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디자인계의 거목, 무카이 슈타로의 마지막 강의
2016년 봄, [밀라노 트리엔날레] [하우스 비전] 전시 때문에 살면서 가장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던 디자이너 하라 켄야는 간신히 짬을 내 서울에 왔다. 그의 스승 무카이 슈타로의 전시[무카이 슈타로, 세계 프로세스로서의 제스처]가 열렸기 때문이다. 일본 디자인 계의 거목으로 알려진 무카이 슈타로를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자리에 기꺼이 참여한 하라 켄야는 연로한 스승을 대신해 진지하고 흥미로운 내용의 강연까지 준비해왔다. 어느 인터뷰에서는 “나비 날개 문양에 관한 질문에 ‘태양의 잔상이 새겨진 것이 아닐까요?’ 하고 진지하게 답하는 경제학자 출신의 시인이자, 철학자이자, 디자인 교육자인 무카이 슈타로에게 배우며 디자인을 시작한 것은 내게 더없이 큰 행운이었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일본 디자이너들은 무카이 슈타로를 ‘디자인의 본질과 지향해야 하는 철학을 가르쳐주고, 다양한 영역으로 나아가게 해준 등대 같은 존재’로 여기며 존경하고 따른다.
일본 디자인계에 이른바 ‘디자인 이론’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점은 산업 디자이너 무카이 슈타로가 울름조형대학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인 1960년대다. ‘통합적 지식의 총체’라 평가받는 무카이 슈타로는 일본에 디자인학 이론의 기반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무사시노미술대학교에 ‘사이언스 오브 디자인학과’를 설립하고 융합적, 학제적 디자인 교육을 실시해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는 유명 디자이너들을 다수 배출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가 퇴임 전 무사시노에서 했던 마지막 강의를 엮은 『디자인학』은 무카이 슈타로가 평생에 걸쳐 실천하고 다져온 디자인 철학을 집대성한 책이다. 국내에서 그의 단독 저서가 정식으로 번역?출간된 것은 『디자인학』이 처음이다. 일본 디자인계에선 워낙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 그 이름이 전설처럼 회자되긴 했으나, 그가 주창한 ‘디자인학’ 이론이 매우 방대하고 복합적이라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었던 탓이다. 일본 현대 디자인 이론의 시원(始原)이라 할 만한 존재지만 국내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무카이 슈타로를 알고 싶다면, 이 책으로 시작해야 한다. 무카이 슈타로 ‘디자인학’의 에센스, 정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제가 ‘디자인학’을 가르치고 연구하며 오랫동안 몸담았던 무사시노미술대학교를 퇴임하며 했던 최종 강연 기록을 보완, 보충해 엮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책에는 제가 디자인학을 어떻게 생각하고 형성해왔는지에 대한 저의 ‘디자인 상(像)’이 담겨 있습니다. 부제에 들어간 ‘컨스텔레이션(constellation)’이라는 단어는 낯설지도 모릅니다. (중략) 이 단어는 말라르메의 시론(詩論)에서 유래한 ‘별자리(星座)’ ‘별자리와 같은 배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책의 각 장의 표지를 보면 제 주요 디자인 단어(design vocabulary)의 성좌에서 하나씩 골라, 단어나 개념과의 만남이나 그들 단어의 의미 세계를 별자리처럼 배치해 그 다양한 상호 관계성이나 의미 관련을 서술해놓았습니다. 이를 통해 제 디자인학 사색의 풍경, 디자인이라는 제작 행위(포이에시스)의 세계상을 그려보려 한 것이지요.”
_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이 책은 또한 무카이 슈타로가 키워낸 제자들과의 합작품이란 점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 저자는 “이 책을 언어로 서술하면서도 만질 수 있는 듯한 형태의 텍스트로 짜내고 싶었다”는 말을 했는데, 이는 책의 편집과 디자인 작업을 맡은 제자들을 통해 독특하게 형상화됐다. 덕분에 『디자인학』은 내용과 형식이 명쾌하고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점을 높이 평가받아 제8회 다케오상(竹尾賞) 디자인 서적 부분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디자인학을 창조한 보물과도 같은 책이다. 디자인학을 서술하는 사색의 풍경으로 ‘사색의 컨스텔레이션’이라 이름 붙인 점에서, 디자인 영역의 독특한 구상적 시각이 엿보인다. 모든 사고의 근원인 철학으로 회귀하려는 구상에 의해 매우 시적이며 촉각적인 논리가 구축됐다.”
_가쓰이 미쓰오(제8회 다케오상 심사위원장)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디자인 교육자
무카이 슈타로가 생각하는 디자인이란 어떤 것일까? 우선 교육자로서 그는 “디자인이란 세부 전공이 없는 전공이다”라고 주장하며 교육 현장에서 이를 적극 실천해왔다. 또한 디자인은 철학처럼 종합적인 면이 있지만 일반 철학과 다른 점은 그 대상이 인간의 삶,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생활 세계’라는 구체적인 현실과 일상을 형성하는 것이라 말하며 그에 따른 자신만의 디자인 철학을 오랜 세월 구축해왔다.
장인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의 전통 문화를 자연스레 체득하며 성장한 무카이 슈타로는 경제학자 출신의 디자이너다. 그는 와세다대학교 상과대학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한 뒤 디자인으로 진로를 변경, 일본 최초의 디자인 국비유학생으로 뽑혀 1956년 독일의 울름조형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그와 함께 국비유학생으로 선정된 다른 한 사람은 훗날 일본의 디자인 산업을 부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GK디자인그룹’의 에쿠안 겐지(榮久庵憲司)다.
그가 수학했던 울름조형대학교는 체계적, 학제적 디자인 교육을 최초로 실시한 곳이다. 1953년 독일 바덴뷔르뎀베르크의 소도시 울름에 설립된 이 대학은 바우하우스(1919~33)의 계승이 핵심 목표였던 디자인 학교로, 현대 디자인 교육의 틀을 형성하고 발전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울름조형대학의 교육 프로그램은 당시 최첨단을 걸었다. 자연 과학을 비롯해 여러 학문의 최신 성과가 집약되고, 그러한 관계성 속에서 조형 연습 과제가 실험적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1950년대 중반에 이미 정보 이론이나 기호론 과목에서 미국의 수학자 노버트 위너의 『사이버네틱스』,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의 『지각(知覺)의 현상학』 등을 수업에 활용했다. 무카이 슈타로는 이곳에서 토마스 말도나도, 막스 빌, 오틀 아이허, 막스 벤제, 오이겐 곰링거 등의 가르침을 받았다. 울름조형대학에서의 경험을 통해 그는 디자인에 대한 종합적인 인식을 품고 디자이너로서 첫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귀국 후에는 일본 통산성 공업기술원 산업공예시범소(Industrial Art Institute)에서 인테리어 및 제품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다시 독일로 떠나 울름조형대학교와 하노버대학교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울름에서는 말도나도가 이끄는 그룹의 일원으로서 제품 디자인의 구체적인 연구 개발과 교육 활동을 했으며, 하노버대학교에서는 산업디자인연구소에서 제품 및 도시 환경의 구체적인 연구 개발과 교육에 종사했다. 무카이 슈타로는 울름조형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연구하며 모던 디자인이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근대성을 형성하기 위한 사회의 혁신적 프로젝트’라는 인식에 이르렀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이를 계승하기 위해 무사시노미술대학에 ‘사이언스 오브 디자인학과’를 설립하고, 디자인학을 다져나가는 동시에 이를 실천할 새로운 인재들을 키우는 데 힘썼다. 무사시노의 사이언스 오브 디자인학과는 울름조형대학의 디자인 운동을 기본 모델로 삼았지만, 무카이 슈타로의 독특한 디자인 사상이 더해지면서 교육 프로그램은 울름과는 차이를 보였다. 특히 일본에서도 일반적으로 학제적 교육은 학자나 연구자 양성이 목적인데, 무사시노의 사이언스 오브 디자인학과는 ‘디자이너’ 양성을 위한 학제적, 융합적, 영역 간의 벽을 없앤 초월적 디자인 교육을 실시했다는 점에서 남다른 면이 있다. 학제적 이론과목-언어학, 사회학, 텍스트 연구, 오토포이에시스론, 기호론, 문화기호론 등-을 따로 마련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새로 개설한 수업은 그 분야 최고의 전문가가 해당 과목을 강의하고, 학생들은 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지식을 얻었다. 이들 교과는 이론에서 멈추지 않고, 실기와 연결돼 프로젝트로 승화됐다.
무사시노의 사이언스 오브 디자인학과 커리큘럼에 나타난 특징, 자연 과학부터 인문 과학까지 아우르는 학제성, 세부 디자인 전공의 구분을 없애고 프로젝트 중심으로 진행하는 횡단성, 생산과 생활의 관계 강화 등은 디자인이 우리 ‘생의 전체’와 연결돼 있다고 보는 무카이 슈타로의 디자인 사상이 그 출발점이다. 무카이 슈타로 디자인학 사상의 기반은, 첫째 생의 철학의 흐름을 이어받아 디자인을 분리할 수 없는 생활 세계의 형성으로 본 점, 둘째 디자인의 시작점을 인류의 직립보행 생활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간 점, 셋째 최첨단 과학의 모든 학문을 신속하게 받아들여 커리큘럼화한 점이다. 이것들이 모두 교육 프로그램으로 녹아들어 디자인에 대한 생각 대상의 범위가 극단적으로 넓어져 이제 거의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됐다. 그의 디자인학은 열린 한계에서 논리적(로고스적)으로 생각해 확연한 답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데리다의 비약적 노마드(유목민) 사고처럼 기존에 없는 생각을 끌어내는 방법론이며, 이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해 제작까지 이어지도록 한다. 하라 켄야가 졸업 세미나로 실시하고 있는 ‘엑스-포메이션’(Ex-formation: 모르게 하다, 미지화하다)도 이러한 방법론의 새로운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집요하고 체계적이며 경계를 넘는 방식의 교육을 통해 학생들은 스스로 사고하는 방법을 배운다. 자신만의 생각하는 방법, 생각하는 힘을 확립하게 해주는 것이다.
무카이 슈타로라는 토양이 키워낸 것
무카이 슈타로가 세운 무사시노미술대학교 사이언스 오브 디자인학과는 지난 50여 년 동안 하라 켄야를 비롯한 새로운 타입의 인재들을 배출했다. 이곳 졸업생들은 기존의 디자인 영역을 뛰어넘고, 다른 학문과 연대하며 디자인 연구 및 제작 활동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해왔다. 규정할 수 없는 창의성을 발하며 일본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활약하는 이곳 출신의 디자이너들은 무카이 슈타로의 디자인학 사상을 기반으로 실천해온 영역 횡단적, 학제적 교육의 성과다. 무사시노의 디자인 교육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학부생들의 창의력을 키우는 데 매우 심혈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이론과 제작은 양자택일의 대상이 아니며, 이론이건 제작이건 비판적 구상력(構想力, imagination)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개별 문제에서 출발해 그 연장선상에서 생에 대한 전체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구성한다. 그런 교육을 받았기에 이 학과 출신 학생들은 자신만의 새로운 디자인 방법론을 찾아냈고 이를 사회에 제안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무사시노의 사이언스 오브 디자인학과는 1기 교수진이 퇴임한 후, 졸업생들이 교수로 합류해 특유의 디자인 철학과 교육 과정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 면면을 살펴보면 대부분 단순하게 정의, 분리될 수 없는 여러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바야시 아키요는 기호론, 디자인 철학, 디자인사 등 전반적인 이론 연구와 학회 활동 등 학문으로 ‘디자인학’을 추구하며 수많은 책을 집필했으며, 실기 영역에서도 활약하고 있다. 미야지마 신고는 GK디자인사무실 제품 디자이너 출신으로, 제품 디자인을 중심으로 디자인을 통한 지역 재생을 추구, 지역의 제품 디자인 개발과 컨설팅, 색채 플래닝을 하고 있다. 『디자인학』 표지와 장 표지 등을 디자인한 반도 다카아키는 타이포그래피, 북 디자인 등 그래픽 디자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편, 조형의 관점에서 ‘시너제틱돔’(Synergetic dome)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요시다 신고는 환경 조사와 색채 계획을 진행하며 도시 계획과 관련해 도시 환경색채를 계획 설정하는 작업을 한다.
그 밖에 전자제품은 물론 가구, 욕실 등 공간과 환경으로 영역을 확장시킨 일본 제품 디자인계의 1인자로 유명한 후카사와 나오토는 무사시노 출신은 아니지만 무카이 슈타로의 디자인 사상에 깊이 공감해 모교인 다마미술대학교에 사이언스 오브 디자인학과와 유사한 성격의 디자인종합학과를 설립했다. 칸 광고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히시가와 세이치는 본인의 영상 스튜디오에서 TV CF, 사진, TV 타이틀 롤, 음악 작곡 및 녹음, 전시 기획 등을 하며 새로운 어플리케이션에 의한 디자인 등 실험적 교육도 하고 있다. 무카이 슈타로가 퇴임한 후 학과 방향을 결정하는 주임 교수를 맡고 있는 하라 켄야는 퍼스의 퇴행화 이론을 변형, 진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는 ‘엑스-포메이션’개념을 발전시켜 신선한 세계 인식 창조 방법론으로 졸업 과제를 진행하고 있다. 하라 켄야가 진행하는 졸업 세미나 엑스-포메이션의 결과물은 매년 출판되며 한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번역?출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