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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 페블즈, 해바라기, 영과 영, 한마음, 사랑과 평화 노래 외 35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서울미디어 (음반) | 2018년 04월 17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252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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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매일 2018년 04월 17일
시간, 무게, 크기 1,500g

관련분류

카테고리 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USB
  • 01 그대로 그렇게 - 휘버스
  • 02 나 어떡해 - 샌드페블즈
  • 03 내 마음의 보석상자 - 해바라기
  • 04 얼룩진 사랑 - 영과 영
  • 05 유리 벽 - 신형원
  • 06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 - 휘버스
  • 07 한동안 뜸 했었지 - 사랑과 평화
  • 08 해야 - 마그마
  • 09 그대 먼 곳에 - 이춘근
  • 10 봄 여름 가을 겨울 - 김현식
  • 11 개구장이 - 산울림
  • 12 너 너 너 - 장계현과 템페스트
  • 13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 산울림
  • 14 내가 말했잖아 - 이현희
  • 15 어둠 속에서 - 백두산
  • 16 옛 시인의 노래 - 한경애
  • 17 그저 바라 볼 수만 있어도 - 유익종
  • 18 모두가 사랑이에요 - 해바라기
  • 19 날개 - 허영란
  • 20 잃어버린 우산 - 우순실
  • 21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 이장희
  • 22 21살의 비망록 - 김상배
  • 23 한잔의 추억 - 이장희
  • 24 시인의 마을 - 정태춘
  • 25 인생은 미완성 - 이진관
  • 26 그날 - 김연숙
  • 27 사랑이여 - 유심초
  • 28 사랑했어요 - 김현식
  • 29 그리움만 쌓이네 - 여진
  • 30 바람아 멈추어 다오 - 이지연
  • 31 촛불 - 정태춘
  • 32 너 - 해바라기
  • 33 별리 - 이연실
  • 34 삼포로 가는 길 - 강은철
  • 35 난 사랑을 아직 몰라 - 지명길
  • 36 님 그림자 - 노사연
  • 37 행복의 나라로 - 한대수
  • 38 이젠 사랑할 수 있어요 - 해바라기
  • 39 사랑하고 싶소 - 정태춘
  • 40 나비 소녀 - 김세화
  • 41 당신의 모든 것을 - 원플러스원
  • 42 찔레꽃 - 이연실
  • 43 외로운 사람들 - 이정선
  • 44 행복 - 이수만
  • 45 아하 날개여 - 박은옥
  • 46 제비꽃 - 조동진
  • 47 한번쯤 - 송창식
  • 48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유심초
  • 49 사랑의 눈동자 - 유익종
  • 50 고래사냥 - 송창식
  • 51 행복을 주는 사람 - 해바라기
  • 52 그건 너 - 이장희
  • 53 돌고 돌아 가는 길 - 노사연
  • 54 여고 졸업반 - 김인순
  • 55 바위섬 - 김원중
  • 56 영상 - 김재성, 안혜경
  • 57 불씨 - 한돌
  • 58 지금은 헤어져도 - 해바라기
  • 59 찻잔 - 노고지리
  • 60 토요일 밤에 - 김세환

아티스트 소개 (40명)

1970년대에 중창단의 진영으로 빼어난 선율과 화음의 융화를 선보이며 모던 포크 계열의 선두에 섰던 혼성그룹 해바라기는 처음에 김의철을 리더로 하고 한영애, 김영미, 이광조가 한 팀이 되어 명동에 있는 업소를 중심으로 노래를 불렀다. 김의철이 건강상의 이유로 팀을 떠나자, 이정선이 대장으로 들어오고 이광조가 군에 간 사이에 이정선과 자주 콘서트를 가졌던 이주호가 들어와 4인조의 진영을 갖춘다. 명동 카톨릭 여학생... 1970년대에 중창단의 진영으로 빼어난 선율과 화음의 융화를 선보이며 모던 포크 계열의 선두에 섰던 혼성그룹 해바라기는 처음에 김의철을 리더로 하고 한영애, 김영미, 이광조가 한 팀이 되어 명동에 있는 업소를 중심으로 노래를 불렀다. 김의철이 건강상의 이유로 팀을 떠나자, 이정선이 대장으로 들어오고 이광조가 군에 간 사이에 이정선과 자주 콘서트를 가졌던 이주호가 들어와 4인조의 진영을 갖춘다. 명동 카톨릭 여학생회관 해바라기 홀에서 콘서트를 갖기 시작한 이들은 1977년 8곡의 합창곡과 4곡의 솔로 곡이 실린 첫 음반을 발표하고 ‘구름 들꽃 돌 연인’을 히트시키며 기타를 든 청년들에게 주요한 레퍼토리를 제공 해 준다. 이 음반은 이미 2장의 솔로 앨범으로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과시한 이정선이 프로듀서의 위치에서 참여했고 그를 비롯한 각 멤버가 솔로 한 곡씩을 불렀다. 이 중 이주호가 고교 시절 지었다는 ‘마음 깊은 곳에 그대로를’은 한영애의 목소리로 담겨 있으며 후에 이주호, 유익종의 해바라기가 리메이크 한다. 1집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이들은 1978년 두 번째 앨범을 발표한다. 이주호 대신에 이광조가 한 자리를 차지한 이 앨범에는 ‘뭉게 구름’이 히트를 했고 같은 해 < TBC 해변가요제 >에서 징검다리의 노래로 대상을 차지한 ‘여름’, 이정선의 솔로 앨범에 수록했었던 ‘섬 소년’ 등이 앨범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다. 이 앨범을 끝으로 이정선은 이광조, 엄인호와 풍선이란 그룹을 만들어 활동했고 한영애는 솔로 앨범의 실패로 연극계로 발을 옮긴다. 그리고 김영미는 유학을 떠난다. 1986년 김영미의 일시적인 귀국으로 같이 모이게 된 이들은 ‘우리가 지금은 헤어져도’, ‘우리네 인생’이 수록된 고별 앨범을 발표한다. 이중 타이틀곡인 ‘우리가 지금은 헤어져도’는 이별과 재회의 희망을 단아하게 노래해 라디오를 중심으로 아주 많은 사랑을 받았다.
멤버 : 양하영, 강영철 멤버 : 양하영, 강영철
현존하는 그룹들 중에서 최장수 그룹으로 인정받고 있는 사랑과 평화는 처음에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최고의 뮤지션들이 모여 결성되었다. 이들은 펑키한 감각을 펼쳐 보임으로써 미국 병사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렸으며 그에 따라 대우도 국내 뮤지션들 중에서 최고의 액수를 지급 받았다. 당시 활동 정지를 당했던 이장희의 지원에 힘입어 본격적인 국내 활동을 시작한 이들은 절대적 명반의 한 칸을 차지하는 데뷔 앨범을 197... 현존하는 그룹들 중에서 최장수 그룹으로 인정받고 있는 사랑과 평화는 처음에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최고의 뮤지션들이 모여 결성되었다. 이들은 펑키한 감각을 펼쳐 보임으로써 미국 병사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렸으며 그에 따라 대우도 국내 뮤지션들 중에서 최고의 액수를 지급 받았다. 당시 활동 정지를 당했던 이장희의 지원에 힘입어 본격적인 국내 활동을 시작한 이들은 절대적 명반의 한 칸을 차지하는 데뷔 앨범을 1978년 발표한다. 한번 들으면 절대 잊혀지지 않는 가사와 멜로디로 충격을 몰고 온 ‘한동안 뜸했었지’가 들어 있는 이 앨범은 펑키한 기타 사운드가 전체를 휘감고 있는 가운데 레게풍의 ‘노래여 퍼져라’, 펑키한 재즈 감각의 농익은 연주를 선보인 ‘뭉게 구름’, 김명곤의 키보드가 춤을 추는 베토벤(Beethoven)의 ‘운명’ 등이 탄탄한 연주력과 호흡을 증명해 주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내공이 되어 있는가를 오늘날 들어도 여실히 느끼게 해 주고 있다. 1978년을 온통 ‘한동안 뜸했었지’의 해로 만든 이들은 다음 해 또 한 장의 명반을 내놓으며 국내 그룹 중 최고의 라인업을 자랑한다. 2집에 수록된 ‘장미’는 전작에 못지 않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으며 ‘딱 꼬집어 얘기 할 수 없어요’를 비롯한 앨범의 수록곡들은 다시 한번 드림팀의 면모를 과시한다. 2집에서는 송홍섭이 이남이 대신에 들어 왔으며 1집의 ‘뭉게 구름’같이 ‘축제’, ‘솔바람’ 등의 창작곡과 ‘엘리제를 위하여’, ‘아베마리아’ 등과 같은 클래식 소품들을 연주곡으로 삽입해 최고의 기량을 인정받았다. 당시에 흔치 않았던 이러한 시도는 펑키함 외에도 프로그레시브한 면과 재즈적인 측면을 강조한 그룹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은 그러나 음악적 견해차로 인해 갈등을 겪게 된다. 그리고 드러머 김태홍의 갑작스런 교통사고는 팀을 와해의 상태로 만들어 공백기를 조성한다. 이 기나긴 휴식기에는 몇몇의 새로운 멤버들이 사랑과 평화를 거쳐간다. 재즈피아니스트 김광민과 정원영, 드러머 문영배 등이 바로 그들로, 이들은 후에 국내 대중 음악계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인물들로 자리잡는다. 한편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몇몇 재즈 팀에서 활동하던 최이철은 사랑과 평화에서 했던 재즈록의 열망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이남이를 불러들인다. 그리고 촉망받던 연주인들을 불러모아 10여 년만에 새 앨범을 내 놓는다. 이 앨범에서는 ‘울고싶어라’가 크게 히트하고 ‘겨울바다’, ‘노래는 숲에 흐르고’ 등과 같은 훌륭한 곡들로 이들이 실력이 녹록치 않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가수 김세화가 리메이크 작품을 다시 내놓는 등 그 해를 강타했던 ‘울고싶어라’는 이남이의 개인적인 인기를 부풀려 놓음으로써 이남이의 솔로 독립만을 지원한 꼴이 되었다. 오뚜기 최이철은 다시 퓨전 재즈의 가능성을 이 땅에 심어준 봄여름가을겨울 출신의 빛과 소금 두 멤버를 영입해 두 팀의 공통점인 재즈적인 팀컬러를 확실히 구축한다. 이 작은 거장들이 합세한 4집 음반은 음반사의 경제 악화에도 불구하고 ‘샴푸의 요정’이라는 히트곡을 내었으며 이들은 한국을 대표하여 < 환태평양 록 오사카 음악제 >에 출전해 사물놀이와 양약을 섞은 ‘덩더쿵’이라는 곡으로 일본 관계자들로부터 격찬을 받는다. 이 환대로 < 경주 엑스포 >에서 펼쳐진 특별 무대를 갖기도 한다. 하지만 역시 박성식과 장기호가 종교적인 이유로 팀을 떠나 빛과 소금이라는 팀을 결성하자, 최이철은 또 다른 라인업을 구상해야 했다. 과거에 팀에서 같이 잠깐 활동했던 이병일 , 이승수, 안정현 등의 뮤지션과 함께한 최이철은 ‘못 생겨도 좋아’가 실린 5집, ‘착각하지마’가 들어 있는 6집을 발표하며 댄스 음악의 한복판을 정면 돌파해 나갔다. 하지만 예전만큼의 인기를 획득하지는 못했다. 현재 이들은 그간 꾸준히 팀을 이끌어 오던 최이철이 팀을 떠나 개인 활동에 들어가고 나머지 멤버가 송기영과 이권희를 받아들여 사랑과 평화를 계속 유지해 오고 있다.
멤버 : 조하문(보컬), 김광현, 문영식 멤버 : 조하문(보컬), 김광현, 문영식
노래만을 위해 혼을 불사른 가수로 사후에 절대적인 평가를 받는 김현식은 고등학교 시절 밴드부에 몸담은 경력이 있으며 학교에서 자퇴한 후에는 음악다방에서 통기타를 치며 음악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는 1978년 이장희의 주선으로 솔로 앨범을 준비했으나 대마초 사건과 회사 사정으로 2년이나 늦게 자신의 앨범을 갖게 된다. 이 앨범에는 후에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의 주요 레파토리가 되는 ‘봄여름가을겨울’이 있고 3집에 다... 노래만을 위해 혼을 불사른 가수로 사후에 절대적인 평가를 받는 김현식은 고등학교 시절 밴드부에 몸담은 경력이 있으며 학교에서 자퇴한 후에는 음악다방에서 통기타를 치며 음악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는 1978년 이장희의 주선으로 솔로 앨범을 준비했으나 대마초 사건과 회사 사정으로 2년이나 늦게 자신의 앨범을 갖게 된다. 이 앨범에는 후에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의 주요 레파토리가 되는 ‘봄여름가을겨울’이 있고 3집에 다시 실리는 ‘떠나가 버렸네’ 등이 실려 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밤무대를 떠도는 무명의 가수로 생계를 이어간다. 결혼과 함께 피자 가게를 운영하기도 했던 그는 1984년 그의 소울 창법이 블루스 속에서 빛을 발하는 2집을 발표한다. 이 앨범에서 ‘사랑했어요’와 ‘어둠 그 별빛’, ‘당신의 모습’ 등이 크게 사랑 받았으며 그는 대중적인 인지도를 서서히 얻기 시작한다. 그는 한때 조원익이 리드하고 최구희가 기타를 치던 그룹 동방의 빛 리드싱어로 있기도 했으며 이 그룹의 해체 후에는 정성조가 팀을 이끌어 가던 메신저스의 싱어도 맡으면서 진가를 발산하기도 했다. 김종진, 전태관, 고 유재하와 후에 빛과 소금이라는 그룹으로 활동하는 박성식 장기호 등과 함께 만든 그룹 봄여름가을겨울과 같이 한 3집은 그를 인기 가수로 만든 앨범이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인기를 얻은 ‘비처럼 음악처럼’은 비가 오는 날이면 여지없이 라디오의 전파를 탔으며 ‘그대와 단둘이서’, ‘쓸쓸한 오후’ 등이 연이어 인기를 끌었다. 이 앨범에는 후에 그들의 앨범에 실리게 되는 ‘쓸쓸한 오후’를 비롯한 봄여름가을겨울의 작품과 유재하의 작품 ‘가리워진 길’ 등이 수록되어 있다. 대마초로 약 2달간 전인권, 허성욱 등과 구속되었던 그는 삭발 콘서트를 벌여 대성공을 거두고 1988년 4집을 발표한다. ‘언제나 그대 내 곁에’가 사랑을 받은 4집에는 윤상의 데뷔 곡 ‘여름밤의 꿈’ 고 유재하의 ‘가리워 진 길’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3집의 ‘우리 이제’에 이어 ‘한국 사람’이라는 하모니카 곡이 그의 연주로 한 트랙을 차지하고 있다. 이정선과 엄인호의 신촌블루스에서 절절한 필링의 블루스를 열창하던 그는 강인원, 권인하, 신형원 등과 영화 < 비오는 날의 수채화 >의 메인 타이틀을 불러 엄청난 인기를 모은다. 그러나 고독을 항상 술로 달래던 그는 이 때부터 육체적으로 힘든 나날 속에 노래를 부르는 병자의 모습으로 살게 되고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가운데 병원을 드나들기 시작한다. 1990년에는 그의 공식적인 앨범으로서는 마지막인 5집이 발매되고 하반기에는 그가 ‘이별의 종착역’을 부른 신촌블루스 3집이 발매된다. 그의 5집은 특별한 히트곡은 없었지만 ‘넋두리’, ‘향기 없는 꽃’이 사후에 사랑을 받았으며 < 비오는 날 수채화 >에 실린 ‘그 거리 그 벤치’도 영화 사운드 트랙의 판매에 힘입어 라디오에서 자주 흘러 나왔다. 1990년 11월 1일 오후 5시 20분 그는 초인적인 힘으로 6집을 녹음하다 지병인 간경화로 자택에서 사망했다. 불과 서른 두 살의 나이로 그를 아끼는 많은 팬들과 동료들의 염원도 소용없이 너무나도 빨리 지상에서 사라졌다. 사후 앨범인 6집은 팬들의 명복 속에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으며 히트곡 ‘내 사랑 내 곁에’는 오태호에게 작곡가상의 영예를 안겨 주었다. 그의 사망 1주기에는 추모콘서트가 열려 김수철, 이정선, 전영록, 강인원, 조하문, 한영애, 김태화, 봄여름가을겨울 최호섭, 권인하 등 30여 명의 가수들이 참가해 그의 노래를 부르며 그의 부재를 안타까워했고 2000년에는 그의 트리뷰트 앨범에 신인 가수와 중견 가수들이 골고루 참여해 그를 기리는 것은 물론 가요계 화합의 장으로 이어졌다. 김현식, 그는 모든 악기와 곡의 멜로디, 리듬을 떠나서 목소리만으로도 영혼을 울릴 수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그의 음성 자체가 외로움이 되고 사랑이 되며 무궁무진한 절대적 표현이 됨을 보여준 절창의 뮤지션이다.
1975년의 가요정화운동과 대마초 파동으로 황폐화된 음악계에 한 줄기 서광을 비쳐 준 것은 삼 형제로 구성된 산울림이었다. 10대 중반부터 작곡을 시작했던 이 형제들은 김창완의 대학 졸업 기념으로 만든 데뷔 앨범으로 한 순간에 가요계를 전복시켰고 우리 모두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의 역사적인 데뷔 음반과 동시대성을 획득한 이들의 데뷔 음반은 끝없는 창작욕을 발현한 첫 번째 단추... 1975년의 가요정화운동과 대마초 파동으로 황폐화된 음악계에 한 줄기 서광을 비쳐 준 것은 삼 형제로 구성된 산울림이었다. 10대 중반부터 작곡을 시작했던 이 형제들은 김창완의 대학 졸업 기념으로 만든 데뷔 앨범으로 한 순간에 가요계를 전복시켰고 우리 모두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의 역사적인 데뷔 음반과 동시대성을 획득한 이들의 데뷔 음반은 끝없는 창작욕을 발현한 첫 번째 단추가 되었으며, 신중현이 열어 놓은 록의 세계를 아마추어의 경지에서 마음껏 조리한 역사적인 음반이 되었다. 둘째 김창훈의 곡인 ‘나 어떡해’를 부른 샌드페블즈가 대상을 받은 제1회 MBC 대학가요제에 ‘문 좀 열어 줘’란 곡으로 출전했지만, 김창완이 졸업생 이여서 자격미달로 실격한 이들은 자신들의 기념 음반을 가지고 싶었던 나머지 친척들을 졸라 앨범 제작비를 구걸했고 그간 만들어 놓았던 150곡 중 몇 곡을 추려 데모 테이프를 만들었다. 그리곤 가장 가까운 레코드 회사인 서라벌을 찾아가 자신들의 소원을 얘기했다. 이들의 데모 테이프를 들어 본 사장은 아무 조건 없이 음반을 만들어 주겠다며 손수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고 이들의 이름을 산울림으로 지어 주었다. 하지만 이들이 가져온 악기는 연주를 하고 나면 줄이 풀려 끝까지 마칠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평론가 이백천에게서 팬더사의 스트라토 기타와 암페그에서 만든 베이스를 빌려온 이들은 하루만에 녹음을 끝마쳤으며 음반의 성공을 예상하지 못한 채 본격적인 사회인이 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렇게 탄생한 이들의 데뷔 음반은 상상을 초월하는 성공을 거두며 삽시간에 팔려 나갔다. 그리고 명반으로 꼽히는 2집을 4개월만에 내놓았으며 역시 파격과 혁신의 메아리로 소리를 내지르며 커다랗게 산울림을 자아냈다. 이것은 2집이 나온 지 6개월만에 발매된 3집의 ‘그대는 이미 나’로까지 이어진다. 동생들이 군대에 가자 산울림은 제대로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4집은 각종 드라마와 영화, 연극 등에 쓰였던 주제곡들을 모아 편집한 음반으로 발매했고 5집은 동생들이 휴가 나온 사이 녹음을 끝내야 했다. 데뷔 음반의 폭발적인 반응에서 멀어진 듯한 이들의 인기는 6집의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동생들이 제대하고 같이 만든 7집의 ‘청춘’, 8집의 ‘내게 사랑은 너무 써’와 같은 스탠더드 류의 히트곡으로 계속 이어지며 초창기의 실험정신이 가득했던 곡들보다는 대중성이 뛰어난 곡들로 꾸며지며 계속 전성기를 누린다. 하지만 3인 밴드 최상의 사운드를 들려주며 우리 나라 헤비메탈 사운드의 포문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9집이 상업적으로 실패하자 이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혼자 남은 김창완은 < 기타가 있는 수필 >이란 솔로 앨범에서 ‘어머니와 고등어’를 히트시키며 이후 계속 되는 솔로 여정의 첫 삽을 뜬다. 그는 이어 본인이 혼자 만든 산울림 10집에서 감상적 발라드 ‘너의 의미’를 히트시킨다. 그는 또한 가능성 있는 신인들을 모아 포크 그룹 꾸러기들을 만들어 활동에 들어갔으며 ‘아주 옛날에는 사람이 안 살았다는데’라는 긴 제목의 곡으로 100일간의 장기 공연을 치뤄 냈다. 밴드 음악의 감독으로 산울림을 지휘한 김창완의 한편에는 동요라는 장르가 있다. 처음의 기획의도는 기존의 동요를 재해석하는 것이었지만, 대부분의 곡들이 외국 곡이라는 한계를 알게 된 그는 직접 동심의 세계를 표현한 곡들로 시장을 두들겼고 ‘개구장이’, ‘산할아버지’, ‘안녕’ 등과 같이 정규 앨범의 히트곡 못지 않은 인기곡들을 양산한다. 그의 동요 앨범들은 그의 천진무구한 창작적인 감수성이 뽑아낸 새로운 시도였다. 9집 이후 김창완 혼자서 작업했던 산울림은 과거의 뮤지션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다시 합체식을 가졌다. 국내에서 트리뷰트를 받은 몇 안 되는 아티스트의 반열에 오른 이들은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로 노익장을 과시했으며 ‘내 마음’에서 보여준 김창훈의 메탈성 보컬로 오랜만에 원초적인 삼 형제의 힘을 발휘하며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음악 자체의 순수성을 엮어낸다. 그리고 폭풍 속의 댄스씬을 빠져 나온 우리는 깨닫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산울림이 있었다는 것을.
1970년 그룹 키브라더스에 창단 멤버로 합류해 보컬리스트로서 음악활동을 시작하였 던 장계현은 유상봉의 제안으로 5인조 포크록 그룹 「템페스트」를 결성하게 되었다. 「템페스트」라는 그룹명은 ‘미풍을 안은 폭풍’이란 뜻으로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작품명 이기도 하다. 1970년 그룹 키브라더스에 창단 멤버로 합류해 보컬리스트로서 음악활동을 시작하였 던 장계현은 유상봉의 제안으로 5인조 포크록 그룹 「템페스트」를 결성하게 되었다. 「템페스트」라는 그룹명은 ‘미풍을 안은 폭풍’이란 뜻으로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작품명 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때 강은철이 불러 히트한 《삼포 가는 길》을 작사·작곡했다. 김흥국의 《호랑나비》, 《59년 왕십리》, 이동기의 《춘희》, 김재희의 《애증의 강》, 이예린의 《포플러 나무 아래》등을 작곡했다. 1983년 《은지》라는 노래 작품을 발표하면서 정식 가수 데뷔했다. 양현경 등과 함께 배따라기로 활동하며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아빠와 크레파스》, 《비와 찻잔 사이》등을 히트시켰다. 가족뮤지컬 《아빠... 고등학교 때 강은철이 불러 히트한 《삼포 가는 길》을 작사·작곡했다. 김흥국의 《호랑나비》, 《59년 왕십리》, 이동기의 《춘희》, 김재희의 《애증의 강》, 이예린의 《포플러 나무 아래》등을 작곡했다. 1983년 《은지》라는 노래 작품을 발표하면서 정식 가수 데뷔했다. 양현경 등과 함께 배따라기로 활동하며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아빠와 크레파스》, 《비와 찻잔 사이》등을 히트시켰다. 가족뮤지컬 《아빠와 크레파스》를 제작하면서 《꼬마 요리사》, 《내 친구 똥》, 《이를 닦는 슈퍼맨》, 《꼬마와 해바라기》, 《내 이름은 풀잎이에요》, 《밥 송(감사합니다 송)》, 《맛있는 우유 송》 등의 동요를 발표했다.
멤버 : 유현상(보컬, 리더), 김도균(기타), 박찬(드럼), 경호진(베이스) 김도균이라는 출중한 기타리스트가 이끌었던 백두산은 한국 헤비메탈의 초석을 쌓았던 그룹이다. 이들은 1980년대 중, 후반 브리티시 헤비메탈과 바로크 메탈을 혼합한 사운드로 헤비 씬의 주역이 되며 많은 팬들을 사로잡았다. 초창기 이들 사운드의 특징은 트로트 리듬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샤우트 창법을 구사하지만 한 편에 성인... 멤버 : 유현상(보컬, 리더), 김도균(기타), 박찬(드럼), 경호진(베이스)

김도균이라는 출중한 기타리스트가 이끌었던 백두산은 한국 헤비메탈의 초석을 쌓았던 그룹이다. 이들은 1980년대 중, 후반 브리티시 헤비메탈과 바로크 메탈을 혼합한 사운드로 헤비 씬의 주역이 되며 많은 팬들을 사로잡았다. 초창기 이들 사운드의 특징은 트로트 리듬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샤우트 창법을 구사하지만 한 편에 성인가요의 필이 진하게 느껴지는 보컬리스트 유현상의 창법에서 그런 느낌이 묻어난다. 1집에 실린 ‘어둠속에서’, ‘애타는 마음''이 그 ‘뽕끼’를 전하는 대표적인 곡들. 하지만 짙었던 트로트 색채는 이들의 대표작인 1987년 두 번째 앨범 < King Of Rock''n Roll >에서 그 비중이 크게 낮아진다. 1집에서 조금은 메탈 보컬이라기엔 어딘가 어색한 음성을 들려준 유현상은 이 음반에서 샤우트 톤의 진수를 드러내며 숨어있던 능력치를 한껏 분출했다. ‘Up in the sky'', ‘Women driving highway''는 일반인들이 ‘헤비메탈’하면 흔히 연상하는 금속성의 보이스 컬러가 잘 드러난 초창기 한국 메탈의 명곡. 절정에 오른 김도균의 기타 연주도 빼놓을 수 없는 앨범의 보석이다. ‘Revelation''의 속주를 비롯해, ‘And I can''t forget'', ‘The moon on the Baekdoo mountain''에서 마음껏 표현하는 테크닉은 분명 세계의 뮤지션들과 어깨를 겨룰 만한 것이었다. 허나 백두산은 김도균이 임재범과 함께 아시아나를 만들기 위해 팀을 빠져나가고, 유현상이 신인 여가수 이지연의 매니저가 되면서 해체됐다. 이후 김도균은 아시아나에서 국악과 메탈의 환상적인 조합을 선보였고, 유현상은 ‘여자야’로 트로트 가수로의 일대 변신을 이뤄냈다. 그렇게 끝난 것 같았던 백두산은 김도균, 한춘근, 김창식의 1집 라인업으로 1992년 세 번째 음반을 공개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하지만 ‘사랑할거야’, ‘너를 기다리네’와 같이 유약한 넘버들이 실린 이 앨범은 전성기의 파워가 현저히 감소했음을 증명한 셈이 되었고 다시 결합한 백두산은 결국 오래가지 못했다. 초창기 한국 헤비메탈이 가진 의무가 ‘외국 그룹 수준의 음악’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보면, 백두산은 그 수입상으로서의 과업을 충실히 이수한 그룹이다. 그러나 한 켠에 자리했던 트로트의 냄새는 ‘한국적’이라는 단어에 대해 가졌던 이들의 고민이다. 이들을 ‘철저한 모방자’나 ‘양다리를 걸친 모호한 이들’로 절단할 수는 없을 듯하다. 원래 첫 단추를 끼운 이의 고뇌는 큰 법이다.
자신의 포크적인 음악세계를 고집하는 유익종은 1974년 박시춘의 막내아들 박재정과 듀엣 그린빈즈(Green Beans)를 결성하면서 가요계에 데뷔했다. 첫 번째로 발표한 음반에서 ‘난 이 다음에’란 곡 등을 발표했지만 군 문제 때문에 휴식기를 가진다. 다시 파랑새란 이름으로 합쳐 ‘나는 왜’가 수록된 음반을 발표한 이들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박재정은 종교 음악과 재즈 공부를 위해 유학을 떠나고 그는 다른... 자신의 포크적인 음악세계를 고집하는 유익종은 1974년 박시춘의 막내아들 박재정과 듀엣 그린빈즈(Green Beans)를 결성하면서 가요계에 데뷔했다. 첫 번째로 발표한 음반에서 ‘난 이 다음에’란 곡 등을 발표했지만 군 문제 때문에 휴식기를 가진다. 다시 파랑새란 이름으로 합쳐 ‘나는 왜’가 수록된 음반을 발표한 이들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박재정은 종교 음악과 재즈 공부를 위해 유학을 떠나고 그는 다른 사업거리를 구상한다. 1981년 해바라기 출신의 이주호와 지금은 녹음기사로 일하고 있는 박성일 등과 유리박이란 그룹을 결성한 유익종은 이 팀의 와해와 동시에 이주호와 듀엣 해바라기를 출범시킨다. 해바라기의 1집에선 ‘행복을 주는 사람’, ‘모두가 사랑 이예요’ 등이 히트했지만 이주호와의 음악 차이를 느낀 그는 팀을 떠나 솔로 앨범을 발표하고 ‘사랑의 눈동자’를 히트시킨다. 하지만 그룹 활동은 하지 않고 노래만 부르기로 했던 해바라기 3집으로 다시 해바라기의 멤버로 오랜 활동을 한다. 이 앨범에서는 ‘내 마음의 보석 상자’, ‘사랑은 언제나 그 자리에’ 등이 크게 히트하고 ‘오랜 침묵은 깨어지고’, ‘도시의 밤 풍경’ 등이 라디오를 타면서 2년여간 활동하며 많은 인기를 모으게 된다. 아직도 이 시절의 인기는 그를 해바라기 시절의 멤버로 각인 시킨다. 해바라기 3집 발표 시에는 그의 솔로 2집 앨범이 일주일먼저 나오고 이주호의 앨범 등과 겹쳐 솔로 활동은 해보지도 못하고 접는다. 2집에서는 아직까지도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가 팬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1987년 옴니버스 앨범에 유영건이 만든 ‘세상 가장 밝은 곳에서 가장 빛나는 목소리로’를 수록해 주목을 받은 그는 1989년 미국의 LA에서 일어난 흑인폭동으로 교민들의 인기를 모은 하광훈의 ‘이연’이 수록된 3집을 발표한다. 이 앨범에는 여진의 ‘그해 가을’, ‘가을에 떠난 사람’, ‘하나가 되어’ 등이 수록되어 있다. 1991년 ‘차창에 흐르는 이별’이 수록된 4집은 그가 처음으로 제작하고 가장 많이 공을 들인 앨범이지만 가장 대중적인 외면을 받은 앨범으로 기억된다. 후에 아쉬움이 남는 곡들을 모아 발표한 < Worst > 앨범에서 이두헌이 만든 ‘저길 저편 저 차에 오르면’, 박강성의 ‘그대의 허상’ 왈츠 풍의 ‘그리움’ 등을 수록해 4집에 대한 애정을 유감없이 표출했다. ‘반추’가 수록된 5집을 발표한 유익종은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던 리메이크 앨범을 내놓는다. 앞으로 나올 3장의 기획 앨범 중 첫 번째라는 의미로 이름 붙인 < 3분의 1 > 앨범에서 여진의 ‘그리움만 쌓이네’, 조용필의 ‘들꽃’, 최성수의 ‘해후’ 등을 불러 오랜 소원을 풀었다. 1998년에 발표한 6집에는 ‘그리운 얼굴’이 주목받으며 매스컴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 앨범에는 따로또같이의 ‘나는 이 노래하리오’의 두 가지 버전을 수록해 자신의 스타일과 유행하는 현재의 음악 스타일을 비교하였다. 1999년 묻어만 두기엔 아까운 노래들로만 모은 < Worst > 앨범을 발표한 그는 최근 미사리에서 라이브로 팬들을 만나며 7집을 구상하고 있다.
이장희는 자신의 삼촌과 가수 조영남이 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것을 보고 반해, 음악을 시작했다. 고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한 뒤, 룸펜 기질이 있던 그는 학교를 중도에 그만 두고 당시 유명했던 음악 살롱 < 세시봉 >에서 시를 외우고 팝송을 부르며 많은 여학생 팬들을 몰고 다녔다. 1972년, 빨간 재킷에 특유의 콧수염과 담뱃대를 입에 문 얼굴을 드러낸 데뷔 앨범 < Young Festival Vol.1 >에서 ... 이장희는 자신의 삼촌과 가수 조영남이 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것을 보고 반해, 음악을 시작했다. 고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한 뒤, 룸펜 기질이 있던 그는 학교를 중도에 그만 두고 당시 유명했던 음악 살롱 < 세시봉 >에서 시를 외우고 팝송을 부르며 많은 여학생 팬들을 몰고 다녔다. 1972년, 빨간 재킷에 특유의 콧수염과 담뱃대를 입에 문 얼굴을 드러낸 데뷔 앨범 < Young Festival Vol.1 >에서 ‘그 애와 나랑은’을 히트시킨 그는 ''73년 앨범에서 ‘그건 너’를 히트시키며 아이돌스타로 떠올랐다. 그룹 동방의 빛을 결성해 당시 리사이틀이란 이름으로 유행하던 라이브 공연을 펼치며 절정의 인기를 과시했고, 1974년에는 영화 < 별들의 고향 > 음악을 작곡해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전국적으로 히트시켰다. 하지만 김민기, 양병집,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양희은 등이 활동하며 트로트 문화에 일침을 가한, 음악적으로 풍성한 수확을 누렸던 1970년대 초반의 이 르네상스는 1975년 5월 긴급조치 9호로 인해 대중가요에 대한 대대적인 검열이 이루어지면서 급격히 퇴락 한다. 정부에서 허락 받은 노래만 불러야 했던 탄압은 이장희에게도 예외가 아니었고 그의 모든 곡들은 퇴폐적이고 국민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고 말았다. 독재 정권의 주도자는 “잠 못 드는 이유는 바로 너”라는 가사가 자신을 빗대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장희는 같은 해 11월, 대마초사건으로 이종용, 윤형주, 김세환, 신중현, 김추자 등과 함께 구속되고, 활동을 정지 당한다. 중저음의 음색을 지닌 그의 곡들은 뛰어난 강근식의 필링이 주조된 ‘띵~’하는 사운드로 대표되는 것으로 포크적 이였지만 분명 두터운 음색과 비음에서 사이키델릭의 요소를 느낄 수 있고 ‘한 소녀가 울고 있네’와 같은 곡은 전적으로 이러한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뛰어난 곡이다. 또한 그의 가사는 추상적이고 시적인 가사 위주의 풍토를 이후 구어체적이고 현대적인 가사로 탈바꿈하는데 많은 공을 세워, 당시 청년 문화의 표준적인 감성체계를 일구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동아방송에서 DJ로 절정의 인기를 누리며 조영남, 김세환, 정미조, 송창식 등에게 곡을 주었던 그는, 활동이 정지되자 그룹 사랑과 평화를 출범시킨다. 작곡가란에 이름을 내 걸 수 없어서 가명을 사용했지만 ‘장미’, ‘한 동안 뜸했었지’, ‘어머니의 자장가’는 모두 그의 노래였고 이런 숨은 노력은 이 그룹을 최고의 연주팀으로 만들었다. 해금 후 1982년 ‘진정 사랑해’가 든 솔로 앨범을 발표하기도 한 그는 녹음실과 의상실을 운영하며 사업가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김현식의 앨범을 제작하던 중 부도를 맞고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변두리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재미교포들을 상대로 노래를 부르며 가끔씩 임병수 등에게 곡을 주며 국내에도 소식을 알렸다. 한 동안 국내 상황을 관망하던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난 이후 자신의 마지막 솔로 앨범을 내놓는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 곡이 들어 있는 이 앨범에서는 ‘솜사탕’이 라디오를 탄다. 같은 뮤지션의 길을 걸었던 동생 이승희의 죽음으로 고국을 찾기도 했지만, 이장희는 현재 한인 사회에서 가장 큰 라디오 방송국 < 라디오 코리아 >를 운영하며 사업가로서 지내고 있다. 카리스마를 뽐내던 콧수염도 밀고.
“오늘 내가 디딘 자국은 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리라”. 선구자적인 발상으로 조국의 독립과 자주를 위해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았던 백범 김구 선생님의 이 말을 그대로 옮겨온다면, 오늘날 이 말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대중 음악의 마지막 투사 정태춘(1954년)일 것이다. 그는 < 실업극복국민운동 >부터 시작해 <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 북한동포 기금마련 < 한가족 열린 음악회 >, < 고 문익환 목사 ... “오늘 내가 디딘 자국은 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리라”. 선구자적인 발상으로 조국의 독립과 자주를 위해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았던 백범 김구 선생님의 이 말을 그대로 옮겨온다면, 오늘날 이 말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대중 음악의 마지막 투사 정태춘(1954년)일 것이다. 그는 < 실업극복국민운동 >부터 시작해 <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 북한동포 기금마련 < 한가족 열린 음악회 >, < 고 문익환 목사 헌정 음반 >, 서구의 문화침탈에 대항한 <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 >까지 자신의 참여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사회개혁의 기치를 빼어들었다. 그는 비록 김민기와 같이 시대적 요청의 화합물이 되거나 서태지와 같은 권능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 나간 파워맨은 아니었지만, 고군분투하여 따낸 사전검열제도폐지와 끔찍한 진실의 현장을 포착한 < 아! 대한민국 >, < 92년 장마, 종로에서 > 등으로 그 동안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지 못했던 소위 운동권의 저항가요들을 뛰어넘었다. 그것은 대학이란 포장지로 감싼 운동권 가요의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는 민중의 노래였으며 오랜 시간 다져진 글래디에이터의 자신에 찬 고백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고 중학교에 들어서는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 이 농부의 아들은, 고등학교 때는 현악반에 다니면서 음악대학에 대한 꿈을 키운다. 하지만 청년시절의 방황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지도 선생님과의 이별은 그를 어두운 사춘기적 자화상 속에서 살게 했고, 재수와 함께 시작된 여러 번의 가출은 이 우울한 시인을 젊은 날의 불안한 군상들 속으로 인도했다. 그는 마음을 잡지 못했고 결국 군대를 가야했다. 이미 학창시절에 곡을 쓸 줄 알았던 그는 이 시절에 ‘서해에서’, ‘시인의 마을’, ‘사랑하고 싶소’와 같은 곡들을 만들었으며, 차근차근 모아두었던 곡들로 제대 후 평론가 최경식의 주선에 의해 서라벌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게 되었다. 1978년 말에 발표한 첫 번째 음반은 엄청난 대중적인 파고를 일으키며 정태춘을 스타덤으로 인도했다. 비록 많은 가사들이 검열에 의해 수정되긴 했지만 그는 ‘시인의 마을’로 1979년 MBC 신인가수상을 수상했으며 ‘촛불로’ TBC 방송가요대상 작사부문을 받았다. 그리고 이 신인가수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978년 만난 인생의 동반자 박은옥과 1980년 결혼식을 올린다. 불교적 색채를 드러낸 2집, 국악과 양악 편곡의 멋진 대비를 보여주는 3집의 실패로 경제적인 압박을 받은 그는 부인 박은옥과 같이 하기 시작한 1984년의 앨범에서 ‘떠나가는 배’로 또 다시 스매시 히트를 터트린다. ‘사랑하는 이에게’라는 스테디 리퀘스트곡을 남긴 이 음반은 포크적 색채를 버리고 스트링 세션 위주의 편곡으로 좀 더 대중적으로 다가간 앨범이었다. 음악을 포기할 마음까지 먹었던 그는 이 음반의 성공으로 다시 활기를 되찾았으며 1985년 1월부터 시작된 < 정태춘.박은옥의 얘기 노래마당 >라는 공연을 벌였다. 자신의 음악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 이 공연에서, 자연스럽게 사회적인 문제들을 얘기할 수 있는 솔직한 태도가 좋았던 그는 TV를 배제한 활동을 계속했으며 ‘북한강에서’, ‘붕숭아’와 같은 곡으로 계속 대중적인 인기를 모았다. 민주화 투쟁과 6.29 선언 등으로 변화한 국내의 분위기를 실감한 그는 검열을 의식해 발표하지 못했던 곡들을 모아 < 무진 새노래 >라는 타이틀로 내놓으며, 이 때부터 달라진 사회적인 시각과 국악에 대한 애정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엉켜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1988년부터는 <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 >라는 공연을 펼쳐 외세의 시각이 진실인 것처럼 되어 있는 현 세대를 교정하는 작업을 시작했으며, 같은 해, 청계피복노조 지지공연을 시작으로 전교조 지지공연, 전노협 지지공연 등에 참석하거나 주도적으로 행사를 만들어 대중집회의 단골주자로 부상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만들어진 < 아, 대한민국 >이 1990년 발효된 새 음비법을 따른 공륜에 의해 거부당하자, 음반을 불법 복제 테이프로 만들어 발표하며 전면적인 투쟁을 선포했으며1991년 1월 29일 < 음반 및 비디오에 관한 법률 개악 저지를 위한 대책위원회 >의 위원장을 맡아 반대 성명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사전검열제도 폐지와의 기나긴 투쟁이 시작된다. 그는 계속해서 < 92 장마, 종로에서 >를 테이프로 제작해 배포했으며 이 앨범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상당한 판매량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의 피땀 어린 노력이 배어 있는 사전 심의 조항 폐지 운동은 1995년 11월 7일 국회를 통과하며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한 힘없던 시인의 승리는 이렇게 기나긴 길을 돌아서 찾아왔다. 그의 고생을 우리는 피상적으로밖에는 알 수 없지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감동과 환희의 순간이었다. 1998년 정태춘은 늘 함께 해온 부인 박은옥과 함께 20주년 기념 음반을 발표했다. 함춘호, 조동익 등의 일급 세션이 참여한 이 앨범에서는 초창기 서정미의 단아해진 멜로디들을 들을 수 있으며 한 층 더 깊이가 새겨진 선동성을 읽을 수 있다. 포크 음악인들 위주의 중견 가수들과 함께 위성방송에 음악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콘텐츠 회사 S.O.K를 설립한 그는 평생 넘어야 할 산처럼 버티고 있는 국악에 대중적인 접근을 꿈꾸며 지금도 대중 집회를 빠짐없이 순회하고 있는 이 시대 민중의 거울이다.


사회성 짙은 "한국적 포크"를 추구해온 대한민국의 가수, 시인, 싱어송라이터, 문화운동가, 사회운동가이다. 서정성과 사회성을 모두 아우르는 노랫말을 직접 쓰고 이를 국악적 특색이 녹아 있는 자연스러운 음률에 실어서 작품을 발표하기 때문에 한국의 대표적인 음유시인으로 불린다. 이번 내레이션 진행은 그의 첫 영화작업으로, ‘블랙딜’ 기획안을 보고 한번에 흔쾌히 작업에 참여하였으며, 울림있는 내레이션으로 다큐멘터리 영화에 진정성을 더했다.

Album
1978 《시인의 마을》
1980 《사랑과 人生과 永遠의 詩》
1983 《떠나가는 배(이어도)》
1985 《북한강에서》
1988 《정태춘 박은옥 무진 새노래》
1993 《92년 장마, 종로에서》
1995 《정태춘 박은옥 - 20년 골든》
2002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2012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멤버 : 유시형, 유의형 멤버 : 유시형, 유의형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던 노사연은 1978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돌고 돌아가는 길’이라는 곡으로 금상을 받으면서 가요계에 발을 들였다. 이 곡은 그녀의 이모인 가수 현미의 소개로 만난 작곡자가 만들어 준 곡으로, 한의 정서가 우리 고유의 언어로 표현된 멋있는 곡이었다. 이 대회에선 송골매의 전신인 활주로의 ‘탈춤’, 임백천과 고영선의 ‘한마음’ 등이 입상을 했으며 입상은 못했지만 심수봉이 ‘그때 그 사람’으로...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던 노사연은 1978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돌고 돌아가는 길’이라는 곡으로 금상을 받으면서 가요계에 발을 들였다. 이 곡은 그녀의 이모인 가수 현미의 소개로 만난 작곡자가 만들어 준 곡으로, 한의 정서가 우리 고유의 언어로 표현된 멋있는 곡이었다. 이 대회에선 송골매의 전신인 활주로의 ‘탈춤’, 임백천과 고영선의 ‘한마음’ 등이 입상을 했으며 입상은 못했지만 심수봉이 ‘그때 그 사람’으로 후에 많은 사랑을 받았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이광조, 이문세, 해바라기 등과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던 그녀는 1983년 ‘돌고 돌아가는 길’의 작곡가 김욱에게 ‘님 그림자’란 곡을 받는다. 뛰어난 서정성으로 감성을 자극하는 이 곡은 대학가와 젊은층을 중심으로 눈에 띄지 않게 꾸준한 사랑을 쌓아간다. 당시 젊은이들에게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 영11 >에 나와 개그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가수로서보다는 개그맨으로서의 위상으로 오랫동안 높은 인기를 누리던 노사연은 1987년 ‘우리에겐’이라는 곡이 들어 있는 앨범을 내 놓는다. 개그맨의 이미지를 벗고 가수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굳히기 위해 내 놓은 이 앨범은 그러나 그녀의 가창력을 확인시키는데 그쳤을 뿐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계속 이어져 2년 후에 내놓은 2집도 처음에는 아무런 시장성도 발휘하지 못한다. 계속 오락 프로그램이나 라디오 프로그램의 게스트로 나오며 만능 엔터테이너로서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던 그녀는 TV 오락 프로그램인 < 일요일 일요일 밤에 >에 고정 게스트로 나가면서 시청자들의 눈에 띄게 된다.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진행자인 주병진, 이경규 등을 최고의 스타로 부각시킨 이 프로그램에서 노사연은 2집의 수록곡 ‘만남’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불러 결국 1991년 최고의 인기곡으로 만들고 만다. 2년이나 늦게 히트된 ‘만남’이란 곡으로 가수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노사연은 연말 각종 시상식을 휩쓸면서 가수왕의 자리에 오르고 계속해서 3집의 수록곡 ‘이 마음 다시 여기에’로 계속해서 많은 사랑을 받는다. 이로서 그녀는 ''90년대에 비 트로트계열의 성인 가요로 가요계의 정상을 밟은 유일무이한 가수가 되었으며 조선일보 선정 건국이후 가수베스트50에서 일약 40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남편 이무송과 결혼하기 전에 ‘사는게 뭔지’를 TV에서 불러 노래의 인기에 혁혁한 공을 세운 노사연은 현재 많은 방송 프로그램에서 게스트로 활약하고 있으며 새 앨범을 발표하기 위해 체코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등 6년만에 가수로의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보헤미안이자 아방가르드적 사고의 전환을 보여준 한대수(1948년)는 한국적 포크 음악의 창시자이자, 자신의 생각을 음악으로 가장 리얼하게 표현한 시인이요 아티스트였다. 그의 음반 활동은 부침을 거듭하며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고 실험을 거듭하며 이 땅의 뮤지션들과 음악애호가들에게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지만, 이 땅의 음반 산업은 이 고독한 선구자를 시대의 부랑아로 만들었다. 과연 우리 음악의 ... 우리나라 최초의 보헤미안이자 아방가르드적 사고의 전환을 보여준 한대수(1948년)는 한국적 포크 음악의 창시자이자, 자신의 생각을 음악으로 가장 리얼하게 표현한 시인이요 아티스트였다. 그의 음반 활동은 부침을 거듭하며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고 실험을 거듭하며 이 땅의 뮤지션들과 음악애호가들에게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지만, 이 땅의 음반 산업은 이 고독한 선구자를 시대의 부랑아로 만들었다. 과연 우리 음악의 미래는 있는 것일까? 그는 어린 시절 핵물리학자인 아버지의 실종으로 조부모와 살았으나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소식을 접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한동안 외국 생활을 적응하지 못했던 그는, 홀이라는 상담교사를 만나면서 음악에 대한 자신의 능력을 감지하게 된다. 대학에서 수의학을 전공하다 사진학교를 다니며 사진에 취미를 붙인 한대수는 1968년 귀국해 국내에서 포크가수의 삶을 시작한다. 디자인 포장센터에서 3급 공무원 디자이너로 일하며 대학가에서는 자신의 철학과 인생이 담긴 노래로 인상적인 공연을 펼친 그는, 자신이 만들고 김민기가 부른 ‘바람과 나’와 양희은이 부른 ‘행복의 나라’로 청중을 사로잡는다. 군 제대 후 곧장 앨범 제의를 받은 그는 하루만에 녹음을 마친 역사적인 데뷔 앨범에서 ‘물 좀 주소’로 전국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외국의 곡을 번안한 곡만을 부르던 당시 포크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하지만 코리아 헤럴드에서 기자 겸 사진작가로 활동하던 중에 발표한 그의 두 번째 앨범은 체제 전복적인 음악이라는 당국의 해석에 따라 수거령이 내려졌으며 1집도 같이 판금조치 당하는 불운을 겪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과 맞지 않는 시대를 사는 한국과 작별하고 미국행 비행기에 다시 오른다. 그는 미국에서 대체적으로 평온한 생활을 보냈다. 아버지와의 관계나 사진작가로서의 직업은 그에게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록밴드 징기스칸을 결성해 클럽 CBGB 등에서 활동하며 음악에 대한 열정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20년간 같이 살았던 분신과도 같았던 아내와 헤어진 뒤 그의 영혼은 다시 가는 전선 위를 건너는 것처럼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졌으며 황폐해졌다. 이러한 정신적 방황은 곧 14년만에 작업한 새 앨범으로 이어졌다. 이 앨범에는 1집에 실렸던 ‘하루 아침’을 약간 바뀐 가사로 다시 실었으며 아내와의 이별에 대한 회한이 서린 ‘나 혼자’, ‘One day'' 등이 실려 있다. 이 후 그는 연이어 재즈를 실험한 < 기억상실 >, 미니멀리즘으로 내달린 < 천사의 담화 > 등의 앨범을 연달아 내며 실험의 선구자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계속 사진 작가로 활동하며 다시 소시민적인 일상으로 돌아간다. 잊혀졌던 그를 다시 재조명한 것은 국내가 아니라 일본이었다. 일본의 록 스타 카멘 마키(Carmen Maki)를 앞세운 후쿠오카 공연은 그를 한국의 대표로 선정해 끊임없는 요청을 해 왔으며 자신을 한국의 대표가수로 선정한 그들의 태도에 반신반의하며 김도균, 이우창 등과 함께 연습한 한대수는 공연 당일 최고의 인기를 모았다. 일본에서의 호응으로 국내에서도 갑작스럽게 환대를 받은 그는 올림픽 경기장에서 펼쳐진 유니텔 록 콘서트 < Koreanism >과 양희은과 < 아주 특별한 만남 > 등의 공연을 가지며 하드록 풍의 앨범 < 이성의 시대 반역의 시대 >를 내 놓는다. 그는 영화 < 공동경비구역 JSA >에 수록된 ‘하루 아침’과 ‘하룻밤’으로 계속 팬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여러 기획사를 전전하던 끝에 나온 2001년의 앨범 < Eternal Sorrow >에서 “음악적으로 한계를 느낀다”며 이 앨범이 마지막이 될 것임을 암시했다. 음악을 허무는 그의 사고가 곳곳에 펼쳐 있는 이 앨범에는 충격적인 인트로와 어린 아내에게 바치는 ‘To Oxana'', 디스코 버전으로 재 수록한 ‘옥의 슬픔’, 배리 맥과이어(Barry McGuire)의 ‘Eve of destruction''을 리메이크한 ‘멸망의 밤’ 등을 싣고 있다.
기타를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 품목이 된 스테디셀러 < 이정선 기타 교실 >의 저자 이정선(1950년)은 김민기가 올라선 봉우리나 ‘언더그라운드의 대부’라는 조동진이 지향하는 지점과도 일치하는 거장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고등학교 1학년, 비교적 늦은 나이에 기타를 처음 시작한 그는 군악대에서 복무한 뒤, 복학하기 전 아르바이트 삼아 노래를 불렀던 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음악을 하게 되었다. 1973... 기타를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 품목이 된 스테디셀러 < 이정선 기타 교실 >의 저자 이정선(1950년)은 김민기가 올라선 봉우리나 ‘언더그라운드의 대부’라는 조동진이 지향하는 지점과도 일치하는 거장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고등학교 1학년, 비교적 늦은 나이에 기타를 처음 시작한 그는 군악대에서 복무한 뒤, 복학하기 전 아르바이트 삼아 노래를 불렀던 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음악을 하게 되었다. 1973년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 어느 정도 이름을 얻은 그는 다음 해 포크록 스타일의 음반을 발표한다. 하지만 “서로를 믿지 않는 사람만이 거리를 덮었네”라는 가사를 담은 ‘거리’라는 곡과 앨범 표지의 장발이 문제가 돼 앨범 전체는 수거령이 내렸고 모든 곡이 금지곡 목록에 올랐다. 하는 수 없이 머리를 짧게 깎고 ‘거리’를 뺀 음반이 1975년 재발매 되었고 비로소 ‘섬 소년’으로 그는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1974년부터 이광조, 한영애 등과 시작된 해바라기의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76년에 발표된 두 번째 음반에서 대통령 박정희 작사, 작곡의 ‘새마을노래’를 넣어 역시 판매금지를 당했다. 해바라기에서 ‘구름, 들, 꽃, 연인’ 등으로 많은 인기를 모은 그는 팀이 해체된 후 이광조, 엄인호와 같이한 삼인조 그룹 풍선의 앨범을 제작했고, 왕영은이 소속된 혼성중창단 징검다리를 해변가요제에 내보내 인기 가수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징검다리는 ‘여름’이란 곡으로 대상을 받았다. ’80년대 후반에는 국내 최초로 블루스 음악을 시도한 신촌블루스의 창단 멤버로 한국적인 록의 지평을 확산시킨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경찰들에게 요주의 인물이었던 그는 1985년 김광석의 리메이크 곡으로 유명해진 ‘그녀가 처음 울던 날’이 수록된 < 30대 >라는 솔로 음반에서 ‘우연히’로 어쿠스틱 기타의 진수를 보여주었으며, 신촌블루스에서 활동하던 1988년에는 < Ballads >란 앨범에서 후에 조하문의 리메이크 곡으로 더욱 사랑 받은 ‘같은 하늘아래’, 봄여름가을겨울에 의해 다시 불려진 ‘외로운 사람들’로 인기를 얻었다. 1994년에는 언플러그의 세계적 유행을 수렴해 < Unplugged >란 앨범으로 기타로 낼 수 있는 화성의 세계를 모두 보여주었다. 자신의 음악을 기타음악이라고 표현하는 그는 1991년 이정선 음악사라는 출판사를 만들어 < 이정선 기타 교실 >로 기타인구의 저변을 넓히며 ‘닥터 기타’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현재는 서울예전, 동덕여대, 동아전문대에 출강하면서 국악에 대한 관심을 조금씩 키워가고 있다. 그의 앞으로 나올 솔로 음반들은 프로젝트성 앨범들이 될 것으로 보이며 다른 가수들의 참여를 많이 유도하는 대신 자신의 보컬을 상대적으로 조금만 보여줄 계획이다.
언더그라운드계의 대부 조동진(1947년)은 슈퍼스타의 광채 나는 옷을 입거나 해서 반도 전역을 들끓게 하는 폭발적인 호응으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아니라 30년 이상을 조용한 읊조림으로 진한 향기를 내뿜고 있는 우리 음악계의 큰산이다. 그의 향기를 쫓아온 후배들은 조동진 사단을 형성하고 레이블을 만들면서 그가 했던 음악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파하며 시대를 쫓아 인기의 허상을 정복하는 가수들과는 다른 무리를 형성... 언더그라운드계의 대부 조동진(1947년)은 슈퍼스타의 광채 나는 옷을 입거나 해서 반도 전역을 들끓게 하는 폭발적인 호응으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아니라 30년 이상을 조용한 읊조림으로 진한 향기를 내뿜고 있는 우리 음악계의 큰산이다. 그의 향기를 쫓아온 후배들은 조동진 사단을 형성하고 레이블을 만들면서 그가 했던 음악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파하며 시대를 쫓아 인기의 허상을 정복하는 가수들과는 다른 무리를 형성하고 있다. 아버지가 영화감독 이였기 때문인지 몰라도, 조동진의 어린 시절 꿈은 영화 배우였다. 그래서 그는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밥딜런(Bob Dylan)을 비롯한 미국의 포크 음악에 영향을 받으면서 음악 쪽으로 급선회했고 김민기와는 달리 서정적이고 담담하게 삶의 편린들을 고백하는 시인이 되었다. 그는 1968년 ‘다시 부르는 노래’를 작곡하면서 음악인이 되었고 이 노래를 이수만과 서유석이, ‘작은 배’를 양희은이 부르면서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게 쑥스러워서”라는 이유로 10여 년이 지나고 나서야 자신의 솔로 음반을 발표한다. 조동진은 5장의 정규 앨범밖에는 내지 않았지만 ‘행복한 사람’, ‘겨울비’가 들어 있는 1집과 ‘나뭇잎 사이로’와 ‘어둠 속에서’가 들어 있는 2집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팔리고 있는 스테디 셀러이며 장필순이 부르기도 했던 3집 수록곡 ‘제비꽃’은 아직까지도 리퀘스트 되고 있는 애청곡 중의 하나이다. 중저음과 좁은 음역 사이에서 급격한 피치를 올리지 않는 그의 음악은 단아한 신디사이저 가 통기타 반주가 전부이지만, 음유시인처럼 노래로만 말을 하는 울림은 어떤 화려한 세션들로 가득 찬 음악들보다도 우리의 인식 세계를 공명하고, 곱씹을수록 새로운 맛을 내는 그의 가사는 어떤 미사여구로 꾸민 시나 직설적인 가사보다도 우리를 주억거리게 한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기로 유명한 공연을 하고 있으며 따르는 후배들과 같이 만든 하나뮤직의 대부로 지지자들에게 조언과 후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리고 1999년에는 영화 < 산책 >의 음악을 맡아 주제곡인 ‘숲을 찾아서’로 다시 한번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초창기의 명성에 비해 그가 내놓은 후반기의 4, 5집은 그다지 주목을 받진 못했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현자의 목소리로 차분히 우리를 위로했다. 그리고 계속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우리의 뒤에서 변하지 않는 산처럼 버티고 있을 것이다.
멤버 : 한철수, 한철호, 홍성삼 멤버 : 한철수, 한철호, 홍성삼
1970년대를 풍미한 통기타 가수에서 최근 세시봉 열풍으로 다시금 전설을 이어가며 한결같은 목소리로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는 음유 가객. 자타가 공인하는 자전거 마니아이기도 한 그는 지난 20년 동안 틈만 나면 한강으로 나가 한강의 바람과 냄새에 몸을 실어 왔다. 은륜 위에서 만나온 한강을 서슴없이 '애인'이라 부른다. 1970년대를 풍미한 통기타 가수에서 최근 세시봉 열풍으로 다시금 전설을 이어가며 한결같은 목소리로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는 음유 가객. 자타가 공인하는 자전거 마니아이기도 한 그는 지난 20년 동안 틈만 나면 한강으로 나가 한강의 바람과 냄새에 몸을 실어 왔다. 은륜 위에서 만나온 한강을 서슴없이 '애인'이라 부른다.
멤버 : 김흥수(기타), 이명훈(보컬), 문장곤(베이스), 정원찬(키보드), 송용섭(드럼) 멤버 : 김흥수(기타), 이명훈(보컬), 문장곤(베이스), 정원찬(키보드), 송용섭(드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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