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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QA/UHQ-CD 팝과 록으로 듣는 비교 체험 샘플러 (Hi-Res CD Samp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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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MQA/UHQ-CD 팝과 록으로 듣는 비교 체험 샘플러 (Hi-Res CD Sampler)

[ 1MQACD+1CD ]
Rod Stewart, Traffic, Marvin Gaye, Witness U.K., Tears For Fears 노래 외 5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Universal / Universal Japan | 2018년 08월 10일 | 원제 : Rock & Pops Hi-Res CD Sampler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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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QA/UHQ-CD 팝과 록으로 듣는 비교 체험 샘플러 (Hi-Res CD Sampler)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8년 08월 10일
제조국 일본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1
  • 01 [Hi-Res CD] Mr. Big / Free
  • 02 [Hi-Res CD] Mandolin Wind / Rod Stewart
  • 03 [Hi-Res CD] California Girls / the Beach Boys
  • 04 [Hi-Res CD] John Barleycorn Must Die / Traffic
  • 05 [Hi-Res CD] Tears of Rage / The Band
  • 06 [Hi-Res CD] You Don't Love Me / The Allman Brothers Band
  • 07 [Hi-Res CD] What's Going on / Marvin Gaye
  • 08 [Hi-Res CD] I'm Not In Love / 10cc
  • 09 [Hi-Res CD] In the dead of Night / U.K.
  • 10 [Hi-Res CD] Shout / Tears for Fears
Disc2
  • 01 [Regular CD] Mr. Big / Free
  • 02 [Regular CD] Mandolin Wind / Rod Stewart
  • 03 [Regular CD] California Girls / the Beach Boys
  • 04 [Regular CD] John Barleycorn Must Die / Traffic
  • 05 [Regular CD] Tears of Rage / The Band
  • 06 [Regular CD] You Don't Love Me / The Allman Brothers Band
  • 07 [Regular CD] What's Going on / Marvin Gaye
  • 08 [Regular CD] I'm Not In Love / 10cc
  • 09 [Regular CD] In the dead of Night / U.K.
  • 10 [Regular CD] Shout / Tears for Fears

아티스트 소개 (10명)

노래 : Rod Stewart (로드 스튜어트)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는 탁월한 보컬 실력과 특유의 카리스마로 40년 가까이 팝 음악계를 휘저어온 록의 슈퍼스타다. 한편으론 화려한 여성 편력과 시류에 영합한 잦은 노선 변경으로 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안타까운 팝 가수이기도 하다. ‘브리티시 록의 대명사’란 기분 좋은 찬사 외에도 ‘금발 사냥꾼’, ‘변신의 귀재’, ‘리메이크의 달인’과 같은 준엄한 평가가 늘 동행한다. 수십 년 세월을 이겨온...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는 탁월한 보컬 실력과 특유의 카리스마로 40년 가까이 팝 음악계를 휘저어온 록의 슈퍼스타다. 한편으론 화려한 여성 편력과 시류에 영합한 잦은 노선 변경으로 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안타까운 팝 가수이기도 하다. ‘브리티시 록의 대명사’란 기분 좋은 찬사 외에도 ‘금발 사냥꾼’, ‘변신의 귀재’, ‘리메이크의 달인’과 같은 준엄한 평가가 늘 동행한다. 수십 년 세월을 이겨온 거장의 풍모와 부끄러운 록 엘리트의 단면을 함께 보여준 역전의 베테랑 뮤지션이 바로 로드 스튜어트다. 1945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로드 스튜어트의 처음은 참담했다. 어려웠던 집안 형편 탓에 각종 잡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축구 클럽에서 고참 선수의 구두도 닦았으며, 유럽을 떠돌다 스페인에서 ‘부랑죄’로 쫓겨나기도 했다. 그러면서 로커의 자질을 연마해 갔던 그는 영국으로 돌아와 1963년 지미 파웰 앤 더 파이브 디멘션스(Jimmy Powell & The Five Dimensions)의 보컬리스트로 공식적인 음악 활동을 스타트했다. 그는 곧 롱 존 보드리(Long John Baldry)가 이끄는 후치 쿠키 멘(Hootchie Coochie Men), 블루스 록 그룹 샷건 익스프레스(Shotgun Express), 당대의 기타리스트가 결성한 제프 벡 그룹(Jeff Beck Group)을 차례로 거치며 최고 보컬리스트로서의 지명도를 계속 쌓아나갔다. 1969년에는 해체된 제프 벡 그룹을 뒤로하고 팀 동지였던 론 우드(Ron Wood)와 함께 스몰 페이시스(Small Faces)에 가입했다. 그는 이름을 짧게 고친 페이시스(Faces)의 간판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첫 솔로 앨범인 〈An Old Raincoat Won’t Let You Down〉(미국에서는 〈Rod Stewart Album〉(139위)이란 제목으로 발표됐다)을 발표하며 블루스와 포크, 그리고 로큰롤이 결합된 뛰어난 음악성을 선보였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로드 스튜어트는 본격적인 성공의 문을 열어 젖혔다. 1970년 발표한 두 번째 음반 〈Gasoline Alley〉(27위)로 평단의 지지와 팬들의 호응을 동시에 끌어낸 그는 이듬해 명작으로 손꼽히는 3집 〈Every Picture Tells A Story〉와 자작곡 ‘Maggie May’를 동시에 차트 정상에 올려놓는 기염을 토했다. 1973년 발표한 〈Never A Dull Moment〉(2위)와 1975년 내놓은 〈Smiler〉(13위)로도 전작들에 뒤지지 않는 흡족한 양수겸장의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바로 이 때부터 ‘바람 바람 바람’과 ‘노골적인 스타덤 뒤쫓기’가 시작됐다. 1975년 금발의 여배우 브릿 에클런드(Britt Ekland)를 필두로 ‘황금빛 로맨스’를 잇달아 터뜨렸고, 무거운 세금을 피할 목적으로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안착했다. 이와 함께 발표한 〈Atlantic Crossing〉(9위)은 오늘날 그의 대표곡으로 각인된 서덜랜드 브라더스(Sutherland Brothers)의 ‘Sailing’(58위)을 담고 있었지만, 초기의 참신함을 버리고 팝 적으로만 나아간다는 따가운 지적을 당했다. 결국 로드 스튜어트는 그 해 말 페이시스를 떠나 완전한 솔로 팝 스타로서의 본색을 드러냈다. 음악적 색깔도 변화시킨 그는 1976년 8주간 차트 1위를 차지한 빅 히트 싱글 ‘Tonight’s the night’을 담은 〈A Night On The Town〉(2위)로 본격적인 인기 사냥에 나섰다. 뒤이은 1977년의 〈Foot Loose & Fancy Free〉(2위)로 여세를 몰아간 후, 마침내 의미심장한(?) 제목의 〈Blonde Have More Fun〉(1979)으로 다시금 차트 1위를 정복했다. 당시의 대세였던 디스코를 수용한 싱글 ’Da ya think I’m sexy?’ 역시 4주간 정상의 황홀경을 체험했다. 이에 성난 펑크 그룹들은 그를 ‘썩은 록 스타’로 규정하고, 사치스런 여성 행각과 실망스러운 인기 영합주의에 맹공을 퍼붓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쏟아지는 비난에 대해 마치 시위라도 하듯 최신 조류인 뉴 웨이브/신스 팝을 버무린 〈Foolish Behaviour〉(12위)와 〈Tonight I’m Yours〉(11위)를 1980년과 1981년 잇달아 내놓았다. 그는 ‘Passion’(5위)과 ’Young turks’(5위)를 각각 히트시키며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빙글빙글 돌리는 요지부동의 여유까지 부렸다. 그러나 타락(?)에 대한 응분의 대가였던지 1983년의 〈Body Wishes〉(30위)와 〈Camouflage〉(18위)는 플래티넘조차 따내지 못하는 쓰라림을 맛봤다. 뼈아픈 슬럼프를 경험한 그는 듀란 듀란(Duran Duran)의 존 테일러(Andy Taylor), 쉭(Chic)의 버나드 에드워즈(Bernard Edwards)와 함께 한 1988년의 〈Out Of Order〉(20위)로 재기의 의지를 다졌다. 1989년에는 톰 웨이츠(Tom Waits)의 ‘Downtown train’(3위)을 타고 다시 한번 전진했다. 1991년에도 〈Vegabond Heart〉(10위)를 톱 텐에 올리며 조금씩 스타 회생의 기미를 엿보이게 했다.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던 그에게 근사한 기회를 제공한 것은 1990년대 초반 불어닥친 언플러그드 열풍이었다. 에릭 클랩튼(Eric Clapton)의 극적인 재기에 고무된 그는 1993년 론 우드와 함께 감동의 MTV 언플러그드 무대를 연출하는데 성공했다. 곧바로 라이브 앨범 〈Unplugged... and Seated〉(2위)를 발표하고는 밴 모리슨(Van Morrison)의 명곡 ‘Have I told you lately’(5위)로 예전의 기력을 거뜬히 회복했다. 같은 해 그는 비슷한 허스키 보이스 후배들인 스팅(Sting), 브라이언 아담스(Brian Adams)와 함께 영화 〈Three Musketeers〉의 주제가 ’All for love’(1위)를 부르며 건재를 과시했다. 로드 스튜어트는 이듬해인 1994년, 마침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후 1995년 톰 페티(Tom Petty)의 ‘Leave Virginia alone’(52위)을 담은 〈Spanner In The Works〉(35위)를 내놓은 그는 이듬해에도 신곡을 포함한 발라드 베스트 앨범 〈If We Fall In Love Tonight〉(19위)로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1998년에는 오아시스(Oasis)나 스컹크 애넌지(Skunk Anansie)같은 새카만 후배들의 곡을 대거 리메이크한 의외의 앨범 〈When We Were The New Boys〉(44위)로 변치 않는 젊음을 자랑하기도 했다. 2001년 그는 R&B 색채로 무장한 신보 〈Human〉(50위)으로 새로운 세기에도 녹슬지 않은 예리한 시대감각을 과시했다. 2003년에는 1930, 40년대의 스탠더드 재즈 송만을 모아 놓은 〈It Had To Be You... The Great American Song Book〉(4위)을 발표하며 숙성된 거장의 깊은 맛을 전달했다. 2003년 현재, 그는 새로운 싱글 ‘They can’t take that away from me’로 세월을 잊은 슈퍼스타의 위용을 또 한번 떨치려 하고 있다.
1960년대 후반 사이키델릭이란 태풍이 휘몰아 쳤을 때 트래픽(Traffic)은 태풍의 눈에 자리했던 그룹이었다. 듣는 이로 하여금 자신을 잊고 상상의 대상과 합일하게 만들어 주는 그의 음악은 광기와도 같은 침묵을 수반하여 그 한가운데서 소용돌이쳤다. 사이키델릭과 소울, 펑키, 거기다 클래식 요소까지 뒤섞여 있지만, 그럼에도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앨범 곳곳에 농축되어 있는 절제미 때문이었다. 스펜서 데이... 1960년대 후반 사이키델릭이란 태풍이 휘몰아 쳤을 때 트래픽(Traffic)은 태풍의 눈에 자리했던 그룹이었다. 듣는 이로 하여금 자신을 잊고 상상의 대상과 합일하게 만들어 주는 그의 음악은 광기와도 같은 침묵을 수반하여 그 한가운데서 소용돌이쳤다. 사이키델릭과 소울, 펑키, 거기다 클래식 요소까지 뒤섞여 있지만, 그럼에도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앨범 곳곳에 농축되어 있는 절제미 때문이었다. 스펜서 데이비스 밴드(Spensor Davis Band)의 보컬로도 잘 알려진 스티비 윈우드(Steve Winwood)가 주축이 되어 형성된 트래픽은 1967년 < Dear Mr. Fantasy >를 가지고 데뷔했다. 프론트맨 윈우드가 노래와 키보드와 기타를 맡고, 드럼의 짐 카팔디(Jim Capaldi)가 드럼을 쳤으며 크리스 우드(Chirs Wood)가 플롯과 색소폰을 연주했다. 당시 사이키델릭의 흐름에서 배제되었던 관악기의 도입은 이 그룹이 지향하는 ''사운드의 색감''측면에서 아주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록의 이미지를 결정해준 인물은 리드 기타의 데이브 메이슨(Dave Mason)이었다. 노래에 관한 한 ''흑인보다 더 흑인처럼'' 부를 줄 알았던 스티비 윈우드도 발군이었지만 팝적 감각이 뛰어난 데이브 메이슨 또한 장르를 뛰어넘는 전천후 인물로 그룹에서 없어선 안 될 인물이었다. 지금도 사람들은 트래픽을 규정할 때 반드시 ''윈우드와 메이슨의 공조그룹''이란 표현을 동원한다. 이러한 쟁쟁한 실력자들의 만남으로 사이키델릭이란 시대 조류에 편승했으면서도 하나의 획을 긋는데 성공했다. 더욱이 비틀즈, 롤링 스톤즈, 후 등 빅3를 제외하고 미국 그룹 판이었던 당시 상황에서 영국 그룹이란 점은 주의를 집중시켰다. 더욱이 롤링 스톤즈와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의 프로듀서로도 잘 알려진 지미 밀러(Jimmy Miller)의 참여로 이 앨범의 음악적 가치는 수직 상승한다. 트래픽은 음악만큼 공연으로도 고평(高評)을 받았다. 사이키델릭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무대의 가지각색 현란한 조명들은 비디오 프로듀서인 테일러 핵포드(Taylor Hacford)의 도움으로 관중을 사로잡으면서 현장효과를 절정으로 이끌곤 했다. 당시 사이키델릭 록그룹에 있어서 이 같은 ''판타지''공연은 당연 필수덕목이었다. 자유가 보인다. 그렇지만 조금도 방종이나 무차별적 개성으로 생각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한 구덩이에 차가운 백인 감성과 활활 타오르는 흑인적 열정이라 함께 어우러져 차가운 입김과 뜨거운 연기를 동시에 내뿜는 듯하다. 대척(對蹠)의 아름다운 동거와 퓨전이 여기 있다. 만약 쾌락만을 추구한 음악이었다면 즐거움 되에는 극도의 상실감이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스터 환상과의 여행은 상실이나 허무 아닌 열락이며 그를 통한 삶의 재충전이다. 트래픽은 이듬해 1968년 < Traffic >, 1970년의 < John Barleycorn Must Die > 등의 걸작 앨범들을 통해 그들은 찬란한 자유의 행보를 계속한다. 그러면서 활동 9년 간 채워지지 않는 그 무언가에 대한 갈망을 깊이 새겨놓았다.
‘모타운(Motown) 가의 황태자’ 마빈 게이의 보컬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달콤한 크루닝(crooning) 창법과 샘 쿡의 호소력 짙은 가스펠의 기운을 온전히 흡수한 그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보컬로 창조해내며 청중들을 흥분시켰다. 기운이 서려있는 듯한 그의 보컬은 ’보컬 연주의 대가’라는 영광스런 칭호에 어울린다. 그의 사후 등장한 수많은 소울 팝 가수들은 모... ‘모타운(Motown) 가의 황태자’ 마빈 게이의 보컬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달콤한 크루닝(crooning) 창법과 샘 쿡의 호소력 짙은 가스펠의 기운을 온전히 흡수한 그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보컬로 창조해내며 청중들을 흥분시켰다. 기운이 서려있는 듯한 그의 보컬은 ’보컬 연주의 대가’라는 영광스런 칭호에 어울린다. 그의 사후 등장한 수많은 소울 팝 가수들은 모두 그의 보컬에 영향받았음을 인정하며 그의 음악성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은 단지 탁월한 창법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록음악 역사에 있어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아티스트의 창작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을 몸소 실천한 음악인이라는 점에서 그를 더욱 기억하게 한다. 70년대가 되기 전 만해도 밤낮으로 사랑과 낭만만을 얘기하며 소일하던 모타운식 소울 음악은 당시 대다수 흑인들이 공감해오던 ‘어두운 현실’엔 둔감했다. ‘팔리는 음악’을 원했던 회사측과의 마찰은 불가피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음악’을 위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이런 산고 끝에 록 역사를 대표하는 명반 < What’s going on >(1971)은 탄생했다 소울 음악은 60년대 그가 소속되어있던 모타운 레코드사를 통해 보다 대중적인 음악 문법으로 자리 잡은데 이어, 그는 같은 회사 소속의 스티비 원더와 함께 미국 대도시 후미진 곳에서 벌어지는 ‘게토 리얼리티를’ 자신의 노래에 담아냄으로써 소울이 ‘사회성’이란 화두를 본격적으로 끌어내는데 기여를 했다. 스티비 원더와 함께 그는 소위 후배 흑인 뮤지션들의 ‘대부’이다. 80년대 이스트 코스트 힙합의 분수령을 일군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의 프론트 맨 척 디(Chuck D)는 1988년도 명반 <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 >을 발표하며 롤링스톤지와 가졌던 인터뷰에서 ‘나는 이번 앨범에서 힙합의 < What’s going on > 버전을 내놓고 싶었다’ 라고 얘기할 정도로 마빈 게이의 유산을 이어받았다고 인정했다. 마빈 펜츠 게이 주니어라는 본명으로 1939년 4월 2일 워싱턴 디씨에서 태어난 그는 목사를 아버지로 둔 기독교 가정에서 어린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다소 억압적인 가정환경은 그로 하여금 음악에 몰입하게 해 아버지 때문에 억눌린 영혼을 달래줄 위안이 된다.(어렸을 때부터 그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공군에 입대, 제대 후 고향으로 돌아와 그는 락 앤 롤 스타 보 디들리(Bo Didely)를 만나 그의 문하생이 된다. 1958년 두왑 그룹인 레인보우에 가입, 이듬해엔 시카고로 진출해 ‘문 그로우’ 라는 두왑밴드에서 활동하며 체스(Chess) 레코드에서 그의 ct첫 싱글 ‘Mama roocie’를 녹음한다. 미국 전역 투어에 나선 문 그로우는 디트로이트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고, 당시 그의 연주를 지켜보던 모타운의 설립자 베리 고디 주니어(Berry Gordy Jr.)는 3옥타브가 넘는 그의 탁월한 테너 창법에 매료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61년 모타운과 전속 계약을 체결하며 베리 고디와 운명적인(?) 관계를 시작한다. 처음엔 세션 드러머로서 모타운의 일원이 된 그는 모타운 간판스타이자 작곡가인 스모키 로빈슨과 함께 활동한다. 1961년 그는 사장인 베리 고디의 누이인 안나와 결혼한다(무려 18살의 연상). 사장과 사돈관계가 된 덕에 회사측에 전폭적인 지원을 얻게 된 그는 이듬해 첫 싱글 ‘Stubborn kind of fellow’(1962)를 발표하고 흥겨운 댄스 팝 ’Hitch hike’(1962)로 빌보드 Top 40에 진입하는 순조로운 출발을 보인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크루닝 창법에 영향 받았던 그는 당시 격조 있는 발라드 음악을 원했지만, 회사 측은 그에게 흥겹게 흔들기 좋은 빠른 댄스 음악만을 요구했다. 큰 키에 수려한 용모를 지닌 덕에 유난히 여성 팬들이 많이 따랐던 그였지만, 무대에 올라 몸을 흔들며 청중들에게 즐거움을 줘야 한다는 것은 늘 못 마땅했다. 후에 그가 회고하길 ‘나는 무대에 나가 청중들 앞에서 내 엉덩이를 흔들어야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했을 정도이니, 얼마 후 있을 회사 측과 창작권을 두고 생긴 갈등은 이미 데뷔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1960년대 내내 그는 모타운 사를 통해 꾸준히 히트곡을 발표했다. ‘Pride & joy’(1963)로 처음 Top 10에 진출한 그는 잇달아 발표한 싱글 ’How sweet it is’(1964), ‘Aint that peculiar’(1965)을 Top 10에 진입시킨다. 솔로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져갈 무렵 그는 모타운 소속의 실력 있는 디바들과 듀엣 곡을 많이 취입했는데, 메리 웰즈(Mary Wells)과 함께 한 ’What’s the matter with you baby’(1964)을 시작으로, 킴 웨스튼(Kim Weston)과 함께 한 ’It takes two’(1966), 70년대 다이아나 로스(Diana Ross)와 함께 한 ‘My mistake is to love you’(1974)등이 대중적인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그와 가장 인상적인 호흡을 보여준 디바는 바로 타미 테렐(Tammi Terell)이었다. 그녀와 함께 했던 ‘Ain’t no mountain high enough’(1966), ’Your precious love’(1967), ’Ain’t nothing like the real thing’(1968), ’You’re all I need to get by’(1968) 모두 Top 10에 진입시키는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팝 역사상 가장 궁합이 잘 맞는 콤비’는 안타깝게도 타미 테렐의 요절로 인해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에게 첫 팝 차트 넘버원의 영광을 안겨준 ‘I heard it through grapevine’(1968)로 그의 인기전선은 절정에 다다랐다. 이듬해 ’Too busy thinking about my baby’(1969), ’That’s the way love is’(1969)를 Top 10에 진입시키며 인기는 더해갔지만, 이내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만다. 데뷔 때부터 창작권을 두고 벌어진 회사 측과의 끈질긴 줄다리기는 무려 2년이라는 시간을 그에게 투쟁의 시간으로 만들었다. 달콤한 사랑타령으로 점철된 지금까지의 음악과는 다른, 자신이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표출해보길 갈망했던 그는 ‘자신의 음악’을 얻기 위한 힘겨운 투쟁 끝에 결국 모타운 사의 백기를 받아내며 ‘음반 제작에 관한 모든 전권을 그에게 위임할 것’이라는 전리품을 얻어낸다. 흑인의 입장에서 아프로 아메리칸(Afro-America)의 비참한 현실을 늘 생각해왔던 그는 주저 없이 이런 자신의 고민을 음악 속에 녹여내는 작업을 했다. 흑인 빈곤문제, 실업, 월남전등, 70년대 초 그의 눈에 보인 흑인의 현실은 ‘참담함’이었다. 핑크빛 미래를 노래했던 발랄한 60년대의 흑인 음악은 슬라이& 페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 커티스 메이필드(Curtis Mayfield)등 기라성같은 흑인 뮤지션들에 의해 한층 진지하고 어두워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내놓은 것이 컨셉 앨범 < What’s going on >(1971)이었다. 흑인 음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내놓은 컨셉 앨범 < What’s going on >은 회사 측에 우려에도 불구, 앨범 수록 곡 중 무려 4곡(What’s going on, God is love, Mercy, mercy, me Inner city blues)이 Top 10에 진입하는 성과를 거뒀고, 앨범은 지금까지 8백만장이라는, 당시로선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스트링을 동원한 세련된 연주 편곡, 참회록을 쓰듯 스토리 텔링(Storytelling) 방식으로 진행되는 진솔한 자기 고백은 당시 소울음악에선 맛볼 수 없었던 신선한 충격이었다. 앨범 < What’s going on >은 그의 음악 경력에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이 때부터 그의 음악성에도 뚜렷한 변화가 감지된다. ’Inner city blues’(1971)에서 목격했던 퍼커션의 가열 찬 울림은 70년대 흑인 음악의 대표 트렌드인 ‘펑키 사운드’로의 변화를 예고했고, 앨범으로는 발표 안 된 저주받은 싱글 ‘You ’re the man pt. 1, 2’(1972)에선 가성, 두성, 진성 등 한층 다채로워진 그의 보컬 연기가 압권이다. 재즈에 대한 평소의 관심은 영화 음악 작곡으로도 이어져 노래보다 연주 쪽에 관심이 반영된 영화음악 앨범 < Trouble man >(1972)으로 이어진다. < What’s going on >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 그는 이전의 고뇌하는 흑인 지성임을 포기하고 이번엔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사랑의 전령사로 변신한다. 그의 두 번째 넘버원을 안겨다 준 앨범< Let’s get it on >(1973)은 ‘성 행위’를 찬미하는 노래들로 가득 찬 앨범으로 주변을 다시 한번 어리둥절하게 했다. 빌보드 No.1 곡인 ‘Let’s get it on’은 그를 단번에 섹시 스타로 변모시켰고, 그가 앨범에서 얘기했던 ’자연스러운 성의 표현 ‘은 80년대 들어 프린스나 조지 마이클같은 팝 스타들의 음악 세계로 계승된다. 하지만 그는 당시 첫 아내였던 안나와의 관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재니스라는 여인과 이미 두 집 살림을 차려 아이까지 낳았던 그의 성적 편력은 결국 아내와의 별거로 이어졌고, 한동안 그 충격에 슬럼프에 빠져 마약으로 세월을 보내게 된다. 재기의 몸부림을 친 그는 베리 고디의 주선으로 만난 레온 웨어(Leon Ware)의 곡으로 채워진 앨범 < I want you >(1976)을 발표하지만, 수록곡 ‘I want you’, ’After the dance’가 약간 주목을 받았을 뿐이었다. 히트곡에 목말라하던 그는 1977년 런던 팔라디움 구장에서의 콘서트 더블 실황 앨범< Live at the Palladium >을 발표하며, 13분이 넘는 디스코 곡 ‘Got to give up’을 수록하고, 4분대의 싱글로도 커팅, 그의 세 번째 넘버 원 싱글로 등극된다. 전형적인 댄스뮤직이었던 ’Got to give up’은 팝 차트, 앨 앤 비 차트 1위를 석권하며 그에게 가수로서 회생의 길을 열어준다. 하지만 ‘Got to give up’의 기쁨도 잠시, 결국 그는 안나와 이혼을 하게 되고 ,이혼에 대한 위자료를 다음에 발표하는 앨범 인세로 한다는 합의를 보게 된다. 앨범 < Here, my dear >(1978)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고 수록 곡 ’When did you stop loving me, When did I stop loving you’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만남과 해어짐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그의 뼈저린 고해성사는 아름다운 가사말과 편곡의 세련됨에도 불구, 이렇다할 히트 싱글 없이 앨범은 파묻히며 그의 디스코그래피 중 가장 안 알려진 앨범이 되고 말았다.(엎친데 덮친격으로 안나는 앨범 내용이 사생활 침해라며 소송을 걸기에 이른다.) 첫 번째 아내와의 이혼에 이어 다시 몇 년간은 그에게 혼란의 시기였다. 두 번째 아내였던 제니스와 급기야 파경에 이르렀고, < Love Man >(1979-발매 취소)과 < In our life time >(1981)의 흥행실패는 그를 더욱 마약으로 치닫게 했다. 급기야 그는 1981년 20년간 그에게 산전수전(?) 다 겪게 했던 모타운 사를 떠나, 하와이로 이주, 새로운 출발을 모색한다. 정확히 1년 후인 1982년, CBS 레코드와 전속 계약하며 그에겐 마지막 걸작으로 남게 된 < Midnight Love >(1982)를 발표한다. ‘Let’s get it on’에 버금갈만한 농염한 보컬이 인상적인 싱글 ‘Sexual healing’이 팝 차트 3위까지 오르며 그는 화려하게 재기한다. 공백기 동안대중들과의 소원함을 해소하기 위해 TV 출연 등 다시 활발한 활동을 벌인 그는 베리 고디와 함께 토크쇼에 출연해 둘의 악연(?)을 만회해보려고도 했고, NBA 농구 경기때 미국 국가를 소울 창법으로 불러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지미 헨드릭스가 우드스탁에서 연주했을 때 이후로 최대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재기 의지는 이내 사그러들고 있었다. 이미 코케인에 찌들 때로 찌든 그의 몸은 말을 듣질 않았고 평소에 사이가 안 좋았던 목사인 아버지와의 관계는 조금도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비극은 그의 아버지와의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되고, 1984년 4월, 그의 45회 생일을 하루 앞둔 날, 심한 다툼 끝에 화를 가누지 못한 아버지가 쏜 총에 맞아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그의 어이없는 죽음은 충격적이었다. 많은 흑인 뮤지션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이듬해인 1985년 모타운사와 CBS가 공동으로 그의 미 발표곡을 모은 < Dream of a life time >과 < Romantically Yours >를 내놓는다. 그에 대한 재평가도 활발히 이뤄져 < 롤링스톤 >을 비롯한 록 전문지들은 앞 다투어 그의 앨범 < What’s going on >을 팝 역사에 남을 명반으로 추대하기 시작했고,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그의 이름이 등재된다.
노래 : Tears For Fears (티어스 포 피어스)
티어스 포 피어스는 ''Everybody wants to rule the world'', ''Shout'', ''Sowing the seeds of love'' 같은 굵직한 히트곡들을 남기며 1980년대 뉴 웨이브 열풍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듀오 그룹이다. 그들은 부드럽고 세련된 신시 팝과 정신 분석학의 영향을 받은 철학적인 가사로 인텔리전트 밴드로 평가받았다. 또한 커트 스미스(Curt Smith)와 롤랜드 오... 티어스 포 피어스는 ''Everybody wants to rule the world'', ''Shout'', ''Sowing the seeds of love'' 같은 굵직한 히트곡들을 남기며 1980년대 뉴 웨이브 열풍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듀오 그룹이다. 그들은 부드럽고 세련된 신시 팝과 정신 분석학의 영향을 받은 철학적인 가사로 인텔리전트 밴드로 평가받았다. 또한 커트 스미스(Curt Smith)와 롤랜드 오자발(Roland Orzabal)의 잘생긴 외모도 인기 상승에 한몫을 거들었다. 열 세 살 때 잉글랜드의 배스(Bath)에서 처음 만난 스미스와 오자발은 학교 스쿨밴드에서 함께 하며 파트너십을 다져나갔고, 졸업 후 펑크의 영향을 받아 스카 펑크 밴드 그레듀에이트(Graduate)에서 활동하며 펑크 키드의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듀오는 1981년 그레듀에이트가 해산하자 곧 바로 뉴 웨이브의 물결에 편승하여 티어스 오브 피어스(Tears Of Fears >를 결성하였다. 멤버들이 시대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룹명은 오자발이 좋아하는 아서 자노브(Arthur Zanov >의 책 < Prisoner Of Pain >에서 따왔는데 프라이멀 스크림 치료 요법과 관련된 용어라고 전해진다. 티어스 오브 피어스의 1983년 데뷔작 < The Hurting >은 바로 아서 자노브의 이론을 토대로 만들어진 앨범이다. 한 소년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재킷 사진으로 담은 음반은 팝 감수성이 물씬한 신시사이저의 향연으로 가득하다. 발매되자마자 영국 차트 정상에 등극하는 쾌거를 이룬 것은 물론이고, ''Change''(4위), ''Pale Shelter''(5위), ''Mad world''(3위) 등의 스매시 히트곡들을 토해냈다. 이러한 듀오의 인기는 1985년 소포모어 작품 < Songs From The Big Chair >를 통해 전세계로 뻗어나갔다. 음반은 영국 차트 2위, 미국 차트 1위를 차지하였고, ''Everybody wants to rule the world''(영국 2위, 미국 1위), ''Shout''(영국 4위, 미국 1위), ''Head over hill''(영국 12위, 미국 3위), ''Mothers talk''(영국 14위, 미국 27위) 등 수록곡 대부분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앨범은 현재까지 전세계적으로 천 만장에 가까운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다. 4년 뒤에 발표한 3집 < The Seeds Of Love >도 영국 차트 1위, 미국 차트 8위에 오르며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비틀즈에 대한 찬가 ''Sowing the seeds of love'', 필 콜린스(Phil Collins)가 드럼을 연주해 준 ''Woman In Chains'' 등의 명곡들이 실려져 있다. 뛰어난 판단력으로 펑크에서 뉴 웨이브로 위치 이동을 하여 재미를 봤던 듀오는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는 얼터너티브와의 소통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1991년 스미스와 오자발은 각자의 길을 가기로 선언하고 1992년 베스트 앨범 < Tears Roll Down(Greatest Hits 82-92) >를 이별선물로 교환했다. 이후 오자발은 티어스 오브 피어스란 이름으로 홀로 활동을 하며 1993년 < Elemental >, 1995년 < Raoul And The Kings Of Spain >을 내놓았지만,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스미스 역시 1993년 솔로 데뷔작 < Soul On Board >를 발표하고 잠잠하다가, 1998년 자신의 밴드 메이필드(Mayfield >를 결성하여 앨범 < Mayfield >를 공개했다.
1960년대 후반 브리티쉬 블루스 붐을 주도한 밴드 중 하나였던 프리(Free)는 1968년 런던에서 결성됐다. 1950년대 록큰롤의 융기 이후 블루스는 본고장 미국에선 이것이 흑인 음악으로부터 잉태됐다는 것이 태생적 한계로 작용해 멸시를 받았고, 의도적으로 스포트라이트의 사정권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러나 대서양 건너편 영국의 젊은 음악인들이 흑인 음악에 관심을 나타내면서 팝 음악계에 큰 획을 그은 밴드들이 출현... 1960년대 후반 브리티쉬 블루스 붐을 주도한 밴드 중 하나였던 프리(Free)는 1968년 런던에서 결성됐다. 1950년대 록큰롤의 융기 이후 블루스는 본고장 미국에선 이것이 흑인 음악으로부터 잉태됐다는 것이 태생적 한계로 작용해 멸시를 받았고, 의도적으로 스포트라이트의 사정권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러나 대서양 건너편 영국의 젊은 음악인들이 흑인 음악에 관심을 나타내면서 팝 음악계에 큰 획을 그은 밴드들이 출현했다. 비틀즈가 그랬고 그들의 라이벌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 더 후(The Who), 애니멀스(Animals), 야드버즈(Yardbirds) 같은 브리티쉬 인배이션을 주도한 밴드들이 그러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좀 더 하드록에 근접하면서도 블루스 필을 고이 간직한 블루스 하드록 그룹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바로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험블 파이(Humble Pie), 크림(Cream),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 등이었다. 프리도 이들과 같은 시대를 호령했던 블루스 하드록 밴드다. 미국 흑인 블루스의 마법에 빠진 드러머 사이먼 커크(Simon Kirke)와 기타리스트 폴 코소프(Paul Kossoff)가 조우하면서 그룹 프리의 첫 단추가 꿰어진다. 팀의 목소리를 급구하던 이들은 런던의 클럽에서 노래하던 무명 싱어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소울풀하고 블루지한 보컬과 카리스마적 무대 매너로 청중을 압도했다. 폴 로저스(Paul Rogers)였다. 사이먼은 “오티스 레딩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그의 보컬은 특별했고 지금도 그렇다”라고 말한다. 영국 블루스의 대부 알렉시스 코너(Alexis Korner)는 프리에겐 아버지였다. ‘프리’라는 이름을 작명했고, 팀의 베이스 주자로 당시 나이가 15살의 미소년 앤디 프레이저(Andy Fraser)를 소개했지만 그는 이미 존 매이올 & 블루스브레이커스(John Mayall & Bluebreakers) 같은 큰물에서 놀던 거물급(?) 인사였다. 사이키델릭의 중흥기와 프로그레시브의 태동기였던 1960년대 후반 그 반대 급부로 프리는 음악적으로 현란한 장식을 배제하고, 폴의 보컬에 포인트를 주면서 끈적끈적하고 호방한 사운드 스케이프로 가닥을 잡아갔다. 이러한 시도는 2집 < Free >에서부터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해 3번째 작품 < Fire And Water >에서 꽃을 피운다. 영화 < 나우 앤 덴 >과 < 아메리칸 뷰티 >에 나왔던 스매쉬 히트 싱글 ‘All right now(4위)’로 이들이 더 이상 영국용 밴드가 아니라 국제적인 그룹으로서의 위상을 얻는다.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다음 앨범 < Highway >는 의외로 실패했고 그로 인해 팀 내분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자신의 분신처럼 서로를 아꼈던 이 4명의 영국인들은 그런 애정을 마지막 음반 < Heartbreaker >에 쏟아 붓고는 1973년 밴드를 해산함으로서 각 멤버들은 그룹 ‘프리’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이후 폴 로저스와 사이먼 커크는 킹 크림슨의 멤버 보즈 버렐(Boz Burrell), 못 더 후플(Mott The Hoople)의 기타리스트 믹 랄프스(Mick Ralphs)와 함께 걸출한 밴드 배드 컴퍼니(Bad Company)를 조직해 프리보다 더 큰 성공을 거뒀지만 새로운 음악 활동을 계획했던 폴 코소프는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혔던 약물 중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1976년 3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비치 보이스는, 파도타기 놀이인 서핑의 즐거움을 담은 노래로 유명한 팝 그룹이다. 이들이 60년대 초반에 발표한 노래 ‘서핑 USA’는 지금도 여름만 되면 어김없이 전파를 탄다. 이들이 ‘록 역사의 전설’로 기록되고 있는 것은 66년에 발표한 < 펫 사운즈(Pet Sounds) >가 있기 때문이다. 그룹의 리더인 브라이언 윌슨의 독집이라 해도 무방한 이 앨범은 서프 음악의 종언을 알리기라도 하듯 갖가지 새로운 시... 비치 보이스는, 파도타기 놀이인 서핑의 즐거움을 담은 노래로 유명한 팝 그룹이다. 이들이 60년대 초반에 발표한 노래 ‘서핑 USA’는 지금도 여름만 되면 어김없이 전파를 탄다. 이들이 ‘록 역사의 전설’로 기록되고 있는 것은 66년에 발표한 < 펫 사운즈(Pet Sounds) >가 있기 때문이다. 그룹의 리더인 브라이언 윌슨의 독집이라 해도 무방한 이 앨범은 서프 음악의 종언을 알리기라도 하듯 갖가지 새로운 시도를 선보여 당시 팝 음악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브라이언은 더빙 반복을 통해 이 앨범의 사운드를 놀라울 만큼 두껍게 했고 종소리, 경적소리, 외침 같은 효과음을 많이 응용했다. 사람들은 이 같은 기술적 개가를 접하고 스튜디오 음악의 실체를 알기 시작했다. 폴 매카트니가 1967년, 팝 사상 최고의 명반인 <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 >를 만든 후 “만약 < 펫 사운즈 >가 없었더라면 이 앨범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실토했을 정도다. 톰 페티, 린지 버킹햄, 그룹 소닉 유스 등도 < 펫 사운즈 >가 음악을 듣는 방식 자체를 변화시켰다고 평가했다. 비치보이스를, 얼핏 < 서핑 USA >하나로 이름을 날린 그저 그런 그룹으로 기억하는 사람들로서는 적이 의아스러울 만한 부분이다. 이 앨범은 국내에 ‘그리운 고향’(‘앞마을 옛터에 빨래하는 순이...’로 시작되는)으로 번안된 ‘슬룹 존 B’와 같은 히트곡을 내긴 했지만, 출반 당시에는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음반을 낸 캐피톨 레코드사 측도 브라이언이 쓸데없는 음반을 만들었다고 불평했었다. 그래서인지 이 앨범이 90년 CD로 나왔을 때도 골든 레코드(50만장 판매)를 기록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 앨범 가치는 상승해 ‘전설적인 걸작’으로 자리잡았다. 근착 빌보드는 < 펫 사운즈 >발매 30주년을 기념해 CD 박스 세트를 오는 5월에 출시될 예정이라고 전하고 있다. 뒤늦게 이 작품이 명반임을 깨달은 캐피톨사가 음반의 의미를 기리려는 의지를 내비침으로써 이 박스 세트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캐피톨사는 이 앨범을 ‘상품’으로서뿐 아니라 ‘역사적 다큐멘트’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원곡을 리마스터한 것들 외에, 당시의 신곡 및 실패본들이 총망라돼 실릴 것으로 알려졌다. 많은 팬이 캐피톨사 측의 이런 노력에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 로이 버크허트는 이런 말을 했다. “그와 같은 일은 마땅히 레코드회사가 해야 한다고 본다. 백년이 지나면 비틀스, 롤링 스톤스, 비치 보이스는 우리 시대의 베토벤, 브람스, 바흐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옛 음반이 거의 재발매되지 않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루츠 록 밴드 루츠 록 밴드
밴드 : The Allman Brothers Band (올맨 브라더스 밴드)
1960년대 중반부터 집중 호우 식으로 등장한 영국 뮤지션들은 한동안 미국인들이 등한시했던 자신들의 음악인 초기 로큰롤과 블루스를 가지고 팝음악계를 평정했다. 이러한 역전 상황에 자극을 받은 미국 아티스트들은 뒤늦게 음악 창고에서 끄집어 낸 포크, 블루스, 재즈 등을 록과 융합해 포크록, 재즈록, 블루스록으로 새로운 가지치기를 했고 이 신종 장르들이 1960년대 후반부터 사운드 볼륨이 증폭되기 시작한 하드록과 만... 1960년대 중반부터 집중 호우 식으로 등장한 영국 뮤지션들은 한동안 미국인들이 등한시했던 자신들의 음악인 초기 로큰롤과 블루스를 가지고 팝음악계를 평정했다. 이러한 역전 상황에 자극을 받은 미국 아티스트들은 뒤늦게 음악 창고에서 끄집어 낸 포크, 블루스, 재즈 등을 록과 융합해 포크록, 재즈록, 블루스록으로 새로운 가지치기를 했고 이 신종 장르들이 1960년대 후반부터 사운드 볼륨이 증폭되기 시작한 하드록과 만나면서 또 다시 새로운 스타일을 잉태했다. 이 갓 태어난 음악에는 하드록, 초기 로큰롤, 블루스, 컨트리, 재즈 등 가장 미국적인 음악 요소를 포괄하고 있었다. 이러한 형식을 처음 시도한 밴드가 미국 동남부에 위치한 조지아주 출신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남부의 록음악, 즉 서던록(Southern Rock)이라 명명했다. 바로 그 발화점이 된 그룹이 올맨 브라더스 밴드(Allman Brothers Band - 이하 ABB)다. 투박한 뚝배기 안에서 펄펄 끓는 된장찌개처럼 진한 서던록을 창조한 올맨 브라더스 밴드는 1970년대 초반, 절정의 순간에 주축 멤버들의 갑작스런 사망 때문에 전성기는 짧았지만 록음악 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점한 그룹이다. 왜냐하면 서던록은 1970년대 하드록 씬에서도 상당한 지분을 차지했던 음악 장르일 뿐만 아니라 레너드 스키너드(Lynyrd Skynyrd), 지지 탑(ZZ Top), 마샬 터커 밴드(Marshall Tucker Band), 아틀란타 리듬 섹션(Atlanta Rhythm Section), 38 스페셜(38 Special)을 거쳐 현재의 블랙 크로우스(Black Crowes)와 데이브 매튜스 밴드(Dave Matthews Band)까지 그 명맥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음악 계보가 바로 ABB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조지아 출신의 6인조 밴드는 1960년대 후반 로큰롤과 부기우기가 결합한 음악을 구사했던 ‘아우어 글래스(Hour Glass)’라는 밴드에서 기타를 담당했던 형 듀안 올맨(Duane Allman)과 키보드를 맡았던 아우 그렉 올맨(Gregg Allman)이 남부 출신의 새로운 친구들인 딕키 벳츠(Dickie Betts/기타, 보컬), 베리 오클리(Berry Oakley/베이스), 그리고 부치 트럭스(Butch Trucks/드럼)와 자이 조하니 조한슨(Jai Johanny Johanson/드럼)을 규합해 프레임을 갖춤으로써 ABB의 위대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대평원을 달리는 카우보이 후예들의 트윈 드럼 시스템은 훗날 같은 계열의 서던록 밴드인 레너드 스키너드(Lynyrd Skynyrd)와 38 스페셜(38 Special)에게 입김이 작용했고, 트윈 기타 체제는 쥬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나 슬레이어(Slayer)같은 헤비메탈 그룹들에게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레너드 스키너드는 무려 3명의 리드 기타리스트를 두어 올맨 브라더스의 벽을 넘고자 했다). 이 섹스텟(sextet-6인조)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부터 듀안 올맨은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이나 윌슨 피켓(Wilson Pickett)같은 대가들의 음반에서 기타를 연주해 음악계에선 그 명성이 대단했다. 그의 이러한 활동 반경은 에릭 클랩튼(Eric Clapton)이 조직했던 데렉 & 더 도미노스(Derek & The Dominoes)가 1971년에 발표한 의 협연으로 이어진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싱글 ‘Layla’의 후반부에서 피아노와 앙상블을 이룬 명 슬라이드 기타 연주의 영광은 듀안 올맨에게 돌아간다. 1969년, 음악팬들은 블루스와 컨트리, 재즈 그리고 하드록이 멋지게 조화를 이룬 이 ABB의 데뷔 앨범 를 통해 새로운 음악 세계를 경험했다. 그것은 블루스 하드록과 컨트리, 재즈가 사이좋게 어깨동무 한 서던록의 힘찬 첫출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후에 공개된 실황 음반 와 정규 앨범 , 그리고 를 통해 가장 미국적인 록음악의 전형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 정점의 시기에 그룹의 버팀목이던 듀안 올맨이 1971년 10월 29일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베이스 주자 베리 오클리도 이듬해인 1972년 같은 장소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는 기막힌 비극을 연출했다. 음악적으로나 연주 면에 있어 가장 물오른 시점을 맞이하고 있던 ABB에게 두 멤버의 죽음은 상당한 치명타였지만 몸과 마음을 추스른 나머지 ‘생존자’들은 그렉 올맨과 딕키 벳츠를 중심으로 뭉쳐 신보를 제작했다. 이 아픔을 딛고 일어선 음반이 최대 히트곡 ‘Ramblin’man(2위)’과 명 연주곡 ‘Jessica(65위)’가 수록된 1973년 작품 다. 이전의 LP보다 대중적이면서도 컨트리 쪽으로 궤도를 대폭 수정한 이 작품으로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의 고지를 점령했고, 올맨 브라더스 밴드에겐 금전적인 여유를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이후에 발표한 음반들은 이전 만큼의 음악적 재능과 창작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것은 듀안 올맨과 베리 오클리가 올맨 브라더스 밴드의 음악적 심장부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후 셰어(Cher) 아주머니와 결혼했던 그렉 올맨은 밴드와 솔로 활동을 병행하면서 1987년에는 ‘I’m no angel(49위)’이란 히트곡을 생산했고, 지금까지 올맨 브라더스 밴드의 이름으로 라이브 활동을 해 오고 있다. 듀안 올맨이 음악팬들의 곁을 떠난 지 정확히 30년이 지난 현재, 그의 이름은 그리움과 아쉬움을 상징하는 고유 명사가 되었다. 특히 에 수록된 ‘In memory of Elizabeth Reed’에서 그렉 올맨의 영롱한 기타 연주는 30년 이상이 흐른 지금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올맨 브라더스 밴드와 서던록의 흥망성쇠를 표현하고 있다.
멤버 : Graham Gouldman, Iain Hornal, Keith Hayman, Lenni Crookes, Paul Burgess, Rick Fenn 멤버 : Graham Gouldman, Iain Hornal, Keith Hayman, Lenni Crookes, Paul Burgess, Rick F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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