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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명연 모음집 (Take Five - Great Jazz Instrumentals) [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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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

재즈 명연 모음집 (Take Five - Great Jazz Instrumentals) [LP]

[ 180g / 블랙 디스크 일반반 ]
Miles Davis, Ben Webster, Oscar Peterson, Cannonball Adderley, Bill Evans 연주 외 9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Vinyl Passion / Vinyl Passion | 2017년 10월 16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720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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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명연 모음집 (Take Five - Great Jazz Instrumentals) [LP]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7년 10월 16일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1
  • 01 Take Five - Dave Brubeck Quartet
  • 02 Blues March - Art Blakey & The Jazz Messengers
  • 03 My Funny Valentine - Miles Davis Quartet
  • 04 Bye Bye Blackbird - Ben Webster & Oscar Peterson
  • 05 Cast Your Fate To The Wind - Vince Guaraldi Trio
  • 06 Waltz For Deb - Cannonball Adderley & Bill Evans
  • 07 Desafinado - Stan Getz & Charlie Byrd
Disc2
  • 01 Ginirique - Miles Davis Quintet
  • 02 Back At The Chicken Shack - Jimmy Smith Quartet
  • 03 Goodbye Pork Pie Hat - Charles Mingus Septet
  • 04 Four On Six - Wes Montgomery Quartet
  • 05 My Favorite Things - John Coltrane Quartet

아티스트 소개 (14명)

연주 : Miles Davis (마일즈 데이비스)
재즈 트럼펫 주자이자 작곡가, 밴드 리더인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음악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 롤링스톤 >는 록전문지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100년 간의 톱10 뮤지션(8위) 가운데 한사람으로 그를 선정했다. 인상적인 선율로 마음 한 가운데를 울리는 우수 어린 트럼펫 소리는 분명 ‘마일스’만의 것이다. 그러나 마일스 데이비스는 출중한 연주실력을 지닌 재즈 음악인이기 전... 재즈 트럼펫 주자이자 작곡가, 밴드 리더인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음악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 롤링스톤 >는 록전문지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100년 간의 톱10 뮤지션(8위) 가운데 한사람으로 그를 선정했다. 인상적인 선율로 마음 한 가운데를 울리는 우수 어린 트럼펫 소리는 분명 ‘마일스’만의 것이다. 그러나 마일스 데이비스는 출중한 연주실력을 지닌 재즈 음악인이기 전에 재즈의 다양한 장르를 창조해 낸 ‘스타일리스트’이다. 194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 마일스는 정체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나가는 창조의 면모를 보여준다. 쿨, 모드, 휴전에 이르기까지 그는 재즈 음악의 새로운 경향을 제시하고 리드해 갔다. 마일스는 현재에 유행하는 음악에 민감했고 시대 상황에 예의 주시할 줄 아는 아티스트였다. 단지 뛰어난 기량을 지닌 일반 뮤지션의 범주에서 논할 수 없는 가히 ‘대가’였다. 본명 마일스 듀이 데이비스 주니어인 그는 1926년 5월 25일 일리노이주 알턴에서 태어났다. 치과의사인 아버지를 둔 중산층의 유복한 가정환경에 자라나 이스트 세인트루이스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13세가 되던 생일 아버지가 사주신 트럼펫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트럼펫 훈련을 받게 된다. 16세때 부터 바(Bar)에서 주말마다 연주를 한 마일스는 지역 밴드인 ‘에디 랜들스 블루 데빌스’의 멤버로 활동하다 17살이었던 1944년 비밥(Bebop)의 혁명을 몰고 온 디지 길레스피와 찰리 파커가 활동하던 ‘빌리 엑스타인 빅 밴드’가 그가 살던 이스트 세인트 루이스에 순회공연을 오게 됐고, 마일스는 우연한 기회에 그들과 한 무대에 설 기회를 얻게 된다. 이 때의 경험은 그가 길레스피와 파커의 추종자가 됨을 물론 비밥의 스타일을 스스로 터득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스피디한 연주, 두드러진 즉흥 솔로, 복잡한 리듬감으로 어우러진 비밥은 40년대 재즈계를 강타한 ‘재즈혁명의 전주곡’이었다. 젊은 재즈 연주자들은 모두 비밥에 심취해 있었고 마일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단지 비밥을 추종하는 트렌드의 수혜로 그치지 않으려고 했고, 그 해 이스트 세인트루이스를 떠나 뉴욕에 있는 줄리어드음대에 입학한다. 줄리어드음대를 다니면서 그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은 바로 뉴욕 52번가의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라는 재즈 클럽이었다. 매일 밤 이곳에 나가 음악을 듣고 또 그곳의 전통에 따라 무대에 돌아가며 올라가고 하면서 재즈 트럼펫 연주의 정체를 깨닫는다. 1947-48년 동안 찰리 파커의 밴드에서 활동하게된 마일스는 이를 통해 비밥의 문법을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익힌다. 1948년 여름 마침내 마일스는 당시로서는 생소한 9인조 빅 밴드를 조직한다. 뉴욕에서 만난 캐나다 출신의 작곡가 길 에반스(Gil Evans)를 비롯한 미국 서부 출신 백인 재즈 연주자들을 기용, 이듬해인 1949년 캐피톨(Capitol)을 통해 발표된 앨범 < Birth Of Cool >은 재즈의 바탕에 백인적 감수성을 가미시킨 걸작이었다. 이 앨범은 ‘쿨의 탄생’이란 제목이 입증하듯 이후 당시 앨범에 참여했던 리 코니츠, 제리 멀리건과 같은 뮤지션들이 중심이 되어 미국 웨스트 코스트를 중심으로 한 ‘쿨’이라는 음악 스타일을 개척하는 데 씨앗을 뿌린 재즈사(史)의 명반이었다. 이 음반이 녹음된 당시엔 재즈계의 촉각이 비밥에 쏠려 있던 시기라 아무도 마일스의 시도에 주목하지 않았다가 1957년 2월 캐피톨사가 이 앨범을 재발매하면서 마침내 그의 진가가 인정받기에 이른다. 1950년대 초반 잠시 헤로인에 중독된 마일스는 위기를 맞지만 이후 프레스티지(Prestige) 레이블을 통해 수많은 음반을 발표한다. 테너 색스폰 주자 존 콜트레인과의 협연으로 유명한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Miles Davis Quintet)의 시작을 알렸던 시기인 프레스티지의 내공축적 시절 동안, 마일스는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는다. 그의 대표작으로 반드시 입에 오르는 ‘Round midnight’를 1955년 7월 뉴 포트 재즈페스티벌서 연주하게 되었고 이를 도화선으로 메이저 레이블인 콜럼비아 레코드사와 계약한다. 트럼펫의 마일스 데이비스를 비롯하여 테너 색스폰의 존 콜트레인, 피아노에 레드 갈런드, 베이스에 폴 챔임버, 드럼에 필리 조 존슨으로 구성된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은 같은 해 10월 콜롬비아 레코드 데뷔작 < Round Midnight >를 발표, 그의 음악은 대중적인 인지도를 획득하기 시작했다. 콜롬비아에서 첫 앨범을 내놓았지만 아직 프레스티지 레코드와 5장의 음반에 대한 계약 분이 남아있었기에 마일스는 잔여 분을 해결하기 위해 단 이틀만의 전대미문 세션을 통해 녹음 작업을 마치는데 성공한다. 그 결과 나온 작품이 < Relaxin > < Cookin’ > < Workin > 그리고 < Steamin’ >이었으며 이 음반들 모두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의 전작 < Round Midnight > 이상의 호평을 받는다. 1957년 < Birth Of Cool >의 재발매와 동시에 그는 이전 음악 동료인 길 에반스와 다시 만난다. ‘쿨의 탄생’에서 보여준 빅 밴드 편성을 다시 도입, 길 에반스의 클래시컬한 편곡으로 ‘쿨의 탄생’에서 진일보한 연주를 선보이기 위해서였다. 1956년의 < Miles Ahead >와 이듬해 < Porgy & Bess > 그리고 1960년의 < Sketches of Spain >이 모두 마일스와 길 에반스와의 공동의 땀으로 결실을 맺은 명작들이었다. 1957년 12월에는 파리를 방문, 프랑스 ‘누벨 바그’ 영화의 거장 루이 말 감독의 <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L’Ascenseur pour l’Echafaud )의 스코어를 맡았으며 이 영화음악으로 1960년 그래미상 베스트 재즈 퍼포먼스부문 후보에 오르는 성과도 거둔다. 1958년에는 존 콜트레인과 함께 했던 그의 퀸텟에 알토 색스폰 주자인 캐논볼 애덜리를 영입, 6인조 섹스텟으로 새로 출발하여 < Milestone >을 녹음한다. 재즈에 모드(mode: 각 스케일, 노트에서 일곱음을 모두 사용하는 연주 방식) 주법을 처음 도입한 이 앨범을 끝으로 밴드 내의 피아노 주자 레드 갈란드가 떠나고 모드에 정통한 피아노 주자 빌 에반스(Bill Evans)가 들어오면서 그의 섹스텟의 색깔은 더욱 ‘모드’로 진행되었다. 모드 주법의 본격적인 시도를 알렸던 그의 대표작 < Kind of Blue >(1959)는 ‘드림팀’이라고 할 만한 쟁쟁한 멤버들로 구성된 그의 섹스텟 연주의 정점이었다. 이 앨범은 코드 변화와 즉흥연주 중심의 기존 재즈음악 스타일을 과감히 벗은 ‘모던 재즈’(modern jazz)의 시작을 알렸으며 지금까지 200만장 판매라는 상업적 성공도 포획했다. 1960년대 초반 솔로 활동을 위해 존 콜트레인과 빌 에반스가 마일스의 섹스텟을 떠나고 이들을 대신할 피아노 주자 윈튼 켈리와 색스폰 주자 행크 모빌이 들어온다. < Kind Of Blue > 때와 같은 창조성은 아니었지만 이전보다 대중들과의 친화력을 더 높아졌으며 < Someday My Prince Will Come >(1961)과 같은 수작 생산을 거르지 않는다. 섹스텟을 떠난 빌 에반스와의 작업을 이후에도 지속하여 같은 해 내놓은 앨범 < Live At Carnegie Hall >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오넷 콜먼(Ornette Coleman)이라는 젊은 색스폰 주자가 ‘프리 재즈’를 선보이면서 재즈 음악계는 어느덧 ‘프리 재즈’ 쪽으로 말을 갈아 타고있었다. 마일스는 이런 오넷 콜먼의 시도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고 마일스의 섹스텟의 활동이 다소간 시들해진 60년대 중반, 다시 퀸텟으로 밴드를 재편했다. 이 때의 명분은 반(反)프리재즈에 입각한 듯한 ‘재즈-스탠더드 풍의 전통에 입각한 새로운 시도’였다. 베이시스트 론 카터,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 드러머 토니 윌리엄스, 테너 색스폰에 웨인 쇼더와 같은 젊은 피를 수혈받으며 마일스의 쿼텟은 < Kind Of Blue > 이후 최고의 창작력을 다시 불태운다. 1965년 < E.S.P >를 시작으로 < Miles Smiles >(1966), < Sorcerer >(1967), < Nefertiti >(1967), < Miles In The Sky >(1968), < Fills De Kilimanjaro >(1968)까지 줄기차게 이어진다. 이중 < Miles Smiles >는 1967년 그래미상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성과를 거뒀고, 기타리스트 조지 벤슨이 참여한 < Miles In The Sky >와 칙 코리아의 일렉트릭 피아노가 참여한 < Filles De Kilimanjaro >는 얼마 후 마일스의 또 한차례 혁명인 ‘재즈-록 휴전’으로의 이동을 암시하는 작품이었다. 1968년 마일스는 제임스 브라운, 슬라이 & 더 훼밀리 스톤, 지미 헨드릭스 등 당시 대중들을 휘어잡은 R&B와 펑키 음악에 관심을 갖는다. 얼마 후 지미 헨드릭스를 만나게 되었고, 둘은 함께 작업할 것을 약속한다(물론 이 약속은 지미 헨드릭스의 요절로 이뤄지지 못했다.)마일스는 당시 유행하던 록 음악의 열풍을 예의 주시했고, 일렉트릭 기타와 키보드가 재즈의 진보를 이끌어낼 것으로 판단한다. 콜트레인의 죽음 후 재즈는 기존 프리 재즈에서 더 진행하지 못하고 있었고, 수요층 측면에서 어느덧 백인 지식인이나 상류층들이 즐기는 음악으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1968년 말 그의 두 번째 퀸텟은 해산을 맞아 색스폰 주자 웨인 쇼더를 제외하고 모두 솔로로 독립한 상황이었지만 마일스는 또 다시 새로운 시도를 감행함으로써 존재를 부각한다. 토니 윌리엄스를 대신 할 잭 드자넷, 론 카터를 대신할 데이브 홀란드, 일렉트릭 건반주자 칙 코리아, 조 자위눌이 마일스와 함께 연주를 하게 되고, 영국 출신의 일렉트릭 기타리스트 존 맥러플린도 그의 밴드에 합류한다. 이들과 함께 1969년 2월에 녹음한 < In A Silent Way >는 코드 없이 부유하는 듯한 멜로디로만 진행된 방식으로서, 거기에 일렉트릭 기타사운드를 집어넣어 ‘록’적인 요소를 재즈에 본격적으로 가미한 것이었다. 같은 해 8월 재즈계의 최대 문제작인 < Bitches Brew >이 녹음되어 1970년 3월 세상에 나왔다. 오케스트라 편곡으로 도저히 옮겨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즉흥성에 토대를 둔 이 앨범에서 마일스의 트럼펫은 전기 코드를 꽂은 듯 우렁찼으며 일렉트릭 피아노와 일렉트릭 기타의 펑키(funky)감과 드럼의 강한 비트는 바야흐로 재즈-록 휴전(Jazz Rock Fusion)의 출현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미 길이 갈라선 록과 재즈의 융합을 꾀한 이 기념비적 가치의 앨범은 발매되자 마자 골드를 기록했고 빌보드 Top40에 오르는 인기를 누려 대중들에게 다가가려는 취지를 충분히 달성했다. 마일스의 재즈-록으로의 실험은 이후 5년 간 계속된다. 라이브 실황을 담은 < Miles Davis In Filmore East >(1970), < Live-Evil >(1970)를 비롯하여 흑인 권투선수 잭 존슨에게 헌정하는 < Tribute to Jack Johnson >(1970), 슬라이 스톤과 제임스 브라운으로부터 영향 받은 게 명백한 펑키 리듬의 < On the Corner >(1972)와 같은 ‘재즈-록 휴전’의 명반을 잇달아 발표한다. 그가 시도한 재즈-퓨전은 잇단 재즈 슈퍼그룹의 출현을 몰고 왔다. 칙 코리아는 1970년 말 마일스를 떠나 써클(Circle)을 거쳐 1971년 리턴 투 포에버(Return To Forever)를 결성했으며 기타주자 존 맥러플린도 같은 해 마하비시누 오케스트라(Mahavishnu Orchestra)를 만들었다. 마일스에게 일렉트릭 피아노를 소개했던 조 자위눌과 색스폰 주자 웨인 쇼터는 그들 보다 더 빠른 1970년 웨더 리포트(Weather Report)를 결성하면서 1970년대 재즈의 대세를 재즈-록 퓨전으로 돌려놓았다. 건강상의 이유로 1975년 마일스는 은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확히 6년 후인 1981년, 일렉트릭 베이스에 마커스 밀러, 일렉 기타에 마이크 스턴, 색스폰에 빌 에반스 등 젊은 재즈 뮤지션들로 완비된 밴드와 함께 재기해 < The Man With The Horn >을 발표한다. 이어 기타리스트 존 스코필드를 가입시키고 자신이 직접 표지그림까지 완성한 < Star People >(1982), < Decoy >(1983), < You’re Under Arrest >(1985)를 연달아 내놓으며 에너지를 과시했다. 30년 동안의 콜롬비아에서의 활동을 마감하고 1986년 워너로 이적하여 < TuTu >를 선보인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투투 주교의 이름을 따온 이 앨범은 토미 리푸마, 마커스 밀러, 조지 듀크 등 3인 프로듀서의 지휘 아래 만들어졌고, 마일스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고 있던 마커스 밀러가 작곡과 편곡을 맡았다. 일렉트릭-펑키 풍의 편곡은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흑인 로커 프린스(Prince)의 영향을 느끼게 했다. 이듬해 1987년 워너 브라더스에서 두 번째로 내놓은 < Siesta >는 엘렌 바킨, 줄리앙 샌즈 주연의 동명 영화 음악으로 작품 전체가 예전 길 에반스와의 작업 < Sketches Of Spain > 때와 같이 스페니시한 연주로 가득 차있다. 마일스는 사망하기 직전인 1991년 7월 스웨덴에서 열린 몬트럭스 재즈 페스티벌서 연주자로 참여, 그의 음악적 동반자로 1988년 세상을 떠난 길 에반스와 녹음했던 많은 곳들을 재즈팬과 평론가들 앞에서 재현하며 엄청난 환호의 박수를 받았다. 꿈꾸던 재즈의 진보를 평생동안 실현해온 마일스는 1991년 9월28일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 소재의 세인트 존스 호스피탈 앤 헬스 센터에서 폐렴에 의한 호흡곤란과 뇌졸중으로 숨을 모았다. 사망 후 완성된 2개의 트랙이 포함된 스튜디오 앨범 < Doo-Bop >이 1992년 공개되면서 위대한 재즈맨을 잃은 상실감에 젖은 팬들의 아쉬움을 달래줬다. 마일스는 ‘모든 음악적 요소’를 그에 트럼펫에 담아 내려했고,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뮤지션이 되길 원했다. 비밥의 출현 때부터 재즈의 중심에 있어오면서 기존의 전통을 답습하기보다는, 재즈-스탠더드를 바탕으로 현재의 음악흐름을 늘 주시했고 거기에서 항상 새롭고 실험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길 원했다. 마일스에게 ‘재즈의 거장’이라는 칭호를 붙임에 있어선 논란의 여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길 에반스와의 작업과 재즈-록 퓨전을 시도할 당시 일각의 재즈평론가들로부터 ‘백인에게 아부하는 재즈 뮤지션’ 혹은 ‘재즈를 팔아먹었다’는 식의 혹평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근거 없는 비판은 이미 루이 암스트롱이나 듀크 엘링턴과 같은 대가들도 경험했던 얘기들이었다. 마일스의 시도는 그의 음악을 통해 대중에게 더 접근하고 싶어 한 그 만의 것이었다. 마일스는 자신의 공연을 할 때 젊은 흑인관객과 눈이 마주치길 원했고, 그런 흑인 청중들에게 반가운 미소를 보내었다.(하지만 물론 지금까지 그의 음악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거의 백인들이다.) 그의 유산은 오늘날에 음악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념과 인종으로 갈라진 세상에서 음악만큼이라도 퓨전되어야 한다”는 그의 지론과 명언은 어느덧 재즈는 물론이고 현대의 대중음악을 가로지르는 음악트렌드가 되었다.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연주 : Oscar Peterson (오스카 피터슨)
재즈 연주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악기는 무엇일까? 사람의 목소리를 가장 닮았다는 달콤한 멜로디의 주인공 색스폰, 다른 악기의 보조를 맞추며 특유의 화성으로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베이스 , 박진감 넘치며 복잡한 리듬감을 구사하는 드럼….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완벽히 하나로 종합할 수 있는 악기는 다름아닌 피아노이다. 리듬, 화성 ,멜로디를 완벽하게 구현해내는 이 악기는 그래서 모든 음악 하는 사람들이 필수적으... 재즈 연주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악기는 무엇일까? 사람의 목소리를 가장 닮았다는 달콤한 멜로디의 주인공 색스폰, 다른 악기의 보조를 맞추며 특유의 화성으로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베이스 , 박진감 넘치며 복잡한 리듬감을 구사하는 드럼….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완벽히 하나로 종합할 수 있는 악기는 다름아닌 피아노이다. 리듬, 화성 ,멜로디를 완벽하게 구현해내는 이 악기는 그래서 모든 음악 하는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연주해봐야 하는 연주의 전공필수와 같은 위상을 지녔다. 재즈에서 피아노 연주자의 위상 또한 남달랐다. 스윙의 선구자로 추앙 받던 카운트 베이시, 듀크 엘링턴 모두 클래식으로 숙련된 피아니스트였고, 밴드에서 편곡과 리더를 맡는 등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다른 악기로는 표현할 수 없는 풍부한 연주의 세계를 피아노는 창조할 수 있었고, 이런 강점을 발판으로 재즈사를 통해 거론되는 피아니스트들은 또한 재즈의 진보를 일궜다. 영화 ‘스팅’의 주제가에서 목격 했던 스콧 조플린의 흥겨운 랙 타임, 랙 타임 리듬에 멜로디의 고난이 즉흥성이 가미된 할렘 스트라이드 주법의 팻츠 월러, 최초의 비밥 피아니스트로 평가 받는 아트 테이텀, 대중성을 바탕으로 범접할 수 없는 연주 세계를 창조한 피아노 예술가 에롤 가너… 한 때 리듬 악기로만 국한 되었던 피아노는 이들의 창조력으로 어느덧 풍부한 화성과 운치 있는 멜로디라는 두 날개를 달며 재즈 연주에선 없어선 안 될 악기로 부상했다. 오스카 피터슨은 위에 언급한 재즈 피아니스트 중 시기적으로 가장 나중에 위치한 사람이다. 1925년생이니까 동년배의 다른 아티스트들이라면 일반적으로 비밥, 하드 밥의 대가쯤으로 알려져야 할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껏 줄기차게 ‘스윙 ’연주만을 고집한 피아니스트다. ‘재즈’는 곧 ‘스윙’이라 할 정도로 그는 이 매력적인 장르를 지금껏 생명력 있게 이어줄 수 있게 한 동인이다. 팝 가수 빌리 조엘(Billy Joel)은 자신의 음악을 구성하는 중요한 한 부분의 바로 ‘재즈’이며 (가령 ‘New york state of mind’를 들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런 재즈 연주자중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을 오스카 피터슨으로 꼽았을 정도로 팝 가수, 특히 피아노 연주를 하는 싱어 송 라이터들에게 그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그만큼 그의 연주는 동시대 ‘비밥’ 연주처럼 난해한 성질의 것은 아니었지만 탁월한 리듬감과 즉흥적으로 멜로디를 구성하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1949년 당시 신생 레이블 버브(verve) 사의 사장 노먼 그란쯔의 주선으로 본격적으로 재즈의 중심에서 활동하게 된 그는 이후 1965년까지 버브 레이블을 통해 ‘피아노 트리오’ 편성(베이스에 레이 브라운, 기타에 허브 엘리스 또는 바니 케슬)으로 기억될 수많은 재즈 연주를 남겼다. 우리에겐 가수로 더 잘 알려진 냇 킹 콜(Nat King Cole)이 1940년대 초 보여준 피아노 트리오 양식을 계승해 그는 ‘드럼’이 없이 베이스와 기타로 구성된 트리오를 계승해 보다 리드미컬하고 다양한 화성과 노트를 사용해 스윙 특유의 경쾌하면서도 세련된 트리오 연주 스타일을 창조했다. 피아노 트리오를 고안한 건 냇 킹 콜이었지만 그가 가수로 나선 뒤 생긴 공백을 오스카 피터슨이 매우며 보다 다채롭게 발전시킨 셈이다. 1925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태어난 오스카 피터슨은 6살부터 클래식 피아노를 통해 음악에 입문한다. 청년시절, 냇 킹 콜의 트리오 연주를 통해 스윙에 마력에 푹 빠지고 만 그는 피아노 역주에 보다 역동성을 가미시키며 자신의 스타일을 정립하려 고군분투한다. 이런 노력 끝에 1949년 버브사의 사장 노먼 그란쯔에 의해 눈에 띄어, 같은 해 ‘Jazz at Philharmonic’ 공연에 초청되었고, 이내 미국에서 유명한 재즈 뮤지션 반열에 오른다. 이후 그에게 기회를 가져다 준 < Jazz at Philharmonic > 공연에 그는 1966년까지 단골 연주자로 참석한다. 사실 미국에서의 그의 첫 밴드는 트리오가 아닌 듀오였다. 데뷔 시절부터 그의 음악적 동반자가 되어 준 베이시스트 레이 브라운(Ray Brown)은 이후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의 핵심이었는데 오스카와 듀엣으로 활동하며 데뷔작 < Tenderly >(1950)을 발표하며 상업적, 비평적인 성공을 거둔다. 50년대 초엔 기타를 추가하며 명실상부 피아노 트리오의 위용을 갖춘다. 오스카 피터슨-레이 브라운-허브 엘리스(바니 케슬)로 구성된 3인조는 < Keyboard >(1950), < An Evening with Oscar Peterson >(1950), < Nostalgic Memories >(1951)등 발표되는 앨범마다 연이어 히트를 기록하며 향후 10년간 연주 경력에 상승곡선을 그린다. 스윙을 바탕으로 빈틈없고 깔끔한 트리오 연주는 이내 입 소문으로 퍼져 빌리 홀리데이, 엘라 핏 제랄드, 루이 암스트롱과 같은 재즈 보컬의 세션을 맡기도 했고, 카운트 베이시 빅 밴드, 레스터 영, 베니 카터, 로이 엘드리지, 벤 웹스터 등 스윙시대 최고의 솔리스트들의 백업을 담당하기도 했다. 스윙에 대한 그의 열정은 ‘고전의 재해석’에서도 남달랐는데, 콜 포터, 어빙 벌린, 조지 거쉰, 제롬 컨, 리처드 로저스으로 구성된 1세대 틴 팬 엘리 작품을 집대성한 송 북(Songbook)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전성시대를 구가하던 그의 트리오도 기타리스트 허브 엘리스의 탈퇴로 잠시 동안 그 견고함이 흔들리게 된다. 이에 기존 피아노-베이스-기타에서 기타를 빼고 드럼을 에드 씨그펜(드럼)을 가입시키며 ‘제 2기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를 출범시킨다. 1965년까지 이어진 트리오 라인업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앨범 < The Trio >(1961)을 시작으로 West Side Story >(1962), < Night Train >(1962), < Canadian Suite >(1964), < We get Request >(1964), 트럼펫 주자 클락 테리가 참가한 중반기 걸작 < The Oscar peterson Trio+ one >(1964)와 같은 명연을 남기며 제 2의 전성시대를 구가한다. 1965년을 정점으로 그의 트리오는 차츰 와해되기 시작했다. 그의 동반자 레이 브라운 마저 탈퇴한 상황에서 잦은 멤버 교체로 그가 쌓아 온 명색도 차츰 퇴색되기 시작했다. 재즈 퓨전이 창궐한 1970년대에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한 그는 20여년 넘게 그의 동반자가 되준 버브 레이블을 떠나 파블로 레이블을 통해 활동을 지속했고 ‘기타 비르투조 조 파스와 함께 한 후반기 명반 < The trio >(1973)을 비롯, 엘라 핏 제랄드, 카운트 베이시, 디지 길레스피, 사라 본, 로이 엘드리지, 주트 심스 등 백전노장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존재를 대중들에게 알리기에 노력했다. 80년대엔 이렇다 할 활동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1990년대 들어 그는 왕년의 트리오 멤버 레이 브라운과 허브 엘리스를 다시 불러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를 한시적으로 다시 구성해 앨범 < Oscar Peterson trio Live at Blue Note >(1990)를 발표한다. 단 이틀간의 재결합이었지만 그 해 재즈 뉴스 중 단연 화제였던 이들의 재결성 이벤트는 그의 올드 팬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했다. 현재 여든을 앞둔 고령인 그는 지난 1993년 급작스런 심장마비로 팬들을 긴장하게 했지만 2년여의 치료 끝에 1995년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무대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미 왼쪽 손이 약해져 현재로는 왕년의 다이내믹한 피아노 연주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지만 “중요한 건 나의 건강상태가 아니다, 다만 팬들 앞에서 완벽한 연주를 들려줄 수 없다는 게 아쉽다”라는 그의 말에서 무대를 향한 열정을 짐작케 한다. 영원한 ‘피아노 맨’으로 기억될 오스카 피터슨은 지금까지 재즈 연주 중 가장 매력적인 연주 스타일인 트리오 연주의 명맥을 지금껏 존재케 해준 선구자로 평가된다.
연주 : Cannonball Adderley (캐넌볼 애덜리 ,Julian 'Cannonball' Adderley)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기타 연주자 재즈 기타 연주자
연주 : Jimmy Smith (지미 스미스 )
재즈 피아노, 오르간 연주자 재즈 피아노, 오르간 연주자
재즈계의 ’보스’(Boss) 찰스 밍거스(Charles Mingus)는 전방위 재즈 뮤지션이었다. 비밥을 시작으로 모던재즈와 실험적인 빅밴드까지 관통하는 그의 연주 여정은 일반적인 베이스 연주인의 영역을 넘는 것이었다. 비밥 혁명의 주역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찰스 밍거스는 그의 전성기인 1950-60년대 중반까지 힘 있고 박진감 넘치는 베이스 플레이어로, ’ Good-bye pork pie hat’ (1959... 재즈계의 ’보스’(Boss) 찰스 밍거스(Charles Mingus)는 전방위 재즈 뮤지션이었다. 비밥을 시작으로 모던재즈와 실험적인 빅밴드까지 관통하는 그의 연주 여정은 일반적인 베이스 연주인의 영역을 넘는 것이었다. 비밥 혁명의 주역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찰스 밍거스는 그의 전성기인 1950-60년대 중반까지 힘 있고 박진감 넘치는 베이스 플레이어로, ’ Good-bye pork pie hat’ (1959)를 위시해 수많은 재즈 연주를 작곡한 작곡자로, 소울 빅밴드(Soul Big Band)의 리더로서 스윙에 한정되지 않는 한층 복잡다단한 현대적인 재즈 오케스트라를 확립한 음악 감독이었다. 이런 음악적 열정과 더불어 밍거스는 그가 활동하던 당시인 1950-60년대 재즈 음악계에서 당시로선 보기 드문 흑인 실력자였다. 흑인 재즈 뮤지션으론 처음으로 1952년, 드러머 맥스 로취와 자신의 음반사인 ‘Debut’을 창립했고, 빅밴드를 이끌던 1960년엔 ’재즈 아티스트 길드’(Jazz Artist Guild)란 조직을 창립시키며 뉴욕 클럽 지역에서 활동하던 흑인 재즈 뮤지션들과 연대해 클럽 주인들의 부당한 대우에 적극 대응하기도 했다. 흡사 보스를 연상시키는 그의 외모처럼 그의 인생은 가히 보스다웠다. 인종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던 밍거스는 1961년 미국 뉴욕 카네기 홀 앞에서 맥스 로취를 비롯한 흑인 뮤지션들을 주축으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동하기도 했다. 이러다보니 백인들 사이에선 그는 경계해야할 흑인 뮤지션 블랙리스트에 단연 선두를 자리 잡았고, 재즈 뮤지션들도 흡사 ‘재즈 정치인’과 같은 그의 음악외적인 활동에 대해 못마땅해 한다. 기인에 가까울 정도의 이런 그의 급진적인 행동은 음악으로도 표출된다. 대표적으로 늘 거론되는 < Mingus Ah-um > (1959) 의 수록곡 ’Fables of Fabus’에서 ‘Fabus’는 당시 ’리틀 룩 사건’이란 인종차별 사건으로 악명 높았던 아칸사스 주의 주지사의 이름을 써 풍자적인 연주로 표현했고, ’Oh Lord, Don’t Let Them Drop That Atomic Bomb on Me’ 와 ’Remember Rockefeller at Attica’ (1974) 역시 제목이 암시하듯 흑인의 입장에서 느끼는 억압의 굴레를 파격적인 연주로 한풀이하고 있다. 흡사 지사와도 같은 이런 밍거스의 모습은 하지만 그가 창조해 낸 풍성한 연주 세계에 비할 바 아니다. 스윙과 비밥을 근간으로 한 그의 연주세계는 하드밥과 가스펠, 소울의 영향이 짙게 깔린 소울 빅밴드 연주를 창조해냈다.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으로 대변되는 전통적인 빅밴드의 차원을 넘어서 밍거스는 10인조미만의 소 편성으로도 얼마든지 충만한 사운드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증명했다. 멤버들의 솔로 기량을 앞세우기 보단 작, 편자의 의해 악보에 근거한 밍거스 빅밴드의 사운드는 빅밴드가 스윙을 벗어나 프리/아방가르드에까지 영역을 넓힐 수 있게 된다. 밍거스가 씨를 뿌린 소울 빅밴드의 유산은 훗날 프로그레시브 빅밴드란 스타일로 이어지며 베이시스트 찰리 헤이든, 베이시스트 데이브 홀랜드, 피아니스트겸 작곡가 칼라 블레이와 같은 수많은 추종자들을 양산하며 현대 빅밴드의 선구자와 같은 위상을 점유한다. 1922년 미국 아리조나주에서 태어난 찰스 밍거스는 L.A 지역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면서 교회를 출석하면서 어께너머로 피아노, 트럼본, 첼로 등 다양한 악기를 섭렵했다. 고등학교 시절 지역을 방문한 듀크 엘링턴 빅밴드 연주를 관람한 밍거스는 재즈에 매료됐고 특히 밴드의 베이스 주자였던 지미 블랜튼(Jimmy Blanton)의 연주에 큰 감동을 받고 베이스 연주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베이스에 빠른 두각을 보인 밍거스는 1940년, 이런 저런 밴드를 거쳐며 본격적으로 베이스 연주인으로 나선다. 키드 오리(Kid Ory),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라이오넬 햄프튼(Lionel Hampton) 밴드에선 초기 뉴 올리언즈와 스윙을 연주했고 40년대 중반부턴 뉴욕 52번가에서 바야흐로 막 물이 오르던 비밥 열풍에 동참하며 찰리 파커와 버드 파웰 밴드에서 베이스를 연주한다. 1950년대 초, 걸출한 흑인 재즈 뮤지션들이 대다수 슬럼프에 빠져있던 것과 달리 밍거스는 기타리스트 탈 팔로우, 테너 색소폰니스트 스탄 게츠 등 백인 뮤지션들과 협연을 했고, 이런 기회를 통해 주류 재즈 무대에 지속적으로 자신을 알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리고 1953년엔 ‘비밥의 종언’이라고까지 불리는 명연 < Live at Massey Hall > 을 비밥의 동료였던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맥스 로취, 버드 파웰과 함께 ‘더 퀸텟’이란 밴드 멤버 자격으로 녹음해 자신이 설립하게 될 레이블 데뷔를 통해 발표한다. 이렇게 화려한 사이드 맨 시절을 통해 얻은 자신감으로 밍거스는 1952년, 드러머 맥스 로취와 의기투합해 자신의 레이블인 ‘Debut’을 창립한다. 여기에 1953년부턴 정기적으로 클럽을 빌려 작곡한 연주를 발표하는 식의 재즈 컴포저스 워크숍(Jazz composer’s Workshop)이란 행사를 개최했다. 재즈 워크숍은 흑인 연주인들 사이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호레이스 실버, 델로니어스 몽크, 아트 블레이키, 맥스 로취와 같은 하드밥의 주역들이 그의 워크숍에 동참한다. 음악인답지 않은 그의 비즈니스적인 면모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비밥에서부터 실험적인 사운드까지 폭넓게 아우른 그의 음반사업은 그러나 경영 악화로 결국 1955년 그가 설립한 Debut 레코드는 문을 닫고 만다. 음반사업을 정리한 밍거스는 어트랜틱을 통해 첫 리더작 < Pithecanthropus Erectus : 직립 원인 > (1956)을 발표한다. 새로 조직한 퀸텟 ‘재즈 워크숍’의 첫 작품이기도 한 앨범에서 타이틀 곡 ‘직립원인’은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게 된 위대한 인간이 어떻게 타락해 가는가를 변화무쌍하고 익살스런 편곡으로 그려낸다. 심오하기까지 한 블루스와 가스펠의 연주 영역을 제시한 ‘직립원인’을 계기로 찰스밍거스 재즈 워크숍은 향후 10년간 ‘흑인에 흑인을 위한 흑인의 빅밴드’라 할 소울 재즈 빅밴드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어틀랜틱 레코드를 통해 밍거스는 특유의 당차고 힘 있는 재즈 앙상블로 명반행진을 이어간다. 시종일관 우렁찬 혼 섹션으로 위풍당당한 재즈 앙상블을 소화한 ‘Haitian Fight song’ (1957), 박수소리와 때창, 고함소리를 활용해 흑인 교회 수요 예배의 전경을 이색적으로 표현한 ’Wednesday night prayer meeting’ (1959)을 연이어 발표한다. 베이스 주자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피아노 연주자이기도 했던 밍거스의 유일한 피아노 연주 앨범 < Oh Yeah! > (1962) 또한 어틀랜틱 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명연이다. 이런 가운데 그의 재즈 워크숍은 5인조에서 7인조라는 확장된 편성되고 그의 밴드 연주에서 편곡은 더욱 중요한 구심점이 되어간다. 그의 또 다른 수작으로 추앙되는 ‘밍거스 아 움’ < Mingus Ah-Um >(1959) 도 바로 새로 정비된 7인조 편성으로 녹음됐다. 메이저 레이블 콜럼비아를 통해 발표된 < 밍거스 아 움 >은 향후 트럼펫터 마일스 데이비스와 명콤비로 활동하게 된 프로듀서 테오 마세로(Teo Macero)가 프로듀싱했다. 앨범에선 재즈 명 스탠더드 ‘Goodbye pork pie hat’를 히트시켰고 당시 막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인종차별 문제를 건드린 ’Fables of Fabus’ 또한 주목받았다. 60년대 접어들면서 그의 밴드 재즈 워크숍은 11인조라는, 가히 빅밴드다운 위용으로 변모했다. 오넷 콜먼(Ornette Coleman)이란 프리 재즈 전도사의 등장으로 재즈뮤지션, 그중에서도 흑인들도 프리 적인 사운드에 차츰 심취해갔고 밍거스 또한 이런 사운드에 관심을 갖게 된다. 임펄스(Impulse!) 레이블을 시작으로 한껏 볼륨을 높인 밍거스의 재즈 워크숍엔 당시 한창 줏가를 올리던 프리-아방가르드 사운드의 주역들이 포진돼 있었다. 만능 리더주자 에릭 돌피(Eric Dolphy)를 위시해 롤랜드 커크(Rolnad Kirk), 잭키 맥린(Jackie Mclean)와 같은 명연주인들이 그의 밴드를 거쳐갔다. 기존 그의 발표한 곡들과 스탠더드를 11인조 앙상블로 리메이크해 녹음한 < Mingus,Mingus,Mingus,Mingus,Mingus > (1963)를 시작으로 같은 해 발표된 < The black saint & the sinner lady > 로 밍거스는 또 한번의 일가를 이뤄낸다. 앨범서 밍거스의 밴드는 연주의 자유로운 즉흥성을 배가시키며 멤버 개개인 자발적인 사운드가 충돌하면서 빚어지는 불협의 매력을 제시했다. 이름 하여 총체적 즉흥(Collective Improvisation)을 통해 재즈 빅밴드가 한층 모던한 사운드로 탈바꿈해 가는 순간이었다. 물론 당시 오넷 콜먼의 프리 재즈처럼 불협으로 일관하는 무형식의 난해한 사운드가 아닌, 불협과 앙상블을 오가며 기승전결의 형식미가 돋보이는 프리 사운드였다. 음악적으로 한창 정점에 달달한 찰스 밍거스는 그러나 이때를 기점으로 차츰 쇄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음악 외적으로 ‘아티스트 길드’를 조직해 흑인 재즈 뮤지션의 권리 보장에 앞장섰지만 그의 의도처럼 상황은 개선되지 않고 있었다. 여기에 출간하기로 했던 자서전의 계약이 무산으로 돌아갔고, 무리한 밴드 운영으로 인해 빚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여기에 거래 은행의 도산과 신경쇄약까지 이어져 밍거스는 60년대가 끝나갈 시점까지 이렇다 할 후속 작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돈이 필요해 다시 음반 작업에 나선 밍거스는 역작 < 밍거스 아 움 >의 제작자 테오 마세로를 찾아간다. 그리고 테오와 다시 손을 잡고 찰스 밍거스는 콜럼비아에서 발표한 < Let my children here music > (1971)으로 다시 한번 혁신적인 사운드를 일궈낸다. 클래식 오케스트라에 버금가는 풍성한 관악기편곡이 돋보인 앨범서 ’Adagio ma non troppo’로 주목받는다. 문제되던 재정문제도 해결 돼 그가 창립했던 Debut 레코드를 판타지 레이블에서 인수해 밍거스는 다시 창작의 안정적인 기반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말년에 접어든 1974년, 초기 퀸텟 사운드로 돌아간 밍거스는 대니 리치몬드(드럼), 돈 풀렌(피아노), 잭 왈라스(트럼펫), 조지 아담스(색소폰)처럼 당시 신예 뮤지션들을 불러 모아 < Changes 1&2 > 를 발표한다. 치밀한 계산과 프리적인 연주가 강화된 작곡은 그의 후기 명연으로 기록된다. 영화음악에도 관여해 밍거스는 < Cumbia & Jazz Fusion > 의 스코아를 맡으며 창작열을 불태웠다. 이런 열화와 같은 노익장에도 불구, 1977년 밍거스는 파킨스씨 병을 얻고 만다. 휠체어 신세가 된 밍거스는 이듬해부턴 사지가 마비돼 더 이상 베이스 연주를 할 수 없게 된다. 사망 1년 전인 1978년, 그의 마지막 프로젝트가 예비 돼 있었는데, 그 주역은 찰스 밍거스와 포크 가수 조니 미첼이었다. 당시 재즈 퓨젼의 물결에 동참하고 있던 조니 미첼은 평소 밍거스의 자유분방하고 호방한 사운드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던 차에 밍거스의 육성을 담아 자신의 독집 앨범에 담게 된다. 1979년 1월 밍거스는 파란만장한 재즈 일대기에 종지부를 찍으며 57세 나이로 숨을 거둔다. 같은 해 그의 음악성에 깊은 오마주를 담은 조니 미첼의 < Mingus > 가 발표됐고 밍거스의 분신과도 같은 스탠더드 ‘Goodbye pork pie hat’은 망자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며 조니 미첼의 체념하는 듯한 목소리로 울려 퍼졌다. 재즈 음악 이상의 족적을 남긴 찰스 밍거스를 기념하기 위해 미망인 슈 밍거스(Sue Mingus)는 그가 남기고 간 전 재산을 투자해 밍거스 재단을 설립한다. 그가 불철주야 매달렸던 재즈 뮤지션들의 저변확대에 기여한 재단은 차츰 규모가 커져 1991년엔 밍거스의 음악을 사랑하는 젊은 재즈 뮤지션들이 모여 밍거스 빅밴드(Mingus Big band)를 창립하기에 이른다. 랜디 브레커, 케니 드류, 잭 왈라스 등 재즈계에 내노라 할 실력파 뮤지션들이 포진된 밍거스 빅밴드는 1993년 첫 앨범 < Nostagia in time sqaure > 를 발표하고 현재까지도 전 세계를 무대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통해 밍거스의 유산을 이어가고 있다.
연주 : Wes Montgomery (웨스 몽고메리 )
재즈 기타 연주자 재즈 기타 연주자
100년이 조금 넘는 재즈 역사 속엔 ‘연주의 감동’을 창조한 대가들이 존재한다. 재즈 즉흥 연주를 창조한 루이 암스트롱, 스윙을 통해 재즈를 일약 미국 주류 대중음악 반열에 올려놓은 듀크 엘링턴, 비밥으로 재즈를 예술적인 경지로 부상시킨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 쿨에서 출발해 모드를 거쳐 퓨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주 스타일을 확립시킨 마일스 데이비스가 그들이다. 앞에 언급된 대가들에 이어 다시 한번 재즈사... 100년이 조금 넘는 재즈 역사 속엔 ‘연주의 감동’을 창조한 대가들이 존재한다. 재즈 즉흥 연주를 창조한 루이 암스트롱, 스윙을 통해 재즈를 일약 미국 주류 대중음악 반열에 올려놓은 듀크 엘링턴, 비밥으로 재즈를 예술적인 경지로 부상시킨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 쿨에서 출발해 모드를 거쳐 퓨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주 스타일을 확립시킨 마일스 데이비스가 그들이다. 앞에 언급된 대가들에 이어 다시 한번 재즈사에 한 획을 그은 연주자가 있다. 바로 색소폰 주자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이다. 1955년부터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의 멤버로 활동하며 주류 재즈계에 등장한 그는 1967년 세상을 떠날기까지 10여년이란 짧은 기간동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연주의 경지를 제시했다. 대표작 < Giant Step >(1959)을 통해 존은 ‘쉬트 오브 사운드’ 즉, ‘음의 덩어리’란 연주 방법을 창안해 재즈계를 경악케 했다. 순간적으로 4옥타브를 넘나드는 엄청난 기복의 연주와 16분음, 32분음과 같은 미분음을 연속해서 내는 ‘쉬트 오브 사운드’는 기존 비밥 즉흥 연주의 한계를 넘어서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 기타 하나만으로도 완벽한 록 오케스트라를 창조한 지미 헨드릭스처럼 존 콜트레인은 색소폰을 통해 재즈가 펼칠 수 있는 연주의 가능성을 무한대로 넓혀 놓은 셈이다. 하지만 ‘파괴의 정서’로 대변되는 이런 그의 연주가 이토록 지금까지 추앙받는 데엔 혁신적인 연주 그 이상의 무엇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음악이 시대의 산물이란 말이 있듯, 존의 연주는 그가 한창 활동했던 1950년대 중반에서 60년대의 혼란했던 미국 사회, 그리고 흑인이 처한 현실을 반영한 결과물이었다. 존 콜트레인은 자신의 음악이 흑인 민권 운동과 관련이 있다고 얘기한 적은 없었지만 사람들을 날려보내는 듯한 가슴 후련한 연주는 자유를 갈망하는 흑인들의 아우성을 연상시켰다. 1963년 9월 15일 미국 알라바마 버밍험에 소재한 교회 내에서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설치한 폭발물이 터져 흑인 소녀 4명의 목숨을 앗아간다. 이들의 장례식엔 음울한 장송곡 대신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와 샘 쿡의 ‘A change is gonna come’, 그리고 존 콜트레인의 ‘Alabama’가 그의 색소폰으로 연주되고 있었다. 존 콜트레인의 음악이 예술적인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밀접히 관련돼 있다는 증거이다. ‘Alabama’는 존 콜트레인이 당시 흑인들을 울분을 대변하는 의식 있는 아티스트라는 인상을 심어줬다. 신께 헌정하는 앨범 < Love Supureme >(1964)으로 존은 ’가장 영향력 있는 흑인 아티스트’ 반열에 오르며 말콤 엑스,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흑인 대통령 후보자로까지 거론된다. 존 콜트레인은 음악을 정치적인 수단으로 활용하진 않았지만 재즈를 연주하는 모든 흑인, 그리고 존 콜트레인의 무의식 속엔 ‘재즈는 곧 흑인의 자부심’이란 가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드밥에서 시작해 프리 재즈로 뿌리내린 짧고 굵었던 음악 인생동안 그는 흑인만이 할 수 있는 연주의 영역을 부단히 개척했고 그 중심엔 가스펠, 다시 말해 흑인의 영혼인 블루스(Blues)가 멤돌고 있었다. 60년대 흑인들이 소울과 더불어 존 콜트레인의 연주에 애착을 갖는 건 블랙,즉 검은것의 자존심을 드높였다는 데에 있다. 1926년 9월 23일 노스캐롤라이나 햄릿에서 태어난 존 콜트레인은 음악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청소년시절 밴드부 클라리넷 연주를 배우며 당시 인기 상종가를 누리던 빅 밴드 리더 아티 쇼의 연주를 카피하며 재즈에 눈을 뜬다. 프로 뮤지션이 되기 위해 필라델피아로 이주한 존은 1943년 지역 스윙 밴드 단원으로 일하며 프로 세계에 진출한다. 오른스타인 음악학교에 입학해 정규 음악교육을 받게 된 존은 1945년 해군에 징집돼 군복무중 해병대 군악대 ‘멜로디 마스터’에 배치되었고 군을 재대하면서 얻은 수입으로 존은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그라노프 스튜디오에서 현대 클래식 작곡가들의 수준 높은 음악을 접할 수 있게 된다. 1947년 군 재대 후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비밥 열풍에 동참하고 싶었던 존은 이때부터 테너 색소폰을 손에 쥐게 된다. 훗날 자신을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트럼펫 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1949년 9월, 존은 비밥의 명인 디지 길레스피 빅밴드에 들어가게 된다. 주류 무대에 도약할 기회를 얻은 그는 다른 명연주자의 스타일을 습득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한다. 특히 찰리 파커의 색소폰 연주는 그야말로 산 교과서였다. 존은 버드의 연주에 완전히 흡수돼 그처럼 연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목표였던 셈이다. 50년대 들어 경기는 호황이었지만 비밥 연주를 하는 흑인 재즈 뮤지션들의 생활은 어려웠다. 대중들은 캡 칼로우 웨이나 빅 조 터너의 알 앤 비 사운드나 프랭크 시나트라와 딘 마틴의 스탠다드 팝에 경도돼 흑인 비밥 뮤지션들이 설 자리를 빼앗아 갔다. 비밥을 연주할 공간을 찾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재즈의 명인들이 헤로인으로 하나 둘 무너져가기 시작했다. 찰리 파커는 이미 마약 중독이 위험수위에 올랐고 ‘쿨의 탄생’으로 비밥의 새로운 스타일을 제시했던 마일스 데이비스도 기대 이하의 씁쓸한 반응을 삼키며 헤로인에 빠져 들고 있었다. 당시 인기를 누리던 알 앤 비 밴드였던 조니 호지스 밴드 투어에 합류해 비교적 탄탄대로를 걷고 있던 존 콜트레인도 결국 얼마 못가 헤로인에 유혹에 빠져들고 만다. 색소폰을 손에 들고 있는 것조차 힘들게 된 존 콜트레인은 결국 1952년 조니 호지스 밴드에서 해고당하고 만다. 다시 3여년의 긴 내공 끝에 존 콜트레인에게 재기의 기회를 가져다 준건 다름 아닌 마일스 데이비스였다. 8년 전의 인연으로 존은 마일스가 조직한 퀸텟의 테너 색소폰 주자로 발탁돼 1955년 메이저 레이블인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첫 앨범 < ’Round Midnight > 녹음에 참여한다. 마일스는 차분하고 부유하는 듯한 자신의 트럼펫 소리와 충돌해 긴장감을 조성해 줄 색소폰 연주를 찾았고 마침 활화산 같이 폭발적인 솔로를 구사하는 존 콜트레인 색소폰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1956년 한 해 동안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 멤버 자격으로 존 콜트레인은 < Workin’ >, < Steamin’ >, < Cookin’ >, < Relaxin’ > 과 같은 하드 밥 명반들을 프레스티지(Prestige)를 통해 연이어 발표한다. 마일스와 만나기 전까진 재즈계에서 무명이었던 존 콜트레인은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 멤버로 활동하며 명실상부 주류 음악 무대에 안착하는데 성공한다. 이런 성공에 반해 헤로인 중독은 여전히 먹구름처럼 그를 괴롭혔다. 거기다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과 툭하면 연주 시간에 늦는 그의 불규칙한 생활로 퀸텟의 팀웍에 금이 가기 일쑤였다. 결국 리더인 마일스와의 심한 다툼 끝에 1956년 말, 존은 퀸텟에서 해고당하고 만다. 졸지에 일자리를 잃어버린 존은 그러나 평소 그의 음악성을 높이 평가해오던 기인 피아니스트 델로니어스 몽크의 선처에 힘입어 그의 밴드 멤버로 활동할 수 있게 된다. 존은 몽크와의 협연으로 리버사이드 레이블을 통해 총 4장의 앨범을 발표하는데, < Thelonious Monk with John Coltrane >, < Thelonious himself >, < Monks Mood >, < Live at the five spot >이 그것들이다. 절제되고 명료한 톤의 연주를 선호했던 마일스와 달리 현란하고 다소 정돈되지 않은 듯한 스타일의 연주를 즐긴 몽크는 그야말로 존 콜트레인과 찰떡궁합이었다. 마일스와 존의 연주는 상극의 연주라면 몽크와 존의 연주는 상생하는 연주였던 셈이다. 몽크의 권유로 한번에 2-3개 음을 동시에 내는 연주기법도 이 때 등장한다. 둘의 협연은 6개월로 그쳤지만 몽크 덕분에 마일스는 자신의 스타일을 찾아갈 수 있게 된다. 재기의 의욕을 다진 존은 헤로인을 끊고 밴드를 결성해 독집 앨범을 준비해간다. 솔로 데뷔작인 < Coltrane >(1957)과 < Soul Trane >(1957)을 거쳐 초기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 Blue Train >(1957)을 발표하며 존은 ‘하드밥의 새로운 거목’이란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된다. 투박하고, 거칠지만 폭발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그의 연주는 청중들에게 강한 느낌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성공적인 솔로 데뷔에 있은 지 얼마 후 존은 다시 마일스로부터 밴드에 와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존이 마일스에게 돌아왔을 땐 퀸텟이 아닌 섹스텟이 되어있었는데 알토 색소폰 주자 캐논볼 애덜리(Cannonball Adderly)가 함께 연주한다. 존이 섹스텟 멤버로 발표한 < Milestone >(1958)은 모달 재즈(Modal)의 원형을 제시하며 코드 중심의 연주가 아닌 스케일 중심의 연주, 다시 말해 화음이 중심이 아닌 선율이 중심이 되는 패턴으로 변화되는 과도기의 작품이었다. 전 재즈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1959년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마일스 데이비스와 존 콜트레인이었다. 지금까지도 모던 재즈의 대표작으로 칭송되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 Kind of Blue >와 존 콜트레인의 < Giant Step >이 탄생됐기 때문이다. < Kind of Blue >의 녹음의 참여한 존은 ‘So What’과 ’All Blues’에서 역사상 가장 빛나는 테너 색소폰 연주를 남긴다. < Kind of Blue >의 녹음이 끝난 직후 존은 어틀랜틱 레코드사에서 < Giant Step >을 녹음한다. 폴 체임버스, 토미 플라나간, 윈튼 켈리, 지미 콥, 아트 테일러가 참여한 앨범은 ‘소리의 신기원’을 제시했다. 테너 색소폰만 하나만으로 존은 한번에 여러 개의 음계를 넘나드는 초절기교를 선보인다. 당시 재즈 평론가 이안 기틀러는 이런 콜트레인의 사운드를 일컬어 ‘음의 덩어리’(Sheet of Sound)라 명명했다. 몽크와의 협연을 계기로 오랜 실험 끝에 빛을 본 존의 이 혁신적인 연주스타일은 재즈의 표현 영역을 한층 넓혔다는 평가와 함께 이후 등장할 많은 색소폰 연주자들이 넘어서야만 하는 절망(?)스런 과제를 남기게 된다. 이듬해 발표된 < My Favorite Thing >(1960)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스코어를 담당하게 될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의 왈츠곡 ‘My favorite thing’을 비롯해 조지 거쉰의 ’summertime’등 좀더 대중적인 배려가 돋보인 앨범이다. 또한 존은 이때부터 묵직한 테너 색소폰 대신 부드러운 선율을 만드는 소프라노 색소폰을 사용한다. 존은 자신의 연주가 좀더 덜 서구적인 것으로 비쳐지길 원했고 아랍이나 동양권의 관악기(가령 우리나라의 태평소)와 흡사한 소리를 내는 소프라노 색소폰을 적극 연주에 포함시킨다. 1961년 마일스 데이비스 섹스텟을 나온 존 콜트레인은 자신의 정규 쿼텟을 조직한다. 이름하여 ‘존 콜트레인 클래식 쿼텟’으로 활동하게 되는 맥코이 타이너(피아노), 엘빈 존슨(드럼), 스티브 데이비스(베이스)는 이후 4년간 가장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하며 신생레이블이었던 임펄스!(Impulse!)를 통해 명연들을 남긴다. 콜트레인 쿼텟은 재즈에만 음악적 관심을 한정시키지 않고, 아프리카, 중동 등 3세계권 음악을 자신의 영향권에 뒀다. < Africa/brass >(1961)같은 앨범이 대표적인 예인데, 존은 당시 부상하고 있던 플릇/색소폰 연주자 에릭 돌피를 비롯해 11개의 브라스가 참여해 아프리카 토속리듬과 인도의 라가를 적극 도입했다. 이런 실험성 짙은 대작에 부담스러워 한 음반사는 존에게 좀 더 대중적인 재즈 연주 앨범을 만들어보길 권했고, 그 결과 나온 작품이 < Ballad >(1962)와 < Duke Ellington and John Coltrane >(1962)이다. < Ballad >에선 프랭크 시나트라가 노래로 유명한 ‘Nancy’가 < Duke Ellington with John Coltrane >에선 ‘In a sentimental mood’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혀를 내 두르게 하는 격정적인 색소폰 연주는 아니었지만 < Ballad >와 < Duke Ellington with John Coltrane >은 존 콜트레인의 다른 어떤 음반보다 인기를 얻었다. 당시 흑인 사회는 혼란 그 자체였다. 킹 목사가 주도한 흑인 민권운동은 1963년 극에 달했다. ‘버밍험의 전투’라고까지 인종차별 반대 시위는 그해 8월 킹 목사의 그 유명한 연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가 나온 워싱턴 행진으로 이어졌다. 억압 속에 자유를 호소하는 노래였던 가스펠은 민권운동을 통해 감정 표현을 넘어서 흑인들의 유일한 무기가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에 아침 이슬과 6월 항쟁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소울은 흑인 민중들의 강력한 저항 수단 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흑인 가수들이 목소리 높여 소울을 들고 나왔다. 존은 신께 경배하는 연주로 흑인 민중의 민심을 반영했다. < Love Supreme >(1964)은 존 콜트레인이 주류 재즈 뮤지션으론 처음 신께 헌정하는 연주였다. 총 4부의 구성으로 진행되는 연주는 흡사 흑인교회 대중 집회를 연상시키는 고양감으로 넘실거린다. 그의 정규 쿼텟 마지막 작품이기도 한 < Love Supreme >은 자유를 갈망하는 흑인들의 내면에 깊은 울림을 전해주며 소리 소문 없이 발매 1년 만에 50만장이란 판매고를 기록한다. 내면에서 부글거리는 존의 자유의지는 결국 프리 재즈로 향한다. 오넷 콜먼이란 젊은 색소폰 주자가 들고 나온 이 무형식의 전위 재즈는 재즈계 내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고 존 콜트레인도 이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미 존 콜트레인은 오넷 콜먼과 함께 연주했던 트럼펫주자 돈 체리와 함께 앨범 < The Avant Garde >를 1959년에 녹음했지만 당시 존의 소속사였던 어틀랜틱 레코드사가 1966년이 돼서 발표하는 바람에 1년 앞선 < Ascension >(1965) 그의 첫 프리 신고식이 됐다. 무한자유로의 질주는 결국 프리 재즈의 광기로 이어졌다.소음과 흡사한 음을 한번도 쉬지 않고 40분 이상 해내는 연주자는 당시까진 존이 유일했다. < Giant Step >과 < Love Supreme >의 연주를 원했던 팬들은 이미 괴물이 돼 버린 존의 음악성에 실망하고 등을 돌렸다. 난해한 연주기교와 멜로디의 부재는 대중성을 외면한 결과가 된 셈이다. 이 당시 수시로 복통을 호소했던 존은 급기야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더욱 창작에 열을 올렸고 1966년 녹음된 < Interstellar space >를 끝으로 존은 말기 간암판정을 받게 되고 급기야 1967년 7월 17일 4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죽음은 재즈계에 예기치 않은 공백을 가져온다. 모든 에너지를 연주에 쏟아 넣었던 탓에 그를 능가할 재즈 뮤지션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더 이상 도전적인 연주가 없다 생각한 재즈계는 심지어 존 콜트레인 사후 ‘재즈는 죽었다’ 란 소리가 나올 정도로 그의 공백은 재즈계에 엄청난 혼란을 야기했다. 이렇게 갈피를 못 잡던 재즈계는 한창 부상하던 록 음악 열풍에 밀려 자꾸만 청중을 잃어갔다. 이런 상황에 한 발짝 물러나 있던 마일스 데이비스는 재즈와 록의 이종교배로 탄생된‘재즈 록 퓨전(Jazz Rock Fusion)’ 을 들고 나와 잃었던 대중을 찾는데 성공했다. 이로서 재즈계는 존 콜트레인을 종점으로 하는 ‘메인스트림’과 마일스 데이비스를 선두로 하는 ‘퓨젼’으로 나뉜다.
연주 : Dave Brubeck (데이브 브루벡)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작곡가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작곡가
연주 : Vince Guaraldi Trio (빈스 과랄디 트리오)
연주 : Art Blakey (아트 블래키)
일평생 하드밥(Hard Bop)만을 고집한 재즈 드럼의 전설 가열찬 두드림으로 재즈의 혼을 전한 연주인 아트 블레이키는 영원한 하드밥 메신저였다. 아트 블레이키는 재즈에서 리듬 섹션의 역할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키며 ‘재즈는 곧 리듬’임을 만방에 알렸다. 다양한 실험과 변신을 특징으로 하는 재즈계에서 아트 블레이키처럼 오로지 하드밥, 한 가지 스타일을 줄기차게 고집한 뮤지션도 드물다. 1954년 그의 퀸텟이 버드 ... 일평생 하드밥(Hard Bop)만을 고집한 재즈 드럼의 전설 가열찬 두드림으로 재즈의 혼을 전한 연주인 아트 블레이키는 영원한 하드밥 메신저였다. 아트 블레이키는 재즈에서 리듬 섹션의 역할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키며 ‘재즈는 곧 리듬’임을 만방에 알렸다. 다양한 실험과 변신을 특징으로 하는 재즈계에서 아트 블레이키처럼 오로지 하드밥, 한 가지 스타일을 줄기차게 고집한 뮤지션도 드물다. 1954년 그의 퀸텟이 버드 랜드 클럽에서 녹음한 라이브 실황 앨범 < A night at birdland > 를 시작으로 1990년 사망 할 때까지 무려 36년 동안 재즈 메신저스의 수장자리를 지켜왔다. 찰리 파커가 들고 나온 비밥이 한층 다양한 리듬 패턴과 악기 편성으로 풍요롭게 발전된 하드 밥은 아트 블레이키의 남다른 뚝심에 힘입어 1950-60년대 화려하게 꽃 필수 있었다. 아트 블레이키에게 스윙은 재즈의 혼이고 그 스윙 리듬을 먹고 자라난 하드밥은 자신과 같은 흑인 재즈 뮤지션들의 자존심이었다. 비슷한 시기 자웅을 겨루었던 마일스 데이비스 사단과 함께 아트 블레이키는 자신의 밴드 재즈 메신저스를 통해 활동시기 내내 걸출한 하드밥뮤지션들을 배출해왔다. 피아노의 호레이스 실버와 키스 자렛, 트럼펫에 클리포드 브라운, 리 모건, 프레디 허바드, 색소폰에 베니 골슨, 행크 모블리, 웨인 쇼터, 그리고 현재까지도 최고의 재즈 뮤지션으로 각광받는 윈튼 마살리스, 브랜포드 마살리스, 척 맨지오니가 재즈 메신저스를 거쳐갔다. 그의 재즈 메신저스는 그야말로 재즈의 사관학교였던 셈이다. 1919년 미국 피츠버그에서 태어난 아트 블레이키는 처음엔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지역 클럽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 중 클럽 사장의 압박(?)으로 드럼으로 자신의 파트가 바뀌게 된다. 그가 연주 초년병 시절이던 1930-40년대, 스윙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만인의 주목을 받았던 밴드 리더가 피아니스트나 클라리넷 주자였던 것에 비해 드럼은 비인기 파트 중 하나였다. 1943년 플레처 헨더슨 악단, 1944년 빌리 엑스타인 밴드에서 스윙 리듬을 연주한 아트는 엘라 핏 제럴드, 사라 본, 디지 길레스피, 찰리 파커와 같은 신세대 재즈 뮤지션들과 교류한다. 그리고 얼마 후 비밥이라는 신종 문법은 그에게 미지의 신대륙처럼 다가온다. 빌리 엑스타인 밴드가 해산되자 아트는 1946년, 17인조 리허설 밴드를 창단한다. 이듬해 밴드는 8인조의 그룹으로 재편되는데, 그의 밴드 이름인 ‘메신저스’는 바로 이때부터 사용된다. 해산과 재편을 거듭한 그의 밴드는 이렇다할 성과 없이 정체됐고 이내 이슬람교를 통해 정신적 위안을 얻으려 했던 아트는 이슬람 문화를 배우기 위해 1년간 아프리카엘 가게 되고 이름도 이슬람식 이름인 ‘압둘라 이븐 부하이나’로 개명한다. 비밥 스타들의 그늘에 가려 빛을 못 보고 있던 아트 블레이키에게 전환점이 온건 1950년대 초 피아니스트 호레이스 실버를 만나면서였다. 펑키 리듬과 가스펠 음악에 관심있던 호레이스 실버는 평소 아트 블레이키가 찾던 리듬에 강한 연주인이었다. 둘은 이내 의기투합하며 루 도날드슨의 알토 색소폰, 클리포드 블라운의 트럼펫, 컬리 러셀의 베이스가 참여하며 아트 블레이키 첫 정규 퀸텟으로 출범된다. 블루 노트레이블에서 발표된 앨범 < A night at birdland > (1954)는 이내 재즈계의 촉각을 건드렸다. 재즈의 명소 버드랜드에서 녹음된 앨범에선 오랫동안 다져온 아트 블레이키의 역동적인 드럼 연주를 선보이고 있다. 몸을 들썩이는 펑키 리듬과 블루스의 기운이 감지되는 호레이스 실버 피아노 연주, 강렬한 울림을 선사하며 다크호스로 떠오른 트럼펫터 클리포드 브라운의 연주는 신선했고 앨범은 한층 업그레이드 된 비밥, 이름 하여 하드 밥의 효시 작으로 평가받기에 이른다. 같은 해 아트 블레이키 퀸텟은 피아니스트 호레이스 실버의 블루노트 첫 리더작 < Horace Silver & Jazz Messenger > 로 다시 모인다. Doodlin’ 이라는 명연을 담고 있는 지금까지도 호레이스 실버의 최고작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확고한 입지를 확보해준다. 자신감을 얻은 호레이스 실버는 색소폰주자 행크 모블리, 트럼펫터 케니 도햄을 만나 자신의 밴드를 결성을 논의했고 결국 호레이스는 아트 블레이키를 떠나 자신의 퀸텟을 결성한다. 다만 호레이스가 사용했던 재즈 메신저스란 팀 이름은 아트 블레이키에게 넘겨졌다. 다소의 혼선을 겪은 그는 ‘아트 블레이키 & 재즈 메신저스’ 로 새 출발하며 팀을 재정비한다. 클리포드 브라운의 안타까운 요절로 그를 대신할 18살의 천재 트럼펫터 리 모건과, 테너 색소폰주자 베니 골슨, 바비 티몬스의 피아노, 지미 메리트의 베이스로 구성된 그의 2기 퀸텟이 출범한다. 이전 1기 때처럼 창창한 신인 뮤지션들로 구성된 그의 메신저스는 여러 레이블은 전전하던 끝에 1958년, 자신의 첫 출사표를 내준 블루 노트에서 또 한번의 명연을 들려주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재즈사의 대표적인 명반으로 기록되는 < Moanin’ > 이다. 피아노와 혼 섹션의 경쾌한 콜 앤 리스펀스가 인상적인 타이틀 곡 ‘Moanin’은 흑인의 원초적 가락인 블루스와 재즈 본연의 리듬인 ‘스윙’이 가장 이상적으로 배합된 명연이다. 앨범은 퀸텟 멤버인 베니 골슨의 뛰어난 작곡 실력을 선보이는 ‘Are you real’ , 아트 블레이키의 폭발하는 드러밍이 솔로를 만끽할 수 있는 ’Blues march’ 등 하드밥연주의 진수를 담아내고 있다. 아트 블레이키와 그의 밴드는 < Moanin’ > 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모달,프리 재즈의 격변에 아랑곳없이 아트 블레이키는 1960년-70년대 내내 하드밥의 지존으로 군림하며 재즈 메신저스를 통해 수많은 신인 스타들을 양산해 낸다. < A night at Tunisia > (1960)에 참여했던 테너 색소폰의 웨인 쇼터, 하드밥트럼펫 연주에 새 전기를 마련한 프레디 허바드가 참여한 < Mosaic >(1961), < Indestructibale > (1964)에서 여전히 기세등등한 연주를 들려줬다. 70-80년대 최고의 찬사를 받게 되는 푸르겔 혼의 척 맨지오니와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 역시 60년대 후반 재즈 메신저스의 멤버였다는 사실은 주목할 사안이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 같던 재즈 메신저스의 열기는 하지만 1970년대 접어들며 재즈 록의 위세에 떠밀려 차츰 식어가고 있었다. 실력 있는 젊은 뮤지션은 재즈 록과 퓨전 재즈 쪽으로 흘러갔고 아트 블레이키는 팀 운영에 난항을 겪는다.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그의 하드밥 열정은 이런 재즈계의 분위기에선 유지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1980년대가 왔고, 존폐위기에 몰린 그의 재즈 메신저스는 다시 한번 세계가 주목한 천재 트럼펫터를 맞이한다. 정통 재즈의 부활을 외치며 신정통주의의 기수로 떠오른 19살의 윈튼 마살리스가 그 주인공이었다. 한살 위인 그의 형 브랜포드 마살리스의 색소폰까지 들어오며 아트 블레이키 재즈 메신저는 1981년 < Straight Ahead > 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마살리스 형제는 1983년까지 재즈 메신저스에 몸담았고, 이듬해 1984년 신예 트럼펫터 테렌스 블랜차드가 참여한 < New York Scene > 으로 이어지며 재즈 메신저스는 건재함을 과시했다. 1985년엔 블루 노트 레이블 재건기념 수퍼 콘서트 < A night with Blue Note > 에 참여했고 이후 1990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그는 무대에서 줄기차게 하드밥의 열기를 이어갔다. 죽기 바로 1달 전 개최된 도쿄 돔에서의 라이브 실황을 끝나자마자 아트는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고 1990년 10월 16일 하드밥 메신저의 옹골찬 연주 인생은 막을 내린다. 하드밥과 결혼한, 아니 하드밥에 인생을 건 아트 블레이키는 그가 연주했던 드럼 솔로만으로 평가될 수 없는 인물이다. 수많은 분파가 생기고 다양한 실험과 변화가 진행되는 현 재즈계에서 어느 순간 2% 부족하다고 느낄 때 필요한 건 바로 블루스와 스윙이 황금 비율로 만나 만개한 하드밥의 충격요법이다. 시류에 아랑곳없이 하드밥 외고집으로 완성된 아트 블레이키의 유산은 지금도 재즈가 연주되는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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