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따뜻한 회복의 의지를 다진다!
17년 만에 두번째 시집을 펴내는 함명춘 시인의 시집 『무명시인』
함명춘. 익숙했다 생소해진 이름이 되어버린 건 순전히 시인 자신 때문이다. 시를 놓치고 시를 놓아버리고 시와 멀어져서는 웬만해서 시로 돌아가려는 엄두를 내지 못한 그를 안다. 시를 잃어버려도 시간은 잘도 갔다. 그 시간이 어느덧 17년의 세월로 흘렀다. 작심 끝에 선보이는 함명춘 시인의 두번째 시집 『무명시인』.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이후 1998년 첫 시집 『빛을 찾아선 나뭇가지』를 낸 뒤 지금껏 잠잠했던 그가 오랫동안의 침묵을 깨고 상재한 이 시집은 소박하면서도 따뜻하고, 식물성에 근거하는 듯하나 동물성을 끌어들여 그 둘의 갈등을 선명하게 대비하면서 한데 뒤섞어 우리들 살아가는 삶의 오늘은 여지없이 비유해내고 있다.
지난 시간 동안의 숨죽임은 오롯이 책을 만드는 편집자이자 기획자로서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시에 대한 그만의 어려움은 시에 대한 두려움은, 임종 때까지 곁을 지켰던 소설가 최인호 선생의 문학하는 자세를 너무 일찍, 너무 자주, 너무 깊이 배우고 익혀왔다는 데서 그 예측을 해볼 수도 있다 하겠다. 문학은 아무나 할까, 시는 아무나 쓸까, 그러나 내가 해야 내 문학이고, 내가 써야 내 시가 됨을 그는 쓰는 사람 최인호 선생님을 통해 쓰는 사람의 기본자세를 배워왔을 테니 말이다.
그는 갔다 눈도 추운 듯 호호 손을 불며 내리는 어느 겨울,
가진 것이라곤 푸른 노트와 몇 자루의 연필밖에 없었던
난 그가 연필을 내려놓은 것을 본 적이 없다
(……)
그는 갔다 눈도 추운 듯 호호 손을 불며 내리는 어느 겨울
끝내 그의 마지막 시는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했다
그 몇 줄의 시를 읽을 수 있는 것들만 주위를 맴돌았다
어떤 날은 바람과 구름이 한참을 읽다가 무릎을 치며 갔다
(……)
그가 떠난 집 마당, 한 그루 나무만 서 있을 뿐
도무지 읽을 수 없는 몇 줄의 시처럼 세월이 흘러갔다, 흘러왔다
-「무명시인」 부분
표제가 된 이 시를 보고 있자니 일견 최인호 선생님인 듯도 하고, 세상의 모든 시인의 이야기인 듯도 하고, ‘무명’이라는 그 단어가 우리네 인생의 부질없음을 얼마나 분명히 함축하고 있는지 알려주는 것도 같다. 이 시를 가만히 읽고 있자니 일만 말고 시를 쓰라고, 시집을 내라고 유언처럼 시인에게 말씀을 남기신 최인호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도 함명춘 시인은 어느 순간부터 시의 언저리를 빙빙 맴돌며 그 원주의 자장을 따라왔던 것으로 유추가 된다. 각종 문예지에 발표를 하기 위해 시를 썼다기보다 이것이 시인가, 시가 될 수 있는가, 혼자만의 점을 치듯 제 시를 객관적 위치에 놓고 지웠다 다시 썼다 버리기를 반복했던 것 같다는 얘기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외로움은 여전하지만 동화처럼 펼쳐지고 우화처럼 펼쳐지는 시의 이야기 속 그가 투영시킨 세계관은 절망을 희망으로 작위적이지 않게 역전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자연이 있고 사람이 있다. 자연은 자연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나뉘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사람이 실사처럼 환상처럼 풀어졌다가 한데 되감기기를 반복한다. 이를 우리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요소로는 정확한 문장력과 적확한 단어 선택의 조건이 주어지는데 그는 이를 모두 마땅히 수행해냈다. 시가 술술 읽히고 살살 만져지고 척척 감긴다. 산문시의 리듬이 이토록 한 호흡으로 읽힐 수 있는 데는 그가 세심하게 다져온 우리말에 대한 애정이 깃들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터.
할머니와 지팡이는 늘 함께 다녔습니다
인연을 맺게 된 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로부터
한 달쯤이었나, 밭둑에 버려진 것을
할머니가 주워온 후부텁니다
어디 하나 성한 데 없는 몸을 잘 다듬어서
돌담 양지 바른 곳에 말렸는데
다음날 아주 튼튼한 지팡이가 되어 있더랍니다
그후부터 지팡이는 할머니가 잠들면
깰 때까지 밤새도록 마당에 서서 기다렸고
뒷간에 가실 때도 문고리에 기대어 떠나질 않았습니다
마실을 가는 날엔 늘 할머니보다
한 걸음 먼저 앞장을 서서 길을 살폈습니다
한눈을 팔지 않았고 딴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지팡이는 한 뼘 정도 할머니보다 키가 컸는데
할머니 허리가 점점 꼬부라지면서
지팡이는 할머니보다 더 키가 커져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팡이와 할머니 키가
딱 맞은 물결이 되어 언덕을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저 보이지 않는 밑바닥에서 지팡이는
할머니와의 키를 맞추기 위해
진 길 마른 길 고르지 않고 다니면서
제 뼈와 살을 깎아댄 것이었습니다
더이상 할머니가 작아질 힘조차 없게 되었을 때도
지팡이는 불 꺼진 집 같은 할머니 곁을
한 걸음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의 유언대로 시냇가가 잘 내다보이는
동네 어귀쯤에 하관을 하던 날
도대체 지팡이가 어떤 신통력을 발휘했는지
아버지를 불러 자신을 관 속에 넣게 했습니다
죽음까지 지팡이는 할머니를 따라간 겁니다
-「지팡이」 전문
이번에 그가 펴낸 두번째 시집은 그래서인지 첫 시집과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인다. 시 안에서 이야기가 화수분처럼 터진다. 첫 시집이 나뭇가지 위에 올라앉은 새의 자세였다면 이번 시집은 그 새가 나뭇가지를 디딤으로 삼아 다른 나뭇가지로 날아가는 역동성과 활력을 띤다. 한 편의 이야기가 어떻게 시가 될 수 있는지, 그 이야기가 어떻게 한 편의 시로 읽히는지 그는 시 한 편마다 익숙한 듯 새롭게 전개하고 있다. 시가 사람을 좇는가, 사람이 시를 좇는가, 이 두 가지 갈래에서 시가 되고 시가 되지 않는 경우의 수가 생긴다. 함명춘은 후자다. 맹목이다. 시가 보폭을 줄였다 넓혔다 하는 그 호흡을 그저 따라가보는 데서 제 시의 운명을 점친다. 시에서의 겸손이 시를 얼마나 풍성한 열매로 살찌우게 하는지 시인은 아무래도 몸으로 일찌감치 알아버린 듯하다. 감나무면 감이고, 살구나무이면 살구고, 사과나무면 사과이렷다. 욕심내지 않는 시의 나무에서 자라는 시의 단맛이 이렇게나 좋구나 증명하고 있다는 얘기다.
함명춘 시집의 미덕을 요약해서 말하자면 딱 우리 같다는 말이다. 그가 힘이 들 적 얘기가 내가 힘이 들 적으로 들리고, 그가 사랑했을 적 얘기가 내가 사랑했을 적으로 들린다. 분수라고 말하는 뭣하지만 그는 딱 제 주제만큼이 담길 사이즈로 빚은 그릇만을 제 것이라 삼아왔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딱 그만큼만, 딱 내 얼굴이 내게 비칠 정도만을 욕심을 내왔다. 시가 연서 같고 시가 편지 같고 시가 일기 같고 시가 시 같을 수 있는 진심이 통할 때 우리의 감동도 그 수갑을 함께 차는 것일 테다. 그의 시를 보고 있자면, 엮임의 불편함보다는 한데 엮임의 편안함이 우리를 안심하게도 한다. 삶이 꿈이라고 보는 그이기 때문이다. 꿈이 삶이라고 보기도 하는 그이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일에 저만큼 떠밀린 시(詩) 한번 써보고
기척이라곤 소달구지처럼 삐걱거리는 바람 소리뿐인
저 먼짓길 끝까지 갔다가 돌아와보는 거
-「분천역에서」 부분
구파발역에서 지축역까지
한 이삼 분이면 사라지고 말 철길
이제는 근사한 차나 한 채의 아파트를 갖는 데에
가끔 사용되는 꿈, 어딘가에 흐르고 있을
배롱나무 노랫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본다
-「구파발역에서 지축역까지」 부분
내 미소의 갈피갈피에 꽂아준 겸손이 얼마나 큰 욕망의 북이었는지 알겠다
그간 걸었던 나의 한 걸음 한 걸음이 그 큰 북을 두들겨댔던 북채였으니
-「각화사」부분
그의 소원은 “석탄이 되어 이 세상을 한 번쯤 뜨겁게 적셨다 사라져버리는 일이었다고” 한다. “소년은 자라 어른이 되었습니다 어른이 되면서/ 누구나 태어나 죽는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라며 삶과 죽음의 문제를 두고 일찌감치 다 알아차렸다는 식의 조숙의 자랑도 떨지 않는다. 순순한 정직이다. “행복이란 원래 가질 수 없는 것이”어서 “자고로 생은 그런 것”이어서 “참, 애늙은이같이” 그는 자신이 넘어야 할 필생의 벽이 ‘바람’이라는 것쯤 이제 안다 말하기 시작한 듯싶다. “언제나 한 발작씩 늦곤” 하는 제 사랑이 불안하여 시를 말씀으로 남기는 것이 아니라 시를 몸소 살아내고 있는 듯싶다. “비바람이 치면 날갯죽지로 품어주는 것”, 어쩌면 그가 이번 생에서 사람들에게 바라고 제가 몸소 행해보려는 삶의 자세가 저 품음, 저 이해라는 대목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