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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마 톤즈 극장판

허클베리 핀, 전람회, Louis Armstrong, 김사랑, Robbie Williams 노래 외 11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디에스미디어 | 2011년 04월 20일 | 원서 : Don't cry for me sudan, 2010 리뷰 총점8.5 정보 더 보기/감추기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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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매일 2011년 04월 20일
시간, 무게, 크기 1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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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출연진 소개 (16명)

멤버 : 이기용(기타, 보컬), 이소영(보컬, 신스), 성장규(기타, 신스, 드럼, 프로그래밍) 멤버 : 이기용(기타, 보컬), 이소영(보컬, 신스), 성장규(기타, 신스, 드럼, 프로그래밍)
전람회는 고급스런 발라드를 주로 들려주던 남성 듀오였다. 서정적인 멜로디에 클래식 감성의 어쿠스틱 피아노 연주로 당시엔 보기 드문 차원 높은 발라드를 구현했다. 그 발라드는 종종 큰 스케일의 오케스트라가 동원되어 웅장함을 더했다. 여기에 간간이 구사하는 1930년대 풍의 스윙 재즈도 맛깔스러웠다. 이들의 세련된 가사도 품격이 달라 보였다. 이들의 가사에서는 감정과잉을 발견할 수 없다. 절제된 이들의 노랫말은 그러... 전람회는 고급스런 발라드를 주로 들려주던 남성 듀오였다. 서정적인 멜로디에 클래식 감성의 어쿠스틱 피아노 연주로 당시엔 보기 드문 차원 높은 발라드를 구현했다. 그 발라드는 종종 큰 스케일의 오케스트라가 동원되어 웅장함을 더했다. 여기에 간간이 구사하는 1930년대 풍의 스윙 재즈도 맛깔스러웠다. 이들의 세련된 가사도 품격이 달라 보였다. 이들의 가사에서는 감정과잉을 발견할 수 없다. 절제된 이들의 노랫말은 그러나 아주 섬세한 감정을 표현해내며 젊은이들의 여린 감성을 더욱 자극했다. 이처럼 이들의 존재는 가요계의 다른 가수들과 뚜렷한 구별이 되었는데, 이는 이들의 음악에 짙게 배인 ‘엘리트’ 냄새 때문에 더욱 그랬다. 건반과 리드보컬을 맡은 김동률(1974년생)과 베이스 주자 서동욱(1974년생)으로 구성된 전람회는 1993년 MBC 대학가요제를 통해 등장했다. 각각 연세대 건축공학과, 사회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들은 전람회를 결성, ‘꿈속에서’란 곡으로 대학가요제에 출전해 대상을 차지했다. 대학가요제에서의 수상으로 주목받은 이들은 신해철의 도움으로 1994년 데뷔앨범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대학가요제 출신의 선배이기도 한 신해철은 그 앨범에서 프로듀싱 작업을 총괄하며 후배들을 감독했다. 전람회의 두 멤버가 모든 곡을 스스로 작곡하고 피아노, 베이스, 컴퓨터 프로그래밍 등을 도맡은 이 앨범은 신인의 데뷔작으로는 놀랄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들의 대표곡 ‘기억의 습작’의 히트로 60만장이 넘는 앨범 판매고를 올렸으며, 비평적으로도 호의적인 평을 얻었다. ‘기억의 습작’ 외에 ‘하늘 높이’, ‘향수’ 같은 아련한 느낌의 발라드 그리고 재즈 뮤지션 해리 코닉 주니어(Harry Connick Jr.)를 표방한 활기찬 재즈 넘버 ‘여행’ 등에서 이들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다. ‘세상의 문 앞에서’는 프로듀서 신해철과의 듀엣 곡. 전작에서 화려한 신고식을 치른 이들은 1996년 2집을 발표하며 자신들의 스타일을 확고히 다져간다. 1집에 이어 신해철이 계속 디렉터 역할을 수행하며, 이병우, 김세황, 정원영 등 최고의 연주인들이 앨범 세션을 맡았다. 2집에서 전람회는 ‘이방인’, ‘취중진담’ 등의 품격 높은 발라드들을 선보이며 예의 유려한 선율감각을 뽐냈다. 재즈 성향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 따왔을 법한 제목의 ‘J’’s Bar에서’를 통해 이어진다. 관현악단의 도입과 일류 세션 맨들의 참여로 사운드는 한결 고급스러워졌다. 한편 또 다른 히트곡 ‘유서’는 표절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감독한 일본 애니메이션 의 배경음악 중 ‘하늘에서 내려온 소녀’의 주요 부분을 표절했다는 혐의였다. 전문가의 비교.청취 결과, 주요 멜로디와 현을 이용한 반주패턴, 편곡 등이 유사하다는 조심스런 결론이 나와 ‘유서’는 대표적인 표절사례가 된 불명예스런 곡이 되었다. 1997년 전람회는 마지막 앨범이 된 EP 를 발표한 뒤 해체했다. 얼마 후 김동률은 패닉의 이적과 함께 카니발이란 프로젝트 듀오를 결성해 앨범 을 발표했으며, 1998년에는 자신의 솔로앨범 를 냈다.
클래식을 얘기할 때 바하를, 팝을 논할 때 비틀스를 빼 놓을 수 없듯 재즈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다. 재즈에 문외한 사람일지라도 루이 암스트롱 이름을 대면 고개를 끄덕인다. 루이 암스트롱은 20세기의 대표적인 대중 음악 ‘재즈’를 정의한 거장이다. 백인 재즈 보컬 빙 크로스비(Bing Crossby)는 루이 암스트롱을 두고 ‘미국 대중음악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극... 클래식을 얘기할 때 바하를, 팝을 논할 때 비틀스를 빼 놓을 수 없듯 재즈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다. 재즈에 문외한 사람일지라도 루이 암스트롱 이름을 대면 고개를 끄덕인다. 루이 암스트롱은 20세기의 대표적인 대중 음악 ‘재즈’를 정의한 거장이다. 백인 재즈 보컬 빙 크로스비(Bing Crossby)는 루이 암스트롱을 두고 ‘미국 대중음악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극찬했다. 그의 코넷/트럼펫 연주는 ‘재즈 연주에 꽃’이라 할 즉흥 솔로(Improvisation)를 창안했다. ‘트럼펫 비르투오조 1호’로 칭송되는 그의 트럼펫 연주엔 떨림(비브라토)과 미끄러짐(글리산도)와 같은 클래식 연주 주법을 독창적으로 소화해 낸 천재성이 돋보인다. 뉴 올리안스의 무명악사 시절을 거쳐 1920년대 초부터 시카고와 뉴욕을 거점으로 암약하면서 1925년 자신이 리드하는 캄보(Combo-소규모 재즈 연주 편성)밴드 핫 파이브 앤 핫 세븐(Hot Five’& Hot Seven) 통해 본격적인 재즈의 서막을 온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 여정은 ‘재즈의 선구자’로만 국한시킬 수 없을 정도로 그 폭이 넓다. 그는 재즈의 천재 일뿐 아니라 팝의 제왕이자 만인의 사랑을 받는 엔터테이너였다. 아무 의미 없는 말들을 리드미컬하게 구사하는 스캣(Scat)이라는 창법을 개발, 재즈 보컬(Jazz vocal)의 길을 열어줬음은 물론이고 천재적인 트럼펫 연주 실력에 더해 그의 출중한 보컬 실력은 그를 ‘위대한 재즈 보컬리스트’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가방만큼 크고 두터운 입술을 지녔다 하여 사치모(Satchmo)라는 애칭을 지녔던 루이 암스트롱은 얼굴만큼이나 커다란 입으로 끓어오르는 독특한 베이스 보컬(속칭 더티 톤)을 들려준다. 이런 그의 독특한 보컬 스타일은 재즈 보컬 빙 크로스비나 토니 베넷(Tony Bennet)을 비롯하여 1930-50년대 전설전인 재즈 디바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의 창법에까지 영향을 준다. 국내에서도 ‘쾌지나 칭칭 나네’의 가수 김상국도 그 보컬을 흉내냈다. 천진 난만(?)한 웃음을 머금으며 청중을 압도할 만한 열정을 뿜어내는 무대 매너로 루이는 대중들에게 잊을 수 없는 넉넉함을 선사했다. ‘만능 재즈 맨’은 그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1901년 재즈의 고향 뉴 올리안스(New Orleans)에서 태어난 루이 암스트롱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가 어머니인 메리 암스트롱의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가출을 했고, 유복자로 태어난 루이는 빈민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길거리의 매춘부였던 어머니는 항상 집을 비워 가족을 돌보지 않았고, 결국 루이는 5살 때부터 생업 전선에 나서야 했다. 스토리 빌(뉴 올리언즈의 재즈 음악인들의 활동 무대)의 홍등가를 지나다가 접한 재즈음악에 매료되어버린 어린 루이는 차츰 재즈라는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된다. 11살에 학교를 그만둬 그만 폭력을 일삼는 불량 써클에 가담, 1912년 신년 축하 행사 때 술에 취해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폭죽 대신 총을 쐈다는 혐의로 소년원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게 전화위복이 되어 소년원에 있는 동안 브라스 밴드에 가입, 제1 코넷 주자로 활동하게 된다. 이를 통해 본격적으로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여기서 접한 코넷(트럼펫과 비슷하나 관이 약간 짧아서 수월하게 다룰 수 있는 악기) 연주는 루이로 하여금 음악을 소명으로 삼게 한다. 1914년 소년원에서 풀려나서 시카고로 이주, 노동자 생활을 하며 차츰 음악가로의 꿈을 키워간다. 광부로, 신문 배달부로, 청소부를 일을 전전해가며 그는 코넷을 사기 위해 돈을 마련해 갔다. 시카고에 여러 바를 전전하며 무명악사로 밑바닥을 기었다. 1918년 기회가 왔다. 당시 재즈의 왕으로 군림하던 킹 올리버(King Oliver)의 도움을 받아 루이는 올리버의 보조 밴드였던 키드 오리(Kid Ory) 밴드에서 프로 뮤지션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는다. 일년 후인 1919년 루이는 시카고에 진출, 미시시피강을 따라 뉴 올리언즈와 세인트루이스 사이를 운행하던 증기선에서 백인들을 위해 음악을 연주한 페이트 매러블(Fate Marable) 밴드에서 3년 간 코넷 주자로서 내공을 다진다. 1922년 루이 암스트롱은 드디어 재즈 연주자로서 날개를 단다. 평소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재즈의 왕’ 조 킹 올리버는 그가 이끄는 크레올 재즈 밴드(Creole Jazz Band) 밴드의 코넷 주자로 그를 가입시킨다. 크레올 재즈 밴드의 정식 멤버 자격으로 루이는 1923년 시카고에서 첫 레코딩을 한다. ‘Chimes blues’(1923), ’Lonesome weary blues’(1923) 등 10여 곡의 싱글 녹음을 통해 독특한 음색의 코넷 연주가 좋은 평가를 이끌어냈고, 이에 자신감을 얻은 루이는 피아노 주자 릴리언 하든(그의 두 번째 부인이며 그는 일생동안 4명의 부인을 맞는다)의 권유로 크레올 밴드를 탈퇴, 이듬해인 1924년 뉴욕으로 진출해 플레처 핸더슨(Fletcher Henderson) 밴드에 제1 트럼펫 주자로 활동한다. 1925년 솔로로 독립, 악기를 코넷에서 트럼펫으로 바꾸고 자신의 밴드 핫 파이브 앤 핫 세븐(Hot Five & Hot seven)을 출범시킨다. 재즈 인디 레이블 오케이(Okeh)레코드 사와 계약, 스캣(scat)의 매력이 넘치는 ‘Heebie jeebies’(1926)를 비롯하여, ’Cornet’(1926), ’Big butter & egg man’(1926), ’Ski-dat-de-dat’(1926), ‘Willie the weeper’(1927), ’Potato head blues’(1927), ’I’m not rough’(1927)를 통해 당시로선 가히 혁명적인 재즈 연주를 선보이며 일약 재즈음악계의 스타로 떠오른다. 1928년 ‘핫 파이브 앤 세븐’을 해체, 자신의 빅 밴드 루이 암스트롱 앤 히스 오케스트라(Louis Armstrong And His Orchestra)’를 결성, ‘Mahogany hall stomp’를 시작으로 이듬해인 1929년 ’Sweet heart on parade’를 발표하며 스윙 밴드 리더로서의 여정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재즈 보컬리스트로서도 활약이 눈에 띄는데, 이미 1927년 ‘핫 파이브 & 세븐‘시절 여성 보컬 메이 엘릭스와 듀엣으로 부른 ’Big butter & egg man’으로 팝 차트에 진출한 루이는 1931년 미쉘 페리시가 작사한 미국의 영원한 스탠다드 명곡 ‘Stardust’를 발표, 선풍적인 인기를 얻는다. 1930년대는 루이 암스트롱의 전성기였다. ‘I gotta right to sing the blues’(1933), ’Struttin’ with some barbecue’(1938) 등 클래식스(Classics)레이블을 통해 발표한 그의 빅 밴드 싱글들은 동시대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 악단,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 악단에 필적할 만한 대중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한다. 1944년 흑인 아티스트로서는 처음으로 링컨 센터에서 공연했으며 이어 할리우드에 진출, 영화배우로서도 활동하며 < 랩소디 인 블랙 & 블루 >(1933)와 1956년의 < 상류사회 >(High Society) 등의 작품을 남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스윙의 열풍은 비밥(Bebop)의 혁명으로 인해 재즈의 중심에서 차츰 언저리로 몰리고 있었다. 스윙을 부정하며 비밥에 물결에 동참한 젊은 재즈음악인들로부터 루이는 ‘엉클 톰’(백인에게 굴종하는 흑인) 식의 비난의 화살을 감내해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무렵 슬럼프를 맞게 된다. 빅 밴드 활동이 더 이상 진척이 되지 않음을 느낀 루이는 결국 빅 밴드를 해체시키고 데카(Decca)레이블로 이적하며 초기의 소 편성 악단의 구성을 한 올 스타즈(All Stars)를 출범시킨다(이후 올 스타즈는 맴버를 교체해 가며 그가 죽을 때까지 유지된다). 1947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데뷔 공연을 가지며 예전보다 활발한 월드투어를 갖는다. ‘High society’(1948), ‘That’s a plenty’(1949), ‘Basin street’(1947), ‘Dippermouth blues’(1947) 등을 히트시키며 1951년에는 투어 실황을 녹음해 발표한 라이브 앨범 < Satchmo At Symphony Hall >을 발표해, LP차트 10위권에 오른다. 같은 해 루이의 히트 송 ‘(When we are dancing) I get ideas’와 ‘A kiss to build a dream on’이 담긴 더블 사이드 싱글을 발표, 이듬해인 1952년 처음으로 싱글 양면이 모두 톱10을 기록한다. ‘A kiss to build a dream on’은 영화 < The Strip >에서 루이가 직접 불렀던 곡인데, 멕 라이언이 주연한 1993년 영화 <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에 다시 삽입돼 화제를 모았다. 1954년 데카와 재계약을 앞두고 루이는 독점 계약 대신 프리랜서를 선언한다. 이 때부터 그의 음악은 다른 음반사를 통해서도 발표되는데, 당대 재즈 명인들과의 협연 앨범들이 눈에 띈다. 1920년대 스트라이드 피아노 대가 팻츠 월러(Fats Waller)에게 헌정하는 < Satch plays Fats >를 1955년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발표해 톱10을 기록했고, 재즈 보컬 엘라 핏제럴드와 호흡을 맞춘 명반 < Ella & Louis >를 1956년 버브 레코드사에서 공개한다. 흑인 공민권 운동이 시작될 무렵인 1956년, 백인 공립학교에 흑인 학생이 군인의 호위를 받고 등교하는 리틀 록(Little Rock)사건을 두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를 ‘위선자’라 비난한 사건이 신문으로 보도되면서 루이는 잠시동안 FBI의 감시를 받으며 ‘요시찰 인물’이라는 불명예를 겪기도 한다. 가뜩이나 나빠진 건강은 1959년 이태리 공연도중 심장 발작으로 잠시 병원 신세를 지게 끔 한다. 이런 악조건을 딛고 루이 암스트롱은 1960년대에도 여전히 ‘제2전성기’라고 할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1963년 12월, 브로드웨이 뮤지컬 < 헬로 돌리 >(Hello Dolly!)의 타이틀곡으로 미국을 침공한 비틀스의 ‘Do you want to know a secret’를 따돌리며 당당히 팝 차트 정상에 등극한다. ‘Hello dolly!’는 1964년 내내 팝 차트 5위권을 고수하며 이듬해 그에게 그래미상 보컬 퍼포먼스부문 수상의 영광도 안겨주었다. 이 곡에 이어 4년 후인 1968년 ‘What a wonderful world’로 루이는 다시 한번 노익장을 과시한다. 평소에 자신이 추구한 팝(pop)음악에 대한 철학을 담아낸 이 곡은 영국에선 발표 즉시 차트1위를 차지했지만 정작 본토 미국에선 별 반응이 없다가, 1987년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영화 < 굿모닝 베트남 >의 배경음악으로 주목받으면서 뒤늦게 톱40에 오른다. 넉넉한 그의 보컬이 멋진 선율과 어우러진 이 곡은 그 무렵 만화가 이현세가 출연한 모 맥주광고 CF에 깔려 국내에서도 광풍을 일으켰다. 그의 마지막 히트 곡 ‘We have all the time in the world’과 함께 루이는 결국 건강상의 이유로 무대에서 은퇴한다. 그와 함께 정확히 7주 후인 1971년 3월15일 건강 악화로 병원에 입원했고, 7월 6일 뉴욕 롱아일랜드의 코로나 소재 자신의 집에서 70세를 일기로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난다. 루이 암스트롱처럼 재즈와 팝이라는 별개의 영역을 넘나들었던 사람도 드물다. 1920-30년대 초기재즈에서 스윙에 이르기까지 재즈의 연주 스타일을 제시했던 선구자 루이 암스트롱은 이에 더해 대중들과 함께 울고 웃을 줄 알았던 진정한 팝 스타였다. 사실 재즈라는 장르에 집착하는 팬들은 그가 보여준 엔터테이너 기질에 못마땅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쿨(cool)의 혁명가 마일즈 데이비스도 자서전에서 “루이의 뛰어난 즉흥 연주엔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그의 익살스러운 무대매너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고 피력할 정도였다. 하지만 루이는 50년을 넘게 연주 생활을 해온 재즈맨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음악 대중들을 위한 ‘팝’에 천착한 사실은 당연하다. 루이는 음악에 있어서 순수한 지향을 잃지 않았고, 자신의 음악을 들어주고 좋아해 줄 청중을 찾아 나서길 원했다. 그의 음악이 꿈꾼 최종 지향점이란 바로 ‘What a wonderful world!’라고 까지 칭송한 팝(pop)이었던 셈이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팝의 세계에 안긴 한 재즈 거장의 허심탄회한 고백은 명언으로 남아있다. ‘그래 팝이 옳았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야!’
2000년 최대의 대어는 박효신이 아니라 김사랑이다. 음악적으로 조숙한 이 천재는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녹음기를 가지고 음원을 만들었으며 중학교 때는 386 컴퓨터와 작은 모듈 하나 가지고 곡 작업을 했다. 그가 발표한 1999년의 충격적인 데뷔작은 메인 스트림의 무관심 속에 평가절하 됐지만 어느 신인도 이 나이에 이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 이 앨범은 심지어 서태지의 핌프록을 예견한 유일무이한 메이저 앨범으로 기... 2000년 최대의 대어는 박효신이 아니라 김사랑이다. 음악적으로 조숙한 이 천재는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녹음기를 가지고 음원을 만들었으며 중학교 때는 386 컴퓨터와 작은 모듈 하나 가지고 곡 작업을 했다. 그가 발표한 1999년의 충격적인 데뷔작은 메인 스트림의 무관심 속에 평가절하 됐지만 어느 신인도 이 나이에 이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 이 앨범은 심지어 서태지의 핌프록을 예견한 유일무이한 메이저 앨범으로 기록된다. 그에게 있어 학교는 음악을 하는데 방해가 될 뿐이었다. 부모님과의 상의 끝에 학교를 뛰쳐나온 그를 친척들은 그를 돌연변이라고 놀렸지만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한 잡지의 구인 광고를 보고 밴드 활동을 시작했으며 청년단체라는 이름으로 홍대 앞의 클럽에서 연주를 하다 기획사의 눈에 띄었다. 이제 16세가 된 이 소년은 댄스계의 무리들과 달리 순전히 실력만으로 캐스팅 된 것이다. 그는 데뷔 앨범에서 단 한 명의 도움도 없이 두 곡의 작사를 제외한 전 곡을 작사, 작곡, 편곡하였으며 기타, 베이스, 건반, 드럼 등 악기 연주를 해냈다. 또한 전곡의 랩을 구성하였으며 보컬과 코러스까지 다 혼자 해내는 괴력을 발휘했다. 신나게 내달리는 질주감의 첫 곡 ‘Mind Control'', 그가 등장한 CF의 배경으로 쓰였고 고감도의 랩핑이 돋보이는 ‘Keep the groove'', 그의 강렬한 기타가 전편을 수놓으며 하드코어에 서정성을 가미한 ‘Mojorida’, 자신의 고차원적인 시선을 노래한 사이키델릭 ‘4AD'' 등이 수록된 그의 앨범은 마를린 맨슨(Marilyn Manson)이나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의 노래를 즐겨 부르고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를 좋아하는 그의 음악 스타일처럼 전체적으로 하드코어 테크노의 분위기를 띤다. 그러나 그의 음색이 하드 코어에만 어울린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Feeling'', ''Promise'', ''U'' 등의 모던록은 노래뿐만 아니라 그의 곡 실력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TV와 공연 무대를 위해 타이틀 곡 ‘Mojorida''를 위해 장승효가 참여한 사운드 퍼포먼스라는 새로운 개념의 무대장치를 구현했다. 기존의 소품위주의 구성에서 벗어나 미술작품을 통해 이미지를 표현한 것으로 테크노의 사이버틱한 분위기를 위해 금속성 폐기계부품과 컴퓨터 칩으로 반기계의 사이보그인 백댄서와 더불어 로봇 8대를 만들었다. 일정한 틀에 얽매이고 싶지 않은 그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였던 1집을 뒤로하고 현재 2집을 준비중이며 좀 더 파격적인 음악들로 돌아올 예정이다.
# 테이크 댓의 미운 오리에서 영국 음악의 희망으로 거듭난 로비 윌리엄스 지난 2001년 2월 26일 거행된 < 브릿 어워즈 >는 영국 내에서 로비 윌리엄스의 드높은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자리였다. ‘영국의 그래미’라 불리는 이 시상식에서 그는 최우수 영국 남자 가수를 포함 싱글 ‘Rock DJ’로 최우수 싱글, 최우수 뮤직비디오 등 주요 3개 부문을 독식했다. 특히 이번 수상은 여러 부문에서 수상이 점쳐지... # 테이크 댓의 미운 오리에서 영국 음악의 희망으로 거듭난 로비 윌리엄스 지난 2001년 2월 26일 거행된 < 브릿 어워즈 >는 영국 내에서 로비 윌리엄스의 드높은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자리였다. ‘영국의 그래미’라 불리는 이 시상식에서 그는 최우수 영국 남자 가수를 포함 싱글 ‘Rock DJ’로 최우수 싱글, 최우수 뮤직비디오 등 주요 3개 부문을 독식했다. 특히 이번 수상은 여러 부문에서 수상이 점쳐지던 로비의 최대 라이벌 크레이그 데이비드(Craig David)를 완전히 제친 쾌거여서 더욱 가치가 빛났다. 이러한 결과를 볼 때 당분간 영국에서 그의 인기는 예전보다 더욱 맹위를 떨쳐 나가지 않을까 싶다. # 영국의 국민가수 그러나 국내에서는 찬밥? 이렇듯 영국 내에서 로비 윌리엄스는 ‘국민가수’로 대접받고있다. 그렇다면 영국 밖에서는? 유감스럽게도 미국이나 특히 국내에서는 그 같은 지명도가 적용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미국 공략을 위해 발표한 편집앨범 < The Ego Has Landed >는 평론가들로부터 비교적 호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팬들을 사로잡는 데는 실패했다. 국내에서는 상황이 더 좋지 못하다. 테이크 댓(Take That)의 팬층이 두텁게 포진하고 있는 국내의 여건이지만 오히려 그 탓에 로비의 음악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의 솔로작품들은 테이크 댓 시절의 음악과는 전혀 개념이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른’ 음악은 보이밴드의 달콤함에 친숙한 국내 음악팬들에게는 다소 난해하게 느껴질 만하다. 로비 윌리엄스는 90년대 초·중반을 풍미했던 보이밴드 테이크 댓 출신이다. ‘뉴 키즈 온 더 블록에 대한 영국의 답변’이라고 평가받던 테이크 댓은 다섯 미소년들의 깔끔한 이미지와 ‘Back for good’ 같은 소녀 취향의 아름다운 발라드로 영국인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다. 팀의 막내였던 로비는 그러나 그룹의 그러한 댄디한 성향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멤버였다. 말하자면 별종이랄까? 약물이나 여성편력 등으로 말썽을 일으켰으며 그로 인해 팀의 리더 게리 발로와 자주 충돌했다. 그 결과 1995년 로비 윌리엄스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룹을 떠났다. 사실 그룹 내에서 그의 비중은 아주 적은 편에 속했다. 자신의 발언이 별로 반영이 되지 않는 그룹보다 솔로활동이 그의 비범함을 과시하기에 훨씬 적합했다. 따라서 그의 음악이 테이크 댓과 이질적인 건 당연하다. 솔로 데뷔와 함께 그가 가장 먼저 주력한 것은 ‘보이밴드 이미지 없애기’였다. 테이크 댓 시절엔 ‘반작용’을 일으켰던 알코올과 마약중독, 섹스어필은 아주 유용한 변신수단이었다. 그것은 단정한 보이밴드의 애송이가 아닌 불량한 성인 로커의 이미지였다. 이미지뿐 아니라 음악성향도 완전히 변모했다. 그룹 시절의 ‘안전한’ 버블 검 팝을 거부하고 록음악을 도입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솔로활동 초반 그의 ‘성장’을 촉진시킨 스승은 또 다른 ‘악동’ 오아시스의 갤러거 형제였다. 그들은 로비 윌리엄스가 마약에 빠지도록 이끌었으며 자신들의 스트레이트한 로큰롤 사운드를 그에게 전수했다. 그때까지는 갤러거 형제가 로비에게 베스트 프렌드이자 정신적·음악적 지주였다. 하지만 얼마 후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절친했던 사이가 영국 최대의 앙숙으로 돌변하고 만다. # 새로운 악동 출현 이러한 로비 윌리엄스의 ‘불량함’은 방정맞은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을 통해 유통되었다(오아시스와 블러의 브릿 팝 전쟁, 스파이스 걸스의 걸 파워 선풍 등 영국언론이 한 번 손대기만 하면 뭐든지 요란해진다. 그것은 그만큼 자국 뮤지션에 대해 애정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는 못했다. 처음엔 영국인들도 미심쩍은 눈초리로 관찰할 뿐이었다. 영국인들 역시 국내 팬들처럼 로비의 변이가 낯설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1995년부터 오아시스와 음악적 교류를 나누던 그는 동시에 술과 마약의 향연을 이어갔고 ‘살찐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좋지 못한 닉네임까지 얻었다. 이 무렵 로비는 레코드사와 불화를 거듭하다가 1996년 드디어 아티스트의 자유를 염원하는 자신의 첫 싱글 ‘Freedom `96’을 발표했다. 조지 마이클의 곡을 커버한 이 곡은 레코드사와 투쟁한 조지 마이클에게 존경을 표하는 곡이었으며 또한 그의 성공적 솔로활동을 닮고 싶은 열망을 담고 있는 곡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싱글은 참담한 실패를 맛봤고 이어 1997년 말 발표한 솔로 데뷔앨범 < Life Thru A Lens >도 발표 당시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로비의 뒷심은 무서웠다. 그의 데뷔작은 발매한 지 28주만에 차트정상을 차지하며 뒤늦은 흥행가도를 달렸으며, 이듬해 발표한 2집 < I`ve Been Expecting You > 곧바로 1위에 올랐다. 게다가 그는 1999년 < 브릿 어워즈 >에서 최우수 영국 남자 가수 등 3개 부문을 수상하며 영국 최고의 인기스타로 떠올랐다. 이미지만이 아닌 그의 진정한 모습, 즉 뮤지션의 모습이 영국 팬들에게 비로소 수용되는 순간이었다. 음악과 더불어 그는 팬들을 즐겁게 해주는 엔터테이너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했다. 각종 쇼와 공연을 통해 섹시함과 자유분방한 기질을 발휘하며 팬들의 눈과 귀를 만족시켰다. 2000년 < 브릿 어워즈 >에 수상자로 나온 로비가 오아시스의 리암 갤러거에게 결투를 신청한 대목은 그 절정이었다. 끊이지 않는 스캔들도 주요 관심대상이다. 트레이시 쇼 같은 여배우들을 시작으로 올 세인츠의 니콜 애플턴, 스파이스 걸스의 전 멤버 제리 할리웰 등과 화려한 연애행각을 벌이며 연일 신문과 잡지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양성애자라는 소문도 심심찮게 들리며 특히 결별한 옛 약혼녀 니콜 애플턴이 최근 그의 숙적 리암 갤러거와 결혼 직전이어서 앞으로 이 둘의 ‘결전’이 더욱 흥미롭다. # 보이밴드 출신으로 가장 성공한 솔로 뮤지션 영국에서의 성공을 기반으로 로비 윌리엄스는 1999년 5월에는 1집과 2집의 히트싱글들을 모은 편집앨범 < The Ego Has Landed >를 미국시장에 내놓았다. 축구광이기도 한 그는 축구게임 < 피파 2000 >의 메인 테마 ‘It`s only us’를 부름으로써 전세계 축구 팬들의 기억에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2000년 9월 발표한 3집 < Sing When Your Winning >은 영국에서만 1백5십만 장이 팔려나갔고, 비틀스의 < 1 >에 이어 ‘아쉬운’ 판매 2위를 기록했다. 특히 첫 싱글 ‘Rock DJ’는 엽기 뮤직비디오로 쇼킹함을 주었다. 그 충격요법은 록의 이단아 마릴린 맨슨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3장의 정규앨범을 발표한 로비 윌리엄스는 현재 그의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치며 영국 음악계를 평정한 상태다. 테이크 댓의 핵심멤버였던 게리 발로와 마크 오웬이 각각 솔로앨범을 내며 활동을 벌였지만 로비의 활약에 비할 게 못된다. 그는 비틀즈의 존 레논, 왬의 조지 마이클에 뒤이어 그룹 출신으로서 성공적인 솔로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아무튼 브릿팝의 쇠퇴와 미국 틴 팝의 득세로 한동안 침체기를 맞고 있는 영국 음악계에 그의 존재는 분명 활력소로 작용할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다시 국내로 돌아온다. 워낙 자국의 음악이 강세인 미국은 그렇다 치고 국내에서 그의 성적은 가혹할 정도다. 현재 국내에는 보이밴드의 나긋나긋한 버블 검 팝 아니면 림프 비즈킷 류의 하드코어라는 이분법이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라면 그리 멜로딕하지도 않고 그리 세지도 않은 로비 윌리엄스 식 록음악은 아마 쉽게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한번 테이크 댓이나 보이밴드의 음악은 과감히 포기하고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이 남자의 ‘어려운’ 음악에 귀기울여 보자. 색다른 음악세계를 발견하는 기쁨을 얻을지도 모른다.
매력적인 고음으로 여성 가수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장혜진(1968년)은 그러나 인기의 사각지대에서 자신의 입지를 활기차게 펴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보석이다. MBC 합창단 출신인 그녀는 영화 < 하얀 비요일 >에서 ‘그대를 위해’로 참여하기도 했지만 주로 가수들의 코러스를 도맡아 하면서 가요계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다(놀랍게도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에서 그녀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이후 발표한 ‘꿈속에... 매력적인 고음으로 여성 가수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장혜진(1968년)은 그러나 인기의 사각지대에서 자신의 입지를 활기차게 펴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보석이다. MBC 합창단 출신인 그녀는 영화 < 하얀 비요일 >에서 ‘그대를 위해’로 참여하기도 했지만 주로 가수들의 코러스를 도맡아 하면서 가요계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다(놀랍게도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에서 그녀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이후 발표한 ‘꿈속에선 언제나’와 ‘혼자만의 이별’이라는 좋은 곡이 숨어 있는 1집이나 ‘키 작은 하늘’이 약간 인기를 끌었지만 그녀의 분위기를 한껏 느낄 수 있는 ‘나 또한 아직’이나 ‘늦가을 모퉁이’가 들어 있는 2집으로는 대중들에게 특별한 인상을 주지 못한다. 1994년 말에 발표한 3집은 높은 인지도를 지닌 뮤지션들의 역량을 빌려와 그녀의 앨범으로서는 가장 많이 알려진 앨범이 됐다. 오랫동안 코러스와 콘서트 단골 초대손님으로 활약한 그녀는 김현철의 프로듀싱 아래 김종서, 박상민, 손무현, 유정연, 황세준, 김동률, 정재윤 등의 화려한 실력을 갖춘 뮤지션들에게 힘을 빌렸으며 그 덕택인지는 모르지만 이 앨범으로 앨범 판매와 방송 횟수 등에서 상위권에 오르며 TV의 가요 차트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코러스가 압권인 ‘내게로’가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스캣송 ‘Before the party'', 그리고 계속 명곡으로 추대를 받고 있는 ‘1994년 어느 늦은 밤’ 등이 수록되어 있다. 발라드 곡만 부르는 가수라는 인식을 가진 그녀는 1996년 4집으로 이러한 통념을 깨려고 했다. 빠른 템포의 댄스곡 ‘위기의 여자’로 춤을 선보였으며 라디오에서 인기를 얻은 ‘완전한 사랑’으로는 클레오파트라 머리와 짙은 눈 화장으로 변신했다. 이 후 이 앨범에서는 그녀의 고혹적인 목소리를 느낄 수 있는 ‘이별후유증’ 등이 인기를 완만하게 이어갔다. 드라마 < 추억 >에서 ‘사랑은 기다림 속의 천국’이라는 곡으로 참여하고 북한 노래 열풍의 확산으로 제작한 < 통일소녀 > 앨범에서 김정화의 목소리를 북한 여성의 비음을 살린 목소리로 바꾸는 훈련을 시킨 그녀는 1997년 싱글앨범 < Moskito >를 발매한다. 이 앨범에는 영화 < 깡패수업 >에서 주제곡으로 쓰인 ‘나는요’를 박상민과 함께 불러 주고 있으며 같은 영화에서 하나코의 테마곡으로 쓰인 ‘꿈의 대화’를 김형석의 지휘 아래 오케스트라의 현으로 새롭게 구현했다. 외모도 4집의 검은톤에서 폭탄머리, 초록빛 아이섀도, 연분홍 입술. 원색 끈달린 원피스에 보색으로 맞춘 배낭을 메고 나타나는 과감한 변신을 시도했다. 많은 공연으로 목이 쇠약해진 그녀는 성대결절이라는 병에 걸린다. 이 병으로 그녀는 오랜 기간 쉬게 되고 높은 음을 내기보다는 중저음에 힘을 싣는 창법을 연구했다. 도발적으로 가슴을 열어 젖힌 포즈가 인상적인 그녀의 5집은 4집부터 작업을 같이 해 왔던 손무현의 프로듀싱 아래 이루어졌다. 일본 여성 피아니스트 게이코 마쓰이의 곡을 리메이크하고 그녀가 처음으로 노랫말을 쓴 ‘드림’, 라틴풍의 발라드 ‘영원으로’, 댄스곡 ‘추억’, 탱고리듬의 ‘내게로 와’ 등이 수록된 이 앨범에서 그녀는 기교위주의 해석보다는 라틴풍의 음악에 몸을 실었다. 그래서인지 음악은 경쾌해져 댄스풍이 됐지만 결코 화려하다거나 시끄럽지는 않았다. 그녀는 1999년 제4회 아시아가요제에 참가해 손무현의 곡인 ‘못다한 사랑’으로 2등 상에 해당하는 특별상을 받았다. 9개국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그녀는 강력한 그랑프리 후보자로 꼽혔으나 당일 날 아침 도진 편도선으로 아깝게 제 실력 발휘를 하지 못했다. 월등한 가창력과 뛰어난 곡 해석으로 주영훈, 이문세, 김현철, 윤종신 등 많은 가수와 듀엣을 한 그녀는 현재 그룹 캔에서 활동했던 유해준의 프로듀싱으로 R&B를 위주로 한 6집을 준비중이며 곧 서울 재즈 아카데미의 지원으로 버클리음대로 유학을 떠날 예정이다.
노래 : Elvis Presley (엘비스 프레슬리)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오늘날 폴과 비틀스를 있게 한, 단 한사람의 영향을 꼽는다면 위 해설처럼 단연 트럭운전사출신 엘비스 프레슬리다. 존 레논은 이를 결정적 한마디로 축약한다. “엘비스가 나타날 때까지 내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무 것도 없다(Nothing affects me until Elvis)." 존과 폴이 만나서 처음 마음먹은 것은 사실 엘비스의 음악을 더 강하게 표출해내는 것일 뿐이었다. 그들을 통해서 로큰롤의 진정한 역사는 ‘시대의 풍운아’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개막되었다는 사실이 다시금 확인된다. 물론 역사가에 따라 로큰롤의 효시를 행크 발라드(Hank Ballard)나 빌 헤일리(Bill Haley) 또는 척 베리(Chuck Berry)로 꼽기도 한다. ‘Work with me, Annie’ ‘Crazy man crazy’ ‘Maybellene’ 등과 같은 이들의 대표곡들이 시기적으로 먼저 구동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 다수 대중들은 여전히 로큰롤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엘비스가 나와서야 비로소 그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빌보드지의 결론. ‘1953년 록음악이 시작되었다고 하나 정작 차트나 방송에서 그 시대를 풍미하기 시작한 것은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싱글 ‘Heartbreak hotel’이 연속 8주 넘버원에 머물면서부터였다.’ 초기 로큰롤은 척 베리나 버디 할리와 같은 탁월한 ‘작가’를 소유했다. 리틀 리처드나 제리 리 루이스라는 출중한 ‘배우’ 그리고 조 터너, 보 디들리와 같은 ‘음악감독’들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로큰롤은 강풍을 휘몰아칠 역동적 ‘스타’가 필요했다. 그가 엘비스였다. 그 시대는 흑인의 리듬 앤 블루스를 소화해줄 백인가수를 요구했고 엘비스는 백인대중들로부터 ‘저 친구는 백인이면서 왜 검둥이노래를 부르는 거야?’라는 의아함을 일으킬 만큼 탁월한 흑인감성의 보유자였다. 이러한 시의성은 그러나 일반의 인식처럼 56년 RCA 소속의 엘비스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었고 이미 54년 선 레코드사의 엘비스로서 확립된 것이었다. 샘 필립스 사장의 전설적인 선 시절에 엘비스는 ‘That`s all right’, ‘Blue moon of Kentucky’ 와 ‘Mystery train’ 등을 부르면서 컨트리와 R&B를 크로스오버화한 신종의 로커빌리를 선보이면서 벌써 ‘웨스턴 밥의 왕’으로 불렸다. 이 때 이미 순회공연에서 팝 음악사상 초유의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다. 『뉴스위크』는 ‘금세기 백년간의 스타’ 특집기사를 다루며 그의 등장을 ‘20세기의 사건’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당시 엘비스 백업 밴드에서 드럼을 쳤던 D.J. 폰타나는 54년 상황을 다음처럼 술회한다. “엘비스 무대가 끝나고 나면 노래를 따라해 줄 관객들은 다 빠져버려 아무도 없었지요. 애들은 백 스테이지에서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습니다. 내 생각에 그 애들은 아마 우리 연주는 듣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오로지 ‘처음으로 흔드는 가수’ 엘비스를 보고자 하는 것이었죠.” 로컬 무대에서 전국 네트워크 TV로 진출하면서 마침내 ‘엘비스마니아’는 폭발했다. 미국의 3대 전국 공중파 방송 ABC CBS NBC의 체제가 정립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그는 텔레비전시대의 영웅으로서 ‘라디오스타를 죽이는’ 새로운 미디어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타미와 지미) 도시 브라더스의 CBS < 스테이지 쇼 >, NBC의 < 밀턴 벌 쇼 >와 < 스티브 알렌 쇼 > 그리고 저 유명한 CBS의 < 에드 셜리번 쇼 >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벌써 음악의 영상시대를 주도했다. 음악이 음반으로만 소구하던 시대는 ‘섹시 가이’ 엘비스의 출현으로 끝났다. ‘보는 음악’ 시대를 주도한 최초의 인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엘비스였다. 스탠다드 팝의 파수꾼 프랭크 시내트라도 자기 TV 쇼의 떨어지는 시청률을 참다못해 ‘음악의 공적(公敵)’이라고 성토해마지 않았던 엘비스를 출연시켜야 했다. TV 뿐만 아니라 영화 최초의 로큰롤 스타도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 러브 미 텐더 > < 러빙 유 > < G.I. 블루스 > < 블루 하와이 > 등 31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그는 관객들에게 로큰롤의 열정과 록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의 호소력을 제공했다. 음반 텔레비전 그리고 영화라는 ‘삼국통일’에 성공하며 천하를 제패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이 아래로 보일 정도의 막강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77년 사망하면서 그의 캐리어가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그는 무려 2억5천만장의 앨범을 팔았다. 이 기록에 가장 접근한 인물은 비틀스가 아닌 2억장의 빙 크로스비(캐롤 ‘White Christmas’가 결정적이다)며 프랭크 시내트라는 겨우 4천만장에 불과했다. ‘1인 기업’ 엘비스는 막대한 돈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인 핑크를 포함한 갖가지 칼라의 자동차 캐딜락을 구입했고 멤피스에 4만 달러 짜리 목장 그리고 10만 달러로 저택 그레이스랜드를 샀다. 전용 비행기는 물론 텔레비전 세트 그리고 첨단기계들도 마련했다. 물론 지금이야 흔해 빠진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특히 엘비스와 같은 하층계급 청년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부의 상징들이었다. 동시대 그리고 후배가수들이 일개가수에서 기업으로 융기한 엘비스를 통해 신분상승과 스타덤 획득 욕구를 품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엘비스처럼 슈퍼스타이면서 동시에 부자가 되고 싶어했다. 버디 할리는 엘비스를 빅 스타로서 존경했고 밥 딜런의 음악동기는 엘비스보다 큰(bigger than Elvis)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톰 존스는 아예 영국의 제록스판 엘비스였다. 엘비스처럼 구레나룻을 길렀던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직접 그를 만나기 위해 그레이스랜드 담을 넘다가 제지당했고 그룹 퀸은 엘비스를 안중에 두고 50년대 로큰롤풍의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를 만들었다(로저 테일러의 증언 “처음으로 텔레캐스터와 부기 앰프를 쓴 다소 빈약한 사운드였다. 분명 엘비스를 염두에 두고 만든 곡이었다.”). 마크 알몬드(Mark Almond)의 명쾌한 한마디를 들어보자. “그는 왕이다. 그밖에 다른 코멘트는 일체 필요없다!” 하지만 60년 전역 이후 엘비스는 달라졌다. 매니저였던 톰 파커 퇴역대령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음악방향이 빗나간 것이었다. 예의 로큰롤 넘버와는 거리가 먼 It`s now or never나 Surrender와 같은 감상적인 이탈리아 민요를 영역해 불렀다. 변화(아니면 변신?)의 징조는 프랭크 시내트라 쇼에 출연했을 때 뚜렷이 나타났다. 이 쇼에서 엘비스는 스탠다드 가수의 상징인 턱시도 정장을 했으며 호스트 프랭크 시내트라와 서로의 대표적 히트곡인 ‘Witchcraft’와 ‘Love me tender’를 바꿔 불렀다. 이 시점을 계기로 엘비스가 로큰롤을 버리고 스탠더드 팝 가수로 돌아서 청춘진영을 배신했다는 주장이 고개를 비집는다. 명백한 훼절이라고 단정해도 선뜻 반대논리를 펴기 어렵다. 그러나 친(親)엘비스 측은 그로써 그가 로큰롤 가수에서 ‘국민가수’로 승격하는 의미 있는 업적을 남기게 됐다고 반박한다. 로큰롤만의 논리로 음악을 풀고 엘비스를 규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어떻게 가치판단을 하느냐는 것은 관련자의 이데올로기나 각 시대의 성격에 따를 수밖에 없다. 변절이든 성숙이든 이 점만은 분명하다. 엘비스의 보컬이 초기의 로큰롤가수로 한정되었을 때 과연 후대에의 보컬 영향력을 소지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의 가창력은 음역, 에너지, 통제력, 피치 등 모든 면에서 압권으로 평가되어왔다.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었지만 ‘멀티칼라’인 그의 보이스에는 자니 레이의 급격한 변색, 두왑 그룹인 잉크스파츠(Inkspots) 빌 케니의 테너, 딘 마틴의 솜사탕 그리고 마리오 란자의 풍미가 동거했다. 그러면서도 로이 오비슨과 같은 유니크한 개성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스탠더드 발라드를 소화함으로 해서 우리들은 ‘Are you lonesome tonight’, ‘Suspicion’, ‘In the ghetto’, ‘The wonder of you’, ‘Fool’, ‘My boy’ 등의 팝 고전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명백한 역사의 유산이다. 그가 없었다면 성악가나 스탠더드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만을 접했을 것이고 로큰롤 싱어가 선사하는 발라드의 진미(珍味)를 영원히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공존공영 가능성을 그처럼 실감나게 시범한 가수도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이미 흑인감성의 전달로 로큰롤이 ‘흑백의 퓨전’임을 목소리 하나로 입증한 그는 이어서 역시 매직 보컬로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제휴를 일궈내는 업적을 남겼다. 어쩌면 우리가 70년대 록과 메탈 분야에서 형식을 확립한 이른바 ‘록발라드’라는 것도 그 원조는 엘비스일지도 모른다. 엘비스는 목소리를 통해 대중의 공감대를 전달한 몇 안 되는 가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건조한 보이스와는 거리가 먼, ‘이끼가 잔뜩 낀’ 풍부한 목소리였다. 아마 신나는 로큰롤 ‘Burning love’ 한 곡으로도 충분히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후대 음악팬들이 그의 노래를 듣고 더러 ‘느끼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후반기의 노래 가운데는 그런 요소를 풍기는 곡이 있었다. 하지만 엘비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거기서 느끼함이 아닌 되레 ‘풍성한 감성’을 수혈 받곤 한다. 미트 로프(Meat Loaf)는 말한다. “엘비스는 노래하는 것 무엇이든지 감정적으로 가사로 스피릿을 감상자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희구했던 명성과 부를 얻고 난 뒤 아쉽게도 그것들의 노예가 되는 비극적인 위인이기도 했다. 아무 데도 나갈 수가 없었고 편안히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도 불가능했다. 60년대나 70년대 로커였다면 이런 사실상의 ‘수감생활’을 극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래적 반항아’가 아니었다. 스타덤의 고독과 소외에 차츰 무너져간 그의 말년을 잘 나타내주는 일화는 무수히 많다. 70년대 들어서 조울증이 불거진 그는 때로 격렬해져 텔레비전 세트나 당구대, 주크박스, 자동차 등 가장집기를 부수는 발작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언젠가 D.J. 폰타나와 그의 아내 앞에서 엘비스는 자신의 감정상태를 이렇게 토로했다. “당신들은 운이 좋은 겁니다. 난 엘비스인게 너무 지겨워요! 뭘 해야될 지를 모르겠어요. 뭔가 딴 일을 했으면 제발 한이 없겠어요.” 고고음악의 대명사인 자니 리버스의 해석. “엘비스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었지요. 그래야만 했을 겁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그 밖의 다른 일이란 없었지요.” 엘비스만큼 화려한 명성과 처절한 고독이라는 양극단을 겪은(아니면 겪기로 강제된)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영욕의 교차요, 희비의 쌍곡선이다. 그래서 그를 통해 우리는 슈퍼스타덤의 빛 외에 냉혹함과 잔인성이라는 그림자를 동시 확인한다. 그의 사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심장마비로 발표되었지만 사후 마약중독 비만증 그리고 자살 등 정황에 근거한 갖가지 설들이 난무했다. 이는 그의 후반기 삶이 얼마나 철저히 비공개로 갇혀 있었는지를 반증한다. 스스로 창조한 혁명에 쓰러진 순종파 가수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비평에 의해 그의 역사적 위상이 훼손되는 일은 없다. 여전히 그는 만인이 공감하는 ‘킹 오브 로큰롤’이며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금세기 최고 가수’다. 비틀스가 그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한마디로 모든 엘비스의 가치는 입증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오류로 더러 지적되지만 비평가 고(故) 레스터 뱅스(Lester Bangs)의 엘비스 예찬은 되새길 가치가 있다. “우리는 엘비스에게 해준 것과 같은 동의를 앞으로 어떤 누구에게도 해주지 않을 것이다!”
서울특별시 강동구 이동(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륜동)에서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박지윤은 1993년 12살 때 하이틴 잡지 모델을 계기로, 1994년 해태제과 광고모델을 거쳐 1994년 SBS 청소년 드라마 《공룡선생》에서 드라마 아역 연기자로 활동했다. 1997년 로커스트의 곡을 리메이크한 〈하늘색 꿈〉으로 가수로 데뷔했으며, 2003년까지 6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 〈Steal Away〉, 〈가버려〉, 〈성인... 서울특별시 강동구 이동(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륜동)에서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박지윤은 1993년 12살 때 하이틴 잡지 모델을 계기로, 1994년 해태제과 광고모델을 거쳐 1994년 SBS 청소년 드라마 《공룡선생》에서 드라마 아역 연기자로 활동했다. 1997년 로커스트의 곡을 리메이크한 〈하늘색 꿈〉으로 가수로 데뷔했으며, 2003년까지 6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 〈Steal Away〉, 〈가버려〉, 〈성인식〉, 〈난 남자야〉 등이 연달아 히트하면서 인기 아이돌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2000년 4집을 준비하면서 JYP 엔터테인먼트에 이적했으나 2003년 초에 나온 6집 《Woo~ Twenty One》이 선정성 논란을 일으키며 19금 판정을 받아 완전히 실패했고, 이로 인해 JYP엔터테인먼트와 결별한 후에는 별다른 활동 없이 약 6년간의 휴식기를 가졌다. 2009년 직접 설립한 기획사 박지윤 크리에이티브에서 자작곡을 담은 7집《꽃, 다시 첫 번째》를 내놓으며 대중과 평단의 호응을 동시에 얻었다. 배우, 사진작가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2013년에 윤종신의 기획사인 미스틱89그리고가족로 이적했으며, 동명이인의 방송인 박지윤과 함께 영입되었다. 이후 산이와 윤종신과 작업한 미니 싱글〈미스터 리〉를 발표하고 국내 주요 음원 사이트에서 1위를 차지하며 크게 선전하고 있다.
사실 조지 마이클의 솔로 활동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으나 한창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듀오 왬!(Wham!)을 갑작스럽게 해체하고 솔로로 나선 점은 팬들을 무척 당혹케 했다. 준비는 1984년에 이미 시작되어 왬의 최고 히트곡 ‘Careless whisper’의 경우 조지의 이름으로 싱글 발매되어 그때부터 홀로서기에 대한 예측이 분분했다. 1986년 싱글 ‘A different corner’가 미국차트 7... 사실 조지 마이클의 솔로 활동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으나 한창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듀오 왬!(Wham!)을 갑작스럽게 해체하고 솔로로 나선 점은 팬들을 무척 당혹케 했다. 준비는 1984년에 이미 시작되어 왬의 최고 히트곡 ‘Careless whisper’의 경우 조지의 이름으로 싱글 발매되어 그때부터 홀로서기에 대한 예측이 분분했다. 1986년 싱글 ‘A different corner’가 미국차트 7위, 영국차트 1위에 오르면서 솔로를 개시한 그는 이듬해인 1987년 소울의 여왕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과 듀엣곡 ‘I knew you were waiting(for me)‘을 취입하여 미국과 영국 차트 정상을 차지, 생애 최초로 그래미 트로피까지 받았다. 이후는 성공의 고공비행. 같은 해 여름 영화 < 비버리 힐스 캅 2 >에 삽입된 문제의 화제작 ‘I want your sex’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다. 영국에선 방송금지가 되었음에도 3위까지 올랐고 상대적으로 관대했던 미국에서도 2위에 오르는 호성적을 거두게 된다. 성에 대한 자유분방한 표현이 오히려 그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켜 놓았다. 마침내 11월 대망의 솔로 프로젝트 < Faith >가 발매되었다. 발매 즉시 전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며 손쉽게 앨범차트 정상을 차지, 12주간을 점령했고 미국에서만 현재까지 1000만장 이상을 팔아치우며 전세계적으로 2000만장에 육박하는 대박을 터뜨렸다. 싱글 히트곡들도 줄줄이 쏟아져 나와 ‘Faith(4주)’, ‘Father figure(2주)’, ‘One more try(3주)‘, ’Monkey(2주)‘등 무려 4곡이 차트 정상을 차례로 밟았다.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은 재즈 풍의 ‘Kissing a fool(4위)’와 미리 발표된 ‘I want your sex’까지 수록곡 중에서 총 6곡이 차트를 숨가쁘게 유린했던 88년이었다. 록, 리듬 앤 블루스, 소울, 재즈, 펑키, 댄스, 가스펠 등의 모든 음악 장르를 한 장의 앨범을 통해 접할 수 있게 만든 사실만으로도 그래미가 선정한 올해의 앨범상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데뷔앨범이 좋은 평판을 얻게 된 것은 가수로서 자질보다도 송라이터로서 조지 마이클의 자질에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된 측면이 작용했다. 그가 ‘Careless whisper’를 만들어낸 때는 10대였다. < Faith >는 이와 같은 조지 마이클의 놀라운 창작재능이 최고조에 달한 결정체인 셈이었다. 또한 이 앨범으로 흑인들의 전유물로만 여겼던 R&B 앨범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하며 1980년대 초반 블랙 빅 3(마이클 잭슨, 라이오넬 리치, 프린스)가 백인들을 흑인음악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였던 것과 달리 백인이 그 작업을 주도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아메리칸 음악상(AMA)에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조지 마이클을 팝/록 부문과 소울/R&B 부문에서 각각 최고의 남자가수로 선정했고 R&B 최우수 앨범상도 그의 몫으로 할당했다. 1990년에 출시된 두번째 프로젝트 < Listen Without Prejudice, Vol 1 >은 전작보다 한층 깊어진 동시에 여유로운 느낌을 주었지만 앨범은 미국 판매고 200만장을 포함하여 800만장 정도(?)가 팔리는데 그쳐 전작의 태풍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싱글도 ‘Praying for time(1위)’, ‘Freedom 90(7위)’, ‘Waiting for that day(21위)‘, ’Mothers Pride(50위)’등이 히트했으나 전작에 비해 훨씬 줄어든 자신의 입지를 실감해야 했다. 조지는 수록곡들의 높은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앨범 홍보에 상당히 미온적이었던 소니 레코드사의 태도로 인해 앨범이 단명했다는 의혹을 갖기에 이른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아티스트의 음악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소니사에 실망한 조지는 1992년 이래로 거대 레코드사를 상대로 외롭고 기나긴 법정투쟁을 시작(92.10)하게 된다. 가장 그에게 힘들었던 이 시기에 금전적, 정신적인 피해는 막대했다. 하지만 4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음악적 호흡을 쌓는데 집중투자한다. 그는 간간이 자선단체를 위한 행사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1991년 11월 영국 웸블리 콘서트에서 자신의 우상이자 친구인 엘튼 존(Elton John)의 1974년 미국차트 2위 곡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를 듀엣으로 함께 불렀다. 이 실황 싱글은 4년 만에 영국차트 정상에 데뷔하였고 미국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1992년 4월에는 에이즈 치료를 위한 자선 앨범 < Red Hot + Dance >에 수록된 신곡 ’Too funky(10위)’로 한 해 유럽에서 가장 많은 방송회수를 기록하게 된다. 이듬해에는 이미 고인이 된 프레디 머큐리(Freddy Mercury) 추모 콘서트 실황(92년)과 자신의 91년 라이브 투어 중에서 5곡의 라이브를 엄선하여 수록한 EP 음반 < Five Live EP >를 발매, 영국차트 3주간 정상을 밟았다. 퀸(Queen)의 나머지 멤버들과 함께 한 ’Somebody to love(32위)’와 영화 < 바그다드의 까페 >의 삽입곡인 제베타 스틸(Jevetta Steele)의 오리지날 ’Calling you’로 멋진 가창력을 다시 한번 뽐냈고 앨범에는 게이(Gay)들의 찬가 ’Killer/Papa was a rolling stone(77위)’와 리사 스탠스필드(Lisa Stansfield)와 함께 노래한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도 수록되어있다. 1994년 소송에서 패소한 후 조지는 이에 불복, 항소했고 항소심이 진행중인 1995년 드림웍스(DreamWorks)사가 나서서 분쟁을 해결해 소니에 막대한 금전적 배상을 치르면서 조지와 새로운 계약이 체결되었다. 영국에선 메이저 레이블 버진(Virgin)과 계약이 이뤄지면서 어렵사리 그의 음악생활이 지속될 수 있었다. 무려 6년의 앨범 공백기를 깬 1996년에 세번째 앨범 < Older >가 세상에 나온다. < Faith >앨범을 그의 미국 최고의 걸작이라고 한다면 < Older >는 영국에서 최고의 걸작이 되었는데 그동안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꼈던 영국에서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한 음반으로 영국에서만 (5X)플래티넘을 기록하며 버진 레코드 역사상 가장 빨리 팔린 앨범으로 기록되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6곡의 싱글이 차트 3위안에 드는 영국에서 최초의 기록을 남기는 기염을 토했다. 미국에선 플래티넘을 따내며 ’Jesus to a child’(7위)’와 ‘Fastlove(8위)’ 두 곡을 Top 10에 진입시켰다. 같은 해 10월에 영국 런던에서 소수의 팬들만을 모아놓고 MTV 언플러그드 공연을 실시하여 큰 호응을 얻었으며 여기서는 보니 레이트(Bonnie Raitt)의 명곡을 리메이크한 ’I cant make you love me’가 주목을 받았다. 98년 소니와의 마지막 동거작인 베스트 앨범 < Ladies & Gentlemen >을 발매하여 미국에서만 200만장 이상을 팔아치웠고 영국에선 앞서 발표한 솔로앨범들과 마찬가지로 차트 1위에 올라서 무려 8주간을 머무르는 가속페달을 밟았다. 항상 베스트 앨범이 발매될 때면 주목을 받는 것이 이전에 미발표된 신곡들인데, 조지의 앨범 역시 3곡의 신곡이 수록되어 있었고, 비버리 힐즈 공원에서 자신의 음란행위를 빗대어 묘사한 뮤직비디오로 화제를 뿌린 ‘Outside(영국 2위)’와 메리 제이 블라이즈(Mary J. Blige) 와 함께 한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오리지날 ‘As(영국 4위)’등이 주목의 대상이었다. 이듬해 세기말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조지는 재즈 보컬리스트로 돌아왔다. 통산 4번째 솔로앨범 < Songs From The Last Century >를 커버 곡들로만 채워 격조를 높였다. 재즈의 고전들을 비롯하여 우리에게도 친숙한 로버타 플랙(Roberta Flack)의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 폴리스(Police)의 ’Roxanne‘, U2의 멤버들이 제작한 ‘Miss Sarajevo’에 이르기까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매력을 선사한 앨범이었다. 2000년에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과 취입한 듀엣곡 ‘If I told you that’이 영국을 비롯한 유럽지역의 최고의 히트곡으로 부상했고 이후 주요 콘서트에서 간간히 모습을 드러냈던 그가 올해 새 앨범 발매에 앞서 파격적인 싱글을 선보였다. 과거 ‘I want your sex‘에 버금갈만한 자극적인 곡 ’Freeek!(영국 7위)‘는 조셉 칸(Joseph Kahn)이 감독한 150만 달러짜리 뮤직 비디오가 전해주는 메시지 만으로 상당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곡이었다. 곧 새 앨범이 발매된다고 하니 그가 걸어온 변화무쌍함 때문에도 한층 기대가 된다. 생기 발랄한 버블 사운드로 청소년들의 절대적인 우상으로 군림했던 20대 초반의 왬! 시절부터 자신의 음악적 욕심을 남김없이 드러낸 솔로 데뷔시절, 성숙함이 짙게 묻어나는 30대 중반의 < Older >시절과 재즈로 수양을 한 30대 후반까지 가수로서뿐 아니라 작곡가로서 소신을 굽히지 않고 매번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며 질주해온 음악인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불혹의 나이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보여줄 시도가 어떤 것일지 관심을 모으고있는 것이다.
노래 : Rachael Yamagata (레이첼 야마가타)
싱어송라이터 레이첼 야마가타(Rachael Yamagata)는 캐롤 킹(Carole King), 로버타 플랙(Roberta Flack), 제임스 테일러(James Taylor), 리키 리 존스(Ricki Lee Jones),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and Garfunkel)등 세간에 내로라하는 작가군의 음악을 들으며 성장했다. 그는 그들의 음악 속에서 자양분을 흡수하며 자신의 미래를 꿈꿔왔던 것. 불행히도 ... 싱어송라이터 레이첼 야마가타(Rachael Yamagata)는 캐롤 킹(Carole King), 로버타 플랙(Roberta Flack), 제임스 테일러(James Taylor), 리키 리 존스(Ricki Lee Jones),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and Garfunkel)등 세간에 내로라하는 작가군의 음악을 들으며 성장했다. 그는 그들의 음악 속에서 자양분을 흡수하며 자신의 미래를 꿈꿔왔던 것. 불행히도 두 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는 불상사를 겪었다. 하지만 대견스럽게도 훌륭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뉴욕에 거주하는 독일계 이태리인 어머니와 워싱턴에 있는 3세대 일본인 아버지의 집을 오가는 일이 사실 고되고 힘들긴 했으나 그는 그러한 일상 속에서도 가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다. 대학에 다니던 1990년 중반 즈음까지, 1년 동안 피아노레슨을 받고 노트한권을 곡으로 꽉 채울 만큼 음악적 열의를 품어왔던 그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체성확립의 기로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노스웨스턴대학에 입학했다. 일 년 만에 바서(Vassar)대학의 이태리영화학으로 전공을 바꿨으나 자신의 연기코치가 급작스레 콜롬비아의 바나드 칼리지로 옮겨감에 따라 차후 행보에 중대한 결정을 해야만 했다. 결국 궤도수정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야마가타는 노스웨스턴대학으로 돌아가기보다 학창시절 친분이 있었던 소울(Soul), 펑크(Funk)밴드 범퍼스(Bumpus)와의 합류를 결심한다. 시카고 내의 클럽을 순회공연하며 생업을 이어가던 밴드 범퍼스와 수개월동안 손발을 맞춰 본 후 마침내 보컬을 꿰찬 레이첼은 6년 동안 곡을 쓰며 세장의 앨범을 냈다. 슬라이스톤(Sly and the family stone)과 프린스(Prince),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의 음악성분을 지향하는 밴드의 성향은 매우 강렬했고, 그 안에서 자신의 역량을 숙성시켜갔다. 풍부한 작곡을 기반으로 다채로운 악기 채용 등의 실험을 통해 절충적 라이브 퍼포먼스를 시도하며 지방순회공연에도 열을 올렸다. 그러는 동안 그는 청중들과 직접 소통하는 라이브 쇼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2001년까지 한솥밥을 먹어온 그녀는 그러나 무언가 새로운 창조적 돌파구를 찾고 있음을 자각했다. 어두웠던 과거에 자신을 지탱해줬던 거목들의 음악세계 안에서 자신을 재발견하고자 했던 것. 마침내 솔로행보를 감행해 데이비드 그레이(David Gray)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 쇼의 오프닝을 장식하며 적당한 메이저 레이블을 찾기 위한 쇼케이스를 진행해나갔다. 2003년 9월 아리스타(Arista)의 프라이비트 뮤직(Private Music)과 계약하고 바로 다음 10월에 6곡이 실린 셀프타이틀 EP를 내놓았다. 소울과 재즈가 가미된 록 사운드로 주위의 호평을 들은 중고신인 레이첼 야마가타는 그리고 2년 만인 2004년 6월, 첫 번째 정규앨범 < Happenstance >를 RCA레이블을 통해 발표했다. 그토록 바라고 원하던 꿈의 구장에 정식으로 발을 내디딘 것이다.
이특, 예성, 강인, 신동, 성민, 은혁 이특, 예성, 강인, 신동, 성민, 은혁
최근 미국 팝음악계의 두드러진 현상은 급작스런 여가수 붐일 것이다. 머라이어 캐리, 샐린 디온, 셰릴 크로, 앨러니스 모리세트와 같은 스타들 말고도 호시탐탐 대권을 노리는 신인들이 줄을 잇고 있다. 과거에도 여가수들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요즘처럼 무리를 지어 전분야에 걸쳐 득세한 것은 없었다. 그야말로 소외된 여성들의 대반란이다. 이처럼 남성을 압도하는 모처럼의 ‘여성시대’를 밝힌 또 한사람이 사라 맥라클란이다. ... 최근 미국 팝음악계의 두드러진 현상은 급작스런 여가수 붐일 것이다. 머라이어 캐리, 샐린 디온, 셰릴 크로, 앨러니스 모리세트와 같은 스타들 말고도 호시탐탐 대권을 노리는 신인들이 줄을 잇고 있다. 과거에도 여가수들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요즘처럼 무리를 지어 전분야에 걸쳐 득세한 것은 없었다. 그야말로 소외된 여성들의 대반란이다. 이처럼 남성을 압도하는 모처럼의 ‘여성시대’를 밝힌 또 한사람이 사라 맥라클란이다. 귀여운 용모에 얼핏 갓 데뷔한 신인같지만 실제로는 경력 10년의 중견. 얼마나 고된 무명시절을 거쳤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챠트 상위권에 명함만 내밀지 않았을 뿐 음악계에서는 이름이 꽤나 알려진 인물이다. 지금은 음악계뿐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이름을 깊이 새기고 있다. 막 발표한 신보 < 떠오름(Surfacing) >은 빌보드 앨범차트 2위에 올랐다. 여기 수록된 곡 ‘미스터리를 만들고(Building a mystery)’도 해당 싱글차트 10위권에 진입했다. 뒤늦게 때를 만난 셈이다. 그의 음악은 전과 비교할 때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그럼 지금이 도대체 어떤 ‘때’이길래 앨범 제목처럼 갑자기 수면위로 떠오른 것일까? ‘널 사랑해(I love you)’ ‘네 할 것을 하라(Do what you have to do)’ 등 그의 노래는 마치 가을의 정취를 자극하듯 차분하고 쓸쓸하다. 조용함의 극치라 해도 과장은 아니다. 분노와 격정의 음악인 앨러니스 모리세트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바로 이것이다. 지금 팝 음악은 시끄러운 얼터너티브 록에서 조용히 자기 세계를 탐구하는 ‘개인 포크풍’으로 대세가 바뀌어가는 듯하다. 사람들이 절규에 지친 것일까. 사라 맥라클란 스스로도 이렇게 말한다. “3년전 전작이 나왔을 적에 방송국 대다수가 내 노래를 틀지 않았다. 다른 여가수, 분노의 광채를 발한 토리 에이모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세말고도 사라의 앨범과 노래가 주목받는 이유가 또 있다. 그가 올여름 ‘릴리스 페어(Lilith Fair)’라고 하는 커다란 행사를 기획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페스티벌에는 요즘 잘 나가는 여성 싱어송라이터들이 총집결해 매스컴의 집중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여가수들만’ 출연했다. 한마디로 ‘여성들의 한판을 벌여보자’는 것이었다. 사라 맥라클란은 남성이 지배하는 록을 향해 ‘분리평등’을 외치는 것이 행사의 취지라고 밝혔다. 제목에도 나타난다. ‘릴리스’는 유태인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로 아담의 조강지처였으나 이브에게 자리를 뺏긴 여인이라고 한다. 그의 상징성은 곧 복수심이다. 사라 맥라클란은 ‘릴리스 페어’에 페미니즘을 투영해 행사가 상업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막았다. 그를 평가해 줄 대목이 이 부분이다. 행사의 주창자로서 그의 음악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1997년 팝계 결산에서 그는 분명히 ‘올해의 인물’로 꼽힐 것이다. 물론 행사 출연진이 너무 포크라는 한 장르에 국한됐다는 점 등 아쉬움도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음악에는 별 아쉬움이 없다. ‘때’가 바뀌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보컬 비루투오조’ 바비 맥퍼린(Bobby Mcferrin)은 현대 음악계에서 가장 기이한 음악인으로 통한다. 순간적으로 최저음의 음역에서 높은 음역까지 자유자재로 옮겨다니며 구사하는 그의 목소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특출난 스타일이다. 재즈 뿐 아니라 팝, 클레식 등 음악 전반을 아우르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도무지 혼자서 내는 소리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다층(多層)적인 목소리를 구사한다. 목소리로만 ... ’보컬 비루투오조’ 바비 맥퍼린(Bobby Mcferrin)은 현대 음악계에서 가장 기이한 음악인으로 통한다. 순간적으로 최저음의 음역에서 높은 음역까지 자유자재로 옮겨다니며 구사하는 그의 목소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특출난 스타일이다. 재즈 뿐 아니라 팝, 클레식 등 음악 전반을 아우르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도무지 혼자서 내는 소리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다층(多層)적인 목소리를 구사한다. 목소리로만 완벽한 오케스트레이션을 구사하는 그는 가히 보컬의 기인이다.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와 세리토스 대학에서 피아노를 공부했다. 1977년 솔로 보컬 주자로 데뷔하기 전까지 아이스 폴리스(Ice Follies)라는 보컬그룹의 멤버로 나이트 클럽과 카바레 등지를 돌며 음악 활동을 했다. 뉴올리안스와 샌프란시스코 등의 활동무대를 거쳐 1981년 쿨 재즈 페스티벌에서의 공연을 통해 일렉트라 레코드와 계약, 이듬해 그의 셀프 타이틀 데뷔작을 내게 된다. 1982년 데뷔 앨범< Bobby Mcferrin >에 이은 < The Voice >(1984)는 재즈 보컬,아니 보컬 음악의 역사를 다시 쓰게 할 만큼 빼어난 것으로, 최초로 오버 더빙과 밴드의 연주 없이 오로지 그의 1인 보컬로만 만들어졌다. 1985년 블루 노트사와 계약, 그 해 재즈 보컬 그룹 맨하탄 트랜스퍼(Manhattan Transfer)와 같이 발표한 곡 ’Another night in Tunisia’로 그래미상을 수상한다. 기인에 가까운 공연 스타일은 그를 유명 뮤지션으로 비상시켰고, 빌 코스비 쇼를 비롯해 각종 광고에도 등장하여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된다. 1988년 < Simple Pleasure >를 통해 발표한 ’Don`t worry, be happy’로 빌보드 팝 차트 1위에 오르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는다. 팝의 대중들에게도 그의 이름을 친숙하게 한 이 곡은 팝 역사상 아카펠라로는 최초로 차트정상을 차지한 곡이 되기도 했다.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 칵테일 >에 삽입된 것이 빅히트의 동력이었다. 1990년대 들어 바비 맥퍼린은 클래식과 재즈의 본격적인 접목을 시도하며 한층 음악적 지평을 넓혔다. 첼리스트 요요마와 함께 1992년 발표한 < Hush >는 클래식 차트에 2년 넘게 머무르는 대성공을 거뒀고, 국내 각종 CF 배경음악과 라디오 방송 삽입 음악으로도 인기를 얻었다.(수록곡 중 트래디셔널 곡 ‘자장가’는 단연 인기 트랙이었다) 이듬해엔 재즈 피아니스트 칙 코리아와 함께 한 실황앨범 < Play >를 발표, 크로스오버 음악의 진수를 선보였다. 1995년에 발표한 < Paper Music >에선 모차르트, 차이코프스키, 바흐의 작품을 세인트 폴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배경으로 목소리로 담아낸다. 이듬해 발표한 < Bang! Zoom >에선 퓨전재즈 그룹 엘로우 자켓이 연주에 참여하며 밴드의 리드보컬을 담당했고, 같은 해 < The Mozart Session >에선 칙 코리아와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춘다. 1997년의 < Circlesongs >는 그의 뿌리로 돌아가 1984년< The Voice >처럼 1인 즉흥 보컬을 재현했다. 2001년 근 10년만에 다시 블루 노트 레이블을 통해 새 앨범 < Beyond Words >를 발표한다. 예전 < Play >를 통해 그와 호흡을 맞춘 칙 코리아가 다시 참여해 눈길을 끈 앨범은 기존의 클래식 곡이나 있던 곡이 아닌 칙과 그의 공동 작업을 통해 완성된 ‘순수한 창작물’이라는 데서 의미가 있다. 송 라이터로 본격적으로 나선 그의 ‘음악적 욕심’이 반영된 수작이었음은 물론이다. 바야흐로 2004년 2월 5-7일, 올해 나올 새 앨범 홍보 차 이뤄질 첫 내한 공연을 앞두고 있다.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넘나들며 재즈 보컬역사를 다시 쓴 그의 내한 연주를 통해 과연 ‘보컬 즉흥연주’의 대가임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앙상블 디토 Ensemble DITTO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새로운 아이콘 앙상블 디토는 2007년 시작되었다.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더 많은 한국 관객에게 실내악을 소개하고자 시작, 현재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피 재키브, 다니엘 정, 첼리스트 마이클 니콜라스, 피아니스트 스티븐 린 등을 중심으로 레퍼토리에 따라 유연한 편성이 가능한 그룹이다. 디토는 이제 실내악을 넘어 더 많은 사람과 '클래식... 앙상블 디토
Ensemble DITTO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새로운 아이콘 앙상블 디토는 2007년 시작되었다.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더 많은 한국 관객에게 실내악을 소개하고자 시작, 현재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피 재키브, 다니엘 정, 첼리스트 마이클 니콜라스, 피아니스트 스티븐 린 등을 중심으로 레퍼토리에 따라 유연한 편성이 가능한 그룹이다. 디토는 이제 실내악을 넘어 더 많은 사람과 '클래식을 공감'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한다.

앙상블 디토는 데뷔 때부터 음악뿐만 아니라 혁신적인 시도로 많은 화제를 낳았다. 차별화된 프로덕션 제작과 공격적인 홍보를 통해 아티스트의 다양한 모습을 소개했고, 이를 통해 청중을 관심을 끌고 더욱 열광하게 하였다. 드라마 OST 연주, 홍대 앞 클래식 연주회, 게릴라 콘서트, 해외 화보촬영, 다양한 뮤직 비디오와 캠페인 비디오 제작 등 클래식 연주 단체로서는 유례없는 파격적인 활동으로 더욱 많은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앙상블 디토는 2007년 시즌1을 시작했으며, 2009년부터 매년 앙상블 디토가 주축이 된 ‘디토 페스티벌’을 열고 있다. 앙상블 디토의 리사이틀은 페스티벌 하이라이트이자 피날레로, 2014년까지 9년 동안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공연을 모두 매진시키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더불어 2012년부터 모던 & 컨템포러리 음악 공연 'Different DITTO'를 시작, 후앙 루오, 스티브 라이히, 올리비에 메시앙, 조지 크럼, 존 아담스 등의 실험적인 레퍼토리로 평단의 극찬까지 끌어냈다.

디토의 패밀리 콘서트 역시 새로운 시도로 주목받고 있다. 미디어 아티스트와 함께 클래식과 비주얼 퍼포먼스의 조합을 기본으로 하는 이 시리즈는 2009년 카니발(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2010년 디토 오디세이(우주), 2011년 디토 올림픽(스포츠), 2012년 디토 오디세이 2(바다와 우주)로 이어지고 있으며 2012년 디토 오디세이 2는 '백야'와 함께 2012 여수엑스포 특별부문에 초청받은 유일한 클래식 공연이기도 하다.

10, 20대, 더 나아가 일반 대중을 클래식 공연장으로 모이게 하며 2008, 2009년 예술의전당 유료관객 1위를 기록, 매년 10개 도시 순회공연을 모두 매진시키는 기염을 토한 앙상블 디토는 2010년, 일본으로 활동 영역을 확장했다. 2010년 6월 도쿄국제포럼과 오사카 심포니 홀 공연을 공식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펼쳤으며, 일본 데뷔 첫해에 7,000석을 매진시키며 세계 2위 규모를 자랑하는 일본 클래식 시장에 당당히 진출, 한국 연주자와 한국 클래식 콘텐츠의 더 클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어 2010년 가을에는 대한민국 외교통상부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주최하는 한-중-일 문화 셔틀 콘서트를 펼쳤다. 한국, 일본, 중국의 젊은 아티스트가 앙상블 디토의 이름으로 모여 펼친 이 공연은 그들의 국제적인 역량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자리이기도 했다. 2011년에는 도쿄 기오이 홀에서 펼쳐진 한일문화교류 공연에 초청받아 문화교류 사절 역할도 소화했으며, 2012년에는 아시아 최대의 클래식 페스티벌, 일본 '열광의 날'에 초청받았다.

2015년에는 클래식 음악에서 혁신적인 시도와 성과를 올린 프로젝트에 수여하는 2015 Classical: NEXT Innovation Awards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같은 해 10월, 앙상블 디토 100회 공연을 기념한 DITTO HITS 투어와 상하이 진출이 이뤄졌다. 2016년까지 열 번의 시즌을 채운 앙상블 디토는 2017년부터 더욱 확장된 개념의 2기를 시작할 예정이다.

리처드 용재 오닐, 음악감독 & 비올라
Richard Yongjae O’Neill, Music Director of DITTO Festival & Viola

리처드 용재 오닐은 비올리스트로서 그래미상 후보 지명뿐만 아니라 에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 상을 받은 드문 연주자 중 한 사람이다. 런던 필, LA 필, BBC 심포니, 서울시향, 알테 무지크 쾰른, 세종솔로이스츠 등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했으며, 실내악에서는 링컨센터 체임버 뮤직 소사이어티, 카메라타 퍼시피카, 에네스 콰르텟 멤버로 활동 중이다. 한국에서는 디토 페스티벌 음악감독과 앙상블 디토 리더이며, 2012년에는 지휘자로도 데뷔했다. 리처드 용재 오닐과 클래식 프로젝트 디토는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클래식 페스티벌로 자리 잡아 지금까지 엄청난 숫자의 관객에게 실내악과 클래식을 소개해 왔다.
리처드 용재 오닐은 유니버설 뮤직 아티스트로서 일곱 장의 솔로 음반과 베스트앨범 를 냈다. 2014년 베스트앨범 가 여세를 몰아 한정판 LP로 출시되었으며, 유키 구라모토와 스페셜 앨범으로 발매한 <로맨티스트>는 최근까지 음반 시장의 돌풍을 이끌었다.
리처드 용재 오닐은 문화관광부가 지정한 한국방문의 해 미소 홍보대사, 유니세프 아우 인형 홍보대사, 대한적십자사 홍보대사로 활동 중이다. 클래식 음악 에세이 <공감>(중앙북스)을 발간하였으며, 2016년에는 베토벤 현악사중주를 주제로 쓴 신간 <나와 당신의 베토벤>(리처드 용재 오닐, 노승림 공저, 오픈하우스)을 출간한다. 한편, 2012년 MBC 대기획 <안녕?!오케스트라>의 멘토와 지휘자 역할로 다문화가정 아이들과의 오케스트라 만들기가 다큐멘터리로 방송되었다. 이 방송은 2013년 국제 에미상을 받았으며, 영화로도 제작되어 2013 부산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 받았다.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비올리스트 최초로 아티스트 디플로마를 받은 리처드 용재 오닐은 서던 캘리포니아 음대에서 학사(마그나 쿰라우데)를, 줄리아드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뉴욕에 거주하면서 예술에 대한 그의 업적과 공로를 인정받아 뉴욕시 의회로부터 명예로운 시민상을 받았으며, 2007년부터 교육자로도 헌신하여 UCLA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리처드 용재 오닐은 마테오 고프릴레르가 만든 1727년 베니스 산 ‘ex-Trampler’를 쓰고 있다.

스테판 피 재키브, 바이올린
Stefan Pi Jackiw, Violin

스테판 피 재키브는 현재 세계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사람으로, 빈틈없는 기술과 시적인 연주로 청중을 사로잡고 있다. 보스턴, 시카고, 클리블랜드, 뉴욕, 필라델피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협연자로서 트레버 피노크, 앤드류 데이비스 경, 한누 린투, 안드리스 넬손스, 야닉 네제-세겡, 미하일 플레트뇨프, 유리 테르미카노프 등 저명한 지휘자들과 성공적인 무대를 이어가고 있다.
이번 시즌 하이라이트로 미하일 플레트노프이 이끄는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와 뉴욕 카네기 홀 무대에 올랐고, 피아니스트 제레미 뎅크와 찰스 아이브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녹음과 리사이틀 투어에 나선다. 아시아에서는 기돈 크레머 & 크레메라타 발티카 한국 투어에 이어 도쿄 심포니와 산토리 홀 공연과 마리오 벤자고가 지휘하는 서울시향과 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랐다.
2002년 재키브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으며 유럽에 데뷔했다. 센세이션을 일으킨 연주는 더 타임스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고, 스트라드 지는 “14세의 바이올리니스트가 폭풍처럼 런던 음악계를 강타했다.” 라고 표현했다. 이어 보스턴, 시카고 심포니 협연에 데뷔했고 특히 보스턴 심포니 협연은 보스턴 글로브에 의해 그해 최고의 협연 중 하나로 뽑혔다. 2008년부터 디토에 합류하며 본격적인 한국 활동을 시작, 2009년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녹음과 예술의전당 독주회를 성공리에 마쳤다. ‘팡파르’ 잡지는 “이것이 지금 소장해야 할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녹음이다.”라고 극찬하였다.
스테판 피 재키브는 한국대표문인 故 피천득의 외손자로 물리학자인 부모님 밑에서 4세에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지나이다 길렐스, 미셸 오클레어, 도널드 웨일러스타인 등을 사사,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였고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의 아티스트 디플로마를 마쳤다. 2002년 미국 최고 권위의 클래식 상인 에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 상을 받았다.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이미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할 정도로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던 김광민은 ‘나비’, ‘하나가 되어요’ 등과 같은 곡으로 매니아층을 형성했던 그룹 동서남북의 키보디스트로 잘 알려진 국내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다. 대학시절에는 시나브로라는 팀의 멤버로 1981년 < MBC 대학가요제 >에 나가 ‘안개’라는 곡으로 동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그는 이후 스튜디오 세션으로 활동하다가 그룹 사랑과 평화...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이미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할 정도로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던 김광민은 ‘나비’, ‘하나가 되어요’ 등과 같은 곡으로 매니아층을 형성했던 그룹 동서남북의 키보디스트로 잘 알려진 국내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다. 대학시절에는 시나브로라는 팀의 멤버로 1981년 < MBC 대학가요제 >에 나가 ‘안개’라는 곡으로 동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그는 이후 스튜디오 세션으로 활동하다가 그룹 사랑과 평화의 키보디스트로 잠깐 속해 있기도 했다. 국내의 좁은 음악적 환경에 한계를 느끼던 그는 1986년 미국의 버클리 대학에서 수학을 시작했다. 그 곳에서 장족의 발전을 거듭한 그는 졸업 후에도 미국 보스톤에 있는 뉴잉글랜드 음악원(NEC)에 수석으로 입학하고 졸업하며 재즈와 클래식을 공부했다. 이 시절의 수학기간은 오로지 독자적인 색을 찾기 위함이었지만 학교에서 인정한 최고의 뮤지션답게 버클리 대학에서 만든 < Berklee Project >에 2곡을 발표했으며 첫 번째 솔로 음반인 < Letter From The Earth >을 발매한다. 그의 순수하고 뛰어난 피아노 실력을 엿볼 수 있는 이 음반은 국내 팬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국내 연주인의 작품으로는 처음 느끼게 하는 세련된 감성의 ‘Morning’’, ‘Rainy day’’ 등과 같은 음악으로 컬트 팬들과 심야의 라디오 청취자들을 사로잡았으며 국내 피아노 연주자들 중에서도 최고의 인지도를 받게 되었다. 앨범의 제목인 동명의 타이틀곡은 고 유재하의 죽음을 애도한 것이다. 1993년 그는 두터운 팬층을 확보하고 있는 MBC의 라이브 프로그램 < 일요예술무대 >의 MC 자리를 가수 이현우와 함께 맡게 된다. 이 프로그램은 개편 때마다 시간대가 가끔 바뀌기는 했지만, 그의 어눌하고 소박한 말솜씨와 편안한 분위기에 힘입어 지금까지도 인기 있는 프로그램으로 장수를 누리고 있으며 그에게 많은 팬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그 이듬해 내놓은 두 번째 앨범 < Shadow Of The Moon >은 전 앨범이나 후의 3집에 비해 많은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이 앨범은 < 수요예술무대 >의 타이틀곡으로 쓰였던 ‘Forgive us’, 김민기의 곡을 본인이 직접 기타로 연주한 ‘Beautiful love’, ‘Anna’, ‘Goodbye again’, ‘Chopstics’ 등의 성숙해진 스케일과 화려한 리듬을 들을 수 있는 앨범으로, 잼세션의 재즈적인 요소가 많이 느껴지는 음반이다. 이 앨범은 3집의 히트로 2000년에 재발매 되었으며 원래 변화경의 연주로 녹음되었던 ‘Purity’란 곡을 그가 다시 연주하여 실었다. 두 편의 영화음악을 비롯한 여러 가수들의 세션으로 참가하며 바쁜 나날을 보낸 김광민은 1999년 오랜만에 솔로 앨범을 발표한다. TV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얻은 인기와 매니아들의 꾸준한 추적을 받으며 이뤄낸 명성은 3집 앨범을 스테디셀러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후기 팻메시니(Pat Metheny)의 음악처럼 재즈보다는 뉴에이지 계열의 음악을 많이 선보인 이 앨범은 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담은 ‘날 수만 있다면’, 소외된 이웃에 대한 음악인 ‘내 마음의 비가’ 등의 곡이 담겨 있으며 고등학교 때 썼다는 ‘회상’, 즉흥 연주로 만들어 낸 ‘어느 날 오후’, 아일랜드 민요로 잘 알려진 재즈 넘버 ‘Danny boy’ 등 섬세한 피아노 터치와 절제된 감정의 전달이 느껴지는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대중적으로 많은 인기를 모은 ‘지금은 우리가 멀리 있을지라도’는 앨범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2000년, 영화 < 공감 >에서 ‘Ditto’라는 곡으로 그의 감성을 스크린으로 옮겨본 김광민은 현재 동덕여대에서 실용음악을 가르치고 있으며 여전히 립싱크 문화에 일타를 가하는 라이브 프로그램 < 수요예술무대 >의 진행자로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연주 : Jimi Hendrix (지미 헨드릭스)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들에게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라는 이름은 하나의 신주단지와도 같다. 그의 전성기는 1960년대 말이었고 1970년대가 열리자마자 이 세상을 떠나 이미 오래 전 역사 속으로 들어간 인물이지만 그는 지금도 불멸의 기타 천재로 많은 뮤지션들의 추앙을 받는다. 누구 말마따나 ‘아직까지도 일렉트릭 기타 음악이 위대한가 아닌가 여부를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이다. 아마 그의 위대함...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들에게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라는 이름은 하나의 신주단지와도 같다. 그의 전성기는 1960년대 말이었고 1970년대가 열리자마자 이 세상을 떠나 이미 오래 전 역사 속으로 들어간 인물이지만 그는 지금도 불멸의 기타 천재로 많은 뮤지션들의 추앙을 받는다. 누구 말마따나 ‘아직까지도 일렉트릭 기타 음악이 위대한가 아닌가 여부를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이다. 아마 그의 위대함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동시대의 그룹이었던 도어스(The Doors)의 건반주자 레이 만자렉(Ray Manzarek)의 말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을 것이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를 천재로 추켜세우는 이유는 그가 진짜로 천재였기 때문이다.” 지미 헨드릭스는 이처럼 먼저 뮤지션들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그가 활동하던 시절에도 록 뮤지션들은 한결같이 그가 창조해낸 폭발적인 기타 연주에 넋을 잃었다. 마이크 블룸필드(Mike Bloomfield)라는 기타연주자는 혀를 내두르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놀라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 연주음은 마치 수소폭탄이 터지는 것 같았고 유도미사일이 날아다니는 듯 했다. 난 그 앞에서 내 기타조차 꺼내들 수가 없었다.” 당시 큰 소리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그룹 더 후(The Who)의 기타리스트 피트 타운센드(Pete Townshend)와 기타의 신(神)이라는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등 초일류 연주자들도 충격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피트 타운센드는 그 소리를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자 경쟁심이고 뭐고 다 떠나서 지미 헨드릭스의 기념비적인 미국 몬터리 팝 페스티벌(Montery Pop Festival) 데뷔를 주선했으며 에릭 클랩튼은 지미가 죽었을 때 하루종일 슬피 울었다고 한다. 스스로 최고라 뻐기고 있던 그를 긴장시킨 천재의 죽음이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이었다. 대중음악 역사에서 지미 헨드릭스가 터뜨린 두 가지 혁명적 대사건이 있다. 하나는 상기한 1967년 몬터리 팝 페스티벌에서였고, 다른 하나는 전설적인 1969년의 우드스탁 페스티벌(Woodstock Festival)에서였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몬터리 공연에서 그는 < Wild thing >을 연주하고 나서 뜻밖에 기타 앞에 무릎을 꿇더니 거기에 기름을 부어 불을 질러버렸고 마치 의식을 거행하듯 그 기타의 화염을 애무(?)했다. 객석은 순식간에 절정의 도가니로 변했다. 필름과 사진으로 잘 알려진 이 사건은 격동의 1960년대를 주도한 ‘성난 젊은이’의 포효로서, 록의 혈통에 면면히 흐르는 항거와 도발의 전형적 의식(儀式)으로 기록되고 있다. 영국의 음악전문지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New Musical Express)는 록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의 하나로 꼽으면서 ‘바로 이 순간 록의 전설이 탄생했다’고 했다. 2년 뒤 우드스탁 축제에서의 사건 또한 너무도 유명하다. 공연 마지막 순서에 나와 일절 딴 악기 없이 오로지 기타만을 가지고, 그것도 다른 곡도 아닌 신성한 미국의 국가 < Star spangled banner >를 ‘린치하듯’ 연주해낸 것이었다(지미는 영국에서 먼저 이름이 났지만 미국 흑인이다). 거기에는 구사된 갖가지 파열음과 소음을 들은 사람들은 즉각 그것이 총격과 포화의 전쟁터를 묘사하고 있는 것임을 알았다. 그 연주는 곧 ‘미국은 현재 전쟁(월남전)중’이라는 암시였고 동시에 기성의 미국에 대한 젊은이들의 저항을 축약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백인 보수적 중산층에게 그는 하나의 공포일 수밖에 없었다. 1968년 민주세력의 염원과 달리 대통령에 당선된 닉슨은 젊은이들의 ‘반(反)문화’를 파악하기 위해 지미 헨드릭스와 만남을 시도했었다는 일화를 남긴다. 지미 헨드릭스는 그리하여 대중음악의 예술성외에 ‘시대성’을 소유한 역사상 드문 인물이다. 그에게는 반드시 기존체제와 질서의 해체를 부르짖었던 1960년대 베이비붐 세대의 카운터 정서를 연주로 대변한 뮤지션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이것이 다른 기타영웅들인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Jimmy Page), 제프 벡(Jeff Beck), 리치 블랙모어(Richie Blackmore) 등과 뚜렷하게 차별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서태지가 그렇듯 하나의 음악가인 동시에 ‘사회적 인사’로서 의미를 지녔던 셈이다. 지미 헨드릭스의 말을 들어본다. “젊은이들은 지금 자신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크고 거칠고 폭력에 가까운 어떤 것을 찾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록 공연장에 가지 않는다면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그가 시대와 음악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기타 오케스트레이션’을 창조해낸 데는 전문적인 용어로 ‘피드백’(feedback)과 ‘와우와우’(wah-wah) 주법의 힘이 컸다. 피드백은 기타와 앰프 사이에서 나는 불협화음인 하울링(howling)을 화음의 소리로 들리게 하는 지점을 찾아 사운드를 이어가는 방식을 가리킨다. 와우와우 역시 효과음페달로서 마치 어린아이 우는 소리처럼 들리는 이 이펙터(effector)를 지미 헨드릭스만큼 유효하게 또 인상적으로 다룬 연주자가 없다는 게 정설로 되어있다. 그는 피드백과 와우와우를 통해 당시 젊은이들의 심정을 관통하는, 마치 고통으로 흐느끼고 울부짖는 기타사운드를 들려주었다. 신음하는 기타, 말하는 기타였다. 더욱이 그의 음악은 슬픈 블루스였고 그 블루스는 지미 헨드릭스에 의해 록의 기반과 뿌리임이 낱낱이 증명되었다. 그를 ‘블루스의 혁명아’로 일컫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가 생전에 남긴 앨범은 1967년의 < Are you experienced > < Axis! bold as love >, 1968년의 < Electric ladyland > 등 3장 밖에 없다. 하지만 연주자나 팬들 그리고 록과 록 기타를 연구하는 사람들한테는 생필품과 같은 작품들로서 모조리 록의 명반으로 꼽힌다. 곡으로는 ‘Hey Joe’ ‘Purple haze’ ‘All along the watchtower’ 그리고 ‘Voodoo child’가 애청된다. 1970년 9월 27살에 요절했지만 그의 천둥 연주는 지금도 쇼크이며, 지금도 아름답고, 지금도 록 무대 특유의 성적 쇼맨십과 오만의 절정을 이룬다. 지금도 그는 많은 기타지망생들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지만 ‘예술성과 시대정신’이 공존하는 그 산을 넘은 사람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도 없다.

줄거리

아프리카 오지 수단에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한
한국의 슈바이처, 故 이태석 신부가 남긴 마지막 선물…
위대한 사랑의 감동 휴먼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

2010년 2월, 아프리카 수단 남쪽의 작은 마을 톤즈. 남 수단의 자랑인 톤즈 브라스 밴드가 마을을 행진했다. 선두에선 소년들은 한 남자의 사진을 들고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 한 남자… 마을 사람들은 톤즈의 아버지였던 그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딩카족이다. 남과 북으로 나뉜 수단의 오랜 내전 속에서 그들의 삶은 분노와 증오 그리고 가난과 질병으로 얼룩졌다. 목숨을 걸고 가족과 소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딩카족. 강인함과 용맹함의 상징인 종족 딩카족에게 눈물은 가장 큰 수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그들이 울고 말았다. 모든 것이 메마른 땅 톤즈에서 눈물의 배웅을 받으며 이 세상 마지막 길을 떠난 사람, 마흔 여덟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 故 이태석 신부다. 톤즈의 아버지이자, 의사였고, 선생님, 지휘자, 건축가였던 쫄리 신부님, 이태석…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온몸 다해 그들을 사랑했던 헌신적인 그의 삶이 스크린에서 펼쳐진다.

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로운
그의 인생이 이제 온 세상을 울린다!

About Movie

남부 수단의 절망의 황무지, 톤즈를 아시나요?
아프리카 오지 톤즈의 희망 故 이태석 신부를 만나다!

잠들지 않는 톤즈의 병원, 그 곳의 유일한 의사 이태석 신부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린 그의 투혼이 살려낸 소중한 생명들!

사랑을 가르치는 거룩한 돈보스코 초. 중 고등학교,
내 집처럼 느껴지는 정이 넘치는 학교를 꿈꾸다!

꿈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
한센인의 아픔을 함께 하다!

총 대신 악기를 든 아이들
브라스 밴드가 만들어낸 희망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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