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지성의 청소
청소한 자국마다, 세상 모든 공부
‘과자 부스러기가 더러운가, 엎질러진 우유가 더러운가.’ 이것은 청결에 대한 개인적 기준이나 선호도를 묻는 질문이 아니다. 바닥에 앉고 눕는 생활 습관과 집 안에서도 신발을 신는 생활 습관의 차이가 ‘공간을 통제하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들여다보기 위한 것이다. 특정 지역의 사람들이 ‘더러움’을 인식하는 과정, 그리고 이를 깨끗하게 만드는 기술은 그들이 오랫동안 구축해온 문화를 반영한다. 즉, 청소라는 행위를 뜯어보면, 가구를 놓는 위치에서부터 난방을 하는 시점까지, 인간이 자신의 ‘둥지’를 어떻게 만들고 보존해왔는지 조망할 수 있다.
또 청소를 통해 더러움을 치워 없애는 ‘사람’에 대한 역사적?사회적 차별을 짚어볼 수도 있다. 저자는 오래전 사회생활을 갓 시작하면서 사무실의 ‘청소 담당’이 되었을 때, 그 공간에서 일하는 모두에게 자신이 영향력을 가진다는 것을 실감했다. 사무용품이 어디에 있는지, 우편물이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등을 하루에도 몇 번씩 물어보는 직원들에게 저자는 ‘대답’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공간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그만한 대우를 받지는 못한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엄마! 내 신발주머니 어디 갔어?”라고 물어보면서도 “내 스케치북 왜 버렸어!”라고 쉽게 화를 내었던 것과 같다.
청소에 대한 사유는 결벽증이나 저장강박증 같은 심리학적 탐구로도 나아간다. 또 본질적으로 현대인의 청소가 쓰레기를 ‘내 담장’ 안에서 밖으로 옮기는 일이라는 점에서, 소유의 개념과 자연의 의미를 되짚어보기도 한다.
청소를 합니다, 삶이 설레지 않으면
한참 실의에 빠졌던 사람이 극복의 신호를 보이는 순간은, 방치해두었던 자신의 공간을 청소하는 때다. 단순히 공간을 깨끗하게 만들고 싶어서가 아니라, 에너지를 느끼고 싶어서다. 저자는 무기력할 때 나를 위한 공간을 청소하다 보면, ‘한번 해보자!’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고 말한다. 내가 주체가 되어 주변을 깨끗하게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은 나의 힘을 실감하게 한다.
이와 함께 저자는 인간의 생활에서 더러움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는 것을 강조한다. 먼지가 ‘생긴’ 것을 불편하게 느끼는 것과 먼지가 ‘생길까 봐’ 불편해하는 것은 다르다. 청소가 주는 자유를 아는 사람은 언제든지 다시 깨끗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공간을 자연스레 더럽히는 행동을 오히려 구속하지 않는다. 다시 지저분해지면 그때 또 치우면 된다. 삶도 그렇다. 힘든 일이나 무거운 감정 자체를 두려워하기보다 그것들을 한번씩 ‘청소한’ 자리에 다시 에너지를 채우면 된다고, 저자는 청소의 즐거움을 삶에 빗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