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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음악 모음집 (The Classic Rock Collection)

주다스 프리스트, 미트 로프, 토토, 딥 퍼플, 모터헤드, 저니, 앨리스 쿠퍼 등

[ 3CD ]
Boston, Alice Cooper, Ram Jam, Blue Oyster Cult, Meat Loaf 노래 외 55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SonyMusic | 2017년 06월 26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48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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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음악 모음집 (The Classic Rock Collection)

이 상품의 시리즈 (5개)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7년 06월 26일
제조국 EU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1
  • 01 More Than a Feeling - Boston
  • 02 Poison - Alice Cooper
  • 03 Black Betty - Ram Jam
  • 04 Smoke On the Water - Deep Purple
  • 05 Breakin The Law - Judas Priest
  • 06 (Don't Fear) The Reaper - Blue Oyster Cult
  • 07 Bat Out of Hell - Meat Loaf
  • 08 Danger Zone - Kenny Loggins
  • 09 Hold the Line - Toto
  • 10 Can't Fight This Feeling - REO Speedwagon
  • 11 The Final Countdown - Europe
  • 12 Burning Heart - Survivor
  • 13 All Day and All of the Night - The Stranglers
  • 14 All the Young Dudes - Mott The Hoople
  • 15 God Gave Rock and Roll to You - Argent
  • 16 I Got a Line on You - Spirit
  • 17 Once Bitten, Twice Shy - Ian Hunter
  • 18 Pictured Life - Scorpions
  • 19 Your Love - The Outfield
Disc2
  • 01 Rocks - Primal Scream
  • 02 Motorcycle Emptiness - Manic Street Preachers
  • 03 Another Girl Another Planet - The Only Ones
  • 04 Word Up! - Korn
  • 05 Bang Your Head (Metal Health) - Quiet Riot
  • 06 Cat Scratch Fever - Motorhead
  • 07 Cherry Pie - Warrant
  • 08 Mississippi Queen - Mountain
  • 09 Barracuda - Heart
  • 10 Any Way You Want It - Journey
  • 11 Carry on Wayward Son - Kansas
  • 12 Sweet Talkin' Woman - Electric Light Orchestra
  • 13 Somebody To Love - Jefferson Airplane
  • 14 Black Magic Woman - Fleetwood Mac
  • 15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 The Jeff Healey Band
  • 16 Teenage Head - Flamin' Groovies
  • 17 Cuddly Toy - Roachford
  • 18 The House Is Rockin' - Stevie Ray Vaughan & Double Trouble
  • 19 Flirtin' With Disaster - Molly Hatchet
  • 20 Frankenstein - The Edgar Winter Group
  • 21 Piece of My Heart - Big Brother & The Holding Company
Disc3
  • 01 Last Goodbye - Jeff Buckley
  • 02 Because the Night - Patti Smith Group
  • 03 Dollar Bill - Screaming Trees
  • 04 Drops of Jupiter - Train
  • 05 Teenage Dirtbag - Wheatus
  • 06 Heartbreak Warfare - John Mayer
  • 07 How to Save a Life - The Fray
  • 08 Eye in the Sky - The Alan Parsons Project
  • 09 She's Not There - Santana
  • 10 The Witch Queen of New Orleans - Redbone
  • 11 Surrender - Cheap Trick
  • 12 Rock and Roll, Hoochie Koo - Johnny Winter
  • 13 The Animal - Steve Vai
  • 14 Race with the Devil - The Gun
  • 15 Love Rears Its Ugly Head - Living Colour
  • 16 Hold on Baby - JJ Cale
  • 17 American Woman - The Guess Who
  • 18 Tuff Enuff - The Fabulous Thunderbirds
  • 19 Carol - Al Stewart
  • 20 When I See You Smile - Bad English

아티스트 소개 (60명)

세계의 석학들이 모인 MIT 공과 대학, 가장 많이 팔린 데뷔 앨범 중 하나, 자신이 손수 제작한 기타와 이펙터, 그리고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팀워크에 의한 깨끗한 사운드. 바로 이런 것들이 1970년대 중반 미국 록음악 계에 신선한 충격을 가한 보스톤(Boston)을 가장 짧게,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하는 문구들이다. 1976년에 데뷔 음반을 발표해 록음악 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보스톤은 포리너(... 세계의 석학들이 모인 MIT 공과 대학, 가장 많이 팔린 데뷔 앨범 중 하나, 자신이 손수 제작한 기타와 이펙터, 그리고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팀워크에 의한 깨끗한 사운드. 바로 이런 것들이 1970년대 중반 미국 록음악 계에 신선한 충격을 가한 보스톤(Boston)을 가장 짧게,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하는 문구들이다. 1976년에 데뷔 음반을 발표해 록음악 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보스톤은 포리너(Foreigner), 저니(Journey), 후반기의 스틱스(Styx) 등과 함께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화려하게 수놓은 성인 취향의 하드록이 메인스트림에 정착하는데 선두적인 역할을 한 것은 물론 새로운 사운드를 창조하는데 이바지하기도 했다. 그룹 보스톤의 중심 인물은 기타리스트 톰 슐츠(Tom Scholz)다. 메사츄세츠 공과 대학(MIT)에서 석사 학위까지 받은 그는 자신의 박식한 전자 지식을 기타와 사운드 이펙터의 개념에 이식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자신만의 일렉트릭 사운드를 구현했다. 보스톤의 깔끔하고 빈틈없는 연주는 완벽 주의자인 톰 슐츠의 기타 사운드가 정의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970년대 초반 이 엘리트 청년은 지방 밴드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배리 구드루(Barry Goudreau)와 고음의 소화력이 출중한 브래드 델프(Brad Delp/보컬), 프랜 쉬한(Fran Ssheehan/베이스), 시브 하시한(Sib Hashihan/드럼)을 만나면서 보스톤의 지형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1975년에 데모 테이프를 제작해 에픽 레코드사와 정식 계약을 맺고 이듬해에 공개된 처녀작이 록의 고전으로 추앙 받는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 < Boston >이다. 기세 등등한 디스코와 펑크록의 물결 속에서 정통 록의 자존심을 지킨 이 LP에서 첫 싱글로 커트된 ’More than a feeling(5위)’을 필두로 ’Foreplay/Long time(22위)’, ’Peace of mind(38위)’가 차례로 싱글 차트를 방문해 록의 건재함을 증명해 보였다. 특히 1997년에는 현재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보이 밴드 엔 싱크(N’ Sync)가 발표한 아시아판 데뷔 앨범에서 ‘More than a feeling’을 리메이크해 실었으며, 1998년에도 라틴계 남성 3인조 댄스 보컬 그룹 노 머시(No Mercy)가 다시 한번 재해석함으로써 록과 팝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1978년에 발표된 두 번째 작품 < Don’t look back >도 록팬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들의 음악 중에서 가장 멋진 기타 리프를 선보인 앨범 타이틀 트랙 ’Don’t look back(4위)’을 비롯해 ’A man I’ll never be(31위)’와 ’Feelin’ satisfied(46위)’가 그 견인차 역할을 했다. 1집에 이어 이 음반도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오름으로써 그동안 영국 세에 밀린 아메리칸 하드록의 자존심을 회복하는데 선두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록밴드가 그러하듯 그들도 음반사와의 함수 관계는 좋지 못했다. 레코드사와의 의견 충돌 때문에 보스톤의 차기작 < Third Stage >는 < Don’t Look Back >이 탄생 한지 8년이 지난 1986년에 발표되었다. 국내에서 보스톤의 이름을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록발라드 ’Amanda’는 그들에게 유일한 넘버원의 영광을 부여한 곡이며 ’We’re ready(9위)’와 ’Can’tcha say (You believe in me)/Still in love(20위)’도 히트 차트를 누볐다. 하지만 8년이란 긴 세월은 보컬리스트인 브래드 델프와 팀의 리더 톰 슐츠만을 원년 멤버로 남겨 두고 나머지 구성원들을 보스톤으로부터 떠나게 했다. 처녀작 공개 이후 정확히 10년이 흘러 새로운 식구들을 맞이해 제작한 음반 < Third Stage >는 이전의 음반들에 비해 확실히 연륜있는 여유가 느껴지기도 한 반면 전작들에 비해 스트레이트한 질주감이 반감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로부터 다시 한번 8년이란 세월을 감내 한 보스톤은 1994년에 네 번째 앨범 < Walk On >을 내놓았지만 이번에는 철저하게 외면 당했다. 브래드 델프 대신 새로운 목소리 프랜 코스모(Fran Cosmo)를 영입해 발표한 보스톤의 4집에서는 ’I need your love’만이 고독하게 51위에 올랐다. 거칠면 거친대로, 있는 그대로, 가공하지 않은 아마추어리즘을 미덕으로 하는 1990년대의 얼터너티브 그런지 시대에 깔끔하고 깨끗한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보스톤의 프로페셔날한 사운드 사이에는 분명한 갭이 존재했었다. 현재는 새로운 음반 제작보다는 공연 위주의 활동을 통해 팬들과 교감을 나누고 있으며, 또한 자신이 발명한 기타와 이펙터를 통해 능숙한 사업 수완을 발휘하고 있다. 프로 뮤지션으로 데뷔 한지 25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 단 4장의 정규 앨범을 공개한 아메리칸 하드록의 지존 보스톤은 레코드사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신념에 따라 음반을 제작했다. 그 원초적인 힘은 음악적인 믿음을 고집하는 리더 톰 슐츠의 장인 정신에서 기인한다.
앨리스 쿠퍼는 현재 대부분의 헤비메탈, 익스트림 록 밴드들이 공통적으로 취하고 있는 이미지, 즉 기괴한 의상, 현란한 분장, 충격적인 무대 매너 등을 가장 먼저 시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록의 산증인’으로 평가 받고 있는 거물이다. 음악 팬들은 30년 넘게 행해진 그의 엽기 반란의 음악과 무대를 ’쇼크 록’으로 명명하고 그를 대부로 임명했다. 1980년대 전성기를 누린 헤비메탈을 시작으로, 1990년대... 앨리스 쿠퍼는 현재 대부분의 헤비메탈, 익스트림 록 밴드들이 공통적으로 취하고 있는 이미지, 즉 기괴한 의상, 현란한 분장, 충격적인 무대 매너 등을 가장 먼저 시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록의 산증인’으로 평가 받고 있는 거물이다. 음악 팬들은 30년 넘게 행해진 그의 엽기 반란의 음악과 무대를 ’쇼크 록’으로 명명하고 그를 대부로 임명했다. 1980년대 전성기를 누린 헤비메탈을 시작으로, 1990년대 데스, 고딕, 블랙, 둠 등으로 가지 치기를 한 익스트림 메탈에 이르기까지 앨리스 쿠퍼가 심어놓은 이미지 장치들은 헤비메탈의 올 라운드를 아우르고 있다. 또한 마릴린 맨슨으로 대표되는 인더스트리얼도 엘리스 쿠퍼의 편린들이다. 1948년 2월 4일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난 앨리스 쿠퍼(본명: Vincent Furnier)는 고교시절 친구들과 함께 나즈(Nazz)라는 스쿨밴드를 결성하며 거친 록의 세계에 문을 두드렸다. 1968년 앨리스 쿠퍼로 개명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밴드명으로 내걸고 쇼크 록의 오프닝을 알렸다. 음악 자체가 파격적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이미지와 행동거지는 파격을 넘어서 충격적이었다. 까마귀를 연상시키는 검은 분장을 눈자위 가득 칠하고 영적인 듯한 행동을 일삼았다. 이는 일부 대중에게 역겨움을 이끌어 내었지만 동시에 수 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어내며 엽기와 극단이 록의 중추적인 흐름으로 이끌어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엘리스 쿠퍼는 1969년 레이블을 통해 발표한 데뷔작 부터 1973년 7집 에 이르는 기간동안 쇼크 록의 제왕으로서 그 본분을 충실히 했다. ’I’m eighteen’, ’Under my wheels’, ’Elected’, ’No more mr. nice guy’, ’Teenage lament ’74’ 등 많은 하드 록 히트곡들을 쏘아올렸고, 1971년 투어로 대표되는 극단적인 공연 모습을 통해 전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마녀가 자신의 뒤를 이으라고 하는 요상한 꿈을 꾼 것으로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만큼 그의 행동은 주술성이 강한 것이었다. 샤머니스트, 또는 ’악령의 전도사’와 같은 단어가 매우 잘 어울렸다. 공연에서는 누런 얼룩 구렁이와 입을 맞추고, 목을 매는 등 갖은 엽기 행각은 절정에 달했다. 1975년 부터 솔로 뮤지션으로 전향한 그는 강렬한 록 밴드의 프런트맨에서 인간미를 겸비한 싱어 송 라이터로 파격 변신을 했다. 당시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고 있기도 했던 그는 전성기 시절에 비해 음악적으로 평가절하 되었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 선보이기 시작한 ’You & me’, ’I never cry’, ’How you gonna see me now’ 등 팝에 가까운 발라드 곡들로 국내에도 많은 팬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80년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잠시동안의 휴지기 이후 앨리스 쿠퍼는 이전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다시금 본령을 회복했다. 1986년 작품 로 재기에 성공한 그는 조 새트리아니, 롭 좀비, 슬래시 등 많은 후배 뮤지션들과 조우하며 거장의 면모를 과시했고, 1994년 발표한 컨셉 앨범 등에서 특유의 개성 넘치는 창작력을 발휘하며 현재까지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노래 : Blue Oyster Cult (블루 오이스터 컬트)
197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혈기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미국 뉴욕 출신의 밴드 블루 오이스터 컬트는 헤비메탈의 원류(原流)를 탐사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그룹이다. 그들은 1960년대 후반을 휩쓴 사이키델릭과 블루스 리바이벌에 의한 하드록 대신 로큰롤의 부기 사운드와 리프 중심의 심플하고 강력한 패턴을 들고 나왔다. 또한 사탄의 이미지를 노랫말과 라이브무대에서 재현하여 ‘헤비메탈은 악마의 음악’이라는 ... 197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혈기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미국 뉴욕 출신의 밴드 블루 오이스터 컬트는 헤비메탈의 원류(原流)를 탐사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그룹이다. 그들은 1960년대 후반을 휩쓴 사이키델릭과 블루스 리바이벌에 의한 하드록 대신 로큰롤의 부기 사운드와 리프 중심의 심플하고 강력한 패턴을 들고 나왔다. 또한 사탄의 이미지를 노랫말과 라이브무대에서 재현하여 ‘헤비메탈은 악마의 음악’이라는 공식을 정의 내렸다. 특히 레이저 광선을 이용한 공연은 블루 오이스터 컬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환각적인 분위기와 사악하고 그로데스크한 이미지가 결합한 라이브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때문에 종교단체와 보수 층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는 일부 팬들이 일시적으로 눈을 못 뜨게 되자 1976년 앨범 < Agents Of Fortutune >의 투어 이후 레이저 쇼는 중단되기도 했다. 블루 오이스터 컬트의 이러한 이미지 확립은 ‘배운’ 멤버들과 ‘평론가’ 매니저의 철저한 계산에 따른 것이다. 그룹은 1960년대 후반 잦은 멤버교체를 겪은 후 1971년 보컬리스트 에릭 블룸(Eric Bloom), 리드 기타리스트 도널드 로저(Donald Roeser), 드러머 앨버트 부처드(Albert Bouchard)와 베이시스트 조 부처드(Joe Bouchard)형제, 그리고 리듬 기타리스트 앨런 래니어(Allen Lanier)로 완벽한 진용을 갖췄다. 멤버들은 모두 대학교 동창들로 구성됐다. 여기에 록 매거진 < 크러대디(Crawdaddy) >의 기자였던 샌디 펄맨(Sandy Pearlman)이 가세, 블루 오이스터 컬트란 그룹명을 만들고 밴드의 이미지 재고에 나섰다(샌디 펄맨은 나중에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의 매니저도 맡는다). 멤버들은 충격적인 무대매너를 위해 ‘쇼크 록의 대부’ 앨리스 쿠퍼(Alice Cooper)로부터 과외(?)까지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룹이 메인 스트림의 수면위로 부상하게 된 것은 1974년의 3집 앨범 < Secret Treaties >를 통해서였다. 평론가들에 의해 블루 오이스터 컬트의 최고 작품으로 꼽히는 이 음반은 지칠 줄 모르는 공격력과 음산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메탈리카(Metallica)가 1998년 앨범 < Garage, Inc. >에서 재해석했던 ‘Astronomy''을 포함해, ‘Harvester Of Eyes'', ‘Subhuman'' 등 라이브에서 항상 연주되는 곡들이 입증한다. 당시 앨런 래니어의 여자 친구였던 ‘펑크의 대모’ 패티 스미스(Patti Smith)가 작곡한 ‘Career Of Evil''도 인상적인 트랙이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블루 오이스터 컬트의 인기행진은 1980년대 초반까지 계속됐다. 차트 12위까지 오르며 단일곡으로 최대의 성공을 거둔 ‘(Don''t fear) the reaper)''가 수록된 1976년 4집 앨범을 필두로, 그룹의 아이콘인 ‘고질라(Godzilla)''가 들어있는 1977년의 < Spectres >,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Burnin'' for you''가 담겨있는 1981년의 < Fire Of Unknown Origin > 등 완성도와 상업성을 두루 갖춘 작품들을 내놓았다. 하지만 앨버트 부처드, 앨런 래니어, 조 부처드 등 멤버들의 잇단 탈퇴는 그룹의 앞날을 불투명하게 했다. 결국 밴드는 1988년 앨런 래니어가 재가입하여 만든 11번째 정규 앨범 < Imaginos >를 마지막으로 긴 휴지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블루 오이스터 컬트는 1998년 앨범 < Heaven Forbid >를 내놓으며 자신들의 음악 본령이 살아있음을 만천하에 고했다. 10년만에 발표한 음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사운드는 여전했다. 헤비메탈이라는 장르를 논할 때 블루 오이스터 컬트는 언제나 상석(上席)에 위치하며 그들의 영향력을 과시한다. 그들이 몰고 온 사운드와 이미지는 ‘헤비메탈’ 그 자체였으며, 모든 것이었다. 허나 밴드는 역사 속으로 안치되는 것을 거부하고 아직도 끊임없이 헤비메탈의 울림을 전파하고 있다.
‘고깃덩어리’라는 뜻의 예명처럼 거구의 몸집과 풍부한 성량을 자랑하는 미트 로프는 우리에게 1977년의 앨범 < Bat Out Of Hell >, 그리고 그 속편격인 1993년의 < Bat Out Of Hell Ⅱ: Back Into Hell >로 널리 알려진 팝 록 뮤지션이다. 곡은 1993년 앨범에서 발표되어 전미 차트 정상에 오른 싱글 ‘I’d do anything for love(but I won’t do... ‘고깃덩어리’라는 뜻의 예명처럼 거구의 몸집과 풍부한 성량을 자랑하는 미트 로프는 우리에게 1977년의 앨범 < Bat Out Of Hell >, 그리고 그 속편격인 1993년의 < Bat Out Of Hell Ⅱ: Back Into Hell >로 널리 알려진 팝 록 뮤지션이다. 곡은 1993년 앨범에서 발표되어 전미 차트 정상에 오른 싱글 ‘I’d do anything for love(but I won’t do that)’가 유명하다. 1946년 1월22일 미국 텍사스 달라스 태생으로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하다가 음악의 길을 선택, 1967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팝콘 비자드’라는 이름의 밴드로 쇼 비즈니스계에 발을 내디뎠다. 본명은 마빈 리 어데이(Marvin Lee Aday)이고 1984년 마이클 어데이로 개명했지만 우량아였던 탓에 아버지가 불렀던 애칭 미트 로프로 예명을 취했다. 밴드가 해산한 뒤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시작으로 영화, TV의 배우로 활동을 넓히게 된 그는 브로드웨이 데뷔작 < 헤어 >에 출연하며 순회공연을 하던 중 스토니(Stoney)라는 이름의 뮤지션을 만났다. 그와 두 번째 밴드 ‘스토니 앤 미트 로프’를 결성해 데뷔 앨범을 1971년 선보였고, 거기서의 싱글 ‘What you see is what you get’은 첫 차트진출 곡이 되었다(싱글 차트 71위) 이후 일련의 뮤지컬에 출연한 것이 전환이 되어 그의 음악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짐 스타인먼(Jim Steinman)을 뮤지컬 < More Than You Deserve > 때 만나게 된다. 그가 곡을 쓴 미트 로프의 앨범 < Bat Out Of hell >은 1977년에 발표되어 그를 최고 스타의 자리로 올려놓았다. 여기서는 빌보드 싱글 11위를 차지한 ‘Two out of three ain’t bad’을 비롯해 ‘Paradise by dashboard light’(39위) ‘You took the words right out of my mouth’(39위) 등의 히트곡이 나왔고 앨범은 미국에서만 1400만장이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영국에서는 15년이 넘게 앨범차트에 머물러 가장 오랫동안 차트에 머문 앨범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앨범의 스매시 히트는 부담으로 작용, 이후의 작품들은 부진을 면치 못했다. 1981년의 앨범 < Dead Ringer >, 1985년의 < Bad Attitude >, 1986년의 < Blind Before I Stop >, 1987년의 라이브 < Meat Loaf Live >는 별반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했고 미트 로프는 영화 쪽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가 다시 음악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때는 전성기로부터 15년 정도가 흐른 1993년에 앨범 < Bat Out Of Hell Ⅱ: Back Into Hell >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싱글 ‘I’d do anything for love(but I won’t do that)’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그에게 생애 첫 싱글 차트 정상의 영광을 안겨주었으며 앨범도 차트 정상을 호령하며 500만장의 판매고를 수립했다. 그와 짐 스타인먼이 모두 존경해마지 않는 바그너(Wagner) 식의 웅장하고 드라마틱한 음악요소들과 < 미녀와 야수 > < 엘리펀트 맨 > < 터미네이터 > 등의 영화에 기초한 싱글의 뮤직비디오 역시 화제를 불러 모았다. 후속 싱글 ‘Rock and roll dream come through’(13위), 긴 제목의 ‘Objects in the rear view mirror may appear closer than they are(백미러의 물체는 실제보다 가까이 보인다)’(38위)도 호응을 얻는 화려한 재기였다. 재기 여파를 타고 2년 뒤인 1995년에 다시 앨범 < Welcome To The Neighborhood >를 내놓았다. 여성 작곡가 다이안 워렌(Dianne Warren)이 쓴, 전작과 유사한 느낌을 준 록발라드 ‘I’d lie for you’(13위)로 저력을 발휘했지만 그것으로 다시 도래한 스타덤은 끝이었다. 2003년, 8년 만의 스튜디오 앨범인 < Couldn’t Have Said It Better >을 내놓고 다시 한번의 영광을 꿈꾸었지만 세인의 관심에서 이미 멀어진 상태였다. 그는 1994년과 1996년 내한한 바 있다. < Discography > 1971 Stoney & Meat Loaf 1977 Bat out of Hell 1981 Dead Ringer 1985 Bad Attitude 1986 Blind Before I Stop 1987 Live 1993 Bat out of Hell II: Back Into Hell 1995 Welcome to the Neighborhood 2003 Couldn’t Have Said It Better
1990년대 후반 일기예보가 발표한 ‘좋아 좋아’의 클라이맥스 소절을 들었을 때 많은 음악 팬들은 팝록, 어덜트 컨템포러리 싱어 케니 로긴스(Kenny Loggins)가 1982년에 공개한 ‘The more we try’를 떠올렸다. 일기예보의 노래가 케니 로긴스의 발라드 스타일보다 업템포로 밝은 면을 강조했지만 클라이막스의 기본 멜로디는 같았다. ‘The more we try’는 ‘Forever’, ‘Footl... 1990년대 후반 일기예보가 발표한 ‘좋아 좋아’의 클라이맥스 소절을 들었을 때 많은 음악 팬들은 팝록, 어덜트 컨템포러리 싱어 케니 로긴스(Kenny Loggins)가 1982년에 공개한 ‘The more we try’를 떠올렸다. 일기예보의 노래가 케니 로긴스의 발라드 스타일보다 업템포로 밝은 면을 강조했지만 클라이막스의 기본 멜로디는 같았다. ‘The more we try’는 ‘Forever’, ‘Footloose’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케니 로긴스의 베스트 트랙이다. 1948년 1월 7일 미국의 워싱턴 주에서 태어난 케니 로긴스는 1970년대 초반 짐 메시나(Jim Messina)와 함께 포크록 듀오 로긴스 & 메시나(Loggins & Messina)를 만들어 ‘Your Mama don''t dance(4위)’나 ‘Thinking of you(18위)’같은 히트곡을 배출했는데 특히 ‘Your mama don''t dance’는 1988년 팝메탈 밴드 포이즌(Poison)이 커버해 다시 한번 탑 텐에 올려놓아 다시 한번 명곡임을 입증했다. 케니는 성공적인 듀엣 활동을 접고 1977년부터 결별해 본격적으로 독립 활동을 시작해 멜리사 맨체스터(Melissa Manchester)와 공동으로 작곡한 ‘Whenever I call you friend(5위)’를 비롯해 ‘This is it(11위)’, 케니 로긴스의 오리지날을 두비 브라더스가 리메이크해 차트 정상은 물론 그래미 올해의 레코드를 수상한 ‘What a fool believes’ 등으로 1970년대를 마감했다. 그의 진정한 성공은 1980년대를 맞이하면서 화려하게 개화하기 시작했다. 1982년에 저니(Journey)의 보컬리스트 스티브 페리(Steve Perry)와 호흡을 맞춘 ‘Don''t fight it(17위)’와 ‘Heart to heart(15위)’, 그리고 유독 국내에서 사랑 받았던 ‘The more we try’가 들어 있는 그의 역작 < High Adventure >는 곧 다가올 성공에 대한 워밍업이었다. 1984년부터 쏟아지는 케니 로긴스의 히트곡들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거의 모두가 영화에 삽입된 노래들이었다. 그의 대표곡 ‘Footloose(1위)’와 ‘I''m free(22위)’는 영화 < 풋루스 >의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노래들이었고, ‘Danger zone(2위)’은 < 탑 건 >에서, ‘Meet me half way(11위)’는 < 오버 더 탑 >으로부터, ‘Nobody''s fool(8위)’은 < 캐디섁Ⅱ >에서 배출된 히트 싱글들이다. 그러나 이 ‘Nobody''s fool’을 마지막으로 싱글 차트와의 친분을 정리한 케니 로긴스는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가족의 소중함과 어린이들을 위한 음반을 만드는데 열중했다. 1990년대 초반 아내와의 이혼이 그에겐 큰 충격이었던 셈이다. 그의 예민하고 가녀린 목소리는 ‘Danger zone’이나 ‘Don''t fight it’처럼 강한 음악보다 ‘The more we try’나 ‘Forever’, ‘Whenever I call you friend’와 같은 차분하고 부드러운 노래에 더 잘 어울린다. 그의 성공은 팝시대로 대표되는 1980년대 음악 풍토에 정확히 들어맞는 시대적 요청이었기에 가능했다.
노래 : REO Speedwagon (알이오 스피드웨건)
꾸준함은 모든 난관을 극복하게 하며 끈기는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의지를 부여한다. 이 소박하고도 당연한 불변의 진리는 대중 음악계에서도 변함 없이 적용된다. 상업적인 성공이나 명성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미쳐 초지일관으로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행복인 동시에 자신감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10년 이상의 무명 생활을 그루터기처럼 꿋꿋하게 감내해 낸 알이오 스피드왜건(REO Speedwagon)은... 꾸준함은 모든 난관을 극복하게 하며 끈기는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의지를 부여한다. 이 소박하고도 당연한 불변의 진리는 대중 음악계에서도 변함 없이 적용된다. 상업적인 성공이나 명성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미쳐 초지일관으로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행복인 동시에 자신감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10년 이상의 무명 생활을 그루터기처럼 꿋꿋하게 감내해 낸 알이오 스피드왜건(REO Speedwagon)은 밴드 결성 12년만인 1980년 아홉 번째 정규 앨범 < High Infidelity >로 정상의 인기를 구가한 대기만성형인 성인 취향의 팝록 그룹이다. 팝음악 계에서는 변방으로 꼽히는 미국 일리노이즈 주에서 건반 주자 닐 도티(Neal Doughty)와 드러머 알란 그랫처(Alan Gratzer)라는 두 젊은 대학생을 중심으로 개리 리치라스(Gary Richrath/기타), 그레그 필빈(Gregg Philbin/베이스), 마이크 머피(Mike Murphy/보컬)가 의기투합한 팀이 1968년에 결성된 알이오 스피드왜건이다. 팀의 목소리는 곧 전직 포크 싱어였던 케빈 크로닌(Kevin Cronin)으로 바통터치 되어 변화를 시도했지만 이들의 성공은 요원해 보였다. 그러자 당시 이 5인조 밴드는 그 타개책으로 ’질보다 양’의 물량 공세 전략을 택했다. 이들은 1971년부터 거의 매년 발표한 앨범과 이 음반들을 지원 사격하기 위해 1년에 250일 이상 강행군된 공연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넓히고자 했다. 하지만 1970년대 당시 인기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고난도의 연주 테크닉과 파워를 바탕으로 하는 하드록과 헤비메탈, 쾌락의 정점을 보여준 디스코, 그리고 그 정반대의 대칭점에 위치한 소프트 록에 근거한 발라드, 그 어느 쪽에도 명쾌하게 포함되지 못한 알이오 스피드왜건은 1980년 < High Infidelity >를 발판으로 삼아 메이저리거로 올라서기 전까지 ’Ridin’ the storm out(94위)’, ’Roll with the changes(58위)’, ’Time for me to fly(77위)’ 같은 극히 미미한 히트 싱글만을 배출한 마이너리거였다. 이 무명 밴드는 1980년대를 맞이하면서 라디오와 싱글에 초점을 맞춘 감각적인 멜로디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국내 주류 광고에도 사용되었던 불후의 넘버원 발라드 ’Keep on loving you’를 시발점으로 ’Take it on the run(5위)’, ’Don’t let him go(24위)’, 그리고 우리나라 팝팬들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In your letter(20위)’가 수록된 < High Infidelity >는 현재까지 900만장 이상이 팔려 다이아몬드 레코드(천만장 이상)를 목전에 두고 있으며, 1982년에 발표한 차기 작품 < Good Trouble >에서는 싱글 ’Keep the fire burnin’’을 7위까지 올려놓았지만 이러한 성공적인 결과와는 달리 음악 평론가들은 이들의 노래가 팬들의 유행 감각에 쉽게 좌우되는 상업 음악의 정점이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Keep on loving you’와 함께 자신들의 발라드 대표곡으로 투 톱을 이루는 ’Can’t fight this feeling(1985년 3주간 1위)’과 ’One lonely night(19위)’, ’Live every moment(34위)’로 다시 한번 인기몰이에 성공한 알이오 스피드왜건은 결성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간 록트랙 ’That ain’t love(16위)’와 국내에서 높은 인기를 누린 ’In my dreams(19위)’ 등으로 1980년대 말까지 그 명성을 이어갔지만 이후 음악 토양이 완벽하게 바뀐 1990년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싱글 차트에서는 명예퇴직을 하게 되었다. 현재 이들은 같은 성향의 동료 밴드들인 스틱스(Styx), 포리너(Foreigner), 저니(Journey), 플리트우드 맥(Fleetwood Mac) 등과 함께 전 미국을 순회하는 공연에 동참하고 있다.
영화 < 록키 3 >도 1편을 능가하는 속편은 없다는 속설을 다시 한번 입증한 보통의 영웅담이었다. 뻔한 스토리에 인간 복제 한 듯 똑같은 주인공, 그리고 틀에 박힌 결말. 그러나 이 평범한 권투 영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것은 서바이버(Survivor)가 부른 주제가 ''Eye of the tiger''다. 이 곡은 스크린의 긴장감을 200% 살리면서 성공적인 흥행을 일궈내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77... 영화 < 록키 3 >도 1편을 능가하는 속편은 없다는 속설을 다시 한번 입증한 보통의 영웅담이었다. 뻔한 스토리에 인간 복제 한 듯 똑같은 주인공, 그리고 틀에 박힌 결말. 그러나 이 평범한 권투 영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것은 서바이버(Survivor)가 부른 주제가 ''Eye of the tiger''다. 이 곡은 스크린의 긴장감을 200% 살리면서 성공적인 흥행을 일궈내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77년, 추운 날씨로 유명한 시카고에서 살아남은 서바이버는 주축 멤버인 키보디스트 짐 페테릭(Jim Peterik)과 기타리스트 프랭키 설리반(Frankie Sullivan)이 거의 모든 노래들을 작곡하는 성인 취향의 팝록 밴드였다. 1980년의 데뷔 앨범 < Survivor >와 2집 < Premonition >에서 ''Somewhere in America(70위)''와 ''Poor man''s son(33위)''으로 어느 정도의 인기 기반을 닦은 그들은 < 록키 3 >의 제작을 기획하던 실베스터 스탤론의 눈에 띄어 영화 오프닝에 수록될 주제곡을 의뢰받는다. "우리는 리듬과 비트를 구상해 놓고 있었지만 정작 그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멜로디 훅을 만들었다"라고 짐 페테릭은 말했다. 긴박한 기타 연주와 박력있는 데이브 빅클러(Dave Bickler)의 보컬이 앙상블을 이뤄 멜로딕하면서도 호전적인 분위기를 제공한 ''Eye of the tiger''는 빌보드 싱글 차트 6주간 정상을 차지한 것을 비롯해 그래미 록부문 최우수 그룹상 수상, 피플스 초이스 어워드 최우수 신곡상 수상, 아카데미 주제가상 후보에 오르는 등 이 한 곡으로 거의 모든 영광을 차지했다. 한편 국내에서는 이 곡이 들어있는 음반 < Eye Of The Tiger >에 수록된 ''Ever since the world began''라는 발라드 곡이 팝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Eye of the tiger'' 이후 이들은 1984년의 영화 < 베스트 키드 >의 주제가 ''Moment of truth(63위)''와 1986년 다시 한번 실베스터 스탤론과 손잡은 < 록키 4 >의 주제가 ''Burning heart(2위)''를 취입하기도 했지만 더 이상의 영화 주제가를 만들지 않았다. 통산 4집 < Caught In The Game >의 좌절 이후 보컬리스트 데이브 빅클러는 건강상의 이유로 밴드를 탈퇴했고 그 후임으로 데이브와 비슷한 음색을 소유한 짐 제이미슨(Jim Jamison)을 맞이하면서 전열을 정비한 서바이버는 3곡의 히트곡을 배출한 < Vital Signs >를 1984년에 발표해 ''I can''t hold back(13위)'', 경쾌한 ''High on you(8위)'', 국내 취향의 록발라드 ''The search is over(4위)''가 모두 히트 차트에 오르면서 다시 한번 황금기를 누렸다. 다시 3년의 기다림 후에 공개된 1987년의 음반 < When Seconds Count >에선 싱글 커트된 ''Is this love(9위)''와 ''How much love(51위)''는 이들의 마지막 싱글 히트곡이 되었고 1988년에 공개한 < Too Hot To Sleep >을 마지막으로 1989년 밴드의 공식 해산을 발표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초창기 보컬리스트 데이브가 짐, 프랭키와 다시 팀을 재 결성해 현재까지 공연 위주의 활동을 하고 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무수히 많은 아레나록 밴드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져갔다. 그 중의 하나인 서바이버는 훠리너(Foreigner)나 스틱스(Styx), 나이트 레인저(Night Ranger)처럼 정교한 연주를 들려준 팀도 아니었고,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심각한 밴드도 아니었지만 서바이버의 음악을 듣는데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록음악계의 ''생존자''가 되길 원했던 서바이버의 제 2 라운드가 시작되었다. ''Eye of the tiger''가 한창 인기있던 1983년에 필자의 친척형은 서바이버의 앨범 속지에 나온 보컬리스트 데이브 빅클러의 사진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얘 눈이 진짜 호랑이 눈 같지 않냐?"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또는 한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삶을 매듭지으려 했다. 그러나 고비 때마다 지인(知人)의 도움을 받으며 재기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들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그 어떤 벽을 넘는 데는 결국 실패했다. 8년 동안의 모트 더 후플 이력이다. 때문에 그들 앞에는 항상 ''비운의 그룹''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닌다. 그들은 밥 딜런의 냉소적 록, 헤비메탈, 글램 록을 넘나...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또는 한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삶을 매듭지으려 했다. 그러나 고비 때마다 지인(知人)의 도움을 받으며 재기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들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그 어떤 벽을 넘는 데는 결국 실패했다. 8년 동안의 모트 더 후플 이력이다. 때문에 그들 앞에는 항상 ''비운의 그룹''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닌다. 그들은 밥 딜런의 냉소적 록, 헤비메탈, 글램 록을 넘나들며 진취적인 사운드를 펼쳐냈지만, 언제나 뒷전이었다.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의 도움을 받아 잠깐의 행복을 누린 것이 전부였다. 믹 랄프스(Mick Ralphs, 기타), 버든 앨런(Verden Allen, 키보드), 오버런드 와츠(Overend Watts, 베이스), 데일 "버핀" 그리핀(Dale "Buffin" Griffin, 드럼) 등의 네 명은 고향인 잉글랜드의 히어포드(Hereford)에서 1968년 사일런스(Silence)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1년 뒤인 1969년 초반 보컬리스트 스탄 티펜스(Stan Tippens)를 영입한 그들은 < 아일랜드(Island) > 레코드사와 협력관계를 맺었다. 얼마 뒤 티펜스를 퇴출시키고 클럽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가수 이안 헌터(Ian Hunter)를 맞아들인 그들은 윌라드 마누스(Willard Manus)의 소설에서 착안하여 그룹명을 모트 더 후플로 변경했다. 1969년에 발표된 그들의 셀프 타이틀 데뷔작은 밥 딜런의 영향이 짙게 베어있는 작품이었다. 이안 헌터의 시니컬한 목소리는 딜런의 그것이었으며, 곡의 진행 패턴도 유사하였다. 비록 레이블의 반대로 금지됐지만, 1집의 원제가 < Talking Bear Mountain Picnic Massacre Disaster Dylan Blues >라는 사실은 안다면 그들과 딜런과의 관계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헌터는 나선형의 긴 머리와 어두운 얼굴 색을 트레이드마크로 삼으면서 글램의 징후를 내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데뷔 음반의 상업적 실패가 1970년 < Mad Shadows >, 1971년 < Wildlife >, < Brain Capers > 등으로도 고스란히 이어지면서, 그들은 밴드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모트 더 후플의 와해라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지기 스타더스트(Ziggy Stardust)'' 데이비드 보위는 그들의 다음 앨범에 곡을 제공하고 프로듀서를 맡아주겠다며 멤버들에게 용기를 줬다(보위는 모트 더 후플의 열려한 팬이라고 한다). 드라마틱한 스토리 끝에 탄생한 작품이 바로 1972년 앨범 < All The Young Dudes >이였다. 보위가 작곡한 ''All the young dudes''는 영국 차트 3위에 오르는 놀라운 성적을 일궈내면서 그들을 무명의 그늘에서 탈출시켰다. 보위의 향기가 자극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이 곡은 동성애자에 대한 노래로 글램 록 시대의 찬가로 불려지고 있다. 헤비 록과 글램 록의 사운드로 새 단장한 그들은 1973년 < Mott >와 1974년 < Hoople >로 또 한번의 인기 행진을 이뤄냈다. 수록곡 ''All the way from memphis''(10위), ''Roll away the stone''(8위)이 스매시 히트를 기록하면서 그들은 글램 록의 선두 주자 중 하나로 대접받았다. 그러나 1972년 말 버든 앨런의 탈퇴, 1973년 믹 랄프스의 배드 컴퍼니(Bad Company) 조직 등으로 인해 모트 앤 후플은 서서히 무너져 내렸고, 급기야 프론트 맨 이안 헌터마저도 보위의 사이드맨 믹 론슨(Mick Ronson)과 함께 듀오 활동을 위해 1974년 팀을 떠나갔다. 남은 멤버들은 라인업을 재정비하고 몇 장의 음반을 발표했지만, 스스로의 길을 알고 1976년 마침표를 찍었다. 억세게 운이 없는 그룹의 멋있는 피날레였다.
블루스 락 기타 연주자, 가수 블루스 락 기타 연주자, 가수
노래 : Big Brother & The Holding Company (빅 브라더 앤 더 홀딩 컴퍼니)
제프 버클리(Jeff Buckley)는 1990년대의 가장 독보적인 싱어 송라이터이자 얼터너티브 포크 록 뮤지션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폭발적이면서도 감미로운 목소리로 독자적인 음악 스타일을 구축했지만 안타깝께도 1997년 5월,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의 죽음과 함께 1990년대 음악계의 가장 비극적 사건이었다. 더욱이 단지 한 장의 앨범만을 남긴 뒤였기에 그 슬픔은 더했다. 제프 ... 제프 버클리(Jeff Buckley)는 1990년대의 가장 독보적인 싱어 송라이터이자 얼터너티브 포크 록 뮤지션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폭발적이면서도 감미로운 목소리로 독자적인 음악 스타일을 구축했지만 안타깝께도 1997년 5월,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의 죽음과 함께 1990년대 음악계의 가장 비극적 사건이었다. 더욱이 단지 한 장의 앨범만을 남긴 뒤였기에 그 슬픔은 더했다. 제프 버클리는 1960년대 유명한 포크 뮤지션이었던 팀 버클리(Tim Buckley)의 아들로 태어나 고등학교 시절부터 밴드 활동을 시작했다. 졸업 후, 음악 공부를 위해 L.A로 이동한 뒤 레게 뮤지션이었던 샤인헤드(Shinehead)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내공을 쌓아나갔다. 이후 기타리스트 게리 루카스(Gary Lucas)와 결성했던 음악 공동체 가즈 앤 몬스터즈(Gods & Monsters)로 어느 정도 이름을 홍보하는데 성공했다. 밴드를 그만두고 결국 솔로로 전향한 제프 버클리는 1994년 데뷔작이자 생전 마지막 음반인 < Grace >를 발표했다. 앨범으로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예상했던 세간의 평들을 완전히 깨부순 그만의 싱어 송라이팅 스킬을 뽐내며 단숨에 주목을 받았다. 특히 동시대의 주류였던 그런지 사운드와는 완연히 다른 독특한 포크 록 소리샘이 돋보였다. 일종의 얼터너티브에 대한 얼터너티브였던 셈. 웅장하면서도 흐느끼는 듯한 그의 목소리와 탁월한 작곡 능력, 백 밴드의 안정감 있는 연주가 만난 걸작이었다. 또한 작품 전반에 걸쳐 흐르는 재지한 느낌은 앨범을 제목 그대로 ‘우아하게’ 만들어주었다. 메시지면에 있어서도 당시 얼터너티브의 염세적, 부정적인 정서가 아닌 ‘음악을 통한 사랑의 전파’라는 소신을 피력, 컬트 팬들을 세력권으로 집결시켰다. 이 후 2집 앨범을 준비하던 중에 떠난 미시시피 강으로의 여행에서 제프 버클리는 익사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데모상태로 존재했던 트랙들은 다행히도 사후 그의 어머니의 노력으로 1998년에 < Sketches (For My Sweetheart the Drunk) >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다. 2집 역시도 1집에 버금가는 뛰어난 성과물이었으나 다만 ’그가 직접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았다. 그리고 2000년에는 제프 버클리의 첫 번째 공식 라이브 앨범인 < Mystery White Boy >(제프 버클리를 일컫는 듯한)가 나와 그를 못 잊는 팬들을 달래주었다. 1970년대에 시작된 ‘싱어 송라이터’라는 개념은 직접 곡을 쓰고 노래를 하는 뮤지션을 지칭하는 의미를 지녔었다. 특히 그들은 1960년대의 ‘우리’의 입장이 아닌 철저히 ‘개인적인’ 감수성을 노래했다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바로 1960년대를 ‘we decade’, 1970년대를 ‘my(혹은me) decade’라 명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싱어 송라이터는 또한 ‘독보적인 음악 파일을 완성한’ 아티스트를 말할 때 쓰일 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1990년대에 제프 버클리만큼 자신만의 소리 메커니즘을 들려 준 아티스트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도 단 한 장의 앨범으로 말이다.
노래 : Patti Smith Group (패티 스미스 그룹)
멤버 : Patti Smith, Ivan Kral 멤버 : Patti Smith, Ivan Kral
버클리 음악 학교에 입학하며 뮤지션으로서의 꿈을 키워가던 한 젊은이. 얼마지 않아 그는 아버지가 주신 돈을 몽땅 써버려 위기(?)에 봉착한다. 궁해진 아들에게 돈을 주며 아버지가 던졌던 한마디. “네 음반이 플래티넘을 따내거든, 결코 날 잊어선 안돼.” 그리고 정확히 5년 뒤 그는 소포모어 앨범으로 플래티넘 고지를 정복하며 부모의 기대에 완벽히 부응한다. 바로 ’아름다운 청년’ 존 마이어(John Mayer)다.... 버클리 음악 학교에 입학하며 뮤지션으로서의 꿈을 키워가던 한 젊은이. 얼마지 않아 그는 아버지가 주신 돈을 몽땅 써버려 위기(?)에 봉착한다. 궁해진 아들에게 돈을 주며 아버지가 던졌던 한마디. “네 음반이 플래티넘을 따내거든, 결코 날 잊어선 안돼.” 그리고 정확히 5년 뒤 그는 소포모어 앨범으로 플래티넘 고지를 정복하며 부모의 기대에 완벽히 부응한다. 바로 ’아름다운 청년’ 존 마이어(John Mayer)다. 존 마이어는 미국 커네티컷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 세 살에 이웃이 건네 준 스티비 레이 본(Stevie Ray Vaughan)의 음악에 심취, 블루스 기타리스트로써 인생의 미래를 설계했다. 이후 오직 연습에만 매진한 결과 지방의 조그마한 바에서 출중한 연주 실력으로 좌중을 사로잡았다. 기타를 손에 잡은 지 불과 2년만의 일이었다. 허나 그는 곧 음악 항로를 새로이 수정했다. 기타 플레이어가 아닌 ’좋은 곡을 쓸 줄 아는 뮤지션’이 그 해답이었다. 기타 테크닉보다 멜로디와 리듬의 전체적인 어울림을 높이는데 필요한 송 라이팅 능력을 길러나갔던 것이다. 열 아홉 살이 되자 존 마이어는 버클리 음악 학교에 입학하며 진로를 본격 모색했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이내 학교를 그만두었다. 음악을 ’공부’하기보다 그것을 ’연주’하기 원하는 자신의 내적 욕망을 절감한 때문이었다. 친구의 권유로 아틀랜타로 남행한 이 전도유망한 싱어 송라이터는 에디의 애틱(Eddie’s Attic)등의 나이트클럽에서 공연을 펼치며 기회를 엿봤다. 1999년에는 인디 레이블에서 을 발매하며 지역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2000년, 드디어 그에게 도약의 때가 찾아왔다. 당해 거행된 에서의 인상적인 퍼포먼스로 메이저 레이블 스카우터들의 레이다에 포착된 것. 결국 컬럼비아 산하의 와 계약을 체결한 존 마이어는 2001년 데뷔작 (1963년 행크 모블리의 작품 에서 따왔다.)를 내놓으며 주류 무대로 입성했다. ’No such thing’, ’Your body is wonderland’ 등의 싱글들이 히트 퍼레이드를 펼치며 최고 차트 15위까지 음반을 견인했다. 현재 무려 200만장을 세일즈하며 50주 이상 빌보드 차트에 머무는 중이다. 무엇보다 데이비드 그레이(David Gray), 데이브 매튜스(Dave Matthews) 등을 연상케 하는 편안한 보이스와 탁월한 선율 감각, 오랜 수련으로 다져진 기타 실력 등이 성공의 주동인(動因)이었다.
노래 : Steve Vai (스티브 바이)
''기타 혁신주의자'' 스티브 바이는 기타가 표현해낼 수 있는 모든 소리들을 현란한 테크닉과 다양한 이펙터 사용으로 재현해낸 인물이다. 그는 트레몰로(Tremolo)와 라이트 핸드(Right Hand) 주법을 트레이드마크로 최첨단 하이 테크닉을 구사했으며, 저음부가 추가된 7현 기타를 사용하여 음(音)의 기복을 심하게 요동치게 만들었다. 또한 크라이 베이비 와와(Cry Baby Wah-Wah), 디지텍 왜미 페달... ''기타 혁신주의자'' 스티브 바이는 기타가 표현해낼 수 있는 모든 소리들을 현란한 테크닉과 다양한 이펙터 사용으로 재현해낸 인물이다. 그는 트레몰로(Tremolo)와 라이트 핸드(Right Hand) 주법을 트레이드마크로 최첨단 하이 테크닉을 구사했으며, 저음부가 추가된 7현 기타를 사용하여 음(音)의 기복을 심하게 요동치게 만들었다. 또한 크라이 베이비 와와(Cry Baby Wah-Wah), 디지텍 왜미 페달(DigiTech Whammy Pedal), 딜레이(Delay) 등의 이펙터를 이용하여 인간의 음성, 동물 울음소리 등 기묘하고 재기 넘치는 효과음들을 곡의 적재 적소에 배치시켜 풍성한 기타 연주의 성찬을 일궈냈다. 이것은 분명 잉베이 맘스틴(Yngwie Malmsteen)과 토니 매칼파인(Tony Macalpine) 등이 뽐내던 클래시컬 속주 기타와는 달랐다. 스티브 바이는 그들과는 반대로 기타의 형식미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변칙적인 박자전개, 스케일의 자유로운 변화 등을 강조했다. 장르의 범주 역시 과감히 탈피하여 메탈, 펑크(Funk), 블루스, 재즈, 클래식 등 모든 장르를 아우르고 있다. 바로 ''사고의 전환''이 그의 영원한 기타 테마였다. 1995년 앨범 < Alien Love Secrets >에서 드러나듯 매번 가상 현실을 기타 연주의 소재로 삼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때문에 그의 기타 음색은 과거가 아닌 ''미래지향적''이다. 1960년 뉴욕에서 태어난 스티브 바이는 13살 되던 해부터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그의 첫 기타 스승은 당시 학교 친구였던 조 새트리아니(Joe Satriani). 바이는 새트리아니에게 1년 정도 기타를 배웠다고 한다. 둘의 우정은 지금까지도 끈끈하게 유지되고 있다. 에릭 존슨(Eric Johnson)을 포함한 G3 투어가 그 예이다. 몇 년 뒤 버클리음대에 진학한 바이는 음악 이론과 채보를 정식으로 배우며 탄탄한 기본기를 완성했다. 스티브 바이는 1980년대 접어들면서 괴짜 기타리스트 프랭크 자파(Frank Zappa)의 밴드를 비롯해, 잉베이 맘스틴이 재직했던 알카트라즈(Alcatrazz), 밴 헤일런(Van Halen) 출신의 보컬리스트 데이빗 리 로스(David Lee Roth) 밴드, 데이빗 커버데일(David Coverdale)이 이끄는 화이트 스네이크(White Snake) 등 명 그룹들에서 활동하며 ''용병'' 기타리스트로서 최고의 주가를 올렸다. 그의 빛나는 기타 테크닉이 이 당시에 차곡차곡 쌓여졌음은 물론이다. 이후 스티브 바이는 1990년 작품 < Passion And Warfare >를 발표하며 화려한 솔로의 길로 들어섰다(이미 그는 1984년 솔로 데뷔작 < Flex-Able >을 내놓은바 있다). 이 앨범은 스티브 바이의 최고 명반으로 꼽히며 기타 인스트루멘틀계에 일대 회오리를 일으켰다. 기존 기타리스트들의 연주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독창적이고 충격적인 사운드로 가득 찼다. 바로 1997년 2월 19일에 열린 내한 공연에서도 연주하여 국내 팬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받았던 명 연주곡 ''For the love of god''가 수록되어있는 음반이다. 그는 계속해서 1993년 < Sex & Religion >, 1995년 < Alien Love Secrets >, 1996년 < Fire Garden >, 1999년 < The Ultra Zone >를 발표하며 기타리스트뿐만 아니라 작곡가로서의 역량도 훌륭히 선보였다. 특히 1996년 앨범 < Fire Garden >은 스티브 바이 자신이 직접 보컬까지 담당하며 숨겨진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어서 2000년에는 ''For the love of god'', ''Tender Surrender'' 등 기존의 곡들과 신곡 3곡이 추가된 편집 앨범 < The 7th Songs >를 내기도 했다.
모두 흑인으로 구성된 헤비메탈 밴드 리빙 컬러는 록음악은 백인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에 반기를 든 그룹이다. 그들은 백인 못지 않게 흑인도 연주력이 뛰어나며 인기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실천했다. 그들은 백인들이 표현해내지 못한 흑인특유의 리듬감을 헤비메탈 사운드에 가미시켜 매우 독특한 사운드 스케이프를 펼쳐냈다. 소울, 랩, 펑크(Funk), 재즈, 리듬 앤 블루스 등의 흑인 음악을 집어넣은 것이다. 이로... 모두 흑인으로 구성된 헤비메탈 밴드 리빙 컬러는 록음악은 백인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에 반기를 든 그룹이다. 그들은 백인 못지 않게 흑인도 연주력이 뛰어나며 인기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실천했다. 그들은 백인들이 표현해내지 못한 흑인특유의 리듬감을 헤비메탈 사운드에 가미시켜 매우 독특한 사운드 스케이프를 펼쳐냈다. 소울, 랩, 펑크(Funk), 재즈, 리듬 앤 블루스 등의 흑인 음악을 집어넣은 것이다. 이로 인해 그들은 헤비메탈의 음악적 지평을 넓힌 그룹으로 평가를 받는다. 리빙 컬러는 1984년 기타리스트 버논 레이드(Vernon Reid), 베이시스트 머즈 스킬링스(Muzz Skillings), 드러머 윌리엄 칼혼(William Calhoun)의 삼인조로 출발했다. 이듬해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 플래툰 >에 출연했던 배우 코리 글로버(Corey Glover)를 그룹의 목소리로 맞아들여 완벽한 진용을 갖췄다. 헤비메탈이 정교하고 뛰어난 연주력을 필요로 하는 음악이기에 멤버들의 ‘배움’도 상당했다. 그룹의 리더 버논 레이드는 대학을 졸업하고 재즈 드러머 로널드 샤논 잭슨(Ronald Shannon Jackson)이 이끌었던 아방가르드 재즈 퓨전 그룹 디코딩 소사이어티(Decoding Society)에서 이력을 쌓았다. 머즈 스킬링스는 시티 칼리지(City College)에서 음악을 수학했고, 윌리엄 칼혼은 버클리 음악 학교 출신이다. 또한 버논 레이드는 저널리스트 그렉 테이트(Greg Tate)와 함께 < 흑인 록 연대(Black Rock Coalition) >라는 압력 단체의 수장을 맡고 있기도 했다. 밴드의 노선이 정치적임을 알 수 있다. 리빙 컬러는 1988년 데뷔작 < Vivid >를 < 에픽(Epic) >레코드사에서 발표하며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 그룹이 메이저 레이블을 통해 데뷔할 수 있게 된 데는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의 악동 믹 재거(Mick Jagger)의 도움이 컸다. 1986년 뉴욕의 명소 CBGB에서 리빙 컬러의 공연 보습을 본 믹 재거가 자신의 솔로 앨범 < Primitive cool >에 세션 뮤지션으로 멤버들을 초빙하면서 ‘도우미’ 관계가 시작됐다. 이후 믹 재거는 리빙 컬러의 데모 음반 < Glamour Boys >와 < Which Way To America >를 직접 프로듀싱 해주며 음악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 에픽 >에서 앨범을 발표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도 믹 재거였다. 리빙 컬러의 데뷔 음반은 단숨에 차트 6위로 진입하며 그들을 전국적인 메탈 밴드로 발돋움시켰다. 고인이 된 존 F 케네디의 육성이 담긴 록과 펑크(Funk)의 퓨전 ‘Cult of personality''와 믹 재거의 가르침이 반영된 ‘Glamouer boys''는 높은 인기를 누렸다. 1990년에 내놓은 2집 앨범 < Time''s Up >도 13위에 올랐고, ‘Type'', ‘Love rears its ugly head''가 히트행진을 이어 나갔다. 특히 이 작품은 믹 재거는 물론이고, 리틀 리차드(Little Richard), 카를로스 산타나(Carlos Santana), 퀸 라티파(Queen Latifah) 등 유명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해 많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리빙 컬러는 1993년 < Stain >을 발표하고, 2년 뒤 돌연 해산을 선언해 많은 이들(믹 재거, 흑인 커뮤니티)을 안타깝게 했다. 레이드는 < 퍼포먼스(Perfomance) >와 가진 인터뷰에서 “더 이상 재미가 없었다. 마술은 오래가지 못했다.”며 해체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올해 3월 그룹은 재결합을 공식 선언했고, 새 앨범 작업에도 들어간다고 전했다. 과연 < Stain >이후 7년이라는 공백을 어떻게 메우고 나타날 지 귀추가 주목되어 진다.
노래 : The Fabulous Thunderbirds (페이불러스 썬더버즈)
텍사스 출신의 록밴드 텍사스 출신의 록밴드
노래 : Al Stewart (알 스튜어트)
1980년대 국내 록의 부활을 선언하는 동시에 인디 음악의 가능성을 타진한 ’한국의 비틀즈’ 들국화의 멤버들은 아티스트이기 이전에 팝 매니아였다. 이들이 예전부터 들었던 팝송은 훗날 이들이 발표하는 명곡들의 밑거름이 되었고 그 노래들 중에서 몇몇 곡들은 들국화가 공연 무대에서 부르거나 새롭게 취입하면서 국내 록 팬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선사했다. 그 대표적인 노래들은 1970-80년대를 수놓은 밴드 스틱스(Styx... 1980년대 국내 록의 부활을 선언하는 동시에 인디 음악의 가능성을 타진한 ’한국의 비틀즈’ 들국화의 멤버들은 아티스트이기 이전에 팝 매니아였다. 이들이 예전부터 들었던 팝송은 훗날 이들이 발표하는 명곡들의 밑거름이 되었고 그 노래들 중에서 몇몇 곡들은 들국화가 공연 무대에서 부르거나 새롭게 취입하면서 국내 록 팬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선사했다. 그 대표적인 노래들은 1970-80년대를 수놓은 밴드 스틱스(Styx)의 ’The Best of times’와 ’Come sail away’, 그리고 스코틀랜드 출신의 포크 로커 알 스튜어트(Al Stewart)의 ’Palace of Versailles’같은 곡들이다. 특히 후자의 곡은 들국화의 전인권이’사랑한 후에’라는 제목으로 번안해 불러 크게 사랑 받았고 다시 2000년에는 로커 박완규가 자신의 2집에서 ‘사랑한 후에’를 리메이크해 팝의 명곡이자 가요의 고전으로 격상되었다. 1945년 9월 5일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우에서 태어난 알 스튜어트는 1960년대 중반 영국 런던을 중심으로 만발했던 포크 무브먼트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에게 음악적인 깨우침을 준 아티스트는 밥 딜런과 도노반(Donovan), 그리고 존 레논처럼 사회적인 관점을 중요시한 인물들이었다. 이 미남 가수가 견지하는 날카롭고 냉철한 시각은 1984년에 공개한 가장 정치적인 음반 로 정점에 이른다. 1960년대 영국과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포크 음악의 물결이 일자 그도 서서히 기지개를 켰지만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의 음반들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거시적인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포크 록에 유지하되 그 방법론에서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거친 이 싱어송라이터의 성공은 1970년대 중반부터 가시적인 거리에 근접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알려진 ’Road to Moscow’가 수록된 1974년의 부터 본인만의 색깔을 구현하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1976년과 1978년에 공개한 걸작 과 를 통해 전 세계적인 뮤지션으로 거듭났다.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걸작 의 엔지니어이자 이후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Alan Parsons Project)를 출범시킨 ‘소리의 마술사’ 알란 파슨스가 프로듀스한 는 빌보드 싱글 차트 8위까지 오른 타이틀곡과 42위를 기록한 후속곡 ’On the border’에 힘입어 대중과의 접선에 완전히 성공했다. 특히 싱글’Year of the cat’의 공동 작곡자이자 건반 연주자인 피터 우드(Peter Wood)의 피아노 인트로, 중반부의 바이올린과 색소폰, 그리고 후반부의 신시사이저 연주가 수려한 멜로디를 뒷받침한 이 곡은 흠잡을 데 없는 정교한 사운드를 구현, 지금 들어도 세련된 팝의 명곡으로 평가받는다. 얇지만 섬세하고 명료한 그의 보컬과 더불어 수려한 외모는 이 무렵 그를 콘서트의 인기인으로 부상시켰다. 1978년의 에서도 싱글 ’Year of the cat’의 연장선상에 있는 앨범 타이틀곡 ’Time passages’가 다시 한번 톱10에 올랐고(7위) 무엇보다 훗날 들국화가 ’사랑한 후에’로 번안해 부르게 되는 외롭고 쓸쓸한 ’Palace of Versailles’가 6번째 트랙으로 자리하고 있다. ‘Song on the radio’가 후속 싱글로 나와 29위를 차지하면서 앨범은 전작에 이어 또 한차례 플래티넘을 기록하는 성공을 이어갔다. 하지만 알 스튜어트의 ’화려한 시절’은 1980년대 뉴웨이브와 팝의 물결에 의해 급속히 후퇴했다. 1980년의 앨범 와 싱글 ‘Midnight rocks’(24위)는 이전 앨범의 활력과 완성도를 재현하지 못한 채 저조한 실적을 거두었다. 그 이후로도 꾸준한 신보 제작과 라이브 무대를 통해 음악 활동을 계속했지만 예전만큼의 호응을 거두지는 못했다. 포크 음악이 상대적으로 약세를 면치 못했던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에 걸친 알 스튜어트의 두드러진 활약은 1970년대 초반까지 만해도 만발했던 포크의 명맥을 1980년대 후반까지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 그의 음악은 포크를 뿌리로 하고 있지만 그 외에도 팝, 록, 심지어는 아트 록과 클래식 기타 연주까지도 광범위하게 녹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에서의 그에 대한 인기와 명성의 폭은 넓게 퍼져 있지는 않지만 들국화처럼 그의 전성기 시절 음악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1960년대의 패러다임이었던 반(反)문화(counterculture), 히피(hippie) 혁명이 현실 불가능한 유토피아로 판명 나자, 1970년대 록의 전반적인 지형도는 큰 변화의 폭을 그렸다. 일명 ’We dacade’에서 ’Me dacade’로의 이동이었다. ’1970년대 들어 반문화적인 주장들이 그 힘을 잃고 일종의 판매기법으로 전락하자 록 걸작들의 특별한 지위는 점차 공동체의 견지가 아닌 개인적 예술의 ... 1960년대의 패러다임이었던 반(反)문화(counterculture), 히피(hippie) 혁명이 현실 불가능한 유토피아로 판명 나자, 1970년대 록의 전반적인 지형도는 큰 변화의 폭을 그렸다. 일명 ’We dacade’에서 ’Me dacade’로의 이동이었다. ’1970년대 들어 반문화적인 주장들이 그 힘을 잃고 일종의 판매기법으로 전락하자 록 걸작들의 특별한 지위는 점차 공동체의 견지가 아닌 개인적 예술의 견지에서 설명되기 시작했다.’ 라는 평론가 사이먼 프리스의 주장이 이를 잘 말해준다. 자연스레 뒤따른 것은 ’장르의 세분화’였다. 특히 록 신에서는 하드 록 혹은 헤비메탈의 급격한 성장세가 도드라졌다. 1960년대 말부터 꽃을 피웠던 하드 록 사운드가 젊은 혈기의 대변자임을 자청, 록의 메인 장르로 우뚝 올라섰던 것. 바로 수많은 밴드들이 자웅을 겨뤘던 록 르네상스 시대의 화려한 개막이었다. 그 중에서도 딥 퍼플은 ’소리의 볼륨’에 있어서 절대 강자였다. 1968년 영국 허트포드(Hertford)에서 결성된 이 하드 록 제왕은 한때 기네스 북 공인의 ’세계에서 가장 시끄러운 그룹’임을 뽐낼 만큼 열혈 헤드뱅어들을 휘하로 집결시켰다. 비록 월드 마케팅에서는 레드 제플린에 비해 뒤졌지만 적어도 국내와 일본에서만큼은 그들이 인기 넘버원이었다. 일례로 밴드의 시그니처 송이자 딥 퍼플이 오프닝을 섰던 스위스 몬트뢰 빌딩에서의 프랭크 자파 공연 당시의 화재를 보며 작곡한 ’Smoke on the water’는 록을 알기 위한 통과의례로 변함 없이 극빈 대접을 받고 있다. 또한 딥 퍼플은 기수로 구분될 만큼 잦은 멤버 교체로 유명했는데 명 기타리스트이자 리더 격이었던 리치 블랙모어의 독선이 그 주된 이유였다. 최초 그룹은 존 로드, 닉 심퍼, 리치 블랙모어, 로드 에반스, 이언 페이스의 라인업으로 출항의 닻을 올렸다. 허나 처녀작 < Shades of Deep Purple >(1968), 소포모어 음반 < Deep Purple >(1969), 3집 < The Book of Taliesyn >(1969) 등의 작품들에서 드러나듯 그들만의 캐릭터가 명확히 잡히지 않은 시기였다. 수록곡 대부분이 조 사우스(Joe South)의 ’Hush’(빌보드 4위)와 ’Hey Joe’, 닐 다이아몬드(Neil Diamond)의 ’Kentucky woman’(38위), 비틀즈의 ’Exposition/We can make it out’, 팝 클래식 ’River deep-Mountain high’(53위) 등, 리메이크로 채워져 있다는 데서 잘 파악된다. ’April’과 ’Anthem’ 등, 존 로드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클래시컬한 넘버들 역시 별다른 피드백 효과를 얻지 못했다. 같은 해 로드 에반스와 닉 심퍼가 팀을 등지고 이언 길런과 로저 글로버가 새로이 투입되면서 딥 퍼플의 황금 시대가 비로소 개막되었다. 권력의 축이 존 로드에서 리치 블랙모어에게로 옮겨간 것 또한 이 즈음이었다. 리치 블랙모어의 진두지휘 아래 그룹은 막강한 하드 록 사운드를 내뿜기 시작했다. 존 로드 작곡의 ’Concerto Group and Orchestra’를 기초로 완성된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작 < Concerto Group and Orchestra >(1969) 이후에 발표한 일련의 앨범들이 이를 잘 대변한다. ’Child in time’, ’Speed king’ 등이 사랑 받았던 1970년의 < Deep Purple in Rock >, ’Strange kind of woman’, ’Black night’(66위) 등이 히트했던 빌보드 앨범 차트 32위의 < Fireball >(1971), 불멸의 명곡 ’Smoke on the water’(4위)와 ’Highway star’를 담고있는 1972년의 마스터피스 < Machine Head >(7위) 등이 그것들이다. 실황 작품인 < Made In Japan >(6위, 1972)은 각종 라이브 명반 선정에 빠지지 않고 등재될 만큼 동종(同種) 품목 중 발군임을 뽐냈다. 허나 1973년의 < Who Do You Think We Are >를 끝으로 이언 길런과 로저 글로버가 탈퇴하면서 2기는 막을 고했다. 데이비드 커버데일과 글렌 휴즈를 맞이하며 시작점을 찍은 3기 역시 찬란한 성과를 이어나갔다. 숨겨진 보석 ’Burn’이 수록된 동명 타이틀의 < Burn >(9위, 1974), 같은 해의 < Stormbringer >(20위)등이 히트 퍼레이드를 펼쳤던 것. 곡들 중, 후자에 실린 ’Soldier of fortune’은 국내에서 선풍적 인기몰이를 한 바 있다. 여러 발라드 선곡집에 현재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골든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곧바로 리치 블랙모어가 레인보우(Rainbow)를 결성, 밴드를 떠남으로써 딥 퍼플은 좌초의 위기에 몰렸지만, 천재 기타리스트 토미 볼린(Tommy Bolin, 1976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이 그 공백을 훌륭히 메워주었다. 그의 음악적 취향이 적극 반영된 재즈풍의 음반 < Come Taste The Band >가 이 시기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는 기존의 헤비 메탈 지향성과 삐걱 화음을 자아내면서 딥 퍼플은 1976년 영국 투어를 끝마친 후 휴지기에 들어갔다. 밴드가 끊임없는 재 결합설에 부응하며 다시 한번 기지개를 편 때는 1984년. 리치 블랙모어, 존 로드, 이언 길런, 로저 글로버, 이언 페이스의 드림 팀으로 구성된 그들은 < Perfect Stranger >(1984), < The House of Blue Light >(1987) 등을 내놓으며 여전한 저력을 과시했다. 이언 길런과 리치 블랙모어의 갈등으로 이언 길런 대신 조 린 터너를 보컬로 기용했던 < Slaves and Masters >(1990)를 기점으로 그룹의 인기 곡선은 완연한 하향세를 그렸다. 이언 길런을 재 수혈해 녹음했던 < The Battle Rages On >(1992)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를 견디지 못한 리치 블랙모어가 또 다시 굿바이를 선언, 밴드는 결국 타이타닉 호의 운명을 걷는 듯 보였다. 그러나 컨트리 록 기타의 달인 스티브 모스를 후임으로 낙점하면서 그룹은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해나갔다. 통산 16집인 1996년작 < Purpendicular >, 17집인 < Abandon > 등으로 호평 받았던 딥 퍼플은 국내에서 가졌던 몇 차례의 공연을 포함, 지금도 여러 곳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밴드 : Judas Priest (주다스 프리스트)
헤비메탈 팬들에게 주다스 프리스트라는 이름은 웅장한 성채와도 같다. 지난 30여 년 동안 발표했던 14장이라는 방대한 디스코그래피(라이브 앨범 제외)는 그들의 커리어를 말해주는 증거다. 그들은 헤비메탈 사운드를 창시했고 헤비메탈을 융성하게 했으며 씬을 리드했다. 차갑게 내뱉는 금속성의 보컬과 예리한 트윈 기타 시스템은 헤비메탈의 원형(原形)이었으며 수많은 후배들의 모델이 되었다. 주다스 프리스트는 단순히 NWOB... 헤비메탈 팬들에게 주다스 프리스트라는 이름은 웅장한 성채와도 같다. 지난 30여 년 동안 발표했던 14장이라는 방대한 디스코그래피(라이브 앨범 제외)는 그들의 커리어를 말해주는 증거다. 그들은 헤비메탈 사운드를 창시했고 헤비메탈을 융성하게 했으며 씬을 리드했다. 차갑게 내뱉는 금속성의 보컬과 예리한 트윈 기타 시스템은 헤비메탈의 원형(原形)이었으며 수많은 후배들의 모델이 되었다. 주다스 프리스트는 단순히 NWOBHM(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에만 한정되는’어떤 밴드’가 아니었다. 그들의 영역은 스래시 메탈, 데스 메탈은 물론이고 멜로딕 메탈을 넘어 블랙 메탈에까지 뻗어있다. 그 거대한 영향력은 머시풀 페이트(Mercyful Fate), 앙그라(Angra), 오버킬(Overkill), 감마 레이(Gamma Ray), 테스타먼트(Testament), 크리에이터(Kreator)등 메탈 계의 중견 그룹들이 대거 참여한 헌정 앨범 < A Tribute To Judas Priest >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 색슨(Saxon)과 함께 브리티시 헤비메탈의 명성을 만방에 떨쳤던 주다스 프리스트는 1971년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를 배출한 영국의 공업도시 버밍햄에서 결성됐다. 기타리스트 케이 케이 다우닝(K.K. Downing)과 베이시스트 이안 힐(Ian Hill)을 중심으로 닻을 올린 그룹은 곧 보컬리스트 앨런 앳킨스(Alan Atkins)와 드러머 존 엘리스(John Ellis)를 식구로 맞이하고 앨범 작업에 착수한다. 하지만 무대 위로 막 나아가려던 그룹은 잦은 멤버 교체의 진통으로 데뷔에 난항을 겪어야 했다. 몇 번의 시행 착오 끝에 그들은 그룹의 상징이 되는 롭 핼포드(Rob Halford)와 다우닝의 파트너 글렌 팁톤(Glenn Tipton)을 영입해 1974년 대망의 1집 < Rocka Rolla >를 내놓았다. 헤비메탈보다는 다분히 하드 록적인 성향을 띤 이 음반은 히트를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비범함을 알리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들의 이름을 국제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 앨범은 1976년 작 < Sad Wings Of Destiny >이다. 보다 강력해진 기타음과 서정적인 건반 연주가 공존하는 이 작품은 헤비메탈의 폭발력과 아트 록의 아름다움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음반으로 평가받으며 팬들에게 그룹을 깊게 각인시켰다. ’Epitaph’, ’Victim of changes’, ’The Ripper’등이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앨범의 성공으로 메이저 레이블 < CBS >와의 계약을 체결한 주다스 프리스트는 < Sin Afet Sin >과 < Stained Class >를 잇따라 발표해 호평 받으며 화려한 시기를 예고했다. 상승 기류를 탄 그룹을 정점으로 도약하게 만든 양대 앨범은 < Hell Bent For Leather > (영국에서는 < Killing Machine >이라는 제목으로 발매)와 < British Steel >로 특히 후자는 AC/DC의 < Back In Black >, 마이클 셍커 그룹(Michael Schenker Group)의 < Michael Schenker Group >과 함께 헤비메탈을 정의해 준 명반으로 손꼽힌다. 이후 창작력이 극대화된 그룹은 < Point Of Entry >, < Screaming For Vengeance >, < Defenders Of The Faith >등의 수작들을 양산해내며 황금기를 맞았다. ’Delivering the goods’, ’Before the dawn’, ’Breaking the law’, ’Metal gods’, ’Steeler’, ’Riding on the wind’, ’You’ve got another thing comin’, ’Freewheel Burning’, ’The Sentinel’등 주다스 프리스트의 베스트 트랙들이 이 기간에 압축된다. 자국에서 뿐 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놀라운 성과를 올리며 그칠 줄 몰랐던 그룹은 < Ram It Down > 발표 후 드러머 데이브 홀랜드(Dave Holland)가 탈퇴하면서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레이서 엑스(Racer X) 출신의 테크니션 스코트 트래비스(Scott Travis)가 가세해 만든 작품 < Painkiller >를 공개하면서 다시 한 번 영광의 시간을 갖는다. 트래비스의 현란한 드러밍과 나이를 잊은 듯한 핼포드의 보컬이 진동하는 이 음반은 그룹 후반기의 최고작으로 손꼽힌다. ’Painkiller’, ’Metal meltdown’,’Night crawler’등이 애청되었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주다스 프리스트는 모던 록의 대대적인 공세에 흔들리는 모습을 노출했다. 나날이 하락하는 인기는 멤버들 스스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롭 핼포드는 그룹을 떠나 파이트(Fight)라는 새로운 팀을 결성했고, 이에 그룹은 실력파 보컬리스트 팀 ‘리퍼’ 오웬스(Tim ‘Ripper’ Owens)가 탑승한 7년만의 신보 < Jugulator >를 발표하며 우려를 얼마간 잠재웠다. 2001년 이들은 다시 < Demolition >을 공개해 열혈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핼포드의 복귀를 바라는 이들에게 오웬스가 자리를 굳혔다는 사실은 아쉬움을 안겼지만, 한층 힘이 붙은 그의 보이스는 그룹 제 2의 전성기를 고대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세션 맨들로 구성되어 화제를 뿌렸던 토토는 그 탄탄한 연주 실력과 고혹적인 팝 감수성으로 1980년대를 풍미했던 그룹이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전개되는 엄밀한 곡 구성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수많은 뮤지션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열렬한 추종자들을 양산해냈다. 전성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룹의 양대 산맥 스티브 루카서와 고(故) 제프 포카로는 전문 연주인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추앙을 받고 있으며, 그들의 초, 중반기 레퍼토... 세션 맨들로 구성되어 화제를 뿌렸던 토토는 그 탄탄한 연주 실력과 고혹적인 팝 감수성으로 1980년대를 풍미했던 그룹이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전개되는 엄밀한 곡 구성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수많은 뮤지션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열렬한 추종자들을 양산해냈다. 전성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룹의 양대 산맥 스티브 루카서와 고(故) 제프 포카로는 전문 연주인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추앙을 받고 있으며, 그들의 초, 중반기 레퍼토리들은 꾸준히 라디오 전파를 타고 있다. 1970년대 제프 포카로와 스티브 루카서의 고등학교 밴드로 출발한 토토는 그 개개인의 출중한 기량으로 1970년대 후반 이미 스타들의 세션을 도맡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팀이 완전히 정비된 후 발표한 대망의 데뷔 앨범 < Toto >는 밀리언셀러로 부상했으며, 재즈와 록이 정교하게 교직된 독특한 사운드로 마니아들을 사로잡았다. 여기에는 국내에서도 자주 리퀘스트를 받는 ‘George porgy’, ‘Hold the line’등이 실려 있다. 토토는 < Hydra >와 < Turn Back >를 계속해서 내놓으며 특급 아티스트의 길로 접어들기 위한 기반을 마련한다. 비록 1집에 비해 판매고는 저조했으나 곡들은 한층 세련되고 연주는 엄격해져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를 갖게끔 만들기에 충분했다. 3장의 음반으로 비행을 시작한 토토는 1982년에 공개한 4집 < Toto Ⅳ >로 모든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이 된다. 빌보드 정상을 밟은 ‘Africa’, 2위에 오른 ‘Rosanna’등 차트를 맹폭한 히트곡들이 터져 나왔으며 그래미는 < 올해의 앨범 >을 포함한 장장 7개 부문의 상을 < Toto Ⅳ >에 안겨주며 1982년을 토토의 해로 선포했다. 멀티 플래티넘을 따낸 이 음반에서 토토는 예측불허의 변박과 고난이도의 테크닉이 난무하던 기존의 현란함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도 거기에 듣기 좋은 멜로디를 부가해 골수 팬들과 팝 키드들을 동시에 포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엄청난 성공 뒤에 토토는 데이빗 헝게이트와 바비 킴볼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으며 5집 < Isolation >을 발표했다. 그러나 새로 영입된 퍼지 프레데릭슨(Fergie Frederiksen)의 보컬은 킴볼을 따라갈 수 없음이 입증되었고 전전긍긍하던 팀원들은 조셉 윌리엄스(Joseph Williams)를 < Fahrenheit >에서 대타로 기용했다. 고품격 발라드의 비중이 높아진 이 앨범은 ‘Lea’, ‘I’ll be over you’등의 히트곡을 배출하며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에도 키보디스트 스티브가 떨어져 나가는 등 멤버 교체와 탈퇴의 악순환을 계속 경험하던 토토는 1992년 팀의 중핵 제프 포카로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면서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당대 최고의 드러머 중 하나로 평가받던 그의 요절은 많은 팬들에게 아쉬움과 슬픔을 안겼다. 토토의 통산 여덟 번째 작품인 < Kingdom Of Desire >는 ‘Only you’라는 매혹적인 곡을 남긴 채 제프의 마지막 레코딩으로 기록되었다. 마이클 셍커 그룹(Michael Schenker Group >을 거친 1급 레벨의 록 드러머 사이먼 필립스(Simon Phillips)의 가세로 힘을 얻은 토토는 1999년 오리지널 멤버 바비 킴볼이 보컬리스트로 재가입해 또 한번의 비상을 노리고 있다. 멤버들 중 스티브 루카서는 재즈 기타의 도인 래리 칼튼과 공동 투어를 나서는 등 특히 두드러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1996년 있었던 토토의 내한 공연은 국내에서 있었던 최고의 공연 중 하나로 회자된다. 그들은 라이브와 스튜디오 앨범에서 모두 사람들을 만족시켜 왔으며, 결성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 팀웍과 기량으로 사랑 받고 있다. 가수의 뒤에서 연주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세션 맨에서 토토는 당당히 무대 중앙으로 진출했었고, 이제는 자신들의 경륜을 하나하나 쌓아가고 있다.
하드 락, 글램 메탈 밴드 하드 락, 글램 메탈 밴드
멤버 : 랜디 캘리포니아(Randy California, 기타, 보컬), 에드 캐시디(Ed Cassidy, 드럼), 존 로크(John Locke, 키보드), 마크 안데스(Mark Andes, 베이스), 제이 퍼거슨(Jay Ferguson, 보컬, 퍼커션) 멤버 : 랜디 캘리포니아(Randy California, 기타, 보컬), 에드 캐시디(Ed Cassidy, 드럼), 존 로크(John Locke, 키보드), 마크 안데스(Mark Andes, 베이스), 제이 퍼거슨(Jay Ferguson, 보컬, 퍼커션)
밴드 : Primal Scream (프라이멀 스크림)
프라이멀 스크림이 또 원시적으로 울부짖는다. 록과 댄스를 결합시켜 애시드 하우스의 몽환적 사운드로 영국 음악의 새 시대를 갈랐던 언더의 위인들이지만 그들은 얼마 전부터 정치적으로 원초적 외침 본능을 풀어헤쳐, 마치 뱉어내듯 초강력 저항의 언어들을 뿌려대고 있다. 그래도 테크노 음악이 주는 비트 반복의 광적 흥분이 먼저겠지만 16년 경력의 이 중견 밴드의 음악에선 이 부분도 중요하다. 신보 < Xtrmntr >은 ... 프라이멀 스크림이 또 원시적으로 울부짖는다. 록과 댄스를 결합시켜 애시드 하우스의 몽환적 사운드로 영국 음악의 새 시대를 갈랐던 언더의 위인들이지만 그들은 얼마 전부터 정치적으로 원초적 외침 본능을 풀어헤쳐, 마치 뱉어내듯 초강력 저항의 언어들을 뿌려대고 있다. 그래도 테크노 음악이 주는 비트 반복의 광적 흥분이 먼저겠지만 16년 경력의 이 중견 밴드의 음악에선 이 부분도 중요하다. 신보 < Xtrmntr >은 전한다. "우린 절규한다. 고로 우린 존재한다!" 프라이멀 스크림의 지휘자 바비 길레스피(Bobby Gillespie)는 1997년 앨범 < Vanishing Point >에서 좀더 과감한 자세를 취했다. 수록곡 ''Star''에서 아주 확연한 정치적 성향을 드러낸 것이다. 펑크출신의 밴드로서 당연지사 아니냐고 할 수만은 없었다. 사실 그들의 1991년 기념비작 < Screamadelica >는 당시 영국 맨체스터를 중심으로 한 ''쾌락주의 댄스문화'' 흐름과 일치되어 뉴 트렌드의 깃대를 꽂았던 음반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우 출신이었지만 맨체스터의 댄스 록 퓨전과 애시드 하우스 집단, 이른바 ''매드체스터''로 일컬어지는 범주에 포함되기도 한다. 이 트렌드의 원조격인 그룹 스톤 로지스(Stone Roses)의 멤버였던 개리 ''마니'' 마운드필드가 1996년 가을 이 그룹에 베이스주자로 가입했다는 사실도 유사한 과(科)임을 말해주는 단서다. 그것이 레이브 문화와 직결된 ''하루종일 춤추고 놀자!''는 해방철학(?)임을 안다면 ''Star''는 곧 발 아니면 가슴에 중심이 있었던 음악이 머리로 상향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메시지의 중압감을 배격하는 뮤지션이나 팬들에게 이 곡은 ''근엄주의''로 비쳐질 수 있는 다소 모험적인 제스처였다. ''난 권리를 위해 싸우는 모든 이들을 위해 이 노래를 부르는 거야. 모든 사람들이 스타지. 시스터 로자(로자 파크스), 말콤 X, 킹목사는 우리도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하는지를 보여줬지. 법을 바꿔야 해. 그들은 죽었지만 그들의 정신은 아직 살아있어…''- ''Star''중에서 길레스피는 말했다. "난 늘 인권평등에 대한 노래를 쓰고싶었다. 로자, 말콤, 킹을 말한다고 흑인노래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자의 곡을 쓰고싶은 거다. 반역의 노래 말이다." 3년이 흘러 길레스피는 이 입장에서 한 두발 정도가 아니라 크게 건너뛴 신보 < Xtrmntr >로 돌아왔다. 크게 건너뛰었다 함은 반역의 강도를 높여 앨범 전체를 선동으로 물들였다는 뜻이다. 통렬한 언어 일색이며 통렬하다 못해 걱정스런 수준의 무차별 독설이다. 강대국의 파시즘에 대한 독설 지난해 영국에서 싱글로 먼저 발표된 곡 ''Swastica eyes''에서 Swastica가 뭔가. 나치독일의 상징인 갈고리십자형의 기장(卍) 아닌가. 바로 미국이나 영국 등 강대국의 폭력과 지구촌 통제를 나치의 파시즘으로 빗대 통렬히 난도질하는 내용이다. ''노조파괴자들, 경찰, 정부, 도적들, 매수된 정신불구자들. 기생충들이야, 너흰 매독환자들이야. 너흰 스와스티카 눈을 가졌어. 너희들의 내비치는 심리를 봐. 모든 것을 제거하려는 정책, 민주주의에 대한 군사적, 산업적 환영이야.''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신보의 커버와 사진들이 전투기 조종사들을 오려 붙인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문제는 표현방식. 거의 오줌 갈기듯, 침 뱉듯 조롱과 고발의 언어를 쏟아낸다. 이번은 ''Kill all hippies''. ''부셔버려, 히피를 다 죽여버려. 아나키! 디스코는 엿이야. 정상인 것을 뒤엎어버려. 넌 돈이 있지만 난 혼(소울)이 있어. 혼은 살 수 없고 소유할 수도 없어.'' 프라이멀 스크림은 이러한 영감, 정신, 소울이 이미 그들 속에 풍부히 자리잡고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전에 충분히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앨범을 물들이고 있는 욕설과 절규들이 더욱 충격적이다. ''Pills'' 같은 곡은 ''식(sick), 퍽(fuck), 퍽, 식''의 그룹명 그대로 원시적인 외침이다. < Q >잡지의 표현에 따르면 ''피에 젖은 라켓''이다. 어찌 보면 우린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이후 모처럼의 독설가를 만나게 된다. < 롤링스톤 >은 레이지의 < The Battle Of Los Angeles >과 비유해 이 음반을 ''The Battle Of London''이라고 했다. 그래도 레이지는 구체적 사안을 다뤘다면 프라이멀 스크림은 모든 사람들에게 닥치는 대로 쏘아댄다. 거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수준이다. 과거에 이런 성격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근래 프라이멀 스크림이 이토록 막가는(?) 것은 현재 록의 상황과도 관련한다. 록의 아이덴티티 상실에 대한 회의와 분노의 시선이 도사리고 있다. ''도대체 지금의 록은 무엇을 지향하는가? 뭘 얘기하며 무엇과 싸우는가?'' "근래 대부분의 록 가사는 실망스럽다. 너무 자기중심적이다. 집합의식이 사라지고 있다. 모험도 없고 의욕도 상실한 상태다. 차라리 흑인 랩의 메시지 전통을 본받는 게 낫다." 90년대 말에 이르러 록은 솔직히 전통적인 주변환경에의 민감성을 버리고 부와 명성을 최대한 만끽하는 엘리트주의로 전락한 감이 있다. ''음악만 잘하고 출세한다면 그만''이라는 태평하고 거만한 사고가 퍼져있다. 그러나 아버지가 노조(勞組)출신인 바비 길레스피는 일례로 지난 1997년 영국의 국가이슈로 떠오른 리버풀 실직 항만노동자들의 고통과 같은 억압사례를 외면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그해 리버풀 노동자들의 도움으로 런던에서 공연을 갖기도 했다. 길레스피의 주장은 곧 ''지금의 록 엘리트들은 모두 노동자들의 뒷줄을 따라 서야 한다''는 것이다. 앨범의 미학은 그러나 결코 정치성이나 의식에만 있지는 않다. 귀를 째듯 울려대는 테크노 빅비트와 사이렌의 불협화음에 그것을 실어댔다는데 있다. < Screamadelica > 이후 94년 < Give Out But Don''t Give Up >에서 의외의 주류 냄새 물씬한 하드록으로 말을 바꿔 탔다가 다시 < Vanishing Point >와 함께 본령인 테크노 댄스로 귀향한 그들은 신보에서 한층 일렉트로닉 성향을 강화하고 있다. 따라서 새 앨범을 이해하려면 < Vanishing Point >와 함께 언제나 개막이 우대되는 앨범해석 경향을 감안할 때 시작점일 수밖에 없는 문제작 < Screamadelica >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전작에서 드러낸 애시드 하우스와 싸이키델리아에 대한 관점, 이를테면 그것이 복고나 퇴행적 컨셉트가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음악개념이라는 시각이 신보에서 다시 한번 강조된다. 분명히 프라이멀 스크림은 그룹의 나이는 중년이되, 여전히 젊으며 현재진행형을 의식하고 있다. 지난번은 약간은 덥(dub)과 어둡고 불길한 트립합 요소 그리고 소울이 산재했다면 이번은 좀더 강렬한 비트의 반복과 공격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확실히 와일드해졌다. 전작에서 소울의 대가 멤피스 혼스와 덥의 전설 어거스터스 파블로(Augusus Pablo)가 참여한 것과 비교해 신작은 게스트들 가운데 지금의 문법인 케미컬 브라더스가 있다는 것으로도 그 강성화, 최신화가 뚜렷이 확인된다. 게스트로 말하면 이들 말고도 슈 게이징 음악을 창조한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의 케빈 실즈, 뉴 오더의 버나드 섬너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손을 보태고 있다. ''Kill all hippies''의 믹싱을 맡은 케빈 실즈는 현재 프라이멀 스크림의 미국 순회공연에도 동행하고 있어 매니아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나긋나긋한 팝에 대한 해체 의지 목적적 메시지를 가진 곡들이 테크노의 몽롱함, 반복성에 실려 전해진다면 그 분위기는 어떠하겠는가. ''Kill all hippies''는 내려치는 커다란 박동과 마치 공습사이렌처럼 귀를 째며 울어대는 키보드 사운드는 그 잔인성과 공격성으로 메시지 전달효과를 극대화한다. 아홉 번째 곡 ''MBV arkestra(if they move kill ''em)'' 역시 찢어대고 아우성치고 몰아대는 일렉트로닉 노이즈 사운드광경이 흡사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식이다. 그나마 < Screamadelica >의 맛을 가깝게 느낄 수 있는 댄스 그루브 성향의 ''Swastica eyes''도 번개처럼 빠른 스피드로 속도문화의 현장에 데려간다. 물론 듣기가 무난한 영롱한 ''Blood money''나 힘을 뺀 ''Keep your dreams''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헤비하고, 자극적이고, 불길하며 혼잡스럽다. 그러면서도 힙합이나 재즈 스타일 등 다양한 스타일을 구사하고 있다는 게 경이롭다. 한마디로 굳이 < Q >지의 정의를 인용한다면 ''때로 난해한'' 앨범이다. 정말 일반 팝송의 길들여진 멜로디 패턴과 나긋나긋한 전개방식에 젖어있는 사람이라면 접수가 까다로운, 용량초과의 음반이다. 프라이멀 스크림은 그런 소극적 소비자들과 연을 맺을 의도를 조금도 갖고있지 않다. 영국의 잡지 < 모조 >는 ''드문 종류의 귀에 거슬리는 앤티 팝(anti-pop)의 악의''를 품고있는 앨범이라고 했다. 아티스트 개성이 초토화된 팝의 사운드와 노랫말에 모두 저항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대목이 핵심이며 또한 왜 프라이멀 스크림이 이런 음악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그들은 팝의 통속적이고 획일화된 문화를 해체하기 위해 수요자들의 청각을 바꾸고자 한다. 그것이 아티스트 자신을 살리고 따라서 음악도 구제하여 ''다양성''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대부분의 언더와 인디 밴드들이 점점 갈수록 타이트한 것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며 느슨해진 록의 현실을 고려할 때, 테크노의 경우는 애초 사회현실과 유리되고 있는 점을 볼 때, 그들의 메시지지향과 반(反)상업적 팝의 자세는 독행(獨行)의 고귀함이 있다. 지금의 음악은 프라이멀 스크림의 고집스럽지만 ''아름다운 앤티''가 절실하다. 정확히 1시간 동안 수요자들의 멱살을 잡고 소닉 공습과 선동의 장으로 강제 소집한다. 음악을 듣는 게 아니라 음악이 들리는 사실상 귀머거리 상태에 있는 다수대중에게 그러한 강제성은 어떤 점에서 정당하다.
밴드 : Manic Street Preachers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 [매닉스],The Manics)
1991년 영국 웨일스(Wales)에서 결성된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이하 매닉스)는 근래에 보기 힘든 음악계의 이단아들이다. 섹스 피스톨스, 클래시 같은 펑크 그룹들의 직계라 할 수 있는 이들은 데뷔 초 ‘막시스트’라 불릴 정도의 과격한 메시지를 쏟아내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 ‘미친 거리의 전도사’들에게 미제국주의는 응당 ‘베어버리고, 불태워야 할’ 것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영국왕실 역시 극도의 혐오대... 1991년 영국 웨일스(Wales)에서 결성된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이하 매닉스)는 근래에 보기 힘든 음악계의 이단아들이다. 섹스 피스톨스, 클래시 같은 펑크 그룹들의 직계라 할 수 있는 이들은 데뷔 초 ‘막시스트’라 불릴 정도의 과격한 메시지를 쏟아내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 ‘미친 거리의 전도사’들에게 미제국주의는 응당 ‘베어버리고, 불태워야 할’ 것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영국왕실 역시 극도의 혐오대상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메시지들은 초강력 펑크 사운드에 실려 이들의 지지자들을 선동했다. 하지만 이들의 강성 이미지와는 달리 감성적인 멜로디라인을 지닌 이들의 음악은 팝 팬들마저도 흡수시킬 수 있었다. 작사를 전담한 기타리스트 리치 제임스(Richey James), 보컬 겸 기타리스트 제임스 딘 브래드필드(James Dean Bradfield), 드러머 션 무어(Sean Moore), 베이스 주자 니키 와이어(Nicky Wire), 이 4인조로 매닉스는 출발했다. 이들이 처음 활동하던 무렵 영국에는 ‘24시간 신나게 놀자’는 애시드 하우스와 신발만 바라보고 연주하는 ‘슈게이징’이 붐을 타고 있었고, 브릿팝 진영이 막 태동하고 있었다. 매닉스는 그러나 그러한 경향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리얼리즘’이라는 절대적 사명감을 표방하고 나섰다. 당시 만연했던 자포자기 식의 향락주의나 소극적 사운드를 쫓는 것이 아니라 대외적인 힘을 발휘하는 ‘강하고 적극적인 음악’을 설파한 것이다. 글램 록을 연상시키는 진한 메이크업을 한 외모로도 유명했던 이들은 한때 이들의 음악이 가짜, 즉 창조성이 결여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단지 선배들의 고전을 무작정 추종하기만 한다는 ‘오리지널리티’의 문제였다. 1991년 영국 록 잡지 < NME > 기자에게 그 같은 질문을 받은 기타리스트 리치 제임스는 즉석에서 그렇지 않음을 보여줬다. 답변으로 그는 말없이 칼로 팔에 ‘4 REAL(우린 진짜다)’라는 글자를 새겼다. 이 무시무시한 자해소동으로 그러한 의심은 어느 정도 불식되었으며 매닉스의 ‘광적인’ 면모는 더욱 부각되었다. 1992년 데뷔앨범 < Generation Terrorists >을 발표하며 이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진지한 설교를 전도해나가기 시작했다. 2집 < Gold Against The Soul >과 3집 < The Holy Bible >에 이르면서 이들의 무정부주의적 좌파 성향은 극에 달했다. 한편 극심한 신경쇠약 증세로 요양과 투어를 병행하던 ‘문제의’ 리치 제임스는 3집 발매 전날 런던의 호텔을 떠나 실종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리치의 부재로 3인조가 된 매닉스는 친구 잃은 슬픔으로 과격함을 잠시 접고 내면으로 침잠했다. 1995년 출시된 4집 < Everything Must Go >는 전작들에서 보인 투박하고 거친 사운드와 정치적 태도 등을 다소 누그러뜨리고 주류 브릿팝 사운드로 화해를 시도한 걸작앨범이다. ‘모든 것은 사라져야만 한다’는 의미심장한 문구를 내건 이 앨범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매닉스는 일약 영국음악계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2년 뒤 발표된 5집 < This Is My True Tell Me Yours > 역시 이들의 진지함이 돋보이는 수작이며, 1999년 말에 초창기의 강성 모습이 담긴 싱글 ‘The masses against the class’가 발표되었다. 2001년 3월에는 역시 데뷔 초의 ‘열혈 펑크 순수주의자’로 되돌아간 여섯 번째 앨범 < Know Your Enemy >가 발표되었다. 매닉스는 직선적이고 단순한 사운드로 좌파적 메시지를 더욱 각인시켰다. 자주 들리는 이들의 반복구는 무모할 정도다. 이러한 이들의 단순함은 같은 영국그룹 라디오헤드의 복잡함과 흥미로운 비교거리다. 라디오헤드의 분열적 변종 미학과 매닉스의 단순 명료함은 분명 서로 ‘극과 극’이다. 음악적 지향도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고 할까. 이 두 밴드는 위력을 잃고 있는 현 영국 음악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누구보다도 독보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쿠바의 아바나에서 공연한 이들은 쿠바에서 공연한 최초의 록 그룹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북한과 더불어 사회주의의 최후의 보루인 쿠바도 매닉스의 혁명성을 인정한 셈이다. 앞으로도 그 같은 정치적 메시지는 이들의 존재가치로 의미를 더할 전망이다.
1993년 캘리포니아 베이커스필드에서 결성된 5인조 하드코어 밴드 콘의 보컬리스트 조나단 데이비스(Jonathan Davis)는 말한다. “우리는 희망 없는 세대다. 그래서 공격적인 음악을 하는 밴드가 많이 나오고 있다." 그들이 음악계에 존재하는 이유이다. 콘이 말하는 희망 없는 세대는 ‘십대''이다. 하지만 그들은 소년, 소녀들의 전통적인 사랑타령을 하지는 않는다. 어린 시절 상처를 받고 자란 소년의 이야기를... 1993년 캘리포니아 베이커스필드에서 결성된 5인조 하드코어 밴드 콘의 보컬리스트 조나단 데이비스(Jonathan Davis)는 말한다. “우리는 희망 없는 세대다. 그래서 공격적인 음악을 하는 밴드가 많이 나오고 있다." 그들이 음악계에 존재하는 이유이다. 콘이 말하는 희망 없는 세대는 ‘십대''이다. 하지만 그들은 소년, 소녀들의 전통적인 사랑타령을 하지는 않는다. 어린 시절 상처를 받고 자란 소년의 이야기를 노래한다. 때문에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강조해온 레이지 어겐스트 머신과는 기본적인 지향점이 다르다. “이 곡은 내가 고등학교 때 친구들로부터 주눅이 들어있는 녀석, 괴상한 녀석 등으로 놀림을 당했던 이야기이다." “이 곡은 내가 학교에서 만나 친구라고 생각했으나 날 망쳐놨던 한 녀석에 대한 내용이다." 1994년 데뷔앨범 < Korn >과 1996년의 2집 < Life Is Peachy >의 수록곡 ‘Faget’, ‘Good god’에 대한 조나단의 설명이다. 단절 속에 뒤틀려 버린 한 인간의 절규이다. 바로 그룹의 프론트 맨 조나단 데이비스의 자서전이다. 우울했던 십대 시절의 삶을 노랫말을 통해 표출한 것이다. 조나단의 분노는 가사로 그치지 않는다. 다시 목소리를 통해 재현된다. 그의 보컬은 이중적이다. 슬픔에 찬 듯 흐느끼다가 갑자기 우렁찬 그로울링으로 급 반전된다.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닌 감정의 굴곡이 심한 ‘연기''를 한다. 탁월한 보컬 연출자이다. 데뷔작의 ‘Ball tongue’와 1999년에 발표한 앨범 < Issues >의 ‘Make me bad’에서 염세주의로 가득 찬 그의 보컬은 압권이다. 조나단 데이비스의 보컬은 콘이 있기에 빛을 발한다. 사실 그는 뛰어난 보컬리스트는 아니다. 기교는 좋지만 힘껏 밀어붙이는 강력한 파워는 부족하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멀티컬쳐군(群)의 수혜자임을 증명하듯 콘의 잡종 사운드는 데이비스의 보컬이 제값을 하도록 만들었다. 제임스 ‘멍키'' 샤퍼(James ‘Munky'' Schaffer)와 브라이언 ‘헤드'' 웰치(Brian ‘Head'' Welch)의 트윈기타 연주는 콘만의 독특한 사운드를 구축하는데 결정적인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들은 기타리스트들이 널리 애용하지 않는 7현기타를 주무기로 함으로써 보다 다양한 코드웍과 음색을 선보였다. 나아가 그들이 시도한 저음 튜닝은 둔탁한 저음과 날카로운 고음이 ''부조화 속의 조화''를 이루며 그들만의 음악색깔을 만들어냈다. 레지널드 ''필디'' 아비주(Reginald ''Fieldy'' Arvizu)의 5현 베이스와 데이빗 실베리아(David Silveria)의 드럼 역시 리드미컬하면서도 굉음을 내는 개성강한 리듬파트를 이루고 있다. 데뷔작의 ‘Blind’와 2집 앨범의 ‘Chi’ 등에서 잘 나타난다. 하지만 콘은 자신들의 사운드를 정형화시키지 않았다. 큰 틀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했다. 1998년의 3집 앨범 < Follow The Leader >가 대표적이다. 아이스 큐브, 림프 비즈킷의 프레드 더스트가 참여한 이 앨범은 전작들보다 음산하고 광기가 서린 사운드를 선사했다. 다면적이던 조나단의 보컬은 데스메탈의 거친 울음소리로 변했고 기타사운드도 보다 헤비해졌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팬들의 귀를 단숨에 파고들 정도로 힙합 색채가 강한 멜로디 라인이었다. 프레드 더스트가 래퍼로 참여한 ‘All in the family’에서 그들의 변신을 실감할 수 있다. 콘이 발표하는 앨범마다 성공을 거듭하며 거물급 밴드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루가 멀다하고 계속되는 ‘공연''에 있었다. 그들은 소위 뜨는 곡과 잘 만들어진 뮤직비디오를 배제했다. 오직 꾸준한 공연을 통해 인지도를 쌓아 나갔다. 데뷔 초 공연을 많이 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준다는 에픽 산하 레이블인 이모틀(Immortal)과 앨범 계약을 체결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들의 데뷔앨범은 발표당시에는 신통치 않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2년 남짓한 투어를 통해 팬들과 꾸준한 교감을 나누었다. 그 결과 70만장이라는 앨범 판매고를 올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들은 그만큼 성실했다. 몸을 던져 성실했다. 팬들을 기다리는 것이 아닌 직접 찾아다니는 서비스를 행한 것이다. 최근작 < Issues >를 발표하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콘의 인터넷 공연사이트에는 유럽과 미국의 투어 스케줄이 빽빽이 잡혀있다. 얼마 전 드러머 데이빗 실베리아가 팔목 부상을 당해 공연에 큰 차질이 생겼다. 하지만 그들은 팬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페이스 노 모어와 오지 오스본의 드러머로 활동했던 마이크 보딘(Mike Bordin)을 긴급 수혈하여 콘서트를 감행하겠다고 발표했다. 다양성은 방치하면 잡거성(雜居性)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협동성과 결합하면 풍요로움으로 탈바꿈한다. “우리는 모두 좋은 친구 사이다. 이것이 우리가 함께 하는 이유다. 만약 우리가 돈이나 명예를 위해 만났다면 지금까지 지속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콘의 음악적 아이콘은 힙합, 메탈, 고딕, 펑크(Funk) 등 다양하다. 그들은 여기에 협동성을 불어넣어 풍성하고 꽉 짜인 음악자산으로 만들어냈다. 이것을 기반으로 콘은 현실의 왜곡된 시선에 반항하고 그 반항 속에 잠재된 참모습을 찾아내고 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십대였다. 대중과의 막힌 벽을 허물기 위한 그들만의 소통방식인 것이다.
헤비메탈의 역사에서 영국 출신의 그룹 모터헤드가 세운 업적은 가히 대단하다. 우선 그들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 불어닥친 NWOBHM(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의 선두에 서서 영국 헤비메탈의 새로운 바람을 주도하였다. 1979년 2집 앨범 < Overkill >이 영국 차트 24위에 오르는 것을 시발점으로, 같은 해 발표된 < Bomber >는 12위, 이듬해의 < ... 헤비메탈의 역사에서 영국 출신의 그룹 모터헤드가 세운 업적은 가히 대단하다. 우선 그들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 불어닥친 NWOBHM(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의 선두에 서서 영국 헤비메탈의 새로운 바람을 주도하였다. 1979년 2집 앨범 < Overkill >이 영국 차트 24위에 오르는 것을 시발점으로, 같은 해 발표된 < Bomber >는 12위, 이듬해의 < Ace Of Spades >는 4위를 차지하는 등 영국 메탈 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확립했다. 1981년에 발매된 실황 음반 < No Sleep Till Hammersmith >도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밴드의 라이브 실력을 만방에 떨쳤다. 라이브 앨범이 1위를 차지하는 것은 무척 드문 예이다. 또한 모터헤드는 헤비메탈에 빠른 스피드를 도입하여 나중에 등장하는 스래시 메탈과 스피드 메탈에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해준 최초의 그룹으로 기록되어 진다. 포효하는 듯한 보컬, 난폭하게 몰아 부치는 드럼과 베이스, 날카롭고 공격적인 기타 연주는 당시로서는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다. 딥 퍼플(Deep Purple), 레드 제플린(Led Zepp;in) 같은 하드 록 그룹과 확연히 구별되는 사운드를 들고 나온 것이다. 1977년 데뷔작 < Motorhead >, 2년 뒤의 < Overkill > 등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메탈리카(Metallica), 메가데스(Megadeth) 등이 바로 모터헤드의 자양분을 받아들이며 음악적 역량을 쌓아나간 대표적 그룹들이다. 주지하다시피 메탈리카의 드러머 라스 울리히(Lars Ulich)는 어린 시절 팬클럽을 운영할 정도로 모터헤드의 골수 추종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모터헤드는 전설적인 스페이스 록 밴드 호크윈드(Hawkwind)에서 베이스를 치던 레미(Lemmy)가 1975년 기타리스트 래리 월러스(Wallace), 드러머 루카스 폭스(Lucas)와 함께 결성한 그룹. 이후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멤버들이 드나들었지만 완벽한 카리스마의 소유자 레미를 구심점으로 별 탈 없이 순항했다. 특히 평론가들과 팬들은 기타리스트 에디 클라크(Eddie Clarke), 드러머 필 테일러(Phil Taylor)가 재직했던 1976년부터 1982까지를 모터헤드의 절정기로 본다. 앞서 언급했던 < Overkill >, < Bomber >, < Ace Of Spades >, < No Sleep Till Hammersmith > 등이 모두 이때의 라인업으로 만들어졌다. 모터헤드는 그러나 과거 속의 밴드가 아니다. 단 한번의 휴지기와 굴곡 없이 지금까지 꾸준하게 앨범들을 내놓으며 혈기 왕성한 활동을 해나가고 있다. 잠깐의 영향력을 행사하며 반짝 인기를 얻고 사라져간, 그리고 앞으로 사라져 갈 그룹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위대한 생명력이다.
1980년대 중반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른 두 곡의 록발라드 ‘These dreams’와 ‘Alone’가 널리 애청되면서 우리나라에서 뒤늦게 빛을 본 하트(Heart)는 1970년대 초반에 결성된 혼성 5인조 그룹이다. 언니 앤 윌슨(Ann Wilson, 1950년 생)과 기타리스트인 동생 낸시 윌슨(Nancy Wilson, 1954년 생) 자매의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하드한 팝록을 음악 아이덴티티로 삼아 상... 1980년대 중반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른 두 곡의 록발라드 ‘These dreams’와 ‘Alone’가 널리 애청되면서 우리나라에서 뒤늦게 빛을 본 하트(Heart)는 1970년대 초반에 결성된 혼성 5인조 그룹이다. 언니 앤 윌슨(Ann Wilson, 1950년 생)과 기타리스트인 동생 낸시 윌슨(Nancy Wilson, 1954년 생) 자매의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하드한 팝록을 음악 아이덴티티로 삼아 상당한 상업적 실적을 쌓았다. 그리하여 대중적인 인지도는 높았지만 결코 록 평단의 찬사를 받지는 못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프로 뮤지션으로서의 활동상을 보여준 하트는 포크와 정통 하드록, 그리고 실험적인 스타일이 혼합된 독특한 음악을 구사함으로써 타 그룹과의 차별화에 성공했다. 레드 제플린(Led Zeppeline)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꽤 직선적인 록을 외연으로 하면서도 내면에는 포크적인 부드러움과 유연함을 간직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이들의 대중성이 위치했다. 보컬리스트 앤 윌슨은 여성판 로버트 플랜트(Robert Plant)라고 불릴 만큼 파워풀한 보컬을 과시했다. 그래서 초창기 하트의 노래들은 국내 팬들에게 익숙한 록발라드 이미지와는 판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워싱턴 주(州)의 시애틀에서 10대 시절을 보낸 앤과 낸시 자매는 포크 음악에 심취했고 곧 낸시는 기타와 플루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두 자매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프로 뮤지션이 되기로 마음을 굳힌 후 낸시는 포크 싱어로, 앤은 캐나다 벤쿠버에 적을 두고 있는 남성 그룹 디 아미(The Army)에 가입했다. 곧이어 동생 낸시가 국경을 넘어 언니 그룹에 가세해 두 번째 이름 화이트 하트(White Heart)를 간단히 하트로 줄이며 활동에 진력해 벤쿠버에서는 고정적인 추종자들이 생겨날 만큼 로컬 인기그룹으로 뻗어났다. 1976년에 공개된 처녀작 < Dreamboat Annie >는 1970년대 록 앨범 중 가장 멋진 데뷔작의 하나로 꼽힌다. 현재까지 이들의 대표 곡으로 남아 있는 ‘Crazy on you(35위)’, ‘Magic man(9위)’, 그리고 컨트리 음악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밴조의 낭랑한 연주와 포크가 멋지게 어깨동무를 한 ‘Dreamboat Annie(42위)’가 자리하고 있는 이 첫 작품은 록의 고전이 되었다. 1년이 지나 발표한 두 번째 앨범 < Little Queen >에서도 여러 히트 싱글들이 배출되어 미국에서만 100만 이상의 판매고를 올려 신인들에겐 두려움인 소포모어 징크스를 거뜬히 넘어섰다. 선동적인 리듬과 기타 연주의 ‘Barracuda’(얼마 전 2000년에 개봉된 영화 < 미녀 삼총사 >에 삽입되어 활달한 영화 분위기에 일조했다)가 차트 11위에 올랐고, 그밖에 ‘Kick it out(79위)’, 펑키(funky)한 기운이 도는 하드록 트랙 ‘Little queen(62위)’ 등이 애청되었다. 그러나 그룹의 결속력이 흔들리기 시작한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남성 멤버들이 탈퇴하고 가입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 기간에 발표된 < Magazine >, < Dog & Butterfly >, < Bebe Le Strange >, < Private Audition >, < Passionworks >는 실패하지 않았지만 하트의 역사에 있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은 앨범들이었다. 하지만 ‘Heartless(24위)’, ‘Straight on(15위)’, ‘Dog & Butterfly(34위)’, ‘Even it up(33위)’, ‘Tell it like it is(8위)’, ‘This man is mine(33위)’, ‘How can I refuse?(44위)’ 등의 싱글 곡들을 차트에 꾸준하게 밀어 올려 대열에서 후퇴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1979년에 마이크와 로저 피셔 형제가 나가고 그 후임으로 하워드 리스(Howard Leese)가 들어왔고, 1982년에는 스티브 포센과 마이클 데로시어 대신 팝록 밴드 파이어폴(Firefall)에 있었던 마크 안데스(Mark Andes)와 데니 카마시(Denny Carmassi)가 합류하면서 1980년대 중반과 후반을 화려하게 비상(飛上)할 프로젝트를 착수한다. 1985년에 나온 여덟 번째 정규 음반 < Heart >는 이들에게 제2의 전성기를 안겨 주었다. 처음으로 넘버 원의 영광을 선사한 록발라드 ‘These dreams’를 비롯해 ‘What about love(10위)’, ‘Never(4위)’, ‘Nothin’ at all(10위)’, ‘If looks could kill(54위)’은 당시 라디오에서 골든 레퍼토리로 자리를 잡았으며 국내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초기부터 이들의 음악에 귀를 기울였던 골수 하트 매니아들은 한결 쉬워진 팝록 사운드에 적지 않게 실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작 < Heart >보다 좀 더 대중적인 취향에 맞춘 < Bad Animals >로 하트는 전 세계 음악 팬들의 가슴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파워 발라드 ‘Alone(3주간 1위)’를 분수령으로 ‘Who will you run to(7위)’, 낸시 윌슨이 부른 ‘There’s the girl(12위)’, 비장미 넘치는 발라드 ‘I want you so bad(49위)’가 차트를 누비며 1987년과 1988년을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국내에서도 본격적인 하트의 추종자들을 늘리는 기폭제가 됐다. 1990년 초에 공개된 < Brigade >에서도 ‘All I wanna do is make love to you(2위)’와 ‘I didn’t want to need you(23위)’, ‘Stranded(13위)’, ‘Secret(64위)’ 등의 싱글로 그들의 명성을 지속했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 윌슨 자매의 고향(그 유명한 시애틀!) 후배들의 분기충천(憤氣沖天)한 얼터너티브 그런지의 음악 파고에 밀린 1993년도 CD < Desire Walks On >은 하트가 그동안 쌓아 온 이름값에 한참을 못 미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싱글 ‘Will you be there (In the morning)’ 만이 39위에 간신히 턱걸이했을 뿐이다. 이후 이들은 공식적인 신보 발표를 유보하고 공연 실황이나 히트곡 모음집 형식의 컴필레이션 음반 위주로 자신들의 지지자들과 음악적인 교류를 단행하고 있다. 언니 앤 윌슨은 러버보이(Loverboy)의 리드 보컬리스트 마이크 레노(Mike Reno)와 함께 댄스 무비인 < 풋루스 >의 사랑의 테마 ‘Almost paradise(1984년 7위)’를 취입한 것 외에도 에디 머피가 주연한 < 골든 차일드 >의 주제곡 ‘The best man in the world(1985년 61위)’와 멜 깁슨과 미셀 파이퍼가 타이틀 롤을 맡은 영화 < 데킬라 선라이스 >의 주제가로 리차드 막스(Richard Marx)가 작곡한 ‘Surrender to me(1989년 6위)’를 칩 트릭(Cheap Trick)의 로빈 젠더(Robin Zander)와 호흡을 맞춰 독행(獨行)으로도 히트 차트에 입성했다. < 세이 애니씽 >, < 싱글스 >, < 제리 맥과이어 >, < 올모스트 페이머스 > 그리고 최신작 < 바닐라 스카이 > 등을 만들어 작년에 내한하기도 했던 영화 감독 카메론 크로우(Cameron Crow)의 부인인 동생 낸시 윌슨은 간혹 남편의 영화 음악 스코어를 작곡함으로써 록음악과는 다른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밴드 : Journey (저니 (락 밴드))
197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저니는 1980년대 초, 중반을 강타했던 록 그룹이다. 하드록, 재즈록 밴드로 출발했던 저니는 미성의 보컬리스트 스티브 페리(Steve Perry)를 영입하면서 팀컬러를 팝 록으로 완전히 전환한다.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어쨌든 대중들의 반응은 뜨거운 것이어서 그 변화가 처음으로 나타난 앨범인 < Evolution >부터 이들은 발표하는 작품마다 수백만장의 앨범을 팔아치우는 ... 197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저니는 1980년대 초, 중반을 강타했던 록 그룹이다. 하드록, 재즈록 밴드로 출발했던 저니는 미성의 보컬리스트 스티브 페리(Steve Perry)를 영입하면서 팀컬러를 팝 록으로 완전히 전환한다.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어쨌든 대중들의 반응은 뜨거운 것이어서 그 변화가 처음으로 나타난 앨범인 < Evolution >부터 이들은 발표하는 작품마다 수백만장의 앨범을 팔아치우는 빅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특히 멤버들의 역량이 집대성된 1981년작 < Escape >는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등극하며 저니의 명성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이 음반에서만 ‘Open arms’(후에 머라이어 캐리가 리메이크), ‘Don''t stop believin''’, ‘Who''s crying now’등 톱 텐 싱글이 3개가 쏟아졌다. 이들은 곧 동시대의 포리너(Foreigner), REO 스피드웨건(REO Speedwagon)등과 함께 성인 취향의 록(AOR)과 발라드를 가장 잘 만드는 팀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처럼 세계인들을 열광시키며 연이은 히트 퍼레이드를 벌인 저니는 라틴 록의 거장 산타나(Santana)에서 활약하던 두 청년 닐 숀(Neal Schon)과 그렉 롤리(Greg Rolie)가 손을 잡으면서 출범했다. 여러 뮤지션들을 영입해 록 밴드의 모양을 갖춘 저니는 곧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을 체결하며 단번에 씬의 실력파 그룹으로 각광받았다. 달콤한 멜로디보다 청자의 예측을 거부하는 굴곡이 심한 리듬과 재기 발랄한 솔로 파트를 강조한 저니의 초창기 작품들은 다분히 매니아 취향이었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마음 편하게 다가서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랐던 것이 사실이다. 데뷔작 < Journey >에서 < Look Into The Future >, < Next >에 이르는 일련의 앨범들은 다소 거칠지만 록의 원시적 매력으로 똘똘 뭉친 곡들로 넘쳐 났다. 저니의 중, 후반기 사운드는 아련한 키보드를 축으로 선율미를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다. 이 때가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어필한 시기였다. 기-승-전-결의 구도를 가지고 점층적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극적인 구성이 밴드의 상징처럼 굳어졌다. 고혹적이고도 애절한 보이스를 지닌 스티브 페리는 그 구성에 꼭 맞는 보컬리스트였고 완벽한 시스템을 장비한 밴드는 힘차게 가속 페달을 밟을 수 있었다. 좋은 반응을 얻었던 싱글 ‘Wheel in the sky’가 수록된 앨범 < Infinity >는 첫 백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기록했고, 이어 < Evolution >부터 < Frontiers >에 이르는 멈추지 않는 성공가도가 열리게 되었다. 저니의 포근한 록은 여러 세대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그들의 이름은 전세계적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샘솟던 그들의 창작력도 이후 둔화되기 시작했고, 멤버들의 빈번한 과외 활동까지 겹치면서 저니는 결국 1986년 < Raised On Radio >를 마지막으로 해체를 맞이하게 됐다. 해산 이후 밴드 사운드의 핵이였던 닐 숀은 배드 잉글리시(Bad English)를 결성해 ‘When I see you smile’, ‘Price of love’라는 히트 싱글들을 제조해 냈고, 드러머 스티브 스미스(Steve Smith)는 자신의 전공인 재즈로 돌아갔다. 싱어 스티브 페리 역시 앨범들을 발표하며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캐리어를 다져 나갔다. 아쉬움이 남아서일까. 각자 개인 플레이에 열심이던 멤버들은 정확히 해체 10년이 되는 1996년 < Trial By Fire >로 다시 뭉쳤고, 차트에서도 괜찮은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두 스티브는 결국 투어 도중에 이별을 선언했고, 새롭게 정비된 저니는 2001년 통산 11번째 음반 < Arrival >을 내놓으며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저니는 팝 전성시대의 화사함 속에서 자신들의 기량을 마음껏 뽐냈던 그룹이다. 록에 이유모를 부담감을 느끼는 이들마저도 살며시 보듬어 안았던 이 매력적인 밴드는 앞으로도 ‘편안한 록’의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아직 남아 있을 팬들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밴드 : Kansas (캔사스 (프로그레시브 락, 하드락 밴드))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록의 예술성에 대한 기치가 드높던 1970년대에 프로그레시브의 불모지 미국에서도 예술성을 향한 몸짓은 작지만 분명 존재했다. 불후의 발라드 곡 ‘Dust in the wind’로 기억되어지는 캔사스는 심포닉 록에 아메리칸 록의 역동성을 더하며 이른바 ‘아메리칸 프로그레시브 록’의 독자성을 확립한 그룹이다. 캔사스는 1970년 미국 캔사스 주의 토페카(Topeka)에서 고등학교 동창생이...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록의 예술성에 대한 기치가 드높던 1970년대에 프로그레시브의 불모지 미국에서도 예술성을 향한 몸짓은 작지만 분명 존재했다. 불후의 발라드 곡 ‘Dust in the wind’로 기억되어지는 캔사스는 심포닉 록에 아메리칸 록의 역동성을 더하며 이른바 ‘아메리칸 프로그레시브 록’의 독자성을 확립한 그룹이다. 캔사스는 1970년 미국 캔사스 주의 토페카(Topeka)에서 고등학교 동창생이었던 케리 리브그렌(Kerry Livgren, 기타, 키보드), 베이브 호프(Dave Hope, 베이스), 필 이허트(Phil Ehart, 드럼)에 의해 결성된 밴드. 다른 남부 록 밴드들이 서던 록의 전통을 만들어가고 있을 당시 이들이 추구한 음악은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1971년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로비 스타인하트(Robby Steinhardt)를 바이올린 주자로 영입하면서 미국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프로그레시브 록을 시도했던 것이다. 로비를 영입하면서 잠시 밴드 이름을 ‘화이트 클로버(White Clover)’로 바꾸기도 했던 이들은 1972년 스티브 월쉬(Steve Walsh, 보컬, 키보드), 리차드 윌리엄스(Richard Wiliams, 기타)를 연이어 맞이하며 프로그레시브 밴드의 기본 틀을 완성하고 다시 캔사스를 이름으로 내걸었다. 클럽 활동을 통해 인지도를 높인 이들은 1974년 셀프 타이틀의 데뷔 앨범 < Kansas >를 발표했다. 하지만 1970년대 초반 이들의 음악은 미국 대중에게 어필하기에는 너무나 생소한 사운드였다. 프로그레시브 록은 영국 밴드들의 전유물이라는 뿌리깊은 생각이 미국적인 사운드와 프로그레시브를 결합하며 나름대로 독자적인 음악성을 만들어 나간 캔사스에게 딴지를 걸고 넘어 졌다. 같은 해 발표한 < Song For America >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캔사스는 1970년대 중반 핑크 플로이드를 위시한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들의 위풍당당이 진행되면서 그 흐름에 전격 편입했다. 1975년 음반 < Masque >는 수록곡인 ‘Icarus borne on wings of steel’이 심오한 가사와 함께 주목을 받으며 20만장이 넘는 판매를 기록했고, 이에 힘입어 전작 < Song For America > 역시 골드를 따내는 기염을 토했다. 한 번 불붙은 상승세는 1976년 블록버스트 앨범 < Leftoverture >로 이어지며 캔사스를 세계적인 밴드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수록곡 ‘Carry on wayward son’이 차트 5위 권 진입에 성공했으며, 앨범은 3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미국적 프로그레시브 가능성의 확인이었다. 캔사스의 프로그레시브 록은 영국 밴드들과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부기(Boogie)를 프로그레시브에 도입했다는 것 외에도, 이들이 표현하는 대상, 서정성, 서사적인 전개는 이들만의 특화된 강점이었다. 미국 남부 특유의 심오한 가사를 다루면서도 현실을 벗어나지 않았고, 심포닉 록을 구사했지만 동시에 미국 록이 가진 역동성과 파워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캔사스는 아트 록 매니아들로부터 부정적인 평을 듣기도 하지만 이 점 때문에 먼저 이 분야를 개척한 영국 밴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밴드는 성공의 여세를 몰아 1977년에는 음반 < Point of Know Return >을 선보였다. 지구 끝에 매달린 범선을 그리고 있는 앨범 재킷으로도 유명한 이 앨범은‘Dust in the wind’ 덕분에 국내 팬들에게서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의 앨범이다. 자신들의 음악적 형태와 일치하는 곡은 아니지만 발라드 넘버 ‘Dust in the wind’는 캔사스의 대표곡이 되었고, 이 곡의 카리스마 덕분에 이들이 프로그레시브 밴드임을 모르는 팬들도 상당수 있었다.‘Dust in the wind’가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지만 이들의 정체성은 여전히 프로그레시브 록에 있었고, 1979년 밴드가 처음으로 프로듀싱한 프로그레시브 록 앨범 < Monolith >를 톱 텐에 올리며 화려하게 미 디케이드(Me- Decade)를 마감했다. 하지만 1980년 작품 < Audio-Visions > 이후 캔사스의 행보는 뿌연 안개 정국 속으로 휘말렸다. 데이브 호프와 케리 립그렌이 종교적인 문제로 멤버들과 갈등을 일으켰고, 그룹의 상업적 성공에 불만을 느끼고 있던 스티브 월시는 탈퇴해 ‘스트리트(Street)’라는 자신의 밴드를 조직하는 등 팀의 내분 사태는 걷잡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존 엘르판테(John Elefante, 보컬)로 스티브의 빈자리를 채우며 1982년 < Vinyl Confessions >, 1983년 < Drastic Measures >를 발표하지만 밴드는 결국 이별의 수순을 밟았다. 해체 3년 후 캔사스는 필 이허트, 리차드 윌리엄스, 스티브 월시 세 명의 오리지널 멤버에 의해 부활했다. 이후 스티브 모스(Steve Morse, 기타), 빌리 그리어(Billy Greer, 베이스) 두 명의 멤버를 보강하여 오 인조 라인업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들은 심포닉 록보다는 하드 록적인 면을 살리며 1986년 < Power >를 통해 재기의 의지를 불태운다. 그러나 < Power >가 잠시 주목을 끌었을 뿐 < In the Spirit of the Things >(88), < Freaks of Nature >(95), < Always Never the Same >(98)로 이어지는 음반 모두 신통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앨범의 부진한 성적에도 불구 꾸준한 활동을 보여온 이들은 2001년에 1980년도 작품 < Audio-Visions > 이후 20년 만에 오리지널 멤버들이 한자리에 모두 모여 < Somewhere To Elsewhere >를 발표했다. 음반에는 대 그룹의 부활을 알리듯 1975년 자신들의 히트곡 ‘Icarus…’의 속편 격인 ‘Icarus II’가 수록되어 있으며, 전성기에 가졌던 매력이 그대로 살아있다.
밴드 : Electric Light Orchestra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E.L.O.)
밴드 : Jefferson Airplane (제퍼슨 에어플레인)
우린 기존 가치의 총체적 전환을 요구한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1967년 봄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지역을 둘러보고 거기서 어떤 새로운 흐름이 조성되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는 “이곳의 사람들은 부의 축적이 목표인 풍요로운 생활방식을 부정한다. 그들은 성(聖) 프란체스코가 의류상이었던 부유한 아버지의 생활방식을 거부했던 것처럼 부모의 생활방식을 거부하고 있다”며 방문 인상을 밝혔다. 토인비가 말하는 ‘이곳’이란 ... 우린 기존 가치의 총체적 전환을 요구한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1967년 봄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지역을 둘러보고 거기서 어떤 새로운 흐름이 조성되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는 “이곳의 사람들은 부의 축적이 목표인 풍요로운 생활방식을 부정한다. 그들은 성(聖) 프란체스코가 의류상이었던 부유한 아버지의 생활방식을 거부했던 것처럼 부모의 생활방식을 거부하고 있다”며 방문 인상을 밝혔다. 토인비가 말하는 ‘이곳’이란 정확하게 샌프란시스코의 헤이트-애시베리 구역이었다. 그곳에는 히피들에 의한 새로운 문화 조류가 무르익고 있었다. 5만여 명에 달했던 그곳의 히피들은 기존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카운터 문화’를 주창했고, 이상 사회 건설을 위해 몸부림을 쳤다. 히피들은 노동계급이 아닌 중산층 자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학을 다니거나 졸업한 이른바 ‘배운’ 사람들이었고, 백인이었고, 경제적으로 넉넉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젊은이들이었다. 2차대전과 대공황을 겪는 부모 세대와 다르게 상대적 풍요 속에 자라난 그들은 기성 세대가 확립해놓은 가치의 절반을 철저히 거부했다. 히피들은 경쟁보다는 화합을, 개인주의보다는 공동체적 생활을 강조했으며, 억압되고 있는 성(性)의 자유와 ‘의식의 해방’을 소망했다. 그들은 사랑, 평등, 공생, 자유가 충만한 사회를 ‘대안의 사회’로 여겼고, 그곳을 향해 치열하게 달려갔다. 그들의 헤어와 복장은 제멋대로였고, 공공연히 프리섹스를 펼쳤으며, ‘군집’ 생활을 전개해 잇따라 기성 사회와 충돌했지만, 제도권과 부모 세대가 볼 때 가장 문제가 된 부분은 ‘의식 해방’과 관련된 것이었다. 의식해방의 수단이 마리화나와 LSD 등 다름아닌 마약이었던 까닭이었다. LSD의 교사로 통했던 전(前)하버드대학 교수 토마스 리어리의 “환각상태에 도달하여(Turn On) 깨달음을 얻고(Tune In) 기존으로부터 빠져나오라(Drop Out)"는 어드바이스는 히피들을 환각의 세계로 내몰았다. 그는 LSD를 복용하게 되면 음악을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음악이 춤추는 입자처럼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이 ‘보인다’고 했다. 이것이 히피의 세계요, 문화였다. 당시 헤이트-애시베리 지역의 1천5백여 록 밴드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거의가 히피 그룹이었으며 LSD 밴드이기도 했다. 록 평론가들은 그들의 장르를 환각제와 관련지어 ‘사이키델릭록’ 혹은 ‘애시드록’(Acid Rock)이라고 일컬었다. 무수한 샌프란시스코의 사이키델릭록 그룹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존재는 제퍼슨 에어플레인(Jefferson Airplane)이었다. 록 역사에 있어서의 위상이나 후대에의 영향을 고려하면 ‘그레이트풀 데드’를 더 높이 평가할 수는 있지만, 지명도는 제퍼슨 에어플레인이 단연 앞섰다. 밥 딜런의 음악을 동경해온 마티 볼란이 주축이 되어 폴 캔트너, 요머 카우코네, 스킵 스펜스 등과 함께 조직한 이 그룹은 1965년 8월 13일 매트릭스라는 클럽에서 첫 비행에 들어갔다. 1년 뒤 ‘그레이트 소사이어티’란 그룹에서 활동하던 여걸 그레이스 슬릭과 드러머 스펜서 드라이덴이 가세, 진용이 확립되었고 이듬해인 1967년 ‘누군가 사랑할 사람(Somebody to Love)’, ‘화이트 래빗(White Rabbit)’ 등 빅 히트곡을 내어 단숨에 샌프란시스코 사운드의 기수로 부상했다.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음악, 장외 발언, 무대 행위에는 그 시대 ‘히피의 정서’가 고스란히 농축되어 스며나왔다. 그들은 ‘히피, 샌프란시스코, 헤이트-애시베리, 사랑의 여름, 사이키델릭 사운드, 록 혁명’의 전형이자 리딩 그룹이었다. “우리는 기존 가치들의 총체적 전환을 요구한다.”그것이 그룹을 가입한 후에 그레이스 슬릭의 첫 일성이었다. 그들은 무엇을 변화시키려했는가. 첫째는 중산층과 전세대가 강요하는 외설에 대한 인식타파였다. 그들은 육체 표현과 섹스의 자유를 설파했고 ‘사랑’을 제1의 가치로 귀결시켰다. 빼어난 미인 그레이스 슬릭은 공연중 웃옷을 벗어 토플리스를 관객 앞에 연출하기도 했다. 그녀는 그룹의 출세작 ‘누군가를 사랑할 사람’을 두고 “가사가 무슨 뜻인가는 중요치 않다. ‘자유로워져라. 사랑에 자유롭고 섹스에 자유롭도록 하라.’ 그것이 전부다”라고 설명했다. 그룹의 실세인 마티 볼란은 한술 더 떠 “스테이지는 침대고 관중은 여자다. 우린 공연하는 게 아니다. 우린 섹스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둘째, 제퍼슨 에어플레인은 부의 축적을 배격하고 ‘분배’를 중시했다. 음악하는 사람이 돈을 배격한다는 것은 우선 기존 레코드 회사로부터 음반 발매를 거부했다는 얘기와 같다. 그룹 초기부터 히피 그룹의 대표로 관심을 모았던 이들에게 메이저 레코드사의 스카웃 제의가 집중되었으나, 이들은 상당기간 ‘제도권’과의 거리를 유지했다. 팬터지 레코드사의 간부인 막스 와이스는 제퍼슨 에어플레인과 같은 샌프란시스코 밴드들에 대해 “그들은 우수하긴 하지만 좀 미친 사람들이다. 그들은 너무 반(反)상업적이다”라며 투덜거렸다. 그들은 제도권 진입을 꺼리고, 잇따라 ‘무료 콘서트’를 하고 다녔다. 극단적인 반(反)상업성의 표현이었다. 무료 콘서트와 관련해서는 그들보다 그레이트풀 데드가 더 적극적이었는데, 데드의 매니저 록 스컬리에 따르면 “우리는 제도권이 원하는 것 - 싱글 히트를 내고 공연을 해서 돈을 챙기는 것 -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료 공연을 고집할 수 있었으되 레코드사 소속 거부는 곧 한계를 드러냈다. 많은 대중들에게 우리의 사이키델릭록과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가. ‘명분상’ 메이저 레코드사라는 제도권 음악계를 뿌리쳐야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그룹 도어즈의 매니저 빌 시돈은 그와 같은 난처한 입장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무대에서 그룹들은 혁명적 메시지를 전파했다. 그러나 그걸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제도적 방식을 채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웃기는 일 아닌가.” 1965년 출범한 제퍼슨 에어플레인은 결국 2년 후인 1967년 RCA사와 음반 계약을 체결, 메이저레이블에 소속된 최초의 헤이트-애시베리 밴드가 되면서 ‘비제도권에의 수절’은 종말을 고했다. 그것은 분명 샌프란시스코록을 세계 팝계에 널리 알린 분기점이 되기도 했지만, 애초의 그룹취지에는 크게 궤도이탈한 것이어서 희비의 쌍곡선을 그렸다. 셋째는 공동체로의 지향이었다. 제퍼슨 에어플레인은 그레이트풀 데드, 빅 브라더 앤 홀딩 컴퍼니, 퀵 실버 메신저 서비스 등 샌프란시스코지역 그룹들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견지했다. 그들은 결코 인기 경쟁을 벌이지 않았고, 화합과 공유를 몸소 실천했다. 내부적으로는 어느 특정인들과 자매 그룹처럼 상호 선린 관계를 구축했다. 서로 지척에 거주하여 자주 왕래했고 하루종일 맞대고 살았으며, 공연을 나가서도 누가 오프닝을 하든, 누가 휘날레를 장식하든 신경쓰지 않았다. 그룹의 파수꾼인 폴 캔트너는 자랑스레 회고한다. “매우 기분좋은 광경이었지요. 그룹들은 서로를 격려해주었습니다. 라디오 방송국에서 우리는 그레이트풀 데드나 퀵 실버 메신저 서비스, 아니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든 테입을 얻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이라는 의미가 존재했어요.” 그들은 1967년 1월 14일 골든게이트 공연에서 거행된 역사적인 ‘부락집단의 모임’(히피공동체의 상징이 됐다)에서 ‘함께 갑시다(Let`s Get Together)’를 열창했다. 1969년에 발표된 음반 < 지원자들(Volunteers) >의 수록곡 가운데 베스트는 ‘우린 함께 할 수 있어요(We can be Together)’라는 노래였다. 샌프란시스코 밴드들의 모토는 바로 ‘함께’ 또는 ‘더불어’였다. ‘우린 함께 할 수 있어요’는 그룹 최초로 사회혁명을 주창한 노래로서 제퍼슨 곡은 정치성이 약하다는 일반의 인식에 쐐기를 박는 역할을 했다. 제퍼슨 에어플레인이나 그 비행선의 탑승자들 모두가 이러한 카운터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제도권에게 이단자들로 찍혀가고 있었다. 활동 내역보다 약물이 그들을 결정적으로 찍히게 한 빌미가 됐다. 새로운 질서를 이해하는 수단으로서 의식 확장의 역할을 했던 마약은 제퍼슨 에어플레인 음악을 특징지웠다. ‘사이키델릭 환각제’, 이를테면 마리화나와 LSD에의 예찬이 노래에 출현했다. ‘알약 하나는 너를 커지게 하고 알약 하나는 또 너를 작게 하지. 어머니가 네게 주는 약은 아무것도 안돼. 앨리스가 10피트일 때 그녀에게 가서 물어봐. 식탁 위의 사람들이 일어나 네게 어디로 갈 거냐고 물을 때 너는 버섯을 먹으면 마음이 부드럽게 움직이게 되지... 논리와 균형감각을 상실하고 백의의 기사가 소곤거리고 붉은 빛 여왕이 정신을 잃을 때 쥐가 한말을 기억해. 네 머리를 채우라. 네 머리를 채우라.’ ‘화이트 래빗’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비행연료는 이처럼 LSD였다. 그 연료로 비행선은 앨리스가 경험한 ‘이상한 나라’로 팬들을 안내했다. 그 연료는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고공 비행을 가능케 해주어 한동안 그들의 레코드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러나 그 비행선은 곧바로 안전벨트가 없고 이륙용 기어가 없음이 판명되었다. 마약 제창이 처음엔 힘으로 작용했지만 후에는 ‘감정 중독’을 초래하는 걸림돌로 변했다. 시나브로 메시지의 신념은 상실되어 갔다. 히피 종식을 벼르고 있던 제도권에게 이 마약 부분은 반격의 미끼를 제공해주어 1970년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은 “상당수의 록 뮤직이 마약 사용을 찬양하고 있다”며 올가미 씌우기를 공식 선언했다(도어스의 짐 모리슨, 컨츄리 조 등이 그 희생자들이었다). 절정기였던 1969년 우드스탁 이후 제퍼슨 에어플레인은 급격히 팬들로부터 멀어져 갔다. 히피즘과 샌프란시스코 록도 함게 기력을 잃어갔다. 1970년대 들어서 스펜서 드라이덴, 리더인 마티 볼란, 요머 카우코넨이 잇따라 그룹을 떠났다. 그렇게 히피의 기수 제퍼슨 에어플레인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들은 분명 사회의 거대 자본 폭격기에 대항하는 전투기였다. 그들은 한 나라의 가치를 변화시키려고 시도했고, 미국이라는 성곽의 이데올로기장벽을 부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거대 자본의 유혹에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팬들은 “3장의 골드 레코드가 우리의 영웅을 납치했다”고 불평했고, 일련의 탐탁치 않은 행각을 목격하고 ‘우상의 죽음’에 실망했다. 돈을 번 그들은 7만 5천 달러짜리 호화판 빅토리아식 맨션을 구입, 풍족하게 살았고 캐딜락과 같은 고급승용차를 몰았다. 레코딩세션을 하러가면서 전세 비행기를 이용했다. RCA로부터 자회사인 그런트사를 헌납받아 레코드 회사를 ‘경영’했다. 중산층의 무대인 휘트니 뮤지엄과 왈도프 호텔에서 크리스마스 이브 공연을 갖기도 했다. 이 모든 행위를 그룹이 초기에 보여주었던 행태와 비교해보라! 시대는 변했다. 시대의 반영인 대중음악도 바뀌게 마련이고 그래서 그들도 히피 밴드에서 ‘기업’ 밴드로 변질되었다. 그룹은 시대의 흐름을 타고 세월의 풍파를 헤쳐가면서 지금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1974년 ‘제퍼슨 스타십’으로, 1985년 다시 ‘스타십’으로 이름이 바뀌고 멤버의 몇몇 열굴만 교체되었을 뿐이었다. 생명력을 과시한 정도가 아니라 포스트 에어플레인의 이 그룹들은 에어플레인 시절보다 더욱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고 ‘나를 믿어요(Count On Me)’, ‘우리가 이 도시를 건설했다(We Built this City)’, ‘사라(Sara)’, ‘아무것도 우릴 멈추게 할 수 없어(Nothings Gonna Stop us now)’ 등 불멸의 히트곡을 남겼다. 세월이 가면 에어플레인은 역사헤 묻히고 제퍼슨 스타십 혹은 스타십이 더욱 기억에 자리잡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레이스 슬릭은 에어플레인 시절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그건 낙관적인 관념들이었습니다. 나이가 들게 되면 불행히도 많은 것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죠. 아마 자그마한 충격을 줄 수는 있겠지만 거대함에 자그마한 충격이란 결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아요. 내가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오직 나 자신일 뿐입니다.” 글쎄. 물론 그처럼 음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데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그렇지만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무덤에 비석을 꽂고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묘비명을 새겨넣으려는 데는 선뜻 동의할 수가 없다.
밴드 : Fleetwood Mac (플리트우드 맥)
플리트우드 맥(Fleetwood Mac)은 이글스(The Eagles), 비지스(Bee Gees)와 더불어 70년대 후반 음반 시장의 산업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밴드이다. 1977년작 < Rumours >는 70년대 단일 뮤지션 최다판매 앨범의 기록을 갖고 있을 만큼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1967년 영국에서 결성된 플리트우드 맥은 1970년대 후반 ‘팝화된 록’으로 절정의 인기를 누렸지만 실상 음악적 시작은 블루... 플리트우드 맥(Fleetwood Mac)은 이글스(The Eagles), 비지스(Bee Gees)와 더불어 70년대 후반 음반 시장의 산업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밴드이다. 1977년작 < Rumours >는 70년대 단일 뮤지션 최다판매 앨범의 기록을 갖고 있을 만큼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1967년 영국에서 결성된 플리트우드 맥은 1970년대 후반 ‘팝화된 록’으로 절정의 인기를 누렸지만 실상 음악적 시작은 블루스였다. 존 메이올의 블루스브레이커스(John Mayall’s Bluesbreakers) 출신의 두 아티스트 피터 그린(Peter Green, 기타), 믹 플리트우드(Mick Fleetwood, 드럼)가 제레미 스펜서(Jeremy Spencer, 세컨기타), 존 맥비(John McVie, 베이스)를 영입하여 출발했다. 밴드는 1968년 < Peter Green’s Fleetwood Mac >을 발표하여 영국차트 5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둔다. 리듬 부분이 약하다는 판단 하에 세 번째 기타리스트로 대니 커완(Danny Kirwan)을 끌어들여 이후 그의 뛰어난 작곡에 힘입어 성공 행진에 가속을 더한다. 1960년대 말 블루스 붐을 타고 많은 싱글들이 영국차트 10위 권내에 진입했으며, 1970년대 중반까지 거침없는 인기가도를 질주한다. 하지만 밴드는 잦은 멤버 교체로 블루스 그룹으로서의 정체성을 차츰 상실해갔고 게다가 1970년 그룹의 간판인 피터 그린(Peter Green)이 그룹을 떠났고, 그린의 후임으로 크리스틴 퍼펙트(Christine Perfect)를 맞아들여 < Kiln House >를 발표하지만 곧 제레미 스펜서마저 밴드를 떠난다. 새 멤버 밥 웰치(Bob Welch)를 받아들인 후 음악은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변화는 후에 있을 대성공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들은 블루스 음악에서 벗어나 선율을 보강한 팝 성향의 앨범을 연이어 발표한다. < Future Games >와 < Bare Trees >는 이전 블루스에 익숙해 있던 영국 팬들을 혼란 속에 빠지게 했지만 미국시장에서 선전하며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크리스틴 퍼펙트(존 맥비와 결혼하여 이후 Christine McVie로 활동한다.), 밥 웰치, 존 맥비, 믹 플리트우드의 라인업으로 활동하던 이들은 다시 한 번 멤버 교체를 겪는다. 웰치 대신 듀오로 활동하던 스티브 닉스(Stevie Nicks)와 린지 버킹햄(Lindsey Buckingham)을 맞아 들인 것이다. 바로 이 5명이 거대한 성공을 창출한 플리우드 맥 전성기의 주역들이다. 1975년 겨울 미국차트를 장식한 앨범 < Fleetwood Mac >은 500만장이 팔려나가는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고 첫 싱글 ‘Over my head(20위)’에 이어 ‘Rhiannon(will you ever win)’과 ‘Say you love me’는 모두 11위에 올라 확실하게 성공의 발판을 다진다. 그리고 1977년 그 유명한 < Rumours >를 발표한다. 앨범은 2,500만장이 팔려나가 마이클 잭슨의 < Thriller >가 나오기 전까지 한 아티스트의 앨범으로서는 가장 많은 판매를 기록한 앨범으로 기네스북에 올랐으며, ‘Go your own way(10위)’에 이어 ‘Dreams(1위)’, ‘Don’t stop(3위)’, ‘You make loving fun(8위)’ 등 싱글 넷이 모조리 톱10을 차지하는 괴력을 발한다. 싱글과는 별도로 ‘Songbird’와 ‘The chains’도 널리 애청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정상의 자리에 오른 순간에 그룹의 결속력은 눈에 띄게 후퇴했다. 부부였던 존 맥비(John McVie)와 크리스틴 맥비(Christine McVie)는 파경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연인 사이었던 스티브 닉스(Stevie Nicks)와 린지 버킹햄(Lindsey Buckingham) 역시 애정에 금이 가 있었다. 결국 파경 관련 루머는 사실이 되어 맥비 부부는 이혼하고 스티브와 린지도 갈라서고 만다. 하지만 이런 좋지 않은 결속력으로도 이들은 1980년대 후반까지 < Tusk >(79년), < Mirage >(82년), < Tango In The Night >(87년)에 이르는 히트를 일구어내며 ‘헤쳐 모여’로 성공하는 아이러니를 이어갔다(결속력이 약하다고 음악이 약하지는 않은 법!). 이 시절에도 < Mirage >의 ‘Gypsy(12위)’나 < Tango In The Night >의 ‘Big love(5위)’와 ‘Little lies(4위)’처럼 록이든 발라드 풍이든, 밝은 듯 우울한 이들의 독특한 매력의 곡들은 국내에서도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 이들의 음악적 특성은 기타 톤에서 잘 드러난다. 맑은 톤에 울림을 주어 고음에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유지한다. 바로 이 점이 플리트우드 맥 음악이 록에 대한 거부감을 뚫고 대중을 스며들 수 있었던 주인(主因)으로 분석된다. 1988년 새로운 멤버들로 짜여진 플리트우드 맥은 1990년대 중반까지 라이브 활동으로 일관했고 1997년 < Rumours > 발매 20주년을 맞아 성공의 주역들이 다시 모여 < The Dance >를 발표, 50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저력을 발휘했다.
블루스 락 기타리스트 스티브 레이 본(Stevie Ray Vaughan)이 1978년 결성한 블루스 락 밴드. 블루스 락 기타리스트 스티브 레이 본(Stevie Ray Vaughan)이 1978년 결성한 블루스 락 밴드.
밴드 : The Edgar Winter Group (에드가 윈터 그룹 )
1960년대 중반 대서양을 건너 미국을 침공한 영국 뮤지션들의 활약에서 자극 받은 미국 아티스트들은 그들의 뿌리인 블루스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롤링 스톤스나 야드버즈 같은 영국 팀들이 초기 로큰롤이나 그것을 낳은 블루스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은 음악이라고 무시했던 태도를 지양하고 블루스를 배우고 연구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음악을 구현하게 되었다. 재니스 조플린(Janis Jop... 1960년대 중반 대서양을 건너 미국을 침공한 영국 뮤지션들의 활약에서 자극 받은 미국 아티스트들은 그들의 뿌리인 블루스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롤링 스톤스나 야드버즈 같은 영국 팀들이 초기 로큰롤이나 그것을 낳은 블루스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은 음악이라고 무시했던 태도를 지양하고 블루스를 배우고 연구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음악을 구현하게 되었다.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텐 이어스 애프터(Ten Years After), 캐니드 히트(Canned Heat), 폴 버터필드(Paul Butterfield), 그리고 형제인 조니와 에드가 (Johnny & Edgar Winter) 등이 미 본토의 블루스 붐을 주도했다. 기타리스트인 형 자니 윈터와는 달리 키보드와 색소폰을 다루면서 다른 블루스맨들과 차별화를 기했던 동생 에드가는 1970년 자신의 데뷔 앨범과 이듬해 결성한 그룹 화이트 트래시(White Trash)를 통해 2장의 앨범 < Edgar Winter’s White Trash > < Roadwork >를 발표하며 콘서트활동으로 지평을 넓혀나갔다. 그러나 그는 그룹을 깨고 1972년 다시 유능한 뮤지션들을 규합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에드가 윈터 그룹(Edgar Winter Group)을 결성해 좀더 실험적인 록을 추구하기로 했다. 건반과 색소폰, 보컬을 맡은 에드가 윈터를 축으로 당시 촉망받는 기타리스트 로니 몬트로스, 베이스 겸 보컬 댄 하트먼 그리고 드럼과 퍼커션의 척 러프으로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1994년 사망한 댄 하트먼은 1984년 영화 < 스트리츠 오브 파이어 >에 수록되어 6위까지 올랐던 ’I can dream about you’를 불렀던 그 인물이다). 이외에 앨범의 프로듀서인 릭 데린저(Rick Derringer)가 기타와 백업 보컬에도 참여해 다섯 번째 멤버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72년에 공개된 이들의 처녀작 < They Only Come Out At Night >은 블루스와 로큰롤이 줄기를 이루고있지만 그 외에도 컨트리, 포크, 팝, 서던 록 같은 미국의 국가대표급 음악 장르들 그리고 재즈에서 영향을 받은 프로그레시브까지 형식을 망라하고있다. 여러 음악 스타일이 만개하던 1970년대의 분위기를 타고 자신들의 음악에 이 모든 것을 실험했던 것이다. 여기에 수록된’Frankenstein’은 연주곡임에도 불구하고 전미차트 정상을 차지하는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으며, 앨범은 3위까지 오르며 200만장의 판매광풍을 야기했다. 이어 또 다른 싱글 ‘Free ride’마저 차트 상위권 14위를 기록했으며 국내에서는 감미로운 발라드 ‘Autumn’이 가을만 되면 단골 리퀘스트를 받으며 현재도 라디오전파를 수놓고있다. 이 무렵 프로듀서인 릭 데린저가 정식 멤버로 가입해 로니 몬트로즈를 이은 제리 윔스(Jerry Weems)를 대신해 앨범 < Shock Treatment >(13위)를 발표, 다시 한번 위용을 발휘하지만 웅대한 시작과 달리 이후의 활동은 레드 제플린의 하드록과 디스코의 광풍에 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1975년 보다 록 성향이 강해진 < With Rick Derringer >를 끝으로 이 유능했던 밴드는 록 현장에서 용퇴(勇退)했다. 이후 에드가 윈터는 형 조니의 앨범 < Johnny Winter > < Second Winter >, 릭 데린저의 명 앨범 < All American Boy >, 댄 하트맨의 솔로 앨범 등에 참여하는 것을 비롯해 자신의 솔로 앨범 < Edgar Winter Group >(1979년) < Standing On Rock >(1981년)를 발표해 블루스연주와 록에 대한 꺼질 줄 모르는 애정을 과시했다. 1992년에도 그는 형 조니와 뉴욕의 유명한 리츠에서 공연, 박수갈채를 받았다. 음악 프리즘이 다양했던 1970년대에 에드가 윈터 그룹의 진보적인 시도는 결코 아트 록 매니아나 밴드 자신들만을 위한 만족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러 이들의 진취적이고 새로운 실험은 상업적으로 비추어질 수 있지만 그러한 주장은 명 연주곡 ’Frankenstein’ 앞에서는 무의미한 탁상공론(卓上空論)일 뿐이다.
밴드 : Screaming Trees (스크리밍 트리즈)
1994년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결성된 트레인(Train)은 1990년대 초반 블랙 크로우즈(Black Crowes)로부터 발흥된 복고 성향의 아메리칸 하드록을 구사하는 그룹이다. 미국의 전통 음악인 컨트리(country)와 포크(folk)를 기저로 강력한 하드록 사운드를 덧입혔던 이 흐름의 최선봉에 위치한 밴드로 평가받고 있다. 트레인은 패트릭 모나한(Patrick Monahan, 보컬, ... 1994년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결성된 트레인(Train)은 1990년대 초반 블랙 크로우즈(Black Crowes)로부터 발흥된 복고 성향의 아메리칸 하드록을 구사하는 그룹이다. 미국의 전통 음악인 컨트리(country)와 포크(folk)를 기저로 강력한 하드록 사운드를 덧입혔던 이 흐름의 최선봉에 위치한 밴드로 평가받고 있다. 트레인은 패트릭 모나한(Patrick Monahan, 보컬, 퍼커션), 롭 호치키스(Rob Hotchkiss, 기타, 보컬), 지미 스태포드(Jimmy Stafford, 기타), 찰리 콜린(Charlie Colin, 베이스), 스콧 언더우드(Scott Underwood, 드럼)의 5인조로 구성되었다. 결성 직후, 다섯은 꾸준한 라이브 공연을 지속하며 팬층을 확보하였고, 이것은 마이너 레이블인 < Aware >와 컨택트되는 동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등장한 데뷔작 < Train >은 진득한 미국 전통 록 사운드를 가감 없이 펼쳐 보임으로서 인상적인 신고식을 치러냈다. 1997년부터 밴드는 블루스 트래블러(Blues Traveler), 카운팅 크로우즈(Counting Crows)등의 오프닝을 맡으며 제 2의 도약의 기회를 모색했다. 메이저 음반사들로부터 구애의 손길이 뻗친 때가 바로 이즈음이었다. 멤버들은 컬럼비아(Columbia)와 손잡은 뒤, 1집을 재발매하며 본격적인 음악 활동의 시작점을 찍었다. ’Meet Virginia’가 당시 라디오 전파를 수시로 타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4년 뒤, 두 번째 음반 < Drops of Jupiter >(2001)를 발표한 트레인은 그래미상 3개 부문의 후보에 오르는 등의(비록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앨범은 현재까지 200만장 이상이 팔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멤버 : 브랜단 비브라운(Brendan B. Brown, 보컬, 기타), 케빈 가르시아(Kevin Garcia, 드럼), 리즈 브라운(Liz Brown, 보컬), 매트 밀리건(Matt Milligan, 베이스), 제라드 호프만(Gerard Hoffmann, 키보드), 미시 헤셀튼(Missy Heselton, 보컬) 멤버 : 브랜단 비브라운(Brendan B. Brown, 보컬, 기타), 케빈 가르시아(Kevin Garcia, 드럼), 리즈 브라운(Liz Brown, 보컬), 매트 밀리건(Matt Milligan, 베이스), 제라드 호프만(Gerard Hoffmann, 키보드), 미시 헤셀튼(Missy Heselton, 보컬)
멤버 : 이삭 슬레이드(Isaac Slade, 보컬), 조 킹(Joe King, 기타), 데이브 웰쉬(Dave Welsh, 기타), 벤 와이삭키(Ben Wysocki, 드럼) 멤버 : 이삭 슬레이드(Isaac Slade, 보컬), 조 킹(Joe King, 기타), 데이브 웰쉬(Dave Welsh, 기타), 벤 와이삭키(Ben Wysocki, 드럼)
밴드 : The Alan Parsons Project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
영화나 뮤직 비디오뿐만 아니라 음악 그 자체만으로도, 창조적인 발상은 비주얼한 상상력을 뛰어넘는 무궁한 힘을 가지고 있다.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가 < Ziggy Stardust >로 전세계에 독창성을 과시한 이래로, 음악은 엔지니어링의 발전과 더불어 모든 영역의 실험을 응축시켜 음원 속에 비춰진 사고만으로도 시각적 감상이 가능함을 인지시켰다. 그런 면에서 알란 파슨스는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로 영화... 영화나 뮤직 비디오뿐만 아니라 음악 그 자체만으로도, 창조적인 발상은 비주얼한 상상력을 뛰어넘는 무궁한 힘을 가지고 있다.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가 < Ziggy Stardust >로 전세계에 독창성을 과시한 이래로, 음악은 엔지니어링의 발전과 더불어 모든 영역의 실험을 응축시켜 음원 속에 비춰진 사고만으로도 시각적 감상이 가능함을 인지시켰다. 그런 면에서 알란 파슨스는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로 영화에 도전하는 뮤지션 중의 한 명이다. 비틀즈의 < Abby Road >, 핑크플로이드(Pink Floyd)의 < Dark Side Of The Moon >을 엔지니어링 함으로써 명성을 얻은 알란 파슨스는, 알 스튜어트(Al Stewart)의 < Time Passages > 작업을 마친 후 자신의 팀을 갖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사운드에 대한 진일보를 가져온 그의 엔지니어링은 에릭 울프슨의 뛰어난 작곡 능력과 결합되었으며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란 팀의 음악 세계를 결정짓게 되었다. 이들은 이 바탕 위에 세션과 보컬을 충원하는 방식의 팀을 만들었다. 이러한 포맷은 후에 우리 나라에서도 공일오비, 토이, 스토리 등의 프로젝트 그룹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들의 충격적인 데뷔 앨범 < Tales of Mystery and Imagination >은 유명한 추리 소설 작가 에드가 알란 포(Edgar Alan Poe)의 소설과 시를 인용해 만든 것이다. 영화 감독 오손 웰스(Orson Wells)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A dream within a dream''을 비롯해 서스펜스의 결정판 ‘The tell-tale heart'', 흔히 < 어셔가의 몰락 >으로 번역되는 대작 ’‘The fall of the house of Usher'' 등이 미래에 펼쳐질 이들의 사운드를 예견해 주고 있다. 이들은 아이작 이시모프(Isaac Asimov)의 동명 소설을 컨셉화한 < I Robot >을 내놓고 기계와 인간의 대결 구도를 디스토피아적으로 그려 최고의 비평적 찬사를 받았으며 계속해서 피라미드에 대한 미스테리와 경이를 노래한 < Pyramid >, 남성에 대한 여성의 우위를 팝 적인 사운드에 실은 < Eve >, 도박에 대한 유혹을 멋지게 형상화한 < The Turn Of A Friendly Card > 등으로 컬트 매니아층을 형성하며 성공적인 판매고를 기록한다. 이들은 < I Robot >의 ‘I wouldn''t want to be like you'' 이후 각 앨범마다 한 곡 이상씩의 싱글 곡을 미국 차트 톱40에 올렸으며 < The Turn Of A Friendly Card >에 수록된 ‘Time''이란 곡으로 우리 나라에서도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들은 1982년에 발표한 < Eye In The Sky >란 앨범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싱글 ‘Eye in the sky''는 싱글 차트 3위까지 올라가는 기염을 토했으며 앨범은 몇 백 만장이 팔려 나갔다. 우리를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지배세력에 대한 힘을 주제로 한 이 앨범에는 시카고불스, 뉴욕 메츠 등의 프로팀들이 시그널 송으로 사용하는 ‘Sirius''와 미국 팬들에게 인기 있는 ‘Psychobabble'', 우리 팬들에게 인기 있는 ’‘Old and wise'' 등이 수록되어 있다. 위 앨범으로 최고의 정점을 기록한 이들은 이후로도 여러 앨범이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지만 이와 같은 대중적 환영을 받는 위치에는 이르지 못했다. 스페인 건축학자 가우디의 작품인 스페인성당을 컨셉으로 만든 < Gaudi > 이후, 에릭 울프슨은 팀을 떠나 뮤지컬에 전념한다(그의 대표작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를 작품화한 < Fraudia >, 우리 나라에서도 공연된 바 있는 < Gambler > 등이다). 울프슨의 이름이 빠진 프로젝트팀은 해체되었지만 알란 파슨스는 혼자 남아 여전히 과거의 성향과 비슷한 프로젝트 앨범을 만들고 있다. 여기에는 그의 오랜 친구들인 스튜어트 엘리엇(Stuart Elliot)과 이안 베어슨(Ian Bairson), 크리스 레인보우(Chris Rainbow) 등이 함께 하고 있으며 주제도 비상에 대한 관심을 그린 < On Air >나 허버트 조지 웰스(H.G. Wells)의 소설 < 타임머신 >을 풀어낸 < The Time Machine >처럼 일정한 주제를 상정하고 음악으로 환원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신디사이저가 발전되기 전부터 음의 시각화와 소리에 대한 연구와 실험으로 30여 년을 보내온 이 베테랑은 여전히 자신의 철학을 소리에 담아 공감각적인 통찰력을 얻고 있다. 이것의 음악의 진보를 사운드로 풀어낸 시대의 요청인 것이다. 알란 파슨스는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것뿐만 아니라 믹싱과 녹음의 중요성을, 무엇보다도 새로운 음의 기술력과 창의성을 밝혀준 인물이다.
밴드 : Santana (산타나 (라틴 락 밴드))
20세기 마지막 팝 음악의 유행은 음반산업이 주조했든 아니든 정열의 라틴음악이 장악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최근에 발표된 제42회 그래미상 후보자 명단이 웅변한다. ‘Livin’ la vida loca’의 주인공 리키 마틴(Ricky Martin)을 비롯 제니퍼 로페즈(Jenifer Lopez), 마크 앤소니(Marc Anthony), 루 베가(Lou Bega) 등 지난해 라틴 열풍을 주도했던 신성(新星)들이 그... 20세기 마지막 팝 음악의 유행은 음반산업이 주조했든 아니든 정열의 라틴음악이 장악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최근에 발표된 제42회 그래미상 후보자 명단이 웅변한다. ‘Livin’ la vida loca’의 주인공 리키 마틴(Ricky Martin)을 비롯 제니퍼 로페즈(Jenifer Lopez), 마크 앤소니(Marc Anthony), 루 베가(Lou Bega) 등 지난해 라틴 열풍을 주도했던 신성(新星)들이 그래미상의 주요 부문에 공천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의 당선 가능성은 희박하다. 다름 아닌 ‘라틴 록의 거장’ 카를로스 산타나가 버티고 있어서다. 올해로 52세인 그는 1999년에 발표한 앨범 < Supernatural >로 그래미 최고의 영예인 ‘올해의 앨범’, ‘올해의 노래’, ‘올해의 레코드’ 부문을 포함, 무려 11개 부문의 후보로 지명되는 기염을 토했다. < 뉴스위크 >는 최신호에서 1998년 밥 딜런에 이어 이번 그래미 시상식은 산타나의 컴백 무대가 될 것이라며 그의 압승을 예견했다. 뉴 밀레니엄을 전후로 빌보드 차트를 장기간 점령한 빅히트 싱글 < Smooth >와 500만장이라는 가공할 음반판매량이 화려한 재기를 견인했다. 음악팬들은 10대 틴 음악의 싹쓸이 판에서 모처럼 대가의 위용을 체험하고 있다. 멕시코 태생의 기타리스트 산타나는 1966년 히피 문화의 본고장 샌프란시스코에서 ‘산타나 블루스 밴드’란 이름으로 음악 여정을 시작했다. 그는 1969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출연, 전설적인 연주곡 ‘Soul sacrifice’를 들려주어 일대 주목을 받았다. 산타나로 그룹명을 바꾼 그는 같은 해 셀프 타이틀 앨범에서 당시의 주도적 경향인 사이키델릭에 라틴 비트, 아프리카 리듬, 그리고 블루스를 이입한 음악을 연주했다. 산타나는 그러나 1970년대가 열리면서 1960년대 말을 어지러이 수놓았던 사이키델릭과 블루스가 퇴조하자 라틴 리듬과 정통 로큰롤을 뒤섞은 이른바 ‘라틴 록’으로 조정을 꾀했다. 1970년에 발표되어 지금도 명반으로 남아있는 2집 < Abraxas >가 바로 처음 라틴 록의 정체를 천하에 고한 작품이었다. 이 음반의 수록곡 ‘Black magic woman/Gypsy queen’과 ‘맘보의 왕’ 티토 푸엔테(Tito Puente)의 곡을 재해석한 ‘Oye como va’는 각각 차트 4위, 13위에 랭크되며 히트했다. 특히 그가 이 음반 수록곡 ‘Samba pa ti’에서 구사한 애절한 기타연주는 국내에서 그의 명성을 한층 드높인 계기를 마련했다. 발라드 선호의 우리 정서와 심금을 울리는 그의 라틴기타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 것이다. 이 같은 어울림은 기타에 멜로디를 집어넣은 카를로스의 연주기법 때문에 가능했다. "나의 음악 키워드는 음(音)으로 이야기하듯 말하는 것이다. 기타를 통해 나는 노래하고 있다" 라틴 록 보석 ‘Europa’가 담겨있는 1976년 앨범 < Amigos >도 앨범차트 10위에 올랐고, 그해 일본 평론가협회 제정 최우수 앨범 상을 받았다. 지금도 기타지망생들은 ‘Europa’와 산타나의 이름을 등식화한다. 이듬해 발표한 작품 < Moonflower >에서도 좀비스(Zombies)의 명곡을 라틴 사운드로 새 단장한 ‘She’s not there’로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카를로스 산타나의 ‘절충주의’ 음악은 한계를 드러냈다. 그의 맛깔스런 기타 연주는 계속해서 위용을 과시했지만, 순하게 들리는 태생적 한계를 드러내면서 뒷심은 뚝 떨어졌다. 새로운 세대의 변화무쌍한 감성을 파고드는 필살(必殺)의 포인트를 상실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시대분위기에 편승하여 팝 성향이 강화된 1979년 앨범 < Marathon >을 발표한 데 이어 1980년 재즈 록 앨범 < Swing Of Delight >, 1987년 명상 앨범 < Blues For Salvador > 등 장르를 따지지 않는 합종연횡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비록 장기외유였지만 ‘록의 경계선을 허문’ 고유업적이 빛이 바랜 건 아니었다. 1980년대 이후의 활동도 사실 ‘퓨전’이란 그의 평생 과업의 선상에 있었다. 1998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당당히 들어섰고, 같은 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도 입적되었다. 마침내 그의 ‘장르 뒤섞기’ 실험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산타나는 지난해 < Supernatural >로 역사에 안치되기를 거부하고 현실무대로 화려히 컴백했다. 아리스타 레코드사의 파워 맨 클라이브 데이비스(Clive Davis)가 직접 지휘봉을 잡고 만든 이 앨범에는 데이브 매튜스, 로린 힐, 와이클레프 진 그리고 매치박스 20의 롭 토마스 등 신세대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했다. 산타나는 평소 자신을 존경해온 이들의 도움으로 상기한 신진 라틴스타들에 못지 않은 활기를 내뿜었다. ‘신구세대의 통합’을 목표로 산타나와 데이비스 사장이 제휴하여 치밀히 계획한 전략의 결과였다. 이 작품이 구현한 절충과 타협의 미학은 젊은 층과 기성세대를 막론했다. 올해 그래미상은 그를 위한 잔치가 될 게 거의 확실해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산타나 본인은 성공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는 앨범 < Supernatural >이 자신의 계획 중 일부분이라고만 했다. 원대한 포부를 시사한다. 하지만 그의 마스터플랜은 인기나 성공이 아니라 ‘음악의 완성’이다.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에서 이미 진실함을 읽을 수 있다.
멤버 : 팻 베스케즈(Pat Vasquez, 보컬, 베이스), 롤리 베스케즈(Lolly Vasquez, 보컬, 기타), 토니 벨러미(Tony Bellamy, 보컬, 기타, 피아노), 레이븐 헤르난데즈(Raven Hernandez) 멤버 : 팻 베스케즈(Pat Vasquez, 보컬, 베이스), 롤리 베스케즈(Lolly Vasquez, 보컬, 기타), 토니 벨러미(Tony Bellamy, 보컬, 기타, 피아노), 레이븐 헤르난데즈(Raven Hernandez)
지난 1979년 소녀들의 비명 소리에 가까운 환호성으로 시작하는 ‘I want you to want me’의 라이브 버전은 그룹 창단 여섯 돌을 맞이하는 칩 트릭(Cheap Trick)에겐 고대하던 성공의 축포였다. 1973년의 공식적인 결성 이후 6년 동안 년(年) 200회 이상의 초인적인 공연을 강행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들에게 당시 전미차트 7위에 오르는 이 곡의 차트정복은 가뭄 속의 단비였다. 칩 트... 지난 1979년 소녀들의 비명 소리에 가까운 환호성으로 시작하는 ‘I want you to want me’의 라이브 버전은 그룹 창단 여섯 돌을 맞이하는 칩 트릭(Cheap Trick)에겐 고대하던 성공의 축포였다. 1973년의 공식적인 결성 이후 6년 동안 년(年) 200회 이상의 초인적인 공연을 강행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들에게 당시 전미차트 7위에 오르는 이 곡의 차트정복은 가뭄 속의 단비였다. 칩 트릭의 신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1973년 미국의 일리노이즈에서 결성된 4인조 팝 록 밴드 칩 트릭의 뿌리는 기타리스트 릭 닐슨(Rick Nielsen)과 베이시스트 톰 피터슨(Tom Petersson)이 1960년대 후반에 결성한 퓨즈(Fuse)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 초반 현재의 이름 칩 트릭으로 개명하고 번 E. 카를로스(Bun E. Carlos)와 랜디 호건(Randy Hogan)을 각각 드러머와 보컬리스트로 받아들였지만 이들의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그러자 공동 리더인 릭과 톰은 팀의 프론트를 랜디 호건에서 미소년의 외모를 소유한 전직 포크 싱어 로빈 잰더(Robin Zander)로 전격 교체하고 비상을 준비한다. 1977년에 공개된 역사적인 데뷔 앨범 < Cheap Trick >은 비록 싱글 히트곡은 없었지만 비틀스에게서 물려받은 확실한 선율 감각과 더 후(The Who)로부터 전수 받은 듯한 파워풀한 연주가 유머러스한 가사와 앙상블을 이뤄 이들의 재능이 꿈틀대고 있음을 내비친 작품이었다. 같은 해에 나온 < In Color >에서는 2년 뒤 공연 실황 버전으로 차트를 강타하게 될 ‘I want you to want me’가 온전한 스튜디오 버전으로 수록되어 있다. 1978년에 발표된 < Heaven Tonight >도 가능성을 재확인하면서 이들에게 첫 번째 싱글 히트곡 ‘Surrender’(62위)’를 제공했다. 펑크적인 기타 백킹 연주와 팝적인 멜로디가 찰떡 궁합을 과시한 이 곡은 전형적인 칩 트릭 사운드를 구현한 대표적인 노래 중 하나이다. 그동안 이들은 자신들의 조국인 미국보단 태평양 건너에 있는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로빈 잰더의 잘생긴 외모와 귀를 슬슬 잡아당기는 자연스런 멜로디의 매력에 빠진 일본 소녀들은 칩 트릭의 진가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78년 4월, 이들은 일본의 그 유명한 공연장인 무도관에서 대대적인 공연을 가졌고, 그 열기를 고스란히 담은 음반이 바로 록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 Live At Budokan >이다. 실은 이 앨범도 일본음반자본이 지원해 탄생되었다. 이전의 어떤 음반 못지 않게 화끈한 연주와 후끈 달아오른 현장의 분위기를 실감나게 전달한 이 앨범에서 ‘I want you to want me’와 1950년대 흑인 로큰롤 스타 팻츠 도미노(Fats Domino)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Ain’t that a shame’은 싱글로 커트되어 각각 7위와 35위를 기록하면서 일본, 미국, 유럽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반을 풍미한 버블검 사운드를 표현한 ‘I want you to want me’는 그 앙증맞은 후렴구 때문에 지금까지도 칩 트릭을 정의하는 노래로 남아 있다. 이 LP는 라이브 실황임에도 불구하고 빌보드 앨범 차트 4위까지 올랐고, 3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함으로써 상업적인 면과 음악적인 면 모두를 달성하는 성과를 올렸다. 같은 해인 1979년, 싱글 ‘Voices(32위)’와 ‘Dream police(26위)’가 들어 있는 다음 앨범 < Dream Police >로 확실하게 스타급 밴드의 반열에 올랐지만 비틀스와 아메리카(America)의 프로듀서였던 조지 마틴(George Martin)을 초빙해 제작한 1980년 < All Shook Up >은 과욕 탓인지 제1의 프로듀서와 최고 인기 밴드의 상봉은 융화되지 못한 채 어색한 만남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앨범 후 톰 피터슨은 그룹을 떠났고, 그 후임으로 존 브랜트(Jon Brant)를 영입해 ‘If you want my love(45위)’와 ‘She’s tight(65위)’가 싱글 차트에 입적한 < One On One >을 발표하면서 팝의 시대인 1980년대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 무렵 톰이 없는 칩 트릭은 예전과 같은 음악을 뽑아 내지 못한 채 힘겨움을 드러냈다. 상생(相生)의 필요성을 절감한 칩 트릭과 피터슨이 재회한 것은 1988년에 공개한 < Lap Of Luxury > 때였다. 최초로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의 영광을 안겨 준 발라드 ‘The Flame’과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의 원곡을 커버한 ‘Don’t be cruel(4위)’, ‘Ghost town(33위), ’Never had a lot to lose(75위) 등을 4장의 싱글을 토해낸 이 음반으로 칩 트릭은 1980년대의 부진을 걷어내고 재기에 성공했다. 특히 국내에서는 경쾌한 분위기의 ‘Don’t be cruel’이 애청되면서 다시 일어선 칩 트릭의 인기를 주도했다. 1988년 말에는 로빈 잰더가 하트(Heart)의 보컬리스트 앤 윌슨(Ann Wilson)과 함께 멜 깁슨과 미셸 파이퍼가 주연한 영화 < 데킬라 선라이스 >의 주제곡 ‘Surrender to me’를 불러 6위에 랭크 시키기도 했다. 곡은 우리에게 ‘Now and forever’와 ‘Right here waiting’, ‘Endless summer night’ 등으로 널리 알려진 리차드 막스(Richard Marx)가 썼다. 이들의 음악은 1980년대에 등장한 헤비메탈 밴드와 1990년대의 얼터너티브 그룹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전수했다. 후배 뮤지션들은 인터뷰를 통해 “칩 트릭의 힘이 넘치는 기타 리프와 사운드에서 음악적인 영감을 받았다”며 무한한 존경과 신임을 밝힌 바 있다. 특히 스매싱 펌킨스(Smashing Pumpkins)는 자신들의 오프닝 무대를 칩 트릭에게 부탁하기도 했으며, 1980년대 팝 시대의 아들들임에도 불구하고 포르노 포 파이러스(Porno for Pyros)의 리더인 페리 파렐(Perry Farrell)이 주창한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 페스티벌의 대명사 롤라팔루자에 참여한 바 있다. 1990년대가 되면서 다시 한번 음악적 침체기를 맞이한 칩 트릭은 현재까지 새로운 음반 제작보다는 데뷔 초기처럼 ‘최고의 라이브 밴드’라는 명성에 걸맞은 줄기찬 공연 활동을 전개하고있다. 칩 트릭의 노래들은 이름처럼 결코 값싸지도 않으며 속임수 또한 아니다. 저항성과 함께 록의 양 날개 중 다른 날개인 ‘대중성’으로 따진다면 이들은 극점에 위치하는 그룹이다. 앞으로도 이들만큼 ‘완벽한 기타 주도의 팝 록 사운드’를 구현한 그룹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멤버 : Adrian Gurvitz, Paul Gurvitz, Louie Farrell 멤버 : Adrian Gurvitz, Paul Gurvitz, Louie Farrell
밴드 : Guess Who (게스 후 (하드락 밴드))
1970년을 전후한 시기에 대표 곡들을 집중포화 식으로 쏟아낸 캐나다 출신의 록 밴드 게스 후(Guess Who)의 역사는 그 전신 격인 그룹 익스프레션스(Expressions)가 결성된 19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채드 알란(Chad Allan/보컬, 기타)과 랜디 바크만(Randy Bachman/보컬, 기타), 짐 케일(Jim Kale/베이스), 개리 피터슨(Garry Peterson/드럼), 밥 에슐리(... 1970년을 전후한 시기에 대표 곡들을 집중포화 식으로 쏟아낸 캐나다 출신의 록 밴드 게스 후(Guess Who)의 역사는 그 전신 격인 그룹 익스프레션스(Expressions)가 결성된 19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채드 알란(Chad Allan/보컬, 기타)과 랜디 바크만(Randy Bachman/보컬, 기타), 짐 케일(Jim Kale/베이스), 개리 피터슨(Garry Peterson/드럼), 밥 에슐리(Bob Ashley/건반)의 5각 구도를 갖춘 익스프레션스는 저니 키드 & 더 파이러츠(Johnny Kidd & The Pirates)의 ‘Shakin’ all over(22위)’를 커버하면서 자국인 캐나다와 미국에서 소폭의 인기를 누렸다. 곧 밴드 명을 게스 후로 바꾸고 건반 주자가 밥 에슐리에서 버튼 커밍스(Burton Cummings)로 교체되면서 이들의 성공 스토리는 막을 열었다. 당시 이름 때문에 영국 록 그룹 더 후(The Who)와 혼동을 야기한 게스 후를 수면 위로 부상시킨 음반은 1968년도 LP < Wheatfield Soul >이다. 록 발라드의 고전으로 자리를 굳힌 ‘These eyes(6위)’가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동시에 캐나다 록의 지분도 동반 상승했다. 이후에 발표된 < Canned Wheat >, < American Woman >, < Share The Land >에서 이들의 대표 곡들이 무더기로 생산되었다. ‘Laughing(10위)’, 보사노바 기타 풍으로 국내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Undun(22위)’, 당시 가요에 영향력을 행사한 ‘No time(5위)’, ‘No sugar tonight/New mother nature’, ‘Hand me down world(17위)’, ‘Share the land(10위)’, 그리고 이들의 유일한 빌보드 싱글 차트 1위 곡이자 1999년 영화 < 아메리칸 뷰티 >에서 주인공 케빈 스페이시가 운전하면서 불렀던 고전 ‘American woman’ 등이 1969년과 1971년 사이에 배출된 히트 넘버들이다. ‘American woman’은 1999년 영화 < 오스틴 파워 > 2편의 사운드트랙에서 레니 크라비츠(Lenny Kravitz)가 리메이크 해 그래미 최우수 남성 록 보컬 상을 수상하게 해주었다. 이러한 성공을 뒤로한 채 랜디 바크만과 채드 알란은 1970년에 게스 후에 마침표를 찍고 그 유명한 바크만 터너 오버드라이브(Bachman Turner Overdrive)를 조직하자 팀워크에는 위기의 비상벨이 울렸다. 새로운 멤버를 영입한 이후 몇 장의 앨범을 더 발표했지만 랜디 바크만의 공백은 더 크게만 느껴졌고 밴드는 곧 중심을 잃었다. 1974년 미국의 유명한 디제이 울프만 잭(Wolfman Jack)에게 바치는 ‘Clap for the Wolfman(6위)’을 마지막 탑 텐 싱글로 장식하고 게스 후는 결국 1975년에 정식으로 해산했다. 솔로로 독립한 버튼 커밍스는 1976년에 ‘Stand tall’이라는 팝 발라드 넘버로 탑 텐을 기록했으며(10위), 1985년에는 자선 음반 < USA For Africa >에서 캐나다 뮤지션들로 구성된 노던 라이츠(Northern Lights)의 일원으로 참여해 ‘Tears are not enough’를 합창해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게스 후 멤버들은 1983년에 재 결성해 현재까지 노장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지리적 특성상 미국 음악에서 많은 영양분을 섭취한 캐나다 록 그룹의 제 1세대인 게스 후에게는 아메리칸 록의 그림자가 넓게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1970년 음반 < American Woman >에서 이들은 좀 더 하드록에 근접한 강한 사운드를 들고 나타나 괄목할만한 성공을 일궈냈다. 1960년대 후반부터 혼란스런 세상을 향해 포효하기 시작한 하드록의 파장에 몸을 맡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더 강하고 빠른 스피드로 전진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 당시 하드록 적인 팝록의 음악 문법에서만 가능한 진화였기 때문이었다. 게스 후는 자신들의 능력과 목적을 뚜렷이 알고 있던 겸손한 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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