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과잉시대, 우리는 오히려 디자인 결핍현상을 겪고 있다
아이폰이 출시된 이래 애플의 성장속도가 예사롭지 않다. 애플에서 나온 다른 제품들인 아이맥과 아이팟도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아이폰에는 미치지 못한다. 여기에는 뛰어난 인터페이스를 포함한 정보통신 기술력도 있지만 무엇보다 디자인의 역할이 컸다. 디자인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했던 것이다.
미래학자들은 미래사회와 경제의 새로운 원동력은 정보가 아니라 이미지와 의미라고 말한다. 미래에는 정보를 다루는 기술보다 인간에게 가치 있는 의미를 이미지로 잘 전달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점차 디자인은 글로벌시대 무한경쟁을 돌파할 기업의 경영전략이자 국가경쟁력에서도 빠져서는 안 되는 핵심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기업들은 ‘디자인 경영’ 전략을 세우고, 서울시도 명품도시를 내세우며 ‘디자인 서울’ 정책을 시행하는 현실이다. 그런데도 저자는 디자인이 세계적 화두가 된 시대에 정작 개인은 ‘디자인 결핍현상’을 겪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어찌된 일일까?
저자는 우리가 디자인의 가능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우리가 디자인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뿐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개입시키지 못하고 소외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디자인이 ‘자기 삶과 환경을 결정할 자유이며 삶에 대한 통제력을 갖는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 결과 우리는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로서, 정부에서 만든 공공시설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용자로서만 역할을 다하고 있다.
본문에서 저자는 오스트리아 빈 시와 우리나라의 서울시의 공공디자인을 예로 든다. 2006년 오스트리아 빈 시는 ‘빈은 다른 눈으로 바라본다’라는 주제로 캠페인을 벌였다. 공공정책에서 성별의 차이를 고려한 정책을 펼치자는 내용이었다. 그 가운데 공공사인에 나타난 성 역할 구분을 개선하자는 프로젝트가 있었다. 이 프로젝트 덕분에 치마 차림으로 출구를 향해 달려가는 여성을 그린 비상구 표시판, 기저귀를 가는 남성, 아기를 무릎에 앉힌 남성을 그린 표시판, 부츠 차림에 치마를 입은 여성을 그린 공사중 표시판이 생겼다.
문제는 이 때부터였다. 시 당국의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더 급진적인 비판을 하는 이들이 생겼던 것이다. 동성애 단체들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성에 근거해 이성애자만을 위한 표지판을 만들었다고 비판했고, 그 결과 콧수염이 난 여성이 그려진 표시판이 생겼다. 그러자 동물보호단체들이 들고 나섰다. 캠페인이 인간만을 위하고 있다며 반대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이쯤 되면 사소한 공공사인 하나 만드는 일에도 다양한 사회 구성원의 의견을 구하고 반영하는 일들이 얼마나 소모적인 논쟁거리인지 비판하는 사람들도 나올 만하다.
같은 해 서울시는 청계천 복원 1주년을 기념해 청계광장에 스웨덴 출신 미술가 클래스 올덴버그의 조형물 '스프링'을 세웠다. 청계천 복원 사업도 오스트리아 빈 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공공디자인을 표방한 것이었다. 하지만 접근 태도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청계광장에 들어선 조형물로 올덴버그의 작품이 선정되기까지 정작 시민들의 참여 기회는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 의견을 밝힐 수도, 토론할 기회도, 선택할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다.
저자가 오스트리아 빈 시와 서울시의 사례를 통해 주목하고자 한 것은 ‘공공디자인의 주체가 누구인가’이다. 저자는 이제 구경꾼에서 벗어나 사용자로서 주권을 찾자고 주장한다. 소비를 부추기는 디자인에 휩쓸려 디자인을 돈과 교환되는 가치로 생각하지 말고, 물건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더 나아가 우리의 생활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민하자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디자인이라고 말한다.
디자인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
디자인의 어원은 라틴어 데시네레(Designare), 즉 ‘표시하는 것(to make out)’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삶을 디자인하다, 도시를 디자인하다’처럼 목적을 위해 무언가를 ‘설계하다, 고안하다, 계획하다’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통 디자인을 이러한 어원에 비해 다소 축소된 의미, 즉 ‘제품을 멋지고 근사하게 만드는 것’으로 한정짓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역사와 깊은 연관이 있다.
디자인이 독자적인 분야로 인정받게 된 계기는 산업혁명이다.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대량생산 체계가 가속화되면서 작업의 효율을 높이고 표준을 맞추기 위해 작업공정 관리에서부터 공장 안의 배치, 사무실 공간 배치, 부품 수송, 창고 관리 등의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필요했다. 이 모든 시스템을 설계하는 과정이 바로 근대 디자인의 시작이었다. 문제는 이런 과정이 인간을 위하기보다는 기계에 인간을 맞추기 위한 목적이 더 강했다는 점이다.
근대를 거치면서 디자인은 기술과 사회의 소통을 가능케 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근대적인 디자인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는 사람들이 변화를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술의 변화와 인간의 삶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기술과 사회의 변화를 포착하여 이를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는 제품과 시스템으로 만들어내는 일이 디자이너의 역할이다. 디자인은 ‘인간적인 기술’이라는 얼굴로, ‘기술의 인간화’라는 이름으로 변화에 대처해야 했다. 그러나 그 실상은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와 포드 시스템에서 알 수 있듯 세계와 인간을 기술적으로, 기계적으로 조작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디자인은 이윤을 위해 인간을 끊임없이 ‘닦달하는’ 기술의 본모습을 감추고 그것을 달래주는 ‘유연한’ 도구로 이용되었다. (26쪽)
이후로 자본주의가 점점 성장하면서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 사람들의 소비 욕구를 자극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는데 이 때 큰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산업디자인이다. 디자인은 낯설고 검증되지 않은 새 것을 세련되고 필요한 것처럼 보이도록 소비자들을 설득했다. 우리는 디자인 세계의 이면에서 디자인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 즉 자본의 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디자인은 가능성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저자는 디자인이 반드시 자본이 지배하는 법칙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저자는 제도화된 디자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새로운 디자인의 원천을 발견할 수 있다면, 삶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일상의 구체적인 행위 속에 녹아있는 디자인, 자신만의 가치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디자인, 서구의 디자인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 주변에서 수비게 찾을 수 있는 디자인, 사물에 깊은 감정을 담은 디자인이 바로 새로운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디자인이라고 말한다. 디자인은 눈에 보이는 가치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가치와 의미까지 더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산업디자인의 세계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오브젝티파이드'에는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세계적인 디자인 회사 IDEO는 칫솔을 디자인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다양한 생각을 가진 디자이너들이 모여 회의를 진행한다. 기존 제품을 검토하며 장단점을 이야기하고, 평소 칫솔을 사용하며 느꼈던 경험을 나누기도 한다. 마침내 디자이너들이 내린 결론은 단순히 더 나은 모양이나 새로운 기능을 추가한 ‘또 하나의’ 칫솔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대신 그들이 택한 것은 치아 건강과 구강 위생 및 관리를 지원하는 포괄적인 시스템을 고안하는 일이었다.(191쪽)
우리는 여전히 디자인의 대상이나 결과물만을 고려하고, 그에 따라 디자인의 분야를 나누고 경계 짓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디자인의 대상은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왔고, 그 경계도 모호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디자인은 제품 하나하나를 완결적으로 잘 만드는 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제 디자인의 대상은 물리적인 의미의 사물이나 제품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정보와 서비스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디자인의 지향점이 제품과 제품 사이의 관계, 제품과 사용자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192쪽)
이 책은 디자인의 유쾌한 에피소드를 이야기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디자인을 때로는 선망의 대상으로 받들면서도, 디자인이 정작 생활을 변화시키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잊고 산다. 그러니 디자인의 비밀을 몇 가지 파헤쳐보는 것은 차라리 뼈아픈 경험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그렇게 저자는 디자인이라는 창을 통해, 우리의 삶의 방식을 다시 되돌아보도록 권유하고 있다.
청소년들과 사회초년생들에게 필요한 디자인 비평서
이 책은 청소년들과 사회초년생들에게 디자인을 인문학적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게 돕기 위해 씌어졌다. 여러 선진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중고등학교에서 디자인 교육을 시행하는 데 비해 한국은 디자인 교육이 전무하다. 영국에서는 1989년부터 중등교육과정에 ‘디자인과 테크놀로지’라는 필수 과목을 두고 있다. 한국에서도 2010년부터 서울시와 시교육청에서 개발한 초등학생용 디자인교과서가 일부 학교에서 재량활동시간에 활용되고 있지만 그 영향은 미미한 편이다. 미술대학에서조차 인문학을 기반으로 하는 디자인 강의가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다. 이런 환경 속에서는 무엇보다 청소년들과 사회초년생들의 눈높이에 맞춘 디자인 비평서가 필요하다.
디자인은 창조적인 프로세스다.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기반으로 미래에 대한 창조적 발상이 필요하다. 인간의 삶 그 자체에 대한 학문이 인문학이므로 디자이너 역시 인문학적 통찰력을 갖추어야 한다. 저자는 디자인은 예술이나 기술이 아니라 차라리 인문과학의 영역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디자인은 인간의 삶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디자인을 순수한 미술이나 예술로 환원할 때, 그 안에 디자인을 접하는 사람의 존재는 없어진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바로 이 기본적인 마음가짐에서 비롯한다. 그러니 그의 글에서 미학과 예술 용어 대신 삶, 역사, 정치, 사회, 소통과 같은 어휘가 빈번히 등장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삶 바깥에 존재하는 디자인이란 없기 때문이다.
《비밀 많은 디자인 씨》에서 우리는 디자인의 역사, 그 속에서 벌어진 논쟁들, 디자인이 담고 있는 삶의 모습, 디자이너들의 고민, 디자인을 능동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고민과 열정과 마주한다. 저자의 시선은 '모던 타임즈'에 등장하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티보 칼맨의 ‘숫자 5만 쓰인 시계’까지, 스티브 잡스의 애플에서 박활민의 촛불소녀까지, 아파트에서 공공 디자인에까지 이른다. 디자인의 역사를 돌아보며 디자인이 만든 삶의 여러 모습을 보여주는 1부, 디자인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 경제적, 문화적 조건을 말하는 2부, 디자인을 통해 우리 모두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게 변화할 수 있는지 창조와 가능성으로서 디자인의 진정한 비밀을 이야기하는 3부를 지나는 동안 독자들은 디자인 비평서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던 대상까지 아우르며, 디자인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