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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ynes Ultimate Guide To Classic Anthems

[ 3CD ]
Survivor, Boston, Blue Oyster Cult, Alice Cooper, Hanoi Rocks 노래 외 54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SonyMusic / SonyMusic | 2018년 07월 12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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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ynes Ultimate Guide To Classic Anthems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8년 07월 12일
제조국 EU

관련분류

디스크

Disc1
  • 01 Eye of the Tiger - Survivor
  • 02 More Than a Feeling - Boston
  • 03 Hold the Line - Toto
  • 04 Carry On Wayward Son - Kansas
  • 05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 The Jeff Healey Band
  • 06 (Don't Fear) The Reaper - Blue Oyster Cult
  • 07 Race with the Devil - The Gun
  • 08 Pictured Life - Scorpions
  • 09 Poison - Alice Cooper
  • 10 Up Around the Bend - Hanoi Rocks
  • 11 The Final Countdown - Europe
  • 12 Turn up the Radio - Autograph
  • 13 The Battle Rages On - Deep Purple
  • 14 Hellraiser - Motorhead
  • 15 Breaking the Law - Judas Priest
  • 16 Cherry Pie - Warrant
  • 17 Metal Health (Bang Your Head) - Quiet Riot
  • 18 God Gave Rock 'n' Roll To You - Argent
Disc2
  • 01 Bat Out of Hell - Meat Loaf
  • 02 Don't Bring Me Down - Electric Light Orchestra
  • 03 Black Betty - Ram Jam
  • 04 Good Rockin' - Molly Hatchet
  • 05 Frankenstein - The Edgar Winter Group
  • 06 Barracuda - Heart
  • 07 Stormtroopin' - Ted Nugent
  • 08 Lady - Beck, Bogert, Appice
  • 09 Good Clean Fun - The Allman Brothers Band
  • 10 Raised on Rock - Johnny Winter
  • 11 Mississippi Queen - Mountain
  • 12 Black Magic Woman - Fleetwood Mac
  • 13 Let Me Love You - Jeff Beck
  • 14 Samba Pa Ti - Santana
  • 15 I Love You More Than You'll Ever Know - Blood, Sweat & Tears
  • 16 Texas Flood - Stevie Ray Vaughan & Double Trouble
  • 17 I'd Rather Go Blind - Chicken Shack
  • 18 Piece of My Heart - Big Brother & The Holding Company
Disc3
  • 01 She Bangs the Drums - The Stone Roses
  • 02 Slash 'n' Burn - Manic Street Preachers
  • 03 Rocks - Primal Scream
  • 04 Hush - Kula Shaker
  • 05 Mighty Wings - Cheap Trick
  • 06 Faster Than the Speed of Night - Bonnie Tyler
  • 07 Pretty in Pink - The Psychedelic Furs
  • 08 The Warrior - Scandal feat. Patty Smyth
  • 09 Ask the Angels - Patti Smith Group
  • 10 I'm So Free - Lou Reed
  • 11 Caroline (Are You Ready for the Outlaw World) - Steppenwolf
  • 12 Sure 'Nuff 'n' Yes, I Do - Captain Beefheart & His Magic Band
  • 13 Eight Miles High - The Byrds
  • 14 Leaving Trunk - Taj Mahal
  • 15 American Woman - The Guess Who
  • 16 Antmusic - Adam & The Ants
  • 17 Once Bitten, Twice Shy - Ian Hunter
  • 18 All the Young Dudes - Mott The Hoople
  • 19 Keep On Loving You - REO Speedwagon
  • 20 Kyrie - Mr. Mister

상세 이미지

상세 이미지 1

아티스트 소개 (59명)

영화 < 록키 3 >도 1편을 능가하는 속편은 없다는 속설을 다시 한번 입증한 보통의 영웅담이었다. 뻔한 스토리에 인간 복제 한 듯 똑같은 주인공, 그리고 틀에 박힌 결말. 그러나 이 평범한 권투 영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것은 서바이버(Survivor)가 부른 주제가 ''Eye of the tiger''다. 이 곡은 스크린의 긴장감을 200% 살리면서 성공적인 흥행을 일궈내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77... 영화 < 록키 3 >도 1편을 능가하는 속편은 없다는 속설을 다시 한번 입증한 보통의 영웅담이었다. 뻔한 스토리에 인간 복제 한 듯 똑같은 주인공, 그리고 틀에 박힌 결말. 그러나 이 평범한 권투 영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것은 서바이버(Survivor)가 부른 주제가 ''Eye of the tiger''다. 이 곡은 스크린의 긴장감을 200% 살리면서 성공적인 흥행을 일궈내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77년, 추운 날씨로 유명한 시카고에서 살아남은 서바이버는 주축 멤버인 키보디스트 짐 페테릭(Jim Peterik)과 기타리스트 프랭키 설리반(Frankie Sullivan)이 거의 모든 노래들을 작곡하는 성인 취향의 팝록 밴드였다. 1980년의 데뷔 앨범 < Survivor >와 2집 < Premonition >에서 ''Somewhere in America(70위)''와 ''Poor man''s son(33위)''으로 어느 정도의 인기 기반을 닦은 그들은 < 록키 3 >의 제작을 기획하던 실베스터 스탤론의 눈에 띄어 영화 오프닝에 수록될 주제곡을 의뢰받는다. "우리는 리듬과 비트를 구상해 놓고 있었지만 정작 그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멜로디 훅을 만들었다"라고 짐 페테릭은 말했다. 긴박한 기타 연주와 박력있는 데이브 빅클러(Dave Bickler)의 보컬이 앙상블을 이뤄 멜로딕하면서도 호전적인 분위기를 제공한 ''Eye of the tiger''는 빌보드 싱글 차트 6주간 정상을 차지한 것을 비롯해 그래미 록부문 최우수 그룹상 수상, 피플스 초이스 어워드 최우수 신곡상 수상, 아카데미 주제가상 후보에 오르는 등 이 한 곡으로 거의 모든 영광을 차지했다. 한편 국내에서는 이 곡이 들어있는 음반 < Eye Of The Tiger >에 수록된 ''Ever since the world began''라는 발라드 곡이 팝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Eye of the tiger'' 이후 이들은 1984년의 영화 < 베스트 키드 >의 주제가 ''Moment of truth(63위)''와 1986년 다시 한번 실베스터 스탤론과 손잡은 < 록키 4 >의 주제가 ''Burning heart(2위)''를 취입하기도 했지만 더 이상의 영화 주제가를 만들지 않았다. 통산 4집 < Caught In The Game >의 좌절 이후 보컬리스트 데이브 빅클러는 건강상의 이유로 밴드를 탈퇴했고 그 후임으로 데이브와 비슷한 음색을 소유한 짐 제이미슨(Jim Jamison)을 맞이하면서 전열을 정비한 서바이버는 3곡의 히트곡을 배출한 < Vital Signs >를 1984년에 발표해 ''I can''t hold back(13위)'', 경쾌한 ''High on you(8위)'', 국내 취향의 록발라드 ''The search is over(4위)''가 모두 히트 차트에 오르면서 다시 한번 황금기를 누렸다. 다시 3년의 기다림 후에 공개된 1987년의 음반 < When Seconds Count >에선 싱글 커트된 ''Is this love(9위)''와 ''How much love(51위)''는 이들의 마지막 싱글 히트곡이 되었고 1988년에 공개한 < Too Hot To Sleep >을 마지막으로 1989년 밴드의 공식 해산을 발표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초창기 보컬리스트 데이브가 짐, 프랭키와 다시 팀을 재 결성해 현재까지 공연 위주의 활동을 하고 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무수히 많은 아레나록 밴드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져갔다. 그 중의 하나인 서바이버는 훠리너(Foreigner)나 스틱스(Styx), 나이트 레인저(Night Ranger)처럼 정교한 연주를 들려준 팀도 아니었고,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심각한 밴드도 아니었지만 서바이버의 음악을 듣는데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록음악계의 ''생존자''가 되길 원했던 서바이버의 제 2 라운드가 시작되었다. ''Eye of the tiger''가 한창 인기있던 1983년에 필자의 친척형은 서바이버의 앨범 속지에 나온 보컬리스트 데이브 빅클러의 사진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얘 눈이 진짜 호랑이 눈 같지 않냐?"
세계의 석학들이 모인 MIT 공과 대학, 가장 많이 팔린 데뷔 앨범 중 하나, 자신이 손수 제작한 기타와 이펙터, 그리고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팀워크에 의한 깨끗한 사운드. 바로 이런 것들이 1970년대 중반 미국 록음악 계에 신선한 충격을 가한 보스톤(Boston)을 가장 짧게,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하는 문구들이다. 1976년에 데뷔 음반을 발표해 록음악 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보스톤은 포리너(... 세계의 석학들이 모인 MIT 공과 대학, 가장 많이 팔린 데뷔 앨범 중 하나, 자신이 손수 제작한 기타와 이펙터, 그리고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팀워크에 의한 깨끗한 사운드. 바로 이런 것들이 1970년대 중반 미국 록음악 계에 신선한 충격을 가한 보스톤(Boston)을 가장 짧게,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하는 문구들이다. 1976년에 데뷔 음반을 발표해 록음악 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보스톤은 포리너(Foreigner), 저니(Journey), 후반기의 스틱스(Styx) 등과 함께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화려하게 수놓은 성인 취향의 하드록이 메인스트림에 정착하는데 선두적인 역할을 한 것은 물론 새로운 사운드를 창조하는데 이바지하기도 했다. 그룹 보스톤의 중심 인물은 기타리스트 톰 슐츠(Tom Scholz)다. 메사츄세츠 공과 대학(MIT)에서 석사 학위까지 받은 그는 자신의 박식한 전자 지식을 기타와 사운드 이펙터의 개념에 이식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자신만의 일렉트릭 사운드를 구현했다. 보스톤의 깔끔하고 빈틈없는 연주는 완벽 주의자인 톰 슐츠의 기타 사운드가 정의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970년대 초반 이 엘리트 청년은 지방 밴드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배리 구드루(Barry Goudreau)와 고음의 소화력이 출중한 브래드 델프(Brad Delp/보컬), 프랜 쉬한(Fran Ssheehan/베이스), 시브 하시한(Sib Hashihan/드럼)을 만나면서 보스톤의 지형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1975년에 데모 테이프를 제작해 에픽 레코드사와 정식 계약을 맺고 이듬해에 공개된 처녀작이 록의 고전으로 추앙 받는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 < Boston >이다. 기세 등등한 디스코와 펑크록의 물결 속에서 정통 록의 자존심을 지킨 이 LP에서 첫 싱글로 커트된 ’More than a feeling(5위)’을 필두로 ’Foreplay/Long time(22위)’, ’Peace of mind(38위)’가 차례로 싱글 차트를 방문해 록의 건재함을 증명해 보였다. 특히 1997년에는 현재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보이 밴드 엔 싱크(N’ Sync)가 발표한 아시아판 데뷔 앨범에서 ‘More than a feeling’을 리메이크해 실었으며, 1998년에도 라틴계 남성 3인조 댄스 보컬 그룹 노 머시(No Mercy)가 다시 한번 재해석함으로써 록과 팝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1978년에 발표된 두 번째 작품 < Don’t look back >도 록팬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들의 음악 중에서 가장 멋진 기타 리프를 선보인 앨범 타이틀 트랙 ’Don’t look back(4위)’을 비롯해 ’A man I’ll never be(31위)’와 ’Feelin’ satisfied(46위)’가 그 견인차 역할을 했다. 1집에 이어 이 음반도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오름으로써 그동안 영국 세에 밀린 아메리칸 하드록의 자존심을 회복하는데 선두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록밴드가 그러하듯 그들도 음반사와의 함수 관계는 좋지 못했다. 레코드사와의 의견 충돌 때문에 보스톤의 차기작 < Third Stage >는 < Don’t Look Back >이 탄생 한지 8년이 지난 1986년에 발표되었다. 국내에서 보스톤의 이름을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록발라드 ’Amanda’는 그들에게 유일한 넘버원의 영광을 부여한 곡이며 ’We’re ready(9위)’와 ’Can’tcha say (You believe in me)/Still in love(20위)’도 히트 차트를 누볐다. 하지만 8년이란 긴 세월은 보컬리스트인 브래드 델프와 팀의 리더 톰 슐츠만을 원년 멤버로 남겨 두고 나머지 구성원들을 보스톤으로부터 떠나게 했다. 처녀작 공개 이후 정확히 10년이 흘러 새로운 식구들을 맞이해 제작한 음반 < Third Stage >는 이전의 음반들에 비해 확실히 연륜있는 여유가 느껴지기도 한 반면 전작들에 비해 스트레이트한 질주감이 반감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로부터 다시 한번 8년이란 세월을 감내 한 보스톤은 1994년에 네 번째 앨범 < Walk On >을 내놓았지만 이번에는 철저하게 외면 당했다. 브래드 델프 대신 새로운 목소리 프랜 코스모(Fran Cosmo)를 영입해 발표한 보스톤의 4집에서는 ’I need your love’만이 고독하게 51위에 올랐다. 거칠면 거친대로, 있는 그대로, 가공하지 않은 아마추어리즘을 미덕으로 하는 1990년대의 얼터너티브 그런지 시대에 깔끔하고 깨끗한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보스톤의 프로페셔날한 사운드 사이에는 분명한 갭이 존재했었다. 현재는 새로운 음반 제작보다는 공연 위주의 활동을 통해 팬들과 교감을 나누고 있으며, 또한 자신이 발명한 기타와 이펙터를 통해 능숙한 사업 수완을 발휘하고 있다. 프로 뮤지션으로 데뷔 한지 25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 단 4장의 정규 앨범을 공개한 아메리칸 하드록의 지존 보스톤은 레코드사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신념에 따라 음반을 제작했다. 그 원초적인 힘은 음악적인 믿음을 고집하는 리더 톰 슐츠의 장인 정신에서 기인한다.
노래 : Blue Oyster Cult (블루 오이스터 컬트)
197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혈기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미국 뉴욕 출신의 밴드 블루 오이스터 컬트는 헤비메탈의 원류(原流)를 탐사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그룹이다. 그들은 1960년대 후반을 휩쓴 사이키델릭과 블루스 리바이벌에 의한 하드록 대신 로큰롤의 부기 사운드와 리프 중심의 심플하고 강력한 패턴을 들고 나왔다. 또한 사탄의 이미지를 노랫말과 라이브무대에서 재현하여 ‘헤비메탈은 악마의 음악’이라는 ... 197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혈기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미국 뉴욕 출신의 밴드 블루 오이스터 컬트는 헤비메탈의 원류(原流)를 탐사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그룹이다. 그들은 1960년대 후반을 휩쓴 사이키델릭과 블루스 리바이벌에 의한 하드록 대신 로큰롤의 부기 사운드와 리프 중심의 심플하고 강력한 패턴을 들고 나왔다. 또한 사탄의 이미지를 노랫말과 라이브무대에서 재현하여 ‘헤비메탈은 악마의 음악’이라는 공식을 정의 내렸다. 특히 레이저 광선을 이용한 공연은 블루 오이스터 컬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환각적인 분위기와 사악하고 그로데스크한 이미지가 결합한 라이브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때문에 종교단체와 보수 층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는 일부 팬들이 일시적으로 눈을 못 뜨게 되자 1976년 앨범 < Agents Of Fortutune >의 투어 이후 레이저 쇼는 중단되기도 했다. 블루 오이스터 컬트의 이러한 이미지 확립은 ‘배운’ 멤버들과 ‘평론가’ 매니저의 철저한 계산에 따른 것이다. 그룹은 1960년대 후반 잦은 멤버교체를 겪은 후 1971년 보컬리스트 에릭 블룸(Eric Bloom), 리드 기타리스트 도널드 로저(Donald Roeser), 드러머 앨버트 부처드(Albert Bouchard)와 베이시스트 조 부처드(Joe Bouchard)형제, 그리고 리듬 기타리스트 앨런 래니어(Allen Lanier)로 완벽한 진용을 갖췄다. 멤버들은 모두 대학교 동창들로 구성됐다. 여기에 록 매거진 < 크러대디(Crawdaddy) >의 기자였던 샌디 펄맨(Sandy Pearlman)이 가세, 블루 오이스터 컬트란 그룹명을 만들고 밴드의 이미지 재고에 나섰다(샌디 펄맨은 나중에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의 매니저도 맡는다). 멤버들은 충격적인 무대매너를 위해 ‘쇼크 록의 대부’ 앨리스 쿠퍼(Alice Cooper)로부터 과외(?)까지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룹이 메인 스트림의 수면위로 부상하게 된 것은 1974년의 3집 앨범 < Secret Treaties >를 통해서였다. 평론가들에 의해 블루 오이스터 컬트의 최고 작품으로 꼽히는 이 음반은 지칠 줄 모르는 공격력과 음산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메탈리카(Metallica)가 1998년 앨범 < Garage, Inc. >에서 재해석했던 ‘Astronomy''을 포함해, ‘Harvester Of Eyes'', ‘Subhuman'' 등 라이브에서 항상 연주되는 곡들이 입증한다. 당시 앨런 래니어의 여자 친구였던 ‘펑크의 대모’ 패티 스미스(Patti Smith)가 작곡한 ‘Career Of Evil''도 인상적인 트랙이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블루 오이스터 컬트의 인기행진은 1980년대 초반까지 계속됐다. 차트 12위까지 오르며 단일곡으로 최대의 성공을 거둔 ‘(Don''t fear) the reaper)''가 수록된 1976년 4집 앨범을 필두로, 그룹의 아이콘인 ‘고질라(Godzilla)''가 들어있는 1977년의 < Spectres >,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Burnin'' for you''가 담겨있는 1981년의 < Fire Of Unknown Origin > 등 완성도와 상업성을 두루 갖춘 작품들을 내놓았다. 하지만 앨버트 부처드, 앨런 래니어, 조 부처드 등 멤버들의 잇단 탈퇴는 그룹의 앞날을 불투명하게 했다. 결국 밴드는 1988년 앨런 래니어가 재가입하여 만든 11번째 정규 앨범 < Imaginos >를 마지막으로 긴 휴지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블루 오이스터 컬트는 1998년 앨범 < Heaven Forbid >를 내놓으며 자신들의 음악 본령이 살아있음을 만천하에 고했다. 10년만에 발표한 음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사운드는 여전했다. 헤비메탈이라는 장르를 논할 때 블루 오이스터 컬트는 언제나 상석(上席)에 위치하며 그들의 영향력을 과시한다. 그들이 몰고 온 사운드와 이미지는 ‘헤비메탈’ 그 자체였으며, 모든 것이었다. 허나 밴드는 역사 속으로 안치되는 것을 거부하고 아직도 끊임없이 헤비메탈의 울림을 전파하고 있다.
앨리스 쿠퍼는 현재 대부분의 헤비메탈, 익스트림 록 밴드들이 공통적으로 취하고 있는 이미지, 즉 기괴한 의상, 현란한 분장, 충격적인 무대 매너 등을 가장 먼저 시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록의 산증인’으로 평가 받고 있는 거물이다. 음악 팬들은 30년 넘게 행해진 그의 엽기 반란의 음악과 무대를 ’쇼크 록’으로 명명하고 그를 대부로 임명했다. 1980년대 전성기를 누린 헤비메탈을 시작으로, 1990년대... 앨리스 쿠퍼는 현재 대부분의 헤비메탈, 익스트림 록 밴드들이 공통적으로 취하고 있는 이미지, 즉 기괴한 의상, 현란한 분장, 충격적인 무대 매너 등을 가장 먼저 시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록의 산증인’으로 평가 받고 있는 거물이다. 음악 팬들은 30년 넘게 행해진 그의 엽기 반란의 음악과 무대를 ’쇼크 록’으로 명명하고 그를 대부로 임명했다. 1980년대 전성기를 누린 헤비메탈을 시작으로, 1990년대 데스, 고딕, 블랙, 둠 등으로 가지 치기를 한 익스트림 메탈에 이르기까지 앨리스 쿠퍼가 심어놓은 이미지 장치들은 헤비메탈의 올 라운드를 아우르고 있다. 또한 마릴린 맨슨으로 대표되는 인더스트리얼도 엘리스 쿠퍼의 편린들이다. 1948년 2월 4일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난 앨리스 쿠퍼(본명: Vincent Furnier)는 고교시절 친구들과 함께 나즈(Nazz)라는 스쿨밴드를 결성하며 거친 록의 세계에 문을 두드렸다. 1968년 앨리스 쿠퍼로 개명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밴드명으로 내걸고 쇼크 록의 오프닝을 알렸다. 음악 자체가 파격적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이미지와 행동거지는 파격을 넘어서 충격적이었다. 까마귀를 연상시키는 검은 분장을 눈자위 가득 칠하고 영적인 듯한 행동을 일삼았다. 이는 일부 대중에게 역겨움을 이끌어 내었지만 동시에 수 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어내며 엽기와 극단이 록의 중추적인 흐름으로 이끌어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엘리스 쿠퍼는 1969년 레이블을 통해 발표한 데뷔작 부터 1973년 7집 에 이르는 기간동안 쇼크 록의 제왕으로서 그 본분을 충실히 했다. ’I’m eighteen’, ’Under my wheels’, ’Elected’, ’No more mr. nice guy’, ’Teenage lament ’74’ 등 많은 하드 록 히트곡들을 쏘아올렸고, 1971년 투어로 대표되는 극단적인 공연 모습을 통해 전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마녀가 자신의 뒤를 이으라고 하는 요상한 꿈을 꾼 것으로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만큼 그의 행동은 주술성이 강한 것이었다. 샤머니스트, 또는 ’악령의 전도사’와 같은 단어가 매우 잘 어울렸다. 공연에서는 누런 얼룩 구렁이와 입을 맞추고, 목을 매는 등 갖은 엽기 행각은 절정에 달했다. 1975년 부터 솔로 뮤지션으로 전향한 그는 강렬한 록 밴드의 프런트맨에서 인간미를 겸비한 싱어 송 라이터로 파격 변신을 했다. 당시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고 있기도 했던 그는 전성기 시절에 비해 음악적으로 평가절하 되었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 선보이기 시작한 ’You & me’, ’I never cry’, ’How you gonna see me now’ 등 팝에 가까운 발라드 곡들로 국내에도 많은 팬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80년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잠시동안의 휴지기 이후 앨리스 쿠퍼는 이전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다시금 본령을 회복했다. 1986년 작품 로 재기에 성공한 그는 조 새트리아니, 롭 좀비, 슬래시 등 많은 후배 뮤지션들과 조우하며 거장의 면모를 과시했고, 1994년 발표한 컨셉 앨범 등에서 특유의 개성 넘치는 창작력을 발휘하며 현재까지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고깃덩어리’라는 뜻의 예명처럼 거구의 몸집과 풍부한 성량을 자랑하는 미트 로프는 우리에게 1977년의 앨범 < Bat Out Of Hell >, 그리고 그 속편격인 1993년의 < Bat Out Of Hell Ⅱ: Back Into Hell >로 널리 알려진 팝 록 뮤지션이다. 곡은 1993년 앨범에서 발표되어 전미 차트 정상에 오른 싱글 ‘I’d do anything for love(but I won’t do... ‘고깃덩어리’라는 뜻의 예명처럼 거구의 몸집과 풍부한 성량을 자랑하는 미트 로프는 우리에게 1977년의 앨범 < Bat Out Of Hell >, 그리고 그 속편격인 1993년의 < Bat Out Of Hell Ⅱ: Back Into Hell >로 널리 알려진 팝 록 뮤지션이다. 곡은 1993년 앨범에서 발표되어 전미 차트 정상에 오른 싱글 ‘I’d do anything for love(but I won’t do that)’가 유명하다. 1946년 1월22일 미국 텍사스 달라스 태생으로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하다가 음악의 길을 선택, 1967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팝콘 비자드’라는 이름의 밴드로 쇼 비즈니스계에 발을 내디뎠다. 본명은 마빈 리 어데이(Marvin Lee Aday)이고 1984년 마이클 어데이로 개명했지만 우량아였던 탓에 아버지가 불렀던 애칭 미트 로프로 예명을 취했다. 밴드가 해산한 뒤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시작으로 영화, TV의 배우로 활동을 넓히게 된 그는 브로드웨이 데뷔작 < 헤어 >에 출연하며 순회공연을 하던 중 스토니(Stoney)라는 이름의 뮤지션을 만났다. 그와 두 번째 밴드 ‘스토니 앤 미트 로프’를 결성해 데뷔 앨범을 1971년 선보였고, 거기서의 싱글 ‘What you see is what you get’은 첫 차트진출 곡이 되었다(싱글 차트 71위) 이후 일련의 뮤지컬에 출연한 것이 전환이 되어 그의 음악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짐 스타인먼(Jim Steinman)을 뮤지컬 < More Than You Deserve > 때 만나게 된다. 그가 곡을 쓴 미트 로프의 앨범 < Bat Out Of hell >은 1977년에 발표되어 그를 최고 스타의 자리로 올려놓았다. 여기서는 빌보드 싱글 11위를 차지한 ‘Two out of three ain’t bad’을 비롯해 ‘Paradise by dashboard light’(39위) ‘You took the words right out of my mouth’(39위) 등의 히트곡이 나왔고 앨범은 미국에서만 1400만장이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영국에서는 15년이 넘게 앨범차트에 머물러 가장 오랫동안 차트에 머문 앨범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앨범의 스매시 히트는 부담으로 작용, 이후의 작품들은 부진을 면치 못했다. 1981년의 앨범 < Dead Ringer >, 1985년의 < Bad Attitude >, 1986년의 < Blind Before I Stop >, 1987년의 라이브 < Meat Loaf Live >는 별반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했고 미트 로프는 영화 쪽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가 다시 음악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때는 전성기로부터 15년 정도가 흐른 1993년에 앨범 < Bat Out Of Hell Ⅱ: Back Into Hell >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싱글 ‘I’d do anything for love(but I won’t do that)’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그에게 생애 첫 싱글 차트 정상의 영광을 안겨주었으며 앨범도 차트 정상을 호령하며 500만장의 판매고를 수립했다. 그와 짐 스타인먼이 모두 존경해마지 않는 바그너(Wagner) 식의 웅장하고 드라마틱한 음악요소들과 < 미녀와 야수 > < 엘리펀트 맨 > < 터미네이터 > 등의 영화에 기초한 싱글의 뮤직비디오 역시 화제를 불러 모았다. 후속 싱글 ‘Rock and roll dream come through’(13위), 긴 제목의 ‘Objects in the rear view mirror may appear closer than they are(백미러의 물체는 실제보다 가까이 보인다)’(38위)도 호응을 얻는 화려한 재기였다. 재기 여파를 타고 2년 뒤인 1995년에 다시 앨범 < Welcome To The Neighborhood >를 내놓았다. 여성 작곡가 다이안 워렌(Dianne Warren)이 쓴, 전작과 유사한 느낌을 준 록발라드 ‘I’d lie for you’(13위)로 저력을 발휘했지만 그것으로 다시 도래한 스타덤은 끝이었다. 2003년, 8년 만의 스튜디오 앨범인 < Couldn’t Have Said It Better >을 내놓고 다시 한번의 영광을 꿈꾸었지만 세인의 관심에서 이미 멀어진 상태였다. 그는 1994년과 1996년 내한한 바 있다. < Discography > 1971 Stoney & Meat Loaf 1977 Bat out of Hell 1981 Dead Ringer 1985 Bad Attitude 1986 Blind Before I Stop 1987 Live 1993 Bat out of Hell II: Back Into Hell 1995 Welcome to the Neighborhood 2003 Couldn’t Have Said It Better
노래 : Ted Nugent (테드 뉴전트)
노래 : Beck (벡,Beck David Campbell / Beck Hansen)
< Family Line > 데이빗 캠벨 : 벡의 아버지로 크래커, 에어로스미스, 그린 데이 같은 밴드들의 스트링을 어레인지하기도 했던 블루그래스 뮤지션. 벡의 싱글 < Jack-Ass >의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비비 한센 : 한마디로 쿨(Cool!)하다고 할 수 있는 그의 어머니로 13살에 팝 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창작 집단 워홀 수퍼스타의 최연소 멤버였고, 배우였으며, 레스토랑의 오너이다. 채닝 한센 ... < Family Line > 데이빗 캠벨 : 벡의 아버지로 크래커, 에어로스미스, 그린 데이 같은 밴드들의 스트링을 어레인지하기도 했던 블루그래스 뮤지션. 벡의 싱글 < Jack-Ass >의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비비 한센 : 한마디로 쿨(Cool!)하다고 할 수 있는 그의 어머니로 13살에 팝 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창작 집단 워홀 수퍼스타의 최연소 멤버였고, 배우였으며, 레스토랑의 오너이다. 채닝 한센 : 벡의 동생. 3기 플럭서스의 아티스트이다. 션 카릴로 : 벡의 새아버지로 비비와 함께 LA의 레스토랑을 운영하는데, 1990년대 초반 벡은 그곳에서 종종 연주를 하곤 했다. 션 역시 예술가라고 한다. 알 한센 : 벡의 외할아버지로 플럭서스 운동의 선구자였다. 그는 콜라쥬 작업과 말 많았던 ‘Yoko Ono Piano Drop''이란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벡은 그의 할아버지의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알 역시 < Oderay >앨범의 부클릿에 작품을 싣기도 했다. 벡과 알 한센의 예술세계에 대한 책도 나왔다고 한다. 오드리 한센 : 배우, 모델, 시인이었던 벡의 외할머니. 이러한 핏줄의 흐름을 이어받아 ‘천재는 타고난다? 혹은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이 두가지를 모두 만족시키는 벡은 여전히 ?긍정적인 의미에서- 독야청청, 유아독존의 모습을 고수하고 있는 1990년대 최고의 엔터테이너이다. 1970년 태어난 벡은 그 화려한 혈통의 집안에서 부모의 이혼 외에는 그다지 큰 일 저지르는 것업이 성장했다. 하기야 그런 예술적 기운(?)이 혁혁한 집안에서 무슨 짓을 한들 놀라기야 했겠느냐마는.. 벡이 성장하던 1970년대, 1980년대 초반 LA에서는 펑크의 열풍이 대단했다. 그의 어머니 비비는 펑크 씬과 교류가 있었고, 자신의 집을 그들을 위해 개방하기도 했지만 정작 벡의 관심을 끌은 것은 델타 블루스와 포크였다. 특히 우디 거스리, 블라인드 윌리 존슨, 프레드 맥도웰, 미시시피 존 허트 등이 그에게 영향을 준 아티스트들이고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며 뉴욕의 이스트 사이드로 간다. 당시 뉴욕의 하드코어 씬은 반 포크적인 움직임이 강했는데, 포크와 그 가사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으려는 시도에 벡은 큰 영향을 받았다. 이곳 저곳을 전전하던 벡은 다시 LA로 돌아와 낮에는 비디오 가게 점원 등 여러 변변치 않은 일을 하며, 밤에는 그가 만든 곡들을 가지고 여러 펑크 클럽에서 밴드들의 공연 막간을 이용해 한 곡씩이지만 자신의 공연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오늘날 그의 음악 사운드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홈 레코딩 솜씨를 처음 발휘하며 < Folk/Noise >라는 데모를 만든다. 그리고 1992년, 지역의 힙합 프로듀서인 동료 칼 스티븐슨와 의기 투합하여 후에 1990년도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킨 곡 ‘Loser’를 만든다. 이 곡은 창고에서 1년 가량 썩고 있다가 그의 음악적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작은 인디레이블 ‘봉로드’에서 12인치 한정 싱글로 발매된다. 처음 500장이 한정 발매된 이 싱글은 한 컬리지 방송곡의 엄청난 방송 공세를 힙입어 얼마 가지 않아 미 전역의 컬리지, 모던록 방송국들을 완전히 장악하게 됐다. 벡은 이러한 갑작스런 성공에 당황했지만, 마이너에서의 독자적 활동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메이저사와 계약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 그는 곧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그리고 가장 성공한 패배자(Loser)의 길로 들어선다. 얼터너티브와 모던록, 칼리지 록이 판치던 1990년 초 당시 록 씬은 이들과 유사한 사운드를 지닌 온갖 밴드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초기 사운드를 만들어낸 이들의 아류들이 판치고, 또 그들의 아류들이 생성되며 그야말로 그게 그거인 정형화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 나타난 벡은 어찌 보면 쓰레기 같기도 했던 ‘Loser’ 한 곡으로 가장 독창적이고 영향력 있는 젊은이의 자리를 차지했다. 당시 들고 나타난 벡의 음악이 도대체 얼마나 독창적이고 무엇이 새로운 것이었을까. 벡의 음악에서 그가 차용한 샘플링과 덕지덕지 씌워놓은 조각들만을 보고 혹자들은 그를 난잡한 콜라주의 대가 정도로만 인식했지만 그가 만들어 놓은 콜라주 조각들은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충분한 오리지낼러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그가 왜 각종 시상식과 그해 말 음악지들의 리스트들의 우위를 차지한 것에 대한 답일 것이다. 5년 전 ‘I''m a loser baby, why don''t you kill me''라고 웅얼대며 어슬렁거리며 나타난 그가 한 일 중에 가장 대단한 것은 그의 음악이 어땠든 간에 그가 만들어낸 센세이션이다. 그리고 그 센세이션에 휘둘리지 않으며 시대의 패배자에서 성공한 패배자로의 전환을 이루어 준 < Odelay >는 그가 그저 시류를 타고 한번의 반짝 성공으로 물러갈 멍청한 낙오자가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준다. 절대 ‘Loser’가 아니었던 벡이 단지 엔터테이너로서 만든 음악을 가지고 사람들이 벡을 20세기의 최고 성공한 루저의 자리에 앉혔다는 아이러니와 함께. 자신의 외할아버지인 알 한센의 영향인지 몰라도 벡의 작업들은 레디메이드를 이용한 난자하고 다소 지저분하기도 한 콜라주의 형상을 띠고 있다. 이제 벡 음악적 요소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다른 데서 잘라다 이어 붙이는 ‘패스티쉬’, 이것저것을 섞어 놓는 ‘믹스&매치’, 겹겹이 쌓아놓는 ‘레이어드’ 등은 자칫 그를 영악한 뮤지션으로 몰락시킬 수도 있었던 요소들이지만 벡은 절대 영악을 넘어선 천재적-벡에게 천재적이라는 말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인 머리로 이것들을 요소로 한 음악을 ‘창작’해냈고, 힙합 비트에 랩을 씌우는 그의 초기의 작업은 그것이 익숙해짐에 따라 점점 더 기발한 장르의 혼합을 이루어내고 있다. 베커델릭(Becadelic)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오히려 벡의 오리지낼러티처럼 되어버린 백인 젊은이의 서툰 랩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고, 그가 백인이기 때문에-그것도 어느 정도 외모가 받쳐주는- 여기저기서 뜯어온 힙합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는 얘기는 이제 사라진 지 오래다. 공연에서 보여주는 그의 엔터테이너로서의 정성스런 모습, 음악과 마찬가지로 빈티지를 조각조각 이어놓은 듯한 패셔너블한 의상들,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했던 재기 있는 유머들은 그것만으로도 우리시대에 영향을 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화려하고 열정적인 댄스와 예상을 뛰어넘는 훌륭한 가창력까지. 그리고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자신의 세계를 변화시켜가는 벡에게 이제 1990년대의 엔터테이너, 총아라는 단어를 붙여주는 것에 대해 2, 3년 전과 같은 조금의 망설임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는 똑같은 것을 반복하며 우려먹고 있지도 않으며, 그의 카피는 오리지낼러티를 창조해냈으며, 이 모든 것이 이제는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항상 스타를 죽이고 살리는 것은 대중들이 아니었던가. 그의 엔터테이너로서의 스타성이 대중들에 의해 입증된 이제 다시 그의 음악을 분석하고 파헤치는 것보다 더 적절한 것은, 도대체 벡은 어떤 사람인가라는 것에 대한 궁금증을 푸는 일이 아닐까 싶다.
블루스 락 기타 연주자, 가수 블루스 락 기타 연주자, 가수
1996년 브릿팝(Brit Pop)의 홍수 속에서 등장한 밴드. 영화감독인 아버지 로이 볼팅(Roy Boulting)과 배우인 어머니 해일리 밀스(Hayley Mills)의 넘치는 재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크리스피언 밀스가 1988년 영국 서리(Surrey)의 리치몬드 컬리지에서 알론자 베번을 만나며 구상한 그룹이다. 오브젝트 오브 디자이어(Object of Desire)로 시작된 밴드의 역사는 이후 두 개의 밴... 1996년 브릿팝(Brit Pop)의 홍수 속에서 등장한 밴드. 영화감독인 아버지 로이 볼팅(Roy Boulting)과 배우인 어머니 해일리 밀스(Hayley Mills)의 넘치는 재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크리스피언 밀스가 1988년 영국 서리(Surrey)의 리치몬드 컬리지에서 알론자 베번을 만나며 구상한 그룹이다. 오브젝트 오브 디자이어(Object of Desire)로 시작된 밴드의 역사는 이후 두 개의 밴드를 더 거치며 와해되기에 이른다. 크리스피언 밀스는 이런 혼란 속에서 인도로 무전여행을 떠나게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1993년에 케이스(The Kays)를 결성한다. 이들은 9세기경 막강한 권력으로 인도를 지배했던 군주 쿨라 세카라(Kula Sekhara)의 이름에서 따온 쿨라 셰이커로 밴드 명을 고치고 4명의 라인업으로 출발했다. 맨체스터의 시티뮤직 비즈니스 페스티벌(The City Music Business Festival)에서 우승하며 콜럼비아와 계약했고, 마침내 대망의 데뷔작 < K >를 발표한다. 그레이트풀 데드(Grateful Dead)의 제리 가르시아(Jerry Garcia)에게 바치는 곡인 ’Grateful when you’re dead/Jerry was there’와 ‘Hey Dude’는 넘실대는 건반과 몽롱하고 환각적인 사운드로 1960년대의 사이키델릭(Psychedelic)의 색채를 그대로 연출해내며 듣는 이로 하여금 무아지경의 최면상태에 빠지게 한다. 산스크리트어로 노래하고있는 ‘Govinda’와 “진실”이라는 의미를 담고있는 ’Tattva’는 < K >가 말하고자 하는 음악적인 중심이 인도의 신비주의로 향해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동양적인 감성은 블러(Blur)와 오아시스(Oasis) 이후의 고만고만한 브릿팝 밴드들과 쿨라 셰이커를 구분 짓는 토대가 된다. 1997년의 브릿 어워즈(Brit Awards)는 최우수 신인상(Best Newcomers)을 쿨라 셰이커에게 안겨주었고 < I know what you did last Summer -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일을 알고 있다 > 사운드 트랙에도 ‘Hush’로 참여하였다. 이 곡은 조 사우스(Joe South)의 원곡을 딥 퍼플(Deep Purple)이 리메이크하였고 다시 쿨라 셰이커가 불러서 90년대 신세대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크리스피언 밀스는 한 인터뷰에서 ‘갈고리 십자문양’에 대한 발언으로 대중의 외면을 받게되는데 인도에서는 수 천년동안 평화의 상징으로 여겨진 십자문양이 나치시대의 상징물이라는 점을 안타까워한데서 오해가 발생한 것이다. 결국 크리스피언 밀스는 신(新)나치주의자로 몰리며 다시 인도 행을 감행해야만했다.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와 엘리스 쿠퍼(Alice Cooper), 키스(Kiss)의 프로듀서였던 밥 에즈린(Bob Ezrin)이 지휘한 쿨라 셰이커의 두 번째 앨범은 3년간의 긴 공백을 깨고 1999년에야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 Peasants, Pigs & Astronauts >는 더욱더 인도사상에 심취한 곡들로 전작만큼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지만 ‘Mystical machine gun’, ’Sound of drums’, ’Shower your love’등이 매니아들로부터 애청되었다. 20세기가 끝날 무렵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밴드가 되 있을 거라고 했던 쿨라 셰이커는 1999년 해체되었지만 첫 번째 작품인 < K >는 오아시스의 < Definitely Maybe >이후 영국 록 역사상 가장 빨리 팔린 데뷔작으로 기록되어있다.
모든 사람들은 기나긴 인생을 항해하면서 좋든 싫든 호사다마(好事多魔)와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순간을 맞는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못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것을 슬기롭고 현명하게 대처해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절호의 기회로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It’s a heartache’와 ’Total eclipse of the heart’, ’Holding out for... 모든 사람들은 기나긴 인생을 항해하면서 좋든 싫든 호사다마(好事多魔)와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순간을 맞는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못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것을 슬기롭고 현명하게 대처해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절호의 기회로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It’s a heartache’와 ’Total eclipse of the heart’, ’Holding out for a hero’ 등으로 우리나라에서 꾸준한 리퀘스트를 받는 보니 타일러(Bonnie Tyler)는 자신에게 주어진 불리한 여건을 자신만의 장점으로 승화시킨 불사조 같은 인물이다. 1970년대 중반 목에 생긴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이후 허스키한 음색을 소유하게 된 보니 타일러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Bette Davis eyes’로 유명한 킴 칸스(Kim Carnes)와 함께 대표적인 ’여성판 로드 스튜어트’로서 당대를 풍미했다. 1953년 6월 8일 영국 연방인 웨일즈에서 게이너 홉킨스(Gaynor Hopkins)라는 본명으로 태어난 그녀의 음악은 1970년대와 1980년대가 확연하게 구별된다. ’It’s a heartache’로 대표되는 어쿠스틱 스타일이 두드러진 성인 취향의 팝이 그녀의 1970년대를 정의했다면, 미트 로프(Meat Loaf)의 음반 제작으로 유명한 작곡자 겸 제작자인 짐 스타인만(Jim Steinman)과 손잡은 1980년대 이후부터는 오페라 형식의 웅장하고 화려한 곡들이 그녀의 후반기를 책임졌다. 1978년, 빌보드 싱글 차트 3위를 기록한 타일러의 ’It’s a heartache’는 국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80년대 보니 타일러의 음악과는 달리 경쾌한 전형적 어덜트 컨템포러리 스타일인 이 곡은 그녀의 두 번째 정규 앨범의 타이틀 트랙이었다. 이후 전자 음원이 없는 포크와 컨트리 성향의 음반을 공개했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80년대 초반에 음반사를 RCA에서 콜롬비아로 옮겨 회심의 역작을 구상하면서 제2의 도약을 준비한다. 1983년 세상에 공개된 < Faster Than The Speed Of Night >은 보니 타일러에게 새로운 음악 인생을 열어 준 걸작 앨범이다. 그녀를 대표하는 ’Total eclipse of the heart’는 1983년 10월 무려 4주 동안이나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뒤이어 후속곡 ’Take me back’도 46위를 기록하면서 1984년에 거행된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가장 유력한 여자 가수상 후보로 예견되었으나 그녀는 ’Flashdance.....what a feeling’의 주인공 아이린 카라(Irene Cara)에게 영광의 트로피를 양보(?)했다. ’Total eclipse of the heart’가 한 달 동안 싱글 차트 1위를 지키고 있을 때 바로 그 밑에서 3주간이나 2위를 지킨 노래도 짐 스타인만이 작곡하고 프로듀싱 한 에어 서플라이(Air Supply)의 ’Making love out of nothing at all’이었다. 그 정도로 당시 짐 스타인만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만큼 기세가 등등했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에 2년이 더 지난 1995년에는 여성 댄스 팝 가수 니키 프렌치(Nicki French)가 ’Total eclipse of the heart’를 댄스 스타일로 커버해 다시 한번 싱글 차트 2위의 자리에 올려놓음으로써 이 곡이 전천후 명곡임을 재확인시켰다. 1984년, 미 전역을 춤바다의 물결로 침몰시킨 영화 < 푸트루스 >의 사운드트랙에는 강력한 보컬과 드럼 연주가 휘몰아치는 ’Holding out for a hero(34위)’가 수록되어 그녀의 지속적인 인기를 유지시켜 주었고, 1920년대 SF 영화를 복원해 1984년에 재개봉한 < 메트로폴리스 >에 삽입된 ’Here she comes(76위)’ 같은 영화 수록곡들을 취입하면서 비교적 여유 있는 한 해를 보냈다. 1986년에는 < Secret Dreams & Forbidden Fire >로 다시 한번 도약을 시도했지만 3년 전과 같은 센세이셔널한 결과를 재현하는데는 실패했다. 이전의 앨범 < Faster Than The Speed Of Night >처럼 짐 스타인만 식의 장대한 스케일이 반복되었으며 대부분 곡들의 길이도 5분대를 훌쩍 뛰어 넘었기 때문에 싱글로 커트 하기엔 약간 무리가 따랐다. 팝 메탈의 기폭제 역할을 한 본 조비(Bon Jovi)의 ’You give love a bad name’(1986년 11월 1위)과 비슷한 멜로디를 가진 ’If you were a woman (And I was a man)’만이 1986년 77위를 끝으로 추락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이 곡은 1990년대 초반에 국내 자동차 광고의 배경 음악으로 쓰인바 있어 우리 귀에 그다지 낯설지 않다. 1970년대 후반 ’It’s a heartache’의 대대적인 인기로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국제 가요제에도 참가해 그 특유의 거친 허스키 음색을 직접 들려준 이 금발의 미녀는 천재 아티스트 마이크 올드필드(Mike Oldfield)의 1987년 음반 < Islands >에 게스트 보컬로 초청되어 그녀만의 보컬 전율을 다시 한번 과시하기도 했다. 보니 타일러는 1990년대 후반까지 꾸준하게 신보를 발표했지만 그 작품들은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한 채 금새 잊혀졌다. 하지만 ‘It’s a heartache’와 ‘Total eclipse of the heart’의 메아리는 아직까지 우리의 뇌리에 남아 그녀의 노래들처럼 격정적인 환희와 감동을 전한다.
스캔들은 데뷔 전부터 인디 차트를 뒤흔들고 해외 공연도 적극적으로 실시하는 등 경이적인 활동을 해왔다. 2009년 말에는 레코드 대상 신인상을 수상하고, 2012 년 3 월에는 스캔들 결성으로부터 5 년 7 개월 만에 일본 부도칸 단독공연을 개최하여 걸즈 밴드로는 가장 빠른 기록을 세웠다. 같은 해 9 월에 발매 된 앨범은 걸스 밴드 사상 최초로 데뷔 앨범부터 4 작품이 연속으로 오리콘 탑5에 진입하는 쾌거를 이... 스캔들은 데뷔 전부터 인디 차트를 뒤흔들고 해외 공연도 적극적으로 실시하는 등 경이적인 활동을 해왔다. 2009년 말에는 레코드 대상 신인상을 수상하고, 2012 년 3 월에는 스캔들 결성으로부터 5 년 7 개월 만에 일본 부도칸 단독공연을 개최하여 걸즈 밴드로는 가장 빠른 기록을 세웠다. 같은 해 9 월에 발매 된 앨범은 걸스 밴드 사상 최초로 데뷔 앨범부터 4 작품이 연속으로 오리콘 탑5에 진입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하였다.
노래 : Patti Smith Group (패티 스미스 그룹)
멤버 : Patti Smith, Ivan Kral 멤버 : Patti Smith, Ivan Kral
세계적으로 루 리드만큼 불우시대를 오랫동안 겪은 록가수도 없을 것이다. 영화 < 트레인스포팅 >에 삽입된 곡 ’완벽한 날(Perfect day)’이 없었다면 팝 음악팬들이라도 그의 존재를 모르고 넘어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곡을 계기로 갑작스레 루 리드의 음악은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난해 히트한 우리 영화 < 접속 >에 ’창백한 푸른 눈동자(Pale blue eyes)’라는 곡이 깔리면서 그에 대한 관심은 폭발... 세계적으로 루 리드만큼 불우시대를 오랫동안 겪은 록가수도 없을 것이다. 영화 < 트레인스포팅 >에 삽입된 곡 ’완벽한 날(Perfect day)’이 없었다면 팝 음악팬들이라도 그의 존재를 모르고 넘어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곡을 계기로 갑작스레 루 리드의 음악은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난해 히트한 우리 영화 < 접속 >에 ’창백한 푸른 눈동자(Pale blue eyes)’라는 곡이 깔리면서 그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으로 변했다. 이 곡은 그가 이끌던 1960년대 전설적인 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 시절에 부른 노래다. 발표된 지 자그마치 30년만에 비로소 팬들의 귀에 ‘접속’된 셈이다. 솔로로 독립해 내놓은 곡 ’완벽한 날’도 출반 시점은 1972년. 잔잔한 반주나 힘을 빼고 읊조리듯 부르는 것도 매력적이고 특히 곡의 무드가 만점이다. 그러면 왜 과거 팝팬들은 이 곡의 진가를 몰랐는지 궁금해진다. 지금 봐선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각 시대의 정서 토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커다란 편차를 드러낸다. 이를테면 1970년대 인기곡과 1990년대 히트곡은 느낌이 다르다는 얘기다. 올드 팝팬들은 밝고 약간은 건조한 노래를 즐겨 들었다. 그런 기조에서 볼 때 루 리드의 음악은 다분히 어둡고 습한 분위기였다. 느낌부터 너무 시대를 앞서 갔다고 할 수 있다. 그와 벨벳 언더그라운드에 늘 따라붙었던 수식어가 이른바 ‘아방가르드(전위)’ 였다. 이 말은 역으로 다수의 음악대중들과는 크게 유리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루 리드의 음악은 역사적 기록과 록평론가들 사이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았다. 그가 그룹과 솔로 시절에 발표한 1960, 1970년대 앨범들 가운데 적어도 서너장은 어김없이 록역사의 명반 리스트에 오른다. 록음악 잡지 < 롤링스톤 >은 ‘데이비드 보위, 브라이언 이노, 패티 스미스를 비롯한 뉴욕 펑커들, 카스, 크리시 하인드, 뉴 오더, U2, REM 그리고 소닉 유스 등이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점호를 받아야 할 아티스트들’이라고 했다. 모두가 근래의 모던 록에 심취한 팬들로부터 환영받는 인물들이다. 때문에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루 리드는 ‘모던 록의 시조’로까지 추앙된다. 강산이 두세번 바뀌고서야 인정받을 때까지 그는 말도 못할 고생을 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깨지고 나서는 레코드사의 외면으로 음반조차 내지 못한 채 방황을 거듭했다. 평소 루 리드의 팬이었다는 데이비드 보위가 적극적으로 도움을 펼치면서 가까스로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 앨범이 ’완벽한 날’이 수록된 걸작 < 트랜스포머(Transformer) >. ’완벽한 날’은 지난해 엘튼 존, 보노 등 30명의 록스타들이 부른 새 노래로 재탄생했다. 음반의 수익금은 세계의 영세가정 어린이를 위한 자선단체에 기부되었다. 이 곡을 동료들과 취입하던 날 루 리드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아마 ‘완벽한 날’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그를 보면서 좋은 음악은 언젠가는 통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한다.
아마도 록 역사상 프랭크 자파(Frank Zappa)와 더불어 가장 기괴하고 전위적인 록을 시도한 인물이 캡틴 비프하트(Captain Beefheart)일 것이다. 그와 백업 밴드였던 매직 밴드는 전원 가명을 쓰면서 무질서의 극을 달린 일련의 실험작품을 내놓아 대중적으로는 차가운 심판을 받았으나 비평과 록 역사로부터는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그룹은 실제로 프랭크 자파와 깊은 인연을 맺어 세상에 대해 뒤틀린 감정을... 아마도 록 역사상 프랭크 자파(Frank Zappa)와 더불어 가장 기괴하고 전위적인 록을 시도한 인물이 캡틴 비프하트(Captain Beefheart)일 것이다. 그와 백업 밴드였던 매직 밴드는 전원 가명을 쓰면서 무질서의 극을 달린 일련의 실험작품을 내놓아 대중적으로는 차가운 심판을 받았으나 비평과 록 역사로부터는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그룹은 실제로 프랭크 자파와 깊은 인연을 맺어 세상에 대해 뒤틀린 감정을 지닌 돈 반 블리에트(Don Van Vliet)더러 ‘마음에 고기가 있다’는 뜻으로 비프하트라는 별명을 붙여준 인물이 프랭크 자파였으며, 그는 실제로 캡틴 비프하트 앨범을 프로듀스해주기도 했다. 화음을 거부한 불규칙한 리듬, 초현실적이고 난해한 가사가 생명인 캡틴 비프하트와 매직 밴드의 음악은 하울링 울프(Howlin’ Wolf)의 울부짖는 보컬이 연상되는 블루스, 아방가르드 재즈 그리고 현대 클래식이 버무려진 전형적인 ‘해체 록’의 양상을 띠었다. 그리하여 대중성을 잃는 대신 후대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 일련의 실험과 파격주의자들인 데보(Devo), 페레 우부(Pere Ubu), 퍼블릭 이미지 리미티트(Public Image Ltd), 토킹 헤즈(Talking Heads)가 그 영향을 받은 밴드로 거론되곤 한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돈 반 블리에트는 4살 때 포르투칼 출신 조각가 아우거스티뇨 로드리게즈에게 발탁되어 8년 간 TV 쇼프로에서 활동하면서 두각을 나타낸 신동 조각가였다. 하지만 부모는 그가 예술을 전공하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캘리포니아의 사막지역인 랑카스타로 이주했고 그곳 모자브 사막에서 음악에 흥미를 붙인 그는 스스로 하모니카와 색스폰 연주를 터득했고 곧 프랭크 자파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자파가 로스앤젤레스로 떠나 거기서 밴드인 마더스 오브 인벤션(Mother Of Invention)을 결성해 함께 음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자 돈 반 블리에트는 1964년 랑카스타에서 매직 밴드를 조직했다. 드러머 존 프렌치(John French)와 힘을 합친 그는 곧 기타리스트 제프 코튼(Jeff Cotton), 베이스 마크 보스톤(Mark Boston)을 충원했으며 마지막으로 기타리스트 빌 하클로드(Bill Harkleroad)가 들어와 고전적인 매직 밴드의 라인업이 완성된다. 이들은 당시로 볼 때는 엉뚱하게도 캡틴 비프하트(돈 반 블리에트), 주트 혼 롤로(Zoot Horn Rollo, 빌 하클로드), 안테네 지미 세멘스(Antennae Jimmy Semens, 제프 코튼), 로케트 모튼(Rockette Morton, 마크 보스톤), 드럼보(Drumbo, 존 프렌치) 등 모두 가명을 내걸어 결성 때부터 ‘비정상적인 음악’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메이저 레이블 A&M과 계약을 체결, 1964년 지역에서 나름대로 어필한 싱글 ‘Diddy wah diddy’를 발표했지만 사장 제리 모스(Jerry Moss)가 데모 테입에 대해 ‘너무 부정적’이란 평가를 내렸고 그러자 캡틴 비트하트는 인디 부다(Buddah)에서 앨범 < Safe As Milk >를 내놓았다. 이 무렵 멤버로는 나중 블루스 컨트리 기타의 거장이 된 라이 쿠더(Ry Cooder)가 있었지만 그는 1967년 몬터리 팝 페스티벌을 앞두고 갑작스레 그룹을 탈퇴해버렸다. 역시 인디인 불루 툼(Blue Thumb) 레이블로 옮긴 뒤 앨범 < Strictly Personal >이 나왔지만 사장이자 프로듀서인 밥 크래스나우(Bob Krasnow)가 밴드가 유럽을 공연하던 틈을 타 발표한 것이라서 캡틴 비프하트의 분노를 샀다. 상당한 피해의식을 안고 그는 로스앤젤레스 근처의 동떨어진 집으로 옮겼고, 여기서 다시 만난 스트레이트(Straight) 레이블의 사장 프랭크 자파로부터 앨범제작의 전권을 캡틴 비프하트에게 약속 받고 앨범을 만들게 된다. 프랭크 자파의 프로듀스 아래 제작된 1969년 < Trout Mask Replica >와 이듬해 < Lick My Decals Off >는 비평적 찬사를 획득하며 그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1972년 잇따라 발표한 약간은 상업적 분위기를 띤 두 장의 앨범 < The Spotlight Kid >와 < Clear Spot > 역시 평단의 찬사는 계속되었으며 매니아확보에도 성공해 앨범은 빌보드 차트에 각각 131위, 191위에 오르기도 했다. 록 평론가들은 대부분 이 시기까지 캡틴 비프하트가 낸 앨범들을 실험성과 예술성 측면에서 수작으로 꼽는다. 2년 뒤 다시 소속사를 메이저 머큐리(Mercury)로 옮겨 한층 재래식 블루스에 가까워진 앨범 < Unconditionally Guaranteed >와 < Bluejeans And Moonbeams >를 연속 발표해 공연까지 나섰으나 그룹은 와해되었다. 이 시기에 캡틴 비프하트는 임시로 그룹 프랭크 자파 앤 더 마더스 오브 인벤션의 보컬로 활동했고 그 공작(共作)인 앨범 < Bongo Fury >는 차트 66위에 오르는 호조를 보였다. 1978년에는 워너브라더스와 계약을 맺어 < Trout Mask Replica >의 충격을 다시 불러내는 듯하다는 평가를 받은 앨범 < Shiny Beast(Bat Chain Puller) >를 선보였다. 앨범은 차트에 오르지 못할 만큼 참패했지만 세월이 흘러 1995년 < 스핀 >지가 선정한 ‘최우수 얼터너티브 록 앨범 100선’에 당당히 포함되는 영예를 얻기도 했다. 이후 공연에서 당시 유행하던 뉴 웨이브 사운드를 도입하여 미국과 유럽 순회공연에서 호응을 얻었으며 심지어 1980년 11월에는 유명 TV 프로 <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에 출연, 충만한 기분을 만끽했다. 이 무렵의 앨범인 < Doc At The Radar Station >과 1982년 < Ice Cream For Crow >은 버진 산하의 레이블에서 발표되었다. 하지만 캡틴 비프하트는 < Ice Cream For Crow >을 끝으로 음악계와 완전 작별을 고하고 음악적 고향이라 할 모자브 사막으로 돌아가 화가로 전업했다. 이후 어떤 음반사의 섭외에도 응하지 않은 채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고 1985년에는 뉴욕 포스트모던 화가이자 캡틴 비프하트의 열성 팬이었던 줄리안 슈나벨(Julian Schnabel)의 도움을 얻어 미국과 유럽에서 성공적인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또는 한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삶을 매듭지으려 했다. 그러나 고비 때마다 지인(知人)의 도움을 받으며 재기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들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그 어떤 벽을 넘는 데는 결국 실패했다. 8년 동안의 모트 더 후플 이력이다. 때문에 그들 앞에는 항상 ''비운의 그룹''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닌다. 그들은 밥 딜런의 냉소적 록, 헤비메탈, 글램 록을 넘나...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또는 한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삶을 매듭지으려 했다. 그러나 고비 때마다 지인(知人)의 도움을 받으며 재기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들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그 어떤 벽을 넘는 데는 결국 실패했다. 8년 동안의 모트 더 후플 이력이다. 때문에 그들 앞에는 항상 ''비운의 그룹''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닌다. 그들은 밥 딜런의 냉소적 록, 헤비메탈, 글램 록을 넘나들며 진취적인 사운드를 펼쳐냈지만, 언제나 뒷전이었다.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의 도움을 받아 잠깐의 행복을 누린 것이 전부였다. 믹 랄프스(Mick Ralphs, 기타), 버든 앨런(Verden Allen, 키보드), 오버런드 와츠(Overend Watts, 베이스), 데일 "버핀" 그리핀(Dale "Buffin" Griffin, 드럼) 등의 네 명은 고향인 잉글랜드의 히어포드(Hereford)에서 1968년 사일런스(Silence)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1년 뒤인 1969년 초반 보컬리스트 스탄 티펜스(Stan Tippens)를 영입한 그들은 < 아일랜드(Island) > 레코드사와 협력관계를 맺었다. 얼마 뒤 티펜스를 퇴출시키고 클럽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가수 이안 헌터(Ian Hunter)를 맞아들인 그들은 윌라드 마누스(Willard Manus)의 소설에서 착안하여 그룹명을 모트 더 후플로 변경했다. 1969년에 발표된 그들의 셀프 타이틀 데뷔작은 밥 딜런의 영향이 짙게 베어있는 작품이었다. 이안 헌터의 시니컬한 목소리는 딜런의 그것이었으며, 곡의 진행 패턴도 유사하였다. 비록 레이블의 반대로 금지됐지만, 1집의 원제가 < Talking Bear Mountain Picnic Massacre Disaster Dylan Blues >라는 사실은 안다면 그들과 딜런과의 관계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헌터는 나선형의 긴 머리와 어두운 얼굴 색을 트레이드마크로 삼으면서 글램의 징후를 내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데뷔 음반의 상업적 실패가 1970년 < Mad Shadows >, 1971년 < Wildlife >, < Brain Capers > 등으로도 고스란히 이어지면서, 그들은 밴드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모트 더 후플의 와해라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지기 스타더스트(Ziggy Stardust)'' 데이비드 보위는 그들의 다음 앨범에 곡을 제공하고 프로듀서를 맡아주겠다며 멤버들에게 용기를 줬다(보위는 모트 더 후플의 열려한 팬이라고 한다). 드라마틱한 스토리 끝에 탄생한 작품이 바로 1972년 앨범 < All The Young Dudes >이였다. 보위가 작곡한 ''All the young dudes''는 영국 차트 3위에 오르는 놀라운 성적을 일궈내면서 그들을 무명의 그늘에서 탈출시켰다. 보위의 향기가 자극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이 곡은 동성애자에 대한 노래로 글램 록 시대의 찬가로 불려지고 있다. 헤비 록과 글램 록의 사운드로 새 단장한 그들은 1973년 < Mott >와 1974년 < Hoople >로 또 한번의 인기 행진을 이뤄냈다. 수록곡 ''All the way from memphis''(10위), ''Roll away the stone''(8위)이 스매시 히트를 기록하면서 그들은 글램 록의 선두 주자 중 하나로 대접받았다. 그러나 1972년 말 버든 앨런의 탈퇴, 1973년 믹 랄프스의 배드 컴퍼니(Bad Company) 조직 등으로 인해 모트 앤 후플은 서서히 무너져 내렸고, 급기야 프론트 맨 이안 헌터마저도 보위의 사이드맨 믹 론슨(Mick Ronson)과 함께 듀오 활동을 위해 1974년 팀을 떠나갔다. 남은 멤버들은 라인업을 재정비하고 몇 장의 음반을 발표했지만, 스스로의 길을 알고 1976년 마침표를 찍었다. 억세게 운이 없는 그룹의 멋있는 피날레였다.
노래 : REO Speedwagon (알이오 스피드웨건)
꾸준함은 모든 난관을 극복하게 하며 끈기는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의지를 부여한다. 이 소박하고도 당연한 불변의 진리는 대중 음악계에서도 변함 없이 적용된다. 상업적인 성공이나 명성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미쳐 초지일관으로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행복인 동시에 자신감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10년 이상의 무명 생활을 그루터기처럼 꿋꿋하게 감내해 낸 알이오 스피드왜건(REO Speedwagon)은... 꾸준함은 모든 난관을 극복하게 하며 끈기는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의지를 부여한다. 이 소박하고도 당연한 불변의 진리는 대중 음악계에서도 변함 없이 적용된다. 상업적인 성공이나 명성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미쳐 초지일관으로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행복인 동시에 자신감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10년 이상의 무명 생활을 그루터기처럼 꿋꿋하게 감내해 낸 알이오 스피드왜건(REO Speedwagon)은 밴드 결성 12년만인 1980년 아홉 번째 정규 앨범 < High Infidelity >로 정상의 인기를 구가한 대기만성형인 성인 취향의 팝록 그룹이다. 팝음악 계에서는 변방으로 꼽히는 미국 일리노이즈 주에서 건반 주자 닐 도티(Neal Doughty)와 드러머 알란 그랫처(Alan Gratzer)라는 두 젊은 대학생을 중심으로 개리 리치라스(Gary Richrath/기타), 그레그 필빈(Gregg Philbin/베이스), 마이크 머피(Mike Murphy/보컬)가 의기투합한 팀이 1968년에 결성된 알이오 스피드왜건이다. 팀의 목소리는 곧 전직 포크 싱어였던 케빈 크로닌(Kevin Cronin)으로 바통터치 되어 변화를 시도했지만 이들의 성공은 요원해 보였다. 그러자 당시 이 5인조 밴드는 그 타개책으로 ’질보다 양’의 물량 공세 전략을 택했다. 이들은 1971년부터 거의 매년 발표한 앨범과 이 음반들을 지원 사격하기 위해 1년에 250일 이상 강행군된 공연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넓히고자 했다. 하지만 1970년대 당시 인기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고난도의 연주 테크닉과 파워를 바탕으로 하는 하드록과 헤비메탈, 쾌락의 정점을 보여준 디스코, 그리고 그 정반대의 대칭점에 위치한 소프트 록에 근거한 발라드, 그 어느 쪽에도 명쾌하게 포함되지 못한 알이오 스피드왜건은 1980년 < High Infidelity >를 발판으로 삼아 메이저리거로 올라서기 전까지 ’Ridin’ the storm out(94위)’, ’Roll with the changes(58위)’, ’Time for me to fly(77위)’ 같은 극히 미미한 히트 싱글만을 배출한 마이너리거였다. 이 무명 밴드는 1980년대를 맞이하면서 라디오와 싱글에 초점을 맞춘 감각적인 멜로디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국내 주류 광고에도 사용되었던 불후의 넘버원 발라드 ’Keep on loving you’를 시발점으로 ’Take it on the run(5위)’, ’Don’t let him go(24위)’, 그리고 우리나라 팝팬들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In your letter(20위)’가 수록된 < High Infidelity >는 현재까지 900만장 이상이 팔려 다이아몬드 레코드(천만장 이상)를 목전에 두고 있으며, 1982년에 발표한 차기 작품 < Good Trouble >에서는 싱글 ’Keep the fire burnin’’을 7위까지 올려놓았지만 이러한 성공적인 결과와는 달리 음악 평론가들은 이들의 노래가 팬들의 유행 감각에 쉽게 좌우되는 상업 음악의 정점이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Keep on loving you’와 함께 자신들의 발라드 대표곡으로 투 톱을 이루는 ’Can’t fight this feeling(1985년 3주간 1위)’과 ’One lonely night(19위)’, ’Live every moment(34위)’로 다시 한번 인기몰이에 성공한 알이오 스피드왜건은 결성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간 록트랙 ’That ain’t love(16위)’와 국내에서 높은 인기를 누린 ’In my dreams(19위)’ 등으로 1980년대 말까지 그 명성을 이어갔지만 이후 음악 토양이 완벽하게 바뀐 1990년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싱글 차트에서는 명예퇴직을 하게 되었다. 현재 이들은 같은 성향의 동료 밴드들인 스틱스(Styx), 포리너(Foreigner), 저니(Journey), 플리트우드 맥(Fleetwood Mac) 등과 함께 전 미국을 순회하는 공연에 동참하고 있다.
노래 : Mr. Mister (미스터 미스터)
남성의 존칭을 두 번이나 강조한 미스터 미스터(Mr. Mister)는 1980년대 중반의 팝 계에 짧지만 굵은 선을 그으며 영국 그룹에 밀렸던 미국 밴드의 체면을 세웠지만 인기의 불꽃이 점화된 지 2년도 안되어 산화한 불가사의한 그룹이다. 고급 세션맨 출신인 각 멤버들의 역량만을 따로 분리해 보면 아쉬울 게 없었지만 그 음악적 실력을 충분히 보여주기도 전에 우리의 기억에서 지워졌기 때문이다(롱런한 토토와 비교해보... 남성의 존칭을 두 번이나 강조한 미스터 미스터(Mr. Mister)는 1980년대 중반의 팝 계에 짧지만 굵은 선을 그으며 영국 그룹에 밀렸던 미국 밴드의 체면을 세웠지만 인기의 불꽃이 점화된 지 2년도 안되어 산화한 불가사의한 그룹이다. 고급 세션맨 출신인 각 멤버들의 역량만을 따로 분리해 보면 아쉬울 게 없었지만 그 음악적 실력을 충분히 보여주기도 전에 우리의 기억에서 지워졌기 때문이다(롱런한 토토와 비교해보라). 미스터 미스터는 죽마고우였던 리차드 페이지(Richard Page/보컬, 베이스)와 스티브 조지(Steve George/보컬, 키보드)가 1979년에 도원결의(桃園結義)한 페이지스(Pages)가 그 시발점이다. 페이지스는 국내에선 다큐멘터리인 < 실크로드 >에 삽입된 ‘Caravan sary’로 아직까지도 기억되지만 본토에서의 반응은 우리나라와는 180도 달랐다. 페이지스의 역사는 1981년에 그 페이지를 넘기며 팝 역사의 비사(?史)로 남게 되었고 리차드와 스티브는 이듬해인 1982년에 기타리스트 스티브 패리스(Steve Farris)와 드러머 팻 마스텔로토(Pat Mastelotto)를 새로운 친구로 맞이하면서 미스터 미스터의 공식적인 명함을 찍었다. 페이지스를 접은 후에 포인터 시스터스(Pointer Sisters), 샤카 칸(Chaka Khan), 도나 서머(Donna Summer) 등과 음악활동을 하면서 그 인지도를 각인시킨 리차드와 스티브는 어렵지 않게 메이저 음반사와의 계약을 통해 1984년에 데뷔작 < I Wear The Face >을 발표했다. 여기서 첫 싱글 ‘Hunters of the night(57위)’을 커트시켜 차트에 처음으로 진입시켰다. 그러나 1집으로 팀 이름에 걸맞지 않은 대접을 받은 미스터 미스터는 1985년에 공개한 두 번째 음반 < Welcome To The Real World >로 자신들이 세운 음악세계에 대중들을 초대했다. 베이스가 주도하는 첫 싱글 ‘Broken wings’와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의 두 번째 싱글 ‘Kyrie’가 연속으로 넘버원을 차지했고 세 번째 커트 싱글 ‘Is it love?’는 8위에 랭크되면서 < Welcome To The Real World >는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올랐다. 특히 ‘Is it love?’는 리차드 드레이퓨스와 에밀리오 에스테베즈가 주연한 1987년도 영화 < 잠복근무(Stakeout) >의 마지막에 삽입되기도 했다. 이러한 선전으로 미스터 미스터는 1985년도 그래미에서 최우수 그룹 후보에 올랐지만 ‘We are the world’의 주인공 USA for Africa에 양보하며 더 큰 인류애(?)를 발휘했다. 하지만 1987년에 부화한 세 번째 앨범 < Go On >은 상업적인 실패를 잉태했다. 첫 싱글 ‘Something real (Inside me/Inside you)’만이 유일하게 싱글 차트에 진입했지만 27위라는 상대적으로 초라한 결과를 낳으면서 대중들과의 눈 맞추기에 난항을 보였지만 그해 그래미에서 두 번째로 올해의 그룹 부문 후보로 지명되었다(수상자는 영화 < 더티 댄싱 >의 주제가 ‘The time of my life’를 부른 빌 메들리와 제니퍼 원스). 3집의 저조한 성과는 밴드의 해산을 가져왔다. 1988년에 미스터 미스터는 해체를 결정했으며 연주 실력이 뛰어난 각 멤버들은 마돈나(Madonna)나 케니 로긴스(Kenny Loggins), 쥬얼(Jewel), 화이트스네이크(Whitesnake), 토리 에이모스(Tori Amos) 같은 뮤지션들의 레코딩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음악 경력을 쌓고 있다.
락 기타 연주자, 보컬 락 기타 연주자, 보컬
세션 맨들로 구성되어 화제를 뿌렸던 토토는 그 탄탄한 연주 실력과 고혹적인 팝 감수성으로 1980년대를 풍미했던 그룹이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전개되는 엄밀한 곡 구성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수많은 뮤지션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열렬한 추종자들을 양산해냈다. 전성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룹의 양대 산맥 스티브 루카서와 고(故) 제프 포카로는 전문 연주인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추앙을 받고 있으며, 그들의 초, 중반기 레퍼토... 세션 맨들로 구성되어 화제를 뿌렸던 토토는 그 탄탄한 연주 실력과 고혹적인 팝 감수성으로 1980년대를 풍미했던 그룹이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전개되는 엄밀한 곡 구성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수많은 뮤지션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열렬한 추종자들을 양산해냈다. 전성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룹의 양대 산맥 스티브 루카서와 고(故) 제프 포카로는 전문 연주인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추앙을 받고 있으며, 그들의 초, 중반기 레퍼토리들은 꾸준히 라디오 전파를 타고 있다. 1970년대 제프 포카로와 스티브 루카서의 고등학교 밴드로 출발한 토토는 그 개개인의 출중한 기량으로 1970년대 후반 이미 스타들의 세션을 도맡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팀이 완전히 정비된 후 발표한 대망의 데뷔 앨범 < Toto >는 밀리언셀러로 부상했으며, 재즈와 록이 정교하게 교직된 독특한 사운드로 마니아들을 사로잡았다. 여기에는 국내에서도 자주 리퀘스트를 받는 ‘George porgy’, ‘Hold the line’등이 실려 있다. 토토는 < Hydra >와 < Turn Back >를 계속해서 내놓으며 특급 아티스트의 길로 접어들기 위한 기반을 마련한다. 비록 1집에 비해 판매고는 저조했으나 곡들은 한층 세련되고 연주는 엄격해져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를 갖게끔 만들기에 충분했다. 3장의 음반으로 비행을 시작한 토토는 1982년에 공개한 4집 < Toto Ⅳ >로 모든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이 된다. 빌보드 정상을 밟은 ‘Africa’, 2위에 오른 ‘Rosanna’등 차트를 맹폭한 히트곡들이 터져 나왔으며 그래미는 < 올해의 앨범 >을 포함한 장장 7개 부문의 상을 < Toto Ⅳ >에 안겨주며 1982년을 토토의 해로 선포했다. 멀티 플래티넘을 따낸 이 음반에서 토토는 예측불허의 변박과 고난이도의 테크닉이 난무하던 기존의 현란함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도 거기에 듣기 좋은 멜로디를 부가해 골수 팬들과 팝 키드들을 동시에 포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엄청난 성공 뒤에 토토는 데이빗 헝게이트와 바비 킴볼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으며 5집 < Isolation >을 발표했다. 그러나 새로 영입된 퍼지 프레데릭슨(Fergie Frederiksen)의 보컬은 킴볼을 따라갈 수 없음이 입증되었고 전전긍긍하던 팀원들은 조셉 윌리엄스(Joseph Williams)를 < Fahrenheit >에서 대타로 기용했다. 고품격 발라드의 비중이 높아진 이 앨범은 ‘Lea’, ‘I’ll be over you’등의 히트곡을 배출하며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에도 키보디스트 스티브가 떨어져 나가는 등 멤버 교체와 탈퇴의 악순환을 계속 경험하던 토토는 1992년 팀의 중핵 제프 포카로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면서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당대 최고의 드러머 중 하나로 평가받던 그의 요절은 많은 팬들에게 아쉬움과 슬픔을 안겼다. 토토의 통산 여덟 번째 작품인 < Kingdom Of Desire >는 ‘Only you’라는 매혹적인 곡을 남긴 채 제프의 마지막 레코딩으로 기록되었다. 마이클 셍커 그룹(Michael Schenker Group >을 거친 1급 레벨의 록 드러머 사이먼 필립스(Simon Phillips)의 가세로 힘을 얻은 토토는 1999년 오리지널 멤버 바비 킴볼이 보컬리스트로 재가입해 또 한번의 비상을 노리고 있다. 멤버들 중 스티브 루카서는 재즈 기타의 도인 래리 칼튼과 공동 투어를 나서는 등 특히 두드러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1996년 있었던 토토의 내한 공연은 국내에서 있었던 최고의 공연 중 하나로 회자된다. 그들은 라이브와 스튜디오 앨범에서 모두 사람들을 만족시켜 왔으며, 결성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 팀웍과 기량으로 사랑 받고 있다. 가수의 뒤에서 연주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세션 맨에서 토토는 당당히 무대 중앙으로 진출했었고, 이제는 자신들의 경륜을 하나하나 쌓아가고 있다.
밴드 : Kansas (캔사스 (프로그레시브 락, 하드락 밴드))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록의 예술성에 대한 기치가 드높던 1970년대에 프로그레시브의 불모지 미국에서도 예술성을 향한 몸짓은 작지만 분명 존재했다. 불후의 발라드 곡 ‘Dust in the wind’로 기억되어지는 캔사스는 심포닉 록에 아메리칸 록의 역동성을 더하며 이른바 ‘아메리칸 프로그레시브 록’의 독자성을 확립한 그룹이다. 캔사스는 1970년 미국 캔사스 주의 토페카(Topeka)에서 고등학교 동창생이...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록의 예술성에 대한 기치가 드높던 1970년대에 프로그레시브의 불모지 미국에서도 예술성을 향한 몸짓은 작지만 분명 존재했다. 불후의 발라드 곡 ‘Dust in the wind’로 기억되어지는 캔사스는 심포닉 록에 아메리칸 록의 역동성을 더하며 이른바 ‘아메리칸 프로그레시브 록’의 독자성을 확립한 그룹이다. 캔사스는 1970년 미국 캔사스 주의 토페카(Topeka)에서 고등학교 동창생이었던 케리 리브그렌(Kerry Livgren, 기타, 키보드), 베이브 호프(Dave Hope, 베이스), 필 이허트(Phil Ehart, 드럼)에 의해 결성된 밴드. 다른 남부 록 밴드들이 서던 록의 전통을 만들어가고 있을 당시 이들이 추구한 음악은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1971년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로비 스타인하트(Robby Steinhardt)를 바이올린 주자로 영입하면서 미국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프로그레시브 록을 시도했던 것이다. 로비를 영입하면서 잠시 밴드 이름을 ‘화이트 클로버(White Clover)’로 바꾸기도 했던 이들은 1972년 스티브 월쉬(Steve Walsh, 보컬, 키보드), 리차드 윌리엄스(Richard Wiliams, 기타)를 연이어 맞이하며 프로그레시브 밴드의 기본 틀을 완성하고 다시 캔사스를 이름으로 내걸었다. 클럽 활동을 통해 인지도를 높인 이들은 1974년 셀프 타이틀의 데뷔 앨범 < Kansas >를 발표했다. 하지만 1970년대 초반 이들의 음악은 미국 대중에게 어필하기에는 너무나 생소한 사운드였다. 프로그레시브 록은 영국 밴드들의 전유물이라는 뿌리깊은 생각이 미국적인 사운드와 프로그레시브를 결합하며 나름대로 독자적인 음악성을 만들어 나간 캔사스에게 딴지를 걸고 넘어 졌다. 같은 해 발표한 < Song For America >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캔사스는 1970년대 중반 핑크 플로이드를 위시한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들의 위풍당당이 진행되면서 그 흐름에 전격 편입했다. 1975년 음반 < Masque >는 수록곡인 ‘Icarus borne on wings of steel’이 심오한 가사와 함께 주목을 받으며 20만장이 넘는 판매를 기록했고, 이에 힘입어 전작 < Song For America > 역시 골드를 따내는 기염을 토했다. 한 번 불붙은 상승세는 1976년 블록버스트 앨범 < Leftoverture >로 이어지며 캔사스를 세계적인 밴드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수록곡 ‘Carry on wayward son’이 차트 5위 권 진입에 성공했으며, 앨범은 3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미국적 프로그레시브 가능성의 확인이었다. 캔사스의 프로그레시브 록은 영국 밴드들과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부기(Boogie)를 프로그레시브에 도입했다는 것 외에도, 이들이 표현하는 대상, 서정성, 서사적인 전개는 이들만의 특화된 강점이었다. 미국 남부 특유의 심오한 가사를 다루면서도 현실을 벗어나지 않았고, 심포닉 록을 구사했지만 동시에 미국 록이 가진 역동성과 파워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캔사스는 아트 록 매니아들로부터 부정적인 평을 듣기도 하지만 이 점 때문에 먼저 이 분야를 개척한 영국 밴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밴드는 성공의 여세를 몰아 1977년에는 음반 < Point of Know Return >을 선보였다. 지구 끝에 매달린 범선을 그리고 있는 앨범 재킷으로도 유명한 이 앨범은‘Dust in the wind’ 덕분에 국내 팬들에게서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의 앨범이다. 자신들의 음악적 형태와 일치하는 곡은 아니지만 발라드 넘버 ‘Dust in the wind’는 캔사스의 대표곡이 되었고, 이 곡의 카리스마 덕분에 이들이 프로그레시브 밴드임을 모르는 팬들도 상당수 있었다.‘Dust in the wind’가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지만 이들의 정체성은 여전히 프로그레시브 록에 있었고, 1979년 밴드가 처음으로 프로듀싱한 프로그레시브 록 앨범 < Monolith >를 톱 텐에 올리며 화려하게 미 디케이드(Me- Decade)를 마감했다. 하지만 1980년 작품 < Audio-Visions > 이후 캔사스의 행보는 뿌연 안개 정국 속으로 휘말렸다. 데이브 호프와 케리 립그렌이 종교적인 문제로 멤버들과 갈등을 일으켰고, 그룹의 상업적 성공에 불만을 느끼고 있던 스티브 월시는 탈퇴해 ‘스트리트(Street)’라는 자신의 밴드를 조직하는 등 팀의 내분 사태는 걷잡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존 엘르판테(John Elefante, 보컬)로 스티브의 빈자리를 채우며 1982년 < Vinyl Confessions >, 1983년 < Drastic Measures >를 발표하지만 밴드는 결국 이별의 수순을 밟았다. 해체 3년 후 캔사스는 필 이허트, 리차드 윌리엄스, 스티브 월시 세 명의 오리지널 멤버에 의해 부활했다. 이후 스티브 모스(Steve Morse, 기타), 빌리 그리어(Billy Greer, 베이스) 두 명의 멤버를 보강하여 오 인조 라인업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들은 심포닉 록보다는 하드 록적인 면을 살리며 1986년 < Power >를 통해 재기의 의지를 불태운다. 그러나 < Power >가 잠시 주목을 끌었을 뿐 < In the Spirit of the Things >(88), < Freaks of Nature >(95), < Always Never the Same >(98)로 이어지는 음반 모두 신통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앨범의 부진한 성적에도 불구 꾸준한 활동을 보여온 이들은 2001년에 1980년도 작품 < Audio-Visions > 이후 20년 만에 오리지널 멤버들이 한자리에 모두 모여 < Somewhere To Elsewhere >를 발표했다. 음반에는 대 그룹의 부활을 알리듯 1975년 자신들의 히트곡 ‘Icarus…’의 속편 격인 ‘Icarus II’가 수록되어 있으며, 전성기에 가졌던 매력이 그대로 살아있다.
멤버 : Adrian Gurvitz, Paul Gurvitz, Louie Farrell 멤버 : Adrian Gurvitz, Paul Gurvitz, Louie Farrell
하드 락, 글램 메탈 밴드 하드 락, 글램 메탈 밴드
1960년대의 패러다임이었던 반(反)문화(counterculture), 히피(hippie) 혁명이 현실 불가능한 유토피아로 판명 나자, 1970년대 록의 전반적인 지형도는 큰 변화의 폭을 그렸다. 일명 ’We dacade’에서 ’Me dacade’로의 이동이었다. ’1970년대 들어 반문화적인 주장들이 그 힘을 잃고 일종의 판매기법으로 전락하자 록 걸작들의 특별한 지위는 점차 공동체의 견지가 아닌 개인적 예술의 ... 1960년대의 패러다임이었던 반(反)문화(counterculture), 히피(hippie) 혁명이 현실 불가능한 유토피아로 판명 나자, 1970년대 록의 전반적인 지형도는 큰 변화의 폭을 그렸다. 일명 ’We dacade’에서 ’Me dacade’로의 이동이었다. ’1970년대 들어 반문화적인 주장들이 그 힘을 잃고 일종의 판매기법으로 전락하자 록 걸작들의 특별한 지위는 점차 공동체의 견지가 아닌 개인적 예술의 견지에서 설명되기 시작했다.’ 라는 평론가 사이먼 프리스의 주장이 이를 잘 말해준다. 자연스레 뒤따른 것은 ’장르의 세분화’였다. 특히 록 신에서는 하드 록 혹은 헤비메탈의 급격한 성장세가 도드라졌다. 1960년대 말부터 꽃을 피웠던 하드 록 사운드가 젊은 혈기의 대변자임을 자청, 록의 메인 장르로 우뚝 올라섰던 것. 바로 수많은 밴드들이 자웅을 겨뤘던 록 르네상스 시대의 화려한 개막이었다. 그 중에서도 딥 퍼플은 ’소리의 볼륨’에 있어서 절대 강자였다. 1968년 영국 허트포드(Hertford)에서 결성된 이 하드 록 제왕은 한때 기네스 북 공인의 ’세계에서 가장 시끄러운 그룹’임을 뽐낼 만큼 열혈 헤드뱅어들을 휘하로 집결시켰다. 비록 월드 마케팅에서는 레드 제플린에 비해 뒤졌지만 적어도 국내와 일본에서만큼은 그들이 인기 넘버원이었다. 일례로 밴드의 시그니처 송이자 딥 퍼플이 오프닝을 섰던 스위스 몬트뢰 빌딩에서의 프랭크 자파 공연 당시의 화재를 보며 작곡한 ’Smoke on the water’는 록을 알기 위한 통과의례로 변함 없이 극빈 대접을 받고 있다. 또한 딥 퍼플은 기수로 구분될 만큼 잦은 멤버 교체로 유명했는데 명 기타리스트이자 리더 격이었던 리치 블랙모어의 독선이 그 주된 이유였다. 최초 그룹은 존 로드, 닉 심퍼, 리치 블랙모어, 로드 에반스, 이언 페이스의 라인업으로 출항의 닻을 올렸다. 허나 처녀작 < Shades of Deep Purple >(1968), 소포모어 음반 < Deep Purple >(1969), 3집 < The Book of Taliesyn >(1969) 등의 작품들에서 드러나듯 그들만의 캐릭터가 명확히 잡히지 않은 시기였다. 수록곡 대부분이 조 사우스(Joe South)의 ’Hush’(빌보드 4위)와 ’Hey Joe’, 닐 다이아몬드(Neil Diamond)의 ’Kentucky woman’(38위), 비틀즈의 ’Exposition/We can make it out’, 팝 클래식 ’River deep-Mountain high’(53위) 등, 리메이크로 채워져 있다는 데서 잘 파악된다. ’April’과 ’Anthem’ 등, 존 로드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클래시컬한 넘버들 역시 별다른 피드백 효과를 얻지 못했다. 같은 해 로드 에반스와 닉 심퍼가 팀을 등지고 이언 길런과 로저 글로버가 새로이 투입되면서 딥 퍼플의 황금 시대가 비로소 개막되었다. 권력의 축이 존 로드에서 리치 블랙모어에게로 옮겨간 것 또한 이 즈음이었다. 리치 블랙모어의 진두지휘 아래 그룹은 막강한 하드 록 사운드를 내뿜기 시작했다. 존 로드 작곡의 ’Concerto Group and Orchestra’를 기초로 완성된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작 < Concerto Group and Orchestra >(1969) 이후에 발표한 일련의 앨범들이 이를 잘 대변한다. ’Child in time’, ’Speed king’ 등이 사랑 받았던 1970년의 < Deep Purple in Rock >, ’Strange kind of woman’, ’Black night’(66위) 등이 히트했던 빌보드 앨범 차트 32위의 < Fireball >(1971), 불멸의 명곡 ’Smoke on the water’(4위)와 ’Highway star’를 담고있는 1972년의 마스터피스 < Machine Head >(7위) 등이 그것들이다. 실황 작품인 < Made In Japan >(6위, 1972)은 각종 라이브 명반 선정에 빠지지 않고 등재될 만큼 동종(同種) 품목 중 발군임을 뽐냈다. 허나 1973년의 < Who Do You Think We Are >를 끝으로 이언 길런과 로저 글로버가 탈퇴하면서 2기는 막을 고했다. 데이비드 커버데일과 글렌 휴즈를 맞이하며 시작점을 찍은 3기 역시 찬란한 성과를 이어나갔다. 숨겨진 보석 ’Burn’이 수록된 동명 타이틀의 < Burn >(9위, 1974), 같은 해의 < Stormbringer >(20위)등이 히트 퍼레이드를 펼쳤던 것. 곡들 중, 후자에 실린 ’Soldier of fortune’은 국내에서 선풍적 인기몰이를 한 바 있다. 여러 발라드 선곡집에 현재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골든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곧바로 리치 블랙모어가 레인보우(Rainbow)를 결성, 밴드를 떠남으로써 딥 퍼플은 좌초의 위기에 몰렸지만, 천재 기타리스트 토미 볼린(Tommy Bolin, 1976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이 그 공백을 훌륭히 메워주었다. 그의 음악적 취향이 적극 반영된 재즈풍의 음반 < Come Taste The Band >가 이 시기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는 기존의 헤비 메탈 지향성과 삐걱 화음을 자아내면서 딥 퍼플은 1976년 영국 투어를 끝마친 후 휴지기에 들어갔다. 밴드가 끊임없는 재 결합설에 부응하며 다시 한번 기지개를 편 때는 1984년. 리치 블랙모어, 존 로드, 이언 길런, 로저 글로버, 이언 페이스의 드림 팀으로 구성된 그들은 < Perfect Stranger >(1984), < The House of Blue Light >(1987) 등을 내놓으며 여전한 저력을 과시했다. 이언 길런과 리치 블랙모어의 갈등으로 이언 길런 대신 조 린 터너를 보컬로 기용했던 < Slaves and Masters >(1990)를 기점으로 그룹의 인기 곡선은 완연한 하향세를 그렸다. 이언 길런을 재 수혈해 녹음했던 < The Battle Rages On >(1992)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를 견디지 못한 리치 블랙모어가 또 다시 굿바이를 선언, 밴드는 결국 타이타닉 호의 운명을 걷는 듯 보였다. 그러나 컨트리 록 기타의 달인 스티브 모스를 후임으로 낙점하면서 그룹은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해나갔다. 통산 16집인 1996년작 < Purpendicular >, 17집인 < Abandon > 등으로 호평 받았던 딥 퍼플은 국내에서 가졌던 몇 차례의 공연을 포함, 지금도 여러 곳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헤비메탈의 역사에서 영국 출신의 그룹 모터헤드가 세운 업적은 가히 대단하다. 우선 그들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 불어닥친 NWOBHM(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의 선두에 서서 영국 헤비메탈의 새로운 바람을 주도하였다. 1979년 2집 앨범 < Overkill >이 영국 차트 24위에 오르는 것을 시발점으로, 같은 해 발표된 < Bomber >는 12위, 이듬해의 < ... 헤비메탈의 역사에서 영국 출신의 그룹 모터헤드가 세운 업적은 가히 대단하다. 우선 그들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 불어닥친 NWOBHM(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의 선두에 서서 영국 헤비메탈의 새로운 바람을 주도하였다. 1979년 2집 앨범 < Overkill >이 영국 차트 24위에 오르는 것을 시발점으로, 같은 해 발표된 < Bomber >는 12위, 이듬해의 < Ace Of Spades >는 4위를 차지하는 등 영국 메탈 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확립했다. 1981년에 발매된 실황 음반 < No Sleep Till Hammersmith >도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밴드의 라이브 실력을 만방에 떨쳤다. 라이브 앨범이 1위를 차지하는 것은 무척 드문 예이다. 또한 모터헤드는 헤비메탈에 빠른 스피드를 도입하여 나중에 등장하는 스래시 메탈과 스피드 메탈에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해준 최초의 그룹으로 기록되어 진다. 포효하는 듯한 보컬, 난폭하게 몰아 부치는 드럼과 베이스, 날카롭고 공격적인 기타 연주는 당시로서는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다. 딥 퍼플(Deep Purple), 레드 제플린(Led Zepp;in) 같은 하드 록 그룹과 확연히 구별되는 사운드를 들고 나온 것이다. 1977년 데뷔작 < Motorhead >, 2년 뒤의 < Overkill > 등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메탈리카(Metallica), 메가데스(Megadeth) 등이 바로 모터헤드의 자양분을 받아들이며 음악적 역량을 쌓아나간 대표적 그룹들이다. 주지하다시피 메탈리카의 드러머 라스 울리히(Lars Ulich)는 어린 시절 팬클럽을 운영할 정도로 모터헤드의 골수 추종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모터헤드는 전설적인 스페이스 록 밴드 호크윈드(Hawkwind)에서 베이스를 치던 레미(Lemmy)가 1975년 기타리스트 래리 월러스(Wallace), 드러머 루카스 폭스(Lucas)와 함께 결성한 그룹. 이후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멤버들이 드나들었지만 완벽한 카리스마의 소유자 레미를 구심점으로 별 탈 없이 순항했다. 특히 평론가들과 팬들은 기타리스트 에디 클라크(Eddie Clarke), 드러머 필 테일러(Phil Taylor)가 재직했던 1976년부터 1982까지를 모터헤드의 절정기로 본다. 앞서 언급했던 < Overkill >, < Bomber >, < Ace Of Spades >, < No Sleep Till Hammersmith > 등이 모두 이때의 라인업으로 만들어졌다. 모터헤드는 그러나 과거 속의 밴드가 아니다. 단 한번의 휴지기와 굴곡 없이 지금까지 꾸준하게 앨범들을 내놓으며 혈기 왕성한 활동을 해나가고 있다. 잠깐의 영향력을 행사하며 반짝 인기를 얻고 사라져간, 그리고 앞으로 사라져 갈 그룹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위대한 생명력이다.
밴드 : Judas Priest (주다스 프리스트)
헤비메탈 팬들에게 주다스 프리스트라는 이름은 웅장한 성채와도 같다. 지난 30여 년 동안 발표했던 14장이라는 방대한 디스코그래피(라이브 앨범 제외)는 그들의 커리어를 말해주는 증거다. 그들은 헤비메탈 사운드를 창시했고 헤비메탈을 융성하게 했으며 씬을 리드했다. 차갑게 내뱉는 금속성의 보컬과 예리한 트윈 기타 시스템은 헤비메탈의 원형(原形)이었으며 수많은 후배들의 모델이 되었다. 주다스 프리스트는 단순히 NWOB... 헤비메탈 팬들에게 주다스 프리스트라는 이름은 웅장한 성채와도 같다. 지난 30여 년 동안 발표했던 14장이라는 방대한 디스코그래피(라이브 앨범 제외)는 그들의 커리어를 말해주는 증거다. 그들은 헤비메탈 사운드를 창시했고 헤비메탈을 융성하게 했으며 씬을 리드했다. 차갑게 내뱉는 금속성의 보컬과 예리한 트윈 기타 시스템은 헤비메탈의 원형(原形)이었으며 수많은 후배들의 모델이 되었다. 주다스 프리스트는 단순히 NWOBHM(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에만 한정되는’어떤 밴드’가 아니었다. 그들의 영역은 스래시 메탈, 데스 메탈은 물론이고 멜로딕 메탈을 넘어 블랙 메탈에까지 뻗어있다. 그 거대한 영향력은 머시풀 페이트(Mercyful Fate), 앙그라(Angra), 오버킬(Overkill), 감마 레이(Gamma Ray), 테스타먼트(Testament), 크리에이터(Kreator)등 메탈 계의 중견 그룹들이 대거 참여한 헌정 앨범 < A Tribute To Judas Priest >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 색슨(Saxon)과 함께 브리티시 헤비메탈의 명성을 만방에 떨쳤던 주다스 프리스트는 1971년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를 배출한 영국의 공업도시 버밍햄에서 결성됐다. 기타리스트 케이 케이 다우닝(K.K. Downing)과 베이시스트 이안 힐(Ian Hill)을 중심으로 닻을 올린 그룹은 곧 보컬리스트 앨런 앳킨스(Alan Atkins)와 드러머 존 엘리스(John Ellis)를 식구로 맞이하고 앨범 작업에 착수한다. 하지만 무대 위로 막 나아가려던 그룹은 잦은 멤버 교체의 진통으로 데뷔에 난항을 겪어야 했다. 몇 번의 시행 착오 끝에 그들은 그룹의 상징이 되는 롭 핼포드(Rob Halford)와 다우닝의 파트너 글렌 팁톤(Glenn Tipton)을 영입해 1974년 대망의 1집 < Rocka Rolla >를 내놓았다. 헤비메탈보다는 다분히 하드 록적인 성향을 띤 이 음반은 히트를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비범함을 알리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들의 이름을 국제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 앨범은 1976년 작 < Sad Wings Of Destiny >이다. 보다 강력해진 기타음과 서정적인 건반 연주가 공존하는 이 작품은 헤비메탈의 폭발력과 아트 록의 아름다움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음반으로 평가받으며 팬들에게 그룹을 깊게 각인시켰다. ’Epitaph’, ’Victim of changes’, ’The Ripper’등이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앨범의 성공으로 메이저 레이블 < CBS >와의 계약을 체결한 주다스 프리스트는 < Sin Afet Sin >과 < Stained Class >를 잇따라 발표해 호평 받으며 화려한 시기를 예고했다. 상승 기류를 탄 그룹을 정점으로 도약하게 만든 양대 앨범은 < Hell Bent For Leather > (영국에서는 < Killing Machine >이라는 제목으로 발매)와 < British Steel >로 특히 후자는 AC/DC의 < Back In Black >, 마이클 셍커 그룹(Michael Schenker Group)의 < Michael Schenker Group >과 함께 헤비메탈을 정의해 준 명반으로 손꼽힌다. 이후 창작력이 극대화된 그룹은 < Point Of Entry >, < Screaming For Vengeance >, < Defenders Of The Faith >등의 수작들을 양산해내며 황금기를 맞았다. ’Delivering the goods’, ’Before the dawn’, ’Breaking the law’, ’Metal gods’, ’Steeler’, ’Riding on the wind’, ’You’ve got another thing comin’, ’Freewheel Burning’, ’The Sentinel’등 주다스 프리스트의 베스트 트랙들이 이 기간에 압축된다. 자국에서 뿐 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놀라운 성과를 올리며 그칠 줄 몰랐던 그룹은 < Ram It Down > 발표 후 드러머 데이브 홀랜드(Dave Holland)가 탈퇴하면서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레이서 엑스(Racer X) 출신의 테크니션 스코트 트래비스(Scott Travis)가 가세해 만든 작품 < Painkiller >를 공개하면서 다시 한 번 영광의 시간을 갖는다. 트래비스의 현란한 드러밍과 나이를 잊은 듯한 핼포드의 보컬이 진동하는 이 음반은 그룹 후반기의 최고작으로 손꼽힌다. ’Painkiller’, ’Metal meltdown’,’Night crawler’등이 애청되었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주다스 프리스트는 모던 록의 대대적인 공세에 흔들리는 모습을 노출했다. 나날이 하락하는 인기는 멤버들 스스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롭 핼포드는 그룹을 떠나 파이트(Fight)라는 새로운 팀을 결성했고, 이에 그룹은 실력파 보컬리스트 팀 ‘리퍼’ 오웬스(Tim ‘Ripper’ Owens)가 탑승한 7년만의 신보 < Jugulator >를 발표하며 우려를 얼마간 잠재웠다. 2001년 이들은 다시 < Demolition >을 공개해 열혈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핼포드의 복귀를 바라는 이들에게 오웬스가 자리를 굳혔다는 사실은 아쉬움을 안겼지만, 한층 힘이 붙은 그의 보이스는 그룹 제 2의 전성기를 고대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밴드 : Electric Light Orchestra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E.L.O.)
밴드 : The Edgar Winter Group (에드가 윈터 그룹 )
1960년대 중반 대서양을 건너 미국을 침공한 영국 뮤지션들의 활약에서 자극 받은 미국 아티스트들은 그들의 뿌리인 블루스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롤링 스톤스나 야드버즈 같은 영국 팀들이 초기 로큰롤이나 그것을 낳은 블루스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은 음악이라고 무시했던 태도를 지양하고 블루스를 배우고 연구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음악을 구현하게 되었다. 재니스 조플린(Janis Jop... 1960년대 중반 대서양을 건너 미국을 침공한 영국 뮤지션들의 활약에서 자극 받은 미국 아티스트들은 그들의 뿌리인 블루스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롤링 스톤스나 야드버즈 같은 영국 팀들이 초기 로큰롤이나 그것을 낳은 블루스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은 음악이라고 무시했던 태도를 지양하고 블루스를 배우고 연구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음악을 구현하게 되었다.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텐 이어스 애프터(Ten Years After), 캐니드 히트(Canned Heat), 폴 버터필드(Paul Butterfield), 그리고 형제인 조니와 에드가 (Johnny & Edgar Winter) 등이 미 본토의 블루스 붐을 주도했다. 기타리스트인 형 자니 윈터와는 달리 키보드와 색소폰을 다루면서 다른 블루스맨들과 차별화를 기했던 동생 에드가는 1970년 자신의 데뷔 앨범과 이듬해 결성한 그룹 화이트 트래시(White Trash)를 통해 2장의 앨범 < Edgar Winter’s White Trash > < Roadwork >를 발표하며 콘서트활동으로 지평을 넓혀나갔다. 그러나 그는 그룹을 깨고 1972년 다시 유능한 뮤지션들을 규합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에드가 윈터 그룹(Edgar Winter Group)을 결성해 좀더 실험적인 록을 추구하기로 했다. 건반과 색소폰, 보컬을 맡은 에드가 윈터를 축으로 당시 촉망받는 기타리스트 로니 몬트로스, 베이스 겸 보컬 댄 하트먼 그리고 드럼과 퍼커션의 척 러프으로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1994년 사망한 댄 하트먼은 1984년 영화 < 스트리츠 오브 파이어 >에 수록되어 6위까지 올랐던 ’I can dream about you’를 불렀던 그 인물이다). 이외에 앨범의 프로듀서인 릭 데린저(Rick Derringer)가 기타와 백업 보컬에도 참여해 다섯 번째 멤버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72년에 공개된 이들의 처녀작 < They Only Come Out At Night >은 블루스와 로큰롤이 줄기를 이루고있지만 그 외에도 컨트리, 포크, 팝, 서던 록 같은 미국의 국가대표급 음악 장르들 그리고 재즈에서 영향을 받은 프로그레시브까지 형식을 망라하고있다. 여러 음악 스타일이 만개하던 1970년대의 분위기를 타고 자신들의 음악에 이 모든 것을 실험했던 것이다. 여기에 수록된’Frankenstein’은 연주곡임에도 불구하고 전미차트 정상을 차지하는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으며, 앨범은 3위까지 오르며 200만장의 판매광풍을 야기했다. 이어 또 다른 싱글 ‘Free ride’마저 차트 상위권 14위를 기록했으며 국내에서는 감미로운 발라드 ‘Autumn’이 가을만 되면 단골 리퀘스트를 받으며 현재도 라디오전파를 수놓고있다. 이 무렵 프로듀서인 릭 데린저가 정식 멤버로 가입해 로니 몬트로즈를 이은 제리 윔스(Jerry Weems)를 대신해 앨범 < Shock Treatment >(13위)를 발표, 다시 한번 위용을 발휘하지만 웅대한 시작과 달리 이후의 활동은 레드 제플린의 하드록과 디스코의 광풍에 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1975년 보다 록 성향이 강해진 < With Rick Derringer >를 끝으로 이 유능했던 밴드는 록 현장에서 용퇴(勇退)했다. 이후 에드가 윈터는 형 조니의 앨범 < Johnny Winter > < Second Winter >, 릭 데린저의 명 앨범 < All American Boy >, 댄 하트맨의 솔로 앨범 등에 참여하는 것을 비롯해 자신의 솔로 앨범 < Edgar Winter Group >(1979년) < Standing On Rock >(1981년)를 발표해 블루스연주와 록에 대한 꺼질 줄 모르는 애정을 과시했다. 1992년에도 그는 형 조니와 뉴욕의 유명한 리츠에서 공연, 박수갈채를 받았다. 음악 프리즘이 다양했던 1970년대에 에드가 윈터 그룹의 진보적인 시도는 결코 아트 록 매니아나 밴드 자신들만을 위한 만족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러 이들의 진취적이고 새로운 실험은 상업적으로 비추어질 수 있지만 그러한 주장은 명 연주곡 ’Frankenstein’ 앞에서는 무의미한 탁상공론(卓上空論)일 뿐이다.
1980년대 중반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른 두 곡의 록발라드 ‘These dreams’와 ‘Alone’가 널리 애청되면서 우리나라에서 뒤늦게 빛을 본 하트(Heart)는 1970년대 초반에 결성된 혼성 5인조 그룹이다. 언니 앤 윌슨(Ann Wilson, 1950년 생)과 기타리스트인 동생 낸시 윌슨(Nancy Wilson, 1954년 생) 자매의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하드한 팝록을 음악 아이덴티티로 삼아 상... 1980년대 중반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른 두 곡의 록발라드 ‘These dreams’와 ‘Alone’가 널리 애청되면서 우리나라에서 뒤늦게 빛을 본 하트(Heart)는 1970년대 초반에 결성된 혼성 5인조 그룹이다. 언니 앤 윌슨(Ann Wilson, 1950년 생)과 기타리스트인 동생 낸시 윌슨(Nancy Wilson, 1954년 생) 자매의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하드한 팝록을 음악 아이덴티티로 삼아 상당한 상업적 실적을 쌓았다. 그리하여 대중적인 인지도는 높았지만 결코 록 평단의 찬사를 받지는 못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프로 뮤지션으로서의 활동상을 보여준 하트는 포크와 정통 하드록, 그리고 실험적인 스타일이 혼합된 독특한 음악을 구사함으로써 타 그룹과의 차별화에 성공했다. 레드 제플린(Led Zeppeline)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꽤 직선적인 록을 외연으로 하면서도 내면에는 포크적인 부드러움과 유연함을 간직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이들의 대중성이 위치했다. 보컬리스트 앤 윌슨은 여성판 로버트 플랜트(Robert Plant)라고 불릴 만큼 파워풀한 보컬을 과시했다. 그래서 초창기 하트의 노래들은 국내 팬들에게 익숙한 록발라드 이미지와는 판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워싱턴 주(州)의 시애틀에서 10대 시절을 보낸 앤과 낸시 자매는 포크 음악에 심취했고 곧 낸시는 기타와 플루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두 자매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프로 뮤지션이 되기로 마음을 굳힌 후 낸시는 포크 싱어로, 앤은 캐나다 벤쿠버에 적을 두고 있는 남성 그룹 디 아미(The Army)에 가입했다. 곧이어 동생 낸시가 국경을 넘어 언니 그룹에 가세해 두 번째 이름 화이트 하트(White Heart)를 간단히 하트로 줄이며 활동에 진력해 벤쿠버에서는 고정적인 추종자들이 생겨날 만큼 로컬 인기그룹으로 뻗어났다. 1976년에 공개된 처녀작 < Dreamboat Annie >는 1970년대 록 앨범 중 가장 멋진 데뷔작의 하나로 꼽힌다. 현재까지 이들의 대표 곡으로 남아 있는 ‘Crazy on you(35위)’, ‘Magic man(9위)’, 그리고 컨트리 음악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밴조의 낭랑한 연주와 포크가 멋지게 어깨동무를 한 ‘Dreamboat Annie(42위)’가 자리하고 있는 이 첫 작품은 록의 고전이 되었다. 1년이 지나 발표한 두 번째 앨범 < Little Queen >에서도 여러 히트 싱글들이 배출되어 미국에서만 100만 이상의 판매고를 올려 신인들에겐 두려움인 소포모어 징크스를 거뜬히 넘어섰다. 선동적인 리듬과 기타 연주의 ‘Barracuda’(얼마 전 2000년에 개봉된 영화 < 미녀 삼총사 >에 삽입되어 활달한 영화 분위기에 일조했다)가 차트 11위에 올랐고, 그밖에 ‘Kick it out(79위)’, 펑키(funky)한 기운이 도는 하드록 트랙 ‘Little queen(62위)’ 등이 애청되었다. 그러나 그룹의 결속력이 흔들리기 시작한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남성 멤버들이 탈퇴하고 가입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 기간에 발표된 < Magazine >, < Dog & Butterfly >, < Bebe Le Strange >, < Private Audition >, < Passionworks >는 실패하지 않았지만 하트의 역사에 있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은 앨범들이었다. 하지만 ‘Heartless(24위)’, ‘Straight on(15위)’, ‘Dog & Butterfly(34위)’, ‘Even it up(33위)’, ‘Tell it like it is(8위)’, ‘This man is mine(33위)’, ‘How can I refuse?(44위)’ 등의 싱글 곡들을 차트에 꾸준하게 밀어 올려 대열에서 후퇴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1979년에 마이크와 로저 피셔 형제가 나가고 그 후임으로 하워드 리스(Howard Leese)가 들어왔고, 1982년에는 스티브 포센과 마이클 데로시어 대신 팝록 밴드 파이어폴(Firefall)에 있었던 마크 안데스(Mark Andes)와 데니 카마시(Denny Carmassi)가 합류하면서 1980년대 중반과 후반을 화려하게 비상(飛上)할 프로젝트를 착수한다. 1985년에 나온 여덟 번째 정규 음반 < Heart >는 이들에게 제2의 전성기를 안겨 주었다. 처음으로 넘버 원의 영광을 선사한 록발라드 ‘These dreams’를 비롯해 ‘What about love(10위)’, ‘Never(4위)’, ‘Nothin’ at all(10위)’, ‘If looks could kill(54위)’은 당시 라디오에서 골든 레퍼토리로 자리를 잡았으며 국내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초기부터 이들의 음악에 귀를 기울였던 골수 하트 매니아들은 한결 쉬워진 팝록 사운드에 적지 않게 실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작 < Heart >보다 좀 더 대중적인 취향에 맞춘 < Bad Animals >로 하트는 전 세계 음악 팬들의 가슴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파워 발라드 ‘Alone(3주간 1위)’를 분수령으로 ‘Who will you run to(7위)’, 낸시 윌슨이 부른 ‘There’s the girl(12위)’, 비장미 넘치는 발라드 ‘I want you so bad(49위)’가 차트를 누비며 1987년과 1988년을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국내에서도 본격적인 하트의 추종자들을 늘리는 기폭제가 됐다. 1990년 초에 공개된 < Brigade >에서도 ‘All I wanna do is make love to you(2위)’와 ‘I didn’t want to need you(23위)’, ‘Stranded(13위)’, ‘Secret(64위)’ 등의 싱글로 그들의 명성을 지속했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 윌슨 자매의 고향(그 유명한 시애틀!) 후배들의 분기충천(憤氣沖天)한 얼터너티브 그런지의 음악 파고에 밀린 1993년도 CD < Desire Walks On >은 하트가 그동안 쌓아 온 이름값에 한참을 못 미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싱글 ‘Will you be there (In the morning)’ 만이 39위에 간신히 턱걸이했을 뿐이다. 이후 이들은 공식적인 신보 발표를 유보하고 공연 실황이나 히트곡 모음집 형식의 컴필레이션 음반 위주로 자신들의 지지자들과 음악적인 교류를 단행하고 있다. 언니 앤 윌슨은 러버보이(Loverboy)의 리드 보컬리스트 마이크 레노(Mike Reno)와 함께 댄스 무비인 < 풋루스 >의 사랑의 테마 ‘Almost paradise(1984년 7위)’를 취입한 것 외에도 에디 머피가 주연한 < 골든 차일드 >의 주제곡 ‘The best man in the world(1985년 61위)’와 멜 깁슨과 미셀 파이퍼가 타이틀 롤을 맡은 영화 < 데킬라 선라이스 >의 주제가로 리차드 막스(Richard Marx)가 작곡한 ‘Surrender to me(1989년 6위)’를 칩 트릭(Cheap Trick)의 로빈 젠더(Robin Zander)와 호흡을 맞춰 독행(獨行)으로도 히트 차트에 입성했다. < 세이 애니씽 >, < 싱글스 >, < 제리 맥과이어 >, < 올모스트 페이머스 > 그리고 최신작 < 바닐라 스카이 > 등을 만들어 작년에 내한하기도 했던 영화 감독 카메론 크로우(Cameron Crow)의 부인인 동생 낸시 윌슨은 간혹 남편의 영화 음악 스코어를 작곡함으로써 록음악과는 다른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밴드 : Beck, Bogert & Appice (벡, 보거트 앤 어피스)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Jeff Beck이 Jeff Beck Group을 해산시키고 Vanilla Fudge와 Cactus의 드러머였던 Carmine Appice와 베이시스트 Tim Bogert과 함께 결성한 록 밴드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Jeff Beck이 Jeff Beck Group을 해산시키고 Vanilla Fudge와 Cactus의 드러머였던 Carmine Appice와 베이시스트 Tim Bogert과 함께 결성한 록 밴드
밴드 : The Allman Brothers Band (올맨 브라더스 밴드)
1960년대 중반부터 집중 호우 식으로 등장한 영국 뮤지션들은 한동안 미국인들이 등한시했던 자신들의 음악인 초기 로큰롤과 블루스를 가지고 팝음악계를 평정했다. 이러한 역전 상황에 자극을 받은 미국 아티스트들은 뒤늦게 음악 창고에서 끄집어 낸 포크, 블루스, 재즈 등을 록과 융합해 포크록, 재즈록, 블루스록으로 새로운 가지치기를 했고 이 신종 장르들이 1960년대 후반부터 사운드 볼륨이 증폭되기 시작한 하드록과 만... 1960년대 중반부터 집중 호우 식으로 등장한 영국 뮤지션들은 한동안 미국인들이 등한시했던 자신들의 음악인 초기 로큰롤과 블루스를 가지고 팝음악계를 평정했다. 이러한 역전 상황에 자극을 받은 미국 아티스트들은 뒤늦게 음악 창고에서 끄집어 낸 포크, 블루스, 재즈 등을 록과 융합해 포크록, 재즈록, 블루스록으로 새로운 가지치기를 했고 이 신종 장르들이 1960년대 후반부터 사운드 볼륨이 증폭되기 시작한 하드록과 만나면서 또 다시 새로운 스타일을 잉태했다. 이 갓 태어난 음악에는 하드록, 초기 로큰롤, 블루스, 컨트리, 재즈 등 가장 미국적인 음악 요소를 포괄하고 있었다. 이러한 형식을 처음 시도한 밴드가 미국 동남부에 위치한 조지아주 출신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남부의 록음악, 즉 서던록(Southern Rock)이라 명명했다. 바로 그 발화점이 된 그룹이 올맨 브라더스 밴드(Allman Brothers Band - 이하 ABB)다. 투박한 뚝배기 안에서 펄펄 끓는 된장찌개처럼 진한 서던록을 창조한 올맨 브라더스 밴드는 1970년대 초반, 절정의 순간에 주축 멤버들의 갑작스런 사망 때문에 전성기는 짧았지만 록음악 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점한 그룹이다. 왜냐하면 서던록은 1970년대 하드록 씬에서도 상당한 지분을 차지했던 음악 장르일 뿐만 아니라 레너드 스키너드(Lynyrd Skynyrd), 지지 탑(ZZ Top), 마샬 터커 밴드(Marshall Tucker Band), 아틀란타 리듬 섹션(Atlanta Rhythm Section), 38 스페셜(38 Special)을 거쳐 현재의 블랙 크로우스(Black Crowes)와 데이브 매튜스 밴드(Dave Matthews Band)까지 그 명맥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음악 계보가 바로 ABB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조지아 출신의 6인조 밴드는 1960년대 후반 로큰롤과 부기우기가 결합한 음악을 구사했던 ‘아우어 글래스(Hour Glass)’라는 밴드에서 기타를 담당했던 형 듀안 올맨(Duane Allman)과 키보드를 맡았던 아우 그렉 올맨(Gregg Allman)이 남부 출신의 새로운 친구들인 딕키 벳츠(Dickie Betts/기타, 보컬), 베리 오클리(Berry Oakley/베이스), 그리고 부치 트럭스(Butch Trucks/드럼)와 자이 조하니 조한슨(Jai Johanny Johanson/드럼)을 규합해 프레임을 갖춤으로써 ABB의 위대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대평원을 달리는 카우보이 후예들의 트윈 드럼 시스템은 훗날 같은 계열의 서던록 밴드인 레너드 스키너드(Lynyrd Skynyrd)와 38 스페셜(38 Special)에게 입김이 작용했고, 트윈 기타 체제는 쥬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나 슬레이어(Slayer)같은 헤비메탈 그룹들에게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레너드 스키너드는 무려 3명의 리드 기타리스트를 두어 올맨 브라더스의 벽을 넘고자 했다). 이 섹스텟(sextet-6인조)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부터 듀안 올맨은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이나 윌슨 피켓(Wilson Pickett)같은 대가들의 음반에서 기타를 연주해 음악계에선 그 명성이 대단했다. 그의 이러한 활동 반경은 에릭 클랩튼(Eric Clapton)이 조직했던 데렉 & 더 도미노스(Derek & The Dominoes)가 1971년에 발표한 의 협연으로 이어진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싱글 ‘Layla’의 후반부에서 피아노와 앙상블을 이룬 명 슬라이드 기타 연주의 영광은 듀안 올맨에게 돌아간다. 1969년, 음악팬들은 블루스와 컨트리, 재즈 그리고 하드록이 멋지게 조화를 이룬 이 ABB의 데뷔 앨범 를 통해 새로운 음악 세계를 경험했다. 그것은 블루스 하드록과 컨트리, 재즈가 사이좋게 어깨동무 한 서던록의 힘찬 첫출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후에 공개된 실황 음반 와 정규 앨범 , 그리고 를 통해 가장 미국적인 록음악의 전형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 정점의 시기에 그룹의 버팀목이던 듀안 올맨이 1971년 10월 29일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베이스 주자 베리 오클리도 이듬해인 1972년 같은 장소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는 기막힌 비극을 연출했다. 음악적으로나 연주 면에 있어 가장 물오른 시점을 맞이하고 있던 ABB에게 두 멤버의 죽음은 상당한 치명타였지만 몸과 마음을 추스른 나머지 ‘생존자’들은 그렉 올맨과 딕키 벳츠를 중심으로 뭉쳐 신보를 제작했다. 이 아픔을 딛고 일어선 음반이 최대 히트곡 ‘Ramblin’man(2위)’과 명 연주곡 ‘Jessica(65위)’가 수록된 1973년 작품 다. 이전의 LP보다 대중적이면서도 컨트리 쪽으로 궤도를 대폭 수정한 이 작품으로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의 고지를 점령했고, 올맨 브라더스 밴드에겐 금전적인 여유를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이후에 발표한 음반들은 이전 만큼의 음악적 재능과 창작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것은 듀안 올맨과 베리 오클리가 올맨 브라더스 밴드의 음악적 심장부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후 셰어(Cher) 아주머니와 결혼했던 그렉 올맨은 밴드와 솔로 활동을 병행하면서 1987년에는 ‘I’m no angel(49위)’이란 히트곡을 생산했고, 지금까지 올맨 브라더스 밴드의 이름으로 라이브 활동을 해 오고 있다. 듀안 올맨이 음악팬들의 곁을 떠난 지 정확히 30년이 지난 현재, 그의 이름은 그리움과 아쉬움을 상징하는 고유 명사가 되었다. 특히 에 수록된 ‘In memory of Elizabeth Reed’에서 그렉 올맨의 영롱한 기타 연주는 30년 이상이 흐른 지금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올맨 브라더스 밴드와 서던록의 흥망성쇠를 표현하고 있다.
밴드 : Fleetwood Mac (플리트우드 맥)
플리트우드 맥(Fleetwood Mac)은 이글스(The Eagles), 비지스(Bee Gees)와 더불어 70년대 후반 음반 시장의 산업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밴드이다. 1977년작 < Rumours >는 70년대 단일 뮤지션 최다판매 앨범의 기록을 갖고 있을 만큼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1967년 영국에서 결성된 플리트우드 맥은 1970년대 후반 ‘팝화된 록’으로 절정의 인기를 누렸지만 실상 음악적 시작은 블루... 플리트우드 맥(Fleetwood Mac)은 이글스(The Eagles), 비지스(Bee Gees)와 더불어 70년대 후반 음반 시장의 산업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밴드이다. 1977년작 < Rumours >는 70년대 단일 뮤지션 최다판매 앨범의 기록을 갖고 있을 만큼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1967년 영국에서 결성된 플리트우드 맥은 1970년대 후반 ‘팝화된 록’으로 절정의 인기를 누렸지만 실상 음악적 시작은 블루스였다. 존 메이올의 블루스브레이커스(John Mayall’s Bluesbreakers) 출신의 두 아티스트 피터 그린(Peter Green, 기타), 믹 플리트우드(Mick Fleetwood, 드럼)가 제레미 스펜서(Jeremy Spencer, 세컨기타), 존 맥비(John McVie, 베이스)를 영입하여 출발했다. 밴드는 1968년 < Peter Green’s Fleetwood Mac >을 발표하여 영국차트 5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둔다. 리듬 부분이 약하다는 판단 하에 세 번째 기타리스트로 대니 커완(Danny Kirwan)을 끌어들여 이후 그의 뛰어난 작곡에 힘입어 성공 행진에 가속을 더한다. 1960년대 말 블루스 붐을 타고 많은 싱글들이 영국차트 10위 권내에 진입했으며, 1970년대 중반까지 거침없는 인기가도를 질주한다. 하지만 밴드는 잦은 멤버 교체로 블루스 그룹으로서의 정체성을 차츰 상실해갔고 게다가 1970년 그룹의 간판인 피터 그린(Peter Green)이 그룹을 떠났고, 그린의 후임으로 크리스틴 퍼펙트(Christine Perfect)를 맞아들여 < Kiln House >를 발표하지만 곧 제레미 스펜서마저 밴드를 떠난다. 새 멤버 밥 웰치(Bob Welch)를 받아들인 후 음악은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변화는 후에 있을 대성공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들은 블루스 음악에서 벗어나 선율을 보강한 팝 성향의 앨범을 연이어 발표한다. < Future Games >와 < Bare Trees >는 이전 블루스에 익숙해 있던 영국 팬들을 혼란 속에 빠지게 했지만 미국시장에서 선전하며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크리스틴 퍼펙트(존 맥비와 결혼하여 이후 Christine McVie로 활동한다.), 밥 웰치, 존 맥비, 믹 플리트우드의 라인업으로 활동하던 이들은 다시 한 번 멤버 교체를 겪는다. 웰치 대신 듀오로 활동하던 스티브 닉스(Stevie Nicks)와 린지 버킹햄(Lindsey Buckingham)을 맞아 들인 것이다. 바로 이 5명이 거대한 성공을 창출한 플리우드 맥 전성기의 주역들이다. 1975년 겨울 미국차트를 장식한 앨범 < Fleetwood Mac >은 500만장이 팔려나가는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고 첫 싱글 ‘Over my head(20위)’에 이어 ‘Rhiannon(will you ever win)’과 ‘Say you love me’는 모두 11위에 올라 확실하게 성공의 발판을 다진다. 그리고 1977년 그 유명한 < Rumours >를 발표한다. 앨범은 2,500만장이 팔려나가 마이클 잭슨의 < Thriller >가 나오기 전까지 한 아티스트의 앨범으로서는 가장 많은 판매를 기록한 앨범으로 기네스북에 올랐으며, ‘Go your own way(10위)’에 이어 ‘Dreams(1위)’, ‘Don’t stop(3위)’, ‘You make loving fun(8위)’ 등 싱글 넷이 모조리 톱10을 차지하는 괴력을 발한다. 싱글과는 별도로 ‘Songbird’와 ‘The chains’도 널리 애청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정상의 자리에 오른 순간에 그룹의 결속력은 눈에 띄게 후퇴했다. 부부였던 존 맥비(John McVie)와 크리스틴 맥비(Christine McVie)는 파경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연인 사이었던 스티브 닉스(Stevie Nicks)와 린지 버킹햄(Lindsey Buckingham) 역시 애정에 금이 가 있었다. 결국 파경 관련 루머는 사실이 되어 맥비 부부는 이혼하고 스티브와 린지도 갈라서고 만다. 하지만 이런 좋지 않은 결속력으로도 이들은 1980년대 후반까지 < Tusk >(79년), < Mirage >(82년), < Tango In The Night >(87년)에 이르는 히트를 일구어내며 ‘헤쳐 모여’로 성공하는 아이러니를 이어갔다(결속력이 약하다고 음악이 약하지는 않은 법!). 이 시절에도 < Mirage >의 ‘Gypsy(12위)’나 < Tango In The Night >의 ‘Big love(5위)’와 ‘Little lies(4위)’처럼 록이든 발라드 풍이든, 밝은 듯 우울한 이들의 독특한 매력의 곡들은 국내에서도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 이들의 음악적 특성은 기타 톤에서 잘 드러난다. 맑은 톤에 울림을 주어 고음에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유지한다. 바로 이 점이 플리트우드 맥 음악이 록에 대한 거부감을 뚫고 대중을 스며들 수 있었던 주인(主因)으로 분석된다. 1988년 새로운 멤버들로 짜여진 플리트우드 맥은 1990년대 중반까지 라이브 활동으로 일관했고 1997년 < Rumours > 발매 20주년을 맞아 성공의 주역들이 다시 모여 < The Dance >를 발표, 50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저력을 발휘했다.
밴드 : Santana (산타나 (라틴 락 밴드))
20세기 마지막 팝 음악의 유행은 음반산업이 주조했든 아니든 정열의 라틴음악이 장악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최근에 발표된 제42회 그래미상 후보자 명단이 웅변한다. ‘Livin’ la vida loca’의 주인공 리키 마틴(Ricky Martin)을 비롯 제니퍼 로페즈(Jenifer Lopez), 마크 앤소니(Marc Anthony), 루 베가(Lou Bega) 등 지난해 라틴 열풍을 주도했던 신성(新星)들이 그... 20세기 마지막 팝 음악의 유행은 음반산업이 주조했든 아니든 정열의 라틴음악이 장악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최근에 발표된 제42회 그래미상 후보자 명단이 웅변한다. ‘Livin’ la vida loca’의 주인공 리키 마틴(Ricky Martin)을 비롯 제니퍼 로페즈(Jenifer Lopez), 마크 앤소니(Marc Anthony), 루 베가(Lou Bega) 등 지난해 라틴 열풍을 주도했던 신성(新星)들이 그래미상의 주요 부문에 공천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의 당선 가능성은 희박하다. 다름 아닌 ‘라틴 록의 거장’ 카를로스 산타나가 버티고 있어서다. 올해로 52세인 그는 1999년에 발표한 앨범 < Supernatural >로 그래미 최고의 영예인 ‘올해의 앨범’, ‘올해의 노래’, ‘올해의 레코드’ 부문을 포함, 무려 11개 부문의 후보로 지명되는 기염을 토했다. < 뉴스위크 >는 최신호에서 1998년 밥 딜런에 이어 이번 그래미 시상식은 산타나의 컴백 무대가 될 것이라며 그의 압승을 예견했다. 뉴 밀레니엄을 전후로 빌보드 차트를 장기간 점령한 빅히트 싱글 < Smooth >와 500만장이라는 가공할 음반판매량이 화려한 재기를 견인했다. 음악팬들은 10대 틴 음악의 싹쓸이 판에서 모처럼 대가의 위용을 체험하고 있다. 멕시코 태생의 기타리스트 산타나는 1966년 히피 문화의 본고장 샌프란시스코에서 ‘산타나 블루스 밴드’란 이름으로 음악 여정을 시작했다. 그는 1969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출연, 전설적인 연주곡 ‘Soul sacrifice’를 들려주어 일대 주목을 받았다. 산타나로 그룹명을 바꾼 그는 같은 해 셀프 타이틀 앨범에서 당시의 주도적 경향인 사이키델릭에 라틴 비트, 아프리카 리듬, 그리고 블루스를 이입한 음악을 연주했다. 산타나는 그러나 1970년대가 열리면서 1960년대 말을 어지러이 수놓았던 사이키델릭과 블루스가 퇴조하자 라틴 리듬과 정통 로큰롤을 뒤섞은 이른바 ‘라틴 록’으로 조정을 꾀했다. 1970년에 발표되어 지금도 명반으로 남아있는 2집 < Abraxas >가 바로 처음 라틴 록의 정체를 천하에 고한 작품이었다. 이 음반의 수록곡 ‘Black magic woman/Gypsy queen’과 ‘맘보의 왕’ 티토 푸엔테(Tito Puente)의 곡을 재해석한 ‘Oye como va’는 각각 차트 4위, 13위에 랭크되며 히트했다. 특히 그가 이 음반 수록곡 ‘Samba pa ti’에서 구사한 애절한 기타연주는 국내에서 그의 명성을 한층 드높인 계기를 마련했다. 발라드 선호의 우리 정서와 심금을 울리는 그의 라틴기타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 것이다. 이 같은 어울림은 기타에 멜로디를 집어넣은 카를로스의 연주기법 때문에 가능했다. "나의 음악 키워드는 음(音)으로 이야기하듯 말하는 것이다. 기타를 통해 나는 노래하고 있다" 라틴 록 보석 ‘Europa’가 담겨있는 1976년 앨범 < Amigos >도 앨범차트 10위에 올랐고, 그해 일본 평론가협회 제정 최우수 앨범 상을 받았다. 지금도 기타지망생들은 ‘Europa’와 산타나의 이름을 등식화한다. 이듬해 발표한 작품 < Moonflower >에서도 좀비스(Zombies)의 명곡을 라틴 사운드로 새 단장한 ‘She’s not there’로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카를로스 산타나의 ‘절충주의’ 음악은 한계를 드러냈다. 그의 맛깔스런 기타 연주는 계속해서 위용을 과시했지만, 순하게 들리는 태생적 한계를 드러내면서 뒷심은 뚝 떨어졌다. 새로운 세대의 변화무쌍한 감성을 파고드는 필살(必殺)의 포인트를 상실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시대분위기에 편승하여 팝 성향이 강화된 1979년 앨범 < Marathon >을 발표한 데 이어 1980년 재즈 록 앨범 < Swing Of Delight >, 1987년 명상 앨범 < Blues For Salvador > 등 장르를 따지지 않는 합종연횡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비록 장기외유였지만 ‘록의 경계선을 허문’ 고유업적이 빛이 바랜 건 아니었다. 1980년대 이후의 활동도 사실 ‘퓨전’이란 그의 평생 과업의 선상에 있었다. 1998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당당히 들어섰고, 같은 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도 입적되었다. 마침내 그의 ‘장르 뒤섞기’ 실험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산타나는 지난해 < Supernatural >로 역사에 안치되기를 거부하고 현실무대로 화려히 컴백했다. 아리스타 레코드사의 파워 맨 클라이브 데이비스(Clive Davis)가 직접 지휘봉을 잡고 만든 이 앨범에는 데이브 매튜스, 로린 힐, 와이클레프 진 그리고 매치박스 20의 롭 토마스 등 신세대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했다. 산타나는 평소 자신을 존경해온 이들의 도움으로 상기한 신진 라틴스타들에 못지 않은 활기를 내뿜었다. ‘신구세대의 통합’을 목표로 산타나와 데이비스 사장이 제휴하여 치밀히 계획한 전략의 결과였다. 이 작품이 구현한 절충과 타협의 미학은 젊은 층과 기성세대를 막론했다. 올해 그래미상은 그를 위한 잔치가 될 게 거의 확실해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산타나 본인은 성공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는 앨범 < Supernatural >이 자신의 계획 중 일부분이라고만 했다. 원대한 포부를 시사한다. 하지만 그의 마스터플랜은 인기나 성공이 아니라 ‘음악의 완성’이다.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에서 이미 진실함을 읽을 수 있다.
밴드 : Blood Sweat and Tears (블러드 스웻 앤 티어스,Blood, Sweat & Tears / BS&T)
재즈-락 밴드 재즈-락 밴드
블루스 락 기타리스트 스티브 레이 본(Stevie Ray Vaughan)이 1978년 결성한 블루스 락 밴드. 블루스 락 기타리스트 스티브 레이 본(Stevie Ray Vaughan)이 1978년 결성한 블루스 락 밴드.
브리티쉬 블루스 록 밴드. Dave Bidwell : drums Stan Webb : vocal/guitar Christine Perfect : vocal/piano Andy Sylvester : bass 브리티쉬 블루스 록 밴드.

Dave Bidwell : drums
Stan Webb : vocal/guitar
Christine Perfect : vocal/piano
Andy Sylvester : bass
밴드 : Big Brother & The Holding Company (빅 브라더 앤 더 홀딩 컴퍼니)
밴드 : Stone Roses (스톤 로지스 (락 밴드))
"이 추악한 뮤직 비즈니스 계에서 10년간을 보내고 스톤 로지스의 종언을 고하게 돼서 무척 기쁘다." 이 뼈있는 코멘트를 끝으로 ’매드체스터’ 스톤 로지스는 1996년 10월 맨체스터의 공장 연기로 화했다. 그들은 서바이벌 전장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음악 산업의 현장에서 음악의 순수성(인디 정신)을 지키며 기쁨과 환희를 제공했으며, 그것을 고이 간직한 채 돌로 굳어졌다. 1989년에 발표한 데뷔 음반 < The ... "이 추악한 뮤직 비즈니스 계에서 10년간을 보내고 스톤 로지스의 종언을 고하게 돼서 무척 기쁘다." 이 뼈있는 코멘트를 끝으로 ’매드체스터’ 스톤 로지스는 1996년 10월 맨체스터의 공장 연기로 화했다. 그들은 서바이벌 전장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음악 산업의 현장에서 음악의 순수성(인디 정신)을 지키며 기쁨과 환희를 제공했으며, 그것을 고이 간직한 채 돌로 굳어졌다. 1989년에 발표한 데뷔 음반 < The Stone Roses >로 스톤 로지스는 록음악으로도 몸을 흔들 수 있다는 맨체스터 사운드(록과 댄스의 결합)의 공식을 성립했고, 1990년대 영국 전역을 휩쓴 브릿 팝의 출현에 결정적 단초를 제공했다. 스톤 로지스의 출발은 폴 웰러(Paul Weller)가 이끌었던 잼(Jam)의 영향을 받은 그룹 잉글리시 로즈(English Rose)로부터 시작된다. 1980년대 초반 잉글리시 로즈에서 활동하던 보컬리스트 이언 브라운(Ian Brown)과 기타리스트 존 스콰이어(John Squire)는 새로운 밴드를 결성하기로 마음먹고, 베이시스트 게리 "매니" 마운필드(Gary "Mani" Mounfield)와 드러머 앨런 "레니" 렌(Alan "Reni" Wren)과 함께 1985년 스톤 로지스를 만들었다(이미 약간의 멤버 변화를 겪은 후였다). 잉글리시 로즈와 밴드가 좋아하는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의 이름을 조합하여 그룹명을 지었다. 1989년 데뷔작이 나오기까지 스톤로지스는 철저히 언더그라운드 클럽에서 긴 시간을 여행했다. 그들은 ’So young’, ’Tell me’, ’Sally Cinnamon’ 같은 싱글들을 내놓으며 맨체스터의 유명 클럽 ’하시엔다’를 중심으로 추종자들을 몰고 다녔다. 그들은 영국 전통의 기타 팝 사운드에 애시드 하우스의 댄스 비트를 가미시켜 ’’댄스 록’’의 모범을 제시했다. 음악의 중심은 기타에 두면서도 댄서블한 느낌을 강조했다. 같은 맨체스터 사운드의 선구자 해피 먼데이스(Happy Mondays)가 약물에 의존하여 환각적인 모습을 부각시킨 반면, 스톤 로지스는 오직 ’사운드’로 사이키델릭적인 요소를 내보였다. 이러한 모든 것이 바로 1989년 앨범 < The Stone Roses >에 모두 녹아있다. 매드체스터의 위대한 찬가 ’I wanna be adored’를 비롯해, ’Made of stone’, ’She bangs the drums’ 같은 명곡들이 증명한다. 음반은 발표되자마자 영국 언론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걸작’ 반열에 올랐고, 영국 음악의 희망으로 추켜세워졌다. 스톤 로지스 최고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또한 종착역으로 가는 트랜스퍼 지점이기도 했다. 이후 밴드는 소속 레이블 < 실버톤(Silvertone) >과 로열티 문제를 놓고 5년 동안의 지루한 법정공방을 벌여야만 했고, 후속 앨범의 작업은 멀어져만 갔다. 아마 이 때문에 멤버들은 음반 산업의 횡포와 추악함에 대해 절실히 깨닫게 되었던 것 같다. 결국 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한 그룹은 메이저 레이블 < 게펜(Geffen) >으로 둥지를 새롭게 틀고 1994년 두 번째 음반 < Second Coming >을 내놓았다. 하지만 앨범은 뛰어난 음악성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스톤 로지스는 해산절차에 들어갔다. 먼저 드러머 앨런 렌이 떠나갔고, 사운드 메이커 존 스콰이어도 탈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1996년 10월, 그들은 사라졌다. 이후 베이시스트 매니는 프라이멀 스크림(Primal Scream)으로 직행했고, 존 스콰이어는 시호지스(Seahorses)를 조직해 1997년 < Do It Yourself >를 발표했다. 이언 브라운 역시 1998년 < Unfinished Monkey Business >, 2000년 < Golden Greats >를 내놓으며 또 다시 추악한 뮤직 비즈니스 계에서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밴드 : Manic Street Preachers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 [매닉스],The Manics)
1991년 영국 웨일스(Wales)에서 결성된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이하 매닉스)는 근래에 보기 힘든 음악계의 이단아들이다. 섹스 피스톨스, 클래시 같은 펑크 그룹들의 직계라 할 수 있는 이들은 데뷔 초 ‘막시스트’라 불릴 정도의 과격한 메시지를 쏟아내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 ‘미친 거리의 전도사’들에게 미제국주의는 응당 ‘베어버리고, 불태워야 할’ 것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영국왕실 역시 극도의 혐오대... 1991년 영국 웨일스(Wales)에서 결성된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이하 매닉스)는 근래에 보기 힘든 음악계의 이단아들이다. 섹스 피스톨스, 클래시 같은 펑크 그룹들의 직계라 할 수 있는 이들은 데뷔 초 ‘막시스트’라 불릴 정도의 과격한 메시지를 쏟아내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 ‘미친 거리의 전도사’들에게 미제국주의는 응당 ‘베어버리고, 불태워야 할’ 것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영국왕실 역시 극도의 혐오대상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메시지들은 초강력 펑크 사운드에 실려 이들의 지지자들을 선동했다. 하지만 이들의 강성 이미지와는 달리 감성적인 멜로디라인을 지닌 이들의 음악은 팝 팬들마저도 흡수시킬 수 있었다. 작사를 전담한 기타리스트 리치 제임스(Richey James), 보컬 겸 기타리스트 제임스 딘 브래드필드(James Dean Bradfield), 드러머 션 무어(Sean Moore), 베이스 주자 니키 와이어(Nicky Wire), 이 4인조로 매닉스는 출발했다. 이들이 처음 활동하던 무렵 영국에는 ‘24시간 신나게 놀자’는 애시드 하우스와 신발만 바라보고 연주하는 ‘슈게이징’이 붐을 타고 있었고, 브릿팝 진영이 막 태동하고 있었다. 매닉스는 그러나 그러한 경향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리얼리즘’이라는 절대적 사명감을 표방하고 나섰다. 당시 만연했던 자포자기 식의 향락주의나 소극적 사운드를 쫓는 것이 아니라 대외적인 힘을 발휘하는 ‘강하고 적극적인 음악’을 설파한 것이다. 글램 록을 연상시키는 진한 메이크업을 한 외모로도 유명했던 이들은 한때 이들의 음악이 가짜, 즉 창조성이 결여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단지 선배들의 고전을 무작정 추종하기만 한다는 ‘오리지널리티’의 문제였다. 1991년 영국 록 잡지 < NME > 기자에게 그 같은 질문을 받은 기타리스트 리치 제임스는 즉석에서 그렇지 않음을 보여줬다. 답변으로 그는 말없이 칼로 팔에 ‘4 REAL(우린 진짜다)’라는 글자를 새겼다. 이 무시무시한 자해소동으로 그러한 의심은 어느 정도 불식되었으며 매닉스의 ‘광적인’ 면모는 더욱 부각되었다. 1992년 데뷔앨범 < Generation Terrorists >을 발표하며 이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진지한 설교를 전도해나가기 시작했다. 2집 < Gold Against The Soul >과 3집 < The Holy Bible >에 이르면서 이들의 무정부주의적 좌파 성향은 극에 달했다. 한편 극심한 신경쇠약 증세로 요양과 투어를 병행하던 ‘문제의’ 리치 제임스는 3집 발매 전날 런던의 호텔을 떠나 실종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리치의 부재로 3인조가 된 매닉스는 친구 잃은 슬픔으로 과격함을 잠시 접고 내면으로 침잠했다. 1995년 출시된 4집 < Everything Must Go >는 전작들에서 보인 투박하고 거친 사운드와 정치적 태도 등을 다소 누그러뜨리고 주류 브릿팝 사운드로 화해를 시도한 걸작앨범이다. ‘모든 것은 사라져야만 한다’는 의미심장한 문구를 내건 이 앨범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매닉스는 일약 영국음악계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2년 뒤 발표된 5집 < This Is My True Tell Me Yours > 역시 이들의 진지함이 돋보이는 수작이며, 1999년 말에 초창기의 강성 모습이 담긴 싱글 ‘The masses against the class’가 발표되었다. 2001년 3월에는 역시 데뷔 초의 ‘열혈 펑크 순수주의자’로 되돌아간 여섯 번째 앨범 < Know Your Enemy >가 발표되었다. 매닉스는 직선적이고 단순한 사운드로 좌파적 메시지를 더욱 각인시켰다. 자주 들리는 이들의 반복구는 무모할 정도다. 이러한 이들의 단순함은 같은 영국그룹 라디오헤드의 복잡함과 흥미로운 비교거리다. 라디오헤드의 분열적 변종 미학과 매닉스의 단순 명료함은 분명 서로 ‘극과 극’이다. 음악적 지향도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고 할까. 이 두 밴드는 위력을 잃고 있는 현 영국 음악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누구보다도 독보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쿠바의 아바나에서 공연한 이들은 쿠바에서 공연한 최초의 록 그룹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북한과 더불어 사회주의의 최후의 보루인 쿠바도 매닉스의 혁명성을 인정한 셈이다. 앞으로도 그 같은 정치적 메시지는 이들의 존재가치로 의미를 더할 전망이다.
밴드 : Primal Scream (프라이멀 스크림)
프라이멀 스크림이 또 원시적으로 울부짖는다. 록과 댄스를 결합시켜 애시드 하우스의 몽환적 사운드로 영국 음악의 새 시대를 갈랐던 언더의 위인들이지만 그들은 얼마 전부터 정치적으로 원초적 외침 본능을 풀어헤쳐, 마치 뱉어내듯 초강력 저항의 언어들을 뿌려대고 있다. 그래도 테크노 음악이 주는 비트 반복의 광적 흥분이 먼저겠지만 16년 경력의 이 중견 밴드의 음악에선 이 부분도 중요하다. 신보 < Xtrmntr >은 ... 프라이멀 스크림이 또 원시적으로 울부짖는다. 록과 댄스를 결합시켜 애시드 하우스의 몽환적 사운드로 영국 음악의 새 시대를 갈랐던 언더의 위인들이지만 그들은 얼마 전부터 정치적으로 원초적 외침 본능을 풀어헤쳐, 마치 뱉어내듯 초강력 저항의 언어들을 뿌려대고 있다. 그래도 테크노 음악이 주는 비트 반복의 광적 흥분이 먼저겠지만 16년 경력의 이 중견 밴드의 음악에선 이 부분도 중요하다. 신보 < Xtrmntr >은 전한다. "우린 절규한다. 고로 우린 존재한다!" 프라이멀 스크림의 지휘자 바비 길레스피(Bobby Gillespie)는 1997년 앨범 < Vanishing Point >에서 좀더 과감한 자세를 취했다. 수록곡 ''Star''에서 아주 확연한 정치적 성향을 드러낸 것이다. 펑크출신의 밴드로서 당연지사 아니냐고 할 수만은 없었다. 사실 그들의 1991년 기념비작 < Screamadelica >는 당시 영국 맨체스터를 중심으로 한 ''쾌락주의 댄스문화'' 흐름과 일치되어 뉴 트렌드의 깃대를 꽂았던 음반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우 출신이었지만 맨체스터의 댄스 록 퓨전과 애시드 하우스 집단, 이른바 ''매드체스터''로 일컬어지는 범주에 포함되기도 한다. 이 트렌드의 원조격인 그룹 스톤 로지스(Stone Roses)의 멤버였던 개리 ''마니'' 마운드필드가 1996년 가을 이 그룹에 베이스주자로 가입했다는 사실도 유사한 과(科)임을 말해주는 단서다. 그것이 레이브 문화와 직결된 ''하루종일 춤추고 놀자!''는 해방철학(?)임을 안다면 ''Star''는 곧 발 아니면 가슴에 중심이 있었던 음악이 머리로 상향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메시지의 중압감을 배격하는 뮤지션이나 팬들에게 이 곡은 ''근엄주의''로 비쳐질 수 있는 다소 모험적인 제스처였다. ''난 권리를 위해 싸우는 모든 이들을 위해 이 노래를 부르는 거야. 모든 사람들이 스타지. 시스터 로자(로자 파크스), 말콤 X, 킹목사는 우리도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하는지를 보여줬지. 법을 바꿔야 해. 그들은 죽었지만 그들의 정신은 아직 살아있어…''- ''Star''중에서 길레스피는 말했다. "난 늘 인권평등에 대한 노래를 쓰고싶었다. 로자, 말콤, 킹을 말한다고 흑인노래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자의 곡을 쓰고싶은 거다. 반역의 노래 말이다." 3년이 흘러 길레스피는 이 입장에서 한 두발 정도가 아니라 크게 건너뛴 신보 < Xtrmntr >로 돌아왔다. 크게 건너뛰었다 함은 반역의 강도를 높여 앨범 전체를 선동으로 물들였다는 뜻이다. 통렬한 언어 일색이며 통렬하다 못해 걱정스런 수준의 무차별 독설이다. 강대국의 파시즘에 대한 독설 지난해 영국에서 싱글로 먼저 발표된 곡 ''Swastica eyes''에서 Swastica가 뭔가. 나치독일의 상징인 갈고리십자형의 기장(卍) 아닌가. 바로 미국이나 영국 등 강대국의 폭력과 지구촌 통제를 나치의 파시즘으로 빗대 통렬히 난도질하는 내용이다. ''노조파괴자들, 경찰, 정부, 도적들, 매수된 정신불구자들. 기생충들이야, 너흰 매독환자들이야. 너흰 스와스티카 눈을 가졌어. 너희들의 내비치는 심리를 봐. 모든 것을 제거하려는 정책, 민주주의에 대한 군사적, 산업적 환영이야.''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신보의 커버와 사진들이 전투기 조종사들을 오려 붙인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문제는 표현방식. 거의 오줌 갈기듯, 침 뱉듯 조롱과 고발의 언어를 쏟아낸다. 이번은 ''Kill all hippies''. ''부셔버려, 히피를 다 죽여버려. 아나키! 디스코는 엿이야. 정상인 것을 뒤엎어버려. 넌 돈이 있지만 난 혼(소울)이 있어. 혼은 살 수 없고 소유할 수도 없어.'' 프라이멀 스크림은 이러한 영감, 정신, 소울이 이미 그들 속에 풍부히 자리잡고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전에 충분히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앨범을 물들이고 있는 욕설과 절규들이 더욱 충격적이다. ''Pills'' 같은 곡은 ''식(sick), 퍽(fuck), 퍽, 식''의 그룹명 그대로 원시적인 외침이다. < Q >잡지의 표현에 따르면 ''피에 젖은 라켓''이다. 어찌 보면 우린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이후 모처럼의 독설가를 만나게 된다. < 롤링스톤 >은 레이지의 < The Battle Of Los Angeles >과 비유해 이 음반을 ''The Battle Of London''이라고 했다. 그래도 레이지는 구체적 사안을 다뤘다면 프라이멀 스크림은 모든 사람들에게 닥치는 대로 쏘아댄다. 거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수준이다. 과거에 이런 성격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근래 프라이멀 스크림이 이토록 막가는(?) 것은 현재 록의 상황과도 관련한다. 록의 아이덴티티 상실에 대한 회의와 분노의 시선이 도사리고 있다. ''도대체 지금의 록은 무엇을 지향하는가? 뭘 얘기하며 무엇과 싸우는가?'' "근래 대부분의 록 가사는 실망스럽다. 너무 자기중심적이다. 집합의식이 사라지고 있다. 모험도 없고 의욕도 상실한 상태다. 차라리 흑인 랩의 메시지 전통을 본받는 게 낫다." 90년대 말에 이르러 록은 솔직히 전통적인 주변환경에의 민감성을 버리고 부와 명성을 최대한 만끽하는 엘리트주의로 전락한 감이 있다. ''음악만 잘하고 출세한다면 그만''이라는 태평하고 거만한 사고가 퍼져있다. 그러나 아버지가 노조(勞組)출신인 바비 길레스피는 일례로 지난 1997년 영국의 국가이슈로 떠오른 리버풀 실직 항만노동자들의 고통과 같은 억압사례를 외면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그해 리버풀 노동자들의 도움으로 런던에서 공연을 갖기도 했다. 길레스피의 주장은 곧 ''지금의 록 엘리트들은 모두 노동자들의 뒷줄을 따라 서야 한다''는 것이다. 앨범의 미학은 그러나 결코 정치성이나 의식에만 있지는 않다. 귀를 째듯 울려대는 테크노 빅비트와 사이렌의 불협화음에 그것을 실어댔다는데 있다. < Screamadelica > 이후 94년 < Give Out But Don''t Give Up >에서 의외의 주류 냄새 물씬한 하드록으로 말을 바꿔 탔다가 다시 < Vanishing Point >와 함께 본령인 테크노 댄스로 귀향한 그들은 신보에서 한층 일렉트로닉 성향을 강화하고 있다. 따라서 새 앨범을 이해하려면 < Vanishing Point >와 함께 언제나 개막이 우대되는 앨범해석 경향을 감안할 때 시작점일 수밖에 없는 문제작 < Screamadelica >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전작에서 드러낸 애시드 하우스와 싸이키델리아에 대한 관점, 이를테면 그것이 복고나 퇴행적 컨셉트가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음악개념이라는 시각이 신보에서 다시 한번 강조된다. 분명히 프라이멀 스크림은 그룹의 나이는 중년이되, 여전히 젊으며 현재진행형을 의식하고 있다. 지난번은 약간은 덥(dub)과 어둡고 불길한 트립합 요소 그리고 소울이 산재했다면 이번은 좀더 강렬한 비트의 반복과 공격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확실히 와일드해졌다. 전작에서 소울의 대가 멤피스 혼스와 덥의 전설 어거스터스 파블로(Augusus Pablo)가 참여한 것과 비교해 신작은 게스트들 가운데 지금의 문법인 케미컬 브라더스가 있다는 것으로도 그 강성화, 최신화가 뚜렷이 확인된다. 게스트로 말하면 이들 말고도 슈 게이징 음악을 창조한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의 케빈 실즈, 뉴 오더의 버나드 섬너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손을 보태고 있다. ''Kill all hippies''의 믹싱을 맡은 케빈 실즈는 현재 프라이멀 스크림의 미국 순회공연에도 동행하고 있어 매니아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나긋나긋한 팝에 대한 해체 의지 목적적 메시지를 가진 곡들이 테크노의 몽롱함, 반복성에 실려 전해진다면 그 분위기는 어떠하겠는가. ''Kill all hippies''는 내려치는 커다란 박동과 마치 공습사이렌처럼 귀를 째며 울어대는 키보드 사운드는 그 잔인성과 공격성으로 메시지 전달효과를 극대화한다. 아홉 번째 곡 ''MBV arkestra(if they move kill ''em)'' 역시 찢어대고 아우성치고 몰아대는 일렉트로닉 노이즈 사운드광경이 흡사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식이다. 그나마 < Screamadelica >의 맛을 가깝게 느낄 수 있는 댄스 그루브 성향의 ''Swastica eyes''도 번개처럼 빠른 스피드로 속도문화의 현장에 데려간다. 물론 듣기가 무난한 영롱한 ''Blood money''나 힘을 뺀 ''Keep your dreams''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헤비하고, 자극적이고, 불길하며 혼잡스럽다. 그러면서도 힙합이나 재즈 스타일 등 다양한 스타일을 구사하고 있다는 게 경이롭다. 한마디로 굳이 < Q >지의 정의를 인용한다면 ''때로 난해한'' 앨범이다. 정말 일반 팝송의 길들여진 멜로디 패턴과 나긋나긋한 전개방식에 젖어있는 사람이라면 접수가 까다로운, 용량초과의 음반이다. 프라이멀 스크림은 그런 소극적 소비자들과 연을 맺을 의도를 조금도 갖고있지 않다. 영국의 잡지 < 모조 >는 ''드문 종류의 귀에 거슬리는 앤티 팝(anti-pop)의 악의''를 품고있는 앨범이라고 했다. 아티스트 개성이 초토화된 팝의 사운드와 노랫말에 모두 저항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대목이 핵심이며 또한 왜 프라이멀 스크림이 이런 음악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그들은 팝의 통속적이고 획일화된 문화를 해체하기 위해 수요자들의 청각을 바꾸고자 한다. 그것이 아티스트 자신을 살리고 따라서 음악도 구제하여 ''다양성''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대부분의 언더와 인디 밴드들이 점점 갈수록 타이트한 것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며 느슨해진 록의 현실을 고려할 때, 테크노의 경우는 애초 사회현실과 유리되고 있는 점을 볼 때, 그들의 메시지지향과 반(反)상업적 팝의 자세는 독행(獨行)의 고귀함이 있다. 지금의 음악은 프라이멀 스크림의 고집스럽지만 ''아름다운 앤티''가 절실하다. 정확히 1시간 동안 수요자들의 멱살을 잡고 소닉 공습과 선동의 장으로 강제 소집한다. 음악을 듣는 게 아니라 음악이 들리는 사실상 귀머거리 상태에 있는 다수대중에게 그러한 강제성은 어떤 점에서 정당하다.
지난 1979년 소녀들의 비명 소리에 가까운 환호성으로 시작하는 ‘I want you to want me’의 라이브 버전은 그룹 창단 여섯 돌을 맞이하는 칩 트릭(Cheap Trick)에겐 고대하던 성공의 축포였다. 1973년의 공식적인 결성 이후 6년 동안 년(年) 200회 이상의 초인적인 공연을 강행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들에게 당시 전미차트 7위에 오르는 이 곡의 차트정복은 가뭄 속의 단비였다. 칩 트... 지난 1979년 소녀들의 비명 소리에 가까운 환호성으로 시작하는 ‘I want you to want me’의 라이브 버전은 그룹 창단 여섯 돌을 맞이하는 칩 트릭(Cheap Trick)에겐 고대하던 성공의 축포였다. 1973년의 공식적인 결성 이후 6년 동안 년(年) 200회 이상의 초인적인 공연을 강행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들에게 당시 전미차트 7위에 오르는 이 곡의 차트정복은 가뭄 속의 단비였다. 칩 트릭의 신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1973년 미국의 일리노이즈에서 결성된 4인조 팝 록 밴드 칩 트릭의 뿌리는 기타리스트 릭 닐슨(Rick Nielsen)과 베이시스트 톰 피터슨(Tom Petersson)이 1960년대 후반에 결성한 퓨즈(Fuse)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 초반 현재의 이름 칩 트릭으로 개명하고 번 E. 카를로스(Bun E. Carlos)와 랜디 호건(Randy Hogan)을 각각 드러머와 보컬리스트로 받아들였지만 이들의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그러자 공동 리더인 릭과 톰은 팀의 프론트를 랜디 호건에서 미소년의 외모를 소유한 전직 포크 싱어 로빈 잰더(Robin Zander)로 전격 교체하고 비상을 준비한다. 1977년에 공개된 역사적인 데뷔 앨범 < Cheap Trick >은 비록 싱글 히트곡은 없었지만 비틀스에게서 물려받은 확실한 선율 감각과 더 후(The Who)로부터 전수 받은 듯한 파워풀한 연주가 유머러스한 가사와 앙상블을 이뤄 이들의 재능이 꿈틀대고 있음을 내비친 작품이었다. 같은 해에 나온 < In Color >에서는 2년 뒤 공연 실황 버전으로 차트를 강타하게 될 ‘I want you to want me’가 온전한 스튜디오 버전으로 수록되어 있다. 1978년에 발표된 < Heaven Tonight >도 가능성을 재확인하면서 이들에게 첫 번째 싱글 히트곡 ‘Surrender’(62위)’를 제공했다. 펑크적인 기타 백킹 연주와 팝적인 멜로디가 찰떡 궁합을 과시한 이 곡은 전형적인 칩 트릭 사운드를 구현한 대표적인 노래 중 하나이다. 그동안 이들은 자신들의 조국인 미국보단 태평양 건너에 있는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로빈 잰더의 잘생긴 외모와 귀를 슬슬 잡아당기는 자연스런 멜로디의 매력에 빠진 일본 소녀들은 칩 트릭의 진가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78년 4월, 이들은 일본의 그 유명한 공연장인 무도관에서 대대적인 공연을 가졌고, 그 열기를 고스란히 담은 음반이 바로 록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 Live At Budokan >이다. 실은 이 앨범도 일본음반자본이 지원해 탄생되었다. 이전의 어떤 음반 못지 않게 화끈한 연주와 후끈 달아오른 현장의 분위기를 실감나게 전달한 이 앨범에서 ‘I want you to want me’와 1950년대 흑인 로큰롤 스타 팻츠 도미노(Fats Domino)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Ain’t that a shame’은 싱글로 커트되어 각각 7위와 35위를 기록하면서 일본, 미국, 유럽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반을 풍미한 버블검 사운드를 표현한 ‘I want you to want me’는 그 앙증맞은 후렴구 때문에 지금까지도 칩 트릭을 정의하는 노래로 남아 있다. 이 LP는 라이브 실황임에도 불구하고 빌보드 앨범 차트 4위까지 올랐고, 3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함으로써 상업적인 면과 음악적인 면 모두를 달성하는 성과를 올렸다. 같은 해인 1979년, 싱글 ‘Voices(32위)’와 ‘Dream police(26위)’가 들어 있는 다음 앨범 < Dream Police >로 확실하게 스타급 밴드의 반열에 올랐지만 비틀스와 아메리카(America)의 프로듀서였던 조지 마틴(George Martin)을 초빙해 제작한 1980년 < All Shook Up >은 과욕 탓인지 제1의 프로듀서와 최고 인기 밴드의 상봉은 융화되지 못한 채 어색한 만남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앨범 후 톰 피터슨은 그룹을 떠났고, 그 후임으로 존 브랜트(Jon Brant)를 영입해 ‘If you want my love(45위)’와 ‘She’s tight(65위)’가 싱글 차트에 입적한 < One On One >을 발표하면서 팝의 시대인 1980년대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 무렵 톰이 없는 칩 트릭은 예전과 같은 음악을 뽑아 내지 못한 채 힘겨움을 드러냈다. 상생(相生)의 필요성을 절감한 칩 트릭과 피터슨이 재회한 것은 1988년에 공개한 < Lap Of Luxury > 때였다. 최초로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의 영광을 안겨 준 발라드 ‘The Flame’과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의 원곡을 커버한 ‘Don’t be cruel(4위)’, ‘Ghost town(33위), ’Never had a lot to lose(75위) 등을 4장의 싱글을 토해낸 이 음반으로 칩 트릭은 1980년대의 부진을 걷어내고 재기에 성공했다. 특히 국내에서는 경쾌한 분위기의 ‘Don’t be cruel’이 애청되면서 다시 일어선 칩 트릭의 인기를 주도했다. 1988년 말에는 로빈 잰더가 하트(Heart)의 보컬리스트 앤 윌슨(Ann Wilson)과 함께 멜 깁슨과 미셸 파이퍼가 주연한 영화 < 데킬라 선라이스 >의 주제곡 ‘Surrender to me’를 불러 6위에 랭크 시키기도 했다. 곡은 우리에게 ‘Now and forever’와 ‘Right here waiting’, ‘Endless summer night’ 등으로 널리 알려진 리차드 막스(Richard Marx)가 썼다. 이들의 음악은 1980년대에 등장한 헤비메탈 밴드와 1990년대의 얼터너티브 그룹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전수했다. 후배 뮤지션들은 인터뷰를 통해 “칩 트릭의 힘이 넘치는 기타 리프와 사운드에서 음악적인 영감을 받았다”며 무한한 존경과 신임을 밝힌 바 있다. 특히 스매싱 펌킨스(Smashing Pumpkins)는 자신들의 오프닝 무대를 칩 트릭에게 부탁하기도 했으며, 1980년대 팝 시대의 아들들임에도 불구하고 포르노 포 파이러스(Porno for Pyros)의 리더인 페리 파렐(Perry Farrell)이 주창한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 페스티벌의 대명사 롤라팔루자에 참여한 바 있다. 1990년대가 되면서 다시 한번 음악적 침체기를 맞이한 칩 트릭은 현재까지 새로운 음반 제작보다는 데뷔 초기처럼 ‘최고의 라이브 밴드’라는 명성에 걸맞은 줄기찬 공연 활동을 전개하고있다. 칩 트릭의 노래들은 이름처럼 결코 값싸지도 않으며 속임수 또한 아니다. 저항성과 함께 록의 양 날개 중 다른 날개인 ‘대중성’으로 따진다면 이들은 극점에 위치하는 그룹이다. 앞으로도 이들만큼 ‘완벽한 기타 주도의 팝 록 사운드’를 구현한 그룹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록 밴드 록 밴드
밴드 : Guess Who (게스 후 (하드락 밴드))
1970년을 전후한 시기에 대표 곡들을 집중포화 식으로 쏟아낸 캐나다 출신의 록 밴드 게스 후(Guess Who)의 역사는 그 전신 격인 그룹 익스프레션스(Expressions)가 결성된 19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채드 알란(Chad Allan/보컬, 기타)과 랜디 바크만(Randy Bachman/보컬, 기타), 짐 케일(Jim Kale/베이스), 개리 피터슨(Garry Peterson/드럼), 밥 에슐리(... 1970년을 전후한 시기에 대표 곡들을 집중포화 식으로 쏟아낸 캐나다 출신의 록 밴드 게스 후(Guess Who)의 역사는 그 전신 격인 그룹 익스프레션스(Expressions)가 결성된 19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채드 알란(Chad Allan/보컬, 기타)과 랜디 바크만(Randy Bachman/보컬, 기타), 짐 케일(Jim Kale/베이스), 개리 피터슨(Garry Peterson/드럼), 밥 에슐리(Bob Ashley/건반)의 5각 구도를 갖춘 익스프레션스는 저니 키드 & 더 파이러츠(Johnny Kidd & The Pirates)의 ‘Shakin’ all over(22위)’를 커버하면서 자국인 캐나다와 미국에서 소폭의 인기를 누렸다. 곧 밴드 명을 게스 후로 바꾸고 건반 주자가 밥 에슐리에서 버튼 커밍스(Burton Cummings)로 교체되면서 이들의 성공 스토리는 막을 열었다. 당시 이름 때문에 영국 록 그룹 더 후(The Who)와 혼동을 야기한 게스 후를 수면 위로 부상시킨 음반은 1968년도 LP < Wheatfield Soul >이다. 록 발라드의 고전으로 자리를 굳힌 ‘These eyes(6위)’가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동시에 캐나다 록의 지분도 동반 상승했다. 이후에 발표된 < Canned Wheat >, < American Woman >, < Share The Land >에서 이들의 대표 곡들이 무더기로 생산되었다. ‘Laughing(10위)’, 보사노바 기타 풍으로 국내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Undun(22위)’, 당시 가요에 영향력을 행사한 ‘No time(5위)’, ‘No sugar tonight/New mother nature’, ‘Hand me down world(17위)’, ‘Share the land(10위)’, 그리고 이들의 유일한 빌보드 싱글 차트 1위 곡이자 1999년 영화 < 아메리칸 뷰티 >에서 주인공 케빈 스페이시가 운전하면서 불렀던 고전 ‘American woman’ 등이 1969년과 1971년 사이에 배출된 히트 넘버들이다. ‘American woman’은 1999년 영화 < 오스틴 파워 > 2편의 사운드트랙에서 레니 크라비츠(Lenny Kravitz)가 리메이크 해 그래미 최우수 남성 록 보컬 상을 수상하게 해주었다. 이러한 성공을 뒤로한 채 랜디 바크만과 채드 알란은 1970년에 게스 후에 마침표를 찍고 그 유명한 바크만 터너 오버드라이브(Bachman Turner Overdrive)를 조직하자 팀워크에는 위기의 비상벨이 울렸다. 새로운 멤버를 영입한 이후 몇 장의 앨범을 더 발표했지만 랜디 바크만의 공백은 더 크게만 느껴졌고 밴드는 곧 중심을 잃었다. 1974년 미국의 유명한 디제이 울프만 잭(Wolfman Jack)에게 바치는 ‘Clap for the Wolfman(6위)’을 마지막 탑 텐 싱글로 장식하고 게스 후는 결국 1975년에 정식으로 해산했다. 솔로로 독립한 버튼 커밍스는 1976년에 ‘Stand tall’이라는 팝 발라드 넘버로 탑 텐을 기록했으며(10위), 1985년에는 자선 음반 < USA For Africa >에서 캐나다 뮤지션들로 구성된 노던 라이츠(Northern Lights)의 일원으로 참여해 ‘Tears are not enough’를 합창해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게스 후 멤버들은 1983년에 재 결성해 현재까지 노장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지리적 특성상 미국 음악에서 많은 영양분을 섭취한 캐나다 록 그룹의 제 1세대인 게스 후에게는 아메리칸 록의 그림자가 넓게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1970년 음반 < American Woman >에서 이들은 좀 더 하드록에 근접한 강한 사운드를 들고 나타나 괄목할만한 성공을 일궈냈다. 1960년대 후반부터 혼란스런 세상을 향해 포효하기 시작한 하드록의 파장에 몸을 맡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더 강하고 빠른 스피드로 전진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 당시 하드록 적인 팝록의 음악 문법에서만 가능한 진화였기 때문이었다. 게스 후는 자신들의 능력과 목적을 뚜렷이 알고 있던 겸손한 밴드였다.
밴드 : Adam and the Ants (아담 앤 디 앤츠 (팝락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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