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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리엘의 웨딩 영화음악 (Muriel's Wedding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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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리엘의 웨딩 영화음악 (Muriel's Wedding OST)

Carpenters, Blondie, ABBA, Peter Allen, Dusty Springfield 노래 외 1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Universal / Universal Japan | 2017년 05월 13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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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리엘의 웨딩 영화음악 (Muriel's Wedding OST)

이 상품의 시리즈 (5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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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7년 05월 13일
제조국 일본

관련분류

카테고리 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
  • 01 Bridal Dancing Queen - The Wedding Band, Blazey Best
  • 02 Sugar Baby Love - The Rubettes
  • 03 We've Only Just Begun - The Carpenters
  • 04 Lonely Hearts - The Wedding Band
  • 05 The Tide Is High - Blondie
  • 06 Waterloo - ABBA
  • 07 I Go To Rio - Peter Allen
  • 08 Bean Bag - The Wedding Band, John Barrett
  • 09 T-Shirts & Jeans - Razorbrain
  • 10 I Just Don't Know What To Do With Myself - Dusty Springfield
  • 11 Bridal Dancing Queen - The Wedding Band, Blazey Best
  • 12 I Do, I Do, I Do, I Do, I Do - ABBA
  • 13 Happy Together - The Turtles
  • 14 Muriel's Wedding - The Weddindg Band
  • 15 Dancing Queen - ABBA

아티스트 소개 (6명)

멤버 : Richard Carpenter, Karen Carpenter 안정희구의 베이비 붐 세대를 위한 윙크 최근 얼터너티브 록 뮤지션들이 카펜터스의 명곡들을 새롭게 해석한 음반 < 내가 카펜터라면(If I Were A Carpenter) >을 냈을 때 록기고가 로저 캐틀린은 이렇게 썼다. “카펜터스에 대한 그들의 인사는 얼핏 70년대의 값싼 것(schlock)에 대한 희화화이며 또다른 비아냥조의 윙크인 ... 멤버 : Richard Carpenter, Karen Carpenter

안정희구의 베이비 붐 세대를 위한 윙크 최근 얼터너티브 록 뮤지션들이 카펜터스의 명곡들을 새롭게 해석한 음반 < 내가 카펜터라면(If I Were A Carpenter) >을 냈을 때 록기고가 로저 캐틀린은 이렇게 썼다. “카펜터스에 대한 그들의 인사는 얼핏 70년대의 값싼 것(schlock)에 대한 희화화이며 또다른 비아냥조의 윙크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어 후배 록 뮤지션들이 듬뿍 경의를 표한 카펜터스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카펜터스를 해석하는 데 있어 후배들이 보여준 ‘놀라운 자유’를 그 음반의 실질적인 성과로 기록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놀라운 것은 얼터너티브 록의 자유 정신이 아니라 카펜터스에 대한 본고장 비평계의 냉랭한 시각이다. 그들을 단칼에 ‘값싼 것’으로 후려치는 것부터가 그러하다. 그 시절 우리 팝송 팬들뿐 아니라 전세계 음악 청취자들의 가슴을 그토록 촉촉이 적셔준 슈퍼스타에 대한 대접치고는 잔인하기 짝이 없다. 팝 음악 관련 자료를 들추어 봐도 카펜터스에 대한 언급은 매우 간단하다. 70년대의 상업화된 팝 음악 시장을 대변한 인물로 치부되고 있을 뿐이다. < 롤링 스톤 >지는 그들을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end), 닐 다이아몬드(Neil Diamond), 오스몬즈(Osmonds) 등과 함께 ‘눈물샘 솟게 하는’ ‘MOR(Middle Of the Road) 팝’ 록의 굶주린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낸 존재 정도로 규정하고 있다. 더러 등장하는, 아바(Abba)의 미국판이라는 해석은 그나마 호의적인 듯하지만 그 속에도 빈정거림은 묻어 있기는 매한가지다. 이러한 비평계의 홀대 뒤에는 이윤 동기와 스타 시스템이 지배하는 70년대 팝 시장(언제나 그렇긴 하지만)에 대한 비판의 논리가 숨어 있다. 이 때문에 단지 ‘귀에 솔솔 들어오는’ 단순하고 편안한 노래를 바라는 사람들은 그러한 비평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평론가들 일부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 또한 바로 그 카펜터스 음악의 성격이다. 그들은 카펜터스의 음악이 너무 유순하고(bland) 건전하며(woholesome) 깨끗하다(clean-cut)는 점을 싫어한다. 그에 따라 그 음악은 기껏해야 오락일 수밖에 없으며 정신은 온데간데없다는 주장이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는다’는 얘기라고나 할까. 카펜터스는 그들이 소속한 레코드 회사 A&M에 어느 아티스트보다 많은 돈을 벌게 해 주었다. 뒤에 경쟁자로 떠오른 캡틴 앤드 테닐(Captain And Tennile)도 그들에겐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측은 음악과 관련한 외부의 줄기찬 비판이 찜찜했던지 사무실에 리처드와 카렌 카펜터 남매의 포스터조차 걸기를 주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70년대 말 펑크(Punk)의 폭풍이 휘몰아칠 때 카펜터스에 대한 비판은 극에 달했다. 물론 엘튼 존(Elton John),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퀸(Queen)을 위시해 펑크 집단의 난도질을 비껴 간 스타들은 없지만 카펜터스 또한 펑크 그룹들의 만만한 표적이었다.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 클래시(Clash), 라몬즈(Ramones) 등 펑크 그룹들은 일제히 ‘고민 많고 일자리 없는 분노와 우리 젊은 세대에게 사랑 이별 타령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하며 카펜터스 등의 팝스타들을 향해 아우성을 쳤다.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지만 1970년대 데뷔이래 순풍에 돛단 듯 거침없는 히트 항해를 해온 카펜터스가 신기하게도 그 시점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밀리언 셀러 싱글 퍼레이드는 1975년부터 뚝 멈추었고 1977년과 1978년에 발표된 곡들인 ‘사랑으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은 사랑 노래(All you get from love is a love song)’ ‘콜링 오큐펜츠 오브 인터플래니터리 크래프트(Calling occupants of interplanetary craft)’ ‘달콤한 미소(Sweet sweet smile)’-모두 한 앨범 < 패시지스(Passage) >의 수록곡-은 우수작임에도 불구하고 인기 차트 성적은 예전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부진했다. 그러나 이전까지 카펜터스가 보여준 히트 행진은 가히 경탄할 만했다. 1970년대부터 1975년까지 차트 10위권에 진입한 싱글이 12곡이나 되었고 그중 10곡이 3위 안에 들었다. 넘버 원 싱글은 ‘네게 가까이(Close to you)’ ‘세상의 꼭대기(Top of the world)’ ‘안녕 우체부 아저씨(Please Mr. Postman)’ 등 셋이었다. 3위권 이내의 곡은 또 모조리 밀리언 셀러 싱글이기도 했다. 사실 이같은 성공의 부분이 더욱 주목해야 할 대목일 것이다. 아무리 비평가의 호된 질책이 따랐을 지라도 그러한 폭발적 인기는 당시 대중들의 압도적인 협조가 아니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대중의 반응을 먹고사는 팝가수라는 점뿐 아니라 슈퍼스타란 때로 긍정적인 발자취를 남긴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높이 사줄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선율적 감수성’은 최고급이었다. ‘내게 가까이’ ‘우린 막 시작했어요(We’ve only just begun)’ ‘슈퍼스타(Superstar)’ ‘솔리테어(Solitaire)’와 같은 곡은 지금 들어도 격조 있는 멜로디의 흥취가 살아 숨쉰다. 물론 리처드 카펜터가 모두 쓴 곡은 아니지만 그가 만든 ‘세상의 꼭대기’ ‘사랑이여 안녕(Goodbye to love)’ ‘어제여 다시 한번(Yesterday once more)’도 수준이 처지지 않는다. 많은 비판을 받았던 카렌 카펜터의 보컬도 ‘옛 곡 해설’에 관한 한 알아줄 만한 실력이었다. 레온 러셀(Leon Rusell)의 ‘슈퍼스타’, 비틀스의 ‘승차권(Ticket to ride)’, 루비 앤 더 로맨틱스(Ruby And The Romantics)의 ‘서로 상처를 주며(Hurting each other)’, 마블리츠(Maveletts)의 ‘안녕 우체부 아저씨’ ‘비치우드(Beachwood 4-5789)’ 등은 그녀의 탁월한 목소리의 소화력이 있기에 가능했다. 비평가들도 이 점만은 인정했다. ‘안녕 우체부 아저씨’를 리메이크해 부른 것도 실상 “카렌의 보이스가 ‘커버버전’에 능수 능란한 만큼 지나간 곡을 다시 부르는 방식을 자주 이용해야 한다”는 몇몇 비평가들의 충고에 따른 결과였다. 이와 함께 적지 않은 뮤지션들과 음악 관계자들도 카펜터스를 존경했다. 그들은 카펜터스가 거물 기타리스트인 토니 펠루소(Tony Peluso)를 ‘사이드맨’으로 기용한 것을 비롯해 여러 부분에서 프로 뮤지션으로서의 참된 자세를 보여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일례로 펑크 록 그룹 소닉 유스(Sonic Youth)는 카펜터스를 존경한 나머지 1990년 발표 앨범 < 구(Goo) >에 ‘카렌을 위한 노래 튜닉(Tunic-song for Karen)’이란 카펜터스에게 바치는 곡을 수록했으며 < 내가 카펜터라면 > 앨범에서도 누구보다 진지하게 그리고 유별나게 ‘슈퍼스타’를 불렀다(이 곡은 앨범에 참여한 록 그룹들이 서로 부르려고 다투어 로비했다는 에피소드를 남기고 있다). 또한 ‘시간이 좀 걸릴 거야(It’s going to take some time)’을 커버한 밴드 베티 세버트(Bettie Seveert)의 멤버 베렌드 더브는 심지어 자신의 침실에 카렌 카펜터 사당(祠堂)을 설치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 앨범은 결코 카펜터스를 향한 조롱이 아니라 직, 간접적으로 영향받은 후배 뮤지션들의 선배에 대한 예우가 담겨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코네티컷 주의 뉴 헤이븐에서 태어났으나 로스엔젤리스 교외의 다우니 구역에서 뿌리내리며 활동을 계속해 < 롤링 스톤 >지로부터 다우니 듀오(Downey Duo)라는 별칭을 얻은 카펜터 남매의 결코 순탄치 않았던 인생 역정을 살펴보자. 1945년생 리처드 카펜터는 12살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가족 전체가 다우니로 이사온 뒤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에 다니면서 대중 음악 이론을 전공했다. 5살 연하인 여동생 카렌 역시 고교 시절 피아노와 노래에 열중했지만 동시에 드럼에 매혹되어 스틱을 잡고 드럼 주자를 꿈꾸기도 했다. 1965년 카렌의 나이 15살 때 카펜터 남매는 친구 웨스 제이콥스를 끌어들여 재즈 트리오를 결성, 할리우드에서 개최된 밴드 콘테스트에서 당당히 우승을 차지해 RCA레코드사 직원인 닐리 플럼브의 눈에 띄었고 곧바로 그 회사와 레코딩 계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싱글 두 장을 녹음했으나 회사측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그 곡들은 발표되지 않았고 아티스트 명부에서도 제외되는 수모를 겪는다. 제이콥스가 줄리어드에서 공부하기 위해 그룹을 떠나게 되자 리처드 카펜터는 다시 6인조 그룹 스펙트럼(Spectrum)을 조직하여 레코드 제작을 위한 ‘데모 테이프’를 만들지만 그것은 번번이 거절당했고 그룹도 해산될 위기에 처한다. 비운은 계속되었지만 리처드는 자신의 재능을 확신했고, 다시 만든 데모 테이프를 거절한 A&M레코드사로부터 비록 스펙트럼은 퇴짜맞았지만 두 남매만은 구제되는 행운을 얻는다. 이때 그들을 픽업한 인물이 ‘이 녀석이 너와 사랑에 빠졌어(This guy’s in love with you)’ ‘상승(Rise)’ 등의 빅 히트곡을 낸, 그 유명한 트럼펫 주자이며 제리 모스와 함께 A&M의 공동 소유주인 허브 앨퍼트(Herb Alpert)였다. 이리하여 ‘다우니 듀오’는 첫 앨범 < 선사(Offerings) >와 싱글 ‘승차권’을 냈지만 만족할 만한 실적을 거두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거물 작곡가인 버트 바카라(Burt Bacharach)가 제리 모스를 찾아와 라디오에서 누군가의 ‘승차권’을 들었는데 무척 좋다고 얘기했고 그에 따라 리처드는 버트의 요청으로 오래 전 팝송을 재편곡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여기서 찾아낸 곡이 대형 여가수 디온 워윅(Dionne Warwick)이 레코딩했으나 대중들에게 호응을 얻지 못한 ‘내게 가까이(They long to be-close to you)’였다. 이 곡은 카렌의 목소리에 실려 전미 싱글 차트 1위를 거머쥐었고 이후 발표한 싱글마다 차트 상위권으로 치솟는 ‘히트 제조기’로서 화려한 다우니 듀오 시대가 펼쳐진다. 1971년 < 카펜터스(Carpenters) > 1972년 < 너를 위한 노래(A Song For You) > 1973년 < 때때로(Now And Then) > 1975년 < 경계선(Horizon) > 등의 앨범은 보통 서너 곡씩 히트 싱글이 터져 나왔고 1974년에 내놓은 싱글 모음집 < The Singles 1969-74 >의 경우는 지금까지 9백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역사상 가장 잘 팔린 앨범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들 노래의 인기는 천정부지로 솟아 ‘세상의 꼭대기’는 여러 가수가 서로 번안 가요로 내놓았으며 카렌의 목소리를 닮은 국내 가수 이성애가 인기 가수로 각광받기도 했다. 본고장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노래들 ‘잠발라야(Jambalaya)’, ‘가장무도회(This masquerade)’가 국내에서는 열렬히 애청될 정도였다. 호사다마라고, 성공적인 질주 속에 카렌 카펜터는 과도한 식이요법에 따른 신경성 식욕부전증을 앓게 되었다. 선천적으로 남성에 대한 두려움이 강했던 그녀는 그 공포심을 없애기 위해 무언가를 계속 먹어야 했고 한때는 85kg까지 체중이 불어 이후 먹기를 두려워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이어트에 열중한 나머지 생존에 필요한 영양소 부족으로 심한 경우 목숨마저 앗아가는 일종의 노이로제성 질환인 식욕부전증은 그녀의 불우한 사생활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카렌은 1980년 부동산업자인 토마스 배리스와 결혼했지만 2년만에 이혼하고 말았다(불행한 결혼 생활을 예고라고 하듯 카펜터스 시절 그녀가 부른 노래는 대다수가 ‘보답 받지 못한 사랑’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결혼 실패와 더불어 1970년대 말 기습적으로 찾아든 인기 퇴조는 그녀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넣었다. 일반적으로 보아 그녀는 결코 살찐 체질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먹기 거부를 지속했다. 비평가들이 더러 그녀의 식욕부전증을 중산층병으로 내리 깎으며 ‘중산층의 고통’, ‘자기 중심의 사고가 팽배한 긴장과 갈등의 1970년대 정서가 낳은 대표적 희생자’로 이들에 대해 결론짓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81년, 4년 만에 카펜터스는 앨범 < 메이드 인 아메리카(Made In America) >를 내놓고 재기에 나서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카렌은 1983년 2월 4일 자택에서 식욕부전증에 대한 거식증으로 급작스레 사망했다. 그것으로 카펜터스의 ‘어제여 다시 한번’ 노력도 끝을 맺었고 다우니 듀오 스토리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카렌의 죽음은 노출시키고 신중하게 대처했더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어처구니없는 비극으로 지적되고 있다. 사고와 행위를 자기 세계에 가둠으로써 잉태시킨, 뜻있는 죽음이 못 된다는 것이 중론이다. 1989년 신시아 깁이 주연한 TV 영화 < 카렌 카펜터 스토리 >도 만들어지고 히트곡집 앨범 < 어제 뿐(Only Yesterday) >이 발매되는 등 카펜터스의 부활은 계속되어 있다. 얼터너티브 록 뮤지션들에 의한 < 내가 카펜터라면 >으로 그들은 또다시 재평가의 기회를 잡은 상태다. 그러나 찬사가 카펜터스가 아닌 그 앨범에 참여한 후배 록 그룹에 돌아가는 기미가 보여주듯 비평계의 시각은 쉽게 호전될 것 같지는 않다.
블론디는 1970년대 말 움트기 시작한 역사적 트렌드 뉴 웨이브와 펑크 시대의 선구자격 밴드이자, 그들 가운데 가장 커다란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던 그룹이다. 그들의 앨범 판매고 만큼이나 찬란하게 빛났던 데비 해리(Debbie Harry)의 금발머리는 당시 팝 음악계에 ‘섹슈얼리티’ 지향적 현상을 만들어 현재의 마돈나에 이르고 있으며, 펑크(Punk)와 훵크(Funk), 디스코를 아우르는 다양한 장르를 록에 혼합한... 블론디는 1970년대 말 움트기 시작한 역사적 트렌드 뉴 웨이브와 펑크 시대의 선구자격 밴드이자, 그들 가운데 가장 커다란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던 그룹이다. 그들의 앨범 판매고 만큼이나 찬란하게 빛났던 데비 해리(Debbie Harry)의 금발머리는 당시 팝 음악계에 ‘섹슈얼리티’ 지향적 현상을 만들어 현재의 마돈나에 이르고 있으며, 펑크(Punk)와 훵크(Funk), 디스코를 아우르는 다양한 장르를 록에 혼합한 ‘블론디식의 팝 만들기’는 근래 당시 뉴 웨이브 음악계의 커다란 팽창을 가져왔다. 이들의 역사적인 시작은 1974년 뉴욕에서였다. 당시 유명 클럽 맥스 캔서스 시티(Max Cansas City)의 웨이트리스이자 플레이보이 모델이기도 했던 데비 해리(본명은 데보라 해리)는 윈드 인 더 윌로스(Wind in the Willows)라는 포크 록밴드에서 활동하던 중 스틸레토(The Stilettos) 출신의 기타리스트 크리스 스타인(Chris Stein)을 만나면서 새로운 밴드를 만들 결심을 굳히게 된다. 베이스 프레드 스미스(Fred Smith)와 드럼 빌리 오코너(Billy O’Connor)가 들어오면서 그룹은 라인업을 완성되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블론디라는 그룹 이름은 트럭운전사가 길거리를 지나가는 데비를 향해 소리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1975년은 유난히도 라인업의 변화가 많았다. 특히 프레드 스미스가 펑크 밴드 텔레비전(Television)으로 이적한 후엔 밴드가 와해될 위기에 처할 정도로 상당한 침체기를 맞는다. 하지만 새로 들어온 드러머 클렘 버크(Clem Burke)의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열정이 그들에게 힘이 되었고, 이후에 베이스 개리 발렌타인(Gary Valentine)과 키보드 지미 데스트리(Jimmy Destri)가 들어오면서 그룹은 다시 안정을 찾았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 블론디는 1976년 프라이비트(Private) 레코드사를 통해 첫 싱글 ‘X-offender’를 발표한 뒤 이어서 대망의 첫 앨범 < Blondie >를 발표한다. 그룹은 이기 팝과 데이비드 보위의 공연의 오프닝에 나서면서 미국과 유럽에서 소규모 투어를 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프라이비트 레코드사에서 이적하여 메이저 레이블인 크리살리스(Chrysalis)와 계약을 맺는 행운을 얻게 된다. 베이스 나이겔 해리슨(Nigel Harrison)을 맞이하면서 6인조의 완전한 라인업으로 진화한 블론디는 1977년 두 번째 앨범 < Plastic Letters >를 발표, 첫 싱글 ‘Denis’ 와 ‘(I’m always touched by your) Presence, dear’가 연속으로 영국차트 Top10 에 오르는 좋은 성적을 거두며 앞으로의 광채를 예고했다. 성공으로 인한 기나긴 투어와 빡빡한 일정으로 지친 가운데서도 1978년, 블론디는 그들의 역사적인 세 번째 앨범 < Parallel Lines >를 발표한다. 당시 디스코 붐을 타고 가장 잘 나가는 프로듀서의 한 사람이 된 마이크 채프먼(Mike Chapman)의 지휘와 함께 디스코 성향으로 거듭난 블론디의 변신은 미국 뉴욕 펑크의 메카인 시비지비(CBGB)클럽 출신의 펑크 록밴드치고는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의외의 전향이었지만 대중들은 폭발적인 반응으로 화답, 앨범은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다. 앨범의 싱글 ‘Hanging on the telephone’과 ‘Picture This’는 영국 차트에서 각각 5위, 12위를 차지하였고, 공전의 히트곡 ‘Heart Of Glass’는 영국과 미국 양쪽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는 대서양 양안 정복의 개가를 일궈냈다. 이 곡은 밴드가 CBGB 클럽활동 시절인 1975년에 데비와 크리스가 쓴 곡이었으나 시류에 맞게 디스코로 업데이트했다. 지미 데스트리는 “우린 우리 자신을 패러디했다”며 자신들의 전향(?)에 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팬들이 블론디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이 곡에서 비롯되었으며 록 분야의 사람들은 이 곡을 계기로 디스코열풍의 수용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히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아 ‘Sunday girl’이 영국차트 1위, 그들이 CBGB 출신임을 고지한 펑크 계열의 곡 ‘One way or another’는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무렵 데비 해리는 그 도발적 섹슈얼리티로 ‘제2의 마릴린 먼로’라는 수식어를 얻으면서 록 음악계의 넘버 원 ‘핀 업 걸’로 떠올랐다. 1979년에 발표한 4집 앨범 < Eat To The Beat >는 싱글 ‘Dreaming’ ‘Union City Blue’를 영국차트 상위권에 올려놓았고 이어 ‘Atomic’이 세 번째로 영국 차트 정상을 차지하는 등 성공행진은 계속되었다. 이후 영화 < 아메리칸 지골로 >(American Gigolo)에 삽입된 곡 ‘Call me’가 다시 한번 영국과 미국 차트 정상을 호령하여 그들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곧이어 발표한 다섯 번째 앨범 < Autoamerican >에서는 레게리듬을 도입한 차트1위 곡 ‘The tide is high’과 ‘Rapture’가 말해주듯 각각 레게 그리고 랩을 시도하여 밴드의 음악적 지평을 넓혔다. 하지만 정상을 질주하던 블론디에게 갑자기 여러 불운이 겹치기 시작하였다. 기타리스트 프랭크 인팬트(Frank Infante)가 그룹내의 음악적인 위치에 불만을 품고 법적인 소송을 제기하였고, 데비가 쿠 쿠(Koo Koo)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만들어 활동하는 등 멤버들의 에너지 분산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 발표된 6집 앨범 < The Hunter >는 ’Island of lost souls’가 영국차트 톱40 에 오르긴 했지만, 이전에 비해 훨씬 못 미치는 성과를 거두었다. 결정적으로 그룹의 축인 크리스 스테인이 심각한 유전병에 걸리게 되면서 1982년에 결국 그룹은 해체되었다. 해체 이후, 데비는 필생의 연인인 크리스의 병이 완전히 회복되기까지 보살피면서 그 사이 영화와 연극에 출연, 솔로 활동을 하기도 하였으나 앨범은 참패를 거듭했고 지미 데스트리는 가정에 충실하기 위해 음악활동을 중단했다. 이후 병이 회복된 크리스는 뉴욕의 밴드들을 프로듀싱하며 음악활동을 재개했고 클렘 버크는 레코딩 작업을 꾸준히 하며 유명한 배우들과 함께 투어를 하기도 했다. 근래 들어 평단에서 뉴 웨이브와 1980년대 팝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해지고, 더불어 영화 < 트레인스포팅 >에 삽입되어 우리에게 익숙한 슬리퍼(Sleeper)의 ’Atomic’ 이 블론디 오리지널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들에 대한 관심이 점차 늘어갔다(이 곡은 1998년 국내 모 음료CF에 삽입되기도 했다). 그룹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의 성숙에 맞춰 마침내 1998년 말 멤버들은 15년 만에 재결합을 선언하고 일곱 번째가 된 앨범 < No Exit >을 선보였고 첫 싱글 ’Maria’가 발표되자마자 영국차트 1위에 올라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멤버 : 아그네사 팰트스코그(Agnetha Faltskog), 애니프리드 린스태드(Anni-Frid Lyngstad), 베니 앤더슨(Benny Andersson), 비요른 울바에우스(Bjorn Ulvaeus) 틴에이저에서 할머니까지... 스웨덴의 침공 1971년 비욘(Bjorn Ulvaeus)과 결혼한 아그네사(Agnetha Foltskog)의 첫 아이 출산 예정일은 하필 1973년 2월 23일 유로비전 송... 멤버 : 아그네사 팰트스코그(Agnetha Faltskog), 애니프리드 린스태드(Anni-Frid Lyngstad), 베니 앤더슨(Benny Andersson), 비요른 울바에우스(Bjorn Ulvaeus)

틴에이저에서 할머니까지... 스웨덴의 침공 1971년 비욘(Bjorn Ulvaeus)과 결혼한 아그네사(Agnetha Foltskog)의 첫 아이 출산 예정일은 하필 1973년 2월 23일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출전 티켓을 따기 위한 스웨덴 본선 당일이었다. 팀 동료 베니(Benny Anderson)의 약혼녀 안니 프리드(Anni-Frid)가 부랴부랴 그녀의 노래 파트까지 연습해 만일을 대비해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 출산이 늦어져 무사히 아그네사는 무대에 올라 ‘링링(Ring ring)’을 부를 수 있었다. 이 네 사람의 그룹 아바()는 이날 3위에 그쳐 스웨덴 대표가 되지 못하는 고배를 마시지만 온전히 출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일이 잘 풀려 나갈 것임을 암시하는 징조였다. 그 같은 길조는 당장 이듬해에 현실로 나타났다. 마침내 ‘워터루(Waterloo)’라는 노래로 1974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출전, 32개국 5억 TV시청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20대 1의 경쟁을 뚫고 당당 그랑프리를 차지한 것이었다. ‘워터루’는 순식간에 영국 및 유럽에서 밀리언 셀링 싱글이 되었다. 이후 아바는 마치 천운을 타고난 그룹인 듯 쾌속 항진을 거듭했다. 영국 출신이 아니면 설령 유로비전 대회에서 우승했다 하더라도 곧 잊혀지고 마는 관례마저 운 좋게 비껴 가는 ‘위대한 예외’를 창조했다. 발표하는 싱글마다 차트 상위권으로 치솟아 영국 차트에서는 18주 연속 톱 10싱글을 기록했고 그중 9곡이 1위에 등극하는 눈부신 히트 퍼레이드를 펼쳤다. 이 ‘9곡의 넘버원’ 기록은 역사상 비틀스, 엘비스 프레슬리, 클리프 리처드 셋만이 장식한 대 기록이었으며 이로써 아바는 ‘1970년대에 가장 레코드를 많이 판 그룹’이라는 타이틀을 안게 됐다. 1978년까지 4년간 아바의 레코드 판매량은 세계적으로 무려 5천3백만 장에 달했다. 1977년 연간 소득이 110억원을 기록, 스웨덴의 자랑인 볼보 자동차 회사의 총판매고 90억원을 제치고 1위 기업으로 부상할 정도였다. 그들의 인기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을 넘어 지구촌을 덮었다. 터키, 이스라엘에서도 음반 판매량 1위였고, 호주 사람 4명 가운데 하나가 1976년 앨범인 < 아바 히트곡집 >< Abba Greatest Hits >를 갖고 있었으며, 심지어 소련의 암시장에서도 그들의 LP가 130달러의 고가(당시 LP 한 장 가격은 8달러)로 거래되었다. 극동 지역에서도 그 인기는 막강해 우리나라의 경우만 하더라도 한 앨범에서 보통 4곡 이상이 방송과 다운타운가를 뒤덮었다. 1978년 < 앨범(The Album) >의 미국 히트 싱글은 ‘게임의 이름(The name of the game)’ ‘내게 승산을 걸어보라(Take a chance on me)’ 두 곡이었지만 국내에서는 ‘독수리(Eagle)’ ‘무브 온(Move on)’ ‘음악을 감사해요(Thank you for the music)’도 덩달아 팝송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아바는 그러나 결코 운으로 먹고 산 팀은 아니었다. 그들은 대중들의 환호를 독점할 만한 충분한 재능이 있었다. 아바의 모든 곡들은 출중한 작곡 실력을 보유한 남성 멤버 비욘과 베니가 당시 매니저이자 폴라(Polar)레코드사 사장인 스틱 앤더슨(Stig Anderson)과 함께 썼다. 그들의 음악이 이윤의 지상 명령에 따라 팝 시장을 요리하기 위해 혈안이 된 음악업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체 생산’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 했다. 베니와 비욘이 제조해 낸 아바의 경쾌한 ‘버블 검(Bubble gum) 음악’은 당시로 볼 때 높은 기술적 완성도를 자랑했다. 신시사이저와 ‘스트링’의 풍요로운 사운드와 종소리 같은 여성 보컬은 유서 깊은 필 스펙터(Phil Spector)의 ‘사운드의 벽’(Wall Of Sound) 방식을 따른 두드러진 부분이었다. 명랑한 리듬의 사운드 구조에 더구나 쉬운 멜로디를 화학적으로 결합시킬 줄 아는 비범한 능력을 뽐냈다. 그리하여 누구나 듣기에도 좋고 춤추기에도 안성맞춤인 곡들을 뽑아내 1970년대 초중반에 세력을 떨친 헤비메탈과 프로그레시브 록의 시끄럽고 복잡한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단순한 음악을 바라는 수요층이 폭넓게 존재하고 있음을 입증했다. 1978년 < 뉴스 위크 >지는 “아바의 부패되지 않은(antiseptic) ‘이지 리스닝’ 사운드는 틴에이저에서부터 할머니까지 포괄하는 전 수요층에 어필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물론 그들도 비판으로부터 완전 해방되지는 못했다. 팻 분(Pat Boone)의 ‘모래 위에 쓴 사랑의 편지(Love letters in the sand)’에 기초해 ‘아이 두, 아이 두, 아이 두, 아이 두(I do, I do, I do, I do)’를 만든 것에서 알 수 있듯 영미의 고전적인 팝 스타일에 편승, 기술 제휴함으로써 그들의 구미에 맞추고 있다는 비난이 뒤따랐다. 이와 함께 음악 외적인 요소가 본질을 압도한다는 문제도 제기돼 한 스웨덴 음악 평론가는 “마케팅, 스테이지 조명 그리고 사운드 기술자를 빼고 나면 그들도 단지 그저 그런 그룹”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록 음악 진영은 < 롤링 스톤 >지 아닌 < 비즈니스 월드 >지를 읽으며 여가를 보내는 상업성 지향의 그들에게 애초부터 무관심이었다. 그러나 많은 음악 관계자들은 그들이 스스로 곡을 써서, 세대와 계층을 포괄하는 작품을 만들어 냈고 또한 외로이 스칸디나비아 출신 뮤지션들의 미국 상륙(Scandinavian Invasion)을 주도했다는 점을 높이 샀다. 사실 비(非) 영미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안고 영미 팝의 본고장을 정복했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이 때문인지 예외 없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른, 비슷한 계열의 버블검 그룹들 오스몬즈(Osmonds), 카펜터스(Carpenters)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시달렸다. 아바가 인기를 얻는 데는 여성 멤버인 안니 프리드와 아그네사의 리드미컬한 보컬이 크게 작용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매끄럽게 곡조를 타면서도 강렬했고, 또 듣기 좋은 하모니를 일궈냈다. 이와 함께 북유럽형의 늘씬한 신체와 미모도 빼놓을 수 없는 인기 창출의 밑거름이었다. 국내에도 개봉된 78년 다큐멘터리 영화 < 아바(Abba-The movie) >의 재미는 순전 두 여인의 ‘환상적인 엉덩이’로 초점이 맞춰질 지경이었다. ‘오디오+비디오’의 AV시스템을 일찍이 구현한 아바의 네 구성원은 하나로 뭉치기 전부터 본국 스웨덴에서는 알아주는 스타들이기도 했다. 기타를 친 비욘(1945년생)은 포크밴드 웨스트 베이 싱어스(West Bay Singers)를 거쳐 후테내니 싱어스(Hootenanny Singers)의 멤버였고, 같은 1945년생인 베니는 ‘스웨덴의 비틀스’로 불린 그룹 헵 스타스(Hep Stars)의 베이스 주자로 활약했다. 1966년 우연히 어느 파티장에서 만난 두 사람은 이후 간헐적으로 함께 일하기 시작했고 1969년 각각 아그네사와 안니 프리드를 만나게 되면서 공동 전선을 펴기에 이른다. 유일하게 노르웨이에서 태어나 2살 때 스웨덴으로 이주해 온 안니 프리드(1945년생)는 13살 때 이미 댄스 그룹의 리드 싱어로 나서 장래의 남편인 베니를 만나기 전까지 일본, 베네수엘라 등 국제 무대에 출전, 명성을 쌓았다. 탁월한 각선미의 아그네사(1950년생)는 스웨덴판 록 오페라 <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에서 마리아 막달레나 역을 맡아 ‘주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I don’t know how to love him)’을 불러 주목받은 인기 가수였다. 그녀와 비욘은 스타들의 결합으로 화제를 모으며 경찰이 하객을 통제하는 들뜬 분위기 속에서 1971년 7월 결혼식을 올렸고, 안니 프리드와 베니도 비슷한 시기에 약혼해 동거에 들어갔다. 배우자들로 짜여진 팀이라는 점은 독신주의가 팽배한 1970년대의 ‘감정 중독’ 경향과 견줄 때 신선한 자극이었고 그룹 내부의 갈등 요소를 감소시켜 주는 순기능을 발휘했다. 눈에 띄는 불협화음없이 순탄하게 1970년대 중반을 질주하는 데 성공했지만 역시 그들도 베이비 붐 세대의 자유분방한 가치와 결별한 별종의 연예 스타는 못 되었다. 남다른 부부애를 과시했던 비욘과 아그네사가 1978년 12월 이혼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랜 동거 끝에 배니와 안니 프리드가 1978년 10월 웨딩마치를 올린 지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터진 일이었다. 여기에 영향을 받았을까, 베니 부부마저 2년 반만인 1981년 2월 갈라서고 말았다. 이혼과 그에 따른 팀 결속력 와해로 아바는 1981년 이후 급속히 인기 차트로부터 멀어져 갔고 1982년 안니 프리드(이 때부터 프리다), 1983년 아바 아그네사가 솔로 싱글을 내놓으면서부터 공식 해산, 뿔뿔이 흩어졌다. 베니와 비욘은 1984년 팀 라이스(Time Rice)와 연대해 뮤지컬 < 체스(Chess) >레퍼토리를 써 그중 머레이 헤드(Muray Head)의 ‘방콕에서의 하룻밤(One night in bangkok)’을 히트시키는 저력을 발휘했다. 전성기에 아바는 미국에서 4장의 톱 10싱글과 5장의 톱 40앨범을 기록했다. 물론 두드러진 성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바의 멤버들은 미국을 유일한 ‘실패 지역’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유럽만큼 미국을 제압하지 못한 것이 늘 불만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미국 팝 시장 진출의 교두보 확보’라는 매우 의미있는 역사적 발자취를 남겼다. 그들로 인해 훗날 많은 북유럽 출신 가수들이 미국 상륙에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노르웨이 그룹 아하(A-ha)가 ‘아바 이후 최대의 스칸디나비아 사절단’으로서 미국 정복에 성공했고, 스웨덴의 록시트(Roxette), 에이스 오브 베이스(Ace Of Base)가 아바의 후광을 업고 1990년대 미 팝계를 석권, 스웨덴 열풍을 일으켰다. 특히 혼성 4인조라는 라인업까지 계승(?)한 에이스 오브 베이스는 ‘아바 신화의 재현’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그들을 능가할 만큼의 기세를 떨쳤다. 이제 아바의 이름은 역사의 뒤켠으로 물러섰지만 이러한 후배들의 잇단 등장은 여전히 아바가 ‘채권자’로 살아 꿈틀대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비단 스칸디나비아 국가 가수들 뿐 아니라 영미 댄스 음악 지향의 가수들도 그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 아바의 영향을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마돈나, 팻 숍 보이즈(Pet Shop Boys) 등 영국과 미국 댄스 가수들이 곧 아바에게 바치는 앨범을 내놓을 예정이라고 한다. 이같은 사실 또한 아바가 팝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 그룹임을 암시하는 뚜렷한 사례일 것이다.
노래 : Dusty Springfield (더스티 스프링필드)
35년여에 달하는 긴 세월 동안 파퓰러 뮤직의 정상에서 활동했던 여가수 더스티 스프링필드(Dusty Springfield)는 백인이 부르는 흑인 소울 이른바 ‘블루 아이드 소울’을 1960년대부터 구사하면서 백인 소울의 영역을 개척한 위대한 여가수로, 흑인에 못지 않은 강렬한 보컬 호소력에 팝의 부드러운 느낌을 동시에 지녔으며, 재즈적 감성까지 구현해 낸 대형 싱어다. 1996년 공전의 반향을 부른 영화 < 접속... 35년여에 달하는 긴 세월 동안 파퓰러 뮤직의 정상에서 활동했던 여가수 더스티 스프링필드(Dusty Springfield)는 백인이 부르는 흑인 소울 이른바 ‘블루 아이드 소울’을 1960년대부터 구사하면서 백인 소울의 영역을 개척한 위대한 여가수로, 흑인에 못지 않은 강렬한 보컬 호소력에 팝의 부드러운 느낌을 동시에 지녔으며, 재즈적 감성까지 구현해 낸 대형 싱어다. 1996년 공전의 반향을 부른 영화 < 접속 >에 그녀의 노래 ‘The look of love’가 삽입되어 애청되면서 국내의 신세대 팬들과도 친숙해졌다. 1939년 영국 런던에서 메리 이사벨 캐서린 버나데트 오브리엔(Mary Isabel Catherine Bernadette O’Brien)이란 본명으로 태어나 1958년 3인조 보컬 그룹 라나 시스터스(Lana Sisters)에서 가수활동을 시작했으며 1960년에는 오빠 디온(Dion), 그의 친구 팀 페일드(Tim Feild)와 함께 더 스프링필즈(The Springfields)를 결성, 본격적인 활동을 펼친다. 더스티 스프링필드로 개명하고 오빠 디온도 팀 스프링필드로 이름을 바꾸며 이듬해 ‘Dear John’으로 데뷔한 스프링필즈는 처음에 차트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으나 1961년 <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 > 독자 선정 영국 최우수 보컬 그룹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1963년 발표한 싱글 ‘Island of dreams’와 ‘Say I won’t be there’가 잇따라 영국 차트 5위에 오르면서 인기 그룹으로 비상한다. 하지만 주가를 올리고 있던 시점에 더스티 스프링필드가 솔로활동을 선언하면서 그룹은 해체를 맞는다. 이미 그룹을 통해 풍부한 음색과 가창력을 대중에게 알린 터라 솔로활동은 순풍에 돛단 듯 시작부터 성공가도를 질주했다. 허스키하면서 소프트한 느낌은 로큰롤 밴드가 맹위를 떨치던 이른바 브리티시 인베이전 시대에 드물게 여성 솔로가수로서 성공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주었고 처음부터 그녀는 단순한 팝이 아닌 ‘미국적인 소울’의 필을 표현했다. 작곡 팀 마이크 호커와 이보르 레이먼드는 미국 흑인음악의 상징인 모타운 식으로 쓴 곡 ‘I only want to be with you’로 그녀에게 차트4위(미국 12위)라는 좋은 성적을 안겼다. 이 곡은 얼마 전 국내 칼라핸드폰 광고에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었으며 1976년에는 비틀스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영국의 틴 아이돌 그룹 베이 시티 롤러즈(Bay City Rollers)가 리메이크해 친숙해지면서 명곡으로 자리잡았다. 더스티 스프링필드는 이어 역시 호커와 레이먼드 컴비가 써준 ‘Stay awhile’로 차트13위에 올랐으며 틴 팬 앨리 전통을 계승한 전설적 작곡 콤비 버트 바카라크(Burt Bacharach)와 할 데이비드(Hal David)가 만들어준 ‘I just don’t know what to do with myself’와 함께 3위로 다시 상위권을 점령했다. 디온 워릭(Dionne Warwick)을 키워낸 이들은 영국 여가수로서 드물게 스탠더드와 소울 감성을 동시에 간직한 그녀를 높이 평가해 디온 워릭이 취입했던 곡 ‘Wishin’ and hopin’’을 제공, 마침내 미국차트 6위에 올려 미국에서도 통하는 가수로 만들어 냈다. 이 때 더스티는 뉴욕에 건너와 녹음하면서 영미(英美)를 관통하는 명실상부한 대서양 스타로 똬리를 틀기 시작한다. ‘Wishin’ and hopin’’에 이어 ‘All cried out’(41위)은 심지어 미국에서만 싱글로 발표되었다. 1964년이 저물어 가던 겨울 오빠 팀 스프링필드가 쓴 곡 ‘Losing you’으로 영국 차트 9위(미국91위)에 오른 그녀는 1965년과 1966년에도 쾌조를 보여 훗날 팝 보석으로 널리 애청된 ‘In the middle of nowhere’(영국8위)와 명콤비 캐롤 킹과 제리 고핀이 쓴 발라드 ‘Some of your lovin’ (영국8위) 그리고 ‘Little by little’(영국17위) 등을 줄줄이 내놓았다. 이 시점에 꼭 기억해야 할 곡은 더스티의 것으로서는 가장 많이 팔렸으며 아직까지 라디오를 통해 오랜 사랑을 받고 있는 ‘You don’t have to say you love me’(엘비스 프레슬리가 리메이크하기도 했다)로 이 곡은 영국차트 정상에 이어 미국에서도 4위를 차지했다. 다시 캐롤 킹과 제리 고핀이 준 ‘Goin’ back’(영국10위)과 ‘All I see is you’(영국9위, 미국20위) 두 곡을 더 히트시킨 그녀는 이 두 곡이 담긴 베스트 앨범 < Golden Hits >를 차트에 6개월 동안 올려놓는 기염을 토했으며, 이러한 성공으로 국제적 팝 스타로 도약, 영국 BBC 텔레비전의 음악프로 MC로 뽑히기도 했다. 당시 <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 >지의 여론조사에서 최우수 영국 여가수와 최우수 국제 여가수에 선정되는 기쁨도 누렸다. 1967년 들어 미국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에서 보내게 된다. 그녀의 국제적인 명성이 더욱 확산된 가운데 ‘I’ll try anything’(영국13위, 미국40위)이 히트했고, 바카라크와 데이비드 콤비의 곡으로 007영화 < Casino Royale >의 삽입곡인 ‘The look of love’ 또한 미국에서 22위에 올라 변함 없는 인기를 과시했다. 이 곡은 30여 년이 지난 1996년 한국영화 < 접속 >에 삽입되어 천지를 진동시켰다. 1968년에는 팝 명반으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 Dusty in Memphis >를 발표한다. 미국의 소울의 도시 멤피스에서 녹음한 이 앨범은 ‘팝과 소울’의 절묘한 결합으로 빠짐없이 여성 팝 보컬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거론되고 있으며, 또한 더스티의 음악을 ‘블루 아이드 소울’로 일컫게 하는데 결정타가 됐던 작품이기도 하다. < Dusty in Memphis >에선 미국 10위를 기록한 ‘Son of a preacher man’를 비롯해 ‘Don’t forget about me/Breakfast in bed’ ‘The windmills of your mind’(스티브 매퀸이 주연한 영화 < Thomas Crown Affair >의 주제곡으로 1999년에 영화가 피어스 브로스넌 주연으로 리메이크되면서 이 곡도 스팅의 노래로 리메이크됐다)가 연속 싱글로 나왔지만 비평적 찬사만큼 상업적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1970년 발표한 앨범 < A Brand New Me > 이후 그녀의 활동과 인기는 눈에 띄게 후퇴했으며 1972년 < See All Her Faces >와 이듬해 < Cameo >는 차트에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곧 사라져 버렸다. 이후 긴 휴식기를 마치고 1978년 < It Begins Again >, 1979년 < Living Without Your Love >, 1982년 < White Heat > 앨범을 발표하는 등 다시 왕성한 활동을 펼쳤지만 자신의 앨범보다는 딴 뮤지션들과 함께 작업한 곡들에서 인기를 누리는 독특한 양상을 보였다. 1984년에는 스펜서 데이비스(Spencer Davis)와 ‘Private number’를 불러 인기를 얻었고, 1987년에는 카펜터스의 리처드 카펜터(Richard Capenter)의 앨범에서 ‘Something in your eyes’를 불러 건재함을 과시했다. 바로 직전 1987년 펫 샵 보이스(Pet Shop Boys)와 호흡을 고른 곡 ‘What have I done to deserve this’는 그녀의 재기를 몰고 온 기폭제가 됐다. 평소 더스티 스프링필드를 존경해 온 펫 샵 보이즈의 초청으로 참여해 고수(高手)의 멜로디 파트 가창력을 시범한 이 곡은 영국 차트2위를 기록한 데 이어 미국차트도 강타, 역시 2위를 밟았다. 이 곡의 대성공과 함께 다시금 자신의 솔로 히트곡들을 생산, 1989년 역시 펫 샵 보이스가 만들어 준 영화 < Scandal >의 삽입곡 ‘Nothing has been proved’를 영국차트 16위까지 올렸으며, 같은 해 ‘In private’도 14위에 랭크시키며 관록의 힘을 과시한다. 펫 샵 보이스가 4곡을 맡은 1990년 앨범 < Reputation >도 차트38위까지 오르는 히트를 기록했다. 50살 초로(初老)에도 활동의 가속페달을 밟으며 노익장을 과시한 그녀는 1995년에도 < A Very Fine Love >를 발표했지만 얼마 후 유방암으로 투병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병이 호전되어 가던 1999년 3월 그녀는 엘튼 존과 함께 로큰롤 명예전당에 이름을 올린 지 10일 후에 암이 재발하면서 60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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