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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ssential #LOVE (에센셜 해시태그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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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The Essential #LOVE (에센셜 해시태그 러브)

[ 2CD 3단 디지팩 / 전곡 영문 가사 해설 수록 ]
Whitney Houston, Savage Garden, Backstreet Boys, N Sync, Westlife 노래 외 33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SonyMusic | 2017년 02월 07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60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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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ssential #LOVE (에센셜 해시태그 러브)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7년 02월 07일
시간, 무게, 크기 600g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CD1
  • 01 Greatest Love Of All - 휘트니 휴스턴
  • 02 Truly Madly Deeply - 새비지 가든
  • 03 As Long As You Love Me - 백스트리트 보이즈
  • 04 This I Promise You - 엔싱크
  • 05 My Love - 웨스트라이프
  • 06 All Out Of Love - 에어서플라이
  • 07 When A Man Loves A Woman - 마이클 볼튼
  • 08 If I Aint Got You (feat. Usher) - 앨리샤 키스, 어셔
  • 09 Beautiful -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 10 True Colors - 신디 로퍼
  • 11 I Believe I Can Fly - 알 켈리
  • 12 Valentine - 짐 브릭만 & 마티나 맥브라이드
  • 13 Mandy - 배리 매닐로우
  • 14 Angel - 사라 맥라클란
  • 15 Un-Break My Heart - 토니 브랙스턴
  • 16 When Can I See You - 베이비페이스
  • 17 The Color Of Love - 보이즈 투 맨
  • 18 Make You Feel My Love - 밥 딜런
CD2
  • 01 All Of Me - 존 레전드
  • 02 Say Something - 어 그레이트 빅월드
  • 03 Your Body Is A Wonderland - 존 메이어
  • 04 Let Her Go (Acoustic) - 패신저
  • 05 One Thing (Acoustic) - 원 디렉션
  • 06 Beneath Your Beautiful (feat. Emeli Sande) - 라브린느
  • 07 Like Im Gonna Lose You (feat. John Legend) - 메간 트레이너
  • 08 Gravity - 사라 바렐리스
  • 09 The Man Who Cant Be Moved - 스크립트
  • 10 Wrecking Ball - 마일리 사이러스
  • 11 Happy - 퍼렐 윌리엄스
  • 12 Chandelier - 시아
  • 13 Torn - 나탈리 임브룰리아
  • 14 With You - 크리스 브라운
  • 15 Bleeding Love - 리오나 루이스
  • 16 Love Like This (Acoustic) - 코다라인
  • 17 How To Save A Life - 더 프레이
  • 18 Marry Me - 트레인

아티스트 소개 (38명)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은 1980, 1990년대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던 메탈의 포화를 뚫고 스탠다드 팝 시장을 개척해 낸 대표적인 ’디바’ 뮤지션이다. 휘트니 휴스턴은 1963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알앤비 가수 씨시 휴스턴(Cissy Houston)의 딸이었으며 시대를 풍미한 여가수 디온 워윅(Dionne Warwick)이 친척이었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대형 가수들을 옆에서 지켜볼 수 ...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은 1980, 1990년대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던 메탈의 포화를 뚫고 스탠다드 팝 시장을 개척해 낸 대표적인 ’디바’ 뮤지션이다. 휘트니 휴스턴은 1963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알앤비 가수 씨시 휴스턴(Cissy Houston)의 딸이었으며 시대를 풍미한 여가수 디온 워윅(Dionne Warwick)이 친척이었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대형 가수들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고,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성가대에서 노래하며 그 실력을 뽐냈다. 수려한 외모까지 겸비한 휘트니는 10대의 나이에 이미 모델, 배우, 가수의 세 가지 활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샤카 칸(Chaka Khan) 등의 백업보컬로 또 클럽에서 가수로 활동하던 그녀는 1982년 19살의 어린 나이에 폴 자바라(Paul Zabara)의 ’Eternal love’라는 곡에 보조 보컬로 참여하며 처음으로 정식 음반 녹음에 참여한다. 이듬해 아리스타(Arista)와 계약을 체결했고, 그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레코드사는 데뷔 앨범에 27만 달러의 제작비를 투자하며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1985년 데뷔앨범 < Whitney Houston >은 흑인 디바 시대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앨범은 14주간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오르며 솔로 아티스트의 데뷔 앨범 중 가장 오랜 기간 1위에 머무른 앨범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세계적으로 2,300만장이라는 경이적인 앨범 판매를 이루어내며 데뷔 앨범 하나로 팝계 최고의 여가수로 자리하게 된다. 앨범 내에서는 ’Saving all my love for you’, ’How will I know’, ’Greatest love of all’(조지 벤슨의 곡 리메이크)의 세 곡이 연속해서 차트 정상에 오르고, 앨범의 경이적인 성공으로 86년 그래미와, 86,87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를 차지한다. 1987년 그녀는 두 번째 앨범 < Whitney >를 통해 전작의 인기를 이어간다. 전작보다 비트감을 더한 이 앨범 역시 대단한 성공을 일구어 낸다. 발매 첫 주에 미국과 영국차트에서 동시에 1위에 오르는데 팝 역사상 처음으로 이룩한 기록이었다. 앨범은 차트 정상에 11주간 머물렀으며 세계적으로 2,000만장이 팔려나갔다. 싱글들의 인기도 대단해서 ’Wanna dance with somebody(Who loves me)’, ’Didn’t we almost have it all’, ’So emotional’, ’Where do broken hearts go’ 네 곡이 연속해서 차트 정상을 밟으며 이전 앨범부터 7개의 싱글이 연속해서 정상을 밟는 대 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 앨범으로 또다시 1988년 그래미를 거머쥐었고, 역시 88년, 89년의 아메리칸 뮤직어워드를 수상한다.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 같은 정통 소울 아티스트들로부터 음악적 영감을 얻었던 그녀이지만 1,2집에서 보여준 음악은 대중성이 지나치게 강조된 흑, 백의 사운드가 뒤섞인 음악이었다. 자신도 그런 자신의 음악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1990년 발표한 세 번째 앨범 < I’m Your Baby Tonight >에서는 대중성을 신경 쓰지 않고 정통 소울 음악으로 변신을 시도한다.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루떠 반데로스(Luther Vandross)등과 함께 작업하는 등 흑인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에 집착했던 이 앨범은 역시 이전 앨범들만큼의 성공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I’m your baby tonight’, ’All the man that I need’가 1위에 올랐고, 앨범은 전 세계 1,200만장의 판매를 기록하는 등 여전히 그 인기는 대단했다. 세 장의 정규 앨범 이후 그녀는 영화 배우로의 변신을 시도하며 세 장의 사운드 트랙을 연속 발표한다. 시작은 < 보디가드 >였다. 1992년 케빈 코스트너와 함께 출연한 ’보디가드’의 사운드 트랙에서 6곡을 노래했고, 이는 팝 역사에 길이 남을 경이적인 상업적 성공을 이끌어낸다. 첫 싱글 ’I will always love you’(돌리 파튼의 곡을 리메이크)는 차트 정상에 14주간 머물렀으며, 앨범은 20주간 1위를 지켰고, 세계적으로 3,500만장이라는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기록한다. 1994년 그녀는 다시 한 번 그래미를 거머쥐었고,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는 8개 부문 수상이라는 대 기록을 세우게 된다. 1995년 휘트니 휴스턴은 다시 한 번 사운드 트랙에 참여한다. 자신이 주연한 < Waiting for Exhale >의 사운드 트랙에 3곡을 수록하면서 영화와 앨범의 성공에 기여한다. 이 앨범은 노장 흑인 여가수들과 신예 흑인 여가수들이 총 동원되어 만들어졌으며, 프로듀서로 참여한 베이비페이스(Babyface)는 그래미 12개 부문 후보에 오르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 1996년 그녀는 영화 < The Preacher’s Wife >에서 주연을 맡으며 다시 한 번 사운드 트랙에 참여한다. 14곡을 자신이 직접 맡은 이 앨범은 가스펠 위주의 곡들로 채워져 있으며 대중성보다는 종교적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어 앨범판매에 있어서는 그다지 큰 성공을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정규 앨범을 발표하지 않고 영화와 사운드 트랙에만 전념해왔던 그녀는 98년 8년 만에 정규앨범 < My Love Is Your Love >을 발표한다. 흑인 아티스트로서의 음악에 충실함을 기했던 이 앨범은 1,000만장의 앨범 판매를 기록하며 그녀의 앨범 중 가장 저조한 성적을 거두게 된다. 앨범 내에는 영화 ’이집트의 왕자’ 주제곡인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와의 듀엣 곡 ’When you believe’가 수록되어 있다. 2000년 그녀는 자신의 15년 음악생활을 결산하는 베스트 앨범 < The Greatest Hits >를 발표한다. 조지 마이클, 엔리케 이글레시아스와의 듀엣 곡 등 네 곡의 신곡도 포함하고 있는 이 앨범은 발라드 곡들만을 모은 < Cool Down >과 댄스곡 및 댄스 리믹스 곡들을 모은 < Throw Down > 두 장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호주의 듀오 새비지 가든(Savage Garden)의 성공담이 반복되고 있다. 에어 서플라이 이후 최고의 호주출신 팝 스타로 평가받는 이들은 새해 들어 또 다시 신곡 ''I Knew I Loved You''로 팝 천하를 평정했다. 전형적인 발라드인 이 곡은 지난해 발표됐을 때 산타나 ''Smooth''의 장기집권을 저지할 유력한 후보 곡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10대 소녀 선풍의 주역인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 호주의 듀오 새비지 가든(Savage Garden)의 성공담이 반복되고 있다. 에어 서플라이 이후 최고의 호주출신 팝 스타로 평가받는 이들은 새해 들어 또 다시 신곡 ''I Knew I Loved You''로 팝 천하를 평정했다. 전형적인 발라드인 이 곡은 지난해 발표됐을 때 산타나 ''Smooth''의 장기집권을 저지할 유력한 후보 곡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10대 소녀 선풍의 주역인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What A Girl Wants''에 밀려 정상 문턱에 주저앉는가 싶더니 기어코 금주 빌보드 1위에 올랐다. 작곡하고 노래하는 대런 헤이즈와 악기편곡 담당 다니엘 존스로 이뤄진 새비지 가든은 1998년 ''Truly, Madly, Deeply''로 이미 차트 정상을 정복한 바 있다. 이 곡이 수록된 데뷔 앨범은 전세계적으로 1100만장이라는 가공할 판매고를 수립했다. 하지만 불확실한 팝 음악계의 생리상 아무도 두 번의 성공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 반짝 그룹으로 전락한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그들은 이번에 빅히트를 재현하면서 사슬과도 같은 ''2집 앨범 징크스''를 떨쳐낸 동시에 히트 메이커로서 롱런할 가능성을 열었다. 두 번째 앨범 ''Affirmation'' 역시 전작처럼 단번에 귀를 잠식하는 전염성 높은 멜로디 감각과 고급스런 편곡이 돋보인다. 머라이어 캐리를 슈퍼스타로 비상시킨 프로듀서 월터 아파나시예프의 도움도 컸다. 음반은 빌보드지로부터 "여기에 히트가 안될 곡은 하나도 없다"는 평을 받았다. 빠른 템포의 곡도 좋지만 ''I Knew I Loved You''와 함께 ''Hold Me'' ''Two Beds And A Coffee Machine'' 등 특허인 발라드들이 더 인상적이다. 그들이 에어 서플라이를 능가할 호주 팝 스타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 같다.
노래 : Backstreet Boys (백스트리트 보이즈)
멤버 : A.J. McLean, Brian Littrell, Howie Dorough, Nick Carter 얼마 전 록 전문지 < 롤링스톤 >이 MTV와 공동으로 선정한 ‘팝 역사를 수놓은 명곡 100선’에 백스트리트 보이스(Backstreet Boys)의 ‘I want it that way’가 예상 밖으로 높은 순위인 10위에 올라 눈길을 끈 바 있다. 10대들을 주요 팬 층으로 하는 ‘버블 검 음악’이... 멤버 : A.J. McLean, Brian Littrell, Howie Dorough, Nick Carter

얼마 전 록 전문지 < 롤링스톤 >이 MTV와 공동으로 선정한 ‘팝 역사를 수놓은 명곡 100선’에 백스트리트 보이스(Backstreet Boys)의 ‘I want it that way’가 예상 밖으로 높은 순위인 10위에 올라 눈길을 끈 바 있다. 10대들을 주요 팬 층으로 하는 ‘버블 검 음악’이라 하여 여기저기서 비판을 받는 와중에 권위 있는 록 언론에 의해 이들의 노래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백스트리트 보이스는 분명 음반업계의 기획에 의해 ‘잘 만들어진 그룹’이다. 보통 이런 기획상품의 경우 아티스트의 자기 표현을 최고 덕목으로 치는 사람들은 여지없이 평가 절하해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무시되지 않는 이유는 먼저 예상 밖으로 양질의 음악을 선사하고있기 때문이다. 곡도 좋고 멜로디를 타는 멤버들의 노래솜씨와 코러스도 우수하다. 애들 음악이라고 푸대접하지만 막상 들으면 모든 곡들이 귀를 감는다. 또 하나 백스트리트 보이스가 손꼽히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버블 검 음악이 1990년대 중반 이후의 팝 주요 경향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들이 요즘의 유행을 만들었고 또 주도하고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백스트리트 보이스가 성공을 거두자 팝 음악계에서는 우후죽순으로 10대 소녀들을 겨냥한 ‘보이 밴드’들이 출현하고 있다. 닉 카터, 하위 D, 케빈 리처슨, AJ 맥클린 그리고 브라이언 리트렐 등 다섯 남자로 이루어진 그룹이다. 케빈은 1972년 생이고 가장 어린 1980년 생 닉 카터도 나이 스물을 넘어섰다. 10대 음악을 하지만 멤버들 가운데 틴에이저는 없다. 1994년 결성될 때는 당시 음악이 얼터너티브 록과 갱스터 랩 판이어서 주목받지 못했지만 2집 < Backstreet''s back >부터 미국시장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1999년 초에 발표한 3집 < Millenium >에 와서는 세계적 열풍을 야기했다. 이 앨범은 지금까지 1300만장이 팔려 틴 음악 앨범 중에서는 최고 판매고를 보이고 있다. 잠시 공백을 갖는 사이 같은 소속사의 라이벌 N싱크한테 추월 당한 감이 없지 않지만 최근 새 앨범 < Black & blue >을 내놓고 왕관탈환에 나섰다. 그래서 과연 신작이 얼마만큼 팔려나갈 것인가가 관심이다. 관계자들은 이번 앨범이 그들의 장수 여부를 결정지을 것으로 내다본다.
지난 2000년 한해는 엔 싱크의 해였다. 2000년 4월 발표한 두 번째 앨범 < No Strings Attached >는 첫 주에 245만장이 팔리며 발매 첫 주 판매기록을 갈아치웠다. 이전 기록은 1999년 백스트리트 보이스(이하 BSB)가 2집 < Millenium >으로 작성했던 113만장. 통상 라이벌로 거론되지만 항상 한 수 앞선다고 평가받던 BSB의 기록을 배 이상 넘어선 것이어서 엔 싱크에겐 더욱... 지난 2000년 한해는 엔 싱크의 해였다. 2000년 4월 발표한 두 번째 앨범 < No Strings Attached >는 첫 주에 245만장이 팔리며 발매 첫 주 판매기록을 갈아치웠다. 이전 기록은 1999년 백스트리트 보이스(이하 BSB)가 2집 < Millenium >으로 작성했던 113만장. 통상 라이벌로 거론되지만 항상 한 수 앞선다고 평가받던 BSB의 기록을 배 이상 넘어선 것이어서 엔 싱크에겐 더욱 값졌다. 앨범은 기세 좋게 팔려나가서 전 세계적으로 무려 1천4백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올해엔 슈퍼볼 게임의 개막식 행사 같은 여러 공연과 각종 행사에 초청되어 극진한 대접도 받았다. 그러나 반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비평계 일각에서는 립싱크하는 꼭두각시니 음반산업을 망치는 주범이니 하는 악평이 계속 이어졌고, 여러 노장 뮤지션들은 보이밴드와 틴 팝의 ‘해악’을 경고했다. 특히 백인래퍼 에미넴은 자신의 노래를 통해 노골적으로 틴 팝과 보이밴드를 조롱했다. 그 때문인지 최근 BSB는 멤버의 개인적 불행까지 겹치며 다소 슬럼프 기미를 보이고 있다. 확실히 보이밴드의 위기다. 이처럼 중요한 시점에 엔 싱크가 잇단 혹평에 반격을 시도한 새 앨범 < Celebrity >를 발표했다. 엔 싱크의 전작이 너무나 엄청난 성적을 거두었고, 현 상황이 상황인지라 과연 이번 신보가 어떤 반응을 얻을 지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고 있다. 이미 5월에 싱글로 먼저 출시한 ‘Pop’은 빌보드 싱글차트 19위에 올라 엔 싱크는 무난한 첫 걸음을 내딛었다. # NSYNC IS… 과연 팝 음악을 듣던 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나 엔 싱크의 현재 위용(偉容)을 상상했을까. 사실 엔 싱크가 1997년 7월, 홍보차 한국에 방문했을 때만해도 이렇게까지 대단해지리라고 예상한 이들은 별로 없었다. 그저 좀 있다 사라질 그런 팀인 줄 알았다. 실제로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많은 그룹들이 잠깐 떴다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하는가. 게다가 당시 그 보이밴드는 유럽, 그것도 독일과 네덜란드 등지에서만 인기 있었을 뿐 정작 본고장 미국에서는 앨범 발매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다. 엔 싱크는 그러나 일부 무지몽매한(?) 음악팬들 또는 평자들의 예상을 깨고 현재까지 살아남았다. 그냥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라 BSB와 더불어 최강의 보이밴드로 군림하며 천하를 호령하고 있다. 이 5인조는 이제 세계 어딜 가나 운집한 소녀 팬들에 휩싸이고, 앨범은 나왔다하면 몇 천만 장이 팔려나간다. 특히 최근의 활약은 눈부시다. 지난 2000년 음악계에서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린 연예인을 조사한 결과, 엔 싱크는 쟁쟁한 뮤지션들을 모두 제치고 당당히 1위를 마크했다. 우선 그들에 대해 알아보자. 엔 싱크는 1996년 미국 플로리다주 올란도에서 결성된 5인조 보이밴드다. 이들은 R&B의 보컬 하모니와 역동적인 댄스음악이 접목된 스타일을 구사한다. 이들의 독특한 댄스음악에는 복잡한 정글리듬이 꿈틀댄다. 이들의 히트곡 ‘Bye bye bye’이나 ‘It`s gonna be me’를 들으면 단번에 느낄 수 있는데, 정글리듬이란 요즘 흑인음악에서 유행하는 리듬패턴, 즉 4비트에서 8비트로, 8비트에서 16비트로, 또 다시 역으로 예상치 못한 비트의 변환을 보이는 리듬패턴을 말한다. 뉴 키즈 온 더 블록이나 테이크 댓과 같은 보이밴드의 전통을 따르고는 있지만 그래서 유독 흑인 필이 강하다. 멤버는 JC(JC Chasez)와 저스틴 팀벌레이크(Justin Timberlake), 크리스 커크패트릭(Chris Kirkpatrick), 조이 페이튼(Joey Fatone), 랜스 베이스(Lance Bass)로 구성되어 있다. 엔 싱크(N Sync)라는 좀 특이한 밴드이름은 ‘함께 한다’는 뜻인 ‘synchronize’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으며 각 멤버들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딴 것이기도 하다. 1996년에 데뷔했지만 이들의 역사는 좀더 오래됐다. 팀의 주축멤버 JC와 저스틴은 어린 시절부터 디즈니 채널의 쇼 프로그램 < 미키 마우스 클럽 >에서 같이 활동했던 사이였기 때문이다. < 미키 마우스 클럽 >의 MC를 거쳐 내시빌에서 솔로 프로젝트에 몰두하던 그 둘은 올란도로 돌아와 크리스와 조이를 만나 그룹을 구상했고, 나중에 랜스가 합류해 완전한 엔 싱크가 탄생되었다. 이들의 최대 후원자는 스웨덴 출신의 프로듀서 데니즈 팝이었다. 에이스 오브 베이스를 위시해 최근 스웨덴의 신성 제시카를 키워낸 이 명장은 엔 싱크에게 ‘I want you back’을 선사함으로써 그들을 일약 세계적 스타로 만들어냈다(올해 초 제시카는 안타깝게도 지난 1998년 요절한 자신의 음악적 대부 데니즈 팝에게 헌정하는 앨범 < Dino >를 발표하기도 했다). ‘I want you back’, ‘Tearin` up my heart’ 같은 싱글들이 독일과 네덜란드, 스웨덴 등 유럽과 아시아에서 큰 성공을 거두자 1998년 봄, 엔 싱크는 미국에서 마침내 자신들의 셀프타이틀 데뷔앨범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먼저 유럽부터 돌며 인기몰이에 나선 후 미국을 공략한 ‘우회전략’은 대성공이었다. 데뷔앨범은 미국에서만 천만 장이 팔려나갔으며 엔 싱크는 BSB와 함께 ‘보이밴드 신드롬’의 주역이 되었다. 그 여세를 몰아 그 해 연말엔 크리스마스 앨범 < Home For Christmas >를 내놓았고, 지난 2000년에는 그들의 위치를 보다 확고히 다져준 2집을 출시했다. # 엔 싱크 VS BSB 이쯤에서 ‘숙명의 라이벌’ 엔 싱크와 BSB의 관계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후발주자로서 엔 싱크는 언제나 BSB의 기준으로 평가받아야 했다. 곧잘 ‘복제물’이라는 비유도 들어야 했던 엔 싱크로서는 BSB의 존재가 하루 빨리 벗어나고픈 굴레였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엔 싱크가 지금의 위치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BSB라는 라이벌이 존재했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들보다 더 큰 존재가 있었기에 언제나 긴장하고 더욱 노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전엔 BSB가 앞서 가고 엔 싱크가 추격하는 형세였지만 현재는 서로 동등하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선의의 경쟁을 벌이고있다. 라이벌인 만큼 이 두 팀은 서로 닮은 부분이 너무도 많다. 출신부터 멤버구성, 프로듀서, 그리고 현 소속사까지 여러 모로 비슷하다. 물론 팬들이야 모든 걸 꿰뚫고 있겠지만 그래도 한번 그 닮은 점을 요모조모 확인해보자. 먼저 출신과 멤버구성. 엔 싱크와 BSB는 모두 미국 플로리다주 올란도 출신이며 백인 남성 5인조로 구성되어있다(이 두 팀의 활약 덕에 디즈니랜드가 있는 관광명소로만 유명했던 올란도는 ‘틴 팝의 산실’이라는 새로운 별칭을 얻기도 했다). 두 팀을 기획한 사람 역시 동일인물. 뉴 키즈 온 더 블록을 매니지먼트했던 조니 라이트(Johnny Wright)의 기획 아래 각각 팀이 만들어졌다. 프로듀서 진용도 마찬가지로 같다. 데니즈 팝(Denniz Pop)과 맥스 마틴, 그리고 최근의 로드니 저킨스(Rodney Jerkins) 같은 최강의 프로듀서들이 그간 엔 싱크와 BSB의 히트작들을 책임졌다. 프로듀서가 같은데 음악 스타일이라고 다를 리 없다. 보컬 하모니를 강조하고 기본적으로 댄스 팝을 구사하는 공통점을 지녀, 초보자들은 여간해선 그 둘의 음악을 분간하기 어렵다. 인기를 얻은 과정은 어떠한가. 역시 같은 케이스다. 미국인이지만 이들은 곧바로 미국에서 데뷔하지 않았다. 두 팀은 똑같이 먼저 유럽과 아시아에 진출해 가능성을 타진해본 다음, 인기를 얻자 미국으로 금의환향, 본격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들을 조련했던 전(前) 매니저도 루이스 펄먼(Louis J. Pearlman)이라는 같은 사람이었다. 여기서 루이스 펄먼은 ‘꼭두각시의 조종자’라는 악명이 붙을 정도로 문제가 많았던 인물이다. 무리한 일정을 강요하며 BSB와 엔 싱크를 끊임없이 옥죄었고, 그들의 엄청난 수입도 거의 착취하다시피 했다. 결국 견디다 못한 BSB가 먼저 그 ‘압제의 사슬’을 끊고 탈출했으며 이어 엔 싱크도 치열한 법정공방 후 펄먼을 떠났다(이런 상황은 국내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이슈가 되었던 에쵸티 멤버들과 SM기획과의 마찰을 보라). 동병상련이라고 했던가. 엔 싱크가 새롭게 보금자리를 마련한 곳은 바로 BSB가 소속한 < 자이브(Jive) >였다. # 보이밴드의 한계와 비전 어찌 보면 엔 싱크도 그저 비슷비슷한 보이밴드 중 하나일 뿐이다. 그 수많은 보이밴드들 중에서 유독 엔 싱크가 해를 거듭할수록 더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이렇게 인기가 있을까. 멤버들이 잘 생겨서일까? 예전의 뉴 키즈나 테이크 댓과 비교해보면 사실 좀 평범한 수준의 외모다. 춤을 잘 춰서? 노래를 잘 해서? 물론 다 맞는 얘기다. 허나 그런 것들은 데뷔 후 2-3년이면 모두 밑천이 드러난다. 물린다는 얘기다. 엔 싱크는 데뷔한지 6년째이지만 더욱 더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팬들에게 결코 싫증나지 않는 즐거움을 선사하며. 그 이유는 엔 싱크 같은 보이밴드들이 지닌 한계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을 듯 하다. 앞선 루이스 펄먼의 예에서 보듯, 보이밴드의 한계는 명확하다. 애초에 기획된 팀이기 때문에 기획자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 탓에 루 펄먼 같은 악덕 매니저에게 노예문서 식의 불평등한 계약을 종용받고, 활동 내내 쉴 틈 없이 바쁜 일정에 쫓긴다(이건 좀 민감한 사안이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국내 문화방송과 연예인간의 대립도 이 문제 때문이다. 현재로선 어느 쪽이 옳은 지는 알 수 없지만 엔 싱크의 경우에는 확실히 ‘노예계약’이었다). 또한 트렌드에 민감해서 하룻밤에 떴다가도 그 트렌드가 사라지면 동시에 내팽개쳐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만일 이 모든 걸 극복하고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다해도 그때쯤이면 보이밴드의 멤버들은 보이가 아닌 어덜트가 돼버렸음을 느낀다.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마냥 신나는 댄스음악만을 할 수 있을까? 엔 싱크는 당연히 위의 한계를 모두 지니고 있는 보이밴드다. 수완 좋은 기획자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노련한 매니저에 의해 다듬어졌다. 인기를 얻고 시간이 지나자 이들은 자신들이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음은 물론 꼭두각시처럼 조종만 당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매니저에게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했으며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법정 소송을 감행했다. 결국 엔 싱크는 승리를 얻어냈고, 자신들이 원하는 소속사로 이적했다. 이 과정이 중요하다. 엔 싱크는 여기서 적어도 자신들이 꼭두각시가 아니라 독립된 뮤지션임을 입증했다. 이 직후 발표한 앨범이 2집 < No Strings Attached >이며, 이 앨범은 그러한 ‘독립의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작품이다. 트렌드의 변화 속에서도 엔 싱크는 정체되거나 도태되지 않았다. 데뷔앨범에서 백인 댄스 팝이나 발라드만을 소화했던 이들은 다음에는 크리스마스 앨범을 내며 영역의 확장을 꾀했다. 틴 팝 열풍이 불어닥쳐 남들은 모두 백인 중심의 틴 팝에 몰려있을 때 흑인음악이 가득한 2집을 발표했다. 우연히도(?) 그때부터 미국 음악계의 흐름은 흑인음악이 대세를 이뤘다. 스타일은 고여있지 않고 늘 흐르는 물과 같았고 그때마다 팬들은 성원으로 답했다. 말하자면 트렌드를 쫓아간 게 아니라 트렌드를 감각적으로 예지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셈이다. 나이도 별 문제 될 게 없는 듯 하다. 엔 싱크의 멤버들은 모두 어엿한 성인이다. 가장 어리다는 저스틴이 우리 나이로 21살이고, 가장 많은 크리스는 31살이나 된다. 연령제한은 없다지만 보이밴드 멤버로서 나이를 차츰 먹어 가는 것이 무척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더욱 정력적이며 좋은 음악으로 활동하겠다"고 의지를 천명하고 있다. 그 의지는 음악을 통해 실제로 드러난다. 보이밴드의 전형적 모습에서 탈피, 록에서 힙합, R&B, 라틴, 컨트리 그리고 최근의 일렉트로니카까지 다양한 음악을 수용하며 입맛 까다로운 수요자들을 만족시키고 있다. 이처럼 보이밴드의 한계와 비전을 동시에 지닌 그룹이 바로 엔 싱크다. 일렉트로니카와 영국식 R&B 등 한층 더 다양해진 새 앨범 < No Strings Attached > 이후 엔 싱크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올 1월말에는 프로 미식축구 결승 경기인 슈퍼볼(SuperBowl) 개막식 행사에 참여해 ‘전국구 스타’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단일 프로그램으로는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며 그 때문에 미국 가수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서보고 싶어하는 ‘꿈의 무대’ 라는 슈퍼볼 행사에서 엔 싱크는 아메리칸 하드 록의 자존심 에어로스미스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멋진 공연을 선사했다. 3월 19일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을 식장에서 직접 소개하는 영광까지 얻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존재하는 법. 이 엄청난 수요를 창출하는 보이밴드에 대한평단의 시각은 그리 곱지 않았다. 이들의 음악이 틴 팝이라서, 만들어진 팀이라서, 캐리어가 부족해서 등등의 이유로 평단으로부터 집중타를 얻어맞았다. 엔 싱크는 이 모든 걸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문했다. "우리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어떻게 하면 한 걸음 앞으로 나갈 수 있을까?" 동시에 여타의 모든 비난을 불식시킬 반격을 준비했다. 그러한 고민 끝에 내놓은 야심작이 3집 < Celebrity >다. 일단 이들이 앨범에서 담당한 역할만 보더라도 일신된 면모를 알 수 있다. JC가 겨우 몇몇 곡을 담당했던 전작들과 달리 신보에서는 저스틴과 JC가 신곡 13트랙 중 10트랙에서 공동 작곡과 공동 제작을 맡았다. 이건 분명 괄목할만한 성장이며 예전의 자신들을 뛰어넘는 음악적 성과다. 그 외에 일렉트로니카 뮤지션 BT(Brian Transeau)를 필두로 브라이언 맥나이트, 엔 싱크의 든든한 후원자인 맥스 마틴과 라미 콤비, 흑인 랩 듀오 넵튠스(The Neptunes), 로드니 저킨스 등이 제작자로 참여해 매끈한 팝/R&B와 좀 더 댄서블한 앨범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작곡가 웨이드 롭슨(Wade Robson)과 저스틴이 함께 작곡한 첫 싱글 ‘Pop’은 일렉트로-펑크(funk) 비트와 유로 댄스 풍 신서사이저, 그리고 메탈 기타 연주가 곁들여진 강력한 일렉트로니카 댄스 넘버다. 파워 넘치기는 여전하지만 ‘Bye bye bye’와는 또 다른 분위기의 이 곡은 폴 반 다익(Paul Van Dyk)과 더불어 일렉트로니카 진영에서 최고의 실력파로 인정받고 있는 BT가 어레인지 및 프로듀스를 담당했다. 로드니 저킨스가 제작을 맡은 ‘Celebrity’나 냅튠스와 저스틴이 공동 작곡한 ‘Girlfriend’, 맥스 마틴과 라미의 작품인 ‘Tell me, tell me…baby’ 등 여러 곡에서 예의 펑키하고 활력 있는 엔 싱크의 음악을 만끽할 수 있다. 여기에 간간이 흘러나오는 발라드는 잠시 쉬어 가는 여유를 준다. 어쿠스틱 기타와 바이올린 연주, 그리고 가녀리지만 액센트 있는 비트가 어우러진 ‘Gone’, R&B 발라드의 귀재 브라이언 맥나이트가 작곡한 ‘Selfish’, ‘Just don`t tell me what’ 등에서 엔 싱크의 달콤하고 농익은 하모니를 감상할 수 있다. 그중 ‘Just don`t tell me what’는 스티비 원더가 참여, 그의 멋진 하모니카 연주까지 들려주는 곡이다. 마치 디온 워윅, 스티비 원더, 글래디스 나이트, 그리고 엘튼 존이 함께 불렀던 ‘That`s what friends are for’에서의 서정적인 하모니카 연주를 다시 듣는 기분이다. 여러 노장 가수들이 틴 팝 뮤지션들을 비난하고 있는 가운데 ‘흑인 음악의 전설’로 불리는 스티비 원더가 참여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앨범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트랙은 ‘The two of us’. 이 곡은 영국식 R&B와 클럽 댄스를 융합한 이른바 ‘2(Two)-스텝 사운드’를 도입한 곡으로, 달콤한 멜로디와 흥겹고 독특한 리듬으로 듣는 누구라도 단번에 반할 만큼 매력적이다. 더 흥미로운 건 이 곡이 ‘영국 R&B의 신성’ 크레이그 데이비드(Craig David)에게 영향 받아 만든 노래라는 점이다. 멤버 랜스 베이스는 최근 음악전문웹진 < 런치(Launch) >와의 인터뷰에서 그 연유에 대해 분명히 밝혔다. "그 곡은 이제 막 미국에 상륙한 크레이그 데이비드 타입의 사운드다. 크레이그 데이비드는 우리가 아주 좋아하는 아티스트이며 우리는 그 음악을 좋아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그 음악을 미국에 소개하려고 몇 곡을 만들었다. ‘The two of us’가 바로 그 곡이다." # Pop isn`t dead. 음악만큼이나 철학적으로도 성숙했다. 얼마 전 저스틴은 빌보드와 가진 인터뷰에서 일부 혹평에 대해 이렇게 항변했다. "비평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저주받는 것에는 이제 아주 진절머리가 난다. 우리는 결코 그들의 선입견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런 의견을 내기 전에 과연 우리 음악을 듣기나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러한 염증은 이 앨범을 아주 도전적으로 만들게 했다. 신보는 앞서 말한 부정적 시각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며, 첫 싱글 ‘Pop’은 그러한 자의식을 대변하는 곡이다. "더러운 팝! 사람들의 그런 얘기를 듣는 것도 지쳤어/ … 넌 이 음악이 왜 널 신나게 해주는 지 한번쯤 생각해봤니?/ 너의 몸이 요동치기 시작할 때 넌 그걸 느끼잖아/ 그리고 넌 멈출 수 없어"- ‘Pop’ 중에서 더불어 팝은 결코 죽지 않으며 단지 취향만 변한다는 주지의 사실을 이들은 강조한다. JC는 좀더 점잖게 말한다. "우리의 목적은 또 하나의 히트 레코드를 만드는 데 있지 않다. 대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음악적으로 변화시키는 좀더 반성적인 앨범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췄다. 또한 팝 음악이 다양한 취향에서 나온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버블 검 음악이 다가 아니라." 새 앨범과 더불어 최근 엔 싱크 팬들이 가장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은 아무래도 엔 싱크의 멤버 저스틴 팀벌레이크와 브리트니 스피어스 커플의 열애소식일 것이다. 처음엔 "우린 오랜 친구일 뿐이다. 뭐 그리 심각한 사이는 아니다"라는 식으로 애매하게 피해갔지만 이 커플은 현재 공공연하게 데이트를 즐기며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연인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카메라에 잡히고 기사화 된다. 말도 많던 브리트니의 ‘순결서약’도 둘만의 밀월여행이 언론에 의해 포착되면서 우스개 소리였냐는 비아냥거림도 나왔다. 급기야 지난 6월에는 두 스타의 동반 사망설까지 퍼져 경찰과 언론사, 팬들까지 미국 전체가 한바탕 난리를 치르기도 했다. 그저 웃자고 한 어느 방송국 DJ들의 농담이었다지만 사태가 너무 심각해졌고, 결국 그 DJ들은 방송국을 떠나야만 했다.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는 그 둘이 너무나도 ‘유명인사’였기 때문이다. 이런 걸 예상이라도 했을까. 엔 싱크의 이번 타이틀 트랙은 유명인사가 되어 오히려 진정한 감정에 소외되는 자신들을 희화화해 표현한 곡이다. "만약 내가 유명인사가 아니었다면 넌 나에게 그리 다정하게 해줬겠니?/ 내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주지 않았다면 그리고 다른 모든 값비싼 것들을 사주지 않았다면 나에게 다가왔겠니?/ 내가 유명인사가 아니었다면?" - ‘Celebrity’ 중에서 신보의 수록곡 중 6곡은 지난 5월부터 필라델피아, 뉴올리언스, 디트로이트 등 미 전역을 돌며 공연한 ‘팝 오디세이 투어’에서 이미 선보였다. 대개 앨범 발매 후 홍보 공연에 나서는 여러 다른 뮤지션들과는 달리 앨범 발매 두 달 전에 공연에 돌입했다는 것이 좀 특이하지만 그만큼 신곡들이 더 큰 호응을 얻을 전망이다. 멤버 중 랜스 베이스와 조이 페이튼은 자신들이 출연한 영화 < 온 더 라인(On The Line) >의 홍보에 바쁘고, 나머지 멤버들도 각기 솔로 프로젝트를 구상중이라는 소식이다. 그리고 최근 알코올 중독으로 요양소에 입원한 BSB의 멤버 A.J. 맥린과 관련, 빠른 쾌유를 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라이벌이긴 하지만 같은 보이밴드로서 동료애를 전하는 그들의 모습이 따뜻해서 보기 좋다. 팝 음악의 세계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무척이나 변덕스러우며 순간적인 것이다. 단순하게 덤벼서 오래 버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엔 싱크는 이제 팝 음악의 그 변하기 쉬운 성질에 웬만큼 적응했다. 이젠 그들에게 칭찬의 말을 건네도 별 문제가 없을 듯하다. 엔 싱크는 자기 몫을 충분히 아는 그리고 자기 몫을 충분히 하는 실력 있는 ‘팝’ 그룹이다.
노래 : Westlife (웨스트라이프)
아일랜드 남성 5인조 웨스트라이프는 비슷비슷한 보이밴드들의 범람 속에서도 자신들만의 영역을 굳건히 마련한 그룹이다. 5명의 멤버가 유려한 하모니로 아름다운 발라드 중심의 팝 음악을 들려준다. 이들의 ‘특화’된 발라드는 댄스음악 중심인 여타 보이밴드들과 구별되게 한다. 이들의 차별화 전략은 천편일률적인 댄스음악에 둔감해진 음악팬들에게 신선한 청량제로 작용하고 있다. 영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소녀 팬들의 상당한 지지를... 아일랜드 남성 5인조 웨스트라이프는 비슷비슷한 보이밴드들의 범람 속에서도 자신들만의 영역을 굳건히 마련한 그룹이다. 5명의 멤버가 유려한 하모니로 아름다운 발라드 중심의 팝 음악을 들려준다. 이들의 ‘특화’된 발라드는 댄스음악 중심인 여타 보이밴드들과 구별되게 한다. 이들의 차별화 전략은 천편일률적인 댄스음악에 둔감해진 음악팬들에게 신선한 청량제로 작용하고 있다. 영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소녀 팬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으며 특히 발라드를 선호하는 국내에서는 가히 절대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이러한 인기도는 보이밴드 계의 ‘절대강자’ 백스트리트 보이스나 엔싱크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차트성적도 화려하다. 영국에서 지금껏 이들이 발표한 7장의 싱글은 연거푸 차트정상을 차지했다. 이는 비틀스도 감히 달성하지 못했던 대기록이다. 팬 층을 10대에서 20대 이상까지 끌어올린 결과라 볼 수 있다. 이렇듯 음악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기대치 이상의 성공을 거두고 있는 그룹이 웨스트라이프다. 브라이언 맥파든(Bryan McFadden), 키언 이건(Kian Egan), 마크 필리(Mark Feehily), 니키 번(Nicky Byrne), 셰인 필런(Shane Filan)으로 구성된 웨스트라이프는 원래 3인조로 출발했다. 6인조 그룹으로 활동하던 키언과 마크, 셰인이 보이존의 매니저였던 루이스 월시에 의해 처음 발탁되었다. 월시는 이들을 보이존의 로넌 키팅에게 소개시켜줬고, 곧 이 둘은 매니저가 되어 웨스트라이프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로넌 키팅의 제안으로 브라이언과 니키를 영입해 완전한 라인업을 갖춘 웨스트라이프는 1999년 셀프타이틀 데뷔앨범 [Westlife]을 발표했다. 그해 5월에 발매한 첫 싱글 ‘Swear it again’은 곧바로 차트 1위를 차지했으며, 앞서 말한 대로 이 싱글을 필두로 7장의 싱글이 연속 차트정상에 오른다. 2000년에 내놓은 2집 [Coast To Coast] 역시 차트를 정복하며 소포모어 징크스 없이 히트행진을 이어갔다. 발라드 외에 이들의 또 하나의 특기는 리메이크다. 이 점은 아일랜드의 선배 그룹 보이존과도 닮은꼴인데, 이들은 주옥같은 팝의 명곡들을 웨스트라이프 식으로 재해석해 옛 추억을 자극하고 있다. 익스트림의 ‘More than words’, 필 콜린스의 ‘Against all odds’, 아바의 ‘I have a dream’, 킹스턴 트리오의 원곡으로 테리 잭스가 히트시켰던 ‘Seasons in the sun’을 깔끔하게 재생시켰다. 이들은 수많은 보이밴드들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프로듀서들에 의해 다듬어졌다. 이들의 전담 프로듀서 스티브 맥(Steve Mac)과 웨인 헥터(Wayne Hector) 외에 ‘틴 팝 히트제조기’ 맥스 마틴, 브리트니 스피어스, 엔 싱크에게 곡을 써줬던 라미, 역시 브리트니 앨범에 참여했던 페르 매그누손(Per Magnusson) 등이 웨스트라이프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다. 이처럼 프로듀서에 의존도가 높은 보이밴드의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지만 이들은 거기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해맑은 감성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보이밴드로서 음악팬들에게 더 없는 만족을 주는 웨스트라이프는 충분히 나름의 가치가 있다.
노래 : Air Supply (에어 서플라이)
호주 출신의 그룹 에어 서플라이(Air Supply)는 아름답고 포근한 노래들로 1980년대 초반을 풍미한 그룹이다. 그 무렵 이들의 스타덤은 마치 함락되지 않는 요새처럼 견고해 자국인 호주는 물론, 팝의 본고장 미국마저 완전 정복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이들에 대한 애정은 지금도 식을 줄 모른다. 이들은 인기가 한창이던 1982년의 첫 내한 공연으로 국내 팝 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겼으며 1992년과 ... 호주 출신의 그룹 에어 서플라이(Air Supply)는 아름답고 포근한 노래들로 1980년대 초반을 풍미한 그룹이다. 그 무렵 이들의 스타덤은 마치 함락되지 않는 요새처럼 견고해 자국인 호주는 물론, 팝의 본고장 미국마저 완전 정복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이들에 대한 애정은 지금도 식을 줄 모른다. 이들은 인기가 한창이던 1982년의 첫 내한 공연으로 국내 팝 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겼으며 1992년과 2001년에도 국내 무대를 가져 그 기억을 다시 한번 재현했다. 1976년 호주에서 상연되는 뮤지컬 <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의 공연장에서 운명적으로 조우한 러셀 히치콕(Russell Hitchcock)와 그래함 러셀(Graham Russell)이 프랭크 에슬러 스미스(Frank Esler Smith/키보드), 데이비드 모이스(David Moyse/기타), 데이비드 그린(David Green/베이스), 랄프 쿠퍼(Ralph Cooper/드럼) 등과 의기투합해 결성했다. 그룹명이 말해주듯 산소처럼 청명한 노래들을 공급했고, 그런 맑은 보컬과 분명한 선율을 선호하는 국내 팝 팬들에게 압도적인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1970년대 후반 로드 스튜어트의 오프닝 공연을 시작으로 북미 지역에서부터 대중과의 친화작업에 들어간 이들은 1980년에 공개한 데뷔 앨범 < Lost In Love >에서 ’Lost in love(3위)’, ’All out of love(2위)’, 그리고 ’Every woman in the world(5위)’가 차례로 빌보드 싱글 차트 상위권을 점령하면서 화려히 비상했다. 차트 성적이 웅변하듯 미국에서도 열화와 같은 호응을 얻었지만 국내에서 특히 ‘All out of love’은 라디오 전파를 독식하며 널리 애청되었다. 데뷔 앨범을 통해 천부적인 작곡 실력을 과시한 그룹의 두 간판인 러셀과 그래함은 1981년의 < The One That You Love >와 1982년의 < Now & Forever >까지 3년 간 매년 한 장씩 음반을 발표, 이미 타오른 인기에 불을 붙였다. ’Here I am(5위)’, ’Sweet dreams(5위)’, ’Young love(38위)’, ’Two less lonely people in the world(38위)’,그리고 우리나라를 위시한 지구촌 전역에 스매시 히트를 기록한 ’The one that you love(1위)’와 ’Even the nights are better(5위)’처럼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었던 대부분의 곡들은 바로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쉼 없이 달려오면서 많은 히트곡들을 배출한 이 호주 밴드는 1983년에 신곡이 포함된 베스트 음반을 공개해 가쁜 숨을 골랐다. 보니 테일러(Bonnie Tyler)의 ’Total eclipse of the heart’나 미트 로프(Meat Loaf)의 ’I’d do anything for love (But I won’t do that)’을 주조해낸 인물로 유명한 짐 스타인만(Jim Steinman)이 작곡한 ’Making love out of nothing at all(2위)’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웅장하고 화려한 오페라 스타일의 사운드스케이프를 그려냈다. 러셀 히치콕의 하이 톤 보컬이 압권인 이 곡은 에어 서플라이의 마지막 차트 톱10 히트곡이었다. 1984년에 흥행 1위를 차지한 영화 < 고스트버스터스 >의 사운드트랙에 삽입된 ’I can wait forever’로 꾸준한 인기를 얻었지만 1985년에 발표한 정규 앨범 < Air Supply >부터 이들은 급격히 내리막길을 밟기 시작했다. ’Just as I am’만이 19위에 올랐을 뿐 더 이상의 히트싱글은 없었으며 1986년에 나온 < Hearts In Motion >의 결과도 실망스러웠다. 1991년 < The Earth Is... >에서는 배드핑거(Badfinger)의 오리지널이나 해리 닐슨과 머라이어 캐리의 리메이크로 더 유명한 ’Without you’를 커버했으나 주목받는데는 실패했고, 2년 뒤 내놓은 < The Vanishing Race >에 수록된 ’Goodbye’는 본인들의 것이 아니라 나중 1998년 스웨덴에서 온 흑진주 제시카(Jessica)의 목소리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활동하면서 6인조 밴드는 1990년대 들어서 러셀 히치코크와 그래함 러셀을 중심으로 한 2인조 듀엣으로 과감한 구조 조정을 감행했고, 현재는 신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음악 팬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공연 위주의 활동에 역점을 두고있다. 이들의 음악은 1970년대의 소프트 팝과 스탠더드 발라드의 전통을 시대에 맞게 새롭게 가공, 1980년대 초반의 컨트리와 뉴 웨이브 파고를 뚫고 나름의 지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 사람들이 어떤 팝 음악을 선호하는지를 말해주는, 한국 음악정서의 바로미터 역할을 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가수, 그러나 가장 천대받는 가수 이처럼 극도로 엇갈린 가수는 없다. 미국의 대중 주간지 < 피플 >은 92년 “그는 팝 음악의 창공에 독특한 위치를 점령하고 있다”며 “팬들로부터 그처럼 열광적인 환호를 받고 동시에 음악 비평가들로부터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받는 아티스트도 드물 것이다”고 기술했다. ‘이 시대의 스타’ 마이클 볼튼(Michael Bolton), 1990년 신년 벽두에 ‘그대없...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가수, 그러나 가장 천대받는 가수 이처럼 극도로 엇갈린 가수는 없다. 미국의 대중 주간지 < 피플 >은 92년 “그는 팝 음악의 창공에 독특한 위치를 점령하고 있다”며 “팬들로부터 그처럼 열광적인 환호를 받고 동시에 음악 비평가들로부터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받는 아티스트도 드물 것이다”고 기술했다. ‘이 시대의 스타’ 마이클 볼튼(Michael Bolton), 1990년 신년 벽두에 ‘그대없이 어떻게 살아가리?(How am I supposed to live without you?)’로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라 1990년대 첫 슈퍼스타가 된,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메가톤급 히트 앨범 < 영혼의 공급자(Soul Provider) > 이후 발표하는 앨범마다 기록적인 판매로 대중적인 명성을 구가했지만 비평가들로부터는 철저히 외면 당했다. 평론가들은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그에게 호된 질책으로 일관했다. 그것은 거의 ‘두들겨 패는’ 수준이었다. 일례로 <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지의 유명 저널리스트 ‘로버트 힐번’은 그를 가리켜 창조성 없이 악보를 그대로 전달하는 단계에 그친다는 의미에서 ‘팝의 썰매’라고 규정짓고는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자신이 돌파 할 수 없는 노래에 결코 도전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틀 속에 안주하려 한다. 그와 음악과의 관계는 스티븐 시걸과 영화와의 관계나 같다” 말이 그렇지 이것은 모욕이나 매 한가지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가 평자들로부터 아티스트란 말을 들을 수가 없다. 볼튼이 소울의 고전을 비롯해 흘러간 명곡을 멋들어지게 재해석해 노래해도 그들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이구동성으로 “원작의 기품을 버려 놓았다”고 질타한다. 그 가운데 가장 심한 것이 < 롤링 스톤 >지의 평가였다. 이 잡지는 1993년 43명의 비평가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 그를 ‘최악의 남자 가수’로 선정했다. 또한 빅 히트작 < 불후의 고전(Timeless, The Classics) >를 ‘최악의 앨범’으로 뽑아 미국에서만 5백만 장 이상이 팔려 나간 대중적 인기를 무색케 해 버렸다. 그가 이처럼 비평계의 푸대접을 받게 된 것은 물론 그의 보컬 스타일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핏줄을 솟게 하고 마치 토해 내는 듯한’ 창법을 구사한다. 4옥타브를 충분히 넘나드는 넓은 음역, 이것이 팬들에게는 환상이었지만 평론가들의 귀에는 높고 답답하게 들릴 뿐이었다. 그들은 그의 가창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금방 눈치챌 정도로 ‘작위적’이어서 곧 사람들을 질리게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그들은 예술적 고뇌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없는 그 작위가 결국은 상업성을 노린 것임을 경계한다. 로버트 힐번이 지적하는 ‘안주적 자세’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이를테면 대중적 성공에 떠밀려 아티스트적 실험 정신을 휴지화했다는 것인데, 실제로 볼튼은 < 영혼의 공급자 > 이후 앨범들인 < 시간, 사랑 그리고 부드러움(Time, Love And Tenderness) >과 < 불후의 고전 >에서 새로움을 선사하기보다는 전작의 성공패턴을 답습하는 경향을 드러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옛 곡의 리메이크가 성공하자, 줄줄이 리메이크 작품을 내놓았으며 더구나 보컬 스타일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변명의 여지없이 전작의 성공 재창출에 지나치게 집착했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 팔리는 음반을 만들기 위해 모험을 가능한 배제한 채 빅히트된 음반(Soul provider)을 모델로 그 스타일을 철저히 쫓는다는 얘기다. 비평가들이 이처럼 유난히 그에게 비판의 화살을 겨냥하는 데는 그가 곡을 만들어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라는 점도 크게 작용한다. 평론가들은 노래만 하는 싱어일 경우 그가 대중적 호응만을 고려한다 할지라도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대중의 기호에 따라 그들의 정서를 위무해 주는 팝 가수도 나름대로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다. 그러나 곡을 만들 능력이 있는 사람, 즉 싱어송라이터의 경우는 자신의 음악 세계를 펼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그가 앨범 판매량을 늘리기에 얽매여 있을 때는 가차없이 장사꾼으로 매도해 버린다. 만약 볼튼이 단순한 싱어에 머물렀다면 아마도 그처럼 잔인한 혹평에 시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과연 이러한 비평가들의 철저한 외면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비평가들이 뭐라 떠들어도 압도적으로 자신의 노래를 사랑해 주는 대중이라는 ‘응원군’을 내세워 여유를 잃지 않았고 앨범의 높은 판매고를 ‘비평에 견디는’(Critic-proof) 방파제로 제시하곤 했다. 사실 그의 노래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진 음악 관계자들도 적지 않다. 우선 그가 1988년 ‘만의 부두에 앉아(Sitting on the dock of the bay)’를 리메이크했을 때 이 곡의 원작자인 오티스 레딩의 미망인 젤마 여사로부터 극찬을 받은 사실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는 볼튼에게 편지를 써서 또는 공개석상에서 그의 노래가 “지금까지 나온 남편 곡의 무수한 버전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며 “만약 지하에 있는 남편도 들었다면 흡족했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볼튼의 강력한 후원자인 어머니 헬렌 볼로틴(볼튼의 본명은 Bolotin) 여사는 “내 아들이 노래하는 것을 비명을 지르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그는 단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라며 비평계의 시각을 몰지각으로 단정한다. 그와 곡을 함께 쓰는 오랜 친구 다이안 워렌(Diane Warren)은 한편으로 볼튼에 대한 평자들의 차가운 시선이 오히려 대중의 호응을 증폭시켰다는 흥미로운 견해를 내놓고 있다. 그의 주장은 “한 남자가 혹독하게 비판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한없이 부드럽게 노래할 때 여성들은 오히려 그를 사랑해 준다. 여성들은 거기서 녹아 버린다”는 것이다. 부연하면 평론가들의 무차별 공격이 도리어 여성 특유의 모성본능을 자극해 그를 감싸주게 됐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그의 음악팬들은 절대 다수가 여성인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그처럼 비평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가엾은(?) 남자가-더구나 수려한 외모를 갖춘 남자가!-애절하게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를 노래할 때 대부분이 여성들은 이성이 마비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마이클 볼튼과 비평과의 대치는 곧 ‘감성적인 여성 팬들’과 ‘날카로운 평론가들’간의 보이지 않는 대결(?)의 측면도 가세된 셈이다. 하지만 아티스트란 어떤 형태로든 비평가들의 눈초리를 암암리에 의식하게 된다. 그는 얼마나 심기가 불편했던지 1991년 그래미 최우수 남자 팝 가수상을 받던 날 밤 기자들에게 “무례한 사람들은 내 엉덩이에 키스하라”고 퍼붓기도 했다. 여기서 무례한 사람들이란 마구 펜을 휘갈기는 저널리스트나 비평가를 가리킴은 물론이다. 그런데 1993년 하반기에 그가 내놓은 앨범 < 한가지 >는 상당히 비평가들을 의식해 만들었다는 느낌을 주었다. 보컬의 톤도 많이 낮추고 자작곡의 비중을 높였으며 비판의 핵이었던 리메이크 남발도 자제, 옛곡은 빌 위더스의 ‘내게 기대어(Lean on me)’ 한 곡으로 대폭 줄여 버린 것이었다. 평론가들의 반응은 당연히 ‘이제까지 볼튼의 앨범 중 최고’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작품성을 인정받는 대가로 대중적인 음반 판매 실적은 과거에 비해 저조해 두 마리 토끼를 사냥하지는 못했다. 그의 상업성이 유달리 지적 받게 된 데는 또한 그의 ‘눈물겨운 과거’도 한 요인이 되었다. 7살 때 섹스폰을 잡고 11살에 기타를 치는 등 음악 생활을 일찍 시작했지만 그의 청년기는 지극히 불우했다. 발표하는 음반마다 실패해 야간 업소 출연으로 겨우 연명해 나갈 정도였다. 1975년 레코드점 여직원인 모린(Maureen)과 결혼한 이후에도 생활은 개선되지 않아 노래 과외와 아이 돌봐주는 일, 즉 베이비시터로 집세를 충당하곤 했다(참고로 그가 봐 준 아이 중의 한 사람이 다름 아닌 폴라 압둘이었다. 이상하게도 두 사람의 관계는 묘한 악연으로 발전해 1990년 마이클 볼튼의 ‘그대 없이 어떻게 살아가리?’를 1위 자리에서 끌어내린 곡이 폴라 압둘의 ‘오포지츠 어트랙트(Opposites attract)’였고 이듬해 앨범 1위를 볼튼과 바통 터치한 주인공도 폴라 압둘이었다). 그의 술회에 따르면 당시 볼튼 부부와 세 딸은 마카로니와 치즈로 끼니를 때웠다고 하며 볼튼은 허구한 날 식탁에 앉아 “어떻게 집세 내고 자식을 먹여 살릴 것인가”만을 걱정했다고 한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터널의 끝에서도 빛을 볼 수 없을 만큼 참담했다”고 표현했다. 때문에 36세가 되어서야 성공했을 때(그는 1954년생으로 미국 코네티컷 주 뉴 헤이븐 출신) 주변에서 ‘하룻밤 자고 나니 스타가 된 케이스’라고 하자 “무슨 소리냐. 성공하기까지 대략 3천6백42번의 밤을 보냈다”고 응수했던 것이다. 비평가들은 그가 바닥 생활을 청산하자마자 곧바로 상업적으로 치달은 것을 못마땅해한다. 그럴수록 과거의 고난을 예술적으로 승화해 작품에 구현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의 성공은 사생활에도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 영혼의 공급자 >가 수면 위로 부상하던 1989년 아내 모린과 15년 결혼 생활을 청산하게 된 것이었다. 그 시점이 볼튼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그 무렵 한 인터뷰에서 그는 “하필 가장 잘 나가는 때에 성공을 축하하는 전화가 걸려 오는가 하면 이혼 증언 서류에 대한 변호사의 전화가 걸려 왔다. 너무 아이러니컬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그는 이듬해 정식으로 이혼했다. 그리하여 방문하는 관계로 매듭짓긴 했지만 세 딸들 아이사(20), 홀리(18), 타린(16)과도 떨어져 살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는 성심 성의껏 딸들을 보호하는 자상한 아빠의 역할에 충실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식들이 인정하는 가운데 1992년부터 TV배우인 니콜레트 셰리단(Nicollette Sheridan)과 건전한 연인 관계를 맺어 오고 있다. 마이클 볼튼은 우리에게 대중적으로 성공한 뮤지션과 비평계간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사이를 생각하게 한다. 앨범이 많이 팔려 나갈수록(진지함이 없을 경우) 비평가들로부터 매질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그처럼 실감나게 보여준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는 성공과 함께 이혼의 아픔을 겪었다. 그 스스로도 “성공하면 할수록 그것은 네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비디오 게임처럼 첫 번째 스크린을 통과하고 나면 너를 쏘려고 레이저 미사일을 단 비행접시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공의 대가는 쓰디쓴 법이다.
2002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핵심부문인 ‘올해의 곡’(Song of the year)과 ‘최우수신인’상을 포함해 ‘여성 R&B 보컬’ ‘R&B 앨범’ ‘R&B 송’ 등 5개 부문을 석권한 앨리샤 키스(Alicia Keys)는 뉴 밀레니엄 초반의 R&B 음악양식을 대표하는 가수라고 할 수 있다. 어번(Urban) R&B라고 단순 정의할 수 없을 만큼 전통과 현대가 절묘하게 조화된 고유상표의 음악을 들려준다. 귀에... 2002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핵심부문인 ‘올해의 곡’(Song of the year)과 ‘최우수신인’상을 포함해 ‘여성 R&B 보컬’ ‘R&B 앨범’ ‘R&B 송’ 등 5개 부문을 석권한 앨리샤 키스(Alicia Keys)는 뉴 밀레니엄 초반의 R&B 음악양식을 대표하는 가수라고 할 수 있다. 어번(Urban) R&B라고 단순 정의할 수 없을 만큼 전통과 현대가 절묘하게 조화된 고유상표의 음악을 들려준다. 귀에 잘 들리는 피아노 멜로디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가스펠을 연상시키는 소울 식의 고전적 창법이 트레이드마크이며, 이 때문에 1970년대 여성 소울의 거성인 로버타 플랙(Roberta Flack)과 자주 비교되곤 한다. 하지만 재래의 미학만을 고집하는 복고형 R&B라고 하기보다는 거기에다 현대적 힙합 분위기를 삼투한 최신 스타일을 부각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 어반이란 수식어가 붙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를테면 과거 블루스와 재즈에 뿌리를 둔 음악을 현대적 창구로 전달하는 셈인데 실제로 피아노의 선율, 1970년대 풍의 소울 창법, 세련된 힙합 분위기가 어울린 그녀의 ‘모던한’ 데뷔 앨범 [Songs In A Minor]는 2001년에 발표되어 화려히 인기차트를 누볐다. 미국 뉴욕 토박이로 1982년에 태어난 앨리샤 키스는 어렸을 적부터 음악을 자신의 미래분야로 삼아 맨하탄의 퍼포먼스 아트 스쿨(Performance Art School)에서 합창을 훈련했고 10대 내내 피아노교습에 열중한다. 이 합창과 피아노는 훗날 데뷔 앨범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아울러 피아노 외의 다른 악기 연주는 물론, 작곡 편곡 등 음악작업 전반에 걸친 실력과 감각을 쌓았다. 고교를 졸업한 16살에 명문 콜롬비아 대학에 입학했지만 음악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학업을 도중 포기했고 대신 1998년 명문 레코드사인 아리스타(Arista)와 계약을 체결한다. 아리스타 사장이었던 클라이브 데이비스(Clive Davis)에 의해 픽업된 관계로, 그가 1999년 아리스타를 떠나 새로운 레이블 제이(J)를 출범시키자 앨리샤도 그를 따라 제이 레코드사로 적을 옮기게 된다. 19살이던 2001년 데뷔 앨범 [Songs In A Minor]이 발표되었고 이 음반은 데뷔와 동시에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을 밟는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다. 특히 자신이 프로듀스한 첫 싱글 ‘Fallin’’은 전미차트 2주간 1위를 차지했다. 그녀의 각별한 신구(新舊)결합형 음악은 시장 뿐 아니라 마침내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 그리고 그래미상이라는 공인 절차마저 거뜬히 통과했다.
1990년대 중반 어른 뺨치게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어린 소년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지난 2001년 4년여의 공백을 깨고 R&B 정상에 우뚝 선 어셔(Usher)가 그 주인공이었다. 어셔(본명: Usher Raymond)는 1979년 미국 테네시(Tennessee)의 채터누가(Chattanooga)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하기 시작한 그는 어머니인 조네타 패튼(Jonnetta Pat... 1990년대 중반 어른 뺨치게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어린 소년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지난 2001년 4년여의 공백을 깨고 R&B 정상에 우뚝 선 어셔(Usher)가 그 주인공이었다. 어셔(본명: Usher Raymond)는 1979년 미국 테네시(Tennessee)의 채터누가(Chattanooga)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하기 시작한 그는 어머니인 조네타 패튼(Jonnetta Patton,이후 그의 매니저로서 활동한다)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하며 역량을 키운다. 아틀란타(Atlanta)로 이주해 온 그는 12살의 어린 나이에 벌서 가수의 길을 준비한다. 출중한 노래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1992년 라페이스(LaFace) 레코드사에서 주최하는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브라이언트 레이드(Bryant Reid)의 눈에 들게 된다. 라페이스 레코드사 공동 대표 안토니오 “엘에이” 레이드(Antonio "LA" Reid)의 동생이었던 그는 형에게 이 출중한 소년을 소개했고, 어셔 레이먼드는 1994년 14살의 어린 나이에 안토니오 “엘에이” 레이드(Antonio "LA" Reid)와 퍼프 대디를 프로듀서로 삼아 데뷔 앨범 < Usher >를 선보인다. 14살 어린 소년의 음악은 대중의 호응을 얻어내며 큰 인기를 누렸다. ’Think of you’가 R&B 차트 톱10(팝에선 58위) 히트를 기록했으며 앨범 또한 골드를 획득했다.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미래의 가능성을 인정받은 그는 이후 여러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친다. 1995년에는 ‘코카콜라’ 음료수 회사의 레코딩에 나섰으며, 남성 R&B 그룹인 블랙 멘 유나이티드(Black Men United)의 ‘You will know’에 입을 보탰다. 이어 영화 < Jason’s Lyric > 사운드트랙에도 참여했으며, 모니카(Monica)와 듀엣 곡 ’Let’s straighten it out’을 부르기도 했다. 어셔가 가진 매력은 남다른 것이었다. 어린아이가 가져야 할 순수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인 못지 않은 감성을 이끌어 내는 매력은 어느 뮤지션에게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그의 재기는 1997년의 두 번째 앨범 < My Way >로 용트림을 한다. 저메인 듀프리(Jermaine Dupri), 테디 라일리(Teddy Riley), 베이비페이스(Babyface)를 공동 프로듀서 겸 작곡가로 끌어 들였고, 이들의 참여는 어셔의 탁월한 재능이 돋보이게끔 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18살이었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내 놓은 이 앨범에서 그는 소년 뮤지션으로서의 이미지를 벗어 던지며 ‘보이 투 맨’ 한다. 직접 곡 작업에도 참여하여 9곡의 노래 중 6곡에 참여하였으며, 보컬에 있어서도 이전보다 한층 성숙해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소년의 티를 벗은 그에게 대중은 열렬한 지지의 뜻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첫 싱글로 커트 된 정통 R&B 곡 ’You make me wanna’는 대단한 인기를 얻으며 차트 2위에 7주 동안 머무르게 된다. 당시 1위 곡이 영국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죽음과 맞물려 14주간 굳건히 1위를 지킨 엘튼 존(Elton John)의 ’Candle in the wind ’97’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 곡의 인기가 다른 1위 곡들에 못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기행진은 쉴 틈 없이 계속되었다. 힙합 스타일의 ’Nice and slow’가 1998년 드디어 차트 정상을 정복했고, 동명 타이틀의 ‘My way’도 차트 2위의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이 노래까지 세 싱글은 모조리 플래티넘(100만장)을 기록했다. 한편 미드나잇 스타(Midnight Star)의 곡을 리메이크한 ’Slow jam’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 앨범에는 거물급 프로듀서들말고도 낯익은 뮤지션들이 참여해 ’Slow jam’에는 모니카(Monica)가, ’Just like me’에는 릴 킴(Lil’ Kim)이 참여했다. 1997년 흑인 음악계를 이끌어 갈 최고의 유망주로 각광 받은 어셔는 97년 소울 트레인 어워드(Soul Train Award)에서 ’Best R&B Single by a Male’ 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으며, 그레미(Grammy)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하였다. 최고의 R&B 스타로 등극했지만 그는 춤과 연기에도 재주를 가진 만능 엔터테이너이기도 하다. 수준 급의 연기로 주목받는 배우는 아니지만 그는 1998년 호러 영화인 < 더 패컬티 >(The Faculty)에 연기자로 출연했고, 이후 학교 드라마인 < 라이트 잇 업 >(Light It Up) 등 3작품에서 가수 이외의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 앨범의 성공 이후 라이브 투어 활동에 진력하던 어셔는 2000년 싱글인 ‘Pop ya collar’를 발표하며 컴백한다. 미국 뮤지션인 그에게 이 곡은 색다른 결과를 가져다주었는데 이 곡은 자국인 미국보다 영국에서 인기를 얻으며 2001년 2월 영국 차트 2위의 성공을 이끌어 낸다. 2000년 11월 2.5집이라고 할 < All About U >를 내놓았으며 < All About U >의 곡들에 새로운 싱글들을 더해 2001년 8월 < 8701 >을 내놓는다. 발매 이전에 이미 싱글 ’U remind me’가 발매 4주만에 정상을 밟은 이 앨범은 전작에 참여했던 거물급 뮤지션들이 다시 손을 걷었음은 물론 어셔 자신 또한 이전 앨범에서 보여준 것보다 훨씬 많은 부분에서 아티스트로서의 역량을 뽐내고있다. 사실상 세 번째 정규 앨범이라고 할 수 있는 < 8701 >은 정통 R&B 곡들의 매력이 주를 이루면서도 지난 앨범보다 힙합에 더 치중한 듯 보이며, 스패니시 요소를 삽입하는 등 전체적으로 다양하고 성숙한 기량을 드러내고있다. 역시 차트 정상을 밟은 두 번째 싱글 ’You got it bad’는 한국 그룹인 지오디(god)의 곡 ‘길’과 표절 논란이 일며 한국 팬들에게도 관심을 끌었다.
노래 : Christina Aguilera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영미의 팝 음악은 그간 국내 대중음악의 길잡이 역할을 해왔다. 아무래도 우리 가요보다 수준이 높아 팝 음악만을 듣는 마니아들도 폭넓게 존재해 있고 사실 배울 것도 많다. 팝은 다양한 장르가 공존하며 음악시장에서 나름대로 지분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10대 중심의 댄스음악에 몰려 있는 국내 음악계에 귀감이 되어왔다. 이 점은 한편으로 미국 팝 음악은 결코 우리처럼 틴에이저 지향의 댄스음악으로 몰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 영미의 팝 음악은 그간 국내 대중음악의 길잡이 역할을 해왔다. 아무래도 우리 가요보다 수준이 높아 팝 음악만을 듣는 마니아들도 폭넓게 존재해 있고 사실 배울 것도 많다. 팝은 다양한 장르가 공존하며 음악시장에서 나름대로 지분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10대 중심의 댄스음악에 몰려 있는 국내 음악계에 귀감이 되어왔다. 이 점은 한편으로 미국 팝 음악은 결코 우리처럼 틴에이저 지향의 댄스음악으로 몰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웬일인지 미국에도 최근 10대 댄스음악 열풍이 불고 있다. 국내 음악계의 교사 역할을 해왔던 미국이 도리어 한국 음악계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라 있는 곡 ‘Genie in a bottle’의 주인공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Christina Aguilera)라는 이름의 여가수다. 올해 나이 겨우 18살이다. 금발에 푸른 눈의 뛰어난 미모를 소유해 노래 이상으로 가수 본인이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전해진다. 크리스티나를 출세시킨 곡 ‘Genie in a bottle’은 물론 댄스음악이다. 이러한 10대 여가수 선풍은 벌써 올해 들어 두 번째다. 상반기에는 브리트니 스피어스라는 소녀가수 얘기로 팝계가 한바탕 떠들썩했다. 크리스티나처럼 미모인 브리트니 스피어스는 17살이며 역시 댄스음악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크리스티나와 브리트니는 모두 올란도 지역의 TV 쇼프로 ‘미키 마우스 클럽’에 출연하다가 가수로 데뷔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것은 미국 음반업계의 스타시스템이 그간의 록 그룹이나 성인 여가수 중심에서 ‘미모의 틴에이저 여가수’를 키우는 쪽으로 선회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증거다. 근래 국내 가요계의 모습과 비슷해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차이점은 있다. 아무리 어린 여가수를 뽑아내 홍보와 마케팅으로 스타를 만들어낸다 할지라도 최소한 ‘기본’을 지킨다는 점이다. 그 기본이란 바로 가수의 필요조건인 가창력이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확실히 증명한다. 얼핏 금발의 미모라서 비디오만 믿고 내보낸 것 같지만 실은 나이답지 않게 노래를 잘한다. ‘Genie in a bottle’외에 그녀의 데뷔작에 수록된 곡 ‘I turn to you’ ‘So emotional’ ‘Reflection’ 등은 기성 가수가 들어도 인정할 정도의 노래 실력이다. 우리의 어린 여가수처럼 듣기가 전혀 거북하지 않다. 특히 발라드 ‘I turn to you’는 감정처리마저 아주 능란하다. 어린 백인 여가수치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흑인 리듬 앤 블루스의 소화력이 뛰어나다. 크리스티나의 포부는 감각이나 앳된 외모를 내세운 하이틴 스타가 아니라 가창력으로 승부하는 머라이어 캐리와 같은 ‘디바’가 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여전히 우리가 적극적으로 참고하고 반성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미국 팝계에 어린 여가수 붐이 일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같거나 또는 앞서 있다고 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1983년 후반, 두 백인 여성 가수의 데뷔곡이 2개월의 짧은 간격을 두고 빌보드 싱글 차트에 나란히 등장했다. 본의 아니게 시작부터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게 된 두 여가수의 경합은 1980년대 동안 가장 흥미롭고(본인들에게는 피 말리는 싸움이었겠지만) 긴장감 넘치는 팝의 핫 이슈였다. 두 여인은 1983년 10월에 데뷔 싱글을 차트에 등록시킨 이후 현재까지 20년이 달하도록 사그라지지 않는 창작력을 과시하는, 매... 1983년 후반, 두 백인 여성 가수의 데뷔곡이 2개월의 짧은 간격을 두고 빌보드 싱글 차트에 나란히 등장했다. 본의 아니게 시작부터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게 된 두 여가수의 경합은 1980년대 동안 가장 흥미롭고(본인들에게는 피 말리는 싸움이었겠지만) 긴장감 넘치는 팝의 핫 이슈였다. 두 여인은 1983년 10월에 데뷔 싱글을 차트에 등록시킨 이후 현재까지 20년이 달하도록 사그라지지 않는 창작력을 과시하는, 매브릭 음반사의 CEO 마돈나(Madonna)와 2개월 늦게 인기차트에 합류했지만 고지를 선점하고 나선 끝내 마돈나에게 밀려버린 ‘귀여운 악녀’ 신디 로퍼(Cyndi Lauper)다. 마돈나의 ‘Holiday’와 신디 로퍼의 ‘Girls just want to have fun’은 아직까지 그들을 정의하는 대표 곡으로 남아 있다. 선의의 경쟁이 시작된 지 20여 년이 흐른 현재, 레이스의 최후 승자는 알다시피 마돈나다. 그것도 판정승 아닌 분명한 KO승이다. 그러나 그들이 풋풋했던 데뷔 시절, 둘의 위치는 지금과 정반대였다. 애초 평단에서 마돈나는 ‘아니 벌써’의 반짝 스타로, 신디 로퍼는 ‘장수 만세’의 아티스트로 전망되었다. 평론가들이 신디 로퍼를 높이 산 이유는 페미니즘을 남근의 음악인 록과 포스트 펑크가 어우러진 ‘뉴 웨이브’로 설파했다는 점과, 마돈나처럼 섹시한 외모나 춤으로 판단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약간은 덜 섹시한 이미지를 고집하면서 음악으로 당당하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러한 독립적인 태도는 고등학교 중퇴, 소규모 클럽에서의 노래 시작, 자신이 결성한 밴드 블루 엔젤(Blue Angel)의 상업적인 실패와 파산, 그리고 남자 친구와의 불화 등 온갖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터득한 그녀의 인생관이 배양했다. 30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망가질(?) 수 있는 자신감은 바로 이 굴곡의 삶을 극복한 인간승리의 드라마에서 비롯된 떳떳함이 원천이다. 그녀의 성공을 가져온 많은 요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대적인 요구에 정확히 부응했다는 점이다. 소녀적 감성을 읊은 신디의 밝고 통통 튀는 가사는 그 시대 정서의 흐름을 타고 대중들을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로 괴롭히지 않았으며, 당대의 뉴 미디어인 MTV의 지원사격을 받은 것이었다. 10대 소녀들을 정신 없으면서도 쾌활하게 묘사한 뮤직비디오 덕분에 데뷔 싱글 ‘Girls just want to have fun’은 차트 2위라는 스매시 히트를 치면서 이 신인 여가수의 시대가 화려하게 개막했음을 알렸다. 이 곡이 수록된 솔로 데뷔 앨범 < She’s So Unusual >에서는 발라드인 ‘Time after time(1위)’과 ‘She bop(3위)’, ‘All through the night(5위)’, 그리고 ‘Money changes everything(27위)’를 포함해 5곡이 빌보드 싱글 차트를 유린하면서 그 무렵 완벽하게 재기에 성공한 티나 터너(Tina Turner)와 함께 1984년 팝 음악계를 가장 화려하게 수놓은 인물이 되었다. 그래미상도 펄펄 난 그녀를 응대해 신인상 트로피를 안겼다. 그 해 마돈나는 그래미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한 것을 비교하면 당시 마돈나와 신디 로퍼의 위상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다. 1985년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영화 < 구니스 >의 주제가 ‘The goonies ‘r’ good enough(10위)’로 기세를 유지했지만 이듬해 1986년 가을에는 두 번째 대결인, 이른바 ‘True 경쟁’을 통해 신디는 마침내 마돈나에게 추월을 당했다. 록, 팝, 펑크, 뉴웨이브, 펑크(funk), 레게 등 젊은층에 어필할 수 있는 색조의 음악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재구성해 큰 성공을 낚은 < She’s So Unusual >에 비해 두 번째 앨범 < True Colors >는 그녀 특유의 톡 쏘는 감각이 많이 희석된 대중적 팝으로 약간 빛깔을 달리했다. 앨범의 타이틀 트랙 ‘True colors’로 두 번째 차트정상의 영광을 안고, ‘Change of heart(3위)’와 ‘What’s going on?(12위)’, ‘Boy blue(71위)’가 연속으로 차트를 밟았지만 기존 팬들은 성인 취향의 팝으로 전향한 신보에 적지 않게 실망했고, 이 LP를 기점으로 그녀는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앨범 판매량도 전작 600만장에서 200만장(현재)으로 격감했다. 반면 경쟁자 마돈나의 < True Blue >는 700만장이나 팔려나갔다. 1989년에 공개된 세 번째 음반 < A Night To Remember >에서는 싱글 ‘I drove all night(6위)’와 ‘My first night without you(62위)’가 차트에 등장하긴 했지만 어느덧 음악적인 매력은 뚝 떨어져있었다. 반면 마돈나는 역작 < Like A Prayer >를 발표해 음악적인 면과 대중적인 면 모두를 포유(包有)하면서 5년간의 라이벌 대결은 마돈나의 완승으로 결판이 났다.(신디 로퍼는 그러나 새 앨범의 홍보 차원으로 내한공연을 가져 국내 팬들에게 시원스런 무대를 선사했고 공연실황이 TV로도 방송되어 열기를 현장에서 맛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달래주었다). 1993년과 1998년에는 < A Hat Full Of Stars >와 < Sisters Of Avalon >을 발표해 재기를 노렸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1994년에는 < 12 Deadly Cyns And Then Some >이라는 제목의 베스트 음반을 공개해 ‘Girls just want to have fun’을 리믹스한 ‘Hey now(87위)’로 마지막 희미한 불꽃을 태웠다. 이 곡은 또한 1970년대 팝 그룹 레드본(Redbone)의 히트곡 ‘Come and get your love(댄스 팝 그룹 리얼 맥코이가 커버해 1995년 19위)’를 샘플링했으며 1995년 웨슬리 스나입스(Wesley Snipes)와 패트릭 스웨이즈(Patrick Swayze)가 주연한 영화 < 투 웡 푸 >(To Wong Foo)에 삽입되었다. 흑인 싱어송라이터 루더 밴드로스(Luther Vandross)는 신디 로퍼의 노래 실력을 두고 “팝의 디바 휘트니 휴스턴에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데뷔 싱글 ‘Girls just want to have fun’과 1960년대 틴 아이돌 팝 가수 진 피트니(Gene Pitney)의 오리지널을 재해석한 ‘I’m gonna be strong’, 그리고 ‘My first night without you’, ‘True colors’ 등은 그녀의 뛰어난 곡 소화력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데뷔 초기의 우스꽝스러운 외모와 펑크적인 스타일에 의해 굳어진 ‘왈패’ 이미지로 인해 그녀의 음악적 진가는 과소평가 받기 일쑤였으며, 성인 취향의 팝 록으로 변신하자 많은 팬들은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던 것이다. 이제는 많이 잊혀졌지만 신디 로퍼의 이미지는 여전히 많은 팬들의 뇌리에 박혀있다. 깜직한 소녀(계집애?) 목소리, 중고품 할인가게 풍의 패션, 레슬링을 즐기는 여성 그리고 MTV 시대. 하지만 무엇보다 팬들은 그녀를 통해 그 시절에 ‘여자들은 단지 재미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의미에서 신디 로퍼야말로 ‘1980년대 팝의 바로미터’라고 할 것이다. 그 시대를 그녀만큼 ‘비범하게’ 산 사람도 없다.
알 켈리(R. Kelly)는 1990년대 베이비페이스(Babyface)와 더불어 흑인음악 최고의 프로듀서로 활약하며 어번 알앤비(Urban R&B), 뉴잭/질스윙(New Jack/Jill Swing)의 확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뮤지션이다. 1969년 1월 8일 시카고 외각의 사우스 사이드(South Side)에서 태어난 알 켈리(본명: Robert Kelly)는 흑인 빈민가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아버... 알 켈리(R. Kelly)는 1990년대 베이비페이스(Babyface)와 더불어 흑인음악 최고의 프로듀서로 활약하며 어번 알앤비(Urban R&B), 뉴잭/질스윙(New Jack/Jill Swing)의 확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뮤지션이다. 1969년 1월 8일 시카고 외각의 사우스 사이드(South Side)에서 태어난 알 켈리(본명: Robert Kelly)는 흑인 빈민가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아버지가 가정을 버리고 떠나 홀어머니와 살아야 했으며, 흑인 갱들과 어울리다 총상을 입는 등 그의 유년기는 저질 흑인 빈민의 삶이었다. 저급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농구선수의 꿈을 키워나가던 그는 레나 맥린(Lena McLin)이라는 음악 선생님을 통해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게 되고 어머니가 선물한 키보드를 가지고 뮤지션으로서의 도전을 시작한다. R&B 그룹 MGM을 결성한 그는 거리 공연을 통해 시카고 다운타운 최고의 뮤지션으로 성장해 간다. TV 음악 컨테스트인 < Big Break >에 출연하여 우승하는 등 지명도를 더해 나가던 알 켈리는 결국 자이브(Jive) 레코드의 웨인 윌리엄즈(Wayne Williams)의 눈에 들게 되었고, 1992년 데뷔 앨범 < Born Into The 90’s >를 발표했다.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첫 싱글 ’She’s got that vibe’가 R&B 차트에서 선전하며 눈길을 끌었고, 이어지는 ’Honey love’, ’Slow dance(Hey Mr. DJ)’가 연이어 R&B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초대형 R&B 뮤지션의 탄생을 알렸다. 데뷔 이듬해인 1993년 발표된 두 번째 앨범 < 12 Play >는 신인급 뮤지션 알 켈리를 R&B 정상의 인기 뮤지션으로 끌어올린다. 70년대 펑키(Funky)스타일과 90년대 힙합을 결합한 알켈리적 사운드가 위력을 발휘했고, 달콤하게 애원하는 발라드 곡 ’Bump n’ grind’가 싱글 차트에서 4주, R&B 차트에서 12주간 정상을 지키며 음악계를 강타했다. 솔로 뮤지션으로서 정상의 자리에 오른 알 켈리는 프로듀서로서의 또 다른 정상을 향해 순항을 시작한다. 1994년 알리야(Aaliyah)의 데뷔 앨범 < Age Ain’t Nothin’ But A Number >를 프로듀싱하며 15세 소녀 가수를 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알리야를 통해 뉴잭/질 스윙의 선두주자로 부상한 알 켈리는 이후 자신의 앨범은 물론 다른 뮤지션들의 앨범에 참여하여 R&B 최고의 프로듀서로 자리하며 어번(Urban) R&B의 흐름을 주도한다. 1995년 ’You are not alone’을 프로듀싱하여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에게 차트 정상의 기쁨을 선사하기도 했던 그는 토니 브랙스턴(Toni Braxton),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 자넷 잭슨(Janet Jackson), 메리 제이 블라이지(Mary J. Blige), 보이즈 투 멘(Boyz II Men) 등 거의 모든 정상급 어번 R&B 뮤지션들의 앨범에 참여하며 프로듀서로서 맹활약했다. 1995년 발표한 3집 앨범 < R. Kelly >는 상업적으로 음악적으로 모두 성공을 거두며 알 켈리 최고의 앨범으로 자리했다. 4백만장 이상이 팔려 나갔고, 발표한 세 장의 싱글 ’You remind me of something’, ’Down low(Nobody has to know)’, ’I can’t sleep baby(If I)’가 모두 플래티넘을 기록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앨범은 노골적으로 성적 유혹에만 치중한 전작과 달리 기독교인으로서의 자세를 담았고, 고급스러움과 저속함을 동시에 담아내는 그 만의 독특한 매력이 빛을 발한다. 1996년 영화 < Space Jam > 수록 곡 ’I believe I can fly’가 차트 정상에 오르며 전 세계에 알 켈리의 이름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켰고, 이 곡으로 그래미(Grammy) 3개 부문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영화 < Batman & Robin >의 사운드 트랙에 참여하여 ’Gotham city’를 연이어 히트시킨 알 켈리는 당시 최고의 인기 여가수였던 셀린 디욘(Celine Dion)과의 듀엣 곡 ’I’m your angel’을 발표하며 다시금 차트 정상을 밟는다. 싱글 ’I’m your angel’의 여세를 몰아 발표한 4집 < R. >(1998)은 더블 앨범에 30여 곡이 수록되었고, 퍼프 대디(Puff Daddy), 나스(Nas), 제이-지(Jay-Z) 등 화려한 게스트들이 힘을 보탰음에도 불구 평단으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얻었고, 이후 큰 히트 싱글 또한 만들어 내지 못했다. 유명 아티스트들의 참여가 알 켈리 특유의 매력을 감소시켰고, 자신의 이름에 대한 중압감 때문인지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전작에서의 흔들림을 감안한 듯 2000년 발표한 < TP-2.com >은 대중성 강했던 < 12 Play >로 회귀하며 달콤함으로 앨범을 채웠다. ’I wish’, ’The storm is over now’, ’Fiesta’ 등이 고루 인기를 얻었지만 이 앨범 역시 R&B 최고의 뮤지션 알 켈리에게 특별한 히트 싱글 하나 가져다 주지 못했다. 알 켈리는 2002년 < R. >앨범에서 함께 했던 제이-지(Jay-Z)와 다시 한 번 손을 잡고 < The Best Of Both Worlds >를 발표하는 등 슬럼프로 접어드는 힘겨운 시기를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노래 : Martina McBride (마티나 맥브라이드)
노래 : Barry Manilow (배리 매닐로우)
10월 말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따뜻한 외로움을 선사하는 ’When October goes’의 주인공 배리 매닐로우는 탄탄한 음악 지식에 따뜻한 감성, 호소력 있는 보컬을 더하며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 가수이다. 그는 다양한 악기 편성, 변조를 통한 감성 고조 등 클래식 코드를 따르는 동시에 강한 서민적 인간미를 전하며 세대와 인종, 지역을 뛰어 넘는 인기를 누렸다. 배리 매닐로우는 1946년 6월 17일 뉴욕 브루... 10월 말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따뜻한 외로움을 선사하는 ’When October goes’의 주인공 배리 매닐로우는 탄탄한 음악 지식에 따뜻한 감성, 호소력 있는 보컬을 더하며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 가수이다. 그는 다양한 악기 편성, 변조를 통한 감성 고조 등 클래식 코드를 따르는 동시에 강한 서민적 인간미를 전하며 세대와 인종, 지역을 뛰어 넘는 인기를 누렸다. 배리 매닐로우는 1946년 6월 17일 뉴욕 브루클린(Brooklyn) 빈민가에서 배리 알란 핀커스(Barry Alan Pincus)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두 살 때 아버지가 가정을 버리고 떠난 뒤 어머니의 성을 따라 배리 매닐로우(Barry Manilow)로 개명한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착실히 음악 실력을 쌓아나갔다. 일곱 살 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이후 음악 공부에 매진하여 명문 줄리어드 음악 학교(Juilliard School of Music)에 진학했다. 하지만 편모 슬하에서 자란 그는 여전히 고학생이었고, 생계를 위해 돈을 벌 수 있는 여러 가지 일에 손을 뻗어야 했다. 음반사의 우편물 발송, 프로듀서 보조역 등 여러 아르바이트에 전전하던 그는 이와 병행하여 CBS 방송국에서 프로그램 배경음악 작곡가로 일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클래식 학도였던 배리 매닐로우는 정상급 컨템포러리 팝 뮤지션으로 거듭나게 된다. CBS에서 인정 받기 시작한 이후 몇 년간 그는 돈벌이에 더욱 매진하여 맥도날드, KFC, 닥터 페퍼 등의 광고 음악 메이커로 활동한다. 1971년 영화배우 겸 가수로 유명한 배트 미들러(Bette Midler)의 피아니스트 겸 작/편곡자로 일하게 된 그는 다듬어진 음악성을 뽐내며 신인이었던 배트 미들러를 인기 가수로 만들었다. 이는 의 전신인 레코드사를 통해 그가 데뷔 앨범 을 발표하는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데뷔 앨범은 기대치에 비해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에 따라 스타 제조기이자 의 사장이었던 클라이브 데이비스(Clive Davis)는 배리 매닐로우에게 스캇 잉글리시(Scott English)가 히트시켰던 ’Brandy’를 ’Mandy’로 개사하여 발표하도록 하는 계획을 단행, 1974년 ’Mandy’가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하게끔 만들었다. 이때부터 배리의 성공시대는 시작됐다. 뒤를 이어 ’It’s a miracle’이 12위를 기록했고, 전작에 수록되었던 ’Could it be magic’이 싱글로 재 발매되어 6위에 오르는 늦깍이 성공을 거두었다. 세 번째 앨범 (1975)에서 ’I write the songs’를 다시 한 번 차트 정상에 올린 그는 ’Trying to get the feeling’(10위), ’Weekend in New England’(10위) 등의 곡을 연이어 히트시켰으며, 1977년 ’Looks like we made it’을 세 번째 정상에 올리며 절정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발라드 곡 위주의 활동을 하던 그는 1978년 카리브 정취의 디스코 넘버 ’Copacabana’를 차트 8위에 올리는 등 창작 영역을 조금씩 넓혀나갔고, 히트 앨범 에서 밝고 상큼한 발라드 곡 ’Can’t smile without you’(국내 CF에 삽입되어 인기를 누린 친숙한 곡이다.)를 3위에, ’Somewhere in the night’을 9위에 올렸다. 같은 해 영화 사운드 트랙 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인 그는 1978년 그래미 최우수 남성 아티스트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하였다. 1979년 에서 로커 이안 헌터(Ian Hunter)의 곡을 팝 발라드로 멋지게 재해석해 낸 ’Ships’가 9위에 오르며 올 타임 리퀘스트로 자리했지만 이후 배리 매닐로우의 인기는 하락세로 돌아섰다. 1980년 ’I made it through the rain’이 차트 10위에 오른 것 말고는 더 이상 톱 텐 히트곡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디온 워윅(Dionne Warwick) 등 여러 가수들의 프로듀서로 활동을 이어가던 배리 매닐로우는 1980년대 중반 스탠더드 재즈 싱어로 변신을 시도하여 새로운 매력을 전달했다. 1984년 발표한 재즈 앨범 에서 재즈 보컬의 최고봉 사라 본(Sarah Vaughan)과 듀엣으로 호흡을 맞추었으며, 수록곡인 ’When October goes’는 곡 자체의 매력은 물론 곡이 다루고 있는 시기적 특성이 함께 어필하면서 차트 성적과 무관하게 꾸준히 사랑 받는 그의 대표곡으로 자리했다. 이후 특별한 히트 곡은 만들어 내지 못했지만 재즈 앨범, 스탠더드 앨범, 크리스마스 앨범, 컴필레이션 앨범 등으로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고, 다른 뮤지션들의 프로듀서, 작곡가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를 비롯한 여러 뮤지컬 작업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지난 2001년 30여 년을 몸담았던 를 떠나 재즈 성향의 레이블 로 둥지를 옮긴 매닐로우는 메이플라워 아파트의 16개의 방을 컨셉트로 잡아 각종 장르를 선사한 를 발표하며 변함없는 왕성한 창작력을 뽐내고 있다.
최근 미국 팝음악계의 두드러진 현상은 급작스런 여가수 붐일 것이다. 머라이어 캐리, 샐린 디온, 셰릴 크로, 앨러니스 모리세트와 같은 스타들 말고도 호시탐탐 대권을 노리는 신인들이 줄을 잇고 있다. 과거에도 여가수들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요즘처럼 무리를 지어 전분야에 걸쳐 득세한 것은 없었다. 그야말로 소외된 여성들의 대반란이다. 이처럼 남성을 압도하는 모처럼의 ‘여성시대’를 밝힌 또 한사람이 사라 맥라클란이다. ... 최근 미국 팝음악계의 두드러진 현상은 급작스런 여가수 붐일 것이다. 머라이어 캐리, 샐린 디온, 셰릴 크로, 앨러니스 모리세트와 같은 스타들 말고도 호시탐탐 대권을 노리는 신인들이 줄을 잇고 있다. 과거에도 여가수들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요즘처럼 무리를 지어 전분야에 걸쳐 득세한 것은 없었다. 그야말로 소외된 여성들의 대반란이다. 이처럼 남성을 압도하는 모처럼의 ‘여성시대’를 밝힌 또 한사람이 사라 맥라클란이다. 귀여운 용모에 얼핏 갓 데뷔한 신인같지만 실제로는 경력 10년의 중견. 얼마나 고된 무명시절을 거쳤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챠트 상위권에 명함만 내밀지 않았을 뿐 음악계에서는 이름이 꽤나 알려진 인물이다. 지금은 음악계뿐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이름을 깊이 새기고 있다. 막 발표한 신보 < 떠오름(Surfacing) >은 빌보드 앨범차트 2위에 올랐다. 여기 수록된 곡 ‘미스터리를 만들고(Building a mystery)’도 해당 싱글차트 10위권에 진입했다. 뒤늦게 때를 만난 셈이다. 그의 음악은 전과 비교할 때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그럼 지금이 도대체 어떤 ‘때’이길래 앨범 제목처럼 갑자기 수면위로 떠오른 것일까? ‘널 사랑해(I love you)’ ‘네 할 것을 하라(Do what you have to do)’ 등 그의 노래는 마치 가을의 정취를 자극하듯 차분하고 쓸쓸하다. 조용함의 극치라 해도 과장은 아니다. 분노와 격정의 음악인 앨러니스 모리세트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바로 이것이다. 지금 팝 음악은 시끄러운 얼터너티브 록에서 조용히 자기 세계를 탐구하는 ‘개인 포크풍’으로 대세가 바뀌어가는 듯하다. 사람들이 절규에 지친 것일까. 사라 맥라클란 스스로도 이렇게 말한다. “3년전 전작이 나왔을 적에 방송국 대다수가 내 노래를 틀지 않았다. 다른 여가수, 분노의 광채를 발한 토리 에이모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세말고도 사라의 앨범과 노래가 주목받는 이유가 또 있다. 그가 올여름 ‘릴리스 페어(Lilith Fair)’라고 하는 커다란 행사를 기획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페스티벌에는 요즘 잘 나가는 여성 싱어송라이터들이 총집결해 매스컴의 집중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여가수들만’ 출연했다. 한마디로 ‘여성들의 한판을 벌여보자’는 것이었다. 사라 맥라클란은 남성이 지배하는 록을 향해 ‘분리평등’을 외치는 것이 행사의 취지라고 밝혔다. 제목에도 나타난다. ‘릴리스’는 유태인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로 아담의 조강지처였으나 이브에게 자리를 뺏긴 여인이라고 한다. 그의 상징성은 곧 복수심이다. 사라 맥라클란은 ‘릴리스 페어’에 페미니즘을 투영해 행사가 상업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막았다. 그를 평가해 줄 대목이 이 부분이다. 행사의 주창자로서 그의 음악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1997년 팝계 결산에서 그는 분명히 ‘올해의 인물’로 꼽힐 것이다. 물론 행사 출연진이 너무 포크라는 한 장르에 국한됐다는 점 등 아쉬움도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음악에는 별 아쉬움이 없다. ‘때’가 바뀌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노래 : Toni Braxton (토니 브랙스톤)
1967년생으로 미국 매릴랜드 주 출신인 토니 브랙스톤은 매우 신앙심이 깊은 부모 아래에서 어린 시절부터 교회 합창단에서 노래를 할 수 밖에 없었고, 이 때부터 노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는 교사 자격증을 받으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프로 가수를 꿈꾼 적은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그녀가 주유소에서 주유를 하면서 혼자 노래를 부르고 있던 모습을 본 매니저 윌리엄 페타웨이(William E... 1967년생으로 미국 매릴랜드 주 출신인 토니 브랙스톤은 매우 신앙심이 깊은 부모 아래에서 어린 시절부터 교회 합창단에서 노래를 할 수 밖에 없었고, 이 때부터 노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는 교사 자격증을 받으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프로 가수를 꿈꾼 적은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그녀가 주유소에서 주유를 하면서 혼자 노래를 부르고 있던 모습을 본 매니저 윌리엄 페타웨이(William E. Pettaway)로 인해 그녀의 인생은 바뀌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그녀와 자매들을 함께 그룹으로 묶어 브랙스톤스(Braxtons)를 결성, 1989년 아리스타 레이블과 계약을 맺은 후, 셀프 타이틀 앨범을 내놓았다. 그들의 싱글 [Good Life]의 성적은 그리 좋진 않았으나, 그 곡은 그녀의 존재를 작곡 콤비이자 자신들의 레이블인 라페이스(LaFace)를 런칭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던 엘에이 리드(Antonio "L.A." Reid)와 베이비페이스(Babyface)의 눈에 띄는 계기가 되었다. 두 사람은 그녀에게서 아니타 베이커의 매력을 가졌으면서 더 대중성이 있는 보이스의 매력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1992년 영화「Boomerang」OST를 제작하면서 원래 아니타에게 부탁하려던 [Love Shoulda Brought You Home]을 그녀에게 부르게 했고, [Give U My Heart]를 베이비페이스와 함께 듀엣으로 녹음하게 하면서 효율적으로 그녀를 팝 씬에 등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뒤이은 데뷔 앨범 「Toni Braxton」(1993)을 통해 [Another Sad Love Song](7위), [Breathe Again](3위), [You Mean the World to Me](7위), [I Belong to You/How Many Ways](28위)를 연이어 히트시키면서 그녀는 '중저음 소울 디바'의 위상을 계승할 후보 1순위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또한 그녀의 데뷔작은 미국 내에서만 8백만 장 이상을 판매하는, 신인의 데뷔앨범으로서는 엄청난 기록을 세웠다. 그 결과 그래미는 1994년 시상식에서 그녀에게 '최우수 신인상'의 영예를, 그리고 그 해부터 2년 연속으로 '최우수 R&B 보컬 퍼포먼스상'을 그녀에게 선사했다.

이처럼 화려하게 시작된 그녀의 인기는 2집「Secret」(1996)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소포모어 징크스라는 말이 그녀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고, 기존 프로듀서 라인업 외에도 알 켈리(R.Kelly), 데이빗 포스터(David Foster) 등이 지원사격을 아끼지 않았던 이 앨범 속에서는 [You Makin' Me High]와 그녀의 커리어 전체를 통틀어 현재까지 가장 애청되고 있는 발라드 [Unbreak My Heart](이 곡 역시 90년대를 주름잡았던 여류 작곡가 다이앤 워렌(Diane Warren)의 작품이다.)이 모두 팝 싱글 차트 1위 자리를 차지했고, [I Don't Want To/I Love Me Some Him], 케니지(Kenny G)와의 조인트였던 [How Could an Angel Break My Heart] 등이 뒤를 이어 히트했다. 앨범 역시 세계적으로 총 2천만 장 이상을 판매하면서 그녀의 인기 곡선은 끝을 모르는 듯 상승했다.

그러나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그녀의 커리어는 예상치 못한 변수들로 인해 계속 험난한 여정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2집의 히트 이후 시작된 라페이스 레이블과 그녀 사이의 계약 분쟁은 1999년 2500만 달러라는 거액의 계약금으로 해결을 보긴 했으나, 2000년에 발표된 그녀의 3집 「The Heat」는 거액의 제작비를 투자한 싱글 [He Wasn't Man Enough](2위)로 기분 좋게 시작하긴 했지만, 후속 싱글들인 [Just Be a Man About It](32위), 그리고 카를로스 산타나의 기타가 가세했던 발라드 [Spanish Guitar](98위) 등이 예상보다 큰 반응을 얻지 못하는 바람에 이 앨범으로 미국 내 2백만 장 이상의 판매고와 6번째 그래미 트로피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전작과 비교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 이후에는 또 다른 문제로 그녀는 레이블과 갈등을 빚었다. 3집 작업을 통해서 만난 민트 컨디션(Mint Condition) 출신의 멤버이자 작곡자인 케리 루이스(Keri Lewis)와 2001년 결혼한 후, 4집 앨범을 막 작업 완료를 했던 시기에 그녀는 둘째 아이를 임신했는데, 그 때 토니 측에서는 앨범 발매를 미뤄줄 것을 요청했으나, 레이블 측이 이를 거절하는 바람에 4집「More Than A Woman」(2002)의 홍보 활동은 그녀의 건강 문제로 계속 꼬여버렸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탄생한 둘째 아들 디젤(Diesel)은 2006년 자폐 판정을 받았다.) 넵튠스(Neptunes)가 작업한 [Hit the Freeway]가 히트하긴 했지만, 앨범의 성과는 골드 레코드로 만족해야했고, 결국 그녀는 라페이스-아리스타 레이블과의 관계를 청산했다.

우여곡절 끝에 2003년 블랙그라운드(Blackground) 레이블로 이적한 그녀는 2005년 5번째 앨범「Libra」로 재기를 노렸지만, 첫 싱글과 앨범의 발매가 미뤄지면서 이 앨범은 제대로 홍보를 받지 못했고, 간신히 골드 레코드에 머물게 되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과 이전 레이블에게 각각 다른 말을 했던 전 매니저에게 소송을 제기, 법원의 판결을 통해 37만 5천 달러의 선불금을 돌려주고 레이블과의 계약을 종결했다. 일단 2008년 TV 리얼리티 쇼 'Dancing with the Stars'의 시즌 7에 출연하고 관련 투어를 돌면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재기의 발판을 찾았고, 결국 새로운 레이블과 계약을 채결하면서 5년 만인 2010년 새 앨범 [Pulse]를 발매했다.
노래 : Babyface (베이비 페이스)
‘때로 귀에 거슬리는 오늘의 팝음악에 없는 모든 것을 생각하라. 그러면 베이비 페이스를 떠올릴 것이다.’ 미 시사주간지 < 타임 >은 ‘낭만의 부재’에 시달리는 시대에 그가 낭만으로의 복귀를 지휘하고 있다며 ‘그의 음악은 촛불의 성찬과 빗속에서 키스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찬사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25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혔다. 프로듀서로서 그는 선배와 동료 경쟁자 모두를... ‘때로 귀에 거슬리는 오늘의 팝음악에 없는 모든 것을 생각하라. 그러면 베이비 페이스를 떠올릴 것이다.’ 미 시사주간지 < 타임 >은 ‘낭만의 부재’에 시달리는 시대에 그가 낭만으로의 복귀를 지휘하고 있다며 ‘그의 음악은 촛불의 성찬과 빗속에서 키스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찬사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25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혔다. 프로듀서로서 그는 선배와 동료 경쟁자 모두를 제쳤다. 퀸시 존스, 데이비드 포스터도 그에게 손을 들었고 테디 라일리, R 켈리도 한참 밑이다. 베이비 페이스가 ‘이 시대의 프로듀서’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수로서도 특급. 부드럽고 편한 목소리로 손쉽게 인기차트 상위권을 공략한다. 막 출시된 베이비 페이스의 < MTV 언플러그드 > 앨범은 ‘소프트 팝의 총아’로서의 진면목을 유감 없이 전달해준다. < 뉴스위크 > 최근호도 그를 ‘루더 밴드로스 이후 가장 유명한 R&B의 연인’으로 일컬었다. 다재다능의 결과로서 그가 펼치는 히트 퍼레이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프로듀싱한 앨범의 판매고가 지금까지 8천만장. 10위권에 든 곡만도 자그마치 1백 10곡이며 그중에서 16곡이 차트 1위를 차지했다. 휘트니 휴스턴, 토니 브랙스턴, 보이즈 투 멘 그리고 에릭 클랩턴이 그의 도움아래 스타덤을 만끽하고 있다. 그를 거치지 않고 진정한 스타가 되기는 어렵다는 말도 나온다. 그의 성공비결은 단연 출중한 대중감각에 있다. 대중이 뭘 좋아하는지, 어떤 소리를 원하는지 정확히 안다. 중학생 시절에 이미 이것을 터득했다고 한다. “ 딴 사람의 노래를 연주하면서 대중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난 항상 사람들이 무엇에 감동하는지 예의 주시해왔다.” 대중성 기질을 타고났는데 영화라고 안될 게 없다. 그는 아내 트레이시와 함께 7백만달러를 투자해 영화 < 솔 푸드(Soul Food) >를 만들어 영화제작자로 데뷔했다. 당연히 흥행은 대성공. 개봉 3개월만에 4천만달러를 벌어들였다. 영화 사운드트랙 앨범도 이미 2곡의 톱 10 히트곡을 내면서 2백만장의 판매를 돌파했다. 음악 만드는 것 뿐 아니라 돈버는 재주도 갖춘 그를 보고 미국 연예계 종사자들 모두가 놀라워했다. 케네스 에드먼즈가 본명인 베이비페이스는 어리고 유순한 인상 때문에 ‘아이얼굴(Babyface)’ 란 별명이 붙었다. 이것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강점이다. 만지는 것마다 황금으로 만드는 성공가도에도 불구하고 ’아이얼굴‘답게 그에게는 오만의 흔적이 없다. < 솔 푸드 >의 관객 폭발에 대해서도 ‘영화를 보러 가도록 흥미를 유발하는 대본을 우연히 갖게 됐을 뿐’이라며 “영화든 레코드든 히트를 칠 수 있는 어떤 것을 골라낼 왕도는 없다. 단지 우리는 운이 좋았을 따름이다.”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음반사 라페이스의 사장으로 회사의 자산을 3억달러로 끌어올린 것이 과연 운에 불과할까. 그런 겸허한 언행이 우리를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린다. 지금은 잠시 영화에 한눈을 팔고 있지만 본연의 프로듀서로 돌아와 곧 토니 브랙스턴과 TLC의 새 앨범을 낸다. 이 음반들도 히트는 ‘따논 당상’이다. 라페이스의 자산 규모는 또 올라갈 게 분명하다. 도대체 ‘베이비 페이스 제국’의 끝은 어디일까?
노래 : Boyz II Men (보이즈 투 맨)
1980년대 후반부터 불어닥친 랩(Rap) 음악의 열풍은 한편으로 기존의 부드럽고 감성적인 소울 음악에 대한 향수라는 역풍(逆風)을 몰고 왔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등장한 4명의 흑인 청년들로 구성된 보컬 그룹 보이즈 투 멘(BoyzⅡMen)은 수려한 보컬 하모니를 무기로, 무너진 소울 음악의 정통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했고 그 결과로 단번에 R&B계의 주류로 일대 신분이 상승, 1990년대 R&B 최강자로 떠올... 1980년대 후반부터 불어닥친 랩(Rap) 음악의 열풍은 한편으로 기존의 부드럽고 감성적인 소울 음악에 대한 향수라는 역풍(逆風)을 몰고 왔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등장한 4명의 흑인 청년들로 구성된 보컬 그룹 보이즈 투 멘(BoyzⅡMen)은 수려한 보컬 하모니를 무기로, 무너진 소울 음악의 정통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했고 그 결과로 단번에 R&B계의 주류로 일대 신분이 상승, 1990년대 R&B 최강자로 떠올랐다. 흑인 음악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모타운(Motown) 레코드사가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소위 확실하게 밀 카드가 없어 부진의 늪에 빠졌으나 필라델피아 고교 동창생인 나산 모리스 (Nathan Morris), 마이클 맥커리(Michael Mccary), 숀 스톡맨(Shawn Stockman), 와냐 모리스(Wanya Morris) 이들 4명의 데뷔앨범은 90년대 모타운 사운드의 부활을 예고했으며 모타운 사의 중흥을 1990년대까지 이어가는 가교 역할을 해냈다. 이들의 우상이기도 했던 뉴 에디션(New Edition) 출신의 마이클 비빈스(Michael Bivins)에 의해 발탁, 정식 데뷔를 하게 된 보이즈 투 멘은 1991년 달라스 오스틴(Dallas Austin)과 트로이 테일러(Troy Taylor)가 공동 프로듀서한 데뷔앨범 < Cooleyhighharmarmony >로 대중들 앞에 첫 선을 보였다. 순식간에 차트 3위를 기록하며 플래티넘 고지를 점령한 첫 싱글 ’Motownphilly’는 모타운 사와 보이즈 투 멘 자신들을 홍보하는 내용(모타운+필라델피아의 신조어를 제목으로 따옴)에다 뉴 잭 스윙 형식을 취한 현대적 두 왑 곡으로 그들의 은인 마이클 비빈스가 제작에 참여하고 랩을 담당했다. 이 곡이 아카펠라의 맛 보여주기를 시도했다면 두번째 싱글 ’It’s so hard to say goodbye to yesterday’는 아카펠라의 진수를 보여준 곡이었다. 그들의 주무기인 환상적인 보컬 하모니를 들려준 이 곡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Black or white’에 밀려서 2위에 수주간 머무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이들의 음악 색깔을 여과 없이 드러낸 명곡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 곡의 영향으로 보컬 그룹들은 가창력을 인정받기 위해서 너나 할 것 없이 아카펠라 곡을 앨범에 수록하는 붐이 일어날 정도였다. 앨범에선 이외에도 고급스런 R&B 스타일을 선보인 ’Uhh ahh’(이상 3곡의 싱글은 차례로 R&B차트 정상에 올랐다.)와 맨하탄스(Manhattans)의 음악을 연상시키는 ’Please don’t go’ (9위)등이 인기를 얻었고, 앨범도 최고 순위 2위까지 오르며 900만장 이상이 팔려나간 엄청난 히트작이 되었다. 각종 시상식에서 R&B 부문의 상들을 휩쓸며 아직 10대의 티를 벗지 못한 4명의 소년들을 R&B계의 가장 주목할 신성으로 자리잡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후의 활동에서 데뷔작의 성공은 시작에 불과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1992년 그들은 베이비페이스(Babyface)와 첫 인연을 맺고 에디 머피(Eddie Murphy) 주연의 영화 < 부메랑 >의 사운드트랙 수록곡이자 역작인 ’End of the road’를 부르게 된다. 다분히 보이즈 투 멘을 위해 만들어진 곡임을 증명하듯 4명의 멤버는 자신들의 파트를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또한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가 ’Don’t be cruel/Hound dog’으로 기록한 11주의 기록을 훌쩍 넘어서 13주간 싱글차트 정상을 지키는 신기원을 이룩한다. 그래미상 2연패와 플래티넘 획득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같은 해 또 하나의 사운드트랙 < 더 잭슨스: 아메리칸 드림 >에 다시 아카펠라 곡을 선사한다. 파이브 새틴스(Five Satins)의 1956년도 오리지널을 리메이크한 전통적인 두 왑 스타일의 ’In the still of the nite(I’ll remember)’로, 이 곡 역시 팝 차트 3위, R&B차트 4위에 오르며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1993년 발매된 캐롤 앨범 < Christmas Interpretations >은 브라이언 맥나이트(Brian Mcknight)가 제작에 참여하고 함께 입을 맞춘 ’Let It snow’(19위)로 인기를 모았으며 이듬해 대망의 2집 앨범 < Ⅱ >를 내놓게 되는데 이들에겐 소모포어 징크스는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했다. 앨범은 발매와 동시에 차트 1위로 데뷔하여 5주간 그 자리를 지켰고 미국에서만 1200만장이라는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올렸다. 모타운 레코드사에 안겨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베이비페이스가 만들고 프로듀서한 첫 싱글 I’ll make love to you’는 빠른 속도로 차트 정상을 점령하더니 14주간이나 머물러 자신들이 세운 기록을 불과 1년만에 갱신한 대선배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과 타이를 이루었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곡을 차트 1위에서 끌어내린 곡이 두 번째 싱글 ’On bended knee’였다는 점이다. 비틀즈와 엘비스만이 가지고 있는 이런 기록을 20대 초반의 흑인 청년들이 손쉽게 이루어낸 사실에 팝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며, 지미 잼 & 테리 루이스가 프로듀서한 ’On bended knee’는 아름다운 화음과 세련된 멜로디가 돋보이는 곡으로 1위 자리를 2번에 걸쳐 오르며 총 6주간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그외에도 ’Thank you’(21위), 매끄럽기 그지없는 ’Water runs dry’(2위), ’Vibin’(56위)등이 차례로 차트에 올라 인기를 얻으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앨범에는 팝계의 최고의 프로듀서들이 참여했다. 앞서 언급한 베이비페이스와 지미 잼 & 테리 루이스, 데뷔 앨범을 함께한 달라스 오스틴, 트로이 테일러, 브라이언 맥나이트, 엘 에이 레이드, 토니 리치등 모두가 쟁쟁한 일급 프로듀서들이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보이즈 투 멘은 다시 한번 1995년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와 함께 한 ’One sweet day’로 인기 정점에 오른다. 당대 최고의 여가수와 최고의 보컬그룹의 만남을 대중들은 16주간 차트 정상이라는 신기록으로 환호했으며 판매고는 200만장을 훌쩍 넘어섰다. 같은 해에 보컬 그룹으로 드물게 리믹스 < The Remix Collection >앨범에 도전했는데 이 앨범엔 브랜디(Brandy)와 와냐의 듀엣곡 ’Brokenhearted’(9위), 엘 엘 쿨 제이(L.L. Cool J)와 함께한 플래티넘 싱글 ’Hey lover’(2위)등이 기존의 히트곡들의 리믹스 버전과 함께 수록되어 있었고 신곡 ’I remember’(46위)도 선전을 했었다. 이후 2년 동안을 필라델피아 교외에 묻혀 앨범 제작에 몰두했고 97년 3집 < Evolution >을 들고 나타났지만 이들의 새 앨범은 기대만큼 큰 화제를 얻지는 못했다. 그 단적인 면이 앨범 판매고에서 나타나 신작은 반짝 인기에 그치며 200만장을 넘기는 것도 힘에 부치는 모습을 보였다. 지미 잼 & 테리 루이스의 ’4 Seasons of loneliness’와 베이비페이스의 ’A song for mama’를 적극 밀었지만 첫 싱글은 차트 1위에 1주간 머무르는데 그쳤고, 두번째 싱글은 영화에 삽입하면서 홍보전략을 폈지만 7위까지 오르는 그들로선 평범한 히트를 기록하고 말았다. 당시 한창 주가를 올리던 퍼프 대디(Puff Daddy)를 프로듀서로 초빙한 수고로움도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결과만 초래했다. 1998년에는 다이안 워렌이 만든 < 이집트의 왕자 > 사운드트랙의 수록곡 ’I will get there’(32위)로 차트에 다시 등장했고, 데뷔 이후 모타운 레코드의 달러박스로 큰 몫을 차지했던 이들은 이듬해 레코드사의 인수 합병으로 인해 유니버살(Universal) 레코드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대망의 2000년을 맞이하여 멤버 자신들의 이름을 내건 네번째 앨범 < Nathan Michael Shawn Wanya >를 발매하기에 이른다.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그 동안의 앨범 작업마다 참여했던 유명 프로듀서들의 이름이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멤버 자신들이 직접 곡을 쓰고 프로듀서 했기에 자신들의 색깔을 제대로 냈고 진정한 싱어송라이터로 거듭났다는 평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상업적으로는 실패했다. 처음 시도하는 빠른 라틴 비트의 ’Beautiful women’, ’Good guy’로 시대의 흐름을 읽는데 소홀히 하지 않았고, 마치 테크노를 듣는 듯 신선한 ’Bounce, shake, move, swing’, 포크 송처럼 부드러운 ’Do you remember’, 특기인 아카펠라를 가미한 두 왑 ’I do’등 전체적으로 수작으로 손꼽을 만한 앨범이었다. 하지만 앨범 홍보가 미비했고 3집에서 시작된 대중들의 피로감 때문에 이미 많은 팬들이 등을 돌린 탓도 있었다. 결국 2001년 베스트 앨범 < Legacy: The Greatest Hits >를 끝으로 아리스타(Arista) 레코드로 새롭게 둥지를 틀었고 절치부심 새 음반 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10대에 데뷔하여 현재 30대 초반이 된 이들이 10년 동안 팝과 R&B계에 끼친 영향력은 그들 이후 많은 보컬그룹들이 생겨났다는 점과 더불어 이런 보컬 그룹들의 음악적 실력을 비교하는 잣대가 되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많은 곡들이 차트에 올랐다가 빠르게 사라져 갔지만 유독 이들의 노래들만은 오랫동안 머물며 사랑을 받았다는 것도 이들의 존재가치를 확실히 웅변하는 대목이다.
노래 : Bob Dylan (밥 딜런 ,Robert Allen Zimmerman)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eatles) 그리고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와 함께 최정상의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이들 ‘전설의 빅 4’ 가운데에서도 딜런이 남긴 궤적은 차별화 아닌 특화(特化)되어 역사를 장식한다.

얼핏 그의 위상은 ‘실적주의’로 따질 때 매우 허약해 보인다. 엘비스, 비틀스, 롤링 스톤즈는 그 화려한 전설에 걸맞게 무수한 히트곡을 쏟아냈다. 넘버 원 히트곡만 치더라도 엘비스는 18곡(통산 2위), 비틀스는 20곡(1위), 스톤즈는 8곡(11위)이나 된다. 하지만 딜런은 그 흔한 차트 1위곡 하나가 없다. ‘Like a rolling stone’과 ‘Rainy day woman #12 & 35’ 등 두 곡이 2위에 오른 것이 고작이다. 차트 톱 10을 기록한 곡을 다 합쳐봐야 4곡에 불과할 뿐이다. 그에게 대중성이란 어휘는 어울리지 않는다. 상업적이란 말과는 아예 인연이 없다. 이렇듯 실적이 미미한 데도 록의 역사는 마치 신주 모시듯 그를 전설적 존재로 떠받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는 차트 정복 외에도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비록 그 가지는 다를지언정 ‘록의 스타일 확립’ 이라는 몸체는 유사하다는 것이다.

비틀스는 록의 예술적 지반을 확대했고, 스톤즈는 록에 헌신하며 형식미를 완성했고, 엘비스는 록의 정체성을 부여했다고들 한다. 분명히 딜런도 몸체에 자리한다. 깃털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타(他) 3인의 몸체가 외양이라면 그는 ‘내면’ 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노랫말이요, 메시지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음악은 사운드와 형식만으로 이미 메시지가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로큰롤이 폭발하여 확산되던 시점인 1950년대, 즉 엘비스가 활약하던 당시에 로큰롤은 메시지가 없었다. 1960년대 들어서 비틀스가 미국을 급습해 록의 르네상스를 일궈내고 있던 때까지도 록은 의미있는 가사와 격리된 상태였다. 그래서 의식계층으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그 때 밥 딜런이 있었다. 비틀스는 누구보다 먼저 딜런의 위력을 절감했다. 그의 포크 사운드와 메시지를 귀담아 듣고 그것을 자신들의 음악에 적극 수용한다. 1965년말 < Rubber Soul > 앨범의 수록곡인 ‘In my life’, ‘Girl’, ‘Norwegian wood’ 등에서 ‘톤 다운’ 을 드러내며 메시지를 잠복시킨 것은 전적으로 딜런의 영향 때문이었다.

밥 딜런은 실로 대중 음악의 지성사(知性史)를 이룬다. 타임(Time)지의 제이 칵스는 1989년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존 업다이크의 소설과 밥 딜런의 앨범 가운데 어느 것이 미국인들의 삶에 보다 자극을 주었는가? 존 업다이크 쪽에 표를 던진 사람이라면 이 기사를 여기까지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가사는 그러나 때론 메시지의 파악이 어려운 ‘난해한 현대시’ 와 같다. 밑줄 긋고 열심히 분석해도 도대체 명쾌하지가 않다. 1960년대 중반 < Another side of Bob Dylan >, < Bring it all black home >, < Highway 61 revisited >가 연속 발표되었을 때, 미국 각 대학의 영문과에 ‘밥 딜런 시분석’ 강좌 개설이 유행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팝팬들에게 딜런이 상대적으로 소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에게도 이 정도인데 영어의 벽에 막혀 있는 우리가 어찌 그를 쉽게 수용할 수 있었겠는가. 때문인지 음반마저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초기곡으로 알려진 것은 그나마 메시지가 확연한 ‘Blowin’ in the wind’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1970년대 중반의 금지곡 태풍으로 반전(反戰) 노래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방송과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 외 우리 팝 인구에 회자된 노래로 ‘One more cup of coffee’나 ‘Knockin’ on heaven’s door’가 있다. 그러나 그의 대표곡 반열에도 오르지 못하는 ‘One more cup of coffee’가 통한 것은 단지 낭만적 제목과 함께 친숙한 선율 때문이었을 뿐, 딜런의 음악 세계에 대한 천착의 결과물은 전혀 아니었다. ‘Knockin’ on heaven’s door’ 인기의 영예도 실은 건스 앤 로지스가 더 누렸다.

극소수의 곡을 제외하고 밥 딜런은 우리에게 인기가 없었다.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에 비한다면 엄청난 ‘부당 대우’였다. 언어 장벽과 무관한 음악 스타일 측면에서도 우리의 ‘홀대’ 는 마찬가지였다. 멜로디가 그럴싸한 곡이 있더라도 풍기는 내음이 지극히 ‘미국적’ 이었기에 우리의 청취 감성은 딜런을 꺼리곤 했다. 그의 음악 세계라 할 포크, 컨트리, 블루스는 미국 전통과 긴밀한 함수 관계를 지닌다. 선율과 사운드의 영국적인 맛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그의 음악에 잠기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사이에 우린 어느덧 딜런과 크게 멀어져버렸다. 록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꼭 딜런에서 막힌다. 신세대 가운데 더러는 우리의 팝 수용 문화에서 딜런 공백이 가져온 취약성을 맹렬히 질타하기도 한다. 우리 기준에서의 ‘팝 음악 여과’는 바람직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의역은 정확한 직역이 기초돼야 올바르다. 미국의 해석을 전제한 뒤라야 우리식 필터링의 의의가 배가된다.

그 직역의 첫 번째 대상이 바로 밥 딜런이다. 밥 딜런이 미국의 현대 음악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그의 음악몸체가 곧 시대와 세대의 흐름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딜런의 음악이 변화하는 과정과 그것을 있게 한 배경, 또한 그것을 주도해간 그의 자세는 ‘음악외적 환경’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먼저 포크 록(Folk-Rock)이다. 그가 1960년대 초반 저항적인 모던 포크로 베이비 붐 세대를 견인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통기타만으로 연주되는 단순한 구조이지만 그것의 포획력은 비틀스가 사정권에 들어올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비틀스가 베이비 붐 세대를 발현시켰다면 그는 그들의 의식화를 유도했다. 그러나 딜런은 케네디의 피살에 자극받으면서 스스로 ‘위기감’ 을 불어넣는다. 이미 비틀스가 세대의 청취 볼륨을 증폭시킨 마당에 포크의 음량 가지고 과연 세대를 관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71년 그는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그들(비틀스)은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코드는 정말 도에 지나친 것이었지만 하모니가 그것을 타당하게끔 했다. 그러나 맹세하건데 난 정말 그들에게 빠졌다. 모두들 그들이 어린 10대를 위한 광대이며 곧 사라질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내겐 명확했다. 그들이 지속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난 그들이 음악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머리 속에는 비틀스가 전부였다.” 그는 일렉트릭 기타를 잡아야 했다. 그것이 포크 록이었다. 포크의 순정파들로부터 배신자라는 질타는 불 보듯 뻔했다. 그가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알 쿠퍼(Al Kooper), 마이크 블룸필드(Mike Boomfield)가 참여한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Butterfield Blues Band)와 함께 전기 기타 연주를 했을 때 관중들은 “이건 포크 공연이야 나가!”라고 야유하며 돌과 계란 세례를 퍼부었다. 무대에서 내쫓긴 그는 통기타를 들고 되돌아왔지만 의미심장한 ‘It’s all over now’, ‘Baby blue’를 부르며 포크 관객들에게 아듀를 고했다. 껄끄러운 통과의례를 거친 뒤 밥 딜런의 포크 록은 ’Like a rolling stone’의 빅히트와 함께 만개했다. 이젠 막을 자도 없어졌다. 포크 록은 당시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존 레논과 밥 딜런을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 그룹 버즈(Byrds)는 ‘Mr. Tambourine man’으로 인기 가도를 질주했다. 그러나 그 곡은 딜런의 작품이었다.

버즈 뿐만 아니라 당시 포크 록계열 뮤지션치고 딜런의 곡을 손대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단숨에 포크 록은 1960년대 록의 주류로 부상했다. 1960년대 중.후반을 강타한 싸이키델릭 록(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도 실상 포크 록에 영향받은 흐름이었다. 그럼 어째서 포크 록은 1960년대 청춘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의식을 대변할 수 있었을까? 비틀스가 딜런에게 배우고, 딜런이 비틀스로부터 영감을 얻은 ‘포크와 록의 결합’ 은 시대성 견인을 가능케 한 절묘한 무브먼트였다. 록은 생태적으로 거리의 청춘에 의해 확립된 ‘하위문화적 표현’이다. 따라서 하이 클래스나 인텔리겐차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다. 또한 포크는 저항성을 견지하는 민중 음악이지만 음악의 주체나 주소비자층은 학생과 지식인 세력이다. 성질상 엇비슷하면서도 걸어온 길이나 ‘계급성’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밥 딜런이 포크 오리지널로부터 급격히 퇴각하여 록으로 전향한 것은 단지 추세의 편승이 아닌 완전함을 향한 ‘하층문화의 긴급 수혈’로 보인다. 이를테면 ‘위’의 고매한 문제의식과 ‘아래’의 근원적 반항을 한고리로 엮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항 영역의 지반 확대와 수요자의 확충을 기할 가능성은 올라가게 된다.

지식인만이 아닌 1960년대 젊은이들의 ‘계층포괄적 무브먼트’ 는 포크 록과 이 점에 있어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1960년대 중후반을 물들인 ‘히피보헤미안’ 물결도 딜런과 떼어낼 수 없는 흐름. 1960년대 록 역사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부분이다. ‘Like a rolling stone’은 포크 지식인의 소리라기보다 보헤미안적 정서의 노출로 파악해야 한다. 당시 딜런은 가치의 상대성을 신뢰하고 제도에 흡수되기룰 거부하는 이른바 비트(Beat) 사상에 빠져 있었다. 그가 진보적 시인인 알렌 긴스버그(Allen Ginsberg)와 교류하며 ‘개인 혁명’에 골똘해 있을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다. 비트는 이후 히피의 융기에 주요 인자가 되는데, 1960년대 중반 딜런의 음악을 가로지르는 것이 바로 이 ‘히피 보헤미안 정서’라 할 수 있다. 스스로 록 세계로 옮아가고 방랑적 지향을 설파한 것은 기존과 기성의 틀 깨기에 목말라 있던 베이비 붐 세대들에게 영도자가 제공한 ‘산교육’과 다름없었다. 따라서 밥 딜런은 그에게 등을 돌린 포크 근본주의자들의 수보다 휠씬 더 많은 록팬을 거뜬히 확보하게 된다. 음악적으로 딜런의 창작성이 이 때만큼 가공의 위력을 떨친 적도 없다. < Highway 61 Revisited >와 < Blonde On Blonde > 앨범은 포크의 엄숙주의에서 해방되어 록과의 결합으로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포획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음악은 ‘남을 위해’ 이데올로기에 봉사한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즐거움이 가져온 산물이기도 했다. 그가 포크의 프로테스트로부터 이탈한 것은 바로 ‘자유’와 등식화되는 ‘예술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는 저항성 대신 예술성을 얻었다. 개인적 경사도 겹쳤다. 사적으로 사라 로운즈와의 결혼은 그의 창작력 한층 북돋아주었으며 그 충만한 행복감은 그대로 < Blonde On Blonde > 앨범에 나타났다. 이 앨범의 탁월한 질감은 상당부분 사라와의 결혼이 낳은 것이라는 게 평자들의 일치된 시각이다. 나중 사라와의 파경 또한 그에게 또 하나의 명반 < Blood On The Tracks >를 안겨준다. 히피의 낭만적인 집단주의와 곧바로 이어진 이피(Yippie)의 전투성이 극에 달할 무렵 그가 뉴욕의 외곽 빅 핑크(Big Pink) 지하실에서 한가로이 더 밴드(The Band)의 멤버들과 자유 세션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가 가져온 행보이기도 했지만 그가 의도적으로 은둔을 택한 것은 분명했다. 세상이 소란함으로 가득할 때 그는 정반대로 정적을 취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물꼬를 터준 미국 사회의 격랑이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을 것으로 예측했는지도 모른다. 세대의 공동체 지향은 지극히 ‘비이성적’으로 비춰졌을 테고 오히려 그는 그럴수록 자신에게 돌아와 근본을 탐구하는 것이 올바른 행위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한 심저(心底)가 < John wesley Harding >과 < Nashiville Skyline >의 골간에 자리한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뜻밖에’ 재래식 컨트리 음악을 선보였다. 두 앨범은 모두 내쉬빌에서 녹음되었고 < Nashiville Skyline >의 경우 딜런은 컨트리 음악의 거성 자니 캐시(Johnny Cash)와 듀오로 ‘Girl from the north country’에서 다정히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이 앨범에서 톱 10 히트곡 ‘Lay lady lay’가 나왔다. 이 곡을 비롯해 대부분의 수록곡에서 딜런의 보컬은 예의 날카로움이 거세된 채 한결 부드러워졌고 가사도 접근이 비교적 용이해지는 등 멜로딕한 무드가 전체를 지배했다. 다시 세상은 소용돌이에서 호수의 조용함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1970년대 초반의 분위기였다. 딜런이 씨앗을 뿌린 ‘컨트리 록’ 은 1970년대 내내 주요 장르 중 하나로 맹위를 떨쳤다.

딜런은 언제나 흐름의 주역이었다. 나중 음반화된 더 밴드와의 세션 앨범 < Basement Tapes >가 록 역사에서 ‘특혜’를 받는 것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970년대 들어서 그는 ‘대중적’ 관점에서 뿌리에 대한 천착에 박차를 가했다. 예전에 그는 ‘좋은 사람만 따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이 많이 따를수록 좋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그가 1970년 < Self Portrait > 앨범에서 ‘Moon river’를 포함한 팝 스탠다드 넘버들을 노래한 것은 이러한 사고와 맥락이 닿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눈을 흘겼다. 레코드 월드(Record World)지는 이 앨범을 두고 “혁명은 끝났다. 밥 딜런이 ‘미스터 존스’에게 ‘Blue moon’을 불러주고 있다”며 혹평했다.(미스터 존스는 딜런이 < Highway 61 Revisited >의 ‘Ballad of thin man’에서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 존스 씨?”라고 했던 가공의 인물로 ‘제도권 인사’를 상징한다.) 빌보드 차트3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처럼 평단의 이해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 Self Portrait >앨범을 상업적 표현으로 볼 수는 없다. 비판의 칼을 휘두르는 비평가들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근본을 탐구하는 방법론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딜런이 1970년대 후반부에 기독교에 귀의한 것도 비슷한 문맥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사실 신(神)에의 의지가 엿보인 < Show Train Coming >, < Saved >, < Shot Of Love > 등 3장의 종교풍 음반은 ‘사고의 깊이’가 두드러졌지만 ‘변신’이라는 부정적 의미에 가치가 함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1970년대 딜런을 ‘혼미의 거듭’으로 규정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그것을 뒤집어보면 그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에 충실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아티스트의 본령이다. 밥 딜런은 언제나 음악을 통해 세상과 삶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고자 했다.

1980년대의 밥 딜런은 1970년대의 습기를 벗고 ‘열기’를 회복한다. 정치적 시각도 이입한 < Infidels >, < Empire Burlesque > 그리고 1989년에 나온 < Oh Mercy >는 이전의 앨범들과 명백한 분리선을 긋는다. 날카로운 보컬은 오히려 1960년대의 모습에 더 가깝다. 그는 1980년대 중반 라이브 에이드(Live Aid),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아티스트의 모임(Sun City) 등 일련의 자선행사에 얼굴을 내밀어 저항 전선에 복귀했다. 한 무대에서 그는 U2의 보노(Bono)와 함께 ‘Blowin’ in the wind’를 부르기도 했다. 딜런의 1980년대 앨범들에는 당시의 보수적이고 위압적 풍토를 거부하는 저항성이 숨쉰다. 그는 시대의 주류 한복판에는 없었지만 ‘시대의 공기’와 늘 함께 호흡했다. 그 공기를 어떤 때는 앞장 서 조성하고 어떤 때는 그것을 피해갔다. 밥 딜런의 한 면만을 바라보게 되면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그가 서 있던 ‘양쪽’ 자리를 다 관찰해야만 그 ‘드라마틱한 록 역사의 굴곡’ 을 읽을 수 있다. 록의 역사는 실로 위와 아래, 진보와 보수, 주류와 비주류, 기존과 대안이 끊임없이 부침을 되풀이 해왔다. 밥 딜런이 밟아온 길은 그것의 축소판이었다. 그러나 어떤 시점에서라도 - 가령 프로테스트의 깃발을 울렸을 때나, 대중성에 기웃거렸을 때나 - 딜런이 주변의 압박에 수동적으로 임한 적은 없다. 남이 시켜서 일렉트릭의 세계로 떠밀려 간 것이 아니었고, 의도적으로 신비를 축적하기 위해 은둔했던 것도 아니다. 그의 터전은 언제나 자신의 의지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비평가들이 밥 딜런을 전설로 숭앙하는 것은 그가 대중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문 ‘음악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음악인의 최고 영예인 ‘아티스트’란 소리를 들어 마땅했다. 그는 록에 언어를 불어넣었다. 포크와 컨트리를 록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시대와 맞서기도 했고 자신의 예술성에 천착하기도 했다. 그러한 업적과 성과의 편린들이 모여 그의 ‘광활한 아티스트의 세계를 축조하고 있다. 밥 딜런은 역사의 수혜와 위협 속에서 ‘인간’을 살려냈다. 음악인으로서 인간의 몸체는 다름 아닌 자유일 것이다. 밥 딜런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R&B, 소울 가수 R&B, 소울 가수
노래 : A Great Big World (어 그레이트 빅 월드)
버클리 음악 학교에 입학하며 뮤지션으로서의 꿈을 키워가던 한 젊은이. 얼마지 않아 그는 아버지가 주신 돈을 몽땅 써버려 위기(?)에 봉착한다. 궁해진 아들에게 돈을 주며 아버지가 던졌던 한마디. “네 음반이 플래티넘을 따내거든, 결코 날 잊어선 안돼.” 그리고 정확히 5년 뒤 그는 소포모어 앨범으로 플래티넘 고지를 정복하며 부모의 기대에 완벽히 부응한다. 바로 ’아름다운 청년’ 존 마이어(John Mayer)다.... 버클리 음악 학교에 입학하며 뮤지션으로서의 꿈을 키워가던 한 젊은이. 얼마지 않아 그는 아버지가 주신 돈을 몽땅 써버려 위기(?)에 봉착한다. 궁해진 아들에게 돈을 주며 아버지가 던졌던 한마디. “네 음반이 플래티넘을 따내거든, 결코 날 잊어선 안돼.” 그리고 정확히 5년 뒤 그는 소포모어 앨범으로 플래티넘 고지를 정복하며 부모의 기대에 완벽히 부응한다. 바로 ’아름다운 청년’ 존 마이어(John Mayer)다. 존 마이어는 미국 커네티컷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 세 살에 이웃이 건네 준 스티비 레이 본(Stevie Ray Vaughan)의 음악에 심취, 블루스 기타리스트로써 인생의 미래를 설계했다. 이후 오직 연습에만 매진한 결과 지방의 조그마한 바에서 출중한 연주 실력으로 좌중을 사로잡았다. 기타를 손에 잡은 지 불과 2년만의 일이었다. 허나 그는 곧 음악 항로를 새로이 수정했다. 기타 플레이어가 아닌 ’좋은 곡을 쓸 줄 아는 뮤지션’이 그 해답이었다. 기타 테크닉보다 멜로디와 리듬의 전체적인 어울림을 높이는데 필요한 송 라이팅 능력을 길러나갔던 것이다. 열 아홉 살이 되자 존 마이어는 버클리 음악 학교에 입학하며 진로를 본격 모색했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이내 학교를 그만두었다. 음악을 ’공부’하기보다 그것을 ’연주’하기 원하는 자신의 내적 욕망을 절감한 때문이었다. 친구의 권유로 아틀랜타로 남행한 이 전도유망한 싱어 송라이터는 에디의 애틱(Eddie’s Attic)등의 나이트클럽에서 공연을 펼치며 기회를 엿봤다. 1999년에는 인디 레이블에서 을 발매하며 지역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2000년, 드디어 그에게 도약의 때가 찾아왔다. 당해 거행된 에서의 인상적인 퍼포먼스로 메이저 레이블 스카우터들의 레이다에 포착된 것. 결국 컬럼비아 산하의 와 계약을 체결한 존 마이어는 2001년 데뷔작 (1963년 행크 모블리의 작품 에서 따왔다.)를 내놓으며 주류 무대로 입성했다. ’No such thing’, ’Your body is wonderland’ 등의 싱글들이 히트 퍼레이드를 펼치며 최고 차트 15위까지 음반을 견인했다. 현재 무려 200만장을 세일즈하며 50주 이상 빌보드 차트에 머무는 중이다. 무엇보다 데이비드 그레이(David Gray), 데이브 매튜스(Dave Matthews) 등을 연상케 하는 편안한 보이스와 탁월한 선율 감각, 오랜 수련으로 다져진 기타 실력 등이 성공의 주동인(動因)이었다.
노래 : Passenger (패신저 (팝 기타, 보컬),Mike Rosenberg)
노래 : One Direction (원 디렉션 (아이돌 밴드))
멤버 : 니엘 호란(Niall Horan), 잔 말리크(Zayn Malik), 리암 페인(Liam Payne), 해리 스타일스(Harry Styles), 루이스 톰린슨(Louis Tomlinson) 이 5명의 소년들이 원 디렉션을 함께 하게 된 계기는 꽤나 이색적이다.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 엑스펙터(X-Factor) 시즌7에서 각각 개인별 오디션에 참가하게 된 이들은 패널인 사이먼 코웰, 니콜 셰르징거에 의... 멤버 : 니엘 호란(Niall Horan), 잔 말리크(Zayn Malik), 리암 페인(Liam Payne), 해리 스타일스(Harry Styles), 루이스 톰린슨(Louis Tomlinson)

이 5명의 소년들이 원 디렉션을 함께 하게 된 계기는 꽤나 이색적이다.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 엑스펙터(X-Factor) 시즌7에서 각각 개인별 오디션에 참가하게 된 이들은 패널인 사이먼 코웰, 니콜 셰르징거에 의해 그룹으로 결성하는 것이 어떠겠냐는 제안을 받게 되고, 다섯 소년은 이를 계기로 '원 디렉션(One Direction)'이란 그룹을 결성하게 되며, 엑스팩터 파이널 리스트까지 진출하게 된다. 이들은 최종 파이널에서 아쉽게도 최종 3위를 차지했지만, 액스팩터가 끝난 후 결국 팝 계 최고의 영향력 있는 인물인 사이먼 코웰의'Syco Music'과 계약을 체결하면서 정식 데뷔하기에 이르렀다. 2011년 11월 18일 유럽지역에서 가장 먼저 선보인 데뷔앨범 [Up All Night]는 먼저 아일랜드에서는 첫 주 앨범 차트 3위에 오르며 화려하게 데뷔했고, 영국에서는 첫 주 138,631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UK 앨범차트 2위로 데뷔했다.
메간 트레이너(Meghan Trainor)는 2014년과 2015년에 미국 팝 씬에서 가장 화려하게 주목받았던 신인 여성 아티스트였다. 일단 2014년 6월 (메이저) 데뷔 싱글 'All About That Bass'가 빌보드 Hot 100 차트에서 총합 8주간 정상에 오르면서 화려하게 대중의 시선을 받기 시작한 그녀는 이 싱글로 미국을 포함 세계 58개국에서 정상을 차지했고, 디지털과 피지컬 세일을 종합해 총 ... 메간 트레이너(Meghan Trainor)는 2014년과 2015년에 미국 팝 씬에서 가장 화려하게 주목받았던 신인 여성 아티스트였다. 일단 2014년 6월 (메이저) 데뷔 싱글 'All About That Bass'가 빌보드 Hot 100 차트에서 총합 8주간 정상에 오르면서 화려하게 대중의 시선을 받기 시작한 그녀는 이 싱글로 미국을 포함 세계 58개국에서 정상을 차지했고, 디지털과 피지컬 세일을 종합해 총 1100만 단위를 판매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뒤이어 같은 해 가을에 발매된 후속 싱글 'Lips Are Movin''도 빌보드 Hot 100 4위를 기록하는 히트를 이어갔으며, 2015년 벽두에 공개된 그녀의 메이저 데뷔 앨범인 [Title]은 발매되자마자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오르면서 모든 음악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Dear Future Husband'(14위)와 존 레전드(John Legend)와 함께한 'Like I'm Gonna Lose You'(8위) 등이 계속 싱글 히트를 거두었고, 이러한 확고한 대중적 인기 기반을 바탕으로 그녀는 2개의 빌보드 뮤직 어워드와 피플즈 초이스 어워드를 수상했다. 그리고 2년 동안 연속(2015년에는 'All About That Bass'로 올해의 노래, 올해의 레코드 부문 후보에 올랐다)으로 그래미 후보에 오르는 화제를 모은 끝에 어느 아티스트건 평생 한 번 탈 기회를 갖는 그래미 최우수 신인상(Best New Artist) 수상자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노래 : Sara Bareilles (사라 바렐리스)
노래 : The Script (더 스크립트)
노래 : Miley Cyrus (마일리 사이러스)
마일리 사이러스(Miley Cyrus)는 10대 청소년들을 위한 디즈니채널의 TV코미디시리즈 (Hannah Montana)에 주역을 맡아 2006년 하루 밤새 대형스타로 급부상했다. 부전자전, 우연인지 필연인지 1992년 ‘Achy breaky heart'를 빌보드 싱글차트 넘버원에 올려놓으며 일약 스타덤에 올라선 그의 아버지 빌리 레이 사이러스(Billy Ray Cyrus)의 행운을 물려받은 것. 더욱이 ’Ac... 마일리 사이러스(Miley Cyrus)는 10대 청소년들을 위한 디즈니채널의 TV코미디시리즈 (Hannah Montana)에 주역을 맡아 2006년 하루 밤새 대형스타로 급부상했다. 부전자전, 우연인지 필연인지 1992년 ‘Achy breaky heart'를 빌보드 싱글차트 넘버원에 올려놓으며 일약 스타덤에 올라선 그의 아버지 빌리 레이 사이러스(Billy Ray Cyrus)의 행운을 물려받은 것. 더욱이 ’Achy Breaky Heart‘가 빌보드차트 정상을 강타한 그해 마일리가 태어나 천우신조(天佑神助)가 따로 없었다. 1992년 11월23일,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 빌리와 아내 레티시아(Leticia) 사이러스는 하늘이 내려준 딸 데스티니 호프 사이러스(Destiny Hope Cyrus)를 선물 받아 겹경사를 맞았다. 꼬마둥이 때부터 쾌활한 성격의 미소천사였던 데스티니 호프는 스마일리라는 별칭을 얻었고 그러한 연유로 지금의 마일리로 불리게 되었다. 타고난 탤런트 활동은 텔레비전 의학시리즈 (2003)의 에피소드에 아버지와 함께 출연하면서 첫발을 내딛었다. 같은 해 그녀는 팀 버튼(Tim Burton)의 영화 (Big Fish)에서 단역으로 출연해 대형스크린에까지 발을 뻗었다. 마일리는 일찍이 노래를 쓰고 가창법을 배우면서 음악에 관심과 자질을 개발해 나아갔다. 이제 갓 10대에 들어선 꼬마였던 그는 마침내 2005년 타고난 연기와 음악 재능을 작품에서 마음껏 펼쳐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마일리는 의 타이틀 역으로 캐스팅되었고, 2006년 3월24일 전파를 타기 시작한 이 TV쇼 프로그램에서 그는 낮엔 평범한 여학생 마일리 스튜어트면서 밤이면 밤마다 금발의 한나 몬타나로 변신해 세계적 유명 팝 스타로서의 숨겨진 끼와 춤 실력을 발산하는 생기발랄 10대 소녀를 연기했다. 2006년 3월 “한나 몬타나”에 출연, 가수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 마일리는 청소년 시청자들의 대대적 호응에 힘입어 디즈니채널의 뉴 호프(New Hope), 힐러리 더프와 린제이 로한의 뒤를 이어 새로운 ‘드라마 퀸’으로 추대되었다. 10월엔 시트콤 에서도 음악가 아버지로 동반 출연한 그의 아버지 빌리 레이와의 듀엣노래 ’I learned from you'를 포함해, TV쇼에서 마일리가 부른 노래와 다른 삽입곡들로 구성된 사운드트랙음반이 발매되었다. 그해 가을 마일리는 디즈니가 배출한 또 다른 팝 스타 치타 걸스(Cheetah Girls)의 오프닝 무대를 장식해 관중들로부터 우레와 같은 갈채와 환호를 받았다. 2006년 10월 첫 번째 사운드트랙앨범 이 발매된 데 이어 2집과도 같은 더블앨범 가 2007년 11월 발매되었다. 는 발매되자 곧 빌보드차트 정상에 오르며 기염을 토했다. 싱글 커트된 ‘See you again'(또 봐요)은 빌보드싱글차트 탑10을 노크했다. 2008년 봄에는 45개 지역 순회공연실황을 보너스 DVD와 패키지로 묶은 (Hannah Montana/Miley Syrus: Best of Both World Concert Tour)가 음반시장에 풀렸다. 그는 또한 자신이 공동작사, 작곡에 참여한 독집 < Breakout >(2008)을 공식 발표하며 본격 팝 아티스트 활동을 공표했다. ※마일리의 형제자매들 마일리는 이복언니 브랜디(Brandi), 두 명의 이복오빠 트레이스(Trace)와 크리스토퍼 코디(Christopher Cody), 남동생 브레이슨(Braison), 그리고 여배우 여동생 노아 린제이 사이러스(Noah Lindsey Cyrus)를 가족으로 두고 있다.
노래 : Natalie Imbruglia (나탈리 임브룰리아)
# ‘진정한 나’,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음악여정 ‘Torn’의 위력은 너무나 거대했다. 나탈리 임부를리아(Natalie Imbruglia)의 데뷔싱글이었던 그 곡은 전 세계 음악팬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1997년과 1998년 사이 영국에서만 1백만장이 팔려나갔고, 미국에서도 10주가 넘게 방송차트 1위를 고수하는 등 국제적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녀를 ‘팝계의 신데렐라’로 만들어준 그... # ‘진정한 나’,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음악여정 ‘Torn’의 위력은 너무나 거대했다. 나탈리 임부를리아(Natalie Imbruglia)의 데뷔싱글이었던 그 곡은 전 세계 음악팬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1997년과 1998년 사이 영국에서만 1백만장이 팔려나갔고, 미국에서도 10주가 넘게 방송차트 1위를 고수하는 등 국제적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녀를 ‘팝계의 신데렐라’로 만들어준 그 곡은 그러나 동시에 그녀에게 치명적인 해악이었다. 문제는 ‘Torn’과 그녀 자신이 너무나 예뻤다는 것. 상큼한 팝과 성난 록이 잘 정제된 음악적 내용물도, 시원한 향기가 배어나는 목소리도, 그리고 ‘밤비’ 같은 큰 눈을 가진 그녀의 얼굴도 너무 예뻤다. 때문에 대중들이 그녀를 소비하는 것은 단 한가지, 바로 그 예쁘장함이었다. 나탈리 임부를리아의 데뷔앨범 < Left Of The Middle >은 ‘Torn’이 성공가도를 달리던 얼마 후에 발매되었다. 만만치 않은 음악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곡의 빛에 가려 음반에 실린 다른 곡들은 별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사실 ‘Torn’은 라디오를 통해, 또 수많은 컴필레이션 음반들을 통해 얼마든지 들을 수 있었으니 정규음반은 사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게다가 잡지나 신문들은 주로 그녀의 외모나 스캔들 따위에 포커스를 맞추었고 팬들은 그 매체에 실린 사진을 오려 방에 걸어두며 그녀를 ‘핀업 걸’로 대했다. 사람들은 그저 ‘Torn’만 들으면, 그녀의 얼굴만 보면 만족했다. 사실 어찌 보면 나탈리에게 그러한 것들은 당연한 결과다. 태어나고 자랐던 호주에서 10대 시절부터 TV스타였던 그녀는 1996년 가수를 꿈꾸며 영국으로 건너갔고, 그곳의 음반 관계자들의 눈에 띄어 가수로 데뷔했다. 그 과정 속에서 그녀의 데뷔앨범은 이미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아무 일도 못하고 1년여를 방황했던 탓에 그녀는 하루라도 빨리 가수가 되길 원했으며, 그 때문에 음반사에서 자신을 부르자 바로 계약했다. 따라서 음반계약 후에도 음악이나 이미지에 대한 선택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없었다. 그녀를 선택한 레이블은 그녀의 청순한 비주얼과 생기 있는 목소리를 십분 활용하면서도 당시 강세를 보이던 앨라니스 모리셋 류의 여성 얼터너티브 록과 어쿠스틱 팝/록 사운드를 덧입히려 했다. 그를 위해 그룹 큐어(Cure)의 베이시스트였던 필 토낼리(Phil Thornalley), 라디오헤드의 < OK Computer >를 제작한 나이젤 고드리치(Nigel Godrich) 등의 일류 프로듀서들을 동원했고, 그들은 아주 훌륭하게 그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그 결과 ‘Torn’이라는 빅히트곡을 탄생시켰으며 그 외에도 ‘Big mistake’, ‘Wishing I was there’, ‘Smoke’ 같은 괜찮은 느낌을 주는 곡들을 배출했다. 이렇게 나탈리 임부를리아의 음악과 이미지는 결정되었고,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는 ‘Torn’과 핀업 걸의 이미지가 고정되었다. 상업적인 측면에서는 도움이 되었을 지는 몰라도 그녀에게 그것은 분명 상당한 부담이었으며 앞날을 고려한다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뮤지션이라면 그러한 장애물은 음악을 통해 극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녀는 3년여 동안 음악에 전념하며 자신과의 투쟁을 벌였고, 드디어 이번에 그 흔적들이 담긴 두 번째 앨범 < White Lilies Island >를 내놓았다. # 예쁜 이미지 벗고 내적 성숙 완연한 새 앨범 그렇다고 이번 신보가 전작과의 완전한 결별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Torn’의 작곡자였던 필 토낼리가 또 다시 참여하고 있으며 여전히 풋풋하고 싱그러운 곡들이 눈에 띈다. 하지만 전작에 비해 전체적인 분위기는 상당히 가라앉았다. 같은 상큼함이라도 더욱 멜랑콜리하게, 더욱 애처롭게 들린다. 그런 변화의 조짐은 1999년도 영화 < 스티그마타 > 사운드트랙에서 불렀던 ‘Identify’에서 이미 예고된 바 있다. 스매싱 펌킨스의 빌리 코건이 작곡했던 그 곡은 나탈리답지 않은 음울함으로 세간을 놀라게 했었다. 특별한 기교 없이 부르는 보컬도 편안하게 들린다. 의도적으로 앨라니스 모리셋를 따라했던 전작에서의 보컬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졌으며, 또 발전했다. 첫 싱글부터 큰 차이가 난다. 전자기타와 피아노, 현악이 묘한 화음을 이루는 첫 싱글 ‘That day’에서 리드미컬한 나탈리의 보컬은 무언가에 불만에 찬 듯 노래하며 예쁘장함 따위는 벗어 던진다. 첼로의 묵직한 연주로 시작하는 ‘Wrong impression’은 어쿠스틱 기타의 영롱함에 슬라이드 기타의 푸근함이 더해져 분위기가 ‘업’된 팝/록 넘버다. 공간의 웅장함이 느껴지는 ‘Beauty on the fire’에서는 일렉트로닉의 몽롱한 전자음이 일렁이며, 사랑스런 느낌이 가득 한 ‘Satellite’는 따뜻한 어쿠스틱 기타 톤과 코러스가 돋보이는 곡. 앨범의 베스트라면 5번째 트랙인 ‘Do you love’을 꼽을 수 있다. 착 가라앉은 분위기에 절제된 보컬이 이끌어 가는 이 곡은 멜랑콜리함을 극대화시키는 중간의 하드 록 연주와 귀를 잡아채는 멋진 멜로디의 훅이 잊혀지지 않는다. 꿈속에 있다가 뒤늦게 꿈에서 깨어나 절규하는 듯한 진행이 압권인 ‘Goodbye’, 인트로 부분이 국내밴드 미선이의 ‘진달래 타이머’를 연상시키는 ‘Everything goes’, "동화 속 신데렐라는 이제 없다"며 담담히 노래하는 마지막 트랙 ‘Come September’ 등이 매력적인 트랙들이다. 음반에 수록된 10곡 모두 나탈리 임부를리아가 공동작곡과 작사를 담당했으며, 그중 절반은 희망을, 나머지 절반은 삶의 비의(悲意)와 깨달음을 노래하고 있다. 그 외의 프로듀서들로는 마돈나의 작업으로 유명한 패트릭 레너드와 필 토낼리, 게리 클락 등이 앨범제작에 참여했다. 몇 년 간 내적 침잠의 결과물인 이번 앨범으로 그녀는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아티스트로서의 가능성을 확보했다.
노래 : Chris Brown (크리스 브라운)
노래 : Leona Lewis (리오나 루이스)
2006년에 방송된 리얼리티 스타 발굴 프로그램 < X Factor >의 시즌 3 우승자 리오나 루이스(Leona Lewis)는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과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의 장점을 겸비한 21세기 형 섹시 디바다. 파워풀한 가창력은 기교를 앞세운 머라이어 캐리보다는 휘트니 휴스턴을 연상시키고 라틴 혈통의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의 핏줄을 이어받은 구리 빛 피부와 뇌쇄적... 2006년에 방송된 리얼리티 스타 발굴 프로그램 < X Factor >의 시즌 3 우승자 리오나 루이스(Leona Lewis)는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과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의 장점을 겸비한 21세기 형 섹시 디바다. 파워풀한 가창력은 기교를 앞세운 머라이어 캐리보다는 휘트니 휴스턴을 연상시키고 라틴 혈통의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의 핏줄을 이어받은 구리 빛 피부와 뇌쇄적인 외모 그리고 파마기 있는 헤어스타일은 머라이어 캐리를 떠올린다. 시장성과 성장성을 자체 프로세스한 이 두 강점은 리오나 루이스가 빠른 시간에 비상(飛上)할 수 있는 날개였다. 1985년 4월 3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리오나 루이스는 10대 때부터 스스로 피아노와 기타를 배워 송라이팅 기술을 습득하면서 접수원이나 웨이트리스의 피곤한 일상을 극복해나갔다. 그러던 중 남자친구가 < X Factor >에 지원하면서 리오나 루이스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이했다. < X Factor >에서 ‘Over the rainbow’, ‘Hero’, ‘Without you’처럼 가창력을 뽐낼 수 있는 노래들을 불러 우승을 차지한 리오나 루이스는 곧바로 메이저 데뷔 싱글로 켈리 클락슨(Kelly Clarkson)의 ‘A moment like this’를 발표해 인기가도에 박차를 가했고 대세를 이어 2007년에 데뷔앨범 < Spirit >를 공개했다. ‘Apologize’를 부른 그룹 원 리퍼블릭(One Republic)의 리더 라이언 테더(Ryan Tedder)와 ‘Beautiful soul’과 ‘She's no you’로 친숙한 아이돌 가수 제시 매카트니(Jesse McCartney)가 공공으로 작곡한 ‘Bleeding love’는 20주 동안 빌보드 싱글 차트 탑 텐에 머물며 4주간 정상을 차지하는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고 두 번째 싱글 ‘Better in time’도 11위에 랭크되었다. 이제 리오나 루이스는 2008년에 대중들의 시선으로 들어왔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2008년 8월, 베이징 올림픽 폐막식에서는 2012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런던을 알리기 위해 지미 페이지(Jimmy Page)와 함께 무대에 올라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명곡 ‘Whole lotta love’를 불러 평생의 영광을 메모리 했으며 2008년 브릿 어워즈에서 4개 부문 후보로 지명되었고 2009년 그래미 어워즈에서는 올해의 레코드와 최우수 여성 팝 보컬 등 모두 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아일랜드 록 밴드 아일랜드 록 밴드
짐 브릭만은 우리 가요 ‘새노야’, ‘홀로 된다는 것’을 수록한 음반 BALLAD로 국내 팬들에게도 친숙한 피아니스트다. 피아노 연주자 겸 작곡가인 짐 브릭만은 세련되거나 화려한 기교보다는 푸근하고 감성이 깊이 밴 연주로 뉴에이지 팬들을 사로잡았다. 피아노로 들려주는 ‘사랑’의 숨결과 달콤함은 대중적인 호응을 얻기에 충분한 미덕이었다. 그는 특히 뉴에이지 뮤지션이라고 해서 연주곡만 고집하지 않는다. ‘연주음악만이... 짐 브릭만은 우리 가요 ‘새노야’, ‘홀로 된다는 것’을 수록한 음반 BALLAD로 국내 팬들에게도 친숙한 피아니스트다. 피아노 연주자 겸 작곡가인 짐 브릭만은 세련되거나 화려한 기교보다는 푸근하고 감성이 깊이 밴 연주로 뉴에이지 팬들을 사로잡았다. 피아노로 들려주는 ‘사랑’의 숨결과 달콤함은 대중적인 호응을 얻기에 충분한 미덕이었다. 그는 특히 뉴에이지 뮤지션이라고 해서 연주곡만 고집하지 않는다. ‘연주음악만이 뉴에이지’라는 고정관념을 깨며 가사가 있는 보컬 곡을 도입한 것이다. 근작들은 하나같이 객원 가수들을 참여시켜 곡을 노래부르도록 하고 있다. 가사가 없어 자칫 지루함으로 흐를 수도 있을 연주곡의 허점을 보완해 ‘얼터너티브 뉴에이지’를 일궈낸 셈이다. ‘순수주의자’ 입장에서 어찌 보면 상당한 파격이고 이단(異端)일 수 있다. 그러나 앨범을 들어보면 그것은 기우(奇遇)에 불과했음을 금방 알게 된다. 연주곡은 연주곡대로 흐름을 잃지 않으며, 보컬 곡은 보컬 곡대로 조화된 매력을 지닌다. 보컬이 쓰였다고 해서 그의 연주가 훼손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상당한 상승효과를 발휘하며 색다른 맛을 팬들에게 전하고 있다. 이 라이브 앨범도 물론 보컬과 연주의 기묘한(?) 동거를 감상할 수 있다. 짐 브릭만은 미국 클리블랜드 출신으로 현재 정상급의 뉴에이지 뮤지션으로 우뚝 섰지만 처음부터 뉴에이지 음악에 뛰어들었던 건 아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하지 않았던가. 학교에서 클래식을 전공했지만 보다 친숙한 대중음악에 더욱 관심이 쏠렸다. 우선 징글(jingle: 광고나 각종 캠페인에 사용되는 짧은 음악) 작곡가로 처음 데뷔했다. 맥도날드, 밀러 맥주, 유명 의류 브랜드 GAP, 장거리 전화 회사 AT&T 등 굵직한 광고 음악을 담당하며 대중친화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메인 게임에 들어가기 위한 몸 풀기 정도였다. 징글 음악으로 공력을 쌓은 브릭만은 1994년 < 윈댐 힐(Windham Hill) > 레이블을 통해 연주 음반 < No Word >를 발표하며 비로소 뉴에이지 음악계에 공식 데뷔했다. 광고 음악에서 이미 대중에게 다가가는 감각을 획득한 그답게 이후 출시하는 앨범마다 성공을 거뒀다. 2집 < By Heart >는 골드(50만장), 3집 < Picture This >와 4집 < The Gift >는 플래티넘(100만장)을 기록했으며, 보컬 곡으로만 채워진 5집 < Vision Of Love >과 작년에 발표된 6집 < Destiny >도 히트를 이어가고 있다. 국내에서만 발매된 스페셜 음반 < Ballad >에서는 앞서 말한 대로 ‘세노야’를 편곡해 수록하며 국내 음악시장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2000년에는 여러 동료 뮤지션과 협연한 첫 라이브 앨범을 발표했다.
멤버 : 이삭 슬레이드(Isaac Slade, 보컬), 조 킹(Joe King, 기타), 데이브 웰쉬(Dave Welsh, 기타), 벤 와이삭키(Ben Wysocki, 드럼) 멤버 : 이삭 슬레이드(Isaac Slade, 보컬), 조 킹(Joe King, 기타), 데이브 웰쉬(Dave Welsh, 기타), 벤 와이삭키(Ben Wysocki, 드럼)
1994년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결성된 트레인(Train)은 1990년대 초반 블랙 크로우즈(Black Crowes)로부터 발흥된 복고 성향의 아메리칸 하드록을 구사하는 그룹이다. 미국의 전통 음악인 컨트리(country)와 포크(folk)를 기저로 강력한 하드록 사운드를 덧입혔던 이 흐름의 최선봉에 위치한 밴드로 평가받고 있다. 트레인은 패트릭 모나한(Patrick Monahan, 보컬, ... 1994년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결성된 트레인(Train)은 1990년대 초반 블랙 크로우즈(Black Crowes)로부터 발흥된 복고 성향의 아메리칸 하드록을 구사하는 그룹이다. 미국의 전통 음악인 컨트리(country)와 포크(folk)를 기저로 강력한 하드록 사운드를 덧입혔던 이 흐름의 최선봉에 위치한 밴드로 평가받고 있다. 트레인은 패트릭 모나한(Patrick Monahan, 보컬, 퍼커션), 롭 호치키스(Rob Hotchkiss, 기타, 보컬), 지미 스태포드(Jimmy Stafford, 기타), 찰리 콜린(Charlie Colin, 베이스), 스콧 언더우드(Scott Underwood, 드럼)의 5인조로 구성되었다. 결성 직후, 다섯은 꾸준한 라이브 공연을 지속하며 팬층을 확보하였고, 이것은 마이너 레이블인 < Aware >와 컨택트되는 동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등장한 데뷔작 < Train >은 진득한 미국 전통 록 사운드를 가감 없이 펼쳐 보임으로서 인상적인 신고식을 치러냈다. 1997년부터 밴드는 블루스 트래블러(Blues Traveler), 카운팅 크로우즈(Counting Crows)등의 오프닝을 맡으며 제 2의 도약의 기회를 모색했다. 메이저 음반사들로부터 구애의 손길이 뻗친 때가 바로 이즈음이었다. 멤버들은 컬럼비아(Columbia)와 손잡은 뒤, 1집을 재발매하며 본격적인 음악 활동의 시작점을 찍었다. ’Meet Virginia’가 당시 라디오 전파를 수시로 타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4년 뒤, 두 번째 음반 < Drops of Jupiter >(2001)를 발표한 트레인은 그래미상 3개 부문의 후보에 오르는 등의(비록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앨범은 현재까지 200만장 이상이 팔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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