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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 드라이버 영화음악 (Baby Driver OST) [Korea Special 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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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베이비 드라이버 영화음악 (Baby Driver OST) [Korea Special Edition]

코리아 스페셜 리미티드 에디션

Kid Koala, Young MC, Sam and Dave, Button Down Brass, Martha & The Vandellas 노래 외 28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SonyMusic / Columbia | 2017년 12월 18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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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 드라이버 영화음악 (Baby Driver OST) [Korea Special Edition]

이 상품의 시리즈 (7개)

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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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매일 2017년 12월 18일
시간, 무게, 크기 220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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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소개

디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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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소개 (33명)

노래 : Kid Koala (키드 코알라,Eric San)
멤버 : 샘 무어(Sam Moore), 데이브 프레이터(Dave Prater) 멤버 : 샘 무어(Sam Moore), 데이브 프레이터(Dave Prater)
노래 : Martha & The Vandellas (마사 앤 더 반델라스)
멤버 : 마사 리브즈(Martha Reeves), 로잘린드 애쉬포드(Rosalind Ashford), 베티 켈리(Betty Kelly) 멤버 : 마사 리브즈(Martha Reeves), 로잘린드 애쉬포드(Rosalind Ashford), 베티 켈리(Betty Kelly)
노래 : David Mccallum (데이비드 맥컬럼)
노래 : Brenda Holloway (브렌다 할러웨이)
소울 & 펑크 가수 소울 & 펑크 가수
노래 : Sky Ferreira (스카이 페레이라)
노래 : Danger Mouse (데인저 마우스)
노래 : Simon & Garfunkel (사이먼 앤 가펑클)
멤버 : 폴 사이먼(Paul Simon, 보컬), 아트 가펑클(Art Garfunkel, 기타, 보컬) 멤버 : 폴 사이먼(Paul Simon, 보컬), 아트 가펑클(Art Garfunkel, 기타, 보컬)
노래 : Beck (벡,Beck David Campbell / Beck Hansen)
< Family Line > 데이빗 캠벨 : 벡의 아버지로 크래커, 에어로스미스, 그린 데이 같은 밴드들의 스트링을 어레인지하기도 했던 블루그래스 뮤지션. 벡의 싱글 < Jack-Ass >의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비비 한센 : 한마디로 쿨(Cool!)하다고 할 수 있는 그의 어머니로 13살에 팝 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창작 집단 워홀 수퍼스타의 최연소 멤버였고, 배우였으며, 레스토랑의 오너이다. 채닝 한센 ... < Family Line > 데이빗 캠벨 : 벡의 아버지로 크래커, 에어로스미스, 그린 데이 같은 밴드들의 스트링을 어레인지하기도 했던 블루그래스 뮤지션. 벡의 싱글 < Jack-Ass >의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비비 한센 : 한마디로 쿨(Cool!)하다고 할 수 있는 그의 어머니로 13살에 팝 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창작 집단 워홀 수퍼스타의 최연소 멤버였고, 배우였으며, 레스토랑의 오너이다. 채닝 한센 : 벡의 동생. 3기 플럭서스의 아티스트이다. 션 카릴로 : 벡의 새아버지로 비비와 함께 LA의 레스토랑을 운영하는데, 1990년대 초반 벡은 그곳에서 종종 연주를 하곤 했다. 션 역시 예술가라고 한다. 알 한센 : 벡의 외할아버지로 플럭서스 운동의 선구자였다. 그는 콜라쥬 작업과 말 많았던 ‘Yoko Ono Piano Drop''이란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벡은 그의 할아버지의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알 역시 < Oderay >앨범의 부클릿에 작품을 싣기도 했다. 벡과 알 한센의 예술세계에 대한 책도 나왔다고 한다. 오드리 한센 : 배우, 모델, 시인이었던 벡의 외할머니. 이러한 핏줄의 흐름을 이어받아 ‘천재는 타고난다? 혹은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이 두가지를 모두 만족시키는 벡은 여전히 ?긍정적인 의미에서- 독야청청, 유아독존의 모습을 고수하고 있는 1990년대 최고의 엔터테이너이다. 1970년 태어난 벡은 그 화려한 혈통의 집안에서 부모의 이혼 외에는 그다지 큰 일 저지르는 것업이 성장했다. 하기야 그런 예술적 기운(?)이 혁혁한 집안에서 무슨 짓을 한들 놀라기야 했겠느냐마는.. 벡이 성장하던 1970년대, 1980년대 초반 LA에서는 펑크의 열풍이 대단했다. 그의 어머니 비비는 펑크 씬과 교류가 있었고, 자신의 집을 그들을 위해 개방하기도 했지만 정작 벡의 관심을 끌은 것은 델타 블루스와 포크였다. 특히 우디 거스리, 블라인드 윌리 존슨, 프레드 맥도웰, 미시시피 존 허트 등이 그에게 영향을 준 아티스트들이고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며 뉴욕의 이스트 사이드로 간다. 당시 뉴욕의 하드코어 씬은 반 포크적인 움직임이 강했는데, 포크와 그 가사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으려는 시도에 벡은 큰 영향을 받았다. 이곳 저곳을 전전하던 벡은 다시 LA로 돌아와 낮에는 비디오 가게 점원 등 여러 변변치 않은 일을 하며, 밤에는 그가 만든 곡들을 가지고 여러 펑크 클럽에서 밴드들의 공연 막간을 이용해 한 곡씩이지만 자신의 공연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오늘날 그의 음악 사운드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홈 레코딩 솜씨를 처음 발휘하며 < Folk/Noise >라는 데모를 만든다. 그리고 1992년, 지역의 힙합 프로듀서인 동료 칼 스티븐슨와 의기 투합하여 후에 1990년도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킨 곡 ‘Loser’를 만든다. 이 곡은 창고에서 1년 가량 썩고 있다가 그의 음악적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작은 인디레이블 ‘봉로드’에서 12인치 한정 싱글로 발매된다. 처음 500장이 한정 발매된 이 싱글은 한 컬리지 방송곡의 엄청난 방송 공세를 힙입어 얼마 가지 않아 미 전역의 컬리지, 모던록 방송국들을 완전히 장악하게 됐다. 벡은 이러한 갑작스런 성공에 당황했지만, 마이너에서의 독자적 활동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메이저사와 계약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 그는 곧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그리고 가장 성공한 패배자(Loser)의 길로 들어선다. 얼터너티브와 모던록, 칼리지 록이 판치던 1990년 초 당시 록 씬은 이들과 유사한 사운드를 지닌 온갖 밴드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초기 사운드를 만들어낸 이들의 아류들이 판치고, 또 그들의 아류들이 생성되며 그야말로 그게 그거인 정형화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 나타난 벡은 어찌 보면 쓰레기 같기도 했던 ‘Loser’ 한 곡으로 가장 독창적이고 영향력 있는 젊은이의 자리를 차지했다. 당시 들고 나타난 벡의 음악이 도대체 얼마나 독창적이고 무엇이 새로운 것이었을까. 벡의 음악에서 그가 차용한 샘플링과 덕지덕지 씌워놓은 조각들만을 보고 혹자들은 그를 난잡한 콜라주의 대가 정도로만 인식했지만 그가 만들어 놓은 콜라주 조각들은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충분한 오리지낼러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그가 왜 각종 시상식과 그해 말 음악지들의 리스트들의 우위를 차지한 것에 대한 답일 것이다. 5년 전 ‘I''m a loser baby, why don''t you kill me''라고 웅얼대며 어슬렁거리며 나타난 그가 한 일 중에 가장 대단한 것은 그의 음악이 어땠든 간에 그가 만들어낸 센세이션이다. 그리고 그 센세이션에 휘둘리지 않으며 시대의 패배자에서 성공한 패배자로의 전환을 이루어 준 < Odelay >는 그가 그저 시류를 타고 한번의 반짝 성공으로 물러갈 멍청한 낙오자가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준다. 절대 ‘Loser’가 아니었던 벡이 단지 엔터테이너로서 만든 음악을 가지고 사람들이 벡을 20세기의 최고 성공한 루저의 자리에 앉혔다는 아이러니와 함께. 자신의 외할아버지인 알 한센의 영향인지 몰라도 벡의 작업들은 레디메이드를 이용한 난자하고 다소 지저분하기도 한 콜라주의 형상을 띠고 있다. 이제 벡 음악적 요소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다른 데서 잘라다 이어 붙이는 ‘패스티쉬’, 이것저것을 섞어 놓는 ‘믹스&매치’, 겹겹이 쌓아놓는 ‘레이어드’ 등은 자칫 그를 영악한 뮤지션으로 몰락시킬 수도 있었던 요소들이지만 벡은 절대 영악을 넘어선 천재적-벡에게 천재적이라는 말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인 머리로 이것들을 요소로 한 음악을 ‘창작’해냈고, 힙합 비트에 랩을 씌우는 그의 초기의 작업은 그것이 익숙해짐에 따라 점점 더 기발한 장르의 혼합을 이루어내고 있다. 베커델릭(Becadelic)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오히려 벡의 오리지낼러티처럼 되어버린 백인 젊은이의 서툰 랩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고, 그가 백인이기 때문에-그것도 어느 정도 외모가 받쳐주는- 여기저기서 뜯어온 힙합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는 얘기는 이제 사라진 지 오래다. 공연에서 보여주는 그의 엔터테이너로서의 정성스런 모습, 음악과 마찬가지로 빈티지를 조각조각 이어놓은 듯한 패셔너블한 의상들,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했던 재기 있는 유머들은 그것만으로도 우리시대에 영향을 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화려하고 열정적인 댄스와 예상을 뛰어넘는 훌륭한 가창력까지. 그리고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자신의 세계를 변화시켜가는 벡에게 이제 1990년대의 엔터테이너, 총아라는 단어를 붙여주는 것에 대해 2, 3년 전과 같은 조금의 망설임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는 똑같은 것을 반복하며 우려먹고 있지도 않으며, 그의 카피는 오리지낼러티를 창조해냈으며, 이 모든 것이 이제는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항상 스타를 죽이고 살리는 것은 대중들이 아니었던가. 그의 엔터테이너로서의 스타성이 대중들에 의해 입증된 이제 다시 그의 음악을 분석하고 파헤치는 것보다 더 적절한 것은, 도대체 벡은 어떤 사람인가라는 것에 대한 궁금증을 푸는 일이 아닐까 싶다.
작곡자와 음반 제작자로 그리고 가수로 충만한 재기를 과시한 흑인 송라이터 배리 화이트(Barry White)는 소울과 펑크(funk)를 토대로 삼아 그 위에 1970년대 흑인 음악의 가장 중요한 지분을 차지했던 디스코 감수성을 혼합한 ‘소울 디스코’ 스타일의 음악으로 폭발적 인기를 얻었던 팝 역사의 거장이다. 조금은 부담스런 그의 굵고 낮은 톤의 목소리,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만을 고집한 노랫말, 그리고 초기 디스... 작곡자와 음반 제작자로 그리고 가수로 충만한 재기를 과시한 흑인 송라이터 배리 화이트(Barry White)는 소울과 펑크(funk)를 토대로 삼아 그 위에 1970년대 흑인 음악의 가장 중요한 지분을 차지했던 디스코 감수성을 혼합한 ‘소울 디스코’ 스타일의 음악으로 폭발적 인기를 얻었던 팝 역사의 거장이다. 조금은 부담스런 그의 굵고 낮은 톤의 목소리,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만을 고집한 노랫말, 그리고 초기 디스코 음악을 트레이드마크로, 혼란스러웠던 1970년대를 부드럽고 흥겨우며 감상적인 풍의 정반대 해법으로 풀어냈다. 컨트리 싱어 글렌 캠벨(Glen Campbell)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 지역인 텍사스주의 갈베스톤(Galveston)에서 1944년 9월 12일에 태어난 배리 화이트는 10대 때부터 ’디 업프론츠(The Upfronts)’라는 그룹에서 프로 음악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에는 ’더 버서타일스(The Versatiles)’란 그룹에 잠시동안 몸담았으며 그가 밴드를 떠난 후 그룹은 이름을 ’더 피프스 디멘션(The Fifth Dimension)’으로 개명해 엄청난 성공의 신화를 일궈 냈다. 이 거구의 흑인 뮤지션은 애초부터 가수보다는 작곡자나 제작자 같은 음반 실무자가 되길 원해 1960년대에는 다른 가수들을 위해 곡을 만들거나 프로듀싱을 하면서 나름대로 스스로의 표현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바로 그 일환으로 1969년에 ’러브 언리미티드 오케스트라(Love Unlimited Orchestra)’를 창설했고 자신의 음반 제작 프로덕션을 설립하기도 했다. 1970년대 초반이 지나자 배리 화이트는 솔로 가수 활동과 러브 언리미티드 오케스트라의 리더 역할을 병행하면서 7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두 곡의 차트 넘버원 싱글과 10여 곡의 톱40 히트곡들을 쏟아 냈다. 1974년에 배리 화이트가 솔로로서 1위를 정복한 ’Can’t get enough of your love, Baby’는 1992년 백인 여가수 테일러 데인(Taylor Dayne)이 리메이크 해 소울 디스코의 고전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러브 언리미티드 오케스트라의 이름으로 나온 싱글 ’Love’s theme’는 연주 음악으로는 드물게 차트 1위를 밟았다. 시원한 여름의 해변가를 연상시키는 이 트랙은 1980년대 초반 임국희가 진행했던 팝 프로그램의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되어 30대 이상의 국내 팝 팬들에게는 매우 귀에 익은 멜로디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상종가를 치고 있는 스카 펑크 밴드 스매시 마우스(Smash Mouth)의 2001년 새 음반에 수록된 ’Pacific coast party’의 도입부에도 이 연주곡의 첫 부분이 샘플링 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국내에서 꾸준한 애청된 ’You’re the first, the last, my everything(2위)’과 ’Walking in the rain(with the one I love/14위)’를 비롯해 ’I’ll do for you anything, you want to me(40위)’, ’It may be winter outside(but in my heart it’s spring/83위)’, ’I’ve got so much to give(32위)’, ’Baby we better try to get it(92위)’, ’What am I gonna do with you(9위)’, ’Let the music play(32위)’, ’I’m gonna love you just little more baby(3위)’, ’It’s ecstasy when you lay down next to me(4위)’, ’Your sweetness is my weakness(60위)’, ’I belong to you(31위)’, 그리고 1997년 영국의 백인 R&B 여가수 리사 스탠스필드(Lisa Stansfield)가 커버해 신세대들에게도 알려진 ’Never never gonna give up(7위)’ 같은 노래들이 빌보드 차트를 무차별 융단 폭격했다. 비록 싱글 히트곡은 아니었지만 1984년 영화 < 고스트버스터스 >의 주제곡을 불러 유명한 기타리스트 레이 파커 주니어(Ray Parker Jr.)와 공동으로 작곡한 ’You see the trouble with me’와 ’What am I gonna with you’, ’Baby we better try to get it’, ’Let the music play’, ’Don’t make me wait too long’ 등은 1970년대 후반을 달구었던 디스코의 전형을 이미 1970년대 초 중반에 제시했던 곡들이다. 그러나 배리 화이트의 음악을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비트 위주의 댄스뮤직으로 단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의 음악적인 뿌리는 커티스 메이필드(Curtis Mayfield)나 아이작 헤이스(Isaac Hayes)처럼 흑인들의 자긍심을 외치는 진한 소울과 펑크(funk)였다. 그는 흑인을 위해 곡을 썼고, 흑인 형제자매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부드러운 음악연대’를 추구했다. 디스코가 무대 저편으로 사라진 1980년대 이후에도 음반제작을 지속했지만 전성기만큼의 성과를 재현하지는 못했다. 1989년에는 흑인음악의 대부 퀸시 존스(Quincy Jones)가 구상한 회심의 음반 < Back On The Block >에 참여, ’Secret garden’을 불러 다시 한번 그 전염성 강한 저음 보컬을 들려주었다. 1993년 댄스 그룹 ’쿼드 시티 디제이스(Quad City DJ’s)’의 유일한 히트곡 ’C’mon N’ Ride(2위)’를 공동으로 작곡해 여전한 작곡능력을 과시했고 1990년대 중반에는 본인도 성공적으로 재기했다. 흑인음악의 힙합진영 아티스트들이 그들의 음악적 자양분이라 할 펑크와 소울을 빛낸 인물 가운데 배리 화이트를 빼놓을 수 없다고 판단, 갑작스레 재조명의 분위기가 조성된 때문이었다. 1999년에 발표한 앨범 < Staying Power >는 평단의 갈채와 대중의 호응을 동시에 받으면서 제42회 그래미상에서 최우수 흑인 남성 보컬 부문과 정통 리듬 앤 블루스 보컬 부문을 수상했다. 뿐만 아니라 1970년대 발표한 그의 명곡들은 < 파리의 늑대 인간 >이나 < 머니 턱스 > 같은 영화에 자주 삽입되면서 신세대들에게도 그의 음악은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미 본토에서의 이러한 호평과는 달리 국내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미약한 편이다. 가장 큰 이유는 전성기인 1970년대 당시 백인음악보다 흑인음악을 푸대접하는(먹통음악!)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했고, 음악적으로는 곡 길이가 6분 이상의 긴 노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깨끗하고 맑은 느낌의 팝 컨트리나 성인 취향의 팝 보컬이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1970년대에 그의 낮고 굵은 목소리는 아무래도 생경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흑인음악에 정서적 유착이 강한 신세대들의 귀에는 덜 이질적인 탓에 근래 들어선 재래의 홀대도 차츰 가시고있다. 얼마 전 화장품 광고에 그의 히트곡 ’Never never gonna give you up’이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것이 그 증좌일 것이다. 배리 화이트는 자신의 이름과는 달리 백인의 구미에 맞는 음악을 쫓지 않고 지금까지 인종적 뿌리를 지켜 왔다. 21세기인 현재까지 새로운 앨범을 발표하면서 흑인음악에 대한 꺼지지 않는 열정을 표현하고있다.
전설적인 힙합 듀오 '아웃캐스트'의 멤버 전설적인 힙합 듀오 '아웃캐스트'의 멤버
연주 : Dave Brubeck Quartet (데이브 브루벡 쿼텟)
Paul Desmond (색소폰), Dave Brubeck (피아노), Gene Wright (베이스), Joe Morello (드럼) 으로 구성된 재즈 쿼텟 Paul Desmond (색소폰), Dave Brubeck (피아노), Gene Wright (베이스), Joe Morello (드럼) 으로 구성된 재즈 쿼텟
밴드 : Blues Incorporated (블루스 인코포레이티드 (블루스 밴드),Alexis Korner's Blues Incorporated)
블루스 뮤지션 알렉시스 코너(Alexis Korner)와 시릴 데이비스(Cyril Davies)가 함께 결성한 블루스 밴드 블루스 뮤지션 알렉시스 코너(Alexis Korner)와 시릴 데이비스(Cyril Davies)가 함께 결성한 블루스 밴드
밴드 : T. Rex (티 렉스,Tyrannosaurus Rex / Marc Bolan & T. Rex)
The Chronology Of Marc Bolan & T-Rex # 1947년 : The Birth Of ‘White Swan’ & 어린 시절 이스트 런던, 아이가 태어나기만을 기다리던 유태인 노동자 부부 시메온과 필리스 펠드는 둘 다 과일 팔거나, 화장품 판매원, 트럭 운전사 등 많은 일들을 전전하는 전형적인 노동자 계층의 부부였다. 1947년 9월 30일,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이들은 아이에게 ... The Chronology Of Marc Bolan & T-Rex # 1947년 : The Birth Of ‘White Swan’ & 어린 시절 이스트 런던, 아이가 태어나기만을 기다리던 유태인 노동자 부부 시메온과 필리스 펠드는 둘 다 과일 팔거나, 화장품 판매원, 트럭 운전사 등 많은 일들을 전전하는 전형적인 노동자 계층의 부부였다. 1947년 9월 30일,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이들은 아이에게 마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마크는 자신은 스타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고 얘기하곤 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내가 아주 뛰어난 존재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른 어떤 인간들과도 달랐다." 마크의 부모는 그가 아주 강하고 거친 소년이었다고 얘기한다. 학교에서 싸우는 것은 늘 그의 몫이었고, 실제로 샥스(Sharks)라는 지역 갱 단의 멤버이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의 음반들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던 어린 시절의 마크가 가장 좋아하던 음악은 그가 자라난 런던과는 아주 먼 나라 미국 개척자들에 대한 노래였다. 빌 헤이즈의 ‘The ballad of david crockett’이 그 곡이었는데, 어느 날 음악에 관심을 보이는 그의 아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빌 헤이즈의 음반을 사러 간 아버지의 사소한 실수가 마크의 인생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바꿔 놓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빌 헤이즈와 ‘빌 헤일리’를 혼동했던 것이다. 8살의 나이에 빌 헤일리의 (이후 시대에 길이 남을 로큰롤 곡인) ‘Rock around the clock’을 들은 마크는 단번에 그의 음성이 이끌리고 말았다. 마크는 단번에 락앤롤과 사랑에 빠졌고, 자신이 기타를 만들고, 부모님를 졸라 8살에 드럼 세트를 받았다. 그리고 9살 때 그런 아들을 위해 그의 부모는 자신들의 한달 봉급에 해당하는 16파운드짜리 기타를 사주었다. 12살 때 베이시스트로 들어간 수지 앤 더 훌라우프라는 3인조 밴드가 그의 첫 밴드였는데,밴드의 보컬이었던 헬린 샤피로는 밴드를 떠나 음반을 발표하며 차트 1위에 오르게도 했다. 그것을 보고 마크는 학교를 그만 두고 자신의 기회를 찾기 시작한다. 13살 때, 그는 모드 패션에 빠져 든다. 그의 모든 돈을 옷을 사는데 썼다고 한다. 후에 이 시기를 얘기하며 마크는 그가 옷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40벌이 넘는 옷을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 입고, 정말로 모드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곤 했단다. 그런 모드 소년 마크는 어느 기자의 눈에 뛰어 모드 잡지를 장식하며 모델 일을 하기도 했다. 15살 이후 그는 파리를 여행하면서 위자드(The Wizard)라고 불리는 흑마술사을 만난다. 그와 몇 달을 그의 부엉이와 샴 고양이와 지낸 후, 로마 근처의 숲 속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런던으로 돌아 온 마크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데카 레코드의 프로듀서 짐을 만나 그의 첫 번째 싱글 ‘The wizard’를 만든다. 당시 마크 펠드(Mark Feld)라는 자신의 이름이 뮤지션의 이름으로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한 그는 마크 보우랜드(Mark Bowland)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는데, 이 때부터는 기독교 식의 ‘K’를 ‘C’로 바꾸고 ‘W’와 ‘D’를 빼버린 마크 볼란(Marc Bolan)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데카에서 만든 두 장의 앨범은 실패작에 그치고 만다. 당연히 데카 레코드는 그를 내던졌다. # 1966 : 솔로활동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첫번 째 실패에도 불구하고 전혀 좌절하지 않은 채 마크는 사이먼 내피어 벨이라는 프로듀서에게 전화를 해서 ‘나는 노래하는 사람인데, 누구보다도 위대한 락 스타가 되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함께 해 줄 훌륭한 매니저가 필요하다’고 대뜸 말한다. 데모를 보내라는 사이먼에게 직접 기타를 들고 찾아간 마크는 그의 앞에서 자신이 만든 노래들을 직접 불렀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의 노래가 모두 끝난 뒤 사이먼은 스튜디오에 전화를 해서 마크의 음악을 위해 예약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녹음된 음악을 받아주는 레코드 회사가 하나도 없었다. 마크는 자신의 꿈이 산산조각 난 줄 알았지만 결국 사이먼은 컬럼비아 레코드의 OK를 얻어냈다. # 1967 : John`s Children & Tyrannosaurus Rex 이 해 6월, 싱글 ‘Hippy gumbo’가 발매됐다. 그러나 런던 라디오의 DJ였던 존 필을 제외한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혹평을 했지만 마크는 두 번째 싱글 ‘Ready, steady, go’를 발표했다. 첫 번째보다는 나았지만 시기가 안 좋았다. 지미 헨드릭스의 첫 영국 TV출연과 그에 대한 영국인들의 환호 속에서 마크의 이름은 가려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마크의 솔로 작업들은 ‘안녕~’이란 말도 남기지 않은 채 끝이 나고 말았다. 사이먼은 당시 지미 페이지가 활동하던 야드버즈와 존스 칠드런(John`s Chidren)이라는 밴드의 음반을 프로듀싱하기도 했는데, 마크 볼란은 이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들어가게 된다. 존스 칠드런으로서는 작곡을 할 수 있는 재능 있는 기타리스트가 필요했고, 마크 볼란으로서는 후(The Who), 지미 헨드릭스와 같은 레이블에서 음반을 낼 수 있다면 (존스 칠드런은 이들과 같은 레이블에 소속되어 있었다) 더 이상 다른 것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기타리스트였던 마크 볼란의 독특한 목소리는 리드 보컬이었던 앤디 엘리슨의 백 보컬에서나 들을 수 있었지만, 라이브 무대에서 마크 볼란의 모습은 다른 멤버들 속에서 유독 두드러져 보였다. 매일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는 멤버들과 달리 마크 볼란은 아주 가끔 와인을 마시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그의 시간 대부분을 곡을 쓰는데 보냈다. 자연히 이들의 합병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마크는 자신이 모든 것을 컨트롤할 수 있는 자신의 락 밴드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존스 칠드런을 떠난다. 그렇게 해서 마크는 자신의 첫 밴드를 만들었는데, 첫 오리지널 라인업은 아직까지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어쨌거나 밴드를 만든 그는 밴드 이름을 생각했다. 결국 자신의 밴드 이름을 다이노서로 하기로 결심했지만 뭐가 약했다. 평범한 다이노서는 성에 안차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크고 가장 포악한 것이어야만 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티래노소러스 렉스 Tyrannosaurus Rex다. 리허설도 못했고, 공연 전까지 단 한번 함께 연습한 채 코벤드 가든에서 가진 이들의 첫 무대는 처참했다. 관객들의 야유 속에서 무대를 내려온 이들은 곧 뿔뿔이 흩어졌고, 남은 것은 낡은 어쿠스틱 기타를 가진 마크 볼란과 달랑 봉고만을 가진 스티브 툭 두 명이었다. # 1968 : Single Debut 락앤롤 스타의 큰 꿈을 가지고 시작한 티래노소러스 렉스는 봉고와 어쿠스틱 기타를 가진 2인조로 붕괴되었고, 그만 음악 역사에서 조용히 사라지기에 충분한 모습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마지막 남은 것이 하나 있었다. BBC방송의 ‘존 필 세션’으로 지금도 유명한 바로 그 존 필이었다. 초기부터의 마크의 가장 큰 팬이었던 존은 자신의 방송에서 티래노서러스 렉스 같은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의 음악을 틀곤 했었다. 불법 방송이 금지되자 존은 자신이 일하기 시작한 미들 어쓰 클럽의 하우스 밴드 자리를 티래노소러스 렉스에게 제공했다. 이후 BBC 라디오 방송 일을 하게 되면서도 그는 이들의 든든한 지원자였다. 존의 이런 도움 속에서 티래노소러스 렉스는 자신들의 팬 층을 만들어가기 시작했고, 곧 많은 대학 공연과 페스티벌에 초대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티래노소러스 렉스는 앞으로 마크 볼란이 보여줄 것들의 잠복기이고 해빙기였다. # Tony Visconti`s Mission Impossible 조 카커, 프로콜 하럼, 무브, 그리고 데이빗 보위의 작업을 프로듀서하던 토니 비스콘티는 회사로부터 하나의 임무를 부여 받았다. 그러나 그건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작전이었다. 바로 비틀스를 대신하여 세계를 열광시킬 넥스트 비틀스를 찾는 것이 임무였기 때문이다. 만남은 UFO에서 이루어졌다. 삼백 명 가량의 히피들이 모여 있던 나이트 클럽 UFO의 무대에서는 한 사람이 기타를 치며 마치 공상 과학 소설에나 나올법한 가사를 웅얼거리고, 그 옆에서는 봉고를 치며 한 명이 하모니를 넣고 있었다. 토니의 생각에 이런 공연에 수백 명이 모였다는 것도 의아했고, 그의 생각에 이들은 넥스트 비틀스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마크 볼란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전형적인 히피 풍의 옷을 입고, 길고 검은 머리를 집시처럼 늘어뜨린 그의 독특한 목소리는 기묘하고 특이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고, 그를 외국인으로 생각한 토니는 스티브에게 다가가 자신을 소개했다. 마크가 영어를 못하는 줄 알고. 그러나 곧 듣게 된 마크의 말은 의외였다. "당신은 우리가 만난 일곱 번째 프로듀서에요, 그 중에는 애플 레코드의 신인을 찾으러 온 존 레논도 있었다구요." 하하~ 하지만 이것은 마크가 머리를 굴려서 만들어 낸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결국 적중했다. 토니는 다음날 아침 바로 회사에 자신이 정말 흥미로운 밴드를 찾아냈는데, 이미 애플 레코드에서 접근을 했다고 상사와 얘기하던 중 마크 볼란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자신들이 로비에 있는데, 오디션을 봐도 되냐고. 마크와 스티브는 자신들이 가져온 러그를 깔고 그 위에 앉아 어젯밤의 곡들을 연주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계약을 했다. # 1968 : Album Debut 7월, 결국 첫 앨범이 발매됐다. 그들의 오랜 동지인 존 필의 극찬을 뒷면에 박고서. 토니는 티래노소러스 렉스의 신자와도 같았다. 그는 자신이 마크 볼란의 재능에 대해 느낀 것을 세계에 알리고 싶어했고, 이들의 음악을 만드는 데 자신의 모든 노력을 했다. 이러한 토니의 노력은 이후 마크 볼란과 T-Rex의 성공을 얘기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 하나의 젊은 뮤지션 데이빗 보위에게는 큰 희생이었다. 사실 마크 볼란과 데이빗 보위는 십대 시절부터 친구사이였다. 데이빗이 가까스로 마크보다 일찍 음반을 발매하고 빛을 보긴 했지만 이들은 비슷한 과정을 굴러온 친구였다. 토니는 마크와 일하기 이전에 데이빗과 작업을 했지만, 이제 데이빗을 버리고 마크에게 왔다. 위트있고 공격적인 마크의 음악과 달리 데이빗의 음악은 음악 비즈니스 쪽으로 다가갔다. 둘 사이의 우정은 여전했지만 음악적으로 이들은 서로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되었다. 첫 앨범은 차트 34위까지 올라갔지만 평론가들의 평은 하나같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최소한 자신들의 음악이 평론가들의 관심을 끌었다는 데 마크는 만족했다. 마크는 자신을 뮤지션이라기보다 시인이고 이야기작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평론가들이 음악보다도 그의 가사를 분석하는 것에 대해 굉장히 행복해 했다고 한다. 이 당시 마크의 인터뷰들은 신비로움, 난장이 요정, 요술과 마술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반지의 왕(The Lord Of King)이었고, 그 책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또한 자신의 음악을 더 잘 이해시키기 위해 토니에게 그 책을 선물하기도 했다. 인기를 얻기 시작한 이들은 도노반, 지미 헨드릭스, 핑크 플로이드, 로이 하퍼, 제스로 툴 등과 함께 많은 페스티벌에 참여했고 그 해 말, 이들의 두 번째 앨범 < Prophets, Seers, And Sages, The Angels Of The Ages >가 발매됐다. 지난 앨범보다 결과는 좋았지만 마크의 눈에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그러나 앨범의 순위와는 상관 없이 그들을 원하는 공연은 점점 더 많아졌다. 이들의 음악을 원하는 사람들은 어린 음악 팬들이 아니라 20대 후반의 LSD에 경도되었던 당시의 히피들이었다. 핑크 플로이드의 시드 배릿과 같이 마크 볼란은 견고한 컬트 지지자들의 우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컬트 히어로가 되는 것이 마크의 목표는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적어도 영국 안에서 가장 위대한 락 스타가 되는 것이었다. 히피들이 좋아하고 안하고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런 태도는 결국 그를 수퍼 스타의 자리에 오르게 했지만 스티브와는 점점 더 불화의 계기를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 1969 : Bye! 스티브 툭 마크는 그가 어느 앨범보다도 자랑스럽게 여기던 73페이지의 시집 < The Warlock Of Love >를 출판한다. 이 시집은 그가 티래노소러스 렉스의 음악에서 얘기하던 가공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이 시집으로 마크는 평론가들에게 밥 딜런, 도노반, 짐 모리슨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되는데, 당시 베스트셀러가 됐던 이 책은 현재는 100달러가 넘는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지난 두 장에서 보여지는 긴 앨범 타이틀은 세 번째 앨범에서는 한 단어로 짧아졌다. 바로 마크와 스티브의 얼굴이 컬러 사진으로 실려 있는 < Unicorn >이다. 이 앨범 역시 가상의 얘기들을 다루고 있지만 지난 두 장의 앨범에서 생긴 로열티 덕분에 프로듀서인 토니는 더욱 정교한 레코딩 기재를 가지고 보다 훌륭하게 녹음되었다. 마크가 콘웰에서 먹었던 수프의 이름을 제목으로 한 ‘Romany soup’같은 곡은 22트랙으로 녹음되어 믹싱에만 5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며칠 만에 완성된 지난 앨범들에 비하면 정말 오랜 시간을 들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 앨범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발매된 앨범이기도 한데, 미국에 받아들여지기에 이들의 음악은 너무나 낯설었다. 지금은 고전이 되었고, 마크와 스티브가 만들어 낸 가장 훌륭한 앨범으로 여겨지지만. 마크와 스티브가 만들어 낸 마지막 앨범이기도 한 이 앨범을 마지막으로 결국 스티브는 티래노소러스 렉스를 떠난다. 이때 나타난 사람이 미키 핀(Micky Finn)이다. 미키는 음악적으로 스티브에 비견될 퍼커션 주자도 아니었고, 그처럼 백 보컬을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마크는 그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마크가 그의 650cc 모터사이클에 마크가 사랑에 빠졌다고도 하지만… 어쨌거나 이들의 만남은 성공이었다. 마크는 서로에게 영감을 주며 함께 작업할 동지를 찾은 것이다. # 1970 Tyrannosaurus Rex Goes Electric & First T-Rex 누구도 이들이 이런 변화를 보일 줄 예상하지 못했다. 마크와 미키가 만든 첫 싱글은 이전과는 다른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처음으로 일렉트릭 기타가 이들의 음악 속에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3월, 앨범 < Beard Of Stars >가 나왔다. 이들의 공연에서 보여지는 일렉트릭 기타와 헤비한 연주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지만 결과는 마크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다음 앨범을 준비하던 중 이들은 다시 미국 투어를 계획했는데, 이 역시 큰 성공을 하지는 못했지만 이전과 같은 커다란 경제적 손실은 없었고, 그 공연으로 이들은 신선한 아이디어들을 얻었다. 10월, 드디어 티렉스(T-Rex)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싱글을 발표한다. 아니 이제 티렉스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12월, 앨범 < T.Rex >는 변형 쟈켓의 모습으로 발매되었다. 이 때 스티브 커리가 베이스 주자로 밴드에 가담했다. # 1971 : The Year Of The Electric Warrior 이 해가 시작될 때 ‘Ride a white swan’은 차트 탑 텐을 장식하고 있었다. 당시 1위 곡은 허비 플라워스가 지키고 있었는데, 마크는 그에게 어떻게 자신의 첫번 째 넘버 1 싱글인 ‘Ride a white swan’을 막을 수 있었냐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드디어 2월 19일, ‘Ride a white swan’이 여전히 차트 12위에 머물러 있는 중에 발매된 싱글 ‘Hot love’는 3월 20일 티렉스의 넘버 1 싱글이 된다. 6주간의 넘버 1을 비롯 24주간 차트에 머물렀던 앨범 < T-Rex >는 그들의 앨범 중 가장 오랫동안 차트를 지킨 앨범이기도 하다. 이들의 인기를 보고 마크가 떠나기로 한 플라이 레코드는 티래노소러스 렉스 당시의 곡들을 모은 < Best Of T-Rex >라는 앨범을 발매해 마크를 열 받게 하기도 했는데, 어쨌든 이 앨범 또한 큰 성공을 거둔다. 7월, 티렉스의 ‘Get it on’이 두 번째 넘버 1 싱글이 됐다. 마크는 팝 음악 계에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말을 했고 많은 팬들은 그 앨범을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9월, 드디어 팬들과 미디어의 환호 속에서 < Electric Warrior >가 발매됐다. 팬들이 비틀즈의 < Sgt.Pepper’s Lonely Heart Club Band > 앨범과 비교를 하기도 하는 이 앨범은 이 해 영국의 베스트셀링 앨범 5위를 기록한다. 이 때부터 모든 TV 쇼들이 티렉스를 불렀고, 모든 신문들이 이들과 인터뷰 하기를 원했다. # 1972 : T-Rex To The Top 1972년은 많은 앨범과 싱글들, 그리고 티렉스가 드디어 팝 음악계의 정상의 위치에 오른 해로 기억된다. 티렉스는 당시 영국 최대의 음반사인 EMI와 성공적으로 계약을 했고, ‘Jeepster’는 차트 3위에서 바로 1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마크의 이전 레코드 회사는 그들의 옛 앨범인 < Prophets, Seers, Sages >와 < My Peoples Were Fair >를 더블 앨범으로 재발매했고 이 앨범 역시 차트 1위에 올랐다. 이들은 엠파이어 풀과 웸블리에서 큰 공연을 가졌고, 이 공연들에은 정말 비틀즈의 공연에 버금가는 많은 팬들이 몰려와 성황을 이루었다. 새로운 싱글 ‘Metal guru’가 차트 정상에 올랐을 때, 지난 레코드 회사는 마크 볼란의 컴필레이션 앨범인 < Bolan Boogie >를 발매했고, 이 역시 차트 1위를 강타한다. 자신들의 인기를 보고 계속 옛 앨범들을 발매하는 플라이 레코드의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모습에 마크는 화를 내고 실망했지만 법적으로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 음반들에서 나오는 로열 티 역시 만만치 않은 수입원이었다. 모든 TV와 신문의 관심을 가져다 준 < Electric Warrior >에 이어 발매된 < The Slider >는 발매 첫 날 10만장의 판매를 기록한다. 하지만 마크가 원했던 넘버 1의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고, 이어 발표된 두 장의 싱글 역시 넘버 1의 자리에는 오르기 못했다. # 1973 : Marc Trucks On 이 해의 첫 싱글은 3월에 발매된 ‘20th century boy’이었다. 그리고 ‘Staggered’가 이어졌다. 싱글에 이어 발표된, 스튜디오에서 많은 시간을 들여 보다 대규모로 작업된 앨범 < Tanx >는 지난 해의 < Slider >와 같이 평론가들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발매 첫 날 10만 장이 팔린 ‘The groover’는 기대와 달리 6위에 그치고 말았고, 1971년 이후 가장 낮은 순위이기도 했다. 마크는 이것이 티렉스 사운드의 마지막이 될 거라고 발표했으며, 그의 말대로 마크 볼란의 솔로 싱글과 앨범이 발매된다. 그리고 이것은 티렉스의 해산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한다. # 1974 : ‘Zinc’ Arrives But Goes Soon 이 해 1월 영국 투어에서 티렉스는 두 명의 드러머와 여러 명의 색스폰 연주자들, 그리고 백 코러스를 대동하여 이전보다 많은 변화를 보였다. 투어 동안 마크 볼란 & 티렉스라는 이름의 첫 싱글 ‘Teenage dream’이 발표됐지만 차트에서는 고작 3주 동안을 머물고 말았다. 차트에 대한 실망보다도 더 크게 다가왔던 실망은 2월, 7년 동안 함께 일을 해 온 토니 비스콘티가 티렉스를 떠난 것이다.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새 앨범이 나왔다. 마크는 분위기를 일신하여 데이빗 보위가 지기 스타더스트를 만들어 내며 많은 글램 락 팬들의 우상이 된 것처럼 자신의 이름을 ‘징크 앨로이(Zinc Alloy)’라고 바꾸고, 자신의 밴드는 ‘내일의 숨겨진 기수들(The Hidden Riders Of Tomorrow)’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 A Creamed Cage In August >로 타이틀이 붙여진 이 앨범을 발표하면서는 너무나 많은 반대와 우려 때문에 밴드명에서는 마크 볼란 & 티렉스라는 이름이 그대로 사용됐다. 징크 앨로이라는 캐릭터는 지기 스타더스트와는 달랐다. 데이빗 보위의 지기는 그가 캐릭터를 죽일 때까지 모든 이들의 우상이었지만, 거창한 홍보에도 불구하고 마크 볼란의 징크 앨로이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고, 모두의 관심 밖에었던 것이다. # 1975-1976 Isolation Years 마크 볼란은 ‘이제 마술은 사라졌다’라는 말과 함께 또 다른 앞날을 준비하기 위해 영국을 떠났다. ‘글램 락은 죽었다. 나는 더 이상 장사꾼이 되고 싶지 않다.’라는 말을 하며. 마크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자신의 팬들이 급격하게 줄었다는 생각이었다. 많지 않은 다이 하드 팬들만이 그가 무엇을 할지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크는 무언가를 더 가지고 있었다. 1975년, 마크는 2 장의 싱글을 발매했다. 7월에 발매된 ‘New york city’는 존경스럽게도 차트 15위까지 올랐다. 그가 생각했던 것 보다는 많은 팬들이 아직 그의 음악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 Bolan’s Zipgun >은 그에게 다시 큰 좌절을 가져다 주었다. 차트에 오르지조차 못하던 1968년의 상황으로 그를 되돌려 놓은 것이다. 그는 좌절 속으로 빠져 들었고, 그 해, 유일한 기쁨은 9월에 그가 동거하던 글로리아 존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롤란 볼란 뿐이었다. 1976년, 마크는 여전히 자신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3월 발매된 싱글 ‘London boys’는 40위에 그쳤지만 미디어들의 반응은 의외로 호의에 찬 것이었다. 마크에게 다시 희망을 가지게 해 준 것은 차트 13위까지 오른 두 번째 싱글이었다. 예전의 마크에게는 실망스러운 결과였겠지만 지금의 마크에게는 너무나 희망적인 결과였다. 그리고 마크와 티렉스는 1971년 이후 가장 큰 공연을 준비했고 한달 후, 발매된 앨범 < Futuristic Dragon >. 이 앨범은 지치지 않고 마크와 티렉스의 음악을 기다려준 팬들에게는 긴 터널을 지나 만나는 빛과도 같이 반가운 앨범이었다. # 1977 : If… ‘마크가 다시 정상에 오를 수 있었을까?’라는 것은 열광적인 팬들만이 가지고 있던 불가능한 생각은 아니었다. 마크는 다시 그 동안 늘어났던 술을 줄이고 몸무게를 빼고 데이빗 보위와 토니를 만나며 자신을 찾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9월 16일, 모든 것이 불가능해 졌다. 운전을 배우지 않았던 마크 대신 운전을 하던 글로리아와 함께 클럽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중, 급커브를 돌다가 글로리아가 길에서 벗어나 나무를 들이받고 만 것이다. 마크 볼란은 며칠 남지 않은 자신의 서른 번째 생일을 영영 맞지 못했다. 그리고 글로리아는 살아 남았다. # 2000년 이미 30년 전에 나타나고 사라진(그것도 영원히) 글램 락 스타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어찌 보면 고리타분한 옛날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래서 여기까지 지루한 글을 읽은 분들께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한마디. 아직까지 마크 볼란과 T-Rex의 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런 연대기 식의 지루한 얘기는 이제 뒤로 하고 당신의 플레이어에 ELECTRIC WARRIOR를 걸고 플레이를 하라는 것이다. 음악을 듣지 않고 이 글을 읽는 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렇게 재미도 없는 글을…
밴드 : Queen (퀸,Freddie Mercury Roger Taylor John Deacon Brian May)
1968년 영국 임페리얼 대학의 학생이었던 브라이언 메이(Brian May)와 팀 스타펠(Tim Staffell)은 밴드를 만들기로 결의했고, 학교 게시판 광고를 보고 찾아온 젊은 의학도 로저 테일러(Roger Talyor)와 함께 스마일(Smile)이라는 트리오를 결성했다. 그러나 레코드사의 지원 부족으로 1970년에 스마일은 해체되고 말았다. 이전부터 스마일의 멤버들과 친했던 프레디 벌서라(Freddie Bu... 1968년 영국 임페리얼 대학의 학생이었던 브라이언 메이(Brian May)와 팀 스타펠(Tim Staffell)은 밴드를 만들기로 결의했고, 학교 게시판 광고를 보고 찾아온 젊은 의학도 로저 테일러(Roger Talyor)와 함께 스마일(Smile)이라는 트리오를 결성했다. 그러나 레코드사의 지원 부족으로 1970년에 스마일은 해체되고 말았다. 이전부터 스마일의 멤버들과 친했던 프레디 벌서라(Freddie Bulsara)는 로저, 브라이언과 함께 새 밴드를 만들기로 하고 그의 이름을 머큐리(Mercury)로, 밴드의 이름을 퀸(Queen)으로 바꾸었다. 세 명의 베이스주자가 퀸을 거쳐 갔고, 1971년 2월, 존 디콘(John Deacon)은 퀸의 네 번째 멤버가 되었다. 1972년에는 트라이던트(Trident)와 계약을 맺었고, 낮은 수당만을 받으며 스튜디오가 비는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녹음한 첫 앨범을 1973년 7월 발매하였다. 퀸의 첫 메이저 투어는 모트 더 후플(Mott The Hoople)의 서포트 밴드 자격으로 1973년 11월 영국 리즈(Leeds)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74년 3월, 재킷의 인쇄 문제를 수정하라는 밴드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예정보다 늦게 2집 < Queen II >가 발매되었다. 1974년 3월, 밴드는 자신들이 주인공인 첫 번째 영국 투어에 착수했고, 4월에는 ‘모트 더 후플’의 서포트 밴드로서 첫 미국 투어에 들어갔다. 5월에 간염으로 쓰러졌던 브라이언이 휴식과 녹음을 병행하며 참여해 만들어낸 세번째 앨범 < Sheer Heart Attack >이 발매된 것은 그 해 11월이었다. 앨범은 유럽과 북미 양쪽에서 엄청나게 히트했고, 사람들은 퀸이 빼놓을 수 없는 거물이 되어버렸음을 알아차렸다. 싱글로 발표된 ‘Killer Queen’은 영국차트 2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고 이듬해에는 미국 팝 차트에도 진출, 12위라는 호성적을 기록했다. 1975년 1월, 퀸은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미국 투어에 나서, 1일2회 공연해도 매진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4월에는 최초로 일본 방문길에 올랐으며, 공항에는 3천명의 팬이 몰려 나와 열광적으로 그들을 환영해 밴드를 놀라게 했다. 6월에는 새 앨범 < A Night At The Opera >의 작업에 착수, 불공정한 트라이던트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존 레이드(John Reid)와 새로운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했다. 사람들은 신곡 ‘Bohemian rhapsody’는 너무 길어 히트하기 힘들 것이라고 했으나, 곡에 매료된 디제이 케니 에버릿(Kenny Everett)이 프레디에게 개인적으로 받은 홍보용 싱글을 이틀 동안 열네 번 방송에 내보냈다. 곡은 어마어마한 히트를 했고, 퀸을 정상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 곡의 홍보를 위한 뮤직비디오는, 이후 뮤직비디오 대유행의 효시로 간주되었다. 싱글은 9주 동안이나 영국차트 1위에 머물렀다. < A Night At The Opera >의 제작비는 당시 최고 수준이었고, 1975년 11월에 발매가 되자 큰 히트를 기록하여 퀸에게 최초의 플래티넘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표지에는 프레디가 첫 앨범을 위해 만들었던 퀸 로고를 재 작업하여 사용하였다. 이 앨범에선 미국 차트 9위에 오른 ‘Bohemian Rhapsody’에 이어 존 디콘이 쓴 ‘You’re my best friend’(영국 7위, 미국 16위)가 히트했고 국내에서는 두 곡 외에도 프레디 머큐리가 쓴 아름다운 발라드 ‘Love of my life’가 폭발적으로 애청되었으며 브라이언 메이 작품인 ‘39’도 줄기차게 전파를 탔다. ‘Love of my life’가 퀸의 한국 최고 레퍼토리가 된 데는 ‘Bohemian rhapsody’가 공륜으로부터 허무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금지처분을 받아 라이선스 앨범에 수록되지 못한 덕(?)도 작용했다. 1976년 1월, 프레디는 ‘Bohemian Rhapsody’로 아이버 노벨로(Ivor Novello)상을 ‘Killer Queen’에 이어 다시 한번 수상했다. 또한 밴드는 세 번째 미국 투어를 시작하여 3월에 끝내고 향일(向日), 다시 열광적인 환대를 받았다. 당시 넉 장의 퀸 앨범 모두가 영국차트 20위권에 머물러 있었고 이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대규모 일본 투어를 끝내고 호주로 가서 < Down Under(호주) >라는 제목의 순회공연을 벌였다. 다음 앨범인 < A Day At The Races >의 작업에 들어가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왔으나 녹음을 중단하고 짧은 영국 투어에 착수했다. 1976년 9월18일, 퀸은 팬들을 향한 감사의 뜻으로 런던의 유명한 하이드파크에서 대규모 무료공연을 열었다. 청중은 15만-20만 명 사이로 추산되어 현재까지도 하이드파크에서 열린 공연의 최다 관객동원기록으로 남아 있다. 밴드는 9월부터 새 앨범작업에 열성적으로 임해, < A Day At The Races >는 12월에 발매되었다. 앨범의 홍보를 위해서 특별 경마가 열리기도 하였다. 발매되기 닷새 전에 < A Day At The Races >의 예약주문은 50만장을 넘어섰고, 그것은 당시 EMI 음반사 초유의 쾌거였다. 이 앨범의 싱글은 ‘Somebody to love’(영국 2위, 미국 13위), ‘Tie your mother down’(영국 31위, 미국 49위) 그리고 첫 EP의 리드트랙이었던 ‘An old-fashioned lover boy’(영국 17위) 등이었지만 국내에서는 ‘Bo rap’을 연상시키는 ‘Millionaire waltz’를 비롯해 ‘You take my breath away’, ‘You and I’도 애청되었다. 1977년 초반에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투어를 했다. 그 즈음에 로저는 자비로 솔로 싱글을 녹음하기로 결심하고 ‘I wanna testify’를 8월에 발매하였다. 그해 5월에는 대규모 유럽 투어를 시작하기 위해 스웨덴의 스톡홀름으로 날아갔다. 런던 얼스 코트(Earls Court)에서의 콘서트에는 초대형 왕관모양의 조명이 등장했다. 폭 54피트, 높이 26피트, 무게 5천 파운드로 제작비는 무려 5만 파운드였다. 그해 10월, 팬클럽 멤버들은 처음으로 퀸의 뮤직 비디오에 출연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We are the champions’의 촬영이 끝난 후, 출연해준 팬들을 위해 즉흥 공연을 벌였다. 같은 달인 10월, ’Bohemian Rhapsody’로 52년부터 77년까지 발표된 영국 싱글 가운데 최우수 싱글에 주어지는 브리태니어 상(Britannia Award)을 ‘A whiter shade of pale’의 프로콜 하럼(Procol Harum)과 공동 수상했다. 그달 28일 ‘We are the champions’가 수록된 신보 < News Of The World >가 나왔다. 로저는 한 과학소설 삽화가의 작품을 앨범 표지로 사용해도 되는지 물어보았고, 작가는 흔쾌히 승낙하고 수정까지 해주었다. 재정상태가 좋아져 자가용 비행기를 구입해서 그해의 두 번째 투어를 훨씬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그해 크리스마스에는 12주 동안 프랑스 차트 1위를 점령한 ‘We are the champions’에 이어 ‘We will rock you’가 1위 행진을 시작했다. ‘We are the champions’는 영국에서 2위를 차지했으며, 미국에서는 ‘We will rock you’와 함께 더블 A면 싱글로 발표되어 밴드 최초의 플래티넘(100만장판매) 영광을 안으며 4위에 올랐다. 이 무렵 한국에서 퀸의 인기는 최고조에 달해 앨범 < News Of The World >에서 ‘We will rock you’와 ‘We are the champions’ 외에 ‘Spread your wings’ ‘All dead all dead’ ‘Who needs you’ ‘My melancholy blues’ 등 다수 트랙이 음악다방을 완전히 잠식할 정도였다. 1978년 2월, 퀸은 그들 스스로의 매니지먼트 체계를 갖추기로 결정하고 존 레이드와의 계약을 종료했다. 퀸의 기준에서 보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유럽 투어가 1978년 4월에, 이번에도 스톡홀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7월에는 새 앨범 작업에 착수했는데, 처음으로 영국이 아닌 스위스 몬트뢰(Montreux)와 프랑스에서 작업하였다. 신곡 ‘Bicycle race’의 홍보를 위해 밴드는 윔블던 스타디움(Wimbledon Stadium)을 빌렸고, 50명의 나체 여성이 자전거 경주를 벌였다. 싱글의 오리지널 커버에는 경주에 나온 한 여성의 뒷모습이 나와 있었는데, 일부 국가에서는 사람들의 항의로 말미암아 팬티를 그려 넣어야 했다. 그해 11월 신보 < Jazz >를 발매했다(영국 2위). 재킷에는 나체 자전거경주 포스터가 들어 있었다. 미국에서는 반대에 부딪혀서, 신청서를 대신 넣어 우편으로 포스터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밴드는 앨범 발매 축하파티에 EMI와 일렉트라(Electra) 두 음반회사의 중역들을 동시에 초대했는데, 양측은 서로 세를 과시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고 한다. 파티는 진흙탕 레슬러, 난장이, 반라의 웨이트레스가 등장하는 기괴한 스타일이었다. 이 앨범에선 더블 A 싱글 ‘Bicycle race/ Fat bottomed girls’(영국 11위, 미국 24위)와 지금도 라디오전파를 수놓는 ‘Don’t stop me’(영국 9위, 미국 86위)가 크게 히트했다. 12월 북미 투어가 끝나고 영국으로 돌아간 퀸은 이듬해 첫 달부터 유럽 투어에 들어갔고 이를 끝마치자마자 라이브 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부틀렉이 유통되는 등 대중적인 수요 때문에 미룰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1979년 6월 마침내 첫 라이브 앨범 < Live Killers >가 발매되었다. 일본 투어와 영국 투어를 끝낸 그들은 그 해 크리스마스 다음날 밤 캄보디아를 돕기 위한 자선 콘서트를 하였다. 1980년 6월 퀸 최초로 신디사이저를 사용한 < The Game >이 발매되었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시키는 로커빌리 싱글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가 최초로 빌보드 정상을 점령했다. 이어 펑키한 리듬이 특징적인 두 번째 싱글 ‘Another one bites the dust’도 빌보드 차트의 팝을 위시해 소울, 디스코, 록 차트에서 모두 1위에 오르는 일대 기염을 토하며 앨범의 세계적 폭풍을 이끌었다. 12월에는 영화 사운드트랙인 < Flash Gordon >이 발매되었고, 그 해까지 퀸이 전세계에 판매한 앨범 수는 4천 5백만 장으로 기록되었다. 1981년에는 남미 투어를 감행하였다. 아르헨티나에서 8일 동안 다섯 차례나 거대한 스타디움 공연을 매진시켰고, 이어 브라질에서는 하룻밤에 13만 명, 이틀 동안 25만 명이 넘는 유료관객을 동원했다. 이것은 단독밴드로서는 당시 최고 기록이었다. 투어 내내 아르헨티나 차트에는 퀸의 모든 앨범이 10위권에 들어 있었다. 퀸이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고 남미에서의 스타디움 투어를 처음으로 해내자, 이후 딴 밴드들의 남미 순회공연이 봇물 터지듯 이어졌다. 한편, 로저는 첫 솔로 앨범 < Fun In Space >를 발매하였다. 세계 최초의 프로모션 비디오 모음집인 < Greatest Flix >와 사진집 < Greatest Pix >, 히트곡 모음 앨범 < Greatest Hits >가 동시에 발매되었는데, < Greatest Hits >는 발매 이래 영국 차트 밖으로 밀려난 적이 거의 없을 만큼 스테디셀러를 기록했다. 1982년에는 유럽 투어 도중에 12번째 앨범 < Hot Space >를 발매했고, 이 무렵 일본에서는 스마일의 < Gettin’ Smile >이라는 앨범이 발매되기도 했다. 12월에는 가장 급료가 높은 경영자로 기네스북에 올라 화제가 되었다. 1983년 1월, 프레디와 로저는 각각 첫 번째와 두 번째 솔로 앨범 작업에 착수했다. 브라이언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에드워드 밴 헤일런을 비롯한 친구들과 모여 잼 세션을 했는데, 그것을 정리해서 < Star Fleet Project >라는 미니 앨범으로 발매하였다. 8월부터는 다음 앨범 녹음작업을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하였는데, 미국에서 녹음한 것은 이게 처음이었다. 1984년 2월, 13번째 앨범인 < The Works >를 발매하였고 첫 싱글 ‘Radio ga ga’는 19개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영국 2위, 미국 16위). 뮤직 비디오에 팬클럽 회원들이 출연하였고 여기서 보여준 박수치는 동작은 각국의 퀸 공연에서 재연되었다. 두 번째 싱글 ‘I want to break free’의 뮤직 비디오는 영국의 유명한 드라마를 패러디했는데, 멤버 모두가 우스꽝스런 여장을 하고 등장했다. 곡은 영국 3위, 미국 45위를 기록했다. 한편, 3월에 로저와 존은 관광차 한국을 방문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한국에 퀸 팬클럽이 결성되어 수년간 활동하기도 했다. 6월에는 로저의 두 번째 솔로앨범 < Strange Frontier >가 발매되었고, 길드 기타(Guild Guitars)가 브라이언의 기타인 레드 스페셜을 카피한 기타 모델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8월에는 벨기에에서부터 투어를 시작하는데, 10월 보츠와나 공화국의 남아공 백인정부가 건설한 선 시티(Sun City) 공연에 출연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밴드는 자신들은 비정치적 밴드이며 단지 사람들을 위해 음악을 연주하러 간 것일 뿐이라고 항변했으나, 남아공 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흑인차별정책)에 대한 세계적 비난여론에도 불구하고 선 시티에 갔다는 맹비난을 피할 수는 없었다. 9월에는 1981년 몬트리올 공연을 촬영한 비디오 < We Will Rock You >가 발매되었고, 영국 차트 탑 200에 아홉 개의 앨범을 올려두어 여전한 퀸의 인기를 증명했다. 1985년에는 록 인 리오(Rock In Rio) 페스티벌에 참여했다. 출연한 모든 밴드의 공연이 방송을 위해 녹화되었으나, 퀸만이 실황 비디오를 발매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프레디의 첫 번째 솔로 앨범인 < Mr. Bad Guy >가 호주 투어 중에 발매되었고, 이어진 일본 투어 중 한 공연이 촬영되어 일본 텔레비전에 방영되었다. 7월의 라이브 에이드(Live Aid)는 퀸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퀸은 주어진 20분간 완벽한 쇼를 선보였고, 언론과 관객은 전체 공연을 ‘훔친’(stole) 밴드로 퀸을 꼽았다. 밴드는 새로운 활력을 얻었고, 이 때 얻은 영감으로 영화 < 아이언 이글 >(Iron Eagle)의 사운드트랙에 삽입된 곡 ‘One vision’(영국 7위)을 녹음하여 출시하였다. 1986년 3월, 존 디콘은 이모털즈(The Immortals)를 결성하여 영화 < 비글즈 >(Biggles)를 위한 곡 ‘No turning back’을 녹음, 발매한다. 6월에는 불사의 종족에 대한 판타지영화 < 하이랜더 >(Highlander)의 음악을 맡아, 몇 곡을 추가하고 재편곡을 거쳐 < A Kind Of Magic >이라는 제목으로 열네 번째 앨범을 발매하여 영국차트 정상을 밟았다. 6월부터는 유럽투어에 돌입하여 런던의 웸블리(Wembley) 스타디움에서 이틀간 매진을 기록하며 절정의 열기를 과시했다. 촬영된 둘째 날의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은 훗날 영국 전역에 텔레비전과 라디오로 동시에 방송되었다. 7월의 헝가리 부다페스트 공연은 동구권 최초의 메이저 록 밴드 공연이었고, 역시 전석 매진되었다. 헝가리 전역의 35mm 카메라를 징발해 촬영된 공연은, 12월에 부다페스트에서 영화로 상영되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유럽 전역에서 백만 명, 영국에서만 40만 명이 관람한 유럽 투어는 12만 명이 운집한 네브워스 파크(Knebworth Park) 공연으로 마무리되었다. 11월에는, 퀸의 전 앨범이 동시에 시디로 발매되었는데, 이 역시 초유의 일이었다. 12월에 발매된 라이브 앨범 < Live Magic >은 영국 차트 3위에 올랐다. 1986년 그해 1년간 퀸이 영국에서 판매한 앨범은 총 1,774,991장이었다. 1987년 2월, 프레디 머큐리는 플래터스(Platters)의 명곡 ‘The great pretender’를 리메이크해 영국차트 4위에 올려놓았다. 3월에 그는 평소 흠모했던 오페라 디바 몽세라 까바예(Montserrat Caballe)를 바르셀로나에서 만나 앨범을 녹음하기로 한다. 9월에 발매된 싱글 ’Barcelona’는 스페인에서 3시간 만에 10000장이 팔려나갔다. 로저는 8월, 퀸의 휴식기에 함께 활동하기 위한 새 밴드 크로스(The Cross)의 멤버를 구하기 위한 광고를 냈다. 12월에는 다큐멘터리 비디오 < The Magic Years >가 발매되어 여러 상을 수상하였다. 1988년 1월이 되자 퀸은 새 앨범 작업에 착수하였고, 한편으로 크로스는 데뷔 앨범 < Shove It >을 발매하였다. 10월 8일 프레디와 몽세라 까바예는, 스페인의 왕과 왕비가 참석한 올림픽 행사에서 이틀 후에 나올 앨범에서 고른 세 곡을 협연하였다. 12월 4일, 크로스는 팬클럽 파티에서 브라이언, 존과 함께 공연을 했다. 1989년 5월 22일에는 < The Miracle >이 발매되어 영국차트 정상에 올랐다. 앨범에 앞선 싱글 ‘I want it all’은 영국차트 3위(미국 50위)에 올랐고 연이어 ‘Breakthru’(영국 7위) ‘The invisible man’(영국 12위) ‘Scandal’(영국 25위)이 차트를 장식했다. 수년간 하지 않았던 합동 인터뷰를 위해 라디오에 출연하는가 하면, ‘인디펜던트 텔레비전’의 시청자 투표에 의해 ‘80년대 최고 밴드’로 선정되기도 했다. 11월에는 < The Miracle >의 대성공에 고무된 멤버들이 다음 앨범 작업을 위해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왔다. 1990년 2월18일에는 영국 음향 산업(British Phonographic Industry, BPI)으로부터 ‘영국 음악에 지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BPI상을 받았다. 크로스는 3월26일 2집 < Mad: Bad: And Dangerous To Know >를 발매하고 독일에서 공연을 가졌다. 브라이언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위한 음악을 작곡하고 제작했으며 11월에는 할리우드 레코드사와 계약하여 북미에서 전 앨범을 리마스터해서 재발매하기로 했다. 12월7일에 크로스는 퀸 팬클럽 파티에서 연주하였는데 앙코르무대에서 브라이언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1991년 1월 14일에는 ‘Innuendo’를 싱글로 발매하여 데뷔와 동시에 영국차트 1위에 오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동명의 앨범이 2월 4일 발매되어 역시 영국차트 1위를 차지하였다(미국에서는 30위). ‘I’m going slightly mad’ ‘Headlong’ ‘The show must go on’ 등 이어진 싱글들도 영국에서 각각 22위, 14위, 16위에 오르며 분전했다. 3월에는 크로스가 세 번째 앨범작업에 들어갔고 브라이언은 솔로 앨범 제작을 위해 7월에 몬트뢰로 날아갔다. 같은 달에 크로스의 앨범 < Blue Rock >도 완성되어 9월 초에 독일에서만 발매되었다. 퀸은 4월에 런던으로 돌아가 다시 다음 앨범 작업에 돌입했다. 5월30일에는 프레디는 마지막 출연작이 된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하였다. 10월에 브라이언은 세빌 기타 레전드(Seville Guitar Legends) 페스티벌에서 누노 베텐코트, 스티브 바이, 조 새트리아니 등과 공연(共演)했다. 같은 달에 < Greatest Hits II >가 발매되었다. 이번에도 비디오 모음집과 사진집을 함께 발매하였다. 앨범과 비디오 모음집은 여지없이 1위에 올랐다. 1991년 11월23일 프레디는 자신이 에이즈 환자임을 갑작스럽게 세상에 알렸고, 그 다음날 친구들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세계는 충격에 빠지고 각국의 팬들이 애도의 꽃과 카드를 보냈으며 프레디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조로아스터교 신자인 부모의 뜻에 따라, 프레디의 장례식은 세상을 떠난 지 3일 후에 조용히 화장으로 치러졌다. 4월에는 브라이언이 포드 자동차를 위한 광고음악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고 ‘Driven by you’를 써서 11월25일에 싱글로 발매, 영국차트 6위를 기록했다. 프레디의 마지막 바람이었던 에이즈와의 투쟁을 위한 기금을 모으기 위해 싱글 ‘Bohemian rhapsody/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가 발매되어 5주간 영국차트 1위에 올라 100만 파운드를 벌어들였다. 12월에는 퀸의 앨범 10장이 영국 차트 100위권에 랭크되었다. 1992년 2월, 브릿 어워드(BRIT awards)에서는 ‘영국 음악에 크게 공헌’한 바를 인정하는 특별상을 수여하였고,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를 ‘1991년 베스트 싱글’로 선정하였다. 수상식에서 로저와 브라이언은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프레디의 삶을 기리기 위한 콘서트를 할 것임을 알렸다. 공연에 누가 나오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 다음날 표가 판매되기 시작하였고, 72,000장의 표는 단 6시간 만에 매진되었다. 4월20일 웸블리 스타디움에서는 세계 최고의 스타들이 모여 프레디를 추모했다. 스타디움은 꽉 찼고, 수십억의 사람들이 시청했다. 여름에는 이 공연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머큐리 피닉스 트러스트(The Mercury Phoenix Trust)가 설립되었다. 프레디 머큐리 추모 공연의 비디오는 크리스마스 직전에 발매되었다. 4월에는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로 아이버 노벨로(Ivor Novello) 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1992년 9월에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브라이언의 솔로 앨범 < Back To The Light >이 발매되어 영국차트 6위에 오르고 판매량에서 더블 골드를 기록했다. 브라이언은 11월의 남미 투어를 시작으로 북미와 유럽, 일본 등 월드투어를 이듬해까지 지속했다. 1993년에는 영국차트 1위를 차지한 프레디의 ’Living on my own’이 아이버 노벨로 상을 수상하였다. 1994년에는 브라이언 메이 밴드가 브릭스톤 아카데미(Brixton Academy)에서의 실황을 라이브 앨범으로 내놓았다. 같은 해 9월에는 로저가 세 번째 솔로 앨범인 < Happiness? >를 선보였다. 1995년에는 브라이언, 로저, 존이 퀸의 마지막 정규앨범 < Made In Heaven >을 완성하여 전 세계적으로 발매하였다. 1996년 3월, 국내 PC통신 나우누리에 퀸 팬클럽 ‘퀸사모’가 개설되었다. 한국에 개설된 최초의 온라인 퀸 팬클럽이었고, 80년대의 퀸 팬클럽이 1987년 초에 마지막 공식 컨벤션을 개최한 이래 9년만의 일이었다. 1997년에 퀸은 ‘Too much love will kill you’로 아이버 노벨로 상을 수상하였다. 한편 프레디에 대한 세 멤버의 추모곡 ’No one but you’가 수록된 편집 앨범 < Queen Rocks >가 발매되었다. 11월에는 한국 최초의 퀸 전문 커버밴드 ‘영부인’(0vueen)이 서울 신촌에서 첫 공연을 하였다. 1998년에는 브라이언과 로저가 각각 솔로 앨범 < Another World >, < Electric Fire >를 발매했고 1999년에는 < Greatest Hits III >가 발매되었다. 2000년에는 10장의 CD와 2장의 DVD로 제작된 프레디 머큐리 박스세트가 발매되었다. 2002년에는 퀸 뮤지컬 < We Will Rock You >가 선보였고, 높은 인기로 유럽 각국에서 2004년 현재까지도 공연이 이어지고 있다. 뮤지컬 개막을 축하하는 깜짝 공연이 브라이언과 로저에 의해 네덜란드에서 열려 큰 화제를 모았다. 또한 브라이언과 로저는 뮤지컬 출연진과 함께 영국여왕 즉위 50주년 기념 공연에 참여하여 ‘God save the Queen’을 비롯한 여러 곡들을 연주하여 열띤 호응을 받았다. 한편, 퀸의 곡들을 테마로 작곡된 교향곡이 톨가 카쉬프(Tolga Kashif)의 지휘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해 초연되기도 했다. 또한 ’Bohemian Rhapsody’가 기네스북이 주관하여 영국인 310,000명이 참여한 ‘시대를 초월하는 최고 싱글‘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다. 2004년 현재 존 디콘은 은퇴하여 언론매체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있고, 브라이언과 로저는 함께 공연하거나, 퀸 관련 디브이디를 제작하는 등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본 내용은 영국의 공식 퀸 팬클럽에서 만든 공식 전기 < As It Began > 축약본을 다시 축약해 내용을 일부 추가한 것입니다.
밴드 : Blur (블러 (락 밴드))
얼터너티브록과 브릿팝은 1990년대 미영 양대륙 대중음악의 아이콘이다. 비슷한 시기에 출발, 발달하였다. 브릿팝은 미국 얼터너티브록에 대한 영국적 답변이 아니다. 얼터너티브록에 관계 없이 브릿팝의 생성은 예정된 것이었다. 1970,80년대 영국의 모드(Mod)와 퍼브록(Pub Rock), 투톤무브먼트(Two Tone Movement), 뉴웨이브 등을 통하여 얼마든지, 그리고 구체적으로 스미스와 스톤 로지스를 통해... 얼터너티브록과 브릿팝은 1990년대 미영 양대륙 대중음악의 아이콘이다. 비슷한 시기에 출발, 발달하였다. 브릿팝은 미국 얼터너티브록에 대한 영국적 답변이 아니다. 얼터너티브록에 관계 없이 브릿팝의 생성은 예정된 것이었다. 1970,80년대 영국의 모드(Mod)와 퍼브록(Pub Rock), 투톤무브먼트(Two Tone Movement), 뉴웨이브 등을 통하여 얼마든지, 그리고 구체적으로 스미스와 스톤 로지스를 통해 이미 80년대부터 선명한 청사진이 제시되었다. 브릿팝은 자생한 것이다. 블러는 브릿팝 수도에 편리하게 도달하기 위한 착오없는 이정표이다. 브릿팝 표준은 블러이다. 수도 감성의 블러를 중심으로 다양한 지방색들이 존재한다. 블러는 1989년 영국 콜체스터에서 세무어(Seymour)라는 이름으로 결성되었다. 그 멤버 그대로 현재 데이몬 알반(Damon Albarn), 그래험 콕슨(Graham Coxon/G), 알렉스 제임스(Alex James/B), 데이브 로운트리(Dave Rowntree)로 짜여져있다. 1990년대 초반까지 브리티쉬 록의 퇴색은 만연했다. 이엠에프, 지저스 존스 등 파트타임 펑큰롤이 겨우 연명하던 시기였다. 아마츄어 블러, 세무어는 어려운 시기에 뛰어들어 나름대로 스타일을 정립했다. 그것은 맨체스터형 배기비트의 수용이었다. 데뷔 앨범 < Leisure >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이웃집 잔치인 매드체스터를 흠모한 흔적이 역력하다. 2집인 < Modern Life Is Rubbish >부터 블러는 구축되기 시작한다. 블러의 영국기질이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 앨범이다. 킹크스, 버즈콕스, 엑스티씨 등 영국 토종의 감성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관악을 등장시킨 뿜바 사운드와 블러 특유의 각 채널의 독창성도 이때부터 두각을 나타낸다. 세 번째 작품인 < Parklife > 앨범에서 블러는 완성된다. 발매직후 영국 앨범차트 1위에 오르며 1995년 브릿어워즈에서 베스트 싱글, 앨범, 비디오, 그룹 등 4개 부문을 석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파크라이프를 통해 브릿팝이라는 단어가 일반화 되었다. 1980년대 후반 맨체스터를 시발로 1990년대 초반까지 증식되던 글리터링한 기타-팝은 파크라이프로 인해 브릿팝으로 명료하게 통합된 것이다. 파크라이프에서는 냉철한 시각으로 수집한 영국의 사회상을 꼼꼼하게 스크랩해 낸다. 전작을 아울렀던 킹크스, 스몰 페이시즈, 매드니스, 잼 등의 내외곽적인 채취는 자취를 감추고 블러의 정체성이 확고해진다. 음악적인 완성도도 뛰어나다. 신스팝, 기타팝, 펑크 등의 각 유니트가 결속된 결정체인 듯한 세련된 브릿팝이 나열된다. 전체적으로 같은 밀도를 유지하며 꽉 찬 느낌을 들게 하는 것도 블러의 대표작 파크라이프의 메리트이다. Girls & Boys, Parklife, To The End는 순차적으로 차트를 휩쓸었다. 블러는 2001년 현재, 변함없는 라인업으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4집 < The Great Escape >에 수록된 Country House가 경쟁끝에 오아시스의 Roll With It을 2위로 밀어내며 오아시스와의 경합은 가속화되기도 하였다. 5집인 < Blur > 앨범부터 다양한 역량과 새로운 스타일에 도전한다. < Blur >에서는 그런지와, 6집 < 13 > 앨범에선 소울과도 타협했다. 미국에서도 먹힌 비교적 성공적 대서양 횡단이었다. 그러나 다양한 시도 속에 묻혀 블러 특유의 영국적인 기질은 서서히 침잠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브릿팝 총대였던, 브릿팝 표준이었던 블러로서는 대단히 아쉬운 부분이다.
비치 보이스는, 파도타기 놀이인 서핑의 즐거움을 담은 노래로 유명한 팝 그룹이다. 이들이 60년대 초반에 발표한 노래 ‘서핑 USA’는 지금도 여름만 되면 어김없이 전파를 탄다. 이들이 ‘록 역사의 전설’로 기록되고 있는 것은 66년에 발표한 < 펫 사운즈(Pet Sounds) >가 있기 때문이다. 그룹의 리더인 브라이언 윌슨의 독집이라 해도 무방한 이 앨범은 서프 음악의 종언을 알리기라도 하듯 갖가지 새로운 시... 비치 보이스는, 파도타기 놀이인 서핑의 즐거움을 담은 노래로 유명한 팝 그룹이다. 이들이 60년대 초반에 발표한 노래 ‘서핑 USA’는 지금도 여름만 되면 어김없이 전파를 탄다. 이들이 ‘록 역사의 전설’로 기록되고 있는 것은 66년에 발표한 < 펫 사운즈(Pet Sounds) >가 있기 때문이다. 그룹의 리더인 브라이언 윌슨의 독집이라 해도 무방한 이 앨범은 서프 음악의 종언을 알리기라도 하듯 갖가지 새로운 시도를 선보여 당시 팝 음악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브라이언은 더빙 반복을 통해 이 앨범의 사운드를 놀라울 만큼 두껍게 했고 종소리, 경적소리, 외침 같은 효과음을 많이 응용했다. 사람들은 이 같은 기술적 개가를 접하고 스튜디오 음악의 실체를 알기 시작했다. 폴 매카트니가 1967년, 팝 사상 최고의 명반인 <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 >를 만든 후 “만약 < 펫 사운즈 >가 없었더라면 이 앨범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실토했을 정도다. 톰 페티, 린지 버킹햄, 그룹 소닉 유스 등도 < 펫 사운즈 >가 음악을 듣는 방식 자체를 변화시켰다고 평가했다. 비치보이스를, 얼핏 < 서핑 USA >하나로 이름을 날린 그저 그런 그룹으로 기억하는 사람들로서는 적이 의아스러울 만한 부분이다. 이 앨범은 국내에 ‘그리운 고향’(‘앞마을 옛터에 빨래하는 순이...’로 시작되는)으로 번안된 ‘슬룹 존 B’와 같은 히트곡을 내긴 했지만, 출반 당시에는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음반을 낸 캐피톨 레코드사 측도 브라이언이 쓸데없는 음반을 만들었다고 불평했었다. 그래서인지 이 앨범이 90년 CD로 나왔을 때도 골든 레코드(50만장 판매)를 기록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 앨범 가치는 상승해 ‘전설적인 걸작’으로 자리잡았다. 근착 빌보드는 < 펫 사운즈 >발매 30주년을 기념해 CD 박스 세트를 오는 5월에 출시될 예정이라고 전하고 있다. 뒤늦게 이 작품이 명반임을 깨달은 캐피톨사가 음반의 의미를 기리려는 의지를 내비침으로써 이 박스 세트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캐피톨사는 이 앨범을 ‘상품’으로서뿐 아니라 ‘역사적 다큐멘트’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원곡을 리마스터한 것들 외에, 당시의 신곡 및 실패본들이 총망라돼 실릴 것으로 알려졌다. 많은 팬이 캐피톨사 측의 이런 노력에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 로이 버크허트는 이런 말을 했다. “그와 같은 일은 마땅히 레코드회사가 해야 한다고 본다. 백년이 지나면 비틀스, 롤링 스톤스, 비치 보이스는 우리 시대의 베토벤, 브람스, 바흐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옛 음반이 거의 재발매되지 않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음반 속으로

BABY DRIVER - Official International Trailer / Baby Driver Official V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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