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진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31인 사진가들의 가방에서 끄집어낸
수백 종의 장비와 물품에서 무수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사진가를 사진가로 있게 해 주는 도구, 사진가들의 ‘비밀 병기’ 전격 공개!
네이버 포토갤러리 포토樂 인기 연재물
후속작 『사진가의 가방 2』 2011년 9월 출간 예정
사진가의 가방에서 엿볼 수 있는 것들
사진은 그 출발부터 기계-혹은 장비-와 함께했다. 19세기에 들어와 기어코 사진이 발명되도록 밀어붙였던 시대의 요청은 ‘훈련받은 화가를 뛰어넘는 기록성’이었으니 말이다. 1839년 사진술이 공표되기 이전에 화가를 고용하여 초상화를 그려낼 형편이 안 되는 서민들이 저렴한 초상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었던 ‘실루엣(천이나 종이에 빛을 비추어 인물의 윤곽을 따라 그린 그림. 사진이나 영화에서 사용되는 ‘실루엣 기법’이 여기에서 유래했다)’이나 여행 중에도 비교적 간편하게 실제와 비슷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돕는 ‘카메라 루시다’ 역시 종이와 연필 이외의 장비가 필요했다. 그러니 오늘날 사진을 찍는 우리가 사진 장비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역사적인 면죄부가 있는 셈이다.
여러 사진 장비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카메라. 매력적인 기계다. 바우하우스의 정신이 잘 구현된, 기계와 전자, 광학 등 첨단 기술이 조화를 이룬 모더니즘의 결정체다. 주말 사진가가 하루 종일 정신없이 먹고사는 일에 좇기다 보면 정작 카메라를 꺼내 바람이라도 쐴 시간은 사진을 찍기 힘든 빛도 없는 한밤중. 그래도 없는 형편에 어렵사리 마련한 카메라를 애지중지 쓰다듬다가 머리맡에 두고 잠을 청하면 마음이 뿌듯하다. 주말에 멋진 사진을 찍는 꿈을 꾸며 누운 잠자리는 행복하다.
처음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이쁘던 내 카메라가 시간이 지나면 눈에 차지 않는다. 시커멓고 커다란 시멘트 블럭 같은 카메라, 대포만 한 망원 렌즈, 사람 눈보다 밝다는 이런저런 값비싼 렌즈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그 장비들을 내 것으로 만들면 늘 멍청해 보이는 내 사진들에 순식간에 날개를 달 수 있을 것만 같다. 선배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네가 가지고 있는 장비들을 충실히 익히고 난 다음에 새로운 장비를 구입하는 것이 옳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멋진 사진들을 뽑아내는 그들이 사용하는 장비들은 정작 내가 꿈꾸는 것들이다. 못 가져 본 것 없는 솔로몬 대왕이 노년에 이르러 ‘모든 것이 헛되다’ 하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장비를 바꾸어 댄다. 결국 그 말이 옳다는 걸 비싼 수업료 내며 체득하고 난 뒤에는 사진을 그만둔다. 사진은 이리 허무한 것인가?
[사진가의 가방]은 사진 잡지 [월간 포토넷]에서 2005년 3월부터 2010년 7월까지 매달 빠지지 않고 많은 독자들에게 폭넓은 인기를 얻었던 연재물이다. 이 기획을 열 때, 우리는 독자들이 단순히 어떤 사진가가 어떤 장비를 사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목록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장비를 발견하곤 어깨를 으쓱하는 관음증을 만족시키는 것을 넘어 그 장비 목록의 행간에서 알 수 있는 사진가와 사진 장비와의 관계, 더 나아가 사진가와 사진 찍히는 대상의 관계를 읽어 낼 수 있기를 바랐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과 35mm 필름을 넣는 작고 가벼운 소형 카메라, 다이앤 아버스와 시선을 집중시키는 정방형 판형의 중형 핫셀블라드, 게리 위노그랜드와 연속 촬영이 가능한 모터 드라이브 달린 소형 카메라, 안셀 애덤스와 존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목제 대형 카메라, 데이비드 호크니와 즉흥적인 촬영이 가능한 폴라로이드 카메라.
이 거장들의 작업과 그들이 선택한 사진 장비는 지극히 합당한, 떼어낼 수 없는 관계이다. 그들이 고민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간 그 지점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기계들이 필요했다.
크고 무거운 카메라와 작고 가벼운 카메라 간에는 단순한 화질의 차이를 넘어 생각보다 큰 간극이 있다. 모든 도구는 사용하는 사람과 영향을 주고받는다. 휴대폰이 등장한 이후 훨씬 많은 전화번호를 저장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외울 수 있는 번호는 몇 이하로 줄어들고, 노래방이 생긴 이후 더 많은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지만 기억하는 가사는 몇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리저리 쉽게 셔터를 누를 수 있는 소형 디지털카메라와 육중한 삼각대에 올려놓고서 검은 보자기를 둘러쓰고 초점을 맞추고 필름이 한 장씩 들어 있는 홀더를 카메라에 끼워 릴리즈로 셔터를 여닫아야 하는 대형 카메라를 사용할 때의 마음이 결코 동일할 수가 없다.
이 책에 실린 장비들은 시간이 지나면 구닥다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진가가 대상과 작업을 대했던 태도와 접근 방법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변하지 않고 남을 것이다.
그 행간을 읽어 낼 수 있다면 이 책은 전문 사진가, 취미 사진가 모두에 오래도록 유익하리라 믿는다. 그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사진 장비들, 이제는 ‘카메라’ 하면 당연히 디지털카메라를 가리키는 것이 되었고 사진과 동영상의 경계도 무너지는 지금, 새로운 장비들로만 얻을 수 있는 신선한 작업을 해내는 사진가들의 등장을 기대해 본다.
귀한 경험을 독자들과 나누어 주신 사진가 한 분 한 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 최재균 / 포토넷 대표
2011년 7월
사진가의 말
“직업으로 하는 사진과 작품으로 하는 사진 모두를 잘 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느껴요. 그것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고, 그 고민의 근간이 된 계기가 있었어요. 소설가이자 교육자이셨던 이문구 선생께서 돌아가시면서 하신 말씀이 ‘작가는 작품으로 얘기를 하는 것이 옳았다’는 거예요. 강재훈도 기자로서, 선생으로서, 작가로서 여러 역할과 활동을 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사진으로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는 고민을 하는 중이에요. 여태까지는 고민이 있어도 참고 살아왔지만 이제는 고민에 대해 깊이 생각해도 될 때라고 느껴져요.”
- 강재훈
“[변방의 가을]이 내 흥미를 끈 것은 도시화를 저지당한, 아직 미치지 못한 인위적인 공간들이 보여 주는 아이러니였다. 아니면 공간의 이중성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가을은 노란색, 붉은색 따위의 식물의 변색에 의해 상처받은 공간을 위장한다. 그래서 ‘변방의 가을’ 풍경은 아름답고, 우울하고, 비감하다. 내가 찍었던 대부분의 공간은 사라져 버렸다. 몇 년 지나지도 않았는데 재개발에 의해서. 따라서 [변방의 가을]은 일종의 소멸에 대한 사진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모든 풍경은 불안과 위협, 소멸의 공포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모든 공간과 시간이 그렇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 강홍구
“나의 작업은 과거 미술에서 아이콘이 되었던 몇몇 요소들을 끌어와 혼합시키는 일종의 복고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작업에 나오는 요소는 첫 번째 회화에서 많이 사용되었던 풍경(landscape)이고 두 번째 동물 아이콘, 그리고 세 번째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많이 이용되는 누드 등이다. 이 세 가지 과거의 아이콘을 끌어왔지만 그 이미지를 그대로 복제하며 과거를 되살리기보다는 현대의 시각으로 조명하고자 했다. 나는 과거 아이콘의 혼성적 재생이라는 작업을 통해 결코 과거로 회귀되지 않는 미묘한 시각의 갭과 역사적 시간의 해체에서 생겨나는 몽환적 세계를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 고명근
“사실 한 번도 사진을 배운 적이 없어요.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죠. 그리고 미술학원 원장을 하면서 40만 원을 들여 카메라를 샀어요. 당시 중학교 선생 봉급이 12만 원 정도였는데 그때 그걸 사고 잠을 못 잤어요. 캐논, 니콘 몇 종류를 쓰다가 니콘 F2를 사면서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리고 1980년 입체 작품으로 파리 비엔날레에 참여하면서 사진이 다음 시대의 매체라는 확신을 얻었죠. 한국으로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 김장섭
“IMF 이전, 부원들이 많고 조직이 제대로 갖춰졌을 때는 자체적으로 세미나를 가졌어요. 당시 서울대학교 공대를 나온 동료가 있었는데 발표 주제가 ‘A기자의 하루’로 아침에 일어나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일정을 살펴보고 카메라를 들고 나가 촬영한 다음 전송한다는 내용이었어요. 그때가 1996, 7년 무렵이었는데 대부분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한다며 웃었어요. 그런데 그게 불과 몇 년 사이에 현실화된 거죠. 놀랐던 게 9시 50분의 일을 10시 마감에 맞출 수 있다는 거였죠. 야, 이거 놀라운데, 좋구나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서운 생각이 들더라고요.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 시간적 여유가 생겨야 되는데 10시 40분 인쇄기가 돌아가기 전 10시 30분의 일도 마감해야 하는 더 급하고 숨 가쁜 생활이 시작됐으니 말이죠.”
- 김선규
“예전에는 마음의 온도와 작업의 온도가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사진을 일종의 게임이라고 생각해요. 사진은 선택과 배제의 시스템으로 만들어져요. 사진은 사실을 다룰 뿐, 사진이 곧 사실은 아니지요. 사진은 사실은 편견에 사로잡힌 매체에요. 그것을 인정하면 사진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요. 사진에서 매우 아름다워 보이는 이미지도 그것의 정체나 맥락을 알고 나면 전혀 아름답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너무 지나치게 쏠리거나 해석의 여지가 차단되지 않게끔 수위 조절을 하면서 작업을 해요. 관람객에게 자신의 온도를 체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작가의 몫이라 생각합니다.”
- 노순택
“사진기자인 나는 적게는 몇백 장, 많게는 수천 장의 사진을 취재 현장에서 찍는다. 지금 맡고 있는 신문 지면이 주말 섹션이기 때문에 사건, 사고 뉴스 취재 현장보다는 덜 급박하고, 취재 대상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많은 정보를 알고 있지만, 내가 만든 공간과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현장에서는 항상 긴장한다. 그 순간을 놓치면 절대 다시 찍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사를 놓쳐 버리면 바로 지면에 영향이 간다. 30분이 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최대한 좋은 사진 기사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내 사진 가방은 항상 무겁고, 철저한 준비는 필수다.”
- 박미향
“히말라야에 갈 때마다 그곳의 모습이 바뀌는 것을 보았어요. 그래서 기록으로 남기고자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전통적인 것을 찾다 보니까 점점 더 깊이 들어가게 되었어요. 사실, 다큐멘터리에 빠져서 작업을 열심히 하지는 않았어요. 원래 보도 사진가였기에 매체를 위한 다큐멘터리가 많았죠. 저만의 작업을 오래 하지는 못했어요. 그래서 내세울 만한 것이 없어요. 다큐멘터리 사진가라고는 하지만 좋아하는 이미지를 따내는 사람이에요. 순수한 다큐멘터리라기보다는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사진가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 박종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