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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ie Parker Quintet - Jazz At Massey Hall [옐로우 컬러 LP]

[ 180g / 한정반 ]
Charlie Parker, Dizzy Gillespie, Bud Powell, Charles Mingus, Max Roach 연주 | Wax Time / Wax Time In Color | 2018년 08월 03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180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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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ie Parker Quintet - Jazz At Massey Hall [옐로우 컬러 LP]

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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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매일 2018년 08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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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크

Disc
  • A1 Perdido
  • A2 Salt Peanuts
  • A3 All The Things You Are
  • A4 52nd Street Theme
  • B1 Wee [Aka Allen’s Alley]
  • B2 Hot House
  • B3 A Night In Tunisia

상세 이미지

상세 이미지 1

아티스트 소개 (5명)

1955년 3월12일, 뉴욕의 어느 조그만 아파트에서 한 흑인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 관계자들은 시신을 살펴본 뒤 조사내용을 서류에 기입했다. 사인은 약물중독에 의한 심장마비, 인종은 흑인, 나이는 약 65세. 당시 현장의 경찰 관계자들은 그것이 누구의 시신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비밥의 혁명가’ 찰리 파커(Charlie Parker; 이하 버드)의 죽음은 이토록 비참했다. 1920년... 1955년 3월12일, 뉴욕의 어느 조그만 아파트에서 한 흑인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 관계자들은 시신을 살펴본 뒤 조사내용을 서류에 기입했다. 사인은 약물중독에 의한 심장마비, 인종은 흑인, 나이는 약 65세. 당시 현장의 경찰 관계자들은 그것이 누구의 시신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비밥의 혁명가’ 찰리 파커(Charlie Parker; 이하 버드)의 죽음은 이토록 비참했다. 1920년 생이니까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35살, 하지만 술과 마약에 찌든 그의 몸은 망가져 있었고, 그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65살 노인으로 착각했을 정도이니 그의 건강이 얼마나 절체 절명의 상황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화배우이자 제작자인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가 감독한 영화 < Bird >(1988)는 이 비운의 버드의 생애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1945년,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Minton’s Play House)에서 동료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와 함께 한 성공적인 데뷔를 시작으로 그는 하루아침에 재즈계의 유명 인사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가 창안한 비밥이란 문법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출 수 없다’는 이유로 대중들의 차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그의 뇌리 속엔 ‘자신은 흑인’이라는 운명이 자리잡고있었다. 공연 때마다 그를 보러오는 백인 여성들은 그를 유혹했고 하루에도 몇 번씩 그는 이들과 성의 향연(?)을 벌이곤 했다. 하지만 흑인이었기에, 그의 천재성은 백인이 패권을 지고 있던 미국 사회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타협이라곤 모르는 그의 성격은 그를 차츰 고립의 늪으로 치닫게 했고, 외로움을 잊기 위해 20년 넘게 해온 마약과 술은 그를 파멸로 몰아넣었다.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서 디지가 작곡해 준 ‘Groovin’ high’를 그의 색스폰으로 우렁차게 울린 그 날, 재즈의 역사는 다시 쓰여졌다. 비밥(Bebop)이라는 재즈의 신종 문법은 1940년대 주류 대중음악인 스윙의 대세를 벗어나 20대 초의 젊은 흑인 재즈 뮤지션들을 중심으로 ’음악적 실험‘을 끝에 비밥은 빛을 본다. 바야흐로 모던 재즈 시대를 활짝 열어놓은 이들 젊은 뮤지션들은 중 단연 눈길을 끌었던 인물은 바로 버드였다. 그의 천재성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미국 캔사스 씨티 출신인 그는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와 같은 스윙 스타를 배출한 캔사스 씨티 음악 씬의 중심부에서 소년기를 보낸다. 바리톤 색스폰을 독학으로 익힌 그는 14세가 되던 1934년, 학교를 그만두고 그 지역 밴드들을 따라다니며 색스폰 연주를 익혀나간다. 이곳저곳을 배회하며 잼(Jam) 세션을 벌인 그는 얼마 후 그는 그 지역의 스타 카운트 베이시 악단과 연주할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카운트 베이시 악단과 함께 했던 기억은 버드에게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상처가 되고 만다. 그의 어설픈(?) 솔로가 진행되던 도중, 당시 드럼을 연주하던 조 존스는 갑자기 연주하던 심발을 풀어 그를 향해 내던졌다. 순간 그가 대중들의 웃음거리로 전략하고 만 이 일화는 물론 16세라는 나이를 감안할 때 아직 완성도가 떨어지는 그의 열악한 연주실력을 반증해주는 사례였지만, 스윙시대를 주름잡은 그의 선배들이 그의 독창적인 솔로 전개를 매우 거북스러워했음을 또한 증명해 준다. 스윙이 대세였던 당시까지만 해도 그가 새로운 재즈의 물결을 주도할 것이라는 예상은 그 누구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색스폰 주자 레스터 영(Lester Yong)의 음악에 심취해 있던 그는 다시 몇 년의 치열한 내공을 쌓은 후인 1940년, 뉴욕 52번가에 자리한 클럽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의 매니저 테디 힐(Teddy Hill)의 주선으로 뉴욕에 입성하며 ‘무서운 신인’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그는 케니 클라트, 델로니우스 몽크, 닉 팬톤, 하워드 맥기, 조 가이, 그리고 그의 비밥 혁명을 가능케 해준 동반자 디지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비밥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재즈의 흐름을 모색해 간다. 당시 재즈 평론가 제임스 콜리어가 옮겨 전하고 있는 케니 클라크의 말은 버드와의 첫 만남에 대해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우리가 전혀 들어본 적도 없는 것들을 연주하고 있었어요. 이미 내가 드럼으로 연주하고 싶어했던 것들을 들려주었죠. 래스터 영보다 두 배는 빠르게 연주했고, 영이 다루지 못한 음들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의 것을 추구하고 있었지만,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있었어요. 무엇보다도 그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943년, 최초의 비밥 보컬리스트 사라 본(Sarah Vaughan)의 백업 밴드를 맡고 있던 드러머 빌리 엑스타인 밴드에 합류해 그의 첫 레코딩을 하게 되고, 1944년 말 디지와 듀오를 결성, 버드 파웰(피아노), 막스 로치(드럼), 찰스 밍거스(베이스)으로 구성된 퀸텟을 결성한다. 이듬해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서 성공적인 데뷔식을 치룬 그는, 자신의 애칭인 ‘새’(Bird)를 자신의 공식적인 이름으로 대신한다. 1945-1947년 디지와 함께 하며 미국 L.A. 지역 클럽들을 중심으로 활발한 투어를 펼치던 이 시기에 ‘Groovin’ high’, ’Salt peanuts’, ’Shaw’ nuff’, ’Hot house’, ’Donna lee’, ’Ko ko’등 그의 음악성을 대표하는 명곡들을 발표한다.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그는 1947-1949년 동안 자신의 새로운 퀸텟을 이끌며 듀크 조던, 토미 포터, 막스 로취, 그리고 줄리어드 음대를 다니다 그의 문하생이 된 신인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를 영입한다. 1950년까지 지속적인 활동을 보인 그의 퀸텟은 사보이(Savoy)레이블에서 활발한 레코딩 작업과 유럽 투어를 펼치며 연주경력의 절정을 맞이한다. 같은 해 버브(Verve)레이블과 계약, 디지와 다시 함께 한 앨범 < Bird & Diz >(1950)을 발표한다. 그러나 당시까지 그의 음악은 대중들로부턴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었다. 그나마 생계를 유지해 준 뉴욕의 클럽들도 하나둘씩 문을 닫고 R&B와 로큰롤이 서서히 고개를 들며 대중들은 점점 재즈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사생활 문제까지 겹친 그는 헤로인과 술로 시름을 달래려 했고, 이로 인해 결국 자살까지 시도하기에 이른다. 1953년 그의 생애 마지막 녹음이 된 명반 < Jazz at Massey Hall >을 데뷔 시절 한솥밥을 먹은 디지 길레스피, 버드 파웰, 찰스 밍거스, 막스 로치와 함께 녹음한다. 악화된 건강은 결국 심장마비를 불러왔고 35세란 젊은 나이에 그는 자신의 여자친구 집에서 객사한다. 50년대 말 그의 영향을 고스란히 계승한 존 콜트레인의 등장으로 인해 그의 업적이 재즈계 내에서 차츰 부각되기 시작, 후대 재즈 학자들은 그를 기점으로 ‘아티스트의 주도’하에 이뤄진 찬란한 모던 재즈(Mordern Jazz) 시대가 개화했다고 칭송해마지 않는다.
비밥의 선구자 찰리 파커(이하 버드)와 디지 길레스피(이하 디지)는 바늘과 실처럼 항상 따라다니는 존재였다. 엄청난 스피드의 솔로와 한번에 2개 이상의 음을 동시에 내는 찰리 파커의 연주 재능은 비밥의 혁명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찰리 파커의 이런 재능을 먼저 알아본 것은 바로 그의 동반자이자 라이벌이었던 트럼펫 주자 디지 길레스피였다. 디지는 항상 버드의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곤 했다. 그러나 이런 연유에서 ... 비밥의 선구자 찰리 파커(이하 버드)와 디지 길레스피(이하 디지)는 바늘과 실처럼 항상 따라다니는 존재였다. 엄청난 스피드의 솔로와 한번에 2개 이상의 음을 동시에 내는 찰리 파커의 연주 재능은 비밥의 혁명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찰리 파커의 이런 재능을 먼저 알아본 것은 바로 그의 동반자이자 라이벌이었던 트럼펫 주자 디지 길레스피였다. 디지는 항상 버드의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곤 했다. 그러나 이런 연유에서 그는 항상 ‘버드 다음’이라는 식으로 ‘2인자’ 취급을 받곤 했다. 하지만 버드의 음악성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던 사람은 디지였고, 그것을 가능케 해준 사람도 바로 디지였다. (그리고 그들이 창조해낸 새로운 재즈 음악 ‘비밥’의 명칭 역시 디지가 고안했다.) 실제로 디지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찰리 파커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얘기할 정도로 버드에게 선사한 디지의 공헌은 막대했다. 눈칫밥을 먹어가며 독학으로 재즈를 익힌 버드와는 달리 디지는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에서 클래식을 전공했다.(물론 중간에 뛰쳐나온다.) 음악적인 지식이 전무했던 찰리 파커는 193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저곳을 배회하던 떠돌이 음악인 신세였고, 디지는 이미 그 실력을 인정받아 1937년부터 테디 힐 오케스트라의 트럼펫 주자였다. 하지만 1941년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서의 이들 둘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디지는 버드가 지닌 천재성에 매료 되 그와 의기투합한다. 버드가 연주해서 유명해진 ‘Groovin’ high’, ’Salt peanuts’, ’Hot house’, ’Shaw ’nuff’등은 모두 디지가 작곡했다. 1945년부터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를 무대로 활동한 이들 콤비는 버드가 곡의 영감과 아이디어를 제공하면 디지가 그것을 흡수해 곡을 쓰는 방식이었다. 독보적인 음악성을 지닌 찰리 파커의 악상은 이렇듯 디지의 체계적인 음악지식에 의해 악보로 재현되었기에 우리가 지금 버드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는 셈이다. 디지가 재즈사에 남긴 공헌은 버드와의 콤비 플레이 이상이다. 1947년 버드와 함께 한 퀸텟 활동을 접고 초유의 비밥 빅밴드(Bebop Big Band)를 결성해,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시도한다. 이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그가 고안한 ‘쿠밥’(Cubop)이라는 장르인데, 쿠바 출신의 타악기 연주 대가 차노 포조(Chano Pozo)를 초청해 비밥과 아프로 큐반 리듬의 온전한 결합을 시도하며 재즈 내에서 본격적인 ’퓨전‘을 실험한 최초의 인물로 디지는 기억되다. 재즈의 명 스탠다드로 자리 매김 한 대표 곡 ’A night in tunisia’, Cubana bop’과 같은 곡은 아프로 큐반 재즈의 원형을 제시했다. 또한 그의 빅 밴드에서 활동하던 밀트 잭슨, 제임스 무디, 유셉 라티프, J.J 존스과 같은 50-60년대 ‘모던 재즈 쿼텟’(Modern Jazz Quartet)이란 이름으로 모인 걸출한 뮤지션들을 배출했고, 그의 트럼펫 연주는 이후 팻츠 나바로, 클리포드 브라운 그리고 마일스 데이비스의 연주에 영향을 끼치며 비밥이 한층 그 흑인성을 더하며 하드 밥 (Hard Bop)으로 진화 해 가는데 기여한다. 1917년 노스 캘롤라이나 주 출신인 디지는 12세때부터 트럼펫을 손에 잡고 이후 대학에서 정규 음악교육을 받지만, 뮤지션이 되기 위해 자퇴한다. 30년대 스윙시대를 빛냈던 트럼펫 주자 로이 엘드리지(Roy Eldridge)의 영향을 받은 그는 1937년 테디 힐 오케스트라를 시작으로 프로로 데뷔한다. 이후 1939-1941년까지 캡 캘로웨이(Cab Calloway) 빅 밴드에서 활동하지만 리더와의 사소한 다툼으로 이윽고 해고된다. 이윽고 그의 첫 음악동지 테디 힐이 세운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 입성, 버드를 비롯한 비밥의 명인들과 음악적 교분을 나누며 1941-1943년까지 엘라 핏 제럴드, 베니 카터, 콜맨 홉킨스의 레코딩 세션에 참여하며 비밥의 혁명을 준비한다. 1942년 얼 하인즈 빅밴드에 합류하며 디지는 버드와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되었고 이때 밴드의 보컬주자 빌 엑스타인의 보컬로 그의 대표작 ‘A night in tunisia’(1943)을 발표한다. 1945-1947년까지 버드와 함께 퀸텟을 조직, 비밥을 세상에 알렸고, 1947년부터 자신의 비밥 빅밴드를 이끌면서 아프로 큐반 음악을 재즈에 소개한다. 1950년엔 버드와 다시 만나며 < Bird & Diz >를 버브 레이블에서 공개했고, 이후 1950년대 내내 버브사를 통해 자신의 연주에 큰 영향을 준 로이 엘드리지와 함께 한< Dizzy Gillespie & Roy Eldridge >(1954), 10년 동안의 빅 밴드 활동을 중간 결산하는 라이브 명반 < At Newport >(1957)을 발표한다.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버드와는 달리 디지는 이후 60년대부터 죽을 때까지 지속적인 활동을 보이는데, 자신의 빅 밴드를 해체시키고 소규모 밴드 중심으로 활동한 그는 레오 라이트(Leo Wright), 라로 쉬프린(Lalo Schifrin), 제임스 무디(James Moody), 케니 바론(Kenny Barron)과 같은 60년대 스타급 재즈 뮤지션들과 교류했고, 70년대 초엔 재즈 자이언츠(Jazz Giants)라는 프로잭트 밴드를 결성, 델로니우스 몽크 ,소니 스티츠, 아트 블래이키와 같은 40-50년대 비밥 명인들과 재결합을 시도한다. 이후 재즈 계에서 그의 영향력은 차츰 줄어 들어갔지만, 후배 재즈 뮤지션들은 그의 업적을 칭송하며 80년대까지 그와 함께 연주를 같이 한다. 그는 최근 개봉했던 영화 ‘리빙 하바나’를 통해 소개된 아르투로 산도발(트럼펫)과 파키토 리베라(색스폰)와 같은 쿠바 출신의 뮤지션들을 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맡았다. 그의 정력적인 활동은 죽기 1년 전인 1992년까지 지속되었다. 디지는 비슷한 시기 자웅을 겨뤘던 버드와 같은 천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흑인이라는 운명’에 자신을 파괴했던 버드와는 달리 그는 자신을 아낄 줄 알았고, 오랜 기다림 끝에 대중적인 인기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버드와 함께 ‘비밥의 산파자’라는 영예와 더불어 많은 후배 뮤지션들을 키워내며 재즈 사에서 버드에 못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로 기억된다.
비밥 피아니스트 버드 파웰은 재즈 피아노 연주의 새로운 패턴을 확립한 인물이다. 20-30년대까지 재즈 피아노 연주의 주류를 이루던 스트라이드 주법(랙타임에서 유래)은 그로 인해 왼손의 역할은 줄어들고 오른손이 연출하는 고난이의 연주 기교가 더욱 중시된다. 왼손으로 ‘움파-움파’하는 식으로 리듬을 만들어 주던 초기재즈-스윙 시대의 피아노 연주는 그의 새로운 시도로 인해 왼손은 코드의 변화만을 집어주고 대신 오른손... 비밥 피아니스트 버드 파웰은 재즈 피아노 연주의 새로운 패턴을 확립한 인물이다. 20-30년대까지 재즈 피아노 연주의 주류를 이루던 스트라이드 주법(랙타임에서 유래)은 그로 인해 왼손의 역할은 줄어들고 오른손이 연출하는 고난이의 연주 기교가 더욱 중시된다. 왼손으로 ‘움파-움파’하는 식으로 리듬을 만들어 주던 초기재즈-스윙 시대의 피아노 연주는 그의 새로운 시도로 인해 왼손은 코드의 변화만을 집어주고 대신 오른손으로 현란한 즉흥성을 강화시킨다. 비밥의 혁명을 주도했던 젊은 흑인 뮤지션들은 연주 전체를 누가 리드하느냐의 상관없이 밴드내 연주자 개개인이 동등하게 주목받길 원했고, 이를 위해선 악기 각자가 보다 강화된 솔로 연주를 필요로 했다. 버드 파웰은 스윙시대까지 색스폰과 트럼펫이 주 선율을 담당하고 리듬과 선율을 동시에 책임지던 피아노의 위상을 좀 더 ‘선율’에 비중을 두면서 피아노 연주는 색스폰과 트럼펫처럼 우렁차게 부각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그는 재즈 피아노 연주 주법을 한껏 풍성하게 해준 인물이다. 또한 그는 피아노 트리오의 전형을 제시했다. 막스 로치(또는 로이 헤인즈)의 드럼, 토미 포터(토는 컬리 러셀)의 베이스로 구성된 그의 초기 트리오는 이후 등장할 재즈 트리오 연주 대중화의 시조 격이었다. 다시 말해 그가 없었다면 빌 에반스, 오스카 피터슨의 트리오 연주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인 호응을 얻었던 80-90년대 칙 코리아와 키스 자렛의 트리오 연주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전성기는 그러나 비밥의 출현이 있던 1945년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로 다소 짧았다. 비밥 시대의 재즈 피아노 연주의 혁신자이자 동료였던 셀로니어스 몽크보다 초기엔 주목을 많이 받았지만, 상습적인 마약 복용과 정신병까지 겹쳐 이후 지속적인 활동을 펼쳐 보이지 못하고 40대 초에 세상을 등지고 만다. 1924년 뉴욕 태생인 파웰은 이미 10살 때 팻츠 월러와 아트 테이텀의 곡들을 연주할 수 있는 신동이었다. 열 여덟 살이 되던 해 선배였던 몽크의 주선으로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서 찰리 파커, 찰리 크리스찬과 함께 연주 하게된다. 또한 당시 몽크가 몸담고 있었던 쿠티 윌리엄스 오케스트라에서도 참여하고,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 콤비와 함께 1945-1947년까지 한솥밥을 먹는다. 당시 그의 독창적인 피아노 주법은 수많은 비밥 아티스트들이 ‘같이 연주하고 싶은 피아니스트 1순위’로 그를 격상시켰고, 일약 그는 비밥 피아노 연주의 대가로 자리를 굳힌다. 그러나 파웰은 당시 마약 중독자였고, 술과 마약으로 인해 온갖 트러블을 일으킨 탓에 경찰서를 자기 집 드나들듯이 했다. 여기에 정신병까지 도져 그는 이후에도 황금 같은 젊은 시절은 마약-정신병원으로 허비한다. 정신병원 퇴원 후인 1949년 그의 실질적인 첫 솔로 앨범 < The Amazing Bud Powell Vol.1.2 >와 이듬해 < The Genious Bud powell >을 각각 블루 노트사와 버브사에서 발표한다. 이 두 앨범은 그의 초기 연주 스타일을 잘 집약한 대표작들로서, 몽크와 ’Misty’의 주인공 에롤 가너(Eroll Garner)를 제외한 수많은 재즈 피아니스트들이 비껴갈 수 없는 ‘재즈 피아노 연주의 고전’으로 자리 매김 한다. ‘Bouncing with bud’, ’Hallucination’, 몽크의 역작이기도 한 ’52nd street theme’, ‘Un poco loco’와 같은 곡만 들어봐도 그가 왜 비밥 피아노 연주의 대표격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전성기는 1953년에 정점에 다다르다가, 이후 잦은 마약 복용과 정신병원 신세로 급속하게 건강이 악화되면서 하향세로 급락했다. 1966년 세상을 뜰 때까지 지속적으로 활동을 펼쳤지만 비밥 초기의 예리함은 점점 무뎌만 져갔고, 사람들 뇌리 속에서도 잊혀져만 갔다. 프리 재즈 피아니스트 세실 테일러(Cecil Taylor)가 등장하기 전까지 파웰의 연주는 독보적이었다. 오른손의 자유자재로운 연주를 통해 그는 재즈 피아노 선율의 흥취를 배가시키며 재즈 피아노 연주의 위상을 한층 높여 놓는다. 버드 파웰의 피아노 연주는 비밥 피아노 연주자라면 반드시 넘어야 할 산과도 같은 존재였다.
재즈계의 ’보스’(Boss) 찰스 밍거스(Charles Mingus)는 전방위 재즈 뮤지션이었다. 비밥을 시작으로 모던재즈와 실험적인 빅밴드까지 관통하는 그의 연주 여정은 일반적인 베이스 연주인의 영역을 넘는 것이었다. 비밥 혁명의 주역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찰스 밍거스는 그의 전성기인 1950-60년대 중반까지 힘 있고 박진감 넘치는 베이스 플레이어로, ’ Good-bye pork pie hat’ (1959... 재즈계의 ’보스’(Boss) 찰스 밍거스(Charles Mingus)는 전방위 재즈 뮤지션이었다. 비밥을 시작으로 모던재즈와 실험적인 빅밴드까지 관통하는 그의 연주 여정은 일반적인 베이스 연주인의 영역을 넘는 것이었다. 비밥 혁명의 주역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찰스 밍거스는 그의 전성기인 1950-60년대 중반까지 힘 있고 박진감 넘치는 베이스 플레이어로, ’ Good-bye pork pie hat’ (1959)를 위시해 수많은 재즈 연주를 작곡한 작곡자로, 소울 빅밴드(Soul Big Band)의 리더로서 스윙에 한정되지 않는 한층 복잡다단한 현대적인 재즈 오케스트라를 확립한 음악 감독이었다. 이런 음악적 열정과 더불어 밍거스는 그가 활동하던 당시인 1950-60년대 재즈 음악계에서 당시로선 보기 드문 흑인 실력자였다. 흑인 재즈 뮤지션으론 처음으로 1952년, 드러머 맥스 로취와 자신의 음반사인 ‘Debut’을 창립했고, 빅밴드를 이끌던 1960년엔 ’재즈 아티스트 길드’(Jazz Artist Guild)란 조직을 창립시키며 뉴욕 클럽 지역에서 활동하던 흑인 재즈 뮤지션들과 연대해 클럽 주인들의 부당한 대우에 적극 대응하기도 했다. 흡사 보스를 연상시키는 그의 외모처럼 그의 인생은 가히 보스다웠다. 인종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던 밍거스는 1961년 미국 뉴욕 카네기 홀 앞에서 맥스 로취를 비롯한 흑인 뮤지션들을 주축으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동하기도 했다. 이러다보니 백인들 사이에선 그는 경계해야할 흑인 뮤지션 블랙리스트에 단연 선두를 자리 잡았고, 재즈 뮤지션들도 흡사 ‘재즈 정치인’과 같은 그의 음악외적인 활동에 대해 못마땅해 한다. 기인에 가까울 정도의 이런 그의 급진적인 행동은 음악으로도 표출된다. 대표적으로 늘 거론되는 < Mingus Ah-um > (1959) 의 수록곡 ’Fables of Fabus’에서 ‘Fabus’는 당시 ’리틀 룩 사건’이란 인종차별 사건으로 악명 높았던 아칸사스 주의 주지사의 이름을 써 풍자적인 연주로 표현했고, ’Oh Lord, Don’t Let Them Drop That Atomic Bomb on Me’ 와 ’Remember Rockefeller at Attica’ (1974) 역시 제목이 암시하듯 흑인의 입장에서 느끼는 억압의 굴레를 파격적인 연주로 한풀이하고 있다. 흡사 지사와도 같은 이런 밍거스의 모습은 하지만 그가 창조해 낸 풍성한 연주 세계에 비할 바 아니다. 스윙과 비밥을 근간으로 한 그의 연주세계는 하드밥과 가스펠, 소울의 영향이 짙게 깔린 소울 빅밴드 연주를 창조해냈다.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으로 대변되는 전통적인 빅밴드의 차원을 넘어서 밍거스는 10인조미만의 소 편성으로도 얼마든지 충만한 사운드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증명했다. 멤버들의 솔로 기량을 앞세우기 보단 작, 편자의 의해 악보에 근거한 밍거스 빅밴드의 사운드는 빅밴드가 스윙을 벗어나 프리/아방가르드에까지 영역을 넓힐 수 있게 된다. 밍거스가 씨를 뿌린 소울 빅밴드의 유산은 훗날 프로그레시브 빅밴드란 스타일로 이어지며 베이시스트 찰리 헤이든, 베이시스트 데이브 홀랜드, 피아니스트겸 작곡가 칼라 블레이와 같은 수많은 추종자들을 양산하며 현대 빅밴드의 선구자와 같은 위상을 점유한다. 1922년 미국 아리조나주에서 태어난 찰스 밍거스는 L.A 지역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면서 교회를 출석하면서 어께너머로 피아노, 트럼본, 첼로 등 다양한 악기를 섭렵했다. 고등학교 시절 지역을 방문한 듀크 엘링턴 빅밴드 연주를 관람한 밍거스는 재즈에 매료됐고 특히 밴드의 베이스 주자였던 지미 블랜튼(Jimmy Blanton)의 연주에 큰 감동을 받고 베이스 연주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베이스에 빠른 두각을 보인 밍거스는 1940년, 이런 저런 밴드를 거쳐며 본격적으로 베이스 연주인으로 나선다. 키드 오리(Kid Ory),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라이오넬 햄프튼(Lionel Hampton) 밴드에선 초기 뉴 올리언즈와 스윙을 연주했고 40년대 중반부턴 뉴욕 52번가에서 바야흐로 막 물이 오르던 비밥 열풍에 동참하며 찰리 파커와 버드 파웰 밴드에서 베이스를 연주한다. 1950년대 초, 걸출한 흑인 재즈 뮤지션들이 대다수 슬럼프에 빠져있던 것과 달리 밍거스는 기타리스트 탈 팔로우, 테너 색소폰니스트 스탄 게츠 등 백인 뮤지션들과 협연을 했고, 이런 기회를 통해 주류 재즈 무대에 지속적으로 자신을 알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리고 1953년엔 ‘비밥의 종언’이라고까지 불리는 명연 < Live at Massey Hall > 을 비밥의 동료였던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맥스 로취, 버드 파웰과 함께 ‘더 퀸텟’이란 밴드 멤버 자격으로 녹음해 자신이 설립하게 될 레이블 데뷔를 통해 발표한다. 이렇게 화려한 사이드 맨 시절을 통해 얻은 자신감으로 밍거스는 1952년, 드러머 맥스 로취와 의기투합해 자신의 레이블인 ‘Debut’을 창립한다. 여기에 1953년부턴 정기적으로 클럽을 빌려 작곡한 연주를 발표하는 식의 재즈 컴포저스 워크숍(Jazz composer’s Workshop)이란 행사를 개최했다. 재즈 워크숍은 흑인 연주인들 사이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호레이스 실버, 델로니어스 몽크, 아트 블레이키, 맥스 로취와 같은 하드밥의 주역들이 그의 워크숍에 동참한다. 음악인답지 않은 그의 비즈니스적인 면모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비밥에서부터 실험적인 사운드까지 폭넓게 아우른 그의 음반사업은 그러나 경영 악화로 결국 1955년 그가 설립한 Debut 레코드는 문을 닫고 만다. 음반사업을 정리한 밍거스는 어트랜틱을 통해 첫 리더작 < Pithecanthropus Erectus : 직립 원인 > (1956)을 발표한다. 새로 조직한 퀸텟 ‘재즈 워크숍’의 첫 작품이기도 한 앨범에서 타이틀 곡 ‘직립원인’은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게 된 위대한 인간이 어떻게 타락해 가는가를 변화무쌍하고 익살스런 편곡으로 그려낸다. 심오하기까지 한 블루스와 가스펠의 연주 영역을 제시한 ‘직립원인’을 계기로 찰스밍거스 재즈 워크숍은 향후 10년간 ‘흑인에 흑인을 위한 흑인의 빅밴드’라 할 소울 재즈 빅밴드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어틀랜틱 레코드를 통해 밍거스는 특유의 당차고 힘 있는 재즈 앙상블로 명반행진을 이어간다. 시종일관 우렁찬 혼 섹션으로 위풍당당한 재즈 앙상블을 소화한 ‘Haitian Fight song’ (1957), 박수소리와 때창, 고함소리를 활용해 흑인 교회 수요 예배의 전경을 이색적으로 표현한 ’Wednesday night prayer meeting’ (1959)을 연이어 발표한다. 베이스 주자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피아노 연주자이기도 했던 밍거스의 유일한 피아노 연주 앨범 < Oh Yeah! > (1962) 또한 어틀랜틱 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명연이다. 이런 가운데 그의 재즈 워크숍은 5인조에서 7인조라는 확장된 편성되고 그의 밴드 연주에서 편곡은 더욱 중요한 구심점이 되어간다. 그의 또 다른 수작으로 추앙되는 ‘밍거스 아 움’ < Mingus Ah-Um >(1959) 도 바로 새로 정비된 7인조 편성으로 녹음됐다. 메이저 레이블 콜럼비아를 통해 발표된 < 밍거스 아 움 >은 향후 트럼펫터 마일스 데이비스와 명콤비로 활동하게 된 프로듀서 테오 마세로(Teo Macero)가 프로듀싱했다. 앨범에선 재즈 명 스탠더드 ‘Goodbye pork pie hat’를 히트시켰고 당시 막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인종차별 문제를 건드린 ’Fables of Fabus’ 또한 주목받았다. 60년대 접어들면서 그의 밴드 재즈 워크숍은 11인조라는, 가히 빅밴드다운 위용으로 변모했다. 오넷 콜먼(Ornette Coleman)이란 프리 재즈 전도사의 등장으로 재즈뮤지션, 그중에서도 흑인들도 프리 적인 사운드에 차츰 심취해갔고 밍거스 또한 이런 사운드에 관심을 갖게 된다. 임펄스(Impulse!) 레이블을 시작으로 한껏 볼륨을 높인 밍거스의 재즈 워크숍엔 당시 한창 줏가를 올리던 프리-아방가르드 사운드의 주역들이 포진돼 있었다. 만능 리더주자 에릭 돌피(Eric Dolphy)를 위시해 롤랜드 커크(Rolnad Kirk), 잭키 맥린(Jackie Mclean)와 같은 명연주인들이 그의 밴드를 거쳐갔다. 기존 그의 발표한 곡들과 스탠더드를 11인조 앙상블로 리메이크해 녹음한 < Mingus,Mingus,Mingus,Mingus,Mingus > (1963)를 시작으로 같은 해 발표된 < The black saint & the sinner lady > 로 밍거스는 또 한번의 일가를 이뤄낸다. 앨범서 밍거스의 밴드는 연주의 자유로운 즉흥성을 배가시키며 멤버 개개인 자발적인 사운드가 충돌하면서 빚어지는 불협의 매력을 제시했다. 이름 하여 총체적 즉흥(Collective Improvisation)을 통해 재즈 빅밴드가 한층 모던한 사운드로 탈바꿈해 가는 순간이었다. 물론 당시 오넷 콜먼의 프리 재즈처럼 불협으로 일관하는 무형식의 난해한 사운드가 아닌, 불협과 앙상블을 오가며 기승전결의 형식미가 돋보이는 프리 사운드였다. 음악적으로 한창 정점에 달달한 찰스 밍거스는 그러나 이때를 기점으로 차츰 쇄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음악 외적으로 ‘아티스트 길드’를 조직해 흑인 재즈 뮤지션의 권리 보장에 앞장섰지만 그의 의도처럼 상황은 개선되지 않고 있었다. 여기에 출간하기로 했던 자서전의 계약이 무산으로 돌아갔고, 무리한 밴드 운영으로 인해 빚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여기에 거래 은행의 도산과 신경쇄약까지 이어져 밍거스는 60년대가 끝나갈 시점까지 이렇다 할 후속 작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돈이 필요해 다시 음반 작업에 나선 밍거스는 역작 < 밍거스 아 움 >의 제작자 테오 마세로를 찾아간다. 그리고 테오와 다시 손을 잡고 찰스 밍거스는 콜럼비아에서 발표한 < Let my children here music > (1971)으로 다시 한번 혁신적인 사운드를 일궈낸다. 클래식 오케스트라에 버금가는 풍성한 관악기편곡이 돋보인 앨범서 ’Adagio ma non troppo’로 주목받는다. 문제되던 재정문제도 해결 돼 그가 창립했던 Debut 레코드를 판타지 레이블에서 인수해 밍거스는 다시 창작의 안정적인 기반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말년에 접어든 1974년, 초기 퀸텟 사운드로 돌아간 밍거스는 대니 리치몬드(드럼), 돈 풀렌(피아노), 잭 왈라스(트럼펫), 조지 아담스(색소폰)처럼 당시 신예 뮤지션들을 불러 모아 < Changes 1&2 > 를 발표한다. 치밀한 계산과 프리적인 연주가 강화된 작곡은 그의 후기 명연으로 기록된다. 영화음악에도 관여해 밍거스는 < Cumbia & Jazz Fusion > 의 스코아를 맡으며 창작열을 불태웠다. 이런 열화와 같은 노익장에도 불구, 1977년 밍거스는 파킨스씨 병을 얻고 만다. 휠체어 신세가 된 밍거스는 이듬해부턴 사지가 마비돼 더 이상 베이스 연주를 할 수 없게 된다. 사망 1년 전인 1978년, 그의 마지막 프로젝트가 예비 돼 있었는데, 그 주역은 찰스 밍거스와 포크 가수 조니 미첼이었다. 당시 재즈 퓨젼의 물결에 동참하고 있던 조니 미첼은 평소 밍거스의 자유분방하고 호방한 사운드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던 차에 밍거스의 육성을 담아 자신의 독집 앨범에 담게 된다. 1979년 1월 밍거스는 파란만장한 재즈 일대기에 종지부를 찍으며 57세 나이로 숨을 거둔다. 같은 해 그의 음악성에 깊은 오마주를 담은 조니 미첼의 < Mingus > 가 발표됐고 밍거스의 분신과도 같은 스탠더드 ‘Goodbye pork pie hat’은 망자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며 조니 미첼의 체념하는 듯한 목소리로 울려 퍼졌다. 재즈 음악 이상의 족적을 남긴 찰스 밍거스를 기념하기 위해 미망인 슈 밍거스(Sue Mingus)는 그가 남기고 간 전 재산을 투자해 밍거스 재단을 설립한다. 그가 불철주야 매달렸던 재즈 뮤지션들의 저변확대에 기여한 재단은 차츰 규모가 커져 1991년엔 밍거스의 음악을 사랑하는 젊은 재즈 뮤지션들이 모여 밍거스 빅밴드(Mingus Big band)를 창립하기에 이른다. 랜디 브레커, 케니 드류, 잭 왈라스 등 재즈계에 내노라 할 실력파 뮤지션들이 포진된 밍거스 빅밴드는 1993년 첫 앨범 < Nostagia in time sqaure > 를 발표하고 현재까지도 전 세계를 무대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통해 밍거스의 유산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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