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지 않는 모자가 됩시다”
-잠재한 언어와 이미지의 역동성
이번 시집의 곳곳에서 시적 자아는 ‘목적 없이 걷기’를 통해 ‘나’와 ‘대상’을 벗어나는 순간의 사유를 반복적으로 시도한다. 시인은 일상에서 일상 너머로, 상식을 뛰어넘는 사선의 상상력으로 산책 중에 마주하는 대상에서 다른 존재로의 변화를 감지해내고 시각적이고도 신체적인 이미지를 다채롭게 끌어낸다. 늘 “딛고 선 자리에서 더 멀리 나아가려는 이원 시의 생래적 에너지”(박상수)가 바로 이것이다.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시적 자아의 발걸음과 집요한 시선으로 인해 이원의 시들은 자주 서사의 축적 대신 뜻밖의 사건들이 잇달아 출연하고 각각 독립적인 사태로 존재하는 형상을 띠기도 한다. 익숙한 현실감을 안겨주는 일상의 장소와 사물들 사이를 얼핏 무연하게 오가는 것 같지만, 간명한 언어와 극단으로 밀어붙인 상상력은 사물의 속성과 본질을 예리하게 드러내고, 그 앙상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숨기지 않으며 “간절함 너머까지” “본 적 없는 아름다움”을 찾아 다시 나아간다. 그러기 위해 시적 자아는 예측불허의 엉뚱함과 천진함으로 똘똘 뭉친 아이의 목소리와 자연스럽게 함께한다.
천 개가 넘는 전화번호를 저장한 휴대폰을 옆에 두고
벽과 나란히 잠드는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꼭 껴안을수록 뼈가 걸리는 당신을 가진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
막힌 문을 향해 뛰어가는 비상구 속 초록 인간과 함께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시체를 뜯어 먹는 독수리들과 함께
높은 곳의 바람과 함께
다른 말을 하나로 알아듣는 이상한 경계와 함께
우리는 고독하다
흰 변기가 점령한 지구에서 우리는 고독하다
변기의 무릎을 갖게 된 우리는
[……]
오로지 긴 귀가 머리 위로 솟아 있다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부분
어둠이 사과 속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했다
사과 속에 씨앗이 들어가는 것을 허용했다
열매와 돌을 같은 모양으로 만들었다
반숙 완숙이 공존했다
[……]
엄지에게 전권을 주었다
표지판을 세우고 길을 잃는 놀이를 멈추지 않았다
냉장고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고 싶어졌다
햄버거는 내부 구조를 바꾸지 않았다
돼지와 닭 들을 생매장했다
[……]
발가락이 향하는 곳을 여전히 앞이라고 불렀다
원스톱 쇼핑몰 귀신 출입을 금지시켰다
희망을 허용하고 있었다
-「뜻밖의 지구」 부분
“가장 끝에서부터 걸어가보자 다시”
-잃어버린 얼굴, 잃어버린 말에 가닿기 위한 감각의 집중
유연한 상상력을 타고 땅을 디뎌 앞으로 나아가는 산책과 더불어 이번 시집에서 두드러지는 또 하나의 풍경과 이미지가 바로 허공에 부려지는 ‘사과-둥그런 흔적들’이다. 실제로 「애플 스토어」라는 동명의 제목을 가진 각기 다른 시 네 편이 실려 있기도 하다(“의자는 허공을 단련시키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계단은 허공의 고독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한밤중 허공의 정중앙에 떠 있다”).
‘어둠과 빛, 밤과 낮이 회전하듯 뒤섞이고, 신맛과 단맛이 뒤엉키고 깎이고 구르다가 어느 모퉁이에서 돌연 출현할지 모를 사과, 무릎을 둥글게 깎아내는 데 몰두하는 인간, 비상을 꿈꾸며 눈알을 떼굴떼굴 굴리는 거위’의 이미지들은 저마다 부박한 현실원칙의 한계를 넘어 미지의 가능성, 언제 어느 때 도래할지 모를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시적 자아의 의지가 투영된 감각의 집체들이다. 중요한 것은 여전히 경계 너머, 더 멀리 닿기 위해 멈추지 않고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어디에도 없는 골목에서 아가들이 눈을 뜨는 소리
횡단보도마다 달빛이 삶을 끌고 가는 소리
모퉁이를 돌면 어떻게 사과가 나타날 수 있습니까
모퉁이를 돌아 나타난 사과는 무엇입니까
-「당일 오픈」 부분
동그란 눈알과 동그란 입술이
나란히 벌어질 때까지
작은 것 속에서 큰 것이 튀어나올 때까지
뺨이 번질 때까지
휘파람이 될 때까지
숲에 바람이 새지 않을 때까지
구역을 잃어버릴 때까지
-「당신이라니까」 부분
“우리의 심장을 풀어, 다시 일렁이기 시작하는 것”
-슬프고도 천진한 기도로 애도의 사회적 확장을 꿈꾸기
지금껏 ‘지금 여기서 더 멀리 가보려는 마음의 행진’으로 아이들의 순결함과 천진함을 호명해온 이원의 시들은 시집의 중반부를 넘어서며 더는 상징이 아닌 현실 속의 아이들, 그 아이들이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슬픔과 고통을 정면으로 안는다. “오도 가도 못하는 허기가 몇 년째 목구멍에 걸려”(「뛰는 심장」)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의 얼굴”(「기둥 뒤에 소년이 서 있었다」)은 점차 “갖고 있던 표정”을 모두 써버려 더는 “꺼낼 수 있는 표정이 없다”(「한 편의 생이 끝날 때마다」).
시집 곳곳에서 “느닷없이 쏟아지는 눈물”과 “목구멍의 불편함”을 동시에 담는 이원만의 언어적 방식으로, 애도의 사회적 확장을 불러오는 데 전심을 다하는 시적 목소리들과 마주하게 된다. 슬픔의 공동화에서 ‘떠난 아이들의 순결함을 다시 호명하는 행위로서의 시 쓰기를 경계까지 밀고 나가며, 그 곁에 자신의 믿음인 아이들의 천진함을 다시 놓아보는 방식으로의 애도’(박상수)가 가능해지는 대목이다.
인사한다. 이상한 새 소리를 내서.
인사한다. 꽃잎과 꽃잎 사이의 그늘에 숨어.
인사한다. 작은 나무 아래 그림자가 되어.
인사한다. 세상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얼굴이 되어
인사한다. 없는 모자를 벗어 두 손에 들고.
[……]
인사한다. 똑딱.
인사한다. 단추.
인사한다. 심장.
인사한다. 멈춤.
없는 모자를 벗어 두 손에 들고.
인사한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로.
인사한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인사한다. 얼굴이 쏟아지도록.
인사한다. 바람이 부드럽게 눈 감겨주기를.
인사한다. 꼭 쥐고 있던 주먹은 내가 가져온다.
[……]
인사한다. 데리고 왔다. 너의 목소리. 간결한 길.
인사한다. 거역할 수 없는 순진함에.
인사한다. 장미가 피어날 시간으로.
인사한다. 목덜미에.
인사한다. 풀밭에서.
인사한다. 데리고 왔다. 둥근 풀밭.
인사한다. 침묵을 조금 옮겨 놓으며.
인사한다. 봄을 조금 옮겨 놓으며.
인사한다.
긴 행렬.
-「아이에게」 부분
“인사하는 행동 곁에 바둑돌처럼 놓이는 슬픔의 이 작은 조약돌들. ‘아이’라는 단어와 ‘단추’라는 단어는, 입술을 깨물며 언어를 가만히 내려놓는 시적 스타일과 내용과 형식의 면에서 적절하게 조응한다. [……] 고통 앞에서 우리는 깊은 무능감에 사로잡히지만 그 순간 오히려 ”거역할 수 없는 순진함”에 자신을 내어주고, 그 순진함의 힘으로 분명 불가능할 것을 알고 있지만 그 불가능마저 밤과 낮을 뒤섞듯 사과 안에서 회전시킨다면, 불현듯 침묵이 옮겨지고, 봄이 옮겨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이다.”(박상수)
그 순간,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는 우리의 마주 잡은 두 손을 간절한 기도로, 손발이 허락되지 않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다가도 무릎이 있던 자리를 조금 더 구부려보는 안간힘을 절망에 굽히지 않는 의지로 새겨도 좋을 것이다. 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사랑이라는 저 오래되고도 포기할 수 없는 단어”(박상수)를 믿어보려 한다.
작고 낮은 테이블이 사이에 있어 우리는
비어 있는 둥그런 접시를 들어 올렸지요
네 개의 손이 하나의 접시를 잡을 때
어떤 기원을 부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얼굴을 지나
허공의 입구까지 빈 접시를 들어 올려야 했나요
접시는 소용돌이를 언제 멈출 수 있을까요
볼로 접혀 들어가는 얼굴
깨져버렸어요
다리가 없는 사람이 되었어요
우리는 무릎이 있던 자리를 조금씩 조금씩 구부려보았어요
-「작고 낮은 테이블」 부분
사람은 절망하라
사람은 탄생하라
사랑은 탄생하라
우리의 심장을 풀어 다시
우리의 심장
모두 다른 박동이 모여
하나의 심장
모두의 숨으로 만드는
단 하나의 심장
우리의 심장을 풀면
심장뿐인 새
-「사람은 탄생하라」 부분
[시인의 말]
본 적 없는 아름다움은 끝내 모를 것인가
끝내 모를 것을 사랑하면 아름다움이 될 것인가
2017년 8월
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