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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의 가스펠 명곡 베스트 50선 (50 Timeless Golden Gospel B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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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의 가스펠 명곡 베스트 50선 (50 Timeless Golden Gospel Best)

Pat Boone, Aretha Franklin, Sam Cooke, Mahalia Jackson, Louis Armstrong 노래 외 6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Warner Music | 2017년 06월 13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36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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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의 가스펠 명곡 베스트 50선 (50 Timeless Golden Gospel Best)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7년 06월 13일
시간, 무게, 크기 110g
제조국 EU

관련분류

음반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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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소개 (11명)

노래 : Aretha Franklin (아레사 프랭클린)
20세기를 정리하는 작업이 러시를 이루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궁금중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가수는 누구였는가? 많은 음악팬들이 먼저 프랭크 시내트라 또는 앨비스 프레슬리를 떠올릴 것이다. 신세대 같으면 머라이어 캐리라고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구 대중음악계는 거의 그 주인공을 흑인 여가수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으로 낙점한 상황이다. 먼저 시사주간지 < 타임 >이 선정한 ‘2... 20세기를 정리하는 작업이 러시를 이루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궁금중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가수는 누구였는가? 많은 음악팬들이 먼저 프랭크 시내트라 또는 앨비스 프레슬리를 떠올릴 것이다. 신세대 같으면 머라이어 캐리라고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구 대중음악계는 거의 그 주인공을 흑인 여가수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으로 낙점한 상황이다. 먼저 시사주간지 < 타임 >이 선정한 ‘20세기 문화예술인 20인’을 보자. 여기에는 대중음악인 넷이 포함되었는데 그들은 프랭크 시내트라, 비틀즈, 밥 딜런 그리고 아레사 프랭클린이었다. # 20세기는 왜 아레사 프랭클린인가? 놀라운 사실은 로큰롤의 황제라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자타가 공인하는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빠졌다는 점이다. 두 대중음악사의 거인은 누가 봐도 아레사 프랭클린에 비해서는 대중적 지명도나 후대의 영향력 측면에서 앞선다. 만약 흑인 음악인 한 사람을 꼽았어야 했어도 그 주인공은 마이클 잭슨이 되어야 당연하다. 그런데 왜 아레사 프랭클린인가? 아레사 프랭클린이 명단에 오른 이유는 마이클 잭슨을 누른 ‘흑인의 대표성’ 때문으로만 볼 수 없다. 흑백을 떠나서 팝 음악계 전체를 진동시킨 ‘경이로운 가창력’ 때문이다. 아레사 프랭클린은 42년생 미국 멤피스에서 태어나 1960년대말 스타덤에 오른 왕년의 가수지만 지금도 노래하면 음악관계자들은 만장일치로 그녀를 거명한다. 얼마나 노래를 잘하길래 그런가. 몇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그녀가 1967년 프로듀서 제리 웩슬러의 지원 아래 어틀랜틱 음반사에서 처음 앨범을 취입했을 때 반주를 해준 사람들. 이른바 세션맨들은 아레사 프랭클린의 노래솜씨에 그만 넋을 잃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너도나도 ‘이런 환상적인 레코딩에 내가 참여한 것이 영광’이라며 어울려 춤을 췄다는 것이다. 지난해 미국의 유선방송국VH원이 주최한 ‘디바스 라이브’(음반으로도 나왔다) 공연에서는 관람객 중 한 사람이었던 여배우 사라 제시카 파커가 인상적인 소감을 남겼다. “아레사를 보기 전에 난 스타에 반한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난 홀린 기분이다. 아레사가 나한테 ‘옷이 멋져요’ 하길래 난 주저없이 ‘가지세요’라고 했다. 발가벗고 여기를 나가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그녀는 옷을 가질만하다!” 지난해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아레사 프랭클린은 다시 한번 천부적인 가창력으로 사람들의 혼을 뺐다. 그녀는 시상식장에서 노래부르기로 돼있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병으로 불참하게 되자 갑작스럽게 대타로 뛰게 되었다. 뒷무대에서 불과 몇분 연습하고 나서 그녀는 거뜬하게 파바로티의 ‘네순 도르마’를 불렀다. 더욱이 72인조 오케스트라에 맞추기 위해 그 곡을 파바로티의 키로 노래했다. 주최측, 오케스트라 단원 그리고 객석 모두가 ‘경외’의 박수를 쳤다. 그녀에 대한 평자들의 찬사와 칭송은 끝이 없다. ‘형언하기 어렵다’(No other description will do)가 대부분이다. 음악평론가 벤 에드먼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지난 50년간 우리를 놀라게 하고 겁에 질리게 한 또다른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영국의 록잡지 < 모조 >는 지난해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100인’을 음악관계자 설문을 통해 선정한 바 있다. 여기서 1위는 말할 것도 없이 아레사 프랭클린이었다. < 모조 >측은 2위와 표차를 엄청나게 내고 그녀가 넘버 원 싱어가 된 것에 놀랐다. 다시금 아레사 프랭클린이 남녀, 흑백, 장르를 통틀어 ‘20세기의 최고 가수’라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 그녀는 소울의 영원한 여왕 그녀의 음악은 목소리와 창법의 미학뿐 아니라 시대성이 있다. < 타임 >지가 20세기의 위대한 문화예술인 중 한 사람으로 뽑은 진정한 이유다. 1960년대 후반 아레사 프랭클린이 불러 유명한 곡 ‘존경(Respect)’, ‘체인 오브 풀스(Chain of fools)’, ‘생각해요(Think)‘ 등에는 당시 흑인들의 당당한 의식이 배어 있다. 흑인 민권운동의 불길이 솟아오르던 그 무렵 흑인들은 백인 지배사회에서 결코 흑인들이 열등한 인종이 아니며, 따라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흑인의 영혼을 의미하는 소울(Soul)이었다. 소울 음악은 때문에 목청을 돋워 질러대는 ‘샤우트’를 특징으로 했다. 국내에서도 록의 비조로 불리는 신중현이 소울을 창조적으로 도입해 김추자, 박인수, 펄 시스터즈와 같은 소울 가수가 1970년대 초반 두각을 나타낸 바 있다. 1967년 미국의 디트로이트에 흑인 폭동이 발발했을 때 성난 흑인 민중들은 백인들에게 존경을 요구하는 의미에서 아레사 프랭클린의 그해 히트곡 ‘존경’을 시위대의 찬가로 불렀다. 이듬 해 디토로이트 시장 제롬 카바나는 ‘아레사 프랭클린의 날’을 선포하기도 했다. 미국사회가 이때부터 흑인의 음악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백인들도 흑인의 레코드를 구입하게 된 것이다. 아레사 프랭클린은 다시 말해 흑인 소울의 존재를 만천하에 고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신(神)의 조리에 의한 거 같은 지존(至尊)의 가창력으로 그것을 전했으니 그 위력은 더할 나위가 없다. 또 지적하는 바이지만 ‘존경’을 듣고 동료가수 오티스 레딩은 혀를 내둘렀다. 이 곡은 그가 쓴 곡으로 직접 불러 발표한 바도 있는데, 아레사 프랭클린이 완전히 새롭게 그리고 완벽하게 소화한 것을 듣고 질려버린 것이었다. 오티스 레딩의 경탄. “난 내 노래를 잃어버렸어. 저 여자가 내 곡을 빼았아갔어!” 아레사는 조금도 변함없는 ‘소울의 여왕(Queen of soul)’으로 통한다. ‘여성 소울(Lady soul)’이란 별명도 있다. < 디바스 라이브 >에서 아레사 프랭클린과 호흡을 맞춘 머라이어 캐리도 그렇게 호칭하고 있지만 이 호칭들은 영원히 아무도 넘아다볼 수 없을 것 같다.
노래 : Sam Cooke (샘 쿡 ,Dale Cook)
소울음악을 거론함에 있어 샘 쿡의 위상은 매우 지대하다. 그는 흑백통합의 광맥이었으며 연주자로서뿐 아니라 레코드비즈니스를 아울러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했다. 예술가이자 사업가로서 자신이 갈 인생길을 현명하게 개척해 갔던 것. 그만큼 당대 음악계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위치는 물론 음반과 출판사를 소유하고 운영할 정도로 그의 관록은 실로 대단했다. 쿡은 그러한 가운데 사회문제에도 ... 소울음악을 거론함에 있어 샘 쿡의 위상은 매우 지대하다. 그는 흑백통합의 광맥이었으며 연주자로서뿐 아니라 레코드비즈니스를 아울러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했다. 예술가이자 사업가로서 자신이 갈 인생길을 현명하게 개척해 갔던 것. 그만큼 당대 음악계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위치는 물론 음반과 출판사를 소유하고 운영할 정도로 그의 관록은 실로 대단했다. 쿡은 그러한 가운데 사회문제에도 적극 동참했다. 인종차별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던 당시 흑인들의 인권보장을 위한 공민권운동에 열정을 불태운 그는 노래를 통해 흑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그러한 그의 의욕적 활동에 흑인들 모두 지지를 보냈다. 사회활동가로서의 지지도는 장차 그에게 돌아올 사회적 지위와 명성에 다름 아니었다. 흑인과 백인의 인종적 갈등의 조정자로서 그리고 기성과 청춘의 세대적 통합자로서 그의 호소력은 당대의 다른 아티스트들을 모두 아우른 것이었다. 1931년 1월에 태어난 그는 목사인 아버지의 교회합창단에서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시카고로 이주한 후 삼형제와 함께 그룹 활동을 하기도 했던 그는 대중음악의 흐름 또한 놓치지 않았다. 틴 하이웨이 큐씨스(Teen Hightway QCs)라는 성가대의 멤버였던 그는 1950년, 전국적 가스펠그룹 소울 스터러스(Soul Stirrers)에 합류했다. 6년여의 활동기간 중 ‘그의 옷자락을 만질 수만 있다면’(Touch the hem of his garment), ’당신에게 더 가까이‘(Nearer to thee), ’내겐 천국 이었어’(That’s heaven to me)와 같은 노래를 통해 흑인사회의 스타로 부상한 그는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종교와 흑인계를 넘어 더 많은 청중들에게 다가가는 게 그의 목표였기 때문. 소울 스터러스와 결별한 그는 1956년, 싱글 ‘사랑스러운’(Lovable)을 발표하며 진정한 자아 정체성 탐구를 위한 새로운 첫발을 내디뎠다. 1950년대 가장 많이 팔린 싱글 중 하나가 된 이 곡과 함께 팝과 알앤비 차트 정상을 차지한 ’You send me’는 2백만 장 이상이 팔려나갔다. 가스펠과 팝 R&B 요소가 응집력 있게 혼합된 노래는 당시로선 선구적인 소울 음반이었다. 그는 또한 로맨틱한 발라드와 틴 팝 싱글들을 연이어 발표하며 지속적인 인기를 확보했다. ‘감상적 이유 때문에’(For sentimental reasons), ’모두 차 차 차를 좋아해‘(Everybody loves to cha cha cha), ’겨우 16세‘(Only sixteen),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What a Wonderful world)를 비롯해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yday)에게 바치는 헌정앨범 < Tribute to the Lady >에 실린 노래들까지 당대를 대표할만한 주목을 끌었다. 하지만 소속사인 킨 레이블에서의 한계를 느낀 그는 메이저 레이블로의 이적을 계획, 콜롬비아(Columbia), 데카(Decca)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3대 레이블 중 하나인 RCA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했다. 음반뿐 아니라 출판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해 왔던 그는 출판사 칵스 뮤직(Kags Music)과 레코드레이블 SAR을 설립해 뮤직비즈니스에 본격 착수했다. RCA에 둥지를 튼 쿡은 차트 2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한 싱글 ’한 사슬에 묶인 옥외 노동죄수들‘(Chain gang, 1960년 싱글2위)로 팝과 소울에 새 지평을 열었으며 블루스적인 로맨틱 ‘슬픈 분위기(Sad mood, 1960년 싱글29위), 목가적 로맨틱 소울 ’큐피드‘(Cupid, 1960년 싱글17위), 보통의 댄스넘버 ‘밤새도록 트위스트를 춰요’(Twistin’ the night away, 1962년 싱글9위), ’나의 집으로 그걸 가져오세요‘(Bring it on home to me, 1962년 싱글13위)’와 같이 다채로운 음악요소와 사회적 인식을 한데 엮어낸 곡들을 내며 왕성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 곡들을 포함, 무려 13곡의 히트넘버가 2년간 차트를 장식했다. 틴에이저와 기성세대 그리고 흑인 전 세대에 걸쳐 폭넓은 팬층을 확보한 그는 특히 백인 청취자들에게 더욱 강하게 다가가고자 했다. 흑인뮤지션에게 주로 굳게 닫혀있던 문을 열고자 했던 것. 1957년 초 뉴욕 코파(Copa)에서 연주를 통해 이를 실현코자 했던 그의 시도는 그러나 실패로 돌아왔다. 경험미숙이 문제였다. 1964년 그는 그러나 당당하게 클럽으로 컴백해 라이브실황을 녹음했고 그해 가장 정교한 앨범 중 하나로 꼽히는 수확을 올렸다. 중년과 백인중산층만을 위한 무대가 됐다는 주위의 냉정한 평가가 뒤따르긴 했지만. 1963년 중반 쿡은 마이애미의 할렘 스퀘어 클럽에서의 공연과 실황을 담은 음반으로 자신의 진가를 확증했다. 흑인청취자들과 함께한 그는 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열창하며 황홀한 연주무대를 통해 쇼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멜로디와 직설적인 소울 감성이 적절히 어우러진 라이브 레퍼토리들은 그야말로 베스트 오브 베스트였다. 라이브의 황제로 우뚝 선 순간이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1963년 중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닥쳤다. 그의 어린 아들이 익사한 것. 쿡은 그해 말까지 깊은 시름에 잠겨 공식적인 음악활동을 중단했다. 그 기간 동안 그러나 그는 비즈니스 매니저 앨런 클라인(Allen Klein)과 함께 재정적으로 그리고 음악활동을 위한 독립의 발판을 견고히 다졌다. 1963년 11월 초 마침내 그의 레코드들에 대한 최종 소유권을 확보했고 지휘감독권도 성취했다. 그가 다시 음반작업에 들어갈 즈음은 1960년대 초의 저항음악적 흥분과 열기가 한창 고조되고 있을 때였다. 쿡은 흑인들을 포함해 차별받는 소수자들의 치료제와 같이 작용한 밥 딜런(Bob Dylan)의 노래 ‘Blowin’ in the wind’에 크게 감화되었다. 피터, 폴&메리도 그 한복판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커다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의식있는 아티스트들의 이러한 사회적 변화의 움직임에 그도 두팔 걷어부치고 나섰다. 샘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변화(의 시기)는 올 겁니다’(A change is gonna come)가 이때 나왔다. 공민권투쟁의 산물로 나온 가장 위대한 노래중 하나. 가스펠부터 팝까지 다양한 음악성향 안에서 탄생한 이 곡은 그의 가장 위대하고도 우아한 예술적 찬양가였다. 이 시기동안 그는 또한 싱글 ’Shake’ 를 통해 더 진보한 댄스 본위의 소울사운드를 들려주었다. 이 두 노래는 쿡의 음악여정에 새로운 가속을 알리는 것이었다. 또 다른 전성기를 알리는 장이 열리는 듯 했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의 꿈과 희망은 한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1964년 11월 11일 이른 오후, 로스앤젤레스의 저급한 모텔에서 쿡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 언쟁에 휘말려 모텔매니저의 총탄을 맞고 싸늘히 식어갔다. 정확한 사인은 규명되지 않고 미궁으로 남았다. 쿡의 죽음으로 흑인 사회는 충격에 휩싸였다. 애도의 물결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965년에 발매된 싱글 ‘A change is gonna come‘과 < Sam Cooke At The Copa > 앨범이 그랬듯 싱글 ‘Shake’는 유작으로 사후 탑 텐 히트를 기록했다.
가스펠 여왕(Gospel Queen)이란 영예로운 칭호를 얻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스펠 여성 싱어다. 오늘날 가스펠이 대중 속에서 호흡하고 전 세계에 걸쳐 널리 퍼진 것은 그녀의 공헌이다. 마할리아는 결코 속세의 음악을 노래하지 않았지만 강렬한 블루스 스타일에 아름다운 저음(contralto)의 창법은 대중음악 분야에도 영향을 미쳐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과 같은 소울 가수들의 존경을 한 ... 가스펠 여왕(Gospel Queen)이란 영예로운 칭호를 얻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스펠 여성 싱어다. 오늘날 가스펠이 대중 속에서 호흡하고 전 세계에 걸쳐 널리 퍼진 것은 그녀의 공헌이다. 마할리아는 결코 속세의 음악을 노래하지 않았지만 강렬한 블루스 스타일에 아름다운 저음(contralto)의 창법은 대중음악 분야에도 영향을 미쳐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과 같은 소울 가수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1911년 미국 뉴올리언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 가족들과 함께 뉴올리언즈 마운트 모라이어 침례교회를 다니면서 가스펠과 접촉했다. 엄한 신앙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뉴올리언즈에 퍼져있는 세속적 재즈와 블루스에 사로잡혔고 이것은 나중 그녀의 창법에 암암리에 투영된다. 때로는 여성 블루스의 거성인 마 레이니(Ma Rainy)와 베시 스미스(Bessie Smith)의 레코드를 경청하기도 했다. 열 여섯 살이던 1927년 가족과 함께 북부 대도시 시카고로 이주, 거기서 가정부와 간호사를 거쳐 나중에는 뷰티 살롱과 꽃가게를 운영했다. 그러면서 다니던 침례교회의 집회나 성가대에서 가스펠을 불러 앞날이 기대되는 재능 있는 가스펠 싱어로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종교적 신념을 상업성으로 연결하는 것을 거부, 결코 야간업소에 출연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탁월한 가창력으로 미국과 유럽 공연에 서게끔 되었고 거기서 마할리아는 일대 두각을 나타나게 된다. 1935년 한 장례식에서 노래한 것이 데카 레코즈 관계자의 눈에 들어 마침내 음반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후 가스펠 전문 레이블인 아폴로(Apollo)로 옮겼고, 거기서의 눈부신 활동으로 ‘가스펠 전설’로 비상한다. 1946년부터 1953년까지 ‘God’s gonna separate the wheat from the tares’ ‘Prayers changes things’ 등 단순하면서도 경건하게 노래한 마할리아의 가스펠은 히트레코드에 담겨 대중들에게 가스펠의 숭고한 열정을 전하게 된다. 특히 레이블 후반기인 1953년 레코드 ‘Move on up a little higher’는 200만장이 팔려나갔고 10년간 800만장이 팔리는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다. 공연에서 마할리아는 때로 이 곡을 늘려 불러 무려 25분간 열창했다는 일화를 남긴다. 이 시기의 레코드는 대부분 피아니스트였던 밀드레드 폴스(Mildred Palls)가 반주를 담당, 그녀의 인기에 절대적 역할을 했다. 레코드사 간부이자 스카우트로 명성을 얻은 존 해먼드(John Hammond)에 따르면 ‘지금까지 본 가장 위대한 가스펠 동반자(accompanist)’였다. 1954년 메이저인 콜롬비아로 이적, 미치 밀러(Mitch Miller)의 지휘 아래 스트링과 코러스 지원을 받은 웅장한 가스펠을 구사해 한층 인기의 지평을 넓혔지만 본래의 가스펠 열정은 상당부분 상실하게 됐다. 나중 그녀의 관객 층은 흑인이 아닌 백인이 다수를 이루는 아이러니가 연출되었다. 마할리아가 백인의 지명도를 획득하게 된 것은 그녀가 백인 중심 미국 사회에서 1960년대의 주된 관심사이자 사회문제였던 흑인인권운동에 상징성을 부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녀의 ‘We shall overcome’은 당시 인권 시위대의 제1 찬가였으며,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노래부른 것을 비롯해 킹 목사의 저 유명한 워싱턴 연설에 앞서 열창했다. 1968년 킹 목사의 장례식 때도 애도 곡의 주인공은 마할리아였다. 60살을 넘긴 1972년 사망했다. 이때 마지막까지 친교를 유지한 후배 여성싱어 아레사 프랭클린이 장례식에서 가스펠 ‘Precious lord’를 불러, 마할리아의 가스펠이 대물림되고있음을 알렸다.
클래식을 얘기할 때 바하를, 팝을 논할 때 비틀스를 빼 놓을 수 없듯 재즈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다. 재즈에 문외한 사람일지라도 루이 암스트롱 이름을 대면 고개를 끄덕인다. 루이 암스트롱은 20세기의 대표적인 대중 음악 ‘재즈’를 정의한 거장이다. 백인 재즈 보컬 빙 크로스비(Bing Crossby)는 루이 암스트롱을 두고 ‘미국 대중음악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극... 클래식을 얘기할 때 바하를, 팝을 논할 때 비틀스를 빼 놓을 수 없듯 재즈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다. 재즈에 문외한 사람일지라도 루이 암스트롱 이름을 대면 고개를 끄덕인다. 루이 암스트롱은 20세기의 대표적인 대중 음악 ‘재즈’를 정의한 거장이다. 백인 재즈 보컬 빙 크로스비(Bing Crossby)는 루이 암스트롱을 두고 ‘미국 대중음악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극찬했다. 그의 코넷/트럼펫 연주는 ‘재즈 연주에 꽃’이라 할 즉흥 솔로(Improvisation)를 창안했다. ‘트럼펫 비르투오조 1호’로 칭송되는 그의 트럼펫 연주엔 떨림(비브라토)과 미끄러짐(글리산도)와 같은 클래식 연주 주법을 독창적으로 소화해 낸 천재성이 돋보인다. 뉴 올리안스의 무명악사 시절을 거쳐 1920년대 초부터 시카고와 뉴욕을 거점으로 암약하면서 1925년 자신이 리드하는 캄보(Combo-소규모 재즈 연주 편성)밴드 핫 파이브 앤 핫 세븐(Hot Five’& Hot Seven) 통해 본격적인 재즈의 서막을 온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 여정은 ‘재즈의 선구자’로만 국한시킬 수 없을 정도로 그 폭이 넓다. 그는 재즈의 천재 일뿐 아니라 팝의 제왕이자 만인의 사랑을 받는 엔터테이너였다. 아무 의미 없는 말들을 리드미컬하게 구사하는 스캣(Scat)이라는 창법을 개발, 재즈 보컬(Jazz vocal)의 길을 열어줬음은 물론이고 천재적인 트럼펫 연주 실력에 더해 그의 출중한 보컬 실력은 그를 ‘위대한 재즈 보컬리스트’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가방만큼 크고 두터운 입술을 지녔다 하여 사치모(Satchmo)라는 애칭을 지녔던 루이 암스트롱은 얼굴만큼이나 커다란 입으로 끓어오르는 독특한 베이스 보컬(속칭 더티 톤)을 들려준다. 이런 그의 독특한 보컬 스타일은 재즈 보컬 빙 크로스비나 토니 베넷(Tony Bennet)을 비롯하여 1930-50년대 전설전인 재즈 디바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의 창법에까지 영향을 준다. 국내에서도 ‘쾌지나 칭칭 나네’의 가수 김상국도 그 보컬을 흉내냈다. 천진 난만(?)한 웃음을 머금으며 청중을 압도할 만한 열정을 뿜어내는 무대 매너로 루이는 대중들에게 잊을 수 없는 넉넉함을 선사했다. ‘만능 재즈 맨’은 그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1901년 재즈의 고향 뉴 올리안스(New Orleans)에서 태어난 루이 암스트롱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가 어머니인 메리 암스트롱의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가출을 했고, 유복자로 태어난 루이는 빈민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길거리의 매춘부였던 어머니는 항상 집을 비워 가족을 돌보지 않았고, 결국 루이는 5살 때부터 생업 전선에 나서야 했다. 스토리 빌(뉴 올리언즈의 재즈 음악인들의 활동 무대)의 홍등가를 지나다가 접한 재즈음악에 매료되어버린 어린 루이는 차츰 재즈라는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된다. 11살에 학교를 그만둬 그만 폭력을 일삼는 불량 써클에 가담, 1912년 신년 축하 행사 때 술에 취해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폭죽 대신 총을 쐈다는 혐의로 소년원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게 전화위복이 되어 소년원에 있는 동안 브라스 밴드에 가입, 제1 코넷 주자로 활동하게 된다. 이를 통해 본격적으로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여기서 접한 코넷(트럼펫과 비슷하나 관이 약간 짧아서 수월하게 다룰 수 있는 악기) 연주는 루이로 하여금 음악을 소명으로 삼게 한다. 1914년 소년원에서 풀려나서 시카고로 이주, 노동자 생활을 하며 차츰 음악가로의 꿈을 키워간다. 광부로, 신문 배달부로, 청소부를 일을 전전해가며 그는 코넷을 사기 위해 돈을 마련해 갔다. 시카고에 여러 바를 전전하며 무명악사로 밑바닥을 기었다. 1918년 기회가 왔다. 당시 재즈의 왕으로 군림하던 킹 올리버(King Oliver)의 도움을 받아 루이는 올리버의 보조 밴드였던 키드 오리(Kid Ory) 밴드에서 프로 뮤지션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는다. 일년 후인 1919년 루이는 시카고에 진출, 미시시피강을 따라 뉴 올리언즈와 세인트루이스 사이를 운행하던 증기선에서 백인들을 위해 음악을 연주한 페이트 매러블(Fate Marable) 밴드에서 3년 간 코넷 주자로서 내공을 다진다. 1922년 루이 암스트롱은 드디어 재즈 연주자로서 날개를 단다. 평소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재즈의 왕’ 조 킹 올리버는 그가 이끄는 크레올 재즈 밴드(Creole Jazz Band) 밴드의 코넷 주자로 그를 가입시킨다. 크레올 재즈 밴드의 정식 멤버 자격으로 루이는 1923년 시카고에서 첫 레코딩을 한다. ‘Chimes blues’(1923), ’Lonesome weary blues’(1923) 등 10여 곡의 싱글 녹음을 통해 독특한 음색의 코넷 연주가 좋은 평가를 이끌어냈고, 이에 자신감을 얻은 루이는 피아노 주자 릴리언 하든(그의 두 번째 부인이며 그는 일생동안 4명의 부인을 맞는다)의 권유로 크레올 밴드를 탈퇴, 이듬해인 1924년 뉴욕으로 진출해 플레처 핸더슨(Fletcher Henderson) 밴드에 제1 트럼펫 주자로 활동한다. 1925년 솔로로 독립, 악기를 코넷에서 트럼펫으로 바꾸고 자신의 밴드 핫 파이브 앤 핫 세븐(Hot Five & Hot seven)을 출범시킨다. 재즈 인디 레이블 오케이(Okeh)레코드 사와 계약, 스캣(scat)의 매력이 넘치는 ‘Heebie jeebies’(1926)를 비롯하여, ’Cornet’(1926), ’Big butter & egg man’(1926), ’Ski-dat-de-dat’(1926), ‘Willie the weeper’(1927), ’Potato head blues’(1927), ’I’m not rough’(1927)를 통해 당시로선 가히 혁명적인 재즈 연주를 선보이며 일약 재즈음악계의 스타로 떠오른다. 1928년 ‘핫 파이브 앤 세븐’을 해체, 자신의 빅 밴드 루이 암스트롱 앤 히스 오케스트라(Louis Armstrong And His Orchestra)’를 결성, ‘Mahogany hall stomp’를 시작으로 이듬해인 1929년 ’Sweet heart on parade’를 발표하며 스윙 밴드 리더로서의 여정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재즈 보컬리스트로서도 활약이 눈에 띄는데, 이미 1927년 ‘핫 파이브 & 세븐‘시절 여성 보컬 메이 엘릭스와 듀엣으로 부른 ’Big butter & egg man’으로 팝 차트에 진출한 루이는 1931년 미쉘 페리시가 작사한 미국의 영원한 스탠다드 명곡 ‘Stardust’를 발표, 선풍적인 인기를 얻는다. 1930년대는 루이 암스트롱의 전성기였다. ‘I gotta right to sing the blues’(1933), ’Struttin’ with some barbecue’(1938) 등 클래식스(Classics)레이블을 통해 발표한 그의 빅 밴드 싱글들은 동시대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 악단,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 악단에 필적할 만한 대중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한다. 1944년 흑인 아티스트로서는 처음으로 링컨 센터에서 공연했으며 이어 할리우드에 진출, 영화배우로서도 활동하며 < 랩소디 인 블랙 & 블루 >(1933)와 1956년의 < 상류사회 >(High Society) 등의 작품을 남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스윙의 열풍은 비밥(Bebop)의 혁명으로 인해 재즈의 중심에서 차츰 언저리로 몰리고 있었다. 스윙을 부정하며 비밥에 물결에 동참한 젊은 재즈음악인들로부터 루이는 ‘엉클 톰’(백인에게 굴종하는 흑인) 식의 비난의 화살을 감내해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무렵 슬럼프를 맞게 된다. 빅 밴드 활동이 더 이상 진척이 되지 않음을 느낀 루이는 결국 빅 밴드를 해체시키고 데카(Decca)레이블로 이적하며 초기의 소 편성 악단의 구성을 한 올 스타즈(All Stars)를 출범시킨다(이후 올 스타즈는 맴버를 교체해 가며 그가 죽을 때까지 유지된다). 1947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데뷔 공연을 가지며 예전보다 활발한 월드투어를 갖는다. ‘High society’(1948), ‘That’s a plenty’(1949), ‘Basin street’(1947), ‘Dippermouth blues’(1947) 등을 히트시키며 1951년에는 투어 실황을 녹음해 발표한 라이브 앨범 < Satchmo At Symphony Hall >을 발표해, LP차트 10위권에 오른다. 같은 해 루이의 히트 송 ‘(When we are dancing) I get ideas’와 ‘A kiss to build a dream on’이 담긴 더블 사이드 싱글을 발표, 이듬해인 1952년 처음으로 싱글 양면이 모두 톱10을 기록한다. ‘A kiss to build a dream on’은 영화 < The Strip >에서 루이가 직접 불렀던 곡인데, 멕 라이언이 주연한 1993년 영화 <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에 다시 삽입돼 화제를 모았다. 1954년 데카와 재계약을 앞두고 루이는 독점 계약 대신 프리랜서를 선언한다. 이 때부터 그의 음악은 다른 음반사를 통해서도 발표되는데, 당대 재즈 명인들과의 협연 앨범들이 눈에 띈다. 1920년대 스트라이드 피아노 대가 팻츠 월러(Fats Waller)에게 헌정하는 < Satch plays Fats >를 1955년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발표해 톱10을 기록했고, 재즈 보컬 엘라 핏제럴드와 호흡을 맞춘 명반 < Ella & Louis >를 1956년 버브 레코드사에서 공개한다. 흑인 공민권 운동이 시작될 무렵인 1956년, 백인 공립학교에 흑인 학생이 군인의 호위를 받고 등교하는 리틀 록(Little Rock)사건을 두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를 ‘위선자’라 비난한 사건이 신문으로 보도되면서 루이는 잠시동안 FBI의 감시를 받으며 ‘요시찰 인물’이라는 불명예를 겪기도 한다. 가뜩이나 나빠진 건강은 1959년 이태리 공연도중 심장 발작으로 잠시 병원 신세를 지게 끔 한다. 이런 악조건을 딛고 루이 암스트롱은 1960년대에도 여전히 ‘제2전성기’라고 할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1963년 12월, 브로드웨이 뮤지컬 < 헬로 돌리 >(Hello Dolly!)의 타이틀곡으로 미국을 침공한 비틀스의 ‘Do you want to know a secret’를 따돌리며 당당히 팝 차트 정상에 등극한다. ‘Hello dolly!’는 1964년 내내 팝 차트 5위권을 고수하며 이듬해 그에게 그래미상 보컬 퍼포먼스부문 수상의 영광도 안겨주었다. 이 곡에 이어 4년 후인 1968년 ‘What a wonderful world’로 루이는 다시 한번 노익장을 과시한다. 평소에 자신이 추구한 팝(pop)음악에 대한 철학을 담아낸 이 곡은 영국에선 발표 즉시 차트1위를 차지했지만 정작 본토 미국에선 별 반응이 없다가, 1987년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영화 < 굿모닝 베트남 >의 배경음악으로 주목받으면서 뒤늦게 톱40에 오른다. 넉넉한 그의 보컬이 멋진 선율과 어우러진 이 곡은 그 무렵 만화가 이현세가 출연한 모 맥주광고 CF에 깔려 국내에서도 광풍을 일으켰다. 그의 마지막 히트 곡 ‘We have all the time in the world’과 함께 루이는 결국 건강상의 이유로 무대에서 은퇴한다. 그와 함께 정확히 7주 후인 1971년 3월15일 건강 악화로 병원에 입원했고, 7월 6일 뉴욕 롱아일랜드의 코로나 소재 자신의 집에서 70세를 일기로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난다. 루이 암스트롱처럼 재즈와 팝이라는 별개의 영역을 넘나들었던 사람도 드물다. 1920-30년대 초기재즈에서 스윙에 이르기까지 재즈의 연주 스타일을 제시했던 선구자 루이 암스트롱은 이에 더해 대중들과 함께 울고 웃을 줄 알았던 진정한 팝 스타였다. 사실 재즈라는 장르에 집착하는 팬들은 그가 보여준 엔터테이너 기질에 못마땅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쿨(cool)의 혁명가 마일즈 데이비스도 자서전에서 “루이의 뛰어난 즉흥 연주엔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그의 익살스러운 무대매너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고 피력할 정도였다. 하지만 루이는 50년을 넘게 연주 생활을 해온 재즈맨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음악 대중들을 위한 ‘팝’에 천착한 사실은 당연하다. 루이는 음악에 있어서 순수한 지향을 잃지 않았고, 자신의 음악을 들어주고 좋아해 줄 청중을 찾아 나서길 원했다. 그의 음악이 꿈꾼 최종 지향점이란 바로 ‘What a wonderful world!’라고 까지 칭송한 팝(pop)이었던 셈이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팝의 세계에 안긴 한 재즈 거장의 허심탄회한 고백은 명언으로 남아있다. ‘그래 팝이 옳았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야!’
노래 : Joan Baez (조안 바에즈 ,Joan Chandos Baez)
포크뮤직은 의식과 관계하는 음악이다. 누군가 그것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면 그것은 포크뮤직이라 말할 수 없다. 1960년대의 포크 뮤직이 저항과 리얼리즘의 성격을 갖추어 청년들의 절대적 호응을 받게 된 데는 ‘남과 여’ 한 쌍의 힘이 컸다. 두 사람은 포크의 콤비로서 당시 젊은이들의 의식, 시각, 욕구 등에 양심적 가치가 우선할 수 있도록 기여했다. 또한 ‘노래란 선율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가사 또한 살아 숨쉬어야... 포크뮤직은 의식과 관계하는 음악이다. 누군가 그것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면 그것은 포크뮤직이라 말할 수 없다. 1960년대의 포크 뮤직이 저항과 리얼리즘의 성격을 갖추어 청년들의 절대적 호응을 받게 된 데는 ‘남과 여’ 한 쌍의 힘이 컸다. 두 사람은 포크의 콤비로서 당시 젊은이들의 의식, 시각, 욕구 등에 양심적 가치가 우선할 수 있도록 기여했다. 또한 ‘노래란 선율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가사 또한 살아 숨쉬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 것도 두 사람의 공이었다. 남자는 밥 딜런이요, 여자는 존 바에즈였다. 존 바에즈는 포크 프로테스트 시대에 딜런의 여성 대응자(對應者)라는 위치 하나만으로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이처럼 딜런과 ‘평등’을 누렸을 뿐 아니라 어떤 측면에서는 딜런보다 더 오래 간직했다. 딜런은 케네디 대통령 암살 후 정치성으로부터 멀어져갔지만 바에즈는 끝까지 시대의 변화에 타협하지 않고 현실적 테마의 노래를 불렀다. 그래서 노선조정 이후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던 딜런과 달리 그의 여성 파트너는 레코드 회사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등 제도권의 박해공작에 시달렸다. 또 하나 바에즈가 ‘비교 우위’를 점하는 부분은 포크의 대중화와 관련하여 바에즈가 딜런보다 시간상 한 발 앞섰다는 사실이다. 딜런이 1959년 미네소타 대학 주변의 다방에서 통기타를 치고 있을 때 바에즈는 제1회 뉴 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출연, 1만 3천 명의 관객 앞에서 노래했다. 딜런이 첫 앨범을 발표하여 신고식을 마친 1962년에 바에즈는 이미 스타로 떠올라 < 타임 >지의 커버스토리에까지 등장했다. 따라서 ‘포크 대중화의 선두주자’는 딜런이 아니라 엄연히 존 바에즈였다. 이를테면 그가 딜런의 선배인 셈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그를 ‘딜런의 여성 대응자’라 일컫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딜런 우월주의(?) 혹은 습관적인 성차별이 깔려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존 바에즈는 실로 약자(弱者)를 위한 여교사와 같았다. 그는 늘 힘없는 사람과 상처받는 사람 편에 서서 노래했다. 세상살이에 뒤쳐지고 외롭고 망가진 사람들을 위해 통기타를 울렸고 미국내의 약자 가운데 한 계층을 이루고 있는 가난한 이주민의 정서를 노래에 자주 실었다. 모든 ‘어둠의 자식들’이 존 바에즈의 진정한 벗이었다. 국내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 존 바에즈의 올타임 리퀘스트들인 ‘세상의 가련한 길손’, ‘도나도나’, ‘솔밭 사이에 강물은 흐르고’ 등이 깊은 애조를 띠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약자의 편에서 노래를 하니 그 가락이 슬플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리고 바에즈는 그들을 달랜 것만이 아니라 잊혀진 자유, 잃어버린 권리를 쟁취하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시장으로 가는 짐차 위의 슬픈 눈망울의 송아지 한 마리, 그 위로 제비 한 마리가 날고 있네... 농부가 말했지. 불평일랑 하지 마. 누가 멍에를 쓰라고 했니. 넌 왜 제비처럼 자랑스레 자유로이 날 수 있는 날개가 없니... 송아지는 쉽게 갇혀 도살되지. 이유도 모른 채. 하지만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제비처럼 날아다니는 법을 배우지’ ‘도나 도나(Donna Donna)’ 존 바에즈는 나아가 이런 소외받는 계층 위에 군림하는 미국 정부, 그러면서도 전쟁만을 밝히는 미국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너무 이상한 꿈(Strangest dream)’과 같은 반전가요를 잇따라 발표했고 심지어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듯한 과격한 노래까지 불러 주위를 깜짝 놀라게도 했다. 정치색이 짙은 노래를 지향한 맹렬 여성의 이미지는 이미 출생 순간부터 고리가 맺어진 운명이었다. 존 바에즈는 1941년 멕시코가 모국인 아버지, 스코틀랜드와 아이랜드 피가 섞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했다. 그의 피부는 검었다. 백인 지배의 세상이었으니 어렸을 적부터 인종차별에 직면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 인구 8백 명인 뉴욕의 조그만 클레어렌스센터 마을에서 본낸 소녀시절에 대한 짧은 술회는 모든 것을 말해준다.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한 우리는 니그로였다.” 그의 부친은 핵물리학자였다. 그래서 방위산업체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곤 했지만 원폭의 가공할 위력을 알고 있는지라 번번히 거절했다고 하다. 존 바에즈의 아버지는 뼈대있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돈보다는 인류애’를 선택하는 이러한 줏대는 고스란히 딸에게 대물림한다. 딸은 민중적, 반(反)상업적 성격을 특질로 하는 포크 음악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집에서 들은 음악은 바하, 비발디, 모차르트였고, 여고시절에는 교내합창단(캘리포니아 팔로 알토 소재의 학교)에서 노래를 불러 다분히 ‘클래식적인’ 분위기였지만 마음은 통기타에 끌렸다. 졸업 직전 주머니를 털어 시어즈 로벅 기타를 구입한 그는 모친의 영향으로 보스톤 대학의 연극과에 입학하긴 했지만, 학업에는 뜻이 없었고 포크의 전당인 하바드 스퀘어 주변의 다방을 드나들곤 했다. 그는 한때 1년 공연 개런티로 10만 달러 이상을 주겠다는 프로모터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한 바 있다. 그는 “포크 뮤직은 의식과 관계하는 음악이다. 누군가 그것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포크 뮤직으로 말할 수 없다”며 거부 이유를 밝혔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존 바에즈는 이 세상이 부자와 빈자로 뚜렷이 이분되어 있음을 일찍이 간파했다. 초기 노랫말을 보면 약자의 교사답게 ‘가난’이라는 어휘가 무수하게 등장한다. ‘난 가난한 소녀야. 운명이 변변치 못하지. 날 항상 쫓아다니는 짐마차꾼의 아이가 있지. 그 앤 밤낮으로 날 유혹하지... 우리 부모는 그를 좋아하지 않아. 가난하기 때문이래. 따를 가치가 없다는 거야. 그는 생계를 위해 일하고 그 돈은 자기 것인데.’ ‘짐마차꾼 아이(Wagoner`s Lad)’ ‘삶이 돈으로 살 수 있는 거라면 아마 부자는 살고 가난한 자는 죽어야 할거야. 신이여, 나의 시련을 끝내주소서.’ ‘나의 시련(All My Trials)’ 미리 지적했듯 존 바에즈는 1950년대 말 보스톤으로 이사와 하바드 스퀘어 일대에서 활약하면서 수면위 급부상의 기틀을 다진다. 이윽고 1959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포크가수들의 등용문 역할을 했는데 얼마전 이를 담은 음반이 국내에 소개되었다)에 출연, 1만3천 명 청중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게 된다. 당시 < 뉴욕 타임즈 > 기자 로버트 셀톤이 그 관객들 가운데 끼어 있었고 그는 바에즈의 노래를 듣고 난 뒤 ‘스타가 탄생했다’는 기사를 썼다. 셀튼 기자는 그녀를 ‘전율을 자아내는 풍부한 비브라토와 열정적이고 잘 통제된 전달능력을 소지한 젊은 소프라노’라고 극찬했다. 1962년 < 타임 >지는 그를 커버스토리로 다루면서 ‘존 바에즈는 현 포크진영의 신인 가운데 가장 재능있는 가수’라고 언급했다. 그 해 그녀는 3장의 음반을 발표하면서 선풍적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포크 무대에서 자신의 ‘남성 대응자’인 밥 딜런과 조우하여 함께 뉴 포트 포크페스티벌 무대에 서는 등 콤비플레이를 전개, 주목을 끌기도 했다. 존 바에즈는 관념적 지성을 배격하고 실천적 가치를 최고로 삼고 사고를 행동에 직결시키려는 자세로 살아갔다. 단호하고 대담하기만 했던 그의 행적을 약식으로 정리해 본다. *1963년 8월 : 흑백 차별 폐지와 인종평등을 기치로 내건 워싱턴 대행진에 참여 *1964년 4월 : 자신에게 부과된 1963년 소득세의 60%에 대해서는 납세를 거부한다고 국세청에 통보(그 60%가 국방비로 지출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1964년 11월 : 국세청은 1963년 소득세의 납부 거부에 대해 5만1백82달러의 벌금을 부과(1965년 12월에는 1964년 소득세를 납부하지 않은 데 대해 3만7천달러의 벌금을 부과했고 1966년 12월에도 전년도 소득세를 내지 않아 세액이 75%증가했다고 통보. 2년 연속 그의 납세거부 이유는 ‘월남전 분위기 고조’였다) *1965년 4월 : 백악관 정문에서 반전 시위 *1966년 12월 : 1964년 데스로 죄수들에게 내려진 사형선고 감형을 촉구하는 크리스마스 기도회에 참석 *1967년 9월 : 징병거부자를 대상으로 입대영장 반송 운동을 조직화하는데 가담(5백명이 실행) *1967년 10월 :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육군 검사대에서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연좌 농성. 해산하지 않고 도로를 점령, 통행을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3명 모두 10일간 수감(집안 전체가 운동권이다!) *1968년 3월 : 징병거부 운동의 지도자인 데이비드 해리스와 연대, 여학생들에게 ‘No라고 말하는 남학생들한테 Yes’할 것을 촉구 반전과 인종평등을 위한 것이라면 뭐든지 다했다. 연좌 농성, 프리덤 라이드, 데모, 시가행진 등 모든 형식의 ‘저항’에 적극 참여했으며, 그런 것들이 순회공연을 대신했고 또 그런 것들이 순회공연 내용이기도 했다. 심지어 1965년에는 캘리포니아의 카멜 밸리에 있던 교사(校舍)를 개조해 ‘비폭력 연구사무소’(그 모토는 비폭력은 반드시 폭력을 이긴다)를 개설하기까지 했다. 이곳에서 수강생들은 『간디와 핵시대』와 같은 평화 관련 서적을 탐독했고 평화에 대한 세미나와 강의를 들었다. 강사는 물론 존 바에즈! 그런데 카벨 밸리의 일부 주민들은 연구소 회원과 수강생들이 ‘아름다운’ 자기네 영토에 침투,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즉각 연구소 활동을 중지하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순진한 마을 사람들 눈에는 이들이 히피, 그리고 자유연애를 부르짖는 ‘위험 인물’로 비쳐졌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의 클레임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연구소는 상당 기간활동을 지속했다. 마을주민뿐 아니라 미국 정부도 존 바에즈를 ‘통기타치는 파괴분자’쯤으로 간주했고 ‘페스트’같은 존재로 치부했다. 그가 대학생들에게는 ‘명성’일지 몰라도 정부에게는 ‘악명’이었다. 여러 차례 정부 관계자들이 직, 간접적으로 ‘유감’을 표해왔지만, 그는 이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현장을 뛴 동지이자 운동권의 지휘자인 데이비드 해리스와 1968년 결혼했다. 개혁과 투쟁을 결혼생활에 까지 이어간 이런 여성이 어찌 제도권의 협박에 흔들렸으랴. 우리에게 존 바에즈는 밥 딜런과의 로맨스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사실 그녀는 딜런을 진정으로 사랑했고 딜런도 그를 모델로 한 ‘조안나의 비전(Vision of Johanna)’ 등의 곡을 써 간접적으로 애정을 표시하기도 했지만 이 부분은 입장의 동일함(기간이 짧았지만)에 의한 동지애로 평가해야 할 줄로 여긴다.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갈 사항이 있다면 밥 딜런은 포크록이라는 장르를 개척하는 등 록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거인으로 추대되는 반면 막상 존 바에즈는 음악적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록 평론가들 중에 그의 작품을 걸작으로 꼽는 사람은 없다. 아마도 그가 직접 곡을 쓰지 못했다는 실력 폄하와 포크는 했지만 너무나 고운 목소리를 지녔다는 거부감이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딜런도 언젠가 “존 바에즈의 목소리는 포크하기에 너무 아름다워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 미성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실상 음반 판매면에서는 딜런을 앞서나갔고, 특히 포크의 프로테스트적 성격을 오래 견지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비평계가 조금은 잔인했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1970년대 이후 존 바에즈에게 정치색은 즐어들고 대신 사회사업가적 면모가 나타난다. 음악에도 변화가 일어나 전속 레코드사가 뱅가드에서 A&M으로 바뀌면서 통기타의 자연음으로부터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로 탈바꿈, 딜런의 전철을 밟는다. 이렇듯 변화가 깃들고 존 바에즈라는 이름 자체가 갖는 신비력이 떨어지고 있던 1971년에 이르러서야 ‘올드 딕스를 내몰았던 밤(The Night They Drove Old Dixie Down)’이라는 곡이 처음으로 빌보드 싱글차트 10위권에 진입했으니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1980년대에 그는 팝 음악의 공식 무대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지만(메이저 레코드사들의 기피 때문이다) 간간이 군비축소, 인종 차별 폐지, 자연보호 등 현실문제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비록 반전가요나 이념송을 내놓지는 않았지만, 입장선회로 빠지지 않았으며 50대인 지금도 여전히 인기를 지향하는 상업가요를 배격하고 있다. 현재의 모습이 어떠하든 실로 ‘1960년대의 존 바에즈’는 기념비적이다. 대중음악의 역사를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현실 반영과 저항의 올곧은 태도로 무대 또는 장외활동에 임했던 여가수는 그 외에 찾기 어려운 까닭이다. 1963년 존 바에즈는 잡지 < 룩 >에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나는 낙태로 아이를 죽이는 행위, 인종차별로 정신을 말살시키는 행위 등과 같은 실제사건에 강한 관심을 갖고 있다. 난 노래하길 좋아하고 신소리를 하자면 사람들은 내 노래 듣기를 좋아한다. 난 이 두 가지 측면을 결코 분리시킬 수가 없다. 그것들이 나의 모든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현실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고 있다. 노래에 대한 애정도 계속되고 있다. 두 부분 아니 그의 모든 부분은 그가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그 순간까지 변함없을 것이다. 1992년 말 존 바에즈는 버진 레코드사에서 앨범 < 나를 되돌려주오(Play Me Backwards) >를 발표했다. 그의 28번째 음반이었다.
멤버: 토니 윌리엄스(Tony Williams),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 폴 로비(Paul Robi), 조라 테일러(Zola Taylor), 허브 리드(Herb Reed). 미국의 보컬 그룹. 멤버: 토니 윌리엄스(Tony Williams),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 폴 로비(Paul Robi), 조라 테일러(Zola Taylor), 허브 리드(Herb Reed).

미국의 보컬 그룹.
노래 : Andy Williams (앤디 윌리엄스)
앤디 윌리엄스는 감미로운 목소리와 편안한 음악스타일의 크루너(Crooner)창법 가수이다. 3장의 플래티넘과 17장의 골드 디스크상을 수상한 이지 리스닝 계열의 대표 주자로 최고의 스탠다드 팝 가수이자 영화주제가의 황제, TV 스타로서 ‘50~’60년대에 전성기와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앤디 윌리엄스는 1927년 12월 3일, 미국 아이오와주 월 레이크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 3명의 형과 보컬그룹을 ... 앤디 윌리엄스는 감미로운 목소리와 편안한 음악스타일의 크루너(Crooner)창법 가수이다. 3장의 플래티넘과 17장의 골드 디스크상을 수상한 이지 리스닝 계열의 대표 주자로 최고의 스탠다드 팝 가수이자 영화주제가의 황제, TV 스타로서 ‘50~’60년대에 전성기와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앤디 윌리엄스는 1927년 12월 3일, 미국 아이오와주 월 레이크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 3명의 형과 보컬그룹을 만들어 지역교회 성가대에서 함께 노래한 것이 계기가 되어 4인조 ‘윌리엄스 브라더즈(Williams Brothers)’를 결성하였다. ‘52년에 형이 결혼하자 그룹을 해산하게 되었으며, ‘53년에 솔로로 독립했다. ‘56년에 커덴스(Cadence) 레이블과 계약을 맺으면서 “Canadian Sunset”이란 곡으로 첫 성공을 거둔다. ‘61년 콜롬비아 레코드사로 이적한 후에 맡은 NBC 방송의 ‘Andy Williams Show’를 시청률 최고의 프로그램으로 만들면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게 된다. 특히 ‘61년도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주제가 “문 리버(Moon River)”를 비롯 수많은 할리우드 명작영화 주제가를 부르면서 ‘영화 주제가의 황제이자 대명사’가 되었다. ‘앤디 윌리엄스 쇼’는 ‘62년부터 ‘71년까지 방영되면서 3차례나 ‘에미상’을 수상했고, 명사회자로서 매년 크리스마스 특별 쇼를 진행했다.

또한 그래미상 후보로 5번이나 지명되었으며, 여러 해 동안 그래미상 시상식 사회를 맡았다. ‘84년에는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로 ‘Greatest Love Classics’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90년대 초 레코딩 업계를 떠나 자신의 초대형 극장인 ‘앤디 윌리암스 문 리버 극장(Andy Williams Moon River Theatre)’의 경영자로 변신하여 열정적인 문화사업을 펼쳤다. ‘81년 11월에는 국내에 내한 공연차 방문하여 국내 음악팬들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2011년 11월, 앤디 윌리엄스는 자신이 방광암을 앓고 있다고 하면서 잠정적인 활동중단을 밝혔다. 그 후 1년여 가까이 투병생활을 해오다 2012년 9월 25일 밤, 미주리 주 자택에서 향년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블루스, 소울 가수 블루스, 소울 가수
‘Diana’의 주인공 폴 앵카(Paul Anka)는 소녀 취향의 팝과 스탠다드 풍의 노래들로 1950년대 후반 전 세계의 ‘오빠부대’를 지휘했던 가장 인기 있는 틴 아이돌 스타였다. 1957년 왜소한 체구를 소유한 폴 앵카의 데뷔 싱글 ‘Diana’가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장기 집권에 성공하고 ‘You are my destiny(7위)’, ‘Crazy love(19위)’, ‘Puppy love(2위)’, ‘Lo... ‘Diana’의 주인공 폴 앵카(Paul Anka)는 소녀 취향의 팝과 스탠다드 풍의 노래들로 1950년대 후반 전 세계의 ‘오빠부대’를 지휘했던 가장 인기 있는 틴 아이돌 스타였다. 1957년 왜소한 체구를 소유한 폴 앵카의 데뷔 싱글 ‘Diana’가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장기 집권에 성공하고 ‘You are my destiny(7위)’, ‘Crazy love(19위)’, ‘Puppy love(2위)’, ‘Lonely boy(1위)’, ‘Put your head on my shoulder(2위)’, ‘It’s time to cry(4위)’등이 내리 차트를 강타하면서 그의 시대가 화려히 전개되었다. 이 곡들이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부드러운 멜로디는 물론, 소녀들의 가려운 데까지 손을 뻗쳐 그들의 감수성을 포착해냈기 때문이었다(그는 전곡을 직접 작곡하고 작사하는 당시의 보기 드문 싱어송라이터였다). 당연히 소녀 팬들의 열렬한 지지가 뒤따랐으며 동시대의 로큰롤 가수들을 못미더워 했던 부모들은 폴 앵카에게만은 안심했다. 1950년대 후반 기성세대의 눈에는 불량스러워 보이는 로큰롤 가수들과는 달리 그는 반듯하고 예의바른 이미지로 자신을 가꾸어 당시 부모님 세대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것이다. 확실히 그는 같은 시기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나 제리 리 루이스(Jerry Lee Lewis), 척 베리(Chuck Berry)보다는 팻 분(Pat Boone), 릭키 넬슨(Ricky Nelson), 닐 세다카(Neil Sedaka)처럼 점잖고 단정한 이미지를 강조했다. 1941년 7월 30일,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에서 아랍계 시리아인의 이민자 2세로 태어난 폴 앵카는 어려서부터 넘쳐흐르는 음악적인 끼를 주체할 수 없어 14살 때 캐나다판 ‘전국 노래 자랑’에 참가하기 위해 부모님의 차를 몰래 몰고 몬트리올까지 진군한 전과도 있었다. 그의 이러한 적극성은 훗날 그가 10대 스타를 거쳐 싱어 송라이터, 영화배우, 음반 제작자, 사업가 등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어린 시절 자신의 보모를 모델로 하여 16살 때 작곡한 ‘Diana’는 이 캐나다 가수의 데뷔 곡이었음에도 북미 지역과 영국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정상을 차지하면서 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싱어송라이터가 등장했음을 알린 기념비작이다. 그리고 이후의 소나기성 히트 퍼레이드로 그의 입지는 더욱 공고히 다져졌다. ‘Puppy love’는 1970년대 가족 그룹 오스몬즈(The Osmonds)의 막내 도니 오스몬드(Donny Osmond)가 리메이크해 3위에 랭크 시키면서 다시 한번 틴아이돌 세대의 명곡임을 입증했고, ‘Put your head on my shoulder’는 1990년대 후반 국내의 샴푸 CF에 쓰여 옛 향수를 자극하기도 했다. 그는 가수뿐만 아니라 동료들을 위해서 멋진 노래들을 만들어 준 음악적 동지로서의 역할도마다하지 않았다. 모범생 스타일의 천재 로큰롤러 버디 홀리(Buddy Holly)의 ‘It doesn’t matter anymore(13위)’와 정력적인 싱어 톰 존스(Tom Jones)의 신나는 넘버 ‘She’s a lady’(2위 - 리차드 샌더슨의 발라드와는 다른 곡),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를 위해 프랑스의 샹송 ‘Comme d’Habitude’를 개사한 ‘My way’, 자신이 직접 출연하기도 한 전쟁 영화 < 지상 최대의 작전 >의 주제가인 ‘The longest day’, 그리고 TV 토크쇼의 대명사로 자니 카슨(Johnny Carson)이 진행한 < 투나잇 쇼 >의 타이틀곡까지 그에게는 음악에 대한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30년 동안 매일 밤 방송된 < 투나잇 쇼 >와 불후의 명곡이 된 ‘My way’만으로도 그는 막대한 로열티를 받았을 것이다. 1970년대 중반, 훌쩍 어른이 되어 버린 왕년의 틴아이돌 스타는 환경이 변한 음악 시장에 적응해 재도약에 성공했다. 국내에서는 제목 때문에 방송금지 곡으로 묶였던 ‘(You’re) Having my baby’로 다시 한번 싱글 차트를 수복했고 ‘One man woman/One woman man(7위)’과 ‘I don’t like to sleep alone(8위)’, ‘Times of your life(7위)’ 모두 탑 텐을 기록하면서 꺼지지 않는 작곡 역량을 과시했다. 이 때가 제2의 전성기였다. 특히 1986년 이장호가 감독한 영화 < 공포의 외인구단 >의 주제곡으로 정수라가 부른 ‘난 너에게’는 ‘I don’t like to sleep alone’을 표절한 것으로 판명되어 ‘난 너에게’는 방송 및 판매가 금지되었다. 이 불세출의 남성 가수 노래들 중에서 ‘Happy’와 ‘Papa’는 외국 차트와는 상관없이 국내 팝 팬들에게 압도적인 사랑을 받았다. 아마도 1970년대 팝 팬들 가운데 ‘Papa’의 멜로디를 모르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이 곡과 데뷔작 ‘Diana’는 심지어 우리말로 번안되기도 해, 팝송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그의 노래는 무의식적으로 입력되어 있다. 데뷔한지 40년이 지난 현재까지 지치지 않고 음악 활동을 하는 그는 1990년대 중반 내한해 디너쇼 공연을 가져 우리의 기성세대들로 하여금 흥겨운 회상에 젖게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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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하고 정확한 포장을 위해 CCTV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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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 안내
  •  구매하신 상품에 포스터 사은품이 있는 경우, 포스터는 상품 수량과 동일한 수량이 제공됩니다.
  •  포스터는 기본적으로 지관통에 포장되며, 2장 이상의 포스터도 1개의 지관통에 담겨 발송됩니다.
  •  포스터 수량이 많은 경우, 상황에 따라 지관통 추가 및 별도 박스에 포장되어 발송될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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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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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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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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