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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ynes Ultimate Guide To 80s

[ 3CD ]
Wham, Dead Or Alive, Stray Cats, Haircut 100, Psychedelic Furs 노래 외 47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SonyMusic / SonyMusic | 2018년 07월 12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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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ynes Ultimate Guide To 80s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8년 07월 12일
제조국 EU

관련분류

디스크

Disc1
  • 01 Freedom - Wham!
  • 02 You Spin Me Round (Like a Record) - Dead Or Alive
  • 03 Kings of the Wild Frontier - Adam & The Ants
  • 04 Rock This Town - Stray Cats
  • 05 Love Plus One - Haircut 100
  • 06 Love My Way - The Psychedelic Furs
  • 07 Go Wild in the Country - Bow Wow Wow
  • 08 Living by Numbers - New Musik
  • 09 Wishing (If I Had a Photograph of You) - A Flock Of Seagulls
  • 10 I Second That Emotion - Japan
  • 11 Just Got Lucky - Jo Boxers
  • 12 Don't Talk to Me About Love - Altered Images
  • 13 Invisible - Alison Moyet
  • 14 Everytime You Go Away - Paul Young
  • 15 Doot Doot - Freur
  • 16 Love & Pride - King
  • 17 Family Man - Daryl Hall & John Oates
  • 18 Who Can It Be Now? - Men At Work
  • 19 Medicine Show - Big Audio Dynamite
Disc2
  • 01 In the Name of Love - Thompson Twins
  • 02 Wishing Well - Terence Trent D'Arby
  • 03 Digging Your Scene - The Blow Monkeys
  • 04 Waiting for a Star to Fall - Boy Meets Girl
  • 05 European Female - The Stranglers
  • 06 Wages Day - Deacon Blue
  • 07 Crash - The Primitives
  • 08 Burst - The Darling Buds
  • 09 Bridge to Your Heart - Wax
  • 10 State of Shock - The Jacksons
  • 11 The Way It Is - Bruce Hornsby & The Range
  • 12 Time After Time - Cyndi Lauper
  • 13 Cross My Heart - Eighth Wonder
  • 14 Waltz Darling - Malcolm McLaren & The Bootzilla Orchestra
  • 15 Riding on a Train - The Pasadenas
  • 16 Oye Mi Canto (Hear My Voice) - Gloria Estefan
  • 17 Toy Soldiers - Martika
  • 18 Keeping the Dream Alive - Freiheit
  • 19 Brilliant Mind - Furniture
Disc3
  • 01 9 to 5 - Dolly Parton
  • 02 Let's Groove - Earth, Wind & Fire
  • 03 Loco in Acapulco - The Four Tops
  • 04 Give It Up - KC & The Sunshine Band
  • 05 Dr. Beat - Miami Sound Machine
  • 06 When the Going Gets Tough, the Tough Get Going - Billy Ocean
  • 07 Living in America - James Brown
  • 08 When Will I Be Famous? - Bros
  • 09 Danger Zone - Kenny Loggins
  • 10 You're the Voice - John Farnham
  • 11 Broken Wings - Mr. Mister
  • 12 (Feels Like) Heaven - Fiction Factory
  • 13 Can't Fight This Feeling - REO Speedwagon
  • 14 Through the Barricades - Spandau Ballet
  • 15 Total Eclipse of the Heart - Bonnie Tyler
  • 16 Africa - Toto
  • 17 Fools Gold - The Stone Roses
  • 18 Sexual Healing - Marvin Gaye

상세 이미지

상세 이미지 1

아티스트 소개 (52명)

조지 마이클이라는 걸출한 팝 스타를 배출한 팝 듀오 왬(Wham!)은 80년대 팝 역사에서 빼놓아서는 안 될 중요한 그룹이다. 소울 음악과 결합된 즐겁고 흥겨운 팝 댄스를 들려줬던 이들은 80년대 특유의 ‘가벼움’을 관통함으로써 80년대 팝의 중흥기를 이끌었으며, 수많은 여성 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또한 이들은 사실상 90년대에 들어 맹위를 떨친 보이밴드의 효시였다. 잘 생긴 외모와 수준급 가창력, 거기... 조지 마이클이라는 걸출한 팝 스타를 배출한 팝 듀오 왬(Wham!)은 80년대 팝 역사에서 빼놓아서는 안 될 중요한 그룹이다. 소울 음악과 결합된 즐겁고 흥겨운 팝 댄스를 들려줬던 이들은 80년대 특유의 ‘가벼움’을 관통함으로써 80년대 팝의 중흥기를 이끌었으며, 수많은 여성 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또한 이들은 사실상 90년대에 들어 맹위를 떨친 보이밴드의 효시였다. 잘 생긴 외모와 수준급 가창력, 거기에 경쾌한 댄스 팝과 매혹적인 발라드 등 현 보이밴드의 전형이랄 수 있는 특질을 이미 80년대 초반에 확립해, 전부 보여줬기 때문이다. 1981년, 왬은 ‘나이트클럽 광’이었던 조지 마이클과 그의 친구 앤드류 리즐리에 의해 탄생되었다. 조지 마이클이 작곡과 작사, 보컬, 제작 등 음악에 관한 한 모든 걸 담당했고, 앤드류 리즐리는 그룹의 스타일과 이미지, 비주얼 등 외적인 측면에만 힘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팀 해산할 때까지 자주 앤드류 리즐리의 역할 부재론이 거론되기도 했다(그렇지만 그룹의 방향성은 앤드류 리즐리가 결정했던 만큼 역할이 아주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꽝!’이란 의미의 그룹이름과 이미지는 앤디 워홀과 더불어 팝 아트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주로 미국의 대중적인 만화를 주제로 매스미디어를 묘사한 바 있는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에서 따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우정을 쌓아온 이 둘은 1979년, 이그제큐티브(Executive)라는 스카 밴드활동을 하면서 음악여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곧 밴드가 해산되고 향후 약 2년간 작곡과 홈메이킹 데모 테이프를 녹음하는 등 수련과정에 들어간다. 당시 작곡한 곡 중에는 나중 메가히트를 기록하는 ‘Careless whisper’와 ‘Club tropicana’가 있었다. 몇 번의 오디션 끝에 1982년, 댄스 레이블 < 이너비전 >(Innervision)과 계약을 체결한 왬은 데뷔싱글 ‘Wham rap!’을 발표했지만 영국차트 100위권에도 못 오르는 실패를 맛봤다. 그러나 그 해 10월에 내놓은 두 번째 싱글 ‘Young guns(go for it)’은 BBC 방송국의 프로그램 < 탑 오브 더 팝스 >(TOTP)에서의 인상적인 댄스 공연으로 차트 3위로 도약했다. 1983년 6월 9일, 팝 댄스로 가득 찬 이들의 데뷔앨범 < Fantastic >이 발매되었고, 이 앨범은 곧장 영국차트 1위를 기록했다. 한편 조지 마이클은 이미 이때부터 독자적인 행보를 걷기 시작한다. 같은 해 8월 그는 미국의 머슬 쇼울스(Muscle Shoals) 스튜디오에서 전설적인 프로듀서 제리 웩슬러와 함께 ‘Careless whisper’를 녹음했다(하지만 별로 성공적이지 않았고 나중에 런던에서 재녹음되어 나중에 출시된다). 1984년부터 왬의 센세이션이 일어났고, 동시에 그들의 히트 퍼레이드가 시작된다. 침대 맡에 적어놓았던 앤드류 리즐리의 노트에서 영감을 얻어 조지 마이클이 만든 ‘Wake me up before you go go’는 영국차트는 물론 미국차트에서도 정상을 차지했다. 수년간 공력을 들인 발라드 ‘Careless whisper’도 3주간 영국차트 넘버원을 지켰다. 이듬해에는 미국차트에서도 역시 3주간 1위를 기록했다. 조지 마이클이 자신의 부모님께 바친 이 싱글의 미국판 크레딧에는 ‘조지 마이클이 피처링한 왬의 곡’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앤드류 리즐리가 두 번째 앨범을 구상하는 동안, 조지 마이클은 다른 음악인들과도 활발한 교류를 했고, 엘튼 존과의 파트너십도 쌓기 시작했다. 12월에는 밴드 에이드의 난민 구호곡 ‘Do they know it''s christmas time?’ 녹음에도 참여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곡 때문에 그들의 크리스마스송 ‘Last christmas’가 차트 2위에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이듬해인 1985년 3월에는 서포모어 앨범 < Make It Big >이 출시되었고, 그 앨범은 제목대로 미국에서만 5백만 장이 팔리는 ‘빅 히트’를 기록했다. 당해 4월 왬은 서구 팝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주인공이 되었다. 그들은 1만여명이 운집한 중국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공연함으로써 ‘중국에서 공연한 최초의 서방 그룹’으로 기록되었다. 계속해서 조지 마이클은 라이브 에이드 행사에서 엘튼 존과 듀엣으로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를 불렀고, 또 엘튼 존의 싱글 ‘Nikita’에서 백업보컬을 담당하는 등 확실하게 솔로활동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결국 조지 마이클과 앤드류 리즐리는 여전히 친한 사이였지만 서로를 위해 1986년 왬을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1986년 4월 발매된 조지 마이클의 두 번째 솔로 싱글 ‘A different corner’는 공식적으로 밴드의 종말을 알리는 곡이었다. 같은 해 6월 윔블던 스타디움에 모인 7만2천명의 관객 앞에서 행한 마지막 콘서트 ‘The Final’을 끝으로 왬은 해산되었다. 왬 이후 조지 마이클은 < Faith >를 시작으로 솔로가수로서 놀랄만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반면 앤드류 리즐리는 < Son Of Albert >를 발표했지만 ‘Shake’라는 희미한 히트곡만 남겼을 뿐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왬의 음악을 담당했던 조지 마이클이 성공을 거두고, 음악적으로는 아무런 역할도 못했던 앤드류 리즐리가 실패한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렇지만 추억 속에 남아있던 앤드류 리즐리의 아름다운 매력이 솔로활동의 참담한 실패로 그나마 퇴색해버린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어쨌거나 왬은 80년대를 살아왔던 음악팬들에게는 아련한 기억으로, 또 아쉬움으로 존재하는 그런 그룹이다.
1980년 영국에서 날아온 데드 오어 얼라이브(Dead or Alive)의 음악은 뉴웨이브 댄스팝으로 정의되지만 사실 그 속을 들춰보면 여러 가지 음악적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다. 이 성분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심히 보고 들으면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우선 프론트 우먼이라 해도 의심치 않을 정도로 기막히게 여성 분장을 한 보컬리스트 피트 번스(Pete Burns)의 ... 1980년 영국에서 날아온 데드 오어 얼라이브(Dead or Alive)의 음악은 뉴웨이브 댄스팝으로 정의되지만 사실 그 속을 들춰보면 여러 가지 음악적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다. 이 성분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심히 보고 들으면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우선 프론트 우먼이라 해도 의심치 않을 정도로 기막히게 여성 분장을 한 보컬리스트 피트 번스(Pete Burns)의 외형에선 글램적인 요소를, 그리고 그가 데드 오어 얼라이브를 조직하기 이전에 몸담았던 미스테리 걸스(Mystery Girls)와 나이트메어스 인 왁스(Nightmares in Wax)같은 밴드에서 어둠을 찬미했기 때문에 고딕적인 분위기도 있다. 음악적으로는 팝과 댄스뿐만 아니라 록, 펑크(funk), 디스코 등이 혼재되어 있어 훨씬 더 복잡하지만 듣고 춤추면서 즐기기엔 안성맞춤이다. 이들의 음악을 만들어 줬던 재단사는 1980년대 릭 애슬리(Rick Astley)의 ‘Never gonna give you up'', 카일리 미노그(Kylie Minogue)의 ’I should be so lucky‘ 등을 만들었던 ‘스톡-아이트켄-워터맨(Stock-Aitken-Waterman) 사단’이었다. 데드 오어 얼라이브의 대표적 히트곡인 ‘You spin me round(Like a record)(85년 11위)’와 ‘Brand new lover(87년 15위)’도 이들이 작곡했다. 비틀즈의 고향 리버풀에서 출발한 이들은 피트 번스(Pete Burns/보컬)를 중심으로 마티 힐리(Marty Healey/키보드), 미치(Mitch/기타), 수 제임스(Sue James/베이스), 조 머스커(Joe Musker/드럼)의 5인조 체제였으나 리더 피트의 화장만큼 짙은 그의 카리스마 때문에 잦은 멤버 교체를 겪었다. 1980년대 중반에서 후반을 왕성한 활동으로 보낸 ‘죽거나 혹은 살거나’는 이후 뉴웨이브가 급속히 쇠퇴하던 때 오버그라운드에서는 자취를 감췄지만 지속적인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1994년엔 일본 팬들만을 위한 CD를 발표했을 정도로 이들에 대한 일본에서의 인기는 예나 지금이나 열광적이다. 데드 오어 얼라이브의 짙은 메이크업, 화려한 의상과 같은 비주얼한 외모, 록커와 록팬들로부터 얻은 음악적 지지, 그리고 유독 일본 내에서의 좋은 평판 등은 일본의 국보급 록밴드 엑스 재팬(X-Japan)에 영향을 줬다. 지금까지 이들의 CD는 국내에 단 한 장도 라이센스로 발매되지 않았다.
노래 : Stray Cats (스트레이 캣츠)
멤버 : Brian Setzer, James McDonnell, Leon Drucker 멤버 : Brian Setzer, James McDonnell, Leon Drucker
노래 : Bow Wow Wow (바우 와우 와우)
뉴웨이브 팝 밴드 뉴웨이브 팝 밴드
영국 런던의 토박이들로 구성된 재팬은 초창기 글램 록과 뉴 로맨틱스의 음악 흐름 속에서 항상 아류라는 평가를 받으며 폄하되곤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해지는 음악적 성숙은 그들을 1980년대 초반의 성공적인 아티스트로 만들었다. 1974년 보컬과 기타를 치는 데이비드 실비안(David Sylvian)과 그의 동생이자 드러머인 스티브 잰슨(Steve Jansen)이 학교 친구들인 롭 딘(Rob Dean, 기타), ... 영국 런던의 토박이들로 구성된 재팬은 초창기 글램 록과 뉴 로맨틱스의 음악 흐름 속에서 항상 아류라는 평가를 받으며 폄하되곤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해지는 음악적 성숙은 그들을 1980년대 초반의 성공적인 아티스트로 만들었다. 1974년 보컬과 기타를 치는 데이비드 실비안(David Sylvian)과 그의 동생이자 드러머인 스티브 잰슨(Steve Jansen)이 학교 친구들인 롭 딘(Rob Dean, 기타), 리처드 바비어리(Richard Barbieri, 키보드), 믹 칸(Mick Karn, 색소폰)과 함께 만든 재팬은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와 록시 뮤직(Roxy Music)의 글램 록 영향을 받아 여성스런 짙은 메이크업, 화려한 복장 등을 하고 무대에 섰다. 특히 그룹의 음악 감독 데이비드 실비안의 목소리는 브라이언 페리(Bryan Ferry)와 매우 흡사하여 록시 뮤직의 추종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만 했다. 독일 < 한자(Hansa) >레코드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만든 1978년 데뷔작 < Adolescent Sex >, 1978년 2집 < Obscure Alternatives >, 1979년 3집 < Quiet Life >에서 확인 할 수 있다. ‘Suburban love’, ‘Adolescent sex’, ‘Love is infectious’, ‘Suburban berlin’, ‘Quiet life’, ‘Halloween’ 등이 주목할만한 글램/뉴 로맨틱스 성향의 곡들이다. 1980년 < 버진(Virgin) >으로 소속사를 옮긴 뒤 그들은 뉴 로맨틱스의 만개와 함께 영국 언론과 대중들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과거 지적의 대상이었던 여성적인 외모와 복장이 시대 사조의 변화로 오히려 득(得)이 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음악 또한 세밀하고 조밀해졌다. 데이비드 실비안의 낭만과 동경으로 가득 찬 송라이팅 실력은 정점에 다다랐다. 1980년 < Gentlemen Take Polaroids >(영국 차트 45위), 1981년 < Tin Drum >(12위)이 잘 말해준다. 웅얼거리는 듯한 보컬, 휘어지고 구부러지는 기묘한 키보드, 우주적인 드럼 등이 조화된 음반은 뉴 로맨틱스, 신시 팝을 뛰어넘어 ‘아트 팝(Art Pop)’이란 영광스런 단어를 부여받았다. ‘Gentlemen take polaroids’(60위), ‘The art of parties’(48위), ‘Visions of china’(32위), ‘Cantonese boy''(24위), ‘Ghosts’(5위) 등의 히트곡들이 대변한다. 재팬은 그러나 데이비드 실비안과 믹 칸의 주도권 다툼으로 인하여 1982년 전격 해산했다. 이후 멤버들은 솔로 활동을 하며 각자의 영역을 확보했고, 1991년에는 레인 트리 크로우(Rain Tree Crow)라는 이름으로 재결합하여 잠시 활동을 하기도 했다.
노래 : Altered Images (얼터드 이미지스)
뉴웨이브-포스트펑크 밴드 뉴웨이브-포스트펑크 밴드
‘8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영국 일렉트릭 팝 듀오 야주(Yazoo) 출신 싱어송라이터 ‘8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영국 일렉트릭 팝 듀오 야주(Yazoo) 출신 싱어송라이터
1980년대 초반에는 유독 호주(오스트레일리아) 출신 가수들의 활동이 두드러져 일약 호주는 팝의 변방에서 주류로 승격되었다. 올리비아 뉴튼 존(Olivia Newton John), 에어 서플라이(Air Supply), 리틀 리버 밴드(Little River Band), 릭 스프링필드(Rick Springfield)등이 모두 이 시기에 빅 히트곡을 발표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조금 뒤늦은 시기에 여기 가세하여 호주... 1980년대 초반에는 유독 호주(오스트레일리아) 출신 가수들의 활동이 두드러져 일약 호주는 팝의 변방에서 주류로 승격되었다. 올리비아 뉴튼 존(Olivia Newton John), 에어 서플라이(Air Supply), 리틀 리버 밴드(Little River Band), 릭 스프링필드(Rick Springfield)등이 모두 이 시기에 빅 히트곡을 발표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조금 뒤늦은 시기에 여기 가세하여 호주의 세력화에 기여한 또 하나의 그룹이 멘 앳 워크(Men At Work)였다. 스코틀랜드 태생으로 14세에 호주로 이민을 온 그룹의 리더 콜린 헤이(Colin Hay)는 대학시절까지 꾸준한 연주 활동을 했었고 1978년 기타리스트 론 스트리커트(Ron Strykert)를 만나 의기투합, 듀오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 그룹의 모체. 여기에 드러머 제리 스피이서(Jerry Speiser), 키보드 주자 겸 색소폰, 플루트, 바이올린 등을 연주하는 그레그 햄(Greg Ham), 베이시스트 존 리스(John Rees)의 가세로 완연한 밴드의 라인업을 갖추고 1년 이상 멜버른 일대 클럽을 돌며 연주 활동을 통해 팀웍을 다져 나갔다. 호주 내에서 차츰 명성을 쌓아나간 이들은 1981년초 CBS 레코드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데뷔싱글 ’Who can it be now?’를 내놓게 되는데 호주에서 정상을 차지하며 일약 톱스타 대열에 합류했다. 여세를 몰아 4개월 뒤엔 두 번째 싱글 ’Down under’와 데뷔앨범 < Business As Usual >을 정상에 올리게 된다. 특히 데뷔작은 1970년대에 활약했던 호주출신 스카이훅스(Skyhooks)의 앨범 < Living In The 70s >의 판매기록을 넘어서는 광풍을 일으켜 곧 이들의 인기는 인접한 뉴질랜드를 비롯하여 멀리 유럽과 캐나다까지 퍼져나갔고 마침내 꿈의 무대인 미국 시장에도 진출했다. 미국도 호주의 상황이 그대로 재현되어 ’Who can it be now?(1주간)’, ’Down under(4주간)’가 빌보드 차트 정상에 차례로 올랐다. 게다가 < Business As Usual >은 신인가수의 앨범으로는 최고의 기록인 15주 동안 차트 정상을 점령했다. 덕분에 전 세계적으로 1000만장에 달하는 앨범이 팔려 나갔으며 25회 그래미 신인상까지 거머쥔 호주 출신의 첫번째 뮤지션이 되었다.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는 고속 질주였다. 사실 이들의 갑작스럽고 엄청난 성공은 당시 주류로 급속하게 인기를 얻고 있던 뉴 웨이브의 물결에 레게리듬의 재빠른 도입이 한몫을 단단히 해 마치 그룹 폴리스(The Police)의 성공을 답습한 듯 했다. 1983년 데뷔앨범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두번째 앨범 < Cargo >을 발매하여 전작과 변함없는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사실 이 앨범은 미리 만들어 놓고도 데뷔앨범의 갑작스런 미국시장 성공에 출시를 미루어야만 했던 음반이다. 하지만 발매 즉시 미국과 영국에서 모두 톱10에 진입했다. ’Overkill(3위)’, ’It’s a mistake(6위)’가 차례로 선전을 했고 흥미로운 곡 ’Dr. heckyle & Mr. jive’도 이어서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영광 속에서 1984년 그룹의 내분으로 제리 스피이서와 존 리스가 떠나고 이들의 자리를 세션 음악인들로 대신하여 85년 3집 앨범 < Two Hearts >를 자신들이 직접 프로듀싱하여 발매하면서 이들은 인기전선에서 급속히 퇴각한다. 의욕적인 자세는 좋았지만 앨범은 겨우 골드 레코드를 기록하는데 그치고 싱글 히트곡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나아가 밴드 최초의 야심에 찬 전미투어 일정이 부진한 티켓 판매로 취소되고 만다. 결국엔 그룹의 해체가 가시화되었고 리더 콜린 헤이가 솔로 앨범을 내면서 겨우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불과 2~3년 사이에 천당과 지옥을 경험한 뒤 1996년까지 멘 앳 워크는 철저히 잊혀진 그룹으로 남아 있었다. 콜린 헤이와 그레그 햄 두 명의 오리지날 멤버가 가진 남아메리카의 콘서트가 뜻밖의 성공을 거두기 전까지 그랬다. 하지만 공연의 성공은 96, 97년에 두 번의 대형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자신감을 얻었고 96년 브라질에서 가졌던 공연 실황은 앨범 < Brazil >로 발매되었다. 비록 히트곡 모음집의 성격을 띄었지만 < Two Hearts >이후 13년 만에 가진 감격적인 레코딩 작업이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폐막식에선 호주를 대표하는 뮤지션 중 하나로 참여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더 이상의 활동은 보여주지 못하고있으며 앞으로도 마찬가지의 상황으로 전개될 듯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틀 리버 밴드- 에어 서플라이-멘 앳 워크- 인엑세스(INXS)로 이어지는 80년대 호주출신 뮤지션들의 미국시장 정복에 한 축을 담당했다는 점과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인기를 누렸다는 명백한 사실이 콜린 헤이를 포함한 5명의 멤버들에겐 커다란 자부심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Hold me now'', ''Doctor Doctor'', ''Lay your hands on me'', ''King for a day''처럼 쫀득쫀득한 히트곡들로 천편일률적인 1980년대 중반의 팝계를 찰기있게 부흥시키는데 일조한 영국의 뉴웨이브 밴드 톰슨 트윈스(Thompson Twins)는 1970년대 후반에 등장해 뉴웨이브 무브먼트에 참여한 초창기 멤버 중 하나다. 이들은 기존의 뉴웨이브에 레게나 아... ''Hold me now'', ''Doctor Doctor'', ''Lay your hands on me'', ''King for a day''처럼 쫀득쫀득한 히트곡들로 천편일률적인 1980년대 중반의 팝계를 찰기있게 부흥시키는데 일조한 영국의 뉴웨이브 밴드 톰슨 트윈스(Thompson Twins)는 1970년대 후반에 등장해 뉴웨이브 무브먼트에 참여한 초창기 멤버 중 하나다. 이들은 기존의 뉴웨이브에 레게나 아프리칸 리듬을 교배해 여유롭고 느긋함을 선사하는 독특한 음악을 만들어 냈다. 1977년 교사 출신인 톰 베일리(Tom Bailey)는 주위의 여러 친구들을 모아 톰슨 트윈스라는 팀을 결성했지만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3인조로 개편되면서 발표한 1982년의 2집 < In The Name Of Love >가 알려지기 전까진 무명의 설움을 견뎌야 했다. 톰은 이전 멤버 조 리웨이(Joe Leeway/퍼커션)는 그대로 기용하고 자신의 여자 친구 알라나 커리(Alannah Currie)를 색소폰과 퍼커션 주자로 앉히는 낙하산 인사를 단행했다. ''사랑의 힘''이 작용했는지 ''톰슨 쌍둥이''의 인기 행진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984년 이전까지는 ''Love on your side(45위)'', ''Lies(30위)'', ''We are detective'' 등의 싱글들로 처음 만나는 팬들과 거리감을 좁히는데 주력했다. 이들은 1984년에 재 장전된 4번째 앨범 < Into The Gap >을 통해 가장 인기있는 뉴웨이브 그룹으로 부상했다. 느릿느릿한 레게리듬이 곡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Hold me now(3위)'', 국내에서 가장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던 ''Doctor Doctor(11위)'', ''You take me up(44위)'',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백 분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드에 반대하는 ''The Gap(69위)'' 등이 싱글 커트됐고, 1985년 가을에 공개된 < Here''s To Future Days >에서도 ''Lay your hands on me(6위)'', ''King for a day(8위)''가 탑 텐에 올라 이 쌍둥이들의 성공은 당분간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986년 조 리웨이가 밴드를 떠나 듀엣으로 발표한 1987년의 후속 음반 < Close To The Bone >에서는 ''Get that love(31위)'' 외엔 아무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후 1991년까지 < Big Trash >와 < Queer >를 발표했지만 예전의 인기와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완벽한 무시를 당했다. 결국 1993년 톰슨가(家)의 쌍둥이들은 갈라섰다.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엄청난 성장세를 보인 팝메탈의 영향으로 1980년대 초, 중반을 호령했던 뉴웨이브 밴드들은 생명 연장의 꿈을 접어야 했다. 유니섹스의 유행으로 여성처럼 예쁘게 화장을 한 남성들에게 질린 음악 팬들은 야성적이고 마초적 이미지의 팝메탈이나 헤비메탈 밴드들로부터 남성미를 찾았다. 이것은 대부분의 뉴웨이브와 신스팝 밴드들에게는 사망 선고였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들의 리스트 중에서 톰슨 트윈스는 프리미엄급 네임 밸류는 아니다. 그러나 이들의 이름이 없이 1980년대를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멤버 : Bruce Hornsby, David Mansfield, John Molo, David Pack, Joe Puerta 멤버 : Bruce Hornsby, David Mansfield, John Molo, David Pack, Joe Puerta
1983년 후반, 두 백인 여성 가수의 데뷔곡이 2개월의 짧은 간격을 두고 빌보드 싱글 차트에 나란히 등장했다. 본의 아니게 시작부터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게 된 두 여가수의 경합은 1980년대 동안 가장 흥미롭고(본인들에게는 피 말리는 싸움이었겠지만) 긴장감 넘치는 팝의 핫 이슈였다. 두 여인은 1983년 10월에 데뷔 싱글을 차트에 등록시킨 이후 현재까지 20년이 달하도록 사그라지지 않는 창작력을 과시하는, 매... 1983년 후반, 두 백인 여성 가수의 데뷔곡이 2개월의 짧은 간격을 두고 빌보드 싱글 차트에 나란히 등장했다. 본의 아니게 시작부터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게 된 두 여가수의 경합은 1980년대 동안 가장 흥미롭고(본인들에게는 피 말리는 싸움이었겠지만) 긴장감 넘치는 팝의 핫 이슈였다. 두 여인은 1983년 10월에 데뷔 싱글을 차트에 등록시킨 이후 현재까지 20년이 달하도록 사그라지지 않는 창작력을 과시하는, 매브릭 음반사의 CEO 마돈나(Madonna)와 2개월 늦게 인기차트에 합류했지만 고지를 선점하고 나선 끝내 마돈나에게 밀려버린 ‘귀여운 악녀’ 신디 로퍼(Cyndi Lauper)다. 마돈나의 ‘Holiday’와 신디 로퍼의 ‘Girls just want to have fun’은 아직까지 그들을 정의하는 대표 곡으로 남아 있다. 선의의 경쟁이 시작된 지 20여 년이 흐른 현재, 레이스의 최후 승자는 알다시피 마돈나다. 그것도 판정승 아닌 분명한 KO승이다. 그러나 그들이 풋풋했던 데뷔 시절, 둘의 위치는 지금과 정반대였다. 애초 평단에서 마돈나는 ‘아니 벌써’의 반짝 스타로, 신디 로퍼는 ‘장수 만세’의 아티스트로 전망되었다. 평론가들이 신디 로퍼를 높이 산 이유는 페미니즘을 남근의 음악인 록과 포스트 펑크가 어우러진 ‘뉴 웨이브’로 설파했다는 점과, 마돈나처럼 섹시한 외모나 춤으로 판단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약간은 덜 섹시한 이미지를 고집하면서 음악으로 당당하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러한 독립적인 태도는 고등학교 중퇴, 소규모 클럽에서의 노래 시작, 자신이 결성한 밴드 블루 엔젤(Blue Angel)의 상업적인 실패와 파산, 그리고 남자 친구와의 불화 등 온갖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터득한 그녀의 인생관이 배양했다. 30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망가질(?) 수 있는 자신감은 바로 이 굴곡의 삶을 극복한 인간승리의 드라마에서 비롯된 떳떳함이 원천이다. 그녀의 성공을 가져온 많은 요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대적인 요구에 정확히 부응했다는 점이다. 소녀적 감성을 읊은 신디의 밝고 통통 튀는 가사는 그 시대 정서의 흐름을 타고 대중들을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로 괴롭히지 않았으며, 당대의 뉴 미디어인 MTV의 지원사격을 받은 것이었다. 10대 소녀들을 정신 없으면서도 쾌활하게 묘사한 뮤직비디오 덕분에 데뷔 싱글 ‘Girls just want to have fun’은 차트 2위라는 스매시 히트를 치면서 이 신인 여가수의 시대가 화려하게 개막했음을 알렸다. 이 곡이 수록된 솔로 데뷔 앨범 < She’s So Unusual >에서는 발라드인 ‘Time after time(1위)’과 ‘She bop(3위)’, ‘All through the night(5위)’, 그리고 ‘Money changes everything(27위)’를 포함해 5곡이 빌보드 싱글 차트를 유린하면서 그 무렵 완벽하게 재기에 성공한 티나 터너(Tina Turner)와 함께 1984년 팝 음악계를 가장 화려하게 수놓은 인물이 되었다. 그래미상도 펄펄 난 그녀를 응대해 신인상 트로피를 안겼다. 그 해 마돈나는 그래미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한 것을 비교하면 당시 마돈나와 신디 로퍼의 위상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다. 1985년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영화 < 구니스 >의 주제가 ‘The goonies ‘r’ good enough(10위)’로 기세를 유지했지만 이듬해 1986년 가을에는 두 번째 대결인, 이른바 ‘True 경쟁’을 통해 신디는 마침내 마돈나에게 추월을 당했다. 록, 팝, 펑크, 뉴웨이브, 펑크(funk), 레게 등 젊은층에 어필할 수 있는 색조의 음악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재구성해 큰 성공을 낚은 < She’s So Unusual >에 비해 두 번째 앨범 < True Colors >는 그녀 특유의 톡 쏘는 감각이 많이 희석된 대중적 팝으로 약간 빛깔을 달리했다. 앨범의 타이틀 트랙 ‘True colors’로 두 번째 차트정상의 영광을 안고, ‘Change of heart(3위)’와 ‘What’s going on?(12위)’, ‘Boy blue(71위)’가 연속으로 차트를 밟았지만 기존 팬들은 성인 취향의 팝으로 전향한 신보에 적지 않게 실망했고, 이 LP를 기점으로 그녀는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앨범 판매량도 전작 600만장에서 200만장(현재)으로 격감했다. 반면 경쟁자 마돈나의 < True Blue >는 700만장이나 팔려나갔다. 1989년에 공개된 세 번째 음반 < A Night To Remember >에서는 싱글 ‘I drove all night(6위)’와 ‘My first night without you(62위)’가 차트에 등장하긴 했지만 어느덧 음악적인 매력은 뚝 떨어져있었다. 반면 마돈나는 역작 < Like A Prayer >를 발표해 음악적인 면과 대중적인 면 모두를 포유(包有)하면서 5년간의 라이벌 대결은 마돈나의 완승으로 결판이 났다.(신디 로퍼는 그러나 새 앨범의 홍보 차원으로 내한공연을 가져 국내 팬들에게 시원스런 무대를 선사했고 공연실황이 TV로도 방송되어 열기를 현장에서 맛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달래주었다). 1993년과 1998년에는 < A Hat Full Of Stars >와 < Sisters Of Avalon >을 발표해 재기를 노렸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1994년에는 < 12 Deadly Cyns And Then Some >이라는 제목의 베스트 음반을 공개해 ‘Girls just want to have fun’을 리믹스한 ‘Hey now(87위)’로 마지막 희미한 불꽃을 태웠다. 이 곡은 또한 1970년대 팝 그룹 레드본(Redbone)의 히트곡 ‘Come and get your love(댄스 팝 그룹 리얼 맥코이가 커버해 1995년 19위)’를 샘플링했으며 1995년 웨슬리 스나입스(Wesley Snipes)와 패트릭 스웨이즈(Patrick Swayze)가 주연한 영화 < 투 웡 푸 >(To Wong Foo)에 삽입되었다. 흑인 싱어송라이터 루더 밴드로스(Luther Vandross)는 신디 로퍼의 노래 실력을 두고 “팝의 디바 휘트니 휴스턴에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데뷔 싱글 ‘Girls just want to have fun’과 1960년대 틴 아이돌 팝 가수 진 피트니(Gene Pitney)의 오리지널을 재해석한 ‘I’m gonna be strong’, 그리고 ‘My first night without you’, ‘True colors’ 등은 그녀의 뛰어난 곡 소화력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데뷔 초기의 우스꽝스러운 외모와 펑크적인 스타일에 의해 굳어진 ‘왈패’ 이미지로 인해 그녀의 음악적 진가는 과소평가 받기 일쑤였으며, 성인 취향의 팝 록으로 변신하자 많은 팬들은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던 것이다. 이제는 많이 잊혀졌지만 신디 로퍼의 이미지는 여전히 많은 팬들의 뇌리에 박혀있다. 깜직한 소녀(계집애?) 목소리, 중고품 할인가게 풍의 패션, 레슬링을 즐기는 여성 그리고 MTV 시대. 하지만 무엇보다 팬들은 그녀를 통해 그 시절에 ‘여자들은 단지 재미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의미에서 신디 로퍼야말로 ‘1980년대 팝의 바로미터’라고 할 것이다. 그 시대를 그녀만큼 ‘비범하게’ 산 사람도 없다.
노래 : Gloria Estefan (글로리아 에스테판)
라틴음악의 본고장 쿠바 출신의 글로리아 에스테판에겐 두 가지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우선 리키 마틴의 라틴 팝 돌풍 이전에 이미 라틴의 혼을 전세계에 전파한 ‘라틴 디바’라는 것이다. 그녀는 1980년대 이미 ‘Conga’, ‘1-2-3’ 같은 라틴 팝 넘버를 히트시켰으며 일련의 노력으로 독보적인 라틴 팝 여왕의 자리를 지금껏 유지해오고 있다. ‘의지의 표상’이라는 존경할만한 또 다른 수식어도 있다. 1990년 ... 라틴음악의 본고장 쿠바 출신의 글로리아 에스테판에겐 두 가지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우선 리키 마틴의 라틴 팝 돌풍 이전에 이미 라틴의 혼을 전세계에 전파한 ‘라틴 디바’라는 것이다. 그녀는 1980년대 이미 ‘Conga’, ‘1-2-3’ 같은 라틴 팝 넘버를 히트시켰으며 일련의 노력으로 독보적인 라틴 팝 여왕의 자리를 지금껏 유지해오고 있다. ‘의지의 표상’이라는 존경할만한 또 다른 수식어도 있다. 1990년 교통사고를 당해 정상적인 생활마저 불투명했지만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고 훌륭히 재기에 성공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20년 가까이 자국인 쿠바의 리듬을 충실히 알린 그녀에겐 라틴 디바라는 표현이 가장 적당할 것이다. 글로리아 마리아 파하르도(Gloria Maria Fajardo)가 본명인 에스테판은 1957년 쿠바 하바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통령가족을 경호하는 일을 담당하며 비교적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갔지만 1959년 가족은 카스트로의 공산혁명을 피해 미국 마이애미로 이주해야만 했다. 난민의 처지로 미국에 정착한 그녀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일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병든 아버지를 간호하며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했고 때문에 야간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힘든 상황에서 글로리아를 지탱해 줬던 것은 물론 기타와 음악이었다. 1975년 마이애미 대학에 진학한 그녀는 학업과 ‘웨딩싱어’라는 자유직업을 병행했다. 거기서 밴드 ‘마이애미 라틴 보이스’를 이끌던 에밀리오 에스테판을 만나 함께 새로운 밴드를 결성, 음악적 욕구를 실현할 토대를 구축했다. 그 그룹이 유명한 마이애미 사운드 머신이었다. 그녀와 음악동료인 에밀리오는 1978년 결혼했다. 마이애미 사운드 머신은 1984년 에픽 레코드사에서 정식 데뷔작인 < Eyes of innocence >를 발표했다. ‘Dr. beat’와 같은 흥겨운 곡이 호응을 얻기도 했지만 그들이 슈퍼스타로 웅비하게 된 것은 이듬해 앨범 < Primitive Love >를 내놓고 나서였다. ‘Conga’, ‘Bad boy’와 같은 싱글이 잇따라 스매시 히트했고, 그와 함께 라틴의 열정적인 리듬도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글로리아 에스테판의 길은 하지만 언제나 순항과 고난의 반복이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딛고 스타덤을 공고히 하는가 했더니 다시 한번 엄청난 시련이 닥쳤다. 1990년 3월 투어 차 뉴욕으로 향하던 버스와 뒤따라오던 트레일러가 추돌하는 사고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 사고로 글로리아는 등뼈가 부러졌으며 400 바늘이나 꿰매야 하는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수술은 성공적으로 이뤄졌고, 그녀는 1년만에 치명적 상처를 딛고 일어서 놀라운 투혼으로 < In To The Light >를 발표했다. 이 앨범에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복하고자 하는 불굴의 의지가 투영되었다. 팬들은 진심 어린 격려와 갈채로 답했으며, 싱글 ‘Coming out of dark’는 차트 1위에 오르는 일대 기염을 토했다. 그것은 기적적인 재기였다. 최근 여러 뮤지션들에 의해 라틴음악이 유행하는 상황이지만 그녀야말로 순수한 라틴음악의 잠재력을 꿰뚫어 본 어쩌면 사상 최초의 가수였다. 1990년에 이미 스페인어로 부른 싱글 ‘Oye mi canto’을 발표했으며 3년 뒤에는 완전한 라틴앨범 < Mi Tierra >를 내놓았다. 1995년에는 다시 스페인어 음반 < Abriendo Puertas >를 출시해 라틴 부흥에 앞장섰다. 두 앨범 모두 대중적으로 큰사랑을 받았고 이 무렵 글로리아는 공식적으로 가장 많은 앨범을 판 라틴계열 가수로 등록되었다. 1998년 앨범 < Gloria! >을 발표한 그녀는 같은 해 뉴욕에서 개최된 ‘디바 라이브 공연’에 참여했다. 아레사 프랭클린, 셀린 디온, 머라이어 캐리, 캐롤 킹, 샤니아 트웨인과 함께 노래한 이 공연을 통해 글로리아는 라틴 디바로서 재확인되었다. 이듬해 그녀는 메릴 스트립이 주연한 < Music Of The Heart >에 배우로서 첫선을 보였으며, 이 영화의 타이틀곡을 보이밴드 엔싱크와 함께 불러 오스카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2000년에는 세 번째 라틴앨범 < Alma Caribena >를 발표하며 남다른 라틴 정체성을 이어가고 있다.
1990년대 초반 국내에서 컨트리 곡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100만장의 판매고를 보인 < 보디가드 >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의 ‘I will always love you’를 비롯해 4인조 보컬 그룹 올 포 원(All 4 One)의 ‘I swear’, ‘I can love you like that’ 등의 원곡은 모두 컨트리 아티스트의 노래였다. ‘I wi... 1990년대 초반 국내에서 컨트리 곡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100만장의 판매고를 보인 < 보디가드 >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의 ‘I will always love you’를 비롯해 4인조 보컬 그룹 올 포 원(All 4 One)의 ‘I swear’, ‘I can love you like that’ 등의 원곡은 모두 컨트리 아티스트의 노래였다. ‘I will always love you’는 ‘9 to 5''로 유명한 돌리 파튼(Dolly Parton)이 1974년에 발표한 노래이고, ‘I swear’와 ‘I can love you like that’은 남성 컨트리 싱어 존 마이클 몽고메리(John Michael Montgomery)의 원곡을 커버한 것이다. 1946년 1월 19일 컨트리 음악의 심장부 테네시 주에서 출생한 돌리 파튼은 작사, 작곡은 물론 영화 배우와 TV 프로그램 사회자로도 활동하는 컨트리 계의 만능 엔터테이너이자 실력자다. 1960년대 컨트리 싱어 포터 와고너(Porter Wagoner)와 결혼 반지를 주고받은 그녀는 1960년대 후반에 발표한 음반들을 통해 차세대 컨트리 음악의 기대주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30여 년이 지난 현재는 컨트리 음악계의 거목으로 대우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은발의 컨트리 여성 싱어에 대한 국내 팬들의 관심은 1980년대 영화 < 나인 투 파이브 >가 개봉하면서 드높아졌다. 영화의 주연도 맡고 주제가도 불러 제작비를 절감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그녀는 이 곡으로 컨트리 차트는 물론 생애 처음으로 싱글 차트에서도 정상을 차지하면서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인 만능 연예인으로 급부상했다. 이후 영화 출연에 적극적이었던 돌리는 버트 레이놀즈(Burt Reynolds), 실베스터 스탤론(Sylvester Stallone) 등과 함께 스크린에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고 그녀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여하는 음악을 소홀히 하진 않았다. 거의 매년 새로운 음반을 발표했고, 1983년에는 비지스(Bee Gees)의 배리 깁(Barry Gibb)이 작곡한 ‘Islands in the stream’을 케니 로저스(Kenny Rogers)와 듀엣으로 취입해 다시 한번 싱글 차트를 탈환했다. 이 곡에서 케니 로저스가 돌리 파튼의 보컬에 눌린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보컬이나 곡의 소화력은 압권이었다. 그러나 밀물로 들어왔으면 썰물로 나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 1980년대 초반 이렇듯 화려한 시절을 보냈지만 1980년대 중반에는 그녀의 음악 인생 중 가장 우울한 시기를 겪게 된다. 더 이상 컨트리 팝은 컨트리 팬들은 물론 팝 팬들에게도 어필하지 못했다. 그 타개책으로 이 영특한 가수가 선택한 것은 린다 론스태드(Linda Ronstadt), 에밀루 해리스(Emmylou Harris)와 함께 정통 컨트리로 회귀한 음반 < Trio >였다. 그 당시 랜디 트래비스(Randy Travis)를 중심으로 신 전통주의 컨트리가 개화하려던 시점을 정확히 포착한 이 앨범으로 그녀는 다시 한번 멋지게 부활했다. 돌리 레베카 파튼(Dolly Rebecca Parton-본명)은 현재까지 새로운 앨범을 제작하고 구상하면서 컨트리 음악계의 지존으로 남아 있다. Hello Dolly!
노래 : Earth, Wind & Fire (어스 윈드 앤 파이어 )
소울, 펑키 그룹 소울, 펑키 그룹
모타운 초기의 남성 하모니 보컬그룹 포탑스(The Four Tops)는 한 명의 스타에 의해서 주도되지 않는 유기적 결속력으로 오랜 기간 정상의 인기를 누렸다. 미국 디트로이트(Detroit) 출신의 4명의 고등학생 레비 스텁스(Levi Stubbs, 1938년생), 르날도 오비 벤슨(Renaldo Obie Benson, 1937년생), 로렌스 페이튼(Lawrence Payton, 1938년생), 압둘 듀크 파커... 모타운 초기의 남성 하모니 보컬그룹 포탑스(The Four Tops)는 한 명의 스타에 의해서 주도되지 않는 유기적 결속력으로 오랜 기간 정상의 인기를 누렸다. 미국 디트로이트(Detroit) 출신의 4명의 고등학생 레비 스텁스(Levi Stubbs, 1938년생), 르날도 오비 벤슨(Renaldo Obie Benson, 1937년생), 로렌스 페이튼(Lawrence Payton, 1938년생), 압둘 듀크 파커(Abdul Duke Fakir, 1938년생)는 동네 파티에서 함께 노래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54년 포 에임스(The Four Aims)라는 이름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한다. 클럽을 무대로 재즈 스탠다드 곡을 부르며 활동해 나가던 이들은 1956년 포 탑스로 개명하고 레코딩 작업에 나선다. 1956년부터 1963년까지 이들은 실패를 거듭해야 했다. 체스(Chess), 레드 탑(Red Top), 콜럼비아(Columbia), 리버사이드(Riverside) 등 여러 레이블을 옮겨 다녔지만 실패만을 거듭했다. 하지만 1963년 모타운(Motown) 레이블로 자리를 옮긴 후 이후 20여 년을 흑인 최고의 보컬 그룹으로 자리하게 된다. 모타운 사장인 베리 고디(Berry Gordy)의 권유로 명제작팀인 홀랜드/도지어/홀랜드(Holland/Dozier/Holland:Brian Holland, Lamont Dozier, Eddie Holland로 구성된 팀으로 이후 1967년까지 이들과 함께 하며 수많은 히트 곡들을 만들어 내게 된다.)에 의해 만들어진 곡들을 부르게 된다. 베리 고디가 이들을 뽑은 이유도 이들 자체의 능력을 키워주기 위함이기보다는 홀랜드/도지어/홀랜드팀과 함께 할 보컬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964년 사실상의 데뷔 앨범 < Breaking Through >를 내놓은 이들은 같은 해 셀프 타이틀의 < Four Tops >를 발표하며 정식 데뷔한다. 이미 첫 싱글인 ’Baby, I need your lovin’을 차트 20위에 올리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인 이들은 ’벤슨-페이튼-파커’의 화음과 리드 보컬인 스텁스의 감성 넘치는 R&B 보컬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발표하는 곡들마다 승승장구하게 된다. 이듬해 발표한 ’I can’t help myself’는 차트 정상을 밟았으며, ’Ask the lonely’(65년), ’It’s the same old song’(65년), ’Something about you’(65년), ’Shake me, wake me(When it’s over’(65년), ’Loving you is sweeter than ever’(66년)가 차트 40위 권 안팎의 꾸준한 성공을 거두었다. 1966년 ’Reach out, I’ll be there’를 다시 한 번 차트 정상에 올린 이들은 여세를 몰아 ’Standing in the shadows of love’(66년), ’Bernadette’(67년), ’7 rooms of gloom’(67년), ’You keep running away’(67년)을 연이어 히트시킨다. 모타운에서 초창기 이들만큼의 인기를 누린 보컬 그룹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슈프림스(The Supremes)나 미라클(The Miracles), 또 템테이션스(The Temptations)나 잭슨 파이브(Jackson Five)와 같은 그룹들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차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정상급 보컬 그룹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1997년 페이튼이 사망하기 전까지 단 한 차례의 멤버 교체도 거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며 스텁스가 리드 보컬을 맡고 있기는 했지만 한 개인의 두드러진 능력이 아닌 멤버 전원의 조화로운 목소리를 중요시 여겨 스모키 로빈슨(Smokey Robinson), 다이아나 로스(Diana Ross)나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처럼 두드러진 멤버로 인해 그룹 전체의 의미가 축소되거나 멤버의 솔로 활동으로 인해 그룹의 조직력이 약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였다. 일견 크게 두드러지는 차이점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이러한 이들의 모습은 모타운에서 컸지만 모타운의 흐름을 따르지 않은 채 독자적인 활동 영역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어 이들이 소울의 발전 과정 속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가치 있는 그룹임을 나타내어 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거부감 없는 보컬 하모니를 통해 흑인 팬들 뿐 아닌 팝 시장의 대중 전체에게 사랑 받을 수 있었던 이들의 음악 그 자체에 있어서의 가치 또한 빼놓아서는 안될 의미 있는 것이다. 승승 장구하던 이들에게도 위기는 찾아온다. 1967년 성공 뒤에 늘 함께 했었던 홀랜드/도지어/홀랜드 팀이 모타운을 나가게 된 것이었다. 오른 팔을 잃은 격인 이들의 활동은 주춤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인기의 공백이 그리 길지 만은 않았다. 자신들에게 맞는 곡을 찾지 못해 팝 히트 곡들을 리메이크 하기도 했던 이들은 레프트 뱅크(Left Banke)의 ’Walk away renee’나 팀 하딘(Tim Hardin)의 ’If I were a carpenter’와 같은 곡들을 소울 풍으로 소화해 내며 좋은 반응을 얻기도 하였으며, 1970년대의 시작과 함께 프랭키 윌슨(Frank Wilson)이나 스모키 로빈슨(Smokey Robinson) 같은 모타운 최고의 제작자들과 호흡을 맞추며 멋지게 재기에 성공한다. 재기에 성공한 이후 토미 에드워즈(Tommy Edwards)의 1950년대 히트 곡을 리메이크 한 ’It’s all in the game’을 히트시켰고, 발라드 곡인 S’till water(Love)’, 슈프림스와 함께 부른 ’River deep mountain high’, ’Just seven numbers (Can straighten out my life)’, ’(It’s the way) Nature planned it’ 등의 곡을 연이어 히트시키게 된다. 한 편 르날도 벤슨은 마빈 게이(Marvin Gaye)의 대 히트 작인 ’What’s going on’을 공동 작곡하는 가수 외적인 면에서의 음악적인 기량을 뽐내기도 하였다. 이들은 1972년 ’Keeper of the castle’을 끝으로 모타운을 떠나 던힐(Dunhill) 레코드에서 활동을 이어간다. 던힐에서도 이들의 인기 행진은 계속되었다. ’Ain’t no woman (Like the one I got)(73년), ’Are you man enough’(73년), ’Sweet understanding love’(73년), ’One chain don’t make no prison’(74년), ’Midnight flower’(74년)가 꾸준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1976년 ’Catfish’로 차트 10위 권에 4년 만에 다시 복귀했다. 잠시 인기가 주춤하던 이들은 카사블랑카(Casablanca)로 소속을 옮기고 1981년 ’When she was my girl’을 R&B 차트 정상에 올려놓는다. 하지만 80년대에 들어선 즈음 이들의 인기는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보컬에만 의존하는 그룹으로서 이미 나이가 40대를 넘어서 있었으며 M-TV의 등장이라는 격변하는 음악계의 흐름 속에서 시대의 그룹으로 차츰 물러서야만 했다. 1983년 모타운으로 돌아온 이들은 < Back Where I Belong >을 발표하며 자신들 음악의 뿌리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 이 앨범에서 이들은 1960년대 자신들과 히트 행진을 벌였던 홀랜드/도지어/홀랜드 팀과 재 만남을 갖기도 하였으며, 동시대의 인기 보컬 그룹이었던 템테이션스와 함께 ’Hang’이라는 곡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1988년 다시 모타운을 떠나 아리스타(Arista)와 계약을 체결한 이들은 ’Indestructible’과 ’Loco in Acapulco’를 히트시키며 나름대로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 가지만 이후 별다른 히트 곡은 나오지 않았다. 4인 라인업의 굳건한 체제를 유지해 왔던 이들이었지만 1997년 페이튼의 사망으로 포탑스의 변함없는 모습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현재 베스트 앨범의 출시 이외에 별다른 음반 활동을 보여주지는 않고 있다.
노래 : KC & The Sunshine Band (케이시 앤 더 선샤인 밴드)
디스코, 펑키, 알앤비 그룹 디스코, 펑키, 알앤비 그룹
옆모습을 보면 코보다 입이 더 돌출되어 있어 그다지 호감 가는 외모를 갖고 있지 않은 빌리 오션(Billy Ocean)은 그 반대급부인 풍부하고 찰진 중저음의 진한 음색으로 1980년대 중반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흑인 남성 가수다. 1950년 1월 21일, 서인도제도에 있는 섬나라 트리니다드에서 레슬리 세바스찬 찰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빌리 오션은 8살 때 영국으로 이민가 낮에는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 옆모습을 보면 코보다 입이 더 돌출되어 있어 그다지 호감 가는 외모를 갖고 있지 않은 빌리 오션(Billy Ocean)은 그 반대급부인 풍부하고 찰진 중저음의 진한 음색으로 1980년대 중반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흑인 남성 가수다. 1950년 1월 21일, 서인도제도에 있는 섬나라 트리니다드에서 레슬리 세바스찬 찰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빌리 오션은 8살 때 영국으로 이민가 낮에는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작은 클럽에서 노래하며 인지도를 획득해 1975년에는 셀프타이틀 데뷔앨범을 발표했다. 여기서 모타운 풍의 경쾌한 싱글 ‘Love really hurts without you’가 미국 차트 22위와 영국 차트 2위에 오르며 성공적인 상견례를 가졌지만 이건 워밍업에 불과했다. 1970년대 후반에 미국에 정착한 빌리 오션은 1980년에 < City Limit >와 1981년에 < Nights (Feel Like Getting Down) >, 1982년에 < Inner Feelings >까지 3장의 음반을 더 발매했지만 미국에서는 댄스 차트와 흑인음악 차트에서만 두각을 나타냈다. 그리고 1984년에 탄생한 다섯 번째 작품 < Suddenly >는 빌리 오션을 전 세계에 메모리시킨 결정타였다. ‘Caribbean queen’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Billie Jean’과 베이스 리듬이 유사해 표절의혹을 받았지만 2주 동안 넘버원을 차지해 지금까지 그의 시그니처 송으로 남아있으며 빌로 오션이 명 프로듀서이자 작곡가인 로버트 존 ‘머트’ 랭(샤니아 트웨인의 전 남편)과 공동으로 작곡한 후속 싱글인 ‘Loverboy’는 2위, 당시 국내 나이트클럽에서 소위 ‘부루스 타임’의 단골이었던 음반타이틀 ‘Suddenly’는 4위, ‘Mystery lady’는 24위에 랭크되어 한 앨범에서 4곡이나 40위권 내에 오르는 대박 히트를 기록했다. 특히 ‘Caribbean queen’으로 빌리 오션은 그해 그래미에서 최우수 리듬 앤 블루스 남성 가수상을 수상했다. 앨범 < Suddenly >의 성공은 1985년까지 이어졌고 1986년에는 그 여세를 몰아 6집 < Love Zone >을 공개했다. 여기서도 히트 싱글이 쏟아졌는데 캐서린 터너와 마이클 더글라스가 주연한 영화 < 나일강의 보석 >에 삽입된 흥겨운 ‘When the going gets tough, the tough gets going’이 2위를 차지했고 고품격 리듬 앤 블루스 ‘There'll be sad songs’가 그의 두 번째 넘버원이 되었다. 그리고 ‘Love zone’이 10위, ‘Love is forever’는 16위에 올라 모두 4곡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2년 후인 1988년에 발표한 앨범 < Tear Down These Walls >에서도 다시 한번 1위곡을 배출하는데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은 댄스곡 ‘Get outta my dreams, get in to my car’이다. ‘Loverboy’와 ‘When the going gets tough, the tough gets going’에 이어 로버트 존 ‘머트’ 랭과 합작한 이 노래 외에도 발라드 ‘Colour of love’와 ‘Licence to chill’이 각각 17위와 32위를 차지하며 3연타석 홈런을 쳤다. 또한 이 음반에는 ‘Because of you’라는 곡이 있는데 나중에 푸른하늘이 1990년에 발표한 ‘이 밤이 지나도록’에서 이 노래를 표절해 우리나라에서 조용히 화제가 되었다.
노래 : James Brown (제임스 브라운,James Joseph Brown Jr.)
‘펑크(Funk)의 선구자’, 혹은 ‘소울의 대부’ 등의 화려한 수식어로 지금까지도 후배 뮤지션들에게 존경받고 있는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은 1960, 70년대에 걸친 시기에 전성기를 구가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흑인 소울 싱어다. 가스펠에 뿌리를 둔 음악적 자양분을 바탕으로 그는 결국 소울에서 리듬 앤 블루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장르 해석을 이끌며 ‘아메리칸 블랙 뮤직’의 혁명을 몰고 온 인물로... ‘펑크(Funk)의 선구자’, 혹은 ‘소울의 대부’ 등의 화려한 수식어로 지금까지도 후배 뮤지션들에게 존경받고 있는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은 1960, 70년대에 걸친 시기에 전성기를 구가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흑인 소울 싱어다. 가스펠에 뿌리를 둔 음악적 자양분을 바탕으로 그는 결국 소울에서 리듬 앤 블루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장르 해석을 이끌며 ‘아메리칸 블랙 뮤직’의 혁명을 몰고 온 인물로 평가받기도 했다. 소위 ‘Mr. 다이너마이트’라고 불려질 정도로 폭발적인 보이스를 지녔던 브라운은 자신의 매력이라 할만한 흡입력 강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펑키(Funky), 소울, R&B 같은 흑인장르를 토해내며 수많은 음반을 레코딩했고, 정열적인 무대매너를 앞세워 왕성한 음악활동을 보여줬다. 특히 라이브 공연에서 그의 재능은 개성 넘치는 플레이의 광분과 더불어 운동선수와도 흡사한 스태미나와 순간적인 타이밍에서 놀라운 기량을 선보였다. 게다가 그가 온몸으로 절규하듯 내지르는 울분과 광기에 가까운 몸짓은 그 당시 미국사회에서 굴욕적인 삶을 살아가던 흑인들에게는 커다란 위안이었고, 또한 백인들마저도 그 열정에 매료되어 감탄과 박수를 보낼 지경이었다. 흑인들의 핏속에 흐르고 있는 자유에 대한 갈망 역시 그의 음악에서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다. 싱어 송 라이터와 프로듀서로서의 능력을 동시에 겸비할 정도로 뛰어난 음악성을 지녔던 그의 존재는 엇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레이 찰스(Ray Charles)나 샘 쿡(Sam Cooke)과 같은 소울 싱어들과 라이벌로 비견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장르를 일궈냈던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이나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과도 비교 대상이었지만, 그 분야에서 일찌감치 여타 아티스트보다 펑크(Funk)를 먼저 시도했던 인물로 지금까지도 널리 팝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1933년 미국 남부의 시골태생으로 어린 시절 빈민가에서 성장한 제임스 브라운은 파워풀하며 깊이 있는 자신의 목소리가 주위에 알려지면서 금새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브라운은 1940년대 중반 소울 싱어 바비 버드(Bobby Byrd)의 도움을 받아 그와 함께 가스펠 그룹에서 노래를 하면서 본격적인 음악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제임스 브라운은 1956년 ‘Please, please, please’(5위)를 발표하면서 공식적인 첫 데뷔를 장식했다. 이 싱글은 미국과 영국에서 호평을 얻어냈고, 1959년에 발매된 두 번째 싱글 ‘Try me’(48위)의 성공으로 브라운은 히트퍼레이드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1960년대로 넘어오면서 브라운은 자신의 끼가 묻어난 개성 넘치는 스타일을 선보이며 싱글 ‘Think’(33위), ‘Night train’(35위), Prisoner of love(18위), ‘Out of sight’(24위), ‘I got you (I feel good)’(3위) 등을 히트시켰으며 공연 실황을 담아낸 < Live At The Apollo >(1963)을 통해서 브라운은 음악 인생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지금까지도 그의 최고 작품으로 손꼽히는 이 라이브 앨범과 1965년에 발매된 < Papa’s Got A Brand New Bag >의 연이은 상업적 성공으로 브라운은 백인들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깊이 각인시켜주는 계기를 만들었다. 계속해서 그는 1969년 < Say It Loud I’m Black I’m Proud >를 발표하며 일련의 기간동안 흑인 음악계 최고의 슈퍼스타덤에 올랐다. “나는 흑인이고, 흑인으로 태어난 것이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이렇게 외쳐대는 이 작품에서 브라운은 연인을 떠나보내는 심경을 애절하게 표현한 ‘Goodbye my love’(9위)와 소울 필이 가득한 ‘Licking stick’(2위) 등 그만의 열정이 녹아든 곡들을 수록하며 소울 싱어로서의 명성을 이어나갔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브라운은 당시 라이브로 녹음한 더블 앨범 < Sex Machine >(1970)을 발표했고, 국내 CF에 쓰여지면서 너무나도 유명해진 ‘It’s a man’s man’s man’s world’ 같은 곡을 배출해냈다. 또한 이듬해부터 < Hot Pants >(1971), < Get on the Good Foot >(1972)등이 계속해서 히트했고, 골드를 기록한 음반 < The Payback >(1973), < Hell >(1974)을 발표하며 의욕적인 음악활동을 계속해나갔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이후부터 브라운은 뮤지션으로서 퇴보의 길을 걷게된다. 그간 조금씩 쌓여갔던 개인적인 재정난과 마약문제로 결국 감옥투옥 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그 이후로 브라운은 별다른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Living in america’(4위)를 히트시킨 < Gravity >(1986)와 2년 뒤 < I’m Real >(1988)을 발표하며 1980년대 말까지 음악활동의 명맥을 이어갔다. 제임스 브라운의 음악은 후대에 와서 랩/힙합 뮤지션들의 앨범에 종종 샘플로 쓰여지면서 다시금 재평가 받기에 이르렀고, 현재 팝 계에서는 예전보다 훨씬 더 영향력 있는 뮤지션으로 남아있다.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록음악과 흑인음악에 걸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가장 중요한 뮤지션중의 한 명으로 손꼽을 만큼 음악을 통해서 분출하고자 했던 그의 혁명과도 같았던 메시지는 강렬했다.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브라운은 이런저런 가정적 불화와 개인적 사생활의 비극까지 겹치면서 음악활동 또한 저조한 결과만을 가져왔다. 1990년대에는 힙합 비트를 시도한 < Universal James >(1992)를 발표했고, 새롭게 자신의 부활을 알리려고 시도했던 < I’m Back >(1998)같은 음반을 발표해 음악계에 다시 돌아왔음을 선언했지만 대중들에게 별다른 호응은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음악으로 인생의 모든 것을 바쳤던 제임스 브라운. 이제 후배 뮤지션들에 의해서 그의 존재는 지금까지도 격상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일기예보가 발표한 ‘좋아 좋아’의 클라이맥스 소절을 들었을 때 많은 음악 팬들은 팝록, 어덜트 컨템포러리 싱어 케니 로긴스(Kenny Loggins)가 1982년에 공개한 ‘The more we try’를 떠올렸다. 일기예보의 노래가 케니 로긴스의 발라드 스타일보다 업템포로 밝은 면을 강조했지만 클라이막스의 기본 멜로디는 같았다. ‘The more we try’는 ‘Forever’, ‘Footl... 1990년대 후반 일기예보가 발표한 ‘좋아 좋아’의 클라이맥스 소절을 들었을 때 많은 음악 팬들은 팝록, 어덜트 컨템포러리 싱어 케니 로긴스(Kenny Loggins)가 1982년에 공개한 ‘The more we try’를 떠올렸다. 일기예보의 노래가 케니 로긴스의 발라드 스타일보다 업템포로 밝은 면을 강조했지만 클라이막스의 기본 멜로디는 같았다. ‘The more we try’는 ‘Forever’, ‘Footloose’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케니 로긴스의 베스트 트랙이다. 1948년 1월 7일 미국의 워싱턴 주에서 태어난 케니 로긴스는 1970년대 초반 짐 메시나(Jim Messina)와 함께 포크록 듀오 로긴스 & 메시나(Loggins & Messina)를 만들어 ‘Your Mama don''t dance(4위)’나 ‘Thinking of you(18위)’같은 히트곡을 배출했는데 특히 ‘Your mama don''t dance’는 1988년 팝메탈 밴드 포이즌(Poison)이 커버해 다시 한번 탑 텐에 올려놓아 다시 한번 명곡임을 입증했다. 케니는 성공적인 듀엣 활동을 접고 1977년부터 결별해 본격적으로 독립 활동을 시작해 멜리사 맨체스터(Melissa Manchester)와 공동으로 작곡한 ‘Whenever I call you friend(5위)’를 비롯해 ‘This is it(11위)’, 케니 로긴스의 오리지날을 두비 브라더스가 리메이크해 차트 정상은 물론 그래미 올해의 레코드를 수상한 ‘What a fool believes’ 등으로 1970년대를 마감했다. 그의 진정한 성공은 1980년대를 맞이하면서 화려하게 개화하기 시작했다. 1982년에 저니(Journey)의 보컬리스트 스티브 페리(Steve Perry)와 호흡을 맞춘 ‘Don''t fight it(17위)’와 ‘Heart to heart(15위)’, 그리고 유독 국내에서 사랑 받았던 ‘The more we try’가 들어 있는 그의 역작 < High Adventure >는 곧 다가올 성공에 대한 워밍업이었다. 1984년부터 쏟아지는 케니 로긴스의 히트곡들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거의 모두가 영화에 삽입된 노래들이었다. 그의 대표곡 ‘Footloose(1위)’와 ‘I''m free(22위)’는 영화 < 풋루스 >의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노래들이었고, ‘Danger zone(2위)’은 < 탑 건 >에서, ‘Meet me half way(11위)’는 < 오버 더 탑 >으로부터, ‘Nobody''s fool(8위)’은 < 캐디섁Ⅱ >에서 배출된 히트 싱글들이다. 그러나 이 ‘Nobody''s fool’을 마지막으로 싱글 차트와의 친분을 정리한 케니 로긴스는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가족의 소중함과 어린이들을 위한 음반을 만드는데 열중했다. 1990년대 초반 아내와의 이혼이 그에겐 큰 충격이었던 셈이다. 그의 예민하고 가녀린 목소리는 ‘Danger zone’이나 ‘Don''t fight it’처럼 강한 음악보다 ‘The more we try’나 ‘Forever’, ‘Whenever I call you friend’와 같은 차분하고 부드러운 노래에 더 잘 어울린다. 그의 성공은 팝시대로 대표되는 1980년대 음악 풍토에 정확히 들어맞는 시대적 요청이었기에 가능했다.
노래 : Mr. Mister (미스터 미스터)
남성의 존칭을 두 번이나 강조한 미스터 미스터(Mr. Mister)는 1980년대 중반의 팝 계에 짧지만 굵은 선을 그으며 영국 그룹에 밀렸던 미국 밴드의 체면을 세웠지만 인기의 불꽃이 점화된 지 2년도 안되어 산화한 불가사의한 그룹이다. 고급 세션맨 출신인 각 멤버들의 역량만을 따로 분리해 보면 아쉬울 게 없었지만 그 음악적 실력을 충분히 보여주기도 전에 우리의 기억에서 지워졌기 때문이다(롱런한 토토와 비교해보... 남성의 존칭을 두 번이나 강조한 미스터 미스터(Mr. Mister)는 1980년대 중반의 팝 계에 짧지만 굵은 선을 그으며 영국 그룹에 밀렸던 미국 밴드의 체면을 세웠지만 인기의 불꽃이 점화된 지 2년도 안되어 산화한 불가사의한 그룹이다. 고급 세션맨 출신인 각 멤버들의 역량만을 따로 분리해 보면 아쉬울 게 없었지만 그 음악적 실력을 충분히 보여주기도 전에 우리의 기억에서 지워졌기 때문이다(롱런한 토토와 비교해보라). 미스터 미스터는 죽마고우였던 리차드 페이지(Richard Page/보컬, 베이스)와 스티브 조지(Steve George/보컬, 키보드)가 1979년에 도원결의(桃園結義)한 페이지스(Pages)가 그 시발점이다. 페이지스는 국내에선 다큐멘터리인 < 실크로드 >에 삽입된 ‘Caravan sary’로 아직까지도 기억되지만 본토에서의 반응은 우리나라와는 180도 달랐다. 페이지스의 역사는 1981년에 그 페이지를 넘기며 팝 역사의 비사(?史)로 남게 되었고 리차드와 스티브는 이듬해인 1982년에 기타리스트 스티브 패리스(Steve Farris)와 드러머 팻 마스텔로토(Pat Mastelotto)를 새로운 친구로 맞이하면서 미스터 미스터의 공식적인 명함을 찍었다. 페이지스를 접은 후에 포인터 시스터스(Pointer Sisters), 샤카 칸(Chaka Khan), 도나 서머(Donna Summer) 등과 음악활동을 하면서 그 인지도를 각인시킨 리차드와 스티브는 어렵지 않게 메이저 음반사와의 계약을 통해 1984년에 데뷔작 < I Wear The Face >을 발표했다. 여기서 첫 싱글 ‘Hunters of the night(57위)’을 커트시켜 차트에 처음으로 진입시켰다. 그러나 1집으로 팀 이름에 걸맞지 않은 대접을 받은 미스터 미스터는 1985년에 공개한 두 번째 음반 < Welcome To The Real World >로 자신들이 세운 음악세계에 대중들을 초대했다. 베이스가 주도하는 첫 싱글 ‘Broken wings’와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의 두 번째 싱글 ‘Kyrie’가 연속으로 넘버원을 차지했고 세 번째 커트 싱글 ‘Is it love?’는 8위에 랭크되면서 < Welcome To The Real World >는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올랐다. 특히 ‘Is it love?’는 리차드 드레이퓨스와 에밀리오 에스테베즈가 주연한 1987년도 영화 < 잠복근무(Stakeout) >의 마지막에 삽입되기도 했다. 이러한 선전으로 미스터 미스터는 1985년도 그래미에서 최우수 그룹 후보에 올랐지만 ‘We are the world’의 주인공 USA for Africa에 양보하며 더 큰 인류애(?)를 발휘했다. 하지만 1987년에 부화한 세 번째 앨범 < Go On >은 상업적인 실패를 잉태했다. 첫 싱글 ‘Something real (Inside me/Inside you)’만이 유일하게 싱글 차트에 진입했지만 27위라는 상대적으로 초라한 결과를 낳으면서 대중들과의 눈 맞추기에 난항을 보였지만 그해 그래미에서 두 번째로 올해의 그룹 부문 후보로 지명되었다(수상자는 영화 < 더티 댄싱 >의 주제가 ‘The time of my life’를 부른 빌 메들리와 제니퍼 원스). 3집의 저조한 성과는 밴드의 해산을 가져왔다. 1988년에 미스터 미스터는 해체를 결정했으며 연주 실력이 뛰어난 각 멤버들은 마돈나(Madonna)나 케니 로긴스(Kenny Loggins), 쥬얼(Jewel), 화이트스네이크(Whitesnake), 토리 에이모스(Tori Amos) 같은 뮤지션들의 레코딩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음악 경력을 쌓고 있다.
멤버 : Eddie Jordan, Graham McGregor, Chic Medley, Mike Ogletree, Kevin Patterson, Grant Taylor, Paul Wishart 멤버 : Eddie Jordan, Graham McGregor, Chic Medley, Mike Ogletree, Kevin Patterson, Grant Taylor, Paul Wishart
노래 : REO Speedwagon (알이오 스피드웨건)
꾸준함은 모든 난관을 극복하게 하며 끈기는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의지를 부여한다. 이 소박하고도 당연한 불변의 진리는 대중 음악계에서도 변함 없이 적용된다. 상업적인 성공이나 명성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미쳐 초지일관으로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행복인 동시에 자신감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10년 이상의 무명 생활을 그루터기처럼 꿋꿋하게 감내해 낸 알이오 스피드왜건(REO Speedwagon)은... 꾸준함은 모든 난관을 극복하게 하며 끈기는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의지를 부여한다. 이 소박하고도 당연한 불변의 진리는 대중 음악계에서도 변함 없이 적용된다. 상업적인 성공이나 명성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미쳐 초지일관으로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행복인 동시에 자신감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10년 이상의 무명 생활을 그루터기처럼 꿋꿋하게 감내해 낸 알이오 스피드왜건(REO Speedwagon)은 밴드 결성 12년만인 1980년 아홉 번째 정규 앨범 < High Infidelity >로 정상의 인기를 구가한 대기만성형인 성인 취향의 팝록 그룹이다. 팝음악 계에서는 변방으로 꼽히는 미국 일리노이즈 주에서 건반 주자 닐 도티(Neal Doughty)와 드러머 알란 그랫처(Alan Gratzer)라는 두 젊은 대학생을 중심으로 개리 리치라스(Gary Richrath/기타), 그레그 필빈(Gregg Philbin/베이스), 마이크 머피(Mike Murphy/보컬)가 의기투합한 팀이 1968년에 결성된 알이오 스피드왜건이다. 팀의 목소리는 곧 전직 포크 싱어였던 케빈 크로닌(Kevin Cronin)으로 바통터치 되어 변화를 시도했지만 이들의 성공은 요원해 보였다. 그러자 당시 이 5인조 밴드는 그 타개책으로 ’질보다 양’의 물량 공세 전략을 택했다. 이들은 1971년부터 거의 매년 발표한 앨범과 이 음반들을 지원 사격하기 위해 1년에 250일 이상 강행군된 공연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넓히고자 했다. 하지만 1970년대 당시 인기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고난도의 연주 테크닉과 파워를 바탕으로 하는 하드록과 헤비메탈, 쾌락의 정점을 보여준 디스코, 그리고 그 정반대의 대칭점에 위치한 소프트 록에 근거한 발라드, 그 어느 쪽에도 명쾌하게 포함되지 못한 알이오 스피드왜건은 1980년 < High Infidelity >를 발판으로 삼아 메이저리거로 올라서기 전까지 ’Ridin’ the storm out(94위)’, ’Roll with the changes(58위)’, ’Time for me to fly(77위)’ 같은 극히 미미한 히트 싱글만을 배출한 마이너리거였다. 이 무명 밴드는 1980년대를 맞이하면서 라디오와 싱글에 초점을 맞춘 감각적인 멜로디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국내 주류 광고에도 사용되었던 불후의 넘버원 발라드 ’Keep on loving you’를 시발점으로 ’Take it on the run(5위)’, ’Don’t let him go(24위)’, 그리고 우리나라 팝팬들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In your letter(20위)’가 수록된 < High Infidelity >는 현재까지 900만장 이상이 팔려 다이아몬드 레코드(천만장 이상)를 목전에 두고 있으며, 1982년에 발표한 차기 작품 < Good Trouble >에서는 싱글 ’Keep the fire burnin’’을 7위까지 올려놓았지만 이러한 성공적인 결과와는 달리 음악 평론가들은 이들의 노래가 팬들의 유행 감각에 쉽게 좌우되는 상업 음악의 정점이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Keep on loving you’와 함께 자신들의 발라드 대표곡으로 투 톱을 이루는 ’Can’t fight this feeling(1985년 3주간 1위)’과 ’One lonely night(19위)’, ’Live every moment(34위)’로 다시 한번 인기몰이에 성공한 알이오 스피드왜건은 결성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간 록트랙 ’That ain’t love(16위)’와 국내에서 높은 인기를 누린 ’In my dreams(19위)’ 등으로 1980년대 말까지 그 명성을 이어갔지만 이후 음악 토양이 완벽하게 바뀐 1990년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싱글 차트에서는 명예퇴직을 하게 되었다. 현재 이들은 같은 성향의 동료 밴드들인 스틱스(Styx), 포리너(Foreigner), 저니(Journey), 플리트우드 맥(Fleetwood Mac) 등과 함께 전 미국을 순회하는 공연에 동참하고 있다.
노래 : Spandau Ballet (스팬다우 발레)
1983년도 싱글 ‘True’는 1990년에 해산한 스팬다우 발레(Spandau Ballet)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했다. 스팬다우 발레라는 밴드 이름은 생소해도 ‘True’의 멜로디는 현재까지 라디오에서, 드라마에서, CF 배경 음악에서, 그리고 여러 컴필레이션 음반에서 여전히 그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한 곡 때문에 다른 노래들은 본의 아니게 단명하고 말았다. 개리 켐프(Gary Kemp/기타)와 ... 1983년도 싱글 ‘True’는 1990년에 해산한 스팬다우 발레(Spandau Ballet)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했다. 스팬다우 발레라는 밴드 이름은 생소해도 ‘True’의 멜로디는 현재까지 라디오에서, 드라마에서, CF 배경 음악에서, 그리고 여러 컴필레이션 음반에서 여전히 그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한 곡 때문에 다른 노래들은 본의 아니게 단명하고 말았다. 개리 켐프(Gary Kemp/기타)와 마틴 켐프(Martin Kemp/베이스) 형제를 중심으로 토니 해들리(Tony Hadley/보컬), 스티브 노먼(Steve Norman/기타, 색소폰, 퍼커션), 존 키블(John Keeble/드럼)이 1979년에 의기투합한 뉴웨이브 그룹 스팬다우 발레는 글램록의 선구자인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와 록시 뮤직(Roxy Music)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아름다운 분장(?)과 화려한 의상으로 자신들의 외형을 가꾸었다. 그래서 뉴로맨틱스 계열로 분류되기도 하는 스팬다우 발레는 세련되고 깔끔한 연주 위에 토핑 치즈처럼 뿌려진 토니 해들리의 소울풀하고 기름진 보컬이 어우러지면서 맛을 낸 담백한 음악이 강점이다. 1981년과 1982년 연이어 발표한 < Journeys To Glory >와 < Diamond >는 영국 내에서만 그 가능성을 타진하는데 그 의의를 두었다. 이듬해인 1983년에 공개한 3집 < True >에서 타이틀 트랙과 후속곡 ‘Gold’, ‘Communication’이 빌보드 싱글 차트 4위와 29위, 59위에 계속 진입하면서 국제적인 밴드로 급부상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True’는 하루가 멀다하고 라디오 전파를 타는 대형 히트를 기록했다. 1985년을 기점으로 뉴웨이브 음악은 촛불처럼 연소되었고, 뉴웨이브 그룹들도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처럼 순식간에 소멸했다. 그리곤 팝메탈이 그 우람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81년부터 1984년까지 강행군 한 스팬다우 발레는 록적인 접근법을 취한 < Through The Barricades >를 1986년에 내놓았으나 반응은 냉담했고, 1989년도 음반 < Heart Like A Sky >를 끝으로 이 퀸텟은 화려했던 활동을 접었다. 개리 켐프는 영화 < 보디가드 >를 비롯한 몇몇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해 배우로 다시 태어났고, 토니 해들리는 1993년에 솔로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True’는 1990년대 들어서도 그 막강한 지명도를 과시했다. 랩듀오 피엠 돈(PM Dawn)의 1992년 넘버원 싱글 ‘Set adrift on memory bliss’는 ‘True’의 주요 멜로디를 사용해 가장 이상적인 샘플링 모델을 제시했으며, 1998년도와 2000년에는 영화 < 웨딩 싱어 >와 < 미녀 삼총사 > 사운드트랙에 수록되어 젊은 팝 팬들에게도 어필했다.
모든 사람들은 기나긴 인생을 항해하면서 좋든 싫든 호사다마(好事多魔)와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순간을 맞는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못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것을 슬기롭고 현명하게 대처해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절호의 기회로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It’s a heartache’와 ’Total eclipse of the heart’, ’Holding out for... 모든 사람들은 기나긴 인생을 항해하면서 좋든 싫든 호사다마(好事多魔)와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순간을 맞는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못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것을 슬기롭고 현명하게 대처해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절호의 기회로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It’s a heartache’와 ’Total eclipse of the heart’, ’Holding out for a hero’ 등으로 우리나라에서 꾸준한 리퀘스트를 받는 보니 타일러(Bonnie Tyler)는 자신에게 주어진 불리한 여건을 자신만의 장점으로 승화시킨 불사조 같은 인물이다. 1970년대 중반 목에 생긴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이후 허스키한 음색을 소유하게 된 보니 타일러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Bette Davis eyes’로 유명한 킴 칸스(Kim Carnes)와 함께 대표적인 ’여성판 로드 스튜어트’로서 당대를 풍미했다. 1953년 6월 8일 영국 연방인 웨일즈에서 게이너 홉킨스(Gaynor Hopkins)라는 본명으로 태어난 그녀의 음악은 1970년대와 1980년대가 확연하게 구별된다. ’It’s a heartache’로 대표되는 어쿠스틱 스타일이 두드러진 성인 취향의 팝이 그녀의 1970년대를 정의했다면, 미트 로프(Meat Loaf)의 음반 제작으로 유명한 작곡자 겸 제작자인 짐 스타인만(Jim Steinman)과 손잡은 1980년대 이후부터는 오페라 형식의 웅장하고 화려한 곡들이 그녀의 후반기를 책임졌다. 1978년, 빌보드 싱글 차트 3위를 기록한 타일러의 ’It’s a heartache’는 국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80년대 보니 타일러의 음악과는 달리 경쾌한 전형적 어덜트 컨템포러리 스타일인 이 곡은 그녀의 두 번째 정규 앨범의 타이틀 트랙이었다. 이후 전자 음원이 없는 포크와 컨트리 성향의 음반을 공개했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80년대 초반에 음반사를 RCA에서 콜롬비아로 옮겨 회심의 역작을 구상하면서 제2의 도약을 준비한다. 1983년 세상에 공개된 < Faster Than The Speed Of Night >은 보니 타일러에게 새로운 음악 인생을 열어 준 걸작 앨범이다. 그녀를 대표하는 ’Total eclipse of the heart’는 1983년 10월 무려 4주 동안이나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뒤이어 후속곡 ’Take me back’도 46위를 기록하면서 1984년에 거행된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가장 유력한 여자 가수상 후보로 예견되었으나 그녀는 ’Flashdance.....what a feeling’의 주인공 아이린 카라(Irene Cara)에게 영광의 트로피를 양보(?)했다. ’Total eclipse of the heart’가 한 달 동안 싱글 차트 1위를 지키고 있을 때 바로 그 밑에서 3주간이나 2위를 지킨 노래도 짐 스타인만이 작곡하고 프로듀싱 한 에어 서플라이(Air Supply)의 ’Making love out of nothing at all’이었다. 그 정도로 당시 짐 스타인만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만큼 기세가 등등했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에 2년이 더 지난 1995년에는 여성 댄스 팝 가수 니키 프렌치(Nicki French)가 ’Total eclipse of the heart’를 댄스 스타일로 커버해 다시 한번 싱글 차트 2위의 자리에 올려놓음으로써 이 곡이 전천후 명곡임을 재확인시켰다. 1984년, 미 전역을 춤바다의 물결로 침몰시킨 영화 < 푸트루스 >의 사운드트랙에는 강력한 보컬과 드럼 연주가 휘몰아치는 ’Holding out for a hero(34위)’가 수록되어 그녀의 지속적인 인기를 유지시켜 주었고, 1920년대 SF 영화를 복원해 1984년에 재개봉한 < 메트로폴리스 >에 삽입된 ’Here she comes(76위)’ 같은 영화 수록곡들을 취입하면서 비교적 여유 있는 한 해를 보냈다. 1986년에는 < Secret Dreams & Forbidden Fire >로 다시 한번 도약을 시도했지만 3년 전과 같은 센세이셔널한 결과를 재현하는데는 실패했다. 이전의 앨범 < Faster Than The Speed Of Night >처럼 짐 스타인만 식의 장대한 스케일이 반복되었으며 대부분 곡들의 길이도 5분대를 훌쩍 뛰어 넘었기 때문에 싱글로 커트 하기엔 약간 무리가 따랐다. 팝 메탈의 기폭제 역할을 한 본 조비(Bon Jovi)의 ’You give love a bad name’(1986년 11월 1위)과 비슷한 멜로디를 가진 ’If you were a woman (And I was a man)’만이 1986년 77위를 끝으로 추락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이 곡은 1990년대 초반에 국내 자동차 광고의 배경 음악으로 쓰인바 있어 우리 귀에 그다지 낯설지 않다. 1970년대 후반 ’It’s a heartache’의 대대적인 인기로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국제 가요제에도 참가해 그 특유의 거친 허스키 음색을 직접 들려준 이 금발의 미녀는 천재 아티스트 마이크 올드필드(Mike Oldfield)의 1987년 음반 < Islands >에 게스트 보컬로 초청되어 그녀만의 보컬 전율을 다시 한번 과시하기도 했다. 보니 타일러는 1990년대 후반까지 꾸준하게 신보를 발표했지만 그 작품들은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한 채 금새 잊혀졌다. 하지만 ‘It’s a heartache’와 ‘Total eclipse of the heart’의 메아리는 아직까지 우리의 뇌리에 남아 그녀의 노래들처럼 격정적인 환희와 감동을 전한다.
‘모타운(Motown) 가의 황태자’ 마빈 게이의 보컬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달콤한 크루닝(crooning) 창법과 샘 쿡의 호소력 짙은 가스펠의 기운을 온전히 흡수한 그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보컬로 창조해내며 청중들을 흥분시켰다. 기운이 서려있는 듯한 그의 보컬은 ’보컬 연주의 대가’라는 영광스런 칭호에 어울린다. 그의 사후 등장한 수많은 소울 팝 가수들은 모... ‘모타운(Motown) 가의 황태자’ 마빈 게이의 보컬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달콤한 크루닝(crooning) 창법과 샘 쿡의 호소력 짙은 가스펠의 기운을 온전히 흡수한 그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보컬로 창조해내며 청중들을 흥분시켰다. 기운이 서려있는 듯한 그의 보컬은 ’보컬 연주의 대가’라는 영광스런 칭호에 어울린다. 그의 사후 등장한 수많은 소울 팝 가수들은 모두 그의 보컬에 영향받았음을 인정하며 그의 음악성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은 단지 탁월한 창법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록음악 역사에 있어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아티스트의 창작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을 몸소 실천한 음악인이라는 점에서 그를 더욱 기억하게 한다. 70년대가 되기 전 만해도 밤낮으로 사랑과 낭만만을 얘기하며 소일하던 모타운식 소울 음악은 당시 대다수 흑인들이 공감해오던 ‘어두운 현실’엔 둔감했다. ‘팔리는 음악’을 원했던 회사측과의 마찰은 불가피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음악’을 위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이런 산고 끝에 록 역사를 대표하는 명반 < What’s going on >(1971)은 탄생했다 소울 음악은 60년대 그가 소속되어있던 모타운 레코드사를 통해 보다 대중적인 음악 문법으로 자리 잡은데 이어, 그는 같은 회사 소속의 스티비 원더와 함께 미국 대도시 후미진 곳에서 벌어지는 ‘게토 리얼리티를’ 자신의 노래에 담아냄으로써 소울이 ‘사회성’이란 화두를 본격적으로 끌어내는데 기여를 했다. 스티비 원더와 함께 그는 소위 후배 흑인 뮤지션들의 ‘대부’이다. 80년대 이스트 코스트 힙합의 분수령을 일군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의 프론트 맨 척 디(Chuck D)는 1988년도 명반 <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 >을 발표하며 롤링스톤지와 가졌던 인터뷰에서 ‘나는 이번 앨범에서 힙합의 < What’s going on > 버전을 내놓고 싶었다’ 라고 얘기할 정도로 마빈 게이의 유산을 이어받았다고 인정했다. 마빈 펜츠 게이 주니어라는 본명으로 1939년 4월 2일 워싱턴 디씨에서 태어난 그는 목사를 아버지로 둔 기독교 가정에서 어린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다소 억압적인 가정환경은 그로 하여금 음악에 몰입하게 해 아버지 때문에 억눌린 영혼을 달래줄 위안이 된다.(어렸을 때부터 그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공군에 입대, 제대 후 고향으로 돌아와 그는 락 앤 롤 스타 보 디들리(Bo Didely)를 만나 그의 문하생이 된다. 1958년 두왑 그룹인 레인보우에 가입, 이듬해엔 시카고로 진출해 ‘문 그로우’ 라는 두왑밴드에서 활동하며 체스(Chess) 레코드에서 그의 ct첫 싱글 ‘Mama roocie’를 녹음한다. 미국 전역 투어에 나선 문 그로우는 디트로이트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고, 당시 그의 연주를 지켜보던 모타운의 설립자 베리 고디 주니어(Berry Gordy Jr.)는 3옥타브가 넘는 그의 탁월한 테너 창법에 매료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61년 모타운과 전속 계약을 체결하며 베리 고디와 운명적인(?) 관계를 시작한다. 처음엔 세션 드러머로서 모타운의 일원이 된 그는 모타운 간판스타이자 작곡가인 스모키 로빈슨과 함께 활동한다. 1961년 그는 사장인 베리 고디의 누이인 안나와 결혼한다(무려 18살의 연상). 사장과 사돈관계가 된 덕에 회사측에 전폭적인 지원을 얻게 된 그는 이듬해 첫 싱글 ‘Stubborn kind of fellow’(1962)를 발표하고 흥겨운 댄스 팝 ’Hitch hike’(1962)로 빌보드 Top 40에 진입하는 순조로운 출발을 보인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크루닝 창법에 영향 받았던 그는 당시 격조 있는 발라드 음악을 원했지만, 회사 측은 그에게 흥겹게 흔들기 좋은 빠른 댄스 음악만을 요구했다. 큰 키에 수려한 용모를 지닌 덕에 유난히 여성 팬들이 많이 따랐던 그였지만, 무대에 올라 몸을 흔들며 청중들에게 즐거움을 줘야 한다는 것은 늘 못 마땅했다. 후에 그가 회고하길 ‘나는 무대에 나가 청중들 앞에서 내 엉덩이를 흔들어야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했을 정도이니, 얼마 후 있을 회사 측과 창작권을 두고 생긴 갈등은 이미 데뷔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1960년대 내내 그는 모타운 사를 통해 꾸준히 히트곡을 발표했다. ‘Pride & joy’(1963)로 처음 Top 10에 진출한 그는 잇달아 발표한 싱글 ’How sweet it is’(1964), ‘Aint that peculiar’(1965)을 Top 10에 진입시킨다. 솔로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져갈 무렵 그는 모타운 소속의 실력 있는 디바들과 듀엣 곡을 많이 취입했는데, 메리 웰즈(Mary Wells)과 함께 한 ’What’s the matter with you baby’(1964)을 시작으로, 킴 웨스튼(Kim Weston)과 함께 한 ’It takes two’(1966), 70년대 다이아나 로스(Diana Ross)와 함께 한 ‘My mistake is to love you’(1974)등이 대중적인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그와 가장 인상적인 호흡을 보여준 디바는 바로 타미 테렐(Tammi Terell)이었다. 그녀와 함께 했던 ‘Ain’t no mountain high enough’(1966), ’Your precious love’(1967), ’Ain’t nothing like the real thing’(1968), ’You’re all I need to get by’(1968) 모두 Top 10에 진입시키는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팝 역사상 가장 궁합이 잘 맞는 콤비’는 안타깝게도 타미 테렐의 요절로 인해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에게 첫 팝 차트 넘버원의 영광을 안겨준 ‘I heard it through grapevine’(1968)로 그의 인기전선은 절정에 다다랐다. 이듬해 ’Too busy thinking about my baby’(1969), ’That’s the way love is’(1969)를 Top 10에 진입시키며 인기는 더해갔지만, 이내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만다. 데뷔 때부터 창작권을 두고 벌어진 회사 측과의 끈질긴 줄다리기는 무려 2년이라는 시간을 그에게 투쟁의 시간으로 만들었다. 달콤한 사랑타령으로 점철된 지금까지의 음악과는 다른, 자신이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표출해보길 갈망했던 그는 ‘자신의 음악’을 얻기 위한 힘겨운 투쟁 끝에 결국 모타운 사의 백기를 받아내며 ‘음반 제작에 관한 모든 전권을 그에게 위임할 것’이라는 전리품을 얻어낸다. 흑인의 입장에서 아프로 아메리칸(Afro-America)의 비참한 현실을 늘 생각해왔던 그는 주저 없이 이런 자신의 고민을 음악 속에 녹여내는 작업을 했다. 흑인 빈곤문제, 실업, 월남전등, 70년대 초 그의 눈에 보인 흑인의 현실은 ‘참담함’이었다. 핑크빛 미래를 노래했던 발랄한 60년대의 흑인 음악은 슬라이& 페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 커티스 메이필드(Curtis Mayfield)등 기라성같은 흑인 뮤지션들에 의해 한층 진지하고 어두워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내놓은 것이 컨셉 앨범 < What’s going on >(1971)이었다. 흑인 음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내놓은 컨셉 앨범 < What’s going on >은 회사 측에 우려에도 불구, 앨범 수록 곡 중 무려 4곡(What’s going on, God is love, Mercy, mercy, me Inner city blues)이 Top 10에 진입하는 성과를 거뒀고, 앨범은 지금까지 8백만장이라는, 당시로선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스트링을 동원한 세련된 연주 편곡, 참회록을 쓰듯 스토리 텔링(Storytelling) 방식으로 진행되는 진솔한 자기 고백은 당시 소울음악에선 맛볼 수 없었던 신선한 충격이었다. 앨범 < What’s going on >은 그의 음악 경력에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이 때부터 그의 음악성에도 뚜렷한 변화가 감지된다. ’Inner city blues’(1971)에서 목격했던 퍼커션의 가열 찬 울림은 70년대 흑인 음악의 대표 트렌드인 ‘펑키 사운드’로의 변화를 예고했고, 앨범으로는 발표 안 된 저주받은 싱글 ‘You ’re the man pt. 1, 2’(1972)에선 가성, 두성, 진성 등 한층 다채로워진 그의 보컬 연기가 압권이다. 재즈에 대한 평소의 관심은 영화 음악 작곡으로도 이어져 노래보다 연주 쪽에 관심이 반영된 영화음악 앨범 < Trouble man >(1972)으로 이어진다. < What’s going on >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 그는 이전의 고뇌하는 흑인 지성임을 포기하고 이번엔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사랑의 전령사로 변신한다. 그의 두 번째 넘버원을 안겨다 준 앨범< Let’s get it on >(1973)은 ‘성 행위’를 찬미하는 노래들로 가득 찬 앨범으로 주변을 다시 한번 어리둥절하게 했다. 빌보드 No.1 곡인 ‘Let’s get it on’은 그를 단번에 섹시 스타로 변모시켰고, 그가 앨범에서 얘기했던 ’자연스러운 성의 표현 ‘은 80년대 들어 프린스나 조지 마이클같은 팝 스타들의 음악 세계로 계승된다. 하지만 그는 당시 첫 아내였던 안나와의 관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재니스라는 여인과 이미 두 집 살림을 차려 아이까지 낳았던 그의 성적 편력은 결국 아내와의 별거로 이어졌고, 한동안 그 충격에 슬럼프에 빠져 마약으로 세월을 보내게 된다. 재기의 몸부림을 친 그는 베리 고디의 주선으로 만난 레온 웨어(Leon Ware)의 곡으로 채워진 앨범 < I want you >(1976)을 발표하지만, 수록곡 ‘I want you’, ’After the dance’가 약간 주목을 받았을 뿐이었다. 히트곡에 목말라하던 그는 1977년 런던 팔라디움 구장에서의 콘서트 더블 실황 앨범< Live at the Palladium >을 발표하며, 13분이 넘는 디스코 곡 ‘Got to give up’을 수록하고, 4분대의 싱글로도 커팅, 그의 세 번째 넘버 원 싱글로 등극된다. 전형적인 댄스뮤직이었던 ’Got to give up’은 팝 차트, 앨 앤 비 차트 1위를 석권하며 그에게 가수로서 회생의 길을 열어준다. 하지만 ‘Got to give up’의 기쁨도 잠시, 결국 그는 안나와 이혼을 하게 되고 ,이혼에 대한 위자료를 다음에 발표하는 앨범 인세로 한다는 합의를 보게 된다. 앨범 < Here, my dear >(1978)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고 수록 곡 ’When did you stop loving me, When did I stop loving you’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만남과 해어짐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그의 뼈저린 고해성사는 아름다운 가사말과 편곡의 세련됨에도 불구, 이렇다할 히트 싱글 없이 앨범은 파묻히며 그의 디스코그래피 중 가장 안 알려진 앨범이 되고 말았다.(엎친데 덮친격으로 안나는 앨범 내용이 사생활 침해라며 소송을 걸기에 이른다.) 첫 번째 아내와의 이혼에 이어 다시 몇 년간은 그에게 혼란의 시기였다. 두 번째 아내였던 제니스와 급기야 파경에 이르렀고, < Love Man >(1979-발매 취소)과 < In our life time >(1981)의 흥행실패는 그를 더욱 마약으로 치닫게 했다. 급기야 그는 1981년 20년간 그에게 산전수전(?) 다 겪게 했던 모타운 사를 떠나, 하와이로 이주, 새로운 출발을 모색한다. 정확히 1년 후인 1982년, CBS 레코드와 전속 계약하며 그에겐 마지막 걸작으로 남게 된 < Midnight Love >(1982)를 발표한다. ‘Let’s get it on’에 버금갈만한 농염한 보컬이 인상적인 싱글 ‘Sexual healing’이 팝 차트 3위까지 오르며 그는 화려하게 재기한다. 공백기 동안대중들과의 소원함을 해소하기 위해 TV 출연 등 다시 활발한 활동을 벌인 그는 베리 고디와 함께 토크쇼에 출연해 둘의 악연(?)을 만회해보려고도 했고, NBA 농구 경기때 미국 국가를 소울 창법으로 불러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지미 헨드릭스가 우드스탁에서 연주했을 때 이후로 최대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재기 의지는 이내 사그러들고 있었다. 이미 코케인에 찌들 때로 찌든 그의 몸은 말을 듣질 않았고 평소에 사이가 안 좋았던 목사인 아버지와의 관계는 조금도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비극은 그의 아버지와의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되고, 1984년 4월, 그의 45회 생일을 하루 앞둔 날, 심한 다툼 끝에 화를 가누지 못한 아버지가 쏜 총에 맞아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그의 어이없는 죽음은 충격적이었다. 많은 흑인 뮤지션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이듬해인 1985년 모타운사와 CBS가 공동으로 그의 미 발표곡을 모은 < Dream of a life time >과 < Romantically Yours >를 내놓는다. 그에 대한 재평가도 활발히 이뤄져 < 롤링스톤 >을 비롯한 록 전문지들은 앞 다투어 그의 앨범 < What’s going on >을 팝 역사에 남을 명반으로 추대하기 시작했고,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그의 이름이 등재된다.
밴드 : Adam and the Ants (아담 앤 디 앤츠 (팝락 밴드))
밴드 : A Flock of Seagulls (플록 오브 시걸스)
1990년대 중반 드루 베리모어와 아담 샌들러가 주연한 < 웨딩 싱어 >는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영화 종반부에 비행기를 타고 떠난 드루 베리모어를 찾기 위해 아담 샌들러는 공항으로 간다. 특이한 헤어스타일에 원색의 옷을 입은 뚱뚱한 항공사 직원은 표를 구입한 아담에게 묻는다. “어 플록 오브 시걸스 좋아하세요?” 영국의 리버풀 출신으로 비틀즈의 동향 후배인 뉴웨이브 밴드 ‘어 플록 오... 1990년대 중반 드루 베리모어와 아담 샌들러가 주연한 < 웨딩 싱어 >는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영화 종반부에 비행기를 타고 떠난 드루 베리모어를 찾기 위해 아담 샌들러는 공항으로 간다. 특이한 헤어스타일에 원색의 옷을 입은 뚱뚱한 항공사 직원은 표를 구입한 아담에게 묻는다. “어 플록 오브 시걸스 좋아하세요?” 영국의 리버풀 출신으로 비틀즈의 동향 후배인 뉴웨이브 밴드 ‘어 플록 오브 시걸스(A Flock Of Seagulls)는 1980년에 전열을 정비했다. 베이스에 프랭크 머드슬리(Frank Maudsley), 기타는 폴 레이놀즈(Paul Reynolds), 보컬과 기타엔 마이크 스코어(Mike Score), 그리고 드럼엔 그의 동생 알리 스코어(Ali Score)의 구성원들 중에서 프랭크와 밴드 리더인 마이크가 전직 헤어드레서 출신이기 때문에 이들의 머리 모양은 매우 독특했으며 의상도 원색의 화려한 옷을 고집했다. 영화에 나온 그 항공사 직원은 바로 ‘어 플록 오브 시걸스’ 그 자체였으며 영화에서 이 밴드에 대한 언급을 삽입함으로써 1980년대 분위기를 훌륭하게 살려냈다. 이들은 1981년 데뷔앨범을 발표해 언더그라운드에서 주목을 받았고 이듬해에 나온 2번째 음반 < A Flock Of Seagulls >부터 자신들의 음악 방향타를 정확하게 설정한 4인조는 싱글 차트 9위까지 오르며 뉴웨이브의 고전으로 자리를 굳힌 ‘I ran(So far away)’와 연주곡 ‘D.N.A.’, 그리고 현재 CBS FM에서 오후 2시에 방송되는 ‘FM 팝스’의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되는 ‘Space age love song’(1983년 싱글차트 30위)과 같은 곡들이 MTV의 막강한 지원에 힘입어 인기가 상승했다. 대부분의 뉴웨이브 밴드들은 연주 음악을 하지 않았지만 ‘4마리의 갈매기들’은 수준 급의 연주를 했기 때문에 ’D.N.A.’로 그래미 최우수 록부문 연주곡 상을 수상했다. 1983년에 나온 < Listen >에서는 ‘Wishing(If I had a photograph of you)’가 싱글차트 26위에 올랐고 연이어 나온 < The Story Of A Young Heart >에서는 ‘The more you live, The more you love’만 56위를 차지하는 부진을 보이자 약간의 멤버 교체가 있었다. 폴 레이놀즈 대신 기타리스트로 임명장을 수여 받은 게리 스테드닌(Gary Steadnin)이 새로운 키보디스트 크리스 크라이사피스(Chris Chryssaphis)와 함께 입성했다. 새로운 식구와 함께 한 5번째 앨범 < Dream Come True >를 1986년에 공개했지만 이 음반으로 혹독한 침체기를 겪고나서 곧 밴드를 해체했지만 1989년 다시 재 결성해서 1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꾸준하게 공연 위주의 활동을 하고 있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연속적으로 나온 3장의 앨범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대중의 인기와 반비례했다는 것은 그만큼 대중 음악에 대한 청취자들의 기호가 급속히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4장의 음반은 음악적인 면이나 사운드적인 면에서 별다른 차이점이 없었지만 어 플록 오브 시걸스는 불과 4년 사이에 천당과 지옥을 경험했다. 변덕스런 유행에 의해 희생된 또 하나의 제물 밴드다.
멤버 : Ricky Ross, James Prime, Lorraine McIntosh, Dougie Vipond, Gregor Philp, Lewis Gordon 멤버 : Ricky Ross, James Prime, Lorraine McIntosh, Dougie Vipond, Gregor Philp, Lewis Gordon
멤버 : Patsy Kensit, Jamie Kensit, Steve Grantley, Geoff Beauchamp, Jake Walters Lawrence Lewis 멤버 : Patsy Kensit, Jamie Kensit, Steve Grantley, Geoff Beauchamp, Jake Walters Lawrence Lewis
밴드 : Miami Sound Machine (마이애미 사운드 머신)
멤버 : 글로리아 에스테판(Gloria Estefan, 보컬), 에밀리오 에스테판 주니어(Emilio Estefan Jr., 프로듀서), 웨슬리 라이트(Wesley B. Wright, 기타), 멀시 나바로 머시아노(Merci Navarro Murciano), 주안 마코스 아빌라(Juan Marcos Avila) 멤버 : 글로리아 에스테판(Gloria Estefan, 보컬), 에밀리오 에스테판 주니어(Emilio Estefan Jr., 프로듀서), 웨슬리 라이트(Wesley B. Wright, 기타), 멀시 나바로 머시아노(Merci Navarro Murciano), 주안 마코스 아빌라(Juan Marcos Avila)
세션 맨들로 구성되어 화제를 뿌렸던 토토는 그 탄탄한 연주 실력과 고혹적인 팝 감수성으로 1980년대를 풍미했던 그룹이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전개되는 엄밀한 곡 구성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수많은 뮤지션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열렬한 추종자들을 양산해냈다. 전성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룹의 양대 산맥 스티브 루카서와 고(故) 제프 포카로는 전문 연주인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추앙을 받고 있으며, 그들의 초, 중반기 레퍼토... 세션 맨들로 구성되어 화제를 뿌렸던 토토는 그 탄탄한 연주 실력과 고혹적인 팝 감수성으로 1980년대를 풍미했던 그룹이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전개되는 엄밀한 곡 구성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수많은 뮤지션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열렬한 추종자들을 양산해냈다. 전성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룹의 양대 산맥 스티브 루카서와 고(故) 제프 포카로는 전문 연주인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추앙을 받고 있으며, 그들의 초, 중반기 레퍼토리들은 꾸준히 라디오 전파를 타고 있다. 1970년대 제프 포카로와 스티브 루카서의 고등학교 밴드로 출발한 토토는 그 개개인의 출중한 기량으로 1970년대 후반 이미 스타들의 세션을 도맡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팀이 완전히 정비된 후 발표한 대망의 데뷔 앨범 < Toto >는 밀리언셀러로 부상했으며, 재즈와 록이 정교하게 교직된 독특한 사운드로 마니아들을 사로잡았다. 여기에는 국내에서도 자주 리퀘스트를 받는 ‘George porgy’, ‘Hold the line’등이 실려 있다. 토토는 < Hydra >와 < Turn Back >를 계속해서 내놓으며 특급 아티스트의 길로 접어들기 위한 기반을 마련한다. 비록 1집에 비해 판매고는 저조했으나 곡들은 한층 세련되고 연주는 엄격해져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를 갖게끔 만들기에 충분했다. 3장의 음반으로 비행을 시작한 토토는 1982년에 공개한 4집 < Toto Ⅳ >로 모든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이 된다. 빌보드 정상을 밟은 ‘Africa’, 2위에 오른 ‘Rosanna’등 차트를 맹폭한 히트곡들이 터져 나왔으며 그래미는 < 올해의 앨범 >을 포함한 장장 7개 부문의 상을 < Toto Ⅳ >에 안겨주며 1982년을 토토의 해로 선포했다. 멀티 플래티넘을 따낸 이 음반에서 토토는 예측불허의 변박과 고난이도의 테크닉이 난무하던 기존의 현란함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도 거기에 듣기 좋은 멜로디를 부가해 골수 팬들과 팝 키드들을 동시에 포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엄청난 성공 뒤에 토토는 데이빗 헝게이트와 바비 킴볼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으며 5집 < Isolation >을 발표했다. 그러나 새로 영입된 퍼지 프레데릭슨(Fergie Frederiksen)의 보컬은 킴볼을 따라갈 수 없음이 입증되었고 전전긍긍하던 팀원들은 조셉 윌리엄스(Joseph Williams)를 < Fahrenheit >에서 대타로 기용했다. 고품격 발라드의 비중이 높아진 이 앨범은 ‘Lea’, ‘I’ll be over you’등의 히트곡을 배출하며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에도 키보디스트 스티브가 떨어져 나가는 등 멤버 교체와 탈퇴의 악순환을 계속 경험하던 토토는 1992년 팀의 중핵 제프 포카로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면서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당대 최고의 드러머 중 하나로 평가받던 그의 요절은 많은 팬들에게 아쉬움과 슬픔을 안겼다. 토토의 통산 여덟 번째 작품인 < Kingdom Of Desire >는 ‘Only you’라는 매혹적인 곡을 남긴 채 제프의 마지막 레코딩으로 기록되었다. 마이클 셍커 그룹(Michael Schenker Group >을 거친 1급 레벨의 록 드러머 사이먼 필립스(Simon Phillips)의 가세로 힘을 얻은 토토는 1999년 오리지널 멤버 바비 킴볼이 보컬리스트로 재가입해 또 한번의 비상을 노리고 있다. 멤버들 중 스티브 루카서는 재즈 기타의 도인 래리 칼튼과 공동 투어를 나서는 등 특히 두드러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1996년 있었던 토토의 내한 공연은 국내에서 있었던 최고의 공연 중 하나로 회자된다. 그들은 라이브와 스튜디오 앨범에서 모두 사람들을 만족시켜 왔으며, 결성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 팀웍과 기량으로 사랑 받고 있다. 가수의 뒤에서 연주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세션 맨에서 토토는 당당히 무대 중앙으로 진출했었고, 이제는 자신들의 경륜을 하나하나 쌓아가고 있다.
밴드 : Stone Roses (스톤 로지스 (락 밴드))
"이 추악한 뮤직 비즈니스 계에서 10년간을 보내고 스톤 로지스의 종언을 고하게 돼서 무척 기쁘다." 이 뼈있는 코멘트를 끝으로 ’매드체스터’ 스톤 로지스는 1996년 10월 맨체스터의 공장 연기로 화했다. 그들은 서바이벌 전장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음악 산업의 현장에서 음악의 순수성(인디 정신)을 지키며 기쁨과 환희를 제공했으며, 그것을 고이 간직한 채 돌로 굳어졌다. 1989년에 발표한 데뷔 음반 < The ... "이 추악한 뮤직 비즈니스 계에서 10년간을 보내고 스톤 로지스의 종언을 고하게 돼서 무척 기쁘다." 이 뼈있는 코멘트를 끝으로 ’매드체스터’ 스톤 로지스는 1996년 10월 맨체스터의 공장 연기로 화했다. 그들은 서바이벌 전장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음악 산업의 현장에서 음악의 순수성(인디 정신)을 지키며 기쁨과 환희를 제공했으며, 그것을 고이 간직한 채 돌로 굳어졌다. 1989년에 발표한 데뷔 음반 < The Stone Roses >로 스톤 로지스는 록음악으로도 몸을 흔들 수 있다는 맨체스터 사운드(록과 댄스의 결합)의 공식을 성립했고, 1990년대 영국 전역을 휩쓴 브릿 팝의 출현에 결정적 단초를 제공했다. 스톤 로지스의 출발은 폴 웰러(Paul Weller)가 이끌었던 잼(Jam)의 영향을 받은 그룹 잉글리시 로즈(English Rose)로부터 시작된다. 1980년대 초반 잉글리시 로즈에서 활동하던 보컬리스트 이언 브라운(Ian Brown)과 기타리스트 존 스콰이어(John Squire)는 새로운 밴드를 결성하기로 마음먹고, 베이시스트 게리 "매니" 마운필드(Gary "Mani" Mounfield)와 드러머 앨런 "레니" 렌(Alan "Reni" Wren)과 함께 1985년 스톤 로지스를 만들었다(이미 약간의 멤버 변화를 겪은 후였다). 잉글리시 로즈와 밴드가 좋아하는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의 이름을 조합하여 그룹명을 지었다. 1989년 데뷔작이 나오기까지 스톤로지스는 철저히 언더그라운드 클럽에서 긴 시간을 여행했다. 그들은 ’So young’, ’Tell me’, ’Sally Cinnamon’ 같은 싱글들을 내놓으며 맨체스터의 유명 클럽 ’하시엔다’를 중심으로 추종자들을 몰고 다녔다. 그들은 영국 전통의 기타 팝 사운드에 애시드 하우스의 댄스 비트를 가미시켜 ’’댄스 록’’의 모범을 제시했다. 음악의 중심은 기타에 두면서도 댄서블한 느낌을 강조했다. 같은 맨체스터 사운드의 선구자 해피 먼데이스(Happy Mondays)가 약물에 의존하여 환각적인 모습을 부각시킨 반면, 스톤 로지스는 오직 ’사운드’로 사이키델릭적인 요소를 내보였다. 이러한 모든 것이 바로 1989년 앨범 < The Stone Roses >에 모두 녹아있다. 매드체스터의 위대한 찬가 ’I wanna be adored’를 비롯해, ’Made of stone’, ’She bangs the drums’ 같은 명곡들이 증명한다. 음반은 발표되자마자 영국 언론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걸작’ 반열에 올랐고, 영국 음악의 희망으로 추켜세워졌다. 스톤 로지스 최고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또한 종착역으로 가는 트랜스퍼 지점이기도 했다. 이후 밴드는 소속 레이블 < 실버톤(Silvertone) >과 로열티 문제를 놓고 5년 동안의 지루한 법정공방을 벌여야만 했고, 후속 앨범의 작업은 멀어져만 갔다. 아마 이 때문에 멤버들은 음반 산업의 횡포와 추악함에 대해 절실히 깨닫게 되었던 것 같다. 결국 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한 그룹은 메이저 레이블 < 게펜(Geffen) >으로 둥지를 새롭게 틀고 1994년 두 번째 음반 < Second Coming >을 내놓았다. 하지만 앨범은 뛰어난 음악성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스톤 로지스는 해산절차에 들어갔다. 먼저 드러머 앨런 렌이 떠나갔고, 사운드 메이커 존 스콰이어도 탈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1996년 10월, 그들은 사라졌다. 이후 베이시스트 매니는 프라이멀 스크림(Primal Scream)으로 직행했고, 존 스콰이어는 시호지스(Seahorses)를 조직해 1997년 < Do It Yourself >를 발표했다. 이언 브라운 역시 1998년 < Unfinished Monkey Business >, 2000년 < Golden Greats >를 내놓으며 또 다시 추악한 뮤직 비즈니스 계에서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음반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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