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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평모 성장소설

배평모 | 바보새 | 2011년 06월 10일 리뷰 총점7.4 정보 더 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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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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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

품목정보

품목정보
출간일 2011년 06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326쪽 | 498g | 153*224*30mm
ISBN13 9788990644466
ISBN10 8990644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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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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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저자 소개

저자 : 배평모
1945년에 태어나 월간 《한국문학》으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작품으로 교육르포『울타리 없는 학교』-거창고등학교 이야기(종로서적 출판부), 장편소설『려부 알 할리』(한국문학),『젊음의 지평』(해냄),『지워진 벽화』(창작과 비평),『하늘로 떠나는 배 1? 2』(아선 미디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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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이 소설은 1950년대의 아름답고 풍요로운 제주도의 자연과 암울하고 빈곤에 찌든 피난민촌 아이들의 이야기다.
소설 『파랑새』 속에는 요즘 아이들이 상상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 사료로 쓰는 밀기울로 만든 수제비로 끼니를 연명하는 아이들이 제주도의 자연에 적응하며 벌이는 모험과 놀이가 있다. 아이들은 모든 걸 스스로 해결했다. 제기를 만들고, 새총을 만들고, 팽이를 만들고, 연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가지고 놀이를 했다. 그 놀이를 통해서 재미와 더불어 사회성을 키웠다.
봄, 여름, 가을, 겨울, 4부로 구성된 『파랑새』속에는 1950년대 제주도의 아름다운 사계절이 들어 있다. 피난민촌 아이들의 모험과 놀이와 삶이 요즘 아이들에게는 전설 같을 것이다. 어른들은 『파랑새』를 읽으면서 힘들고 가난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기억이라는 길을 따라 아득한 유년의 벌판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으리라.

프롤로그에서 화자가 50년 만에 마음의 고향을 찾아온다. 화자는 치명적인 고통과 슬픔을 안겨준 상처를 끌어안고 50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았다. 꽃처럼 아름답고 보석처럼 빛나는 추억을 다 합쳐도 그 상처에 덧칠조차 할 수 없었다. 화자는 이제 그 오랜 세월과 화해를 하기 위해 반세기 만에 마음의 고향을 찾아온다. 그러나 그를 기억해주는 존재는 없었다. 그보다 2년 앞서 모택동세력에 밀려 중국을 떠나와 제주도에 붙박이가 된 정크선을 ‘피난선’이라는 이름으로 복원해놓은 것을 보고 어떤 생각이 떠올라 6년 동안 다녔던 동국민학교로 간다. 생활기록부에서 자신에 대한 6년 동안의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정훈이는 경익이와 함께 1.4후퇴 때, 원산에서 미군 L.S.T군함에 실려 제주도로 피난을 왔다. 피난민촌에는 평안도에서 온 여섯 명의 또래의 아이들이 있었다. 모두 다 광복이 되던 해 태어난 광복둥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암울하고 궁핍했던 시대에 제주도의 자연환경에 놀랍도록 잘 적응하며 튼튼하게 자란다.

- 우리들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찾는 지역이 달랐다. 자연이 우리들을 다른 곳에서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은 자연이 부르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자연의 일부가 된 우리들의 몸속에는 자연의 시계가 작동하고 있었다. 자연은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것들을 주었고, 우리들은 그것들에 의지해서 자랐다. 우리들은 자연이주는 것들을 얻기 위해 그만큼의 노력을 했다. 들판을 가로 지르기도하고 벼랑을 아슬아슬하게 기어오르기도 했다. 햇볕에 그을린 우리들의 살갗은 검게 윤기가 흐르고 근육은 단단하게 발달했다. 자연은 우리들이 원하는 것들을 주면서 단련을 시켰다. -

정훈이는 심성이 고운 아이다.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소가 인간을 위해 얼마나 희생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는다. 다음날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말하라고 했을 때 가슴을 펴고 ‘소가 되겠습니다’ 하고 말해서 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훈이는 생각이 깊은 아이다. 동무와 함께 제주 사람들이 치성을 드리는 소래기동산에서 사과와 백설기 떡을 훔쳐 먹고 남의 정성을 훔쳤다는 깊은 죄책감에 빠지기도 한다.
아이들은 자연이 베풀어주는 것들을 얻으며 여러 가지 모험을 통해 점차 소년이 되어갔다.

- 왜 하필이면 해골들이 널려 있다는 캄캄한 굴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놀이를 하자는 건지 경익이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다른 동무들의 마음도 같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불알을 차고 있다는 수컷의 허영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겁이 나서 꽁무니를 빼면 겁쟁이라는 꼬리표를 오래도록 달고 있어야 했기에.-

피난민촌에는 소설가 아저씨가 살고 있었다. 소설가 아저씨는 해방둥이들을 광복둥이들이라고 불렀다. 소설가 아저씨는 광복둥이들 중에서 정훈이의 정신의 문을 조금씩 열어주었다.

- “아저씬 항상 너희들을 지켜보고 있어. 지금부터 아저씨가 중요한 얘기를 해줄게. 아저씨가 처음 말했던 평등은 겉으로 드러난 것이고, 진짜 평등은 너희들 마음속에 있어. 너희들은 다른 동무가 잘하는 걸 인정해주고 있어.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은 눈만 뜨면 뭉쳐 다니는 거야. 만약 다른 동무가 잘하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한 덩어리로 뭉칠 수가 없어. 그리고 서로 다른 걸 잘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너희들은 서로에게 도움을 주면서 강해질 수 있는 거야. 학교에서 아무리 힘이 센 애라도 너희들 누구에게도 함부로 못하지? 그건 너희들이 한 덩어리로 뭉쳐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야. 서로를 인정하면서 하나가 되는 게 진짜평등이야. 내가 말한 진짜평등을 알겠어?” -

정훈이는 어머니와 단 둘이 피난을 왔다. 원산부두에서 미군군함을 타기위해 피난민들 대열에 서 있던 아버지가 금방 다녀오겠다며 간 후 끝내 오지를 않았다. 피난민들에 떠밀려서 배를 탄 게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정훈이 어머니는 시장통에서 헌옷을 고치는 바느질을 하고 있다. 정훈이 아버지와 원산에서 같은 학교에 근무했던 김 선생의 도움 덕택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에게 행패를 부리는 상이군인 허벅지를 물어버린 정훈이는 상이군인의 쇠칼쿠리에 맞아서 머리를 네 바늘이나 꿰매었다. 어른들도 무서워서 꺼리는 상이군인에게 달려들어 상처를 입은 정훈이는 어머니를 지킨 장한아이라고 시장 안에 소문이 났다.

소년들은 성장의 마디가 하나씩 늘어남에 따라 행동반경도 넓어지고 모험도 늘어났다. 6월 하순 뙤약볕을 쬐며 하루 종일 걸어서 거대한 분화구가 있는 산굼부리까지 갔다 오기도 하고, 한 밤중에 중국인들이 살고 있는 정크선에 신발 한 짝을 갔다두고 가져오는 모험도 한다. 소년들에게는 해협이나 다름없는 서 부두에서 동 부두까지 헤엄쳐 갔다 오기도 한다.
소년들에게 여름은 눈부신 계절이다.

- 6월 바다는 우리들을 거부했다. 바닷물 속에서 마음껏 놀게 내버려 두지를 않았다. 물속에 조금만 있으면 몸이 움츠러들며 찬 기운이 살 속으로 스며들었다. 물 밖으로 나와서 햇볕에 몸을 말리고 있어도 턱이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칸나 꽃이 활짝 피는 7월이 되면 바다는 언제 그렇게 냉담했나 싶게 우리들을 너그럽게 받아주었다. 그게 자연이었다. -

소년들은 점심도 굶은 채 진종일 바다에서 놀다 썰물 때가 되면 신선한 해산물로 허기를 채웠다. 여름바다는 소년들의 몸을 튼실하게 키워주었다.

- 오늘은 좀체 소라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다른 바위 틈새로 옮겨갔다. 바위 틈새를 들여다 본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제주 사람들이 ‘구쟁기’라고 부르는 소라가 여섯 마리나 바위에 붙어 있었다. 단단한 껍질에 뿔 같은 게 비죽비죽 돋아 있는 소라는 다른 무엇보다 우리들의 입맛을 돋우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소라를 깨어먹었다. 진종일 헤엄을 치고 놀았던 터라 배가 고팠기 때문이었다. 돌멩이를 꽉 움켜쥐고 소라껍데기를 깬 후 자잘한 돌기가 돋아 있는 둥근 뚜껑을 잡고 몸통 아래 부분 창자를 떼어냈다. 그런 다음 바닷물에 담그고 창자의 잔재를 손가락 끝을 꼼지락 거려서 말끔히 씻어냈다. 몸통과 뚜껑사이에 앞니를 박아서 분리시킨 후 씹는 소라 살은 허기를 매우기 위해 먹기가 아깝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오돌오돌하면서도 연하게 씹히는 소라 살은 여운이 오래 남았다. -

반장인 정훈이는 부 반장인 혜란이를 좋아하게 된다. 헤란이도 정훈이를 좋아한다. 정훈이는 혜란이를 통해서 삭막한 현실을 아름답게 채색할 수 있는 위안을 받는다.

- “너 아까 학교에 올 때 마대자루 쓰고 있는 걸 나한테 보여주기 싫어서 빨리 갔지?”
혜란이가 내 마음을 꼭 짚어서 물었다. 나는 혜란이가 내 마음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이 기쁨으로 포화되어 발걸음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마대자루를 뒤집어 쓴 내 모습이 부끄럽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비오는 날이면 다른 애들도 마대자루를 쓰고 학교에 오기도 했지만 나는 가난이라는 옷을 언제나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혜란이에게만은 마대자루를 쓴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정훈아, 그런 너 모습이 자랑스러웠어.”
헤란이 목소리가 차분하게 갈아 앉아 있었다.
“정훈아, 피난민들이 제주를 떠나고 있다고 하던데 너도 곧 떠날거니?”
“혜란아, 난 떠날 수가 없어.”
그 말을 할 때 내 마음에 빛과 어둠이 뒤섞인 것 같은 슬픔이 안개처럼 어리고 있었다. -

원산에서 함께 피난을 왔던 경익이가 서울로 떠났다. 그리고 다른 동무들도 머잖아 떠날 것이라고 했다. 정훈이는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평선 너머 크고 넓은 세계를 언제나 동경하던 정훈이는 동무와 이별하는 것 이상의 슬픔과 아픔을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정훈이는 동무들이 던져주는 오색종이테이프를 온몸에 두르고 여객선 갑판 위에 서 있는 경익이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 아, 경익이는 한 마리 새였다. 눈부신 오색 깃털이 돋아난 날개를 퍼덕이며 비상을 서두르는 새였다. 내 눈에 고인 눈물 때문만은 아니었다. 경익이는 분명 오색 깃털만큼이나 아름다운 미래를 향해 비상을 서두르는 새였다. 수평선 너머 넓고 큰 세계에 둥지를 틀기위해 잠시 머물렀던 둥지를 떠나려는 새였다.
피난민촌 토담집에 남아 있는 내게는 날고 싶어도 날 수 있는 날개가 없었다. 경익이처럼 화려한 날개를 영영 가질 수 없다는 비애가 내 마음을 무겁게 눌렀다. 어쩌면 경익이를 떠나보내는 이별의 아픔보다 더 클지도 모른다. -

경익이를 떠나보낸 소년들은 가을들판으로 나가 보리수열매도 따 먹고 사계절 중에서 가장 맛있는 으름도 따 먹는다. 경익이가 없는 빈자리를 모두가 느끼지뢸 머잖아 뒤따라 서울로 간다는 희망으로 위안을 삼는다. 그러나 정훈이에게는 희망이 없다. 하지만 정훈이는 꿋꿋하게 자신을 가누며 동무들과 함께 추억을 하나라도 더 만들려고 한다.

- “다시 드려.”
춘일이가 제기를 집어서 뒤쪽으로 멀리 던지며 상전의 위세를 한껏 부렸다. 제기를 상전이 차기 좋게 드리지 못했을 때 받는 벌이었다. 추억거리를 하나라도 더 만들기 위해 일부러 하인이 되려고 한 내 마음을 동무들이 몰라도 좋았다. 이다음에 동무들이 오늘을 기억해주기만을 바랄뿐이다. -

동무들이 다 떠나도 정훈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소설가 선생님이었다.

- 무서운 밤이었다. 하늘과 땅이 무서운 기세로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하늘은 무시무시한 소리를 토해내며 상상할 수 없는 힘으로 땅을 덮치고 있었다. 장대 같은 빗줄기가 땅 위의 모든 것을 날려버릴 것 같은 엄청난 기세의 바람에 실려 쏟아져 내렸다. 부잣집 대문간보다 작은 오두막집을 날려버릴 것 같은 비바람이었다. 남포등마저 꺼져버린 캄캄한 방에서 어머니가 내 손을 꼭 잡았다.
“정훈아, 괜찮니?”
아, 소설가 선생님 목소리였다. -

소설가 선생님은 피난민촌의 광복둥이들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고 있었다.

- 나는 책상 위에 있는 원고지를 바라보았다. 원고지 속에 우리들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니 원고지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원고지 옆에 놓여 있는 잉크병과 펜촉을 꽂아서 잉크를 찍어 쓰는 펜대마저도 소설가 선생님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호리병처럼 생긴 유리 안에서 석유를 빨아올리는 심지 끝에 타오르는 남포등 불빛마저도 소설가 선생님의 정신을 비춰주는 등불처럼 신비롭게 보였다.
“소설가 선생님이 우리들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고 있다고 하셨어요.”
“너희들이 소설의 주인공이 된다고?”
“예. 그랬어요. 맨날 학교 갔다 와서 놀러나 다니는 우리들이 어떻게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느냐고 했어요.”
“그랬더니?”
“소설은 십오 소년의 표류기처럼 상상력으로 쓰기도 하지만 보고 겪은 시대의 아픔을 그려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우리들한테서 이 시시대의 희망을 볼 수 있다고 하시면서 우리들을 이 시대의 파랑새라고 하셨어요.
“희망과 행운을 가져다주는 파랑새 말이지. 그래. 너희들은 파랑새야.”
“엄마도 파랑새를 아네요.”
“그럼 알지.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파랑새를 품고 살아. 마음속에 파랑새가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훨씬 불행하단다.”
“지난번 그 상이군인 아저씨 같은 사람 말이죠?”
“그래. 그런 사람일 수도 있어. 음식은 몸을 키워주지만 희망은 정신을 키워주는 거야. 지난번 그 상이군인 아저씨 같은 사람은 희망이 없기 때문에 남에게 피해를 주며 사는 거란다.”
“그 아저씨 마음속에 있는 파랑새는 죽어버린 거겠네?”
“파랑새는 죽지 않아. 그 아저씨 마음속에서 날아가 버린 거지.”
“그럼 언젠가 다시 날아 올 수도 있겠네?”
“그럼. 그 아저씨가 희망을 갖는 날 파랑새는 날아오지. 파랑새는 희망이니까.”
“엄마, 내 마음속에 있는 파랑새는 알에서 깨어 난지 얼마 안 되었겠네?”
“아니야. 우리 정훈이 파랑새는 크고 씩씩해. 그 무서운 상이군인 아저씨한테서 엄마를 지켜줄 만큼 용감하고 씩씩한 파랑새야.” -

소설가 선생님은 결핵환자였다. 겨울이 시작된 어느 날 마산에 있는 결핵요양소로 떠났다. 독신인 소설가 선생님과 어머니를 결혼시키려고 동무들의 어머니가 시도했지만 어머니가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마음속으로 소설가 선생님을 좋아했다. 소설가 선생님도 어머니를 좋아했다. 정훈이도 소설가 선생님과 어머니가 결혼을 했으면 하고 바랐다. 피난민촌 사람들이 머잖아 떠나려는 참에 소설가 선생님마저 떠나고 나니 정훈이 마음은 황량한 벌판 같았다.

- 산은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의 길을 걸어왔다는 소설가 선생님의 편지를 생각했다. 아득한 세월 저편 언젠가 한라산은 폭발을 일으켜서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땅까지도 붉은 용암으로 뒤덮혔을 테지. 저 맑은 대기에는 검은 화산재가 층을 이루며 떠 있었을 테고. 용암이 식고 화산재가 내려앉기까지는 얼마나 긴 세월이 흘렀을까? 그리고 풀이 돋고 나무가 자라서 동물이 살기까지는 또 얼마나 긴 세월이 흘러야 했을까? 또한 사람이 살기까지는 얼마나 긴, 긴 세월이 흘러야 했을까? 그래! 그것은 시간의 길이었어! 이 세상 모든 건 시간의 길을 걸어 왔어 !-

- 정훈아, 동무들과 헤어지는 외로움은 시간의 길을 걸어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잊혀지는 거야. 사람은 시간의 길을 걸어가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일을 겪으며 사는 거야. 그런 변화가 없다면 동물이나 식물과 다를 바 없지. 그런 변화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발전하는 거야. -

정훈이는 동규라는 좋은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동규는 4학년이 막 되어서 장래 희망 발표를 할 때, 소가 되겠다고 한 정훈이 말을 마음속에 담아두었다가 2년 뒤인 6학년 겨울방학을 앞두고 말을 꺼낼 정도로 속이 깊었다. 속만 깊은 게 아니라 머리도 명민했다.

- “동규야, 우리 동네 소설가 선생님이 지식은 포도와 같은 거라고 했어. 포도가 아무리 많이 있어도 그냥두면 시들어 버리지만 발효를 시켜서 포도주를 만들면 다른 사람들이 즐겁게 마실 수 있다고 했어. 지식을 정신으로 발효시키지 못하면 시들어버리는 포도와 같다고 했어. 무슨 말인지 이해는 하겠는데 지식을 정신으로 발효시킨다는 말은 이해가 잘 안 돼.”
“정훈아,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우리 머리를 솥이라고 치자. 머릿속에 쌀, 보리, 조, 수수 따위 곡식이 가득 들어 있어. 그런데 밥을 지으려면 불이 있어야 하잖아. 그 불이 바로 우리들 정신이 아닐까? 지식을 정신으로 발효시키는 거나 머릿속에 있는 곡식을 정신의 불로 밥을 짓는 거나 같은 거라고 생각해.”-

겨울방학이 가까워지자 담임선생님이 정훈이와 종갑이를 불러서 진학할 중학교를 정해주었다.

- 정훈이는 제일중학교로 가고 종갑이는 제주중학교로 가는 게 좋겠어. 삼주와 동규는 오현중학교로 갈 텐데 둘 중 하나는 틀림없이 특대생으로 뽑힐 거야. 오현중학교에는 지원자가 많이 몰려서 경쟁이 치열할 거야. 물론 너희 둘이 오현중학교로 가도 특대생으로 거뜬히 뽑힐 수 있어. 그런데 너희 둘은 반드시 일등으로 들어가야 돼. 너희 둘은 집안이 어려우니까 제일중학교와 제주중학교로 가서 입학금과 삼 년 동안 학비를 면제해주는 일등을 해야 해. 특대생은 일 년밖에 학비면제가 안 되잖아. 방학이 시작되면 저녁 먹고 선생님한테 와서 공부해. 방학 동안 나와 함께 입시 공부를 하는 거다. 알았지?” -

크리스마스 날 밤에 정훈이네 집이 불이 나서 다 타버렸다. 작은 오두막집 폐허에서 겉만 끄슬린 팽이를 발견했다. 정훈이는 팽이를 손에 들고 다짐했다. 이 팽이처럼 어떤 난관도 이겨내리라고.

- 이제 마지막 남은 두 전사, 창규와 내 팽이가 물러설 틈도 없이 투지를 불태웠다. 창규와 내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마지막 결전을 위해 두 전사를 접근시켰다. 최고조에 이른 회전속도와 필살의 기세로 상대를 쓰러뜨릴 순간만 남았다. 팽이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힘껏 팽이채를 내리쳤다. 두 팽이가 생과 사의 접점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돌진했다. 생과 사의 접점에서 격돌한 두 팽이가 서로를 밀어냈다. 내 팽이는 치명상을 입지 않고 창규의 팽이를 쓰러뜨렸다. 나는 팽이를 격려하며 바로 세웠다. 무아의 상태로 돌면서 정지해 있는 팽이 윗면에 칠해놓은 무지개 색깔의 크레용 선이 선명하면서도 아름다웠다. -


내일이면 피난민촌의 모두가 떠나는 날이었다. 밤늦도록 어른들이 목사님 사택에서 석별의 정을 나누고 있을 때 동무들이 특별한 송별회를 하자며 얼레와 연을 들고 늙은 팽나무가 있는 성터로 갔다. 정월 대보름날 밤에 연을 날려 보내듯이 연줄에 실을 꼰 것을 매달고 불을 붙여서 연을 날렸다.

-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연이 얼레를 팽팽한 힘으로 잡아당겼다. 그 팽팽하던 힘이 어느 순간, 툭 끊기면서 얼레를 잡고 있는 손이 허전했다. 나는 연이 떨어져나간 빈 얼레를 쥐고 멍하니 어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다. 동무들아 잘 가라고.
동무들이 나를 에워쌌다.
“우리들이 연에다 뭐라고 쓴 줄 알아? 축 일등 장정훈이라고 썼어. 꼭 일등 해야 해.”
창규가 말을 하고 나를 껴안았다. 다른 동무들도 나를 껴안았다. 나도, 동무들도 울고 있었다. -

겨울방학 동안 담임선생님의 헌신적인 가르침 덕분에 정훈이와 종갑이는 일등으로 합격했다.

- 나는 동무들이 모두 떠난 텅 빈 피난민촌에서 겪어야 했던 그 쓸쓸하고 외로웠던 시간들을 말끔히 잊을 수 있게 되었다. 내 마음을 채우고 있는 환희와 희망 때문에.
모두가 떠나버린 피난민촌은 폐허 같았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그렇게 클줄 몰랐다. 동일이를 부르는 동일이 어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정길이네 개가 짖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동무들의 발길로 다져진 공터에는 흙먼지가 날렸고 바람이 불면 빈 집들이 소리 내어 우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외로움 속에서 오늘을 기다렸다. 오늘의 이 환희와 희망을 안을 수 있다면 미래를 향해 날아갈 수 있는 날개를 펼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에. -

정훈이는 동규 아버지가 경영하는 동부여객 버스를 타고 동규와 함께 일박 이일 제주도 일주여행을 떠났다. 제주도에 와서 처음 타보는 자동차였다. 서귀포에 사는 동규 친척집에서 자고 다음날 오후에 제주시에 왔다. 어머니와 함께 집에 가려고 시장통에 있는 바느질집으로 갔다.

- 어머니 가게 앞에 사람들이 여럿 서 있었고, 사납게 떠드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가게 앞에 도착해보니 김 선생 부인인 희망잡화점 여자가 어머니 머리채를 움켜잡고 마구 흔들고 있었다. 어머니는 머리채를 잡힌 채 아무런 저항도 없이 희망잡화점 여자에게 모든 걸 내맡기고 있었다.
“이년아, 넘볼 데가 없어서 네 서방 친구를 넘 보냐? 오늘 새벽 피난민촌 네년 집에서 나오는 걸 본 사람이 일러주지 않았으면 깜빡 속을 뻔 했다.”
내가 서 있는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그 상황이 무얼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었기에.
머리채를 휘둘리던 어머니가 나를 보았다. 나를 보는 어머니 눈빛 속에 이 세상 모든 치욕과 절망이 담겨 있었다. -

어머니는 그날 밤 성터 옆 늙은 팽나무에 목을 매고 세상과 작별했다. 정훈이는 치명적인 고통과 슬픔을 안고 제주도를 떠나야 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 나는 작가가 되었다.
1960년 봄, 서울을 떠나서 50년이 되도록 한 번도 모국을 찾아오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 옹이처럼 박혀 있는 상처의 신경세포가 예민하게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쟁, 아버지와 이별, 어머니의 죽음, 사랑하는 사람들을 볼 수 없다는 절망, 그 모든 것들이 상처의 신경세포를 끊임없이 자극했다. 소설가 선생님, 동규, 혜란이, 피난민촌 동무들이 보고 싶어서 태평양을 헤엄쳐서라도 오고 싶었지만 상처의 고통이 나를 주저앉혔다. 그리고 치욕과 절망으로 번뜩이던 어머니의 마지막 눈빛이 나를 가로막았다.
나는 고통 속에서 나이를 먹으며 성장했다. 나의 나이테에는 고통을 겪어낸 인내가 배어 있었다. 추위와 가뭄과 태풍을 견뎌낸 나무의 나이테처럼. -

정훈이는 시간의 층이 쌓여 있는 제주시가지를 닷새 동안 유령처럼 걸어 다니다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된다.

- 광복둥이들, 광복과 더불어 태어나서 전쟁의 광풍에 밀려 이곳 제주도에까지 와서 유년을 보낸 동무들은 이 나라와 함께 성장을 했을 것이다. 피난민촌의 헐벗고 굶주린 환경에서도 튼튼하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제주도의 자연덕분이었다. 우리들의 유년은 제주도가 키워주었다. 우리들의 몸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정신까지도 키워주었다. 제주도의 자연은 우리들에게 인내와 도전의 정신을 심어주었고 협동과 공정함의 가치를 일깨워주었다.
피난민촌의 환경만큼이나 가난했던 이 나라의 정치와 사회의 격변을 겪으면서 그 파랑새들은 모두 무슨 꿈을 이루었을까?
나는 그 파랑새들 얘기를 모국어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나라의 발전과 함께 성장한 그 파랑새들, 소설가 선생님이 썼던 파랑새들 얘기를 마무리하고 싶다. 소설가 선생님이 내게 남겨준 숙제라는 생각이 든다. 포도를 발효시켜서 포도주를 만드는 일, 그 일의 적임자가 바로 작가가 아닌가. 소설가 선생님은 어린 내게 그 말을 들려줄 때 내게서 작가의 싹을 보았을까?
소설가 선생님과 나는 비록 남이지만 숙명적인 관계라는 생각이 든다. 내 생에서 소설가 선생님만큼 영향을 끼친 사람은 없었다. 소설가 선생님과 내가 숙명적인 관계라면 파랑새들 얘기를 마무리하는 것 역시도 숙명일 것이다.

추천평

이 소설을 읽으니 우리가 어렵게 살던 옛날이 생각난다. 가난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꼭 불행하지만은 않았다는 생각도 새삼스럽게 든다. 어쩌면 우리가 자연 속에 들어가 자연과 하나가 되는 슬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물질적 풍요 속에 살면서 삶에 있어 정말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방황하는 오늘의 청소년들에게 꼭 읽히고 싶은 소설이다. 성장소설이란 바로 이런 소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경림 (시인)
이 소설은 해방과 더불어 태어난 해방둥이들의 성장 이야기이다.?6?25전쟁의 광풍에 먼 땅 제주도까지?떠밀려가야 했던?그 아이들이?피난민촌의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튼튼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제주 자연의 풍요로움과 자비로움 덕분이었다. 이 소설 속에서?피난민촌 아이들은 늘 무리를 지어 들과 바다를 여기저기 쏘다닌다. 제주 자연은 배고픈 그 아이들에게 야생의 열매들과 바닷가 해물들을 제공하여줄 뿐만 아니라, 인내와 도전정신, 협동정신을 심어 준다. 억새 무성한 들판을 가로지르기도 하고, 아슬아슬한 벼랑을 기어오르기도 하고, 해골들이 나뒹구는 어둔 굴속을 탐험하기도 하고, 여름철?깜둥이가 되도록 몸을 태우면서 바닷물에서?헤엄치기도 하는?그 아이들의 겁 없는?모험들이 참 흥미롭다. 그 아이들이 겪는 가난한 피난민 생활, 가난 속에서도 결코 기죽지 않는 그들의 모험과 놀이는 요즘 아이들에게는 전설 같을 것이다. 어른들은 이 소설 속에서 가난했던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기억의 길을 따라 아득한 유년의 벌판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으리라.
현기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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