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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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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윤동주, 백석, 정지용, 박인환, 김소월 저 외 15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저녁달고양이 | 2018년 05월 15일 리뷰 총점9.6 정보 더 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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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8년 05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112쪽 | 122g | 110*170*20mm
ISBN13 9791196324322
ISBN10 1196324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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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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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20명)

일제강점기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일제 강점기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노래한 민족시인. 우리 것이 탄압받던 시기에 우리말과 우리글로 시를 썼다. 윤동주는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 실을 가슴 아파하는 철인이었다. 그의 사상은 짧은 시 속에 반영되어 있다.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윤영석과... 일제강점기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일제 강점기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노래한 민족시인. 우리 것이 탄압받던 시기에 우리말과 우리글로 시를 썼다. 윤동주는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 실을 가슴 아파하는 철인이었다. 그의 사상은 짧은 시 속에 반영되어 있다.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윤영석과 김룡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윤동주는 청춘 시인이다. 절친한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의 시 ‘동주야’에 의하면 아직 새파란 젊은이로 기억되고 있었다. 한글을 구사하면서 작품을 발표한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만주 용정과 경성 신촌 일대에서 문학청년들과 몸을 부대끼며 시를 썼기에 청춘의 고뇌가 담겨 있다. 1925년(9세) 4월 4일, 명동 소학교에 입학했다. 1927년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 [새 명동]을 발간했다. 1931년(15세)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16세)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1934년(18세) 12월 24일, 「삶과 죽음」, 「초한대」, 「내일은 없다」 등 3편의 시 작품을 썼고 이는 오늘 날 찾을 수 있는 윤동주 최초의 작품이다. 1935년(19세)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로 편입했다. 같은 해 평양 숭실중학교 문예지 [숭실활천]에서 시 ‘공상’이 인쇄화되었다. 1936년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숭실학교를 자퇴하고 [카톨릭 소년]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를, 1937년 [카톨릭 소년]에 동시 「오줌싸개 지도」, 「무얼 먹고 사나」, 「거짓부리」를 발표했다. 1938년(22세)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문과에 입학했고 1939년 조선일보에 「유언」, 「아우의 인상화」, [소년(少年)]지에 「산울림」을 발표하였다. 처음 윤동주 시들은 노트에 봉인된 채, 인쇄되지도 않았고 신문 지면에 발표되지 않았다. 그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지고 난 후 동문들이 그의 노트에 있던 시를 모아 정음사에서 출판한다. 유해가 안치된 지 3년 후, 그러니까 1948년, 조선은 대한민국으로 국호가 바뀌어 혼란한 시기에 청춘 시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광복 후에 정병욱과 윤일주에 의하여 다른 유고와 함께「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만주 북간도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에 「달을 쏘다」, 「자화상」, 「쉽게 씌어진 시」를 발표하였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6개월 후에 교토 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복역 중이던 1945년 2월 16일 광복을 여섯 달 앞두고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였다.
저 : 백석 (BAEK SEOK,白石,白奭,백기행)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본명 백기행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식교육을 받았다. 필명은 백석(白石)과 백석(白奭)이 있었는데 주로 백석(白石)을 많이 사용하였다.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좋아하여 그의 이름 중 석을 택해서 썼다. 오산고보 재학 중 백석은 부친을 닮아 성격이 차분했으며 친...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본명 백기행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식교육을 받았다. 필명은 백석(白石)과 백석(白奭)이 있었는데 주로 백석(白石)을 많이 사용하였다.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좋아하여 그의 이름 중 석을 택해서 썼다. 오산고보 재학 중 백석은 부친을 닮아 성격이 차분했으며 친구가 없었다. 1936년 시집 ‘사슴’을 경성문화 인쇄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찍었다. 윤동주는 백석 시집을 구할 수 없어 노트에 시를 필사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해방 전 천재 시인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오산소학교, 오산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오산고보 졸업 후, 조선일보가 후원하는 춘해장학회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학과에 입학하였다. 김소월을 동경하면서 시인의 꿈을 키웠으며,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1934년에 귀국하여 8·15 광복이 될 때까지 [조선일보],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영어교사로, [여성사], [왕문사] 등에서 근무하며 시작 활동을 했다. 1935년 [조광] 창간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시작 활동 외에도 많은 외서들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였으며 같은 해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하였다. 1939년 [여성]지 편집 주간 일을 사직하고 고향인 평북 지역을 여행하였다. 1940년 만주의 신징(지금의 장춘)으로 가서 3월부터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말단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창씨개명의 압박이 계속되자 6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1942년 만주의 안둥 세관에서 일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신의주를 거쳐 고향인 정주로 돌아왔다.

1946년 북조선예술총동맹이 결성된 후 1947년 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 번역에 매진했다. 1949년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의 편집위원으로 위촉되었고 [아동문학]과 [조쏘문화] 편집위원을 맡으며 안정적인 창작활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57년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간행하였으나 1958년 ‘붉은 편지 사건’ 이후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면서 이후 창작과 번역 등 대부분의 문학적 활동을 중단했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국영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으면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고 농촌 체험을 담은 시들을 발표했으나, 1962년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 활동을 접었다. 1996년까지 삼수군 관평리에서 농사를 짓다가 사망했다는 내용이 드러났지만 정확한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수용하여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 백석은 일제 강점기에도 모국어를 지키고자 하였다. 시집으로 『사슴』(1936)이 있으며, 대표 작품으로 「여우난골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이 있다. 북한에서 나즘 히크메트의 시 외에도 푸슈킨, 레르몬토프, 이사콥스키, 니콜라이 티호노프, 드미트리 굴리아 등의 시를 옮겼다. 1936년에 펴낸 시집 『사슴』에 그의 시 대부분이 실려 있으며 수록된 시 「통영」, 「적막강산」, 「북방」 등 백석의 대표작들은 실향 의식을 바탕으로 서민들의 삶을 토속적인 언어로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한국의 대표 모더니즘 시인으로 평가받는 백석의 시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1902년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에서 태어났다. 옥천보통공립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일본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22년 고교생 때 첫 작품 풍랑몽을 발표하며 데뷔했다. 시문학, 구인회 등의 문학 동인과 가톨릭 청년, 문장 등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휘문고보 교원을 거쳐 해방 후에는 이화여전교수, 경향신문주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시 납북되어 사망했다고 알려졌... 1902년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에서 태어났다. 옥천보통공립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일본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22년 고교생 때 첫 작품 풍랑몽을 발표하며 데뷔했다. 시문학, 구인회 등의 문학 동인과 가톨릭 청년, 문장 등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휘문고보 교원을 거쳐 해방 후에는 이화여전교수, 경향신문주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시 납북되어 사망했다고 알려졌으나, 전쟁으로 인해 폭사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아직까지 정확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1926년 일본 유학중 「카페 프란스」 등 9편의 시를 발표하고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33년 9인회를 결성하고 [가톨릭청년]의 편집고문을 맡아 다수의 시와 산문을 발표하였으며, 시인 이상을 문단에 등단시키기도 하였다. 1935년 첫 시집인 『정지용 시집』을 출간하였으며, 1939년 [문장]의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이한직, 박남수 등을 등단시켰다. 1950년 한국전쟁이 뒤에 납북되어 사망하였다.

섬세하고 독특한 언어를 구사, 생생하고 선명한 대상 묘사에 특유의 빛을 발하는 시인 정지용. 한국현대시의 신경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이상을 비롯하여 조지훈, 박목월 등과 같은 청록파 시인들을 등장시키기도한 시인이었다. 1902년 음력 5월 15일 충북 옥천읍에서 좀 떨어진 구읍의 청석교 바로 옆 촌가에서 한약상을 경영하던 영일 정씨 태국(泰國)을 아버지로 하동정씨 미하(美河)를 어머니로 탄생한 그는 그 당시 풍습에 따라 12살 때(1913) 동갑의 부인 송재숙과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 처가에서 결혼하였다. 이 부인 사이에 3남 1녀가 태어났으며, 그 가운데 차남과 3남은 6.25사변중에 행방불명 되었고, 현재 장남 구관과 장녀 구원만 생존해 있다.

그는 휘문고보 재학 시절 [서광] 창간호에 소설 「삼인」을 발표하였으며, 일본 유학시절에느 대표작의 하나인 「향수」를 썼다. 1930년에 시문학 동인으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전개하였고, 구인회를 결성하기도 하였으며 문장지의 추천위원으로 활동했다. 해방이 되서는 경향신문의 주간으로 일하고, 이화여대와 서울대에 출강하여 시론, 수필, 평문을 발표하였다.
저 : 박인환 (Park In-hwan,朴寅煥,)
1926년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에서 출생했다. 인제공립보통학교 입학, 서울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 경기공립중학교 자퇴하고 한성중학교에 다니다 명신중학교 4학년에 편입, 평양 의학 전문학교를 다니다가 8·15 광복을 맞으면서 학업을 중단, 종로 2가 낙원동 입구에 서점 ‘마리서사(茉莉書舍)’를 개업했다.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시부가 주최한 ‘예술의 밤’에 참여하여 시 「단층」(... 1926년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에서 출생했다. 인제공립보통학교 입학, 서울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 경기공립중학교 자퇴하고 한성중학교에 다니다 명신중학교 4학년에 편입, 평양 의학 전문학교를 다니다가 8·15 광복을 맞으면서 학업을 중단, 종로 2가 낙원동 입구에 서점 ‘마리서사(茉莉書舍)’를 개업했다.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시부가 주최한 ‘예술의 밤’에 참여하여 시 「단층」(斷層)을 낭독하고, 이를 예술의 밤 낭독시집인 『순수시선』(1946)에 발표함으로써 등단했다. 1948년 김경린, 김경희, 김병욱, 임호권과 『신시론』 발간했다. 1949년 김경린, 김수영, 임호권, 양병식과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발간했으며, 동인그룹 김경린, 김규동, 김차영, 이봉래, 조향 등과 ‘후반기’를 발족하여 활동하였다. 「거리」「남품」「지하실」 등을 발표하는 한편 「아메리카 영화시론」을 비롯한 많은 영화평을 썼고, 1949년엔 김경린, 김수영 등과 함께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여 본격적인 모더니즘의 기수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50년 [경향신문] 입사 후 6·25 동란이 일어나자, 9·28 수복 때까지 지하생활을 하다가 가족과 함께 대구로 피난, 부산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했다. 1952년 존 스타인벡의 기행문 『소련의 내막』 번역해서 간행하였으며, 6월 16일「주간국제」의 ‘후반기 동인 문예’ 특집에 평론 발표했다. 1954년 유두연, 이봉래, 허백년, 김규동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 발족하였다. 1955년 시작품 『목마와 숙녀』(시작), 『박인환 시선집』, 『선시집』을 간행하였고 그 다음 해인 1956년에 시작품 「세월이 가면」 이진섭 작곡으로 널리 불리다 3월 20일 오후 9시 심장마비로 31세 젊은 나이에 자택에서 타계해 3월 22일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59년 3주기를 맞아 윌러 캐더의 장편소설 『이별』 번역해서 간행되었으며, 그가 사망한지 20년 후인 1976년에 시집 『목마와 숙녀』가 간행되었다.
혼란한 정국과 전쟁 등의 당대 상황에서 적지 않은 총 173편의 작품을 남기고 타계한 박인환 시인은, 암울한 시대의 절망과 실존적 허무를 피에로의 몸짓으로 대변한 당대의 정신적 제왕이자 모더니즘, 리얼리즘, 실존주의의 시세계를 구축하며 전후 문단의 지평을 넓힌 기린아였다. 전쟁의 충격에 함몰되지 않고 시인다운 세계 인식을 가지려 노력하며 자신이 살아가는 황폐한 시대를 새로운 시 형식으로 반영한 그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미학과 역사성이 결합하는 접점을 확인시켜 준다.
저 : 김소월 (金素月, 김정식)
1902년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에 있는 외가에서 부친 김성도와 모친 장경숙의 장자로 출생한다. 본명은 김정식이다. 태어난 지 백일 후부터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의 본가에서 자란다. 1904년 부친 김성도가 당시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를 하던 일본 목도꾼에게 폭행을 당한 이후 정신 이상 증세에 시달린다.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할아버지의 손에서 컸는데, 이 무렵 시인의 길로 가도록 영향을 준 숙모 계희영을 ... 1902년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에 있는 외가에서 부친 김성도와 모친 장경숙의 장자로 출생한다. 본명은 김정식이다. 태어난 지 백일 후부터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의 본가에서 자란다. 1904년 부친 김성도가 당시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를 하던 일본 목도꾼에게 폭행을 당한 이후 정신 이상 증세에 시달린다.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할아버지의 손에서 컸는데, 이 무렵 시인의 길로 가도록 영향을 준 숙모 계희영을 만났다. 1915년 평안북도 곽산의 4년제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김억과 사제관계를 맺게 되고 한시, 민요시, 서구시 등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다. 후에 경성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1923년 졸업했다. 이후 일본 도쿄 상과대학교에 입학 후 귀국했을 시점에 시인 나도향과 만나 친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별과 그리움을 주제로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을 노래하는 시를 썼다. 김소월은 자신의 문학적 스승인 김억의 격려를 받아 그의 지도 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등 5편을 소월(素月)이라는 필명으로 동인지 『창조』 5호에 처음으로 시 「그리워」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오산학교를 다니는 동안 김소월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21년 [동아일보]에 「봄밤」, 「풀 따기」 등을 발표했다. 1922년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를 개벽지에 발표하였으며, 1925년에 시론 「시혼(詩魂)」을 발표하고, 같은 해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을 발표하여 크게 각광받았다. 이는 시인이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으로 기록된다. 그 밖에 1923년 『깊고 깊은 언약』 『접동새』 1924년 『밭고랑 위에서』 『생과 사』 1926년 『봄』 『저녁』 『첫눈』 1934년 『제이, 엠, 에스』 『고향』 등을 발표했다.

1923년 도쿄상업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중퇴하고 귀국했다. 김소월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돕다가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어 1926년평안북도 구성군 남시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개설하고서 이도 실패하자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기도 했다. 예민한 성격이었던 김소월은 이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류머티즘을 앓으며 친척들에게도 대접을 받지 못하는 등 고생하다가 1934년 12월 24일 만 32세의 나이로 평안북도 곽산에서 아편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39년 스승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素月詩抄)』가 발간된다. 1977년 [문학사상] 11월호에 미발표 소월 자필 유고시 40여 편이 발굴, 게재된다.
한국의 시인. 황해도 장연 출생이다.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녀는 이화여전 재학때인 1932년에 시 「밤의 찬미」, 「포구의 밤」 등을 발표하였다. 그후 「눈 오는 밤」, 「망향」 등 주로 애틋한 향수를 노래한 시들을 발표했다. 널리 애송된 그의 대표작 「사슴」으로 인해 '사슴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독신으로 살았던 그의 시에는 주로 개인적인 고독과 슬... 한국의 시인. 황해도 장연 출생이다.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녀는 이화여전 재학때인 1932년에 시 「밤의 찬미」, 「포구의 밤」 등을 발표하였다. 그후 「눈 오는 밤」, 「망향」 등 주로 애틋한 향수를 노래한 시들을 발표했다. 널리 애송된 그의 대표작 「사슴」으로 인해 '사슴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독신으로 살았던 그의 시에는 주로 개인적인 고독과 슬픔의 정서가 부드럽게 표현되고 있으며, 전통 문화와 농촌의 정서가 어우러진 소박한 서정성, 현실에 초연한 비정치성이 특징이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중에 쓴 작품 중에는 「군신송」 등 전쟁을 찬양하고 전사자들을 칭송하는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1957년 12월 10일 유명을 달리 하였다.
시인, 영문학자, 대학 교수, 수필가, 번역문학가이다. 신문학 초창기에 등장한 신시의 선구자로서, 압축된 시구 속에 서정과 상징을 담은 기교를 보였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18년 [청춘]에 영시 「코스모스(Cosmos)」를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천재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부드럽고 정서적이어서 시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작품 기저에는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한 의도도 깔려 있었다. 대표작... 시인, 영문학자, 대학 교수, 수필가, 번역문학가이다. 신문학 초창기에 등장한 신시의 선구자로서, 압축된 시구 속에 서정과 상징을 담은 기교를 보였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18년 [청춘]에 영시 「코스모스(Cosmos)」를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천재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부드럽고 정서적이어서 시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작품 기저에는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한 의도도 깔려 있었다. 대표작으로 「논개」가 있다.
1934년 [시학] 동인의 한 사람으로 문단에 등장했다. 초기에는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파의 한 사람으로 시를 썼으나 곧 암흑과 불안, 절망을 노래하는 퇴폐적 시풍을 띠게 되었고 풍자적인 시를 썼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전통적정서에 대한 애착과 탐구를 시에 표현했다. 1934년 [시학] 동인의 한 사람으로 문단에 등장했다. 초기에는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파의 한 사람으로 시를 썼으나 곧 암흑과 불안, 절망을 노래하는 퇴폐적 시풍을 띠게 되었고 풍자적인 시를 썼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전통적정서에 대한 애착과 탐구를 시에 표현했다.
시인. 1937년 6월에 창간된 시 동인지 [시인춘추(詩人春秋)]와 1938년 6월 창간된 [맥]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시집의 자서(自序)에서 “인생이 예술을 낳는다.”는 자신의 문학관을 피력하였는데, 이는 바로 이해문의 시적 기조가 되기도 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자연스런 유로(流露), 곧 감상과 낭만성이 이해문의 시적 특색이다. 시인. 1937년 6월에 창간된 시 동인지 [시인춘추(詩人春秋)]와 1938년 6월 창간된 [맥]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시집의 자서(自序)에서 “인생이 예술을 낳는다.”는 자신의 문학관을 피력하였는데, 이는 바로 이해문의 시적 기조가 되기도 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자연스런 유로(流露), 곧 감상과 낭만성이 이해문의 시적 특색이다.
저 : 이상화 (상화尙火, 무량無量, 상화想華, 백아白啞)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역사를 바로 꿰뚫어보는 가운데 치열한 시대 정신과 따뜻한 휴머니즘 정신을 아름다운 예술 혼으로 승화시킨 민족 시인이자 저항 시인. 1901년 4월 5일(음력) 대구시 중구 서문로 2가 1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한문 수학 후 상경하여 중앙학교에 입학, 1918년 3월 25일에 수료하고, 그 해 7월 서문로 집을 나서 강원도 일대를 방랑하다 1919년 대구에서 3·1운동 ...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역사를 바로 꿰뚫어보는 가운데 치열한 시대 정신과 따뜻한 휴머니즘 정신을 아름다운 예술 혼으로 승화시킨 민족 시인이자 저항 시인.

1901년 4월 5일(음력) 대구시 중구 서문로 2가 1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한문 수학 후 상경하여 중앙학교에 입학, 1918년 3월 25일에 수료하고, 그 해 7월 서문로 집을 나서 강원도 일대를 방랑하다 1919년 대구에서 3·1운동 거사 모임에 참석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서울 냉동 박태원의 하숙으로 피신하였다. 1922년 현진건의 소개로 월탄 박종화와 만나 [백조(白潮)] 동인으로 문단에 참여하기 시작, 창간호에 시「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등을 발표하였다. 이후 도일하여 아테네 프랑세에 입학, 1923년 3월 아테네 프랑세를 수료하였으나, 9월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에서 본 일본인의 조선인 학살에 분노하여 귀국했다. 가회동 이른바 취운정(翠雲亭)에 머물면서 시 「나의 침실로」를 [백조] 3호에 발표, 1925년엔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다음해인 1926년, [개벽] 70호에 그의 대표작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했지만 이 시의 게재로 [개벽]지는 판매 금치 처분을 당했다. 작품활동 초기에는 탐미적 경향의 시를 썼으나 이 시기를 고비로 식민치하의 민족 현실을 바탕으로 한 저항 정신과 향토적 세계를 노래하였다. 이후 심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창작의 끈을 놓지 않다가, 1943년 4월 25일 오전 8시 45분, 계산동 2가 84번지 고택에서 부인과 세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숙환으로 운명하였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지 5년째 되는 1948년에, 해방 후 최초의 시비가 달성공원에 건립되었다.
저 : 노자영 (盧子泳, 춘성春城)
시인 · 수필가. 호는 춘성(春城). 1898년 평남(황해도 송화군 상리면 양지리)에서 출생하였으며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한성도서주식회사(漢城圖書株式會社)에 입사했으며, 1925년경 일본으로 넘어가서 니혼대학[日本大學]에서 수학하였으나 폐 질환으로 학업을 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해 병상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서울]·[학생]지의 기자로 있으면서 감상문 등을 발표했으며, 19... 시인 · 수필가. 호는 춘성(春城). 1898년 평남(황해도 송화군 상리면 양지리)에서 출생하였으며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한성도서주식회사(漢城圖書株式會社)에 입사했으며, 1925년경 일본으로 넘어가서 니혼대학[日本大學]에서 수학하였으나 폐 질환으로 학업을 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해 병상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서울]·[학생]지의 기자로 있으면서 감상문 등을 발표했으며, 1934년 문예지 [신인문학(新人文學)]을 발간하였으나 자본 부족으로 중단, 1935년 조선일보사 출판부에 입사하여 [조광(朝光)]지의 편집을 맡았고, 1938년 기자 생활 청산 후 '청조사(靑鳥社)'를 직접 경영하기 시작했다.

1919년 8월 [매일신보]에 「월하(月下)의 몽(夢)」이, 그 해 11월에 「파몽(破夢)」·「낙목(落木)」 등이 시부분에서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장미촌], 1922년 [백조] 창간 동인으로 가담하여 [백조] 창간호에 시 「객(客)」·「하늘의 향연(饗宴)」·「이별한 후에」를 발표했고, [백조] 2호에 「우연애형(牛涎愛兄)에게」라는 수필을, 1923년 소설 「반항(反抗)」을 발표했다. 1924년 첫 시집 『처녀(處女)의 화환(花環)』, 1928년 제2시집 『내 혼(魂)이 불탈 때』, 1938년 제3시집 『백공작(白孔雀)』 등을 간행하였다. 1940년 10월 6일 41세 나이에 갑작스런 발병으로 사망했다.
세속적인 것을 싫어하여 고독하게 살다가 1929년 11월 대구 자택에서 음독, 자살하였다. 이장희의 전 시편에 나타난 시적 특색은 섬세한 감각과 시각적 이미지, 그리고 계절의 변화에 따른 시적 소재의 선택에 있다. 대표작 「봄은 고양이로다」는 다분히 보들레르와 같은 발상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고양이’라는 한 사물이 예리한 감각으로 조형되어 생생한 감각미를 보이고 있다. 1920년대 초반의 시단은 퇴폐주의·낭... 세속적인 것을 싫어하여 고독하게 살다가 1929년 11월 대구 자택에서 음독, 자살하였다. 이장희의 전 시편에 나타난 시적 특색은 섬세한 감각과 시각적 이미지, 그리고 계절의 변화에 따른 시적 소재의 선택에 있다. 대표작 「봄은 고양이로다」는 다분히 보들레르와 같은 발상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고양이’라는 한 사물이 예리한 감각으로 조형되어 생생한 감각미를 보이고 있다. 1920년대 초반의 시단은 퇴폐주의·낭만주의·자연주의·상징주의 등 서구 문예사조에 온통 휩싸여 퇴폐성이나 감상성이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섬세한 감각과 이미지의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뒤를 이어 활동한 정지용(鄭芝溶)과 함께 한국시사에서 새로운 시적 경지를 개척하였다.
저 : 허민 (許民, 허종許宗, 허창호許昌瑚, 민民)
허민의 시는 자유시를 중심으로 시조, 민요시, 동요, 노랫말에다 성가, 합창극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갈래에 걸쳐 있다. 본명 허종(許宗), 필명 허창호(許昌瑚), 민(民)이다. 경상남도 사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시의 제재는 산·마을·바다·강·호롱불·주막·물귀신·산신령 등 자연과 민속에 속하며, 주제는 막연한 소년기 정서에서부터 농촌을 중심으로 민족 현실에 대한 다채로운 깨달음과 질병(폐결핵)에 맞서 싸우는 한 개인... 허민의 시는 자유시를 중심으로 시조, 민요시, 동요, 노랫말에다 성가, 합창극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갈래에 걸쳐 있다. 본명 허종(許宗), 필명 허창호(許昌瑚), 민(民)이다. 경상남도 사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시의 제재는 산·마을·바다·강·호롱불·주막·물귀신·산신령 등 자연과 민속에 속하며, 주제는 막연한 소년기 정서에서부터 농촌을 중심으로 민족 현실에 대한 다채로운 깨달음과 질병(폐결핵)에 맞서 싸우는 한 개인의 실존적 고독 등을 표현하고 있다. 「율화촌」, 「해수도」, 「아픈 다리」 등을 저술했다. 1937년 [동아일보] 진주지국 기자로 일하였으며, 지병인 폐결핵을 앓다가 1943년 봄 2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의 소설 『구룡산』으로 문단에 진출하여 민족 현실과 산촌의 궁핍한 삶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특히 민담, 전설을 잘 활용했다. 단편 『어산금(魚山琴)』은 '이태준' 작가의 추천으로 문예잡지에 게재되었고, 예술가 소설로 장신정신이 담겨있다. 또한 허민의 당대 시대를 반영한 문체가 그대로 들어나는데 경남 지역어를 풍부한 사투리가 그대로 담겨있는 것이 특징이다. 시적 자연 묘사가 두드러지고 있다.

허민은 이른 나이에 세상과 이별하여 많은 작품의 시, 경수필, 소설(아동문학) 등이 묻혀 있다가 사후 32년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1940년대 암흑기 우리 민족문학사의 한 자리를 메울 수 있는 윤동주와 쌍벽을 이루는 소설과 시인으로서 미발표 유작시 2백여 편이지만, 유작 소설만도 대부분은 6·25 때 소실됐으며 어려운 시대에 한글로만 작품을 썼다.
박용철은 1930년대 사재를 털어 문예잡지 『시문학』 3권(1930), 『문예월간』 4권(1931), 『문학』 3권(1934) 등 도합 10권을 간행하였다. 또한 문학활동에 전념하면서도 그가 주재하던 시문학사에서 1935년 『정지용시집』과 『영랑시집』을 간행하였지만, 정작 자신의 작품집은 내지 못하였다. 『시문학』 창간호에 「떠나가는 배」·「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싸늘한 이마」·「비내리는 날」 등을 발표하면서... 박용철은 1930년대 사재를 털어 문예잡지 『시문학』 3권(1930), 『문예월간』 4권(1931), 『문학』 3권(1934) 등 도합 10권을 간행하였다. 또한 문학활동에 전념하면서도 그가 주재하던 시문학사에서 1935년 『정지용시집』과 『영랑시집』을 간행하였지만, 정작 자신의 작품집은 내지 못하였다. 『시문학』 창간호에 「떠나가는 배」·「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싸늘한 이마」·「비내리는 날」 등을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시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시문학』·『문예월간』·『문학』 및 기타 잡지에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또한 발표되지 않고 유고로 전하여진 작품도 상당수에 달한다. 자신이 주축이 된 시문학 동인활동과 ‘해외문학파’,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참여하여 연극공연을 위한 몇 편의 희곡(입센 원작 『인형의 집』, 그리고 「바보」, 「베니스 상인」, 「말 안 하는 시악시」, 「사랑의 기적」… 등)을 번역 및 창작하였으며 직접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방대한 번역시 등을 통해 해외문학을 국내에 소개하는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은 한국 근현대문학사에서 큰 의의라 하겠다. 또한 『삼천리문학』에 실린 박용철의 대표적인 평론인 「시적 변용에 대해서」(1938)는 지금도 널리 읽혀지는 시작(詩作) 이론이다. 이 시론을 통하여 1930년대 초반 『시문학』이 기틀을 잡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1930년대 중반부터는 모더니즘과 기교주의 논쟁에서도 순수파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일본의 방랑시인. 호후시 출신. 5.7.5의 정형시인 하이쿠(俳句)에 자유율을 도입한 일본의 천재시인이다. 그의 평생소원은 ‘진정한 나의 시를 창조하는 것’과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죽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이쿠 하나만을 쓰는 데 삶을 바쳤다. 겉으로는 무전걸식하는 탁발승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한량에 술고래에다 툭하면 기생집을 찾는 등 소란을 피우며 문필가 친구들에게 누를 끼쳤다. 그래도 인간적인 매력... 일본의 방랑시인. 호후시 출신. 5.7.5의 정형시인 하이쿠(俳句)에 자유율을 도입한 일본의 천재시인이다. 그의 평생소원은 ‘진정한 나의 시를 창조하는 것’과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죽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이쿠 하나만을 쓰는 데 삶을 바쳤다. 겉으로는 무전걸식하는 탁발승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한량에 술고래에다 툭하면 기생집을 찾는 등 소란을 피우며 문필가 친구들에게 누를 끼쳤다. 그래도 인간적인 매력이 많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산토카를 모델로 한 만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실제 주인공이다.
일본의 시인. 세이세이는 어렸을 때 시가를 배웠는데, 그 하이쿠는 마사오카 시키에게 상찬을 받았다. 도쿄에 올라와서 한때 하이쿠 전문 잡지인 [호토토기스(ホトトギス, 두견새)]의 편집에 종사했다. 오사카로 돌아온 후, 아사히 신문에 ‘아사히 하이단(朝日俳壇)’의 심사를 맡아 오사카 하이단의 기초를 다졌다. 초기에는 요사 부손에 심취했고 나중에는 바쇼에 심취해 연구하는 데 노력했다. 일본의 시인. 세이세이는 어렸을 때 시가를 배웠는데, 그 하이쿠는 마사오카 시키에게 상찬을 받았다. 도쿄에 올라와서 한때 하이쿠 전문 잡지인 [호토토기스(ホトトギス, 두견새)]의 편집에 종사했다. 오사카로 돌아온 후, 아사히 신문에 ‘아사히 하이단(朝日俳壇)’의 심사를 맡아 오사카 하이단의 기초를 다졌다. 초기에는 요사 부손에 심취했고 나중에는 바쇼에 심취해 연구하는 데 노력했다.
저 : 마사오카 시키 (Shiku Masaoka,まさおか しき,正岡 子規)
하이쿠시인, 수필가. 근대 하이쿠 예술을 집대성한 인물. 시키 혹은 호토토기스라 불리는 두견새는 목에서 피를 토하도록 운다는 중국설화 때문에 폐결핵을 상징하는 새가 됐다. 대학시절 폐결핵이 발병한 이래 줄곧 병상을 멀리 떠나지 못했던 그는 필명을 시키라 짓고 하이쿠 연구와 창작에 몰두했다. 그가 만든 하이쿠 잡지 『호토토기스』는 하이쿠시인을 위한 창작의 장이 됐고 시키와 평생의 벗이었던 소세키의 작품이 처음 발표... 하이쿠시인, 수필가. 근대 하이쿠 예술을 집대성한 인물. 시키 혹은 호토토기스라 불리는 두견새는 목에서 피를 토하도록 운다는 중국설화 때문에 폐결핵을 상징하는 새가 됐다. 대학시절 폐결핵이 발병한 이래 줄곧 병상을 멀리 떠나지 못했던 그는 필명을 시키라 짓고 하이쿠 연구와 창작에 몰두했다. 그가 만든 하이쿠 잡지 『호토토기스』는 하이쿠시인을 위한 창작의 장이 됐고 시키와 평생의 벗이었던 소세키의 작품이 처음 발표되기도 했다. 수필집 「병상육척」은 고통스런 일상을 위트 있고 아름다운 문체로 써낸 산문으로 이름이 높다.
여성 시인. 원래 이름은 ‘지요조(千代女)’이나 불교에 귀의했기 때문에 ‘지요니’라고 불린다. 나팔꽃 하이쿠로 친숙하다. 바쇼의 제자 시코가 어린 지요니의 재능을 발견하고 문단에 소개함으로써 이름이 알려졌다. 여성 시인. 원래 이름은 ‘지요조(千代女)’이나 불교에 귀의했기 때문에 ‘지요니’라고 불린다. 나팔꽃 하이쿠로 친숙하다. 바쇼의 제자 시코가 어린 지요니의 재능을 발견하고 문단에 소개함으로써 이름이 알려졌다.
19세기와 20세기의 문학적 감수성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 소설가.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작은 칼뱅주의 마을 애머스트에서 태어나 평생을 보냈으며, 평생 결혼하지 않다. 평생 살며 1800편의 시를 남겼다. 자신의 시를 직접 출판하거나 세상에 거의 공개하지 않았지만 소수의 친구와 가족, 지인들에게 보여주기를 좋아했다. 자연을 사랑했으며 동물, 식물, 계절의 변화에서 깊은 영감을 얻었다. 말년에는 은둔생활을 했으며 시... 19세기와 20세기의 문학적 감수성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 소설가.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작은 칼뱅주의 마을 애머스트에서 태어나 평생을 보냈으며, 평생 결혼하지 않다. 평생 살며 1800편의 시를 남겼다. 자신의 시를 직접 출판하거나 세상에 거의 공개하지 않았지만 소수의 친구와 가족, 지인들에게 보여주기를 좋아했다. 자연을 사랑했으며 동물, 식물, 계절의 변화에서 깊은 영감을 얻었다. 말년에는 은둔생활을 했으며 시작 활동을 했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매우 높은 지성을 표현하고 있으며 또한 뛰어난 유머 감각도 보여준다. 운율이나 문법에서 파격성이 있어서 19세기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20세기에는 형이상학적인 시가 유행하면서 더불어 높은 평가를 받았다.

40여 편씩 시를 직접 필사하고 편집한 손제본 형태의 파시클fascicle 40권에 보관했고 더러는 편지봉투를 뜯어 그 안에 적어두기도 했다. 주변의 일상과 자연을 시에 담아 사랑, 죽음, 상실, 영원함, 아름다움, 글쓰기와 읽기의 즐거움을 노래한 시인은 당시 청교도의 엄숙함이나 가부장적 질서, 물질주의 생활양식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리듬과 형식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사유했다. 현재 독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미국 시인 가운데 한 명이며, 많은 후배 시인들과 비평가는 물론 음악가와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는 페미니스트 뮤즈이기도 하다.
1848~1894.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1870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법관이 되기를 포기하고 레옹 보나(Leon Bonnat)의 스튜디오에서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1873년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했으며,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그림 그리기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는 사실주의 화풍을 공부하며 학문으로... 1848~1894.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1870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법관이 되기를 포기하고 레옹 보나(Leon Bonnat)의 스튜디오에서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1873년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했으며,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그림 그리기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는 사실주의 화풍을 공부하며 학문으로서 미술을 공부했지만 인상주의 화가들과 어울리며 그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75년 「마루를 깎는 사람들」을 살롱전에 출품했으나 너무 적나라한 현실감 때문에 심사위원들로부터 거부당했다. 그는 1876년 제2회 인상파 전시회에 이 작품을 출품하고,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인상파전에 참여하며, 전시를 기획하고 재정적인 지원을 했다. 그가 도움을 주었던 가난한 인상파 화가들은, 마네, 모네, 르느와르, 피사로, 드가, 세잔 등이었다.

그가 소장하고 있던 67점의 인상파 작품을 사후에 프랑스국립미술관에 기증했으나 ‘주제넘은 기증’에 당황하여 수용 여부를 놓고 한바탕 논란이 있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 논란을 계기로 인상파 화가들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카유보트는 고전적인 규범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파리의 모습을 주제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길 위의 풍경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커다란 도로, 광장, 다리, 그리고 그 위를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으며 19세기 새롭게 변화하는 파리의 풍경을 재현했다.

그의 작품은 치밀한 화면 구성과 화면을 구성하는 각 요소들 간의 균형, 독특한 구도, 대담한 원근법의 사용 등을 특징으로 한다. 그리고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과는 다르게 남성이 작품의 주제로 부상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창가의 남자(A Young Man at His Window)」(1875), 「마루를 깎는 사람들(The Floor Scrapers)」(1875), 「유럽 다리(The Pont du Europe)」(1876), 「비 오는 파리 거리(Paris Street, Rainy Day)」(1877), 「눈 쌓인 지붕(Rooftops Under Snow)」(1878), 「자화상(Self-portrait)」(189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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