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난 뒤 현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바뀐 거라곤 ‘내 인생’ 하나뿐!
직장을 그만둔 뒤 여행을 떠나는 것은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는 통과의례처럼 흔한 일이 되었다. 여행의 목적은 지금까지의 현실에서 벗어나 인생을 바꾸고 다시 시작하려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돌아온 뒤 현실은 어떤가? 여행에서는 먹고, 입고, 말하는 언어마저 바뀐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돌아온 현실에서는 가족도, 집도, 친구도 그대로다. 똑같은 환경과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음에 우리는 절망한다. 그렇게 재취업을 하고 만나던 친구를 만나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바뀌지 않는 현실을 한탄하면서.
이 책의 주인공 크리스티네도 똑같았다. 학창 시절 성적표에 ‘수’가 가득이었던 저자는 36세에 독일 중견기업의 재무관리 책임자 자리에 올랐을 만큼 능력 있는 여성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해고를 당하고 오랜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뒤 크리스티네는 미 서부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걷는 4,277km의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을 종주할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5개월간의 대장정 끝에 실제 종주에 성공한다. 크리스티네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생각한다.
“정말 트레일의 전 구간을 내 두 발로 완주한 것이다. 멕시코에서 캐나다까지. 오로지 혼자서. 사막의 불타는 열기도,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던 북서부 태평양 연안의 비도, 시에라네바다의 눈 덮인 고개도, 오리건의 거센 계곡물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던 방울뱀과 흑곰까지도. 이 모든 것을 이겨냈는데 이제 무엇이 나를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의 삶도 우리네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독일로 돌아온 크리스티네는 다시 직업을 구하고 일을 하며 일상을 살아간다. 트레일 위에서의 성취감과 벅찬 기분은 어느새 희미해지고 이전의 삶과 다를 바 없는 지루한 인생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이런 그녀의 ‘인생’이 뒤바뀐 건 바로 그 ‘현실’을 버리면서부터다. 누구나 선망하는 메르세데스 벤츠와 개인비서와 회사, 마지막으로 자신의 집까지 버리고 트레일로 떠나자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6kg의 배낭을 가지고 길 위에 선 순간,
모든 ‘행복의 기준’이 무너져 내리다
‘디드로 효과’라는 게 있다.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드니 디드로의 이름에서 따온 말로 빨간색 새 침실가운을 선물 받은 디드로가 그와 어울릴 만한 빨간 책상을 사고 또 빨간 의자를, 빨간 책장을 샀지만 돈을 낭비하고 빨간 가운의 노예가 되었다며 우울해했다는 그의 에세이에서 유래된 말이다.
크리스티네도 이 ‘디드로 효과’의 노예였다. 그녀는 연봉 인상만 기다렸고 급여가 입금되면 스스로에게 보상으로 점점 더 비싸고 구하기 어려운 것만을 찾았다.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 고가의 의류와 신발이 그녀가 가진 ‘행복의 기준’이었다. 그러나 ‘트레일’이라는 곳에 들어서자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다. 그녀가 걸은 12,700km 트레일에서는 말 그대로 길에서 자고, 먹고, 걷는다. 길이 집이자 일터이며 여가를 즐기는 곳이다. 이렇게 트레일을 걷는 사람을 일컬어 ‘스루하이커’라고 부르는데 말만 그럴싸할 뿐이지 고어텍스가 들어간 아웃도어복을 입었단 사실을 빼고는 노숙자와 별반 다를 게 없다.
크리스티네는 그 ‘길’ 위에서 직접적이고도 강렬한 행복을 찾았다. 오랜 기간 잘 걷기 위해서 칫솔을 머리만 남기고 자르고, 여벌옷 하나 없이 최소한의 식량만을 가지고 걷던 그녀에게 새로운 행복의 기준은 1주일 만에 하는 샤워, 맨바닥 생활 끝에 맞은 침대, 길에서 만난 사람이 전해준 뜻밖의 초코바, 비를 맞으며 걷다 만난 한 줄기 햇살 같은 것이었다. ‘작은 사치’라는 말을 붙여가며 좋은 호텔, 멋스런 맛집, 소소한 명품을 사는 사람들에게 그녀가 말하는 ‘행복의 기준’은 터무니없을 만큼 보잘것없는 것이다. 하지만 소비 후에 더 좋은 곳을 가고, 먹고, 입고 싶다는 불만족감, 그 뒤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죄책감을 한번쯤을 느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어쩌면 내가 가진 ‘행복의 기준’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각자의 취향이 다르듯 행복의 기준도 다를 게 분명한데 우리는 어쩌면 잘못된 번지수에서 행복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게 아닐까? 모든 것을 비워내고 자신이 무엇에 행복을 느끼는지 되짚다 보면, 우린 조금 더 작은 것에서 조금 더 빨리 행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혼자서 길을 걸어본 사람만이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다
여행을 계획할 때 가장 큰 고려 요소는 ‘돈'보다 ’동행‘이다. 여행 카페들을 둘러보다 보면 언어, 인종, 문화도 다른 타국으로 혼자 떠나는 게 두려워 동행을 구하는 글이 하루에도 수백 개씩 올라오곤 한다. 그리고 동행을 구하지 못하면 아예 여행을 포기해버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혼자 여행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평생 해본 적 없는 경험‘을 해봤노라고. 또 ’가장 강한 나‘를 만났노라고.
베를린에 살던 크리스티네는 주말이면 꼭 친구들과 유흥을 즐겼다. 그녀가 PCT를 처음 걷던 날도 혼자가 두려워 함께 차를 타고 온 존과 함께 걸었고 두 번째 트레일인 콘티넨털 디바이드 트레일(CDT)를 걸을 때도 친구인 ‘밥’과 함께였다. 하지만 점점 혼자 걷는 날이 많아지면서, 또 같이 걸을 때면 자신의 의견이 묵살당하고 그렇게 경험의 폭도 좁아지는 것을 알게 되면서 크리스티네는 깨닫는다.
“어차피 걷는 동안에는 어떤 동반자도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걷는 동안에는 누구나 혼자니까. 한 걸음 한 걸음을 혼자 내딛고, 모든 산봉우리를 혼자 힘으로 오르고, 모든 식량의 무게를 혼자서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뒤에야 나는 서서히 깨달았다. 트레일 위에서 사람은 혼자일 때 가장 강하다!”
여기서 ‘걷기’를 ‘살기’로, ‘길’을 ‘인생’으로 대치해봐도 의미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사는 동안에는 누구나 혼자다. 한 걸음 한 걸음을 혼자 내딛고, 모든 역경을 혼자 올라야 한다. 인생 위에서 사람은 혼자 일 때 가장 강하다.’ 특히 인생의 고난을, 몸의 질병을 죽을힘을 다해 이겨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 기회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강한 힘을 갖고 있는지 깨달았다는 것을. 그런 경험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인생을 바꾸고 새로운 일에서 성공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직업도, 가족도, 친구도, 집도 포기하고 길을 혼자서 걸은 크리스티네가 인생을 바꿨던 것처럼 말이다.
크리스티네가 걸은 미국 3대 트레일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총 4,277km. 미국 서부의 시에라네바다 산맥과 캐스케이드 산맥을 따라 종단하는 트레일로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이어져 있다.
◆콘티넨털 디바이드 트레일(CDT)
총 4,200~5,000km.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미국의 대륙분수계(로키 산맥을 기준으로 미국 대륙을 동서로 나누는 경계)를 따라 이어진 트레일이다.
◆애팔래치아 트레일(AT)
총 3,508km. 미국 동부 애팔래치아 산맥을 따라 이어진 트레일로 세 트레일 중 가장 거리가 짧고 도시와도 인접해 초보 도보여행자들이 많이 찾는다.
추천사
누구나 저마다 다른 행복을 꿈꾸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일의 성공을, 누군가는 사랑의 결실을 행복으로 여길 수도 있을 테다. 이 책의 저자 크리스티네는 트레일 위에서의 삶이 행복의 기준을 어마어마하게 끌어내렸다고 한다. 아주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더 풍요롭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모든 여행이 각각 멋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만, 꼭 필요한 것들만 지닌 채 떠나는 트레일은 얼마나 간결하면서도 가득 찬 멋이 담겨 있는지 이 책을 읽으며 또 한 번 깨닫는다.
우리는 어쩌면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진 채 걷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원하는 곳까지 행복하게 걸어가기 위해선 꼭 필요한 만큼만 넘치지 않도록 지니고 걸어야 한다. 짐은 넘치지 않도록, 우리 안에 행복은 가득 넘치도록, 그렇게 오늘도 우리 함께 이 길을 걸어가자.
- 손미나(작가, 인생학교 서울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