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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FM 그대와 여는 아침 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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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여는 아침 시리즈
CD

CBS FM 그대와 여는 아침 5집

베스트 팝 40곡 수록

Henry Mancini 작곡/Doris Day, Barry Manilow, Diana King, Earth, Wind & Fire 노래 외 36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SonyMusic | 2018년 03월 02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240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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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8년 03월 02일
시간, 무게, 크기 500g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1
선택듣기
  • 01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 도리스 데이 Doris Day 선택듣기
  • 02 Can't Smile Without You - 배리 매닐로우 Barry Manilow 선택듣기
  • 03 I Say A Little Prayer - 다이아나 킹 Diana King 선택듣기
  • 04 Let's Groove - 어스 윈드 앤 파이어 Earth Wind & Fire 선택듣기
  • 05 Saving All My Love For You - 휘트니 휴스턴 Whitney Houston 선택듣기
  • 06 Oh Pretty Woman - 로이 오비슨 Roy Orbison 선택듣기
  • 07 Take Me Home, Country Roads - 존 덴버 John Denver 선택듣기
  • 08 I'll Meet You At Midnight - 스모키 Smokie 선택듣기
  • 09 Eres Tu - 모세다데스 Mocedades 선택듣기
  • 10 Midnight Blue -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 (ELO) Electric Light Or 선택듣기
  • 11 Try To Remember - 브라더스 포 The Brothers Four 선택듣기
  • 12 Private Eyes - 홀 앤 오츠 Hall & Oates 선택듣기
  • 13 The Power Of Love - 제니퍼 러쉬 Jennifer Rush 선택듣기
  • 14 Celebrate (From the Original Motion Picture "Penguins of Madagascar") - 핏불 Pitbull 선택듣기
  • 15 Over The Rainbow - 해리 닐슨 Harry Nilsson 선택듣기
  • 16 She's So Lovely - 스카우팅 포 걸즈 Scouting For Girls 선택듣기
  • 17 Brother Louie - 모던 토킹 Modern Talking 선택듣기
  • 18 (I've Had) The Time Of My Life - 빌 메들리 & 제니퍼 원스 Bill Medly & Jennifer Warn 선택듣기
  • 19 For The Good Times - 레이 프라이스 Ray Price 선택듣기
  • 20 Macarena - 로스 델 리오 Los Del Rio 선택듣기
Disc2
선택듣기
  • 01 Saturday Night - 베이 시티 롤러스 Bay City Rollers 선택듣기
  • 02 Sexy Music - 놀란스 The Nolans 선택듣기
  • 03 How Am I Supposed To Live Without You - 마이클 볼튼 Michael Bolton 선택듣기
  • 04 Yes Sir, I Can Boogie - 바카라 Baccara 선택듣기
  • 05 I Want You To Want Me - 칩 트릭 Cheap Trick 선택듣기
  • 06 Can't Help Falling In Love - 엘비스 프레슬리 Elvis Presley 선택듣기
  • 07 Got To Be Real - 세릴 린 Cheryl Lynn 선택듣기
  • 08 Constellations - 톰 오델 Tom Odell 선택듣기
  • 09 "The Thorn Birds" Theme (가시나무새 테마) - 헨리 맨시니 Henry Mancicni 선택듣기
  • 10 Funky Town - 수도 에코 Pseudo Echo 선택듣기
  • 11 Happy (Gru`s Theme From Despicable Me 2) - 퍼렐 윌리엄스 Pharrl Williams 선택듣기
  • 12 Torn Between Two Lovers - 매리 맥그리거 Mary MacGregor 선택듣기
  • 13 It Never Rains In Southern California - 앨버트 하몬드 Albert Hammond 선택듣기
  • 14 Chandelier - 시아 Sia 선택듣기
  • 15 Volare (Nel Blu di Pinto di Blu) - 집시 킹스 Gipsy Kings 선택듣기
  • 16 Through The Eyes Of Love - 멜리사 맨체스터 Melissa Manchester 선택듣기
  • 17 Happy Song - 보니 엠 Boney M 선택듣기
  • 18 Speak Softly Love - 앤디 윌리엄스 Andy Williams 선택듣기
  • 19 Hush - 쿨라 셰이커 Kula Shaker 선택듣기
  • 20 My Way - 캘빈 해리스 Calvin Harris 선택듣기

상세 이미지

상세 이미지 1 상세 이미지 2

아티스트 소개 (41명)

작곡 : Henry Mancini (헨리 맨시니 ,Henry Mancini & His Orchestra)
미국의 작곡가. 1951년부터는 영화계에 관계하여 영화음악을 작곡하고, 이어 텔레비전드라마 《피터 건》에 재즈를 도입한 음악으로 대중의 주목을 끌었다. 1960년대 미국의 영화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가 되었다. 미국의 작곡가. 1951년부터는 영화계에 관계하여 영화음악을 작곡하고, 이어 텔레비전드라마 《피터 건》에 재즈를 도입한 음악으로 대중의 주목을 끌었다. 1960년대 미국의 영화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가 되었다.
노래 : Doris Day (도리스 데이)
노래 : Barry Manilow (배리 매닐로우)
10월 말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따뜻한 외로움을 선사하는 ’When October goes’의 주인공 배리 매닐로우는 탄탄한 음악 지식에 따뜻한 감성, 호소력 있는 보컬을 더하며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 가수이다. 그는 다양한 악기 편성, 변조를 통한 감성 고조 등 클래식 코드를 따르는 동시에 강한 서민적 인간미를 전하며 세대와 인종, 지역을 뛰어 넘는 인기를 누렸다. 배리 매닐로우는 1946년 6월 17일 뉴욕 브루... 10월 말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따뜻한 외로움을 선사하는 ’When October goes’의 주인공 배리 매닐로우는 탄탄한 음악 지식에 따뜻한 감성, 호소력 있는 보컬을 더하며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 가수이다. 그는 다양한 악기 편성, 변조를 통한 감성 고조 등 클래식 코드를 따르는 동시에 강한 서민적 인간미를 전하며 세대와 인종, 지역을 뛰어 넘는 인기를 누렸다. 배리 매닐로우는 1946년 6월 17일 뉴욕 브루클린(Brooklyn) 빈민가에서 배리 알란 핀커스(Barry Alan Pincus)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두 살 때 아버지가 가정을 버리고 떠난 뒤 어머니의 성을 따라 배리 매닐로우(Barry Manilow)로 개명한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착실히 음악 실력을 쌓아나갔다. 일곱 살 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이후 음악 공부에 매진하여 명문 줄리어드 음악 학교(Juilliard School of Music)에 진학했다. 하지만 편모 슬하에서 자란 그는 여전히 고학생이었고, 생계를 위해 돈을 벌 수 있는 여러 가지 일에 손을 뻗어야 했다. 음반사의 우편물 발송, 프로듀서 보조역 등 여러 아르바이트에 전전하던 그는 이와 병행하여 CBS 방송국에서 프로그램 배경음악 작곡가로 일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클래식 학도였던 배리 매닐로우는 정상급 컨템포러리 팝 뮤지션으로 거듭나게 된다. CBS에서 인정 받기 시작한 이후 몇 년간 그는 돈벌이에 더욱 매진하여 맥도날드, KFC, 닥터 페퍼 등의 광고 음악 메이커로 활동한다. 1971년 영화배우 겸 가수로 유명한 배트 미들러(Bette Midler)의 피아니스트 겸 작/편곡자로 일하게 된 그는 다듬어진 음악성을 뽐내며 신인이었던 배트 미들러를 인기 가수로 만들었다. 이는 의 전신인 레코드사를 통해 그가 데뷔 앨범 을 발표하는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데뷔 앨범은 기대치에 비해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에 따라 스타 제조기이자 의 사장이었던 클라이브 데이비스(Clive Davis)는 배리 매닐로우에게 스캇 잉글리시(Scott English)가 히트시켰던 ’Brandy’를 ’Mandy’로 개사하여 발표하도록 하는 계획을 단행, 1974년 ’Mandy’가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하게끔 만들었다. 이때부터 배리의 성공시대는 시작됐다. 뒤를 이어 ’It’s a miracle’이 12위를 기록했고, 전작에 수록되었던 ’Could it be magic’이 싱글로 재 발매되어 6위에 오르는 늦깍이 성공을 거두었다. 세 번째 앨범 (1975)에서 ’I write the songs’를 다시 한 번 차트 정상에 올린 그는 ’Trying to get the feeling’(10위), ’Weekend in New England’(10위) 등의 곡을 연이어 히트시켰으며, 1977년 ’Looks like we made it’을 세 번째 정상에 올리며 절정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발라드 곡 위주의 활동을 하던 그는 1978년 카리브 정취의 디스코 넘버 ’Copacabana’를 차트 8위에 올리는 등 창작 영역을 조금씩 넓혀나갔고, 히트 앨범 에서 밝고 상큼한 발라드 곡 ’Can’t smile without you’(국내 CF에 삽입되어 인기를 누린 친숙한 곡이다.)를 3위에, ’Somewhere in the night’을 9위에 올렸다. 같은 해 영화 사운드 트랙 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인 그는 1978년 그래미 최우수 남성 아티스트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하였다. 1979년 에서 로커 이안 헌터(Ian Hunter)의 곡을 팝 발라드로 멋지게 재해석해 낸 ’Ships’가 9위에 오르며 올 타임 리퀘스트로 자리했지만 이후 배리 매닐로우의 인기는 하락세로 돌아섰다. 1980년 ’I made it through the rain’이 차트 10위에 오른 것 말고는 더 이상 톱 텐 히트곡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디온 워윅(Dionne Warwick) 등 여러 가수들의 프로듀서로 활동을 이어가던 배리 매닐로우는 1980년대 중반 스탠더드 재즈 싱어로 변신을 시도하여 새로운 매력을 전달했다. 1984년 발표한 재즈 앨범 에서 재즈 보컬의 최고봉 사라 본(Sarah Vaughan)과 듀엣으로 호흡을 맞추었으며, 수록곡인 ’When October goes’는 곡 자체의 매력은 물론 곡이 다루고 있는 시기적 특성이 함께 어필하면서 차트 성적과 무관하게 꾸준히 사랑 받는 그의 대표곡으로 자리했다. 이후 특별한 히트 곡은 만들어 내지 못했지만 재즈 앨범, 스탠더드 앨범, 크리스마스 앨범, 컴필레이션 앨범 등으로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고, 다른 뮤지션들의 프로듀서, 작곡가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를 비롯한 여러 뮤지컬 작업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지난 2001년 30여 년을 몸담았던 를 떠나 재즈 성향의 레이블 로 둥지를 옮긴 매닐로우는 메이플라워 아파트의 16개의 방을 컨셉트로 잡아 각종 장르를 선사한 를 발표하며 변함없는 왕성한 창작력을 뽐내고 있다.
노래 : Diana King (다이애나 킹)
다이애나 킹(Diana King)은 레게음악이 크게 인기를 누리던 1990년대 중반 정통 흑인 소울에 기반을 둔 차별화된 레게음악으로 인기를 누렸다. 레게의 본거지 자메이카 출신인 다이애나 킹은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Kingston) 근교의 스패니시 타운(Spanish Town)에서 태어났다. 다이애나는 어린 시절 성 필립포 뱁티스트(St. Phillipo Baptist) 교회의 합창단 일원으로 활동하며 가수의... 다이애나 킹(Diana King)은 레게음악이 크게 인기를 누리던 1990년대 중반 정통 흑인 소울에 기반을 둔 차별화된 레게음악으로 인기를 누렸다. 레게의 본거지 자메이카 출신인 다이애나 킹은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Kingston) 근교의 스패니시 타운(Spanish Town)에서 태어났다. 다이애나는 어린 시절 성 필립포 뱁티스트(St. Phillipo Baptist) 교회의 합창단 일원으로 활동하며 가수의 꿈을 키웠지만 재능이 남달랐음에도 불구 부모의 반대로 가수의 꿈을 펼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13살의 어린 나이에 가출을 선택했고, 호텔 나이트클럽의 가수로 생활하며 생계를 꾸려 나간다. 너무도 어린 나이에 홀로서기를 시도한 그녀는 클럽 가수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경험하며 정상급 흑인 보컬리스트로 성장해 나간다. 소울 최고의 디바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을 우상으로 삼고 있었던 그녀는 자메이카 출신이었지만 아레사를 모델로 여기고 있었던 만큼 소울/R&B의 정통 흑인 음악에 가까웠고, 소울/R&B는 물론 자메이카 특유의 레게에서 댄스곡으로 사용되는 하우스 음악과 단순한 팝 음악까지 10대의 어린 나이에 그녀가 소화해 내는 영역은 광범위했다. 씨티 히트(City Heat)라는 밴드에서 보컬을 맡기도 했던 그녀는 곧 밴드 활동을 그만두고 자신의 솔로 레코딩 작업을 서두른다. 자메이카에서 녹음한 데뷔 앨범은 별다른 히트를 기록하지 못했지만 이 앨범을 계기로 샤바 랭스(Shabba Ranks)에게 발탁되면서 서서히 메이저급 뮤지션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샤바 랭스의 투어에 듀엣 싱어로 참여한 그녀는 곧 콜럼비아(Columbia)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고, 레게 넘버들로 채워진 영화 < 쿨 러닝(Cool Runnings) >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하여 정식 데뷔 싱글이라 할 수 있는 ’Stir it up’을 발표한다. 레게의 고전을 리메이크 한 이 곡은 좋은 평을 받으며 인기를 끌었고, 이 영화를 시작으로 다이애나 킹과 영화 삽입곡과의 인연은 계속 이어진다. ’Stir it up’으로 미국 시장에서 지명도를 확보한 다이애나 킹은 1994년 노토리어스 비아이지(Notorious B.I.G.)의 앨범 < Ready To Die >에 얼굴을 보이는 등 스타 만들기를 시도하는 기획사의 배려 속에서 착실하게 성장해 나간다. 1995년 발표한 데뷔 앨범 < Tougher Than Love >은 발매 직후 큰 반응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지만 영화 < 나쁜 녀석들(Bad Boys) >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Shy guy’가 크게 히트하면서 뒤 늦게 인기를 누렸다. 영화의 선전과 맞물리며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한 ’Shy guy’를 통해 다이애나 킹은 레게를 노래하는 실력파 R&B 싱어로 주목 받게 된다. 1997년 그녀는 다시 한 번 영화 사운드트랙에 도전장을 내 던진다. 국내에서도 크게 히트한 영화 < 내 남자 친구의 결혼식(My Best Friend’s Wedding) >에 버트 바카라(Burt Bacharach)의 고전 ’I say a little prayer’가 그녀의 목소리로 실렸고, 이 곡을 통해 다이애나 킹이라는 이름은 또 한 번 전 세계에 알려진다. 영화 사운드트랙에 실린 세 곡의 노래만으로 인기를 누린 톡특한 경력의 소유자 다이애나 킹은 레게가 창궐하던 1990년대 중반을 스쳐 지나간 한 명의 흑인 여가수에 지나지 않지만 탁월한 가창력으로 레게의 약점을 상쇄시켰던 그녀의 레게 싱어로서의 가치는 특별했다.
노래 : Earth, Wind & Fire (어스 윈드 앤 파이어 )
소울, 펑키 그룹 소울, 펑키 그룹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은 1980, 1990년대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던 메탈의 포화를 뚫고 스탠다드 팝 시장을 개척해 낸 대표적인 ’디바’ 뮤지션이다. 휘트니 휴스턴은 1963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알앤비 가수 씨시 휴스턴(Cissy Houston)의 딸이었으며 시대를 풍미한 여가수 디온 워윅(Dionne Warwick)이 친척이었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대형 가수들을 옆에서 지켜볼 수 ...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은 1980, 1990년대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던 메탈의 포화를 뚫고 스탠다드 팝 시장을 개척해 낸 대표적인 ’디바’ 뮤지션이다. 휘트니 휴스턴은 1963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알앤비 가수 씨시 휴스턴(Cissy Houston)의 딸이었으며 시대를 풍미한 여가수 디온 워윅(Dionne Warwick)이 친척이었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대형 가수들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고,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성가대에서 노래하며 그 실력을 뽐냈다. 수려한 외모까지 겸비한 휘트니는 10대의 나이에 이미 모델, 배우, 가수의 세 가지 활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샤카 칸(Chaka Khan) 등의 백업보컬로 또 클럽에서 가수로 활동하던 그녀는 1982년 19살의 어린 나이에 폴 자바라(Paul Zabara)의 ’Eternal love’라는 곡에 보조 보컬로 참여하며 처음으로 정식 음반 녹음에 참여한다. 이듬해 아리스타(Arista)와 계약을 체결했고, 그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레코드사는 데뷔 앨범에 27만 달러의 제작비를 투자하며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1985년 데뷔앨범 < Whitney Houston >은 흑인 디바 시대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앨범은 14주간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오르며 솔로 아티스트의 데뷔 앨범 중 가장 오랜 기간 1위에 머무른 앨범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세계적으로 2,300만장이라는 경이적인 앨범 판매를 이루어내며 데뷔 앨범 하나로 팝계 최고의 여가수로 자리하게 된다. 앨범 내에서는 ’Saving all my love for you’, ’How will I know’, ’Greatest love of all’(조지 벤슨의 곡 리메이크)의 세 곡이 연속해서 차트 정상에 오르고, 앨범의 경이적인 성공으로 86년 그래미와, 86,87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를 차지한다. 1987년 그녀는 두 번째 앨범 < Whitney >를 통해 전작의 인기를 이어간다. 전작보다 비트감을 더한 이 앨범 역시 대단한 성공을 일구어 낸다. 발매 첫 주에 미국과 영국차트에서 동시에 1위에 오르는데 팝 역사상 처음으로 이룩한 기록이었다. 앨범은 차트 정상에 11주간 머물렀으며 세계적으로 2,000만장이 팔려나갔다. 싱글들의 인기도 대단해서 ’Wanna dance with somebody(Who loves me)’, ’Didn’t we almost have it all’, ’So emotional’, ’Where do broken hearts go’ 네 곡이 연속해서 차트 정상을 밟으며 이전 앨범부터 7개의 싱글이 연속해서 정상을 밟는 대 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 앨범으로 또다시 1988년 그래미를 거머쥐었고, 역시 88년, 89년의 아메리칸 뮤직어워드를 수상한다.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 같은 정통 소울 아티스트들로부터 음악적 영감을 얻었던 그녀이지만 1,2집에서 보여준 음악은 대중성이 지나치게 강조된 흑, 백의 사운드가 뒤섞인 음악이었다. 자신도 그런 자신의 음악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1990년 발표한 세 번째 앨범 < I’m Your Baby Tonight >에서는 대중성을 신경 쓰지 않고 정통 소울 음악으로 변신을 시도한다.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루떠 반데로스(Luther Vandross)등과 함께 작업하는 등 흑인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에 집착했던 이 앨범은 역시 이전 앨범들만큼의 성공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I’m your baby tonight’, ’All the man that I need’가 1위에 올랐고, 앨범은 전 세계 1,200만장의 판매를 기록하는 등 여전히 그 인기는 대단했다. 세 장의 정규 앨범 이후 그녀는 영화 배우로의 변신을 시도하며 세 장의 사운드 트랙을 연속 발표한다. 시작은 < 보디가드 >였다. 1992년 케빈 코스트너와 함께 출연한 ’보디가드’의 사운드 트랙에서 6곡을 노래했고, 이는 팝 역사에 길이 남을 경이적인 상업적 성공을 이끌어낸다. 첫 싱글 ’I will always love you’(돌리 파튼의 곡을 리메이크)는 차트 정상에 14주간 머물렀으며, 앨범은 20주간 1위를 지켰고, 세계적으로 3,500만장이라는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기록한다. 1994년 그녀는 다시 한 번 그래미를 거머쥐었고,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는 8개 부문 수상이라는 대 기록을 세우게 된다. 1995년 휘트니 휴스턴은 다시 한 번 사운드 트랙에 참여한다. 자신이 주연한 < Waiting for Exhale >의 사운드 트랙에 3곡을 수록하면서 영화와 앨범의 성공에 기여한다. 이 앨범은 노장 흑인 여가수들과 신예 흑인 여가수들이 총 동원되어 만들어졌으며, 프로듀서로 참여한 베이비페이스(Babyface)는 그래미 12개 부문 후보에 오르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 1996년 그녀는 영화 < The Preacher’s Wife >에서 주연을 맡으며 다시 한 번 사운드 트랙에 참여한다. 14곡을 자신이 직접 맡은 이 앨범은 가스펠 위주의 곡들로 채워져 있으며 대중성보다는 종교적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어 앨범판매에 있어서는 그다지 큰 성공을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정규 앨범을 발표하지 않고 영화와 사운드 트랙에만 전념해왔던 그녀는 98년 8년 만에 정규앨범 < My Love Is Your Love >을 발표한다. 흑인 아티스트로서의 음악에 충실함을 기했던 이 앨범은 1,000만장의 앨범 판매를 기록하며 그녀의 앨범 중 가장 저조한 성적을 거두게 된다. 앨범 내에는 영화 ’이집트의 왕자’ 주제곡인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와의 듀엣 곡 ’When you believe’가 수록되어 있다. 2000년 그녀는 자신의 15년 음악생활을 결산하는 베스트 앨범 < The Greatest Hits >를 발표한다. 조지 마이클, 엔리케 이글레시아스와의 듀엣 곡 등 네 곡의 신곡도 포함하고 있는 이 앨범은 발라드 곡들만을 모은 < Cool Down >과 댄스곡 및 댄스 리믹스 곡들을 모은 < Throw Down > 두 장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노래 : Roy Orbison (로이 오비슨 )
로이 오비슨(Roy "Kelton" Orbison)은 1936년 텍사스주 버논(Vernon)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기타를 연주했던 그는 10대에 ’윙크 웨스터너스(Wink Westerners)’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인기를 얻는 등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그룹명을 텐 킹스(The Ten Kings)로 바꾸고 버디 할리(Buddy Holly)의 프로듀서였던 노만 페티(Norman Pe... 로이 오비슨(Roy "Kelton" Orbison)은 1936년 텍사스주 버논(Vernon)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기타를 연주했던 그는 10대에 ’윙크 웨스터너스(Wink Westerners)’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인기를 얻는 등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그룹명을 텐 킹스(The Ten Kings)로 바꾸고 버디 할리(Buddy Holly)의 프로듀서였던 노만 페티(Norman Petty)와 함께 작업하며 첫 히트곡인 ‘Ooby dooby’를 발표한다. 하지만 1950년대 그의 주요 관심사는 작곡에 있었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인정받고 싶었던 그는 자작곡인 로크롤 넘버 ‘Only the lonely’를 당시 최고의 자리에 올라있었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와 에버리 브러더스(Everly Brothers)에게 권했지만 거절을 당하자 “내가 직접 노래하겠다”며 직접 이 곡을 녹음한다. 우수 가득하면서도 고음에서 불안한 듯한 독특한 목소리와 발군의 곡 제조로 록 역사에 길이 남게되는 로이 오비슨의 본격 가수인생은 이렇게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다. 흥겨운 후렴 구를 가지고 있었던 ’Only the lonely’는 스피드와 파워가 특징이던 당시의 로큰롤과 분리 선을 그으며 인기를 누린다. 이 곡은 1960년 전미차트 2위에 올랐고 영국 차트에선 정상을 차지했다. 이후 그의 인기는 눈부셨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훌륭한 멜로디와 서정적인 보컬은 여타 음악과는 완전 차별되면서, 1960년대 중반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히트행진을 이어간다. 1961년 ’Running scared’가 미국차트 정상을 밟았고 1964년에는 ‘Pretty woman’가 비틀매니아에 굴하지 않고 다시 차트정상에 올랐다. 1960년 ‘Blue angel’을 비롯해 1961년 ’Crying(2위)’, 1962년 ‘Dream baby’, 1963년 ‘In dreams’, ‘Mean woman blues’, 1964년 ‘It’s over(9위, 영국1위)’ 등은 모두 톱10에 진입했다. 하지만 그의 인기는 음악 외적인 면 때문에 제동이 걸려야 했다. 1966년 그의 아내 클라우데트(Claudette)가 자신의 오토바이 뒤에서 떨어져 죽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맞았고, 그 슬픔이 잊혀질 새도 없이 이듬해에는 집에 불이 나 두 아들이 화재로 죽게된다. 이 사건들이 일어난 이후 그에게는 ‘비운의 스타’라는 호칭이 계속해서 따라다니게 되다. 큰 슬픔을 여러 차례 겪은 후 활동은 암흑기에 접어들어 싱글 하나 제대로 히트하지 못했고, 라이브 공연도 가지지 않았다. 1960년대 초반을 풍미한 가수로 사라져가던 그였지만 전성기가 오로지 1960년대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우수한 곡들은 후대의 많은 아티스트들에 의해 다시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976년 그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영국 차트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1977년 린다 론스태드(Linda Ronstadt)가 ‘Blue bayou’를 리메이크해 오리지널 뮤지션으로 재조명되는 순간을 맞았다. 결국 1980년대 시작과 함께 재기한다. 그 해 늦은 봄 에밀루 해리스(Emmylou Harris)와 함께 영화 주제곡인 ‘That lovin’ you feelin’ again(55위)’를 부르며 가수활동을 재개하게 됐고 옛 명성에 걸맞게 해리스와 함께 그래미상을 거머쥔다. 오랜 공백을 깨고 재기한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힘을 실어주는데, 1980년 수잔 잭스(Susan Jacks)가 그의 곡 ‘Evergreen’을 리메이크했으며, 1981년 돈 맥클린(Don McLean)이 그의 곡 ’Crying’(88년 K.D. Lang과 듀엣으로 다시 불러 영화 ’하이딩 아웃(Hiding out)’에 삽입되었다.)을 불러 빅히트를 기록했다. 1985년에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영화 < 블루 벨벳 >(Blue velvet)에 ‘In dreams’를 삽입한 것도 로이 오비슨 재림(再臨)을 도왔다.(’In dreams’는 국내에서도 영화 음악으로 사랑 받으며 친숙한 곡으로 자리해있다.) 후배들의 협조로 그는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추대되는 영광을 누리기에 이른다. 자신감을 회복한 그는 거물들의 프로젝트 그룹인 트래블링 윌베리스(Traveling Wilburys)에 가담하게 된다. 이 그룹의 멤버는 한 명만으로도 영광스러울만한 이름인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밥 딜런(Bob Dylan), 톰 페티(Tom Petty) 그리고 이엘오(ELO)의 리더 제프 린(Jeff Lynne)으로 짜여졌고 데뷔 앨범 < Mystery Girl >에는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 유투(U2)가 참여했다. 하지만 ‘비운의 스타’ 로이 오비슨은 자신의 별명대로(?) 이 역작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988년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 Mystery Girl >은 1989년 그의 사후에 발매되었고, 비운의 스토리와 앨범 참여 면면들의 명성이 겹치면서 그의 앨범 중 가장 성공한 앨범이 된다. 이 가운데 싱글 ‘You got it’은 차트9위에 올라 정확히 25년 만에 톱10을 기록했다. 하지만 사후에도 그의 노래는 영화 삽입과 후배 아티스트들의 리메이크를 통해 부활을 계속했다. 1991년 넘버원 히트곡인 ’Pretty woman’이 동명영화에 삽입되어 오비슨 열풍을 야기했고, 같은 해 그와 함께 노래했던 동료, 후배 가수들이 그와 함께 불렀던 곡들을 모아 < A Black And White Night Live >라는 앨범을 발표했으며, 이 앨범으로 사후에 그래미상 최우수 남성 보컬상을 수상하는 이색적인 사건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영화 보이즈 온더 사이드(Boys on the Side)에 ‘You got it’이 보니 레이트(Bonnie Raitt)에 의해 리메이크 되어 히트했다. 로이 오비슨은 최고의 전성기였던 1950년대 엘비스라는 거대한 존재로 인해 정상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고, 1960년대 역시 비틀즈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날개를 펴야 할 1970년대는 자신 앞에 닥친 비극으로 좌절해야 했으며, 후배들의 도움으로 화려하게 일어선 1980년대는 어이없는 죽음으로 사라져야 했다. 비운으로 점철된 음악역정이었으나 팝 역사는 그 비운을 환대로 바꿔 기록했다. 끊임없는 역사적 재조명은 시공을 막론하고 그의 노래가 애청되는 길을 터 주었다.
1970년대 복고적인 ‘미국의 소리’ ‘32세의 그는 미국의 가장 대중적인 가수’라고 < 뉴스 위크 >지가 1976년 공언한 대로 존 덴버는 전성기 시절 내내 ‘미국의 목소리’(The voice of America)로 통했다. 그의 청량제 같은 노래들과 수더분한 ‘촌놈’ 외모는 곧 1970년대 중반의 ‘미국 그 자체’였다. 그 무렵 미국은 존 덴버와 같은 존재를 필요로 했다. 1974년과 1975년 미국인들은 워... 1970년대 복고적인 ‘미국의 소리’ ‘32세의 그는 미국의 가장 대중적인 가수’라고 < 뉴스 위크 >지가 1976년 공언한 대로 존 덴버는 전성기 시절 내내 ‘미국의 목소리’(The voice of America)로 통했다. 그의 청량제 같은 노래들과 수더분한 ‘촌놈’ 외모는 곧 1970년대 중반의 ‘미국 그 자체’였다. 그 무렵 미국은 존 덴버와 같은 존재를 필요로 했다. 1974년과 1975년 미국인들은 워터게이트와 월남전 패색이라는 최대의 국가적 위기를 맞고 있었다. 워싱턴 정가는 갈피를 못 잡고 휘청거렸고 국론은 ‘고도의 민주주의 나라’라는 위상을 무색케 할만큼 완전 분열되었다. 미국인들은 허탈했고 피곤했으며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누군가가 나서서 정체성의 위기에 시달리고 있는 그들에게 ‘건강한 미국’을 얘기해 주고 공허한 그들의 마음을 위무해 주어야 했다. 그가 가수라면 좋았고 나아가 ‘쉽고 깨끗한’ 노래를 들려준다면 더 좋았다. 거기에 존 덴버는 딱 알맞은 구세주와 같은 인물이었다. 명반 < 궤적의 피(Blood On The Tracks) >를 내놓은 밥 딜런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실의에 빠진 미국인들을 달래 주기란 힘들었다. 그는 이름만 들어도 격동의 1960년대가 떠오르는, 골치 아픈 존재였다. 그러나 존 덴버는 편했다. 그에게 근심거리란 없어 보였고, 다시 세상은 살 만한 곳인 듯 했다. 그 자신도 1970년대 중반의 상황이 자신을 수면 위로 부상 시켜준 원천임을 알았다. 그는 < 세븐틴 >지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여, 내가 세상이 왜 행복한 곳인가를 노래할 때 내게 그대의 귀를 주오”라고 말했다. “난 미국에 대해, 가족에 대해, 삶의 축복에 대해 노래한다. 난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노래부른다.” 당시 미국인들은 그의 노래 제목만 들어도 즐거워했다. ‘내 어깨 위의 햇살이 나를 행복하게해(Sunshine on my shoulder)’ ‘나를 고향으로, 시골길로 보내주오(Take me home, country roads)’ ‘나의 달콤한 여인(My sweet lady)’ ‘내가 촌놈인 것을 신께 감사드려요(Thank god I’m a country boy)’ 등.. 참으로 낙천적이고 전원적이며 명랑했다. 이 곡들은 모두 싱글 차트에서 1, 2위를 기록했다. ‘차라리 카우보이가 되고 싶다(I’d rather be a cowboy)’고 하고 ‘집에 다시 돌아온(Back home again)’ 것을 찬양하고 산과 바다, 시골이 무대인 그의 노래가 거부감을 줄 리 없었다. 그는 실제로 산을 사랑한 컨트리 보이였다. 공군 조종사의 아들로(1943년생) 존 헨리 듀센도르프가 본명인 그는 로스앤젤레스에 가서 산이 많은 도시 덴버의 이름을 따 개명했다. 또 유랑과 속세의 삶을 살다가 27세에 로키산에 올라가 새로운 인생을 발견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리 바빠도 매년 시간을 내 콜로라도의 전원에 있는 아스펜 집에 묵곤 했다. 그는 ‘콜로라도의 정신’이었다. 주지사 존 밴더후프는 그에게 ‘콜로라도의 계관 시인’이란 칭호를 부여했다. 그는 1970년대 중반 닉슨과 포드 대통령 교체 이후 미국 사회에 자리 잡은 전통적이고 복고적인 가치를 대변했다. 해맑은 컨트리 음악을 들고 나온 그가 환영받은 것은 당시의 보수 바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가 미국인이었고 미국의 정서를 견인한 주역이었기에 1974년과 1975년에 그의 인기는 경쟁자인 영국 로커 엘튼 존을 추월했다. 팝적인 컨트리 록은 강렬한 하드 록과 복잡한 프로그레시브 록이 대세였다. 그러나 워터게이트와 월남전 패망으로 시끄럽고 혼잡스런 사람들에게 이러한 음악들은 귀에 들려 오지 않았다. 존 덴버는 정반대의 ‘컨트리 팝’으로 록의 퇴각을 강제했다. 록 진영은 갑작스런 그의 인기 행진에 놀랐다. 록 비평가들이 볼 때 덴버 노래의 낙천적 분위기는 건강한 정서의 반영이 아니라 단순한 ‘도피적 심리’에 불과했다. 혼탁한 세상을 잊고 편하게 살자는 심산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를 악평하는 사람들은 때문에 그를 ‘팝음악의 극단적 낙천주의자’라고 일컫는가 하면 ‘록의 미키 마우스’라고 내리깔곤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노래가 대중들을 사로잡은 ‘어처구니없는’ 실상에 록 언론의 주도층은 궁지에 빠진 것이 사실이었다. 1974년 여름 전미 차트 정상에 오른 ‘애니의 노래(Annie’s song)’만 해도 그렇다. 삶의 축복을 노래하는 그의 지향을 축약한 이 노래는 이후 수년간 결혼식 때 축가로 가장 많이 연주되었다. 이 곡은 영국 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했으며 4년 뒤에는 아일랜드 플루트 주자 제임스 골웨이(James Galway)가 연주곡으로 리메이크해 3위에 랭크 시켰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이 곡은 그가 캠퍼스 커플로 1967년 결혼한 아내 앤 마텔(Ann Martell)을 위해 쓴 곡이었다. 스키 리프트에서 10분만에 썼다는 이 곡은 노랫말 가운데 애니(앤의 애칭)라는 말을 집어넣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 노래가 애송되는 이점으로 작용했다. 이 곡은 < 피플 >지로부터 그가 쓴 가장 훌륭한 러브 발라드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1980년대 들어서 존 덴버는 이 축복의 찬가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아내 앤 마텔과의 관계가 삐꺽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1979년에 이미 궤도를 이탈했다. 잉꼬나 다름없던 둘은 덴버의 엄청난 성공에 불안과 위기를 느낀 앤이 남편과 ‘의사 소통이 중단됨을 느끼면서’ 악화되었다. 이혼 수속을 밟은 두 사람은 마침내 1983년 갈라서고 말았다. 존은 이 무렵을 이렇게 회고한다. “애니와의 이혼은 내 생애 가장 뼈아픈 순간 중의 하나였다. 우리는 16년간 부부였다. 결혼 15주년 기념일에 우리는 조용히 앉아 ‘우리 잘 안되고 있어’라고 얘기했다. 난 그녀에게 ‘당신이 내게 원하는 것을 난 당신에게 줄 수가 없어. 그러니 다른데 눈을 돌리는게 나을 거야’라고 말했다” 이혼을 맞아 그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슬쩍 입장을 내비쳤다. “난 다시 사랑에 빠지고 싶지만 그렇게 될 거라고 확신하지 않는다. 난 너무도 바빠 한 여인을 내 인생에서 가질 수 없다. 내 마음속의 마지막 일은 관계를 지속할 여인을 찾는 것이다. 그러니 하여튼 그리 쉽지 않을 것 같다. 여성에 대해 정말 배워야 할 것이 많다” 당시 언론은 잉꼬 부부였던 존과 애니의 이혼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한결같이 ‘아니 존 덴버가 이혼이라니...’라는 반응이었다. 아마도 그가 ‘애니의 노래’만 부르지 않았어도 충격은 훨씬 덜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충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더욱 커다란 쇼크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1988년 8월 ‘너무 바빠서 여자를 사귈 수 없다’는 말과 달리 호주 출신의 늘씬한 가수 겸 배우인 카산드라 델라니(Cassandra Delaney)와 재혼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28살인 델라니는 45세였던 존 덴버보다 무려 17살 연하였다. 그는 지난 1990년 한국을 찾아 힐튼호텔에서 공연을 가진 바 있다. 콘서트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는 “‘애니의 노래’의 주인공인 애니와 왜 헤어지게 됐는가”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당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사람은 좋아질 때도 싫어질 때도 있다”고 말끝을 흐렸다. 휴식도 없이 내리 10곡 이상을 부르는 등 환상적인 호흡과 성량을 자랑한 이 내한 무대에서 그는 끝내 최고의 레퍼토리인 ‘애니의 노래’는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 아내인 델라니와의 부부 생활도 순탄하진 못했다. 4년간의 짧은 인연을 끝내고 두 사람은 1992년 이혼 법정에 들어서야 했다. 이 과정에서 불미스런 일이 발생, 그는 다시 언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환경운동가’ 또 ‘마음씨 좋은 컨트리 보이’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그가 음주 운전 사고를 일으켜 구속된 것이었다. 1993년 8월의 일이었다. 그는 델라니와 이혼을 확정짓고 난 뒤 축하하는 뜻에서(아니 이런!) 과음하게 됐다고 진술했다. 50만 달러의 벌금과 자선 콘서트를 개최하라는 징계를 받고 풀려나긴 했지만 이 사건은 그의 이미지에 단단히 먹칠을 했다. 일이 안되다 보니 그가 1976년에 설립한 윈드스타 파운데이션(Windstar Foundation)도 갈수록 재정이 악화돼 규모와 인원을 줄이는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그러나 존의 고행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음주 운전 사건 1년 뒤인 1994년 8월 21일 자정, 다시 만취상태에서 1963년형 포르셰가 가로수를 들이받는 사고를 일으켰다. 이날 사고도 델라니와 이혼 별거 수당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뜻대로 잘 안 풀려’ 그만 홧김에 음주한 것 때문이었다. 존 덴버는 ‘캐시(카산드라)가 나의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었다’고 불평했다. 음주 운전 사고 재범으로 그는 유죄판결이 날 경우 2년 간 옥살이를 하게 될 위기에 몰렸지만 명성에 힘입어 다행히 그 같은 화는 면했다. 하지만 이는 ‘만능 연예인’으로서의 그의 제기를 불능으로 만드는 치명타 역할을 했다. 환경 운동에 나서고 기아 문제와 복지 부문, 그리고 반전 활동에 아낌없이 자신을 바쳤던, 모든 찬란한 순간이 빛을 잃어 가는 순간이었다. 1976년 이후 그가 인기 차트 톱 10에 랭크시킨 곡은 없었다. 1982년 플라시도 도밍고와 ‘아마도 사랑은(Perhaps love)’을 함께 부르며 건재를 과시했지만 주류에서는 이미 떨어져 있었다. 그는 1984년 <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지의 테니스 헌트와의 인터뷰에서 “난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난 요즘 젊은이들이 살 레코드를 만들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의 가수로서의 시대는 소실점을 향했고 4년 연속 그래미상 시상식 사회를 본 엔터테이너로서의 시대도 거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1970년대 중반 미국 상황이 불러낸 가수일 뿐이었다. 사회기류가 바뀌면서 그에 대한 ‘효용가치’는 뚝 떨어졌다. 그가 가수보다 ‘예능인’에 비중을 둔 것도 외부 환경 변화에 따른 적응의 방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우리나라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위에 나열한 곡 외에도 ‘오늘(Today)’ ‘정크(Junk)’를 비롯해 무수한 곡들이 라디오 전파를 탔다. 그러나 그의 노래가 지금은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우리의 1970년대 팝송 청취가 압도적으로 ‘백인 팝(White Pop)’에 젖어 있음을 상징하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언젠가 ‘내가 낙천적인 이유는 내가 할 때마다 모든 것이 새롭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제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다.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팝계의 메인스트림을 기웃거리던 라틴 음악은 21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비로소 팝시장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1980년대 라틴계 미소년들로 구성된 그룹 메뉴도(Menudo)의 일원이었던 리키 마틴(Ricky Martin)과 배우와 가수 활동을 겸하고 있는 제니퍼 로페즈(Jennifer Lopez)로부터 점화된 라틴 팝의 인기는 라틴 지역의 날씨보다 더 뜨거웠다. 그러나 그들의 인기...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팝계의 메인스트림을 기웃거리던 라틴 음악은 21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비로소 팝시장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1980년대 라틴계 미소년들로 구성된 그룹 메뉴도(Menudo)의 일원이었던 리키 마틴(Ricky Martin)과 배우와 가수 활동을 겸하고 있는 제니퍼 로페즈(Jennifer Lopez)로부터 점화된 라틴 팝의 인기는 라틴 지역의 날씨보다 더 뜨거웠다. 그러나 그들의 인기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 리치 발렌스(Ritchie Valens), 세르지오 멘데스(Sergio Mendez), 산타나(Santana), 마이아미 사운드 머신(Miami Sound Machine), 셀레나(Selena), 루이스 미구엘(Luis Miguel), 훌리오 이글레시아스(Julio Iglesias), 존 세카다(Jon Secada) 같은 선배들이 닦아 놓은 길 위에서 이 후배들은 라틴 댄스를 추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Eres Tu''라는 히트곡으로 우리 기억에 살아있는 모세다데스(Mocedades)도 라틴 음악을 언급할 빼놓아서는 안 될 혼성 6인조 보컬 그룹이다. 1967년 스페인의 빌바오에서 결성된 이들은 Voces Y Guitaras(Voice And Guitar란 뜻)이란 혼성 8인조로 출발했지만 이들이 인기 가도를 달리던 1970년대부터는 이름을 모세다데스로 개명하면서 6명으로 구조 조정을 단행했다. 모세다데스가 활동의 나래를 펴기 시작한 1960년대 후반은 포크 음악과 비틀즈가 전 세계 대중 음악을 압도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초기 이들의 음악도 포크적인 라틴팝이었다. 1973년, 스페인 대표로 ''Eres Tu''로 유러비젼송 콘테스트에 참가한 이들은 2위로 입상했고 이 곡은 미국에서도 싱글로 발표됐다. ''Touch the wind''란 영어 부제가 붙은 ''Eres Tu''가 1974년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도 9위까지 오르자 모세다데스는 전 세계에 퍼지는 자신들의 인기를 확인했으며, 특히 우리나라 라디오에서 엄청난 신청 엽서를 자랑했다. 지금까지 20여장이 넘는 정규 앨범을 발표했고, 1980년대에는 같은 국적의 세계적인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Placido Doningo)와 함께 음반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들은 모국어인 스페인어 외에도 영어, 포루투갈어, 독일어, 불어, 이태리어 등으로 음반을 발표해 말 그대로 ''세계적인 밴드''로서의 명성에 맞는 활동을 했다. 1997년에는 디즈니 만화 영화의 주제곡들을 취입한 < Mocedades Canta A Walt Disney >를 발표해 스페인을 중심으로 한 라틴 국가들에서 이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입증했다. 모든 음악에는 뿌리가 있다. 그 기초와 원류를 무시하고 현재의 것만을 중시하고 최고라고 생각은 사상누각일 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온고지신''의 정신을 소중히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멤버 : Bob Flick, Dick Foley, John Paine (2), Mark Pearson, Mike Kirkland 멤버 : Bob Flick, Dick Foley, John Paine (2), Mark Pearson, Mike Kirkland
핏불(Pitbull)의 본명은 아르만도 크리스티안 페레스(Armando Christian Perez) 로 미국의 랩퍼, 가수, 프로듀서이다. 핏불(Pitbull)의 본명은 아르만도 크리스티안 페레스(Armando Christian Perez) 로 미국의 랩퍼, 가수, 프로듀서이다.
노래 : Scouting For Girls (스카우팅 포 걸즈)
청아한 음색과 미인은 아니지만 이지적이고 고결한 모습으로 다른 가수들과는 확실한 차별성을 둔 제니퍼 원스(Jennifer Warnes)는 영화 < 사관과 신사 >와 < 더티 댄싱 >의 주제곡 'Up where we belong'과 '(I've had) The time of my life'로 1980년대에 알려졌지만 음악을 꼼꼼히 찾아 듣는 사람들에겐 그 이전인 1977년에 전미 차트 6위를 차지한 'Rig... 청아한 음색과 미인은 아니지만 이지적이고 고결한 모습으로 다른 가수들과는 확실한 차별성을 둔 제니퍼 원스(Jennifer Warnes)는 영화 < 사관과 신사 >와 < 더티 댄싱 >의 주제곡 'Up where we belong'과 '(I've had) The time of my life'로 1980년대에 알려졌지만 음악을 꼼꼼히 찾아 듣는 사람들에겐 그 이전인 1977년에 전미 차트 6위를 차지한 'Right time of the night'로 이미 익숙해진 여가수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두 곡 외에도 1987년에 공개한 'Famous Blue Raincoat'로 다운타운을 점령하며 국내 팬들과의 착상에 다시 한번 성공하기도 했다. 1947년 3월 3일, 시애틀에서 태어난 제니퍼 원스는 갓 20살이던 1967년에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하면서 인지도를 쌓기 시작해 이듬해에 뮤지컬 < 헤어 >에 주연 급으로 출연하면서 가수로서의 워밍업을 시작했다. 뮤지컬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정치, 사회적으로 어수선하던 1968년에 차분한 포크 성향의 데뷔앨범 < I Can Remember Everything >으로 가멸찬 스타트를 했지만 블루스 리바이벌과 사이키델릭이 대세이던 당시의 음악 시장에 삼투하지 못했다. 1969년에는 더 후(The Who)의 노래 제목에서 힌트를 얻은 듯한 앨범 < See Me, Feel Me, Touch Me, Heal Me >로 기백 있는 두 번째 도전을 시도했지만 이 역시 철저히 가려졌다. 좌절한 제니퍼 원스는 3년 동안 신작을 발표하지 않은 채 자신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고민한 후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의 멤버였던 존 케일(John Cale)이 프로듀서로 참여한 3집 < Jennifer >를 발표했지만 이 역시 성공하지 못하자 개인적인 좌절을 마음에 안고 캐나다 출신의 거물 싱어 송라이터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의 백 보컬리스트가 되었다. 하지만 제니퍼 원스는 레너드 코헨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공감하고, 느끼게 된다. 결국 레너드 코헨은 제니퍼 원스의 '멘토'와 같은 존재가 되었고 제니퍼는 레너드 코헨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1987년에 그의 노래들로만 채워진 명반 < Famous Blue Raincoat >를 내놓아 흠모의 정을 표했다. 이 앨범은 미국에서는 72위까지 밖에 오르지 못했지만 국내에서 이 타이틀곡만큼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확실히 장악했고 지금도 비 오는 날이면 신청이 끊이지 않는 그의 시그니처 송이 되었다. 제니퍼 원스가 세인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1977년에 자신의 이름을 타이틀로 내세운 4집에서 컨트리 풍의 'Right time of the night'이 빌보드 싱글 차트 6위에 오르면서부터. 후속 곡 으로 낙점된 발라드 'I'm dreaming'이 50위에 랭크되는 성적을 거둔 그는 1979년에 다섯 번째 음반 < Shot Through The Heart >을 발표해 컨트리 팝 스타일의 'I know a heartache when I see one'이 19위를 차지하며 '원히트원더 가수'라는 꼬리표를 뗐다. 그로부터 8년 동안 제니퍼 원스는 정규앨범 제작에 착수하지 않았지만 그 사이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고 바쁜 시간을 보내는 아이러니를 맞이했다. 제니퍼 원스는 1982년에 리차드 기어와 데보라 윙어가 주연한 영화 < 사관과 신산 >의 주제곡 'Up where we belong'을 허스키 보이스로 유명한 블루 아이드 소울 가수 조 카커(Joe Cocker)와 듀엣으로 불러 그해 가장 큰 히트 곡이 되었다. 이 곡은 3주 동안 싱글 차트 정상을 지켰으며 그래미 최우수 듀엣 부문과 아카데미에서 주제가 부문도 수상하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이제 제니퍼 원스는 더 이상 '레너드 코헨'의 백 보컬리스트가 아니라 당대를 대표하는 여가수로 그 위치가 격상됐다. 하지만 이 노래의 스매시 히트는 그를 옭아맸다. 1983년에는 당시 신인이었던 탐 크루즈가 주연한 미식축구 영화 < All The Rights Moves/뜨거운 가슴으로 내일을 >의 동명 주제곡을 크리스 톰슨(Chris Thompson)과 함께 부르며 'Up where we belong'의 성공 공식을 그대로 따랐으나 영화와 주제곡 모두 참패하자 제니퍼 원스는 다시 자신 속으로 움츠려 들었다. 4년 후인 1987년, 이 지적인 여가수는 다시 남성 가수와 함께 영화 주제곡을 취입했다. 바로 'Unchained melody'로 유명한 라이처스 브라더스(Righteous Brothers)의 멤버였던 빌 메들리(Bill Medley)와 함께 그 유명한 댄스 무비 < 더티 댄싱 >의 주제가 '(I've had) The time of my life'를 부른 것. 이 곡으로 제니퍼 원스는 'Up where we belong'으로 달성한 그랜드슬램(싱글차트 1위, 그래미 수상, 아카데미 주제가 부문 수상)을 재현하며 다시 한번 영화 주제가 여왕으로서의 명성을 이어갔다. 1992년에 발표한 일곱 번째 앨범 < The Hunter >와 2001년에 공개한 8집 < The Well >은 빌보드 앨범차트 200위에 랭크되지도 못한 채 대중들과의 접점 찾기에 실패했지만 < The Well >에 수록된 빌리 조엘(Billy Joel)의 원곡을 재해석한 'And so it goes'는 국내에서 은은한 사랑을 받았다.
노래 : Los Del Rio (로스 델 리오)
멤버 : 안토니오 로미오 몽주(Antonio Romeo Monge), 라파엘 루이즈(Rafael Ruiz) 멤버 : 안토니오 로미오 몽주(Antonio Romeo Monge), 라파엘 루이즈(Rafael Ruiz)
노래 : Bay City Rollers (베이 시티 롤러스)
1980년대 초반에 우리나라에서 ’’Sexy music’’의 멜로디를 몰랐던 사람이 있었을까? 그 선율은 몰라도 그 관능적이다 못해 불경하기까지 했던 노래 제목을 몰랐던 사람이 있었을까? 놀란스의 ’’Sexy music’’은 메이드 인 잉글랜드의 가족 그룹 둘리스(Dooleys)의 ’’Wanted’’, 독일산(産) 3인조 여성 보컬 트리오 아라베스크(Arabesque)의 ’’Hello, Mr. Monkey’’와 ... 1980년대 초반에 우리나라에서 ’’Sexy music’’의 멜로디를 몰랐던 사람이 있었을까? 그 선율은 몰라도 그 관능적이다 못해 불경하기까지 했던 노래 제목을 몰랐던 사람이 있었을까? 놀란스의 ’’Sexy music’’은 메이드 인 잉글랜드의 가족 그룹 둘리스(Dooleys)의 ’’Wanted’’, 독일산(産) 3인조 여성 보컬 트리오 아라베스크(Arabesque)의 ’’Hello, Mr. Monkey’’와 함께 소위 ’’한국의 3대 디스코 음악’’으로 198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디스코의 전형이었다. 1970년대 후반 영국에서 놀란(Nolan) 가(家)의 5자매로 구성되었지만 곧 큰언니가 결혼과 함께 밴드에서 출가하면서 4인조로 굳어졌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까지 나름의 지명도를 갖고 있던 일본의 동경 가요제에 ’’Sexy music’’으로 출전한 자매들이 그랑프리를 차지하자 그 인기는 현해탄을 건너와 국내에서는 스폰지가 물을 먹듯 급격히 퍼져 갔다. 아름다운 용모와 제목처럼 ’’섹시한’’ 율동으로 우리나라 남성들의 애간장을 태운 이들은 우리나라에서만 스타였던 둘리스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 영국 출신, 가족 중심의 그룹, 동경 가요제 대상 수상, 그리고 영국이나 일본에서보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하늘만큼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는 점 등이다. 이들의 인기 상승은 1980년대 초반 우리나라 정부가 국민의 관심을 이러한 유흥이나 스포츠에 돌리기 위해 오락 문화에 대해 빗장을 풀어 준 영향도 작용했기 때문이다. 놀란스, 둘리스, 아라베스크 모두 미국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팀들이었다. 이때부터 국내 팝 청취자들은 미국의 빌보드 차트에 구애받지 않고 다른 나라들의 대중 음악에도 본격적으로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FR 데이비드(FR David), 가제보(Gazebo), 런던 보이스(London Boys), 조이(Joy) 등은 이러한 선배들이 일군 금단의 열매를 맛본 것이다. ’’Sexy music’’ 이후 발표된 일련의 싱글들은 모두 우리나라에서 일정 수준의 인기 가도를 달렸다. 초기 로큰롤 시절 두왑 밴드의 코러스를 살린 ’’I’’m in the mood for dancing’’, 가장 멋진 하모니를 들려준 ’’Who’’s gonna rock you’’, 그리고 펑키(funky)한 ’’Don’’t love me too hard’’ 등 그들이 발표하는 싱글 모두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노래를 직접 빚어내지 못한 것이 치명타였다. 국내의 록과 아트록 매니아들은 그러한 이유로 이 놀란 가문의 자매들에게 돌팔매를 가했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아티스트는 시간이 흐를수록 모진 생명력을 과시한다. 1999년 ’’Sexy music’’이 수록된 팝 모음집 음반이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1982년 내한 공연 때 놀란스를 환영했던 것처럼 이 앨범을 반갑게 맞이했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가수, 그러나 가장 천대받는 가수 이처럼 극도로 엇갈린 가수는 없다. 미국의 대중 주간지 < 피플 >은 92년 “그는 팝 음악의 창공에 독특한 위치를 점령하고 있다”며 “팬들로부터 그처럼 열광적인 환호를 받고 동시에 음악 비평가들로부터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받는 아티스트도 드물 것이다”고 기술했다. ‘이 시대의 스타’ 마이클 볼튼(Michael Bolton), 1990년 신년 벽두에 ‘그대없...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가수, 그러나 가장 천대받는 가수 이처럼 극도로 엇갈린 가수는 없다. 미국의 대중 주간지 < 피플 >은 92년 “그는 팝 음악의 창공에 독특한 위치를 점령하고 있다”며 “팬들로부터 그처럼 열광적인 환호를 받고 동시에 음악 비평가들로부터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받는 아티스트도 드물 것이다”고 기술했다. ‘이 시대의 스타’ 마이클 볼튼(Michael Bolton), 1990년 신년 벽두에 ‘그대없이 어떻게 살아가리?(How am I supposed to live without you?)’로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라 1990년대 첫 슈퍼스타가 된,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메가톤급 히트 앨범 < 영혼의 공급자(Soul Provider) > 이후 발표하는 앨범마다 기록적인 판매로 대중적인 명성을 구가했지만 비평가들로부터는 철저히 외면 당했다. 평론가들은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그에게 호된 질책으로 일관했다. 그것은 거의 ‘두들겨 패는’ 수준이었다. 일례로 <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지의 유명 저널리스트 ‘로버트 힐번’은 그를 가리켜 창조성 없이 악보를 그대로 전달하는 단계에 그친다는 의미에서 ‘팝의 썰매’라고 규정짓고는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자신이 돌파 할 수 없는 노래에 결코 도전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틀 속에 안주하려 한다. 그와 음악과의 관계는 스티븐 시걸과 영화와의 관계나 같다” 말이 그렇지 이것은 모욕이나 매 한가지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가 평자들로부터 아티스트란 말을 들을 수가 없다. 볼튼이 소울의 고전을 비롯해 흘러간 명곡을 멋들어지게 재해석해 노래해도 그들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이구동성으로 “원작의 기품을 버려 놓았다”고 질타한다. 그 가운데 가장 심한 것이 < 롤링 스톤 >지의 평가였다. 이 잡지는 1993년 43명의 비평가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 그를 ‘최악의 남자 가수’로 선정했다. 또한 빅 히트작 < 불후의 고전(Timeless, The Classics) >를 ‘최악의 앨범’으로 뽑아 미국에서만 5백만 장 이상이 팔려 나간 대중적 인기를 무색케 해 버렸다. 그가 이처럼 비평계의 푸대접을 받게 된 것은 물론 그의 보컬 스타일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핏줄을 솟게 하고 마치 토해 내는 듯한’ 창법을 구사한다. 4옥타브를 충분히 넘나드는 넓은 음역, 이것이 팬들에게는 환상이었지만 평론가들의 귀에는 높고 답답하게 들릴 뿐이었다. 그들은 그의 가창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금방 눈치챌 정도로 ‘작위적’이어서 곧 사람들을 질리게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그들은 예술적 고뇌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없는 그 작위가 결국은 상업성을 노린 것임을 경계한다. 로버트 힐번이 지적하는 ‘안주적 자세’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이를테면 대중적 성공에 떠밀려 아티스트적 실험 정신을 휴지화했다는 것인데, 실제로 볼튼은 < 영혼의 공급자 > 이후 앨범들인 < 시간, 사랑 그리고 부드러움(Time, Love And Tenderness) >과 < 불후의 고전 >에서 새로움을 선사하기보다는 전작의 성공패턴을 답습하는 경향을 드러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옛 곡의 리메이크가 성공하자, 줄줄이 리메이크 작품을 내놓았으며 더구나 보컬 스타일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변명의 여지없이 전작의 성공 재창출에 지나치게 집착했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 팔리는 음반을 만들기 위해 모험을 가능한 배제한 채 빅히트된 음반(Soul provider)을 모델로 그 스타일을 철저히 쫓는다는 얘기다. 비평가들이 이처럼 유난히 그에게 비판의 화살을 겨냥하는 데는 그가 곡을 만들어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라는 점도 크게 작용한다. 평론가들은 노래만 하는 싱어일 경우 그가 대중적 호응만을 고려한다 할지라도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대중의 기호에 따라 그들의 정서를 위무해 주는 팝 가수도 나름대로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다. 그러나 곡을 만들 능력이 있는 사람, 즉 싱어송라이터의 경우는 자신의 음악 세계를 펼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그가 앨범 판매량을 늘리기에 얽매여 있을 때는 가차없이 장사꾼으로 매도해 버린다. 만약 볼튼이 단순한 싱어에 머물렀다면 아마도 그처럼 잔인한 혹평에 시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과연 이러한 비평가들의 철저한 외면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비평가들이 뭐라 떠들어도 압도적으로 자신의 노래를 사랑해 주는 대중이라는 ‘응원군’을 내세워 여유를 잃지 않았고 앨범의 높은 판매고를 ‘비평에 견디는’(Critic-proof) 방파제로 제시하곤 했다. 사실 그의 노래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진 음악 관계자들도 적지 않다. 우선 그가 1988년 ‘만의 부두에 앉아(Sitting on the dock of the bay)’를 리메이크했을 때 이 곡의 원작자인 오티스 레딩의 미망인 젤마 여사로부터 극찬을 받은 사실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는 볼튼에게 편지를 써서 또는 공개석상에서 그의 노래가 “지금까지 나온 남편 곡의 무수한 버전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며 “만약 지하에 있는 남편도 들었다면 흡족했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볼튼의 강력한 후원자인 어머니 헬렌 볼로틴(볼튼의 본명은 Bolotin) 여사는 “내 아들이 노래하는 것을 비명을 지르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그는 단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라며 비평계의 시각을 몰지각으로 단정한다. 그와 곡을 함께 쓰는 오랜 친구 다이안 워렌(Diane Warren)은 한편으로 볼튼에 대한 평자들의 차가운 시선이 오히려 대중의 호응을 증폭시켰다는 흥미로운 견해를 내놓고 있다. 그의 주장은 “한 남자가 혹독하게 비판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한없이 부드럽게 노래할 때 여성들은 오히려 그를 사랑해 준다. 여성들은 거기서 녹아 버린다”는 것이다. 부연하면 평론가들의 무차별 공격이 도리어 여성 특유의 모성본능을 자극해 그를 감싸주게 됐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그의 음악팬들은 절대 다수가 여성인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그처럼 비평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가엾은(?) 남자가-더구나 수려한 외모를 갖춘 남자가!-애절하게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를 노래할 때 대부분이 여성들은 이성이 마비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마이클 볼튼과 비평과의 대치는 곧 ‘감성적인 여성 팬들’과 ‘날카로운 평론가들’간의 보이지 않는 대결(?)의 측면도 가세된 셈이다. 하지만 아티스트란 어떤 형태로든 비평가들의 눈초리를 암암리에 의식하게 된다. 그는 얼마나 심기가 불편했던지 1991년 그래미 최우수 남자 팝 가수상을 받던 날 밤 기자들에게 “무례한 사람들은 내 엉덩이에 키스하라”고 퍼붓기도 했다. 여기서 무례한 사람들이란 마구 펜을 휘갈기는 저널리스트나 비평가를 가리킴은 물론이다. 그런데 1993년 하반기에 그가 내놓은 앨범 < 한가지 >는 상당히 비평가들을 의식해 만들었다는 느낌을 주었다. 보컬의 톤도 많이 낮추고 자작곡의 비중을 높였으며 비판의 핵이었던 리메이크 남발도 자제, 옛곡은 빌 위더스의 ‘내게 기대어(Lean on me)’ 한 곡으로 대폭 줄여 버린 것이었다. 평론가들의 반응은 당연히 ‘이제까지 볼튼의 앨범 중 최고’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작품성을 인정받는 대가로 대중적인 음반 판매 실적은 과거에 비해 저조해 두 마리 토끼를 사냥하지는 못했다. 그의 상업성이 유달리 지적 받게 된 데는 또한 그의 ‘눈물겨운 과거’도 한 요인이 되었다. 7살 때 섹스폰을 잡고 11살에 기타를 치는 등 음악 생활을 일찍 시작했지만 그의 청년기는 지극히 불우했다. 발표하는 음반마다 실패해 야간 업소 출연으로 겨우 연명해 나갈 정도였다. 1975년 레코드점 여직원인 모린(Maureen)과 결혼한 이후에도 생활은 개선되지 않아 노래 과외와 아이 돌봐주는 일, 즉 베이비시터로 집세를 충당하곤 했다(참고로 그가 봐 준 아이 중의 한 사람이 다름 아닌 폴라 압둘이었다. 이상하게도 두 사람의 관계는 묘한 악연으로 발전해 1990년 마이클 볼튼의 ‘그대 없이 어떻게 살아가리?’를 1위 자리에서 끌어내린 곡이 폴라 압둘의 ‘오포지츠 어트랙트(Opposites attract)’였고 이듬해 앨범 1위를 볼튼과 바통 터치한 주인공도 폴라 압둘이었다). 그의 술회에 따르면 당시 볼튼 부부와 세 딸은 마카로니와 치즈로 끼니를 때웠다고 하며 볼튼은 허구한 날 식탁에 앉아 “어떻게 집세 내고 자식을 먹여 살릴 것인가”만을 걱정했다고 한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터널의 끝에서도 빛을 볼 수 없을 만큼 참담했다”고 표현했다. 때문에 36세가 되어서야 성공했을 때(그는 1954년생으로 미국 코네티컷 주 뉴 헤이븐 출신) 주변에서 ‘하룻밤 자고 나니 스타가 된 케이스’라고 하자 “무슨 소리냐. 성공하기까지 대략 3천6백42번의 밤을 보냈다”고 응수했던 것이다. 비평가들은 그가 바닥 생활을 청산하자마자 곧바로 상업적으로 치달은 것을 못마땅해한다. 그럴수록 과거의 고난을 예술적으로 승화해 작품에 구현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의 성공은 사생활에도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 영혼의 공급자 >가 수면 위로 부상하던 1989년 아내 모린과 15년 결혼 생활을 청산하게 된 것이었다. 그 시점이 볼튼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그 무렵 한 인터뷰에서 그는 “하필 가장 잘 나가는 때에 성공을 축하하는 전화가 걸려 오는가 하면 이혼 증언 서류에 대한 변호사의 전화가 걸려 왔다. 너무 아이러니컬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그는 이듬해 정식으로 이혼했다. 그리하여 방문하는 관계로 매듭짓긴 했지만 세 딸들 아이사(20), 홀리(18), 타린(16)과도 떨어져 살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는 성심 성의껏 딸들을 보호하는 자상한 아빠의 역할에 충실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식들이 인정하는 가운데 1992년부터 TV배우인 니콜레트 셰리단(Nicollette Sheridan)과 건전한 연인 관계를 맺어 오고 있다. 마이클 볼튼은 우리에게 대중적으로 성공한 뮤지션과 비평계간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사이를 생각하게 한다. 앨범이 많이 팔려 나갈수록(진지함이 없을 경우) 비평가들로부터 매질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그처럼 실감나게 보여준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는 성공과 함께 이혼의 아픔을 겪었다. 그 스스로도 “성공하면 할수록 그것은 네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비디오 게임처럼 첫 번째 스크린을 통과하고 나면 너를 쏘려고 레이저 미사일을 단 비행접시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공의 대가는 쓰디쓴 법이다.
노래 : Elvis Presley (엘비스 프레슬리)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오늘날 폴과 비틀스를 있게 한, 단 한사람의 영향을 꼽는다면 위 해설처럼 단연 트럭운전사출신 엘비스 프레슬리다. 존 레논은 이를 결정적 한마디로 축약한다. “엘비스가 나타날 때까지 내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무 것도 없다(Nothing affects me until Elvis)." 존과 폴이 만나서 처음 마음먹은 것은 사실 엘비스의 음악을 더 강하게 표출해내는 것일 뿐이었다. 그들을 통해서 로큰롤의 진정한 역사는 ‘시대의 풍운아’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개막되었다는 사실이 다시금 확인된다. 물론 역사가에 따라 로큰롤의 효시를 행크 발라드(Hank Ballard)나 빌 헤일리(Bill Haley) 또는 척 베리(Chuck Berry)로 꼽기도 한다. ‘Work with me, Annie’ ‘Crazy man crazy’ ‘Maybellene’ 등과 같은 이들의 대표곡들이 시기적으로 먼저 구동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 다수 대중들은 여전히 로큰롤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엘비스가 나와서야 비로소 그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빌보드지의 결론. ‘1953년 록음악이 시작되었다고 하나 정작 차트나 방송에서 그 시대를 풍미하기 시작한 것은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싱글 ‘Heartbreak hotel’이 연속 8주 넘버원에 머물면서부터였다.’ 초기 로큰롤은 척 베리나 버디 할리와 같은 탁월한 ‘작가’를 소유했다. 리틀 리처드나 제리 리 루이스라는 출중한 ‘배우’ 그리고 조 터너, 보 디들리와 같은 ‘음악감독’들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로큰롤은 강풍을 휘몰아칠 역동적 ‘스타’가 필요했다. 그가 엘비스였다. 그 시대는 흑인의 리듬 앤 블루스를 소화해줄 백인가수를 요구했고 엘비스는 백인대중들로부터 ‘저 친구는 백인이면서 왜 검둥이노래를 부르는 거야?’라는 의아함을 일으킬 만큼 탁월한 흑인감성의 보유자였다. 이러한 시의성은 그러나 일반의 인식처럼 56년 RCA 소속의 엘비스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었고 이미 54년 선 레코드사의 엘비스로서 확립된 것이었다. 샘 필립스 사장의 전설적인 선 시절에 엘비스는 ‘That`s all right’, ‘Blue moon of Kentucky’ 와 ‘Mystery train’ 등을 부르면서 컨트리와 R&B를 크로스오버화한 신종의 로커빌리를 선보이면서 벌써 ‘웨스턴 밥의 왕’으로 불렸다. 이 때 이미 순회공연에서 팝 음악사상 초유의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다. 『뉴스위크』는 ‘금세기 백년간의 스타’ 특집기사를 다루며 그의 등장을 ‘20세기의 사건’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당시 엘비스 백업 밴드에서 드럼을 쳤던 D.J. 폰타나는 54년 상황을 다음처럼 술회한다. “엘비스 무대가 끝나고 나면 노래를 따라해 줄 관객들은 다 빠져버려 아무도 없었지요. 애들은 백 스테이지에서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습니다. 내 생각에 그 애들은 아마 우리 연주는 듣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오로지 ‘처음으로 흔드는 가수’ 엘비스를 보고자 하는 것이었죠.” 로컬 무대에서 전국 네트워크 TV로 진출하면서 마침내 ‘엘비스마니아’는 폭발했다. 미국의 3대 전국 공중파 방송 ABC CBS NBC의 체제가 정립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그는 텔레비전시대의 영웅으로서 ‘라디오스타를 죽이는’ 새로운 미디어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타미와 지미) 도시 브라더스의 CBS < 스테이지 쇼 >, NBC의 < 밀턴 벌 쇼 >와 < 스티브 알렌 쇼 > 그리고 저 유명한 CBS의 < 에드 셜리번 쇼 >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벌써 음악의 영상시대를 주도했다. 음악이 음반으로만 소구하던 시대는 ‘섹시 가이’ 엘비스의 출현으로 끝났다. ‘보는 음악’ 시대를 주도한 최초의 인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엘비스였다. 스탠다드 팝의 파수꾼 프랭크 시내트라도 자기 TV 쇼의 떨어지는 시청률을 참다못해 ‘음악의 공적(公敵)’이라고 성토해마지 않았던 엘비스를 출연시켜야 했다. TV 뿐만 아니라 영화 최초의 로큰롤 스타도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 러브 미 텐더 > < 러빙 유 > < G.I. 블루스 > < 블루 하와이 > 등 31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그는 관객들에게 로큰롤의 열정과 록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의 호소력을 제공했다. 음반 텔레비전 그리고 영화라는 ‘삼국통일’에 성공하며 천하를 제패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이 아래로 보일 정도의 막강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77년 사망하면서 그의 캐리어가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그는 무려 2억5천만장의 앨범을 팔았다. 이 기록에 가장 접근한 인물은 비틀스가 아닌 2억장의 빙 크로스비(캐롤 ‘White Christmas’가 결정적이다)며 프랭크 시내트라는 겨우 4천만장에 불과했다. ‘1인 기업’ 엘비스는 막대한 돈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인 핑크를 포함한 갖가지 칼라의 자동차 캐딜락을 구입했고 멤피스에 4만 달러 짜리 목장 그리고 10만 달러로 저택 그레이스랜드를 샀다. 전용 비행기는 물론 텔레비전 세트 그리고 첨단기계들도 마련했다. 물론 지금이야 흔해 빠진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특히 엘비스와 같은 하층계급 청년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부의 상징들이었다. 동시대 그리고 후배가수들이 일개가수에서 기업으로 융기한 엘비스를 통해 신분상승과 스타덤 획득 욕구를 품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엘비스처럼 슈퍼스타이면서 동시에 부자가 되고 싶어했다. 버디 할리는 엘비스를 빅 스타로서 존경했고 밥 딜런의 음악동기는 엘비스보다 큰(bigger than Elvis)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톰 존스는 아예 영국의 제록스판 엘비스였다. 엘비스처럼 구레나룻을 길렀던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직접 그를 만나기 위해 그레이스랜드 담을 넘다가 제지당했고 그룹 퀸은 엘비스를 안중에 두고 50년대 로큰롤풍의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를 만들었다(로저 테일러의 증언 “처음으로 텔레캐스터와 부기 앰프를 쓴 다소 빈약한 사운드였다. 분명 엘비스를 염두에 두고 만든 곡이었다.”). 마크 알몬드(Mark Almond)의 명쾌한 한마디를 들어보자. “그는 왕이다. 그밖에 다른 코멘트는 일체 필요없다!” 하지만 60년 전역 이후 엘비스는 달라졌다. 매니저였던 톰 파커 퇴역대령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음악방향이 빗나간 것이었다. 예의 로큰롤 넘버와는 거리가 먼 It`s now or never나 Surrender와 같은 감상적인 이탈리아 민요를 영역해 불렀다. 변화(아니면 변신?)의 징조는 프랭크 시내트라 쇼에 출연했을 때 뚜렷이 나타났다. 이 쇼에서 엘비스는 스탠다드 가수의 상징인 턱시도 정장을 했으며 호스트 프랭크 시내트라와 서로의 대표적 히트곡인 ‘Witchcraft’와 ‘Love me tender’를 바꿔 불렀다. 이 시점을 계기로 엘비스가 로큰롤을 버리고 스탠더드 팝 가수로 돌아서 청춘진영을 배신했다는 주장이 고개를 비집는다. 명백한 훼절이라고 단정해도 선뜻 반대논리를 펴기 어렵다. 그러나 친(親)엘비스 측은 그로써 그가 로큰롤 가수에서 ‘국민가수’로 승격하는 의미 있는 업적을 남기게 됐다고 반박한다. 로큰롤만의 논리로 음악을 풀고 엘비스를 규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어떻게 가치판단을 하느냐는 것은 관련자의 이데올로기나 각 시대의 성격에 따를 수밖에 없다. 변절이든 성숙이든 이 점만은 분명하다. 엘비스의 보컬이 초기의 로큰롤가수로 한정되었을 때 과연 후대에의 보컬 영향력을 소지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의 가창력은 음역, 에너지, 통제력, 피치 등 모든 면에서 압권으로 평가되어왔다.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었지만 ‘멀티칼라’인 그의 보이스에는 자니 레이의 급격한 변색, 두왑 그룹인 잉크스파츠(Inkspots) 빌 케니의 테너, 딘 마틴의 솜사탕 그리고 마리오 란자의 풍미가 동거했다. 그러면서도 로이 오비슨과 같은 유니크한 개성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스탠더드 발라드를 소화함으로 해서 우리들은 ‘Are you lonesome tonight’, ‘Suspicion’, ‘In the ghetto’, ‘The wonder of you’, ‘Fool’, ‘My boy’ 등의 팝 고전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명백한 역사의 유산이다. 그가 없었다면 성악가나 스탠더드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만을 접했을 것이고 로큰롤 싱어가 선사하는 발라드의 진미(珍味)를 영원히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공존공영 가능성을 그처럼 실감나게 시범한 가수도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이미 흑인감성의 전달로 로큰롤이 ‘흑백의 퓨전’임을 목소리 하나로 입증한 그는 이어서 역시 매직 보컬로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제휴를 일궈내는 업적을 남겼다. 어쩌면 우리가 70년대 록과 메탈 분야에서 형식을 확립한 이른바 ‘록발라드’라는 것도 그 원조는 엘비스일지도 모른다. 엘비스는 목소리를 통해 대중의 공감대를 전달한 몇 안 되는 가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건조한 보이스와는 거리가 먼, ‘이끼가 잔뜩 낀’ 풍부한 목소리였다. 아마 신나는 로큰롤 ‘Burning love’ 한 곡으로도 충분히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후대 음악팬들이 그의 노래를 듣고 더러 ‘느끼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후반기의 노래 가운데는 그런 요소를 풍기는 곡이 있었다. 하지만 엘비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거기서 느끼함이 아닌 되레 ‘풍성한 감성’을 수혈 받곤 한다. 미트 로프(Meat Loaf)는 말한다. “엘비스는 노래하는 것 무엇이든지 감정적으로 가사로 스피릿을 감상자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희구했던 명성과 부를 얻고 난 뒤 아쉽게도 그것들의 노예가 되는 비극적인 위인이기도 했다. 아무 데도 나갈 수가 없었고 편안히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도 불가능했다. 60년대나 70년대 로커였다면 이런 사실상의 ‘수감생활’을 극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래적 반항아’가 아니었다. 스타덤의 고독과 소외에 차츰 무너져간 그의 말년을 잘 나타내주는 일화는 무수히 많다. 70년대 들어서 조울증이 불거진 그는 때로 격렬해져 텔레비전 세트나 당구대, 주크박스, 자동차 등 가장집기를 부수는 발작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언젠가 D.J. 폰타나와 그의 아내 앞에서 엘비스는 자신의 감정상태를 이렇게 토로했다. “당신들은 운이 좋은 겁니다. 난 엘비스인게 너무 지겨워요! 뭘 해야될 지를 모르겠어요. 뭔가 딴 일을 했으면 제발 한이 없겠어요.” 고고음악의 대명사인 자니 리버스의 해석. “엘비스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었지요. 그래야만 했을 겁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그 밖의 다른 일이란 없었지요.” 엘비스만큼 화려한 명성과 처절한 고독이라는 양극단을 겪은(아니면 겪기로 강제된)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영욕의 교차요, 희비의 쌍곡선이다. 그래서 그를 통해 우리는 슈퍼스타덤의 빛 외에 냉혹함과 잔인성이라는 그림자를 동시 확인한다. 그의 사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심장마비로 발표되었지만 사후 마약중독 비만증 그리고 자살 등 정황에 근거한 갖가지 설들이 난무했다. 이는 그의 후반기 삶이 얼마나 철저히 비공개로 갇혀 있었는지를 반증한다. 스스로 창조한 혁명에 쓰러진 순종파 가수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비평에 의해 그의 역사적 위상이 훼손되는 일은 없다. 여전히 그는 만인이 공감하는 ‘킹 오브 로큰롤’이며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금세기 최고 가수’다. 비틀스가 그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한마디로 모든 엘비스의 가치는 입증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오류로 더러 지적되지만 비평가 고(故) 레스터 뱅스(Lester Bangs)의 엘비스 예찬은 되새길 가치가 있다. “우리는 엘비스에게 해준 것과 같은 동의를 앞으로 어떤 누구에게도 해주지 않을 것이다!”
디스코의 광기가 마지막 불꽃을 발산하던 1979년에 ‘Got to be real’이란 디스코 곡으로 등장한 세릴 린(Cheryl Lynn)은 TV 프로그램인 < Gong Show >에서 발탁된 흑인 여가수로 1957년 3월 11일,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1978년 콜롬비아 레코드와 정식 계약을 체결한 셰릴 린은 셀프타이틀 데뷔앨범 < Cheryl Lynn >을 공개해 첫 싱글 ‘Got to be real’이... 디스코의 광기가 마지막 불꽃을 발산하던 1979년에 ‘Got to be real’이란 디스코 곡으로 등장한 세릴 린(Cheryl Lynn)은 TV 프로그램인 < Gong Show >에서 발탁된 흑인 여가수로 1957년 3월 11일,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1978년 콜롬비아 레코드와 정식 계약을 체결한 셰릴 린은 셀프타이틀 데뷔앨범 < Cheryl Lynn >을 공개해 첫 싱글 ‘Got to be real’이 싱글 차트 12위, 리듬 앤 블루스 차트 1위에 오르며 재능 있는 신인이 탄생했음을 고했다. 명 프로듀서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와 토토(TOTO)의 보컬리스트 겸 건반 주자인 데이비드 페이치(David Paich)가 셰릴 린과 공동으로 작곡한 ‘Got to be real’은 1990년대 이후에 디스코 시대를 대표하는 곡으로 그 위상이 격상됐으며 < 칼리토 >, < 키핑 더 페이스 > 같은 사운드트랙에도 삽입됐다. 또한 2004년에 발매된 애니메이션 영화 < 샤크 테일 >의 OST에서는 메리 J. 블라이즈(Mary J. Blige)가 재해석해 수록하기도 했다(이 음반에서 셰릴 린은 ‘Sweet kind of life’란 곡을 불렀다). 뿐만 아니라 국내 힙합 그룹 CB Mass는 ‘진짜’에서 이 곡을 샘플링 할 정도로 ‘Got to be real’은 동서양을 막론한 최고의 댄스곡임을 입증했다. ‘Got to be real’의 작곡으로 데이비드 페이치와 인연을 맺은 셰릴 린은 토토의 히트곡 ‘Gerogy Porgy’의 백 보컬로 참여해 은혜를 갚았고(?), 1981년에 발표한 ‘Shake it up tonight’은 레이 파커 주니어(Ray Parker Jr.)가 프로듀싱을 맡아 주는 등 좋은 인간성의 소유자임을 과시했다. 1984년에는 싱글 차트에서는 69위밖에 오르지 못했지만 리듬 앤 블루스 차트에선 1위에 오른 Encore로 다시 한번 팝 계의 정면에 부상한 셰릴 린은 1980년대 후반까지 모두 8장의 음반을 발표했지만 ‘Got to be real’ 이상의 인기곡은 없었다.
노래 : Mary Macgregor (매리 맥그리거)
열정이 넘치는 플라멩코(Flamenco) 기타 연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집시 킹스는 팝(pop)의 옷을 입은 대중적인 플라멩코 연주를 창조한 월드뮤직 슈퍼스타이다. 7인조 대식구로서 유랑과 가무(歌舞)로 삶을 꾸려 가는 집시들의 애환과 정서를 녹여낸 연주와 노래를 들려준다. 1989년 굴지의 메이저 레이블인 소니 뮤직에서 데뷔 앨범을 발표, 빌보드 월드뮤직 차트 1위와 200주간 차트에 머무르는 열풍을 일으키며 ... 열정이 넘치는 플라멩코(Flamenco) 기타 연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집시 킹스는 팝(pop)의 옷을 입은 대중적인 플라멩코 연주를 창조한 월드뮤직 슈퍼스타이다. 7인조 대식구로서 유랑과 가무(歌舞)로 삶을 꾸려 가는 집시들의 애환과 정서를 녹여낸 연주와 노래를 들려준다. 1989년 굴지의 메이저 레이블인 소니 뮤직에서 데뷔 앨범을 발표, 빌보드 월드뮤직 차트 1위와 200주간 차트에 머무르는 열풍을 일으키며 전 세계에 ‘월드뮤직 돌풍’을 몰고 왔다. 국내 모 제약회사의 파스제품 광고에서 울려 퍼졌던 흥겨운 연주 ‘Volare’(1989)를 통해 집시 킹스는 우리나라 대중들에게도 어느덧 익숙한 음악인이 되었다. 그룹의 시작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 프랑스에 아르레(Arles)라는 마을에 위치한 집시 공동부락 출신인 플라멩코 기타리스트 호세 레이에스의 아들들인 니콜라스 레이에스(Nicholas Reyes)와 안드레 레이에스(Andre Reyes) 형제가 주축이 되어 자신의 사촌들을 모아 1979년 집시 킹즈의 전신인 로스 레이에스(Los Reyes)를 결성한다. 이들은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거리, 축제, 결혼식장에서 연주 활동을 해 나간다. 일정한 지역에 머물지 않고 평생 떠돌아다니는 집시들의 관습을 따라 그들 역시 특정 장소에 머물지 않고 이곳 저곳을 전전하며 연주한 것이다. 집시 킹스라는 이름도 말할 것도 없이 집시라는 그들의 출신 배경에서 얻어진 것이다. 유럽 지역서 2장의 앨범을 발표했지만 프로듀서인 클로드 마틴즈(Claude Martinze)을 1986년에 만날 때까지는 프랑스와 유럽 몇몇 지역에서만 알려졌을 뿐이었다. 클로드 마틴과의 만남은 집시 킹즈의 음악인 플라멩코가 단지 그들만이 즐기던 폐쇄된 스타일을 탈피해 팝(pop) 음악의 감성을 갖추며 친화력을 획득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때부터 플라멩코 기타에 신시사이저, 일렉트릭 기타 등 서구 팝의 악기들을 도입했고, 캐스터네츠로 이용해 잘게 쪼개는 특유의 ‘마캄’ 리듬에 아프리카, 라틴 리듬 등을 차용하기도 한다. 1987년, 대망의 첫 싱글 ‘Djobi Djoba(조비, 조바)’와 ‘Bamboleo(밤볼레오)’를 프랑스 소재 인디 레이블을 통해 발표한다. 불어나 영어가 아닌 집시들의 방언인 지타네(Gitane)로 녹음된 첫 싱글은 반응이 없을 거라 우려(?)한 음악관계자들의 예상을 기우로 넘기며 프랑스 전 지역서 스매시 히트를 기록한다. 이를 기점으로 콜롬비아 레코드사 프랑스 지사와 계약을 하게 된 집시 킹스는 1988년 그들의 데뷔작 < Gipsy Kings >를 발표한다. 이 앨범은 프랑스는 물론 영국을 비롯한 전 유럽 지역서 앨범 차트 10위권 안에 오르는 선풍을 야기한다. 열풍은 이듬해 미국에까지 뻗쳐 콜롬비아(소니) 레코드를 통해 데뷔작은 미국에서도 출시된다. 신대륙에서 집시 킹스에 대한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이로써 그룹은 이른바 월드뮤직을 미국 빌보드 차트에 이식하는 기념비적 업적을 이룩하게 된다. 앨범은 40주 동안 빌보드 앨범차트에 머물며 미국에서만 300만장 이상 팔려나갔다.(유럽 지역까지 합하면 1300만장) 미국을 석권하면서 그룹은 1989년 부시 대통령 취임식에도 초대를 받아 연주하는 영광을 얻는다. 과거 1970년대 엘튼 존(Elton John)이나 에릭 클랩튼(Eric Clapton)이 레게를, 1980년대엔 폴 사이먼(Paul Simon)과 피터 가브리엘(Peter Gabriel)이 아프리카 음악을 선보이며 빌보드 차트에 진입한 경우는 있었지만 집시 킹스처럼 본토 출신 음악인들이 자신들의 방언으로 부른 ‘순수 월드뮤직’이 빌보드 차트 상위권에 진입하기는 처음이었다. 첫 앨범의 성공에 힘입어 연이어 발표한 앨범마다 골드를 기록했다. < Mosaique >(1989), < Allegria >(1989) < Este Mundo >(1991), < Gipsy Kings Live! >(1992) < Love & Liberte >(1994) < Tierra Gitana >(1996)를 통해 그룹은 월드뮤직의 선두에 선다. 특히 1998년에 발표된 베스트 < Gipsy Kings Greatest Hits >는 빌보드 월드뮤직 앨범 차트에 1년 동안 머무르는 저력을 보였다. 이들의 플라멩코 음악은 나아가 영화에도 진출, 1993년 영화 < 피어리스 >(Fearless)의 스코어 멤버로도 참여했고, 이어 1996년 미국 공영방송 PBS에서도 그들을 초대하여 성공담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방영한다.
노래 : Melissa Manchester (멜리사 맨체스터)
가수, 영화배우 가수, 영화배우
지난 1993년 김건모의 ‘핑계’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우리는 앞 아닌 뒤 박에 악센트가 있는 독특한 리듬의 ‘레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지만, 사실 한국 음악 팬들이 레게를 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의 일로, 문제의 곡은 1978년에 전국적 히트를 기록한 그룹 보니 엠(Boney M)의 ‘Rivers of Babylon’이었다. 그때는 레게라는 장르가 대중적인 관심이 되질 못해... 지난 1993년 김건모의 ‘핑계’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우리는 앞 아닌 뒤 박에 악센트가 있는 독특한 리듬의 ‘레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지만, 사실 한국 음악 팬들이 레게를 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의 일로, 문제의 곡은 1978년에 전국적 히트를 기록한 그룹 보니 엠(Boney M)의 ‘Rivers of Babylon’이었다. 그때는 레게라는 장르가 대중적인 관심이 되질 못해, 그것이 레게인지도 모르고 열심히 들었지만 따지고 보면 많은 국내 음악 대중들에게 레게음악의 정체를 알려준 노래는 ‘Rivers of Babylon’이었고 가수는 보니 엠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디스코’ 유행이 지구촌을 석권하던 1970년대 말 영국을 비롯한 유럽과 아시아에서 최고인기를 누렸다. 그러니까 ‘Rivers of Babylon’은 디스코와 레게의 퓨전이었던 셈이다. 그들 음악은 신시사이저에 의한 사운드와 마치 로봇과도 같은 드럼 리듬을 내세운 경쾌한 ‘유로디스코(Eurodisco)’로 당대를 풍미했다. 여성 멤버들의 적정한 수준의 섹시 비주얼 이미지가 관객들의 시선을 끌었던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조금은 키치적인 느낌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디스코 리듬에 실린 그들의 신나는 음악은 심각한 것을 싫어한 당대 사람들의 취향과 맞아 떨어지면서 미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 압도적 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국내에서도 그들의 인기는 막강했다. ‘Rivers of Babylon’은 지겨울 정도로 라디오 전파를 타고 흘러나왔으며 ‘Brown girl in the ring’ ‘Daddy cool’ ‘Rasputin’ ‘Sunny’ 등이 줄줄이 애청되었다. 1985년에는 김병조 진행의 최고인기 코미디 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한 곡 ‘Happy song’으로 또 한번 기염을 토했다. 그들의 앨범은 비록 미국시장의 외면으로(그들이 80년대 해산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빌보드 차트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한국에서는 그와 무관하게, 어떤 유명한 미국 디스코 가수 노래보다 더 호응을 만끽했다. 그것은 디스코의 경우도 한국 사람은 미국의 것보다는 유로디스코 즉 유럽의 취향에 가깝다는 점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보니 엠은 70년대 중반 미국에서 ‘Fly, robin, fly’와 ‘Get up and boogie(that’s right)’로 크게 성공한 그룹 실버 컨벤션(Silver Convention)의 성공에 고무되고 자극받은 독일의 프로듀서이자 작곡가 프랭크 파리안(Frank Farian)의 기획 작품이었다. 1989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그래미상 신인상을 수상했지만 나중 립싱크 사기로 몰락한 그 유명한 밀리 바닐리(Milli Vanilli)를 만들어낸 바로 그였다. 당시 파리안은 실버 컨벤션처럼 유로디스코를 내걸면 글로벌 인기가 가능할 것이라는 야심을 불태웠다. 먼저 그는 1976년 보니 엠이라는 가명으로 ‘Baby do you wanna lump’란 곡을 발표해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자 그 곡을 무대에서 재현해줄 실제 그룹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독일에서 클럽 디스크자키, 뮤지컬 가수, 세션 가수 등으로 활동하고 있던 서인도제도 출신 여자 셋과 남자 하나로 구성된 혼성 4인조 보니 엠이 꾸려진다. 결성한 이듬해인 1977년에만 그들은 ‘Daddy cool’를 시작으로 바비 헵(Bobby Hebb)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Sunny’, ‘Ma baker’, ‘Belfast’ 등 무려 네 곡을 영국 차트 상위권에 올려놓는 기염을 토했다. 1978년은 그들의 전성기였다. ‘Rivers of Babylon’과 ‘Mary’s boy child’가 폭발적인 판매고를 거듭하면서 영국 차트 1위를 점령했고 ‘Rasputin’도 톱10에 올랐다. ‘Rivers of Babylon’은 그때까지 영국 차트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싱글을 기록했고, ‘Mary’s boy child’는 다섯 번째에 랭크되었다. ‘Rivers of Babylon’은 그해 미국 빌보드에서 30위에 올라 체면은 차렸지만 파장은 짧았다. 1979년에도 영국에선 ‘Painter man’과 ‘Hooray! hooray!’와 같은 히트 곡들이 나왔다. 이 3년간 팔린 싱글과 앨범 판매고가 5000만장에 달했다. 앨범은 78년 < Nightflight To Venus >, 1979년 < Oceans Of Fantasy >이 유명했다. 마지막 히트넘버는 1981년의 ‘We kill the world’. 열거한 노래제목이 말해주듯 그들은 널리 알려진 구미의 히트송들을 레퍼토리로 삼았고, 자메이카 등 카리브해 국가들의 노래도 메뉴화했다. 이 또한 프랑크 파리안의 영민한 구상이다. ‘Mary’s boy child’는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에 의해 레코딩되어 기성세대가 숙지한 곡이며, ‘Rivers of Babylon’도 자메이카 레게 그룹 멜로디안스의 오리지널이었다. 익숙한 노래를 파리안 특유의 유로 디스코 재가공해 ‘복고와 최신’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한 것이다. 해산한 뒤 다시 1989년 재결합했고 이후에는 카바레를 토대로 유럽에서 다시 인기를 쌓았다. 1992년에는 자신의 히트곡을 리믹스한 ‘Boney M megamix’으로 영국차트 톱10에 올라 건재를 확인했다. 전성기에도 국내를 찾은 바 있던 그들은 활동30년을 맞아 2005년 7월16일 경기 과천 시민회관에서, 7월22일과 7월23일 올림픽공원에서 내한공연을 갖기도 했다.
노래 : Andy Williams (앤디 윌리엄스)
앤디 윌리엄스는 감미로운 목소리와 편안한 음악스타일의 크루너(Crooner)창법 가수이다. 3장의 플래티넘과 17장의 골드 디스크상을 수상한 이지 리스닝 계열의 대표 주자로 최고의 스탠다드 팝 가수이자 영화주제가의 황제, TV 스타로서 ‘50~’60년대에 전성기와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앤디 윌리엄스는 1927년 12월 3일, 미국 아이오와주 월 레이크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 3명의 형과 보컬그룹을 ... 앤디 윌리엄스는 감미로운 목소리와 편안한 음악스타일의 크루너(Crooner)창법 가수이다. 3장의 플래티넘과 17장의 골드 디스크상을 수상한 이지 리스닝 계열의 대표 주자로 최고의 스탠다드 팝 가수이자 영화주제가의 황제, TV 스타로서 ‘50~’60년대에 전성기와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앤디 윌리엄스는 1927년 12월 3일, 미국 아이오와주 월 레이크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 3명의 형과 보컬그룹을 만들어 지역교회 성가대에서 함께 노래한 것이 계기가 되어 4인조 ‘윌리엄스 브라더즈(Williams Brothers)’를 결성하였다. ‘52년에 형이 결혼하자 그룹을 해산하게 되었으며, ‘53년에 솔로로 독립했다. ‘56년에 커덴스(Cadence) 레이블과 계약을 맺으면서 “Canadian Sunset”이란 곡으로 첫 성공을 거둔다. ‘61년 콜롬비아 레코드사로 이적한 후에 맡은 NBC 방송의 ‘Andy Williams Show’를 시청률 최고의 프로그램으로 만들면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게 된다. 특히 ‘61년도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주제가 “문 리버(Moon River)”를 비롯 수많은 할리우드 명작영화 주제가를 부르면서 ‘영화 주제가의 황제이자 대명사’가 되었다. ‘앤디 윌리엄스 쇼’는 ‘62년부터 ‘71년까지 방영되면서 3차례나 ‘에미상’을 수상했고, 명사회자로서 매년 크리스마스 특별 쇼를 진행했다.

또한 그래미상 후보로 5번이나 지명되었으며, 여러 해 동안 그래미상 시상식 사회를 맡았다. ‘84년에는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로 ‘Greatest Love Classics’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90년대 초 레코딩 업계를 떠나 자신의 초대형 극장인 ‘앤디 윌리암스 문 리버 극장(Andy Williams Moon River Theatre)’의 경영자로 변신하여 열정적인 문화사업을 펼쳤다. ‘81년 11월에는 국내에 내한 공연차 방문하여 국내 음악팬들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2011년 11월, 앤디 윌리엄스는 자신이 방광암을 앓고 있다고 하면서 잠정적인 활동중단을 밝혔다. 그 후 1년여 가까이 투병생활을 해오다 2012년 9월 25일 밤, 미주리 주 자택에서 향년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96년 브릿팝(Brit Pop)의 홍수 속에서 등장한 밴드. 영화감독인 아버지 로이 볼팅(Roy Boulting)과 배우인 어머니 해일리 밀스(Hayley Mills)의 넘치는 재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크리스피언 밀스가 1988년 영국 서리(Surrey)의 리치몬드 컬리지에서 알론자 베번을 만나며 구상한 그룹이다. 오브젝트 오브 디자이어(Object of Desire)로 시작된 밴드의 역사는 이후 두 개의 밴... 1996년 브릿팝(Brit Pop)의 홍수 속에서 등장한 밴드. 영화감독인 아버지 로이 볼팅(Roy Boulting)과 배우인 어머니 해일리 밀스(Hayley Mills)의 넘치는 재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크리스피언 밀스가 1988년 영국 서리(Surrey)의 리치몬드 컬리지에서 알론자 베번을 만나며 구상한 그룹이다. 오브젝트 오브 디자이어(Object of Desire)로 시작된 밴드의 역사는 이후 두 개의 밴드를 더 거치며 와해되기에 이른다. 크리스피언 밀스는 이런 혼란 속에서 인도로 무전여행을 떠나게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1993년에 케이스(The Kays)를 결성한다. 이들은 9세기경 막강한 권력으로 인도를 지배했던 군주 쿨라 세카라(Kula Sekhara)의 이름에서 따온 쿨라 셰이커로 밴드 명을 고치고 4명의 라인업으로 출발했다. 맨체스터의 시티뮤직 비즈니스 페스티벌(The City Music Business Festival)에서 우승하며 콜럼비아와 계약했고, 마침내 대망의 데뷔작 < K >를 발표한다. 그레이트풀 데드(Grateful Dead)의 제리 가르시아(Jerry Garcia)에게 바치는 곡인 ’Grateful when you’re dead/Jerry was there’와 ‘Hey Dude’는 넘실대는 건반과 몽롱하고 환각적인 사운드로 1960년대의 사이키델릭(Psychedelic)의 색채를 그대로 연출해내며 듣는 이로 하여금 무아지경의 최면상태에 빠지게 한다. 산스크리트어로 노래하고있는 ‘Govinda’와 “진실”이라는 의미를 담고있는 ’Tattva’는 < K >가 말하고자 하는 음악적인 중심이 인도의 신비주의로 향해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동양적인 감성은 블러(Blur)와 오아시스(Oasis) 이후의 고만고만한 브릿팝 밴드들과 쿨라 셰이커를 구분 짓는 토대가 된다. 1997년의 브릿 어워즈(Brit Awards)는 최우수 신인상(Best Newcomers)을 쿨라 셰이커에게 안겨주었고 < I know what you did last Summer -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일을 알고 있다 > 사운드 트랙에도 ‘Hush’로 참여하였다. 이 곡은 조 사우스(Joe South)의 원곡을 딥 퍼플(Deep Purple)이 리메이크하였고 다시 쿨라 셰이커가 불러서 90년대 신세대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크리스피언 밀스는 한 인터뷰에서 ‘갈고리 십자문양’에 대한 발언으로 대중의 외면을 받게되는데 인도에서는 수 천년동안 평화의 상징으로 여겨진 십자문양이 나치시대의 상징물이라는 점을 안타까워한데서 오해가 발생한 것이다. 결국 크리스피언 밀스는 신(新)나치주의자로 몰리며 다시 인도 행을 감행해야만했다.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와 엘리스 쿠퍼(Alice Cooper), 키스(Kiss)의 프로듀서였던 밥 에즈린(Bob Ezrin)이 지휘한 쿨라 셰이커의 두 번째 앨범은 3년간의 긴 공백을 깨고 1999년에야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 Peasants, Pigs & Astronauts >는 더욱더 인도사상에 심취한 곡들로 전작만큼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지만 ‘Mystical machine gun’, ’Sound of drums’, ’Shower your love’등이 매니아들로부터 애청되었다. 20세기가 끝날 무렵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밴드가 되 있을 거라고 했던 쿨라 셰이커는 1999년 해체되었지만 첫 번째 작품인 < K >는 오아시스의 < Definitely Maybe >이후 영국 록 역사상 가장 빨리 팔린 데뷔작으로 기록되어있다.
연주 : Ray Price (레이 프라이스 (재즈 드럼))
비틀즈로부터 막대한 은혜를 입은 영국 요크셔 태생의 4인조 소프트 팝록 밴드 스모키(Smokie)의 국내에서의 인기는 Fab 4(비틀즈의 별명)와 맞먹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까지 ''Living next door to Alice'', ''Don''t play Rock''n Roll to me'', ''If you think you know how to love me'', ''Mexican girl... 비틀즈로부터 막대한 은혜를 입은 영국 요크셔 태생의 4인조 소프트 팝록 밴드 스모키(Smokie)의 국내에서의 인기는 Fab 4(비틀즈의 별명)와 맞먹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까지 ''Living next door to Alice'', ''Don''t play Rock''n Roll to me'', ''If you think you know how to love me'', ''Mexican girl'', ''What can I do?'', ''I''ll meet you at midnight'' 등으로 우리나라 라디오를 도배했으며 이들의 베스트 음반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팔리는 스테디셀러 반열에 오른 지 오래다. 이들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인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컬에 크리스 노만(Chris Norman), 기타는 테리 우틀리(Terry Uttley), 그리고 베이스 주자에 알란 실슨(Alan Silson)이 모여 출범시킨 ''엘리자베단스(Elizabethans)''란 그룹이 스모키의 모체였다. 곧 피트 스펜서(Pete Spencer)가 드러머로 가입하자 친절하게도 이름을 ''카인드네스(Kindness)''로 바꾸고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다수의 싱글들을 발표했지만 음악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데 실패했다. 정작 이들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75년 밴드 명을 스모키(Smokey)로 교체한 다음부터였다. 1975년의 두 번째 앨범 < Changing All The Time >에 수록된 ''Don''t play Rock''n Roll to me''와 비록 2주만에 강제 퇴출당했지만 최초의 미국 싱글 차트 진입 곡으로 기록된 ''If you think you know how to love me''로서 서서히 팬들에게 다가갔다. 이 곡은 1979년 위대한 여성 록 싱어 팻 베나타(Pat Benatar)가 자신의 데뷔 앨범을 위해 리메이크함으로서 미국인들에게는 그녀의 버전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당시 철자만 약간 수정한 Smokie로 이름이 굳어지면서 음악적인 면이나 판매고적인 면 모두 형편이 나아지고 있었다. 국내와 미국에서 이들 최고의 히트곡으로 남아 있는 ''Living next door to Alice''가 1976년에 공개되어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도 21위까지 오르는 성공을 기록했고 1979년에는 보컬리스트 크리스 노만이 여성 록커 수지 쿼트로(Suzi Quatro)와 듀엣으로 ''Stumblin'' in''을 취입해 4위까지 올려놓았다. 이 4인조의 음악적 재능은 그들의 음악적 브레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작곡 파트너 닉키 친(Nicky Chinn)과 마이크 채프만(Mike Chapman)이 1980년대 초반에 결별하면서 급속히 고갈되기 시작했다. 1982년 < Strangers In Paradise >를 마지막으로 개인의 길을 걸었다가 1988년에 각자의 필요성에 의해 다시 헤체모여를 감행했다. 이후 현재까지 새로운 음반 제작보다는 올드팬들을 위한 공연 위주의 활동으로 백의종군하고 있다 로큰롤과 소프트팝, 그리고 포크가 조화를 이룬 스모키의 음악은 부드럽고, 로맨틱한 면을 강조한 밝은 음악으로 1970년대의 어두웠던 시대를 극복하던 우리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면서 대단한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들의 쇠퇴를 야기한 것이 바로 이러한 음악이었다. 음악 대세가 뉴웨이브와 팝댄스로 변한 1980년대가 도래했음에도 스모키의 멤버들은 자신들의 음악적인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팝음악 계에서 도태되었다. 스모키는 감수성이 풍부했던 편안한 음악들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던 밴드 중 하나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밴드 : Electric Light Orchestra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E.L.O.)
지난 1979년 소녀들의 비명 소리에 가까운 환호성으로 시작하는 ‘I want you to want me’의 라이브 버전은 그룹 창단 여섯 돌을 맞이하는 칩 트릭(Cheap Trick)에겐 고대하던 성공의 축포였다. 1973년의 공식적인 결성 이후 6년 동안 년(年) 200회 이상의 초인적인 공연을 강행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들에게 당시 전미차트 7위에 오르는 이 곡의 차트정복은 가뭄 속의 단비였다. 칩 트... 지난 1979년 소녀들의 비명 소리에 가까운 환호성으로 시작하는 ‘I want you to want me’의 라이브 버전은 그룹 창단 여섯 돌을 맞이하는 칩 트릭(Cheap Trick)에겐 고대하던 성공의 축포였다. 1973년의 공식적인 결성 이후 6년 동안 년(年) 200회 이상의 초인적인 공연을 강행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들에게 당시 전미차트 7위에 오르는 이 곡의 차트정복은 가뭄 속의 단비였다. 칩 트릭의 신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1973년 미국의 일리노이즈에서 결성된 4인조 팝 록 밴드 칩 트릭의 뿌리는 기타리스트 릭 닐슨(Rick Nielsen)과 베이시스트 톰 피터슨(Tom Petersson)이 1960년대 후반에 결성한 퓨즈(Fuse)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 초반 현재의 이름 칩 트릭으로 개명하고 번 E. 카를로스(Bun E. Carlos)와 랜디 호건(Randy Hogan)을 각각 드러머와 보컬리스트로 받아들였지만 이들의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그러자 공동 리더인 릭과 톰은 팀의 프론트를 랜디 호건에서 미소년의 외모를 소유한 전직 포크 싱어 로빈 잰더(Robin Zander)로 전격 교체하고 비상을 준비한다. 1977년에 공개된 역사적인 데뷔 앨범 < Cheap Trick >은 비록 싱글 히트곡은 없었지만 비틀스에게서 물려받은 확실한 선율 감각과 더 후(The Who)로부터 전수 받은 듯한 파워풀한 연주가 유머러스한 가사와 앙상블을 이뤄 이들의 재능이 꿈틀대고 있음을 내비친 작품이었다. 같은 해에 나온 < In Color >에서는 2년 뒤 공연 실황 버전으로 차트를 강타하게 될 ‘I want you to want me’가 온전한 스튜디오 버전으로 수록되어 있다. 1978년에 발표된 < Heaven Tonight >도 가능성을 재확인하면서 이들에게 첫 번째 싱글 히트곡 ‘Surrender’(62위)’를 제공했다. 펑크적인 기타 백킹 연주와 팝적인 멜로디가 찰떡 궁합을 과시한 이 곡은 전형적인 칩 트릭 사운드를 구현한 대표적인 노래 중 하나이다. 그동안 이들은 자신들의 조국인 미국보단 태평양 건너에 있는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로빈 잰더의 잘생긴 외모와 귀를 슬슬 잡아당기는 자연스런 멜로디의 매력에 빠진 일본 소녀들은 칩 트릭의 진가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78년 4월, 이들은 일본의 그 유명한 공연장인 무도관에서 대대적인 공연을 가졌고, 그 열기를 고스란히 담은 음반이 바로 록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 Live At Budokan >이다. 실은 이 앨범도 일본음반자본이 지원해 탄생되었다. 이전의 어떤 음반 못지 않게 화끈한 연주와 후끈 달아오른 현장의 분위기를 실감나게 전달한 이 앨범에서 ‘I want you to want me’와 1950년대 흑인 로큰롤 스타 팻츠 도미노(Fats Domino)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Ain’t that a shame’은 싱글로 커트되어 각각 7위와 35위를 기록하면서 일본, 미국, 유럽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반을 풍미한 버블검 사운드를 표현한 ‘I want you to want me’는 그 앙증맞은 후렴구 때문에 지금까지도 칩 트릭을 정의하는 노래로 남아 있다. 이 LP는 라이브 실황임에도 불구하고 빌보드 앨범 차트 4위까지 올랐고, 3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함으로써 상업적인 면과 음악적인 면 모두를 달성하는 성과를 올렸다. 같은 해인 1979년, 싱글 ‘Voices(32위)’와 ‘Dream police(26위)’가 들어 있는 다음 앨범 < Dream Police >로 확실하게 스타급 밴드의 반열에 올랐지만 비틀스와 아메리카(America)의 프로듀서였던 조지 마틴(George Martin)을 초빙해 제작한 1980년 < All Shook Up >은 과욕 탓인지 제1의 프로듀서와 최고 인기 밴드의 상봉은 융화되지 못한 채 어색한 만남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앨범 후 톰 피터슨은 그룹을 떠났고, 그 후임으로 존 브랜트(Jon Brant)를 영입해 ‘If you want my love(45위)’와 ‘She’s tight(65위)’가 싱글 차트에 입적한 < One On One >을 발표하면서 팝의 시대인 1980년대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 무렵 톰이 없는 칩 트릭은 예전과 같은 음악을 뽑아 내지 못한 채 힘겨움을 드러냈다. 상생(相生)의 필요성을 절감한 칩 트릭과 피터슨이 재회한 것은 1988년에 공개한 < Lap Of Luxury > 때였다. 최초로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의 영광을 안겨 준 발라드 ‘The Flame’과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의 원곡을 커버한 ‘Don’t be cruel(4위)’, ‘Ghost town(33위), ’Never had a lot to lose(75위) 등을 4장의 싱글을 토해낸 이 음반으로 칩 트릭은 1980년대의 부진을 걷어내고 재기에 성공했다. 특히 국내에서는 경쾌한 분위기의 ‘Don’t be cruel’이 애청되면서 다시 일어선 칩 트릭의 인기를 주도했다. 1988년 말에는 로빈 잰더가 하트(Heart)의 보컬리스트 앤 윌슨(Ann Wilson)과 함께 멜 깁슨과 미셸 파이퍼가 주연한 영화 < 데킬라 선라이스 >의 주제곡 ‘Surrender to me’를 불러 6위에 랭크 시키기도 했다. 곡은 우리에게 ‘Now and forever’와 ‘Right here waiting’, ‘Endless summer night’ 등으로 널리 알려진 리차드 막스(Richard Marx)가 썼다. 이들의 음악은 1980년대에 등장한 헤비메탈 밴드와 1990년대의 얼터너티브 그룹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전수했다. 후배 뮤지션들은 인터뷰를 통해 “칩 트릭의 힘이 넘치는 기타 리프와 사운드에서 음악적인 영감을 받았다”며 무한한 존경과 신임을 밝힌 바 있다. 특히 스매싱 펌킨스(Smashing Pumpkins)는 자신들의 오프닝 무대를 칩 트릭에게 부탁하기도 했으며, 1980년대 팝 시대의 아들들임에도 불구하고 포르노 포 파이러스(Porno for Pyros)의 리더인 페리 파렐(Perry Farrell)이 주창한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 페스티벌의 대명사 롤라팔루자에 참여한 바 있다. 1990년대가 되면서 다시 한번 음악적 침체기를 맞이한 칩 트릭은 현재까지 새로운 음반 제작보다는 데뷔 초기처럼 ‘최고의 라이브 밴드’라는 명성에 걸맞은 줄기찬 공연 활동을 전개하고있다. 칩 트릭의 노래들은 이름처럼 결코 값싸지도 않으며 속임수 또한 아니다. 저항성과 함께 록의 양 날개 중 다른 날개인 ‘대중성’으로 따진다면 이들은 극점에 위치하는 그룹이다. 앞으로도 이들만큼 ‘완벽한 기타 주도의 팝 록 사운드’를 구현한 그룹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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