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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로이드 웨버 뮤지컬 음악 모음집 (Andrew Lloyd Webber - Unmasked: The Platinum Collec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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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앤드류 로이드 웨버 뮤지컬 음악 모음집 (Andrew Lloyd Webber - Unmasked: The Platinum Collection )

Andrew Lloyd Webber 작곡/Murray Head, Sarah Brightman, Michael Crawford, Alex Brightman 노래 외 25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Universal / Verve | 2018년 03월 16일 리뷰 총점7.0 정보 더 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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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로이드 웨버 뮤지컬 음악 모음집 (Andrew Lloyd Webber - Unmasked: The Platinum Collection )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8년 03월 16일
시간, 무게, 크기 500g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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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 Superstar - Murray Head & The Trinidad Singers 선택듣기
  • 02 The Phantom Of The Opera - Sarah Brightman & Michael Crawford 선택듣기
  • 03 Don't Cry For Me Argentina - Julie Covington 선택듣기
  • 04 Stick It To The Man - Alex Brightman & The Broadway Cast Of School Of Ro 선택듣기
  • 05 Love Changes Everything - Michael Ball 선택듣기
  • 06 With One Look - Barbra Streisand 선택듣기
  • 07 Memory* - Nicole Scherzinger 선택듣기
  • 08 No Matter What - Boyzone 선택듣기
  • 09 Buenos Aires - Glee Cast 선택듣기
  • 10 Take That Look Off Your Face - Marti Webb 선택듣기
  • 11 Light At The End Of The Tunnel* - Gregory Porter 선택듣기
  • 12 The Music Of The Night - Michael Crawford 선택듣기
  • 13 Lloyd Webber : Pie Jesu - Anna Netrebko 선택듣기
  • 14 Gethsemane ( I Only Want To Say) - Ian Gillan 선택듣기
  • 15 Any Dream Will Do - Donny Osmond 선택듣기
  • 16 Sunset Boulevard - Original 1993 London Cast Recording - Kevin Anderson 선택듣기
  • 17 Amigos Para Siempre - Sarah Brightman & Jose Carreras 선택듣기
  • 18 Macavity: The Mystery Cat - Wendy Edmead & Donna King 선택듣기
  • 19 I Don'T Know How To Love Him - Yvonne Elliman 선택듣기
Dis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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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소개 (30명)

작곡 : Andrew Lloyd Webber (앤드류 로이드 웨버)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는 '에비타' '오페라의 유령', '캣츠', '스타라이트 익스프레스' '에스펙츠 오브 러브' 등의 작품으로 전세계 뮤지컬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뮤지컬 계의 거장이다. 그의 최근작 '봄베이 드림스'가 브로드웨이에서 공연 중이며 최근에는 웨스트엔드 극장에서 월키 콜린스의 클래식 소설을 바탕으로 한 신작 '더 우먼 인 화이트'...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는 '에비타' '오페라의 유령', '캣츠', '스타라이트 익스프레스' '에스펙츠 오브 러브' 등의 작품으로 전세계 뮤지컬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뮤지컬 계의 거장이다. 그의 최근작 '봄베이 드림스'가 브로드웨이에서 공연 중이며 최근에는 웨스트엔드 극장에서 월키 콜린스의 클래식 소설을 바탕으로 한 신작 '더 우먼 인 화이트'를 선보였다. 또 감독 조엘 슈마허의 연출로 '오페라의 유령'을 영화화해 전세계적인 흥행몰이를 한 바 있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는 토니상 7회, 그래미상 3회, 올리비에상 6회, 골든 글러브상, 오스카상 등의 화려한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2000년에는 리처드 로저스 최우수 뮤지컬상과 크리틱스 서클 최우수 뮤지컬상을 수상하였다. 1992년에 기사 작위(Knighthood)를, 1997년에는 종신작위(House of Lords)을 수여받아, 영국에서 그의 이름을 부를 때는 로드(Lord)라는 존칭어를 수반해야 한다.
배우, 가수 배우, 가수
노래 : Sarah Brightman (사라 브라이트만)
노래 : Michael Crawford (마이클 크로포드)
배우, 가수 배우, 가수
노래 : Alex Brightman (알렉스 브라이트만)
뮤지컬 배우 뮤지컬 배우
노래 : Barbra Streisand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and)는 40여 년의 시간 동안 가수와 배우의 길에서 모두 정상의 자리를 지켜 낸 이른 바 ’미국의 연인’이다. 1942년 뉴욕의 브루클린(Brooklyn)에서 태어난 바브라 스트라이잰드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편모 슬하에서 어렵게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노래 부르는데 남다른 재주를 보인 그녀는 스타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고, 꿈을 이루기 위해 연극 학교인 에라스무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and)는 40여 년의 시간 동안 가수와 배우의 길에서 모두 정상의 자리를 지켜 낸 이른 바 ’미국의 연인’이다. 1942년 뉴욕의 브루클린(Brooklyn)에서 태어난 바브라 스트라이잰드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편모 슬하에서 어렵게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노래 부르는데 남다른 재주를 보인 그녀는 스타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고, 꿈을 이루기 위해 연극 학교인 에라스무스-홀 고등학교(Erasmus-hall high-school)에 입학한다. 연극 학교를 졸업한 후 1960년대 초반 뉴욕에서 무명 배우와 클럽 가수생활을 병행했는데 1961년 아마추어 가수 경연대회에서 우승하고, 1962년 브로드웨이(Brodway)에 입성하여 뮤지컬 배우로서의 화려한 삶을 시작한다. 1962년 ’Can get it for you wholesale’이 뮤지컬 첫 작품이었는데 이 뮤지컬에 쓰였던 곡들은 그녀의 스튜디오 앨범으로 다시 레코딩되어 공식적인 그녀의 첫 앨범 < Pins And Needles >가 만들어진다. 1963년 콜럼비아(Columbia) 레코드와 계약을 맺은 이후 가수로서의 삶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정규 첫 앨범인 < The Barbra Streisand Album >은 탑10진입과 동시에 골드 레코드 획득의 큰 성공을 거둔다. 1964년 < The Second Barbra Streisand Album >, < The Third Album >을 성공시키며 가수로서의 길을 확고히 다졌지만 바브라는 다시 브로드웨이로 돌아간다. 1964년 가수 성공을 발판으로 삼아 당시 브로드웨이 최고의 걸작 < Funny Girl >에 주연으로 출연했고 그녀는 곧 브로드웨이 대 스타로 성장한다.(이 뮤지컬은 4년 후 영화화되었으며 이 영화로 1968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뮤지컬 배우로 각광 받는 동안에도 가수로서의 활동에 소홀하지는 않았다. 1964년 싱글로 내놓은 ’People’이 탑10에 올랐으며 동명 앨범 < People >은 그녀에게 차트 첫 정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1965년 TV 프로그램 < My Name Is Barbra >가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바브라는 5개의 에미상을 수상했고, 이후 1968년 ’Funny girl’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이 시기 그녀는 영화 배우로서 더 두각을 나타내었다. 1969년 < Hello Dolly >에 출연했으며, 같은 해 작품인 < On A Clear Day You Can See Forever >, 1971년 코메디 영화 < The Owl And The Pussycat >, 1973년 < Up The Sandbox > 등이 성공을 거두었다. 가수로서의 성공이 그녀에게 배우로서의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면 영화의 성공은 사운드트랙을 통한 가수로서의 재 성공을 이끌었다. 1973년작 < The Way We Were >, 1977년 < A Star Is Born >은 영화와 사운드트랙이 동시에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The way we were’는 첫 싱글 1위 곡이 되었으며 < A Star Is Born >의 러브테마 ’Evergreen’ 역시 두 번째 싱글 1위 곡이 되어 1970년대 그녀를 최고의 엔터테이너로 규정짓는다. < A Star Is Born >로 바브라는 그래미를 거머쥐었다. 바브라 스트라이잰드는 여러 듀엣 곡으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닐 다이아몬드(Neil Diamond)와의 듀엣곡 ’You don’t bring me flowers’으로 정상을 밟았고, 도나 섬머(Donna Summer)와 함께 ’No more tears (Enough is enough)’를 불러 인기를 얻었다. 듀엣 곡은 80년 작 < Guilty >에서 절정에 이르렀는데 비지스(Bee Gees)와 함께 작업한 이 앨범은 현재까지 바브라 스트라이잰드 최고의 히트 앨범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비지스 멤버들과 그들의 작업 멤버들이 모두 참여한 이 앨범에서는 비지스의 맏형 배리 깁(Barry Gibb)과 그녀의 듀엣 곡 ’Guilty’가 정상을 밟으며 그래미를 수상했고, 국내에서도 큰 사랑을 받은 ’Woman in love’ 역시 정상에 올랐다. 1980년대 영화에서 또 음악에서 그녀의 성공은 꾸준히 이어졌다. 영화 < Memories > 역시 영화와 음악이 모두 인기를 누렸으며(수록곡인 ’Memory’가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곡은 뮤지컬 ’Cats’의 러브송이기도 한다.), 1983년에는 영화 감독으로도 데뷔하여 영화 < Yentl >을 만들었고, 사운드트랙 앨범 역시 큰 성공을 거둔다. 이어진 1985년 작 < The Broadway Album > 역시 차트 정상에 오르며 명성을 이었다. 80년대 후반 이후 영화와 관련되지 않은 가수로서의 정규 앨범을 자주 내어놓지 않았던 바브라 스트라이잰드... 영화 감독과 배우로서의 바쁜 활동이 겹치면서 이러한 모습은 더 심화되었지만 간간이 선보이는 가수로서의 모습, 가수로서의 위상은 변함 없다. 1996년에는 자신이 감독, 주연한 영화 < The Mirror Has Two Faces >의 주제곡 ’I finally found someone’을 브라이언 아담스(Bryan Adams)와 함께 불러 인기를 얻었으며 1997년에는 셀린 디욘(Celine Dion)과의 듀엣 곡 ’Tell him’으로 차트 정상을 밟으며 < Higher Ground >를 히트시켰다. 1999년 < A Love Like Ours >를 선뵈며 40년의 긴 인기행진을 이어가고 훀지만 영화 감독으로서의 활동에 심취해있는 그녀는 최근 ’앞으로 대형 콘서트를 열지 않겠다’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등 가수 활동을 자제하고 있다.
2000년대를 선도했던 걸 그룹 푸시캣 돌스(The Pussycat Dolls)의 메인 보컬리스트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니콜 셰르징거(Nicole Scherzinger)는 섹시하고 화려한 외모, 무엇보다 윤기 있는 보컬 톤으로 인해 팝 팬들 뿐 아니라 국내 가요 팬들의 지지마저 얻어냈다. 싱어송라이터, 댄서, 모델, 그리고 여배우로 폭넓게 활약한 니콜 셰르징거는 인기 TV 오디션 프로그램 엑스팩터(The X Fa... 2000년대를 선도했던 걸 그룹 푸시캣 돌스(The Pussycat Dolls)의 메인 보컬리스트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니콜 셰르징거(Nicole Scherzinger)는 섹시하고 화려한 외모, 무엇보다 윤기 있는 보컬 톤으로 인해 팝 팬들 뿐 아니라 국내 가요 팬들의 지지마저 얻어냈다. 싱어송라이터, 댄서, 모델, 그리고 여배우로 폭넓게 활약한 니콜 셰르징거는 인기 TV 오디션 프로그램 엑스팩터(The X Factor)의 영국 판, 미국 판 모두에서 심사위원을 도맡으면서 부동의 인지도를 확립하였다.
테이크 댓(Take That)과 함께 1990년대 영국의 보이그룹을 대표했던 보이존(Boyzone)은 매니저 루이스 월시(Louis Walsh)가 신문에 낸 광고를 보고 온 젊은이들 중에서 다섯 명을 선발해 구성한 아이돌 보컬 팀이다. 영국 본토의 테이크 댓과 미국의 뉴 키즈 온 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의 인기에 착악한 루이스 월시는 두 선배 그룹보다 훨씬 더 정갈하고 반듯하고 깔끔한 이... 테이크 댓(Take That)과 함께 1990년대 영국의 보이그룹을 대표했던 보이존(Boyzone)은 매니저 루이스 월시(Louis Walsh)가 신문에 낸 광고를 보고 온 젊은이들 중에서 다섯 명을 선발해 구성한 아이돌 보컬 팀이다. 영국 본토의 테이크 댓과 미국의 뉴 키즈 온 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의 인기에 착악한 루이스 월시는 두 선배 그룹보다 훨씬 더 정갈하고 반듯하고 깔끔한 이미지 메이킹을 통해 보이존을 1990년대 중반 최고의 상업적 성공을 거둔 팀 중 하나로 조각했다. 1993년 아일랜드에서 결성된 보이존의 멤버는 로난 키팅(Ronan Keating), 스테판 게이틀리(Stephen Gately), 키스 더피(Keith Duffy), 셰인 린치(Shane Lynch), 마이키 그래함(Mikey Graham)으로 당시 10대 후반의 미소년들이었다. 미국 디트로이트 출신 보컬 그룹 스피너스(Spinners)의 원곡을 재해석한 ‘Working my way back to you’ 이후 모두 16곡을 영국 차트 5위권 안에 랭크시키며 1996년에 해산한 테이크 댓이 없는 무주공산이 된 영연방의 보이밴드 기득권을 독식했다. ‘Working on my way back to you’를 포함한 싱글 16곡(‘Love me for a reason’, ’So good’, ’Key to my life’, ‘Father & son’, ‘Coming home now’, ‘Words’, ‘A different beat’, ‘Isn’t it wonder’, ‘Picture of you’, ‘Baby can I hold you’, ‘All that I need’, ‘No matter what’, ‘I love the way you love me’, ‘When the going gets tough’ 그리고 ‘You needed me’, ‘Everyday I love you’)이 모두 영국 차트 5위권 내에 드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특히 ‘All that I need’부터 ‘No matter what’, ‘I love the way you love me’, ‘When the going gets tough’, ‘You needed me’까지 다섯 곡의 싱글은 1위로 데뷔하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인쇄했다. 비틀스(Beatles)도, 조지 마이클(George Michael)도 오르지 못한 거대한 성공의 탑이다. 이에 비례해 이들의 음반은 영국에서만 1,000만장 이상이나 판매가 되었다. 그 인기를 반영하듯 1997년에는 영국의 대표적인 코미디언 미스터 빈 선생이 주연한 영화 의 주제가 ‘Picture of you’를 부르는 등 생애 최고의 순간을 향유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이들의 성적표는 낙제점이었다. ‘Mystical experience’, ‘A different beat’, ‘No matter what’이 종합 차트가 아닌 세분화된 차트에만 올랐고 앨범 < Where We Belong >만이 음반 차트 167위에서 성장을 멈추는 굴욕을 당했다.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발표한 싱글들이 대부분이 리메이크하는 점이다. 스피너스의 ‘Working my way back to you’를 비롯해 흑인 가수 존 브리스톨(John Bristol)의 원곡인 ‘Love me for a reason’, 캣 스티븐스(Cat Stevens)의 ‘Father & son’, 비지스(Bee Gees)의 ‘Words’, 트레이시 채프만(Tracy Chapman)의 ‘Baby can I hold you’, 뮤지컬 음악의 명인(名人) 앤드루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가 작곡한 ‘No matter what’, 빌리 오션(Billy Ocean)의 ‘When the going gets tough’, 앤 머레이(Anne Murray)의 ‘You needed me’ 등 이들의 히트 곡들은 미국인들에겐 새롭지 못했고 얼터너티브 그런지와 흑인 음악이 대세였기에 보이존은 무관심의 모래 속에 매몰되었다. 로난 키팅은 1999년에 미국의 컨트리 가수 가스 브룩스(Garth Brooks)의 원곡 ‘When you say nothing at all’을 리메이크한 버전이 영화 < 노팅힐 > 사운드트랙에 수록되면서 솔로활동의 엔진에 시동을 걸었고 이로 인해 해체설이 불거졌다. 결국 1999년에 공개한 네 번째 앨범 < By Request >를 마지막으로 보이존의 역사는 명문화되었다. 이후 로난 키팅은 솔로 가수로 성공을 이어갔지만 셰인 린치, 마이키 그래함 그리고 자신이 게이임을 밝힌 스테판 게이틀리는 본인의 이름을 내건 솔로앨범들을 발표했지만 철저히 잊혀졌다. 그러나 1999년, 보이존은 갔지만 이들과 모든 면에서 흡사한 웨스트라이프가 등장했다(웨스트라이프 역시 아일랜드 출신의 꽃미남 5인조). 역사는 이렇게 반복된다.
배우, 가수 배우, 가수
노래 : Gregory Porter (그레고리 포터)
풍부하고 중후한 목소리를 통해 마음을 달래주는 그레고리 포터! 매력적인 목소리 덕분에 제이미 칼럼, 디스클로저 등 수많은 아티스트와 콜라보를 했으며 비틀스의 노래 ‘let it be’를 통해 기타리스트 밀로쉬와도 작업했다. 2014 Grammy Awards - Best Jazz Vocal Album (Artist) 풍부하고 중후한 목소리를 통해 마음을 달래주는 그레고리 포터!
매력적인 목소리 덕분에 제이미 칼럼, 디스클로저 등 수많은 아티스트와 콜라보를 했으며 비틀스의 노래 ‘let it be’를 통해 기타리스트 밀로쉬와도 작업했다.

2014 Grammy Awards - Best Jazz Vocal Album (Artist)
노래 : Anna Netrebko (안나 네트렙코)
성악가 (소프라노) 성악가 (소프라노)
노래 : Donny Osmond (도니 오스몬드)
배우, 가수 배우, 가수
노래 : Yvonne Elliman (이본느 엘리만)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통해 세 번의 토니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으며 1982년 연극 무대에서 스크린으로 무대를 옮겼다. 극영화 데뷔작은 조지 로이 힐스의 < The World According to Garp >이다. 이 작품으로 그녀는 평단의 뜨거운 갈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지명됐다. 이처럼 눈부신 그녀의 재능은 후속 작품에서도 빛을 발하였다. 래리 카스단 감독의 < Th...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통해 세 번의 토니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으며 1982년 연극 무대에서 스크린으로 무대를 옮겼다. 극영화 데뷔작은 조지 로이 힐스의 < The World According to Garp >이다. 이 작품으로 그녀는 평단의 뜨거운 갈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지명됐다.

이처럼 눈부신 그녀의 재능은 후속 작품에서도 빛을 발하였다. 래리 카스단 감독의 < The Big Chill >과 배리 레빈슨 감독의 <내츄럴>로도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 후보에 지명됐다. 이어서 그녀는 리챠드 마칸드의 탁월한 스릴러 <톱니바퀴의 칼날>에서 자신의 의뢰인과 사랑에 빠지는 변호사 역을 열연했다. 1987년에는 아드리안 라인 감독의 <위험한 정사>에서는 마이클 더글라스의 상대역인 알렉스 포레스트 역을 열연하여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 후보에 지명됐다. 그 다음 해, 글렌 클로즈는 스티븐 프리어즈 감독의 <위험한 관계>에서 존 말코비치의 상대역을 호연하여 또 한 번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 후보에 지명됐다.

[필모그래피]

102마리 달마시안()|주연배우
내츄럴(1984)|주연배우
위험한 정사 (1987)(1987)|주연배우
햄릿 (1990)(1990)|주연배우
영혼의 집(1993)|주연배우
화성침공 (1996)|주연배우
메리 라일리(1996)|주연배우
101마리 달마시안(1996)|주연배우
파라다이스 로드(1997)|주연배우
에어 포스 원(1997)|주연배우
타잔 (1999)|주연배우
그녀를 보기만해도 알 수 있는 것(2000)|주연배우
프렌치 아메리칸(2003)|주연배우
스텝포드 와이프(2004)|주연배우
빨간모자의 진실(2005)|주연배우
나인 라이브즈(2005)|주연배우
이브닝(2007)|조연배우
노래 : Madonna (마돈나,Madonna Louise Ciccone)
새 천년의 화제는 아직도(조금 너무하다는 생각도 든다) 비틀스인 것 같다. 그들의 베스트 앨범 은 전세계에서 판매 1위를 점령했고, 여기저기서 ‘비틀스 다시 세우기’ 작업이 한창이다. 해체한 지 30년이 지났건만 과연 ‘팹 포(The Fab Four)’의 힘은 대단하다. 그렇다면 마돈나는 어떨까? 2000년 9월 그녀는 새 앨범(베스트가 아니다) 을 발표했다. 이미 그 전에 발매되었던 싱글 ‘Music’은 4주만... 새 천년의 화제는 아직도(조금 너무하다는 생각도 든다) 비틀스인 것 같다. 그들의 베스트 앨범 은 전세계에서 판매 1위를 점령했고, 여기저기서 ‘비틀스 다시 세우기’ 작업이 한창이다. 해체한 지 30년이 지났건만 과연 ‘팹 포(The Fab Four)’의 힘은 대단하다. 그렇다면 마돈나는 어떨까? 2000년 9월 그녀는 새 앨범(베스트가 아니다) 을 발표했다. 이미 그 전에 발매되었던 싱글 ‘Music’은 4주만에 1위를 기록했으며, 그 ‘일렉트로니카’ 앨범도 가뿐히 차트 정상에 등극했다. 물론 예전의 마돈나로서는 당연한 결과겠지만 10대 여가수들과 보이밴드들이 휘어잡고(?) 있는 현 팝 음악계를 고려한다면 그녀도 상당히 분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사실 폴 사이먼이나 유투 같은 거장들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1983년에 공식 데뷔했으니 18년간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찬반이 극명하게 갈리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대중들의 주요 관심대상이다. 비틀스에 필적할 만한 여가수를 꼽는다면 단연 마돈나 아닐까? 최소한 그녀만큼 열심히 음악활동을 지속해오는 여가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최근 그녀에게 지가 붙인 ‘The Music Woman’이란 호칭은 아주 적절하다. 그렇다면 ‘마돈나 다시 세우기’는 아닐지라도 ‘마돈나 바로 세우기’(?) 정도는 있어야 할 듯 싶다. 그녀는 우리에게 뭘 선사했을까 그리고 과연 그녀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라는 궁금증 내지는 의심을 가지고 그녀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이 글을 시작하는데 이런 의문이 든다. ‘그런데 마돈나와 동시대에 활약하던 그 많던 여가수들은 도대체 다 어디로 간 거야?’ 1. Like A Virgin ‘영화계의 악동’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가 감독한 데뷔작 (1992)의 첫 장면을 잠시 들여다보자.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8명의 등장인물들이 아침식사를 위해 카페에 모여 앉아있다. 이들은 모두 다이아몬드 강도를 위해 모인 건달들이다. 식사를 마친 그들은 커피를 마시며 길고도(무려 12분간 이어진다) 지루한(?) 잡담을 하기 시작한다. 마돈나의 ‘Like a virgin’이 바로 그 화제. 가장 방정맞은 캐릭터인 미스터 핑크가 먼저 운을 띄운다. "‘Like a virgin’은 말이야. 커다란 ‘성기’를 가진 남자와 관계를 갖는 여자에 대한 노래야. 곡 전체가 ‘크기’에 관한 은유인 셈이지." 좀더 나이 든 악당 미스터 블루가 이에 대해 반박한다. "그렇지 않아. 그것은 아주 상처받기 쉬운 여자에 관한 거야. 그리곤 정말로 섬세한 남자를 만나게 되지." 이후 등장인물들이 제각기 마돈나(또는 그녀의 노래)에 대해 한 마디씩 던진다. "난 마돈나가 싫어", "‘True blue’란 곡이 뭐지?", "난 그녀의 초기작이 좋아. ‘Lucky star’, ‘Borderline’ 같은 거 말야. 하지만 ‘Papa don`t preach’ 시절은 별로야." 동시에 음담패설 정도로 끝날 줄 알았던 잡담이 논쟁으로 과열되어 자못 심각해진다. 미스터 핑크의 일관된 주장은 계속된다. "그녀는 존 홈즈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고 하룻밤을 보내지. 거기서 그녀는 그 크기에 고통을 느끼는 거야. 그걸 바로 ‘처음처럼, 처녀처럼’이라고 한 거야." 그러나 결국 그와 다른 이들의 상반된 견해는 화해되지 못한 채 그 에피소드는 끝난다. 이것은 픽션인 영화의 한 장면이고, 그것도 1992년에 제작된 것이다. 따라서 마돈나 전체의 모습을 조망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들이 언급하는 가수와 노래는 분명 실재하는 것이고, 그들의 코멘트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이 에피소드는 그녀가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소비되고 있는가를 살짝이나마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적어도 마돈나의 중요한 일면이 드러난다. 그것은 그때까지 마돈나의 음악적인 면보다는 섹슈얼리티 측면이 더욱 부각되고 또 소비되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녀가 댄스 팝의 디바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뒷골목의 성적인 농담거리로 소통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가, 라는 문제는 좀더 다양한 또는 심층적인 이야기가 필요할 듯 하다. 아무튼 세속적인 건달들의 세계를 그리는 데에 마돈나가 쓰였다는 것은 한 번 곰곰이 되새겨 볼만하다. 2. Material Girl 마돈나라는 가수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음악보다는 이미지다. 성(性)의 이미지다. 그 이미지는 그녀에 관한 한 모든 가치 판단에 있어서 가장 우위에 있다. 대중들이 모두 위의 건달들처럼 속물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그녀는 바로 ‘스테레오타입’이 돼버린 것이다. 마돈나라는 한 인물이 섹시한 ‘가상의 이미지’로 전이되어, 우리는 그것에 우선 반응한다. 가령 밥 딜런 하면 포크 음악이 생각나지만 마돈나 하면 도발적인 몸짓이 떠오른다(물론 음악도 생각난다). 일종의 편견일 수 있지만 아직까지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 같은 이미지로 인해 어쩌면 뒷전으로 물러난 그녀의 음악적 미덕이 어느 정도 손해봤을 수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마돈나의 성적(性的) 이미지는 지금껏 그녀가 음악계에서 살아남아 있을 수 있었던 ‘존재이유’가 된다. 또한 그것은 마돈나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기엔 여러 복잡한 커넥션이 얽혀있다. 그녀의 찬란한 섹슈얼리티는 성 상품화를 부추기는 자본주의의 검은 시대정신(?)과 이에 상응하는 마돈나의 고도의 전략 등이 맞물려서 탄생된 것이다. 그녀가 데뷔했던 1983년 당시 미국은 보수와 극우의 시대였다. 레이건 정부는 보수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물질만능주의라는 변질된 아메리칸 드림만을 장려했다. ‘물질적인 소녀’ 마돈나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고향을 등지고 뉴욕에 홀로 올라와 가진 건 ‘몸뚱이’ 하나와 음악적 재능뿐이었던 마돈나에게 그러한 사회 분위기는 절대적인 기회였다. 이미 그녀는 몇 년간 파트 타임 누드모델과 밴드의 백 보컬 등으로 힘겨운 뉴욕 생활을 보낸 바 있었다. 하지만 그 경험은 그녀에게 어느 정도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때문에 그녀는 성을 거리낌없이 전면에 내세울 수 있었다. 섹슈얼리티로 중무장한 채 내놓은 데뷔앨범 (1983)는 이후 마돈나가 끊임없이 던지는 충격파 중 첫 번째가 되었다. 감각적이고 달콤한 댄스 팝 음악이 훌륭하기도 했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끈 건 단연 마돈나의 육감적인 외모였다. 그녀는 친절하게도 자신의 탄탄한 몸매 중 일부를 스스럼없이 내보였다. 앨범 재킷 뒷면에서도 쉽게 확인되듯, 그녀는 그 충격적이던- 그러나 지금은 일반화되다 못해 촌스런 지경까지 이른- 배꼽티를 입고 흥겹게 ‘Holiday’, ‘Borderline’을 노래했다. 아마도 이 ‘불량한’ 모습은 순진하던 국내의 20·30대 음악팬들의 뇌리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하여간에 하루아침에 ‘Lucky Star’가 된 그녀는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음악적인 것 외에 마돈나는 ‘보이 토이’(Boy Toy)로 대변되는 그녀만의 패션을 선도하기 시작했다. 배꼽티는 물론 헤어밴드, 검은 고무 팔찌, 보이 토이 벨트 등을 전세계로 유행시키며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전파했다. 그 같은 마돈나의 이미지가 급속도로 전파될 수 있던 것은 뮤직비디오 즉, MTV의 영향이었다. 앨범만으로는 그녀의 이미지를 그렇게 효과적으로 팔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마돈나의 모습을 우리가 ‘감상’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MTV 덕분이다. 마이클 잭슨과 마찬가지로 마돈나도 MTV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해서 마돈나만 이득을 본 건 아니다. MTV는 자신들을 홍보할만한 이미지 메이커, 즉 스타가 필요했고, 마돈나의 섹슈얼리티는 이들의 조건에 아주 적합한 것이었다. 결국 그들의 필요에 의해 그녀가 선택된 것뿐이고, 그녀 역시 그런 MTV를 자신의 스타성을 배출할 일종의 통로로 이용한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때부터 마돈나가 자신은 물론 외부의 것까지 통제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장점을 충분히 끌어올릴 줄 알았을 뿐 아니라 외부의 관심까지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였다. 따라서 그녀의 성공 요인이 섹슈얼리티 때문이다, 라고 한정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그것은 그렇게 쉽게 볼 문제가 아니다. 성적인 매력 하나만 가지고 10여 년을 버틸 만큼 마돈나는 단순한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상당히 똑똑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각인된 그녀의 성적 이미지는 더욱 위력을 더해간다. 그리고 그것이 결정적인 것이지만 마돈나 전체의 이미지는 아니었음을 우리는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알게된다. 아직 마돈나의 진면목이 다 드러난 것은 아니다. 3. Express Yourself 데뷔작 에서는 ‘Holiday’, ‘Borderline’, ‘Lucky star’가 연이어 히트를 기록하며 상쾌한 출발을 보였다. 이듬해인 1984년 마돈나는 수잔 사이델먼(Susan Seidelman)감독의 영화 (Desperately Seeking Susan)에 조연으로 출연했다. 가수를 넘어서 배우로서, 또한 ‘멀티 플레이어’로서 첫 걸음을 내딛은 것이다(이후 그녀는 , 를 포함 16편의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연극의 주역을 도맡았던 마돈나에게 이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어서 그녀는 ‘문제의’ 앨범 (1984)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미국차트에서 3주간 1위를 차지했고, 2년이 넘도록 차트에 머무는 등 그녀의 최대성공작이 되었다. 타이틀곡 ‘Like a virgin’은 그녀 최초의 넘버원 송으로 기록되었다. 이 앨범은 상업적인 성공 외에 다른 하나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전작에서 외면상의 섹스 어필에 머물렀던 마돈나가 한 걸음 나아가 본격적으로 ‘성의 해방’을 외친 것이다. 이제 슬슬 본색을 드러내는 것일까? 여전히 화제성 있는 댄스 가수였지만 마돈나는 여기서부터는 이미지를 스스로 ‘만들어’간다. 지금까지 맛보기로 보여준 그녀의 성적 매력은 자연스럽게 ‘드러났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Like a virgin’이나 ‘Material girl’에서 도발적인 발언은 수줍은 듯한 살랑댐에서 벗어나 있다. 자신의 적극적인 표현, 즉 성 해방의 의지천명이다. 이 곡들에 대해 ‘보수파’들의 반발이 거셌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서부터 그녀의 또 다른 수식어 ‘혁명전사’의 이미지가 구체화되기 시작한 셈이다. 그녀의 탁월한 ‘이미지 제조’ 능력은 뮤직비디오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Material girl’의 뮤직비디오는 명백히 마릴린 먼로를 훔친 것이다. 그녀는 단순히 먼로의 이미지만 차용한 것이 아니다. 먼로 향수(鄕愁)에 젖어 있는 다수의 미국인들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였다. 뿐만 아니라 그 이미지마저 먼로에게서 앗아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현재까지 지속된다. 마돈나의 위대한 점 중 중요한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녀는 창조자가 아니다.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혹은 아무 데나 널브러져 있는 평범함을 찾아내 그것을 이용할 뿐이다. 하지만 곧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것은 아주 독창적인 무언가가 된다. 즉, 마돈나만의 스타일이 된다. 이것은 그녀의 음악, 이미지, 기질이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이때부터 마돈나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일련의 사건들을 겪게 된다. 자신의 첫 순회공연이 있었던 1985년, 그녀는 약간의 위기상황을 맞이한다. 그해 7월, 성인잡지 와 가 무명시절(1977년)에 찍어뒀던 마돈나의 누드사진을 게재한 것이다. 그녀의 인기가 오르자 이를 노린 잡지사들의 추악한 폭로사건이었다(이젠 이런 것도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마돈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고, 같은 달 열린 난민구호 자선공연 에 당당히 출연 ‘Into the groove’, ‘Holiday’를 열창했다. 결국 그 사건은 공짜로 그녀를 홍보해준 것이 되었다. 그녀의 인기는 더욱 치솟았으니 말이다. 한편 그녀는 26번째 생일인 8월 16일 배우 숀 펜과 행복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마돈나는 세 번째 정규앨범 (1996), 사운드트랙 (1987), 댄스 리믹스 앨범 (1987)를 잇달아 발표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쳐 나간다. 그러나 대중들은 결코 비슷한 세기의 자극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마돈나는 역시 똑똑하다. 반복요법은 쓰지 않는다. 좀 더 적극적인 자기표현들을 이어나간다. 4. Justify My Love 1989년은 마돈나에게 있어 가장 논란이 되었던 한 해였다. 그 해 4월 그녀의 최고 명반으로 꼽히는 가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프린스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슈가 될만했다. 음반이 발매되기 직전 마돈나는 펩시콜라와 5백만 달러의 TV 광고 계약을 맺었다. 바로 얼마 후 ‘Like a prayer’의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다. 이 곡은 가스펠 분위기로 진행되는데, 엽기적이게도 그 뮤직비디오는 마돈나가 흑인성자와 키스하는 장면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한 술 더 떠서 불타는 십자가 앞에서 춤추기까지 했다. 이것은 미국내의 종교적 논란을 넘어서서 전세계 미디어들의 기사거리가 되었고, 급기야 바티칸 교황청에 의해 금지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불똥은 엉뚱한 곳에 튀었다. 마돈나와 광고계약을 맺은 펩시콜라 측은 그 덕에 소비자들의 엄청난 항의를 받았다. 결국 펩시는 그 광고를 제대로 방영도 못한 채 접어야 했다. 마돈나가 5백만 달러를 고스란히 챙긴 것은 물론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이듬해 발생한다. 마돈나의 베스트 (1990)에 수록된 신곡 ‘Justify my love’가 말썽이었다. 천재 록 뮤지션 레니 크라비츠가 작곡·제작을 맡은 그 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돈나의 에로틱한 목소리와 암시적인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이 정도만으로 범상치 않은 곡인데 그 뮤직비디오는 더욱 자극적이었다. 이에 MTV가 그 곡의 방영을 금지했다(따라서 국내에서도 볼 수 없었다). 이 조처는 그간 마돈나에게 호의적이었던 MTV로서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당당했다. 마돈나에 의하면, 그러한 모든 행위는 ‘예술적 풍자’일 뿐이다. 최고의 자유국가라 자처하는 미국이 보장해야 할 최소한의 표현의 자유인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며 오히려 MTV측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정말 대단하다. 논란을 일으키는 능력만 뛰어난 게 아니라 그것을 종식시키는 능력도 뛰어나다. 이 정도 되면 ‘여성 운동가’라고 말해도 부족하지 않다. 상업성이 뻔히 보이는 가운데서도 그녀는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자신 스스로에게 진실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 가질 수 없는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마돈나는 이제 그저 얼굴만 예쁘장한 얼치기 여가수가 아니다. 그저 자신의 외모만 믿고 성을 상품으로만 팔 줄 알았던 그녀의 데뷔 때 모습을 생각하면 실로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이러한 마돈나의 모습 하나 하나가 현재의 수많은 여가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이다(굳이 따져보자면, 앨러니스 모리셋, 스파이스 걸스가 직계후배일 듯. 아, 브리트니 스피어스도 있다). 그후에도 마돈나의 도발적인 모습은 화보집 와 앨범 (1992)로 이어지지만 1994년 드디어 그녀의 극적인 반전이 시작된다. 소녀적 감성에서 팜므 파탈(Femme Fatale)의 단계를 지나 성숙한 여인으로. 그리고 종착역인 음악으로. 5. Truth Or Dare 쉬어 가는 의미로 여기서 잠깐 마돈나의 영화 한 편을 소개한다. 마돈나는 1990년 다큐멘터리 필름 (Madonna: Truth Or Dare / In Bed With Madonna)에 출연했다. MTV에서 많은 뮤직 비디오를 만들었던 알렉 커시시언(Alek Keshishian)이 감독한 이 기록영화는 별다른 주관적 개입 없이 마돈나의 일상을 그려냈다. 마돈나의 세계 순회공연 장면과 무대 뒤의 사생활 장면이 여과 없이 포착되어있다. 전자와 후자를 각각 컬러와 흑백 톤, 다른 터치로 표현해낸 것이 신선하다. 지금으로 따지면 이나 ‘셀프 카메라’ 정도일텐데, 적어도 그런 것보다는 훨씬 진실하게 만들어졌다. 일단 장면 속으로 들어가 보자. 캐나다 토론토 공연장이다. 공연 전부터 경찰들이 몰려와서 매니저들에게 반 협박을 한다. 마돈나가 손을 하복부 아래로 내리는 이상한(?) 행위를 하면 체포하겠다고. 이 소식을 접한 그녀는 당황한다. 퍼포먼스를 수정하느니 아예 공연을 취소하겠다는 말까지 한다. 하지만 쇼 타임이 임박하고 약간 불안해진 마돈나는 댄서들과 기도를 한다. "오늘은 파쇼적인 토론토의 마지막날입니다. 저에게 이것을 이겨낼 힘을 주세요." 댄서들과 마돈나는 프로테스트 송 ‘We Shall Overcome’을 합창하며 무대에 올라선다. 그녀는 두 명의 남자 무희가 호위하고 있는 빨간 침대 위에서 ‘Like a virgin’을 노래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그 곡을 아주 느리게 부르며(여기의 ‘Like a virgin’ 버전은 최고다) 에로틱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노래는 절정에 이르고 마침내 그녀는 ‘문제의’ 손동작을 감행한다. 마돈나는 승리했다. 다음은 그녀의 고향인 디트로이트 공연장이다. 그녀는 공연 전 언제나 댄서들과 손을 맞잡고 기도한다. "노래할 목소리를 허락해주세요. 내 인생의 진실을 보여줄 힘을 주세요." 이 날은 공연 중에 그녀의 아버지를 모시고 나온다. 바로 그의 생일이었다. 무대에 나온 아버지를 향해 마돈나는 절까지 하며 2만 여명의 관객과 함께 축하 노래를 부른다. 상당히 인상적인 장면이다. 하지만 공연 후 그녀는 내뱉는다. "오늘은 너무 힘들었어. 두 달이나 이걸 해야하다니. 너무 피곤해." 이런 장면도 있다. 스페인 공연 전 침울해진 마돈나는 매니저에게 푸념한다. "내겐 공연 뿐이야. 지겨워." 그런 그녀에게 매니저는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는지 묻는다. "만나고 싶은 사람? 안토니오 반데라스." 결국 스페인 공연에서 안토니오를 만나지만 그는 마돈나를 거절한다. 1주일간 그를 만난다는 기대에 차 있었던 그녀는 욕실로 뛰쳐나간다. "욕실에 가서 내 슬픔을 식혀야겠어. 안토니오 나쁜 자식. 날 버렸어." 그녀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이다. 그런데 이탈리아 공연 도중 일련의 공연이 취소된다. 교황청의 요청으로 금지된 것이다. 이에 마돈나는 담담히 기자회견을 한다. "나는 예술가고 내 공연은 내가 나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내 공연은 빛과 어둠 같은 양면성을 보여준다. 판단은 청중이 한다. 이것이 언론 표현 사고의 자유다." 이 다큐멘터리에 주목해야할 것은 이 영화가 지금껏 마돈나에게 품고 있던 편견들을 해소시키는 데 아주 훌륭한 단서가 된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다보면 ‘성의 상품화’라든지 ‘섹스의 화신’ 따위의 말들은 어느새 잊혀진다. 그리고 가수로서의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마돈나를 느낄 수 있다. 그녀는 관객들 앞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프로 가수이며, 동료 댄서들의 따뜻한 어머니다. 그녀의 팬이든 팬이 아니든 이 영화를 보는 누구나 그녀에 대한 생각이 바뀔 것이다(비디오 출시되어 있는 국내판은 아쉽게도 30여분이 잘려나간 반쪽 짜리다. 하지만 그녀를 느끼기엔 충분하다). 6. Who`s That Girl 마돈나는 재능 있는 가수다, 라는 말에 이견을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아티스트다, 라는 말에는 다소 의견이 분분할 듯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감히 단언하건대 그녀는 진정한 아티스트다. 그것은 지난 18년간을 지켜온 그녀의 음반이 증명한다. 그리고 여전히 음반을 내고, 무대에 서서 팬들 앞에서 노래하는 마돈나의 모습이 증명한다. 재능이라는 것은 고갈되기 마련이고, 중요한 것은 현재 그녀가 어디에 서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알고있듯 마돈나는 지금 바로 우리 곁에 서있다. 마돈나가 변신에 가장 능한 연예인으로 꼽히는 데는 그 이미지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음악 역시 변신을 거듭해왔다. 1977년 마돈나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고향인 미시건을 떠나 뉴욕에 올라왔다. 그녀의 원래 꿈은 발레리나였다. 발레수업을 받던 1979년 그녀는 디스코 가수 패트릭 헤르난데즈(Patrick Hernadez)의 백 보컬 겸 댄서로 연예계에 입문했다. 이후 팝 댄스 그룹 브랙퍼스트 클럽(Breakfast Club)의 보컬을 거쳐, 1983년 꿈에 그리던 솔로앨범 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그녀의 초기작들의 음악이 디스코나 댄스 팝인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Holiday’, ‘Material girl’, ‘Like a virgin’, ‘Papa don`t preach’로 대표되는 발랄한 댄스 경향은 , 시기까지 계속된다. 그 댄스 넘버들에서 그녀의 모습은 때론 수줍은 듯, 때론 대담하게 비춰졌다. 하지만 아직은 앳된 소녀적 감성이 더 많이 풍긴다. 1989년부터 마돈나의 음악적 성향이 서서히 바뀌어 간다. 그해 발표된 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마돈나의 다른 모습이 담겨있다. 좀더 풍부해졌다고 할까. 댄스 지향에서 탈피해서 다양한 음악을 시도했다. 가스펠나 소울도 눈에 띄지만 무엇보다 록적인 접근이 두드러졌다. 똑같이 흥겹지만 거기엔 록 비트와 연주가 강화되었다. ‘Keep it together’ 같은 곡에서 확연히 알 수 있다. 외적으로는 앞서 말한 뮤직비디오 ‘Like a prayer’에서 보듯, 요부의 이미지로 자신을 한껏 드러냈다. 이제 예전의 마돈나와는 작별한 것이다. 더 이상 수줍음은 사라지고 충만한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말하자면 이 앨범을 기점으로 그녀는 음악적으로나 애티튜드(attitude)로나 아티스트로서의 본격적인 시동을 건 것이다. 1990년대 들어서는 더욱 달라진 면모를 보였다. 자신의 출연한 영화 에 쓰인 곡과 그로부터 영감 받은 몇 곡들을 모은 (1990)를 통해 뮤지컬 스타일의 또 다른 창법을 들려줬다. 1994년 작 와 이듬해 발표된 에서 마돈나는 완연한 여인의 향기를 내뿜었다. 멜로디는 한결 풍부해졌고, 곡의 진행은 부드럽고 여유 있어졌다. ‘Take a bow’ 같은 곡에서의 노래실력은 어느 발라드 가수에도 뒤지지 않는다. 마치 ‘이래도 내가 아직 율동만 하는 창부로 보이니?’ 라고 항변하는 듯 하다. 또한 1996년에는 뮤지컬영화 (Evita)에 출연하여 ‘진지한’ 역할을 소화해냈다. 비록 ‘율동 없는 그녀는 볼 게 없다’, ‘어울리지 않는다’ 등 혹평도 있었지만, 뛰어난 가창력과 영혼이 깃들은 열연으로 그녀에 대한 일반 인식을 바꿔놓았다. ‘섹스 중독증 환자’에서 ‘성녀’(聖女) 그리고 진정한 아티스트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이것은 물론 그녀가 나이든 탓도 있겠지만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부단히 투쟁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의 투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직 알을 깨지 못한 것인가? 7. Music 마돈나는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 클럽 문화 속에서 가수의 꿈을 키워왔다. 물론 디스코, 댄스 클럽이었다. 그 자양분은 그녀의 초기 앨범들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1998년, 여전히 클럽 문화는 지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클럽의 분위기나 음악은 많이 바뀌었다. 클럽에는 약물이 넘쳐흐르고, 이에 맞춰 어지러운 테크노, 일렉트로니카가 꿈틀댄다. ‘클럽 키드’ 마돈나는 바로 이것을 취했다. 어쩌면 그녀는 70년대 말의 클럽 시절로 되돌아가려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옛날의 클럽 시절을 회고하면서 현재의 클럽 심장부로 입성한 것이다. 의미심장한 귀환이다. 그해 발표된 는 마돈나의 그와 같은 음악적 전환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일렉트로니카 아티스트 윌리엄 오비트(William Orbit)가 영입된 이 앨범의 화두는 클럽 문화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매개물인 약물과 테크노 음악이다(그리고 이 둘의 관계는 서로를 보충해주는 일종의 상호보완물이다). 앨범 발표 후 마돈나는 패션잡지 (Elle)와의 인터뷰에서 그것의 약물관련성을 언급했다. "‘Ray of light’가 말하고 있는 것은 성적 모호함과 마약으로 인한 환각 체험이다." 아무래도 그것은 자신의 체험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앨범은 정통 테크노 뮤지션이 아닌 테크노 앨범으로선 상당한 평가를 받았다. 대다수의 록 잡지에서 호평을 얻었고, 그때까지 한 번도 수상하지 못했던 그래미상도 4개나 획득하며 그간 그래미에 맺혔던 한을 풀었다. 여기서도 일반적인 것을 끌어다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마돈나의 미덕이 빛을 발한다. 확실히 마돈나의 그 ‘옛날 음악’은 시원한 매력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2000년에 발표된 이다. 이 음반을 녹음할 당시 마돈나는 임신 중이었다. 나이도 벌써 우리나이로 마흔 셋이나 되었다. 국내로 따지면 아줌마 그것도 중년을 넘긴 아줌마 중의 아줌마인 것이다. 국내가 아닌 미국이라도 썩 유리한 조건은 아니다. 게다가 팝 음악계도 예전보다 상황이 많이 나빠져 있었다. ‘아이들 음악’이 음악판을 싹쓸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년의 노장들은 점차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마돈나가 분연히 일어섰다. ‘음악이 세상을 바꾼다’라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서. 그리곤 아주 심플한 제목을 달고 앨범을 냈다. 그 단순한 제목은 그러나 지금껏 마돈나가 걸어온 모든 과정을 함축하고 있다. 아무리 음악 외적인 것에 치중했더라도 자신의 중심은 늘 음악에 있었다는 것이다. 마돈나가 대단한 결의를 가지고 낸 그 음반은 전작 와 비슷한 음악성향을 담고 있다. 차이라면, 일렉트로니카 성향과 함께 좀더 ‘애시드 록’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전작이 차갑고 직선적이었다면 은 차갑지만 왠지 부드럽고 곡선적이다. 그리고 좀더 복고적이 되었다. ‘Music’의 가사 중 ‘음악은 사람들 모두를 모이게 한다’라는 부분은 가장 상투적이지만 가장 강력한 문구다. 비틀스의 ‘Come together’를 연상시키는 그 가사는 가장 진실하고 절실하게 느껴진다. 음악생활 20년만에 마돈나가 한 말이라 더욱 그렇다. 8. Something To Remember 마돈나는 1958년 6월 15일 미국의 미시건 주 베이 시티에서 태어났다. 1983년에 데뷔했으며, 2001년 현재까지도 여전히 현역가수다.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계속해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간다. 예전 같지는 않지만 이슈를 만들어내는 힘 또한 유효하다. 지난 9월 의 발매와 함께 록 잡지 은 그녀를 커버인물로 다루었다. 이로써 그녀는 10번째로 지 커버를 장식했으며, 이는 전무(前無)한 기록이다. 성(城)에서 올린 그녀의 결혼식은 또 어떠했는가. 그녀가 썼던 다이아몬드 박힌 머리장식은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의 것이어서 대단한 관심을 끌었다. 게다가 웨딩드레스는 바로 폴 매카트니의 딸 스텔라 매카트니가 디자인한 것이었다. 언론이나 대중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사실 마돈나가 이렇게 오래 가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마돈나 데뷔 당시 라이벌은 신디 로퍼였다. 그때는 마돈나보다는 신디 로퍼에 대한 평가가 훨씬 좋았고(그녀는 그래미 신인상도 차지했다), 신디 로퍼가 더 장수할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주지하다시피 마돈나의 절대적 승리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것은 마돈나만이 갖고 있는 놀라운 힘의 결과다. 음악과 이미지 그리고 끊임없이 이슈를 만들어내는 능력. 이 셋의 완벽한 조화가 바로 마돈나 파워의 본질이다. 그녀는 현재 10년 연하의 남편 가이 리치와 함께 영국 런던에서 살고 있다. ‘영국의 타란티노’라고 불리는 영화감독 가이 리치와는 1999년부터 사귀었으며, 지난 12월 22일 스코틀랜드의 스키노 성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치렀다. 이제 그녀는 두 아이를 가진 자비로운 어머니이자 한 남자의 사랑스런 아내이다. 요즘 그녀의 관심은 자식들 밖에 없는 것 같다. 마돈나는 딸에 대해 "그 애는 꼭 옛날의 나를 보는 것 같아요. 그 애는 나예요. 나."라며 더없이 흐뭇해한다. 그녀의 생애 중에서 처음으로 안정을 찾은 듯 보인다. 수많은 이미지 중에서 이번엔 어머니란 이미지를 찾아낸 것이다. Material Girl, 섹스 중독증 환자, 혁명전사, 헐리우드 디바, 테크노 퀸, 클럽 키드, 살아있는 록의 전설. 지금까지 그녀에게 따라 붙었던 수식어들이다. 이중 진정한 마돈나의 모습은 무엇일까. 모든 것이 허상일 수도, 어쩌면 전부 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녀에게 있어 음악이 바로 삶이고, 삶이 바로 음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자, 이제 그녀에게 다름 아닌 편안한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물론 ‘음악인’ 마돈나를 기억하면서 말이다.
이란계 캐나다인으로 록 밴드에서 활동하다 뮤지컬 배우가 된 라민 카림루는 이국적이면서도 선 굵은 외모와 독특한 음색으로 뮤지컬 계의 천재 작곡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와 가장 영향력 있는 뮤지컬 제작가 캐머론 매킨토시 등 많은 뮤지컬 관계자들과 팬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20대 후반부터 '레 미제라블', '미스 사이공' 등 굵직한 작품의 주연 자리를 꿰차며 현재 웨스트엔드에서 가장 각광받고 있는 뮤지컬 배우.... 이란계 캐나다인으로 록 밴드에서 활동하다 뮤지컬 배우가 된 라민 카림루는 이국적이면서도 선 굵은 외모와 독특한 음색으로 뮤지컬 계의 천재 작곡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와 가장 영향력 있는 뮤지컬 제작가 캐머론 매킨토시 등 많은 뮤지컬 관계자들과 팬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20대 후반부터 '레 미제라블', '미스 사이공' 등 굵직한 작품의 주연 자리를 꿰차며 현재 웨스트엔드에서 가장 각광받고 있는 뮤지컬 배우. 2005년 '오페라의 유령'에서 '팬텀' 역을 맡은 인연으로 '오페라의 유령: 25주년 특별공연'에서 '팬텀' 역을 열연했다.
노래 : Elvis Presley (엘비스 프레슬리)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오늘날 폴과 비틀스를 있게 한, 단 한사람의 영향을 꼽는다면 위 해설처럼 단연 트럭운전사출신 엘비스 프레슬리다. 존 레논은 이를 결정적 한마디로 축약한다. “엘비스가 나타날 때까지 내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무 것도 없다(Nothing affects me until Elvis)." 존과 폴이 만나서 처음 마음먹은 것은 사실 엘비스의 음악을 더 강하게 표출해내는 것일 뿐이었다. 그들을 통해서 로큰롤의 진정한 역사는 ‘시대의 풍운아’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개막되었다는 사실이 다시금 확인된다. 물론 역사가에 따라 로큰롤의 효시를 행크 발라드(Hank Ballard)나 빌 헤일리(Bill Haley) 또는 척 베리(Chuck Berry)로 꼽기도 한다. ‘Work with me, Annie’ ‘Crazy man crazy’ ‘Maybellene’ 등과 같은 이들의 대표곡들이 시기적으로 먼저 구동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 다수 대중들은 여전히 로큰롤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엘비스가 나와서야 비로소 그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빌보드지의 결론. ‘1953년 록음악이 시작되었다고 하나 정작 차트나 방송에서 그 시대를 풍미하기 시작한 것은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싱글 ‘Heartbreak hotel’이 연속 8주 넘버원에 머물면서부터였다.’ 초기 로큰롤은 척 베리나 버디 할리와 같은 탁월한 ‘작가’를 소유했다. 리틀 리처드나 제리 리 루이스라는 출중한 ‘배우’ 그리고 조 터너, 보 디들리와 같은 ‘음악감독’들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로큰롤은 강풍을 휘몰아칠 역동적 ‘스타’가 필요했다. 그가 엘비스였다. 그 시대는 흑인의 리듬 앤 블루스를 소화해줄 백인가수를 요구했고 엘비스는 백인대중들로부터 ‘저 친구는 백인이면서 왜 검둥이노래를 부르는 거야?’라는 의아함을 일으킬 만큼 탁월한 흑인감성의 보유자였다. 이러한 시의성은 그러나 일반의 인식처럼 56년 RCA 소속의 엘비스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었고 이미 54년 선 레코드사의 엘비스로서 확립된 것이었다. 샘 필립스 사장의 전설적인 선 시절에 엘비스는 ‘That`s all right’, ‘Blue moon of Kentucky’ 와 ‘Mystery train’ 등을 부르면서 컨트리와 R&B를 크로스오버화한 신종의 로커빌리를 선보이면서 벌써 ‘웨스턴 밥의 왕’으로 불렸다. 이 때 이미 순회공연에서 팝 음악사상 초유의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다. 『뉴스위크』는 ‘금세기 백년간의 스타’ 특집기사를 다루며 그의 등장을 ‘20세기의 사건’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당시 엘비스 백업 밴드에서 드럼을 쳤던 D.J. 폰타나는 54년 상황을 다음처럼 술회한다. “엘비스 무대가 끝나고 나면 노래를 따라해 줄 관객들은 다 빠져버려 아무도 없었지요. 애들은 백 스테이지에서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습니다. 내 생각에 그 애들은 아마 우리 연주는 듣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오로지 ‘처음으로 흔드는 가수’ 엘비스를 보고자 하는 것이었죠.” 로컬 무대에서 전국 네트워크 TV로 진출하면서 마침내 ‘엘비스마니아’는 폭발했다. 미국의 3대 전국 공중파 방송 ABC CBS NBC의 체제가 정립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그는 텔레비전시대의 영웅으로서 ‘라디오스타를 죽이는’ 새로운 미디어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타미와 지미) 도시 브라더스의 CBS < 스테이지 쇼 >, NBC의 < 밀턴 벌 쇼 >와 < 스티브 알렌 쇼 > 그리고 저 유명한 CBS의 < 에드 셜리번 쇼 >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벌써 음악의 영상시대를 주도했다. 음악이 음반으로만 소구하던 시대는 ‘섹시 가이’ 엘비스의 출현으로 끝났다. ‘보는 음악’ 시대를 주도한 최초의 인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엘비스였다. 스탠다드 팝의 파수꾼 프랭크 시내트라도 자기 TV 쇼의 떨어지는 시청률을 참다못해 ‘음악의 공적(公敵)’이라고 성토해마지 않았던 엘비스를 출연시켜야 했다. TV 뿐만 아니라 영화 최초의 로큰롤 스타도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 러브 미 텐더 > < 러빙 유 > < G.I. 블루스 > < 블루 하와이 > 등 31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그는 관객들에게 로큰롤의 열정과 록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의 호소력을 제공했다. 음반 텔레비전 그리고 영화라는 ‘삼국통일’에 성공하며 천하를 제패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이 아래로 보일 정도의 막강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77년 사망하면서 그의 캐리어가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그는 무려 2억5천만장의 앨범을 팔았다. 이 기록에 가장 접근한 인물은 비틀스가 아닌 2억장의 빙 크로스비(캐롤 ‘White Christmas’가 결정적이다)며 프랭크 시내트라는 겨우 4천만장에 불과했다. ‘1인 기업’ 엘비스는 막대한 돈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인 핑크를 포함한 갖가지 칼라의 자동차 캐딜락을 구입했고 멤피스에 4만 달러 짜리 목장 그리고 10만 달러로 저택 그레이스랜드를 샀다. 전용 비행기는 물론 텔레비전 세트 그리고 첨단기계들도 마련했다. 물론 지금이야 흔해 빠진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특히 엘비스와 같은 하층계급 청년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부의 상징들이었다. 동시대 그리고 후배가수들이 일개가수에서 기업으로 융기한 엘비스를 통해 신분상승과 스타덤 획득 욕구를 품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엘비스처럼 슈퍼스타이면서 동시에 부자가 되고 싶어했다. 버디 할리는 엘비스를 빅 스타로서 존경했고 밥 딜런의 음악동기는 엘비스보다 큰(bigger than Elvis)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톰 존스는 아예 영국의 제록스판 엘비스였다. 엘비스처럼 구레나룻을 길렀던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직접 그를 만나기 위해 그레이스랜드 담을 넘다가 제지당했고 그룹 퀸은 엘비스를 안중에 두고 50년대 로큰롤풍의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를 만들었다(로저 테일러의 증언 “처음으로 텔레캐스터와 부기 앰프를 쓴 다소 빈약한 사운드였다. 분명 엘비스를 염두에 두고 만든 곡이었다.”). 마크 알몬드(Mark Almond)의 명쾌한 한마디를 들어보자. “그는 왕이다. 그밖에 다른 코멘트는 일체 필요없다!” 하지만 60년 전역 이후 엘비스는 달라졌다. 매니저였던 톰 파커 퇴역대령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음악방향이 빗나간 것이었다. 예의 로큰롤 넘버와는 거리가 먼 It`s now or never나 Surrender와 같은 감상적인 이탈리아 민요를 영역해 불렀다. 변화(아니면 변신?)의 징조는 프랭크 시내트라 쇼에 출연했을 때 뚜렷이 나타났다. 이 쇼에서 엘비스는 스탠다드 가수의 상징인 턱시도 정장을 했으며 호스트 프랭크 시내트라와 서로의 대표적 히트곡인 ‘Witchcraft’와 ‘Love me tender’를 바꿔 불렀다. 이 시점을 계기로 엘비스가 로큰롤을 버리고 스탠더드 팝 가수로 돌아서 청춘진영을 배신했다는 주장이 고개를 비집는다. 명백한 훼절이라고 단정해도 선뜻 반대논리를 펴기 어렵다. 그러나 친(親)엘비스 측은 그로써 그가 로큰롤 가수에서 ‘국민가수’로 승격하는 의미 있는 업적을 남기게 됐다고 반박한다. 로큰롤만의 논리로 음악을 풀고 엘비스를 규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어떻게 가치판단을 하느냐는 것은 관련자의 이데올로기나 각 시대의 성격에 따를 수밖에 없다. 변절이든 성숙이든 이 점만은 분명하다. 엘비스의 보컬이 초기의 로큰롤가수로 한정되었을 때 과연 후대에의 보컬 영향력을 소지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의 가창력은 음역, 에너지, 통제력, 피치 등 모든 면에서 압권으로 평가되어왔다.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었지만 ‘멀티칼라’인 그의 보이스에는 자니 레이의 급격한 변색, 두왑 그룹인 잉크스파츠(Inkspots) 빌 케니의 테너, 딘 마틴의 솜사탕 그리고 마리오 란자의 풍미가 동거했다. 그러면서도 로이 오비슨과 같은 유니크한 개성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스탠더드 발라드를 소화함으로 해서 우리들은 ‘Are you lonesome tonight’, ‘Suspicion’, ‘In the ghetto’, ‘The wonder of you’, ‘Fool’, ‘My boy’ 등의 팝 고전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명백한 역사의 유산이다. 그가 없었다면 성악가나 스탠더드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만을 접했을 것이고 로큰롤 싱어가 선사하는 발라드의 진미(珍味)를 영원히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공존공영 가능성을 그처럼 실감나게 시범한 가수도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이미 흑인감성의 전달로 로큰롤이 ‘흑백의 퓨전’임을 목소리 하나로 입증한 그는 이어서 역시 매직 보컬로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제휴를 일궈내는 업적을 남겼다. 어쩌면 우리가 70년대 록과 메탈 분야에서 형식을 확립한 이른바 ‘록발라드’라는 것도 그 원조는 엘비스일지도 모른다. 엘비스는 목소리를 통해 대중의 공감대를 전달한 몇 안 되는 가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건조한 보이스와는 거리가 먼, ‘이끼가 잔뜩 낀’ 풍부한 목소리였다. 아마 신나는 로큰롤 ‘Burning love’ 한 곡으로도 충분히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후대 음악팬들이 그의 노래를 듣고 더러 ‘느끼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후반기의 노래 가운데는 그런 요소를 풍기는 곡이 있었다. 하지만 엘비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거기서 느끼함이 아닌 되레 ‘풍성한 감성’을 수혈 받곤 한다. 미트 로프(Meat Loaf)는 말한다. “엘비스는 노래하는 것 무엇이든지 감정적으로 가사로 스피릿을 감상자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희구했던 명성과 부를 얻고 난 뒤 아쉽게도 그것들의 노예가 되는 비극적인 위인이기도 했다. 아무 데도 나갈 수가 없었고 편안히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도 불가능했다. 60년대나 70년대 로커였다면 이런 사실상의 ‘수감생활’을 극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래적 반항아’가 아니었다. 스타덤의 고독과 소외에 차츰 무너져간 그의 말년을 잘 나타내주는 일화는 무수히 많다. 70년대 들어서 조울증이 불거진 그는 때로 격렬해져 텔레비전 세트나 당구대, 주크박스, 자동차 등 가장집기를 부수는 발작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언젠가 D.J. 폰타나와 그의 아내 앞에서 엘비스는 자신의 감정상태를 이렇게 토로했다. “당신들은 운이 좋은 겁니다. 난 엘비스인게 너무 지겨워요! 뭘 해야될 지를 모르겠어요. 뭔가 딴 일을 했으면 제발 한이 없겠어요.” 고고음악의 대명사인 자니 리버스의 해석. “엘비스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었지요. 그래야만 했을 겁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그 밖의 다른 일이란 없었지요.” 엘비스만큼 화려한 명성과 처절한 고독이라는 양극단을 겪은(아니면 겪기로 강제된)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영욕의 교차요, 희비의 쌍곡선이다. 그래서 그를 통해 우리는 슈퍼스타덤의 빛 외에 냉혹함과 잔인성이라는 그림자를 동시 확인한다. 그의 사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심장마비로 발표되었지만 사후 마약중독 비만증 그리고 자살 등 정황에 근거한 갖가지 설들이 난무했다. 이는 그의 후반기 삶이 얼마나 철저히 비공개로 갇혀 있었는지를 반증한다. 스스로 창조한 혁명에 쓰러진 순종파 가수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비평에 의해 그의 역사적 위상이 훼손되는 일은 없다. 여전히 그는 만인이 공감하는 ‘킹 오브 로큰롤’이며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금세기 최고 가수’다. 비틀스가 그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한마디로 모든 엘비스의 가치는 입증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오류로 더러 지적되지만 비평가 고(故) 레스터 뱅스(Lester Bangs)의 엘비스 예찬은 되새길 가치가 있다. “우리는 엘비스에게 해준 것과 같은 동의를 앞으로 어떤 누구에게도 해주지 않을 것이다!”
노래 : Everly Brothers (에벌리 브라더스)
컨트리 음악 성향의 로커빌리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황금 형제듀엣. 형 돈 에벌리(Don Everly)는 1937년 켄터키주 브라우니 출생이고, 동생 필 에벌리(Phil Everly)는 1939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가수였던 부모와 함께 어릴 적부터 노래했고 컨트리의 본고장 내시빌에서 기타의 대가 쳇 애트킨스(Chet Atkins)에 초청되어 1955년에 첫 레코딩을 했다. 2년 뒤 소규모 음반사 케이던스와 계... 컨트리 음악 성향의 로커빌리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황금 형제듀엣. 형 돈 에벌리(Don Everly)는 1937년 켄터키주 브라우니 출생이고, 동생 필 에벌리(Phil Everly)는 1939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가수였던 부모와 함께 어릴 적부터 노래했고 컨트리의 본고장 내시빌에서 기타의 대가 쳇 애트킨스(Chet Atkins)에 초청되어 1955년에 첫 레코딩을 했다. 2년 뒤 소규모 음반사 케이던스와 계약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Bye bye love’, ‘All I have to do is dream’, ‘Bird dog’, ‘Cathy’s clown’ 등 빅 히트송이 줄을 이었다. 낭만적인 멜로디를 전하는 두 형제의 하모니가 압권. 1960년대의 사이먼 & 가펑클(Simon & Garfunkel) 등 많은 듀엣 팀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한 뱃속에서 태어난 형제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둘 사이가 나빠서 1973년에 해산했고 10년이 흐른 1983년에 재결합했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아 ‘Let it be me’, ‘Crying in the rain’ 등이 널리 애청되었다.
노래 : Denise Van Outen (데니스 반 아우텐,Denise Kathleen Outen)
배우, 가수 배우, 가수
노래 : Sierra Boggess (시에라 보게스)
사에라 보게스는 2007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인어공주'에서 주인공 '에리얼' 역으로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혜성처럼 등장한 신예다. 그녀는 '러브 네버 다이즈'에서도 '크리스틴' 역으로 캐스팅되며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새로운 뮤즈로 떠올랐다. '오페라의 유령: 25주년 특별공연'에서 사에라 보게스는 사랑스러운 외모와 애절한 감성 연기, 청아한 목소리로 관객들을 사로잡는 최고의 무대를 선보인다. 사에라 보게스는 2007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인어공주'에서 주인공 '에리얼' 역으로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혜성처럼 등장한 신예다. 그녀는 '러브 네버 다이즈'에서도 '크리스틴' 역으로 캐스팅되며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새로운 뮤즈로 떠올랐다. '오페라의 유령: 25주년 특별공연'에서 사에라 보게스는 사랑스러운 외모와 애절한 감성 연기, 청아한 목소리로 관객들을 사로잡는 최고의 무대를 선보인다.
뮤지컬 배우, 팝 가수 뮤지컬 배우, 팝 가수
노래 : Mica Paris (미카 패리스,Michelle Antoinette Wallen)
소울, 알앤비, 재즈 가수 소울, 알앤비, 재즈 가수
노래 : Cliff Richard (클리프 리차드)
1969년 10월 16일부터 18일. 이 3일은 우리나라의 척박했던 공연 문화와 사회 전반에 걸쳐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된 사건의 시간적 배경이다. ‘오빠부대’의 원조이며 팝 스타로서는 처음으로 국내에서 자발적인 팬클럽이 탄생했던 클리프 리차드(Cliff Richard)의 3회에 걸친 내한 공연, 그것은 집단적인 행동과 조용한 환호성(지금은 아니지만)의 이율배반적인 분위기로 특징지어지는 한국 공연 문화의 시발점이 ... 1969년 10월 16일부터 18일. 이 3일은 우리나라의 척박했던 공연 문화와 사회 전반에 걸쳐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된 사건의 시간적 배경이다. ‘오빠부대’의 원조이며 팝 스타로서는 처음으로 국내에서 자발적인 팬클럽이 탄생했던 클리프 리차드(Cliff Richard)의 3회에 걸친 내한 공연, 그것은 집단적인 행동과 조용한 환호성(지금은 아니지만)의 이율배반적인 분위기로 특징지어지는 한국 공연 문화의 시발점이 되는 계기였다. 시민회관에서 1회, 이대 강당에서 2회의 공연을 가졌던 클리프 라치드의 무대는 콘서트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던 당시로서는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청소년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어두운 교복과 청순한 단발머리를 한 여고생들의 클리프 리차드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헌신적인 몰입은 ‘울다가 지쳐 기절까지’라는 과장된 신문 기사로 옮겨지면서 공연장의 열기는 기성 세대들에게 일종의 집단적 히스테리이자 광적인 소란으로 비쳐지며 젊은이들에 대한 불안과 불만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클리프 리차드는 4박 5일 동안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만나는 팬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주최측에서 마련한 파티 비용을 본인이 직접 내는 것은 물론 구세군 교회에 가서 불우이웃성금을 내는 선행으로 일간지 사회면을 훈훈하게 장식해 팬들의 비난을 희석시켜 주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클리프 리차드는 우리나라에서 대중 음악 역사에 있어 전환점을 제시했던 슈퍼스타였다. 1940년 10월 14일 인도의 럭크나우에서 해리 로저 웹(Harry Roger Webb)의 본명으로 태어난 클리프 리차드는 엘비스 프레슬리로부터 영향을 받아 1957년부터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흑인 감성이 풍부했던 엘비스와는 달리 경쾌하고 팝 적인 느낌이 짙은 음악으로 ‘영국의 로큰롤 황제’로 등극했다. 1963년 비틀스(Beatles)와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가 등장하기 전까지 클리프 리차드는 브리티시 록의 ‘절대 강자’였으며 그의 음악 세계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성지(聖地)였다. 1958년 ‘Move it’으로 시작한 히트 퍼레이드는 1960년대 후반까지 40곡 이상을 영국 인기 차트에 등록시키며 경이로운 행진을 기록했다. 당시 그의 백 밴드 드리프터스(Drifters)는 미국의 리듬 앤 블루스 보컬 그룹(‘Stand by me’를 부른 Ben E. King이 멤버였던)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섀도우스(Shadows)로 바꾸었다. 그의 인기가 치솟자 영화 관계자들은 < Serious Charge >, < Summer Holiday >, < The Young Ones >처럼 젊은이들을 소재로 한 상업적인 영화에 출연시켜 비상(飛上)하는 클리프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국내에서도 ‘Living doll’, ‘Visions’, ‘Constantly’, ‘Summer holiday’, ‘Congratulations’, 그리고 그 유명한 ‘The young ones’등이 확실하게 인기를 주도했다. 하지만 이것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한정된 반숙(半熟)의 인기였다. 대서양 건너편 미국에서는 물이 끓지도 않았다. ‘Living doll(30위)’과 ‘Lucky lips(62위)’, ‘It’s all in the game(25위)’, ‘Bachelor boy(99위)’, ‘I’m the only one(92위)’, 그리고 생일 축하 곡으로 세계를 평정한 ‘Congratulations(99위)’ 만이 1960년대 동안 빌보드 싱글 차트에 올랐을 뿐이다. 데뷔곡 ‘Move it’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노래들은 너무 소녀 취향이었으며 시기상으로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라는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뮤지션들 사이에서 샌드위치 마크를 당했기 때문에 틈새 시장을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내한 공연을 가졌던 1960년대 후반에 그의 지지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1960년대 미국 음악계를 침공한 브리티시 인베이션의 명단에서 제외되었던 클리프 리차드는 미국 진출의 꿈을 접었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에 자신의 백 보컬리스트 출신의 올리비아 뉴튼 존(Olivia Newton John)이 미국에서 대대적인 성공하자 이것에 고무된 클리프는 미국 진출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서서히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미국인의 구미에 맞는 노래들로 북미 시장을 두드렸다. 1976년에 공개된 디스코 풍의 ‘Devil woman(6위)’이 처음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탑 텐에 올랐고 1980년대 초반까지 ‘We don’t talk anymore(7위)’, ‘Carrie(34위)’, ‘Dreaming(10위)’, ‘Little in love(17위)’, ‘Daddy’s home(23위)’, 그리고 자신보다 더 유명해진 올리비아 뉴튼 존과 호흡을 맞춘 영화 < 제너두 >의 삽입곡 ‘Suddenly(20위)’ 같은 성인 취향의 팝 사운드로 두 번째 전성기를 일구었다. 이제는 아주머니들이 된 예전의 소녀 팬들을 위해 현재까지 공연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클리프 리차드는 1995년 영국 왕실로부터 대중 음악계에 미친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 작위를 수여 받았다. 국내에서는 지난 1998년에 개봉된 임창정, 고소영이 주연한 영화 <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의 마지막 장면에 ‘Early in the morning’이 삽입되어 다시 한번 클리프 리차드 신드롬을 재연했다. 차이코프스키가 “예술 작품이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소망과 힘이다”라고 했듯이 클리프 리차드의 노래는 우리 부모님 세대가 살아야 했던 어려웠던 시절의 좌절과 아픔을 낭만과 추억으로 승화시킨 희망의 원동력이었다.
노래 : Elaine Paige (일레인 페이지)
1948년 영국 런던 출신. 가수인 어머니와 아마추어 드러머 부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가수 겸 배우로 활동하고 있으며 특히 뮤지컬 공연으로 명성이 높다. 수잔 보일의 동경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해서 화제가 된 바 있으며 뮤지컬계의 프리마돈나로 불린다. ‘레미제라블’, ‘에비타’, ‘캣츠’ 등에 출연했으며, 특히 ‘캣츠’에서 그녀가 부른 “메모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았다. 1948년 영국 런던 출신. 가수인 어머니와 아마추어 드러머 부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가수 겸 배우로 활동하고 있으며 특히 뮤지컬 공연으로 명성이 높다. 수잔 보일의 동경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해서 화제가 된 바 있으며 뮤지컬계의 프리마돈나로 불린다. ‘레미제라블’, ‘에비타’, ‘캣츠’ 등에 출연했으며, 특히 ‘캣츠’에서 그녀가 부른 “메모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았다.
노래 : Beyonce (비욘세,Beyonce Giselle Know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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