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여자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다 빈치의 유산』 『권력과 광기』 『천재 파티시에, 프랑스 요리의 왕; 앙토넹 카렘 평전』 『아인슈타인, 신이 선택한 인간』 『누가 달을 만들었는가』 『인류의 조상을 찾아서』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 등이 있다. 또한 『여성에게 물어라』 『변호사처럼 설득하라』 『그레이 매터스』 『Abs 다이어트』 『먹히는 말』,『모사드』등...
서울여자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다 빈치의 유산』 『권력과 광기』 『천재 파티시에, 프랑스 요리의 왕; 앙토넹 카렘 평전』 『아인슈타인, 신이 선택한 인간』 『누가 달을 만들었는가』 『인류의 조상을 찾아서』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 등이 있다. 또한 『여성에게 물어라』 『변호사처럼 설득하라』 『그레이 매터스』 『Abs 다이어트』 『먹히는 말』,『모사드』등을 번역했다.
세계사를 바꾼 튜더 왕조의 흥망사
천년의 스캔들, 튜더 왕조의 실체를 밝힌다.
- 수십 년 만에 튜더 왕조를 한 권에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한 책 -
튜더 왕조가 잉글랜드를 통치한 기간은 3대(5명의 왕)에 걸쳐 총 118년에 지나지 않는다. 전후의 다른 왕조들에 비하면 매우 짧은 기간이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군주들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세계사를 바꿔 놓았으며, 지금까지도 학자들의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학자들이 그들의 치세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는 늘 신앙에 관한 문제가 거론되고 있으며, 실제로 튜더 가의 모든 왕이 국민들의 종교적인 합의를 원했고 그 합의가 자신들이 원하는 조건으로 이뤄지길 바랐다.
튜더 왕조의 시조 헨리 7세는 25년의 재위 기간 중 탁월한 지도력으로 튜더 왕조의 기틀을 다졌으며, '피의 메리'로 악명을 떨쳤던 메리 1세는, 그녀의 재위 기간이 좀 더 길었더라면 세계사를 다시 썼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 탁월한 통치자였다. 튜더 왕조의 핵심인물인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업적을 남겼지만, 단순한 통치자를 넘어 정치적 선전과 연기의 달인이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두 사람은 실제와 거의 연관성이 없는 허구의 자신을 만들어 놓고 그 뒤에 숨어 살았지만, 그럼에도 당대의 집단적인 생각에 성공적인 인상을 남겼다. 그들이 만들어낸 페르소나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이유는, 그 페르소나가 고유의 매력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는 정치적 유용성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통치자의 개인적인 야망이 그 나라의 국민들과 나아가 역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그 야망이 역사의 흐름과 맞물려 긍정적인 부분으로 작용할 때도 있지만 국민적 합의를 외면한 정책은 필연적으로 국민들에게 참혹한 고통을 남길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다.
또한 튜더 왕조 외에도 계층 구조와 중세 가톨릭교회, 프랑스와 스페인과의 관계, 오스만 제국, 정치, 문화, 종교, 사회, 교육, 연극, 생활상 등 당시 잉글랜드를 포함한 유럽의 역사적 배경을 비중 있게 다룸으로써 책의 가치를 더 한층 돋보이게 한다.
**튜더 왕조의 기원**
웨일스의 대지주였던 오언 튜더가 헨리 5세의 미망인 왕비 캐서린(발루아의 카트린)과 결혼해서 낳은 에드먼드 튜더가 플랜태저넷 왕가의 분가인 랭커스터 가문의 마거릿 보퍼트와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 헨리 튜더이다.
1470~1471년 군사적 격변의 와중에 헨리 6세와 그의 아들의 죽음으로 랭커스터 가문의 부계혈통은 완전히 끊어지게 되고, 플랜태저넷의 또 다른 분가인 요크 가문의 리처드 3세가 왕위를 쟁취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보스워스 전투에서 헨리 튜더에 의해 목숨을 잃음으로써 약 450년 동안 잉글랜드를 통치했던 플랜태저넷 왕조는 끝이 나고 랭커스터 가문의 모계혈통인 헨리 튜더가 1485년 왕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헨리 7세이며, 튜더 왕조의 시조이다.
1대 왕; 헨리 7세 (재위 1485∼1509)
잉글랜드의 왕권을 과거 수대에 비해 훨씬 더 확고하고 강력하게 만들었다. 스스로를 엄격하게 통제했으며 언제나 베일에 쌓여있었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귀족들의 자치권을 없애기 위한 장기적인 활동을 펼쳤는데, 새로운 귀족의 탄생을 막아 그의 치세 초기 55개였던 귀족 가문의 수는 말기에 이르러 42개로 줄였으며, 사법위원회를 설치하여 그에게 재산을 압수당한 귀족은 138명에 달했다. 또 그는 교회의 권력도 빼앗았으며 잉글랜드에서 주교직은 왕실에 공헌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되었다. 이렇듯 헨리 7세는 재위 기간 25년 동안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들의 득세를 잠재우고, 왕실의 수입을 늘려 국고를 튼튼히 하였으며, 전쟁을 피하고 국내의 안정을 이뤄 튜더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다.
2대 왕; 헨리 8세 (재위 1509∼1547)
헨리 7세와 요크의 엘리자베스 사이에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잉글랜드에서 그보다 더 깊은 인상을 남긴 왕은 거의 없을 정도로 그가 이룬 업적은 절대적이었다. 그는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왕권신수설 사상이 퍼지고 있을 때 왕위에 올라 예술과 종교라는 수단을 통해 왕권의 존엄성에 관한 이론을 조직화했다.
캐서린 왕비와의 결혼무효 소송으로 인해 로마 교회와의 갈등으로 야기된 그의 종교 개혁은 마르틴 루터의 개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더불어 개신교의 확장을 앞당겼고, 장로교회의 탄생을 촉발시켰다. 더 나아가 그는 지상권, 취임세폐지법, 성직자 복종법 등을 시행하여 교황을 배척하고 자신이 지배하는 영국의 국교를 만들어 수장(잉글랜드 교황)을 자처했다. 항상 성공적은 아니었지만 그는 유럽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의 적대적인 경쟁 속에서 국가의 안전을 위해 신중한 길을 걸었다. 또한 그는 상류 귀족의 개혁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지방 신사계급 등의 신흥 상류계급을 탄생시킴으로써 훗날(찰스 1세) 이들의 세력에 의해 군주제가 전복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는 어떤 군주도 꿈꾸지 못했던 왕권을 확립하기위해 공포정치를 시행해서 왕국을 수 세대에 걸친 분열과 혼란에 빠뜨렸고, 자신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한 백성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토머스 울지 등 최고의 측근들을 차례차례 죽였으며, 영국 국교회의 수립을 위해 토머스 모어, 존 피셔 등 당대의 최고의 학자 및 주교 등을 처형했다. 또 여섯 부인 중 두 명을 처형했다. 이렇듯 그는 잉글랜드 천년 역사에 유래 없는 피와 배신의 유산을 남겼다.
3대 왕; 에드워드 6세 (재위 1547∼1553)
헨리 8세와 세 번째 왕비 제인 시모어 사이에서 태어났다. 9세에 왕위에 올라 16세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어린 나이에 왕에 올라 당시 최고 실세인 어머니 오빠 서머셋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의 섭정을 받았다. 급진적인 종교 개혁가였으며, 언제나 그의 목표는 복음주의 개혁을 가속화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혁에 저항하는 구교의 보수주의자들을 한명도 죽이지 않았다. 구교 신봉자인 누나 메리와의 관계도 원만했으나 죽기 전에 잉글랜드를 구교에 넘길 수 없다는 신념으로 아버지 헨리 8세의 유언을 수정하여 신교 신봉자인 요크가의 상속인이자, 존 더들리의 며느리인 제인 그레이에게 왕위를 계승하고자 했다.
4대 왕; 여왕 메리 1세 (재위 1553∼1558)
헨리 8세와 첫 번째 왕비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잉글랜드 최초의 여성 통치자로서, 제인 그레이의 여왕 옹립을 위한 신교 세력의 반란을 잠재우고 극적으로 등극했다. 등극 6개월 후 다시 발생한 복음주의 세력의 반란을 물리치고 왕권을 굳건히 했다.
정략결혼의 일환으로 조카인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결혼했다. 그녀는 전통교회로 돌아가려는 정부에 저항하는 각계각층의 복음주의 신도 300명을 이단 혐의로 화형에 처해 '피의 메리'로 불렸다. 그러나 신앙 문제를 제외하고는 메리는 소통을 중요시 여겼고, 백성들에게 이롭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성과 열을 다한 통치자로 남아있다. 메리가 재위 5년만인 42세에 죽지 않고 더 오래 살았더라면 헨리나 엘리자베스를 뛰어 넘는 탁월한 통치자가 되었을 거라는 학자들의 견해가 지배적이다.
5대 왕; 엘리자베스 1세 (재위 1558∼1603)
헨리 8세와 두 번째 왕비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지난 천년 동안 가장 뛰어났던 통치자로 평가 받는다. 그녀는 즉위 한 후 구교와 신교를 적절히 통제해가며 아버지가 설립한 잉글랜드 국교회의 확립과 국내적 안정을 위해 힘을 기울였다.
45년 재위기간 동안 대내외적으로 막강한 세력들이 잉글랜드를 압박하는 동안 계속 정권을 유지함으로써 근대 민족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으며,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침으로써 잉글랜드가 해상 강국으로 떠오르게 되고, 해외 식민지 개척에 대한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기틀이 이 때 부터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1601년 구민법을 제정, 부랑자들의 구제에 힘쓰는 등 내치에 힘을 쏟았고,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문학과, 프랜시스 베이컨의 경험철학 등 인본주의를 장려해 국민 문학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녀는 잉글랜드의 처녀 여왕Virgin Queen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놓고 그 뒤에 숨어 자신의 인생과 통치기간 내 생존을 위해 개인적인 행복의 모든 기회를 희생한 불우한 인물로 평가된다.
**저자와의 인터뷰**
왜 튜더 인가?
이 질문은 튜더 왕조에 관한 새 책이 등장할 때마다 거의 어김없이 나올 법한 질문이다.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를 낳은 왕조에 관해 아직도 더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과연 있을까? 이 두 사람은 이미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많이 글 속에 언급된 군주들이며, 너무도 많은 영화, 소설, TV 드라마에서 다뤄진 탓에 때로는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현존하는 유명 연예인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런 그들에 관한 책을 굳이 또 읽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두 가지 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튜더 왕조의 가장 유명한 인물들에 관한 책들은 실제로 무수히 많이 출판되었지만, 한 권 안에 왕조 전체를 다루면서 일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책은 언제나 드물었다. 이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튜더 왕조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제대로 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좀처럼 없기 때문이다. 무일푼의 도망자였다가 갑자기 왕관을 쟁취한 헨리 7세의 위업이 없었다면 헨리 8세의 전설적인 행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헨리 8세의 자식들 중 세 번째로 그의 왕위를 물려받고 피에 젖은 유산을 처리하기 위해 분투했을 뿐이다. 그녀에게는 남동생(에드워드 6세)과 언니(여왕 메리)가 있었고, 두 사람 모두 헨리의 유산들을 되돌리려 애썼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 두 사람의 이야기에 비춰 보아야만 온전히 생명력을 얻는다. 튜더 왕가는 3세대에 걸쳐 118년 동안 잉글랜드를 통치했다. 그런데 잉글랜드와 유럽, 심지어는 세계의 역사를 점증적으로 바꿔놓은 5명의 통치 기간을 하나의 연속체로 다루어 원인과 결과를 살피는 작업은 아직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둘째, 마지막 튜더 사망 후 4세기 이상이 흐르는 동안, 튜더 왕가 사람들의 실제 모습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들의 모습 사이에는 줄곧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실제 헨리 8세는 6명의 부인을 거느린 전설 속의 헨리 왕보다 더 나은 사람이기도 했고 더 못한 사람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는 화려한 겉모습에 비해 훨씬 더 복잡했고, 애처로웠고, 덜 위대했다. 그토록 유명하지 않은 헨리 7세와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중요한 통치자들이었고 매력적인 사람들이었다.
튜더 왕조에 관한 진실한 이야기는 종교적인 논쟁과 정치적인 이념의 차이 때문에 오랫동안 주요 역사학자들에게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튜더 왕조의 진실이 제대로 다뤄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2세대 사이의 일이며, 그런 이야기들은 대개 역사학자들만 접할 수 있었다. 일반 대중은 좀처럼 진실을 접하지 못하고, 사실에 깊이 근거하지 않은 오랜 전설들만을 들어 왔다. 《튜더스》를 출판하면서 내가 바라는 점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왕조들 중 하나인 튜더 왕조에 관해 대중의 이해가 현실과 좀 더 일치할 수 있도록 이 책이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 G.J. 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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