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문은 누구인가?
4ㆍ19혁명의 시대정신을 횃불처럼 선명하게 노래한 「아! 신화같이 다비데군들」의 시인 신동문(1927~1993)은 김수영, 신동엽 등과 함께 1950~1960년대 시단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시흥이나 관념을 좇기보다는 부조리한 현실을 바꾸어보려는 의지로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시를 여럿 남겼다. 4ㆍ19혁명 당시 학생 시위의 배후자로 지목되어 청주에서 서울로 쫓겨 온 신동문은 시 창작 외에도 《새벽》 편집장, 《창작과비평》 발행인, 신구문화사 주간 등을 지내며 최인훈의 「광장」, 이병주의 「소설 알렉산드리아」, 《현대한국문학전집》 등을 발굴한 출판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상계》《자유문학》《현대문학》 등 월간지와 《경향신문》 등 일간지에 정치사회 현실을 비판하거나 문학이 나아갈 방향에 관한 글을 쓰는 논객이자 언론인이기도 했다.
이처럼 시인이자 출판인, 논객으로 활발히 활동하던 신동문은 《창작과비평》 발행인이던 1975년에 겪은 필화사건 직후, 그간의 모든 활동을 접고 충북 단양의 오지로 내려가 1993년 담도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농민이자 침술가로 18년을 살았다. 그런 탓에 신동문은 문단과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48세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낙향한 그를 둘러싸고 무수한 소문만 떠돌았다. 신동문이 세상을 떠난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그 이름조차 잊혔거나, 기억한다 해도 한때 시를 쓰다 절필하고 은둔한 불행한 시인 정도로만 알고 있다. 그는 ‘신동문은 누구인가’를 물어야 할 만큼 잊힌 존재가 되었다.
오래 묵은 인연, 그리고 신동문의 육성을 담은 첫 평전
이런 신동문의 이름을 새삼 떠올리며 그의 삶을 되짚어보는 저자 김판수는 대학생이던 1980년대 중반 서울 청계천 고서점 거리에서 신동문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저자는 4ㆍ19혁명을 격정적으로 노래한 「아! 신화같이 다비데군들」, 최고정치지도자의 무능함을 풍자한 「비닐 우산」, 지식인의 무기력함을 참회하는 「내 노동으로」 등 신동문의 시에 매력을 느껴, 시인 신동문의 삶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신동문이 독재정권에 밉보여 수차례 필화를 겪은 적이 있고, 필화사건 후 더 이상 시를 쓰지 않고 단양의 오지에 정착해 농사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저자는 신동문을 만나기 위해 단양으로 그를 찾아갔다.
1988년 가을 신동문을 처음 만난 것을 시작으로, 이후 신문기자가 되어 신동문을 인터뷰한 1992년 6월까지 저자는 몇 차례 단양으로 내려가 신동문을 만났다. 특히 신동문이 작고하기 1년 전에 인터뷰 형식을 빌려 지금까지 그를 둘러싸고 있던 무수한 소문들, 즉 ‘절필’ ‘필화사건’ ‘은둔’ 등에 대한 신동문의 진솔한 고백을 들게 되었고, 그것이 근간이 되어 이 책 『시인 신동문 평전: 시대와의 대결』을 쓰게 되었다. 문단을 떠난 이후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지금까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데, 특히 이 책은 문단을 떠나 농촌에서 생활할 당시 그의 내면이 어떠했는지를 신동문을 직접 만나 그의 생생한 육성으로 집중 소개한다.
이런 열정적인 삶도 있다: 40년간 잊혀온 신동문의 문학과 삶의 재발견
이 책은 그동안 잊혀온 신동문의 시인, 출판인, 논객(저널리스트), 농부, 침술가로서의 삶을 재조명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알려진 그의 삶이 실제로 다른 부분이 많으며, 그에 대한 무성한 소문들 가운데 적잖은 부분이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또한 “신동문은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시나 산문을 자주 쓰다가 고문과 협박을 받고 절필한 채 숨어 살아야 했다.”라는 식으로 요약되는 그런 소문들이 그의 후반기 삶을 옥죄고 있었다는 사실도 밝힌다. 실제로 신동문은 그런 헛소문 때문에 생의 후반기에 혼자 꽤 심하게 괴로워했고, 그런 점에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신동문의 삶을 은둔이나 불행이라는 ‘언어의 감옥’으로부터 해금시켜보고 싶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신동문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 복된 삶을 살아가기를 꿈꾸었다. 또한 그는 정치권력의 독재와 부조리, 그리고 전쟁과 기계문명의 비정함에 펜으로 용기 있게 맞선 시인이다. 그가 출판기획가로서 또 논객으로서 추구한 가치도 그런 태도의 연장선에 있었다(이 책의 부제가 ‘시대와의 대결’인 것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자신의 그런 신념에 충실하려고 자신의 삶을 쉼 없이 열정적으로 바꾸어나갔다. 그러다보니 매우 특이하고 다양한 이력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신동문의 그런 열정적인 삶의 근본적인 동력이 무엇인지도 짚어본다.
그렇다면 그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날로 첨단으로 치닫는 자동화기계와 거대화되어가는 자본에 치여 하루하루 버둥거리며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신동문의 시각으로 보자면 부조리한 삶이다. 그의 말처럼 “독재가 새로운 옷을 ?아입고 겉모양만 바꾼 채 여전히 우리의 삶을 교묘히 옥죄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시대에 신동문이 중시한 삶의 태도인 인간성에 대한 존중이 새삼 소중하게 생각된다는 점도 그를 재조명하는 이유 중 하나다.
신동문의 시와 삶을 이끈 원동력: 인간의 몸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삶의 열정
시인, 출판인, 논객(저널리스트), 농부, 침술가 등 신동문이 걸었던 다양한 삶의 행로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가 아무리 열정적으로 살았다 해도 그의 삶의 이력은 상식적으로 이해될 만한 범주를 넘어선다. 그렇다면 그의 이런 삶을 이끌었던 원동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신동문의 열정적인 삶의 동력을 ‘인간의 몸에 대한 깊은 이해’라고 분석한다. 신동문은 문학을 포함한 자신의 삶에서 관념의 추상성보다는 당대의 구체적 현실을 일관되게 중시했다. 그가 보여준 삶의 행로도 당대의 굴곡진 시대가 요구하는 삶의 가치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인간의 몸에 대한 신동문의 깊고도 폭넓은 이해가 깔려 있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신동문에게 인간의 몸은 자아 그 자체로, 그가 평소 중시했던 인간 실존의 근원이었다. 그가 걸었던 삶에는 철저하게 몸 중심으로 사유한 흔적이 강하게 배어 있다. 몸은 그에게 가장 지배적인 사유체계였다.
우선, 그의 시가 그런 태도를 짙게 풍긴다. 그가 쓴 시는 대부분 인간의 실존적 삶을 위협하는 부조리를 거부하는 문학으로, 좁혀 말하면 실존의 근원인 몸에 대한 옹호론인 셈이었다. 연작시로, 그의 1950년대 시를 대표하는 「풍선기」는 전시의 군 비행장, 그 불모의 허허벌판에서 부조리에 노출된 한 인간의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가엾은 몸을 얘기한 셈이었다. 이를테면 “기진맥진” “신열” “육체의 파편” “정욕” “모가지” “거인스러운 불구성” “파열하여버리는 육체” “체온” 등의 시어나 표현이 그 시의 전반에 나타나는데, 이는 시종 인간의 몸에 대한 강한 애착과 연민을 드러내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또 연작시 「제3포복」은 몸의 근육이 적병과 직접 맞부딪혀야 하는 급박한 상황을 설정해 전장이라는 한계상황에 내몰린 인간의 비극을 고발하는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신동문은 세상의 구조적인 탐욕과 기계문명을 거부하는 방편으로 인간의 몸을 전면에 내세워 옹호했다. 탐욕은 인간성에 대한 모독이었고, 기계문명은 인간의 몸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이르러 「아! 신화같이 다비데군들」에서 “요동치는 근육/뒤틀리는 사지/약동하는 육체”라는 생생한 몸동작 표현을 낳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쓴 시 「내 노동으로」에서는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라는, 마치 삶의 좌우명 같은 표현을 낳았는데, 그 역시 노동하는 삶의 주역인 몸을 옹호한 것이다.
몸에 대한 그의 각별한 관심은 개인적인 콤플렉스에서 비롯되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어 부정을 경험한 적이 없다는 사실, 결핵을 앓아 집 안에 혀 지내다시피 했던 소년기의 삶, 그리고 그 결핵이 날로 악화되어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던 청년기의 삶, 이어 4ㆍ19혁명 때 젊은 목숨들이 숱하게 스러져가는 모습을 시위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다는 사실, 정보기관에 끌려가 실존을 위협받을 정도로 심한 고초를 겪었다는 사실 등은 그의 몸에 대한 집착이 전혀 생뚱맞은 태도는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비록 사춘기 무렵에는 자신의 몸을 욕망의 배출구쯤으로 여기며 저열하게 생각하거나 자학하곤 했지만, 그런 강박에서 벗어난 이후에 그의 몸은 영혼이나 정체성과 동격이었다. 그리고 그가 본명 “건호” 대신에 시구문의 의미를 지닌 필명 “동문”을 평생 달고 다닌 것도, 몸을 온전히 보전하기 위한 부적의 효과를 보려는 뜻이었을 수도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몸에 대한 그의 관심이 가장 깊고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은 침술가로서의 삶이다. 시인, 출판인, 논객으로 서울생활을 할 때부터 그는 침술을 공부했고, 침을 여러 차례 직접 시술하곤 했다. 또 그는 작고할 무렵까지 침봉을 놓지 않았다. 그가 침술에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았는지는 신경림 시인의 회고를 통해서도 이미 간간이 알려진 바 있다. 침술가에게 몸은 세상의 축소판이다. 우주의 모든 진리가 몸에 구현되어 있으며, 몸은 우주의 궁극적 실체이다. 또 몸은 뭇 생물들의 오랜 진화과정이 응축된 것이며 기의 발현체이다. 그래서 몸은 그 자체로 활발히 순환되어야 하며, 나아가 세상 만물과도 자유롭게 순환되어야 마땅하다. 물론 그런 관점은 침술에 정통한 신동문에게도 해당되었을 테다. 그의 몸이, 곧 삶의 근원이 어느 한 영역에만 쏠린다거나 머물러 집착한다는 것은 기의 정체이며, 그것은 몸 중심적인 사유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가 삶의 절정기에서 시 쓰기를 그만둔 것도 그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농장에서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침과 노동에 점차 많은 관심을 갖게 되면궼 시 쓰는 일이 나의 삶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멀어졌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도회지 지식인의 삶을 포기하고 농촌에서 육체노동을 하는 삶을 선택한 것도 몸의 대한 깊은 이해와 무관하지 않았다. 흙에서 하는 노동이야말로 몸이 수행하는 가장 본원적인 것이다. 펜으로 쓰는 시를 포기한 것도 노동과 침술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곧 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부터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결국 그의 삶이 예상 밖의 큰 진폭을 갖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몸에 대한 진지하고도 오랜 탐구와 깊은 이해 속에 들어 있었던 셈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억압하는 독재에 끊임없이 저항한 것도 몸에 대한 이해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글과 삶이 일치하는 열정의 실천가: 펜 대신 노동으로 쓴 시
신동문은 시와 산문, 그리고 신문기사를 통해 권력층의 거짓과 부조리, 당대 지식인들의 나약함과 비겁함,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고발했다. 나아가 실제 그의 삶도 그의 글이 담고 있는 메시지와 별로 동떨어지지 않았다. 예컨대 「내 노동으로」는 지식인으로 살아온 시인 자신의 유약한 태도를 심하게 자책하는 시이다. 일종의 참회록인 셈이다. 그 참회가 너무나 절절하여, 마치 시인 윤동주의 「참회록」을 연상케 한다. 그가 말한 ‘내 노동’은 자기 방식대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노동을 의미한다. 그는 일찍이 그런 노동을 하고 싶어 했지만, 도회지 지식인으로서 그러지 못하는 현실을 이 시에서 부끄러워하고 있다. 그는 통렬한 자기반성 끝에 마침내 농촌에서 농민들과 함께 ‘내 노동’을 실천하며, 인간이 주체적으로 복되게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드는 데 애썼다. 이때 그에게 시는 삶을 실천하기 위한 서약서 혹은 지침서 같은 것이었다.
당시에는 서민이라면 대개 농민이었는데, 그가 농촌에 정착한 것은 평소 시문학을 통해 보듬어 안으려했던 서민들의 삶 속으로 몸소 나아간 것이다. 거기서 침술로 서민들의 병을 무료로 치료하고, 그들과 함께 삽과 괭이를 들고 노동을 했다. 그렇다면 그가 농촌에서 보낸 삶은 시 창작의 연장이었던 셈이다. 문학을 통해 서민이 편에 서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자신의 생활로써 서민이 되었다. 서울의 이름난 지식인이 누릴 수 있는 명예 같은 것을 모두 버린 채 그는 작고할 때까지 농촌과 농민과 침술을 버린 적이 없다. 이를 두고 문학평론가 염무웅 교수는 이 책 발문에서 “그의 삶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고귀한 가치를 실천하는 것이었다.”라고 평했다. 또 신경림 시인은 『시인을 찾아서』라는 회고록에서 그의 농촌 삶을 “삶을 통한 시의 완성”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