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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timate Soul : The Greatest Soul & Funk Music (얼티메잇 소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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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Ultimate Soul : The Greatest Soul & Funk Music (얼티메잇 소울)

모두가 사랑하는 소울 음악 총정리!

[ 4CD / 오리지널 음원 / 절판된 앨범 속 희귀곡 다수 수록 ]
Nina Simone, The O′Jays, The 5 Stairsteps, Gladys Knight & The Pips, Erma Franklin 노래 외 53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SonyMusic | 2017년 03월 17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144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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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timate Soul : The Greatest Soul & Funk Music (얼티메잇 소울)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7년 03월 17일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CD1
  • 01 Ain't Got No - I Got Life - Nina Simone
  • 02 Love Train - The O'jays
  • 03 O-O-H Child - Remastered - The Five Stairsteps
  • 04 Midnight Train To Georgia - Gladys Knight & The Pips
  • 05 Piece Of My Heart - Erma Franklin
  • 06 Me And Mrs. Jones - Billy Paul
  • 07 If You Don't Know Me By Now - Harold Melvin And The Blue Notes
  • 08 Lean On Me - Bill Withers
  • 09 If You're Lookin' For A Way Out - Odyssey
  • 10 Didn't I (Blow Your Mind This Time) - The Delfonics
  • 11 Cry Like A Baby - Aretha Franklin
  • 12 Cowboys To Girls - The Intruders
  • 13 Back Up Train - Al Green
  • 14 California Soul - The Fifth Dimension
  • 15 Show You The Way To Go - The Jacksons
  • 16 T.S.O.P. (The Sound Of Philadelphia) - Mfsb Feat. The Three Degrees
  • 17 Everyday People - Sly & The Family Stone
  • 18 Strawberry Letter 23 - Shuggie Otis
  • 19 You're More Than A Number In My Little Red Book - The Drifters
  • 20 Love Really Hurts Without You - Billy Ocean
CD2
  • 01 It's Your Thing - The Isley Brothers
  • 02 Dance To The Music - Sly & The Family Stone
  • 03 Ain't That A Lot Of Love - Taj Mahal
  • 04 Grazing In The Grass - Friends Of Distinction
  • 05 Soul Time - Shirley Ellis
  • 06 I Need Your Love So Desperately - Peaches & Herb
  • 07 Moonlight Music And You - Laura Greene
  • 08 Get Down With It - Little Richard
  • 09 We Got Latin Soul - Mongo Santamaria
  • 10 The Snake - Al Wilson
  • 11 Soul Drums - Bernard "Pretty" Purdie
  • 12 Everybody Plays The Fool - Main Ingredient, The
  • 13 Ride Your Pony - Lee Dorsey
  • 14 I Can See Clearly Now - Johnny Nash
  • 15 Um, Um, Um, Um, Um, Um - Major Lance
  • 16 The Dark End Of The Street - James Carr
  • 17 Walk On By - Aretha Franklin
  • 18 I'm Your Puppet - James & Bobby Purify
  • 19 Grandma's Hands - Bill Withers
  • 20 Oh Happy Day - The Edwin Hawkins Singers
CD3
  • 01 Best Of My Love - The Emotions
  • 02 Enjoy Yourself - The Jacksons
  • 03 I Love To Love - Tina Charles
  • 04 When Will I See You Again - The Three Degrees
  • 05 Fantasy - Earth, Wind & Fire
  • 06 You'll Never Find Another Love Like Mine - Lou Rawls
  • 07 Native New Yorker - Odyssey
  • 08 Sunshower - Dr. Buzzard' Original Savannah Band
  • 09 Harvest For The World - Isley Brothers, The
  • 10 Till You Take My Love - Harvey Mason
  • 11 This Is It - Melba Moore
  • 12 I Thought It Was You - Herbie Hancock
  • 13 Give Me Your Love - Barbara Mason
  • 14 Free - Deniece Williams
  • 15 Always And Forever - Heatwave
  • 16 Kiss And Say Goodbye - The Manhattans
  • 17 Wake Up Everybody - Harold Melvin And The Blue Notes
  • 18 Please Don't Stop (That Song From Playing) - Johnnie Taylor
  • 19 Ms. Grace - The Tymes
  • 20 Lady Marmalade - Labelle
CD4
  • 01 Never Too Much - Luther Vandross
  • 02 Love Come Down - Evelyn "Champagne" King
  • 03 Ain't No Stoppin' Us Now - Mcfadden & Whitehead
  • 04 How Could You Break My Heart - Bobby Womack
  • 05 All The Love In The World - Dionne Warwick
  • 06 How 'Bout Us - Champaign
  • 07 Baltimore - Nina Simone
  • 08 Fire - Pointer Sisters, The
  • 09 You Gonna Make Me Love Somebody Else - Jones Girls, The
  • 10 All My Lovin' - Cheryl Lynn
  • 11 In The Mood - Tyrone Davis
  • 12 Risin' To The Top - Keni Burke
  • 13 Sweet Baby - Stanley Clarke, George Duke
  • 14 Love T.K.O. - Teddy Pendergrass
  • 15 Love, Need And Want You - Patti Labelle
  • 16 Shake You Down - Gregory Abbott
  • 17 Juicy Fruit - Mtume
  • 18 Sexual Healing - Marvin Gaye

아티스트 소개 (58명)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엘라 핏제랄드(Ella Fitzgerald), 줄리 런던(Julie London), 사라 본(Sarah Vaughan), 디나 워싱턴(Dinah Washington)과 함께 최고의 여성재즈가수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디바 니나 시몬(Nina Simone). 음지에 잔뜩 웅크린 자세로 바깥세상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마법의 주...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엘라 핏제랄드(Ella Fitzgerald), 줄리 런던(Julie London), 사라 본(Sarah Vaughan), 디나 워싱턴(Dinah Washington)과 함께 최고의 여성재즈가수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디바 니나 시몬(Nina Simone). 음지에 잔뜩 웅크린 자세로 바깥세상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마법의 주문과도 같다. 통한과 슬픔, 분노와 격정 그리고 발산하고 싶어도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없어 떠도는 영혼들에게 그녀는 구원의 손짓을 보낸다. 어둡고 습한 곳에 자신을 숨기고 있지만 말고 잘못된 세상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라고. 화를 내고, 하고 싶은 소리를 외치라고. 이제 너의 주장을 펴고 권리를 찾을 때라고. 속삭이듯 한탄하듯 때론 비단처럼 윤기 나게 때론 벨벳처럼 부드럽게 노래에 실어 전언한다. 본명은 유니스 웨이몬(Eunice Waymon), 가수 니나 시몬(Nina Siomone)으로 대중음악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 트라이온에서 가난한 집안의 여섯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4살 때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피아노신동으로 불린 그는 ‘유니스 웨이몬 기금’(Eunice Waymon Fund)을 설립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음악선생님의 도움으로 음악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었고 뉴욕 소재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가정을 지탱하기위해, 그는 피아노반주자로 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1954년 여름 그는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에 있는 아일랜드 바의 연주자로 직업을 잡았는데, 바 주인은 그에게 노래도 잘하길 요구했다.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끊임없는 연습을 해왔던 유니스 웨이몬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차릴 새도 없이 연예사업으로 들어섰다. 그는 이름을 니나(리틀 원)시몬으로 바꿨다.(1950년대 할리우드의 쟁쟁한 여배우들과 어깨를 겨룬 프랑스의 여배우 시몬 시뇨레(Simone Signoret)의 이름을 차용) 1950년대 후반, 니나 시몬은 베들레헴 레이블에서 최초의 트랙들을 녹음했다. 이 곡들에서 피아니스트, 가수, 편곡과 작곡가로서 그의 비범한 재능은 한층 더 빛을 발했다. ‘Plain gold ring’, ’Don’t smoke in bed’, ’Little girl blue’와 같은 노래들은 곧 그의 상연목록에서 스탠더드가 되었다. 오페라 (Porgy and Bess)의 곡 중 하나인 ‘I love you, Porgy’가 타운 홀, 카네기 홀 그리고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 불리고 히트를 기록하면서 나이트클럽 가수였던 그는 스타로 발돋움했다. 재즈스탠더드, 가스펠, 흑인영가, 클래식음악, 유래가 다양한 포크음악, 블루스, 팝, 뮤지컬과 오페라 송, 아프리카의 영창 게다가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까지, 이미 음악활동의 시작부터 창대했던 그는 준비된 스타였다. 기회는 당연한 만찬이었다. 클래식의 대위법, 재즈의 즉흥연주, 블루스의 변조 등 다방면의 음악요소를 결합해내는 시몬의 재능은 더 이상 무시될 수 없는 발군의 실력이었다. 독자적인 타이밍, 고요함의 음악적 극대화, 몇몇 코드로만 곡을 진행시키는 피아노연주 등의 방식으로 절제미가 돋보이는 자신만의 공연분위기를 주조해내는 실력은 가히 범접을 불허할 정도로 특징적이었으며 그의 여러 작품들에 녹아들었다. 때로 그의 목소리는 어둡고 가공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것에서부터 부드럽고 달콤한 것까지 변화무쌍한 스펙트럼을 과시했다. 잠시의 휴지와 반복 속에 그의 목소리는 외치고 속삭이고 또 한탄했다. 가끔은 피아노, 노래 소리, 몸짓이 따로 노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의 결정체로 모아졌다. 다양한 방식으로 그는 청중들에게 주문을 걸었다. 여러 가지 주문 중 하나에만 걸려도 니나 시몬이 비교불허의 아티스트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마력에 청중들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1963년 버밍햄의 교회에서 터진 폭파사건으로 네 명의 흑인아이들이 사망하자, 니나는 미국에서 동족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비통함과 격노를 금치 못했고 곧 규탄의 의미를 담은 ‘Mississippi Goddam’(빌어먹을 미시시피)을 썼다. 이 노래의 강력한 호소력과 필립스 레코드에서 처음 녹음 발표한 < Nina Simone in Concert >에 실린 노래들은 그녀의 또 다른 예술적 지평을 보여주었다. 예술적 목표를 이뤄내기 위해 자신만의 음색과 세심한 피아노연주에 심혈을 기울인 그는 사랑, 증오, 슬픔, 기쁨, 외로움 등 인간의 모든 감정을 노래에 실어 분명하게 전해주었다. 한때 커트 웨일(Kurt Weill)과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d Brecht)가 작곡한 노래 ‘Pirate Jenny’를 부르며 여배우로서 대극장을 순회하기도 했던 그는 프랑스에서 자끄 브렐(Jacques Brel)의 연약한 사랑노래 ’날 떠나지 말아요’(Ne me quitte pas)를 부르기로 했다. 니나는 ‘소울의 여대사제’로 불리며 팬들과 비평가들에 의해 신비로운 인물로 존경받음과 동시에 거의 종교계인사로 종종 오해를 사기도 했다. 1966년 흑인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시선을 네 명의 흑인여성들의 비애로 써낸 ‘네 여인들’(Four women)을 발표했는데, 이 노래는 흑인들에게 모욕적이라는 이유로 필라델피아와 뉴욕 라디오방송에서 금지되었다. 여대사제는 말씀전파에 적당한 음악을 찾기 위해 다른 길을 걸어갔다. RCA레이블로 옮겨 발표한 첫 앨범 < Nina Simone Sings The Blues >에 실린 ‘I want a little sugar in my bowl’, ’Do I move you?’, ’My man’s gone now’ 그리고 랭스톤 휴스(Langston Hughes)가 그녀를 위해 써준 시를 토대로 한 저항가요 ‘Backlash blues’를 포함해 더 많은 공민권운동가요를 불러 자신의 노선을 확증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의 비극을 노래한 ‘Why?(The King of Love is Dead)’을 위시해 ’Brown baby’, ’Images’(워링 쿠니의 시에 근거한), ‘Go limp’, ’Old Jim Crow’, ’To be Young, Gifted and Black’ 등의 노래들은 미국에서 흑인국민적인 찬가가 되었다. 그녀는 홀로 외롭게 노래하고 연주한 앨범 < Nina Simone and Piano ! >(1970)로 열성적인 팬들조차 놀라게 만들었다. 환생, 죽음, 고독 그리고 사랑에 대한 내성적인 노래들로 채운 모음집은 그녀의 녹음경력에 변함없는 하이라이트였다. 노래들에 새롭고 더 깊은 차원의 선물을 담아냈다. ‘Ain’t got no/I got life’(뮤지컬 “헤어”에서),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의 ’Suzanne’, ‘To love somebody’와 같은 비지스의 노래들, 봉고연주로 두 배의 속도감을 붙인 클래식 ’My way’, ‘Just like Thumb’s blues’ 그리고 네 곡의 밥 딜런의 노래들의 주목할 만한 버전들에는 더 새롭고 깊은 차원의 재능을 담아냈다. < Emergency Ward >는 절정의 선물이었다. 그녀는 조지 해리슨이 쓴 두 곡 ’My sweet lord’와 ‘Isn’t it a pity’의 긴 버전을 연주하면서 환각과 도피성을 배제한 분위기로 꾸몄다. 니나는 그러나 어쨌든 자유로워지고자 했다. 그녀는 자신이 조종당해 왔다고 느꼈고, 음반회사, 연예사업, 인종차별주의에 넌더리가 났다. 1974년 미국을 떠나 바바도스(Barbados)로 향한 그녀는 이듬해 리베리아, 스위스, 파리, 네덜란드에서 살다가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남부에 안착했다. 1978년엔 주디 콜린스(Judy Collins)의 ‘My father’를 정확한 해석으로 다시 부른 버전과 최면술을 거는 ’Everything must change’가 실린 새 앨범 < Baltimore >을 오랜만에 내놓았다. 그리고 1982년 미국으로부터 자진 “망명”을 선언한 자신의 마음을 노래로 표시한 앨범 < Fodder On My Wings >을 파리에서 녹음했다. 자신의 음악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여느 때보다도 잘 담긴 앨범이었다. 니나는 곡을 쓰고 개작하고 편곡했다. 피아노 하프시코드를 연주하며 영어와 프랑스어로 노래했다. 이 앨범은 1988년 그녀의 아버지의 죽음을 회상(추억)하는 노래 ‘Alone again naturally’의 특별버전을 포함한 몇몇 보너스트랙이 더해져 CD로 재발매 되었다. 1984년, 런던의 로니 스콧(Ronnie Scott)에서 열린 그녀의 콘서트실황을 담은 필름이 매혹적인 비디오로 발매되었다. 드럼에 폴 로빈슨(Paul Robinson)이 찬조 출연한 이 비디오에는 그녀의 첫 레코드에서 발췌한 노래 ‘My baby just cares for me’가 포함돼 큰 인기를 누렸다. 다음 해 < Nina’s Back >(니나의 귀환)이란 제목의 새 앨범을 발표한 그녀는 전 세계를 누비는 콘서트에 나섰다. 1989년 그녀는 피트 타운젠트(Pete Townsend)의 뮤지컬 < The Iron Man >에 공헌한 것을 시작으로 1990년과 1991년 브라질 팝가수 마리아 베사니아(Maria Bethania)와 아프리카음악의 세계화에 앞장선 유명 여성보컬리스트 마리암 마케바(Mariam Makeba)와 함께 녹음했다. 1991년엔 또한 자서전 < I Put A Spell On You >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프랑스, 독일 그리고 네덜란드어 번역본으로도 출판되었다. 1993년 스튜디오에서 만든 새 앨범 < A Single Woman >이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는 로드 맥퀸(Rod McKuen)의 노래들, 자신의 노래 ‘Marry me’, 프랑스의 스탠더드를 자기버전으로 부른 ’Il n’y a pas d’amour heureux’, 매우 감동적인 ‘Papa, can you hear me?’가 수록되었다. 그녀의 노래는 영화음악으로도 사용되었다. 레퍼토리 중 5곡이 사운드트랙에 들어간 1993년 영화 (Point Of No Return, The Assassin, code name: Nina로도 불린다)를 위시해 (1996)에 사용된 ‘I wish I knew how it would feel to be free’, (1996)에 삽입된 ’My baby just cares for me’ 그리고 (1997)의 ‘Exactly like you’까지 그의 목소리는 영화와 함께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세월은 흘러도 그녀의 음악은 변함없이 새롭고 젊은 청취자들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Ain’t got no/I got life’는 1988년 네덜란드에서 대형히트를 기록했다. 그녀는 또한 자신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는 절친한 반주자들, 퍼커션의 레폴도 플레밍(Lepoldo Fleming), 베이스의 토니 존스(Tony Jones), 드럼의 폴 로빈슨(Paul Robinson), 키보드의 하비에르 콜라도스(Xavier Collados) 그리고 기타리스트 겸 그녀의 음악 감독 알 섀크만(Al Schackman)과 함께 세계 순회공연을 펼치며 청중들과 함께 여전히 흥분의 순간을 맛봤다. 1997년 런던에 바비칸(Barbican) 극장에서 그는 공민권운동, 형제애를 위해 미국의 첫 번째이자 주요한 리더들 중 한사람에게 헌정하는 의미의 노래 ’Every Time I Feel The Spirit’을 불렀다. ‘Reached down and got my soul’, ’The blood done changed my name’, ’When I see the blood’와 같이 더욱 영가(Spiritual)적이고 생명과 같은 노래들이 뒤를 이었다. 니나는 1997년 프랑스에서 열린 니스 재즈 페스티벌(Nice Jazz Festival), 1998년 그리스의 의 데살로니가 재즈 페스티벌(Thessalonica Jazz Festival)의 하이라이트였다. 1999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기네스 블루스 페스티벌에서는 그녀의 딸 리사 첼레스테(Lisa Celeste)와 함께 몇몇 곡을 듀엣으로 합창해 모녀의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시몬은 라틴 수퍼스타 라파엘(Rafael)과 함께 노래하고 두 번의 디즈니 연극 워크숍에 참여, 의 타이틀 역과 의 날라 역을 맡아 공연하면서 세계 투어를 했다. 1998년 7월 24일, 니나 시몬은 넬슨 만델라의 80회 생일파티에 특별손님으로 초대됐다. 1999년 10월 7일 그녀는 더블린에서 개최된 음악시상식에서 평생업적을 기리는 공로상을 품에 안았다. 2000년에 들어 그녀는 5월 26일 애틀랜타 명예 시민권을 수여받았다. 6월 9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아프리카계 미국인 음악 협회로부터 다이아몬드 상을 수상한데 이어 8월 7일에는 프랑스에서 명예로운 총사상을 수상했다. 닥터. 시몬은 2003년 4월 21일 프랑스 남부 까리-르-루에에 그녀의 별장에서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소망대로 유해는 아프리카의 여러 곳에 뿌려졌다. 매사추세츠대학으로부터 음악과 인류애에 대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바로 최후의 전승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역사적 지위를 얻었다. 최고의 여류시인, 우리시대의 음악작가로 그는 영원히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노래 : The 5 Stairsteps (파이브 스테어스텝스)
노래 : Gladys Knight & The Pips (글래디스 나이트 앤 핍스)
노래 : Erma Franklin (에르마 프랭클린)
노래 : Harold Melvin & The Blue notes (해럴드 멜빈 & 더 블루 노트)
소울 펑크 가수 소울 펑크 가수
멤버: 릴리안 로페즈, 스티븐 콜라조, 로미나 존슨, 앤 피터스, 애니스 피터스 멤버: 릴리안 로페즈, 스티븐 콜라조, 로미나 존슨, 앤 피터스, 애니스 피터스
멤버 : 윌리엄 하트(William Hart), 윌버트 하트(Wilbert Hart), 랜디 케인(Randy Cain) 멤버 : 윌리엄 하트(William Hart), 윌버트 하트(Wilbert Hart), 랜디 케인(Randy Cain)
노래 : Aretha Franklin (아레사 프랭클린)
20세기를 정리하는 작업이 러시를 이루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궁금중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가수는 누구였는가? 많은 음악팬들이 먼저 프랭크 시내트라 또는 앨비스 프레슬리를 떠올릴 것이다. 신세대 같으면 머라이어 캐리라고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구 대중음악계는 거의 그 주인공을 흑인 여가수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으로 낙점한 상황이다. 먼저 시사주간지 < 타임 >이 선정한 ‘2... 20세기를 정리하는 작업이 러시를 이루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궁금중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가수는 누구였는가? 많은 음악팬들이 먼저 프랭크 시내트라 또는 앨비스 프레슬리를 떠올릴 것이다. 신세대 같으면 머라이어 캐리라고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구 대중음악계는 거의 그 주인공을 흑인 여가수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으로 낙점한 상황이다. 먼저 시사주간지 < 타임 >이 선정한 ‘20세기 문화예술인 20인’을 보자. 여기에는 대중음악인 넷이 포함되었는데 그들은 프랭크 시내트라, 비틀즈, 밥 딜런 그리고 아레사 프랭클린이었다. # 20세기는 왜 아레사 프랭클린인가? 놀라운 사실은 로큰롤의 황제라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자타가 공인하는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빠졌다는 점이다. 두 대중음악사의 거인은 누가 봐도 아레사 프랭클린에 비해서는 대중적 지명도나 후대의 영향력 측면에서 앞선다. 만약 흑인 음악인 한 사람을 꼽았어야 했어도 그 주인공은 마이클 잭슨이 되어야 당연하다. 그런데 왜 아레사 프랭클린인가? 아레사 프랭클린이 명단에 오른 이유는 마이클 잭슨을 누른 ‘흑인의 대표성’ 때문으로만 볼 수 없다. 흑백을 떠나서 팝 음악계 전체를 진동시킨 ‘경이로운 가창력’ 때문이다. 아레사 프랭클린은 42년생 미국 멤피스에서 태어나 1960년대말 스타덤에 오른 왕년의 가수지만 지금도 노래하면 음악관계자들은 만장일치로 그녀를 거명한다. 얼마나 노래를 잘하길래 그런가. 몇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그녀가 1967년 프로듀서 제리 웩슬러의 지원 아래 어틀랜틱 음반사에서 처음 앨범을 취입했을 때 반주를 해준 사람들. 이른바 세션맨들은 아레사 프랭클린의 노래솜씨에 그만 넋을 잃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너도나도 ‘이런 환상적인 레코딩에 내가 참여한 것이 영광’이라며 어울려 춤을 췄다는 것이다. 지난해 미국의 유선방송국VH원이 주최한 ‘디바스 라이브’(음반으로도 나왔다) 공연에서는 관람객 중 한 사람이었던 여배우 사라 제시카 파커가 인상적인 소감을 남겼다. “아레사를 보기 전에 난 스타에 반한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난 홀린 기분이다. 아레사가 나한테 ‘옷이 멋져요’ 하길래 난 주저없이 ‘가지세요’라고 했다. 발가벗고 여기를 나가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그녀는 옷을 가질만하다!” 지난해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아레사 프랭클린은 다시 한번 천부적인 가창력으로 사람들의 혼을 뺐다. 그녀는 시상식장에서 노래부르기로 돼있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병으로 불참하게 되자 갑작스럽게 대타로 뛰게 되었다. 뒷무대에서 불과 몇분 연습하고 나서 그녀는 거뜬하게 파바로티의 ‘네순 도르마’를 불렀다. 더욱이 72인조 오케스트라에 맞추기 위해 그 곡을 파바로티의 키로 노래했다. 주최측, 오케스트라 단원 그리고 객석 모두가 ‘경외’의 박수를 쳤다. 그녀에 대한 평자들의 찬사와 칭송은 끝이 없다. ‘형언하기 어렵다’(No other description will do)가 대부분이다. 음악평론가 벤 에드먼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지난 50년간 우리를 놀라게 하고 겁에 질리게 한 또다른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영국의 록잡지 < 모조 >는 지난해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100인’을 음악관계자 설문을 통해 선정한 바 있다. 여기서 1위는 말할 것도 없이 아레사 프랭클린이었다. < 모조 >측은 2위와 표차를 엄청나게 내고 그녀가 넘버 원 싱어가 된 것에 놀랐다. 다시금 아레사 프랭클린이 남녀, 흑백, 장르를 통틀어 ‘20세기의 최고 가수’라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 그녀는 소울의 영원한 여왕 그녀의 음악은 목소리와 창법의 미학뿐 아니라 시대성이 있다. < 타임 >지가 20세기의 위대한 문화예술인 중 한 사람으로 뽑은 진정한 이유다. 1960년대 후반 아레사 프랭클린이 불러 유명한 곡 ‘존경(Respect)’, ‘체인 오브 풀스(Chain of fools)’, ‘생각해요(Think)‘ 등에는 당시 흑인들의 당당한 의식이 배어 있다. 흑인 민권운동의 불길이 솟아오르던 그 무렵 흑인들은 백인 지배사회에서 결코 흑인들이 열등한 인종이 아니며, 따라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흑인의 영혼을 의미하는 소울(Soul)이었다. 소울 음악은 때문에 목청을 돋워 질러대는 ‘샤우트’를 특징으로 했다. 국내에서도 록의 비조로 불리는 신중현이 소울을 창조적으로 도입해 김추자, 박인수, 펄 시스터즈와 같은 소울 가수가 1970년대 초반 두각을 나타낸 바 있다. 1967년 미국의 디트로이트에 흑인 폭동이 발발했을 때 성난 흑인 민중들은 백인들에게 존경을 요구하는 의미에서 아레사 프랭클린의 그해 히트곡 ‘존경’을 시위대의 찬가로 불렀다. 이듬 해 디토로이트 시장 제롬 카바나는 ‘아레사 프랭클린의 날’을 선포하기도 했다. 미국사회가 이때부터 흑인의 음악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백인들도 흑인의 레코드를 구입하게 된 것이다. 아레사 프랭클린은 다시 말해 흑인 소울의 존재를 만천하에 고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신(神)의 조리에 의한 거 같은 지존(至尊)의 가창력으로 그것을 전했으니 그 위력은 더할 나위가 없다. 또 지적하는 바이지만 ‘존경’을 듣고 동료가수 오티스 레딩은 혀를 내둘렀다. 이 곡은 그가 쓴 곡으로 직접 불러 발표한 바도 있는데, 아레사 프랭클린이 완전히 새롭게 그리고 완벽하게 소화한 것을 듣고 질려버린 것이었다. 오티스 레딩의 경탄. “난 내 노래를 잃어버렸어. 저 여자가 내 곡을 빼았아갔어!” 아레사는 조금도 변함없는 ‘소울의 여왕(Queen of soul)’으로 통한다. ‘여성 소울(Lady soul)’이란 별명도 있다. < 디바스 라이브 >에서 아레사 프랭클린과 호흡을 맞춘 머라이어 캐리도 그렇게 호칭하고 있지만 이 호칭들은 영원히 아무도 넘아다볼 수 없을 것 같다.
레이 찰스, 샘 쿡, 아레사 프랭클린, 오티스 레딩, 제임스 브라운…. 이들의 공통점은(흑인인 것 빼고) 무엇일까? 바로 목소리 하나만으로 50- 60년대 대중 음악의 혁명을 일궈낸 흑인 보컬의 대가들이란 점이다. 소울로 대변되는 흑인 대중 음악은 ‘흑인의 정신’과 연결되며 한껏 우렁차고 독특한 울림을 창조하며 60년대 흑인들의 자존심을 한껏 높이는데 기여했다. 록의 역사에서 이들의 음반을 두고두고 명반으로 추대... 레이 찰스, 샘 쿡, 아레사 프랭클린, 오티스 레딩, 제임스 브라운…. 이들의 공통점은(흑인인 것 빼고) 무엇일까? 바로 목소리 하나만으로 50- 60년대 대중 음악의 혁명을 일궈낸 흑인 보컬의 대가들이란 점이다. 소울로 대변되는 흑인 대중 음악은 ‘흑인의 정신’과 연결되며 한껏 우렁차고 독특한 울림을 창조하며 60년대 흑인들의 자존심을 한껏 높이는데 기여했다. 록의 역사에서 이들의 음반을 두고두고 명반으로 추대하는 것 또한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대중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만큼 대중 음악의 고향 미국에서 흑인이 대중 앞에 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담아 노래를 해 지지를 받는 것이 어려웠다는 애기다. 70년대 들어서도 흑인 대중 음악은 보컬이 단연 강세였다. 지금 소개하는 알 그린 역시 70년대를 대표하는 흑인 보컬리스트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선 그가 70년대 스티비 원더나 80년대 라이오넬 리치만큼의 지명도는 없지만 적어도 그가 활동한 미국에선 소위 보컬의 대가로 그를 알아 모신다. 그가 인기를 누리던 시기 마빈 게이와 스티비 원더, 배리 화이트가 ‘셀프 프로듀싱’을 감행하며 아티스트의 명예를 획득하는 동안 알 그린은 과거 선배들처럼 오로지 목소리로만 승부하며 흑인 대중음악계의 기린아로 떠오른다. 스모키 로빈슨, 마빈 게이와 같은 디트로이트의 모타운(motown) 보컬이 고급 와인처럼 잘 정제된 세련된 보컬이라면 그의 보컬은 잘 익은 곡주처럼 구수한 멤피스 지역의 어틀랜틱 레코드 산하 스택스(stax) 소울에 보컬 정체성을 두고 있다. 멤피스를 중심으로 미국 중남부를 주 활동무대로 한 그는 바로 멤피스 소울의 대가 오티스 레딩의 혼을 계승한 보컬리스트이다. 텁텁한 느낌에, 숨이 막히듯 조여 드는 듯한(오티스 레딩의 ‘Sitting on the dock of bay’를 들어보라!) 멤피스 소울 처럼 그의 보컬색은 대중들이 쉽게 다가가긴 힘든 성질이지만 익숙해지면 그만의 보컬 마력에 헤어나오지 못한다. 귀를 콕콕 찌르는 듯한 강한 훅을 날리는 그의 보컬은 그래서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감흥이 있다. 하지만 알 그린은 선배 오티스 레딩의 업적을 단순히 계승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1972년에 발표한 그의 명반 < I’m Still in Love with You >에선 로이 오비슨의 히트곡 ‘Oh pretty woman’ 과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의 컨트리 곡 ’For the good times’과 이듬해 1973년 명반 < Call Me >에선 컨트리의 아버지 행크 윌리엄스의 ‘I’ m so lonesome I could cry’와 역시 컨트리 싱어 윌리 넬슨의 ‘Funny how times slips away’를 무리 없이 리메이크해 그의 보컬dl 단순히 정통 흑인 성향의 것을 넘어 백인들에게도 어필하며 보편성을 획득했다. 여기에 비지스를 연상시키는 유려한 팔세토(가성) 실력은 특유의 섹시(sexy)함을 과시하며 오빠부대를 양성하기도 했다. TV 출연도 많이 해 공연 시 관객석에 꽃을 건내며 대중들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연출하는 그의 무대 매너 또한 시선을 집중시키는데 한 몫 했다. 그의 목소리를 돋보이게 해준 세련된 연주 편곡도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 1971년부터 1976년까지 활동하면서 그의 든든한 오른팔이 되준 윌리 미첼(Willie Mitchell)은 알 그린의 명성을 가능케 해준 일등 공신이다. 음계의 8개 노트를 코드로 사용하는 재즈적인 화성전개와 스트링이 애잔하게 깔아주는 그의 편곡방식은 다소 거북하게 느껴지는 알의 목소리에 도회지적인 세련된 감수성을 더해줬다. 여기에 1960년대 대표적인 R&B 연주 밴드 부커 티 앤 엠지(Booker T. & Mg’s)의 드러머 알 잭슨(Al Jackson)을 모셔오면서 알 그린-윌리 미첼-알 잭슨의 3인 공조 체제를 유지하며 히트곡 양산에 나선다. 1946년 미국의 아칸소주 태생인 알 그린은 교회를 통해 자연스레 음악을 접했고, 재키 윌슨(Jackie Wilson)의 음악에 매료되면 차츰 소울 가수로의 꿈을 키우게 된다. 종교적인 분위기의 집안 환경 탓에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지만 1967년 자신의 밴드 ‘소울 매이트’를 조직해 ‘Back up train’이라는 싱글을 발표해 빌보드 차트에 진입하지만 이렇다 할 성공을 거두진 못한다. 1969년 텍사스의 한 클럽에서 무명가수로 활동하던 알 그린은 그의 보컬에 매료 되 그의 프로듀서를 자청해 나선 윌리 미첼과 운명적 만남을 갖는다. 재즈 빅밴드의 리더였던 윌리는 원래 트럼펫 연주가였는데, 알 그린의 보컬을 접한 그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를 멤피스로 데리고 가 하이(Hi) 레코드사를 설립, 이후 그와 뗄래야 뗄 수 없는 명콤비로 자리 메김 한다. 윌리와 알은 이후 6개의 골든 앨범과 8개의 골든 싱글을 양산하며 70년대를 그들의 시대 로 만들었다. ‘Tired of being alone’(1971), ‘Let’s stay together’(1971) , ‘Look what you have done for me’(1972), ‘You ought to be with me’(1972) , ‘Call me’(1973) , ‘Here I’m’(1973), ‘Livin’ for you’(1973) , ‘Sha-La-La(1974)를 모두 빌보드 차트 top 10에 올려놓는다. 골드를 기록한 앨범 < Let’s Stay Together >(1972), < I’m Still in Love with You >(1972), < Call Me >(1973)는 지금까지도 대표적인 소울 명반으로 빠짐없이 추대된다. 부와 명예를 획득한 알의 인생행로는 그러나 이후 순탄치 않았다. 위장과 척추에 이상이 오며 건강이 악화되고 자신이 보는 앞에서 그의 부인이 권총으로 자살을 하는 불상사가 생긴다. 정신이 극도로 황폐해진 그는 이후 ‘신의 경고’라는 생각에 1977년 윌리 미첼과 결별하며 대중 음악계를 떠난다. 그리고 교회를 사 들여 목사가 되기로 한 그는 이후 설교와 가스펠 가수 활동을 병행한다. 80년대 내내 그는 대표적인 가스펠 싱어로 등극하며 수많은 그래미 상을 획득하기도 한다. 영원히 결별인줄 알았던 윌리 미첼과 1985년에는 재결합하며 앨범 < He is the right >를 발표했지만 이미 알 그린만의 매혹적인 보컬마력은 거세 당한 후였다. 대중들은 차츰 70년대 섹시미를 날리던 왕년의 알 그린을 잊고 있었다. 70년대의 그의 보컬업적은 이후 섹시 록커 프린스 등 수많은 소울 가수들에게 영향을 주며 대중음악계에 끼친 그의 공로를 인정 받아 1995년엔 락 앤 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영광을 얻는다. 그리고 올해 2003년, 그가 정확히 대중음악계를 은퇴한지 26년 만에 왕년의 알 그린식 소울을 들고 컴백했다. 그것도 그의 명 콤비 윌리 미첼이 프로듀싱과 편곡을 담당하며 그를 기억하던 팬들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2003년 11월 26년만의 회심작 < I’ Can’t Stop >을 재즈 레이블 블루노트에서 발표하며 활동을 재개한 그는 20대 전성기의 느낌을 50대 중반의 노장 가수의 느낌으로 고스란히 담아냈다. 혼의 우렁찬 울림과 펑키한 느낌이 배가된 더욱 다채로워진 윌리 미첼의 편곡과 그의 농익은 보컬은 여전히 ‘노장은 살아있다’를 증명하고도 남는 반가운 컴백이다.
노래 : 5th Dimension (피프스 디멘션,The Fifth Dimension)
미국의 보컬 그룹 미국의 보컬 그룹
노래 : MFSB (마더 파더 시스터 브라더,Mother Father Sister Brother)
알앤비, 소울, 펑키 그룹 알앤비, 소울, 펑키 그룹
노래 : Sly & The Family Stone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1944년 달라스 태생인 흑인 실베스터 스튜어트(Sylvester Stewart/별명이 슬라이 스톤)가 이끈 그룹. 샌프란시스코에서 성장하면서 히피의 개혁 사조에 공감, 사이키델릭한 소울에 정치색과 사회성이 강한 노래들을 불렀다. ‘Don’t call me nigger, Whitey(날 검둥이라고 부르지 마, 흰둥이야!)’란 제목의 노래가 말해준다. 메시지보다 더 영감을 준 것은 리더 슬라이 스톤이 펼쳐내는 변화... 1944년 달라스 태생인 흑인 실베스터 스튜어트(Sylvester Stewart/별명이 슬라이 스톤)가 이끈 그룹. 샌프란시스코에서 성장하면서 히피의 개혁 사조에 공감, 사이키델릭한 소울에 정치색과 사회성이 강한 노래들을 불렀다. ‘Don’t call me nigger, Whitey(날 검둥이라고 부르지 마, 흰둥이야!)’란 제목의 노래가 말해준다. 메시지보다 더 영감을 준 것은 리더 슬라이 스톤이 펼쳐내는 변화무쌍한 폴리리듬이었다. 때문에 펑크(funk)의 원조로 항상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과 함께 언급되며 나중의 디스코에도 길을 열어준 ‘리듬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재즈의 거성 마일스 데이비드(Miles David)도 펑크(funk)에 관심을 가졌을 때 이들의 음반을 열심히 들었을 정도. 흑인가수의 경우 단일 곡이 팔릴 뿐 앨범판매는 저조한 관행에도 이 그룹의 앨범은 잘 팔렸다. 1970년 히트곡 모음집은 판매고 500만장을 상회했다. 하지만 슬라이 스톤은 마약에 찌들어 1970년대 중반부터는 급격히 내리막길로 빠졌다. 천재는 기인임을 말해주는 사례. 대표곡으로는 ‘Dance to the music’, ‘Everyday people’, ‘Hot fun in the summertime’ 등이 있다.
멤버 : 로한 데라노 터니(Rohan Delano Turney, 보컬), 피터 라마(Peter Lamarr, 보컬), 빅터 비노에(Victor Bynoe, 보컬), 패트릭 알란(Patrick Alan, 보컬) 멤버 : 로한 데라노 터니(Rohan Delano Turney, 보컬), 피터 라마(Peter Lamarr, 보컬), 빅터 비노에(Victor Bynoe, 보컬), 패트릭 알란(Patrick Alan, 보컬)
옆모습을 보면 코보다 입이 더 돌출되어 있어 그다지 호감 가는 외모를 갖고 있지 않은 빌리 오션(Billy Ocean)은 그 반대급부인 풍부하고 찰진 중저음의 진한 음색으로 1980년대 중반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흑인 남성 가수다. 1950년 1월 21일, 서인도제도에 있는 섬나라 트리니다드에서 레슬리 세바스찬 찰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빌리 오션은 8살 때 영국으로 이민가 낮에는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 옆모습을 보면 코보다 입이 더 돌출되어 있어 그다지 호감 가는 외모를 갖고 있지 않은 빌리 오션(Billy Ocean)은 그 반대급부인 풍부하고 찰진 중저음의 진한 음색으로 1980년대 중반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흑인 남성 가수다. 1950년 1월 21일, 서인도제도에 있는 섬나라 트리니다드에서 레슬리 세바스찬 찰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빌리 오션은 8살 때 영국으로 이민가 낮에는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작은 클럽에서 노래하며 인지도를 획득해 1975년에는 셀프타이틀 데뷔앨범을 발표했다. 여기서 모타운 풍의 경쾌한 싱글 ‘Love really hurts without you’가 미국 차트 22위와 영국 차트 2위에 오르며 성공적인 상견례를 가졌지만 이건 워밍업에 불과했다. 1970년대 후반에 미국에 정착한 빌리 오션은 1980년에 < City Limit >와 1981년에 < Nights (Feel Like Getting Down) >, 1982년에 < Inner Feelings >까지 3장의 음반을 더 발매했지만 미국에서는 댄스 차트와 흑인음악 차트에서만 두각을 나타냈다. 그리고 1984년에 탄생한 다섯 번째 작품 < Suddenly >는 빌리 오션을 전 세계에 메모리시킨 결정타였다. ‘Caribbean queen’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Billie Jean’과 베이스 리듬이 유사해 표절의혹을 받았지만 2주 동안 넘버원을 차지해 지금까지 그의 시그니처 송으로 남아있으며 빌로 오션이 명 프로듀서이자 작곡가인 로버트 존 ‘머트’ 랭(샤니아 트웨인의 전 남편)과 공동으로 작곡한 후속 싱글인 ‘Loverboy’는 2위, 당시 국내 나이트클럽에서 소위 ‘부루스 타임’의 단골이었던 음반타이틀 ‘Suddenly’는 4위, ‘Mystery lady’는 24위에 랭크되어 한 앨범에서 4곡이나 40위권 내에 오르는 대박 히트를 기록했다. 특히 ‘Caribbean queen’으로 빌리 오션은 그해 그래미에서 최우수 리듬 앤 블루스 남성 가수상을 수상했다. 앨범 < Suddenly >의 성공은 1985년까지 이어졌고 1986년에는 그 여세를 몰아 6집 < Love Zone >을 공개했다. 여기서도 히트 싱글이 쏟아졌는데 캐서린 터너와 마이클 더글라스가 주연한 영화 < 나일강의 보석 >에 삽입된 흥겨운 ‘When the going gets tough, the tough gets going’이 2위를 차지했고 고품격 리듬 앤 블루스 ‘There'll be sad songs’가 그의 두 번째 넘버원이 되었다. 그리고 ‘Love zone’이 10위, ‘Love is forever’는 16위에 올라 모두 4곡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2년 후인 1988년에 발표한 앨범 < Tear Down These Walls >에서도 다시 한번 1위곡을 배출하는데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은 댄스곡 ‘Get outta my dreams, get in to my car’이다. ‘Loverboy’와 ‘When the going gets tough, the tough gets going’에 이어 로버트 존 ‘머트’ 랭과 합작한 이 노래 외에도 발라드 ‘Colour of love’와 ‘Licence to chill’이 각각 17위와 32위를 차지하며 3연타석 홈런을 쳤다. 또한 이 음반에는 ‘Because of you’라는 곡이 있는데 나중에 푸른하늘이 1990년에 발표한 ‘이 밤이 지나도록’에서 이 노래를 표절해 우리나라에서 조용히 화제가 되었다.
노래 : Isley Brothers (아이슬리 브라더스)
흑인 소울, 리듬 앤 블루스 그룹 아이슬리 브라더스(The Isley Brothers)의 힘은 끈질긴 생명력이다. 4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한결같은 음악여정을 걸어왔다는 점이 이를 강하게 시사한다. 보컬 팀워크와 하모니를 전면에 내세운 이들은 로맨틱한 R&B 발라드와 가스펠, 소울, 펑크(Funk)에 이르는 흑인 장르를 대중적으로 소개하는데 가장 중심에 섰던 형제그룹이다.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결성된 ... 흑인 소울, 리듬 앤 블루스 그룹 아이슬리 브라더스(The Isley Brothers)의 힘은 끈질긴 생명력이다. 4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한결같은 음악여정을 걸어왔다는 점이 이를 강하게 시사한다. 보컬 팀워크와 하모니를 전면에 내세운 이들은 로맨틱한 R&B 발라드와 가스펠, 소울, 펑크(Funk)에 이르는 흑인 장르를 대중적으로 소개하는데 가장 중심에 섰던 형제그룹이다.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결성된 아이슬리 브라더스는 원래 팀의 정신적 지주이자 리드 싱어인 로날드 아이슬리(Ronald Isley)를 중심으로 루돌프(Rudolph), 오켈리(O’Kelly), 베론(Vernon)의 가스펠 쿼텟(quartet)으로 구성된 보컬 밴드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1955년 자전거 사고로 베론이 사망하자 아이슬리 형제는 트리오 라인업으로 팝 계의 첫 출발을 내디뎠다. 데뷔 초기 고향을 등지고 뉴욕으로 이주해 두-왑(doo-wop) 레코드를 녹음하며 활동에 포문을 연 그룹은 1959년 가스펠 송 ‘Shout’가 팝 차트에서 톱 40의 놀랄만한 성과를 올리면서 서서히 이름을 알렸다. 1962년 R&B싱글 차트 2위를 기록한 ‘Twist and shout’(비틀즈가 커버한 곡), 1966년 스매시 히트 싱글 ‘This old heart of mine (Is weak for you)’(팝 차트 12위, 이듬해 영국차트 3위) 등이 성공가도의 대표적인 열쇠였다. 이후 그룹은 수많은 음반을 레코딩하면서 소울과 R&B뿐만 아니라 펑크와 록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을 넓혀나갔다.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는 바로 그룹의 혁명을 이끈 시기였다. 그 출발선상에 자리한 1969년 작품 < It’s Our Thing >(R&B앨범 차트 2위)부터 그룹은 줄 곳 히트 퍼레이드를 이어나갔다. 결국 1970년에 발표한 < Get Into Something >에서 R&B차트 톱 30에 랭크된 곡을 무려 여섯 곡이나 배출해내는 저력을 과시했고, 1971년 < Givin’ It Back >을 발표해 밥 딜런(Bob Dylan), 제임스 테일러(James Taylor), 스페판 스틸스(Stephen Stills), 빌 위더스(Bill Withers), 닐영(Neil Young)의 곡들을 리메이크하며 주류 음악시장의 성공 궤도에 안착하기 시작했다. 아이슬리 형제가 인기그룹으로 급부상한 1973년작 < 3 + 3 >(팝 앨범 차트 8위)은 제 2세대 아이슬리 브라더스를 형성한 시기였다. 지미 헨드릭스로부터 영향 받은 기타리스트 어니 아이슬리(Ernie Isley)와 베이스, 퍼커션 주자 마빈 아이슬리(Marvin Isley), 사촌 형제인 크리스 자스퍼(Chris Jasper)가 이 앨범부터 그룹에 새롭게 가입. 이때부터 아이슬리 브라더스는 6인 체제로 전성기가 끝날 무렵까지 10년 동안 멤버교체 없이 ‘가문의 영광’을 지속해나갔다. 결국 이들은 발표하는 앨범마다 골드와 플래티넘을 달성하며 장기간 대중들과 함께 호흡했다. 그룹의 진가가 발휘된 1975년 걸작 < The Heat Is On >는 아이슬리에게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라는 영광을 수여한 금자탑이었다. 더불어 1978년작 < Showdown >(팝 앨범 차트 4위)에 수록되어 R&B싱글 차트 1위를 기록한 ‘Take me to the next phase (Part 1)’의 빅 히트로 1970년대에 접어들어 그룹은 가장 화려한 시기를 맞이한다. 1976년 < Harvest for the World >(9위), 1977년 < Go for Your Guns >(6위), 1978년 < Showdown >(4위) 등의 발표하는 음반마다 그룹은 매번 R&B앨범 차트 정상을 점령했고, 여러 싱글 히트곡들로 R&B차트를 힘차게 꿰찼다. 흑인음악계의 많은 후배들이 아이슬리 브라더스를 존경하게된 결정적 배경이 바로 이 당시 축적되었다. 10여 년 간 지속적인 성공가도를 달린 그룹은 1983년 < Between the Sheets > 이후 점차 하락세에 접어들며 침체기를 맞이한다. 어스 윈 앤 파이어(Earth, Wind & Fire), 쿨 앤 더 갱(Kool & The Gang) 같은 펑키(Funky) 사운드가 조금씩 무기력해질 시점에서 로맨틱 발라드 곡조로 일대 사운드의 변화를 꽤했다. 하지만 결과는 예전만큼 순탄하지 않았다. 결국 1986년 심장마비로 오켈리가 세상을 떠난 뒤 아이슬리 브라더스는 흑인 여성아티스트 안젤라 윈부시(Angela Winbush)를 작업 동료로 맞이해 그룹 재건에 나섰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팀을 떠났던 마빈, 어니와 재결합한 그룹은 그간 30년이 넘는 꾸준한 음악활동에 대한 공적을 인정받아 1992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4년 뒤 1996년 < Mission to Please >(R&B앨범 차트 2위)는 R&B 크루너 키스 스웨트(Keith Sweat), 알 켈리(R. Kelly) 같은 후배 뮤지션들이 참여해 젊은 감각으로 앨범의 빛을 더해주었다. 현재 그룹은 로날드와 어니의 듀오 체제를 구축해 기나긴 음악여정을 꾸준히 이어오며 2001년 < Eternal >(3위)을 발표해 다시금 팝 팬들에게 회자되기도 했다. 그룹은 2003년 발매 첫 주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등극한 < Body Kiss >로 거의 30년 만에 차트 1위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동시대 여러 아티스트들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운명을 달리하거나 팀의 해체를 맛보았지만 이들은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 흑인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노장의 투혼을 아직도 십분 발휘하고 있다. 지나간 세월이 대가를 인정하는 법이다.
노래 : Edwin Hawkins Singers (에드윈 호킨스 싱어스)
3명의 친자매들로 구성된 이모션스(Emotions)는 시카고에서 출발한 흑인 여성 보컬 그룹이다. 대부분의 흑인 가수들처럼 이들도 어려서부터 교회 성가대에서 내공을 쌓았기 때문에 디스코 싱글 ‘Best of my love’(이글스의 노래와는 동명이곡)로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에도 앨범 전체적으로는 가스펠적인 뿌리를 간직하고 있었다. 맏언니 쉴라(Sheila)를 위시한 완다(Wanda), 재닛(Jeane... 3명의 친자매들로 구성된 이모션스(Emotions)는 시카고에서 출발한 흑인 여성 보컬 그룹이다. 대부분의 흑인 가수들처럼 이들도 어려서부터 교회 성가대에서 내공을 쌓았기 때문에 디스코 싱글 ‘Best of my love’(이글스의 노래와는 동명이곡)로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에도 앨범 전체적으로는 가스펠적인 뿌리를 간직하고 있었다. 맏언니 쉴라(Sheila)를 위시한 완다(Wanda), 재닛(Jeanette) 이렇게 허친슨(Hutchinson) 가(家)의 자매들은 1968년에 정식으로 이모션스를 결성하고 이듬해 데뷔 앨범 < So I Can Love You >를 흑인 음악으로 유명했던 스택스(Stax) 레이블을 통해 발표했고 1970년대 중반까지는 이렇게 자신들의 음악적 고향인 소울과 가스펠에 근접한 리듬 앤 블루스 팝을 주로 소화했다. 1970년대 중반 콜럼비아 레코드로 이적한 이후 어스 윈드 & 파이어(Earth Wind & Fire)의 리더 모리스 화이트(Maurice White)의 후원 하에 이들의 음악은 디스코적인 리듬 앤 블루스로 서서히 변모해 갔다. 이 자매들의 고유 스타일에 모리스 화이트의 펑키(funky)한 음악 터치가 가해져 팝적이고 댄서블해진 후천적 형질을 획득했다. 모리스 화이트가 작곡과 제작을 맡은 ‘Best of my love’는 1977년 5주 동안 1위를 지켰으며 이후 이 자매들과 모리스 화이트 간의 연합은 1979년 어스 윈드 앤 파이어의 신곡 ‘Boogie wonderland’의 백보컬에 3 자매가 기꺼이 참여함으로써 다시 한번 굳건함을 과시했다. 1980년대 디스코의 물결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이모션스의 인기도 정비례하면서 음악계에서 유유히 사라져 간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영원한 퇴장이 아니었다. 복고 열풍에 일조한 샘플링 기법은 새로운 음악 장르에 대해 앞만 보고 달려가던 1990년대에 팝의 고전들을 재조명하는 기회를 부여했다. 그동안 잊혀졌거나 신세대들이 들어보지 못한 곡들의 멜로디를 시대적 감각에 맞게 생명력을 부여한 점은 샘플링 그 자체의 단점을 희석시킬 수 있을 정도의 기특함이었다. 팝의 디바 머라이어 캐리는 1993년 3번째 정규 음반 < Music Box >의 첫 번째 싱글 커트곡 ‘Dream lover’에서 이모션스의 ‘Show me how’를 멋들어지게 샘플링 했지만 2집 음반 < Emotions >의 타이틀곡은 바로 이 이모션스의 ‘Best of my love’와 비슷하다는 오명을 감수해야 했다. 이모션스, 쓰리 디그리스(Three Degrees), 라벨(LaBelle), 포인터 시스터스(Pointer Sisters) 같은 1970년대 ‘피매일(female)’ 보컬 그룹의 활동은 걸 그룹의 전성기인 1960년대와 여성 보컬 그룹의 황금기인 1990년대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했다. 이 세 자매의 가창력과 하모니는 별 다섯 개를 매겨도 아깝지 않다. 노병은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이다.
노래 : Earth, Wind & Fire (어스 윈드 앤 파이어 )
소울, 펑키 그룹 소울, 펑키 그룹
노래 : Barbara Mason (바바라 메이슨)
노래 : Deniece Williams (데니스 윌리엄스)
1976년 한 달 동안 빌보드 싱글 차트 1위 자리를 고수했던 ‘Disco lady’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은 저니 테일러(Johnnie Taylor)가 시대에 영합한 단순한 디스코 가수로 생각하지만 그는 오티스 레딩(Otis Redding), 마빈 게이(Marvin Gaye) 등과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소울 싱어 송라이터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진 거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흑인 가수가 제임스 브라운(Jame... 1976년 한 달 동안 빌보드 싱글 차트 1위 자리를 고수했던 ‘Disco lady’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은 저니 테일러(Johnnie Taylor)가 시대에 영합한 단순한 디스코 가수로 생각하지만 그는 오티스 레딩(Otis Redding), 마빈 게이(Marvin Gaye) 등과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소울 싱어 송라이터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진 거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흑인 가수가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이나 윌슨 피켓(Wilson Pickett), 샘 앤 데이브(Sam & Dave)처럼 위대한 소울 싱어로 추앙받지 못하는 것은 ‘Disco lady’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1938년 어린이 날(5월 5일)에 태어난 저니 테일러는 교회의 가스펠로 음악계에 입문한다. 1960년대 중반에 소울 음악으로 유명한 스택스 레이블과 약정을 맺고 블루스, 재즈, 소울, 리듬 앤 블루스 등 모든 흑인 음악 요소가 고루 들어 있는 데뷔 앨범 < Wanted : One Soul Singer >를 1967년에 공개했다. 1976년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발표된 스매시 히트 싱글 ‘Disco lady’가 수록된 < Eargasm >이 상업적 성공을 클릭하기 이전까지 대부분 그의 음반은 스택스 레코드에서 찍어냈다. 그러나 이 대표곡을 제외한 나머지 수록곡들도 예전처럼 소울과 블루스로 채색된 앨범이었지만 ‘Disco lady’의 위용에 압도당해 아직까지도 많은 음악 팬들은 저니 테일러를 디스코 가수로만 인식한다. 외국의 한 평론가는 “Disco lady는 결코 디스코 곡이 아니다. 펑크(funk) 밴드 팔라먼트(Parliament)와 펑카델릭(Funkadelic)의 멤버들이 연주했기 때문에 그렇게 들리는 것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저니 테일러는 ‘Disco lady’ 때문에 ‘Who''s making love?(1968년 5위)’, ‘(I wanna) Testify(1969년 36위)’, ‘I am somebody part Ⅱ(1970년 39위)’, ‘I believe in you(You believe in me)(1973년 11위)’, ‘Cheaper to keep her(1973년 15위)’, ‘We''re getting careless with our love(1974년 34위)’같은 일련의 히트곡들이 묻혀 버렸다. 1990년대까지 정력적으로 음반을 발표한 저니 테일러는 1996년 < Good Love >를 세상에 내놓고 2000년 5월 31일 지병인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우리는 오티스 레딩, 마빈 게이 등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소울 싱어 한 명을 잃어버렸다.
1970년대 소울알앤비 걸그룹 - 패티 라벨, 노나 헨드릭스, 새라 대쉬 1970년대 소울알앤비 걸그룹 - 패티 라벨, 노나 헨드릭스, 새라 대쉬
노래 : Luther Vandross (루더 밴드로스,Luther Ronzoni Vandross)
흑인 남성 싱어 송라이터이자 프로듀서로 입지전적인 위치를 다진 루더 밴드로스(Luther Vandross)는 본격적인 캐리어를 쌓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왕성한 음악 활동을 펼치면서 20세기 후반 리듬 앤 블루스를 언급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거물급 인사가 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이후 그의 노래들이 빌보드 싱글 차트의 높은 순위에 오르면서 알려졌다. 제작자로서 그에 대한 평가는 스티비... 흑인 남성 싱어 송라이터이자 프로듀서로 입지전적인 위치를 다진 루더 밴드로스(Luther Vandross)는 본격적인 캐리어를 쌓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왕성한 음악 활동을 펼치면서 20세기 후반 리듬 앤 블루스를 언급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거물급 인사가 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이후 그의 노래들이 빌보드 싱글 차트의 높은 순위에 오르면서 알려졌다. 제작자로서 그에 대한 평가는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나 프린스(Prince), 테디 라일리(Teddy Riley) 등과 동등한 위치에서 언급되고 있으며 초코 우유처럼 감미로운 그의 테너와 바리톤의 중간 음색으로 그려지는 가창력은 현존 최정상임을 입증한다. 1951년 4월 20일 뉴욕에서 태어난 이 재능 있는 뮤지션은 샘 쿡(Sam Cooke),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같은 소울 가수들의 음반들을 들으며 음악적인 진실함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채득했다. 1970년대에는 선배 가수들의 백보컬 활동과 TV 광고 노래를 부름으로서 음악 생활을 시작했다. 1981년, 루더 밴드로스는 첫 번째 정규 앨범 < Never Too Much >를 자신이 직접 어레인지와 제작을 담당해 음악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음반 제작을 관장하는 흑인 아티스트가 드물었기 때문에 루더 밴드로스의 처녀작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작품에 대한 호평으로 그는 1980년대 초반 ‘소울의 영왕’ 아레사 프랭클린을 위해 퓨젼 재즈 베이시스트 마커스 밀러(Marcus Miller)와 파트너가 되어 ‘Jump to it(24위)’, ‘Get it right(61위)’ 등을 작곡하고 음반을 제작하면서 그녀에게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이후 이들의 관계는 음악적인 파트너쉽을 넘어 인간적인 우정으로 지속된다. 1980년대를 활동하면서 모두 6장의 정규 음반을 발표했지만 싱글 종합 차트와 국내에서의 반응은 흑인 음악 차트에 비해 폭발적이지는 못했다. 데뷔 곡 ‘Never too much(33위)’, 댄서블한 ‘Stop to love(15위)’와 ‘She won’t talk to me(30위)’, 그리고 ‘Give me the reason(57위)’과 ‘Any love(44위)’ 등이 주로 차트의 허리권에서 멤돌다가 사라지곤 했었다. 1990년대가 밝아오면서 루더 밴드로스는 지난 10년을 재조명하는 베스트 음반을 발표했다. 이 앨범에 수록된 신곡 ‘Here and now(6위)’가 최초로 Top10에 랭크되면서 20세기의 마지막 10년을 화려하게 장식할 준비를 시작했다. 1991년의 < Power Of Love >는 싱글 ‘Power of love/Love power(4위)’와 ‘Don’t want to be a fool(9위)’의 호 성적으로 그의 앨범들 중에서 가장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으며, 1992년에는 영화 < 모 머니 >에 수록된 ‘The best thing in life are free(10위)’를 자넷 잭슨(Janet Jackson)과 함께 호흡을 맞추었고 1994년에는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와 함께 ‘Endless love(2위)’를 리메이크 했다. 루더 밴드로스의 음악 스타일과 역량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친절하게 멜로디를 살려주는 그의 노래들은 화음보다 최소한의 리듬을 강조하는 현재의 흑인 음악의 트랜드와 다소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지금, 그의 음악이 발전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정체하고 있는 것처럼 비추어 지는 면이 없지 않지만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한 번도 식은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음악은 언제든지 사랑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노래 : Mcfadden & Whitehead (맥파든 앤 화이트헤드 )
멤버 : Gene McFadden, John Whitehead 멤버 : Gene McFadden, John Whitehead
R&B, 팝 보컬 R&B, 팝 보컬
노래 : Pointer Sisters (포인터 시스터즈)
디스코의 광기가 마지막 불꽃을 발산하던 1979년에 ‘Got to be real’이란 디스코 곡으로 등장한 세릴 린(Cheryl Lynn)은 TV 프로그램인 < Gong Show >에서 발탁된 흑인 여가수로 1957년 3월 11일,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1978년 콜롬비아 레코드와 정식 계약을 체결한 셰릴 린은 셀프타이틀 데뷔앨범 < Cheryl Lynn >을 공개해 첫 싱글 ‘Got to be real’이... 디스코의 광기가 마지막 불꽃을 발산하던 1979년에 ‘Got to be real’이란 디스코 곡으로 등장한 세릴 린(Cheryl Lynn)은 TV 프로그램인 < Gong Show >에서 발탁된 흑인 여가수로 1957년 3월 11일,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1978년 콜롬비아 레코드와 정식 계약을 체결한 셰릴 린은 셀프타이틀 데뷔앨범 < Cheryl Lynn >을 공개해 첫 싱글 ‘Got to be real’이 싱글 차트 12위, 리듬 앤 블루스 차트 1위에 오르며 재능 있는 신인이 탄생했음을 고했다. 명 프로듀서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와 토토(TOTO)의 보컬리스트 겸 건반 주자인 데이비드 페이치(David Paich)가 셰릴 린과 공동으로 작곡한 ‘Got to be real’은 1990년대 이후에 디스코 시대를 대표하는 곡으로 그 위상이 격상됐으며 < 칼리토 >, < 키핑 더 페이스 > 같은 사운드트랙에도 삽입됐다. 또한 2004년에 발매된 애니메이션 영화 < 샤크 테일 >의 OST에서는 메리 J. 블라이즈(Mary J. Blige)가 재해석해 수록하기도 했다(이 음반에서 셰릴 린은 ‘Sweet kind of life’란 곡을 불렀다). 뿐만 아니라 국내 힙합 그룹 CB Mass는 ‘진짜’에서 이 곡을 샘플링 할 정도로 ‘Got to be real’은 동서양을 막론한 최고의 댄스곡임을 입증했다. ‘Got to be real’의 작곡으로 데이비드 페이치와 인연을 맺은 셰릴 린은 토토의 히트곡 ‘Gerogy Porgy’의 백 보컬로 참여해 은혜를 갚았고(?), 1981년에 발표한 ‘Shake it up tonight’은 레이 파커 주니어(Ray Parker Jr.)가 프로듀싱을 맡아 주는 등 좋은 인간성의 소유자임을 과시했다. 1984년에는 싱글 차트에서는 69위밖에 오르지 못했지만 리듬 앤 블루스 차트에선 1위에 오른 Encore로 다시 한번 팝 계의 정면에 부상한 셰릴 린은 1980년대 후반까지 모두 8장의 음반을 발표했지만 ‘Got to be real’ 이상의 인기곡은 없었다.
노래 : Tyrone Davis (타이론 데이비스)
1960년대부터 시작된 흑인 여성 싱어 패티 라벨(Patti Labelle)의 음악 이력은 현재까지 작성 중에 있다. 그녀는 약 40년 동안 가스펠부터 걸그룹, 소울, 디스코, 펑크(funk), 리듬 앤 블루스, 댄스팝, 어반(Urban) 등 많은 스타일을 섭렵하면서 흑인 음악 계의 디바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현존하는 여성 가수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싱어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패티 라벨에 대한 국내에서의 ... 1960년대부터 시작된 흑인 여성 싱어 패티 라벨(Patti Labelle)의 음악 이력은 현재까지 작성 중에 있다. 그녀는 약 40년 동안 가스펠부터 걸그룹, 소울, 디스코, 펑크(funk), 리듬 앤 블루스, 댄스팝, 어반(Urban) 등 많은 스타일을 섭렵하면서 흑인 음악 계의 디바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현존하는 여성 가수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싱어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패티 라벨에 대한 국내에서의 명성은 그러나 미국 본토와 다르다. 1986년에 백인 남성 싱어 마이클 맥도날드(Michael McDonald)와 듀엣으로 부른 1위 곡 ‘On my own’과 2001년 크리스티나 아길레라(Christina Aguilera)가 친구들과 함께 리메이크해 원곡에이어 다시 한번 정상을 차지한 ‘Lady Marmalade’의 인기로 뒤늦게 회자되었다. 1944년 5월 24일, 미국의 필라델피아를 고향으로 둔 패티 라벨은 어려서부터 교회의 성가대에 참여하면서 영혼의 목소리를 소유한 재능 있는 여가수로 다시 태어났다. 1960년대에는 여성 3인조 보컬 그룹 패티 라벨 & 블루 벨스(Patti Labelle & Blue Belle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지만 마이너 히트 곡들만을 배출하자, 이들은 1970년대 들어서자 그룹 이름을 패티의 이름을 따서 라벨(Labelle)로 단순화시키면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이전의 정통 R&B에 펑크(funk), 글램(음악적인 면이 아니라 화려한 시각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록적인 감각을 수용한 이들의 새로운 음악 스타일은 초기 디스코의 개화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바로 그 대표적인 노래가 1975년 빌보드 싱글 차트를 석권한 ‘Lady Marmalade’이었다. 1977년 빌보드 차트 3위까지 오른 ‘I like dreamin’의 주인공 케니 놀란(Kenny Nolan)이 작곡한 이 노래는 상당한 가창력을 필요로 한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는 이 곡을 커버해 가창력을 인정받음으로서 라이벌인 브리트니 스피어스(Britney Spears)와 제시카 심슨(Jessica Simpson)보다 우위를 선점하고자 했다. 1977년 라벨을 접고 본격적인 솔로 경력을 쌓기 시작한 이 폭발적인 소울 싱어가 다시 히트 차트에 이름을 등록시킨 것은 1985년, 에디 머피(Eddie Murphy)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영화 < 비벌리 힐스 컵 >의 사운드트랙에 있는 ‘New attitude(17위)’이었고, 이듬해인 1986년에는 작곡의 달인 버트 바카라크(Burt Bacharach)가 작곡한 리듬 앤 블루스 발라드 넘버 ‘On my own’을 두비 브라더스(Doobie Brothers)의 멤버였던 블루 아이드 소울 싱어 마이클 맥도날드와 함께 불러 3주간 정상을 달렸다. 이 넘버로 우리나라에서도 비로소 널리 알려지는 발판을 마련했다. 1989년에는 다이안 워렌(Diane Warren)이 만든 007 영화 시리즈 < 라이센스 투 킬 - 살인 면허 >의 주제곡 ‘If you asked me to’를 불렀지만 그녀의 트랙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 못했고 3년 후에 셀린 디온(Celine Dion)이 다시 리메이크해 싱글 차트 3위를 차지하면서 잠재적인 히트 곡이었음을 입증했다. 1991년에는 < Burnin’ >이란 앨범으로 ‘How can I ease the pain’의 리자 피셔(Lisa Fischer)와 공동으로 그래미 최우수 리듬 앤 블루스 여자 가수상을 수상했다. 이렇듯 패티 라벨의 노래들은 알게 모르게 우리들의 귀에 익숙하지만 정작 그녀에 대해서는 친숙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 국내 팝 팬들의 흑인 음악에 대한 관심도를 고려해 본다면 패티 라벨에 대한 재조명은 필요하게 될 것이다. 패티라는 이름을 가진 여가수들은 모두 노래를 잘 했다. 이 글의 주인공 패티 라벨을 비롯해 펑크 계의 큰언니 패티 스미스(Patti Smith), ‘Baby come to me’의 패티 오스틴(Patti Austin), 스탠다드 팝의 여왕 패티 페이지(Patti Page), 그리고 우리나라의 패티 김까지.....
‘모타운(Motown) 가의 황태자’ 마빈 게이의 보컬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달콤한 크루닝(crooning) 창법과 샘 쿡의 호소력 짙은 가스펠의 기운을 온전히 흡수한 그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보컬로 창조해내며 청중들을 흥분시켰다. 기운이 서려있는 듯한 그의 보컬은 ’보컬 연주의 대가’라는 영광스런 칭호에 어울린다. 그의 사후 등장한 수많은 소울 팝 가수들은 모... ‘모타운(Motown) 가의 황태자’ 마빈 게이의 보컬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달콤한 크루닝(crooning) 창법과 샘 쿡의 호소력 짙은 가스펠의 기운을 온전히 흡수한 그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보컬로 창조해내며 청중들을 흥분시켰다. 기운이 서려있는 듯한 그의 보컬은 ’보컬 연주의 대가’라는 영광스런 칭호에 어울린다. 그의 사후 등장한 수많은 소울 팝 가수들은 모두 그의 보컬에 영향받았음을 인정하며 그의 음악성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은 단지 탁월한 창법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록음악 역사에 있어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아티스트의 창작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을 몸소 실천한 음악인이라는 점에서 그를 더욱 기억하게 한다. 70년대가 되기 전 만해도 밤낮으로 사랑과 낭만만을 얘기하며 소일하던 모타운식 소울 음악은 당시 대다수 흑인들이 공감해오던 ‘어두운 현실’엔 둔감했다. ‘팔리는 음악’을 원했던 회사측과의 마찰은 불가피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음악’을 위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이런 산고 끝에 록 역사를 대표하는 명반 < What’s going on >(1971)은 탄생했다 소울 음악은 60년대 그가 소속되어있던 모타운 레코드사를 통해 보다 대중적인 음악 문법으로 자리 잡은데 이어, 그는 같은 회사 소속의 스티비 원더와 함께 미국 대도시 후미진 곳에서 벌어지는 ‘게토 리얼리티를’ 자신의 노래에 담아냄으로써 소울이 ‘사회성’이란 화두를 본격적으로 끌어내는데 기여를 했다. 스티비 원더와 함께 그는 소위 후배 흑인 뮤지션들의 ‘대부’이다. 80년대 이스트 코스트 힙합의 분수령을 일군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의 프론트 맨 척 디(Chuck D)는 1988년도 명반 <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 >을 발표하며 롤링스톤지와 가졌던 인터뷰에서 ‘나는 이번 앨범에서 힙합의 < What’s going on > 버전을 내놓고 싶었다’ 라고 얘기할 정도로 마빈 게이의 유산을 이어받았다고 인정했다. 마빈 펜츠 게이 주니어라는 본명으로 1939년 4월 2일 워싱턴 디씨에서 태어난 그는 목사를 아버지로 둔 기독교 가정에서 어린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다소 억압적인 가정환경은 그로 하여금 음악에 몰입하게 해 아버지 때문에 억눌린 영혼을 달래줄 위안이 된다.(어렸을 때부터 그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공군에 입대, 제대 후 고향으로 돌아와 그는 락 앤 롤 스타 보 디들리(Bo Didely)를 만나 그의 문하생이 된다. 1958년 두왑 그룹인 레인보우에 가입, 이듬해엔 시카고로 진출해 ‘문 그로우’ 라는 두왑밴드에서 활동하며 체스(Chess) 레코드에서 그의 ct첫 싱글 ‘Mama roocie’를 녹음한다. 미국 전역 투어에 나선 문 그로우는 디트로이트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고, 당시 그의 연주를 지켜보던 모타운의 설립자 베리 고디 주니어(Berry Gordy Jr.)는 3옥타브가 넘는 그의 탁월한 테너 창법에 매료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61년 모타운과 전속 계약을 체결하며 베리 고디와 운명적인(?) 관계를 시작한다. 처음엔 세션 드러머로서 모타운의 일원이 된 그는 모타운 간판스타이자 작곡가인 스모키 로빈슨과 함께 활동한다. 1961년 그는 사장인 베리 고디의 누이인 안나와 결혼한다(무려 18살의 연상). 사장과 사돈관계가 된 덕에 회사측에 전폭적인 지원을 얻게 된 그는 이듬해 첫 싱글 ‘Stubborn kind of fellow’(1962)를 발표하고 흥겨운 댄스 팝 ’Hitch hike’(1962)로 빌보드 Top 40에 진입하는 순조로운 출발을 보인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크루닝 창법에 영향 받았던 그는 당시 격조 있는 발라드 음악을 원했지만, 회사 측은 그에게 흥겹게 흔들기 좋은 빠른 댄스 음악만을 요구했다. 큰 키에 수려한 용모를 지닌 덕에 유난히 여성 팬들이 많이 따랐던 그였지만, 무대에 올라 몸을 흔들며 청중들에게 즐거움을 줘야 한다는 것은 늘 못 마땅했다. 후에 그가 회고하길 ‘나는 무대에 나가 청중들 앞에서 내 엉덩이를 흔들어야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했을 정도이니, 얼마 후 있을 회사 측과 창작권을 두고 생긴 갈등은 이미 데뷔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1960년대 내내 그는 모타운 사를 통해 꾸준히 히트곡을 발표했다. ‘Pride & joy’(1963)로 처음 Top 10에 진출한 그는 잇달아 발표한 싱글 ’How sweet it is’(1964), ‘Aint that peculiar’(1965)을 Top 10에 진입시킨다. 솔로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져갈 무렵 그는 모타운 소속의 실력 있는 디바들과 듀엣 곡을 많이 취입했는데, 메리 웰즈(Mary Wells)과 함께 한 ’What’s the matter with you baby’(1964)을 시작으로, 킴 웨스튼(Kim Weston)과 함께 한 ’It takes two’(1966), 70년대 다이아나 로스(Diana Ross)와 함께 한 ‘My mistake is to love you’(1974)등이 대중적인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그와 가장 인상적인 호흡을 보여준 디바는 바로 타미 테렐(Tammi Terell)이었다. 그녀와 함께 했던 ‘Ain’t no mountain high enough’(1966), ’Your precious love’(1967), ’Ain’t nothing like the real thing’(1968), ’You’re all I need to get by’(1968) 모두 Top 10에 진입시키는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팝 역사상 가장 궁합이 잘 맞는 콤비’는 안타깝게도 타미 테렐의 요절로 인해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에게 첫 팝 차트 넘버원의 영광을 안겨준 ‘I heard it through grapevine’(1968)로 그의 인기전선은 절정에 다다랐다. 이듬해 ’Too busy thinking about my baby’(1969), ’That’s the way love is’(1969)를 Top 10에 진입시키며 인기는 더해갔지만, 이내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만다. 데뷔 때부터 창작권을 두고 벌어진 회사 측과의 끈질긴 줄다리기는 무려 2년이라는 시간을 그에게 투쟁의 시간으로 만들었다. 달콤한 사랑타령으로 점철된 지금까지의 음악과는 다른, 자신이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표출해보길 갈망했던 그는 ‘자신의 음악’을 얻기 위한 힘겨운 투쟁 끝에 결국 모타운 사의 백기를 받아내며 ‘음반 제작에 관한 모든 전권을 그에게 위임할 것’이라는 전리품을 얻어낸다. 흑인의 입장에서 아프로 아메리칸(Afro-America)의 비참한 현실을 늘 생각해왔던 그는 주저 없이 이런 자신의 고민을 음악 속에 녹여내는 작업을 했다. 흑인 빈곤문제, 실업, 월남전등, 70년대 초 그의 눈에 보인 흑인의 현실은 ‘참담함’이었다. 핑크빛 미래를 노래했던 발랄한 60년대의 흑인 음악은 슬라이& 페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 커티스 메이필드(Curtis Mayfield)등 기라성같은 흑인 뮤지션들에 의해 한층 진지하고 어두워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내놓은 것이 컨셉 앨범 < What’s going on >(1971)이었다. 흑인 음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내놓은 컨셉 앨범 < What’s going on >은 회사 측에 우려에도 불구, 앨범 수록 곡 중 무려 4곡(What’s going on, God is love, Mercy, mercy, me Inner city blues)이 Top 10에 진입하는 성과를 거뒀고, 앨범은 지금까지 8백만장이라는, 당시로선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스트링을 동원한 세련된 연주 편곡, 참회록을 쓰듯 스토리 텔링(Storytelling) 방식으로 진행되는 진솔한 자기 고백은 당시 소울음악에선 맛볼 수 없었던 신선한 충격이었다. 앨범 < What’s going on >은 그의 음악 경력에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이 때부터 그의 음악성에도 뚜렷한 변화가 감지된다. ’Inner city blues’(1971)에서 목격했던 퍼커션의 가열 찬 울림은 70년대 흑인 음악의 대표 트렌드인 ‘펑키 사운드’로의 변화를 예고했고, 앨범으로는 발표 안 된 저주받은 싱글 ‘You ’re the man pt. 1, 2’(1972)에선 가성, 두성, 진성 등 한층 다채로워진 그의 보컬 연기가 압권이다. 재즈에 대한 평소의 관심은 영화 음악 작곡으로도 이어져 노래보다 연주 쪽에 관심이 반영된 영화음악 앨범 < Trouble man >(1972)으로 이어진다. < What’s going on >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 그는 이전의 고뇌하는 흑인 지성임을 포기하고 이번엔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사랑의 전령사로 변신한다. 그의 두 번째 넘버원을 안겨다 준 앨범< Let’s get it on >(1973)은 ‘성 행위’를 찬미하는 노래들로 가득 찬 앨범으로 주변을 다시 한번 어리둥절하게 했다. 빌보드 No.1 곡인 ‘Let’s get it on’은 그를 단번에 섹시 스타로 변모시켰고, 그가 앨범에서 얘기했던 ’자연스러운 성의 표현 ‘은 80년대 들어 프린스나 조지 마이클같은 팝 스타들의 음악 세계로 계승된다. 하지만 그는 당시 첫 아내였던 안나와의 관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재니스라는 여인과 이미 두 집 살림을 차려 아이까지 낳았던 그의 성적 편력은 결국 아내와의 별거로 이어졌고, 한동안 그 충격에 슬럼프에 빠져 마약으로 세월을 보내게 된다. 재기의 몸부림을 친 그는 베리 고디의 주선으로 만난 레온 웨어(Leon Ware)의 곡으로 채워진 앨범 < I want you >(1976)을 발표하지만, 수록곡 ‘I want you’, ’After the dance’가 약간 주목을 받았을 뿐이었다. 히트곡에 목말라하던 그는 1977년 런던 팔라디움 구장에서의 콘서트 더블 실황 앨범< Live at the Palladium >을 발표하며, 13분이 넘는 디스코 곡 ‘Got to give up’을 수록하고, 4분대의 싱글로도 커팅, 그의 세 번째 넘버 원 싱글로 등극된다. 전형적인 댄스뮤직이었던 ’Got to give up’은 팝 차트, 앨 앤 비 차트 1위를 석권하며 그에게 가수로서 회생의 길을 열어준다. 하지만 ‘Got to give up’의 기쁨도 잠시, 결국 그는 안나와 이혼을 하게 되고 ,이혼에 대한 위자료를 다음에 발표하는 앨범 인세로 한다는 합의를 보게 된다. 앨범 < Here, my dear >(1978)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고 수록 곡 ’When did you stop loving me, When did I stop loving you’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만남과 해어짐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그의 뼈저린 고해성사는 아름다운 가사말과 편곡의 세련됨에도 불구, 이렇다할 히트 싱글 없이 앨범은 파묻히며 그의 디스코그래피 중 가장 안 알려진 앨범이 되고 말았다.(엎친데 덮친격으로 안나는 앨범 내용이 사생활 침해라며 소송을 걸기에 이른다.) 첫 번째 아내와의 이혼에 이어 다시 몇 년간은 그에게 혼란의 시기였다. 두 번째 아내였던 제니스와 급기야 파경에 이르렀고, < Love Man >(1979-발매 취소)과 < In our life time >(1981)의 흥행실패는 그를 더욱 마약으로 치닫게 했다. 급기야 그는 1981년 20년간 그에게 산전수전(?) 다 겪게 했던 모타운 사를 떠나, 하와이로 이주, 새로운 출발을 모색한다. 정확히 1년 후인 1982년, CBS 레코드와 전속 계약하며 그에겐 마지막 걸작으로 남게 된 < Midnight Love >(1982)를 발표한다. ‘Let’s get it on’에 버금갈만한 농염한 보컬이 인상적인 싱글 ‘Sexual healing’이 팝 차트 3위까지 오르며 그는 화려하게 재기한다. 공백기 동안대중들과의 소원함을 해소하기 위해 TV 출연 등 다시 활발한 활동을 벌인 그는 베리 고디와 함께 토크쇼에 출연해 둘의 악연(?)을 만회해보려고도 했고, NBA 농구 경기때 미국 국가를 소울 창법으로 불러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지미 헨드릭스가 우드스탁에서 연주했을 때 이후로 최대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재기 의지는 이내 사그러들고 있었다. 이미 코케인에 찌들 때로 찌든 그의 몸은 말을 듣질 않았고 평소에 사이가 안 좋았던 목사인 아버지와의 관계는 조금도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비극은 그의 아버지와의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되고, 1984년 4월, 그의 45회 생일을 하루 앞둔 날, 심한 다툼 끝에 화를 가누지 못한 아버지가 쏜 총에 맞아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그의 어이없는 죽음은 충격적이었다. 많은 흑인 뮤지션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이듬해인 1985년 모타운사와 CBS가 공동으로 그의 미 발표곡을 모은 < Dream of a life time >과 < Romantically Yours >를 내놓는다. 그에 대한 재평가도 활발히 이뤄져 < 롤링스톤 >을 비롯한 록 전문지들은 앞 다투어 그의 앨범 < What’s going on >을 팝 역사에 남을 명반으로 추대하기 시작했고,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그의 이름이 등재된다.
연주 : Mongo Santamaria (몽고 산타마리아 )
재즈 드럼 연주자 재즈 드럼 연주자
재즈 피아니스트 허비 핸콕은 40년이 넘는 활동기간 동안 정통 재즈에서부터 최첨단 일렉트로닉 악기를 내세운 재즈 퓨전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음악 세계를 선보여왔다.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의 영향이 느껴지는 강한 서정성의 < Maiden Voyage >(1965)에서 슬라이 & 패밀리 스톤 풍의 펑키 리듬이 압도적인 < Headhunters >(1973)에 이르기까지 그의 음악은 특정 스타일로 규정될 수 없다. ... 재즈 피아니스트 허비 핸콕은 40년이 넘는 활동기간 동안 정통 재즈에서부터 최첨단 일렉트로닉 악기를 내세운 재즈 퓨전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음악 세계를 선보여왔다.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의 영향이 느껴지는 강한 서정성의 < Maiden Voyage >(1965)에서 슬라이 & 패밀리 스톤 풍의 펑키 리듬이 압도적인 < Headhunters >(1973)에 이르기까지 그의 음악은 특정 스타일로 규정될 수 없다. 정통 재즈에서부터, R&B, 일렉트로닉 뮤직, 펑키 등 다채로운 음악지형도를 펼쳐온 그는 한마디로 ‘변신’을 즐기는 재즈맨이다. 1940년 4월12일 미국 시카고의 사우스사이스에서 허버트 제프리 핸콕(Herbert Jeffery Hancock)이라는 본명으로 태어난 그는 7살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 일찍 두각을 나타내 11살에 이미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모차르트 협주곡 D장조를 연주하는 천재성을 보였다. 기계 다루는데도 재능을 보여 나중에는 재즈 뮤지션으로서는 특이하게 대학서 전자공학을 전공한다. 이런 경력은 그가 1960년대 일렉트릭 피아노인 펜더 로즈(Fender Rhodes)나 클라비넷(Clavinet)과 같은 키보드 사운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대학서 만난 색스폰 주자 행크 모블리, 트럼펫 주자 리 모건과 연주 활동을 하면서 도날드 버드의 권유로 1961년 뉴욕으로 진출해 그의 밴드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재즈맨의 길을 걷게 된다. 잠시 후 재즈 레이블 블루 노트(Blue Note)사가 그에게 계약을 요청, 이듬해인 1962년 데뷔작 < Takin’ off >(1962)를 내놓는다. 호레이스 실버(Horace Silver) 풍의 펑키한 피아노 주법이 인상적인 이 앨범의 수록곡 ‘Watermelon man’은 라틴 재즈 퍼커션 주자인 몽고 산타마리아(Mongo Santamaria)의 노래 버전으로 더 유명하다. 총 7장의 앨범을 블루 노트를 통해 발표하는 동안, 1993년 애시드 재즈그룹 US3가 커버해 유명해진 ‘Cantaloupe island’가 수록된 < Empyrean Isle >(1964)를 비롯하여 < Maiden Voyage >(1965), < Speak Like A Child >(1968)과 같은 명반을 통해 빌 에반스 풍의 서정성과 호레이스 실버의 펑키한 감각을 합쳐놓은 듯한 개성 어린 피아노 연주를 들려줌은 물론, 그의 탁월한 곡 쓰기 실력을 유감 없이 발휘한다. 재즈 솔리스트로서 1960년대 내내 왕성한 활동을 보였지만, 재즈의 대가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에서의 활동은 그가 보다 진취적인 재즈뮤지션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토니 윌리암스(Tony Williams), 론 카터(Ron Carter), 웨인 쇼터(Wayne Shorter),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그리고 허비 핸콕(Herbie Hancock)으로 이루어진 제2기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은 < E. S. P >, < Miles In The Sky >, < Socerrer >, < Nefertiti >, < Filles De Killimanjaro >와 같은 명반을 잇달아 발표한다. 당시 “Miles In The Sky”(1968)를 작업하던 중 마일스 데이비스의 권유로 일렉트릭 피아노를 연주하게 된 허비 핸콕은 칙 코리아(Chick Corea)와 함께 키보드 사운드를 바탕으로 70년대 재즈-록 퓨전의 선두주자로 군림하는 초석을 다진다. 마일스와의 활동이 그가 ‘음악에 다양한 시도를 할 줄 아는 뮤지션’으로 비상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재즈-퓨전’으로의 음악성을 표방했던 1969년 허비 핸콕은 마일스를 벗어나 독립, 므완디시(Mwandish)라는 이름의 7인조 밴드를 결성한다. < Mwandish >(1970), < Crossing >(1971), < Sextant >(1973)에서 실험적인 ‘일렉트로닉-펑키’ 뮤직을 선보인 허비 핸콕은 다양한 종류의 키보드 사운드를 재료로 한 진보적인 재즈-록 퓨전을 선보이며 비평적 찬사를 얻는다. 이런 므완디시 밴드에서 보여준 허비 핸콕의 새로운 시도는 주목할 만했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실험적 사운드에 천착한 음악이 대중들이 수용하기엔 어려웠던 것이다. 허비 핸콕은 자신의 밴드에 쏟은 열정만큼 대중적 성과가 나오지 않자, 당시 유행하던 R&B의 문법을 자신의 음악에 대거 도입한다.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을 통해 경험한 ‘펑키 사운드’에 자신의 지향을 정했고 그 결과 나온 < Headhunters >(1973)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다. 빌보드 앨범 차트 13위까지 오른 이 앨범은 명료한 백 비트를 바탕으로 펑키 사운드가 전면에 부각된 ‘파티용 댄스뮤직’이었다. 200만장 판매라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자신감을 회복한 그는 연이어 발표한 < Thrust >(1974), < Man-Child >(1975), < Secret >(1976)를 계속 히트시키며 재즈 펑크(Jazz- Funk)의 전도사로서 1970년대 내내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재즈 퓨전을 이 시기에 표방하면서도 그는 1977년 V.S.O.P.라는 팀을 결성, 1960년대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에서 연주를 같이 했던 멤버들과 같이 ‘정통 재즈로의 외도(?)’를 즐기기도 한다. 재즈-퓨전에 이어 1980년대 윈턴 마샬리스(Wynton Marshallis)등에 의해 꽃 피운 포스트 밥(Post-bop) 혹은 신(新)전통주의라 불리는 새로운 경향을 그는 이미 V.S.O.P.를 통해 그 도화선을 제시했던 것이다. 1980년대 들어 허비 핸콕은 또 한번의 변신을 감행한다. 1983년 발표한 < Future Shock >에 수록된 ‘Rockit’은 힙합 뮤직에 퍼져있던 스크래치(scratch) 사운드를 도입, 독특한 리듬감이 느껴지는, 이른바 디스코-텍(Disco-Teque) 뮤직을 선보인다. < Head Hunters >에 이어 이번에는 컴퓨터로 찍어 낸 듯한 테크노 음악을 선보이며 다시 한번 음악 관계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 Future Shock >에 이은 1984년 작 < Sound System >으로 연속 그래미상을 거머쥔 허비 핸콕은 재즈 뮤지션의 한계를 뛰어 넘는 폭넓은 활동을 전개한다. 덱스터 고든이 주연했던 1986년 영화 < Round Midnight >에 참여, 이번엔 그래미상이 아닌 아카데미에서 오리지날 스코어 상을 수상한다. 1988년 테크노 팝 앨범 < Perfect Machine >을 끝으로 콜롬비아 레코드사를 떠난 허비 핸콕은 마일스의 추모앨범, TV 쇼 프로그램 진행자, 윈튼 마샬리스와의 협연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인다. 1994년 버브 레코드를 통해 < Dis Is Da Drum >을 발표하여 비평적 찬사를 받는 동시에 < Future Shock >에 이은 테크노 팝 열풍을 재현한다. 1995년엔 커트 코베인, 프린스, 토킹 헤즈, 비틀즈, 사이먼 & 가펑클 등의 록과 팝을 그만의 재즈 연주로 리메이크한 < The New Standard >를 발표했고 1998년엔 조지 거슈인(George Gershwin)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발표한 < Gershwin’s World >를 통해 그의 명성을 공고히 했다. 21세기를 맡아 예순을 넘기면서도 그 특유의 변신은 멈추지 않아 올 9월에 발표한 신작앨범 < Future 2 Future >를 통해서는 일렉트로닉과 다양한 장르의 혼합을 꾀하기도 했다.
재즈-록 그룹 리턴 투 포에버(Return to Forever)의 베이스 주자 스탠리 클락(Stanley Clarke)은 펑키한 베이스 연주가 매력이다. 슬랩(Slap)주법을 통한 다양한 리듬감을 만드는 그의 베이스 연주는 비슷한 시기 자코 패스토리우스(Jaco Pastorius)와 함께 일렉트릭 베이스연주의 가능성을 확산시킨 연주자로 평가된다. 그는 재즈-록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1970년대 초반, 칙 코리아의 ... 재즈-록 그룹 리턴 투 포에버(Return to Forever)의 베이스 주자 스탠리 클락(Stanley Clarke)은 펑키한 베이스 연주가 매력이다. 슬랩(Slap)주법을 통한 다양한 리듬감을 만드는 그의 베이스 연주는 비슷한 시기 자코 패스토리우스(Jaco Pastorius)와 함께 일렉트릭 베이스연주의 가능성을 확산시킨 연주자로 평가된다. 그는 재즈-록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1970년대 초반, 칙 코리아의 ‘리턴 투 포에버’의 창단 멤버로 일렉트릭 베이스를 연주했고 잠시 후에는 < School Days >(1976)처럼 베이스연주가 중심이 된 솔로앨범으로도 찬사를 받았다. 1951년 6월 30일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관심을 보여 바이올린, 첼로, 더블베이스 등을 배우며 음악저인 가정환경 속에서 자랐다. 14세 때 콘트라베이스를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베이스 연주를 시작했고, 필라델피아 뮤직 아카데미에서수학했다. 1960년대 후반 필라델피아 주변의 무명 록 그룹들과 활동하면서 자신의 음악 방향을 세운 그는 1970년 뉴욕으로 활동무대를 옮겨 거기서 아방가르드 재즈 색스폰 주자인 파로아 샌더스(Pharoah sanders)와 호흡을 맞춘다. 이 외에도 길 에반스, 멜 루이스, 호레이스 실버, 스탄 겟츠, 덱스터 고든, 그리고 아트 블레이키와 같은 재즈 명인들과 공연했으며 특히 호레이스 실버(Horace Silver)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6개월 간 미국 투어에 참가,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며 존재를 각인시켰다. 이후 1972년 칙 코리아(Chick Corea)가 이끄는 그룹 리턴 투 포에버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그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리기 시작한다. 이 그룹을 통해 총 7장의 앨범을 발표하는 동안 그는 초기엔 어쿠스틱 베이스 연주를 하다 1973년 하드록 성향의 재즈-퓨전을 표방한 < The Hymn Of Seventh Galaxy >에서부터 일렉트릭 베이스를 손에 잡는다. 1977년 밴드의 해산을 맞이할 때까지 ‘After the cosmic rain’(1973), ‘Vulcan world’(1974), ‘Day ride’(1975), ‘The magician’(1976) 등의 명곡을 작곡, 송라이팅 실력을 유감 없이 발휘한다. 밴드 활동 중에도 솔로 활동을 병행한 스탠리 클락은 1974년엔 일렉트릭 베이스로 완전 전향해 만든 앨범 < Stanley Clarke >은 일렉 베이스의 슬랩 주법의 매력을 한껏 발휘한 수준 작이었다. 이듬해 앨범 < Journey To Love >는 같은 해 < Blow by Blow >를 통해 재즈-퓨전 스타일의 연주음악을 선보인 기타리스트 제프 벡(Jeff Beck)이 참가, ‘Hello Jeff’에서 인상적인 기타 솔로를 들려주었다. 1976년에 발표한 < School Days >는 그의 슬랩 베이스주법의 완성을 보여준 ‘베이스 연주의 교과서’로 통한다. 일렉트릭 기타 연주가 강한 록 필(feel)이 그의 펑키한 베이스 리듬감과 만나면서 ‘재즈-록’의 전형을 보여준 명반이었다. 1979년엔 그의 베이스 연주를 집대성한 < I Wanna Play For You >를 발표했다. 이후 조지 듀크와 함께 클락 듀크 프로젝트(Clarke/Duke Project)를 조직, R&B를 기반으로 한 팝 연주곡들을 발표한다. 점차 그의 음악 성향이 재즈에서 멀어져 가던 상황에서, 1988년에 내놓은 앨범 < If This Bass Could Talk >는 그의 음악 뿌리인 재즈로 회귀하려는 시도가 돋보였다. 1995년에는 일렉 바이올린 주자 장 뤽 폰티(Jean Luc Ponty), 리턴 투 포에버 시절 팀 동료 알 디 메올라(Al Di Meola)와 함께 < Rite Of Spring >을 발표, 다시 한번 그의 바래지 않은 연주기량을 과시했다.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재즈 피아노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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