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데뷔하여, 첫 시집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으로 폭발적인 주목을 받은 조동범은 지치지 않는 에너지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문학평론집 『디아스포라의 고백』을 펴내기까지 문학 전반에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고 있는 그가 두번째 시집을 들고 왔다. 첫 시집에서 시인은 자본주의 사회 속의 고독한 개인들을 포착한 여러 시편들을 보였는데 그 바통을 이어받은 이번 두번째 시집에서는 현대 문명의 톱니 틈새에 산재한 죽음의 이미지가 도처에서 출몰한다.
왜 카니발인가 보니, 여기 축제의 소음과 잔해들이 가득하다. “공중에 던”져진 “광대들의 고깔모자”는 “붉은 리듬”을 타며 행렬중이고, “여왕은 빛나는 지휘봉을 들고 최선을 다해 카니발을 지휘”(「카니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여왕이 쓰고 있는 왕관은 화려하게 수놓인 왕관이 아니라 검은 왕관이다. 공중에 날리고 있는 것은 갖가지 색종이가 아닌, 검은 피다. 어쩐지 음울한 기운이 도는 이 축제의 밤은 어디로부터 연유한 것일까. 축제라 하면, 군중들의 함성과 불꽃이 터져야 할 텐데 여기 이 카니발은 “동굴처럼 길고 막막한 어둠이 기다리고 있”는 “붉은 심장의 밤”이다. 이 “붉은 심장의 밤”을 관통하는 축제 가운데에, 군중 속에서 고독한 포즈를 한 시인이 있다. 산란한 광기의 축제 속, 그의 마른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에 주목한다면 아주 이질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문학평론가 고봉준은 이번 시집을 두고 “현대 문명의 묵시록”이라 했다. “검은 묵시록의 세계 속에서 일상과 죽음의 경계는 극단적으로 모호하”며, “무차별적인 죽음의 세계에서 일상은 ‘죽음’이 등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비극적”이라고 했다. 희열의 축제는 없다. 다만 번잡한 소용돌이처럼 엉켜 축제 같은 삶을 살아갈 뿐이다. 축제로 위장된, 문명의 현란한 불빛 사이를 헤치면서.
검은 축제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이렇다.
그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고속도로였다./ 하반신이 잘린 채였고 그의 마지막 시선은 내리는 눈발 너머의 막막한 우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잘린 몸통 안으로, 쏟아지는 눈발과 함께 우주가 들어서는 날의 어느 밤이었다. (「정물」부분)
남자는 여전히 늙은 개와 썩은 생선 통조림으로 가득한 거리를 지나
검은 구두의 집으로 돌아간다.
남자의 식탁은 어둡고 오래된 냉장고의 식욕으로 빛났지만 누구도 검은 전등불 아래에서의 식사를 본 사람은 없었다.
남자의 검은 밤과 검은 낮이, 무수히 지나간다. (「검은 TV와 신문의 날들」부분)
장갑을 낀 그의 손이
시민들의 환호에 답하며 퍼레이드를 지휘했다
저격수는 퍼레이드를 향해 총신을 겨누고는 말이 없다
퍼레이드의 큰북이 햇살을 퉁겨
빌딩을 향해 날아가는 순간에도
저격수의 총신은 예리하게
그의 심장을 더듬었다 (「퍼레이드」부분)
절단된 신체의 이미지, 그 이미지가 출현하는 공간은 고속도로다. 이쯤 되면 왜 그의 시를 “현대 문명의 묵시록”이라 하는지 알 것이다. 더군다나 퍼레이드를 겨누고 있는 저격수라니. 퍼레이드 행렬이 우리 삶의 반복되는 궤도라면, 그 궤도에 총을 겨누는 일은 이 카니발 속에서 희망이나 미래는 찾을 수 없음을 시사하는 행위다. 예정된 ‘죽음’만이 삶을 포위한 채 위태로움을 증폭시키고 있을 뿐이라는 펀치라인이다. 이처럼 축제에 초대된 비극은 진실만을 말하는 불편한 손님 같다. 검은 옷의 손님과 나란히 앉으니 삶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형국이다. “레일 위에서” 보는 “붉은 밤”은 우리의 밤, “저수지의 죽은 물고기 떼”(「롤러코스터 타는 밤」)는 부패해가는 지금 여기의 풍경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롤러코스터를 타러 놀이동산에 가는 날. (중략)
레일을 만지는 손이 은빛으로 부서지는 밤.
서늘한 바람 한 조각을 베어 물고 평화롭게 속도를 기다리면, 고요한 질주가 다가오지. 즐거운 축제가 경쾌한 비명으로 가득한 롤러코스터를 바라보지.
롤러코스터가 다가오기 전에 폴짝 뛰어오르고 싶지 않았지. 축제처럼 피가 흩어지고, 사방으로 롤러코스터 타는 밤이 무심하게 지나가지. (「롤러코스터 타는 밤」 부분 )
소리 없이 계속되는 카니발
삶과 죽음이 더이상 분리되지 않는 곳, 일상. 그 일상 속의 타자의 모습은 어떨까. 조동범의 ‘타자’들은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다. 그들은 ‘검은 축제’의 또다른 분신이며, ‘죽음’의 급파된 사자이고 항상 거기 있으나 들리지 않는 백색소음이다. “여자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모든 것이 믿기지 않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쓸쓸했다./ 그녀의 목은 마지막 남은 숨을 움켜쥐던 남자의 손을 떠올렸다.// 죽음은 간단했고, 남자의 눈물쳀 여자의 가슴 위로 떨어졌다./ 남자의 손은 차마 여자의 눈을 보지 못했지만, 그것이 사랑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공중에 매달린 남자의 붉은 혀가 오래도록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믿을 수 없이 건조하며 동시에 처절한 시의 제목이 「허니문」이다. 사랑마저 우리를 연결시키지 못한 채 타자로 남겨둔다.
이처럼 삶의 공간이 죽음의 공간으로 변화하는 것을 바라보며 시인은 얼굴을 찌푸리지도 어떠한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지도 않는다. 다만 침식해가는 그림자들을 보며 가만히 말한다. “수많은 당신들의 힘은 진실이었을까.”(「차력사」)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것,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것, 그것의 접경에 조동범의 ‘카니발’이 있다. 자, 이제 축제를 즐기시라. 검은 피가 튈지라도, 축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잠든 새벽의 지하철 역, 텅 빈 빌딩, 혹은 아스팔트 도로에서 소리 없는 축제가 열리고 있으니. 이 치밀하게 조탁된 두번째 시집을 펼치면 당신이 볼 수 없는 투명한 알전구가 빛나고, 당신이 들을 수 없는 회전목마 오르골 소리가 들린다. 치명적인 거리를 조동범과 함께 걷는다면, 검고 검은 이곳을 한순간이나마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