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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를 노래한 재즈 60곡 모음집 (Jazz & Paris)

Quincy Jones 작곡/Ella Fitzgerald, Frank Sinatra, Nat King Cole, Helen Merrill 노래 외 30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Lucky Stars Music | 2018년 01월 19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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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를 노래한 재즈 60곡 모음집 (Jazz & Paris)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8년 01월 19일
제조국 EU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1
선택듣기
  • 01 Florence Sur Les Champs Elysees - Miles Davis Quintet 선택듣기
  • 02 Evening In Paris - Art Farmer Septet 선택듣기
  • 03 Under Paris Skies - Duke Ellington & His Orchestra 선택듣기
  • 04 Afternoon In Paris - John Lewis-Sacha Distel Quintet 선택듣기
  • 05 Parisian Thoroughfare - Bud Powell 선택듣기
  • 06 Autumn Leaves - John Lewis-Albert Mangelsdorff Quartet 선택듣기
  • 07 Django - the Modern Jazz Quartet 선택듣기
  • 08 Under Paris Skies - Lou Levy Trio 선택듣기
  • 09 April In Paris - Charlie Parker With Strings 선택듣기
  • 10 Petite Fleur - Sidney Bechet With Claude Luter Orchestra 선택듣기
  • 11 I Wish You Love [Que Reste T-Il De Nos Amours?] - Duke Elling 선택듣기
  • 12 Afternoon In Paris - Milt Jackson Sextet 선택듣기
  • 13 April In Paris - Count Basie & His Orchestra 선택듣기
  • 14 Swing De Paris - Django Reinhardt Sextet 선택듣기
  • 15 Darling, Je Vous Aime Beaucoup - Charlie Shavers Quartet 선택듣기
  • 16 A Midnight In Paris - Duke Ellington & His Orchestra 선택듣기
  • 17 April In Paris - Al Haig Trio 선택듣기
  • 18 Blues In Paris - Sidney Bechet With Claude Luter Orchestra 선택듣기
  • 19 Fontainebleau - Tadd Dameron Orchestra With Bill Evans 선택듣기
  • 20 The Song From Moulin Rouge - Erroll Garner Trio 선택듣기
Dis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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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 La Vie En Rose - Louis Armstrong With Sy Oliver Orchestra 선택듣기
  • 02 I Love Paris - Ella Fitzgerald With Buddy Bregman Orchestra 선택듣기
  • 03 M'am'selle - the Four Freshmen 선택듣기
  • 04 Blue Champagne - Anita O'Day With Bill Holman Orchestra 선택듣기
  • 05 April In Paris - Frank Sinatra With Billy May Orchestra 선택듣기
  • 06 I Wish You Love [Que Reste T-Il De Nos Amours?] - Nat King C 선택듣기
  • 07 Lorsque Tu M'embrasses [Just Squeeze Me] - Helen Merrill Wit 선택듣기
  • 08 My Man [Mon Homme] - Carmen McRae With Nat Adderley Sextet 선택듣기
  • 09 I Love Paris - Etta Jones With Frank Wess Quintet 선택듣기
  • 10 Vous M'eblouissez [You Go To My Head]-H.Merrill W J.Quintet - Vous M'eblouissez [You Go To My Head]-H.Merrill W 선택듣기
  • 11 You're Blase - Peggy Lee With Sy Oliver Orchestra 선택듣기
  • 12 The Last Time I Saw Paris - the Four Freshmen 선택듣기
  • 13 I Love Paris - Frank Sinatra With Nelson Riddle Orchestra 선택듣기
  • 14 C'est Si Bon - Louis Armstrong With Sy Oliver Orchestra 선택듣기
  • 15 Lonely Night In Paris - Julie London With Dick Reynolds Orch 선택듣기
  • 16 April In Paris - Sarah Vaughan With Clifford Brown 선택듣기
  • 17 C'est Magnifique - Frank Sinatra With Nelson Riddle Orchestr 선택듣기
  • 18 Under Paris Skies - Chris Connor With Ray Ellis Orchestra 선택듣기
  • 19 My Man [Mon Homme] - Billie Holiday W.Bobby Tucker Quartet 선택듣기
  • 20 La Vie En Rose - Marlene Dietrich 선택듣기
  • 21 Pink Champagne - Jimmy Rushing & His Sextet 선택듣기
  • 22 Bonjour, Paris! - Fred Astaire, Audrey Hepburn & K.Thompson 선택듣기
Disc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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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 Autumn Leaves - Cannonball Adderley-Miles Davis Quintet (1958 선택듣기
  • 02 Afternoon In Paris - Phineas Newborn, Jr. Quartet 선택듣기
  • 03 Evening In Paris - Quincy Jones & His All Stars 선택듣기
  • 04 The Last Time I Saw Paris - Johnny Hodges Quartet 선택듣기
  • 05 La Vie En Rose - Erroll Garner Trio 선택듣기
  • 06 I Love Paris - Charlie Parker Quintet 선택듣기
  • 07 Under Paris Skies - Quincy Jones & His Orchestra 선택듣기
  • 08 Parisian Thoroughfare - Clifford Brown-Max Roach Quintet 선택듣기
  • 09 Comme Ci, Comme Ca - Ahmad Jamal With Joe Kennedy Orchestra 선택듣기
  • 10 Pigalle - Charlie Shavers Quartet 선택듣기
  • 11 Under Paris Skies - Coleman Hawkins W.Manny Albam Orchestra 선택듣기
  • 12 Paris Midnight - Erroll Garner Trio 선택듣기
  • 13 Nuit Sur Les Champs Elysees - Miles Davis Quintet 선택듣기
  • 14 Paris Blues - Duke Ellington & His Orchestra 선택듣기
  • 15 Promenade Aux Champs Elysees - Sidney Bechet With Claude Lute 선택듣기
  • 16 Montmartre - Rex Stewart & Django Reinhardt 선택듣기
  • 17 Mademoiselle De Paris - Coleman Hawkins W.Manny Albam Orch. 선택듣기
  • 18 Echoes of France [La Marseillaise] - D.Reinhardt & S.Grapelli 선택듣기

아티스트 소개 (35명)

퀸시 존스(Quincy Jones)는 20세기를 빛낸 ’팝 흥행사’라 칭송될 앨범 프로듀서이자 빅 밴드 마스터이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과의 황금 콤비로 활약한 그는 마이클 잭슨의 성인 데뷔작 < Off the wall >(1979), 흑, 백 음악의 완벽한 크로스 오버로 전 세계 4천 2백 만장 판매라는 신기록을 달성한 < Thriller >(1982), 한층 그 볼륨을 높이... 퀸시 존스(Quincy Jones)는 20세기를 빛낸 ’팝 흥행사’라 칭송될 앨범 프로듀서이자 빅 밴드 마스터이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과의 황금 콤비로 활약한 그는 마이클 잭슨의 성인 데뷔작 < Off the wall >(1979), 흑, 백 음악의 완벽한 크로스 오버로 전 세계 4천 2백 만장 판매라는 신기록을 달성한 < Thriller >(1982), 한층 그 볼륨을 높이며 그가 ’팝의 지존’임을 다시 한번 천하에 증명한 < Bad >(1987)의 프로듀서로서 참여하며 1980년대 ’팝 천하’를 일궈낸 대가이다. 마이클 잭슨을 위시해 그는 패티 오스틴, 조지 벤슨, 엘라 핏 제랄드, 레이 찰스, 아레사 프랭클린, 사라 본 등 수많은 R&B, 재즈 가수들을 비롯, 90년대 갱스터 랩퍼 갱스타(Gang starr)의 < Hard to run >(1994)에 이르기까지 프로듀서로 참여, ’흑인 대중 음악의 산파자’로서의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다. 하지만 그는 명 프로듀서이기 전에 1950년대부터 카운트 베이시, 디지 길레스피와 같은 재즈의 대가들과 연주 활동을 함께 한 트럼펫 주자이자 빅 밴드마스터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23세라는 젊은 나이에 나이로 빅 밴드 마스터로 무대에 섰던 그는 다수의 리더작을 발표하며 편곡과 프로듀싱에서 발군의 재능을 발휘했고, 이러한 음악적 자양분을 바탕으로 70년대부턴 팝 가수들의 앨범 프로듀싱과 자신이 설립한 레이블 퀘스트 레코드(Qwest Record)의 기획자로서 역할에 전념하게 된다. 1933년 시카고 태생인 그는 청소년기에 트럼펫과 피아노로 재즈의 기본을 쌓아갔고, 1951년 비브라폰 주자 라이오넬 햄프튼(Lionel Hampton)의 오케스트라에서 2년 간 트럼펫 주자와 편곡자로 활동하며 재즈 계에 투신한다. 햄프튼의 밴드에서 활동하던 무렵, 비운의 하드밥(Hard-Bop) 대가 클리포드 브라운(Clifford Brown)과 쿨(Cool) 트럼펫터 아트 파머(Art Farmer)와 어깨를 나란히 했을 정도로 그는 출중한 트럼펫 연주 실력을 보유하게 된다. 얼마 후 프리랜서 음악인으로 활동하며 카운트 베이시, 캐논볼 애덜리, 토미 도시, 디나 워싱턴등 쟁쟁한 재즈 음악인들의 편곡과 세션을 담당했고 1956년엔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와 함께 투어활동을 하며 그는 차츰 뉴욕 52번가에서 명성을 쌓아간다. 약관의 나이를 조금 넘긴 1956년, 블루스 보이 비비 킹(B. B. King)이 소속되어 있던 ABC 레코드사와 계약, 앨범 < This is how I feel Jazz >에서 그는 밴드마스터로 데뷔한다. 이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등지에서 활발한 투어 활동을 전개하며 스탠더드 팝 작곡가 해롤드 알렌(Harold Arlen)이 배경 음악을 맡은 쇼(Show) ’Free & Easy’(1959)의 편곡 작업에도 참여한다. 솔로 활동과 병행해 그는 1957년, 성이 ’Jones’인 음악인들과 함께 한 이색적인 프로젝트 재즈 섹스텟(Sextet) ’The Jones Brothers’결성 , 타드 존스(Thad Jones), 지미 존스(Jimmy Jones), 조 존스(Joe Jones)와 같은 재즈 뮤지션들과 잠깐 활동한다. 60년대 초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그는 머큐리(Mercury) 레코드사에서 앨범을 발표하며 회사 내 부사장과 A&R맨(Artist & Repertoire)으로도 활동한다. 솔로 활동과 더불어 그는 이후 TV와 영화 음악에도 관여하며 화려한 경력을 쌓는다. 2차 대전 나찌의 만행을 고발한 영화 < The Pawnbroker >(1964)를 시작으로 오스카 상 4개 부문을 휩쓴 미스테리 극 < In the heart of night >(1967), 워렌 비티(Warren Beaty)와 골디 혼(Goldie Hawn)이 등장한 코미디< The Dollars >(1971),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이 주연한 액션물 < The Getaway >(1972), TV 미니시리즈의 새 지평을 열며 전 세계적으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화제작 < The Root >(1977), 남부출신 흑인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을 담은 우피 골드버그 주연의 < The Color Purple >(1985)등에서 영화 음악 작곡과 프로듀서로 참여하며 다방면에서 그의 재능을 펼쳐 보인다. 1969년, 그는 CTI 레코드 설립자인 명 프로듀서 크리드 테일러(Creed Taylor)가 소속되어있던 A&M 레코드와 의기투합, 같은 해 프레디 허바드(트럼펫), 휴버트 로우즈(플룻)를 비롯한 크리드 테일러 사단에 이름을 걸고 있는 명 연주자들이 함께 한 그의 중기 걸작 < Walking in space >(1969)를 시작으로 1981년까지 A&M 레코드에서 활동하게 된다. 1974년을 기점으로 그는 평소 해오던 밴드 마스터로서의 활동을 접고 A&M 소속 아티스트들의 프로듀서 활동에 집중한다. 1980년, 자신의 레이블 퀘스트(Qwest) 레코드를 설립, 자신의 프로듀서 하에 수많은 팝의 명작들을 양산해낸다. R&B 보컬 패티 오스틴(Patti Austin), 신스 팝의 신기원을 제시한 뉴 오더(New Order), 하드 밥 색스폰 주자 어니 왓츠(Ernie Watts), 여성 싱어송 라이터 칼리 사이몬(Carly Simon), 브라질 출신의 싱어 송 라이터 도리 캐이미(Dori Caymmi)의 앨범을 기획했고, 기타리스트 겸 팝 보컬리스트 조지 벤슨의 < Give me the night >(1980), 마이클 잭슨의 히트 작들을 비롯, 80년대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았던 이디오피아 난민 돕기 자선 앨범 < We are the world >(1984)에서도 프로듀서로 맹위를 떨친다. 20세기가 차츰 저물어가던 시점인 1989년, 그는 20세기 미국 대중음악의 본령인 흑인 대중 음악을 자신의 기획으로 집대성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는 마일즈 데이비스, 디지 길레스피, 사라 본, 엘라 핏 제랄드와 같은 노장 재즈 맨 들을 비롯, 블루스에서 힙합에 이르는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중인 흑인 음악인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은 미증유의 대작을 발표하는데 그것이 바로 < Back on the block >(1989)이다. 자신의 레이블 퀘스트에서 내놓는 그의 야심작이기도 했던 앨범은 이듬해인 1990년 그래미 상 ’올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상이라는 대어를 낚게 된다. 90년대 들어 그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생전 공식적인 마지막 녹음인 < Montreux Jazz festival >(1991)의 프로듀싱과 편곡을 맡았고, 쿨리오(Coolio), 알 켈리(R. Kelly), 미스터 엑스(Mr. X) 등이 참여하며 당시 유행하던 재즈-힙합(Jazz-Hip hop)의 면모를 한껏 보여준 < Q’s jook joint >(1994)를 기획 및 프로듀싱한다. 재즈 밴드 마스터로 음악계에 발을 들어 놓았지만 이후 창작보다는 프로듀싱으로 명성을 쌓으며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으로 대변되는 아티스트의 숙명대신 뮤직 비즈니스계의 실력자를 택한 그는 분명 순전한 의미의 재즈 음악인이라고 칭송되긴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대중 음악의 절반 이상을 규정한 흑인 대중 음악의 우수성을 흑인 스스로의 힘으로 만방에 알리는데 공헌한 인물로 그는 60년대 모타운의 전설 베리 고디 주니어(Berry Gordy Jr.)와 70년대 필리 소울(Philly Soul) 콤비 케니 갬블 & 레온 허프 (Kenny Gamble & Leon Huff)와 함께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흑인 대중음악계의 산 증인이다.
노래 : Ella Fitzgerald (엘라 피츠제랄드)
엘라 핏제랄드는 재즈 보컬의 역사를 다시 쓴 디바이다. 그녀는 아무 의미 없이 재잘거리는 스캣(Scat)이라는 창법을 가장 능숙하게 소화해냈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그 어느 악기 못지 않은 즉흥성을 표현할 줄 알았으며 스윙과 비밥 시대에 걸쳐 더욱 빛난 달콤한 목소리와 넘실대는 스윙감을 통해 엘라 핏 랄드는 재즈의 ‘퍼스트 레이디’로 재즈역사에 각인되었다. 사라 본, 빌리 홀리데이와 함... 엘라 핏제랄드는 재즈 보컬의 역사를 다시 쓴 디바이다. 그녀는 아무 의미 없이 재잘거리는 스캣(Scat)이라는 창법을 가장 능숙하게 소화해냈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그 어느 악기 못지 않은 즉흥성을 표현할 줄 알았으며 스윙과 비밥 시대에 걸쳐 더욱 빛난 달콤한 목소리와 넘실대는 스윙감을 통해 엘라 핏 랄드는 재즈의 ‘퍼스트 레이디’로 재즈역사에 각인되었다. 사라 본, 빌리 홀리데이와 함께 재즈 음악사에 길이 남는 ‘여인천하’를 이뤄낸 엘라 핏제랄드는 1917년 4월 25일 버지니아주 뉴포트에서 태어났다. 비운의 여가수 빌리 홀리데이처럼 엘라 역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데, 성장기의 대부분을 홈리스(homeless)로 보낼 정도로 어려운 시기를 보낸다. 엘라는 1934년 뉴욕 할렘가에 소재한 아폴로 극장에서 열린 노래 경연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청중의 자격으로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던 밴드 리더이자 드러머인 칙 웹(Chick Web)은 이 체구 작은(?) 소녀에게서 가능성을 발견, 자신의 빅 밴드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게 한다. 칙 웹의 도움으로 엘라는 그의 밴드의 리드 싱어 자격으로 대중 앞에 섰고 얼마 후 그녀가 데카(Decca) 레이블에서 처음 녹음한 ‘A-tiskete, A- Taskete’(1938), ’Undecided’(1939)가 공전의 히트를 거두며 가수로서의 순조로운 출발을 한다. 그러나 1939년, 칙 웹의 갑작스런 요절로 인해 엘라는 그 후 2년 간 그가 떠난 밴드의 빈 공간을 메워 나가야 했다. 1942년 솔로로 독립한 그녀는 예전 소녀의 상큼함과 순수함이 느껴지던 데뷔시절과 달리 좀 더 완숙한 목소리로의 변신을 필요로 했다. 잉크 스팟(Ink Spot), 루이스 조던(Louis Jordan)과 같은 R&B 싱어들과 잠시 활동을 같이 하던 엘라였지만 자신이 가야할 길은 역시 ‘재즈’임을 깨 닳고, 1946년 노먼 그란즈(Norman Granz-훗날 버브 레코드의 사장이 됨)를 새 매니저로 맞이하며 비밥의 거성인 트럼펫 주자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밴드의 리드 싱어로 일하게된다. 디지와의 연주 경험은 엘라가 비밥의 문법을 자기의 목소리로 소화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변화무쌍한 리듬과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파트별 연주에 맞춰 터져 나오는 유창한 스캣 창법은 비밥의 연주와 그녀의 보컬이 어울림을 갖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당시 그녀의 남편이기도 한 베이시스트 레이 브라운(Ray Brown) 트리오의 백업 연주로 녹음된 ‘How high the moon’(1947)같은 곡에서 그녀의 스캣 창법은 악기에 버금가는 애드립이 목격된다. 1955년 버브(Verve)와 전속 계약을 맺은 엘라는 이 때부터 음악 인생의 최고의 황금기를 맞는다. < Songs from Pete Kelly’s blues >(1955)가 앨범 차트 7위를 기록하는 것을 시작으로 인기가도를 질주한다. 이듬해, 구수한 목소리의 트럼펫 주자 루이 암스트롱과의 듀엣 < Ella & Louis >(1956)가 오스카 피터슨(Oscar Peterson) 쿼텟의 백업 연주로 발표 되 대중적, 비평적 찬사를 얻었으며 두 사람간의 음악적 교분은 < Ella & Louis again >(1957)과 < Porgy & Bess >(1958)로 이어진다. 이 앨범들은 재즈 팬들의 필수 컬렉션 대상들이기도 하다. 같은 해 < Ella Fitzgerald Sings The Cole Porter Song Book >(1956)이 재즈 판을 휩쓸며 베스트셀러로 기록되는 성공을 거둔다. 이를 시작으로 엘라는 조지 거쉰(George Gerswin), 제롬 컨(Jerome Kern), 해롤드 알렌(Harold Arlen), 어빙 벌린(Irving Berlin)등 1세대 틴 팬 앨리 작곡가들의 명곡들을 자신의 목소리로 담아내는 방대한 작업을 수행한다. 이런 그녀의 노력은 틴 팬 엘리 작곡가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dgers)와 하트 로렌즈(Hart Lorenz)의 곡으로 꾸며진 실황 앨범 < Ella Fitzgerald Sings The Rodgers And Hart Song >(1957)의 성공으로 이어지며 마침내 재즈의 ‘퍼스트 레이디‘로 군림하게 된다. 틴 팬 앨리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1958-59년 사이에 녹음해 발표한 조지 & 이라 거쉰(George & Ira Gershwin)의 곡을 집대성한 < The George & Ira Gershwin Song Book >(1959)을 통해 정점에 다다른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 엘라는 < Mack The Knife-Ella In Berlin >(1960)을 폴 스미스(Paul Smith) 쿼텟의 연주로 녹음된 라이브 앨범을 공개, ‘How high the moon’, ’Mack the knife’를 히트시킨다. 이후 1963년엔 명 프로듀서이자 작곡가인 퀸시 존슨(Quincy Jones)이 편곡으로 연주된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와의 협연작 < Ella & Basie! >과 1965년엔 오랫동안 음악적 교분을 쌓아온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과 다시 의기투합해 < Ella At Duke Place >를 각각 발표하는 등 스윙의 거장과의 잇단 명작을 공개한다. 캐피톨(Capitol)로 이적해 다시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간 엘라는 1969년 그만 백내장으로 인해 잠시 활동을 중단한다. 1973년 연로한 나이에 불구하고 < Ella Fitzgerald At The Carnegie Hall >을 발표했고, 1977년 몬트럭스 재즈 페스티벌에도 참가해 실황 앨범 < Ella Fitzgerlad With The Tommy Flanagan Trio-Montreux’77 >을 공개하며 예순이라는 나이가 무색한 손색없는 보컬 기량을 선보였다. 1980년대 이르러 지병인 심장병으로 인해 예전만큼의 노련함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엘라는 근근히 연주 활동을 지속해나간다. 그러나 나빠진 건강과 시력을 인해 그녀는 1994년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2년 후인 1996년 6월 15일 비버리 힐즈에 있는 자신에 집에서 세상을 떠난다.
노래 : Frank Sinatra (프랭크 시나트라,Francis Albert Sinatra)
스타 앞에서 소녀 팬들이 괴성을 지르다 졸도하는 장면은 팝 음악 또는 록 음악의 무대에서만 발견되는 히스테리적 광경이다. 비틀스, 베이 시티 롤러즈, 마이클 잭슨, 뉴 키즈 온 더 블록 등이 그런 장면 하면 떠오르는 스타들일 테지만, 그 부문의 원조는 역시 시대적으로 가장 앞선 50년대의 슈퍼스타 엘비스 프레슬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엘비스 이전에 십대 소녀의 아우성과 기절 소동을 일으킨 스타가 분명히 있었다. ... 스타 앞에서 소녀 팬들이 괴성을 지르다 졸도하는 장면은 팝 음악 또는 록 음악의 무대에서만 발견되는 히스테리적 광경이다. 비틀스, 베이 시티 롤러즈, 마이클 잭슨, 뉴 키즈 온 더 블록 등이 그런 장면 하면 떠오르는 스타들일 테지만, 그 부문의 원조는 역시 시대적으로 가장 앞선 50년대의 슈퍼스타 엘비스 프레슬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엘비스 이전에 십대 소녀의 아우성과 기절 소동을 일으킨 스타가 분명히 있었다. 그 주인공은 40년대의 빅 스타 프랭크 시나트라가 되는 셈이다. 40년대를 통해 그는 여성팬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42년 그가 ‘타미 도시와 그의 오케스트라’의 싱어로 활약하면서 뉴욕의 파라마운트 극장 무대에서 공연을 가졌을 때 수많은 여고생들이 입장하려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당시는 ‘빅 밴드’가 위세를 떨치던 시절이었지만 소녀들은 빅 밴드의 음악을 감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밴드의 젊고 깡마른 가수를 보려고 벌떼처럼 몰려든 것이었다. 그가 무대에 입장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객서의 십대 소녀들은 목청이 터져나가도록 소리를 내질렀고 급기야 복도에서 졸도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때 졸도한 소녀들 가운데는 홍보 전략의 일환으로 돈을 주고 고용한 사람도 끼어 있었다는 보도가 이어져 ‘흠집’을 남겼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현대의 ‘팝 히스테리’가 탄생된 순간이었다. 44년 10월에 있었던 파라마운트 공연에서는 무려 2만 5천명의 틴에이저들이 거리를 막고 아우성치는 대소동이 일어나 십대 우상으로서의 그의 면모가 재확인되었다. 그래서 한때 시나트라는 ‘졸도 유발의 황제’ ‘수백만을 전율시키는 목소리’(나중에는 단축되어 ‘목소리’)라는 닉네임이 붙기도 했다. 젊음의 음악인 록 뮤직이 아닌 당시의 팝, 그것도 ‘어른적인’ 스탠다드 팝을 가지고 소녀 관객의 흥분을 자극했다는 점은 실로 기념비적이었다. 그만큼 그는 충분한 매력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때는 전시(戰時)였고 젊은 남자들이 징병으로 끌려가 없고 여성들 가슴에 고독이 엄습해 왔을 때 ‘이웃집 청년’같은 그는 알맞은 해소 상대가 되었던 것이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1915년 뉴 저지주 호보큰시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노래부르는 재질이 뛰어나 고교 때는 교내 합창단을 조직하기도 했으면 졸업 후에는 신문을 나르는 트럭 운전사, 스포츠 기고가로 활약했다. 36년 빙 크로스비의 공연을 보고 가수가 되기로 결심했고, 이듬해 팝계에 데뷔했다. 그 후 그는 십대 소녀의 우상이 되었고 팝계뿐 아니라 영화계도 섭렵, 전천후 스타로 명성을 휘날렸다. 80세를 목전에 둔 지금도 활약을 계속하여 ‘팝 뮤직의 살아 있는 역사’로 불려지고 있다. 그는 장구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대부분의 음악팬들에게 ‘품위있는 노신사’, ‘노래하는 예술가’ 등 좋은 이미지를 남겼다. 그러나 그는 대중음악계 ‘보수 진영의 원로’라는 지적을 받을 만큼 보수의 목소리를 대변, 비판적 시각의 젊은이들로부터는 적지 않은 비난세례를 받기도 했다. 그는 청년 세대의 우상으로 무대생활이 펼쳐졌지만 그의 시대 이후 등장한 젊은 감각의 노래에는 등을 돌렸다. 그는 4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기성세대와 ‘중산층의’ 대중음악인 스탠다드 팝만을 고수했다. 그가 선 무대는 늘 그런 음악에 걸맞는 고급 사교홀이나 서민층은 접근하기 어려운 대극장이었다. 편안하게 연예계를 주름잡고 있던 그는 50년대 중반 일대 위기를 맞았다. 대중음악계에 록 뮤직이 침투한 것이었다. 그는 뉴 뮤직인 록큰롤이 팝계를 강타하고 젊은층을 장악하게 되면서 스탠다드 팝의 인기가 폭락하자, 즉각 위기관리자의 역할을 자처하여 록에 대한 비판의 선봉장으로 나섰다. 이때 그의 나이 이미 사십대에 들어서 리듬이 강한 록 음악을 그가 수용하는 것 자체가 힘들기도 했지만 그것에 대한 시각은 너무도 강경했다. 그는 58년 의회의 연단에 등장, 록 음악의 폐해를 증언했다. 여기서 그는 록큰롤을 “가장 야수적이고 절망적이고 추하며 사악한 표현양식”이라고 성토했다. 또 록큰롤 하는 가수들은 저능한 되풀이와 교활하고 저속한, 단순하게 말하면 더러운 노랫말로 십대를 유혹하는 ‘백치의 깡패들’이라는 것이었다. 나쁘다는 어휘는 총동원시킨 듯한 이런 규탄도 부족했던지 시나트라는 “그런 빗나간 방식으로 록 음악은 지구상의 모든 구렛나룻 십대 범죄자들의 군대 음악이 되려 하고 있다”거 쏘아붙였다(구렛나룻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상징이었다). 스탠다드 팝의 위기라는 판단에서 록을 공박한 이유도 있었지만 그는 록 뮤직의 이념적 특질이라고 할 기성세대와 사회에 대한 도전적 가치를 혐오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자기 세대의 음악 스탠다드 팝에 평생 수절(?)한 만큼, 50년대 이후 록 음악과포크 음악이 내세운 ‘저항’의 기조에는 쌍심지를 켜고 반발했던 것이다. 저항을 이념으로 했던 70년대 말의 펑크를 비난한 것이나 90년대 미국 국가의 연주를 거부해 물의를 빚은 시네드 오코너의 행각에 크게 분노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록 음악 불가론’을 제창했던 그는 록의 위용이 의외로 거세다고 판단, 곧 입장을 수정했고 60년 TV 프로그램에서는 군복무를 마치고 귀향한 엘비스 프레슬리를 ‘무대의 황제’라는 칭송과 함께 그를 따뜻하게 환영하기도 했다. 그는 데뷔이래 부와 명성에 엄청난 집착을 보여온 인물로 유명하다. 한 예가 그의 대표작이 된 53년도 영화 < 지상에서 영원으로 >(From Here To Eternity)와 관련된 에피소드. 40년대에 천하를 호령하던 그는 50년대 초반 여러 악재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갑작스런 슬럼프에 직면했다. 가수에게 중요한 목 상태가 악화되었고 두 번째 아내 에바 가드너와의 파경으로 이미지가 실추된 것이 주원인이었다. 레코드 판매는 뚝 떨어졌고 영화 출연 제의가 끊겼으며 목에서는 피가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재기를 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 지상에서 영원으로 >의 돋보이는 마지오 배역을 따내야 했다. 스타임에도 불구하고 스크린 테스트를 받았으며 배당금을 취소로 정하는 수모도 감내했다. 이를 악물고 덤벼든 결과 그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위기관리의 천재다운 면모였다. 그는 소속 레코드사인 캐피톨을 떠나 61년 리프라이즈 레코드사를 차려 사장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2년 뒤인 63년 회사를 대기업인 워너브라더스에 팔아넘겼다. 리프라이즈의 매매는 그에게 엄청난 돈을 안겨주었고, 그는 이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엔터테이너 중 한 사람으로 부상했다. 그에게 최고가치는 언제나 달러였고 그는 열심히 그것을 찾아다녔다. 그는 사업운영에 있어서 간혹 정계와 손을 대기도 해 논란을 빚었으며 72년에는 경마장의 부정거래 혐의로 조사를 받고 의회의 범죄색출위원회에 출두, 신문의 톱 뉴스를 장식하기도 했다. 이같은 스캔들은 80년대에도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다. 그는 케네디 대통령 때부터 마피아와 밀월관계에 있었으며, 마피아를 등에 업고 연예활동을 해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 86년에는 시나트라와 마피아의 관계를 폭로한 그의 전기 『그의 길』(His Way)이 출간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프랭크 시나트라에게 가장 비난이 집중되었던 사건은 보츠와나 공화국의 ‘선 시티’ 공연 부분이었다. 81년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만든 초호화판 휴양지인 이 공연장의 개막식에 리자 미넬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고 특별무대를 가졌다. 그는 9일간 여기에 출연하는 대가로 1백 60만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을 샀다. 그의 선 시티 출연은 폭압적 인종 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시행하는 남아공의 체제유지에 기여하는 기회주의적 태도로 의식 있는 팝 가수 진영으로부터 지탄을 받기에 충분했다. 85년 리틀 스티븐(스티븐 밴 잰트)의 발의로 결성된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항하는 아티스트연합’은 ‘반(反)선 시티’를 주장하면서 프랭크 시나트라를 비롯한 일부 팝 가수들의 비양심을 맹공했다. 선 시티 출연으로 평소 ‘진보적 민주주의자’로 인식되어온 그의 이미지는 크게 추락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본래의 보수성을 그럭저럭 잘 감추어온 그의 정체를 확실히 밝혀준 ‘오점’이 되었다. 그는 정당과 관련하여 애초 40년대에는 보수적인 공화당보다는 개혁지향적인 민주당 쪽이었다.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도 그는 진보파인 민주당후보 프랭클린 루즈벨트를 지지했으며 루즈벨트를 존경하는 뜻에서 그의 이름을 따 자기 아들의 이름을 프랭클린 웨인 시나트라로 짓기도 했다. 47년에는 쿠바를 방문해 공산주의자라는 공격을 받기도 할 정도로 진보적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정치적 입장의 고수는 정치에 대한 관심과 반비례했다. 그는 74년 미국을 방문한 이탈리아 안드레오티 수상을 환영하기 위해 ‘공화당’의 닉슨 대통령이 베푼 백악관의 만찬석상에 출연, 노래를 불렀다. 자신의 속뜻이 어떠했든 결과적으로 그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입지를 변화시킨 ‘철새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히트송 레퍼터리는 나열이 벅찰 정도로 무수하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뭐니뭐니해도 ‘나의 길(My Way)’일 것이다. 원래는 프랑스 샹송으로, 라스베가스에 함께 출연하고 있던 폴 앵카가 은퇴를 앞둔 시나트라를 위해 영어 가사를 붙여 개작해준 곡이다. 시나트라의 인생이 그려진 자전적 작품이기도 하다. 미국에서는 그다지 크게 히트하지 못했으나, 영국에서는 40위권내에 무려 122주간 랭크되는 전무후무한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다. ‘인생의 종반부가 다가와 난 종막을 맞이하고 있네. 여러 벗들에게 나만이 확실히 알고 있는 인생 기록을 말하겠노라. 난 인생의 항로를 고루 밟아가며 꽉찬 삶을 살아왔지. 그게 나의 길이었소. 후회도 얼마간 있었지.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특별히 언급할 것은 없었네.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철저히 해내었지. 항상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전세 낸 인생 코스를 계획했지. 그게 나의 길이었소. 물론 감당하지 못할 고난의 시절이 있었지. 의혹의 순간도 있었다오, 그러나 난 그것을 나 혼자 씹어 삼키고 그것에 정면으로 맞서 당당히 일어섰지. 소신을 굽히지 않고 살아온 그것이 나의 길이었소.’ 이 노래로 인생을 정리한 그는 70년 은퇴를 공식 선언했으며, 71년에는 화려한 고별무대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불과 2년 후인 73년 그 결심을 번복하고 다시 팝계에 복귀해 노래와 연기를 계속했다. 그러한 것이 바로 프랭크 시나트라의 길이었다.
솜사탕같이 부드럽고 격조 있는 발라드 음악을 들려준 냇 킹 콜은 1940-50년대 백인 재즈 보컬의 대명사 프랭크 시내트라의 인기전선에 위협을 가한 유일한 흑인 크루너(crooner)이다. 반세기가 넘도록 대중들의 끊임없는 추종을 받고있는 그는 틴 팬 앨리 출신의 작곡가 어빙 벌린이 작곡한 발라드의 고전 ‘Unforgettable’(1951), 바로 그 곡의 주인공이다. 대중들은 그의 이름을 듣고 ‘가수’로서의 ... 솜사탕같이 부드럽고 격조 있는 발라드 음악을 들려준 냇 킹 콜은 1940-50년대 백인 재즈 보컬의 대명사 프랭크 시내트라의 인기전선에 위협을 가한 유일한 흑인 크루너(crooner)이다. 반세기가 넘도록 대중들의 끊임없는 추종을 받고있는 그는 틴 팬 앨리 출신의 작곡가 어빙 벌린이 작곡한 발라드의 고전 ‘Unforgettable’(1951), 바로 그 곡의 주인공이다. 대중들은 그의 이름을 듣고 ‘가수’로서의 냇 킹 콜만을 떠올릴지 모르지만, 가수로 성공하기 전인 1930-40년대에 그는 미국 로스엔젤레스(L.A) 지역에서 이름을 날리던 재즈 피아니스트였다. ‘냇 킹 콜 트리오’를 결성해 활동하던 1930년대 말-1940년 대 초까지 그는 수많은 레코드를 녹음해 발표했다. 기타, 베이스, 피아노로 구성된 독특한 재즈 트리오 양식을 정립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비밥 재즈의 봉인 버드 파웰이 드럼-베이스-피아노로 이뤄진 트리오 양식을 제시하면서 지금까지 이 편성이 굳혀지긴 했지만, 재즈 트리오로 대중적인 인지도를 처음 얻은 사람은 바로 냇 킹 콜이었다. ‘Route 66’(1943) 와 같은 히트곡을 발표하기도 한 냇 킹 콜 트리오는 한결 부드럽고 팝 적인 색채의 재즈 연주로 주목받으며 이후 1950년대 명성을 얻은 오스카 피터슨(Oscar Peterson) 트리오의 출현을 예견케 했다. 1945년 캐피톨(Capitol) 레코드사와 계약하면서 이후 그는 피아니스트로서보다 수많은 히트곡을 팝 차트에 올리는 가수로서 우리에게 기억된다. 1917년 생으로 어린 시절을 시카고에서 보낸 그는, 12살 때 부터 교회 성가대에서 오르간을 연주했다. 형제가 모두 재즈 음악인으로 성장했을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음악적으로 유복했던 그는 1936년 재즈 베이스주자 에디 콜(Eddie Cole)의 밴드에서 잠시 몸을 담지만, 얼마 후 자신의 무대를 찾아 로스엔젤레스로 이주한다. 이런저런 쇼 무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자신의 음악세계를 찾기에 몰두한 끝에 기타리스트 오스카 무어(Oscar Moore), 베이시스트 웨슬리 프린스(Wesley Prince)를 만나며 ‘냇 킹 콜 트리오’를 헐리우드에서 출범시킨다. 이들의 음악은 초기엔 순수 연주곡 중심이었으나, 1940년 데카(Decca)레코드와 계약하면서 ‘Sweet Lorraine’(1940)을 그의 노래로 녹음했고, 이내 대중들의 호응에 힘입어 그는 트리오에서 피아노와 노래를 병행하게 되었다. 냇 킹 콜 트리오는 1940년대 초반 대중들의 성원에 힘입어 ‘Route 66’, ’Straighten up and flying right‘(1943)와 같은 히트곡들을 연이어 발표한다. 40-50년대 명성을 구가했던 아마드 자말 트리오,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 아트 테이텀 트리오는 모두 냇 킹 콜 트리오(피아노/베이스/기타)를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 ‘The christmas song’(1947) , ’Nature boy’(1947)와 같은 히트곡을 연이어 발표한 냇 킹 콜 트리오활동은 1940년대 말까지 지속된다. 그러다 1950년, 그의 트리오가 오케스트라 세션을 넣어 발표한 ‘Mona risa’가 차트 넘버원을 기록하며 냇 킹 콜은 더 이상 피아노 연주자가 아닌 인기 정상에 가수로 탈바꿈한다. 그의 노래는 어느덧 재즈뿐만 아니라 팝 청취자들의 애청 곡 리스트에 올라가게 되었고 대중들은 차츰 그가 재즈 피아니스트였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다. 이후 ‘Unforgettable’, ’Ramblin’ rose’(1962)를 비롯한 수많은 히트곡을 차트에 올려놓으며 발라드 가수로서만 활동하게 된다. TV가 미국 대중들의 안방에 자리하면서 그는 쇼에 출연하며 50-60년대 내내 인기가수로서 분주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1965년 폐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의 음악엔 더 이상 재즈 피아니스트로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이후 그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 양상을 띄게 된다. 트리오 양식의 대중화를 가져온 ‘재즈의 선구자’라는 호평에 반해 발라드 가수로서 백인 청취자들의 귀를 즐겁게 하며 ‘재즈를 팔아먹은 장본인’이라는 비난 역시 감수해야 했다. 재즈의 선조 루이 암스트롱을 비롯해, 마일즈 데이비스, 조지 벤슨과 같은 거물급 재즈 스타가 겪은 이 대중성과 음악성과의 숙명과도 같은 패러독스는 냇 킹 콜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그는 2000년대인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추앙 받는 뮤지션이다. 초기의 그의 연주 스타일은 재즈 연주의 백미라 할 트리오 양식의 발전에 기여했고, 부드럽게 감싸주는 듯한 그의 바리톤 보컬은 샘 쿡, 마빈 게이, 루더 밴드로스로 이어지는 소울 팝 가수들이 반드시 참고해야 할 ‘보컬 연주의 교과서’로 자리 메김 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룩했던 위업을 지금껏 꾸준히 이어나가는 그의 딸이자 재즈 보컬 나탈리 콜(Natalie Cole)과 함께 한 ‘Unforgettable’(1994)로 탈바꿈 해 대중들을 놀라게 했다. 이미 세상에 안 계신 아버지와 딸의 목소리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첨단 디지털 기술은 그 만의 독창적인 보컬 스타일은 지금에도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며 많은 후배 보컬리스트들에 의해 여전히 계승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재즈 보컬 재즈 보컬
노래 : Carmen McRae (카르멘 맥레이 )
재즈 보컬, 피아노 연주자 재즈 보컬, 피아노 연주자
노래 : Billie Holiday (빌리 할리데이)
재즈 보컬 재즈 보컬
노래 : Marlene Dietrich (마를렌 디트리히)
노래 : Fred Astaire (프레드 아스테어)
노래 : Anita O'Day (애니타 오데이,Anita Belle Colton)
재즈 가수 재즈 가수
연주 : Miles Davis Quintet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
연주 : Art Farmer (아트 파머 ,Arthur Stewart "Art" Farmer )
재즈 트럼펫 연주자 재즈 트럼펫 연주자
‘음의 마술사’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은 두말할 필요없이 재즈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대가로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다. 1927년 데뷔이래 근 50년에 이르는 오랜 활동 기간동안 무려 6000곡이라는 미증유의 창작력을 보이며 빅 밴드 재즈 연주가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실험과 혁신을 선보였다. 그는 빅 밴드를 구성하는 악기 하나 하나의 특색을 정확히 이해했다. 관악기의 독특한 울림이 들리는 그의 ... ‘음의 마술사’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은 두말할 필요없이 재즈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대가로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다. 1927년 데뷔이래 근 50년에 이르는 오랜 활동 기간동안 무려 6000곡이라는 미증유의 창작력을 보이며 빅 밴드 재즈 연주가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실험과 혁신을 선보였다. 그는 빅 밴드를 구성하는 악기 하나 하나의 특색을 정확히 이해했다. 관악기의 독특한 울림이 들리는 그의 음악엔 그만의 음색이 느껴진다. 여기에 그는 재즈의 정체성을 강화해주는 다양한 화성 전개를 고안했고, 클래식 음악에서나 볼 수 있는 조곡(suite) 형식의 대곡을 재즈로 소화해낸다. 사후에도 그의 음악유산은 막대한 영향력을 과시, 많은 음악 학자들이 “듀크 엘링턴은 세계 대중음악을 20년 이상 앞당겼다”고 평했을 만큼 그는 재즈를 예술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1899년 4월29일, 에드워드 케네디 엘링턴이라는 본명으로 미국 워싱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 연주를 접한다. 아버지는 백악관에서 일하는 집사였고 당시 흑인들 중에선 드물게 중산층에 속했던 덕에 가정교사를 통해 정규 클래식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914년, ‘Soda fountain rag’와 ’What you gonna do when the bed breaks down’를 처음으로 작곡했고, 18세 때에는 워싱턴 지역의 유명한 밴드 리더로서 지역의 유명인사로 떠오른다. 1923년 재즈의 메카로 부상하던 뉴욕에 진출한 그는 자신의 밴드 ‘더 워싱턴스’(The Washingtons)를 결성한다. 이 때 자신의 이름에 영예로운 공작(Duke) 칭호를 부여하며 듀크 엘링턴으로 개칭한다. 1927년에 이르러 밴드는 뉴욕 지역의 여러 나이트클럽에서 인정을 받았고, 얼마 후 백인 전용클럽이었던 코튼 클럽(Cotton Club)에 입성한다. 그가 악장으로 일하게 된 코튼 클럽은 미국의 상류층들이 가무를 즐기던 곳으로 이후 재즈의 상징어가 된다. 뉴 올리언즈의 스토리 빌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음악 생활을 하게 된 그는 바야흐로 자신의 음악세계를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고 여기서 그의 첫 출세작 ‘East St. Louis toddle-oo’(1927)가 발표된다. ’와우-와우‘하는 독특한 트럼펫 소리가 시작을 알리는 이 곡은 당시까지의 재즈 연주가 대부분 장조였던 것과 달리 구슬픈 멜로디가 들리는 단조 풍의 연주곡이었다. 독특한 악기 음색과 치밀한 계산이 돋보이는 연주 편곡은 당시 28세를 갓 넘은 청년 듀크 엘링턴을 일약 재즈의 비범한 뮤지션으로 상승시킨다. 1931년까지 코튼 클럽에서 연주를 하며 ‘Black beauty’(1928), ’Mood indigo’(1930)와 같은 걸작을 남긴다. 하지만 대공황이라는 경제 한파는 코튼 클럽에 사람들의 발길을 주춤케 했고 그는 잠시 유럽으로 진출, 이후에 있을 전성기를 위한 ’일보후퇴‘를 택한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경제 개혁은 미국 사회에 다시 활기를 되찾게 해준다. 여기에 NBC, CBS, ABC 미국 3대 라디오 방송국이 뉴욕에 생기면서 재즈 음악인들은 금주(禁酒)령으로 묶인 그들의 창작 혼을 다시금 살려 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맞이한다. 듀크 엘링턴은 이 절호의 찬스를 통해 ‘스윙의 왕’으로 군림하며 1930-40년대를 그의 음악 경력 상 최고의 절정기로 기록되게 한다. 경제 공황이라는 무거운 짐을 떨쳐버린 1930년대 미국 시민들은 신나고 경쾌한 음악을 필요로 했고, 1935년 베니 굿맨과 카운트 베이시로 대표되는 스윙(Swing)의 폭발은 뉴욕 시내의 무도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코튼 클럽에서 다시 지휘봉을 잡은 듀크 엘링턴은 이 시기에 ’It dont mean a thing(If it ain’t got that swing)’(1932), ’Echoes of Harlem’(1936), ‘Dimuniendo in blue’(1937), ‘Cotton tail’(1940), ’Ko-ko’(1940), ’Take the “A" train’(1941) 등 그를 대표하는 수많은 명곡들을 발표한다. 특히 1937년에 발표한 ’Dimuniendo in blue’는 재즈 역사에서 처음으로 접하는 7분이 넘는 대곡이다. ‘Dimuniendo in blue’가 탄생하기까지엔 웃지 못할 애피소드가 있다. 1930년대 당시 SP(78회전)음반 한 면에는 대략 3분 정도의 음악 밖에 수록할 수 없었다. 이 음악을 녹음하기 위해 그는 앞뒷면을 전부 사용해서 녹음을 했고, 결국 7분이 넘는 연주 테입은 SP 음반에 앞뒷면으로 나뉘어져 실린다. ‘3분 짜리 춤곡’으로 인식되었던 당시 스윙 음악 스타일에 그는 자신의 음악성을 한정 당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스윙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당당하게 외친 그는 스윙이라는 음악을 단순한 ’춤곡‘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고자 했다. 훗날 마일스 데이비스가 애용했던 플런저(Plunger; 트럼펫 앞을 막았다 닫았다 하며 음색을 조절하는 기구, 우리말로 소음기라고도 한다)를 이용한 트럼펫의 독특한 울림은 여전히 연주 전체에 ’약방의 감초‘처럼 짜릿한 생기를 불어넣었고, 정적인 분위기와 웅장한 분위기를 번갈아 가며 연출하는 세련된 편곡은 스윙 연주 편곡의 전형을 제시했다. 단조와 장조를 교묘하게 합쳐 놓은 듯한 정교한 멜로디 진행, 싱코페이션(당김음)을 이용한 원활한 감정 처리, 극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빠르기 조절과 다양한 악기 음색을 실험하며 그는 정통 재즈(mainstream)의 알파에서 오메가까지를 자신의 음악에 모두 담아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무렵 ’재즈의 세대교체’를 선언하며 등장한 비밥(Bebop)의 선풍에 아랑곳없이 듀크 엘링턴은 여전히 자신의 빅 밴드를 지속시키며 스윙을 고집했고, 주변의 많은 밴드들을 위해 수많은 곡을 써 줄 정도로 왕성한 창작력을 유지한다. 1950년대 중반에 들어 그는 작곡 구조에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조곡’(suite)형식이 바로 그것인데, 하나의 커다란 주제를 갖고 여러 소품들을 만들어 전체가 하나의 큰 대곡 형식을 갖추는 조곡을 재즈에 도입해 그는 다시 한번 재즈 역사에 방점을 찍는다. 그의 작곡 콤비로 오랜 동안 함께 해온 작곡가 빌리 스트레이혼(Biily Strayhorn)과 공동으로 작, 편곡하여 1957년 발표한 < Such Sweet Thunder >같은 앨범은 조곡 스타일의 재즈 연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극찬을 받았다. 세익스피어(Shakespear)의 작품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묘사한 이 작품은, 재즈 역사에 손꼽히는 명반 중 하나로 남아있다. 1956년 뉴욕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하며 듀크 엘링턴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1950년대 말엽과 1960년대의 활동은 비록 1930년대만큼의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쉬지 않고 빅 밴드를 이끌며 세계 투어를 비롯하여, 활발한 음반 발표와 곡 작업을 지속한다. 이 당시에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Tourist point of view’(1966)같은 곡에선 말년에 아랑곳없이 기세 등등한 멤버들의 연주실력과 그의 변함 없는 음악성이 느껴진다. 빅 밴드 단원들은 기복 없는 안정적인 연주를 했는데, 이는 1930년대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 평생을 같이한 단원들이 함께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바리톤 색스폰 주자 해리 카네이(Harry Carney)는 듀크 엘링턴이 코튼 클럽에서 데뷔한 1927년 때부터 무려 47년 동안 그가 그의 밴드 멤버로서 활동한다. 후반기 명작으로 거론되는 재즈 조곡 < Latin American Suite >(1970)를 발표하고 끊임없는 투어는 1970년대 초까지 계속 되었으나 몸이 쇠약해진 듀크 엘링턴은 결국 1974년 5월 24일 세상을 떠나고 만다. 끊임없이 재즈 음악에 새로움을 불어넣기 위해 자기개발에 부단했던 그는 죽을 때까지도 피아노 앞에서 작곡을 놓지 않는 열정의 소유자였다. ‘위대한 재즈 맨’ 듀크 엘링턴은 그의 밴드와 자신의 곡으로 미국 대중음악의 국보인 재즈의 위상을 한껏 높이는데 기여했다. 클래식 계를 비롯한 전 세계의 유명한 작곡가들은 지금까지도 초연 되지 않은 그의 곡들을 연구하며 지금도 그의 놀라운 음악성에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재즈 피아노 연주자
비밥 피아니스트 버드 파웰은 재즈 피아노 연주의 새로운 패턴을 확립한 인물이다. 20-30년대까지 재즈 피아노 연주의 주류를 이루던 스트라이드 주법(랙타임에서 유래)은 그로 인해 왼손의 역할은 줄어들고 오른손이 연출하는 고난이의 연주 기교가 더욱 중시된다. 왼손으로 ‘움파-움파’하는 식으로 리듬을 만들어 주던 초기재즈-스윙 시대의 피아노 연주는 그의 새로운 시도로 인해 왼손은 코드의 변화만을 집어주고 대신 오른손... 비밥 피아니스트 버드 파웰은 재즈 피아노 연주의 새로운 패턴을 확립한 인물이다. 20-30년대까지 재즈 피아노 연주의 주류를 이루던 스트라이드 주법(랙타임에서 유래)은 그로 인해 왼손의 역할은 줄어들고 오른손이 연출하는 고난이의 연주 기교가 더욱 중시된다. 왼손으로 ‘움파-움파’하는 식으로 리듬을 만들어 주던 초기재즈-스윙 시대의 피아노 연주는 그의 새로운 시도로 인해 왼손은 코드의 변화만을 집어주고 대신 오른손으로 현란한 즉흥성을 강화시킨다. 비밥의 혁명을 주도했던 젊은 흑인 뮤지션들은 연주 전체를 누가 리드하느냐의 상관없이 밴드내 연주자 개개인이 동등하게 주목받길 원했고, 이를 위해선 악기 각자가 보다 강화된 솔로 연주를 필요로 했다. 버드 파웰은 스윙시대까지 색스폰과 트럼펫이 주 선율을 담당하고 리듬과 선율을 동시에 책임지던 피아노의 위상을 좀 더 ‘선율’에 비중을 두면서 피아노 연주는 색스폰과 트럼펫처럼 우렁차게 부각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그는 재즈 피아노 연주 주법을 한껏 풍성하게 해준 인물이다. 또한 그는 피아노 트리오의 전형을 제시했다. 막스 로치(또는 로이 헤인즈)의 드럼, 토미 포터(토는 컬리 러셀)의 베이스로 구성된 그의 초기 트리오는 이후 등장할 재즈 트리오 연주 대중화의 시조 격이었다. 다시 말해 그가 없었다면 빌 에반스, 오스카 피터슨의 트리오 연주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인 호응을 얻었던 80-90년대 칙 코리아와 키스 자렛의 트리오 연주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전성기는 그러나 비밥의 출현이 있던 1945년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로 다소 짧았다. 비밥 시대의 재즈 피아노 연주의 혁신자이자 동료였던 셀로니어스 몽크보다 초기엔 주목을 많이 받았지만, 상습적인 마약 복용과 정신병까지 겹쳐 이후 지속적인 활동을 펼쳐 보이지 못하고 40대 초에 세상을 등지고 만다. 1924년 뉴욕 태생인 파웰은 이미 10살 때 팻츠 월러와 아트 테이텀의 곡들을 연주할 수 있는 신동이었다. 열 여덟 살이 되던 해 선배였던 몽크의 주선으로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서 찰리 파커, 찰리 크리스찬과 함께 연주 하게된다. 또한 당시 몽크가 몸담고 있었던 쿠티 윌리엄스 오케스트라에서도 참여하고,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 콤비와 함께 1945-1947년까지 한솥밥을 먹는다. 당시 그의 독창적인 피아노 주법은 수많은 비밥 아티스트들이 ‘같이 연주하고 싶은 피아니스트 1순위’로 그를 격상시켰고, 일약 그는 비밥 피아노 연주의 대가로 자리를 굳힌다. 그러나 파웰은 당시 마약 중독자였고, 술과 마약으로 인해 온갖 트러블을 일으킨 탓에 경찰서를 자기 집 드나들듯이 했다. 여기에 정신병까지 도져 그는 이후에도 황금 같은 젊은 시절은 마약-정신병원으로 허비한다. 정신병원 퇴원 후인 1949년 그의 실질적인 첫 솔로 앨범 < The Amazing Bud Powell Vol.1.2 >와 이듬해 < The Genious Bud powell >을 각각 블루 노트사와 버브사에서 발표한다. 이 두 앨범은 그의 초기 연주 스타일을 잘 집약한 대표작들로서, 몽크와 ’Misty’의 주인공 에롤 가너(Eroll Garner)를 제외한 수많은 재즈 피아니스트들이 비껴갈 수 없는 ‘재즈 피아노 연주의 고전’으로 자리 매김 한다. ‘Bouncing with bud’, ’Hallucination’, 몽크의 역작이기도 한 ’52nd street theme’, ‘Un poco loco’와 같은 곡만 들어봐도 그가 왜 비밥 피아노 연주의 대표격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전성기는 1953년에 정점에 다다르다가, 이후 잦은 마약 복용과 정신병원 신세로 급속하게 건강이 악화되면서 하향세로 급락했다. 1966년 세상을 뜰 때까지 지속적으로 활동을 펼쳤지만 비밥 초기의 예리함은 점점 무뎌만 져갔고, 사람들 뇌리 속에서도 잊혀져만 갔다. 프리 재즈 피아니스트 세실 테일러(Cecil Taylor)가 등장하기 전까지 파웰의 연주는 독보적이었다. 오른손의 자유자재로운 연주를 통해 그는 재즈 피아노 선율의 흥취를 배가시키며 재즈 피아노 연주의 위상을 한층 높여 놓는다. 버드 파웰의 피아노 연주는 비밥 피아노 연주자라면 반드시 넘어야 할 산과도 같은 존재였다.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재즈 피아노 연주자
1955년 3월12일, 뉴욕의 어느 조그만 아파트에서 한 흑인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 관계자들은 시신을 살펴본 뒤 조사내용을 서류에 기입했다. 사인은 약물중독에 의한 심장마비, 인종은 흑인, 나이는 약 65세. 당시 현장의 경찰 관계자들은 그것이 누구의 시신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비밥의 혁명가’ 찰리 파커(Charlie Parker; 이하 버드)의 죽음은 이토록 비참했다. 1920년... 1955년 3월12일, 뉴욕의 어느 조그만 아파트에서 한 흑인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 관계자들은 시신을 살펴본 뒤 조사내용을 서류에 기입했다. 사인은 약물중독에 의한 심장마비, 인종은 흑인, 나이는 약 65세. 당시 현장의 경찰 관계자들은 그것이 누구의 시신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비밥의 혁명가’ 찰리 파커(Charlie Parker; 이하 버드)의 죽음은 이토록 비참했다. 1920년 생이니까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35살, 하지만 술과 마약에 찌든 그의 몸은 망가져 있었고, 그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65살 노인으로 착각했을 정도이니 그의 건강이 얼마나 절체 절명의 상황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화배우이자 제작자인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가 감독한 영화 < Bird >(1988)는 이 비운의 버드의 생애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1945년,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Minton’s Play House)에서 동료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와 함께 한 성공적인 데뷔를 시작으로 그는 하루아침에 재즈계의 유명 인사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가 창안한 비밥이란 문법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출 수 없다’는 이유로 대중들의 차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그의 뇌리 속엔 ‘자신은 흑인’이라는 운명이 자리잡고있었다. 공연 때마다 그를 보러오는 백인 여성들은 그를 유혹했고 하루에도 몇 번씩 그는 이들과 성의 향연(?)을 벌이곤 했다. 하지만 흑인이었기에, 그의 천재성은 백인이 패권을 지고 있던 미국 사회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타협이라곤 모르는 그의 성격은 그를 차츰 고립의 늪으로 치닫게 했고, 외로움을 잊기 위해 20년 넘게 해온 마약과 술은 그를 파멸로 몰아넣었다.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서 디지가 작곡해 준 ‘Groovin’ high’를 그의 색스폰으로 우렁차게 울린 그 날, 재즈의 역사는 다시 쓰여졌다. 비밥(Bebop)이라는 재즈의 신종 문법은 1940년대 주류 대중음악인 스윙의 대세를 벗어나 20대 초의 젊은 흑인 재즈 뮤지션들을 중심으로 ’음악적 실험‘을 끝에 비밥은 빛을 본다. 바야흐로 모던 재즈 시대를 활짝 열어놓은 이들 젊은 뮤지션들은 중 단연 눈길을 끌었던 인물은 바로 버드였다. 그의 천재성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미국 캔사스 씨티 출신인 그는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와 같은 스윙 스타를 배출한 캔사스 씨티 음악 씬의 중심부에서 소년기를 보낸다. 바리톤 색스폰을 독학으로 익힌 그는 14세가 되던 1934년, 학교를 그만두고 그 지역 밴드들을 따라다니며 색스폰 연주를 익혀나간다. 이곳저곳을 배회하며 잼(Jam) 세션을 벌인 그는 얼마 후 그는 그 지역의 스타 카운트 베이시 악단과 연주할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카운트 베이시 악단과 함께 했던 기억은 버드에게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상처가 되고 만다. 그의 어설픈(?) 솔로가 진행되던 도중, 당시 드럼을 연주하던 조 존스는 갑자기 연주하던 심발을 풀어 그를 향해 내던졌다. 순간 그가 대중들의 웃음거리로 전략하고 만 이 일화는 물론 16세라는 나이를 감안할 때 아직 완성도가 떨어지는 그의 열악한 연주실력을 반증해주는 사례였지만, 스윙시대를 주름잡은 그의 선배들이 그의 독창적인 솔로 전개를 매우 거북스러워했음을 또한 증명해 준다. 스윙이 대세였던 당시까지만 해도 그가 새로운 재즈의 물결을 주도할 것이라는 예상은 그 누구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색스폰 주자 레스터 영(Lester Yong)의 음악에 심취해 있던 그는 다시 몇 년의 치열한 내공을 쌓은 후인 1940년, 뉴욕 52번가에 자리한 클럽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의 매니저 테디 힐(Teddy Hill)의 주선으로 뉴욕에 입성하며 ‘무서운 신인’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그는 케니 클라트, 델로니우스 몽크, 닉 팬톤, 하워드 맥기, 조 가이, 그리고 그의 비밥 혁명을 가능케 해준 동반자 디지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비밥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재즈의 흐름을 모색해 간다. 당시 재즈 평론가 제임스 콜리어가 옮겨 전하고 있는 케니 클라크의 말은 버드와의 첫 만남에 대해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우리가 전혀 들어본 적도 없는 것들을 연주하고 있었어요. 이미 내가 드럼으로 연주하고 싶어했던 것들을 들려주었죠. 래스터 영보다 두 배는 빠르게 연주했고, 영이 다루지 못한 음들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의 것을 추구하고 있었지만,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있었어요. 무엇보다도 그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943년, 최초의 비밥 보컬리스트 사라 본(Sarah Vaughan)의 백업 밴드를 맡고 있던 드러머 빌리 엑스타인 밴드에 합류해 그의 첫 레코딩을 하게 되고, 1944년 말 디지와 듀오를 결성, 버드 파웰(피아노), 막스 로치(드럼), 찰스 밍거스(베이스)으로 구성된 퀸텟을 결성한다. 이듬해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서 성공적인 데뷔식을 치룬 그는, 자신의 애칭인 ‘새’(Bird)를 자신의 공식적인 이름으로 대신한다. 1945-1947년 디지와 함께 하며 미국 L.A. 지역 클럽들을 중심으로 활발한 투어를 펼치던 이 시기에 ‘Groovin’ high’, ’Salt peanuts’, ’Shaw’ nuff’, ’Hot house’, ’Donna lee’, ’Ko ko’등 그의 음악성을 대표하는 명곡들을 발표한다.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그는 1947-1949년 동안 자신의 새로운 퀸텟을 이끌며 듀크 조던, 토미 포터, 막스 로취, 그리고 줄리어드 음대를 다니다 그의 문하생이 된 신인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를 영입한다. 1950년까지 지속적인 활동을 보인 그의 퀸텟은 사보이(Savoy)레이블에서 활발한 레코딩 작업과 유럽 투어를 펼치며 연주경력의 절정을 맞이한다. 같은 해 버브(Verve)레이블과 계약, 디지와 다시 함께 한 앨범 < Bird & Diz >(1950)을 발표한다. 그러나 당시까지 그의 음악은 대중들로부턴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었다. 그나마 생계를 유지해 준 뉴욕의 클럽들도 하나둘씩 문을 닫고 R&B와 로큰롤이 서서히 고개를 들며 대중들은 점점 재즈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사생활 문제까지 겹친 그는 헤로인과 술로 시름을 달래려 했고, 이로 인해 결국 자살까지 시도하기에 이른다. 1953년 그의 생애 마지막 녹음이 된 명반 < Jazz at Massey Hall >을 데뷔 시절 한솥밥을 먹은 디지 길레스피, 버드 파웰, 찰스 밍거스, 막스 로치와 함께 녹음한다. 악화된 건강은 결국 심장마비를 불러왔고 35세란 젊은 나이에 그는 자신의 여자친구 집에서 객사한다. 50년대 말 그의 영향을 고스란히 계승한 존 콜트레인의 등장으로 인해 그의 업적이 재즈계 내에서 차츰 부각되기 시작, 후대 재즈 학자들은 그를 기점으로 ‘아티스트의 주도’하에 이뤄진 찬란한 모던 재즈(Mordern Jazz) 시대가 개화했다고 칭송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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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 : Milt Jackson (밀트 잭슨 ,Milton Jackson / Milton "Bags" Jackson)
재즈 비브라폰 연주자 재즈 비브라폰 연주자
연주 : Count Basie (카운트 베이시)
1930-40년대 스윙 열풍의 주인공 중 한 명이었던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는 듀크 엘링턴, 베니 굿맨과 함께 스윙(Swing)의 대중화에 공헌한 재즈음악계의 위인이다. 그가 이끈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Count Basie Orchestra)는 그의 사후인 지금까지도 남아서 그가 남긴 스윙의 유산을 재현하고 있다. 그는 듀크 엘링턴과 같은 뛰어난 작곡가도, 베니 굿맨과 같은 탁월한 솔리스트는 아... 1930-40년대 스윙 열풍의 주인공 중 한 명이었던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는 듀크 엘링턴, 베니 굿맨과 함께 스윙(Swing)의 대중화에 공헌한 재즈음악계의 위인이다. 그가 이끈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Count Basie Orchestra)는 그의 사후인 지금까지도 남아서 그가 남긴 스윙의 유산을 재현하고 있다. 그는 듀크 엘링턴과 같은 뛰어난 작곡가도, 베니 굿맨과 같은 탁월한 솔리스트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빅 밴드만의 차별점을 제시했다. 그는 멤버들 각자의 탁월한 연주 기량에 더해 솔로와 리듬연주간의 긴밀한 조화를 일궈내며 재즈 연주에서 앙상블(Ensemble)의 매력을 만끽케 한다. 그는 1920년대 스트라이드(랙타임에서 발전된 피아노 연주법)의 대가 팻츠 월러(Fats Waller)의 피아노 주법을 계승하며 부기우기(Boogie Woogie)라는 독특한 리듬 패턴을 제시한다. 12마디 블루스 형식의 부기우기(셔플 리듬이라고도 함)는 일반적인 스윙 연주가 1박과 3박에 강세가 오는(츄우 추 취- 츄우 추 취-)리듬패턴이었던 것과는 달리 2박과 4박에 비트가 가해지는(칙 둥- 칙 둥-)식의 리듬을 창조해내며 향후 재즈에서 비트(Beat)가 중요해 질 것을 예견케 했다. 카운트 베이시가 제시한 이 ’리듬의 혁명’은 당시까지 밴드 안에서 그 역할이 미비했던 드럼과 베이스, 그리고 기타의 리듬 연주를 강화하며 재즈 쪽에서 1940년대 비밥(Bebop)의 전야(前夜)를 수놓았고, 블루스 쪽에선 루이스 조던(Louis Jordan)과 빅 조 터너(Big "Joe" Turner) 와 같은 점프 블루스(Jump Blues) 스타의 출현을 가져오게 한다. 1904년 미국 뉴저지주 생으로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덕에 일찍부터 음악 레슨을 받았고, 1920대에 이르러 할렘 스트라이드 피아노 주자 팻츠 월러로부터 사사한다. 1927년 미국 중소도시를 도는 유랑극단인 보드빌(vaudeville) 무대에서 처음 직업 음악인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28년 곤젤 화이트의 빅 재즈 잼보리(Gonzelle White’s Big Jazz Jamboree)의 멤버로 미국 중서부 지역을 순회하다 뉴 올리언즈에 버금가는 재즈의 고장 캔사스(Kansas City)에 도착해 밴드의 해산을 맞았지만 곧바로 캔사스에 정착한다. 뉴욕은 대공황으로 실업자들이 들 끌고 금주령으로 클럽들은 하나 둘 문을 닫았지만 정치적인 보스였던 톰 팬더개스트의 지배 아래 캔사스 시는 완전히 개방되어 있었다. 불법적인 음주와 도박이 벌어지던 수많은 클럽이 도시 안에 성행했고, 거의 모든 클럽에서 재즈 라이브가 열렸다. 그를 비롯해 수많은 흑인 뮤지션들은 일자리를 찾아 캔사스 시티로 몰려들어 1930년대 스윙 시대에 만개할 ’리듬의 향연’을 준비한다.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영화 < 캔사스 시티 >(1995)를 보면 1930년대 그곳의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다) 1928년 캔사스 지역을 무대로 연주활동을 한 월터 페이지(Walter Page)가 이끄는 블루 데빌스(Blue Devils)의 멤버로 가입, 여기서 훗날 그의 페르소나(Persona)로 남게 된 가수 지미 러싱(Jimmy Rushing)과 테너 색스폰 주자 레스터 영(Lester Young)을 만난다. 이듬해엔 캔사스 시티 출신인 밴드 리더 베니 모튼(Bennie Morton)을 만나며 모튼의 빅 밴드에 가입한다. 모튼의 밴드에서 편곡을 맡았던 그는 1935년 모튼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밴드의 리더로 나서게 되고, 이때 블루 데빌스 시절에 만났던 동료들을 규합해 1936년 자신의 밴드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를 결성한다. 이때 자신의 본명 윌리엄 베이시(William Basie) 대신 ’백작(Count)’의 작위를 수여하며 ’카운트 베이시’로 개칭한다. 1936년, 그의 음악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접했던 세기의 명 프로듀서 존 해몬드(John Hammond)의 주선으로 그와 그의 밴드는 캔사스를 떠나 뉴욕으로 입성하게 되었고, 1937년 1월, 데카(Decca) 레코드사와 계약하며 수많은 밴드의 명곡들을 녹음하게 된다. ’One o’clock jump’(1937)를 차트 톱10에 진입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Boogie woogie’(1937), 지미 러싱의 보컬로 더 유명한 ’Stop beatin’ round the Mulberry Bush’(1938), ’Cherokee’(1939)등을 모두 차트에 진입시키는 성과를 거둔다. 그의 창작력의 정점이었던 이 당시 그의 대표 곡들은 3장 짜리 CD 박스세트 < Count Basie-The Complete Decca Recordings >를 통해 만날 수 있다. 1940년대 들어 그의 밴드는 전 세계를 투어하며 활발한 연주활동을 했지만,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지속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1942-1944년까지 그와 밴드는 미국 서부에 머물며 5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I didn’t know about you’(1945), ’Red bank blues’(1945), ’Rusty dusty blues’(1945) ’Jimmy’s blues’(1945), ’Blue skies’(1946)등을 팝, R&B 차트에 진입시키면서 그의 인기는 절정에 다다랐다. 모던 재즈 창궐과 함께 스윙음악이 점차 그 인기가 시들해지자 그도 몇 년의 공백기를 거친 후인 1952년에서야 다시 그의 밴드를 부활시켜 활동에 들어간다. 버브 (Verve) 레이블을 통해 활동한 1950년대는 그가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는 시기다. 지미 러싱에 이은 재즈 보컬리스트 조 윌리엄스(Joe Willliams)를 밴드에 영입해 만든 < Count Basie Swings, Joe Williams Sings >(1955), < April In Paris >(1955)를 각각 앨범차트 톱40와, R&B 차트 톱10에 진입시키며 성공적인 재기를 거둔다. 특히 1957년 발표한 < Count Basie At New Port >는 레스터 영(Lester Young), 지미 러싱(Jimmy Ryshing), 로이 엘드리지(Roy Eldridge), 프레디 그린(Freddie Green)등 과거 1930년대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밴드 멤버들을 다시 불러들여 만든 연주라는 점에서도 가치 있는 스윙 명반이다. 1960년대 들어 그는 주로 보컬 연주의 대가들과 함께 음반을 발표한다. 엘라 핏제럴드(Ella Fitzgerald)와 함께 한< Ella And Basie! >(1963), 프랭크 시나트라와 함께 한 < Sinatra Again >(1964- 수록곡 ’It might as well be swing’이 팝 차트 톱20에 오름),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와 함께 한 < Our Shining Hour >(1965), 밀스 브라더즈와 함께 한 < The Board Of Directors >(1968), 그리고 소울 가수 재키 윌슨과 함께 한 < Manufacturers Of Soul >(1968)등이 있다. 1970년대 들어 지병인 심장병으로 예전처럼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주진 못했지만,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면서 그는 계속 세계 투어를 통해 연주활동을 지속했고, 파블로(Pablo) 레이블을 통해 발표한 그의 말년 작들은 그래미 상 재즈 부문에 다수 노미네이트 되는 영광을 얻으며 변함 없는 노익장을 드러냈다. 리드 악기 주자 주트 심스(Zoot Sims)와 발표한< Basie & Zoot >(1975), 그의 빅 밴드 작품 < Prime Time >(1976), 혼 주자 디지 길레스피와 함께 한 < The Gifted Ones >(1978)은 모두 그래미 상 재즈 부문 후보에 오른 작품들이다. 1981년 건강 악화로 결국 무대를 떠나 병원 생활을 하던 카운트 베이시는 암으로 1984년 향년 79세에 ’찬란한 스윙 백작’의 일대기를 접는다.
연주 : Django Reinhardt (장고 라인하르트)
재즈 기타 연주자 재즈 기타 연주자
연주 : Charlie Shavers (찰리 쉐이버스 )
재즈 트럼펫 연주자 재즈 트럼펫 연주자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재즈 피아노 연주자
연주 : Erroll Garner (에롤 가너 ,Erroll Louis Garner)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재즈 피아노 연주자
클래식을 얘기할 때 바하를, 팝을 논할 때 비틀스를 빼 놓을 수 없듯 재즈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다. 재즈에 문외한 사람일지라도 루이 암스트롱 이름을 대면 고개를 끄덕인다. 루이 암스트롱은 20세기의 대표적인 대중 음악 ‘재즈’를 정의한 거장이다. 백인 재즈 보컬 빙 크로스비(Bing Crossby)는 루이 암스트롱을 두고 ‘미국 대중음악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극... 클래식을 얘기할 때 바하를, 팝을 논할 때 비틀스를 빼 놓을 수 없듯 재즈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다. 재즈에 문외한 사람일지라도 루이 암스트롱 이름을 대면 고개를 끄덕인다. 루이 암스트롱은 20세기의 대표적인 대중 음악 ‘재즈’를 정의한 거장이다. 백인 재즈 보컬 빙 크로스비(Bing Crossby)는 루이 암스트롱을 두고 ‘미국 대중음악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극찬했다. 그의 코넷/트럼펫 연주는 ‘재즈 연주에 꽃’이라 할 즉흥 솔로(Improvisation)를 창안했다. ‘트럼펫 비르투오조 1호’로 칭송되는 그의 트럼펫 연주엔 떨림(비브라토)과 미끄러짐(글리산도)와 같은 클래식 연주 주법을 독창적으로 소화해 낸 천재성이 돋보인다. 뉴 올리안스의 무명악사 시절을 거쳐 1920년대 초부터 시카고와 뉴욕을 거점으로 암약하면서 1925년 자신이 리드하는 캄보(Combo-소규모 재즈 연주 편성)밴드 핫 파이브 앤 핫 세븐(Hot Five’& Hot Seven) 통해 본격적인 재즈의 서막을 온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 여정은 ‘재즈의 선구자’로만 국한시킬 수 없을 정도로 그 폭이 넓다. 그는 재즈의 천재 일뿐 아니라 팝의 제왕이자 만인의 사랑을 받는 엔터테이너였다. 아무 의미 없는 말들을 리드미컬하게 구사하는 스캣(Scat)이라는 창법을 개발, 재즈 보컬(Jazz vocal)의 길을 열어줬음은 물론이고 천재적인 트럼펫 연주 실력에 더해 그의 출중한 보컬 실력은 그를 ‘위대한 재즈 보컬리스트’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가방만큼 크고 두터운 입술을 지녔다 하여 사치모(Satchmo)라는 애칭을 지녔던 루이 암스트롱은 얼굴만큼이나 커다란 입으로 끓어오르는 독특한 베이스 보컬(속칭 더티 톤)을 들려준다. 이런 그의 독특한 보컬 스타일은 재즈 보컬 빙 크로스비나 토니 베넷(Tony Bennet)을 비롯하여 1930-50년대 전설전인 재즈 디바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의 창법에까지 영향을 준다. 국내에서도 ‘쾌지나 칭칭 나네’의 가수 김상국도 그 보컬을 흉내냈다. 천진 난만(?)한 웃음을 머금으며 청중을 압도할 만한 열정을 뿜어내는 무대 매너로 루이는 대중들에게 잊을 수 없는 넉넉함을 선사했다. ‘만능 재즈 맨’은 그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1901년 재즈의 고향 뉴 올리안스(New Orleans)에서 태어난 루이 암스트롱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가 어머니인 메리 암스트롱의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가출을 했고, 유복자로 태어난 루이는 빈민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길거리의 매춘부였던 어머니는 항상 집을 비워 가족을 돌보지 않았고, 결국 루이는 5살 때부터 생업 전선에 나서야 했다. 스토리 빌(뉴 올리언즈의 재즈 음악인들의 활동 무대)의 홍등가를 지나다가 접한 재즈음악에 매료되어버린 어린 루이는 차츰 재즈라는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된다. 11살에 학교를 그만둬 그만 폭력을 일삼는 불량 써클에 가담, 1912년 신년 축하 행사 때 술에 취해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폭죽 대신 총을 쐈다는 혐의로 소년원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게 전화위복이 되어 소년원에 있는 동안 브라스 밴드에 가입, 제1 코넷 주자로 활동하게 된다. 이를 통해 본격적으로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여기서 접한 코넷(트럼펫과 비슷하나 관이 약간 짧아서 수월하게 다룰 수 있는 악기) 연주는 루이로 하여금 음악을 소명으로 삼게 한다. 1914년 소년원에서 풀려나서 시카고로 이주, 노동자 생활을 하며 차츰 음악가로의 꿈을 키워간다. 광부로, 신문 배달부로, 청소부를 일을 전전해가며 그는 코넷을 사기 위해 돈을 마련해 갔다. 시카고에 여러 바를 전전하며 무명악사로 밑바닥을 기었다. 1918년 기회가 왔다. 당시 재즈의 왕으로 군림하던 킹 올리버(King Oliver)의 도움을 받아 루이는 올리버의 보조 밴드였던 키드 오리(Kid Ory) 밴드에서 프로 뮤지션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는다. 일년 후인 1919년 루이는 시카고에 진출, 미시시피강을 따라 뉴 올리언즈와 세인트루이스 사이를 운행하던 증기선에서 백인들을 위해 음악을 연주한 페이트 매러블(Fate Marable) 밴드에서 3년 간 코넷 주자로서 내공을 다진다. 1922년 루이 암스트롱은 드디어 재즈 연주자로서 날개를 단다. 평소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재즈의 왕’ 조 킹 올리버는 그가 이끄는 크레올 재즈 밴드(Creole Jazz Band) 밴드의 코넷 주자로 그를 가입시킨다. 크레올 재즈 밴드의 정식 멤버 자격으로 루이는 1923년 시카고에서 첫 레코딩을 한다. ‘Chimes blues’(1923), ’Lonesome weary blues’(1923) 등 10여 곡의 싱글 녹음을 통해 독특한 음색의 코넷 연주가 좋은 평가를 이끌어냈고, 이에 자신감을 얻은 루이는 피아노 주자 릴리언 하든(그의 두 번째 부인이며 그는 일생동안 4명의 부인을 맞는다)의 권유로 크레올 밴드를 탈퇴, 이듬해인 1924년 뉴욕으로 진출해 플레처 핸더슨(Fletcher Henderson) 밴드에 제1 트럼펫 주자로 활동한다. 1925년 솔로로 독립, 악기를 코넷에서 트럼펫으로 바꾸고 자신의 밴드 핫 파이브 앤 핫 세븐(Hot Five & Hot seven)을 출범시킨다. 재즈 인디 레이블 오케이(Okeh)레코드 사와 계약, 스캣(scat)의 매력이 넘치는 ‘Heebie jeebies’(1926)를 비롯하여, ’Cornet’(1926), ’Big butter & egg man’(1926), ’Ski-dat-de-dat’(1926), ‘Willie the weeper’(1927), ’Potato head blues’(1927), ’I’m not rough’(1927)를 통해 당시로선 가히 혁명적인 재즈 연주를 선보이며 일약 재즈음악계의 스타로 떠오른다. 1928년 ‘핫 파이브 앤 세븐’을 해체, 자신의 빅 밴드 루이 암스트롱 앤 히스 오케스트라(Louis Armstrong And His Orchestra)’를 결성, ‘Mahogany hall stomp’를 시작으로 이듬해인 1929년 ’Sweet heart on parade’를 발표하며 스윙 밴드 리더로서의 여정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재즈 보컬리스트로서도 활약이 눈에 띄는데, 이미 1927년 ‘핫 파이브 & 세븐‘시절 여성 보컬 메이 엘릭스와 듀엣으로 부른 ’Big butter & egg man’으로 팝 차트에 진출한 루이는 1931년 미쉘 페리시가 작사한 미국의 영원한 스탠다드 명곡 ‘Stardust’를 발표, 선풍적인 인기를 얻는다. 1930년대는 루이 암스트롱의 전성기였다. ‘I gotta right to sing the blues’(1933), ’Struttin’ with some barbecue’(1938) 등 클래식스(Classics)레이블을 통해 발표한 그의 빅 밴드 싱글들은 동시대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 악단,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 악단에 필적할 만한 대중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한다. 1944년 흑인 아티스트로서는 처음으로 링컨 센터에서 공연했으며 이어 할리우드에 진출, 영화배우로서도 활동하며 < 랩소디 인 블랙 & 블루 >(1933)와 1956년의 < 상류사회 >(High Society) 등의 작품을 남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스윙의 열풍은 비밥(Bebop)의 혁명으로 인해 재즈의 중심에서 차츰 언저리로 몰리고 있었다. 스윙을 부정하며 비밥에 물결에 동참한 젊은 재즈음악인들로부터 루이는 ‘엉클 톰’(백인에게 굴종하는 흑인) 식의 비난의 화살을 감내해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무렵 슬럼프를 맞게 된다. 빅 밴드 활동이 더 이상 진척이 되지 않음을 느낀 루이는 결국 빅 밴드를 해체시키고 데카(Decca)레이블로 이적하며 초기의 소 편성 악단의 구성을 한 올 스타즈(All Stars)를 출범시킨다(이후 올 스타즈는 맴버를 교체해 가며 그가 죽을 때까지 유지된다). 1947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데뷔 공연을 가지며 예전보다 활발한 월드투어를 갖는다. ‘High society’(1948), ‘That’s a plenty’(1949), ‘Basin street’(1947), ‘Dippermouth blues’(1947) 등을 히트시키며 1951년에는 투어 실황을 녹음해 발표한 라이브 앨범 < Satchmo At Symphony Hall >을 발표해, LP차트 10위권에 오른다. 같은 해 루이의 히트 송 ‘(When we are dancing) I get ideas’와 ‘A kiss to build a dream on’이 담긴 더블 사이드 싱글을 발표, 이듬해인 1952년 처음으로 싱글 양면이 모두 톱10을 기록한다. ‘A kiss to build a dream on’은 영화 < The Strip >에서 루이가 직접 불렀던 곡인데, 멕 라이언이 주연한 1993년 영화 <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에 다시 삽입돼 화제를 모았다. 1954년 데카와 재계약을 앞두고 루이는 독점 계약 대신 프리랜서를 선언한다. 이 때부터 그의 음악은 다른 음반사를 통해서도 발표되는데, 당대 재즈 명인들과의 협연 앨범들이 눈에 띈다. 1920년대 스트라이드 피아노 대가 팻츠 월러(Fats Waller)에게 헌정하는 < Satch plays Fats >를 1955년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발표해 톱10을 기록했고, 재즈 보컬 엘라 핏제럴드와 호흡을 맞춘 명반 < Ella & Louis >를 1956년 버브 레코드사에서 공개한다. 흑인 공민권 운동이 시작될 무렵인 1956년, 백인 공립학교에 흑인 학생이 군인의 호위를 받고 등교하는 리틀 록(Little Rock)사건을 두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를 ‘위선자’라 비난한 사건이 신문으로 보도되면서 루이는 잠시동안 FBI의 감시를 받으며 ‘요시찰 인물’이라는 불명예를 겪기도 한다. 가뜩이나 나빠진 건강은 1959년 이태리 공연도중 심장 발작으로 잠시 병원 신세를 지게 끔 한다. 이런 악조건을 딛고 루이 암스트롱은 1960년대에도 여전히 ‘제2전성기’라고 할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1963년 12월, 브로드웨이 뮤지컬 < 헬로 돌리 >(Hello Dolly!)의 타이틀곡으로 미국을 침공한 비틀스의 ‘Do you want to know a secret’를 따돌리며 당당히 팝 차트 정상에 등극한다. ‘Hello dolly!’는 1964년 내내 팝 차트 5위권을 고수하며 이듬해 그에게 그래미상 보컬 퍼포먼스부문 수상의 영광도 안겨주었다. 이 곡에 이어 4년 후인 1968년 ‘What a wonderful world’로 루이는 다시 한번 노익장을 과시한다. 평소에 자신이 추구한 팝(pop)음악에 대한 철학을 담아낸 이 곡은 영국에선 발표 즉시 차트1위를 차지했지만 정작 본토 미국에선 별 반응이 없다가, 1987년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영화 < 굿모닝 베트남 >의 배경음악으로 주목받으면서 뒤늦게 톱40에 오른다. 넉넉한 그의 보컬이 멋진 선율과 어우러진 이 곡은 그 무렵 만화가 이현세가 출연한 모 맥주광고 CF에 깔려 국내에서도 광풍을 일으켰다. 그의 마지막 히트 곡 ‘We have all the time in the world’과 함께 루이는 결국 건강상의 이유로 무대에서 은퇴한다. 그와 함께 정확히 7주 후인 1971년 3월15일 건강 악화로 병원에 입원했고, 7월 6일 뉴욕 롱아일랜드의 코로나 소재 자신의 집에서 70세를 일기로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난다. 루이 암스트롱처럼 재즈와 팝이라는 별개의 영역을 넘나들었던 사람도 드물다. 1920-30년대 초기재즈에서 스윙에 이르기까지 재즈의 연주 스타일을 제시했던 선구자 루이 암스트롱은 이에 더해 대중들과 함께 울고 웃을 줄 알았던 진정한 팝 스타였다. 사실 재즈라는 장르에 집착하는 팬들은 그가 보여준 엔터테이너 기질에 못마땅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쿨(cool)의 혁명가 마일즈 데이비스도 자서전에서 “루이의 뛰어난 즉흥 연주엔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그의 익살스러운 무대매너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고 피력할 정도였다. 하지만 루이는 50년을 넘게 연주 생활을 해온 재즈맨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음악 대중들을 위한 ‘팝’에 천착한 사실은 당연하다. 루이는 음악에 있어서 순수한 지향을 잃지 않았고, 자신의 음악을 들어주고 좋아해 줄 청중을 찾아 나서길 원했다. 그의 음악이 꿈꾼 최종 지향점이란 바로 ‘What a wonderful world!’라고 까지 칭송한 팝(pop)이었던 셈이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팝의 세계에 안긴 한 재즈 거장의 허심탄회한 고백은 명언으로 남아있다. ‘그래 팝이 옳았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야!’
재즈 가수 재즈 가수
연주 : Cannonball Adderley (캐넌볼 애덜리 ,Julian 'Cannonball' Adderley)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연주 : Phineas Newborn Jr (피니어스 뉴본 주니어 )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연주 : Clifford Brown (클리포드 브라운 )
재즈 트럼펫 연주자 재즈 트럼펫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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