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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on Rattle / Berliner Philharmoniker 시대의 본질 (Essence of an Era) 사이먼 래틀, 베를린 필하모닉

1993~2017 레코딩

[ 7DVD / 18p 영어 해설지 ]
Hector Berlioz, Jean-Philippe Rameau, Leonard Bernstein, George Gershwin, Richard Strauss 작곡 외 30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EuroArts | 2018년 08월 14일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 판매지수 234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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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on Rattle / Berliner Philharmoniker 시대의 본질 (Essence of an Era) 사이먼 래틀, 베를린 필하모닉

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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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매일 2018년 0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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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상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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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출연진 소개 (35명)

작곡 : Hector Berlioz (엑토르 베를리오즈)
프랑스의 낭만주의 작곡가이자 음악 평론가. 남프랑스 라코트생탕드레에서 의사인 아버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들을 의사로 키우기 위해 파리로 보냈지만, 그곳에서 글루크, 스폰티니 등의 오페라에 매료되어 결국 작곡가의 길로 들어선다. 1826년 파리 음악원에 입학,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1830년 네 번째 도전 끝에 칸타타 〈사르다나팔의 죽음La Derniere nuit de Sardanap... 프랑스의 낭만주의 작곡가이자 음악 평론가. 남프랑스 라코트생탕드레에서 의사인 아버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들을 의사로 키우기 위해 파리로 보냈지만, 그곳에서 글루크, 스폰티니 등의 오페라에 매료되어 결국 작곡가의 길로 들어선다. 1826년 파리 음악원에 입학,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1830년 네 번째 도전 끝에 칸타타 〈사르다나팔의 죽음La Derniere nuit de Sardanapale〉으로 ‘로마 대상’을 수상, 로마 유학의 기회를 얻지만 3년의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돌아온다. 일찍이 베토벤을 알아보고 파리 음악원 시절 작곡가의 후기 현악 사중주를 연구한 것 외에도 당시 베토벤을 받아들이기를 꺼리던 프랑스 비평계에 반발, 직접 평론 활동에 뛰어들어 여러 매체에 이 작곡가에 대한 호평과 찬사의 기사들을 기고한다.

1830년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보다가 배역을 맡은 여인에 대한 짝사랑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표작인 〈환상 교향곡Symphonie fantastique〉을 작곡한다. 1834년부터 본격적으로 작곡을 이어가 〈이탈리아의 해럴드Harold en Italie〉(1834), 〈레퀴엠Requiem〉(1837), 오페라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1838) 등을 썼으나 마지막 작품이 참패하면서 한동안 침체기를 겪는다. 이후 외국으로 연주 여행을 떠나 1842-1843년에는 독일 각지에서 연주를 하면서 〈로마의 사육제 서곡Le Carnaval romain: Ouverture〉을 작곡하였다. 1845-1846년 프라하와 부다페스트에서의 성공적인 연주 여행에 자신감을 회복, 1846년에 일시 귀국하여 오페라 〈파우스트의 겁벌La Damnation de Faust〉을 발표하지만 비평계의 극찬에도 불구, 흥행에는 실패한다. 1854년 3부작 오라토리오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L’Enfance du Christ〉이 비로소 파리에서 성공을 거두고, 만년에는 2부작 오페라 〈트로이 사람들Les Troyens〉 작곡에 열중하였으나, 살아생전 온전히 무대에 올리지는 못한다. 1867-1868년 많은 사랑을 받았던 러시아에서의 공연을 끝으로 연주 여행에 종지부를 찍는다. 대표 저서로 《근대 악기법과 관현악법Grand traite d’instrumentation et d’orchestration modernes》(1844), 《회상록Memoires》(1870)이 있으며, 《노래를 가로질러A travers chants》(1862)를 비롯해 매체에 발표한 글들을 묶어 만든 여러 권의 평론집이 있다.
장 필립 라모는 화성법을 이론화한 최초의 이론가이자 작곡가이다. 교회 오르가니스트의 아들로 태어나 17세 무렵부터 프랑스 각지의 교회 오르가니스트를 전전하면서 이론과 창작에 힘썼다. 1722년(39세) 파리에서 유명한 '화성론'을 출판해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 여기에 정착한다. 1726년에는 다시 '신음악 이론 체계'를 출판, '화성론'과 함께 3도 음의 누적에 바탕을 둔 화음 연결의 원리를 확립했다. 후에는 대... 장 필립 라모는 화성법을 이론화한 최초의 이론가이자 작곡가이다. 교회 오르가니스트의 아들로 태어나 17세 무렵부터 프랑스 각지의 교회 오르가니스트를 전전하면서 이론과 창작에 힘썼다. 1722년(39세) 파리에서 유명한 '화성론'을 출판해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 여기에 정착한다. 1726년에는 다시 '신음악 이론 체계'를 출판, '화성론'과 함께 3도 음의 누적에 바탕을 둔 화음 연결의 원리를 확립했다. 후에는 대표작 「이폴리트와 아리시 Hippolyte et Aricie」(1733)를 비롯한 많은 오페라와, 쿠프랭의 뒤를 이어받아 클라브생(하프시코드 또는 쳄발로라고도 부른다)곡을 작곡해 갔다. 후에 궁정 실내악 작곡가로 임명된 라모는 당시의 프랑스 악단 최대의 지도자가 되고, 죽음 직전에는 귀족 지위에 올랐다. 라모의 음악은 일반적으로는 「암탉 La poule」이나 「탕부랭 Tambourin」과 같은 극소수의 소품에 의해 사랑받고 있을 뿐이지만, 그 작풍은 동시대의 작곡가에 비해 훨씬 진보적이었다. 특히 '선율은 화성에서 태어난다'고 하는 그의 기본적인 음악관은 이미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시대를 앞서가고 있었다.
작곡 : Leonard Bernstein (레너드 번스타인)
레너드 번스타인은 1918년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모는 러시아 출신이며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이다. 어린시절부터 피아노 연주하기를 좋아했으며 음악적인 재능을 보였다. 하버드대학교에 진학하여 작곡을 전공했고, 1937년 모더니즘 음악의 대가였던 디미트리 미트로폴로스(Dimitri Mitropolous)를 만나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또한 하버드의 미학교수였던 데이비드 프롤(David Pral... 레너드 번스타인은 1918년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모는 러시아 출신이며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이다. 어린시절부터 피아노 연주하기를 좋아했으며 음악적인 재능을 보였다. 하버드대학교에 진학하여 작곡을 전공했고, 1937년 모더니즘 음악의 대가였던 디미트리 미트로폴로스(Dimitri Mitropolous)를 만나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또한 하버드의 미학교수였던 데이비드 프롤(David Prall)로 부터 예술을 이해하고 음악을 표현하는데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39년 그의 졸업논문은 '인종적 요소가 미국 음악에 끼친 영향'이라는 주제로 썼다.

졸업 후에는 F.라이너, S.쿠세비츠키에게 지휘법을, 톰프슨에게 관현악법을 배웠다. 1943년 뉴욕필하모니 음악감독이었던 아서 로진스키(Arthur rodzinski)의 인정을 받아 뉴욕필하모닉의 보조지휘자가 되었다. 그해 11월 14일 뉴욕필하모니의 지휘자 브루노 발터(Bruno Walter)가 급환으로 지휘를 못하게 되자, 그의 대신 뉴욕필하모니의 지휘를 맡았고 CBS방송을 통해 전국에 중계되었다. 번스타인은 이 한번의 기회로 유명세를 탔고 이름을 떨치게되었다. 1944년 피츠버그 교향악단을 지휘하였고 자신의 첫 교향곡 《예레미야 심포니 Jeremiah Symphony》을 연주했다.

당시 유럽에서 일어난 2차세계대전은 러시아로 확전되었고 히틀러가 저지런 대량학살 소식이 미국 전해졌다. 부모가 러시아 출신인 번스타인은 러시아 난민을 돕자는 자선행사에 자주 초대되어 나갔으며 카네기홀 등에서 자선 연주회를 열었다. 번스타인은 음악뿐만아니라 정치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디트로이트를 중심으로 진보당 창당에 관여하였고 진보적 단체의 단결을 주장했다. 이때부터 그는 FBI의 조사를 받았으며 그의 정치적 성향은 공산주의로 분류되었다. 그는 CBS 방송국 출입이 금지되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그의 음악과 공연은 취소되었다. 번스타인은 정치적인 성향 때문에 급격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마침내 미국의 유력지인 라이프 지에 50명의 대표적인 좌파 블랙리스트로 번스타인이 소개되었고 뉴욕필하모니 지위자 명단에서도 제외되었다.

1953년 7월 미국 국무부는 번스타인의 여권 갱신을 거부하였고 항상 FBI의 감시를 받으며 고립되었다가 자신의 활동과 신념을 부정하는 진술서에 서명하고 나서야 여권을 받아 유럽으로 갈 수 있었다. 그해 8월에 이탈리아로 건너가 연주활동을 하였는데 음악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표면적으로 보수적 성향의 미국인임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 결과 컬럼비아 영화사의 승인을 얻어내 《워터프론트 Waterfront》(1954)라는 영화음악 제작을 맡을 수 있었다. 그후 포드 자동차의 의뢰를 받아 연주회를 열었고 CBS를 통해 방송되었다. 번스타인은 다시 뉴욕 필하모니로 복귀하게 되었으며 미국에서 지휘자로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1957년 뉴욕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 이듬해 음악감독으로 취임하였고 그가 연주하는 음악회는 최대의 흥행을 보증하게 되었다. 번스타인은 뮤지컬《웨스트사이드 스토리 West Side Story》(1957)의 음악을 담당하면서 가장 미국적인 뮤지컬의 창작하였다는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진보적인 성향이 보수로 전향한 것은 아니었으며 미국내 민권투쟁과 인종차별 등 사회적인 문제에 적극 참여하였다. 1964년 번스타인은 미국에서 일어난 흑인민권운동에 가담하여 마틴 루터 킹 목사(Martin Luther King)와 함께 앨라바마에서 열린 셀마 대행진에 참가하였다. 번스타인은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닉슨 행정부가 일으킨 베트남 전쟁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종전을 주장하였고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였다. 이 시기에 자신의 사회사상을 표현한 교향곡《카디시 Kaddish》(1963)와《치체스터 시편 Chichester Psalms》(1965)을 발표하였다. 미국의 보수파인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자 미국내 진보세력의 몰락을 우려하였고 보수파가 추진하는 핵무기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이상과 다르게 변모하는 미국사회의 모습으로 번스타인은 상실감으로 실의에 빠져들었다. 20세기 미국을 표현하는 오페라를 구상하였으나 끝내 작곡을 완성하지 못했다. 1985년 세계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영국, 일본, 그리스, 헝가리 등지에서 연주했으며 이후에는 주로 유럽을 무대로 연주활동을 했다. 1990년 10월 14일 사망했다.
현대 음악이라 불리는 20세기 전반에 있어서 미국적인 성격과 수법을 가장 잘 발휘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작곡가이다. 그는 가난한 유대계의 러시아 이민 장사꾼의 아들로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10세때 우연히 바이올린소리를 들어 형의 피아노를 사용하며 처음으로 음악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3세엔 화성학을 공부하였다. 16세에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뉴욕에 있는 리믹 악보 출판사의 피아니스트로서 손님들에게 피... 현대 음악이라 불리는 20세기 전반에 있어서 미국적인 성격과 수법을 가장 잘 발휘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작곡가이다. 그는 가난한 유대계의 러시아 이민 장사꾼의 아들로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10세때 우연히 바이올린소리를 들어 형의 피아노를 사용하며 처음으로 음악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3세엔 화성학을 공부하였다. 16세에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뉴욕에 있는 리믹 악보 출판사의 피아니스트로서 손님들에게 피아노를 쳐 주었다. 19세때는 극장의 쇼와 같은 곳에서 일한 적도 있었는데, 21세 때 뮤지컬 코미디 라 라 루실(La La Lucille)을 창작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작곡한 작품 스와니 강(Swanee)은 인기가 상당히 높아서 악보가 100만부가 팔리고 레코드도 225만 장이나 팔렸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당시 '재즈의 왕'이라 불리던 폴 화이트먼이 거슈윈의 재능을 인정하고 '심포닉 재즈'를 작곡할 것을 권하였다. 그 후, 마침내 《랩소디 인 블루》를 1924년에 작곡하여 많은 칭찬과 인기를 얻었으며, 악단에 데뷔하기도 하였다. 거슈윈은 화성학을 다시 공부하였는데, 순음악의 방면에는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뉴욕 교향악단에서 그에게 협주곡을 부탁했기 때문에 고전 형식을 공부해 가며 작곡을 했다. 1925년 봄에 그는 파리를 여행한 적이 있는데, 그 곳에서 영감을 얻고, 《파리의 미국인》란 작품을 발표하여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35년에는 오페라 《포기와 베스》를 작곡하여 절찬을 받았다.

그는 1937년 뇌종양으로 수술을 받던 중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웨스트체스터 힐즈 공동묘지(Westchester Hills Cemetery)에 있다. 평생 독신이었던 거슈윈은 작사가인 형 아일러와 단란하게 살면서 부모와 친척도 잘 돌보았다고 한다. 취미는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1960년에 회고전(回顧展)이 개최되었을 정도로 전문가 솜씨였다.
작곡 : Richard Strauss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교향곡, 교향시, 협주곡, 실내악, 오페라, 가곡 등 서양 고전음악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걸작을 남긴 대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1864년 독일 뮌헨에서 호른 연주자 프란츠 슈트라우스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음악 교육을 받았다. 6세에 크리스마스 노래를 작곡하여 신동으로 불렸고, 11세에는 음악 이론과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바그너에 반하는 입장이었기에 그의 작품을 접하지 못하다가 187... 교향곡, 교향시, 협주곡, 실내악, 오페라, 가곡 등 서양 고전음악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걸작을 남긴 대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1864년 독일 뮌헨에서 호른 연주자 프란츠 슈트라우스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음악 교육을 받았다. 6세에 크리스마스 노래를 작곡하여 신동으로 불렸고, 11세에는 음악 이론과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바그너에 반하는 입장이었기에 그의 작품을 접하지 못하다가 1874년 처음 만난 바그너 오페라에서 큰 감동을 받는다. 1882년 뮌헨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과 예술사를 공부했다. 당대 최고 지휘자 중 한 사람인 한스 폰 뷜로의 보조 지휘자로 일하다가, 1885년에 뷜로의 후임으로 마이닝겐 궁정 극장의 음악 감독이 된 이후 많은 극장에서 지휘자로 활약했다.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96), 오페라 〈살로메〉(1905), 〈엘렉트라〉(1909), 〈장미의 기사〉(1911), 교향곡 〈가정 교향곡〉(1904), 〈알프스 교향곡〉(1915), 가곡 〈네 개의 마지막 노래〉(1948)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작곡 : Wolfgang Amadeus Mozart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
서양 고전주의 음악의 완성자이자 현재까지도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음악가. 35년의 생애 동안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 오페라, 실내악, 미사곡 등 600개가 넘는 작품을 남겼으며 많은 작품이 각 장르의 정점에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다섯 살 때 첫 작곡을 했으며 열네 살 때 이탈리아 여행 중에 오페라 [폰투스의 왕 미트라다테스]를 무대에 올려 대성공을 거두었다.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몇 차례에 걸쳐 유... 서양 고전주의 음악의 완성자이자 현재까지도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음악가. 35년의 생애 동안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 오페라, 실내악, 미사곡 등 600개가 넘는 작품을 남겼으며 많은 작품이 각 장르의 정점에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다섯 살 때 첫 작곡을 했으며 열네 살 때 이탈리아 여행 중에 오페라 [폰투스의 왕 미트라다테스]를 무대에 올려 대성공을 거두었다.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몇 차례에 걸쳐 유럽 전역을 여행했으나 경이적인 음악의 신동이라는 평판과 작품들의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그것을 얻는 데 실패했다. 고향인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잠깐 동안 일했으나 대주교와의 불화로 해고되고 이후 빈으로 거처를 옮겨 작곡과 연주에 전념했다. 피아니스트, 작곡가로서의 높은 명성과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등 오페라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것에 대한 보수는 그의 형편없는 경제관념과 낭비벽을 감당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안정적인 예술 활동을 위해서는 궁정이나 귀족으로부터의 후원이 필수적이었던 시대에 높은 급료를 안정적으로 지급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죽을 때까지 얻지 못했던 모차르트는 짧은 생애 동안 주로 생계를 위해 곡들을 썼고, 만년에는 닥치는 대로 주위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런 불안정한 생활 속에서도 모차르트의 창작열은 죽기 직전까지 조금도 식지 않아 음악사에 영원히 남을 수많은 작품들을 썼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관한 일화는 무수히 많은데 바티칸에서 외부에 그 악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던 비곡 알레그리의 [미제레레]를 처음 듣고 거의 완벽하게 채보했고 이틀 뒤 두 번째에는 몇 개의 소소한 것들을 수정해 악보를 완성했다. 모차르트에 의해 처음으로 [미제레레]는 일반에 악보가 공개되었다. [교향곡 36번]을 사흘 만에 작곡했고 그의 3대 교향곡으로 평가받는 [교향곡 39번]부터 [교향곡 41번]까지를 6주 만에 완성했다. 모차르트 스스로 자신은 음악에 대한 천재를 타고났다고 자부했으나 작곡을 위해서 자신보다도 많은 시간을 생각하고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단언했을 정도로 그는 음악에 전념한 천재이기도 했다. 모차르트의 작품은 가볍고 경쾌한 장조의 작품이 대부분인데 만년에 접어들어서는 장조의 작품이라도 비장함과 애수에 넘치는 작품이 늘었고, 그런 작품들은 ‘천상의 음악’이라고 형용되었다. 죽기 두 달 전 건강이 이미 안 좋은 상황에서도 [마적]을 작곡해 초연하는 등 정력적으로 곡들을 썼으나 미완의 걸작 [레퀴엠]을 쓰던 도중 쓰러져 불과 2주 뒤에 35년 10개월의 젊은 나이로 빈에서 사망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하이든, 베버, 베토벤, 슈베르트, 쇼팽, 로시니, 베를리오즈 같은 음악가들뿐 아니라, 실러, 괴테, 나폴레옹을 비롯해 많은 저명인사와 유럽 왕족들의 장례식에서 연주되었다.
작곡 : Igor Stravinsky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스트라빈스키는 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법률을 배우다가, 1903년 독일에서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를 만난 후 음악에 뜻을 두고, 그에게서 작곡 개인지도를 받았다. 1908년 관현악곡 《불꽃》으로 러시아 발레단의 디아길레프에게 인정을 받고, 그의 의뢰로 발레곡 《불새》(1910), 《페트루시카》(1911)를 작곡하여 성공을 거둠으로써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1913년 ...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스트라빈스키는 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법률을 배우다가, 1903년 독일에서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를 만난 후 음악에 뜻을 두고, 그에게서 작곡 개인지도를 받았다.

1908년 관현악곡 《불꽃》으로 러시아 발레단의 디아길레프에게 인정을 받고, 그의 의뢰로 발레곡 《불새》(1910), 《페트루시카》(1911)를 작곡하여 성공을 거둠으로써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1913년 발표한 《봄의 제전》으로 파리악단에서 찬반 양론의 소동이 일어났으며, 이 곡으로 당시 전위파 기수의 한 사람으로 주목받게 되었고,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러시아 혁명으로 조국을 떠난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후 신고전주의 작품으로 전환하였는데, 이 시기의 작품으로 《풀치넬라》(1920)가 있다. 그리고 고전 시대와 바로크 시대 음악의 정신을 부흥시키려고 한 음악풍조는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에서 유럽 음악의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는 이 시기의 풍조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1934년 프랑스에 귀화했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1945년 미국으로 망명, 귀화하여, 한때의 침체기를 거쳐 《3악장의 교향곡》(1945)과 《미사》(1948) 등으로 재기, 다시 제2의 전기(轉機)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말년에는 종교음악에 관심을 두어 《설교, 설화 및 기도》(1961), 칸타타 《아브라함과 이삭》(1963), 합창곡 《케네디의 추억을 위하여》(1965) 등의 작품을 남겼다.
작곡 : Max Bruch (막스 브루흐)
작곡 : Ludwig van Beethoven (루드비히 판 베토벤)
1770년 12월 17일 세례 ~ 1827년 3월 26일)은 독일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감기와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57세로 생을 마친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작곡가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음악의 성인(聖人)" 또는 "악성"(樂聖)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가장 잘 ... 1770년 12월 17일 세례 ~ 1827년 3월 26일)은 독일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감기와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57세로 생을 마친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작곡가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음악의 성인(聖人)" 또는 "악성"(樂聖)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교향곡 9번》,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등이 있다.

베토벤의 조부는 21세의 나이에 브라반트 오스트리아 공국(현재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의 메헬렌 마을에서 본으로 이주한 귀족 출신의 음악가로, 손자와 동명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12-1773)이었다. 루트비히는 쾰른 선제후국, 클레멘스 아우구스트의 궁정에서 베이스 가수로 고용되었고, 결국 1761년에 카펠마이스터가 되었으며 본에서 저명한 음악가가 되었다. 그의 생애 말기에 그가 위임한 초상화는 그의 음악적 유산의 부적으로 그의 손자의 방에 남아 있었다. 루트비히에게는 같은 음악 기관에서 테너로 일하면서 그의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키보드와 바이올린 레슨을 한 외아들 요한(Johann van Beethoven, 1740-1792)이 있었다.

요한은 1767년에 마리아 막달레나 케베리히(Maria Magdalena Keverich, 1746-1787)와 결혼했다. 그녀는 트리어 대주교 궁정의 수석 요리사였던 하인리히 케베리히(Johann Heinrich Keverich, 1701-1759)의 딸이었다. 베토벤은 현재 본, 본가세 20번지의 베토벤 하우스 박물관에 해당하는 건물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생년월일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1770년 12월 17일에 성 레미기우스 가톨릭 교구에서의 그의 세례 기록은 존속하고 있다. 당시 이 지역의 관습은 출생 후 24시간 이내에 세례를 행하는 것이었다. 그의 생년월일이 12월 16일이라는 합의(베토벤 자신이 동의 한 바 있음)가 있지만, 이에 대한 문서로 된 증거는 없다.

요한 판 베토벤에게서 태어난 일곱 자녀 중 두 번째로 태어난 루트비히와 두 명의 남동생 만이 유아기에서 살아 남았다. 첫째 동생인 카스파 안톤 카를 베토벤(Kaspar Anton Karl van Beethoven, 1774-1815)은 형과 같이 작곡가가 되려고 했지만 일찍 포기하고 세무서원이 되었다. 피아노를 웬만큼 치기는 하였지만 별다른 재능이 없었기에 형의 비서 역할을 맡으며 출판을 도왔다. 하지만 나중에 형의 평판이 높아지자 형의 작품을 처분해서 한 몫 보려는 생각으로 형이 출판을 꺼려했던 초기의 습작들을 팔아치우는 등 여러가지로 형을 괴롭혔다. 카스파의 아들도 삼촌인 베토벤에게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막내동생인 니콜라우스 요한(Nikolaus Johann van Beethoven, 1776-1848) 역시 베토벤에게 골치 아픈 존재였다. 형의 도움으로 약제사가 된 그는 상당한 돈을 모은 후 형에게 빌려주고는 그것을 미끼로 형의 작품을 마음대로 처분했다. 품행이 단정치 못한 여인과 결혼할 때에도 형의 반대를 꺾고 결혼한 뒤부터는 더 멀어졌다. 사업수완이 좋아서 제법 재산을 모았으나 베토벤이 어려운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결코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베토벤의 첫 번째 음악 교사는 그의 아버지 요한이었다. 흔히 요한은 가혹한 선생이며 어린 베토벤을 "건반 악기 앞에 세워놓았고 아이는 대개 울고 있었다"고 회자되는데, 이는 그만큼 엄격한 아버지의 행동 때문이었다. 그러나 음악학자이자 음악평론가인 조지 그로브(Sir George Grove, 1820-1900)의 그로브 음악과 음악인 사전에서는 요한의 그런 행동에 대한 확실한 기록 증거가 없다고 지적하며, "억측과 속설은 둘 다 늘어나는 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요한은 혹독했을지 모르지만 아들의 두드러진 재능을 인식하고 베토벤에 대한 음악 교육을 같은 궁정의 동료들을 포함한 다른 유능한 교사들에게 재빨리 양도했다. 베토벤은 후에 궁정 오르간 연주자인 질 판 덴 에덴(Gilles van den Eeden, 1708-1782), 건반 수업을 한 가족의 후원자인 토비아스 프리드리히 파이퍼(Tobias Friedrich Pfeiffer, 1751-1805), 바이올린과 비올라 연주를 지도한 그의 친척 프란츠 로반티니Franz Rovantini 그리고 바이올린 연주를 지도한 한 궁정의 악장인 프란츠 안톤 리스Franz Anton Ries 등 다른 지역 교사들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그의 수업료는 5년차에 시작되었다. 체제는 엄하고 철두철미해서 종종 그는 눈물을 흘렸다. 불면증 환자 파이퍼의 개입으로 젊은 베토벤이 침대에서 건반으로 끌려가는 비정기적인 심야 세션이 있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어린 나이에 분명했다. 요한은 이 지역에서의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성공을 알고(아들 볼프강, 딸 나넬과 함께) 1778년 3월의 첫 공개 연주회 포스터에 베토벤이 여섯 살(그는 일곱 살이었다)이라고 주장하며 아들을 "신동"으로 선전하려고 했다. 여하튼 베토벤이 피아노 연주 "신동"으로 불린 건 사실이며 그 후 개인 연주회를 포함하여 많은 소규모 공연이 이어졌다. 평소 수줍음이 많았던 베토벤은 음악이 자신감을 높여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780년 또는 1781년에 베토벤은 본에서 가장 중요한 스승인 크리스티안 고틀로브 네페(Christian Gottlob Neefe, 1748-1798)와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 켐니츠 출신의 작곡가로서 많은 재능을 갖고 있었던 네페는 베토벤의 능력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그에게 작곡을 가르쳤다; 1783년 3월 베토벤의 첫 번째 출판 작품인 피아노 변주곡, 《드레슬러의 행진곡 주제에 의한 아홉 개의 변주곡, WoO 63》이 등장했다. 베토벤은 곧 네페의 보조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처음에는 무급(1782년)으로 일했고, 그 다음에는 궁정 예배당의 유급(1784년)의 직원으로 일했다. 그의 첫 세 개의 피아노 소나타, WoO 47은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Maximilian Friedrich von Konigsegg-Rothenfels, 1708-1784)에게 헌정되었기 때문에 때때로 Kurfurst ("선제후")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1783년에 출판되었다.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은 모차르트와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인정받았는데, 이 세 개의 소나타는 작곡가로서의 재능은 물론 그의 대담성을 일찌감치 엿볼 수 있게 한다. 같은 해에 베토벤에 대한 최초의 인쇄된 언급이 Magazin der Musik ("음악잡지")에 실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 11살 소년으로 가장 유망한 재능있는 소년이다. 그는 피아노를 매우 능숙하게 연주하고, 파워풀하게 연주하며, 책을 아주 잘 읽는다... 그가 연주하는 가장 중요한 작품은 스승 네페가 손에 쥐여준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이다 ..."

본의 선제후로서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의 후계자는 막시밀리안 프란츠(Maximilian Franz Xaver Joseph Johann Anton de Paula Wenzel, 1756-1801)였다. 그는 베토벤에게 약간의 지원을 하며 1784년 그를 두번째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 영구 임명하였고, 1792년 빈 방문을 위해 돈을 지불했다. 베토벤은 또한 궁정 예배당에서 하프시코디스트와 비올리스트로서 일했다.

베토벤은 몇 년 동안 그의 인생에서 중요해진 몇몇 사람들에게 소개되었다. 그는 교양 있는 폰 브로우닝von Breuning 가문을 자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독일 문학과 고전 문학을 접하였고 몇몇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으며 미망인이 된 폰 브로우닝로부터 어머니와 같은 우정을 제공받았다.

여기서 그는 그의 평생의 친구가 되었고 폰 브로우닝의 딸들 중 한 명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던 젊은 의대생 프란츠 게르하르트 베겔러(Franz Gerhard Wegeler, 1765-1848)를 만났다. 폰 브로이닝의 가족 환경은 알코올 의존증 환자인 아버지의 통제가 점점 심해지는 그의 가정 생활에 대안을 제시해 주었다. 폰 브로이닝 가문의 또 다른 단골은 페르디난드 폰 발트슈타인(Ferdinand von Waldstein, 1762-1823) 백작이었는데, 그는 베토벤의 본 시대 동안 친구이자 재정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발트슈타인은 1791년에 베토벤의 무대를 위한 첫 번째 작품인 발레 음악, 《기사 발레를 위한 음악, WoO 1》을 의뢰했다.

하이든, 발트슈타인의 도움으로 베토벤은 빈 귀족들의 살롱에서 연주자와 즉흥 연주자로서의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의 친구 니콜라우스 짐로크는 디터스도르프를 주제로 한 일련의 피아노 변주곡, WoO 66(디터스도르프의 오페라 《빨간 모자》 중 아리아 "옛날 한 노인이" 주제에 의한 열세 개의 변주곡 A 장조)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793년까지 그는 빈에서 피아노 거장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그는 작품의 최종적인 모습이 더 큰 영향을 미치도록 작품 출판을 보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첫 번째 빈 연주회는 1795년 3월이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그의 피아노 협주곡 중 하나를 연주했다. 이 공연 직후, 그는 Op.를 부여한 첫 번째 작품(세 개의 피아노 삼중주 1-3번, Op. 1)의 출판을 위해 편곡 작업을 했다. 이 작품들은 그의 후원자인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헌정되었고, 재정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베토벤의 수익은 1년 동안 그의 생활비를 충당하기에 거의 충분했다.

1796년 베토벤은 1789년의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처럼 중부 유럽의 문화 중심지를 순회하였다. 여정에는 모차르트의 연주여행에도 동행했던 리히노브스키 공작도 함께 하였다. 베토벤은 프라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베를린을 방문하였으며 작곡과 연주회 활동으로 환영받았다. 여행 중 그는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는데, 리히노브스키 가문의 인맥 덕분에 그는 도시에 오기도 전에 이미 명성이 높았다. 베를린에서는 첼로 소나타 1?2번, Op. 5를 작곡하여 첼로를 연주하는 음악 애호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게 헌정하였다. 그것들은 첼로와 피아노의 서로 다른 성격을 잘 고려하고 있으며 비르투오소 첼로와 피아노 파트를 잘 결합한 것으로 유명하다. 왕은 베토벤에게 금화가 가득 든 코담뱃갑을 주었는데, 베토벤은 연주 여행으로 "많은 돈"을 벌었음을 알게 되었다. 1796년 7월 베토벤은 빈으로 돌아왔고 그해 11월 다시 여행을 떠났는데, 북쪽이 아닌 동쪽으로 가서 프레스부르크(오늘날의 브라티슬라바)와 페슈트로 갔다. 프레스부르크에서 그는 친구 안드레아스 슈트라이허(Johann Andreas Streicher, 1761-1833)가 보낸 피아노로 연주하였는데, 이를 놓고 그가 농담하기를 "나에게는 너무 좋다 ... 왜냐하면 이 피아노는 나만의 음색을 낼 수 있는 자유를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베토벤은 1797년에 거의 빈에서 체재하였는데, 그에게는 여름과 가을마다 심각한 질병(아마 티푸스)에 시달렸으나, 작곡(작곡 부탁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과 연주를 계속하였다. 이 시기에(1795년일 수도 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청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1798년 다시 프라하로 여행할 때, 청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결국 연주 여행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1799년 베토벤은 모차르트의 전 후원자인 라이문트 베츨라어 남작의 집에서 악명높은 피아노 "결투"에 참가, 거장 요제프 뵐플(Joseph Johann Baptist Wolfl, 1773-1812)에 대항하여 승리했다; 그리고 이듬해 모리츠 폰 프리스(Moritz Christian Johann Reichsgraf von Fries, 1777-1826) 백작의 살롱에서 다니엘 슈타이벨트(Daniel Gottlieb Steibelt, 1765-1823)를 상대로 비슷한 승리를 거두었다. 1799년 출판된 베토벤의 여덟번째 피아노 소나타 "비창", Op. 13은 음악학자 배리 쿠퍼(Barry Cooper, 1949?)에 의해 "성격의 강인함, 감정의 깊이, 독창성의 수준, 동기와 음조의 창의력 면에서 그의 이전 어느 작품들 보다도 능가하고 있다"고 묘사되었다.

1813년, 베토벤은 영국 피아니스트 찰스 네이트(Charles Neate, 1806-1879)에게 1798년 경 한 가수와의 다툼으로 인한 발작이 원인이 되어 청력 상실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그의 청력은 점진적으로 감소하면서 심각한 형태의 이명(耳鳴) 때문에 더욱 방해를 받았다. 일찍이 1801년에 그는 프란츠 베겔러(Franz Gerhard Wegeler, 1765-1848)와 또 다른 친구인 카를 아멘다(Carl Friedrich Amenda, 1771-1836)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증상과 그것들이 직업적, 사회적 환경 모두에서 일으킨 어려움들을 기술했다(그러나 그의 가까운 친구들 중 일부는 이미 문제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원인은 아마 귀경화증이었을 것이며, 아마도 청각 신경의 퇴화를 동반했을 것이다.

베토벤은 주치의의 충고에 따라 1802년 4월부터 10월까지 빈의 바로 외곽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하일리겐슈타트로 이주하여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현재의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로 알려진 문서를 썼는데, 이 문서는 그의 형제들에게 보내는 편지로서 그의 청각 장애로 인한 자살에 대한 생각과, 그의 예술을 통해 계속해서 살겠다는 결심을 기록하고 있다. 이 편지는 결코 보내지지 않았으며 그가 죽은 후 그의 서류에서 발견되었다. 베겔러와 아멘다에게 보낸 편지들은 그다지 절망적이지 않았다; 그 편지들 속에서 베토벤은 또한 그 시기에 진행 중이던 그의 직업적, 재정적 성공에 대해서 언급했고, 베겔러에게 말했다 시피 "운명의 멱살을 잡으십시오. 그것은 확실히 나를 완전히 짓밟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그의 결단에 대해서 언급했다. 1806년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 스케치 중 하나에서 "당신의 귀먹음이 더 이상 비밀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 예술에서 조차."라고 언급했다.

베토벤의 청력 손실은 그가 음악을 작곡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그의 삶의 이러한 단계에서 중요한 수입원인 연주회에서의 연주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것은 또한 그의 사회적 탈퇴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체르니는 베토벤이 1812년까지도 여전히 언어와 음악을 정상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베토벤은 결코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지는 않았다. 말년에도 그는 여전히 낮은 음색과 갑작스러운 큰 소리를 구별할 수 있었다.

베토벤이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빈으로 돌아온 것은 음악적 양식의 변화로 표시되었으며, 현재는 대규모로 작곡된 많은 창작품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중기 또는 "영웅적" 시기의 시작으로 지정되는 경우가 많다. 카를 체르니에 따르면 베토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까지 해 온 작업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길을 택할 것이다." 이 새로운 양식을 사용한 초기 주요 작품은 1803-04년에 작곡된 교향곡 3번 "영웅"이다. 나폴레옹의 경력을 바탕으로 한 교향곡을 만들고자 하는 아이디어는 1798년에 베르나도트 백작(칼 14세 요한)에 의해 베토벤에게 제안이 되었을 수 있다. 영웅적 혁명 지도자의 이상에 동조하는 베토벤은 원래 교향곡에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을 부여했지만 1804년에 나폴레옹이 자신을 "황제"라고 선언한 것에 환멸을 느꼈고 원고의 제목 페이지에서 나폴레옹의 이름을 긁어내었다. 교향곡은 1806년에 "위대한 사람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된Sinfonia eroica, composta per festeggiare il sovvenire d'un grand'uomo"이라는 부제와 현재의 제목인 "영웅 교향곡"으로 출판된다. "영웅"은 이전 교향곡보다 더 길고 더 거대했다. 1805년 초에 초연되었을 때 그것은 엇갈린 반응을 받았다. 어떤 청취자들은 그 길이에 반대하거나 그 구조를 오해했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걸작으로 보았다.

다른 중기의 작품들은, 베토벤이 물려받은 음악 언어와 같은 극적인 방식으로 확장된다. 라주모프스키 현악 사중주, 그리고 발트슈타인과 열정 피아노 소나타는 교향곡 3번 등의 영웅적인 정신을 공유한다. 이 시기의 다른 작품으로는 4번부터 8번까지의 교향곡과 오라토리오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 오페라 피델리오, 그리고 바이올린 협주곡 등이 있다. 1810년에 작가이자 작곡가인 E. T. A 호프만의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 ("일반음악신문")에서의 영향력 있는 리뷰에서 베토벤은 "낭만주의 음악"의 작곡가 세 명 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칭송되었다; 호프만은 베토벤의 교향곡 5번에 관하여 드라마틱한 필치로 '깊은 밤의 장막을 뚫어내는 것'에 비유하면서, "이를 통해 우리는 열정과 함성을 모두 쏟아낼 수 있고, 꿋꿋이 살아남아 영혼의 파수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 천재의 광상곡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내적인 것과 연관성이 있고, 심중하고 친절하게 듣는 이들을 끝없는 정신세계로 끌어들인다"라며 칭찬했다. 이 기간 동안 베토벤의 수입은 자신의 작품 출판, 그것들의 공연, 그리고 출판 전 독점 기간 동안 후원자들에게 그들이 의뢰한 개인 공연과 작품의 사본을 제공했던 것으로부터 나왔다. 로브코비츠 공작과 리히노브스키 공작을 포함한 그의 초기 후원자들 중 일부는 그에게 작품을 의뢰하고 출판된 작품을 구매하는 것 외에도 연간 급여를 제공했다. 아마도 그의 가장 중요한 귀족 후원자는 1803년, 또는 1804년에 그와 함께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한 황제 레오폴드 2세의 막내 아들인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대공일 것이다. 그들은 친구가되었고 그들의 만남은 1824년까지 계속되었다. 베토벤은 루돌프에게 14개의 작곡을 바쳤다. 여기에는 대공 삼중주, Op. 97 (1811년) 및 장엄미사, Op. 123 (1823년)도 포함된다.

안 데르 빈 극장에서의 그의 지위는 1804년 초에 극장이 경영을 변경하면서 종료되었고, 친구인 스테판 폰 브로우닝(Stephan von Breuning, 1774-1827)과 함께 일시적으로 빈의 교외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레오노레(그의 오페라 원제)에 대한 작업이 잠시 주춤해졌다. 오스트리아의 검열관에 의해 다시 연기되었고, 마침내 1805년 11월에 현재의 피델리오라는 호칭으로 프랑스의 도시 점령으로 거의 비어 있던 집들에서 초연되었다. 이 피델리오 판은 재정적인 실패일 뿐만 아니라 중대한 실패작이기도 하였고, 베토벤은 그것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계속해서 인정을 받았다. 1807년에 음악가 겸 출판인인 무치오 클레멘티(Muzio Filippo Vincenzo Francesco Saverio Clementi, 1752-1832)가 영국에서 그의 작품을 출판할 권리를 확보했고, 하이든의 전 후원자 에스테르하지 왕자는 아내의 명일을 위해 미사곡(미사곡 다장조, Op. 86)을 의뢰했다.

1811년 봄, 베토벤은 두통과 고열을 겪으며 중병에 걸렸다. 그의 주치의 요한 말파티(Johann Baptist Malfatti von Monteregio, 1775-1859)는 테플리츠(현 체코의 테플리체) 온천에서 치료제를 복용할 것을 권유했다. 테플리츠에서 그는 코체부의 극에 사용할 서곡을 포함한 부수 음악 2개-슈테판왕, Op. 117과 아테네의 폐허, Op. 113을 썼다. 다음 해에도 테플리츠를 다시 방문하라는 조언을 받은 베토벤은 그곳에서 괴테를 만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는 다양한 귀족, 군주들과 함께 재능있는 작가 베티나 브렌타노도 있었다. 이러한 만남을 추진한 것은 바로 베티나였다. 베티나는 베토벤과 괴테, 모두를 존경하고 있었다. 얼마후 괴테는 카를 프리드리히 젤터(Carl Friedrich Zelter, 1758-1832)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그(베토벤)의 재능은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성격입니다. 그가 세상을 혐오스럽게 여기는 것이 전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그러한 그의 태도는 자신이나 타인을 더 이상 즐겁게 하지 못합니다." 베토벤은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출판사에 "괴테는 시인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궁정의 분위기를 좋아합니다."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 후에 그는 괴테의 한 쌍의 시를 기반으로 1815년에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조용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 Op. 112를 작곡하게 된다. 이것은 1822년에 시인에게 헌정되며 출판되었고, 베토벤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젊었을 때 이미 소중히 여겼던 유일한 불멸의 괴테를 위해 간직하고 있던, 감탄과 사랑과 존경이 지속되었습니다." 음악적 취향과 같은 괴테의 사회적 태도는 보다 형식적인 시대에 형성되었다. 스물 한 살 후배인 베토벤에게 있어서 진정한 귀족은 예술가 뿐이었다. 20년 후 베티나가 보고한 것 처럼, 신화에 대한 그의 환멸은 거리에서 왕족을 만났을 때 괴테의 행동에 의해 결정되었다. 베토벤이 괴테에게 말했다. "귀족들도 우리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길을 양보할 것이니 계속 걸으십시오." 그러나 괴테는 길가로 비켜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했다. 베토벤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들의 행렬을 바로 통과했다. 그리고 괴테를 기다리며 베토벤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존경하고 당신의 작품을 존경하기 때문에 당신을 기다렸지만 당신은 그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존경심을 보였습니다."

1812년, 그가 테플리츠에 있는 동안 그는 그의 "불멸의 연인"에게 10 페이지 분량의 러브레터를 썼는데, 그는 이 편지를 그 수취인에게 보내지 않았다. 음악학자 메이너드 솔로몬이 의도한 수신자가 안토니 브렌타노(Antonie Brentano, 1780-1869)인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된 수신자의 신원은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 모든 것들은 베토벤이 빈에서의 첫 10년 동안 가능한 소울메이트로 여겨져 왔다. 귀차르디(Julie Guicciardi, 1784-1856)는 베토벤과 바람을 피웠지만 그에게 진지한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고 1803년 11월에 갈렌베르크 백작과 결혼했다(베토벤은 후대의 비서 겸 전기작가인 안톤 쉰들러에게 "(귀차르디가) 나를 찾았고 울었지만, 나는 그녀를 경멸했다"고 주장했다. 요제피네(Josephine Brunsvik or Countess Josephine Deym, 1779-1821)는 베토벤이 그녀로 인해 열병을 앓고 있을 때에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귀족, 그리고 부유한 귀족과 결혼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설득으로 노인 백작 요제프 다임(Joseph von Deym, 1752-1804)과 결혼했다. 요제프 다임은 1804년에 사망했다. 베토벤은 그녀의 집을 방문하기 시작했고 열정적인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요제피네가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지만, 그녀가 부다페스트로 이주한 후에도 계속해서 그녀에게 말을 걸어, 마침내 1807년에 그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내가 당신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듯 여전히 나타나길 바라주셔서 감사합니다." 말파티(Therese Malfatti von Rohrenbach zu Dezza, 1792-1851)는 베토벤의 주치의의 조카딸로 1810년에 그녀에게 청혼했었다. 그는 40세, 그녀는 19세였다. 그 제안은 거절당했다. 그녀는 이제 피아노 바가텔 엘리제를 위하여, WoO 59의 수령자로 기억된다.

823년에는 세 개의 주목할 만한 작품이 완성되었다. 이 작품들은 모두 몇 년 동안 베토벤을 점령하고 있던 것들로서 장엄미사, 교향곡 9번, 디아벨리 변주곡이 바로 그것들이다. 베토벤은 마침내 완성된 미사곡 사본을 3월 19일(대공이 대주교로 취임한 지 1년이 지난 때)에 루돌프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그는 작품의 원고를 독일과 유럽의 여러 법원에 각각 50 듀카트로 수익성 있게 판매 할 수 있다는 개념을 세웠기 때문에 출판이나 공연을 서두르지 않았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소수 중 한 명은 베토벤에게 무거운 금메달을 보냈던 프랑스의 루이 13세였다. 교향곡과 변주곡은 나머지 베토벤 작업 연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디아벨리는 두 작품을 모두 출판하기를 원했지만 미사곡의 잠재적 인상은 슐레진저와 피터스를 포함한 다른 많은 출판사들이 베토벤에게 로비를 하게 했다. 그리고 결국 쇼트(Schott Music)에 의해 획득되었다.

베토벤은 건강이 나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갈리친을 위해 현악 사중주를 쓰기 시작했다. 이것들 중 첫 번째의 사중주 12번 E♭ 장조, Op. 127은 1825년 3월에 슈판치히 사중주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1825년 4월, 사중주 A 단조 15번, Op. 132를 쓰다가 갑작스런 병에 걸렸다. 바덴에서 회복하면서 그는 "건강을 회복한 자가 신에게 감사하는 신성한 노래, 리디안 선법을 따름"이라고 불리는 느린 악장을 착수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완성된 것은 사중주 13번 B♭ 장조, Op. 130이었다. 6악장에서 마지막 대위법의 악장은 1826년 3월의 초연에서 연주자와 관객 모두에게 매우 어려운 것으로 증명되었다. 베토벤은 출판사 아르타리아에 의해 추가 요금을 받으며 새로운 피날레를 쓰고 마지막 악장을 별도의 작품(대푸가, Op. 133)으로 발행하도록 설득되었다. 베토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이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사중주 14번 C# 단조, Op. 131이며 베토벤은 이것을 가장 완벽한 단일 작품으로 평가했다.

베토벤과 그의 조카 카를과의 관계는 계속해서 격렬했다. 베토벤이 그에게 보낸 편지는 요구가 지나쳤고 꾸짖는 방식이었다. 8월 베토벤의 뜻에 반하여 어머니를 다시 만난 카를은 자살을 시도했다. 그는 살아 남았고 퇴원 후 베토벤과 그의 삼촌 요한과 함께 그나이젠도르프로 요양하러 갔다. 그곳에 있는 동안 베토벤은 추가로 사중주(F 장조 16번, Op. 135)를 완료하여 슐레진저에게 보냈다. 베토벤은 마지막 악장에서 도입부의 느린 화음 아래에 "Muss es sein?"("그래야만 하는가?")라는 문구를 붙였다; 그 응답의 문구는 이 악장의 더 빠른 제1주제 위에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라고 적혀 있다. 악장 전체는 제목처럼 "어려운 결정"("Der schwer gefasste Entschluss")을 향하고 있다. 11월에 베토벤은 최종 작품인 사중주 13번 B♭ 장조, Op. 130의 대체 피날레를 완성했다. 이때 베토벤은 이미 병이 들어 우울해 있었다; 그는 요한과 다투기 시작했고, 요한은 그의 아내보다 우선권으로 카를을 상속자로 삼았다고 주장했다.

베토벤은 종종 30세 무렵부터 질병에 시달렸다. 설사, 복통, 산통, 열병, 또는 염증과 같은 다양한 증상에 대한 설명이 있다. 한편으로는 급성 질환이 원인으로 간주 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 이상의 만성 질환이 주요 원인으로 명명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납 중독, 브루셀라증 및 잦은 음주 등이 의심되고 있다. 현재까지는 베토벤의 건강 문제가 한 가지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여러 가지 다른 원인으로 인한 것인지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베토벤의 전기 작가들은 예술가가 값비싼 사탕 수수 설탕 대신 납 설탕으로 달게 했던 값싼 화이트 와인을 정기적으로 마셨다고 언급했다. 베토벤의 뼈와 머리카락에는 거의 측정되지 않은 농도의 납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질병의 빈도와 강도가 증가했다. 1821년 여름, 심한 황달이 간경변을 예고했다. 베토벤은 목욕과 란트 체류에 대한 불만에서 구제를 구했고, 1826년 9월 29일 그의 조카와 함께 그나익센도르프에 있는 그의 형제 요한의 집으로 옮겨 석달동안 머물렀다. 12월 초, 춥고 습한 날씨에 열린 차를 타고 빈으로 돌아오는 여행에서 베토벤은 폐렴에 걸렸다. 회복 직후 다리와 복부의 수분 저류 및 황달과 함께 심각한 간경변 증상이 나타나 베토벤은 더 이상 병상을 떠날 수 없었다. 카를은 12월 동안 베토벤의 침대 옆에 머물렀다. 하지만, 다음 해 1월 초에 이흘라바에 입대하기 위해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베토벤에게 편지를 썼다ː "사랑하는 아버지... 나는 만족하며 살고 있으면서도, 당신과 헤어지게 된 것 만은 후회합니다." 하지만 카를은 삼촌을 다시 보지 못했다. 카를이 떠난 직후 베토벤은 그의 조카를 유일한 상속자로 만드는 유언장을 썼다.

1월 말에는 베토벤의 병 치료를 위해 말파티 박사가 참석했다. 그의 치료는 주로 알코올에 집중되었다. 베토벤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소식이 퍼지자 디아벨리, 슈판치히, 리히노프스키, 쉰들러, 훔멜과 그의 제자 페르디난트 힐러를 포함한 많은 오랜 친구들이 방문했다. 런던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에서 온 백 파운드, 쇼츠에서 온 값비싼 와인을 포함하여 많은 조공과 선물도 보내졌다. 이 시기 동안 베토벤은 때때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는 용감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의 완전히 병상에 누워 있었다. 3월 24일, 그는 쉰들러와 다른 사람들에게 "박수를 쳐주게, 친구들, 희극은 끝났네."라고 말했다. 그날 늦게, 쇼트에서 온 와인이 도착했을 때, 그는 속삭였다. "애석하군, 너무 늦었네."

여러 의사들에 의한 몇 차례의 천공과 실패한 치료 시도 끝에 베토벤은 1827년 3월 26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의사는 안드레아스 이그나츠 바브루흐였다. 베토벤의 임종시, 안젤름 휘텐브렌너와 요한나 판 베토벤 만이 참석했다. 바르부흐에 따르면, 오후 5시 경에 번개와 천둥 소리가 들렸다ː "베토벤은 눈을 뜨고 오른손을 들어 주먹을 쥐고 몇 초 동안 올려다 보았다.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고, 심장박동도 뛰지 않았다." 많은 방문객이 임종을 보러왔다.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 일부는 휘텐브렌너와 힐러에 의해 보관되었다. 부검 결과 베토벤은 과도한 알코올 섭취와 청각 및 기타 관련 신경의 상당한 확장으로 인해 심각한 간 손상을 입었다.

3월 29일 배링 지역 공동 묘지의 매장은 빈 인구의 큰 공감으로 이루어졌다. 약 2만명이 장례 행렬에 참여했다. 프란츠 그릴파르처가 쓴 장례식 연설은 배우 하인리히 안쉬츠가 연설했다. 불과 1년 후 베토벤을 따라 무덤까지 가야했던 프란츠 슈베르트는 훔멜, 체르니, 그릴파르처, 마이세더, 슈판치히, 카스텔리, 베른하르트, 피링거, 하슬링거, 뵘, 슈트라이허, 슈타이너, 홀츠, 볼프마이어, 링케와 함께 36명의 성화 운반자 중 한 명으로서 그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했다.

베토벤의 시신은 두 번 발굴되었다. 1863년에 뼈를 측정하고 두개골을 촬영했다. 1888년에 그의 유골은 다시 대중적인 지지를 받으며 빈 중앙묘지의 명예 묘역으로 옮겨졌다.
작곡 : Gyorgy Ligeti (죄르지 리게티,Gyorgy Ligeti)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고전음악 작곡가 중 하나로 꼽히며,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아이즈 와이드 셧》에 삽입된 음악으로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리게티 죄르지는 루마니아 왕국 시절의 트란실바니아에 태어나 그곳에서 음악을 배웠다. 1943년, 나치에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음악 공부를 금지당했다. 그의 가족과 친척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수감되었고 그...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고전음악 작곡가 중 하나로 꼽히며,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아이즈 와이드 셧》에 삽입된 음악으로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리게티 죄르지는 루마니아 왕국 시절의 트란실바니아에 태어나 그곳에서 음악을 배웠다. 1943년, 나치에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음악 공부를 금지당했다. 그의 가족과 친척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수감되었고 그의 어머니만 살아남았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부다페스트에서 음악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코다이 졸탄을 사사했다. 1949년에 졸업하고 나서 교수가 되었다. 그는 루마니아 민족음악에 관심이 있었지만, 공산주의 정권은 서유럽과의 교류를 막았기 때문에 연구가 어려웠다. 1956년, 공산당에 대한 헝가리 시민들의 항거 이후 리게티는 비엔나로 탈출하여 1967년에 오스트리아 국적을 얻었다. 그곳에서 그는 동유럽에서 접하지 못했던 아방가르드 음악을 접했다.

그때부터 리게티는 작곡가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작품 중 많이 알려진 것은 시대적으로 《Apparitions》(1958~9)부터 《Lontano》(1967) 사이의 것이지만 그 시대 이후의 오페라인 《Le grand macabre》(1978)도 역시 잘 알려져 있다.

리게티는 함부르크에서 1973년부터 1989년까지 음악을 가르쳤다. 1980년대에는 건강이 나빠졌지만, 2006년 빈에서 사망할 때까지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브누아 망델브로의 프랙털 기하학, 그리고 루이스 캐럴과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글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리게티의 아들 리게티 루카스는 작곡가이자 타악기 연주자이다.

리게티의 초기 작품은 같은 나라 사람인 벨러 버르토크의 작품을 확장시킨 것이었다. 피아노를 위한 작품인 《Musica Ricercata》(1951~53)와 같은 경우 종종 버르토크의 미크로코스모스와 비교된다. 이 작품은 11개의 곡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 곡은 가 음만을 옥타브를 왔다갔다하며 연주하고 맨 마지막을 라 음으로 끝낸다. 두 번째 곡에는 첫 번째 곡에 음 하나가 더해지고, 세 번째 곡에는 다른 음 하나가 더해지고, 이런 식으로 음을 덧붙여 마지막 열한번째 곡에는 반음계에 나타나는 12음이 모두 들어가게 된다. 공산주의 정권은 이 작품의 10번째 곡을 ‘퇴폐적’이라 하여 연주를 금지시켰다. 이는 이 곡에서 나타나는 단 2도 음정의 자유로운 사용 때문으로 보인다.

헝가리를 떠나 쾰른에 살면서 리게티는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과 함께 전자 음악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Glissandi》(1957)와 《Artikulation》(1958)을 포함한 세 곡만을 쓰고 연주 음악으로 돌아섰다. 그의 음악에서 전자 음악의 느낌이 나타나는 것은 그당시 전자 음악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Apparitions》(1958~59)은 리게티를 주목받게 만든 첫 번째 곡이었다. 그 다음 작품인 《Atmospheres》(1961)는 《Lux Aeterna》와 《Requiem》과 함께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삽입곡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는 작곡가의 허락을 받지 않고 인용한 것이다.

《Atmospheres》는 큰 관현악단을 위한 곡인데, 선율, 박자, 화성 어느 것도 부각되어 있지 않지만 sound mass라는 기법을 써서 음색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이 곡은 음악사상 가장 큰 음괴로 시작하는데, 반음계로 5옥타브가 넘는 음역에 해당하는 음을 동시에 연주한다. 그리고 화음과 음악의 질감이 천천히 바뀐다. 그는 《Atmospheres》, 《Apparitions》를 포함한 그의 몇몇 작품에 쓰인 기법을 설명하기 위해 마이크로폴리포니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이는 화성이 급작스럽게 변하지 않고 서로 융합하면서 진행하는 다성 음악 기법이라고 리게티는 설명한다.

1970년대 이후 리게티는 선율과 박자를 가진 음악을 쓰기 시작했다. 또한 아프리카 음악, 특히 피그미족 음악의 박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피아노 연습곡》(제1권 1985, 제2권 1988~94, 제3권 1995~2001)와 같은 작품은 인도네시아의 가멜란 음악과 아프리카의 polyrhythm, 버르토크, Conlon Nancarrow, Bill Evans 등의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호른과 관현악을 위한 《Hamburg Concerto》(1998-99, 2003 개작)와 song cycle인 《Sippal, dobbal, nadihegeduvel》(파이프, 드럼, 피들과 함께, 2000)이다.

그는 70년대 이후 후진들을 양성하는 데 집중했다. 많은 유명한 작곡가가 그로부터 작곡을 배웠는데, 진은숙도 그 중 하나이다.
작곡 : Richard Wagner (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년 5월 22일 ~ 1883년 2월 13일)는 독일의 작곡가, 극작가, 극 연출가, 지휘자, 음악 비평가 및 저술가였다. 독일의 오페라에 있어서 대표적인 작곡가 중의 하나이며, 19세기 유럽의 음악 및 문화 전체에 있어서도 독보적인 예술가 중의 하나였다. 그의 종합예술관과 종교적 예술관은 각 예술의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음악에 있어서 독일의 낭만주의 오페라의 전성시대를 열었으며, 음악극이라는 새로... 1813년 5월 22일 ~ 1883년 2월 13일)는 독일의 작곡가, 극작가, 극 연출가, 지휘자, 음악 비평가 및 저술가였다. 독일의 오페라에 있어서 대표적인 작곡가 중의 하나이며, 19세기 유럽의 음악 및 문화 전체에 있어서도 독보적인 예술가 중의 하나였다. 그의 종합예술관과 종교적 예술관은 각 예술의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음악에 있어서 독일의 낭만주의 오페라의 전성시대를 열었으며, 음악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시하였다. 활동후기에는 풍부한 반음계적 음악언어를 발전시켜, 후대의 작곡가들로 하여금 조성을 약화시키고 결국에 파기하도록 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또한 본인의 작품을 공연하는 바이로이트 축제만을 위한 전용 공연장인 바이로이트 페스트슈필하우스를 건립했다.

그는 음악사에 있어서 뿐 아니라 문학사에서도 많은 영향을 준 독보적 예술가이다. 음악사에서는 초기 낭만파의 뒤를 이어 낭만파 음악을 대성한 음악인이며, 문학사에서는 신낭만파의 희곡 영역에 있어서의 거봉이었다. 또한 니체에게도 영향을 준 그는,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염세주의, 종교적인 신비주의, 탐미주의적인 경향의 작품으로 19세기 말 낭만주의 부흥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바그너의 유럽 예술과 문화에 기여한 바는 부인할 수 없으며 기념비적이다. 그의 생전과 사후 여러 해 동안, 바그너는 그의 다수의 애호가들 사이에서 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으며, 그들 사이에서 거의 신과 같은 지위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의 음악인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특히 중요한 새 지평을 열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많은 작곡가들은 바그너 편에 서거나 바그너에 반대하는 편 중 하나에 설 수밖에 없었다. 안톤 브루크너와 휴고 볼프는 그에게 특히 많은 빚을 졌으며, 세자르 프랑크, 앙리 뒤팍, 에르네스트 쇼송, 쥘 마스네,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 한스 피츠너 등등의 수많은 음악가들 또한 그러하였다. 구스타프 말러는 "오직 베토벤과 바그너만이 있었다"고 말했다. 클로드 드뷔시와 아르놀트 쉔베르크의 이십 세기 화성 혁명은 트리스탄으로부터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처음으로 어떤 종류의 드라마적인 공연 동안에 불빛을 희미하게 해야 한다고 처음 요구했던 사람이 바그너였으며, 처음으로 관현악단 피트(바이로이트에서는 관중석과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를 바이로이트 극장에서 사용했던 것도 그였다. 바그너는 그의 작품이 청중들의 상상 속에서 경험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극장"을 꿈꿨다. 오디오 기기의 발달로 이 꿈은 현실이 되었다.

바그너의 문학과 철학, 미술에 대한 영향 또한 분명하다. 영향력 있는 저작물인 비극의 탄생의 저자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처음에 바그너를 숭배했는데, 그의 음악에서 유럽 정신이 다시 젊어지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니체는 《파르지팔》 이후에 바그너와 결별했다. 그는 《파르지팔》를 기독교 신앙심에 영합하는 표현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20세기에, W. H. 오든은 한때 바그너를 "아마도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했던 천재"로 불렀으며,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그리고 마르셀 프루스트도 바그너에게 크게 영향을 받아 그들의 소설에서 바그너를 논했다. 바그너는 T. S. 엘리엇의 《황무지》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며, 그의 오페라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반지의 제왕 작가 존 로널드 로웰 톨킨은 바그너와 그의 음악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톨킨 자신이 옥스포드의 고대영어 교수이었기에 북구 신화와 사가에는 정통했었고, 따라서 북구 신화를 차용한 바그너의 작품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또한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C.S. 루이스가 열렬한 바그네리안이었으며, 20세기 초의 유럽 문화계의 풍토를 보아도 바그너에 대한 자기만의 관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상태였었다. 게다가 톨킨은 C.S. 루이스와 함께 종종 바그너 공연을 보러 갔었으며, 한때는 C.S. 루이스와 함께 <니벨룽의 반지>의 2부 발퀴레를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 그는 바그너를 즐겨 들었고 또 열심히 연구를 했다. 스테판 말라르메, 폴 베를렌느, 그리고 샤를르 보들레르는 그를 숭배했다. 사랑과 죽음(즉 에로스와 탄토스)의 관계에 대한 것 등 그의 음악 속의 많은 발상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의한 정신 분석을 예고했다. 추상미술의 아버지 바실리 칸딘스키는 바그너 신봉자이기도 했다.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음악을 들으면서 색을 보는 공감각을 경험했다. 그 후 칸딘스키는 음악이 그림이 될 수 있고, 또 그림이 음악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의 그림들은 대상에 연연하지 않는 추상화로 바뀌게 된다. 또 칸딘스키는 '로엔그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바그너의 음악에서 바이올린, 베이스, 관악기의 울림, 나의 마음 속에서 나의 모든 빛깔을 보았다. 야성적이며 미친 것 같은 선들이 내 앞에 그려졌다. 회화는 음악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었다.' 라고 말했다

바그너의 영향이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한 때, 독일 음악계는 바그너 지지자와 요하네스 브람스 지지자의 두 파로 나뉘었다. 브람스 지지파는 강력한 비평가인 에두아르트 한슬릭의 도움을 받고 있었는데, 그는 전통 형태를 최고로 인정하고 바그너식 혁신에 반대하는 보수파를 이끌었다. 클로드 드뷔시는 바그너를 심하게 비판했던 사람이지만 ("그 오래된 중독자"), 바그너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작곡자 중 한 사람임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사실 드뷔시는 바그너의 영향을 의심할 여지도 없이 받았기 때문에 바그너와 결별할 필요가 있었던 많은 작곡가들 중에 한 명이었다.

바그너의 음악은 강한 반응을 계속 일으켰다. 그의 후기작에서, 그는 바그너 작품의 그것처럼 긴 시간과 깊은 맥박을 만들어내어 음악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청자들이 바그너의 시간 개념에 완전히 익숙해지기를 요구하는 그런 음악을 만들어 냈다. 로시니("바그너는 굉장한 순간과 진절머리나는 15분을 가지고 있다")를 포함해 많은 저항이 있었지만, 그 자신의 "Guillaume Tell"이 네 시간 이상의, 어떤 바그너 작품 하나보다도 긴 시간을 요구했다. 바그너의 이상은, 지크프리트의 "금발의 괴물" 영웅주의로부터, 그의 열성적인 쇼펜하우어 오독과 더불어 죽음과 신격화에 대한 매혹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심하게 유행에 뒤떨어져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오페라는 계속 강한 추종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바그너는 나폴레옹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그에게 자극받은 이차 문학의 양이 많은 역사적 인물로 꼽히고 있다. 그렇게 그는 계속적으로 많은 찬반 논란과 존경을 동시에 받고 있다. 그 원인이 그의 음악의 뿌리에 있는 능가할 자 없는 숭고함, 힘, 장엄함, 그리고 때때로 위험한 초월적인 아름다움 때문이다.

종합적인 음악 표현과 유도동기의 사용은 20세기의 영화음악에 강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바그너는 또한 극도로 찬반이 엇갈리는 평가를 받는 인물로서, 이는 그의 음악과 드라마에 대한 혁신으로 인한 것뿐만 아니라, 그의 반유대인적 시각에도 기인한다.

바그너는 새로운 교향악적인 오페라(또는 "음악극")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작품에 새로운 화성, 연속적인 대위법적 텍스처, 풍부한 오케스트레이션, 그리고 유도동기(라이트모티프, Leitmotif; 특정한 인물이나 상황에 연관된 음악 동기)을 사용하였다. 바그너의 반음계적 음악 언어는 유럽의 고전음악에 중대한 변화를 끼쳤으며, 이는 극단적인 반음계법과 무조성을 지향한다. 그의 음악극들은 "총체예술(Gesamtkunstwerk)"이라는 미학적 개념에 기반을 두었으며 니벨룽의 반지(1876)의 4부작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바그너의 오페라와 음악극은 그의 대표적 예술적 유산이며 시기별로 세 범주로 나눌 수 있다.

바그너의 초기 단계는 나이 열 아홉에 그의 첫 오페라 도전 혼례(Die Hochzeit)로 시작되었는데, 작곡의 초기 단계에서 1832년에 포기했다. 바그너의 완성된 초기 단계 오페라는 세 개로, 요정(Die Feen), 연애금제(Das Liebesverbot - 쉽게 말해서 연애 금지), 그리고 리엔치이다. 이 작품들의 작곡 양식은 전형적인 것으로 음악사에서 바그너의 위치를 매김해 준 혁신적인 발상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의 생의 나중에, 바그너는 이 비성숙한 작품들은 그의 예술 작품의 일부로 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작품들은 거의 연주되지 않지만, 리엔치 서곡은 콘서트용 작품이 되었다.

바그너의 중기 단계의 작품은 굉장히 뛰어난 것으로 여겨지며, 그의 드라마 작가이자 작곡가로서의 힘이 깊어가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작품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Der Fliegnde Hollander), 그 뒤를 이어서 탄호이저(Tannhauser)와 로엔그린(Lohengrin)을 포함한다. 이 작품들은 오늘날 광범위하게 연주되고 있다.

바그너의 후기 단계의 오페라 작품들은 총체예술을 본격적으로 실현시킨 음악으로서 음악극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은 그의 가장 위대한 단편 음악극 작품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장인 가수)(Die Meistersinger von Nurnberg)는 바그너의 유일한 희극이며 (그의 잊혀진 초기작인 연애금제를 제외하면) 현재 공연되는 오페라 가운데 가장 긴 것들 중 하나이다. 니벨룽의 반지는 흔히 반지 사이클이라고 회자되며,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신화에 기초한 네 개의 오페라 모음이다. 연주에 걸리는 시간은 대략 16시간 가량으로, 반지 사이클은 이제까지 작곡된 음악 작품 중 가장 야심찬 것으로 불린고 있다. 바그너의 최후의 오페라, 파르지팔(Parsifal)은 바그너의 바이로이트 축제를 위해 특별히 작곡되었으며 악보에 "무대신성제전극"("Buhnenweihfestspiel")이라고 쓰여 있다. 이 작품은 성배에 대한 기독교 전설에 기초해 쓰여진 명상적인 작품이다.

그의 오페라와 음악 이론에 대한 수필에 걸쳐, 바그너는 오페라라는 매체에 대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그는 그가 "악극"이라고 부른, 음악과 드라마의 요소를 모두 함께 융합한 새로운 오페라 형태에 대한 옹호자였다. 대본 작성 작업을 직접 하지 않은 다른 오페라 작곡가들과 달리, 바그너는 그의 오페라를 위한 대본을 직접 썼으며 자신은 그것을 "시"라고 지칭했다. 그의 작품의 줄거리 대부분은 북유럽 신화와 전설에 기초해 있다. 거기에 더해, 바그너는 오케스트라의 역할이 가수의 그것과 동등한 작품 양식을 개발해 냈다. 오페라의 드라마에 대한 오케스트라의 역할에는, 특정한 인물, 장소, 줄거리 요소를 알려 주는 음악 주제인 유도동기의 연주가 포함된다; 유도동기가 서로 복잡하게 얽히고 진화해 나가는 양상이 드라마의 발전을 설명하고 있다.

바그너의 음악적인 양식은 종종 서양 고전음악의 낭만파 시기의 축약으로 간주되는데, 이는 전례가 없는 감정적 표현에 대한 탐구 때문이다. 그는 화성과 음악 형식에 있어서 새로운 생각을 소개했으며, 여기에는 극단적인 반음계법이 포함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그는 전통적인 조성 체계의 한계를 탐구하여 조와 화음을 각각 인물과 동일시하는 방법으로, 20세기의 무조성으로의 길을 가리켰다. 몇몇 음악 사학자는 현대 서양 고전음악의 시작을, 소위 트리스탄 화음이라고 불리는 트리스탄의 첫 음표들로 보고 있다.

오페라를 떠나서는, 바그너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음악을 작곡했다. 여기에는 2개의 교향곡 (나이 19세와 21세에 씀) 과 몇 개의 서곡, 합창곡 및 피아노곡, 그리고 글룩의 아울리데의 이피게니의 관현악 재편곡 등이 포함된다. 이들 중에 가장 자주 연주되는 작품은,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코지마의 생일을 위해 작곡된 실내악 작품인 지크프리트 목가이다. 목가는 반지 사이클에서 여러 모티프를 끌어오지만, 반지의 일부는 아니다. 그 다음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베젠동크 가곡으로, 이전에는 여성 성악을 위한 다섯 개의 노래로 알려졌으며, 바그너가 트리스탄을 작곡하는 동안에 마틸데 베젠동크를 위해 작곡되었다.

파르지팔을 끝낸 후, 바그너는 분명히 교향곡 작곡으로 방향을 전환하려 의도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가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작곡되지 않았다.

바그너의 중기와 후기 오페라에서 서곡과 관현악 소절은 콘서트 작품으로 흔히 연주된다, 이들의 대부분에 대해, 바그너는 이 발췌부에 대해 짧은 소절을 덧붙여서 곡이 갑자기 끝나지 않도록 만들었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에 파르지팔 전주곡과 지크프리트의 장송 음악이 해당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트리스탄 전주곡의 콘서트용 판은 인기가 없고 거의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전주곡의 원래 형태가 콘서트 연주를 위해서도 보통 더 나은 것으로 간주된다.

영어권 국가에서 신부의 입장 시에 연주되는 가장 대중적인 결혼 행진곡 중 하나(흔히 "여기 신부가 온다"("Here Comes the Bride")라고 알려져 있다)는 그 가락을 로엔그린의 "혼례 합창곡"에서 따 온다. 오페라에서 이 곡은 신부와 신랑이 축하 행사장을 떠나 결혼식장으로 들어갈 때에 불린다. 로엔그린과 엘자의 재앙과도 같은 결혼은, 합창곡이 불리는 20분 후에 회복할 수 없이 파경으로 도달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이런 이상한 사용을 막는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작곡 : Edward Elgar (에드워드 엘가)
영국의 낭만주의 작곡가이다. 잉글랜드의 우스터 근교에서 태어난 엘가는 피아노 조율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거의 독학으로 음악을 배웠다. 그가 처음 음악가로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1899년 발표한 《수수께끼 변주곡》부터였다. 이후 《제론티우스의 꿈》, 《남국에서》, 《서주와 알레그로》, 《바이올린 소나타》, 《첼로 협주곡》등의 걸작들을 남겼다. 그의 곡들 중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901년에... 영국의 낭만주의 작곡가이다. 잉글랜드의 우스터 근교에서 태어난 엘가는 피아노 조율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거의 독학으로 음악을 배웠다. 그가 처음 음악가로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1899년 발표한 《수수께끼 변주곡》부터였다. 이후 《제론티우스의 꿈》, 《남국에서》, 《서주와 알레그로》, 《바이올린 소나타》, 《첼로 협주곡》등의 걸작들을 남겼다.

그의 곡들 중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901년에 작곡한 《위풍당당 행진곡》이다.
작곡 : Giacomo Puccini (지아코모 푸치니)
1858년 12월 22일 ~ 1924년 11월 29일)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이다. 주세페 베르디 이후 이탈리아가 낳은 최대의 오페라 작곡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보유하고 있으며 대표작으로 라 보엠, 토스카, 나비 부인 등이 있다. 푸치니의 오페라 중 일부 아리아 - 잔니 스키키에서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O mio babbino caro 오 미오 바비노 카로[*])”와 투란도트에서 “공주는 잠 못이루고(N... 1858년 12월 22일 ~ 1924년 11월 29일)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이다. 주세페 베르디 이후 이탈리아가 낳은 최대의 오페라 작곡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보유하고 있으며 대표작으로 라 보엠, 토스카, 나비 부인 등이 있다. 푸치니의 오페라 중 일부 아리아 - 잔니 스키키에서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O mio babbino caro 오 미오 바비노 카로[*])”와 투란도트에서 “공주는 잠 못이루고(Nessun Dorma 네순 도르마[*])”등 - 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주세페 베르디의 후계자로서, 독일 오페라와 이탈리아 오페라 기법 둘 다 성공적으로 사용한 작곡가 중 하나로 평가된다.
작곡 : Antonin Dvorak (안토닌 드보르작)
낭만주의 시대에 활동한 체코의 작곡가로, 관현악과 실내악에서 모국의 보헤미안적인 민속 음악적 작품성 풍색과 선율을 표현하였다.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에 의하여 확립된 체코 민족주의 음악을 세계적으로 만든 음악가이다. 드보르작은 오스트리아 제국 프라하(현재는 체코 공화국) 근처 넬라호제베스에서 태어나서, 생애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드보르작은 즈로니체에 있는 외삼촌과 리마 선생이 부친을 설득한 보람으로 ... 낭만주의 시대에 활동한 체코의 작곡가로, 관현악과 실내악에서 모국의 보헤미안적인 민속 음악적 작품성 풍색과 선율을 표현하였다.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에 의하여 확립된 체코 민족주의 음악을 세계적으로 만든 음악가이다.

드보르작은 오스트리아 제국 프라하(현재는 체코 공화국) 근처 넬라호제베스에서 태어나서, 생애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드보르작은 즈로니체에 있는 외삼촌과 리마 선생이 부친을 설득한 보람으로 1857년 16세에 프라하의 오르간학교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음악가가 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 프라하에서는 오르간 학교에서의 교육보다도 학우이며 훗날의 지휘자 칼레르 벤달과 친교를 맺고, 재학 중부터 오케스트라에 가담하여 바이올린을 켜서 수확을 올렸다. 특히 그 오케스트라가 당시 명성을 얻고 있던 바그너를 영입하고 있던 관계도 있어 드보르작은 퍽 오래도록 바그너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드보르작은 바그너식의 오페라나 음악극의 체코판을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바그너의 멜로디나, 특히 화성의 특징을 자기 나름대로 소화하여 받아들였다. 드보르작은 꽤 노력형이어서 학생시절부터 친척집에 기숙하면서 침식을 잊고 공부하였다.

졸업 후에는 프라하의 일류 호텔이나 레스토랑에 출연하고 있던 갈레루 코므자크 악단에 가담하여 비올라를 켜게 되었으나 1862년에 체코인을 위한 국민극장이 건설될 때까지의 임시극장이 개관되어 악단과 더불어 이 극장 전속 오케스트라의 핵심이 되어 약 10년간 근속하였다. 1866년부터 스메타나가 이 극장의 오페라 감독에 취임, 자작의 오페라 등을 지휘하게 되었으므로 바그너, 슈베르트나 베토벤의 영향과 함께 스메타나의 민족주의적인 음악사상이 그의 작품을 채색하게 되었다. 드보르작은 오케스트라 동료들로부터 작곡 같은 것을 해서 무엇하느냐고 핀잔을 받았으나 묵묵히 작곡을 하였으며 특히 1861년(20세 때)부터 실내악의 대곡(작품 1의 현악 5중주곡)을, 또 1865년부터 교향곡(제1과 제2를 이해에)을 작곡한 것은 당시의 슬라브계의 민족음악의 작곡가들이 스메타나를 비롯하여 대체로 이와 같은 순음악보다도 표제 음악이나 오페라에 끌려 있던 것과 대조적이어서 주목할 만하다. 드보르작의 이러한 순음악에 대한 열정은 죽기 약 9년 전인 1895년까지 계속된다. 후기 낭만적 음악의 화성조직이나 색채적인 오케스트라의 사용법이라든가 그러한 개개의 기법에 이끌렸어도 고전적인 음악형식을 저버리려고 하는 그 무렵의 작곡계의 일반적인 경향에는 반대였고 새로운 고전주의를 목표로 한 점에서 독일의 대작곡가 브람스의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어 사실 브람스에게는 매우 총애를 받아 드보르작의 작품이 1877년 이후 베를린의 지므로크 음악출판사를 통해 출판되었고, 체코 이외의 나라에서 연주하게 된 것도 브람스의 소개로 된 것이었다.

브람스를 비롯하여 지휘자이며 피아니스트인 한스 폰 뷜로, 지휘자인 한스 리히터, 당시 빈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평론가 한슬리크 등 독일,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음악인 지위를 얻게 된 것도 드보르작의 명성과 작품을 세계적으로 만드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독일,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1884년 말 영국에도 9번 방문하여 영국을 위해 <유령의 신부> 및 <교향곡 제7번 D단조>를 쓰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명예 음악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드보르작은 국제인으로서 사는 것을 바라지 않고 끝까지 체코인으로 살아갔다. 빈으로 이주하도록 재삼 권유된 것을 거절한 것도 그의 신념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빈 정부에 대해 독립투쟁을 밀고 있던 동포들을 버리고 자신만 빈에서 안일하게 생활을 한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1890년부터 프라하 음악원에서 작곡과 그 밖의 것을 가르치고 있었으나, 1892년의 51세 때 뉴욕의 국민음악원의 원장으로 초빙되었다.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 현악 4중주곡 <아메리카> 등 오늘날 가장 많이 연주되고 있는 드보르작의 작품이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에 작곡되었다. 그러나 1894년의 여름 휴가로 귀국(이 때 피아노 독주곡, 8개의 <유모레스크>를 작곡했다. 그 중에서 7번째 곡이 바이올린으로 편곡되어 유명해지자 다시 미국으로 가기가 싫어졌지만 일단 돌아가서 결국 다음해 봄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오래도록 미국에 머물러 있을 것을 바라는데도 불구하고 계약을 중도파기하고 귀국했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에는 슬라브풍의 음악에 흑인과 인디언의 멜로디를 조화하며 작곡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귀국 후 만년의 약 10년간은 일반 민족주의 음악의 작곡가와 같이 오페라와 교향시에 주력하여 <루살카>(1901 초연)와 같은 귀여운 오페라도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창작력이 그 정상에 달한 것은 이 이전, 특히 도미 직전인 수년간으로 추측된다. 피아노 3중주곡 <도무키>(1890-1891)가 그 좋은 한 예이듯이 종래의 독일류의 음악형식에 구속되지 않은, 슬라브인의 변화와 대조를 좋아하는 민족성에 한층 잘 맞는 새로운 형식적 질서를 낳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1901년엔 빈의 종신 상원의원으로 귀족이 되었고, 같은 해 프라하 음악원의 원장이 되기도 한, 독립 전의 체코의 문화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받은 뒤 1904년 뇌일혈로 사망, 국장으로 모셔졌다.

드보르작은 이른바 귀재형의 음악가는 아니며 굳이 말하자면 평범 속에 위대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평이 있다.
작곡 : Dmitri Shostakovich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 Schostakowitsch Dmitriyevich Shostakovich )
러시아의 작곡가이다. 그는 소비에트 정부와 복잡한 관계에 있었는데, 1936년과 1948년에는 그의 두 작품이 공개적인 경고를 받기도 했으며, 종종 그의 작품에 대해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 그는 동시대의 가운데 가장 유명한 소비에트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이자, 여러 개의 표창과 상을 받기도 했으며, 소비에트 최고 회의 위원이기도 했다. 초창기의 아방가르드 시기를 제외하면, 쇼스타코비치는 주... 러시아의 작곡가이다. 그는 소비에트 정부와 복잡한 관계에 있었는데, 1936년과 1948년에는 그의 두 작품이 공개적인 경고를 받기도 했으며, 종종 그의 작품에 대해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 그는 동시대의 가운데 가장 유명한 소비에트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이자, 여러 개의 표창과 상을 받기도 했으며, 소비에트 최고 회의 위원이기도 했다.

초창기의 아방가르드 시기를 제외하면, 쇼스타코비치는 주로 낭만파의 작품을 썼으며, 특히 구스타프 말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무조주의 형식을 도입하였으며 종종 12음렬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의 음악은 강한 대조에, 그로테스크적인 요소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의 작품 가운데 교향곡과 현악 사중주 각각 열 다섯 곡씩이 유명하며, 오페라와 여섯 개의 협주곡, 그리고 여러 영화 음악도 널리 알려져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1906년 러시아 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9살 되던 해부터 피아노를 그의 어머니 소피아 바실리에프나로부터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남다른 재능 덕분에 또래 아이들보다 월등한 피아노 실력을 갖게 되었다. 그는 피아노와 함께 작곡도 배웠는데, 작곡 부문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쇼스타코비치의 어릴 때 기억은 거의 육성 회고록에 잘 나타나있다.

우리 가정은 제1차 세계대전, 2월 혁명, 10월 혁명과 연이어 터지는 사회적 사건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이 연대에 썼던 내 작품에서 이미 무언가 실생활을 담아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드러나는 것은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다. 이러한 ‘실생활을 담고 싶다’는 어린 마음으로 만든 작품에는 피아노 소곡 <병사>, <자유의 찬가>, <혁명의 희생자에게 바치는 장송 행진곡>이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회고록에서도 잘 나타나 있듯이, 그는 어린 시절부터 ‘혁명’ 같은 사회적 현상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1919년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였다. 그는 작곡과 피아노를 모두 공부하였는데, 작곡은 막시밀리안 슈테인베르크에게, 피아노는 로자노바와 레오니드 니콜라에프에게 사사하였다. 그는 음악원에서 다양한 형식과 장르의 곡을 썼다. 이 당시 썼던 곡들은 피아노를 위한 소품 시리즈, 관현악을 위한 주제와 변주곡,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트리오, 피아노를 위한 전주곡 등이 있다. 그는 음악원 졸업 작품으로 첫 번째 교향곡을 탄생시켰다. 그의 작품은 당대 최고의 지휘자였던 토스카니니, 브루노 발터 등에 의해 소개되어 젊은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쌓기 시작한다.

쇼스타코비치는 1번 교향곡(1925)를 작곡한 이후, 2번 교향곡, 10월 혁명에 바침(1927), 3번 교향곡, 메이데이]](1929), [[4번 교향곡(1936)을 작곡하였다. 그리고 1927년에는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 피아노 부문 2등을 하기도 한다. 이 무렵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뿐만 아니라 오페라, 발레음악 등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작곡하였다. 그는 오페라 귀는 1933년에,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1934년에 발표한다.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전통 오페라와 달리 상당히 전위적인 작품이었는데, 당시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비판하는 기사가 실리게 된다. 당시 "프라우다"에는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음악이 아니라 혼란(Chaos instead of Music/Sumbru vmesto muzyki)"라고 표현한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사건 때문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으나 결국 1936년 4번 교향곡을 완성했다. 하지만 <4번 교향곡>의 초연 일정이 무산되었고, 25년이 지난 1961년에 초연이 이루어졌다.

그는 1937년에서 1941년에는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1943에서 1948년에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작곡교수를 지냈다.

쇼스타코비치의 5번 교향곡은 1937년에 작곡된다. 5번 교향곡은 혁명 교향곡이라고도 불린다.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비롯한 자신의 음악이 지나치게 형식주의적이라는 비판을 깨기 위해 다음 작품에 더욱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5번 교향곡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이전의 비판과는 달리 호평을 받아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다. 그 뒤로 쇼스타코비치는 6번교향곡과 7번 교향곡을 작곡한다. 특히 7번 교향곡은 1941년 6월, 히틀러가 레닌그라드를 침공했을 때 레닌그라드에서 작곡한 작품인데, 이 때문에 7번 교향곡은 '레닌그라드 교향곡'이라고도 불린다. 레닌그라드 교향곡의 초연은 소련 내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관심이 컸다. 초연은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NBC 교향악단이 진행했는데, 이 공연은 미국 전 방송국을 통해 중계되었다.

7번 교향곡(레닌그라드)을 쓰고 난 이후, 그는 8번 교향곡을 작곡한다. 7번 교향곡은 전쟁의 고통을 가장 극적으로 반영한 교향곡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쇼스타코비치는 9번 교향곡을 작곡한다. 그는 9번 교향곡 자체를 쉽고 명쾌한 분위기에 의한 곡이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귀엽고 발랄하기만 한 9번 교향곡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스탈린은 9번 교향곡이 지니는 상징성(예를 들어, 베토벤의 9번 합창 교향곡이 갖는 상징성)과 전쟁의 종결이라는 큰 사건이 결합하여 대단한 걸작이 탄생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쇼스타코비치의 9번 교향곡은 그러한 기대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이로 인해 즈다노프 비판이 시작되었다. 즈다노프 비판은 다양한 문화 영역에서 이루어졌는데, 음악 분야의 토론은 1948년 1월에 진행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전후 서유럽에서 도입된 형식주의적 사상과의 투쟁, 광범위한 인민대중을 높은 음악성에 가까워지도록 하기 위한 음악 예술 발전의 과제가 토의되었다. 이 회의 이후, 쇼스타코비치 뿐만 아니라 프로코피예프, 하차투리안, 포포프, 세바린, 미야스코프스키 등이 형식주의자로 비난을 받게 된다. 이 즈다노프 비판으로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이 사망하는 1953년까지 교향곡을 작곡하지 않게 되고, 주로 스탈린 선전용 영화음악만을 작곡하게 된다.

스탈린이 사망(1953)하고 나서 쇼스타코비치는 같은 해 10월 10번 교향곡을 8년 만에 발표한다. 그리고 그 이후로 11번 교향곡과 12번 교향곡, 13번 교향곡, 14번 교향곡을 발표한다. 11번째 교향곡과 12번째 교향곡은 혁명을 주제로 쓴 교향곡이라고 평가받는데, 이는 표제 음악적 특징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반면 13번째 교향곡과 14번째 교향곡은 합창이 들어가기 때문에 성악 교향곡의 형태를 띠고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제 14번 교향곡을 작곡한 2년 뒤에 마지막 교향곡인 15번 교향을 작곡한다. 15번 교향곡은 앞 선 두개의 교향곡과 달리 순수 기악곡이다. 이 곡을 작곡할 때, 쇼스타코비치는 심근경색으로 병상에 있었다. 계속적인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그는 1975년에 심장 발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의 음악은 러시아 사람들의 생활이나 기분을 잘 나타냈으며 듣기 쉬운 것이 특징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은 교향곡이 대표적이며, 교향곡 뿐만 아니라 오페라, 관현악곡, 협주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성악곡으로 매우 다양하게 존재한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은 총 15개로 이루어진다.

제 1번 교향곡은 쇼스타코비치의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졸업 작품으로, 이 곡을 통해 세상에 젊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알려지기 시작한다. 곡은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당시 예술과 혁명은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서유럽의 현대음악 콘서트가 열리면서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2번 교향곡, 3번 교향곡을 작곡한다. 2,3번 교향곡에서는 대위적인 기법을 많이 사용하는데, 2번 교향곡에서는 극단적으로 27성부 모두 폴리포니를 이루기도 한다.

4번 교향곡은 표제가 없는 순수한 절대 음악이다. 또한 쇼스타코비치의 작품 중 가장 많은 인원(총 134명)이 필요한 기악곡이다. 하지만 4번 교향곡이 <프라우다>지에서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에 대한 비판 사건으로 초연이 연기된다.

5번 교향곡은 쇼스타코비치의 15개 교향곡 중 으뜸으로 뽑힐 만큼 높은 작품성을 지녔다. 그는 그 무렵 [프라우다]에 쓰인 자신에 대한 비판, 즉 지나친 형식주의자라는 평가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한 고민 끝에 탄생한 작품인 5번 교향곡은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운명과 극복-승리라는 내용으로 자주 비교되곤 한다.쇼스타코비치는 회고록을 통해 5번 교향곡의 주제가 인간성(인격)의 확립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 작품은 4악장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는 모든 악장에 일정 리듬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조성을 명확하게 표시하지 않았는데, 1악장은 d단조, 2악장은 a단조, 3악장은 f#단조, 4악장은 d단조로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하자 소련 정부는 예술에 대한 간섭을 더욱 심하게 한다. 그리고 애국적인 예술 작품을 탄생시키는데, 7번 교향곡 레닌그라드도 이러한 맥락에서 탄생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를 포위하였던 것에서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을 시작하였다. 이 작품 발표 당시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은 전쟁의 시(詩)이며, 뿌리 깊은 민족정신의 찬가이다라고 발표했지만 1악장을 제외하고는 묘사적 요소가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다.[10] 이전,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비난을 했던 <프라우다>에서도 이 곡에 대해서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곡은 훗날, 레닌그라드 시(市)에 헌정되었으며, 당시 스탈린상도 수상하게 된다. 이 곡은 표제 음악이며, 1악장은 '전쟁', 2악장은 '회상', 3악장은 '조국의 광야', 4악장은 '승리'로 알려져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9번 교향곡은 짧고 매우 경쾌한 소품 형식이다. 곡 자체는 완성도가 높은 편이었지만, 대작이 나올 것을 기대하였던 사람들에게 소규모의 경쾌하고 재치있는 곡은 실망을 안겨주었다. 쇼스타코비치는 9번 교향곡은 만든 지 8년 후에 제 10번 교향곡을 발표한다. 이 곡은 스탈린이 사망한 직후에 쓰여진 작품이었기 때문에 전 세계의 관심을 받았다. 총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을 "확대 된 타악기군을 포함하는 오케스트라"의 표준에 가까운 4악장의 교향곡이라고 설명하였다.

그의 13번 교향곡과 14번 교향곡에는 성악 부분이 들어가 있다.

쇼스타코비치가 마지막으로 쓴 교향곡은 1971년의 15번 교향곡이다. 15번 교향곡은 순수 기악 교향곡이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뿐만 아니라 관현악곡, 협주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오페라, 성악곡에 걸쳐 많은 작품을 썼다. 관현악곡은 모음곡, 서곡, 교향시가 대부분이다. 특히 모음곡에서는 발레 음악을 모은 발레 모음곡이 대표적이다. 또한 쇼스타코비치는 민족 음악에도 관심을 가져 러시아와 기르기스 민요 서곡 op.115같은 민속적 선율로 곡을 쓰기도 하였다. <10월 혁명>이라는 교향시 op.131는 1967년에 있었던 10월 혁명 50주년을 기념하여 작곡된 작품이다.

협주곡은 피아노, 바이올린, 그리고 첼로 협주곡이 대표적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는 미완성 작품까지 모두 3개이다. 그 중 코(The Nose) Op.15와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Lady Macbeth of Mtsensk District) Op.29이 대표적이다. 코는 고골리의 동명소설을 러시아로 번역한 것으로, G. 이오닌, A. 플라이스, J.자미야틴과 쇼스타코비치가 함께 공동으로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잃어버린 코를 찾아 원래 있던 자리에 붙인다는 내용의 원작을 모방하여 코믹적인 요소를 없앤 중후하고 무거운 음악이 오페라 전체에 흐른다.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1930년~1932년에 작곡되었다. 이 작품은 러시아어로 번역한 A. 플레이스와 쇼스타코비치의 공동 작품 <므첸스크의 백베스 부인>의 대본이 거의 그대로 사용되었다. 이 작품은 굉장히 규모가 큰 대작으로, 러시아 오페라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다. 즉, 이 작품은 부정적인 일들을 고발하고, 풍자하며, 극적이고, 서정적이면서 인물에 대한 심리 묘사, 성격 묘사에 대한 음악이 어우러진다. 이 작품은 1934년 초연 된 이후, <프라우다>지에서 ‘음악이 아니라 시끄러운 소리들일 뿐’이라는 비판을 받은 후, 상연이 금지되었다. 1979년에 원곡이 부활, 상연되었다.
노래 : Willard White (윌라드 화이트)
성악가 (베이스 바리톤) 성악가 (베이스 바리톤)
노래 : Cynthia Haymon (신시아 헤이먼,Cynthia Haymon-Coleman)
성악가 (소프라노) 성악가 (소프라노)
노래 : Damon Evans (데이먼 에반스)
노래 : Cynthia Clarey (신시아 클라레이)
성악가 (메조소프라노) 성악가 (메조소프라노)
성악가 (베이스 바리톤) 성악가 (베이스 바리톤)
성악가 (소프라노) 성악가 (소프라노)
노래 : Dale Duesing (데일 듀싱)
노래 : Magdalena Kozena (막달레나 코체나)
성악가 (메조소프라노) 성악가 (메조소프라노)
노래 : Camilla Nylund (카밀라 닐룬트 )
성악가(소프라노) 성악가(소프라노)
노래 : Kristine Opolais (크리스틴 오포라이스)
노래 : Marcelo Alvarez (마르첼로 알바레스)
노래 : Marco Vratogna (마르코 브라토그나)
노래 : Joyce DiDonato (조이스 디도나토)
성악가 (메조소프라노) 성악가 (메조소프라노)
피아노 연주자 피아노 연주자
연주 : Mitsuko Uchida (미츠코 우치다)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클래식 바이올린 연주자 클래식 바이올린 연주자
첼로 연주자 첼로 연주자
영국의 오케스트라 지휘자이다. 리버풀에서 태어나 왕립음악원(RAM)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전공했으며,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본머스 관현악단과 왕립 리버풀 필하모니 관현악단 부지휘자를 거쳐, 1980년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다. 래틀은 버밍엄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 잘 알려지지 않았던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을 영국의 대표적인 오케스트라로 발전시켰다. 특히 현대 음악과 ... 영국의 오케스트라 지휘자이다.

리버풀에서 태어나 왕립음악원(RAM)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전공했으며,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본머스 관현악단과 왕립 리버풀 필하모니 관현악단 부지휘자를 거쳐, 1980년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다.

래틀은 버밍엄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 잘 알려지지 않았던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을 영국의 대표적인 오케스트라로 발전시켰다. 특히 현대 음악과 말러의 교향곡에 대한 독특한 해석으로 눈길을 끌었다.

2002년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후임으로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수석지휘자 임기를 시작하였으며, 2010년 투표를 통해 임기가 2018년까지 연장되었다. 현재 베를린 필 에서의 성공적인 임기를 마치고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로 활동 중이다. 2023년부터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임기를 마치고, 그 직후 5년간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수석지휘자로 부임할 예정이다.
오케스트라 : Berliner Philharmoniker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B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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