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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1990년대 팝 러브송 모음집 (Classic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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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1980~1990년대 팝 러브송 모음집 (Classic Love)

[ 3CD 디지팩 ]
Elton John, Foreigner, Bette Midler, Tina Turner, Boyz II Men 노래 외 53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Universal | 2017년 02월 17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108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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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1990년대 팝 러브송 모음집 (Classic Love)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7년 02월 17일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CD1
  • 01 Tiny Dancer - Elton John
  • 02 I Want to Know What Love Is - Foreigner
  • 03 The Rose - Bette Midler
  • 04 What's Love Got to Do With It - Tina Turner
  • 05 I'll Make Love to You - Boyz II Men
  • 06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 UB40
  • 07 Just the Way You Are - Barry White
  • 08 Arthur's Theme (Best That You Can Do) - Chris Cross
  • 09 Solid - Ashford & Simpson
  • 10 Up Where We Belong - Joe Cocker & Jennifer Warnes
  • 11 Higher Love - Steve Winwood
  • 12 We're All Alone - Rita Coolidge
  • 13 Desperado - Linda Ronstadt
  • 14 You've Lost That Lovin' Feelin' - The Righteous Brothers
  • 15 The World's Strongest Man - Scott Walker
  • 16 Thinking of You - Sister Sledge
  • 17 Save the Best for Last - Vanessa Williams
  • 18 Love to Love You Baby - Donna Summer
  • 19 Outstanding - The Gap Band
CD2
  • 01 Teenage Dream - Katy Perry
  • 02 I Believe in You - Kylie Minogue
  • 03 Brown Sugar - D'Angelo
  • 04 Open - Rhye
  • 05 I Love You Always Forever - Donna Lewis
  • 06 Wanted - Hunter Hayes
  • 07 Holding Back the Years - Simply Red
  • 08 TRUE - Spandau Ballet
  • 09 Slave to Love - Bryan Ferry
  • 10 All of My Heart - ABC
  • 11 Save a Prayer - Duran Duran
  • 12 This Must Be the Place (Naive Melody) - Talking Heads
  • 13 Time (Clock of the Heart) - Culture Club
  • 14 Come Live With Me - Heaven 17
  • 15 Human - The Human League
  • 16 You're the Best Thing - The Style Council
  • 17 Kiss from a Rose - Seal
  • 18 Fall at Your Feet - Crowded House
  • 19 Over You - Roxy Music
CD3
  • 01 Ain't Nobody - Rufus and Chaka Khan
  • 02 Sweet Love - Anita Baker
  • 03 Let's Get It On - Marvin Gaye
  • 04 One Day I'll Fly Away - Randy Crawford
  • 05 One Day in Your Life - Michael Jackson
  • 06 Endless Love - Diana Ross & Lionel Richie
  • 07 I Love You More Than You'll Ever Know - Donny Hathaway
  • 08 I Say a Little Prayer - Aretha Franklin
  • 09 Breakfast in Bed - Dusty Springfield
  • 10 At Last - Etta James
  • 11 If You Need Me - Solomon Burke
  • 12 When a Man Loves a Woman - Percy Sledge
  • 13 Stand By Me - Ben E. King
  • 14 My Girl - The Temptations
  • 15 Heaven Must Have Sent You - The Elgins
  • 16 I'll Be There - The Jackson 5
  • 17 My Cherie Amour - Stevie Wonder
  • 18 I Love Every Little Thing About You - Syreeta
  • 19 You've Made Me So Very Happy - Brenda Holloway
  • 20 Theme from 'Mahogany' (Do You Know Where You're Going To) - Diana Ross

아티스트 소개 (58명)

세상일에 아무 관심없는 천재 작곡가 대중 음악인을 ‘음악 하는 자세’와 관련하여 분류한다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가 처해 있는 시대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여 대중 정서의 현 위치를 찾으려는 사람들이며, 다른 한쪽은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무관하게 자신의 음악만을 표출하는 데 심혈을 쏟는 사람들이다. 두 가지 스타일이 혼재되어 있는 음악인도 있을 테지만 대체로 전자의 무게 중심은 시각... 세상일에 아무 관심없는 천재 작곡가 대중 음악인을 ‘음악 하는 자세’와 관련하여 분류한다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가 처해 있는 시대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여 대중 정서의 현 위치를 찾으려는 사람들이며, 다른 한쪽은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무관하게 자신의 음악만을 표출하는 데 심혈을 쏟는 사람들이다. 두 가지 스타일이 혼재되어 있는 음악인도 있을 테지만 대체로 전자의 무게 중심은 시각(view)일 것이며 후자는 예술(art)이다. 엘튼 존은 바로 후자를 대표하는 금세기 최고 록 스타 가운데 한사람이다. 흔히 그는 1970년대를 대변하는 톱 가수로서 록 역사에 기록된다. 1970년대가 개막되면서 ‘보더 송(Border song)’을 빌보드 차트에 랭크시키며 등장한 그는 이후 당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탁월한 선율로 인기 차트를 석권했다. 그의 멜로디를 뽑아내는 재주는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쌍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경이적이었고 또 천재적이었다. 만약 1970년대에 그가 없었더라면 팝계의 ‘예술적 활기’는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와 관련, 록 평론가인 로버트 크리스트고(Robert Christgau)의 엘튼 존에 대한 서술은 참으로 맹쾌하다. “1960년대의 비치 보이스처럼 엘튼 존은 1970년대의 필수적인 시금석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그가 해악의 진부성을 축약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렇게 하라. 하지만 내 생각으로 그는 가장 유순하고 황량한 시절마저도 생기로 가득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인물이다.” 그런데 크리스트고도 인정하고 있듯이 1970년대는 사회성으로 특징지어진 1960년대 록 혁명의 정신이 함몰되어 버린 ‘록 예술성의 시대’로 정의된다. 크리스트고가 그때를 ‘해악’이니 ‘유순하고 황량한 시절’이니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에 기초한 것이다. 엘튼 존 스스로도 ‘음악을 만들면서 정치적 이슈를 내거는 것은 넌센스다. 세상사를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가서 음악하는 것뿐’ 이라며 자신의 비(非)참여적 음악관을 천명하곤 했다. 그는 “음악에 있어서 정치가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말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1960년대 가수들을 보라. 삶은 여전히 똑같지 않은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록의 사회성에 얼마나 등을 돌렸는지는 곡 쓰기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는 다른 송라이터들과 달리 작사는 직접 하지 않고 남에게 맡겼는데 당시 그의 작사 파트너는 버니 토핀(Bernie Taupin)이었다. 버니가 쓴 노랫말은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으로 가득 찼다. 버니는 사회를 떠난 신변잡기의 소재에 집착하면서 공상을 써내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엘튼은 그의 가사를 좀처럼 따지지 않았다. 그저 즐겁게 그의 공상을 팬들에게 전달할 뿐이었다. 그는 심지어 “난 정말 버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에 대한 노래냐고 묻기는 하지만 의미를 캐내지는 않는다. 난 그의 가사 10편에 곡을 붙일 때까지 그를 만나지 않은 적도 있다”고 스스럼없이 밝히기도 했다. 자기 환상만을 늘어놓는 작사가, 그것을 검증도 없이 곡을 쓰고 즐겁게 노래하는 가수, 그들에게서 시각을 바랄 수 없다. 그런 음악은 본질적으로 예술 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엘튼 존이 1970년대의 특성을 떠 안은 인물임을 시사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있다. 1970년대는 1960년대 히피의 프리 섹스 여파로 성의 일반적 개념이 철저히 해체되어 독신, 동성애, 그룹 섹스, 배우자 바꾸기 등 새로운 섹스 스타일이 마구 고개를 들던 시기이기도 했다. 때문에 1970년대를 ‘자극의 시대’라고도 일컫는 것이다. 엘튼은 소문난 양성(兩性)주의자였다. 아니, 스스로 바이 섹슈얼(Bi-sexual)이라고 공언하고 다녔다. 그런 충격적 신상 공개는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를 뺀다면 록 스타들 중에서는 그에게서 최초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는 양성주의자가 아니라 동성주의자, 즉 게이라는 사실이었다. 최근 < 디테일즈 >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왜 그 때 호모라고 하지 않고 바이 섹슈얼이라고 했냐”하는 질문에 “아마 겁이 나서였기 때문일 거다. 진실 파기이지만 그 당시에는 가능한 한 ‘외교적’으로 말하려고 생각했다”고 답변했다. 이 부분에 관해서 그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인터뷰 내용을 더 살펴보기로 하자. - 언제부터 여성 관계를 단계적으로 끝냈는가? :끝내다니? 어떠한 여성 관계도 결코 없었다. 그 누구도 나는 끝내고 자시고 하지 않았다. - 몇 살 때부터 자신이 게이임을 알았는가? :대략 23세쯤이었을 거다(그는 1947년생이므로 1970년쯤 된다). 그때가 나의 첫 실제 경험이었다. 아마 그 전부터 게이인지 알았을 텐데 23살에 실질적으로 그것을 맞이했다. - 그런데 결혼은 왜 했나? :잘못된 이유로 결혼했다. 난 결혼하면 내가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게이야. 난 정말 불행해’라고 여기곤 했으니까. 동성연애자라는 여론의 화살을 피하려고 결혼했다는 얘기다. 그는 1984년 독일 출신의 레코딩 엔지니어인 레니트 블라우어(Renete Blauer)와 결혼식을 올렸다. 게이라고 공공연히 밝힌 사람이 여자에게 갔다는 이유로 화제를 모았던 이 관계는 당연히 오래가지 못했다. 둘은 3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1987년 이혼했다. 게이 발언, 여성과 결혼, 그리고 이혼 등의 사건으로 이미 타블로이드 신문의 가십 단골이 된 그는 1988년 마침내 한 차례 커다란 홍역을 치러야 했다. 영국의 < 선 >지가 “엘튼이 10대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추잡한 섹스 파티를 벌였다”는 기사를 게재한 것이었다. 그 기사에 따르면 그는 게이를 초월하는 ‘성도착증 환자’이자 ‘성격 장애자’나 다름없었다. 인간 관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어머니마저 창피해 스페인으로 떠나버리자 분기탱천한 그는 두주먹 불끈 쥐고 < 선 >지를 고소했고 이어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이게 됐다. 그는 이 재판에서 승소해 명예를 회복했지만 이후 언론으로부터는 ‘흥미의 대사(Ambassador of Fun)’라는 불명예스런 타이틀을 얻었다. 애초부터 매스컴과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지만-언론의 등쌀이 마릴린 먼로를 죽이게 했다는 내용을 노래 ‘바람속의 촛불(Candle in the wind)’로 알 수 있다-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언론에 몸서리를 치게 되었다. 그는 영화 < 라이온 킹 >의 사운드 트랙은 ‘오늘밤 그대는 사랑을 느끼나요?(Can you feel the love tonight?)’으로 재기한 94년까지 근 7년 간 가능한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회피했다. 그의 기자 혐오증은 너무나 유명하다. 스스로도 “난 영국의 언론에 분노가 치민다. 정말로 그들이 싫다. 그들은 거짓말쟁이들이며 지구의 깡패들이다”라고 강도 높게 말하기도 했다. 그의 언론에 대한 분노는 지금도 살아 끓어 넘친다. 올해 발표된 새 앨범의 타이틀 송 ‘메이드 인 잉글랜드(Made in England-8월 19일자 빌보드 싱글 차트 52위)’가 그것을 실증해 주는 곡이다. “난 영국에서 만들어졌어. 블루 코티나차처럼 말야... ...넌 스캔들의 냄새를 좇았지. 여기 내 가운데 손가락을 봐. 난 고통의 40년을 살았어. 아무것도 기댈 것이 없어... ...넌 아직도 호모라고 얘기하고 모든 사람이 웃지.” 그가 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것도 일리는 있다. 원래가 솔직하고 감성적인 성격으로 자신의 성(性)을 고백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을 거치면서 일반인들의 미움과 손가락질이 생겨난 것이라고 그는 믿기 때문이다. 그의 인기가 하향세로 접어든 것도 양성주의자임을 밝힌 1976년부터였다. 그는 1989년 < 파리 마치 >지와의 인터뷰에서 “지난번 앨범 < 레그 스트라이크스 백(Reg Strikes Back) >은 전세계적으로 판매 성적이 대단히 좋았는데 유독 영국에서만은 결과가 안 좋았다. 영국인들 대부분이 < 선 >지의 악의적인 기사를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어떤 논리적인 응수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술과 자극’의 1970년대라는 보수 시대를 살아왔으며 보수 성향의 인물이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는 또 명백한 ‘록 엘리트’다. 부자라는 점에서도 그렇거니와 음악 능력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그는 “버니의 가사를 받아 기분이 좋을 때면 곡을 쓰는데 15분도 안걸린다”고 자랑했다. 그런 천부적 재능을 밑천 삼아 그는 지금까지 무려 32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물론 이 왕성한 생산력을 아티스트의 성실성이라는 측면에서 극구 칭송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틀어보면 그것은 음악 엘리트만이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실제로 그는 비평계 일각으로부터 ‘음악의 과소비’를 행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그가 1970년대 후반 ‘엘리트만이 아니라 누구나 음악할 수 있다’는 평등의 이데올로기를 내건 펑크 진영의 공격 대상이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아직도 그의 이름에는 ‘로커’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러며 연상되는 과거의 거친 피아노 연주나 기행적 무대는 분명 폭발과 반란을 특질로 하는 록의 전형적 제스처였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서 그러한 ‘록의 반항적 미학’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오늘밤 사랑을 느끼나요’가 말해주듯 중산층의 격조와 결탁한 ‘AOR(Adult Oriented Rock)’이나 스탠더드 팝으로 색깔을 바꾸어 안전지대에 정착해 있다. < 타임 >지는 얼마전 그의 새로운 전성기가 도래했음을 대서특필하는 순간에도 ‘그에게는 실재(實在)하는 록 스타의 고뇌와 거친 감정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빼놓지 않았다. 그가 ‘팝계의 불사조’라는 작위를 하사 받아야 함은 마땅하다. 정글과도 같은 팝계를 4반세기에 걸쳐 롱런한 ‘영광의 생존’만으로도 그는 위대하다. 1993년에 이미 엘비스 프레슬리의 벽을 넘어 24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차트 40위권의 히트곡을 낸(올해로 그 햇수는 26년으로 늘어났다) 사실만으로도 그의 위력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마흔여덟 살의 노장이 신인들 틈새에서 몇 백만 장의 음반 판매고를 올리는 것 또한 우리 입장에서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그 나이의 사람에게 록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것도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시각이 없다. 그는 4반세기 동안 그의 관점을 개인으로부터 해방시킨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보수적인 시대에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이다. 내내 부진하다가 미국 사회에 보수적인 기류가 소생한 지난해(1994년) 재기한 것을 보라. 그의 노래들 ‘굿바이 옐로 브릭 로드(Goodbye yellow brick road)’ ‘오늘밤(Tonight)’ ‘미안하다는 말은 정말 어려워(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등은 아직도 우리들에게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팝송 청취와 수용이 예술적 가치에만 집중되어 있음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에서는 ‘Waiting for a girl like you’, ‘I want to know what love is’, ‘I don''t want to live without you’와 같은 발라드 넘버들이 유명하기 때문에 국내의 음악 팬들은 포리너(Foreigner)를 발라드 전문 밴드로 한정짓기 쉽지만 원래 이들은 시원시원하고 파워 넘치는 루 그램(Lou Gramm)의 보컬과 호방하고 드라이브감 넘치는 ... 우리나라에서는 ‘Waiting for a girl like you’, ‘I want to know what love is’, ‘I don''t want to live without you’와 같은 발라드 넘버들이 유명하기 때문에 국내의 음악 팬들은 포리너(Foreigner)를 발라드 전문 밴드로 한정짓기 쉽지만 원래 이들은 시원시원하고 파워 넘치는 루 그램(Lou Gramm)의 보컬과 호방하고 드라이브감 넘치는 믹 존스(Mick Jones)의 기타에 의해 주도되는 하드록 밴드다. 1976년, 영국의 하드록 밴드 스푸키 투스(Spooky Tooth)에서 뛰쳐나온 기타리스트 믹 존스(영국 펑크 밴드 클래쉬의 믹 존스와는 동명이인)와 프로그레시브 그룹 킹 크림슨(King Crimson)의 기타 주자 이안 맥도날드(Ian McDonald)가 의기투합해 미국인과 영국인의 비율을 3 : 3으로 조율한 6인조 연합 밴드가 훠리너였고 믹 존스와 뉴욕 토박이 루 그램이 작곡 파트너가 되어 대부분의 노래들을 생산했다. ‘Feels like the first time(4위)’, ‘Cold as ice(6위)’, ‘Long long way from home(20위)’ 등의 하드록 넘버가 활약한 1977년의 데뷔 앨범 < Foreigner >는 당시 팝음악의 폭풍이던 펑크와 디스코에 대한 반대 급부로 등장해 높은 음반 판매고를 기록한 동시에 호의적인 평가도 거머쥐었다. 처녀작보다 좀 더 화끈한 하드록에 가까웠던 두 번째 작품 < Double Vision >에서는 ‘Double Vision(2위)’, ‘Hot Blooded(3위)’, ‘Blue morning, Blue day(15위)’가 FM 라디오를 장악하면서 전작을 상회하는 성공을 낚았다. 상대적으로 허약한 결과를 거둔 3집 < Head Games >로 1970년대를 마감한 포리너는 1981년 역작 < 4 >를 공개했다. 이들의 4번째 음반이며, 6인조에서 4인조로 멤버를 감축하고 발표한 첫 음반인 동시에 밴드명과 같은 발음으로 시작한다는 3가지 의미를 내포한 < 4 >에서는 신시사이저 연주가 곡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그 유명한 ‘Waiting for a girl like you’와 색소폰 연주를 시도한 ‘Urgent(4위)’, 그리고 ‘Juke box hero(26위)’ 등이 수록되었는데 특히 ‘Waiting for a girl like you’는 올리비아 뉴튼 존(Olivia Newton John)의 ‘Physical’의 그림자 밑에서 무려 10주 동안 싱글 차트 2위를 고수한 불운한 노래로 기록되었다. 이 레코드부터 초기의 직선적인 하드록은 많이 거세되고 팝적인 감각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 정점에 오른 음반들이 가스펠 코러스와 루 그램의 소울풀한 음색으로 넘버원의 한을 풀어 준 ‘I want to know what love is’와 ‘That was yesterday(12위)’가 들어 있는 < Agent Provocateur >와 ‘Say you will(6위)’, ‘I don''t want to live without you(5위)’가 히트 싱글을 기록한 < Inside Information >이다. < Inside Information >은 상업적으로 성공한 포리너의 마지막 LP가 되었고 이후 1990년대에 발표한 < Unusual Heat >와 < Mr. Moonlight >은 얼터너티브 그런지와 모던록, 힙합으로 대표되는 흑인 음악의 기세에 뭍혀버렸다. 포리너같은 성인 취향의 아레나록 밴드들의 등장과 성공은 시대성이 크게 좌우했다. 이 6인조 밴드가 1집을 공개한 1977년, 전 세계가 경기 침체와 극심한 불경기로 신음하고 있을 때 대중 음악은 두 가지 형태로 반응했다. 기성 세대와 기존의 가치를 전면 부정한 분노의 펑크와 쾌락과 리듬으로 그 고통을 잊기 위한 디스코였다. 이 정반대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펑크와 디스코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대중 음악에 충격을 가했다. 그러나 그 당시를 호흡했어도 모두가 펑크와 디스코를 들으면서 흥분하거나 몸을 흔든 것은 아니었다. 이 음악들을 좋아했던 사람들 만큼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포리너를 비롯한 저니(Journey), 하트(Heart), 보스톤(Boston), REO 스피드왜건(REO Speedwagon), 후반기의 스틱스(Styx)나 캔사스(Kansas)같은 성인 취향의 록밴드는 그 틈새를 파고들어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뉴웨이브 음악이 팝계를 평정했던 1980년대 초중반까지 대중 음악을 지배했다. 하지만 디스코가 사라지고 펑크가 지하로 몸을 숨긴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포리너를 포함한 아레나록 밴드들은 더 이상 맥을 추지 못했다. 그들은 펑크와 디스코에 대한 카운터 펀치 역할을 했지만 그 존재 의미를 부여하는 상대가 없어지자 이들은 급속히 쇠락하기 시작했고 또한 그들보다 월등했던 성공의 단맛에 도취한 것도 중요한 이유다. 그들로서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적과 경쟁을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음악의 지향점이 달랐던 펑크, 디스코, 그리고 성인 취향의 아레나록은 공생 관계였다.
팝계에 대표적인 여장부로 칭하는 입지적인 인물 2명을 꼽으라면 바브라 스트라이젠드(Barbra Streisand)와 베트 미들러(Bette Midler)가 될 것이다. 먼저 두 여인 사이엔 많은 공통점이 존재한다. 언뜻 보기에도 둘의 외모는 미인이라는 기준의 잣대를 가지고 볼 때 성에 차지 않는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수, 영화배우, 뮤지컬 배우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정상의 자리를 꿰찼다. 이는 선천적 재능도 ... 팝계에 대표적인 여장부로 칭하는 입지적인 인물 2명을 꼽으라면 바브라 스트라이젠드(Barbra Streisand)와 베트 미들러(Bette Midler)가 될 것이다. 먼저 두 여인 사이엔 많은 공통점이 존재한다. 언뜻 보기에도 둘의 외모는 미인이라는 기준의 잣대를 가지고 볼 때 성에 차지 않는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수, 영화배우, 뮤지컬 배우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정상의 자리를 꿰찼다. 이는 선천적 재능도 재능이거니와 동시에 피나는 노력과 성실한 활동의 후천적 결과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1942년생인 바브라와 1945년생인 베트 둘 다 유태계 출신이라는 점과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보이며 후배 가수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는 점도 역시 닮은꼴이다. 굳이 차이점이라면 바브라의 경우 귀족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반면에 베트의 경우는 보다 서민적이고 친근한 이미지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몫은 언제나 바브라의 차지였다. 뉴저지의 패터슨에서 태어나 하와이에서 성장한 베트 미들러는 자신의 꿈인 배우가 되기 위해 대학서 드라마를 전공하였고, 1965년 영화 < 하와이 >의 단역배우로 시작하여 1966년부터 3년 동안 뉴욕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합창단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70년엔 카바레 원맨쇼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기에 그녀의 음악적인 조우자 배리 메닐로(Barry Manilow)를 만나게 되었는데, 베리 매닐로는 베트의 초기 2장의 앨범에서 피아니스트 겸 프로듀서로 활약하며 인지도를 쌓아간 인물이었다. 1972년 TV에 정기적인 출연으로 얼굴 알리기에 나선 그녀는 메이저레이블인 어틀랜틱 레코드사와 정식 계약을 체결하고 가수로 데뷔한다. 데뷔앨범 < The Divine Miss M >에선 ‘Boogie woogie bugle boy(8위)’, ‘Do you want to dance?(17위)’, ‘Friends(40위)’ 등을 히트됐으며 이듬해 그녀는 그래미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스케일이 컸던 데뷔 시절이 무색하게 1973년부터 1979년까지 내놓은 5장의 음반은 빅히트와 거리가 멀었다. 그러던 중 약물과용으로 요절한 여성 록커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 더 로즈 >의 주인공으로 분하면서 마침내 기회를 잡았다. 이 영화에서 혼신을 다한 열연으로 골든 글러브 여우주연상 수상과 더불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배우로서의 성공과 ’When a man loves a woman’(35위), ’The Rose’(3위) 등이 포함된 사운드트랙 앨범으로 두번째 그래미상을 수상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히트를 견인한 타이틀곡 ‘The rose’는 지금까지도 국내 올드 팬들에게 향수를 자아내는 명곡으로 남아있다. 재니스 조플린의 삶을 돌이켜 볼 때 결코 쉽지 않은 배역이었음에도 훌륭히 소화해낸 베트 미들러는 세상을 떠난 가수의 재조명을 통해 새로운 스타탄생을 얻는 이라는 역사의 교차 한복판에 서게 되는 영광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그녀의 활동은 영화 쪽으로 흘렀다. 영화 < 하와이 >에서 단역을 시작으로 배우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 더 로즈 >의 주연으로 확고한 눈 도장을 찍은 뒤로 수많은 영화와 TV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에미상, 토니상, 골든 글러브상 등 화려한 수상실적을 쌓았다. 1980년 < 디바인 매드니스 >는 콘서트 영화였고, 1982년 < 징크스드 >에선 겜블러의 여자 친구로, 사운드 트랙 앨범이 300만장 이상이 팔려나간 1988년 작품 < 비치스 >에선 진한 우정을 나누는 중년의 여인으로,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 포 더 보이즈 >에서는 위문공연을 다니는 가수로 분하며 스크린을 누볐다. 그러나 약 20편에 달하는 출연작중 사운드트랙 수록곡 전곡을 혼자서 부른 영화만도 5편에 이르는 것을 보면 가수로서의 임무도 소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 비치스 >의 사운드트랙 수록곡 ‘Wind beneath my wings’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전미 차트 정상의 자리에 올려 주었으며 통산 세번째 그래미상 트로피를 안겨다 주었다. 이 때가 베트 미들러의 전성기였다. 데뷔 이후 15년의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된 때였다는 점에서 이 시기에 토한 기염은 각별했다. < Beaches > 이후 1990년 앨범 < Some Peoples Lives >은 사운드트랙이 아닌 정규앨범으론 최초로 판매고 200만장을 돌파했고 여기서 발표한 싱글 ‘From a distance(2위)’는 걸프전이라는 시대상황과 맞물려 미국 전역의 라디오 방송을 휩쓸었다. 이 무렵 안정되고 굵은 그녀의 보이스 색깔과 부피는 경력의 완숙미를 드러내고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발매하는 앨범마다 골드나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지금까지 음반판매고는 1400여만장. 하지만 1990년대 들어서 머라이어 캐리와 셀린 디온과 같은 대형 여가수들이 출현하면서 기세가 하락, 막강 여가수의 바통을 신진 디바들에게 넘기고 만다.
가정 폭력의 피해자에서 마음이 따뜻한 팝의 여왕으로! 티나 터너(Tina Turner)에게 있어 1958년부터 18년 동안 지속된 아이크 터너(Ike Turner)와의 결혼 생활은 영욕으로 점철된 세월이었다. 로큰롤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부부 듀엣 아이크 & 티나 터너(Ike & Tina Turner)는 영광스런 부분으로 자리하지만 그동안 남편에게 당한 폭력은 쉽게 도려낼 수 없는 어두운 부분이다. 그녀의 그러... 가정 폭력의 피해자에서 마음이 따뜻한 팝의 여왕으로! 티나 터너(Tina Turner)에게 있어 1958년부터 18년 동안 지속된 아이크 터너(Ike Turner)와의 결혼 생활은 영욕으로 점철된 세월이었다. 로큰롤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부부 듀엣 아이크 & 티나 터너(Ike & Tina Turner)는 영광스런 부분으로 자리하지만 그동안 남편에게 당한 폭력은 쉽게 도려낼 수 없는 어두운 부분이다. 그녀의 그러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음악이라는 것을 옛 동료인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의 ’입술’ 믹 재거(Mick Jagger)와 ’팝계의 카멜레온’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는 알고 있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티나 터너는 팝 역사상 가장 멋진 ’컴백’에 성공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45살이던 1984년, 티나 터너는 자신의 영원한 걸작으로 남게 된 < Private Dancer >를 세상에 공개했다. 알 그린(Al Green)의 원곡을 소울적인 록으로 해석한 ’Let’s stay together(26위)’로 첫 포문으로 연 이 LP는 그 유명한 ’What’s love got to do with it’가 3주 동안 싱글 차트 1위를 지켰고, 전남편 아이크 터너에게 전하는 록트랙 ’Better be good to me(5위)’와 ’Show some respect(37위)’, 그리고 다이어 스트레이츠(Dire Straits)의 리더 마크 노플러(Mark Knopfler)가 작곡한 ’Private dancer(7위)’까지 무려 5곡이 40위안에 랭크되면서 극적인 재기를 선호하는 그래미와 평론가들의 대대적인 환대를 받았다. 특히 그래미는 올해의 레코드, 올해의 여가수, 올해의 여성 록가수 부문을 사자 머리(?) 여가수에게 몰아주면서 쌍수를 들며 환영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녀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티나 터너의 성공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과 프린스(Prince)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한 록과 리듬 앤 블루스가 적극적으로 결합한 음악의 열매였다. 록 필(feel)이 충만한 그녀의 노래는 백인들에게도 비교적 쉽게 어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브라이언 아담스(Bryan Adams)의 히트작 < Reckless >에 수록된 ’It’s only love(1985년 15위)’를 함께 불러 인기를 얻은 티나 터너는 1975년 영화 < 토미 >에 출연한 경력을 살려 1985년에 멜 깁슨(Mel Gibson) 주연의 액션 영화 < 매드 맥스 Ⅱ >에 조연으로 등장했으며 동시에 삽입곡 ’We don’t need another hero(2위)’와 ’One of the living(15위)’을 불러 히트시켰다. ’One of the living’으로 2년 연속 그래미 최우수 여성 록보컬을 수상한 이 흑인 록커는 그 여세를 몰아 1986년에 < Break Every Rule >을 공개했다. 필 콜린스(Phil Collins)가 드럼을 연주한 ’Typical male(2위)’을 비롯해 ’Two people(30위)’, ’What you get is what you see(13위)’, ’Break Every Rule(74위)’ 등으로 계속되는 인기를 누렸으며 다음 작품 < Foreign Affair >에서도 ’The Best(15위)’, ’Steamy windows(39위)’같은 싱글을 배출했다. 이렇듯 왕성한 활동으로 1986년과 1988년에도 그래미 최우수 여성 록 보컬리스트 상을 수상하면서 팻 베나타(Pat Benatar)와 같은 이 부문 4회 수상을 기록했다(그러나 연속 수상은 아님). 1993년에는 자서전 < I, Tina >를 바탕으로 한 영화 < 왓쓰 러브 갓 투 두 위드 잇 >이 개봉되었다. 티나와 아이크 역을 완벽하게 소화한 안젤라 바셋(Angela Bassett)과 로렌스 피시번(Lawrence Fishburne)을 오스카 남년 주연상 후보에 올려놓은 이 영화로 흑인 사회에서는 다시 한번 ’티나 터너 열풍’이 일었다. 1996년도 음반 < Wildest Dreams >에는 영화 < 007 골든아이 >의 주제가 ’Goldeneye(71위)’, 1984년에 자신의 ’What’s love got to do with it’을 밀어내고 정상을 차지한 존 웨이트(John Waite)의 ’Missing you(84위)’와 트립합의 선두주자 매시브 어택(Massive Attack)의 ’Unfinished sympathy’를 커버했다. 선배의 노래를 밀어냈다는 죄책감에 떨고 있을 후배 존 웨이트에겐 면죄부(?)를 주고 메시브 어택으로부터는 시대에 뒤쳐지지 않으려는 신(新) 감각을 이식하기 위함이었으리라.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가죽옷과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는 ’팝계의 야생마’ 티나 터너의 앨범에는 항상 유명 뮤지션들의 눈부신 세션 참여가 우리의 눈을 잡아끈다. 그녀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음악 재능뿐만이 아니라 주위 동료들로부터 받는 인정도 넘친다. 바로 이것들이 티나 터너가 장수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요소가 아닐까?
노래 : Boyz II Men (보이즈 투 맨)
1980년대 후반부터 불어닥친 랩(Rap) 음악의 열풍은 한편으로 기존의 부드럽고 감성적인 소울 음악에 대한 향수라는 역풍(逆風)을 몰고 왔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등장한 4명의 흑인 청년들로 구성된 보컬 그룹 보이즈 투 멘(BoyzⅡMen)은 수려한 보컬 하모니를 무기로, 무너진 소울 음악의 정통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했고 그 결과로 단번에 R&B계의 주류로 일대 신분이 상승, 1990년대 R&B 최강자로 떠올... 1980년대 후반부터 불어닥친 랩(Rap) 음악의 열풍은 한편으로 기존의 부드럽고 감성적인 소울 음악에 대한 향수라는 역풍(逆風)을 몰고 왔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등장한 4명의 흑인 청년들로 구성된 보컬 그룹 보이즈 투 멘(BoyzⅡMen)은 수려한 보컬 하모니를 무기로, 무너진 소울 음악의 정통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했고 그 결과로 단번에 R&B계의 주류로 일대 신분이 상승, 1990년대 R&B 최강자로 떠올랐다. 흑인 음악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모타운(Motown) 레코드사가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소위 확실하게 밀 카드가 없어 부진의 늪에 빠졌으나 필라델피아 고교 동창생인 나산 모리스 (Nathan Morris), 마이클 맥커리(Michael Mccary), 숀 스톡맨(Shawn Stockman), 와냐 모리스(Wanya Morris) 이들 4명의 데뷔앨범은 90년대 모타운 사운드의 부활을 예고했으며 모타운 사의 중흥을 1990년대까지 이어가는 가교 역할을 해냈다. 이들의 우상이기도 했던 뉴 에디션(New Edition) 출신의 마이클 비빈스(Michael Bivins)에 의해 발탁, 정식 데뷔를 하게 된 보이즈 투 멘은 1991년 달라스 오스틴(Dallas Austin)과 트로이 테일러(Troy Taylor)가 공동 프로듀서한 데뷔앨범 < Cooleyhighharmarmony >로 대중들 앞에 첫 선을 보였다. 순식간에 차트 3위를 기록하며 플래티넘 고지를 점령한 첫 싱글 ’Motownphilly’는 모타운 사와 보이즈 투 멘 자신들을 홍보하는 내용(모타운+필라델피아의 신조어를 제목으로 따옴)에다 뉴 잭 스윙 형식을 취한 현대적 두 왑 곡으로 그들의 은인 마이클 비빈스가 제작에 참여하고 랩을 담당했다. 이 곡이 아카펠라의 맛 보여주기를 시도했다면 두번째 싱글 ’It’s so hard to say goodbye to yesterday’는 아카펠라의 진수를 보여준 곡이었다. 그들의 주무기인 환상적인 보컬 하모니를 들려준 이 곡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Black or white’에 밀려서 2위에 수주간 머무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이들의 음악 색깔을 여과 없이 드러낸 명곡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 곡의 영향으로 보컬 그룹들은 가창력을 인정받기 위해서 너나 할 것 없이 아카펠라 곡을 앨범에 수록하는 붐이 일어날 정도였다. 앨범에선 이외에도 고급스런 R&B 스타일을 선보인 ’Uhh ahh’(이상 3곡의 싱글은 차례로 R&B차트 정상에 올랐다.)와 맨하탄스(Manhattans)의 음악을 연상시키는 ’Please don’t go’ (9위)등이 인기를 얻었고, 앨범도 최고 순위 2위까지 오르며 900만장 이상이 팔려나간 엄청난 히트작이 되었다. 각종 시상식에서 R&B 부문의 상들을 휩쓸며 아직 10대의 티를 벗지 못한 4명의 소년들을 R&B계의 가장 주목할 신성으로 자리잡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후의 활동에서 데뷔작의 성공은 시작에 불과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1992년 그들은 베이비페이스(Babyface)와 첫 인연을 맺고 에디 머피(Eddie Murphy) 주연의 영화 < 부메랑 >의 사운드트랙 수록곡이자 역작인 ’End of the road’를 부르게 된다. 다분히 보이즈 투 멘을 위해 만들어진 곡임을 증명하듯 4명의 멤버는 자신들의 파트를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또한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가 ’Don’t be cruel/Hound dog’으로 기록한 11주의 기록을 훌쩍 넘어서 13주간 싱글차트 정상을 지키는 신기원을 이룩한다. 그래미상 2연패와 플래티넘 획득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같은 해 또 하나의 사운드트랙 < 더 잭슨스: 아메리칸 드림 >에 다시 아카펠라 곡을 선사한다. 파이브 새틴스(Five Satins)의 1956년도 오리지널을 리메이크한 전통적인 두 왑 스타일의 ’In the still of the nite(I’ll remember)’로, 이 곡 역시 팝 차트 3위, R&B차트 4위에 오르며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1993년 발매된 캐롤 앨범 < Christmas Interpretations >은 브라이언 맥나이트(Brian Mcknight)가 제작에 참여하고 함께 입을 맞춘 ’Let It snow’(19위)로 인기를 모았으며 이듬해 대망의 2집 앨범 < Ⅱ >를 내놓게 되는데 이들에겐 소모포어 징크스는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했다. 앨범은 발매와 동시에 차트 1위로 데뷔하여 5주간 그 자리를 지켰고 미국에서만 1200만장이라는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올렸다. 모타운 레코드사에 안겨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베이비페이스가 만들고 프로듀서한 첫 싱글 I’ll make love to you’는 빠른 속도로 차트 정상을 점령하더니 14주간이나 머물러 자신들이 세운 기록을 불과 1년만에 갱신한 대선배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과 타이를 이루었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곡을 차트 1위에서 끌어내린 곡이 두 번째 싱글 ’On bended knee’였다는 점이다. 비틀즈와 엘비스만이 가지고 있는 이런 기록을 20대 초반의 흑인 청년들이 손쉽게 이루어낸 사실에 팝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며, 지미 잼 & 테리 루이스가 프로듀서한 ’On bended knee’는 아름다운 화음과 세련된 멜로디가 돋보이는 곡으로 1위 자리를 2번에 걸쳐 오르며 총 6주간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그외에도 ’Thank you’(21위), 매끄럽기 그지없는 ’Water runs dry’(2위), ’Vibin’(56위)등이 차례로 차트에 올라 인기를 얻으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앨범에는 팝계의 최고의 프로듀서들이 참여했다. 앞서 언급한 베이비페이스와 지미 잼 & 테리 루이스, 데뷔 앨범을 함께한 달라스 오스틴, 트로이 테일러, 브라이언 맥나이트, 엘 에이 레이드, 토니 리치등 모두가 쟁쟁한 일급 프로듀서들이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보이즈 투 멘은 다시 한번 1995년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와 함께 한 ’One sweet day’로 인기 정점에 오른다. 당대 최고의 여가수와 최고의 보컬그룹의 만남을 대중들은 16주간 차트 정상이라는 신기록으로 환호했으며 판매고는 200만장을 훌쩍 넘어섰다. 같은 해에 보컬 그룹으로 드물게 리믹스 < The Remix Collection >앨범에 도전했는데 이 앨범엔 브랜디(Brandy)와 와냐의 듀엣곡 ’Brokenhearted’(9위), 엘 엘 쿨 제이(L.L. Cool J)와 함께한 플래티넘 싱글 ’Hey lover’(2위)등이 기존의 히트곡들의 리믹스 버전과 함께 수록되어 있었고 신곡 ’I remember’(46위)도 선전을 했었다. 이후 2년 동안을 필라델피아 교외에 묻혀 앨범 제작에 몰두했고 97년 3집 < Evolution >을 들고 나타났지만 이들의 새 앨범은 기대만큼 큰 화제를 얻지는 못했다. 그 단적인 면이 앨범 판매고에서 나타나 신작은 반짝 인기에 그치며 200만장을 넘기는 것도 힘에 부치는 모습을 보였다. 지미 잼 & 테리 루이스의 ’4 Seasons of loneliness’와 베이비페이스의 ’A song for mama’를 적극 밀었지만 첫 싱글은 차트 1위에 1주간 머무르는데 그쳤고, 두번째 싱글은 영화에 삽입하면서 홍보전략을 폈지만 7위까지 오르는 그들로선 평범한 히트를 기록하고 말았다. 당시 한창 주가를 올리던 퍼프 대디(Puff Daddy)를 프로듀서로 초빙한 수고로움도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결과만 초래했다. 1998년에는 다이안 워렌이 만든 < 이집트의 왕자 > 사운드트랙의 수록곡 ’I will get there’(32위)로 차트에 다시 등장했고, 데뷔 이후 모타운 레코드의 달러박스로 큰 몫을 차지했던 이들은 이듬해 레코드사의 인수 합병으로 인해 유니버살(Universal) 레코드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대망의 2000년을 맞이하여 멤버 자신들의 이름을 내건 네번째 앨범 < Nathan Michael Shawn Wanya >를 발매하기에 이른다.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그 동안의 앨범 작업마다 참여했던 유명 프로듀서들의 이름이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멤버 자신들이 직접 곡을 쓰고 프로듀서 했기에 자신들의 색깔을 제대로 냈고 진정한 싱어송라이터로 거듭났다는 평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상업적으로는 실패했다. 처음 시도하는 빠른 라틴 비트의 ’Beautiful women’, ’Good guy’로 시대의 흐름을 읽는데 소홀히 하지 않았고, 마치 테크노를 듣는 듯 신선한 ’Bounce, shake, move, swing’, 포크 송처럼 부드러운 ’Do you remember’, 특기인 아카펠라를 가미한 두 왑 ’I do’등 전체적으로 수작으로 손꼽을 만한 앨범이었다. 하지만 앨범 홍보가 미비했고 3집에서 시작된 대중들의 피로감 때문에 이미 많은 팬들이 등을 돌린 탓도 있었다. 결국 2001년 베스트 앨범 < Legacy: The Greatest Hits >를 끝으로 아리스타(Arista) 레코드로 새롭게 둥지를 틀었고 절치부심 새 음반 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10대에 데뷔하여 현재 30대 초반이 된 이들이 10년 동안 팝과 R&B계에 끼친 영향력은 그들 이후 많은 보컬그룹들이 생겨났다는 점과 더불어 이런 보컬 그룹들의 음악적 실력을 비교하는 잣대가 되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많은 곡들이 차트에 올랐다가 빠르게 사라져 갔지만 유독 이들의 노래들만은 오랫동안 머물며 사랑을 받았다는 것도 이들의 존재가치를 확실히 웅변하는 대목이다.
노래 : UB40 (유비포티)
영국의 실업수당 신청 카드넘버(Unemployment Benefit) 40의 준말인 유비포티(UB40)는 1980년대와 1990년대 가장 큰 인기를 누렸던 팝 레게 밴드이다. 4명의 흑인과 4명의 백인으로 구성되어 ‘평등한 다민족 공동체’를 모토로 내걸었던 그들은 특히 시그니처 송인 ‘Red Wine’과 엘비스 프레슬리의 고전인 ‘Can’t help falling in love’ 등을 통해 전세계의 팬들의 뇌리에... 영국의 실업수당 신청 카드넘버(Unemployment Benefit) 40의 준말인 유비포티(UB40)는 1980년대와 1990년대 가장 큰 인기를 누렸던 팝 레게 밴드이다. 4명의 흑인과 4명의 백인으로 구성되어 ‘평등한 다민족 공동체’를 모토로 내걸었던 그들은 특히 시그니처 송인 ‘Red Wine’과 엘비스 프레슬리의 고전인 ‘Can’t help falling in love’ 등을 통해 전세계의 팬들의 뇌리에 ‘가장 성공한 메인스트림 레게 그룹’으로 남아있다. 때는 1978년. 유비포티는 당시 끝없는 경제의 추락으로 신음하고 있던 영국에서 밴드 발족의 깃대를 꽂았다. 형제인 로빈 캠벨(Robin Campbell, 리드 기타)과 알리 캠벨(Ali Campbell, 기타, 리드 보컬)의 주도 하에 얼 팔코너(Earl Falconer, 베이스), 미키 버튜(Mickey Virtue, 키보드), 브라이언 트래버(Brian Travers, 색소폰), 짐 브라운(Jim Brown, 드럼), 노만 하산(Norman Hassan, 퍼커션), 테렌체 “아스트로” 윌슨(Terence “Astro” Wilson, 랩) 등으로 구성된 그들은 최초 악기를 잘 다룰 줄 아는 멤버가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 음악적 열정 하나로 뭉치며 앞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알리 캠벨이 바에서 행해졌던 일대일 격투에서 번 돈으로 장비를 구입해 연주하는 등, 고된 하루하루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다마호사(多魔好事)라고, 1980년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갑작스레 급변을 거듭했다. 프리텐더스(The Pretenders)의 공연에 게스트로 참여한 뒤, 콘서트 장에서 그룹을 눈 여겨본 < 그래듀에이트(Graduate) >사와 음반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싱글 ‘Fool For Tonight’이 영국 차트 10위 권에 진입하면서 유비포티는 단 2년 만에 무명의 딱지를 떼어내는 쾌거를 일궈냈다. 같은 해에 발표한 데뷔작 < Signing Off > 역시 대박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레이블 < 데프 인터내셔널(DEF International) >을 설립한 유비포티는 1년 뒤인 1981년 2집 < Present Arms >(영국 2위)을 통해 이후 전개될 차트 맹폭격의 전조를 알렸다. 수록곡 중 대처 시절의 경제상황을 비판한 ‘One in ten’이 팬들과 공감대를 형성, 큰 히트를 기록했다. 1983년은 그룹 역사상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커버송 모음집인 < Labour of Love >이 닐 다이아몬드(Neil Diamond) 원곡의 싱글 ‘Red red wine’의 대활약에 힘입어 영국 차트 정상을 밟았던 것. 동시에 그들은 미국 차트에서도 최초로 얼굴을 들이밀며 그토록 원하던 대서양 횡단에 시작점을 찍었다. 1984년의 < Geffery Morgan >과 1985년의 < Little Baggaridim > 또한 반응이 뜨겁기는 마찬가지였다. 크리시 하인드와 함께 부른 ‘I got you babe’(1위)와 ‘Don’t break my heart’(3위)가 특히 많은 리퀘스트를 이끌어냈으며 이러한 폭풍과도 같은 히트 퍼레이드는 구(舊) 소련 공연의 계기를 마련해준 < Rat in the Kitchen >(1986)과 이후의 < Watchdogs >(1987), < UB40 >(1988)까지, 도무지 사그러들 줄을 몰랐다. 1988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개최된 넬슨 만델라 자유 공연에서 ‘Red red wine’을 멋지게 부르며 관중들의 박수세례를 이끌어낸 유비포티는 이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서벌(西伐)에 나섰다. 곡이 빌보드 싱글 차트 1위까지 치솟은 것을 비롯, 이후 내놓았던 음반인 < Labour of Love 2 >에서 ‘The way you do the things you do’와 ‘Here I am’ 두 곡이 각각 6위와 7위에 랭크되었던 것이다. 1993년에 출시되었던 < Promises And Lies >(미국 6위, 영국 1위) 역시 샤론 스톤 주연의 영화 < 슬리버 >에 삽입되었던 ‘Can’t help falling in love’(1위)의 선전에 힘입어 유비포티의 장기집권체제 유지에 큰 기여를 해주었다. 레게 스페셜리스트로서 당시의 그들에게 대적할 이들은 거의 전무한 듯 보였다. 이후 1997년 < Guns in the Ghetto >를 발표하며 전세계 순회공연을 가졌던 그들은 1999년 닐 다이아몬드의 ‘Holly holy’가 소폭 히트한 < Lobour of Love 3 >를 발표, 레게 음악의 전도사로서 식지 않는 열의를 잘 보여주었다.
작곡자와 음반 제작자로 그리고 가수로 충만한 재기를 과시한 흑인 송라이터 배리 화이트(Barry White)는 소울과 펑크(funk)를 토대로 삼아 그 위에 1970년대 흑인 음악의 가장 중요한 지분을 차지했던 디스코 감수성을 혼합한 ‘소울 디스코’ 스타일의 음악으로 폭발적 인기를 얻었던 팝 역사의 거장이다. 조금은 부담스런 그의 굵고 낮은 톤의 목소리,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만을 고집한 노랫말, 그리고 초기 디스... 작곡자와 음반 제작자로 그리고 가수로 충만한 재기를 과시한 흑인 송라이터 배리 화이트(Barry White)는 소울과 펑크(funk)를 토대로 삼아 그 위에 1970년대 흑인 음악의 가장 중요한 지분을 차지했던 디스코 감수성을 혼합한 ‘소울 디스코’ 스타일의 음악으로 폭발적 인기를 얻었던 팝 역사의 거장이다. 조금은 부담스런 그의 굵고 낮은 톤의 목소리,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만을 고집한 노랫말, 그리고 초기 디스코 음악을 트레이드마크로, 혼란스러웠던 1970년대를 부드럽고 흥겨우며 감상적인 풍의 정반대 해법으로 풀어냈다. 컨트리 싱어 글렌 캠벨(Glen Campbell)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 지역인 텍사스주의 갈베스톤(Galveston)에서 1944년 9월 12일에 태어난 배리 화이트는 10대 때부터 ’디 업프론츠(The Upfronts)’라는 그룹에서 프로 음악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에는 ’더 버서타일스(The Versatiles)’란 그룹에 잠시동안 몸담았으며 그가 밴드를 떠난 후 그룹은 이름을 ’더 피프스 디멘션(The Fifth Dimension)’으로 개명해 엄청난 성공의 신화를 일궈 냈다. 이 거구의 흑인 뮤지션은 애초부터 가수보다는 작곡자나 제작자 같은 음반 실무자가 되길 원해 1960년대에는 다른 가수들을 위해 곡을 만들거나 프로듀싱을 하면서 나름대로 스스로의 표현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바로 그 일환으로 1969년에 ’러브 언리미티드 오케스트라(Love Unlimited Orchestra)’를 창설했고 자신의 음반 제작 프로덕션을 설립하기도 했다. 1970년대 초반이 지나자 배리 화이트는 솔로 가수 활동과 러브 언리미티드 오케스트라의 리더 역할을 병행하면서 7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두 곡의 차트 넘버원 싱글과 10여 곡의 톱40 히트곡들을 쏟아 냈다. 1974년에 배리 화이트가 솔로로서 1위를 정복한 ’Can’t get enough of your love, Baby’는 1992년 백인 여가수 테일러 데인(Taylor Dayne)이 리메이크 해 소울 디스코의 고전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러브 언리미티드 오케스트라의 이름으로 나온 싱글 ’Love’s theme’는 연주 음악으로는 드물게 차트 1위를 밟았다. 시원한 여름의 해변가를 연상시키는 이 트랙은 1980년대 초반 임국희가 진행했던 팝 프로그램의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되어 30대 이상의 국내 팝 팬들에게는 매우 귀에 익은 멜로디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상종가를 치고 있는 스카 펑크 밴드 스매시 마우스(Smash Mouth)의 2001년 새 음반에 수록된 ’Pacific coast party’의 도입부에도 이 연주곡의 첫 부분이 샘플링 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국내에서 꾸준한 애청된 ’You’re the first, the last, my everything(2위)’과 ’Walking in the rain(with the one I love/14위)’를 비롯해 ’I’ll do for you anything, you want to me(40위)’, ’It may be winter outside(but in my heart it’s spring/83위)’, ’I’ve got so much to give(32위)’, ’Baby we better try to get it(92위)’, ’What am I gonna do with you(9위)’, ’Let the music play(32위)’, ’I’m gonna love you just little more baby(3위)’, ’It’s ecstasy when you lay down next to me(4위)’, ’Your sweetness is my weakness(60위)’, ’I belong to you(31위)’, 그리고 1997년 영국의 백인 R&B 여가수 리사 스탠스필드(Lisa Stansfield)가 커버해 신세대들에게도 알려진 ’Never never gonna give up(7위)’ 같은 노래들이 빌보드 차트를 무차별 융단 폭격했다. 비록 싱글 히트곡은 아니었지만 1984년 영화 < 고스트버스터스 >의 주제곡을 불러 유명한 기타리스트 레이 파커 주니어(Ray Parker Jr.)와 공동으로 작곡한 ’You see the trouble with me’와 ’What am I gonna with you’, ’Baby we better try to get it’, ’Let the music play’, ’Don’t make me wait too long’ 등은 1970년대 후반을 달구었던 디스코의 전형을 이미 1970년대 초 중반에 제시했던 곡들이다. 그러나 배리 화이트의 음악을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비트 위주의 댄스뮤직으로 단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의 음악적인 뿌리는 커티스 메이필드(Curtis Mayfield)나 아이작 헤이스(Isaac Hayes)처럼 흑인들의 자긍심을 외치는 진한 소울과 펑크(funk)였다. 그는 흑인을 위해 곡을 썼고, 흑인 형제자매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부드러운 음악연대’를 추구했다. 디스코가 무대 저편으로 사라진 1980년대 이후에도 음반제작을 지속했지만 전성기만큼의 성과를 재현하지는 못했다. 1989년에는 흑인음악의 대부 퀸시 존스(Quincy Jones)가 구상한 회심의 음반 < Back On The Block >에 참여, ’Secret garden’을 불러 다시 한번 그 전염성 강한 저음 보컬을 들려주었다. 1993년 댄스 그룹 ’쿼드 시티 디제이스(Quad City DJ’s)’의 유일한 히트곡 ’C’mon N’ Ride(2위)’를 공동으로 작곡해 여전한 작곡능력을 과시했고 1990년대 중반에는 본인도 성공적으로 재기했다. 흑인음악의 힙합진영 아티스트들이 그들의 음악적 자양분이라 할 펑크와 소울을 빛낸 인물 가운데 배리 화이트를 빼놓을 수 없다고 판단, 갑작스레 재조명의 분위기가 조성된 때문이었다. 1999년에 발표한 앨범 < Staying Power >는 평단의 갈채와 대중의 호응을 동시에 받으면서 제42회 그래미상에서 최우수 흑인 남성 보컬 부문과 정통 리듬 앤 블루스 보컬 부문을 수상했다. 뿐만 아니라 1970년대 발표한 그의 명곡들은 < 파리의 늑대 인간 >이나 < 머니 턱스 > 같은 영화에 자주 삽입되면서 신세대들에게도 그의 음악은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미 본토에서의 이러한 호평과는 달리 국내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미약한 편이다. 가장 큰 이유는 전성기인 1970년대 당시 백인음악보다 흑인음악을 푸대접하는(먹통음악!)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했고, 음악적으로는 곡 길이가 6분 이상의 긴 노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깨끗하고 맑은 느낌의 팝 컨트리나 성인 취향의 팝 보컬이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1970년대에 그의 낮고 굵은 목소리는 아무래도 생경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흑인음악에 정서적 유착이 강한 신세대들의 귀에는 덜 이질적인 탓에 근래 들어선 재래의 홀대도 차츰 가시고있다. 얼마 전 화장품 광고에 그의 히트곡 ’Never never gonna give you up’이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것이 그 증좌일 것이다. 배리 화이트는 자신의 이름과는 달리 백인의 구미에 맞는 음악을 쫓지 않고 지금까지 인종적 뿌리를 지켜 왔다. 21세기인 현재까지 새로운 앨범을 발표하면서 흑인음악에 대한 꺼지지 않는 열정을 표현하고있다.
노래 : Ashford & Simpson (애쉬포드 앤 심슨,Nickolas Ashford & Valerie Simpson)
백인을 뜻하는 푸른 눈(블루 아이)과 흑인 음악을 대표하는 소울이란 단어가 합해져 생성된 신조어 블루 아이드 소울(Blue eyed soul)은 말 그대로 백인이 흑인의 창법으로 노래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1944년 생인 조 카커(Joe Cocker)는 블루 아이드 소울 싱어 중에서도 그 출중한 실력을 인정받는 영국 셰필드 출신의 가수이다. 그가 발효시킨 영혼의 울림은 이 분야의 원조 격인 남성 듀엣 라이처스 ... 백인을 뜻하는 푸른 눈(블루 아이)과 흑인 음악을 대표하는 소울이란 단어가 합해져 생성된 신조어 블루 아이드 소울(Blue eyed soul)은 말 그대로 백인이 흑인의 창법으로 노래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1944년 생인 조 카커(Joe Cocker)는 블루 아이드 소울 싱어 중에서도 그 출중한 실력을 인정받는 영국 셰필드 출신의 가수이다. 그가 발효시킨 영혼의 울림은 이 분야의 원조 격인 남성 듀엣 라이처스 브라더스(Righteous Brothers)와 대등한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이후에 등장하는 홀 & 오츠(Hall & Oates), 폴 영(Paul Young), 로버트 파머(Robert Palmer), 폴 캐릭(Paul Carrack) 심플리 레드(Simply Red), 조지 마이클(George Michael), 마이클 볼튼(Michael Bolton)과 같은 푸른 눈의 백인 소울 싱어들에게 하나의 전형을 제시했다. 1960년대 후반에 등장한 조 카커는 1969년에 열린 전설적인 콘서트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초청되어 자신의 능력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방송되었던 외화 시리즈 < 케빈은 12살 >의 주제가로 쓰였던 비틀스의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s(68위)’를 오징어 구워지듯 온 몸을 비비꼬는 무대 매너로 열창해 수많은 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이 신인 소울 싱어와 ‘Soul sacrifice’를 연주한 역시 신인 산타나(Santana)는 이 페스티발에서의 멋진 공연으로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조 카커는 1969년부터 1970년까지 만 3년 동안 3장의 정규 음반을 발표했다. 자신이 작사, 작곡한 것 외에도 다른 가수의 노래들을 많이 커버했다. 데이브 메이슨(Dave Mason)의 ‘Feelin’ alright(69위)’, 밥 딜런(Bob Dylan)의 ‘Just like a woman’과 ‘Dear Landlord’,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의 ‘Bird on a wire’,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She came in through the bathroom window(30위)’, 포크 록 그룹 러빙 스푼풀(Lovin’ Spoonful)의 ‘Darling be home soon’, 박스 탑스(Box Tops)의 ‘Letter(7위)’ 등의 트랙들을 재해석해 여러 장르의 음악들을 멋진 소울 음악으로 통일시켰고 록 감각의 ‘High time we went(22위)’로 당시 백인 소울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했다. 음주 문제 때문에 197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그의 음악 활동은 순탄하지 못했다. 이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도록 그의 양 날개를 받쳐 준 사람은 비틀스와 각별한 사이였던 흑인 건반 연주자 겸 싱어 송라이터 빌리 프레스톤(Billy Preston)이었으며 그 결과물이 그의 대표작이 된 1975년의 ‘You are so beautiful(5위)’이었다. 임재범도 리메이크해 국내 신세대 가요팬들에게도 알려진 이 발라드로 조 카커는 다시 한번 화려한 비상을 했고, 1982년에는 영화 < 사관과 신사 >의 주제가 ‘Up where we belong’을 제니퍼 원스(Jennifer Warnes)와 듀엣으로 불러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은 물론,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수상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1990년대 초반 국내의 나이트 클럽에서 자주 들을 수 있었던 신나는 소울 곡 ‘Unchain my heart’는 1987년에 발표한 음반의 타이틀곡으로 ‘Up where we belong’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노래이다. 하지만 이 곡은 본고장에서 싱글로 발표되지 않은 숨은 보석이었다. 이 블루 아이드 싱어의 마지막 히트 곡은 1989년 말에 발표한 ‘When the night comes’로 싱글 차트 20위 권 진입에 성공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히트 차트에서 멀어져갔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일군 조 카커의 성공은 당시 제대로 조명 받기 시작한 흑인음악을 백인이 잘 소화한다는 희소성에 초점이 맞추어 졌고, 그를 비롯한 스티브 윈우드(Steve Winwood), 밴 모리슨(Van Morrison), 라이처스 브라더스 같은 선지자들이 뿌리내린 토양 위에서 후배들은 흑과 백의 자연스런 크로스 오버를 시도해 대대적인 성공을 일궈내고 있다. 공식적으로 데뷔한지 30년이 넘었지만 뉴 밀레니엄을 맞아 신보 < No Ordinary World >을 공개하면서 차트 경쟁과는 무관하게 음악에 대한 열정을 과시했다. 그를 통해 우리는 무엇보다 가수는 ‘독창적 음색’이 생명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의 음악이 꾸준히 매니아들을 창출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청아한 음색과 미인은 아니지만 이지적이고 고결한 모습으로 다른 가수들과는 확실한 차별성을 둔 제니퍼 원스(Jennifer Warnes)는 영화 < 사관과 신사 >와 < 더티 댄싱 >의 주제곡 'Up where we belong'과 '(I've had) The time of my life'로 1980년대에 알려졌지만 음악을 꼼꼼히 찾아 듣는 사람들에겐 그 이전인 1977년에 전미 차트 6위를 차지한 'Rig... 청아한 음색과 미인은 아니지만 이지적이고 고결한 모습으로 다른 가수들과는 확실한 차별성을 둔 제니퍼 원스(Jennifer Warnes)는 영화 < 사관과 신사 >와 < 더티 댄싱 >의 주제곡 'Up where we belong'과 '(I've had) The time of my life'로 1980년대에 알려졌지만 음악을 꼼꼼히 찾아 듣는 사람들에겐 그 이전인 1977년에 전미 차트 6위를 차지한 'Right time of the night'로 이미 익숙해진 여가수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두 곡 외에도 1987년에 공개한 'Famous Blue Raincoat'로 다운타운을 점령하며 국내 팬들과의 착상에 다시 한번 성공하기도 했다. 1947년 3월 3일, 시애틀에서 태어난 제니퍼 원스는 갓 20살이던 1967년에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하면서 인지도를 쌓기 시작해 이듬해에 뮤지컬 < 헤어 >에 주연 급으로 출연하면서 가수로서의 워밍업을 시작했다. 뮤지컬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정치, 사회적으로 어수선하던 1968년에 차분한 포크 성향의 데뷔앨범 < I Can Remember Everything >으로 가멸찬 스타트를 했지만 블루스 리바이벌과 사이키델릭이 대세이던 당시의 음악 시장에 삼투하지 못했다. 1969년에는 더 후(The Who)의 노래 제목에서 힌트를 얻은 듯한 앨범 < See Me, Feel Me, Touch Me, Heal Me >로 기백 있는 두 번째 도전을 시도했지만 이 역시 철저히 가려졌다. 좌절한 제니퍼 원스는 3년 동안 신작을 발표하지 않은 채 자신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고민한 후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의 멤버였던 존 케일(John Cale)이 프로듀서로 참여한 3집 < Jennifer >를 발표했지만 이 역시 성공하지 못하자 개인적인 좌절을 마음에 안고 캐나다 출신의 거물 싱어 송라이터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의 백 보컬리스트가 되었다. 하지만 제니퍼 원스는 레너드 코헨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공감하고, 느끼게 된다. 결국 레너드 코헨은 제니퍼 원스의 '멘토'와 같은 존재가 되었고 제니퍼는 레너드 코헨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1987년에 그의 노래들로만 채워진 명반 < Famous Blue Raincoat >를 내놓아 흠모의 정을 표했다. 이 앨범은 미국에서는 72위까지 밖에 오르지 못했지만 국내에서 이 타이틀곡만큼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확실히 장악했고 지금도 비 오는 날이면 신청이 끊이지 않는 그의 시그니처 송이 되었다. 제니퍼 원스가 세인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1977년에 자신의 이름을 타이틀로 내세운 4집에서 컨트리 풍의 'Right time of the night'이 빌보드 싱글 차트 6위에 오르면서부터. 후속 곡 으로 낙점된 발라드 'I'm dreaming'이 50위에 랭크되는 성적을 거둔 그는 1979년에 다섯 번째 음반 < Shot Through The Heart >을 발표해 컨트리 팝 스타일의 'I know a heartache when I see one'이 19위를 차지하며 '원히트원더 가수'라는 꼬리표를 뗐다. 그로부터 8년 동안 제니퍼 원스는 정규앨범 제작에 착수하지 않았지만 그 사이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고 바쁜 시간을 보내는 아이러니를 맞이했다. 제니퍼 원스는 1982년에 리차드 기어와 데보라 윙어가 주연한 영화 < 사관과 신산 >의 주제곡 'Up where we belong'을 허스키 보이스로 유명한 블루 아이드 소울 가수 조 카커(Joe Cocker)와 듀엣으로 불러 그해 가장 큰 히트 곡이 되었다. 이 곡은 3주 동안 싱글 차트 정상을 지켰으며 그래미 최우수 듀엣 부문과 아카데미에서 주제가 부문도 수상하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이제 제니퍼 원스는 더 이상 '레너드 코헨'의 백 보컬리스트가 아니라 당대를 대표하는 여가수로 그 위치가 격상됐다. 하지만 이 노래의 스매시 히트는 그를 옭아맸다. 1983년에는 당시 신인이었던 탐 크루즈가 주연한 미식축구 영화 < All The Rights Moves/뜨거운 가슴으로 내일을 >의 동명 주제곡을 크리스 톰슨(Chris Thompson)과 함께 부르며 'Up where we belong'의 성공 공식을 그대로 따랐으나 영화와 주제곡 모두 참패하자 제니퍼 원스는 다시 자신 속으로 움츠려 들었다. 4년 후인 1987년, 이 지적인 여가수는 다시 남성 가수와 함께 영화 주제곡을 취입했다. 바로 'Unchained melody'로 유명한 라이처스 브라더스(Righteous Brothers)의 멤버였던 빌 메들리(Bill Medley)와 함께 그 유명한 댄스 무비 < 더티 댄싱 >의 주제가 '(I've had) The time of my life'를 부른 것. 이 곡으로 제니퍼 원스는 'Up where we belong'으로 달성한 그랜드슬램(싱글차트 1위, 그래미 수상, 아카데미 주제가 부문 수상)을 재현하며 다시 한번 영화 주제가 여왕으로서의 명성을 이어갔다. 1992년에 발표한 일곱 번째 앨범 < The Hunter >와 2001년에 공개한 8집 < The Well >은 빌보드 앨범차트 200위에 랭크되지도 못한 채 대중들과의 접점 찾기에 실패했지만 < The Well >에 수록된 빌리 조엘(Billy Joel)의 원곡을 재해석한 'And so it goes'는 국내에서 은은한 사랑을 받았다.
노래 : Linda Ronstadt (린다 론스태드)
팝계는 흥분과 격동의 60년대를 마감하고 70년대를 맞이하면서 린다 론스태드라는 뛰어난 여가수의 출현을 알린다. 70년대 초반 팝 음악은 불과 몇 해 전의 파워풀한 분위기와는 크게 다른 ‘차분한’ 기조가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는데 린다 론스태드는 이러한 소프트록과 ‘70년대식’포크의 상징이었다. 그의 인기는 70년대 중반부터 폭발해 이후부터 여가수 가운데 최고, 남자가수를 합쳐도 톱클래스라는 명성을 쌓아올렸다. 그... 팝계는 흥분과 격동의 60년대를 마감하고 70년대를 맞이하면서 린다 론스태드라는 뛰어난 여가수의 출현을 알린다. 70년대 초반 팝 음악은 불과 몇 해 전의 파워풀한 분위기와는 크게 다른 ‘차분한’ 기조가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는데 린다 론스태드는 이러한 소프트록과 ‘70년대식’포크의 상징이었다. 그의 인기는 70년대 중반부터 폭발해 이후부터 여가수 가운데 최고, 남자가수를 합쳐도 톱클래스라는 명성을 쌓아올렸다. 그리고 슈퍼스타의 지위는 지금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린다의 이름은 70, 80년대를 걸쳐 인지도가 가히 최고급으로 불멸의 애청곡 ‘아주 오랫동안(Long, Long Time)’ 하나만으로 기억하기 충분하고 ‘사랑에 빠지긴 너무 쉬워(It’s So Easy)’. ‘당신은 나빠요(You’re No Good)’등도 널리 알려진 노래들이다. 이십대 팝 팬들은 90년대를 강타한 수작 ‘많이는 몰라요(Don’t Know Much)’로 린다의 존재를 숙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린다에게서 우선 발견되는 유별난 특성은 가히 놀라울 정도의 생명력이다. 1967년에 팝계에 첫발을 내디뎠으니 활동 경력이 어느덧 사반세기를 넘겼다. 이처럼 롱런하는 동안 눈에 띄는 슬럼프를 경험함이 없이 팬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인기만 유지한 것이 아니라 여가수 중 드물게 가창력은 물론 앨범으로서 음악성을 인정받아 ‘실력을 갖춘 여가수’라는 희소가치를 누리고 있기도 하다. 말이 사반세기이지 그 기간 동안 팝 음악의 유행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으랴. 너무나도 쉽게 변해버리는 팝음악의 조류를 쫓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린다는 이것을 거뜬히 해냈으며 바로 이 점이 그를 무수한 팝가수 가운데 우뚝 서게 해준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영원한 인기를 보장해준 밑거름은 출생부터 딸려나온, 거의 천재적인 ‘유행의 포착능력’이었다. 그는 유행을 미리 내다볼 줄 알았다. 록 음악의 시대에는 남자 못지않게 록을 소화했고 유행이 컨츄리 음악 쪽이겠다 싶으면 지체없이 컨츄리를 노래했으며, 펑크가 거세질 때는 펑크를 음반에 담았다. 옛날 고리짝 시절의 스탠다드 팝을 선보여 80년대 초반의 분위기를 맞추어 나갔고 멕시코 가요 음반을 내놓기도 했고 블루스를 시도하기도 했다. 조금 과장하자면 미국의 팝 음악이 역사에 걸쳐 생성시킨 그 무수한 장르 가운데 린다의 손을 거치지 않은 장르는 없다! 90년대 그는 AP통신의 앤 피터슨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난 노래 스타일이 어찌됐든 단지 노래를 계속 해야 한다”며 “현재의 캐리어에 그냥 머물러 앉는 것은 양에 차지 않는다”고 밝혔다. 장르에 구애됨이 없이 능력이 닿는다면, 시대가 그 스타일을 원한다면 기꺼이 그것을 시도하겠다는 얘기다. 장하다고 칭찬해 줄 만한 바로 이 점이 정반대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그가 데뷔이래 지금까지 내놓은 음반을 쭉 분석하면 그것은 영락없는 ‘카멜레온’의 음악행각이다. 하나의 고정 장르를 오랜 기간 고집스럽게 밀고나간 족적이 없다. 변덕스럽기 작이 없다. 스타일에 상관하지 않겠다는 철저한 프로의식을 다른 시점에서 보면 그 만큼 대중의 감각에 철저히 ‘영합’했다는 의미를 안고 있다. 유행의 흐름을 파도라 한다면 그는 실로 ‘파도타기의 명수’였다. 60년대말 록의 ‘저항’물결이 쇠락하면서 70년대가 소프트 록의 시대가 될 것을 간파한 그는 즉각 ‘보수적 신념’을 내비쳤다. 에벌리 브라더즈 또는 버디 할리의 컨츄리풍 록넘버를 리메이크해 ‘복고’의 기치를 드높였고, 60년대 록 스타들이 미국정부에 대해 도전한 것과 같은 공격성에 넌더리를 치며 “이 나라에 실질적인 애국심의 부활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70년대 초 린다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위한 선거 캠페인을 끝낸 뒤 이렇게 말했다. “난 사실 그때 뭘 말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지 누구든 알겠는가. 만약 누군가 그것을 결정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면 기업 ‘스탠다드 오일’은 대통령이 안될 게 뭐 있는가. 기업이 사실 득실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스탠다드 오일에 만약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게 될 것이다. 다국적 대기업이 국가를 통치해야 된다는 얘기가 아니냐고 당신들은 말하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그 기업을 필요로 하고 그 기업 서비스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 기업으로부터 직장을 얻고 있다. 그 기업이 이 나라와 나머지 전세계 국가의 경제상황에 무엇이 유리한가를 결정하는, 더 바람직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미국의 체제에 회의를 품지 말고 나라사랑의 마음으로 미국체제의 근간인 경제적 과두제, 대기업에 의한 경제운용, 그리고 기업이익 추구를 적극 지지해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다. 이 시점부터 린다는 ‘미국 예찬론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회 비판을 하나의 기조로 하는 록 뮤직에 투신했음에도 불구하고 60년대 스타들과는 달리 의미있는 노랫말과는 결별했다. < 뉴스위크 >지는 77년 2월 그를 커버스토리로 다루면서 “린다는 상승추세의 록 무대 활동기간 중 록성좌들의 ‘붉은 거성’과 ‘블랙 홀’을 피했다”며 그를 운좋고 조심할 줄 아는 인물로 묘사했다. 저항적 색채 또는 정치색에 물들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보수성은 간혹 이중적 자세를 엿보이게 했다. 린다는 70년대말 미국 뉴욕과 영국 런던에 사회저항적인 펑크 록의 움직임이 확산될 무렵 보수적 색깔을 드러내 “펑크는 변비가 심해 ‘치질’의 록이라 불러야 한다”며 욕설조로 펑크의 가치를 부정했다. 그런데 펑크의 기세가 거대한 물결을 야기시키며 팝과 록의 여러 장르에 영향을 미치게 되자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듯 펑크의 이미지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78년 펑크의 거목 엘비스 코스텔로의 노래 ‘앨리슨(Alison)’을 부른 것을 필두로 80년도 음반 < 광기의 사랑(Mad Love) >에는 펑크적 분위기를 적극 살려 스파이크 헤어스타일을 한 린다가 자켓에 등장했으며 코스텔로의 노래를 ‘파티여자(Party Girl)’, ‘여자들의 말(Girl’s Talk)’ 등 두 곡이나 수록했다. 물론 이 시절에도 처크 베리, 엘비스 프레슬리, 스모키 로빈슨 등 옛곡을 재해석하는 ‘복고적 성향’을 잊지는 않았다. 외적으로는 최신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내용적으로는 ‘구식’을 고수하는 이 자세야말로 린다의 전형적인 대중접근 수법이자 그의 진정한 색깔이기도 하다(70년대 린다의 히트곡 대다수가 옛노래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라는 점은 특기할 사항이다). 80년대 들어서도 린다는 시대적 특성을 정확히 읽었다. 때는 바야흐로 레이건의 보수 시대였다. 그는 지금껏 줄기차게 구사해왔던 록 뮤직을 걷어치워버리고 83년 스탠다드 넘버로 채색한 음반 < 무엇이 새로운가(What’s New) >를 발표했다. 스탠다드 넘버란 40년대 이전까지 유행한 상류계층의 노래로 향수어린 이지 리스닝을 연상하면 되는데, 린다의 음반 가운데에선 가장 보수적인 색채라 할 만한 것이었다. 넬슨 리들 오케스트라와 협연해 제작한 이 앨범은 < 타임 >지 선정 그 해 팝음반 베스트 10의 하나였다. 이 작품이 예상외로 호평을 받자 린다는 84년 다시 한번 넬슨 리들과 손잡고 < 돌진하는 삶(Rush Life) >을 내놓았고, 이후 87년에는 멕시코 전통가요로 꾸민 < 아버지의 노래(Canciones de Mi Padre) >를, 88년에는 컨츄리 스타인 돌리 파튼, 에밀루 해리스와 노래한 < 트리오(Trio) >를 각각 출반했다. 이런 유형의 작품들은 대중으로부터 커다란 호응을 끌어내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할 때 린다의 시도는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 성질의 것이었다. 여하튼 그는 레이건 통치 8년간 단 한 번도 록 뮤직 또는 파워풀한 음악과 재회함 없이 부드러운 노래로 일관했다. 린다의 보수성은 가정환경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1964년 미국 애리조나주 턱슨에서 태어난 그의 가정은 매우 부유한 편이었다. 린다에게는 어렸을 적에 벌써 조랑말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과학 방면에서 뛰어난 지식을 소유한 인텔리였고, 아버지는 턱슨에서 대규모 하드웨어사업을 경영했다. ‘자본과 기술’이 제휴된 부르조아 부모 덕분에 린다는 전혀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고 풍족하게 살았다. 대다수 록스타가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난 노동계급 출신이라는 사실과 큰 대조를 이루는 부분이다. 그러나 린다의 소녀시절과 사춘기는 여느 록스타들처럼 도발적 끼가 넘쳐흘렀다. 여고시절에 그가 펼친 상상 가운데 하나는 ‘목사를 유혹하는 것’이었고, 아리조나 주립대학에서 한 학기를 수료한 뒤 대부분의 여학생들이 결혼하거나 수녀가 되는 두 가지 길을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 그는 전국을 다니며 공연을 하겠다는 제 3의 길을 택할 만큼 대담했다. 그는 스스로 그 시절의 자기를 ‘사악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학을 중퇴하고 남성 지배의 록 세계로 뛰어든 것 자체가 용기였고 공연을 다니면서 남자의 세계에 깊이 동화될 정도로 순종적 자세를 거부했다(“난 공연을 다니면서 남성적 태도를 배웠다. 록큰롤의 실질적 자세를 말이다. 공연을 마치고 돌아올 때 내 말버릇은 마치 트럭 운전사와 같았다”). 그는 나이 50세가 되어가는 지금도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 그간 제이 디 사우더, 돈 헨리, 믹 재거, 그리고 캘리포니아 시장 제리 브라운과 열애하거나 동거하기도 했지만 관계를 오래 끌지 않았다. 77년에는 ‘난 결혼하지 않으리(I Never Will Marry)’라는 곡을 내놓아 독신을 공식선언한 바도 있다. 부잣집 딸이, 게다가 용모까지 아름다운 여자가 사서 고생하고 결혼이라는 제도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린다가 반항적 기질의 소유자임을 말해준다. 하지만 성년기의 린다는 상층사회의 흐름에 거역치 않는 타협적, 보수적 자세로 일관해오고 있으니 아이러니컬하기만 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난 무질서로부터 질서를 창조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낀다. 음악에 임하는 태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무질서로부터 질서의 확립이야말로 내가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예술을 창조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린다가 노래하는 것은 다름아닌 질서와 안정이다. 그는 무질서를 원치 않는다. 우리가 그에게 현실과 사회에 대한 도전적 자세를 기대하기 힘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The Righteous Brothers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The Righteous Brothers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노래 : Sister Sledge (시스터 슬레지)
멤버 : 킴 슬레지(Kim Sledge), 데비 슬레지(Debbie Sledge), 조니 슬레지(Joni Sledge), 캐시 슬레지(Kathy Sledge) 멤버 : 킴 슬레지(Kim Sledge), 데비 슬레지(Debbie Sledge), 조니 슬레지(Joni Sledge), 캐시 슬레지(Kathy Sledge)
노래 : Vanessa Williams (바네사 윌리암스)
미스아메리카 출신으로 팝 음악계에 나름의 강렬한 무늬를 새긴 여가수다. 동시에 그 뛰어난 미모 때문에 뮤지션으로서의 가치가 평가절하 되어온 인물이기도 하다. 1963년 3월 뉴욕에서 태어난 바네사 윌리엄스(Vanessa Lynn Williams)는 부모가 모두 음악학위를 가진 ‘뮤직 패밀리’ 출신으로 유년기부터 피아노, 바이올린, 플루트, 프렌치 혼 등 다양한 악기를 다루었으며, 목소리 또한 빼어났다. 1981년... 미스아메리카 출신으로 팝 음악계에 나름의 강렬한 무늬를 새긴 여가수다. 동시에 그 뛰어난 미모 때문에 뮤지션으로서의 가치가 평가절하 되어온 인물이기도 하다. 1963년 3월 뉴욕에서 태어난 바네사 윌리엄스(Vanessa Lynn Williams)는 부모가 모두 음악학위를 가진 ‘뮤직 패밀리’ 출신으로 유년기부터 피아노, 바이올린, 플루트, 프렌치 혼 등 다양한 악기를 다루었으며, 목소리 또한 빼어났다. 1981년 시라쿠스(Syracuse) 대학 연극예술학과에 진학하여 뮤지컬 배우로서의 꿈을 구체화시켜 나가지만 외모 덕분(?)에 샛길로 빠지게 된다. 완벽한 얼굴과 몸매를 자랑하던 그녀는 대학 시절부터 캠퍼스 퀸으로 손꼽혔고, 결국 ‘미스 뉴욕’을 거쳐 역사상 최초의 흑인 ‘미스 아메리카’에 오르는 영광을 맞이한다. 그러나 미인대회에 참가한 것이 원인이 되어 뮤지컬 배우로서의 꿈마저 접어야 할 위기에 처한다. 미국의 인종주의 언론은 달갑지 않은 시선을 보냈고 그녀가 성인잡지 < 펜트하우스 >에서 찍었던 누드사진으로 바네사는 마침내 1984년 미스아메리카 왕관을 박탈당하고 만다. 절망은 그러나 곧 전화위복의 기회로 다가온다. 다시 노래에 열정을 쏟아 펑키의 대부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의 백업 보컬로 참여, ‘Hey good looking’, ‘Do fries go with that shake?’와 같은 곡에서 가능성을 타진했다. 곡 자체는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바네사의 매력에 관심을 가진 윙 레코드(Wing Record)는 그녀에게 본격적인 가수로서의 길을 열어주게 된다. 1988년 ‘미스아메리카’ 축출 사건을 겪은 지 4년 만에 드디어 데뷔 앨범인 < Right Stuff >을 발표한다. ‘어번 R&B’ 장르를 선보인 그녀는 이 앨범 하나로 4년 전 불명예를 대중의 기억 속에서 말끔히 씻어낸다. 첫 싱글인 ‘Dreaming’이 차트 정상을 밟았으며 ‘He’s got the look’, ‘Darling I’가 내리 인기를 얻었고, 연이은 인기행진으로 그 해 최우수신인 부문을 포함한 그래미상 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광명을 맛본다. 덩달아 미국흑인지위향상협회(NAACP/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에서 이미지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1년 작 < The Comfort Zone >도 데뷔 앨범의 성공을 확대 재현했다. 수록곡인 발라드 곡 ‘Save the best for last’는 5주간 빌보드 1위를 차지하는 대박을 터뜨렸고, ‘Running back to you’ 등이 인기를 누리며 앨범 역시 더블 플래티넘(200만장)의 성공을 거둔다. 당시 앨범 차트 정상을 차지했던 < 비벌리힐스의 아이들 >(Beverly Hills, 90210) 사운드트랙 역시 그녀의 성공 화염에 기름을 붓는다. 여기선 브라이언 맥나이트와 호흡을 고른 ‘Love is’가 차트 5위에 오르며 당시 인기가 절정에 올랐음을 알렸다. 전작에서 펑크, 재즈, R&B 등 다양한 장르를 소화해내기 시작한 그녀는 세 번째 앨범 < The Sweetest Days >에서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있는 음악적 욕구를 다시 한 번 실현시키며 비주얼 가수가 아니라는 인상을 확실히 심어준다. 동명 타이틀 곡 ’The sweetest days’, 스팅(Sting)의 재즈 넘버를 리메이크한 ‘Sister moon’등이 인기를 얻었다. 특히 후자는 곡의 주인 스팅이 직접 백 보컬과 베이스 연주를 맡아 화제가 되었다. 스타의 자리를 굳힌 그녀는 어린 시절 꿈꾸어 왔던 연기 활동에도 손을 뻗치기 시작하고, 결국 1994년 브로드웨이에 입성해 < Kiss Of The Spiderwoman >를 통해 연기자로 데뷔한다. 이후 < Motown Returns To The Apollo >, < The Boy Who Loved Christmas And Stompin’ At The Savoy >, < Another You >, < Harley Davidson And The Marlboro Man >등 다수의 영화와 TV 드라마에 주연했으며, R&B TV쇼 < The Soul Of VH-1 >의 진행을 맡기도 하였다. 1995년 디즈니 만화영화 < 포카혼타스(Pocahontas) >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하여 주제곡인 ’The color of the wind’를 히트시키고 캐롤 앨범, 1997년작 < The Next >까지 가수로서의 끈을 놓지는 않았지만 전성기의 드라이브는 끊겼고 1990년대 후반에는 음악보다는 영화에 치중했다. 이 무렵 아놀드 슈왈츠네거와 함께 한 영화 < 이레이저 >(Eraser)를 통해 영화배우로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TV 미니시리즈인 < Odyssey >에 출연하여 인기를 누렸고, 영화 < Dance With Me >에서는 화려한 라틴 댄스까지 선보이며 연기자로서 기반도 확실히 구축했다. 1998년에는 10년 음악생활을 정리하는 베스트 < Greatest Hits-The First Ten Years >를 발표했다.
디스코의 여왕(Queen of Disco). 1948년 12월 31일 보스턴에서 출생. 본명은 아드리안 도나 게인스이며 독일에서 거주하던 1975년에 레코딩한 ‘Love to love you baby’가 에로틱한 신음소리와 함께 성적 분위기의 극치를 전하면서 빅 히트한 이후 전성기를 맞았다. 듣기만 해도 침이 마르는 ‘섹시 디스코’가 주특기. 초기 디스코의 배후인물은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활동한 프로듀서 ... 디스코의 여왕(Queen of Disco). 1948년 12월 31일 보스턴에서 출생. 본명은 아드리안 도나 게인스이며 독일에서 거주하던 1975년에 레코딩한 ‘Love to love you baby’가 에로틱한 신음소리와 함께 성적 분위기의 극치를 전하면서 빅 히트한 이후 전성기를 맞았다. 듣기만 해도 침이 마르는 ‘섹시 디스코’가 주특기. 초기 디스코의 배후인물은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활동한 프로듀서 조르지오 모로더(Georgio Moroder). 그가 뮌헨 스튜디오에서 신시사이저로 주조해낸 유로디스코는 미국을 압도했다 ‘I feel love’와 ‘Heaven knows’도 그의 작품. 때문에 도나 서머는 유럽과 미국 댄스음악 결합의 통로라는 평을 받았다. 인기절정은 ‘Hot stuff’와 ‘Bad girls’를 연속 1위에 올려놨던 1979년 여름. 1980년에 동료 뮤지션인 브루스 수다노와 결혼했다.
노래 : Katy Perry (케이티 페리)
캐서린 엘리자베스 허드슨(Katheryn Elizabeth Hudson)은 캘리포니아 산타 바바라에서 1984년 10월 25일에 태어났다. 독실한 크리스찬 집안에서 가스펠만 듣고 자랐는데 산타 바바라 레크리에이션 센타에서 여러가지 춤을 배우면서 성장했다. 그러는 와중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음악에 전념하기로 결심한다. 작곡법과 기타연주를 배우면서 2001년도에는 케이티 허드슨(Katy Hudson)이라는 이름으로 가... 캐서린 엘리자베스 허드슨(Katheryn Elizabeth Hudson)은 캘리포니아 산타 바바라에서 1984년 10월 25일에 태어났다. 독실한 크리스찬 집안에서 가스펠만 듣고 자랐는데 산타 바바라 레크리에이션 센타에서 여러가지 춤을 배우면서 성장했다. 그러는 와중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음악에 전념하기로 결심한다. 작곡법과 기타연주를 배우면서 2001년도에는 케이티 허드슨(Katy Hudson)이라는 이름으로 가스펠 록 앨범을 하나 발매하기도 했는데, 안됐지만 세일즈는 크게 성공적이지 못했고 심지어 레이블까지 문을 닫게 된다. 이후 비슷한 이름의 영화배우도 있고 해서, 어머니의 결혼 전 패밀리 네임인 '페리(Perry)'를 자신의 이름에 붙이고 우리가 알고있는 케이티 페리(Katy Perry)가 된다.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부터 앨라니스 모리셋(Alanis Morissette) 등의 각종 히트곡을 만들어왔던 글렌 발라드(Glen Ballad)와 함께 아일랜드(Island) 레이블에서 앨범을 발매할 것을 목표로 작업을 진행했고 몇몇 곡들이 자신의 마이 스페이스 페이지에 업로드 되기도 했지만 결국 계약이 성사되지는 못한 채 함께 작업했던 곡은 영화의 사운드트랙에 수록되는 데에 그쳤다. 그 후에는 콜럼비아(Columbia) 레코드와 싸인한다. 콜럼비아는 최고의 프로덕션 팀인 매트릭스(The Matrix)의 프로젝트에 여성 보컬 중 하나로 그녀를 붙여 그들의 주특기인 여성 보컬의 모던록 트랙들을 만들어낼 계획이었다. 여러 잡지에서는 이미 그녀를 '넥스트 빅 씽'으로 꼽기도 했다. 하지만 앨범이 진행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케이티 페리 스스로가 혼자 곡들을 만들어갔는데 80퍼센트 정도 완성됐을 무렵 불현듯 콜럼비아가 그녀의 앨범을 내지 않기로 결정해버린다.

좀 다사다난한데, 홀로 레이블을 찾는 와중 또 다른 CCM 메탈 팀인 P.O.D.의 싱글에 참여하기도 하고, 여러 뮤직비디오에도 까메오로 출연하기도 한다. 결국은 버진(Virgin) 레코드 CEO의 눈에 띄면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 레이블 캐피탈(Capitol)과 사인하게 된다.

CCM 시절과는 180도로 다른 [Ur So Gay]를 맛배기로 대중들 앞에 다가선다. 2008년도에 스매쉬 히트를 기록한, 그리고 빌보드 차트 1천번째 넘버원 트랙으로 기록되기도 했던 역사적인(?) 싱글 [I Kissed a Girl]이 7주 연속 1위를 거두며 화려한 등장을 알린다. 사실 이건 무슨 어느날 백화점엘 갔는데 몇 만번째 고객이라서 상품을 받는 경우와 비슷한 것 같다. 아무튼 싱글의 성공 이후 정규앨범 [One of the Boys]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메인스트림 씬에 합류한다. 앨범은 전세계 토탈 7백만장 이상을 판매했고 미국 내에서도 플래티넘을 기록했는데, 2008년도에 33번째로 많이 판 앨범으로도 알려져 있다. 앨범의 두 번째 싱글인 [Hot n Cold]역시 선전하면서 각종 시상식과 음악 페스티발, 그리고 잡지에서 그녀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남자친구는 게이 같고, 어쩌다 여자랑 키스를 했는데 좋더라...하는 류의 가사들은 게이/레즈비언 커뮤니티의 사람들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모 인기의 반증 정도로 이것을 해석해도 무방하겠다. 무려 마돈나(Madonna)가 그 당시 가장 마음에 드는 신인이라고 언급했었으니.

함께 투어를 다니기도 했던 콜로라도 출신의 듀오 3OH!3의 [Starstrukk] 리믹스에 참여하면서 흥행 보증수표가 됐고 또 다른 히트 제조기 팀바랜드(Timbaland)의 앨범 [Shock Value II]에 피쳐링한 곡 [If We Ever Meet Again] 또한 싱글커트 됐다. 게다가 실력파 메인스트림 아티스트의 통과의례라 할만한 [MTV Unplugged]를 녹화하고 앨범을 발표하면서 고작 단 한 장의 정규작을 발매했음에도 자신의 위치를 확실시한다. 여성스러운 외모와는 달리 강렬한 허스키 보이스와 퍼포먼스를 통해 다양한 층에서 소비됐다.
노래 : Kylie Minogue (카일리 미노그)
카일리 미노그(Kylie Minogue), 그녀가 다시 돌아왔다. 88년 데뷔앨범 < Kylie >를 들고 나타난 청순하고 귀여운 이미지에서 이젠 성숙미가 물씬 풍기는 지나칠 정도의 섹슈얼리티로 승부를 건다. 호주 멜버른 출신의 그녀는 가수 데뷔 이전에 TV 탤런트로 명성을 쌓아 호주를 비롯하여 영국까지 활동 영역을 확대했다. 우연한 기회에 자선 공연에서 불렀던 리틀 에바(Little Eva)의 ’Loco-mot... 카일리 미노그(Kylie Minogue), 그녀가 다시 돌아왔다. 88년 데뷔앨범 < Kylie >를 들고 나타난 청순하고 귀여운 이미지에서 이젠 성숙미가 물씬 풍기는 지나칠 정도의 섹슈얼리티로 승부를 건다. 호주 멜버른 출신의 그녀는 가수 데뷔 이전에 TV 탤런트로 명성을 쌓아 호주를 비롯하여 영국까지 활동 영역을 확대했다. 우연한 기회에 자선 공연에서 불렀던 리틀 에바(Little Eva)의 ’Loco-motion’이 행운을 안겨 줄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상품적 가치를 발견한 지역 음반사에 의해 이 곡은 호주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물론 그녀의 외모와 연기자로서의 명성이 한 몫 했을 것이다. 지역 음반사는 당시 영국 최고의 제작진으로 손꼽히던 유명한 3인조 SAW(스톡, 아이트켄 앤 워터맨)에게 카일리를 소개했고 이들은 신인이나 다름없는 여배우에게 데뷔곡 ’I should be so lucky’를 주어서 영국차트 1위에 오르는 예상밖의 결과를 빗어냈다. 그러자 SAW는 만사를 제치고 그녀의 데뷔앨범 제작에 몰두했으나 당시 카일리는 단지 노래만 부르는 앵무새 역할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I should be so lucky(미국 28위)’는 고향인 호주와 영국에서 동시에 차트 정상에 섰고 유럽 전역을 휩쓸고 다니며 싱글 판매가 100만장을 넘어서는 성공을 거두게 된다. 유럽지역의 인기를 바탕으로 미국시장에도 진출, ’The loco-motion(3위)’으로 다시 한번 성공을 반복한다. 1960년대 리틀 에바(Little Eva), 1970년대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Grand Funk Railroad)에 의해 차트 정상에 오른 바 있는 미국의 골든 레퍼토리를 리메이크한 것이다. 여세를 몰아 ’Its no secret(37위)’가 미국에서 히트했고 영국에선 ’Got to be certain’, ’The loco-motion’, ’Je Ne Sais Pas Porquoi’등 3곡이 연속해서 2위에 오르는 줄 히트를 기록하며 앨범 차트도 정상을 움켜쥐었다. 외모에 딱 어울리는 경쾌하고 달콤한 댄스곡들을 수록한 기획의도가 적절히 맞아떨어진 셈이다. 이제 그녀에겐 탤런트라는 명함 대신 가수라는 직함이 어울리게 되었고 가수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자신을 키워준 인기 TV 시리즈 < 이웃들 >의 출연도 그만두는 강수를 띄웠다. 그 아쉬움을 상대역으로 출연했던 제이슨 도노반(Jason Donovan)과 함께 한 발라드 ’Especially for you(영국 1위)’로 달랬고 1989년 두번째 앨범 < Enjoy Yourself >도 SAW의 진두 지휘 아래 제작, 발매했는데 분위기는 전작에 비해 다를 것이 없었다. ’Hand on your heart(영국 1위)’, ’I wouldn’t change a thing(영국 2위)’가 히트했고 ’Tears on my Pillow’가 자신이 직접 출연한 영화 < 비행자들 >에 삽입되면서 뒤늦게 영국차트 정상에 올랐다. 1990년 세 번째 앨범 < Rhythm Of Love >은 송 라이터로서 앨범 제작에도 참여했고 미국 출신의 유명 프로듀서를 영입하여 궁극적으론 미국시장의 재진출을 노렸으나 정작 미국에선 앨범이 발매되지도 못한 채 영국에서만 4곡의 싱글을 Top 10에 진입하는 체면치레로 그치고 말았다. 1991년에 발매된 4집 앨범 < Kylie Minogue >는 버블 검 음악에서 탈피해 성숙한 사운드와 섹시한 이미지로 새로운 도전에 나서 앨범 수록곡 가운데 6곡을 공동으로 작곡하는 열의를 보였다. 하지만 변변한 히트곡 하나 없는, 음악인생 최대 위기를 맞았다. 결국 1993년 인디 레이블과 계약을 맺으며 음악생활을 이어가 1994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앨범 < Kylie Minogue >를 발매한다. 부단히 체질 개선에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고 마치 마돈나(Madonna)의 음악을 듣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신비로운 댄스곡 ’Confide in me’가 유럽지역에서의 인기를 회복해주는 듯 했지만 가시적 성과는 없었다. 이어지는 < Impossible Princess > (1997년) 앨범에선 시대의 주류로 자리매김한 테크노 사운드를 채택했고, 본국인 호주에서 가진 < Impossible Princess Tour > 실황을 앨범으로 제작한 < Intimate & Live >앨범을 발매, 호주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였는데 여기선 이례적으로 펑크 밴드 클래시(Clash)의 ’Should I stay or should I go’를 리메이크했다. 1998년 인디 레이블에서 마저 해고된 그녀는 더 이상 설 곳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댄스라는 생명력이 짧은 음악을 하면서 30살을 넘긴 나이는 부담감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오뚝이처럼 일어서 EMI를 통해 복고풍의 디스코 댄스곡들로 가득한 < Light Years >(2000년)앨범을 발표했고 화끈하고 자극적인 뮤직비디오들을 통해서 ’섹스 심벌’의 이미지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폴라 압둘(Paula Abdul)과 함께 곡을 쓴 첫 싱글 ’Spinning Around’로 영국을 비롯한 8개국 차트를 석권하며 마돈나(Madonna)와 더불어 영국차트 역사상 1980, 1990, 2000년대에 걸쳐서 정상을 차지하는 가수가 되었다. 계속해서 ’On a night like this(2위)’, 로비 윌리암스(Robbie Williams)와 함께 한 ’Kids(2위)’, ’Please stay(10위)’, ’Your disco needs you’등이 잇따라 히트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재기에 성공한 그녀에게 시드니 올림픽의 폐회식 공연 무대가 마련되고 아바(Abba)의 명곡 ’Dancing queen’과 자신의 히트곡 ’On a night like this’를 4억 시청자 앞에서 불렀다. 고삐를 늦추지 않고 2001년 봄 성공적인 투어 활동을 벌였고 이는 BBC가 선정한 그해 최고의 투어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같은 해 10월 발표한 미드 템포의 댄스곡 ’Can’t get you out of my head’는 부활한 명성에 가속도를 붙이면서 영국을 비롯한 17개국에서 정상에 자리에 등극하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어 발표된 새앨범 < Fever >도 순풍에 돛 단 듯 차트행진을 거듭했고 올해 초 제21회 브릿 어워즈(Brit Awards)에선 최우수 국제 여자가수상과 최우수 국제 앨범상을 수상, 마침내 영국의 최고인기 여가수자리를 탈환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그토록 열망하던 미국시장의 재진입에 성공했다는 점으로, 앨범은 차트 3위에 올라 가수 데뷔이래 최고의 성적을 올렸고 싱글 ’Can’t get you out of my head(7위)’는 ’The loco-motion’ 이후 14년 만에 미국차트 Top 10에 진입하는 감격을 누렸다. 영국에선 발빠르게 두번째 싱글 ’In your eyes’가 3위에 올랐고 ’Love at first sight’를 다음 싱글로 준비하고 있다. 귀여움으로 1980년대 후반 전성기를 누린 후 섹시함으로 재무장하여 2000년대 초반 또 한차례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노래 : D'Angelo (디안젤로,Michael Eugene Archer)
지난 1995년 ‘Brown Sugar’ 앨범으로 신선한 충격을 던진 흑인가수 디안젤로(D’Angelo)가 오랫동안 신보를 내지 않자 천재 뮤지션으로 통하는 벡(Beck)은 언젠가 “디안젤로가 그 앨범으로 끝난 거야?”라고 말했다. 자신도 그렇지만 천재적인 리듬을 선보인 그의 새 앨범을 들어 보고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디안젤로의 신작을 학수고대했다. 그가 얼마 전 5년 만에 새 앨범 < Voodoo... 지난 1995년 ‘Brown Sugar’ 앨범으로 신선한 충격을 던진 흑인가수 디안젤로(D’Angelo)가 오랫동안 신보를 내지 않자 천재 뮤지션으로 통하는 벡(Beck)은 언젠가 “디안젤로가 그 앨범으로 끝난 거야?”라고 말했다. 자신도 그렇지만 천재적인 리듬을 선보인 그의 새 앨범을 들어 보고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디안젤로의 신작을 학수고대했다. 그가 얼마 전 5년 만에 새 앨범 < Voodoo >를 갖고 컴백했다. 앨범은 전작처럼 힙합에 부드러운 소울과 펑키한 재즈 리듬을 혼합한 사운드를 유지하고 있으나 세련미가 한층 더해졌다. 평자들이 말하는 ‘뉴 소울’ 또는 ‘네오소울’의 진수라 할 만큼 ‘최신 흑인리듬의 천국’이다. 일례로 로버타 플랙의 1975년 넘버원 싱글을 리메이크한 ‘Feel like makin’ love’의 경우 완전히 세련된 신작으로 재탄생되어 나왔다. ‘타임’은 “노래들이 신나는 팝송은 아니지만 마치 낮잠에서 깨어난 고양이처럼 오묘함이 쫙 뻗어나가는 곡들”이라며 근래 드문 걸작으로 평했다. 한번으론 모르지만 여러 번 들으면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게 디안젤로의 음악이다. 앨범은 발표 첫 주에 차트 1위를 차지했다. 현재 차트 30위 권에 올라있는 ‘Untitled(How does it feel)’이 첫 싱글이다.
미국 얼터너티브 R&B 듀오 미국 얼터너티브 R&B 듀오
노래 : Simply Red (심플리 레드)
영국 맨체스터 출신의 심플리 레드는 흑인의 소울과 리듬 앤 블루스를 백인의 감수성으로 표현해내며 1980년대 중반부터 오늘날까지 전세계적으로 4천 만장이 넘는 앨범 판매고를 기록하며 커다란 인기를 누리고 있는 ''블루 아이드 소울'' 그룹이다. 밴드는 뉴 웨이브 그룹 프랜틱 엘리베이터스(Frantic Elevators)에서 활동했던 보컬리스트 믹 허크날이 1994년 결성했다. 그는 처음 베이시스트 토니 바우어즈(... 영국 맨체스터 출신의 심플리 레드는 흑인의 소울과 리듬 앤 블루스를 백인의 감수성으로 표현해내며 1980년대 중반부터 오늘날까지 전세계적으로 4천 만장이 넘는 앨범 판매고를 기록하며 커다란 인기를 누리고 있는 ''블루 아이드 소울'' 그룹이다. 밴드는 뉴 웨이브 그룹 프랜틱 엘리베이터스(Frantic Elevators)에서 활동했던 보컬리스트 믹 허크날이 1994년 결성했다. 그는 처음 베이시스트 토니 바우어즈(Tony Bowers), 드러머 크리스 조이스(Chrs Joyce), 브라스 주자 팀 켈렛(Tim Kellett), 기타리스트 실반 리차드슨(Sylvan Richardson), 키보디스트 프리츠 매킨타이어(Fritz McIntyre) 등과 함께 팀을 꾸려나갔다. 하지만 많은 멤버 변화를 겪은 후 현재는 허크날 혼자서 사실상 그룹을 이끌고 있다. 심플리 레드는 데뷔 이후 단 한번의 침체기도 없었다. 1985년 데뷔작 < Picture Book >은 영국 차트 2위, 미국 차트 16위에 랭크되며 단숨에 플래티넘을 따냈고, 수록곡 ''Holding back the years''는 미국에서 정상을 차지했다. 또한 1970년대 후반 인기를 모았던 미국 소울 듀오 발렌타인 브라더스(Valentine Brothers)의 고전 ''Money''s too tight (to mention)''를 모던하게 재해석하며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다. 계속해서 믹 허크날은 1987년 < Men And Women >은 영국 차트 2위, 1989년 < A New Flame >은 1위에 등극하는 히트 퍼레이드를 펼쳤다. ''The Right Thing''(영국 11위), ''Infidelity''(영국 31위), 소울 발라드 ''It''s only love''(영국 13위) 등의 인기 곡들을 쏘아 올렸다. 특히 필라델피아 두 압 그룹 해롤드 멜빈 앤 더 블루 노츠(Harold Melvin And The Blue Notes)의 1972년 고전 ''If you don''t know me by now''의 리메이크 버전은 미국에서 또 다시 넘버원 히트를 장식하며 심플리 레드를 세계적인 그룹으로 진입시켰다. 무엇보다 심플리 레드의 최고점은 1991년 작품 < Stars >라 할 수 있다. 비록 이 음반이 미국에서는 골드에 그치는데 만족했지만, 영국을 포함해 다른 국가에서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900만장이라는 판매량이 잘 말해준다(영국에서는 1991년부터 1993년 동안에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남아있다). ''Stars'', ''Something got me started'', ''For your babies'', ''Thrill me'', ''Your Mirror'' 등 수록곡의 대부분이 히트를 쳤다. < Stars >의 인기는 밴드가 1995년 < Life >(영국 차트 1위)를 발표할 때까지 파죽지세였다. 이러한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심플리 레드는 1996년 베스트 앨범 < Greatest Hits >, 1998년 정규 6집 < Blue >를 발매하여 모두 영국 차트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1년 뒤에 내놓은 < Love & The Russian Winter >도 좋은 성적을 올렸다. 그리고 지금 심플리 레드는 또 한차례의 거대한 폭풍을 몰고 올 새 앨범 작업에 모든 정성을 쏟아 붓고 있다고 전해진다.
노래 : Spandau Ballet (스팬다우 발레)
1983년도 싱글 ‘True’는 1990년에 해산한 스팬다우 발레(Spandau Ballet)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했다. 스팬다우 발레라는 밴드 이름은 생소해도 ‘True’의 멜로디는 현재까지 라디오에서, 드라마에서, CF 배경 음악에서, 그리고 여러 컴필레이션 음반에서 여전히 그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한 곡 때문에 다른 노래들은 본의 아니게 단명하고 말았다. 개리 켐프(Gary Kemp/기타)와 ... 1983년도 싱글 ‘True’는 1990년에 해산한 스팬다우 발레(Spandau Ballet)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했다. 스팬다우 발레라는 밴드 이름은 생소해도 ‘True’의 멜로디는 현재까지 라디오에서, 드라마에서, CF 배경 음악에서, 그리고 여러 컴필레이션 음반에서 여전히 그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한 곡 때문에 다른 노래들은 본의 아니게 단명하고 말았다. 개리 켐프(Gary Kemp/기타)와 마틴 켐프(Martin Kemp/베이스) 형제를 중심으로 토니 해들리(Tony Hadley/보컬), 스티브 노먼(Steve Norman/기타, 색소폰, 퍼커션), 존 키블(John Keeble/드럼)이 1979년에 의기투합한 뉴웨이브 그룹 스팬다우 발레는 글램록의 선구자인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와 록시 뮤직(Roxy Music)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아름다운 분장(?)과 화려한 의상으로 자신들의 외형을 가꾸었다. 그래서 뉴로맨틱스 계열로 분류되기도 하는 스팬다우 발레는 세련되고 깔끔한 연주 위에 토핑 치즈처럼 뿌려진 토니 해들리의 소울풀하고 기름진 보컬이 어우러지면서 맛을 낸 담백한 음악이 강점이다. 1981년과 1982년 연이어 발표한 < Journeys To Glory >와 < Diamond >는 영국 내에서만 그 가능성을 타진하는데 그 의의를 두었다. 이듬해인 1983년에 공개한 3집 < True >에서 타이틀 트랙과 후속곡 ‘Gold’, ‘Communication’이 빌보드 싱글 차트 4위와 29위, 59위에 계속 진입하면서 국제적인 밴드로 급부상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True’는 하루가 멀다하고 라디오 전파를 타는 대형 히트를 기록했다. 1985년을 기점으로 뉴웨이브 음악은 촛불처럼 연소되었고, 뉴웨이브 그룹들도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처럼 순식간에 소멸했다. 그리곤 팝메탈이 그 우람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81년부터 1984년까지 강행군 한 스팬다우 발레는 록적인 접근법을 취한 < Through The Barricades >를 1986년에 내놓았으나 반응은 냉담했고, 1989년도 음반 < Heart Like A Sky >를 끝으로 이 퀸텟은 화려했던 활동을 접었다. 개리 켐프는 영화 < 보디가드 >를 비롯한 몇몇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해 배우로 다시 태어났고, 토니 해들리는 1993년에 솔로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True’는 1990년대 들어서도 그 막강한 지명도를 과시했다. 랩듀오 피엠 돈(PM Dawn)의 1992년 넘버원 싱글 ‘Set adrift on memory bliss’는 ‘True’의 주요 멜로디를 사용해 가장 이상적인 샘플링 모델을 제시했으며, 1998년도와 2000년에는 영화 < 웨딩 싱어 >와 < 미녀 삼총사 > 사운드트랙에 수록되어 젊은 팝 팬들에게도 어필했다.
노래 : Bryan Ferry (브라이언 페리)
1970년대말, 쉐필드 대학에서 팬진을 만들던 마틴 프라이(Martin Fry)는 지방 밴드 ‘더 바이스 버사( The Vice Versa)’의 멤버인 기타리스트 마크 화이트(Mark White)와 색소폰 주자 스테픈 싱글튼(Stephen Singleton)을 인터뷰하던 도중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을 받는다. 그들이 함께 음악을 하자고 마틴을 꼬신 것이다. 마틴으로서는 황당함과 영광스러움이 공존하는 기분을 맞본 ... 1970년대말, 쉐필드 대학에서 팬진을 만들던 마틴 프라이(Martin Fry)는 지방 밴드 ‘더 바이스 버사( The Vice Versa)’의 멤버인 기타리스트 마크 화이트(Mark White)와 색소폰 주자 스테픈 싱글튼(Stephen Singleton)을 인터뷰하던 도중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을 받는다. 그들이 함께 음악을 하자고 마틴을 꼬신 것이다. 마틴으로서는 황당함과 영광스러움이 공존하는 기분을 맞본 것이다. 그리하여 마틴을 보컬리스트로 한 신스팝, 뉴로맨틱스 밴드 ABC의 역사가 시작된다. 곧 사운드 보강을 위해 드러머엔 데이빗 로빈슨(David Robinson)과 베이시스트 마크 릭클리(Mark Lickley)를 영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스타트 시동을 걸었다. 1982년 정규 앨범으로 1집이 되는 < The Lexicon Of Love >를 발표하고 싱글 ''The Look of love(18위)''와 2번째 싱글 ''Poison arrow(25위)''로 대서양을 횡단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당시 대부분의 뉴로맨틱 계열의 밴드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들도 비주얼한 측면을 많이 강조했기 때문에 MTV의 단골 손님이 되었다. 말쑥한 옷차림과 세련된 외모는 글램록의 아버지 데이빗 보위와 짙은 화장으로 여자보다 더 예쁜 남성들로 질투를 유발시킨 같은 계열의 밴드 저팬(Japan)의 이미지를 동시에 떠올리게 했다. 1983년 말에 발표된 2번째 작품 < Beauty Stab >은 록적인 느낌이 강했기 때문에 뉴웨이브 사운드가 한창 귀에 꽂힐 시점에 발표되어 큰 성공을 낚는데는 실패했지만 비 온 뒤 땅이 굳듯, 1985년에 발표된 < How To Be A .... Zillionaire >는 그들에게 가장 상업적인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이 음반은 확실히 더 댄서블하며 흑인적인 감정이 짙어졌다. 싱글 ‘Be near me’는 9위까지 오르며 그들의 미국 차트 최초의 탑 텐 기록을 세웠고, 두 번째 싱글 ‘How to be a millionaire’는 20위를 기록한다. 1987년의 4집 < Alphabet City >에서는 그동안 그들이 존경해왔던 흑인가수 스모키 로빈슨(Smokey Robinson)에게 헌정하는 ‘When Smokey sings’를 싱글로 발표해 5위까지 오르면서 인기 굳히기에 성공했다. ABC에게 영향을 준 아티스트는 리듬 앤 블루스 가수들과 흑인적인 보컬을 구사했던 데이빗 보위(당연히 비주얼적인 영감도), 그리고 모든 가수들의 스승인 비틀즈도 있다.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1990년대까지 활동을 했지만 1980년대만큼의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MTV시대의 총아’로 1980년대 팝을 풍미했던 영국 그룹 듀란듀란은 닉 로즈(Nick Rhodes)와 존 테일러(John Taylor)를 주축으로 스테판 더피(Stephen Duffy), 사이먼 콜리(Simon Colley) 등 4명으로 1978년 영국 버밍햄에서 활동을 개시했다. 독특한 밴드명은 제인 폰다 주연의 1968년 SF 영화 < 바바렐라 >(Barbarella)에 등장하는 캐릭터 이름에서 따왔다. ... ‘MTV시대의 총아’로 1980년대 팝을 풍미했던 영국 그룹 듀란듀란은 닉 로즈(Nick Rhodes)와 존 테일러(John Taylor)를 주축으로 스테판 더피(Stephen Duffy), 사이먼 콜리(Simon Colley) 등 4명으로 1978년 영국 버밍햄에서 활동을 개시했다. 독특한 밴드명은 제인 폰다 주연의 1968년 SF 영화 < 바바렐라 >(Barbarella)에 등장하는 캐릭터 이름에서 따왔다. 시작은 순탄하지만은 않아 줄기차게 멤버탈퇴와 새로운 멤버의 영입이 반복되었다. 닉과 존은 영국의 유명한 음악지 멜로디메이커(MelodyMaker)의 광고로 멤버영입을 위한 오디션을 통해 로저 테일러(Roger Taylor), 앤디 테일러(Andy Taylor), 그리고 마지막으로 닉과 존이 한눈에 반한 사이먼 르본(Simon Lebon)을 가입시켰다. 이렇게 닉 로즈, 존 테일러, 사이먼 르본, 앤디 테일러, 로저 테일러 다섯 명의 공인된 라인업으로 듀란듀란은 1980년대를 헤쳐가게 된다. 1980년 에딘버러(Edinburgh) 페스티벌에서 커다란 주목을 받으며 이듬해인 1981년 EMI와 음반계약을 체결한 그들은 바로 첫 싱글 ‘Planet earth’를 내놓아 영국 차트(12위)에 진출했고 이어 데뷔앨범 < Duran Duran >을 발매한다. 당시 흐름을 뭉뚱그려 표현한 이른바 뉴 웨이브(New wave)의 신호탄이 된 이 앨범과 함께 그들은 비주얼 스타로서의 재능을 드러내게 된다. 그들은 뮤직비디오를 통해서, 음악은 물론 여성들을 사로잡은 탁월한 외모를 과시하며 MTV 개막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일례로 ‘Girls on film’ 뮤직비디오는 포르노 터치의 화면으로 여러 나라에서 방영금지를 당했지만, 그만큼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1982년 발표된 앨범 < Rio >는 미국 진출의 이정표가 된 앨범이었다. 이 앨범의 첫 싱글 ‘Hungry like the wolf’는 빌보드 차트 3위에 오르는 빅히트를 기록하면서 단숨에 그들을 팝 팬들의 친숙한 이름으로 부상시켰다. 그들 성공의 일등공신은 앞에서도 지적했듯 뮤직비디오 산업을 리드하며 음악매체의 중심으로 도약한 ‘뉴 미디어’ MTV였다. 멤버 닉 로즈는 “이 곡 이전에 미국의 라디오는 우리 노래를 틀지 않았다. 하지만 MTV에서 반응이 폭발하자 그때서야 라디오는 우리 음악을 선택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듬해인 1983년 그룹은 싱글 ‘Rio’가 14위, ‘Is there something I should know’ 4위(영국차트 1위), ‘Union of the snake’ 3위에 오르는 등 거푸 3곡의 히트싱글이 터뜨리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국내에서도 이때쯤 그들의 인기가 비등하기 시작했다. 이 해 11월에는 < Seven and the Ragged Tiger >앨범을 발표했고 여기서 ‘New moon on Monday’(10위)와 미국에서 1위의 첫 감격을 안겨준 ‘The reflex’로 차트를 석권, 영미를 포함한 세계 최고 인기밴드로 자리를 굳힌다. 다음해인 1984년에도 그들은 천장부지의 인기를 누려 라이브앨범 < Arena >로 ‘The wild boys’(2위)를 히트시켰다. 이 무렵 음악전문지 < 롤링스톤 >은 가장 시대를 앞서는 밴드로 듀란 듀란을 선정, 표지기사로 다루었으며 그래미상은 3년 늦게 발매된 < Duran Duran >에 베스트비디오 앨범부문을 포상해, 미국에서의 위상도 공인되었다. 1985년 5월, 007영화 주제곡이었던 ‘A view to a kill’은 다섯 원년멤버의 작품으로는 마지막 히트곡이 되었다. 이 해 그룹 멤버들의 과외활동이 빈번해져 존 테일러와 앤디 테일러는 로버트 파머(Robert Palmer)와 쉭(Chic)의 드러머였던 토니 톰슨(Tony Thompson)과 함께 파워 스테이션(Power Station)을 결성해 별도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이 그룹은 ‘Some like it hot(6위)’와 티렉스(T-Rex)의 곡을 커버한 ’Get it on’(9위), 그리고 ‘Communication’(34위)을 잇따라 차트에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이에 뒤질세라 사이먼 르본과 닉 로즈, 로저 테일러도 아카디아(Arcadia)를 만들어 ‘Election day’를 6위까지 올려놓아, 마치 그룹이 둘로 쪼개진 느낌마저 주었다. 결국 그룹의 결속력은 크게 약화되어 앤디 테일러와 로저 테일러가 그룹을 나가, 이후 듀란듀란은 3인조로 재편성되기에 이르렀다. 작아진 듀란듀란은 1986년 < Notorious >를 발매해 동명의 싱글 ‘Notorious’로 성공적으로 싱글차트를 공략하지만(차트 2위), 전성기의 파괴력에는 떨어진 감을 주었다. 이후 발표된 음반들 역시 모두 평단의 혹평과 대중의 피로감에 고전을 면치 못했고 1988년의 앨범 < Big Thing >에 수록된 ‘I don’t want your love’만이 차트 톱10(4위)에 들었을 뿐이었다. 1989년에는 서울 잠실에서 내한공연을 가져 국내 팬들의 성원을 받았으나 늦은 타이밍으로 아쉬움을 주었다. 이해 그들은 베스트음반 < Decade >를 출시, 활동정리의 느낌을 강하게 풍기며 듀란듀란 시대의 종언이 다가왔음을 알렸다. 음악 경향도 198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중심이 뉴 웨이브에서 팝 메탈로 이동해버려 그들의 퇴진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룹은 예상을 깨고 1993년 얼터너티브 록 파동 속에서 공백을 깨고 컴백, 우호적인 평가를 얻은 앨범 < Wedding Album >을 내놓았다. 이 음반은 뮤직비디오에 의한 비주얼 스타가 아닌 음악적인 면으로 평가를 받아 재기 이상의 의미를 안겨주었다. 지금까지도 라디오 전파를 타고있는 이 앨범의 수록곡 ‘Ordinary world’는 싱글차트 3위에 올랐으며 ‘Come undone(7위)’과 ‘Too much information(45위)’도 호응을 얻었다. 1995년에는 그랜드마스터플래시(Grandmaster Flash),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 루 리드(Lou Reed) 등 자신들이 좋아한다는 아티스트들의 곡들을 커버한 리메이크 앨범 < Thank You >를 발매했고 존 테일러가 팀을 탈퇴한 1997년엔 < Medazzaland >를 냈다. 그는 그룹탈퇴 후 솔로앨범 한 장과 펑크 성향의 그룹 뉴로틱 아웃사이더스(Neurotic Outsiders)에 참여해서도 앨범을 만들었다. 듀란듀란은 보이 조지의 컬처 클럽(Culture Club), 왬(Wham!)과 더불어 비틀스 이후의 ‘제2의 영국침공’(The Second British Invasion)을 일궈낸 주역이자 ‘80년대의 대표밴드’로 시대를 갈랐다. 비록 최고인기에 못지 않은 평단의 거센 비판에 시달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 뉴 웨이브 시대를 규정짓는 상징이라는 위치는 흔들리지 않는다. 1990년대에는 브릿팝과 테크노에 의해 영국 팝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복고 붐이 야기되어, 다시금 신세대의 관심을 부르기도 했다. 2002년에는 원년멤버였던 다섯 명이 재결성해 새 앨범을 발표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뉴욕 출신의 토킹 헤즈(Talking Heads)는 ‘록음악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4인조 펑크 밴드이다. 그들은 제3세계 음악(특히 남미와 아프리카)의 다양한 리듬을 일렉트로닉적이고 멜로딕한 기타 팝에 혼합시켜 실험성 강하고 지적인 사운드를 창조해냈다. 그것은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와 비틀스(Beatles)의 카테고리 안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었다. 실제로 프런트맨 데이비드 ... 뉴욕 출신의 토킹 헤즈(Talking Heads)는 ‘록음악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4인조 펑크 밴드이다. 그들은 제3세계 음악(특히 남미와 아프리카)의 다양한 리듬을 일렉트로닉적이고 멜로딕한 기타 팝에 혼합시켜 실험성 강하고 지적인 사운드를 창조해냈다. 그것은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와 비틀스(Beatles)의 카테고리 안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었다. 실제로 프런트맨 데이비드 번(David Byrne)은 자신들의 음악을 가리켜 ‘이것은 더 이상 로큰롤이 아니다’라고 규정지었다. 그의 말대로 토킹 헤즈의 음악은 동시대의 어떤 밴드보다도 컬트적이고 진보적인 오리지널리티를 지니고 있었다. 토킹 헤즈는 1974년 월드 뮤직에 관심이 많았던 보컬리스트이자 기타리스트 데이비드 번과 베이시스트 티나 웨이마우스(Tina Weymouth), 그리고 웨이마우스의 남자친구였던 드러머 크리스 프란츠(Chris Frantz)가 의기투합하면서 결성됐다. 트리오는 이듬해 뉴욕의 전설적인 펑크 클럽인 CBGB에서 라몬즈(Ramones)의 오프닝을 맡았고, 1년 뒤인 1976년에는 < 사이어 레코드(Sire Records) >와 제휴 관계를 맺는 등 가볍게 스타트라인을 끊었다. 그리고 모던 러버스(Modern Lovers)출신의 키보디스트 제리 해리슨을 맞이하면서 완벽한 진용을 구축했다. 그들은 1977년 번의 어눌한 보컬과 그에 어울리는 지적인 가사가 돋보인 데뷔작 < Talking Heads’77 >(미국 97위, 영국 60위))과 1년 후인 1978년 브라이언 이노(Brian Eno)가 프로듀서를 맡은 2집 < More Songs About Building And Food >(미국 29위, 영국 21위)를 차례로 내놓으며 평단의 호평을 이끌어냈다. 소포모어 작품부터 토킹 헤즈와 인연을 맺은 이노는 이후 발표하는 앨범에서 프로듀서는 물론이고, 작곡과 보컬, 연주에도 참여하며 ‘제 5의 멤버’로서 활약했다. 1979년 < Fear Of Music >(미국 21위, 영국 33위), 1980년에는 < Remain In Light >(미국 19위, 영국 33위)가 대표적이다. 특히 뉴 웨이브씬을 대표하는 고전 ‘Once In A Life Time’등이 수록된 < Remain In Light >는 비평가들로부터 무한한 찬사를 받은 밴드의 위대한 걸작으로 남아있다. 잇단 수작들을 발표하며 거물 밴드로 성장한 토킹 헤즈는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휴지기에 들어갔다. 그 동안 멤버들은 각자의 프로젝트 활동에 몰두했는데, 번은 브라이언 이노와 함께 음악 작업을 펼쳤고, 프란츠와 웨이마우스는 펑크 밴드(Funk Band) 톰 톰 클럽(Tom Tom Club)을 조직했다. 밝고 듣기 편한 사운드를 선사한 톰 톰 클럽은 첫 싱글 ‘Genius Of Love’가 톱 40에 올랐고, 셀프 타이틀 음반은 골드를 기록하는 등 인기를 얻었다. 1983년 한자리에 다시 모인 그들은 같은 해 팝적인 느낌이 베어나는 5집 < Speaking In Tongue >(미국 15위, 영국 21위)를, 2년 뒤인 1985년에는 보다 더 소프트해진 6집 < Little Creatures >(미국 20위, 영국 10위)를 선보였다. 이와 함께 음악 감독 데이빗 번은 독자적인 캐리어 쌓기에도 여념이 없었다. 그는 1985년 오페라 < Civil Wars >의 음악을 담당하였고, 이듬해에는 영화 < True Stories >를 직접 제작하고, 사운드트랙까지 책임지는 등 다방면에서 끼를 과시했다. 또한 1988년에는 류이치 사카모토와 함께 영화 < 마지막 황제 >의 음악을 맡아 ‘아카데미 영화 음악상’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룩하기도 했다. 하지만 번의 빈번한 외도는 그의 그룹 내 실권을 점차 약화시켰고, 다른 멤버들로부터 불만의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결국 1988년 7집 < Naked >를 끝으로 멤버들은 그룹 활동을 접고 각자의 길로 떠났다. 프란츠와 웨이마우스는 톰 톰 클럽을 계속해서 이어갔고, 번은 월드뮤직 레이블 < 루애카 밥(Luaka Bop) >을 설립했다. 그리고 1991년 공식적으로 해체를 선언했다. 이후 1996년 데이비드 벗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더 헤즈’(The Heads)라는 밴드명으로 < No Talking Just Head >라는 앨범을 발표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한편 번은 지난해 솔로 음반 < Look Into The Eye Ball >을 공개했다. 펑크와 뉴 웨이브의 물줄기에서 기념비적인 족적을 남긴 토킹 헤즈. 그들은 비록 데이비드 번의 독선적 태도로 인해 팀워크가 금가고, 급기야 밴드가 공중 분해되는 상황까지 이르렀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금도 끊임없이 재평가작업이 활발하다. 아마도 그들이 새로운 음악 스타일을 향한 끊임없는 실험정신과 그것을 지속시키기 위한 뜨거운 열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타도, 드럼도, 베이스도 없다. 오직 목소리와 천의 얼굴을 한 신시사이저가 있을 뿐이다. 이 유일한 악기로 그들은 전혀 새로운 음악을 창조했다. 영국의 뉴웨이브, 신스팝 그룹 휴먼 리그(Human League). 그들은 거짓말처럼 컴퓨터와 신시사이저만으로 ‘Don’t you want me’나 ‘Human’ 같은 명곡을 만들어냈다. 휴먼 리그에겐 악기에 대한 제한이나 고정관념을 뛰어 넘는 자신들의 자신감과 음악 ... 기타도, 드럼도, 베이스도 없다. 오직 목소리와 천의 얼굴을 한 신시사이저가 있을 뿐이다. 이 유일한 악기로 그들은 전혀 새로운 음악을 창조했다. 영국의 뉴웨이브, 신스팝 그룹 휴먼 리그(Human League). 그들은 거짓말처럼 컴퓨터와 신시사이저만으로 ‘Don’t you want me’나 ‘Human’ 같은 명곡을 만들어냈다. 휴먼 리그에겐 악기에 대한 제한이나 고정관념을 뛰어 넘는 자신들의 자신감과 음악 철학이 있었다. 1985년을 고비로 대부분의 뉴웨이브 그룹들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현재까지 살아남은 혼성 4인조 그룹 휴먼 리그는 뉴웨이브의 산 증인이자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영국 펑크의 해로 기억되는 1977년, 두 신시사이저 플레이어 마틴 웨어(Martyn Ware)와 이안 크레이그 마쉬(Ian Craig Marsh), 그리고 냉소적인 음색의 보컬리스트 필립 오케이(Philip Oakey)의 트리오 체제로 출발한 휴먼 리그는 전자 음악의 선구자인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나 록시 뮤직(Roxy Music) 등으로부터 음악적인 채무를 지고 있다. 그러나 그 선배들보단 더 세련되고 상업적인 멜로디를 뽑아내 싱글 커트에 부담 없는 곡들로 대중들의 귀를 정복했다. 애드리안 라이트(Adrian Wright)로 멤버를 보강한 후 2년의 담금질을 감내해 낸 휴먼 리그는 1979년의 데뷔 앨범 < Reproduction >을 가지고 본격적인 팝 무대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 작품과 1980년의 2집 < Travelogue >을 발표하자마자 마틴 웨어와 이안 크레이그 마쉬는 휴먼 리그를 떠나 헤븐 17(Heaven 17)이라는 뉴웨이브 트리오로 가지치기를 감행했다. 그들과 필립 오케이와의 파워 게임이 원인이었다. 두 여성 수잔 설리(Susanne Sulley)와 조앤 캐써롤(Joanne Catherall)을 보컬리스트로, 이안 버든(Ian Burden)을 새로운 신시사이저 연주자로 새롭게 맞이한 후 제작한 앨범이 뉴웨이브의 최고 명반 중 하나로 자리한 < Dare >다. 여기서 싱글로 커트 된 ‘Don’t you want me’가 빌보드에서 3주 동안 1위를 고수하면서 휴먼 리그는 국제적인 그룹 대열에 합류했다. 비록 히트곡은 아니었지만 같은 음반에 수록된 ‘Love action(I believe in love)’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이 곡은 2000년에 영국의 음악 전문지 < 언컷 >에서 선정한 1976년 이후에 탄생한 명곡 100위에서 ‘Don’t you want me’를 물리치고 당당히 36위를 차지했다. 1983년에는 싱글 ‘(Keep feeling) Fascination’이 8위에 오르면서 꾸준한 인기 행진을 이어가는 듯 보였으나 다음 작품 < Hysteria >가 예상 밖의 참패를 거두었다. 당시 뜨거운 감자였던 레바논 사태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밝힌 싱글 ‘Lebanon(64위)’을 위해서 처음으로 전기 기타를 직접 연주했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자넷 잭슨(Janet Jackson)의 앨범으로 명성을 드높인 지미 잼(Jimmy Jam)과 테리 루이스(Terry Lewis) 콤비가 제작을 맡은 1986년의 < Crash >에서는 두 번째 넘버원 곡 ‘Human’과 ‘I need your loving(46위)’이 싱글 차트에 기록되면서 전작의 실패를 만회했다. 1990년대, ‘Heart like a wheel(32위)’과 ‘Tell me when(31위)’ 등으로 얼터너티브의 폭풍 속에서도 살아남은 뉴웨이브의 지존 휴먼 리그는 2001년에도 정식 음반 < Secrets >로 자신들이 익힌 생존 비법의 비밀을 들려주었다. 그들의 음악은 그룹 이름처럼 인간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신시사이저로 찍어내는 휴먼 리그의 노래들은 듣는 사람들에게 차갑고 냉정한 음원의 미학을 제공했다. 그러나 2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들의 음악도 이제는 정겹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휴먼 리그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이제부터다.
나이지리아와 브라질의 혈통이 반반씩 섞여있는 실은 1990년대 영국을 대표하는 댄스 팝 가수이다. 하지만 그는 그저 가벼움만을 추구하는 댄스 음악을 하지 않는다. 풍부한 표현력이 압권인 소울풀한 보컬을 바탕으로 그는 하우스, 포크, 록, 소울 등을 넘나드는 폭넓은 스케일을 선보인다. 또 모든 곡을 직접 작곡·작사하는 싱어 송 라이터이기도 하다. 1963년 2월 19일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학... 나이지리아와 브라질의 혈통이 반반씩 섞여있는 실은 1990년대 영국을 대표하는 댄스 팝 가수이다. 하지만 그는 그저 가벼움만을 추구하는 댄스 음악을 하지 않는다. 풍부한 표현력이 압권인 소울풀한 보컬을 바탕으로 그는 하우스, 포크, 록, 소울 등을 넘나드는 폭넓은 스케일을 선보인다. 또 모든 곡을 직접 작곡·작사하는 싱어 송 라이터이기도 하다. 1963년 2월 19일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학교에서 주최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등 일찌감치 재능을 인정받았다. 열 다섯 살이 되자 독립 선언을 한 그는 낮에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생계를 꾸려나갔고, 밤에는 런던의 클럽에서 공연을 하며 음악의 꿈을 키웠다. 1980년대 중반 펑크(Funk) 밴드 푸시(Push)에 가담하여 아시아 투어를 마친 그는 런던으로 돌아와 래퍼 체스터 카멘(Chester Kamen)으로부터 테크노 팝 아티스트 아담스키(Adamski)를 소개받고, 1990년 넘버 원 싱글이 되는 ''Killer''를 공동 작곡했다. 진솔한 그의 보컬과 주술적인 사운드가 특징인 ''Killer''의 히트로 그는 프랭키 고스 투 할리우드(Frankie Goes To Hollywood), 에이비시(ABC), 버글스(The Buggles)를 키워낸 마이다스의 손 트래버 혼(Travor Horn)의 눈에 띄어 데뷔 음반을 내게되는 행운을 잡았다. 소울과 록이 감미로운 하우스 음악과 조화되면서 신선함을 불러일으킨 1991년 데뷔작 은 ''Crazy''(영국 2위), ''Future love''(12위) 등이 히트하면서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하였고, 3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는 대성공을 거뒀다. 이 작품으로 그는 이듬해 브릿 어워즈에서 ''최고의 브리티시 남자 아티스트'', ''최고의 브리티시 앨범'' 등 두 개 부문을 수상하는 영광도 안았다. 3년 뒤인 1994년에 발표한 두 번째 작품 (데뷔작과 타이틀이 같다)도 1집을 능가하는 인기를 누렸다. 제프 벡(Jeff Beck), 자니 미첼(Joni Mitchell) 등이 참여한 음반은 영국 차트 정상을 정복하며 소포모어 징크스를 한 방에 날려보냈다. 미국에서도 영화 의 사운드트랙에 실리며 스매시 히트를 친 달콤한 발라드 ''Kiss from a rose''에 힘입어 400만장이나 팔려나가는 대박을 터트렸다.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노래'', ''올해의 레코드'', ''최고의 팝 보컬'' 등 알짜배기 상을 휩쓴 것도 이 곡 덕분이었다. 소울 음악으로 대부분을 할애한 1998년의 3집 은 전작들의 명성에는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영국 차트 44위와 미국 차트 22위, 그리고 판매량은 골드에 그쳤다. ''Kiss from a rose''에 익숙해진 팬들을 위한 제 2의 복제품을 생산해내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현재 실은 공연 활동에만 전념하고 있다. 새 앨범에 대한 기대는 아직 이른 듯 하다. 거의 4년마다 음반을 선보이는 그이기에 조바심 낼 필요가 없다. 아직 3년도 채 안됐다.
1970년대에는 루퍼스(Rufus)란 그룹의 멤버로, 1980년대는 솔로 싱어로서 두 차례나 ‘화려한 시절’을 누린 흑인 여성 싱어 샤카 칸(Chaka Khan)은 그래미상을 일곱 차례나 수상하면서 미국 본토에서는 수많은 후배 뮤지션들이 숭배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국내에서는 푸대접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프린스(Prince)의 원 곡을 재해석해 그녀의 대표작으로 안착한 ‘I fe... 1970년대에는 루퍼스(Rufus)란 그룹의 멤버로, 1980년대는 솔로 싱어로서 두 차례나 ‘화려한 시절’을 누린 흑인 여성 싱어 샤카 칸(Chaka Khan)은 그래미상을 일곱 차례나 수상하면서 미국 본토에서는 수많은 후배 뮤지션들이 숭배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국내에서는 푸대접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프린스(Prince)의 원 곡을 재해석해 그녀의 대표작으로 안착한 ‘I feel for you’와 훗날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이 리메이크해 영화 < 보디가드 >에 실린 ‘I’m every woman’은 우리나라 팝 팬들에게도 익히 알려진 샤카 칸의 고전이다. 국내에는 댄스 성향의 R&B 가수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녀의 음악적인 근간은 빌리 헐리데이(Billie Holiday)나 사라 본(Sarah Vaughn) 같은 재즈다. ‘The end of a love affair’나 ‘And the melody still lingers on (night in Tunisia)’ 등에서 보여준 탁월한 재즈 보컬을 들어보면 그녀가 왜 흑인 음악의 디바로 추앙되는지를 알 수 있다. 1953년 3월 23일, 추운 지역인 일리노이즈 주(州)에서 이베트 마리 스티븐스(Yvette Marie Stevens)란 실명으로 태어난 샤카 칸은 11살 때부터 크리스탈렛츠(Crystalettes)를 포함한 여러 보컬을 전전했지만 성공의 대어(大漁)를 낚지는 못했다. 1970년대 초반에 케빈 머피(Kevin Murphy), 안드레 피셔(Andre Fisher)와 함께 루퍼스란 소울 펑크(funk) 밴드를 결성하면서 진정한 인기 싱어로서의 이력을 쓰기 시작했다. 1973부터 1983년까지 10년 간 그룹 루퍼스의 리드 싱어로 활약하면서 스티비 원더가 그녀를 위해 만든 ‘Tell me something good(3위)’와 1984년에 개봉된 댄스영화 < 브레이킹 >에 삽입된 ‘Ain’t nobody(22위)’로 두 차례나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1976년 히트곡인 ‘Sweet thing’은 차트5위에 골드 레코드를 따냈다. 1978년경부터는 홀로 서기와 밴드 생활을 병행했다. 첫 솔로 곡은 우리에겐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로 잘 알려진 1978년 ‘I’m every woman(21위)’로, 이 곡은 유명한 전설적인 흑인 부부 듀오 애시포드 & 심슨(Ashford & Simpson)이 썼다. 특히 1983년에 발표한 펑키 리듬의 싱글 ‘Ain’t nobody’는 MTV가 배출한 두 아이돌 스타(?) ‘비비스와 벗헤드(Beavis & Butt-Head)’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 비비스 & 벗헤드 두 아메리카 > 사운드트랙에 래퍼 엘엘 쿨 제이(LL Cook J)의 힙합 버전으로 수록되어 있어 펑크(funk)가 힙합의 뿌리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1983년 그룹 루퍼스가 해산을 선언하면서 이 흑인 여성은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솔로 활동에 몰두할 수 있었다. 1983년의 앨범 < Chaka Khan >으로 두 부문의 그래미상를 수상하면서 음악으로는 공인을 받았지만 대중들과의 관계는 그다지 친밀하지 못했다. 1984년의 < I Feel For You > 앨범으로 마침내 그녀는 흑인은 물론 백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프린스(Prince)의 2집 < Prince >에 자리하고 있는 펑키(funky)한 원 곡에 비해 스티비 원더의 하모니카 연주와 초창기 래퍼로서 한 획을 그은 멜 멜(Melle Mel)의 피처링으로 힙합적인 요소를 가미한 이 트랙으로 그녀는 다시 그래미상 트로피를 수상했고 무엇보다 히트 차트 3위에 오르며 밀리언셀러가 돼 성큼 인기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후속곡인 아름다운 발라드 ‘Through the fire’와 ‘This is my night’는 나란히 60위를 기록했다. 또한 이 흑인 여성 싱어는 팝계의 거물 퀸시 존스(Quincy Jones)가 1989년에 제작한 회심의 역작 < Back On The Block >에 수록된 브라더스 존슨(Brothers Johnson)의 오리지날 ‘I’ll be good to you(18위)’를 소울 음악의 거목 레이 찰스(Ray Charles)와 ‘Just once’의 주인공 제임스 인그램(James Ingram)과 더불어 또 다시 그래미상을 탈환했다. 1992년의 음반 < The Woman I Am >으로 R&B 여가수 상을 수상한 샤카 칸은 1990년대에 눈에 띄는 활동 상을 보여주지 못하다가 1990년대 후반에 붐을 이룬 ‘디바 시리즈’의 두 번째 무대에서 후배 휘트니 휴스턴과 함께 ‘I’m every woman’을 불러 노병은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샤카 칸은 현재까지 꾸준한 라이브 활동을 펼치면서 팬들에게 음악적인 희열을 제공하고있다.
노래 : Anita Baker (아니타 베이커)
전자 악기와 백인음악 요소를 받아들이면서 승승장구하던 1980년대 중반 흑인음악계에서 여성 싱어 아니타 베이커(Anita Baker)의 등장은 정통 리듬 앤 블루스의 부활을 예견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 새로운 흑진주에 대한 평단의 시선은 찬사로 가득 찼으며 음반 판매량에서도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흑인 여가수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들려주는 ’Sweet love’나 ’Giving you the ... 전자 악기와 백인음악 요소를 받아들이면서 승승장구하던 1980년대 중반 흑인음악계에서 여성 싱어 아니타 베이커(Anita Baker)의 등장은 정통 리듬 앤 블루스의 부활을 예견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 새로운 흑진주에 대한 평단의 시선은 찬사로 가득 찼으며 음반 판매량에서도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흑인 여가수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들려주는 ’Sweet love’나 ’Giving you the best that I got’, ’Caught in the rapture’ 같은 노래들은 1980년대 성인 취향의 R&B 발라드의 전형이자 최고봉으로 우뚝 섰다. 아니타 베이커의 음악적인 뿌리는 로버타 플랙(Roberta Flack)이나 스모키 로빈슨(Smokey Robinson)같은 R&B 싱어는 물론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와 사라 본(Sarah Vaughn)같은 재즈 보컬의 거목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래서 그녀의 노래에서는 어반(Urban - 도시적 감각의 세련된 리듬 앤 블루스)과 동시에 재즈적인 분위기도 감지된다. 1958년 1월 26일 미국의 오하이오에서 태어나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 실력을 연마한 베이커는 가수로 데뷔하기 이전 비서와 웨이트레스 생활을 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속담을 입증하듯 1970년대 후반 소울 보컬 그룹 챕터 에이트(Chapter 8)의 멤버로 활동하면서 프로 가수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마침내 1983년에 인상적인 솔로 데뷔 처녀작 < Sonsgstress >를 공개하여 비록 팬들의 사정권에 들지 못했지만 다음에 이어질 명반 < Rapture >를 잉태하게 한 모체(母體)로 작용했다. 3년의 기다림 후, 음악팬들은 1980년대를 통틀어 가장 멋진 흑인 음반 중의 하나를 접했다. 사랑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 < Rapture >는 그녀 자신에게나 팬들에게 앨범 제목처럼 진정한 환희였다. 첫 싱글이자 지금까지 그녀를 대표하는 곡 ’Sweet love(8위)’와 ’Caught in the rapture(37위)’, 최고의 가창력을 보여준 ’No one in the world(44위)’, 펑키(funky)한 ’Same ole love(44위)’ 같은 히트 싱글이 이어져 비평은 물론 시장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싱글말고도’You bring me joy’와 ’Been so long’처럼 자신에게 영향을 준 재즈 감성이 자연스레 흐른 곡들도 매니아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 음반으로 그래미 최우수 리듬 앤 블루스 노래와 최우수 흑인 여성 가수상을 수상해 음악적인 면과 대중적인 면 모두에서 확실한 공인을 받은 이 미모의 여가수는 이듬해인 1987년에는 와이난스(Winans) 가(家)와 함께 ’Ain’t no need to worry’를 취입해 가스펠 분야에서도 그래미를 거머쥐었다. 1988년 말에 발표한 세 번째 LP < Giving You The Best That I Got >에서도 앨범 타이틀 ’Giving you the best that I got’과 ’Just because’가 싱글 차트 3위와 14위에 올라 다시 차트를 뒤흔들었다. 싱글 ’Giving you the best that I got’으로 1988년 그래미에서 다시 한번 최우수 리듬 앤 블루스 노래와 최우수 흑인 여자 가수상을 받은 아니타 베이커는 이듬해인 1989년에도 앨범 < Giving You The Best That I Got >으로 2년 연속 최우수 흑인 여자 가수상을 획득하는 기록을 달성하면서 1980년대 중반 이후 티나 터너(Tina Turner),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 자넷 잭슨(Janet Jackson) 등과 함께 당시 최고의 흑인 디바의 자리를 놓고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그러나 이렇게 거칠 것 없던 아니타 베이커도 새로운 음악 트렌드가 퍼져 가던 1990년대가 도래하자 서서히 대중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힙합이나 뉴 잭 스윙 같은 당시의 유행을 따르지 않고 한층 더 전통적이고 복고적인 입지를 고수한 음반 < Compositions >와 < Rhythm Of Love >를 발표했기 때문에 1990년대 이후 그녀의 상업적인 후퇴는 어느 정도 예상된 결과였다. 그러나 대중들의 선택과는 달리 그래미상 위원들은 1990년과 1995년도에도 아니타 베이커에게 R&B 최우수 여성 가수상을 수여하면서 자신의 길을 선택한 그녀의 손을 들어주었다. 18년 동안 초지일관(初志一貫), 오직 한 길을 걸어온 아니타 베이커는 1994년의 < Rhythm Of Love > 이후 새 음반 소식이 없다. 1980년대 그녀의 궤적을 간직하고있는 사람들은 그녀의 컴백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모타운(Motown) 가의 황태자’ 마빈 게이의 보컬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달콤한 크루닝(crooning) 창법과 샘 쿡의 호소력 짙은 가스펠의 기운을 온전히 흡수한 그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보컬로 창조해내며 청중들을 흥분시켰다. 기운이 서려있는 듯한 그의 보컬은 ’보컬 연주의 대가’라는 영광스런 칭호에 어울린다. 그의 사후 등장한 수많은 소울 팝 가수들은 모... ‘모타운(Motown) 가의 황태자’ 마빈 게이의 보컬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달콤한 크루닝(crooning) 창법과 샘 쿡의 호소력 짙은 가스펠의 기운을 온전히 흡수한 그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보컬로 창조해내며 청중들을 흥분시켰다. 기운이 서려있는 듯한 그의 보컬은 ’보컬 연주의 대가’라는 영광스런 칭호에 어울린다. 그의 사후 등장한 수많은 소울 팝 가수들은 모두 그의 보컬에 영향받았음을 인정하며 그의 음악성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은 단지 탁월한 창법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록음악 역사에 있어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아티스트의 창작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을 몸소 실천한 음악인이라는 점에서 그를 더욱 기억하게 한다. 70년대가 되기 전 만해도 밤낮으로 사랑과 낭만만을 얘기하며 소일하던 모타운식 소울 음악은 당시 대다수 흑인들이 공감해오던 ‘어두운 현실’엔 둔감했다. ‘팔리는 음악’을 원했던 회사측과의 마찰은 불가피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음악’을 위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이런 산고 끝에 록 역사를 대표하는 명반 < What’s going on >(1971)은 탄생했다 소울 음악은 60년대 그가 소속되어있던 모타운 레코드사를 통해 보다 대중적인 음악 문법으로 자리 잡은데 이어, 그는 같은 회사 소속의 스티비 원더와 함께 미국 대도시 후미진 곳에서 벌어지는 ‘게토 리얼리티를’ 자신의 노래에 담아냄으로써 소울이 ‘사회성’이란 화두를 본격적으로 끌어내는데 기여를 했다. 스티비 원더와 함께 그는 소위 후배 흑인 뮤지션들의 ‘대부’이다. 80년대 이스트 코스트 힙합의 분수령을 일군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의 프론트 맨 척 디(Chuck D)는 1988년도 명반 <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 >을 발표하며 롤링스톤지와 가졌던 인터뷰에서 ‘나는 이번 앨범에서 힙합의 < What’s going on > 버전을 내놓고 싶었다’ 라고 얘기할 정도로 마빈 게이의 유산을 이어받았다고 인정했다. 마빈 펜츠 게이 주니어라는 본명으로 1939년 4월 2일 워싱턴 디씨에서 태어난 그는 목사를 아버지로 둔 기독교 가정에서 어린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다소 억압적인 가정환경은 그로 하여금 음악에 몰입하게 해 아버지 때문에 억눌린 영혼을 달래줄 위안이 된다.(어렸을 때부터 그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공군에 입대, 제대 후 고향으로 돌아와 그는 락 앤 롤 스타 보 디들리(Bo Didely)를 만나 그의 문하생이 된다. 1958년 두왑 그룹인 레인보우에 가입, 이듬해엔 시카고로 진출해 ‘문 그로우’ 라는 두왑밴드에서 활동하며 체스(Chess) 레코드에서 그의 ct첫 싱글 ‘Mama roocie’를 녹음한다. 미국 전역 투어에 나선 문 그로우는 디트로이트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고, 당시 그의 연주를 지켜보던 모타운의 설립자 베리 고디 주니어(Berry Gordy Jr.)는 3옥타브가 넘는 그의 탁월한 테너 창법에 매료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61년 모타운과 전속 계약을 체결하며 베리 고디와 운명적인(?) 관계를 시작한다. 처음엔 세션 드러머로서 모타운의 일원이 된 그는 모타운 간판스타이자 작곡가인 스모키 로빈슨과 함께 활동한다. 1961년 그는 사장인 베리 고디의 누이인 안나와 결혼한다(무려 18살의 연상). 사장과 사돈관계가 된 덕에 회사측에 전폭적인 지원을 얻게 된 그는 이듬해 첫 싱글 ‘Stubborn kind of fellow’(1962)를 발표하고 흥겨운 댄스 팝 ’Hitch hike’(1962)로 빌보드 Top 40에 진입하는 순조로운 출발을 보인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크루닝 창법에 영향 받았던 그는 당시 격조 있는 발라드 음악을 원했지만, 회사 측은 그에게 흥겹게 흔들기 좋은 빠른 댄스 음악만을 요구했다. 큰 키에 수려한 용모를 지닌 덕에 유난히 여성 팬들이 많이 따랐던 그였지만, 무대에 올라 몸을 흔들며 청중들에게 즐거움을 줘야 한다는 것은 늘 못 마땅했다. 후에 그가 회고하길 ‘나는 무대에 나가 청중들 앞에서 내 엉덩이를 흔들어야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했을 정도이니, 얼마 후 있을 회사 측과 창작권을 두고 생긴 갈등은 이미 데뷔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1960년대 내내 그는 모타운 사를 통해 꾸준히 히트곡을 발표했다. ‘Pride & joy’(1963)로 처음 Top 10에 진출한 그는 잇달아 발표한 싱글 ’How sweet it is’(1964), ‘Aint that peculiar’(1965)을 Top 10에 진입시킨다. 솔로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져갈 무렵 그는 모타운 소속의 실력 있는 디바들과 듀엣 곡을 많이 취입했는데, 메리 웰즈(Mary Wells)과 함께 한 ’What’s the matter with you baby’(1964)을 시작으로, 킴 웨스튼(Kim Weston)과 함께 한 ’It takes two’(1966), 70년대 다이아나 로스(Diana Ross)와 함께 한 ‘My mistake is to love you’(1974)등이 대중적인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그와 가장 인상적인 호흡을 보여준 디바는 바로 타미 테렐(Tammi Terell)이었다. 그녀와 함께 했던 ‘Ain’t no mountain high enough’(1966), ’Your precious love’(1967), ’Ain’t nothing like the real thing’(1968), ’You’re all I need to get by’(1968) 모두 Top 10에 진입시키는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팝 역사상 가장 궁합이 잘 맞는 콤비’는 안타깝게도 타미 테렐의 요절로 인해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에게 첫 팝 차트 넘버원의 영광을 안겨준 ‘I heard it through grapevine’(1968)로 그의 인기전선은 절정에 다다랐다. 이듬해 ’Too busy thinking about my baby’(1969), ’That’s the way love is’(1969)를 Top 10에 진입시키며 인기는 더해갔지만, 이내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만다. 데뷔 때부터 창작권을 두고 벌어진 회사 측과의 끈질긴 줄다리기는 무려 2년이라는 시간을 그에게 투쟁의 시간으로 만들었다. 달콤한 사랑타령으로 점철된 지금까지의 음악과는 다른, 자신이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표출해보길 갈망했던 그는 ‘자신의 음악’을 얻기 위한 힘겨운 투쟁 끝에 결국 모타운 사의 백기를 받아내며 ‘음반 제작에 관한 모든 전권을 그에게 위임할 것’이라는 전리품을 얻어낸다. 흑인의 입장에서 아프로 아메리칸(Afro-America)의 비참한 현실을 늘 생각해왔던 그는 주저 없이 이런 자신의 고민을 음악 속에 녹여내는 작업을 했다. 흑인 빈곤문제, 실업, 월남전등, 70년대 초 그의 눈에 보인 흑인의 현실은 ‘참담함’이었다. 핑크빛 미래를 노래했던 발랄한 60년대의 흑인 음악은 슬라이& 페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 커티스 메이필드(Curtis Mayfield)등 기라성같은 흑인 뮤지션들에 의해 한층 진지하고 어두워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내놓은 것이 컨셉 앨범 < What’s going on >(1971)이었다. 흑인 음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내놓은 컨셉 앨범 < What’s going on >은 회사 측에 우려에도 불구, 앨범 수록 곡 중 무려 4곡(What’s going on, God is love, Mercy, mercy, me Inner city blues)이 Top 10에 진입하는 성과를 거뒀고, 앨범은 지금까지 8백만장이라는, 당시로선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스트링을 동원한 세련된 연주 편곡, 참회록을 쓰듯 스토리 텔링(Storytelling) 방식으로 진행되는 진솔한 자기 고백은 당시 소울음악에선 맛볼 수 없었던 신선한 충격이었다. 앨범 < What’s going on >은 그의 음악 경력에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이 때부터 그의 음악성에도 뚜렷한 변화가 감지된다. ’Inner city blues’(1971)에서 목격했던 퍼커션의 가열 찬 울림은 70년대 흑인 음악의 대표 트렌드인 ‘펑키 사운드’로의 변화를 예고했고, 앨범으로는 발표 안 된 저주받은 싱글 ‘You ’re the man pt. 1, 2’(1972)에선 가성, 두성, 진성 등 한층 다채로워진 그의 보컬 연기가 압권이다. 재즈에 대한 평소의 관심은 영화 음악 작곡으로도 이어져 노래보다 연주 쪽에 관심이 반영된 영화음악 앨범 < Trouble man >(1972)으로 이어진다. < What’s going on >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 그는 이전의 고뇌하는 흑인 지성임을 포기하고 이번엔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사랑의 전령사로 변신한다. 그의 두 번째 넘버원을 안겨다 준 앨범< Let’s get it on >(1973)은 ‘성 행위’를 찬미하는 노래들로 가득 찬 앨범으로 주변을 다시 한번 어리둥절하게 했다. 빌보드 No.1 곡인 ‘Let’s get it on’은 그를 단번에 섹시 스타로 변모시켰고, 그가 앨범에서 얘기했던 ’자연스러운 성의 표현 ‘은 80년대 들어 프린스나 조지 마이클같은 팝 스타들의 음악 세계로 계승된다. 하지만 그는 당시 첫 아내였던 안나와의 관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재니스라는 여인과 이미 두 집 살림을 차려 아이까지 낳았던 그의 성적 편력은 결국 아내와의 별거로 이어졌고, 한동안 그 충격에 슬럼프에 빠져 마약으로 세월을 보내게 된다. 재기의 몸부림을 친 그는 베리 고디의 주선으로 만난 레온 웨어(Leon Ware)의 곡으로 채워진 앨범 < I want you >(1976)을 발표하지만, 수록곡 ‘I want you’, ’After the dance’가 약간 주목을 받았을 뿐이었다. 히트곡에 목말라하던 그는 1977년 런던 팔라디움 구장에서의 콘서트 더블 실황 앨범< Live at the Palladium >을 발표하며, 13분이 넘는 디스코 곡 ‘Got to give up’을 수록하고, 4분대의 싱글로도 커팅, 그의 세 번째 넘버 원 싱글로 등극된다. 전형적인 댄스뮤직이었던 ’Got to give up’은 팝 차트, 앨 앤 비 차트 1위를 석권하며 그에게 가수로서 회생의 길을 열어준다. 하지만 ‘Got to give up’의 기쁨도 잠시, 결국 그는 안나와 이혼을 하게 되고 ,이혼에 대한 위자료를 다음에 발표하는 앨범 인세로 한다는 합의를 보게 된다. 앨범 < Here, my dear >(1978)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고 수록 곡 ’When did you stop loving me, When did I stop loving you’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만남과 해어짐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그의 뼈저린 고해성사는 아름다운 가사말과 편곡의 세련됨에도 불구, 이렇다할 히트 싱글 없이 앨범은 파묻히며 그의 디스코그래피 중 가장 안 알려진 앨범이 되고 말았다.(엎친데 덮친격으로 안나는 앨범 내용이 사생활 침해라며 소송을 걸기에 이른다.) 첫 번째 아내와의 이혼에 이어 다시 몇 년간은 그에게 혼란의 시기였다. 두 번째 아내였던 제니스와 급기야 파경에 이르렀고, < Love Man >(1979-발매 취소)과 < In our life time >(1981)의 흥행실패는 그를 더욱 마약으로 치닫게 했다. 급기야 그는 1981년 20년간 그에게 산전수전(?) 다 겪게 했던 모타운 사를 떠나, 하와이로 이주, 새로운 출발을 모색한다. 정확히 1년 후인 1982년, CBS 레코드와 전속 계약하며 그에겐 마지막 걸작으로 남게 된 < Midnight Love >(1982)를 발표한다. ‘Let’s get it on’에 버금갈만한 농염한 보컬이 인상적인 싱글 ‘Sexual healing’이 팝 차트 3위까지 오르며 그는 화려하게 재기한다. 공백기 동안대중들과의 소원함을 해소하기 위해 TV 출연 등 다시 활발한 활동을 벌인 그는 베리 고디와 함께 토크쇼에 출연해 둘의 악연(?)을 만회해보려고도 했고, NBA 농구 경기때 미국 국가를 소울 창법으로 불러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지미 헨드릭스가 우드스탁에서 연주했을 때 이후로 최대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재기 의지는 이내 사그러들고 있었다. 이미 코케인에 찌들 때로 찌든 그의 몸은 말을 듣질 않았고 평소에 사이가 안 좋았던 목사인 아버지와의 관계는 조금도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비극은 그의 아버지와의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되고, 1984년 4월, 그의 45회 생일을 하루 앞둔 날, 심한 다툼 끝에 화를 가누지 못한 아버지가 쏜 총에 맞아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그의 어이없는 죽음은 충격적이었다. 많은 흑인 뮤지션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이듬해인 1985년 모타운사와 CBS가 공동으로 그의 미 발표곡을 모은 < Dream of a life time >과 < Romantically Yours >를 내놓는다. 그에 대한 재평가도 활발히 이뤄져 < 롤링스톤 >을 비롯한 록 전문지들은 앞 다투어 그의 앨범 < What’s going on >을 팝 역사에 남을 명반으로 추대하기 시작했고,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그의 이름이 등재된다.
마이클 잭슨 음악 여정은 주지하다시피 1963년 4명의 형들과 함께 결성했던 패밀리 그룹 잭슨 파이브(Jackson 5)로 시작되었다. 5살이라는 어린 나이와 그에 걸맞지 않게 리드 보컬을 맡았던 그는 너무나도 빼어났던 가창력과 귀여운 춤 실력 때문에 언제나 세간의 관심대상이었다. 지방을 중심으로 명성을 쌓아가던 잭슨 파이브와 마이클은 1969년 베리 고디의 모타운 레코드와 계약하면서 본격적으로 팝 음악계에 뛰어... 마이클 잭슨 음악 여정은 주지하다시피 1963년 4명의 형들과 함께 결성했던 패밀리 그룹 잭슨 파이브(Jackson 5)로 시작되었다. 5살이라는 어린 나이와 그에 걸맞지 않게 리드 보컬을 맡았던 그는 너무나도 빼어났던 가창력과 귀여운 춤 실력 때문에 언제나 세간의 관심대상이었다. 지방을 중심으로 명성을 쌓아가던 잭슨 파이브와 마이클은 1969년 베리 고디의 모타운 레코드와 계약하면서 본격적으로 팝 음악계에 뛰어들었다.

첫 넘버 원 싱글 ‘I want you back’에 이어 ‘ABC’ ‘The love you save’ ‘I’ll be there’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2년 간 그룹활동에 전념하던 마이클 잭슨은 1971년 12월 탐라-모타운 레코드와 솔로 계약을 체결했다. 1971년 데뷔곡 ‘Got to be there’를 발표해 싱글차트 4위에 랭크시킨 후 ‘Rockin’ Robin’, ‘Ain’t no sunshine’, ‘Ben’, ‘I wanna be where you are’, 등을 잇따라 히트시키며 솔로와 그룹활동을 성공적으로 병행했다.

마이클 잭슨이 변성기가 지나고 성인으로 접어들자 잭슨 파이브도 점점 퇴색해갔고, 1979년 마이클은 드디어 성인으로서 첫 음반 을 발표했다. 1977년 흑인판 <오즈의 마법사>였던 뮤지컬 영화 <더 위즈(The Wiz)> 사운드트랙을 통해 만났던 퀸시 존스가 앨범의 프로듀서로 동참해 마이클 잭슨의 ‘성인신고작’을 한결 윤택하게 빛냈다.

활기 넘치는 리듬의 펑크(funk)와 디스코, 소울, 그리고 록과 팝, 발라드가 퓨전된 그 음반에는 마이클 잭슨이 작곡한 2곡의 업 템포 댄스넘버 ‘Don’t stop till you get enough’(최근 영화 <러시아워2>에 삽입되었음)와 ‘Working day and night’와 로드 템퍼튼 작곡의 깔끔한 팝 넘버 ‘Rock with you’, 절제된 보컬의 발라드 ‘She’s out of my life’ 같은 히트곡이 실려있었다. 수록곡 중 ‘Girlfriend’는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가 작곡해 준 곡으로 향후 둘 간의 파트너십을 예고했다.

이 마이클 잭슨의 방향성을 제시해 준 앨범이라면 1982년 12월에 발표된 는 ‘팝의 황제’라는 마이클 잭슨의 원대한 꿈을 실현시킨 회심작이었다. 퀸시 존스와 마이클 잭슨의 공동 프로듀스작인 그 앨범은 37주간이나 앨범차트 정상을 지켰으며 현재까지 미국에서만 2천6백만장의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또한 전례가 없는 무려 7곡이 싱글 발매되어 모두 차트 10위 내에 올랐고 그 중 2곡이 정상을 차지했다. 그 앨범으로 마이클 잭슨은 1984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역대최다인 7개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2000년 산타나와 타이 기록).

‘문워크(Moonwalk)’라는 독창적인 댄스를 유행시킨 ‘Billie Jean’과 에디 밴 헤일런의 기타 속주가 흐르는 ‘Beat it’이 차트 1위에 올랐으며, 첫 싱글로서 폴 매카트니와의 듀엣 곡이었던 ‘The girl is mine’(2위), ‘Wanna be startin’ somethin’(5위), ‘Human nature’(7위), ‘P.Y.T.’(10위), 마지막 싱글 ‘Thriller’(4위) 등이 연속해서 히트했다. 백인 최고스타 폴 매카트니와 록 기타의 거장 에드워드 밴 헤일런을 끌어들였다는 것은 크로스오버는 물론, 더 많은 수요층에게 다가가려는 그의 음악적 야심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Billie Jean’의 뮤직비디오는 MTV가 백인 록 뮤지션의 뮤직비디오만을 방영한다는 불문율을 깨고 틀었던 역사적인 첫 흑인 뮤직비디오였다. 한편 1984년 4월에는 폴카 음악과 ‘패러디의 대가’인 얀코빅(‘Weird Al’ Yankovic)이 ‘Beat it’을 패러디한 ‘Eat it’을 발표해 싱글차트 12위에 진입시키기도 했다.

영국의 난민구호 자선 프로젝트였던 밴드 에이드(Band Aid)의 ‘Do they know it’s christmas?’의 성공에 자극 받은 마이클 잭슨과 라이오넬 리치는 막강한 스타들을 규합, 유에스 포 아프리카(USA For Africa)를 조직해 1985년 1월 그 미국 버전인 ‘We are the world’를 만들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다. 그 해 8월에는 그간 음악동지였던 폴 매카트니와의 심각한 균열이 생겼다. 마이클 잭슨이 ‘레논/매카트니’ 크레딧으로 된 250곡이 넘는 비틀스 곡들의 판권을 4천7백5십만 달러에 사버렸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해 협력관계가 깨졌음은 물론 현재까지도 그 둘은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갱스터 영화의 대부 마틴 스코시즈가 감독한 17분짜리 뮤직비디오 ‘Bad’가 1987년 2월에 선보였고, 8월에는 분위기가 한층 어두워졌으며 록적인 느낌이 강화된 새 앨범 가 발매되었다. 퀸시 존스가 세 번째로 프로듀스를 맡은 이 앨범은 전작의 흥행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8백만장 이상 팔려나가는 성공을 거둔다. 특히 무려 5곡이 싱글차트 1위를 기록해 2곡이 1위에 오른 전작을 능가했다.

여성 보컬 시다 가렛과 호흡을 맞춘 ‘I just can’t stop loving you’를 시작으로 타이틀곡 ‘Bad’, 흥겨운 핑거 스냅이 시종일관 등장하는 ‘The way you make me feel’, 시다 가렛과 글렌 발라드가 공동 작곡한 발라드 넘버 ‘Man in the mirror’, 음산한 분위기가 압권인 ‘Dirty Diana’ 등 모두 5곡이 차례로 정상에 등극했다. 그 외에도 ‘Smooth criminal’, ‘Leave me alone’ 등 수록곡 전반이 주목받았다. 1988년 12월에는 마이클 잭슨과 존 레논의 아들 숀 레논 등이 출연한 영화 <문워커(Moonwalker)>가 전 세계에 개봉되었다.

보다 자신 고유의 음악을 찾기 위해 퀸시 존스와 헤어진 마이클 잭슨은 1991년 홀로서기를 시도한 첫 작품 를 발표한다. 젊은 프로듀서 테디 라일리를 메인 프로듀서로 받아들여 만든 이 음반은 마이클 특유의 사운드에 최신식 힙 합과 랩, 메탈 음악 등이 합쳐졌다. 작곡과 제작에 있어 마이클 잭슨의 재능을 마음껏 펼쳐 보인 음반이었지만 너바나 같은 그룹의 얼터너티브 록 태풍에 휘말려 전작들의 파괴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Remember the time’, ‘Jam’, ‘In the closet’ 등 테디 라일리가 솜씨를 발휘한 곡들과 영화 <프리 윌리>의 주제곡으로 쓰였던 ‘Will you be there’ 같은 곡들은 대중들과 평단으로부터 동시에 큰사랑을 받았다. 또한 ‘Black or white’의 뮤직비디오에서 보여준 ‘모핑’ 기법 같은 놀라운 기법들은 향후 영상 발전에 디딤돌이 되었으며 에서부터 구현된 환상적인 스튜디오 기술로 다시 한번 녹음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마이클 잭슨은 자신이 원하는 악기음색과 음원을 찾을 때까지 스튜디오 작업에 매달렸으며, 코러스 만해도 음색을 바꿔가며 다채롭고 풍부하게 꾸며 일반 제작자들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녹음기술만으로 볼 때는 모든 ‘프로듀서와 엔지니어의 드림’이었다.

해가 지지 않는 성공가도를 달리던 마이클 잭슨의 기세가 한풀 꺾인 것은 1993년의 일이다. 그 해 8월 바로 어린이 성추행 사건이 터진 것. 이 사건은 그간 깨끗한 이미지를 이어가던 그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한동안 그는 언론의 집중포화에 시달렸다. 그러다 얼마 후 갑작스레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했고, 이에 매스컴은 ‘여론 무마용’이라며 그에 대한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매체의 공격이 심해짐에 따라 마이클 잭슨의 분노도 정비례했다. 그에 대한 분노는 1995년에 발표한 더블앨범 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한 장은 히트곡들로, 다른 한 장은 신곡들로 구성된 이 음반은 ‘역사’로 해석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얘기들을 많이 담고있었다. 특히 그를 괴롭혀온 매스컴과 어린이 성추행 소송인에 대한 원한과 경멸, 냉소 등이 짙게 깔려있었으며, 그 때문에 음악도 예전과는 달리 상당히 거친 사운드가 지배적이었다.

알 켈리와 지미 잼 & 테리 루이스, 댈러스 오스틴 등이 프로듀서로 참여한 이 음반에서는 여동생 재닛 잭슨과 듀엣을 이룬 ‘Scream’과 ‘They don’t care about us’, ‘D.S.’, ‘Money’, ‘2 Bad’ 같은 곡을 통해 쇼비즈니스와 세상의 폭력에 대한 분노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물론 ‘You are not alone’, ‘Smile’ 등 따뜻한 노래들도 있었지만 다른 차가운 곡들 탓에 듣기가 좀 부담스러웠고, 그래서였는지 ’주라기음반’에 걸맞지 않게 흥행도 부진했다. 1997년에는 리믹스 앨범 을 발매하기도 했다.

4년이 흘러 2001년 그는 솔로 데뷔 30주년을 맞았다. 3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영예를 얻었으며, 9월에는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휘트니 휴스턴을 비롯해 엔 싱크, 브리트니 스피어스, 데스티니스 차일드, 어셔 등 당대 최고의 팝스타들이 출연한 가운데 그의 솔로 30주년 기념 공연을 가졌다.

그리고 10월 30일, 마이클 잭슨은 6년만의 정규 앨범 을 발표하며 다시 팬들 앞에 섰다. R&B 최고의 프로듀서 로드니 저킨스가 메인 프로듀서로 참여한 이 음반은 전작에 비해 훨씬 부드러워졌으며 한동안 찾아보기 힘들었던 특유의 활기 넘치는 리듬도 회복했다.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등 여러 좋은 일이 겹쳐서인지 밝은 분위기의 내용물들이 담겼다.

3마디의 독특한 리듬이 중독성을 발휘하는 첫 트랙 ‘Unbreakable’, 춤추기에 좋은 부드러운 댄스리듬 그리고 약간은 복고적 사운드가 듣기 편한 첫 싱글 ‘You rock my world’, 변화가 심한 비트가 인상적인 ‘Heartbreaker’ 등이 비트감 느껴지는 곡들. 라틴 풍의 기타 연주가 잔잔한 ‘Whatever happens’에서는 산타나의 무게감 있는 연주도 들을 수 있으며, ‘Speechless’, ‘The lost children’, ‘Break of dawn’ 같은 곡들은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발라드 곡들이다.
노래 : Diana Ross (다이애나 로스)
다이아나 로스(Diana Ross)는 록 역사에서 그룹 멤버와 솔로 아티스트로서 모두 정상의 자리에 오른 몇 안 되는 여성 가수다. 그녀가 리더로 있던 3인조 슈프림스(Supremes)는 1961년부터 1969년 해산할 때까지 12곡의 1위 곡과 10곡의 탑 텐 싱글을 배출하면서 여성 보컬 그룹의 스타일을 규정지었고, 1969년부터 시작한 솔로 활동으로 다시 6곡의 빌보드 싱글 차트 1위 곡을 포함한 26곡을 탑... 다이아나 로스(Diana Ross)는 록 역사에서 그룹 멤버와 솔로 아티스트로서 모두 정상의 자리에 오른 몇 안 되는 여성 가수다. 그녀가 리더로 있던 3인조 슈프림스(Supremes)는 1961년부터 1969년 해산할 때까지 12곡의 1위 곡과 10곡의 탑 텐 싱글을 배출하면서 여성 보컬 그룹의 스타일을 규정지었고, 1969년부터 시작한 솔로 활동으로 다시 6곡의 빌보드 싱글 차트 1위 곡을 포함한 26곡을 탑 40에 진입시키면서 그녀는 화려한 날개를 달고 높이 비상(飛上)했다. 이모션스(Emotions), 제이드(Jade), 티엘시(TLC), 스파이스 걸스(Spice Girls) 등 거의 모든 여성 보컬 그룹은 다이아나 로스가 ’짱’으로 있던 슈프림스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고 그 벽을 넘어야 비로소 여성 보컬 그룹의 1인자로 공인 받을 수 있었다. 또한 그녀는 피부 색깔에 관계없이 수많은 뮤지션들에겐 훌륭한 스승이자 좋은 선배의 본보기였다. 마이클 잭슨의 어린 시절 우상이 바로 다이아나 로스였으며 그녀를 닮길 원해 성형 수술을 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마이클 잭슨의 1987도 앨범 < Bad >에 수록된 ’Dirty Diana’가 싱글로 커트 되었을 때 많은 호사가들은 잭슨의 로스에 대한 애정(愛情)이 애증(愛憎)으로 바뀌었다고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1960년대 흑인 음악의 공장 모타운 레코드의 주력 상품이었던 슈프림스의 리드 보컬로 있으면서 모타운의 사장 베리 고디와 로맨틱한 관계를 유지했던 다이아나 로스는 뛰어난 외모와 치밀하게 아름다운 가창력, 그리고 세련된 매너로 그룹의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했다. 그녀의 이 스타 기질과 베리 고디의 아낌없는 서포트에 힘입어 다이아나 로스가 1969년 독립 활동을 발표하자 걸 그룹의 최고봉 슈프림스는 해산한다. ’Reach out and touch(20위)’, ’Remember me(16위)’, ’Surrender(38위)’, 그리고 마빈 게이(Marvin Gaye)와 태미 테럴(Tammi Terrell)이 함께 불러 1967년에 19위를 기록했던 ’Ain’t no mountain high enough’를 리메이크해 싱글 차트를 3주간 정복한 다이아나 로스는 성공적인 홀로서기를 했다. 이 노래들은 1984년 ’Solid(12위)’란 히트곡을 낸 부부듀엣 애쉬포드 & 심슨(Ashford & Simpson)이 수혈한 작품들이었다. 그녀의 이러한 엔터테이너적 재능은 단지 무대 위에서만 한정되지 않았고 스크린에서도 그 끼를 발산했다. 전설적인 재즈 싱어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의 일생을 영화로 만든 < 레이디 싱스 더 블루스 >에서 빌리 홀리데이 역을 성공적으로 소화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영광을 이루었고, 이후 < 마호가니 >와 < 더 위즈 > 등의 영화를 비롯해 TV 영화에도 얼굴을 내밀어 가볍지 않은 연기력을 과시했다. 흑인 디바 다이아나 로스는 1970년대를 통해 ’Touch me in the morning(1973년 1주간 1위)’, 마빈 게이와 호흡을 맞춘 ’You’re a special part of me(12위)’, ’Last time I saw him(14위)’, 국내에서도 애청된 ’Do you know where you’re going to(1976년 1주간 1위)’, 디스코 스타일의 ’Love hangover(1976년 2주간 1위)’ 같은 대형 히트곡들을 발표하면서 팝 역사에 ’다이아나 로스’라는 이름의 철도를 가설했다. 특히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디스코 성향의 곡들을 취입했는데 바로 그 상업적 음반의 결정판이 디스코가 사향 길에 접어들고 새로운 물결인 뉴웨이브가 도래하던 1980년에 공개한 < Diana >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디스코 밴드로 꼽히는 쉭(Chic)의 사령관이던 나일 로저스(Nile Rodgers)와 버나드 에드워즈(Bernard Edwards) 콤비가 전 곡의 작곡과 제작을 전담한 이 작품에서는 신해철이 한때 열광했다는 ’Upside down’이 그녀에게 다섯 번째 넘버원의 영광을 선사했고, 두 번째 싱글 ’I’m coming out’은 5위를 기록했다. 이 ’I’m coming out’은 1997년 노토리어스 B.I.G.(Notorious B.I.G.)의 두 번째 1위 곡인 ’Mo money mo problems’에 샘플링 되어 재조명되었다. 1980년에는 마이클 더글라스(Michael Douglas) 주연의 영화 주제가 ’It’s my turn(9위)’과 1981년에는 코모도스(Commodores) 출신의 라이오넬 리치(Lionel Richie)와 함께 영화 < 끝없는 사랑 >의 사랑의 테마 ’Endless love’로 빌보드 싱글 차트를 9주 동안 장기 집권하면서 영화 음악으로도 쉼 없는 인기 행진을 이어갔다. 1994년에는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와 루더 밴드로스(Luther Vandross)가 다시 불렀지만 원곡의 부드러움과 원숙함에는 미치지 못했다(1994년 2위). 이렇듯 1980년대 초반 이 흑진주의 인기는 거칠 것이 없었다. 1956년 6위를 기록했던 프랭키 라이몬 & 더 틴에이저(Frankie Lymon & The Teenager)의 ’Who do fools fall in love’를 커버해 7위에 랭크시켰고 ’Mirror Mirror’는 8위,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이 작곡과 프로듀싱을 담당한 ’Muscles(10위)’ 등으로 인기 차트를 융단폭격 하면서 올리비아 뉴튼 존(Olivia Newton John)과 함께 1980년대 초반 흑과 백을 대표하는 양대 산맥으로 우뚝 섰다. 1984년에는 훌리오 이글레시아스(Julio Iglesias)의 영어 앨범 < 1100 Bel Air Place >에 수록된 발라드 ’All of you(19위)’를 위해 입을 맞추었으며 같은 해 가을에 공개된 자신의 독집 음반 < Swept Away >에서는 록적인 타이틀 트랙(19위)과 ’Missing you(10위)’가 사랑 받았다. ’Missing you’는 1984년 4월 1일 아버지의 손에 의해 비극적으로 사망한 친구이자 음악 동료인 마빈 게이를 추모하는 곡으로 라이오넬 리치로부터 받은 명곡이었다. 이 곡은 현재까지 그녀의 마지막 탑 텐 히트 싱글로 남아있다. 1990년대에도 꾸준한 레코딩 활동과 검증된 연기력을 바탕으로 여러 TV 영화에 간간이 모습을 드러낸 다이아나 로스는 2001년 여행 차 방문한 유럽에서 물건을 훔치다 걸리는 망신을 당해 타블로이드 신문을 크게 장식하기도 했다. 1960년대에는 모타운 레코드의 사장 베리 고디에 의해 움직이는 바비 인형처럼 체제에 순응하는 가수로 인식되었고 그 당시 슈프림스는 새로운 음악 트렌드를 창조하면서 그 유행을 좇았다. 한편에선 소울이 등장해 흑인 형제자매들의 자긍심을 표현했지만 슈프림스는 그 현실을 외면한 채 침묵의 악보에 그려진 음표에 의한 사랑타령으로 엄청난 부와 인기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백인들로부터도 거부감 없는 ’엉클 톰’이었다. 이것은 현재까지 당대 최고의 여가수인 다이아나 로스에게 쉽게 아물지 않는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흑진주가 팝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그녀의 음악 인생이 현대 흑인 음악의 역사와 그 궤적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자신에게 밀려오는 음악적인 고독과 인간적인 자괴감을 잊을 수 있었다. 종소리는 때리는 자의 힘만큼 울려 퍼지듯 대중 음악의 내력에서 다이아나 로스의 이름도 그녀의 명성만큼이나 굵고 선명하게 남아있다.
노래 : Lionel Richie (라이오넬 리치)
1980년대에 마이클 잭슨과 더불어 가장 큰 인기를 얻었던 흑인 남자가수로 이미 1970년대를 풍미한 대표적 소울 펑키 그룹 코모도스(Commodores)의 리드보컬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룹만으로서 음악생활을 국한할 수 없는 뛰어난 재능으로 1980년대 팝 음악계를 석권했으며 세월이 흐른 지금도 ‘Hello’ ‘Stuck on you’ ‘Sa you say me’ 등 그가 만든 탁월한 선율의 노... 1980년대에 마이클 잭슨과 더불어 가장 큰 인기를 얻었던 흑인 남자가수로 이미 1970년대를 풍미한 대표적 소울 펑키 그룹 코모도스(Commodores)의 리드보컬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룹만으로서 음악생활을 국한할 수 없는 뛰어난 재능으로 1980년대 팝 음악계를 석권했으며 세월이 흐른 지금도 ‘Hello’ ‘Stuck on you’ ‘Sa you say me’ 등 그가 만든 탁월한 선율의 노래들이 꾸준히 애청되고있다. 미국 앨러바마의 터스카기 출신인 라이오넬 리치(Lionel Richie)는 같은 대학 동창생들이 모여서 결성된 그룹 코모도스의 음악지휘자로 그룹의 대다수의 히트곡을 직접 쓰고 불렀다. 그룹과 직결되는 곡들인 `Easy , `Three Times A Lady , `Still’ 등 이지 리스닝 계열의 발라드들이 바로 그의 작품이었다. 또 1980년에는 컨트리 팝의 거성 케니 로저스(Kenny Rogers)의 최대 히트곡 ‘Lady’를 작곡해 주었고 이듬해엔 앨범 프로듀서를 담당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 영화 ‘Endless Love’의 주제가를 직접 제작하여 당대 최고의 여가수 다이애나 로스(Diana Ross)와 듀엣으로 불러서 싱글차트 정상에 9주간 점령, 최고도에 오른 인기를 과시했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1982년에 솔로 데뷔앨범 < Lionel Richie >를 내놓고 본격적인 솔로 가수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앨범의 첫 싱글 `Truly’ 가 손쉽게 차트 정상에 올랐고, (이 곡은 Commodores식의 발라드를 답습한 결과로 그에게 첫번째 Grammy 트로피를 안겨준 곡이 되었다.) 계속해서 `You are`, `My love’ 등이 차트 상위권을 공략했다. 1983년에는 그를 월드 슈퍼스타로 부상시킨 앨범 < Can’t Slow Down >이 발매되어 미국에서만 판매고가 1000만장을 넘어섰고 세계적으론 2000만장 이상이 팔려나가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 이 LP는 3년 동안 앨범차트에 머무르면서 앨범차트 정상 등극은 물론, 이듬해 그래미상에서는 ‘올해의 앨범’ ‘올해의 프로듀서’부문 상을 수상했다. 수록곡 중 5곡이 싱글로 발매되어 모두 차트 톱10에 오르는 연쇄 히트를 기록했다. 업 템포의 댄스 넘버 `All night long(All night) 이 4주간 정상에 오르며 솔로로서 3번째 골드 레코드를 기록했고, 미국과 영국에서 모두 차트 정상에 오른 감성적인 발라드 `Hello‘ 는 국내에서도 아직까지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밝고 통통 튀는 리듬이 인상적인 곡 ‘Running with the night’, 감미로운 리듬의 극치 ‘Penny lover’, 복고풍의 편안함이 압권인 ‘Stuck on you’가 바로 그 곡들이었다. 그 무렵 1984년 L.A 올림픽에서는 폐막식의 피날레공연을 맡기도 했다. 1985년에는 마이클 잭슨과 함께 기아로 고통받는 아프리카를 위한 기금모금 행사의 일환으로 앨범 < We Are The World >의 타이틀곡을 제작하여 400만장 이상의 싱글 판매고를 올렸고, 이어서 또 한차례 영화음악으로 대박을 터트렸으니 바로 영화 < 백야 >(White Nights)의 주제곡인 ‘Say you say me’였다. 역시 골드가 이 곡은 차트 정상을 4주간 점령했고 이듬해 그에게 오스카상을 안겼다. 이 곡이 수록된 솔로 3집 앨범 < Dancing On The Ceiling >은 1986년에 발매되어 전작의 성공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싱글차트 2위까지 오른 ‘Dancing on the ceiling’을 비롯하여 서정적인 발라드들인 `Ballerina girl(7위)’과 ‘Love will conquer all(9위)’, 레게리듬의 경쾌한 멜로디가 흥겨움을 더하는 `Se la(20위)’, 그리고 당시 최고의 컨트리 그룹 앨러바마(Alabama)가 함께 불러준 곡 `Deep river woman(71위)’ 등 싱글이 무더기로 발표되었다. 이후로 새 앨범이 발매될 때까지 6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애초 20년 가까이 계속해온 음악생활을 잠시 접어두고자 한 휴지기였지만 그런 선택은 대중의 기억 속에 차츰 잊혀져 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1992년 모타운 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컴필레이션 앨범 < Back To Front >는 신곡 셋 외에 모두 기존의 히트곡들로 채워져 창작력에 제동이 걸린 듯한 느낌을 주었다. 부인의 이혼소송에 따른 위자료 문제로 앨범 발매를 늦추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다시 4년의 세월이 흐른 뒤 4번째 정규앨범 < Louder Than Words >로 모처럼 복귀, 10년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듯이 대가(大家)다운 도시화되고 세련된 R&B 음악을 선보였으나 실적은 기대 이하였다. 1998년 < Time >과 2001년 < Renaissance > 등 계속해서 선보인 신작 역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마이클 잭슨, 프린스와 더불어 1980년대를 주름잡던 흑인음악의 삼성(三星) 중의 하나는 쇠퇴해 가는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1978년부터 1986년까지 매년 자신이 만든 곡을 싱글차트 정상에 올린 진기록, 4개의 그래미상, 9개의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 상,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상이라는 풍부한 수상경력이 주는 가치 그리고 백인들도 거부할 수 없는 그만의 ‘크로스오버 러브 R&B 발라드’의 흡수력은 아직도 천연히 빛을 발한다.
노래 : Donny Hathaway (도니 헤더웨이)
노래 : Aretha Franklin (아레사 프랭클린)
20세기를 정리하는 작업이 러시를 이루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궁금중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가수는 누구였는가? 많은 음악팬들이 먼저 프랭크 시내트라 또는 앨비스 프레슬리를 떠올릴 것이다. 신세대 같으면 머라이어 캐리라고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구 대중음악계는 거의 그 주인공을 흑인 여가수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으로 낙점한 상황이다. 먼저 시사주간지 < 타임 >이 선정한 ‘2... 20세기를 정리하는 작업이 러시를 이루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궁금중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가수는 누구였는가? 많은 음악팬들이 먼저 프랭크 시내트라 또는 앨비스 프레슬리를 떠올릴 것이다. 신세대 같으면 머라이어 캐리라고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구 대중음악계는 거의 그 주인공을 흑인 여가수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으로 낙점한 상황이다. 먼저 시사주간지 < 타임 >이 선정한 ‘20세기 문화예술인 20인’을 보자. 여기에는 대중음악인 넷이 포함되었는데 그들은 프랭크 시내트라, 비틀즈, 밥 딜런 그리고 아레사 프랭클린이었다. # 20세기는 왜 아레사 프랭클린인가? 놀라운 사실은 로큰롤의 황제라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자타가 공인하는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빠졌다는 점이다. 두 대중음악사의 거인은 누가 봐도 아레사 프랭클린에 비해서는 대중적 지명도나 후대의 영향력 측면에서 앞선다. 만약 흑인 음악인 한 사람을 꼽았어야 했어도 그 주인공은 마이클 잭슨이 되어야 당연하다. 그런데 왜 아레사 프랭클린인가? 아레사 프랭클린이 명단에 오른 이유는 마이클 잭슨을 누른 ‘흑인의 대표성’ 때문으로만 볼 수 없다. 흑백을 떠나서 팝 음악계 전체를 진동시킨 ‘경이로운 가창력’ 때문이다. 아레사 프랭클린은 42년생 미국 멤피스에서 태어나 1960년대말 스타덤에 오른 왕년의 가수지만 지금도 노래하면 음악관계자들은 만장일치로 그녀를 거명한다. 얼마나 노래를 잘하길래 그런가. 몇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그녀가 1967년 프로듀서 제리 웩슬러의 지원 아래 어틀랜틱 음반사에서 처음 앨범을 취입했을 때 반주를 해준 사람들. 이른바 세션맨들은 아레사 프랭클린의 노래솜씨에 그만 넋을 잃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너도나도 ‘이런 환상적인 레코딩에 내가 참여한 것이 영광’이라며 어울려 춤을 췄다는 것이다. 지난해 미국의 유선방송국VH원이 주최한 ‘디바스 라이브’(음반으로도 나왔다) 공연에서는 관람객 중 한 사람이었던 여배우 사라 제시카 파커가 인상적인 소감을 남겼다. “아레사를 보기 전에 난 스타에 반한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난 홀린 기분이다. 아레사가 나한테 ‘옷이 멋져요’ 하길래 난 주저없이 ‘가지세요’라고 했다. 발가벗고 여기를 나가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그녀는 옷을 가질만하다!” 지난해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아레사 프랭클린은 다시 한번 천부적인 가창력으로 사람들의 혼을 뺐다. 그녀는 시상식장에서 노래부르기로 돼있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병으로 불참하게 되자 갑작스럽게 대타로 뛰게 되었다. 뒷무대에서 불과 몇분 연습하고 나서 그녀는 거뜬하게 파바로티의 ‘네순 도르마’를 불렀다. 더욱이 72인조 오케스트라에 맞추기 위해 그 곡을 파바로티의 키로 노래했다. 주최측, 오케스트라 단원 그리고 객석 모두가 ‘경외’의 박수를 쳤다. 그녀에 대한 평자들의 찬사와 칭송은 끝이 없다. ‘형언하기 어렵다’(No other description will do)가 대부분이다. 음악평론가 벤 에드먼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지난 50년간 우리를 놀라게 하고 겁에 질리게 한 또다른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영국의 록잡지 < 모조 >는 지난해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100인’을 음악관계자 설문을 통해 선정한 바 있다. 여기서 1위는 말할 것도 없이 아레사 프랭클린이었다. < 모조 >측은 2위와 표차를 엄청나게 내고 그녀가 넘버 원 싱어가 된 것에 놀랐다. 다시금 아레사 프랭클린이 남녀, 흑백, 장르를 통틀어 ‘20세기의 최고 가수’라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 그녀는 소울의 영원한 여왕 그녀의 음악은 목소리와 창법의 미학뿐 아니라 시대성이 있다. < 타임 >지가 20세기의 위대한 문화예술인 중 한 사람으로 뽑은 진정한 이유다. 1960년대 후반 아레사 프랭클린이 불러 유명한 곡 ‘존경(Respect)’, ‘체인 오브 풀스(Chain of fools)’, ‘생각해요(Think)‘ 등에는 당시 흑인들의 당당한 의식이 배어 있다. 흑인 민권운동의 불길이 솟아오르던 그 무렵 흑인들은 백인 지배사회에서 결코 흑인들이 열등한 인종이 아니며, 따라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흑인의 영혼을 의미하는 소울(Soul)이었다. 소울 음악은 때문에 목청을 돋워 질러대는 ‘샤우트’를 특징으로 했다. 국내에서도 록의 비조로 불리는 신중현이 소울을 창조적으로 도입해 김추자, 박인수, 펄 시스터즈와 같은 소울 가수가 1970년대 초반 두각을 나타낸 바 있다. 1967년 미국의 디트로이트에 흑인 폭동이 발발했을 때 성난 흑인 민중들은 백인들에게 존경을 요구하는 의미에서 아레사 프랭클린의 그해 히트곡 ‘존경’을 시위대의 찬가로 불렀다. 이듬 해 디토로이트 시장 제롬 카바나는 ‘아레사 프랭클린의 날’을 선포하기도 했다. 미국사회가 이때부터 흑인의 음악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백인들도 흑인의 레코드를 구입하게 된 것이다. 아레사 프랭클린은 다시 말해 흑인 소울의 존재를 만천하에 고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신(神)의 조리에 의한 거 같은 지존(至尊)의 가창력으로 그것을 전했으니 그 위력은 더할 나위가 없다. 또 지적하는 바이지만 ‘존경’을 듣고 동료가수 오티스 레딩은 혀를 내둘렀다. 이 곡은 그가 쓴 곡으로 직접 불러 발표한 바도 있는데, 아레사 프랭클린이 완전히 새롭게 그리고 완벽하게 소화한 것을 듣고 질려버린 것이었다. 오티스 레딩의 경탄. “난 내 노래를 잃어버렸어. 저 여자가 내 곡을 빼았아갔어!” 아레사는 조금도 변함없는 ‘소울의 여왕(Queen of soul)’으로 통한다. ‘여성 소울(Lady soul)’이란 별명도 있다. < 디바스 라이브 >에서 아레사 프랭클린과 호흡을 맞춘 머라이어 캐리도 그렇게 호칭하고 있지만 이 호칭들은 영원히 아무도 넘아다볼 수 없을 것 같다.
노래 : Dusty Springfield (더스티 스프링필드)
35년여에 달하는 긴 세월 동안 파퓰러 뮤직의 정상에서 활동했던 여가수 더스티 스프링필드(Dusty Springfield)는 백인이 부르는 흑인 소울 이른바 ‘블루 아이드 소울’을 1960년대부터 구사하면서 백인 소울의 영역을 개척한 위대한 여가수로, 흑인에 못지 않은 강렬한 보컬 호소력에 팝의 부드러운 느낌을 동시에 지녔으며, 재즈적 감성까지 구현해 낸 대형 싱어다. 1996년 공전의 반향을 부른 영화 < 접속... 35년여에 달하는 긴 세월 동안 파퓰러 뮤직의 정상에서 활동했던 여가수 더스티 스프링필드(Dusty Springfield)는 백인이 부르는 흑인 소울 이른바 ‘블루 아이드 소울’을 1960년대부터 구사하면서 백인 소울의 영역을 개척한 위대한 여가수로, 흑인에 못지 않은 강렬한 보컬 호소력에 팝의 부드러운 느낌을 동시에 지녔으며, 재즈적 감성까지 구현해 낸 대형 싱어다. 1996년 공전의 반향을 부른 영화 < 접속 >에 그녀의 노래 ‘The look of love’가 삽입되어 애청되면서 국내의 신세대 팬들과도 친숙해졌다. 1939년 영국 런던에서 메리 이사벨 캐서린 버나데트 오브리엔(Mary Isabel Catherine Bernadette O’Brien)이란 본명으로 태어나 1958년 3인조 보컬 그룹 라나 시스터스(Lana Sisters)에서 가수활동을 시작했으며 1960년에는 오빠 디온(Dion), 그의 친구 팀 페일드(Tim Feild)와 함께 더 스프링필즈(The Springfields)를 결성, 본격적인 활동을 펼친다. 더스티 스프링필드로 개명하고 오빠 디온도 팀 스프링필드로 이름을 바꾸며 이듬해 ‘Dear John’으로 데뷔한 스프링필즈는 처음에 차트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으나 1961년 <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 > 독자 선정 영국 최우수 보컬 그룹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1963년 발표한 싱글 ‘Island of dreams’와 ‘Say I won’t be there’가 잇따라 영국 차트 5위에 오르면서 인기 그룹으로 비상한다. 하지만 주가를 올리고 있던 시점에 더스티 스프링필드가 솔로활동을 선언하면서 그룹은 해체를 맞는다. 이미 그룹을 통해 풍부한 음색과 가창력을 대중에게 알린 터라 솔로활동은 순풍에 돛단 듯 시작부터 성공가도를 질주했다. 허스키하면서 소프트한 느낌은 로큰롤 밴드가 맹위를 떨치던 이른바 브리티시 인베이전 시대에 드물게 여성 솔로가수로서 성공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주었고 처음부터 그녀는 단순한 팝이 아닌 ‘미국적인 소울’의 필을 표현했다. 작곡 팀 마이크 호커와 이보르 레이먼드는 미국 흑인음악의 상징인 모타운 식으로 쓴 곡 ‘I only want to be with you’로 그녀에게 차트4위(미국 12위)라는 좋은 성적을 안겼다. 이 곡은 얼마 전 국내 칼라핸드폰 광고에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었으며 1976년에는 비틀스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영국의 틴 아이돌 그룹 베이 시티 롤러즈(Bay City Rollers)가 리메이크해 친숙해지면서 명곡으로 자리잡았다. 더스티 스프링필드는 이어 역시 호커와 레이먼드 컴비가 써준 ‘Stay awhile’로 차트13위에 올랐으며 틴 팬 앨리 전통을 계승한 전설적 작곡 콤비 버트 바카라크(Burt Bacharach)와 할 데이비드(Hal David)가 만들어준 ‘I just don’t know what to do with myself’와 함께 3위로 다시 상위권을 점령했다. 디온 워릭(Dionne Warwick)을 키워낸 이들은 영국 여가수로서 드물게 스탠더드와 소울 감성을 동시에 간직한 그녀를 높이 평가해 디온 워릭이 취입했던 곡 ‘Wishin’ and hopin’’을 제공, 마침내 미국차트 6위에 올려 미국에서도 통하는 가수로 만들어 냈다. 이 때 더스티는 뉴욕에 건너와 녹음하면서 영미(英美)를 관통하는 명실상부한 대서양 스타로 똬리를 틀기 시작한다. ‘Wishin’ and hopin’’에 이어 ‘All cried out’(41위)은 심지어 미국에서만 싱글로 발표되었다. 1964년이 저물어 가던 겨울 오빠 팀 스프링필드가 쓴 곡 ‘Losing you’으로 영국 차트 9위(미국91위)에 오른 그녀는 1965년과 1966년에도 쾌조를 보여 훗날 팝 보석으로 널리 애청된 ‘In the middle of nowhere’(영국8위)와 명콤비 캐롤 킹과 제리 고핀이 쓴 발라드 ‘Some of your lovin’ (영국8위) 그리고 ‘Little by little’(영국17위) 등을 줄줄이 내놓았다. 이 시점에 꼭 기억해야 할 곡은 더스티의 것으로서는 가장 많이 팔렸으며 아직까지 라디오를 통해 오랜 사랑을 받고 있는 ‘You don’t have to say you love me’(엘비스 프레슬리가 리메이크하기도 했다)로 이 곡은 영국차트 정상에 이어 미국에서도 4위를 차지했다. 다시 캐롤 킹과 제리 고핀이 준 ‘Goin’ back’(영국10위)과 ‘All I see is you’(영국9위, 미국20위) 두 곡을 더 히트시킨 그녀는 이 두 곡이 담긴 베스트 앨범 < Golden Hits >를 차트에 6개월 동안 올려놓는 기염을 토했으며, 이러한 성공으로 국제적 팝 스타로 도약, 영국 BBC 텔레비전의 음악프로 MC로 뽑히기도 했다. 당시 <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 >지의 여론조사에서 최우수 영국 여가수와 최우수 국제 여가수에 선정되는 기쁨도 누렸다. 1967년 들어 미국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에서 보내게 된다. 그녀의 국제적인 명성이 더욱 확산된 가운데 ‘I’ll try anything’(영국13위, 미국40위)이 히트했고, 바카라크와 데이비드 콤비의 곡으로 007영화 < Casino Royale >의 삽입곡인 ‘The look of love’ 또한 미국에서 22위에 올라 변함 없는 인기를 과시했다. 이 곡은 30여 년이 지난 1996년 한국영화 < 접속 >에 삽입되어 천지를 진동시켰다. 1968년에는 팝 명반으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 Dusty in Memphis >를 발표한다. 미국의 소울의 도시 멤피스에서 녹음한 이 앨범은 ‘팝과 소울’의 절묘한 결합으로 빠짐없이 여성 팝 보컬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거론되고 있으며, 또한 더스티의 음악을 ‘블루 아이드 소울’로 일컫게 하는데 결정타가 됐던 작품이기도 하다. < Dusty in Memphis >에선 미국 10위를 기록한 ‘Son of a preacher man’를 비롯해 ‘Don’t forget about me/Breakfast in bed’ ‘The windmills of your mind’(스티브 매퀸이 주연한 영화 < Thomas Crown Affair >의 주제곡으로 1999년에 영화가 피어스 브로스넌 주연으로 리메이크되면서 이 곡도 스팅의 노래로 리메이크됐다)가 연속 싱글로 나왔지만 비평적 찬사만큼 상업적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1970년 발표한 앨범 < A Brand New Me > 이후 그녀의 활동과 인기는 눈에 띄게 후퇴했으며 1972년 < See All Her Faces >와 이듬해 < Cameo >는 차트에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곧 사라져 버렸다. 이후 긴 휴식기를 마치고 1978년 < It Begins Again >, 1979년 < Living Without Your Love >, 1982년 < White Heat > 앨범을 발표하는 등 다시 왕성한 활동을 펼쳤지만 자신의 앨범보다는 딴 뮤지션들과 함께 작업한 곡들에서 인기를 누리는 독특한 양상을 보였다. 1984년에는 스펜서 데이비스(Spencer Davis)와 ‘Private number’를 불러 인기를 얻었고, 1987년에는 카펜터스의 리처드 카펜터(Richard Capenter)의 앨범에서 ‘Something in your eyes’를 불러 건재함을 과시했다. 바로 직전 1987년 펫 샵 보이스(Pet Shop Boys)와 호흡을 고른 곡 ‘What have I done to deserve this’는 그녀의 재기를 몰고 온 기폭제가 됐다. 평소 더스티 스프링필드를 존경해 온 펫 샵 보이즈의 초청으로 참여해 고수(高手)의 멜로디 파트 가창력을 시범한 이 곡은 영국 차트2위를 기록한 데 이어 미국차트도 강타, 역시 2위를 밟았다. 이 곡의 대성공과 함께 다시금 자신의 솔로 히트곡들을 생산, 1989년 역시 펫 샵 보이스가 만들어 준 영화 < Scandal >의 삽입곡 ‘Nothing has been proved’를 영국차트 16위까지 올렸으며, 같은 해 ‘In private’도 14위에 랭크시키며 관록의 힘을 과시한다. 펫 샵 보이스가 4곡을 맡은 1990년 앨범 < Reputation >도 차트38위까지 오르는 히트를 기록했다. 50살 초로(初老)에도 활동의 가속페달을 밟으며 노익장을 과시한 그녀는 1995년에도 < A Very Fine Love >를 발표했지만 얼마 후 유방암으로 투병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병이 호전되어 가던 1999년 3월 그녀는 엘튼 존과 함께 로큰롤 명예전당에 이름을 올린 지 10일 후에 암이 재발하면서 60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노래 : Etta James (에타 제임스)
재즈 소울 블루스 보컬 재즈 소울 블루스 보컬
노래 : Percy Sledge (퍼시 슬레이지)
노래 : Ben E. King (벤 이 킹,Benjamin Earl King)
멤버 : 재키 잭슨(Jackie Jackson, 보컬, 탬버린), 티토 잭슨(Tito Jackson, 보컬, 기타), 저메인 잭슨(Jermaine Jackson, 보컬, 베이스기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보컬, 퍼커션, 피아노, 기타), 랜디 잭슨(Randy Jackson, 보컬, 봉고, 키보드, 신디사이저, 베이스기타) 멤버 : 재키 잭슨(Jackie Jackson, 보컬, 탬버린), 티토 잭슨(Tito Jackson, 보컬, 기타), 저메인 잭슨(Jermaine Jackson, 보컬, 베이스기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보컬, 퍼커션, 피아노, 기타), 랜디 잭슨(Randy Jackson, 보컬, 봉고, 키보드, 신디사이저, 베이스기타)
1960년대 제임스 브라운과 더불어 흑인 대중음악의 산 증인으로 칭송되는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흑인 팝 소울 음악의 전설 모타운 레코드(Motown)사에 소속되어 음악활동을 시작, 1970년대부터 셀프 프로듀싱(Self-producing)을 선언하며 앨범 제작 전 과정을 진두지휘하는 ’아티스트’의 천재(天才)를 부각시킨 팝 스타이다. 천부적인 작곡 감각과 각종 키보드를 비... 1960년대 제임스 브라운과 더불어 흑인 대중음악의 산 증인으로 칭송되는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흑인 팝 소울 음악의 전설 모타운 레코드(Motown)사에 소속되어 음악활동을 시작, 1970년대부터 셀프 프로듀싱(Self-producing)을 선언하며 앨범 제작 전 과정을 진두지휘하는 ’아티스트’의 천재(天才)를 부각시킨 팝 스타이다. 천부적인 작곡 감각과 각종 키보드를 비롯, 앨범 녹음시 대부분의 악기를 혼자서 다 연주해 낼 정도의 다재(多才)를 유감 없이 발휘한 그는 도무지 시각 장애인이라고 믿을 수 없는 독창성을 자신에 음악에 담아낸다. 또한 마빈 게이(Marvin Gaye)와 함께 1970년대 미국 사회 내 흑인들의 비참한 삶과 애환을 표현한 ’게토 리얼리티’를 얘기한 음악인으로 기억되면서 흑인 인권 지도자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하자는 운동을 이끌었던 사회 운동가이기도 했다. 자신의 노래를 통해 스티비 원더는 지금껏 인종과 이념의 벽을 넘어선 절대불변의 숭고한 가치인 ’사랑의 전도사’임을 전 세계에 알려왔다. 그의 음악만큼이나 이런 그의 행적은 전 세계 음악인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으로 그를 기억하게 했다. 1950년 5월 13일 스티브 랜드 모리슨(Steveland Morrison)이라는 본명으로 미국 미조리주 출신인 그는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의 과잉 산소 공급 사고로 맹인이 되었다. 디트로이트로 이주해 소년기를 보낸 그는 일찍부터 음악적으로 재능을 드러내 10살이 되기도 전에 대부분의 악기를 스스로 터득하는 천재성을 보인다. 1962년 11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그는 천재성을 인정받으며 베리 고디(Berry Gordy Jr.)가 이끄는 모타운 레코드사와 계약을 한다. 리틀 스티비 원더(Little Stevie Wonder)라는 아름으로 발표한 그의 첫 싱글인 라이브 버전 ’Fingerprints-part 2’(1963)가 발표 즉시 차트 1위에 오르며 순조롭게 출발한다. 1965년부터 이후 6년 간 ’Uptight’(1966), ’I was made to love her’(1967), ’For once in my life’(1969), ’My cherie amour’(1969), ’Yester-me, yester-you, yesterday’(1969), ’Signed, sealed, delivered’(1970)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며 그는 명실상부한 모타운 대표 인기스타로 떠오른다. 21살이 되던 1971년 모타운 측과 재계약을 앞두고는 ’앨범 제작에 관한 모든 통솔권을 자신에게 위임할 것’이라는 계약 조건을 내세운다. 당시까지 철저한 ’스타 시스템’으로 운영되던 모타운 사의 입장에선 매우 부담스러웠던 요구를 그는 끝내 관철시키며 셀프 프로듀싱으로 제작한 첫 앨범 < When I’m Coming From >(1971)을 발표한다. 이듬해인 1972년 < Music of my Mind: 앨범 차트 21위 >를 시작으로 같은 해 가을 발표된 명반 < Talking Book:앨범 차트 3위 >(1972)을 연속으로 히트시키며 앨범 모든 수록 곡의 작곡은 물론 연주와 프로듀싱을 혼자서 해낸다. 또한 이 앨범은 A면의 첫 곡 ’You are the sunshine of My life’와 B면의 첫 곡 ’Superstition’을 모두 싱글차트 1위에 등극하는 놀라운 기록을 수립한다. 1972년 같은 해 발표된 두 장의 앨범을 통해 그는 기존 3분대의 모타운 식 히트 곡의 틀을 벗어나 ’Super woman’, ’Maybe your baby’와 같은 6-7분대의 대곡을 과감히 수록했고, 재 계약을 통해 받은 계약금으로 클라비넷, OBX, ARP, 폴리포닉, 무그와 같은 다양한 신시사이저 장비들을 도입, 사운드의 혁신을 일궈낸다. 이듬해 발표한 < Innervisions >(1973)는 그의 싱어 송 라이터로서의 위상을 한층 높여준 명반으로 흑인 빈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Living in the city’와 재즈적인 접근을 강하게 드러낸 ’Too High’, ’Superstition’에 버금가는 펑키한 넘버 ’Higher Ground’, 절대자인 신에게 헌정하는 가스펠 곡 ’He’s Misstra know it all’을 담은 수작이었다. 전작에 이어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하며 < Innervisions >는 이듬해인 1974년 그래미 상 ’올해의 앨범’ 부문을 비롯, 4개 부문을 휩쓰는 쾌거를 올린다. 1974년 교통사고로 심한 부상을 당하며 잠시 활동의 위기를 맞은 그는 이에 아랑곳없이 < Fulfillingness’ First Finale >(1974)를 발표하며 ’You Haven’t done nothing’, ’Boogie on Reggae woman’을 각각 팝 차트와 R&B 차트 1위에 올리며 앨범은 1975년 다시 한번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을 비롯, 5개 부문을 석권한다.(올해의 앨범상을 연속으로 수상한 건 스티비 원더가 처음이었다.) 1975년 모타운 사와 1천 3백만 불의 재계약을 한(당시 팝 음악계에선 최고의 액수) 그는 2년여의 준비 끝에 더블 앨범< Songs in the key of life >(1976)을 발표한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히트곡이 쏟아진 앨범에서 ’Sir Duke’, ’I Wish’가 팝 차트 1위에 오르고, 팝 가수 조지 마이클이 1998년에 리메이크 하기도 한 7분이 넘는 대곡 ’As’(36위)와 재즈 기타리스트 조지 벤슨(George Benson)의 코러스와 재즈 플롯주자 바비 험프리(Bobby Humphrey)가 참여한 라틴 팝 ’Another star’(32위) 역시 좋은 반응을 얻는다. < Songs on the key of life >는 이듬해 1977년 다시 그에게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을 안겨다 준다. 70년대 말, 스티비 원더는 흑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하자는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음악 외에도 흑인의 권익신장 운동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그는 4년여의 공백 끝에 발표한 < Hotter than July >(1980)의 수록곡 ’Happy Birthday’를 통해 이런 그의 노력을 전 세계에 알린다.(결국 1985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일은 미국 국경일로 지정된다) 앨범에선 이 외에 레게의 시인 밥 말리(Bob marley)에게 헌정하는 레게 넘버 ’Master Blaster(jammin’)’와 지금껏 애청되는 그의 러브 발라드 ’Lately’를 차트에 진입시키는(각각 5위, 64위) 성과를 거둔다. 영화 음악 작곡에도 열심이었던 스티비 원더는 < Journey Through the secret life of Plant >(1979)를 시작으로, 그에게 오스카 주제가 상을 안겨준 영화 < Woman in Red >(1984)의 테마 곡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를 팝 차트 1위에 올리며 전 세계를 스티비 원더 열풍 속으로 다시 한번 몰아넣는다. 그의 영화 음악 작업은 < Jungle Fever >(1991), < The adventure of Pinocchio >로 계속된다. 1983년엔 폴 메카트니와 함께 한 듀엣 곡 ’Ebony & Ivory’로, 1985년 ’Part time Lover’로 다시 팝 차트 1위에 오르며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 Character >(1987)이후 8년이라는 긴 공백기에 들어간 그는 < Conversation Peace >(1995)로 다시 팝 무대에 복귀한다. 90년대 활동은 비록 예전만큼의 날카로운 창조력은 아니었지만 전 세계 수많은 팝 음악인들의 기대와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다시는 그 누구도 재현 못할 ’팝 음악의 대가’임을 다시 한번 전 세계에 알린다.
노래 : Brenda Holloway (브렌다 할러웨이)
1980년대를 대표하는 뉴웨이브 밴드 컬쳐 클럽(Culture Club)은 1981년 영국 런던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그룹의 보컬이자 간판인 아이콘 보이 조지는 데이비드 보위와 티 렉스 같은 글램 록에 흠뻑 빠져 십대시절을 보냈고 이는 그의 외모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보이 조지와 베이시스트 미키 크레이그, 기타리스트 존 스웨이드는 드러머 존 모스를 만나며 밴드의 모습을 갖추어갔고 존 스웨이드 대신 들어온 기타... 1980년대를 대표하는 뉴웨이브 밴드 컬쳐 클럽(Culture Club)은 1981년 영국 런던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그룹의 보컬이자 간판인 아이콘 보이 조지는 데이비드 보위와 티 렉스 같은 글램 록에 흠뻑 빠져 십대시절을 보냈고 이는 그의 외모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보이 조지와 베이시스트 미키 크레이그, 기타리스트 존 스웨이드는 드러머 존 모스를 만나며 밴드의 모습을 갖추어갔고 존 스웨이드 대신 들어온 기타연주자 로이 헤이가 영입되면서 컬처 클럽은 완성되었다. 1982년에 버진 레코드와 계약한 이들은 싱글 ‘White boy’와 ’I’m afraid of me’를 발표했고 보이 조지의 독특한 스타일은 음악과 패션계에서 주목을 받게된다. 같은 해에 ‘Do you really want to hurt me’는 영국 차트 정상(미국 차트 2위)을 차지하며 화려한 성공의 시작을 알렸고 이어 대망의 데뷔 앨범 < Kissing To Be Clever >이 발표되었다. 영국 3위와 미국 9위의 실적을 올린 ‘I’ll tumble 4 ya’과 LP판에만 수록되어 영국 3위 미국 2위를 차지한 ‘Time(Clock of the heart)’이 수록된 이 첫 번째 음반은 록과 댄스, 소울까지 뒤섞인 잡종 음악에 보이 조지의 다분히 게이적인 성향이 짙은 현란한 옷차림과 메이크업, 그리고 복고적인 목소리로 ‘보이 조지’라는 하나의 트렌드를 탄생시킨다. 미국에서도 성공행진을 시작한 1983년엔 지금까지도 1980년대를 대표하는 음반으로 손꼽히는 < Colour By Numbers >를 출시한다. 시사주간지 < 타임 >으로부터 ‘모든 팝을 담아낸 포켓’이라는 평을 받은 이 앨범은 ‘Church of the poison mind’, ‘Karma chameleon’, ‘Miss me blind’ 등 3장의 전미 톱10 싱글을 터뜨리면서 그룹을 듀란 듀란과 더불어 시장과 MTV에서 가장 잘 팔리는 밴드로 부상시켰다. ‘Karma chameleon’은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1위에 올랐으며 국내에서도 상당한 파급력을 발휘했다. 톱10 싱글 말고도 ‘It’s a miracle’은 13위에 올랐고 비록 싱글로 나오지 않았지만 엘튼 존 노래를 연상시켰던 ‘Victims’도 널리 애청되었다. 이들은 84년 그래미상에서 최우수 신인상을 받았고 브릿 어워즈에서도 포효했다. 하지만 1984년에 내놓은 앨범 < Waking Up With The House On Fire >는 ‘The war song’과 ‘Mistake No.3’만이 간신히 차트에 명함을 내밀었을 뿐 이전만큼의 인기는 얻지 못했다. 1986년의 < From Luxury To Heartache >는 더욱 참패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Move away’만이 순위에서 반짝하다가 사라져버렸다. 이즈음 이미 보이 조지는 헤로인 중독 상태였고 불운은 계속되어 마리화나 소지혐의로 영국경찰에 체포되는가하면 앨범의 키보드 연주를 했던 마이클 루데츠키(Michale Rudestski)가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보이 조지의 집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어 그는 언론의 돌팔매질을 당했다. 결국 < From Luxury To Heartache >는 마지막 앨범이 되었으며 1986년 밴드는 해체됐다. 보이 조지는 1987년 솔로 데뷔작 < Sold > 이후 5년 만인 1992년 불운을 딛고 영화의 동명 타이틀 ‘The crying game’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컬처 클럽은 1998년 공연 실황 앨범으로 자신들의 재결합을 알렸다. 1998년 아담 샌들러와 드류 배리모어가 주연을 맡은 80년대 뉴 웨이브 음악을 집대성한 영화 < 웨딩 싱어 >에 ‘Do you really want to hurt me’가 수록된 것을 비롯해 뉴 웨이브 복고 붐을 타고 재평가됨으로써 90년대 후반에는 그들 바람이 일었다.
연주 : Steve Winwood (스티브 윈우드)
싱어 송라이터 스티브 윈우드(Steve Winwood)는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음악계의 살아있는 화석 같은 존재이다. 국내에선 푸대접받지만 그에 대한 외국의 평가는 존경에 가깝다. 1960년대 스펜서 데이비스 그룹(Spencer Davis Group)과 슈퍼그룹의 원조 격인 트랙픽(Traffic)과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를 거치면서 실력을 검증 받은 스티브 윈우드는 1980년대엔... 싱어 송라이터 스티브 윈우드(Steve Winwood)는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음악계의 살아있는 화석 같은 존재이다. 국내에선 푸대접받지만 그에 대한 외국의 평가는 존경에 가깝다. 1960년대 스펜서 데이비스 그룹(Spencer Davis Group)과 슈퍼그룹의 원조 격인 트랙픽(Traffic)과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를 거치면서 실력을 검증 받은 스티브 윈우드는 1980년대엔 솔로 가수로서도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순악질 여사의 검은색 일자 눈썹처럼 짙고 깊은 음색을 소유한 스티브 윈우드는 대표적인 블루 아이드 소울 싱어이며 그의 가창력은 예전부터 최고로 꼽히고 있다. 1948년 5월 12일 영국의 버밍햄에서 스테픈 로렌스 윈우드(Stephen Lawrence Winwood)란 본명으로 태어난 스티브 윈우드는 유년 시절, 재즈에 빠지면서 드럼, 기타,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1963년, 친형 머프 윈우드(Muff Winwood)와 함께 스펜서 데이비스 그룹에 가입했을 때 그는 겨우 15살이었다. ‘I’m a man(10위)’, ‘Keep on running(76위)’, ‘Gimme some lovin’(7위)’ 같은 블루 아이드 소울의 명곡들을 발표한 스티브 윈우드는 이 팀을 떠나 1967년에 영국 출신의 로큰롤 가수 데이브 매이슨(Dave Mason) 등과 함께 트래픽(Traffic)을 결성했다. 이어서 1969년에는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진저 베이커(Ginger Baker)와 함께 블라인드 페이스를 만드는데 의기투합했으나 단 한 장의 음반을 남기고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후 공연과 동료들의 앨범 작업에 참여하는 번외 경기로 세월을 보낸 스티브 윈우드는 1977년에 솔로 데뷔작을 공개했지만 평단과 대중들 모두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가 다시 팝계의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은 신시사이저 키보드를 과용한 1981년도 음반 < Arc Of A Diver >였다. 싱글 히트곡 ‘While see you a chance(7위)’와 ‘Arc of a diver(47위)’로 키다리 아저씨는 솔로 가수로서 새로운 인생을 그렸다. 그에게 전환점이 된 앨범 < Back In The High Life >는 지난 1986년에 공개되었다. 흑인 여가수 샤캬 칸(Chaka Khan)이 백보컬로 힘을 보탠 ‘Higher love(1위)’와 ‘The finer thing(8위)’, ‘Back in the high life again(13위)’, ‘Freedom overspill(20위)’이 인기 차트와 접속하면서 300만장의 음반 판매고를 이룩했고, ‘Higher love’는 1986년도 그래미에서 올해의 레코드와 최우수 남자 가수상을 접수했다. 이어진 5집 음반 < Roll With It >에서 타이틀트랙 ‘Roll with it’은 4주 동안 정상을 달렸고, 그밖에 ‘Don’t you know what the night can do(6위)’, ‘Holding on(11위)’, ‘Hearts of fire(53위)’가 연타석 홈런을 치면서 스티브 윈우드에게 가장 화려한 순간을 선사했다. 뿐만 아니라 < Roll With It >과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 베스트 음반 < Chronicles >에서는 2집에 수록됐었던 ‘Valerie(9위)’와 ‘Taking back to the night(57위)’가 다시 싱글로 커트 되어 차트에 오르기도 했다. 이렇듯 승승장구하던 스티브 윈우드의 성공은 1990년대에도 이어질 것처럼 보였지만 이후 그의 모든 음악적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1990년과 1997년에 발표한 정규 음반 < Refugees Of The Heart >과 < Junction Seven >은 저조한 결과를 낳았고, 그의 주도로 1994년에 재결성한 트래픽도 얼터와 그런지 후배들에게 밀려 처량한 뒷모습을 보이며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영광의 순간이든 쓰라린 순간이든 그 모든 것은 이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인생의 그림이 되어 스티브 윈우드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연주 : Randy Crawford (랜디 크로포드)
영국 뉴웨이브 록 밴드 영국 뉴웨이브 록 밴드
70년대는 록 음악의 춘추전국시대였다. 대세가 없이 록 음악은 수많은 장르들로 핵 분열하며 복잡한 지형도를 그려나가고 있었다. 정신은 퇴색되고 스타일이나 예술성에만 집착해가던 70년대 록 음악 씬을 두고 못마땅해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표현 방식이나 연주기법에 있어 이 때만큼 일취월장한 시기도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창궐했던 아트 록(Art Rock)은 70년대 내내 강세를 띄며 영국을 중심으로 서서히 팝 차트에도... 70년대는 록 음악의 춘추전국시대였다. 대세가 없이 록 음악은 수많은 장르들로 핵 분열하며 복잡한 지형도를 그려나가고 있었다. 정신은 퇴색되고 스타일이나 예술성에만 집착해가던 70년대 록 음악 씬을 두고 못마땅해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표현 방식이나 연주기법에 있어 이 때만큼 일취월장한 시기도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창궐했던 아트 록(Art Rock)은 70년대 내내 강세를 띄며 영국을 중심으로 서서히 팝 차트에도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예스,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그리고 제네시스 등, 록은 어느덧 클래식 음악만큼이나 진지해져있었지만 록 음악 특유의 비판성과는 거리를 둔 채 예술성에만 몰입해 갔다. 록시 뮤직(Roxy Music)의 등장은 70년대 아트록의 발흥과 함께하지만 이들의 활동 방식은 일반 아트 록 밴드들과 사뭇 달랐다. 신시사이저의 등장이나 대위법이 감지되는 혁신적인 연주는 아트록적이었지만 훅(hook)이 뚜렷한 싱글들을 놓치지 않았기에 밴드는 매니아를 넘어선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데뷔 싱글 ’Virginia plain’(1972)을 영국 차트 10위에 올려놓는 것을 시작으로 ’Love is the drug’(1975). ’Dance away’(1979), ’Over you’(1980), ’Jealous guy’(1981) ’Avalon’(1982), ’More than this’(1982)등을 모두 브리티시 차트 Top 10과 미국 빌보드 차트 Top 40위권에 진입시키는 저력을 보였다. 동시에 그들은 실험성과 분노로 점철된 완성도 있는 대곡으로도 주목받았다. 하드 록 성향의 거친 기타 리프가 휘몰아치는 밴드 최고 걸작 < Country Life >(1974)를 비롯해 < For Your Pleasure >(1973), < Stranded >(1973), < Siren >(1975)은 모두 영국 앨범 차트 10위권에 드는 동시에 록 음악 평론가들로부터 추앙 받는 70년대 록 음악 명반 대열에 끼는 수작들이다. 탄탄한 곡 구성력과 기세등등한 연주가 압권인 러닝타임 7-8분대의 대곡들인 ’Bogus Man’(1973), ’The thrill it of all’(1974), ’Psalm’(1973)등은 아트 록 매니아들에게도 사랑을 받았다. 대중들은 ’Virginia plain’ , ’Love is the drug’, ‘Avalon’으로 이들의 존재를 알았지만 아트 록 음악 수절파들은 < Country Life >나 < Siren >같은 앨범으로 그들을 추앙했다. 밴드는 팀의 수장 브라이언 페리가 1971년 브라이언 이노를 만나며 시작된다. 소울과 락 앤 롤, 그리고 비틀즈 풍의 세련된 팝 음악에 경도 되 있던 브라이언 페리는 얼마 후 브라이언 이노를 통해 신시사이저가 그려내는 전자 음악에 관심을 갖는다. 이듬해 기타리스트 필 만자네라와 섹소폰 주자 앤디 맥카이를 만나며 밴드의 위용을 갖춘다. 하드 록, 알 엔비 , 전자 음악, 재즈, 서로 다른 음악적 자양분이 전면에 부각된 이들의 음악은 밴드라는 화학작용을 통해 예술적인 내공이 느껴지는 통속적인 팝 음악을 양산한다. 1972년 데뷔 작 < Roxy Music >로 베일에 가려있던 그들의 실체가 드러났다. 발매 동시에 브리티시 앨범 차트 10위에 등극한 밴드의 신고식은 당시로선 쇼킹 자체 였다. 데뷔 앨범에는 실리지 않았던 첫 싱글 ’Virginia plain’이 성공(영국 싱글 차트 10위)을 낚아내며 밴드는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데뷔 싱글’이란 록 비평가들의 찬사까지 거머쥔다. 짙은 화장과 ’빤짝이’ 의상을 걸치고 나와 청중들의 시선을 을 사로잡은 밴드는 단번에 ’글램 록’의 선두주자로 인식되며 당시 인기를 모왔던 데이빗 보위에 강력한 라이벌로 떠오른다. 유혹을 하는 듯한 요염한 포즈의 여자 모델들이 매번 앨범 자켓 사진에 등장한 것도 밴드를 둘러싼 주요한 화젯거리였다. 다양한 스타일이 동시에 공존하며 충돌할 때 생긱는 에너지는 밴드의 색다른 매력이었다. 슈퍼 크루너(CROONER) 브라이언 페리의 농염한 보컬, 필 만자네라의 불끈거리는 기타 솔로, 브라이언 이노의 귀를 의심케 하는 전자음, 앤디 마케이의 해학적인 색소폰 연주가 그 매력의 진원지였다. 여기에 b급 연애소설에서나 등장하는 애정행각을 다룬 통속적인 가사는 이들의 연주와 함께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곤 했다. ’Virginia plain’에 이은 싱글 ’Pyjamarama’(1973)를 성공시킨 후 두 번째 앨범 < For Your Plaesure >는 싱글 위주로 나갔던 전작과 달리 이노와 페리의 공력이 극점에 달한 앨범이었다. 록시 뮤직다운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싱글 ’Do the strand’, ’Edition of you’와 9분 여에 달하는 대곡 ’Bogus man’은 페리와 이노의 돌출된 음악성이 충돌된 ’아름다운 불협화음’으로 칭송될 걸작이었다. 하지만 앨범은 시장에서 이렇다할 관심을 끌지 못했고 결국 상업적 실패를 맛본다. 이로 인해 이노와 페리 사이의 불거진 불화는 결국 이노의 팀 탈퇴로 이어진다(이듬해 그는 솔로로 데뷔, 이후 엠비언트 음악의 대가이자, 명 프로듀서로의 길을 걷게 된다.) 이노의 탈퇴로 ’실험성’이라는 한쪽 날개를 잃어 잠깐 기우뚱거린 밴드는 그러나 팝/록 사운드로 일관된 세 번째 앨범 < Stranded >(1973)를 발표, 그들의 첫 영국 앨범 차트 1위로 등극하며 이런 불안을 종식시킨다. 페리는 자신의 솔로 앨범 < These Foolish things >를 같은 해 발표하며 왕성한 창작욕을 과시했고, 밴드의 사운드는 페리의 노선대로 윤기가 줄줄 흐르는 그의 보컬과 필 만자네라의 화려한 기타 솔로 , 앤디 맥케이의 최류성 색스폰 연주가 한층 부각되며 ’Mother of pearl’ , ’Street life’처럼 한층 스트레이트한 록 음악을 선보인다. 매년 꾸준히 발표하는 앨범마다 브리티시 앨범 차트 10권에 들었던 이들은 이듬해 발표된< Country life >(1974)로 창조의 정점을 맞이한다. 지금까지도 밴드의 대표곡으로 칭송되는 ’The thrill it of all’을 시작으로 쉴세라 연달아 포진된 ’All I want is you’와 ’Out of the blue’, ’Prarie rose’ 같은 곡은 이들의 연주에 가장 거친 느낌을 대변해주는 곡들이다. 앨범은 유난히 하드한 면모와 그들이 추구해오던 우아한 팝/록 사운드를 온전히 융화해 낸 수작이었다. < Country Life >는 처음으로 미국 앨범 차트 Top40에 들어가면서 페리가 그토록 원하던 미국 진출의 성과도 획득한다. 이듬해 발표한 앨범 < Siren >(1975)로 밴드는 대중적인 스포라이트를 한껏 받는다.댄스리듬을 사용한 히트곡 ’Love is the drug’ 와 강렬한 팝/록 사운드 ’Both end burning’으로 밴드는 어느덧 초기의 아트-록 의 면모보단 팝-록 그룹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 Siren >은 그들이 원래 추구해왔던 아트 팝의 면모가 한층 대중적으로 어필된 작품이란 점에서 주목할만한데, 향후 80년대 초 팝 음악의 대세를 잡은 듀란듀란이나 뉴 오더와 같은 신스팝/뉴 로맨틱스 뮤지션들에게 신선한 영감을 줬다는데에도 의미 있다. 밴드는 < Siren >을 기점으로 멤버들 각자가 솔로 활동의 들어가며 잠시의 활동 휴지기를 맞는다. 첫 공식 라이브 앨범< Viva! >(1976) 발표 이후 3년의 공백기를 갖게 된 밴드는 1978년 가을, 페리를 위시해 필 만자네라, 앤디 멕케이, 폴 톰슨 기존 멤버를 주축으로 새로 영입된 키보디스트 폴 카랙으로 제 3기 록시 뮤직이 가동된다. 밴드의 활동 재개와 함께 발표된 < Manifesto >(1979)는 디스코 리듬이 대폭 수용되며 그들의 이전 앨범들보다 접근하기가 수월한 앨범이었고, 덕분에 싱글로 커팅 된 ’Dance away’가 미국 팝 차트 23위까지 오르는 성과를 거둔다. 1980년 폴 톰슨이 교통사고로 팀을 탈퇴하고 밴드는 3인조로 재편되며 < Flesh + Blood >를 발표한다. 앨범은 < Stranded >에 이어 영국 앨범 차트 1위에 오르며 싱글 ’Over you’가 브리티시 top10과 미국 빌보드 top 차트 40위권에 드는 성과를 거둔다. 이듬해인 1981년, 광적인 팬이 쏜 흉탄에 쓰러진 존 레논을 기리며 헌정한 싱글 ’Jealous guy’로 밴드는 그들의 첫 브리티시 싱글 차트 1위로 등극되는 영광을 맛본다. 1982년 이들의 공식적인 마지막 앨범이 된 < Avalon >은 미국에서 첫 골드를 기록하며 수록 곡 ’More than this’ 와 ’Avalon’이 인기를 얻으며 앨범은 브리티시 차트 3주간 1위, 미국 앨범 차트 27위까지 오른다. 밴드의 최고의 성공작이라 불릴만한 < Avalon > 10여년이 넘는 밴드 경력을 통해 고집스래 추구한 ’아트 팝’의 진수를 담아낸 밴드 최후의 역작이 되었다. 밴드는 1983년 ’Avalon tour’를 끝으로 해산을 맞는다. 이후 브라이언 페리는 왕성한 솔로 활동을 보이고 필 만자네라와 앤디 맥케이는 ’익스플로러’라는 프로젝트 밴드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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