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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팝스타가 들려주는 불후의 팝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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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위대한 팝스타가 들려주는 불후의 팝송

[ 2CD ]
Patti Page, Sam Cooke, Lobo, Randy VanWarmer, Skeeter Davis 노래 외 35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서울미디어 (음반) | 2018년 02월 02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114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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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팝스타가 들려주는 불후의 팝송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8년 02월 02일
시간, 무게, 크기 600g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1
  • 01 로보 I'd Love You To Want Me
  • 02 랜디 반 워머 Just When I Needed You Most
  • 03 스키터 데이비스 The End Of The World
  • 04 벤 이 킹 Stand By Me
  • 05 클리프 리처드 Evergreen Tree
  • 06 버티 히긴스 Casablanca
  • 07 브라이언 하일랜드 Sealed With A Kiss
  • 08 플래터즈 Only You
  • 09 배드 핑거 Without You
  • 10 에벌리 브라더스 All I Have To Do Is Dream
  • 11 폴 리비어 앤 레이더스 Indian Reservation
  • 12 팻 분 Love Letters In The Sand
  • 13 패티 페이지 Changing Partners
  • 14 브룩 벤톤 Think Twice
  • 15 샘 쿡 You Send Me
  • 16 조니 레이 Just Walking In The Rain
  • 17 밴 모리슨 Brown Eyed Girl
  • 18 슈 톰슨 Sad Movies
  • 19 파일럿 Magic
  • 20 벤처스 Walk Don't Run
  • 21 서처스 Love Potion No.9
  • 22 토큰스 The Lion Sleeps Tonight
Disc2
  • 01 엘비스 프레슬리 Love Me Tender
  • 02 새미 스미스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 03 마말레이드 Reflection Of My Life
  • 04 베너티 페어 Early In The Morning
  • 05 루 크리스티 Beyond The Blue Horizon
  • 06 비제이 토마스 Raindrop Keep Falling On My Head
  • 07 돈 깁슨 Sea Of Heartbreak
  • 08 애니멀즈 The House Of Rising Sun
  • 09 드리플터즈 Save The Last Dance For Me
  • 10 다니엘 분 Beautiful Sunday
  • 11 클린트 홈스 Playground In My Mind
  • 12 딘 마틴 Sway
  • 13 닐 세다카 Oh Carol
  • 14 폴 앵카 Diana
  • 15 아치스 Sugar Sugar
  • 16 어소시에이션 Never My Love
  • 17 호세 펠리치아노 Rain
  • 18 프레디 펜더 Before The Next Teardrop Falls
  • 19 샤이 라이츠 Have You Seen Her
  • 20 케니 로저스 For The Good Times
  • 21 마릴린 먼로 The River Of No Return
  • 22 애커 빌크 Stranger On The Shore

아티스트 소개 (40명)

노래 : Patti Page (패티 페이지)
노래 : Sam Cooke (샘 쿡 ,Dale Cook)
소울음악을 거론함에 있어 샘 쿡의 위상은 매우 지대하다. 그는 흑백통합의 광맥이었으며 연주자로서뿐 아니라 레코드비즈니스를 아울러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했다. 예술가이자 사업가로서 자신이 갈 인생길을 현명하게 개척해 갔던 것. 그만큼 당대 음악계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위치는 물론 음반과 출판사를 소유하고 운영할 정도로 그의 관록은 실로 대단했다. 쿡은 그러한 가운데 사회문제에도 ... 소울음악을 거론함에 있어 샘 쿡의 위상은 매우 지대하다. 그는 흑백통합의 광맥이었으며 연주자로서뿐 아니라 레코드비즈니스를 아울러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했다. 예술가이자 사업가로서 자신이 갈 인생길을 현명하게 개척해 갔던 것. 그만큼 당대 음악계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위치는 물론 음반과 출판사를 소유하고 운영할 정도로 그의 관록은 실로 대단했다. 쿡은 그러한 가운데 사회문제에도 적극 동참했다. 인종차별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던 당시 흑인들의 인권보장을 위한 공민권운동에 열정을 불태운 그는 노래를 통해 흑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그러한 그의 의욕적 활동에 흑인들 모두 지지를 보냈다. 사회활동가로서의 지지도는 장차 그에게 돌아올 사회적 지위와 명성에 다름 아니었다. 흑인과 백인의 인종적 갈등의 조정자로서 그리고 기성과 청춘의 세대적 통합자로서 그의 호소력은 당대의 다른 아티스트들을 모두 아우른 것이었다. 1931년 1월에 태어난 그는 목사인 아버지의 교회합창단에서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시카고로 이주한 후 삼형제와 함께 그룹 활동을 하기도 했던 그는 대중음악의 흐름 또한 놓치지 않았다. 틴 하이웨이 큐씨스(Teen Hightway QCs)라는 성가대의 멤버였던 그는 1950년, 전국적 가스펠그룹 소울 스터러스(Soul Stirrers)에 합류했다. 6년여의 활동기간 중 ‘그의 옷자락을 만질 수만 있다면’(Touch the hem of his garment), ’당신에게 더 가까이‘(Nearer to thee), ’내겐 천국 이었어’(That’s heaven to me)와 같은 노래를 통해 흑인사회의 스타로 부상한 그는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종교와 흑인계를 넘어 더 많은 청중들에게 다가가는 게 그의 목표였기 때문. 소울 스터러스와 결별한 그는 1956년, 싱글 ‘사랑스러운’(Lovable)을 발표하며 진정한 자아 정체성 탐구를 위한 새로운 첫발을 내디뎠다. 1950년대 가장 많이 팔린 싱글 중 하나가 된 이 곡과 함께 팝과 알앤비 차트 정상을 차지한 ’You send me’는 2백만 장 이상이 팔려나갔다. 가스펠과 팝 R&B 요소가 응집력 있게 혼합된 노래는 당시로선 선구적인 소울 음반이었다. 그는 또한 로맨틱한 발라드와 틴 팝 싱글들을 연이어 발표하며 지속적인 인기를 확보했다. ‘감상적 이유 때문에’(For sentimental reasons), ’모두 차 차 차를 좋아해‘(Everybody loves to cha cha cha), ’겨우 16세‘(Only sixteen),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What a Wonderful world)를 비롯해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yday)에게 바치는 헌정앨범 < Tribute to the Lady >에 실린 노래들까지 당대를 대표할만한 주목을 끌었다. 하지만 소속사인 킨 레이블에서의 한계를 느낀 그는 메이저 레이블로의 이적을 계획, 콜롬비아(Columbia), 데카(Decca)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3대 레이블 중 하나인 RCA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했다. 음반뿐 아니라 출판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해 왔던 그는 출판사 칵스 뮤직(Kags Music)과 레코드레이블 SAR을 설립해 뮤직비즈니스에 본격 착수했다. RCA에 둥지를 튼 쿡은 차트 2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한 싱글 ’한 사슬에 묶인 옥외 노동죄수들‘(Chain gang, 1960년 싱글2위)로 팝과 소울에 새 지평을 열었으며 블루스적인 로맨틱 ‘슬픈 분위기(Sad mood, 1960년 싱글29위), 목가적 로맨틱 소울 ’큐피드‘(Cupid, 1960년 싱글17위), 보통의 댄스넘버 ‘밤새도록 트위스트를 춰요’(Twistin’ the night away, 1962년 싱글9위), ’나의 집으로 그걸 가져오세요‘(Bring it on home to me, 1962년 싱글13위)’와 같이 다채로운 음악요소와 사회적 인식을 한데 엮어낸 곡들을 내며 왕성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 곡들을 포함, 무려 13곡의 히트넘버가 2년간 차트를 장식했다. 틴에이저와 기성세대 그리고 흑인 전 세대에 걸쳐 폭넓은 팬층을 확보한 그는 특히 백인 청취자들에게 더욱 강하게 다가가고자 했다. 흑인뮤지션에게 주로 굳게 닫혀있던 문을 열고자 했던 것. 1957년 초 뉴욕 코파(Copa)에서 연주를 통해 이를 실현코자 했던 그의 시도는 그러나 실패로 돌아왔다. 경험미숙이 문제였다. 1964년 그는 그러나 당당하게 클럽으로 컴백해 라이브실황을 녹음했고 그해 가장 정교한 앨범 중 하나로 꼽히는 수확을 올렸다. 중년과 백인중산층만을 위한 무대가 됐다는 주위의 냉정한 평가가 뒤따르긴 했지만. 1963년 중반 쿡은 마이애미의 할렘 스퀘어 클럽에서의 공연과 실황을 담은 음반으로 자신의 진가를 확증했다. 흑인청취자들과 함께한 그는 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열창하며 황홀한 연주무대를 통해 쇼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멜로디와 직설적인 소울 감성이 적절히 어우러진 라이브 레퍼토리들은 그야말로 베스트 오브 베스트였다. 라이브의 황제로 우뚝 선 순간이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1963년 중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닥쳤다. 그의 어린 아들이 익사한 것. 쿡은 그해 말까지 깊은 시름에 잠겨 공식적인 음악활동을 중단했다. 그 기간 동안 그러나 그는 비즈니스 매니저 앨런 클라인(Allen Klein)과 함께 재정적으로 그리고 음악활동을 위한 독립의 발판을 견고히 다졌다. 1963년 11월 초 마침내 그의 레코드들에 대한 최종 소유권을 확보했고 지휘감독권도 성취했다. 그가 다시 음반작업에 들어갈 즈음은 1960년대 초의 저항음악적 흥분과 열기가 한창 고조되고 있을 때였다. 쿡은 흑인들을 포함해 차별받는 소수자들의 치료제와 같이 작용한 밥 딜런(Bob Dylan)의 노래 ‘Blowin’ in the wind’에 크게 감화되었다. 피터, 폴&메리도 그 한복판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커다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의식있는 아티스트들의 이러한 사회적 변화의 움직임에 그도 두팔 걷어부치고 나섰다. 샘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변화(의 시기)는 올 겁니다’(A change is gonna come)가 이때 나왔다. 공민권투쟁의 산물로 나온 가장 위대한 노래중 하나. 가스펠부터 팝까지 다양한 음악성향 안에서 탄생한 이 곡은 그의 가장 위대하고도 우아한 예술적 찬양가였다. 이 시기동안 그는 또한 싱글 ’Shake’ 를 통해 더 진보한 댄스 본위의 소울사운드를 들려주었다. 이 두 노래는 쿡의 음악여정에 새로운 가속을 알리는 것이었다. 또 다른 전성기를 알리는 장이 열리는 듯 했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의 꿈과 희망은 한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1964년 11월 11일 이른 오후, 로스앤젤레스의 저급한 모텔에서 쿡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 언쟁에 휘말려 모텔매니저의 총탄을 맞고 싸늘히 식어갔다. 정확한 사인은 규명되지 않고 미궁으로 남았다. 쿡의 죽음으로 흑인 사회는 충격에 휩싸였다. 애도의 물결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965년에 발매된 싱글 ‘A change is gonna come‘과 < Sam Cooke At The Copa > 앨범이 그랬듯 싱글 ‘Shake’는 유작으로 사후 탑 텐 히트를 기록했다.
노래 : Skeeter Davis (스키터 데이비스)
노래 : Ben E. King (벤 이 킹,Benjamin Earl King)
노래 : Cliff Richard (클리프 리차드)
1969년 10월 16일부터 18일. 이 3일은 우리나라의 척박했던 공연 문화와 사회 전반에 걸쳐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된 사건의 시간적 배경이다. ‘오빠부대’의 원조이며 팝 스타로서는 처음으로 국내에서 자발적인 팬클럽이 탄생했던 클리프 리차드(Cliff Richard)의 3회에 걸친 내한 공연, 그것은 집단적인 행동과 조용한 환호성(지금은 아니지만)의 이율배반적인 분위기로 특징지어지는 한국 공연 문화의 시발점이 ... 1969년 10월 16일부터 18일. 이 3일은 우리나라의 척박했던 공연 문화와 사회 전반에 걸쳐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된 사건의 시간적 배경이다. ‘오빠부대’의 원조이며 팝 스타로서는 처음으로 국내에서 자발적인 팬클럽이 탄생했던 클리프 리차드(Cliff Richard)의 3회에 걸친 내한 공연, 그것은 집단적인 행동과 조용한 환호성(지금은 아니지만)의 이율배반적인 분위기로 특징지어지는 한국 공연 문화의 시발점이 되는 계기였다. 시민회관에서 1회, 이대 강당에서 2회의 공연을 가졌던 클리프 라치드의 무대는 콘서트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던 당시로서는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청소년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어두운 교복과 청순한 단발머리를 한 여고생들의 클리프 리차드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헌신적인 몰입은 ‘울다가 지쳐 기절까지’라는 과장된 신문 기사로 옮겨지면서 공연장의 열기는 기성 세대들에게 일종의 집단적 히스테리이자 광적인 소란으로 비쳐지며 젊은이들에 대한 불안과 불만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클리프 리차드는 4박 5일 동안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만나는 팬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주최측에서 마련한 파티 비용을 본인이 직접 내는 것은 물론 구세군 교회에 가서 불우이웃성금을 내는 선행으로 일간지 사회면을 훈훈하게 장식해 팬들의 비난을 희석시켜 주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클리프 리차드는 우리나라에서 대중 음악 역사에 있어 전환점을 제시했던 슈퍼스타였다. 1940년 10월 14일 인도의 럭크나우에서 해리 로저 웹(Harry Roger Webb)의 본명으로 태어난 클리프 리차드는 엘비스 프레슬리로부터 영향을 받아 1957년부터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흑인 감성이 풍부했던 엘비스와는 달리 경쾌하고 팝 적인 느낌이 짙은 음악으로 ‘영국의 로큰롤 황제’로 등극했다. 1963년 비틀스(Beatles)와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가 등장하기 전까지 클리프 리차드는 브리티시 록의 ‘절대 강자’였으며 그의 음악 세계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성지(聖地)였다. 1958년 ‘Move it’으로 시작한 히트 퍼레이드는 1960년대 후반까지 40곡 이상을 영국 인기 차트에 등록시키며 경이로운 행진을 기록했다. 당시 그의 백 밴드 드리프터스(Drifters)는 미국의 리듬 앤 블루스 보컬 그룹(‘Stand by me’를 부른 Ben E. King이 멤버였던)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섀도우스(Shadows)로 바꾸었다. 그의 인기가 치솟자 영화 관계자들은 < Serious Charge >, < Summer Holiday >, < The Young Ones >처럼 젊은이들을 소재로 한 상업적인 영화에 출연시켜 비상(飛上)하는 클리프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국내에서도 ‘Living doll’, ‘Visions’, ‘Constantly’, ‘Summer holiday’, ‘Congratulations’, 그리고 그 유명한 ‘The young ones’등이 확실하게 인기를 주도했다. 하지만 이것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한정된 반숙(半熟)의 인기였다. 대서양 건너편 미국에서는 물이 끓지도 않았다. ‘Living doll(30위)’과 ‘Lucky lips(62위)’, ‘It’s all in the game(25위)’, ‘Bachelor boy(99위)’, ‘I’m the only one(92위)’, 그리고 생일 축하 곡으로 세계를 평정한 ‘Congratulations(99위)’ 만이 1960년대 동안 빌보드 싱글 차트에 올랐을 뿐이다. 데뷔곡 ‘Move it’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노래들은 너무 소녀 취향이었으며 시기상으로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라는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뮤지션들 사이에서 샌드위치 마크를 당했기 때문에 틈새 시장을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내한 공연을 가졌던 1960년대 후반에 그의 지지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1960년대 미국 음악계를 침공한 브리티시 인베이션의 명단에서 제외되었던 클리프 리차드는 미국 진출의 꿈을 접었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에 자신의 백 보컬리스트 출신의 올리비아 뉴튼 존(Olivia Newton John)이 미국에서 대대적인 성공하자 이것에 고무된 클리프는 미국 진출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서서히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미국인의 구미에 맞는 노래들로 북미 시장을 두드렸다. 1976년에 공개된 디스코 풍의 ‘Devil woman(6위)’이 처음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탑 텐에 올랐고 1980년대 초반까지 ‘We don’t talk anymore(7위)’, ‘Carrie(34위)’, ‘Dreaming(10위)’, ‘Little in love(17위)’, ‘Daddy’s home(23위)’, 그리고 자신보다 더 유명해진 올리비아 뉴튼 존과 호흡을 맞춘 영화 < 제너두 >의 삽입곡 ‘Suddenly(20위)’ 같은 성인 취향의 팝 사운드로 두 번째 전성기를 일구었다. 이제는 아주머니들이 된 예전의 소녀 팬들을 위해 현재까지 공연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클리프 리차드는 1995년 영국 왕실로부터 대중 음악계에 미친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 작위를 수여 받았다. 국내에서는 지난 1998년에 개봉된 임창정, 고소영이 주연한 영화 <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의 마지막 장면에 ‘Early in the morning’이 삽입되어 다시 한번 클리프 리차드 신드롬을 재연했다. 차이코프스키가 “예술 작품이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소망과 힘이다”라고 했듯이 클리프 리차드의 노래는 우리 부모님 세대가 살아야 했던 어려웠던 시절의 좌절과 아픔을 낭만과 추억으로 승화시킨 희망의 원동력이었다.
노래 : Brian Hyland (브라이언 하일랜드)
멤버: 토니 윌리엄스(Tony Williams),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 폴 로비(Paul Robi), 조라 테일러(Zola Taylor), 허브 리드(Herb Reed). 미국의 보컬 그룹. 멤버: 토니 윌리엄스(Tony Williams),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 폴 로비(Paul Robi), 조라 테일러(Zola Taylor), 허브 리드(Herb Reed).

미국의 보컬 그룹.
영국 출신의 4인조 팝 록 밴드 배드핑거(Badfinger)의 역사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박복’하다. 비틀즈의 지원사격 덕분에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시작된 그들의 성공은 불행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들은 비틀스 때문에 성공했고 비틀스 때문에 좌절했다. 활동 후반부 그들은 비틀스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창작력의 부재와 금전적인 문제가 끼어 들면서 주축 멤버 두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영욕(榮... 영국 출신의 4인조 팝 록 밴드 배드핑거(Badfinger)의 역사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박복’하다. 비틀즈의 지원사격 덕분에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시작된 그들의 성공은 불행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들은 비틀스 때문에 성공했고 비틀스 때문에 좌절했다. 활동 후반부 그들은 비틀스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창작력의 부재와 금전적인 문제가 끼어 들면서 주축 멤버 두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영욕(榮辱)으로 점철된 밴드의 역사를 마감했다. 때문에’Carry on till tomorrow’, ’No matter what’, ’Maybe tomorrow’, ’Day after day’, 그리고 해리 닐슨(Harry Nilsson)과 에어 서플라이(Air Supply),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가 커버한 ’Without you’ 같은 명곡들을 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배드핑거는 가장 불행한 팝 그룹 중 하나로 기억된다. 1960년대 후반 비틀스가 설립한 ’애플’ 레코드에서 처음으로 계약한 밴드는 피트 햄(Pete Ham/보컬), 마이크 기본스(Mike Gibbons/드럼), 톰 에반스(Tom Evans), 론 그리피스(Ron Griffiths/베이스)로 구성된 디 아이비스(The Iveys)라는 이름이었다. 이들은 곧 배드핑거로 개명하고 1970년 데뷔 앨범 < Magic Christian Music >을 발표했다. 이 앨범에는 폴 매카트니가 작곡해 비틀스의 체취가 짙게 묻어나는 ’Come and get it(7위)’과 ’Maybe tomorrow’, 그리고 국내에서 이들의 대표 곡으로 자리 매김을 한 ’Carry on till tomorrow’ 같은 곡들이 들어있다. 사이키델릭 요소를 담고 있는 ’Carry on till tomorrow’와 로큰롤 트랙 ’Rock of all ages’는 비틀스의 드러머인 링고 스타(Ringo Starr)가 주연한 영화 < 매직 크리스찬 >의 사운드트랙에도 수록되어 다시 한번 비틀스와 배드핑거의 남다른 관계를 과시했다. ’No matter what(8위)’와 그 유명한 ’Without you’가 수록된 2집 < No Dice >는 처녀작이 공개된 1970년 연말에 발표되어 음악언론의 호평과 더불어 이미 공고화된 대중적 인기에 박차를 가했다. ’No matter what’은 나중 197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 나우 앤 덴 >의 사운드트랙에 삽입되어 당시 분위기를 훌륭하게 살려내는데 일조했다. 특히 ’Without you’는 ’Everybody’s talking’이나 ’Jump into the fire’로 유명한 싱어 송라이터 해리 닐슨(Harry Nilsson)이 1971년에 리메이크 해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하면서 팝의 고전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비틀스의 노래인 줄 알았다”라고 닐슨이 회고할 정도로 당시 배드핑거의 음악은 비틀스와의 인연을 뗄 수 없었다. “제작자인 리차드 페리와 함께 이 노래를 처음 접했을 때부터 나는 이 곡이 고전이 될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언급한 대로 이 노래는 팝의 명곡으로 안전 착륙했고 1990년대에 에어 서플라이와 머라이어 캐리가 커버해 팝의 클래식임을 증명했다. 배드핑거에게는 억울한 일이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 스스로가 싱어송라이터인 관계로 해리 닐슨이 ’Without you’을 작곡한 것으로 알고 있다(사실 해리 닐슨은 여성을 방불케 하는 하이 톤 보컬로 원곡에 없는 악센트를 부여했다). 1971년의 < Straight Up >은 로커 토드 룬그렌(Todd Rundgren)과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이 앨범 제작을 맡아 주었다. 1982년에 발표된 영국 출신 뉴 웨이브 싱어 송라이터 조 잭슨(Joe Jackson)의 ’Breaking us in two(18위)’와 유사한 멜로디를 뽑아 낸 ’Day after day(4위)’와 1980년대 초반의 팝록 사운드를 이미 10여년 전에 구현한 ’Baby blue(14위)’가 이 음반의 가치를 높여 주었다. 영국에서 출발한 이 4인조 밴드의 네 번째 앨범 < Ass >는 애플 레코드에서 발표하는 마지막 ’열매’였다. 대형 히트 싱글은 없었지만 밴드가 직접 음반 제작에 참여하면서 커다란 발자국을 남겼다. 그러나 이 LP부터 배드핑거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번져갔다. 이때를 기점으로 그들의 음반들은 레코드 매장에서 재고의 양이 점차 증가했고 그에 따라 이들에겐 재정적인 문제와 멤버간에 불협화음이 잇따랐다. 음반사를 워너로 바꾸고 1974년 말에 < Wish You Were Here >를 공개했지만 초기 디스코의 자극적인 리듬과 하드록과 헤비메탈의 후련하고 화려한 음악에 매력을 느낀 대중들은 더 이상 이 영국 밴드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신보의 판매력이 급격히 힘을 잃기 시작하자 적자에 빠진 리더 피트 햄은 1975년 4월 23일 차고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머지 멤버들도 충격에서 벗어나 새 열매를 맺기까지는 4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1979년에 공개된 음반 < Airwaves >마저 그리던 성공은 재현되지 못했다. 디스코나 부드러운 발라드 아니면 성인 취향의 록음악이 당시를 호령하던 1970년대 말에 이들의 음악은 더 이상 먹혀들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1981년에 발표된 < Say No More >까지 계속되었고 그 참패의 결과 또한 마찬가지였다. 계속된 실패와 재정 문제는 음악방향을 잠식해 톰 에반스와 조이 몰랜드는 전화로 심하게 다툰 후 에반스도 피트 햄처럼 목을 매 자살했다. 1983년 11월 19일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이 사건으로 밴드는 공식적인 해산을 발표했다. 화려한 인기의 뒤안길에 잠복하고 있는 외로움과 고통은 다른 아티스트들에게도 똑같이 다가와 누구는 그것을 즐기고 어떤 이는 무너진다. 아마도 팝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종말이 배드핑거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노래는 비극에 아랑곳없이 여전히 우리의 귀를 낭만적으로 자극한다. 훗날 언젠가 그들의 탁출(卓出)한 멜로디 제조능력이 재조명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Carry on till tomorrow!!
노래 : Everly Brothers (에벌리 브라더스)
컨트리 음악 성향의 로커빌리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황금 형제듀엣. 형 돈 에벌리(Don Everly)는 1937년 켄터키주 브라우니 출생이고, 동생 필 에벌리(Phil Everly)는 1939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가수였던 부모와 함께 어릴 적부터 노래했고 컨트리의 본고장 내시빌에서 기타의 대가 쳇 애트킨스(Chet Atkins)에 초청되어 1955년에 첫 레코딩을 했다. 2년 뒤 소규모 음반사 케이던스와 계... 컨트리 음악 성향의 로커빌리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황금 형제듀엣. 형 돈 에벌리(Don Everly)는 1937년 켄터키주 브라우니 출생이고, 동생 필 에벌리(Phil Everly)는 1939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가수였던 부모와 함께 어릴 적부터 노래했고 컨트리의 본고장 내시빌에서 기타의 대가 쳇 애트킨스(Chet Atkins)에 초청되어 1955년에 첫 레코딩을 했다. 2년 뒤 소규모 음반사 케이던스와 계약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Bye bye love’, ‘All I have to do is dream’, ‘Bird dog’, ‘Cathy’s clown’ 등 빅 히트송이 줄을 이었다. 낭만적인 멜로디를 전하는 두 형제의 하모니가 압권. 1960년대의 사이먼 & 가펑클(Simon & Garfunkel) 등 많은 듀엣 팀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한 뱃속에서 태어난 형제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둘 사이가 나빠서 1973년에 해산했고 10년이 흐른 1983년에 재결합했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아 ‘Let it be me’, ‘Crying in the rain’ 등이 널리 애청되었다.
노래 : Paul Revere & The Raiders (폴 리비어 & 더 레이더스)
멤버 : 폴 리비어(Paul Revere, 보컬), 론 푸스(Ron foos, 베이스), 더그 히스(Doug Heath, 리드기타), 다니엘 그라우즈(Daniel Krause, 키보드), 대린 메들리(Darrin Medley, 드럼) 멤버 : 폴 리비어(Paul Revere, 보컬), 론 푸스(Ron foos, 베이스), 더그 히스(Doug Heath, 리드기타), 다니엘 그라우즈(Daniel Krause, 키보드), 대린 메들리(Darrin Medley, 드럼)
노래 : Van Morrison (밴 모리슨,George Ivan Morrison)
30년 이상의 장구한 세월에 걸쳐 거의 매년 앨범을 발표하는 밴 모리슨(Van Morrison)은 상업성에 구애받지 않고 외로운 음악항해를 펼치며 독보적 음악 소우주를 구축한 록 음악계의 거장이다. 비록 인기차트를 주름잡은 바 없었지만 ‘아일랜드 음악의 대부’라는 명성과 함께 모든 아일랜드 출신 음악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떠받들어지며 밥 딜런, 브루스 스프링스틴, 엘비스 코스텔로 등 당대와 후대를 막론한 무수한 아... 30년 이상의 장구한 세월에 걸쳐 거의 매년 앨범을 발표하는 밴 모리슨(Van Morrison)은 상업성에 구애받지 않고 외로운 음악항해를 펼치며 독보적 음악 소우주를 구축한 록 음악계의 거장이다. 비록 인기차트를 주름잡은 바 없었지만 ‘아일랜드 음악의 대부’라는 명성과 함께 모든 아일랜드 출신 음악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떠받들어지며 밥 딜런, 브루스 스프링스틴, 엘비스 코스텔로 등 당대와 후대를 막론한 무수한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헌정앨범이 드물던 시절인 1992년에 누구보다 먼저 트리뷰트 앨범이 바쳐질 정도였다. 도어스의 짐 모리슨(Jim Morrison)도 밴의 무대행위를 모방한 것은 물론, 그의 명곡 ‘Gloria’를 라이브 레퍼토리로 채택했으며 ‘Have I told you lately’(로드 스튜어트) ‘Wild night’(존 멜렌캠프와 미셀 엔드제오첼로) ‘Jackie Wilson said’(덱시스 미드나이트 러너스) ‘Carrying a torch’(톰 존스) ‘Crazy love’(브라이언 맥나이트, 애론 네빌) 등 많은 곡들이 리메이크 히트된 것도 그의 드높은 음악성을 방증한다. 1945년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조지 이반 모리슨(George Ivan Morrison)이란 이름으로 태어난 그는 재즈, 블루스 음반 수집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많은 음악을 접한다. 10대의 나이에 그룹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63년 자신이 주도한 브리티스 인베이전시기의 주요 그룹 가운데 하나인 뎀(Them)에서 보컬, 색소폰, 하모니카를 맡으며 홀연히 비상한다. 뎀은 아일랜드 출신으로는 이색적으로 미국음악인 R&B와 블루스를 연주하며 1965년 ‘Baby please don’t go’와 ‘Here comes the night’을 히트차트에 올려놓으며 명성을 얻는다. 1967년 밴 모리슨은 밴드를 떠나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밴드 활동을 통해 지명도를 확보한 그는 솔로앨범 < Blowin’ Your Mind >에서 ‘Brown eyed girl’(영화 < 적과의 동침 >에 삽입되어 국내 팬들에게도 친숙한 곡이다)을 전미차트 10위에 올리며 성공적으로 데뷔한다. 이듬해 미국의 ‘워너브라더스’와 계약을 체결하고 꿈꾸어왔던 미국 시장에 진출하며 기념비적인 앨범 < Astral Weeks >를 발표한다. 1968년 발표된 이 앨범은 현재까지 세계적으로 30만장이 채 팔리지 않은 형편없는 실적을 거두었지만 지금도 록 역사에서 빠지지 않는 명반으로 찬란한 빛을 발하고있다. < Astral Weeks >는 60년대 후반의 히피즘 속에서 내면 탐구에 몰두했으며 이데올로기의 난립 속에서 예술 그 자체에 주목한 탁이(卓異)한 앨범으로 유명한 재즈 세션 맨들과의 연주로 이틀만에 완성되었다. 자신의 감정을 녹음실에서 혼자 소화해 낸 그의 녹음 과정과 앨범에 담긴 모습은 록음악에서 표현된 최초의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대중에게 외면당한 전작과 달리 1970년에 발표된 < Moondance >는 싱글 ‘Come running’과 ‘Into the mystic’, ‘Moondance’, ‘Crazy love’가 애청되면서 그에게 상업적 성공을 안겨주었다. 재즈, 블루스, 소울, R&B, 클래식 등 다양한 스타일을 록의 테두리 안에서 소화해내는 그의 탁월한 음악적 시도는 이후 30년 넘도록 줄기차게 이어진다. 1970년 < His Band And The Street Choir >, 1971년 < Tupelo Honey >, 1972년 < St. Dominic’s Preview >를 연이어 발표했고, 이 가운데 < St. Dominic’s Preview >는 다양한 보컬, 악기의 시도가 담겨 있는 이해하기 어려운 예술적 극치를 선보인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73년 발표된 < Hard Nose The Highway >는 포크송과 세사미 스트리트(Sesame Street) 음악을 수록하는 색다른 면모를 보여주었지만 일관성이 결여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후 잠시 공백기에도 라이브 활동과 더욱 다양한 예술적 탐미를 통해 음악세계를 견고히 한 그는 1977년 < A Period Of Transition >, 1978년 < Wavelength >, 1979년 < Into The Music >(국내 최초로 라이센스 앨범이 나왔다), 1980년 < Common One >을 잇따라 발표하며 건재함을 과시한다. < Common One >에 수록된 곡 ‘Somewhere in England’에선 영국의 대표적 낭만주의 시인들인 워즈워드, 코울리지를 언급하며 자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내적 탐닉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도 고삐를 늦추지 않고 < Beautiful Vision >(1982년) < Inarticulate Speech Of Heart >(1983년) < A Sense Of Wonder >(1984년) < No Guru, No Method, No Teacher >(1986년) < Poetic Champions Compose >(1987년)을 발표했다. 1988년에는 아일랜드의 민속그룹 치프턴스(Chieftains)와 함께 < Irish Heartbeat >를 발표, 자신의 뿌리인 아일랜드의 켈트족에게 그 관심을 돌린다. 이즈음 영국으로 돌아가 1989년 < Avalon Sunset >을 발표, 싱글 ‘Whenever god shines his light on me’로 영국차트 20위권에 처음으로 진입한다. 그 수많은 앨범들과 오랜 음악생활 속에서 영국 차트 첫 20위권 진출 또한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이 앨범에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가 언플러그드로 커버하여 국내 팬들에게도 친숙한 곡 ‘Have I told you lately’가 수록되어 있다. 1990년대에도 왕성한 활동을 전개해 1990년 < Enlightenment >, 1991년 < Hymns To The Silence >, 1993년 < Too Long In Exile >를 연속 발표한다. 늘 그랬듯 뚜렷한 히트 싱글 하나 없었지만 1994년 브릿 어워드(Brit Award)에서 공로상이란 예우를 받는다. 1995년 이후 베스트 음반과 쟁쟁한 후배 아티스트들의 헌정앨범이 이어졌으며 50살이 넘은 나이에도 매년 꾸준하게 정규 앨범을 발표하고 있다. 1998년 미발표곡 모음집인 < The Philosopher’s Stone >에 이어 이듬해엔 신작 < Back On Top >으로 골드를 기록했고, 2000년에도 제리 리 루이스(Jerry Lee Lewis)의 형제인 린다 게일 루이스(Linda Gail Lewis)와의 듀엣 앨범 < You Win Again >으로 다시금 그의 음악에 대한 탈속(脫俗)적 열정과 천착을 알렸다.
노래 : The Ventures (더 벤처스 (락 밴드))
노래 : Elvis Presley (엘비스 프레슬리)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오늘날 폴과 비틀스를 있게 한, 단 한사람의 영향을 꼽는다면 위 해설처럼 단연 트럭운전사출신 엘비스 프레슬리다. 존 레논은 이를 결정적 한마디로 축약한다. “엘비스가 나타날 때까지 내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무 것도 없다(Nothing affects me until Elvis)." 존과 폴이 만나서 처음 마음먹은 것은 사실 엘비스의 음악을 더 강하게 표출해내는 것일 뿐이었다. 그들을 통해서 로큰롤의 진정한 역사는 ‘시대의 풍운아’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개막되었다는 사실이 다시금 확인된다. 물론 역사가에 따라 로큰롤의 효시를 행크 발라드(Hank Ballard)나 빌 헤일리(Bill Haley) 또는 척 베리(Chuck Berry)로 꼽기도 한다. ‘Work with me, Annie’ ‘Crazy man crazy’ ‘Maybellene’ 등과 같은 이들의 대표곡들이 시기적으로 먼저 구동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 다수 대중들은 여전히 로큰롤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엘비스가 나와서야 비로소 그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빌보드지의 결론. ‘1953년 록음악이 시작되었다고 하나 정작 차트나 방송에서 그 시대를 풍미하기 시작한 것은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싱글 ‘Heartbreak hotel’이 연속 8주 넘버원에 머물면서부터였다.’ 초기 로큰롤은 척 베리나 버디 할리와 같은 탁월한 ‘작가’를 소유했다. 리틀 리처드나 제리 리 루이스라는 출중한 ‘배우’ 그리고 조 터너, 보 디들리와 같은 ‘음악감독’들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로큰롤은 강풍을 휘몰아칠 역동적 ‘스타’가 필요했다. 그가 엘비스였다. 그 시대는 흑인의 리듬 앤 블루스를 소화해줄 백인가수를 요구했고 엘비스는 백인대중들로부터 ‘저 친구는 백인이면서 왜 검둥이노래를 부르는 거야?’라는 의아함을 일으킬 만큼 탁월한 흑인감성의 보유자였다. 이러한 시의성은 그러나 일반의 인식처럼 56년 RCA 소속의 엘비스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었고 이미 54년 선 레코드사의 엘비스로서 확립된 것이었다. 샘 필립스 사장의 전설적인 선 시절에 엘비스는 ‘That`s all right’, ‘Blue moon of Kentucky’ 와 ‘Mystery train’ 등을 부르면서 컨트리와 R&B를 크로스오버화한 신종의 로커빌리를 선보이면서 벌써 ‘웨스턴 밥의 왕’으로 불렸다. 이 때 이미 순회공연에서 팝 음악사상 초유의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다. 『뉴스위크』는 ‘금세기 백년간의 스타’ 특집기사를 다루며 그의 등장을 ‘20세기의 사건’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당시 엘비스 백업 밴드에서 드럼을 쳤던 D.J. 폰타나는 54년 상황을 다음처럼 술회한다. “엘비스 무대가 끝나고 나면 노래를 따라해 줄 관객들은 다 빠져버려 아무도 없었지요. 애들은 백 스테이지에서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습니다. 내 생각에 그 애들은 아마 우리 연주는 듣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오로지 ‘처음으로 흔드는 가수’ 엘비스를 보고자 하는 것이었죠.” 로컬 무대에서 전국 네트워크 TV로 진출하면서 마침내 ‘엘비스마니아’는 폭발했다. 미국의 3대 전국 공중파 방송 ABC CBS NBC의 체제가 정립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그는 텔레비전시대의 영웅으로서 ‘라디오스타를 죽이는’ 새로운 미디어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타미와 지미) 도시 브라더스의 CBS < 스테이지 쇼 >, NBC의 < 밀턴 벌 쇼 >와 < 스티브 알렌 쇼 > 그리고 저 유명한 CBS의 < 에드 셜리번 쇼 >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벌써 음악의 영상시대를 주도했다. 음악이 음반으로만 소구하던 시대는 ‘섹시 가이’ 엘비스의 출현으로 끝났다. ‘보는 음악’ 시대를 주도한 최초의 인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엘비스였다. 스탠다드 팝의 파수꾼 프랭크 시내트라도 자기 TV 쇼의 떨어지는 시청률을 참다못해 ‘음악의 공적(公敵)’이라고 성토해마지 않았던 엘비스를 출연시켜야 했다. TV 뿐만 아니라 영화 최초의 로큰롤 스타도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 러브 미 텐더 > < 러빙 유 > < G.I. 블루스 > < 블루 하와이 > 등 31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그는 관객들에게 로큰롤의 열정과 록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의 호소력을 제공했다. 음반 텔레비전 그리고 영화라는 ‘삼국통일’에 성공하며 천하를 제패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이 아래로 보일 정도의 막강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77년 사망하면서 그의 캐리어가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그는 무려 2억5천만장의 앨범을 팔았다. 이 기록에 가장 접근한 인물은 비틀스가 아닌 2억장의 빙 크로스비(캐롤 ‘White Christmas’가 결정적이다)며 프랭크 시내트라는 겨우 4천만장에 불과했다. ‘1인 기업’ 엘비스는 막대한 돈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인 핑크를 포함한 갖가지 칼라의 자동차 캐딜락을 구입했고 멤피스에 4만 달러 짜리 목장 그리고 10만 달러로 저택 그레이스랜드를 샀다. 전용 비행기는 물론 텔레비전 세트 그리고 첨단기계들도 마련했다. 물론 지금이야 흔해 빠진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특히 엘비스와 같은 하층계급 청년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부의 상징들이었다. 동시대 그리고 후배가수들이 일개가수에서 기업으로 융기한 엘비스를 통해 신분상승과 스타덤 획득 욕구를 품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엘비스처럼 슈퍼스타이면서 동시에 부자가 되고 싶어했다. 버디 할리는 엘비스를 빅 스타로서 존경했고 밥 딜런의 음악동기는 엘비스보다 큰(bigger than Elvis)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톰 존스는 아예 영국의 제록스판 엘비스였다. 엘비스처럼 구레나룻을 길렀던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직접 그를 만나기 위해 그레이스랜드 담을 넘다가 제지당했고 그룹 퀸은 엘비스를 안중에 두고 50년대 로큰롤풍의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를 만들었다(로저 테일러의 증언 “처음으로 텔레캐스터와 부기 앰프를 쓴 다소 빈약한 사운드였다. 분명 엘비스를 염두에 두고 만든 곡이었다.”). 마크 알몬드(Mark Almond)의 명쾌한 한마디를 들어보자. “그는 왕이다. 그밖에 다른 코멘트는 일체 필요없다!” 하지만 60년 전역 이후 엘비스는 달라졌다. 매니저였던 톰 파커 퇴역대령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음악방향이 빗나간 것이었다. 예의 로큰롤 넘버와는 거리가 먼 It`s now or never나 Surrender와 같은 감상적인 이탈리아 민요를 영역해 불렀다. 변화(아니면 변신?)의 징조는 프랭크 시내트라 쇼에 출연했을 때 뚜렷이 나타났다. 이 쇼에서 엘비스는 스탠다드 가수의 상징인 턱시도 정장을 했으며 호스트 프랭크 시내트라와 서로의 대표적 히트곡인 ‘Witchcraft’와 ‘Love me tender’를 바꿔 불렀다. 이 시점을 계기로 엘비스가 로큰롤을 버리고 스탠더드 팝 가수로 돌아서 청춘진영을 배신했다는 주장이 고개를 비집는다. 명백한 훼절이라고 단정해도 선뜻 반대논리를 펴기 어렵다. 그러나 친(親)엘비스 측은 그로써 그가 로큰롤 가수에서 ‘국민가수’로 승격하는 의미 있는 업적을 남기게 됐다고 반박한다. 로큰롤만의 논리로 음악을 풀고 엘비스를 규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어떻게 가치판단을 하느냐는 것은 관련자의 이데올로기나 각 시대의 성격에 따를 수밖에 없다. 변절이든 성숙이든 이 점만은 분명하다. 엘비스의 보컬이 초기의 로큰롤가수로 한정되었을 때 과연 후대에의 보컬 영향력을 소지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의 가창력은 음역, 에너지, 통제력, 피치 등 모든 면에서 압권으로 평가되어왔다.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었지만 ‘멀티칼라’인 그의 보이스에는 자니 레이의 급격한 변색, 두왑 그룹인 잉크스파츠(Inkspots) 빌 케니의 테너, 딘 마틴의 솜사탕 그리고 마리오 란자의 풍미가 동거했다. 그러면서도 로이 오비슨과 같은 유니크한 개성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스탠더드 발라드를 소화함으로 해서 우리들은 ‘Are you lonesome tonight’, ‘Suspicion’, ‘In the ghetto’, ‘The wonder of you’, ‘Fool’, ‘My boy’ 등의 팝 고전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명백한 역사의 유산이다. 그가 없었다면 성악가나 스탠더드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만을 접했을 것이고 로큰롤 싱어가 선사하는 발라드의 진미(珍味)를 영원히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공존공영 가능성을 그처럼 실감나게 시범한 가수도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이미 흑인감성의 전달로 로큰롤이 ‘흑백의 퓨전’임을 목소리 하나로 입증한 그는 이어서 역시 매직 보컬로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제휴를 일궈내는 업적을 남겼다. 어쩌면 우리가 70년대 록과 메탈 분야에서 형식을 확립한 이른바 ‘록발라드’라는 것도 그 원조는 엘비스일지도 모른다. 엘비스는 목소리를 통해 대중의 공감대를 전달한 몇 안 되는 가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건조한 보이스와는 거리가 먼, ‘이끼가 잔뜩 낀’ 풍부한 목소리였다. 아마 신나는 로큰롤 ‘Burning love’ 한 곡으로도 충분히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후대 음악팬들이 그의 노래를 듣고 더러 ‘느끼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후반기의 노래 가운데는 그런 요소를 풍기는 곡이 있었다. 하지만 엘비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거기서 느끼함이 아닌 되레 ‘풍성한 감성’을 수혈 받곤 한다. 미트 로프(Meat Loaf)는 말한다. “엘비스는 노래하는 것 무엇이든지 감정적으로 가사로 스피릿을 감상자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희구했던 명성과 부를 얻고 난 뒤 아쉽게도 그것들의 노예가 되는 비극적인 위인이기도 했다. 아무 데도 나갈 수가 없었고 편안히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도 불가능했다. 60년대나 70년대 로커였다면 이런 사실상의 ‘수감생활’을 극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래적 반항아’가 아니었다. 스타덤의 고독과 소외에 차츰 무너져간 그의 말년을 잘 나타내주는 일화는 무수히 많다. 70년대 들어서 조울증이 불거진 그는 때로 격렬해져 텔레비전 세트나 당구대, 주크박스, 자동차 등 가장집기를 부수는 발작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언젠가 D.J. 폰타나와 그의 아내 앞에서 엘비스는 자신의 감정상태를 이렇게 토로했다. “당신들은 운이 좋은 겁니다. 난 엘비스인게 너무 지겨워요! 뭘 해야될 지를 모르겠어요. 뭔가 딴 일을 했으면 제발 한이 없겠어요.” 고고음악의 대명사인 자니 리버스의 해석. “엘비스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었지요. 그래야만 했을 겁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그 밖의 다른 일이란 없었지요.” 엘비스만큼 화려한 명성과 처절한 고독이라는 양극단을 겪은(아니면 겪기로 강제된)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영욕의 교차요, 희비의 쌍곡선이다. 그래서 그를 통해 우리는 슈퍼스타덤의 빛 외에 냉혹함과 잔인성이라는 그림자를 동시 확인한다. 그의 사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심장마비로 발표되었지만 사후 마약중독 비만증 그리고 자살 등 정황에 근거한 갖가지 설들이 난무했다. 이는 그의 후반기 삶이 얼마나 철저히 비공개로 갇혀 있었는지를 반증한다. 스스로 창조한 혁명에 쓰러진 순종파 가수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비평에 의해 그의 역사적 위상이 훼손되는 일은 없다. 여전히 그는 만인이 공감하는 ‘킹 오브 로큰롤’이며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금세기 최고 가수’다. 비틀스가 그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한마디로 모든 엘비스의 가치는 입증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오류로 더러 지적되지만 비평가 고(故) 레스터 뱅스(Lester Bangs)의 엘비스 예찬은 되새길 가치가 있다. “우리는 엘비스에게 해준 것과 같은 동의를 앞으로 어떤 누구에게도 해주지 않을 것이다!”
노래 : B. J. Thomas (B. J. 토마스,Billy Joe Thomas)
멤버 : 로한 데라노 터니(Rohan Delano Turney, 보컬), 피터 라마(Peter Lamarr, 보컬), 빅터 비노에(Victor Bynoe, 보컬), 패트릭 알란(Patrick Alan, 보컬) 멤버 : 로한 데라노 터니(Rohan Delano Turney, 보컬), 피터 라마(Peter Lamarr, 보컬), 빅터 비노에(Victor Bynoe, 보컬), 패트릭 알란(Patrick Alan, 보컬)
노래 : Daniel Boone (다니엘 분,Peter Green)
‘You mean everything to me’, ‘Oh! Carol’, 그리고 ‘One way ticket’으로 국내 팝 음악의 수용 역사에 하나의 획을 그은 닐 세다카(Neil Sedaka)는 한 번도 어려운 전성 시대를 두 번이나 경험했다. 첫 번째 전성기는‘Oh! Carol(16위)’과 ‘You mean everything to me(17위)’, ‘Calendar girl(4위)’, ‘Little dev... ‘You mean everything to me’, ‘Oh! Carol’, 그리고 ‘One way ticket’으로 국내 팝 음악의 수용 역사에 하나의 획을 그은 닐 세다카(Neil Sedaka)는 한 번도 어려운 전성 시대를 두 번이나 경험했다. 첫 번째 전성기는‘Oh! Carol(16위)’과 ‘You mean everything to me(17위)’, ‘Calendar girl(4위)’, ‘Little devil(11위)’, ‘Bad girl(33위)’, ‘Breaking up is hard to do(1위)’, ‘Stairway to heaven(9위-레드 제플린의 노래와는 동명이곡)’, ‘Happy birthday, sweet sixteen(6위)’, ‘Next door to an angel(5위)’처럼 청소년기의 감수성을 읊은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였고, 두 번째 융성기는 엘튼 존(Elton John)을 비롯한 여러 친구들의 도움으로 ‘Laughter in the rain(1위)’, ‘Bad blood(1위)’, 그리고 캡틴 & 테닐(Captain & Tennile)이 커버해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는 물론 그래미에서 올해의 레코드 트로피를 거머쥐게 한 ‘Love will keep us together’같은 성인 취향의 팝록으로 재기에 성공한 1970년대 중반이었다. 세계 금융의 중심이 뉴욕의 월스트리트인 것처럼 영국 뮤지션들이 미국을 침공하기 이전인 1960년대 초반까지 미국 대중 음악의 황금기를 일군 심장부도 뉴욕에 위치한 브릴 빌딩가(街)였다. 바로 이곳에서 일류 작곡가들이 만든 명곡들이 가지를 뻗고 이파리를 피워 1960년대 음악을 꽃피게 했다. 캐롤 킹(Carole King), 버트 바카라크(Burt Bacharach), 레이버 & 스톨러(Leiber & Stoller), 베리 만 & 신시아 웨일(Barry Mann & Cynthia Weil), 닐 세다카 등은 당시 프리미엄급 작곡가였고, 이 중에서 캐롤 킹과 닐 세다카는 가수로 전업해 팝음악 계에 지워지지 않는 업적을 남겼다.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다루며 음악적인 능력을 키워 온 닐 세다카는 1939년 3월 13일 뉴욕의 브룩클린에서 태어났고 모든 음악인들의 선망의 대상인 줄리아드 음악 대학에 입학하면서 그 천재성을 입증하기 시작했다. 이 젊은 작곡가의 첫 번째 작품은 카니 프란시스(Connie Francis)의 ‘Stupid Cupid(17위)’였다. 이 곡의 히트로 각 음반사들이 눈독을 들인 닐은 1950년대 후반 RCA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가수로서의 캐리어도 쌓기 시작했다. 여자 친구였던 캐롤 킹에게 바치는 ‘Oh! Carol’과 ‘You mean everything to me’는 특히 우리 나라에서 국가 대표 급 팝송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Breaking up is hard to do’는 1962년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하면서 절정의 인기를 실감했지만 대서양을 건너온 영국 뮤지션들의 융단 폭격 때문에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위축된 활동을 보여주었다. 이 천재 아티스트는 1970년대에 들어서자 ‘I’m not in love’로 알려진 10CC의 멤버 그래함 굴드만(Graham Gouldman - 1980년대 앤드루 골드와 함께 Wax 결성)이나 엘튼 존(Elton John) 등의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Laughter in the rain’, ‘Bad blood’, ‘Love will keep us together’는 정상을 호령했고, 14년 전에 1위의 고지를 차지했던 ‘Breaking up is hard to do’는 새로운 생명력을 수혈받아 9위를 차지함으로서 다시 한번 팝음악의 고전임을 공인 받았다. 그래도 뭐니뭐니해도 국내에서는 현재 자동차 CF의 배경 음악으로 쓰여 TV 방송을 타고 있는 ‘Oh! Carol’과 ‘You mean everything to me’그리고 1980년대 초반 유로 디스코 밴드 이럽션(Eruption)이 재해석한 ‘One way ticket’이다. 1990년대 이후부터는 새로운 음반 작업보다는 예전의 히트곡들을 컴필레이션으로 짜집기하거나 자신의 곡들을 새로운 스타일로 재해석한 커버 버전 형식의 음반을 발매함으로서 예전의 영광을 답습하고 있지만 그가 여전히 위대한 가수 겸 작곡가라는 이 ’평가 불변의 법칙’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Diana’의 주인공 폴 앵카(Paul Anka)는 소녀 취향의 팝과 스탠다드 풍의 노래들로 1950년대 후반 전 세계의 ‘오빠부대’를 지휘했던 가장 인기 있는 틴 아이돌 스타였다. 1957년 왜소한 체구를 소유한 폴 앵카의 데뷔 싱글 ‘Diana’가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장기 집권에 성공하고 ‘You are my destiny(7위)’, ‘Crazy love(19위)’, ‘Puppy love(2위)’, ‘Lo... ‘Diana’의 주인공 폴 앵카(Paul Anka)는 소녀 취향의 팝과 스탠다드 풍의 노래들로 1950년대 후반 전 세계의 ‘오빠부대’를 지휘했던 가장 인기 있는 틴 아이돌 스타였다. 1957년 왜소한 체구를 소유한 폴 앵카의 데뷔 싱글 ‘Diana’가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장기 집권에 성공하고 ‘You are my destiny(7위)’, ‘Crazy love(19위)’, ‘Puppy love(2위)’, ‘Lonely boy(1위)’, ‘Put your head on my shoulder(2위)’, ‘It’s time to cry(4위)’등이 내리 차트를 강타하면서 그의 시대가 화려히 전개되었다. 이 곡들이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부드러운 멜로디는 물론, 소녀들의 가려운 데까지 손을 뻗쳐 그들의 감수성을 포착해냈기 때문이었다(그는 전곡을 직접 작곡하고 작사하는 당시의 보기 드문 싱어송라이터였다). 당연히 소녀 팬들의 열렬한 지지가 뒤따랐으며 동시대의 로큰롤 가수들을 못미더워 했던 부모들은 폴 앵카에게만은 안심했다. 1950년대 후반 기성세대의 눈에는 불량스러워 보이는 로큰롤 가수들과는 달리 그는 반듯하고 예의바른 이미지로 자신을 가꾸어 당시 부모님 세대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것이다. 확실히 그는 같은 시기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나 제리 리 루이스(Jerry Lee Lewis), 척 베리(Chuck Berry)보다는 팻 분(Pat Boone), 릭키 넬슨(Ricky Nelson), 닐 세다카(Neil Sedaka)처럼 점잖고 단정한 이미지를 강조했다. 1941년 7월 30일,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에서 아랍계 시리아인의 이민자 2세로 태어난 폴 앵카는 어려서부터 넘쳐흐르는 음악적인 끼를 주체할 수 없어 14살 때 캐나다판 ‘전국 노래 자랑’에 참가하기 위해 부모님의 차를 몰래 몰고 몬트리올까지 진군한 전과도 있었다. 그의 이러한 적극성은 훗날 그가 10대 스타를 거쳐 싱어 송라이터, 영화배우, 음반 제작자, 사업가 등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어린 시절 자신의 보모를 모델로 하여 16살 때 작곡한 ‘Diana’는 이 캐나다 가수의 데뷔 곡이었음에도 북미 지역과 영국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정상을 차지하면서 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싱어송라이터가 등장했음을 알린 기념비작이다. 그리고 이후의 소나기성 히트 퍼레이드로 그의 입지는 더욱 공고히 다져졌다. ‘Puppy love’는 1970년대 가족 그룹 오스몬즈(The Osmonds)의 막내 도니 오스몬드(Donny Osmond)가 리메이크해 3위에 랭크 시키면서 다시 한번 틴아이돌 세대의 명곡임을 입증했고, ‘Put your head on my shoulder’는 1990년대 후반 국내의 샴푸 CF에 쓰여 옛 향수를 자극하기도 했다. 그는 가수뿐만 아니라 동료들을 위해서 멋진 노래들을 만들어 준 음악적 동지로서의 역할도마다하지 않았다. 모범생 스타일의 천재 로큰롤러 버디 홀리(Buddy Holly)의 ‘It doesn’t matter anymore(13위)’와 정력적인 싱어 톰 존스(Tom Jones)의 신나는 넘버 ‘She’s a lady’(2위 - 리차드 샌더슨의 발라드와는 다른 곡),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를 위해 프랑스의 샹송 ‘Comme d’Habitude’를 개사한 ‘My way’, 자신이 직접 출연하기도 한 전쟁 영화 < 지상 최대의 작전 >의 주제가인 ‘The longest day’, 그리고 TV 토크쇼의 대명사로 자니 카슨(Johnny Carson)이 진행한 < 투나잇 쇼 >의 타이틀곡까지 그에게는 음악에 대한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30년 동안 매일 밤 방송된 < 투나잇 쇼 >와 불후의 명곡이 된 ‘My way’만으로도 그는 막대한 로열티를 받았을 것이다. 1970년대 중반, 훌쩍 어른이 되어 버린 왕년의 틴아이돌 스타는 환경이 변한 음악 시장에 적응해 재도약에 성공했다. 국내에서는 제목 때문에 방송금지 곡으로 묶였던 ‘(You’re) Having my baby’로 다시 한번 싱글 차트를 수복했고 ‘One man woman/One woman man(7위)’과 ‘I don’t like to sleep alone(8위)’, ‘Times of your life(7위)’ 모두 탑 텐을 기록하면서 꺼지지 않는 작곡 역량을 과시했다. 이 때가 제2의 전성기였다. 특히 1986년 이장호가 감독한 영화 < 공포의 외인구단 >의 주제곡으로 정수라가 부른 ‘난 너에게’는 ‘I don’t like to sleep alone’을 표절한 것으로 판명되어 ‘난 너에게’는 방송 및 판매가 금지되었다. 이 불세출의 남성 가수 노래들 중에서 ‘Happy’와 ‘Papa’는 외국 차트와는 상관없이 국내 팝 팬들에게 압도적인 사랑을 받았다. 아마도 1970년대 팝 팬들 가운데 ‘Papa’의 멜로디를 모르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이 곡과 데뷔작 ‘Diana’는 심지어 우리말로 번안되기도 해, 팝송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그의 노래는 무의식적으로 입력되어 있다. 데뷔한지 40년이 지난 현재까지 지치지 않고 음악 활동을 하는 그는 1990년대 중반 내한해 디너쇼 공연을 가져 우리의 기성세대들로 하여금 흥겨운 회상에 젖게 하기도 했다.
노래 : Jose Feliciano (호세 펠리치아노,Jose Montserrate Feliciano Garcia)
1980년대를 장식한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와 그 다음의 글로리아 에스테 그리고 세기말이었던 1999년에 쏟아져 나온 미끈했던 리키 마틴, 배우활동도 겸한 제니퍼 로페즈 그리고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아들 엔리케 이글레시아스 등은 영미 음악과는 색조가 다른 라틴 팝으로 유명한 가수들이다. 이제는 흑인보다 미국에서 인종비가 높은 히스패닉 계들의 음악이라 할 중남미의 라틴 팝은 1950년대에 국내에도 번안되어 애청된 곡 ... 1980년대를 장식한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와 그 다음의 글로리아 에스테 그리고 세기말이었던 1999년에 쏟아져 나온 미끈했던 리키 마틴, 배우활동도 겸한 제니퍼 로페즈 그리고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아들 엔리케 이글레시아스 등은 영미 음악과는 색조가 다른 라틴 팝으로 유명한 가수들이다. 이제는 흑인보다 미국에서 인종비가 높은 히스패닉 계들의 음악이라 할 중남미의 라틴 팝은 1950년대에 국내에도 번안되어 애청된 곡 ‘베사메무초’ ‘키엔 세라’가 말해주듯 특유의 낭만적인 리듬과 애조 띤 멜로디를 생명으로 구미사회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부터 인기를 누려왔다. 라틴 팝 하면 상기한 이름들이 먼저 떠오르겠지만, 원조는 그들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가 1960년대 후반 미국시장을 강타한 시각장애자 가수 호세 펠리치아노(Jose Feliciano)라고 할 수 있다. 해마다 12월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길거리 스피커와 라디오 전파를 뒤덮는 곡 ‘펠리즈 나비다드(Feliz Navidad-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뜻)’를 부른 주인공이 바로 호세 펠리치아노다. 이 곡 말고도 그는 국내에서 ‘한때 사랑이 있었지(Once there was a love)’와 ‘집시(The gypsy)’, ‘레인(Rain)’, ‘케 사라(Che sara)’, ‘내추어 보이(Nature boy)와 같은 골든 팝송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상기한 노래 대부분은 국내에서는 라디오 전파를 잠식하며 절대적인 호응을 누렸지만 본고장 팝 팬들이 기억하는 곡들은 아니다. ‘레인’의 경우도 빌보드 차트에서 76위에 그쳤다. 심지어 외국에서는 전혀 싱글로 발표되지 않은 앨범의 수록곡 가운데 우리 정서에 맞는 것들을 당대의 음악다방과 라디오 디스크자키들이 골라내 인구에 회자시킨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적 팝송’이다. 디제이들이 이 곡들을 숨겨진 보물 찾듯이 발굴한데는 ‘그 애조 띤 멜로디와 낭랑한 어쿠스틱 기타 음을 분명히 우리의 팝팬들이 좋아할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했을 것이다. 그럼 미국에서는 어떤 곡들이 사랑 받았을까. 그는 음악계에 데뷔한 1968년 그때부터 딴 가수들이 부른 것을 특유의 감성으로 놀랍게 바꿔낸 ‘리메이크’ 노래들로 명성을 떨쳤다. 우선 1967년 여름에 발표되어 수 주간 전미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대중화된 록그룹 도어스(Doors)의 명곡 ‘내 불을 밝혀라(Light my fire)’를 들 수 있다. 호세 펠리치아노는 1년도 지나지 않은 이듬해 초에 이 곡을 다시 불러 내놓았다. 재해석해낸 곡의 질감은 원곡과는 영 딴판이었다. 능란한 어쿠스틱 기타연주를 바탕으로 로맨틱하면서도 클라이맥스에서 솟아오르며 사정없이 뿌려대는 보컬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넘어 기겁했을 정도였다. 도어스의 곡과 다르기로 따지면 거의 환골탈태 아니면 둔갑 수준. 사이키델릭 곡이 단숨에 라틴 팝이 되어 나온 것이다. 호세 펠리치아노의 ‘Light my fire’는 리메이크임에도 불구하고 전미차트 3위를 오르며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음악 팬들이 원작의 단순 재해석이 아닌 호세 펠리치아노 그만의 독창적 개조로 받아들인, 다시 말하면 그의 독자적 표현세계를 인정해준 덕분이었다. 지금도 호세 펠리치아노의 ‘내 불을 밝혀라’는 팝 역사상 가장 득의에 찬 리메이크 곡으로 꼽힌다. 국내 팝 팬들은 마찬가지 이유로 마마스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California dreaming)’이나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의 ‘Susie Q’ 그리고 산레모 가요제 입상곡인 ‘케 세라’ 등을 오리지널 이상으로 호세 펠리치아노의 독창적인 버전으로 즐겨들었다. 이번 예술의 전당 공연에서도 관객들은 오리지널 가수의 목소리로 이미 많은 대중들에게 익히 알려진 유명 팝송들을 -비틀스의 ‘Yesterday’, 사이먼 앤 가펑클의 ‘El condor pasa’, 바비 헵의 ‘Sunny’, 더스티 스프링필드 ‘The windmills of your mind’- 완전히 그의 것으로 새롭게 주조해내는 호세 펠리치아노의 노래에 감탄할 것이다. 호세 펠리치아노가 이처럼 상대적으로 리메이크 노래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아티스트와 뮤지션으로 융숭하게 대접하는 것은 리메이크가 새로운 창조임을 웅변해냈기 때문이다. 역사에 기록된 리메이크 사례로는 그가 떠오른 해였던 1968년 10월7일 야구 월드시리즈 5번째 게임에서 초대가수로 부른 미국 국가(Star-spangled banner)가 꼽힌다. 어쿠스틱 기타로 워낙 ‘괴상하게’ 부른 바람에 국가를 신성시하는 미국의 국수주의자들과 보수진영으로부터 거친 항의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 경기장 라이브는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인기차트에도 올라 전미 차트 50위에 오르는 히트를 쳤다. 호세 펠리치아노는 그해 그래미상의 최우수신인상을 수상했다. 1945년 푸에르토리코 생인 그의 주특기는 호소력 있는 얇은 고음의 보컬 외에 낭랑한 어쿠스틱 기타의 울림이다. 선천성 녹내장으로 앞을 볼 수 없는 불리를 타고난 재능과 하루 14시간씩 연습하는 노력을 통해 빼어난 기타연주자로 거듭났다. 이름 앞에 거물 기타리스트(virtuoso guitarist)라는 수식이 모든 공식자료에 붙을 정도. 기타전문지들에 의해 수도 없이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40년 넘게 어쿠스틱 기타분야의 전설로 숭앙받으며 지금도 라틴 음악에 관한 한 ‘일렉트릭 기타는 산타나, 어쿠스틱 기타는 호세 펠리치아노’라는 일반의 인식을 확립했다. 그의 발표 곡 가운데는 ‘Fireworks’ ‘Pegao’ 등 기타 연주곡들이 많다. 라틴 기타연주자로서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은 그의 대중적 인기가 떨어진 1980-1990년대에서도 전문가들의 존경이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는 1983년 ‘Me enamore’, 1986년 ‘Lelolai’, 1989년 ‘Cielito’, 1990년의 ‘Por que te tengo que olvidar?’로 그래미 최우수 라틴 팝 퍼포먼스 상을 무려 네 차례나 수상했다. 2000년대에도 그는 계속적인 월드투어를 통해 팬들에게 라틴 음악의 로맨티시즘을 전달하는 동시에 과거의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신보를 발표하고 있다. 그가 연주하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음악에 대한 헌신’과 ‘음악을 향한 열정과 즐거움’이 고스란히 드러나 감동이 배가된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처럼 그는 재능과 노력 그리고 낙천적인 사고로서 예술가의 전형을 확립했다. 우리가 너무도 좋아했던 곡 ‘집시’를 통해 그의 음악 하는 자세를 확인할 수 있다. ‘난 노래를 연주하고 음반을 만들어 돈을 받는 그런 집시죠/ 난 순회하는 무리의 일부예요/ 난 온 땅을 돌아다니죠/ 내 동료를 위해 곡을 만들어주고/ 슬프고 때로는 행복한 음으로 모든 곡을 쓰고 연주해요/ 어떤 곡은 사람들을 웃기고/ 어떤 곡은 사람들을 울리죠/ 왜 그렇게 되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난 끝없이 음악 여행을 계속해요/ 내 기타가 낡고 쉬 고되더라도...’ 이번 내한공연에서 팬들은 그가 남긴 무수한 추억의 골든 팝, 공연장에 울림을 가져다줄 상쾌한 보컬 그리고 라틴 기타 연주의 환상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진정한 뮤지션이 전하는 헌신과 즐거움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라틴 팝가수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호세 펠리치아노의 재능과 존재감을 넘어설 인물은 없다. 우리는 세기말에 유행을 타고 우후죽순 쏟아진 라틴 팝가수들이 아닌, 그보다 훨씬 전에 등장한 호세 펠리치아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노래 : Freddy Fender (프레디 펜더,Baldemar Huerta)
198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서 컨트리 음악의 인기 몰이에 공을 세운 가수는 덥수룩한 수염으로 유명한 케니 로저스(Kenny Rogers)다. 그는 분명 컨트리 아티스트지만 1980년대 초반 당시 국내에서 사랑 받았던 ‘Lady’, ‘Islands in the stream’, ‘We''ve got tonight’, 그리고 ‘Don''t fall in love with a dreamer’ 등은 정통 컨트리 음악과 거... 198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서 컨트리 음악의 인기 몰이에 공을 세운 가수는 덥수룩한 수염으로 유명한 케니 로저스(Kenny Rogers)다. 그는 분명 컨트리 아티스트지만 1980년대 초반 당시 국내에서 사랑 받았던 ‘Lady’, ‘Islands in the stream’, ‘We''ve got tonight’, 그리고 ‘Don''t fall in love with a dreamer’ 등은 정통 컨트리 음악과 거리가 멀었다. 1980년 6주간 정상의 자리를 지키면서 그의 대표곡이 된 ‘Lady’는 코모도스(Commodores) 출신의 흑인 싱어 송라이터 라이오넬 리치(Lionel Richie)가 작곡했고, 1983년 돌리 파튼(Dolly Parton)과 듀엣으로 녹음해 2번째로 1위에 등극한 ‘Islands in the stream’은 디스코의 지존 비지스(Bee Gees)의 맏형 배리 깁(Barry Gibb)이 만들어 준 곡이었으며 시나 이스턴(Sheena Easton)과 함께 한 ‘We''ve got tonight(1983년 3위)’은 미국의 록큰롤 싱어 송라이터 밥 시거(Bob Seger)의 노래를 리매이크 한 것이다. 그리고 킴 칸스가 만들고 함께 호흡을 맞춘 ‘Don''t fall in love with a dreamer(1980년 4위)’도 컨트리팝이라기 보다는 어덜트 컨템포러리 발라드다. 케니 로저스가 이렇게 컨트리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성인 취향의 소프트 팝도 막힘 없이 잘 소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팝그룹 더 퍼스트 에디션(The First Edition)과 포크 밴드 뉴 크리스티 민스트렐스(New Christy Minstrels)에 몸담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래를 부른 케니 로저스는 컨트리 가수였지만 국내에서 인기를 얻은 그의 노래들은 정통 컨트리가 아니었다. 케니 로저스의 사례는 정통적인 컨트리보다 팝적인 감성을 살린 컨트리팝이 보편적으로 사랑 받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1938년 8월 21일 미국 텍사스주의 휴스톤을 고향으로 태어난 케니 로저스는 1960년대부터 음악 경력을 쌓았다. 그가 맨 처음 시도한 음악은 재즈였지만 재미를 보지 못하자 더 퍼스트 에디션(The First Edition)과 뉴 크리스티 민스트렐스(New Christy Minsrels)같은 그룹에 가담해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다. 그러나 그가 대중들로부터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1972년 솔로 아티스트로서 활동을 개시 한지 5년이 지난 1977년 싱글 ‘Lucille(5위)’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농부인 남편과 4 자녀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인생사를 담은 이 진솔하고 구슬픈 곡은 당시를 평정하고 있던 신경 말초적인 가사로 유흥 지향적인 디스코에 카운터 펀치를 날려 대단한 성공을 일궈 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스크린에도 손길을 뻗쳐 < 갬블러 >, < 카워드 오브 더 카운티 > 등의 영화에 출연하고 주제가도 직접 불러 지속적인 인기를 유지했다. 절정의 인기에 있던 1980년대 초반에는 많은 여가수들과 듀엣 곡들을 취입했다. 위에 열거한 킴 칸스, 시나 이스턴, 돌리 파튼 외에도 자기보다 연상의 컨트리 싱어 도티 웨스트(Dottie West)와 짝꿍을 이뤄 ‘Everytime two fools collide’를 불러 여가수와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 가수라는 명예를 재확인했다. 1984년 킴 칸스, 흑인 싱어 제임스 인그램(James Ingram)과 화음을 맞춘 ‘What about me(15위)’를 끝으로 지금까지 이렇다 할 싱글 히트곡을 생산하지 못한 그는 올해 힙합 그룹 퓨지스(Fugees)의 멤버였던 와이클레프 진(Wyclef Jean)과 ‘Buy me a lose’를 공개하는 등 현재의 음악 씬을 이해하고 적응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웃 아저씨처럼 후덕한 인상에 바리톤 음색을 소유한 남부 출신의 케니 로저스가 부르는 노래들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슬프고 기쁜 일들을 가감 없이 진실하게 전한다. 그래서 이 턱수염 가수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그 곡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고 그것에 동화되는 마력에 빠져든다. 정통 컨트리 신봉자들은 컨트리팝 아티스트들을 폄하하지만 그들로 인해 컨트리 음악이 미국이라는 경계선을 넘어 많은 나라들에서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게 한 공로는 높이 평가돼야 한다. 그 중심에 당당히 서 있는 가수가 케네스 도날드 로저스(Kenneth Donald Rogers)란 본명을 가지고 있는 케니 로저스다.
멤버 : 딘 포드(Dean Ford, 보컬), 주니어 캠벨(Junior Campbell, 보컬), 그레이엄 나이트(Graham Knight, 베이스), 팻 페어리(Pat Fairley, 기타, 베이스), 앨런 화이트헤드(Alan Whitehead, 드럼) 멤버 : 딘 포드(Dean Ford, 보컬), 주니어 캠벨(Junior Campbell, 보컬), 그레이엄 나이트(Graham Knight, 베이스), 팻 페어리(Pat Fairley, 기타, 베이스), 앨런 화이트헤드(Alan Whitehead, 드럼)
밴드 : The Animals (애니멀스,Eric Burdon And The Animals)
애니멀스(Animals)는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 야드버즈(Yardbirds)와 함께 영국에서 건너온 가장 영향력 있는 화이트 블루스 밴드였다. 이들은 비틀즈(Beatles), 롤링 스톤스, 더 후(The Who), 킹크스(Kinks), 허맨스 허밋츠(Herman’s Hermits) 등과 손을 맞잡고 브리티시 인베이션의 물꼬를 텄고, 블루스의 원산지인 미 본토에 블루스 붐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애니멀스(Animals)는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 야드버즈(Yardbirds)와 함께 영국에서 건너온 가장 영향력 있는 화이트 블루스 밴드였다. 이들은 비틀즈(Beatles), 롤링 스톤스, 더 후(The Who), 킹크스(Kinks), 허맨스 허밋츠(Herman’s Hermits) 등과 손을 맞잡고 브리티시 인베이션의 물꼬를 텄고, 블루스의 원산지인 미 본토에 블루스 붐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밥 딜런(Bob Dylan)으로 대표되는 포크록의 탄생에 동기를 부여함으로서 1960년대 팝 음악계를 풍성하게 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한 건반 주자 알란 프라이스(Alan Price)가 흑인 음색을 소유한 에릭 버든(Eric Burdon)과 존 스틸(John Steel/드럼), 힐튼 발렌타인(Hilton Valentine/기타), 브라이언 채스 챈들러(Bryan Chas Chandler/베이스)를 만나 1964년부터 애니멀스의 웅대한 역사를 써 내려갔다. 비참한 생활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국내에서 오래 동안 금지 곡의 사슬에 묶였던 ‘House of the rising sun’은 비틀즈의 해로 기억되던 1964년 5주만에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밥 딜런이 자신의 데뷔 앨범에 수록했던 이 미국의 구전 민요를 애니멀스는 전자 기타가 울부짖는 블루스 넘버로 완벽하게 재 탄생시켰다. 이 음악을 듣고 음악 쇼크를 받은 밥 딜런은 통기타 대신 일렉트릭 기타를 부여잡고 포크록을 탄생시켰다. 원래 재즈 보컬리스트 니나 시몬(Nina Simone)이 취입한 ‘Don’t let me be misunderstood(39위)’는 애니멀스의 록 버전으로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특히 국내에서는 1970년대 후반 라틴계 디스코 밴드 산타 에스메랄다(Santa Esmeralda)의 댄스 버전(15위)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당시 디스코 클럽의 플로어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리고 이들의 노래들 중에서 가장 정통 록적인 ‘It’s my life(23위)’는 록의 고전으로 대우받고 있다. 이 외에도 히트 차트에 등록된 ‘I’m crying(19위)’와 ‘Bring it on home to me(32위)’, 싱글로 히트하진 않았지만 록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We’ve gotta get out of this place’, 시카고 블루스의 전설인 지미 리드(Jimmy Reed)의 곡을 리매이크 한 ‘Bright lights, Big city’, 그리고 같은 백인 블루스 싱어들과의 비교를 거부할 정도로 에릭 버든의 완벽한 가창 실력을 입증한 ‘For Miss Caulker’까지 영국에서 온 5명의 블루스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하지만 에릭이 자신의 목소리를 앞세운 보컬 카리스마로 알란과의 알력이 스멀스멀 피어나자 알란 프라이스는 애니멀스를 탈퇴해 나름의 활동을 시작했고, 이 쟁탈전의 승리로 밴드의 주도권을 쥔 에릭 버든은 공석으로 비어 있는 자리에 데이브 로베리(Dave Rowberry)를 앉히고 그룹의 새로운 설계도를 작성했다. 그러나 에릭은 알란의 반쪽이었고, 알란도 에릭의 절반이었다. 그 둘은 헤어지고 나서야 그들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절대적인지를 실감하게 되면서 1976년에 원년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지만 만족스런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음악의 최소주의 미학을 구현한 3인조 뉴웨이브 밴드 폴리스(Police - 스팅이 있었던)의 기타리스트 앤디 서머스(Andy Summers)는 1960년대 후반 에릭과의 친분으로 애니멀스에 몸담기도 했었다. 1970년대 들어서 에릭은 이 위대한 밴드를 접고 두 차례나 내한 공연을 가진 덴마크 출신의 하모니카 연주자 리 오스카(Lee Oskar)와 여러 흑인 뮤지션들을 규합해 소울 그룹 워(War)를 조직해 치열한 순위 경쟁에 참전해 ‘Why can’t we be friends?(6위)’를 랭크 시켰다. 이 트랙은 1997년 스카 펑크 밴드 스매시 마우스(Smash Mouth)가 재해석해 자신들의 데뷔 음반에 수록하기도 했다. 1976년과 1983년에 다시금 모여 예전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했지만 역전된 음악 환경은 ‘새로운 애니멀스’에게 호의적이지 못했고 다시 이들은 각자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만든 옛 영예의 그림자 속에서 현재의 숨결을 이어가는 것이다.
밴드 : Association (어소시에이션)
멤버 : Gary 'Jules' Alexander, Ted Bluechel, Terry Kirkman, Russ Giguere, Larry Ramos, Jim Yester, Brian Cole 멤버 : Gary 'Jules' Alexander, Ted Bluechel, Terry Kirkman, Russ Giguere, Larry Ramos, Jim Yester, Brian C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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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 포장안내1
  • 포장안내2
  • 포장안내3
  • 포장안내4
포스터 안내
  •  구매하신 상품에 포스터 사은품이 있는 경우, 포스터는 상품 수량과 동일한 수량이 제공됩니다.
  •  포스터는 기본적으로 지관통에 포장되며, 2장 이상의 포스터도 1개의 지관통에 담겨 발송됩니다.
  •  포스터 수량이 많은 경우, 상황에 따라 지관통 추가 및 별도 박스에 포장되어 발송될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반품/교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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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전자책 단말기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 예) CD/LP, DVD/Blu-ray,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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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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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피해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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