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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피아노 뉴에이지 - 당신이 잠든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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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피아노 뉴에이지 - 당신이 잠든 사이에

Ennio Morricone, Adam Schleinger, James Horner, 박진영, 임재범 작곡 외 13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Naturally Music | 2017년 12월 05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258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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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피아노 뉴에이지 - 당신이 잠든 사이에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7년 12월 05일
시간, 무게, 크기 220g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1
  • 01 Cinema paradiso - Morricone ennio '시네마천국 中'
  • 02 Love theme - Morricone ennio '시네마천국 中'
  • 03 Way back into love - Adam schleinger '그 여자 작사 그남자 작곡 中'
  • 04 All by myself - Eric carman
  • 05 love affair (piano solo) - Morricone ennio '러브 어페어 中'
  • 06 Tears in heaven - Eric clapton '러쉬 中'
  • 07 Try to remember - Tom jones '유리의 성 中'
  • 08 Return - Morricone ennio '러브어페어 中'
  • 09 A love idea - Knopfler mark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中'
  • 10 My heart will go on - Horner James '타이타닉 中'
  • 11 Playing love - Morricone ennio '피아니스트의 전설 中'
  • 12 Deboran's theme - Morricone ennio '원스어폰어 타임 인 아메리카 中'
  • 13 She - Aznavour charles '노팅힐 中'
  • 14 Gabriel's oboe - Morricone ennio '미션 中'
  • 15 Childhood and mangood - Morricone ennio '시네마 천국 中'
Disc2
  • 01 그대는 어디에 - 태양의 남쪽 中' 이인,임재범 작곡
  • 02 애인있어요 - 내생에 마지막 스캔들 中' 윤일상 작곡
  • 03 가질 수 없는너 - 시크릿 가든 中' 정시로 작곡
  • 04 꿈에 - 써니 中' 조덕배 작곡
  • 05 그런사람 또 없습니다 -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 中' 조영수 작곡
  • 06 화장을 고치고 - "1박 2일 " 中' 임기훈,최준영 작곡
  • 07 다줄꺼야 - 햇빛속으로 中' 조규만 작곡
  • 08 비와 당신 - 라디오 스타 中' 방준석 작곡
  • 09 사랑과 우정사이 - 김삼순 中' 오태호 작곡
  • 10 천년의 사랑 - '카우보이 비밥 中' 유해준 작곡
  • 11 사랑하기때문에 - 유재하 작곡
  • 12 다시 사랑한다면 - 당돌한 여자 中' 김태원 작곡
  • 13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 나는 가수다 中' 조용필 작곡
  • 14 나항상 그대를 - 가문의 영광 中' 송시현 작곡
  • 15 또한번사랑은가고 - 박진영 작곡

아티스트 소개 (18명)

작곡 : Ennio Morricone (엔니오 모리코네)
엔니오 모리꼬네는 1928년 11월 10일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는 항상 손을 놓지 않았던 절대 음악부터 표제음악까지 넓은 영역에서 창작활동을 펼치며 오케스트라 편곡가이자 야외 공연장의 오케스트라 지휘자로도 활동하고 연극, 라디오, 영화의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다. 1946년 트럼펫 전공으로 졸업, 1947년 영화 음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후 1953년에 처음으로 라디오 시리즈의 편곡을 담당했다. 1954년에는 ... 엔니오 모리꼬네는 1928년 11월 10일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는 항상 손을 놓지 않았던 절대 음악부터 표제음악까지 넓은 영역에서 창작활동을 펼치며 오케스트라 편곡가이자 야외 공연장의 오케스트라 지휘자로도 활동하고 연극, 라디오, 영화의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다. 1946년 트럼펫 전공으로 졸업, 1947년 영화 음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후 1953년에 처음으로 라디오 시리즈의 편곡을 담당했다. 1954년에는 예술학교에서 작곡학위를 받았다. 1958년 이탈리아 국영 TV방송사인 RAI에서 음향 담당 차장 자리를 얻었으나 출근 첫날 사직했다.

그가 처음으로 영화음악을 시작한 작품은 루치아노 살세(Luciano Salce)의 1961년 작, 서기(Il Federale)지만 그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시작한 건 세르지오 레오네의 서부극인 황야의 무법자(1964), 석양의 건맨(1965), 석양의 건맨2(1966),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1968), 석양의 갱들(1971)을 거치면서다.

그는 1965년 누오바 콘소난차 (Nuova Consonanza)에 합류했으며, 동료 작곡가들과 함께 I.R.TE.M(뮤지컬을위한 연구소)를 창설하기도 했다. 1960년 이후 모리꼬네는 400편이 넘는 영화에서 세르지오 레오네, 질로 폰테코르보,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줄리아노 몬탈도, 리나 베르트뮐러, 쥬세페 토르나토레, 브라이언 드 팔마, 로만 폴란스키, 워렌 비티, 애드리안 라인, 올리버 스톤, 마가 마가레테 폰 트로타, 헨리 베르누이, 페트로 알모소사, 로랜드 제프 같은 수많은 이탈리아 감독 및 세계적인 감독들과 함께 작업을 했다.

대표작으로는 알제리 전투, 사코 앤 반젯티 (Sacco and Vanzetti), 시네마 천국, 피아니스트의 전설, 말레나, 언터처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미션, 유턴 등이 있다. 그는 100곡이 넘는 절대 음악을 작곡했는데 대표작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1(1957), 에로스의 파편(1985), Rag in Frantumi(1986), 유럽을 위한칸타타(1988), 트럼펫과 타악기를 위한 UT(1991), 멀리 있는 그림자, (1997), 침묵의 소리(2002), 시실리의 파편(2002), 비어있는 영혼(2008)등이다.

엔니오 모리꼬네는 산타 세실리아 아카데미 오케스트를 비롯하여 전 세계의 다양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그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라 스칼라극장 합창단, 로마 오페라 하우스 오케스트라, 부다페스트 오페라 하우스오케스트라, 스페인 국립 오케스트라(ONE), 브라질 국립 오케스트라, 바이에른 라디오 독일 뮌헨 방송 오케스트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불가리아 심포니 오케스트라, 스페인 텔레비전 합창단과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았다. 모리꼬네는 이탈리아 및 세계 각지에서 로마 신포니에타 오케스트라와 여러 차례 콘서트를 열었으며, 함께 영화 음악 작업도 하고 있다.
지난 20년간 할리우드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쳐온 영화음악의 거장. 그의 대표작 <타이타닉>은 전례 없는 빌보드차트 16주간 1위라는 대기록과 3,600만장이라는 역대 최고의 판매고를 올린 영화앨범으로 남아있다. 두 번의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그리고 그래미 ‘올해의 노래상’을 수상했다. <에어리언>, <브레이브하트>, <아폴로 13>, <뷰티풀 마인드>의 인상적인 배경음악으로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지난 20년간 할리우드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쳐온 영화음악의 거장.
그의 대표작 <타이타닉>은 전례 없는 빌보드차트 16주간 1위라는 대기록과 3,600만장이라는 역대 최고의 판매고를 올린 영화앨범으로 남아있다. 두 번의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그리고 그래미 ‘올해의 노래상’을 수상했다. <에어리언>, <브레이브하트>, <아폴로 13>, <뷰티풀 마인드>의 인상적인 배경음악으로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여러 작품으로 여섯 개의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필모그래피]

아이리스(2001)|음악
윈드토커(2002)|음악
머나먼 사랑(2003)|음악
모래와 안개의 집(2003)|음악
트로이(2004)|음악
포가튼(2004)|음악
플라이트 플랜(2005)|음악
플라이트 플랜+10분단편(2005)|음악
올 더 킹즈 맨(2006)|음악
아포칼립토(2006)|음악
인 블룸(2007)|음악
스파이더위크가의 비밀(2008)|음악
네 살 때 어머니가 쌀 씻는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었을 만큼 음악적 재능을 타고난 박진영은,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뒤 1994년 '날 떠나지마'로 가수 데뷔를 한다. 이후 '허니', '청혼가', '그녀는 예뻤다' 등 도발적이고 선정적인 가사와 춤을 앞세운 노래를 연달아 발표하며 가수로서 최고의 인기를 얻고, 2000년에는 한국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그룹 JYP의 프로듀서로 활동하며 '비', 'god' 등 실력과 스타... 네 살 때 어머니가 쌀 씻는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었을 만큼 음악적 재능을 타고난 박진영은,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뒤 1994년 '날 떠나지마'로 가수 데뷔를 한다. 이후 '허니', '청혼가', '그녀는 예뻤다' 등 도발적이고 선정적인 가사와 춤을 앞세운 노래를 연달아 발표하며 가수로서 최고의 인기를 얻고, 2000년에는 한국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그룹 JYP의 프로듀서로 활동하며 '비', 'god' 등 실력과 스타성을 가진 가수들을 키워내며 엔터테인먼트 리더로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준다.

한국 최고의 프로듀서, 실력 있는 작곡가, 인기 절정의 가수로 정상에 선 그지만 그의 도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더 큰 꿈을 향해 이미 기반을 잡은 한국 무대를 떠나 미국이라는 세계무대에 도전했고, 자신이 작곡한 음반을 들고 뉴욕의 유명 레코드사의 문을 수없이 두드린 지 11개월 만에 윌 스미스의 음반에 자신의 곡을 수록시키며 미국 음악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이후 '비'를 아시아 아티스트로는 최초로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단독 공연을 갖게 하는가 하면, 그가 직접 유창한 영어와 능숙한 화술로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한류' 강연을 하는 등 성공적인 미국 출전권을 따낸다.

2007년, 여성 그룹 '원더걸스'를 선보이며 또 한차례 대중의 폭발적 관심을 이끌어낸 그는 현재, '민(min)', '지소울(G-soul)', '임정희(J Lim)' 등 세계무대 진출을 위해 7년여 동안 준비한 세 명의 가수들을 주축으로 세계 대중문화 시장 정복의 꿈을 현실로 만들고 있다.
굴곡과 요철로 가득한 길. 가수 임재범이 걸어온 길은 결코 평탄하진 않았다. 그는 편안한 내부에 있을 때에도 항상 풍랑으로 가득한 바깥을 꿈꿨다. 앨범 발표 후마다 기정 사실화된 ‘잠적’은 주류와의 화해를 거부하는 몸짓처럼 보였다. 시나위와 외인부대, 아시아나를 거치며 임재범은 국내 굴지의 록 보컬리스트로 군림하게 된다. 그의 카리스마 가득한 보이스는 시나위의 프론트맨 자리를 계승한 김종서를 제외하면 별다른 맞수... 굴곡과 요철로 가득한 길. 가수 임재범이 걸어온 길은 결코 평탄하진 않았다. 그는 편안한 내부에 있을 때에도 항상 풍랑으로 가득한 바깥을 꿈꿨다. 앨범 발표 후마다 기정 사실화된 ‘잠적’은 주류와의 화해를 거부하는 몸짓처럼 보였다. 시나위와 외인부대, 아시아나를 거치며 임재범은 국내 굴지의 록 보컬리스트로 군림하게 된다. 그의 카리스마 가득한 보이스는 시나위의 프론트맨 자리를 계승한 김종서를 제외하면 별다른 맞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특히 시나위 1집에 실린 ‘크게 라디오를 켜고’와 외인부대 시절의 히트곡 ‘줄리’는 임재범의 역량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명곡이었다. 1991년 < On The Turning Away >를 공개하며 그는 솔로 가수로서의 활동을 시작한다. ‘이 밤이 지나면’이 인기를 얻었지만 뒤이어 터진 불미스러운 일은 임재범의 이미지에 엄청난 타격을 가했고 그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정말 긴 시간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를 회상하는 사람들도 서서히 지쳐갈 무렵인 1997년 임재범은 두 번째 앨범 < 임재범 Ⅱ >를 들고 나타났다. 첫 번째 앨범에 비해 한층 소울의 맛이 강해지고 가사적으로도 성숙이 드러난 이 음반은 그 동안의 오랜 칩거에 대한 소문을 일소해 버릴 수 있는 수준의 작품이었다. 제법 인기를 모은 ‘그대는 어디에’와 자신의 삶을 고백조로 말하는 듯한 ‘비상’등에서 깊이가 더해진 그의 보이스가 한껏 드러났다. 세 번째 음반 < 고해 >는 록으로의 귀환을 알리는 앨범이었다. 마치 초창기 그룹 시절의 앨 범을 듣는 듯한 강한 리프와 보컬이 압도감을 주었다. 수록곡들은 그의 출신 성분이 어디인지를 역력히 피력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종적을 감췄다. 1999년 박정현과 함께 부른 ‘사랑보다 깊은 상처’가 모 이동통신회사의 CF에 삽입되며 그는 다시 한번 대중들의 주목대상이 됐다. 정작 가수의 행방은 묘연한 가운데 노래는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원래 이 노래는 그의 2집에 실렸던 곡으로 발표 당시에는 별다른 관심을 얻지 못하다가 우연한 계기로 빛을 보게 된 것이었다. 갑작스레 쏠린 세인들의 시선에 한 번 눈길을 줄만도 했으나 그는 끝까지 침묵으로 응답했다. 그는 역시 ‘인기’라는 것에 즉물적으로 반응할 가수는 아니었다. 다시 오랜 침묵을 걷어 내고 임재범은 2000년 4집 < Story Of Two Years >를 공개했다. 수록곡 중 ‘너를 위해’가 김하늘, 유지태 주연의 영화 < 동감 >에 삽입되면서 그는 다시 한 번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이 됐다. 허나 그는 요란한 메인스트림과는 체질적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별다른 방송 활동 없이 그는 소실점 너머로 멀어져 갔다. 비록 빈번히 자아를 드러내는 가수는 아니지만 임재범의 보컬 소화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고음 역과 저음 역에서 모두 강점을 보이는 그의 목소리는 경이로울 정도다. 가창력을 갖춘 신인이 등장할 때마다 그의 이름이 종종 ‘비교 우위’의 대상으로 언급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의 음악을 알리는 데 ‘공중파’라는 것이 ‘정도(正道)’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라이브 무대에서라도 그의 모습을 봤으면 하는 게 팬들의 바램이다. 좀더 유연한 모습을 보일 시기도 됐다.
생년월일 : 1974년 2월 21일 외가 쪽이 클래식을 전공한 분위기에서 4살 때 피아노를, 6살 때 첫 작곡을 시작한 윤일상은 1992년 박준희에게 ’Oh boy’와 ’Kuk kuk’이란 곡을 주면서 본격적으로 음악계에 입문했다. 아버지가 생일 선물로 사준 비틀스(Beatles) 앨범을 듣고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그는 작곡가인 외삼촌 최경식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편곡 중심의 대중 음악에 눈을 떴다. 첫 ... 생년월일 : 1974년 2월 21일 외가 쪽이 클래식을 전공한 분위기에서 4살 때 피아노를, 6살 때 첫 작곡을 시작한 윤일상은 1992년 박준희에게 ’Oh boy’와 ’Kuk kuk’이란 곡을 주면서 본격적으로 음악계에 입문했다. 아버지가 생일 선물로 사준 비틀스(Beatles) 앨범을 듣고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그는 작곡가인 외삼촌 최경식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편곡 중심의 대중 음악에 눈을 떴다. 첫 번째 히트곡은 Mr2의 ’난 단지 나일 뿐’이였지만 그의 이름을 만방에 알린 건 DJ DOC의 ’Ok? Ok!’, ’겨울이야기’, ’Remember’로 이어지는 그들의 3집 앨범 이였다. 전래 없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이 곡들 덕에 그는 단숨에 정상의 작곡가로 발돋움했으며 이어 제작자로부터 3번이나 거절당했던 영턱스클럽의 ’정’으로 모든 댄스 음악의 전선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1996년, 97년 거푸 SBS 최고 작곡가상을 수상했으며 쿨(Cool), 구피, 임성은, 이승철, 김건모, 하리수, 터보, 조관우, 이정현 등과 작업을 하면서 댄스 음악계를 주도했다. 그가 만든 음악이 지닌 최대의 독특함은 해외의 음악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뽕끼를 주무기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Ok? Ok!’와 같이 표절시비를 낳은 곡도 있지만, 중·장년이 선호하는 트로트 음악을 과감하게 이용한 것은 ’한국형 댄스 음악’이라는 신조어를 낳았으며 힙합형 댄스음악과 더불어 ’90년대 중·후반의 음악 시장을 양분할 만큼 인기를 모았다. 이 빠른 트로트는 노래방 문화에 익숙한 10대와 20대의 주요한 레퍼토리가 됨은 물론 랩이 주도하는 반항적 댄스 음악에 비해 비교적 어른들의 기호에도 다가설 수 있었다. 그의 첫 번째 프로젝트 앨범은 1996년에 나왔다. 싸이키(Ssaiki)란 이름으로 발표한 이 앨범에서, 가수보다 더 인기 있는 작곡가 시대를 연 장본인 중의 한 명인 그는 가수로서의 시도를 숨기지 않고 힘찬 행보를 시작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Innocence’란 곡의 흐름 속에서 짜임새를 연출하려했던 이 음반은 철저하게 대중적으로 무시당했다. 이 앨범에는 예의 그 트로트댄스로 무장한 ’왜’, 코믹한 분위기로 그룹 쿨의 분위기를 연출한 ’행복탈출’, 발라드의 정수에 도전한 ’돌아와 주오’, ’용서해줘’ 등이 수록되어 그가 주조했던 인기전선을 그대로 빌려왔지만 랩을 양념처럼 삽입한 빠른 댄스곡들이 승부욕을 내포하고 있진 않았다. nTn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해 자신의 음악 터전을 마련한 그는 < Soulist >란 타이틀로 자신의 두 번째 음반을 발표한다. 첫 앨범과 달리 그간 작업을 같이하며 뜻이 통한 슈퍼스타들로 채운 이 앨범은 윤일상 본인이 부르고 차분한 느낌의 뮤직 비디오로 세인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혼자’가 타이틀곡이다. 클립의 내러티브는 설렘, 희망사항, 선물, 고백이라는 4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곡과 ’So what’, ’Saddest love’을 제외한 모든 곡은 다른 가수들에게 협조를 구했다. 먼저 1집에도 수록되어 있었던 ’왜’란 곡은 ’Why me’란 제목으로 문명진이 다시 불러주고 있으며 ’돌아와 주오’는 조영기가 부르고 있다. 이 외에도 쿨의 이재훈, 애즈 원(As One), 김범수, 이윤정, 철이와 미애 등이 참여해 색다른 감각을 선사하고 있으며 윤일상의 코믹함이 잘 드러나는 ’김대리의 하루’가 후반부의 지루함을 덜어내고 있다. 주영훈, 최준영, 이경섭, 김형석 등과 ’90년대 국내 대중음악계에서 빅5를 형성한 윤일상은 김범수의 ’하루’로 댄스뿐 아니라 발라드에도 일가견이 있음을 과시했다. 그가 소망하는 앞으로의 계획은 한국적인 정서를 색다르게 표출할 수 있는 국악샘플 CD를 만들어보고 싶은 것이며 류이치 사카모토처럼 폭 넓은 음악 세계를 펼치며 블루스 계열의 음악에 도전하는 것이다.
한 2년 전부터 포크 가수들의 연대가 두드러지고 있다. 트윈폴리오의 번안곡 시대가 열린 뒤 발흥된 우리의 포크 문화는 한대수와 김민기의 실험성과 독창성으로 정점을 이루던 시기가 있었고 유신정권의 가요규제 조치로 타격을 받았다. 조동진으로 시작된 발라드 계열의 일상 언어를 소재로 한 포크 음악은 해바라기, 따로또같이, 시인과 촌장, 어떤날로 이어지며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았고 다시 1990년대의 댄스씬으로 인해 좌초... 한 2년 전부터 포크 가수들의 연대가 두드러지고 있다. 트윈폴리오의 번안곡 시대가 열린 뒤 발흥된 우리의 포크 문화는 한대수와 김민기의 실험성과 독창성으로 정점을 이루던 시기가 있었고 유신정권의 가요규제 조치로 타격을 받았다. 조동진으로 시작된 발라드 계열의 일상 언어를 소재로 한 포크 음악은 해바라기, 따로또같이, 시인과 촌장, 어떤날로 이어지며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았고 다시 1990년대의 댄스씬으로 인해 좌초되었다. 포크 발라드의 전형을 이루며 많은 인기를 누렸던 조덕배도 1980년대의 인기를 1990년대에 잃어버리며 바로 포크의 운명을 그대로 따랐다. 한 쪽 다리를 절었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 기타를 퉁기며 모든 음악을 섭렵했던 그는, 이루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추억으로 만든 ‘나의 옛날 이야기’로 라디오의 차트에 등장해 높은 순위를 기록한다. 그의 애잔한 목소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같은 데뷔 앨범에 속해 있던 ‘너풀거리듯’을 히트시켰다. 담백한 목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몽환적 분위기 때문에 포크 경향이면서도 사이키델릭한 느낌을 주는 데뷔 앨범은 이후로도 계속 라디오를 타며 사랑을 받았다. 그는 2집의 ‘꿈에’로 차트 정상에 오르고 계속해서 ‘슬픈 노래는 부르지 않을 꺼야’, 국내에 보사노바의 열기를 전한 곡으로 평가받는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은’으로 아낌없는 갈채를 받으며 전성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발라드의 몰락과 더불어 그의 통기타 시절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 1990년대에 환영을 받은 포크 가수는 김광석, 안치환, 정태춘 등의 운동권 계열의 가수들이었고 나긋나긋한 그의 목소리는 힘과 이미지, 센세이셔널한 사고 등, 모든 면에서 이들에게 밀렸다. 1996년 발표한 리메이크 앨범을 비롯한 그의 모든 앨범은 이후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했고 그는 단지 대마초로 신문지상을 여러 차례 오르내렸다. 조덕배는 포크 음악의 재건에 나선 노장 가수들과 함께 기념 콘서트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으며 2000년에는 포크 음악 30주년 기념 음반에서 ‘하늘에서 나무까지’라는 타이틀곡을 부르기도 했다. 현재는 미사리의 라이브 카페에서 음악을 들려주고 있으며 언젠가는 험난했던 자신의 삶을 들려 줄 시간을 기다리며 음악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고 있다.
일곱 살 되던 해 가을, 달빛이 무척 밝았던 밤 멀리서 들려오던 하모니카의 선율이 음악과의 첫 만남이었다고 고백하는 조용필은 국내에서 인기와 음악성 모두 최고의 인정을 받은 가수다. 그의 가창력은 아직도 모든 가수들이 꿈꾸는 선망의 경지이며, 오빠부대를 최초로 이끌 때부터 < Eternity >의 ‘바람의 소리’로 다시 주목을 받을 때까지, 그는 내내 실질적인 인기 순위 1위는 물론 역대 최정상의 위용을 뽐냈다.... 일곱 살 되던 해 가을, 달빛이 무척 밝았던 밤 멀리서 들려오던 하모니카의 선율이 음악과의 첫 만남이었다고 고백하는 조용필은 국내에서 인기와 음악성 모두 최고의 인정을 받은 가수다. 그의 가창력은 아직도 모든 가수들이 꿈꾸는 선망의 경지이며, 오빠부대를 최초로 이끌 때부터 < Eternity >의 ‘바람의 소리’로 다시 주목을 받을 때까지, 그는 내내 실질적인 인기 순위 1위는 물론 역대 최정상의 위용을 뽐냈다. 그가 오버그라운드에 군림함으로써 언더그라운드의 모든 기수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과대포장하지 않았고 그가 있음으로 다양한 장르가 조명받았다. 비록 1980년대 내내 아무런 저항이나 반정부적 구호 하나 외치지 않았고 발전을 위한 2인자도 허락하지 않았지만 현재 그를 미워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것은 기교와 센세이셔널리즘을 넘어 일정한 경지를 몸소 터득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는 당분간 이런 가수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중.고등학교 시절, 기타를 끼고 살았던 그는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쳐 집을 가출한다. 이후 7년 동안 첵돌스, 파이브 핑거스 등의 그룹을 거치며 파주 일대의 미군기지에서 활동했던 그는 오로지 음악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만을 체득한다. 어느 날, 한 미군병사가 신청한 재즈뮤지션 바비 블랜드(Bobby Blend)의 ‘Lead me on’은 그의 음악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친 그룹 애드포(AD4)의 드러머 김대환을 만나게 해 준다. 당시 업소에서 소울 계통의 음악을 자주 불렀던 그는 이 신청 곡을 접수한 뒤, 밤무대의 중요한 레파토리로 선정했고, 이 노래를 들은 김대환은 그에게 팀을 만들자고 제의했다. 김대환, 이남이, 최이철 등 쟁쟁한 뮤지션이 합류한 그의 새로운 팀은 리더인 김대환의 성을 딴 김트리오였다. 후에 김대환이 매니저로 물러서고 4인조가 된 이 그룹에서, 조용필은 청음, 채보 하는 법 등을 배웠으며 지독한 연습으로 일취월장했다. 이 팀은 선데이 서울컵 팝그룹 콘테스트에서 ‘Lead me on’을 번안한 ‘님이여’란 곡으로 최우수 가수왕상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김대환의 해체 선언으로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군 제대 후 조갑출과 그룹 25시에 잠시 몸담았던 그는 미국의 재즈록 그룹 시카고(Chicago)의 영향을 받아 8인조 브라스 밴드인 조용필과 그림자를 만들고 당시 인기 있던 서울의 고고클럽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김트리오와 조용필과 그림자 시절 각각 한 장의 음반을 냈던 그는, 축구선수 이회택과 조갑출을 통해 소개받은 박성배를 만나 첫 솔로 음반을 제의 받는다. 그리고 최초의 메이저 히트곡을 터트린다. 부산이라는 지명 때문인지는 몰라도, 부산에서부터 치고 올라온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원래는 4분의 2박 트로트 음악이었지만 4분의 4박형 트로트 고고로 편곡한 곡이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저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했으며 세인들의 가슴을 파고들기까지는 몇 개월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이 짧은 기다림은 그에게 다가올 80년대의 영광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했다. 조용필은 벅찬 감격에 젖어 그 뜨거운 반응을 만끽했으며 방송 출연 및 밤무대를 휩쓸었다. 그러나 파이브 핑거스 시절 몇 대 피웠던 대마초는 1975년 휩쓴 대마초 파동 때 그를 비껴가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정부의 활동정지처분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1977년 “톱 싱어가 되기보다는 음악 하는 사람으로 계속 머물기를 바랐습니다”라는 말을 남긴 은퇴 선언으로 세상에 이별을 고한다. 휴식기에 TV 드라마에서 본 ‘한오백년’이라는 창을 들은 그는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와 같은 탁성을 내고 싶어 명산을 찾아다니며 발성연습을 시작했다. 진도 아리랑, 성주풀이, 흥부전까지 소화하며 목을 틔운 그는 급기야 피를 쏟았으며 부은 목이 가라앉을 시점이 되서는 그토록 원하던 목소리가 비로서 시원스럽게 터져 나왔다. 그는 용기를 얻고 베이스 주자 유재학과 조용필과 그림자란 팀을 이끌며 부산, 서울 등지의 밤무대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대마초가수라는 오명을 벗기는 힘이 들었으며 그의 전과를 알아본 팬들 때문에 금방 금방 쫓겨났다. 다시 방송에 설 수 있게 되기까지는 1979년 대마초 연예인 완전해금조치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가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은 1980년 초 동아방송 연속극 < 창 밖의 여자 > 주제곡을 작곡하면서부터였다. 지금 들으면 난해하기 짝이 없는 이 가사에서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라는 결정적 문구는 절대적인 지위를 얻었고 같은 앨범 수록곡 ‘단발머리’, ‘한오백년’ 등의 히트곡으로 인기 지형의 급 물살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는 유재학을 매니저로 하고 김청산, 이건태, 이호준, 곽경욱, 김택환을 멤버로 하여 1980년대를 가로지른 실력파 그룹 위대한 탄생을 출범시키기에 이른다. 조선일보 선정 건국 이후 최고의 가수 자리를 차지한 조용필의 후일담은 우리가 모두 아는 대로 살아있는 전설 그 자체이다. 1980년대 그의 아성에 도전한 이는 이용, 김수철, 전영록 정도였으며 그리 길지 못했다.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그의 활동은 일본과 중국을 가로질렀고 국내 음악씬을 초토화시켰다. 그는 오빠부대의 원조이며 모든 장르를 국내 음악에 이식시킨 공로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제쳐두더라도 그가 쏟아낸 히트곡은 역사상 최고의 수준이다. 1998년, 그는 음악 인생 30주년을 맞아 그간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는 곡들을 모아 기념음반을 냈다. 아직까지 우리에게 이런 가수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행복이다. 영화나 TV에 기웃거리지 않고 후배 자신들도 인기와 음악성만으로 끝까지 사랑 받을 수 있다는, 살아 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뮤지션이라면 한번 도전해 볼만한 일 아닌가?
# 살아있는 음악 전설 에릭 클랩튼은 그 이름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음악 전설’이다. 40여 년의 음악 여정 동안 그가 쌓아올린 메리트는 가히 대단하다. 야드버즈(Yardbirds)와 존 메이올스 블루스브레이커(John Mayall`s Bluesbreakers) 시절 블루스의 부흥을 주도했으며, 크림(Cream)의 활동기간 동안 헤비메탈의 원형을 제공했고, 재즈와 블루스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했다. 솔로로 독립하고... # 살아있는 음악 전설 에릭 클랩튼은 그 이름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음악 전설’이다. 40여 년의 음악 여정 동안 그가 쌓아올린 메리트는 가히 대단하다. 야드버즈(Yardbirds)와 존 메이올스 블루스브레이커(John Mayall`s Bluesbreakers) 시절 블루스의 부흥을 주도했으며, 크림(Cream)의 활동기간 동안 헤비메탈의 원형을 제공했고, 재즈와 블루스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했다. 솔로로 독립하고부터는 ‘진짜 블루스’에 접속불가를 외치는 대중들에게 팝 지향적인 ‘달콤 쌉싸름한 블루스’를 패스워드로 내놓아 블루스의 대중화를 선도했다. 그래미 트로피를 13번이나 받았으며,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1992년 야드버즈, 1993년 크림, 그리고 지난해 개인 자격으로 헌액된 것에서도 클랩튼의 공로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지난해 ‘블루스의 제왕’ B.B 킹(B.B King)과 협연한 작품〔Riding With The King〕으로 이번 그래미 시상식 ‘최고의 트래디셔널 블루스 앨범(Best Traditional Blues album)’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클랩튼은 ‘기타의 신’, ‘슬로우 핸드(Slowhand)’라는 닉네임이 말해주듯 기타 테크닉에 있어서도 대가(大家)의 경지에 올랐다. 감정을 질펀하게 쏟아내면서도 정확하고 절제된 테크닉을 구사하는 벤딩 주법(일명 쵸킹)과 비브라토는 다른 연주자들이 흉내조차 힘들 정도다. 그의 기타 연주와 관련하여 유명 기타리스트들의 칭찬 코멘트를 들어보자. “에릭은 정말 재주가 많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플레이는 뭐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감정과 함께 블루스를 연주한다. 그가 연주할 때 당신은 그것이 블루스라는 것을 알 것이다.” -B.B 킹- “그는 나보다 훨씬 더 블루스 연주가 뛰어나다. 왜냐하면 그는 블루스를 공부했고, 그것에 대해 당당하기 때문이다.” -제프 벡(Jeff Beck)- “내가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나는 그의 연주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바로 하늘에서 치는 천둥번개 같았다.” -존 이써리지(John Etheridge) 하지만 이런 융숭한 대접에 대해 클랩튼은 “나에 대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나는 악평을 받았을 때 그 사실을 소화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호평도 마찬가지다.”며 자신을 향한 관심을 무척 꺼려했다. 그를 추종하는 후배 뮤지션에 대해서도 한마디했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목소리가 있는 것처럼 나같이 연주하는 것은 아마 무리일 것이다. 자기 스타일로 연주해야 한다.”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경외보다는 그들만의 길을 개척할 것을 충고한다. 그의 음악과 인생 여로(旅路)가 굴곡이 심했기에 그 말은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 전설의 시작 에릭 클랩튼은 1945년 3월 30일 영국 서레이(Surrey)주의 리플리(Ripley)에서 태어났다. 그는 14살 생일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기타를 선물 받고 블루스에 빠져들었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하여 할머니 품에서 자라며 외로운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흑인들의 비참함과 슬픔을 노래한 블루스가 그에게 찾아간 것은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클랩튼은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빅 빌 블룬지(Big Bill Broonzy), 블라인드 윌리 존슨(Blind Willie Johnson) 등 초기 블루스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연주하며 성장했다. 특히 ‘델타 블루스의 왕’이라 불리는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의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로버트 존슨의 앨범들은 내가 음악적으로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에릭 클랩튼의 기타 연주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1963년 야드버즈에 가입하면서부터였다. 그의 뛰어난 블루스 기타 테크닉은 단숨에 그룹의 사운드를 특징지었고, 매니저 지오지오 고멜스키(Giorgio Gomelsky)는 그에게 ‘슬로우 핸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클랩튼은 그룹의 음악이 상업적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며 1965년 3월 팀을 떠나 존 메이올이 이끌었던 블루스브레이커스로 자리를 옮겼다. 야드버즈를 탈퇴한 직후 그가 연주했던 ‘For Your Love’는 영국 차트 3위를 기록했다. 이후 야드버즈는 제프 벡과 지미 페이지(Jimmy Page)가 가세하며 전성시대를 누렸다. 바로 록음악계의 ‘3대 기타리스트’가 야즈버즈를 통해 모두 비상했다. # 나, 블루스로 돌아갈래! 이 당시 에릭 클랩튼의 블루스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이와 관계된 에피소드 한가지. 그는 블루스브레이커스의 휴지기 동안에 다른 뮤지션들과 전세계를 돌며 블루스 전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클랩튼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몇몇 멤버들이 영국으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한 클럽에서 계속 머물며 공연을 계속했다. 그는 그러나 강도로 돌변한 클럽 주인의 협박으로 옷과 새로 산 마샬 앰프를 놔둔 채 영국으로 도망쳐야했다. 음악 외에는 모든 일에 문외한이었던 ‘순수한’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클랩튼은 블루스브레이커스에서 존 메이올의 독단적 행동에 불만을 품고 자신만의 그룹을 결성하기로 계획했다. 그는 1966년 존 메이올 몰래 드러머 진저 베이커(Ginger Baker), 베이시스트 잭 브루스(Jack Bruce)와 함께 크림을 조직하고 합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후 음악 전문지 < 멜로디 메이커(Melody Maker) >의 폭로로 인해 클랩튼은 블루스브레이커스에서 해고를 당해야만 했다. 이때 런던의 한 빌딩 벽에는 ‘클랜튼은 신이다(Clapton is god)’라는 문구가 새겨져 많은 화제를 몰고 왔다. 에릭 클랩튼은 크림을 통해 ‘악기 예술의 미학’을 획득했다. 블루스와 재즈가 절묘하게 어울러진 그들의 사운드는 즉흥적이고 빠르며 굉음을 발산했다. 멤버들의 정교하고 뛰어난 연주 실력은 타 밴드와의 간격 차를 크게 벌려놓았고, 음악계에 상당한 충격파를 던졌다. 그들의 앨범들인 1966년의 < Fresh Cream >, 1967년의 < Disraeli Gears >, 그리고 이듬해의 < Wheels Of Fire > 모두 명반으로 손꼽히며 파죽지세의 인기몰이를 했다. 특히 스튜디오 녹음과 라이브를 한자리에 모은 더블 앨범 < Wheels Of Fire >는 미국에서 4주간 정상을 차지하며 멤버들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다. 바로 이 작품에 명곡 ‘White room’이 수록되어 있다. 그룹은 그러나 서로간의 음악적 견해차를 이유로 1968년 11월 해산했다. 클랩튼의 음악 이력 중 최고의 절정기가 막을 내린 것이다. 이후 트리오는 1993년 1월 명예의 전당 헌액 기념으로 재결합 공연을 가져 많은 박수를 받기도 했다. 크림의 해체 이듬해 클랩튼은 진저 베이커와 함께 트래픽(Traffic) 출신의 스티브 윈우드(Steve Winwood), 페밀리(Family)의 베이스 주자였던 릭 그레치(Rick Grech)를 영입하여 ‘슈퍼 그룹’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를 탄생시켰다. 언론에서는 ‘인스턴트 슈퍼 그룹’이라고 비아냥거렸지만, 그들은 공연 때 ‘최후의 슈퍼 그룹’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대조를 이뤘다. 하지만 언론의 지적대로 그들은 1969년 데뷔 앨범 < Blind Faith >를 내놓고 각자의 길로 떠났다. # ‘레일라’의 비극 에릭 클랩튼의 1970년대는 한 여인과의 슬픈 사랑 얘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다름 아닌 비틀스의 멤버 조지 해리슨의 아내 패티 보이드(Patti Boyd)였다. 클랩튼은 1968년 비틀즈의 화이트 앨범에 수록된 조지의 곡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와 같은 해 공개된 솔로 음반 < Wonderwall Music >에서 기타를 맡을 정도로 조지 해리슨과는 절친한 사이였다. 조지와 음악적 교류를 하면서 패티를 본 후 사랑에 빠진 것이다. 당시 종교에 심취해 있던 남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패티 보이드는 클랩튼에게 의도적으로 눈길을 주었다. 음악 밖에 모르던 에릭은 그만 사랑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조지와의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갔고, 실의에 빠진 에릭 클랩튼은 술과 마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이런 사랑에 대한 좌절감과 패배감은 1970년 11월에 발표된 데릭 앤 더 도미노스(Derek And The Dominos)의 마스터피스 < Layla & Other Assorted Lovesongs >에 고스란히 담겨졌다. ‘남편이 당신을 슬프게 만들었을 때/ 나는 당신을 위로하려고 노력했어요/ 바보처럼 나는 당신과 사랑에 빠져버렸죠/레일라 당신은 나를 무릎꿇게 만들었어요/ 레일라, 당신께 애원합니다/ 제발...’. 수록곡 ‘Layla’의 구구 절절한 가사처럼 에릭 클랩튼의 상처받은 마음은 노래 전체에 용광로처럼 녹아들었다. 고통스런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바닥까지 긁어내어, 그 고통을 음악으로 걸러냈다. ‘처절한 내면의 사생화’다. 클랩튼의 이러한 마음에 하늘도 감동했던지 얼마 후 패티 보이드는 조지 해리슨과 이혼했고, 둘은 1979년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이 음반은 비록 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블루스와 삶을 완벽하게 조화시키며 걸작의 반열로 들어섰다. # 극적인 재기 드라마 1부 실연의 파장은 매우 컸다. 에릭 클랩튼은 감정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알코올과 약물 중독으로 인하여 병원과 요양원을 들락거려야만 했다. 기타조차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이때부터 드라마틱한 재기 스토리가 전개된다.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던 그에게 구세주가 찾아왔다. 그룹 후(The Who)의 ‘피트 타운센드’(Pete Townshend)였다. 피트는 이미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찬밥취급을 받던 지미 헨드릭스를 영국으로 데려와 음악계에 데뷔시키는 등 ‘선행’을 벌여왔다. 피트는 클랩튼에게 마약에서 벗어날 것을 권유했고, 1973년 에렉 클랩튼의 레인보우 콘서트를 주최해 재기의 무대를 마련해줬다. 클랩튼은 데릭 앤 도미노스 이후 3년 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피트는 에릭 클랩튼이 정신을 못 차리자 하와이안 기타로 머리를 때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기력을 회복한 에릭 클랩튼은 1년 뒤 재기 작품 < 461 Ocean Boulevard >를 내놓았다. 앨범이 출시되기까지는 피트 타운센드와 함께 RSO 레이블의 사장인 로버트 스틱우드(Robert Stigwood)의 도움이 컸다. 그는 폐인이 된 클랩튼을 위해 요양장소로 플로리다에 있는 자신의 별장을 선뜻 내주며 재기의 기틀을 마련케 했다. 클랩튼도 스틱우드의 호의에 고개 숙여 감사하며 다시 기타를 집어들었다. 스틱우드의 별장주소가 바로 이 앨범의 타이틀이다. 스틱우드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인 것이다. 밥 말리(Bob Marley)의 곡을 리메이크한 ‘I shot the sheriff’는 정상을 차지했고, ‘Let it grow’, ‘Give me strength’ 등이 인기가도를 달리며 ‘기타의 신’으로 부활했다. 이후 연이어 내놓은 앨범들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특히 ‘Wonderful tonight’이 실려있는 1977년 작품 < Slowhand >는 300만장이상의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에릭 클랩튼은 약물 중독으로 고생하던 이 시기를 잊지 못하고, 1999년 마약 중독자 치료기금을 위해 자신의 기타 100대를 경매에 내놓은바 있다. # 극적인 재기 드라마 2부 에릭 클랩튼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도 꾸준하게 앨범을 발표하지만 별다른 활약상을 보이지 못했다. 물론 1989년 작품 < Journeyman >같은 수작을 낚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룹시절과 달리 음악적 측면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평론가들은 ‘에너지가 없어지고 느슨해진 팝 블루스’라며 평가 절하했다. 하지만 그는 1991년 아들의 죽음이라는 ‘비극’과 함께 현실무대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운명의 여인’ 패티 보이드와 헤어지고 이탈리아 투어 도중 만난 젊은 사진작가이자 배우였던 로리 델 산토(Lori Del Santo)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코너(Corner)가 뉴욕 맨하탄의 아파트에서 실족사한 것이다. 나중에 에릭 클랩튼은 “내가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온통 경찰관과 의료진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것이 나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일처럼 느껴졌다.”며 망연자실했던 당시의 심정을 묘사했다. 클랩튼은 그러나 ‘예전처럼’ 기타를 놓지 않았다. 오히려 기타와 노래에 더욱 몰두했다. 음악만이 유일한 치료제라는 것을 이전 경험으로 깨달았다. 그는 1992년 영화 < 러쉬(Rush) >의 사운드 트랙에 삽입된 ‘Tears in heaven’에 죽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실었다. MTV의 제안으로 그 해 녹음된 앨범 < Unplugged >에서의 백미도 단연 이 곡이었다. 어쿠스틱 기타에 실린 애절한 멜로디와 노랫말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듬해 그래미는 그에게 ‘올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 ‘올해의 레코드(Record Of The Year)’, ‘올해의 노래(Song Of The Year)’ 등 알짜배기를 포함하여 6개의 트로피를 ‘위로 선물’로 전달했다. ‘추억’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재진입하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에릭 클랩튼의 상승세는 계속됐다. 1994년 발매한 < From The Cradle >은 흥행과 평단 양편에서 세계적인 지위를 얻었다. 미국과 영국 앨범차트를 동시 석권하였고, 블루스의 성찬을 담아낸 작품으로 격찬 받았다. 4년 뒤에 내놓은 앨범 < Pilgrim > 또한 플래티넘을 기록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 전설은 영원하다 에릭 클랩튼은 작품마다 자신의 인생을 투영시켰다. 혼을 불어넣었다. 올해 발표한 앨범 < Reptile >에도 그의 숨결을 살아 숨쉰다. 신작의 기저에 흐르는 물줄기는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삼촌의 죽음’이다. 삼촌에 대한 존경심을 작품 전체에 고스란히 옮겼다. “‘Reptile(사전적 의미로는 비열한 인간이라는 뜻)’은 삼촌과 관련이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내가 태어난 곳에서 ‘Reptile’이란 단어는 사랑스러운 말이다.” 이 음반은 프로듀서 사이먼 클리미에(Simon Climie)를 포함하여 전작 < Riding With The King >의 세션팀이 그대로 참여했다. 또한 시카고 소울의 거장 커티스 메이필드(Cutis Mayfield)의 빈자리를 남겨둔 채 임프레션스(The Impressions)가 부드러운 화음을 더하고 있다. 블루스뿐만 아니라 레게, 컨트리, 테크노 등 다양한 장르로 음악 지류를 넓히고 있는 클랩튼은 새 앨범에서도 그 폭을 확대했다. 퓨전 재즈풍의 기타 연주가 도입됐으며, 라틴 음악의 요소도 엿보인다. 보사 노바의 흥취가 물씬 풍기는 첫 곡 ‘Reptile’을 비롯해, ‘Modern girl’, ‘Son & sylvia’ 등에서 알 수 있다. ‘리듬’에 대한 클랩튼의 지속적인 실험이다. 선배들을 향한 오마쥬도 계속된다. 에릭 클랩튼의 음악적 스승 중 한 명인 기타리스트 J.J. 케일(J.J. Cale)의 ‘Travelin` light’, 1985년에 세상을 떠난 ‘점프 블루스의 대가’ 빅 조 터너(Big Joe Turner)의 고전 ‘Got you on my mind’ 등이 그것이다. 또한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1980년대 히트넘버 ‘I ain`t gonna stand for it’, 레이 찰스(Ray Charles)의 ‘Come back baby’를 새롭게 재해석하며 두 명의 맹인 거장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있다. 그는 그러나 ‘향수’를 풍기지 않는다. 애절하면서도 포근하게 감싸안는 음색과 선율로 그만의 분위기를 낸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곡조에 맞게 ‘톤’을 찾아내는, 바로 ‘기타의 신’만이 할 수 있는 특허품이다. 음악을 만들고 듣는 이가 인간이지만 ‘비인간적’인 음악이 판치는 요즘이다. 그러나 에릭 클랩튼의 음악과 인생은 접점이 없는 평행선을 달리지 않는다. 합일점을 찾아 예술로 승화시킨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희노애락이 담겨져 있다. 특히 역경 속에서 소중한 음악의 싹을 틔우고 키워냈다. 내면의 고통과 이별의 슬픔을 블루스로 쏟아냈다. ‘인간의 음악’이다. 당연하다. 허나 바로 이 점 때문에 클랩튼은 전설로 추앙 받는다.
1980년대 영국 최고의 록밴드 다이어스트레이츠(Dire Straits)의 프런트맨으로 록 팬들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는 마크 노플러(Mark Knopfler)는 맑고 인간적인 자신만의 독특한 기타 톤으로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대접받는다. 지성파 뮤지션으로도 유명한 그는 록 뮤지션이면서 영화음악에도 놀라운 재능을 보여 1980년대를 수놓았던 영화음악가의 반열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 놓고 있기도 하다. 1949년 8월 ... 1980년대 영국 최고의 록밴드 다이어스트레이츠(Dire Straits)의 프런트맨으로 록 팬들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는 마크 노플러(Mark Knopfler)는 맑고 인간적인 자신만의 독특한 기타 톤으로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대접받는다. 지성파 뮤지션으로도 유명한 그는 록 뮤지션이면서 영화음악에도 놀라운 재능을 보여 1980년대를 수놓았던 영화음악가의 반열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 놓고 있기도 하다. 1949년 8월 12일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우(Glasgow)에서 태어난 마크 노플러(Mark Knopfler)는 하이클래스 집안에서 모범생으로 자랐다. 대학에 진학 영문학과 어학을 공부한 후 신문사 기자가 되지만 자신의 소박한 꿈을 위해 선생님으로 직업을 바꾼다. 학교 선생님을 하면서 여유 시간에 기타를 다루던 그는 뒤늦게 기타에 빠져들게 되고 이 때부터 뮤지션의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1977년 동생인 데이비드 노플러(David Knopfler)와 의기투합, 다이어 스트레이츠를 결성한 그는 록 밴드의 보컬리스트이자 기타리스트로서 또 상업성으로 얼룩져 있었던 1980년대 사회성과 인간성을 이야기했던 지성파 송라이터로서 각광 받는다. 하지만 다이어 스트레이츠가 성공 행진을 거듭하고 있던 순간에도 마크는 개인적인 활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밥 딜런, 필 리놋(Phil Lynott), 아즈텍 카메라(Aztec Camera)등의 앨범에 기타세션으로, 또 프로듀서로 참여하였으며, 1983년 < Local Hero >를 시작으로 영화 음악에 뛰어든다. 1980년대 솔로 뮤지션으로서 발표한 4장의 앨범은 모두 영화 사운드트랙이었다. 1985년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이름으로 < Brothers in Arms >를 영국에서 2,000만장 이상 팔아치우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지만 영화음악가로서의 그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1984년 < Cal >, 1987년 < The Princess Bride >, 1989년 < Last Exit to Brooklyn >에 이르기까지 영화음악가로서 그가 보여준 역량은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영광에 다가설 만한 가치있는 작업이었다. 1980년대 동시대에 록 뮤지션으로서, 또 영화음악가로서 그가 보여준 활동은 이색적이다. ’Money for nothing’, ’Walk of life’ 과 같은 록앤롤 트랙으로 대 성공을 거둠과 동시에 < Cal >의 ’The long road’, < Last Exit to Brooklyn >의 ’Love idea’와 같은 서정적인 스코어들을 동시에 히트시켰기 때문이다. 이 네 편의 영화음악은 1993년 < Screenplaying >이라는 베스트 앨범에 함께 수록되기도 하였다. 영화음악 앨범에서는 그의 맑고 부드러운 기타 연주 뿐 아니라 바이올린, 색소폰 등으로 전개되는 다양한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 사운드트랙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강한 ’스카치(Scotch) 향기’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1990년대에도 영화음악가로서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80년대만큼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1998년 작 < Wag the Dog >, 1999년 작 < Metroland >, 2002년 최근작인 < Shot at Glory >에 이르기까지 유려한 멜로디와 서정적 사운드를 자랑하는 스코어 맨으로서의 가치는 계속 유지되고 있다. 영화음악가로 활동하면서 록 뮤지션으로서의 활동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1989년 컨트리 밴드인 낫싱 힐빌리스(The Nothing Hillbillies)를 조직하여 앨범을 발표하였으며, 1990년 컨트리 기타의 명인 쳇 엣킨스(Chet Atkins)와 동반 앨범 < Neck And Neck >을 발표하였고, 1991년 6년 만에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앨범 < On Every Street >를 발표, 영국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마크 노플러는 동료 뮤지션들이 함께 작업하고픈 기타리스트로도 유명하다. 1980년대 이후 다양한 뮤지션들과 호흡을 맞추며, 티나 터너(Tina Turner), 스틸리 댄(Steely Dan), 스팅(Sting), 씬 리지(Thin Lizzy), 지난 2000년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의 앨범에 이르기까지 그가 기타리스트로서, 프로듀서로서 참여한 앨범은 무궁무진하다. 1996년 마크 노플러는 록 뮤지션으로서의 솔로 데뷔 앨범 < Golden Hearts >를 발표하고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해체를 선언한다. 그룹을 유지하면서 많은 외도를 거쳤던 그이지만 솔로 앨범은 다이어 스트레이츠 당시의 음악으로 돌아가듯 컨트리, 포크, 록의 다양한 스타일을 포섭하며 록 뮤지션으로서의 능력을 과시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는 2000년 < Sailing to Philadelphia >를 발표하고 다이어 스트레이츠에서 시작된 록 뮤지션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있다. 앨범에는 밴 모리슨, 제임스 테일러 등의 뮤지션이 함께 참여하여 눈길을 끌었다.
노래 : Charles Aznavour (샤를르 아즈나부르)
프랑스 샹송 가수 프랑스 샹송 가수
1987년 11월 1일 새벽 강변도로를 달리던 차가 택시와 충돌했다. 거기에 타고 있던 25살 꿈 많던 미완의 음악가는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 즉사했다. 그렇게 유재하라는 천재의 전설은 시작된다(유독 술을 좋아했던 그는 술 취한 친구의 차를 타고 가다 변을 당했으며 그 사고로 그 친구의 부모는 4천4백60만원이라는 배상 판결을 받게 된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던 유재하는 1962년 6월 ... 1987년 11월 1일 새벽 강변도로를 달리던 차가 택시와 충돌했다. 거기에 타고 있던 25살 꿈 많던 미완의 음악가는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 즉사했다. 그렇게 유재하라는 천재의 전설은 시작된다(유독 술을 좋아했던 그는 술 취한 친구의 차를 타고 가다 변을 당했으며 그 사고로 그 친구의 부모는 4천4백60만원이라는 배상 판결을 받게 된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던 유재하는 1962년 6월 6일 광산업을 하는 아버지(유일청 - 1989년 작고)와 어머니 황영씨 사이의 3남 3녀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유복했던 집안덕택에 그는 소위 빽판과 전축으로 음악적 향유를 누릴 수 있었으며 전기 기타로 자신의 싹트는 창작열을 시험해 볼 수도 있었다. 삼선중학교시절, 그는 브레드(Bread), 퀸(Queen), 비틀스(Beatles), 피터 프램프톤(Peter Frampton)의 음악을 많이 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음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쌓아가던 그는(Fresh라는 그룹을 구상하기도 했다) 클래식으로 진로를 잡게 된다. 대중 음악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던 시절 이였기에 음악을 위한 선택은 사실상 그것이 전부였다. 한양대 음대 작곡가를 지망(이 당시의 동창으로 그와 알고 지내던 이는 작곡가 김형석과 수요 예술 무대라는 인기 장수 라이브 프로그램의 PD인 한봉근이 있다)한 그는 4학년 때인 1982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이라는 당대 최고의 인기 그룹에 몸을 담게 된다. 이 2개월의 짧은 여정은 학교의 방해로 중단되었지만 후에 그의 목소리로 전국을 강타하게되는 ‘사랑하기 때문에’를 조용필의 7집에 수록하게 된다. 대학 졸업 후 군복무를 마친 그는 1986년 어릴 적 친구였던 김종진이 속해있던 김현식의 밴드인 봄여름가을겨울에 들어가게 된다. 이 그룹에서 그는 6개월간 활동하면서 김현식에게 역시 그의 유작 앨범에 있는 ‘가리워진 길’이란 곡을 취입하게 한다. 그룹을 나온 후 솔로 앨범을 위한 작업에 대한 구상을 마친 그는 1986년 겨울 베이시스트이자 후에 매니지먼트를 맞게되는 조원익을 찾아가 자신의 프로젝트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한다. 작사, 작곡은 물론 편곡에 대한 완벽한 밑그림을 이미 제시해 놓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은 드디어 1987년 3월 봄의 새싹들과 함께 세상에 나온다. 그러나 그는 방송사의 오디션(일종의 가수에 대한 심의 같은 것이다)에서 떨어지는 불운을 겪게 되고 앨범에 대한 늦은 반응으로 자신의 음악에 대한 자신감을 잃게된다. 거기다가 일본의 야마다 가요제에 출품한 ‘지난날’은 예선탈락의 비운을 맛보고 만다. 길게만 느껴지던 이 무명의 시간은 여름이 되어 ‘지난날’이 전파를 타기 시작하면서 끝이 난다. 부담 없는 목소리는 순식간에 모든 불운의 상황을 반전시켰고, 음반은 호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팬들의 사랑을 느낄 즈음 그의 삶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정지되었다. 그가 앞으로 발표할 수많은 걸작들을 음미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렇게 그는 훌쩍 우리 곁을 떠나갔다. 1년 후의 추모공연은 조동진, 이광조, 김수철과 같은 당대의 음악인들이 함께 했으며 그 수익금과 더불어 발족된 유재하 음악 장학회는 조규찬, 유희열, 이규호, 박인영 등의 기라성 같은 신예들을 배출했다. 그의 사후 10주년에는 김현철이 주축이 되어 신해철, 이적, 이소라 등 100여 명의 음악인들이 모여 추모앨범을 만들었으며 기념비를 만들려는 계획도 추진되었다. 그의 음악에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들의 행렬은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으며 그가 남긴 발라드의 문법은 이후 이문세를 비롯한 변진섭 등 1990년 댄스 음악의 출현이 있기 전까지 우리 음악계를 풍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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