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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FM 굿모닝 팝스: 아침을 시작하는 팝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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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KBS FM 굿모닝 팝스: 아침을 시작하는 팝 음악

굿모닝팝스 제작진이 엄선한 팝 명곡 36곡

[ 2CD / 영문 가사 & 번역 가사 / 핵심 단어와 숙어 정리 ]
Junkie XL 작곡/Boys Like Girls, Avril Lavigne, Elvis Presley, The Ting Tings 노래 외 32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SonyMusic | 2017년 07월 27일 리뷰 총점10.0 정보 더 보기/감추기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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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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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FM 굿모닝 팝스: 아침을 시작하는 팝 음악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7년 07월 27일
시간, 무게, 크기 220g
KC인증 kc마크 인증유형 : 확인 중
인증번호 : -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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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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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 Feels Like Home - 샨탈 크리비아주크 Chantal Kreviazuk 선택듣기
  • 02 Because You Loved Me (Theme from "Up Close and Personal") - 셀린 디온 Celine Dion 선택듣기
  • 03 Truly Madly Deeply - 새비지 가든 Savage Garden 선택듣기
  • 04 Heart Of Mine - 보즈 스캑스 Boz Scaggs 선택듣기
  • 05 You Were There - 베이비페이스 Babyface 선택듣기
  • 06 My Love - 웨스트라이프 Westlife 선택듣기
  • 07 I Just Can't Stop Loving You - 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선택듣기
  • 08 I'll Be Loving You (Forever) - 뉴 키즈 온 더 블록 New Kids On The Block 선택듣기
  • 09 Falling In Love At A Coffee Shop - 랜든 픽 Landon Pigg 선택듣기
  • 10 Here With Me - 다이도 Dido 선택듣기
  • 11 Building A Mystery - 사라 맥라클란 Sarah McLachlan 선택듣기
  • 12 Landed - 벤 폴즈 Ben Folds 선택듣기
  • 13 Drops Of Jupiter - 트레인 Train 선택듣기
  • 14 Torn - 나탈리 임브룰리아 Natalie Imbruglia 선택듣기
  • 15 Time After Time - 신디 로퍼 Cyndi Lauper 선택듣기
  • 16 Superman (It's Not Easy) - 파이브 포 파이팅 Five For Fighting 선택듣기
  • 17 As I Lay Me Down - 소피 비 호킨스 Sophie B. Hawkins 선택듣기
  • 18 Because I Love You - 셰이킨 스티븐스 Shakin' Stevens 선택듣기

아티스트 소개 (37명)

작곡 : Junkie XL (정키 XL,Tom Holkenborg)
노래 : Boys Like Girls (보이즈 라이크 걸스)
노래 : Avril Lavigne (에이브릴 라빈)
에이브릴 라빈은 인구 5천 명이 전부인 캐나다의 작은 마을 나파니(Napanee)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곡을 쓰고 기타 연주하기를 좋아했던 그녀는 교회 성가대와 마을의 각종 축제에 참여하며 뮤지션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녀는 그 시절을 “나는 확실히 내 또래들과 조금 달랐어요. 일반적인 생활 패턴은 그 때부터 이미 멀리했었죠.”라며 회고한다. 합창보다는 혼자 노래 부르는 것을 더 좋아했던 에이브릴 라빈은 방... 에이브릴 라빈은 인구 5천 명이 전부인 캐나다의 작은 마을 나파니(Napanee)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곡을 쓰고 기타 연주하기를 좋아했던 그녀는 교회 성가대와 마을의 각종 축제에 참여하며 뮤지션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녀는 그 시절을 “나는 확실히 내 또래들과 조금 달랐어요. 일반적인 생활 패턴은 그 때부터 이미 멀리했었죠.”라며 회고한다. 합창보다는 혼자 노래 부르는 것을 더 좋아했던 에이브릴 라빈은 방에 들어앉아 아버지에게 빌린 기타로 레니 크래비츠(Lenny Kravitz)의 ’Fly Away’등을 카피하며 반항적인 로커를 동경했다. 이 예비 슈퍼 스타는 자신이 출연했던 지방 행사에 휴가 차 들린 [아리스타 레코드(Arista Records)] 경영자 겸 저명한 프로듀서 안토니오 LA 리드(Antonio ‘L.A.’ Reid)의 러브 콜을 받아 L.A.로 음악 인생의 방향타를 틀었다. 이후 작곡가인 클리프 매그니스(Clif Magness)와 심혈을 기울여 곡 작업에 들어가는 등, 데뷔 앨범의 준비에 만반을 기울였다. 첫 싱글 ‘Complicated’가 그 시작이었다. [MTV]의 간판 프로그램 [TRL]에서 인기를 모으며 빌보드 싱글 차트 2위까지 치고 올라간 곡은 톱 40 라디오에서도 1위에 등극하며 걸 록 전성 시대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이어 발표한 공식 1집 [Let Go]는 빌보드 앨범 차트(2위)를 비롯한 각국 차트의 정상권에서 마음껏 뛰놀며 차세대 록 주자의 탄생을 신고했다. 미국 내에서만 600만장이라는 매머드 석세스를 쾌척했으며 후속 싱글 ‘Sk8er Boy’도 톱 텐에 방점을 찍었다. 무엇보다 팬들이 < 롤링 스톤 >에서 실시한 ‘당신의 아메리칸 아이들은 누가 될 것인가’라는 투표에서 그녀를 1순위로 꼽으며 대환영 의사를 표시했다. 오랜 기간의 꿈이 이루어진 극적인 순간이었다. 이후 에이브릴 라빈은 3000천명 이상의 관객이 운집한 한국에서의 공연도 성황리에 끝마치는 등, 현재의 범세계적인 센세이션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곳곳에서 증명해나갔다. 이러한 국제적인 호응은 곧 최고의 음악 잔치인 < 그래미 시상식 >으로 이어졌다. 모두 5개 부문에서 후보에 오른 에이브릴 라빈은 멋진 라이브 공연권도 손에 쥐며 수상에의 기대를 부풀렸다.(그래미에서는 그 동안 공연을 치른 뮤지션들이 트로피를 많이 가져갔다.) 그러나 9.11의 여파로 뉴욕풍 재즈를 시범한 노라 존스(Norah Jones)에게 상이 몰리며 에이브릴 라빈은 빈손으로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을 빠져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은 미국인의 마음을 달래주기엔 그녀의 음악이 너무 거칠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국인 캐나다에서는 달랐다. 캐나다의 그래미로 불리는 < 주노 어워드 >는 에이브릴 라빈에게 최우수 앨범과 최우수 팝 앨범 등, 모두 4개의 트로피를 안겨주며 고향으로 돌아온 소녀 로커에게 따뜻한 환대식을 치러주었다. 이 때부터 상복이 줄줄이 터져 [머치 뮤직 시상식]에서는 2관왕을, 2002년 [MTV VMA]에서는 신인상을, [MTV Latin America VMA]에서는 최우수 인터내셔널 아티스트상을 싹쓸이했다. [Nickelodeon Kids Choice Award]의 최고 인기곡상과 [Teen Choice Music Award]의 최우수 싱글상도 그녀의 몫이었다. 둘 모두 ‘Sk8ter boy’의 선전 덕분이었다. 3번째 싱글 ‘I’m With You’가 발매되자 한번 붙은 인기의 화염은 더욱 높이 치솟아 올랐다. 팝 싱글 차트에서 4위에 오른 이 매력적인 발라드 트랙은 어덜트 팝 차트에서도 4위를 꿰차며 팬 베이스의 연령층을 높이는데 견인차의 역할을 해주었다. 화끈한 록 넘버 ‘Losing Grip’을 차트 중위권에 올려놓는 것으로 에이브릴 라빈은 공식적인 1집 활동을 멋지게 마무리했다.
노래 : Elvis Presley (엘비스 프레슬리)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오늘날 폴과 비틀스를 있게 한, 단 한사람의 영향을 꼽는다면 위 해설처럼 단연 트럭운전사출신 엘비스 프레슬리다. 존 레논은 이를 결정적 한마디로 축약한다. “엘비스가 나타날 때까지 내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무 것도 없다(Nothing affects me until Elvis)." 존과 폴이 만나서 처음 마음먹은 것은 사실 엘비스의 음악을 더 강하게 표출해내는 것일 뿐이었다. 그들을 통해서 로큰롤의 진정한 역사는 ‘시대의 풍운아’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개막되었다는 사실이 다시금 확인된다. 물론 역사가에 따라 로큰롤의 효시를 행크 발라드(Hank Ballard)나 빌 헤일리(Bill Haley) 또는 척 베리(Chuck Berry)로 꼽기도 한다. ‘Work with me, Annie’ ‘Crazy man crazy’ ‘Maybellene’ 등과 같은 이들의 대표곡들이 시기적으로 먼저 구동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 다수 대중들은 여전히 로큰롤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엘비스가 나와서야 비로소 그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빌보드지의 결론. ‘1953년 록음악이 시작되었다고 하나 정작 차트나 방송에서 그 시대를 풍미하기 시작한 것은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싱글 ‘Heartbreak hotel’이 연속 8주 넘버원에 머물면서부터였다.’ 초기 로큰롤은 척 베리나 버디 할리와 같은 탁월한 ‘작가’를 소유했다. 리틀 리처드나 제리 리 루이스라는 출중한 ‘배우’ 그리고 조 터너, 보 디들리와 같은 ‘음악감독’들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로큰롤은 강풍을 휘몰아칠 역동적 ‘스타’가 필요했다. 그가 엘비스였다. 그 시대는 흑인의 리듬 앤 블루스를 소화해줄 백인가수를 요구했고 엘비스는 백인대중들로부터 ‘저 친구는 백인이면서 왜 검둥이노래를 부르는 거야?’라는 의아함을 일으킬 만큼 탁월한 흑인감성의 보유자였다. 이러한 시의성은 그러나 일반의 인식처럼 56년 RCA 소속의 엘비스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었고 이미 54년 선 레코드사의 엘비스로서 확립된 것이었다. 샘 필립스 사장의 전설적인 선 시절에 엘비스는 ‘That`s all right’, ‘Blue moon of Kentucky’ 와 ‘Mystery train’ 등을 부르면서 컨트리와 R&B를 크로스오버화한 신종의 로커빌리를 선보이면서 벌써 ‘웨스턴 밥의 왕’으로 불렸다. 이 때 이미 순회공연에서 팝 음악사상 초유의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다. 『뉴스위크』는 ‘금세기 백년간의 스타’ 특집기사를 다루며 그의 등장을 ‘20세기의 사건’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당시 엘비스 백업 밴드에서 드럼을 쳤던 D.J. 폰타나는 54년 상황을 다음처럼 술회한다. “엘비스 무대가 끝나고 나면 노래를 따라해 줄 관객들은 다 빠져버려 아무도 없었지요. 애들은 백 스테이지에서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습니다. 내 생각에 그 애들은 아마 우리 연주는 듣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오로지 ‘처음으로 흔드는 가수’ 엘비스를 보고자 하는 것이었죠.” 로컬 무대에서 전국 네트워크 TV로 진출하면서 마침내 ‘엘비스마니아’는 폭발했다. 미국의 3대 전국 공중파 방송 ABC CBS NBC의 체제가 정립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그는 텔레비전시대의 영웅으로서 ‘라디오스타를 죽이는’ 새로운 미디어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타미와 지미) 도시 브라더스의 CBS < 스테이지 쇼 >, NBC의 < 밀턴 벌 쇼 >와 < 스티브 알렌 쇼 > 그리고 저 유명한 CBS의 < 에드 셜리번 쇼 >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벌써 음악의 영상시대를 주도했다. 음악이 음반으로만 소구하던 시대는 ‘섹시 가이’ 엘비스의 출현으로 끝났다. ‘보는 음악’ 시대를 주도한 최초의 인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엘비스였다. 스탠다드 팝의 파수꾼 프랭크 시내트라도 자기 TV 쇼의 떨어지는 시청률을 참다못해 ‘음악의 공적(公敵)’이라고 성토해마지 않았던 엘비스를 출연시켜야 했다. TV 뿐만 아니라 영화 최초의 로큰롤 스타도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 러브 미 텐더 > < 러빙 유 > < G.I. 블루스 > < 블루 하와이 > 등 31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그는 관객들에게 로큰롤의 열정과 록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의 호소력을 제공했다. 음반 텔레비전 그리고 영화라는 ‘삼국통일’에 성공하며 천하를 제패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이 아래로 보일 정도의 막강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77년 사망하면서 그의 캐리어가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그는 무려 2억5천만장의 앨범을 팔았다. 이 기록에 가장 접근한 인물은 비틀스가 아닌 2억장의 빙 크로스비(캐롤 ‘White Christmas’가 결정적이다)며 프랭크 시내트라는 겨우 4천만장에 불과했다. ‘1인 기업’ 엘비스는 막대한 돈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인 핑크를 포함한 갖가지 칼라의 자동차 캐딜락을 구입했고 멤피스에 4만 달러 짜리 목장 그리고 10만 달러로 저택 그레이스랜드를 샀다. 전용 비행기는 물론 텔레비전 세트 그리고 첨단기계들도 마련했다. 물론 지금이야 흔해 빠진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특히 엘비스와 같은 하층계급 청년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부의 상징들이었다. 동시대 그리고 후배가수들이 일개가수에서 기업으로 융기한 엘비스를 통해 신분상승과 스타덤 획득 욕구를 품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엘비스처럼 슈퍼스타이면서 동시에 부자가 되고 싶어했다. 버디 할리는 엘비스를 빅 스타로서 존경했고 밥 딜런의 음악동기는 엘비스보다 큰(bigger than Elvis)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톰 존스는 아예 영국의 제록스판 엘비스였다. 엘비스처럼 구레나룻을 길렀던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직접 그를 만나기 위해 그레이스랜드 담을 넘다가 제지당했고 그룹 퀸은 엘비스를 안중에 두고 50년대 로큰롤풍의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를 만들었다(로저 테일러의 증언 “처음으로 텔레캐스터와 부기 앰프를 쓴 다소 빈약한 사운드였다. 분명 엘비스를 염두에 두고 만든 곡이었다.”). 마크 알몬드(Mark Almond)의 명쾌한 한마디를 들어보자. “그는 왕이다. 그밖에 다른 코멘트는 일체 필요없다!” 하지만 60년 전역 이후 엘비스는 달라졌다. 매니저였던 톰 파커 퇴역대령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음악방향이 빗나간 것이었다. 예의 로큰롤 넘버와는 거리가 먼 It`s now or never나 Surrender와 같은 감상적인 이탈리아 민요를 영역해 불렀다. 변화(아니면 변신?)의 징조는 프랭크 시내트라 쇼에 출연했을 때 뚜렷이 나타났다. 이 쇼에서 엘비스는 스탠다드 가수의 상징인 턱시도 정장을 했으며 호스트 프랭크 시내트라와 서로의 대표적 히트곡인 ‘Witchcraft’와 ‘Love me tender’를 바꿔 불렀다. 이 시점을 계기로 엘비스가 로큰롤을 버리고 스탠더드 팝 가수로 돌아서 청춘진영을 배신했다는 주장이 고개를 비집는다. 명백한 훼절이라고 단정해도 선뜻 반대논리를 펴기 어렵다. 그러나 친(親)엘비스 측은 그로써 그가 로큰롤 가수에서 ‘국민가수’로 승격하는 의미 있는 업적을 남기게 됐다고 반박한다. 로큰롤만의 논리로 음악을 풀고 엘비스를 규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어떻게 가치판단을 하느냐는 것은 관련자의 이데올로기나 각 시대의 성격에 따를 수밖에 없다. 변절이든 성숙이든 이 점만은 분명하다. 엘비스의 보컬이 초기의 로큰롤가수로 한정되었을 때 과연 후대에의 보컬 영향력을 소지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의 가창력은 음역, 에너지, 통제력, 피치 등 모든 면에서 압권으로 평가되어왔다.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었지만 ‘멀티칼라’인 그의 보이스에는 자니 레이의 급격한 변색, 두왑 그룹인 잉크스파츠(Inkspots) 빌 케니의 테너, 딘 마틴의 솜사탕 그리고 마리오 란자의 풍미가 동거했다. 그러면서도 로이 오비슨과 같은 유니크한 개성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스탠더드 발라드를 소화함으로 해서 우리들은 ‘Are you lonesome tonight’, ‘Suspicion’, ‘In the ghetto’, ‘The wonder of you’, ‘Fool’, ‘My boy’ 등의 팝 고전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명백한 역사의 유산이다. 그가 없었다면 성악가나 스탠더드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만을 접했을 것이고 로큰롤 싱어가 선사하는 발라드의 진미(珍味)를 영원히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공존공영 가능성을 그처럼 실감나게 시범한 가수도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이미 흑인감성의 전달로 로큰롤이 ‘흑백의 퓨전’임을 목소리 하나로 입증한 그는 이어서 역시 매직 보컬로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제휴를 일궈내는 업적을 남겼다. 어쩌면 우리가 70년대 록과 메탈 분야에서 형식을 확립한 이른바 ‘록발라드’라는 것도 그 원조는 엘비스일지도 모른다. 엘비스는 목소리를 통해 대중의 공감대를 전달한 몇 안 되는 가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건조한 보이스와는 거리가 먼, ‘이끼가 잔뜩 낀’ 풍부한 목소리였다. 아마 신나는 로큰롤 ‘Burning love’ 한 곡으로도 충분히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후대 음악팬들이 그의 노래를 듣고 더러 ‘느끼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후반기의 노래 가운데는 그런 요소를 풍기는 곡이 있었다. 하지만 엘비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거기서 느끼함이 아닌 되레 ‘풍성한 감성’을 수혈 받곤 한다. 미트 로프(Meat Loaf)는 말한다. “엘비스는 노래하는 것 무엇이든지 감정적으로 가사로 스피릿을 감상자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희구했던 명성과 부를 얻고 난 뒤 아쉽게도 그것들의 노예가 되는 비극적인 위인이기도 했다. 아무 데도 나갈 수가 없었고 편안히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도 불가능했다. 60년대나 70년대 로커였다면 이런 사실상의 ‘수감생활’을 극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래적 반항아’가 아니었다. 스타덤의 고독과 소외에 차츰 무너져간 그의 말년을 잘 나타내주는 일화는 무수히 많다. 70년대 들어서 조울증이 불거진 그는 때로 격렬해져 텔레비전 세트나 당구대, 주크박스, 자동차 등 가장집기를 부수는 발작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언젠가 D.J. 폰타나와 그의 아내 앞에서 엘비스는 자신의 감정상태를 이렇게 토로했다. “당신들은 운이 좋은 겁니다. 난 엘비스인게 너무 지겨워요! 뭘 해야될 지를 모르겠어요. 뭔가 딴 일을 했으면 제발 한이 없겠어요.” 고고음악의 대명사인 자니 리버스의 해석. “엘비스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었지요. 그래야만 했을 겁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그 밖의 다른 일이란 없었지요.” 엘비스만큼 화려한 명성과 처절한 고독이라는 양극단을 겪은(아니면 겪기로 강제된)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영욕의 교차요, 희비의 쌍곡선이다. 그래서 그를 통해 우리는 슈퍼스타덤의 빛 외에 냉혹함과 잔인성이라는 그림자를 동시 확인한다. 그의 사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심장마비로 발표되었지만 사후 마약중독 비만증 그리고 자살 등 정황에 근거한 갖가지 설들이 난무했다. 이는 그의 후반기 삶이 얼마나 철저히 비공개로 갇혀 있었는지를 반증한다. 스스로 창조한 혁명에 쓰러진 순종파 가수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비평에 의해 그의 역사적 위상이 훼손되는 일은 없다. 여전히 그는 만인이 공감하는 ‘킹 오브 로큰롤’이며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금세기 최고 가수’다. 비틀스가 그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한마디로 모든 엘비스의 가치는 입증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오류로 더러 지적되지만 비평가 고(故) 레스터 뱅스(Lester Bangs)의 엘비스 예찬은 되새길 가치가 있다. “우리는 엘비스에게 해준 것과 같은 동의를 앞으로 어떤 누구에게도 해주지 않을 것이다!”
멤버 : 케이티 화이트(Katie White), 쥴스 드 마티노(Jules De Martino) 2006년 맨체스터에서 결성된 이 혼성 2인조 일렉트로-팝 유닛은 3인조 걸그룹 Tko 출신의 케이티 화이트(Katie White)와 TKO에게 네 곡을 써준 송라이터 쥴스 드 마티노(Jules De Martino)에 의해 결성됐다. 결성 이후 네번째 라이브에서는 업계 관계자들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뤘고, 다섯번째... 멤버 : 케이티 화이트(Katie White), 쥴스 드 마티노(Jules De Martino)

2006년 맨체스터에서 결성된 이 혼성 2인조 일렉트로-팝 유닛은 3인조 걸그룹 Tko 출신의 케이티 화이트(Katie White)와 TKO에게 네 곡을 써준 송라이터 쥴스 드 마티노(Jules De Martino)에 의해 결성됐다. 결성 이후 네번째 라이브에서는 업계 관계자들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뤘고, 다섯번째 공연을 2007년도 글래스톤베리(Glastonbury) 페스티발에서 치루며 급성장을 보인다. 2008년 3월 재발매된 [Great Dj]의 싱글은 Nme '이주의 트랙'으로 랭크됐고, 두번째 싱글 [That's Not My Name]은 Uk 싱글차트 첫 등장 1위를 기록하면서 급속도로 수순을 밟아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5월 13일에 발매된 데뷔작 [We Started Nothing]은 Uk 앨범차트 1위로 데뷔하면서 이 기세를 이어간다. 이들은 이렇게 순식간에 슈퍼스타가 됐다. 'Shut Up And Let Me Go'의 경우 아이팟/아이튠즈 CM으로 사용되면서 전세계 젊은 층들에게 각인되기도 했고, 각종 TV 토크쇼와 드라마 삽입곡으로도 이들의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데뷔앨범 발매 이전부터 화제를 모으다가 뚜껑이 열리고 나서는 거의 전세계를 한번 들었다가 놓았다. TV CF나 라디오 시그널로는 물론, 국내경우, [슈퍼스타 K]에 출연했던 어느 밴드가 이들의 곡 'Shut Up And Let Me Go'를 부르면서 다시금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 펜타포트 록 페스티발을 통해 국내에도 다녀가면서 눈도장까지 확실하게 찍었다.
노래 : Des'ree (데즈리 ,Desiree Annette Weeks)
소울, R&B 보컬 소울, R&B 보컬
R&B, 소울 가수 R&B, 소울 가수
2002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핵심부문인 ‘올해의 곡’(Song of the year)과 ‘최우수신인’상을 포함해 ‘여성 R&B 보컬’ ‘R&B 앨범’ ‘R&B 송’ 등 5개 부문을 석권한 앨리샤 키스(Alicia Keys)는 뉴 밀레니엄 초반의 R&B 음악양식을 대표하는 가수라고 할 수 있다. 어번(Urban) R&B라고 단순 정의할 수 없을 만큼 전통과 현대가 절묘하게 조화된 고유상표의 음악을 들려준다. 귀에... 2002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핵심부문인 ‘올해의 곡’(Song of the year)과 ‘최우수신인’상을 포함해 ‘여성 R&B 보컬’ ‘R&B 앨범’ ‘R&B 송’ 등 5개 부문을 석권한 앨리샤 키스(Alicia Keys)는 뉴 밀레니엄 초반의 R&B 음악양식을 대표하는 가수라고 할 수 있다. 어번(Urban) R&B라고 단순 정의할 수 없을 만큼 전통과 현대가 절묘하게 조화된 고유상표의 음악을 들려준다. 귀에 잘 들리는 피아노 멜로디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가스펠을 연상시키는 소울 식의 고전적 창법이 트레이드마크이며, 이 때문에 1970년대 여성 소울의 거성인 로버타 플랙(Roberta Flack)과 자주 비교되곤 한다. 하지만 재래의 미학만을 고집하는 복고형 R&B라고 하기보다는 거기에다 현대적 힙합 분위기를 삼투한 최신 스타일을 부각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 어반이란 수식어가 붙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를테면 과거 블루스와 재즈에 뿌리를 둔 음악을 현대적 창구로 전달하는 셈인데 실제로 피아노의 선율, 1970년대 풍의 소울 창법, 세련된 힙합 분위기가 어울린 그녀의 ‘모던한’ 데뷔 앨범 [Songs In A Minor]는 2001년에 발표되어 화려히 인기차트를 누볐다. 미국 뉴욕 토박이로 1982년에 태어난 앨리샤 키스는 어렸을 적부터 음악을 자신의 미래분야로 삼아 맨하탄의 퍼포먼스 아트 스쿨(Performance Art School)에서 합창을 훈련했고 10대 내내 피아노교습에 열중한다. 이 합창과 피아노는 훗날 데뷔 앨범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아울러 피아노 외의 다른 악기 연주는 물론, 작곡 편곡 등 음악작업 전반에 걸친 실력과 감각을 쌓았다. 고교를 졸업한 16살에 명문 콜롬비아 대학에 입학했지만 음악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학업을 도중 포기했고 대신 1998년 명문 레코드사인 아리스타(Arista)와 계약을 체결한다. 아리스타 사장이었던 클라이브 데이비스(Clive Davis)에 의해 픽업된 관계로, 그가 1999년 아리스타를 떠나 새로운 레이블 제이(J)를 출범시키자 앨리샤도 그를 따라 제이 레코드사로 적을 옮기게 된다. 19살이던 2001년 데뷔 앨범 [Songs In A Minor]이 발표되었고 이 음반은 데뷔와 동시에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을 밟는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다. 특히 자신이 프로듀스한 첫 싱글 ‘Fallin’’은 전미차트 2주간 1위를 차지했다. 그녀의 각별한 신구(新舊)결합형 음악은 시장 뿐 아니라 마침내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 그리고 그래미상이라는 공인 절차마저 거뜬히 통과했다.
1990년대 ‘걸 그룹 붐’의 한복판에 서있던 TLC는 음악은 물론이고 신선한 발상의 전환이 돋보이는 여성 트리오다. 톡톡 튀는 힙합과 말랑말랑한 팝이 절묘하게 녹아든 이들의 음악은 팝계 최고의 남성 작곡가와 프로듀서의 작품이다. 하지만 이들은 결코 만만하게 그 남성들, 또 그들이 지배하는 사회의 종속물로 흡수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같은 남성들을 마음껏 비웃으며 자유자재로 요리하는 것이 바로 TLC의 스타일이다... 1990년대 ‘걸 그룹 붐’의 한복판에 서있던 TLC는 음악은 물론이고 신선한 발상의 전환이 돋보이는 여성 트리오다. 톡톡 튀는 힙합과 말랑말랑한 팝이 절묘하게 녹아든 이들의 음악은 팝계 최고의 남성 작곡가와 프로듀서의 작품이다. 하지만 이들은 결코 만만하게 그 남성들, 또 그들이 지배하는 사회의 종속물로 흡수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같은 남성들을 마음껏 비웃으며 자유자재로 요리하는 것이 바로 TLC의 스타일이다. 남성들과 동등해질 여성들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는 그 구도 자체를 허무는 것이며 차라리 그 구도를 역전시키는 것이었다. 솔트 앤 페파나 엔 보그 같은 선배 여성그룹들에게 영향받았을 법한 이들의 자유분방하고 솔직한 태도는 이미 페미니즘이나 성 담론의 차원을 넘어선다. 천방지축 장난기 어린 모습으로 등장했던 데뷔시절부터 성숙한 여인의 모습을 지나 사이버 여전사의 모습으로 변신한 최근까지 이들의 남성 상은 한결같다. 이들에게 남성은 즐거움의 상대인 동시에 언제나 계도대상이며 한 수 아래인 존재다. 데뷔앨범 이 전하는 메시지는 바람기 많은 남자친구를 다루는 방법이며, 2집의 히트곡 ‘Creep’은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한 남자에게 여자의 한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곡이다. 또 3집의 히트곡 ‘No scrubs’는 여자에게 의존해 사는 찰거머리 같은 남자를 차버린다는 가사를 담았다. 남자들 입장에서 본다면 내심 가슴 떨리는 내용들이다. 이러한 가치전복(?)적 마인드가 담긴 ‘여성찬가’는 그러나 그리 과격하지 않은 형태로 전달된다. 재미있는 상상력으로 접근하는 TLC의 메시지는 섹시하고 사랑스럽게 들린다. 그만큼 이들의 음악은 거부감 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이것이 남들과 구별되는 이들만의 뛰어난 능력이다. 비록 그것이 치밀한 계산의 산물일지라도 발상이 새로운 이들의 메시지와 남들이 다 속을 정도로 완벽한 이들의 모습은 분명 감탄할 만한 의미를 지닌다. 티 보즈(T-Boz), 레프트 아이(Left Eye), 칠리(Chilli)로 이뤄진 TLC는 1991년 미국의 애틀랜타에서 결성되었다. R&B 여성 가수 페블스(Pebbles)에 의해 발탁된 이들은 댈러스 오스틴과 베이비페이스의 레코드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1992년 데뷔작 을 발표했다. 넝마 같은 힙합 바지를 입은 장난꾸러기 모습으로 데뷔한 이들은 급속도로 팝 음악계를 잠식했다. 수록곡 ‘Ain`t 2 proud 2 beg’(6위), ‘Baby-baby-baby’(2위), ‘What about your friend’(7위)가 연이어 싱글차트를 휩쓸며 ‘여성의 즐거움’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어 1994년에는 2집 이 발매되었다. 개구쟁이 소녀에서 깔끔한 숙녀로 변모한 이들은 관능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며 전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성공을 맛봤다. 힙합과 팝, 소울이 가미된 이 앨범은 3곡이나 정상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고, 그래미상, 빌보드 어워즈, MTV 어워즈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1천만 장이 넘게 팔린 그 앨범은 또한 지난 세기에 가장 많이 팔린 힙합 앨범으로 선정되었다. 이들은 공연패션으로 콘돔의상을 입고 나와 충격을 주는 등 남다른 상상력을 이어갔다. 그 같은 성공 여파로 이들은 이후 장기간 휴지기에 들어가서 해체 의혹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1999년 3집 을 출시하며 팬들에게 복귀했다. 전작들과 음악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관록의 TLC답게 일정수준 이상의 노래들을 선보였다. 오랜 공백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싱글 ‘No scrubs’와 ‘Unpretty’를 차트정상에 등극시키며 저력을 과시했다. 사이버 시대답게 앨범 커버와 외모를 사이버 패션으로 장식해서 이목을 끌기도 했다. TLC는 완벽한 팝 사운드와 넘치는 끼로 여성그룹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 비록 그 성공의 절반은 LA 리드&베이비페이스, 지미 잼&테리 루이스, 저메인 듀프리, 댈라스 오스틴 같은 막강 프로듀서들의 몫이지만 TLC의 눈부신 활약은 그 절반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다. 적어도 마초적 남성사회에게 구속되지 않고 오히려 역습하는 이들의 재기는 분명 그들 자신의 공로다.
노래 : Chris Brown (크리스 브라운)
조지 마이클이라는 걸출한 팝 스타를 배출한 팝 듀오 왬(Wham!)은 80년대 팝 역사에서 빼놓아서는 안 될 중요한 그룹이다. 소울 음악과 결합된 즐겁고 흥겨운 팝 댄스를 들려줬던 이들은 80년대 특유의 ‘가벼움’을 관통함으로써 80년대 팝의 중흥기를 이끌었으며, 수많은 여성 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또한 이들은 사실상 90년대에 들어 맹위를 떨친 보이밴드의 효시였다. 잘 생긴 외모와 수준급 가창력, 거기... 조지 마이클이라는 걸출한 팝 스타를 배출한 팝 듀오 왬(Wham!)은 80년대 팝 역사에서 빼놓아서는 안 될 중요한 그룹이다. 소울 음악과 결합된 즐겁고 흥겨운 팝 댄스를 들려줬던 이들은 80년대 특유의 ‘가벼움’을 관통함으로써 80년대 팝의 중흥기를 이끌었으며, 수많은 여성 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또한 이들은 사실상 90년대에 들어 맹위를 떨친 보이밴드의 효시였다. 잘 생긴 외모와 수준급 가창력, 거기에 경쾌한 댄스 팝과 매혹적인 발라드 등 현 보이밴드의 전형이랄 수 있는 특질을 이미 80년대 초반에 확립해, 전부 보여줬기 때문이다. 1981년, 왬은 ‘나이트클럽 광’이었던 조지 마이클과 그의 친구 앤드류 리즐리에 의해 탄생되었다. 조지 마이클이 작곡과 작사, 보컬, 제작 등 음악에 관한 한 모든 걸 담당했고, 앤드류 리즐리는 그룹의 스타일과 이미지, 비주얼 등 외적인 측면에만 힘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팀 해산할 때까지 자주 앤드류 리즐리의 역할 부재론이 거론되기도 했다(그렇지만 그룹의 방향성은 앤드류 리즐리가 결정했던 만큼 역할이 아주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꽝!’이란 의미의 그룹이름과 이미지는 앤디 워홀과 더불어 팝 아트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주로 미국의 대중적인 만화를 주제로 매스미디어를 묘사한 바 있는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에서 따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우정을 쌓아온 이 둘은 1979년, 이그제큐티브(Executive)라는 스카 밴드활동을 하면서 음악여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곧 밴드가 해산되고 향후 약 2년간 작곡과 홈메이킹 데모 테이프를 녹음하는 등 수련과정에 들어간다. 당시 작곡한 곡 중에는 나중 메가히트를 기록하는 ‘Careless whisper’와 ‘Club tropicana’가 있었다. 몇 번의 오디션 끝에 1982년, 댄스 레이블 < 이너비전 >(Innervision)과 계약을 체결한 왬은 데뷔싱글 ‘Wham rap!’을 발표했지만 영국차트 100위권에도 못 오르는 실패를 맛봤다. 그러나 그 해 10월에 내놓은 두 번째 싱글 ‘Young guns(go for it)’은 BBC 방송국의 프로그램 < 탑 오브 더 팝스 >(TOTP)에서의 인상적인 댄스 공연으로 차트 3위로 도약했다. 1983년 6월 9일, 팝 댄스로 가득 찬 이들의 데뷔앨범 < Fantastic >이 발매되었고, 이 앨범은 곧장 영국차트 1위를 기록했다. 한편 조지 마이클은 이미 이때부터 독자적인 행보를 걷기 시작한다. 같은 해 8월 그는 미국의 머슬 쇼울스(Muscle Shoals) 스튜디오에서 전설적인 프로듀서 제리 웩슬러와 함께 ‘Careless whisper’를 녹음했다(하지만 별로 성공적이지 않았고 나중에 런던에서 재녹음되어 나중에 출시된다). 1984년부터 왬의 센세이션이 일어났고, 동시에 그들의 히트 퍼레이드가 시작된다. 침대 맡에 적어놓았던 앤드류 리즐리의 노트에서 영감을 얻어 조지 마이클이 만든 ‘Wake me up before you go go’는 영국차트는 물론 미국차트에서도 정상을 차지했다. 수년간 공력을 들인 발라드 ‘Careless whisper’도 3주간 영국차트 넘버원을 지켰다. 이듬해에는 미국차트에서도 역시 3주간 1위를 기록했다. 조지 마이클이 자신의 부모님께 바친 이 싱글의 미국판 크레딧에는 ‘조지 마이클이 피처링한 왬의 곡’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앤드류 리즐리가 두 번째 앨범을 구상하는 동안, 조지 마이클은 다른 음악인들과도 활발한 교류를 했고, 엘튼 존과의 파트너십도 쌓기 시작했다. 12월에는 밴드 에이드의 난민 구호곡 ‘Do they know it''s christmas time?’ 녹음에도 참여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곡 때문에 그들의 크리스마스송 ‘Last christmas’가 차트 2위에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이듬해인 1985년 3월에는 서포모어 앨범 < Make It Big >이 출시되었고, 그 앨범은 제목대로 미국에서만 5백만 장이 팔리는 ‘빅 히트’를 기록했다. 당해 4월 왬은 서구 팝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주인공이 되었다. 그들은 1만여명이 운집한 중국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공연함으로써 ‘중국에서 공연한 최초의 서방 그룹’으로 기록되었다. 계속해서 조지 마이클은 라이브 에이드 행사에서 엘튼 존과 듀엣으로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를 불렀고, 또 엘튼 존의 싱글 ‘Nikita’에서 백업보컬을 담당하는 등 확실하게 솔로활동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결국 조지 마이클과 앤드류 리즐리는 여전히 친한 사이였지만 서로를 위해 1986년 왬을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1986년 4월 발매된 조지 마이클의 두 번째 솔로 싱글 ‘A different corner’는 공식적으로 밴드의 종말을 알리는 곡이었다. 같은 해 6월 윔블던 스타디움에 모인 7만2천명의 관객 앞에서 행한 마지막 콘서트 ‘The Final’을 끝으로 왬은 해산되었다. 왬 이후 조지 마이클은 < Faith >를 시작으로 솔로가수로서 놀랄만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반면 앤드류 리즐리는 < Son Of Albert >를 발표했지만 ‘Shake’라는 희미한 히트곡만 남겼을 뿐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왬의 음악을 담당했던 조지 마이클이 성공을 거두고, 음악적으로는 아무런 역할도 못했던 앤드류 리즐리가 실패한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렇지만 추억 속에 남아있던 앤드류 리즐리의 아름다운 매력이 솔로활동의 참담한 실패로 그나마 퇴색해버린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어쨌거나 왬은 80년대를 살아왔던 음악팬들에게는 아련한 기억으로, 또 아쉬움으로 존재하는 그런 그룹이다.
노래 : The Script (더 스크립트)
노래 : Chantal Kreviazuk (샨탈 크레비아주크)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 토니 브랙스톤(Toni Braxton) 등과 함께 1990년대 중 후반의 팝 시장을 천하 삼분했던 셀린 디온(Celine Dion)은 디바(diva)의 정점을 대표하는 여가수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 머라이어 캐리에게 밀려 만년 2등 가수의 한을 삭였던 그녀는 영화 < 타이타닉 >의 테마송인 ‘My heart will go on’을 통해 단숨에 넘버원 팝 싱어의 반열에 ...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 토니 브랙스톤(Toni Braxton) 등과 함께 1990년대 중 후반의 팝 시장을 천하 삼분했던 셀린 디온(Celine Dion)은 디바(diva)의 정점을 대표하는 여가수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 머라이어 캐리에게 밀려 만년 2등 가수의 한을 삭였던 그녀는 영화 < 타이타닉 >의 테마송인 ‘My heart will go on’을 통해 단숨에 넘버원 팝 싱어의 반열에 올랐다. 캐나다에서 유일하게 불어를 쓰는 퀘벡 지방의 작은 집에서 1968년 첫 울음보를 터트린 셀린 디온. 그녀는 합계가 무려 16명인 대식구의 막내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또한 부모님 모두 노동자 출신이었기에 물질적으로 그다지 풍요롭지 못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부모님의 우산 아래 셀린 디온의 음악적 재능은 어린 시절부터 싹을 맘껏 틔웠다. 5살 때부터 부모님의 피아노 바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12살 때에는 ‘It was only a dream’이라는 최초의 자작곡을 썼다는 등의 후일담들이 잘 증명해준다. 오빠와 어머니의 전폭적 지원 하에 상기한 곡을 테이프화(化)했던 셀린 디온. 그녀는 그것을 매니저인 르네 앤젤릴(Rene Angelil)에게 보낸 뒤, 답변을 기다렸지만 묵묵 부답이었다. 허나 독촉 전화를 받고 그제서야 셀린 디온의 숨은 재능을 발견한 르네 앤젤릴은 그 날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고 그녀는 정식 데뷔 코스를 밟기 시작했다.(셀린 디온의 노래를 직접 들은 순간, 르네 앤젤릴은 그녀가 곧 인터내셔널 슈퍼 스타가 될 것임을 확신했다고 한다.) 1983년 15살의 나이에 발표했던 음반 < D’Amour Ou D’Amite >을 통해 캐나다 출신 아티스트로는 최초로 프랑스에서 골드 레코드를 기록하고 일본에서 개최되었던 야마하 작곡 대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하는 등, 이후 셀린 디온의 행보는 거칠 것 없는 탄탄대로였다. 또한 그녀는 그 즈음 조우했던 베테랑 프로듀서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와의 인연 덕에 걸프 전 참전 용사들을 위한 기획 앨범 < Voices That Care >에 참여, 수많은 팝 필드의 거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미국 시장 진출이라는 ‘좁은 문’뿐인 듯 보였다. 이를 위해 그녀는 우선 음악 외적인 면에서 파격적 변신을 단행했다. 팝 계의 별이 되기 위해서는 음악만큼이나 이미지 메이킹 또한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 동시에 셀린 디온은 영국의 랭귀지 스쿨에서 언어 교육을 받으며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춰나갔다. 어느새 그녀는 틴에이저에서 성숙미를 내뿜는 여인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피드백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1990년에 발매했던 처녀작 < Unison >(74위)이 각각 빌보드 싱글 차트 35위와 4위를 기록한 ‘If there was (any other way)’와 ‘Why does my heart beat now’의 선전에 힘입어 꽤 괜찮은 성적표를 받았던 것. 허나 정작 그녀를 꼭지점으로 견인했던 곡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테마였던 ‘Beauty and the beast’였다. 차트 1위를 단박에 꿰찬 곡은 그녀에게 1992년 그래미의 팝 듀오/그룹 부문 트로피를 안겨주며 이후의 성공 시대를 예감케 했다. 또한 2집 앨범인 < Celine Dion >(1992)에도 수록되어 소포모어 징크스를 깨부수는데 일등 공신의 역할을 해주었다. 곡 외에 다이안 워렌(Diane Warren) 작곡의 ‘If you asked me to’(4위), ‘Nothing broken but my heart’(29위), ‘Love can move mountains’(36위) 등이 팬들의 애정 공세를 한 몸에 받았다. 같은 해에 내놓았던 영화 <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의 주제곡인 ‘When I fall in love’(23위) 역시 대박이었다. 2년 뒤인 1994년에는 셀린 디온의 인생에 있어 중대한 터닝 포인트가 찾아왔다. 매니저였던 르네 앤젤릴과의 결혼이 바로 그것. 1988년부터 비밀리에 연인 관계를 유지해왔던 둘은 6년 뒤인 1994년에야 그 사실을 발표하고 몬트리올의 노틀담 성당에서 결혼, 세간을 놀라움 속에 빠뜨렸다. 정확이 배가 되는 나이차도 화제거리를 양산하기에 충분했다.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은 덕분인지 셀린 디온의 정상을 향한 질주는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5년 간, 무려 6장의 앨범을 녹음했다는 사실이 주는 양적 포만감부터가 남달랐다. 1993년의 < Colour of My Love >(4위)가 첫 테이프를 끊으며 제니퍼 러시(Jennifer Rush)의 곡을 리메이크한 ‘The power of love’(4주간 1위), 그리고 ‘Misled’(23위) 등의 히트 넘버들을 배출했다. 1994년과 1995년에 셀린 디온은 두 장의 불어 LP를 내놓으며 음악적 본령을 되새김질하는 기회를 가졌다. 제베타 스틸(Jevetta Steele)의 팝 클래식인 ‘Calling you’를 수록한 < Live A L’olympia >와 장자크 골드만이 프로듀스해준 < D’eux >이었다. 특히 후자는 지금까지 800만장을 세일즈, 가장 많이 팔린 샹송 작품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절정의 순간은 단연코 1996년의 팝 마스터피스 < Falling Into You >였다. 현재까지 미국 내에서만 집계된 판매량이 1100만장인 작품은 그 해 그래미에서 ‘팝 앨범’과 ‘올해의 앨범’, 두 개 부문을 석권하며 엄청난 위세를 떨쳤다. < 업 클로즈 앤 퍼스널 >의 테마송이자 다이안 워렌이 써 준 ‘Because you loved me’(1위)를 위시로 팝 고전을 다시 부른 ‘All by myself’(4위), ‘It’s all coming back to me mow’(2위) 등이 차트에 핵 폭탄을 마구 투하했다. 어디 이 뿐이겠는가. 같은 해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이 감독한 블록버스터 무비 [타이타닉]의 주제곡 ‘My heart will go on’(14주 연속 1위)은 더했다. 또 다시 그래미 두 개상을 차지하는 등, ‘셀린 디온을 모르면 간첩’일 정도의 상황을 연출했다. 곡이 수록된 1997년의 앨범 < Let’s Talk About Love >(1위)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 두 음반의 합산 판매고가 무려 6000만장을 상회했다. 이 시기를 전후해 그녀는 실로 당대에 무적, 팝 계 최고의 디바 자리에 우뚝 섰다. 그간 참여했던 뮤지션들을 포함해 새로 가세한 조지 마틴(George Martin), 비지스(The Bee Gees), 캐롤 킹(Carole King),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 등, 후자에 참여한 초특급 아티스트들의 면면만 살펴봐도 당시 그녀의 입김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를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이후 셀린 디온은 크리스마스 스페셜 반인 < These Are Special Times >(1998, 2위)와 샹송 앨범 < S’il Suffisatt D’aimer >(1998)를 선보이고 베스트 컬렉션인 < All The Way: A Decade of Song >(1999, 1위)을 내놓는 등,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남편의 후두암 투병이라는 절망적 사건이 발발한 때도 이 즈음이었다. 비극이 종결되고 셀린 디온에게 행복이 찾아왔던 때는 2001년이었다. 체외 수정에 성공하며 그토록 소망했던 아이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남편의 증세도 나날이 호전되는 등, 셀린 디온이 가정에서 본업으로 컴백할 기운이 날로 충만해져 갔다. 그리고 2002년, 무려 5년 만에 출시했던 정규작 < A New Day Has Come >은 그녀의 디스코그라피 중 최초로 발매 첫 주에 정상에 등극하며 변함없는 팬 베이스를 과시했다. 허나 뒷심 부족을 드러내며 전성기 시절에는 많이 못 미치는 결과를 얻고 말았다. 현재 셀린 디온은 1년 만에 신작 < One Heart >를 내놓으며 팬들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2003/04 배순탁(greattak@izm.co.kr) 오이뮤직 머라이어 캐리가 있고 휘트니 휴스턴이 있지만 이들 못지 않게 지난 9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가수가 셀린 디온(Celine Dion)이다. 흔히들 이들을 오페라의 주역가수에서 나온 말로 최고 인기의 여가수를 의미하는 어휘인 디바(diva)로 일컫는다. 휘트니 휴스턴과 머라이어 캐리가 팝 음악계의 디바 시대를 이끌었다면 셀린 디온은 디바 시대의 정점에 선 여가수라고 할 수 있다. 셀린 디온은 같은 음반회사 소니 뮤직에 소속된 머라이어 캐리에 밀려 90년대 중반까지 만년 2등 가수였다. 하지만 셀린 디온이 부른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곡 ‘나의 마음은 영원할 거예요(My heart will go on)’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그 동안 명실상부한 공동 1위였던 머라이어 캐리와 휘트니 휴스턴이 모두 셀린 디온의 밑으로 내려앉고 말았으며 급기야 ‘셀린 디온 격파’를 외치며 함께 듀엣 곡을 내놓는 공동 대항전선을 펴기도 했다. 근래 셀린 디온의 위풍당당한 기세를 이보다 잘 말해주는 단서도 없을 것이다. 1998년 연말호에서 영국의 잡지 ‘Q’는 소니 뮤직의 통계를 빌어 “지난 30개월 동안 셀린 디온은 매 1.2초마다 한 장의 앨범을 팔았다”고 보도했다. 96년 발표한 앨범 < 너에게 빠져 (Falling into you) >가 그때까지 세계적으로 2500만장, 97년 말에 나온 후속 앨범 < 사랑을 얘기합시다(Let`s talk about love) >가 2400만장이라는 경이적 판매고를 수립한 것을 두고 시간당 수치를 계산한 것이다. ‘1초당 한 장’의 파죽지세는 이후에도 변함없어 현재 두 앨범은 모두 3000만장을 돌파했으며 이어서 프랑스어 앨범과 히트곡 모음집도 날개돋친 듯 팔리고 있다. 셀린 디온이 이처럼 가공할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노래를 잘하기 때문’이다. 참 단순한 설명이지만 가장 확실한 분석이다. 일례로 셀린 디온의 히트송 ‘이제 모두 나한테 되돌아오네요(It`s all coming back to me now)’를 들어보면 왜 때로 ‘질릴 정도로 노래를 잘한다’는 평을 듣는지 알게 된다. 셀린 디온은 엄청난 보컬의 파괴력이 주무기이다. 쉬지도 않고 20곡을 내리 한결같이 높은 음으로 질러대는 놀라운 힘을 보유하고 있다. 가창력이 뛰어난 다른 여가수들과 바로 이 점에서 다르다. 머라이어 캐리나 휘트니 휴스턴의 무대는 정적이고 우아한데 반해서 셀린 디온의 공연은 열띠고 힘이 넘친다. 공연장은 그래서 어떤 헤비메탈 그룹의 무대 못지 않은 열광의 도가니를 연출한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감상하더라도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만끽한다. 한마디로 시원하다. 이런 에너지와 파워 말고도 그녀를 당대 톱 가수로 부상시켜준 또 하나 원동력이 있다면 그것은 가사 해석이 아주 자연스럽다는 점이다. 결코 억지로 질러대지 않는다.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미리 짜놓은 적은 없다. 노래 부르기란 기본적으로 첫 키스나 첫 사랑을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키스나 포옹할 때 미리 리허설하는 사람이 있는가? 또 어떤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치르는가?” 마치 실제처럼 가사의 감정을 충분히 살리되 정해진 공식대로 노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셀린 디온은 철저히 백인 풍의 노래를 부른다는 점에서도 딴 가수와 차별화된다. 머라이어나 휘트니를 비롯해서 근래 디바들 노래는 흑인이건 백인이건 흑인음악 즉 리듬 앤 블루스의 느낌이 녹아있다. 하지만 셀린 디온은 그러한 공통분모를 배격하고 철저히 백인 스탠더드 팝을 구사한다. 여전히 흑인음악이 친근감이 덜 한 유럽의 기성세대 음악팬들이 이 때문에 셀린 디온에게 열광한다. 캐나다 퀘벡 태생인 그녀는 캐나다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가수이기도 하다. 캐나다 음반산업협회는 올해 초 셀린 디온이 지난 한 세기에 걸쳐 국내와 국외에서 가장 음반을 많이 판 캐나다가수라고 공식 발표했다. 1999년 말 캐나다의 음반판매고는 9백만장으로 어떤 캐나다가수보다 많았으며 해외에서는 1억1천장을 넘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다. 근래 최고인 샤니아 트웨인과 브라이언 아담스도 그녀에게는 역부족인 것으로 나타났다. 캐나다는 물론 특히 퀘벡과 같은 문화권인 프랑스도 셀린 디온을 ‘국민가수’ 또는 ‘국보급 가수’로 떠받든다. 프랑스 팬들에게 인기는 거의 절대적이어서 프랑스정부가 수여하는 문화훈장을 이미 두 차례나 받았다. 셀린 디온도 이를 의식해 정기적으로 불어음반을 발표하고 있다. 셀린 디온의 지난 94년 말 결혼은 특급화제였다. 1968년 생으로 스물 여섯이던 그 해 그녀는 정확히 나이가 배인 52세의 매니저 레니 안젤리와 몬트리올 노틀담 성당에서 웨딩 마치를 거행했다. 어렵던 시절 자기 집까지 저당 잡혀가며 셀린의 음반작업을 주선한 매니저와 결혼하자 사람들은 사랑의 결실임을 인정하면서도 요즘 가수치고는 드물게 ‘의리형’ 인물이라고 셀린 디온을 높이 평가했다. 너무도 바쁜 스케줄로 가정생활에 여유가 없는 관계로 아직 레니와의 사이에 자식 소식은 없다. 남편이 나이가 많은 탓인지 더욱이 사람들은 언제 그녀가 아기를 가질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다. 얼마 전 타블로이드 신문 ‘내셔녈 인콰이어러’는 “셀린이 체외수정을 통해 현재 쌍둥이를 임신했다”고 보도했지만 셀린 디온 측은 이를 완강히 부인하며 그 신문에 대해 2천만달러의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셀린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여가수임을 웅변하는 에피소드들이다. 지난 91년 ‘지금 내 심장이 어디서 두근거리나요(Where does my heart beat now)’를 차트 상위권에 올려놓은 이래 무수한 히트퍼레이드를 펼치며 그녀는 ‘90년대의 가수’로 영광의 나날들을 보냈다. 휴식 후 내후년에 신보가 나오게 되면 다시 광풍을 몰아칠 것이 확실시된다. 현재진형형이라 실감은 나지 않지만 분명 셀린 디온은 ‘살아있는 전설’이다.
호주의 듀오 새비지 가든(Savage Garden)의 성공담이 반복되고 있다. 에어 서플라이 이후 최고의 호주출신 팝 스타로 평가받는 이들은 새해 들어 또 다시 신곡 ''I Knew I Loved You''로 팝 천하를 평정했다. 전형적인 발라드인 이 곡은 지난해 발표됐을 때 산타나 ''Smooth''의 장기집권을 저지할 유력한 후보 곡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10대 소녀 선풍의 주역인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 호주의 듀오 새비지 가든(Savage Garden)의 성공담이 반복되고 있다. 에어 서플라이 이후 최고의 호주출신 팝 스타로 평가받는 이들은 새해 들어 또 다시 신곡 ''I Knew I Loved You''로 팝 천하를 평정했다. 전형적인 발라드인 이 곡은 지난해 발표됐을 때 산타나 ''Smooth''의 장기집권을 저지할 유력한 후보 곡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10대 소녀 선풍의 주역인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What A Girl Wants''에 밀려 정상 문턱에 주저앉는가 싶더니 기어코 금주 빌보드 1위에 올랐다. 작곡하고 노래하는 대런 헤이즈와 악기편곡 담당 다니엘 존스로 이뤄진 새비지 가든은 1998년 ''Truly, Madly, Deeply''로 이미 차트 정상을 정복한 바 있다. 이 곡이 수록된 데뷔 앨범은 전세계적으로 1100만장이라는 가공할 판매고를 수립했다. 하지만 불확실한 팝 음악계의 생리상 아무도 두 번의 성공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 반짝 그룹으로 전락한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그들은 이번에 빅히트를 재현하면서 사슬과도 같은 ''2집 앨범 징크스''를 떨쳐낸 동시에 히트 메이커로서 롱런할 가능성을 열었다. 두 번째 앨범 ''Affirmation'' 역시 전작처럼 단번에 귀를 잠식하는 전염성 높은 멜로디 감각과 고급스런 편곡이 돋보인다. 머라이어 캐리를 슈퍼스타로 비상시킨 프로듀서 월터 아파나시예프의 도움도 컸다. 음반은 빌보드지로부터 "여기에 히트가 안될 곡은 하나도 없다"는 평을 받았다. 빠른 템포의 곡도 좋지만 ''I Knew I Loved You''와 함께 ''Hold Me'' ''Two Beds And A Coffee Machine'' 등 특허인 발라드들이 더 인상적이다. 그들이 에어 서플라이를 능가할 호주 팝 스타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 같다.
노래 : Boz Scaggs (보즈 스칵스)
보즈 스캑스(Boz Scaggs)는 1970년대에 빌리 조엘(Billy Joel)과 함께 쓸쓸하고 고독한 도시의 삶을 음악으로 표현한 소위 ‘시티 뮤직’이란 스타일을 정의한 남성 송라이터로 국내에선 리타 쿨리지(Rita Coolidge)의 리메이크 버전으로 유명한 ‘We’re all alone’의 오리지널 가수다. 그의 음악은 고가의 양복을 입은 남성이 벽난로가 있는 고층 아파트에서 와인을 마시며 화려한 야경을 ... 보즈 스캑스(Boz Scaggs)는 1970년대에 빌리 조엘(Billy Joel)과 함께 쓸쓸하고 고독한 도시의 삶을 음악으로 표현한 소위 ‘시티 뮤직’이란 스타일을 정의한 남성 송라이터로 국내에선 리타 쿨리지(Rita Coolidge)의 리메이크 버전으로 유명한 ‘We’re all alone’의 오리지널 가수다. 그의 음악은 고가의 양복을 입은 남성이 벽난로가 있는 고층 아파트에서 와인을 마시며 화려한 야경을 감상하듯 세련되고 멋지지만 그 속에는 그런 인생을 영위하기 위해 포기해야만 했던 가치를 잃고 외로움에 지친 우리들의 삶을 노래한다. 그래서 더 사무치는 감정의 과잉이 느껴진다. 1944년 6월 8일 오하이오 주에서 윌리암 조이스 스캑스(William Joyce Scaggs)로 태어난 보즈 스캑스는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는데 바로 여기서 스티브 밀러(Steve Miller)를 만난다. 음악으로 통한 그는 스티브 밀러와 함께 마스크맨(Maskmen)이란 블루스 스타일의 음악을 추구하는 그룹에서 기타리스트 겸 보컬리스트로 활동하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개인 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다섯 장의 음반이 실패해 오랫동안 마음을 졸인 보즈 스캑스는 토토(Toto)를 결성하게 되는 초일류 세션맨들이 참여한 여섯 번째 솔로앨범 < Silk Degrees >로 드디어 금광을 캤다. 38위까지 오른 첫 싱글 ‘It’s over’를 비롯해 ‘What can I say(42위)’, ‘Lido shuffle(11위)’ 그리고 그의 이름을 한 단계 격상시킨 디스코 명곡 ‘Lowdown’까지 모두 네 곡이 인기 차트에 입성해 대중들과의 접촉에 성공했다. 몇 년 후에 토토의 드러머가 될 제프 포카로(Jeff Porcaro)의 연주와 건반의 데이비드 페이치와 보즈 스캑스가 공동으로 작곡한 ‘Lowdown(3위)’은 그래미에서 최우수 리듬 앤 블루스 노래로 선정되어 그 진가를 인정받았다. 특히 이 음반에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꾸준히 애청되는 ‘We’re all alone’이 수록되어 있지만 싱글로 발표하지 않았다가 여가수 리타 쿨리지(Rita Coolidge)가 리메이크해서 싱글 차트 7위를 차지하는 히트를 기록했다. 인지도가 상승한 보즈 스캑스는 ‘Ghostbusters’로 유명한 흑인 기타리스트 겸 싱어 송라이터인 레이 파커 주니어(Ray Parker Jr.)가 참여한 흥겨운 넘버 ‘Jojo(17위)’와 존 트라볼타와 데보라 윙어가 주연한 영화 < 어반 카우보이 >에 삽입된 발라드 ‘Look what you’ve done to me(14위)’ 그리고 ‘Miss sun(14위)’ 같은 노래들로 1980년대 초반까지 그 인기 곡선을 탔지만 1980년대 후반까지는 자신의 나이트클럽 사업 때문에 음악활동을 접었다. 8년만인 1988년에 정규앨범 < Other Roads >를 발표해 발라드 싱글 ‘Heart of mine(35위)’을 차트에 올린 후 지금까지 아무런 히트 곡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지만 4장의 정규앨범과 무대 활동을 통해 어덜트 컨템포러리 팬들과 함께 자신들의 향수를 공유하고 있다.
노래 : Babyface (베이비 페이스)
‘때로 귀에 거슬리는 오늘의 팝음악에 없는 모든 것을 생각하라. 그러면 베이비 페이스를 떠올릴 것이다.’ 미 시사주간지 < 타임 >은 ‘낭만의 부재’에 시달리는 시대에 그가 낭만으로의 복귀를 지휘하고 있다며 ‘그의 음악은 촛불의 성찬과 빗속에서 키스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찬사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25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혔다. 프로듀서로서 그는 선배와 동료 경쟁자 모두를... ‘때로 귀에 거슬리는 오늘의 팝음악에 없는 모든 것을 생각하라. 그러면 베이비 페이스를 떠올릴 것이다.’ 미 시사주간지 < 타임 >은 ‘낭만의 부재’에 시달리는 시대에 그가 낭만으로의 복귀를 지휘하고 있다며 ‘그의 음악은 촛불의 성찬과 빗속에서 키스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찬사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25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혔다. 프로듀서로서 그는 선배와 동료 경쟁자 모두를 제쳤다. 퀸시 존스, 데이비드 포스터도 그에게 손을 들었고 테디 라일리, R 켈리도 한참 밑이다. 베이비 페이스가 ‘이 시대의 프로듀서’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수로서도 특급. 부드럽고 편한 목소리로 손쉽게 인기차트 상위권을 공략한다. 막 출시된 베이비 페이스의 < MTV 언플러그드 > 앨범은 ‘소프트 팝의 총아’로서의 진면목을 유감 없이 전달해준다. < 뉴스위크 > 최근호도 그를 ‘루더 밴드로스 이후 가장 유명한 R&B의 연인’으로 일컬었다. 다재다능의 결과로서 그가 펼치는 히트 퍼레이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프로듀싱한 앨범의 판매고가 지금까지 8천만장. 10위권에 든 곡만도 자그마치 1백 10곡이며 그중에서 16곡이 차트 1위를 차지했다. 휘트니 휴스턴, 토니 브랙스턴, 보이즈 투 멘 그리고 에릭 클랩턴이 그의 도움아래 스타덤을 만끽하고 있다. 그를 거치지 않고 진정한 스타가 되기는 어렵다는 말도 나온다. 그의 성공비결은 단연 출중한 대중감각에 있다. 대중이 뭘 좋아하는지, 어떤 소리를 원하는지 정확히 안다. 중학생 시절에 이미 이것을 터득했다고 한다. “ 딴 사람의 노래를 연주하면서 대중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난 항상 사람들이 무엇에 감동하는지 예의 주시해왔다.” 대중성 기질을 타고났는데 영화라고 안될 게 없다. 그는 아내 트레이시와 함께 7백만달러를 투자해 영화 < 솔 푸드(Soul Food) >를 만들어 영화제작자로 데뷔했다. 당연히 흥행은 대성공. 개봉 3개월만에 4천만달러를 벌어들였다. 영화 사운드트랙 앨범도 이미 2곡의 톱 10 히트곡을 내면서 2백만장의 판매를 돌파했다. 음악 만드는 것 뿐 아니라 돈버는 재주도 갖춘 그를 보고 미국 연예계 종사자들 모두가 놀라워했다. 케네스 에드먼즈가 본명인 베이비페이스는 어리고 유순한 인상 때문에 ‘아이얼굴(Babyface)’ 란 별명이 붙었다. 이것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강점이다. 만지는 것마다 황금으로 만드는 성공가도에도 불구하고 ’아이얼굴‘답게 그에게는 오만의 흔적이 없다. < 솔 푸드 >의 관객 폭발에 대해서도 ‘영화를 보러 가도록 흥미를 유발하는 대본을 우연히 갖게 됐을 뿐’이라며 “영화든 레코드든 히트를 칠 수 있는 어떤 것을 골라낼 왕도는 없다. 단지 우리는 운이 좋았을 따름이다.”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음반사 라페이스의 사장으로 회사의 자산을 3억달러로 끌어올린 것이 과연 운에 불과할까. 그런 겸허한 언행이 우리를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린다. 지금은 잠시 영화에 한눈을 팔고 있지만 본연의 프로듀서로 돌아와 곧 토니 브랙스턴과 TLC의 새 앨범을 낸다. 이 음반들도 히트는 ‘따논 당상’이다. 라페이스의 자산 규모는 또 올라갈 게 분명하다. 도대체 ‘베이비 페이스 제국’의 끝은 어디일까?
노래 : Westlife (웨스트라이프)
아일랜드 남성 5인조 웨스트라이프는 비슷비슷한 보이밴드들의 범람 속에서도 자신들만의 영역을 굳건히 마련한 그룹이다. 5명의 멤버가 유려한 하모니로 아름다운 발라드 중심의 팝 음악을 들려준다. 이들의 ‘특화’된 발라드는 댄스음악 중심인 여타 보이밴드들과 구별되게 한다. 이들의 차별화 전략은 천편일률적인 댄스음악에 둔감해진 음악팬들에게 신선한 청량제로 작용하고 있다. 영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소녀 팬들의 상당한 지지를... 아일랜드 남성 5인조 웨스트라이프는 비슷비슷한 보이밴드들의 범람 속에서도 자신들만의 영역을 굳건히 마련한 그룹이다. 5명의 멤버가 유려한 하모니로 아름다운 발라드 중심의 팝 음악을 들려준다. 이들의 ‘특화’된 발라드는 댄스음악 중심인 여타 보이밴드들과 구별되게 한다. 이들의 차별화 전략은 천편일률적인 댄스음악에 둔감해진 음악팬들에게 신선한 청량제로 작용하고 있다. 영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소녀 팬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으며 특히 발라드를 선호하는 국내에서는 가히 절대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이러한 인기도는 보이밴드 계의 ‘절대강자’ 백스트리트 보이스나 엔싱크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차트성적도 화려하다. 영국에서 지금껏 이들이 발표한 7장의 싱글은 연거푸 차트정상을 차지했다. 이는 비틀스도 감히 달성하지 못했던 대기록이다. 팬 층을 10대에서 20대 이상까지 끌어올린 결과라 볼 수 있다. 이렇듯 음악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기대치 이상의 성공을 거두고 있는 그룹이 웨스트라이프다. 브라이언 맥파든(Bryan McFadden), 키언 이건(Kian Egan), 마크 필리(Mark Feehily), 니키 번(Nicky Byrne), 셰인 필런(Shane Filan)으로 구성된 웨스트라이프는 원래 3인조로 출발했다. 6인조 그룹으로 활동하던 키언과 마크, 셰인이 보이존의 매니저였던 루이스 월시에 의해 처음 발탁되었다. 월시는 이들을 보이존의 로넌 키팅에게 소개시켜줬고, 곧 이 둘은 매니저가 되어 웨스트라이프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로넌 키팅의 제안으로 브라이언과 니키를 영입해 완전한 라인업을 갖춘 웨스트라이프는 1999년 셀프타이틀 데뷔앨범 [Westlife]을 발표했다. 그해 5월에 발매한 첫 싱글 ‘Swear it again’은 곧바로 차트 1위를 차지했으며, 앞서 말한 대로 이 싱글을 필두로 7장의 싱글이 연속 차트정상에 오른다. 2000년에 내놓은 2집 [Coast To Coast] 역시 차트를 정복하며 소포모어 징크스 없이 히트행진을 이어갔다. 발라드 외에 이들의 또 하나의 특기는 리메이크다. 이 점은 아일랜드의 선배 그룹 보이존과도 닮은꼴인데, 이들은 주옥같은 팝의 명곡들을 웨스트라이프 식으로 재해석해 옛 추억을 자극하고 있다. 익스트림의 ‘More than words’, 필 콜린스의 ‘Against all odds’, 아바의 ‘I have a dream’, 킹스턴 트리오의 원곡으로 테리 잭스가 히트시켰던 ‘Seasons in the sun’을 깔끔하게 재생시켰다. 이들은 수많은 보이밴드들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프로듀서들에 의해 다듬어졌다. 이들의 전담 프로듀서 스티브 맥(Steve Mac)과 웨인 헥터(Wayne Hector) 외에 ‘틴 팝 히트제조기’ 맥스 마틴, 브리트니 스피어스, 엔 싱크에게 곡을 써줬던 라미, 역시 브리트니 앨범에 참여했던 페르 매그누손(Per Magnusson) 등이 웨스트라이프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다. 이처럼 프로듀서에 의존도가 높은 보이밴드의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지만 이들은 거기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해맑은 감성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보이밴드로서 음악팬들에게 더 없는 만족을 주는 웨스트라이프는 충분히 나름의 가치가 있다.
마이클 잭슨 음악 여정은 주지하다시피 1963년 4명의 형들과 함께 결성했던 패밀리 그룹 잭슨 파이브(Jackson 5)로 시작되었다. 5살이라는 어린 나이와 그에 걸맞지 않게 리드 보컬을 맡았던 그는 너무나도 빼어났던 가창력과 귀여운 춤 실력 때문에 언제나 세간의 관심대상이었다. 지방을 중심으로 명성을 쌓아가던 잭슨 파이브와 마이클은 1969년 베리 고디의 모타운 레코드와 계약하면서 본격적으로 팝 음악계에 뛰어... 마이클 잭슨 음악 여정은 주지하다시피 1963년 4명의 형들과 함께 결성했던 패밀리 그룹 잭슨 파이브(Jackson 5)로 시작되었다. 5살이라는 어린 나이와 그에 걸맞지 않게 리드 보컬을 맡았던 그는 너무나도 빼어났던 가창력과 귀여운 춤 실력 때문에 언제나 세간의 관심대상이었다. 지방을 중심으로 명성을 쌓아가던 잭슨 파이브와 마이클은 1969년 베리 고디의 모타운 레코드와 계약하면서 본격적으로 팝 음악계에 뛰어들었다.

첫 넘버 원 싱글 ‘I want you back’에 이어 ‘ABC’ ‘The love you save’ ‘I’ll be there’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2년 간 그룹활동에 전념하던 마이클 잭슨은 1971년 12월 탐라-모타운 레코드와 솔로 계약을 체결했다. 1971년 데뷔곡 ‘Got to be there’를 발표해 싱글차트 4위에 랭크시킨 후 ‘Rockin’ Robin’, ‘Ain’t no sunshine’, ‘Ben’, ‘I wanna be where you are’, 등을 잇따라 히트시키며 솔로와 그룹활동을 성공적으로 병행했다.

마이클 잭슨이 변성기가 지나고 성인으로 접어들자 잭슨 파이브도 점점 퇴색해갔고, 1979년 마이클은 드디어 성인으로서 첫 음반 을 발표했다. 1977년 흑인판 <오즈의 마법사>였던 뮤지컬 영화 <더 위즈(The Wiz)> 사운드트랙을 통해 만났던 퀸시 존스가 앨범의 프로듀서로 동참해 마이클 잭슨의 ‘성인신고작’을 한결 윤택하게 빛냈다.

활기 넘치는 리듬의 펑크(funk)와 디스코, 소울, 그리고 록과 팝, 발라드가 퓨전된 그 음반에는 마이클 잭슨이 작곡한 2곡의 업 템포 댄스넘버 ‘Don’t stop till you get enough’(최근 영화 <러시아워2>에 삽입되었음)와 ‘Working day and night’와 로드 템퍼튼 작곡의 깔끔한 팝 넘버 ‘Rock with you’, 절제된 보컬의 발라드 ‘She’s out of my life’ 같은 히트곡이 실려있었다. 수록곡 중 ‘Girlfriend’는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가 작곡해 준 곡으로 향후 둘 간의 파트너십을 예고했다.

이 마이클 잭슨의 방향성을 제시해 준 앨범이라면 1982년 12월에 발표된 는 ‘팝의 황제’라는 마이클 잭슨의 원대한 꿈을 실현시킨 회심작이었다. 퀸시 존스와 마이클 잭슨의 공동 프로듀스작인 그 앨범은 37주간이나 앨범차트 정상을 지켰으며 현재까지 미국에서만 2천6백만장의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또한 전례가 없는 무려 7곡이 싱글 발매되어 모두 차트 10위 내에 올랐고 그 중 2곡이 정상을 차지했다. 그 앨범으로 마이클 잭슨은 1984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역대최다인 7개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2000년 산타나와 타이 기록).

‘문워크(Moonwalk)’라는 독창적인 댄스를 유행시킨 ‘Billie Jean’과 에디 밴 헤일런의 기타 속주가 흐르는 ‘Beat it’이 차트 1위에 올랐으며, 첫 싱글로서 폴 매카트니와의 듀엣 곡이었던 ‘The girl is mine’(2위), ‘Wanna be startin’ somethin’(5위), ‘Human nature’(7위), ‘P.Y.T.’(10위), 마지막 싱글 ‘Thriller’(4위) 등이 연속해서 히트했다. 백인 최고스타 폴 매카트니와 록 기타의 거장 에드워드 밴 헤일런을 끌어들였다는 것은 크로스오버는 물론, 더 많은 수요층에게 다가가려는 그의 음악적 야심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Billie Jean’의 뮤직비디오는 MTV가 백인 록 뮤지션의 뮤직비디오만을 방영한다는 불문율을 깨고 틀었던 역사적인 첫 흑인 뮤직비디오였다. 한편 1984년 4월에는 폴카 음악과 ‘패러디의 대가’인 얀코빅(‘Weird Al’ Yankovic)이 ‘Beat it’을 패러디한 ‘Eat it’을 발표해 싱글차트 12위에 진입시키기도 했다.

영국의 난민구호 자선 프로젝트였던 밴드 에이드(Band Aid)의 ‘Do they know it’s christmas?’의 성공에 자극 받은 마이클 잭슨과 라이오넬 리치는 막강한 스타들을 규합, 유에스 포 아프리카(USA For Africa)를 조직해 1985년 1월 그 미국 버전인 ‘We are the world’를 만들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다. 그 해 8월에는 그간 음악동지였던 폴 매카트니와의 심각한 균열이 생겼다. 마이클 잭슨이 ‘레논/매카트니’ 크레딧으로 된 250곡이 넘는 비틀스 곡들의 판권을 4천7백5십만 달러에 사버렸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해 협력관계가 깨졌음은 물론 현재까지도 그 둘은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갱스터 영화의 대부 마틴 스코시즈가 감독한 17분짜리 뮤직비디오 ‘Bad’가 1987년 2월에 선보였고, 8월에는 분위기가 한층 어두워졌으며 록적인 느낌이 강화된 새 앨범 가 발매되었다. 퀸시 존스가 세 번째로 프로듀스를 맡은 이 앨범은 전작의 흥행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8백만장 이상 팔려나가는 성공을 거둔다. 특히 무려 5곡이 싱글차트 1위를 기록해 2곡이 1위에 오른 전작을 능가했다.

여성 보컬 시다 가렛과 호흡을 맞춘 ‘I just can’t stop loving you’를 시작으로 타이틀곡 ‘Bad’, 흥겨운 핑거 스냅이 시종일관 등장하는 ‘The way you make me feel’, 시다 가렛과 글렌 발라드가 공동 작곡한 발라드 넘버 ‘Man in the mirror’, 음산한 분위기가 압권인 ‘Dirty Diana’ 등 모두 5곡이 차례로 정상에 등극했다. 그 외에도 ‘Smooth criminal’, ‘Leave me alone’ 등 수록곡 전반이 주목받았다. 1988년 12월에는 마이클 잭슨과 존 레논의 아들 숀 레논 등이 출연한 영화 <문워커(Moonwalker)>가 전 세계에 개봉되었다.

보다 자신 고유의 음악을 찾기 위해 퀸시 존스와 헤어진 마이클 잭슨은 1991년 홀로서기를 시도한 첫 작품 를 발표한다. 젊은 프로듀서 테디 라일리를 메인 프로듀서로 받아들여 만든 이 음반은 마이클 특유의 사운드에 최신식 힙 합과 랩, 메탈 음악 등이 합쳐졌다. 작곡과 제작에 있어 마이클 잭슨의 재능을 마음껏 펼쳐 보인 음반이었지만 너바나 같은 그룹의 얼터너티브 록 태풍에 휘말려 전작들의 파괴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Remember the time’, ‘Jam’, ‘In the closet’ 등 테디 라일리가 솜씨를 발휘한 곡들과 영화 <프리 윌리>의 주제곡으로 쓰였던 ‘Will you be there’ 같은 곡들은 대중들과 평단으로부터 동시에 큰사랑을 받았다. 또한 ‘Black or white’의 뮤직비디오에서 보여준 ‘모핑’ 기법 같은 놀라운 기법들은 향후 영상 발전에 디딤돌이 되었으며 에서부터 구현된 환상적인 스튜디오 기술로 다시 한번 녹음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마이클 잭슨은 자신이 원하는 악기음색과 음원을 찾을 때까지 스튜디오 작업에 매달렸으며, 코러스 만해도 음색을 바꿔가며 다채롭고 풍부하게 꾸며 일반 제작자들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녹음기술만으로 볼 때는 모든 ‘프로듀서와 엔지니어의 드림’이었다.

해가 지지 않는 성공가도를 달리던 마이클 잭슨의 기세가 한풀 꺾인 것은 1993년의 일이다. 그 해 8월 바로 어린이 성추행 사건이 터진 것. 이 사건은 그간 깨끗한 이미지를 이어가던 그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한동안 그는 언론의 집중포화에 시달렸다. 그러다 얼마 후 갑작스레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했고, 이에 매스컴은 ‘여론 무마용’이라며 그에 대한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매체의 공격이 심해짐에 따라 마이클 잭슨의 분노도 정비례했다. 그에 대한 분노는 1995년에 발표한 더블앨범 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한 장은 히트곡들로, 다른 한 장은 신곡들로 구성된 이 음반은 ‘역사’로 해석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얘기들을 많이 담고있었다. 특히 그를 괴롭혀온 매스컴과 어린이 성추행 소송인에 대한 원한과 경멸, 냉소 등이 짙게 깔려있었으며, 그 때문에 음악도 예전과는 달리 상당히 거친 사운드가 지배적이었다.

알 켈리와 지미 잼 & 테리 루이스, 댈러스 오스틴 등이 프로듀서로 참여한 이 음반에서는 여동생 재닛 잭슨과 듀엣을 이룬 ‘Scream’과 ‘They don’t care about us’, ‘D.S.’, ‘Money’, ‘2 Bad’ 같은 곡을 통해 쇼비즈니스와 세상의 폭력에 대한 분노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물론 ‘You are not alone’, ‘Smile’ 등 따뜻한 노래들도 있었지만 다른 차가운 곡들 탓에 듣기가 좀 부담스러웠고, 그래서였는지 ’주라기음반’에 걸맞지 않게 흥행도 부진했다. 1997년에는 리믹스 앨범 을 발매하기도 했다.

4년이 흘러 2001년 그는 솔로 데뷔 30주년을 맞았다. 3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영예를 얻었으며, 9월에는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휘트니 휴스턴을 비롯해 엔 싱크, 브리트니 스피어스, 데스티니스 차일드, 어셔 등 당대 최고의 팝스타들이 출연한 가운데 그의 솔로 30주년 기념 공연을 가졌다.

그리고 10월 30일, 마이클 잭슨은 6년만의 정규 앨범 을 발표하며 다시 팬들 앞에 섰다. R&B 최고의 프로듀서 로드니 저킨스가 메인 프로듀서로 참여한 이 음반은 전작에 비해 훨씬 부드러워졌으며 한동안 찾아보기 힘들었던 특유의 활기 넘치는 리듬도 회복했다.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등 여러 좋은 일이 겹쳐서인지 밝은 분위기의 내용물들이 담겼다.

3마디의 독특한 리듬이 중독성을 발휘하는 첫 트랙 ‘Unbreakable’, 춤추기에 좋은 부드러운 댄스리듬 그리고 약간은 복고적 사운드가 듣기 편한 첫 싱글 ‘You rock my world’, 변화가 심한 비트가 인상적인 ‘Heartbreaker’ 등이 비트감 느껴지는 곡들. 라틴 풍의 기타 연주가 잔잔한 ‘Whatever happens’에서는 산타나의 무게감 있는 연주도 들을 수 있으며, ‘Speechless’, ‘The lost children’, ‘Break of dawn’ 같은 곡들은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발라드 곡들이다.
노래 : New Kids On The Block (뉴 키즈 온 더 블록)
90년대 초반 구미 각국에 ‘뉴 키즈’ 태풍이 불었다. 미국 보스톤 지역에서 발생한 그 태풍은 사정권에서 벗어난 지역으로 보이던 우리나라도 사정없이 강타했다. 그러나 태풍 뉴 키즈호는 우리에게 엄청난 피해만 남긴 채 스쳐 갔다. 92년 3월 서울 잠실벌에 불어온 뉴 키즈 태풍의 위력은 막강했다. 그것이 할퀴고 간 흔적에 한국 사회 전체가 들썩거렸다. 피해 상황은 사망 1명, 부상 40여 명, 외형적으로는 그리 큰... 90년대 초반 구미 각국에 ‘뉴 키즈’ 태풍이 불었다. 미국 보스톤 지역에서 발생한 그 태풍은 사정권에서 벗어난 지역으로 보이던 우리나라도 사정없이 강타했다. 그러나 태풍 뉴 키즈호는 우리에게 엄청난 피해만 남긴 채 스쳐 갔다. 92년 3월 서울 잠실벌에 불어온 뉴 키즈 태풍의 위력은 막강했다. 그것이 할퀴고 간 흔적에 한국 사회 전체가 들썩거렸다. 피해 상황은 사망 1명, 부상 40여 명, 외형적으로는 그리 큰 피해는 아니었으나 급기야 청소년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데 언론이 흥분했고 기성 세대들이 비탄의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에게 잊을래야 잊을 수 없게 된 외국 팝 그룹 ‘뉴 키즈 온 더 블록’. ‘소녀를 몰고 다니는’ 그 그룹은 한국의 소녀들도 자극해 사망자까지 발생한 비극적 사태를 몰고왔다. 사건 직후 공연을 주최한 레코드사 사장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문화부의 해외 팝스타 공연 불허조치로 예정되어 있던 공연이 무산 또는 연기되었다. 이 공연을 계기롤 우리 공연 문화가 수술대 위에 올랐고, 더 나아가 청소년 문화에 대한 전면적 검토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만큼 뉴 키즈 사태의 후유증은 컸고, 많은 시간과 정력을 피해복구 작업에 쏟게 했다. 뉴 키즈 사태는 한마디로 틴에이저의 ‘히스테리’가 빚어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환호 괴성 아우성 열광 기절 졸도 등의 양상으로 나타나는 히스테리는 팝스타 공연만이 갖는 고유 현상이다. 십대들은 영화배우와 TV 탤런트보다는 가수에게 열광한다. 음반과 비디오로 접하고, 다른 연예계 스타들과는 달리 공연 현장에서 직접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대를 통해 팬들과의 접촉이 빈번하게 이뤄지는 관계로 공연장 경비 등 ‘히스테리를 객석에 한정시키는’ 대책이 강구되지 않을 경우 사고는 필연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뉴 키즈 사태는 히스테리를 보인 청소년들을 매도할 것이 아니라 공연 기획 및 주최자의 준비 소홀에 그 책임을 지워야 한다. 팝스타와 관련한 틴에이저의 히스테리는 또 전통적이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뉴 키즈가 팝 히스테리의 최초 사례는 아니다. 1971년 클리프 리차드 내한 공연 때와 80년 광주항쟁 직후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개최된 레이프 가렛 공연 때는 흥분한 일부 여성 관중이 속옷을 벗어 던진 해프닝까지 발발하였다. 그때의 한국 사회는 지금처럼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들)의 시대가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같은 해프닝은 충격적 히스테리였고, 따라서 뉴 키즈 공연 때 관객들이 보여준 히스테리는 오히려 약과일지도 모른다. 영미 팝계에는 고금을 통해 십대의 히스테리를 유발시킨 가수 또는 그룹이 끊임없이 출현했다.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 롤링 스톤즈. 오스몬즈, 몽키스, 잭슨5, 베이 시티 롤러즈, 마이클 잭슨 등등... 이들 중 강도에 있어서 가장 압권은 역시 비틀스라 할 수 있고, 그 가운데 더러는 제도권 팝계가 ‘마케팅’의 차원에서 틴에이저의 히스테리를 겨냥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작품’도 있다. 몽키스와 잭슨5(후자의 경우는 시각에 따라 ‘자생적’이라 볼 수도 있다)가 여기 해당한다. 뉴 키즈는 바로 이 방식의 최신형이다. 비틀스 현상의 충격이 너무 컸기에 십대 소녀들로부터 유별난 인기를 끄는 그룹이 등장할 경우 흔히 ‘제2의 비틀스’라고 붙여주는 습관이 있다. 몽키스가 그랬고, 베이 시티 롤러즈가 그랬다. 뉴 키즈가 데뷔할 당시 미국의 일부 다운타운 DJ들은 그들을 제2의 비틀스라 일컬었다. 그러나 제도권의 시나리오에 의해서 탄생된 상품이라는 점에서 뉴 키즈는 제2의 비틀스라기보다는 ‘제2의 몽키스’라고 해야 옳다. 그래서 60년대의 몽키스가 제도권의 도구라는 지적을 받았던 것처럼 뉴 키즈 역시 음악 관계자들로부터 비슷한 문책을 받았다. < 타임 >지는 90년 그들을 “모리스 스타(뉴 키즈의 프로듀서)라는 제페토의 조종에 따라 움직이는 피노키오”로 비유했다. 모리스 스타는 80년대 중반 ‘뉴 에디션’이라는 흑인 틴에이저 그룹(바비 브라운이 이 그룹 출신)을 키워낸 역량을 인정받은 바 있는 인물이다. 그가 뉴 키즈 사단을 구성하려 했을 때의 출발점은 ‘경제 상황에 대한 고려’였다. 80년대 중반 당시 미국의 경기는 침체에 빠져있었고 따라서 호주머니의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시점. 모리스는 시장 조사를 통하여 그래도 돈 쓸 여유가 있는 백인 중산층의 자녀를 겨냥한 틴에이저 그룹이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룹의 구성원은 그들을 충족시킬 백인 소년들이라야 했다. 그는 민첩하게 거리로 나가 백인 중산층이 압도적으로 운집해 있는 보스톤 시내를 샅샅이 뒤져 ‘쓸 만한 애’들을 픽업해냈다. 도니 왈버그, 조나단 나잇, 조단 나잇, 조 매킨타이어, 그리고 대니 우드 등 5인조 ‘동네의 새 아이들’이 이렇게 하여 짜여졌다. 뉴 키즈는 ‘가장 완벽한 중부 미국적 그룹’이 되었다. 중부 미국(Middle America)은 지역적으로 중부일뿐 아니라 중산층이 많이 사는 지역을 상징하기도 한다. 뉴 키즈는 백인 중산층 자녀를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그룹답게 외모나 의상 등 외형 총체에서 ‘고생 없이 자라난 신세대 애들’의 이미지가 진하게 풍겨나왔다. 당연히 그들 공연장에는 대부분 부모가 중산층인 백인 십대 소녀들이 몰려들었다. 그래서 이 그룹은 옛날의 그룹들과는 여러 측면에서 차이를 드러냈다. 그 중 하나가 ‘인기와 돈의 관계’를 보는 시각이었다. 이들의 선배 그룹들은 통상적으로 공연을 개최하면서 기업으로부터의 후원을 꺼리는 경향을 보여왔다. 관객들에게 행여 돈벌이에 집착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뉴 키즈는 스폰서가 붙는 것 자체를 ‘성공의 징표’로 보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도니 왈버그는 이렇게 털어놓는다. “팬들이 우릴 줄줄 쫓아오고 스폰서가 우리에게 계약서를 내미는 것은 내 입장에서 짜릿하기만 하다. 난 그들을 쳐다보며 ‘맥도날드, 여기서 나가주세요’라고 하지 않겠다. 난 ‘저와 함께 일해 보실래요?’라고 말하겠다.” 맥도날드 햄버거 회사는 90년 뉴 키즈 미국 순회 공연 때 스폰서로 나섰다. 맥도날드측은 그들의 후원자가 되면서 “뉴 키즈는 맥도날드사가 갖고 있는 것과 똑같은 가족의 가치관을 갖고 있는 매우 건전하고 가장 미국적인 그룹”이라며 즐거워했다. 뉴 키즈는 실로 90년대의 팝계가 ‘성공과 판매술’에 포인트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반영하는 표본적 존재였다. 멤버 전원의 기계적 율동, 현란한 쇼무대, 십대 감각을 예리하게 찌르는 음악 모두가 마케팅과 판매신장의 구도 아래서 기초되었다. 레코드가 팔리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고 싱글이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오르지 않으면 실패나 다름없다. 공연 티켓을 구입하는 데 어려움이 없는 십대 고객들이 공연장을 찾지 않으면, 또 아우성을 치지 않으면 게임은 끝이다. 이유는 단 하나, 돈에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돈을 긁어모으려면, ‘소구력이 있는 상품’을 생산해야 한다. 그것이 모리스 스타의 이념이었다. 그는 뉴 키즈를 구성하고 즉각 스파르타식 훈련을 통해 율동을 주입했다. 춤의 스타일은 빈틈없이 맞아 돌아가는 마이클 잭슨식의 리듬과 랩 뮤직 가수들이 구사하는 탄력적인 스텝을 혼합시켰다. ‘외형 가꾸기’와 더불어 음악의 색깔에도 신경을 기울였다. 모리스는 ‘전통적으로 대중에게 잘 먹히는’ 흑인 음악을 최적의 장르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멋진 춤, 검은 음악, 흰 피부’의 뉴 키즈 온 더 블록이 탄생했다. 모리스의 기획과정 및 생산과정은 매우 ‘유서깊은 방식’이었다. 인재의 발굴, 상품화, 소구력 제고, 품질관리, 마케팅 전략 도입 등 제반 방법은 이미 몽키즈나 잭슨5 시절에 적용된 바 있었던 것들이었다. 다만 소구 대상(백인 중산층의 십대 자녀)을 확실히 정하고 들어갔다는 점이 달랐다. 그러나 모리스 기획의 효력은 즉시 나타나지 않았다. 출범한 뒤 86년 첫 음반을 발매했으나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문제는 소구 대상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때는 아직 뉴 키즈의 소구 대상이 팝계의 주체세력으로 군림한 시점이 아니었다. 그룹 유투나 휘트니 휴스턴 등의 록과 스탠다드팝을 소화할 수 있는 ‘20대 이상의 소비자들’이 팝시장의 주요 고객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뉴 키즈가 성공하려면 십대 소녀가 음반의 주구매층, 공연의 주관객층으로 떠올라야 했다. 그들의 매니저인 딕 스코트는 “팝 사람들이 시장을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성공은 찾아왔다”고 지적했다. 팝 사람들(Pop People)이야말로 뉴 키즈가 고대하고 있던 소구대상이었는데, 바로 ‘백인 틴에이저 걸’을 지칭했다. 그 시점이 이듬해 두 번째 음반 < 굳세게(Hangin’ Tough) >가 발표된 88년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들의 인기는 폭발했다. 90년까지 뉴 키즈의 앨범은 미국에서만 1천 5백만 장이 팔렸다. 그들의 뮤직 비디오는 3백 30만 개 이상의 판매고를 올려 그 부문 최고였던 마이클 잭슨의 기록을 앞질렀다. 89년과 90년 2년에 걸쳐 벌어들인 수입은 7천 8백만 달러나 되어 해마다 연예인 수입을 공개하는 < 포브스 >지의 리스트에 처음 오르면서 당당 5위에 랭크되었다(당시 1위는 코미디언 빌 코스비, 2위는 마이클 잭슨, 3위는 롤링 스톤즈 순이었고, 마돈나는 6천 2백만 달러로 8위를 차지했다). < 뉴욕 타임즈 >는 90년 뉴 키즈의 대성공을 더 많은 관객으로 향하려는 ‘흑인음악의 마케팅’과 ‘적절한 그룹을 시장의 적재적소에 심어놓은 프로듀서의 뛰어난 안목’ 등 두 가지 전략의 우연한 결합이 일구어낸 성과로 분석했다. 어쨌든 뉴 키즈는 잘 만들어진 상품이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조립한 상품은 어딘가 허점이 있기 마련, 춤을 강조하다 보니 노래가 빈약해지고 특히 공연 현장에서 춤과 노래의 병행은 벅차게 되어 있다. 이 문제점을 가끔 노래를 틀어놓고 입만 벙긋거리는 소위 ‘립 싱크’로 커버할 수 밖에 없는데, 뉴 키즈도 이러한 범행(?)을 수시로 저질러 마돈나, 폴라 압둘, 자넷 잭슨 등과 함께 ‘앵무새 가수 집단’으로 분류돼 비난받기도 했다. 잠실 공연에서도 이 점이 지적된 바 있었다. 립 싱크의 그룹, 돈과 성공을 위해 조직된 그룹 가장 양키적인 그룹, 그리고 또 하나 언급할 뉴 키즈의 중요한 성격이 있다. 뉴 키즈 진영에 뉴 키즈 빼고는 스탭 전원이 흑인이라는 점이다. 프로듀서 모리스 스타, 매니저 딕 스코트를 위시하여 로드매니저, 보디가드, 공연사회자, 백 밴드 모두가 흑인들이다. 뉴 키즈는 ‘흑인이 생산, 관리하는 백인 상품’의 첫 케이스이기도 하다. 미국의 한 평론가는 이를 흑백의 조화로운 결합이라고 했다. 흑백의 결합? 아니다. 그것은 생산자와 상품의 결합이다.
지난 2002년 브릿 어워드(Brit Award)는 단 한 장의 앨범을 낸 신인 여가수 다이도(Dido)에게 최우수 여성 가수(Best British Female)상과 최우수 앨범(Best British Album)상을 넘겼다. 그만큼 다이도가 보여주는 매력은 다양하고 특별하다. 클래식의 격조, 포크의 친근함, 토속음악을 통한 신비감, 게다가 일렉트로니카의 중독성까지 그리고 밝고 귀여운 이미지 등등. 어울릴 것 ... 지난 2002년 브릿 어워드(Brit Award)는 단 한 장의 앨범을 낸 신인 여가수 다이도(Dido)에게 최우수 여성 가수(Best British Female)상과 최우수 앨범(Best British Album)상을 넘겼다. 그만큼 다이도가 보여주는 매력은 다양하고 특별하다. 클래식의 격조, 포크의 친근함, 토속음악을 통한 신비감, 게다가 일렉트로니카의 중독성까지 그리고 밝고 귀여운 이미지 등등.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많은 이미지들이 그녀 안에서는 하나가 된다. 다이도는 1971년 크리스마스에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다이도 암스트롱(Dido Armstrong)이다. 5살 때 리코더를 훔친 것이 계기가 되어 음악을 시작하게 된 이색적인 경력을 갖고 있는 그녀는 클래식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영국의 줄리아드’로 알려진 길드홀(Guildhall) 음악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10대의 대부분을 클래식 음악에 파묻혀 살았던 그녀는 피아노, 바이올린, 리코더 연주에 능했고, 작곡 실력과 노래 실력 또한 늘려 나간다. 그녀는 어린 시절을 클래식에 묻혀 살았다. 18살이 되어서 대중음악을 처음 접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뒤늦게 접한 대중음악의 매력은 클래식에서 맛볼 수 없는 강한 것이었고, 결국 다이도는 클래식을 버리고 대중음악 뮤지션으로 음악적 방향을 바꾼다. 여기에는 친오빠 롤로(Rollo)의 도움이 컸다. 정상급 소울 테크노 그룹 페이스리스(Faithless)의 리더였던 롤로는 일렉트로니카와 클래식의 접목을 원했고, 클래식을 공부한 동생 다이도를 멤버로 맞아들인다. 페이스리스의 멤버로 투어를 펼치며 팝 뮤지션으로의 변신에 성공한 다이도는 ‘My lover’s gone’을 데모 앨범으로 제작하며 솔로전향을 선언했고, 아리스타(Arista) 레코드에서 데뷔 앨범 작업에 들어간다. 아카펠라나 기타, 피아노를 사용한 심플한 사운드를 생각하고 있었던 데뷔 앨범은 프로듀싱에 참여한 오빠 롤로 및 엔지니어의 요구에 따라 네오팝적인 사운드가 가미되었고, 그 과정에서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포크 사운드가 결합된 독특한 매력을 지닌 앨범이 탄생하게 된다. 이리하여 탄생한 데뷔작 < No Angel >은 1999년 6월, 자국이 아닌 미국에서 먼저 발매되었다. 발매 직후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음악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대중들에게 알려진다. 시작은 ‘Here with me’였다. 미국 TV 시리즈인 < 로스웰 >(Roswell)에 이 곡이 테마음악으로 사용되었고, 이어 기네스 펠트로우 주연의 영화 < 슬라이딩 도어스 >(Sliding Doors)에 그녀의 곡 ‘Thank you’가 삽입된다. 별 반응 없이 사라져가던 < No Angel >은 다시 한번 대중들에게 어필했고, 그와 때맞추어 인기 래퍼 에미넴(Eminem)이 자신의 곡 ‘Stan’에 다이도의 곡 ‘Thank you’를 샘플링으로 사용한 덕분에 그녀의 음악과 이름은 뒤늦게 널리 퍼지게 됐다. (‘Stan’의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이 바로 다이도!). 이 곡은 2001년 빌보드 톱10에 오르는 빅히트를 기록했다. 다이도는 이 무렵 고국 영국에 돌아와 마침내 인기스타로 올라섰고 에미넴도 ‘Stan’으로 첫 영국차트 1위의 영예를 누리며 서로 도움을 교환했다. *Dido Interview http://nine4u.asiamusic.net/dj/program.asp?popstory+15
최근 미국 팝음악계의 두드러진 현상은 급작스런 여가수 붐일 것이다. 머라이어 캐리, 샐린 디온, 셰릴 크로, 앨러니스 모리세트와 같은 스타들 말고도 호시탐탐 대권을 노리는 신인들이 줄을 잇고 있다. 과거에도 여가수들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요즘처럼 무리를 지어 전분야에 걸쳐 득세한 것은 없었다. 그야말로 소외된 여성들의 대반란이다. 이처럼 남성을 압도하는 모처럼의 ‘여성시대’를 밝힌 또 한사람이 사라 맥라클란이다. ... 최근 미국 팝음악계의 두드러진 현상은 급작스런 여가수 붐일 것이다. 머라이어 캐리, 샐린 디온, 셰릴 크로, 앨러니스 모리세트와 같은 스타들 말고도 호시탐탐 대권을 노리는 신인들이 줄을 잇고 있다. 과거에도 여가수들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요즘처럼 무리를 지어 전분야에 걸쳐 득세한 것은 없었다. 그야말로 소외된 여성들의 대반란이다. 이처럼 남성을 압도하는 모처럼의 ‘여성시대’를 밝힌 또 한사람이 사라 맥라클란이다. 귀여운 용모에 얼핏 갓 데뷔한 신인같지만 실제로는 경력 10년의 중견. 얼마나 고된 무명시절을 거쳤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챠트 상위권에 명함만 내밀지 않았을 뿐 음악계에서는 이름이 꽤나 알려진 인물이다. 지금은 음악계뿐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이름을 깊이 새기고 있다. 막 발표한 신보 < 떠오름(Surfacing) >은 빌보드 앨범차트 2위에 올랐다. 여기 수록된 곡 ‘미스터리를 만들고(Building a mystery)’도 해당 싱글차트 10위권에 진입했다. 뒤늦게 때를 만난 셈이다. 그의 음악은 전과 비교할 때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그럼 지금이 도대체 어떤 ‘때’이길래 앨범 제목처럼 갑자기 수면위로 떠오른 것일까? ‘널 사랑해(I love you)’ ‘네 할 것을 하라(Do what you have to do)’ 등 그의 노래는 마치 가을의 정취를 자극하듯 차분하고 쓸쓸하다. 조용함의 극치라 해도 과장은 아니다. 분노와 격정의 음악인 앨러니스 모리세트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바로 이것이다. 지금 팝 음악은 시끄러운 얼터너티브 록에서 조용히 자기 세계를 탐구하는 ‘개인 포크풍’으로 대세가 바뀌어가는 듯하다. 사람들이 절규에 지친 것일까. 사라 맥라클란 스스로도 이렇게 말한다. “3년전 전작이 나왔을 적에 방송국 대다수가 내 노래를 틀지 않았다. 다른 여가수, 분노의 광채를 발한 토리 에이모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세말고도 사라의 앨범과 노래가 주목받는 이유가 또 있다. 그가 올여름 ‘릴리스 페어(Lilith Fair)’라고 하는 커다란 행사를 기획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페스티벌에는 요즘 잘 나가는 여성 싱어송라이터들이 총집결해 매스컴의 집중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여가수들만’ 출연했다. 한마디로 ‘여성들의 한판을 벌여보자’는 것이었다. 사라 맥라클란은 남성이 지배하는 록을 향해 ‘분리평등’을 외치는 것이 행사의 취지라고 밝혔다. 제목에도 나타난다. ‘릴리스’는 유태인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로 아담의 조강지처였으나 이브에게 자리를 뺏긴 여인이라고 한다. 그의 상징성은 곧 복수심이다. 사라 맥라클란은 ‘릴리스 페어’에 페미니즘을 투영해 행사가 상업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막았다. 그를 평가해 줄 대목이 이 부분이다. 행사의 주창자로서 그의 음악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1997년 팝계 결산에서 그는 분명히 ‘올해의 인물’로 꼽힐 것이다. 물론 행사 출연진이 너무 포크라는 한 장르에 국한됐다는 점 등 아쉬움도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음악에는 별 아쉬움이 없다. ‘때’가 바뀌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노래 : Natalie Imbruglia (나탈리 임브룰리아)
# ‘진정한 나’,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음악여정 ‘Torn’의 위력은 너무나 거대했다. 나탈리 임부를리아(Natalie Imbruglia)의 데뷔싱글이었던 그 곡은 전 세계 음악팬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1997년과 1998년 사이 영국에서만 1백만장이 팔려나갔고, 미국에서도 10주가 넘게 방송차트 1위를 고수하는 등 국제적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녀를 ‘팝계의 신데렐라’로 만들어준 그... # ‘진정한 나’,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음악여정 ‘Torn’의 위력은 너무나 거대했다. 나탈리 임부를리아(Natalie Imbruglia)의 데뷔싱글이었던 그 곡은 전 세계 음악팬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1997년과 1998년 사이 영국에서만 1백만장이 팔려나갔고, 미국에서도 10주가 넘게 방송차트 1위를 고수하는 등 국제적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녀를 ‘팝계의 신데렐라’로 만들어준 그 곡은 그러나 동시에 그녀에게 치명적인 해악이었다. 문제는 ‘Torn’과 그녀 자신이 너무나 예뻤다는 것. 상큼한 팝과 성난 록이 잘 정제된 음악적 내용물도, 시원한 향기가 배어나는 목소리도, 그리고 ‘밤비’ 같은 큰 눈을 가진 그녀의 얼굴도 너무 예뻤다. 때문에 대중들이 그녀를 소비하는 것은 단 한가지, 바로 그 예쁘장함이었다. 나탈리 임부를리아의 데뷔앨범 < Left Of The Middle >은 ‘Torn’이 성공가도를 달리던 얼마 후에 발매되었다. 만만치 않은 음악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곡의 빛에 가려 음반에 실린 다른 곡들은 별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사실 ‘Torn’은 라디오를 통해, 또 수많은 컴필레이션 음반들을 통해 얼마든지 들을 수 있었으니 정규음반은 사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게다가 잡지나 신문들은 주로 그녀의 외모나 스캔들 따위에 포커스를 맞추었고 팬들은 그 매체에 실린 사진을 오려 방에 걸어두며 그녀를 ‘핀업 걸’로 대했다. 사람들은 그저 ‘Torn’만 들으면, 그녀의 얼굴만 보면 만족했다. 사실 어찌 보면 나탈리에게 그러한 것들은 당연한 결과다. 태어나고 자랐던 호주에서 10대 시절부터 TV스타였던 그녀는 1996년 가수를 꿈꾸며 영국으로 건너갔고, 그곳의 음반 관계자들의 눈에 띄어 가수로 데뷔했다. 그 과정 속에서 그녀의 데뷔앨범은 이미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아무 일도 못하고 1년여를 방황했던 탓에 그녀는 하루라도 빨리 가수가 되길 원했으며, 그 때문에 음반사에서 자신을 부르자 바로 계약했다. 따라서 음반계약 후에도 음악이나 이미지에 대한 선택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없었다. 그녀를 선택한 레이블은 그녀의 청순한 비주얼과 생기 있는 목소리를 십분 활용하면서도 당시 강세를 보이던 앨라니스 모리셋 류의 여성 얼터너티브 록과 어쿠스틱 팝/록 사운드를 덧입히려 했다. 그를 위해 그룹 큐어(Cure)의 베이시스트였던 필 토낼리(Phil Thornalley), 라디오헤드의 < OK Computer >를 제작한 나이젤 고드리치(Nigel Godrich) 등의 일류 프로듀서들을 동원했고, 그들은 아주 훌륭하게 그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그 결과 ‘Torn’이라는 빅히트곡을 탄생시켰으며 그 외에도 ‘Big mistake’, ‘Wishing I was there’, ‘Smoke’ 같은 괜찮은 느낌을 주는 곡들을 배출했다. 이렇게 나탈리 임부를리아의 음악과 이미지는 결정되었고,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는 ‘Torn’과 핀업 걸의 이미지가 고정되었다. 상업적인 측면에서는 도움이 되었을 지는 몰라도 그녀에게 그것은 분명 상당한 부담이었으며 앞날을 고려한다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뮤지션이라면 그러한 장애물은 음악을 통해 극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녀는 3년여 동안 음악에 전념하며 자신과의 투쟁을 벌였고, 드디어 이번에 그 흔적들이 담긴 두 번째 앨범 < White Lilies Island >를 내놓았다. # 예쁜 이미지 벗고 내적 성숙 완연한 새 앨범 그렇다고 이번 신보가 전작과의 완전한 결별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Torn’의 작곡자였던 필 토낼리가 또 다시 참여하고 있으며 여전히 풋풋하고 싱그러운 곡들이 눈에 띈다. 하지만 전작에 비해 전체적인 분위기는 상당히 가라앉았다. 같은 상큼함이라도 더욱 멜랑콜리하게, 더욱 애처롭게 들린다. 그런 변화의 조짐은 1999년도 영화 < 스티그마타 > 사운드트랙에서 불렀던 ‘Identify’에서 이미 예고된 바 있다. 스매싱 펌킨스의 빌리 코건이 작곡했던 그 곡은 나탈리답지 않은 음울함으로 세간을 놀라게 했었다. 특별한 기교 없이 부르는 보컬도 편안하게 들린다. 의도적으로 앨라니스 모리셋를 따라했던 전작에서의 보컬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졌으며, 또 발전했다. 첫 싱글부터 큰 차이가 난다. 전자기타와 피아노, 현악이 묘한 화음을 이루는 첫 싱글 ‘That day’에서 리드미컬한 나탈리의 보컬은 무언가에 불만에 찬 듯 노래하며 예쁘장함 따위는 벗어 던진다. 첼로의 묵직한 연주로 시작하는 ‘Wrong impression’은 어쿠스틱 기타의 영롱함에 슬라이드 기타의 푸근함이 더해져 분위기가 ‘업’된 팝/록 넘버다. 공간의 웅장함이 느껴지는 ‘Beauty on the fire’에서는 일렉트로닉의 몽롱한 전자음이 일렁이며, 사랑스런 느낌이 가득 한 ‘Satellite’는 따뜻한 어쿠스틱 기타 톤과 코러스가 돋보이는 곡. 앨범의 베스트라면 5번째 트랙인 ‘Do you love’을 꼽을 수 있다. 착 가라앉은 분위기에 절제된 보컬이 이끌어 가는 이 곡은 멜랑콜리함을 극대화시키는 중간의 하드 록 연주와 귀를 잡아채는 멋진 멜로디의 훅이 잊혀지지 않는다. 꿈속에 있다가 뒤늦게 꿈에서 깨어나 절규하는 듯한 진행이 압권인 ‘Goodbye’, 인트로 부분이 국내밴드 미선이의 ‘진달래 타이머’를 연상시키는 ‘Everything goes’, "동화 속 신데렐라는 이제 없다"며 담담히 노래하는 마지막 트랙 ‘Come September’ 등이 매력적인 트랙들이다. 음반에 수록된 10곡 모두 나탈리 임부를리아가 공동작곡과 작사를 담당했으며, 그중 절반은 희망을, 나머지 절반은 삶의 비의(悲意)와 깨달음을 노래하고 있다. 그 외의 프로듀서들로는 마돈나의 작업으로 유명한 패트릭 레너드와 필 토낼리, 게리 클락 등이 앨범제작에 참여했다. 몇 년 간 내적 침잠의 결과물인 이번 앨범으로 그녀는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아티스트로서의 가능성을 확보했다.
1983년 후반, 두 백인 여성 가수의 데뷔곡이 2개월의 짧은 간격을 두고 빌보드 싱글 차트에 나란히 등장했다. 본의 아니게 시작부터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게 된 두 여가수의 경합은 1980년대 동안 가장 흥미롭고(본인들에게는 피 말리는 싸움이었겠지만) 긴장감 넘치는 팝의 핫 이슈였다. 두 여인은 1983년 10월에 데뷔 싱글을 차트에 등록시킨 이후 현재까지 20년이 달하도록 사그라지지 않는 창작력을 과시하는, 매... 1983년 후반, 두 백인 여성 가수의 데뷔곡이 2개월의 짧은 간격을 두고 빌보드 싱글 차트에 나란히 등장했다. 본의 아니게 시작부터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게 된 두 여가수의 경합은 1980년대 동안 가장 흥미롭고(본인들에게는 피 말리는 싸움이었겠지만) 긴장감 넘치는 팝의 핫 이슈였다. 두 여인은 1983년 10월에 데뷔 싱글을 차트에 등록시킨 이후 현재까지 20년이 달하도록 사그라지지 않는 창작력을 과시하는, 매브릭 음반사의 CEO 마돈나(Madonna)와 2개월 늦게 인기차트에 합류했지만 고지를 선점하고 나선 끝내 마돈나에게 밀려버린 ‘귀여운 악녀’ 신디 로퍼(Cyndi Lauper)다. 마돈나의 ‘Holiday’와 신디 로퍼의 ‘Girls just want to have fun’은 아직까지 그들을 정의하는 대표 곡으로 남아 있다. 선의의 경쟁이 시작된 지 20여 년이 흐른 현재, 레이스의 최후 승자는 알다시피 마돈나다. 그것도 판정승 아닌 분명한 KO승이다. 그러나 그들이 풋풋했던 데뷔 시절, 둘의 위치는 지금과 정반대였다. 애초 평단에서 마돈나는 ‘아니 벌써’의 반짝 스타로, 신디 로퍼는 ‘장수 만세’의 아티스트로 전망되었다. 평론가들이 신디 로퍼를 높이 산 이유는 페미니즘을 남근의 음악인 록과 포스트 펑크가 어우러진 ‘뉴 웨이브’로 설파했다는 점과, 마돈나처럼 섹시한 외모나 춤으로 판단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약간은 덜 섹시한 이미지를 고집하면서 음악으로 당당하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러한 독립적인 태도는 고등학교 중퇴, 소규모 클럽에서의 노래 시작, 자신이 결성한 밴드 블루 엔젤(Blue Angel)의 상업적인 실패와 파산, 그리고 남자 친구와의 불화 등 온갖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터득한 그녀의 인생관이 배양했다. 30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망가질(?) 수 있는 자신감은 바로 이 굴곡의 삶을 극복한 인간승리의 드라마에서 비롯된 떳떳함이 원천이다. 그녀의 성공을 가져온 많은 요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대적인 요구에 정확히 부응했다는 점이다. 소녀적 감성을 읊은 신디의 밝고 통통 튀는 가사는 그 시대 정서의 흐름을 타고 대중들을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로 괴롭히지 않았으며, 당대의 뉴 미디어인 MTV의 지원사격을 받은 것이었다. 10대 소녀들을 정신 없으면서도 쾌활하게 묘사한 뮤직비디오 덕분에 데뷔 싱글 ‘Girls just want to have fun’은 차트 2위라는 스매시 히트를 치면서 이 신인 여가수의 시대가 화려하게 개막했음을 알렸다. 이 곡이 수록된 솔로 데뷔 앨범 < She’s So Unusual >에서는 발라드인 ‘Time after time(1위)’과 ‘She bop(3위)’, ‘All through the night(5위)’, 그리고 ‘Money changes everything(27위)’를 포함해 5곡이 빌보드 싱글 차트를 유린하면서 그 무렵 완벽하게 재기에 성공한 티나 터너(Tina Turner)와 함께 1984년 팝 음악계를 가장 화려하게 수놓은 인물이 되었다. 그래미상도 펄펄 난 그녀를 응대해 신인상 트로피를 안겼다. 그 해 마돈나는 그래미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한 것을 비교하면 당시 마돈나와 신디 로퍼의 위상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다. 1985년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영화 < 구니스 >의 주제가 ‘The goonies ‘r’ good enough(10위)’로 기세를 유지했지만 이듬해 1986년 가을에는 두 번째 대결인, 이른바 ‘True 경쟁’을 통해 신디는 마침내 마돈나에게 추월을 당했다. 록, 팝, 펑크, 뉴웨이브, 펑크(funk), 레게 등 젊은층에 어필할 수 있는 색조의 음악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재구성해 큰 성공을 낚은 < She’s So Unusual >에 비해 두 번째 앨범 < True Colors >는 그녀 특유의 톡 쏘는 감각이 많이 희석된 대중적 팝으로 약간 빛깔을 달리했다. 앨범의 타이틀 트랙 ‘True colors’로 두 번째 차트정상의 영광을 안고, ‘Change of heart(3위)’와 ‘What’s going on?(12위)’, ‘Boy blue(71위)’가 연속으로 차트를 밟았지만 기존 팬들은 성인 취향의 팝으로 전향한 신보에 적지 않게 실망했고, 이 LP를 기점으로 그녀는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앨범 판매량도 전작 600만장에서 200만장(현재)으로 격감했다. 반면 경쟁자 마돈나의 < True Blue >는 700만장이나 팔려나갔다. 1989년에 공개된 세 번째 음반 < A Night To Remember >에서는 싱글 ‘I drove all night(6위)’와 ‘My first night without you(62위)’가 차트에 등장하긴 했지만 어느덧 음악적인 매력은 뚝 떨어져있었다. 반면 마돈나는 역작 < Like A Prayer >를 발표해 음악적인 면과 대중적인 면 모두를 포유(包有)하면서 5년간의 라이벌 대결은 마돈나의 완승으로 결판이 났다.(신디 로퍼는 그러나 새 앨범의 홍보 차원으로 내한공연을 가져 국내 팬들에게 시원스런 무대를 선사했고 공연실황이 TV로도 방송되어 열기를 현장에서 맛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달래주었다). 1993년과 1998년에는 < A Hat Full Of Stars >와 < Sisters Of Avalon >을 발표해 재기를 노렸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1994년에는 < 12 Deadly Cyns And Then Some >이라는 제목의 베스트 음반을 공개해 ‘Girls just want to have fun’을 리믹스한 ‘Hey now(87위)’로 마지막 희미한 불꽃을 태웠다. 이 곡은 또한 1970년대 팝 그룹 레드본(Redbone)의 히트곡 ‘Come and get your love(댄스 팝 그룹 리얼 맥코이가 커버해 1995년 19위)’를 샘플링했으며 1995년 웨슬리 스나입스(Wesley Snipes)와 패트릭 스웨이즈(Patrick Swayze)가 주연한 영화 < 투 웡 푸 >(To Wong Foo)에 삽입되었다. 흑인 싱어송라이터 루더 밴드로스(Luther Vandross)는 신디 로퍼의 노래 실력을 두고 “팝의 디바 휘트니 휴스턴에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데뷔 싱글 ‘Girls just want to have fun’과 1960년대 틴 아이돌 팝 가수 진 피트니(Gene Pitney)의 오리지널을 재해석한 ‘I’m gonna be strong’, 그리고 ‘My first night without you’, ‘True colors’ 등은 그녀의 뛰어난 곡 소화력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데뷔 초기의 우스꽝스러운 외모와 펑크적인 스타일에 의해 굳어진 ‘왈패’ 이미지로 인해 그녀의 음악적 진가는 과소평가 받기 일쑤였으며, 성인 취향의 팝 록으로 변신하자 많은 팬들은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던 것이다. 이제는 많이 잊혀졌지만 신디 로퍼의 이미지는 여전히 많은 팬들의 뇌리에 박혀있다. 깜직한 소녀(계집애?) 목소리, 중고품 할인가게 풍의 패션, 레슬링을 즐기는 여성 그리고 MTV 시대. 하지만 무엇보다 팬들은 그녀를 통해 그 시절에 ‘여자들은 단지 재미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의미에서 신디 로퍼야말로 ‘1980년대 팝의 바로미터’라고 할 것이다. 그 시대를 그녀만큼 ‘비범하게’ 산 사람도 없다.
노래 : Five For Fighting (파이브 포 파이팅)
노래 : Sophie B. Hawkins (소피 B. 호킨스,Sophie Ballantine Hawkins)
노래 : Shakin' Stevens (쉐이킨 스티븐스)
‘카우보이’ 제이 케이(Jay Kay)가 이끌고 있는 영국 밴드 자미로콰이는 고품격 댄스 음악으로 1990년대 전세계 클럽 신을 뒤흔든 팀이다. 펑크(Funk), 소울, 재즈, 리듬 앤 블루스, 하우스, 힙 합, 팝, 테크노 등 다양한 장르의 곳간을 넘나들며 일궈낸 그들의 올드 앤 와이즈(Old And Wise) 퓨전 사운드는 새로운 트렌드를 갈구하던 클러버들에게 이상적인 음악이었다. 그들은 다채로운 색깔의 소리... ‘카우보이’ 제이 케이(Jay Kay)가 이끌고 있는 영국 밴드 자미로콰이는 고품격 댄스 음악으로 1990년대 전세계 클럽 신을 뒤흔든 팀이다. 펑크(Funk), 소울, 재즈, 리듬 앤 블루스, 하우스, 힙 합, 팝, 테크노 등 다양한 장르의 곳간을 넘나들며 일궈낸 그들의 올드 앤 와이즈(Old And Wise) 퓨전 사운드는 새로운 트렌드를 갈구하던 클러버들에게 이상적인 음악이었다. 그들은 다채로운 색깔의 소리들을 끌어다 쓰면서도 단 한차례의 난잡함과 엉성함을 내비치지 않는다. 각각의 장르가 가진 특성들을 정확히 해독하여 일정한 통일성과 화려함이 번뜩이는 댄스 음악으로 완벽하게 주조해낸다. 그 안에는 보통의 댄스 음악에 주어지는 천박스러움이 없다. 그렇다고 일반 대중들이 듣기에 어려운 것도 아니다. 대중 친화적이며, 고급스럽다. 이처럼 남녀노소 누구나 신나는 펑크(Funk) 음악에 맞춰 춤을 출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자미로콰이, 특히 제이 케이가 어릴 적부터 꿈꿔온 소망이었다. 랭크셔 지방에서 태어난 제이 케이(1969년 생)는 1970년대 나이트클럽 재즈 싱어로 활약했던 어머니 카렌 케이(Karen Kay)로부터 영향을 받아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로이 에이어스(Roy Ayers), 슬라이 스톤(Sly Stone)의 음악을 들으며 리듬 앤 블루스, 재즈, 소울 등에 대한 감각을 키웠다. 1980년대 런던으로 이주한 그는 어렵게 구입한 신디사이저로 곡을 만들며 여러 개의 데모 테이프를 제작했다. 그 중 한 트랙이었던 ‘When you gonna learn?’이 런던의 리듬 앤 블루스 라디오 방송 < Kiss FM >에 소개되면서 그는 서서히 지명도를 확보했고, 인디 레이블 < 애시드 재즈(Acid Jazz) >-이후 자미로콰이의 음악은 애시드 재즈라는 장르로 정의되며 오해 아닌 오해를 받게 됐다-에서 정식 싱글로 발매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92년 메이저 레코드사 < 소니(Sony) >와 8장의 음반 계약이라는 파격을 연출하며 단번에 주목받는 신인으로 급부상 했다.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위해 제이 케이는 키보디스트 토비 스미스(Toby Smith), 비브라폰 연주자 월리스 부캐넌(Wallis Buchanan), 드러머 닉 밴 겔더(Nick Van Gelder), 베이시스트 스튜어트 젠더(Stuart Zender) 등을 영입하여 자미로콰이를 결성하고 1년 뒤인 1993년 데뷔작 < Emergency On Planet Earth >를 발표했다. 이미 공식 음반을 공개하기 전부터 타올랐던 자미로콰이의 열기는 데뷔 앨범의 영국 차트 1위라는 결과로 정점에 달했고, 곧장 플래티넘으로 직행했다. 도발적인 펑키 리듬과 관능적인 그루브, 경쾌한 록 필, 진한 소울의 향기가 한 몸으로 용해된 ‘Emergency on planet earth’(32위), ‘Too young to die’(10위), ‘Blow your mind’(12위), ‘When You Gonna Learn?’(28위) 등의 히트곡들을 터트리며 밴드는 영국 클럽 신에 메가톤급 폭풍우를 일으켰다. 이때부터 음반 재킷에 등장하는 버팔로 모자를 눌러쓴 제이 케이의 모습은 자미로콰이를 상징하는 로고로 자리잡았다. 1년 뒤인 1994년 데릭 매켄지(Derrick McKenzie)로 드럼 주자를 교체한 그룹은 재즈적 색채가 강화된 소포모어 작품 < Return Of The Space Cowboy >를 내놓았다. 이 음반 역시 차트 2위에 오르며 전작의 흥분을 그대로 이어나갔고, ‘Space cowboy’(17위), ‘Half the man’(15위), ‘Stillness in time’(9위) 등의 인기 곡들을 영국 전역으로 쏘아 올렸다. 앞선 두 장의 앨범을 통해 영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밴드 중 하나로 성장한 자미로콰이는 1996년 3집 < Travelling Without Moving >과 1999년 4집 < Synchronized >로 세계적인 그룹의 반열에 도달했다. 친근한 멜로디와 리듬을 앞세운 스매시 히트곡 ‘Virtual insanity’(3집)와 세련된 디스코와 테크노로 무장한 ‘Canned heat’(4집)의 폭발력은 영국과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를 포함한 지구촌 전역을 들썩거리게 했다. 천 백 만장이라는 두 음반의 판매 합계 역시 그룹의 뜨거운 인기도를 잘 나타내는 증거이다. 자미로콰이는 오는 9월 초 다섯 번째 정규 음반 < A Funk Odyssey >를 공개할 예정이다. 신보는 첫 싱글로 커트된 ‘Little l’을 비롯하여, ‘Feels so good’, ‘Black crow’, ‘Twenty zero one’ 등 그들의 음악 주요소인 펑크(Funk)에 대한 찬가로 가득하다.
밴드 : Journey (저니 (락 밴드))
197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저니는 1980년대 초, 중반을 강타했던 록 그룹이다. 하드록, 재즈록 밴드로 출발했던 저니는 미성의 보컬리스트 스티브 페리(Steve Perry)를 영입하면서 팀컬러를 팝 록으로 완전히 전환한다.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어쨌든 대중들의 반응은 뜨거운 것이어서 그 변화가 처음으로 나타난 앨범인 < Evolution >부터 이들은 발표하는 작품마다 수백만장의 앨범을 팔아치우는 ... 197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저니는 1980년대 초, 중반을 강타했던 록 그룹이다. 하드록, 재즈록 밴드로 출발했던 저니는 미성의 보컬리스트 스티브 페리(Steve Perry)를 영입하면서 팀컬러를 팝 록으로 완전히 전환한다.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어쨌든 대중들의 반응은 뜨거운 것이어서 그 변화가 처음으로 나타난 앨범인 < Evolution >부터 이들은 발표하는 작품마다 수백만장의 앨범을 팔아치우는 빅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특히 멤버들의 역량이 집대성된 1981년작 < Escape >는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등극하며 저니의 명성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이 음반에서만 ‘Open arms’(후에 머라이어 캐리가 리메이크), ‘Don''t stop believin''’, ‘Who''s crying now’등 톱 텐 싱글이 3개가 쏟아졌다. 이들은 곧 동시대의 포리너(Foreigner), REO 스피드웨건(REO Speedwagon)등과 함께 성인 취향의 록(AOR)과 발라드를 가장 잘 만드는 팀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처럼 세계인들을 열광시키며 연이은 히트 퍼레이드를 벌인 저니는 라틴 록의 거장 산타나(Santana)에서 활약하던 두 청년 닐 숀(Neal Schon)과 그렉 롤리(Greg Rolie)가 손을 잡으면서 출범했다. 여러 뮤지션들을 영입해 록 밴드의 모양을 갖춘 저니는 곧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을 체결하며 단번에 씬의 실력파 그룹으로 각광받았다. 달콤한 멜로디보다 청자의 예측을 거부하는 굴곡이 심한 리듬과 재기 발랄한 솔로 파트를 강조한 저니의 초창기 작품들은 다분히 매니아 취향이었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마음 편하게 다가서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랐던 것이 사실이다. 데뷔작 < Journey >에서 < Look Into The Future >, < Next >에 이르는 일련의 앨범들은 다소 거칠지만 록의 원시적 매력으로 똘똘 뭉친 곡들로 넘쳐 났다. 저니의 중, 후반기 사운드는 아련한 키보드를 축으로 선율미를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다. 이 때가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어필한 시기였다. 기-승-전-결의 구도를 가지고 점층적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극적인 구성이 밴드의 상징처럼 굳어졌다. 고혹적이고도 애절한 보이스를 지닌 스티브 페리는 그 구성에 꼭 맞는 보컬리스트였고 완벽한 시스템을 장비한 밴드는 힘차게 가속 페달을 밟을 수 있었다. 좋은 반응을 얻었던 싱글 ‘Wheel in the sky’가 수록된 앨범 < Infinity >는 첫 백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기록했고, 이어 < Evolution >부터 < Frontiers >에 이르는 멈추지 않는 성공가도가 열리게 되었다. 저니의 포근한 록은 여러 세대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그들의 이름은 전세계적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샘솟던 그들의 창작력도 이후 둔화되기 시작했고, 멤버들의 빈번한 과외 활동까지 겹치면서 저니는 결국 1986년 < Raised On Radio >를 마지막으로 해체를 맞이하게 됐다. 해산 이후 밴드 사운드의 핵이였던 닐 숀은 배드 잉글리시(Bad English)를 결성해 ‘When I see you smile’, ‘Price of love’라는 히트 싱글들을 제조해 냈고, 드러머 스티브 스미스(Steve Smith)는 자신의 전공인 재즈로 돌아갔다. 싱어 스티브 페리 역시 앨범들을 발표하며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캐리어를 다져 나갔다. 아쉬움이 남아서일까. 각자 개인 플레이에 열심이던 멤버들은 정확히 해체 10년이 되는 1996년 < Trial By Fire >로 다시 뭉쳤고, 차트에서도 괜찮은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두 스티브는 결국 투어 도중에 이별을 선언했고, 새롭게 정비된 저니는 2001년 통산 11번째 음반 < Arrival >을 내놓으며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저니는 팝 전성시대의 화사함 속에서 자신들의 기량을 마음껏 뽐냈던 그룹이다. 록에 이유모를 부담감을 느끼는 이들마저도 살며시 보듬어 안았던 이 매력적인 밴드는 앞으로도 ‘편안한 록’의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아직 남아 있을 팬들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멤버 : 리치 맥도날드(Richie McDonald, 보컬), 마이클 브릿(Michael Britt, 기타), 키치 레인워터(Keech Rainwater, 드럼), 덴 셈스(Dean Sams, 키보드) 멤버 : 리치 맥도날드(Richie McDonald, 보컬), 마이클 브릿(Michael Britt, 기타), 키치 레인워터(Keech Rainwater, 드럼), 덴 셈스(Dean Sams, 키보드)
1994년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결성된 트레인(Train)은 1990년대 초반 블랙 크로우즈(Black Crowes)로부터 발흥된 복고 성향의 아메리칸 하드록을 구사하는 그룹이다. 미국의 전통 음악인 컨트리(country)와 포크(folk)를 기저로 강력한 하드록 사운드를 덧입혔던 이 흐름의 최선봉에 위치한 밴드로 평가받고 있다. 트레인은 패트릭 모나한(Patrick Monahan, 보컬, ... 1994년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결성된 트레인(Train)은 1990년대 초반 블랙 크로우즈(Black Crowes)로부터 발흥된 복고 성향의 아메리칸 하드록을 구사하는 그룹이다. 미국의 전통 음악인 컨트리(country)와 포크(folk)를 기저로 강력한 하드록 사운드를 덧입혔던 이 흐름의 최선봉에 위치한 밴드로 평가받고 있다. 트레인은 패트릭 모나한(Patrick Monahan, 보컬, 퍼커션), 롭 호치키스(Rob Hotchkiss, 기타, 보컬), 지미 스태포드(Jimmy Stafford, 기타), 찰리 콜린(Charlie Colin, 베이스), 스콧 언더우드(Scott Underwood, 드럼)의 5인조로 구성되었다. 결성 직후, 다섯은 꾸준한 라이브 공연을 지속하며 팬층을 확보하였고, 이것은 마이너 레이블인 < Aware >와 컨택트되는 동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등장한 데뷔작 < Train >은 진득한 미국 전통 록 사운드를 가감 없이 펼쳐 보임으로서 인상적인 신고식을 치러냈다. 1997년부터 밴드는 블루스 트래블러(Blues Traveler), 카운팅 크로우즈(Counting Crows)등의 오프닝을 맡으며 제 2의 도약의 기회를 모색했다. 메이저 음반사들로부터 구애의 손길이 뻗친 때가 바로 이즈음이었다. 멤버들은 컬럼비아(Columbia)와 손잡은 뒤, 1집을 재발매하며 본격적인 음악 활동의 시작점을 찍었다. ’Meet Virginia’가 당시 라디오 전파를 수시로 타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4년 뒤, 두 번째 음반 < Drops of Jupiter >(2001)를 발표한 트레인은 그래미상 3개 부문의 후보에 오르는 등의(비록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앨범은 현재까지 200만장 이상이 팔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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