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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

넷플릭스 '기묘한 이야기 시즌 1-2' 드라마 음악 (Stranger Things: Music From The Netflix Original Series OST) [2 LP]

[ 게이트폴드 ]
Echo & The Bunnymen, Psychedelic Furs, Devo, Jim Croce, Joy Division 노래 외 12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SonyMusic / Legacy | 2018년 01월 04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120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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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기묘한 이야기 시즌 1-2' 드라마 음악 (Stranger Things: Music From The Netflix Original Series OST) [2 LP]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8년 01월 04일
제조국 미국

관련분류

이 상품의 이벤트 (1개)

음반소개

디스크

Disc
  • 01 Intro - Will Singing The Clash (Dialogue) - Stranger Things (Dialogue)
  • 02 Every Breath You Take - The Police
  • 03 Should I Stay Or Should I Go - The Clash
  • 04 "Coffee And Contemplation" (Dialogue) - Stranger Things (Dialogue)
  • 05 Hazy Shade Of Winter - Bangles
  • 06 Nocturnal Me - Echo & The Bunnymen
  • 07 "Bring Him Home!" (Dialogue) - Stranger Things (Dialogue)
  • 08 Sunglasses At Night - Corey Hart
  • 09 Girls On Film - Duran Duran
  • 10 "Just Because People Tell You..." (Dialogue) - Stranger Things (Dialogue)
  • 11 Atmosphere - Joy Division
  • 12 "Maybe I'm Crazy..." (Dialogue) - Stranger Things (Dialogue)
  • 13 Twist Of Fate - Olivia Newton-John
  • 14 "Says Logic" (Dialogue) - Stranger Things (Dialogue)
  • 15 The Ghost In You - The Psychedelic Furs
  • 16 Africa - Toto
  • 17 You Don't Mess Around With Jim - Jim Croce
  • 18 "Accident Or Not" (Dialogue) - Stranger Things (Dialogue)
  • 19 Whip It - Devo
  • 20 Runaway - Bon Jovi
  • 21 Time After Time - Cyndi Lauper
  • 22 Talking In Your Sleep - The Romantics
  • 23 "Mouthbreather" (Dialogue) - Stranger Things (Dialogue)
  • 24 Back To Nature - Fad Gadget
  • 25 "She's Our Friend And She's Crazy!" (Dialogue) - Stranger Things (Dialogue)
  • 26 Rock You Like A Hurricane - Scorpions
  • 27 Heroes - Peter Gabriel
  • 28 "Friends Don't Lie" (Dialogue) - Stranger Things (Dialogue)
  • 29 Elegia - New Order
  • 30 Outro - Will Singing The Clash (Dialogue) - Stranger Things (Dialogue)

상세 이미지

상세 이미지 1

아티스트 소개 (17명)

노래 : Echo & The Bunnymen (에코 앤 더 버니멘)
워소우(Warsaw-폴란드 수도 바르샤바)를 이름으로 하여 출발한 영국출신 4인조 밴드 조이 디비전은 1977년 말 맨체스터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조이 디비젼 이란 밴드이름은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소설 ‘인형의 집’에 나오는 매춘 굴(기쁨조?)을 뜻하는 속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1979년 마틴 해넷(Martin Hannett)이 프로듀스한 공식적인 첫 앨범 < Unknown Pleasure >는 반복되는 ... 워소우(Warsaw-폴란드 수도 바르샤바)를 이름으로 하여 출발한 영국출신 4인조 밴드 조이 디비전은 1977년 말 맨체스터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조이 디비젼 이란 밴드이름은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소설 ‘인형의 집’에 나오는 매춘 굴(기쁨조?)을 뜻하는 속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1979년 마틴 해넷(Martin Hannett)이 프로듀스한 공식적인 첫 앨범 < Unknown Pleasure >는 반복되는 드럼머신, 둥둥거리는 베이스, 날카로운 기타, 그리고 묘하게 흐르는 신서사이저 소리로 시종일관 듣는 사람을 압박한다. 이로써 펑크를 신시사이저로 표현하는 새 음악시대가 개막되었다. 조이 디비전 이후 ‘포스트펑크’의 신시사이저 팝의 흐름이 정착되었다. 보컬 이언 커티스(Ian Curtis)는 낮게 읊조리는 듯하지만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목소리와 라이브공연장에서의 발작적이고 광적인 행동으로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게되고 급기야 공연장마다 밴드 멤버들과 똑같은 레인 코트를 입은 부대가 이들을 따라다니게 된다. 1980년 4월 역사적인 싱글 ‘Love will tear us apart''이 발표되었고 이어진 미국 순회공연을 앞두고 2주간의 휴식을 가지게된 상황에서 이언 커티스는 자신의 집에서 스스로 목을 멘 채 자살, 시체로 발견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사라진 그 해 여름에 조이 디비젼은 커티스의 죽음과 상업적인 성공을 맞바꾼다. 재발매된 ‘Love will tear us apart''이 차트 13위에 올랐고 바로 발매된 앨범 < Closer >도 6위로 치솟았다. 저주받은 걸작 < Unknown Pleasure >도 동시에 차트에 진입하며 마침내 진가를 인정받게 된다. 이 두 앨범은 포스트 펑크는 물론 영국 록 역사를 수놓은 명반으로 빠짐없이 거론된다. 스물 셋의 젊은 나이에 목숨을 끊어 ‘절망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이언 커티스, 기타리스트 버나드 서머(Benard Summer), 베이시스트 피터 훅(Peter Hook), 그리고 드러머인 스테판 모리스(Stephen Morris)로 구성된 조이 디비젼은 포스트펑크의 밴드이면서 동시에 고딕의 색채를 가진 밴드였다. 비주얼 측면이 아닌 냉소적이고 고통스런 느낌의 가사와 절망적인 멜로디로 고딕의 분위기를 발산한 것이다. 유작앨범이 되어버린 < Closer >에서 이언 커티스가 들려주는 무감각한 목소리에는 개인의 고립과 좌절이 투영되어있다. 1981년 1월 나머지 버나드 서머, 피터 훅, 스테판 모리스는 뉴 오더(New Order)라는 그룹을 결성해 조이 디비전의 음악을 계승 확대한다. 그리고 같은 해 조이 디비전의 미발표 곡과 라이브 곡을 담은 앨범 < Still >이 차트 5위에 올라 ‘못다 핀’ 이언 커티스를 진혼하면서 그룹이 역사에서 보상받는 길을 열어주었다.
‘MTV시대의 총아’로 1980년대 팝을 풍미했던 영국 그룹 듀란듀란은 닉 로즈(Nick Rhodes)와 존 테일러(John Taylor)를 주축으로 스테판 더피(Stephen Duffy), 사이먼 콜리(Simon Colley) 등 4명으로 1978년 영국 버밍햄에서 활동을 개시했다. 독특한 밴드명은 제인 폰다 주연의 1968년 SF 영화 < 바바렐라 >(Barbarella)에 등장하는 캐릭터 이름에서 따왔다. ... ‘MTV시대의 총아’로 1980년대 팝을 풍미했던 영국 그룹 듀란듀란은 닉 로즈(Nick Rhodes)와 존 테일러(John Taylor)를 주축으로 스테판 더피(Stephen Duffy), 사이먼 콜리(Simon Colley) 등 4명으로 1978년 영국 버밍햄에서 활동을 개시했다. 독특한 밴드명은 제인 폰다 주연의 1968년 SF 영화 < 바바렐라 >(Barbarella)에 등장하는 캐릭터 이름에서 따왔다. 시작은 순탄하지만은 않아 줄기차게 멤버탈퇴와 새로운 멤버의 영입이 반복되었다. 닉과 존은 영국의 유명한 음악지 멜로디메이커(MelodyMaker)의 광고로 멤버영입을 위한 오디션을 통해 로저 테일러(Roger Taylor), 앤디 테일러(Andy Taylor), 그리고 마지막으로 닉과 존이 한눈에 반한 사이먼 르본(Simon Lebon)을 가입시켰다. 이렇게 닉 로즈, 존 테일러, 사이먼 르본, 앤디 테일러, 로저 테일러 다섯 명의 공인된 라인업으로 듀란듀란은 1980년대를 헤쳐가게 된다. 1980년 에딘버러(Edinburgh) 페스티벌에서 커다란 주목을 받으며 이듬해인 1981년 EMI와 음반계약을 체결한 그들은 바로 첫 싱글 ‘Planet earth’를 내놓아 영국 차트(12위)에 진출했고 이어 데뷔앨범 < Duran Duran >을 발매한다. 당시 흐름을 뭉뚱그려 표현한 이른바 뉴 웨이브(New wave)의 신호탄이 된 이 앨범과 함께 그들은 비주얼 스타로서의 재능을 드러내게 된다. 그들은 뮤직비디오를 통해서, 음악은 물론 여성들을 사로잡은 탁월한 외모를 과시하며 MTV 개막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일례로 ‘Girls on film’ 뮤직비디오는 포르노 터치의 화면으로 여러 나라에서 방영금지를 당했지만, 그만큼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1982년 발표된 앨범 < Rio >는 미국 진출의 이정표가 된 앨범이었다. 이 앨범의 첫 싱글 ‘Hungry like the wolf’는 빌보드 차트 3위에 오르는 빅히트를 기록하면서 단숨에 그들을 팝 팬들의 친숙한 이름으로 부상시켰다. 그들 성공의 일등공신은 앞에서도 지적했듯 뮤직비디오 산업을 리드하며 음악매체의 중심으로 도약한 ‘뉴 미디어’ MTV였다. 멤버 닉 로즈는 “이 곡 이전에 미국의 라디오는 우리 노래를 틀지 않았다. 하지만 MTV에서 반응이 폭발하자 그때서야 라디오는 우리 음악을 선택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듬해인 1983년 그룹은 싱글 ‘Rio’가 14위, ‘Is there something I should know’ 4위(영국차트 1위), ‘Union of the snake’ 3위에 오르는 등 거푸 3곡의 히트싱글이 터뜨리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국내에서도 이때쯤 그들의 인기가 비등하기 시작했다. 이 해 11월에는 < Seven and the Ragged Tiger >앨범을 발표했고 여기서 ‘New moon on Monday’(10위)와 미국에서 1위의 첫 감격을 안겨준 ‘The reflex’로 차트를 석권, 영미를 포함한 세계 최고 인기밴드로 자리를 굳힌다. 다음해인 1984년에도 그들은 천장부지의 인기를 누려 라이브앨범 < Arena >로 ‘The wild boys’(2위)를 히트시켰다. 이 무렵 음악전문지 < 롤링스톤 >은 가장 시대를 앞서는 밴드로 듀란 듀란을 선정, 표지기사로 다루었으며 그래미상은 3년 늦게 발매된 < Duran Duran >에 베스트비디오 앨범부문을 포상해, 미국에서의 위상도 공인되었다. 1985년 5월, 007영화 주제곡이었던 ‘A view to a kill’은 다섯 원년멤버의 작품으로는 마지막 히트곡이 되었다. 이 해 그룹 멤버들의 과외활동이 빈번해져 존 테일러와 앤디 테일러는 로버트 파머(Robert Palmer)와 쉭(Chic)의 드러머였던 토니 톰슨(Tony Thompson)과 함께 파워 스테이션(Power Station)을 결성해 별도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이 그룹은 ‘Some like it hot(6위)’와 티렉스(T-Rex)의 곡을 커버한 ’Get it on’(9위), 그리고 ‘Communication’(34위)을 잇따라 차트에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이에 뒤질세라 사이먼 르본과 닉 로즈, 로저 테일러도 아카디아(Arcadia)를 만들어 ‘Election day’를 6위까지 올려놓아, 마치 그룹이 둘로 쪼개진 느낌마저 주었다. 결국 그룹의 결속력은 크게 약화되어 앤디 테일러와 로저 테일러가 그룹을 나가, 이후 듀란듀란은 3인조로 재편성되기에 이르렀다. 작아진 듀란듀란은 1986년 < Notorious >를 발매해 동명의 싱글 ‘Notorious’로 성공적으로 싱글차트를 공략하지만(차트 2위), 전성기의 파괴력에는 떨어진 감을 주었다. 이후 발표된 음반들 역시 모두 평단의 혹평과 대중의 피로감에 고전을 면치 못했고 1988년의 앨범 < Big Thing >에 수록된 ‘I don’t want your love’만이 차트 톱10(4위)에 들었을 뿐이었다. 1989년에는 서울 잠실에서 내한공연을 가져 국내 팬들의 성원을 받았으나 늦은 타이밍으로 아쉬움을 주었다. 이해 그들은 베스트음반 < Decade >를 출시, 활동정리의 느낌을 강하게 풍기며 듀란듀란 시대의 종언이 다가왔음을 알렸다. 음악 경향도 198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중심이 뉴 웨이브에서 팝 메탈로 이동해버려 그들의 퇴진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룹은 예상을 깨고 1993년 얼터너티브 록 파동 속에서 공백을 깨고 컴백, 우호적인 평가를 얻은 앨범 < Wedding Album >을 내놓았다. 이 음반은 뮤직비디오에 의한 비주얼 스타가 아닌 음악적인 면으로 평가를 받아 재기 이상의 의미를 안겨주었다. 지금까지도 라디오 전파를 타고있는 이 앨범의 수록곡 ‘Ordinary world’는 싱글차트 3위에 올랐으며 ‘Come undone(7위)’과 ‘Too much information(45위)’도 호응을 얻었다. 1995년에는 그랜드마스터플래시(Grandmaster Flash),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 루 리드(Lou Reed) 등 자신들이 좋아한다는 아티스트들의 곡들을 커버한 리메이크 앨범 < Thank You >를 발매했고 존 테일러가 팀을 탈퇴한 1997년엔 < Medazzaland >를 냈다. 그는 그룹탈퇴 후 솔로앨범 한 장과 펑크 성향의 그룹 뉴로틱 아웃사이더스(Neurotic Outsiders)에 참여해서도 앨범을 만들었다. 듀란듀란은 보이 조지의 컬처 클럽(Culture Club), 왬(Wham!)과 더불어 비틀스 이후의 ‘제2의 영국침공’(The Second British Invasion)을 일궈낸 주역이자 ‘80년대의 대표밴드’로 시대를 갈랐다. 비록 최고인기에 못지 않은 평단의 거센 비판에 시달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 뉴 웨이브 시대를 규정짓는 상징이라는 위치는 흔들리지 않는다. 1990년대에는 브릿팝과 테크노에 의해 영국 팝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복고 붐이 야기되어, 다시금 신세대의 관심을 부르기도 했다. 2002년에는 원년멤버였던 다섯 명이 재결성해 새 앨범을 발표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83년 후반, 두 백인 여성 가수의 데뷔곡이 2개월의 짧은 간격을 두고 빌보드 싱글 차트에 나란히 등장했다. 본의 아니게 시작부터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게 된 두 여가수의 경합은 1980년대 동안 가장 흥미롭고(본인들에게는 피 말리는 싸움이었겠지만) 긴장감 넘치는 팝의 핫 이슈였다. 두 여인은 1983년 10월에 데뷔 싱글을 차트에 등록시킨 이후 현재까지 20년이 달하도록 사그라지지 않는 창작력을 과시하는, 매... 1983년 후반, 두 백인 여성 가수의 데뷔곡이 2개월의 짧은 간격을 두고 빌보드 싱글 차트에 나란히 등장했다. 본의 아니게 시작부터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게 된 두 여가수의 경합은 1980년대 동안 가장 흥미롭고(본인들에게는 피 말리는 싸움이었겠지만) 긴장감 넘치는 팝의 핫 이슈였다. 두 여인은 1983년 10월에 데뷔 싱글을 차트에 등록시킨 이후 현재까지 20년이 달하도록 사그라지지 않는 창작력을 과시하는, 매브릭 음반사의 CEO 마돈나(Madonna)와 2개월 늦게 인기차트에 합류했지만 고지를 선점하고 나선 끝내 마돈나에게 밀려버린 ‘귀여운 악녀’ 신디 로퍼(Cyndi Lauper)다. 마돈나의 ‘Holiday’와 신디 로퍼의 ‘Girls just want to have fun’은 아직까지 그들을 정의하는 대표 곡으로 남아 있다. 선의의 경쟁이 시작된 지 20여 년이 흐른 현재, 레이스의 최후 승자는 알다시피 마돈나다. 그것도 판정승 아닌 분명한 KO승이다. 그러나 그들이 풋풋했던 데뷔 시절, 둘의 위치는 지금과 정반대였다. 애초 평단에서 마돈나는 ‘아니 벌써’의 반짝 스타로, 신디 로퍼는 ‘장수 만세’의 아티스트로 전망되었다. 평론가들이 신디 로퍼를 높이 산 이유는 페미니즘을 남근의 음악인 록과 포스트 펑크가 어우러진 ‘뉴 웨이브’로 설파했다는 점과, 마돈나처럼 섹시한 외모나 춤으로 판단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약간은 덜 섹시한 이미지를 고집하면서 음악으로 당당하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러한 독립적인 태도는 고등학교 중퇴, 소규모 클럽에서의 노래 시작, 자신이 결성한 밴드 블루 엔젤(Blue Angel)의 상업적인 실패와 파산, 그리고 남자 친구와의 불화 등 온갖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터득한 그녀의 인생관이 배양했다. 30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망가질(?) 수 있는 자신감은 바로 이 굴곡의 삶을 극복한 인간승리의 드라마에서 비롯된 떳떳함이 원천이다. 그녀의 성공을 가져온 많은 요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대적인 요구에 정확히 부응했다는 점이다. 소녀적 감성을 읊은 신디의 밝고 통통 튀는 가사는 그 시대 정서의 흐름을 타고 대중들을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로 괴롭히지 않았으며, 당대의 뉴 미디어인 MTV의 지원사격을 받은 것이었다. 10대 소녀들을 정신 없으면서도 쾌활하게 묘사한 뮤직비디오 덕분에 데뷔 싱글 ‘Girls just want to have fun’은 차트 2위라는 스매시 히트를 치면서 이 신인 여가수의 시대가 화려하게 개막했음을 알렸다. 이 곡이 수록된 솔로 데뷔 앨범 < She’s So Unusual >에서는 발라드인 ‘Time after time(1위)’과 ‘She bop(3위)’, ‘All through the night(5위)’, 그리고 ‘Money changes everything(27위)’를 포함해 5곡이 빌보드 싱글 차트를 유린하면서 그 무렵 완벽하게 재기에 성공한 티나 터너(Tina Turner)와 함께 1984년 팝 음악계를 가장 화려하게 수놓은 인물이 되었다. 그래미상도 펄펄 난 그녀를 응대해 신인상 트로피를 안겼다. 그 해 마돈나는 그래미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한 것을 비교하면 당시 마돈나와 신디 로퍼의 위상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다. 1985년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영화 < 구니스 >의 주제가 ‘The goonies ‘r’ good enough(10위)’로 기세를 유지했지만 이듬해 1986년 가을에는 두 번째 대결인, 이른바 ‘True 경쟁’을 통해 신디는 마침내 마돈나에게 추월을 당했다. 록, 팝, 펑크, 뉴웨이브, 펑크(funk), 레게 등 젊은층에 어필할 수 있는 색조의 음악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재구성해 큰 성공을 낚은 < She’s So Unusual >에 비해 두 번째 앨범 < True Colors >는 그녀 특유의 톡 쏘는 감각이 많이 희석된 대중적 팝으로 약간 빛깔을 달리했다. 앨범의 타이틀 트랙 ‘True colors’로 두 번째 차트정상의 영광을 안고, ‘Change of heart(3위)’와 ‘What’s going on?(12위)’, ‘Boy blue(71위)’가 연속으로 차트를 밟았지만 기존 팬들은 성인 취향의 팝으로 전향한 신보에 적지 않게 실망했고, 이 LP를 기점으로 그녀는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앨범 판매량도 전작 600만장에서 200만장(현재)으로 격감했다. 반면 경쟁자 마돈나의 < True Blue >는 700만장이나 팔려나갔다. 1989년에 공개된 세 번째 음반 < A Night To Remember >에서는 싱글 ‘I drove all night(6위)’와 ‘My first night without you(62위)’가 차트에 등장하긴 했지만 어느덧 음악적인 매력은 뚝 떨어져있었다. 반면 마돈나는 역작 < Like A Prayer >를 발표해 음악적인 면과 대중적인 면 모두를 포유(包有)하면서 5년간의 라이벌 대결은 마돈나의 완승으로 결판이 났다.(신디 로퍼는 그러나 새 앨범의 홍보 차원으로 내한공연을 가져 국내 팬들에게 시원스런 무대를 선사했고 공연실황이 TV로도 방송되어 열기를 현장에서 맛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달래주었다). 1993년과 1998년에는 < A Hat Full Of Stars >와 < Sisters Of Avalon >을 발표해 재기를 노렸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1994년에는 < 12 Deadly Cyns And Then Some >이라는 제목의 베스트 음반을 공개해 ‘Girls just want to have fun’을 리믹스한 ‘Hey now(87위)’로 마지막 희미한 불꽃을 태웠다. 이 곡은 또한 1970년대 팝 그룹 레드본(Redbone)의 히트곡 ‘Come and get your love(댄스 팝 그룹 리얼 맥코이가 커버해 1995년 19위)’를 샘플링했으며 1995년 웨슬리 스나입스(Wesley Snipes)와 패트릭 스웨이즈(Patrick Swayze)가 주연한 영화 < 투 웡 푸 >(To Wong Foo)에 삽입되었다. 흑인 싱어송라이터 루더 밴드로스(Luther Vandross)는 신디 로퍼의 노래 실력을 두고 “팝의 디바 휘트니 휴스턴에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데뷔 싱글 ‘Girls just want to have fun’과 1960년대 틴 아이돌 팝 가수 진 피트니(Gene Pitney)의 오리지널을 재해석한 ‘I’m gonna be strong’, 그리고 ‘My first night without you’, ‘True colors’ 등은 그녀의 뛰어난 곡 소화력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데뷔 초기의 우스꽝스러운 외모와 펑크적인 스타일에 의해 굳어진 ‘왈패’ 이미지로 인해 그녀의 음악적 진가는 과소평가 받기 일쑤였으며, 성인 취향의 팝 록으로 변신하자 많은 팬들은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던 것이다. 이제는 많이 잊혀졌지만 신디 로퍼의 이미지는 여전히 많은 팬들의 뇌리에 박혀있다. 깜직한 소녀(계집애?) 목소리, 중고품 할인가게 풍의 패션, 레슬링을 즐기는 여성 그리고 MTV 시대. 하지만 무엇보다 팬들은 그녀를 통해 그 시절에 ‘여자들은 단지 재미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의미에서 신디 로퍼야말로 ‘1980년대 팝의 바로미터’라고 할 것이다. 그 시대를 그녀만큼 ‘비범하게’ 산 사람도 없다.
5장의 스튜디오 음반을 내놓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폴리스는 펑크와 기업화된 록 사이에서 ‘제 3의 길’을 표방하며 뉴웨이브 시기를 관통했던 위대한 그룹이다. 우리에게는 후에 솔로로서 더욱 명성을 얻게 되는 천재 아티스트 스팅이 잠시 몸담았던 그룹 정도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그들의 음악은 결코 평가절하 할 수준이 아니었다. 급진적이지는 않았으나 폴리스의 음악은 항상 실험적이었다. 그들은 틀에 박히고, 정체화 된 산업... 5장의 스튜디오 음반을 내놓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폴리스는 펑크와 기업화된 록 사이에서 ‘제 3의 길’을 표방하며 뉴웨이브 시기를 관통했던 위대한 그룹이다. 우리에게는 후에 솔로로서 더욱 명성을 얻게 되는 천재 아티스트 스팅이 잠시 몸담았던 그룹 정도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그들의 음악은 결코 평가절하 할 수준이 아니었다. 급진적이지는 않았으나 폴리스의 음악은 항상 실험적이었다. 그들은 틀에 박히고, 정체화 된 산업으로서의 록음악을 추구하지 않았지만, 쓰리 코드로 밀어붙이는 펑크 음악의 단순성 또한 거부했다. 그들은 펑크의 정공법에 레게와 재즈, 팝을 혼합해 한층 세련되고 맛깔스러운 완성품을 주조해냈다. 그들의 첫 빌보드 톱 40 히트곡이자 폴리스를 코스모폴리탄으로 격상케 한 기념비 ‘Roxanne’은 이런 독특한 음악성이 나타난 좋은 예시이다. 폴리스는 펑크가 영국을 지배하던 1977년 전직 교사라는 이채로운 이력을 지닌 스팅(Gordon Sumner)과 ‘Midnight wire’로 잘 알려진 아트 록 그룹 커브드 에어(Curved Air)에서 연주했던 스튜어트 코프랜드(Stewart Copeland)가 도킹하면서 그 시작을 알렸다. 얼마 후 기타리스트 헨리 파도바니(Padovami)가 가세해 전열을 정비한 이들은 런던 일대의 클럽에서 공연을 하며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구상한다. 밑바닥부터 출발하기로 결심한 그들은 결국 인디 레이블 < I.R.S. >에서 데뷔 싱글 ‘Fall out’을 공개하며 점진적인 도약을 준비한다. 도중에 탈퇴한 파도바니의 후임으로 에릭 버든(Eric Burdon)의 밴드 애니멀스(The Animals)출신의 앤디 서머스(Andy Summers)가 들어온 것은 행운이었다. 그의 예리하면서도 캐치(catchy)한 기타는 그들이 앞으로 추구하게 될 방향성과 꼭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를 영입하면서 팀워크가 한 단계 레벨 업 된 그룹은 곧 < A&M >과의 계약하며 장미 빛 미래를 향한 토대를 확보한다. 그들은 미국 본토를 공략하기 위해 토킹 헤즈(Talking Heads), 텔레비전(Television)등을 배출한 펑크 록의 메카 CBGB로 건너가 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물론 앨범 작업을 병행하면서였다. 그들에게 미국 시장 개척을 위한 교두보를 놓아준 ‘Roxanne’이 수록된 1집 < Outlandos D’Amour >은 대서양의 양편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영국 6위, 미국 23위). 기회를 포착한 그룹은 곧바로 후속작 제작에 몰두했고, 1년 후인 1979년 2집인 < Regatta De Blanc >에서 ‘Message in the bottle’을 인기곡으로 올려놓으며 영광의 순간을 접했다. 하지만 그 당시 본격적인 성공의 씨앗은 아직 배양 단계에 있었다. 폴리스의 골든 이어스는 < Zenyatta Mondatta >가 발표된 1980년부터 그들 최고의 걸작이자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인 < Synchronicity >가 나온 1983년까지에 해당한다. < Zenyatta Mondatta >에서는 ‘De do do do, de da da da’, ‘Don’t stand close to me’(모두 10위)라는 두 곡의 미국 톱 텐 싱글이 배출되었고, 네 번째 작품인 < Ghost In The Machine >에선 최고의 레퍼토리 중 하나인 ‘Every little thing she does is magic’(미국 3위)가 터져 나왔다. 이후 여러 뮤지션의 레코딩에 참여하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팀원들은 1983년 불멸의 마스터피스 < Synchronicity >로 단숨에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등극한다. 보다 팝적인 느낌이 강해진 이 음반에서는 빌보드 정상을 호령한 ‘Every breath you take’(후에 퍼프 대디가 ‘I’ll be missing you’에서 샘플링해 다시 한번 비상한 그 곡), ‘King of pain’(미국 3위)등이 연달아 히트 퍼레이드를 펼쳤다. 폴리스의 이름은 곧 뉴웨이브였다. 그들의 미국 시장 개척은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준 셈이였다. 이때부터 듀란 듀란(Duran Duran), 컬쳐 클럽(Culture club), 왬(Wham)등 영국 뉴웨이브 그룹들의 미국 진출 러시가 이어졌고 그들은 모두 1980년대 중반을 강타하며 시장을 주름잡았다.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 이후 가장 강력했던 영국의 침공(British Invasion)이었다. 파죽지세로 승천하던 그룹은 그러나 멤버들 사이의 갈등으로 1985년 그룹을 접었다. 잘 알려진 것과 같이 그 후 스팅은 독립해 그룹 때보다 더 찬란한 커리어를 쌓아갔으며, 앤디와 스튜어트는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각각 아트 록과 월드뮤직에 투신했다. 폴리스는 흐름을 잘 파악한 팀이었다. 펑크가 그 생명력을 다하려 하는 혼돈과 방황의 시기에 그들은 해답을 찾아냈다. ‘기회주의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지만, 오히려 그것을 남들보다 한 수 앞선 혜안을 지니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선지자였다.
노래 : Peter Gabriel (피터 가브리엘)
하나의 전형은 유행을 낳고, 하나의 명작은 아류를 낳는다. 어떤 뮤지션은 새롭고 독창적인 음악을 창조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남이 만든 형식에 자신의 능력을 맞춰나간다. 그러나 영국 출신의 싱어 송라이터 피터 가브리엘(Peter Gabriel)은 다른 아티스트가 닦아 놓은 길을 거부했다. 스스로 선택한 고행의 길을 통해 음악의 프리즘을 다각화시켰고 대중 음악의 개념을 넓혔다. 아트록, 팝록, 컬리지록 등을 두... 하나의 전형은 유행을 낳고, 하나의 명작은 아류를 낳는다. 어떤 뮤지션은 새롭고 독창적인 음악을 창조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남이 만든 형식에 자신의 능력을 맞춰나간다. 그러나 영국 출신의 싱어 송라이터 피터 가브리엘(Peter Gabriel)은 다른 아티스트가 닦아 놓은 길을 거부했다. 스스로 선택한 고행의 길을 통해 음악의 프리즘을 다각화시켰고 대중 음악의 개념을 넓혔다. 아트록, 팝록, 컬리지록 등을 두루 섭렵하면서 자신의 음악 제국을 건설한 그는 또한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민속 음악을 월드 뮤직(다분히 서양인 중심적인 시각이지만)이란 이름으로 알린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상업적이고 틀에 박힌 유행음악에 싫증을 느낀 팬들은 피터 가브리엘의 노래들을 통해 음악적인 갈증을 풀었고 지적인 배고픔을 채웠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피터 가브리엘은 명 프로그레시브 그룹 제네시스(Genesis)를 이끌면서 음악적인 이상을 찾았고, 1977년부터 시작된 솔로 활동은 그 유토피아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실천의 시간이었다. 그가 몸담고 있던 제네시스는 1970년을 전후한 기간 동안 클래식을 근간으로 한 복잡한 곡 구조와 난해한 가사, 그리고 시각적인 충격 요법을 가미한 공연으로 가장 초현실적인 아트록 밴드로 팬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고 그 선두엔 바로 피터 가브리엘이 있었다. 그러나 1976년에 친정인 제네시스를 출가한 이 영국 아티스트는 이전처럼 일반 대중들이 쉽게 수용하기 어려운 음악에서 좀 더 대중적인 음악으로 방향타를 틀었다. 그 대표적인 곡이 1986년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한 ’Sledgehammer’이지만 그러한 세속적인(?) 성공이 그의 음악 철학을 송두리째 뒤흔든 것은 아니었다. 친숙한 멜로디의 강점을 살리면서도 자신만의 고집스런 눈으로 응시한 날카로운 가사와 긴장감을 풀지 않는 도전적인 실험 정신으로 수많은 뮤지션들은 그를 대중 음악의 스승이자 정신적인 지주로 추앙하고 있다. 1977년, 포크 스타일의 기타 연주로 포문을 여는 데뷔 싱글 ’Solsbury hill(68위)’이 수록된 처녀작 < Peter Gabriel >부터 1980년의 세 번째 음반까지 모두 자신의 이름을 앨범 타이틀로 정한 그는 이전 제네시스 시절과는 달리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투사로 거듭났다. 특히 < Peter Gabriel Ⅲ >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반인륜적인 인종차별 정책에 저항한 인권운동가 스티븐 비코에게 헌정한 명곡 ’Biko’와 케이트 부시(Kate Bush)의 얼음처럼 차갑고 오싹한 백보컬이 전율적인 ’Games without frontiers(48위)’가 자리하고 있어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1994년에 열린 우드스탁 페스티발 25주년 기념 공연에서 피터는 관중들과 함께 ’Biko’를 열창해 쉽게 잊혀지지 않는 감동과 환희의 무대를 연출하기도 했다. 제네시스 시절부터 짙은 화장과 화려한 공연으로 시각적인 면에서도 앞서갔던 가브리엘은 1981년 MTV가 개국하면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1982년의 4집 < Security >에 수록된 ’Shock the monkey(29위)’의 긴박한 멜로디를 그로데스크한 분위기와 공포스런 화면으로 풀어낸 뮤직비디오는 MTV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작품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으며 스탑 모션으로 제작된 1986년도 싱글 ’Sledgehammer’도 여러 상을 수상하면서 뮤직비디오 역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렇듯 영상에도 깊은 조예를 나타낸 그는 1984년 알란 파커 감독의 영화 < 버디 >와 1988년 마틴 스콜세지의 < 예수의 마지막 유혹 >의 사운드트랙을 전담함으로써 자신의 활동 반경을 확장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수상한 4개의 그래미 트로피 중에서 3개가 뮤직비디오 부문일 정도로 ’보는 것’에 대한 그의 집념과 의지는 대단하다. 또한 그는 대중음악의 새로운 대안을 제3세계의 민속음악에서 찾기 시작했다. 피터 가브리엘은 WOMAD(World of Music, Arts and Dance) 재단을 만들어 1980년대 폴 사이먼(Paul Simon), 토킹 헤즈(Talking Heads)의 리더 데이비드 번(David Byrne)과 함께 아프리카와 남미, 그리고 아시아의 전통음악을 서방인들에게 널리 알렸다. 자신의 곡인 ’Biko’의 도입부에서 들을 수 있는 아프리카 합창단의 음원과 < So > 앨범에 수록된 세네갈 출신의 남성 가수 유쑨 두루(Youssou N’Dour)를 백보컬리스트로 모셔온 ’In your eyes’ 등은 타지역의 민속음악에 대한 그의 각별한 애정을 의미하는 대표곡이다. 1986년에 발표된 통산 다섯 번째 정규 음반 < So >는 피터 가브리엘을 상업적으로 성공한 남성 가수로 등극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첫 싱글 ’Sledgehammer’가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의 고지를 점령했고 ’In your eyes(26위)’와 ’Big time(8위)’, 케이트 부시와 호흡을 맞춘 발라드 ’Don’t give up(72위)’이 무더기로 차트를 누비면서 일반 팝 팬들과의 거리감을 대폭 줄였다. < So >는 앨범 차트 2위까지 상승했고 그래미에도 여러 부문에 후보로 노미네이트 되면서 대중성과 음악성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특히 ’In your eyes’는 1989년에 카메론 크로우(Cameron Crowe)의 영화 < 세이 애니씽 >에 삽입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겨 다시 싱글 차트에 입적되기도 했다(41위). 1989년, 영화 < 예수의 마지막 유혹 >의 사운드트랙 < Passion >으로 그래미 뉴에이지 부문을 수상한 그는 1992년에 < Us >를 발표했다. 피터 가브리엘과 핑크 빛 염문을 뿌렸던 아일랜드의 자존심 시네이드 오코너(Sinead O’Connor)와 입을 맞춘 ’Come talk to me’를 위시해 그루브한 싱글 ’Steam(32위)’, ’Digging in the dirt(52위)’를 배출한 이 작품은 그러나 전작의 영광을 이어가지는 못했다. 이후 ’Secret Live’로 명명된 전 대규모 세계 순회 공연의 열광과 희열을 담은 음반과 비디오를 1994년에 발표해 다시 한번 그래미상을 거머쥔 피터 가브리엘은 현재 음악과 영상, 그리고 컴퓨터 산업을 아우르는 멀티미디어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다시 한번 세계에 가할 충격을 준비하고 있다.
노래 : Olivia Newton John (올리비아 뉴튼 존)
5곡의 넘버원 싱글과 22곡의 탑 40 히트곡을 배출한 팝의 여왕 올리비아 뉴튼 존(Olivia Newton-John)은 ‘팝계의 신데렐라’ 혹은 ‘팝계의 꾀꼬리’라는 애교스런 별명으로 1970년대와 1980년대를 통치했다. 국내에서는 디스코와 팝록으로 전향한 1970년대 후반 이후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그녀의 첫사랑은 컨트리 음악이었다. 우리 한국인들에게 이 미녀 가수의 초기 히트곡들인 ‘If not for... 5곡의 넘버원 싱글과 22곡의 탑 40 히트곡을 배출한 팝의 여왕 올리비아 뉴튼 존(Olivia Newton-John)은 ‘팝계의 신데렐라’ 혹은 ‘팝계의 꾀꼬리’라는 애교스런 별명으로 1970년대와 1980년대를 통치했다. 국내에서는 디스코와 팝록으로 전향한 1970년대 후반 이후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그녀의 첫사랑은 컨트리 음악이었다. 우리 한국인들에게 이 미녀 가수의 초기 히트곡들인 ‘If not for you’나 ‘Let me be there’, ‘If you love me(Let me know)’ 등은 ‘Physical’, ‘Xanadu’, ‘Summer nights’, ‘Magic’보다 조금은 더 생경하게 다가온다.

1948년 9월 26일, 영국의 캠브리지에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독일계 할아버지인 막스 본(Max Born)과 대학 학장인 아버지를 둔 ‘영국판 사대부’ 집안의 딸로 태어나 곱게 자란 올리비아 뉴튼 존은 기숙사처럼 딱딱한 가풍(家風)과 부모님의 이혼으로 받은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음악에 몰입했다. 20대 초반에 클리프 리차드(Cliff Richard)의 백보컬리스트로 합류하면서 가닥을 잡아가던 금발의 뉴튼 존은 1971년에 밥 딜런(Bob Dylan)의 원곡 ‘If not for you’로 데뷔하면서 팝 역사의 표면 위로 떠올랐다.

1970년대 초반 그녀는 미국인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컨트리 음악으로 그래미는 물론 주요 컨트리 음악 상을 수상하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정통 컨트리 신봉자들은 그녀를 인정하지 않았다. 우선 이 미녀 가수가 미국인이 아니라 호주에서 성장한 영국인이었고, 둘째는 컨트리의 트레이드마크인 소위 ‘꺾기 창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깔끔하게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한 잔의 맑은 정화수나 청명한 봄바람 그 자체다. 이 컨트리 창법 상의 약점(혹은 장점) 때문에 1970년대 후반 올리비아 뉴튼 존이 디스코나 팝 록으로의 방향 전환이 어렵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올리비아 뉴튼 존의 명성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데뷔 초기 그녀가 취입한 곡들은 다른 아티스트들의 노래들을 커버한 것이 많았다. 브레드(Bread)의 ‘If’, ‘Everything I own’, 존 덴버(John Denver)의 ‘Take me home country road’,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의 ‘What is life’, 홀리스(Hollies)의 ‘The air that I breathe’,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등, 그녀가 그래미 최우수 컨트리 여자 가수상을 수상한 ‘Let me be there(6위)’를 제외하면 초기 3장의 음반은 거의 컴필레이션의 성격이 짙은 앨범으로 구성되었다. 그것은 기존에 많이 알려진 곡들로 신인 가수들의 입지를 빠르게 다지면서 대중들에게 쉽게 어필하기 위한 스타 메이킹 공식이었다. 소포모어 징크스(첫 작품에서 성공한 후 내놓은 두 번째 작품이 흥행이나 완성도에서 첫 작품에 비해 부진한 상황)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녀를 스쳐갔다.

경쾌한 컨트리 곡 ‘If you love me(Let me know-5위)’, 포크 풍의 발라드 ‘Please Mr. Please(3위)’, 그리고 빌보드 싱글 차트 탑을 장식한 ‘I honestly love you’와 ‘Have you never been mellow’로 눈이 큰 올리비아의 인기에 가속도를 붙였다. ‘I honestly love you’로 그래미 최우수 여성 팝보컬과 올해의 레코드를 수상한 금발의 싱어는 1976년엔 프레드 로스(Fred Rose)의 컨트리 고전 ‘Blue eyes crying in the rain’을 재해석했다. 이 곡은 1990년대 초반 국내의 땅콩 CF에서 조영남이 불러 뒤늦게 알려졌다. 1975년도 싱글 ‘Please Mr. Please’가 3위에 오른 이후 인기 전선이 소강상태를 보이자 그녀는 ‘컨트리 소녀’에서 ‘섹시 걸’로 과감한 이미지 변신을 감행했다. 청바지 대신 검정색 가죽 바지를 입은 올리비아 뉴튼 존은 머리 기름을 한껏 바른 존 트라볼타와 1978년도 뮤지컬 영화 < 그리스 >의 주인공을 맡은 것이다. 옷만 바뀐게 아니었다. 음악도 바뀌었다. 컨트리와 포크의 카테고리에서 벗어나 디스코와 팝록, 소프트 팝 등 다양한 음악 형식을 소화했다. 성공적인 변신이었다.

그녀의 인기는 마른 장작에 붙은 불처럼 다시 활활 타올랐다. 영화 성적도 좋았고 사운드트랙도 플래티넘의 고지에 올라섰다. 프랭키 밸리(Frankie Valli)의 ‘Grease’와 뉴튼 존과 트라볼타가 함께 부른 ‘You’re the one that I want’가 차트 1위를 차지했고 컨트리 풍의 ‘Hopelessly devoted to you’와 ‘Summer nights’도 각각 3위와 5위를 기록하면서 1980년대 꽃을 피우는 컴필레이션 형(形) 사운드트랙의 물꼬를 텄다. ‘Summer nights’는 정우성과 고소영이 등장하는 국내 청바지 광고의 배경 음악으로 깔리면서 1990년대 후반에 사랑 받았다. 다시 맞이한 전성기로 한껏 고무된 금발의 여가수는 안정적인 길을 택했다. 1978년도 솔로 음반 < Totally Hot >은 성인 취향의 팝록과 디스코 사운드에 의지했다. 1980년에는 < 그리스 > 형식을 답습한 공상 과학 뮤지컬 영화 < 제너두 >에 출연해 ELO와 함께 뉴웨이브 스타일의 사운드트랙을 담당했다. 타이틀 트랙 ‘Xanadu(8위)’와 ‘Magic(1위)’, 클리프 리차드와 호흡을 맞춘 발라드 ‘Suddenly(20위)’의 히트로 앨범은 성공했지만 영화는 혹평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뉴튼 존은 이 영화에서 만난 11살 연하의 배우 매트 라탄지(Matt Lattanzi)와 1984년에 결혼해 개인적으로는 큰 수확(?)을 거두었다.

1981년 연말, 제목만큼이나 육감적인 뮤직비디오를 앞세운 ‘Physical’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곡은 데비 분(Debbie Boone)의 ‘You light up my life’와 함께 빌보드 싱글 차트 10주간 1위 고수라는 당시로서는 기네스 적인 기록을 새운 대형 히트 곡이었다. 이 노래 때문에 포리너(Foreigner)의 ‘Waiting for a girl like you’는 10주 동안 2위에 머물러야 했었고, 개국한지 1년도 안 된 MTV는 이 선정적인 뮤직비디오로 광고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헬스와 에어로빅 장면을 코믹하게 다룬 이 뮤직비디오로 1980년대 초반 에어로빅 비디오 제작이 봇물을 이루어 제인 폰다 같은 여배우들이 그 덕을 봤지만 그 이면에는 뮤비의 음란성에 대한 사회적인 파장도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그래미 위원들은 ‘Physical’에게 최우수 비디오 트로피를 건네면서 더 이상의 잡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도 올리비아 뉴튼 존의 수혜자가 존재했다. 현재 팝송 개그로 사랑 받고 있는 박성호의 원조인 박세민은 ‘냉장고를 녹이는 뜨거운 남자’라는 모토를 내세워 1980년대에 ‘Physical’의 가사 ‘let me hear you body talk’를 ‘냄비 위에 밥이 타’로, ‘If not for you’를 ‘기분 나뻐유’처럼 들리는 대로 번역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개그를 선보여 가공할 인기를 누렸다(직접 확인해 보시라!).

그 시기에 국내의 팝 마니아들은 미국 차트와는 별개로 ‘Silvery rain’을 선호했다. ‘Make a move on me(5위)’, ‘Heart attack(3위)’, ‘Tied up(38위)’으로 인기의 끈을 이어간 뉴튼 존은 1983년에도 존 트라볼타와 다시 한번 < 투 오브 어 카인드 >라는 로맨틱 코메디 영화에 출연했지만 이 작품도 실패작이라는 멍에를 벗어나지 못했다.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Twist of fate(5위)’와 ‘Livin’ in desperate times(31위)’만이 인기곡 대열에 합류했다. 1986년에는 유명한 작곡가 겸 제작자인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와 함께 부른 ‘Best of me(80위)’가 국내에서 유독 사랑을 받았다. 타이틀 트랙 ‘Soul kiss’가 20위에 랭크된 1985년도 LP < Soul Kiss >를 마지막으로 그녀의 성공 스토리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1989년부터는 UN에서 추진하는 환경 운동의 민간대사를 맡아 부메랑처럼 데뷔 시절의 풋풋한 이미지로 돌아간 그녀는 1990년대에 유방암을 극복하면서 인간 승리의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 몇 편의 영화에 실패한 올리비아 뉴튼 존이 드디어 ‘인생’이라는 영화를 통해 진정한 헤로인이 된 것이다.

이후 1990년대까지 꾸준한 앨범을 발표했지만 현재는 환경 운동가나 사회 사업에 좀 더 집중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00년 8월, 시드니 올림픽 성화 주자로 참여하기 직전 내한 공연을 가져 우리에게 신선한 감동을 안겨준 올리비아 뉴튼 존의 당시 나이는 52세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노송(老松)의 나이테만큼 많은 주름살이 그녀의 얼굴을 책임질 것이다. 그러나 올리비아 뉴튼 존의 노래를 듣고 있는 한 그녀는 앞으로도 ‘영원한 소녀’로 우리의 마음 속에 기억될 것이다.
1980년대 팝과 여성 록을 얘기하면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그룹이 있다면 뱅글스일 것이다. 멤버 전원이 노래와 연주를 하며 버즈나 비틀스 같은 밴드를 목표로 1981년 1월 LA에서 결성된 뱅글스는 보컬과 기타를 담당했던 수잔나 홉스(Susanna Hoffs)를 리더로, 데비와 비키 피터슨 자매(Debbi Peterson, Vicki Peterson) 그리고 여성그룹 런어웨이스(Runaways) 출신의 베이시스... 1980년대 팝과 여성 록을 얘기하면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그룹이 있다면 뱅글스일 것이다. 멤버 전원이 노래와 연주를 하며 버즈나 비틀스 같은 밴드를 목표로 1981년 1월 LA에서 결성된 뱅글스는 보컬과 기타를 담당했던 수잔나 홉스(Susanna Hoffs)를 리더로, 데비와 비키 피터슨 자매(Debbi Peterson, Vicki Peterson) 그리고 여성그룹 런어웨이스(Runaways) 출신의 베이시스트 마이클 스틸(Michael Steele) 등 ‘전원여성’의 라인업으로 출발했다. 애초 뱅스(Bangs)라는 이름에서 뱅글스로 개명한 뒤 오랜 연습기간을 거쳐 1984년 메이저 데뷔작 < All Over The Place >로 팝 음악계에 첫발을 내딛는다. 마마스 앤 파파스(Mamas And Papas) 같은 분위기의 ‘Going down to Liverpool'' ‘Hero takes a fall'' 등이 수록된 이 앨범은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존재를 알리는 작은 성공을 거둔다. 이제는 기념비작이 된 1986년의 < Different Light > 앨범으로 그들의 운명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여기서 첫 싱글이자 프린스(Prince)가 작곡해준 ‘Manic monday''는 차트 2위로 솟아올랐다. 이 곡의 히트되면서 세계의 라디오는 이후로 월요일에 종전의 단골인 마마스 앤 파파스의 ‘Monday Monday''를 버리고 대신 뱅글스의 곡을 틀어댔다. 다음 싱글 ‘If she knew what she wants''(29위)는 좀 부진했지만 세 번째 싱글 ‘Walk like an Egyptian''는 대망의 넘버원을 기록했다. 4주간 정상을 지키며 골드를 기록하는 대박이었다. 이어 네 번째 싱글 ‘Walking down your street''(11위)도 호응을 얻었고 이러한 연속히트로 앨범은 여성 록밴드로서는 드물게 300만장 이상의 앨범판매고를 수립했다. 최고의 여성 팝 록밴드의 진가는 공연에서도 나타나 그들의 최고무기인 화음과 물오른 연주력으로 남성밴드에 못지 않은 실력을 과시하며 가는 곳마다 관객을 몰고 다녔다. 그들의 무대는 여성밴드와 미모의 덕을 본 것만은 아니었음을 관객들에게 충분히 납득시키는 성질의 것이었다(수잔나 홉스는 이 무렵 영화 < 올나이터 >에 출연한다). 또한 1988년에는 사이먼 앤 가펑클(Simon&Garfunkel)의 ‘Hazy shade of winter''를 커버한 곡이 앤드류 매카시 주연의 영화 < Less Than Zero >에 삽입되어 차트 2위를 기록, 인기 절정상태를 알렸다. 뱅글스는 고공비행 속에서도 1988년 3집을 내놓아 차트 5위에 오른 ‘In your room’으로 신보 신고식을 치렀고 마돈나의 ''Like a virgin''과 신디 로퍼의 ‘True Colors''로 알려진 빌리 스타인버그와 톰 켈리 콤비 그리고 수잔나 홉스가 함께 만든 발라드 ‘Eternal flame''이 다시 빌보드 정상을 밟으며 영원할 것 같은 인기를 구가한다. 하지만 싱글 ‘Be with you''(30위)를 끝으로 수잔나 홉스의 솔로 활동에 대한 의지와 급속한 결속력 후퇴로 그룹은 1989년 해체를 선언하고 만다. 1980년대 남성밴드의 독점시대 속에서도 탁월한 보컬실력과 완벽하고 아름다운 하모니의 조화로 고고스(Go-Go''s)에 이은 ‘여성 록밴드’의 성공사례를 남긴 것은 두고두고 역사의 평가를 받는다. 이후 수잔나 홉스는 솔로로 전향하여 2장의 음반을 내놓았고 나머지 멤버들도 각자 밴드를 조직하여 지금도 활동을 계속하고있다.
일본의 겐쇼 오누키라는 록 음악 해설가는 이 그룹을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런던은 불타고 있다. 60년대 록의 꿈이 타버린 죽음의 거리 런던에 갑자기 불꽃처럼 나타난 펑크록이야말로 옛시대의 레퀴엠이고 도래할 신세계의 찬가이다. 클래시는 이 성전을 위해 태어난 도시 게릴라이다. 그들은 불을 토하지 않는다. 다만 독을 토해낼 뿐이다.” 묘사가 너무 거창해서 조금은 무서운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그룹 이미지를 ‘독’... 일본의 겐쇼 오누키라는 록 음악 해설가는 이 그룹을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런던은 불타고 있다. 60년대 록의 꿈이 타버린 죽음의 거리 런던에 갑자기 불꽃처럼 나타난 펑크록이야말로 옛시대의 레퀴엠이고 도래할 신세계의 찬가이다. 클래시는 이 성전을 위해 태어난 도시 게릴라이다. 그들은 불을 토하지 않는다. 다만 독을 토해낼 뿐이다.” 묘사가 너무 거창해서 조금은 무서운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그룹 이미지를 ‘독’으로 연결지은 부분이 너무 그럴싸해서 일본인의 표현이라는 막연한 거부감을 덮어두고 인용해 보았다. 사실 그들의 음악을 접해볼 기회가 있었던 사람이라면 그들이 독을 뿜어댔다는 오누키 씨의 의견에 동감을 표시할 것이다. 조 스트러머(보칼), 믹 존스(기타), 니키 히든(드럼), 폴 시모넌(베이스)의 4인조 영국 그룹 클래시(Clash). 이들의 가슴에 독이 고이게 된 배경은 70년대 중반 경기 침체, 높은 실업률, 빈부의 갈등, 사회적 혼란 등 당시 영국의 상황에 기인한다. 영국의 청년들은 그 무렵 직장이 없어 생계 자체를 위협받는 절대적 박탈감에 직면하고 있었고, 국가 기강의 흔들림에 따른 경찰과 갱단 등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따라서 클래시의 독은 섹스 피스톨즈의 독과 같았다. 클래시도 피스톨즈처럼 런던 젊은이들의 분노와 한을, 심층에 내재하는 혼돈된 에너지를 격렬한 펑크 사운드로 전환시켜 놓은 그룹이었다. 탄생 배경만 피스톨즈와 같은 연장선상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클래시의 출발 자체가 피스톨즈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리더인 조 스트러머가 런던에서 섹스 피스톨즈의 공연을 구경하고 그만 ‘감동되어’ 펑크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고 그때까지 몸담고 있던 그룹(퍼브록 밴드 101`ers)을 탈퇴하여 믹 존스와 함께 클래시를 결성했다. 그리고 76년 12월에는 그 악명높았던 피스톨즈의 ‘대영제국의 무정부 상태’ 순회공연에 오프닝으로 참가, 펑크 물결 확산에 나섰다. 이처럼 피스톨즈의 덕을 보고, 조금 늦게 출발했지만 클래시는 피스톨즈보다 양질의 펑크 음악을 선보여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영국내에서만 삐까뻔쩍했던 피스톨즈와 달리 세계 무대 진출에 성공, 그 존재가 더 널리 알려졌다. 또한 2년 만에 파산한 피스톨즈보다 훨씬 수명이 길었다. 우선 그들이 토해낸 독을 들어보라. ‘흑인들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벽돌을 던지는 데 주저하지 않지. 백인들은 학교에서 둔해지도록 교육되어 모두 하라는 것만 하지. 아무도 감옥에 가길 원하지 않아. 모든 권력은 부자들 손에 있고 우린 너무 겁쟁이들이라 시도조차 못해보고 거리를 배회하는 거야. 백색의 폭동이 있어야 해. 나같은 백인의 폭동이! 지배할 것인가 아니면 지배당할 것인가. 퇴각할 것인가, 전진할 것인가.’ ‘백색 폭동(White Riot)’ 피스톨즈에 대한 클래시의 상대적 우수성은 이 곡 하나로 증명된다. ‘피스톨즈=대영제국의 무정부 상태’라면 ‘클래시=백색 폭동’이라고 할만큼 이 노래는 크래시의 성격을 대변한다. 록 뮤직 관계자들은 흔히 클래시를 “피스톨즈의 한계였던 허무주의의 굴레를 벗고 현실과 밀착하여 투쟁으로까지 치달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들의 노래에서 피스톨즈적인 니힐리즘은 보이지 않는다. 그 단계를 훌쩍 뛰어넘어 현실에서 목격되고 있는 구체적 문제점들 - 이를테면 경찰의 잔학상, 형평을 잃은 법 집행, 정부의 인권 유린, 미국의 유럽 지배, 실업 등 -을 과감히 지적하고 그것들에 대한 시정을 강력히 요구했다. 따라서 크래시의 노래들에는 저항적 선동적 투쟁적인 분위기가 강하게 드러났다. ‘난 미국이 너무너무 지긋지긋해. 양키 달러는 세계의 독재들에게 말하지. 아니 사실은 명령하는 거야. 이제 독재자들은 말 한마디 잘못할 수 없지. TV에는 항상 양키 형사들이 나오지. 미국에는 킬러들이 일주일에 7일간 암약하니까 그래. 스타스키를 움직여, CIA를 위해! 코작을 핥아줘. USA를 위해.’ ‘난 미국이 너무 지긋지긋해(I`m so Bored with the USA)’ 스타스키와 코작은 텔레비젼 수사극에 등장하는 명형사들인데(우리나라에도 방영된 바 있다) 클래시는 여기서 군대와 달러와 대중 문화로 유럽을, 아니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미국을 꼬집으면서 ‘양키 고우 홈!’의 메시지를 던진다. ‘다수의 땀으로 받쳐지는 체제는 소수를 죽여 없애버리려는 암살자들을 낳지. 어떤 곳을 차지하여 그것을 법정이라고 부르자. 이곳은 판사가 서 있을 곳이 아냐. 모든 법관을 고소하고 서류를 불태워버리자!’ ‘지붕위의 총(Guns on the Roof)’ 그들의 투쟁지향성은 음반 제목만으로도 뚜렷이 목도된다. 78년에 발표한 2집 음반 타이틀은 < 그들에게 충분한 자유를(Give` em Enough Rope) >이었고, 80년에는 미국의 중남미 내정 개입을 비판하려는 취지에서 당시 니카라과의 친미적 콘트라 반군과 싸운 좌익 민족해방전선인 ‘산디니스타’를 음반제목으로 내걸기도 했다. 82년도 음반은 숫제 < 투쟁의 록(Combat Rock) >으로 붙였다. 79년 말에 선보인 걸작 음반 < 런던의 부름(London Calling) >에도 그러한 경향은 유지되었다. 여기 수록된 ‘스페인 전쟁(Spanish Bombs)’이란 곡에서 클래시는 1939년 스페인 내전 당시 독재자 프랑코 대통령과 싸운 대중들을 자유의 전사로 찬양했고 ‘브릭스톤의 총(The Guns of Brixton)’을 통해서는 자메이카 흑인 빈민 지역에 대한 정부의 폭동 진압에 강한 반발을 표출했다. ‘그들이 네 정문을 박차고 들어왔을 때 너흰 어찌할 것인가. 손을 머리에 올리고 항복할 것인가 아니면 총을 쏘며 대항할 것인가. ... 우릴 억누를 수 있어.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있어. 하지만 당신네들은 브릭스톤의 총에 응답해야 할 거야.’ ‘브릭스톤의 총’ 이 곡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클래시는 당시 영국에 만연되어 있던 ‘인종차별’을 가장 반민주적인 형태로 규정하고 노래 운동의 전부를 이의 종식에 걸었다. 그리하여 78년 하반기에는 동료 펑크 가수들인 엘비스 코스텔로, 탐 로빈슨 등과 함께 ‘인종주의에 대항하는 록’(Rock Against Racism) 운동을 주도했다. 이 운동은 60년대 록 음악의 정신, 이른바 ‘저항 정신의 부활’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담긴 움직임이었다. 클래시는 60년대의 정신이 화석화되지 않고 후대 록 음악인에게 면면히 계승되고 있음을 실증했다. 이들은 이념적으로 좌파의 경향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조 스트러머는 저 유명한 이탈리아의 좌익집단 < 붉은 여단 >의 신파라며 스스로 좌익임을 공언했다. 초창기 공연 때는 ‘레드’라고 쓰인 완장을 착용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클래시의 색깔과 장외의 움직임은 즉각 우익 진영의 궐기를 불렀다. 우익 쪽에서는 영국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하여 제모순을 걸고 넘어지고 따라서 민중에게 설득력을 발휘한 클래시를 가장 두려워했다. 그무렵 대표적 극우집단은 신나치 사상을 표방한 < 구국 전선 >(National Front)이었는데 블랙리스트에 첫 번째로 올린 격파 대상이 다름아닌 클래시였다. 이 집단이 발행하는 선전용 책자 『영국의 애국자』는 77년 클래시를 현재 록 그룹 가운데 가장 좌익이라고 분류하여 독자들의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하고는 “그들의 공연 포스터를 깡그리 벽에서 뜯어내 원래 그것들이 있어야 할 곳인 시궁창에 처박자”고 제창했다. 79년에는 우익의 청년들도 덩달아 궐기하여 < 청년 구국전선 >을 결성, 펑크 진영의 ‘인종주의에 대항하는 록’운동에 맞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록’운동을 전개했다. 반인종주의가 졸지에 공산주의로 몰린 것이었다. 이런 우익 쪽의 록 밴드로는 ‘벤츠’, ‘칼럼 44’, ‘비극의 정신’ 등이 있었으며 < 백인의 힘 >, < 지배인종 >, < 빨갱이를 몰아내자 > 등과 같이 타이틀만으로도 색깔(?)이 확연히 드러나는 노래를 발표했다. 이처럼 클래시는 적대 집단으로부터 철저히 빨갱이로 취급받았다. 클래시는 또한 이름이 나기 시작한 77년 이후부터 경찰의 교묘한 방해 공작에 낸 시달려야 했다. 첫 순회공연(공연 제목이 < 백색 폭동 >) 때 경찰은 ‘특별한 이유 없이’ 순회공연 버스를 반복해서 가로막았고 호텔 키 반납을 잊어먹었다고 벌금형을 내리기도 했다. 보잘것없는 작은 절도 용의 또는 연습장 주위의 주택으로부터의 소음 고발에도 경찰은 촉각을 곤두세웠고 권총으로 호텔에서 레이스 중인 비둘기를 쏘았다고 해서(분명히 잘못한 것이지만) 헬리콥터가 출동하고 무장경찰이 두 멤버를 체포하는 등 난리 법석을 피운 일도 있었다. 79년에는 경찰이 펑크록의 전당인 ‘사운드홀 뮤지션 협동조합’에 쳐들어와 악기와 음향 시스템을 박살내버린 일이 있었는데, 클래시는 자선공연을 기획해 부서진 물품을 새로 구비하고도 남을 많은 기금을 마련해 피해 공연장에 기증, 팬들로부터 통쾌한 보복이었다는 칭찬을 받았다. 클래시는 어느 그룹보다도 펑크의 정신을 잘 소화했지만 섹스 피스톨즈가 실패했던 ‘해외 음악 보급’이나 펑크가 대체로 놓치기 쉬웠던 ‘음악적 완성도’의 추구에도 발군의 성과를 거두었다. 엄밀히 말해서 클래시는 피스톨즈보다는 음악 보급의 환경에 관한 한 운이 좋았다. 피스톨즈는 메이저 레코드사들에게 연이어 ‘물먹었지만’ 클래시는 첫 음반부터 메이저인 CBS 레코드의 영국지사로부터 20만 불이라는 엄청난 선금을 받고 그 회사와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미국의 배급업자들이 너무 조잡하다고 무시하는 바람에 미국 진출에 쉽지는 않았지만 클래시는 끊임없이 미국의 문을 두드렸다. 이러한 자세는 ‘미국이 너무 지긋지긋하다’는 애초의 반미적 경향과는 상반되는 것이어서 의구심을 부르기도 했지만 그들의 입장에는 나름대로 논리가 있었다. 믹 존스의 주장을 들어보자. “우리가 좀더 가지를 뻗치려면 더 많은 사람에게 접근해야 한다. 우린 마침내 똑같은 팬만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많은 10대들이 음반을 듣게 된다면 가사를 읽게 될 것이고 그리되면 그로부터 무언가 배우게 될 것 아닌가.” 이는 곧 자신들의 급진적 메시지를 더 널리 전파하기 위해서라도 음반 유통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과 직결되었다. 그들의 꾸준한 시도는 마침내 미국의 빗장을 풀어 79년부터 미국에서 클래시의 인기는 급등하기 시작했다. < 타임 >지는 70녀대의 앨범 베스트 10의 하나로 < 그들에게 충분한 자유를 >을 선정했고, < 롤링 스톤 >지는 80년 그들을 커버스토리로 다뤘다. 음반 판매도 상승국면을 타 82년 < 투쟁의 록 >은 1백만 장 이상이 팔려 플래티넘 음반을 기록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이 음반에서는 또 최초의 미국 싱글 차트 10위권내 진입곡인 ‘카스바를 록으로(Rock the Casbah)’가 나왔다. 음악적 측면에서도 그들은 A학점이었다. 펑크는 신시사이저나 관악기를 쓰지 않고 사운드의 ‘최소주의’를 지향, 시끄럽고 지루한 맛을 주는 약점을 지녀 전세계 대중으로부터 변함없이 사랑받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클래시는 펑크의 공간(時空)적 핸디캡을 해소키 위해 자메이카의 레게를 접목시키는 등 다양한 스타일을 시도했다. 클래시는 레게 음악이 ‘저항 음악’이라는 점에서 펑크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이해했고 그래서 적극적인 수용 자세를 보였다. 그들의 데뷔 앨범에는 ‘경찰과 도둑(Police and Thieves)’이라는 레게풍의 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노래의 오리지널 작곡자이자 프로듀서인 리 페리는 클래시버전을 듣고 그만 감격해 그들의 사진을 자메이카 스튜디오에 걸어놓았을 정도였다. 당시 레게를 가장 잘 소화한 백인 뮤지션이라는 평가도 뒤따랐다. 클래시가 섹스 피스톨즈의 후발주자였으면서도 장기간 활동하고 더 널리 인정받았던 이유도 바로 이같은 음악적 수준을 획득했기 때문이었다. 실로 피스톨즈가 ‘펑크의 시작’이었다면 클래시는 ‘펑크의 완성’이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세계적 성공을 거둔 82년부터 멤버들 간에 어색한 기류가 맴돌아 그 해 니키 히든이 정치적 견해차를 이유로 그룹을 떠났고 이듬해에는 조 스트러머와 작사 작곡 콤비로 사실상의 기둥이었던 믹 존스가 탈퇴했다. 믹은 클래시 이후 자신의 새 그룹 ‘빅 오디오 다이나마이트’를 결성하여 다이나믹한 활동을 펼쳤으나 날개 한 쪽을 잃은 조 스트러머의 클래시는 추락을 거듭했다. 클래시는 85년 < 컷 더 크랩(Cut the Crap) > 앨범을 발표해 건재를 과시했지만 음반 평가는 빅 오디오 다이나마이트의 작품보다 나빴다. 그룹의 명성은 나날이 퇴조했고 결국 86년에 해산되어버렸다. 스트러머는 믹 존스 탈퇴시 “그는 스튜디오에 오려고 하지도 않고 휴일에는 쉬려고만 하는 등 더 이상 밴드의 이상에 맞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축출하게 됐다”며 불화의 책임을 믹에게 돌렸으나, 86년 클래시 해산 후 영국의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지와의 인터뷰에서 그 책임이 실은 자기에게 있었다고 고백하고 독자들에게 잘못을 공개 사과했다. 그 무렵 조와 믹은 2년간의 적대 감정을 씻고 해후하여 옛날처럼 같이 작품을 쓰는 등 우정을 회복했다. 뒤늦게나마 클래시의 대미를 멋지게 장식한 것이었다. 친구사이는 원래 그런 것이고 또 그렇게 돼야 한다! 10년간을 휘몰아치며 파시즘과 인종주의에 맞서 분연히 투쟁한, 그리고 펑크의 틀을 완성시킨 클래시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클래시의 펑크 정신은 여전히 위력적이며 세계 각국의 청년 록 팬들을 흥분시키고 있다. 믹 존스는 자신들의 음악을 ‘계몽’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들은 펑크를 단순한 욕구 분출의 차원에서 하나의 힘으로, ‘사회변동의 유효한 도구’로 끌어올렸다. 그리하여 무수한 젊은이들의 미몽을 깨뜨리는 역할을 해냈다. ‘이 음악은 국가를 휘젓는 거지. 이 음악은 센세이션을 야기시키는 거야. 어머니에게 말해. 아버지에게 말해. 모든 게 잘될 거라고. 이것은 혁명의 록이지. 난 충격의 상태야.’ ‘혁명의 록(Revolution Rock)’ 이 노래처럼 그들의 음악은 계몽이 아니라 실상은 혁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펑크의 팬들은, 클래시의 매니아들은 그렇게 단정하고 싶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 투쟁의 록 >에 수록된 클래시의 골든 레퍼터리 중 하나인 ‘권리를 알라(Know your Right)’를 통해 그들이 젊음을 향해 외친 권리 선언을 들어보자. ‘이것은 기타에 의한 공공방송이다. 제군들은 자신들의 삼권(三權)을 알라. 제1조, 너희는 살해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제2조, 너희는 먹고 돈쓸 권리가 있다! 제3조, 너희는 벙어리가 아닌 한 자유롭게 말할 권리가 있다!’ 노랫말이 아닌 마치 시위대가 피켓에 적어 부르짖는 듯한 내용. 이런 가사를 담은 대중 가요를 그대는 지금껏 들어본 기억이 있는가.
멤버 : 웰리 파커(Wally Palmar, 기타, 하모니카, 보컬), 마이크 스킬(Mike Skill, 베이스), 코즈 캔러(Coz Canler, 리드기타), 브래드 엘비스(Brad Elvis, 드럼) 멤버 : 웰리 파커(Wally Palmar, 기타, 하모니카, 보컬), 마이크 스킬(Mike Skill, 베이스), 코즈 캔러(Coz Canler, 리드기타), 브래드 엘비스(Brad Elvis, 드럼)
세션 맨들로 구성되어 화제를 뿌렸던 토토는 그 탄탄한 연주 실력과 고혹적인 팝 감수성으로 1980년대를 풍미했던 그룹이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전개되는 엄밀한 곡 구성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수많은 뮤지션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열렬한 추종자들을 양산해냈다. 전성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룹의 양대 산맥 스티브 루카서와 고(故) 제프 포카로는 전문 연주인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추앙을 받고 있으며, 그들의 초, 중반기 레퍼토... 세션 맨들로 구성되어 화제를 뿌렸던 토토는 그 탄탄한 연주 실력과 고혹적인 팝 감수성으로 1980년대를 풍미했던 그룹이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전개되는 엄밀한 곡 구성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수많은 뮤지션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열렬한 추종자들을 양산해냈다. 전성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룹의 양대 산맥 스티브 루카서와 고(故) 제프 포카로는 전문 연주인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추앙을 받고 있으며, 그들의 초, 중반기 레퍼토리들은 꾸준히 라디오 전파를 타고 있다. 1970년대 제프 포카로와 스티브 루카서의 고등학교 밴드로 출발한 토토는 그 개개인의 출중한 기량으로 1970년대 후반 이미 스타들의 세션을 도맡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팀이 완전히 정비된 후 발표한 대망의 데뷔 앨범 < Toto >는 밀리언셀러로 부상했으며, 재즈와 록이 정교하게 교직된 독특한 사운드로 마니아들을 사로잡았다. 여기에는 국내에서도 자주 리퀘스트를 받는 ‘George porgy’, ‘Hold the line’등이 실려 있다. 토토는 < Hydra >와 < Turn Back >를 계속해서 내놓으며 특급 아티스트의 길로 접어들기 위한 기반을 마련한다. 비록 1집에 비해 판매고는 저조했으나 곡들은 한층 세련되고 연주는 엄격해져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를 갖게끔 만들기에 충분했다. 3장의 음반으로 비행을 시작한 토토는 1982년에 공개한 4집 < Toto Ⅳ >로 모든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이 된다. 빌보드 정상을 밟은 ‘Africa’, 2위에 오른 ‘Rosanna’등 차트를 맹폭한 히트곡들이 터져 나왔으며 그래미는 < 올해의 앨범 >을 포함한 장장 7개 부문의 상을 < Toto Ⅳ >에 안겨주며 1982년을 토토의 해로 선포했다. 멀티 플래티넘을 따낸 이 음반에서 토토는 예측불허의 변박과 고난이도의 테크닉이 난무하던 기존의 현란함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도 거기에 듣기 좋은 멜로디를 부가해 골수 팬들과 팝 키드들을 동시에 포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엄청난 성공 뒤에 토토는 데이빗 헝게이트와 바비 킴볼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으며 5집 < Isolation >을 발표했다. 그러나 새로 영입된 퍼지 프레데릭슨(Fergie Frederiksen)의 보컬은 킴볼을 따라갈 수 없음이 입증되었고 전전긍긍하던 팀원들은 조셉 윌리엄스(Joseph Williams)를 < Fahrenheit >에서 대타로 기용했다. 고품격 발라드의 비중이 높아진 이 앨범은 ‘Lea’, ‘I’ll be over you’등의 히트곡을 배출하며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에도 키보디스트 스티브가 떨어져 나가는 등 멤버 교체와 탈퇴의 악순환을 계속 경험하던 토토는 1992년 팀의 중핵 제프 포카로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면서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당대 최고의 드러머 중 하나로 평가받던 그의 요절은 많은 팬들에게 아쉬움과 슬픔을 안겼다. 토토의 통산 여덟 번째 작품인 < Kingdom Of Desire >는 ‘Only you’라는 매혹적인 곡을 남긴 채 제프의 마지막 레코딩으로 기록되었다. 마이클 셍커 그룹(Michael Schenker Group >을 거친 1급 레벨의 록 드러머 사이먼 필립스(Simon Phillips)의 가세로 힘을 얻은 토토는 1999년 오리지널 멤버 바비 킴볼이 보컬리스트로 재가입해 또 한번의 비상을 노리고 있다. 멤버들 중 스티브 루카서는 재즈 기타의 도인 래리 칼튼과 공동 투어를 나서는 등 특히 두드러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1996년 있었던 토토의 내한 공연은 국내에서 있었던 최고의 공연 중 하나로 회자된다. 그들은 라이브와 스튜디오 앨범에서 모두 사람들을 만족시켜 왔으며, 결성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 팀웍과 기량으로 사랑 받고 있다. 가수의 뒤에서 연주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세션 맨에서 토토는 당당히 무대 중앙으로 진출했었고, 이제는 자신들의 경륜을 하나하나 쌓아가고 있다.
밴드 : New Order (뉴 오더 (팝/락 밴드))
비극은 절망만을 대동하지 않는다. 때론 묘한 반전을 이루며 최고의 호재로 작용하기도 한다. 1980년 5월 18일 포스트 펑크 밴드 조이 디비전(Joy Division)의 보컬리스트 이안 커티스(Ian Curtis)의 자살은 나머지 멤버들-버나드 섬너(Bernard Sumner, 기타·보컬), 피터 훅(Peter Hook, 베이스), 스티븐 모리스(Stephen Morris, 드럼)-에게는 슬픈 비극이자 한편으론... 비극은 절망만을 대동하지 않는다. 때론 묘한 반전을 이루며 최고의 호재로 작용하기도 한다. 1980년 5월 18일 포스트 펑크 밴드 조이 디비전(Joy Division)의 보컬리스트 이안 커티스(Ian Curtis)의 자살은 나머지 멤버들-버나드 섬너(Bernard Sumner, 기타·보컬), 피터 훅(Peter Hook, 베이스), 스티븐 모리스(Stephen Morris, 드럼)-에게는 슬픈 비극이자 한편으론 어둠을 뚫고 빛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조이 디비전 시절 < Unknown Pleasures >(1979년), < Closer >(1980년)를 통해 갈래를 치고 몸통을 얻으며 끊임없이 진화하여, 결국에는 어둠(또는 고딕)의 카리스마로 굳어진 이안 커티스의 우울하고 가녀린 감성이 다른 멤버들의 존재감을 무력화시킬 정도로 커다란 벽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안 커티스의 빈자리는 버나드 섬너를 위시하여 숨죽이고 있던 멤버들에게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따스한 햇볕이었는지도 모른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극복한 맨체스터 출신의 뉴 오더는 1980년대 영국 음악 흐름을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우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신시 팝 그룹이다. 그들은 1980년대 개막과 함께 등장한 새로운 음악 무브먼트였던 뉴 웨이브 물줄기에서 록과 일렉트로닉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밴드로 평가받으며 클러버들에게 빈번하게 클릭되는 검색어로 각광받고 있다. 펑크로부터 물려받은 도전적인 록 사운드에 신시사이저와 시퀀서를 사용하여 만들어낸 디스코, 하우스 등 다양한 클럽 음악과 실험적인 전자 사운드를 완전히 용해시켜 고급스러우면서도 대중 지향적인 댄스뮤직을 창조해낸 것이다. 이는 1980년대 후반 맨체스터 사운드가 폭발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고, 당시 클럽씬의 기하급수적인 세(勢)확산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스타디움 록 밴드 유투(U2)부터 매드체스터 808 스테이트(808 State)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지나간 궤적은 넓고도 깊었다. 뉴 오더는 1980년 말 조이 디비전 출신의 버나드 섬너, 피터 훅, 스티븐 모리스가 스티븐의 여자친구이자 여성 펑크 밴드 이내디퀴츠(Inadequates)에서 활동했던 길리언 길버트(Gillian Gilbert, 키보드)와 함께 결성한 밴드. 토니 윌슨(Tony Wilson)의 인디 레이블 < 팩토리(Factory) >와 음반 계약을 체결한 그들은 1년 뒤인 1981년 데뷔작 < Movement >(영국 차트 30위)를 내놓으며 힘찬 출발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 스케이프는 단조롭지만 호소력 짙은 버나드 섬너의 보컬을 제외하고 여전히 조이 디비전, 특히 이안 커티스의 테두리에 갇혀있었다. 첫 싱글 ‘Ceremony’(영국 차트 34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뉴 오더만의 확고한 음악 메커니즘이 확립된 것은 1983년 기념비적인 12인치 싱글 ‘Blue Monday’(영국 차트 12위)를 통해서였다. 냉정하게 울려대는 머신 리듬과 버나드 섬너의 무미 건조한 음색은 차갑고 슬픈 그러나 몸을 흔들게 만드는 댄스 음악의 극점이었다. 영국에서만 60만장, 전세계적으로 300만장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 이 싱글은 지금까지 가장 많이 팔린 12인치 싱글로 남아있다. ‘Blue Monday’가 수록된 2집 앨범 < Power, Corruption & Lies > 역시 영국 차트 4위에 랭크되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Blue Monday’로 탄탄한 음악적·대중적 기반을 다진 뉴 오더는 같은 해 미국의 유명한 힙 합 프로듀서 아서 베이커(Arthur Baker)의 프로듀싱 도움을 받아 ‘Confusion’을 내놓았고, 퀸시 존스(Quincy Jones)의 < 퀘스트 레코드(Qwest Records) >로 이적한 1985년에는 3집 < Low-life >를, 그리고 1년 뒤인 1986년에는 4집 < Brotherhood >를 발표하며 왕성한 창작욕을 과시했다. 특히 1986년 4집에는 미국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한 빛나는 명곡‘Bizarre love triangle’이 실려있다. 계속해서 뉴 오더는 1987년 그들의 디스코그라피 중 최고의 소장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싱글 모음집 < Substance >(영국 차트 3위)를 들고 나왔고, 1989년에는 다섯 번째 정규 음반 < Technique >(영국 차트 1위)를 공개하며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또 1990년에는 월드컵에 진출한 영국 축구팀을 위해 노래한 응원가 ‘World in motion’으로 밴드 최초의 넘버 원 히트곡이라는 이정표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뉴 오더는 1993년 선보인 < Republic >(영국 차트 4위)을 전후하여 전(前) 스미스(The Smiths)의 기타리스트 자니 마(Johnny Marr)와 함께 한 버나드 섬너의 일렉트로닉(Electronic), 피터 훅의 리벤지(Revenge)와 모나코(Monaco), 그리고 스티븐 모리스와 질리언 길버트의 디 어더 투(The Other Two) 등 모든 멤버들이 외도에 몰두해 그룹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다. 이로 인해 밴드는 최근까지 해산설 등 각종 악성루머에 시달렸다. 이는 팬들의 뉴 오더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컸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난해 그들은 7년간의 공백을 깨고 대니 보일 감독의 영화 < ?치 >의 사운드트랙에 신곡 ‘Brutal’을 선보였으며, 올해에는 컴백 작품 < Get Ready >를 발표하며 오랫동안 웅크렸던 기지개를 활짝 폈다.
불혹(不惑)은 나이 사십을 일컫는다. 주위의 어떠한 상황에도 미혹(迷惑)됨이 없이 앞으로 정진한다는 뜻으로 공자가 < 논어 > ‘위정편(爲政篇)’에서 언급한 말이다. 예쁘장한 뉴저지 소년들 본 조비가 어느새 우리네 나이로 불혹이 됐다. ‘그룹의 존재 이유’ 존 본 조비(John Bon Jovi, 1962년 생)와 키보디스트 데이비드 브라이언(David Bryan, 1962년 생)이 올해로 마흔 줄에 접어들었다. ... 불혹(不惑)은 나이 사십을 일컫는다. 주위의 어떠한 상황에도 미혹(迷惑)됨이 없이 앞으로 정진한다는 뜻으로 공자가 < 논어 > ‘위정편(爲政篇)’에서 언급한 말이다. 예쁘장한 뉴저지 소년들 본 조비가 어느새 우리네 나이로 불혹이 됐다. ‘그룹의 존재 이유’ 존 본 조비(John Bon Jovi, 1962년 생)와 키보디스트 데이비드 브라이언(David Bryan, 1962년 생)이 올해로 마흔 줄에 접어들었다. 리치 샘보라(Richie Sambora, 1959년 생)와 티고 토레스(Tico Torres, 1953년 생)는 과거에 이미 안착했다. 그들은 1980년대부터 자신들의 특허품 ‘뉴저지 사운드’를 들고 나와 현재까지 변함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음악성이 떨어진다, 이젠 변해야 산다, 제발 음악 인테리어 좀 다시 해라 등의 주변의 입방아와 시선에도 그들은 ‘Keep the faith’와 ‘It’s my life’를 부르며 현혹되지 않았다. 불혹은 그러한 밴드의 신념을 더욱 확고히 해주는 격려의 나이테이다. 바로 이번에 발표되는 본 조비 최초의 라이브 앨범 < One Wild Night >는 ‘앞으로도 유혹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그들의 굳건한 의지가 담긴 뜨거운 열기의 현장이다. # Always 본 조비는 1980년대 거대 자본을 바탕으로 음반 산업이 빚어낸 ‘의도적’ 결과물인 팝 메탈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그룹이다. 하지만 그들은 머틀리 크루(Motley), 래트(Ratt), 포이즌(Poison), L.A. 건스(L.A. Guns), 워런트(Warrant), 슬로터(Slaughter), 도켄(Dokken), 스키드 로우(Skid Row) 등 대부분의 동료 헤어 메탈 밴드들이 1990년대 들어 얼터너티브 열풍에 밀려 강제 퇴출 당하는 수모를 겪는 와중에도 불구하고, 차트를 점령하며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또는 상업적인) 록 그룹으로 자리잡았다. 본 조비의 성공 요인은 ‘건강함’에 있다. 그들은 퇴폐 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자극적이고 쾌락적인 사운드를 구사하는 LA 출신 그룹들과 달리, 아메리칸 하드록의 전통을 흡수하여 밝고 경쾌한 음악 세계를 펼쳐냈다. 한때의 유행을 지배하는 충격 요법보다 은근하지만 뿌리가 깊은 정공법을 택하여 꾸준한 인기를 얻었다. 존 본 조비의 루츠적인 목소리와 리치 샘보라의 블루스에 기반을 둔 기타 스타일이 대변한다. 가사 또한 대부분 건강미를 한껏 뽐낸다. 술과 마약, 걸(Girl)들을 찬양했던 타 밴드와 갈라서게 되는 두 번째 지점이다. ‘우리는 이제 겨우 반쯤 왔어요/ 기도로 살아요/ 내 손을 잡으세요/ 단언컨대 우린 그것을 해낼 수 있어요’ -1986년 앨범 < Slippery When Wet >의 수록곡 ‘Livin’ on a prayer’ 중에서- ‘누구나 힘들기 마련이에요/ 만족할 수 없으니까요/ 의지할 누군가가 아무도 없을 때 버텨내기란 힘이 들어요/ 신념, 당신은 빗속을 헤쳐나갈 수 있어요/ 신념을 지키세요’ -1992년 앨범 < Keep The Faith >의 수록곡 ‘Keep the faith’ 중에서- 그들은 결코 실패와 절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용기와 믿음을 준다. 때문에 남녀 노소 들어도 부담이 없다. 본 조비를 얘기하면서 동향 출신의 로큰롤러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팝 메탈과 노동자 록이라는 다른 노선을 걷고 있지만 그 사이에는 ‘트래디셔널’이라고 하는 공통분모가 있다. 미국의 전통 록 사운드를 둘 다 품고 있다. 본 조비는 바로 ‘보스(Boss)’로부터 그것을 물려받았다. 1984년 셀프 타이틀 데뷔작에 실린 ‘Runaway’가 대표적이다. 서로는 또한 뉴저지를 위해 일하고 봉사한다. 각종 자선 단체의 기금 모금 공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으며, 1998년에는 탈주 범에게 살해된 뉴저지 경찰관 패트릭 킹 가족들의 생계비 마련을 위해 함께 합동 공연을 열기도 하는 등 뉴저지의 음악 일꾼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아마도 본 조비의 건강함은 브루스 스프링스틴에게서 파생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 New Jersey 본 조비는 1983년 고등학교 친구사이였던 존 본 조비와 키보디스트 데이비드 브라이언이 뉴저지주의 세이레빌(Sayreville)에서 만든 밴드. 곧이어 리치 샘보라와 베이시스트 알렉 존 서치(Alec John Such), 드러머 티코 토레스가 가세하여 완벽한 짜임새를 갖췄다. 그들은 1984년 데뷔 음반 < Bon Jovi >, 1985년 2집 < 7800 Fahrenheit > 등을 발표하며 음악의 바다로 힘차게 닻을 올렸다. 각각 앨범 차트 43위와 37위를 기록하며 선전했지만, 사운드 측면에서는 불안함이 엿보였다. 키보드에 주안점을 둔 경쾌한 하드록은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밴드는 변화가 필요했다. 결국 그들은 에어로스미스(Aerosmith), 엘리스 쿠퍼(Alice Cooper), 마이클 볼튼(Michael Bolton), 그리고 요즘의 리키 마틴(Ricky Martin) 등에게 굵직한 히트곡들을 제공한 명 작곡가 데스몬드 차일드(Desmond child)와 전격 제휴하였다. 데스몬드의 입김에 의해 팝 적인 감각을 대폭 받아들인 그들은 팝 메탈로 그룹의 음악 방향을 확정했다. 그래서 완성된 결과물이 바로 1986년의 < Slippery When Wet >이였다. 귀를 단숨에 자극하는 훅(Hook)과 신나고 흥겨운 그들의 메탈 사운드는 미국 전역을 강타했다. 앨범 차트 정상에 오른 것은 물론이고, ‘Livin’ on a prayer’, ‘You give love a bad name’, ‘Wanted dead or alive’, ‘Never say goodbye’ 등의 인기 곡들을 쏘아 올렸다. 음반은 현재까지 미국에서만 천 만장이 훨씬 넘게 팔려나갔다. 본 조비의 가장 빛나는 마스터피스이자 팝 메탈의 위대한 명반으로 남아있다. 그들은 이것을 계기로 데스몬드 차일드와 끈끈한 파트너십을 유지하며 오늘날까지 좋은 노래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번 점화된 본 조비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1988년에 발매된 작품 < New Jersey >는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에 정상을 밟았고, ‘Bad medicine’, ‘Born to be my baby’, ‘I’ll be there for you’, ‘Lay your hands on me’ 등이 히트 퍼레이드를 이어 나갔다. 한편 그들은 1989년에 열린 MTV 뮤직 비디오 시상식에서 강한 하드록 ‘Wanted dead or alive’를 어쿠스틱 버전으로 불러 많은 화제를 불러모았는데, 이는 1990년대 들어 MTV에 의해 기획된 언플러그드 공연에 핵심적인 단초를 제공했다. 이후 휴지기에 돌입하여 각자의 솔로 활동에 전념하는 것으로 미국에서의 찬란했던 1980년대를 마감한 본 조비는 1990년대의 개막과 함께 영국에서 더욱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1992년 컴백 앨범 < Keep The Faith >, 1994년 베스트 앨범 < Crossroad >, 1995년 정규 6집 앨범 < These Days >(1994년 알렉 존 서치가 견해차로 탈퇴하여 후임 베이스 주자로 휴 맥도널드(Hugh Mcdonald)가 가세했다) 모두 영국 차트 넘버원을 차지했다. 미국에서 각각 5위, 8위, 9위에 올라선 것과 대조적이다. 이는 당시 너바나가 주도한 얼터너티브 록이 미국을 휩쓸고 있었기에, 조금은 피해가 덜한 영국에서 비상(飛上)할 수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Keep the faith’, ‘Bed of roses’, ‘I’ll sleep when i’m dead’, ‘I believe’, ‘Always’, ‘Someday i’ll be saturday night’, ‘This ain’t a love song’, ‘Something for the pain’, ‘Lie to me’, ‘These days’ 등의 무수한 히트곡들이 이 기간동안 쏟아져 나왔다. 본 조비는 얼마 후 개인 플레이와 음악적 충전을 위해 또다시 장기간의 칩거에 들어가며 1990년대를 보냈고, 멀티 플래티넘을 따낸 재기 작품 < Crush >와 함께 뉴 밀레니엄을 맞았다. # One Wild Night 우선 수록곡의 질적인 면이나, 사운드의 완성도를 떠나 본 조비의 이번 라이브 앨범 < One Wild Night >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7년 동안의 음악 이력서에 처음으로 올리는 실황 음반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라이브는 흥겹기로 정평이 나있다(국내에서도 이미 1995년 내한공연으로 확인했다). 한해 공연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익만 2천 8백 4십만 달러, 매진 사태로 인해 무조건 공연장으로 들어가려는 막무가내 팬들의 잦은 부상 등은 그들의 공연이 얼마나 인기가 높은지를 단적으로 설명해 준다. 그리고 밴드는 1987년 몬스터 록 페스티발, 1989년 모스크바 뮤직 피스(Peace) 페스티발, 앨범 발표 후 가지는 월드 투어 등을 통해 스타디움 록 밴드로서 확실한 발판을 마련한 지 오래다.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장의 라이브 앨범도 없었다는 것은 정말 의외의 일이다. 팬들이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린 것은 당연지사. 이에 대해 존 본 조비는 "이 음반은 팬들이 오랫동안 리퀘스트 해왔던 것이다. 우리를 위해서는 라이브 앨범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구세대와 신세대 그들을 위해 이것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팬들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현장(現場) 사운드가 세상에 공개됐음을 알 수 있다. 음반은 1985년부터 올해까지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스위스, 영국, 남아프리카 등을 돌며 녹음한 곡들 중에서 최고의 소스만을 뽑아낸 14곡과 < Crush >의 수록곡 ‘One Wild Night’의 리믹스 버전을 담고 있다. 본 조비의 음악 여정을 가늠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이다. 데뷔작의 ‘Runaway’, < 7800 Fahrenheit >의 ‘In and out of love’, < Slippery When Wet >의 ‘Livin’ on a prayer’, < New Jersey >의 ‘Bad medicine’, < Keep The Faith >의 ‘Keep the faith’, < These Days >의 ‘Something for the pain’, < Crush >의 ‘It’s my life’ 등 지금까지 발표한 앨범들에서 알짜배기만을 엄선했다. 또한 닐 영(Neil Young)의 ‘Rockin’ in the free world’와 밥 겔도프(Bob Geldof)의 ‘I don’t like mondays’를 리메이크한 것은 거장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다. 특히 ‘I don’t like mondays’는 밥 겔도프가 직접 참여하여 존 본 조비와 번갈아 부르는 흐뭇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다. 몇 년 전에 존 본 조비는 영국의 헤비메탈 전문지 < 케랑 >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시대의 음악 조류를 왜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기자의 가시 돋친 질문에 "나는 아직 뉴저지에 살고 있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그것은 자신들의 삶과 음악의 고향 뉴저지를 계속 고집하겠다는 뜻이다. 때론 변화가 필요하다. 분위기를 바꾸어 활력을 되찾고 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적절한 시점이 요구된다. 아무 때나 하면 위험스런 탈주의 모험밖에 안 된다. 본 조비 스스로도 지금은 그 때가 아니라고 믿고 있다. 그러기에 오직 한 길만을 걸어간다. 주위의 비판에 아랑곳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 뉴저지에 살고 있다. 하지만 때가 되면 그들은 스스로 뉴저지를 떠날 것이다. 불혹이 아닌가. 팬들의 환호와 함께 메아리치던 ‘It’s my life’의 노랫말이 아직도 귓가를 뒤흔든다. ‘이게 나의 삶이에요/ 지금이 아니면 결코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난 영원히 살수 없어요/ 나는 단지 내가 살아있는 동안의 삶을 원해요/ 나의 마음은 훤히 트인 고속도로 같아요/ 프랭크가 나의 길을 갔다고 말한 것처럼/ 나는 단지 내가 살아있는 동안의 삶을 원해요/ 이게 나의 삶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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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 안내

안전하고 정확한 포장을 위해 CCTV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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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 안내
  •  구매하신 상품에 포스터 사은품이 있는 경우, 포스터는 상품 수량과 동일한 수량이 제공됩니다.
  •  포스터는 기본적으로 지관통에 포장되며, 2장 이상의 포스터도 1개의 지관통에 담겨 발송됩니다.
  •  포스터 수량이 많은 경우, 상황에 따라 지관통 추가 및 별도 박스에 포장되어 발송될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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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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