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로 쌓아올린 든든한 말의 집
서정시의 힘과 아름다움을 깊이 있게 탐구하고, 자신의 시에서 그것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시인 최서림의 여섯번째 시집 『버들치』가 출간되었다. 1993년 『현대시』를 통해 문단에 나온 최서림 시인은 등단 후 20여 년 동안 꾸준히 시집을 펴내며 삶과 말에 대한 관심을 시에 오롯이 담아내왔는데, 이번 시집에 이르러 이러한 그의 색은 절정에 이르렀다.
시인이 바라보는 삶이란 개인적인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땅에서 조상을 같이 하며 살아온 고향 사람들이나 시인이 살아오면서 직간접적으로 만나온 사람들, 그들의 황폐하고 비루한 삶을 말하는 것이며, 시인은 이렇게 찾아낸 삶의 원형을 바탕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힘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탐색한다.
이 과정에서 시인이 무기로 삼는 것은 다름아닌 언어, 말이다. 그는 거칠고 폭력적이며 공허한 말놀이에 그치지 않는 세상의 언어를 관찰하고, 그 거친 언어를 감싸안으며 허기진 삶을 채워줄 수 있는 살아 있고 먹을 수 있는 시의 언어를 꿈꾼다. 그리하여 “말이 곧 시가 되고 노래가 되는/ 말이 곧 법이 되고 밥이 되는 때로 돌아가기, 아니/ 말이 곧 목화가 되고 햇콩이 되는 때가 다시 돌아오기까지/ 물렁물렁한 말의 혓바닥으로/ 깨어진 말의 사금파리에 베인 상처 핥아주기”(시인의 말)에 이르는 것이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이혜원의 진단처럼, 최서림 시인은 “서정시야말로 삶의 상처와 비애에 공감하면서도 그 본바탕을 탐구하고 치유와 각성의 언어를 실현할 수 있는 저력을 지닌다고 보고 그 가능성을 추구해나가고 있다.”
중택이는 버들치의 청도 사투리다 중학교 때부터 중택이란 별호(別號)를 얻은 까까머리 친구가 있다 1급수에만 사는 버들치같이 맑은 눈을 가졌기 때문인지 중 같은 머리 때문인지 지금도 청도서 가장 깊은 계곡 버드나무 숲 속에다 집을 짓고 산다 버드나무 숲 때문인지 눈물 많은 중택이 때문인지 이곳 바람은 누물처럼 맑고 푸르다 으레 술자리가 막 벌어질 드음이면 주식 얘기, 군대 얘기 다음으로 먹는 얘기가 따라나와서 개, 개구리, 뱁 잡아먹던 얘기로 마무리되지만, 물이 맑고 길이 곧은 청도서 나온 우리들에겐 뻐구리, 송사리, 버들치 얘기로 끝이 난다 한밤에 차를 몰아, 버들치같이 해맑은 얼굴로 산림청 서기를 하다가 이제는 진짜로 버들치가 되어버린, 바위틈에 숨쉬고 산다는 중택이를 찾아가는 친구들도 있다
-「버들치」 전문
표제작 「버들치」는 “말이 곧 법이 되고 밥이 되는 때로 돌아가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로 읽을 수 있다. 시인이 꿈꾸는 시의 언어는 “버들치”처럼 1급수에만 사는 순수하고 깨끗한 자연의 언어이다. 그리고 그 속엔 유년의 순수한 기억이 함께 자리한다. “버들치같이 맑은 눈을 가”진 친구도 그 언어 안에서 다시금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유년의 기억으로 천진하고 충만한 삶의 원형을 재현하는데, 그것은 동시에 그때로 돌아갈 수 없는 현재의 자리를 다시금 실감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은 현재를 낙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말이 곧 목화가 되고 햇콩이 되는 때가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년의 순수한 기억의 말뿐 아니라 현재의 아름다운 삶의 말도 그의 시에 담겨 있다.
대낮에 켜진 가로등처럼
벚꽃이 너무 눈부셔 쓸쓸한 봄날,
모래먼지 풀풀 날리는 그녀의 봄날이
삽날에 잘린 지렁이처럼 그렇게
말라비틀어지며 기어서 간다
길이 보이지 않는 가슴속에서
이리 비뚤, 저리 비뚤, 서둘러서 지나간다
천지사방을 할퀴며 간다
그녀의 봄은 칼날을 품고 있다 때론
아플 정도로 황량해서 아름다운 生도 있다
-「봄날 2」 전문
파란만장한 운명에 휩쓸려, 그 거센 격랑 끝에 매달려 삶을 위해 발버둥치는 생명의 몸짓에서 시인은 절실하게 다가오는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은 아니었을까.
한편 이번 시집에서는 고흐, 고갱, 마티스, 렘브란트의 그림을 다양한 방식으로 시와 결합하고, 옛 대중가요에 기대어 내밀한 감성을 드러낸 시편들을 한데 볼 수 있다. 최서림 시인에게는 예술의 경계가 따로 없고, “삶의 비애를 간파하고 어루만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좋은 예술의 기준이 된다.”(이혜원)
시인이 이번 시집뿐 아니라, 자신의 말이 나아갈 방향을 끊임없이 모색하며 시인으로서 마침내 이루고자 하는 경지는 “물렁물렁한 말의 혓바닥으로/ 깨어진 말의 사금파리에 베인 상처 핥아주기”이다. 유년의 친구, 황폐한 삶을 절실하게 건너는 사람, 명화와 대중가요 속의 이야기와 맞닿은 지점에 놓인 사람…… 『버들치』는 그들의 이야기를 최서림 시인의 “물렁물렁한 혓바닥으로” 쌓아올린 단단한 말의 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자 시론가로서 서정시의 뿌리를 탐색해온 그는 말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무서운 상처를 낼 수도 있고 크나큰 위안이 될 수도 있는 말을 다루는 데 있어 이제 그는 누구보다도 뚜렷한 기준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외롭고 굶주린 이웃에게 한마디의 위로와 한 그릇의 밥이 될 수 있는 말로 시의 집을 지으려 한다. 그것은 화려하고 공허한 말들이 일으킨 신기루가 아니라 상처와 사랑으로 다져진 견고한 집이다. 서정시의 견고한 뿌리가 자리잡고 있는 핍진한 삶의 거처이다. _이혜원, 해설 「삶과 서정의 뿌리」에서
● 시인의 말
말이 곧 시가 되고 노래가 되는
말이 곧 법이 되고 밥이 되는 때로 돌아가기, 아니
말이 곧 목화가 되고 햇콩이 되는 때가 다시 돌아오기까지
물렁물렁한 말의 혓바닥으로
깨어진 말의 사금파리에 베인 상처 핥아주기
2014년 6월
최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