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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FM 4U 푸른밤 종현입니다 - 컴필레이션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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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MBC FM 4U 푸른밤 종현입니다 - 컴필레이션 앨범

프로그램 3주년 기념 앨범

[ 종현 사진 수록된 20p 부클릿 + 영문 가사집, 구성: CD(2) ]
Billie Holiday, Tony Bennett, Silje Nergaard, Kodaline, Guy Sebastian 노래 외 31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SonyMusic | 2017년 03월 10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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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FM 4U 푸른밤 종현입니다 - 컴필레이션 앨범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7년 03월 10일
시간, 무게, 크기 220g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CD1
선택듣기
  • 01 I'm A Fool To Want You - 빌리 홀리데이 Billie Holiday 선택듣기
  • 02 Who Can I Turn To (When Nobody Needs Me) - 토니 베넷 Tony Bennett 선택듣기
  • 03 Based On A Thousand True Stories - 실예 네가드 Silje Nergaard 선택듣기
  • 04 Lights - 저니 Journey 선택듣기
  • 05 Brand New Day - 코다라인 Kodaline 선택듣기
  • 06 Candle - 가이 세바스찬 Guy Sebastian 선택듣기
  • 07 At The River - 그루브 아만다 Groove Armada 선택듣기
  • 08 Love Never Felt So Good - 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선택듣기
  • 09 Space Cowboy - 자미로콰이 Jamiroquai 선택듣기
  • 10 Nous Debout - 자즈 Zaz 선택듣기
  • 11 No Words - 에릭 해슬 Erik Hassle 선택듣기
  • 12 Save Room - 존 레전드 John Legend 선택듣기
  • 13 Don't Wake Me Up - 크리스 브라운 Chris Brown 선택듣기
  • 14 No Freedom - 다이도 Dido 선택듣기
  • 15 Goodbye Kiss - 카사비안 Kasabian 선택듣기
  • 16 Last Goodbye - 제프 버클리 Jeff Buckley 선택듣기
  • 17 Conviction of the Heart - 케니 로긴스 Kenny Loggins 선택듣기
  • 18 Sitting Here In Silence (On My Own) - 오아시스 Oasis 선택듣기
CD2
선택듣기
  • 01 A.M - 원 디렉션 One Direction 선택듣기
  • 02 Prelude To A Kiss - 앨리샤 키스 Alicia Keys 선택듣기
  • 03 A World To Believe In - 셀린 디온 Celine Dion 선택듣기
  • 04 Days Are Numbers (The Traveller) -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 The Alan Parsons Project 선택듣기
  • 05 Just The Way You Are - 빌리 조엘 Billy Joel 선택듣기
  • 06 Leader Of The Band - 댄 포겔버그 Dan Fogelberg 선택듣기
  • 07 Falling In Love At A Coffee Shop - 랜든 픽 Landon Pigg 선택듣기
  • 08 Real Love - 톰 오델 Tom Odell 선택듣기
  • 09 Do You… - 미구엘 Miguel 선택듣기
  • 10 Pretty Wings - 맥스웰 Maxwell 선택듣기
  • 11 Ice Box - 오마리온 Omarion 선택듣기
  • 12 Radio - 라파엘 사딕 Raphael Saadiq 선택듣기
  • 13 Girlfriend - 비투케이 B2K 선택듣기
  • 14 Openning Up - 사라 바렐리스 Sara Bareilles 선택듣기
  • 15 Chandelier - 시아 Sia 선택듣기
  • 16 I Didn't Know My Own Strength - 휘트니 휴스턴 Whitney Houston 선택듣기
  • 17 Say You Love Me - 패티 오스틴 Patti Austin 선택듣기
  • 18 Time After Time - 마일스 데이비스 Miles Davis 선택듣기

아티스트 소개 (36명)

노래 : Billie Holiday (빌리 할리데이)
재즈 보컬 재즈 보컬
노래 : Tony Bennett (토니 베넷,Anthony Dominick Benedetto)
미국의 가수, 영화배우 미국의 가수, 영화배우
아일랜드 록 밴드 아일랜드 록 밴드
노래 : Guy Sebastian (가이 세바스찬)
노래 : Groove Armada (그루브 아마다)
영국 런던 출신의 일렉트로니카 댄스 듀오 그루브 아마다(Groove Armada)는 베이스먼트 잭스(Basement Jaxx), 모치바(Morcheeba), 엠제이 콜(MJ Cole) 등과 함께 세기말 유행처럼 번진 일렉트로니카와 트립 합의 계보를 이어간 그룹이다. 이들은 레벨 42(Level 42), 스파이로 자이라(Spyro Gyra), 샤카탁(Shakatak) 같은 일련의 재즈펑크(Jazz-Funk) 퓨전 ... 영국 런던 출신의 일렉트로니카 댄스 듀오 그루브 아마다(Groove Armada)는 베이스먼트 잭스(Basement Jaxx), 모치바(Morcheeba), 엠제이 콜(MJ Cole) 등과 함께 세기말 유행처럼 번진 일렉트로니카와 트립 합의 계보를 이어간 그룹이다. 이들은 레벨 42(Level 42), 스파이로 자이라(Spyro Gyra), 샤카탁(Shakatak) 같은 일련의 재즈펑크(Jazz-Funk) 퓨전 그룹들처럼 언더그라운드 클럽가를 중심으로 출발해 이후 영국 실험주의 음악노선을 초토화시키는데 든든한 공을 세웠다. 톰 핀들레이(Tom Findlay)와 앤디 카토(Andy Cato)의 2인 체제로 구성된 그루브 아마다는 일렉트로니카, 앰비언트, 다운비트, 트립 합, 테크노 등의 다양한 장르를 한데 융합한다. 아울러 이들은 음반을 통해 몽환적이고 중독성 강한 일렉트로닉 연주 음악을 들려주는가 하면 객원싱어들을 초빙해 각 앨범마다 독특한 색깔을 주조해낸다. 1997년에 이르러 선보인 ‘4 tune cookie’, ‘At the river’ 등의 몇몇 싱글과 이듬해 발표한 데뷔음반 < Northern Star >(1998)부터 그러한 사운드 특징을 잘 증명한다. 그룹은 1999년 보다 범위가 폭넓어진 2집 음반 < Vertigo >을 발표해 영국차트 톱 20에 들어가는 성적표를 얻어냈다. ‘If everybody looked the same’, ‘At the river’, ‘I see you baby’(팻보이 슬림에 의해 리믹스) 같은 히트곡을 배출해내며 이들을 일렉트로티카 계열 그룹의 리스트에 당당히 올려놓았다. 이후 그룹은 엘튼 존(Elton John) 공연의 오프닝 밴드로 무대에 서며 조금씩 성공가도를 내달렸고, 2000년에 접어들어 2집 < Vertigo >를 미국에서 재 발매하며 대중적 인지도를 넓혀나갔다. 2000년 발표된 < The Remixes >에 뒤이어 선보인 < Back to Mine >(2000)은 알그린(Al Green), 베리 화이트(Barry White), 티어스 포 피어스(Tears for Fears), 어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A Tribe Called Quest), 루츠 마누바(Roots Manuva) 등의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참여해 앨범의 질을 드높였다. 나아가 그룹은 이듬해에 드디어 주류로 진입해 일렉트로닉 앨범차트 7위를 기록한 3집 음반 < Goodbye Country (Hello Nightclub) >에서 이스트코스트 래퍼 제루(Jeru)가 피처링한 ‘Suntoucher’와 싱글 ‘Superstylin’ 등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자신들의 개성을 거침없이 표출했다. 2년 뒤인 2003년에 발표된 4집 < Lovebox >은 전작보다 진일보해 일렉트로닉 앨범차트 3위까지 오르는 성과를 거둔다. 특히 앨범은 이글 아이 체리(Eagle-Eye Cherry)의 누나인 네네 체리(Neneh Cherry), 랩 그룹 내피 루츠(Nappy Roots), R&B 여가수 선샤인 앤더슨(Sunshine Anderson), 포크 싱어 리치 헤이븐스(Richie Havens) 등과 함께 작업해 다양한 양질의 사운드를 구사하기도 했다.
마이클 잭슨 음악 여정은 주지하다시피 1963년 4명의 형들과 함께 결성했던 패밀리 그룹 잭슨 파이브(Jackson 5)로 시작되었다. 5살이라는 어린 나이와 그에 걸맞지 않게 리드 보컬을 맡았던 그는 너무나도 빼어났던 가창력과 귀여운 춤 실력 때문에 언제나 세간의 관심대상이었다. 지방을 중심으로 명성을 쌓아가던 잭슨 파이브와 마이클은 1969년 베리 고디의 모타운 레코드와 계약하면서 본격적으로 팝 음악계에 뛰어... 마이클 잭슨 음악 여정은 주지하다시피 1963년 4명의 형들과 함께 결성했던 패밀리 그룹 잭슨 파이브(Jackson 5)로 시작되었다. 5살이라는 어린 나이와 그에 걸맞지 않게 리드 보컬을 맡았던 그는 너무나도 빼어났던 가창력과 귀여운 춤 실력 때문에 언제나 세간의 관심대상이었다. 지방을 중심으로 명성을 쌓아가던 잭슨 파이브와 마이클은 1969년 베리 고디의 모타운 레코드와 계약하면서 본격적으로 팝 음악계에 뛰어들었다.

첫 넘버 원 싱글 ‘I want you back’에 이어 ‘ABC’ ‘The love you save’ ‘I’ll be there’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2년 간 그룹활동에 전념하던 마이클 잭슨은 1971년 12월 탐라-모타운 레코드와 솔로 계약을 체결했다. 1971년 데뷔곡 ‘Got to be there’를 발표해 싱글차트 4위에 랭크시킨 후 ‘Rockin’ Robin’, ‘Ain’t no sunshine’, ‘Ben’, ‘I wanna be where you are’, 등을 잇따라 히트시키며 솔로와 그룹활동을 성공적으로 병행했다.

마이클 잭슨이 변성기가 지나고 성인으로 접어들자 잭슨 파이브도 점점 퇴색해갔고, 1979년 마이클은 드디어 성인으로서 첫 음반 을 발표했다. 1977년 흑인판 <오즈의 마법사>였던 뮤지컬 영화 <더 위즈(The Wiz)> 사운드트랙을 통해 만났던 퀸시 존스가 앨범의 프로듀서로 동참해 마이클 잭슨의 ‘성인신고작’을 한결 윤택하게 빛냈다.

활기 넘치는 리듬의 펑크(funk)와 디스코, 소울, 그리고 록과 팝, 발라드가 퓨전된 그 음반에는 마이클 잭슨이 작곡한 2곡의 업 템포 댄스넘버 ‘Don’t stop till you get enough’(최근 영화 <러시아워2>에 삽입되었음)와 ‘Working day and night’와 로드 템퍼튼 작곡의 깔끔한 팝 넘버 ‘Rock with you’, 절제된 보컬의 발라드 ‘She’s out of my life’ 같은 히트곡이 실려있었다. 수록곡 중 ‘Girlfriend’는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가 작곡해 준 곡으로 향후 둘 간의 파트너십을 예고했다.

이 마이클 잭슨의 방향성을 제시해 준 앨범이라면 1982년 12월에 발표된 는 ‘팝의 황제’라는 마이클 잭슨의 원대한 꿈을 실현시킨 회심작이었다. 퀸시 존스와 마이클 잭슨의 공동 프로듀스작인 그 앨범은 37주간이나 앨범차트 정상을 지켰으며 현재까지 미국에서만 2천6백만장의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또한 전례가 없는 무려 7곡이 싱글 발매되어 모두 차트 10위 내에 올랐고 그 중 2곡이 정상을 차지했다. 그 앨범으로 마이클 잭슨은 1984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역대최다인 7개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2000년 산타나와 타이 기록).

‘문워크(Moonwalk)’라는 독창적인 댄스를 유행시킨 ‘Billie Jean’과 에디 밴 헤일런의 기타 속주가 흐르는 ‘Beat it’이 차트 1위에 올랐으며, 첫 싱글로서 폴 매카트니와의 듀엣 곡이었던 ‘The girl is mine’(2위), ‘Wanna be startin’ somethin’(5위), ‘Human nature’(7위), ‘P.Y.T.’(10위), 마지막 싱글 ‘Thriller’(4위) 등이 연속해서 히트했다. 백인 최고스타 폴 매카트니와 록 기타의 거장 에드워드 밴 헤일런을 끌어들였다는 것은 크로스오버는 물론, 더 많은 수요층에게 다가가려는 그의 음악적 야심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Billie Jean’의 뮤직비디오는 MTV가 백인 록 뮤지션의 뮤직비디오만을 방영한다는 불문율을 깨고 틀었던 역사적인 첫 흑인 뮤직비디오였다. 한편 1984년 4월에는 폴카 음악과 ‘패러디의 대가’인 얀코빅(‘Weird Al’ Yankovic)이 ‘Beat it’을 패러디한 ‘Eat it’을 발표해 싱글차트 12위에 진입시키기도 했다.

영국의 난민구호 자선 프로젝트였던 밴드 에이드(Band Aid)의 ‘Do they know it’s christmas?’의 성공에 자극 받은 마이클 잭슨과 라이오넬 리치는 막강한 스타들을 규합, 유에스 포 아프리카(USA For Africa)를 조직해 1985년 1월 그 미국 버전인 ‘We are the world’를 만들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다. 그 해 8월에는 그간 음악동지였던 폴 매카트니와의 심각한 균열이 생겼다. 마이클 잭슨이 ‘레논/매카트니’ 크레딧으로 된 250곡이 넘는 비틀스 곡들의 판권을 4천7백5십만 달러에 사버렸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해 협력관계가 깨졌음은 물론 현재까지도 그 둘은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갱스터 영화의 대부 마틴 스코시즈가 감독한 17분짜리 뮤직비디오 ‘Bad’가 1987년 2월에 선보였고, 8월에는 분위기가 한층 어두워졌으며 록적인 느낌이 강화된 새 앨범 가 발매되었다. 퀸시 존스가 세 번째로 프로듀스를 맡은 이 앨범은 전작의 흥행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8백만장 이상 팔려나가는 성공을 거둔다. 특히 무려 5곡이 싱글차트 1위를 기록해 2곡이 1위에 오른 전작을 능가했다.

여성 보컬 시다 가렛과 호흡을 맞춘 ‘I just can’t stop loving you’를 시작으로 타이틀곡 ‘Bad’, 흥겨운 핑거 스냅이 시종일관 등장하는 ‘The way you make me feel’, 시다 가렛과 글렌 발라드가 공동 작곡한 발라드 넘버 ‘Man in the mirror’, 음산한 분위기가 압권인 ‘Dirty Diana’ 등 모두 5곡이 차례로 정상에 등극했다. 그 외에도 ‘Smooth criminal’, ‘Leave me alone’ 등 수록곡 전반이 주목받았다. 1988년 12월에는 마이클 잭슨과 존 레논의 아들 숀 레논 등이 출연한 영화 <문워커(Moonwalker)>가 전 세계에 개봉되었다.

보다 자신 고유의 음악을 찾기 위해 퀸시 존스와 헤어진 마이클 잭슨은 1991년 홀로서기를 시도한 첫 작품 를 발표한다. 젊은 프로듀서 테디 라일리를 메인 프로듀서로 받아들여 만든 이 음반은 마이클 특유의 사운드에 최신식 힙 합과 랩, 메탈 음악 등이 합쳐졌다. 작곡과 제작에 있어 마이클 잭슨의 재능을 마음껏 펼쳐 보인 음반이었지만 너바나 같은 그룹의 얼터너티브 록 태풍에 휘말려 전작들의 파괴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Remember the time’, ‘Jam’, ‘In the closet’ 등 테디 라일리가 솜씨를 발휘한 곡들과 영화 <프리 윌리>의 주제곡으로 쓰였던 ‘Will you be there’ 같은 곡들은 대중들과 평단으로부터 동시에 큰사랑을 받았다. 또한 ‘Black or white’의 뮤직비디오에서 보여준 ‘모핑’ 기법 같은 놀라운 기법들은 향후 영상 발전에 디딤돌이 되었으며 에서부터 구현된 환상적인 스튜디오 기술로 다시 한번 녹음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마이클 잭슨은 자신이 원하는 악기음색과 음원을 찾을 때까지 스튜디오 작업에 매달렸으며, 코러스 만해도 음색을 바꿔가며 다채롭고 풍부하게 꾸며 일반 제작자들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녹음기술만으로 볼 때는 모든 ‘프로듀서와 엔지니어의 드림’이었다.

해가 지지 않는 성공가도를 달리던 마이클 잭슨의 기세가 한풀 꺾인 것은 1993년의 일이다. 그 해 8월 바로 어린이 성추행 사건이 터진 것. 이 사건은 그간 깨끗한 이미지를 이어가던 그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한동안 그는 언론의 집중포화에 시달렸다. 그러다 얼마 후 갑작스레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했고, 이에 매스컴은 ‘여론 무마용’이라며 그에 대한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매체의 공격이 심해짐에 따라 마이클 잭슨의 분노도 정비례했다. 그에 대한 분노는 1995년에 발표한 더블앨범 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한 장은 히트곡들로, 다른 한 장은 신곡들로 구성된 이 음반은 ‘역사’로 해석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얘기들을 많이 담고있었다. 특히 그를 괴롭혀온 매스컴과 어린이 성추행 소송인에 대한 원한과 경멸, 냉소 등이 짙게 깔려있었으며, 그 때문에 음악도 예전과는 달리 상당히 거친 사운드가 지배적이었다.

알 켈리와 지미 잼 & 테리 루이스, 댈러스 오스틴 등이 프로듀서로 참여한 이 음반에서는 여동생 재닛 잭슨과 듀엣을 이룬 ‘Scream’과 ‘They don’t care about us’, ‘D.S.’, ‘Money’, ‘2 Bad’ 같은 곡을 통해 쇼비즈니스와 세상의 폭력에 대한 분노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물론 ‘You are not alone’, ‘Smile’ 등 따뜻한 노래들도 있었지만 다른 차가운 곡들 탓에 듣기가 좀 부담스러웠고, 그래서였는지 ’주라기음반’에 걸맞지 않게 흥행도 부진했다. 1997년에는 리믹스 앨범 을 발매하기도 했다.

4년이 흘러 2001년 그는 솔로 데뷔 30주년을 맞았다. 3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영예를 얻었으며, 9월에는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휘트니 휴스턴을 비롯해 엔 싱크, 브리트니 스피어스, 데스티니스 차일드, 어셔 등 당대 최고의 팝스타들이 출연한 가운데 그의 솔로 30주년 기념 공연을 가졌다.

그리고 10월 30일, 마이클 잭슨은 6년만의 정규 앨범 을 발표하며 다시 팬들 앞에 섰다. R&B 최고의 프로듀서 로드니 저킨스가 메인 프로듀서로 참여한 이 음반은 전작에 비해 훨씬 부드러워졌으며 한동안 찾아보기 힘들었던 특유의 활기 넘치는 리듬도 회복했다.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등 여러 좋은 일이 겹쳐서인지 밝은 분위기의 내용물들이 담겼다.

3마디의 독특한 리듬이 중독성을 발휘하는 첫 트랙 ‘Unbreakable’, 춤추기에 좋은 부드러운 댄스리듬 그리고 약간은 복고적 사운드가 듣기 편한 첫 싱글 ‘You rock my world’, 변화가 심한 비트가 인상적인 ‘Heartbreaker’ 등이 비트감 느껴지는 곡들. 라틴 풍의 기타 연주가 잔잔한 ‘Whatever happens’에서는 산타나의 무게감 있는 연주도 들을 수 있으며, ‘Speechless’, ‘The lost children’, ‘Break of dawn’ 같은 곡들은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발라드 곡들이다.
노래 : Zaz (자즈 (보컬),Isabelle Geffroy)
R&B, 소울 가수 R&B, 소울 가수
노래 : Chris Brown (크리스 브라운)
지난 2002년 브릿 어워드(Brit Award)는 단 한 장의 앨범을 낸 신인 여가수 다이도(Dido)에게 최우수 여성 가수(Best British Female)상과 최우수 앨범(Best British Album)상을 넘겼다. 그만큼 다이도가 보여주는 매력은 다양하고 특별하다. 클래식의 격조, 포크의 친근함, 토속음악을 통한 신비감, 게다가 일렉트로니카의 중독성까지 그리고 밝고 귀여운 이미지 등등. 어울릴 것 ... 지난 2002년 브릿 어워드(Brit Award)는 단 한 장의 앨범을 낸 신인 여가수 다이도(Dido)에게 최우수 여성 가수(Best British Female)상과 최우수 앨범(Best British Album)상을 넘겼다. 그만큼 다이도가 보여주는 매력은 다양하고 특별하다. 클래식의 격조, 포크의 친근함, 토속음악을 통한 신비감, 게다가 일렉트로니카의 중독성까지 그리고 밝고 귀여운 이미지 등등.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많은 이미지들이 그녀 안에서는 하나가 된다. 다이도는 1971년 크리스마스에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다이도 암스트롱(Dido Armstrong)이다. 5살 때 리코더를 훔친 것이 계기가 되어 음악을 시작하게 된 이색적인 경력을 갖고 있는 그녀는 클래식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영국의 줄리아드’로 알려진 길드홀(Guildhall) 음악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10대의 대부분을 클래식 음악에 파묻혀 살았던 그녀는 피아노, 바이올린, 리코더 연주에 능했고, 작곡 실력과 노래 실력 또한 늘려 나간다. 그녀는 어린 시절을 클래식에 묻혀 살았다. 18살이 되어서 대중음악을 처음 접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뒤늦게 접한 대중음악의 매력은 클래식에서 맛볼 수 없는 강한 것이었고, 결국 다이도는 클래식을 버리고 대중음악 뮤지션으로 음악적 방향을 바꾼다. 여기에는 친오빠 롤로(Rollo)의 도움이 컸다. 정상급 소울 테크노 그룹 페이스리스(Faithless)의 리더였던 롤로는 일렉트로니카와 클래식의 접목을 원했고, 클래식을 공부한 동생 다이도를 멤버로 맞아들인다. 페이스리스의 멤버로 투어를 펼치며 팝 뮤지션으로의 변신에 성공한 다이도는 ‘My lover’s gone’을 데모 앨범으로 제작하며 솔로전향을 선언했고, 아리스타(Arista) 레코드에서 데뷔 앨범 작업에 들어간다. 아카펠라나 기타, 피아노를 사용한 심플한 사운드를 생각하고 있었던 데뷔 앨범은 프로듀싱에 참여한 오빠 롤로 및 엔지니어의 요구에 따라 네오팝적인 사운드가 가미되었고, 그 과정에서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포크 사운드가 결합된 독특한 매력을 지닌 앨범이 탄생하게 된다. 이리하여 탄생한 데뷔작 < No Angel >은 1999년 6월, 자국이 아닌 미국에서 먼저 발매되었다. 발매 직후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음악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대중들에게 알려진다. 시작은 ‘Here with me’였다. 미국 TV 시리즈인 < 로스웰 >(Roswell)에 이 곡이 테마음악으로 사용되었고, 이어 기네스 펠트로우 주연의 영화 < 슬라이딩 도어스 >(Sliding Doors)에 그녀의 곡 ‘Thank you’가 삽입된다. 별 반응 없이 사라져가던 < No Angel >은 다시 한번 대중들에게 어필했고, 그와 때맞추어 인기 래퍼 에미넴(Eminem)이 자신의 곡 ‘Stan’에 다이도의 곡 ‘Thank you’를 샘플링으로 사용한 덕분에 그녀의 음악과 이름은 뒤늦게 널리 퍼지게 됐다. (‘Stan’의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이 바로 다이도!). 이 곡은 2001년 빌보드 톱10에 오르는 빅히트를 기록했다. 다이도는 이 무렵 고국 영국에 돌아와 마침내 인기스타로 올라섰고 에미넴도 ‘Stan’으로 첫 영국차트 1위의 영예를 누리며 서로 도움을 교환했다. *Dido Interview http://nine4u.asiamusic.net/dj/program.asp?popstory+15
제프 버클리(Jeff Buckley)는 1990년대의 가장 독보적인 싱어 송라이터이자 얼터너티브 포크 록 뮤지션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폭발적이면서도 감미로운 목소리로 독자적인 음악 스타일을 구축했지만 안타깝께도 1997년 5월,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의 죽음과 함께 1990년대 음악계의 가장 비극적 사건이었다. 더욱이 단지 한 장의 앨범만을 남긴 뒤였기에 그 슬픔은 더했다. 제프 ... 제프 버클리(Jeff Buckley)는 1990년대의 가장 독보적인 싱어 송라이터이자 얼터너티브 포크 록 뮤지션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폭발적이면서도 감미로운 목소리로 독자적인 음악 스타일을 구축했지만 안타깝께도 1997년 5월,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의 죽음과 함께 1990년대 음악계의 가장 비극적 사건이었다. 더욱이 단지 한 장의 앨범만을 남긴 뒤였기에 그 슬픔은 더했다. 제프 버클리는 1960년대 유명한 포크 뮤지션이었던 팀 버클리(Tim Buckley)의 아들로 태어나 고등학교 시절부터 밴드 활동을 시작했다. 졸업 후, 음악 공부를 위해 L.A로 이동한 뒤 레게 뮤지션이었던 샤인헤드(Shinehead)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내공을 쌓아나갔다. 이후 기타리스트 게리 루카스(Gary Lucas)와 결성했던 음악 공동체 가즈 앤 몬스터즈(Gods & Monsters)로 어느 정도 이름을 홍보하는데 성공했다. 밴드를 그만두고 결국 솔로로 전향한 제프 버클리는 1994년 데뷔작이자 생전 마지막 음반인 < Grace >를 발표했다. 앨범으로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예상했던 세간의 평들을 완전히 깨부순 그만의 싱어 송라이팅 스킬을 뽐내며 단숨에 주목을 받았다. 특히 동시대의 주류였던 그런지 사운드와는 완연히 다른 독특한 포크 록 소리샘이 돋보였다. 일종의 얼터너티브에 대한 얼터너티브였던 셈. 웅장하면서도 흐느끼는 듯한 그의 목소리와 탁월한 작곡 능력, 백 밴드의 안정감 있는 연주가 만난 걸작이었다. 또한 작품 전반에 걸쳐 흐르는 재지한 느낌은 앨범을 제목 그대로 ‘우아하게’ 만들어주었다. 메시지면에 있어서도 당시 얼터너티브의 염세적, 부정적인 정서가 아닌 ‘음악을 통한 사랑의 전파’라는 소신을 피력, 컬트 팬들을 세력권으로 집결시켰다. 이 후 2집 앨범을 준비하던 중에 떠난 미시시피 강으로의 여행에서 제프 버클리는 익사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데모상태로 존재했던 트랙들은 다행히도 사후 그의 어머니의 노력으로 1998년에 < Sketches (For My Sweetheart the Drunk) >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다. 2집 역시도 1집에 버금가는 뛰어난 성과물이었으나 다만 ’그가 직접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았다. 그리고 2000년에는 제프 버클리의 첫 번째 공식 라이브 앨범인 < Mystery White Boy >(제프 버클리를 일컫는 듯한)가 나와 그를 못 잊는 팬들을 달래주었다. 1970년대에 시작된 ‘싱어 송라이터’라는 개념은 직접 곡을 쓰고 노래를 하는 뮤지션을 지칭하는 의미를 지녔었다. 특히 그들은 1960년대의 ‘우리’의 입장이 아닌 철저히 ‘개인적인’ 감수성을 노래했다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바로 1960년대를 ‘we decade’, 1970년대를 ‘my(혹은me) decade’라 명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싱어 송라이터는 또한 ‘독보적인 음악 파일을 완성한’ 아티스트를 말할 때 쓰일 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1990년대에 제프 버클리만큼 자신만의 소리 메커니즘을 들려 준 아티스트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도 단 한 장의 앨범으로 말이다.
1990년대 후반 일기예보가 발표한 ‘좋아 좋아’의 클라이맥스 소절을 들었을 때 많은 음악 팬들은 팝록, 어덜트 컨템포러리 싱어 케니 로긴스(Kenny Loggins)가 1982년에 공개한 ‘The more we try’를 떠올렸다. 일기예보의 노래가 케니 로긴스의 발라드 스타일보다 업템포로 밝은 면을 강조했지만 클라이막스의 기본 멜로디는 같았다. ‘The more we try’는 ‘Forever’, ‘Footl... 1990년대 후반 일기예보가 발표한 ‘좋아 좋아’의 클라이맥스 소절을 들었을 때 많은 음악 팬들은 팝록, 어덜트 컨템포러리 싱어 케니 로긴스(Kenny Loggins)가 1982년에 공개한 ‘The more we try’를 떠올렸다. 일기예보의 노래가 케니 로긴스의 발라드 스타일보다 업템포로 밝은 면을 강조했지만 클라이막스의 기본 멜로디는 같았다. ‘The more we try’는 ‘Forever’, ‘Footloose’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케니 로긴스의 베스트 트랙이다. 1948년 1월 7일 미국의 워싱턴 주에서 태어난 케니 로긴스는 1970년대 초반 짐 메시나(Jim Messina)와 함께 포크록 듀오 로긴스 & 메시나(Loggins & Messina)를 만들어 ‘Your Mama don''t dance(4위)’나 ‘Thinking of you(18위)’같은 히트곡을 배출했는데 특히 ‘Your mama don''t dance’는 1988년 팝메탈 밴드 포이즌(Poison)이 커버해 다시 한번 탑 텐에 올려놓아 다시 한번 명곡임을 입증했다. 케니는 성공적인 듀엣 활동을 접고 1977년부터 결별해 본격적으로 독립 활동을 시작해 멜리사 맨체스터(Melissa Manchester)와 공동으로 작곡한 ‘Whenever I call you friend(5위)’를 비롯해 ‘This is it(11위)’, 케니 로긴스의 오리지날을 두비 브라더스가 리메이크해 차트 정상은 물론 그래미 올해의 레코드를 수상한 ‘What a fool believes’ 등으로 1970년대를 마감했다. 그의 진정한 성공은 1980년대를 맞이하면서 화려하게 개화하기 시작했다. 1982년에 저니(Journey)의 보컬리스트 스티브 페리(Steve Perry)와 호흡을 맞춘 ‘Don''t fight it(17위)’와 ‘Heart to heart(15위)’, 그리고 유독 국내에서 사랑 받았던 ‘The more we try’가 들어 있는 그의 역작 < High Adventure >는 곧 다가올 성공에 대한 워밍업이었다. 1984년부터 쏟아지는 케니 로긴스의 히트곡들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거의 모두가 영화에 삽입된 노래들이었다. 그의 대표곡 ‘Footloose(1위)’와 ‘I''m free(22위)’는 영화 < 풋루스 >의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노래들이었고, ‘Danger zone(2위)’은 < 탑 건 >에서, ‘Meet me half way(11위)’는 < 오버 더 탑 >으로부터, ‘Nobody''s fool(8위)’은 < 캐디섁Ⅱ >에서 배출된 히트 싱글들이다. 그러나 이 ‘Nobody''s fool’을 마지막으로 싱글 차트와의 친분을 정리한 케니 로긴스는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가족의 소중함과 어린이들을 위한 음반을 만드는데 열중했다. 1990년대 초반 아내와의 이혼이 그에겐 큰 충격이었던 셈이다. 그의 예민하고 가녀린 목소리는 ‘Danger zone’이나 ‘Don''t fight it’처럼 강한 음악보다 ‘The more we try’나 ‘Forever’, ‘Whenever I call you friend’와 같은 차분하고 부드러운 노래에 더 잘 어울린다. 그의 성공은 팝시대로 대표되는 1980년대 음악 풍토에 정확히 들어맞는 시대적 요청이었기에 가능했다.
노래 : One Direction (원 디렉션 (아이돌 밴드))
멤버 : 니엘 호란(Niall Horan), 잔 말리크(Zayn Malik), 리암 페인(Liam Payne), 해리 스타일스(Harry Styles), 루이스 톰린슨(Louis Tomlinson) 이 5명의 소년들이 원 디렉션을 함께 하게 된 계기는 꽤나 이색적이다.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 엑스펙터(X-Factor) 시즌7에서 각각 개인별 오디션에 참가하게 된 이들은 패널인 사이먼 코웰, 니콜 셰르징거에 의... 멤버 : 니엘 호란(Niall Horan), 잔 말리크(Zayn Malik), 리암 페인(Liam Payne), 해리 스타일스(Harry Styles), 루이스 톰린슨(Louis Tomlinson)

이 5명의 소년들이 원 디렉션을 함께 하게 된 계기는 꽤나 이색적이다.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 엑스펙터(X-Factor) 시즌7에서 각각 개인별 오디션에 참가하게 된 이들은 패널인 사이먼 코웰, 니콜 셰르징거에 의해 그룹으로 결성하는 것이 어떠겠냐는 제안을 받게 되고, 다섯 소년은 이를 계기로 '원 디렉션(One Direction)'이란 그룹을 결성하게 되며, 엑스팩터 파이널 리스트까지 진출하게 된다. 이들은 최종 파이널에서 아쉽게도 최종 3위를 차지했지만, 액스팩터가 끝난 후 결국 팝 계 최고의 영향력 있는 인물인 사이먼 코웰의'Syco Music'과 계약을 체결하면서 정식 데뷔하기에 이르렀다. 2011년 11월 18일 유럽지역에서 가장 먼저 선보인 데뷔앨범 [Up All Night]는 먼저 아일랜드에서는 첫 주 앨범 차트 3위에 오르며 화려하게 데뷔했고, 영국에서는 첫 주 138,631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UK 앨범차트 2위로 데뷔했다.
2002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핵심부문인 ‘올해의 곡’(Song of the year)과 ‘최우수신인’상을 포함해 ‘여성 R&B 보컬’ ‘R&B 앨범’ ‘R&B 송’ 등 5개 부문을 석권한 앨리샤 키스(Alicia Keys)는 뉴 밀레니엄 초반의 R&B 음악양식을 대표하는 가수라고 할 수 있다. 어번(Urban) R&B라고 단순 정의할 수 없을 만큼 전통과 현대가 절묘하게 조화된 고유상표의 음악을 들려준다. 귀에... 2002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핵심부문인 ‘올해의 곡’(Song of the year)과 ‘최우수신인’상을 포함해 ‘여성 R&B 보컬’ ‘R&B 앨범’ ‘R&B 송’ 등 5개 부문을 석권한 앨리샤 키스(Alicia Keys)는 뉴 밀레니엄 초반의 R&B 음악양식을 대표하는 가수라고 할 수 있다. 어번(Urban) R&B라고 단순 정의할 수 없을 만큼 전통과 현대가 절묘하게 조화된 고유상표의 음악을 들려준다. 귀에 잘 들리는 피아노 멜로디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가스펠을 연상시키는 소울 식의 고전적 창법이 트레이드마크이며, 이 때문에 1970년대 여성 소울의 거성인 로버타 플랙(Roberta Flack)과 자주 비교되곤 한다. 하지만 재래의 미학만을 고집하는 복고형 R&B라고 하기보다는 거기에다 현대적 힙합 분위기를 삼투한 최신 스타일을 부각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 어반이란 수식어가 붙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를테면 과거 블루스와 재즈에 뿌리를 둔 음악을 현대적 창구로 전달하는 셈인데 실제로 피아노의 선율, 1970년대 풍의 소울 창법, 세련된 힙합 분위기가 어울린 그녀의 ‘모던한’ 데뷔 앨범 [Songs In A Minor]는 2001년에 발표되어 화려히 인기차트를 누볐다. 미국 뉴욕 토박이로 1982년에 태어난 앨리샤 키스는 어렸을 적부터 음악을 자신의 미래분야로 삼아 맨하탄의 퍼포먼스 아트 스쿨(Performance Art School)에서 합창을 훈련했고 10대 내내 피아노교습에 열중한다. 이 합창과 피아노는 훗날 데뷔 앨범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아울러 피아노 외의 다른 악기 연주는 물론, 작곡 편곡 등 음악작업 전반에 걸친 실력과 감각을 쌓았다. 고교를 졸업한 16살에 명문 콜롬비아 대학에 입학했지만 음악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학업을 도중 포기했고 대신 1998년 명문 레코드사인 아리스타(Arista)와 계약을 체결한다. 아리스타 사장이었던 클라이브 데이비스(Clive Davis)에 의해 픽업된 관계로, 그가 1999년 아리스타를 떠나 새로운 레이블 제이(J)를 출범시키자 앨리샤도 그를 따라 제이 레코드사로 적을 옮기게 된다. 19살이던 2001년 데뷔 앨범 [Songs In A Minor]이 발표되었고 이 음반은 데뷔와 동시에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을 밟는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다. 특히 자신이 프로듀스한 첫 싱글 ‘Fallin’’은 전미차트 2주간 1위를 차지했다. 그녀의 각별한 신구(新舊)결합형 음악은 시장 뿐 아니라 마침내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 그리고 그래미상이라는 공인 절차마저 거뜬히 통과했다.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 토니 브랙스톤(Toni Braxton) 등과 함께 1990년대 중 후반의 팝 시장을 천하 삼분했던 셀린 디온(Celine Dion)은 디바(diva)의 정점을 대표하는 여가수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 머라이어 캐리에게 밀려 만년 2등 가수의 한을 삭였던 그녀는 영화 < 타이타닉 >의 테마송인 ‘My heart will go on’을 통해 단숨에 넘버원 팝 싱어의 반열에 ...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 토니 브랙스톤(Toni Braxton) 등과 함께 1990년대 중 후반의 팝 시장을 천하 삼분했던 셀린 디온(Celine Dion)은 디바(diva)의 정점을 대표하는 여가수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 머라이어 캐리에게 밀려 만년 2등 가수의 한을 삭였던 그녀는 영화 < 타이타닉 >의 테마송인 ‘My heart will go on’을 통해 단숨에 넘버원 팝 싱어의 반열에 올랐다. 캐나다에서 유일하게 불어를 쓰는 퀘벡 지방의 작은 집에서 1968년 첫 울음보를 터트린 셀린 디온. 그녀는 합계가 무려 16명인 대식구의 막내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또한 부모님 모두 노동자 출신이었기에 물질적으로 그다지 풍요롭지 못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부모님의 우산 아래 셀린 디온의 음악적 재능은 어린 시절부터 싹을 맘껏 틔웠다. 5살 때부터 부모님의 피아노 바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12살 때에는 ‘It was only a dream’이라는 최초의 자작곡을 썼다는 등의 후일담들이 잘 증명해준다. 오빠와 어머니의 전폭적 지원 하에 상기한 곡을 테이프화(化)했던 셀린 디온. 그녀는 그것을 매니저인 르네 앤젤릴(Rene Angelil)에게 보낸 뒤, 답변을 기다렸지만 묵묵 부답이었다. 허나 독촉 전화를 받고 그제서야 셀린 디온의 숨은 재능을 발견한 르네 앤젤릴은 그 날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고 그녀는 정식 데뷔 코스를 밟기 시작했다.(셀린 디온의 노래를 직접 들은 순간, 르네 앤젤릴은 그녀가 곧 인터내셔널 슈퍼 스타가 될 것임을 확신했다고 한다.) 1983년 15살의 나이에 발표했던 음반 < D’Amour Ou D’Amite >을 통해 캐나다 출신 아티스트로는 최초로 프랑스에서 골드 레코드를 기록하고 일본에서 개최되었던 야마하 작곡 대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하는 등, 이후 셀린 디온의 행보는 거칠 것 없는 탄탄대로였다. 또한 그녀는 그 즈음 조우했던 베테랑 프로듀서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와의 인연 덕에 걸프 전 참전 용사들을 위한 기획 앨범 < Voices That Care >에 참여, 수많은 팝 필드의 거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미국 시장 진출이라는 ‘좁은 문’뿐인 듯 보였다. 이를 위해 그녀는 우선 음악 외적인 면에서 파격적 변신을 단행했다. 팝 계의 별이 되기 위해서는 음악만큼이나 이미지 메이킹 또한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 동시에 셀린 디온은 영국의 랭귀지 스쿨에서 언어 교육을 받으며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춰나갔다. 어느새 그녀는 틴에이저에서 성숙미를 내뿜는 여인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피드백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1990년에 발매했던 처녀작 < Unison >(74위)이 각각 빌보드 싱글 차트 35위와 4위를 기록한 ‘If there was (any other way)’와 ‘Why does my heart beat now’의 선전에 힘입어 꽤 괜찮은 성적표를 받았던 것. 허나 정작 그녀를 꼭지점으로 견인했던 곡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테마였던 ‘Beauty and the beast’였다. 차트 1위를 단박에 꿰찬 곡은 그녀에게 1992년 그래미의 팝 듀오/그룹 부문 트로피를 안겨주며 이후의 성공 시대를 예감케 했다. 또한 2집 앨범인 < Celine Dion >(1992)에도 수록되어 소포모어 징크스를 깨부수는데 일등 공신의 역할을 해주었다. 곡 외에 다이안 워렌(Diane Warren) 작곡의 ‘If you asked me to’(4위), ‘Nothing broken but my heart’(29위), ‘Love can move mountains’(36위) 등이 팬들의 애정 공세를 한 몸에 받았다. 같은 해에 내놓았던 영화 <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의 주제곡인 ‘When I fall in love’(23위) 역시 대박이었다. 2년 뒤인 1994년에는 셀린 디온의 인생에 있어 중대한 터닝 포인트가 찾아왔다. 매니저였던 르네 앤젤릴과의 결혼이 바로 그것. 1988년부터 비밀리에 연인 관계를 유지해왔던 둘은 6년 뒤인 1994년에야 그 사실을 발표하고 몬트리올의 노틀담 성당에서 결혼, 세간을 놀라움 속에 빠뜨렸다. 정확이 배가 되는 나이차도 화제거리를 양산하기에 충분했다.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은 덕분인지 셀린 디온의 정상을 향한 질주는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5년 간, 무려 6장의 앨범을 녹음했다는 사실이 주는 양적 포만감부터가 남달랐다. 1993년의 < Colour of My Love >(4위)가 첫 테이프를 끊으며 제니퍼 러시(Jennifer Rush)의 곡을 리메이크한 ‘The power of love’(4주간 1위), 그리고 ‘Misled’(23위) 등의 히트 넘버들을 배출했다. 1994년과 1995년에 셀린 디온은 두 장의 불어 LP를 내놓으며 음악적 본령을 되새김질하는 기회를 가졌다. 제베타 스틸(Jevetta Steele)의 팝 클래식인 ‘Calling you’를 수록한 < Live A L’olympia >와 장자크 골드만이 프로듀스해준 < D’eux >이었다. 특히 후자는 지금까지 800만장을 세일즈, 가장 많이 팔린 샹송 작품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절정의 순간은 단연코 1996년의 팝 마스터피스 < Falling Into You >였다. 현재까지 미국 내에서만 집계된 판매량이 1100만장인 작품은 그 해 그래미에서 ‘팝 앨범’과 ‘올해의 앨범’, 두 개 부문을 석권하며 엄청난 위세를 떨쳤다. < 업 클로즈 앤 퍼스널 >의 테마송이자 다이안 워렌이 써 준 ‘Because you loved me’(1위)를 위시로 팝 고전을 다시 부른 ‘All by myself’(4위), ‘It’s all coming back to me mow’(2위) 등이 차트에 핵 폭탄을 마구 투하했다. 어디 이 뿐이겠는가. 같은 해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이 감독한 블록버스터 무비 [타이타닉]의 주제곡 ‘My heart will go on’(14주 연속 1위)은 더했다. 또 다시 그래미 두 개상을 차지하는 등, ‘셀린 디온을 모르면 간첩’일 정도의 상황을 연출했다. 곡이 수록된 1997년의 앨범 < Let’s Talk About Love >(1위)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 두 음반의 합산 판매고가 무려 6000만장을 상회했다. 이 시기를 전후해 그녀는 실로 당대에 무적, 팝 계 최고의 디바 자리에 우뚝 섰다. 그간 참여했던 뮤지션들을 포함해 새로 가세한 조지 마틴(George Martin), 비지스(The Bee Gees), 캐롤 킹(Carole King),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 등, 후자에 참여한 초특급 아티스트들의 면면만 살펴봐도 당시 그녀의 입김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를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이후 셀린 디온은 크리스마스 스페셜 반인 < These Are Special Times >(1998, 2위)와 샹송 앨범 < S’il Suffisatt D’aimer >(1998)를 선보이고 베스트 컬렉션인 < All The Way: A Decade of Song >(1999, 1위)을 내놓는 등,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남편의 후두암 투병이라는 절망적 사건이 발발한 때도 이 즈음이었다. 비극이 종결되고 셀린 디온에게 행복이 찾아왔던 때는 2001년이었다. 체외 수정에 성공하며 그토록 소망했던 아이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남편의 증세도 나날이 호전되는 등, 셀린 디온이 가정에서 본업으로 컴백할 기운이 날로 충만해져 갔다. 그리고 2002년, 무려 5년 만에 출시했던 정규작 < A New Day Has Come >은 그녀의 디스코그라피 중 최초로 발매 첫 주에 정상에 등극하며 변함없는 팬 베이스를 과시했다. 허나 뒷심 부족을 드러내며 전성기 시절에는 많이 못 미치는 결과를 얻고 말았다. 현재 셀린 디온은 1년 만에 신작 < One Heart >를 내놓으며 팬들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2003/04 배순탁(greattak@izm.co.kr) 오이뮤직 머라이어 캐리가 있고 휘트니 휴스턴이 있지만 이들 못지 않게 지난 9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가수가 셀린 디온(Celine Dion)이다. 흔히들 이들을 오페라의 주역가수에서 나온 말로 최고 인기의 여가수를 의미하는 어휘인 디바(diva)로 일컫는다. 휘트니 휴스턴과 머라이어 캐리가 팝 음악계의 디바 시대를 이끌었다면 셀린 디온은 디바 시대의 정점에 선 여가수라고 할 수 있다. 셀린 디온은 같은 음반회사 소니 뮤직에 소속된 머라이어 캐리에 밀려 90년대 중반까지 만년 2등 가수였다. 하지만 셀린 디온이 부른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곡 ‘나의 마음은 영원할 거예요(My heart will go on)’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그 동안 명실상부한 공동 1위였던 머라이어 캐리와 휘트니 휴스턴이 모두 셀린 디온의 밑으로 내려앉고 말았으며 급기야 ‘셀린 디온 격파’를 외치며 함께 듀엣 곡을 내놓는 공동 대항전선을 펴기도 했다. 근래 셀린 디온의 위풍당당한 기세를 이보다 잘 말해주는 단서도 없을 것이다. 1998년 연말호에서 영국의 잡지 ‘Q’는 소니 뮤직의 통계를 빌어 “지난 30개월 동안 셀린 디온은 매 1.2초마다 한 장의 앨범을 팔았다”고 보도했다. 96년 발표한 앨범 < 너에게 빠져 (Falling into you) >가 그때까지 세계적으로 2500만장, 97년 말에 나온 후속 앨범 < 사랑을 얘기합시다(Let`s talk about love) >가 2400만장이라는 경이적 판매고를 수립한 것을 두고 시간당 수치를 계산한 것이다. ‘1초당 한 장’의 파죽지세는 이후에도 변함없어 현재 두 앨범은 모두 3000만장을 돌파했으며 이어서 프랑스어 앨범과 히트곡 모음집도 날개돋친 듯 팔리고 있다. 셀린 디온이 이처럼 가공할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노래를 잘하기 때문’이다. 참 단순한 설명이지만 가장 확실한 분석이다. 일례로 셀린 디온의 히트송 ‘이제 모두 나한테 되돌아오네요(It`s all coming back to me now)’를 들어보면 왜 때로 ‘질릴 정도로 노래를 잘한다’는 평을 듣는지 알게 된다. 셀린 디온은 엄청난 보컬의 파괴력이 주무기이다. 쉬지도 않고 20곡을 내리 한결같이 높은 음으로 질러대는 놀라운 힘을 보유하고 있다. 가창력이 뛰어난 다른 여가수들과 바로 이 점에서 다르다. 머라이어 캐리나 휘트니 휴스턴의 무대는 정적이고 우아한데 반해서 셀린 디온의 공연은 열띠고 힘이 넘친다. 공연장은 그래서 어떤 헤비메탈 그룹의 무대 못지 않은 열광의 도가니를 연출한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감상하더라도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만끽한다. 한마디로 시원하다. 이런 에너지와 파워 말고도 그녀를 당대 톱 가수로 부상시켜준 또 하나 원동력이 있다면 그것은 가사 해석이 아주 자연스럽다는 점이다. 결코 억지로 질러대지 않는다.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미리 짜놓은 적은 없다. 노래 부르기란 기본적으로 첫 키스나 첫 사랑을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키스나 포옹할 때 미리 리허설하는 사람이 있는가? 또 어떤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치르는가?” 마치 실제처럼 가사의 감정을 충분히 살리되 정해진 공식대로 노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셀린 디온은 철저히 백인 풍의 노래를 부른다는 점에서도 딴 가수와 차별화된다. 머라이어나 휘트니를 비롯해서 근래 디바들 노래는 흑인이건 백인이건 흑인음악 즉 리듬 앤 블루스의 느낌이 녹아있다. 하지만 셀린 디온은 그러한 공통분모를 배격하고 철저히 백인 스탠더드 팝을 구사한다. 여전히 흑인음악이 친근감이 덜 한 유럽의 기성세대 음악팬들이 이 때문에 셀린 디온에게 열광한다. 캐나다 퀘벡 태생인 그녀는 캐나다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가수이기도 하다. 캐나다 음반산업협회는 올해 초 셀린 디온이 지난 한 세기에 걸쳐 국내와 국외에서 가장 음반을 많이 판 캐나다가수라고 공식 발표했다. 1999년 말 캐나다의 음반판매고는 9백만장으로 어떤 캐나다가수보다 많았으며 해외에서는 1억1천장을 넘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다. 근래 최고인 샤니아 트웨인과 브라이언 아담스도 그녀에게는 역부족인 것으로 나타났다. 캐나다는 물론 특히 퀘벡과 같은 문화권인 프랑스도 셀린 디온을 ‘국민가수’ 또는 ‘국보급 가수’로 떠받든다. 프랑스 팬들에게 인기는 거의 절대적이어서 프랑스정부가 수여하는 문화훈장을 이미 두 차례나 받았다. 셀린 디온도 이를 의식해 정기적으로 불어음반을 발표하고 있다. 셀린 디온의 지난 94년 말 결혼은 특급화제였다. 1968년 생으로 스물 여섯이던 그 해 그녀는 정확히 나이가 배인 52세의 매니저 레니 안젤리와 몬트리올 노틀담 성당에서 웨딩 마치를 거행했다. 어렵던 시절 자기 집까지 저당 잡혀가며 셀린의 음반작업을 주선한 매니저와 결혼하자 사람들은 사랑의 결실임을 인정하면서도 요즘 가수치고는 드물게 ‘의리형’ 인물이라고 셀린 디온을 높이 평가했다. 너무도 바쁜 스케줄로 가정생활에 여유가 없는 관계로 아직 레니와의 사이에 자식 소식은 없다. 남편이 나이가 많은 탓인지 더욱이 사람들은 언제 그녀가 아기를 가질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다. 얼마 전 타블로이드 신문 ‘내셔녈 인콰이어러’는 “셀린이 체외수정을 통해 현재 쌍둥이를 임신했다”고 보도했지만 셀린 디온 측은 이를 완강히 부인하며 그 신문에 대해 2천만달러의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셀린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여가수임을 웅변하는 에피소드들이다. 지난 91년 ‘지금 내 심장이 어디서 두근거리나요(Where does my heart beat now)’를 차트 상위권에 올려놓은 이래 무수한 히트퍼레이드를 펼치며 그녀는 ‘90년대의 가수’로 영광의 나날들을 보냈다. 휴식 후 내후년에 신보가 나오게 되면 다시 광풍을 몰아칠 것이 확실시된다. 현재진형형이라 실감은 나지 않지만 분명 셀린 디온은 ‘살아있는 전설’이다.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수련해 온 한 소년은 어느 날 에드 셜리번 쇼에 나온 비틀즈의 모습에 감명 받아 뮤지션으로서 삶을 영위하기로 결심했다. 피아노만큼이나 좋아했던 권투 선수로서의 인생을 포기하고 한 우물만 파기로 한 뒤 로컬 밴드에 몸담으며 내공을 연마해나갔다. 당시 20살이 채 안된 어린애가 장차 거물급 싱어 송라이터 명단에 세세토록 이름을 남길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건 당연지사.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수련해 온 한 소년은 어느 날 에드 셜리번 쇼에 나온 비틀즈의 모습에 감명 받아 뮤지션으로서 삶을 영위하기로 결심했다. 피아노만큼이나 좋아했던 권투 선수로서의 인생을 포기하고 한 우물만 파기로 한 뒤 로컬 밴드에 몸담으며 내공을 연마해나갔다. 당시 20살이 채 안된 어린애가 장차 거물급 싱어 송라이터 명단에 세세토록 이름을 남길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건 당연지사.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 했던 그 아이, 바로 영원한 피아노맨 빌리 조엘(Billy Joel)이다. 빌리 조엘은 1965년부터 에코스(The Echoes), 해슬스(The Hassles), 아틸라(Attila) 등의 밴드에서 활동하며 팝 계에 명함을 내밀었다. 허나 당시 하드록, 사이키델릭이 주를 이뤘던 음 세계는 대중들의 무관심 속에 사장되고 말았다. 생계를 위해 저널에 비평을 기고하고 음악적 실패로 인해 마약 센터에 들락거리며 자살을 기도하는 등, 최악의 상황이 그를 엄습한 시기였다. 1971년에 빌리 조엘은 솔로 데뷔작 < Cold Spring Harbor >를 내놓으며 복귀식을 치렀다. 발표 직후 가졌던 공연 릴레이는 호평 받았지만 지지부진한 판매고는 여전했다. 결국 빌리 조엘은 L.A.에 새 둥지를 틀었고, 빌 마틴(Bill Martin)이란 가명으로 클럽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며 재기를 꿈꿨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비슷한 시기에 겹경사가 일어났다. 1973년 엘리자베스 웨버와 결혼하며 안정을 찾았고 ’Captin Jack’의 라이브 버전이 라디오 전파를 타기 시작한 것이다. 재능을 간파한 콜롬비아(Columbia)가 구애의 손길을 보낸 것은 예정된 순서였다. 같은 해에 2집 < Piano Man >이 등장했다. ’피아노맨’이라는 별명의 진원지이기도 한 앨범은 빌보드 차트 27위까지 올랐고 타이틀 트랙 역시 싱글 차트 40위권에 안착하며 그에게 처음으로 성공의 단 열매를 맺어주었다. 제이 가일스 밴드(The J. Geils Band), 두비 브라더스(The Doobie Brothers)의 오프닝을 맡아 투어를 돈 뒤, 1974년 말에 내놓은 3집 < Streetlife Serenade >(1974)은 차트 35위를 기록하며 탄탄대로를 열어주는 듯 했다. 허나 4집 < Turnstiles >(1976)는 명곡 ’New York State of Mind’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 차트 10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제작 전에 프로듀서인 궈시오(Guercio)를 해고하고 아내를 매니저로 기용하는 등, 잡음이 많았던 점이 실패의 원인으로 분석된다. 1977년의 < The Stranger >는 오늘날의 빌리 조엘이 있게 한 명반이었다. 19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미국에서 각광받았던 시티 뮤직을 대폭 수용한 작품은 차트 2위까지 상승하며 단숨에 플래티넘을 따냈고 ’Just the way you are’(3위), ’Monin’ out’(17위), ’Only the good die young’(24위), ’She’s always a woman’(17위)등, 네 곡의 히트작을 쏟아냈다. ’Just the way you are’는 그래미에서 ’Record of the Year’와 ’Song of the Year’, 두 개 부문을 수상하며 비평적 찬사를 안겼다. 6집 < 52nd Street >(1978)도 맹렬한 기세를 이어나갔다. 아니, 오히려 능가했다.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8주간 1위를 고수하며 한달 만에 200만장을 세일즈했고 ’My life’(3위), ’Big shot’(14위) ’Honesty’(24위)등이 수시로 울려 퍼졌다. 마침내 그는 그토록 소망했던 그래미 ’올해의 작품상’을 거머쥐었다. 펑크와 뉴 웨이브의 세상 속으로 과감히 돌진한 < Glass Houses >(1980)에서도 한번 불붙은 열기는 식지 않았다. 급격한 음악적 변화에도 기존 팬들은 쌍수 들어 그를 환영했다. 앨범 차트 6주간 1위, 4곡의 히트송 배출, 그래미 ’Best Rock Vocal Performance, Male’ 부문 수상이 마치 자연스런 수순처럼 보일 정도였다. 1년 뒤, 초기곡들의 라이브 콜렉션인 < Songs in the Attic >(1981)을 발표한 뒤, 빌리 조엘은 이혼과 오토바이 사고를 겪으며 위기의 남자가 되었다. 베이비 붐 세대의 삶에 대해 컨셉트 앨범으로 꾸민 야심작 < The Nylon Curtain >(1982)마저 낮은 판매량에 허덕이며 전성 시대가 지난 것 아니냐는 추측성 발언을 낳게 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불굴의 의지로 다시 일어섰다. 과거 사운드로 회귀한 < An Innocent Man >(1983)을 내놓으며 슈퍼스타로서의 면모를 되찾았다. 차트 1위에 오른 ’Tell her about it’을 비롯해, ’Uptown girl’, ’An innocent man’, ’Keeping the faith’ 등이 바톤 터치하며 차트 상위권에 안착했다. MTV 시대를 맞이하며 비디오 제작에도 심혈을 기울였던 그는 이를 계기로 만난 슈퍼모델 크리스티 브링클리와 결혼에 골인했다. 1985년에 중간 결산 차원에서 피아노 맨은 히트곡 모음집 < Greatest Hits, VolumeⅠand VolumeⅡ >을 내놓으며 미국에서만 무려 2천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앨범 판매량 역대 5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자 미국인들이 그의 음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 The Bridge >를 발표하여 성공을 이어나간 빌리 조엘은 1987년, 소련에서 공연을 가졌는데 이 때의 실황을 담은 더블 앨범 < Kohuept(Live In Leningrad) >(1987)을 선보이기도 했다. 신장 결석과 법정 소송의 혼란 속에서 등장한 < Storm Front >(1989)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순간을 선물한 작품이었다. 앨범 차트 1위에 오른 것은 제쳐두고서라도, 싱글 ’We didn’t start the fire’가 세계 역사를 훌륭히 그려냈다는 이유로 미국 전역의 고교에 악보가 배포되는 등 화제를 낳았기 때문이다. 베스트 앨범에서 숫자로 드러난 미국인들의 애정이 공적으로 가시화된 순간이었다. 퀸시 존스, 자니 캐쉬, 아레사 프랭클린과 함께 1990년부터 1년 간 가졌던 월드 투어로 ’Grammy Living Legend’상을 수상한 빌리 조엘은 1993년 나온 < River of Dreams >(1위)로 순항을 거듭했다. 1996년 크리스티 브링클리와 이혼한 후, 이 위대한 싱어 송라이터는 20세기 마지막 날 타임스 스퀘어(Times Square)에서 가졌던 공연 결과물 < 2000 Years: The Millennium Concert >를 발매하며 새 출발을 암시했다. 결국 그는 또 다른 히트송 콜렉션인 < The Essential Billy Joel >(2001)로 팝 아티스트로서의 화려했던 시절을 마감했다. 그리고 같은 해, 빌리 조엘은 클래식 크로스오버 작품인 < Fantasies & Delusions >을 소개하며 클래식 작곡가로서의 야심한 행보에 첫 걸음을 내디뎠다.
노래 : Dan Fogelberg (댄 포겔버그 (포크 보컬))
뉴욕 브룩클린 출신의 맥스웰(1973년 생)은 가창력보다는 리듬과 비트에 중점을 둔 1990년대의 현대적인 리듬 앤 블루스 추세 속에서 소울의 감칠맛 나는 음색을 구현해 내며 네오 소울의 대표주자로 떠오른 인물이다. 상업적인 색채가 짙게 드리워진 현란하고 화려한 리듬 앤 블루스의 트렌드에서 한 발짝 비켜서서 가슴을 울리게 하는 1970~1980년대의 전통적인 리듬 앤 블루스를 재현해낸 것이다. 때문에 얼터너티브 ... 뉴욕 브룩클린 출신의 맥스웰(1973년 생)은 가창력보다는 리듬과 비트에 중점을 둔 1990년대의 현대적인 리듬 앤 블루스 추세 속에서 소울의 감칠맛 나는 음색을 구현해 내며 네오 소울의 대표주자로 떠오른 인물이다. 상업적인 색채가 짙게 드리워진 현란하고 화려한 리듬 앤 블루스의 트렌드에서 한 발짝 비켜서서 가슴을 울리게 하는 1970~1980년대의 전통적인 리듬 앤 블루스를 재현해낸 것이다. 때문에 얼터너티브 R & B, 뉴 클래식 소울 등으로 칭하여 진다. 에리카 바두(Erykah Badu), 디앤젤로(D’Angelo) 등도 이 분야의 간판스타들이다. 서부 인디언과 푸에르토리코인의 혈통을 물려받은 혼혈아인 맥스웰은 열 일곱 살이 되던 해 친구로부터 낡아빠진 키보드를 선물 받고 음악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를 해나갔다. 작곡과 보컬 창법 등에 대해 꾸준히 공부하여 갈고 닦았으며,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뉴욕 클럽 등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앨범을 발표하지도 않았는데도 발빠른 입 소문을 통해 뉴욕 클럽 신의 유명 인사로 발돋움한 그는 뒤늦게 내놓은 1996년 데뷔작 < Maxwell’s Urban Hang Suite >로 리듬 앤 블루스 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몰고 왔다. 영혼을 담아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섹시하면서도 진실에 찬 목소리는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다. 평론가들은 ‘프린스(Prince)와 마빈 게이(Marvin Gaye)의 합작품’이라고 했다. ‘Sumthin’ sumthin’ ’, ‘Ascension(Don’t ever wonder)’, ‘Whenever, wherever, whatever’ 등의 히트곡들이 증명한다. 플래티넘을 획득한 이 음반으로 그는 < 롤링스톤 >에 의해 ‘최우수 R & B 아티스트’로 선정됐고, 그래미 상 후보에도 올랐다. 또한 소울 트레인 시상식에서 ‘최우수 남자 가수’, ‘올해의 소울 앨범’, ‘올해의 싱글(‘Ascension’)’, ‘최우수 신인 아티스트’ 등 4개 부문 상을 휩쓰는 저력을 발휘했다. 이듬해에는 MTV 언플러그드 공연 실황을 엮은 < Maxwell Unplugged EP >를 발표하기도 했다. 2년 뒤인 1998년 들고 나온 두 번째 작품 < Embrya >에서 맥스웰은 전작보다 더욱 더 깊이 있는 리듬 앤 블루스를 선보였다. 매우 가라앉은 그의 음색은 깊이를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철학적이고 사색적이었다. 대중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칩거한 것이다. 하지만 이듬해 영화 < Life >의 사운드트랙에 삽입된 ‘Fortunate’가 빅 히트를 치면서 그의 이름은 다시금 세상에 회자됐다. 단 두 장의 정규 앨범으로 트래디셔널 리듬 앤 블루스 싱어로서 당당히 그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맥스웰은 현재 새 음반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이다.
라파엘 사딕(Raphael Saadiq)을 가리켜 '장인'이라 부르길 주저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는 십중팔구 내츄럴 본 얼간이이거나 사딕에게 돈을 뜯긴 적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1966년생. 우리 나이로 이제 46살에 접어드는 그는 1980년대 후반부터 꾸준하고도 묵묵한 행보로 존중할만한 발자취를 걸어온, 미성(!)의 알앤비/소울 싱어송라이터다. 라파엘 사딕은 십대의 나이로 프린스(Pri... 라파엘 사딕(Raphael Saadiq)을 가리켜 '장인'이라 부르길 주저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는 십중팔구 내츄럴 본 얼간이이거나 사딕에게 돈을 뜯긴 적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1966년생. 우리 나이로 이제 46살에 접어드는 그는 1980년대 후반부터 꾸준하고도 묵묵한 행보로 존중할만한 발자취를 걸어온, 미성(!)의 알앤비/소울 싱어송라이터다.

라파엘 사딕은 십대의 나이로 프린스(Prince)의 투어에 백 밴드로 합류해 베이스를 연주했다. 투어를 통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경험을 쌓은 그가 본격적으로 프로 뮤지션의 커리어를 시작한 건 그룹 토니! 토니! 톤!(Tony! Toni! Ton?!)을 결성하면서부터였다. 친형 드웨인 위긴스(Dwayne Wiggins), 사촌 티모시 크리스찬(Timothy Christian)과 의기투합해 결성한 이 남성 알앤비/소울 팀은 모두가 알고 있듯 한 시대를 풍미하는 큰 인기를 누렸다. 4장의 앨범을 발매해 4백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고 "Little Walter", "Feels Good", "If I Had No Loot"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만 해도 그의 이름은 라파엘 위긴스(Raphael Wiggins)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사딕'이란 단어의 어감을 내심 마음에 들어 했고, 이름이 겹치는 친형 드웨인 위긴스와 자신을 확실히 구분 짓기 위해 라파엘 사딕으로 개명하게 된다.

토니! 토니! 톤! 활동을 하면서, 그리고 토니! 토니! 톤!의 해산 후에도 간간히 솔로작업을 하던 그는 1999년에 다시 3인조 그룹을 결성하기에 이르는데, 이 팀이 바로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도 안다는 루시 펄(Lucy Pearl) 되겠다. 라파엘 사딕과 뜻을 함께 한 이들은 여성 알앤비 그룹 엔 보그(En Vogue)의 돈 로빈슨(Dawn Robinson), 그리고 1990년대 초중반에 이미 재즈 힙합의 문법을 완성시켜놓은 인텔리전트 힙합 팀 어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A Tribe Called Quest)의 멤버 알리 샤히드 무하마드(Ali Shaheed Muhammad)였다. 일정 문제로 하차한 디안젤로(D'Angelo)까지 원래대로 팀에 합류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루시 펄은 이 3명의 멤버만으로도 충분한 역량을 발휘해 처음이자 마지막 앨범이 된 걸작 [Lucy Pearl](2000)을 남겼다. 깔끔하게 끈적이는 리듬 위에 청명한 보컬이 흐르는 "Dance Tonight", 어쿠스틱 기타와 베이스 기타의 어우러짐이 인상적인 "Don't Mess with My Man", 그리고 웨스트코스트 힙합의 베테랑 프로듀서 배틀캣(Battlecat)이 프로듀싱하고 스눕 독(Snoop Dogg)과 큐-팁(Q-Tip)이 참여해 널리 알려져 있는 "You" 등 많은 명곡이 수록된 작품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아이러니하게도 라파엘 사딕의 공식적인 솔로 커리어는 데뷔 십 수 년이 지난 2002년에서야 비로소 첫 발을 뗀다. 첫 솔로 앨범 [Instant Vintage](2002)는 앨범 타이틀처럼 복고의 향기를 품고 있으면서 보다 진한 네오-소울을 추구한 작품이었다. 라파엘 사딕은 데뷔 때부터 조력을 아끼지 않았던 디안젤로를 이번에는 자신의 앨범에 불러들였고, 둘의 조인트 "Be Here"는 그래미에 노미네이트 되는 영광을 누린다. [Instant Vintage] 자체가 앨범 부문 후보에 올랐음은 물론이다.

이후 라이브 앨범 [All The Hits At The House of Blues](2003), 두 번째 솔로 앨범 [Ray Ray](2004)를 발표한 그는 4년간의 침묵을 깨고 2008년 가을 세 번째 솔로 앨범 [The Way I See It]을 세상에 내놓는다. 그리고 [The Way I See It]은 단숨에 2008년의 문제작으로 주목 받는다. 앨범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두말할 것 없이 '레트로(retro)'였다. 아니 레트로 정도가 아니라 그냥 '옛날 앨범'이었다. 라파엘 사딕은 1960~1970년대의 감성과 소리를 완벽하게 재현했고 이는 곧 평단의 지지로 이어져 또다시 그래미에 노미네이트되는 영예를 안았다(비록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제이-지(Jay-Z)가 도입부를 랩으로 수놓는 소울 발라드 "Oh Girl",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가 영혼의 하모니카 연주를 선사한 "Never Give You Up", 펑키 리듬이 가미된 "100 Yard Dash" 등이 눈길을 끌었다.
노래 : B2K (비투케이)
1997년, 지 부그(J-Boog)와 릴 피즈(Lil’ Fizz), 래즈 비(Raz-B)라는 코흘리개 친구들이 가수의 꿈을 품고 결성한 B2K. IMx의 멤버 배트맨(Batman)의 사촌 동생(지 부그)과 데스티니스 차일드(Destiny’s Child), 마크스 휴스턴(Marques Houston)과 작업한 크리스 스톡스(Chris Stokes)의 친척(래즈 비)이 뭉쳤다는 소문만으로 기대와 총아를 받기에 충분했... 1997년, 지 부그(J-Boog)와 릴 피즈(Lil’ Fizz), 래즈 비(Raz-B)라는 코흘리개 친구들이 가수의 꿈을 품고 결성한 B2K. IMx의 멤버 배트맨(Batman)의 사촌 동생(지 부그)과 데스티니스 차일드(Destiny’s Child), 마크스 휴스턴(Marques Houston)과 작업한 크리스 스톡스(Chris Stokes)의 친척(래즈 비)이 뭉쳤다는 소문만으로 기대와 총아를 받기에 충분했다. 이후 TV 광고에서 활약하던 오마리온(Omarion)이 가세하면서 본격적인 팝 스타로의 트레이닝이 시작되었다. 크리스 스톡스의 지휘 아래 보컬과 댄스를 연마해 가던 중, LA에서 개최된 신인 발굴 오디션에 출전, 레코드사 관계자의 눈에 띄어 뉴욕 본사로부터 호출 받는 행운이 찾아온다. 총수, 사장 등 여러 중역 앞에서 당당하게 퍼포먼스로 펼쳐 보인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계약을 맺고 즉시 데뷔전 준비에 들어간다. 물론 릴 바우 와우(Lil Bow Wow)의 투어와 MTV, 소울 트레인, 폭스 패밀리 채널 등에 출연하면서 21세기 만능 팝 스타가 되기 위한 갖은 경험 쌓기에도 주력했다. 그러던 중 발매된 데뷔 싱글 ‘Uh huh’는 어셔(Usher)와 블루 캔트렐(Blu Cantrell)의 곡을 만든 크리스 “트리키” 스튜어트(C. “Tricky” Stewart)가 프로듀스하여 트렌트를 정확히 꿰찬 리듬과 멤버들의 고운 미성을 부각시켰는데, 호시탐탐 적기만을 노리고 있던 B2K는 이 곡과 함께 10주 연속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하면서 메인 스트림으로 점핑한다. 비록 수상까지 가지는 못했으나 BET 어워드에서 세 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고, 데스티니스 차일드의 영국 투어에서 개막 공연을 맡는 등 등장하자마자 종횡무진 인기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여세를 몰아 조속히 발표한 셀프 타이틀 데뷔작 < B2K >는 저메인 듀프리(Jermaine Dupri), 브라이언 마이클 콕스(Bryan Michael Cox) 등 호화 제작진이 참여하여 파워풀한 역동성과 스무디한 유연성을 동시에 갖췄다. ‘Uh huh’의 뒤를 이어 ‘Gots ta be’가 차트 상위권에 랭크되고, 한 달 후에는 리믹스 음반 < B2K; The Remixes Vol. 1 >과 크리스마스 앨범 < Santa Hooked Me Up >을 차례로 발매한다. 그리고 그 해 겨울에 발포한 두 번째 정규 앨범 < Pandemonium! >에서 피 디디(P. Diddy)와 알 켈리(R. Kelly)가 서포트한 메가 히트 싱글 ‘Bump, bump, bump’으로 다시 한번 차트를 점령한다. 풋내기 티가 풀풀 풍기던 전작에 비해 이제는 듬직한 뮤지션으로 성장한 것이 확연히 눈에 띄는데, 오래 전에 맥이 끊긴 흑인 보이밴드의 자존심을 지킨 것을 격찬하며 (지난번 약만 된통 올렸던) BET 어워드가 베스트 그룹상을 포함한 두 개의 상을 수여했다. 멤버들이 주연한 영화 < You Got Served >(2004년)의 사운드 트랙까지 포함해 총 다섯 장의 음반을 반년 동안 팔아치웠다. 2002년 하반기 차트에서 B2K의 이름이 빠진 적이 없을 정도라고 하면 믿을 수 있겠는가. 속도에 불을 붙이다보니 정통성이 떨어진다는 문제점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신통하게도 아이들은 그 어떤 허점도 보이지 않고 완벽하게 일을 처리했다. 보이밴드의 수명을 간파하여 일망타진 전법으로 한꺼번에 밀어 붙인 것이 결과적으로는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21세기를 대표하는 팀이 되겠다는 뜻의 B2K라는 이름이 얼마나 후대에 전해질지는 의문이다.
노래 : Sara Bareilles (사라 바렐리스)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은 1980, 1990년대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던 메탈의 포화를 뚫고 스탠다드 팝 시장을 개척해 낸 대표적인 ’디바’ 뮤지션이다. 휘트니 휴스턴은 1963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알앤비 가수 씨시 휴스턴(Cissy Houston)의 딸이었으며 시대를 풍미한 여가수 디온 워윅(Dionne Warwick)이 친척이었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대형 가수들을 옆에서 지켜볼 수 ...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은 1980, 1990년대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던 메탈의 포화를 뚫고 스탠다드 팝 시장을 개척해 낸 대표적인 ’디바’ 뮤지션이다. 휘트니 휴스턴은 1963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알앤비 가수 씨시 휴스턴(Cissy Houston)의 딸이었으며 시대를 풍미한 여가수 디온 워윅(Dionne Warwick)이 친척이었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대형 가수들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고,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성가대에서 노래하며 그 실력을 뽐냈다. 수려한 외모까지 겸비한 휘트니는 10대의 나이에 이미 모델, 배우, 가수의 세 가지 활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샤카 칸(Chaka Khan) 등의 백업보컬로 또 클럽에서 가수로 활동하던 그녀는 1982년 19살의 어린 나이에 폴 자바라(Paul Zabara)의 ’Eternal love’라는 곡에 보조 보컬로 참여하며 처음으로 정식 음반 녹음에 참여한다. 이듬해 아리스타(Arista)와 계약을 체결했고, 그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레코드사는 데뷔 앨범에 27만 달러의 제작비를 투자하며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1985년 데뷔앨범 < Whitney Houston >은 흑인 디바 시대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앨범은 14주간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오르며 솔로 아티스트의 데뷔 앨범 중 가장 오랜 기간 1위에 머무른 앨범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세계적으로 2,300만장이라는 경이적인 앨범 판매를 이루어내며 데뷔 앨범 하나로 팝계 최고의 여가수로 자리하게 된다. 앨범 내에서는 ’Saving all my love for you’, ’How will I know’, ’Greatest love of all’(조지 벤슨의 곡 리메이크)의 세 곡이 연속해서 차트 정상에 오르고, 앨범의 경이적인 성공으로 86년 그래미와, 86,87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를 차지한다. 1987년 그녀는 두 번째 앨범 < Whitney >를 통해 전작의 인기를 이어간다. 전작보다 비트감을 더한 이 앨범 역시 대단한 성공을 일구어 낸다. 발매 첫 주에 미국과 영국차트에서 동시에 1위에 오르는데 팝 역사상 처음으로 이룩한 기록이었다. 앨범은 차트 정상에 11주간 머물렀으며 세계적으로 2,000만장이 팔려나갔다. 싱글들의 인기도 대단해서 ’Wanna dance with somebody(Who loves me)’, ’Didn’t we almost have it all’, ’So emotional’, ’Where do broken hearts go’ 네 곡이 연속해서 차트 정상을 밟으며 이전 앨범부터 7개의 싱글이 연속해서 정상을 밟는 대 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 앨범으로 또다시 1988년 그래미를 거머쥐었고, 역시 88년, 89년의 아메리칸 뮤직어워드를 수상한다.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 같은 정통 소울 아티스트들로부터 음악적 영감을 얻었던 그녀이지만 1,2집에서 보여준 음악은 대중성이 지나치게 강조된 흑, 백의 사운드가 뒤섞인 음악이었다. 자신도 그런 자신의 음악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1990년 발표한 세 번째 앨범 < I’m Your Baby Tonight >에서는 대중성을 신경 쓰지 않고 정통 소울 음악으로 변신을 시도한다.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루떠 반데로스(Luther Vandross)등과 함께 작업하는 등 흑인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에 집착했던 이 앨범은 역시 이전 앨범들만큼의 성공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I’m your baby tonight’, ’All the man that I need’가 1위에 올랐고, 앨범은 전 세계 1,200만장의 판매를 기록하는 등 여전히 그 인기는 대단했다. 세 장의 정규 앨범 이후 그녀는 영화 배우로의 변신을 시도하며 세 장의 사운드 트랙을 연속 발표한다. 시작은 < 보디가드 >였다. 1992년 케빈 코스트너와 함께 출연한 ’보디가드’의 사운드 트랙에서 6곡을 노래했고, 이는 팝 역사에 길이 남을 경이적인 상업적 성공을 이끌어낸다. 첫 싱글 ’I will always love you’(돌리 파튼의 곡을 리메이크)는 차트 정상에 14주간 머물렀으며, 앨범은 20주간 1위를 지켰고, 세계적으로 3,500만장이라는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기록한다. 1994년 그녀는 다시 한 번 그래미를 거머쥐었고,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는 8개 부문 수상이라는 대 기록을 세우게 된다. 1995년 휘트니 휴스턴은 다시 한 번 사운드 트랙에 참여한다. 자신이 주연한 < Waiting for Exhale >의 사운드 트랙에 3곡을 수록하면서 영화와 앨범의 성공에 기여한다. 이 앨범은 노장 흑인 여가수들과 신예 흑인 여가수들이 총 동원되어 만들어졌으며, 프로듀서로 참여한 베이비페이스(Babyface)는 그래미 12개 부문 후보에 오르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 1996년 그녀는 영화 < The Preacher’s Wife >에서 주연을 맡으며 다시 한 번 사운드 트랙에 참여한다. 14곡을 자신이 직접 맡은 이 앨범은 가스펠 위주의 곡들로 채워져 있으며 대중성보다는 종교적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어 앨범판매에 있어서는 그다지 큰 성공을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정규 앨범을 발표하지 않고 영화와 사운드 트랙에만 전념해왔던 그녀는 98년 8년 만에 정규앨범 < My Love Is Your Love >을 발표한다. 흑인 아티스트로서의 음악에 충실함을 기했던 이 앨범은 1,000만장의 앨범 판매를 기록하며 그녀의 앨범 중 가장 저조한 성적을 거두게 된다. 앨범 내에는 영화 ’이집트의 왕자’ 주제곡인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와의 듀엣 곡 ’When you believe’가 수록되어 있다. 2000년 그녀는 자신의 15년 음악생활을 결산하는 베스트 앨범 < The Greatest Hits >를 발표한다. 조지 마이클, 엔리케 이글레시아스와의 듀엣 곡 등 네 곡의 신곡도 포함하고 있는 이 앨범은 발라드 곡들만을 모은 < Cool Down >과 댄스곡 및 댄스 리믹스 곡들을 모은 < Throw Down > 두 장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연주 : Miles Davis (마일즈 데이비스)
재즈 트럼펫 주자이자 작곡가, 밴드 리더인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음악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 롤링스톤 >는 록전문지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100년 간의 톱10 뮤지션(8위) 가운데 한사람으로 그를 선정했다. 인상적인 선율로 마음 한 가운데를 울리는 우수 어린 트럼펫 소리는 분명 ‘마일스’만의 것이다. 그러나 마일스 데이비스는 출중한 연주실력을 지닌 재즈 음악인이기 전... 재즈 트럼펫 주자이자 작곡가, 밴드 리더인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음악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 롤링스톤 >는 록전문지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100년 간의 톱10 뮤지션(8위) 가운데 한사람으로 그를 선정했다. 인상적인 선율로 마음 한 가운데를 울리는 우수 어린 트럼펫 소리는 분명 ‘마일스’만의 것이다. 그러나 마일스 데이비스는 출중한 연주실력을 지닌 재즈 음악인이기 전에 재즈의 다양한 장르를 창조해 낸 ‘스타일리스트’이다. 194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 마일스는 정체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나가는 창조의 면모를 보여준다. 쿨, 모드, 휴전에 이르기까지 그는 재즈 음악의 새로운 경향을 제시하고 리드해 갔다. 마일스는 현재에 유행하는 음악에 민감했고 시대 상황에 예의 주시할 줄 아는 아티스트였다. 단지 뛰어난 기량을 지닌 일반 뮤지션의 범주에서 논할 수 없는 가히 ‘대가’였다. 본명 마일스 듀이 데이비스 주니어인 그는 1926년 5월 25일 일리노이주 알턴에서 태어났다. 치과의사인 아버지를 둔 중산층의 유복한 가정환경에 자라나 이스트 세인트루이스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13세가 되던 생일 아버지가 사주신 트럼펫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트럼펫 훈련을 받게 된다. 16세때 부터 바(Bar)에서 주말마다 연주를 한 마일스는 지역 밴드인 ‘에디 랜들스 블루 데빌스’의 멤버로 활동하다 17살이었던 1944년 비밥(Bebop)의 혁명을 몰고 온 디지 길레스피와 찰리 파커가 활동하던 ‘빌리 엑스타인 빅 밴드’가 그가 살던 이스트 세인트 루이스에 순회공연을 오게 됐고, 마일스는 우연한 기회에 그들과 한 무대에 설 기회를 얻게 된다. 이 때의 경험은 그가 길레스피와 파커의 추종자가 됨을 물론 비밥의 스타일을 스스로 터득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스피디한 연주, 두드러진 즉흥 솔로, 복잡한 리듬감으로 어우러진 비밥은 40년대 재즈계를 강타한 ‘재즈혁명의 전주곡’이었다. 젊은 재즈 연주자들은 모두 비밥에 심취해 있었고 마일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단지 비밥을 추종하는 트렌드의 수혜로 그치지 않으려고 했고, 그 해 이스트 세인트루이스를 떠나 뉴욕에 있는 줄리어드음대에 입학한다. 줄리어드음대를 다니면서 그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은 바로 뉴욕 52번가의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라는 재즈 클럽이었다. 매일 밤 이곳에 나가 음악을 듣고 또 그곳의 전통에 따라 무대에 돌아가며 올라가고 하면서 재즈 트럼펫 연주의 정체를 깨닫는다. 1947-48년 동안 찰리 파커의 밴드에서 활동하게된 마일스는 이를 통해 비밥의 문법을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익힌다. 1948년 여름 마침내 마일스는 당시로서는 생소한 9인조 빅 밴드를 조직한다. 뉴욕에서 만난 캐나다 출신의 작곡가 길 에반스(Gil Evans)를 비롯한 미국 서부 출신 백인 재즈 연주자들을 기용, 이듬해인 1949년 캐피톨(Capitol)을 통해 발표된 앨범 < Birth Of Cool >은 재즈의 바탕에 백인적 감수성을 가미시킨 걸작이었다. 이 앨범은 ‘쿨의 탄생’이란 제목이 입증하듯 이후 당시 앨범에 참여했던 리 코니츠, 제리 멀리건과 같은 뮤지션들이 중심이 되어 미국 웨스트 코스트를 중심으로 한 ‘쿨’이라는 음악 스타일을 개척하는 데 씨앗을 뿌린 재즈사(史)의 명반이었다. 이 음반이 녹음된 당시엔 재즈계의 촉각이 비밥에 쏠려 있던 시기라 아무도 마일스의 시도에 주목하지 않았다가 1957년 2월 캐피톨사가 이 앨범을 재발매하면서 마침내 그의 진가가 인정받기에 이른다. 1950년대 초반 잠시 헤로인에 중독된 마일스는 위기를 맞지만 이후 프레스티지(Prestige) 레이블을 통해 수많은 음반을 발표한다. 테너 색스폰 주자 존 콜트레인과의 협연으로 유명한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Miles Davis Quintet)의 시작을 알렸던 시기인 프레스티지의 내공축적 시절 동안, 마일스는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는다. 그의 대표작으로 반드시 입에 오르는 ‘Round midnight’를 1955년 7월 뉴 포트 재즈페스티벌서 연주하게 되었고 이를 도화선으로 메이저 레이블인 콜럼비아 레코드사와 계약한다. 트럼펫의 마일스 데이비스를 비롯하여 테너 색스폰의 존 콜트레인, 피아노에 레드 갈런드, 베이스에 폴 챔임버, 드럼에 필리 조 존슨으로 구성된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은 같은 해 10월 콜롬비아 레코드 데뷔작 < Round Midnight >를 발표, 그의 음악은 대중적인 인지도를 획득하기 시작했다. 콜롬비아에서 첫 앨범을 내놓았지만 아직 프레스티지 레코드와 5장의 음반에 대한 계약 분이 남아있었기에 마일스는 잔여 분을 해결하기 위해 단 이틀만의 전대미문 세션을 통해 녹음 작업을 마치는데 성공한다. 그 결과 나온 작품이 < Relaxin > < Cookin’ > < Workin > 그리고 < Steamin’ >이었으며 이 음반들 모두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의 전작 < Round Midnight > 이상의 호평을 받는다. 1957년 < Birth Of Cool >의 재발매와 동시에 그는 이전 음악 동료인 길 에반스와 다시 만난다. ‘쿨의 탄생’에서 보여준 빅 밴드 편성을 다시 도입, 길 에반스의 클래시컬한 편곡으로 ‘쿨의 탄생’에서 진일보한 연주를 선보이기 위해서였다. 1956년의 < Miles Ahead >와 이듬해 < Porgy & Bess > 그리고 1960년의 < Sketches of Spain >이 모두 마일스와 길 에반스와의 공동의 땀으로 결실을 맺은 명작들이었다. 1957년 12월에는 파리를 방문, 프랑스 ‘누벨 바그’ 영화의 거장 루이 말 감독의 <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L’Ascenseur pour l’Echafaud )의 스코어를 맡았으며 이 영화음악으로 1960년 그래미상 베스트 재즈 퍼포먼스부문 후보에 오르는 성과도 거둔다. 1958년에는 존 콜트레인과 함께 했던 그의 퀸텟에 알토 색스폰 주자인 캐논볼 애덜리를 영입, 6인조 섹스텟으로 새로 출발하여 < Milestone >을 녹음한다. 재즈에 모드(mode: 각 스케일, 노트에서 일곱음을 모두 사용하는 연주 방식) 주법을 처음 도입한 이 앨범을 끝으로 밴드 내의 피아노 주자 레드 갈란드가 떠나고 모드에 정통한 피아노 주자 빌 에반스(Bill Evans)가 들어오면서 그의 섹스텟의 색깔은 더욱 ‘모드’로 진행되었다. 모드 주법의 본격적인 시도를 알렸던 그의 대표작 < Kind of Blue >(1959)는 ‘드림팀’이라고 할 만한 쟁쟁한 멤버들로 구성된 그의 섹스텟 연주의 정점이었다. 이 앨범은 코드 변화와 즉흥연주 중심의 기존 재즈음악 스타일을 과감히 벗은 ‘모던 재즈’(modern jazz)의 시작을 알렸으며 지금까지 200만장 판매라는 상업적 성공도 포획했다. 1960년대 초반 솔로 활동을 위해 존 콜트레인과 빌 에반스가 마일스의 섹스텟을 떠나고 이들을 대신할 피아노 주자 윈튼 켈리와 색스폰 주자 행크 모빌이 들어온다. < Kind Of Blue > 때와 같은 창조성은 아니었지만 이전보다 대중들과의 친화력을 더 높아졌으며 < Someday My Prince Will Come >(1961)과 같은 수작 생산을 거르지 않는다. 섹스텟을 떠난 빌 에반스와의 작업을 이후에도 지속하여 같은 해 내놓은 앨범 < Live At Carnegie Hall >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오넷 콜먼(Ornette Coleman)이라는 젊은 색스폰 주자가 ‘프리 재즈’를 선보이면서 재즈 음악계는 어느덧 ‘프리 재즈’ 쪽으로 말을 갈아 타고있었다. 마일스는 이런 오넷 콜먼의 시도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고 마일스의 섹스텟의 활동이 다소간 시들해진 60년대 중반, 다시 퀸텟으로 밴드를 재편했다. 이 때의 명분은 반(反)프리재즈에 입각한 듯한 ‘재즈-스탠더드 풍의 전통에 입각한 새로운 시도’였다. 베이시스트 론 카터,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 드러머 토니 윌리엄스, 테너 색스폰에 웨인 쇼더와 같은 젊은 피를 수혈받으며 마일스의 쿼텟은 < Kind Of Blue > 이후 최고의 창작력을 다시 불태운다. 1965년 < E.S.P >를 시작으로 < Miles Smiles >(1966), < Sorcerer >(1967), < Nefertiti >(1967), < Miles In The Sky >(1968), < Fills De Kilimanjaro >(1968)까지 줄기차게 이어진다. 이중 < Miles Smiles >는 1967년 그래미상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성과를 거뒀고, 기타리스트 조지 벤슨이 참여한 < Miles In The Sky >와 칙 코리아의 일렉트릭 피아노가 참여한 < Filles De Kilimanjaro >는 얼마 후 마일스의 또 한차례 혁명인 ‘재즈-록 휴전’으로의 이동을 암시하는 작품이었다. 1968년 마일스는 제임스 브라운, 슬라이 & 더 훼밀리 스톤, 지미 헨드릭스 등 당시 대중들을 휘어잡은 R&B와 펑키 음악에 관심을 갖는다. 얼마 후 지미 헨드릭스를 만나게 되었고, 둘은 함께 작업할 것을 약속한다(물론 이 약속은 지미 헨드릭스의 요절로 이뤄지지 못했다.)마일스는 당시 유행하던 록 음악의 열풍을 예의 주시했고, 일렉트릭 기타와 키보드가 재즈의 진보를 이끌어낼 것으로 판단한다. 콜트레인의 죽음 후 재즈는 기존 프리 재즈에서 더 진행하지 못하고 있었고, 수요층 측면에서 어느덧 백인 지식인이나 상류층들이 즐기는 음악으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1968년 말 그의 두 번째 퀸텟은 해산을 맞아 색스폰 주자 웨인 쇼더를 제외하고 모두 솔로로 독립한 상황이었지만 마일스는 또 다시 새로운 시도를 감행함으로써 존재를 부각한다. 토니 윌리엄스를 대신 할 잭 드자넷, 론 카터를 대신할 데이브 홀란드, 일렉트릭 건반주자 칙 코리아, 조 자위눌이 마일스와 함께 연주를 하게 되고, 영국 출신의 일렉트릭 기타리스트 존 맥러플린도 그의 밴드에 합류한다. 이들과 함께 1969년 2월에 녹음한 < In A Silent Way >는 코드 없이 부유하는 듯한 멜로디로만 진행된 방식으로서, 거기에 일렉트릭 기타사운드를 집어넣어 ‘록’적인 요소를 재즈에 본격적으로 가미한 것이었다. 같은 해 8월 재즈계의 최대 문제작인 < Bitches Brew >이 녹음되어 1970년 3월 세상에 나왔다. 오케스트라 편곡으로 도저히 옮겨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즉흥성에 토대를 둔 이 앨범에서 마일스의 트럼펫은 전기 코드를 꽂은 듯 우렁찼으며 일렉트릭 피아노와 일렉트릭 기타의 펑키(funky)감과 드럼의 강한 비트는 바야흐로 재즈-록 휴전(Jazz Rock Fusion)의 출현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미 길이 갈라선 록과 재즈의 융합을 꾀한 이 기념비적 가치의 앨범은 발매되자 마자 골드를 기록했고 빌보드 Top40에 오르는 인기를 누려 대중들에게 다가가려는 취지를 충분히 달성했다. 마일스의 재즈-록으로의 실험은 이후 5년 간 계속된다. 라이브 실황을 담은 < Miles Davis In Filmore East >(1970), < Live-Evil >(1970)를 비롯하여 흑인 권투선수 잭 존슨에게 헌정하는 < Tribute to Jack Johnson >(1970), 슬라이 스톤과 제임스 브라운으로부터 영향 받은 게 명백한 펑키 리듬의 < On the Corner >(1972)와 같은 ‘재즈-록 휴전’의 명반을 잇달아 발표한다. 그가 시도한 재즈-퓨전은 잇단 재즈 슈퍼그룹의 출현을 몰고 왔다. 칙 코리아는 1970년 말 마일스를 떠나 써클(Circle)을 거쳐 1971년 리턴 투 포에버(Return To Forever)를 결성했으며 기타주자 존 맥러플린도 같은 해 마하비시누 오케스트라(Mahavishnu Orchestra)를 만들었다. 마일스에게 일렉트릭 피아노를 소개했던 조 자위눌과 색스폰 주자 웨인 쇼터는 그들 보다 더 빠른 1970년 웨더 리포트(Weather Report)를 결성하면서 1970년대 재즈의 대세를 재즈-록 퓨전으로 돌려놓았다. 건강상의 이유로 1975년 마일스는 은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확히 6년 후인 1981년, 일렉트릭 베이스에 마커스 밀러, 일렉 기타에 마이크 스턴, 색스폰에 빌 에반스 등 젊은 재즈 뮤지션들로 완비된 밴드와 함께 재기해 < The Man With The Horn >을 발표한다. 이어 기타리스트 존 스코필드를 가입시키고 자신이 직접 표지그림까지 완성한 < Star People >(1982), < Decoy >(1983), < You’re Under Arrest >(1985)를 연달아 내놓으며 에너지를 과시했다. 30년 동안의 콜롬비아에서의 활동을 마감하고 1986년 워너로 이적하여 < TuTu >를 선보인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투투 주교의 이름을 따온 이 앨범은 토미 리푸마, 마커스 밀러, 조지 듀크 등 3인 프로듀서의 지휘 아래 만들어졌고, 마일스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고 있던 마커스 밀러가 작곡과 편곡을 맡았다. 일렉트릭-펑키 풍의 편곡은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흑인 로커 프린스(Prince)의 영향을 느끼게 했다. 이듬해 1987년 워너 브라더스에서 두 번째로 내놓은 < Siesta >는 엘렌 바킨, 줄리앙 샌즈 주연의 동명 영화 음악으로 작품 전체가 예전 길 에반스와의 작업 < Sketches Of Spain > 때와 같이 스페니시한 연주로 가득 차있다. 마일스는 사망하기 직전인 1991년 7월 스웨덴에서 열린 몬트럭스 재즈 페스티벌서 연주자로 참여, 그의 음악적 동반자로 1988년 세상을 떠난 길 에반스와 녹음했던 많은 곳들을 재즈팬과 평론가들 앞에서 재현하며 엄청난 환호의 박수를 받았다. 꿈꾸던 재즈의 진보를 평생동안 실현해온 마일스는 1991년 9월28일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 소재의 세인트 존스 호스피탈 앤 헬스 센터에서 폐렴에 의한 호흡곤란과 뇌졸중으로 숨을 모았다. 사망 후 완성된 2개의 트랙이 포함된 스튜디오 앨범 < Doo-Bop >이 1992년 공개되면서 위대한 재즈맨을 잃은 상실감에 젖은 팬들의 아쉬움을 달래줬다. 마일스는 ‘모든 음악적 요소’를 그에 트럼펫에 담아 내려했고,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뮤지션이 되길 원했다. 비밥의 출현 때부터 재즈의 중심에 있어오면서 기존의 전통을 답습하기보다는, 재즈-스탠더드를 바탕으로 현재의 음악흐름을 늘 주시했고 거기에서 항상 새롭고 실험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길 원했다. 마일스에게 ‘재즈의 거장’이라는 칭호를 붙임에 있어선 논란의 여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길 에반스와의 작업과 재즈-록 퓨전을 시도할 당시 일각의 재즈평론가들로부터 ‘백인에게 아부하는 재즈 뮤지션’ 혹은 ‘재즈를 팔아먹었다’는 식의 혹평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근거 없는 비판은 이미 루이 암스트롱이나 듀크 엘링턴과 같은 대가들도 경험했던 얘기들이었다. 마일스의 시도는 그의 음악을 통해 대중에게 더 접근하고 싶어 한 그 만의 것이었다. 마일스는 자신의 공연을 할 때 젊은 흑인관객과 눈이 마주치길 원했고, 그런 흑인 청중들에게 반가운 미소를 보내었다.(하지만 물론 지금까지 그의 음악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거의 백인들이다.) 그의 유산은 오늘날에 음악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념과 인종으로 갈라진 세상에서 음악만큼이라도 퓨전되어야 한다”는 그의 지론과 명언은 어느덧 재즈는 물론이고 현대의 대중음악을 가로지르는 음악트렌드가 되었다.
밴드 : Journey (저니 (락 밴드))
197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저니는 1980년대 초, 중반을 강타했던 록 그룹이다. 하드록, 재즈록 밴드로 출발했던 저니는 미성의 보컬리스트 스티브 페리(Steve Perry)를 영입하면서 팀컬러를 팝 록으로 완전히 전환한다.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어쨌든 대중들의 반응은 뜨거운 것이어서 그 변화가 처음으로 나타난 앨범인 < Evolution >부터 이들은 발표하는 작품마다 수백만장의 앨범을 팔아치우는 ... 197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저니는 1980년대 초, 중반을 강타했던 록 그룹이다. 하드록, 재즈록 밴드로 출발했던 저니는 미성의 보컬리스트 스티브 페리(Steve Perry)를 영입하면서 팀컬러를 팝 록으로 완전히 전환한다.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어쨌든 대중들의 반응은 뜨거운 것이어서 그 변화가 처음으로 나타난 앨범인 < Evolution >부터 이들은 발표하는 작품마다 수백만장의 앨범을 팔아치우는 빅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특히 멤버들의 역량이 집대성된 1981년작 < Escape >는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등극하며 저니의 명성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이 음반에서만 ‘Open arms’(후에 머라이어 캐리가 리메이크), ‘Don''t stop believin''’, ‘Who''s crying now’등 톱 텐 싱글이 3개가 쏟아졌다. 이들은 곧 동시대의 포리너(Foreigner), REO 스피드웨건(REO Speedwagon)등과 함께 성인 취향의 록(AOR)과 발라드를 가장 잘 만드는 팀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처럼 세계인들을 열광시키며 연이은 히트 퍼레이드를 벌인 저니는 라틴 록의 거장 산타나(Santana)에서 활약하던 두 청년 닐 숀(Neal Schon)과 그렉 롤리(Greg Rolie)가 손을 잡으면서 출범했다. 여러 뮤지션들을 영입해 록 밴드의 모양을 갖춘 저니는 곧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을 체결하며 단번에 씬의 실력파 그룹으로 각광받았다. 달콤한 멜로디보다 청자의 예측을 거부하는 굴곡이 심한 리듬과 재기 발랄한 솔로 파트를 강조한 저니의 초창기 작품들은 다분히 매니아 취향이었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마음 편하게 다가서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랐던 것이 사실이다. 데뷔작 < Journey >에서 < Look Into The Future >, < Next >에 이르는 일련의 앨범들은 다소 거칠지만 록의 원시적 매력으로 똘똘 뭉친 곡들로 넘쳐 났다. 저니의 중, 후반기 사운드는 아련한 키보드를 축으로 선율미를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다. 이 때가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어필한 시기였다. 기-승-전-결의 구도를 가지고 점층적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극적인 구성이 밴드의 상징처럼 굳어졌다. 고혹적이고도 애절한 보이스를 지닌 스티브 페리는 그 구성에 꼭 맞는 보컬리스트였고 완벽한 시스템을 장비한 밴드는 힘차게 가속 페달을 밟을 수 있었다. 좋은 반응을 얻었던 싱글 ‘Wheel in the sky’가 수록된 앨범 < Infinity >는 첫 백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기록했고, 이어 < Evolution >부터 < Frontiers >에 이르는 멈추지 않는 성공가도가 열리게 되었다. 저니의 포근한 록은 여러 세대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그들의 이름은 전세계적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샘솟던 그들의 창작력도 이후 둔화되기 시작했고, 멤버들의 빈번한 과외 활동까지 겹치면서 저니는 결국 1986년 < Raised On Radio >를 마지막으로 해체를 맞이하게 됐다. 해산 이후 밴드 사운드의 핵이였던 닐 숀은 배드 잉글리시(Bad English)를 결성해 ‘When I see you smile’, ‘Price of love’라는 히트 싱글들을 제조해 냈고, 드러머 스티브 스미스(Steve Smith)는 자신의 전공인 재즈로 돌아갔다. 싱어 스티브 페리 역시 앨범들을 발표하며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캐리어를 다져 나갔다. 아쉬움이 남아서일까. 각자 개인 플레이에 열심이던 멤버들은 정확히 해체 10년이 되는 1996년 < Trial By Fire >로 다시 뭉쳤고, 차트에서도 괜찮은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두 스티브는 결국 투어 도중에 이별을 선언했고, 새롭게 정비된 저니는 2001년 통산 11번째 음반 < Arrival >을 내놓으며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저니는 팝 전성시대의 화사함 속에서 자신들의 기량을 마음껏 뽐냈던 그룹이다. 록에 이유모를 부담감을 느끼는 이들마저도 살며시 보듬어 안았던 이 매력적인 밴드는 앞으로도 ‘편안한 록’의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아직 남아 있을 팬들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카우보이’ 제이 케이(Jay Kay)가 이끌고 있는 영국 밴드 자미로콰이는 고품격 댄스 음악으로 1990년대 전세계 클럽 신을 뒤흔든 팀이다. 펑크(Funk), 소울, 재즈, 리듬 앤 블루스, 하우스, 힙 합, 팝, 테크노 등 다양한 장르의 곳간을 넘나들며 일궈낸 그들의 올드 앤 와이즈(Old And Wise) 퓨전 사운드는 새로운 트렌드를 갈구하던 클러버들에게 이상적인 음악이었다. 그들은 다채로운 색깔의 소리... ‘카우보이’ 제이 케이(Jay Kay)가 이끌고 있는 영국 밴드 자미로콰이는 고품격 댄스 음악으로 1990년대 전세계 클럽 신을 뒤흔든 팀이다. 펑크(Funk), 소울, 재즈, 리듬 앤 블루스, 하우스, 힙 합, 팝, 테크노 등 다양한 장르의 곳간을 넘나들며 일궈낸 그들의 올드 앤 와이즈(Old And Wise) 퓨전 사운드는 새로운 트렌드를 갈구하던 클러버들에게 이상적인 음악이었다. 그들은 다채로운 색깔의 소리들을 끌어다 쓰면서도 단 한차례의 난잡함과 엉성함을 내비치지 않는다. 각각의 장르가 가진 특성들을 정확히 해독하여 일정한 통일성과 화려함이 번뜩이는 댄스 음악으로 완벽하게 주조해낸다. 그 안에는 보통의 댄스 음악에 주어지는 천박스러움이 없다. 그렇다고 일반 대중들이 듣기에 어려운 것도 아니다. 대중 친화적이며, 고급스럽다. 이처럼 남녀노소 누구나 신나는 펑크(Funk) 음악에 맞춰 춤을 출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자미로콰이, 특히 제이 케이가 어릴 적부터 꿈꿔온 소망이었다. 랭크셔 지방에서 태어난 제이 케이(1969년 생)는 1970년대 나이트클럽 재즈 싱어로 활약했던 어머니 카렌 케이(Karen Kay)로부터 영향을 받아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로이 에이어스(Roy Ayers), 슬라이 스톤(Sly Stone)의 음악을 들으며 리듬 앤 블루스, 재즈, 소울 등에 대한 감각을 키웠다. 1980년대 런던으로 이주한 그는 어렵게 구입한 신디사이저로 곡을 만들며 여러 개의 데모 테이프를 제작했다. 그 중 한 트랙이었던 ‘When you gonna learn?’이 런던의 리듬 앤 블루스 라디오 방송 < Kiss FM >에 소개되면서 그는 서서히 지명도를 확보했고, 인디 레이블 < 애시드 재즈(Acid Jazz) >-이후 자미로콰이의 음악은 애시드 재즈라는 장르로 정의되며 오해 아닌 오해를 받게 됐다-에서 정식 싱글로 발매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92년 메이저 레코드사 < 소니(Sony) >와 8장의 음반 계약이라는 파격을 연출하며 단번에 주목받는 신인으로 급부상 했다.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위해 제이 케이는 키보디스트 토비 스미스(Toby Smith), 비브라폰 연주자 월리스 부캐넌(Wallis Buchanan), 드러머 닉 밴 겔더(Nick Van Gelder), 베이시스트 스튜어트 젠더(Stuart Zender) 등을 영입하여 자미로콰이를 결성하고 1년 뒤인 1993년 데뷔작 < Emergency On Planet Earth >를 발표했다. 이미 공식 음반을 공개하기 전부터 타올랐던 자미로콰이의 열기는 데뷔 앨범의 영국 차트 1위라는 결과로 정점에 달했고, 곧장 플래티넘으로 직행했다. 도발적인 펑키 리듬과 관능적인 그루브, 경쾌한 록 필, 진한 소울의 향기가 한 몸으로 용해된 ‘Emergency on planet earth’(32위), ‘Too young to die’(10위), ‘Blow your mind’(12위), ‘When You Gonna Learn?’(28위) 등의 히트곡들을 터트리며 밴드는 영국 클럽 신에 메가톤급 폭풍우를 일으켰다. 이때부터 음반 재킷에 등장하는 버팔로 모자를 눌러쓴 제이 케이의 모습은 자미로콰이를 상징하는 로고로 자리잡았다. 1년 뒤인 1994년 데릭 매켄지(Derrick McKenzie)로 드럼 주자를 교체한 그룹은 재즈적 색채가 강화된 소포모어 작품 < Return Of The Space Cowboy >를 내놓았다. 이 음반 역시 차트 2위에 오르며 전작의 흥분을 그대로 이어나갔고, ‘Space cowboy’(17위), ‘Half the man’(15위), ‘Stillness in time’(9위) 등의 인기 곡들을 영국 전역으로 쏘아 올렸다. 앞선 두 장의 앨범을 통해 영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밴드 중 하나로 성장한 자미로콰이는 1996년 3집 < Travelling Without Moving >과 1999년 4집 < Synchronized >로 세계적인 그룹의 반열에 도달했다. 친근한 멜로디와 리듬을 앞세운 스매시 히트곡 ‘Virtual insanity’(3집)와 세련된 디스코와 테크노로 무장한 ‘Canned heat’(4집)의 폭발력은 영국과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를 포함한 지구촌 전역을 들썩거리게 했다. 천 백 만장이라는 두 음반의 판매 합계 역시 그룹의 뜨거운 인기도를 잘 나타내는 증거이다. 자미로콰이는 오는 9월 초 다섯 번째 정규 음반 < A Funk Odyssey >를 공개할 예정이다. 신보는 첫 싱글로 커트된 ‘Little l’을 비롯하여, ‘Feels so good’, ‘Black crow’, ‘Twenty zero one’ 등 그들의 음악 주요소인 펑크(Funk)에 대한 찬가로 가득하다.
"미국 얼터너티브 록에 짓눌린 영국 음악계의 권위를 되찾자!" 1990년대 초반 너바나를 필두로 한 그런지 록의 엄청난 물량공세에 맞서 영국 매스컴들이 내건 대항 캐치프레이즈였다. 그들은 구제방안으로 ‘브릿 팝’을 내세웠다. 미국 록에 대한 차별화 나아가 특화(特化) 정책이었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그들은 대표주자를 물색했고 바로 블러(Blur)와 오아시스가 국가대표로 낙점 됐다. 블러는 그러나 1995년 앨범... "미국 얼터너티브 록에 짓눌린 영국 음악계의 권위를 되찾자!" 1990년대 초반 너바나를 필두로 한 그런지 록의 엄청난 물량공세에 맞서 영국 매스컴들이 내건 대항 캐치프레이즈였다. 그들은 구제방안으로 ‘브릿 팝’을 내세웠다. 미국 록에 대한 차별화 나아가 특화(特化) 정책이었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그들은 대표주자를 물색했고 바로 블러(Blur)와 오아시스가 국가대표로 낙점 됐다. 블러는 그러나 1995년 앨범 < Parklife >를 통해 ‘반미(反美)성향’의 음악 이데올로기를 탈피하지 못한 채 자국내 태풍을 야기한데 만족해야했다. 하지만 오아시스는 같은 해 발매된 <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를 통해 블러와 정반대의 ‘친미(親美)성향’ 음악으로 북미대륙 공습에 성공했다. 그 음악은 다름 아닌 ‘비틀스’였다. 비틀즈 신화를 가슴속 깊이 간직하던 미국인들은 오아시스를 전폭 지지했다. 이 같은 혁혁한 업적으로 그들은 단숨에 ‘비틀스의 환생’ ‘제3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선두’라는 영국 언론과 팬들의 찬사세례와 함께 ‘영국 음악의 국보’로 솟아올랐다. 오아시스는 1980년대 영국 록의 산파지로 불리는 ‘예향’ 맨체스터 출신이다. 지역만으로도 그들의 기본기가 충실함을 알 수 있다. 그들은 1990년대 초 맨체스터 사운드 첨병 중 하나인 인스파이럴 카페츠(Inspiral Carpets)에서 아르바이트하던 노엘 갤러거(Noel Gallagher)가 막내 동생인 보컬 리암 갤러거(Liam Gallagher)와 베이스 폴 맥귀건(Paul McGuigan), 드럼 토니 맥캐롤(Tony McCarroll)이 꾸려가던 밴드 레인(Rain)에 스카웃 되면서 낙원의 청사진을 마련했다. 이어서 1993년 글래스고우의 한 클럽에서 연주하던 오아시스에게 펑크와 뉴 웨이브 전문 레이블인 크리에이션(Creation)의 사장 앨런 맥기(Alan McGee)가 러브콜을 보냈다. 그룹의 잠재력을 대번에 안 맥기와 의기투합한 그들은 싱글 ‘Supersonic’과 ‘Shakermaker’를 잇따라 내놓으며 시장의 반응을 탐색했다. 결과는 예상 대로였다(노엘의 위풍당당. "오만하게 들리겠지만 우린 정말 베스트 오브 베스트 밴드다. 어떤 그룹도 우리보다 곡을 잘 쓰진 못한다!"). 곡들이 차트에 진입하며 팝 인구들에게 오아시스란 이름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이에 용기를 얻어 그들은 1994년에 데뷔 앨범 < Definitely Maybe >를 들고 나와 영국 앨범 차트 1위를 정복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작품에서 그들은 ‘전통’ ‘정통’ 로큰롤을 구사하며, 영향을 준 섹스 피스톨즈, 비틀스, 롤링 스톤즈, 후 등 영국 록의 거인들을 더욱더 빛나게 했다. ‘과거로의 음악여행’이 그들로부터 실현된 것이다. 질풍노도의 오아시스는 드러머를 토니 맥캐롤에서 앨런 화이트(Alan White)로 교체하고 ‘브릿 팝의 세계화’를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그들의 2집이자 스매시 히트음반 <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가 그 결과물. 여기에 구사된 수려한 멜로디 감성은 비틀스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Wonderwall’ ‘Don’t look back in anger’ ‘Some might say’ 등 발표하는 싱글마다 모조리 영국차트 정상에 올랐고 ‘Wonderwall’의 경우는 브릿 팝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 차트 톱10이라는 영광을 포획했다. 국내에 브릿 팝 열풍을 몰고 온 것이 바로 이 앨범이다. 특히 그룹내의 ‘음악독재자’ 노엘 갤러거는 < Champagne supernova >에서 영국 록의 대부 폴 웰러(Paul Weller)를 초빙하여 이른바 ‘데드 록’의 출현을 알리기도 했다. 이것은 ‘실낙원’이 되어버린 영국 음악의 명예와 자긍심을 회복해 ‘복낙원’으로 재건하고자 한 그룹의 의지와 준비가 낳은 소산이었다. 순항에 장애물이 없진 않았다. 그룹의 노엘과 리암 형제의 반목이 이 때부터 노골화되었다. 틈만 나면 불거진 형제들의 ‘첩혈쌍웅’과 그에 따른 그룹의 해산설, 탈퇴설이 꼬리를 물고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러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형제애는 음악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노엘과 리암의 팽팽한 심리전을 극복했고 그들은 1997년 3집 < Be Here Now >로 ‘패밀리 비즈니스’를 복원했다. 수록곡 ‘Stand by me’ ‘All around the world’에서 필생의 과업인 ‘비틀스 따라잡기’는 계속되지만 전체적으로는 ‘비틀스 벗어나기’를 감행한 앨범이었다. 그들의 음악적 성숙도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들의 포인트인 곡의 질과 음반판매량은 전작보다 후퇴했다. 오아시스는 이후 브릿 팝과 성공의 굴레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음악으로 실천하고 있다. 멤버들의 잇단 동요로 지난해 구조조정을 단행한 오아시스는 곧 정규 4집이 될 새 앨범 <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 >을 내고 돌아올 채비를 갖추었다. 첫 싱글 ‘Go let it out’을 비롯해 비틀즈의 향기는 여전하지만 이미지 탈출을 위한 노력이 곳곳에 투영되어있다. 얼마만큼 성공을 재현하느냐는 매스컴의 관심일지 모르나 갤러거 형제들은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들은 차라리 데뷔시절부터 계속되어온 언론의 집중 공세를 어떻게 피하느냐를 자신들의 ‘숙원사업’으로 여길 것이다.
밴드 : The Alan Parsons Project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
영화나 뮤직 비디오뿐만 아니라 음악 그 자체만으로도, 창조적인 발상은 비주얼한 상상력을 뛰어넘는 무궁한 힘을 가지고 있다.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가 < Ziggy Stardust >로 전세계에 독창성을 과시한 이래로, 음악은 엔지니어링의 발전과 더불어 모든 영역의 실험을 응축시켜 음원 속에 비춰진 사고만으로도 시각적 감상이 가능함을 인지시켰다. 그런 면에서 알란 파슨스는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로 영화... 영화나 뮤직 비디오뿐만 아니라 음악 그 자체만으로도, 창조적인 발상은 비주얼한 상상력을 뛰어넘는 무궁한 힘을 가지고 있다.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가 < Ziggy Stardust >로 전세계에 독창성을 과시한 이래로, 음악은 엔지니어링의 발전과 더불어 모든 영역의 실험을 응축시켜 음원 속에 비춰진 사고만으로도 시각적 감상이 가능함을 인지시켰다. 그런 면에서 알란 파슨스는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로 영화에 도전하는 뮤지션 중의 한 명이다. 비틀즈의 < Abby Road >, 핑크플로이드(Pink Floyd)의 < Dark Side Of The Moon >을 엔지니어링 함으로써 명성을 얻은 알란 파슨스는, 알 스튜어트(Al Stewart)의 < Time Passages > 작업을 마친 후 자신의 팀을 갖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사운드에 대한 진일보를 가져온 그의 엔지니어링은 에릭 울프슨의 뛰어난 작곡 능력과 결합되었으며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란 팀의 음악 세계를 결정짓게 되었다. 이들은 이 바탕 위에 세션과 보컬을 충원하는 방식의 팀을 만들었다. 이러한 포맷은 후에 우리 나라에서도 공일오비, 토이, 스토리 등의 프로젝트 그룹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들의 충격적인 데뷔 앨범 < Tales of Mystery and Imagination >은 유명한 추리 소설 작가 에드가 알란 포(Edgar Alan Poe)의 소설과 시를 인용해 만든 것이다. 영화 감독 오손 웰스(Orson Wells)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A dream within a dream''을 비롯해 서스펜스의 결정판 ‘The tell-tale heart'', 흔히 < 어셔가의 몰락 >으로 번역되는 대작 ’‘The fall of the house of Usher'' 등이 미래에 펼쳐질 이들의 사운드를 예견해 주고 있다. 이들은 아이작 이시모프(Isaac Asimov)의 동명 소설을 컨셉화한 < I Robot >을 내놓고 기계와 인간의 대결 구도를 디스토피아적으로 그려 최고의 비평적 찬사를 받았으며 계속해서 피라미드에 대한 미스테리와 경이를 노래한 < Pyramid >, 남성에 대한 여성의 우위를 팝 적인 사운드에 실은 < Eve >, 도박에 대한 유혹을 멋지게 형상화한 < The Turn Of A Friendly Card > 등으로 컬트 매니아층을 형성하며 성공적인 판매고를 기록한다. 이들은 < I Robot >의 ‘I wouldn''t want to be like you'' 이후 각 앨범마다 한 곡 이상씩의 싱글 곡을 미국 차트 톱40에 올렸으며 < The Turn Of A Friendly Card >에 수록된 ‘Time''이란 곡으로 우리 나라에서도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들은 1982년에 발표한 < Eye In The Sky >란 앨범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싱글 ‘Eye in the sky''는 싱글 차트 3위까지 올라가는 기염을 토했으며 앨범은 몇 백 만장이 팔려 나갔다. 우리를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지배세력에 대한 힘을 주제로 한 이 앨범에는 시카고불스, 뉴욕 메츠 등의 프로팀들이 시그널 송으로 사용하는 ‘Sirius''와 미국 팬들에게 인기 있는 ‘Psychobabble'', 우리 팬들에게 인기 있는 ’‘Old and wise'' 등이 수록되어 있다. 위 앨범으로 최고의 정점을 기록한 이들은 이후로도 여러 앨범이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지만 이와 같은 대중적 환영을 받는 위치에는 이르지 못했다. 스페인 건축학자 가우디의 작품인 스페인성당을 컨셉으로 만든 < Gaudi > 이후, 에릭 울프슨은 팀을 떠나 뮤지컬에 전념한다(그의 대표작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를 작품화한 < Fraudia >, 우리 나라에서도 공연된 바 있는 < Gambler > 등이다). 울프슨의 이름이 빠진 프로젝트팀은 해체되었지만 알란 파슨스는 혼자 남아 여전히 과거의 성향과 비슷한 프로젝트 앨범을 만들고 있다. 여기에는 그의 오랜 친구들인 스튜어트 엘리엇(Stuart Elliot)과 이안 베어슨(Ian Bairson), 크리스 레인보우(Chris Rainbow) 등이 함께 하고 있으며 주제도 비상에 대한 관심을 그린 < On Air >나 허버트 조지 웰스(H.G. Wells)의 소설 < 타임머신 >을 풀어낸 < The Time Machine >처럼 일정한 주제를 상정하고 음악으로 환원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신디사이저가 발전되기 전부터 음의 시각화와 소리에 대한 연구와 실험으로 30여 년을 보내온 이 베테랑은 여전히 자신의 철학을 소리에 담아 공감각적인 통찰력을 얻고 있다. 이것의 음악의 진보를 사운드로 풀어낸 시대의 요청인 것이다. 알란 파슨스는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것뿐만 아니라 믹싱과 녹음의 중요성을, 무엇보다도 새로운 음의 기술력과 창의성을 밝혀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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