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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 불타는 청춘 가요 & 팝송 베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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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7080 불타는 청춘 가요 & 팝송 베스트

[ 4CD ]
나원주, 활주로, 김창훈, 샌드 페블즈, 김정호 노래 외 49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서울미디어 (음반) | 2017년 03월 29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168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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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 불타는 청춘 가요 & 팝송 베스트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7년 03월 29일
시간, 무게, 크기 700g
제조국 한국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CD1 [7080 불타는 청춘 애창 가요베스트]
  • 01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 이응수, 나원주, 활주로
  • 02 나 어떡해 - 김창훈, 김창훈, 샌드페블즈
  • 03 얼룩진 사랑 - 김범룡, 김범룡, 영과영
  • 04 작은 새 - 김정호, 김정호, 김정호
  • 05 제 연인의 이름은 - 이혜민, 이혜민, 이재민
  • 06 그대 작은 화분에 비가 내리네 - 이혜민, 이혜민, 배따라기
  • 07 기타 하나 동전 한닢 - 이재성, 이재성, 이재성
  • 08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 - 정원찬, 정원찬, 이명훈
  • 09 사랑이여 - 최용식, 최용식, 유심초
  • 10 편지 - 김미선, 임창제, 어니언스
  • 11 구름과 나 - 고상록, 고상록, 블랙테트라
  • 12 하얀 나비 - 김정호, 김정호, 김정호
  • 13 그대로 그렇게 - 정원찬, 정원찬, 이명훈
  • 14 옛 시인의 노래 - 이경미, 이현섭, 한경애
  • 15 바람과 구름 - 노수영, 노수영, 장남들
  • 16 날개 - 조운파, 조운파, 허영란
CD2 [7080 불타는 청춘 인기 가요베스트]
  • 01 이름 모를 소녀 - 김정호, 김정호, 김정호
  • 02 삼포로 가는 길 - 이혜민, 이혜민, 강은철
  • 03 난 사랑을 아직 몰라 - 지명길, 유현상, 이지연
  • 04 인생은 미완성 - 김지평, 이진관, 이진관
  • 05 영상 - 길영국, 길영국, 김재성, 안혜경
  • 06 내일로 가는 마차 - 이재성, 이재성, 이재성
  • 07 너 너 너 - 박완석, 박완석, 장계현과 템페스트
  • 08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 김창완, 김창완, 산울림
  • 09 그날 - 이철식, 이철식, 김연숙
  • 10 모두가 사랑이에요 - 이주호, 이주호, 해바라기
  • 11 바람아 멈추어 다오 - 전영록, 전영록, 이지연
  • 12 봄 여름 가을 겨울 - 김현식, 김현식, 김현식
  • 13 그리움만 쌓이네 - 여진, 여진, 여진
  • 14 촛불 - 정태춘, 정태춘, 정태춘
  • 15 토요일 밤에 - 조성욱, 조성욱, 김세환
  • 16 해변으로 가요 - 이철, 이철, 키보이스
CD3 [7080 불타는 청춘 올드 팝 베스트]
  • 01 I Will Survive - Gloria Gaynor 글로리아 게이너
  • 02 Sealed With A Kiss - Brian Hyland 브라이언 하이랜드
  • 03 Changing Partners - Patti Page 패티 페이지
  • 04 Beautiful Sunday - Daniel Boone 다니엘 분
  • 05 Those Were The Days - Mary Hopkin 메리홉킨
  • 06 You Mean Everything To Me - Neil Sedaka 닐 세다카
  • 07 Top Of The World - Lynn Anderson 린 앤더슨
  • 08 Love Me Tender - Elvis Presley 엘비스 프레슬리
  • 09 The End Of The World - Skeeter Davis 스키터 데이비스
  • 10 Crazy Love - Paul Anka 폴앵카
  • 11 For The Good Times - Kenny Rogers 케니 로저스
  • 12 Stand By Me - Ben E. King 벤 E. 킹
  • 13 All I Have To Do Is Dream - Everly Brothers, The 에벌리 브라더스
  • 14 I'd Love You To Want Me - Lobo 로보
  • 15 Only You (And You Alone) - The Platters 플레터스
  • 16 Padam Padam - Edith Piaf 에디트 피아프
CD4 [7080 불타는 청춘 인기 팝 베스트]
  • 01 If (광고 `카페라떼 2`) - Bread 브레드 (former members)
  • 02 A Whiter Shade Of Pale - Percy Sledge 퍼시 슬레이지
  • 03 Reflections Of My Life - Marmalade, The 마멀레이드
  • 04 What A Wonderful World - Louis Armstrong 루이 암스트롱
  • 05 Itsy Bitsy Teenie Weenie Yellow Polka Dot Bikini - Brian Hyland 브라이언 하이랜드
  • 06 Can't Help Falling In Love - Elvis Presley 엘비스 프레슬리
  • 07 Let's Twist Again - Chubby Checker 처비 체커
  • 08 Evergreen Tree - Cliff Richard 클리프 리처드
  • 09 You Are My Destiny - Paul Anka 폴앵카
  • 10 Quizas, Quizas, Quizas (Perhaps, Perhaps, Perhaps) - Nat King Cole 냇 킹 콜
  • 11 Hippy Hippy Shake - Swinging Blue Jeans 스윙잉 블루진스
  • 12 Smoke Gets In Your Eyes - The Platters 플레터스
  • 13 Playground In My Mind - Clint Holmes 클린트 홈즈
  • 14 Beyond The Sea - Bobby Darin 바비 대런
  • 15 Papa Loves Mambo - Perry Como 페리 코모
  • 16 Before The Next Teardrop Falls - Freddy Fender 프레디 펜더

아티스트 소개 (54명)

조규찬, 고찬용, 유희열, 박인영, 이승환(Story), 최근의 스윗소로우에 이르기까지 실력 있는 뮤지션들을 배출해 온 유재하 가요제에서 나원주는 1995년 ‘나의 고백’이란 곡으로 대상을 수상한다. 이 곡에서 들려주는 독특한 건반 편곡과 키(key) 변화는 유재하 가요제에 있어서 하나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정립시켰고, 이승철은 이듬해에, 이 노래를 자신의 앨범 < The Bridge Of Sonic Heaven... 조규찬, 고찬용, 유희열, 박인영, 이승환(Story), 최근의 스윗소로우에 이르기까지 실력 있는 뮤지션들을 배출해 온 유재하 가요제에서 나원주는 1995년 ‘나의 고백’이란 곡으로 대상을 수상한다. 이 곡에서 들려주는 독특한 건반 편곡과 키(key) 변화는 유재하 가요제에 있어서 하나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정립시켰고, 이승철은 이듬해에, 이 노래를 자신의 앨범 < The Bridge Of Sonic Heaven >에 수록함으로써 일찍이 그의 음악성을 인정하게 된다. 나원주의 수상 이후 1년 뒤인 1996년, 홍익 대학교 4학년의 재학 중이던 정지찬이 ‘네가 날 볼 수 있게’란 곡으로 대상을 수상하게 되면서 이들은 ‘자화상’이라는 이름으로 의기투합하게 된다. 1997년 ’나의 고백‘을 타이틀 곡으로 내세우고, 풍성한 오케스트레이션으로 사운드를 살찌운 ‘별이 되어 내리는 비’, 세련된 코러스의 ‘너를 사랑해’, 흥겨운 브라스 편곡의 ‘어쩌란 말인지’등 높은 완성도로 갈무리 된 1집을 발표한다. 이 앨범은 별다른 홍보와 방송출연 없이도 20만장 가까운 판매고를 기록하며, 뛰어난 음악성을 바탕으로 대중성까지 겸비한 신인의 저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98년 ‘니가 내리는 날’, ‘그대도 나처럼’, ’빠리야리야’등이 수록된 2집 앨범을 발표하면서, ‘자화상’의 이름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로운 서로의 음악활동을 인정하고자 현재까지 자화상의 활동은 잠시 유보한 상태이다. 홀로서기를 시작한 나원주는 이소라의 ‘믿음’을 시작으로 린애의 ‘기다릴께요’, 이문세의 ‘내 마음속의 너를’을 작곡했으며, 김건모와 성시경 앨범 크레딧에 편곡으로 이름을 올리며, 자신만의 음악 커리어를 구축해나가기 시작한다. 특히 그의 발군의 피아노 실력은 여러 가수들의 건반세션에서 빛을 발하게 되는데, 김동률의 ‘사랑한다는 말’,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와 휘성 1집에 수록된 ‘하늘에서’에서 보여준 세련된 코드 보이싱은 재즈와 펑크(funk)의 건반편곡에서도 단연 일인자임을 확인시켜주었다. 이제는 자신의 음악을 하고 싶었던 그는 4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2003년 나원주의 이름을 내건 첫 솔로앨범을 발표한다. ‘나의 고백’의 맥을 잇는 고급스러운 타이틀 곡 ‘사랑했나요’를 시작으로 보사노바의 ‘그대이기에’, 퓨전재즈넘버 ‘니가 아니야’, 팝 발라드 곡인 ‘Baby it’s you’를 아우르는 음악적 시도를 감행했지만, ’사랑했나요’의 대중적 흡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일까. 이런 다양하고 고급스러운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은 다수의 지각범주에 들지 못한 채, 폭넓은 대중성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그가 존경하는 마이더스의 손, 데이빗 포스터(David Foster)에게서 흡수한 감각적이고 웅장한 스트링 편곡을 바탕으로 조지듀크(George Duke)와 키스자렛(Keith Jarrett)의 재즈적인 감성코드, 그리고 몇몇 곡에서 잠시 내비췄던 가스펠 성향의 곡들은 그의 음악을 지탱한 자양분이었고, 그가 지향하는 음악적 목표였다. 예리한 감수성으로 대중과의 소통을 꿈꾸는 그는 2005년 11월, 영화 < 야수와 미녀 > OST이자, 솔로 2집 앨범을 발표하면서 자신의 ‘특화’된 음악스타일을 확고히 다져가고 있다.
어니언스(Onions)의 노래 ‘작은새’의 작곡가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김정호는 국악의 명인들이 많은 외가 쪽의 피를 받고 태어났다. 그는 중학교 때 삼촌으로부터 선물 받은 기타로 음악가의 기질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고등학교 때에 밴드부에 가입해 악기를 다루었다. 졸업 후 미8군에서 기타를 치다가 후배 임창제가 결성한 그룹 어니언스의 앨범에 작곡자로 참여하게 되었으며 그룹의 인기와 더불어 그의 이름도 알려지게 ... 어니언스(Onions)의 노래 ‘작은새’의 작곡가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김정호는 국악의 명인들이 많은 외가 쪽의 피를 받고 태어났다. 그는 중학교 때 삼촌으로부터 선물 받은 기타로 음악가의 기질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고등학교 때에 밴드부에 가입해 악기를 다루었다. 졸업 후 미8군에서 기타를 치다가 후배 임창제가 결성한 그룹 어니언스의 앨범에 작곡자로 참여하게 되었으며 그룹의 인기와 더불어 그의 이름도 알려지게 되었다. < 쉘부르 > 등의 통기타 업소에서 노래를 시작한 그는 그룹 4월과 5월에서 잠깐 머물다가 1973년 자신의 자작곡인 ‘이름 모를 소녀’로 데뷔했다. 이후 ‘하얀 나비’로 정상에 오른 그는 ‘사랑의 진실’, ‘잊으리라’, ‘꽃잎’ 등의 히트곡을 쏟아 부으며 최고의 포크가수로 자리 매김 한다. 그는 < 꽃잎 >이란 카페를 운영하며 강은철, 김학래, 임하룡, 남궁옥분 등과 함께 무대에 섰으며 자주 국악 공연을 관람하며 소울풀한 음색에 토속적인 맛을 입혔다. 폐결핵 환자라는 소문이 돌던 시기에, 그는 1975년 마약 사범으로 잡혀 들어간다. 그는 이 대마초파동으로 구금되어 정신병원까지 가야 했으며 이후 두문불출하며 자신의 깊어지는 병마와 싸웠다. 심해지는 병은 그를 파산으로 몰고 갔으며 변변치 않던 작곡비로 연명하던 그는 단칸방을 전전해야 했다.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5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끊어 녹음한 끝에 1983년 마지막 앨범을 낸 김정호는 병원의 환자에게서 영감을 얻은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로 재기에 성공하지만 결국 병을 이기지 못하고 1985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임종 3개월 전, 딸에게 자신이 인기가수였음을 증명하기 위해 TV에 출연했고 이것이 마지막 그의 모습이 되었다. 그의 유작에선 또한 ‘하얀 나비’와 함께 그의 죽음을 예견한 곡으로 비유되곤 하는 ‘님’이 사후에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의 음악은 포크로 분류되지만 독특한 음색에서 품어져 나오는 혼의 목소리는 소울과 블루스의 어느 지점에서 머물고 있으며 마지막까지 꽹과리를 들고 우리의 소리에 심취한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또 다른 원천은 국악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사망하자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던 이종환의 < 밤의 디스크쇼 >에서는 추모 방송을 연일 내보냈고 1986년에는 홍민, 김수희, 김학래, 하남석, 윤시내, 김범룡, 이정선, 신형원, 윤승태, 한마음, 전영록, 김현식, 서수남, 하청일, 송창식, 이태원, 강은철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힘을 합친 트리뷰트 음반이 나왔다. 그리고 그의 생을 영화화한 < 님 >이 개봉되었다. 팬들의 사랑이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그는 1998년 조선일보가 선정한 < 건국 이후 가수 베스트 50 > 중에서 30위를 차지하는 위용을 과시했다.
고등학교 때 강은철이 불러 히트한 《삼포 가는 길》을 작사·작곡했다. 김흥국의 《호랑나비》, 《59년 왕십리》, 이동기의 《춘희》, 김재희의 《애증의 강》, 이예린의 《포플러 나무 아래》등을 작곡했다. 1983년 《은지》라는 노래 작품을 발표하면서 정식 가수 데뷔했다. 양현경 등과 함께 배따라기로 활동하며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아빠와 크레파스》, 《비와 찻잔 사이》등을 히트시켰다. 가족뮤지컬 《아빠... 고등학교 때 강은철이 불러 히트한 《삼포 가는 길》을 작사·작곡했다. 김흥국의 《호랑나비》, 《59년 왕십리》, 이동기의 《춘희》, 김재희의 《애증의 강》, 이예린의 《포플러 나무 아래》등을 작곡했다. 1983년 《은지》라는 노래 작품을 발표하면서 정식 가수 데뷔했다. 양현경 등과 함께 배따라기로 활동하며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아빠와 크레파스》, 《비와 찻잔 사이》등을 히트시켰다. 가족뮤지컬 《아빠와 크레파스》를 제작하면서 《꼬마 요리사》, 《내 친구 똥》, 《이를 닦는 슈퍼맨》, 《꼬마와 해바라기》, 《내 이름은 풀잎이에요》, 《밥 송(감사합니다 송)》, 《맛있는 우유 송》 등의 동요를 발표했다.
서울대학교 잠사학과 졸업. 그룹 '산울림'의 리드보컬. 1977년 록 밴드 ‘산울림’ 1집 〈아니 벌써〉로 데뷔한 뒤 지금까지 가수와 배우, 방송 진행자로 활약하고 있다. 주요 음반으로 산울림 1집~13집을 비롯해 「개구장이」 「산할아버지」 「운동회」 등 동요집들이 있다. 2008년, 젊은 뮤지션들과 ‘김창완 밴드’를 결성하여 EP 앨범 「The Happiest」와 1집 「BUS」(2009)를 발표했다. 현재 S... 서울대학교 잠사학과 졸업. 그룹 '산울림'의 리드보컬. 1977년 록 밴드 ‘산울림’ 1집 〈아니 벌써〉로 데뷔한 뒤 지금까지 가수와 배우, 방송 진행자로 활약하고 있다. 주요 음반으로 산울림 1집~13집을 비롯해 「개구장이」 「산할아버지」 「운동회」 등 동요집들이 있다. 2008년, 젊은 뮤지션들과 ‘김창완 밴드’를 결성하여 EP 앨범 「The Happiest」와 1집 「BUS」(2009)를 발표했다. 현재 SBS 파워FM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와 MBC TV 「음악여행 라라라」의 진행을 맡고 있다.

"내가 정말로 쓰고 싶은 글은 판타지 소설"이라고 밝힌 그는, ‘인간 김창완’이 드러나지 않는 글, 상상력을 극대화한 이야기를 한 편씩 써나갔다. 영감이 떠오를 때면 바닥에 엎드려 종이에 이야기를 풀어내며,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사람에 대해 전지적 입장에서 쓰는, 가르치려는 글은 싫다”고 말하는 작가 김창완. 그가 이제 『사일런트 머신, 길자』를 통해 “문학으로 자신의 존재를 없애는” 작업을 열어 보인다.
1975년의 가요정화운동과 대마초 파동으로 황폐화된 음악계에 한 줄기 서광을 비쳐 준 것은 삼 형제로 구성된 산울림이었다. 10대 중반부터 작곡을 시작했던 이 형제들은 김창완의 대학 졸업 기념으로 만든 데뷔 앨범으로 한 순간에 가요계를 전복시켰고 우리 모두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의 역사적인 데뷔 음반과 동시대성을 획득한 이들의 데뷔 음반은 끝없는 창작욕을 발현한 첫 번째 단추... 1975년의 가요정화운동과 대마초 파동으로 황폐화된 음악계에 한 줄기 서광을 비쳐 준 것은 삼 형제로 구성된 산울림이었다. 10대 중반부터 작곡을 시작했던 이 형제들은 김창완의 대학 졸업 기념으로 만든 데뷔 앨범으로 한 순간에 가요계를 전복시켰고 우리 모두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의 역사적인 데뷔 음반과 동시대성을 획득한 이들의 데뷔 음반은 끝없는 창작욕을 발현한 첫 번째 단추가 되었으며, 신중현이 열어 놓은 록의 세계를 아마추어의 경지에서 마음껏 조리한 역사적인 음반이 되었다. 둘째 김창훈의 곡인 ‘나 어떡해’를 부른 샌드페블즈가 대상을 받은 제1회 MBC 대학가요제에 ‘문 좀 열어 줘’란 곡으로 출전했지만, 김창완이 졸업생 이여서 자격미달로 실격한 이들은 자신들의 기념 음반을 가지고 싶었던 나머지 친척들을 졸라 앨범 제작비를 구걸했고 그간 만들어 놓았던 150곡 중 몇 곡을 추려 데모 테이프를 만들었다. 그리곤 가장 가까운 레코드 회사인 서라벌을 찾아가 자신들의 소원을 얘기했다. 이들의 데모 테이프를 들어 본 사장은 아무 조건 없이 음반을 만들어 주겠다며 손수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고 이들의 이름을 산울림으로 지어 주었다. 하지만 이들이 가져온 악기는 연주를 하고 나면 줄이 풀려 끝까지 마칠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평론가 이백천에게서 팬더사의 스트라토 기타와 암페그에서 만든 베이스를 빌려온 이들은 하루만에 녹음을 끝마쳤으며 음반의 성공을 예상하지 못한 채 본격적인 사회인이 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렇게 탄생한 이들의 데뷔 음반은 상상을 초월하는 성공을 거두며 삽시간에 팔려 나갔다. 그리고 명반으로 꼽히는 2집을 4개월만에 내놓았으며 역시 파격과 혁신의 메아리로 소리를 내지르며 커다랗게 산울림을 자아냈다. 이것은 2집이 나온 지 6개월만에 발매된 3집의 ‘그대는 이미 나’로까지 이어진다. 동생들이 군대에 가자 산울림은 제대로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4집은 각종 드라마와 영화, 연극 등에 쓰였던 주제곡들을 모아 편집한 음반으로 발매했고 5집은 동생들이 휴가 나온 사이 녹음을 끝내야 했다. 데뷔 음반의 폭발적인 반응에서 멀어진 듯한 이들의 인기는 6집의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동생들이 제대하고 같이 만든 7집의 ‘청춘’, 8집의 ‘내게 사랑은 너무 써’와 같은 스탠더드 류의 히트곡으로 계속 이어지며 초창기의 실험정신이 가득했던 곡들보다는 대중성이 뛰어난 곡들로 꾸며지며 계속 전성기를 누린다. 하지만 3인 밴드 최상의 사운드를 들려주며 우리 나라 헤비메탈 사운드의 포문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9집이 상업적으로 실패하자 이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혼자 남은 김창완은 < 기타가 있는 수필 >이란 솔로 앨범에서 ‘어머니와 고등어’를 히트시키며 이후 계속 되는 솔로 여정의 첫 삽을 뜬다. 그는 이어 본인이 혼자 만든 산울림 10집에서 감상적 발라드 ‘너의 의미’를 히트시킨다. 그는 또한 가능성 있는 신인들을 모아 포크 그룹 꾸러기들을 만들어 활동에 들어갔으며 ‘아주 옛날에는 사람이 안 살았다는데’라는 긴 제목의 곡으로 100일간의 장기 공연을 치뤄 냈다. 밴드 음악의 감독으로 산울림을 지휘한 김창완의 한편에는 동요라는 장르가 있다. 처음의 기획의도는 기존의 동요를 재해석하는 것이었지만, 대부분의 곡들이 외국 곡이라는 한계를 알게 된 그는 직접 동심의 세계를 표현한 곡들로 시장을 두들겼고 ‘개구장이’, ‘산할아버지’, ‘안녕’ 등과 같이 정규 앨범의 히트곡 못지 않은 인기곡들을 양산한다. 그의 동요 앨범들은 그의 천진무구한 창작적인 감수성이 뽑아낸 새로운 시도였다. 9집 이후 김창완 혼자서 작업했던 산울림은 과거의 뮤지션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다시 합체식을 가졌다. 국내에서 트리뷰트를 받은 몇 안 되는 아티스트의 반열에 오른 이들은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로 노익장을 과시했으며 ‘내 마음’에서 보여준 김창훈의 메탈성 보컬로 오랜만에 원초적인 삼 형제의 힘을 발휘하며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음악 자체의 순수성을 엮어낸다. 그리고 폭풍 속의 댄스씬을 빠져 나온 우리는 깨닫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산울림이 있었다는 것을.
1970년대에 중창단의 진영으로 빼어난 선율과 화음의 융화를 선보이며 모던 포크 계열의 선두에 섰던 혼성그룹 해바라기는 처음에 김의철을 리더로 하고 한영애, 김영미, 이광조가 한 팀이 되어 명동에 있는 업소를 중심으로 노래를 불렀다. 김의철이 건강상의 이유로 팀을 떠나자, 이정선이 대장으로 들어오고 이광조가 군에 간 사이에 이정선과 자주 콘서트를 가졌던 이주호가 들어와 4인조의 진영을 갖춘다. 명동 카톨릭 여학생... 1970년대에 중창단의 진영으로 빼어난 선율과 화음의 융화를 선보이며 모던 포크 계열의 선두에 섰던 혼성그룹 해바라기는 처음에 김의철을 리더로 하고 한영애, 김영미, 이광조가 한 팀이 되어 명동에 있는 업소를 중심으로 노래를 불렀다. 김의철이 건강상의 이유로 팀을 떠나자, 이정선이 대장으로 들어오고 이광조가 군에 간 사이에 이정선과 자주 콘서트를 가졌던 이주호가 들어와 4인조의 진영을 갖춘다. 명동 카톨릭 여학생회관 해바라기 홀에서 콘서트를 갖기 시작한 이들은 1977년 8곡의 합창곡과 4곡의 솔로 곡이 실린 첫 음반을 발표하고 ‘구름 들꽃 돌 연인’을 히트시키며 기타를 든 청년들에게 주요한 레퍼토리를 제공 해 준다. 이 음반은 이미 2장의 솔로 앨범으로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과시한 이정선이 프로듀서의 위치에서 참여했고 그를 비롯한 각 멤버가 솔로 한 곡씩을 불렀다. 이 중 이주호가 고교 시절 지었다는 ‘마음 깊은 곳에 그대로를’은 한영애의 목소리로 담겨 있으며 후에 이주호, 유익종의 해바라기가 리메이크 한다. 1집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이들은 1978년 두 번째 앨범을 발표한다. 이주호 대신에 이광조가 한 자리를 차지한 이 앨범에는 ‘뭉게 구름’이 히트를 했고 같은 해 < TBC 해변가요제 >에서 징검다리의 노래로 대상을 차지한 ‘여름’, 이정선의 솔로 앨범에 수록했었던 ‘섬 소년’ 등이 앨범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다. 이 앨범을 끝으로 이정선은 이광조, 엄인호와 풍선이란 그룹을 만들어 활동했고 한영애는 솔로 앨범의 실패로 연극계로 발을 옮긴다. 그리고 김영미는 유학을 떠난다. 1986년 김영미의 일시적인 귀국으로 같이 모이게 된 이들은 ‘우리가 지금은 헤어져도’, ‘우리네 인생’이 수록된 고별 앨범을 발표한다. 이중 타이틀곡인 ‘우리가 지금은 헤어져도’는 이별과 재회의 희망을 단아하게 노래해 라디오를 중심으로 아주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영화배우 황해와 가수 백설희를 부모님으로 모시고 있는 전영록(1955년)은 고등학교 2학년 때 KBS 노래자랑에서 입상하면서 가요계에 데뷔했다. 처음에는 부모님 몰래 노래를 불렀지만 뒤에는 전폭적인 지원을 얻은 그는 데뷔 곡 ‘나그네 길’을 히트시켰고 이어 ‘애심’이란 곡으로 인기를 끌었으며 < 제7교실 >과 같은 영화에 출연했다. 한동안 가요계를 떠나있던 그는 불치의 병에 걸린 한 팬이 접어준 천 마리의 종이학... 영화배우 황해와 가수 백설희를 부모님으로 모시고 있는 전영록(1955년)은 고등학교 2학년 때 KBS 노래자랑에서 입상하면서 가요계에 데뷔했다. 처음에는 부모님 몰래 노래를 불렀지만 뒤에는 전폭적인 지원을 얻은 그는 데뷔 곡 ‘나그네 길’을 히트시켰고 이어 ‘애심’이란 곡으로 인기를 끌었으며 < 제7교실 >과 같은 영화에 출연했다. 한동안 가요계를 떠나있던 그는 불치의 병에 걸린 한 팬이 접어준 천 마리의 종이학을 계기로 다시 음악계로 돌아왔다. 이 당시의 사연을 노래로 만든 ‘종이학’으로 인기 가수의 문을 다시 두들긴 것이다. 이 곡에 이어 그는 해 마다 ‘그대 뺨에 흐르는 눈물’,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 봐’, ‘그대가 미워요’, ‘불티’, ‘그대 우나봐’ 등을 히트시키며 조용필 외에 한 앨범에서 두 곡 이상을 가요 Top 10에 올리는 유일한 가수가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밤에’,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하얀 밤에’, ‘내 사랑 울보’, ‘이제 자야하나 봐’ 등을 히트시킨 1986년과 1987년에는 조용필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2년 연속 KBS 가수왕의 영예를 차지하기도 했다. 무그 연주가 2분 이상 울려 퍼지는 전주를 가진 ‘불티’의 뮤직비디오로 당시 가장 비주얼한 측면을 신경 썼던 전영록은 직접 감독을 맡은 < 돌아이 >란 영화의 시리즈로 또한 명성을 날린다. 가장 인기 있었던 시리즈는 < 돌아이2 >로 상당히 많은 관객이 그의 액션을 보러 영화관을 찾았다. 라디오 프로그램 < 젊음의 음악캠프 >, < 밤을 잊은 그대에게 > 등에서 DJ를 맡은 그는 1988년 발표한 앨범에서 ‘저녁놀’, ‘추억’, ‘아직도 못 다한 이야기’ 등 3곡을 연속해서 히트시켰으며 그 이듬해에는 ‘바람에 실려간 사랑’, ‘아직도 새벽은 오질 않아’를 히트시키며 오랜 동안 인기를 끌었지만 아버지와 함께 부른 ‘황혼’이란 곡이 들어 있는 1990년도 음반에서 ‘창가에 흐르는 세월’이 별 반응을 얻지 못하며 이후로는 인기를 회복하지 못했다. 양수경, 임백천, 이은하 등에게 곡을 주며 히트 작곡가로도 인기를 얻었던 그는 현재 라디오 프로그램 < Oldies But Goodies >를 진행하고 있으며 자신이 운영하는 미사리의 라이브 클럽에서 매일 밤 노래를 부르고 있다.
노래만을 위해 혼을 불사른 가수로 사후에 절대적인 평가를 받는 김현식은 고등학교 시절 밴드부에 몸담은 경력이 있으며 학교에서 자퇴한 후에는 음악다방에서 통기타를 치며 음악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는 1978년 이장희의 주선으로 솔로 앨범을 준비했으나 대마초 사건과 회사 사정으로 2년이나 늦게 자신의 앨범을 갖게 된다. 이 앨범에는 후에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의 주요 레파토리가 되는 ‘봄여름가을겨울’이 있고 3집에 다... 노래만을 위해 혼을 불사른 가수로 사후에 절대적인 평가를 받는 김현식은 고등학교 시절 밴드부에 몸담은 경력이 있으며 학교에서 자퇴한 후에는 음악다방에서 통기타를 치며 음악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는 1978년 이장희의 주선으로 솔로 앨범을 준비했으나 대마초 사건과 회사 사정으로 2년이나 늦게 자신의 앨범을 갖게 된다. 이 앨범에는 후에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의 주요 레파토리가 되는 ‘봄여름가을겨울’이 있고 3집에 다시 실리는 ‘떠나가 버렸네’ 등이 실려 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밤무대를 떠도는 무명의 가수로 생계를 이어간다. 결혼과 함께 피자 가게를 운영하기도 했던 그는 1984년 그의 소울 창법이 블루스 속에서 빛을 발하는 2집을 발표한다. 이 앨범에서 ‘사랑했어요’와 ‘어둠 그 별빛’, ‘당신의 모습’ 등이 크게 사랑 받았으며 그는 대중적인 인지도를 서서히 얻기 시작한다. 그는 한때 조원익이 리드하고 최구희가 기타를 치던 그룹 동방의 빛 리드싱어로 있기도 했으며 이 그룹의 해체 후에는 정성조가 팀을 이끌어 가던 메신저스의 싱어도 맡으면서 진가를 발산하기도 했다. 김종진, 전태관, 고 유재하와 후에 빛과 소금이라는 그룹으로 활동하는 박성식 장기호 등과 함께 만든 그룹 봄여름가을겨울과 같이 한 3집은 그를 인기 가수로 만든 앨범이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인기를 얻은 ‘비처럼 음악처럼’은 비가 오는 날이면 여지없이 라디오의 전파를 탔으며 ‘그대와 단둘이서’, ‘쓸쓸한 오후’ 등이 연이어 인기를 끌었다. 이 앨범에는 후에 그들의 앨범에 실리게 되는 ‘쓸쓸한 오후’를 비롯한 봄여름가을겨울의 작품과 유재하의 작품 ‘가리워진 길’ 등이 수록되어 있다. 대마초로 약 2달간 전인권, 허성욱 등과 구속되었던 그는 삭발 콘서트를 벌여 대성공을 거두고 1988년 4집을 발표한다. ‘언제나 그대 내 곁에’가 사랑을 받은 4집에는 윤상의 데뷔 곡 ‘여름밤의 꿈’ 고 유재하의 ‘가리워 진 길’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3집의 ‘우리 이제’에 이어 ‘한국 사람’이라는 하모니카 곡이 그의 연주로 한 트랙을 차지하고 있다. 이정선과 엄인호의 신촌블루스에서 절절한 필링의 블루스를 열창하던 그는 강인원, 권인하, 신형원 등과 영화 < 비오는 날의 수채화 >의 메인 타이틀을 불러 엄청난 인기를 모은다. 그러나 고독을 항상 술로 달래던 그는 이 때부터 육체적으로 힘든 나날 속에 노래를 부르는 병자의 모습으로 살게 되고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가운데 병원을 드나들기 시작한다. 1990년에는 그의 공식적인 앨범으로서는 마지막인 5집이 발매되고 하반기에는 그가 ‘이별의 종착역’을 부른 신촌블루스 3집이 발매된다. 그의 5집은 특별한 히트곡은 없었지만 ‘넋두리’, ‘향기 없는 꽃’이 사후에 사랑을 받았으며 < 비오는 날 수채화 >에 실린 ‘그 거리 그 벤치’도 영화 사운드 트랙의 판매에 힘입어 라디오에서 자주 흘러 나왔다. 1990년 11월 1일 오후 5시 20분 그는 초인적인 힘으로 6집을 녹음하다 지병인 간경화로 자택에서 사망했다. 불과 서른 두 살의 나이로 그를 아끼는 많은 팬들과 동료들의 염원도 소용없이 너무나도 빨리 지상에서 사라졌다. 사후 앨범인 6집은 팬들의 명복 속에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으며 히트곡 ‘내 사랑 내 곁에’는 오태호에게 작곡가상의 영예를 안겨 주었다. 그의 사망 1주기에는 추모콘서트가 열려 김수철, 이정선, 전영록, 강인원, 조하문, 한영애, 김태화, 봄여름가을겨울 최호섭, 권인하 등 30여 명의 가수들이 참가해 그의 노래를 부르며 그의 부재를 안타까워했고 2000년에는 그의 트리뷰트 앨범에 신인 가수와 중견 가수들이 골고루 참여해 그를 기리는 것은 물론 가요계 화합의 장으로 이어졌다. 김현식, 그는 모든 악기와 곡의 멜로디, 리듬을 떠나서 목소리만으로도 영혼을 울릴 수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그의 음성 자체가 외로움이 되고 사랑이 되며 무궁무진한 절대적 표현이 됨을 보여준 절창의 뮤지션이다.
“오늘 내가 디딘 자국은 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리라”. 선구자적인 발상으로 조국의 독립과 자주를 위해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았던 백범 김구 선생님의 이 말을 그대로 옮겨온다면, 오늘날 이 말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대중 음악의 마지막 투사 정태춘(1954년)일 것이다. 그는 < 실업극복국민운동 >부터 시작해 <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 북한동포 기금마련 < 한가족 열린 음악회 >, < 고 문익환 목사 ... “오늘 내가 디딘 자국은 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리라”. 선구자적인 발상으로 조국의 독립과 자주를 위해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았던 백범 김구 선생님의 이 말을 그대로 옮겨온다면, 오늘날 이 말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대중 음악의 마지막 투사 정태춘(1954년)일 것이다. 그는 < 실업극복국민운동 >부터 시작해 <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 북한동포 기금마련 < 한가족 열린 음악회 >, < 고 문익환 목사 헌정 음반 >, 서구의 문화침탈에 대항한 <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 >까지 자신의 참여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사회개혁의 기치를 빼어들었다. 그는 비록 김민기와 같이 시대적 요청의 화합물이 되거나 서태지와 같은 권능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 나간 파워맨은 아니었지만, 고군분투하여 따낸 사전검열제도폐지와 끔찍한 진실의 현장을 포착한 < 아! 대한민국 >, < 92년 장마, 종로에서 > 등으로 그 동안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지 못했던 소위 운동권의 저항가요들을 뛰어넘었다. 그것은 대학이란 포장지로 감싼 운동권 가요의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는 민중의 노래였으며 오랜 시간 다져진 글래디에이터의 자신에 찬 고백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고 중학교에 들어서는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 이 농부의 아들은, 고등학교 때는 현악반에 다니면서 음악대학에 대한 꿈을 키운다. 하지만 청년시절의 방황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지도 선생님과의 이별은 그를 어두운 사춘기적 자화상 속에서 살게 했고, 재수와 함께 시작된 여러 번의 가출은 이 우울한 시인을 젊은 날의 불안한 군상들 속으로 인도했다. 그는 마음을 잡지 못했고 결국 군대를 가야했다. 이미 학창시절에 곡을 쓸 줄 알았던 그는 이 시절에 ‘서해에서’, ‘시인의 마을’, ‘사랑하고 싶소’와 같은 곡들을 만들었으며, 차근차근 모아두었던 곡들로 제대 후 평론가 최경식의 주선에 의해 서라벌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게 되었다. 1978년 말에 발표한 첫 번째 음반은 엄청난 대중적인 파고를 일으키며 정태춘을 스타덤으로 인도했다. 비록 많은 가사들이 검열에 의해 수정되긴 했지만 그는 ‘시인의 마을’로 1979년 MBC 신인가수상을 수상했으며 ‘촛불로’ TBC 방송가요대상 작사부문을 받았다. 그리고 이 신인가수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978년 만난 인생의 동반자 박은옥과 1980년 결혼식을 올린다. 불교적 색채를 드러낸 2집, 국악과 양악 편곡의 멋진 대비를 보여주는 3집의 실패로 경제적인 압박을 받은 그는 부인 박은옥과 같이 하기 시작한 1984년의 앨범에서 ‘떠나가는 배’로 또 다시 스매시 히트를 터트린다. ‘사랑하는 이에게’라는 스테디 리퀘스트곡을 남긴 이 음반은 포크적 색채를 버리고 스트링 세션 위주의 편곡으로 좀 더 대중적으로 다가간 앨범이었다. 음악을 포기할 마음까지 먹었던 그는 이 음반의 성공으로 다시 활기를 되찾았으며 1985년 1월부터 시작된 < 정태춘.박은옥의 얘기 노래마당 >라는 공연을 벌였다. 자신의 음악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 이 공연에서, 자연스럽게 사회적인 문제들을 얘기할 수 있는 솔직한 태도가 좋았던 그는 TV를 배제한 활동을 계속했으며 ‘북한강에서’, ‘붕숭아’와 같은 곡으로 계속 대중적인 인기를 모았다. 민주화 투쟁과 6.29 선언 등으로 변화한 국내의 분위기를 실감한 그는 검열을 의식해 발표하지 못했던 곡들을 모아 < 무진 새노래 >라는 타이틀로 내놓으며, 이 때부터 달라진 사회적인 시각과 국악에 대한 애정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엉켜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1988년부터는 <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 >라는 공연을 펼쳐 외세의 시각이 진실인 것처럼 되어 있는 현 세대를 교정하는 작업을 시작했으며, 같은 해, 청계피복노조 지지공연을 시작으로 전교조 지지공연, 전노협 지지공연 등에 참석하거나 주도적으로 행사를 만들어 대중집회의 단골주자로 부상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만들어진 < 아, 대한민국 >이 1990년 발효된 새 음비법을 따른 공륜에 의해 거부당하자, 음반을 불법 복제 테이프로 만들어 발표하며 전면적인 투쟁을 선포했으며1991년 1월 29일 < 음반 및 비디오에 관한 법률 개악 저지를 위한 대책위원회 >의 위원장을 맡아 반대 성명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사전검열제도 폐지와의 기나긴 투쟁이 시작된다. 그는 계속해서 < 92 장마, 종로에서 >를 테이프로 제작해 배포했으며 이 앨범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상당한 판매량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의 피땀 어린 노력이 배어 있는 사전 심의 조항 폐지 운동은 1995년 11월 7일 국회를 통과하며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한 힘없던 시인의 승리는 이렇게 기나긴 길을 돌아서 찾아왔다. 그의 고생을 우리는 피상적으로밖에는 알 수 없지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감동과 환희의 순간이었다. 1998년 정태춘은 늘 함께 해온 부인 박은옥과 함께 20주년 기념 음반을 발표했다. 함춘호, 조동익 등의 일급 세션이 참여한 이 앨범에서는 초창기 서정미의 단아해진 멜로디들을 들을 수 있으며 한 층 더 깊이가 새겨진 선동성을 읽을 수 있다. 포크 음악인들 위주의 중견 가수들과 함께 위성방송에 음악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콘텐츠 회사 S.O.K를 설립한 그는 평생 넘어야 할 산처럼 버티고 있는 국악에 대중적인 접근을 꿈꾸며 지금도 대중 집회를 빠짐없이 순회하고 있는 이 시대 민중의 거울이다.


사회성 짙은 "한국적 포크"를 추구해온 대한민국의 가수, 시인, 싱어송라이터, 문화운동가, 사회운동가이다. 서정성과 사회성을 모두 아우르는 노랫말을 직접 쓰고 이를 국악적 특색이 녹아 있는 자연스러운 음률에 실어서 작품을 발표하기 때문에 한국의 대표적인 음유시인으로 불린다. 이번 내레이션 진행은 그의 첫 영화작업으로, ‘블랙딜’ 기획안을 보고 한번에 흔쾌히 작업에 참여하였으며, 울림있는 내레이션으로 다큐멘터리 영화에 진정성을 더했다.

Album
1978 《시인의 마을》
1980 《사랑과 人生과 永遠의 詩》
1983 《떠나가는 배(이어도)》
1985 《북한강에서》
1988 《정태춘 박은옥 무진 새노래》
1993 《92년 장마, 종로에서》
1995 《정태춘 박은옥 - 20년 골든》
2002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2012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1970년대를 풍미한 통기타 가수에서 최근 세시봉 열풍으로 다시금 전설을 이어가며 한결같은 목소리로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는 음유 가객. 자타가 공인하는 자전거 마니아이기도 한 그는 지난 20년 동안 틈만 나면 한강으로 나가 한강의 바람과 냄새에 몸을 실어 왔다. 은륜 위에서 만나온 한강을 서슴없이 '애인'이라 부른다. 1970년대를 풍미한 통기타 가수에서 최근 세시봉 열풍으로 다시금 전설을 이어가며 한결같은 목소리로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는 음유 가객. 자타가 공인하는 자전거 마니아이기도 한 그는 지난 20년 동안 틈만 나면 한강으로 나가 한강의 바람과 냄새에 몸을 실어 왔다. 은륜 위에서 만나온 한강을 서슴없이 '애인'이라 부른다.
여름이면 들려오는 ‘해변으로 가요’의 주인공인 키보이스(Keyboys)는 우리 나라에 그룹 사운드의 태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팀이다. 이들은 주로 서구 대중 음악인 팝에 가까운 음악들을 수용하며 국내에서 대중적으로 최고의 인기를 얻은 밴드였다. 우리 나라 최초의 그룹사운드로 인정되는 신중현의 애드4(Add4)가 롤링스톤즈 등의 흑인 소울에 가까운 음악들과 뛰어난 창작곡들을 선보이며 활동할 때, 이들은 엘비스 프... 여름이면 들려오는 ‘해변으로 가요’의 주인공인 키보이스(Keyboys)는 우리 나라에 그룹 사운드의 태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팀이다. 이들은 주로 서구 대중 음악인 팝에 가까운 음악들을 수용하며 국내에서 대중적으로 최고의 인기를 얻은 밴드였다. 우리 나라 최초의 그룹사운드로 인정되는 신중현의 애드4(Add4)가 롤링스톤즈 등의 흑인 소울에 가까운 음악들과 뛰어난 창작곡들을 선보이며 활동할 때, 이들은 엘비스 프레슬리나 비치보이스, 비틀즈의 대중적인 사운드에 영향을 받아 그들을 서슴지 않고 모방하는 뛰어난 엔터테이너적인 성격을 보여 주었다. 요절한 차중락은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의 모창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윤항기는 레이 찰스(Ray Charles)의 흉내를 내며 그룹의 대중적 인기와 화제를 끌어 모으는데 한 몫 했다. 이들이 발표한 ‘해변으로 가요’, ‘바닷가의 추억’, ‘정든 배’, ‘파도’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 그룹 비치보이스(Beach Boys)의 주요 레파토리인 서프 뮤직(Serf music)이라는 장르를 보급했으며, 공연에서뿐만 아니라 발표한 앨범들에 비틀즈의 ‘Ob-la-di, Ob-la-da'', 스페판 울프(Steppan Wolfe)의 ‘Born to be wild''를 넣는 등 미국 대중 음악의 수용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뛰어난 음악성을 선보이기보다는 젊은이들의 사랑에 관한 주제만으로 밤무대를 활동하며 해외 밴드의 곡들을 카피하는 수준 이였다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키보이스는 비틀즈와 동시대의 그룹으로 이후 우리 나라 밴드의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의 씨앗을 제공하는 무시무시한 화력을 가진 팀이었다. 애드포와 키보이스를 1세대로 둔 우리의 밴드 문화는 라디오에서의 고정적인 팝 음악 소개와 TV방송국 TBC에서의 < 쇼쇼쇼 >란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엄청난 증폭을 이뤄내며 밴드의 춘추전국시대를 시작한다. 여기에 혁혁한 공을 세운 키보이스의 멤버 중 차도균, 차중락은 가이스앤달스(Guys and Dolls)라는 팀으로, 윤항기와 김홍탁은 록앤키(Rock and Key)로 가서 새로운 그룹을 만든다. 그리고 한참 후에 다시 윤항기와 활동했던 록앤키의 조영조, 장영, 박명수는 키보이스 2기를 출범시킨다. 이러한 그룹에서 내공을 쌓은 가수들은 훗날 모두 솔로로 성공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차중락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곡 ‘Anything that''s part of you''를 번안한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을 히트시킨 후 1968년 세상을 떠났고, 솔로 가수로 절정의 인기를 누린 윤항기는 현재 목사가 되었다. 김홍탁은 사업가로 변했고 차도균은 업소를 운영하며 아직 음악과 인연을 맺고 있다.
노래 : Gloria Gaynor (글로리아 게이너)
노래 : Brian Hyland (브라이언 하일랜드)
노래 : Patti Page (패티 페이지)
노래 : Daniel Boone (다니엘 분,Peter Green)
‘You mean everything to me’, ‘Oh! Carol’, 그리고 ‘One way ticket’으로 국내 팝 음악의 수용 역사에 하나의 획을 그은 닐 세다카(Neil Sedaka)는 한 번도 어려운 전성 시대를 두 번이나 경험했다. 첫 번째 전성기는‘Oh! Carol(16위)’과 ‘You mean everything to me(17위)’, ‘Calendar girl(4위)’, ‘Little dev... ‘You mean everything to me’, ‘Oh! Carol’, 그리고 ‘One way ticket’으로 국내 팝 음악의 수용 역사에 하나의 획을 그은 닐 세다카(Neil Sedaka)는 한 번도 어려운 전성 시대를 두 번이나 경험했다. 첫 번째 전성기는‘Oh! Carol(16위)’과 ‘You mean everything to me(17위)’, ‘Calendar girl(4위)’, ‘Little devil(11위)’, ‘Bad girl(33위)’, ‘Breaking up is hard to do(1위)’, ‘Stairway to heaven(9위-레드 제플린의 노래와는 동명이곡)’, ‘Happy birthday, sweet sixteen(6위)’, ‘Next door to an angel(5위)’처럼 청소년기의 감수성을 읊은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였고, 두 번째 융성기는 엘튼 존(Elton John)을 비롯한 여러 친구들의 도움으로 ‘Laughter in the rain(1위)’, ‘Bad blood(1위)’, 그리고 캡틴 & 테닐(Captain & Tennile)이 커버해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는 물론 그래미에서 올해의 레코드 트로피를 거머쥐게 한 ‘Love will keep us together’같은 성인 취향의 팝록으로 재기에 성공한 1970년대 중반이었다. 세계 금융의 중심이 뉴욕의 월스트리트인 것처럼 영국 뮤지션들이 미국을 침공하기 이전인 1960년대 초반까지 미국 대중 음악의 황금기를 일군 심장부도 뉴욕에 위치한 브릴 빌딩가(街)였다. 바로 이곳에서 일류 작곡가들이 만든 명곡들이 가지를 뻗고 이파리를 피워 1960년대 음악을 꽃피게 했다. 캐롤 킹(Carole King), 버트 바카라크(Burt Bacharach), 레이버 & 스톨러(Leiber & Stoller), 베리 만 & 신시아 웨일(Barry Mann & Cynthia Weil), 닐 세다카 등은 당시 프리미엄급 작곡가였고, 이 중에서 캐롤 킹과 닐 세다카는 가수로 전업해 팝음악 계에 지워지지 않는 업적을 남겼다.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다루며 음악적인 능력을 키워 온 닐 세다카는 1939년 3월 13일 뉴욕의 브룩클린에서 태어났고 모든 음악인들의 선망의 대상인 줄리아드 음악 대학에 입학하면서 그 천재성을 입증하기 시작했다. 이 젊은 작곡가의 첫 번째 작품은 카니 프란시스(Connie Francis)의 ‘Stupid Cupid(17위)’였다. 이 곡의 히트로 각 음반사들이 눈독을 들인 닐은 1950년대 후반 RCA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가수로서의 캐리어도 쌓기 시작했다. 여자 친구였던 캐롤 킹에게 바치는 ‘Oh! Carol’과 ‘You mean everything to me’는 특히 우리 나라에서 국가 대표 급 팝송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Breaking up is hard to do’는 1962년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하면서 절정의 인기를 실감했지만 대서양을 건너온 영국 뮤지션들의 융단 폭격 때문에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위축된 활동을 보여주었다. 이 천재 아티스트는 1970년대에 들어서자 ‘I’m not in love’로 알려진 10CC의 멤버 그래함 굴드만(Graham Gouldman - 1980년대 앤드루 골드와 함께 Wax 결성)이나 엘튼 존(Elton John) 등의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Laughter in the rain’, ‘Bad blood’, ‘Love will keep us together’는 정상을 호령했고, 14년 전에 1위의 고지를 차지했던 ‘Breaking up is hard to do’는 새로운 생명력을 수혈받아 9위를 차지함으로서 다시 한번 팝음악의 고전임을 공인 받았다. 그래도 뭐니뭐니해도 국내에서는 현재 자동차 CF의 배경 음악으로 쓰여 TV 방송을 타고 있는 ‘Oh! Carol’과 ‘You mean everything to me’그리고 1980년대 초반 유로 디스코 밴드 이럽션(Eruption)이 재해석한 ‘One way ticket’이다. 1990년대 이후부터는 새로운 음반 작업보다는 예전의 히트곡들을 컴필레이션으로 짜집기하거나 자신의 곡들을 새로운 스타일로 재해석한 커버 버전 형식의 음반을 발매함으로서 예전의 영광을 답습하고 있지만 그가 여전히 위대한 가수 겸 작곡가라는 이 ’평가 불변의 법칙’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노래 : Elvis Presley (엘비스 프레슬리)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오늘날 폴과 비틀스를 있게 한, 단 한사람의 영향을 꼽는다면 위 해설처럼 단연 트럭운전사출신 엘비스 프레슬리다. 존 레논은 이를 결정적 한마디로 축약한다. “엘비스가 나타날 때까지 내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무 것도 없다(Nothing affects me until Elvis)." 존과 폴이 만나서 처음 마음먹은 것은 사실 엘비스의 음악을 더 강하게 표출해내는 것일 뿐이었다. 그들을 통해서 로큰롤의 진정한 역사는 ‘시대의 풍운아’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개막되었다는 사실이 다시금 확인된다. 물론 역사가에 따라 로큰롤의 효시를 행크 발라드(Hank Ballard)나 빌 헤일리(Bill Haley) 또는 척 베리(Chuck Berry)로 꼽기도 한다. ‘Work with me, Annie’ ‘Crazy man crazy’ ‘Maybellene’ 등과 같은 이들의 대표곡들이 시기적으로 먼저 구동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 다수 대중들은 여전히 로큰롤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엘비스가 나와서야 비로소 그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빌보드지의 결론. ‘1953년 록음악이 시작되었다고 하나 정작 차트나 방송에서 그 시대를 풍미하기 시작한 것은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싱글 ‘Heartbreak hotel’이 연속 8주 넘버원에 머물면서부터였다.’ 초기 로큰롤은 척 베리나 버디 할리와 같은 탁월한 ‘작가’를 소유했다. 리틀 리처드나 제리 리 루이스라는 출중한 ‘배우’ 그리고 조 터너, 보 디들리와 같은 ‘음악감독’들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로큰롤은 강풍을 휘몰아칠 역동적 ‘스타’가 필요했다. 그가 엘비스였다. 그 시대는 흑인의 리듬 앤 블루스를 소화해줄 백인가수를 요구했고 엘비스는 백인대중들로부터 ‘저 친구는 백인이면서 왜 검둥이노래를 부르는 거야?’라는 의아함을 일으킬 만큼 탁월한 흑인감성의 보유자였다. 이러한 시의성은 그러나 일반의 인식처럼 56년 RCA 소속의 엘비스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었고 이미 54년 선 레코드사의 엘비스로서 확립된 것이었다. 샘 필립스 사장의 전설적인 선 시절에 엘비스는 ‘That`s all right’, ‘Blue moon of Kentucky’ 와 ‘Mystery train’ 등을 부르면서 컨트리와 R&B를 크로스오버화한 신종의 로커빌리를 선보이면서 벌써 ‘웨스턴 밥의 왕’으로 불렸다. 이 때 이미 순회공연에서 팝 음악사상 초유의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다. 『뉴스위크』는 ‘금세기 백년간의 스타’ 특집기사를 다루며 그의 등장을 ‘20세기의 사건’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당시 엘비스 백업 밴드에서 드럼을 쳤던 D.J. 폰타나는 54년 상황을 다음처럼 술회한다. “엘비스 무대가 끝나고 나면 노래를 따라해 줄 관객들은 다 빠져버려 아무도 없었지요. 애들은 백 스테이지에서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습니다. 내 생각에 그 애들은 아마 우리 연주는 듣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오로지 ‘처음으로 흔드는 가수’ 엘비스를 보고자 하는 것이었죠.” 로컬 무대에서 전국 네트워크 TV로 진출하면서 마침내 ‘엘비스마니아’는 폭발했다. 미국의 3대 전국 공중파 방송 ABC CBS NBC의 체제가 정립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그는 텔레비전시대의 영웅으로서 ‘라디오스타를 죽이는’ 새로운 미디어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타미와 지미) 도시 브라더스의 CBS < 스테이지 쇼 >, NBC의 < 밀턴 벌 쇼 >와 < 스티브 알렌 쇼 > 그리고 저 유명한 CBS의 < 에드 셜리번 쇼 >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벌써 음악의 영상시대를 주도했다. 음악이 음반으로만 소구하던 시대는 ‘섹시 가이’ 엘비스의 출현으로 끝났다. ‘보는 음악’ 시대를 주도한 최초의 인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엘비스였다. 스탠다드 팝의 파수꾼 프랭크 시내트라도 자기 TV 쇼의 떨어지는 시청률을 참다못해 ‘음악의 공적(公敵)’이라고 성토해마지 않았던 엘비스를 출연시켜야 했다. TV 뿐만 아니라 영화 최초의 로큰롤 스타도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 러브 미 텐더 > < 러빙 유 > < G.I. 블루스 > < 블루 하와이 > 등 31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그는 관객들에게 로큰롤의 열정과 록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의 호소력을 제공했다. 음반 텔레비전 그리고 영화라는 ‘삼국통일’에 성공하며 천하를 제패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이 아래로 보일 정도의 막강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77년 사망하면서 그의 캐리어가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그는 무려 2억5천만장의 앨범을 팔았다. 이 기록에 가장 접근한 인물은 비틀스가 아닌 2억장의 빙 크로스비(캐롤 ‘White Christmas’가 결정적이다)며 프랭크 시내트라는 겨우 4천만장에 불과했다. ‘1인 기업’ 엘비스는 막대한 돈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인 핑크를 포함한 갖가지 칼라의 자동차 캐딜락을 구입했고 멤피스에 4만 달러 짜리 목장 그리고 10만 달러로 저택 그레이스랜드를 샀다. 전용 비행기는 물론 텔레비전 세트 그리고 첨단기계들도 마련했다. 물론 지금이야 흔해 빠진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특히 엘비스와 같은 하층계급 청년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부의 상징들이었다. 동시대 그리고 후배가수들이 일개가수에서 기업으로 융기한 엘비스를 통해 신분상승과 스타덤 획득 욕구를 품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엘비스처럼 슈퍼스타이면서 동시에 부자가 되고 싶어했다. 버디 할리는 엘비스를 빅 스타로서 존경했고 밥 딜런의 음악동기는 엘비스보다 큰(bigger than Elvis)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톰 존스는 아예 영국의 제록스판 엘비스였다. 엘비스처럼 구레나룻을 길렀던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직접 그를 만나기 위해 그레이스랜드 담을 넘다가 제지당했고 그룹 퀸은 엘비스를 안중에 두고 50년대 로큰롤풍의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를 만들었다(로저 테일러의 증언 “처음으로 텔레캐스터와 부기 앰프를 쓴 다소 빈약한 사운드였다. 분명 엘비스를 염두에 두고 만든 곡이었다.”). 마크 알몬드(Mark Almond)의 명쾌한 한마디를 들어보자. “그는 왕이다. 그밖에 다른 코멘트는 일체 필요없다!” 하지만 60년 전역 이후 엘비스는 달라졌다. 매니저였던 톰 파커 퇴역대령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음악방향이 빗나간 것이었다. 예의 로큰롤 넘버와는 거리가 먼 It`s now or never나 Surrender와 같은 감상적인 이탈리아 민요를 영역해 불렀다. 변화(아니면 변신?)의 징조는 프랭크 시내트라 쇼에 출연했을 때 뚜렷이 나타났다. 이 쇼에서 엘비스는 스탠다드 가수의 상징인 턱시도 정장을 했으며 호스트 프랭크 시내트라와 서로의 대표적 히트곡인 ‘Witchcraft’와 ‘Love me tender’를 바꿔 불렀다. 이 시점을 계기로 엘비스가 로큰롤을 버리고 스탠더드 팝 가수로 돌아서 청춘진영을 배신했다는 주장이 고개를 비집는다. 명백한 훼절이라고 단정해도 선뜻 반대논리를 펴기 어렵다. 그러나 친(親)엘비스 측은 그로써 그가 로큰롤 가수에서 ‘국민가수’로 승격하는 의미 있는 업적을 남기게 됐다고 반박한다. 로큰롤만의 논리로 음악을 풀고 엘비스를 규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어떻게 가치판단을 하느냐는 것은 관련자의 이데올로기나 각 시대의 성격에 따를 수밖에 없다. 변절이든 성숙이든 이 점만은 분명하다. 엘비스의 보컬이 초기의 로큰롤가수로 한정되었을 때 과연 후대에의 보컬 영향력을 소지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의 가창력은 음역, 에너지, 통제력, 피치 등 모든 면에서 압권으로 평가되어왔다.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었지만 ‘멀티칼라’인 그의 보이스에는 자니 레이의 급격한 변색, 두왑 그룹인 잉크스파츠(Inkspots) 빌 케니의 테너, 딘 마틴의 솜사탕 그리고 마리오 란자의 풍미가 동거했다. 그러면서도 로이 오비슨과 같은 유니크한 개성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스탠더드 발라드를 소화함으로 해서 우리들은 ‘Are you lonesome tonight’, ‘Suspicion’, ‘In the ghetto’, ‘The wonder of you’, ‘Fool’, ‘My boy’ 등의 팝 고전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명백한 역사의 유산이다. 그가 없었다면 성악가나 스탠더드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만을 접했을 것이고 로큰롤 싱어가 선사하는 발라드의 진미(珍味)를 영원히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공존공영 가능성을 그처럼 실감나게 시범한 가수도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이미 흑인감성의 전달로 로큰롤이 ‘흑백의 퓨전’임을 목소리 하나로 입증한 그는 이어서 역시 매직 보컬로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제휴를 일궈내는 업적을 남겼다. 어쩌면 우리가 70년대 록과 메탈 분야에서 형식을 확립한 이른바 ‘록발라드’라는 것도 그 원조는 엘비스일지도 모른다. 엘비스는 목소리를 통해 대중의 공감대를 전달한 몇 안 되는 가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건조한 보이스와는 거리가 먼, ‘이끼가 잔뜩 낀’ 풍부한 목소리였다. 아마 신나는 로큰롤 ‘Burning love’ 한 곡으로도 충분히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후대 음악팬들이 그의 노래를 듣고 더러 ‘느끼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후반기의 노래 가운데는 그런 요소를 풍기는 곡이 있었다. 하지만 엘비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거기서 느끼함이 아닌 되레 ‘풍성한 감성’을 수혈 받곤 한다. 미트 로프(Meat Loaf)는 말한다. “엘비스는 노래하는 것 무엇이든지 감정적으로 가사로 스피릿을 감상자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희구했던 명성과 부를 얻고 난 뒤 아쉽게도 그것들의 노예가 되는 비극적인 위인이기도 했다. 아무 데도 나갈 수가 없었고 편안히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도 불가능했다. 60년대나 70년대 로커였다면 이런 사실상의 ‘수감생활’을 극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래적 반항아’가 아니었다. 스타덤의 고독과 소외에 차츰 무너져간 그의 말년을 잘 나타내주는 일화는 무수히 많다. 70년대 들어서 조울증이 불거진 그는 때로 격렬해져 텔레비전 세트나 당구대, 주크박스, 자동차 등 가장집기를 부수는 발작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언젠가 D.J. 폰타나와 그의 아내 앞에서 엘비스는 자신의 감정상태를 이렇게 토로했다. “당신들은 운이 좋은 겁니다. 난 엘비스인게 너무 지겨워요! 뭘 해야될 지를 모르겠어요. 뭔가 딴 일을 했으면 제발 한이 없겠어요.” 고고음악의 대명사인 자니 리버스의 해석. “엘비스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었지요. 그래야만 했을 겁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그 밖의 다른 일이란 없었지요.” 엘비스만큼 화려한 명성과 처절한 고독이라는 양극단을 겪은(아니면 겪기로 강제된)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영욕의 교차요, 희비의 쌍곡선이다. 그래서 그를 통해 우리는 슈퍼스타덤의 빛 외에 냉혹함과 잔인성이라는 그림자를 동시 확인한다. 그의 사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심장마비로 발표되었지만 사후 마약중독 비만증 그리고 자살 등 정황에 근거한 갖가지 설들이 난무했다. 이는 그의 후반기 삶이 얼마나 철저히 비공개로 갇혀 있었는지를 반증한다. 스스로 창조한 혁명에 쓰러진 순종파 가수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비평에 의해 그의 역사적 위상이 훼손되는 일은 없다. 여전히 그는 만인이 공감하는 ‘킹 오브 로큰롤’이며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금세기 최고 가수’다. 비틀스가 그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한마디로 모든 엘비스의 가치는 입증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오류로 더러 지적되지만 비평가 고(故) 레스터 뱅스(Lester Bangs)의 엘비스 예찬은 되새길 가치가 있다. “우리는 엘비스에게 해준 것과 같은 동의를 앞으로 어떤 누구에게도 해주지 않을 것이다!”
노래 : Skeeter Davis (스키터 데이비스)
‘Diana’의 주인공 폴 앵카(Paul Anka)는 소녀 취향의 팝과 스탠다드 풍의 노래들로 1950년대 후반 전 세계의 ‘오빠부대’를 지휘했던 가장 인기 있는 틴 아이돌 스타였다. 1957년 왜소한 체구를 소유한 폴 앵카의 데뷔 싱글 ‘Diana’가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장기 집권에 성공하고 ‘You are my destiny(7위)’, ‘Crazy love(19위)’, ‘Puppy love(2위)’, ‘Lo... ‘Diana’의 주인공 폴 앵카(Paul Anka)는 소녀 취향의 팝과 스탠다드 풍의 노래들로 1950년대 후반 전 세계의 ‘오빠부대’를 지휘했던 가장 인기 있는 틴 아이돌 스타였다. 1957년 왜소한 체구를 소유한 폴 앵카의 데뷔 싱글 ‘Diana’가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장기 집권에 성공하고 ‘You are my destiny(7위)’, ‘Crazy love(19위)’, ‘Puppy love(2위)’, ‘Lonely boy(1위)’, ‘Put your head on my shoulder(2위)’, ‘It’s time to cry(4위)’등이 내리 차트를 강타하면서 그의 시대가 화려히 전개되었다. 이 곡들이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부드러운 멜로디는 물론, 소녀들의 가려운 데까지 손을 뻗쳐 그들의 감수성을 포착해냈기 때문이었다(그는 전곡을 직접 작곡하고 작사하는 당시의 보기 드문 싱어송라이터였다). 당연히 소녀 팬들의 열렬한 지지가 뒤따랐으며 동시대의 로큰롤 가수들을 못미더워 했던 부모들은 폴 앵카에게만은 안심했다. 1950년대 후반 기성세대의 눈에는 불량스러워 보이는 로큰롤 가수들과는 달리 그는 반듯하고 예의바른 이미지로 자신을 가꾸어 당시 부모님 세대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것이다. 확실히 그는 같은 시기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나 제리 리 루이스(Jerry Lee Lewis), 척 베리(Chuck Berry)보다는 팻 분(Pat Boone), 릭키 넬슨(Ricky Nelson), 닐 세다카(Neil Sedaka)처럼 점잖고 단정한 이미지를 강조했다. 1941년 7월 30일,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에서 아랍계 시리아인의 이민자 2세로 태어난 폴 앵카는 어려서부터 넘쳐흐르는 음악적인 끼를 주체할 수 없어 14살 때 캐나다판 ‘전국 노래 자랑’에 참가하기 위해 부모님의 차를 몰래 몰고 몬트리올까지 진군한 전과도 있었다. 그의 이러한 적극성은 훗날 그가 10대 스타를 거쳐 싱어 송라이터, 영화배우, 음반 제작자, 사업가 등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어린 시절 자신의 보모를 모델로 하여 16살 때 작곡한 ‘Diana’는 이 캐나다 가수의 데뷔 곡이었음에도 북미 지역과 영국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정상을 차지하면서 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싱어송라이터가 등장했음을 알린 기념비작이다. 그리고 이후의 소나기성 히트 퍼레이드로 그의 입지는 더욱 공고히 다져졌다. ‘Puppy love’는 1970년대 가족 그룹 오스몬즈(The Osmonds)의 막내 도니 오스몬드(Donny Osmond)가 리메이크해 3위에 랭크 시키면서 다시 한번 틴아이돌 세대의 명곡임을 입증했고, ‘Put your head on my shoulder’는 1990년대 후반 국내의 샴푸 CF에 쓰여 옛 향수를 자극하기도 했다. 그는 가수뿐만 아니라 동료들을 위해서 멋진 노래들을 만들어 준 음악적 동지로서의 역할도마다하지 않았다. 모범생 스타일의 천재 로큰롤러 버디 홀리(Buddy Holly)의 ‘It doesn’t matter anymore(13위)’와 정력적인 싱어 톰 존스(Tom Jones)의 신나는 넘버 ‘She’s a lady’(2위 - 리차드 샌더슨의 발라드와는 다른 곡),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를 위해 프랑스의 샹송 ‘Comme d’Habitude’를 개사한 ‘My way’, 자신이 직접 출연하기도 한 전쟁 영화 < 지상 최대의 작전 >의 주제가인 ‘The longest day’, 그리고 TV 토크쇼의 대명사로 자니 카슨(Johnny Carson)이 진행한 < 투나잇 쇼 >의 타이틀곡까지 그에게는 음악에 대한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30년 동안 매일 밤 방송된 < 투나잇 쇼 >와 불후의 명곡이 된 ‘My way’만으로도 그는 막대한 로열티를 받았을 것이다. 1970년대 중반, 훌쩍 어른이 되어 버린 왕년의 틴아이돌 스타는 환경이 변한 음악 시장에 적응해 재도약에 성공했다. 국내에서는 제목 때문에 방송금지 곡으로 묶였던 ‘(You’re) Having my baby’로 다시 한번 싱글 차트를 수복했고 ‘One man woman/One woman man(7위)’과 ‘I don’t like to sleep alone(8위)’, ‘Times of your life(7위)’ 모두 탑 텐을 기록하면서 꺼지지 않는 작곡 역량을 과시했다. 이 때가 제2의 전성기였다. 특히 1986년 이장호가 감독한 영화 < 공포의 외인구단 >의 주제곡으로 정수라가 부른 ‘난 너에게’는 ‘I don’t like to sleep alone’을 표절한 것으로 판명되어 ‘난 너에게’는 방송 및 판매가 금지되었다. 이 불세출의 남성 가수 노래들 중에서 ‘Happy’와 ‘Papa’는 외국 차트와는 상관없이 국내 팝 팬들에게 압도적인 사랑을 받았다. 아마도 1970년대 팝 팬들 가운데 ‘Papa’의 멜로디를 모르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이 곡과 데뷔작 ‘Diana’는 심지어 우리말로 번안되기도 해, 팝송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그의 노래는 무의식적으로 입력되어 있다. 데뷔한지 40년이 지난 현재까지 지치지 않고 음악 활동을 하는 그는 1990년대 중반 내한해 디너쇼 공연을 가져 우리의 기성세대들로 하여금 흥겨운 회상에 젖게 하기도 했다.
198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서 컨트리 음악의 인기 몰이에 공을 세운 가수는 덥수룩한 수염으로 유명한 케니 로저스(Kenny Rogers)다. 그는 분명 컨트리 아티스트지만 1980년대 초반 당시 국내에서 사랑 받았던 ‘Lady’, ‘Islands in the stream’, ‘We''ve got tonight’, 그리고 ‘Don''t fall in love with a dreamer’ 등은 정통 컨트리 음악과 거... 198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서 컨트리 음악의 인기 몰이에 공을 세운 가수는 덥수룩한 수염으로 유명한 케니 로저스(Kenny Rogers)다. 그는 분명 컨트리 아티스트지만 1980년대 초반 당시 국내에서 사랑 받았던 ‘Lady’, ‘Islands in the stream’, ‘We''ve got tonight’, 그리고 ‘Don''t fall in love with a dreamer’ 등은 정통 컨트리 음악과 거리가 멀었다. 1980년 6주간 정상의 자리를 지키면서 그의 대표곡이 된 ‘Lady’는 코모도스(Commodores) 출신의 흑인 싱어 송라이터 라이오넬 리치(Lionel Richie)가 작곡했고, 1983년 돌리 파튼(Dolly Parton)과 듀엣으로 녹음해 2번째로 1위에 등극한 ‘Islands in the stream’은 디스코의 지존 비지스(Bee Gees)의 맏형 배리 깁(Barry Gibb)이 만들어 준 곡이었으며 시나 이스턴(Sheena Easton)과 함께 한 ‘We''ve got tonight(1983년 3위)’은 미국의 록큰롤 싱어 송라이터 밥 시거(Bob Seger)의 노래를 리매이크 한 것이다. 그리고 킴 칸스가 만들고 함께 호흡을 맞춘 ‘Don''t fall in love with a dreamer(1980년 4위)’도 컨트리팝이라기 보다는 어덜트 컨템포러리 발라드다. 케니 로저스가 이렇게 컨트리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성인 취향의 소프트 팝도 막힘 없이 잘 소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팝그룹 더 퍼스트 에디션(The First Edition)과 포크 밴드 뉴 크리스티 민스트렐스(New Christy Minstrels)에 몸담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래를 부른 케니 로저스는 컨트리 가수였지만 국내에서 인기를 얻은 그의 노래들은 정통 컨트리가 아니었다. 케니 로저스의 사례는 정통적인 컨트리보다 팝적인 감성을 살린 컨트리팝이 보편적으로 사랑 받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1938년 8월 21일 미국 텍사스주의 휴스톤을 고향으로 태어난 케니 로저스는 1960년대부터 음악 경력을 쌓았다. 그가 맨 처음 시도한 음악은 재즈였지만 재미를 보지 못하자 더 퍼스트 에디션(The First Edition)과 뉴 크리스티 민스트렐스(New Christy Minsrels)같은 그룹에 가담해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다. 그러나 그가 대중들로부터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1972년 솔로 아티스트로서 활동을 개시 한지 5년이 지난 1977년 싱글 ‘Lucille(5위)’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농부인 남편과 4 자녀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인생사를 담은 이 진솔하고 구슬픈 곡은 당시를 평정하고 있던 신경 말초적인 가사로 유흥 지향적인 디스코에 카운터 펀치를 날려 대단한 성공을 일궈 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스크린에도 손길을 뻗쳐 < 갬블러 >, < 카워드 오브 더 카운티 > 등의 영화에 출연하고 주제가도 직접 불러 지속적인 인기를 유지했다. 절정의 인기에 있던 1980년대 초반에는 많은 여가수들과 듀엣 곡들을 취입했다. 위에 열거한 킴 칸스, 시나 이스턴, 돌리 파튼 외에도 자기보다 연상의 컨트리 싱어 도티 웨스트(Dottie West)와 짝꿍을 이뤄 ‘Everytime two fools collide’를 불러 여가수와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 가수라는 명예를 재확인했다. 1984년 킴 칸스, 흑인 싱어 제임스 인그램(James Ingram)과 화음을 맞춘 ‘What about me(15위)’를 끝으로 지금까지 이렇다 할 싱글 히트곡을 생산하지 못한 그는 올해 힙합 그룹 퓨지스(Fugees)의 멤버였던 와이클레프 진(Wyclef Jean)과 ‘Buy me a lose’를 공개하는 등 현재의 음악 씬을 이해하고 적응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웃 아저씨처럼 후덕한 인상에 바리톤 음색을 소유한 남부 출신의 케니 로저스가 부르는 노래들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슬프고 기쁜 일들을 가감 없이 진실하게 전한다. 그래서 이 턱수염 가수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그 곡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고 그것에 동화되는 마력에 빠져든다. 정통 컨트리 신봉자들은 컨트리팝 아티스트들을 폄하하지만 그들로 인해 컨트리 음악이 미국이라는 경계선을 넘어 많은 나라들에서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게 한 공로는 높이 평가돼야 한다. 그 중심에 당당히 서 있는 가수가 케네스 도날드 로저스(Kenneth Donald Rogers)란 본명을 가지고 있는 케니 로저스다.
노래 : Ben E. King (벤 이 킹,Benjamin Earl King)
노래 : Everly Brothers (에벌리 브라더스)
컨트리 음악 성향의 로커빌리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황금 형제듀엣. 형 돈 에벌리(Don Everly)는 1937년 켄터키주 브라우니 출생이고, 동생 필 에벌리(Phil Everly)는 1939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가수였던 부모와 함께 어릴 적부터 노래했고 컨트리의 본고장 내시빌에서 기타의 대가 쳇 애트킨스(Chet Atkins)에 초청되어 1955년에 첫 레코딩을 했다. 2년 뒤 소규모 음반사 케이던스와 계... 컨트리 음악 성향의 로커빌리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황금 형제듀엣. 형 돈 에벌리(Don Everly)는 1937년 켄터키주 브라우니 출생이고, 동생 필 에벌리(Phil Everly)는 1939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가수였던 부모와 함께 어릴 적부터 노래했고 컨트리의 본고장 내시빌에서 기타의 대가 쳇 애트킨스(Chet Atkins)에 초청되어 1955년에 첫 레코딩을 했다. 2년 뒤 소규모 음반사 케이던스와 계약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Bye bye love’, ‘All I have to do is dream’, ‘Bird dog’, ‘Cathy’s clown’ 등 빅 히트송이 줄을 이었다. 낭만적인 멜로디를 전하는 두 형제의 하모니가 압권. 1960년대의 사이먼 & 가펑클(Simon & Garfunkel) 등 많은 듀엣 팀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한 뱃속에서 태어난 형제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둘 사이가 나빠서 1973년에 해산했고 10년이 흐른 1983년에 재결합했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아 ‘Let it be me’, ‘Crying in the rain’ 등이 널리 애청되었다.
멤버: 토니 윌리엄스(Tony Williams),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 폴 로비(Paul Robi), 조라 테일러(Zola Taylor), 허브 리드(Herb Reed). 미국의 보컬 그룹. 멤버: 토니 윌리엄스(Tony Williams),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 폴 로비(Paul Robi), 조라 테일러(Zola Taylor), 허브 리드(Herb Reed).

미국의 보컬 그룹.
노래 : Edith Piaf (에디뜨 피아프 )
< 작은 체구 큰 노래 -세기의 가수 에디트 피아프 > 지금은 미국이나 영국의 음악에 밀려 유럽 가수들의 노래는 거의 전파를 타지 못하고 있지만 60년대까지만 해도 프랑스 샹송이나 이탈리아 칸소네의 위력은 대단했다. 국내의 당시 팝 팬들도 영미가수들 못지 않게 이브 몽탕, 줄리엣 그레코, 밀바 등 유럽가수들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 그 중에서도 40년대와 50년대를 석권한 프랑스 여가수 에디트 피아프(Edith P... < 작은 체구 큰 노래 -세기의 가수 에디트 피아프 > 지금은 미국이나 영국의 음악에 밀려 유럽 가수들의 노래는 거의 전파를 타지 못하고 있지만 60년대까지만 해도 프랑스 샹송이나 이탈리아 칸소네의 위력은 대단했다. 국내의 당시 팝 팬들도 영미가수들 못지 않게 이브 몽탕, 줄리엣 그레코, 밀바 등 유럽가수들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 그 중에서도 40년대와 50년대를 석권한 프랑스 여가수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는 전세계에 걸쳐 지명도를 확립한 금세기 톱 가수로 남아 있다. 시사주간지「뉴스위크」는 얼마 전 ‘20세기 100년의 스타들’ 특집을 마련하면서 에디트 피아프를 ‘불후의 프랑스 목소리’라고 칭송하고 별도의 지면을 할애했다. 그녀가 이처럼 지난 세기의 위대한 음악유산으로 기록되는 것은 단지 ‘진실하고 열정적으로’ 노래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력(死力)을 다해서 또 혼을 토해내며 노래를 불렀다. 엄청난 파괴력이 탑재된 그 막강한 소리가 왜소한 체구의 여성에게서 나온 것을 알고 나면 더욱 경이롭다. 피아프는 참새라는 뜻의 파리 속어로 그를 스타로 키워준 카바레 주인 루이 레플레가 그의 작은 체구를 두고 붙여준 별명이다(카바레는 지금 성인오락장으로 인식되어 있지만 애초에는 작은 뮤직 홀이었다). 1915년에 태어나 2차 대전 때인 1939년에 스타덤에 오르기 전까지 ‘작은 거인’ 피아프의 인생은 비참했다. 어머니는 피아프를 낳자마자 도망쳤고 아버지 역시 그녀를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멀리 떠나버렸다. 그녀는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90년대의 여가수 리앙 폴리는 말한다. “피아프는 안락과 돈이란 조금도 없이 시작해 길거리에서 노래했다. 지금의 흑인 랩 가수들과 다를 게 없다. 진실로 사랑의 이야기와 세상의 곤궁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그녀는 혁명적이었다.” 인기가 치솟으면서 프랭크 시내트라와 빙 크로스비 다음으로 돈을 많이 번 연예인이 됐지만 그랬어도 그녀의 생은 언제나 불행했다. 헤비급 복싱 챔피언 마르셀 세르당, 이브 몽탕, 자크 필스 그리고 26살 연하의 청년 테오 사라포 등 잇단 남자들과의 실연으로 고통을 당했으며 내내 술과 진통제에 의존해 살아갔다. 최근 영화 「노팅 힐」에서 엘비스 코스텔로가 불러 히트한 곡 ‘그녀(She)''의 오리지널 가수 겸 작곡자이며 ‘샹송의 대부’로 추앙되는 샤를르 아즈나부르는 이렇게 술회한다. “피아프는 복서 마르셀 세르당을 사랑했지요. 그는 경기를 위해 뉴욕으로 떠나 있었고 피아프는 베르샤이유에서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세르당은 피아프와 같이 있기 위해 일찍 떠났고 비행기는 추락하고 말았지요. 그녀는 이틀 아니면 사흘 자기 방에 꼭 박혀 있더니 삭발하고 나타나 ‘사랑의 찬가(Hymne a l''amour)''를 불렀습니다. 방에서 그 곡의 가사를 완성하여 죽은 세르당을 위해 노래한 것입니다.” 피아프의 또 다른 고전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도 이브 몽탕과의 핑크빛 사연이 빚어낸 곡이다. 이처럼 상상이나 허구가 아닌 실제의 삶이 진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녀의 노래가 우리에게 감동을 제공하는 것이다. 피아프는 음악과 예술에 헌신한 사람이다. 결코 인기나 영예를 노리고 노래한 것은 아니었다. 죽기 전 무대에서 노래부르다 쓰러져 스탭이 무대 밖으로 끌고 나오려고 했으나 그가 피아노 레그를 붙잡고 ‘노래는 마쳐야 한다’며 고집을 부려 노래를 끝까지 마친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영화「파니 핑크」에 사용되어 재조명된 후반기의 절창 ‘난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를 위시한 그의 무수한 노래를 듣고 있으면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가공할 전율을 경험하게 된다. 많은 사람이 스캔들, 비극, 알코올중독을 먼저 기억하고, 실상 그것들이 피아프를 시대의 아이콘으로 상승시킨 요소가 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기적 열창의 절대 파워가 빚어내는 미학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어떤 평자가 묘사한 것처럼 신성한 광기(Divine madness)라고 할까. 하지만 그녀는 노래의 터뜨릴 때를 알았던 것처럼 속삭일 때를 알았고 사람의 감정을 뒤흔들어놓을 때를 알았다. 그리하여 그녀의 노래에는 폭발과 절제가 절묘하게 동거한다. 간혹 전문가들은 그녀가 잘하는 노래가 아니었다고 주장하지만 그녀의 노래에 투영된 진실성과 불굴의 에너지만으로도 피아프가 ‘세기 최고의 여가수’였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여가수를 집대성한 저서「시 밥」을 쓴 루시 오브리엔은 그녀를 ‘잔다르크와 동등한 팝 히로인’으로 표현했다. 1963년 48살의 길지 않은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녀가 역사에 남긴 자취는 거대하다. 그녀야말로 지금 여가수의 텃밭이 된 ‘팝 발라드’의 영역을 크게 넓혔다. ‘여가수는 노래를 이렇게 해야 감동을 부른다’는 패턴을 시범한 것이다. 샹송이 프랑스를 넘어 ‘국제 음악언어’로 승격된 것도 다름 아닌 피아프의 공헌이다. 그녀는 또한 54년 미국을 방문해 피아프 열풍을 일으키면서 뉴욕 브로드웨이에서도 ‘미국판 피아프’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주디 갈란드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명백히 그녀의 영향을 흡수하여 스타덤에 오른 인물들이다. 에디트 피아프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가수는 목숨을 걸고 노래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무대에 설 자격이 없다’는 사실이다. 노래로 승부하지 않고 요란한 의상과 차림이나 섹시한 자태 등 음악외적인 측면에 호소하려는 경향이 농후한 요즘 여가수들이 바로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인기와 명성에만 중독이 되어 기본기를 갖추지 못한 그들에게 이런 무대에 대한 천착이 있을 리 만무다. 그러니 그들의 노래에서 어찌 그녀와 같은 카리스마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사망한지 어느덧 35년 이상이 흘렀어도 아직도 에디트 피아프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70년대 인기 차트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미국 LA 출신 그룹으로, 국내에서도 널리 애청되고있는 발라드 ‘If''의 주인공이다. 직접 악기를 연주하는 록 밴드임에도 불구하고 애절한 선율의 전형적인 팝을 내세워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 오클라호마 출신으로 그룹의 간판이었던 데이비드 게이츠는 1950년대 말 레온 러셀(Leon Russel)과 제임스 그리핀과 함께 음반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대 초반 LA에 와서 ... 1970년대 인기 차트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미국 LA 출신 그룹으로, 국내에서도 널리 애청되고있는 발라드 ‘If''의 주인공이다. 직접 악기를 연주하는 록 밴드임에도 불구하고 애절한 선율의 전형적인 팝을 내세워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 오클라호마 출신으로 그룹의 간판이었던 데이비드 게이츠는 1950년대 말 레온 러셀(Leon Russel)과 제임스 그리핀과 함께 음반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대 초반 LA에 와서 롭 로이어(Rob Royer)가 소속된 그룹 플레저 리그(Pleasure League)의 앨범을 프로듀스하면서 로이어를 알게 된 게이츠는 제임스 그리핀과 함께 팝 색채가 강한 록을 구사하는 그룹을 결성해 일렉트라(Elektra)와 음반계약을 체결했다. ‘원더 브레드(Wonder Bread)’라는 트럭 뒤에서 교통체증을 당한 것을 계기로 그룹 이름을 브레드로 정한 이들은 유명한 세션 드러머 짐 고든(Jim Gordon)을 끌어 들여 데뷔작 < Bread >를 내놓았으나 차트실적은 초라했다(앨범 127위). 하지만 이듬해 내놓은 2집 앨범 < On The Waters >은 1집의 실패를 완전히 만회, 게이츠가 쓴 첫 싱글 ‘Make it with you''는 전미차트 1위에 오르며 골드 레코드를 기록했다. 이 앨범에서는 두 번째 곡 ‘It don''t matter to me''도 10위에 진입해 이미 인기그룹으로 비상했음을 알렸다. 1971년 3집 < Mana >에서 팝 차트 4위에 오르며 성공을 반복한 곡 ‘If’로 브레드의 사운드는 정형화됐다. 이후 게이츠의 수정처럼 맑은 가녀린 진동음과 흡수력 높은 애상(哀傷)조의 멜로디는 브레드의 트레이드마크로 팬들의 뇌리에 자리했다. 이 무렵 멤버에도 변화가 일어 롭 로이어와 짐 고든이 빠지고 듀언 에디의 밴드 멤버였던 래리 네첼과 드러머 마이크 보트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듬해 앨범에서도 ‘Baby I''m-a want you''가 차트 3위와 함께 골드를 기록한 것을 비롯해 ‘Everything I own''(5위) ‘Diary’(15위)가 연속 성공을 거두었다. 같은 해 말 내놓은 5집 앨범 < Guitar Man >은 비록 톱10 싱글은 내지 못했으나 ‘Guitar man’(11위) ‘Sweet surrender’(15위) ‘Aubrey’(15위) 등이 히트해 팬들의 애정이 여전함을 증명했다. ‘Aubrey''는 국내의 음악다방에서 꾸준히 리퀘스트를 받았던 곡이기도 했다. 하지만 게이츠 못지 않은 작곡실력을 지닌 제임스 그리핀이 자신의 곡이 싱글로 전혀 채택되지 않은 것에 불만을 드러내면서 두 사람간의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리핀은 로이어와 함께 카펜터스의 명곡 ‘For all we know''를 썼을 만큼 역량 있는 인물이었다. 히트곡 모음집 < Best Of Bread >가 2위에 오른 1973년 6월에 이들은 마지막 공연을 갖고 미련 없이 갈라서 버렸다. 데이비드 게이츠는 일렉트라에서 여전히 솔로활동을 계속해 브레드 스타일의 곡을 발표했으나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자 1976년 말 과거의 갈등을 접고 그는 그리핀과 옛 그룹 동료들과 일시적으로 재결합해 ‘Lost without your love''를 발표했다. 이 곡은 차트 9위에 오르며 분전, 브레드의 지금까지 사랑 받는 또 하나 명곡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 팀은 끝내 화학적 결합을 이루어내지 못했고 1977년 말 게이츠가 솔로 공연 시 브레드란 이름을 쓰자 그리핀이 소송을 제기하는 등 법정공방을 벌이기도 했다. 게이츠는 1981년 동료 래리 네첼과 함께 솔로 앨범 < Take Me Now >를 발표했으나 성적은 저조했고 이 앨범을 끝으로 그는 음반활동을 중단했다. 한편 2001년에 개봉된 우리 영화 < 인디언 섬머 >에는 스웨덴 팝 가수 제시카(Jessica)가 리메이크한 곡 ‘Lost without your love''가 삽입돼 다시 한번 브레드가 재조명되었다.
노래 : Percy Sledge (퍼시 슬레이지)
클래식을 얘기할 때 바하를, 팝을 논할 때 비틀스를 빼 놓을 수 없듯 재즈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다. 재즈에 문외한 사람일지라도 루이 암스트롱 이름을 대면 고개를 끄덕인다. 루이 암스트롱은 20세기의 대표적인 대중 음악 ‘재즈’를 정의한 거장이다. 백인 재즈 보컬 빙 크로스비(Bing Crossby)는 루이 암스트롱을 두고 ‘미국 대중음악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극... 클래식을 얘기할 때 바하를, 팝을 논할 때 비틀스를 빼 놓을 수 없듯 재즈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다. 재즈에 문외한 사람일지라도 루이 암스트롱 이름을 대면 고개를 끄덕인다. 루이 암스트롱은 20세기의 대표적인 대중 음악 ‘재즈’를 정의한 거장이다. 백인 재즈 보컬 빙 크로스비(Bing Crossby)는 루이 암스트롱을 두고 ‘미국 대중음악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극찬했다. 그의 코넷/트럼펫 연주는 ‘재즈 연주에 꽃’이라 할 즉흥 솔로(Improvisation)를 창안했다. ‘트럼펫 비르투오조 1호’로 칭송되는 그의 트럼펫 연주엔 떨림(비브라토)과 미끄러짐(글리산도)와 같은 클래식 연주 주법을 독창적으로 소화해 낸 천재성이 돋보인다. 뉴 올리안스의 무명악사 시절을 거쳐 1920년대 초부터 시카고와 뉴욕을 거점으로 암약하면서 1925년 자신이 리드하는 캄보(Combo-소규모 재즈 연주 편성)밴드 핫 파이브 앤 핫 세븐(Hot Five’& Hot Seven) 통해 본격적인 재즈의 서막을 온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 여정은 ‘재즈의 선구자’로만 국한시킬 수 없을 정도로 그 폭이 넓다. 그는 재즈의 천재 일뿐 아니라 팝의 제왕이자 만인의 사랑을 받는 엔터테이너였다. 아무 의미 없는 말들을 리드미컬하게 구사하는 스캣(Scat)이라는 창법을 개발, 재즈 보컬(Jazz vocal)의 길을 열어줬음은 물론이고 천재적인 트럼펫 연주 실력에 더해 그의 출중한 보컬 실력은 그를 ‘위대한 재즈 보컬리스트’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가방만큼 크고 두터운 입술을 지녔다 하여 사치모(Satchmo)라는 애칭을 지녔던 루이 암스트롱은 얼굴만큼이나 커다란 입으로 끓어오르는 독특한 베이스 보컬(속칭 더티 톤)을 들려준다. 이런 그의 독특한 보컬 스타일은 재즈 보컬 빙 크로스비나 토니 베넷(Tony Bennet)을 비롯하여 1930-50년대 전설전인 재즈 디바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의 창법에까지 영향을 준다. 국내에서도 ‘쾌지나 칭칭 나네’의 가수 김상국도 그 보컬을 흉내냈다. 천진 난만(?)한 웃음을 머금으며 청중을 압도할 만한 열정을 뿜어내는 무대 매너로 루이는 대중들에게 잊을 수 없는 넉넉함을 선사했다. ‘만능 재즈 맨’은 그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1901년 재즈의 고향 뉴 올리안스(New Orleans)에서 태어난 루이 암스트롱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가 어머니인 메리 암스트롱의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가출을 했고, 유복자로 태어난 루이는 빈민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길거리의 매춘부였던 어머니는 항상 집을 비워 가족을 돌보지 않았고, 결국 루이는 5살 때부터 생업 전선에 나서야 했다. 스토리 빌(뉴 올리언즈의 재즈 음악인들의 활동 무대)의 홍등가를 지나다가 접한 재즈음악에 매료되어버린 어린 루이는 차츰 재즈라는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된다. 11살에 학교를 그만둬 그만 폭력을 일삼는 불량 써클에 가담, 1912년 신년 축하 행사 때 술에 취해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폭죽 대신 총을 쐈다는 혐의로 소년원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게 전화위복이 되어 소년원에 있는 동안 브라스 밴드에 가입, 제1 코넷 주자로 활동하게 된다. 이를 통해 본격적으로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여기서 접한 코넷(트럼펫과 비슷하나 관이 약간 짧아서 수월하게 다룰 수 있는 악기) 연주는 루이로 하여금 음악을 소명으로 삼게 한다. 1914년 소년원에서 풀려나서 시카고로 이주, 노동자 생활을 하며 차츰 음악가로의 꿈을 키워간다. 광부로, 신문 배달부로, 청소부를 일을 전전해가며 그는 코넷을 사기 위해 돈을 마련해 갔다. 시카고에 여러 바를 전전하며 무명악사로 밑바닥을 기었다. 1918년 기회가 왔다. 당시 재즈의 왕으로 군림하던 킹 올리버(King Oliver)의 도움을 받아 루이는 올리버의 보조 밴드였던 키드 오리(Kid Ory) 밴드에서 프로 뮤지션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는다. 일년 후인 1919년 루이는 시카고에 진출, 미시시피강을 따라 뉴 올리언즈와 세인트루이스 사이를 운행하던 증기선에서 백인들을 위해 음악을 연주한 페이트 매러블(Fate Marable) 밴드에서 3년 간 코넷 주자로서 내공을 다진다. 1922년 루이 암스트롱은 드디어 재즈 연주자로서 날개를 단다. 평소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재즈의 왕’ 조 킹 올리버는 그가 이끄는 크레올 재즈 밴드(Creole Jazz Band) 밴드의 코넷 주자로 그를 가입시킨다. 크레올 재즈 밴드의 정식 멤버 자격으로 루이는 1923년 시카고에서 첫 레코딩을 한다. ‘Chimes blues’(1923), ’Lonesome weary blues’(1923) 등 10여 곡의 싱글 녹음을 통해 독특한 음색의 코넷 연주가 좋은 평가를 이끌어냈고, 이에 자신감을 얻은 루이는 피아노 주자 릴리언 하든(그의 두 번째 부인이며 그는 일생동안 4명의 부인을 맞는다)의 권유로 크레올 밴드를 탈퇴, 이듬해인 1924년 뉴욕으로 진출해 플레처 핸더슨(Fletcher Henderson) 밴드에 제1 트럼펫 주자로 활동한다. 1925년 솔로로 독립, 악기를 코넷에서 트럼펫으로 바꾸고 자신의 밴드 핫 파이브 앤 핫 세븐(Hot Five & Hot seven)을 출범시킨다. 재즈 인디 레이블 오케이(Okeh)레코드 사와 계약, 스캣(scat)의 매력이 넘치는 ‘Heebie jeebies’(1926)를 비롯하여, ’Cornet’(1926), ’Big butter & egg man’(1926), ’Ski-dat-de-dat’(1926), ‘Willie the weeper’(1927), ’Potato head blues’(1927), ’I’m not rough’(1927)를 통해 당시로선 가히 혁명적인 재즈 연주를 선보이며 일약 재즈음악계의 스타로 떠오른다. 1928년 ‘핫 파이브 앤 세븐’을 해체, 자신의 빅 밴드 루이 암스트롱 앤 히스 오케스트라(Louis Armstrong And His Orchestra)’를 결성, ‘Mahogany hall stomp’를 시작으로 이듬해인 1929년 ’Sweet heart on parade’를 발표하며 스윙 밴드 리더로서의 여정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재즈 보컬리스트로서도 활약이 눈에 띄는데, 이미 1927년 ‘핫 파이브 & 세븐‘시절 여성 보컬 메이 엘릭스와 듀엣으로 부른 ’Big butter & egg man’으로 팝 차트에 진출한 루이는 1931년 미쉘 페리시가 작사한 미국의 영원한 스탠다드 명곡 ‘Stardust’를 발표, 선풍적인 인기를 얻는다. 1930년대는 루이 암스트롱의 전성기였다. ‘I gotta right to sing the blues’(1933), ’Struttin’ with some barbecue’(1938) 등 클래식스(Classics)레이블을 통해 발표한 그의 빅 밴드 싱글들은 동시대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 악단,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 악단에 필적할 만한 대중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한다. 1944년 흑인 아티스트로서는 처음으로 링컨 센터에서 공연했으며 이어 할리우드에 진출, 영화배우로서도 활동하며 < 랩소디 인 블랙 & 블루 >(1933)와 1956년의 < 상류사회 >(High Society) 등의 작품을 남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스윙의 열풍은 비밥(Bebop)의 혁명으로 인해 재즈의 중심에서 차츰 언저리로 몰리고 있었다. 스윙을 부정하며 비밥에 물결에 동참한 젊은 재즈음악인들로부터 루이는 ‘엉클 톰’(백인에게 굴종하는 흑인) 식의 비난의 화살을 감내해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무렵 슬럼프를 맞게 된다. 빅 밴드 활동이 더 이상 진척이 되지 않음을 느낀 루이는 결국 빅 밴드를 해체시키고 데카(Decca)레이블로 이적하며 초기의 소 편성 악단의 구성을 한 올 스타즈(All Stars)를 출범시킨다(이후 올 스타즈는 맴버를 교체해 가며 그가 죽을 때까지 유지된다). 1947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데뷔 공연을 가지며 예전보다 활발한 월드투어를 갖는다. ‘High society’(1948), ‘That’s a plenty’(1949), ‘Basin street’(1947), ‘Dippermouth blues’(1947) 등을 히트시키며 1951년에는 투어 실황을 녹음해 발표한 라이브 앨범 < Satchmo At Symphony Hall >을 발표해, LP차트 10위권에 오른다. 같은 해 루이의 히트 송 ‘(When we are dancing) I get ideas’와 ‘A kiss to build a dream on’이 담긴 더블 사이드 싱글을 발표, 이듬해인 1952년 처음으로 싱글 양면이 모두 톱10을 기록한다. ‘A kiss to build a dream on’은 영화 < The Strip >에서 루이가 직접 불렀던 곡인데, 멕 라이언이 주연한 1993년 영화 <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에 다시 삽입돼 화제를 모았다. 1954년 데카와 재계약을 앞두고 루이는 독점 계약 대신 프리랜서를 선언한다. 이 때부터 그의 음악은 다른 음반사를 통해서도 발표되는데, 당대 재즈 명인들과의 협연 앨범들이 눈에 띈다. 1920년대 스트라이드 피아노 대가 팻츠 월러(Fats Waller)에게 헌정하는 < Satch plays Fats >를 1955년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발표해 톱10을 기록했고, 재즈 보컬 엘라 핏제럴드와 호흡을 맞춘 명반 < Ella & Louis >를 1956년 버브 레코드사에서 공개한다. 흑인 공민권 운동이 시작될 무렵인 1956년, 백인 공립학교에 흑인 학생이 군인의 호위를 받고 등교하는 리틀 록(Little Rock)사건을 두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를 ‘위선자’라 비난한 사건이 신문으로 보도되면서 루이는 잠시동안 FBI의 감시를 받으며 ‘요시찰 인물’이라는 불명예를 겪기도 한다. 가뜩이나 나빠진 건강은 1959년 이태리 공연도중 심장 발작으로 잠시 병원 신세를 지게 끔 한다. 이런 악조건을 딛고 루이 암스트롱은 1960년대에도 여전히 ‘제2전성기’라고 할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1963년 12월, 브로드웨이 뮤지컬 < 헬로 돌리 >(Hello Dolly!)의 타이틀곡으로 미국을 침공한 비틀스의 ‘Do you want to know a secret’를 따돌리며 당당히 팝 차트 정상에 등극한다. ‘Hello dolly!’는 1964년 내내 팝 차트 5위권을 고수하며 이듬해 그에게 그래미상 보컬 퍼포먼스부문 수상의 영광도 안겨주었다. 이 곡에 이어 4년 후인 1968년 ‘What a wonderful world’로 루이는 다시 한번 노익장을 과시한다. 평소에 자신이 추구한 팝(pop)음악에 대한 철학을 담아낸 이 곡은 영국에선 발표 즉시 차트1위를 차지했지만 정작 본토 미국에선 별 반응이 없다가, 1987년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영화 < 굿모닝 베트남 >의 배경음악으로 주목받으면서 뒤늦게 톱40에 오른다. 넉넉한 그의 보컬이 멋진 선율과 어우러진 이 곡은 그 무렵 만화가 이현세가 출연한 모 맥주광고 CF에 깔려 국내에서도 광풍을 일으켰다. 그의 마지막 히트 곡 ‘We have all the time in the world’과 함께 루이는 결국 건강상의 이유로 무대에서 은퇴한다. 그와 함께 정확히 7주 후인 1971년 3월15일 건강 악화로 병원에 입원했고, 7월 6일 뉴욕 롱아일랜드의 코로나 소재 자신의 집에서 70세를 일기로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난다. 루이 암스트롱처럼 재즈와 팝이라는 별개의 영역을 넘나들었던 사람도 드물다. 1920-30년대 초기재즈에서 스윙에 이르기까지 재즈의 연주 스타일을 제시했던 선구자 루이 암스트롱은 이에 더해 대중들과 함께 울고 웃을 줄 알았던 진정한 팝 스타였다. 사실 재즈라는 장르에 집착하는 팬들은 그가 보여준 엔터테이너 기질에 못마땅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쿨(cool)의 혁명가 마일즈 데이비스도 자서전에서 “루이의 뛰어난 즉흥 연주엔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그의 익살스러운 무대매너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고 피력할 정도였다. 하지만 루이는 50년을 넘게 연주 생활을 해온 재즈맨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음악 대중들을 위한 ‘팝’에 천착한 사실은 당연하다. 루이는 음악에 있어서 순수한 지향을 잃지 않았고, 자신의 음악을 들어주고 좋아해 줄 청중을 찾아 나서길 원했다. 그의 음악이 꿈꾼 최종 지향점이란 바로 ‘What a wonderful world!’라고 까지 칭송한 팝(pop)이었던 셈이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팝의 세계에 안긴 한 재즈 거장의 허심탄회한 고백은 명언으로 남아있다. ‘그래 팝이 옳았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야!’
노래 : Cliff Richard (클리프 리차드)
1969년 10월 16일부터 18일. 이 3일은 우리나라의 척박했던 공연 문화와 사회 전반에 걸쳐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된 사건의 시간적 배경이다. ‘오빠부대’의 원조이며 팝 스타로서는 처음으로 국내에서 자발적인 팬클럽이 탄생했던 클리프 리차드(Cliff Richard)의 3회에 걸친 내한 공연, 그것은 집단적인 행동과 조용한 환호성(지금은 아니지만)의 이율배반적인 분위기로 특징지어지는 한국 공연 문화의 시발점이 ... 1969년 10월 16일부터 18일. 이 3일은 우리나라의 척박했던 공연 문화와 사회 전반에 걸쳐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된 사건의 시간적 배경이다. ‘오빠부대’의 원조이며 팝 스타로서는 처음으로 국내에서 자발적인 팬클럽이 탄생했던 클리프 리차드(Cliff Richard)의 3회에 걸친 내한 공연, 그것은 집단적인 행동과 조용한 환호성(지금은 아니지만)의 이율배반적인 분위기로 특징지어지는 한국 공연 문화의 시발점이 되는 계기였다. 시민회관에서 1회, 이대 강당에서 2회의 공연을 가졌던 클리프 라치드의 무대는 콘서트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던 당시로서는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청소년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어두운 교복과 청순한 단발머리를 한 여고생들의 클리프 리차드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헌신적인 몰입은 ‘울다가 지쳐 기절까지’라는 과장된 신문 기사로 옮겨지면서 공연장의 열기는 기성 세대들에게 일종의 집단적 히스테리이자 광적인 소란으로 비쳐지며 젊은이들에 대한 불안과 불만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클리프 리차드는 4박 5일 동안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만나는 팬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주최측에서 마련한 파티 비용을 본인이 직접 내는 것은 물론 구세군 교회에 가서 불우이웃성금을 내는 선행으로 일간지 사회면을 훈훈하게 장식해 팬들의 비난을 희석시켜 주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클리프 리차드는 우리나라에서 대중 음악 역사에 있어 전환점을 제시했던 슈퍼스타였다. 1940년 10월 14일 인도의 럭크나우에서 해리 로저 웹(Harry Roger Webb)의 본명으로 태어난 클리프 리차드는 엘비스 프레슬리로부터 영향을 받아 1957년부터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흑인 감성이 풍부했던 엘비스와는 달리 경쾌하고 팝 적인 느낌이 짙은 음악으로 ‘영국의 로큰롤 황제’로 등극했다. 1963년 비틀스(Beatles)와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가 등장하기 전까지 클리프 리차드는 브리티시 록의 ‘절대 강자’였으며 그의 음악 세계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성지(聖地)였다. 1958년 ‘Move it’으로 시작한 히트 퍼레이드는 1960년대 후반까지 40곡 이상을 영국 인기 차트에 등록시키며 경이로운 행진을 기록했다. 당시 그의 백 밴드 드리프터스(Drifters)는 미국의 리듬 앤 블루스 보컬 그룹(‘Stand by me’를 부른 Ben E. King이 멤버였던)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섀도우스(Shadows)로 바꾸었다. 그의 인기가 치솟자 영화 관계자들은 < Serious Charge >, < Summer Holiday >, < The Young Ones >처럼 젊은이들을 소재로 한 상업적인 영화에 출연시켜 비상(飛上)하는 클리프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국내에서도 ‘Living doll’, ‘Visions’, ‘Constantly’, ‘Summer holiday’, ‘Congratulations’, 그리고 그 유명한 ‘The young ones’등이 확실하게 인기를 주도했다. 하지만 이것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한정된 반숙(半熟)의 인기였다. 대서양 건너편 미국에서는 물이 끓지도 않았다. ‘Living doll(30위)’과 ‘Lucky lips(62위)’, ‘It’s all in the game(25위)’, ‘Bachelor boy(99위)’, ‘I’m the only one(92위)’, 그리고 생일 축하 곡으로 세계를 평정한 ‘Congratulations(99위)’ 만이 1960년대 동안 빌보드 싱글 차트에 올랐을 뿐이다. 데뷔곡 ‘Move it’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노래들은 너무 소녀 취향이었으며 시기상으로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라는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뮤지션들 사이에서 샌드위치 마크를 당했기 때문에 틈새 시장을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내한 공연을 가졌던 1960년대 후반에 그의 지지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1960년대 미국 음악계를 침공한 브리티시 인베이션의 명단에서 제외되었던 클리프 리차드는 미국 진출의 꿈을 접었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에 자신의 백 보컬리스트 출신의 올리비아 뉴튼 존(Olivia Newton John)이 미국에서 대대적인 성공하자 이것에 고무된 클리프는 미국 진출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서서히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미국인의 구미에 맞는 노래들로 북미 시장을 두드렸다. 1976년에 공개된 디스코 풍의 ‘Devil woman(6위)’이 처음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탑 텐에 올랐고 1980년대 초반까지 ‘We don’t talk anymore(7위)’, ‘Carrie(34위)’, ‘Dreaming(10위)’, ‘Little in love(17위)’, ‘Daddy’s home(23위)’, 그리고 자신보다 더 유명해진 올리비아 뉴튼 존과 호흡을 맞춘 영화 < 제너두 >의 삽입곡 ‘Suddenly(20위)’ 같은 성인 취향의 팝 사운드로 두 번째 전성기를 일구었다. 이제는 아주머니들이 된 예전의 소녀 팬들을 위해 현재까지 공연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클리프 리차드는 1995년 영국 왕실로부터 대중 음악계에 미친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 작위를 수여 받았다. 국내에서는 지난 1998년에 개봉된 임창정, 고소영이 주연한 영화 <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의 마지막 장면에 ‘Early in the morning’이 삽입되어 다시 한번 클리프 리차드 신드롬을 재연했다. 차이코프스키가 “예술 작품이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소망과 힘이다”라고 했듯이 클리프 리차드의 노래는 우리 부모님 세대가 살아야 했던 어려웠던 시절의 좌절과 아픔을 낭만과 추억으로 승화시킨 희망의 원동력이었다.
솜사탕같이 부드럽고 격조 있는 발라드 음악을 들려준 냇 킹 콜은 1940-50년대 백인 재즈 보컬의 대명사 프랭크 시내트라의 인기전선에 위협을 가한 유일한 흑인 크루너(crooner)이다. 반세기가 넘도록 대중들의 끊임없는 추종을 받고있는 그는 틴 팬 앨리 출신의 작곡가 어빙 벌린이 작곡한 발라드의 고전 ‘Unforgettable’(1951), 바로 그 곡의 주인공이다. 대중들은 그의 이름을 듣고 ‘가수’로서의 ... 솜사탕같이 부드럽고 격조 있는 발라드 음악을 들려준 냇 킹 콜은 1940-50년대 백인 재즈 보컬의 대명사 프랭크 시내트라의 인기전선에 위협을 가한 유일한 흑인 크루너(crooner)이다. 반세기가 넘도록 대중들의 끊임없는 추종을 받고있는 그는 틴 팬 앨리 출신의 작곡가 어빙 벌린이 작곡한 발라드의 고전 ‘Unforgettable’(1951), 바로 그 곡의 주인공이다. 대중들은 그의 이름을 듣고 ‘가수’로서의 냇 킹 콜만을 떠올릴지 모르지만, 가수로 성공하기 전인 1930-40년대에 그는 미국 로스엔젤레스(L.A) 지역에서 이름을 날리던 재즈 피아니스트였다. ‘냇 킹 콜 트리오’를 결성해 활동하던 1930년대 말-1940년 대 초까지 그는 수많은 레코드를 녹음해 발표했다. 기타, 베이스, 피아노로 구성된 독특한 재즈 트리오 양식을 정립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비밥 재즈의 봉인 버드 파웰이 드럼-베이스-피아노로 이뤄진 트리오 양식을 제시하면서 지금까지 이 편성이 굳혀지긴 했지만, 재즈 트리오로 대중적인 인지도를 처음 얻은 사람은 바로 냇 킹 콜이었다. ‘Route 66’(1943) 와 같은 히트곡을 발표하기도 한 냇 킹 콜 트리오는 한결 부드럽고 팝 적인 색채의 재즈 연주로 주목받으며 이후 1950년대 명성을 얻은 오스카 피터슨(Oscar Peterson) 트리오의 출현을 예견케 했다. 1945년 캐피톨(Capitol) 레코드사와 계약하면서 이후 그는 피아니스트로서보다 수많은 히트곡을 팝 차트에 올리는 가수로서 우리에게 기억된다. 1917년 생으로 어린 시절을 시카고에서 보낸 그는, 12살 때 부터 교회 성가대에서 오르간을 연주했다. 형제가 모두 재즈 음악인으로 성장했을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음악적으로 유복했던 그는 1936년 재즈 베이스주자 에디 콜(Eddie Cole)의 밴드에서 잠시 몸을 담지만, 얼마 후 자신의 무대를 찾아 로스엔젤레스로 이주한다. 이런저런 쇼 무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자신의 음악세계를 찾기에 몰두한 끝에 기타리스트 오스카 무어(Oscar Moore), 베이시스트 웨슬리 프린스(Wesley Prince)를 만나며 ‘냇 킹 콜 트리오’를 헐리우드에서 출범시킨다. 이들의 음악은 초기엔 순수 연주곡 중심이었으나, 1940년 데카(Decca)레코드와 계약하면서 ‘Sweet Lorraine’(1940)을 그의 노래로 녹음했고, 이내 대중들의 호응에 힘입어 그는 트리오에서 피아노와 노래를 병행하게 되었다. 냇 킹 콜 트리오는 1940년대 초반 대중들의 성원에 힘입어 ‘Route 66’, ’Straighten up and flying right‘(1943)와 같은 히트곡들을 연이어 발표한다. 40-50년대 명성을 구가했던 아마드 자말 트리오,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 아트 테이텀 트리오는 모두 냇 킹 콜 트리오(피아노/베이스/기타)를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 ‘The christmas song’(1947) , ’Nature boy’(1947)와 같은 히트곡을 연이어 발표한 냇 킹 콜 트리오활동은 1940년대 말까지 지속된다. 그러다 1950년, 그의 트리오가 오케스트라 세션을 넣어 발표한 ‘Mona risa’가 차트 넘버원을 기록하며 냇 킹 콜은 더 이상 피아노 연주자가 아닌 인기 정상에 가수로 탈바꿈한다. 그의 노래는 어느덧 재즈뿐만 아니라 팝 청취자들의 애청 곡 리스트에 올라가게 되었고 대중들은 차츰 그가 재즈 피아니스트였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다. 이후 ‘Unforgettable’, ’Ramblin’ rose’(1962)를 비롯한 수많은 히트곡을 차트에 올려놓으며 발라드 가수로서만 활동하게 된다. TV가 미국 대중들의 안방에 자리하면서 그는 쇼에 출연하며 50-60년대 내내 인기가수로서 분주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1965년 폐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의 음악엔 더 이상 재즈 피아니스트로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이후 그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 양상을 띄게 된다. 트리오 양식의 대중화를 가져온 ‘재즈의 선구자’라는 호평에 반해 발라드 가수로서 백인 청취자들의 귀를 즐겁게 하며 ‘재즈를 팔아먹은 장본인’이라는 비난 역시 감수해야 했다. 재즈의 선조 루이 암스트롱을 비롯해, 마일즈 데이비스, 조지 벤슨과 같은 거물급 재즈 스타가 겪은 이 대중성과 음악성과의 숙명과도 같은 패러독스는 냇 킹 콜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그는 2000년대인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추앙 받는 뮤지션이다. 초기의 그의 연주 스타일은 재즈 연주의 백미라 할 트리오 양식의 발전에 기여했고, 부드럽게 감싸주는 듯한 그의 바리톤 보컬은 샘 쿡, 마빈 게이, 루더 밴드로스로 이어지는 소울 팝 가수들이 반드시 참고해야 할 ‘보컬 연주의 교과서’로 자리 메김 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룩했던 위업을 지금껏 꾸준히 이어나가는 그의 딸이자 재즈 보컬 나탈리 콜(Natalie Cole)과 함께 한 ‘Unforgettable’(1994)로 탈바꿈 해 대중들을 놀라게 했다. 이미 세상에 안 계신 아버지와 딸의 목소리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첨단 디지털 기술은 그 만의 독창적인 보컬 스타일은 지금에도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며 많은 후배 보컬리스트들에 의해 여전히 계승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노래 : Swinging Blue Jeans (스윙잉 블루 진스)
노래 : Freddy Fender (프레디 펜더,Baldemar Huerta)
멤버 : 김철(보컬, 기타), 박일병(기타), 장순봉(베이스), 김창진(키보드) 멤버 : 김철(보컬, 기타), 박일병(기타), 장순봉(베이스), 김창진(키보드)
멤버 : 딘 포드(Dean Ford, 보컬), 주니어 캠벨(Junior Campbell, 보컬), 그레이엄 나이트(Graham Knight, 베이스), 팻 페어리(Pat Fairley, 기타, 베이스), 앨런 화이트헤드(Alan Whitehead, 드럼) 멤버 : 딘 포드(Dean Ford, 보컬), 주니어 캠벨(Junior Campbell, 보컬), 그레이엄 나이트(Graham Knight, 베이스), 팻 페어리(Pat Fairley, 기타, 베이스), 앨런 화이트헤드(Alan Whitehead, 드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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