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물 먹고 숨을 쉰다’라는 부제가 붙은 1부와 ‘세상 가장 낮은 말씀이시라’라는 부제가 붙은 5부에서 그는 자연을 보듯 저를 보는 일에 발동을 걸고 있다. 이때의 ‘저’란 다름 아닌 시일 것인데 그는 시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를 살기 위해 내내 헤매는 형국이다. “모든 노래가 한낮 그늘인/ 지금은 사라져 다시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뻥이라고 했다」) 그 시를 찾기 위해 그는 미친 듯이 떠들어보기도 하고 ‘묵언’을 일삼기도 하며 ‘채근담을 읽’기도 하고 ‘동치미’를 퍼마시기도 한다.
그가 찾으려는 시는 어디에 있을까. 그가 찾으려는 시는 어떤 소리를 낼까. 그는 끝끝내 ‘시가 내게로 안 왔다’고 하지만 시를 찾아 헤매는 그 과정 속에서 그가 보고 들은 자연의 여실함은 시이면서도 시 아닌 양 툭툭 무심히도 던져져 있다. 그 증거들로 우리는 “이빨 물고 깨어 있는 서리꽃을 밟”듯 앞서가는 그의 뒤를 좇으며 내 삶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공유하게 된다. 그래, “나무는 원래 눈물이 많은 동물이었다”(「눈꽃」)라는 진심은 비단 나무에게만 바치는 헌사는 아니리라.
‘내 아이는 어디 출신인가’라는 부제가 붙은 2부에서 그는 삶에 있어 그 어떤 ‘고(苦)’의 증거들을 어머니와 아버지와 동생들과 친구의 일화들을 통해 확인시키고 있다. 특히나 “어깨가 아프다고 드라이버 대가리로 문질러달라고”(「거머리」) 하는 아내, 그 아내가 “흰머리를 뽑아 일기장 위에 쌓아놓고 출근을”(「선풍기」) 한 대목에서 자신을 ‘벌레’로 지칭하며 제 살아옴의 시간들을 반추하고도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이룬 거 없이 늙어버”(「거머리」)린 그에게 가장 큰 두려움과 떨림의 존재는 아마도 딸아이인 듯싶다. 시집 제목이 된 구절이 스미어 있기도 한 「시골 쥐」를 보면 서울 변두리에 사는 딸아이가, “몇 겹을 덮어도 냉골”인 방에서 “인턴을 위해 인턴을” 다니는 딸아이가 “서울은 왜 이렇게 추운 겨” 하고 제 아버지 앞에서만은 사투리를 숨기지 않는 대목에서 우리 역시 그들 부녀처럼 “애꿎은 소주병”만 절로 찾게도 되는 형국이니 말이다.
‘힘들 때만 쓴다’라는 부제가 붙은 3부에서 그는 제가 만나온 사람들, 이웃이라 말할 수 있는 우정 어린 사람들의 인생사를 줄기차게 담아내고 있다. 살아 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죽어 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찐득찐득한 눈물과 간질간질한 웃음이 반에 반씩 교차되어 있는 터라 그 자체로 ‘생’의 비유가 되어주는 한 부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 삶과 죽음은 영원한 단절이 아니며 이 둘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시인이 몸소 실천해 보이는 과정 속에 아름다움이 만져진다. 예컨대 이런 대목이랄까. “시 빼놓고는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는 영근이 형이 결국 의식불명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추 씨를 뿌렸다// 병원비가 무서워서(그것보다는 병원은 아예 관심 밖이었을 거라) 병원 문턱 한번 제대로 밟아본 적 없는 시인들의 생활에 대해 화를 낼 수도 없어 땅을 파고 쑥갓 씨를 뿌렸다” 이렇게 그는 누군가의 죽음을 두고 호박도 심고 가지도 심고 고추모종도 심는 사람, 그렇게 세상을 연둣빛으로 순환하게 하는 시인.
‘거기까지 갔다 왔다’라는 부제가 붙은 4부는 비유컨대 아무리 껴입어도 해소가 안 되는, 우리 현대사의 ‘추위’라 할 수 있는 온갖 사건 사고들 앞에 분노하고 있는 시인 유용주의 맨 얼굴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그뿐이랴. 우리 현대사를 그 어떤 겉옷 없이 맨몸으로 통과해야 했을 시인 유용주의 맨주먹이 고스란히 뻗쳐 있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끝도 없이 자문한다. “이것이 인간인가” 그는 덧붙인다. “사람이 짐승보다 무서웠다// 인간관계를 끊었다// 비로소 숨통이 트인다/ 비로소 사람이 짐승으로 보인다”고.
그런 가운데 시인은 2014년 4월 16일 이후 제 자신을 ‘개보다 못한 시인’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세상 모두가 잠든 한밤중/ 하느님 뒤척이며 침 흘리는 순간에도 어김없이 짖는”(「개보다 못한 시인」) 개새끼처럼 제 자신이 처절하게 깨어 있지 못하다고 느낀 탓이다. 시인은 그날 이후 소리 없이 세월호를 살아냈다.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을 거다. 시인의 눈이 그 자체로 시를 긁는 갈퀴인데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제 앞에 도통 설명 불가한 세월호가 매 순간 둥둥 떠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는 “거기까지 갔다 왔”으나 “세월호 얘기는 함부로 하지 말자”(「평범한 악」)고 말한다. 죽어도 죽지 못하는 삶, 죽어도 살지 못하는 삶, 그 삶의 도통 알 수 없음에 대해서는 보다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 기인한 듯하다. 그가 찾으려고 했던 시, 그가 살아내려 한 삶, 대체 그는 무얼 얻으려 이 한 권의 시집 속에 제 헤맴을 부끄럼도 없이 그대로 쏟아냈을까.
“농부만큼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손해나는 장사를 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질 줄 알면서도 싸우는 선수가 어디 있겠습니까”(「당신의 참말-노무현 대통령 추모시」)라는 대목에서 감히 정답을 찾은 듯도 하다. 그렇지, 그 ‘사람’.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는 일, 결국 그것이 유용주 시인이 평생 몸이 되려 했던 시와 삶의 평생 숙원이 아니려나.
시인의 말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대참사가 일어났습니다.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왜 구조하지 못했나, 자문하기 바빴습니다. 아프게 물어본 거죠. 1980년 5월을 떠올리고도 살아 있는 제가 말입니다. 억울하게 죽어간 아이들을 생각하며 유가족들과 함께 있는 힘껏 외쳤습니다. 죽어도 잊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다큐 영화를 봤고, 시청 앞에서 낭송을 했으며, 순례길에 동참해 53일간 해안선을 따라 걷기도 했고, 광화문에서 단식(내 인생을 세 토막으로 나눈다면 전반기는 굶주림의 연속이었다)도 했습니다. 뒤늦게 팽목항과 목포 신부두에 가봤으며 여러 번 촛불을 켜고 얼마 안 되는 돈도 내놨습니다. 남도는 황량했으며 바람은 남쪽으로 쉼 없이 불었습니다. 헤엄을 쳐 인천에서 제주까지 갈까(친구와 상의했으나 돈이 많이 들어간다 하여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제주도 사는 시인이 제일 반대했다는데 아마 그는 대한해협의 높은 파도를 걱정했을 겁니다.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데……), 바닷가에 조형물을 설치할까, 별생각을 다 했습니다. 그러면 뭐합니까? 아이들이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데요. 아이를 둔 아빠의 마음으로 썼습니다. ‘아이들’에게 평생 ‘빚진 어른’임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2018년 4월
유용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