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YES24 카테고리 리스트

YES24 유틸메뉴

Global YES24안내보기

Global YES24는?

K-POP/K-Drama 관련상품(음반,도서,DVD)을
영문/중문 으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Korean wave shopping mall, sell the
K-POP/K-Drama (CD,DVD,Blu-ray,Book) We aceept PayPal/UnionPay/Alipay
and support English/Chinese Language service

English

作为出售正规 K-POP/K-Drama 相关(CD,图书,DVD) 韩流商品的网站, 支持 中文/英文 等海外结账方式

中文

검색


어깨배너

8월 전사
8월 혜택 모음
책을 듣다
젊은 작가 투표
1/6

빠른분야찾기


윙배너

마우스를 올려주세요.

마케팅 텍스트 배너

웹진채널예스


Luciano Pavarotti 파바로티와 친구들 콜렉션 1992-2000
공유하기 예스24 음반 판매 수량은
차트와 차트 집계에 반영됩니다. 한터차트/가온차트 집계 반영 안내
수입
DVD

Luciano Pavarotti 파바로티와 친구들 콜렉션 1992-2000

[ 4DVD ]
John Adams 작곡/Luciano Pavarotti, Patricia Kaas, Sting, Zucchero 노래 외 31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Universal | 2003년 05월 01일 | 원서 : The Pavarotti & Friends Collection : The Complete Concert 1992-2000 리뷰 총점8.8 정보 더 보기/감추기
작품
4.5점
디자인/구성
4.3점
회원리뷰(4건) | 판매지수 120 판매지수란?
상품 가격정보
판매가 102,700원
할인가 83,200 (19% 할인)
YES포인트
추가혜택쿠폰 및 사은품(1종)
추가혜택쿠폰 쿠폰받기
  • 주문금액대별 할인쿠폰
카드혜택
결제혜택
카드할인 정보
 모바일팝 모바일 5% 즉시할인 (모바일 결제시) 자세히 보기
네이버페이 네이버페이 1% 적립 (전체결제) 자세히 보기
페이코 페이코 포인트결제 2% 적립 (신규고객 4,500원 할인) 자세히 보기
할인/적립 카드 더보기
구매 시 참고사항
구매 시 참고사항

판매중| 한정판매

수량
배송비 : 무료 배송비 안내
  • 해외배송 가능
1/4
광고 AD

Luciano Pavarotti 파바로티와 친구들 콜렉션 1992-2000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03년 05월 01일
시간, 무게, 크기 300g

제품소개

파바로티와 친구들 콜렉션 1992-2000

사양

감독/출연진 소개 (36명)

미국의 현대음악 작곡가. 미국의 현대음악 작곡가.
노래 : Luciano Pavarotti (루치아노 파바로티 )
성악가 (테너) 성악가 (테너)
노래 : Patricia Kaas (파트리샤 카스)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5위에 꼽히는 등 프랑스의 국민 가수로서 거의 절대적인 칭송을 받고 있는 파트리샤 카스(Patricia kaas)는 19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도 지속적인 활동을 보여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있는 샹송 뮤지션이다. 열정적인 허스키 보이스와 함께 외모 또한 출중하여 국내 모 화장품 광고에도 등장한 바 있는 그녀는 에디트 피아프, 이브 몽땅 등의 뒤를 잇는 샹송의 월드스타의 반열에 ...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5위에 꼽히는 등 프랑스의 국민 가수로서 거의 절대적인 칭송을 받고 있는 파트리샤 카스(Patricia kaas)는 19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도 지속적인 활동을 보여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있는 샹송 뮤지션이다. 열정적인 허스키 보이스와 함께 외모 또한 출중하여 국내 모 화장품 광고에도 등장한 바 있는 그녀는 에디트 피아프, 이브 몽땅 등의 뒤를 잇는 샹송의 월드스타의 반열에 올라있다. 1966년 광부인 프랑스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노래에 천부적인 소질을 보였다. 8세 때부터 많은 노래 경연 대회에 참가하였고, 13세 때 한 가요제에서 우승한 것을 계기로 독일 사르브르크(Saarebruck)의 ’룸펠캄머(Rumpelkammer)’라는 클럽에서 가수로서 첫 발을 내딛게 된다. 이후 1985년 한 건축가의 도움으로 파리에서 치렀던 한 오디션을 통해 유명한 영화배우 제라르 듀파르드가 제작한 첫 싱글 ‘Jalouse(질투)’를 발표했다. 이 싱글은 비록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나 미래의 가능성을 밝혔다. 얼마 후 당시 프랑스 최고의 작곡가였던 디디에 바르블리비앙(Didier Barbelivien)의 눈에 띄면서 그와 작업한 곡 ‘Mademoiselle chante le blues(블루스를 부르는 여인)’로 마침내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 곡은 40만장이라는 성공적인 판매고를 올렸으며, 또한 그녀에게 ‘French music awards’(프랑스 음악 시상식)의 ’올해의 신인 여가수상‘을 안겨주었다. 이 곡이 수록된 첫 앨범 < Mademoiselle Chante >(노래하는 여인)’이 세계적으로 250여만장이 팔려나가면서 파트리샤 카스는 데뷔와 함께 월드 스타로써의 첫 걸음을 내딛는 수확을 거둔다. 두 달 동안 앨범 차트에서 2위를 유지하였으며, 스위스 벨기에 등의 유럽국가에서도 호응을 얻으며 골든 디스크를 기록했다. 1990년에 발표한 두 번째 앨범 < Sce De Vie >(인생의 정경)도 1집에 못지 않은 성공행진을 이어갔다. ‘Les mannequins d’osier’(버들로 엮은 허수아비), ’Kennedy rose’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이 음반은 재즈, 록, 블루스적 요소를 수용해 업그레이드된, 팝적인 샹송을 들려주었다. 1991년의 성공적인 투어를 기념하기 위한 실황앨범 < Carnet De Sce >(정경을 담은 사진첩)를 발매한 이후 1993년, 세 번째 앨범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바로 그녀의 앨범 중 가장 많이 팔리고, 또 그녀를 대표하는 앨범으로 가장 많이 손꼽히는 < Je Te Dis Vous >(난 널 당신이라고 부르게 됐어)였다. 이 앨범은 세계적으로 25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기록했고 특히 격정적인 팝 발라드 넘버인 ’Entrer dans a lumier’(빛 안으로 들어가요), 록적 요소를 가미한 ‘Il me dit que je suis belle’(그는 내가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등의 히트곡들이 줄을 이었다. 1997년 4집 < Dan Ma Chair >(내 피부 속에는)는 많은 새로운 뮤지션들과의 합작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세계적으로 15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던 이 앨범은 빌리 조엘, 폴 사이먼 등의 프로듀서로 유명한 필 라몬(Phil Ramone)이 프로듀스하고 프랑스의 또 다른 국민 가수 장 자크 골드만(Jean-Jacques Goldmann)이 참여했다. 또한 제임스 테일러와 영어로 듀엣을 시도한 것도 눈길을 끌었다. 여기에선 격정적인 발라드 넘버 ‘Je voudrais la connaitre(난 그것을 알고 싶어요)’와 ‘Quand J’ai peur de tout’(내가 모든 걱정 근심에 잠겨있을 때)가 주목을 받았다. 1999년에는 5집 < Le Mot De Passe >(암호)를 냈지만 실적은 부진했다. 하지만 5집을 계기로, 그녀는 12년간의 가수 생활에 있어서 전환점을 맞았다. ‘Nouvelle Ambassadrice(새로운 대사)’라는 칭호를 얻으며 국제적 활동을 본격화한 것이다. 1999년에는 국내에서 열린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Micheal Jackson and friends)콘서트에서 열정적인 무대를 선보이는 등 적극적인 홍보를 펼쳤다. 이와 함께 샹송을 국제음악으로 승격시키려는 프랑스 정부차원의 지원에 힘입어 그녀는 ‘신세대 샹송 여왕’으로 발돋움했다. 2001년에는 제레미 아이언스(Jeremy Irons)와 호흡을 맞춰 프랑스 최고 감독인 클로드 를루슈(Claude Lelouch) 감독의 영화 < And Now… Ladies And Gentlemen >의 주연을 맡아 화제를 모았으며 베스트 앨범 < Best Of 1987-2001 >을 발표했다. 2002년에는 영화 < And Now... Ladies And Gentlemen >에서 영감을 받은 노래들과 영어 번안 곡으로 채운 앨범 < Piano Bar >를 내놓고 세계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있다. 그녀는 1994년에 이어 2002년 두 번째 한국 단독공연을 가졌다.
영국 출신의 팝 아티스트 스팅은 절대 현실의 삶에 안주하지 않는 인물이다. 20년 넘게 계속된 그의 음악세계는 ‘도전’과 ‘실험’이라는 두 단어로 압축된다. 그는 스타덤에 오르면서 겪는 매너리즘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발표하는 앨범마다 팬들에게 신선함과 새로움을 선사했다. 그는 뉴 밀레니엄 특수(特需)에 발맞춰 1999년에 발표한 앨범 < Brand New Day >에서도 컨트리와 랩을 과감히 수용하여 젊은 피 못... 영국 출신의 팝 아티스트 스팅은 절대 현실의 삶에 안주하지 않는 인물이다. 20년 넘게 계속된 그의 음악세계는 ‘도전’과 ‘실험’이라는 두 단어로 압축된다. 그는 스타덤에 오르면서 겪는 매너리즘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발표하는 앨범마다 팬들에게 신선함과 새로움을 선사했다. 그는 뉴 밀레니엄 특수(特需)에 발맞춰 1999년에 발표한 앨범 < Brand New Day >에서도 컨트리와 랩을 과감히 수용하여 젊은 피 못지 않은 독창력을 선보였다. 이 앨범으로 스팅은 올해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고의 팝 가수’와 ‘최고의 팝 앨범’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이처럼 음악에 녹아있는 스팅의 탐구적인 철학은 장외로까지 연결되어 그 강도가 더욱 강해졌다. 얼마 전 그는 6월 7일과 13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와 버그에서 갖기로 예정되어 있던 콘서트를 전격 취소했다. 이유는 외르크 하이더 당수가 이끄는 극우 자유당이 오스트리아 새 연정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음악관이 퇴보나 보수가 아닌 진보와 개혁임을 말해준다. 하지만 스팅의 음악색깔은 그의 외곬수적인 성격과는 달리 ‘다색(多色)’이다. 그의 음악 속에는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 여러 개의 장르가 만나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나는 순수하지 않은 혼합적인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순수한 록, 순수한 재즈에는 흥미가 없다." 한 채널에 귀를 구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채널 안에 귀를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스팅의 퓨전 지향은 아트록 그룹 커브드 에어 출신의 스튜어트 코플랜드, 애니멀스 출신의 앤디 서머스와 함께 했던 록그룹 폴리스 시절부터 이미 시작됐다. 그룹의 음악은 단순하게 몰아치는 펑크에 머물지 않고 레게, 재즈, 민속음악 등을 집어넣어서 감칠맛 나게 요리한 당시에는 보기 드문 유니크한 사운드였다. 스팅의 재즈 어프로치가 돋보이는 베이스라인, 레게 리듬을 완벽히 구사하는 코플랜드의 드럼 테크닉, 그리고 에코가 약간 가미된 서머스의 클린 톤의 기타는 폴리스 사운드의 결정체였다. 그들의 데뷔작 < Outlandos D’ Amour >와 2집 < Reggatta De Blanc >의 히트곡 ‘Can’t stand losing you’, ‘Walking on the moon’에서 시도된 이국적인 레게 뮤직이 그 한 예다. 영·미 음악 중심에서 벗어나 제3세계로 음악의 발판을 넓힌 것이다. 스팅은 1983년에 발표한 폴리스의 5집 앨범 < Synchronicity >의 수록곡 ‘Every breath you take’로 8주 동안 빌보드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인기정점에 섰을 때 그룹을 해산시켰다. 멤버간의 불화도 원인이었지만 가장 큰 해체이유는 자신의 음악적 영역을 확장시키기 위해서였다. "나는 처음 시작하는 나의 입장이 전혀 두렵지 않다. 나는 모든 상황 속에 내 자신을 던져버리고 싶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자 하는 그의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다. 솔로 활동과 함께 스팅은 월드 뮤직으로 한 단계 도약을 꾀했다. 그는 자메이카에서 녹음한 1985년 솔로 데뷔작 < The Dream Of The Blue Turtles >에서 색소폰 주자 브랜포드 마샬리스, 키보디스트 케니 커크랜드 등 젊은 재즈 뮤지션을 영입하여 고품격·고감도 재즈 음악을 선보였다. 하지만 단순히 재즈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 민속 음악을 차용한 ‘Russians’, 중동 풍의 리듬이 인상적인 ‘We work the black seam’ 등 전세계에 펼쳐져 있는 다채로운 음악 소재들을 자신의 앨범에 담았다. 모든 곡을 포르투갈어로 부른 1988년 EP < ...Nada Como El Sol >, 1996년 앨범 < Mercury Falling >의 ‘Valparaiso’에서 나타나는 아일랜드의 민족정서, 1997년 베스트 앨범 < The Very Best Of Sting & The Police >에서 퍼프 대디가 참여하여 힙합 버전으로 새롭게 탈바꿈된 < Roxanne ’97 > 역시 크로스오버를 위한 스팅의 실험정신이 담겨진 작품들이다. 스팅의 음악은 세련되고 고급스럽다. 그래서 선뜻 받아들이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대중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스팅에 대한 국내 여성 팬들의 사랑은 절대적이다. 여기에는 영화음악이 한몫을 했다. 그는 영화 < 레옹(Leon) >의 ‘Shape of my heart’, < 네 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Four Weddings & A Funeral) >의 ‘The secret marriage’, < 라스베가스를 떠나며(Leaving Las Vegas) >의 ‘Angel eyes’, ‘It’s a lonesome old town’ 등을 통해 팬들과의 거리를 좁혔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스팅은 아예 까메오가 아닌 배우로서 1979년 영화 < Quadrophenia >를 비롯 < Brimston & Treacle >, < Dune >, < The Bride >, < Plenty >, < Lock, Stock And Two Smoking Barrels > 등 많은 작품에서 열연을 했다. 그가 영화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팅은 대중이 아닌 자기자신을 위해 음악을 한다. "나는 먼저 나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곡을 쓴다." 상업성에 포박 당하여 자아(自我)를 상실해버린 뮤지션들에 대한 따끔한 질책이다. 때문에 그의 음악에는 예술성이 베어있다. 50이 넘는 나이에도 다양한 변화를 모색하며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하는 자신감 또한 마찬가지다.
노래 : Zucchero (주케로,Zucchero Sugar Fornaciari)
걸쭉하고 목소리로 노래하는 주케로(Zucchero)는 이탈리아의 국보급 가수로 통하는 인물이다. 국내에도 히트곡 모음집을 비롯한 몇 장의 앨범이 공개된 바 있다. 비록 미국과 영국의 팝 스타처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1990년에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곡 ‘Senz una donna’(Without a woman)는 국내 팬들에게도 꽤 알려져 있다. 기타 영웅 에릭 클랩튼(Eric Clapto... 걸쭉하고 목소리로 노래하는 주케로(Zucchero)는 이탈리아의 국보급 가수로 통하는 인물이다. 국내에도 히트곡 모음집을 비롯한 몇 장의 앨범이 공개된 바 있다. 비록 미국과 영국의 팝 스타처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1990년에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곡 ‘Senz una donna’(Without a woman)는 국내 팬들에게도 꽤 알려져 있다. 기타 영웅 에릭 클랩튼(Eric Clapton)과 함께 유럽 투어에 나서기도 했으며, 위대한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연례 자선행사로 유명한 ‘파바로티와 친구들’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 얼굴도 알려져 있다. 1956년 생이며 본명은 알델모 포르나치아리(Aldelmo Fornaciari). 70년대 말에 수의약품을 전공하면서 볼롱가에서 밴드를 결성했지만 지명도를 획득하지 못했고 결국 80년대 초반에는 노래부르기에서 작곡으로 전향했다. 하지만 86년 < Respetto > 앨범과 함께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새기기 시작해 이듬해 앨범 < Blues >가 본국 이탈리아에서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면서 비로소 톱스타로 부상했다. ‘Senz una donna’가 수록된 87년의 앨범 < Ora Incenso Birra >도 유럽에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Senz una donna’는 1991년 영국 소울 가수 폴 영(Paul Young)과 함께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뒤섞은 버전으로 다시 발표되어 영국차트 5위에 올랐다. 이 때가 이탈리아를 벗어 국제적 명성을 확보한 시점. 한편 이 싱글이 수록된 1990년의 앨범 < Zucchero Fornaciari >는 국제적 지향을 뚜렷이 반영, 영어 노래가 포함되었으며 에릭 클랩튼과 R&B 오르간주자인 지미 스미스(Jimmy Smith)가 게스트로 참여했다. 90년대 초반 그가 영국차트에 명함을 내민 또 다른 2곡은 모두 듀엣 곡으로 소울 여가수 랜디 크로포드(Randy Crawford)와 부른 ‘Diamante’와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호흡을 맞춘 ‘Miserere’로 뒤 곡은 U2의 보노(Bono)가 만들어주었다. 그는 이로써 얻은 지명도로 1994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에도 출연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 퀸(Queen)의 프레디 머큐리 트리뷰트 공연에 참여해 노래하기도 했다. 그의 음악은 영국가수로 비교한다면 조 카커(Joe Cocker)와 유사한 ‘블루스와 소울 성향의 록’이다. 앨범 제목으로 ‘블루스’로 내걸었다는 점이나, 폴 영 랜디 크로포드와 노래했다는 것이 말해준다. 열정적이고 혼에 넘친 창법이란 점에서 영미 소울 가수들과 유사하지만 그러면서도 결코 이탈리아적 요소를 놓치지 않는 것이 특징. 그는 2003년 프랑스 프로듀서 알랑 시몬(Alan Simon)이 주도한 환경 프로젝트 앨범 < Gaia >에 인도네시아 앙군(Anngun)과 함께 ‘World’란 곡으로 참여했다.
노래 : Andrea Bocelli (안드레아 보첼리)
‘영혼의 목소리’, ‘눈먼 천사’ 등 여러 수식어가 따라붙는 보첼리는 비록 본격적인 오페라 가수는 못되었을지언정 자신만이 갖는 음악재능을 극대화시키며 전 세계 대중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클래식 가수로 우뚝 섰다. 그의 음악은 국내 음악팬들에게도 가슴 속 깊이 스며들어 있다. 굳이 그의 팬이 아니더라도 차태현, 김민희가 출연했던 모 이동통신 CF연작과 ‘결혼할까요’라는 프로그램의 배경음악으로 쓰였던 그의 음... ‘영혼의 목소리’, ‘눈먼 천사’ 등 여러 수식어가 따라붙는 보첼리는 비록 본격적인 오페라 가수는 못되었을지언정 자신만이 갖는 음악재능을 극대화시키며 전 세계 대중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클래식 가수로 우뚝 섰다. 그의 음악은 국내 음악팬들에게도 가슴 속 깊이 스며들어 있다.

굳이 그의 팬이 아니더라도 차태현, 김민희가 출연했던 모 이동통신 CF연작과 ‘결혼할까요’라는 프로그램의 배경음악으로 쓰였던 그의 음악을 기억할 게다. 사라 브라이트만과 함께 불러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한 ‘Time to say goodbye’와 ‘Canto della terra’, ‘Mai piu’ cosi’ lontano’ 등이 연속으로 방송전파를 타면서 국내 음악 팬들도 보첼리에 중독되었다. 가장 최근에도 모 광고를 통해 ‘Time to say goodbye’의 원곡 ‘Con te partiro’를 들을 수 있다.

클래식을 수업을 받은 보첼리는 탄탄한 성악적 실력을 기반으로 클래식과 대중음악과의 부드러운 결합을 시도했다. 이탈리아 특유의 벨 칸토 창법으로 오페라를 부르는 한편, 감미로운 목소리로 팝 발라드를 노래한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클래식과 팝을 섞는다고 해서 사람들이 감동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의 음악에 감동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그의 목소리가 지닌 특별함 때문이다. 파스빈더의 영화제목처럼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할까? 상처를 극복한 영혼의 심연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듣는 이들을 잠식하며 숭고함마저 일깨운다. 또한 그가 추구하는 팝과 클래식의 결합은 결코 한때의 방편이나 줄타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신뢰가 간다. 그것은 일부 한정된 클래식 팬들하고만 소통하는 게 아니라 보다 많은 대중과 호흡하고 싶다는 보첼리의 신념이 낳은 결과이기에 우리는 그 진솔한 열정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클래식과 팝 음악 활동을 동시에 병행하면서 그가 확립한 것은 팝과 클래식의 크로스오버이며, 최근 등장한 용어로는 ‘대중화된 오페라’, ‘팝 스타일로 부른 오페라’라는 뜻의 팝페라(Popera)였다. 그가 등장한 1990년대 중반 이후 팝과 클래식의 크로스오버 또는 팝페라는 대중들에게 더욱 폭넓게 흡수되었고, 여러 스타들을 배출하며 클래식 음반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현재 활약중인 사라 브라이트만, ‘이탈리아의 마리아 칼라스’ 필리파 지오다노(Filippa Giordano), 그리고 이지(Izzy) 같은 팝페라 가수들은 모두 보첼리의 수혜자들이다.

잘 알려진 대로 보첼리는 시각장애인이다. 오페라 가수를 소망했던 그에게 앞을 볼 수 없다는 건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시골의 소산’이라고 칭할 정도로 이탈리아 투스카니(Tuscany)의 가족생활, 그리고 시골의 목가적인 문화와 전통에서 자양분을 얻으며 자란 그는 그 불편함을 딛고 일어섰다. 오페라 무대를 휘저으며 노래할 수는 없었지만 기어코 성악가수라는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냈다.

자신의 영웅이던 성악가 프랑코 코넬리(Franco Corelli)의 제자가 되어 본격적으로 수련을 쌓던 그는 1992년 ‘Miserere’란 곡의 데모 작업에 참여하면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록 뮤지션 주케로(Zucchero)와의 운명적 만남이 성사되었다. 벨 칸토 창법에 충실하면서도 부드러우며 공명하는 비브라토가 특징인 그의 목소리는 주케로와 테너 파바로티에게 큰 감명을 주었고, 이어 1994년에는 산 레모 가요제에서 ‘Il mare calmo della sera’란 곡으로 우승하며 그때부터 그의 음악생활이 꽃피기 시작한다. 1994년과 1995년 클래식 음반 2장을 잇따라 발표한 그는 1997년 드디어 첫 크로스오버 앨범 를 출시해 국제적인 성공을 거둔다. 이어 1999년에는 본격적인 팝 음반 가 발매 즉시 빌보드 팝 차트 5위 내에 진입하는 ‘사건’을 연출했다.

셀린 디온, 에로스 라마조티 같은 팝 가수들이 참여한 이 음반은 대중들에게 더욱 더 눈높이를 맞춰 훌륭한 팝 음반으로 평가받았다. 더욱 놀라운 건 그 앨범이 발매되자 동시에 그가 전에 발표했던 앨범 4장이 모조리 미국 팝 차트에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1987년 U2, 1992년 가스 브룩스 이후에 첫 번째 위업이었으며, 그와 같은 현상을 지켜본 미국 언론들은 비틀매니아, 데드헤드에 버금가는 ‘보첼리매니아’(Bocellimania)라는 문구를 붙여줬다.

특히 국내에서 인기가 높았던 그는, 내한 공연에서 지휘자 정명훈, 소프라노 조수미와 함께 주옥같은 오페라 아리아를 열창, 한국 팬들에게 잊지 못할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노래 : Bryan Adams (브라이언 아담스)
2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꾸준한 활동을 펼쳐 큰 성공을 거둔 캐나다 출신의 로큰롤 싱어 송라이터 브라이언 아담스(Bryan Adams)는 팝 역사상 가장 소박하고 진솔한 가수 중 한 명이다. 출중한 외모도, 잘빠진 몸매(?)도,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도 타고나진 않았지만 그의 솔직 담백한 노래와 ‘이웃집 형’ 같은 친근한 이미지는 짧은 기간에 그를 1980년대 메인스트림에서 확고부동(確固不動)한 순수 로큰... 2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꾸준한 활동을 펼쳐 큰 성공을 거둔 캐나다 출신의 로큰롤 싱어 송라이터 브라이언 아담스(Bryan Adams)는 팝 역사상 가장 소박하고 진솔한 가수 중 한 명이다. 출중한 외모도, 잘빠진 몸매(?)도,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도 타고나진 않았지만 그의 솔직 담백한 노래와 ‘이웃집 형’ 같은 친근한 이미지는 짧은 기간에 그를 1980년대 메인스트림에서 확고부동(確固不動)한 순수 로큰롤의 영웅으로 끌어올렸다. 음악 자체보다는 화려한 뮤직 비디오와 요란한 의상처럼 음악 외적인 요소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던 1980년대, 브라이언 아담스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뉴 웨이브와 MTV 유행으로 일반 가수들이 신시사이저가 찍어내는 인공적인 음악과 화려한 비주얼로 팬들의 귀와 눈을 현혹시킬 때 그는 요란한 치장을 배제하고 기타를 중심으로 하는 로큰롤을 들고 나와 눈길을 끌었다.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으면서 의상비를 절약(?)한 그가 자신만의 수수한 패션 스타일을 고집한 것은 당시 음악 외적인 것에 쏠려 가는 음악계의 트렌드에 대한 반발이었다. 1959년 11월5일 캐나다의 온타리오주(州) 킹스턴에서 태어나 요즈음 빌보드 싱글차트를 강타하고 있는 니클벡(Nickelback)의 고향인 서부 해안 도시 벤쿠버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이 개구쟁이 소년은 바로 그곳 벤쿠버에서 미래 로큰롤의 파수꾼으로 성장하는 꿈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작곡가 짐 발란스(JimVallance)와 파트너십을 형성, 같은 국적의 러버보이(Loverboy)에게 ‘Jump’나 미국 하드록의 거물급 밴드 키스(Kiss)의 ‘Down on your knees’와 ‘Rock and Roll Hell’ 등을 제공하면서 나름의 탄탄한 입지를 구축했다. 1980년과 1981년, 연이어 처녀작과 소포모어 앨범을 공개했지만 팬들로부터 주목받는데 실패하고 만다. 두 번째 앨범에서 커트된 ‘Lonely nights’는 84위를 기록하곤 2주만에 차트 밖으로 밀려나는 참패를 경험했다. 그러나 그의 진가는 1983년에 발표된 3집 < Cuts Like A Knife >에서부터 마침내 그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의 첫 히트곡이 된 허스키 록 보컬의 발라드 ‘Straight from the heart(10위)’는 같은 해에 여성 로커 보니 타일러(Bonnie Tyler)에 의해 웅장한 스케일로 커버되었고, 팬들은 이 앨범의 ‘Cuts like a knife(15위)’와 ‘This time(24위)’도 애청했다. 특히 음반 타이틀곡 ‘Cuts like a knife’의 그 유명한 후반부 코러스는 이 곡을 로큰롤의 고전으로 만들었다. 성공의 만족감을 채 누릴 수 없을 정도로 1984년 연말에 발표된 4집 < Reckless >는 그에게 더 큰 성공을 안겼다. 그의 음반들 중에서 가장 많은 판매고를 기록한 이 앨범으로 브라이언 아담스는 북미 지역을 훌쩍 뛰어넘어 월드 슈퍼스타로 솟아올랐다. < Cuts Like A Knife >가 성공의 씨앗이었다면 < Reckless >는 성공의 열매였던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Heaven’으로 그는 최초로 차트1위에 올랐으며 ‘Run to you(6위)’,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밴드를 조직했던 경험을 노래한 ‘Summer of 69(5위)’, ‘Somebody(11위)’, ‘One night love affair(13위)’, 그리고 1984년에 인상적으로 재기한 흑인 여성싱어 티나 터너(Tina Turner)와 함께 로큰롤의 열기를 발산한 ‘It’s only love(15위)’ 등이 줄줄이 히트차트를 도배했다. 여섯 싱글 모두 Top20을 기록한 대수확이었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것은 물론, 수록곡들은 기타주자 키스 스코트(Keith Scott)가 이끄는 백업 밴드의 견고한 연주로 사운드 측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일례로 오픈 코드를 구사한 ‘Summer of 69’는 기타지망생들의 연습교본이 되었다. 싱글들 덕에 앨범 역시 1985년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등극했고 5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항상 미국의 그림자에 눌려 있던 캐나다가 조니 미첼, 닐 영 등에 이은 또 하나의 팝 거목을 배출하는 순간이었다. < Reckless >의 성공으로 브라이언 아담스는 바빠졌다. 1985년에는 아프리카의 기아를 돕기 위한 음반 < We Are The World >에서 캐나다 아티스트들이 모여 부른 ‘Tears are not enough’를 작곡하는 것은 물론 ‘라이브 에이드’에도 기꺼이 동참하면서 뜨거운 인간애를 나누었다. 이렇게 타이트한 스케줄을 뒤로하고 1987년에 공개한 < Into The Fire >로부터는 싱글 ‘Heat of the night(6위)’과 ‘Hearts on fire(26위)’, ‘Victim of love(32위)’가 나왔지만 전작의 인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다음 앨범 < Waking Up The Neighbours >가 세상에 공개된 것은 다시 4년의 시간이 흐른 1991년이었다. 이 음반에 수록된 영화 < 로빈후드 >의 주제가 ‘(Everything I do) I do it for you’는 팝 싱글차트 정상을 7주간이나 호령했고, 아름다운 선율과 서정적인 분위기를 선호하는 국내 음악 팬들에게도 크게 어필했다. 이 곡으로 그는 생애 처음으로 그래미상 트로피를 손에 쥐었고 아카데미 후보에도 오르면서 1990년대에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빅히트 곡 외에도 ‘Can’t stop this thing we started(2위)’, ‘There will never be another tonight(31위)’, ‘Though I’d died and gone to heaven(13위)’, ‘Do I have to say the words?(11위)’ 등으로 인기를 이어갔으며, 이듬해에는 지난 10년 동안 자신의 음악 인생을 되돌아보는 베스트 음반 < So Far So Good >을 발표했고 여기서 다시 신작 싱글 ‘Please forgive me’를 7위에 올려놓으면서 절정의 분위기를 이어갔다. 전형적인 브라이언 아담스표 발라드인 이 곡도 국내에선 오랫동안 애청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브라이언 아담스의 음악은 거친 혈기와 패기 속에서 낭만을 전하는 로큰롤보다는, 멜로디를 내건 성인 취향의 미드템포와 발라드 노래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는 이 때문에 음악 향방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 Waking Up The Neighbours >는 아담스 특유의 직선적이고 흥겨운 로큰롤 사운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마지막 정규 음반이 되었다. 성공 퍼레이드는 여전해 1994년에는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 스팅(Sting)과 함께 ‘허스키 삼총사’를 이뤄 영화 < 삼총사 >의 주제곡 ‘All for love’로 또 다시 차트 정상을 수복했고, 1995년에는 영화 < 돈주앙 >에 삽입된 ‘Have you ever really loved a woman?’으로 빌보드 정상을 5주간이나 접수했다. 이 곡의 인트로 어쿠스틱 기타 연주부분은 팝 연주의 결정판으로 인정받았다. 이듬해에도 여장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and)와 함께 영화 < 미러 해스 투 페이시스 >의 주제가 ‘I finally found someone(8위)’을 불러 히트 레퍼토리를 추가했다. 나이 30대 중반을 넘어선 시점과 맞물린 1990년대의 두 번째 전성기는 이전의 로큰롤 스타일보다는 영화 주제곡이나 공연실황 음반을 발표하는 등 다소간 정체성을 조정한 듯한 인상이 투영되었지만 상기한 히트곡들은 예외 없이 차분한 발라드로 나타나 여전히 히트가수 이미지에 끌려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히트곡 모음집 < So Far So Good >은 500만장이 팔려나갔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팬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브라이언의 추억과 낭만이 긷든 로큰롤에서 자신들의 어렸을 적 꿈을 반추하길 원하는 팬들과 나이에 어울리는 음악을 추구하고 싶은 아담스 자신간에 불가피한 괴리가 생겨났다.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해 뉴욕 해머스타인 볼룸에서 거행된 1997년의 프로젝트 < MTV Unplugged >는 일렉트릭 기타 위주의 예전 히트곡들을 어쿠스틱 음원으로 재생하는 절충적 방법을 취한 동시에 앞으로 그의 음악이 예전과 달라질 것임을 시사했지만 실적은 저조했다. 여기서 싱글 커트한 ‘Back to you(42위)’는 마지막 싱글 히트곡이 되었다. 1998년에 발표된 다음 앨범 < On A Day Like Today >는 팬들의 사정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1994년 2월 내한 공연을 가져 국내의 팝 팬들에게 벅찬 감동을 안겨준 브라이언 아담스는 관객들 중에서 한 남학생을 무대 위로 초청해 함께 ‘Heaven’을 부르기도 했고, 관중석 중간에 간이 무대를 마련해 뒤쪽에 위치한 팬들과도 거리감을 좁히는 등 수수하고 친절한 이미지를 실천, 큰 박수를 받았다. 그 이미지는 아직도 캐나다를 대표하는 가수로서 그를 기억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가수, 그러나 가장 천대받는 가수 이처럼 극도로 엇갈린 가수는 없다. 미국의 대중 주간지 < 피플 >은 92년 “그는 팝 음악의 창공에 독특한 위치를 점령하고 있다”며 “팬들로부터 그처럼 열광적인 환호를 받고 동시에 음악 비평가들로부터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받는 아티스트도 드물 것이다”고 기술했다. ‘이 시대의 스타’ 마이클 볼튼(Michael Bolton), 1990년 신년 벽두에 ‘그대없...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가수, 그러나 가장 천대받는 가수 이처럼 극도로 엇갈린 가수는 없다. 미국의 대중 주간지 < 피플 >은 92년 “그는 팝 음악의 창공에 독특한 위치를 점령하고 있다”며 “팬들로부터 그처럼 열광적인 환호를 받고 동시에 음악 비평가들로부터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받는 아티스트도 드물 것이다”고 기술했다. ‘이 시대의 스타’ 마이클 볼튼(Michael Bolton), 1990년 신년 벽두에 ‘그대없이 어떻게 살아가리?(How am I supposed to live without you?)’로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라 1990년대 첫 슈퍼스타가 된,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메가톤급 히트 앨범 < 영혼의 공급자(Soul Provider) > 이후 발표하는 앨범마다 기록적인 판매로 대중적인 명성을 구가했지만 비평가들로부터는 철저히 외면 당했다. 평론가들은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그에게 호된 질책으로 일관했다. 그것은 거의 ‘두들겨 패는’ 수준이었다. 일례로 <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지의 유명 저널리스트 ‘로버트 힐번’은 그를 가리켜 창조성 없이 악보를 그대로 전달하는 단계에 그친다는 의미에서 ‘팝의 썰매’라고 규정짓고는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자신이 돌파 할 수 없는 노래에 결코 도전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틀 속에 안주하려 한다. 그와 음악과의 관계는 스티븐 시걸과 영화와의 관계나 같다” 말이 그렇지 이것은 모욕이나 매 한가지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가 평자들로부터 아티스트란 말을 들을 수가 없다. 볼튼이 소울의 고전을 비롯해 흘러간 명곡을 멋들어지게 재해석해 노래해도 그들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이구동성으로 “원작의 기품을 버려 놓았다”고 질타한다. 그 가운데 가장 심한 것이 < 롤링 스톤 >지의 평가였다. 이 잡지는 1993년 43명의 비평가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 그를 ‘최악의 남자 가수’로 선정했다. 또한 빅 히트작 < 불후의 고전(Timeless, The Classics) >를 ‘최악의 앨범’으로 뽑아 미국에서만 5백만 장 이상이 팔려 나간 대중적 인기를 무색케 해 버렸다. 그가 이처럼 비평계의 푸대접을 받게 된 것은 물론 그의 보컬 스타일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핏줄을 솟게 하고 마치 토해 내는 듯한’ 창법을 구사한다. 4옥타브를 충분히 넘나드는 넓은 음역, 이것이 팬들에게는 환상이었지만 평론가들의 귀에는 높고 답답하게 들릴 뿐이었다. 그들은 그의 가창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금방 눈치챌 정도로 ‘작위적’이어서 곧 사람들을 질리게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그들은 예술적 고뇌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없는 그 작위가 결국은 상업성을 노린 것임을 경계한다. 로버트 힐번이 지적하는 ‘안주적 자세’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이를테면 대중적 성공에 떠밀려 아티스트적 실험 정신을 휴지화했다는 것인데, 실제로 볼튼은 < 영혼의 공급자 > 이후 앨범들인 < 시간, 사랑 그리고 부드러움(Time, Love And Tenderness) >과 < 불후의 고전 >에서 새로움을 선사하기보다는 전작의 성공패턴을 답습하는 경향을 드러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옛 곡의 리메이크가 성공하자, 줄줄이 리메이크 작품을 내놓았으며 더구나 보컬 스타일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변명의 여지없이 전작의 성공 재창출에 지나치게 집착했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 팔리는 음반을 만들기 위해 모험을 가능한 배제한 채 빅히트된 음반(Soul provider)을 모델로 그 스타일을 철저히 쫓는다는 얘기다. 비평가들이 이처럼 유난히 그에게 비판의 화살을 겨냥하는 데는 그가 곡을 만들어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라는 점도 크게 작용한다. 평론가들은 노래만 하는 싱어일 경우 그가 대중적 호응만을 고려한다 할지라도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대중의 기호에 따라 그들의 정서를 위무해 주는 팝 가수도 나름대로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다. 그러나 곡을 만들 능력이 있는 사람, 즉 싱어송라이터의 경우는 자신의 음악 세계를 펼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그가 앨범 판매량을 늘리기에 얽매여 있을 때는 가차없이 장사꾼으로 매도해 버린다. 만약 볼튼이 단순한 싱어에 머물렀다면 아마도 그처럼 잔인한 혹평에 시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과연 이러한 비평가들의 철저한 외면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비평가들이 뭐라 떠들어도 압도적으로 자신의 노래를 사랑해 주는 대중이라는 ‘응원군’을 내세워 여유를 잃지 않았고 앨범의 높은 판매고를 ‘비평에 견디는’(Critic-proof) 방파제로 제시하곤 했다. 사실 그의 노래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진 음악 관계자들도 적지 않다. 우선 그가 1988년 ‘만의 부두에 앉아(Sitting on the dock of the bay)’를 리메이크했을 때 이 곡의 원작자인 오티스 레딩의 미망인 젤마 여사로부터 극찬을 받은 사실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는 볼튼에게 편지를 써서 또는 공개석상에서 그의 노래가 “지금까지 나온 남편 곡의 무수한 버전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며 “만약 지하에 있는 남편도 들었다면 흡족했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볼튼의 강력한 후원자인 어머니 헬렌 볼로틴(볼튼의 본명은 Bolotin) 여사는 “내 아들이 노래하는 것을 비명을 지르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그는 단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라며 비평계의 시각을 몰지각으로 단정한다. 그와 곡을 함께 쓰는 오랜 친구 다이안 워렌(Diane Warren)은 한편으로 볼튼에 대한 평자들의 차가운 시선이 오히려 대중의 호응을 증폭시켰다는 흥미로운 견해를 내놓고 있다. 그의 주장은 “한 남자가 혹독하게 비판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한없이 부드럽게 노래할 때 여성들은 오히려 그를 사랑해 준다. 여성들은 거기서 녹아 버린다”는 것이다. 부연하면 평론가들의 무차별 공격이 도리어 여성 특유의 모성본능을 자극해 그를 감싸주게 됐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그의 음악팬들은 절대 다수가 여성인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그처럼 비평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가엾은(?) 남자가-더구나 수려한 외모를 갖춘 남자가!-애절하게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를 노래할 때 대부분이 여성들은 이성이 마비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마이클 볼튼과 비평과의 대치는 곧 ‘감성적인 여성 팬들’과 ‘날카로운 평론가들’간의 보이지 않는 대결(?)의 측면도 가세된 셈이다. 하지만 아티스트란 어떤 형태로든 비평가들의 눈초리를 암암리에 의식하게 된다. 그는 얼마나 심기가 불편했던지 1991년 그래미 최우수 남자 팝 가수상을 받던 날 밤 기자들에게 “무례한 사람들은 내 엉덩이에 키스하라”고 퍼붓기도 했다. 여기서 무례한 사람들이란 마구 펜을 휘갈기는 저널리스트나 비평가를 가리킴은 물론이다. 그런데 1993년 하반기에 그가 내놓은 앨범 < 한가지 >는 상당히 비평가들을 의식해 만들었다는 느낌을 주었다. 보컬의 톤도 많이 낮추고 자작곡의 비중을 높였으며 비판의 핵이었던 리메이크 남발도 자제, 옛곡은 빌 위더스의 ‘내게 기대어(Lean on me)’ 한 곡으로 대폭 줄여 버린 것이었다. 평론가들의 반응은 당연히 ‘이제까지 볼튼의 앨범 중 최고’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작품성을 인정받는 대가로 대중적인 음반 판매 실적은 과거에 비해 저조해 두 마리 토끼를 사냥하지는 못했다. 그의 상업성이 유달리 지적 받게 된 데는 또한 그의 ‘눈물겨운 과거’도 한 요인이 되었다. 7살 때 섹스폰을 잡고 11살에 기타를 치는 등 음악 생활을 일찍 시작했지만 그의 청년기는 지극히 불우했다. 발표하는 음반마다 실패해 야간 업소 출연으로 겨우 연명해 나갈 정도였다. 1975년 레코드점 여직원인 모린(Maureen)과 결혼한 이후에도 생활은 개선되지 않아 노래 과외와 아이 돌봐주는 일, 즉 베이비시터로 집세를 충당하곤 했다(참고로 그가 봐 준 아이 중의 한 사람이 다름 아닌 폴라 압둘이었다. 이상하게도 두 사람의 관계는 묘한 악연으로 발전해 1990년 마이클 볼튼의 ‘그대 없이 어떻게 살아가리?’를 1위 자리에서 끌어내린 곡이 폴라 압둘의 ‘오포지츠 어트랙트(Opposites attract)’였고 이듬해 앨범 1위를 볼튼과 바통 터치한 주인공도 폴라 압둘이었다). 그의 술회에 따르면 당시 볼튼 부부와 세 딸은 마카로니와 치즈로 끼니를 때웠다고 하며 볼튼은 허구한 날 식탁에 앉아 “어떻게 집세 내고 자식을 먹여 살릴 것인가”만을 걱정했다고 한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터널의 끝에서도 빛을 볼 수 없을 만큼 참담했다”고 표현했다. 때문에 36세가 되어서야 성공했을 때(그는 1954년생으로 미국 코네티컷 주 뉴 헤이븐 출신) 주변에서 ‘하룻밤 자고 나니 스타가 된 케이스’라고 하자 “무슨 소리냐. 성공하기까지 대략 3천6백42번의 밤을 보냈다”고 응수했던 것이다. 비평가들은 그가 바닥 생활을 청산하자마자 곧바로 상업적으로 치달은 것을 못마땅해한다. 그럴수록 과거의 고난을 예술적으로 승화해 작품에 구현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의 성공은 사생활에도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 영혼의 공급자 >가 수면 위로 부상하던 1989년 아내 모린과 15년 결혼 생활을 청산하게 된 것이었다. 그 시점이 볼튼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그 무렵 한 인터뷰에서 그는 “하필 가장 잘 나가는 때에 성공을 축하하는 전화가 걸려 오는가 하면 이혼 증언 서류에 대한 변호사의 전화가 걸려 왔다. 너무 아이러니컬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그는 이듬해 정식으로 이혼했다. 그리하여 방문하는 관계로 매듭짓긴 했지만 세 딸들 아이사(20), 홀리(18), 타린(16)과도 떨어져 살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는 성심 성의껏 딸들을 보호하는 자상한 아빠의 역할에 충실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식들이 인정하는 가운데 1992년부터 TV배우인 니콜레트 셰리단(Nicollette Sheridan)과 건전한 연인 관계를 맺어 오고 있다. 마이클 볼튼은 우리에게 대중적으로 성공한 뮤지션과 비평계간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사이를 생각하게 한다. 앨범이 많이 팔려 나갈수록(진지함이 없을 경우) 비평가들로부터 매질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그처럼 실감나게 보여준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는 성공과 함께 이혼의 아픔을 겪었다. 그 스스로도 “성공하면 할수록 그것은 네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비디오 게임처럼 첫 번째 스크린을 통과하고 나면 너를 쏘려고 레이저 미사일을 단 비행접시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공의 대가는 쓰디쓴 법이다.
아일랜드의 전통 민속악을 연주하여 세계적 명성을 구가하고있는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 그룹이다. 연주자들의 탁월한 역량을 바탕으로, 이전 아일랜드 특히 더블린 사람들로 연상되는 조야한 남녀상열지사의 민요로부터, 청명하고 정화(淨化)를 자극하는 순수한 아일랜드 재래식 포크로 중심의 이동을 주도한 그룹이기도 하다. 면면히 내려오는 아일랜드 전통음악에 즉흥성을 얹힌 편곡을 통해 세계인들에게 켈트(Celt)로 표현되는 아일... 아일랜드의 전통 민속악을 연주하여 세계적 명성을 구가하고있는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 그룹이다. 연주자들의 탁월한 역량을 바탕으로, 이전 아일랜드 특히 더블린 사람들로 연상되는 조야한 남녀상열지사의 민요로부터, 청명하고 정화(淨化)를 자극하는 순수한 아일랜드 재래식 포크로 중심의 이동을 주도한 그룹이기도 하다. 면면히 내려오는 아일랜드 전통음악에 즉흥성을 얹힌 편곡을 통해 세계인들에게 켈트(Celt)로 표현되는 아일랜드 민속음악의 향기, 흥취 그리고 절절함을 전했다. 그룹은 더블린 출신의 민요연구자이자 작곡자인 숀 오리아다(Sean O’Riada)가 이끄는 코엘티오리 쿠알란(Coeltiori Cualann)이란 포크 연주그룹에서 활동한 패디 몰로니(Paddy Moloney)와 숀 오리아다가 1962년 한 단계 진전된 음악을 구현하려는 의도 아래, 같이 연주하던 구성원들과 손잡고 새로이 결성했다. 패디 몰로니가 연주하는 아일랜드 재래악기인 우일리언 파이프와 틴 휘슬은 향후 치프턴스의 사운드패턴을 결정하는 구심역할을 한다. 지금까지 4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라인업의 변화는 잦은 편이었지만 패디 몰로니와 하프 연주자 데릭 벨(Derek Bell), 피들 연주자 시안 키안(Sean Keane), 보드란을 연주하는 케빈 코네프(Kevin Conneff) 플루트 주자 매트 몰로이(Matt Molloy) 등 현재 다섯 멤버들은 1970년대부터 호흡을 맞춰왔다. 초창기 멤버인 피들 주자 마틴 파이(Martin Fay)도 1990년대 후반까지 함께 활동했다. 1963년 클라다(Claddagh) 레이블에서 그룹명을 제목으로 한 첫 앨범을 발표한다. 여기에는 더블린 사람들에게는 ‘The rocky road to Dublin’이란 제목으로 더 친숙한 춤곡 ‘Comb your hair and curl it’이 수록되어있다. 이 곡은 1995년의 걸작 < Long Black Veil >에서 롤링 스톤스이 참여한 버전으로도 유명하다. 6년이 지난 1969년에서야 2집 < Chieftains Ⅱ >가 나왔고 이듬해 영국 캠브리지 포크 페스티벌에 출연하면서 외국에서의 지명도를 높였지만, 좀더 세계로 뻗어가게 된 것은 1973년 포크그룹 스틸아이 스팬(Steeleye Span)의 매니저였던 조 러스티그(Jo Lustig)와 인연을 맺으면서부터였다. 치프턴스의 음악을 대중화 세계화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그는 영국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던 하프 연주자 데릭 벨의 참여를 주선했으며, 굴지의 레이블 아일랜드(Island)와의 계약체결을 이뤄냈다. 1975년 5집 < Chieftains Ⅴ >은 아일랜드 음반사에서 출시되었고 한층 켈틱 분위기가 강조되었다. 이전 1973년 < Chieftains Ⅳ >에서는 데릭 벨(1974년 가입)의 하프 연주가 압권인 ‘Morgan magan’이 히트했으며, 1975년에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 배리 린든 >(Barry Lyndon)의 스코어를 맡아 여기서 ‘Women of Ireland’가 주목을 받는다. 이 곡으로 치프턴스는 이듬해 영예의 오스카상을 수상한다. 보드란을 연주하면서 노래를 하는 멤버 케빈 코네프가 가세한 것도 이 무렵인 1976년이었다. 1970년대 중반 치프턴스의 위상은 날로 높아져 북미 일본 호주 유럽 각지를 돌며 성황리의 순회공연을 가졌으며 다수의 영화에 스코어로 참여했다. 1979년에는 더블린 피닉스공원에서 열린 교황의 미사에 운집한 130만명의 인파 앞에서 공연을 가져, ‘사상 최다 관중수 라이브 공연’의 기록을 갖게 된다. 이 해에 피들과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매트 몰로이가 가입했다. 한해 전인 1978년 그룹은 콜롬비아 레이블로 이적했고 이 때부터 그들의 음악은 아일랜드 토속음악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타국(他國)의 민속음악을 수용하는 탄력성을 내비친다. 1985년 서방 그룹 최초로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의 포크 오케스트라(Chinese Ensemble)와 협연하고 역사적 만리장성 공연을 가진 것은 그 정점이었다. 차이니스 앙상블과의 공연은 당시로는 드문 동서(東西) 민속음악의 융합을 실현, 세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불법으로 나돌던 음반은 < Chieftains In China >란 제목으로 1987년에 정식으로 나와 팬들의 강한 수집욕구를 불렀다. 1988년에는 같은 아일랜드 출신의 팝 거목 밴 모리슨(Van Morrison)과 협연한 아일랜드 켈틱 정서가 물씬한 앨범 < Irish Heartbeat >를 발표, 또 한차례 격찬을 받았다. 이후 밴 모리슨은 그들의 공연과 음반 작업에 꾸준히 참여하는 단골손님이 되었고, 이후 치프턴스 앨범이 팝가수와의 협연이란 방향을 취하게 되는 물꼬를 텄다. 그룹은 다시 레이블을 RCA 빅터로 옮겨 1985년에는 활동 25주년을 기념하는 베스트 앨범 < A Chieftains Celebration >을 내놓았고 1991년에는 역시 아일랜드 출신으로 클래식 플루트주자이면서 팝과의 퓨전에 열심이었던 제임스 골웨이(James Galway)와의 공작 < Over The Sea To Skye >를 발표했고, 같은 해 잇따라 낸 앨범 < Reel Music >은 그간 그들이 만들어낸 영화음악을 집대성한 작품이었다. 1991년 앨범 < The Bells Of Dublin >은 팝 스타 친구들과 음반을 함께 만드는 치프턴스의 전통을 확립했다. 여기에는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마리안느 페이스풀(Marianne Faithful), 잭슨 브라운(Jackson Browne), 리키 리 존스(Rickie Lee Jones) 등이 참여했다. 이듬해 아일랜드 벨파스트 그랜드 오페라 하우스에서 가진 실황공연 앨범 < An Irish Evening >에는 후(The Who)의 로저 달트리(Roger Daltrey)와 컨트리 팝가수 낸시 그리피스(Nanci Griffith)가 초대되었다. 로저 달트리는 후의 명곡 ‘Behind blue eyes’를 치프턴스의 연주에 맞춰 이색적인 버전을 만들어냈다. 이 앨범으로 치프턴스는 그래미상 베스트 트래디셔널 포크 앨범 부문을 수상했다. 같은 해 앨범 < Another Country >는 음악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내비친 작품이었다. 여기에는 체트 애트킨스(Chet Atkins), 에밀루 해리스(Emmylou Harris), 리키 스캑스(Ricky Scaggs), 윌리 넬슨(Willie Nelson) 등 굵직한 미국의 컨트리 음악계의 스타가 게스트로 참여해, 오늘날 미국의 컨트리 음악이 아일랜드 민속음악에서 발전해왔음을 입증했다. 이 앨범 역시 그래미상 베스트 콘템포러리 포크 앨범을 수상, < An Irish Evening >과 함께 그 해 포크 뮤직 부문 2개 트로피는 모두 치프턴스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팝스타와의 공동작업은 1995년의 앨범 < The Long Black Veil >에서 한층 빛났다. 이 음반에선 스팅(Sting)이 ‘Mo ghile mear(our hero)’, 시네드 오코너(Sinead O’Connor)가 ‘The foggy dew’, 밴 모리슨이 ‘Have I told you lately that I love you’, 마크 노플러(Mark Knofler)가 ‘The lily of the west’를 각각 불렀고 롤링 스톤스는 ‘The long black veil’과 ‘The rocky road to Dublin’ 2곡에 참여했다. 치프턴스나 게스트들 공히 새로운 음악적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은 이 앨범은 치프턴스 걸작 중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이후에도 영화음악 모음집 < Film Cuts >(1996년), 린다 론스태드(Linda Ronstadt)와 로스 로보스(Los Lobos)가 힘을 보탠 < Santiago >(1996년), 미국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TV드라마 ‘The Irish In America’의 음악을 모은 것으로 다시 엘비스 코스텔로와 밴 모리슨이 동참한 < The Long Journey >(1998년)을 출시해 지치지 않는 열정과 관록을 과시했다. 1999년의 앨범 < Tears Of Stone >은 메리 채핀 카펜터(Mary-Chapin Carpenter), 조니 미첼(Joni Mitchell), 코어스(Corrs), 보니 레이트(Bonnie Raiit)등의 유명 여성 싱어송라이터들만이 참여하는 시의성 기획으로 다시금 주목을 획득했고 새 천년을 맞아서는 아일랜드의 뿌리로 돌아간 앨범 < Water From The Well >을 내놓았다. 2002년에는 밥 말리의 아들 지기 말리(Ziggy Marley), 다이애나 크롤(Diana Krall)과 아트 가펑클(Art Garfunkel)이 듀엣으로 부른 신곡들이 포함된 1990년대 베스트 앨범 < The Wide World Over >로 찬란한 그룹활동 40주년을 기념했다. (참조 Phil Hardy저 The Faber Companion To 20th Century Popular Music)
세상일에 아무 관심없는 천재 작곡가 대중 음악인을 ‘음악 하는 자세’와 관련하여 분류한다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가 처해 있는 시대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여 대중 정서의 현 위치를 찾으려는 사람들이며, 다른 한쪽은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무관하게 자신의 음악만을 표출하는 데 심혈을 쏟는 사람들이다. 두 가지 스타일이 혼재되어 있는 음악인도 있을 테지만 대체로 전자의 무게 중심은 시각... 세상일에 아무 관심없는 천재 작곡가 대중 음악인을 ‘음악 하는 자세’와 관련하여 분류한다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가 처해 있는 시대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여 대중 정서의 현 위치를 찾으려는 사람들이며, 다른 한쪽은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무관하게 자신의 음악만을 표출하는 데 심혈을 쏟는 사람들이다. 두 가지 스타일이 혼재되어 있는 음악인도 있을 테지만 대체로 전자의 무게 중심은 시각(view)일 것이며 후자는 예술(art)이다. 엘튼 존은 바로 후자를 대표하는 금세기 최고 록 스타 가운데 한사람이다. 흔히 그는 1970년대를 대변하는 톱 가수로서 록 역사에 기록된다. 1970년대가 개막되면서 ‘보더 송(Border song)’을 빌보드 차트에 랭크시키며 등장한 그는 이후 당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탁월한 선율로 인기 차트를 석권했다. 그의 멜로디를 뽑아내는 재주는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쌍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경이적이었고 또 천재적이었다. 만약 1970년대에 그가 없었더라면 팝계의 ‘예술적 활기’는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와 관련, 록 평론가인 로버트 크리스트고(Robert Christgau)의 엘튼 존에 대한 서술은 참으로 맹쾌하다. “1960년대의 비치 보이스처럼 엘튼 존은 1970년대의 필수적인 시금석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그가 해악의 진부성을 축약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렇게 하라. 하지만 내 생각으로 그는 가장 유순하고 황량한 시절마저도 생기로 가득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인물이다.” 그런데 크리스트고도 인정하고 있듯이 1970년대는 사회성으로 특징지어진 1960년대 록 혁명의 정신이 함몰되어 버린 ‘록 예술성의 시대’로 정의된다. 크리스트고가 그때를 ‘해악’이니 ‘유순하고 황량한 시절’이니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에 기초한 것이다. 엘튼 존 스스로도 ‘음악을 만들면서 정치적 이슈를 내거는 것은 넌센스다. 세상사를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가서 음악하는 것뿐’ 이라며 자신의 비(非)참여적 음악관을 천명하곤 했다. 그는 “음악에 있어서 정치가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말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1960년대 가수들을 보라. 삶은 여전히 똑같지 않은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록의 사회성에 얼마나 등을 돌렸는지는 곡 쓰기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는 다른 송라이터들과 달리 작사는 직접 하지 않고 남에게 맡겼는데 당시 그의 작사 파트너는 버니 토핀(Bernie Taupin)이었다. 버니가 쓴 노랫말은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으로 가득 찼다. 버니는 사회를 떠난 신변잡기의 소재에 집착하면서 공상을 써내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엘튼은 그의 가사를 좀처럼 따지지 않았다. 그저 즐겁게 그의 공상을 팬들에게 전달할 뿐이었다. 그는 심지어 “난 정말 버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에 대한 노래냐고 묻기는 하지만 의미를 캐내지는 않는다. 난 그의 가사 10편에 곡을 붙일 때까지 그를 만나지 않은 적도 있다”고 스스럼없이 밝히기도 했다. 자기 환상만을 늘어놓는 작사가, 그것을 검증도 없이 곡을 쓰고 즐겁게 노래하는 가수, 그들에게서 시각을 바랄 수 없다. 그런 음악은 본질적으로 예술 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엘튼 존이 1970년대의 특성을 떠 안은 인물임을 시사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있다. 1970년대는 1960년대 히피의 프리 섹스 여파로 성의 일반적 개념이 철저히 해체되어 독신, 동성애, 그룹 섹스, 배우자 바꾸기 등 새로운 섹스 스타일이 마구 고개를 들던 시기이기도 했다. 때문에 1970년대를 ‘자극의 시대’라고도 일컫는 것이다. 엘튼은 소문난 양성(兩性)주의자였다. 아니, 스스로 바이 섹슈얼(Bi-sexual)이라고 공언하고 다녔다. 그런 충격적 신상 공개는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를 뺀다면 록 스타들 중에서는 그에게서 최초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는 양성주의자가 아니라 동성주의자, 즉 게이라는 사실이었다. 최근 < 디테일즈 >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왜 그 때 호모라고 하지 않고 바이 섹슈얼이라고 했냐”하는 질문에 “아마 겁이 나서였기 때문일 거다. 진실 파기이지만 그 당시에는 가능한 한 ‘외교적’으로 말하려고 생각했다”고 답변했다. 이 부분에 관해서 그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인터뷰 내용을 더 살펴보기로 하자. - 언제부터 여성 관계를 단계적으로 끝냈는가? :끝내다니? 어떠한 여성 관계도 결코 없었다. 그 누구도 나는 끝내고 자시고 하지 않았다. - 몇 살 때부터 자신이 게이임을 알았는가? :대략 23세쯤이었을 거다(그는 1947년생이므로 1970년쯤 된다). 그때가 나의 첫 실제 경험이었다. 아마 그 전부터 게이인지 알았을 텐데 23살에 실질적으로 그것을 맞이했다. - 그런데 결혼은 왜 했나? :잘못된 이유로 결혼했다. 난 결혼하면 내가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게이야. 난 정말 불행해’라고 여기곤 했으니까. 동성연애자라는 여론의 화살을 피하려고 결혼했다는 얘기다. 그는 1984년 독일 출신의 레코딩 엔지니어인 레니트 블라우어(Renete Blauer)와 결혼식을 올렸다. 게이라고 공공연히 밝힌 사람이 여자에게 갔다는 이유로 화제를 모았던 이 관계는 당연히 오래가지 못했다. 둘은 3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1987년 이혼했다. 게이 발언, 여성과 결혼, 그리고 이혼 등의 사건으로 이미 타블로이드 신문의 가십 단골이 된 그는 1988년 마침내 한 차례 커다란 홍역을 치러야 했다. 영국의 < 선 >지가 “엘튼이 10대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추잡한 섹스 파티를 벌였다”는 기사를 게재한 것이었다. 그 기사에 따르면 그는 게이를 초월하는 ‘성도착증 환자’이자 ‘성격 장애자’나 다름없었다. 인간 관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어머니마저 창피해 스페인으로 떠나버리자 분기탱천한 그는 두주먹 불끈 쥐고 < 선 >지를 고소했고 이어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이게 됐다. 그는 이 재판에서 승소해 명예를 회복했지만 이후 언론으로부터는 ‘흥미의 대사(Ambassador of Fun)’라는 불명예스런 타이틀을 얻었다. 애초부터 매스컴과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지만-언론의 등쌀이 마릴린 먼로를 죽이게 했다는 내용을 노래 ‘바람속의 촛불(Candle in the wind)’로 알 수 있다-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언론에 몸서리를 치게 되었다. 그는 영화 < 라이온 킹 >의 사운드 트랙은 ‘오늘밤 그대는 사랑을 느끼나요?(Can you feel the love tonight?)’으로 재기한 94년까지 근 7년 간 가능한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회피했다. 그의 기자 혐오증은 너무나 유명하다. 스스로도 “난 영국의 언론에 분노가 치민다. 정말로 그들이 싫다. 그들은 거짓말쟁이들이며 지구의 깡패들이다”라고 강도 높게 말하기도 했다. 그의 언론에 대한 분노는 지금도 살아 끓어 넘친다. 올해 발표된 새 앨범의 타이틀 송 ‘메이드 인 잉글랜드(Made in England-8월 19일자 빌보드 싱글 차트 52위)’가 그것을 실증해 주는 곡이다. “난 영국에서 만들어졌어. 블루 코티나차처럼 말야... ...넌 스캔들의 냄새를 좇았지. 여기 내 가운데 손가락을 봐. 난 고통의 40년을 살았어. 아무것도 기댈 것이 없어... ...넌 아직도 호모라고 얘기하고 모든 사람이 웃지.” 그가 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것도 일리는 있다. 원래가 솔직하고 감성적인 성격으로 자신의 성(性)을 고백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을 거치면서 일반인들의 미움과 손가락질이 생겨난 것이라고 그는 믿기 때문이다. 그의 인기가 하향세로 접어든 것도 양성주의자임을 밝힌 1976년부터였다. 그는 1989년 < 파리 마치 >지와의 인터뷰에서 “지난번 앨범 < 레그 스트라이크스 백(Reg Strikes Back) >은 전세계적으로 판매 성적이 대단히 좋았는데 유독 영국에서만은 결과가 안 좋았다. 영국인들 대부분이 < 선 >지의 악의적인 기사를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어떤 논리적인 응수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술과 자극’의 1970년대라는 보수 시대를 살아왔으며 보수 성향의 인물이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는 또 명백한 ‘록 엘리트’다. 부자라는 점에서도 그렇거니와 음악 능력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그는 “버니의 가사를 받아 기분이 좋을 때면 곡을 쓰는데 15분도 안걸린다”고 자랑했다. 그런 천부적 재능을 밑천 삼아 그는 지금까지 무려 32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물론 이 왕성한 생산력을 아티스트의 성실성이라는 측면에서 극구 칭송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틀어보면 그것은 음악 엘리트만이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실제로 그는 비평계 일각으로부터 ‘음악의 과소비’를 행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그가 1970년대 후반 ‘엘리트만이 아니라 누구나 음악할 수 있다’는 평등의 이데올로기를 내건 펑크 진영의 공격 대상이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아직도 그의 이름에는 ‘로커’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러며 연상되는 과거의 거친 피아노 연주나 기행적 무대는 분명 폭발과 반란을 특질로 하는 록의 전형적 제스처였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서 그러한 ‘록의 반항적 미학’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오늘밤 사랑을 느끼나요’가 말해주듯 중산층의 격조와 결탁한 ‘AOR(Adult Oriented Rock)’이나 스탠더드 팝으로 색깔을 바꾸어 안전지대에 정착해 있다. < 타임 >지는 얼마전 그의 새로운 전성기가 도래했음을 대서특필하는 순간에도 ‘그에게는 실재(實在)하는 록 스타의 고뇌와 거친 감정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빼놓지 않았다. 그가 ‘팝계의 불사조’라는 작위를 하사 받아야 함은 마땅하다. 정글과도 같은 팝계를 4반세기에 걸쳐 롱런한 ‘영광의 생존’만으로도 그는 위대하다. 1993년에 이미 엘비스 프레슬리의 벽을 넘어 24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차트 40위권의 히트곡을 낸(올해로 그 햇수는 26년으로 늘어났다) 사실만으로도 그의 위력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마흔여덟 살의 노장이 신인들 틈새에서 몇 백만 장의 음반 판매고를 올리는 것 또한 우리 입장에서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그 나이의 사람에게 록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것도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시각이 없다. 그는 4반세기 동안 그의 관점을 개인으로부터 해방시킨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보수적인 시대에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이다. 내내 부진하다가 미국 사회에 보수적인 기류가 소생한 지난해(1994년) 재기한 것을 보라. 그의 노래들 ‘굿바이 옐로 브릭 로드(Goodbye yellow brick road)’ ‘오늘밤(Tonight)’ ‘미안하다는 말은 정말 어려워(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등은 아직도 우리들에게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팝송 청취와 수용이 예술적 가치에만 집중되어 있음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 살아있는 음악 전설 에릭 클랩튼은 그 이름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음악 전설’이다. 40여 년의 음악 여정 동안 그가 쌓아올린 메리트는 가히 대단하다. 야드버즈(Yardbirds)와 존 메이올스 블루스브레이커(John Mayall`s Bluesbreakers) 시절 블루스의 부흥을 주도했으며, 크림(Cream)의 활동기간 동안 헤비메탈의 원형을 제공했고, 재즈와 블루스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했다. 솔로로 독립하고... # 살아있는 음악 전설 에릭 클랩튼은 그 이름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음악 전설’이다. 40여 년의 음악 여정 동안 그가 쌓아올린 메리트는 가히 대단하다. 야드버즈(Yardbirds)와 존 메이올스 블루스브레이커(John Mayall`s Bluesbreakers) 시절 블루스의 부흥을 주도했으며, 크림(Cream)의 활동기간 동안 헤비메탈의 원형을 제공했고, 재즈와 블루스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했다. 솔로로 독립하고부터는 ‘진짜 블루스’에 접속불가를 외치는 대중들에게 팝 지향적인 ‘달콤 쌉싸름한 블루스’를 패스워드로 내놓아 블루스의 대중화를 선도했다. 그래미 트로피를 13번이나 받았으며,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1992년 야드버즈, 1993년 크림, 그리고 지난해 개인 자격으로 헌액된 것에서도 클랩튼의 공로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지난해 ‘블루스의 제왕’ B.B 킹(B.B King)과 협연한 작품〔Riding With The King〕으로 이번 그래미 시상식 ‘최고의 트래디셔널 블루스 앨범(Best Traditional Blues album)’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클랩튼은 ‘기타의 신’, ‘슬로우 핸드(Slowhand)’라는 닉네임이 말해주듯 기타 테크닉에 있어서도 대가(大家)의 경지에 올랐다. 감정을 질펀하게 쏟아내면서도 정확하고 절제된 테크닉을 구사하는 벤딩 주법(일명 쵸킹)과 비브라토는 다른 연주자들이 흉내조차 힘들 정도다. 그의 기타 연주와 관련하여 유명 기타리스트들의 칭찬 코멘트를 들어보자. “에릭은 정말 재주가 많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플레이는 뭐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감정과 함께 블루스를 연주한다. 그가 연주할 때 당신은 그것이 블루스라는 것을 알 것이다.” -B.B 킹- “그는 나보다 훨씬 더 블루스 연주가 뛰어나다. 왜냐하면 그는 블루스를 공부했고, 그것에 대해 당당하기 때문이다.” -제프 벡(Jeff Beck)- “내가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나는 그의 연주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바로 하늘에서 치는 천둥번개 같았다.” -존 이써리지(John Etheridge) 하지만 이런 융숭한 대접에 대해 클랩튼은 “나에 대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나는 악평을 받았을 때 그 사실을 소화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호평도 마찬가지다.”며 자신을 향한 관심을 무척 꺼려했다. 그를 추종하는 후배 뮤지션에 대해서도 한마디했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목소리가 있는 것처럼 나같이 연주하는 것은 아마 무리일 것이다. 자기 스타일로 연주해야 한다.”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경외보다는 그들만의 길을 개척할 것을 충고한다. 그의 음악과 인생 여로(旅路)가 굴곡이 심했기에 그 말은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 전설의 시작 에릭 클랩튼은 1945년 3월 30일 영국 서레이(Surrey)주의 리플리(Ripley)에서 태어났다. 그는 14살 생일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기타를 선물 받고 블루스에 빠져들었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하여 할머니 품에서 자라며 외로운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흑인들의 비참함과 슬픔을 노래한 블루스가 그에게 찾아간 것은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클랩튼은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빅 빌 블룬지(Big Bill Broonzy), 블라인드 윌리 존슨(Blind Willie Johnson) 등 초기 블루스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연주하며 성장했다. 특히 ‘델타 블루스의 왕’이라 불리는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의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로버트 존슨의 앨범들은 내가 음악적으로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에릭 클랩튼의 기타 연주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1963년 야드버즈에 가입하면서부터였다. 그의 뛰어난 블루스 기타 테크닉은 단숨에 그룹의 사운드를 특징지었고, 매니저 지오지오 고멜스키(Giorgio Gomelsky)는 그에게 ‘슬로우 핸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클랩튼은 그룹의 음악이 상업적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며 1965년 3월 팀을 떠나 존 메이올이 이끌었던 블루스브레이커스로 자리를 옮겼다. 야드버즈를 탈퇴한 직후 그가 연주했던 ‘For Your Love’는 영국 차트 3위를 기록했다. 이후 야드버즈는 제프 벡과 지미 페이지(Jimmy Page)가 가세하며 전성시대를 누렸다. 바로 록음악계의 ‘3대 기타리스트’가 야즈버즈를 통해 모두 비상했다. # 나, 블루스로 돌아갈래! 이 당시 에릭 클랩튼의 블루스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이와 관계된 에피소드 한가지. 그는 블루스브레이커스의 휴지기 동안에 다른 뮤지션들과 전세계를 돌며 블루스 전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클랩튼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몇몇 멤버들이 영국으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한 클럽에서 계속 머물며 공연을 계속했다. 그는 그러나 강도로 돌변한 클럽 주인의 협박으로 옷과 새로 산 마샬 앰프를 놔둔 채 영국으로 도망쳐야했다. 음악 외에는 모든 일에 문외한이었던 ‘순수한’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클랩튼은 블루스브레이커스에서 존 메이올의 독단적 행동에 불만을 품고 자신만의 그룹을 결성하기로 계획했다. 그는 1966년 존 메이올 몰래 드러머 진저 베이커(Ginger Baker), 베이시스트 잭 브루스(Jack Bruce)와 함께 크림을 조직하고 합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후 음악 전문지 < 멜로디 메이커(Melody Maker) >의 폭로로 인해 클랩튼은 블루스브레이커스에서 해고를 당해야만 했다. 이때 런던의 한 빌딩 벽에는 ‘클랜튼은 신이다(Clapton is god)’라는 문구가 새겨져 많은 화제를 몰고 왔다. 에릭 클랩튼은 크림을 통해 ‘악기 예술의 미학’을 획득했다. 블루스와 재즈가 절묘하게 어울러진 그들의 사운드는 즉흥적이고 빠르며 굉음을 발산했다. 멤버들의 정교하고 뛰어난 연주 실력은 타 밴드와의 간격 차를 크게 벌려놓았고, 음악계에 상당한 충격파를 던졌다. 그들의 앨범들인 1966년의 < Fresh Cream >, 1967년의 < Disraeli Gears >, 그리고 이듬해의 < Wheels Of Fire > 모두 명반으로 손꼽히며 파죽지세의 인기몰이를 했다. 특히 스튜디오 녹음과 라이브를 한자리에 모은 더블 앨범 < Wheels Of Fire >는 미국에서 4주간 정상을 차지하며 멤버들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다. 바로 이 작품에 명곡 ‘White room’이 수록되어 있다. 그룹은 그러나 서로간의 음악적 견해차를 이유로 1968년 11월 해산했다. 클랩튼의 음악 이력 중 최고의 절정기가 막을 내린 것이다. 이후 트리오는 1993년 1월 명예의 전당 헌액 기념으로 재결합 공연을 가져 많은 박수를 받기도 했다. 크림의 해체 이듬해 클랩튼은 진저 베이커와 함께 트래픽(Traffic) 출신의 스티브 윈우드(Steve Winwood), 페밀리(Family)의 베이스 주자였던 릭 그레치(Rick Grech)를 영입하여 ‘슈퍼 그룹’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를 탄생시켰다. 언론에서는 ‘인스턴트 슈퍼 그룹’이라고 비아냥거렸지만, 그들은 공연 때 ‘최후의 슈퍼 그룹’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대조를 이뤘다. 하지만 언론의 지적대로 그들은 1969년 데뷔 앨범 < Blind Faith >를 내놓고 각자의 길로 떠났다. # ‘레일라’의 비극 에릭 클랩튼의 1970년대는 한 여인과의 슬픈 사랑 얘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다름 아닌 비틀스의 멤버 조지 해리슨의 아내 패티 보이드(Patti Boyd)였다. 클랩튼은 1968년 비틀즈의 화이트 앨범에 수록된 조지의 곡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와 같은 해 공개된 솔로 음반 < Wonderwall Music >에서 기타를 맡을 정도로 조지 해리슨과는 절친한 사이였다. 조지와 음악적 교류를 하면서 패티를 본 후 사랑에 빠진 것이다. 당시 종교에 심취해 있던 남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패티 보이드는 클랩튼에게 의도적으로 눈길을 주었다. 음악 밖에 모르던 에릭은 그만 사랑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조지와의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갔고, 실의에 빠진 에릭 클랩튼은 술과 마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이런 사랑에 대한 좌절감과 패배감은 1970년 11월에 발표된 데릭 앤 더 도미노스(Derek And The Dominos)의 마스터피스 < Layla & Other Assorted Lovesongs >에 고스란히 담겨졌다. ‘남편이 당신을 슬프게 만들었을 때/ 나는 당신을 위로하려고 노력했어요/ 바보처럼 나는 당신과 사랑에 빠져버렸죠/레일라 당신은 나를 무릎꿇게 만들었어요/ 레일라, 당신께 애원합니다/ 제발...’. 수록곡 ‘Layla’의 구구 절절한 가사처럼 에릭 클랩튼의 상처받은 마음은 노래 전체에 용광로처럼 녹아들었다. 고통스런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바닥까지 긁어내어, 그 고통을 음악으로 걸러냈다. ‘처절한 내면의 사생화’다. 클랩튼의 이러한 마음에 하늘도 감동했던지 얼마 후 패티 보이드는 조지 해리슨과 이혼했고, 둘은 1979년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이 음반은 비록 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블루스와 삶을 완벽하게 조화시키며 걸작의 반열로 들어섰다. # 극적인 재기 드라마 1부 실연의 파장은 매우 컸다. 에릭 클랩튼은 감정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알코올과 약물 중독으로 인하여 병원과 요양원을 들락거려야만 했다. 기타조차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이때부터 드라마틱한 재기 스토리가 전개된다.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던 그에게 구세주가 찾아왔다. 그룹 후(The Who)의 ‘피트 타운센드’(Pete Townshend)였다. 피트는 이미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찬밥취급을 받던 지미 헨드릭스를 영국으로 데려와 음악계에 데뷔시키는 등 ‘선행’을 벌여왔다. 피트는 클랩튼에게 마약에서 벗어날 것을 권유했고, 1973년 에렉 클랩튼의 레인보우 콘서트를 주최해 재기의 무대를 마련해줬다. 클랩튼은 데릭 앤 도미노스 이후 3년 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피트는 에릭 클랩튼이 정신을 못 차리자 하와이안 기타로 머리를 때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기력을 회복한 에릭 클랩튼은 1년 뒤 재기 작품 < 461 Ocean Boulevard >를 내놓았다. 앨범이 출시되기까지는 피트 타운센드와 함께 RSO 레이블의 사장인 로버트 스틱우드(Robert Stigwood)의 도움이 컸다. 그는 폐인이 된 클랩튼을 위해 요양장소로 플로리다에 있는 자신의 별장을 선뜻 내주며 재기의 기틀을 마련케 했다. 클랩튼도 스틱우드의 호의에 고개 숙여 감사하며 다시 기타를 집어들었다. 스틱우드의 별장주소가 바로 이 앨범의 타이틀이다. 스틱우드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인 것이다. 밥 말리(Bob Marley)의 곡을 리메이크한 ‘I shot the sheriff’는 정상을 차지했고, ‘Let it grow’, ‘Give me strength’ 등이 인기가도를 달리며 ‘기타의 신’으로 부활했다. 이후 연이어 내놓은 앨범들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특히 ‘Wonderful tonight’이 실려있는 1977년 작품 < Slowhand >는 300만장이상의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에릭 클랩튼은 약물 중독으로 고생하던 이 시기를 잊지 못하고, 1999년 마약 중독자 치료기금을 위해 자신의 기타 100대를 경매에 내놓은바 있다. # 극적인 재기 드라마 2부 에릭 클랩튼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도 꾸준하게 앨범을 발표하지만 별다른 활약상을 보이지 못했다. 물론 1989년 작품 < Journeyman >같은 수작을 낚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룹시절과 달리 음악적 측면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평론가들은 ‘에너지가 없어지고 느슨해진 팝 블루스’라며 평가 절하했다. 하지만 그는 1991년 아들의 죽음이라는 ‘비극’과 함께 현실무대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운명의 여인’ 패티 보이드와 헤어지고 이탈리아 투어 도중 만난 젊은 사진작가이자 배우였던 로리 델 산토(Lori Del Santo)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코너(Corner)가 뉴욕 맨하탄의 아파트에서 실족사한 것이다. 나중에 에릭 클랩튼은 “내가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온통 경찰관과 의료진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것이 나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일처럼 느껴졌다.”며 망연자실했던 당시의 심정을 묘사했다. 클랩튼은 그러나 ‘예전처럼’ 기타를 놓지 않았다. 오히려 기타와 노래에 더욱 몰두했다. 음악만이 유일한 치료제라는 것을 이전 경험으로 깨달았다. 그는 1992년 영화 < 러쉬(Rush) >의 사운드 트랙에 삽입된 ‘Tears in heaven’에 죽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실었다. MTV의 제안으로 그 해 녹음된 앨범 < Unplugged >에서의 백미도 단연 이 곡이었다. 어쿠스틱 기타에 실린 애절한 멜로디와 노랫말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듬해 그래미는 그에게 ‘올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 ‘올해의 레코드(Record Of The Year)’, ‘올해의 노래(Song Of The Year)’ 등 알짜배기를 포함하여 6개의 트로피를 ‘위로 선물’로 전달했다. ‘추억’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재진입하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에릭 클랩튼의 상승세는 계속됐다. 1994년 발매한 < From The Cradle >은 흥행과 평단 양편에서 세계적인 지위를 얻었다. 미국과 영국 앨범차트를 동시 석권하였고, 블루스의 성찬을 담아낸 작품으로 격찬 받았다. 4년 뒤에 내놓은 앨범 < Pilgrim > 또한 플래티넘을 기록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 전설은 영원하다 에릭 클랩튼은 작품마다 자신의 인생을 투영시켰다. 혼을 불어넣었다. 올해 발표한 앨범 < Reptile >에도 그의 숨결을 살아 숨쉰다. 신작의 기저에 흐르는 물줄기는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삼촌의 죽음’이다. 삼촌에 대한 존경심을 작품 전체에 고스란히 옮겼다. “‘Reptile(사전적 의미로는 비열한 인간이라는 뜻)’은 삼촌과 관련이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내가 태어난 곳에서 ‘Reptile’이란 단어는 사랑스러운 말이다.” 이 음반은 프로듀서 사이먼 클리미에(Simon Climie)를 포함하여 전작 < Riding With The King >의 세션팀이 그대로 참여했다. 또한 시카고 소울의 거장 커티스 메이필드(Cutis Mayfield)의 빈자리를 남겨둔 채 임프레션스(The Impressions)가 부드러운 화음을 더하고 있다. 블루스뿐만 아니라 레게, 컨트리, 테크노 등 다양한 장르로 음악 지류를 넓히고 있는 클랩튼은 새 앨범에서도 그 폭을 확대했다. 퓨전 재즈풍의 기타 연주가 도입됐으며, 라틴 음악의 요소도 엿보인다. 보사 노바의 흥취가 물씬 풍기는 첫 곡 ‘Reptile’을 비롯해, ‘Modern girl’, ‘Son & sylvia’ 등에서 알 수 있다. ‘리듬’에 대한 클랩튼의 지속적인 실험이다. 선배들을 향한 오마쥬도 계속된다. 에릭 클랩튼의 음악적 스승 중 한 명인 기타리스트 J.J. 케일(J.J. Cale)의 ‘Travelin` light’, 1985년에 세상을 떠난 ‘점프 블루스의 대가’ 빅 조 터너(Big Joe Turner)의 고전 ‘Got you on my mind’ 등이 그것이다. 또한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1980년대 히트넘버 ‘I ain`t gonna stand for it’, 레이 찰스(Ray Charles)의 ‘Come back baby’를 새롭게 재해석하며 두 명의 맹인 거장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있다. 그는 그러나 ‘향수’를 풍기지 않는다. 애절하면서도 포근하게 감싸안는 음색과 선율로 그만의 분위기를 낸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곡조에 맞게 ‘톤’을 찾아내는, 바로 ‘기타의 신’만이 할 수 있는 특허품이다. 음악을 만들고 듣는 이가 인간이지만 ‘비인간적’인 음악이 판치는 요즘이다. 그러나 에릭 클랩튼의 음악과 인생은 접점이 없는 평행선을 달리지 않는다. 합일점을 찾아 예술로 승화시킨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희노애락이 담겨져 있다. 특히 역경 속에서 소중한 음악의 싹을 틔우고 키워냈다. 내면의 고통과 이별의 슬픔을 블루스로 쏟아냈다. ‘인간의 음악’이다. 당연하다. 허나 바로 이 점 때문에 클랩튼은 전설로 추앙 받는다.
이번 주 빌보드 싱글 차트 4위에 올라있는 곡 ‘우리 중 하나(One of us)’의 주인공 조안 오스본은 스타 자리를 예약한 유망신인이다. 가파른 상승곡선을 긋고 있는 그의 노래는 머라이어 캐리의 ‘어느 달콤한 날’을 깨고 1996년의 첫 번째 넘버원 신곡이 될 가능성이 크다. 최근 들어 그 만큼 칭송을 많이 받는 가수도 없을 것이다. < 뉴요커 >는 그를 ‘록 계의 가장 명료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 가운데 한 ... 이번 주 빌보드 싱글 차트 4위에 올라있는 곡 ‘우리 중 하나(One of us)’의 주인공 조안 오스본은 스타 자리를 예약한 유망신인이다. 가파른 상승곡선을 긋고 있는 그의 노래는 머라이어 캐리의 ‘어느 달콤한 날’을 깨고 1996년의 첫 번째 넘버원 신곡이 될 가능성이 크다. 최근 들어 그 만큼 칭송을 많이 받는 가수도 없을 것이다. < 뉴요커 >는 그를 ‘록 계의 가장 명료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 가운데 한 명’이라고 했고 <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는 ‘서민들의 고통과 즐거움을 표현할 줄 아는 브루스 스프링스턴의 재능을 지닌 인물’이라고 추켜세웠다. < 롤링스톤 >도 리뷰 코너에서 우수작이란 의미로 별표 네 개를 주었다. 이처럼 호평이 쏟아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째 노래를 썩 잘한다는 점이다. 허스키 하면서도 목소리가 탁하지 않은 데다, 미세한 감정 표현도 잘해낸다. 음악의 바탕이 중량감 있는 록이라는 것도 그가 지닌 장점이다. 그의 앨범 < 맛(Relish) >이 지난해의 걸작 록 앨범 중 하나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수록곡의 내용도 매우 광범위하면서 사실적이다. 약물에 찌든 매춘부나 자살하는 친구, 납부하지 않은 전화요금으로 인한 다툼 등을 소재로 했다. 제목이 ‘이제 벗읍시다(Let`s just get naked)’인 노래도 있다. 또 ‘거미줄(Spider web)’은 맹인가수 레이 찰스가 ‘볼 수는 없지만 노래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일어날 상황을 노래로 묘사한 것이다. 그처럼 그의 노래는 상상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 자신도 “내가 이 레코드를 취입하게 됐을 때 스스로에게 한 약속은 가능한 한 나의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풀어헤치자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때문에 그의 곡들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뭔가 해야겠다’는 억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 같은 결과를 ‘자유스런 곡 쓰기’를 통해 얻었다. 그는 이번 앨범을 만들기 전에 고(故) 독 퍼머스가 지도한 작곡 워크숍에 참여해, 그로부터 곡을 쓰려면 뭔가 머리 속에 떠오를 때 즉시 쓰라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저녁 식사 때도 노트북을 지참했고 종이가 없을 때는 팔뚝에 가사를 쓰기도 했다. 작위적으로 짜내듯 만들지 않은 만큼 그의 작품은 듣기에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수작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의 앨범은 음악이 짜 맞추는 ‘과학의 소산’이 아니라 ‘상상의 산물’이어야 함을 웅변해 준다. 그는 미국 켄터키 주 앵커리지 출신으로 1962년생이다. 신인이지만 결코 신세대는 아니다. 전에 두 장의 앨범을 낸 바 있지만 이제야 비로소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 빌보드 >기고가 래리 르블랑은 그의 뒤늦은 성공을 두고 ‘결국 재능은 승리한다는 증거’라고 묘사했다. 중고 신인으로 지각 성공한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그는 지난해 그래미의 주인공인 셰릴 크로와 닮은꼴이다. 마침 조안 오스본도 올해 그래미 6개 부문 수상 후보에 올라 있다. 셰릴 크로에 이은 또 한 번의 스타탄생을 기다려 본다.
1993년 서른살의 늦은 나이로 데뷔한 여성 로커 셰릴 크로우는 미국의 정통 록 사운드를 들려주는 뮤지션이다. 블루스와 컨트리가 섞인-국내에는 이상하게도 인기가 없는- ‘루츠(roots) 록’ 계열의 음악을 한다. 복고적인 음악에다 경쾌한 록 사운드와 여성 특유의 세밀한 감성이 합쳐져서 듣기 좋은 셰릴 크로우의 음악이 된다. 백업 싱어 출신인 그녀는 일상적 삶에 대해 때론 격정적으로 때론 담담하게 노래한다. 발랄... 1993년 서른살의 늦은 나이로 데뷔한 여성 로커 셰릴 크로우는 미국의 정통 록 사운드를 들려주는 뮤지션이다. 블루스와 컨트리가 섞인-국내에는 이상하게도 인기가 없는- ‘루츠(roots) 록’ 계열의 음악을 한다. 복고적인 음악에다 경쾌한 록 사운드와 여성 특유의 세밀한 감성이 합쳐져서 듣기 좋은 셰릴 크로우의 음악이 된다. 백업 싱어 출신인 그녀는 일상적 삶에 대해 때론 격정적으로 때론 담담하게 노래한다. 발랄한 귀염성이 느껴지는 음색에서는 선배 여가수 리키 리 존스(Rickie Lee Jones)의 영향이 느껴진다. 미국적인 루츠 록을 반기지 않는 정서 탓에 국내에서는 그 지명도가 낮은 편이지만 본고장 미국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나오는 앨범마다 격찬을 받았고 대형 팝 스타들이 자청해서 그녀를 돕는 등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가수다. 뒤늦게 빛을 본 ‘늦깎이 신인’의 전형인 셰릴 크로우는 1996년 이후 그래미상을 4년 연속 수상하며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그녀는 특히 남성중심의 록음악계에서 여성 뮤지션의 활동영역을 확장시킨 주역이다. 여성 싱어 송 라이터의 붐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으며, 사라 맥라클란과 함께 여성 뮤지션들의 축제인 를 주도하기도 했다. 1963년 2월 11일 태어난 셰릴 크로우는 아마추어 빅 밴드에서 활동했던 부모 덕에 어려서부터 음악과 친해졌다. 6살 때 이미 피아노 연주를 배우기 시작했고, 13살 때 처음으로 작곡을 하며 음악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클래식 음악 학위를 땄던 그녀는 잠시 음악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곧 작곡과 노래에 전념한다. 1987년부터는 백업 가수로서의 화려한 경력이 시작된다. 셰릴 크로우는 그 해 8월부터 18개월 간 마이클 잭슨의 월드투어에 백업 보컬로 따라 나섰다. 이후 돈 헨리, 로드 스튜어트, 조 카커, 조지 해리슨 등 쟁쟁한 슈퍼스타들의 공연에 참여하며 가수로서의 가능성을 키워갔다. 다양한 세션 활동으로 주가를 올린 셰릴 크로우는 1991년 < A&M > 레코드와 솔로 앨범을 내기로 계약한다. 이후 ‘튜스데이 나이트 뮤직 클럽(Tuesday Night Music Club)’이라는 이름으로 밴드생활을 하던 그녀는 1993년 밴드의 동료들이 작곡, 세션에 대거 참여한 데뷔앨범 을 발표했다. 그 앨범은 발표 당시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듬해부터 대단한 저력을 발휘하며 7백만 장이라는 놀라운 판매고를 기록했다. 역시 밀리언셀러가 된 싱글 ‘All I wanna do’는 13주간 정상을 지켰던 보이즈 투 멘의 ‘I make love to you’에 이어 차트 2위에 올랐다. 그 곡으로 셰릴 크로우는 1995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레코드’, ‘최우수 신인’ 등 4개 부문을 수상했다. 음악 전문지 이 1994년 선정한 ‘차세대 록의 주역’으로 뽑히기도 했다. ‘Leaving Las Vegas’, ‘Strong enough’ 등이 연속히트하며 성공적 솔로 가수가 된 그녀는 더 이상 백업 보컬이 아니었다. 밥 딜런, 롤링 스톤스, 이글스 같은 거장들의 공연에 오프닝 가수로서 당당히 노래를 불렀다. 1996년 10월에는 셀프타이틀의 두 번째 앨범이 발표되었다. 그녀 자신의 역할이 훨씬 커진 2집은 전작과 달리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차트 상위권에 올랐던 ‘If it makes you happy’, ‘Everyday is a winding road’ 같은 곡은 그녀의 훌륭한 작곡능력을 재확인시켰다. 1997년 8월 그녀는 사라 맥라클란, 숀 콜빈(Shawn Calvin), 주얼(Jewel) 등과 연계해서 를 주최했다. 이 여성들만의 축전은 ‘남성과 경쟁하는 여성이 아니라 개별적 존재로서의 여성’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어서 수많은 지지를 이끌어냈다. 1998년 9월 그녀는 세 번째 앨범 를 출시해서 ‘My favorite mistake’를 히트시켰다. 1998년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열렸던 공연실황은 음반 에 담겨 출시되었다. 이 앨범은 에릭 클랩튼, 롤링 스톤스의 키스 리처드, 프리텐더스의 크리시 하인드, 플릿우드 맥의 스티브 닉스, 사라 맥라클란 등 쟁쟁한 진용이 참여해 그녀의 높아진 위상을 실감케 했다. 건스 앤 로지스의 히트곡을 리메이크해 영화 에 삽입되었던 ‘Sweet child o` mine’는 그녀의 곡으로는 드물게 국내에서 히트를 기록했다. 셰릴 크로우의 음악은 뒤늦게 꽃피운 그녀의 인생과도 상통한다. 폭발적이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자연스럽게 사람의 마음을 끄는 미묘한 힘이 있다. 담배연기 자욱한 클럽에 홀로 앉아서 일상적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관조적 자세가 그녀에게 느껴진다. 그래서 더욱 그녀가 미덥다. 자극적인 첫맛보다는 은은한 뒷맛이 깊게 남는 가수다.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 토니 브랙스톤(Toni Braxton) 등과 함께 1990년대 중 후반의 팝 시장을 천하 삼분했던 셀린 디온(Celine Dion)은 디바(diva)의 정점을 대표하는 여가수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 머라이어 캐리에게 밀려 만년 2등 가수의 한을 삭였던 그녀는 영화 < 타이타닉 >의 테마송인 ‘My heart will go on’을 통해 단숨에 넘버원 팝 싱어의 반열에 ...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 토니 브랙스톤(Toni Braxton) 등과 함께 1990년대 중 후반의 팝 시장을 천하 삼분했던 셀린 디온(Celine Dion)은 디바(diva)의 정점을 대표하는 여가수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 머라이어 캐리에게 밀려 만년 2등 가수의 한을 삭였던 그녀는 영화 < 타이타닉 >의 테마송인 ‘My heart will go on’을 통해 단숨에 넘버원 팝 싱어의 반열에 올랐다. 캐나다에서 유일하게 불어를 쓰는 퀘벡 지방의 작은 집에서 1968년 첫 울음보를 터트린 셀린 디온. 그녀는 합계가 무려 16명인 대식구의 막내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또한 부모님 모두 노동자 출신이었기에 물질적으로 그다지 풍요롭지 못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부모님의 우산 아래 셀린 디온의 음악적 재능은 어린 시절부터 싹을 맘껏 틔웠다. 5살 때부터 부모님의 피아노 바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12살 때에는 ‘It was only a dream’이라는 최초의 자작곡을 썼다는 등의 후일담들이 잘 증명해준다. 오빠와 어머니의 전폭적 지원 하에 상기한 곡을 테이프화(化)했던 셀린 디온. 그녀는 그것을 매니저인 르네 앤젤릴(Rene Angelil)에게 보낸 뒤, 답변을 기다렸지만 묵묵 부답이었다. 허나 독촉 전화를 받고 그제서야 셀린 디온의 숨은 재능을 발견한 르네 앤젤릴은 그 날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고 그녀는 정식 데뷔 코스를 밟기 시작했다.(셀린 디온의 노래를 직접 들은 순간, 르네 앤젤릴은 그녀가 곧 인터내셔널 슈퍼 스타가 될 것임을 확신했다고 한다.) 1983년 15살의 나이에 발표했던 음반 < D’Amour Ou D’Amite >을 통해 캐나다 출신 아티스트로는 최초로 프랑스에서 골드 레코드를 기록하고 일본에서 개최되었던 야마하 작곡 대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하는 등, 이후 셀린 디온의 행보는 거칠 것 없는 탄탄대로였다. 또한 그녀는 그 즈음 조우했던 베테랑 프로듀서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와의 인연 덕에 걸프 전 참전 용사들을 위한 기획 앨범 < Voices That Care >에 참여, 수많은 팝 필드의 거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미국 시장 진출이라는 ‘좁은 문’뿐인 듯 보였다. 이를 위해 그녀는 우선 음악 외적인 면에서 파격적 변신을 단행했다. 팝 계의 별이 되기 위해서는 음악만큼이나 이미지 메이킹 또한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 동시에 셀린 디온은 영국의 랭귀지 스쿨에서 언어 교육을 받으며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춰나갔다. 어느새 그녀는 틴에이저에서 성숙미를 내뿜는 여인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피드백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1990년에 발매했던 처녀작 < Unison >(74위)이 각각 빌보드 싱글 차트 35위와 4위를 기록한 ‘If there was (any other way)’와 ‘Why does my heart beat now’의 선전에 힘입어 꽤 괜찮은 성적표를 받았던 것. 허나 정작 그녀를 꼭지점으로 견인했던 곡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테마였던 ‘Beauty and the beast’였다. 차트 1위를 단박에 꿰찬 곡은 그녀에게 1992년 그래미의 팝 듀오/그룹 부문 트로피를 안겨주며 이후의 성공 시대를 예감케 했다. 또한 2집 앨범인 < Celine Dion >(1992)에도 수록되어 소포모어 징크스를 깨부수는데 일등 공신의 역할을 해주었다. 곡 외에 다이안 워렌(Diane Warren) 작곡의 ‘If you asked me to’(4위), ‘Nothing broken but my heart’(29위), ‘Love can move mountains’(36위) 등이 팬들의 애정 공세를 한 몸에 받았다. 같은 해에 내놓았던 영화 <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의 주제곡인 ‘When I fall in love’(23위) 역시 대박이었다. 2년 뒤인 1994년에는 셀린 디온의 인생에 있어 중대한 터닝 포인트가 찾아왔다. 매니저였던 르네 앤젤릴과의 결혼이 바로 그것. 1988년부터 비밀리에 연인 관계를 유지해왔던 둘은 6년 뒤인 1994년에야 그 사실을 발표하고 몬트리올의 노틀담 성당에서 결혼, 세간을 놀라움 속에 빠뜨렸다. 정확이 배가 되는 나이차도 화제거리를 양산하기에 충분했다.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은 덕분인지 셀린 디온의 정상을 향한 질주는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5년 간, 무려 6장의 앨범을 녹음했다는 사실이 주는 양적 포만감부터가 남달랐다. 1993년의 < Colour of My Love >(4위)가 첫 테이프를 끊으며 제니퍼 러시(Jennifer Rush)의 곡을 리메이크한 ‘The power of love’(4주간 1위), 그리고 ‘Misled’(23위) 등의 히트 넘버들을 배출했다. 1994년과 1995년에 셀린 디온은 두 장의 불어 LP를 내놓으며 음악적 본령을 되새김질하는 기회를 가졌다. 제베타 스틸(Jevetta Steele)의 팝 클래식인 ‘Calling you’를 수록한 < Live A L’olympia >와 장자크 골드만이 프로듀스해준 < D’eux >이었다. 특히 후자는 지금까지 800만장을 세일즈, 가장 많이 팔린 샹송 작품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절정의 순간은 단연코 1996년의 팝 마스터피스 < Falling Into You >였다. 현재까지 미국 내에서만 집계된 판매량이 1100만장인 작품은 그 해 그래미에서 ‘팝 앨범’과 ‘올해의 앨범’, 두 개 부문을 석권하며 엄청난 위세를 떨쳤다. < 업 클로즈 앤 퍼스널 >의 테마송이자 다이안 워렌이 써 준 ‘Because you loved me’(1위)를 위시로 팝 고전을 다시 부른 ‘All by myself’(4위), ‘It’s all coming back to me mow’(2위) 등이 차트에 핵 폭탄을 마구 투하했다. 어디 이 뿐이겠는가. 같은 해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이 감독한 블록버스터 무비 [타이타닉]의 주제곡 ‘My heart will go on’(14주 연속 1위)은 더했다. 또 다시 그래미 두 개상을 차지하는 등, ‘셀린 디온을 모르면 간첩’일 정도의 상황을 연출했다. 곡이 수록된 1997년의 앨범 < Let’s Talk About Love >(1위)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 두 음반의 합산 판매고가 무려 6000만장을 상회했다. 이 시기를 전후해 그녀는 실로 당대에 무적, 팝 계 최고의 디바 자리에 우뚝 섰다. 그간 참여했던 뮤지션들을 포함해 새로 가세한 조지 마틴(George Martin), 비지스(The Bee Gees), 캐롤 킹(Carole King),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 등, 후자에 참여한 초특급 아티스트들의 면면만 살펴봐도 당시 그녀의 입김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를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이후 셀린 디온은 크리스마스 스페셜 반인 < These Are Special Times >(1998, 2위)와 샹송 앨범 < S’il Suffisatt D’aimer >(1998)를 선보이고 베스트 컬렉션인 < All The Way: A Decade of Song >(1999, 1위)을 내놓는 등,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남편의 후두암 투병이라는 절망적 사건이 발발한 때도 이 즈음이었다. 비극이 종결되고 셀린 디온에게 행복이 찾아왔던 때는 2001년이었다. 체외 수정에 성공하며 그토록 소망했던 아이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남편의 증세도 나날이 호전되는 등, 셀린 디온이 가정에서 본업으로 컴백할 기운이 날로 충만해져 갔다. 그리고 2002년, 무려 5년 만에 출시했던 정규작 < A New Day Has Come >은 그녀의 디스코그라피 중 최초로 발매 첫 주에 정상에 등극하며 변함없는 팬 베이스를 과시했다. 허나 뒷심 부족을 드러내며 전성기 시절에는 많이 못 미치는 결과를 얻고 말았다. 현재 셀린 디온은 1년 만에 신작 < One Heart >를 내놓으며 팬들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2003/04 배순탁(greattak@izm.co.kr) 오이뮤직 머라이어 캐리가 있고 휘트니 휴스턴이 있지만 이들 못지 않게 지난 9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가수가 셀린 디온(Celine Dion)이다. 흔히들 이들을 오페라의 주역가수에서 나온 말로 최고 인기의 여가수를 의미하는 어휘인 디바(diva)로 일컫는다. 휘트니 휴스턴과 머라이어 캐리가 팝 음악계의 디바 시대를 이끌었다면 셀린 디온은 디바 시대의 정점에 선 여가수라고 할 수 있다. 셀린 디온은 같은 음반회사 소니 뮤직에 소속된 머라이어 캐리에 밀려 90년대 중반까지 만년 2등 가수였다. 하지만 셀린 디온이 부른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곡 ‘나의 마음은 영원할 거예요(My heart will go on)’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그 동안 명실상부한 공동 1위였던 머라이어 캐리와 휘트니 휴스턴이 모두 셀린 디온의 밑으로 내려앉고 말았으며 급기야 ‘셀린 디온 격파’를 외치며 함께 듀엣 곡을 내놓는 공동 대항전선을 펴기도 했다. 근래 셀린 디온의 위풍당당한 기세를 이보다 잘 말해주는 단서도 없을 것이다. 1998년 연말호에서 영국의 잡지 ‘Q’는 소니 뮤직의 통계를 빌어 “지난 30개월 동안 셀린 디온은 매 1.2초마다 한 장의 앨범을 팔았다”고 보도했다. 96년 발표한 앨범 < 너에게 빠져 (Falling into you) >가 그때까지 세계적으로 2500만장, 97년 말에 나온 후속 앨범 < 사랑을 얘기합시다(Let`s talk about love) >가 2400만장이라는 경이적 판매고를 수립한 것을 두고 시간당 수치를 계산한 것이다. ‘1초당 한 장’의 파죽지세는 이후에도 변함없어 현재 두 앨범은 모두 3000만장을 돌파했으며 이어서 프랑스어 앨범과 히트곡 모음집도 날개돋친 듯 팔리고 있다. 셀린 디온이 이처럼 가공할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노래를 잘하기 때문’이다. 참 단순한 설명이지만 가장 확실한 분석이다. 일례로 셀린 디온의 히트송 ‘이제 모두 나한테 되돌아오네요(It`s all coming back to me now)’를 들어보면 왜 때로 ‘질릴 정도로 노래를 잘한다’는 평을 듣는지 알게 된다. 셀린 디온은 엄청난 보컬의 파괴력이 주무기이다. 쉬지도 않고 20곡을 내리 한결같이 높은 음으로 질러대는 놀라운 힘을 보유하고 있다. 가창력이 뛰어난 다른 여가수들과 바로 이 점에서 다르다. 머라이어 캐리나 휘트니 휴스턴의 무대는 정적이고 우아한데 반해서 셀린 디온의 공연은 열띠고 힘이 넘친다. 공연장은 그래서 어떤 헤비메탈 그룹의 무대 못지 않은 열광의 도가니를 연출한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감상하더라도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만끽한다. 한마디로 시원하다. 이런 에너지와 파워 말고도 그녀를 당대 톱 가수로 부상시켜준 또 하나 원동력이 있다면 그것은 가사 해석이 아주 자연스럽다는 점이다. 결코 억지로 질러대지 않는다.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미리 짜놓은 적은 없다. 노래 부르기란 기본적으로 첫 키스나 첫 사랑을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키스나 포옹할 때 미리 리허설하는 사람이 있는가? 또 어떤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치르는가?” 마치 실제처럼 가사의 감정을 충분히 살리되 정해진 공식대로 노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셀린 디온은 철저히 백인 풍의 노래를 부른다는 점에서도 딴 가수와 차별화된다. 머라이어나 휘트니를 비롯해서 근래 디바들 노래는 흑인이건 백인이건 흑인음악 즉 리듬 앤 블루스의 느낌이 녹아있다. 하지만 셀린 디온은 그러한 공통분모를 배격하고 철저히 백인 스탠더드 팝을 구사한다. 여전히 흑인음악이 친근감이 덜 한 유럽의 기성세대 음악팬들이 이 때문에 셀린 디온에게 열광한다. 캐나다 퀘벡 태생인 그녀는 캐나다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가수이기도 하다. 캐나다 음반산업협회는 올해 초 셀린 디온이 지난 한 세기에 걸쳐 국내와 국외에서 가장 음반을 많이 판 캐나다가수라고 공식 발표했다. 1999년 말 캐나다의 음반판매고는 9백만장으로 어떤 캐나다가수보다 많았으며 해외에서는 1억1천장을 넘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다. 근래 최고인 샤니아 트웨인과 브라이언 아담스도 그녀에게는 역부족인 것으로 나타났다. 캐나다는 물론 특히 퀘벡과 같은 문화권인 프랑스도 셀린 디온을 ‘국민가수’ 또는 ‘국보급 가수’로 떠받든다. 프랑스 팬들에게 인기는 거의 절대적이어서 프랑스정부가 수여하는 문화훈장을 이미 두 차례나 받았다. 셀린 디온도 이를 의식해 정기적으로 불어음반을 발표하고 있다. 셀린 디온의 지난 94년 말 결혼은 특급화제였다. 1968년 생으로 스물 여섯이던 그 해 그녀는 정확히 나이가 배인 52세의 매니저 레니 안젤리와 몬트리올 노틀담 성당에서 웨딩 마치를 거행했다. 어렵던 시절 자기 집까지 저당 잡혀가며 셀린의 음반작업을 주선한 매니저와 결혼하자 사람들은 사랑의 결실임을 인정하면서도 요즘 가수치고는 드물게 ‘의리형’ 인물이라고 셀린 디온을 높이 평가했다. 너무도 바쁜 스케줄로 가정생활에 여유가 없는 관계로 아직 레니와의 사이에 자식 소식은 없다. 남편이 나이가 많은 탓인지 더욱이 사람들은 언제 그녀가 아기를 가질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다. 얼마 전 타블로이드 신문 ‘내셔녈 인콰이어러’는 “셀린이 체외수정을 통해 현재 쌍둥이를 임신했다”고 보도했지만 셀린 디온 측은 이를 완강히 부인하며 그 신문에 대해 2천만달러의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셀린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여가수임을 웅변하는 에피소드들이다. 지난 91년 ‘지금 내 심장이 어디서 두근거리나요(Where does my heart beat now)’를 차트 상위권에 올려놓은 이래 무수한 히트퍼레이드를 펼치며 그녀는 ‘90년대의 가수’로 영광의 나날들을 보냈다. 휴식 후 내후년에 신보가 나오게 되면 다시 광풍을 몰아칠 것이 확실시된다. 현재진형형이라 실감은 나지 않지만 분명 셀린 디온은 ‘살아있는 전설’이다.
불혹(不惑)은 나이 사십을 일컫는다. 주위의 어떠한 상황에도 미혹(迷惑)됨이 없이 앞으로 정진한다는 뜻으로 공자가 < 논어 > ‘위정편(爲政篇)’에서 언급한 말이다. 예쁘장한 뉴저지 소년들 본 조비가 어느새 우리네 나이로 불혹이 됐다. ‘그룹의 존재 이유’ 존 본 조비(John Bon Jovi, 1962년 생)와 키보디스트 데이비드 브라이언(David Bryan, 1962년 생)이 올해로 마흔 줄에 접어들었다. ... 불혹(不惑)은 나이 사십을 일컫는다. 주위의 어떠한 상황에도 미혹(迷惑)됨이 없이 앞으로 정진한다는 뜻으로 공자가 < 논어 > ‘위정편(爲政篇)’에서 언급한 말이다. 예쁘장한 뉴저지 소년들 본 조비가 어느새 우리네 나이로 불혹이 됐다. ‘그룹의 존재 이유’ 존 본 조비(John Bon Jovi, 1962년 생)와 키보디스트 데이비드 브라이언(David Bryan, 1962년 생)이 올해로 마흔 줄에 접어들었다. 리치 샘보라(Richie Sambora, 1959년 생)와 티고 토레스(Tico Torres, 1953년 생)는 과거에 이미 안착했다. 그들은 1980년대부터 자신들의 특허품 ‘뉴저지 사운드’를 들고 나와 현재까지 변함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음악성이 떨어진다, 이젠 변해야 산다, 제발 음악 인테리어 좀 다시 해라 등의 주변의 입방아와 시선에도 그들은 ‘Keep the faith’와 ‘It’s my life’를 부르며 현혹되지 않았다. 불혹은 그러한 밴드의 신념을 더욱 확고히 해주는 격려의 나이테이다. 바로 이번에 발표되는 본 조비 최초의 라이브 앨범 < One Wild Night >는 ‘앞으로도 유혹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그들의 굳건한 의지가 담긴 뜨거운 열기의 현장이다. # Always 본 조비는 1980년대 거대 자본을 바탕으로 음반 산업이 빚어낸 ‘의도적’ 결과물인 팝 메탈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그룹이다. 하지만 그들은 머틀리 크루(Motley), 래트(Ratt), 포이즌(Poison), L.A. 건스(L.A. Guns), 워런트(Warrant), 슬로터(Slaughter), 도켄(Dokken), 스키드 로우(Skid Row) 등 대부분의 동료 헤어 메탈 밴드들이 1990년대 들어 얼터너티브 열풍에 밀려 강제 퇴출 당하는 수모를 겪는 와중에도 불구하고, 차트를 점령하며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또는 상업적인) 록 그룹으로 자리잡았다. 본 조비의 성공 요인은 ‘건강함’에 있다. 그들은 퇴폐 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자극적이고 쾌락적인 사운드를 구사하는 LA 출신 그룹들과 달리, 아메리칸 하드록의 전통을 흡수하여 밝고 경쾌한 음악 세계를 펼쳐냈다. 한때의 유행을 지배하는 충격 요법보다 은근하지만 뿌리가 깊은 정공법을 택하여 꾸준한 인기를 얻었다. 존 본 조비의 루츠적인 목소리와 리치 샘보라의 블루스에 기반을 둔 기타 스타일이 대변한다. 가사 또한 대부분 건강미를 한껏 뽐낸다. 술과 마약, 걸(Girl)들을 찬양했던 타 밴드와 갈라서게 되는 두 번째 지점이다. ‘우리는 이제 겨우 반쯤 왔어요/ 기도로 살아요/ 내 손을 잡으세요/ 단언컨대 우린 그것을 해낼 수 있어요’ -1986년 앨범 < Slippery When Wet >의 수록곡 ‘Livin’ on a prayer’ 중에서- ‘누구나 힘들기 마련이에요/ 만족할 수 없으니까요/ 의지할 누군가가 아무도 없을 때 버텨내기란 힘이 들어요/ 신념, 당신은 빗속을 헤쳐나갈 수 있어요/ 신념을 지키세요’ -1992년 앨범 < Keep The Faith >의 수록곡 ‘Keep the faith’ 중에서- 그들은 결코 실패와 절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용기와 믿음을 준다. 때문에 남녀 노소 들어도 부담이 없다. 본 조비를 얘기하면서 동향 출신의 로큰롤러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팝 메탈과 노동자 록이라는 다른 노선을 걷고 있지만 그 사이에는 ‘트래디셔널’이라고 하는 공통분모가 있다. 미국의 전통 록 사운드를 둘 다 품고 있다. 본 조비는 바로 ‘보스(Boss)’로부터 그것을 물려받았다. 1984년 셀프 타이틀 데뷔작에 실린 ‘Runaway’가 대표적이다. 서로는 또한 뉴저지를 위해 일하고 봉사한다. 각종 자선 단체의 기금 모금 공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으며, 1998년에는 탈주 범에게 살해된 뉴저지 경찰관 패트릭 킹 가족들의 생계비 마련을 위해 함께 합동 공연을 열기도 하는 등 뉴저지의 음악 일꾼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아마도 본 조비의 건강함은 브루스 스프링스틴에게서 파생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 New Jersey 본 조비는 1983년 고등학교 친구사이였던 존 본 조비와 키보디스트 데이비드 브라이언이 뉴저지주의 세이레빌(Sayreville)에서 만든 밴드. 곧이어 리치 샘보라와 베이시스트 알렉 존 서치(Alec John Such), 드러머 티코 토레스가 가세하여 완벽한 짜임새를 갖췄다. 그들은 1984년 데뷔 음반 < Bon Jovi >, 1985년 2집 < 7800 Fahrenheit > 등을 발표하며 음악의 바다로 힘차게 닻을 올렸다. 각각 앨범 차트 43위와 37위를 기록하며 선전했지만, 사운드 측면에서는 불안함이 엿보였다. 키보드에 주안점을 둔 경쾌한 하드록은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밴드는 변화가 필요했다. 결국 그들은 에어로스미스(Aerosmith), 엘리스 쿠퍼(Alice Cooper), 마이클 볼튼(Michael Bolton), 그리고 요즘의 리키 마틴(Ricky Martin) 등에게 굵직한 히트곡들을 제공한 명 작곡가 데스몬드 차일드(Desmond child)와 전격 제휴하였다. 데스몬드의 입김에 의해 팝 적인 감각을 대폭 받아들인 그들은 팝 메탈로 그룹의 음악 방향을 확정했다. 그래서 완성된 결과물이 바로 1986년의 < Slippery When Wet >이였다. 귀를 단숨에 자극하는 훅(Hook)과 신나고 흥겨운 그들의 메탈 사운드는 미국 전역을 강타했다. 앨범 차트 정상에 오른 것은 물론이고, ‘Livin’ on a prayer’, ‘You give love a bad name’, ‘Wanted dead or alive’, ‘Never say goodbye’ 등의 인기 곡들을 쏘아 올렸다. 음반은 현재까지 미국에서만 천 만장이 훨씬 넘게 팔려나갔다. 본 조비의 가장 빛나는 마스터피스이자 팝 메탈의 위대한 명반으로 남아있다. 그들은 이것을 계기로 데스몬드 차일드와 끈끈한 파트너십을 유지하며 오늘날까지 좋은 노래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번 점화된 본 조비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1988년에 발매된 작품 < New Jersey >는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에 정상을 밟았고, ‘Bad medicine’, ‘Born to be my baby’, ‘I’ll be there for you’, ‘Lay your hands on me’ 등이 히트 퍼레이드를 이어 나갔다. 한편 그들은 1989년에 열린 MTV 뮤직 비디오 시상식에서 강한 하드록 ‘Wanted dead or alive’를 어쿠스틱 버전으로 불러 많은 화제를 불러모았는데, 이는 1990년대 들어 MTV에 의해 기획된 언플러그드 공연에 핵심적인 단초를 제공했다. 이후 휴지기에 돌입하여 각자의 솔로 활동에 전념하는 것으로 미국에서의 찬란했던 1980년대를 마감한 본 조비는 1990년대의 개막과 함께 영국에서 더욱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1992년 컴백 앨범 < Keep The Faith >, 1994년 베스트 앨범 < Crossroad >, 1995년 정규 6집 앨범 < These Days >(1994년 알렉 존 서치가 견해차로 탈퇴하여 후임 베이스 주자로 휴 맥도널드(Hugh Mcdonald)가 가세했다) 모두 영국 차트 넘버원을 차지했다. 미국에서 각각 5위, 8위, 9위에 올라선 것과 대조적이다. 이는 당시 너바나가 주도한 얼터너티브 록이 미국을 휩쓸고 있었기에, 조금은 피해가 덜한 영국에서 비상(飛上)할 수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Keep the faith’, ‘Bed of roses’, ‘I’ll sleep when i’m dead’, ‘I believe’, ‘Always’, ‘Someday i’ll be saturday night’, ‘This ain’t a love song’, ‘Something for the pain’, ‘Lie to me’, ‘These days’ 등의 무수한 히트곡들이 이 기간동안 쏟아져 나왔다. 본 조비는 얼마 후 개인 플레이와 음악적 충전을 위해 또다시 장기간의 칩거에 들어가며 1990년대를 보냈고, 멀티 플래티넘을 따낸 재기 작품 < Crush >와 함께 뉴 밀레니엄을 맞았다. # One Wild Night 우선 수록곡의 질적인 면이나, 사운드의 완성도를 떠나 본 조비의 이번 라이브 앨범 < One Wild Night >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7년 동안의 음악 이력서에 처음으로 올리는 실황 음반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라이브는 흥겹기로 정평이 나있다(국내에서도 이미 1995년 내한공연으로 확인했다). 한해 공연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익만 2천 8백 4십만 달러, 매진 사태로 인해 무조건 공연장으로 들어가려는 막무가내 팬들의 잦은 부상 등은 그들의 공연이 얼마나 인기가 높은지를 단적으로 설명해 준다. 그리고 밴드는 1987년 몬스터 록 페스티발, 1989년 모스크바 뮤직 피스(Peace) 페스티발, 앨범 발표 후 가지는 월드 투어 등을 통해 스타디움 록 밴드로서 확실한 발판을 마련한 지 오래다.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장의 라이브 앨범도 없었다는 것은 정말 의외의 일이다. 팬들이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린 것은 당연지사. 이에 대해 존 본 조비는 "이 음반은 팬들이 오랫동안 리퀘스트 해왔던 것이다. 우리를 위해서는 라이브 앨범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구세대와 신세대 그들을 위해 이것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팬들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현장(現場) 사운드가 세상에 공개됐음을 알 수 있다. 음반은 1985년부터 올해까지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스위스, 영국, 남아프리카 등을 돌며 녹음한 곡들 중에서 최고의 소스만을 뽑아낸 14곡과 < Crush >의 수록곡 ‘One Wild Night’의 리믹스 버전을 담고 있다. 본 조비의 음악 여정을 가늠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이다. 데뷔작의 ‘Runaway’, < 7800 Fahrenheit >의 ‘In and out of love’, < Slippery When Wet >의 ‘Livin’ on a prayer’, < New Jersey >의 ‘Bad medicine’, < Keep The Faith >의 ‘Keep the faith’, < These Days >의 ‘Something for the pain’, < Crush >의 ‘It’s my life’ 등 지금까지 발표한 앨범들에서 알짜배기만을 엄선했다. 또한 닐 영(Neil Young)의 ‘Rockin’ in the free world’와 밥 겔도프(Bob Geldof)의 ‘I don’t like mondays’를 리메이크한 것은 거장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다. 특히 ‘I don’t like mondays’는 밥 겔도프가 직접 참여하여 존 본 조비와 번갈아 부르는 흐뭇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다. 몇 년 전에 존 본 조비는 영국의 헤비메탈 전문지 < 케랑 >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시대의 음악 조류를 왜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기자의 가시 돋친 질문에 "나는 아직 뉴저지에 살고 있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그것은 자신들의 삶과 음악의 고향 뉴저지를 계속 고집하겠다는 뜻이다. 때론 변화가 필요하다. 분위기를 바꾸어 활력을 되찾고 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적절한 시점이 요구된다. 아무 때나 하면 위험스런 탈주의 모험밖에 안 된다. 본 조비 스스로도 지금은 그 때가 아니라고 믿고 있다. 그러기에 오직 한 길만을 걸어간다. 주위의 비판에 아랑곳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 뉴저지에 살고 있다. 하지만 때가 되면 그들은 스스로 뉴저지를 떠날 것이다. 불혹이 아닌가. 팬들의 환호와 함께 메아리치던 ‘It’s my life’의 노랫말이 아직도 귓가를 뒤흔든다. ‘이게 나의 삶이에요/ 지금이 아니면 결코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난 영원히 살수 없어요/ 나는 단지 내가 살아있는 동안의 삶을 원해요/ 나의 마음은 훤히 트인 고속도로 같아요/ 프랭크가 나의 길을 갔다고 말한 것처럼/ 나는 단지 내가 살아있는 동안의 삶을 원해요/ 이게 나의 삶이에요’
나탈리 콜(Natalie Cole)은 파워와 가녀림을 함께 담아 내는 특색 있는 보컬로 재즈와 팝을 넘나들며 오랜 기간 인기를 누려왔다. 1900년대 중반 흑인 최고의 스탠다드 보컬로 인기를 누렸던 냇 "킹" 콜(Nat "King" Cole)의 딸로도 유명한 그녀는 1991년 아버지의 목소리에 자신의 목소리를 입혀 부른 ’Unforgettable’로 그래미(Grammy) 7개 부문을 수상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나탈리 콜(Natalie Cole)은 파워와 가녀림을 함께 담아 내는 특색 있는 보컬로 재즈와 팝을 넘나들며 오랜 기간 인기를 누려왔다. 1900년대 중반 흑인 최고의 스탠다드 보컬로 인기를 누렸던 냇 "킹" 콜(Nat "King" Cole)의 딸로도 유명한 그녀는 1991년 아버지의 목소리에 자신의 목소리를 입혀 부른 ’Unforgettable’로 그래미(Grammy) 7개 부문을 수상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1950년 미국 로스 앤젤리스(Los Angeles)에서 태어난 나탈리는 아버지 곁에서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했다. 10살 정도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함께 무대에 오르는 등 뮤지션으로 성장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 속에서 재즈 싱어로서의 자질을 키워 나간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고 아버지의 유명세를 통해 쉽게 가수로 데뷔할 수 있었지만 나탈리는 대학생이 된 197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가수로서의 길을 결정한다.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대학 재학 중이던 그녀는 매니저인 케빈 헌터(Kevin Hunter)를 만나게 되고 재즈 클럽을 무대로 노래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녀에게는 냇 "킹" 콜의 딸이라는 꼬리표가 항상 붙어 다녔고, 그녀의 독특한 음악적 신분은 프로페셔널로서의 활동에 큰 힘을 실어주게 된다. 클럽 활동을 하면서 만난 여러 재즈 뮤지션들과 앨범을 내려고 했던 그녀의 생각은 그다지 쉽게 풀려 나가지 않았다. 그녀는 여러 레이블에서 음반 제의를 거절당했고, 결국 아버지가 소속되어 있었던 캐피톨(Capitol) 레코드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1974년 캐피톨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한 그녀는 1975년 적지 않은 나이에 데뷔 싱글인 ’This will be’를 발표한다. 시작부터 성공의 연속이었다. 첫 싱글인 ’This will be’는 싱글 차트 6위의 성공을 거두었고, R&B 차트에서는 No.1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는 데뷔 싱글의 성공에 힘입어 데뷔 이듬해인 1976년 그래미에서 ’Best Female R&B Vocal Performance’와 ’Best New Artist of the Year’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린다. 이어지는 싱글들 ’Inseparable’, ’Sophisticated lady (She’s a different lady)’, ’I’ve got love on my mind’, ’Our love’ 또한 R&B 차트에서 1위에 오르는 성공들을 거두어 들였다. 프로듀서 겸 작곡가 척 잭슨(Chuck Jackson)과 마빈 얀시(Marvin Yancy)는 데뷔 때부터 나탈리의 성공을 이끈 숨은 공로자들이었고, 마빈 얀시는 1976난 나탈리 콜의 남편이 된다.(결혼 생활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1970년대 후반에도 줄기찬 성공 행진을 이어갔다. 여섯 장의 앨범 < Inseparable >, < Natalie >, < Unpredicatable >, < Thankful >, < Natalie Live! >, < I Love You So >를 모두 골드와 플래티넘에 올려놓았으며 가수로서의 연이은 성공 덕분에 CBS와 NBC에서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는 기쁨까지 누렸다. 엘라 핏제럴드의 음악을 듣고 부르며 자란 그녀의 음악적 기반은 분명 재즈에 있었다. 하지만 가수로 데뷔한 후 그녀는 팝과 재즈의 경계를 의식하지 않으며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소화했다. 재즈, 소울, 가스펠, 알앤비, 팝을 다양하게 소화해 내었고, 그런 다양한 스타일은 재즈 싱어에게 강한 대중성을 부여했다. 화려한 1970년대를 보낸 그녀였지만 1980년대는 그리 평탄하게 시작되지 않았다. 마빈 얀시와의 결혼 생활에서 아들까지 얻었지만 마빈과 이혼에 이르렀고, 과다한 약물 복용으로 콘서트를 취소하는 등 갑작스럽게 찾아온 개인적인 문제들 때문에 씨름해야 했다. 이러한 문제들로 캐피톨과의 재계약 마저 실패한 나탈리는 미네아폴리스의 한 클리닉에서 갱생치료를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갱생 치료를 받기 시작한지 6년이 지난 후 이전의 모습으로 다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1987년 프로듀서인 안드레 피셔(Andre Fischer)와 재혼한 나탈리는 이전의 영광을 재현하는 두 번째 고공 비행을 시작한다. 1987년 작 < Everlasting >에서 ’Jump start’, ’I live for your love’, ’Pink cadillac’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골드를 거머쥐었고, 의미 있는 앨범 제목을 담고 있는 1989년 작 < Good to Be Back >에서는 팝적 성향이 강한 ’Miss you like crazy’와 ’Wild women do’(1990년 히트 사운드트랙 < Pretty Woman >의 첫 곡으로 수록되었다.)를 히트시킨다. 1991년은 그녀의 삶에 있어서 최고의 해였다. 아버지인 냇 "킹" 콜이 생전에 녹음했던 ’Unforgettable’에 자신의 목소리를 입힌 새로운 방식의 듀엣 곡을 수록한 < Unforgettable >을 발표하였고, 이 앨범으로 그래미에서 7개 부문을 수상하는 대단한 영예를 누리게 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팝적인 곡보다는 재즈적 성향이 강한 노래들 또는 초기 스탠다드 팝들을 앨범에 수록하면서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영국 댄스 팝 그룹 스파이스 걸스는 1960년대 로네츠(Ronettes), 슈프림스(Supremes) 등 모타운 풍의 흑인 여성그룹 이후 맥이 끊겼던 ‘주류 걸 그룹’의 전성시대를 부활시킨 소녀들이다. 하지만 기존의 여성 그룹들과는 좀 다르다. 1996년 스파이스 걸스가 데뷔싱글 ‘Wannabe’를 발표했을 때, 사람들은 이들의 기이한(?) 모습에 적잖게 당황했다. 탱크탑과 짧은 미니스커트 차림에다 몸에 문신까지... 영국 댄스 팝 그룹 스파이스 걸스는 1960년대 로네츠(Ronettes), 슈프림스(Supremes) 등 모타운 풍의 흑인 여성그룹 이후 맥이 끊겼던 ‘주류 걸 그룹’의 전성시대를 부활시킨 소녀들이다. 하지만 기존의 여성 그룹들과는 좀 다르다. 1996년 스파이스 걸스가 데뷔싱글 ‘Wannabe’를 발표했을 때, 사람들은 이들의 기이한(?) 모습에 적잖게 당황했다. 탱크탑과 짧은 미니스커트 차림에다 몸에 문신까지 한 그들은 천방지축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마치 에어로빅을 하듯 춤추며 노래했다. 게다가 예쁘게 보이려하기는커녕 오히려 ‘나 못났죠!’라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노래하는 모습은 무척 무례하게 보였으며 그야말로 도발적이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여성다움, 즉 아름답고 지순한 성질과는 분명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파격’은 곧 거대한 반향을 일으키며 하나의 ‘현상’이 되었다. 그때까지 여성가수 또는 여성그룹이라고 하면 청순한 외모에 수동적인 사랑을 노래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양념 소녀들’은 이 점을 역이용했다. 대중들이 그러한 ‘스탠더드’에 싫증을 낼 만한 시기에 그들은 ‘순종’을 거부하고 ‘걸 파워’(Girl Power)를 내세우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90년대 들어 각광받았던 여성 싱어송라이터들의 페미니즘과는 다른 차원이다). 그렇다고 마돈나처럼 엄청난 섹슈얼리티도, 시네드 오코너처럼 과격한 메시지도 갖고 있지 못했던 스파이스 걸스는 대신 다른 것으로 승부를 걸었다. 바로 누구나 쉽게 다가설 수 있을 것 같은 친근함과 통통 튀는 특별한 개성이었다. 거기에 정상급 프로듀서들과 작곡가들이 주조해낸 고품격의 음악이 튼튼한 뒷받침이 되었다. 이러한 것들을 모두 소화시킴으로써 스파이스 걸스는 새로운 여성상을 창조할 수 있었으며, 10대 소녀들의 우상으로, 또 여러 후배 여가수들의 전형으로 받들어 질 수 있었다. 제리 할리웰(Geri Halliwell), 빅토리아 아담스(Victoria Adams), 멜라니 B(Melanie Brown), 멜라니 C(Melanie Chisholm), 엠마 번튼(Emma Bunton). 끼가 넘치던 이 5명의 여성으로 구성되었던 스파이스 걸스의 역사는 1993년 한 기획사의 오디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뉴 키즈 온 더 블록이나 테이크 댓의 ‘여성버전’을 만들고자했던 것이 기획사의 의도였다. 이들(엠마를 제외한)은 그 오디션을 통해 서로 만났고, 몇 달 후 엠마를 멤버로 추가했다. 그 5인조는 이후 같이 살면서 작곡과 데모 테이프를 만드는 등 가수로서의 내공을 다져갔다. 스파이스 걸스로 이름을 정한 그들은 여가수 애니 레녹스(Annie Lennox)의 매니저였던 사이먼 풀러(Simon Fuller)를 매니저로 영입해 완벽한 진용을 갖췄다. 1995년 3월 스파이스 걸스는 ‘메이저 레이블’인 < 버진 레코드 >(Virgin Records)와 계약을 체결했으며, 이듬해 팝과 R&B가 크로스오버된 그리고 파워넘치는 댄스곡과 상큼한 발라드가 적절히 배열된 데뷔앨범 < Spice >를 발표했다. 기념비적 싱글 ‘Wannabe’는 등장하자마자 영국차트 1위를 차지했고 10대 소녀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며 무려 7주간이나 1위에 머물렀다. 이때부터 대중들은 그들이 퍼붓는 자극적인 ‘양념공세’에 흠뻑 취하게 된다. 10대 소녀들은 스파이스 걸스의 거침없는 태도에 매료되었으며, 처음엔 그들의 버릇없음에 거부반응을 보이던 ‘어른들’도 이들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하모니에 무릎꿇었다. 호들갑스럽기로 소문난 영국 언론들은 그들의 행동 하나 하나마다 기사화하는 데 열올렸으며 멤버 각자의 별명까지 지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이후 스파이스 걸스는 ‘Say you`ll be there’ 등 후속곡들을 연속 히트시키며 유럽과 미국 그리고 전세계로 ‘스파이스 열풍’을 몰아갔다. 1997년 발표한 2집 < Spiceworld >에서 스파이스 걸스는 선머슴 같은 이미지를 누그러뜨리고 좀더 성숙된 모습으로 변신했다. 댄스와 발라드는 물론 라틴 넘버에서부터 스윙 재즈, 모타운 풍까지 풍성한 팝 사운드 스케이프를 구축해 또 다른 면모를 과시했다. 이후 맏언니 격이던 제리 할리웰이 탈퇴하며 팀이 위기를 맞았지만 나머지 네 멤버는 < 파바로티와 친구들 > 공연에 참가하는 등 계속해서 그룹을 이어갔다. 멤버들의 솔로 프로젝트도 시작되었다. 멤버 중 가장 탄탄한 보컬실력을 자랑하던 멜라니 C는 1999년 록 성향의 앨범 < Northern Star >를 발표하며 성공적인 솔로 캐리어를 쌓았다. 이후 멤버들의 결혼과 출산 그리고 이혼 등 희비를 동시에 겪었던 스파이스 걸스가 5인조에서 4인조로 탈바꿈하여 2000년 3집 < Forever >를 발표했다. 흑인 프로듀서들을 대거 영입해서 R&B의 ‘검은 톤’을 부각시켰다. 이혼의 아픔을 겪은 멜라니 B도 같은 시기에 솔로앨범 < Hot >을 출시했다. 걸 그룹 선풍을 일으켰던 스파이스 걸스의 ‘존재가치’는 생기발랄하고 자유분방한 ‘태도(attitude)’였다. 경쟁관계에 있었던 올 세인츠나 최근의 아토믹 키튼 같은 여러 걸 그룹들 그리고 브리트니 스피어스나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까지도 그들의 ‘걸 파워 세례’를 받았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몇 년이 흐른 지금 이들의 신선함은 점차 시들어가고 파릇파릇한 후배들이 그들을 압도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래서 스파이스 걸스는 이제부터가 정말 중요하다. 자신들이 이룩해 논 업적을 무너뜨리지 않고 앞으로 어떻게 이어나갈지 아니면 어떻게 그만 둘지가 그들의 최대 과제다.
1960년대 제임스 브라운과 더불어 흑인 대중음악의 산 증인으로 칭송되는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흑인 팝 소울 음악의 전설 모타운 레코드(Motown)사에 소속되어 음악활동을 시작, 1970년대부터 셀프 프로듀싱(Self-producing)을 선언하며 앨범 제작 전 과정을 진두지휘하는 ’아티스트’의 천재(天才)를 부각시킨 팝 스타이다. 천부적인 작곡 감각과 각종 키보드를 비... 1960년대 제임스 브라운과 더불어 흑인 대중음악의 산 증인으로 칭송되는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흑인 팝 소울 음악의 전설 모타운 레코드(Motown)사에 소속되어 음악활동을 시작, 1970년대부터 셀프 프로듀싱(Self-producing)을 선언하며 앨범 제작 전 과정을 진두지휘하는 ’아티스트’의 천재(天才)를 부각시킨 팝 스타이다. 천부적인 작곡 감각과 각종 키보드를 비롯, 앨범 녹음시 대부분의 악기를 혼자서 다 연주해 낼 정도의 다재(多才)를 유감 없이 발휘한 그는 도무지 시각 장애인이라고 믿을 수 없는 독창성을 자신에 음악에 담아낸다. 또한 마빈 게이(Marvin Gaye)와 함께 1970년대 미국 사회 내 흑인들의 비참한 삶과 애환을 표현한 ’게토 리얼리티’를 얘기한 음악인으로 기억되면서 흑인 인권 지도자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하자는 운동을 이끌었던 사회 운동가이기도 했다. 자신의 노래를 통해 스티비 원더는 지금껏 인종과 이념의 벽을 넘어선 절대불변의 숭고한 가치인 ’사랑의 전도사’임을 전 세계에 알려왔다. 그의 음악만큼이나 이런 그의 행적은 전 세계 음악인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으로 그를 기억하게 했다. 1950년 5월 13일 스티브 랜드 모리슨(Steveland Morrison)이라는 본명으로 미국 미조리주 출신인 그는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의 과잉 산소 공급 사고로 맹인이 되었다. 디트로이트로 이주해 소년기를 보낸 그는 일찍부터 음악적으로 재능을 드러내 10살이 되기도 전에 대부분의 악기를 스스로 터득하는 천재성을 보인다. 1962년 11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그는 천재성을 인정받으며 베리 고디(Berry Gordy Jr.)가 이끄는 모타운 레코드사와 계약을 한다. 리틀 스티비 원더(Little Stevie Wonder)라는 아름으로 발표한 그의 첫 싱글인 라이브 버전 ’Fingerprints-part 2’(1963)가 발표 즉시 차트 1위에 오르며 순조롭게 출발한다. 1965년부터 이후 6년 간 ’Uptight’(1966), ’I was made to love her’(1967), ’For once in my life’(1969), ’My cherie amour’(1969), ’Yester-me, yester-you, yesterday’(1969), ’Signed, sealed, delivered’(1970)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며 그는 명실상부한 모타운 대표 인기스타로 떠오른다. 21살이 되던 1971년 모타운 측과 재계약을 앞두고는 ’앨범 제작에 관한 모든 통솔권을 자신에게 위임할 것’이라는 계약 조건을 내세운다. 당시까지 철저한 ’스타 시스템’으로 운영되던 모타운 사의 입장에선 매우 부담스러웠던 요구를 그는 끝내 관철시키며 셀프 프로듀싱으로 제작한 첫 앨범 < When I’m Coming From >(1971)을 발표한다. 이듬해인 1972년 < Music of my Mind: 앨범 차트 21위 >를 시작으로 같은 해 가을 발표된 명반 < Talking Book:앨범 차트 3위 >(1972)을 연속으로 히트시키며 앨범 모든 수록 곡의 작곡은 물론 연주와 프로듀싱을 혼자서 해낸다. 또한 이 앨범은 A면의 첫 곡 ’You are the sunshine of My life’와 B면의 첫 곡 ’Superstition’을 모두 싱글차트 1위에 등극하는 놀라운 기록을 수립한다. 1972년 같은 해 발표된 두 장의 앨범을 통해 그는 기존 3분대의 모타운 식 히트 곡의 틀을 벗어나 ’Super woman’, ’Maybe your baby’와 같은 6-7분대의 대곡을 과감히 수록했고, 재 계약을 통해 받은 계약금으로 클라비넷, OBX, ARP, 폴리포닉, 무그와 같은 다양한 신시사이저 장비들을 도입, 사운드의 혁신을 일궈낸다. 이듬해 발표한 < Innervisions >(1973)는 그의 싱어 송 라이터로서의 위상을 한층 높여준 명반으로 흑인 빈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Living in the city’와 재즈적인 접근을 강하게 드러낸 ’Too High’, ’Superstition’에 버금가는 펑키한 넘버 ’Higher Ground’, 절대자인 신에게 헌정하는 가스펠 곡 ’He’s Misstra know it all’을 담은 수작이었다. 전작에 이어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하며 < Innervisions >는 이듬해인 1974년 그래미 상 ’올해의 앨범’ 부문을 비롯, 4개 부문을 휩쓰는 쾌거를 올린다. 1974년 교통사고로 심한 부상을 당하며 잠시 활동의 위기를 맞은 그는 이에 아랑곳없이 < Fulfillingness’ First Finale >(1974)를 발표하며 ’You Haven’t done nothing’, ’Boogie on Reggae woman’을 각각 팝 차트와 R&B 차트 1위에 올리며 앨범은 1975년 다시 한번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을 비롯, 5개 부문을 석권한다.(올해의 앨범상을 연속으로 수상한 건 스티비 원더가 처음이었다.) 1975년 모타운 사와 1천 3백만 불의 재계약을 한(당시 팝 음악계에선 최고의 액수) 그는 2년여의 준비 끝에 더블 앨범< Songs in the key of life >(1976)을 발표한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히트곡이 쏟아진 앨범에서 ’Sir Duke’, ’I Wish’가 팝 차트 1위에 오르고, 팝 가수 조지 마이클이 1998년에 리메이크 하기도 한 7분이 넘는 대곡 ’As’(36위)와 재즈 기타리스트 조지 벤슨(George Benson)의 코러스와 재즈 플롯주자 바비 험프리(Bobby Humphrey)가 참여한 라틴 팝 ’Another star’(32위) 역시 좋은 반응을 얻는다. < Songs on the key of life >는 이듬해 1977년 다시 그에게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을 안겨다 준다. 70년대 말, 스티비 원더는 흑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하자는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음악 외에도 흑인의 권익신장 운동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그는 4년여의 공백 끝에 발표한 < Hotter than July >(1980)의 수록곡 ’Happy Birthday’를 통해 이런 그의 노력을 전 세계에 알린다.(결국 1985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일은 미국 국경일로 지정된다) 앨범에선 이 외에 레게의 시인 밥 말리(Bob marley)에게 헌정하는 레게 넘버 ’Master Blaster(jammin’)’와 지금껏 애청되는 그의 러브 발라드 ’Lately’를 차트에 진입시키는(각각 5위, 64위) 성과를 거둔다. 영화 음악 작곡에도 열심이었던 스티비 원더는 < Journey Through the secret life of Plant >(1979)를 시작으로, 그에게 오스카 주제가 상을 안겨준 영화 < Woman in Red >(1984)의 테마 곡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를 팝 차트 1위에 올리며 전 세계를 스티비 원더 열풍 속으로 다시 한번 몰아넣는다. 그의 영화 음악 작업은 < Jungle Fever >(1991), < The adventure of Pinocchio >로 계속된다. 1983년엔 폴 메카트니와 함께 한 듀엣 곡 ’Ebony & Ivory’로, 1985년 ’Part time Lover’로 다시 팝 차트 1위에 오르며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 Character >(1987)이후 8년이라는 긴 공백기에 들어간 그는 < Conversation Peace >(1995)로 다시 팝 무대에 복귀한다. 90년대 활동은 비록 예전만큼의 날카로운 창조력은 아니었지만 전 세계 수많은 팝 음악인들의 기대와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다시는 그 누구도 재현 못할 ’팝 음악의 대가’임을 다시 한번 전 세계에 알린다.
아일랜드의 4인조 남매 그룹 코어스는 리드보컬과 틴 휘슬(Tin Whistle)을 맡고 있는 안드레아 코어, 드럼과 보드란(Bodhran)을 연주하는 캐롤라인 코어(Caroline Corr), 바이올린의 샤론 코어(Sharon Corr), 그리고 기타와 키보드의 짐 코어(Jim Corr)로 1990년에 결성됐다. 그들은 더블린에서 북쪽으로 50마일 정도 떨어진 던다크에서(Dundalk)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 아일랜드의 4인조 남매 그룹 코어스는 리드보컬과 틴 휘슬(Tin Whistle)을 맡고 있는 안드레아 코어, 드럼과 보드란(Bodhran)을 연주하는 캐롤라인 코어(Caroline Corr), 바이올린의 샤론 코어(Sharon Corr), 그리고 기타와 키보드의 짐 코어(Jim Corr)로 1990년에 결성됐다. 그들은 더블린에서 북쪽으로 50마일 정도 떨어진 던다크에서(Dundalk)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들은 뮤지션이었던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음악에 대해 일찍 눈을 떴다. “우리 부모님 진(Jean Corr)과 제리(Jerry Corr)는 밴드에서 연주했다. 집에서 어머니는 아버지의 키보드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는데 카펜터스에서 이글스 그리고 클래식과 찬송가까지 다양했다. 이것은 우리를 자연스레 음악과 가깝도록 만들었다.” 짐의 회상이다. 음악가에게 필요한 최적의 음악환경이었다. 남매들 중 연장자였던 짐이 맨 먼저 음악을 시작했다. 그는 1980년대 초에 더블린으로 건너가 여러 밴드에서 세션 연주자로 활동했다. 당시에 그는 ‘아일랜드의 목소리’라 불리던 돌로레스 킨(Dolores Keane)과 연주를 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는 그러나 전통적인 아일랜드 민속음악에 대중적인 팝 사운드를 조화시키고 싶어했다. “신토불이는 당연하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그 음악을 한 단계 더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세계화’ 흐름에 동참하겠다는 것이다. 그의 음악관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대목이다. 코어스의 ‘캐치프레이즈’이기도 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짐은 동생들의 눈부시게 향상된 연주실력을 보고 가족 그룹을 결성하기로 마음먹고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짐이 곡에 대한 아이디어와 멜로디를 구상하면 자매들이 가사를 쓰는 ‘분업체계’를 확립했다. 이 당시 코어스의 악기 편성은 짐과 캐롤라인이 키보드, 샤론이 바이올린과 피들, 그리고 안드레아가 리드보컬을 맡는 단순하고 간결한 패턴이었다. 코어스를 위한 행운의 여신은 멀리 있지 않았다. 그들이 1990년에 로디 도일(Roddy Doyle)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알란 파커의 영화 < 커미트먼츠(The Commitments) >에 등장하는 밴드의 배역을 얻기 위해 오디션을 보고 있을 때 음악 감독을 맡고 있던 존 휴즈(John Hugues)가 그들을 눈여겨본 것이다. 휴즈는 이후 코어스의 매니저가 된다. 비록 오디션에는 떨어졌지만 그들은 휴즈의 도움으로 영화 홍보 차 마련된 스페셜 라이브 콘서트에 초청되는 영광을 안았다. 무사히 공연은 마쳤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악기 구성에 있었다. 코어스에게 선율악기는 있되 리듬 악기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일랜드의 민속음악을 연주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지만 그들의 지향점인 듣기 편한 팝 음악과는 거리가 멀었다. 반쪽 짜리 그룹이었다. 그래서 사운드가 꽉 차지 않고 어딘가 허전한 구석이 존재했다. 결론은 악기 재편성. 캐롤라인이 직접 드럼을 배우겠다고 나섰다. 그녀는 또 비디오를 보고 보드란의 연주 기술을 터득하여 그룹의 사운드 향상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주: 보드란은 끝이 둘로 갈라진 스틱을 사용하는 아일랜드의 전통 타악기이다.) 그 결과 그들은 한결 나은 짜임새를 갖추게 됐다. 전열을 재정비하고 1993년 더블린의 한 클럽에서 공연을 하던 코어스에게 또 한 명의 ‘도우미’가 등장했다. 그 인물은 다름 아닌 당시 주 아일랜드 미국 대사였던 진 케네디 스미스(Jean Kennedy Smith)였다. 그는 코어스의 음악을 듣고 감명 받아 1994년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월드컵 축하 공연에 그들을 초청했다. 꿈에 그리던 미국 진출길이 열린 것이다. 남매들의 성공적인 미국 공연은 애틀랜틱 레코드 부사장인 제이슨 플롬(Jason Flom)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는 그래미상을 14개나 거머쥔 ‘히트 보증수표’ 데이빗 포스터(David Foster)를 밴드의 프로듀서로 지명했다. 하지만 데이빗은 마이클 잭슨의 앨범 작업을 하던 터라 시간을 내지 못했다. 멤버들은 안타까운 한숨만 내쉬었고 메이저 레이블과의 계약 체결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그저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악기도 준비하고 서로 화음도 맞췄다. 유비무환(有備無患)!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매니저 휴즈를 필두로 코어스는 포스터의 작업실로 직접 찾아갔다. 하지만 포스터는 싫어하는 기색 없이 반가운 얼굴로 즉석에서 연주를 요청했고 그들은 자작 곡 ''Love to love you''를 선보였다(이후 이 곡은 1996년 데뷔작 < Forgiven Not Forgotten >에 수록된다). 아일랜드의 음악 색채가 듬뿍 담긴 멜로디와 아름다운 보컬 하모니는 포스터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그룹이 학수고대하던 합격점을 받았다. “10점 만점에 10점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천군 마마를 얻어 확실한 성공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이후 발매된 그룹의 데뷔 앨범은 미국에서 골드, 영국에서는 플래티넘을 차지하며 전세계적으로 1,400만장이라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기록했다. 단숨에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그들이 펼치는 아일랜드 민속음악과 포스터가 만들어낸 세련된 팝 사운드가 절묘한 대비를 이루며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한 것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 남매들은 포스터와 공동 작곡한 ‘Someday’를 제외하고 전 곡을 작사, 작곡하는 뛰어난 음악 실력을 자랑했다. 총 15곡 중 6곡이 연주곡으로 채워진 것도 특기사항. 데뷔작의 성공으로 코어스는 셀린 디온, 마이클 볼튼 같은 슈퍼스타의 콘서트에 게스트로 초청됐다. 나아가 덴마크의 오던스 페스티벌(Odense Festival), 런던의 플리드 페스티벌(Fleadh Festival) 같은 유명 록음악 축제에서도 스팅, 밴 모리슨과 함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언론도 그들의 공연을 보고 호평 일색이었다. < 런던 타임tm >는 ‘코어스의 공연은 왜 그들이 스타덤에 올랐는가를 여실히 증명해 보인 자리였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안드레아는 출중한 미모와 연기력 덕분에 마돈나가 주연한 영화 < 에비타(Evita) >에 출연하기도 했다. 코어스의 쾌속항진은 1997년에 발표한 2집 앨범 < Talk On Corners >에서도 계속됐다. 영국 앨범차트 1위에 랭크되며 270만장이나 팔렸고 1집 또한 2위로 재등장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15개 나라에서 플래티넘을, 9개 나라에서 골드를 기록했다. 수록곡 ''Dreams'', ''So Young'', ''What can I do''는 앨범의 인기몰이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밴드의 이 작품은 전작 보다 팝 적인 사운드에서 탈피해 록 비트가 강화됐다. ‘Only when I sleep’이 말해준다. 아일랜드 음악색깔도 많이 희석됐다. 다양한 음악 실험을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지미 헨드릭스의 고전을 켈트 뮤직의 대명사 치프턴스(Chieftains)와 함께 리메이크한 ‘Little Wing’은 정말 색다른 시도였다. 코어가(家) 남매들의 열풍은 그칠 줄 몰랐다. 그들은 1999년 2월에 열린 브릿 어워즈에서 ‘최우수 인터내셔널 그룹''으로 선정됐다. 그해 10월에는 아이리시 어워즈에서 최고의 영예인 ‘하이네켄/핫 프레스상(Heineken/Hot Press)’을 비롯, ‘최고의 국내 밴드''상과 ''국내 아티스트에 의한 최고의 라이브 공연''상을 휩쓸었다. 또한 리드 싱어 안드레아 코어는 ''최고 여자 가수''상을 차지했다. 드디어 밴 모리슨, 유투, 밥 겔도프, 엔야, 시네드 오코너 등 선배들의 배턴을 이어받아 아일랜드의 국민가수로 당당히 자리 매김을 한 것이다.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코어스는 MTV 언플러그드 라이브 앨범을 내놓았다. 1999년 10월 5일 아일랜드의 위크로(Wicklow)에 있는 한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이 음반은 아일랜드 전통악기와 언플러그드가 ‘찰떡 궁합’임을 증명했다. 아일랜드 특유의 애절함과 신비함이 앨범 곳곳에 베어있다. 그들은 또한 메리 블랙(Mary Black)의 ‘No frontiers’, 알이엠(REM)의 ''Everybody hurts''에서 다시 한번 ‘코어스식’ 리메이크를 자랑했다. 이듬해 선보인 코어스의 3집 앨범 < In Blue >는 1.2집의 작업장소 미국이 아닌 제2의 고향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녹음됐다. “우리들의 장소에서 작업하는 것은 매우 자유로웠다. LA에서 녹음하는 것은 큰 경험이었으나 우리는 변화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고향에서는 매우 특별했다.” 캐롤라인의 말이다. 틀에 박힌 음악과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피를 수혈하여 ‘신(新)음악’ ‘신(新)사고’를 하겠다는 뜻이다. 코어스의 결심은 곧바로 실천으로 이어졌다. 프로듀서가 물갈이됐다. 그들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음악 전권을 행사하던 데이빗 포스터가 물러났다. 그 자리에 샤니아 트웨인의 남편이자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는 로버트 머트 랭(Robert "Mutt" Range)이 자리잡았다. 그는 이미 록 그룹 데프레파드와 포리너의 프로듀서로 명성을 날렸던 인물이다. 이뿐이 아니다. 음반 수록곡 ‘Give me a reason’, ‘All in a day’에서는 남매들이 직접 프로듀서를 맡아 사운드를 책임졌다. 강력한 드럼 비트와 함께 코어자매들의 보컬 하모니가 매력적인 ‘Breathless’, 부드러운 팝 넘버 ‘Somebody for someone’와 ‘All the love in the world’, 안드레아의 보컬이 돋보이는 ‘Rain’, 흥겨운 댄스 팝 ‘Give it all up’등 귀에 착착 감기는 멜로디와 리듬이 앨범 전체에 진동한다. ‘아이리시 팝’에서 ‘미국 팝’으로의 접근이다. 코어스의 이 앨범에는 ‘아티스트의 자유’가 넘실댄다. 그들이 주도권을 쥐고 음악을 만들었다. 결과는 상관없다. 그들의 손안으로 음악이 들어온 게 중요하다. “우리는 이번 앨범에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담았다. 이 음반이 그것을 말해주리라 희망한다.” 아티스트의 열정과 노력은 음악팬들도 알아준다. 지금 코어스는 그것을 믿고 있다.
노래 : Vanessa Williams (바네사 윌리암스)
미스아메리카 출신으로 팝 음악계에 나름의 강렬한 무늬를 새긴 여가수다. 동시에 그 뛰어난 미모 때문에 뮤지션으로서의 가치가 평가절하 되어온 인물이기도 하다. 1963년 3월 뉴욕에서 태어난 바네사 윌리엄스(Vanessa Lynn Williams)는 부모가 모두 음악학위를 가진 ‘뮤직 패밀리’ 출신으로 유년기부터 피아노, 바이올린, 플루트, 프렌치 혼 등 다양한 악기를 다루었으며, 목소리 또한 빼어났다. 1981년... 미스아메리카 출신으로 팝 음악계에 나름의 강렬한 무늬를 새긴 여가수다. 동시에 그 뛰어난 미모 때문에 뮤지션으로서의 가치가 평가절하 되어온 인물이기도 하다. 1963년 3월 뉴욕에서 태어난 바네사 윌리엄스(Vanessa Lynn Williams)는 부모가 모두 음악학위를 가진 ‘뮤직 패밀리’ 출신으로 유년기부터 피아노, 바이올린, 플루트, 프렌치 혼 등 다양한 악기를 다루었으며, 목소리 또한 빼어났다. 1981년 시라쿠스(Syracuse) 대학 연극예술학과에 진학하여 뮤지컬 배우로서의 꿈을 구체화시켜 나가지만 외모 덕분(?)에 샛길로 빠지게 된다. 완벽한 얼굴과 몸매를 자랑하던 그녀는 대학 시절부터 캠퍼스 퀸으로 손꼽혔고, 결국 ‘미스 뉴욕’을 거쳐 역사상 최초의 흑인 ‘미스 아메리카’에 오르는 영광을 맞이한다. 그러나 미인대회에 참가한 것이 원인이 되어 뮤지컬 배우로서의 꿈마저 접어야 할 위기에 처한다. 미국의 인종주의 언론은 달갑지 않은 시선을 보냈고 그녀가 성인잡지 < 펜트하우스 >에서 찍었던 누드사진으로 바네사는 마침내 1984년 미스아메리카 왕관을 박탈당하고 만다. 절망은 그러나 곧 전화위복의 기회로 다가온다. 다시 노래에 열정을 쏟아 펑키의 대부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의 백업 보컬로 참여, ‘Hey good looking’, ‘Do fries go with that shake?’와 같은 곡에서 가능성을 타진했다. 곡 자체는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바네사의 매력에 관심을 가진 윙 레코드(Wing Record)는 그녀에게 본격적인 가수로서의 길을 열어주게 된다. 1988년 ‘미스아메리카’ 축출 사건을 겪은 지 4년 만에 드디어 데뷔 앨범인 < Right Stuff >을 발표한다. ‘어번 R&B’ 장르를 선보인 그녀는 이 앨범 하나로 4년 전 불명예를 대중의 기억 속에서 말끔히 씻어낸다. 첫 싱글인 ‘Dreaming’이 차트 정상을 밟았으며 ‘He’s got the look’, ‘Darling I’가 내리 인기를 얻었고, 연이은 인기행진으로 그 해 최우수신인 부문을 포함한 그래미상 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광명을 맛본다. 덩달아 미국흑인지위향상협회(NAACP/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에서 이미지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1년 작 < The Comfort Zone >도 데뷔 앨범의 성공을 확대 재현했다. 수록곡인 발라드 곡 ‘Save the best for last’는 5주간 빌보드 1위를 차지하는 대박을 터뜨렸고, ‘Running back to you’ 등이 인기를 누리며 앨범 역시 더블 플래티넘(200만장)의 성공을 거둔다. 당시 앨범 차트 정상을 차지했던 < 비벌리힐스의 아이들 >(Beverly Hills, 90210) 사운드트랙 역시 그녀의 성공 화염에 기름을 붓는다. 여기선 브라이언 맥나이트와 호흡을 고른 ‘Love is’가 차트 5위에 오르며 당시 인기가 절정에 올랐음을 알렸다. 전작에서 펑크, 재즈, R&B 등 다양한 장르를 소화해내기 시작한 그녀는 세 번째 앨범 < The Sweetest Days >에서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있는 음악적 욕구를 다시 한 번 실현시키며 비주얼 가수가 아니라는 인상을 확실히 심어준다. 동명 타이틀 곡 ’The sweetest days’, 스팅(Sting)의 재즈 넘버를 리메이크한 ‘Sister moon’등이 인기를 얻었다. 특히 후자는 곡의 주인 스팅이 직접 백 보컬과 베이스 연주를 맡아 화제가 되었다. 스타의 자리를 굳힌 그녀는 어린 시절 꿈꾸어 왔던 연기 활동에도 손을 뻗치기 시작하고, 결국 1994년 브로드웨이에 입성해 < Kiss Of The Spiderwoman >를 통해 연기자로 데뷔한다. 이후 < Motown Returns To The Apollo >, < The Boy Who Loved Christmas And Stompin’ At The Savoy >, < Another You >, < Harley Davidson And The Marlboro Man >등 다수의 영화와 TV 드라마에 주연했으며, R&B TV쇼 < The Soul Of VH-1 >의 진행을 맡기도 하였다. 1995년 디즈니 만화영화 < 포카혼타스(Pocahontas) >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하여 주제곡인 ’The color of the wind’를 히트시키고 캐롤 앨범, 1997년작 < The Next >까지 가수로서의 끈을 놓지는 않았지만 전성기의 드라이브는 끊겼고 1990년대 후반에는 음악보다는 영화에 치중했다. 이 무렵 아놀드 슈왈츠네거와 함께 한 영화 < 이레이저 >(Eraser)를 통해 영화배우로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TV 미니시리즈인 < Odyssey >에 출연하여 인기를 누렸고, 영화 < Dance With Me >에서는 화려한 라틴 댄스까지 선보이며 연기자로서 기반도 확실히 구축했다. 1998년에는 10년 음악생활을 정리하는 베스트 < Greatest Hits-The First Ten Years >를 발표했다.
노래 : B.B. King (비비 킹 ,Riley B. King)
명실상부한 블루스 기타의 왕자이자, 블루스와 로큰롤 역사의 산증인. U2와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등 후배 유명 로커들과 공연을 자주 탓에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하울링 울프(Howlin’ Wolf), 엘모어 제임스(Elmore James) 등 동시대 블루스맨 중에서도 대중적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이기도 하다. 기타 줄을 들어올리는 그의 벤딩 주법과 탁월한 가창은 흑인 블루스의... 명실상부한 블루스 기타의 왕자이자, 블루스와 로큰롤 역사의 산증인. U2와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등 후배 유명 로커들과 공연을 자주 탓에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하울링 울프(Howlin’ Wolf), 엘모어 제임스(Elmore James) 등 동시대 블루스맨 중에서도 대중적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이기도 하다. 기타 줄을 들어올리는 그의 벤딩 주법과 탁월한 가창은 흑인 블루스의 한과 고통을 그대로 전달한다. 미시시피 아이티 베나에서 1925년에 라일리 비 킹(Riley B. King)을 본명으로 태어났고 1946년에 멤피스로 올라왔다. 선배 흑인 기타리스트 티 본 워커(T. Bone Walker)의 영향을 받은 그는 자신의 기타를 ‘루실’로 명명한 1949년에 첫 레코드를 취입했다. 이듬해 비하리 형제가 설립한 음반사 RPM과 계약을 체결한 뒤 1952년 ‘Three o’clock blues’, 1954년 ‘You upset me, baby’를 히트시켰다. 1951년부터 1992년까지 리듬 앤 블루스 히트 차트에 올린 곡만도 무려 75곡. 1960년대 말 블루스 리바이벌 시기에 백인 뮤지션들에 의해 재조명되면서 유명해졌고 1969년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Thrill is gone’은 그의 대표작으로 남아있다. 1987년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받았고, 역시 같은 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적되었다.
테이크 댓(Take That)과 함께 1990년대 영국의 보이그룹을 대표했던 보이존(Boyzone)은 매니저 루이스 월시(Louis Walsh)가 신문에 낸 광고를 보고 온 젊은이들 중에서 다섯 명을 선발해 구성한 아이돌 보컬 팀이다. 영국 본토의 테이크 댓과 미국의 뉴 키즈 온 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의 인기에 착악한 루이스 월시는 두 선배 그룹보다 훨씬 더 정갈하고 반듯하고 깔끔한 이... 테이크 댓(Take That)과 함께 1990년대 영국의 보이그룹을 대표했던 보이존(Boyzone)은 매니저 루이스 월시(Louis Walsh)가 신문에 낸 광고를 보고 온 젊은이들 중에서 다섯 명을 선발해 구성한 아이돌 보컬 팀이다. 영국 본토의 테이크 댓과 미국의 뉴 키즈 온 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의 인기에 착악한 루이스 월시는 두 선배 그룹보다 훨씬 더 정갈하고 반듯하고 깔끔한 이미지 메이킹을 통해 보이존을 1990년대 중반 최고의 상업적 성공을 거둔 팀 중 하나로 조각했다. 1993년 아일랜드에서 결성된 보이존의 멤버는 로난 키팅(Ronan Keating), 스테판 게이틀리(Stephen Gately), 키스 더피(Keith Duffy), 셰인 린치(Shane Lynch), 마이키 그래함(Mikey Graham)으로 당시 10대 후반의 미소년들이었다. 미국 디트로이트 출신 보컬 그룹 스피너스(Spinners)의 원곡을 재해석한 ‘Working my way back to you’ 이후 모두 16곡을 영국 차트 5위권 안에 랭크시키며 1996년에 해산한 테이크 댓이 없는 무주공산이 된 영연방의 보이밴드 기득권을 독식했다. ‘Working on my way back to you’를 포함한 싱글 16곡(‘Love me for a reason’, ’So good’, ’Key to my life’, ‘Father & son’, ‘Coming home now’, ‘Words’, ‘A different beat’, ‘Isn’t it wonder’, ‘Picture of you’, ‘Baby can I hold you’, ‘All that I need’, ‘No matter what’, ‘I love the way you love me’, ‘When the going gets tough’ 그리고 ‘You needed me’, ‘Everyday I love you’)이 모두 영국 차트 5위권 내에 드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특히 ‘All that I need’부터 ‘No matter what’, ‘I love the way you love me’, ‘When the going gets tough’, ‘You needed me’까지 다섯 곡의 싱글은 1위로 데뷔하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인쇄했다. 비틀스(Beatles)도, 조지 마이클(George Michael)도 오르지 못한 거대한 성공의 탑이다. 이에 비례해 이들의 음반은 영국에서만 1,000만장 이상이나 판매가 되었다. 그 인기를 반영하듯 1997년에는 영국의 대표적인 코미디언 미스터 빈 선생이 주연한 영화 의 주제가 ‘Picture of you’를 부르는 등 생애 최고의 순간을 향유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이들의 성적표는 낙제점이었다. ‘Mystical experience’, ‘A different beat’, ‘No matter what’이 종합 차트가 아닌 세분화된 차트에만 올랐고 앨범 < Where We Belong >만이 음반 차트 167위에서 성장을 멈추는 굴욕을 당했다.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발표한 싱글들이 대부분이 리메이크하는 점이다. 스피너스의 ‘Working my way back to you’를 비롯해 흑인 가수 존 브리스톨(John Bristol)의 원곡인 ‘Love me for a reason’, 캣 스티븐스(Cat Stevens)의 ‘Father & son’, 비지스(Bee Gees)의 ‘Words’, 트레이시 채프만(Tracy Chapman)의 ‘Baby can I hold you’, 뮤지컬 음악의 명인(名人) 앤드루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가 작곡한 ‘No matter what’, 빌리 오션(Billy Ocean)의 ‘When the going gets tough’, 앤 머레이(Anne Murray)의 ‘You needed me’ 등 이들의 히트 곡들은 미국인들에겐 새롭지 못했고 얼터너티브 그런지와 흑인 음악이 대세였기에 보이존은 무관심의 모래 속에 매몰되었다. 로난 키팅은 1999년에 미국의 컨트리 가수 가스 브룩스(Garth Brooks)의 원곡 ‘When you say nothing at all’을 리메이크한 버전이 영화 < 노팅힐 > 사운드트랙에 수록되면서 솔로활동의 엔진에 시동을 걸었고 이로 인해 해체설이 불거졌다. 결국 1999년에 공개한 네 번째 앨범 < By Request >를 마지막으로 보이존의 역사는 명문화되었다. 이후 로난 키팅은 솔로 가수로 성공을 이어갔지만 셰인 린치, 마이키 그래함 그리고 자신이 게이임을 밝힌 스테판 게이틀리는 본인의 이름을 내건 솔로앨범들을 발표했지만 철저히 잊혀졌다. 그러나 1999년, 보이존은 갔지만 이들과 모든 면에서 흡사한 웨스트라이프가 등장했다(웨스트라이프 역시 아일랜드 출신의 꽃미남 5인조). 역사는 이렇게 반복된다.
노래 : Gloria Estefan (글로리아 에스테판)
라틴음악의 본고장 쿠바 출신의 글로리아 에스테판에겐 두 가지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우선 리키 마틴의 라틴 팝 돌풍 이전에 이미 라틴의 혼을 전세계에 전파한 ‘라틴 디바’라는 것이다. 그녀는 1980년대 이미 ‘Conga’, ‘1-2-3’ 같은 라틴 팝 넘버를 히트시켰으며 일련의 노력으로 독보적인 라틴 팝 여왕의 자리를 지금껏 유지해오고 있다. ‘의지의 표상’이라는 존경할만한 또 다른 수식어도 있다. 1990년 ... 라틴음악의 본고장 쿠바 출신의 글로리아 에스테판에겐 두 가지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우선 리키 마틴의 라틴 팝 돌풍 이전에 이미 라틴의 혼을 전세계에 전파한 ‘라틴 디바’라는 것이다. 그녀는 1980년대 이미 ‘Conga’, ‘1-2-3’ 같은 라틴 팝 넘버를 히트시켰으며 일련의 노력으로 독보적인 라틴 팝 여왕의 자리를 지금껏 유지해오고 있다. ‘의지의 표상’이라는 존경할만한 또 다른 수식어도 있다. 1990년 교통사고를 당해 정상적인 생활마저 불투명했지만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고 훌륭히 재기에 성공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20년 가까이 자국인 쿠바의 리듬을 충실히 알린 그녀에겐 라틴 디바라는 표현이 가장 적당할 것이다. 글로리아 마리아 파하르도(Gloria Maria Fajardo)가 본명인 에스테판은 1957년 쿠바 하바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통령가족을 경호하는 일을 담당하며 비교적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갔지만 1959년 가족은 카스트로의 공산혁명을 피해 미국 마이애미로 이주해야만 했다. 난민의 처지로 미국에 정착한 그녀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일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병든 아버지를 간호하며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했고 때문에 야간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힘든 상황에서 글로리아를 지탱해 줬던 것은 물론 기타와 음악이었다. 1975년 마이애미 대학에 진학한 그녀는 학업과 ‘웨딩싱어’라는 자유직업을 병행했다. 거기서 밴드 ‘마이애미 라틴 보이스’를 이끌던 에밀리오 에스테판을 만나 함께 새로운 밴드를 결성, 음악적 욕구를 실현할 토대를 구축했다. 그 그룹이 유명한 마이애미 사운드 머신이었다. 그녀와 음악동료인 에밀리오는 1978년 결혼했다. 마이애미 사운드 머신은 1984년 에픽 레코드사에서 정식 데뷔작인 < Eyes of innocence >를 발표했다. ‘Dr. beat’와 같은 흥겨운 곡이 호응을 얻기도 했지만 그들이 슈퍼스타로 웅비하게 된 것은 이듬해 앨범 < Primitive Love >를 내놓고 나서였다. ‘Conga’, ‘Bad boy’와 같은 싱글이 잇따라 스매시 히트했고, 그와 함께 라틴의 열정적인 리듬도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글로리아 에스테판의 길은 하지만 언제나 순항과 고난의 반복이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딛고 스타덤을 공고히 하는가 했더니 다시 한번 엄청난 시련이 닥쳤다. 1990년 3월 투어 차 뉴욕으로 향하던 버스와 뒤따라오던 트레일러가 추돌하는 사고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 사고로 글로리아는 등뼈가 부러졌으며 400 바늘이나 꿰매야 하는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수술은 성공적으로 이뤄졌고, 그녀는 1년만에 치명적 상처를 딛고 일어서 놀라운 투혼으로 < In To The Light >를 발표했다. 이 앨범에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복하고자 하는 불굴의 의지가 투영되었다. 팬들은 진심 어린 격려와 갈채로 답했으며, 싱글 ‘Coming out of dark’는 차트 1위에 오르는 일대 기염을 토했다. 그것은 기적적인 재기였다. 최근 여러 뮤지션들에 의해 라틴음악이 유행하는 상황이지만 그녀야말로 순수한 라틴음악의 잠재력을 꿰뚫어 본 어쩌면 사상 최초의 가수였다. 1990년에 이미 스페인어로 부른 싱글 ‘Oye mi canto’을 발표했으며 3년 뒤에는 완전한 라틴앨범 < Mi Tierra >를 내놓았다. 1995년에는 다시 스페인어 음반 < Abriendo Puertas >를 출시해 라틴 부흥에 앞장섰다. 두 앨범 모두 대중적으로 큰사랑을 받았고 이 무렵 글로리아는 공식적으로 가장 많은 앨범을 판 라틴계열 가수로 등록되었다. 1998년 앨범 < Gloria! >을 발표한 그녀는 같은 해 뉴욕에서 개최된 ‘디바 라이브 공연’에 참여했다. 아레사 프랭클린, 셀린 디온, 머라이어 캐리, 캐롤 킹, 샤니아 트웨인과 함께 노래한 이 공연을 통해 글로리아는 라틴 디바로서 재확인되었다. 이듬해 그녀는 메릴 스트립이 주연한 < Music Of The Heart >에 배우로서 첫선을 보였으며, 이 영화의 타이틀곡을 보이밴드 엔싱크와 함께 불러 오스카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2000년에는 세 번째 라틴앨범 < Alma Caribena >를 발표하며 남다른 라틴 정체성을 이어가고 있다.
백인을 뜻하는 푸른 눈(블루 아이)과 흑인 음악을 대표하는 소울이란 단어가 합해져 생성된 신조어 블루 아이드 소울(Blue eyed soul)은 말 그대로 백인이 흑인의 창법으로 노래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1944년 생인 조 카커(Joe Cocker)는 블루 아이드 소울 싱어 중에서도 그 출중한 실력을 인정받는 영국 셰필드 출신의 가수이다. 그가 발효시킨 영혼의 울림은 이 분야의 원조 격인 남성 듀엣 라이처스 ... 백인을 뜻하는 푸른 눈(블루 아이)과 흑인 음악을 대표하는 소울이란 단어가 합해져 생성된 신조어 블루 아이드 소울(Blue eyed soul)은 말 그대로 백인이 흑인의 창법으로 노래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1944년 생인 조 카커(Joe Cocker)는 블루 아이드 소울 싱어 중에서도 그 출중한 실력을 인정받는 영국 셰필드 출신의 가수이다. 그가 발효시킨 영혼의 울림은 이 분야의 원조 격인 남성 듀엣 라이처스 브라더스(Righteous Brothers)와 대등한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이후에 등장하는 홀 & 오츠(Hall & Oates), 폴 영(Paul Young), 로버트 파머(Robert Palmer), 폴 캐릭(Paul Carrack) 심플리 레드(Simply Red), 조지 마이클(George Michael), 마이클 볼튼(Michael Bolton)과 같은 푸른 눈의 백인 소울 싱어들에게 하나의 전형을 제시했다. 1960년대 후반에 등장한 조 카커는 1969년에 열린 전설적인 콘서트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초청되어 자신의 능력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방송되었던 외화 시리즈 < 케빈은 12살 >의 주제가로 쓰였던 비틀스의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s(68위)’를 오징어 구워지듯 온 몸을 비비꼬는 무대 매너로 열창해 수많은 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이 신인 소울 싱어와 ‘Soul sacrifice’를 연주한 역시 신인 산타나(Santana)는 이 페스티발에서의 멋진 공연으로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조 카커는 1969년부터 1970년까지 만 3년 동안 3장의 정규 음반을 발표했다. 자신이 작사, 작곡한 것 외에도 다른 가수의 노래들을 많이 커버했다. 데이브 메이슨(Dave Mason)의 ‘Feelin’ alright(69위)’, 밥 딜런(Bob Dylan)의 ‘Just like a woman’과 ‘Dear Landlord’,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의 ‘Bird on a wire’,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She came in through the bathroom window(30위)’, 포크 록 그룹 러빙 스푼풀(Lovin’ Spoonful)의 ‘Darling be home soon’, 박스 탑스(Box Tops)의 ‘Letter(7위)’ 등의 트랙들을 재해석해 여러 장르의 음악들을 멋진 소울 음악으로 통일시켰고 록 감각의 ‘High time we went(22위)’로 당시 백인 소울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했다. 음주 문제 때문에 197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그의 음악 활동은 순탄하지 못했다. 이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도록 그의 양 날개를 받쳐 준 사람은 비틀스와 각별한 사이였던 흑인 건반 연주자 겸 싱어 송라이터 빌리 프레스톤(Billy Preston)이었으며 그 결과물이 그의 대표작이 된 1975년의 ‘You are so beautiful(5위)’이었다. 임재범도 리메이크해 국내 신세대 가요팬들에게도 알려진 이 발라드로 조 카커는 다시 한번 화려한 비상을 했고, 1982년에는 영화 < 사관과 신사 >의 주제가 ‘Up where we belong’을 제니퍼 원스(Jennifer Warnes)와 듀엣으로 불러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은 물론,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수상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1990년대 초반 국내의 나이트 클럽에서 자주 들을 수 있었던 신나는 소울 곡 ‘Unchain my heart’는 1987년에 발표한 음반의 타이틀곡으로 ‘Up where we belong’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노래이다. 하지만 이 곡은 본고장에서 싱글로 발표되지 않은 숨은 보석이었다. 이 블루 아이드 싱어의 마지막 히트 곡은 1989년 말에 발표한 ‘When the night comes’로 싱글 차트 20위 권 진입에 성공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히트 차트에서 멀어져갔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일군 조 카커의 성공은 당시 제대로 조명 받기 시작한 흑인음악을 백인이 잘 소화한다는 희소성에 초점이 맞추어 졌고, 그를 비롯한 스티브 윈우드(Steve Winwood), 밴 모리슨(Van Morrison), 라이처스 브라더스 같은 선지자들이 뿌리내린 토양 위에서 후배들은 흑과 백의 자연스런 크로스 오버를 시도해 대대적인 성공을 일궈내고 있다. 공식적으로 데뷔한지 30년이 넘었지만 뉴 밀레니엄을 맞아 신보 < No Ordinary World >을 공개하면서 차트 경쟁과는 무관하게 음악에 대한 열정을 과시했다. 그를 통해 우리는 무엇보다 가수는 ‘독창적 음색’이 생명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의 음악이 꾸준히 매니아들을 창출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노래 : Mariah Carey (머라이어 캐리)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만큼 ‘디바’라는 호칭이 잘 어울리는 아티스트가 있을까? 머라이어 캐리의 데뷔는 화려했다. 콜롬비아 레코드의 토미 모톨라에게 발탁, 1990년에 데뷔하자마자 4개의 싱글을 빌보드 핫 100 차트 1위에 올리는 기록을 세우며 단숨에 팝계의 신데렐라로 등극했다. 이후 1993년 모톨라와 결혼하며 최전성기를 맞이했고, 콜롬비아 레코드의 주력 아티스트로써 15개의 1위 곡을 쏟아냈...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만큼 ‘디바’라는 호칭이 잘 어울리는 아티스트가 있을까? 머라이어 캐리의 데뷔는 화려했다. 콜롬비아 레코드의 토미 모톨라에게 발탁, 1990년에 데뷔하자마자 4개의 싱글을 빌보드 핫 100 차트 1위에 올리는 기록을 세우며 단숨에 팝계의 신데렐라로 등극했다. 이후 1993년 모톨라와 결혼하며 최전성기를 맞이했고, 콜롬비아 레코드의 주력 아티스트로써 15개의 1위 곡을 쏟아냈다.

2001년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버진 레코드로 옮기면서는 8천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계약금을 받아 또 한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후 아일랜드 레코드에서 2005년 발표한 정규 앨범 [The Emancipation of Mimi]이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머라이어 캐리는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특히 싱글 커트되었던 ‘We Belong Together’는 그 해 전 세계 차트를 휩쓸었고,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뿐만아니라 빌보드 10년 결산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하는 큰 성공을 거두며, 머라이어 캐리의 경력 중 가장 성공적인 싱글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아일랜드 레코드에 따르면 머라이어 캐리는 20여년의 기간 동안 전세계적으로 총 2억장의 음반, 싱글, 비디오 판매고를 올리고있고, 2000년 월드 뮤직 어워드에서 ‘1990년대 최다 앨범 판매량을 기록한 여가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미국 음반 산업 협회(RIAA)에 따르면 미국 내에서의 판매량 역시 약 6천 3백만 장으로 역대 세 번째로 높은 세일즈를 기록한 여자 가수이다. 또한 빌보드 핫 100 1위곡을 18개나 보유하고 있어, 솔로 가수로는 이부문 최고의 기록을 보유하고있다. 또한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분석한 50년간의 차트 기록 분석에서도 역대 6위에 이름을 올렸다. 이와 같은 화려한 상업적인 성과 이외에도 5개의 그래미 트로피를 가지고 있어, 이 시대의 진정한 디바로써의 자격을 충분히 같추고 있는 머라이어 캐리의 음악적 여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노래 : Lionel Richie (라이오넬 리치)
1980년대에 마이클 잭슨과 더불어 가장 큰 인기를 얻었던 흑인 남자가수로 이미 1970년대를 풍미한 대표적 소울 펑키 그룹 코모도스(Commodores)의 리드보컬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룹만으로서 음악생활을 국한할 수 없는 뛰어난 재능으로 1980년대 팝 음악계를 석권했으며 세월이 흐른 지금도 ‘Hello’ ‘Stuck on you’ ‘Sa you say me’ 등 그가 만든 탁월한 선율의 노... 1980년대에 마이클 잭슨과 더불어 가장 큰 인기를 얻었던 흑인 남자가수로 이미 1970년대를 풍미한 대표적 소울 펑키 그룹 코모도스(Commodores)의 리드보컬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룹만으로서 음악생활을 국한할 수 없는 뛰어난 재능으로 1980년대 팝 음악계를 석권했으며 세월이 흐른 지금도 ‘Hello’ ‘Stuck on you’ ‘Sa you say me’ 등 그가 만든 탁월한 선율의 노래들이 꾸준히 애청되고있다. 미국 앨러바마의 터스카기 출신인 라이오넬 리치(Lionel Richie)는 같은 대학 동창생들이 모여서 결성된 그룹 코모도스의 음악지휘자로 그룹의 대다수의 히트곡을 직접 쓰고 불렀다. 그룹과 직결되는 곡들인 `Easy , `Three Times A Lady , `Still’ 등 이지 리스닝 계열의 발라드들이 바로 그의 작품이었다. 또 1980년에는 컨트리 팝의 거성 케니 로저스(Kenny Rogers)의 최대 히트곡 ‘Lady’를 작곡해 주었고 이듬해엔 앨범 프로듀서를 담당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 영화 ‘Endless Love’의 주제가를 직접 제작하여 당대 최고의 여가수 다이애나 로스(Diana Ross)와 듀엣으로 불러서 싱글차트 정상에 9주간 점령, 최고도에 오른 인기를 과시했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1982년에 솔로 데뷔앨범 < Lionel Richie >를 내놓고 본격적인 솔로 가수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앨범의 첫 싱글 `Truly’ 가 손쉽게 차트 정상에 올랐고, (이 곡은 Commodores식의 발라드를 답습한 결과로 그에게 첫번째 Grammy 트로피를 안겨준 곡이 되었다.) 계속해서 `You are`, `My love’ 등이 차트 상위권을 공략했다. 1983년에는 그를 월드 슈퍼스타로 부상시킨 앨범 < Can’t Slow Down >이 발매되어 미국에서만 판매고가 1000만장을 넘어섰고 세계적으론 2000만장 이상이 팔려나가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 이 LP는 3년 동안 앨범차트에 머무르면서 앨범차트 정상 등극은 물론, 이듬해 그래미상에서는 ‘올해의 앨범’ ‘올해의 프로듀서’부문 상을 수상했다. 수록곡 중 5곡이 싱글로 발매되어 모두 차트 톱10에 오르는 연쇄 히트를 기록했다. 업 템포의 댄스 넘버 `All night long(All night) 이 4주간 정상에 오르며 솔로로서 3번째 골드 레코드를 기록했고, 미국과 영국에서 모두 차트 정상에 오른 감성적인 발라드 `Hello‘ 는 국내에서도 아직까지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밝고 통통 튀는 리듬이 인상적인 곡 ‘Running with the night’, 감미로운 리듬의 극치 ‘Penny lover’, 복고풍의 편안함이 압권인 ‘Stuck on you’가 바로 그 곡들이었다. 그 무렵 1984년 L.A 올림픽에서는 폐막식의 피날레공연을 맡기도 했다. 1985년에는 마이클 잭슨과 함께 기아로 고통받는 아프리카를 위한 기금모금 행사의 일환으로 앨범 < We Are The World >의 타이틀곡을 제작하여 400만장 이상의 싱글 판매고를 올렸고, 이어서 또 한차례 영화음악으로 대박을 터트렸으니 바로 영화 < 백야 >(White Nights)의 주제곡인 ‘Say you say me’였다. 역시 골드가 이 곡은 차트 정상을 4주간 점령했고 이듬해 그에게 오스카상을 안겼다. 이 곡이 수록된 솔로 3집 앨범 < Dancing On The Ceiling >은 1986년에 발매되어 전작의 성공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싱글차트 2위까지 오른 ‘Dancing on the ceiling’을 비롯하여 서정적인 발라드들인 `Ballerina girl(7위)’과 ‘Love will conquer all(9위)’, 레게리듬의 경쾌한 멜로디가 흥겨움을 더하는 `Se la(20위)’, 그리고 당시 최고의 컨트리 그룹 앨러바마(Alabama)가 함께 불러준 곡 `Deep river woman(71위)’ 등 싱글이 무더기로 발표되었다. 이후로 새 앨범이 발매될 때까지 6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애초 20년 가까이 계속해온 음악생활을 잠시 접어두고자 한 휴지기였지만 그런 선택은 대중의 기억 속에 차츰 잊혀져 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1992년 모타운 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컴필레이션 앨범 < Back To Front >는 신곡 셋 외에 모두 기존의 히트곡들로 채워져 창작력에 제동이 걸린 듯한 느낌을 주었다. 부인의 이혼소송에 따른 위자료 문제로 앨범 발매를 늦추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다시 4년의 세월이 흐른 뒤 4번째 정규앨범 < Louder Than Words >로 모처럼 복귀, 10년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듯이 대가(大家)다운 도시화되고 세련된 R&B 음악을 선보였으나 실적은 기대 이하였다. 1998년 < Time >과 2001년 < Renaissance > 등 계속해서 선보인 신작 역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마이클 잭슨, 프린스와 더불어 1980년대를 주름잡던 흑인음악의 삼성(三星) 중의 하나는 쇠퇴해 가는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1978년부터 1986년까지 매년 자신이 만든 곡을 싱글차트 정상에 올린 진기록, 4개의 그래미상, 9개의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 상,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상이라는 풍부한 수상경력이 주는 가치 그리고 백인들도 거부할 수 없는 그만의 ‘크로스오버 러브 R&B 발라드’의 흡수력은 아직도 천연히 빛을 발한다.
보이그룹 메누도의 아이돌스타에서 라틴영웅으로 훌쩍 커버린 리키 마틴은 단연 라틴열풍의 일등공신이다. 팝과 살사 리듬이 크로스오버된 라틴 팝을 들려주는 그는 ‘변방’에 있던 라틴음악을 ‘중앙’으로 화려하게 진입시켰다. 절충적 사운드와 함께 영어로 노래함으로써 팝에 친숙한 영어권 음악팬들과 라틴 본토의 팬들을 동시 만족시켰다. 또한 그의 격렬한 움직임과 넘치는 에너지, 강렬한 땀 냄새는 지구촌의 여성 팬들을 사로잡았... 보이그룹 메누도의 아이돌스타에서 라틴영웅으로 훌쩍 커버린 리키 마틴은 단연 라틴열풍의 일등공신이다. 팝과 살사 리듬이 크로스오버된 라틴 팝을 들려주는 그는 ‘변방’에 있던 라틴음악을 ‘중앙’으로 화려하게 진입시켰다. 절충적 사운드와 함께 영어로 노래함으로써 팝에 친숙한 영어권 음악팬들과 라틴 본토의 팬들을 동시 만족시켰다. 또한 그의 격렬한 움직임과 넘치는 에너지, 강렬한 땀 냄새는 지구촌의 여성 팬들을 사로잡았다. 이러한 그의 섹시한 매력은 여가수로 치자면 전성기 시절의 마돈나에 비견될 정도다. 거기에 레코드사의 든든한 후원까지 등에 업은 리키 마틴은 가공할 만한 위력을 발휘하며 팝 음악의 한 지류에 머물던 라틴음악을 ‘팝의 주류’에 입성시켰다. 리키 마틴은 1971년 12월 24일 푸에르토리코의 산 후안(San Juan)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엔리케 마틴 모랄레스(Enrique Martin Morales). 어렸을 적부터 합창단에서 노래하기 시작한 그는 카톨릭 학교를 거쳐 예술학교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노래와 연기 수업을 쌓아 나갔다. 1984년 리키 마틴은 변성기 이전의 미소년들로 구성된 보이그룹 메누도(Menudo)의 일원이 되었다. 5년간 메누도의 리드싱어로 활약하던 리키는 그룹의 까다로운 나이규정 탓에 팀을 떠났다. 이후 1991년 리키 마틴은 셀프타이틀 데뷔앨범 < Ricky Martin >을 발표했다. 향후 리키의 작업에 조력자로서 지속적인 도움을 주는 메누도 시절의 동료 로비 로사(Robi Rosa)가 이 음반의 공동작곡자로 참여했다. 2년 후에는 리키의 두 번째 앨범이 출시되었고, 이 2장의 앨범 발매 이후 점차 미국시장에도 그의 인지도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4년부터 3년간 ABC의 인기 드라마 < General Hospital >에 바텐더 겸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출연한 덕도 봤다. 리키 마틴은 1995년 풍성한 라틴 리듬 위에 록 비트가 강화된 3집 < A Medio Vivir >를 발표했으며, 3년 뒤에는 4집 < Vuelve >를 내놓았다. ‘La copa de la vida’가 프랑스 월드컵 주제곡으로 만방에 울려 퍼져 한껏 기세가 오른 리키 마틴은 1999년 영어앨범 < Ricky Martin >을 진수시켰다. 블록버스터 싱글 ‘Livin` la vida loca’가 수록된 이 앨범은 전세계적으로 1천5백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라틴 관중을 넘어 전세계 음악팬들이 그의 라틴 팝에 흥분하도록 만들었다. 그 흥행여파로 리키 마틴은 MTV 라틴 뮤직 시상식, 빌보드 시상식 등 각종 시상식에서 상을 석권했다. 각종 매체에서도 그를 집중 조명했다. < 피플(People) >지는 그를 ‘1999년 가장 흥미로운 인물 25명’중 한 명으로 뽑았으며, 시사주간지 < 타임 >은 ‘1999년 화제의 인물’로 선정했다. 2000년에는 두 번째 영어앨범 < Sound Loaded >의 발매에 맞춰 내한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스타일이 너무 정형화된 그 앨범이 예상 밖의 부진에 빠지자 그는 수록곡 ‘Nobody wants to be lonely’를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와 함께 재녹음해서 인기만회를 시도했다. 2001년 3월에는 데뷔작부터 최근의 히트곡까지 수록한 스페인어 베스트앨범 < La Historia >를 출시했다. 2001년 1월 리키 마틴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축하공연을 가졌다. 이에 대해 그의 동반자 로비 로사가 강도 높은 비판을 해 화제다. 보수적인 부시의 취임식에서 노래한 것은 당파성이 다분한 행동이며 히스패닉에 대한 심각한 배반행위라는 것이다. 리키 마틴은 인터뷰에서 "그 공연에 정치적 이유는 없었다. 단지 나의 음악을 전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참여했다"고 해명했다. 이 같은 에피소드를 보면 리키 마틴의 지향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상업가수이다. 상업가수로서 자신을 알리는 일은 중요하다. 리키 마틴은 그러한 자신의 본분을 훌륭히 해냈다. 적어도 그의 음악은 우리를 충분히 흥분시킨다.
노래 : Caetano Veloso (까에따누 벨로주)
노래 : Enrique Iglesias (엔리케 이글레시아스)
라틴 팝의 왕자는 누군가. 두 말할 나위 없이 섹시 가이 리키 마틴이다. 전통적으로 말끔한 오스몬드 형제들에게 충성해온 미국의 솔트 레이크 시마저 리키 마틴의 앨범이 동이 날 만큼 그는 글로벌 스타로, 그리고 그의 라틴음악은 단숨에 팝의 트렌드로 떠올랐다. 그는 시사주간지 < 타임 >이 선정한 1999년 화제의 인물이다. 하지만 엔리케 이글레시아스가 그의 견고한 아성에 도전하면서 라틴 판은 갑자기 안개정국으로 변... 라틴 팝의 왕자는 누군가. 두 말할 나위 없이 섹시 가이 리키 마틴이다. 전통적으로 말끔한 오스몬드 형제들에게 충성해온 미국의 솔트 레이크 시마저 리키 마틴의 앨범이 동이 날 만큼 그는 글로벌 스타로, 그리고 그의 라틴음악은 단숨에 팝의 트렌드로 떠올랐다. 그는 시사주간지 < 타임 >이 선정한 1999년 화제의 인물이다. 하지만 엔리케 이글레시아스가 그의 견고한 아성에 도전하면서 라틴 판은 갑자기 안개정국으로 변했다. 엔리케 이글레시아스는 지난해 영화 <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에 삽입된 곡 < Bailamos(춤춰요) >로 빌보드 차트 1위를 정복하면서 화려하게 북미대륙에 명함을 내밀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신인으로 여겼다. 하지만 미국 등 전세계에 퍼져있는 히스패닉 인구들 사이에선 이미 든든한 스타덤을 구축했다. 1995년에 자기 이름을 내건 데뷔앨범을 발표한 것을 위시해 해마다 한 장씩 음반을 출시해 벌써 3장의 독집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앨범들은 15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96년에는 그래미상의 라틴 아티스트 부문을 수상했고 이듬해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도 최우수 앨범상을 탔다. 엔리케 이글레시아스가 이런 분투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이제껏 덜 알려진 것은 큰물인 미국에 진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전 앨범은 모두 스페니시로 불렀다. 하지만 < Bailamos >로 세계적 지명도를 획득하면서 그의 포부는 확대 개편되었다. “이제 미국으로 간다. 라틴 팝의 확산을 위하여!” 막 출시된 그의 앨범 < Enrique >는 미국시장을 겨냥한 첫 영어앨범이다. 미국 로큰롤의 보스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곡 < Sad eyes >를 리메이크한 것이나 이 시대의 프로듀서 데이비드 포스터나 히트곡 제조기인 다이안 워렌(Diane Warren)이 작업에 참여한 사실이 앨범의 성격을 규정한다. 자신감도 충만해 있다. ‘라틴음악의 황제’로 일컬어진 아버지 훌리오 이글레시아스(Julio Iglesias)도 80년대에 미국침공을 꾀했지만 빌보드 정상에 오르진 못한 것과 달리 이미 엔리케는 위업을 달성했다. 못다 이룬 아버지의 한을 풀어주었다. 이제 꺼리길 게 없다는 뜻이 앨범에 배어있다. 사람들의 관심은 그러나 결코 엔리케 한사람의 행보에 머물러있지 않다. 다름 아닌 이미 고지를 선점한 리키 마틴 때문이다. 언론과 팬들의 시선은 그와 엔리케의 관계함수에 쏠려있다. 이번 엔리케의 앨범도 사실상 리키 마틴를 향한 한판대결 선언이다. 신보로 리키 마틴에 정면대결 선언 아닌게 아니라 얼마 전 외신은 리키 마틴과 엔리케 이글레시아스가 공식석상에서는 예를 갖추지만 돌아서면 원수처럼 서로를 깎아 내리는 사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언론 특유의 작위적 라이벌 붙이기의 요소도 있지만 차트라는 좌표만 봐도 실제로 둘 간에 치열한 경쟁의식이 전개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음악은 기본적으로 팝 내음이 물씬하다. 어느 정도 라틴 아이덴티티의 손상은 감수한 것으로 생각된다(북미진출을 위한 불가피한 대가?). 리키 마틴과 다를 게 없다. 그러나 숙명의 라이벌답게 공통분모 속에서도 차별화 포인트는 명백히 존재한다. 리키 마틴의 음악은 살사(salsa)의 전형으로 라틴의 흥취 아니면 고요라는 ‘댄스와 발라드’ 공식이 적용되고 있다. 반면 엔리케의 음악은 스페니시 혈통(그는 1975년 스페인 마드리드 태생)을 간직하여 보다 유럽적이며 라틴으로 보자면 낭만에 가깝다. 당연히 리키의 것보다는 템포의 편차가 적다. < Bailamos >의 콤비 폴 배리와 마크 테일러가 다시 실력을 발휘한 싱글 < Rhythm divine >은 스페니시 기타와 플라멩코 리듬에 강조되어 로맨틱한 분위기가 넘치며 열정적인 댄스의 < Oyeme(내 말을 들어요) >도 기타 리프는 무드를 내뿜고 있다. 댄스플로어에서는 리키 마틴의 것이 우세할지 몰라도 감상하기에는 엔리케가 더 낫다. < Rhythm divine >의 경우 뮤직 비디오를 로스앤젤레스의 코리아타운에서 촬영하여 배경에 한국어가 선명하게 등장해 국내 팬들의 관심을 자극하고 있다. 게스트 선정에도 라이벌의식이 작용 엔리케의 리키 마틴에 대한 심리전은 수록곡 < Could I have this kiss forever >로 여실히 증명된다. 그는 리키가 마돈나와의 듀엣 곡을 시도한 것을 인지하고 그에 대항하기 위해 파트너로 휘트니 휴스턴을 택했다(실제론 휘트니가 엔리케를 택했겠지만). 게스트 선정에 있어서도 리키한테 지지 않겠다는 의도가 드러난다. 이 곡이 바로 다이안 워렌(Diane Warren)이 쓴 작품. 나중 싱글로 나와도 손색이 없을 만큼 선율의 대중흡인력이 강하다. 요즘 너무도 중요해진 섹슈얼리티 측면에서도 엔리케는 경쟁력을 구비하고있다. 190㎝의 훤칠한 키에 아버지로부터 카리스마도 물려받았다. 조금 어두운 요소가 부담이긴 하나 섹시 가이의 측면에서도 리키와 좋은 싸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미지에 있어서 리키는 라틴 팝 바람의 시작자라는 강점이 있는데 반해 자칫 잘못하면 엔리케는 뒷북치기가 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 약점이다. 둘의 승부는 물론 그가 어떻게 이 과제를 해결하는가 주시하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덴마크 출신의 4인조 혼성댄스그룹 아쿠아는 밝고 즐거운 유로 댄스의 전통 위에 상큼한 팝 사운드를 가미시킨 독특한 스타일로 각광받는 그룹이다. 이들은 반복되는 비트를 특징으로 하는 ‘유로 댄스’를 유지하되 서정적 멜로디의 팝 사운드를 곳곳에 배치시킴으로써 그 기계적 리듬의 지루함을 희석시켰다. 여기에 홍일점 르네 그로포드(Lene Grawford)의 섹시한 외모와 음색 덕분에 아쿠아의 매력이 한층 더 부각되었다.... 덴마크 출신의 4인조 혼성댄스그룹 아쿠아는 밝고 즐거운 유로 댄스의 전통 위에 상큼한 팝 사운드를 가미시킨 독특한 스타일로 각광받는 그룹이다. 이들은 반복되는 비트를 특징으로 하는 ‘유로 댄스’를 유지하되 서정적 멜로디의 팝 사운드를 곳곳에 배치시킴으로써 그 기계적 리듬의 지루함을 희석시켰다. 여기에 홍일점 르네 그로포드(Lene Grawford)의 섹시한 외모와 음색 덕분에 아쿠아의 매력이 한층 더 부각되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보컬과 대비되는 남성멤버 르네 디프(Rene Dif)의 굵은 래핑도 특징이다. 그들의 싱글 ‘Barbie girl’은 그 이름처럼 ‘바비 인형’의 파급력과 비등할 정도로 전세계 음악계에 침투했다. 그 단 하나의 곡으로 아쿠아는 일약 북유럽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1988년 클라우스 노린(Claus Norreen)과 소렌 라스티드(Soeren Rasted)가 덴마크의 한 영화음악을 담당하기 위해 함께 일하면서 아쿠아가 태동했다. 그룹의 작곡을 전담하는 이 둘은 르네(Rene)를 만나 의기투합했고, 그는 나중에 노르웨이 여성가수 르네(Lene)를 소개했다. 그 네 명은 1992년 조이스피드(Joyspeed)라는 팀을 처음으로 결성했다. 조이스피드란 이름으로 발매한 싱글 ‘Itzy bitzy’가 시원찮은 반응을 얻자 이들은 한 수족관 포스터에서 따왔다는 ‘아쿠아’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활동을 새롭게 전개해나갔다. 얼마 후 이들은 < 유니버설 >(Universal)과 계약을 맺고 1996년 9월 싱글 ‘Roses are red’를 발표했다. 이 싱글은 덴마크 차트 정상에 올랐고, 후속싱글 ‘My oh my’ 역시 1위를 점령하며 아쿠아의 히트예감을 증폭시켰다. 1997년 덴마크 자국내의 스타를 넘어 드디어 국제적 인지도를 얻게되는 아쿠아의 첫 번째 정규앨범 < Aquarium >가 출시되었다. 발랄한 댄스 비트와 친근함으로 무장한 이 앨범은 미국에서 발매 2주만에 2백만장이 팔려나갔으며 전세계적으로 2천5백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메가히트 싱글 ‘Barbie girl’은 방송횟수만으로 빌보드차트 7위에 입성했으며, 영국에서는 발매 2주만에 ‘영국의 자존심’ 스파이스 걸스를 밀어내고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이러한 흥행 여파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1998년 발매된 후속싱글 ‘Doctor Jones’, ‘Turn back time’은 영국차트에서 데뷔와 동시에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기네스 팰트로 주연의 영화 < 슬라이딩 도어스 >에 삽입되기도 한 팝 발라드 ‘Turn back time’은 유로 댄스그룹이라곤 믿지 못할 정도로 뛰어난 서정성과 팝 감수성을 뽐내며 국내 팬들에게 큰사랑을 받았다. 2000년 5월에는 멤버 전원이 프로듀싱과 레코딩, 믹싱 등의 작업을 모두 도맡은 두 번째 앨범 < Aquarius >이 출시되었다. 아쿠아는 말 그대로 맑고 투명한 댄스음악으로 히트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한없이 흥겹고 경쾌한 사운드로도 이들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음악적 변신을 시도하며 다양성을 얻고자한 2집으로 봐선 이들이 유로 댄스라는 한정된 범주 내에서 만족할 것 같지는 않다.
멤버 : 애니 레녹스(Annie Lennox), 데이빗 스튜어트(David Stewart) 지금이야 모든 음악(심지어 리얼 뮤직까지도)이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도움을 받지만, 1980년대 초반에 형성된 뉴 웨이브씬의 뮤지션들은 전자 악기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수준이나 태도 등에서 비평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았고, 그것이 마치 1980년대 미 보수물결의 원인인 것처럼 치부되었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1970년대... 멤버 : 애니 레녹스(Annie Lennox), 데이빗 스튜어트(David Stewart)

지금이야 모든 음악(심지어 리얼 뮤직까지도)이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도움을 받지만, 1980년대 초반에 형성된 뉴 웨이브씬의 뮤지션들은 전자 악기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수준이나 태도 등에서 비평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았고, 그것이 마치 1980년대 미 보수물결의 원인인 것처럼 치부되었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1970년대의 음악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1980년대의 음악을 별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혁명적 전환기는 포크기타에서 일렉트릭기타로의 변환만큼이나 범 세계적으로 현 음악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 당시 등장한 여러 그룹들 중에서(비록 중간에 해체하긴 했었지만), 현재까지도 활동을 하고 있는 유일한 혼성그룹 유리스믹스는 중성적인 외모와 목소리를 소유한 짧은 머리의 애니 레녹스와 그녀의 뒤에서 모든 음악을 조율하는 감독 데이브 스튜어트로 이루어져 있다. 이 둘의 첫 만남은 애니가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레스토랑에서 이루어졌다. 자신의 밴드 롱댄서(Longdancer)로 전세계를 돌던 데이브는 독일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영국으로 돌아왔고, 폐 수술을 받은 후 동료 피트 쿰(Peet Coombes)과 식사를 하며 새 밴드에 대한 구상을 하던 중이었다. 주문을 받던 애니에게 데이브가 건넨 첫 마디는''나랑 결혼할래요?''라는 말이었다. 애니는 데이브의 정신상태를 의심했지만 이 한 마디는 둘의 미래를 결정지어 버렸다. 데이브, 애니, 피트는 투어리스트(The Tourist)란 그룹을 만들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고 이들은 영국 차트에도 몇 곡을 올리며 괜찮은 성적을 올린다. 하지만 로얄티 문제로 소속사와 송사를 벌이기도 했던 이 팀은 방콕 공연 중에 해산을 하고 만다. 밴드의 해산은 연인관계였던 두 사람도 서먹서먹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둘은 새 팀을 만들기로 의기투합했고 1981년 < In The Garden >을 내놓는다. 그리고 1983년 발매된 < Sweet Dreams >로 드디어 정상을 정복한다. 8트랙으로 녹음한 이 앨범에서 ''Sweet dreams''는 영국뿐 아니라 미국의 차트에서도 정상을 밟았고 뮤직비디오는 화제를 모았다. 언론은 애니 레녹스의 양성적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보도했으며, 애니의 알토 소프라노와 어우러진 데이브의 무거운 펑크, 정교한 사운드는 비평적 찬사를 얻어냈다. 1983년 < Touch >에서 ''Here comes the rain again''을 히트시킨 이들은 1984년에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소설 < 1984 >를 마이클 레드포드(Michael Radford) 감독이 동명의 타이틀로 영화화한 작품에서 음악을 맡아 ''Sex crime''으로 인기를 얻는다. 1985년에는 미국 차트 4위까지 오른 ''Would lie to you?''를 비롯해 여러 곡의 히트곡을 쏟아 낸 < Be Yourself Tonight >으로 막대한 성공을 거둔다. 앨범의 제목으로 알 수 있듯이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한 이 앨범에서는 일종의 페미니즘을 역설한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과의 듀엣곡 ''Sisters are doin'' it for themselves''가 영국 차트 9위까지 올랐고,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하모니카를 들을 수 있는 ''There must be an Angel'',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와 함께 한 ''Adrian''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전에 없던 블루지(bluesy)한 창법으로 전자적이고 차거운 느낌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애니의 소프라노적 발성이 돋보이는 ''There must be an Angel''은 영국 차트를 13주간 지배했다. 이 앨범 이후로 유리스믹스는 비평적으로나 대중적으로 큰사랑을 얻지는 못한다. 해체하기 전까지 미국 차트와 영국 차트에 꾸준히 히트곡을 올리며 팬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긴 했지만, 저물어 가는 뉴웨이브의 시대와 더불어 이들의 존재도 데이브 자신의 표현대로 자신의 감수성과 맞지 않는 ''90년대 음악 속으로 잊혀져갔다. 각자의 가정에 충실하며 애니는 솔로 앨범 < Diva >, < Medusa > 등으로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했지만 데이브는 나탈리 임브루글리아(Natalie Imbruglia)의 성공에서 보여주듯이 프로듀서로서의 역량은 여전했지만, 그가 조직한 데이브와 고상한 카우보이들(Dave Stewart & the Spiritual Cowboys)의 앨범들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데이브와 애니는 자신들이 유리스믹스란 이름으로 속해 있던 음반사(RCA) 사장의 은퇴 기념 회장에서 옛날을 떠올리며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감회에 젖은 이들은 1989년 당시 해체의 소문을 일축하기 위해 만들었던 < We Are Too One > 앨범 이후 10년만에 재결성식을 가졌다. 1999년에 나온 < Peace > 앨범은 힙합이 지배하는 세상을 따라가지 않고 자신들이 주조할 수 있는 음악으로 돌아온 음반이다. 여기에 대해 팬들이나 본인들은 여러 가지 의견을 가지고 있고, 애니의 경우는 힙합에 대한 긍정적인 흡수를 얘기하고 있지만, 욾직까지 이들이 음악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 장르는 과거에 비해 많이 따뜻해진 뉴웨이브 라는 것이 모두가 내린 공통적인 결론이다.
사실 조지 마이클의 솔로 활동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으나 한창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듀오 왬!(Wham!)을 갑작스럽게 해체하고 솔로로 나선 점은 팬들을 무척 당혹케 했다. 준비는 1984년에 이미 시작되어 왬의 최고 히트곡 ‘Careless whisper’의 경우 조지의 이름으로 싱글 발매되어 그때부터 홀로서기에 대한 예측이 분분했다. 1986년 싱글 ‘A different corner’가 미국차트 7... 사실 조지 마이클의 솔로 활동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으나 한창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듀오 왬!(Wham!)을 갑작스럽게 해체하고 솔로로 나선 점은 팬들을 무척 당혹케 했다. 준비는 1984년에 이미 시작되어 왬의 최고 히트곡 ‘Careless whisper’의 경우 조지의 이름으로 싱글 발매되어 그때부터 홀로서기에 대한 예측이 분분했다. 1986년 싱글 ‘A different corner’가 미국차트 7위, 영국차트 1위에 오르면서 솔로를 개시한 그는 이듬해인 1987년 소울의 여왕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과 듀엣곡 ‘I knew you were waiting(for me)‘을 취입하여 미국과 영국 차트 정상을 차지, 생애 최초로 그래미 트로피까지 받았다. 이후는 성공의 고공비행. 같은 해 여름 영화 < 비버리 힐스 캅 2 >에 삽입된 문제의 화제작 ‘I want your sex’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다. 영국에선 방송금지가 되었음에도 3위까지 올랐고 상대적으로 관대했던 미국에서도 2위에 오르는 호성적을 거두게 된다. 성에 대한 자유분방한 표현이 오히려 그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켜 놓았다. 마침내 11월 대망의 솔로 프로젝트 < Faith >가 발매되었다. 발매 즉시 전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며 손쉽게 앨범차트 정상을 차지, 12주간을 점령했고 미국에서만 현재까지 1000만장 이상을 팔아치우며 전세계적으로 2000만장에 육박하는 대박을 터뜨렸다. 싱글 히트곡들도 줄줄이 쏟아져 나와 ‘Faith(4주)’, ‘Father figure(2주)’, ‘One more try(3주)‘, ’Monkey(2주)‘등 무려 4곡이 차트 정상을 차례로 밟았다.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은 재즈 풍의 ‘Kissing a fool(4위)’와 미리 발표된 ‘I want your sex’까지 수록곡 중에서 총 6곡이 차트를 숨가쁘게 유린했던 88년이었다. 록, 리듬 앤 블루스, 소울, 재즈, 펑키, 댄스, 가스펠 등의 모든 음악 장르를 한 장의 앨범을 통해 접할 수 있게 만든 사실만으로도 그래미가 선정한 올해의 앨범상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데뷔앨범이 좋은 평판을 얻게 된 것은 가수로서 자질보다도 송라이터로서 조지 마이클의 자질에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된 측면이 작용했다. 그가 ‘Careless whisper’를 만들어낸 때는 10대였다. < Faith >는 이와 같은 조지 마이클의 놀라운 창작재능이 최고조에 달한 결정체인 셈이었다. 또한 이 앨범으로 흑인들의 전유물로만 여겼던 R&B 앨범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하며 1980년대 초반 블랙 빅 3(마이클 잭슨, 라이오넬 리치, 프린스)가 백인들을 흑인음악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였던 것과 달리 백인이 그 작업을 주도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아메리칸 음악상(AMA)에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조지 마이클을 팝/록 부문과 소울/R&B 부문에서 각각 최고의 남자가수로 선정했고 R&B 최우수 앨범상도 그의 몫으로 할당했다. 1990년에 출시된 두번째 프로젝트 < Listen Without Prejudice, Vol 1 >은 전작보다 한층 깊어진 동시에 여유로운 느낌을 주었지만 앨범은 미국 판매고 200만장을 포함하여 800만장 정도(?)가 팔리는데 그쳐 전작의 태풍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싱글도 ‘Praying for time(1위)’, ‘Freedom 90(7위)’, ‘Waiting for that day(21위)‘, ’Mothers Pride(50위)’등이 히트했으나 전작에 비해 훨씬 줄어든 자신의 입지를 실감해야 했다. 조지는 수록곡들의 높은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앨범 홍보에 상당히 미온적이었던 소니 레코드사의 태도로 인해 앨범이 단명했다는 의혹을 갖기에 이른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아티스트의 음악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소니사에 실망한 조지는 1992년 이래로 거대 레코드사를 상대로 외롭고 기나긴 법정투쟁을 시작(92.10)하게 된다. 가장 그에게 힘들었던 이 시기에 금전적, 정신적인 피해는 막대했다. 하지만 4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음악적 호흡을 쌓는데 집중투자한다. 그는 간간이 자선단체를 위한 행사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1991년 11월 영국 웸블리 콘서트에서 자신의 우상이자 친구인 엘튼 존(Elton John)의 1974년 미국차트 2위 곡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를 듀엣으로 함께 불렀다. 이 실황 싱글은 4년 만에 영국차트 정상에 데뷔하였고 미국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1992년 4월에는 에이즈 치료를 위한 자선 앨범 < Red Hot + Dance >에 수록된 신곡 ’Too funky(10위)’로 한 해 유럽에서 가장 많은 방송회수를 기록하게 된다. 이듬해에는 이미 고인이 된 프레디 머큐리(Freddy Mercury) 추모 콘서트 실황(92년)과 자신의 91년 라이브 투어 중에서 5곡의 라이브를 엄선하여 수록한 EP 음반 < Five Live EP >를 발매, 영국차트 3주간 정상을 밟았다. 퀸(Queen)의 나머지 멤버들과 함께 한 ’Somebody to love(32위)’와 영화 < 바그다드의 까페 >의 삽입곡인 제베타 스틸(Jevetta Steele)의 오리지날 ’Calling you’로 멋진 가창력을 다시 한번 뽐냈고 앨범에는 게이(Gay)들의 찬가 ’Killer/Papa was a rolling stone(77위)’와 리사 스탠스필드(Lisa Stansfield)와 함께 노래한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도 수록되어있다. 1994년 소송에서 패소한 후 조지는 이에 불복, 항소했고 항소심이 진행중인 1995년 드림웍스(DreamWorks)사가 나서서 분쟁을 해결해 소니에 막대한 금전적 배상을 치르면서 조지와 새로운 계약이 체결되었다. 영국에선 메이저 레이블 버진(Virgin)과 계약이 이뤄지면서 어렵사리 그의 음악생활이 지속될 수 있었다. 무려 6년의 앨범 공백기를 깬 1996년에 세번째 앨범 < Older >가 세상에 나온다. < Faith >앨범을 그의 미국 최고의 걸작이라고 한다면 < Older >는 영국에서 최고의 걸작이 되었는데 그동안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꼈던 영국에서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한 음반으로 영국에서만 (5X)플래티넘을 기록하며 버진 레코드 역사상 가장 빨리 팔린 앨범으로 기록되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6곡의 싱글이 차트 3위안에 드는 영국에서 최초의 기록을 남기는 기염을 토했다. 미국에선 플래티넘을 따내며 ’Jesus to a child’(7위)’와 ‘Fastlove(8위)’ 두 곡을 Top 10에 진입시켰다. 같은 해 10월에 영국 런던에서 소수의 팬들만을 모아놓고 MTV 언플러그드 공연을 실시하여 큰 호응을 얻었으며 여기서는 보니 레이트(Bonnie Raitt)의 명곡을 리메이크한 ’I cant make you love me’가 주목을 받았다. 98년 소니와의 마지막 동거작인 베스트 앨범 < Ladies & Gentlemen >을 발매하여 미국에서만 200만장 이상을 팔아치웠고 영국에선 앞서 발표한 솔로앨범들과 마찬가지로 차트 1위에 올라서 무려 8주간을 머무르는 가속페달을 밟았다. 항상 베스트 앨범이 발매될 때면 주목을 받는 것이 이전에 미발표된 신곡들인데, 조지의 앨범 역시 3곡의 신곡이 수록되어 있었고, 비버리 힐즈 공원에서 자신의 음란행위를 빗대어 묘사한 뮤직비디오로 화제를 뿌린 ‘Outside(영국 2위)’와 메리 제이 블라이즈(Mary J. Blige) 와 함께 한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오리지날 ‘As(영국 4위)’등이 주목의 대상이었다. 이듬해 세기말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조지는 재즈 보컬리스트로 돌아왔다. 통산 4번째 솔로앨범 < Songs From The Last Century >를 커버 곡들로만 채워 격조를 높였다. 재즈의 고전들을 비롯하여 우리에게도 친숙한 로버타 플랙(Roberta Flack)의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 폴리스(Police)의 ’Roxanne‘, U2의 멤버들이 제작한 ‘Miss Sarajevo’에 이르기까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매력을 선사한 앨범이었다. 2000년에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과 취입한 듀엣곡 ‘If I told you that’이 영국을 비롯한 유럽지역의 최고의 히트곡으로 부상했고 이후 주요 콘서트에서 간간히 모습을 드러냈던 그가 올해 새 앨범 발매에 앞서 파격적인 싱글을 선보였다. 과거 ‘I want your sex‘에 버금갈만한 자극적인 곡 ’Freeek!(영국 7위)‘는 조셉 칸(Joseph Kahn)이 감독한 150만 달러짜리 뮤직 비디오가 전해주는 메시지 만으로 상당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곡이었다. 곧 새 앨범이 발매된다고 하니 그가 걸어온 변화무쌍함 때문에도 한층 기대가 된다. 생기 발랄한 버블 사운드로 청소년들의 절대적인 우상으로 군림했던 20대 초반의 왬! 시절부터 자신의 음악적 욕심을 남김없이 드러낸 솔로 데뷔시절, 성숙함이 짙게 묻어나는 30대 중반의 < Older >시절과 재즈로 수양을 한 30대 후반까지 가수로서뿐 아니라 작곡가로서 소신을 굽히지 않고 매번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며 질주해온 음악인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불혹의 나이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보여줄 시도가 어떤 것일지 관심을 모으고있는 것이다.
호주의 듀오 새비지 가든(Savage Garden)의 성공담이 반복되고 있다. 에어 서플라이 이후 최고의 호주출신 팝 스타로 평가받는 이들은 새해 들어 또 다시 신곡 ''I Knew I Loved You''로 팝 천하를 평정했다. 전형적인 발라드인 이 곡은 지난해 발표됐을 때 산타나 ''Smooth''의 장기집권을 저지할 유력한 후보 곡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10대 소녀 선풍의 주역인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 호주의 듀오 새비지 가든(Savage Garden)의 성공담이 반복되고 있다. 에어 서플라이 이후 최고의 호주출신 팝 스타로 평가받는 이들은 새해 들어 또 다시 신곡 ''I Knew I Loved You''로 팝 천하를 평정했다. 전형적인 발라드인 이 곡은 지난해 발표됐을 때 산타나 ''Smooth''의 장기집권을 저지할 유력한 후보 곡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10대 소녀 선풍의 주역인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What A Girl Wants''에 밀려 정상 문턱에 주저앉는가 싶더니 기어코 금주 빌보드 1위에 올랐다. 작곡하고 노래하는 대런 헤이즈와 악기편곡 담당 다니엘 존스로 이뤄진 새비지 가든은 1998년 ''Truly, Madly, Deeply''로 이미 차트 정상을 정복한 바 있다. 이 곡이 수록된 데뷔 앨범은 전세계적으로 1100만장이라는 가공할 판매고를 수립했다. 하지만 불확실한 팝 음악계의 생리상 아무도 두 번의 성공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 반짝 그룹으로 전락한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그들은 이번에 빅히트를 재현하면서 사슬과도 같은 ''2집 앨범 징크스''를 떨쳐낸 동시에 히트 메이커로서 롱런할 가능성을 열었다. 두 번째 앨범 ''Affirmation'' 역시 전작처럼 단번에 귀를 잠식하는 전염성 높은 멜로디 감각과 고급스런 편곡이 돋보인다. 머라이어 캐리를 슈퍼스타로 비상시킨 프로듀서 월터 아파나시예프의 도움도 컸다. 음반은 빌보드지로부터 "여기에 히트가 안될 곡은 하나도 없다"는 평을 받았다. 빠른 템포의 곡도 좋지만 ''I Knew I Loved You''와 함께 ''Hold Me'' ''Two Beds And A Coffee Machine'' 등 특허인 발라드들이 더 인상적이다. 그들이 에어 서플라이를 능가할 호주 팝 스타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 같다.
연주 : Mike Oldfield (마이크 올드필드)
언제나 충격은 갑작스럽게,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기 마련이다. 혼자 모든 악기를 다루고 2500번 이상의 오버 더빙을 한 앨범 < Tubular Bells >는 이제껏 우리가 들어왔던 모든 음악의 선입견을 깨버렸다. 세상의 악기는 기타와 피아노만 있는 것이 아니었고 장르는 록과 컨트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이크 올드필드는 이 한 장의 명반 속에서 이제껏 전통의 이름으로 군림해 오던 모든 것을 ... 언제나 충격은 갑작스럽게,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기 마련이다. 혼자 모든 악기를 다루고 2500번 이상의 오버 더빙을 한 앨범 < Tubular Bells >는 이제껏 우리가 들어왔던 모든 음악의 선입견을 깨버렸다. 세상의 악기는 기타와 피아노만 있는 것이 아니었고 장르는 록과 컨트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이크 올드필드는 이 한 장의 명반 속에서 이제껏 전통의 이름으로 군림해 오던 모든 것을 와해시켰고 동시에 완성해냈다. 그러나 더욱 더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이 멀티 인스트루멘탈리스트(Multi-instrumentalist)의 나이였다. 그는 고작 스무 살에 비틀즈(Beatles)가 몇 년 동안의 화합 끝에 일구어 놓은 아트록(Art rock)의 경지에 올라서 버린 것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그랬듯 이 앨범은 신생 레이블인 리처드 브랜슨(Richard Branson)의 버진(Virgin)을 일약 굴지의 회사 중 하나로 만들었으며 전세계적으로 20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그리고 아직도 해마다 100만장씩 나가고 있다. 물론 < Tubular Bells >의 성공 신화에는 영화 < Exorcist >의 홍보 효과가 뒤에 버티고 있다. 하지만 이 필생의 역작은 이후 마이크의 강박관념이 되었으며 그가 넘어서야 할 하나의 산이 되어버렸다. 어떤 작품을 완성해도 데뷔 앨범의 명망에는 이르지 못했고 그로 인해 온갖 실험과 갖가지 시험이 계속 되었다. 그러나 결코 이 앨범이 끼친 영향을 뛰어 넘을 수 없었다. 그는 어느 순간 체념하게 되었고 그 자체를 즐길 수 밖에는 없었다. 그리하여 오히려 그는 마이크 올드필드=Tubular Bells라는 등식을 공식화시키는 매니지먼트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1992년에는 원곡의 포맷을 새롭게 편곡해 덧입힌 버전을 만들어 < Tubular Bells 2 >를 발매했고 1998년에는 아예 신곡 위주의 < Tubular Bells 3 >를 만들어 모두 앨범 차트 1위에 올렸다. 데뷔 앨범의 엄청난 성공 때문에 나머지 인생이 이 음반의 극복과정이 되어 버린 마이크 올드필드의 음악 역정은 범상치 않다. 그는 7살 때부터 기타를 쳤으며 11살 때에 이미 클럽에서 연주를 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 누나 샐리 올드필드(Sally Oldfield)와 같이 팀을 이뤄 샐리앤지(Sallyangie)로 활동하며 < Children Of The Sun >이란 앨범을 발표했고 후에는 친구들과 ''맨발''(Barefoot)이란 팀을 만들어 활동했다. 1970년에는 그룹 소프트머신(Soft Machine)에서 활동하던 케빈 에이어스(Kevin Ayers)가 만든 그룹 더 홀 월드(The Whole World)에 기타리스트로 참여해 < Shooting At The Moon >과 < Whatevershebringswesing > 음반에 참여했으며 팀에서 나온 후에는 세션맨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솔로 음반 제작에 들어갔다. 이때가 18살이었다. 그의 음악은 패턴으로 봐서 3기로 나눌 수 있다(물론 이 분류에는 아직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방대한 스케일과 한 곡을 20분씩 가져가는 교향악 구성, 변화무쌍한 표현 등이 주가 되는 1기는 < Tubular Bells >부터 < Incantations >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기간에는 < Tubular Bells >와 비슷한 방법으로 음을 만들고 녹음했다. 좀 더 자신의 철학에 구체적인 방향을 잡은 < Hergest Ridge >, 전원적인 신비함을 명상과 초월적인 관념 속에서 이루어낸 < Ommadawn >, 신비적인 경향을 최면의 발전 단계로 풀어낸 < Incantations >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그는 항상 < Tubular Bells >의 접근법과 다른 것을 고안해 냈다. < Platinum >부터 < Earth Moving >에 이르는 2기는 대작 위주의 패턴을 소품 지향적으로 바꾼 단계이다. 3분에서 20분 사이의 다양한 곡들이 형식미를 갖추고 있는 이 시기는 가장 팝적인 사운드가 많은 기간이기도 하고 보컬에 비중을 두고 싱글에 주안점을 둔 시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메기 레일리(Maggie Reilly)의 ''Moonlight shadow'', 황소 시리즈(Taurus)가 있는 시점도 여기고, 비평적으로 최악의 평가를 받았던 보컬 위주의 음반인 < Earth Moving >을 발표했던 것도 이 시기이다. 그는 < Amarok >과 < Tubular Bells 2 >를 발표하며 다시 방대한 컨셉의 시대로 돌아온다. 하지만 LP의 시대에는 한 곡이 앞뒷면으로 채우고 있었다면, CD의 경우에는 짧은 여러 곡들이 전체의 큰 트랙을 만들어 가고 있다. 3기라 부를 수 있는 이 시기에는 켈틱 사운드를 현대화시킨 < The Voyager >, 그의 주요한 테마가 되어버린 Tubular bell 시리즈의 20세기적 마감 < Millenium Bell >, 아서 클락(Arthur A. Clark)의 원작을 음원화한 < The Song Of Distance Earth >, 등이 앞선 시기들의 음악 패턴과 혼용되어 표현되고 있다.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감독이 마이크 올드필드를 알았다면 < 2001 Space Odyssey >에서 그토록 과거의 음악들로 포장하진 않았을 것이다. 자연 속에 숨겨진 우주적인 실체를 밝히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마이크는 본인의 정규 앨범 작업 외에도 영화 < The Killing Field >의 음악을 맡아 캄보디아 대학살이 빚어낸 음울한 레퀴엠을 표현해 영국 영화 시상식에 노미네이트 되었으며, 인기 있는 TV 시리즈를 스크린으로 옮긴 < The X Files >에서 ''Tubular X''를 선보이며 현실과 초현실의 세계에 맞닿은 근원적 진리를 살피는 혜안을 보여주기도 했다. 마이크의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공연을 본 팬들은 그만이 할 수 있는, 독창적인 역량이 펼쳐내는 세계를 의심하지 않지만, 평자들은 그에게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은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듯하다. 그러나 그는 이제 겨우 반을 지나왔을 뿐이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인간의 본성이 우주로 통하는 창구를 밝혀내며 우리를 경이의 차원으로 인도할 것이다.
연주 : Al Di Meola (알 디 메올라)
퓨전 재즈 기타 연주자 퓨전 재즈 기타 연주자
오케스트라 : Royal Philharmonic Orchestra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전설적인 지휘자인 토마스 비첨에 의해 1946년 설립된 런던이 자랑하는 5대 오케스트라의 하나로 세계 일류급 관현악단으로 평가받고 있다. 거장 지휘자들과 뛰어난 연주자들의 참여로 수많은 명연들을 탄생시켰으며, 파격적인 레퍼토리와 다양한 활동으로 대중적인 인기도 또한 높다. 오늘날 클래식 음악문화에 있어서 그 이름만으로도 명품 클래식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고 있다. 전설적인 지휘자인 토마스 비첨에 의해 1946년 설립된 런던이 자랑하는 5대 오케스트라의 하나로 세계 일류급 관현악단으로 평가받고 있다. 거장 지휘자들과 뛰어난 연주자들의 참여로 수많은 명연들을 탄생시켰으며, 파격적인 레퍼토리와 다양한 활동으로 대중적인 인기도 또한 높다. 오늘날 클래식 음악문화에 있어서 그 이름만으로도 명품 클래식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고 있다.

줄거리

파바로티와 친구들 콜렉션 1992-2000
Luciano Pavarotti with

Pavarotti & Friends 1992
- Aaron Neville
- Bob Geldof
- Brian May
- Lucio Dalla
- Michael Kamen
- Mike Oldfield
- Neville Brothers
- Patricia Kaas
- Sting
- Suzanne Vega
- Zucchero

Pavarotti & Friends 2 1994
- Andrea Bocelli
- Andreas Vollenweider
- Bryan Adams
- Giorgia
- Michael Kamen
- Nance Gustafson

Pavarotti & Friends for the Children of Bosnia 1995
- Brian Eno, Bono & The Edge
- Dolores O'Riordan
- Gam Gam
- Jovanotti
- Marco Armiliato
- Meat Loaf
- Michael Bloton
- Michael Kamen
- Nenad Bach
- Simon Le Bon
- The Chieftains
- Zuchero

Pavarotti & Friends for War Child 1996
- Al Di Meola
- Edoardo Bennato
- Elton John
- Eric Clapton
- Joan Osborne
- John McLaughlin
- Jon Secada
- Ligabue
- Litfiba
- Liza Minnelli
- Paco de Lucia
- Sheryl Crow
- The Kelly Family
- Zucchero

Pavarotti & Friends for the Children of Liberia 1998
- Celine Dion
- Eros Ramazzotti
- Florent Pagny
- Jon Bon Jovi
- Pino Daniele
- Natalie Cole
- Spice Girls
- Stevie Wonder
- The Corrs
- Trisha Yearwood
- Vanessa Williams
- Zucchero

Pavarotti & Friends fot Guatemala & Kosovo 1999
- Alex Britti
- B.B. King
- Boyzone
- Gianni Morandi
- Gloria Estefan
- Joe Cocker
- Mariah Carey
- Laura Pausini
- Lionel Richie
- Renato Zero
- Ricky Martin
- Zucchero

Pavarotti & Friends fot Cambodia & Tibet 2000
- Aqua
- Biagio Antonacci
- Caetano Veloso
- Enrique Iglesias
- Eurythmics
- George Michael
- Irene Grandi
- Monica Naranjo
- Savage Garden
- Skunk Anansie
- Tracy Chapman
- Zucchero

Bonus Concert My Heart's Delight 1993
Luciano Pavarotti with
- Nuccia Focile
- Maurizio Benini
- Royal Philharmonic Orchestra

회원리뷰 (4건)

매주 10건의 우수리뷰를 선정하여 YES상품권 3만원을 드립니다.
3,000원 이상 구매 후 리뷰 작성 시 일반회원 300원, 마니아회원 600원의 YES포인트를 드립니다.
(CD/LP, DVD/Blu-ray, 패션 및 판매금지 상품, 예스24 앱스토어 상품 제외)
리뷰쓰기

4명의 YES24 회원이 평가한 평균별점

리뷰 총점8.8/ 10.0
작품 작품 점수 디자인/구성 디자인/구성 점수 정보 더 보기/감추기 작품
75% (3건)
5점
0% (0건)
4점
25% (1건)
3점
0% (0건)
2점
0% (0건)
1점
디자인/구성
50% (2건)
5점
25% (1건)
4점
25% (1건)
3점
0% (0건)
2점
0% (0건)
1점

한줄평 (0건)

1,000원 이상 구매 후 한줄평 작성 시 일반회원 50원, 마니아회원 100원의 YES포인트를 드립니다.
(CD/LP, DVD/Blu-ray, 패션 및 판매금지 상품, 예스24 앱스토어 상품 제외)
0/50

등록된 한줄평이 없습니다.

첫번째 한줄평을 남겨주세요.

배송/반품/교환 안내

배송 안내

배송 안내
배송 구분 YES24 배송
포장 안내

안전하고 정확한 포장을 위해 CCTV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 포장안내1
  • 포장안내2
  • 포장안내3
  • 포장안내4
포스터 안내
  •  구매하신 상품에 포스터 사은품이 있는 경우, 포스터는 상품 수량과 동일한 수량이 제공됩니다.
  •  포스터는 기본적으로 지관통에 포장되며, 2장 이상의 포스터도 1개의 지관통에 담겨 발송됩니다.
  •  포스터 수량이 많은 경우, 상황에 따라 지관통 추가 및 별도 박스에 포장되어 발송될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반품/교환 방법
  •  마이페이지 > 반품/교환 신청 및 조회, 1:1 문의, 고객만족센터(1544-3800), 중고샵(1566-4295)
  •  판매자 배송 상품은 판매자와 반품/교환이 협의된 상품에 한해 가능합니다.
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전자책 단말기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 예) CD/LP, DVD/Blu-ray,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문 제작되는 상품의 경우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예스이십사(주)
서울시 영등포구 은행로 11, 5층~6층(여의도동,일신빌딩) 대표 : 김석환   개인정보보호책임자 : 권민석 yes24help@yes24.com 사업자등록번호 : 229-81-37000   통신판매업신고 : 제 2005-02682호 사업자 정보확인 호스팅 서비스사업자 : 예스이십사(주)
고객만족센터 T.1544-3800
상담 전화번호
  • 중고샵 문의 1566-4295
  • 영화예매 문의 1544-7758
  • 공연예매 문의 1544-6399
1:1 문의하기 자주 묻는 질문 상담시간 안내
YES24 수상내역 정보보호 관리체계 ISMS인증획득 개인정보보호 우수사이트
소비자피해보상보험 서울보증보험
고객님은 안전거래를 위해 현금 등으로 결제 시 저희 쇼핑몰에서 가입한 구매안전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서비스가입사실 확인
EQUUS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