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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7년 07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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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48쪽 | 276g | 130*190*20mm |
ISBN13 | 9788988613665 |
ISBN10 | 898861366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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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지침서
장미의 전쟁
마이클 더글라스와 캐슬린 터너가 주연한 1989년 작 『장미의 전쟁』은 전쟁 장르의 새로운 소재를 개척한 입지적인 영화입니다. 부부인 올리버(마이클 더글러스)와 바바라(캐슬린 터너)가 결국 죽음에 이르기까지 죽으라고 싸우는 장면은 꽤나 충격적이었습니다(아마도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가 집 한 채를 부부싸움으로 박살내는 블록버스터 『미스터&미세스 스미스』가 참조했을 법합니다). 영화에서 전쟁의 스펙터클이 가능했던 것은 남녀가 대등한 화력으로 전투에 임하면서 기세가 일방적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대등함, 치열함이 제게 오래 기억되는 것은 대개의 형국에서 여자가 약자로서 기능하던 제 뇌속의 편견을 보기 좋게 깨부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영화는 결혼 전이었던 저에게 막연하게나마 결혼에 대해 여러 가지 의문(이라기보다 공포감)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여 결혼하고 그 긴 세월 자식까지 낳고 키우며 외관상 거의 완벽한 가정을 이루었는데 왜 하필 서로 위하고 의지해야할 시점에서 원수처럼 싸우게 된 것일까 의아스러웠습니다. 하루아침에 성격이 바뀐 게 아니라면 결국 아이가 장성하여 독립하기까지 그 오랜 시간 동안 참고 살았다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죽이고 싶을 만큼 싫은 사람과 그렇게 오래도록 살아간다는 게 가능할까요? 무엇보다 어떻게 사랑해서 결혼한 사람이 죽이고 싶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일까요? 만약 이 극한의 대립이 결혼의 본질이라면 유하 감독의 영화 제목처럼 결혼은 미친 짓이 아닌가요?
진짜의 나를 만난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결혼생활은 그 일면을 극화한 것이니 만큼 실제로는 ‘평범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부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상상을 잇자면 나의 결혼생활이 불행한 것은 우연이며 더 나아가 운명이고 팔자입니다. 혹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국 상대적으로 누군가는 좀 더 양보해야 결혼이 원만해 보이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각자에게 최후의 보루가 있습니다. 그 보루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양보가 이루어지면 ‘아름다운’ 결혼 장면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결혼하면 ‘이게 바로 나의 본모습이야’라고 믿고 있던 자신의 자기동일성이 상당히 깨지기 쉬운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결혼생활에서는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고 할 만한 ‘최후의 보루’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p.144
그러나 저자는 최후의 보루 따위란 없다고 단언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요? 영화 속 올리버와 바바라도 그랬고 물론 저도 그랬습니다. 무엇보다 그 최후의 보루 따위란 없다는 사실 자체를 깨닫는 것이 저에겐 당혹스럽고 인정하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최후의 보루가 계속해서 무너지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요? 남는 것은 있을까요? 저자는 그때 남는 앙상한 골격, 아슬아슬한 균형 감각이 고작 자기 정체성의 전부라고 답변합니다. 그러니 저자에게 자기동일성이 완강하게 유지되는 주체로서 나라는 것이 인정될 리가 없습니다. 도리어 나란 대타적일 때 겨우 성립되는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내면에는 여러 가지 타입의 ‘배우자 특성’이 잠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과 결혼하더라도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가?’와 같은 의문을 품게 할 인격적 특성이 등장합니다. 다시 말해 배우자가 바뀌면 당신도 다른 인간이 되는 것이지요. … 여기 이렇게 다양한 ‘자신’ 안에 어떤 특수한 조건에서만 발현하는 유일무이한 ‘진짜 자신’이라는 건 애당초 존재하지 않습니다. p.33-35
지금 현재 나는 지금 나의 배우자에 대한 모습입니다. 그 배우자에 대해 좀 더 근사하고 나은 모습이었으면 좋았겠지만 배우자 특성으로 발현된 지금의 옹졸하고 찌질한 모습이 진짜 나인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결혼하지 않으면 결코 발견, 혹은 발현할 수 없는 나의 진짜 모습인 것입니다.
무엇으로 싸우는가
『장미의 전쟁』에서 올리버와 바바라는 하필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시기에 서로에게 총구를 겨눕니다. 시간적 물질적 여유가 없어서 그전에 보이지 않았던 자신과 주변이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제야 겉으로 화려해 보이던 나의 결혼생활은 실제로 얼마나 황량한가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권태감이란 자기 인생에 질려버린 인간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자신의 인생에 질려 있지만 이를 인정해버리자니 인생의 ‘뒤가 없으므로’ 권태감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아 ‘누군가 때문에 내 인생이 재미없다’는 스토리를 만들고는 이를 믿어버리는 것이지요. p.220
부부마다 다를 수는 있겠지만, 올리버와 바바라에게는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이 ‘진짜 나’에 이르게 하는 부부 간 ‘주인-노예의 투쟁’을 유보시켰을 것입니다. 그래서 도리어 안정기가 권태기를 선사하고 권태기는 멜로물을 순식간에 전쟁물로 탈바꿈해 놓았을 것입니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였고 의지하며 살았던 만큼 이 선악극에서 악당은 배우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회고적으로 의미화되는 과거의 결혼생활은 끊임없이 상대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호출해냅니다.
위험한 것은 자신이 사회적으로 슬럼프에 빠진 상황을 결혼 관계와 연관지어 설명하려는 태도입니다. ‘이 사람이랑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도’라는 상황을 가정해서 배우자의 무능함과 몰이해를 불행의 원인으로 삼기 시작하면 이미 관계는 끝난 것입니다. p.215,6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쉽게 배우자의 무능함과 몰이해를 불행의 원인으로 생각하는 부부들을 많이 봅니다. 특히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결혼계약이 곧장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계속 최후의 보루를 무너뜨리며 자신의 진짜 모습을 대면해온 사람이라면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더라도 인생에 질려버린 자신의 삶을 어렴풋하게나마 직관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 미묘한 깨우침과 ‘자잘한 실천’이 서로에게 인정될 만큼 인식되지 않으면 그때서야 결혼생활은 끝장나는 게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올리버와 바바라에게는 전혀 그런 과정이 없었습니다.
결혼, 왜 하는 것일까
최후의 보루 따위가 무너진 자리는 자유가 보장된 아름다운 꽃밭이기보다 길이 없는 황량한 폐허에 가깝습니다. 보고 싶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것을 긍정이든 부정이든 하는 과정이 행복할 리 없습니다. 이쯤 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결혼은 미친 짓이고, 그러니 결혼을 하지 않으면 되는 게 아닌가도 싶습니다. 구태여 전쟁을 통해 자신의 남루한 모습을 보아야만 할까요? 그래도 한번쯤 결혼을 해볼 만한 이유가 있을까요
저자가 드는 결혼의 ‘최소’ 장점은 결혼이 “시민적 성숙을 위해 대단히 의미 있는 훈련의 장이며, ‘궁핍하거나 병들어 누웠을 때’ 상호 부양의 안전망”이라는 것입니다.
결혼생활이라는 가장 작은 형태의 사회조직을 통해 우리는 공동체의 조직을 배우고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기술을 체득하는 것입니다. … 사랑하고 소원해지고 신뢰하고 배신당하고 헤어지고 상처받고 치유하고 간호하고…. 이 과정에서 모두가 어른이 되어가지요. p.78,9
꼭 그렇게 아등바등 어른이 되어야 하느냐고 반문할 법합니다. 저자가 생각하는 어른이란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갖춘 사람을 말합니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갖추지 않는다면, 즉 어른이 되지 못한다면 타인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공생할 수 없습니다. 저자는 결혼이야말로 공생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관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장점인 ‘상호 부양의 안전망’은 보다 실용적입니다.
물론 모두가 결혼을 꼭 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결혼은 본질적으로 위기 상황에 대비한 안전보장 계약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자신이 ‘슬럼프’에 빠졌을 때 물심양면으로 보살펴줄 사람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인 것입니다. p.236
올리버가 바바라에게 분노하게 되는 사건이 있습니다. 올리버가 심장 질환을 의심하여 병원에 진료를 받는데 바바라가 병원에 오지 않고 연락조차 취하지 않은 것입니다. 올리버는 바바라에게 찾아온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상호 부양의 안전망’으로서 바바라가 제 역할을 다하지 않는 것에 분노합니다. 이 장면은 배우자가 병들거나 슬럼프에 빠졌을 때 보살펴 주는 것이 적어도 결혼생활 유지의 디폴트임을 시사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의지할 수 있는 인간이 된다는 건
물론 어른이 되기 위해 혹은 병들거나 궁핍할 때 보살펴 줄 사람이 필요해서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른이 되는 것과 간병인이 필요한 것은 결혼의 일반적인 장점이지 목적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결혼은 어떤 목적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라기 보다 자연스럽게 진입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그 공동체로의 진입을 ‘비이성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겪습니다. 둘이 동시에 좋아하고 동시에 결혼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결혼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좋아하는 마음과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서로 비대칭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특별히 없는 데도 결혼이 이뤄지기도 합니다.
‘이 사람과 결혼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라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자신의 통제 영역을 벗어난 것입니다. … 약간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결혼은 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사회적 사건’인 겁니다. 상대가 누군지 잘 모르는 단계에서 사랑에 빠져버렸다는 사람과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단계에서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사람’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서로 만났을 때 결혼이 성립하는 겁니다. p.95-100
결혼이 대체적으로 속수무책의 기세나 관성에 따라 이뤄진다고 해도 결혼에 대한 환상이 없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 환상조차 사적이라기보다 사회적입니다. 배우자가 자신을 이해하고 배려해주며 어려움과 고통을 보듬어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자연스러운 환상입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나면 배우자의 이해와 사랑 속에 편안해지기는커녕 결혼 전에는 없었던 각종 제약 속에 놓이게 됩니다. 살림과 출산, 육아, 시댁과 처가, 하다못해 함께 자는 문제까지 도리어 불편함이 폭증하죠.
결혼하면 결혼 전에는 가능했던 일들이 대부분 불가능해집니다. … 어떤 일이든 타인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마다 자신의 잠재 가능성 중 일부는 실현 불가능해집니다.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p.131
배우자는 연애할 때 사랑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전혀 낯선 존재로 다가오죠. 게다가 그 존재는 결혼 전에 누렸던 자유 대부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결국 배우자와의 수없는 전쟁을 통해 자신이 ‘최소’라고 생각했던 기대가 ‘최대’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저자는 서로 의지하고 기대며 생기는 불편에 대한 생각을 뒤집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제약받지 않는 인생은, 달리 말하면 ‘아무도 당신에게 의지하지 않는 인생’과 같지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생각하면서 유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노력해온 것 아닌가요? p.132
저자의 시각에 따르면 외부에 의해 자신이 제약받고 그에 맞게 이것저것 책임지면서 ‘나다운 삶’이 발현됩니다. 아무런 저항이나 제약도 없다면 자신의 특성이 발현되거나 삶의 의지가 생성될 리 없습니다. 비단 가족 관계뿐만이 아닙니다. 회사에서 상관이 자신을 믿고 일을 맡긴다는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을 의지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능력을 인정받는 것입니다. 저자의 말처럼 “‘의지할 수 있는’ 인간인 것이 사회적인 성숙도와 능력의 지표”인 것입니다(p.133).
가족의 커뮤니케이션이란
옮긴이의 말, 에 이런 찬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의 거침없는 해석이 양궁선수가 결승전에서 10점 과녁판을 명중시키는 순간처럼 독자의 마음을 꿰뚫을 때가 있는데, 이런 경험을 한 독자는 우치다의 팬이 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p.243
이 ‘명중’은 강신주의 강인함에 이끌렸을 때와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입니다. 어느 누구도 결혼을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 준 ‘어른’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결혼하고 한참이나 너덜너덜해진 지금에서야 읽는 저자의 조언들은 모두 10점 과녁판을 명중시켜서 저를 넉다운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의 결혼생활에는 출구가 없는 것일까요
상대가 없을 때, 상대가 없는 장소에서 상대가 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 이것이 생물들이 갖춘 공생의 지혜입니다. 결혼생활도 기본은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상대가 없을 때, 상대가 없는 장소에서 상대가 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을 자신의 주활동으로 삼는 것. 그리고 함께 있을 때는 가능한 상대를 방해하지 않는 것. … 부부가 제각각 하고 싶은 잃을 하면서 서로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 멍하니 그저 시간을 보내는 것. 이것이 단란한 가족의 완성된 모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p.161-163
따지고 보면 결혼생활 내내 ‘서로에게 방해가 되건 말건 힘들게 같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싸웠던 것은 아닐까 반문해 봅니다. 근본적으로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 그래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다만 “그런 차이를 절충할 수 있는 폭 넓고 느슨한 공간을 만들어가는 것이 결혼생활의 즐거움”이라는 저자의 깨우침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결혼생활을 지속하는 사람들이라면 조금씩 체득해 가고 있는 지혜는 아닐까요. 물론 그것이 ‘결혼생활의 즐거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경청할만한 지혜입니다.
구조주의 혹은 현상학에서 조망된 주체와, 레비나스의 타자를 공부한 철학자인 만큼 우치다 타츠루의 조언은 호통이나 훈계라기보다 설득과 이해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좀 더 일찍 이 책을 만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다가도 올해 7월 번역되어 나온 것을 보니 지금이라도 읽게 되어 다행이지 싶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저자의 말처럼 좀 더 젊었을 때 이 책을 만났다면 지금처럼 이해됐을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사실은 잘 모릅니다. 당신이 배우자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십중팔구 그 배우자 본인도 잘 모르고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당신, 사실은 나한테 뭘 바라는 건데?” 같은 질문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질문에 곧바로 대답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요.p.149-150
뼈아프게도 저는 그녀에게 “나한테 뭘 바라는 건데?”와 같은 질문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또 아무래도 그녀는 나에게 하지 않았던 질문인 것 같기도 합니다. 아마도 각자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고, 잘 모르더라도 입장을 정리하여 말할 수는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이란 자신을 알 수 있고 상대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래서 접점을 찾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아주 조금은, 그렇게 배워왔다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대체적으로 흠결은 제가 더 많은 듯합니다. 제가 무관심이라고 믿어왔던 그녀의 변화는 어쩌면 그녀 나름대로 저에 대해 직관적으로 체득한 거리 두기의 커뮤니케이션은 아니었을까요
필요할 때만 돕는 거리감 있는 가족으로서
서로 의지하는 것과 거리를 두어 존중하는 것이 양립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자는 가족을 대할 때 심지어 귀신을 대하듯 어렵고 두려운 마음으로 존중하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의지하는 것과 간섭하는 것은 별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거수일투족을 다 아는 것이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 길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타자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일부로 복속시키려는 무모한 시도일 것입니다. 정말 서로를 존중하는 부부 관계라면 “서로 지나치게 간섭하는 일 없이 필요할 때만 서로 돕는 긍정적인 관계”일 것입니다(p.122).
그렇더라도 결혼생활은 실전이므로 가령 가사와 같은 문제는 서로 존중만 해서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요즘은 그래도 남자가 앞치마를 두르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닌 세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가사 문제는 결혼생활의 핵심입니다. 예컨대 남자는 요즘 세태에 비추어 어느 정도 가사를 분담하는 괜찮은 남자라고 우쭐대고, 여자는 똑같이 일하는데 자신이 부담해야할 몫이 많은 것이 부당해 보입니다. 그러니 가사 문제에 대해 모른 체하는 조언들은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아마 그랬다면 저는 이 책을 독후감으로 남기지도 우치다 선생의 팬이 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저자인 우치다 선생의 솔루션은 “‘고역의 배분’에 당사자 모두가 납득할 만한 접점이 있을 리가 없”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고역의 분배’를 위해 비생산적인 교섭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보다는 어느 한쪽이 ‘가사노동은 전부 내일’이라고 각오하는 편이 체력적으로는 힘들겠지만 심리적으로는 그나마 낫다고 봅니다. 어디까지나 ‘그나마’ 낫다는 것입니다만.
또 하나의 해결책으로 ‘가사는 그 누구의 담당도 아니다’라는 규칙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아, 이제 슬슬 밥을 해야겠는데?’라고 생각한 사람이 밥을 하면 됩니다. … 먼저 인지한 사람이 하기. 절대로 “자기야 그것 좀 해놔”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p.193
저에게 적용해 보자면 ‘가사는 쾌락이다’라는 착각에 중독될 형편까지는 못되니 조금 더 노력할 여지는 있겠으나 다행히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이것이 유일한 실천 지침은 아닐 것입니다. 저자는 결혼생활은 각자에게 유일무이하므로 구체적인 정답은 본인이 최대한 갈등하고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그를 찾아가 저의 이런 저런 상황들을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늘어놓는다고 한들 이 책에 기록해 놓은 것 이상을 이야기해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가장 와 닿는 말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타인에 대한 호기심은 자기에 대한 호기심과 연동되어 있습니다. 이를 지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만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자기 안에 어떤 미지의 자질이 잠들어 있는지 미개발 자원이 매장되어 있는지, 이에 대해 진지하게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질리거나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변화할 때마다 눈앞에 있는 타인의 얼굴도, 모습도 함께 변화하기 때문이지요. 자신이 변하면 세상도 변합니다. p.221
나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이라는 라캉의 말을 처음 접했을 때만큼의 먹먹함이 듭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타자이며 커뮤니케이션이 궁극적으로 욕망의 상호작용임을 모르고 있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삶에 안착하지는 못했던 모양입니다. 남의 무심함만 탓했지 나의 변화에는 너무 무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더 심각하게도 어쩌면 저 역시 저 자신에게 질려 있었던 것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회고적으로 추억되는 결혼초기 행복한 상태로의 복귀는 거의 불가능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자 말마따나 “자잘한 노력을 거듭하”면 적어도 병들거나 궁핍해질 때 서로 보살펴줄 수 있는 관계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좀 더 노력하면 지나치게 간섭하지는 않지만 “필요할 때 돕는 긍정적인 관계”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떠한 자잘한 노력들이 필요한 지는 저자의 말대로 고민하고 또 고민해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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