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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날 듣는 크리스마스 음악 (Christmas H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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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눈 내리는 날 듣는 크리스마스 음악 (Christmas Hits)

[ 4CD, 오리지널 음원 68곡 수록 ]
Wham, Andy Williams, Hall & Oates, Boney M, Michael Bolton 노래 외 56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SonyMusic | 2017년 11월 16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144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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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날 듣는 크리스마스 음악 (Christmas Hits)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7년 11월 16일
시간, 무게, 크기 440g
제조국 EU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1
  • 01 Last Christmas - 웸!
  • 02 It'S The Most Wonderful Time Of The Year - 앤디 윌리엄스
  • 03 Jingle Bell Rock - 홀 앤 오츠
  • 04 Mary'S Boy Child/Oh My Lord - 보니 엠
  • 05 Merry Christmas Everyone - 쉐이킹 스티븐스
  • 06 Santa Claus Is Coming To Town - 마이클 볼튼
  • 07 When A Child Is Born - 조니 마티스
  • 08 Give Me Peace On Earth - 모던 토킹
  • 09 Silver Bells - 토니 베넷
  • 10 (There'S No Place Like) Home For The Holidays - 베리 매닐로우
  • 11 Frosty The Snowman - 피오나 애플
  • 12 We Call It Christmas - 켑모
  • 13 All My Bells Are Ringing - 렌카
  • 14 Have Yourself A Merry Little Christmas -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 15 Give Love On Christmas Day - SWV
  • 16 Home For Christmas - 마리아 메나
  • 17 Silent Night - 일 디보
Disc2
  • 01 Winter Wonderland - 존 레전드
  • 02 I Believe In Father Christmas - 수잔 보일
  • 03 The Christmas Song - 개빈 디그로우
  • 04 Little Drummer Boy - 밥 딜런
  • 05 Santa Baby - 메이시 그레이
  • 06 What Child Is This? - 트레인
  • 07 Every Year, Every Christmas - 루더 밴드로스
  • 08 Grown-Up Christmas List - 모니카
  • 09 Christmas Day - 다이도
  • 10 O Holy Night - 소피 젤마니
  • 11 Blue Christmas - 니콜 앳킨스
  • 12 Feliz Navidad - 호세 펠리시아노
  • 13 Hallelujah - 펜타토닉스
  • 14 Do You Hear What I Hear - 글래디스 나이트 앤드 더 핍스
  • 15 Don'T Save It All For Christmas - 셀린 디온
  • 16 Love Is Christmas - 사라 바렐리스
  • 17 Christmas Angels - 클라나드
Disc3
  • 01 Rudolph The Red-Nosed Reindeer - 베이비페이스
  • 02 My Favorite Things - 켈리 클락슨
  • 03 At Christmas - 프래디 잭슨
  • 04 The First Noel - 휘트니 휴스턴
  • 05 Little Drummer Girl - 앨리샤 키스
  • 06 Merry Christmas Darling - 타마 브랙스톤
  • 07 All I Want For Christmas Is A Real Good Tan - 케니 채스니
  • 08 My Only Wish (This Year) - 브리트니 스피어스
  • 09 Christmas Time - 백스트리트 보이즈
  • 10 Santa'S Coming - 3LW
  • 11 Spread A Little Love On Christmas Day - 데스티니스 차일드
  • 12 Merry Christmas, Happy Holidays - 엔 싱크
  • 13 Why'D You Leave Me On Christmas - B2K
  • 14 What Christmas Means To Me - 판타지아
  • 15 Holiday Celebrate - 토니 브랙스톤
  • 16 Endless Christmas - 3T
  • 17 Christmas Through Your Eyes - 글로리아 에스테판
Disc4
  • 01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 피프스 하모니
  • 02 12 Nights Of Christmas - 알 켈리
  • 03 Love Me Like You (Christmas Mix)] - 리틀 믹스
  • 04 Shake Up Christmas 2011 (Official Coca-Cola Christmas Song) - 나타샤 베딩필드
  • 05 Why Couldn'T It Be Christmas Everyday? - 비안카 라이언
  • 06 I Wish It Could Be Christmas Everyday (Bbc Live Version) - 올리 머스
  • 07 One More Sleep - 리오나 루이스
  • 08 This Christmas - 크리스 브라운
  • 09 I'Ll Be Home - 메간 트레이너
  • 10 Sleigh Ride - 카르민
  • 11 I Saw Mommy Kissing Santa Claus - 제시카 심슨
  • 12 Beautiful Christmas - 빅 타임 러쉬
  • 13 Funky, Funky, Xmas - 뉴 키즈 온 더 블록
  • 14 Everyday Is Christmas - 디오
  • 15 It'S Not Christmas Without You - 시트콤 '빅토리어스' 캐스트 (feat. 빅토리아 저스티스)
  • 16 Christmas Fool - 아만다 옌슨
  • 17 All I Want For Christmas Is New Year'S Day - 허츠

아티스트 소개 (61명)

조지 마이클이라는 걸출한 팝 스타를 배출한 팝 듀오 왬(Wham!)은 80년대 팝 역사에서 빼놓아서는 안 될 중요한 그룹이다. 소울 음악과 결합된 즐겁고 흥겨운 팝 댄스를 들려줬던 이들은 80년대 특유의 ‘가벼움’을 관통함으로써 80년대 팝의 중흥기를 이끌었으며, 수많은 여성 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또한 이들은 사실상 90년대에 들어 맹위를 떨친 보이밴드의 효시였다. 잘 생긴 외모와 수준급 가창력, 거기... 조지 마이클이라는 걸출한 팝 스타를 배출한 팝 듀오 왬(Wham!)은 80년대 팝 역사에서 빼놓아서는 안 될 중요한 그룹이다. 소울 음악과 결합된 즐겁고 흥겨운 팝 댄스를 들려줬던 이들은 80년대 특유의 ‘가벼움’을 관통함으로써 80년대 팝의 중흥기를 이끌었으며, 수많은 여성 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또한 이들은 사실상 90년대에 들어 맹위를 떨친 보이밴드의 효시였다. 잘 생긴 외모와 수준급 가창력, 거기에 경쾌한 댄스 팝과 매혹적인 발라드 등 현 보이밴드의 전형이랄 수 있는 특질을 이미 80년대 초반에 확립해, 전부 보여줬기 때문이다. 1981년, 왬은 ‘나이트클럽 광’이었던 조지 마이클과 그의 친구 앤드류 리즐리에 의해 탄생되었다. 조지 마이클이 작곡과 작사, 보컬, 제작 등 음악에 관한 한 모든 걸 담당했고, 앤드류 리즐리는 그룹의 스타일과 이미지, 비주얼 등 외적인 측면에만 힘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팀 해산할 때까지 자주 앤드류 리즐리의 역할 부재론이 거론되기도 했다(그렇지만 그룹의 방향성은 앤드류 리즐리가 결정했던 만큼 역할이 아주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꽝!’이란 의미의 그룹이름과 이미지는 앤디 워홀과 더불어 팝 아트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주로 미국의 대중적인 만화를 주제로 매스미디어를 묘사한 바 있는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에서 따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우정을 쌓아온 이 둘은 1979년, 이그제큐티브(Executive)라는 스카 밴드활동을 하면서 음악여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곧 밴드가 해산되고 향후 약 2년간 작곡과 홈메이킹 데모 테이프를 녹음하는 등 수련과정에 들어간다. 당시 작곡한 곡 중에는 나중 메가히트를 기록하는 ‘Careless whisper’와 ‘Club tropicana’가 있었다. 몇 번의 오디션 끝에 1982년, 댄스 레이블 < 이너비전 >(Innervision)과 계약을 체결한 왬은 데뷔싱글 ‘Wham rap!’을 발표했지만 영국차트 100위권에도 못 오르는 실패를 맛봤다. 그러나 그 해 10월에 내놓은 두 번째 싱글 ‘Young guns(go for it)’은 BBC 방송국의 프로그램 < 탑 오브 더 팝스 >(TOTP)에서의 인상적인 댄스 공연으로 차트 3위로 도약했다. 1983년 6월 9일, 팝 댄스로 가득 찬 이들의 데뷔앨범 < Fantastic >이 발매되었고, 이 앨범은 곧장 영국차트 1위를 기록했다. 한편 조지 마이클은 이미 이때부터 독자적인 행보를 걷기 시작한다. 같은 해 8월 그는 미국의 머슬 쇼울스(Muscle Shoals) 스튜디오에서 전설적인 프로듀서 제리 웩슬러와 함께 ‘Careless whisper’를 녹음했다(하지만 별로 성공적이지 않았고 나중에 런던에서 재녹음되어 나중에 출시된다). 1984년부터 왬의 센세이션이 일어났고, 동시에 그들의 히트 퍼레이드가 시작된다. 침대 맡에 적어놓았던 앤드류 리즐리의 노트에서 영감을 얻어 조지 마이클이 만든 ‘Wake me up before you go go’는 영국차트는 물론 미국차트에서도 정상을 차지했다. 수년간 공력을 들인 발라드 ‘Careless whisper’도 3주간 영국차트 넘버원을 지켰다. 이듬해에는 미국차트에서도 역시 3주간 1위를 기록했다. 조지 마이클이 자신의 부모님께 바친 이 싱글의 미국판 크레딧에는 ‘조지 마이클이 피처링한 왬의 곡’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앤드류 리즐리가 두 번째 앨범을 구상하는 동안, 조지 마이클은 다른 음악인들과도 활발한 교류를 했고, 엘튼 존과의 파트너십도 쌓기 시작했다. 12월에는 밴드 에이드의 난민 구호곡 ‘Do they know it''s christmas time?’ 녹음에도 참여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곡 때문에 그들의 크리스마스송 ‘Last christmas’가 차트 2위에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이듬해인 1985년 3월에는 서포모어 앨범 < Make It Big >이 출시되었고, 그 앨범은 제목대로 미국에서만 5백만 장이 팔리는 ‘빅 히트’를 기록했다. 당해 4월 왬은 서구 팝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주인공이 되었다. 그들은 1만여명이 운집한 중국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공연함으로써 ‘중국에서 공연한 최초의 서방 그룹’으로 기록되었다. 계속해서 조지 마이클은 라이브 에이드 행사에서 엘튼 존과 듀엣으로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를 불렀고, 또 엘튼 존의 싱글 ‘Nikita’에서 백업보컬을 담당하는 등 확실하게 솔로활동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결국 조지 마이클과 앤드류 리즐리는 여전히 친한 사이였지만 서로를 위해 1986년 왬을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1986년 4월 발매된 조지 마이클의 두 번째 솔로 싱글 ‘A different corner’는 공식적으로 밴드의 종말을 알리는 곡이었다. 같은 해 6월 윔블던 스타디움에 모인 7만2천명의 관객 앞에서 행한 마지막 콘서트 ‘The Final’을 끝으로 왬은 해산되었다. 왬 이후 조지 마이클은 < Faith >를 시작으로 솔로가수로서 놀랄만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반면 앤드류 리즐리는 < Son Of Albert >를 발표했지만 ‘Shake’라는 희미한 히트곡만 남겼을 뿐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왬의 음악을 담당했던 조지 마이클이 성공을 거두고, 음악적으로는 아무런 역할도 못했던 앤드류 리즐리가 실패한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렇지만 추억 속에 남아있던 앤드류 리즐리의 아름다운 매력이 솔로활동의 참담한 실패로 그나마 퇴색해버린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어쨌거나 왬은 80년대를 살아왔던 음악팬들에게는 아련한 기억으로, 또 아쉬움으로 존재하는 그런 그룹이다.
노래 : Andy Williams (앤디 윌리엄스)
앤디 윌리엄스는 감미로운 목소리와 편안한 음악스타일의 크루너(Crooner)창법 가수이다. 3장의 플래티넘과 17장의 골드 디스크상을 수상한 이지 리스닝 계열의 대표 주자로 최고의 스탠다드 팝 가수이자 영화주제가의 황제, TV 스타로서 ‘50~’60년대에 전성기와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앤디 윌리엄스는 1927년 12월 3일, 미국 아이오와주 월 레이크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 3명의 형과 보컬그룹을 ... 앤디 윌리엄스는 감미로운 목소리와 편안한 음악스타일의 크루너(Crooner)창법 가수이다. 3장의 플래티넘과 17장의 골드 디스크상을 수상한 이지 리스닝 계열의 대표 주자로 최고의 스탠다드 팝 가수이자 영화주제가의 황제, TV 스타로서 ‘50~’60년대에 전성기와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앤디 윌리엄스는 1927년 12월 3일, 미국 아이오와주 월 레이크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 3명의 형과 보컬그룹을 만들어 지역교회 성가대에서 함께 노래한 것이 계기가 되어 4인조 ‘윌리엄스 브라더즈(Williams Brothers)’를 결성하였다. ‘52년에 형이 결혼하자 그룹을 해산하게 되었으며, ‘53년에 솔로로 독립했다. ‘56년에 커덴스(Cadence) 레이블과 계약을 맺으면서 “Canadian Sunset”이란 곡으로 첫 성공을 거둔다. ‘61년 콜롬비아 레코드사로 이적한 후에 맡은 NBC 방송의 ‘Andy Williams Show’를 시청률 최고의 프로그램으로 만들면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게 된다. 특히 ‘61년도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주제가 “문 리버(Moon River)”를 비롯 수많은 할리우드 명작영화 주제가를 부르면서 ‘영화 주제가의 황제이자 대명사’가 되었다. ‘앤디 윌리엄스 쇼’는 ‘62년부터 ‘71년까지 방영되면서 3차례나 ‘에미상’을 수상했고, 명사회자로서 매년 크리스마스 특별 쇼를 진행했다.

또한 그래미상 후보로 5번이나 지명되었으며, 여러 해 동안 그래미상 시상식 사회를 맡았다. ‘84년에는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로 ‘Greatest Love Classics’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90년대 초 레코딩 업계를 떠나 자신의 초대형 극장인 ‘앤디 윌리암스 문 리버 극장(Andy Williams Moon River Theatre)’의 경영자로 변신하여 열정적인 문화사업을 펼쳤다. ‘81년 11월에는 국내에 내한 공연차 방문하여 국내 음악팬들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2011년 11월, 앤디 윌리엄스는 자신이 방광암을 앓고 있다고 하면서 잠정적인 활동중단을 밝혔다. 그 후 1년여 가까이 투병생활을 해오다 2012년 9월 25일 밤, 미주리 주 자택에서 향년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 1993년 김건모의 ‘핑계’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우리는 앞 아닌 뒤 박에 악센트가 있는 독특한 리듬의 ‘레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지만, 사실 한국 음악 팬들이 레게를 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의 일로, 문제의 곡은 1978년에 전국적 히트를 기록한 그룹 보니 엠(Boney M)의 ‘Rivers of Babylon’이었다. 그때는 레게라는 장르가 대중적인 관심이 되질 못해... 지난 1993년 김건모의 ‘핑계’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우리는 앞 아닌 뒤 박에 악센트가 있는 독특한 리듬의 ‘레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지만, 사실 한국 음악 팬들이 레게를 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의 일로, 문제의 곡은 1978년에 전국적 히트를 기록한 그룹 보니 엠(Boney M)의 ‘Rivers of Babylon’이었다. 그때는 레게라는 장르가 대중적인 관심이 되질 못해, 그것이 레게인지도 모르고 열심히 들었지만 따지고 보면 많은 국내 음악 대중들에게 레게음악의 정체를 알려준 노래는 ‘Rivers of Babylon’이었고 가수는 보니 엠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디스코’ 유행이 지구촌을 석권하던 1970년대 말 영국을 비롯한 유럽과 아시아에서 최고인기를 누렸다. 그러니까 ‘Rivers of Babylon’은 디스코와 레게의 퓨전이었던 셈이다. 그들 음악은 신시사이저에 의한 사운드와 마치 로봇과도 같은 드럼 리듬을 내세운 경쾌한 ‘유로디스코(Eurodisco)’로 당대를 풍미했다. 여성 멤버들의 적정한 수준의 섹시 비주얼 이미지가 관객들의 시선을 끌었던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조금은 키치적인 느낌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디스코 리듬에 실린 그들의 신나는 음악은 심각한 것을 싫어한 당대 사람들의 취향과 맞아 떨어지면서 미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 압도적 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국내에서도 그들의 인기는 막강했다. ‘Rivers of Babylon’은 지겨울 정도로 라디오 전파를 타고 흘러나왔으며 ‘Brown girl in the ring’ ‘Daddy cool’ ‘Rasputin’ ‘Sunny’ 등이 줄줄이 애청되었다. 1985년에는 김병조 진행의 최고인기 코미디 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한 곡 ‘Happy song’으로 또 한번 기염을 토했다. 그들의 앨범은 비록 미국시장의 외면으로(그들이 80년대 해산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빌보드 차트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한국에서는 그와 무관하게, 어떤 유명한 미국 디스코 가수 노래보다 더 호응을 만끽했다. 그것은 디스코의 경우도 한국 사람은 미국의 것보다는 유로디스코 즉 유럽의 취향에 가깝다는 점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보니 엠은 70년대 중반 미국에서 ‘Fly, robin, fly’와 ‘Get up and boogie(that’s right)’로 크게 성공한 그룹 실버 컨벤션(Silver Convention)의 성공에 고무되고 자극받은 독일의 프로듀서이자 작곡가 프랭크 파리안(Frank Farian)의 기획 작품이었다. 1989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그래미상 신인상을 수상했지만 나중 립싱크 사기로 몰락한 그 유명한 밀리 바닐리(Milli Vanilli)를 만들어낸 바로 그였다. 당시 파리안은 실버 컨벤션처럼 유로디스코를 내걸면 글로벌 인기가 가능할 것이라는 야심을 불태웠다. 먼저 그는 1976년 보니 엠이라는 가명으로 ‘Baby do you wanna lump’란 곡을 발표해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자 그 곡을 무대에서 재현해줄 실제 그룹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독일에서 클럽 디스크자키, 뮤지컬 가수, 세션 가수 등으로 활동하고 있던 서인도제도 출신 여자 셋과 남자 하나로 구성된 혼성 4인조 보니 엠이 꾸려진다. 결성한 이듬해인 1977년에만 그들은 ‘Daddy cool’를 시작으로 바비 헵(Bobby Hebb)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Sunny’, ‘Ma baker’, ‘Belfast’ 등 무려 네 곡을 영국 차트 상위권에 올려놓는 기염을 토했다. 1978년은 그들의 전성기였다. ‘Rivers of Babylon’과 ‘Mary’s boy child’가 폭발적인 판매고를 거듭하면서 영국 차트 1위를 점령했고 ‘Rasputin’도 톱10에 올랐다. ‘Rivers of Babylon’은 그때까지 영국 차트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싱글을 기록했고, ‘Mary’s boy child’는 다섯 번째에 랭크되었다. ‘Rivers of Babylon’은 그해 미국 빌보드에서 30위에 올라 체면은 차렸지만 파장은 짧았다. 1979년에도 영국에선 ‘Painter man’과 ‘Hooray! hooray!’와 같은 히트 곡들이 나왔다. 이 3년간 팔린 싱글과 앨범 판매고가 5000만장에 달했다. 앨범은 78년 < Nightflight To Venus >, 1979년 < Oceans Of Fantasy >이 유명했다. 마지막 히트넘버는 1981년의 ‘We kill the world’. 열거한 노래제목이 말해주듯 그들은 널리 알려진 구미의 히트송들을 레퍼토리로 삼았고, 자메이카 등 카리브해 국가들의 노래도 메뉴화했다. 이 또한 프랑크 파리안의 영민한 구상이다. ‘Mary’s boy child’는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에 의해 레코딩되어 기성세대가 숙지한 곡이며, ‘Rivers of Babylon’도 자메이카 레게 그룹 멜로디안스의 오리지널이었다. 익숙한 노래를 파리안 특유의 유로 디스코 재가공해 ‘복고와 최신’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한 것이다. 해산한 뒤 다시 1989년 재결합했고 이후에는 카바레를 토대로 유럽에서 다시 인기를 쌓았다. 1992년에는 자신의 히트곡을 리믹스한 ‘Boney M megamix’으로 영국차트 톱10에 올라 건재를 확인했다. 전성기에도 국내를 찾은 바 있던 그들은 활동30년을 맞아 2005년 7월16일 경기 과천 시민회관에서, 7월22일과 7월23일 올림픽공원에서 내한공연을 갖기도 했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가수, 그러나 가장 천대받는 가수 이처럼 극도로 엇갈린 가수는 없다. 미국의 대중 주간지 < 피플 >은 92년 “그는 팝 음악의 창공에 독특한 위치를 점령하고 있다”며 “팬들로부터 그처럼 열광적인 환호를 받고 동시에 음악 비평가들로부터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받는 아티스트도 드물 것이다”고 기술했다. ‘이 시대의 스타’ 마이클 볼튼(Michael Bolton), 1990년 신년 벽두에 ‘그대없...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가수, 그러나 가장 천대받는 가수 이처럼 극도로 엇갈린 가수는 없다. 미국의 대중 주간지 < 피플 >은 92년 “그는 팝 음악의 창공에 독특한 위치를 점령하고 있다”며 “팬들로부터 그처럼 열광적인 환호를 받고 동시에 음악 비평가들로부터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받는 아티스트도 드물 것이다”고 기술했다. ‘이 시대의 스타’ 마이클 볼튼(Michael Bolton), 1990년 신년 벽두에 ‘그대없이 어떻게 살아가리?(How am I supposed to live without you?)’로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라 1990년대 첫 슈퍼스타가 된,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메가톤급 히트 앨범 < 영혼의 공급자(Soul Provider) > 이후 발표하는 앨범마다 기록적인 판매로 대중적인 명성을 구가했지만 비평가들로부터는 철저히 외면 당했다. 평론가들은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그에게 호된 질책으로 일관했다. 그것은 거의 ‘두들겨 패는’ 수준이었다. 일례로 <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지의 유명 저널리스트 ‘로버트 힐번’은 그를 가리켜 창조성 없이 악보를 그대로 전달하는 단계에 그친다는 의미에서 ‘팝의 썰매’라고 규정짓고는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자신이 돌파 할 수 없는 노래에 결코 도전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틀 속에 안주하려 한다. 그와 음악과의 관계는 스티븐 시걸과 영화와의 관계나 같다” 말이 그렇지 이것은 모욕이나 매 한가지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가 평자들로부터 아티스트란 말을 들을 수가 없다. 볼튼이 소울의 고전을 비롯해 흘러간 명곡을 멋들어지게 재해석해 노래해도 그들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이구동성으로 “원작의 기품을 버려 놓았다”고 질타한다. 그 가운데 가장 심한 것이 < 롤링 스톤 >지의 평가였다. 이 잡지는 1993년 43명의 비평가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 그를 ‘최악의 남자 가수’로 선정했다. 또한 빅 히트작 < 불후의 고전(Timeless, The Classics) >를 ‘최악의 앨범’으로 뽑아 미국에서만 5백만 장 이상이 팔려 나간 대중적 인기를 무색케 해 버렸다. 그가 이처럼 비평계의 푸대접을 받게 된 것은 물론 그의 보컬 스타일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핏줄을 솟게 하고 마치 토해 내는 듯한’ 창법을 구사한다. 4옥타브를 충분히 넘나드는 넓은 음역, 이것이 팬들에게는 환상이었지만 평론가들의 귀에는 높고 답답하게 들릴 뿐이었다. 그들은 그의 가창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금방 눈치챌 정도로 ‘작위적’이어서 곧 사람들을 질리게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그들은 예술적 고뇌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없는 그 작위가 결국은 상업성을 노린 것임을 경계한다. 로버트 힐번이 지적하는 ‘안주적 자세’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이를테면 대중적 성공에 떠밀려 아티스트적 실험 정신을 휴지화했다는 것인데, 실제로 볼튼은 < 영혼의 공급자 > 이후 앨범들인 < 시간, 사랑 그리고 부드러움(Time, Love And Tenderness) >과 < 불후의 고전 >에서 새로움을 선사하기보다는 전작의 성공패턴을 답습하는 경향을 드러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옛 곡의 리메이크가 성공하자, 줄줄이 리메이크 작품을 내놓았으며 더구나 보컬 스타일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변명의 여지없이 전작의 성공 재창출에 지나치게 집착했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 팔리는 음반을 만들기 위해 모험을 가능한 배제한 채 빅히트된 음반(Soul provider)을 모델로 그 스타일을 철저히 쫓는다는 얘기다. 비평가들이 이처럼 유난히 그에게 비판의 화살을 겨냥하는 데는 그가 곡을 만들어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라는 점도 크게 작용한다. 평론가들은 노래만 하는 싱어일 경우 그가 대중적 호응만을 고려한다 할지라도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대중의 기호에 따라 그들의 정서를 위무해 주는 팝 가수도 나름대로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다. 그러나 곡을 만들 능력이 있는 사람, 즉 싱어송라이터의 경우는 자신의 음악 세계를 펼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그가 앨범 판매량을 늘리기에 얽매여 있을 때는 가차없이 장사꾼으로 매도해 버린다. 만약 볼튼이 단순한 싱어에 머물렀다면 아마도 그처럼 잔인한 혹평에 시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과연 이러한 비평가들의 철저한 외면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비평가들이 뭐라 떠들어도 압도적으로 자신의 노래를 사랑해 주는 대중이라는 ‘응원군’을 내세워 여유를 잃지 않았고 앨범의 높은 판매고를 ‘비평에 견디는’(Critic-proof) 방파제로 제시하곤 했다. 사실 그의 노래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진 음악 관계자들도 적지 않다. 우선 그가 1988년 ‘만의 부두에 앉아(Sitting on the dock of the bay)’를 리메이크했을 때 이 곡의 원작자인 오티스 레딩의 미망인 젤마 여사로부터 극찬을 받은 사실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는 볼튼에게 편지를 써서 또는 공개석상에서 그의 노래가 “지금까지 나온 남편 곡의 무수한 버전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며 “만약 지하에 있는 남편도 들었다면 흡족했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볼튼의 강력한 후원자인 어머니 헬렌 볼로틴(볼튼의 본명은 Bolotin) 여사는 “내 아들이 노래하는 것을 비명을 지르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그는 단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라며 비평계의 시각을 몰지각으로 단정한다. 그와 곡을 함께 쓰는 오랜 친구 다이안 워렌(Diane Warren)은 한편으로 볼튼에 대한 평자들의 차가운 시선이 오히려 대중의 호응을 증폭시켰다는 흥미로운 견해를 내놓고 있다. 그의 주장은 “한 남자가 혹독하게 비판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한없이 부드럽게 노래할 때 여성들은 오히려 그를 사랑해 준다. 여성들은 거기서 녹아 버린다”는 것이다. 부연하면 평론가들의 무차별 공격이 도리어 여성 특유의 모성본능을 자극해 그를 감싸주게 됐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그의 음악팬들은 절대 다수가 여성인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그처럼 비평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가엾은(?) 남자가-더구나 수려한 외모를 갖춘 남자가!-애절하게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를 노래할 때 대부분이 여성들은 이성이 마비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마이클 볼튼과 비평과의 대치는 곧 ‘감성적인 여성 팬들’과 ‘날카로운 평론가들’간의 보이지 않는 대결(?)의 측면도 가세된 셈이다. 하지만 아티스트란 어떤 형태로든 비평가들의 눈초리를 암암리에 의식하게 된다. 그는 얼마나 심기가 불편했던지 1991년 그래미 최우수 남자 팝 가수상을 받던 날 밤 기자들에게 “무례한 사람들은 내 엉덩이에 키스하라”고 퍼붓기도 했다. 여기서 무례한 사람들이란 마구 펜을 휘갈기는 저널리스트나 비평가를 가리킴은 물론이다. 그런데 1993년 하반기에 그가 내놓은 앨범 < 한가지 >는 상당히 비평가들을 의식해 만들었다는 느낌을 주었다. 보컬의 톤도 많이 낮추고 자작곡의 비중을 높였으며 비판의 핵이었던 리메이크 남발도 자제, 옛곡은 빌 위더스의 ‘내게 기대어(Lean on me)’ 한 곡으로 대폭 줄여 버린 것이었다. 평론가들의 반응은 당연히 ‘이제까지 볼튼의 앨범 중 최고’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작품성을 인정받는 대가로 대중적인 음반 판매 실적은 과거에 비해 저조해 두 마리 토끼를 사냥하지는 못했다. 그의 상업성이 유달리 지적 받게 된 데는 또한 그의 ‘눈물겨운 과거’도 한 요인이 되었다. 7살 때 섹스폰을 잡고 11살에 기타를 치는 등 음악 생활을 일찍 시작했지만 그의 청년기는 지극히 불우했다. 발표하는 음반마다 실패해 야간 업소 출연으로 겨우 연명해 나갈 정도였다. 1975년 레코드점 여직원인 모린(Maureen)과 결혼한 이후에도 생활은 개선되지 않아 노래 과외와 아이 돌봐주는 일, 즉 베이비시터로 집세를 충당하곤 했다(참고로 그가 봐 준 아이 중의 한 사람이 다름 아닌 폴라 압둘이었다. 이상하게도 두 사람의 관계는 묘한 악연으로 발전해 1990년 마이클 볼튼의 ‘그대 없이 어떻게 살아가리?’를 1위 자리에서 끌어내린 곡이 폴라 압둘의 ‘오포지츠 어트랙트(Opposites attract)’였고 이듬해 앨범 1위를 볼튼과 바통 터치한 주인공도 폴라 압둘이었다). 그의 술회에 따르면 당시 볼튼 부부와 세 딸은 마카로니와 치즈로 끼니를 때웠다고 하며 볼튼은 허구한 날 식탁에 앉아 “어떻게 집세 내고 자식을 먹여 살릴 것인가”만을 걱정했다고 한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터널의 끝에서도 빛을 볼 수 없을 만큼 참담했다”고 표현했다. 때문에 36세가 되어서야 성공했을 때(그는 1954년생으로 미국 코네티컷 주 뉴 헤이븐 출신) 주변에서 ‘하룻밤 자고 나니 스타가 된 케이스’라고 하자 “무슨 소리냐. 성공하기까지 대략 3천6백42번의 밤을 보냈다”고 응수했던 것이다. 비평가들은 그가 바닥 생활을 청산하자마자 곧바로 상업적으로 치달은 것을 못마땅해한다. 그럴수록 과거의 고난을 예술적으로 승화해 작품에 구현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의 성공은 사생활에도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 영혼의 공급자 >가 수면 위로 부상하던 1989년 아내 모린과 15년 결혼 생활을 청산하게 된 것이었다. 그 시점이 볼튼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그 무렵 한 인터뷰에서 그는 “하필 가장 잘 나가는 때에 성공을 축하하는 전화가 걸려 오는가 하면 이혼 증언 서류에 대한 변호사의 전화가 걸려 왔다. 너무 아이러니컬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그는 이듬해 정식으로 이혼했다. 그리하여 방문하는 관계로 매듭짓긴 했지만 세 딸들 아이사(20), 홀리(18), 타린(16)과도 떨어져 살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는 성심 성의껏 딸들을 보호하는 자상한 아빠의 역할에 충실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식들이 인정하는 가운데 1992년부터 TV배우인 니콜레트 셰리단(Nicollette Sheridan)과 건전한 연인 관계를 맺어 오고 있다. 마이클 볼튼은 우리에게 대중적으로 성공한 뮤지션과 비평계간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사이를 생각하게 한다. 앨범이 많이 팔려 나갈수록(진지함이 없을 경우) 비평가들로부터 매질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그처럼 실감나게 보여준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는 성공과 함께 이혼의 아픔을 겪었다. 그 스스로도 “성공하면 할수록 그것은 네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비디오 게임처럼 첫 번째 스크린을 통과하고 나면 너를 쏘려고 레이저 미사일을 단 비행접시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공의 대가는 쓰디쓴 법이다.
팝, 재즈 가수 팝, 재즈 가수
노래 : Tony Bennett (토니 베넷,Anthony Dominick Benedetto)
미국의 가수, 영화배우 미국의 가수, 영화배우
노래 : Barry Manilow (배리 매닐로우)
10월 말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따뜻한 외로움을 선사하는 ’When October goes’의 주인공 배리 매닐로우는 탄탄한 음악 지식에 따뜻한 감성, 호소력 있는 보컬을 더하며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 가수이다. 그는 다양한 악기 편성, 변조를 통한 감성 고조 등 클래식 코드를 따르는 동시에 강한 서민적 인간미를 전하며 세대와 인종, 지역을 뛰어 넘는 인기를 누렸다. 배리 매닐로우는 1946년 6월 17일 뉴욕 브루... 10월 말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따뜻한 외로움을 선사하는 ’When October goes’의 주인공 배리 매닐로우는 탄탄한 음악 지식에 따뜻한 감성, 호소력 있는 보컬을 더하며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 가수이다. 그는 다양한 악기 편성, 변조를 통한 감성 고조 등 클래식 코드를 따르는 동시에 강한 서민적 인간미를 전하며 세대와 인종, 지역을 뛰어 넘는 인기를 누렸다. 배리 매닐로우는 1946년 6월 17일 뉴욕 브루클린(Brooklyn) 빈민가에서 배리 알란 핀커스(Barry Alan Pincus)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두 살 때 아버지가 가정을 버리고 떠난 뒤 어머니의 성을 따라 배리 매닐로우(Barry Manilow)로 개명한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착실히 음악 실력을 쌓아나갔다. 일곱 살 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이후 음악 공부에 매진하여 명문 줄리어드 음악 학교(Juilliard School of Music)에 진학했다. 하지만 편모 슬하에서 자란 그는 여전히 고학생이었고, 생계를 위해 돈을 벌 수 있는 여러 가지 일에 손을 뻗어야 했다. 음반사의 우편물 발송, 프로듀서 보조역 등 여러 아르바이트에 전전하던 그는 이와 병행하여 CBS 방송국에서 프로그램 배경음악 작곡가로 일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클래식 학도였던 배리 매닐로우는 정상급 컨템포러리 팝 뮤지션으로 거듭나게 된다. CBS에서 인정 받기 시작한 이후 몇 년간 그는 돈벌이에 더욱 매진하여 맥도날드, KFC, 닥터 페퍼 등의 광고 음악 메이커로 활동한다. 1971년 영화배우 겸 가수로 유명한 배트 미들러(Bette Midler)의 피아니스트 겸 작/편곡자로 일하게 된 그는 다듬어진 음악성을 뽐내며 신인이었던 배트 미들러를 인기 가수로 만들었다. 이는 의 전신인 레코드사를 통해 그가 데뷔 앨범 을 발표하는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데뷔 앨범은 기대치에 비해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에 따라 스타 제조기이자 의 사장이었던 클라이브 데이비스(Clive Davis)는 배리 매닐로우에게 스캇 잉글리시(Scott English)가 히트시켰던 ’Brandy’를 ’Mandy’로 개사하여 발표하도록 하는 계획을 단행, 1974년 ’Mandy’가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하게끔 만들었다. 이때부터 배리의 성공시대는 시작됐다. 뒤를 이어 ’It’s a miracle’이 12위를 기록했고, 전작에 수록되었던 ’Could it be magic’이 싱글로 재 발매되어 6위에 오르는 늦깍이 성공을 거두었다. 세 번째 앨범 (1975)에서 ’I write the songs’를 다시 한 번 차트 정상에 올린 그는 ’Trying to get the feeling’(10위), ’Weekend in New England’(10위) 등의 곡을 연이어 히트시켰으며, 1977년 ’Looks like we made it’을 세 번째 정상에 올리며 절정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발라드 곡 위주의 활동을 하던 그는 1978년 카리브 정취의 디스코 넘버 ’Copacabana’를 차트 8위에 올리는 등 창작 영역을 조금씩 넓혀나갔고, 히트 앨범 에서 밝고 상큼한 발라드 곡 ’Can’t smile without you’(국내 CF에 삽입되어 인기를 누린 친숙한 곡이다.)를 3위에, ’Somewhere in the night’을 9위에 올렸다. 같은 해 영화 사운드 트랙 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인 그는 1978년 그래미 최우수 남성 아티스트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하였다. 1979년 에서 로커 이안 헌터(Ian Hunter)의 곡을 팝 발라드로 멋지게 재해석해 낸 ’Ships’가 9위에 오르며 올 타임 리퀘스트로 자리했지만 이후 배리 매닐로우의 인기는 하락세로 돌아섰다. 1980년 ’I made it through the rain’이 차트 10위에 오른 것 말고는 더 이상 톱 텐 히트곡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디온 워윅(Dionne Warwick) 등 여러 가수들의 프로듀서로 활동을 이어가던 배리 매닐로우는 1980년대 중반 스탠더드 재즈 싱어로 변신을 시도하여 새로운 매력을 전달했다. 1984년 발표한 재즈 앨범 에서 재즈 보컬의 최고봉 사라 본(Sarah Vaughan)과 듀엣으로 호흡을 맞추었으며, 수록곡인 ’When October goes’는 곡 자체의 매력은 물론 곡이 다루고 있는 시기적 특성이 함께 어필하면서 차트 성적과 무관하게 꾸준히 사랑 받는 그의 대표곡으로 자리했다. 이후 특별한 히트 곡은 만들어 내지 못했지만 재즈 앨범, 스탠더드 앨범, 크리스마스 앨범, 컴필레이션 앨범 등으로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고, 다른 뮤지션들의 프로듀서, 작곡가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를 비롯한 여러 뮤지컬 작업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지난 2001년 30여 년을 몸담았던 를 떠나 재즈 성향의 레이블 로 둥지를 옮긴 매닐로우는 메이플라워 아파트의 16개의 방을 컨셉트로 잡아 각종 장르를 선사한 를 발표하며 변함없는 왕성한 창작력을 뽐내고 있다.
노래 : Christina Aguilera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영미의 팝 음악은 그간 국내 대중음악의 길잡이 역할을 해왔다. 아무래도 우리 가요보다 수준이 높아 팝 음악만을 듣는 마니아들도 폭넓게 존재해 있고 사실 배울 것도 많다. 팝은 다양한 장르가 공존하며 음악시장에서 나름대로 지분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10대 중심의 댄스음악에 몰려 있는 국내 음악계에 귀감이 되어왔다. 이 점은 한편으로 미국 팝 음악은 결코 우리처럼 틴에이저 지향의 댄스음악으로 몰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 영미의 팝 음악은 그간 국내 대중음악의 길잡이 역할을 해왔다. 아무래도 우리 가요보다 수준이 높아 팝 음악만을 듣는 마니아들도 폭넓게 존재해 있고 사실 배울 것도 많다. 팝은 다양한 장르가 공존하며 음악시장에서 나름대로 지분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10대 중심의 댄스음악에 몰려 있는 국내 음악계에 귀감이 되어왔다. 이 점은 한편으로 미국 팝 음악은 결코 우리처럼 틴에이저 지향의 댄스음악으로 몰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웬일인지 미국에도 최근 10대 댄스음악 열풍이 불고 있다. 국내 음악계의 교사 역할을 해왔던 미국이 도리어 한국 음악계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라 있는 곡 ‘Genie in a bottle’의 주인공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Christina Aguilera)라는 이름의 여가수다. 올해 나이 겨우 18살이다. 금발에 푸른 눈의 뛰어난 미모를 소유해 노래 이상으로 가수 본인이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전해진다. 크리스티나를 출세시킨 곡 ‘Genie in a bottle’은 물론 댄스음악이다. 이러한 10대 여가수 선풍은 벌써 올해 들어 두 번째다. 상반기에는 브리트니 스피어스라는 소녀가수 얘기로 팝계가 한바탕 떠들썩했다. 크리스티나처럼 미모인 브리트니 스피어스는 17살이며 역시 댄스음악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크리스티나와 브리트니는 모두 올란도 지역의 TV 쇼프로 ‘미키 마우스 클럽’에 출연하다가 가수로 데뷔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것은 미국 음반업계의 스타시스템이 그간의 록 그룹이나 성인 여가수 중심에서 ‘미모의 틴에이저 여가수’를 키우는 쪽으로 선회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증거다. 근래 국내 가요계의 모습과 비슷해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차이점은 있다. 아무리 어린 여가수를 뽑아내 홍보와 마케팅으로 스타를 만들어낸다 할지라도 최소한 ‘기본’을 지킨다는 점이다. 그 기본이란 바로 가수의 필요조건인 가창력이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확실히 증명한다. 얼핏 금발의 미모라서 비디오만 믿고 내보낸 것 같지만 실은 나이답지 않게 노래를 잘한다. ‘Genie in a bottle’외에 그녀의 데뷔작에 수록된 곡 ‘I turn to you’ ‘So emotional’ ‘Reflection’ 등은 기성 가수가 들어도 인정할 정도의 노래 실력이다. 우리의 어린 여가수처럼 듣기가 전혀 거북하지 않다. 특히 발라드 ‘I turn to you’는 감정처리마저 아주 능란하다. 어린 백인 여가수치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흑인 리듬 앤 블루스의 소화력이 뛰어나다. 크리스티나의 포부는 감각이나 앳된 외모를 내세운 하이틴 스타가 아니라 가창력으로 승부하는 머라이어 캐리와 같은 ‘디바’가 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여전히 우리가 적극적으로 참고하고 반성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미국 팝계에 어린 여가수 붐이 일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같거나 또는 앞서 있다고 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멤버 : Cheryl Gamble, Leanne Lyons, Tamara Johnson 멤버 : Cheryl Gamble, Leanne Lyons, Tamara Johnson
노래 : Maria Mena (마리아 메나)
멤버 : 카를로스 마린 (Carlos Marin), 세바스티앙 이장바르 (Sebastien Izambard), 데이비드 밀러 (David Miller), 우르스 뷜러 (Urs Buhler) 멤버 : 카를로스 마린 (Carlos Marin), 세바스티앙 이장바르 (Sebastien Izambard), 데이비드 밀러 (David Miller), 우르스 뷜러 (Urs Buhler)
R&B, 소울 가수 R&B, 소울 가수
노래 : Bob Dylan (밥 딜런 ,Robert Allen Zimmerman)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eatles) 그리고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와 함께 최정상의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이들 ‘전설의 빅 4’ 가운데에서도 딜런이 남긴 궤적은 차별화 아닌 특화(特化)되어 역사를 장식한다.

얼핏 그의 위상은 ‘실적주의’로 따질 때 매우 허약해 보인다. 엘비스, 비틀스, 롤링 스톤즈는 그 화려한 전설에 걸맞게 무수한 히트곡을 쏟아냈다. 넘버 원 히트곡만 치더라도 엘비스는 18곡(통산 2위), 비틀스는 20곡(1위), 스톤즈는 8곡(11위)이나 된다. 하지만 딜런은 그 흔한 차트 1위곡 하나가 없다. ‘Like a rolling stone’과 ‘Rainy day woman #12 & 35’ 등 두 곡이 2위에 오른 것이 고작이다. 차트 톱 10을 기록한 곡을 다 합쳐봐야 4곡에 불과할 뿐이다. 그에게 대중성이란 어휘는 어울리지 않는다. 상업적이란 말과는 아예 인연이 없다. 이렇듯 실적이 미미한 데도 록의 역사는 마치 신주 모시듯 그를 전설적 존재로 떠받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는 차트 정복 외에도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비록 그 가지는 다를지언정 ‘록의 스타일 확립’ 이라는 몸체는 유사하다는 것이다.

비틀스는 록의 예술적 지반을 확대했고, 스톤즈는 록에 헌신하며 형식미를 완성했고, 엘비스는 록의 정체성을 부여했다고들 한다. 분명히 딜런도 몸체에 자리한다. 깃털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타(他) 3인의 몸체가 외양이라면 그는 ‘내면’ 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노랫말이요, 메시지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음악은 사운드와 형식만으로 이미 메시지가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로큰롤이 폭발하여 확산되던 시점인 1950년대, 즉 엘비스가 활약하던 당시에 로큰롤은 메시지가 없었다. 1960년대 들어서 비틀스가 미국을 급습해 록의 르네상스를 일궈내고 있던 때까지도 록은 의미있는 가사와 격리된 상태였다. 그래서 의식계층으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그 때 밥 딜런이 있었다. 비틀스는 누구보다 먼저 딜런의 위력을 절감했다. 그의 포크 사운드와 메시지를 귀담아 듣고 그것을 자신들의 음악에 적극 수용한다. 1965년말 < Rubber Soul > 앨범의 수록곡인 ‘In my life’, ‘Girl’, ‘Norwegian wood’ 등에서 ‘톤 다운’ 을 드러내며 메시지를 잠복시킨 것은 전적으로 딜런의 영향 때문이었다.

밥 딜런은 실로 대중 음악의 지성사(知性史)를 이룬다. 타임(Time)지의 제이 칵스는 1989년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존 업다이크의 소설과 밥 딜런의 앨범 가운데 어느 것이 미국인들의 삶에 보다 자극을 주었는가? 존 업다이크 쪽에 표를 던진 사람이라면 이 기사를 여기까지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가사는 그러나 때론 메시지의 파악이 어려운 ‘난해한 현대시’ 와 같다. 밑줄 긋고 열심히 분석해도 도대체 명쾌하지가 않다. 1960년대 중반 < Another side of Bob Dylan >, < Bring it all black home >, < Highway 61 revisited >가 연속 발표되었을 때, 미국 각 대학의 영문과에 ‘밥 딜런 시분석’ 강좌 개설이 유행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팝팬들에게 딜런이 상대적으로 소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에게도 이 정도인데 영어의 벽에 막혀 있는 우리가 어찌 그를 쉽게 수용할 수 있었겠는가. 때문인지 음반마저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초기곡으로 알려진 것은 그나마 메시지가 확연한 ‘Blowin’ in the wind’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1970년대 중반의 금지곡 태풍으로 반전(反戰) 노래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방송과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 외 우리 팝 인구에 회자된 노래로 ‘One more cup of coffee’나 ‘Knockin’ on heaven’s door’가 있다. 그러나 그의 대표곡 반열에도 오르지 못하는 ‘One more cup of coffee’가 통한 것은 단지 낭만적 제목과 함께 친숙한 선율 때문이었을 뿐, 딜런의 음악 세계에 대한 천착의 결과물은 전혀 아니었다. ‘Knockin’ on heaven’s door’ 인기의 영예도 실은 건스 앤 로지스가 더 누렸다.

극소수의 곡을 제외하고 밥 딜런은 우리에게 인기가 없었다.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에 비한다면 엄청난 ‘부당 대우’였다. 언어 장벽과 무관한 음악 스타일 측면에서도 우리의 ‘홀대’ 는 마찬가지였다. 멜로디가 그럴싸한 곡이 있더라도 풍기는 내음이 지극히 ‘미국적’ 이었기에 우리의 청취 감성은 딜런을 꺼리곤 했다. 그의 음악 세계라 할 포크, 컨트리, 블루스는 미국 전통과 긴밀한 함수 관계를 지닌다. 선율과 사운드의 영국적인 맛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그의 음악에 잠기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사이에 우린 어느덧 딜런과 크게 멀어져버렸다. 록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꼭 딜런에서 막힌다. 신세대 가운데 더러는 우리의 팝 수용 문화에서 딜런 공백이 가져온 취약성을 맹렬히 질타하기도 한다. 우리 기준에서의 ‘팝 음악 여과’는 바람직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의역은 정확한 직역이 기초돼야 올바르다. 미국의 해석을 전제한 뒤라야 우리식 필터링의 의의가 배가된다.

그 직역의 첫 번째 대상이 바로 밥 딜런이다. 밥 딜런이 미국의 현대 음악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그의 음악몸체가 곧 시대와 세대의 흐름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딜런의 음악이 변화하는 과정과 그것을 있게 한 배경, 또한 그것을 주도해간 그의 자세는 ‘음악외적 환경’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먼저 포크 록(Folk-Rock)이다. 그가 1960년대 초반 저항적인 모던 포크로 베이비 붐 세대를 견인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통기타만으로 연주되는 단순한 구조이지만 그것의 포획력은 비틀스가 사정권에 들어올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비틀스가 베이비 붐 세대를 발현시켰다면 그는 그들의 의식화를 유도했다. 그러나 딜런은 케네디의 피살에 자극받으면서 스스로 ‘위기감’ 을 불어넣는다. 이미 비틀스가 세대의 청취 볼륨을 증폭시킨 마당에 포크의 음량 가지고 과연 세대를 관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71년 그는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그들(비틀스)은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코드는 정말 도에 지나친 것이었지만 하모니가 그것을 타당하게끔 했다. 그러나 맹세하건데 난 정말 그들에게 빠졌다. 모두들 그들이 어린 10대를 위한 광대이며 곧 사라질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내겐 명확했다. 그들이 지속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난 그들이 음악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머리 속에는 비틀스가 전부였다.” 그는 일렉트릭 기타를 잡아야 했다. 그것이 포크 록이었다. 포크의 순정파들로부터 배신자라는 질타는 불 보듯 뻔했다. 그가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알 쿠퍼(Al Kooper), 마이크 블룸필드(Mike Boomfield)가 참여한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Butterfield Blues Band)와 함께 전기 기타 연주를 했을 때 관중들은 “이건 포크 공연이야 나가!”라고 야유하며 돌과 계란 세례를 퍼부었다. 무대에서 내쫓긴 그는 통기타를 들고 되돌아왔지만 의미심장한 ‘It’s all over now’, ‘Baby blue’를 부르며 포크 관객들에게 아듀를 고했다. 껄끄러운 통과의례를 거친 뒤 밥 딜런의 포크 록은 ’Like a rolling stone’의 빅히트와 함께 만개했다. 이젠 막을 자도 없어졌다. 포크 록은 당시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존 레논과 밥 딜런을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 그룹 버즈(Byrds)는 ‘Mr. Tambourine man’으로 인기 가도를 질주했다. 그러나 그 곡은 딜런의 작품이었다.

버즈 뿐만 아니라 당시 포크 록계열 뮤지션치고 딜런의 곡을 손대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단숨에 포크 록은 1960년대 록의 주류로 부상했다. 1960년대 중.후반을 강타한 싸이키델릭 록(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도 실상 포크 록에 영향받은 흐름이었다. 그럼 어째서 포크 록은 1960년대 청춘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의식을 대변할 수 있었을까? 비틀스가 딜런에게 배우고, 딜런이 비틀스로부터 영감을 얻은 ‘포크와 록의 결합’ 은 시대성 견인을 가능케 한 절묘한 무브먼트였다. 록은 생태적으로 거리의 청춘에 의해 확립된 ‘하위문화적 표현’이다. 따라서 하이 클래스나 인텔리겐차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다. 또한 포크는 저항성을 견지하는 민중 음악이지만 음악의 주체나 주소비자층은 학생과 지식인 세력이다. 성질상 엇비슷하면서도 걸어온 길이나 ‘계급성’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밥 딜런이 포크 오리지널로부터 급격히 퇴각하여 록으로 전향한 것은 단지 추세의 편승이 아닌 완전함을 향한 ‘하층문화의 긴급 수혈’로 보인다. 이를테면 ‘위’의 고매한 문제의식과 ‘아래’의 근원적 반항을 한고리로 엮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항 영역의 지반 확대와 수요자의 확충을 기할 가능성은 올라가게 된다.

지식인만이 아닌 1960년대 젊은이들의 ‘계층포괄적 무브먼트’ 는 포크 록과 이 점에 있어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1960년대 중후반을 물들인 ‘히피보헤미안’ 물결도 딜런과 떼어낼 수 없는 흐름. 1960년대 록 역사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부분이다. ‘Like a rolling stone’은 포크 지식인의 소리라기보다 보헤미안적 정서의 노출로 파악해야 한다. 당시 딜런은 가치의 상대성을 신뢰하고 제도에 흡수되기룰 거부하는 이른바 비트(Beat) 사상에 빠져 있었다. 그가 진보적 시인인 알렌 긴스버그(Allen Ginsberg)와 교류하며 ‘개인 혁명’에 골똘해 있을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다. 비트는 이후 히피의 융기에 주요 인자가 되는데, 1960년대 중반 딜런의 음악을 가로지르는 것이 바로 이 ‘히피 보헤미안 정서’라 할 수 있다. 스스로 록 세계로 옮아가고 방랑적 지향을 설파한 것은 기존과 기성의 틀 깨기에 목말라 있던 베이비 붐 세대들에게 영도자가 제공한 ‘산교육’과 다름없었다. 따라서 밥 딜런은 그에게 등을 돌린 포크 근본주의자들의 수보다 휠씬 더 많은 록팬을 거뜬히 확보하게 된다. 음악적으로 딜런의 창작성이 이 때만큼 가공의 위력을 떨친 적도 없다. < Highway 61 Revisited >와 < Blonde On Blonde > 앨범은 포크의 엄숙주의에서 해방되어 록과의 결합으로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포획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음악은 ‘남을 위해’ 이데올로기에 봉사한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즐거움이 가져온 산물이기도 했다. 그가 포크의 프로테스트로부터 이탈한 것은 바로 ‘자유’와 등식화되는 ‘예술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는 저항성 대신 예술성을 얻었다. 개인적 경사도 겹쳤다. 사적으로 사라 로운즈와의 결혼은 그의 창작력 한층 북돋아주었으며 그 충만한 행복감은 그대로 < Blonde On Blonde > 앨범에 나타났다. 이 앨범의 탁월한 질감은 상당부분 사라와의 결혼이 낳은 것이라는 게 평자들의 일치된 시각이다. 나중 사라와의 파경 또한 그에게 또 하나의 명반 < Blood On The Tracks >를 안겨준다. 히피의 낭만적인 집단주의와 곧바로 이어진 이피(Yippie)의 전투성이 극에 달할 무렵 그가 뉴욕의 외곽 빅 핑크(Big Pink) 지하실에서 한가로이 더 밴드(The Band)의 멤버들과 자유 세션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가 가져온 행보이기도 했지만 그가 의도적으로 은둔을 택한 것은 분명했다. 세상이 소란함으로 가득할 때 그는 정반대로 정적을 취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물꼬를 터준 미국 사회의 격랑이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을 것으로 예측했는지도 모른다. 세대의 공동체 지향은 지극히 ‘비이성적’으로 비춰졌을 테고 오히려 그는 그럴수록 자신에게 돌아와 근본을 탐구하는 것이 올바른 행위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한 심저(心底)가 < John wesley Harding >과 < Nashiville Skyline >의 골간에 자리한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뜻밖에’ 재래식 컨트리 음악을 선보였다. 두 앨범은 모두 내쉬빌에서 녹음되었고 < Nashiville Skyline >의 경우 딜런은 컨트리 음악의 거성 자니 캐시(Johnny Cash)와 듀오로 ‘Girl from the north country’에서 다정히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이 앨범에서 톱 10 히트곡 ‘Lay lady lay’가 나왔다. 이 곡을 비롯해 대부분의 수록곡에서 딜런의 보컬은 예의 날카로움이 거세된 채 한결 부드러워졌고 가사도 접근이 비교적 용이해지는 등 멜로딕한 무드가 전체를 지배했다. 다시 세상은 소용돌이에서 호수의 조용함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1970년대 초반의 분위기였다. 딜런이 씨앗을 뿌린 ‘컨트리 록’ 은 1970년대 내내 주요 장르 중 하나로 맹위를 떨쳤다.

딜런은 언제나 흐름의 주역이었다. 나중 음반화된 더 밴드와의 세션 앨범 < Basement Tapes >가 록 역사에서 ‘특혜’를 받는 것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970년대 들어서 그는 ‘대중적’ 관점에서 뿌리에 대한 천착에 박차를 가했다. 예전에 그는 ‘좋은 사람만 따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이 많이 따를수록 좋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그가 1970년 < Self Portrait > 앨범에서 ‘Moon river’를 포함한 팝 스탠다드 넘버들을 노래한 것은 이러한 사고와 맥락이 닿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눈을 흘겼다. 레코드 월드(Record World)지는 이 앨범을 두고 “혁명은 끝났다. 밥 딜런이 ‘미스터 존스’에게 ‘Blue moon’을 불러주고 있다”며 혹평했다.(미스터 존스는 딜런이 < Highway 61 Revisited >의 ‘Ballad of thin man’에서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 존스 씨?”라고 했던 가공의 인물로 ‘제도권 인사’를 상징한다.) 빌보드 차트3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처럼 평단의 이해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 Self Portrait >앨범을 상업적 표현으로 볼 수는 없다. 비판의 칼을 휘두르는 비평가들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근본을 탐구하는 방법론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딜런이 1970년대 후반부에 기독교에 귀의한 것도 비슷한 문맥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사실 신(神)에의 의지가 엿보인 < Show Train Coming >, < Saved >, < Shot Of Love > 등 3장의 종교풍 음반은 ‘사고의 깊이’가 두드러졌지만 ‘변신’이라는 부정적 의미에 가치가 함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1970년대 딜런을 ‘혼미의 거듭’으로 규정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그것을 뒤집어보면 그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에 충실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아티스트의 본령이다. 밥 딜런은 언제나 음악을 통해 세상과 삶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고자 했다.

1980년대의 밥 딜런은 1970년대의 습기를 벗고 ‘열기’를 회복한다. 정치적 시각도 이입한 < Infidels >, < Empire Burlesque > 그리고 1989년에 나온 < Oh Mercy >는 이전의 앨범들과 명백한 분리선을 긋는다. 날카로운 보컬은 오히려 1960년대의 모습에 더 가깝다. 그는 1980년대 중반 라이브 에이드(Live Aid),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아티스트의 모임(Sun City) 등 일련의 자선행사에 얼굴을 내밀어 저항 전선에 복귀했다. 한 무대에서 그는 U2의 보노(Bono)와 함께 ‘Blowin’ in the wind’를 부르기도 했다. 딜런의 1980년대 앨범들에는 당시의 보수적이고 위압적 풍토를 거부하는 저항성이 숨쉰다. 그는 시대의 주류 한복판에는 없었지만 ‘시대의 공기’와 늘 함께 호흡했다. 그 공기를 어떤 때는 앞장 서 조성하고 어떤 때는 그것을 피해갔다. 밥 딜런의 한 면만을 바라보게 되면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그가 서 있던 ‘양쪽’ 자리를 다 관찰해야만 그 ‘드라마틱한 록 역사의 굴곡’ 을 읽을 수 있다. 록의 역사는 실로 위와 아래, 진보와 보수, 주류와 비주류, 기존과 대안이 끊임없이 부침을 되풀이 해왔다. 밥 딜런이 밟아온 길은 그것의 축소판이었다. 그러나 어떤 시점에서라도 - 가령 프로테스트의 깃발을 울렸을 때나, 대중성에 기웃거렸을 때나 - 딜런이 주변의 압박에 수동적으로 임한 적은 없다. 남이 시켜서 일렉트릭의 세계로 떠밀려 간 것이 아니었고, 의도적으로 신비를 축적하기 위해 은둔했던 것도 아니다. 그의 터전은 언제나 자신의 의지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비평가들이 밥 딜런을 전설로 숭앙하는 것은 그가 대중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문 ‘음악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음악인의 최고 영예인 ‘아티스트’란 소리를 들어 마땅했다. 그는 록에 언어를 불어넣었다. 포크와 컨트리를 록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시대와 맞서기도 했고 자신의 예술성에 천착하기도 했다. 그러한 업적과 성과의 편린들이 모여 그의 ‘광활한 아티스트의 세계를 축조하고 있다. 밥 딜런은 역사의 수혜와 위협 속에서 ‘인간’을 살려냈다. 음악인으로서 인간의 몸체는 다름 아닌 자유일 것이다. 밥 딜런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노래 : Macy Gray (메이시 그레이)
Talkin’ Bout A Sexual Revolution 오는 9월 18일 메이시 그레이의 두 번째 앨범 < The Id >가 발매된다. 이미 몇 달 전부터 미국과 영국의 유수한 매체들 그리고 팬들은 그녀의 신보 소식에 몸이 후끈 달아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번 앨범은 ‘아주 화끈한 앨범’이라고 한다. 벌써부터 흥분된다. 지난 2000년 5월 영국 록 잡지 < Q >에서는 ‘이 시대 최고의 소울 앨범’’이라... Talkin’ Bout A Sexual Revolution 오는 9월 18일 메이시 그레이의 두 번째 앨범 < The Id >가 발매된다. 이미 몇 달 전부터 미국과 영국의 유수한 매체들 그리고 팬들은 그녀의 신보 소식에 몸이 후끈 달아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번 앨범은 ‘아주 화끈한 앨범’이라고 한다. 벌써부터 흥분된다. 지난 2000년 5월 영국 록 잡지 < Q >에서는 ‘이 시대 최고의 소울 앨범’’이라는 특집기사를 실었다. 각 분야 최고의 명반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는 취지로 마련된 이 기사에서, < Q > 편집진들은 총 12장의 소울 앨범을 선정했다. 아레사 프랭클린의 < Lady Soul >부터 제임스 브라운의 < Live At The Apollo >, 마빈 게이의 < Midnight Love > 등 그야말로 ‘시대를 빛낸’ 소울 명반들이 리스트에 올랐다. 이밖에 오티스 레딩, 스티비 원더, 레이 찰스, 알 그린, 커티스 메이필드, 그리고 마이클 잭슨의 음반이 꼽혔다. 그런데 거기서 다소 의외의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메이시 그레이였고, 그녀의 데뷔앨범 < On How Life Is >가 소울 거장들의 명반들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데뷔한 지 1년도 안된 신인가수였다. 어떻게 그런 풋내기 가수가 경력 30∼40년이 된 베테랑 가수들과 동석에 위치할 수 있을까. 하지만 바로 그랬다. 단 한 장의 앨범으로 메이시 그레이는 일약 최고의 소울 여가수로 도약한 것이다. 그레이를 선택한 편집진들의 변은 간단하다. "메이시 그레이가 이 시대에 나온 진정한 첫 ‘소울 디바’라는 것을 알아채기 위해서는 그리 날카로운 눈과 귀를 가질 필요는 없다." < Q >의 호평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빌리 할리데이와 니나 시몬과 비교되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독특한 그녀의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자격이 있다. 또한 힙 합, 소울, 레게, 올드 스쿨 펑크를 절묘하게 믹스한 음악스타일은 근 20년 동안 들을 수 없던 매력 넘치는 것이었다. 이러한 ‘특별함’은 음악을 조금이라도 들어본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다. 단지 시간이 문제일 뿐. 1999년 7월 발매된 메이시 그레이의 데뷔앨범은 느린 황소걸음으로 차트에 진입하더니 빌보드 앨범차트 4위까지 올랐고, 미국에서만 3백만장이 팔렸다. 히트곡 ‘I try’는 싱글차트 5위라는 좋은 성적을 냈으며, 메이시는 비평가들의 전폭적인 찬사를 받았다. 그녀는 2000년 < 그래미 > 신인상을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에게 빼앗겼지만 뒷심을 발휘, 올해 < 그래미 >에서는 ‘최우수 여자 팝 보컬 퍼포먼스’ 부문을 기어코 거머쥐었다. 이 소울 여가수는 어쩌면 본고장 미국보다 영국에서 더 큰 대접을 받았다. 데뷔한 그 해부터 영국 음악팬들과 비평가들이 열렬히 환영했고 각종 공연과 행사에 그녀를 초청했다. 앞선 < Q >의 예는 물론, 2000년 < 브릿 어워즈 >는 ‘최우수 여성 해외 아티스트’와 ‘최우수 해외 신인’ 부문을 메이시의 몫으로 남겨 두었다. 1970년 9월 9일 미국 오하이오의 캔튼에서 태어난 메이시 그레이는 현재 세 아이의 엄마다. 결혼에 실패했고, 공연에 나설 때면 아이들은 그녀의 어머니가 맡는다. 그녀의 이름은 사실 본명이 아니다. 본명은 나탈리 매킨타이어(Natalie McIntyre). 어렸을 적 몹시 따르던 이웃집 아저씨가 죽은 줄 알고 추모하는 마음에서 그의 이름을 예명으로 삼았다. 음악을 좋아한 부모님 덕에 어려서부터 메이시는 마빈 게이, 스티비 원더, 아레사 프랭클린 같은 소울 아티스트들의 음반을 들으며 자랐다. 주목할 건 그녀가 소울 음악뿐 아니라 당시 막 태동하던 힙 합에 심취했었다는 사실이다.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시나리오를 공부하던 메이시는 그곳에서 재즈밴드에서 음악을 시작하게 된다. 앞서 풋내기 가수라고 표현했지만 그녀는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8년간 활동한, 이미 충분한 기량을 쌓은 뮤지션이었다. 마침내 1998년 에픽 레코드와 계약한 그녀는 프로듀서 앤드류 슬레이터를 맞이해 이듬해 ‘Stll’, ‘I try’, ‘Why didn’t you call me’ 등을 수록한 데뷔앨범을 발표했다. 2집 < The Id >의 녹음에 들어가기 전 메이시 그레이는 꽤 오랫동안 유럽을 여행했다(그 사이에 팻보이 슬림의 앨범작업에도 참여했다). 덕분에 그녀는 프랑스의 아프리카 리듬, 독일의 힙합, 영국의 테크노, 드럼 앤 베이스, 정글 뮤직 등을 접했고, 그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채로운 건 이처럼 유럽음악에 영향 받아 음반을 만들었는데 정작 제작은 미국 당대 최고의 록 프로듀서 릭 루빈이 총괄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음반을 들어보면 더할 나위 없이 활기차고 펑키한 소울과 힙 합이 담겨있지만 곳곳에 록 필이 더해져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릭 루빈의 기막힌 솜씨다. 전작과는 달리 여러 뮤지션들이 게스트 보컬로 참여한 것도 신보의 특색이다. 첫 트랙 ‘Psychopath’부터 테크노와 힙 합에 믹스된 록 비트가 강렬하다. 시종일관 흥겨운 가운데 날카롭게 솟구치는 기타 솔로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기타리스트 존 프루시안테의 작품이다. ‘I try’나 ‘Still’ 같은 곡을 바라는 팬들을 위해서는 ‘Sweet baby’가 있다. 메이시의 절친한 친구인 에리카 바두가 백업보컬로 나선 이 곡은 팬들을 한없이 편안하게 만들만한 부드러운 곡이다. 앨범의 주제곡이자 가장 의미심장한 트랙은 ‘Sexual revolution’. 현란한 1970년대 디스코 풍의 이 곡은 ‘내 자신의 성 혁명을 통해 정체성을 찾자’는 선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쉽게 말하면, 눈치 보지 말고 자유롭게 섹스하자는 얘기다(이미 전작의 ‘Caligula’, ‘Do something’ 같은 곡을 통해 과감한 성표현을 한 바 있다). 이 앨범의 제목이 ‘본능적 충동’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녀의 의도는 더욱 명백하다. 아무튼 그 곡은 아마도 마빈 게이의 ‘Sexual healing’과 더불어 섹스를 적극 권장하는 최고의 에로틱 송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 외에 성룡의 영화 < 러시 아워2 >에도 삽입된 ‘The world is yours’,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의 앤지 스톤과 힙 합 그룹 모스 데프가 함께 한 ‘My nutmeg fantasy’ 등이 필청트랙. 메이시 그레이는 어릴 적 목소리 때문에 주위 친구들로부터 소위 ‘왕따’ 취급을 당하며 놀림받은 걸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러나 놀림감이었던 메이시의 목소리야말로 지금 그녀가 가진 최고의 미덕이다. 목소리와 더불어 세 아이의 엄마인 메이시가 펼치는 솔직한 성담론은 그녀를 더욱 더 돋보이게 한다. 예전에 트레이시 채프먼이 그랬듯이 이 소울 디바는 지금 혁명을 논하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선뜻 얘기하지 않는 성의 혁명을, 그녀식대로 화끈하고 시끄럽게.
노래 : Luther Vandross (루더 밴드로스,Luther Ronzoni Vandross)
흑인 남성 싱어 송라이터이자 프로듀서로 입지전적인 위치를 다진 루더 밴드로스(Luther Vandross)는 본격적인 캐리어를 쌓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왕성한 음악 활동을 펼치면서 20세기 후반 리듬 앤 블루스를 언급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거물급 인사가 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이후 그의 노래들이 빌보드 싱글 차트의 높은 순위에 오르면서 알려졌다. 제작자로서 그에 대한 평가는 스티비... 흑인 남성 싱어 송라이터이자 프로듀서로 입지전적인 위치를 다진 루더 밴드로스(Luther Vandross)는 본격적인 캐리어를 쌓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왕성한 음악 활동을 펼치면서 20세기 후반 리듬 앤 블루스를 언급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거물급 인사가 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이후 그의 노래들이 빌보드 싱글 차트의 높은 순위에 오르면서 알려졌다. 제작자로서 그에 대한 평가는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나 프린스(Prince), 테디 라일리(Teddy Riley) 등과 동등한 위치에서 언급되고 있으며 초코 우유처럼 감미로운 그의 테너와 바리톤의 중간 음색으로 그려지는 가창력은 현존 최정상임을 입증한다. 1951년 4월 20일 뉴욕에서 태어난 이 재능 있는 뮤지션은 샘 쿡(Sam Cooke),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같은 소울 가수들의 음반들을 들으며 음악적인 진실함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채득했다. 1970년대에는 선배 가수들의 백보컬 활동과 TV 광고 노래를 부름으로서 음악 생활을 시작했다. 1981년, 루더 밴드로스는 첫 번째 정규 앨범 < Never Too Much >를 자신이 직접 어레인지와 제작을 담당해 음악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음반 제작을 관장하는 흑인 아티스트가 드물었기 때문에 루더 밴드로스의 처녀작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작품에 대한 호평으로 그는 1980년대 초반 ‘소울의 영왕’ 아레사 프랭클린을 위해 퓨젼 재즈 베이시스트 마커스 밀러(Marcus Miller)와 파트너가 되어 ‘Jump to it(24위)’, ‘Get it right(61위)’ 등을 작곡하고 음반을 제작하면서 그녀에게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이후 이들의 관계는 음악적인 파트너쉽을 넘어 인간적인 우정으로 지속된다. 1980년대를 활동하면서 모두 6장의 정규 음반을 발표했지만 싱글 종합 차트와 국내에서의 반응은 흑인 음악 차트에 비해 폭발적이지는 못했다. 데뷔 곡 ‘Never too much(33위)’, 댄서블한 ‘Stop to love(15위)’와 ‘She won’t talk to me(30위)’, 그리고 ‘Give me the reason(57위)’과 ‘Any love(44위)’ 등이 주로 차트의 허리권에서 멤돌다가 사라지곤 했었다. 1990년대가 밝아오면서 루더 밴드로스는 지난 10년을 재조명하는 베스트 음반을 발표했다. 이 앨범에 수록된 신곡 ‘Here and now(6위)’가 최초로 Top10에 랭크되면서 20세기의 마지막 10년을 화려하게 장식할 준비를 시작했다. 1991년의 < Power Of Love >는 싱글 ‘Power of love/Love power(4위)’와 ‘Don’t want to be a fool(9위)’의 호 성적으로 그의 앨범들 중에서 가장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으며, 1992년에는 영화 < 모 머니 >에 수록된 ‘The best thing in life are free(10위)’를 자넷 잭슨(Janet Jackson)과 함께 호흡을 맞추었고 1994년에는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와 함께 ‘Endless love(2위)’를 리메이크 했다. 루더 밴드로스의 음악 스타일과 역량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친절하게 멜로디를 살려주는 그의 노래들은 화음보다 최소한의 리듬을 강조하는 현재의 흑인 음악의 트랜드와 다소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지금, 그의 음악이 발전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정체하고 있는 것처럼 비추어 지는 면이 없지 않지만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한 번도 식은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음악은 언제든지 사랑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노래 : Monica (모니카,Monica Denise Arnold)
지난 1998년 빌보드지 연말 결산에서 그 해 가장 많이 판매된 싱글은 단번에 260만 장을 팔아치운 ‘The boy is mine’이었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그 남자는 내 꺼야”라며 두 여성이 ‘티격태격’ 사랑싸움을 벌이던 그 싱글은 당시 ‘뉴 히트메이커’로 부상하던 로드니 저킨스(Rodney Jerkins)가 지휘했고, 세 남녀의 ‘트라이앵글 러브’를 노래해 빌보드 차트 13주간 1위를 고수했다. 그 ... 지난 1998년 빌보드지 연말 결산에서 그 해 가장 많이 판매된 싱글은 단번에 260만 장을 팔아치운 ‘The boy is mine’이었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그 남자는 내 꺼야”라며 두 여성이 ‘티격태격’ 사랑싸움을 벌이던 그 싱글은 당시 ‘뉴 히트메이커’로 부상하던 로드니 저킨스(Rodney Jerkins)가 지휘했고, 세 남녀의 ‘트라이앵글 러브’를 노래해 빌보드 차트 13주간 1위를 고수했다. 그 아름다운 선의의 경쟁을 펼친 주인공은 10대 소녀 가수의 저력을 만방에 과시했었던 브랜디와 모니카였다. 이듬해 그래미상 트로피까지 거머쥔 ‘The boy is mine’의 매력은 신세대의 사랑 방식을 유쾌하게 그려냈다는 것 외에 또 하나가 더 있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더욱 끌어당긴 것은 바로 데뷔 초 ‘10대 유망주’로 주목받으며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브랜디와 모니카가 듀엣으로 입을 맞추었다는 이슈였다. 결국 모니카에게 국제적 성공을 가져다준 ‘The boy is mine’은 곧바로 발매된 2집 < The Boy Is Mine >의 제목으로 쓰여졌고, 한달 먼저 출시된 브랜디의 2집 음반 < Never Say Never >에도 동시 수록됐다. 이렇듯 모니카 아놀드(Monica Arnold)라는 본명으로 1980년 10월 24일 남부 애틀랜타에서 울음보를 터트린 모니카는 ‘한 살 언니’ 브랜디와 여러 면에서 비교 대상이었다. 서로 비슷한 시기에 데뷔했고, 비슷한 또래로서 비슷한 노래(컨템퍼러리 알앤비)를 부른 까닭이다. 귀여운 외모의 소유자로 노래 솜씨 또한 발군이던 브랜디가 1994년 데뷔했고, 모니카는 이듬해 7월 처녀작 < Miss Thang >을 내놓았다. 즉 둘 다 15세의 싱싱한 풋내기 때 대중음악계에 겁도 없이 노크한 셈이다. 이후 1990년대 팝 시장의 10대 돌풍을 리드한 브랜디와 더불어 모니카의 고공비행은 빠르게 팝 네트워크를 강타했다. 음반 발매 이전부터 히트선상에 오른 첫 싱글 ‘Don’t take it personal’이 R&B 차트 정상을 밟았고, 후속곡 ‘Before you walk out of my life’ 역시 차트 1위에 오르며 팝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 무렵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유명한 구절로 틴에이저 파워를 보여준 알리야(브랜디와 동갑내기)와 함께 그 셋은 그 후로 우후죽순 생겨난 10대 여가수의 비전을 제시해줬다. 1995년 7월 흑인 음악 잡지 < 바이브 >가 모니카의 1집 < Miss Thang >을 평가한 칭찬을 들어보자. “블루지하게 메아리치는 조숙하고 소울풀한 목소리는 그 나이를 뛰어넘는 풍족한 경험과 권위의 상징이다” 모니카의 장점은 ‘어린애가 어른처럼’ 노래했다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했던 곡을 접해보면 알 수 있듯, 도저히 15세 소녀의 목소리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성숙한 보이스를 선사했던 것이 인기 비결이었다. 이후 블록버스터 영화 < 스페이스 잼 >(1996) 사운드트랙 삽입곡으로 인기가도를 내달린 알앤비 발라드 ‘For you I will’(팝 차트 4위)이 한번 더 그 사실을 입증했다. 모니카가 그런 매력적인 음색을 발산할 수 있었던 데는 네 살 때부터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하며 보컬을 가다듬은 오랜 연습이 결정적이었다. 12세가 되던 1992년, 고향 애틀랜타의 ‘10대 스타 발굴 대회’에 출전, 명 프로듀서 댈러스 오스틴(Dallas Austin)의 오감을 끌어 당겼고, 이윽고 < 아리스타 >와 계약을 성사시키며 가수 데뷔의 기회를 잡았다. ‘스타 제조기’로 불리는 클라이브 데이비스가 재능으로 똘똘 뭉친 모니카를 그냥 놓칠 리 없었다. 시작 초부터 브랜디를 의식한 탓에 클라이브는 모니카를 ‘제 2의 휘트니 휴스턴’으로 키우고 싶은 야망을 품었고, 그의 마케팅 전략은 즉시 성공을 가져다줬다. 이후 오랜 공백을 깨고 발표한 3집 앨범 < After The Storm >(2003)은 이전 2장의 음반이 < 아리스타 >에서 발매됐었기에 클라이브 데이비스의 새 왕국 < J > 레코드사에서 공개됐다. 올해로 어느새 데뷔 10주년. 그 조그마한 15세 소녀가 이제 스물 다섯의 숙녀가 됐다. 세월의 흐름은 정말 빠르다.
지난 2002년 브릿 어워드(Brit Award)는 단 한 장의 앨범을 낸 신인 여가수 다이도(Dido)에게 최우수 여성 가수(Best British Female)상과 최우수 앨범(Best British Album)상을 넘겼다. 그만큼 다이도가 보여주는 매력은 다양하고 특별하다. 클래식의 격조, 포크의 친근함, 토속음악을 통한 신비감, 게다가 일렉트로니카의 중독성까지 그리고 밝고 귀여운 이미지 등등. 어울릴 것 ... 지난 2002년 브릿 어워드(Brit Award)는 단 한 장의 앨범을 낸 신인 여가수 다이도(Dido)에게 최우수 여성 가수(Best British Female)상과 최우수 앨범(Best British Album)상을 넘겼다. 그만큼 다이도가 보여주는 매력은 다양하고 특별하다. 클래식의 격조, 포크의 친근함, 토속음악을 통한 신비감, 게다가 일렉트로니카의 중독성까지 그리고 밝고 귀여운 이미지 등등.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많은 이미지들이 그녀 안에서는 하나가 된다. 다이도는 1971년 크리스마스에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다이도 암스트롱(Dido Armstrong)이다. 5살 때 리코더를 훔친 것이 계기가 되어 음악을 시작하게 된 이색적인 경력을 갖고 있는 그녀는 클래식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영국의 줄리아드’로 알려진 길드홀(Guildhall) 음악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10대의 대부분을 클래식 음악에 파묻혀 살았던 그녀는 피아노, 바이올린, 리코더 연주에 능했고, 작곡 실력과 노래 실력 또한 늘려 나간다. 그녀는 어린 시절을 클래식에 묻혀 살았다. 18살이 되어서 대중음악을 처음 접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뒤늦게 접한 대중음악의 매력은 클래식에서 맛볼 수 없는 강한 것이었고, 결국 다이도는 클래식을 버리고 대중음악 뮤지션으로 음악적 방향을 바꾼다. 여기에는 친오빠 롤로(Rollo)의 도움이 컸다. 정상급 소울 테크노 그룹 페이스리스(Faithless)의 리더였던 롤로는 일렉트로니카와 클래식의 접목을 원했고, 클래식을 공부한 동생 다이도를 멤버로 맞아들인다. 페이스리스의 멤버로 투어를 펼치며 팝 뮤지션으로의 변신에 성공한 다이도는 ‘My lover’s gone’을 데모 앨범으로 제작하며 솔로전향을 선언했고, 아리스타(Arista) 레코드에서 데뷔 앨범 작업에 들어간다. 아카펠라나 기타, 피아노를 사용한 심플한 사운드를 생각하고 있었던 데뷔 앨범은 프로듀싱에 참여한 오빠 롤로 및 엔지니어의 요구에 따라 네오팝적인 사운드가 가미되었고, 그 과정에서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포크 사운드가 결합된 독특한 매력을 지닌 앨범이 탄생하게 된다. 이리하여 탄생한 데뷔작 < No Angel >은 1999년 6월, 자국이 아닌 미국에서 먼저 발매되었다. 발매 직후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음악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대중들에게 알려진다. 시작은 ‘Here with me’였다. 미국 TV 시리즈인 < 로스웰 >(Roswell)에 이 곡이 테마음악으로 사용되었고, 이어 기네스 펠트로우 주연의 영화 < 슬라이딩 도어스 >(Sliding Doors)에 그녀의 곡 ‘Thank you’가 삽입된다. 별 반응 없이 사라져가던 < No Angel >은 다시 한번 대중들에게 어필했고, 그와 때맞추어 인기 래퍼 에미넴(Eminem)이 자신의 곡 ‘Stan’에 다이도의 곡 ‘Thank you’를 샘플링으로 사용한 덕분에 그녀의 음악과 이름은 뒤늦게 널리 퍼지게 됐다. (‘Stan’의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이 바로 다이도!). 이 곡은 2001년 빌보드 톱10에 오르는 빅히트를 기록했다. 다이도는 이 무렵 고국 영국에 돌아와 마침내 인기스타로 올라섰고 에미넴도 ‘Stan’으로 첫 영국차트 1위의 영예를 누리며 서로 도움을 교환했다. *Dido Interview http://nine4u.asiamusic.net/dj/program.asp?popstory+15
노래 : Jose Montserrate (호세 펠리시아노)
멤버 : 미치 그래시(Mitch Grassi), 스콧 호잉(Scott Hoying), 아비 카플랜(Avi Kaplan), 커스티 말도나도(Kirstie Maldonado), 케빈 올루졸라(Kevin Olusola) 멤버 : 미치 그래시(Mitch Grassi), 스콧 호잉(Scott Hoying), 아비 카플랜(Avi Kaplan), 커스티 말도나도(Kirstie Maldonado), 케빈 올루졸라(Kevin Olusola)
노래 : Gladys Knight & The Pips (글래디스 나이트 앤 핍스)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 토니 브랙스톤(Toni Braxton) 등과 함께 1990년대 중 후반의 팝 시장을 천하 삼분했던 셀린 디온(Celine Dion)은 디바(diva)의 정점을 대표하는 여가수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 머라이어 캐리에게 밀려 만년 2등 가수의 한을 삭였던 그녀는 영화 < 타이타닉 >의 테마송인 ‘My heart will go on’을 통해 단숨에 넘버원 팝 싱어의 반열에 ...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 토니 브랙스톤(Toni Braxton) 등과 함께 1990년대 중 후반의 팝 시장을 천하 삼분했던 셀린 디온(Celine Dion)은 디바(diva)의 정점을 대표하는 여가수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 머라이어 캐리에게 밀려 만년 2등 가수의 한을 삭였던 그녀는 영화 < 타이타닉 >의 테마송인 ‘My heart will go on’을 통해 단숨에 넘버원 팝 싱어의 반열에 올랐다. 캐나다에서 유일하게 불어를 쓰는 퀘벡 지방의 작은 집에서 1968년 첫 울음보를 터트린 셀린 디온. 그녀는 합계가 무려 16명인 대식구의 막내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또한 부모님 모두 노동자 출신이었기에 물질적으로 그다지 풍요롭지 못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부모님의 우산 아래 셀린 디온의 음악적 재능은 어린 시절부터 싹을 맘껏 틔웠다. 5살 때부터 부모님의 피아노 바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12살 때에는 ‘It was only a dream’이라는 최초의 자작곡을 썼다는 등의 후일담들이 잘 증명해준다. 오빠와 어머니의 전폭적 지원 하에 상기한 곡을 테이프화(化)했던 셀린 디온. 그녀는 그것을 매니저인 르네 앤젤릴(Rene Angelil)에게 보낸 뒤, 답변을 기다렸지만 묵묵 부답이었다. 허나 독촉 전화를 받고 그제서야 셀린 디온의 숨은 재능을 발견한 르네 앤젤릴은 그 날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고 그녀는 정식 데뷔 코스를 밟기 시작했다.(셀린 디온의 노래를 직접 들은 순간, 르네 앤젤릴은 그녀가 곧 인터내셔널 슈퍼 스타가 될 것임을 확신했다고 한다.) 1983년 15살의 나이에 발표했던 음반 < D’Amour Ou D’Amite >을 통해 캐나다 출신 아티스트로는 최초로 프랑스에서 골드 레코드를 기록하고 일본에서 개최되었던 야마하 작곡 대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하는 등, 이후 셀린 디온의 행보는 거칠 것 없는 탄탄대로였다. 또한 그녀는 그 즈음 조우했던 베테랑 프로듀서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와의 인연 덕에 걸프 전 참전 용사들을 위한 기획 앨범 < Voices That Care >에 참여, 수많은 팝 필드의 거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미국 시장 진출이라는 ‘좁은 문’뿐인 듯 보였다. 이를 위해 그녀는 우선 음악 외적인 면에서 파격적 변신을 단행했다. 팝 계의 별이 되기 위해서는 음악만큼이나 이미지 메이킹 또한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 동시에 셀린 디온은 영국의 랭귀지 스쿨에서 언어 교육을 받으며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춰나갔다. 어느새 그녀는 틴에이저에서 성숙미를 내뿜는 여인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피드백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1990년에 발매했던 처녀작 < Unison >(74위)이 각각 빌보드 싱글 차트 35위와 4위를 기록한 ‘If there was (any other way)’와 ‘Why does my heart beat now’의 선전에 힘입어 꽤 괜찮은 성적표를 받았던 것. 허나 정작 그녀를 꼭지점으로 견인했던 곡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테마였던 ‘Beauty and the beast’였다. 차트 1위를 단박에 꿰찬 곡은 그녀에게 1992년 그래미의 팝 듀오/그룹 부문 트로피를 안겨주며 이후의 성공 시대를 예감케 했다. 또한 2집 앨범인 < Celine Dion >(1992)에도 수록되어 소포모어 징크스를 깨부수는데 일등 공신의 역할을 해주었다. 곡 외에 다이안 워렌(Diane Warren) 작곡의 ‘If you asked me to’(4위), ‘Nothing broken but my heart’(29위), ‘Love can move mountains’(36위) 등이 팬들의 애정 공세를 한 몸에 받았다. 같은 해에 내놓았던 영화 <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의 주제곡인 ‘When I fall in love’(23위) 역시 대박이었다. 2년 뒤인 1994년에는 셀린 디온의 인생에 있어 중대한 터닝 포인트가 찾아왔다. 매니저였던 르네 앤젤릴과의 결혼이 바로 그것. 1988년부터 비밀리에 연인 관계를 유지해왔던 둘은 6년 뒤인 1994년에야 그 사실을 발표하고 몬트리올의 노틀담 성당에서 결혼, 세간을 놀라움 속에 빠뜨렸다. 정확이 배가 되는 나이차도 화제거리를 양산하기에 충분했다.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은 덕분인지 셀린 디온의 정상을 향한 질주는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5년 간, 무려 6장의 앨범을 녹음했다는 사실이 주는 양적 포만감부터가 남달랐다. 1993년의 < Colour of My Love >(4위)가 첫 테이프를 끊으며 제니퍼 러시(Jennifer Rush)의 곡을 리메이크한 ‘The power of love’(4주간 1위), 그리고 ‘Misled’(23위) 등의 히트 넘버들을 배출했다. 1994년과 1995년에 셀린 디온은 두 장의 불어 LP를 내놓으며 음악적 본령을 되새김질하는 기회를 가졌다. 제베타 스틸(Jevetta Steele)의 팝 클래식인 ‘Calling you’를 수록한 < Live A L’olympia >와 장자크 골드만이 프로듀스해준 < D’eux >이었다. 특히 후자는 지금까지 800만장을 세일즈, 가장 많이 팔린 샹송 작품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절정의 순간은 단연코 1996년의 팝 마스터피스 < Falling Into You >였다. 현재까지 미국 내에서만 집계된 판매량이 1100만장인 작품은 그 해 그래미에서 ‘팝 앨범’과 ‘올해의 앨범’, 두 개 부문을 석권하며 엄청난 위세를 떨쳤다. < 업 클로즈 앤 퍼스널 >의 테마송이자 다이안 워렌이 써 준 ‘Because you loved me’(1위)를 위시로 팝 고전을 다시 부른 ‘All by myself’(4위), ‘It’s all coming back to me mow’(2위) 등이 차트에 핵 폭탄을 마구 투하했다. 어디 이 뿐이겠는가. 같은 해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이 감독한 블록버스터 무비 [타이타닉]의 주제곡 ‘My heart will go on’(14주 연속 1위)은 더했다. 또 다시 그래미 두 개상을 차지하는 등, ‘셀린 디온을 모르면 간첩’일 정도의 상황을 연출했다. 곡이 수록된 1997년의 앨범 < Let’s Talk About Love >(1위)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 두 음반의 합산 판매고가 무려 6000만장을 상회했다. 이 시기를 전후해 그녀는 실로 당대에 무적, 팝 계 최고의 디바 자리에 우뚝 섰다. 그간 참여했던 뮤지션들을 포함해 새로 가세한 조지 마틴(George Martin), 비지스(The Bee Gees), 캐롤 킹(Carole King),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 등, 후자에 참여한 초특급 아티스트들의 면면만 살펴봐도 당시 그녀의 입김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를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이후 셀린 디온은 크리스마스 스페셜 반인 < These Are Special Times >(1998, 2위)와 샹송 앨범 < S’il Suffisatt D’aimer >(1998)를 선보이고 베스트 컬렉션인 < All The Way: A Decade of Song >(1999, 1위)을 내놓는 등,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남편의 후두암 투병이라는 절망적 사건이 발발한 때도 이 즈음이었다. 비극이 종결되고 셀린 디온에게 행복이 찾아왔던 때는 2001년이었다. 체외 수정에 성공하며 그토록 소망했던 아이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남편의 증세도 나날이 호전되는 등, 셀린 디온이 가정에서 본업으로 컴백할 기운이 날로 충만해져 갔다. 그리고 2002년, 무려 5년 만에 출시했던 정규작 < A New Day Has Come >은 그녀의 디스코그라피 중 최초로 발매 첫 주에 정상에 등극하며 변함없는 팬 베이스를 과시했다. 허나 뒷심 부족을 드러내며 전성기 시절에는 많이 못 미치는 결과를 얻고 말았다. 현재 셀린 디온은 1년 만에 신작 < One Heart >를 내놓으며 팬들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2003/04 배순탁(greattak@izm.co.kr) 오이뮤직 머라이어 캐리가 있고 휘트니 휴스턴이 있지만 이들 못지 않게 지난 9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가수가 셀린 디온(Celine Dion)이다. 흔히들 이들을 오페라의 주역가수에서 나온 말로 최고 인기의 여가수를 의미하는 어휘인 디바(diva)로 일컫는다. 휘트니 휴스턴과 머라이어 캐리가 팝 음악계의 디바 시대를 이끌었다면 셀린 디온은 디바 시대의 정점에 선 여가수라고 할 수 있다. 셀린 디온은 같은 음반회사 소니 뮤직에 소속된 머라이어 캐리에 밀려 90년대 중반까지 만년 2등 가수였다. 하지만 셀린 디온이 부른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곡 ‘나의 마음은 영원할 거예요(My heart will go on)’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그 동안 명실상부한 공동 1위였던 머라이어 캐리와 휘트니 휴스턴이 모두 셀린 디온의 밑으로 내려앉고 말았으며 급기야 ‘셀린 디온 격파’를 외치며 함께 듀엣 곡을 내놓는 공동 대항전선을 펴기도 했다. 근래 셀린 디온의 위풍당당한 기세를 이보다 잘 말해주는 단서도 없을 것이다. 1998년 연말호에서 영국의 잡지 ‘Q’는 소니 뮤직의 통계를 빌어 “지난 30개월 동안 셀린 디온은 매 1.2초마다 한 장의 앨범을 팔았다”고 보도했다. 96년 발표한 앨범 < 너에게 빠져 (Falling into you) >가 그때까지 세계적으로 2500만장, 97년 말에 나온 후속 앨범 < 사랑을 얘기합시다(Let`s talk about love) >가 2400만장이라는 경이적 판매고를 수립한 것을 두고 시간당 수치를 계산한 것이다. ‘1초당 한 장’의 파죽지세는 이후에도 변함없어 현재 두 앨범은 모두 3000만장을 돌파했으며 이어서 프랑스어 앨범과 히트곡 모음집도 날개돋친 듯 팔리고 있다. 셀린 디온이 이처럼 가공할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노래를 잘하기 때문’이다. 참 단순한 설명이지만 가장 확실한 분석이다. 일례로 셀린 디온의 히트송 ‘이제 모두 나한테 되돌아오네요(It`s all coming back to me now)’를 들어보면 왜 때로 ‘질릴 정도로 노래를 잘한다’는 평을 듣는지 알게 된다. 셀린 디온은 엄청난 보컬의 파괴력이 주무기이다. 쉬지도 않고 20곡을 내리 한결같이 높은 음으로 질러대는 놀라운 힘을 보유하고 있다. 가창력이 뛰어난 다른 여가수들과 바로 이 점에서 다르다. 머라이어 캐리나 휘트니 휴스턴의 무대는 정적이고 우아한데 반해서 셀린 디온의 공연은 열띠고 힘이 넘친다. 공연장은 그래서 어떤 헤비메탈 그룹의 무대 못지 않은 열광의 도가니를 연출한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감상하더라도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만끽한다. 한마디로 시원하다. 이런 에너지와 파워 말고도 그녀를 당대 톱 가수로 부상시켜준 또 하나 원동력이 있다면 그것은 가사 해석이 아주 자연스럽다는 점이다. 결코 억지로 질러대지 않는다.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미리 짜놓은 적은 없다. 노래 부르기란 기본적으로 첫 키스나 첫 사랑을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키스나 포옹할 때 미리 리허설하는 사람이 있는가? 또 어떤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치르는가?” 마치 실제처럼 가사의 감정을 충분히 살리되 정해진 공식대로 노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셀린 디온은 철저히 백인 풍의 노래를 부른다는 점에서도 딴 가수와 차별화된다. 머라이어나 휘트니를 비롯해서 근래 디바들 노래는 흑인이건 백인이건 흑인음악 즉 리듬 앤 블루스의 느낌이 녹아있다. 하지만 셀린 디온은 그러한 공통분모를 배격하고 철저히 백인 스탠더드 팝을 구사한다. 여전히 흑인음악이 친근감이 덜 한 유럽의 기성세대 음악팬들이 이 때문에 셀린 디온에게 열광한다. 캐나다 퀘벡 태생인 그녀는 캐나다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가수이기도 하다. 캐나다 음반산업협회는 올해 초 셀린 디온이 지난 한 세기에 걸쳐 국내와 국외에서 가장 음반을 많이 판 캐나다가수라고 공식 발표했다. 1999년 말 캐나다의 음반판매고는 9백만장으로 어떤 캐나다가수보다 많았으며 해외에서는 1억1천장을 넘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다. 근래 최고인 샤니아 트웨인과 브라이언 아담스도 그녀에게는 역부족인 것으로 나타났다. 캐나다는 물론 특히 퀘벡과 같은 문화권인 프랑스도 셀린 디온을 ‘국민가수’ 또는 ‘국보급 가수’로 떠받든다. 프랑스 팬들에게 인기는 거의 절대적이어서 프랑스정부가 수여하는 문화훈장을 이미 두 차례나 받았다. 셀린 디온도 이를 의식해 정기적으로 불어음반을 발표하고 있다. 셀린 디온의 지난 94년 말 결혼은 특급화제였다. 1968년 생으로 스물 여섯이던 그 해 그녀는 정확히 나이가 배인 52세의 매니저 레니 안젤리와 몬트리올 노틀담 성당에서 웨딩 마치를 거행했다. 어렵던 시절 자기 집까지 저당 잡혀가며 셀린의 음반작업을 주선한 매니저와 결혼하자 사람들은 사랑의 결실임을 인정하면서도 요즘 가수치고는 드물게 ‘의리형’ 인물이라고 셀린 디온을 높이 평가했다. 너무도 바쁜 스케줄로 가정생활에 여유가 없는 관계로 아직 레니와의 사이에 자식 소식은 없다. 남편이 나이가 많은 탓인지 더욱이 사람들은 언제 그녀가 아기를 가질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다. 얼마 전 타블로이드 신문 ‘내셔녈 인콰이어러’는 “셀린이 체외수정을 통해 현재 쌍둥이를 임신했다”고 보도했지만 셀린 디온 측은 이를 완강히 부인하며 그 신문에 대해 2천만달러의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셀린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여가수임을 웅변하는 에피소드들이다. 지난 91년 ‘지금 내 심장이 어디서 두근거리나요(Where does my heart beat now)’를 차트 상위권에 올려놓은 이래 무수한 히트퍼레이드를 펼치며 그녀는 ‘90년대의 가수’로 영광의 나날들을 보냈다. 휴식 후 내후년에 신보가 나오게 되면 다시 광풍을 몰아칠 것이 확실시된다. 현재진형형이라 실감은 나지 않지만 분명 셀린 디온은 ‘살아있는 전설’이다.
노래 : Sara Bareilles (사라 바렐리스)
노래 : Babyface (베이비 페이스)
‘때로 귀에 거슬리는 오늘의 팝음악에 없는 모든 것을 생각하라. 그러면 베이비 페이스를 떠올릴 것이다.’ 미 시사주간지 < 타임 >은 ‘낭만의 부재’에 시달리는 시대에 그가 낭만으로의 복귀를 지휘하고 있다며 ‘그의 음악은 촛불의 성찬과 빗속에서 키스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찬사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25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혔다. 프로듀서로서 그는 선배와 동료 경쟁자 모두를... ‘때로 귀에 거슬리는 오늘의 팝음악에 없는 모든 것을 생각하라. 그러면 베이비 페이스를 떠올릴 것이다.’ 미 시사주간지 < 타임 >은 ‘낭만의 부재’에 시달리는 시대에 그가 낭만으로의 복귀를 지휘하고 있다며 ‘그의 음악은 촛불의 성찬과 빗속에서 키스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찬사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25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혔다. 프로듀서로서 그는 선배와 동료 경쟁자 모두를 제쳤다. 퀸시 존스, 데이비드 포스터도 그에게 손을 들었고 테디 라일리, R 켈리도 한참 밑이다. 베이비 페이스가 ‘이 시대의 프로듀서’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수로서도 특급. 부드럽고 편한 목소리로 손쉽게 인기차트 상위권을 공략한다. 막 출시된 베이비 페이스의 < MTV 언플러그드 > 앨범은 ‘소프트 팝의 총아’로서의 진면목을 유감 없이 전달해준다. < 뉴스위크 > 최근호도 그를 ‘루더 밴드로스 이후 가장 유명한 R&B의 연인’으로 일컬었다. 다재다능의 결과로서 그가 펼치는 히트 퍼레이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프로듀싱한 앨범의 판매고가 지금까지 8천만장. 10위권에 든 곡만도 자그마치 1백 10곡이며 그중에서 16곡이 차트 1위를 차지했다. 휘트니 휴스턴, 토니 브랙스턴, 보이즈 투 멘 그리고 에릭 클랩턴이 그의 도움아래 스타덤을 만끽하고 있다. 그를 거치지 않고 진정한 스타가 되기는 어렵다는 말도 나온다. 그의 성공비결은 단연 출중한 대중감각에 있다. 대중이 뭘 좋아하는지, 어떤 소리를 원하는지 정확히 안다. 중학생 시절에 이미 이것을 터득했다고 한다. “ 딴 사람의 노래를 연주하면서 대중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난 항상 사람들이 무엇에 감동하는지 예의 주시해왔다.” 대중성 기질을 타고났는데 영화라고 안될 게 없다. 그는 아내 트레이시와 함께 7백만달러를 투자해 영화 < 솔 푸드(Soul Food) >를 만들어 영화제작자로 데뷔했다. 당연히 흥행은 대성공. 개봉 3개월만에 4천만달러를 벌어들였다. 영화 사운드트랙 앨범도 이미 2곡의 톱 10 히트곡을 내면서 2백만장의 판매를 돌파했다. 음악 만드는 것 뿐 아니라 돈버는 재주도 갖춘 그를 보고 미국 연예계 종사자들 모두가 놀라워했다. 케네스 에드먼즈가 본명인 베이비페이스는 어리고 유순한 인상 때문에 ‘아이얼굴(Babyface)’ 란 별명이 붙었다. 이것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강점이다. 만지는 것마다 황금으로 만드는 성공가도에도 불구하고 ’아이얼굴‘답게 그에게는 오만의 흔적이 없다. < 솔 푸드 >의 관객 폭발에 대해서도 ‘영화를 보러 가도록 흥미를 유발하는 대본을 우연히 갖게 됐을 뿐’이라며 “영화든 레코드든 히트를 칠 수 있는 어떤 것을 골라낼 왕도는 없다. 단지 우리는 운이 좋았을 따름이다.”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음반사 라페이스의 사장으로 회사의 자산을 3억달러로 끌어올린 것이 과연 운에 불과할까. 그런 겸허한 언행이 우리를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린다. 지금은 잠시 영화에 한눈을 팔고 있지만 본연의 프로듀서로 돌아와 곧 토니 브랙스턴과 TLC의 새 앨범을 낸다. 이 음반들도 히트는 ‘따논 당상’이다. 라페이스의 자산 규모는 또 올라갈 게 분명하다. 도대체 ‘베이비 페이스 제국’의 끝은 어디일까?
미국 팝의 살아있는 인간극장, 켈리 클락슨의 성공기 1982년 텍사스 출생으로 도회적인 삶과 동떨어진 순박한 시골 소녀였던 켈리 클락슨(Kelly Clarkson)은 학교 선생님의 권유로 합창부에 들어가기 전까지 딱히 음악을 하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집안은 음악적으로 학식이 뛰어난 편이 아니었을 뿐더러 그저 레바 매킨타이어(Reba McEntire), 에어로스미스(Aerosmith), 애니 레녹스(... 미국 팝의 살아있는 인간극장, 켈리 클락슨의 성공기 1982년 텍사스 출생으로 도회적인 삶과 동떨어진 순박한 시골 소녀였던 켈리 클락슨(Kelly Clarkson)은 학교 선생님의 권유로 합창부에 들어가기 전까지 딱히 음악을 하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집안은 음악적으로 학식이 뛰어난 편이 아니었을 뿐더러 그저 레바 매킨타이어(Reba McEntire), 에어로스미스(Aerosmith), 애니 레녹스(Annie Lennox)를 즐겨 듣는 정도였다. 그러나 선생님의 용안은 훗날 전미를 정복할 한 소녀의 잠재력을 미리 점치고 있던 것이다. 비록 시작은 타의였으나, 점차 켈리 클락슨의 내면에서도 노래를 향한 열정의 꽃망울이 싹트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발성 연습으로 창법을 연마해가던 중, 지역 내 콘테스트에서 진가를 인정받으며 본격적으로 가수의 길을 준비한다. 학교 졸업 후, 부푼 꿈을 안고 할리우드 행을 택했지만 이름 없고 연줄 없는 시골 소녀를 자선할 만큼 인정 많은 곳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켈리의 가능성을 알아본 제리 고핀(Gerry Goffin)마저 병으로 몸져누우면서 희망의 빛줄기는 한순간에 소멸해버렸고, 결국 웨이트리스와 극장 아르바이트, TV 드라마 < 사브리나 >에서 대사 없는 엑스트라로 출연하며 막연히 호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내민 < 아메리칸 아이돌 >의 참가 신청서는 막막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던 그녀에게 서광의 실마리였다. 이미 그와 비슷한 프로그램에서 고배를 마신 적이 있었기에 마음을 비우고 여유롭게 오디션에 응해 본선까지 진출하게 된다. 꾸준히 단련해온 가창력과 전형적인 스탠더드 팝 스타일의 음색, 그리고 회를 거듭할수록 드러나는 성실하고 다부진 캐릭터가 TV를 시청하는 전국의 수백만 미국인들을 감동시켰다. 마침내 저스틴 구아리니(Justin Guarini)와 겨룬 최종 결선 무대에서 치열한 접전을 펼쳐 58%의 지지율로 우승을 거머쥐며 인생역전, 그 꿈처럼 아득하기만 했던 가수의 길로 진입한다. 클라이브 데이비스(Clive Davis)의 RCA 레코드사와 계약을 체결한 켈리는 조속히 싱글 ’A moment like this’를 발표한다. 컨트리의 영향이 컸던 어린시절의 성장배경을 그린 순도 높은 팝 발라드로 차트 정상을 꿰차며 켈리 클락슨의 이름을 전 세계에 분포시켰다. 붉은 드레스를 입고 호수처럼 맑은 두 눈을 글썽이던 소녀는 차기 싱글 ’Miss independent’에서 디스토션을 잔뜩 걸은 기타 사운드와 혼연일체가 되어 씩씩하고 용맹스러운 독립 여성으로 변신을 꾀했다. 켈리의 변신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앨범 차트 1위로 핫 샷 데뷔한 처녀작 < Thankful >은 록, 발라드, 소울, 포크, 댄스 뮤직 등을 아울렀고, 2005년에 공개한 < Breakaway >에서는 ’Since you been gone’, ’Behind theses hazel eyes’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탄탄한 록 사운드를 구축하여 걸리시 록의 새로운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한다. 아이돌 콘테스트 출신자로서 저항할 수 없는 정약인 틴 팝의 운명을 버리고 굳이 록을 택한 이유가 뭐냐는 질문 공세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이 세상에 좋은 음악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한 가지 장르에 안주할 생각은 없어요. 할 수 있는 것은 일단 다 해보고 싶거든요.” 아이돌인 상태로 롱런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미국 폭스 TV가 주최한 < 아메리칸 아이돌 >의 초대 우승자. 이는 앞으로 가수 켈리 클락슨의 꼬리표처럼 평생을 따라다닐 문구임에 틀림없다. 초년생의 한계를 뛰어 넘어 역대 그 어떤 아이돌보다 눈부신 스포트라이트 아래 데뷔전을 치러냈어도, 카멜레온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그 안에서 성숙한 음악인으로 거듭나겠다고 다부지게 말하는 켈리의 휴먼 드라마는 오늘도 방영 중이다.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은 1980, 1990년대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던 메탈의 포화를 뚫고 스탠다드 팝 시장을 개척해 낸 대표적인 ’디바’ 뮤지션이다. 휘트니 휴스턴은 1963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알앤비 가수 씨시 휴스턴(Cissy Houston)의 딸이었으며 시대를 풍미한 여가수 디온 워윅(Dionne Warwick)이 친척이었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대형 가수들을 옆에서 지켜볼 수 ...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은 1980, 1990년대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던 메탈의 포화를 뚫고 스탠다드 팝 시장을 개척해 낸 대표적인 ’디바’ 뮤지션이다. 휘트니 휴스턴은 1963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알앤비 가수 씨시 휴스턴(Cissy Houston)의 딸이었으며 시대를 풍미한 여가수 디온 워윅(Dionne Warwick)이 친척이었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대형 가수들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고,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성가대에서 노래하며 그 실력을 뽐냈다. 수려한 외모까지 겸비한 휘트니는 10대의 나이에 이미 모델, 배우, 가수의 세 가지 활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샤카 칸(Chaka Khan) 등의 백업보컬로 또 클럽에서 가수로 활동하던 그녀는 1982년 19살의 어린 나이에 폴 자바라(Paul Zabara)의 ’Eternal love’라는 곡에 보조 보컬로 참여하며 처음으로 정식 음반 녹음에 참여한다. 이듬해 아리스타(Arista)와 계약을 체결했고, 그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레코드사는 데뷔 앨범에 27만 달러의 제작비를 투자하며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1985년 데뷔앨범 < Whitney Houston >은 흑인 디바 시대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앨범은 14주간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오르며 솔로 아티스트의 데뷔 앨범 중 가장 오랜 기간 1위에 머무른 앨범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세계적으로 2,300만장이라는 경이적인 앨범 판매를 이루어내며 데뷔 앨범 하나로 팝계 최고의 여가수로 자리하게 된다. 앨범 내에서는 ’Saving all my love for you’, ’How will I know’, ’Greatest love of all’(조지 벤슨의 곡 리메이크)의 세 곡이 연속해서 차트 정상에 오르고, 앨범의 경이적인 성공으로 86년 그래미와, 86,87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를 차지한다. 1987년 그녀는 두 번째 앨범 < Whitney >를 통해 전작의 인기를 이어간다. 전작보다 비트감을 더한 이 앨범 역시 대단한 성공을 일구어 낸다. 발매 첫 주에 미국과 영국차트에서 동시에 1위에 오르는데 팝 역사상 처음으로 이룩한 기록이었다. 앨범은 차트 정상에 11주간 머물렀으며 세계적으로 2,000만장이 팔려나갔다. 싱글들의 인기도 대단해서 ’Wanna dance with somebody(Who loves me)’, ’Didn’t we almost have it all’, ’So emotional’, ’Where do broken hearts go’ 네 곡이 연속해서 차트 정상을 밟으며 이전 앨범부터 7개의 싱글이 연속해서 정상을 밟는 대 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 앨범으로 또다시 1988년 그래미를 거머쥐었고, 역시 88년, 89년의 아메리칸 뮤직어워드를 수상한다.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 같은 정통 소울 아티스트들로부터 음악적 영감을 얻었던 그녀이지만 1,2집에서 보여준 음악은 대중성이 지나치게 강조된 흑, 백의 사운드가 뒤섞인 음악이었다. 자신도 그런 자신의 음악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1990년 발표한 세 번째 앨범 < I’m Your Baby Tonight >에서는 대중성을 신경 쓰지 않고 정통 소울 음악으로 변신을 시도한다.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루떠 반데로스(Luther Vandross)등과 함께 작업하는 등 흑인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에 집착했던 이 앨범은 역시 이전 앨범들만큼의 성공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I’m your baby tonight’, ’All the man that I need’가 1위에 올랐고, 앨범은 전 세계 1,200만장의 판매를 기록하는 등 여전히 그 인기는 대단했다. 세 장의 정규 앨범 이후 그녀는 영화 배우로의 변신을 시도하며 세 장의 사운드 트랙을 연속 발표한다. 시작은 < 보디가드 >였다. 1992년 케빈 코스트너와 함께 출연한 ’보디가드’의 사운드 트랙에서 6곡을 노래했고, 이는 팝 역사에 길이 남을 경이적인 상업적 성공을 이끌어낸다. 첫 싱글 ’I will always love you’(돌리 파튼의 곡을 리메이크)는 차트 정상에 14주간 머물렀으며, 앨범은 20주간 1위를 지켰고, 세계적으로 3,500만장이라는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기록한다. 1994년 그녀는 다시 한 번 그래미를 거머쥐었고,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는 8개 부문 수상이라는 대 기록을 세우게 된다. 1995년 휘트니 휴스턴은 다시 한 번 사운드 트랙에 참여한다. 자신이 주연한 < Waiting for Exhale >의 사운드 트랙에 3곡을 수록하면서 영화와 앨범의 성공에 기여한다. 이 앨범은 노장 흑인 여가수들과 신예 흑인 여가수들이 총 동원되어 만들어졌으며, 프로듀서로 참여한 베이비페이스(Babyface)는 그래미 12개 부문 후보에 오르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 1996년 그녀는 영화 < The Preacher’s Wife >에서 주연을 맡으며 다시 한 번 사운드 트랙에 참여한다. 14곡을 자신이 직접 맡은 이 앨범은 가스펠 위주의 곡들로 채워져 있으며 대중성보다는 종교적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어 앨범판매에 있어서는 그다지 큰 성공을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정규 앨범을 발표하지 않고 영화와 사운드 트랙에만 전념해왔던 그녀는 98년 8년 만에 정규앨범 < My Love Is Your Love >을 발표한다. 흑인 아티스트로서의 음악에 충실함을 기했던 이 앨범은 1,000만장의 앨범 판매를 기록하며 그녀의 앨범 중 가장 저조한 성적을 거두게 된다. 앨범 내에는 영화 ’이집트의 왕자’ 주제곡인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와의 듀엣 곡 ’When you believe’가 수록되어 있다. 2000년 그녀는 자신의 15년 음악생활을 결산하는 베스트 앨범 < The Greatest Hits >를 발표한다. 조지 마이클, 엔리케 이글레시아스와의 듀엣 곡 등 네 곡의 신곡도 포함하고 있는 이 앨범은 발라드 곡들만을 모은 < Cool Down >과 댄스곡 및 댄스 리믹스 곡들을 모은 < Throw Down > 두 장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2002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핵심부문인 ‘올해의 곡’(Song of the year)과 ‘최우수신인’상을 포함해 ‘여성 R&B 보컬’ ‘R&B 앨범’ ‘R&B 송’ 등 5개 부문을 석권한 앨리샤 키스(Alicia Keys)는 뉴 밀레니엄 초반의 R&B 음악양식을 대표하는 가수라고 할 수 있다. 어번(Urban) R&B라고 단순 정의할 수 없을 만큼 전통과 현대가 절묘하게 조화된 고유상표의 음악을 들려준다. 귀에... 2002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핵심부문인 ‘올해의 곡’(Song of the year)과 ‘최우수신인’상을 포함해 ‘여성 R&B 보컬’ ‘R&B 앨범’ ‘R&B 송’ 등 5개 부문을 석권한 앨리샤 키스(Alicia Keys)는 뉴 밀레니엄 초반의 R&B 음악양식을 대표하는 가수라고 할 수 있다. 어번(Urban) R&B라고 단순 정의할 수 없을 만큼 전통과 현대가 절묘하게 조화된 고유상표의 음악을 들려준다. 귀에 잘 들리는 피아노 멜로디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가스펠을 연상시키는 소울 식의 고전적 창법이 트레이드마크이며, 이 때문에 1970년대 여성 소울의 거성인 로버타 플랙(Roberta Flack)과 자주 비교되곤 한다. 하지만 재래의 미학만을 고집하는 복고형 R&B라고 하기보다는 거기에다 현대적 힙합 분위기를 삼투한 최신 스타일을 부각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 어반이란 수식어가 붙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를테면 과거 블루스와 재즈에 뿌리를 둔 음악을 현대적 창구로 전달하는 셈인데 실제로 피아노의 선율, 1970년대 풍의 소울 창법, 세련된 힙합 분위기가 어울린 그녀의 ‘모던한’ 데뷔 앨범 [Songs In A Minor]는 2001년에 발표되어 화려히 인기차트를 누볐다. 미국 뉴욕 토박이로 1982년에 태어난 앨리샤 키스는 어렸을 적부터 음악을 자신의 미래분야로 삼아 맨하탄의 퍼포먼스 아트 스쿨(Performance Art School)에서 합창을 훈련했고 10대 내내 피아노교습에 열중한다. 이 합창과 피아노는 훗날 데뷔 앨범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아울러 피아노 외의 다른 악기 연주는 물론, 작곡 편곡 등 음악작업 전반에 걸친 실력과 감각을 쌓았다. 고교를 졸업한 16살에 명문 콜롬비아 대학에 입학했지만 음악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학업을 도중 포기했고 대신 1998년 명문 레코드사인 아리스타(Arista)와 계약을 체결한다. 아리스타 사장이었던 클라이브 데이비스(Clive Davis)에 의해 픽업된 관계로, 그가 1999년 아리스타를 떠나 새로운 레이블 제이(J)를 출범시키자 앨리샤도 그를 따라 제이 레코드사로 적을 옮기게 된다. 19살이던 2001년 데뷔 앨범 [Songs In A Minor]이 발표되었고 이 음반은 데뷔와 동시에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을 밟는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다. 특히 자신이 프로듀스한 첫 싱글 ‘Fallin’’은 전미차트 2주간 1위를 차지했다. 그녀의 각별한 신구(新舊)결합형 음악은 시장 뿐 아니라 마침내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 그리고 그래미상이라는 공인 절차마저 거뜬히 통과했다.
노래 : Tamar Braxton (타마 브랙스톤)
노래 : Britney Spears (브리트니 스피어스 (팝 보컬))
지금 미국 팝계를 뒤흔들고 있는 가수는 브리트니 스피어스라는 이름의 아직 19살이 안된 어린 여가수다. 그녀의 지난해 데뷔앨범은 미국 내에서만 천2백만장 판매고라는 일대 회오리를 일으켰다. 단숨에 ‘틴에이저 여왕’으로 떠오른 그녀가 막 2집 앨범을 내놓자 전 미국이 또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미국의 도하 각 신문과 방송은 브리트니 스피어스 모시기 쟁탈전을 벌이고있다. 전 매체의 당면 최대 과제가 ‘브리트니 스피어... 지금 미국 팝계를 뒤흔들고 있는 가수는 브리트니 스피어스라는 이름의 아직 19살이 안된 어린 여가수다. 그녀의 지난해 데뷔앨범은 미국 내에서만 천2백만장 판매고라는 일대 회오리를 일으켰다. 단숨에 ‘틴에이저 여왕’으로 떠오른 그녀가 막 2집 앨범을 내놓자 전 미국이 또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미국의 도하 각 신문과 방송은 브리트니 스피어스 모시기 쟁탈전을 벌이고있다. 전 매체의 당면 최대 과제가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잡아라!’라는 것이다. 아무리 인기 있는 틴에이저 가수가 출현해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언론이 예외적으로 그녀를 다루는데 골몰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어리지만 어른 특히 성인남자 팬들이 많기 때문이다. 남성들한테 브리트니는 결코 소녀로 비치지 않는다. 옷을 하나 입어도 섹시하게 치장하고, 춤을 춰도 어른 못지 않은 에너지가 넘친다. 그녀가 내뿜는 강한 섹슈얼 파워에 어른들도 매혹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어린 섹스심벌’이다. 솔직히 그녀가 대단한 미모이거나 다리가 길다거나 하는 탁월한 신체조건의 소유자는 아니다. 그러나 이런 보통의 외모에 섹슈얼리티를 갖춘 것이 도리어 또래들에게는 자신감, 어른들에게는 친근감을 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런 탓에 그녀는 ‘롤링스톤’과 같은 록 전문지의 표지인물로도 등장한다. 최신호 커버에 등장한 그녀가 던지는 인상은 ‘착해 보이면서도 섹시하다’는 것이다. 그녀의 음악도 외모를 닮아있다. 달콤한 멜로디를 지닌 댄스곡들이지만 아주 힘차다.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있는 신곡 ‘Oops! ... I did it again''부터가 강렬한 비트를 바탕으로 하고있다. 다른 댄스 팝 여가수들과 여기서 차별화된다. 실제의 그녀 또한 마돈나처럼 스스로 캐리어를 개척하는 독립의지가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보에서 그녀는 대담하게 록그룹 롤링 스톤스의 명곡 ‘(I can''t get no)Satisfaction''를 부르고 있다. 레코드회사나 주변인들이 ‘해봤자 욕먹는다’며 말렸는데도 끝내 고집을 부려 새 앨범에 이 곡을 수록했다. 브리트니는 “강한 느낌의 곡을 만들어낼 테니 두고 보라”고 큰소리쳤다고 한다. 브리트니가 록계에서도 주목받는 것은 이처럼 음악계 어른들의 말대로 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밀고 나가는 당돌한 자세 때문이다. 관심사는 신보가 과연 얼마나 팔려나가는데 있다. 전작의 판매고를 따른다는 게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곡은 벌써 라디오 최다 신청곡 기록을 깼다. 현재 미국 라디오 전파는 브리트니의 노래로 완전히 장악되었다는 소식이다.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여기저기서 신보의 대박 조짐이 보인다. 무엇보다 음악이 대중적으로 어필할 소지가 충분하다. 음반업계는 그녀만은 소포모어 징크스 즉 2집 앨범 징크스는 없을 것으로 단정하고 있다. 2000년 팝계가 다시 그녀의 것이 될 공산이 크다.

[브리트니 스피어스 주요 기록]
-여섯 장의 정규 앨범으로 통산 8천 6백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
-대한민국 통산 판매량 100만 장 돌파
-3곡의 빌보드 싱글차트 1위곡, 5곡의 영국차트 1위곡 보유
-새싱글 ‘3’ 빌보드 싱글차트 1위로 핫샷데뷔 * 非아메리칸 아이돌 싱글로는 21세기 유일
-그래미상, 빌보드상,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 등 주요 시상식 수상
-2003 포브스 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유명인사 (가수로는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
-야후! 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많이 검색되는 유명인사 7년간 1위
-2000년대에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아티스트
-2000년대에 미국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여가수
-기네스 선정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10대 아티스트
-기네스 선정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10대 아티스트의 앨범 "...Baby One More Time"
-기네스 선정 7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많이 검색되는 인물
-기네스 선정 가장 어린 나이에 가장 많은 영국차트 1위를 기록한 여성 아티스트
-기네스 선정 가장 어린 나이에 5장의 빌보드 넘버원 앨범을 보유한 아티스트
-가장 어린 나이에 빌보드 싱글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여성 가수
-가장 어린 나이에 빌보드 앨범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여성 가수
-가장 어린 나이에 헐리우드 "명예의 거리" 에 입성한 셀러브리티
-가장 어린 나이에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린 여성 가수
-그녀의 저서 “Heart To Heart” - 뉴욕 타임즈 주간 및 베스트 셀러 선정
-역대 투어 티켓 수입 5억달러, 머천다이즈 수입 2억달러 이상 (역대 최고 기록)
-역사상 가장 많은 수입을 벌어들인 셀러브리티 향수 “Curious” - 6억 달러 이상의 수익
-2004년 가장 많이 판매된 향수 “Curious” - 출시 5주만에 1억달러 수익 돌파
-브리트니의 향수 통산 수익 20억 달러 돌파 * 향수로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드린 셀러브리티
-동명의 앨범/싱글을 같은 주에 빌보드 앨범/싱글차트 1위에 올린 최초의 아티스트
-영국에서 가장 단기간에 가장 많이 판매된 싱글 "...Baby One More Time"
-미국에서 역사상 가장 많은 리퀘스트를 받은 곡 “Oops!...I Did It Again”
-데뷔 앨범부터 두 장의 음반이 연속으로 미국에서 다이아몬드 인증 (1,000만장 이상 판매)
-2000년 이후 메인스트림 팝 라디오차트에 가장 많은 곡을 올린 아티스트: 22곡의 싱글
-역사상 많은 'Teen Choice Awards' 를 수상한 스타: 통산 16개
-여섯 장의 음반이 모두 빌보드 앨범차트 1위, 혹은 2위를 차지한 유일한 여가수
-MTV TRL 에서 가장 많은 비디오를 순위에 올린 아티스트 (18곡)
-MTV TRL 에서 가장 많은 비디오를 1위에 올린 아티스트 (15곡)
-MTV TRL 에서 가장 많은 비디오를 명예 은퇴 시킨 아티스트 (13곡)
-영국 역사상 첫 주에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 앨범 “Greatest Hits: My Prerogative”
-월드 차트에서 가장 많은 1위 곡을 보유한 여가수 2위 (1위: 마돈나)
-미국에서 첫 주에 가장 많이 팔린 여성 가수의 앨범 "Oops!...I Did It Again" - 131만장
-미국에서 50만 장 이상의 오프닝 세일즈를 기록한 음반을 네 장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여가수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여성가수 8위
-미국에서 첫 주에 가장 많이 다운로드된 여성 가수의 싱글 "Womanizer" ? 28만 6천건
-빌보드 싱글차트에서 가장 높은 순위 상승으로 1위를 기록한 곡 "Womanizer" - 96위 → 1위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조회수를 기록한 뮤직비디오 “Womanizer”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지 선정 지난 25년간 가장 위대한 팝 앨범 중 하나로 선정된 ‘Britney’
-가장 많은 트위터 ‘Follower’ 를 보유한 아티스트
-미국 인기 시트콤 ‘How I Met Your Mother’ * 브리트니 카메오 출연분 시리즈 통산 시청률 1위
-최신 월드 투어 “The Circus Starring: Britney Spears” - 61회에 걸친 북미 투어 전회 매진
-“Circus” 투어는 북미 공연으로만 94만 명 이상의 관객 동원, 8천만 달러 이상의 수입 기록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큰 규모의 투어 “The Circus Starring: Britney Spears”
-2002 코스모폴리탄 매거진 선정 올해의 여성
-2003 글래머 매거진 UK 선정 올해의 여성
-2004 FHM 매거진 선정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여성
-2008 코스모폴리탄 매거진 선정 ‘역사상 가장 위대한 컴백’
-2008 GQ 매거진 독일 선정 ‘올해의 여성’
-2008 AOL 선정 가장 많이 검색된 유명인사
-2009 플레이보이 매거진 선정 가장 섹시한 뮤직비디오 “Womanizer”
-2009 상반기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투어 “The Circus Starring: Britney Spears”

[브리트니 스피어스 주요 수상 경력]
Grammy Awards
-2000 Best New Artist 후보
-2000 Best Female Pop Vocal Performance "...Baby One More Time" 후보
-2001 Best Pop Vocal Album "Oops!...I Did It Again" 후보
-2001 Best Female Pop Vocal Performance "Oops!...I Did It Again" 후보
-2003 Best Female Pop Vocal Performance "Overprotected" 후보
-2005 Best Dance Recording "Toxic" 수상

Billboard Music Awards
-1999 Female Artist of the Year 수상
-1999 Female Album Artist of the Year 수상
-1999 Hot 100 Singles Female Artist of the Year 수상
-1999 Best New Artist of the Year 수상
-2000 Best Album Artist 수상
-2000 World-Record Breaker "Oops!... I Did It Again" 수상
-2004 Best-selling Dance Single of the Year "Me Against the Music" 수상
-2007 Best Album of 2007 "Blackout" 선정
-2008 Best Album of 2008 "Circus" 선정
-2009 Best Album "Circus" 수상

American Music Awards
-2000 Favorite Pop/Rock New Artist 수상
-2000 Favorite Pop/Rock Artist 후보
-2000 Favorite Pop/Rock Album "...Baby One More Time" 후보
-2001 Favorite Pop/Rock Artist 후보
-2001 Favorite Pop/Rock Album "Oops!...I Did It Again" 후보

MTV Video Music Awards
-1999 Best Female Video "...Baby One More Time" 후보
-1999 Best Pop Video "...Baby One More Time" 후보
-1999 Best Choreography in a Video "...Baby One More Time" 후보
-2000 Best Female Video "Oops!...I Did It Again" 후보
-2000 Best Pop Video "Oops!...I Did It Again" 후보
-2000 Best Dance Video "(You Drive Me) Crazy" 후보
-2000 Viewer's Choice "Oops!...I Did It Again" 후보
-2001 Best Pop Video "Stronger" 후보
-2002 Best Female Video "I'm a Slave 4 U" 후보
-2002 Best Dance Video "I'm a Slave 4 U" 후보
-2002 Best Choreography in a Video "I'm a Slave 4 U" 후보
-2003 Best Video from a Film "Boys" 후보
-2004 Video of the Year "Toxic" 후보
-2004 Best Female Video "Toxic" 후보
-2004 Best Pop Video "Toxic" 후보
-2004 Best Dance Video "Toxic" 후보
-2008 Video of the Year "Piece of Me" 수상
-2008 Best Female Video "Piece of Me" 수상
-2008 Best Pop Video "Piece of Me" 수상
-2009 Best Pop Video "Womanizer" 수상
-2009 Video of the Year "Womanizer" 후보
-2009 Best Direction in a Video "Circus" 후보
-2009 Best Choreography in a Video "Circus" 후보
-2009 Best Art Direction in a Video "Circus" 후보
-2009 Best Editing in a Video "Circus" 후보
-2009 Best Cinematography in a Video "Circus" 후보

MTV Europe Music Awards
-1999 Best Song "...Baby One More Time" 수상
-1999 Best Pop Act 수상
-1999 Best Female Solo Artist 수상
-1999 Best Breakthrough Act 수상
-2000 Best Song "Oops!...I Did It Again" 후보
-2000 Best Female Artist 후보
-2000 Best Pop Artist 후보
-2001 Best Pop Artist 후보
-2002 Best Female Artist 후보
-2004 Best Female Artist of the Year 수상
-2004 Best Song "Toxic" 후보
-2004 Best Pop Artist 후보
-2008 Album of the Year "Blackout" 수상
-2008 Best Act of 2008 수상
-2008 Best Act Ever 후보
-2009 Best Video "Circus" 후보

Kids' Choice Awards
-2000 Favorite Song "(You Drive Me) Crazy" 후보
-2001 Favorite Female Singer 수상
-2001 Favorite Music Solo or Group 후보
-2003 Favorite Female Singer 후보
-2005 Favorite Song "Toxic" 후보

Teen Choice Awards: 총 16개 부문 수상 (역사상 가장 많이 수상한 스타)
-1999 Choice Single "...Baby One More Time" 수상
-2000 Choice Female Artist 수상
-2000 Choice Hottie Female 수상
-2001 Choice Hottie Female 수상
-2002 Choice Female Artist 수상
-2002 Choice Hottie Female 수상
-2004 Choice Single "Toxic" 수상
-2009 The Ultimate Choice Awards 수상 등

MTV Total Request Live Awards
-2003 First Lady Award 수상
-2008 Most iconic video of the past TRL decade "...Baby One More Time" 수상
-2008 Queen of TRL 수상
-2008 Queen of Music Videos 수상

World Music Awards
-2000 World's best selling Pop Female Artist 수상
-2001 World's best-selling Pop Female Artist 수상
-2001 World's best-selling Dance Female Artist 수상

Rolling Stone Magazine Awards
-2001 Artist of the Year 수상
-2002 Best Dressed Female 수상
-2002 Best Female Artist 수상

NRJ Radio Awards (프랑스)
-2000 Best International Female Artist
-2008 Best International Album "Blackout" 수상
-2009 Female International Artist of the Year 수상
-2009 Video of the Year "Womanizer" 수상

Groovevolt Awards
-2004 Video of the Year "Toxic" 수상
-2004 Best Female Album "In The Zone" 수상
-2004 Best Song Performance by a Female Artist "Everytime" 수상
-2004 Most Fashionable Artist 수상

Bravo A List Awards
-2009 A-List Artist of the Year 수상
-2009 A-List Album " Circus " 수상
-2009 A-List Download "Circus" 수상

NewNowNext-Awards
2009 Always Now, Forever Next Award 수상

People's Choice awards
-Best International Artist 수상

MTV Asia Awards
-2002 Best Female Artist 수상

MTV Video Music Brazil Awards
-2009 International Artist Of The Year 수상

Bambi Awards (독일)
-2008 Best International Pop Star 수상

AOL Awards
-1999 Best New Artist 수상

Much Music Awards (캐나다)
-1999 Best International Artist 수상

Germany Bravo Gold Awards (독일)
-1999 Best International Female Vocalist 수상

Japan Golden Disc Awards (일본)
-Best International Music Video "I'm Not A Girl, Not Yet A Woman" 수상
-Best International New Artist 수상 외 세계 각국에서 다수의 수상경력 보유
노래 : Backstreet Boys (백스트리트 보이즈)
멤버 : A.J. McLean, Brian Littrell, Howie Dorough, Nick Carter 얼마 전 록 전문지 < 롤링스톤 >이 MTV와 공동으로 선정한 ‘팝 역사를 수놓은 명곡 100선’에 백스트리트 보이스(Backstreet Boys)의 ‘I want it that way’가 예상 밖으로 높은 순위인 10위에 올라 눈길을 끈 바 있다. 10대들을 주요 팬 층으로 하는 ‘버블 검 음악’이... 멤버 : A.J. McLean, Brian Littrell, Howie Dorough, Nick Carter

얼마 전 록 전문지 < 롤링스톤 >이 MTV와 공동으로 선정한 ‘팝 역사를 수놓은 명곡 100선’에 백스트리트 보이스(Backstreet Boys)의 ‘I want it that way’가 예상 밖으로 높은 순위인 10위에 올라 눈길을 끈 바 있다. 10대들을 주요 팬 층으로 하는 ‘버블 검 음악’이라 하여 여기저기서 비판을 받는 와중에 권위 있는 록 언론에 의해 이들의 노래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백스트리트 보이스는 분명 음반업계의 기획에 의해 ‘잘 만들어진 그룹’이다. 보통 이런 기획상품의 경우 아티스트의 자기 표현을 최고 덕목으로 치는 사람들은 여지없이 평가 절하해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무시되지 않는 이유는 먼저 예상 밖으로 양질의 음악을 선사하고있기 때문이다. 곡도 좋고 멜로디를 타는 멤버들의 노래솜씨와 코러스도 우수하다. 애들 음악이라고 푸대접하지만 막상 들으면 모든 곡들이 귀를 감는다. 또 하나 백스트리트 보이스가 손꼽히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버블 검 음악이 1990년대 중반 이후의 팝 주요 경향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들이 요즘의 유행을 만들었고 또 주도하고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백스트리트 보이스가 성공을 거두자 팝 음악계에서는 우후죽순으로 10대 소녀들을 겨냥한 ‘보이 밴드’들이 출현하고 있다. 닉 카터, 하위 D, 케빈 리처슨, AJ 맥클린 그리고 브라이언 리트렐 등 다섯 남자로 이루어진 그룹이다. 케빈은 1972년 생이고 가장 어린 1980년 생 닉 카터도 나이 스물을 넘어섰다. 10대 음악을 하지만 멤버들 가운데 틴에이저는 없다. 1994년 결성될 때는 당시 음악이 얼터너티브 록과 갱스터 랩 판이어서 주목받지 못했지만 2집 < Backstreet''s back >부터 미국시장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1999년 초에 발표한 3집 < Millenium >에 와서는 세계적 열풍을 야기했다. 이 앨범은 지금까지 1300만장이 팔려 틴 음악 앨범 중에서는 최고 판매고를 보이고 있다. 잠시 공백을 갖는 사이 같은 소속사의 라이벌 N싱크한테 추월 당한 감이 없지 않지만 최근 새 앨범 < Black & blue >을 내놓고 왕관탈환에 나섰다. 그래서 과연 신작이 얼마만큼 팔려나갈 것인가가 관심이다. 관계자들은 이번 앨범이 그들의 장수 여부를 결정지을 것으로 내다본다.
노래 : 3LW (쓰리엘더블유)
멤버 : 킬리 윌리엄스(Kiely Williams), 아드리앤 베일론(Adrienne Bailon), 제시카 벤슨(Jessica Benson) 멤버 : 킬리 윌리엄스(Kiely Williams), 아드리앤 베일론(Adrienne Bailon), 제시카 벤슨(Jessica Benson)
노래 : Destiny's Child (데스티니스 차일드)
지난 2000년 한해는 엔 싱크의 해였다. 2000년 4월 발표한 두 번째 앨범 < No Strings Attached >는 첫 주에 245만장이 팔리며 발매 첫 주 판매기록을 갈아치웠다. 이전 기록은 1999년 백스트리트 보이스(이하 BSB)가 2집 < Millenium >으로 작성했던 113만장. 통상 라이벌로 거론되지만 항상 한 수 앞선다고 평가받던 BSB의 기록을 배 이상 넘어선 것이어서 엔 싱크에겐 더욱... 지난 2000년 한해는 엔 싱크의 해였다. 2000년 4월 발표한 두 번째 앨범 < No Strings Attached >는 첫 주에 245만장이 팔리며 발매 첫 주 판매기록을 갈아치웠다. 이전 기록은 1999년 백스트리트 보이스(이하 BSB)가 2집 < Millenium >으로 작성했던 113만장. 통상 라이벌로 거론되지만 항상 한 수 앞선다고 평가받던 BSB의 기록을 배 이상 넘어선 것이어서 엔 싱크에겐 더욱 값졌다. 앨범은 기세 좋게 팔려나가서 전 세계적으로 무려 1천4백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올해엔 슈퍼볼 게임의 개막식 행사 같은 여러 공연과 각종 행사에 초청되어 극진한 대접도 받았다. 그러나 반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비평계 일각에서는 립싱크하는 꼭두각시니 음반산업을 망치는 주범이니 하는 악평이 계속 이어졌고, 여러 노장 뮤지션들은 보이밴드와 틴 팝의 ‘해악’을 경고했다. 특히 백인래퍼 에미넴은 자신의 노래를 통해 노골적으로 틴 팝과 보이밴드를 조롱했다. 그 때문인지 최근 BSB는 멤버의 개인적 불행까지 겹치며 다소 슬럼프 기미를 보이고 있다. 확실히 보이밴드의 위기다. 이처럼 중요한 시점에 엔 싱크가 잇단 혹평에 반격을 시도한 새 앨범 < Celebrity >를 발표했다. 엔 싱크의 전작이 너무나 엄청난 성적을 거두었고, 현 상황이 상황인지라 과연 이번 신보가 어떤 반응을 얻을 지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고 있다. 이미 5월에 싱글로 먼저 출시한 ‘Pop’은 빌보드 싱글차트 19위에 올라 엔 싱크는 무난한 첫 걸음을 내딛었다. # NSYNC IS… 과연 팝 음악을 듣던 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나 엔 싱크의 현재 위용(偉容)을 상상했을까. 사실 엔 싱크가 1997년 7월, 홍보차 한국에 방문했을 때만해도 이렇게까지 대단해지리라고 예상한 이들은 별로 없었다. 그저 좀 있다 사라질 그런 팀인 줄 알았다. 실제로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많은 그룹들이 잠깐 떴다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하는가. 게다가 당시 그 보이밴드는 유럽, 그것도 독일과 네덜란드 등지에서만 인기 있었을 뿐 정작 본고장 미국에서는 앨범 발매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다. 엔 싱크는 그러나 일부 무지몽매한(?) 음악팬들 또는 평자들의 예상을 깨고 현재까지 살아남았다. 그냥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라 BSB와 더불어 최강의 보이밴드로 군림하며 천하를 호령하고 있다. 이 5인조는 이제 세계 어딜 가나 운집한 소녀 팬들에 휩싸이고, 앨범은 나왔다하면 몇 천만 장이 팔려나간다. 특히 최근의 활약은 눈부시다. 지난 2000년 음악계에서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린 연예인을 조사한 결과, 엔 싱크는 쟁쟁한 뮤지션들을 모두 제치고 당당히 1위를 마크했다. 우선 그들에 대해 알아보자. 엔 싱크는 1996년 미국 플로리다주 올란도에서 결성된 5인조 보이밴드다. 이들은 R&B의 보컬 하모니와 역동적인 댄스음악이 접목된 스타일을 구사한다. 이들의 독특한 댄스음악에는 복잡한 정글리듬이 꿈틀댄다. 이들의 히트곡 ‘Bye bye bye’이나 ‘It`s gonna be me’를 들으면 단번에 느낄 수 있는데, 정글리듬이란 요즘 흑인음악에서 유행하는 리듬패턴, 즉 4비트에서 8비트로, 8비트에서 16비트로, 또 다시 역으로 예상치 못한 비트의 변환을 보이는 리듬패턴을 말한다. 뉴 키즈 온 더 블록이나 테이크 댓과 같은 보이밴드의 전통을 따르고는 있지만 그래서 유독 흑인 필이 강하다. 멤버는 JC(JC Chasez)와 저스틴 팀벌레이크(Justin Timberlake), 크리스 커크패트릭(Chris Kirkpatrick), 조이 페이튼(Joey Fatone), 랜스 베이스(Lance Bass)로 구성되어 있다. 엔 싱크(N Sync)라는 좀 특이한 밴드이름은 ‘함께 한다’는 뜻인 ‘synchronize’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으며 각 멤버들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딴 것이기도 하다. 1996년에 데뷔했지만 이들의 역사는 좀더 오래됐다. 팀의 주축멤버 JC와 저스틴은 어린 시절부터 디즈니 채널의 쇼 프로그램 < 미키 마우스 클럽 >에서 같이 활동했던 사이였기 때문이다. < 미키 마우스 클럽 >의 MC를 거쳐 내시빌에서 솔로 프로젝트에 몰두하던 그 둘은 올란도로 돌아와 크리스와 조이를 만나 그룹을 구상했고, 나중에 랜스가 합류해 완전한 엔 싱크가 탄생되었다. 이들의 최대 후원자는 스웨덴 출신의 프로듀서 데니즈 팝이었다. 에이스 오브 베이스를 위시해 최근 스웨덴의 신성 제시카를 키워낸 이 명장은 엔 싱크에게 ‘I want you back’을 선사함으로써 그들을 일약 세계적 스타로 만들어냈다(올해 초 제시카는 안타깝게도 지난 1998년 요절한 자신의 음악적 대부 데니즈 팝에게 헌정하는 앨범 < Dino >를 발표하기도 했다). ‘I want you back’, ‘Tearin` up my heart’ 같은 싱글들이 독일과 네덜란드, 스웨덴 등 유럽과 아시아에서 큰 성공을 거두자 1998년 봄, 엔 싱크는 미국에서 마침내 자신들의 셀프타이틀 데뷔앨범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먼저 유럽부터 돌며 인기몰이에 나선 후 미국을 공략한 ‘우회전략’은 대성공이었다. 데뷔앨범은 미국에서만 천만 장이 팔려나갔으며 엔 싱크는 BSB와 함께 ‘보이밴드 신드롬’의 주역이 되었다. 그 여세를 몰아 그 해 연말엔 크리스마스 앨범 < Home For Christmas >를 내놓았고, 지난 2000년에는 그들의 위치를 보다 확고히 다져준 2집을 출시했다. # 엔 싱크 VS BSB 이쯤에서 ‘숙명의 라이벌’ 엔 싱크와 BSB의 관계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후발주자로서 엔 싱크는 언제나 BSB의 기준으로 평가받아야 했다. 곧잘 ‘복제물’이라는 비유도 들어야 했던 엔 싱크로서는 BSB의 존재가 하루 빨리 벗어나고픈 굴레였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엔 싱크가 지금의 위치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BSB라는 라이벌이 존재했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들보다 더 큰 존재가 있었기에 언제나 긴장하고 더욱 노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전엔 BSB가 앞서 가고 엔 싱크가 추격하는 형세였지만 현재는 서로 동등하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선의의 경쟁을 벌이고있다. 라이벌인 만큼 이 두 팀은 서로 닮은 부분이 너무도 많다. 출신부터 멤버구성, 프로듀서, 그리고 현 소속사까지 여러 모로 비슷하다. 물론 팬들이야 모든 걸 꿰뚫고 있겠지만 그래도 한번 그 닮은 점을 요모조모 확인해보자. 먼저 출신과 멤버구성. 엔 싱크와 BSB는 모두 미국 플로리다주 올란도 출신이며 백인 남성 5인조로 구성되어있다(이 두 팀의 활약 덕에 디즈니랜드가 있는 관광명소로만 유명했던 올란도는 ‘틴 팝의 산실’이라는 새로운 별칭을 얻기도 했다). 두 팀을 기획한 사람 역시 동일인물. 뉴 키즈 온 더 블록을 매니지먼트했던 조니 라이트(Johnny Wright)의 기획 아래 각각 팀이 만들어졌다. 프로듀서 진용도 마찬가지로 같다. 데니즈 팝(Denniz Pop)과 맥스 마틴, 그리고 최근의 로드니 저킨스(Rodney Jerkins) 같은 최강의 프로듀서들이 그간 엔 싱크와 BSB의 히트작들을 책임졌다. 프로듀서가 같은데 음악 스타일이라고 다를 리 없다. 보컬 하모니를 강조하고 기본적으로 댄스 팝을 구사하는 공통점을 지녀, 초보자들은 여간해선 그 둘의 음악을 분간하기 어렵다. 인기를 얻은 과정은 어떠한가. 역시 같은 케이스다. 미국인이지만 이들은 곧바로 미국에서 데뷔하지 않았다. 두 팀은 똑같이 먼저 유럽과 아시아에 진출해 가능성을 타진해본 다음, 인기를 얻자 미국으로 금의환향, 본격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들을 조련했던 전(前) 매니저도 루이스 펄먼(Louis J. Pearlman)이라는 같은 사람이었다. 여기서 루이스 펄먼은 ‘꼭두각시의 조종자’라는 악명이 붙을 정도로 문제가 많았던 인물이다. 무리한 일정을 강요하며 BSB와 엔 싱크를 끊임없이 옥죄었고, 그들의 엄청난 수입도 거의 착취하다시피 했다. 결국 견디다 못한 BSB가 먼저 그 ‘압제의 사슬’을 끊고 탈출했으며 이어 엔 싱크도 치열한 법정공방 후 펄먼을 떠났다(이런 상황은 국내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이슈가 되었던 에쵸티 멤버들과 SM기획과의 마찰을 보라). 동병상련이라고 했던가. 엔 싱크가 새롭게 보금자리를 마련한 곳은 바로 BSB가 소속한 < 자이브(Jive) >였다. # 보이밴드의 한계와 비전 어찌 보면 엔 싱크도 그저 비슷비슷한 보이밴드 중 하나일 뿐이다. 그 수많은 보이밴드들 중에서 유독 엔 싱크가 해를 거듭할수록 더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이렇게 인기가 있을까. 멤버들이 잘 생겨서일까? 예전의 뉴 키즈나 테이크 댓과 비교해보면 사실 좀 평범한 수준의 외모다. 춤을 잘 춰서? 노래를 잘 해서? 물론 다 맞는 얘기다. 허나 그런 것들은 데뷔 후 2-3년이면 모두 밑천이 드러난다. 물린다는 얘기다. 엔 싱크는 데뷔한지 6년째이지만 더욱 더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팬들에게 결코 싫증나지 않는 즐거움을 선사하며. 그 이유는 엔 싱크 같은 보이밴드들이 지닌 한계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을 듯 하다. 앞선 루이스 펄먼의 예에서 보듯, 보이밴드의 한계는 명확하다. 애초에 기획된 팀이기 때문에 기획자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 탓에 루 펄먼 같은 악덕 매니저에게 노예문서 식의 불평등한 계약을 종용받고, 활동 내내 쉴 틈 없이 바쁜 일정에 쫓긴다(이건 좀 민감한 사안이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국내 문화방송과 연예인간의 대립도 이 문제 때문이다. 현재로선 어느 쪽이 옳은 지는 알 수 없지만 엔 싱크의 경우에는 확실히 ‘노예계약’이었다). 또한 트렌드에 민감해서 하룻밤에 떴다가도 그 트렌드가 사라지면 동시에 내팽개쳐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만일 이 모든 걸 극복하고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다해도 그때쯤이면 보이밴드의 멤버들은 보이가 아닌 어덜트가 돼버렸음을 느낀다.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마냥 신나는 댄스음악만을 할 수 있을까? 엔 싱크는 당연히 위의 한계를 모두 지니고 있는 보이밴드다. 수완 좋은 기획자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노련한 매니저에 의해 다듬어졌다. 인기를 얻고 시간이 지나자 이들은 자신들이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음은 물론 꼭두각시처럼 조종만 당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매니저에게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했으며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법정 소송을 감행했다. 결국 엔 싱크는 승리를 얻어냈고, 자신들이 원하는 소속사로 이적했다. 이 과정이 중요하다. 엔 싱크는 여기서 적어도 자신들이 꼭두각시가 아니라 독립된 뮤지션임을 입증했다. 이 직후 발표한 앨범이 2집 < No Strings Attached >이며, 이 앨범은 그러한 ‘독립의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작품이다. 트렌드의 변화 속에서도 엔 싱크는 정체되거나 도태되지 않았다. 데뷔앨범에서 백인 댄스 팝이나 발라드만을 소화했던 이들은 다음에는 크리스마스 앨범을 내며 영역의 확장을 꾀했다. 틴 팝 열풍이 불어닥쳐 남들은 모두 백인 중심의 틴 팝에 몰려있을 때 흑인음악이 가득한 2집을 발표했다. 우연히도(?) 그때부터 미국 음악계의 흐름은 흑인음악이 대세를 이뤘다. 스타일은 고여있지 않고 늘 흐르는 물과 같았고 그때마다 팬들은 성원으로 답했다. 말하자면 트렌드를 쫓아간 게 아니라 트렌드를 감각적으로 예지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셈이다. 나이도 별 문제 될 게 없는 듯 하다. 엔 싱크의 멤버들은 모두 어엿한 성인이다. 가장 어리다는 저스틴이 우리 나이로 21살이고, 가장 많은 크리스는 31살이나 된다. 연령제한은 없다지만 보이밴드 멤버로서 나이를 차츰 먹어 가는 것이 무척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더욱 정력적이며 좋은 음악으로 활동하겠다"고 의지를 천명하고 있다. 그 의지는 음악을 통해 실제로 드러난다. 보이밴드의 전형적 모습에서 탈피, 록에서 힙합, R&B, 라틴, 컨트리 그리고 최근의 일렉트로니카까지 다양한 음악을 수용하며 입맛 까다로운 수요자들을 만족시키고 있다. 이처럼 보이밴드의 한계와 비전을 동시에 지닌 그룹이 바로 엔 싱크다. 일렉트로니카와 영국식 R&B 등 한층 더 다양해진 새 앨범 < No Strings Attached > 이후 엔 싱크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올 1월말에는 프로 미식축구 결승 경기인 슈퍼볼(SuperBowl) 개막식 행사에 참여해 ‘전국구 스타’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단일 프로그램으로는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며 그 때문에 미국 가수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서보고 싶어하는 ‘꿈의 무대’ 라는 슈퍼볼 행사에서 엔 싱크는 아메리칸 하드 록의 자존심 에어로스미스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멋진 공연을 선사했다. 3월 19일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을 식장에서 직접 소개하는 영광까지 얻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존재하는 법. 이 엄청난 수요를 창출하는 보이밴드에 대한평단의 시각은 그리 곱지 않았다. 이들의 음악이 틴 팝이라서, 만들어진 팀이라서, 캐리어가 부족해서 등등의 이유로 평단으로부터 집중타를 얻어맞았다. 엔 싱크는 이 모든 걸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문했다. "우리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어떻게 하면 한 걸음 앞으로 나갈 수 있을까?" 동시에 여타의 모든 비난을 불식시킬 반격을 준비했다. 그러한 고민 끝에 내놓은 야심작이 3집 < Celebrity >다. 일단 이들이 앨범에서 담당한 역할만 보더라도 일신된 면모를 알 수 있다. JC가 겨우 몇몇 곡을 담당했던 전작들과 달리 신보에서는 저스틴과 JC가 신곡 13트랙 중 10트랙에서 공동 작곡과 공동 제작을 맡았다. 이건 분명 괄목할만한 성장이며 예전의 자신들을 뛰어넘는 음악적 성과다. 그 외에 일렉트로니카 뮤지션 BT(Brian Transeau)를 필두로 브라이언 맥나이트, 엔 싱크의 든든한 후원자인 맥스 마틴과 라미 콤비, 흑인 랩 듀오 넵튠스(The Neptunes), 로드니 저킨스 등이 제작자로 참여해 매끈한 팝/R&B와 좀 더 댄서블한 앨범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작곡가 웨이드 롭슨(Wade Robson)과 저스틴이 함께 작곡한 첫 싱글 ‘Pop’은 일렉트로-펑크(funk) 비트와 유로 댄스 풍 신서사이저, 그리고 메탈 기타 연주가 곁들여진 강력한 일렉트로니카 댄스 넘버다. 파워 넘치기는 여전하지만 ‘Bye bye bye’와는 또 다른 분위기의 이 곡은 폴 반 다익(Paul Van Dyk)과 더불어 일렉트로니카 진영에서 최고의 실력파로 인정받고 있는 BT가 어레인지 및 프로듀스를 담당했다. 로드니 저킨스가 제작을 맡은 ‘Celebrity’나 냅튠스와 저스틴이 공동 작곡한 ‘Girlfriend’, 맥스 마틴과 라미의 작품인 ‘Tell me, tell me…baby’ 등 여러 곡에서 예의 펑키하고 활력 있는 엔 싱크의 음악을 만끽할 수 있다. 여기에 간간이 흘러나오는 발라드는 잠시 쉬어 가는 여유를 준다. 어쿠스틱 기타와 바이올린 연주, 그리고 가녀리지만 액센트 있는 비트가 어우러진 ‘Gone’, R&B 발라드의 귀재 브라이언 맥나이트가 작곡한 ‘Selfish’, ‘Just don`t tell me what’ 등에서 엔 싱크의 달콤하고 농익은 하모니를 감상할 수 있다. 그중 ‘Just don`t tell me what’는 스티비 원더가 참여, 그의 멋진 하모니카 연주까지 들려주는 곡이다. 마치 디온 워윅, 스티비 원더, 글래디스 나이트, 그리고 엘튼 존이 함께 불렀던 ‘That`s what friends are for’에서의 서정적인 하모니카 연주를 다시 듣는 기분이다. 여러 노장 가수들이 틴 팝 뮤지션들을 비난하고 있는 가운데 ‘흑인 음악의 전설’로 불리는 스티비 원더가 참여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앨범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트랙은 ‘The two of us’. 이 곡은 영국식 R&B와 클럽 댄스를 융합한 이른바 ‘2(Two)-스텝 사운드’를 도입한 곡으로, 달콤한 멜로디와 흥겹고 독특한 리듬으로 듣는 누구라도 단번에 반할 만큼 매력적이다. 더 흥미로운 건 이 곡이 ‘영국 R&B의 신성’ 크레이그 데이비드(Craig David)에게 영향 받아 만든 노래라는 점이다. 멤버 랜스 베이스는 최근 음악전문웹진 < 런치(Launch) >와의 인터뷰에서 그 연유에 대해 분명히 밝혔다. "그 곡은 이제 막 미국에 상륙한 크레이그 데이비드 타입의 사운드다. 크레이그 데이비드는 우리가 아주 좋아하는 아티스트이며 우리는 그 음악을 좋아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그 음악을 미국에 소개하려고 몇 곡을 만들었다. ‘The two of us’가 바로 그 곡이다." # Pop isn`t dead. 음악만큼이나 철학적으로도 성숙했다. 얼마 전 저스틴은 빌보드와 가진 인터뷰에서 일부 혹평에 대해 이렇게 항변했다. "비평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저주받는 것에는 이제 아주 진절머리가 난다. 우리는 결코 그들의 선입견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런 의견을 내기 전에 과연 우리 음악을 듣기나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러한 염증은 이 앨범을 아주 도전적으로 만들게 했다. 신보는 앞서 말한 부정적 시각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며, 첫 싱글 ‘Pop’은 그러한 자의식을 대변하는 곡이다. "더러운 팝! 사람들의 그런 얘기를 듣는 것도 지쳤어/ … 넌 이 음악이 왜 널 신나게 해주는 지 한번쯤 생각해봤니?/ 너의 몸이 요동치기 시작할 때 넌 그걸 느끼잖아/ 그리고 넌 멈출 수 없어"- ‘Pop’ 중에서 더불어 팝은 결코 죽지 않으며 단지 취향만 변한다는 주지의 사실을 이들은 강조한다. JC는 좀더 점잖게 말한다. "우리의 목적은 또 하나의 히트 레코드를 만드는 데 있지 않다. 대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음악적으로 변화시키는 좀더 반성적인 앨범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췄다. 또한 팝 음악이 다양한 취향에서 나온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버블 검 음악이 다가 아니라." 새 앨범과 더불어 최근 엔 싱크 팬들이 가장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은 아무래도 엔 싱크의 멤버 저스틴 팀벌레이크와 브리트니 스피어스 커플의 열애소식일 것이다. 처음엔 "우린 오랜 친구일 뿐이다. 뭐 그리 심각한 사이는 아니다"라는 식으로 애매하게 피해갔지만 이 커플은 현재 공공연하게 데이트를 즐기며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연인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카메라에 잡히고 기사화 된다. 말도 많던 브리트니의 ‘순결서약’도 둘만의 밀월여행이 언론에 의해 포착되면서 우스개 소리였냐는 비아냥거림도 나왔다. 급기야 지난 6월에는 두 스타의 동반 사망설까지 퍼져 경찰과 언론사, 팬들까지 미국 전체가 한바탕 난리를 치르기도 했다. 그저 웃자고 한 어느 방송국 DJ들의 농담이었다지만 사태가 너무 심각해졌고, 결국 그 DJ들은 방송국을 떠나야만 했다.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는 그 둘이 너무나도 ‘유명인사’였기 때문이다. 이런 걸 예상이라도 했을까. 엔 싱크의 이번 타이틀 트랙은 유명인사가 되어 오히려 진정한 감정에 소외되는 자신들을 희화화해 표현한 곡이다. "만약 내가 유명인사가 아니었다면 넌 나에게 그리 다정하게 해줬겠니?/ 내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주지 않았다면 그리고 다른 모든 값비싼 것들을 사주지 않았다면 나에게 다가왔겠니?/ 내가 유명인사가 아니었다면?" - ‘Celebrity’ 중에서 신보의 수록곡 중 6곡은 지난 5월부터 필라델피아, 뉴올리언스, 디트로이트 등 미 전역을 돌며 공연한 ‘팝 오디세이 투어’에서 이미 선보였다. 대개 앨범 발매 후 홍보 공연에 나서는 여러 다른 뮤지션들과는 달리 앨범 발매 두 달 전에 공연에 돌입했다는 것이 좀 특이하지만 그만큼 신곡들이 더 큰 호응을 얻을 전망이다. 멤버 중 랜스 베이스와 조이 페이튼은 자신들이 출연한 영화 < 온 더 라인(On The Line) >의 홍보에 바쁘고, 나머지 멤버들도 각기 솔로 프로젝트를 구상중이라는 소식이다. 그리고 최근 알코올 중독으로 요양소에 입원한 BSB의 멤버 A.J. 맥린과 관련, 빠른 쾌유를 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라이벌이긴 하지만 같은 보이밴드로서 동료애를 전하는 그들의 모습이 따뜻해서 보기 좋다. 팝 음악의 세계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무척이나 변덕스러우며 순간적인 것이다. 단순하게 덤벼서 오래 버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엔 싱크는 이제 팝 음악의 그 변하기 쉬운 성질에 웬만큼 적응했다. 이젠 그들에게 칭찬의 말을 건네도 별 문제가 없을 듯하다. 엔 싱크는 자기 몫을 충분히 아는 그리고 자기 몫을 충분히 하는 실력 있는 ‘팝’ 그룹이다.
노래 : B2K (비투케이)
1997년, 지 부그(J-Boog)와 릴 피즈(Lil’ Fizz), 래즈 비(Raz-B)라는 코흘리개 친구들이 가수의 꿈을 품고 결성한 B2K. IMx의 멤버 배트맨(Batman)의 사촌 동생(지 부그)과 데스티니스 차일드(Destiny’s Child), 마크스 휴스턴(Marques Houston)과 작업한 크리스 스톡스(Chris Stokes)의 친척(래즈 비)이 뭉쳤다는 소문만으로 기대와 총아를 받기에 충분했... 1997년, 지 부그(J-Boog)와 릴 피즈(Lil’ Fizz), 래즈 비(Raz-B)라는 코흘리개 친구들이 가수의 꿈을 품고 결성한 B2K. IMx의 멤버 배트맨(Batman)의 사촌 동생(지 부그)과 데스티니스 차일드(Destiny’s Child), 마크스 휴스턴(Marques Houston)과 작업한 크리스 스톡스(Chris Stokes)의 친척(래즈 비)이 뭉쳤다는 소문만으로 기대와 총아를 받기에 충분했다. 이후 TV 광고에서 활약하던 오마리온(Omarion)이 가세하면서 본격적인 팝 스타로의 트레이닝이 시작되었다. 크리스 스톡스의 지휘 아래 보컬과 댄스를 연마해 가던 중, LA에서 개최된 신인 발굴 오디션에 출전, 레코드사 관계자의 눈에 띄어 뉴욕 본사로부터 호출 받는 행운이 찾아온다. 총수, 사장 등 여러 중역 앞에서 당당하게 퍼포먼스로 펼쳐 보인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계약을 맺고 즉시 데뷔전 준비에 들어간다. 물론 릴 바우 와우(Lil Bow Wow)의 투어와 MTV, 소울 트레인, 폭스 패밀리 채널 등에 출연하면서 21세기 만능 팝 스타가 되기 위한 갖은 경험 쌓기에도 주력했다. 그러던 중 발매된 데뷔 싱글 ‘Uh huh’는 어셔(Usher)와 블루 캔트렐(Blu Cantrell)의 곡을 만든 크리스 “트리키” 스튜어트(C. “Tricky” Stewart)가 프로듀스하여 트렌트를 정확히 꿰찬 리듬과 멤버들의 고운 미성을 부각시켰는데, 호시탐탐 적기만을 노리고 있던 B2K는 이 곡과 함께 10주 연속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하면서 메인 스트림으로 점핑한다. 비록 수상까지 가지는 못했으나 BET 어워드에서 세 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고, 데스티니스 차일드의 영국 투어에서 개막 공연을 맡는 등 등장하자마자 종횡무진 인기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여세를 몰아 조속히 발표한 셀프 타이틀 데뷔작 < B2K >는 저메인 듀프리(Jermaine Dupri), 브라이언 마이클 콕스(Bryan Michael Cox) 등 호화 제작진이 참여하여 파워풀한 역동성과 스무디한 유연성을 동시에 갖췄다. ‘Uh huh’의 뒤를 이어 ‘Gots ta be’가 차트 상위권에 랭크되고, 한 달 후에는 리믹스 음반 < B2K; The Remixes Vol. 1 >과 크리스마스 앨범 < Santa Hooked Me Up >을 차례로 발매한다. 그리고 그 해 겨울에 발포한 두 번째 정규 앨범 < Pandemonium! >에서 피 디디(P. Diddy)와 알 켈리(R. Kelly)가 서포트한 메가 히트 싱글 ‘Bump, bump, bump’으로 다시 한번 차트를 점령한다. 풋내기 티가 풀풀 풍기던 전작에 비해 이제는 듬직한 뮤지션으로 성장한 것이 확연히 눈에 띄는데, 오래 전에 맥이 끊긴 흑인 보이밴드의 자존심을 지킨 것을 격찬하며 (지난번 약만 된통 올렸던) BET 어워드가 베스트 그룹상을 포함한 두 개의 상을 수여했다. 멤버들이 주연한 영화 < You Got Served >(2004년)의 사운드 트랙까지 포함해 총 다섯 장의 음반을 반년 동안 팔아치웠다. 2002년 하반기 차트에서 B2K의 이름이 빠진 적이 없을 정도라고 하면 믿을 수 있겠는가. 속도에 불을 붙이다보니 정통성이 떨어진다는 문제점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신통하게도 아이들은 그 어떤 허점도 보이지 않고 완벽하게 일을 처리했다. 보이밴드의 수명을 간파하여 일망타진 전법으로 한꺼번에 밀어 붙인 것이 결과적으로는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21세기를 대표하는 팀이 되겠다는 뜻의 B2K라는 이름이 얼마나 후대에 전해질지는 의문이다.
노래 : Fantasia (판타지아 (R&B 보컬))
노래 : Toni Braxton (토니 브랙스톤)
1967년생으로 미국 매릴랜드 주 출신인 토니 브랙스톤은 매우 신앙심이 깊은 부모 아래에서 어린 시절부터 교회 합창단에서 노래를 할 수 밖에 없었고, 이 때부터 노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는 교사 자격증을 받으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프로 가수를 꿈꾼 적은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그녀가 주유소에서 주유를 하면서 혼자 노래를 부르고 있던 모습을 본 매니저 윌리엄 페타웨이(William E... 1967년생으로 미국 매릴랜드 주 출신인 토니 브랙스톤은 매우 신앙심이 깊은 부모 아래에서 어린 시절부터 교회 합창단에서 노래를 할 수 밖에 없었고, 이 때부터 노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는 교사 자격증을 받으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프로 가수를 꿈꾼 적은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그녀가 주유소에서 주유를 하면서 혼자 노래를 부르고 있던 모습을 본 매니저 윌리엄 페타웨이(William E. Pettaway)로 인해 그녀의 인생은 바뀌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그녀와 자매들을 함께 그룹으로 묶어 브랙스톤스(Braxtons)를 결성, 1989년 아리스타 레이블과 계약을 맺은 후, 셀프 타이틀 앨범을 내놓았다. 그들의 싱글 [Good Life]의 성적은 그리 좋진 않았으나, 그 곡은 그녀의 존재를 작곡 콤비이자 자신들의 레이블인 라페이스(LaFace)를 런칭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던 엘에이 리드(Antonio "L.A." Reid)와 베이비페이스(Babyface)의 눈에 띄는 계기가 되었다. 두 사람은 그녀에게서 아니타 베이커의 매력을 가졌으면서 더 대중성이 있는 보이스의 매력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1992년 영화「Boomerang」OST를 제작하면서 원래 아니타에게 부탁하려던 [Love Shoulda Brought You Home]을 그녀에게 부르게 했고, [Give U My Heart]를 베이비페이스와 함께 듀엣으로 녹음하게 하면서 효율적으로 그녀를 팝 씬에 등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뒤이은 데뷔 앨범 「Toni Braxton」(1993)을 통해 [Another Sad Love Song](7위), [Breathe Again](3위), [You Mean the World to Me](7위), [I Belong to You/How Many Ways](28위)를 연이어 히트시키면서 그녀는 '중저음 소울 디바'의 위상을 계승할 후보 1순위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또한 그녀의 데뷔작은 미국 내에서만 8백만 장 이상을 판매하는, 신인의 데뷔앨범으로서는 엄청난 기록을 세웠다. 그 결과 그래미는 1994년 시상식에서 그녀에게 '최우수 신인상'의 영예를, 그리고 그 해부터 2년 연속으로 '최우수 R&B 보컬 퍼포먼스상'을 그녀에게 선사했다.

이처럼 화려하게 시작된 그녀의 인기는 2집「Secret」(1996)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소포모어 징크스라는 말이 그녀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고, 기존 프로듀서 라인업 외에도 알 켈리(R.Kelly), 데이빗 포스터(David Foster) 등이 지원사격을 아끼지 않았던 이 앨범 속에서는 [You Makin' Me High]와 그녀의 커리어 전체를 통틀어 현재까지 가장 애청되고 있는 발라드 [Unbreak My Heart](이 곡 역시 90년대를 주름잡았던 여류 작곡가 다이앤 워렌(Diane Warren)의 작품이다.)이 모두 팝 싱글 차트 1위 자리를 차지했고, [I Don't Want To/I Love Me Some Him], 케니지(Kenny G)와의 조인트였던 [How Could an Angel Break My Heart] 등이 뒤를 이어 히트했다. 앨범 역시 세계적으로 총 2천만 장 이상을 판매하면서 그녀의 인기 곡선은 끝을 모르는 듯 상승했다.

그러나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그녀의 커리어는 예상치 못한 변수들로 인해 계속 험난한 여정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2집의 히트 이후 시작된 라페이스 레이블과 그녀 사이의 계약 분쟁은 1999년 2500만 달러라는 거액의 계약금으로 해결을 보긴 했으나, 2000년에 발표된 그녀의 3집 「The Heat」는 거액의 제작비를 투자한 싱글 [He Wasn't Man Enough](2위)로 기분 좋게 시작하긴 했지만, 후속 싱글들인 [Just Be a Man About It](32위), 그리고 카를로스 산타나의 기타가 가세했던 발라드 [Spanish Guitar](98위) 등이 예상보다 큰 반응을 얻지 못하는 바람에 이 앨범으로 미국 내 2백만 장 이상의 판매고와 6번째 그래미 트로피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전작과 비교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 이후에는 또 다른 문제로 그녀는 레이블과 갈등을 빚었다. 3집 작업을 통해서 만난 민트 컨디션(Mint Condition) 출신의 멤버이자 작곡자인 케리 루이스(Keri Lewis)와 2001년 결혼한 후, 4집 앨범을 막 작업 완료를 했던 시기에 그녀는 둘째 아이를 임신했는데, 그 때 토니 측에서는 앨범 발매를 미뤄줄 것을 요청했으나, 레이블 측이 이를 거절하는 바람에 4집「More Than A Woman」(2002)의 홍보 활동은 그녀의 건강 문제로 계속 꼬여버렸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탄생한 둘째 아들 디젤(Diesel)은 2006년 자폐 판정을 받았다.) 넵튠스(Neptunes)가 작업한 [Hit the Freeway]가 히트하긴 했지만, 앨범의 성과는 골드 레코드로 만족해야했고, 결국 그녀는 라페이스-아리스타 레이블과의 관계를 청산했다.

우여곡절 끝에 2003년 블랙그라운드(Blackground) 레이블로 이적한 그녀는 2005년 5번째 앨범「Libra」로 재기를 노렸지만, 첫 싱글과 앨범의 발매가 미뤄지면서 이 앨범은 제대로 홍보를 받지 못했고, 간신히 골드 레코드에 머물게 되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과 이전 레이블에게 각각 다른 말을 했던 전 매니저에게 소송을 제기, 법원의 판결을 통해 37만 5천 달러의 선불금을 돌려주고 레이블과의 계약을 종결했다. 일단 2008년 TV 리얼리티 쇼 'Dancing with the Stars'의 시즌 7에 출연하고 관련 투어를 돌면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재기의 발판을 찾았고, 결국 새로운 레이블과 계약을 채결하면서 5년 만인 2010년 새 앨범 [Pulse]를 발매했다.
멤버 : 티토 조셉 잭슨(Tito Joseph Jackson), 타릴 안드렌 잭슨(Taryll Adren Jackson), 토리애노 잭슨(Toriano Jackson) 멤버 : 티토 조셉 잭슨(Tito Joseph Jackson), 타릴 안드렌 잭슨(Taryll Adren Jackson), 토리애노 잭슨(Toriano Jackson)
노래 : Gloria Estefan (글로리아 에스테판)
라틴음악의 본고장 쿠바 출신의 글로리아 에스테판에겐 두 가지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우선 리키 마틴의 라틴 팝 돌풍 이전에 이미 라틴의 혼을 전세계에 전파한 ‘라틴 디바’라는 것이다. 그녀는 1980년대 이미 ‘Conga’, ‘1-2-3’ 같은 라틴 팝 넘버를 히트시켰으며 일련의 노력으로 독보적인 라틴 팝 여왕의 자리를 지금껏 유지해오고 있다. ‘의지의 표상’이라는 존경할만한 또 다른 수식어도 있다. 1990년 ... 라틴음악의 본고장 쿠바 출신의 글로리아 에스테판에겐 두 가지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우선 리키 마틴의 라틴 팝 돌풍 이전에 이미 라틴의 혼을 전세계에 전파한 ‘라틴 디바’라는 것이다. 그녀는 1980년대 이미 ‘Conga’, ‘1-2-3’ 같은 라틴 팝 넘버를 히트시켰으며 일련의 노력으로 독보적인 라틴 팝 여왕의 자리를 지금껏 유지해오고 있다. ‘의지의 표상’이라는 존경할만한 또 다른 수식어도 있다. 1990년 교통사고를 당해 정상적인 생활마저 불투명했지만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고 훌륭히 재기에 성공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20년 가까이 자국인 쿠바의 리듬을 충실히 알린 그녀에겐 라틴 디바라는 표현이 가장 적당할 것이다. 글로리아 마리아 파하르도(Gloria Maria Fajardo)가 본명인 에스테판은 1957년 쿠바 하바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통령가족을 경호하는 일을 담당하며 비교적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갔지만 1959년 가족은 카스트로의 공산혁명을 피해 미국 마이애미로 이주해야만 했다. 난민의 처지로 미국에 정착한 그녀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일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병든 아버지를 간호하며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했고 때문에 야간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힘든 상황에서 글로리아를 지탱해 줬던 것은 물론 기타와 음악이었다. 1975년 마이애미 대학에 진학한 그녀는 학업과 ‘웨딩싱어’라는 자유직업을 병행했다. 거기서 밴드 ‘마이애미 라틴 보이스’를 이끌던 에밀리오 에스테판을 만나 함께 새로운 밴드를 결성, 음악적 욕구를 실현할 토대를 구축했다. 그 그룹이 유명한 마이애미 사운드 머신이었다. 그녀와 음악동료인 에밀리오는 1978년 결혼했다. 마이애미 사운드 머신은 1984년 에픽 레코드사에서 정식 데뷔작인 < Eyes of innocence >를 발표했다. ‘Dr. beat’와 같은 흥겨운 곡이 호응을 얻기도 했지만 그들이 슈퍼스타로 웅비하게 된 것은 이듬해 앨범 < Primitive Love >를 내놓고 나서였다. ‘Conga’, ‘Bad boy’와 같은 싱글이 잇따라 스매시 히트했고, 그와 함께 라틴의 열정적인 리듬도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글로리아 에스테판의 길은 하지만 언제나 순항과 고난의 반복이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딛고 스타덤을 공고히 하는가 했더니 다시 한번 엄청난 시련이 닥쳤다. 1990년 3월 투어 차 뉴욕으로 향하던 버스와 뒤따라오던 트레일러가 추돌하는 사고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 사고로 글로리아는 등뼈가 부러졌으며 400 바늘이나 꿰매야 하는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수술은 성공적으로 이뤄졌고, 그녀는 1년만에 치명적 상처를 딛고 일어서 놀라운 투혼으로 < In To The Light >를 발표했다. 이 앨범에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복하고자 하는 불굴의 의지가 투영되었다. 팬들은 진심 어린 격려와 갈채로 답했으며, 싱글 ‘Coming out of dark’는 차트 1위에 오르는 일대 기염을 토했다. 그것은 기적적인 재기였다. 최근 여러 뮤지션들에 의해 라틴음악이 유행하는 상황이지만 그녀야말로 순수한 라틴음악의 잠재력을 꿰뚫어 본 어쩌면 사상 최초의 가수였다. 1990년에 이미 스페인어로 부른 싱글 ‘Oye mi canto’을 발표했으며 3년 뒤에는 완전한 라틴앨범 < Mi Tierra >를 내놓았다. 1995년에는 다시 스페인어 음반 < Abriendo Puertas >를 출시해 라틴 부흥에 앞장섰다. 두 앨범 모두 대중적으로 큰사랑을 받았고 이 무렵 글로리아는 공식적으로 가장 많은 앨범을 판 라틴계열 가수로 등록되었다. 1998년 앨범 < Gloria! >을 발표한 그녀는 같은 해 뉴욕에서 개최된 ‘디바 라이브 공연’에 참여했다. 아레사 프랭클린, 셀린 디온, 머라이어 캐리, 캐롤 킹, 샤니아 트웨인과 함께 노래한 이 공연을 통해 글로리아는 라틴 디바로서 재확인되었다. 이듬해 그녀는 메릴 스트립이 주연한 < Music Of The Heart >에 배우로서 첫선을 보였으며, 이 영화의 타이틀곡을 보이밴드 엔싱크와 함께 불러 오스카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2000년에는 세 번째 라틴앨범 < Alma Caribena >를 발표하며 남다른 라틴 정체성을 이어가고 있다.
노래 : Fifth Harmony (피프스 하모니)
멤버 : Ally Brooke Hernandez, Camila Cabello, Normani Kordei, Dinah Jane Hansen, Lauren Jauregui 멤버 : Ally Brooke Hernandez, Camila Cabello, Normani Kordei, Dinah Jane Hansen, Lauren Jauregui
멤버 : Perrie Edwards, Jesy Nelson, Leigh-Anne Pinnock, Jade Thirlwall 멤버 : Perrie Edwards, Jesy Nelson, Leigh-Anne Pinnock, Jade Thirlwall
노래 : Natasha Bedingfield (나타샤 베딩필드)
나타샤 베딩필드(Natasha Bedingfield)가 처음 등장했을 땐 ‘Gotta get thru this’와 ‘If you’re not the one’으로 2002년과 2003년 사이에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한 다니엘 베딩필드(Daniel Bedinfield)의 여동생이라는 어드밴티지를 이용한 벤치 마케팅 틴 아이돌 가수로만 여겼다. 그래서 나타샤 베딩필드는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제시카 심슨(Jessica S... 나타샤 베딩필드(Natasha Bedingfield)가 처음 등장했을 땐 ‘Gotta get thru this’와 ‘If you’re not the one’으로 2002년과 2003년 사이에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한 다니엘 베딩필드(Daniel Bedinfield)의 여동생이라는 어드밴티지를 이용한 벤치 마케팅 틴 아이돌 가수로만 여겼다. 그래서 나타샤 베딩필드는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제시카 심슨(Jessica Simpson)의 동생 애슐리 심슨(Ashlee Simpson)과 얼떨결에 비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애슐리 심슨의 음악이 좀 더 성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10대의 감성에 익숙하다면 나타샤 베딩필드는 빨리 어른이 되고자 하는 어덜트 컨템포러리 성향에 가깝다. 1981년 11월 26일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나타샤 베딩필드는 유년시절에 영국으로 건너와 런던에 정착하면서 뮤지션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 오빠 다니엘 베딩필드와 친구 니콜라와 함께 DNA 알고리듬(DNA Algorhythm)을 결성해 목표에 다가섰지만 큰 활동을 보여주지 못한 채 2001년에 다니엘이 ‘Gotta get thru this’로 성공적인 솔로활동을 펼치자 나타샤의 첫 음악인생은 흐지부지 되었다. 절치부심(切齒腐心)한 나타샤. 2004년에 대망의 솔로 데뷔앨범 < Unwritten >으로 영국을 초토화시킨 그는 미국에서도 타이틀 곡 ‘Unwritten(5위)’과 ‘These words(17위)’, ‘Single(57위)’이 연이어 싱글 차트를 정복했고 제49회 그래미에서는 ‘Unwritten’으로 최우수 여성 팝 보컬 부문 후보에 오르며 대영제국과 아메리카 대륙을 성공적으로 접수했다. 오빠 다니엘을 능가하는 호성적에 고무된 나타샤는 2007년에 마돈나(Madonna)의 옛 작곡 파트너 패트릭 레너드(Patrick Leonard)와 마룬 5(Maroon 5)의 보컬리스트 아담 레빈(Adam Levine) 등이 조력자로 참여한 2집 < N.B. >을 공개했지만 미국보다는 유럽에서 더 큰 피드백을 얻었고 ‘I wanna have your babies’라는 발칙한 제목의 노래가 구라파에서 인기를 누렸다. 2008년에 출산(?)한 세 번째 앨범 < Pocketful Of Sunshine >은 빌보드 앨범 차트 3위까지 오르는 큰 반향을 일으켰고 첫 싱글 ‘Pocketful of sunshine’은 싱글 차트 8위를 기록했다.
노래 : Bianca Ryan (비앙카 라이언)
노래 : Leona Lewis (리오나 루이스)
2006년에 방송된 리얼리티 스타 발굴 프로그램 < X Factor >의 시즌 3 우승자 리오나 루이스(Leona Lewis)는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과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의 장점을 겸비한 21세기 형 섹시 디바다. 파워풀한 가창력은 기교를 앞세운 머라이어 캐리보다는 휘트니 휴스턴을 연상시키고 라틴 혈통의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의 핏줄을 이어받은 구리 빛 피부와 뇌쇄적... 2006년에 방송된 리얼리티 스타 발굴 프로그램 < X Factor >의 시즌 3 우승자 리오나 루이스(Leona Lewis)는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과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의 장점을 겸비한 21세기 형 섹시 디바다. 파워풀한 가창력은 기교를 앞세운 머라이어 캐리보다는 휘트니 휴스턴을 연상시키고 라틴 혈통의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의 핏줄을 이어받은 구리 빛 피부와 뇌쇄적인 외모 그리고 파마기 있는 헤어스타일은 머라이어 캐리를 떠올린다. 시장성과 성장성을 자체 프로세스한 이 두 강점은 리오나 루이스가 빠른 시간에 비상(飛上)할 수 있는 날개였다. 1985년 4월 3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리오나 루이스는 10대 때부터 스스로 피아노와 기타를 배워 송라이팅 기술을 습득하면서 접수원이나 웨이트리스의 피곤한 일상을 극복해나갔다. 그러던 중 남자친구가 < X Factor >에 지원하면서 리오나 루이스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이했다. < X Factor >에서 ‘Over the rainbow’, ‘Hero’, ‘Without you’처럼 가창력을 뽐낼 수 있는 노래들을 불러 우승을 차지한 리오나 루이스는 곧바로 메이저 데뷔 싱글로 켈리 클락슨(Kelly Clarkson)의 ‘A moment like this’를 발표해 인기가도에 박차를 가했고 대세를 이어 2007년에 데뷔앨범 < Spirit >를 공개했다. ‘Apologize’를 부른 그룹 원 리퍼블릭(One Republic)의 리더 라이언 테더(Ryan Tedder)와 ‘Beautiful soul’과 ‘She's no you’로 친숙한 아이돌 가수 제시 매카트니(Jesse McCartney)가 공공으로 작곡한 ‘Bleeding love’는 20주 동안 빌보드 싱글 차트 탑 텐에 머물며 4주간 정상을 차지하는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고 두 번째 싱글 ‘Better in time’도 11위에 랭크되었다. 이제 리오나 루이스는 2008년에 대중들의 시선으로 들어왔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2008년 8월, 베이징 올림픽 폐막식에서는 2012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런던을 알리기 위해 지미 페이지(Jimmy Page)와 함께 무대에 올라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명곡 ‘Whole lotta love’를 불러 평생의 영광을 메모리 했으며 2008년 브릿 어워즈에서 4개 부문 후보로 지명되었고 2009년 그래미 어워즈에서는 올해의 레코드와 최우수 여성 팝 보컬 등 모두 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노래 : Chris Brown (크리스 브라운)
메간 트레이너(Meghan Trainor)는 2014년과 2015년에 미국 팝 씬에서 가장 화려하게 주목받았던 신인 여성 아티스트였다. 일단 2014년 6월 (메이저) 데뷔 싱글 'All About That Bass'가 빌보드 Hot 100 차트에서 총합 8주간 정상에 오르면서 화려하게 대중의 시선을 받기 시작한 그녀는 이 싱글로 미국을 포함 세계 58개국에서 정상을 차지했고, 디지털과 피지컬 세일을 종합해 총 ... 메간 트레이너(Meghan Trainor)는 2014년과 2015년에 미국 팝 씬에서 가장 화려하게 주목받았던 신인 여성 아티스트였다. 일단 2014년 6월 (메이저) 데뷔 싱글 'All About That Bass'가 빌보드 Hot 100 차트에서 총합 8주간 정상에 오르면서 화려하게 대중의 시선을 받기 시작한 그녀는 이 싱글로 미국을 포함 세계 58개국에서 정상을 차지했고, 디지털과 피지컬 세일을 종합해 총 1100만 단위를 판매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뒤이어 같은 해 가을에 발매된 후속 싱글 'Lips Are Movin''도 빌보드 Hot 100 4위를 기록하는 히트를 이어갔으며, 2015년 벽두에 공개된 그녀의 메이저 데뷔 앨범인 [Title]은 발매되자마자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오르면서 모든 음악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Dear Future Husband'(14위)와 존 레전드(John Legend)와 함께한 'Like I'm Gonna Lose You'(8위) 등이 계속 싱글 히트를 거두었고, 이러한 확고한 대중적 인기 기반을 바탕으로 그녀는 2개의 빌보드 뮤직 어워드와 피플즈 초이스 어워드를 수상했다. 그리고 2년 동안 연속(2015년에는 'All About That Bass'로 올해의 노래, 올해의 레코드 부문 후보에 올랐다)으로 그래미 후보에 오르는 화제를 모은 끝에 어느 아티스트건 평생 한 번 탈 기회를 갖는 그래미 최우수 신인상(Best New Artist) 수상자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1999년 18살의 나이로 데뷔한 제시카 심슨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I wanna love you forever’ 같은 파워 넘치는 발라드를 훌륭히 소화해내 ‘차세대 머라이어 캐리’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그래서 버블검 팝 가수라도 그녀는 다른 이들보다 성숙한 면모가 두드러졌다. 1999년은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전염성 강한 댄스음악으로 10대 팝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한 해다. 10대 여가... 1999년 18살의 나이로 데뷔한 제시카 심슨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I wanna love you forever’ 같은 파워 넘치는 발라드를 훌륭히 소화해내 ‘차세대 머라이어 캐리’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그래서 버블검 팝 가수라도 그녀는 다른 이들보다 성숙한 면모가 두드러졌다. 1999년은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전염성 강한 댄스음악으로 10대 팝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한 해다. 10대 여가수 신드롬을 일으켰던 그 둘은 이후 팽팽한 라이벌 전선을 형성하며 독보적인 상승세를 이어갔다. 이러한 2파전의 구도 속에 용감히 뛰어든 가수가 제시카 심슨이다. 그녀는 브리트니, 크리스티나와 같은 또래였지만 그들과는 왠지 다른 분위기였다. 보다 정통의 느낌이랄까. 머라이어 캐리를 빼 닮은 음색과 창법, 가스펠로 다져진 탄탄한 가창력은 그러한 느낌을 뒷받침했다. 어리고 미모인데다 ‘포스트 머라이어 캐리’라는 화제성까지 갖춘 제시카 심슨은 그때부터 차세대 틴 팝 진영을 이끌어갈 기대주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1980년 7월 10일 미국 텍사스 주 달라스에서 태어난 제시카 심슨은 12살 때부터 노래실력을 키워갔다. 침례교 목사였던 아버지를 둔 탓에 그녀의 수련장이 된 곳은 교회였다. 얼마 후에는 ‘아이돌 스타 등용문’ < 미키마우스 클럽 >을 통해 주류로의 편입을 시도했으나 아쉽게도 오디션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가스펠 음악진영에서 꾸준히 활동하며 가수의 꿈을 이어갔다. 여기서 제시카 심슨의 꿈을 이루게 도와준 이가 < 소니뮤직 >의 사장 토미 모톨라(Tommy Mottola)였다. 집에서 손수 제작한 그녀의 레코드가 좋은 평판을 얻자 토미 모톨라가 그녀를 즉각 불러들여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이는 그러나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의 상부상조였다. 당시 이렇다할 10대 여가수가 없었던 < 소니 뮤직 >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소속된 < BMG >,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소속된 < 자이브 >의 대박 흥행을 옆에서 지켜만 봐야했다. 따라서 그 같은 열세를 만회하길 바랬던 < 소니 뮤직 >으로선 제시카 심슨이 어둠 속의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아무튼 그녀는 1999년 말 첫 앨범 < Sweet Kisses >를 공개하며 예정된 팝 스타의 수순을 밟아갔다. 2년 만에 출시되는 2집 < Irresistible >는 전작에서 선보였던 디바형 발라드에서 10대 취향인 댄스 팝 사운드로 전향한 앨범이다. 말하자면 머라이어 캐리보다는 브리트니 스피어스에 가깝다. 강렬한 후크가 제목처럼 거부하기 힘든 ‘Irresistible’, 질주하는 신서사이저 연주와 급박한 비트가 인상적인 ‘A little bit’ 등의 곡들은 강한 리듬이 중심인 틴 팝 사운드에 기초한 곡들이다. 창법도 변화무쌍하다. 제니퍼 로페즈, 데스티니스 차일드 등의 음반작업에 참여했던 코리 루니(Cory Rooney)가 프로듀스한 R&B 넘버 ‘Hot Like Fire’에서 그녀는 마이클 잭슨을 연상시키는 힘찬 흑인 창법을 구사하며 발라드를 들려 줄 때의 직선적 창법과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리듬이 대폭 강화되었지만 발라드를 소홀히 다루진 않았다. 휘트니 휴스턴, 머라이어 캐리, 셀린 디온 같은 ‘원조 디바’들에게 노래를 공급했던 초특급 프로듀서 월터 아파나시에프(Walter Afanasieff)가 앨범에 참여해 발라드감각을 조율했다. ‘There your were’, ‘To fall in love’가 예의 발라드 트랙. 특히 ‘There your were’는 ‘You sang to me''에서 화려한 발라드 실력을 자랑한 라틴 팝 가수 마크 앤소니(Marc Anthony)와의 만남이 이루어진 멋진 듀엣 곡이다. 마지막 트랙으로 수록된 가스펠 ‘His eyes is on the sparrow’는 교회에서 성장한 제시카 심슨의 음악적 뿌리를 알 수 있는 곡이다. 이전까지 그녀가 다른 10대 여가수들과 다소 차별화 되었다면 그것은 기존의 댄스음악보다는 발라드를 특화해서 불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번 앨범은 그 비율이 역전되었다. 다른 댄스 가수의 앨범들과 다를 게 없다. 이건 좀 문제가 있다. 댄스음악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문제는 이미 정형화된 틀에 자신을 맞춰가려는 퇴행적 방식이다. 그녀보다 더 어리지만 최근 새 앨범에서 틴 팝 공식을 벗어나려고 시도한 맨디 무어와는 무척 대조적이다. 지금껏 제시카 심슨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와 브리트니 스피어스에 대적할 제3의 인물로 평가받아왔지만 이젠 그 자리를 맨디 무어에게 양보해야 할 듯하다. 이번 앨범으로 더 많은 10대 팬들을 끌어들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이제 그녀는 결코 브리트니나 크리스티나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다.
노래 : New Kids On The Block (뉴 키즈 온 더 블록)
90년대 초반 구미 각국에 ‘뉴 키즈’ 태풍이 불었다. 미국 보스톤 지역에서 발생한 그 태풍은 사정권에서 벗어난 지역으로 보이던 우리나라도 사정없이 강타했다. 그러나 태풍 뉴 키즈호는 우리에게 엄청난 피해만 남긴 채 스쳐 갔다. 92년 3월 서울 잠실벌에 불어온 뉴 키즈 태풍의 위력은 막강했다. 그것이 할퀴고 간 흔적에 한국 사회 전체가 들썩거렸다. 피해 상황은 사망 1명, 부상 40여 명, 외형적으로는 그리 큰... 90년대 초반 구미 각국에 ‘뉴 키즈’ 태풍이 불었다. 미국 보스톤 지역에서 발생한 그 태풍은 사정권에서 벗어난 지역으로 보이던 우리나라도 사정없이 강타했다. 그러나 태풍 뉴 키즈호는 우리에게 엄청난 피해만 남긴 채 스쳐 갔다. 92년 3월 서울 잠실벌에 불어온 뉴 키즈 태풍의 위력은 막강했다. 그것이 할퀴고 간 흔적에 한국 사회 전체가 들썩거렸다. 피해 상황은 사망 1명, 부상 40여 명, 외형적으로는 그리 큰 피해는 아니었으나 급기야 청소년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데 언론이 흥분했고 기성 세대들이 비탄의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에게 잊을래야 잊을 수 없게 된 외국 팝 그룹 ‘뉴 키즈 온 더 블록’. ‘소녀를 몰고 다니는’ 그 그룹은 한국의 소녀들도 자극해 사망자까지 발생한 비극적 사태를 몰고왔다. 사건 직후 공연을 주최한 레코드사 사장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문화부의 해외 팝스타 공연 불허조치로 예정되어 있던 공연이 무산 또는 연기되었다. 이 공연을 계기롤 우리 공연 문화가 수술대 위에 올랐고, 더 나아가 청소년 문화에 대한 전면적 검토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만큼 뉴 키즈 사태의 후유증은 컸고, 많은 시간과 정력을 피해복구 작업에 쏟게 했다. 뉴 키즈 사태는 한마디로 틴에이저의 ‘히스테리’가 빚어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환호 괴성 아우성 열광 기절 졸도 등의 양상으로 나타나는 히스테리는 팝스타 공연만이 갖는 고유 현상이다. 십대들은 영화배우와 TV 탤런트보다는 가수에게 열광한다. 음반과 비디오로 접하고, 다른 연예계 스타들과는 달리 공연 현장에서 직접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대를 통해 팬들과의 접촉이 빈번하게 이뤄지는 관계로 공연장 경비 등 ‘히스테리를 객석에 한정시키는’ 대책이 강구되지 않을 경우 사고는 필연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뉴 키즈 사태는 히스테리를 보인 청소년들을 매도할 것이 아니라 공연 기획 및 주최자의 준비 소홀에 그 책임을 지워야 한다. 팝스타와 관련한 틴에이저의 히스테리는 또 전통적이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뉴 키즈가 팝 히스테리의 최초 사례는 아니다. 1971년 클리프 리차드 내한 공연 때와 80년 광주항쟁 직후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개최된 레이프 가렛 공연 때는 흥분한 일부 여성 관중이 속옷을 벗어 던진 해프닝까지 발발하였다. 그때의 한국 사회는 지금처럼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들)의 시대가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같은 해프닝은 충격적 히스테리였고, 따라서 뉴 키즈 공연 때 관객들이 보여준 히스테리는 오히려 약과일지도 모른다. 영미 팝계에는 고금을 통해 십대의 히스테리를 유발시킨 가수 또는 그룹이 끊임없이 출현했다.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 롤링 스톤즈. 오스몬즈, 몽키스, 잭슨5, 베이 시티 롤러즈, 마이클 잭슨 등등... 이들 중 강도에 있어서 가장 압권은 역시 비틀스라 할 수 있고, 그 가운데 더러는 제도권 팝계가 ‘마케팅’의 차원에서 틴에이저의 히스테리를 겨냥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작품’도 있다. 몽키스와 잭슨5(후자의 경우는 시각에 따라 ‘자생적’이라 볼 수도 있다)가 여기 해당한다. 뉴 키즈는 바로 이 방식의 최신형이다. 비틀스 현상의 충격이 너무 컸기에 십대 소녀들로부터 유별난 인기를 끄는 그룹이 등장할 경우 흔히 ‘제2의 비틀스’라고 붙여주는 습관이 있다. 몽키스가 그랬고, 베이 시티 롤러즈가 그랬다. 뉴 키즈가 데뷔할 당시 미국의 일부 다운타운 DJ들은 그들을 제2의 비틀스라 일컬었다. 그러나 제도권의 시나리오에 의해서 탄생된 상품이라는 점에서 뉴 키즈는 제2의 비틀스라기보다는 ‘제2의 몽키스’라고 해야 옳다. 그래서 60년대의 몽키스가 제도권의 도구라는 지적을 받았던 것처럼 뉴 키즈 역시 음악 관계자들로부터 비슷한 문책을 받았다. < 타임 >지는 90년 그들을 “모리스 스타(뉴 키즈의 프로듀서)라는 제페토의 조종에 따라 움직이는 피노키오”로 비유했다. 모리스 스타는 80년대 중반 ‘뉴 에디션’이라는 흑인 틴에이저 그룹(바비 브라운이 이 그룹 출신)을 키워낸 역량을 인정받은 바 있는 인물이다. 그가 뉴 키즈 사단을 구성하려 했을 때의 출발점은 ‘경제 상황에 대한 고려’였다. 80년대 중반 당시 미국의 경기는 침체에 빠져있었고 따라서 호주머니의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시점. 모리스는 시장 조사를 통하여 그래도 돈 쓸 여유가 있는 백인 중산층의 자녀를 겨냥한 틴에이저 그룹이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룹의 구성원은 그들을 충족시킬 백인 소년들이라야 했다. 그는 민첩하게 거리로 나가 백인 중산층이 압도적으로 운집해 있는 보스톤 시내를 샅샅이 뒤져 ‘쓸 만한 애’들을 픽업해냈다. 도니 왈버그, 조나단 나잇, 조단 나잇, 조 매킨타이어, 그리고 대니 우드 등 5인조 ‘동네의 새 아이들’이 이렇게 하여 짜여졌다. 뉴 키즈는 ‘가장 완벽한 중부 미국적 그룹’이 되었다. 중부 미국(Middle America)은 지역적으로 중부일뿐 아니라 중산층이 많이 사는 지역을 상징하기도 한다. 뉴 키즈는 백인 중산층 자녀를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그룹답게 외모나 의상 등 외형 총체에서 ‘고생 없이 자라난 신세대 애들’의 이미지가 진하게 풍겨나왔다. 당연히 그들 공연장에는 대부분 부모가 중산층인 백인 십대 소녀들이 몰려들었다. 그래서 이 그룹은 옛날의 그룹들과는 여러 측면에서 차이를 드러냈다. 그 중 하나가 ‘인기와 돈의 관계’를 보는 시각이었다. 이들의 선배 그룹들은 통상적으로 공연을 개최하면서 기업으로부터의 후원을 꺼리는 경향을 보여왔다. 관객들에게 행여 돈벌이에 집착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뉴 키즈는 스폰서가 붙는 것 자체를 ‘성공의 징표’로 보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도니 왈버그는 이렇게 털어놓는다. “팬들이 우릴 줄줄 쫓아오고 스폰서가 우리에게 계약서를 내미는 것은 내 입장에서 짜릿하기만 하다. 난 그들을 쳐다보며 ‘맥도날드, 여기서 나가주세요’라고 하지 않겠다. 난 ‘저와 함께 일해 보실래요?’라고 말하겠다.” 맥도날드 햄버거 회사는 90년 뉴 키즈 미국 순회 공연 때 스폰서로 나섰다. 맥도날드측은 그들의 후원자가 되면서 “뉴 키즈는 맥도날드사가 갖고 있는 것과 똑같은 가족의 가치관을 갖고 있는 매우 건전하고 가장 미국적인 그룹”이라며 즐거워했다. 뉴 키즈는 실로 90년대의 팝계가 ‘성공과 판매술’에 포인트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반영하는 표본적 존재였다. 멤버 전원의 기계적 율동, 현란한 쇼무대, 십대 감각을 예리하게 찌르는 음악 모두가 마케팅과 판매신장의 구도 아래서 기초되었다. 레코드가 팔리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고 싱글이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오르지 않으면 실패나 다름없다. 공연 티켓을 구입하는 데 어려움이 없는 십대 고객들이 공연장을 찾지 않으면, 또 아우성을 치지 않으면 게임은 끝이다. 이유는 단 하나, 돈에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돈을 긁어모으려면, ‘소구력이 있는 상품’을 생산해야 한다. 그것이 모리스 스타의 이념이었다. 그는 뉴 키즈를 구성하고 즉각 스파르타식 훈련을 통해 율동을 주입했다. 춤의 스타일은 빈틈없이 맞아 돌아가는 마이클 잭슨식의 리듬과 랩 뮤직 가수들이 구사하는 탄력적인 스텝을 혼합시켰다. ‘외형 가꾸기’와 더불어 음악의 색깔에도 신경을 기울였다. 모리스는 ‘전통적으로 대중에게 잘 먹히는’ 흑인 음악을 최적의 장르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멋진 춤, 검은 음악, 흰 피부’의 뉴 키즈 온 더 블록이 탄생했다. 모리스의 기획과정 및 생산과정은 매우 ‘유서깊은 방식’이었다. 인재의 발굴, 상품화, 소구력 제고, 품질관리, 마케팅 전략 도입 등 제반 방법은 이미 몽키즈나 잭슨5 시절에 적용된 바 있었던 것들이었다. 다만 소구 대상(백인 중산층의 십대 자녀)을 확실히 정하고 들어갔다는 점이 달랐다. 그러나 모리스 기획의 효력은 즉시 나타나지 않았다. 출범한 뒤 86년 첫 음반을 발매했으나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문제는 소구 대상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때는 아직 뉴 키즈의 소구 대상이 팝계의 주체세력으로 군림한 시점이 아니었다. 그룹 유투나 휘트니 휴스턴 등의 록과 스탠다드팝을 소화할 수 있는 ‘20대 이상의 소비자들’이 팝시장의 주요 고객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뉴 키즈가 성공하려면 십대 소녀가 음반의 주구매층, 공연의 주관객층으로 떠올라야 했다. 그들의 매니저인 딕 스코트는 “팝 사람들이 시장을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성공은 찾아왔다”고 지적했다. 팝 사람들(Pop People)이야말로 뉴 키즈가 고대하고 있던 소구대상이었는데, 바로 ‘백인 틴에이저 걸’을 지칭했다. 그 시점이 이듬해 두 번째 음반 < 굳세게(Hangin’ Tough) >가 발표된 88년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들의 인기는 폭발했다. 90년까지 뉴 키즈의 앨범은 미국에서만 1천 5백만 장이 팔렸다. 그들의 뮤직 비디오는 3백 30만 개 이상의 판매고를 올려 그 부문 최고였던 마이클 잭슨의 기록을 앞질렀다. 89년과 90년 2년에 걸쳐 벌어들인 수입은 7천 8백만 달러나 되어 해마다 연예인 수입을 공개하는 < 포브스 >지의 리스트에 처음 오르면서 당당 5위에 랭크되었다(당시 1위는 코미디언 빌 코스비, 2위는 마이클 잭슨, 3위는 롤링 스톤즈 순이었고, 마돈나는 6천 2백만 달러로 8위를 차지했다). < 뉴욕 타임즈 >는 90년 뉴 키즈의 대성공을 더 많은 관객으로 향하려는 ‘흑인음악의 마케팅’과 ‘적절한 그룹을 시장의 적재적소에 심어놓은 프로듀서의 뛰어난 안목’ 등 두 가지 전략의 우연한 결합이 일구어낸 성과로 분석했다. 어쨌든 뉴 키즈는 잘 만들어진 상품이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조립한 상품은 어딘가 허점이 있기 마련, 춤을 강조하다 보니 노래가 빈약해지고 특히 공연 현장에서 춤과 노래의 병행은 벅차게 되어 있다. 이 문제점을 가끔 노래를 틀어놓고 입만 벙긋거리는 소위 ‘립 싱크’로 커버할 수 밖에 없는데, 뉴 키즈도 이러한 범행(?)을 수시로 저질러 마돈나, 폴라 압둘, 자넷 잭슨 등과 함께 ‘앵무새 가수 집단’으로 분류돼 비난받기도 했다. 잠실 공연에서도 이 점이 지적된 바 있었다. 립 싱크의 그룹, 돈과 성공을 위해 조직된 그룹 가장 양키적인 그룹, 그리고 또 하나 언급할 뉴 키즈의 중요한 성격이 있다. 뉴 키즈 진영에 뉴 키즈 빼고는 스탭 전원이 흑인이라는 점이다. 프로듀서 모리스 스타, 매니저 딕 스코트를 위시하여 로드매니저, 보디가드, 공연사회자, 백 밴드 모두가 흑인들이다. 뉴 키즈는 ‘흑인이 생산, 관리하는 백인 상품’의 첫 케이스이기도 하다. 미국의 한 평론가는 이를 흑백의 조화로운 결합이라고 했다. 흑백의 결합? 아니다. 그것은 생산자와 상품의 결합이다.
로니 제임스 디오(Ronnie James Dio)는 1980년대 초반까지 헤비메탈 보컬리스트로서는 그 누구도 대적하기 힘든 업적을 쌓아 올린 인물이었다. 그는 레인보우(Rainbow)와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라는 기라성 같은 그룹을 두 개나 거치며 최정상의 싱어로 도약했다. 하지만 그 그룹들에서 그는 결국 2인자의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레인보우는 엄연히 리치 블랙모어(Ritchie Blac... 로니 제임스 디오(Ronnie James Dio)는 1980년대 초반까지 헤비메탈 보컬리스트로서는 그 누구도 대적하기 힘든 업적을 쌓아 올린 인물이었다. 그는 레인보우(Rainbow)와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라는 기라성 같은 그룹을 두 개나 거치며 최정상의 싱어로 도약했다. 하지만 그 그룹들에서 그는 결국 2인자의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레인보우는 엄연히 리치 블랙모어(Ritchie Blackmore)의 밴드였고,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이 떠나면서 토니 아이오미(Toni Iommi)에게 주도권이 넘어간 블랙 사바스 역시 신참인 그가 휘어잡을 수 있는 팀이 아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보컬이면서도 리더가 될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고, 드디어 1983년 블랙 사바스를 나와 자신의 밴드 ‘디오’를 출범시킨다. 로니는 자신의 목소리가 악기를 누를 정도로 강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키보드를 포함해 악기 편성을 최대한 다채롭게 가져가면서 그 밸런스를 맞추었다. 클래식 교육을 통해 ‘음감’에 대해 정통했던 그였기에, 곡의 전개나 사운드의 배치, 작품의 전반적 구성은 흠 잡을 곳이 없었다. 마침내 고대하던 지휘봉을 갖게 된 로니의 인솔하에 그룹 디오는 날개를 활짝 폈다. < Holy Diver >를 시발점으로 < The Last In Line >, < Sacred Heart >까지 앨범 당 평균 서너 개에 이르는 인상적인 곡들이 터져 나왔다. 멤버들의 기량도 일취월장해서 기타리스트 비비안 캠벨(Vivian Campbell)은 ‘미완의 대기’에서 손꼽히는 실력파로 부상했으며, 블랙 사바스 시절부터 로니가 애지중지하던 드러머 비니 어피스(Vinnie Appice)는 파워 드러밍의 진수를 선보였다. 완전한 ‘마왕’의 이미지를 굳힌 통솔자 로니의 보컬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광기에 도취된 채 제물을 탐식하는 디오니소스 신이었다. 많은 팬들이 ‘디오’하면 떠올리는 ‘Rainbow in the dark'', ‘We rock'', ‘Hungry for heaven''등이 모두 이 시기에 공개된 곡들이다. 그러나 디오는 달라진 자신들의 좌표를 모르는 팀이었다. 그들은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비주얼적 감각과 세련된 패션으로 현혹하는 많은 그룹들이 생겨나 시각에 민감한 젊은 팬들을 빼앗아 갔지만, 디오는 굳건하게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했다. 록 필드에 오랫동안 몸 담으며 산전수전 다 겪은 이 노장에게는 자신의 음악에 대한 확신과 집념밖에 없었다. 1987년, 새로운 기타 연주자 크레익 골디(Craig Goldy)와 제작한 < Dream Evil >은 이전의 디오 사운드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수작이었으나 이 음반을 내놓은 직후부터 로니는 자신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직감해야 했다. 1990년대에도 디오는 < Lock Up The Wolves >, < Strange Highway >, < Angry Machine >등을 발표하며 투혼을 불살랐다. 여전히 반응은 무덤덤했다. 다만 향수를 가진 팬들이 이전의 작품을 다시 들으며 옛 모습을 추억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오래 될수록 향기가 그윽해지는 이들이 있다. 로니 제임스 디오가 바로 그러하다. 수십 년 동안 변함없는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음악을 하나의 소우주로 만들어 버린 이에게 악평을 할 수는 없다. 세월의 힘겨움에 빛 바래고, 구식이 되는 것은 막을 길이 없지만, 로니는 판도에 신경 쓰지 않는 인물이다. 아직도 그의 음악을 찾는 이들에게 시들지 않은 록의 정기를 공급해 주고 있을 뿐이다. 그는 이미 거장이다.
1994년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결성된 트레인(Train)은 1990년대 초반 블랙 크로우즈(Black Crowes)로부터 발흥된 복고 성향의 아메리칸 하드록을 구사하는 그룹이다. 미국의 전통 음악인 컨트리(country)와 포크(folk)를 기저로 강력한 하드록 사운드를 덧입혔던 이 흐름의 최선봉에 위치한 밴드로 평가받고 있다. 트레인은 패트릭 모나한(Patrick Monahan, 보컬, ... 1994년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결성된 트레인(Train)은 1990년대 초반 블랙 크로우즈(Black Crowes)로부터 발흥된 복고 성향의 아메리칸 하드록을 구사하는 그룹이다. 미국의 전통 음악인 컨트리(country)와 포크(folk)를 기저로 강력한 하드록 사운드를 덧입혔던 이 흐름의 최선봉에 위치한 밴드로 평가받고 있다. 트레인은 패트릭 모나한(Patrick Monahan, 보컬, 퍼커션), 롭 호치키스(Rob Hotchkiss, 기타, 보컬), 지미 스태포드(Jimmy Stafford, 기타), 찰리 콜린(Charlie Colin, 베이스), 스콧 언더우드(Scott Underwood, 드럼)의 5인조로 구성되었다. 결성 직후, 다섯은 꾸준한 라이브 공연을 지속하며 팬층을 확보하였고, 이것은 마이너 레이블인 < Aware >와 컨택트되는 동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등장한 데뷔작 < Train >은 진득한 미국 전통 록 사운드를 가감 없이 펼쳐 보임으로서 인상적인 신고식을 치러냈다. 1997년부터 밴드는 블루스 트래블러(Blues Traveler), 카운팅 크로우즈(Counting Crows)등의 오프닝을 맡으며 제 2의 도약의 기회를 모색했다. 메이저 음반사들로부터 구애의 손길이 뻗친 때가 바로 이즈음이었다. 멤버들은 컬럼비아(Columbia)와 손잡은 뒤, 1집을 재발매하며 본격적인 음악 활동의 시작점을 찍었다. ’Meet Virginia’가 당시 라디오 전파를 수시로 타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4년 뒤, 두 번째 음반 < Drops of Jupiter >(2001)를 발표한 트레인은 그래미상 3개 부문의 후보에 오르는 등의(비록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앨범은 현재까지 200만장 이상이 팔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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