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와 인간 존재의 상관관계를 찾아가는 기행
조선일보 수석논설위원 오태진 기자가 우리 시대 예술가 21명의 삶을 그 도시의 정취와 함께 인터뷰하고 취재한 산문집『내 인생의 도시』가 도서출판 푸르메에서 출간되었다. 영화감독 곽경택, 시인 안도현, 화가 박대성, 소설가 한승원, 판화가 이철수, 민속학자 황루시 등 치열한 삶 끝에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예술가들의 인생 열전이 담박하고 경쾌한 문체로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다양한 인사를 고루 취재하리라 맘먹었던 건 여의치 않았다. 어떤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루기까지 치열한 인생 스토리를 지닌 분을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인에 치우치게 됐다. 화가 네 분, 학자와 스님과 영화감독이 한 분씩이었고, 열네 분이 시인과 소설가였다. 얼핏 문학기행처럼 보이지만 그보다는 한 사람이 거기 자리잡아 우뚝 서기까지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기행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p.6)
한 개인이 어느 도시, 혹은 지역에 뿌리 내리게 된 인생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 도시의 정취와 역사까지도 함께 아우른 이 책을 읽다 보면 곽경택의 부산에서는 용광로 같은 열정을, 함민복의 강화에서는 ‘말랑말랑한 힘’을, 한승원의 장흥에서는 바다와 자연이 주는 유쾌함을, 사석원의 동대문에서는 점점 사라져가는 인심과 ‘흥’을, 전상국의 춘천에서는 바라보기만 해도 위안이 되는 자연의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장소애’라는 삶과 예술의 자양분
누구나 자신이 자리잡고 살아가는 터전에 대한 애정이 있을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런 인간과 장소를 이어주는 정서적 관계로 인해 자신의 업을 풍성하게 꽃 피웠다. 그들은 자신의 터전을 아끼고, 사랑하고, 보살핀다. 그 도시 또한 그들을 따스하게 품어준다. 그렇게 도시의 역사와 삶이 그들의 인생이 되어간다.
“나를 소설가로 키운 것은 무등산 자락 고향의 청정한 댓바람 소리와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 그 골짜기를 짜글짜글 뒤흔든 6?25의 총소리이다. -소설가 문순태”
“스스로 지리산을 찾아든 것은 한없는 추락을 자처한 내 인생의 마지막 번지점프였다. 서울살이 10년의 환멸과 권태를 단숨에 깨뜨리는 자발적 가난의 외통수, 백척간두에서 한 발을 내딛는 해방이었다. -시인 이원규”
단오제를 만난 후로 민속학자 황루시에게 강릉은 가슴 뛰는 공간이 됐다. 소설가 김도연은 고향인 평창에서 나무와 자연, 짐승들과 교감하며 대관령의 눈과 바람과 외로움으로 글을 쓴다. 그는 “도시에 나가면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또 화가 박대성은 경주의 자연과 역사를, 시인 안도현은 전라도 땅과 사람들 마음속에 밴 슬픔을 문학적 자양분으로 삼아 글을 쓴다. 이런 도시와 사람의 특별한 관계를 오태진은 미려하되 간결한 문장으로 가감없이 풀어냈다.
문득 봄이었다. 아직 바람이 찼지만 부산 영도 남쪽 끝, 태종대 앞바다에 은빛 물비늘로 부서져 반짝이는 건 분명 봄볕이었다. 살아 있다는 기븜을 일깨우는 이른 봄날, 죽고 싶도록 아름답다는 태종대를 영화감독 곽경택과 함께 천천히 거닐었다.(p.15)
앞이 안 보이도록 폭우가 쏟아지던 날, 마을 안 언덕 맨 끝에 서 있는 그의 집을 찾았다. 법적인 지적도에 길을 물고 있지 못한 땅, 맹지여서 숨듯 들어앉았다.
파란 감이 비바람에 떨어져 뒹구는 마당에 서니 섬진강이 한눈에 든다. 며느리 옷고름처럼 순하디 순하게 흐르던 섬진강은 누런 황톳물로 몸을 불려 거칠게 바다로 내달린다.
(p.201~202)
저자는 30년 경력 기자답게 ‘인터뷰의 정석’을 보여준다. 글쓰는 사람의 생각을 거의 담지 않고, 아름답고 절제된 언어로 사람과 장소, 그 운명적인 상관관계를 벼려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꿈을 이렇게 세세하게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인터뷰가 아니라 고문”에 가까운 오태진 기자의 취재 덕분이었다. 기자나 기자 지망생, 다큐멘터리 작가 등 글쓰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교본이 될 만한 책이다.
“가슴 뛰는 곳”에서의 가슴 벅찬 인생
이 책에 소개된 21명의 예술가는 모두 살고 있는 곳이 다르다. 서울, 부산, 전주, 강릉, 강화, 제주 등 책을 읽고 나면 이들과 전국 일주라도 하고 난 기분이 든다. 하지만 공통점은 있다. 고향이건 아니건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그들에게는 장소 그 이상의 의미가 되었고, 한결같이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며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결코 평범한 삶을 살지 않았다. 어려움에 부딪히고, 외로움과 싸우고, 자기 자신을 이겨냈다. 그들에게는 바로 꿈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인 유홍준의 경우, 한복집, 고추가게, 기계부품공장, 채소가게, 막노동 등 마흔아홉 살이 되도록 온갖 거친 일을 했다. 그러던 그가 진주에서 우연? 시인 김언희를 만나 스승으로 모시며 시공부를 한 후, 수많은 수작들을 쏟아냈고 문단의 각광을 받게 되었으니 그에게 진주란 어떤 곳일까?
“진주는 힘겹게 떠돌던 나를 받아들여 정착시켜준 곳, 진주에 오지 않았다면 문학은 영영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진주는 무엇보다 스승 김언희를 만나게 해준 곳이다.”(p.83)
시인 함민복은 충북 중원에서 태어나 경북 월성 원전에서 첫 직장생활을 한 후, 서울로 올라와 도시의 그늘진 곳을 떠돌다 1995년부터 강화에 머물기 시작했다. 버섯 비닐하우스 일도 거들고 함께 배 타고 나가 품도 보태고 갯벌에 말뚝 치고 숭어 그물 매는 일을 도와가며 강화의 삶에 빠져든 지 15년 만에 결혼을 하고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글쓰는 내게 바다며 삶이며 역사며, 강화의 모든 것이 새로운 공부거리여서 끝없이 자극을 준다.”(p.39)
이 책에 소개된 21명의 삶에는 이처럼 자신의 꿈을 향한 강렬한 열망과 노력이 수맥처럼 관통하고 있다. 비록 한때는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지만 그들은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음에도 하루하루를 열정적으로 배우고, 느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독자 또한 그러한 열망과 꿈이 있는지 새삼 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뜨겁게 살고 싶은 의지가 살아남을 느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