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YES24 카테고리 리스트

YES24 유틸메뉴

Global YES24안내보기

Global YES24는?

K-POP/K-Drama 관련상품(음반,도서,DVD)을
영문/중문 으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Korean wave shopping mall, sell the
K-POP/K-Drama (CD,DVD,Blu-ray,Book) We aceept PayPal/UnionPay/Alipay
and support English/Chinese Language service

English

作为出售正规 K-POP/K-Drama 相关(CD,图书,DVD) 韩流商品的网站, 支持 中文/英文 等海外结账方式

中文

검색


어깨배너

8월 전사
8월 혜택 모음
정재승 여름특강
책을 듣다
주말엔 보너스
북클럽
1/6

빠른분야찾기


윙배너

마우스를 올려주세요.

마케팅 텍스트 배너

웹진채널예스


더 베트남 워 다큐멘터리 10부작 시리즈 음악 (The Vietnam War OST)
공유하기 예스24 음반 판매 수량은
차트와 차트 집계에 반영됩니다. 한터차트/가온차트 집계 반영 안내
수입
CD

더 베트남 워 다큐멘터리 10부작 시리즈 음악 (The Vietnam War OST)

[ 2CD ]
Johnny Wright 작곡/Bob Dylan, Barry Mcguire, The Staple Singers, Wilson Pickett 노래 외 31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Universal / Universal | 2017년 11월 17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12 판매지수란?
상품 가격정보
판매가 38,800원
할인가 31,400 (19% 할인)
YES포인트
추가혜택쿠폰 및 사은품(1종)
추가혜택쿠폰 쿠폰받기
  • 주문금액대별 할인쿠폰
카드혜택
결제혜택
카드할인 정보
BC카드 BC카드 4000원 할인쿠폰 (페이북 경유, 금요일 9시 1500장 한정) 자세히 보기
 모바일팝 모바일 5% 즉시할인 (모바일 결제시) 자세히 보기
네이버페이 네이버페이 1% 적립 (전체결제) 자세히 보기
페이코 페이코 포인트결제 2% 적립 (신규고객 4,500원 할인) 자세히 보기
할인/적립 카드 더보기
구매 시 참고사항
구매 시 참고사항
  • 현재 새 상품은 구매 할 수 없습니다. 아래 상품으로 구매하거나 판매 해보세요.

일시품절

수량
배송비 : 무료 배송비 안내
  • 국내배송만 가능
1/4
광고 AD

더 베트남 워 다큐멘터리 10부작 시리즈 음악 (The Vietnam War OST)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7년 11월 17일
제조국 미국

관련분류

카테고리 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1
  • 01 A Hard Rain's A-gonna Fall - Bob Dylan
  • 02 Hello Vietnam - Johnny Wright
  • 03 It's My Life - The Animals
  • 04 Eve Of Destruction - Barry Mcguire
  • 05 Turn Turn Turn - The Byrds
  • 06 Masters Of War - The Staple Singers
  • 07 Mustang Sally - Wilson Pickett
  • 08 Smokestack Lightnin' - Howlin' Wolf
  • 09 Backlash Blues - Nina Simone
  • 10 The Sound Of Silence - Simon & Garfunkel
  • 11 One Too Many Mornings - Bob Dylan
  • 12 Ain't Too Proud To Beg - The Temptations
  • 13 Are You Experienced? - The Jimi Hendrix Experience
  • 14 I'm A Man - The Spencer Davis Group
  • 15 Green Onions - Booker T & The Mg's
  • 16 Strange Brew - Cream
  • 17 Waist Deep In The Big Muddy - Pete Seeger
  • 18 A Whiter Shade Of Pale - Procol Harum
  • 19 The Lord Is In This Place - Fairport Convention
  • 20 For What It's Worth - Buffalo Springfield
Disc2
  • 01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 Bob Dylan
  • 02 Piece Of My Heart - Janis Joplin & The Holding Company
  • 03 Magic Carpet Ride - Steppenwolf
  • 04 Tell The Truth - Otis Redding
  • 05 The Letter - The Box Tops
  • 06 Bad Moon Rising - Creedence Clearwater Revival
  • 07 Soul Sacrifice - Santana
  • 08 Okie From Muskogee - Merle Haggard & The Strangers
  • 09 The Thrill Is Gone - B.B. King
  • 10 Psychedelic Shack - The Temptations
  • 11 Ohio - Crosby, Stills, Nash & Young
  • 12 Get Together - The Youngbloods
  • 13 Gimme Shelter - The Rolling Stones
  • 14 Tail Dragger - Link Wray
  • 15 America The Beautiful - Ray Charles
  • 16 What's Going On - Marvin Gaye
  • 17 Bridge Over Troubled Water - Simon & Garfunkel
  • 18 Let It Be - The Beatles

아티스트 소개 (36명)

노래 : Bob Dylan (밥 딜런 ,Robert Allen Zimmerman)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eatles) 그리고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와 함께 최정상의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이들 ‘전설의 빅 4’ 가운데에서도 딜런이 남긴 궤적은 차별화 아닌 특화(特化)되어 역사를 장식한다.

얼핏 그의 위상은 ‘실적주의’로 따질 때 매우 허약해 보인다. 엘비스, 비틀스, 롤링 스톤즈는 그 화려한 전설에 걸맞게 무수한 히트곡을 쏟아냈다. 넘버 원 히트곡만 치더라도 엘비스는 18곡(통산 2위), 비틀스는 20곡(1위), 스톤즈는 8곡(11위)이나 된다. 하지만 딜런은 그 흔한 차트 1위곡 하나가 없다. ‘Like a rolling stone’과 ‘Rainy day woman #12 & 35’ 등 두 곡이 2위에 오른 것이 고작이다. 차트 톱 10을 기록한 곡을 다 합쳐봐야 4곡에 불과할 뿐이다. 그에게 대중성이란 어휘는 어울리지 않는다. 상업적이란 말과는 아예 인연이 없다. 이렇듯 실적이 미미한 데도 록의 역사는 마치 신주 모시듯 그를 전설적 존재로 떠받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는 차트 정복 외에도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비록 그 가지는 다를지언정 ‘록의 스타일 확립’ 이라는 몸체는 유사하다는 것이다.

비틀스는 록의 예술적 지반을 확대했고, 스톤즈는 록에 헌신하며 형식미를 완성했고, 엘비스는 록의 정체성을 부여했다고들 한다. 분명히 딜런도 몸체에 자리한다. 깃털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타(他) 3인의 몸체가 외양이라면 그는 ‘내면’ 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노랫말이요, 메시지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음악은 사운드와 형식만으로 이미 메시지가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로큰롤이 폭발하여 확산되던 시점인 1950년대, 즉 엘비스가 활약하던 당시에 로큰롤은 메시지가 없었다. 1960년대 들어서 비틀스가 미국을 급습해 록의 르네상스를 일궈내고 있던 때까지도 록은 의미있는 가사와 격리된 상태였다. 그래서 의식계층으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그 때 밥 딜런이 있었다. 비틀스는 누구보다 먼저 딜런의 위력을 절감했다. 그의 포크 사운드와 메시지를 귀담아 듣고 그것을 자신들의 음악에 적극 수용한다. 1965년말 < Rubber Soul > 앨범의 수록곡인 ‘In my life’, ‘Girl’, ‘Norwegian wood’ 등에서 ‘톤 다운’ 을 드러내며 메시지를 잠복시킨 것은 전적으로 딜런의 영향 때문이었다.

밥 딜런은 실로 대중 음악의 지성사(知性史)를 이룬다. 타임(Time)지의 제이 칵스는 1989년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존 업다이크의 소설과 밥 딜런의 앨범 가운데 어느 것이 미국인들의 삶에 보다 자극을 주었는가? 존 업다이크 쪽에 표를 던진 사람이라면 이 기사를 여기까지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가사는 그러나 때론 메시지의 파악이 어려운 ‘난해한 현대시’ 와 같다. 밑줄 긋고 열심히 분석해도 도대체 명쾌하지가 않다. 1960년대 중반 < Another side of Bob Dylan >, < Bring it all black home >, < Highway 61 revisited >가 연속 발표되었을 때, 미국 각 대학의 영문과에 ‘밥 딜런 시분석’ 강좌 개설이 유행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팝팬들에게 딜런이 상대적으로 소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에게도 이 정도인데 영어의 벽에 막혀 있는 우리가 어찌 그를 쉽게 수용할 수 있었겠는가. 때문인지 음반마저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초기곡으로 알려진 것은 그나마 메시지가 확연한 ‘Blowin’ in the wind’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1970년대 중반의 금지곡 태풍으로 반전(反戰) 노래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방송과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 외 우리 팝 인구에 회자된 노래로 ‘One more cup of coffee’나 ‘Knockin’ on heaven’s door’가 있다. 그러나 그의 대표곡 반열에도 오르지 못하는 ‘One more cup of coffee’가 통한 것은 단지 낭만적 제목과 함께 친숙한 선율 때문이었을 뿐, 딜런의 음악 세계에 대한 천착의 결과물은 전혀 아니었다. ‘Knockin’ on heaven’s door’ 인기의 영예도 실은 건스 앤 로지스가 더 누렸다.

극소수의 곡을 제외하고 밥 딜런은 우리에게 인기가 없었다.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에 비한다면 엄청난 ‘부당 대우’였다. 언어 장벽과 무관한 음악 스타일 측면에서도 우리의 ‘홀대’ 는 마찬가지였다. 멜로디가 그럴싸한 곡이 있더라도 풍기는 내음이 지극히 ‘미국적’ 이었기에 우리의 청취 감성은 딜런을 꺼리곤 했다. 그의 음악 세계라 할 포크, 컨트리, 블루스는 미국 전통과 긴밀한 함수 관계를 지닌다. 선율과 사운드의 영국적인 맛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그의 음악에 잠기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사이에 우린 어느덧 딜런과 크게 멀어져버렸다. 록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꼭 딜런에서 막힌다. 신세대 가운데 더러는 우리의 팝 수용 문화에서 딜런 공백이 가져온 취약성을 맹렬히 질타하기도 한다. 우리 기준에서의 ‘팝 음악 여과’는 바람직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의역은 정확한 직역이 기초돼야 올바르다. 미국의 해석을 전제한 뒤라야 우리식 필터링의 의의가 배가된다.

그 직역의 첫 번째 대상이 바로 밥 딜런이다. 밥 딜런이 미국의 현대 음악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그의 음악몸체가 곧 시대와 세대의 흐름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딜런의 음악이 변화하는 과정과 그것을 있게 한 배경, 또한 그것을 주도해간 그의 자세는 ‘음악외적 환경’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먼저 포크 록(Folk-Rock)이다. 그가 1960년대 초반 저항적인 모던 포크로 베이비 붐 세대를 견인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통기타만으로 연주되는 단순한 구조이지만 그것의 포획력은 비틀스가 사정권에 들어올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비틀스가 베이비 붐 세대를 발현시켰다면 그는 그들의 의식화를 유도했다. 그러나 딜런은 케네디의 피살에 자극받으면서 스스로 ‘위기감’ 을 불어넣는다. 이미 비틀스가 세대의 청취 볼륨을 증폭시킨 마당에 포크의 음량 가지고 과연 세대를 관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71년 그는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그들(비틀스)은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코드는 정말 도에 지나친 것이었지만 하모니가 그것을 타당하게끔 했다. 그러나 맹세하건데 난 정말 그들에게 빠졌다. 모두들 그들이 어린 10대를 위한 광대이며 곧 사라질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내겐 명확했다. 그들이 지속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난 그들이 음악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머리 속에는 비틀스가 전부였다.” 그는 일렉트릭 기타를 잡아야 했다. 그것이 포크 록이었다. 포크의 순정파들로부터 배신자라는 질타는 불 보듯 뻔했다. 그가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알 쿠퍼(Al Kooper), 마이크 블룸필드(Mike Boomfield)가 참여한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Butterfield Blues Band)와 함께 전기 기타 연주를 했을 때 관중들은 “이건 포크 공연이야 나가!”라고 야유하며 돌과 계란 세례를 퍼부었다. 무대에서 내쫓긴 그는 통기타를 들고 되돌아왔지만 의미심장한 ‘It’s all over now’, ‘Baby blue’를 부르며 포크 관객들에게 아듀를 고했다. 껄끄러운 통과의례를 거친 뒤 밥 딜런의 포크 록은 ’Like a rolling stone’의 빅히트와 함께 만개했다. 이젠 막을 자도 없어졌다. 포크 록은 당시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존 레논과 밥 딜런을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 그룹 버즈(Byrds)는 ‘Mr. Tambourine man’으로 인기 가도를 질주했다. 그러나 그 곡은 딜런의 작품이었다.

버즈 뿐만 아니라 당시 포크 록계열 뮤지션치고 딜런의 곡을 손대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단숨에 포크 록은 1960년대 록의 주류로 부상했다. 1960년대 중.후반을 강타한 싸이키델릭 록(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도 실상 포크 록에 영향받은 흐름이었다. 그럼 어째서 포크 록은 1960년대 청춘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의식을 대변할 수 있었을까? 비틀스가 딜런에게 배우고, 딜런이 비틀스로부터 영감을 얻은 ‘포크와 록의 결합’ 은 시대성 견인을 가능케 한 절묘한 무브먼트였다. 록은 생태적으로 거리의 청춘에 의해 확립된 ‘하위문화적 표현’이다. 따라서 하이 클래스나 인텔리겐차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다. 또한 포크는 저항성을 견지하는 민중 음악이지만 음악의 주체나 주소비자층은 학생과 지식인 세력이다. 성질상 엇비슷하면서도 걸어온 길이나 ‘계급성’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밥 딜런이 포크 오리지널로부터 급격히 퇴각하여 록으로 전향한 것은 단지 추세의 편승이 아닌 완전함을 향한 ‘하층문화의 긴급 수혈’로 보인다. 이를테면 ‘위’의 고매한 문제의식과 ‘아래’의 근원적 반항을 한고리로 엮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항 영역의 지반 확대와 수요자의 확충을 기할 가능성은 올라가게 된다.

지식인만이 아닌 1960년대 젊은이들의 ‘계층포괄적 무브먼트’ 는 포크 록과 이 점에 있어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1960년대 중후반을 물들인 ‘히피보헤미안’ 물결도 딜런과 떼어낼 수 없는 흐름. 1960년대 록 역사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부분이다. ‘Like a rolling stone’은 포크 지식인의 소리라기보다 보헤미안적 정서의 노출로 파악해야 한다. 당시 딜런은 가치의 상대성을 신뢰하고 제도에 흡수되기룰 거부하는 이른바 비트(Beat) 사상에 빠져 있었다. 그가 진보적 시인인 알렌 긴스버그(Allen Ginsberg)와 교류하며 ‘개인 혁명’에 골똘해 있을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다. 비트는 이후 히피의 융기에 주요 인자가 되는데, 1960년대 중반 딜런의 음악을 가로지르는 것이 바로 이 ‘히피 보헤미안 정서’라 할 수 있다. 스스로 록 세계로 옮아가고 방랑적 지향을 설파한 것은 기존과 기성의 틀 깨기에 목말라 있던 베이비 붐 세대들에게 영도자가 제공한 ‘산교육’과 다름없었다. 따라서 밥 딜런은 그에게 등을 돌린 포크 근본주의자들의 수보다 휠씬 더 많은 록팬을 거뜬히 확보하게 된다. 음악적으로 딜런의 창작성이 이 때만큼 가공의 위력을 떨친 적도 없다. < Highway 61 Revisited >와 < Blonde On Blonde > 앨범은 포크의 엄숙주의에서 해방되어 록과의 결합으로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포획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음악은 ‘남을 위해’ 이데올로기에 봉사한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즐거움이 가져온 산물이기도 했다. 그가 포크의 프로테스트로부터 이탈한 것은 바로 ‘자유’와 등식화되는 ‘예술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는 저항성 대신 예술성을 얻었다. 개인적 경사도 겹쳤다. 사적으로 사라 로운즈와의 결혼은 그의 창작력 한층 북돋아주었으며 그 충만한 행복감은 그대로 < Blonde On Blonde > 앨범에 나타났다. 이 앨범의 탁월한 질감은 상당부분 사라와의 결혼이 낳은 것이라는 게 평자들의 일치된 시각이다. 나중 사라와의 파경 또한 그에게 또 하나의 명반 < Blood On The Tracks >를 안겨준다. 히피의 낭만적인 집단주의와 곧바로 이어진 이피(Yippie)의 전투성이 극에 달할 무렵 그가 뉴욕의 외곽 빅 핑크(Big Pink) 지하실에서 한가로이 더 밴드(The Band)의 멤버들과 자유 세션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가 가져온 행보이기도 했지만 그가 의도적으로 은둔을 택한 것은 분명했다. 세상이 소란함으로 가득할 때 그는 정반대로 정적을 취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물꼬를 터준 미국 사회의 격랑이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을 것으로 예측했는지도 모른다. 세대의 공동체 지향은 지극히 ‘비이성적’으로 비춰졌을 테고 오히려 그는 그럴수록 자신에게 돌아와 근본을 탐구하는 것이 올바른 행위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한 심저(心底)가 < John wesley Harding >과 < Nashiville Skyline >의 골간에 자리한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뜻밖에’ 재래식 컨트리 음악을 선보였다. 두 앨범은 모두 내쉬빌에서 녹음되었고 < Nashiville Skyline >의 경우 딜런은 컨트리 음악의 거성 자니 캐시(Johnny Cash)와 듀오로 ‘Girl from the north country’에서 다정히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이 앨범에서 톱 10 히트곡 ‘Lay lady lay’가 나왔다. 이 곡을 비롯해 대부분의 수록곡에서 딜런의 보컬은 예의 날카로움이 거세된 채 한결 부드러워졌고 가사도 접근이 비교적 용이해지는 등 멜로딕한 무드가 전체를 지배했다. 다시 세상은 소용돌이에서 호수의 조용함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1970년대 초반의 분위기였다. 딜런이 씨앗을 뿌린 ‘컨트리 록’ 은 1970년대 내내 주요 장르 중 하나로 맹위를 떨쳤다.

딜런은 언제나 흐름의 주역이었다. 나중 음반화된 더 밴드와의 세션 앨범 < Basement Tapes >가 록 역사에서 ‘특혜’를 받는 것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970년대 들어서 그는 ‘대중적’ 관점에서 뿌리에 대한 천착에 박차를 가했다. 예전에 그는 ‘좋은 사람만 따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이 많이 따를수록 좋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그가 1970년 < Self Portrait > 앨범에서 ‘Moon river’를 포함한 팝 스탠다드 넘버들을 노래한 것은 이러한 사고와 맥락이 닿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눈을 흘겼다. 레코드 월드(Record World)지는 이 앨범을 두고 “혁명은 끝났다. 밥 딜런이 ‘미스터 존스’에게 ‘Blue moon’을 불러주고 있다”며 혹평했다.(미스터 존스는 딜런이 < Highway 61 Revisited >의 ‘Ballad of thin man’에서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 존스 씨?”라고 했던 가공의 인물로 ‘제도권 인사’를 상징한다.) 빌보드 차트3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처럼 평단의 이해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 Self Portrait >앨범을 상업적 표현으로 볼 수는 없다. 비판의 칼을 휘두르는 비평가들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근본을 탐구하는 방법론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딜런이 1970년대 후반부에 기독교에 귀의한 것도 비슷한 문맥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사실 신(神)에의 의지가 엿보인 < Show Train Coming >, < Saved >, < Shot Of Love > 등 3장의 종교풍 음반은 ‘사고의 깊이’가 두드러졌지만 ‘변신’이라는 부정적 의미에 가치가 함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1970년대 딜런을 ‘혼미의 거듭’으로 규정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그것을 뒤집어보면 그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에 충실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아티스트의 본령이다. 밥 딜런은 언제나 음악을 통해 세상과 삶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고자 했다.

1980년대의 밥 딜런은 1970년대의 습기를 벗고 ‘열기’를 회복한다. 정치적 시각도 이입한 < Infidels >, < Empire Burlesque > 그리고 1989년에 나온 < Oh Mercy >는 이전의 앨범들과 명백한 분리선을 긋는다. 날카로운 보컬은 오히려 1960년대의 모습에 더 가깝다. 그는 1980년대 중반 라이브 에이드(Live Aid),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아티스트의 모임(Sun City) 등 일련의 자선행사에 얼굴을 내밀어 저항 전선에 복귀했다. 한 무대에서 그는 U2의 보노(Bono)와 함께 ‘Blowin’ in the wind’를 부르기도 했다. 딜런의 1980년대 앨범들에는 당시의 보수적이고 위압적 풍토를 거부하는 저항성이 숨쉰다. 그는 시대의 주류 한복판에는 없었지만 ‘시대의 공기’와 늘 함께 호흡했다. 그 공기를 어떤 때는 앞장 서 조성하고 어떤 때는 그것을 피해갔다. 밥 딜런의 한 면만을 바라보게 되면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그가 서 있던 ‘양쪽’ 자리를 다 관찰해야만 그 ‘드라마틱한 록 역사의 굴곡’ 을 읽을 수 있다. 록의 역사는 실로 위와 아래, 진보와 보수, 주류와 비주류, 기존과 대안이 끊임없이 부침을 되풀이 해왔다. 밥 딜런이 밟아온 길은 그것의 축소판이었다. 그러나 어떤 시점에서라도 - 가령 프로테스트의 깃발을 울렸을 때나, 대중성에 기웃거렸을 때나 - 딜런이 주변의 압박에 수동적으로 임한 적은 없다. 남이 시켜서 일렉트릭의 세계로 떠밀려 간 것이 아니었고, 의도적으로 신비를 축적하기 위해 은둔했던 것도 아니다. 그의 터전은 언제나 자신의 의지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비평가들이 밥 딜런을 전설로 숭앙하는 것은 그가 대중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문 ‘음악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음악인의 최고 영예인 ‘아티스트’란 소리를 들어 마땅했다. 그는 록에 언어를 불어넣었다. 포크와 컨트리를 록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시대와 맞서기도 했고 자신의 예술성에 천착하기도 했다. 그러한 업적과 성과의 편린들이 모여 그의 ‘광활한 아티스트의 세계를 축조하고 있다. 밥 딜런은 역사의 수혜와 위협 속에서 ‘인간’을 살려냈다. 음악인으로서 인간의 몸체는 다름 아닌 자유일 것이다. 밥 딜런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노래 : The Staple Singers (더 스테이플 싱어즈)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엘라 핏제랄드(Ella Fitzgerald), 줄리 런던(Julie London), 사라 본(Sarah Vaughan), 디나 워싱턴(Dinah Washington)과 함께 최고의 여성재즈가수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디바 니나 시몬(Nina Simone). 음지에 잔뜩 웅크린 자세로 바깥세상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마법의 주...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엘라 핏제랄드(Ella Fitzgerald), 줄리 런던(Julie London), 사라 본(Sarah Vaughan), 디나 워싱턴(Dinah Washington)과 함께 최고의 여성재즈가수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디바 니나 시몬(Nina Simone). 음지에 잔뜩 웅크린 자세로 바깥세상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마법의 주문과도 같다. 통한과 슬픔, 분노와 격정 그리고 발산하고 싶어도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없어 떠도는 영혼들에게 그녀는 구원의 손짓을 보낸다. 어둡고 습한 곳에 자신을 숨기고 있지만 말고 잘못된 세상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라고. 화를 내고, 하고 싶은 소리를 외치라고. 이제 너의 주장을 펴고 권리를 찾을 때라고. 속삭이듯 한탄하듯 때론 비단처럼 윤기 나게 때론 벨벳처럼 부드럽게 노래에 실어 전언한다. 본명은 유니스 웨이몬(Eunice Waymon), 가수 니나 시몬(Nina Siomone)으로 대중음악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 트라이온에서 가난한 집안의 여섯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4살 때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피아노신동으로 불린 그는 ‘유니스 웨이몬 기금’(Eunice Waymon Fund)을 설립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음악선생님의 도움으로 음악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었고 뉴욕 소재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가정을 지탱하기위해, 그는 피아노반주자로 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1954년 여름 그는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에 있는 아일랜드 바의 연주자로 직업을 잡았는데, 바 주인은 그에게 노래도 잘하길 요구했다.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끊임없는 연습을 해왔던 유니스 웨이몬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차릴 새도 없이 연예사업으로 들어섰다. 그는 이름을 니나(리틀 원)시몬으로 바꿨다.(1950년대 할리우드의 쟁쟁한 여배우들과 어깨를 겨룬 프랑스의 여배우 시몬 시뇨레(Simone Signoret)의 이름을 차용) 1950년대 후반, 니나 시몬은 베들레헴 레이블에서 최초의 트랙들을 녹음했다. 이 곡들에서 피아니스트, 가수, 편곡과 작곡가로서 그의 비범한 재능은 한층 더 빛을 발했다. ‘Plain gold ring’, ’Don’t smoke in bed’, ’Little girl blue’와 같은 노래들은 곧 그의 상연목록에서 스탠더드가 되었다. 오페라 (Porgy and Bess)의 곡 중 하나인 ‘I love you, Porgy’가 타운 홀, 카네기 홀 그리고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 불리고 히트를 기록하면서 나이트클럽 가수였던 그는 스타로 발돋움했다. 재즈스탠더드, 가스펠, 흑인영가, 클래식음악, 유래가 다양한 포크음악, 블루스, 팝, 뮤지컬과 오페라 송, 아프리카의 영창 게다가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까지, 이미 음악활동의 시작부터 창대했던 그는 준비된 스타였다. 기회는 당연한 만찬이었다. 클래식의 대위법, 재즈의 즉흥연주, 블루스의 변조 등 다방면의 음악요소를 결합해내는 시몬의 재능은 더 이상 무시될 수 없는 발군의 실력이었다. 독자적인 타이밍, 고요함의 음악적 극대화, 몇몇 코드로만 곡을 진행시키는 피아노연주 등의 방식으로 절제미가 돋보이는 자신만의 공연분위기를 주조해내는 실력은 가히 범접을 불허할 정도로 특징적이었으며 그의 여러 작품들에 녹아들었다. 때로 그의 목소리는 어둡고 가공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것에서부터 부드럽고 달콤한 것까지 변화무쌍한 스펙트럼을 과시했다. 잠시의 휴지와 반복 속에 그의 목소리는 외치고 속삭이고 또 한탄했다. 가끔은 피아노, 노래 소리, 몸짓이 따로 노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의 결정체로 모아졌다. 다양한 방식으로 그는 청중들에게 주문을 걸었다. 여러 가지 주문 중 하나에만 걸려도 니나 시몬이 비교불허의 아티스트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마력에 청중들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1963년 버밍햄의 교회에서 터진 폭파사건으로 네 명의 흑인아이들이 사망하자, 니나는 미국에서 동족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비통함과 격노를 금치 못했고 곧 규탄의 의미를 담은 ‘Mississippi Goddam’(빌어먹을 미시시피)을 썼다. 이 노래의 강력한 호소력과 필립스 레코드에서 처음 녹음 발표한 < Nina Simone in Concert >에 실린 노래들은 그녀의 또 다른 예술적 지평을 보여주었다. 예술적 목표를 이뤄내기 위해 자신만의 음색과 세심한 피아노연주에 심혈을 기울인 그는 사랑, 증오, 슬픔, 기쁨, 외로움 등 인간의 모든 감정을 노래에 실어 분명하게 전해주었다. 한때 커트 웨일(Kurt Weill)과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d Brecht)가 작곡한 노래 ‘Pirate Jenny’를 부르며 여배우로서 대극장을 순회하기도 했던 그는 프랑스에서 자끄 브렐(Jacques Brel)의 연약한 사랑노래 ’날 떠나지 말아요’(Ne me quitte pas)를 부르기로 했다. 니나는 ‘소울의 여대사제’로 불리며 팬들과 비평가들에 의해 신비로운 인물로 존경받음과 동시에 거의 종교계인사로 종종 오해를 사기도 했다. 1966년 흑인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시선을 네 명의 흑인여성들의 비애로 써낸 ‘네 여인들’(Four women)을 발표했는데, 이 노래는 흑인들에게 모욕적이라는 이유로 필라델피아와 뉴욕 라디오방송에서 금지되었다. 여대사제는 말씀전파에 적당한 음악을 찾기 위해 다른 길을 걸어갔다. RCA레이블로 옮겨 발표한 첫 앨범 < Nina Simone Sings The Blues >에 실린 ‘I want a little sugar in my bowl’, ’Do I move you?’, ’My man’s gone now’ 그리고 랭스톤 휴스(Langston Hughes)가 그녀를 위해 써준 시를 토대로 한 저항가요 ‘Backlash blues’를 포함해 더 많은 공민권운동가요를 불러 자신의 노선을 확증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의 비극을 노래한 ‘Why?(The King of Love is Dead)’을 위시해 ’Brown baby’, ’Images’(워링 쿠니의 시에 근거한), ‘Go limp’, ’Old Jim Crow’, ’To be Young, Gifted and Black’ 등의 노래들은 미국에서 흑인국민적인 찬가가 되었다. 그녀는 홀로 외롭게 노래하고 연주한 앨범 < Nina Simone and Piano ! >(1970)로 열성적인 팬들조차 놀라게 만들었다. 환생, 죽음, 고독 그리고 사랑에 대한 내성적인 노래들로 채운 모음집은 그녀의 녹음경력에 변함없는 하이라이트였다. 노래들에 새롭고 더 깊은 차원의 선물을 담아냈다. ‘Ain’t got no/I got life’(뮤지컬 “헤어”에서),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의 ’Suzanne’, ‘To love somebody’와 같은 비지스의 노래들, 봉고연주로 두 배의 속도감을 붙인 클래식 ’My way’, ‘Just like Thumb’s blues’ 그리고 네 곡의 밥 딜런의 노래들의 주목할 만한 버전들에는 더 새롭고 깊은 차원의 재능을 담아냈다. < Emergency Ward >는 절정의 선물이었다. 그녀는 조지 해리슨이 쓴 두 곡 ’My sweet lord’와 ‘Isn’t it a pity’의 긴 버전을 연주하면서 환각과 도피성을 배제한 분위기로 꾸몄다. 니나는 그러나 어쨌든 자유로워지고자 했다. 그녀는 자신이 조종당해 왔다고 느꼈고, 음반회사, 연예사업, 인종차별주의에 넌더리가 났다. 1974년 미국을 떠나 바바도스(Barbados)로 향한 그녀는 이듬해 리베리아, 스위스, 파리, 네덜란드에서 살다가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남부에 안착했다. 1978년엔 주디 콜린스(Judy Collins)의 ‘My father’를 정확한 해석으로 다시 부른 버전과 최면술을 거는 ’Everything must change’가 실린 새 앨범 < Baltimore >을 오랜만에 내놓았다. 그리고 1982년 미국으로부터 자진 “망명”을 선언한 자신의 마음을 노래로 표시한 앨범 < Fodder On My Wings >을 파리에서 녹음했다. 자신의 음악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여느 때보다도 잘 담긴 앨범이었다. 니나는 곡을 쓰고 개작하고 편곡했다. 피아노 하프시코드를 연주하며 영어와 프랑스어로 노래했다. 이 앨범은 1988년 그녀의 아버지의 죽음을 회상(추억)하는 노래 ‘Alone again naturally’의 특별버전을 포함한 몇몇 보너스트랙이 더해져 CD로 재발매 되었다. 1984년, 런던의 로니 스콧(Ronnie Scott)에서 열린 그녀의 콘서트실황을 담은 필름이 매혹적인 비디오로 발매되었다. 드럼에 폴 로빈슨(Paul Robinson)이 찬조 출연한 이 비디오에는 그녀의 첫 레코드에서 발췌한 노래 ‘My baby just cares for me’가 포함돼 큰 인기를 누렸다. 다음 해 < Nina’s Back >(니나의 귀환)이란 제목의 새 앨범을 발표한 그녀는 전 세계를 누비는 콘서트에 나섰다. 1989년 그녀는 피트 타운젠트(Pete Townsend)의 뮤지컬 < The Iron Man >에 공헌한 것을 시작으로 1990년과 1991년 브라질 팝가수 마리아 베사니아(Maria Bethania)와 아프리카음악의 세계화에 앞장선 유명 여성보컬리스트 마리암 마케바(Mariam Makeba)와 함께 녹음했다. 1991년엔 또한 자서전 < I Put A Spell On You >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프랑스, 독일 그리고 네덜란드어 번역본으로도 출판되었다. 1993년 스튜디오에서 만든 새 앨범 < A Single Woman >이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는 로드 맥퀸(Rod McKuen)의 노래들, 자신의 노래 ‘Marry me’, 프랑스의 스탠더드를 자기버전으로 부른 ’Il n’y a pas d’amour heureux’, 매우 감동적인 ‘Papa, can you hear me?’가 수록되었다. 그녀의 노래는 영화음악으로도 사용되었다. 레퍼토리 중 5곡이 사운드트랙에 들어간 1993년 영화 (Point Of No Return, The Assassin, code name: Nina로도 불린다)를 위시해 (1996)에 사용된 ‘I wish I knew how it would feel to be free’, (1996)에 삽입된 ’My baby just cares for me’ 그리고 (1997)의 ‘Exactly like you’까지 그의 목소리는 영화와 함께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세월은 흘러도 그녀의 음악은 변함없이 새롭고 젊은 청취자들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Ain’t got no/I got life’는 1988년 네덜란드에서 대형히트를 기록했다. 그녀는 또한 자신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는 절친한 반주자들, 퍼커션의 레폴도 플레밍(Lepoldo Fleming), 베이스의 토니 존스(Tony Jones), 드럼의 폴 로빈슨(Paul Robinson), 키보드의 하비에르 콜라도스(Xavier Collados) 그리고 기타리스트 겸 그녀의 음악 감독 알 섀크만(Al Schackman)과 함께 세계 순회공연을 펼치며 청중들과 함께 여전히 흥분의 순간을 맛봤다. 1997년 런던에 바비칸(Barbican) 극장에서 그는 공민권운동, 형제애를 위해 미국의 첫 번째이자 주요한 리더들 중 한사람에게 헌정하는 의미의 노래 ’Every Time I Feel The Spirit’을 불렀다. ‘Reached down and got my soul’, ’The blood done changed my name’, ’When I see the blood’와 같이 더욱 영가(Spiritual)적이고 생명과 같은 노래들이 뒤를 이었다. 니나는 1997년 프랑스에서 열린 니스 재즈 페스티벌(Nice Jazz Festival), 1998년 그리스의 의 데살로니가 재즈 페스티벌(Thessalonica Jazz Festival)의 하이라이트였다. 1999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기네스 블루스 페스티벌에서는 그녀의 딸 리사 첼레스테(Lisa Celeste)와 함께 몇몇 곡을 듀엣으로 합창해 모녀의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시몬은 라틴 수퍼스타 라파엘(Rafael)과 함께 노래하고 두 번의 디즈니 연극 워크숍에 참여, 의 타이틀 역과 의 날라 역을 맡아 공연하면서 세계 투어를 했다. 1998년 7월 24일, 니나 시몬은 넬슨 만델라의 80회 생일파티에 특별손님으로 초대됐다. 1999년 10월 7일 그녀는 더블린에서 개최된 음악시상식에서 평생업적을 기리는 공로상을 품에 안았다. 2000년에 들어 그녀는 5월 26일 애틀랜타 명예 시민권을 수여받았다. 6월 9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아프리카계 미국인 음악 협회로부터 다이아몬드 상을 수상한데 이어 8월 7일에는 프랑스에서 명예로운 총사상을 수상했다. 닥터. 시몬은 2003년 4월 21일 프랑스 남부 까리-르-루에에 그녀의 별장에서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소망대로 유해는 아프리카의 여러 곳에 뿌려졌다. 매사추세츠대학으로부터 음악과 인류애에 대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바로 최후의 전승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역사적 지위를 얻었다. 최고의 여류시인, 우리시대의 음악작가로 그는 영원히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노래 : Simon & Garfunkel (사이먼 앤 가펑클)
멤버 : 폴 사이먼(Paul Simon, 보컬), 아트 가펑클(Art Garfunkel, 기타, 보컬) 멤버 : 폴 사이먼(Paul Simon, 보컬), 아트 가펑클(Art Garfunkel, 기타, 보컬)
피트 시거는 아마도 다른 어떤 뮤지션보다도 모던 포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일 것이다. 음악학자 찰스 시거(Charles Seeger)의 아들인 그는 십대 시절부터 밴조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곧 그의 대명사가 되는 5현 밴조를 자신의 주악기로 다뤘다. 피트는 30년대 말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와 함께 노조설립을 증진시키고 파시즘을 비난하는 몇몇 다른 포크음악가들과 함께 정치적인 그룹 알... 피트 시거는 아마도 다른 어떤 뮤지션보다도 모던 포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일 것이다. 음악학자 찰스 시거(Charles Seeger)의 아들인 그는 십대 시절부터 밴조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곧 그의 대명사가 되는 5현 밴조를 자신의 주악기로 다뤘다. 피트는 30년대 말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와 함께 노조설립을 증진시키고 파시즘을 비난하는 몇몇 다른 포크음악가들과 함께 정치적인 그룹 알마낙 싱어스(Almanac Singers)를 조직했다. 그룹의 리더인 그는 또한 People’s Song과 People’s Artists와 같은 단체의 공동 창설자였다. 1948년 그는 다시 포크그룹 위버스(The Weavers)를 만드는데, 이 그룹은 레코드 계약관련 권리를 모두 잃기 전, 즉 1950년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색깔론적 마녀사냥 기간 전 기간 동안, ‘제나, 제나, 제나’(Tzena, Tzena, Tzena), 리드벨리의 포크 고전 ‘Goodnight Irene’ 그리고 ’On top of old smokey’ 등의 엄청난 히트로 포크 뮤직계의 선봉에 나섰다. 이후 시거는 미 하원의 반미활동 조사위원회 앞에서의 증언을 거부해 의회모욕죄로 고소당하기도 했으나, 이 고소는 1962년 기각되었다. 그때까지 그는 포크웨이즈 레코드사를 위해 수많은 솔로 앨범을 만들었고, 뱅가드 레코드사를 위해서 위버스의 더 많은 음악들을 작사 작곡했다. 1961년 그는 콜롬비아레코드사와 계약, 1960년대 말까지 소속아티스트로 활동을 지속했다. 피트 시거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의 중요 인물이자 떠오르는 신인들을 섭외하기도 했다. 그의 연이은 공연은 스페인 노래, 아프리카 노래, 흑인 노동요, 새로운 저항 노래, 그리고 포크의 고전들까지 폭넓은 장르와 스타일의 곡들을 포함한 다양한 레퍼토리로 채워졌다. 가끔은 즉흥적으로 개사된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며, 다양한 화성으로 변주해 관객들과 같이 다함께 노래 부르기를 실천하기도 했다. 간혹 다른 곡의 소스를 빌어다 개작한 것을 포함해 시거의 노래는 주위 동료나 후배들이 불러 히트한 경우도 많았다. Trini Lopez와 Peter, Paul&Mary를 위한 ‘If I had a hammer’, The Byrds가 노래한 ’Turn!, Turn!, Turn!’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Malvina Reynolds가 부른 ‘Little boxes’를 위시한 ’We shall overcome’, ’Guantanamera’ 외 다수 곡들도 유명하기는 마찬가지. 1970~80년대 환경관련 이슈에 몰두하고 앞장섰던 피트는 특히 1969년에 허드슨 강의 환경개선을 위해 클리어워터 범선을 띄우는데 관심을 표명하기도 했다. 그는 이어지는 야외콘서트, 페스티벌 순회공연 등의 바쁜 일정 속에서도 노동조합에서부터 반공해 법률제정까지 다양한 사건들의 주최가 되는 사회활동을 끊임없이 이어갔다. 그는 73세 생일 며칠 후인 뉴욕 주 Sparkhillshad Festival에서 자신의 전혀 노쇠하지 않은 건장함을 과시했다. 그리고 Baptist 교회 앞에서 임시무대를 오픈했을때 그는 ‘허드슨 강이 20년 전보다 훨씬 더 깨끗해졌다’고 말했다. 1990년까지 모던 포크의 선봉장 피트 시거는 케네디 센터로부터 최고의 국가적 예술인에게 수여하는 명예 상을 수여한 것을 비롯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적, ‘Harvard Arts Medal’ 획득하는 등 다방면에서 그의 공로를 인증 받았다. 그는 또 1996년에는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고의 트레디셔널 포크 앨범‘상을 수상했을 뿐 아니라, 1999년에는 쿠바를 여행하던 중 ’Felix Varela Medal’(환경보호와 반인종주의에 입각한 인도주의적 예술 활동에 대한 공로를 치하하는 쿠바 최고의 영예)을 수여했다. 음악인으로서 그는 그야말로 진솔, 정직, 온후, 순수했으며 지구촌 모든 이들의 아버지였다.
노래 : Fairport Convention (페어포트 컨벤션)
멤버 : 사이몬 니콜(Simon Nicol), 크리스 레슬리(Chris Leslie), 릭 샌더스(Ric Sanders), 제리 콘웨이(Gerry Conway), 데이브 페그(Dave Pegg) 멤버 : 사이몬 니콜(Simon Nicol), 크리스 레슬리(Chris Leslie), 릭 샌더스(Ric Sanders), 제리 콘웨이(Gerry Conway), 데이브 페그(Dave Pegg)
노래 : Janis Joplin (제니스 조플린)
샌프란시스코 히피 시절을 수놓은 로큰롤의 화신이자 그 무렵의 ‘백인 블루스’ 열풍에 불을 댕긴 여걸이다. 1943년 텍사스 포트아더에서 출생해 히피 라이프스타일에 끌린 채 1966년에 홀연히 샌프란시스코로 올라왔다. 사이키델릭 록 밴드 빅 브라더 & 홀딩 컴퍼니(Big Brother & Holding Company)에 리드 싱어로 합류해 마치 무당 같은 광기로 무대를 평정, 관객들의 전율을 일으켰다. 한 인터뷰에... 샌프란시스코 히피 시절을 수놓은 로큰롤의 화신이자 그 무렵의 ‘백인 블루스’ 열풍에 불을 댕긴 여걸이다. 1943년 텍사스 포트아더에서 출생해 히피 라이프스타일에 끌린 채 1966년에 홀연히 샌프란시스코로 올라왔다. 사이키델릭 록 밴드 빅 브라더 & 홀딩 컴퍼니(Big Brother & Holding Company)에 리드 싱어로 합류해 마치 무당 같은 광기로 무대를 평정, 관객들의 전율을 일으켰다. 한 인터뷰에서 “언젠가 한 콘서트에서 2만5천명 관객과 섹스하고 그런 뒤 집에 홀로 가는 내용의 노래를 쓸 것”이라고 한 말은 소외와 폭발로 점철된 히피 세대정서를 축약한다. 1968년 그룹을 나온 뒤는 비교적 잔잔한 블루스로 전향했지만, 마약과용으로 27살의 꽃다운 나이인 1970년에 불운한 생을 마감했다. 사후 발표된 노래 ‘Me and Bobby McGee’는 추모열기로 빌보드 정상을 점했다. 하지만 대표작은 ‘어떻게 저런 노래가 나오나?’하는 경탄을 부르는 1967년 앨범의 ‘Ball and chain’과 ‘Summertime’.
소울음악의 빼놓을 수 없는 신화적 존재로 한때 ‘소울의 왕(King of soul)’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멤피스의 음반사 스택스 특유의 반 박자 늦은 백비트 곡이 다른 소울가수와의 차별 점이다. 흑인 소울가수 가운데 드물게 곡을 직접 쓴 싱어송라이터였으며,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의 1967년 시그니처 송 ‘Respect’도 그가 써서 1965년에 발표한 곡(차트순위 35위)이다. 롤링 ... 소울음악의 빼놓을 수 없는 신화적 존재로 한때 ‘소울의 왕(King of soul)’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멤피스의 음반사 스택스 특유의 반 박자 늦은 백비트 곡이 다른 소울가수와의 차별 점이다. 흑인 소울가수 가운데 드물게 곡을 직접 쓴 싱어송라이터였으며,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의 1967년 시그니처 송 ‘Respect’도 그가 써서 1965년에 발표한 곡(차트순위 35위)이다.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의 ‘(I can’t get no) Satisfaction’을 리메이크하는 등 1960년대 소울과 록이 동반자 사이임을 증명했다. 실제로 그는 출연진이 백인 뮤지션 일색이었던 1967년 몬터리 페스티벌에 출연해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1941년 조지아주 도손 출신으로 샘 쿡(Sam Cooke)에 영향 받아 가수활동에 입문했다. 전성기였던 1967년 12월에 비행기추돌로 27살에 요절했다. 유작으로 1968년 전미차트 정상을 밟은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는 톤을 낮춘 소울 발라드의 수작. 이외에 ‘I’ve loving you too long (To stop now)’와 ‘Try a little tenderness’도 잊을 수 없는 레퍼토리들이다.
멤버 : Renato Caranto / Doug Colosio / Jim Christie / Floyd Domino / Ben Haggard / Dana Haggard / Noel Haggard / Theresa Haggard / Norman Hamlet / Scott Joss / Taras Prodaniuk 멤버 : Renato Caranto / Doug Colosio / Jim Christie / Floyd Domino / Ben Haggard / Dana Haggard / Noel Haggard / Theresa Haggard / Norman Hamlet / Scott Joss / Taras Prodaniuk
블루스, 소울 가수 블루스, 소울 가수
‘모타운(Motown) 가의 황태자’ 마빈 게이의 보컬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달콤한 크루닝(crooning) 창법과 샘 쿡의 호소력 짙은 가스펠의 기운을 온전히 흡수한 그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보컬로 창조해내며 청중들을 흥분시켰다. 기운이 서려있는 듯한 그의 보컬은 ’보컬 연주의 대가’라는 영광스런 칭호에 어울린다. 그의 사후 등장한 수많은 소울 팝 가수들은 모... ‘모타운(Motown) 가의 황태자’ 마빈 게이의 보컬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달콤한 크루닝(crooning) 창법과 샘 쿡의 호소력 짙은 가스펠의 기운을 온전히 흡수한 그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보컬로 창조해내며 청중들을 흥분시켰다. 기운이 서려있는 듯한 그의 보컬은 ’보컬 연주의 대가’라는 영광스런 칭호에 어울린다. 그의 사후 등장한 수많은 소울 팝 가수들은 모두 그의 보컬에 영향받았음을 인정하며 그의 음악성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은 단지 탁월한 창법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록음악 역사에 있어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아티스트의 창작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을 몸소 실천한 음악인이라는 점에서 그를 더욱 기억하게 한다. 70년대가 되기 전 만해도 밤낮으로 사랑과 낭만만을 얘기하며 소일하던 모타운식 소울 음악은 당시 대다수 흑인들이 공감해오던 ‘어두운 현실’엔 둔감했다. ‘팔리는 음악’을 원했던 회사측과의 마찰은 불가피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음악’을 위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이런 산고 끝에 록 역사를 대표하는 명반 < What’s going on >(1971)은 탄생했다 소울 음악은 60년대 그가 소속되어있던 모타운 레코드사를 통해 보다 대중적인 음악 문법으로 자리 잡은데 이어, 그는 같은 회사 소속의 스티비 원더와 함께 미국 대도시 후미진 곳에서 벌어지는 ‘게토 리얼리티를’ 자신의 노래에 담아냄으로써 소울이 ‘사회성’이란 화두를 본격적으로 끌어내는데 기여를 했다. 스티비 원더와 함께 그는 소위 후배 흑인 뮤지션들의 ‘대부’이다. 80년대 이스트 코스트 힙합의 분수령을 일군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의 프론트 맨 척 디(Chuck D)는 1988년도 명반 <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 >을 발표하며 롤링스톤지와 가졌던 인터뷰에서 ‘나는 이번 앨범에서 힙합의 < What’s going on > 버전을 내놓고 싶었다’ 라고 얘기할 정도로 마빈 게이의 유산을 이어받았다고 인정했다. 마빈 펜츠 게이 주니어라는 본명으로 1939년 4월 2일 워싱턴 디씨에서 태어난 그는 목사를 아버지로 둔 기독교 가정에서 어린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다소 억압적인 가정환경은 그로 하여금 음악에 몰입하게 해 아버지 때문에 억눌린 영혼을 달래줄 위안이 된다.(어렸을 때부터 그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공군에 입대, 제대 후 고향으로 돌아와 그는 락 앤 롤 스타 보 디들리(Bo Didely)를 만나 그의 문하생이 된다. 1958년 두왑 그룹인 레인보우에 가입, 이듬해엔 시카고로 진출해 ‘문 그로우’ 라는 두왑밴드에서 활동하며 체스(Chess) 레코드에서 그의 ct첫 싱글 ‘Mama roocie’를 녹음한다. 미국 전역 투어에 나선 문 그로우는 디트로이트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고, 당시 그의 연주를 지켜보던 모타운의 설립자 베리 고디 주니어(Berry Gordy Jr.)는 3옥타브가 넘는 그의 탁월한 테너 창법에 매료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61년 모타운과 전속 계약을 체결하며 베리 고디와 운명적인(?) 관계를 시작한다. 처음엔 세션 드러머로서 모타운의 일원이 된 그는 모타운 간판스타이자 작곡가인 스모키 로빈슨과 함께 활동한다. 1961년 그는 사장인 베리 고디의 누이인 안나와 결혼한다(무려 18살의 연상). 사장과 사돈관계가 된 덕에 회사측에 전폭적인 지원을 얻게 된 그는 이듬해 첫 싱글 ‘Stubborn kind of fellow’(1962)를 발표하고 흥겨운 댄스 팝 ’Hitch hike’(1962)로 빌보드 Top 40에 진입하는 순조로운 출발을 보인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크루닝 창법에 영향 받았던 그는 당시 격조 있는 발라드 음악을 원했지만, 회사 측은 그에게 흥겹게 흔들기 좋은 빠른 댄스 음악만을 요구했다. 큰 키에 수려한 용모를 지닌 덕에 유난히 여성 팬들이 많이 따랐던 그였지만, 무대에 올라 몸을 흔들며 청중들에게 즐거움을 줘야 한다는 것은 늘 못 마땅했다. 후에 그가 회고하길 ‘나는 무대에 나가 청중들 앞에서 내 엉덩이를 흔들어야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했을 정도이니, 얼마 후 있을 회사 측과 창작권을 두고 생긴 갈등은 이미 데뷔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1960년대 내내 그는 모타운 사를 통해 꾸준히 히트곡을 발표했다. ‘Pride & joy’(1963)로 처음 Top 10에 진출한 그는 잇달아 발표한 싱글 ’How sweet it is’(1964), ‘Aint that peculiar’(1965)을 Top 10에 진입시킨다. 솔로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져갈 무렵 그는 모타운 소속의 실력 있는 디바들과 듀엣 곡을 많이 취입했는데, 메리 웰즈(Mary Wells)과 함께 한 ’What’s the matter with you baby’(1964)을 시작으로, 킴 웨스튼(Kim Weston)과 함께 한 ’It takes two’(1966), 70년대 다이아나 로스(Diana Ross)와 함께 한 ‘My mistake is to love you’(1974)등이 대중적인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그와 가장 인상적인 호흡을 보여준 디바는 바로 타미 테렐(Tammi Terell)이었다. 그녀와 함께 했던 ‘Ain’t no mountain high enough’(1966), ’Your precious love’(1967), ’Ain’t nothing like the real thing’(1968), ’You’re all I need to get by’(1968) 모두 Top 10에 진입시키는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팝 역사상 가장 궁합이 잘 맞는 콤비’는 안타깝게도 타미 테렐의 요절로 인해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에게 첫 팝 차트 넘버원의 영광을 안겨준 ‘I heard it through grapevine’(1968)로 그의 인기전선은 절정에 다다랐다. 이듬해 ’Too busy thinking about my baby’(1969), ’That’s the way love is’(1969)를 Top 10에 진입시키며 인기는 더해갔지만, 이내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만다. 데뷔 때부터 창작권을 두고 벌어진 회사 측과의 끈질긴 줄다리기는 무려 2년이라는 시간을 그에게 투쟁의 시간으로 만들었다. 달콤한 사랑타령으로 점철된 지금까지의 음악과는 다른, 자신이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표출해보길 갈망했던 그는 ‘자신의 음악’을 얻기 위한 힘겨운 투쟁 끝에 결국 모타운 사의 백기를 받아내며 ‘음반 제작에 관한 모든 전권을 그에게 위임할 것’이라는 전리품을 얻어낸다. 흑인의 입장에서 아프로 아메리칸(Afro-America)의 비참한 현실을 늘 생각해왔던 그는 주저 없이 이런 자신의 고민을 음악 속에 녹여내는 작업을 했다. 흑인 빈곤문제, 실업, 월남전등, 70년대 초 그의 눈에 보인 흑인의 현실은 ‘참담함’이었다. 핑크빛 미래를 노래했던 발랄한 60년대의 흑인 음악은 슬라이& 페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 커티스 메이필드(Curtis Mayfield)등 기라성같은 흑인 뮤지션들에 의해 한층 진지하고 어두워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내놓은 것이 컨셉 앨범 < What’s going on >(1971)이었다. 흑인 음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내놓은 컨셉 앨범 < What’s going on >은 회사 측에 우려에도 불구, 앨범 수록 곡 중 무려 4곡(What’s going on, God is love, Mercy, mercy, me Inner city blues)이 Top 10에 진입하는 성과를 거뒀고, 앨범은 지금까지 8백만장이라는, 당시로선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스트링을 동원한 세련된 연주 편곡, 참회록을 쓰듯 스토리 텔링(Storytelling) 방식으로 진행되는 진솔한 자기 고백은 당시 소울음악에선 맛볼 수 없었던 신선한 충격이었다. 앨범 < What’s going on >은 그의 음악 경력에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이 때부터 그의 음악성에도 뚜렷한 변화가 감지된다. ’Inner city blues’(1971)에서 목격했던 퍼커션의 가열 찬 울림은 70년대 흑인 음악의 대표 트렌드인 ‘펑키 사운드’로의 변화를 예고했고, 앨범으로는 발표 안 된 저주받은 싱글 ‘You ’re the man pt. 1, 2’(1972)에선 가성, 두성, 진성 등 한층 다채로워진 그의 보컬 연기가 압권이다. 재즈에 대한 평소의 관심은 영화 음악 작곡으로도 이어져 노래보다 연주 쪽에 관심이 반영된 영화음악 앨범 < Trouble man >(1972)으로 이어진다. < What’s going on >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 그는 이전의 고뇌하는 흑인 지성임을 포기하고 이번엔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사랑의 전령사로 변신한다. 그의 두 번째 넘버원을 안겨다 준 앨범< Let’s get it on >(1973)은 ‘성 행위’를 찬미하는 노래들로 가득 찬 앨범으로 주변을 다시 한번 어리둥절하게 했다. 빌보드 No.1 곡인 ‘Let’s get it on’은 그를 단번에 섹시 스타로 변모시켰고, 그가 앨범에서 얘기했던 ’자연스러운 성의 표현 ‘은 80년대 들어 프린스나 조지 마이클같은 팝 스타들의 음악 세계로 계승된다. 하지만 그는 당시 첫 아내였던 안나와의 관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재니스라는 여인과 이미 두 집 살림을 차려 아이까지 낳았던 그의 성적 편력은 결국 아내와의 별거로 이어졌고, 한동안 그 충격에 슬럼프에 빠져 마약으로 세월을 보내게 된다. 재기의 몸부림을 친 그는 베리 고디의 주선으로 만난 레온 웨어(Leon Ware)의 곡으로 채워진 앨범 < I want you >(1976)을 발표하지만, 수록곡 ‘I want you’, ’After the dance’가 약간 주목을 받았을 뿐이었다. 히트곡에 목말라하던 그는 1977년 런던 팔라디움 구장에서의 콘서트 더블 실황 앨범< Live at the Palladium >을 발표하며, 13분이 넘는 디스코 곡 ‘Got to give up’을 수록하고, 4분대의 싱글로도 커팅, 그의 세 번째 넘버 원 싱글로 등극된다. 전형적인 댄스뮤직이었던 ’Got to give up’은 팝 차트, 앨 앤 비 차트 1위를 석권하며 그에게 가수로서 회생의 길을 열어준다. 하지만 ‘Got to give up’의 기쁨도 잠시, 결국 그는 안나와 이혼을 하게 되고 ,이혼에 대한 위자료를 다음에 발표하는 앨범 인세로 한다는 합의를 보게 된다. 앨범 < Here, my dear >(1978)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고 수록 곡 ’When did you stop loving me, When did I stop loving you’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만남과 해어짐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그의 뼈저린 고해성사는 아름다운 가사말과 편곡의 세련됨에도 불구, 이렇다할 히트 싱글 없이 앨범은 파묻히며 그의 디스코그래피 중 가장 안 알려진 앨범이 되고 말았다.(엎친데 덮친격으로 안나는 앨범 내용이 사생활 침해라며 소송을 걸기에 이른다.) 첫 번째 아내와의 이혼에 이어 다시 몇 년간은 그에게 혼란의 시기였다. 두 번째 아내였던 제니스와 급기야 파경에 이르렀고, < Love Man >(1979-발매 취소)과 < In our life time >(1981)의 흥행실패는 그를 더욱 마약으로 치닫게 했다. 급기야 그는 1981년 20년간 그에게 산전수전(?) 다 겪게 했던 모타운 사를 떠나, 하와이로 이주, 새로운 출발을 모색한다. 정확히 1년 후인 1982년, CBS 레코드와 전속 계약하며 그에겐 마지막 걸작으로 남게 된 < Midnight Love >(1982)를 발표한다. ‘Let’s get it on’에 버금갈만한 농염한 보컬이 인상적인 싱글 ‘Sexual healing’이 팝 차트 3위까지 오르며 그는 화려하게 재기한다. 공백기 동안대중들과의 소원함을 해소하기 위해 TV 출연 등 다시 활발한 활동을 벌인 그는 베리 고디와 함께 토크쇼에 출연해 둘의 악연(?)을 만회해보려고도 했고, NBA 농구 경기때 미국 국가를 소울 창법으로 불러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지미 헨드릭스가 우드스탁에서 연주했을 때 이후로 최대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재기 의지는 이내 사그러들고 있었다. 이미 코케인에 찌들 때로 찌든 그의 몸은 말을 듣질 않았고 평소에 사이가 안 좋았던 목사인 아버지와의 관계는 조금도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비극은 그의 아버지와의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되고, 1984년 4월, 그의 45회 생일을 하루 앞둔 날, 심한 다툼 끝에 화를 가누지 못한 아버지가 쏜 총에 맞아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그의 어이없는 죽음은 충격적이었다. 많은 흑인 뮤지션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이듬해인 1985년 모타운사와 CBS가 공동으로 그의 미 발표곡을 모은 < Dream of a life time >과 < Romantically Yours >를 내놓는다. 그에 대한 재평가도 활발히 이뤄져 < 롤링스톤 >을 비롯한 록 전문지들은 앞 다투어 그의 앨범 < What’s going on >을 팝 역사에 남을 명반으로 추대하기 시작했고,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그의 이름이 등재된다.
연주 : B.B. King (비비 킹 ,Riley B. King)
명실상부한 블루스 기타의 왕자이자, 블루스와 로큰롤 역사의 산증인. U2와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등 후배 유명 로커들과 공연을 자주 탓에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하울링 울프(Howlin’ Wolf), 엘모어 제임스(Elmore James) 등 동시대 블루스맨 중에서도 대중적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이기도 하다. 기타 줄을 들어올리는 그의 벤딩 주법과 탁월한 가창은 흑인 블루스의... 명실상부한 블루스 기타의 왕자이자, 블루스와 로큰롤 역사의 산증인. U2와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등 후배 유명 로커들과 공연을 자주 탓에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하울링 울프(Howlin’ Wolf), 엘모어 제임스(Elmore James) 등 동시대 블루스맨 중에서도 대중적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이기도 하다. 기타 줄을 들어올리는 그의 벤딩 주법과 탁월한 가창은 흑인 블루스의 한과 고통을 그대로 전달한다. 미시시피 아이티 베나에서 1925년에 라일리 비 킹(Riley B. King)을 본명으로 태어났고 1946년에 멤피스로 올라왔다. 선배 흑인 기타리스트 티 본 워커(T. Bone Walker)의 영향을 받은 그는 자신의 기타를 ‘루실’로 명명한 1949년에 첫 레코드를 취입했다. 이듬해 비하리 형제가 설립한 음반사 RPM과 계약을 체결한 뒤 1952년 ‘Three o’clock blues’, 1954년 ‘You upset me, baby’를 히트시켰다. 1951년부터 1992년까지 리듬 앤 블루스 히트 차트에 올린 곡만도 무려 75곡. 1960년대 말 블루스 리바이벌 시기에 백인 뮤지션들에 의해 재조명되면서 유명해졌고 1969년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Thrill is gone’은 그의 대표작으로 남아있다. 1987년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받았고, 역시 같은 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적되었다.
밴드 : The Animals (애니멀스,Eric Burdon And The Animals)
애니멀스(Animals)는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 야드버즈(Yardbirds)와 함께 영국에서 건너온 가장 영향력 있는 화이트 블루스 밴드였다. 이들은 비틀즈(Beatles), 롤링 스톤스, 더 후(The Who), 킹크스(Kinks), 허맨스 허밋츠(Herman’s Hermits) 등과 손을 맞잡고 브리티시 인베이션의 물꼬를 텄고, 블루스의 원산지인 미 본토에 블루스 붐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애니멀스(Animals)는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 야드버즈(Yardbirds)와 함께 영국에서 건너온 가장 영향력 있는 화이트 블루스 밴드였다. 이들은 비틀즈(Beatles), 롤링 스톤스, 더 후(The Who), 킹크스(Kinks), 허맨스 허밋츠(Herman’s Hermits) 등과 손을 맞잡고 브리티시 인베이션의 물꼬를 텄고, 블루스의 원산지인 미 본토에 블루스 붐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밥 딜런(Bob Dylan)으로 대표되는 포크록의 탄생에 동기를 부여함으로서 1960년대 팝 음악계를 풍성하게 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한 건반 주자 알란 프라이스(Alan Price)가 흑인 음색을 소유한 에릭 버든(Eric Burdon)과 존 스틸(John Steel/드럼), 힐튼 발렌타인(Hilton Valentine/기타), 브라이언 채스 챈들러(Bryan Chas Chandler/베이스)를 만나 1964년부터 애니멀스의 웅대한 역사를 써 내려갔다. 비참한 생활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국내에서 오래 동안 금지 곡의 사슬에 묶였던 ‘House of the rising sun’은 비틀즈의 해로 기억되던 1964년 5주만에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밥 딜런이 자신의 데뷔 앨범에 수록했던 이 미국의 구전 민요를 애니멀스는 전자 기타가 울부짖는 블루스 넘버로 완벽하게 재 탄생시켰다. 이 음악을 듣고 음악 쇼크를 받은 밥 딜런은 통기타 대신 일렉트릭 기타를 부여잡고 포크록을 탄생시켰다. 원래 재즈 보컬리스트 니나 시몬(Nina Simone)이 취입한 ‘Don’t let me be misunderstood(39위)’는 애니멀스의 록 버전으로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특히 국내에서는 1970년대 후반 라틴계 디스코 밴드 산타 에스메랄다(Santa Esmeralda)의 댄스 버전(15위)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당시 디스코 클럽의 플로어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리고 이들의 노래들 중에서 가장 정통 록적인 ‘It’s my life(23위)’는 록의 고전으로 대우받고 있다. 이 외에도 히트 차트에 등록된 ‘I’m crying(19위)’와 ‘Bring it on home to me(32위)’, 싱글로 히트하진 않았지만 록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We’ve gotta get out of this place’, 시카고 블루스의 전설인 지미 리드(Jimmy Reed)의 곡을 리매이크 한 ‘Bright lights, Big city’, 그리고 같은 백인 블루스 싱어들과의 비교를 거부할 정도로 에릭 버든의 완벽한 가창 실력을 입증한 ‘For Miss Caulker’까지 영국에서 온 5명의 블루스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하지만 에릭이 자신의 목소리를 앞세운 보컬 카리스마로 알란과의 알력이 스멀스멀 피어나자 알란 프라이스는 애니멀스를 탈퇴해 나름의 활동을 시작했고, 이 쟁탈전의 승리로 밴드의 주도권을 쥔 에릭 버든은 공석으로 비어 있는 자리에 데이브 로베리(Dave Rowberry)를 앉히고 그룹의 새로운 설계도를 작성했다. 그러나 에릭은 알란의 반쪽이었고, 알란도 에릭의 절반이었다. 그 둘은 헤어지고 나서야 그들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절대적인지를 실감하게 되면서 1976년에 원년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지만 만족스런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음악의 최소주의 미학을 구현한 3인조 뉴웨이브 밴드 폴리스(Police - 스팅이 있었던)의 기타리스트 앤디 서머스(Andy Summers)는 1960년대 후반 에릭과의 친분으로 애니멀스에 몸담기도 했었다. 1970년대 들어서 에릭은 이 위대한 밴드를 접고 두 차례나 내한 공연을 가진 덴마크 출신의 하모니카 연주자 리 오스카(Lee Oskar)와 여러 흑인 뮤지션들을 규합해 소울 그룹 워(War)를 조직해 치열한 순위 경쟁에 참전해 ‘Why can’t we be friends?(6위)’를 랭크 시켰다. 이 트랙은 1997년 스카 펑크 밴드 스매시 마우스(Smash Mouth)가 재해석해 자신들의 데뷔 음반에 수록하기도 했다. 1976년과 1983년에 다시금 모여 예전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했지만 역전된 음악 환경은 ‘새로운 애니멀스’에게 호의적이지 못했고 다시 이들은 각자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만든 옛 영예의 그림자 속에서 현재의 숨결을 이어가는 것이다.
록 밴드 록 밴드
밴드 : Jimi Hendrix Experience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밴드 : Spencer Davis Group (스펜서 데이비스 그룹)
‘60년대 브리티쉬 인베이전을 주도하였던 4인조 록 그룹. ‘60년대 브리티쉬 인베이전을 주도하였던 4인조 록 그룹.
밴드 : Booker T. & the M.G.'s (부커 티 앤 더 엠지스)
미국 남부의 멤피스 소울을 이끈 알앤비/펑크 밴드 미국 남부의 멤피스 소울을 이끈 알앤비/펑크 밴드
‘파워 록 트리오’ 크림은 블루스와 록을 절묘하게 결합시키며 1960년대 후반 블루스의 부흥을 주도했고, 빠르고 즉흥적이면서 굉음을 발산하는 사운드로 1970년대 하드 록의 태동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위대한 록 밴드이다. 또한 그들은 기타, 베이스, 드럼이라는 록 밴드의 기본적인 악기 편성이자 완벽한 트라이앵글을 정교한 연주력과 멤버간의 끈끈한 호흡을 통해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악기 예술의 미학’을 터득한... ‘파워 록 트리오’ 크림은 블루스와 록을 절묘하게 결합시키며 1960년대 후반 블루스의 부흥을 주도했고, 빠르고 즉흥적이면서 굉음을 발산하는 사운드로 1970년대 하드 록의 태동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위대한 록 밴드이다. 또한 그들은 기타, 베이스, 드럼이라는 록 밴드의 기본적인 악기 편성이자 완벽한 트라이앵글을 정교한 연주력과 멤버간의 끈끈한 호흡을 통해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악기 예술의 미학’을 터득한 것이다. 크림은 야드버즈(Yardbirds)와 존 메이올스 블루스 브레이커스(John Mayoll''s Blues Blakers)에서 활약했던 ‘기타의 신(神)’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맨프래드 맨(Manfred Mann)과 존 메이올스 블루스 브레이커스에 몸담았던 ‘베이스의 귀재’ 잭 브루스(Jack Bruce), 그래험 본드 오르가너제이션(Graham Bond Organasation)에서 연주했던 ‘드럼의 마왕’ 진저 베이커(Ginger Baker)의 라인업으로 1966년 결성됐다. 트리오는 1966년 데뷔작 < Fresh Cream >을 내놓으며 힘찬 출발을 했다. 음반은 발매되자마자 영국 차트 6위에 오르는 선전을 했다. 당시 대중들이 삼인조에 대해 얼마나 많은 관심이 있었는지 잘 말해준다.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 데일리 익스프레스(Daily Express) >, <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New Musical Express) > 등은 앞다투어 그룹의 콘서트를 마련해 주었다. 크림의 인기는 1967년 2집 < Disraeli Gears >와 이듬해의 3집 < Wheels Of Fire >를 발표하면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2집은 미국 차트 4위, 3집은 정상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고, ‘Strange brew'', ‘Sunshine of your love'', ‘Swlabr'', ‘White room'', ‘Born under a bad sign'' 같은 굵직한 히트곡들을 연신 토해냈다. 특히 < Wheels Of Fire >는 스튜디오 녹음과 라이브를 한자리에 모은 더블 앨범으로 트리오의 출중한 연주 실력을 감상할 수 있다. ‘Cross roads'', ‘Toad'' 등에서 화려하게 빛을 발한다. 하지만 크림은 1968년 11월 서로의 음악적 견해차를 이유로 돌연 해산을 선언해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얼마 후 에릭 클랩튼과 진저 베이커는 슈퍼 그룹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를 만들었고, 잭 블루스는 솔로로 전향했다. 이러한 아쉬움을 반영한 듯 1969년에 발표된 편집 앨범 < Goodbye >는 미국 차트 2위에 올랐고, 데뷔 음반 < Fresh Cream > 또한 영국에서 7위로 재 진입하는 이변을 낳았다. 이후 트리오는 1993년 1월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 기념으로 재결합 공연을 가져 많은 박수를 받았다.
게리 브루커(Gary Brooker, 피아노, 보컬), 조쉬 필립스(Josh Phillips, 오르간), 저프 던(Geoff Dunn, 드럼), 저프 화이트혼(Geoff Whitehorn, 기타, 보컬), 맷 페그(Matt Pegg, 베이스) 게리 브루커(Gary Brooker, 피아노, 보컬), 조쉬 필립스(Josh Phillips, 오르간), 저프 던(Geoff Dunn, 드럼), 저프 화이트혼(Geoff Whitehorn, 기타, 보컬), 맷 페그(Matt Pegg, 베이스)
밴드 : Buffalo Springfield (버팔로 스프링필드 (락 밴드))
각 멤버마다 뛰어난 기량을 소유했던 5인조 버팔로 스프링필드(Buffalo Springfield)는 1960년대의 포크록 붐을 형성했던 중심적인 그룹 중 하나였다. 이들은 뭉쳐서도 위대했지만 구성원 개개인이 세포분열 한 각개 전투(?)에서도 모두 승리할 정도로 송라이팅 실력과 가창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이 가지를 친 포크와 컨트리 성향의 여러 그룹들(포코, 로긴스 & 메시나, 크로스비 스틸스 내시 &... 각 멤버마다 뛰어난 기량을 소유했던 5인조 버팔로 스프링필드(Buffalo Springfield)는 1960년대의 포크록 붐을 형성했던 중심적인 그룹 중 하나였다. 이들은 뭉쳐서도 위대했지만 구성원 개개인이 세포분열 한 각개 전투(?)에서도 모두 승리할 정도로 송라이팅 실력과 가창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이 가지를 친 포크와 컨트리 성향의 여러 그룹들(포코, 로긴스 & 메시나, 크로스비 스틸스 내시 & 영)도 팝 계의 지형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록을 바탕으로 그 위에 포크와 컨트리를 이식한 버팔로 스프링필드는 미국 서부의 맑고 경쾌한 성격을 살린 청명한 음악으로 당대를 풍미한 밴드이다. 어쿠스틱 기타를 맛깔스럽게 연주하는 스테픈 스틸스(Stephen Stills/보컬, 기타)와 리치 퓨레이(Richie Furay/보컬, 기타), 닐 영(Neil Young/보컬, 기타), 브루스 파머(Bruce Palmer/베이스), 그리고 듀이 마틴(Dewey Martin/드럼)으로 역사를 시작한 버팔로 스프링필드는 1966년부터 1968년까지, 만 2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활동했지만 동시대 동료들이나 후배에게 미친 그 파급력은 깊고 둔중하다. 1967년에 탄생한 데뷔앨범 < Buffalo Springfield >에서는 스테픈 스틸스가 작곡해 포크 록의 범주를 넘어 전천후 팝의 고전으로 인정받는 ‘For what it’s worth (Stop, hey what’s that sound)’가 싱글차트 7위에 안착하며 음악성과 대중성 모두를 끌어안는 ‘윈윈 전략’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발표한 < Buffalo Springfield Again >로 다섯 명의 젊은 포크 로커들은 음악적으로 한 단계 더 높은 곳에 위치하며 음악 평론가들의 훌륭한 ‘지적 파트너’가 되었다. 스테픈 스틸스의 ‘Bluebird(58위)’와 물오른 작곡 솜씨가 드러난 ‘Rock n’ roll woman(44위)’, 그리고 닐 영이 만든 ‘Expecting to fly(98위)’가 순차적으로 대중들의 귀를 잡아끌며 자신들의 입지를 굳건히 했고, 비평가들은 닐 영의 또 다른 걸작 ‘Broken arrow’에 높은 별점을 주었다. 한편 브릿팝 밴드 블루톤스(Bluetones)는 1996년에 발표한 데뷔앨범 타이틀을 < Expexting To Fly >로 정해 버팔로 스프링필드에 대해 헌정을 표하기도 했다. 이렇게 빛나는 음반으로 대중음악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달성한 버팔로 스프링필드는 그러나 베이시스트 브루스 파머 대신 짐 메시나(Jim Messina)로 교체되었다. 팀 내 분위기를 쇄신한 이들이 1968년에 내놓은 세 번째 음반 < Last Time Around >에서는 ‘On the way home’ 만이 82위에 등장했으며, 이것은 앨범 제목처럼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스테픈 스틸스, 닐 영, 리치 퓨레이 간에 벌어진 주도권 경쟁이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해지자 결국 닐 영이 먼저 버팔로 스프링필드를 떠났다. 이후 결속력은 급격히 와해되어 결국 1968년에 포크 록의 위대한 역사를 작성했던 버팔로 스프링필드는 역사책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되었다. 스테픈 스틸스와 닐 영은 크로스비 스틸스 내시 & 영에서 다시 한번 영광을 재현했고, 리치 퓨레이와 짐 메시나는 나중에 이글스(Eagles)의 멤버가 되는 랜디 마이스너(Randy Meisner) 등과 함께 국내에서 ‘Sea of heartbreak’와 ‘Crazy love’로 많은 사랑을 받은 컨트리 록 그룹 포코를 결성하며 미국적인 음악의 부활을 꿈꾸었다. 한편 짐 메시나는 1970년대 초반에 케니 로긴스와 함께 듀엣 로긴스 & 메시나(Loggins & Messina)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만 2년이라는 단기간 동안 단 세 장의 음반으로 팝 계에 선혈처럼 뚜렷한 여흔을 남긴 버팔로 스프링필드는 커다란 그룹이었다. 그리고 그 거대함은 시간이 흘러도 축소되지 않고 있다.
밴드 : Creedence Clearwater Revival(C.C.R.)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 )
멤버 : 존 포거티(John Fogerty), 스투 쿡(Stu Cook), 더그 클리퍼드(Doug Clifford), 톰 포거티(Tom Fogerty) 멤버 : 존 포거티(John Fogerty), 스투 쿡(Stu Cook), 더그 클리퍼드(Doug Clifford), 톰 포거티(Tom Fogerty)
밴드 : Santana (산타나 (라틴 락 밴드))
20세기 마지막 팝 음악의 유행은 음반산업이 주조했든 아니든 정열의 라틴음악이 장악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최근에 발표된 제42회 그래미상 후보자 명단이 웅변한다. ‘Livin’ la vida loca’의 주인공 리키 마틴(Ricky Martin)을 비롯 제니퍼 로페즈(Jenifer Lopez), 마크 앤소니(Marc Anthony), 루 베가(Lou Bega) 등 지난해 라틴 열풍을 주도했던 신성(新星)들이 그... 20세기 마지막 팝 음악의 유행은 음반산업이 주조했든 아니든 정열의 라틴음악이 장악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최근에 발표된 제42회 그래미상 후보자 명단이 웅변한다. ‘Livin’ la vida loca’의 주인공 리키 마틴(Ricky Martin)을 비롯 제니퍼 로페즈(Jenifer Lopez), 마크 앤소니(Marc Anthony), 루 베가(Lou Bega) 등 지난해 라틴 열풍을 주도했던 신성(新星)들이 그래미상의 주요 부문에 공천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의 당선 가능성은 희박하다. 다름 아닌 ‘라틴 록의 거장’ 카를로스 산타나가 버티고 있어서다. 올해로 52세인 그는 1999년에 발표한 앨범 < Supernatural >로 그래미 최고의 영예인 ‘올해의 앨범’, ‘올해의 노래’, ‘올해의 레코드’ 부문을 포함, 무려 11개 부문의 후보로 지명되는 기염을 토했다. < 뉴스위크 >는 최신호에서 1998년 밥 딜런에 이어 이번 그래미 시상식은 산타나의 컴백 무대가 될 것이라며 그의 압승을 예견했다. 뉴 밀레니엄을 전후로 빌보드 차트를 장기간 점령한 빅히트 싱글 < Smooth >와 500만장이라는 가공할 음반판매량이 화려한 재기를 견인했다. 음악팬들은 10대 틴 음악의 싹쓸이 판에서 모처럼 대가의 위용을 체험하고 있다. 멕시코 태생의 기타리스트 산타나는 1966년 히피 문화의 본고장 샌프란시스코에서 ‘산타나 블루스 밴드’란 이름으로 음악 여정을 시작했다. 그는 1969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출연, 전설적인 연주곡 ‘Soul sacrifice’를 들려주어 일대 주목을 받았다. 산타나로 그룹명을 바꾼 그는 같은 해 셀프 타이틀 앨범에서 당시의 주도적 경향인 사이키델릭에 라틴 비트, 아프리카 리듬, 그리고 블루스를 이입한 음악을 연주했다. 산타나는 그러나 1970년대가 열리면서 1960년대 말을 어지러이 수놓았던 사이키델릭과 블루스가 퇴조하자 라틴 리듬과 정통 로큰롤을 뒤섞은 이른바 ‘라틴 록’으로 조정을 꾀했다. 1970년에 발표되어 지금도 명반으로 남아있는 2집 < Abraxas >가 바로 처음 라틴 록의 정체를 천하에 고한 작품이었다. 이 음반의 수록곡 ‘Black magic woman/Gypsy queen’과 ‘맘보의 왕’ 티토 푸엔테(Tito Puente)의 곡을 재해석한 ‘Oye como va’는 각각 차트 4위, 13위에 랭크되며 히트했다. 특히 그가 이 음반 수록곡 ‘Samba pa ti’에서 구사한 애절한 기타연주는 국내에서 그의 명성을 한층 드높인 계기를 마련했다. 발라드 선호의 우리 정서와 심금을 울리는 그의 라틴기타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 것이다. 이 같은 어울림은 기타에 멜로디를 집어넣은 카를로스의 연주기법 때문에 가능했다. "나의 음악 키워드는 음(音)으로 이야기하듯 말하는 것이다. 기타를 통해 나는 노래하고 있다" 라틴 록 보석 ‘Europa’가 담겨있는 1976년 앨범 < Amigos >도 앨범차트 10위에 올랐고, 그해 일본 평론가협회 제정 최우수 앨범 상을 받았다. 지금도 기타지망생들은 ‘Europa’와 산타나의 이름을 등식화한다. 이듬해 발표한 작품 < Moonflower >에서도 좀비스(Zombies)의 명곡을 라틴 사운드로 새 단장한 ‘She’s not there’로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카를로스 산타나의 ‘절충주의’ 음악은 한계를 드러냈다. 그의 맛깔스런 기타 연주는 계속해서 위용을 과시했지만, 순하게 들리는 태생적 한계를 드러내면서 뒷심은 뚝 떨어졌다. 새로운 세대의 변화무쌍한 감성을 파고드는 필살(必殺)의 포인트를 상실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시대분위기에 편승하여 팝 성향이 강화된 1979년 앨범 < Marathon >을 발표한 데 이어 1980년 재즈 록 앨범 < Swing Of Delight >, 1987년 명상 앨범 < Blues For Salvador > 등 장르를 따지지 않는 합종연횡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비록 장기외유였지만 ‘록의 경계선을 허문’ 고유업적이 빛이 바랜 건 아니었다. 1980년대 이후의 활동도 사실 ‘퓨전’이란 그의 평생 과업의 선상에 있었다. 1998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당당히 들어섰고, 같은 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도 입적되었다. 마침내 그의 ‘장르 뒤섞기’ 실험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산타나는 지난해 < Supernatural >로 역사에 안치되기를 거부하고 현실무대로 화려히 컴백했다. 아리스타 레코드사의 파워 맨 클라이브 데이비스(Clive Davis)가 직접 지휘봉을 잡고 만든 이 앨범에는 데이브 매튜스, 로린 힐, 와이클레프 진 그리고 매치박스 20의 롭 토마스 등 신세대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했다. 산타나는 평소 자신을 존경해온 이들의 도움으로 상기한 신진 라틴스타들에 못지 않은 활기를 내뿜었다. ‘신구세대의 통합’을 목표로 산타나와 데이비스 사장이 제휴하여 치밀히 계획한 전략의 결과였다. 이 작품이 구현한 절충과 타협의 미학은 젊은 층과 기성세대를 막론했다. 올해 그래미상은 그를 위한 잔치가 될 게 거의 확실해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산타나 본인은 성공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는 앨범 < Supernatural >이 자신의 계획 중 일부분이라고만 했다. 원대한 포부를 시사한다. 하지만 그의 마스터플랜은 인기나 성공이 아니라 ‘음악의 완성’이다.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에서 이미 진실함을 읽을 수 있다.
밴드 : Crosby, Stills, Nash & Young (크로스비 스틸스 내시 앤 영,Crosby, Stills & Nash, CSN, CSN&Y)
멤버 : David Crosby, Graham Nash, Neil Young, Stephen Stills 멤버 : David Crosby, Graham Nash, Neil Young, Stephen Stills
미국의 록 밴드 미국의 록 밴드
록은 탄소 같은 음악이다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는 60년대가 끝날 때까지 언제나 인기 랭킹 2위였다. 최강의 자리는 늘 라이벌인 비틀스에게 빼앗겼다. 그럴만도 했다. 비틀스의 노래가 밝고 깨끗한 데 반하여 그들의 노래는 거의 끈적끈적하고 지저분했다. 비틀스가 아침이라면 롤링 스톤스는 밤이었고 비틀스의 활동무대가 푸른 초원이었다면 롤링 스톤스의 터전은 어두침침한 묘지였다. 엘리트 백인 팝 문화에 ... 록은 탄소 같은 음악이다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는 60년대가 끝날 때까지 언제나 인기 랭킹 2위였다. 최강의 자리는 늘 라이벌인 비틀스에게 빼앗겼다. 그럴만도 했다. 비틀스의 노래가 밝고 깨끗한 데 반하여 그들의 노래는 거의 끈적끈적하고 지저분했다. 비틀스가 아침이라면 롤링 스톤스는 밤이었고 비틀스의 활동무대가 푸른 초원이었다면 롤링 스톤스의 터전은 어두침침한 묘지였다. 엘리트 백인 팝 문화에 젖어든 우리 60~70년대 사람들에게 롤링 스톤스의 곡들이 환영받을 리 만무했다. 무수한 곡들이 애청된 비틀스에 비해 그들의 인기곡은 고작 ‘눈물이 지나갈 때(As tears go by)’ ‘루비 튜즈데이(Ruby Thesday)’ ‘엔지(Angie)’ 정도에 불과했다. ‘검게 칠하라(Paint it black)’가 어필한 것도 80년대 말 국내 방영된 TV외화 < 머나먼 정글 >에 이 곡이 ‘시그널 송’으로 삽입되고 나서였다. 팝의 본고장에서의 휘황찬란한 히트 행진에 견주었을 때 롤링 스톤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실로 보잘 것이 없었다. 비틀스가 ‘산소 같은 음악’을 했다면 그들은 고집스럽게 ‘탄소 같은 음악’을 구사했다. 바로 그 탄소라는 요소로 인해 그들은 ‘4인의 전설’이 된 비틀스처럼 결코 ‘5인의 전설’이라는 명예 작위를 하사 받지 못했다. 대신 그들이 얻은 꼬리표는 ‘5인의 악동들’이었다. 사실 악동은 출신 성분상 비틀스에 어울리는 용어였다. 그들은 영국 리버풀의 ‘노동계급 로커’들이었다. 존 레논의 경우 여지없이 그 어휘에 딱 들어맞는 존재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스톤스 멤버들은 비틀스처럼 가난하거나 못 배운 청년들이 아니었다. 보컬리스트 믹 재거(Mick Jagger)는 런던 대학 경제학부 출신이며 기타주자 키스 리차즈(Keith Richards) 역시 중산층 자손이었으며 초기 리더인 브라이언 존스(Brian Jones)는 음악가정에서 자랐다. 베이스 담당 빌 와이먼(Bill Wyman)과 드럼 찰리 와츠(Charlie Watts)가 노동계급 출신이지만 스톤스에 가입할 무렵에는 엄연한 ‘직장인’이었다. 신분으로 보자면 그들은 결코 록을 해선 안될 위인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울리지 않게 악동 노릇을 자처했다. 그것은 노동계급 청춘에 의한 하위문화라는 ‘록의 헌법’을 거스르는 위헌 사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그러한 ‘자격 미달’을 의식해서인지 비틀스보다 훨씬 강도 높게 록의 규율을 준수했다. 롤링 스톤스는 기꺼이 악동이 되기를 희망했다. 말쑥한 헤어스타일과 정장 차림으로 비틀스와 겨룬다는 것은 뱁새가 황새를 쫓은 격이었다. 데뷔 당시 비틀스 흉내를 내다가 참패를 맛본 그들은 매니저 앤드류 루그 올드햄(Andrew Loog Oldham)의 권고에 따라 곧바로 정반대 이미지로 ‘차별화’하여 재도전을 단행했다. 그들은 비틀스에 이어 1965년 마침내 대망의 미국 정복에 성공했다. 이때부터 그들의 트레이드마크는 불량, 퇴폐, 반항, 비행, 섹스 그리고 말썽과 같은 ‘하위정서’가 되었다. 그들은 ‘게으른 불량 저능아들’임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가는 곳마다 소란과 골칫거리를 야기시켰다. 기성 세대와 제도권의 ‘계급 공포’는 예고된 것이었다. 영국의 < 뉴스 오브 더 월드 >지는 ‘당신의 딸이 롤링 스톤스 멤버와 놀러 나가는 것을 허락하겠는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 뉴스 위크 >지는 그들을 ‘포르노 같은 가사에 젖어 있는 심술궂은 무리들’이라고 규정했다. 노심초사한 한 여인은 < 타임 >지에 “왜 디스크자키들은 스톤스 같은 쓰레기 노래들을 틀어 대느냐”고 따지는 항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양복 전문지 < 더 테일러 앤드 커터 >는 넥타이 매출이 형편없다고 스톤스에게 제발 넥타이를 매달라고 통사정했다. 클리블랜드 시장 랄프 로커는 스톤스 공연을 보던 17세 소년이 다치자 “그러한 그룹은 우리 공동체의 문화와 오락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며 그들의 콘서트를 불허하는 ‘비민주적’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비틀스에게는 인기폭발의 계기가 된 CBS TV 에드 설리번 쇼의 사례도 유명하다. 객석의 예기치 않은 소요와 그들의 불량스러운 모습에 당황한 나머지 에드 설리번은 상기된 표정으로 선언했다. “그들을 다시는 출연시키지 않겠다! 이 쇼를 구축하는데 자그마치 17년의 세월이 걸렸다. 단 몇 주만에 쇼를 망치게 할 수는 없다” 에드 설리번은 물론 이 선언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지만 2년 뒤인 1967년 섭외 때도 그들의 노래 ‘밤을 함께 보냅시다(Let’s spend the night together)’의 제목을 ‘시간을 함께 보냅시다(Let’s spend some time together)’로 고쳐 부르기를 강요했다. 그러나 사회적 지탄이 있으면 그에 비례하여 응원군도 출현하는 법이다. 어느 록밴드보다 흑인 리듬 앤드 블루스(R&B)를 뛰어나게 소화했기 때문에 ‘소울의 왕’ 오티스 레딩은 가장 좋아하는 그룹으로 롤링 스톤스를 지목했으며 그들의 레퍼토리를 리메이크해 음반에 담기도 했다. 1965년 미국 콜로라도 존 A 러브 주지사는 성공적으로 공연에 감사하는 뜻으로 ‘롤링 스톤스의 날’(11월 29일)을 공식 선포했다. 믹 재거가 1964년 난폭 운전으로 면허 취소의 위기에 몰렸을 때 사무 변호사 데일 파킨슨의 간청은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 “면허가 취소되면 믹 재거와 그의 그룹이 움직이는데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이다. 영국은 그들이 벌어들이는 달러를 필요로 하며 그들은 어느 수출업체보다도 많은 달러를 번다.” 재거는 16파운드의 벌금을 내고 다시 차를 몰 수 있었다(좌우지간 유명해지고 봐야 한다!). 1967년 재거와 리차즈가 마약 불법 소지 사건으로 무거운 형량을 선고 받고 이어 브라이언 존스도 런던 아파트에서 같은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도 그랬다. 이번에는 언론이 도왔다. 보수신문으로 정평 나있는 < 더 타임스 >지가 놀랍게도 ‘누가 바퀴로 나비를 찢어 죽이나?(Who breaks a butterfly on a wheel?)’라는 제목의 비호 기사를 게재한 것이었다. 당시 언론은 롤링 스톤스에 대한 대중의 집단 히스테리를 알고 있었다. 롤링 스톤스는 당시 기성 가치에 거스르는 ‘히피 보헤미안’들의 정서를 반영했다. 그들의 곡에는 의도했든 안했든 히피 세대의 분노와 불만이 스며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60년대 록정신의 한복판에 ‘구르는 돌’의 깃발이 휘날리게 된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차를 운전하고 있을 때 라디오에 그 양반이 나오더군, 점점 더 쓸데없는 정보만 늘어놓는 거야. 내 상상을 불태우려는 듯 말야. 노력해 도 노력해도 난 도무지 만족할 수 없어’-‘난 만족할 수 없어(I can’t get no satisfaction)’중에서 이 노래는 세 번째 구절의 ‘여성 생리’ 관련 가사로도 어필한 것이 사실이지만 청년 대중들이 주로 멜로디 부분에 맞춰 “현실 상황에 절대 만족할 수 없음”을 목청 높여 부른 것에 힘입어 빅히트했다(그들의 최초 미국 차트 1위곡). 믹 재거 스스로도 “이 곡은 모든 것에 대한 나의 욕구 불만을 담았다. 그것은 꾸밈없는 10대의 반항이었다”고 말했다. 히피 세대들은 정말 스톤스의 말을 따라 순종을 거부했고 도전했고 싸웠으며 싸돌아다녔다. 스톤스 또한 확고한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지 않았지만 시종일관 그들에 대한 ‘자극’을 즐겼다. ‘그녀가 왜 자유로워지려는지 묻지마. 그녀는 그게 유일한 낙이라고 말할 거야. 그녀는 삶에 묶여 있지 않아. 그런 대가를 치러 봤자 인생은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어’-‘루비 튜스데이’ ‘난 자유를 갖고 있지만 많은 시간은 없다. 신념은 무너졌고 눈물은 쏟아야만 해. 우리가 죽고 난 뒤 어떠한 생을 얻읍시다. 야생마는 날 질질 끌고 다니지 않지. 어느 날 우리는 야생마를 타게 될 거야’-‘야생마(Wild horses)’ 1960년대 그들의 음악은 라이벌 밴드 비틀스에 끌려 다닌 측면이 없지 않았다. 1966년 작 < 여파(Aftermath) >는 재거와 리차즈가 존 레논과 폴 메카트니의 콤비 자작곡인 < 러버 소울(Rubber soul) >에 충격 받고 ‘우리도 그렇게 해보자’는 자세로 제작에 임한 것이며, 1967년 사이키델릭 음반 < 악마 폐하의 요청(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 >만 해도 비틀스의 <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 >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황급히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2등이었다. 결코 비틀스로부터 왕관의 소유권을 이전 받지는 못했다. 비틀스는 록밴드에서 ‘전천후 팝 밴드’로 승천하면서 어느 세대에도, 어느 계층에도 적(敵)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 서전트 >의 시점부터 음악의 축을 로큰롤의 흥분에서 팝 예술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롤링 스톤스는 적이 많았다. 기성 세대들은 록의 부랑아인 그들을 꺼렸으며 록이란 또 애초부터 전 세대를 포괄할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음악이었다. 결국 비틀스는 록을 버려 ‘국민그룹’이 된 것이다. 만약 비틀스에게 약점이란 것이 있다면 바로 ‘록과의 작별’일 것이었다. 이 비틀스의 허점이 롤링 스톤스에게는 강점을 의미했다. 롤링 스톤스는 록을 배신한 비틀스에게 실망한, 그리하여 멀어져 간 ‘록 충절파들’을 끌어 모으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그 팬들에게 ‘우리가 진정한 로큰롤 밴드’임을 열심히 음악으로 웅변했다. 비틀스의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은 1966년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어른들이 비틀스가 훌륭하고 비틀스가 재미있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해졌다. 기성 세대들은 우리를 좋아했다. 그리하여 진정한 ‘히피’ 아이들은 또는 그렇게 자신을 생각하는 애들은 우리를 떠나 버렸다. 그들에게 관심 있는 것은 스톤스의 팬이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부모는 롤링 스톤스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록밖에 몰랐다. 그것도 기타와 드럼 베이스가 물려 빚어내는, 단순하고 경쾌한 원시 로큰롤로 일관했다. 1960년대 후반으로 가서는 데뷔 시절에 더러 다루곤 했던 느린 리듬 앤드 블루스나 발라드의 비율마저 낮추어 버렸다. 1960년대 후반기에 발표한 3장의 앨범 < 단추 사이에(Between The Buttons) >, < 거지의 향연(Beggar’s Banquet) >, < 렛 잇 블리드(Let It Bleed) >가 뚜렷한 히트 싱글이 없음에도 록비평가들이 일제히 걸작 음반으로 꼽는 것도 이 앨범들이 철저히 록음악에 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 거지의 향연 >에 수록된 곡 ‘거리의 싸움꾼(Street fighting man)’에 내비친 그들의 ‘로큰롤 신념’을 들어보자. ‘내 이름은 소란이라고 하지. 난 외치고 울부짖을 거야. 난 왕을 죽이고 그의 종복들을 박살낼테야. 가난한 아이가 로큰롤 밴드에서 노래하는 것 말고 할 게 뭐 있나. 졸린 런던 타운에서 거리의 싸움꾼을 위한 장소는 없기 때문이지!’ 그들의 록에 대한 헌신은 < 타임 >지로부터 ‘피에 굶주린 로큰롤 앨범’이라는 칭찬을 받은 기념작 < 스티키 핑거스(Sticky Fingers) >와 이듬해의 음반 < 대로의 추방자(Exile On Main Street) >로 절정에 달했다. 록 비평가 로버트 크리스트고(Robert Christgau)는 “적어도 펑크가 도래할 때까지 아무도 그들처럼 몰아(沒我)의 에너지로 철저히 록을 한 사람들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롤링 스톤스는 록에 온몸을 내던진 대가로 막대한 부와 명성을 창출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록의 ‘낙오자 정서’와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록이 제도권의 스타가 아닌 거리의 청년들에게 소유권이 있음을 입증한 펑크 밴드들에게 공격 타깃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이와 관련하여 섹스 피스톨스 자니 로튼이 “롤링 스톤스와 후는 비위에 거슬린다. 그들은 더 이상 젊은이들에게 제시할 것이 없다”고 성토한 것은 유명하다. 그들은 순식간에 ‘록의 공룡’으로 둔갑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일말의 ‘반성’도 없었다. 오히려 의기양양하게 1978년 당시의 인기 음악인 디스코를 채용한 ‘네가 그리워(Miss you)’를 노래하며 제도권 한복판에서 유유자적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위기 속에서도 록의 공격성을 잃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펑크 록은 펑크 세대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자신들이 오래 전에 터득한 ‘그들만의’ 원시적인 로큰롤을 했다. 록의 뿌리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원형 록을 보존하며 그 ‘충실성’을 옹호한 것이었다. 1980년대 들어서도 그들은 그렇게 록을 했고 끊임없이 해체설이 떠도는 가운데에서도 1989년 < 강철바퀴(Steel Wheels) >를 통해서 원형 록으로 재기했다. 1994년에 발표한 < 부두 라운지(Voodoo Lounge) >나 1995년 말에 내놓은 < 스트립드(Stripped) >도 거친 로큰롤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변한 것이라곤 1969년 브라이언 존스가 사망하자 믹 테일러(Mick Taylor)가 그 자리를 메꾸고, 1974년 다시 그 자리에 그룹 페이시스의 전 멤버 론 우드(Ron Wood)가 들어온 것, 또한 1994년 빌 와이먼이 탈퇴한 것뿐이었다. 이제 멤버들 대부분의 나이 50세를 넘어섰다. 롤링 스톤스는 오랫동안 록이 가지는 열정과 흥분에 몸바치면서 쌓은 금자탑에 또 하나의 글귀, ‘록은 늙어서도 할 수 있다’를 새겨 넣었다. 그러면서 펑크 진영의 지탄도, 얼터너티브 록의 대공세도 거뜬히 극복했다. 믹 재거는 1988년 이렇게 말했다. “만약 로큰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배우나 작가, 감독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렸을 때 로큰롤이 나를 휘어잡았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여기 있는 것이다” 그의 롤링 스톤스는 < 스트립드 > 앨범에서 밥 딜런의 고전 ‘구르는 돌처럼(Like a rolling stone)’을 불렀다. 이 한 곡이 아마도 이 앨범이 말하려는 바와 그들의 음악과 역사를 축약하는 노래일 것이다.
< 1부 세계정복을 향한 혹독한 고행 > 비틀스에 대한 오해가 과거에도 있고 지금도 있다. 그들이 최고의 곡조를 선보였을지 몰라도 연주력과 가창력은 제1이 아니라고. 기타 연주를 에릭 클랩튼과 비교하고 노래를 프랭크 시내트라와 비교하기 때문인가. 하지만 이것은 록을, 대중음악을 테크닉과 기능주의 관점으로만 들이대는데서 나오는 말이다. 로큰롤의 중심은 결코 연주나 작곡에 있어서 천부적 재주에 위치하지 않는다. 노력... < 1부 세계정복을 향한 혹독한 고행 > 비틀스에 대한 오해가 과거에도 있고 지금도 있다. 그들이 최고의 곡조를 선보였을지 몰라도 연주력과 가창력은 제1이 아니라고. 기타 연주를 에릭 클랩튼과 비교하고 노래를 프랭크 시내트라와 비교하기 때문인가. 하지만 이것은 록을, 대중음악을 테크닉과 기능주의 관점으로만 들이대는데서 나오는 말이다. 로큰롤의 중심은 결코 연주나 작곡에 있어서 천부적 재주에 위치하지 않는다. 노력하는 자세와 조화를 향한 열정, 말하자면 음악에 대한 자연적 ‘감성’에 무게가 있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음악은 감성이 지성을 만든다. 비틀스가 그런 그룹이다. 비틀스는 바로 피와 땀으로 세계정복의 열매와 천재라는 칭송을 획득했다. 그들의 성공은 천재성 아닌 가혹한 고행의 결과물이다. 천재성도 피와 땀이 만들어낸 것이다. 결코 하늘이 준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존 레논과 폴이 만난 게 1957년이고 존이 ‘Hey little girl’을 쓴 게 1958년이며 가장 멋진 밴드명인 비틀스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도 1960년이다.

그들은 1964년 세계를 휘몰아치기 전 최소 4-5년 밑바닥생활을 했다. 이 점에서 비틀스는 그들이 꽃을 피운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의 호시절을 타고 졸속으로 결성된 다른 그룹들과는 종이 달랐다. 그들은 그동안 무수한 오디션 실패와 해외 투어로 연주력을 다졌으며 오로지 세계정복이란 목표를 위해 눈물과 배고픔을 삼켰다. 정말 그들 말대로 손이 아프도록 기타를 쳤고 목이 터져라 노래했다. 리버풀 캐번과 저 멀리 독일 함부르크 클럽을 왕래하며 연주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지구촌 석권을 위한 숨가쁜 열정이자 가혹한 훈련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대목에서 “나는 리버풀에서 길러졌지만 함부르크에서 성장했다”는 존의 말은 너무도 유명하다. 영화 < 백비트 >에 잘 묘사되었듯 그들은 이곳 클럽무대에서 댄서들 뒤에서 반주를 했고 비좁은 단칸방에서 집단 기식했다. 그들은 그러면서 당시 서구권에서 유행하는 음악을 열심히도 챙겼다. 모르는 게 없었다. 1950년대 블루스와 로커빌리, 모타운 R&B, 틴 팬 앨리 팝, 라틴 음악 등 갖가지 계열의 곡들을 골라 커버 연주했다. 아이슬리 브라더스 ‘Twist and shout’, 스모키 로빈슨 ‘You really got a hold on me’, 캐롤 킹 ‘Chains’, 리틀 리처드 ‘Long tall Sally’, 척 베리 ‘Rock and roll music’ 등이 그 파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모든 것을 흡수해 자신들의 독창적 스타일로 빚어낼 줄 알았다. 거기서 ‘Love me do’가 ‘From me to you’가 ‘A hard day’s night’가 ‘I feel fine’’이 나왔다. 스펀지 같은 흡수력이 길러낸 창조성, 이를테면 노력에 의해 축적된 내공의 폭발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먼저 남들 곡의 템포와 볼륨을 업그레이드했고 그 작업을 통해 이후 그들만의 코드 진행감각 즉 독자적 화성을 찾아낸 것이었다.

비평가 그렉 쇼(Greg Shaw)는 말한다. “비틀스는 단지 뮤지션이 아니었다. 그들은 최초의 그리고 첫째가는 로큰롤 팬이었다. 그리고 바로 음악에 대한 지식과 헌신이 그들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다.” 감성에서 지성으로, 그리고 그 두 가지의 환상적 퓨전! 비틀스의 이 무명시절을 놓쳐서는 곤란하다. 이번에 나온 앨범 < The Beatles 1 >에서 초기 곡인 ‘Love me do’에서 ‘Help!’까지는 이 출발 이전의 워밍업 시기와 불가분의 관련을 맺는다. 실상 비틀스 초기 작품은 이 준비기를 떼어놓고는 논할 수도 없다. 하긴 연습 없이 실전을 잘 치른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리고 비틀스는 나중 실전을 연습처럼 해야한다는 진리도 잊지 않았다. 제2부 < 지구촌 전체를 손에 넣다 > 1964년 2월7일 영국의 더벅머리 네 남자가 미국 케네디 공항에 내리는 순간, 세계의 음악역사는 송두리째 바뀌었다. 유럽과 미국 뿐 아니라 지구촌 전체를 떠들썩하게 한 이른바 ‘비틀매니아’의 시작. 그것은 이후 음악의 중심이 ‘젊은이들’과 ‘대중음악’으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했다. 어른과 고전음악은 이제 뒷전으로 물러나야 했다.

비틀스가 먼저 1963년 영국을 뒤흔들었을 때 그 광풍은 당시 내각을 발칵 뒤집어놓은 성추문 이른바 ‘프로퓨모 스캔들’도 잠재워버렸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정치 판에 관심을 깡그리 잊었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미국은 케네디 대통령이 사망한지 불과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온 국민이 실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비틀스가 오자 그런 일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 전국이 들썩들썩했다. 비틀스는 이처럼 정치 사회적 회오리마저 제압하는 엄청난 팝 폭발(pop explosion)현상이었다. 비틀스 초기 음악은 한마디로 경쾌한 로큰롤이었다. 1950년대 미국 로큰롤에 영국 특유의 셔플 리듬과 보컬 하모니를 덧입힌 스타일로, 강했으되 느낌은 밝았다. 기본 코드를 이용한 로큰롤만의 단순한 진행이었지만 1950년대의 로큰롤보다는 훨씬 템포도 빠르고 볼륨도 컸다. 본격적인 밴드중심 로큰롤의 개막이었다. 지구촌의 젊은이들이 너도나도 그들처럼 기타를 치고 드럼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비틀매니아 시대의 음악은 이처럼 ‘로큰롤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것들이었다. 영국에서 1963년 ‘From me to you’는 7주간 1위에 오르면서 당시로 볼 때는 경이적인 65만장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다. 그것은 비틀스가 이후 발표한 11장의 싱글이 모두 정상에 오르는 ‘넘버원 퍼레이드’의 서막이었다. 다음 싱글 ‘She loves you’는 선(先)주문만도 31만장에 달하면서 영국에서만 160만장이 팔려나갔다. 이 기록은 폴 매카트니의 1977년 ‘Mull of kintyre’에 의해 깨질 때까지 무려 14년 간 ‘영국 최고판매의 싱글’ 타이틀을 지켰다. 같은 해 12월 발표한 ‘I want to hold your hand’는 ‘She loves you’로부터 1위 자리를 승계하며 선주문 94만장에 총 150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그들의 꿈이던 미국정복을 이룩해낸 곡도 바로 이 노래였다. 이 곡은 전미차트 7주간 정상을 차지했다.

1964년 미국에서 ‘Can’t buy me love’는 판매 신기원을 이룩했다. 선주문 170만장에 발매와 동시에 모두 200만장이 팔려나간 것이다(영국에서도 첫 주 122만6천장). 굳이 판매고를 거듭 언급하는 것은 비틀스광풍을 설명하기에 그 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공할 행진은 직접 출연한 영화의 주제곡 ‘A hard day’s night’, ‘I feel fine’, 두 번째 영화에 삽입된 ‘Ticket to ride’ ‘Help!’로 이어진다. 이 때까지 넘버원 싱글 가운데 느린 곡은 하나도 없을 만큼 그들은 당시 세대와 호흡하는 로큰롤의 대중성을 신뢰했다. ‘Help!’ 만해도 존 레논은 "원래 느린 곡조로 썼으나 대중의 반응을 고려해 빠르게 불렀다"고 밝혔다. 그 속도감을 갖춘 로큰롤에 소녀들을 미치게 한 곡 중간의 함성 ‘yeah yeah yeah’(비틀스 시대의 상징어가 됐다)으로 그들은 영국의 침공을 견인하며 지구촌을 손아귀에 넣은 것이다. 성공하기 전 그들이 주로 커버했던 곡을 골라 녹음한 폴 매카트니의 1999년 앨범 < Run Devil Run >에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I got stung’를 부른 경위에 대한 폴의 설명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엘비스 레퍼토리는 아니었으나 인트로가 맘에 들었고 난 엘비스보다 조금은 더 난폭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터뜨리고 질러대는 로큰롤을 가지고 그들은 마침내 ‘최강의 로큰롤밴드’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비틀스는 더 나아가 ‘최강의 팝 밴드’가 되고자 했다. 그 비상을 알리듯 1965년 가을 때마침 현악 반주의 ‘Yesterday’가 나왔다. 제3부 < 거리의 록을 전당의 예술로 >(중기 비틀스) 엄밀히 말해서 로큰롤은 거리의 젊은이들 음악이다. 그리하여 1950년대 그것이 등장했을 때 그것은 어른들이 듣는 이전의 스윙 재즈와 스탠더드 팝 발라드와 완전히 ‘분리와 독립’의 선을 그었다.

비틀스도 초기 로큰롤의 영웅들인 척 베리, 리틀 리처드, 버디 할리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에 영향을 받은 로큰롤(전에 지적한 듯 좀 더 강하긴 했지만)을 구사했다. 초기에 그들은 기타로 곡을 썼고 그래서 그 때의 곡들은 업 비트의 장조계열 곡들이었다. 그러나 ‘제5의 비틀’이라는 프로듀서 조지 마틴을 만나면서, 그로부터 피아노의 미학을 터득하면서 그들은 느린 단조계열의 발라드 팝을 쓰기 시작했다. 이제 거리의 록은 완전히 근사한 전당의 예술로 ‘신분상승’했다. 그것을 상징하는 곡이 ‘Yesterday’ ‘Eleanor Rigby’ 그리고 앨범 < Rubber Soul > < Revolver >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였다. 또 하나의 변화는 가사였다. 이전의 그들의 신나는 로큰롤에 담긴 노랫말이라곤 고작 젊은 남녀의 풋사랑에 대한 얘기들이었다. 한마디로 ‘소년이 소녀를 만나는’ 내용이 주종이었다. 그러나 미국에 와서 포크와 통기타의 영웅 밥 딜런(Bob Dylan)을 경험하면서 그들은 가사의 중력을 절감했다. 특히 존 레논에게 이 부분의 충격은 절대적이었다. 갑자기 비틀스 노래는 사랑타령에서 ‘사색과 인생’으로 바뀌어갔다. 중기의 대표적인 노래들인 ‘Girl’ ‘In my life’ ‘Eleanor Rigby’는 이전 노래와는 확실히 깊이가 달랐다. 비틀스는 싱글 중심이 아닌 앨범 중심으로 음악작업의 축을 전환했다. 곡도 커버 버전은 완전히 걷어치우고 철저히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콤비(더러 조지 해리슨)의 자작으로 앨범을 채우기 시작했다. 평자들이나 대중들 할 것 없이 일제히 비틀스의 최고 명반으로 중기작품들을 거론하는 이유는 이런 저간의 상황이 있다. 물론 무엇보다 음악이 너무도 우수하다는 점이 작용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얼마 전 영국인들 20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권위 있는 ‘버진 올 타임 톱 1000 앨범’ 여론조사가 말해준다. 이 리서치에서 < Revolver >가 당당 1위를 차지했으며 < Sgt. Pepper’s.. >는 3위, < Rubber Soul >은 34위에 올랐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당시 미국 문화계 인사들과 히피들 사이에 급속히 퍼져나간 싸이키델릭(psychedelic) 풍향이다. 환각과 약물로 이미지화된 이 흐름은 기존의 지배적 가치와 이데올로기에 대해 반기를 들고 문화적 대안(代案)을 찾고자 한 일종의 ‘문화운동’이었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의식확장을 위해 약물 LSD를 실험했고 동양종교를 탐색했고 갖가지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에 대해 항의의 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들의 최종적 캐치프레이즈는 ‘사랑과 평화’였다. 버진 조사에서 1등을 뺏겼지만 여전히 팝 역사상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는 1967년 앨범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는 바로 싸이키델릭과 히피의 ‘안티’ 성향을 농축해낸 작품이었다. 이와 함께 그들은 다시 시사주간지 ‘타임’의 커버스토리를 장식했다(타임에 커버로 두 번 등장한 대중가수는 비틀스밖에 없다). < The Beatles 1 > 앨범은 넘버원 곡들만 수록해 싱글을 내지 않은 이 앨범의 레퍼토리들이 수록되어있지 않지만 대신 ‘Yellow submarine’ ‘All you need is love’로 그 메시지와 분위기를 희미하게 맛볼 수 있다. 중기의 포크와 싸이키델릭 시대를 통해 비틀스는 ‘자기 음악중심’을 확립했다.

단순한 성공공식으로 일관하면서 실험을 배제하는 여타 그룹들과는 달랐다. 초기에 그토록 흔하던 히트싱글 발표도 가급적 자제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음악의, 소위 얼터너티브를 찾아 실험하고 탐구했다. 오늘날에도 비틀스가 최강의 그룹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것도 이 시기의 ‘음악혁명’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비틀스의 이러한 성과의 뒷면에는 그룹의 결속력의 약화라는 음지가 존재했다. 4인 각자의 개성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정서적으로 하나의 그룹 아닌 ‘존 폴 조지 링고’로 흩어지면서 비틀스는 말기를 맞는다. 물론 그러면서도 그들은 명반 생산을 게을리 하지는 않지만.. 제4부 < 미래의 기약-4분의 4는 역시 하나! >(말기 비틀스) 1968년 자신들의 음반사 애플(Apple)을 설립했을 때, 그리고 애플의 첫 싱글 ‘Hey Jude’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을 때 비틀스의 웅대한 새 출발은 이상하게도 그룹의 결속력 와해로 이어졌다. 비틀스라는 우산 아래 뭉쳤던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독자 영역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에 그룹을 대표하던 존은 비틀스 아닌 필생의 동반자 오노 요코와의 관계에 빠져 들어갔으며, 폴은 그룹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넷 가운데 단연 최강자로, 실세로 솟아났다.

존과 폴 간의 균형이 깨진 것을 의미하는 이러한 ‘헤쳐’ 상황은 비틀스를 ‘존과 폴의 그룹’에서 ‘폴의 그룹’으로 재편했다. 조지 역시 자신의 음악세계에 액센트를 두기 시작했고 곡을 쓰지 못했던 링고도 마침내 ‘Don’t pass me by’나 ‘Octopus’s garden’과 같은 곡을 써내면서 자신감을 획득했다. 애플사에서 낸 첫 앨범 < The Beatles >(일명 화이트 앨범)는 불가피하게 ‘한지붕 네가족’의 앨범이 되어 나왔다. 자신이 쓴 곡을 녹음할 때 다른 멤버들은 그룹동료가 아니라 거의 세션 맨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비틀스의 재정문제를 관장하는 사업고문 발탁을 놓고 존 조지 링고와 폴 간의 입장차이가 불거지면서 멤버들간의 갈등도 노출되었다. 존과 폴은 모든 면에서 가령 예를 들면 결혼날짜와 장소와 같은 문제에서도 사사건건 경쟁적 심리전을 전개했다. 말기에서 비틀스가 차지한 차트 넘버원 곡들은 존의 ‘The ballad of John & Yoko’ ‘Come together’, 조지의 ‘Something’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폴이 주도적으로 쓴 곡이었다. 폴의 작곡 감각은 이후에도 접하기 어려울 만큼 이 시기에 절정에 달했다. 해산 직전에 나온 ‘Let it be’나 ‘The long and winding road’를 드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 곡들은 비틀스 작품이기보다는 폴의 솔로 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폴의 천재성은 말기의 앨범 < The White Album > < Abbey Road >에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굳이 싱글이 아니었어도 전자의 ‘Obladi oblada’ ‘Martha my dear’ ‘I will’, 후자에서는 ‘You never give your money’ ‘Golden slumber’ ‘She came in through the bathroom window’ 등 그가 주조한 곡들은 어떤 싱글보다도 사랑을 받았다.

기습적인 비틀스 해산 기자회견을 가진 것도 폴이었다. 전설의 4인들은 해산 후에도 각각의 길을 걸으면서 누구 할 것 없이 1970년대의 어떤 싱어 송 라이터나 팝 스타들보다 굵직한 행보를 보였다. 네 사람 모두 차트 넘버원 곡을 기록했다. 그룹 출신으로 솔로활동에서 멤버 모두가 1위 곡을 가진 그룹은 비틀스밖에 없고 이는 앞으로도 깨질 수 없는 기록이 될 것이다. 그 가운데 윙스(Wings)라는 그룹을 만든 폴의 히트행진은 비틀스 업적을 거의 재현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존 폴 조지 링고를 아무리 개별적으로 기억하려고 해도 사람들은 언제나 비틀스라는 집합으로 기억한다. 말기 이후가 ‘4분의 4’이었을지언정 대중의 뇌리에는 언제나 ‘하나’였다. 그리고 영원히 하나임은 비틀스 재결합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관측을 깨고 1995년 폴 조지 링고가 투합해 존의 노래 ‘Free as a bird’ ‘Real love’를 만들어 내놓았을 때 다시금 입증되었다. 여기서 링고 스타의 비틀스론(論)을 들어보자. "우린 신비로웠고 그것은 텔레파시였다. 우리가 녹음실에서 작업했을 때…그걸 묘사하기란 정말 어렵다. 우린 넷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였다. 우리 모두의 마음은 언제나 동시에 움직였다." 신기하게도 비틀스는 시간이 지나면서 역사에 묻히지 않고 갈수록 위대성과 가치가 증대한다. 미국 브라질 쿠바 일본 그리고 한국을 가리지 않고 < The Beatles 1 >가 전 세계적으로 판매열풍을 일으키고있다는 사실은 뉴 밀레니엄 첫 스타가 비틀스라는 것을 말해준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1960년과 2000년 사이의 40년 세월의 간극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 비틀스는 언제나 있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들은 불로(不老) 불사(不死) 불패(不敗)의 그룹이다.

음반 속으로

EBSstory

회원리뷰 (0건)

매주 10건의 우수리뷰를 선정하여 YES상품권 3만원을 드립니다.
3,000원 이상 구매 후 리뷰 작성 시 일반회원 300원, 마니아회원 600원의 YES포인트를 드립니다.
(CD/LP, DVD/Blu-ray, 패션 및 판매금지 상품, 예스24 앱스토어 상품 제외)
리뷰쓰기

등록된 리뷰가 없습니다.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한줄평 (0건)

1,000원 이상 구매 후 한줄평 작성 시 일반회원 50원, 마니아회원 100원의 YES포인트를 드립니다.
(CD/LP, DVD/Blu-ray, 패션 및 판매금지 상품, 예스24 앱스토어 상품 제외)
0/50

등록된 한줄평이 없습니다.

첫번째 한줄평을 남겨주세요.

배송/반품/교환 안내

배송 안내

배송 안내
배송 구분 YES24 배송
포장 안내

안전하고 정확한 포장을 위해 CCTV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 포장안내1
  • 포장안내2
  • 포장안내3
  • 포장안내4
포스터 안내
  •  구매하신 상품에 포스터 사은품이 있는 경우, 포스터는 상품 수량과 동일한 수량이 제공됩니다.
  •  포스터는 기본적으로 지관통에 포장되며, 2장 이상의 포스터도 1개의 지관통에 담겨 발송됩니다.
  •  포스터 수량이 많은 경우, 상황에 따라 지관통 추가 및 별도 박스에 포장되어 발송될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반품/교환 방법
  •  마이페이지 > 반품/교환 신청 및 조회, 1:1 문의, 고객만족센터(1544-3800), 중고샵(1566-4295)
  •  판매자 배송 상품은 판매자와 반품/교환이 협의된 상품에 한해 가능합니다.
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전자책 단말기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 예) CD/LP, DVD/Blu-ray,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문 제작되는 상품의 경우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예스이십사(주)
서울시 영등포구 은행로 11, 5층~6층(여의도동,일신빌딩) 대표 : 김석환   개인정보보호책임자 : 권민석 yes24help@yes24.com 사업자등록번호 : 229-81-37000   통신판매업신고 : 제 2005-02682호 사업자 정보확인 호스팅 서비스사업자 : 예스이십사(주)
고객만족센터 T.1544-3800
상담 전화번호
  • 중고샵 문의 1566-4295
  • 영화예매 문의 1544-7758
  • 공연예매 문의 1544-6399
1:1 문의하기 자주 묻는 질문 상담시간 안내
YES24 수상내역 정보보호 관리체계 ISMS인증획득 개인정보보호 우수사이트
소비자피해보상보험 서울보증보험
고객님은 안전거래를 위해 현금 등으로 결제 시 저희 쇼핑몰에서 가입한 구매안전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서비스가입사실 확인
EQUUS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