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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timate Acoustic : The Greatest Acoustic Music (얼티메잇 어쿠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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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Ultimate Acoustic : The Greatest Acoustic Music (얼티메잇 어쿠스틱)

모두가 사랑하는 어쿠스틱 음악 총정리!

[ 4CD / 오리지널 음원 / 절판된 앨범 속 희귀곡 다수 수록 ]
Tom Odell, John Legend, One Direction, Ward Thomas, George Ezra 노래 외 63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SonyMusic | 2017년 03월 17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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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timate Acoustic : The Greatest Acoustic Music (얼티메잇 어쿠스틱)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7년 03월 17일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CD1
  • 01 Magnetised - Acoustic - Tom Odell
  • 02 All Of Me - John Legend
  • 03 Perfect - Stripped - One Direction
  • 04 Cartwheels - Ward Thomas
  • 05 Budapest - George Ezra
  • 06 Black Magic - Acoustic - Little Mix
  • 07 Shut Up And Dance (Live Acoustic) - Walk The Moon
  • 08 Fight Song (Acoustic) - Rachel Platten
  • 09 Jealous - Labrinth
  • 10 Fallin' (Unplugged Version) - Alicia Keys
  • 11 The Sound Of Silence - Simon & Garfunkel
  • 12 Everybody's Talkin' (From "Midnight Cowboy") - Harry Nilsson
  • 13 Cowboys & Kisses (Unplugged Version) - Anastacia
  • 14 Underneath Your Clothes - Shakira
  • 15 Jolene - Dolly Parton
  • 16 Emmylou - Spotify Sessions - First Aid Kit
  • 17 Shelter From The Storm - Bob Dylan
CD2
  • 01 Xo - John Mayer
  • 02 Over My Head (Cable Car) (Acoustic - Live) - Fray, The
  • 03 Picking Up The Pieces (Acoustic Version) - Paloma Faith
  • 04 Let Me Love You (Acoustic Version) - Mario
  • 05 Come Alive (Acoustic) - Leona Lewis
  • 06 Nothing's Real But Love - Rebecca Ferguson
  • 07 No One's Gonna Love You (Live From Spotify Sweden) - Band Of Horses
  • 08 Honest (Acoustic) - Kodaline
  • 09 Call You Home - Kelvin Jones
  • 10 Meet Virginia - Acoustic Version - Train
  • 11 Carry You (Acoustic) - Union J
  • 12 We Just Got Here - Carly Simon
  • 13 Lost - Acoustic - Leo Stannard
  • 14 Once In A While - Acoustic - Timeflies
  • 15 Sunny Came Home - Shawn Colvin
  • 16 Precious Burden - Sophie Zelmani
  • 17 Change The World - Live On MTV Unplugged - Babyface, Eric Clapton
CD3
  • 01 When Love Breaks Down (Acoustic Version) - Prefab Sprout
  • 02 I Know It's Over - Jeff Buckley
  • 03 You And Me - You+Me
  • 04 Simple Song (Acoustic Session) - Shins, The
  • 05 Find My Love - Fairground Attraction
  • 06 She Used To Be Mine - Sara Bareilles
  • 07 She Cries Your Name - Beth Orton
  • 08 Torn Between Two Lovers - Mary Macgregor
  • 09 Poison (Acoustic) - Rita Ora
  • 10 Coming Home - Leon Bridges
  • 11 Here Comes The Sun - Nina Simone
  • 12 Your Love Gets Sweeter (The Abbey Road Version) - Finley Quaye
  • 13 Shiver - Lucy Rose
  • 14 Pass It On - Coral, The
  • 15 Dust In The Wind - Kansas
  • 16 Yesterday's Train - Byrds, The
  • 17 Beneath The Southern Cross - Patti Smith
CD4
  • 01 This Woman's Work (MTV Unplugged) - Maxwell
  • 02 Me And Julio Down By The Schoolyard - Paul Simon
  • 03 I Don't Want To Be (Stripped Version) - Gavin Degraw
  • 04 Edge Of Seventeen - Wind And The Wave, The
  • 05 Wild World (Acoustic Version) - Joanna Wang
  • 06 I'll Never Fall In Love Again - Deacon Blue
  • 07 I Ain't Movin' (Family Stand Acoustic Mix) - Des'ree
  • 08 Who Are You - Acoustic - Fifth Harmony
  • 09 Mother's Spiritual - Laura Nyro
  • 10 Somebody To Die For (Unplugged) - Hurts
  • 11 Burning House - Cam
  • 12 The River (Acoustic Version) - Live
  • 13 A Lighter Shade Of Blue - Shelby Lynne
  • 14 Longer - Dan Fogelberg
  • 15 Southern Comfort Zone (Acoustic Version) - Brad Paisley
  • 16 Arms Of Mary - Sutherland Brothers, The
  • 17 Light My Fire - Jose Feliciano

아티스트 소개 (68명)

R&B, 소울 가수 R&B, 소울 가수
노래 : One Direction (원 디렉션 (아이돌 밴드))
멤버 : 니엘 호란(Niall Horan), 잔 말리크(Zayn Malik), 리암 페인(Liam Payne), 해리 스타일스(Harry Styles), 루이스 톰린슨(Louis Tomlinson) 이 5명의 소년들이 원 디렉션을 함께 하게 된 계기는 꽤나 이색적이다.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 엑스펙터(X-Factor) 시즌7에서 각각 개인별 오디션에 참가하게 된 이들은 패널인 사이먼 코웰, 니콜 셰르징거에 의... 멤버 : 니엘 호란(Niall Horan), 잔 말리크(Zayn Malik), 리암 페인(Liam Payne), 해리 스타일스(Harry Styles), 루이스 톰린슨(Louis Tomlinson)

이 5명의 소년들이 원 디렉션을 함께 하게 된 계기는 꽤나 이색적이다.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 엑스펙터(X-Factor) 시즌7에서 각각 개인별 오디션에 참가하게 된 이들은 패널인 사이먼 코웰, 니콜 셰르징거에 의해 그룹으로 결성하는 것이 어떠겠냐는 제안을 받게 되고, 다섯 소년은 이를 계기로 '원 디렉션(One Direction)'이란 그룹을 결성하게 되며, 엑스팩터 파이널 리스트까지 진출하게 된다. 이들은 최종 파이널에서 아쉽게도 최종 3위를 차지했지만, 액스팩터가 끝난 후 결국 팝 계 최고의 영향력 있는 인물인 사이먼 코웰의'Syco Music'과 계약을 체결하면서 정식 데뷔하기에 이르렀다. 2011년 11월 18일 유럽지역에서 가장 먼저 선보인 데뷔앨범 [Up All Night]는 먼저 아일랜드에서는 첫 주 앨범 차트 3위에 오르며 화려하게 데뷔했고, 영국에서는 첫 주 138,631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UK 앨범차트 2위로 데뷔했다.
노래 : Ward Thomas (워드 토마스 (컨트리 듀오 밴드))
멤버 : Perrie Edwards, Jesy Nelson, Leigh-Anne Pinnock, Jade Thirlwall 멤버 : Perrie Edwards, Jesy Nelson, Leigh-Anne Pinnock, Jade Thirlwall
노래 : Rachel Platten (레이첼 플래튼)
2002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핵심부문인 ‘올해의 곡’(Song of the year)과 ‘최우수신인’상을 포함해 ‘여성 R&B 보컬’ ‘R&B 앨범’ ‘R&B 송’ 등 5개 부문을 석권한 앨리샤 키스(Alicia Keys)는 뉴 밀레니엄 초반의 R&B 음악양식을 대표하는 가수라고 할 수 있다. 어번(Urban) R&B라고 단순 정의할 수 없을 만큼 전통과 현대가 절묘하게 조화된 고유상표의 음악을 들려준다. 귀에... 2002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핵심부문인 ‘올해의 곡’(Song of the year)과 ‘최우수신인’상을 포함해 ‘여성 R&B 보컬’ ‘R&B 앨범’ ‘R&B 송’ 등 5개 부문을 석권한 앨리샤 키스(Alicia Keys)는 뉴 밀레니엄 초반의 R&B 음악양식을 대표하는 가수라고 할 수 있다. 어번(Urban) R&B라고 단순 정의할 수 없을 만큼 전통과 현대가 절묘하게 조화된 고유상표의 음악을 들려준다. 귀에 잘 들리는 피아노 멜로디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가스펠을 연상시키는 소울 식의 고전적 창법이 트레이드마크이며, 이 때문에 1970년대 여성 소울의 거성인 로버타 플랙(Roberta Flack)과 자주 비교되곤 한다. 하지만 재래의 미학만을 고집하는 복고형 R&B라고 하기보다는 거기에다 현대적 힙합 분위기를 삼투한 최신 스타일을 부각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 어반이란 수식어가 붙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를테면 과거 블루스와 재즈에 뿌리를 둔 음악을 현대적 창구로 전달하는 셈인데 실제로 피아노의 선율, 1970년대 풍의 소울 창법, 세련된 힙합 분위기가 어울린 그녀의 ‘모던한’ 데뷔 앨범 [Songs In A Minor]는 2001년에 발표되어 화려히 인기차트를 누볐다. 미국 뉴욕 토박이로 1982년에 태어난 앨리샤 키스는 어렸을 적부터 음악을 자신의 미래분야로 삼아 맨하탄의 퍼포먼스 아트 스쿨(Performance Art School)에서 합창을 훈련했고 10대 내내 피아노교습에 열중한다. 이 합창과 피아노는 훗날 데뷔 앨범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아울러 피아노 외의 다른 악기 연주는 물론, 작곡 편곡 등 음악작업 전반에 걸친 실력과 감각을 쌓았다. 고교를 졸업한 16살에 명문 콜롬비아 대학에 입학했지만 음악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학업을 도중 포기했고 대신 1998년 명문 레코드사인 아리스타(Arista)와 계약을 체결한다. 아리스타 사장이었던 클라이브 데이비스(Clive Davis)에 의해 픽업된 관계로, 그가 1999년 아리스타를 떠나 새로운 레이블 제이(J)를 출범시키자 앨리샤도 그를 따라 제이 레코드사로 적을 옮기게 된다. 19살이던 2001년 데뷔 앨범 [Songs In A Minor]이 발표되었고 이 음반은 데뷔와 동시에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을 밟는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다. 특히 자신이 프로듀스한 첫 싱글 ‘Fallin’’은 전미차트 2주간 1위를 차지했다. 그녀의 각별한 신구(新舊)결합형 음악은 시장 뿐 아니라 마침내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 그리고 그래미상이라는 공인 절차마저 거뜬히 통과했다.
노래 : Simon & Garfunkel (사이먼 앤 가펑클)
멤버 : 폴 사이먼(Paul Simon, 보컬), 아트 가펑클(Art Garfunkel, 기타, 보컬) 멤버 : 폴 사이먼(Paul Simon, 보컬), 아트 가펑클(Art Garfunkel, 기타, 보컬)
노래 : Shakira (샤키라,Shakira Isabel Mebarak Ripoll)
제니퍼 로페즈(Jennifer Lopez), 마크 앤서니(Marc Anthony), 엔리케 이글레시아스(Enrique Iglesias), 그리고 무엇보다 노장 산타나(Santana) 등의 연이은 선전에도 불구, 라틴 팝의 황제 리키 마틴(Ricky Martin)의 추락은 실로 충격이었다. 본토 팝 시장에서 일정 지분 이상을 지속적으로 확보하며 신흥 메카로 자리잡았던 라틴 열풍이 점차 그 위용을 잃어가는 것 아니냐... 제니퍼 로페즈(Jennifer Lopez), 마크 앤서니(Marc Anthony), 엔리케 이글레시아스(Enrique Iglesias), 그리고 무엇보다 노장 산타나(Santana) 등의 연이은 선전에도 불구, 라틴 팝의 황제 리키 마틴(Ricky Martin)의 추락은 실로 충격이었다. 본토 팝 시장에서 일정 지분 이상을 지속적으로 확보하며 신흥 메카로 자리잡았던 라틴 열풍이 점차 그 위용을 잃어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관측이 빗발쳤다. 확실히 그 즈음의 라틴 뮤직은 ‘젊고 신선한 피’의 수혈이 시급했다. 때에 맞춰 무대에 입성한 샤키라(Shakira)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섹시한 자태와 화끈한 춤 실력, 거기에 수준 이상의 음악성 까지. 제1회 라틴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여성 팝 보컬’과 ‘최우수 여성 록 보컬’ 부문을 수상, 미리 검증 절차를 끝마친 점도 그의 미국 정복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뉴 라틴 팝 헤로인으로 단숨에 떠오른 샤키라의 본명은 샤키라 이사벨 메바랙 리폴(Shakira Isabel Mebarak Ripoll). 1977년 콜롬비아에서 태어난 그는 콜롬비아 토박이인 어머니와 레바논 이민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두 문화권의 음악을 모두 섭렵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동시에 영미 헤비메탈에도 심취, 자신만의 사운드 메커니즘 설계도를 그려나갔다. 8살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던 그는 5년 뒤인 1991년에 데뷔작 < Magia >(Magic)로 음악 인생의 출항 경적을 울렸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 상당한 성숙미를 내뿜은 점이 호평을 이끌어내며 샤키라는 모국에서 서서히 명성의 탑을 쌓아나갔다. 그는 1993년의 소포모어 음반 < Peligro >(Danger)에서 팝에 경도된 소리샘을 구현하며 본격적인 야심을 드러냈다. 허나 별다른 피드백을 얻지 못한데 좌절, TV 드라마에 얼굴품을 팔며 재기전 준비에 들어갔다. 절치부심 끝에 1995년 선보였던 3집 < Pies Descalzos >(Bare Feet)의 성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브라질, 스페인을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선전을 기반으로 결국 미국에서도 100만장 이상을 세일즈 했던 것. 무엇보다 록의 에센스를 포섭한 것이 성공의 주동인(動因)이었다. 1997년 리믹스 앨범인 < The Remixes >의 발표 즈음에 그는 글로리아 에스테판(Gloir Estefan)의 남편이자 탁월한 비즈니스맨인 에밀리오 에스테판(Emilio Estefan)과 매니저 계약을 체결, 월드 스타가 되기 위한 시금석을 마련했다. 이후 등장한 작품이 바로 1998년의 < Donde Estan Los Ladrones? >(Where Are The Thieves?). 에밀리오 에스테판과 공동 프로듀스를 담당한 음반은 빌보드 라틴 앨범 차트 1위를 무려 11주간 수성하며 샤키라 시대의 개막 축포를 터뜨렸다. 싱글 ‘Ciega, Sordomuda’, ‘Tu’ 등은 라틴 싱글 차트 정상을 꿰찼고 ‘Ojos As?’도 팬들의 폭 넓은 지지를 획득했다. 모두 라틴과 록, 중동풍 사운드의 트로이카적 조화를 일궈낸 덕분이었다. 이후 < MTV Unplugged >(2000)로 앞서 설명한 라틴 그래미 2개 부문과 그래미 라틴 팝 앨범 트로피를 차지한 그는 2001년의 < Laundry Service >로 그간 소망하던 모든 꿈을 이뤄냈다. 무엇보다 미국 마케팅을 겨냥해 대부분의 곡을 영어로 써낸 점이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했다. 빌보드 앨범 차트 3위, 트리플 플래티넘, ‘Whenever, Wherever’(6위) ‘Underneath Your Clothes’(9위) 등의 탑 텐 히트 송이 이를 잘 대변해주었다.
1990년대 초반 국내에서 컨트리 곡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100만장의 판매고를 보인 < 보디가드 >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의 ‘I will always love you’를 비롯해 4인조 보컬 그룹 올 포 원(All 4 One)의 ‘I swear’, ‘I can love you like that’ 등의 원곡은 모두 컨트리 아티스트의 노래였다. ‘I wi... 1990년대 초반 국내에서 컨트리 곡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100만장의 판매고를 보인 < 보디가드 >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의 ‘I will always love you’를 비롯해 4인조 보컬 그룹 올 포 원(All 4 One)의 ‘I swear’, ‘I can love you like that’ 등의 원곡은 모두 컨트리 아티스트의 노래였다. ‘I will always love you’는 ‘9 to 5''로 유명한 돌리 파튼(Dolly Parton)이 1974년에 발표한 노래이고, ‘I swear’와 ‘I can love you like that’은 남성 컨트리 싱어 존 마이클 몽고메리(John Michael Montgomery)의 원곡을 커버한 것이다. 1946년 1월 19일 컨트리 음악의 심장부 테네시 주에서 출생한 돌리 파튼은 작사, 작곡은 물론 영화 배우와 TV 프로그램 사회자로도 활동하는 컨트리 계의 만능 엔터테이너이자 실력자다. 1960년대 컨트리 싱어 포터 와고너(Porter Wagoner)와 결혼 반지를 주고받은 그녀는 1960년대 후반에 발표한 음반들을 통해 차세대 컨트리 음악의 기대주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30여 년이 지난 현재는 컨트리 음악계의 거목으로 대우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은발의 컨트리 여성 싱어에 대한 국내 팬들의 관심은 1980년대 영화 < 나인 투 파이브 >가 개봉하면서 드높아졌다. 영화의 주연도 맡고 주제가도 불러 제작비를 절감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그녀는 이 곡으로 컨트리 차트는 물론 생애 처음으로 싱글 차트에서도 정상을 차지하면서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인 만능 연예인으로 급부상했다. 이후 영화 출연에 적극적이었던 돌리는 버트 레이놀즈(Burt Reynolds), 실베스터 스탤론(Sylvester Stallone) 등과 함께 스크린에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고 그녀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여하는 음악을 소홀히 하진 않았다. 거의 매년 새로운 음반을 발표했고, 1983년에는 비지스(Bee Gees)의 배리 깁(Barry Gibb)이 작곡한 ‘Islands in the stream’을 케니 로저스(Kenny Rogers)와 듀엣으로 취입해 다시 한번 싱글 차트를 탈환했다. 이 곡에서 케니 로저스가 돌리 파튼의 보컬에 눌린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보컬이나 곡의 소화력은 압권이었다. 그러나 밀물로 들어왔으면 썰물로 나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 1980년대 초반 이렇듯 화려한 시절을 보냈지만 1980년대 중반에는 그녀의 음악 인생 중 가장 우울한 시기를 겪게 된다. 더 이상 컨트리 팝은 컨트리 팬들은 물론 팝 팬들에게도 어필하지 못했다. 그 타개책으로 이 영특한 가수가 선택한 것은 린다 론스태드(Linda Ronstadt), 에밀루 해리스(Emmylou Harris)와 함께 정통 컨트리로 회귀한 음반 < Trio >였다. 그 당시 랜디 트래비스(Randy Travis)를 중심으로 신 전통주의 컨트리가 개화하려던 시점을 정확히 포착한 이 앨범으로 그녀는 다시 한번 멋지게 부활했다. 돌리 레베카 파튼(Dolly Rebecca Parton-본명)은 현재까지 새로운 앨범을 제작하고 구상하면서 컨트리 음악계의 지존으로 남아 있다. Hello Dolly!
노래 : Bob Dylan (밥 딜런 ,Robert Allen Zimmerman)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eatles) 그리고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와 함께 최정상의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이들 ‘전설의 빅 4’ 가운데에서도 딜런이 남긴 궤적은 차별화 아닌 특화(特化)되어 역사를 장식한다.

얼핏 그의 위상은 ‘실적주의’로 따질 때 매우 허약해 보인다. 엘비스, 비틀스, 롤링 스톤즈는 그 화려한 전설에 걸맞게 무수한 히트곡을 쏟아냈다. 넘버 원 히트곡만 치더라도 엘비스는 18곡(통산 2위), 비틀스는 20곡(1위), 스톤즈는 8곡(11위)이나 된다. 하지만 딜런은 그 흔한 차트 1위곡 하나가 없다. ‘Like a rolling stone’과 ‘Rainy day woman #12 & 35’ 등 두 곡이 2위에 오른 것이 고작이다. 차트 톱 10을 기록한 곡을 다 합쳐봐야 4곡에 불과할 뿐이다. 그에게 대중성이란 어휘는 어울리지 않는다. 상업적이란 말과는 아예 인연이 없다. 이렇듯 실적이 미미한 데도 록의 역사는 마치 신주 모시듯 그를 전설적 존재로 떠받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는 차트 정복 외에도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비록 그 가지는 다를지언정 ‘록의 스타일 확립’ 이라는 몸체는 유사하다는 것이다.

비틀스는 록의 예술적 지반을 확대했고, 스톤즈는 록에 헌신하며 형식미를 완성했고, 엘비스는 록의 정체성을 부여했다고들 한다. 분명히 딜런도 몸체에 자리한다. 깃털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타(他) 3인의 몸체가 외양이라면 그는 ‘내면’ 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노랫말이요, 메시지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음악은 사운드와 형식만으로 이미 메시지가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로큰롤이 폭발하여 확산되던 시점인 1950년대, 즉 엘비스가 활약하던 당시에 로큰롤은 메시지가 없었다. 1960년대 들어서 비틀스가 미국을 급습해 록의 르네상스를 일궈내고 있던 때까지도 록은 의미있는 가사와 격리된 상태였다. 그래서 의식계층으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그 때 밥 딜런이 있었다. 비틀스는 누구보다 먼저 딜런의 위력을 절감했다. 그의 포크 사운드와 메시지를 귀담아 듣고 그것을 자신들의 음악에 적극 수용한다. 1965년말 < Rubber Soul > 앨범의 수록곡인 ‘In my life’, ‘Girl’, ‘Norwegian wood’ 등에서 ‘톤 다운’ 을 드러내며 메시지를 잠복시킨 것은 전적으로 딜런의 영향 때문이었다.

밥 딜런은 실로 대중 음악의 지성사(知性史)를 이룬다. 타임(Time)지의 제이 칵스는 1989년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존 업다이크의 소설과 밥 딜런의 앨범 가운데 어느 것이 미국인들의 삶에 보다 자극을 주었는가? 존 업다이크 쪽에 표를 던진 사람이라면 이 기사를 여기까지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가사는 그러나 때론 메시지의 파악이 어려운 ‘난해한 현대시’ 와 같다. 밑줄 긋고 열심히 분석해도 도대체 명쾌하지가 않다. 1960년대 중반 < Another side of Bob Dylan >, < Bring it all black home >, < Highway 61 revisited >가 연속 발표되었을 때, 미국 각 대학의 영문과에 ‘밥 딜런 시분석’ 강좌 개설이 유행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팝팬들에게 딜런이 상대적으로 소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에게도 이 정도인데 영어의 벽에 막혀 있는 우리가 어찌 그를 쉽게 수용할 수 있었겠는가. 때문인지 음반마저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초기곡으로 알려진 것은 그나마 메시지가 확연한 ‘Blowin’ in the wind’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1970년대 중반의 금지곡 태풍으로 반전(反戰) 노래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방송과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 외 우리 팝 인구에 회자된 노래로 ‘One more cup of coffee’나 ‘Knockin’ on heaven’s door’가 있다. 그러나 그의 대표곡 반열에도 오르지 못하는 ‘One more cup of coffee’가 통한 것은 단지 낭만적 제목과 함께 친숙한 선율 때문이었을 뿐, 딜런의 음악 세계에 대한 천착의 결과물은 전혀 아니었다. ‘Knockin’ on heaven’s door’ 인기의 영예도 실은 건스 앤 로지스가 더 누렸다.

극소수의 곡을 제외하고 밥 딜런은 우리에게 인기가 없었다.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에 비한다면 엄청난 ‘부당 대우’였다. 언어 장벽과 무관한 음악 스타일 측면에서도 우리의 ‘홀대’ 는 마찬가지였다. 멜로디가 그럴싸한 곡이 있더라도 풍기는 내음이 지극히 ‘미국적’ 이었기에 우리의 청취 감성은 딜런을 꺼리곤 했다. 그의 음악 세계라 할 포크, 컨트리, 블루스는 미국 전통과 긴밀한 함수 관계를 지닌다. 선율과 사운드의 영국적인 맛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그의 음악에 잠기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사이에 우린 어느덧 딜런과 크게 멀어져버렸다. 록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꼭 딜런에서 막힌다. 신세대 가운데 더러는 우리의 팝 수용 문화에서 딜런 공백이 가져온 취약성을 맹렬히 질타하기도 한다. 우리 기준에서의 ‘팝 음악 여과’는 바람직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의역은 정확한 직역이 기초돼야 올바르다. 미국의 해석을 전제한 뒤라야 우리식 필터링의 의의가 배가된다.

그 직역의 첫 번째 대상이 바로 밥 딜런이다. 밥 딜런이 미국의 현대 음악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그의 음악몸체가 곧 시대와 세대의 흐름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딜런의 음악이 변화하는 과정과 그것을 있게 한 배경, 또한 그것을 주도해간 그의 자세는 ‘음악외적 환경’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먼저 포크 록(Folk-Rock)이다. 그가 1960년대 초반 저항적인 모던 포크로 베이비 붐 세대를 견인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통기타만으로 연주되는 단순한 구조이지만 그것의 포획력은 비틀스가 사정권에 들어올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비틀스가 베이비 붐 세대를 발현시켰다면 그는 그들의 의식화를 유도했다. 그러나 딜런은 케네디의 피살에 자극받으면서 스스로 ‘위기감’ 을 불어넣는다. 이미 비틀스가 세대의 청취 볼륨을 증폭시킨 마당에 포크의 음량 가지고 과연 세대를 관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71년 그는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그들(비틀스)은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코드는 정말 도에 지나친 것이었지만 하모니가 그것을 타당하게끔 했다. 그러나 맹세하건데 난 정말 그들에게 빠졌다. 모두들 그들이 어린 10대를 위한 광대이며 곧 사라질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내겐 명확했다. 그들이 지속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난 그들이 음악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머리 속에는 비틀스가 전부였다.” 그는 일렉트릭 기타를 잡아야 했다. 그것이 포크 록이었다. 포크의 순정파들로부터 배신자라는 질타는 불 보듯 뻔했다. 그가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알 쿠퍼(Al Kooper), 마이크 블룸필드(Mike Boomfield)가 참여한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Butterfield Blues Band)와 함께 전기 기타 연주를 했을 때 관중들은 “이건 포크 공연이야 나가!”라고 야유하며 돌과 계란 세례를 퍼부었다. 무대에서 내쫓긴 그는 통기타를 들고 되돌아왔지만 의미심장한 ‘It’s all over now’, ‘Baby blue’를 부르며 포크 관객들에게 아듀를 고했다. 껄끄러운 통과의례를 거친 뒤 밥 딜런의 포크 록은 ’Like a rolling stone’의 빅히트와 함께 만개했다. 이젠 막을 자도 없어졌다. 포크 록은 당시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존 레논과 밥 딜런을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 그룹 버즈(Byrds)는 ‘Mr. Tambourine man’으로 인기 가도를 질주했다. 그러나 그 곡은 딜런의 작품이었다.

버즈 뿐만 아니라 당시 포크 록계열 뮤지션치고 딜런의 곡을 손대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단숨에 포크 록은 1960년대 록의 주류로 부상했다. 1960년대 중.후반을 강타한 싸이키델릭 록(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도 실상 포크 록에 영향받은 흐름이었다. 그럼 어째서 포크 록은 1960년대 청춘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의식을 대변할 수 있었을까? 비틀스가 딜런에게 배우고, 딜런이 비틀스로부터 영감을 얻은 ‘포크와 록의 결합’ 은 시대성 견인을 가능케 한 절묘한 무브먼트였다. 록은 생태적으로 거리의 청춘에 의해 확립된 ‘하위문화적 표현’이다. 따라서 하이 클래스나 인텔리겐차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다. 또한 포크는 저항성을 견지하는 민중 음악이지만 음악의 주체나 주소비자층은 학생과 지식인 세력이다. 성질상 엇비슷하면서도 걸어온 길이나 ‘계급성’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밥 딜런이 포크 오리지널로부터 급격히 퇴각하여 록으로 전향한 것은 단지 추세의 편승이 아닌 완전함을 향한 ‘하층문화의 긴급 수혈’로 보인다. 이를테면 ‘위’의 고매한 문제의식과 ‘아래’의 근원적 반항을 한고리로 엮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항 영역의 지반 확대와 수요자의 확충을 기할 가능성은 올라가게 된다.

지식인만이 아닌 1960년대 젊은이들의 ‘계층포괄적 무브먼트’ 는 포크 록과 이 점에 있어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1960년대 중후반을 물들인 ‘히피보헤미안’ 물결도 딜런과 떼어낼 수 없는 흐름. 1960년대 록 역사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부분이다. ‘Like a rolling stone’은 포크 지식인의 소리라기보다 보헤미안적 정서의 노출로 파악해야 한다. 당시 딜런은 가치의 상대성을 신뢰하고 제도에 흡수되기룰 거부하는 이른바 비트(Beat) 사상에 빠져 있었다. 그가 진보적 시인인 알렌 긴스버그(Allen Ginsberg)와 교류하며 ‘개인 혁명’에 골똘해 있을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다. 비트는 이후 히피의 융기에 주요 인자가 되는데, 1960년대 중반 딜런의 음악을 가로지르는 것이 바로 이 ‘히피 보헤미안 정서’라 할 수 있다. 스스로 록 세계로 옮아가고 방랑적 지향을 설파한 것은 기존과 기성의 틀 깨기에 목말라 있던 베이비 붐 세대들에게 영도자가 제공한 ‘산교육’과 다름없었다. 따라서 밥 딜런은 그에게 등을 돌린 포크 근본주의자들의 수보다 휠씬 더 많은 록팬을 거뜬히 확보하게 된다. 음악적으로 딜런의 창작성이 이 때만큼 가공의 위력을 떨친 적도 없다. < Highway 61 Revisited >와 < Blonde On Blonde > 앨범은 포크의 엄숙주의에서 해방되어 록과의 결합으로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포획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음악은 ‘남을 위해’ 이데올로기에 봉사한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즐거움이 가져온 산물이기도 했다. 그가 포크의 프로테스트로부터 이탈한 것은 바로 ‘자유’와 등식화되는 ‘예술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는 저항성 대신 예술성을 얻었다. 개인적 경사도 겹쳤다. 사적으로 사라 로운즈와의 결혼은 그의 창작력 한층 북돋아주었으며 그 충만한 행복감은 그대로 < Blonde On Blonde > 앨범에 나타났다. 이 앨범의 탁월한 질감은 상당부분 사라와의 결혼이 낳은 것이라는 게 평자들의 일치된 시각이다. 나중 사라와의 파경 또한 그에게 또 하나의 명반 < Blood On The Tracks >를 안겨준다. 히피의 낭만적인 집단주의와 곧바로 이어진 이피(Yippie)의 전투성이 극에 달할 무렵 그가 뉴욕의 외곽 빅 핑크(Big Pink) 지하실에서 한가로이 더 밴드(The Band)의 멤버들과 자유 세션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가 가져온 행보이기도 했지만 그가 의도적으로 은둔을 택한 것은 분명했다. 세상이 소란함으로 가득할 때 그는 정반대로 정적을 취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물꼬를 터준 미국 사회의 격랑이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을 것으로 예측했는지도 모른다. 세대의 공동체 지향은 지극히 ‘비이성적’으로 비춰졌을 테고 오히려 그는 그럴수록 자신에게 돌아와 근본을 탐구하는 것이 올바른 행위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한 심저(心底)가 < John wesley Harding >과 < Nashiville Skyline >의 골간에 자리한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뜻밖에’ 재래식 컨트리 음악을 선보였다. 두 앨범은 모두 내쉬빌에서 녹음되었고 < Nashiville Skyline >의 경우 딜런은 컨트리 음악의 거성 자니 캐시(Johnny Cash)와 듀오로 ‘Girl from the north country’에서 다정히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이 앨범에서 톱 10 히트곡 ‘Lay lady lay’가 나왔다. 이 곡을 비롯해 대부분의 수록곡에서 딜런의 보컬은 예의 날카로움이 거세된 채 한결 부드러워졌고 가사도 접근이 비교적 용이해지는 등 멜로딕한 무드가 전체를 지배했다. 다시 세상은 소용돌이에서 호수의 조용함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1970년대 초반의 분위기였다. 딜런이 씨앗을 뿌린 ‘컨트리 록’ 은 1970년대 내내 주요 장르 중 하나로 맹위를 떨쳤다.

딜런은 언제나 흐름의 주역이었다. 나중 음반화된 더 밴드와의 세션 앨범 < Basement Tapes >가 록 역사에서 ‘특혜’를 받는 것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970년대 들어서 그는 ‘대중적’ 관점에서 뿌리에 대한 천착에 박차를 가했다. 예전에 그는 ‘좋은 사람만 따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이 많이 따를수록 좋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그가 1970년 < Self Portrait > 앨범에서 ‘Moon river’를 포함한 팝 스탠다드 넘버들을 노래한 것은 이러한 사고와 맥락이 닿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눈을 흘겼다. 레코드 월드(Record World)지는 이 앨범을 두고 “혁명은 끝났다. 밥 딜런이 ‘미스터 존스’에게 ‘Blue moon’을 불러주고 있다”며 혹평했다.(미스터 존스는 딜런이 < Highway 61 Revisited >의 ‘Ballad of thin man’에서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 존스 씨?”라고 했던 가공의 인물로 ‘제도권 인사’를 상징한다.) 빌보드 차트3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처럼 평단의 이해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 Self Portrait >앨범을 상업적 표현으로 볼 수는 없다. 비판의 칼을 휘두르는 비평가들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근본을 탐구하는 방법론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딜런이 1970년대 후반부에 기독교에 귀의한 것도 비슷한 문맥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사실 신(神)에의 의지가 엿보인 < Show Train Coming >, < Saved >, < Shot Of Love > 등 3장의 종교풍 음반은 ‘사고의 깊이’가 두드러졌지만 ‘변신’이라는 부정적 의미에 가치가 함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1970년대 딜런을 ‘혼미의 거듭’으로 규정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그것을 뒤집어보면 그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에 충실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아티스트의 본령이다. 밥 딜런은 언제나 음악을 통해 세상과 삶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고자 했다.

1980년대의 밥 딜런은 1970년대의 습기를 벗고 ‘열기’를 회복한다. 정치적 시각도 이입한 < Infidels >, < Empire Burlesque > 그리고 1989년에 나온 < Oh Mercy >는 이전의 앨범들과 명백한 분리선을 긋는다. 날카로운 보컬은 오히려 1960년대의 모습에 더 가깝다. 그는 1980년대 중반 라이브 에이드(Live Aid),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아티스트의 모임(Sun City) 등 일련의 자선행사에 얼굴을 내밀어 저항 전선에 복귀했다. 한 무대에서 그는 U2의 보노(Bono)와 함께 ‘Blowin’ in the wind’를 부르기도 했다. 딜런의 1980년대 앨범들에는 당시의 보수적이고 위압적 풍토를 거부하는 저항성이 숨쉰다. 그는 시대의 주류 한복판에는 없었지만 ‘시대의 공기’와 늘 함께 호흡했다. 그 공기를 어떤 때는 앞장 서 조성하고 어떤 때는 그것을 피해갔다. 밥 딜런의 한 면만을 바라보게 되면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그가 서 있던 ‘양쪽’ 자리를 다 관찰해야만 그 ‘드라마틱한 록 역사의 굴곡’ 을 읽을 수 있다. 록의 역사는 실로 위와 아래, 진보와 보수, 주류와 비주류, 기존과 대안이 끊임없이 부침을 되풀이 해왔다. 밥 딜런이 밟아온 길은 그것의 축소판이었다. 그러나 어떤 시점에서라도 - 가령 프로테스트의 깃발을 울렸을 때나, 대중성에 기웃거렸을 때나 - 딜런이 주변의 압박에 수동적으로 임한 적은 없다. 남이 시켜서 일렉트릭의 세계로 떠밀려 간 것이 아니었고, 의도적으로 신비를 축적하기 위해 은둔했던 것도 아니다. 그의 터전은 언제나 자신의 의지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비평가들이 밥 딜런을 전설로 숭앙하는 것은 그가 대중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문 ‘음악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음악인의 최고 영예인 ‘아티스트’란 소리를 들어 마땅했다. 그는 록에 언어를 불어넣었다. 포크와 컨트리를 록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시대와 맞서기도 했고 자신의 예술성에 천착하기도 했다. 그러한 업적과 성과의 편린들이 모여 그의 ‘광활한 아티스트의 세계를 축조하고 있다. 밥 딜런은 역사의 수혜와 위협 속에서 ‘인간’을 살려냈다. 음악인으로서 인간의 몸체는 다름 아닌 자유일 것이다. 밥 딜런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버클리 음악 학교에 입학하며 뮤지션으로서의 꿈을 키워가던 한 젊은이. 얼마지 않아 그는 아버지가 주신 돈을 몽땅 써버려 위기(?)에 봉착한다. 궁해진 아들에게 돈을 주며 아버지가 던졌던 한마디. “네 음반이 플래티넘을 따내거든, 결코 날 잊어선 안돼.” 그리고 정확히 5년 뒤 그는 소포모어 앨범으로 플래티넘 고지를 정복하며 부모의 기대에 완벽히 부응한다. 바로 ’아름다운 청년’ 존 마이어(John Mayer)다.... 버클리 음악 학교에 입학하며 뮤지션으로서의 꿈을 키워가던 한 젊은이. 얼마지 않아 그는 아버지가 주신 돈을 몽땅 써버려 위기(?)에 봉착한다. 궁해진 아들에게 돈을 주며 아버지가 던졌던 한마디. “네 음반이 플래티넘을 따내거든, 결코 날 잊어선 안돼.” 그리고 정확히 5년 뒤 그는 소포모어 앨범으로 플래티넘 고지를 정복하며 부모의 기대에 완벽히 부응한다. 바로 ’아름다운 청년’ 존 마이어(John Mayer)다. 존 마이어는 미국 커네티컷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 세 살에 이웃이 건네 준 스티비 레이 본(Stevie Ray Vaughan)의 음악에 심취, 블루스 기타리스트로써 인생의 미래를 설계했다. 이후 오직 연습에만 매진한 결과 지방의 조그마한 바에서 출중한 연주 실력으로 좌중을 사로잡았다. 기타를 손에 잡은 지 불과 2년만의 일이었다. 허나 그는 곧 음악 항로를 새로이 수정했다. 기타 플레이어가 아닌 ’좋은 곡을 쓸 줄 아는 뮤지션’이 그 해답이었다. 기타 테크닉보다 멜로디와 리듬의 전체적인 어울림을 높이는데 필요한 송 라이팅 능력을 길러나갔던 것이다. 열 아홉 살이 되자 존 마이어는 버클리 음악 학교에 입학하며 진로를 본격 모색했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이내 학교를 그만두었다. 음악을 ’공부’하기보다 그것을 ’연주’하기 원하는 자신의 내적 욕망을 절감한 때문이었다. 친구의 권유로 아틀랜타로 남행한 이 전도유망한 싱어 송라이터는 에디의 애틱(Eddie’s Attic)등의 나이트클럽에서 공연을 펼치며 기회를 엿봤다. 1999년에는 인디 레이블에서 을 발매하며 지역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2000년, 드디어 그에게 도약의 때가 찾아왔다. 당해 거행된 에서의 인상적인 퍼포먼스로 메이저 레이블 스카우터들의 레이다에 포착된 것. 결국 컬럼비아 산하의 와 계약을 체결한 존 마이어는 2001년 데뷔작 (1963년 행크 모블리의 작품 에서 따왔다.)를 내놓으며 주류 무대로 입성했다. ’No such thing’, ’Your body is wonderland’ 등의 싱글들이 히트 퍼레이드를 펼치며 최고 차트 15위까지 음반을 견인했다. 현재 무려 200만장을 세일즈하며 50주 이상 빌보드 차트에 머무는 중이다. 무엇보다 데이비드 그레이(David Gray), 데이브 매튜스(Dave Matthews) 등을 연상케 하는 편안한 보이스와 탁월한 선율 감각, 오랜 수련으로 다져진 기타 실력 등이 성공의 주동인(動因)이었다.
노래 : Paloma Faith (팔로마 페이스)
노래 : Mario (마리오,Mario Barett)
*1986년 미국 생. 본명은 마리오 버레트(Mario Barett). *스스로를 '보이 원더(Boy Wonder)'라 칭할 정도로 R&B의 거장 스티비 원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브라이언 맥나이트, 어셔, 마이클 잭슨 등을 우상으로 성장. *14살 되던 해, 현존하는 팝계 최고의 마이다스, 클라이브 데이비스(Clive Davis)에게 재능을 인정받으며 제이 레코드(J Records)와의 메이저 계약이... *1986년 미국 생. 본명은 마리오 버레트(Mario Barett).
*스스로를 '보이 원더(Boy Wonder)'라 칭할 정도로 R&B의 거장 스티비 원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브라이언 맥나이트, 어셔, 마이클 잭슨 등을 우상으로 성장.
*14살 되던 해, 현존하는 팝계 최고의 마이다스, 클라이브 데이비스(Clive Davis)에게 재능을 인정받으며 제이 레코드(J Records)와의 메이저 계약이라는 개가를 올림.
*2002년 , 의 연속 Top 10 히트를 통해, 데뷔 앨범 [Mario]가 골드 레코드를 기록하며 스타덤에 오름.
*어셔, 알 켈리 보컬의 장점만을 취한 듯 빼어난 노래 실력, 영화계로부터 지속적인 러브 콜을 받을 정도의 수려한 외모로 어셔, 저스틴 팀버레이크 등과 어깨를 견줄 최고의 차세대 슈퍼스타로 집중적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음.
노래 : Leona Lewis (리오나 루이스)
2006년에 방송된 리얼리티 스타 발굴 프로그램 < X Factor >의 시즌 3 우승자 리오나 루이스(Leona Lewis)는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과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의 장점을 겸비한 21세기 형 섹시 디바다. 파워풀한 가창력은 기교를 앞세운 머라이어 캐리보다는 휘트니 휴스턴을 연상시키고 라틴 혈통의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의 핏줄을 이어받은 구리 빛 피부와 뇌쇄적... 2006년에 방송된 리얼리티 스타 발굴 프로그램 < X Factor >의 시즌 3 우승자 리오나 루이스(Leona Lewis)는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과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의 장점을 겸비한 21세기 형 섹시 디바다. 파워풀한 가창력은 기교를 앞세운 머라이어 캐리보다는 휘트니 휴스턴을 연상시키고 라틴 혈통의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의 핏줄을 이어받은 구리 빛 피부와 뇌쇄적인 외모 그리고 파마기 있는 헤어스타일은 머라이어 캐리를 떠올린다. 시장성과 성장성을 자체 프로세스한 이 두 강점은 리오나 루이스가 빠른 시간에 비상(飛上)할 수 있는 날개였다. 1985년 4월 3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리오나 루이스는 10대 때부터 스스로 피아노와 기타를 배워 송라이팅 기술을 습득하면서 접수원이나 웨이트리스의 피곤한 일상을 극복해나갔다. 그러던 중 남자친구가 < X Factor >에 지원하면서 리오나 루이스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이했다. < X Factor >에서 ‘Over the rainbow’, ‘Hero’, ‘Without you’처럼 가창력을 뽐낼 수 있는 노래들을 불러 우승을 차지한 리오나 루이스는 곧바로 메이저 데뷔 싱글로 켈리 클락슨(Kelly Clarkson)의 ‘A moment like this’를 발표해 인기가도에 박차를 가했고 대세를 이어 2007년에 데뷔앨범 < Spirit >를 공개했다. ‘Apologize’를 부른 그룹 원 리퍼블릭(One Republic)의 리더 라이언 테더(Ryan Tedder)와 ‘Beautiful soul’과 ‘She's no you’로 친숙한 아이돌 가수 제시 매카트니(Jesse McCartney)가 공공으로 작곡한 ‘Bleeding love’는 20주 동안 빌보드 싱글 차트 탑 텐에 머물며 4주간 정상을 차지하는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고 두 번째 싱글 ‘Better in time’도 11위에 랭크되었다. 이제 리오나 루이스는 2008년에 대중들의 시선으로 들어왔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2008년 8월, 베이징 올림픽 폐막식에서는 2012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런던을 알리기 위해 지미 페이지(Jimmy Page)와 함께 무대에 올라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명곡 ‘Whole lotta love’를 불러 평생의 영광을 메모리 했으며 2008년 브릿 어워즈에서 4개 부문 후보로 지명되었고 2009년 그래미 어워즈에서는 올해의 레코드와 최우수 여성 팝 보컬 등 모두 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노래 : Band Of Horses (밴드 오브 호시즈)
인디록 밴드 인디록 밴드
아일랜드 록 밴드 아일랜드 록 밴드
노래 : Union J (유니온 제이)
유니온 제이는 보컬 위주의 4인조 그룹이다. 유니온 제이의 시작은 트리플 제이로, 이름에 J가 들어가는 세 명의 친구가 만나 팀으로 출전했다가 기타를 들고 솔로로 도전한 조지 셸리가 합류하면서 4인조 체제를 이루게 됐다. 유니온 제이는 보컬 위주의 4인조 그룹이다. 유니온 제이의 시작은 트리플 제이로, 이름에 J가 들어가는 세 명의 친구가 만나 팀으로 출전했다가 기타를 들고 솔로로 도전한 조지 셸리가 합류하면서 4인조 체제를 이루게 됐다.
칼리 사이먼(Carly Simon)은 다분히 1970년대 감성을 소유한 성인 취향의 소프트 팝 싱어 송라이터다. 그녀의 개인적이면서 진솔한 노랫말과 매력적인 선율은 석유 가격 인상으로 야기된 경제 불황과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스타일을 구긴 1970년대 초반 미국인들의 마음고생을 어루만져 주었고 진실에 대한 갈증을 해갈시켜 주었다. 이렇게 그녀는 1970년대의 빗장 풀린 상황을 치유하는 순기능을 담당하면서 자신의 입... 칼리 사이먼(Carly Simon)은 다분히 1970년대 감성을 소유한 성인 취향의 소프트 팝 싱어 송라이터다. 그녀의 개인적이면서 진솔한 노랫말과 매력적인 선율은 석유 가격 인상으로 야기된 경제 불황과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스타일을 구긴 1970년대 초반 미국인들의 마음고생을 어루만져 주었고 진실에 대한 갈증을 해갈시켜 주었다. 이렇게 그녀는 1970년대의 빗장 풀린 상황을 치유하는 순기능을 담당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다졌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5년 전인 1945년 6월 25일, 뉴욕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칼리 사이먼은 1971년에 솔로 활동을 시작하기 훨씬 이전인 1964년에 동생 루시 사이먼(Lucy Simon)과 함께 사이먼 시스터스(Simon Sisters)란 듀엣으로 ’Winkin’ Blinkin’ and Nod’를 빌보드 싱글 차트 73위에 올리면서 신고식을 치렀지만 대중들은 그녀의 이름을 가슴과 머리에 입력시키지 못했다. 늘씬한 몸매의 그녀가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1971년에 공개된 셀프 타이틀의 처녀작 < Carly Simon >부터이다. 신인으로서 대담하게도 결혼 제도에 반대하는 ’That’s the way I’ve always heard it should be(10위)’를 데뷔 싱글로 선택해 당시 사회적 이슈로 부상하던 독신주의와 여권 운동에 힘을 실어주었으며 두 번째 작품 < Anticipation >에서 터진 앨범 타이틀 ’Anticipation(13위)’과 ’Legend in your own time(50위)’의 뒷심으로 칼리 사이먼은 그래미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1972년의 3집 < No Secrets >에는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에게 혐의(?)를 둔 가사로 유명해진 ’You’re so vain’이 3주 동안 싱글 차트 정상에서 내려올 줄을 몰랐고, 두 번째 싱글 ’The right thing to do’도 17위를 마크하면서 가장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혼인에 회의적인 시각을 표현한 ’That’s the way I’ve always heard it should be’를 만들었으면서도 1972년에 같은 계열의 남성 싱어 송라이터 제임스 테일러(James Taylor)와 화촉을 밝혀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 칼리 사이먼은 1974년에 ’Mockingbird(5위)’를 함께 불러 잉꼬부부의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그들은 1983년에 이혼했다). 그러나 불안정하고 혼란스런 사회를 반영하지 못한 그녀의 사랑 타령에 팝 팬들이 식상하면서 칼리 사이먼은 197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침체의 늪으로 침잠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화려하게 회생(回生)시킨 노래는 1977년에 개봉된 영화 <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 >의 주제가 ’Nobody does it better(2위)’였다. 이 여세를 몰아 1978년에 발표한 < Boys In The Trees >를 통해 배출된 히트 싱글 ’You belong to me(6위)’와 남편 제임스 테일러와 다시 함께 부른 ’Devoted to you(36위)’는 ’부활의 노래’였다. 1980년 음반 < Come Upstairs >의 4번째 트랙 ’Jesse’가 비록 11위에 등록되어 인기 차트와의 친밀감을 과시하긴 했지만 1980년대 팝계의 판도는 전자 음악의 등장이라는 커다란 지각 변동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 뉴요커가 아날로그 방법으로 창조하는 노래들은 디지털 방식으로 찍어내는 당시의 혁신적인 음악 스타일에 자리를 내주면서 다시 한번 사정권 밖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그녀의 1980년대 부진도 영화 음악으로 극복되었다. 칼리 사이먼은 명배우 메릴 스트립과 잭 니콜슨 주연의 영화 < 하트번 >의 사랑의 테마 ’Coming around again(1986년 18위)’와 멜라니 그리피스와 해리슨 포드가 타이틀 롤을 맡은 < 워킹 걸 >의 주제가 ’Let the river run(1989년 49위)’으로 예전의 명성을 회복했다. 특히 최고의 가창력을 과시한 ’Let the river run’으로 그래미와 아카데미를 석권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연출했다. 그러나 어렵사리 탈환한 영광의 자리는 1980년대 후반에 번성한 팝메탈과 그것에 반(反)한 1990년대 얼터너티브 그런지의 함성에 급속히 빛이 바랬다. 칼리 사이먼은 현재까지도 샘솟는 창작열을 모아 새로운 음반에 담아내고 있다. 그녀의 디스코그라피는 현재 진행형이다.
노래 : Leo Stannard (레오 스태너드)
노래 : Timeflies (타임플라이즈)
멤버 : 롭 레스닉(Rob Resnick), 칼 샤피로(Cal Shapiro) 멤버 : 롭 레스닉(Rob Resnick), 칼 샤피로(Cal Shapiro)
노래 : Babyface (베이비 페이스)
‘때로 귀에 거슬리는 오늘의 팝음악에 없는 모든 것을 생각하라. 그러면 베이비 페이스를 떠올릴 것이다.’ 미 시사주간지 < 타임 >은 ‘낭만의 부재’에 시달리는 시대에 그가 낭만으로의 복귀를 지휘하고 있다며 ‘그의 음악은 촛불의 성찬과 빗속에서 키스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찬사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25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혔다. 프로듀서로서 그는 선배와 동료 경쟁자 모두를... ‘때로 귀에 거슬리는 오늘의 팝음악에 없는 모든 것을 생각하라. 그러면 베이비 페이스를 떠올릴 것이다.’ 미 시사주간지 < 타임 >은 ‘낭만의 부재’에 시달리는 시대에 그가 낭만으로의 복귀를 지휘하고 있다며 ‘그의 음악은 촛불의 성찬과 빗속에서 키스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찬사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25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혔다. 프로듀서로서 그는 선배와 동료 경쟁자 모두를 제쳤다. 퀸시 존스, 데이비드 포스터도 그에게 손을 들었고 테디 라일리, R 켈리도 한참 밑이다. 베이비 페이스가 ‘이 시대의 프로듀서’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수로서도 특급. 부드럽고 편한 목소리로 손쉽게 인기차트 상위권을 공략한다. 막 출시된 베이비 페이스의 < MTV 언플러그드 > 앨범은 ‘소프트 팝의 총아’로서의 진면목을 유감 없이 전달해준다. < 뉴스위크 > 최근호도 그를 ‘루더 밴드로스 이후 가장 유명한 R&B의 연인’으로 일컬었다. 다재다능의 결과로서 그가 펼치는 히트 퍼레이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프로듀싱한 앨범의 판매고가 지금까지 8천만장. 10위권에 든 곡만도 자그마치 1백 10곡이며 그중에서 16곡이 차트 1위를 차지했다. 휘트니 휴스턴, 토니 브랙스턴, 보이즈 투 멘 그리고 에릭 클랩턴이 그의 도움아래 스타덤을 만끽하고 있다. 그를 거치지 않고 진정한 스타가 되기는 어렵다는 말도 나온다. 그의 성공비결은 단연 출중한 대중감각에 있다. 대중이 뭘 좋아하는지, 어떤 소리를 원하는지 정확히 안다. 중학생 시절에 이미 이것을 터득했다고 한다. “ 딴 사람의 노래를 연주하면서 대중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난 항상 사람들이 무엇에 감동하는지 예의 주시해왔다.” 대중성 기질을 타고났는데 영화라고 안될 게 없다. 그는 아내 트레이시와 함께 7백만달러를 투자해 영화 < 솔 푸드(Soul Food) >를 만들어 영화제작자로 데뷔했다. 당연히 흥행은 대성공. 개봉 3개월만에 4천만달러를 벌어들였다. 영화 사운드트랙 앨범도 이미 2곡의 톱 10 히트곡을 내면서 2백만장의 판매를 돌파했다. 음악 만드는 것 뿐 아니라 돈버는 재주도 갖춘 그를 보고 미국 연예계 종사자들 모두가 놀라워했다. 케네스 에드먼즈가 본명인 베이비페이스는 어리고 유순한 인상 때문에 ‘아이얼굴(Babyface)’ 란 별명이 붙었다. 이것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강점이다. 만지는 것마다 황금으로 만드는 성공가도에도 불구하고 ’아이얼굴‘답게 그에게는 오만의 흔적이 없다. < 솔 푸드 >의 관객 폭발에 대해서도 ‘영화를 보러 가도록 흥미를 유발하는 대본을 우연히 갖게 됐을 뿐’이라며 “영화든 레코드든 히트를 칠 수 있는 어떤 것을 골라낼 왕도는 없다. 단지 우리는 운이 좋았을 따름이다.”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음반사 라페이스의 사장으로 회사의 자산을 3억달러로 끌어올린 것이 과연 운에 불과할까. 그런 겸허한 언행이 우리를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린다. 지금은 잠시 영화에 한눈을 팔고 있지만 본연의 프로듀서로 돌아와 곧 토니 브랙스턴과 TLC의 새 앨범을 낸다. 이 음반들도 히트는 ‘따논 당상’이다. 라페이스의 자산 규모는 또 올라갈 게 분명하다. 도대체 ‘베이비 페이스 제국’의 끝은 어디일까?
제프 버클리(Jeff Buckley)는 1990년대의 가장 독보적인 싱어 송라이터이자 얼터너티브 포크 록 뮤지션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폭발적이면서도 감미로운 목소리로 독자적인 음악 스타일을 구축했지만 안타깝께도 1997년 5월,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의 죽음과 함께 1990년대 음악계의 가장 비극적 사건이었다. 더욱이 단지 한 장의 앨범만을 남긴 뒤였기에 그 슬픔은 더했다. 제프 ... 제프 버클리(Jeff Buckley)는 1990년대의 가장 독보적인 싱어 송라이터이자 얼터너티브 포크 록 뮤지션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폭발적이면서도 감미로운 목소리로 독자적인 음악 스타일을 구축했지만 안타깝께도 1997년 5월,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의 죽음과 함께 1990년대 음악계의 가장 비극적 사건이었다. 더욱이 단지 한 장의 앨범만을 남긴 뒤였기에 그 슬픔은 더했다. 제프 버클리는 1960년대 유명한 포크 뮤지션이었던 팀 버클리(Tim Buckley)의 아들로 태어나 고등학교 시절부터 밴드 활동을 시작했다. 졸업 후, 음악 공부를 위해 L.A로 이동한 뒤 레게 뮤지션이었던 샤인헤드(Shinehead)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내공을 쌓아나갔다. 이후 기타리스트 게리 루카스(Gary Lucas)와 결성했던 음악 공동체 가즈 앤 몬스터즈(Gods & Monsters)로 어느 정도 이름을 홍보하는데 성공했다. 밴드를 그만두고 결국 솔로로 전향한 제프 버클리는 1994년 데뷔작이자 생전 마지막 음반인 < Grace >를 발표했다. 앨범으로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예상했던 세간의 평들을 완전히 깨부순 그만의 싱어 송라이팅 스킬을 뽐내며 단숨에 주목을 받았다. 특히 동시대의 주류였던 그런지 사운드와는 완연히 다른 독특한 포크 록 소리샘이 돋보였다. 일종의 얼터너티브에 대한 얼터너티브였던 셈. 웅장하면서도 흐느끼는 듯한 그의 목소리와 탁월한 작곡 능력, 백 밴드의 안정감 있는 연주가 만난 걸작이었다. 또한 작품 전반에 걸쳐 흐르는 재지한 느낌은 앨범을 제목 그대로 ‘우아하게’ 만들어주었다. 메시지면에 있어서도 당시 얼터너티브의 염세적, 부정적인 정서가 아닌 ‘음악을 통한 사랑의 전파’라는 소신을 피력, 컬트 팬들을 세력권으로 집결시켰다. 이 후 2집 앨범을 준비하던 중에 떠난 미시시피 강으로의 여행에서 제프 버클리는 익사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데모상태로 존재했던 트랙들은 다행히도 사후 그의 어머니의 노력으로 1998년에 < Sketches (For My Sweetheart the Drunk) >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다. 2집 역시도 1집에 버금가는 뛰어난 성과물이었으나 다만 ’그가 직접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았다. 그리고 2000년에는 제프 버클리의 첫 번째 공식 라이브 앨범인 < Mystery White Boy >(제프 버클리를 일컫는 듯한)가 나와 그를 못 잊는 팬들을 달래주었다. 1970년대에 시작된 ‘싱어 송라이터’라는 개념은 직접 곡을 쓰고 노래를 하는 뮤지션을 지칭하는 의미를 지녔었다. 특히 그들은 1960년대의 ‘우리’의 입장이 아닌 철저히 ‘개인적인’ 감수성을 노래했다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바로 1960년대를 ‘we decade’, 1970년대를 ‘my(혹은me) decade’라 명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싱어 송라이터는 또한 ‘독보적인 음악 파일을 완성한’ 아티스트를 말할 때 쓰일 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1990년대에 제프 버클리만큼 자신만의 소리 메커니즘을 들려 준 아티스트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도 단 한 장의 앨범으로 말이다.
멤버 : Dallas Green, P!nk 멤버 : Dallas Green, P!nk
노래 : Sara Bareilles (사라 바렐리스)
1998년경부터 엘리엇 스미쓰(Elliott Smith)와 벨 앤 세바스찬(Belle & Sebastian)에 의해 시작된 ‘세기말 포크의 재조명’은 작지만 중요한 흐름을 낳았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이전의 포크와는 다른 방식으로 대중들과의 소통체계를 형성했다. 즉, 60년대 포크의 절정을 이루었던 대규모 대중들과의 만남이 아닌 동일한 감수성을 지닌 소규모 (열혈) 매니아들과의 교류를 구축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 1998년경부터 엘리엇 스미쓰(Elliott Smith)와 벨 앤 세바스찬(Belle & Sebastian)에 의해 시작된 ‘세기말 포크의 재조명’은 작지만 중요한 흐름을 낳았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이전의 포크와는 다른 방식으로 대중들과의 소통체계를 형성했다. 즉, 60년대 포크의 절정을 이루었던 대규모 대중들과의 만남이 아닌 동일한 감수성을 지닌 소규모 (열혈) 매니아들과의 교류를 구축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베쓰 오튼(Beth Orton)은 비록 비슷한 씬(Scene)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앞서 언급한 둘과는 또 다른 음악적 접근을 선보여 주목받았다. 1996년에 발매한 데뷔 앨범인 < Trailer Park >는 전통적인 포크 사운드와 트립 합적인 일렉트로닉 기법을 결합시켜 그녀에게 ‘일렉트로니카 시대의 포키(folkie)’라는 칭호를 부여한 작품이었다. 솔로 활동 이전부터 그녀는 윌리엄 오빗(William Orbit), 케미컬 부라더tm(Chemical Brothers)등의 일렉트로니카 뮤지션들과 함께 작업을 해왔는데, 이로부터 형성된 내공을 자신의 데뷔에 십분 발휘, 음악적 역량을 과시했다. 특히 어쿠스틱 사운드와 전자적인 사운드 사이의 (엄청난?) 갭(gap)을 현명한 방식으로 조율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하지만, 1997년에 < Best Bit EP >를 발표한 후 나온 2집 < Central Reservation >(1999)에서 그녀는 어쿠스틱한 면을 보다 강조한 정적인 사운드를 선보였다. 물론 몇몇 트랙들은 1집에서의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보다는 포크와 블루스, 재즈에 기반한 사운드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오히려 1집보다 베쓰 오튼의 거칠면서도 고요한 목소리와 더욱 어울린다는 느낌이다. 점점 디지털화되어 가고 있는 현대 대중 음악 속에서 그것을 예전 것들과 성공적으로 조화시키기란 매우 어려운 작업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베쓰 오튼은 그녀의 데뷔 앨범에서 이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냈으며, 바로 이 지점에서 그녀만의 독창성은 보증 수표를 부여받았다. 또한 이것은 동시대의 다른 포키들과는 구분되는 독특한 페르소나(persona)를 획득하게 했고, 트립 합 디바(diva)(포크 뮤지션이 트립 합의 디바?)라는 아이러니컬한 지위를 그녀에게 선사했다.
노래 : Mary Macgregor (매리 맥그리거)
가수이자 배우로 [Ora] [R.I.P.] [Poison] [Body On Me]등의 앨범을 발표하였고, <분노의 질주: 더 맥시멈><사우스포><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50가지 그림자: 심연><50가지 그림자: 해방> 등에 출연하였다. 가수이자 배우로 [Ora] [R.I.P.] [Poison] [Body On Me]등의 앨범을 발표하였고, <분노의 질주: 더 맥시멈><사우스포><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50가지 그림자: 심연><50가지 그림자: 해방> 등에 출연하였다.
노래 : Leon Bridges (리온 브릿지스)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엘라 핏제랄드(Ella Fitzgerald), 줄리 런던(Julie London), 사라 본(Sarah Vaughan), 디나 워싱턴(Dinah Washington)과 함께 최고의 여성재즈가수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디바 니나 시몬(Nina Simone). 음지에 잔뜩 웅크린 자세로 바깥세상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마법의 주...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엘라 핏제랄드(Ella Fitzgerald), 줄리 런던(Julie London), 사라 본(Sarah Vaughan), 디나 워싱턴(Dinah Washington)과 함께 최고의 여성재즈가수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디바 니나 시몬(Nina Simone). 음지에 잔뜩 웅크린 자세로 바깥세상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마법의 주문과도 같다. 통한과 슬픔, 분노와 격정 그리고 발산하고 싶어도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없어 떠도는 영혼들에게 그녀는 구원의 손짓을 보낸다. 어둡고 습한 곳에 자신을 숨기고 있지만 말고 잘못된 세상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라고. 화를 내고, 하고 싶은 소리를 외치라고. 이제 너의 주장을 펴고 권리를 찾을 때라고. 속삭이듯 한탄하듯 때론 비단처럼 윤기 나게 때론 벨벳처럼 부드럽게 노래에 실어 전언한다. 본명은 유니스 웨이몬(Eunice Waymon), 가수 니나 시몬(Nina Siomone)으로 대중음악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 트라이온에서 가난한 집안의 여섯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4살 때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피아노신동으로 불린 그는 ‘유니스 웨이몬 기금’(Eunice Waymon Fund)을 설립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음악선생님의 도움으로 음악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었고 뉴욕 소재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가정을 지탱하기위해, 그는 피아노반주자로 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1954년 여름 그는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에 있는 아일랜드 바의 연주자로 직업을 잡았는데, 바 주인은 그에게 노래도 잘하길 요구했다.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끊임없는 연습을 해왔던 유니스 웨이몬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차릴 새도 없이 연예사업으로 들어섰다. 그는 이름을 니나(리틀 원)시몬으로 바꿨다.(1950년대 할리우드의 쟁쟁한 여배우들과 어깨를 겨룬 프랑스의 여배우 시몬 시뇨레(Simone Signoret)의 이름을 차용) 1950년대 후반, 니나 시몬은 베들레헴 레이블에서 최초의 트랙들을 녹음했다. 이 곡들에서 피아니스트, 가수, 편곡과 작곡가로서 그의 비범한 재능은 한층 더 빛을 발했다. ‘Plain gold ring’, ’Don’t smoke in bed’, ’Little girl blue’와 같은 노래들은 곧 그의 상연목록에서 스탠더드가 되었다. 오페라 (Porgy and Bess)의 곡 중 하나인 ‘I love you, Porgy’가 타운 홀, 카네기 홀 그리고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 불리고 히트를 기록하면서 나이트클럽 가수였던 그는 스타로 발돋움했다. 재즈스탠더드, 가스펠, 흑인영가, 클래식음악, 유래가 다양한 포크음악, 블루스, 팝, 뮤지컬과 오페라 송, 아프리카의 영창 게다가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까지, 이미 음악활동의 시작부터 창대했던 그는 준비된 스타였다. 기회는 당연한 만찬이었다. 클래식의 대위법, 재즈의 즉흥연주, 블루스의 변조 등 다방면의 음악요소를 결합해내는 시몬의 재능은 더 이상 무시될 수 없는 발군의 실력이었다. 독자적인 타이밍, 고요함의 음악적 극대화, 몇몇 코드로만 곡을 진행시키는 피아노연주 등의 방식으로 절제미가 돋보이는 자신만의 공연분위기를 주조해내는 실력은 가히 범접을 불허할 정도로 특징적이었으며 그의 여러 작품들에 녹아들었다. 때로 그의 목소리는 어둡고 가공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것에서부터 부드럽고 달콤한 것까지 변화무쌍한 스펙트럼을 과시했다. 잠시의 휴지와 반복 속에 그의 목소리는 외치고 속삭이고 또 한탄했다. 가끔은 피아노, 노래 소리, 몸짓이 따로 노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의 결정체로 모아졌다. 다양한 방식으로 그는 청중들에게 주문을 걸었다. 여러 가지 주문 중 하나에만 걸려도 니나 시몬이 비교불허의 아티스트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마력에 청중들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1963년 버밍햄의 교회에서 터진 폭파사건으로 네 명의 흑인아이들이 사망하자, 니나는 미국에서 동족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비통함과 격노를 금치 못했고 곧 규탄의 의미를 담은 ‘Mississippi Goddam’(빌어먹을 미시시피)을 썼다. 이 노래의 강력한 호소력과 필립스 레코드에서 처음 녹음 발표한 < Nina Simone in Concert >에 실린 노래들은 그녀의 또 다른 예술적 지평을 보여주었다. 예술적 목표를 이뤄내기 위해 자신만의 음색과 세심한 피아노연주에 심혈을 기울인 그는 사랑, 증오, 슬픔, 기쁨, 외로움 등 인간의 모든 감정을 노래에 실어 분명하게 전해주었다. 한때 커트 웨일(Kurt Weill)과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d Brecht)가 작곡한 노래 ‘Pirate Jenny’를 부르며 여배우로서 대극장을 순회하기도 했던 그는 프랑스에서 자끄 브렐(Jacques Brel)의 연약한 사랑노래 ’날 떠나지 말아요’(Ne me quitte pas)를 부르기로 했다. 니나는 ‘소울의 여대사제’로 불리며 팬들과 비평가들에 의해 신비로운 인물로 존경받음과 동시에 거의 종교계인사로 종종 오해를 사기도 했다. 1966년 흑인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시선을 네 명의 흑인여성들의 비애로 써낸 ‘네 여인들’(Four women)을 발표했는데, 이 노래는 흑인들에게 모욕적이라는 이유로 필라델피아와 뉴욕 라디오방송에서 금지되었다. 여대사제는 말씀전파에 적당한 음악을 찾기 위해 다른 길을 걸어갔다. RCA레이블로 옮겨 발표한 첫 앨범 < Nina Simone Sings The Blues >에 실린 ‘I want a little sugar in my bowl’, ’Do I move you?’, ’My man’s gone now’ 그리고 랭스톤 휴스(Langston Hughes)가 그녀를 위해 써준 시를 토대로 한 저항가요 ‘Backlash blues’를 포함해 더 많은 공민권운동가요를 불러 자신의 노선을 확증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의 비극을 노래한 ‘Why?(The King of Love is Dead)’을 위시해 ’Brown baby’, ’Images’(워링 쿠니의 시에 근거한), ‘Go limp’, ’Old Jim Crow’, ’To be Young, Gifted and Black’ 등의 노래들은 미국에서 흑인국민적인 찬가가 되었다. 그녀는 홀로 외롭게 노래하고 연주한 앨범 < Nina Simone and Piano ! >(1970)로 열성적인 팬들조차 놀라게 만들었다. 환생, 죽음, 고독 그리고 사랑에 대한 내성적인 노래들로 채운 모음집은 그녀의 녹음경력에 변함없는 하이라이트였다. 노래들에 새롭고 더 깊은 차원의 선물을 담아냈다. ‘Ain’t got no/I got life’(뮤지컬 “헤어”에서),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의 ’Suzanne’, ‘To love somebody’와 같은 비지스의 노래들, 봉고연주로 두 배의 속도감을 붙인 클래식 ’My way’, ‘Just like Thumb’s blues’ 그리고 네 곡의 밥 딜런의 노래들의 주목할 만한 버전들에는 더 새롭고 깊은 차원의 재능을 담아냈다. < Emergency Ward >는 절정의 선물이었다. 그녀는 조지 해리슨이 쓴 두 곡 ’My sweet lord’와 ‘Isn’t it a pity’의 긴 버전을 연주하면서 환각과 도피성을 배제한 분위기로 꾸몄다. 니나는 그러나 어쨌든 자유로워지고자 했다. 그녀는 자신이 조종당해 왔다고 느꼈고, 음반회사, 연예사업, 인종차별주의에 넌더리가 났다. 1974년 미국을 떠나 바바도스(Barbados)로 향한 그녀는 이듬해 리베리아, 스위스, 파리, 네덜란드에서 살다가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남부에 안착했다. 1978년엔 주디 콜린스(Judy Collins)의 ‘My father’를 정확한 해석으로 다시 부른 버전과 최면술을 거는 ’Everything must change’가 실린 새 앨범 < Baltimore >을 오랜만에 내놓았다. 그리고 1982년 미국으로부터 자진 “망명”을 선언한 자신의 마음을 노래로 표시한 앨범 < Fodder On My Wings >을 파리에서 녹음했다. 자신의 음악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여느 때보다도 잘 담긴 앨범이었다. 니나는 곡을 쓰고 개작하고 편곡했다. 피아노 하프시코드를 연주하며 영어와 프랑스어로 노래했다. 이 앨범은 1988년 그녀의 아버지의 죽음을 회상(추억)하는 노래 ‘Alone again naturally’의 특별버전을 포함한 몇몇 보너스트랙이 더해져 CD로 재발매 되었다. 1984년, 런던의 로니 스콧(Ronnie Scott)에서 열린 그녀의 콘서트실황을 담은 필름이 매혹적인 비디오로 발매되었다. 드럼에 폴 로빈슨(Paul Robinson)이 찬조 출연한 이 비디오에는 그녀의 첫 레코드에서 발췌한 노래 ‘My baby just cares for me’가 포함돼 큰 인기를 누렸다. 다음 해 < Nina’s Back >(니나의 귀환)이란 제목의 새 앨범을 발표한 그녀는 전 세계를 누비는 콘서트에 나섰다. 1989년 그녀는 피트 타운젠트(Pete Townsend)의 뮤지컬 < The Iron Man >에 공헌한 것을 시작으로 1990년과 1991년 브라질 팝가수 마리아 베사니아(Maria Bethania)와 아프리카음악의 세계화에 앞장선 유명 여성보컬리스트 마리암 마케바(Mariam Makeba)와 함께 녹음했다. 1991년엔 또한 자서전 < I Put A Spell On You >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프랑스, 독일 그리고 네덜란드어 번역본으로도 출판되었다. 1993년 스튜디오에서 만든 새 앨범 < A Single Woman >이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는 로드 맥퀸(Rod McKuen)의 노래들, 자신의 노래 ‘Marry me’, 프랑스의 스탠더드를 자기버전으로 부른 ’Il n’y a pas d’amour heureux’, 매우 감동적인 ‘Papa, can you hear me?’가 수록되었다. 그녀의 노래는 영화음악으로도 사용되었다. 레퍼토리 중 5곡이 사운드트랙에 들어간 1993년 영화 (Point Of No Return, The Assassin, code name: Nina로도 불린다)를 위시해 (1996)에 사용된 ‘I wish I knew how it would feel to be free’, (1996)에 삽입된 ’My baby just cares for me’ 그리고 (1997)의 ‘Exactly like you’까지 그의 목소리는 영화와 함께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세월은 흘러도 그녀의 음악은 변함없이 새롭고 젊은 청취자들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Ain’t got no/I got life’는 1988년 네덜란드에서 대형히트를 기록했다. 그녀는 또한 자신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는 절친한 반주자들, 퍼커션의 레폴도 플레밍(Lepoldo Fleming), 베이스의 토니 존스(Tony Jones), 드럼의 폴 로빈슨(Paul Robinson), 키보드의 하비에르 콜라도스(Xavier Collados) 그리고 기타리스트 겸 그녀의 음악 감독 알 섀크만(Al Schackman)과 함께 세계 순회공연을 펼치며 청중들과 함께 여전히 흥분의 순간을 맛봤다. 1997년 런던에 바비칸(Barbican) 극장에서 그는 공민권운동, 형제애를 위해 미국의 첫 번째이자 주요한 리더들 중 한사람에게 헌정하는 의미의 노래 ’Every Time I Feel The Spirit’을 불렀다. ‘Reached down and got my soul’, ’The blood done changed my name’, ’When I see the blood’와 같이 더욱 영가(Spiritual)적이고 생명과 같은 노래들이 뒤를 이었다. 니나는 1997년 프랑스에서 열린 니스 재즈 페스티벌(Nice Jazz Festival), 1998년 그리스의 의 데살로니가 재즈 페스티벌(Thessalonica Jazz Festival)의 하이라이트였다. 1999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기네스 블루스 페스티벌에서는 그녀의 딸 리사 첼레스테(Lisa Celeste)와 함께 몇몇 곡을 듀엣으로 합창해 모녀의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시몬은 라틴 수퍼스타 라파엘(Rafael)과 함께 노래하고 두 번의 디즈니 연극 워크숍에 참여, 의 타이틀 역과 의 날라 역을 맡아 공연하면서 세계 투어를 했다. 1998년 7월 24일, 니나 시몬은 넬슨 만델라의 80회 생일파티에 특별손님으로 초대됐다. 1999년 10월 7일 그녀는 더블린에서 개최된 음악시상식에서 평생업적을 기리는 공로상을 품에 안았다. 2000년에 들어 그녀는 5월 26일 애틀랜타 명예 시민권을 수여받았다. 6월 9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아프리카계 미국인 음악 협회로부터 다이아몬드 상을 수상한데 이어 8월 7일에는 프랑스에서 명예로운 총사상을 수상했다. 닥터. 시몬은 2003년 4월 21일 프랑스 남부 까리-르-루에에 그녀의 별장에서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소망대로 유해는 아프리카의 여러 곳에 뿌려졌다. 매사추세츠대학으로부터 음악과 인류애에 대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바로 최후의 전승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역사적 지위를 얻었다. 최고의 여류시인, 우리시대의 음악작가로 그는 영원히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히피들의 혁명적인 자유의 외침이 시들해질 무렵, 미국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클럽에서는 이전의 록과는 다른 음악적 실험들이 행해지고 있었다. 텔레비전(Television)과 레이먼즈(Ramones) 등의 CBGB 클럽을 중심으로 한 펑크 록이었다. 패티 스미스(Patti Smith)는 그러한 남자들의 홍수 가운데서도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며 ’펑크의 대모’ 라는 칭호와 함께 70년대의 유니크한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 히피들의 혁명적인 자유의 외침이 시들해질 무렵, 미국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클럽에서는 이전의 록과는 다른 음악적 실험들이 행해지고 있었다. 텔레비전(Television)과 레이먼즈(Ramones) 등의 CBGB 클럽을 중심으로 한 펑크 록이었다. 패티 스미스(Patti Smith)는 그러한 남자들의 홍수 가운데서도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며 ’펑크의 대모’ 라는 칭호와 함께 70년대의 유니크한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된다. 펑크와 여성 뮤지션의 역사에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커다란 줄기라고 할 그녀는 문학과 음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적인 언어의 사용과 중성적이고 강인한 이미지를 결합한 독특한 음악세계를 전개하면서 ‘언어의 힘을 융합한 3 코드 록(Three Chord Rock Merged the Power of Words)’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여성 로커들의 역할모델이 되어왔다. 어릴 적부터 랭보와 짐 모리슨, 롤링 스톤tm의 음악에 빠져있던 그녀는 학교 교육이라는 울타리에 갇혀있기를 거부하고 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뉴욕으로 향하게 된다. 그곳에서 연극 공동집필과 시를 쓰며 지내던 그녀는 기타리스트 레니 케이(Lenny Kaye)를 만나게 되는데, 케이의 기타 리듬에 맞추어 자신의 시를 낭송하는 것을 계기로 음악역정에 첫 씨를 뿌리게 된다. 이후 몇 년 동안 록 전문지 크림(Creem)에 정기 기고하는 록 평론가로 활동했으며 뉴욕 돌스(New York Dolls)의 오프닝 무대에 서기도 했다. 뉴욕 타임 스퀘어 광장에서 벌어진 ‘록과 랭보(Rock’n Rimbaud)’ 공연을 계기로 레니 케이와 다시 손잡게 되고 피아노 리차드 솔(Richard Sohl)이 가세하면서 본격적인 밴드활동을 시작한다. 1974년 그룹은 곡목부터 신랄한 ‘Piss Factory’ 라는 첫 싱글(리드 기타에 텔레비전의 톰 벌레인이 참여)을 발표하였고, 이후 블론디 출신의 기타리스트 이반 크랠(Ivan Kral)을 영입하여 4인조로 거듭나 텔레비전 등과 함께 CBGB 클럽의 고정 출연진으로 활약하며 왕성한 라이브 활동을 펼친다. 한때 모던 러버스(Modern Lovers)를 이끌었던 조나단 리치맨(Jonathan Richman)이 드럼 파트를 맡아준 적도 있었지만, 곧 제이 디 도허티(Jay Dee Daugherty)가 들어오고 밴드가 점차 자신의 색깔을 굳힐 때쯤인 1975년 그룹은 아리스타(Arista) 레이블에 픽업되어 역사적인 첫 앨범 < Horses >를 발표한다. 전 벨벳 언더그라운드 멤버였던 존 케일(John Cale)이 프로듀싱을 맡고, 톰 벌레인이 참여하기도 했던 이 앨범은 화려한 그들의 지원 못지 않게 밴드의 주축인 패티 스미스와 레니 케이의 음악적인 역량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펑크 록은 물론 록 전체의 역사에 길이 남을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상징주의’로 표현되는 애매 모호하고 즉흥적인 노랫말, 강렬하지만 세련된 짜임새를 가진 사운드는 당시의 펑크 초창기 앨범들의 ‘날것’이나 ’껄렁껄렁’한 것들과는 차별된, 아트형 펑크의 새 길을 열었다. ‘예수는 남의 죄를 위해 죽었지만 나를 위해선 아냐...’하는 가사로 시작되는 록 역사의 명곡 ‘Gloria’와 ‘Land of 1,000 dances’(메들리 곡 ‘Land’)가 여기 들어있다. 이후 두 번째 앨범 < Radio Ethiopia >로 돌아온 그녀는 투어 도중 무대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여, 잠시의 공백기를 가진 후에 1978년 마침내 패티 스미스란 이름을 대중에게 익히게 한 세 번 째 앨범 < Easter >를 발표한다.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과 함께 곡을 쓴 ‘Because the night’는 빌보드 팝 싱글차트 13위를 기록했고 이어 전미와 유럽 투어에 나서는 등 세계적 성공을 만끽했다. 이 곡은 나중 나탈리 머천트가 이끈 뉴욕의 포크 밴드 텐 싸우선드 매니악스(10.000 Maniacs)의 MTV 언플러그드 공연에서 리메이크되어, 그때까지 차트실적이 미미했던 그들에게 고대하던 성공을 안기면서(차트 11위) 명곡의 위력을 되새김질했다. 한편 < Easter > 앨범에는 영화 < 올리버 스톤의 킬러 >에 삽입되어 패티 스미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Rock N roll nigger’가 수록되어있기도 하다. 하지만 록 스타덤에 대한 깊은 회의감과 프로토 펑크 그룹 엠씨 파이브(MC5) 출신의 기타리스트 프레드 스미스(Fred ’Sonic’ Smith)와의 사랑으로 그녀는 새로운 삶을 갈구하면서 활동중단을 결심하게 된다. 결국 토드 런그런(Todd Rundgren)이 프로듀스한 네 번째 앨범 < Wave >를 발표한 얼마 뒤인 1979년 가을, 수많은 예술적 이상적 목표를 묻어버린 채 이탈리아 축구 스타디움에 운집한 7만명의 관중 앞에서 ‘Bye, Bye, Hey, Hey’를 외치며 은퇴하였다. 1980년 프레드와 결혼한 스미스는 디트로이트에 정착하였고, 그 후 몇 년 동안은 두 아이의 양육과 음악적인 영감에만 온 힘을 쏟으며 조용하고 행복한 삶을 누렸다. 그러한 행복은 1988년 두 부부의 합작 앨범 ’Dream Of Life’에 그대로 반영되어 사람들 속에 내재된 무한한 긍정적 가능성에 대해 노래하는 한편, 어린이들에 대한 평화적인 메시지를 담기도 했다. 국가 간의 평화를 기원하는 ‘People have the power’가 수록된 이 앨범은 당시 국내에 라이선스 음반으로 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삶의 행복 속에서 그녀의 주위에는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게 된다. 1994년 남편 프레드가 심장병으로 사망했고 한달 뒤에는 동생인 토드(Todd)마저 심장 마비로 죽었으며, 오랜 친구 메이플소프와 옛 동료인 리처드 솔마저 이승을 떠났다. 너무나 짧은 시간에 많은 소중한 친구들을 잃어버린 스미스는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 뼛속깊이 느낀 나머지 프레드와 함께 준비중이던 앨범 작업을 중단한 채, 슬픔과 비탄의 생활에 빠지게 된다. 그러한 절망 속에서 스미스는 무대 위에서의 청중, 팬들과의 교감을 더욱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음악을 사랑했던 이들을 위해서라도 다시 무대 위에 서야겠다고 결심하고, 이전의 멤버들을 모아 라이브 공연 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롤라팔루자 무대에 서고 영화 < 데드 맨 워킹 >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당시 모던 록계에서의 자신의 존재와 가능성에 대해 실험한 그녀는 1996년 통산 여섯 번째 앨범인 < Gone Again >과 함께 돌아왔다. < 롤링스톤 >지는 무려 8년 만에 신작을 낸 그녀를 ‘올해의 컴백’으로 포상했다. 이전부터 그녀와 음악적인 활동을 교류하던 톰 벌레인과 존 케일은 비롯하여 지금은 고인이 된 포크 싱어송라이터 제프(Jeff Buckley) 그리고 만돌린을 연주해준 친동생 킴벌리 스미스(Kimberly Smith)가 참여한 이 앨범은, 주변인들 죽음에 대한 비탄에서 벗어나 그것을 긍정적인 마인드로 극복하려는 치유의 메시지를 담으면서 초창기 때보다 더욱 성숙한 사운드를 과시함으로써, 수많은 후배 뮤지션들의 존경과 갈채를 받기도 했다. 이후 1997년 < Peace And Noise >과 2000년 < Gung Ho >, 두 앨범을 더 발표하여 활력을 되찾은 패티 스미스는 4반세기의 열정적 음악인생을 간직한 채 올해로 56세를 맞았다.
뉴욕 브룩클린 출신의 맥스웰(1973년 생)은 가창력보다는 리듬과 비트에 중점을 둔 1990년대의 현대적인 리듬 앤 블루스 추세 속에서 소울의 감칠맛 나는 음색을 구현해 내며 네오 소울의 대표주자로 떠오른 인물이다. 상업적인 색채가 짙게 드리워진 현란하고 화려한 리듬 앤 블루스의 트렌드에서 한 발짝 비켜서서 가슴을 울리게 하는 1970~1980년대의 전통적인 리듬 앤 블루스를 재현해낸 것이다. 때문에 얼터너티브 ... 뉴욕 브룩클린 출신의 맥스웰(1973년 생)은 가창력보다는 리듬과 비트에 중점을 둔 1990년대의 현대적인 리듬 앤 블루스 추세 속에서 소울의 감칠맛 나는 음색을 구현해 내며 네오 소울의 대표주자로 떠오른 인물이다. 상업적인 색채가 짙게 드리워진 현란하고 화려한 리듬 앤 블루스의 트렌드에서 한 발짝 비켜서서 가슴을 울리게 하는 1970~1980년대의 전통적인 리듬 앤 블루스를 재현해낸 것이다. 때문에 얼터너티브 R & B, 뉴 클래식 소울 등으로 칭하여 진다. 에리카 바두(Erykah Badu), 디앤젤로(D’Angelo) 등도 이 분야의 간판스타들이다. 서부 인디언과 푸에르토리코인의 혈통을 물려받은 혼혈아인 맥스웰은 열 일곱 살이 되던 해 친구로부터 낡아빠진 키보드를 선물 받고 음악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를 해나갔다. 작곡과 보컬 창법 등에 대해 꾸준히 공부하여 갈고 닦았으며,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뉴욕 클럽 등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앨범을 발표하지도 않았는데도 발빠른 입 소문을 통해 뉴욕 클럽 신의 유명 인사로 발돋움한 그는 뒤늦게 내놓은 1996년 데뷔작 < Maxwell’s Urban Hang Suite >로 리듬 앤 블루스 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몰고 왔다. 영혼을 담아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섹시하면서도 진실에 찬 목소리는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다. 평론가들은 ‘프린스(Prince)와 마빈 게이(Marvin Gaye)의 합작품’이라고 했다. ‘Sumthin’ sumthin’ ’, ‘Ascension(Don’t ever wonder)’, ‘Whenever, wherever, whatever’ 등의 히트곡들이 증명한다. 플래티넘을 획득한 이 음반으로 그는 < 롤링스톤 >에 의해 ‘최우수 R & B 아티스트’로 선정됐고, 그래미 상 후보에도 올랐다. 또한 소울 트레인 시상식에서 ‘최우수 남자 가수’, ‘올해의 소울 앨범’, ‘올해의 싱글(‘Ascension’)’, ‘최우수 신인 아티스트’ 등 4개 부문 상을 휩쓰는 저력을 발휘했다. 이듬해에는 MTV 언플러그드 공연 실황을 엮은 < Maxwell Unplugged EP >를 발표하기도 했다. 2년 뒤인 1998년 들고 나온 두 번째 작품 < Embrya >에서 맥스웰은 전작보다 더욱 더 깊이 있는 리듬 앤 블루스를 선보였다. 매우 가라앉은 그의 음색은 깊이를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철학적이고 사색적이었다. 대중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칩거한 것이다. 하지만 이듬해 영화 < Life >의 사운드트랙에 삽입된 ‘Fortunate’가 빅 히트를 치면서 그의 이름은 다시금 세상에 회자됐다. 단 두 장의 정규 앨범으로 트래디셔널 리듬 앤 블루스 싱어로서 당당히 그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맥스웰은 현재 새 음반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이다.
노래 : Gavin DeGraw (게빈 디그로,Gavin Shane DeGraw)
멤버 : Patricia Lynn, Dwight Baker 멤버 : Patricia Lynn, Dwight Baker
노래 : Joanna Wang (조안나 왕 (왕약림))
노래 : Des'ree (데즈리 ,Desiree Annette Weeks)
소울, R&B 보컬 소울, R&B 보컬
노래 : Fifth Harmony (피프스 하모니)
멤버 : Ally Brooke Hernandez, Camila Cabello, Normani Kordei, Dinah Jane Hansen, Lauren Jauregui 멤버 : Ally Brooke Hernandez, Camila Cabello, Normani Kordei, Dinah Jane Hansen, Lauren Jauregui
노래 : Cam (캠,Camaron Marvel Ochs)
컨트리 싱어송라이터 컨트리 싱어송라이터
전 세계 젊은이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던 그런지/얼터너티브 사운드가 서서히 무대의 뒤로 사라지면서 등장한 수많은 ‘포스트(Post)’세대 중에서 라이브(Live)는 발군의 존재였다. 특히 이들은 중학교 때부터 계속되어 온 밴드 경력을 바탕으로 탄탄한 연주력과 사려 깊은 가사 쓰기를 선보였다. 허나 이것은 모두 이들의 2집 이후에 드러난 것일 뿐 밴드 이름을 2번이나 바꾸는 등의 철저한 무명 시절은 이들에게도 존... 전 세계 젊은이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던 그런지/얼터너티브 사운드가 서서히 무대의 뒤로 사라지면서 등장한 수많은 ‘포스트(Post)’세대 중에서 라이브(Live)는 발군의 존재였다. 특히 이들은 중학교 때부터 계속되어 온 밴드 경력을 바탕으로 탄탄한 연주력과 사려 깊은 가사 쓰기를 선보였다. 허나 이것은 모두 이들의 2집 이후에 드러난 것일 뿐 밴드 이름을 2번이나 바꾸는 등의 철저한 무명 시절은 이들에게도 존재한다. 혹독한 무명 시절을 거친 뒤 결국 이들은 밴드 명을 라이브로 최종 결정하고 인도의 철학자인 Jiddu Kreshnamurti의 서적에서 제목을 빌려온 데뷔 앨범 < Mental Jewelry >를 1991년에 발매했다. 수록곡 중, ‘Pain lies on the riverside’, ‘Operation spirit(The tyranny of tradition)’등의 싱글들에서 다이내믹한 사운드와 이상주의적, 영적인 에드의 송라이팅이 조화를 이뤄냈으나 차트에서의 실질적인 성과는 미미했다. 3년 뒤, 이들은 전작의 실패를 교훈 삼아 2집 < Throwing Copper >(1994)를 내놓았다. 더욱 강력해진 록 사운드와 뛰어난 완급조절, 제리 해리슨(Jerry Harrison)의 감각적인 프로듀싱, 성숙한 가사 쓰기가 ‘삼위 일체’를 이루어 낸 앨범은 600만장이라는 거대한 성공을 가져왔다. 팬들은 물론이고 밴드 자신들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또한 얼터너티브 사운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아메리칸 록’의 느낌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음악적 성과였다. 거대한 성공에 따른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1997년의 3집 < Secret Samadhi >에서 밴드는 프로듀서를 이들의 데모를 프로듀스했던 제이 힐리(Jay Healey)로 교체하고 자신들도 공동 프로듀스를 했다. 무겁고 더욱 침잠된 어두운 톤이 앨범을 지배하는 가운데 그들 사운드의 표면을 은근한 대중성으로 포장해주던 독특한 멜로디 감각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갑작스런 변화 때문인지, 전작의 성공을 이어가지는 못했다. 결국 이들은 다시 제리 해리슨을 프로듀서로 불러들인 1999년의 4집 < The Distance To Here >에서 실험적인 사운드를 배제하고, 이전의 스타일로 돌아갔다. 하지만, 결국 앨범은 ‘일보 전진을 위한 이보 후퇴’에 이르지 못한 성공하지도, 실패하지도 않은 범작이 되고 말았다.
포크/컨트리 싱어송 라이터 포크/컨트리 싱어송 라이터
노래 : Dan Fogelberg (댄 포겔버그 (포크 보컬))
노래 : Brad Paisley (브래드 페이즐리)
노래 : Jose Feliciano (호세 펠리치아노,Jose Montserrate Feliciano Garcia)
1980년대를 장식한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와 그 다음의 글로리아 에스테 그리고 세기말이었던 1999년에 쏟아져 나온 미끈했던 리키 마틴, 배우활동도 겸한 제니퍼 로페즈 그리고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아들 엔리케 이글레시아스 등은 영미 음악과는 색조가 다른 라틴 팝으로 유명한 가수들이다. 이제는 흑인보다 미국에서 인종비가 높은 히스패닉 계들의 음악이라 할 중남미의 라틴 팝은 1950년대에 국내에도 번안되어 애청된 곡 ... 1980년대를 장식한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와 그 다음의 글로리아 에스테 그리고 세기말이었던 1999년에 쏟아져 나온 미끈했던 리키 마틴, 배우활동도 겸한 제니퍼 로페즈 그리고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아들 엔리케 이글레시아스 등은 영미 음악과는 색조가 다른 라틴 팝으로 유명한 가수들이다. 이제는 흑인보다 미국에서 인종비가 높은 히스패닉 계들의 음악이라 할 중남미의 라틴 팝은 1950년대에 국내에도 번안되어 애청된 곡 ‘베사메무초’ ‘키엔 세라’가 말해주듯 특유의 낭만적인 리듬과 애조 띤 멜로디를 생명으로 구미사회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부터 인기를 누려왔다. 라틴 팝 하면 상기한 이름들이 먼저 떠오르겠지만, 원조는 그들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가 1960년대 후반 미국시장을 강타한 시각장애자 가수 호세 펠리치아노(Jose Feliciano)라고 할 수 있다. 해마다 12월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길거리 스피커와 라디오 전파를 뒤덮는 곡 ‘펠리즈 나비다드(Feliz Navidad-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뜻)’를 부른 주인공이 바로 호세 펠리치아노다. 이 곡 말고도 그는 국내에서 ‘한때 사랑이 있었지(Once there was a love)’와 ‘집시(The gypsy)’, ‘레인(Rain)’, ‘케 사라(Che sara)’, ‘내추어 보이(Nature boy)와 같은 골든 팝송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상기한 노래 대부분은 국내에서는 라디오 전파를 잠식하며 절대적인 호응을 누렸지만 본고장 팝 팬들이 기억하는 곡들은 아니다. ‘레인’의 경우도 빌보드 차트에서 76위에 그쳤다. 심지어 외국에서는 전혀 싱글로 발표되지 않은 앨범의 수록곡 가운데 우리 정서에 맞는 것들을 당대의 음악다방과 라디오 디스크자키들이 골라내 인구에 회자시킨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적 팝송’이다. 디제이들이 이 곡들을 숨겨진 보물 찾듯이 발굴한데는 ‘그 애조 띤 멜로디와 낭랑한 어쿠스틱 기타 음을 분명히 우리의 팝팬들이 좋아할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했을 것이다. 그럼 미국에서는 어떤 곡들이 사랑 받았을까. 그는 음악계에 데뷔한 1968년 그때부터 딴 가수들이 부른 것을 특유의 감성으로 놀랍게 바꿔낸 ‘리메이크’ 노래들로 명성을 떨쳤다. 우선 1967년 여름에 발표되어 수 주간 전미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대중화된 록그룹 도어스(Doors)의 명곡 ‘내 불을 밝혀라(Light my fire)’를 들 수 있다. 호세 펠리치아노는 1년도 지나지 않은 이듬해 초에 이 곡을 다시 불러 내놓았다. 재해석해낸 곡의 질감은 원곡과는 영 딴판이었다. 능란한 어쿠스틱 기타연주를 바탕으로 로맨틱하면서도 클라이맥스에서 솟아오르며 사정없이 뿌려대는 보컬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넘어 기겁했을 정도였다. 도어스의 곡과 다르기로 따지면 거의 환골탈태 아니면 둔갑 수준. 사이키델릭 곡이 단숨에 라틴 팝이 되어 나온 것이다. 호세 펠리치아노의 ‘Light my fire’는 리메이크임에도 불구하고 전미차트 3위를 오르며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음악 팬들이 원작의 단순 재해석이 아닌 호세 펠리치아노 그만의 독창적 개조로 받아들인, 다시 말하면 그의 독자적 표현세계를 인정해준 덕분이었다. 지금도 호세 펠리치아노의 ‘내 불을 밝혀라’는 팝 역사상 가장 득의에 찬 리메이크 곡으로 꼽힌다. 국내 팝 팬들은 마찬가지 이유로 마마스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California dreaming)’이나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의 ‘Susie Q’ 그리고 산레모 가요제 입상곡인 ‘케 세라’ 등을 오리지널 이상으로 호세 펠리치아노의 독창적인 버전으로 즐겨들었다. 이번 예술의 전당 공연에서도 관객들은 오리지널 가수의 목소리로 이미 많은 대중들에게 익히 알려진 유명 팝송들을 -비틀스의 ‘Yesterday’, 사이먼 앤 가펑클의 ‘El condor pasa’, 바비 헵의 ‘Sunny’, 더스티 스프링필드 ‘The windmills of your mind’- 완전히 그의 것으로 새롭게 주조해내는 호세 펠리치아노의 노래에 감탄할 것이다. 호세 펠리치아노가 이처럼 상대적으로 리메이크 노래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아티스트와 뮤지션으로 융숭하게 대접하는 것은 리메이크가 새로운 창조임을 웅변해냈기 때문이다. 역사에 기록된 리메이크 사례로는 그가 떠오른 해였던 1968년 10월7일 야구 월드시리즈 5번째 게임에서 초대가수로 부른 미국 국가(Star-spangled banner)가 꼽힌다. 어쿠스틱 기타로 워낙 ‘괴상하게’ 부른 바람에 국가를 신성시하는 미국의 국수주의자들과 보수진영으로부터 거친 항의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 경기장 라이브는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인기차트에도 올라 전미 차트 50위에 오르는 히트를 쳤다. 호세 펠리치아노는 그해 그래미상의 최우수신인상을 수상했다. 1945년 푸에르토리코 생인 그의 주특기는 호소력 있는 얇은 고음의 보컬 외에 낭랑한 어쿠스틱 기타의 울림이다. 선천성 녹내장으로 앞을 볼 수 없는 불리를 타고난 재능과 하루 14시간씩 연습하는 노력을 통해 빼어난 기타연주자로 거듭났다. 이름 앞에 거물 기타리스트(virtuoso guitarist)라는 수식이 모든 공식자료에 붙을 정도. 기타전문지들에 의해 수도 없이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40년 넘게 어쿠스틱 기타분야의 전설로 숭앙받으며 지금도 라틴 음악에 관한 한 ‘일렉트릭 기타는 산타나, 어쿠스틱 기타는 호세 펠리치아노’라는 일반의 인식을 확립했다. 그의 발표 곡 가운데는 ‘Fireworks’ ‘Pegao’ 등 기타 연주곡들이 많다. 라틴 기타연주자로서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은 그의 대중적 인기가 떨어진 1980-1990년대에서도 전문가들의 존경이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는 1983년 ‘Me enamore’, 1986년 ‘Lelolai’, 1989년 ‘Cielito’, 1990년의 ‘Por que te tengo que olvidar?’로 그래미 최우수 라틴 팝 퍼포먼스 상을 무려 네 차례나 수상했다. 2000년대에도 그는 계속적인 월드투어를 통해 팬들에게 라틴 음악의 로맨티시즘을 전달하는 동시에 과거의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신보를 발표하고 있다. 그가 연주하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음악에 대한 헌신’과 ‘음악을 향한 열정과 즐거움’이 고스란히 드러나 감동이 배가된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처럼 그는 재능과 노력 그리고 낙천적인 사고로서 예술가의 전형을 확립했다. 우리가 너무도 좋아했던 곡 ‘집시’를 통해 그의 음악 하는 자세를 확인할 수 있다. ‘난 노래를 연주하고 음반을 만들어 돈을 받는 그런 집시죠/ 난 순회하는 무리의 일부예요/ 난 온 땅을 돌아다니죠/ 내 동료를 위해 곡을 만들어주고/ 슬프고 때로는 행복한 음으로 모든 곡을 쓰고 연주해요/ 어떤 곡은 사람들을 웃기고/ 어떤 곡은 사람들을 울리죠/ 왜 그렇게 되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난 끝없이 음악 여행을 계속해요/ 내 기타가 낡고 쉬 고되더라도...’ 이번 내한공연에서 팬들은 그가 남긴 무수한 추억의 골든 팝, 공연장에 울림을 가져다줄 상쾌한 보컬 그리고 라틴 기타 연주의 환상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진정한 뮤지션이 전하는 헌신과 즐거움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라틴 팝가수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호세 펠리치아노의 재능과 존재감을 넘어설 인물은 없다. 우리는 세기말에 유행을 타고 우후죽순 쏟아진 라틴 팝가수들이 아닌, 그보다 훨씬 전에 등장한 호세 펠리치아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 살아있는 음악 전설 에릭 클랩튼은 그 이름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음악 전설’이다. 40여 년의 음악 여정 동안 그가 쌓아올린 메리트는 가히 대단하다. 야드버즈(Yardbirds)와 존 메이올스 블루스브레이커(John Mayall`s Bluesbreakers) 시절 블루스의 부흥을 주도했으며, 크림(Cream)의 활동기간 동안 헤비메탈의 원형을 제공했고, 재즈와 블루스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했다. 솔로로 독립하고... # 살아있는 음악 전설 에릭 클랩튼은 그 이름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음악 전설’이다. 40여 년의 음악 여정 동안 그가 쌓아올린 메리트는 가히 대단하다. 야드버즈(Yardbirds)와 존 메이올스 블루스브레이커(John Mayall`s Bluesbreakers) 시절 블루스의 부흥을 주도했으며, 크림(Cream)의 활동기간 동안 헤비메탈의 원형을 제공했고, 재즈와 블루스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했다. 솔로로 독립하고부터는 ‘진짜 블루스’에 접속불가를 외치는 대중들에게 팝 지향적인 ‘달콤 쌉싸름한 블루스’를 패스워드로 내놓아 블루스의 대중화를 선도했다. 그래미 트로피를 13번이나 받았으며,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1992년 야드버즈, 1993년 크림, 그리고 지난해 개인 자격으로 헌액된 것에서도 클랩튼의 공로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지난해 ‘블루스의 제왕’ B.B 킹(B.B King)과 협연한 작품〔Riding With The King〕으로 이번 그래미 시상식 ‘최고의 트래디셔널 블루스 앨범(Best Traditional Blues album)’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클랩튼은 ‘기타의 신’, ‘슬로우 핸드(Slowhand)’라는 닉네임이 말해주듯 기타 테크닉에 있어서도 대가(大家)의 경지에 올랐다. 감정을 질펀하게 쏟아내면서도 정확하고 절제된 테크닉을 구사하는 벤딩 주법(일명 쵸킹)과 비브라토는 다른 연주자들이 흉내조차 힘들 정도다. 그의 기타 연주와 관련하여 유명 기타리스트들의 칭찬 코멘트를 들어보자. “에릭은 정말 재주가 많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플레이는 뭐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감정과 함께 블루스를 연주한다. 그가 연주할 때 당신은 그것이 블루스라는 것을 알 것이다.” -B.B 킹- “그는 나보다 훨씬 더 블루스 연주가 뛰어나다. 왜냐하면 그는 블루스를 공부했고, 그것에 대해 당당하기 때문이다.” -제프 벡(Jeff Beck)- “내가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나는 그의 연주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바로 하늘에서 치는 천둥번개 같았다.” -존 이써리지(John Etheridge) 하지만 이런 융숭한 대접에 대해 클랩튼은 “나에 대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나는 악평을 받았을 때 그 사실을 소화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호평도 마찬가지다.”며 자신을 향한 관심을 무척 꺼려했다. 그를 추종하는 후배 뮤지션에 대해서도 한마디했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목소리가 있는 것처럼 나같이 연주하는 것은 아마 무리일 것이다. 자기 스타일로 연주해야 한다.”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경외보다는 그들만의 길을 개척할 것을 충고한다. 그의 음악과 인생 여로(旅路)가 굴곡이 심했기에 그 말은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 전설의 시작 에릭 클랩튼은 1945년 3월 30일 영국 서레이(Surrey)주의 리플리(Ripley)에서 태어났다. 그는 14살 생일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기타를 선물 받고 블루스에 빠져들었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하여 할머니 품에서 자라며 외로운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흑인들의 비참함과 슬픔을 노래한 블루스가 그에게 찾아간 것은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클랩튼은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빅 빌 블룬지(Big Bill Broonzy), 블라인드 윌리 존슨(Blind Willie Johnson) 등 초기 블루스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연주하며 성장했다. 특히 ‘델타 블루스의 왕’이라 불리는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의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로버트 존슨의 앨범들은 내가 음악적으로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에릭 클랩튼의 기타 연주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1963년 야드버즈에 가입하면서부터였다. 그의 뛰어난 블루스 기타 테크닉은 단숨에 그룹의 사운드를 특징지었고, 매니저 지오지오 고멜스키(Giorgio Gomelsky)는 그에게 ‘슬로우 핸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클랩튼은 그룹의 음악이 상업적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며 1965년 3월 팀을 떠나 존 메이올이 이끌었던 블루스브레이커스로 자리를 옮겼다. 야드버즈를 탈퇴한 직후 그가 연주했던 ‘For Your Love’는 영국 차트 3위를 기록했다. 이후 야드버즈는 제프 벡과 지미 페이지(Jimmy Page)가 가세하며 전성시대를 누렸다. 바로 록음악계의 ‘3대 기타리스트’가 야즈버즈를 통해 모두 비상했다. # 나, 블루스로 돌아갈래! 이 당시 에릭 클랩튼의 블루스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이와 관계된 에피소드 한가지. 그는 블루스브레이커스의 휴지기 동안에 다른 뮤지션들과 전세계를 돌며 블루스 전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클랩튼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몇몇 멤버들이 영국으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한 클럽에서 계속 머물며 공연을 계속했다. 그는 그러나 강도로 돌변한 클럽 주인의 협박으로 옷과 새로 산 마샬 앰프를 놔둔 채 영국으로 도망쳐야했다. 음악 외에는 모든 일에 문외한이었던 ‘순수한’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클랩튼은 블루스브레이커스에서 존 메이올의 독단적 행동에 불만을 품고 자신만의 그룹을 결성하기로 계획했다. 그는 1966년 존 메이올 몰래 드러머 진저 베이커(Ginger Baker), 베이시스트 잭 브루스(Jack Bruce)와 함께 크림을 조직하고 합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후 음악 전문지 < 멜로디 메이커(Melody Maker) >의 폭로로 인해 클랩튼은 블루스브레이커스에서 해고를 당해야만 했다. 이때 런던의 한 빌딩 벽에는 ‘클랜튼은 신이다(Clapton is god)’라는 문구가 새겨져 많은 화제를 몰고 왔다. 에릭 클랩튼은 크림을 통해 ‘악기 예술의 미학’을 획득했다. 블루스와 재즈가 절묘하게 어울러진 그들의 사운드는 즉흥적이고 빠르며 굉음을 발산했다. 멤버들의 정교하고 뛰어난 연주 실력은 타 밴드와의 간격 차를 크게 벌려놓았고, 음악계에 상당한 충격파를 던졌다. 그들의 앨범들인 1966년의 < Fresh Cream >, 1967년의 < Disraeli Gears >, 그리고 이듬해의 < Wheels Of Fire > 모두 명반으로 손꼽히며 파죽지세의 인기몰이를 했다. 특히 스튜디오 녹음과 라이브를 한자리에 모은 더블 앨범 < Wheels Of Fire >는 미국에서 4주간 정상을 차지하며 멤버들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다. 바로 이 작품에 명곡 ‘White room’이 수록되어 있다. 그룹은 그러나 서로간의 음악적 견해차를 이유로 1968년 11월 해산했다. 클랩튼의 음악 이력 중 최고의 절정기가 막을 내린 것이다. 이후 트리오는 1993년 1월 명예의 전당 헌액 기념으로 재결합 공연을 가져 많은 박수를 받기도 했다. 크림의 해체 이듬해 클랩튼은 진저 베이커와 함께 트래픽(Traffic) 출신의 스티브 윈우드(Steve Winwood), 페밀리(Family)의 베이스 주자였던 릭 그레치(Rick Grech)를 영입하여 ‘슈퍼 그룹’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를 탄생시켰다. 언론에서는 ‘인스턴트 슈퍼 그룹’이라고 비아냥거렸지만, 그들은 공연 때 ‘최후의 슈퍼 그룹’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대조를 이뤘다. 하지만 언론의 지적대로 그들은 1969년 데뷔 앨범 < Blind Faith >를 내놓고 각자의 길로 떠났다. # ‘레일라’의 비극 에릭 클랩튼의 1970년대는 한 여인과의 슬픈 사랑 얘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다름 아닌 비틀스의 멤버 조지 해리슨의 아내 패티 보이드(Patti Boyd)였다. 클랩튼은 1968년 비틀즈의 화이트 앨범에 수록된 조지의 곡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와 같은 해 공개된 솔로 음반 < Wonderwall Music >에서 기타를 맡을 정도로 조지 해리슨과는 절친한 사이였다. 조지와 음악적 교류를 하면서 패티를 본 후 사랑에 빠진 것이다. 당시 종교에 심취해 있던 남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패티 보이드는 클랩튼에게 의도적으로 눈길을 주었다. 음악 밖에 모르던 에릭은 그만 사랑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조지와의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갔고, 실의에 빠진 에릭 클랩튼은 술과 마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이런 사랑에 대한 좌절감과 패배감은 1970년 11월에 발표된 데릭 앤 더 도미노스(Derek And The Dominos)의 마스터피스 < Layla & Other Assorted Lovesongs >에 고스란히 담겨졌다. ‘남편이 당신을 슬프게 만들었을 때/ 나는 당신을 위로하려고 노력했어요/ 바보처럼 나는 당신과 사랑에 빠져버렸죠/레일라 당신은 나를 무릎꿇게 만들었어요/ 레일라, 당신께 애원합니다/ 제발...’. 수록곡 ‘Layla’의 구구 절절한 가사처럼 에릭 클랩튼의 상처받은 마음은 노래 전체에 용광로처럼 녹아들었다. 고통스런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바닥까지 긁어내어, 그 고통을 음악으로 걸러냈다. ‘처절한 내면의 사생화’다. 클랩튼의 이러한 마음에 하늘도 감동했던지 얼마 후 패티 보이드는 조지 해리슨과 이혼했고, 둘은 1979년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이 음반은 비록 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블루스와 삶을 완벽하게 조화시키며 걸작의 반열로 들어섰다. # 극적인 재기 드라마 1부 실연의 파장은 매우 컸다. 에릭 클랩튼은 감정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알코올과 약물 중독으로 인하여 병원과 요양원을 들락거려야만 했다. 기타조차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이때부터 드라마틱한 재기 스토리가 전개된다.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던 그에게 구세주가 찾아왔다. 그룹 후(The Who)의 ‘피트 타운센드’(Pete Townshend)였다. 피트는 이미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찬밥취급을 받던 지미 헨드릭스를 영국으로 데려와 음악계에 데뷔시키는 등 ‘선행’을 벌여왔다. 피트는 클랩튼에게 마약에서 벗어날 것을 권유했고, 1973년 에렉 클랩튼의 레인보우 콘서트를 주최해 재기의 무대를 마련해줬다. 클랩튼은 데릭 앤 도미노스 이후 3년 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피트는 에릭 클랩튼이 정신을 못 차리자 하와이안 기타로 머리를 때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기력을 회복한 에릭 클랩튼은 1년 뒤 재기 작품 < 461 Ocean Boulevard >를 내놓았다. 앨범이 출시되기까지는 피트 타운센드와 함께 RSO 레이블의 사장인 로버트 스틱우드(Robert Stigwood)의 도움이 컸다. 그는 폐인이 된 클랩튼을 위해 요양장소로 플로리다에 있는 자신의 별장을 선뜻 내주며 재기의 기틀을 마련케 했다. 클랩튼도 스틱우드의 호의에 고개 숙여 감사하며 다시 기타를 집어들었다. 스틱우드의 별장주소가 바로 이 앨범의 타이틀이다. 스틱우드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인 것이다. 밥 말리(Bob Marley)의 곡을 리메이크한 ‘I shot the sheriff’는 정상을 차지했고, ‘Let it grow’, ‘Give me strength’ 등이 인기가도를 달리며 ‘기타의 신’으로 부활했다. 이후 연이어 내놓은 앨범들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특히 ‘Wonderful tonight’이 실려있는 1977년 작품 < Slowhand >는 300만장이상의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에릭 클랩튼은 약물 중독으로 고생하던 이 시기를 잊지 못하고, 1999년 마약 중독자 치료기금을 위해 자신의 기타 100대를 경매에 내놓은바 있다. # 극적인 재기 드라마 2부 에릭 클랩튼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도 꾸준하게 앨범을 발표하지만 별다른 활약상을 보이지 못했다. 물론 1989년 작품 < Journeyman >같은 수작을 낚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룹시절과 달리 음악적 측면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평론가들은 ‘에너지가 없어지고 느슨해진 팝 블루스’라며 평가 절하했다. 하지만 그는 1991년 아들의 죽음이라는 ‘비극’과 함께 현실무대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운명의 여인’ 패티 보이드와 헤어지고 이탈리아 투어 도중 만난 젊은 사진작가이자 배우였던 로리 델 산토(Lori Del Santo)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코너(Corner)가 뉴욕 맨하탄의 아파트에서 실족사한 것이다. 나중에 에릭 클랩튼은 “내가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온통 경찰관과 의료진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것이 나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일처럼 느껴졌다.”며 망연자실했던 당시의 심정을 묘사했다. 클랩튼은 그러나 ‘예전처럼’ 기타를 놓지 않았다. 오히려 기타와 노래에 더욱 몰두했다. 음악만이 유일한 치료제라는 것을 이전 경험으로 깨달았다. 그는 1992년 영화 < 러쉬(Rush) >의 사운드 트랙에 삽입된 ‘Tears in heaven’에 죽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실었다. MTV의 제안으로 그 해 녹음된 앨범 < Unplugged >에서의 백미도 단연 이 곡이었다. 어쿠스틱 기타에 실린 애절한 멜로디와 노랫말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듬해 그래미는 그에게 ‘올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 ‘올해의 레코드(Record Of The Year)’, ‘올해의 노래(Song Of The Year)’ 등 알짜배기를 포함하여 6개의 트로피를 ‘위로 선물’로 전달했다. ‘추억’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재진입하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에릭 클랩튼의 상승세는 계속됐다. 1994년 발매한 < From The Cradle >은 흥행과 평단 양편에서 세계적인 지위를 얻었다. 미국과 영국 앨범차트를 동시 석권하였고, 블루스의 성찬을 담아낸 작품으로 격찬 받았다. 4년 뒤에 내놓은 앨범 < Pilgrim > 또한 플래티넘을 기록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 전설은 영원하다 에릭 클랩튼은 작품마다 자신의 인생을 투영시켰다. 혼을 불어넣었다. 올해 발표한 앨범 < Reptile >에도 그의 숨결을 살아 숨쉰다. 신작의 기저에 흐르는 물줄기는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삼촌의 죽음’이다. 삼촌에 대한 존경심을 작품 전체에 고스란히 옮겼다. “‘Reptile(사전적 의미로는 비열한 인간이라는 뜻)’은 삼촌과 관련이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내가 태어난 곳에서 ‘Reptile’이란 단어는 사랑스러운 말이다.” 이 음반은 프로듀서 사이먼 클리미에(Simon Climie)를 포함하여 전작 < Riding With The King >의 세션팀이 그대로 참여했다. 또한 시카고 소울의 거장 커티스 메이필드(Cutis Mayfield)의 빈자리를 남겨둔 채 임프레션스(The Impressions)가 부드러운 화음을 더하고 있다. 블루스뿐만 아니라 레게, 컨트리, 테크노 등 다양한 장르로 음악 지류를 넓히고 있는 클랩튼은 새 앨범에서도 그 폭을 확대했다. 퓨전 재즈풍의 기타 연주가 도입됐으며, 라틴 음악의 요소도 엿보인다. 보사 노바의 흥취가 물씬 풍기는 첫 곡 ‘Reptile’을 비롯해, ‘Modern girl’, ‘Son & sylvia’ 등에서 알 수 있다. ‘리듬’에 대한 클랩튼의 지속적인 실험이다. 선배들을 향한 오마쥬도 계속된다. 에릭 클랩튼의 음악적 스승 중 한 명인 기타리스트 J.J. 케일(J.J. Cale)의 ‘Travelin` light’, 1985년에 세상을 떠난 ‘점프 블루스의 대가’ 빅 조 터너(Big Joe Turner)의 고전 ‘Got you on my mind’ 등이 그것이다. 또한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1980년대 히트넘버 ‘I ain`t gonna stand for it’, 레이 찰스(Ray Charles)의 ‘Come back baby’를 새롭게 재해석하며 두 명의 맹인 거장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있다. 그는 그러나 ‘향수’를 풍기지 않는다. 애절하면서도 포근하게 감싸안는 음색과 선율로 그만의 분위기를 낸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곡조에 맞게 ‘톤’을 찾아내는, 바로 ‘기타의 신’만이 할 수 있는 특허품이다. 음악을 만들고 듣는 이가 인간이지만 ‘비인간적’인 음악이 판치는 요즘이다. 그러나 에릭 클랩튼의 음악과 인생은 접점이 없는 평행선을 달리지 않는다. 합일점을 찾아 예술로 승화시킨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희노애락이 담겨져 있다. 특히 역경 속에서 소중한 음악의 싹을 틔우고 키워냈다. 내면의 고통과 이별의 슬픔을 블루스로 쏟아냈다. ‘인간의 음악’이다. 당연하다. 허나 바로 이 점 때문에 클랩튼은 전설로 추앙 받는다.
락앤롤, 팝락, 인디팝 밴드 락앤롤, 팝락, 인디팝 밴드
밴드 : First Aid Kit (퍼스트 에이드 킷)
멤버 : 클라라(Klara Soderberg, 오토하프, 키보드, 보컬), 조한나(Johanna Soderberg, 기타, 보컬) 멤버 : 클라라(Klara Soderberg, 오토하프, 키보드, 보컬), 조한나(Johanna Soderberg, 기타, 보컬)
멤버 : 이삭 슬레이드(Isaac Slade, 보컬), 조 킹(Joe King, 기타), 데이브 웰쉬(Dave Welsh, 기타), 벤 와이삭키(Ben Wysocki, 드럼) 멤버 : 이삭 슬레이드(Isaac Slade, 보컬), 조 킹(Joe King, 기타), 데이브 웰쉬(Dave Welsh, 기타), 벤 와이삭키(Ben Wysocki, 드럼)
1994년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결성된 트레인(Train)은 1990년대 초반 블랙 크로우즈(Black Crowes)로부터 발흥된 복고 성향의 아메리칸 하드록을 구사하는 그룹이다. 미국의 전통 음악인 컨트리(country)와 포크(folk)를 기저로 강력한 하드록 사운드를 덧입혔던 이 흐름의 최선봉에 위치한 밴드로 평가받고 있다. 트레인은 패트릭 모나한(Patrick Monahan, 보컬, ... 1994년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결성된 트레인(Train)은 1990년대 초반 블랙 크로우즈(Black Crowes)로부터 발흥된 복고 성향의 아메리칸 하드록을 구사하는 그룹이다. 미국의 전통 음악인 컨트리(country)와 포크(folk)를 기저로 강력한 하드록 사운드를 덧입혔던 이 흐름의 최선봉에 위치한 밴드로 평가받고 있다. 트레인은 패트릭 모나한(Patrick Monahan, 보컬, 퍼커션), 롭 호치키스(Rob Hotchkiss, 기타, 보컬), 지미 스태포드(Jimmy Stafford, 기타), 찰리 콜린(Charlie Colin, 베이스), 스콧 언더우드(Scott Underwood, 드럼)의 5인조로 구성되었다. 결성 직후, 다섯은 꾸준한 라이브 공연을 지속하며 팬층을 확보하였고, 이것은 마이너 레이블인 < Aware >와 컨택트되는 동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등장한 데뷔작 < Train >은 진득한 미국 전통 록 사운드를 가감 없이 펼쳐 보임으로서 인상적인 신고식을 치러냈다. 1997년부터 밴드는 블루스 트래블러(Blues Traveler), 카운팅 크로우즈(Counting Crows)등의 오프닝을 맡으며 제 2의 도약의 기회를 모색했다. 메이저 음반사들로부터 구애의 손길이 뻗친 때가 바로 이즈음이었다. 멤버들은 컬럼비아(Columbia)와 손잡은 뒤, 1집을 재발매하며 본격적인 음악 활동의 시작점을 찍었다. ’Meet Virginia’가 당시 라디오 전파를 수시로 타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4년 뒤, 두 번째 음반 < Drops of Jupiter >(2001)를 발표한 트레인은 그래미상 3개 부문의 후보에 오르는 등의(비록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앨범은 현재까지 200만장 이상이 팔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밴드 : Prefab Sprout (프리팹 스프라우트 )
뉴웨이브 밴드 뉴웨이브 밴드
멤버 : 제임스 머서(James Mercer/ v) 마틴 크랜달(Martin Crandall/b) 데이브 허난데즈(Dave Hernandez/g, b) 제시 샌도발(Jesse Sandoval/d) 에릭 존슨(Eric Johnson/g) 밴드의 브레인 제임스 머서(James Mercer)의 사이드 프로젝트로 시작한 신스의 원래 이름은 플레이크뮤직(Flake Music)이었다. 누군가가 말했듯 큐어(... 멤버 :
제임스 머서(James Mercer/ v)
마틴 크랜달(Martin Crandall/b)
데이브 허난데즈(Dave Hernandez/g, b)
제시 샌도발(Jesse Sandoval/d)
에릭 존슨(Eric Johnson/g)

밴드의 브레인 제임스 머서(James Mercer)의 사이드 프로젝트로 시작한 신스의 원래 이름은 플레이크뮤직(Flake Music)이었다. 누군가가 말했듯 큐어(The Cure)와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el)의 가장 신성하지 못한 충돌이라는 표현은 그의 목소리에 적절한 칭호였다. 이후 여러 작업을 거치면서 서서히 활동을 이어나가던 와중, 모데스트 마우스(Modest Mouse)와의 공연 이후 2000년 무렵 시애틀의 인디명문 서브팝(Sub Pop)과 계약한다. 그리고 계약 직후 발표한 2001년도 데뷔작 [Oh, Inverted World]는 싱글 [New Slang]의 성공에 힘입어 그야말로 신데렐라처럼 급부상했다. 여러 영화와 TV 시리즈, 그리고 CF에서도 그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고, 곧바로 발표한 2003년도 두 번째 정규작 [Chutes Too Narrow]에서는 더욱 화려한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이 두 번째 정규작 또한 인디 앨범으로는 이례적으로 거진 40만장 이상을 팔아치웠다. 그리고 2007년도 세 번째 앨범 [Wincing the Night Away]가 첫 주에 십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면서 빌보드 앨범차트 2위라는 쾌거를 이룩해낸다. 유독 제임스 머서의 솔로 작업물처럼 여겨졌던 이 횃불같은 수수함은 이처럼 승승장구 해나갔고, 하와이안 포크부터 사이키델릭, 그리고 뉴웨이브 등을 성공적으로 버무려내면서 평단에서도 꽤나 환영받았다. 앨범은 그래미 베스트 얼터너티브 부문에도 노미네이트 된다. 이후 프론트맨 제임스 머서는 제이지(Jay-Z)의 [Grey Album] 리믹스 작업, 그리고 날스 바클리(Gnarls Barkley) 활동 이후 꾸준한 상승곡선을 이어나가고있는 프로듀서 데인저 마우스(Danger Mouse)와 함께 브로큰 벨즈(Broken Bells)라는 의외의 프로젝트 또한 성공적으로 진행시켜나갔다.
밴드 : Fairground Attraction (페어그라운드 어트랙션)
멤버 : Eddi Reader, Mark E. Nevin, Simon Edwards, Roy Dodds 멤버 : Eddi Reader, Mark E. Nevin, Simon Edwards, Roy Dodds
밴드 : Kansas (캔사스 (프로그레시브 락, 하드락 밴드))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록의 예술성에 대한 기치가 드높던 1970년대에 프로그레시브의 불모지 미국에서도 예술성을 향한 몸짓은 작지만 분명 존재했다. 불후의 발라드 곡 ‘Dust in the wind’로 기억되어지는 캔사스는 심포닉 록에 아메리칸 록의 역동성을 더하며 이른바 ‘아메리칸 프로그레시브 록’의 독자성을 확립한 그룹이다. 캔사스는 1970년 미국 캔사스 주의 토페카(Topeka)에서 고등학교 동창생이...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록의 예술성에 대한 기치가 드높던 1970년대에 프로그레시브의 불모지 미국에서도 예술성을 향한 몸짓은 작지만 분명 존재했다. 불후의 발라드 곡 ‘Dust in the wind’로 기억되어지는 캔사스는 심포닉 록에 아메리칸 록의 역동성을 더하며 이른바 ‘아메리칸 프로그레시브 록’의 독자성을 확립한 그룹이다. 캔사스는 1970년 미국 캔사스 주의 토페카(Topeka)에서 고등학교 동창생이었던 케리 리브그렌(Kerry Livgren, 기타, 키보드), 베이브 호프(Dave Hope, 베이스), 필 이허트(Phil Ehart, 드럼)에 의해 결성된 밴드. 다른 남부 록 밴드들이 서던 록의 전통을 만들어가고 있을 당시 이들이 추구한 음악은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1971년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로비 스타인하트(Robby Steinhardt)를 바이올린 주자로 영입하면서 미국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프로그레시브 록을 시도했던 것이다. 로비를 영입하면서 잠시 밴드 이름을 ‘화이트 클로버(White Clover)’로 바꾸기도 했던 이들은 1972년 스티브 월쉬(Steve Walsh, 보컬, 키보드), 리차드 윌리엄스(Richard Wiliams, 기타)를 연이어 맞이하며 프로그레시브 밴드의 기본 틀을 완성하고 다시 캔사스를 이름으로 내걸었다. 클럽 활동을 통해 인지도를 높인 이들은 1974년 셀프 타이틀의 데뷔 앨범 < Kansas >를 발표했다. 하지만 1970년대 초반 이들의 음악은 미국 대중에게 어필하기에는 너무나 생소한 사운드였다. 프로그레시브 록은 영국 밴드들의 전유물이라는 뿌리깊은 생각이 미국적인 사운드와 프로그레시브를 결합하며 나름대로 독자적인 음악성을 만들어 나간 캔사스에게 딴지를 걸고 넘어 졌다. 같은 해 발표한 < Song For America >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캔사스는 1970년대 중반 핑크 플로이드를 위시한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들의 위풍당당이 진행되면서 그 흐름에 전격 편입했다. 1975년 음반 < Masque >는 수록곡인 ‘Icarus borne on wings of steel’이 심오한 가사와 함께 주목을 받으며 20만장이 넘는 판매를 기록했고, 이에 힘입어 전작 < Song For America > 역시 골드를 따내는 기염을 토했다. 한 번 불붙은 상승세는 1976년 블록버스트 앨범 < Leftoverture >로 이어지며 캔사스를 세계적인 밴드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수록곡 ‘Carry on wayward son’이 차트 5위 권 진입에 성공했으며, 앨범은 3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미국적 프로그레시브 가능성의 확인이었다. 캔사스의 프로그레시브 록은 영국 밴드들과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부기(Boogie)를 프로그레시브에 도입했다는 것 외에도, 이들이 표현하는 대상, 서정성, 서사적인 전개는 이들만의 특화된 강점이었다. 미국 남부 특유의 심오한 가사를 다루면서도 현실을 벗어나지 않았고, 심포닉 록을 구사했지만 동시에 미국 록이 가진 역동성과 파워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캔사스는 아트 록 매니아들로부터 부정적인 평을 듣기도 하지만 이 점 때문에 먼저 이 분야를 개척한 영국 밴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밴드는 성공의 여세를 몰아 1977년에는 음반 < Point of Know Return >을 선보였다. 지구 끝에 매달린 범선을 그리고 있는 앨범 재킷으로도 유명한 이 앨범은‘Dust in the wind’ 덕분에 국내 팬들에게서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의 앨범이다. 자신들의 음악적 형태와 일치하는 곡은 아니지만 발라드 넘버 ‘Dust in the wind’는 캔사스의 대표곡이 되었고, 이 곡의 카리스마 덕분에 이들이 프로그레시브 밴드임을 모르는 팬들도 상당수 있었다.‘Dust in the wind’가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지만 이들의 정체성은 여전히 프로그레시브 록에 있었고, 1979년 밴드가 처음으로 프로듀싱한 프로그레시브 록 앨범 < Monolith >를 톱 텐에 올리며 화려하게 미 디케이드(Me- Decade)를 마감했다. 하지만 1980년 작품 < Audio-Visions > 이후 캔사스의 행보는 뿌연 안개 정국 속으로 휘말렸다. 데이브 호프와 케리 립그렌이 종교적인 문제로 멤버들과 갈등을 일으켰고, 그룹의 상업적 성공에 불만을 느끼고 있던 스티브 월시는 탈퇴해 ‘스트리트(Street)’라는 자신의 밴드를 조직하는 등 팀의 내분 사태는 걷잡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존 엘르판테(John Elefante, 보컬)로 스티브의 빈자리를 채우며 1982년 < Vinyl Confessions >, 1983년 < Drastic Measures >를 발표하지만 밴드는 결국 이별의 수순을 밟았다. 해체 3년 후 캔사스는 필 이허트, 리차드 윌리엄스, 스티브 월시 세 명의 오리지널 멤버에 의해 부활했다. 이후 스티브 모스(Steve Morse, 기타), 빌리 그리어(Billy Greer, 베이스) 두 명의 멤버를 보강하여 오 인조 라인업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들은 심포닉 록보다는 하드 록적인 면을 살리며 1986년 < Power >를 통해 재기의 의지를 불태운다. 그러나 < Power >가 잠시 주목을 끌었을 뿐 < In the Spirit of the Things >(88), < Freaks of Nature >(95), < Always Never the Same >(98)로 이어지는 음반 모두 신통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앨범의 부진한 성적에도 불구 꾸준한 활동을 보여온 이들은 2001년에 1980년도 작품 < Audio-Visions > 이후 20년 만에 오리지널 멤버들이 한자리에 모두 모여 < Somewhere To Elsewhere >를 발표했다. 음반에는 대 그룹의 부활을 알리듯 1975년 자신들의 히트곡 ‘Icarus…’의 속편 격인 ‘Icarus II’가 수록되어 있으며, 전성기에 가졌던 매력이 그대로 살아있다.
록 밴드 록 밴드
멤버 : Ricky Ross, James Prime, Lorraine McIntosh, Dougie Vipond, Gregor Philp, Lewis Gordon 멤버 : Ricky Ross, James Prime, Lorraine McIntosh, Dougie Vipond, Gregor Philp, Lewis Gordon
밴드 : The Sutherland Brothers (서덜랜드 브라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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