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학생들은 글쓰기를 어떻게 배우는가?
서울대 최고의 인기교양 강좌를 책으로 만나다
정답이 없고, 교수의 강의도 없는 수업이 있다면 어떨까? 그런데도 학생들로부터 최고의 명강의라는 찬사가 쏟아지는, 아주 독특한 수업이 있다면? 이 책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는 서울대에서 만 6년, 12학기째 인문학 글쓰기 강의를 운영해온 이상원 교수가 학생들과 만나온 경험과 노하우를 담아낸 아주 특별한 강의록이다. 서울대 학생들로부터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개성과 장점을 충분히 살리면서도 글쓰기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던 수업” “명불허전”이라는 찬사를 받은 저자의 강의는 수강신청 시작과 동시에 마감될 정도로 높은 인기를 자랑한다. 저자는 열성을 다해 글을 쓰고 친구들의 글을 진지하게 읽으며 평하는 학생들, 글로 소통하는 내밀한 기쁨을 고백해오는 학생들을 보며, 더 많은 이들에게 글쓰기가 즐거운 작업이 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구상했다.
서울대의 글쓰기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독자들이 생생하게 경험해볼 수 있도록 책 속에는 인문학 글쓰기 강의의 실제 커리큘럼을 충실히 담았다. 이와 함께 학생들이 작성한 글 11편을 함께 수록해, 이 시대 대학생들이 글로 어떻게 자신의 삶과 치열한 고민을 표현해내는지 엿볼 수 있다.
놀이와 수업의 경계를 허무는 글 놀이판
이상원 교수는 자신의 글쓰기 수업을 한 마디로 “함께 쓰고 함께 읽기”라고 정의한다. 논문 쓰는 법 위주로 전개되는 다른 수업과는 달리 그의 인문학 글쓰기 강의에선 각기 분량이 다른 글 세 편을 아무런 형식적 제약 없이 쓰고 함께 읽는 것이 원칙이다. 자신을 표현하는 글은 한쪽 이상, 감상 에세이는 3쪽 이상, 주제 에세이는 5쪽 이상 쓰는데, 수업 시간마다 3~4명의 글쓴이들과 직접 만나고 미리 읽어둔 그들의 글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이어진다. 이상원 교수가 보기에 글쓴이와 독자가 직접 만나는 일은 쓰고 읽는 능력을 본질적으로 향상시키는, 가장 빠르고도 즐거운 길이었다. 묻고 대답하는 것이야말로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처음엔 죄인이라도 된 양 앞에 나와서 주눅이 들어 있던 학생들도 두 번째 글, 세 번째 글로 이어지면 자신이 글을 써낸 주제에 대해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진심으로 궁금해하며 묻기에 이르렀다.
수업은 강의실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온라인 강의실에서도 떠들썩한 글 놀이판이 벌어졌다. 글 세 편을 쓰는 동안 25명의 학생들은 온라인 강의실(ETL)에 올라온 모든 글을 읽고 답글을 달아야 했는데, 각자 자료를 찾아가며 “글쓴이에게 도움이 될 만한” 답글을 쓰기 위해 애썼다. 글의 구조를 지적하는 학생, 내용에 공감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학생, 맞춤법과 띄어쓰기 오류를 고쳐주는 학생, 긍정적인 부분을 애써 찾아내며 따스하게 격려하는 학생……. 자신의 글에 대한 24명의 코멘트를 받아든 학생들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제 글을 읽고 평해준 건 평생 처음”이라며 감격했다.
사실 한 학기에 세 편의 글을 쓰고, 다른 학생들의 모든 글을 읽은 뒤 답글을 다는 일이 만만한 과정은 아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글쓰기란 새삼 다른 차원의 놀이판이 되어 있었다. 글을 쓰고 읽고 소통하며 나와 타인에 대한, 삶에 대한 관심을 넓혀가는 “인문적 즐거움”을 비로소 발견하게 된 것이다.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에 없는 것
이상원 교수의 강의에는 없는 게 많다. 우선 그는 “글쓰기에는 정답이 없다”고 못박는다. 정답이 없으니 시험도 없고, 그 흔한 교수 첨삭 과정도 생략된다. 이상원 교수에게 글쓰기란 애초에 시험으로 평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을 뿐더러, 글에서 잘된 점을 칭찬하기보단 잘못된 점을 지적해야 하는 첨삭 방식도 불편했다. 자신의 지적을 학생들이 정답으로 받아들일까 우려되기도 했다.
정답이 없는 글쓰기 강의, 자유롭게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는 강의 시간을 만들기 위해 이상원 교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선생의 역할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는 75분간의 강의 시간 동안 일방적으로 설명하고 가르치는 데 단 1분도 사용하지 않는다. 글쓰기란 바느질이나 낚시질처럼 무작정 직접 뛰어들어보는 수밖에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백날 앉아서 서론과 본론이 어떻다고 설명을 듣는 방식과 달리“바늘에 손이 찔리고 줄이 엉켜버리는”사고를 직접 해결해보면서 자신만의 방법론을 터득하는 과정은 놀라운 효과를 나타냈다. 글쓰기의 바다에서 능동적으로 헤엄칠 수 있게 된 학생들은 한 편 한 편, 눈에 번쩍 뜨이는 글을 써냈다.
이 시대 청춘들의 뜨겁고 아픈 삶
인문학 글쓰기 수업의 첫 단계, 한 페이지로 자신을 소개하는 글을 쓸 때부터 학생들은 기발하고도 창의적인 방법을 동원했다. 스스로 홈쇼핑 쇼호스트가 되어 자신을 판매하는 글, 같이 사는 고양이의 눈으로 자신을 관찰하는 글, 20대에 삶을 마감하게 된 상황을 가정하고 쓴 유서……. 감상 에세이와 주제 에세이로 진행되면 이야기마당이 더욱 넓어졌다. 누군가는 정성껏 반찬을 만들어 딸에게 올려보내는 엄마의 택배상자 이야기를 풀어놓았고, 누군가는 어린 시절 뛰놀던 장소를 머릿속에서 탐험하며 추억을 되새겼다. 연극이나 학생신문 등 관심사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었고, 서로 지긋지긋하게 싸우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워하다 당장 이혼하라고 소리를 질렀다는 고백도 들려왔다.
20대는 책도 안 읽고 세상 돌아가는 데는 관심도 없으며 인생을 고민하는 대신 스펙 쌓기에만 열중한다는 어른들의 비판은, 그가 보기에 편견에 찬 말일 뿐이었다. 그가 만나본 대학생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글 속에 자신의 약점과 치부들까지 솔직하게 드러낼 줄 아는 용기도 갖추고 있었다. 이상원 교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동료들의 글을 통해 자기를 돌이켜보고 반성하고 새로운 결심까지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 젊은이들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새로운 소통의 가능성을 위하여
글쓰기 교육은 최근 몇 년 동안 봇물 터지듯 대학과정 속에 자리잡았다. 검증된 교수법이 없어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 가야 할 상황이었다. 이상원 교수는 단순한 글쓰기 기술을 가르치는 대신 ‘글쓰기의 즐거움’과 ‘인문적 관심’, 즉 글쓰기의 본질에 접근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선 이제껏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방식이 필요했다. 그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해온 ‘선생이 가르치고 학생은 배운다’는 학습 방식을 허물고, 모두가 더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글쓰기 강의 모델을 마련했다.
이 실험적인 교수법은 학생들이 참여해주지 않으면 결코 완성될 수 없었다. 서울대 학생들은 열렬한 관심으로 이 황당하고도 색다른 강의를 채워주었다. 학생들 스스로도 이전까진 자각하지 못했던 소통에 대한 갈증과 의지가 글 속에서, 강의실 안에서 샘처럼 솟아올랐다. 그들은 늘 정해진 분량을 훌쩍 뛰어넘어 이야기를 자유롭게 풀어놓았고, 강의는 매 시간 뜨거웠다. 이상원 교수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성과였다.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글쓰기의 기능이 점점 강화되는 시대,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실 안에서 독자들은 글쓰기를 익히고 또 가르치는 방법에 대한 보다 본질적인 안목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