 배경이다. ‘오빠부대’의 원조이며 팝 스타로서는 처음으로 국내에서 자발적인 팬클럽이 탄생했던 클리프 리차드(Cliff Richard)의 3회에 걸친 내한 공연, 그것은 집단적인 행동과 조용한 환호성(지금은 아니지만)의 이율배반적인 분위기로 특징지어지는 한국 공연 문화의 시발점이 되는 계기였다. 시민회관에서 1회, 이대 강당에서 2회의 공연을 가졌던 클리프 라치드의 무대는 콘서트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던 당시로서는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청소년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어두운 교복과 청순한 단발머리를 한 여고생들의 클리프 리차드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헌신적인 몰입은 ‘울다가 지쳐 기절까지’라는 과장된 신문 기사로 옮겨지면서 공연장의 열기는 기성 세대들에게 일종의 집단적 히스테리이자 광적인 소란으로 비쳐지며 젊은이들에 대한 불안과 불만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클리프 리차드는 4박 5일 동안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만나는 팬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주최측에서 마련한 파티 비용을 본인이 직접 내는 것은 물론 구세군 교회에 가서 불우이웃성금을 내는 선행으로 일간지 사회면을 훈훈하게 장식해 팬들의 비난을 희석시켜 주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클리프 리차드는 우리나라에서 대중 음악 역사에 있어 전환점을 제시했던 슈퍼스타였다. 1940년 10월 14일 인도의 럭크나우에서 해리 로저 웹(Harry Roger Webb)의 본명으로 태어난 클리프 리차드는 엘비스 프레슬리로부터 영향을 받아 1957년부터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흑인 감성이 풍부했던 엘비스와는 달리 경쾌하고 팝 적인 느낌이 짙은 음악으로 ‘영국의 로큰롤 황제’로 등극했다. 1963년 비틀스(Beatles)와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가 등장하기 전까지 클리프 리차드는 브리티시 록의 ‘절대 강자’였으며 그의 음악 세계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성지(聖地)였다. 1958년 ‘Move it’으로 시작한 히트 퍼레이드는 1960년대 후반까지 40곡 이상을 영국 인기 차트에 등록시키며 경이로운 행진을 기록했다. 당시 그의 백 밴드 드리프터스(Drifters)는 미국의 리듬 앤 블루스 보컬 그룹(‘Stand by me’를 부른 Ben E. King이 멤버였던)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섀도우스(Shadows)로 바꾸었다. 그의 인기가 치솟자 영화 관계자들은 < Serious Charge >, < Summer Holiday >, < The Young Ones >처럼 젊은이들을 소재로 한 상업적인 영화에 출연시켜 비상(飛上)하는 클리프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국내에서도 ‘Living doll’, ‘Visions’, ‘Constantly’, ‘Summer holiday’, ‘Congratulations’, 그리고 그 유명한 ‘The young ones’등이 확실하게 인기를 주도했다. 하지만 이것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한정된 반숙(半熟)의 인기였다. 대서양 건너편 미국에서는 물이 끓지도 않았다. ‘Living doll(30위)’과 ‘Lucky lips(62위)’, ‘It’s all in the game(25위)’, ‘Bachelor boy(99위)’, ‘I’m the only one(92위)’, 그리고 생일 축하 곡으로 세계를 평정한 ‘Congratulations(99위)’ 만이 1960년대 동안 빌보드 싱글 차트에 올랐을 뿐이다. 데뷔곡 ‘Move it’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노래들은 너무 소녀 취향이었으며 시기상으로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라는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뮤지션들 사이에서 샌드위치 마크를 당했기 때문에 틈새 시장을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내한 공연을 가졌던 1960년대 후반에 그의 지지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1960년대 미국 음악계를 침공한 브리티시 인베이션의 명단에서 제외되었던 클리프 리차드는 미국 진출의 꿈을 접었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에 자신의 백 보컬리스트 출신의 올리비아 뉴튼 존(Olivia Newton John)이 미국에서 대대적인 성공하자 이것에 고무된 클리프는 미국 진출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서서히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미국인의 구미에 맞는 노래들로 북미 시장을 두드렸다. 1976년에 공개된 디스코 풍의 ‘Devil woman(6위)’이 처음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탑 텐에 올랐고 1980년대 초반까지 ‘We don’t talk anymore(7위)’, ‘Carrie(34위)’, ‘Dreaming(10위)’, ‘Little in love(17위)’, ‘Daddy’s home(23위)’, 그리고 자신보다 더 유명해진 올리비아 뉴튼 존과 호흡을 맞춘 영화 < 제너두 >의 삽입곡 ‘Suddenly(20위)’ 같은 성인 취향의 팝 사운드로 두 번째 전성기를 일구었다. 이제는 아주머니들이 된 예전의 소녀 팬들을 위해 현재까지 공연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클리프 리차드는 1995년 영국 왕실로부터 대중 음악계에 미친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 작위를 수여 받았다. 국내에서는 지난 1998년에 개봉된 임창정, 고소영이 주연한 영화 <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의 마지막 장면에 ‘Early in the morning’이 삽입되어 다시 한번 클리프 리차드 신드롬을 재연했다. 차이코프스키가 “예술 작품이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소망과 힘이다”라고 했듯이 클리프 리차드의 노래는 우리 부모님 세대가 살아야 했던 어려웠던 시절의 좌절과 아픔을 낭만과 추억으로 승화시킨 희망의 원동력이었다.
1965년 히피문화의 본거지인 미국 샌프란시스코 출신의 밴드 제퍼슨 에어플레인(Jefferson Airplane), 74년엔 제퍼슨 스타쉽(Jefferson Starship)으로 그리고 85년엔 다시 스타쉽(Starship)으로 태어나면서 30년 이상 건재함을 과시한 록의 전설이다. 그룹명이 바뀌는 동안 많은 라인업의 변동이 따랐지만 언제나 중심에는 항상 그레이스 슬릭(Grace Slick)이라는 여장부가 서있었... 1965년 히피문화의 본거지인 미국 샌프란시스코 출신의 밴드 제퍼슨 에어플레인(Jefferson Airplane), 74년엔 제퍼슨 스타쉽(Jefferson Starship)으로 그리고 85년엔 다시 스타쉽(Starship)으로 태어나면서 30년 이상 건재함을 과시한 록의 전설이다. 그룹명이 바뀌는 동안 많은 라인업의 변동이 따랐지만 언제나 중심에는 항상 그레이스 슬릭(Grace Slick)이라는 여장부가 서있었다. 그룹의 초창기 멤버 폴 켄트너(Paul Kantner)가 1984년 결별을 선언하고 그레이스가 다시 돌아오면서 그룹은 스타쉽(Starship)으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게 되는데, 더 이상의 소수 매니아들을 위한 음악이 아닌 성인 취향의 대중성이 강한 록 음악으로 승부를 걸게 된다. 1985년 첫 선을 보인 < Knee Deep In The Hoopla >에서 그들의 현대적인 감각에 대한 조율은 예상 밖의 큰 성공을 거두었다. ’We build this city’와 ’Sara’ 두 곡의 싱글이 연속해서 전미 차트 1위를 기록하는 선풍과 함께 1970년대 중후반 이후의 ’히트갈증’을 모처럼 푼 것이다. 앨범에선 또 하나의 히트곡 ’Tomorrow doesn’t matter tonight(26위)’가 나왔다. 이듬해 4월 영화 < 마네킨 >(Mannequin)의 삽입곡 ’Nothings gonna stop us now’와 함께 이들의 인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미국에서 2주간, 영국에서 4주간 정상 등극의 선풍을 일으켰다. 여세를 몰아 발표한 스타십의 두번째 앨범 < No Protection >은 ’Its not over(Til its over)(9위)’, ’Best patrol(46위)’등의 히트곡들을 쏟아냈고 후에 로버타 플랙(Roberta Flack)과 맥시 프리스트(Maxi Priest)에 의해 리메이크 되어 더 큰 인기를 얻었던 ’Set the night music’도 수록되어 있다. 3년 동안 넘버원 히트곡을 꾸준히 배출하며 확실한 전성기를 구가했던 밴드에게 1988년은 활동이 뜸했고 그레이스가 공식적으로 그룹을 떠난(제퍼슨 에어플레인의 재결성을 위해)해이기도 하다. 영화 < 칵테일 >(Cocktail) 사운드트랙의 ’Wild again(73위)’이 유일한 활동으로 기억된다. 이듬해 그레이스가 떠난 자리에 키보드 주자와 베이시스트를 보강하고 3집 앨범 < Love Among The Cannibals >을 출반하였는데 이 시기 그룹의 구심점은 미키 토마스(Micky Thomas)였고 앨범엔 다수의 명망 있는 작곡가들이 참여하였다. 버니 토핀(Bernie Taupin)과 마틴 페이지(Martin Page), 로버트 존 뮤트 랭(Robert John Mutt Lange)등이 주인공들이었고 ’Its not enough(12위)’, ’I didnt mean to stay all night(75위)’과 같은 싱글이 탄생했다. 1990년 스타쉽은 공식적으로 해산했다. 멤버들 각자의 솔로활동을 위해 내려진 결정이었고 발빠른 행보를 보인 RCA에선 이듬해 < Starship Greatest Hits (Ten Years and Change) >라는 히트곡 모음집을 발표하여 제퍼슨 스타쉽과 스타쉽의 음악이 공존하는 형태에 두 곡의 신곡도 포함시켰다. 1992년 미키와 브레트가 의기투합, 8인조로 거대해진 스타쉽을 재탄생 시켰으나 새 앨범 제작은 없었고 이듬해 스타십만의 베스트 앨범 < The Best Of Starship >이 발매되었지만 대표작 ’We build this city’가 빠져서 아쉬움을 주었다. 이후 간간이 소규모의 공을 통해 팬들을 만나면서 명맥을 유지해 가고 있다.
영국 출신의 4인조 팝 록 밴드 배드핑거(Badfinger)의 역사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박복’하다. 비틀즈의 지원사격 덕분에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시작된 그들의 성공은 불행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들은 비틀스 때문에 성공했고 비틀스 때문에 좌절했다. 활동 후반부 그들은 비틀스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창작력의 부재와 금전적인 문제가 끼어 들면서 주축 멤버 두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영욕(榮... 영국 출신의 4인조 팝 록 밴드 배드핑거(Badfinger)의 역사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박복’하다. 비틀즈의 지원사격 덕분에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시작된 그들의 성공은 불행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들은 비틀스 때문에 성공했고 비틀스 때문에 좌절했다. 활동 후반부 그들은 비틀스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창작력의 부재와 금전적인 문제가 끼어 들면서 주축 멤버 두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영욕(榮辱)으로 점철된 밴드의 역사를 마감했다. 때문에’Carry on till tomorrow’, ’No matter what’, ’Maybe tomorrow’, ’Day after day’, 그리고 해리 닐슨(Harry Nilsson)과 에어 서플라이(Air Supply),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가 커버한 ’Without you’ 같은 명곡들을 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배드핑거는 가장 불행한 팝 그룹 중 하나로 기억된다. 1960년대 후반 비틀스가 설립한 ’애플’ 레코드에서 처음으로 계약한 밴드는 피트 햄(Pete Ham/보컬), 마이크 기본스(Mike Gibbons/드럼), 톰 에반스(Tom Evans), 론 그리피스(Ron Griffiths/베이스)로 구성된 디 아이비스(The Iveys)라는 이름이었다. 이들은 곧 배드핑거로 개명하고 1970년 데뷔 앨범 < Magic Christian Music >을 발표했다. 이 앨범에는 폴 매카트니가 작곡해 비틀스의 체취가 짙게 묻어나는 ’Come and get it(7위)’과 ’Maybe tomorrow’, 그리고 국내에서 이들의 대표 곡으로 자리 매김을 한 ’Carry on till tomorrow’ 같은 곡들이 들어있다. 사이키델릭 요소를 담고 있는 ’Carry on till tomorrow’와 로큰롤 트랙 ’Rock of all ages’는 비틀스의 드러머인 링고 스타(Ringo Starr)가 주연한 영화 < 매직 크리스찬 >의 사운드트랙에도 수록되어 다시 한번 비틀스와 배드핑거의 남다른 관계를 과시했다. ’No matter what(8위)’와 그 유명한 ’Without you’가 수록된 2집 < No Dice >는 처녀작이 공개된 1970년 연말에 발표되어 음악언론의 호평과 더불어 이미 공고화된 대중적 인기에 박차를 가했다. ’No matter what’은 나중 197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 나우 앤 덴 >의 사운드트랙에 삽입되어 당시 분위기를 훌륭하게 살려내는데 일조했다. 특히 ’Without you’는 ’Everybody’s talking’이나 ’Jump into the fire’로 유명한 싱어 송라이터 해리 닐슨(Harry Nilsson)이 1971년에 리메이크 해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하면서 팝의 고전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비틀스의 노래인 줄 알았다”라고 닐슨이 회고할 정도로 당시 배드핑거의 음악은 비틀스와의 인연을 뗄 수 없었다. “제작자인 리차드 페리와 함께 이 노래를 처음 접했을 때부터 나는 이 곡이 고전이 될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언급한 대로 이 노래는 팝의 명곡으로 안전 착륙했고 1990년대에 에어 서플라이와 머라이어 캐리가 커버해 팝의 클래식임을 증명했다. 배드핑거에게는 억울한 일이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 스스로가 싱어송라이터인 관계로 해리 닐슨이 ’Without you’을 작곡한 것으로 알고 있다(사실 해리 닐슨은 여성을 방불케 하는 하이 톤 보컬로 원곡에 없는 악센트를 부여했다). 1971년의 < Straight Up >은 로커 토드 룬그렌(Todd Rundgren)과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이 앨범 제작을 맡아 주었다. 1982년에 발표된 영국 출신 뉴 웨이브 싱어 송라이터 조 잭슨(Joe Jackson)의 ’Breaking us in two(18위)’와 유사한 멜로디를 뽑아 낸 ’Day after day(4위)’와 1980년대 초반의 팝록 사운드를 이미 10여년 전에 구현한 ’Baby blue(14위)’가 이 음반의 가치를 높여 주었다. 영국에서 출발한 이 4인조 밴드의 네 번째 앨범 < Ass >는 애플 레코드에서 발표하는 마지막 ’열매’였다. 대형 히트 싱글은 없었지만 밴드가 직접 음반 제작에 참여하면서 커다란 발자국을 남겼다. 그러나 이 LP부터 배드핑거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번져갔다. 이때를 기점으로 그들의 음반들은 레코드 매장에서 재고의 양이 점차 증가했고 그에 따라 이들에겐 재정적인 문제와 멤버간에 불협화음이 잇따랐다. 음반사를 워너로 바꾸고 1974년 말에 < Wish You Were Here >를 공개했지만 초기 디스코의 자극적인 리듬과 하드록과 헤비메탈의 후련하고 화려한 음악에 매력을 느낀 대중들은 더 이상 이 영국 밴드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신보의 판매력이 급격히 힘을 잃기 시작하자 적자에 빠진 리더 피트 햄은 1975년 4월 23일 차고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머지 멤버들도 충격에서 벗어나 새 열매를 맺기까지는 4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1979년에 공개된 음반 < Airwaves >마저 그리던 성공은 재현되지 못했다. 디스코나 부드러운 발라드 아니면 성인 취향의 록음악이 당시를 호령하던 1970년대 말에 이들의 음악은 더 이상 먹혀들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1981년에 발표된 < Say No More >까지 계속되었고 그 참패의 결과 또한 마찬가지였다. 계속된 실패와 재정 문제는 음악방향을 잠식해 톰 에반스와 조이 몰랜드는 전화로 심하게 다툰 후 에반스도 피트 햄처럼 목을 매 자살했다. 1983년 11월 19일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이 사건으로 밴드는 공식적인 해산을 발표했다. 화려한 인기의 뒤안길에 잠복하고 있는 외로움과 고통은 다른 아티스트들에게도 똑같이 다가와 누구는 그것을 즐기고 어떤 이는 무너진다. 아마도 팝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종말이 배드핑거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노래는 비극에 아랑곳없이 여전히 우리의 귀를 낭만적으로 자극한다. 훗날 언젠가 그들의 탁출(卓出)한 멜로디 제조능력이 재조명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Carry on till tomorrow!!
멤버 : 팻 베스케즈(Pat Vasquez, 보컬, 베이스), 롤리 베스케즈(Lolly Vasquez, 보컬, 기타), 토니 벨러미(Tony Bellamy, 보컬, 기타, 피아노), 레이븐 헤르난데즈(Raven Hernandez) 멤버 : 팻 베스케즈(Pat Vasquez, 보컬, 베이스), 롤리 베스케즈(Lolly Vasquez, 보컬, 기타), 토니 벨러미(Tony Bellamy, 보컬, 기타, 피아노), 레이븐 헤르난데즈(Raven Hernandez)
밴드 : Average White Band (애버리지 화이트 밴드,AWB)
1970년대를 풍미했던 애버리지 화이트 밴드(이하 AWB)는 독특한 그룹이었다. 흑인들의 주종목인 펑크(funk)와 소울, 리듬 앤 블루스를 연주했지만 그룹 이름처럼 멤버 중 1명을 제외한 5명이 백인이었으며 이들의 출신지도 미국이 아니라 대서양 건너편인 스코틀랜드다. 보컬과 베이스를 맡은 알란 고리(Alan Gorrie), 기타리스트 하미쉬 스튜어트(Hamish Stuart)와 오니 맥클린타이어(Onnie Mc... 1970년대를 풍미했던 애버리지 화이트 밴드(이하 AWB)는 독특한 그룹이었다. 흑인들의 주종목인 펑크(funk)와 소울, 리듬 앤 블루스를 연주했지만 그룹 이름처럼 멤버 중 1명을 제외한 5명이 백인이었으며 이들의 출신지도 미국이 아니라 대서양 건너편인 스코틀랜드다. 보컬과 베이스를 맡은 알란 고리(Alan Gorrie), 기타리스트 하미쉬 스튜어트(Hamish Stuart)와 오니 맥클린타이어(Onnie Mclntyre), 색소폰에 말콤 던컨(Malcolm Duncan)과 로저 볼(Roger Ball), 그리고 드럼을 맡은 로비 맥클린토쉬(Robbie Mclntosh)로 스코티쉬 소울, 펑크(funk)의 싹을 틔운 이 6인조는 60년대부터 자국에서 소울과 재즈 뮤지션으로 활동했던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흑인 음악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1972년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우에서 결성된 AWB는 그동안 술과 마약으로 음악을 멀리했었던 에릭 클랩튼의 1973년의 재기 공연에서 오프닝을 맡음으로서 공식적으로 데뷔했다. 그 해에 이들은 데뷔 앨범 < Show Your Hand >를 발표했지만 주목을 못 받고 이듬해 나온 2번째 앨범 < AWB >에서 그 유명한 ‘Pick up the pieces’가 75년 2월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하면서 성공의 ‘케잌’을 맛보았지만 이 곡이 발표되기 전인 1974년 9월, 드러머인 로비 맥클린토쉬가 헤로인 과용으로 사망한다. 마약을 극복한 에릭 클랩튼의 재기 공연에서 오프닝 액트를 맡았던 AWB의 드러머가 마약으로 사망함으로서 인생의 아이러니를 연출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싱글 차트와는 무관한 앨범 위주의 음악을 염두에 둔 활동을 전개했다. 1976년의 < Soul Searching >과 1977년에는 전 드리프터스(Drifters)의 멤버이자 ‘Stand by me’로 유명한 전설적인 소울 싱어 벤 E 킹(Ben E. King)과 작업한 < Benny & Us > 같은 실험적인 음반들을 통해 자기 자신들에게 빠질 수 있는 매너리즘을 스스로 극복했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도래하기 시작한 뉴웨이브의 물결은 AWB를 메인스트림 밖으로 밀어냈고 후반기 드러머 스티브 페론은 ‘듀란 듀란’으로 자리를 옮겼고, 기타리스트 하미쉬 스튜어트는 폴 매카트니와 녹음 활동을 하는 등 밴드 내 움직임보다는 번외 작업을 더 활발히 했다. 이들은 흑인 음악을 연주함으로서 음악적인 고정관념을 넘어섰으며, 피부색으로 구분되어진 인종간의 경계도 무너뜨렸다. 그랬기 때문에 이 스코틀랜드 출신의 6인조 AWB는 훌륭한 음악을 만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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