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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as Schiff 안드라스 쉬프 - 1974년 5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라이브 (Live from the V International Tchaikovsky Compet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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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as Schiff 안드라스 쉬프 - 1974년 5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라이브 (Live from the V International Tchaikovsky Competition)

[ 2CD ]
Sergei Rachmaninov, Franz Liszt, Dmitri Shostakovich, Johannes Brahms, Piotr I. Tchaikovsky 작곡 외 4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MELODIYA / MELODIYA | 2016년 12월 14일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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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as Schiff 안드라스 쉬프 - 1974년 5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라이브 (Live from the V International Tchaikovsky Competition)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6년 12월 14일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 1
  • 01 Sergei Rachmaninov: Etudes-Tableaux Op.33: No.7 in E flat Major
  • 02 Franz Liszt: Etudes S.144 (Trois Caprices Poetiques, 3 Etudes de Concert): No.2 in F minor
  • 03 Dmitri Shostakovich: Praludien und Fugen Op.87 No.15 in D flat Major
  • 04 Johannes Brahms: Handel Variations & Fugue in B Major Op.24
  • 05 Alexander Pirumov: Scherzo for piano
  • 06 Pyotr Ilyich Tchaikovsky: Six Morceaux for Piano Op.19 No.6 in F Major
  • 07 Sergei Prokofiev: Sonata for Piano No.3 in A minor Op.28
Disc 2
  • 01 Pyotr Ilyich Tchaikovsky: (1-3) Concerto for Piano & Orchestra No.1 in B minor Op.23
  • 04 Johannes Brahms: (4-6) Concerto for Piano & Orchestra No.1 in D minor Op.15

상세 이미지

상세 이미지 1

아티스트 소개 (9명)

작곡 : Sergei Rachmaninov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y Vasilyevich Rachmaninoff Sergej Rachmaninoff )
러시아계 미국인 작곡가, 피아노 연주가이자 지휘자이다. 라흐마니노프의 가족은 오래된 귀족 가문의 하나였다. 9세 때 페테르스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며, 3년 뒤에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였다. 1895년에 완성된 1번 교향곡은 라흐마니노프의 불안증세 속에 1897년 발표되었는데, 이는 많은 혹평을 받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그는 우울증에 시달려 약 3년 간 거의 작곡 활동을 하지 못하였... 러시아계 미국인 작곡가, 피아노 연주가이자 지휘자이다.
라흐마니노프의 가족은 오래된 귀족 가문의 하나였다. 9세 때 페테르스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며, 3년 뒤에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였다.

1895년에 완성된 1번 교향곡은 라흐마니노프의 불안증세 속에 1897년 발표되었는데, 이는 많은 혹평을 받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그는 우울증에 시달려 약 3년 간 거의 작곡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19되었다. 1901년 완성된 제2번 피아노 협주곡 역시 니콜라이 달에게 헌정된 것이다.

1905-1906년에는 모스크바 황실 극장 지휘자를 거쳐 미국 및 유럽 연주 여행을 하였다.

1917년 러시아에서는 2월 혁명이 일어났고 곧 라흐마니노프의 재산도 몰수당하였다. 그는 가난 속에서 북유럽에 머물러있다가 미국에서 지휘자의 자리를 제안받고 건너가 음악활동을 계속했다.

1942년부터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1943년 사망했다. 그는 모스크바에 묻히고 싶어했지만 이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의 피아노 연주가로서의 기량은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작곡가로서의 명성은 뒤늦게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종종 자신의 작품을 직접 연주했다. 전설적인 기교와 13도의 음정까지도 연주해 낼 수 있을 만큼 컸던 손 등에 힘입어, 그는 당대 가장 위대한 피아노 연주가 가운데 한 명이었다. 라흐마니노프 스스로 연주한 자신의 음악이나 일반적인 레파토리 곡들의 연주는 빅터 토킹 머신 컴퍼니의 레이블로 출시되었다.

라흐마니노프는 후기 낭만파에 속하는 작품을 썼다. 그의 작품은 다양한 악곡 형식과 장르를 포괄하지만, 그 안에서도 슬라브적인 경향이 짙게 나타난다.

그의 작품에는 다섯 개의 피아노 협주곡, 세 개의 교향곡과 두 개의 피아노 소나타, 세 개의 오페라, 저녁기도곡,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전주곡 올림 다 단조를 포함한 스물 네 개의 전주곡, 열 일곱 개의 연습곡, 교향적 무곡과 많은 가곡 등이 있다. 그는 비록 명백히 쇼팽과 리스트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작품 대부분은 차이콥스키와 비슷한 후기 낭만파 양식이다.
작곡 : Franz Liszt (프란츠 리스트)
프란츠 리스트(독일어: Franz Liszt, 1811년 10월 22일 ~ 1886년 7월 31일)은 헝가리 출생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다. 헝가리식 이름은 리스트 페렌츠(헝가리어: Liszt Ferenc)이다. 교향시(symphonic poem)을 창시했고, 단악장 sonata를 최초로 작곡했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나타내었고, 파리에 가서는 훌륭한 연주가로 인정받아 "피아노의 왕"이라 불리었으며... 프란츠 리스트(독일어: Franz Liszt, 1811년 10월 22일 ~ 1886년 7월 31일)은 헝가리 출생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다. 헝가리식 이름은 리스트 페렌츠(헝가리어: Liszt Ferenc)이다. 교향시(symphonic poem)을 창시했고, 단악장 sonata를 최초로 작곡했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나타내었고, 파리에 가서는 훌륭한 연주가로 인정받아 "피아노의 왕"이라 불리었으며, 이 별칭은 오늘날까지도 리스트를 의미하는 명칭으로 자리잡았다. 뛰어난 기교로 유럽에 명성을 떨쳤고, 지금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정작 피아니스트로 활동한 시간은 채 10년이 안된다. 낭만시대 음악에 큰 공헌을 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에서는 <메피스토 왈츠(mephisto waltz)>, <헝가리 광시곡(Hungarian rhapsody)>, <사랑의 꿈 3번 (love dream no. 3)>, <라캄파넬라 (la campanella)>, 등이 있다. 리스트만의 특별한 기교들과 표현들이 이 곡들에 들어있다. 헝가리 광시곡 2번을 예를 들어 옥타브를 치면서 다른 음을 연타하는 기교가 있다. 음악 전공생들이 거쳐야 하는 고난도 레파토리이다.

리스트는 1811년 10월 22일, 안나 리스트와 아담 리스트의 아들로 헝가리의 라이딩 근처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리스트의 아버지는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과 기타를 연주했다. 그리고 궁정음악가여서 여러 유명한 musician들을 알고 있었다. 후에 Liszt가 훌륭한 피아니스트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침 받을 수 있던 이유였다. 어머니도 여러 악기를 다룰 수 있었다고 한다.

리스트는 여섯살 때 아버지에게 처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금방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리스트는 베토벤의 제자였던 카를 체르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웠고, 열두살이 되던 1822년 12월 데뷔했다. 카를 체르니는 리스트의 첫 정식 piano 교사이자 마지막 스승이었다. 리스트는 프레데리크 쇼팽과도 친해졌지만 이는 곧 라이벌 관계로 발전했다.

1823년 파리로 옮겨간 리스트는 1824년부터 파에르와 레이하 밑에서 푸가와 대위법을 공부했다. 그러나 아버지 아담 리스트가 세상을 떠나 리스트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잠시 성직자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비쳤다. 1832년 천재 바이올린 연주자 파가니니의 공연에 다녀온 후 리스트는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기로 마음먹고 매일 10시간이 넘도록 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는 어머니가 아프셔서 피아노 교사로 일하며 동시에 연습을 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음악계의 넓은 발을 가지게 되었다.

리스트는 베를리오즈, 로베르트 슈만, 장차 그의 사위가 되는 리하르트 바그너 등의 당대의 음악가들과 화가 앵그르, 시인 하이네,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등과 친분을 다졌다. 그는 연주 활동을 하면서 특히 작곡에 힘을 쏟아 많은 피아노곡을 발표하였다. <12개의 연습곡> 을 더 어렵게 편곡한 것도 15세의 일이다.

1832년 4월 20일, 니콜로 파가니니에 의해 개최된 파리 콜레라 유행 희생자들을 위한 자선 콘서트를 관람한 뒤, 리스트는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에서 거장이었던 것처럼 피아노에서 거장이 되기로 결심했다.

1847년 리스트는 키예프에서 카펠마이스터로 일하였다. 이 시기 리스트는 자인-비트겐슈타인 (Sayn-Wittgenstein) 공작부인과 깊은 사랑에 빠져 다구 백작부인과 헤어졌다. 피아노 공연보다는 작곡에 주력할 것을 권한 사람도 공작부인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하려 했으나, 교황청과 비오 9세는 리스트와 공작부인의 결혼을 승낙하지 않았다. 이유는 전 남편 자인 비트겐슈타인 공작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압력 때문이었다. 자인 비트겐슈타인은 아직 살아 있었으며 정작 3년전 재혼했고 아버지가 러시아 황제의 부관이었던 유력 가문의 사람이었으며 니콜라이 1세는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회에서 리스트의 연주 도중 수다를 떨다 리스트에게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대한 앙금이 있었다. 리스트는 1861년 로마로 옮겨갔다. 1865년 리스트는 예전의 희망대로 로마 가톨릭 성직자가 되어 교회음악 작곡에 헌신했다.

1869년부터 리스트는 로마, 바이마르, 부다페스트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다. 같은 해 리스트의 딸 코지마가 바그너와 결혼하면서 개신교로 개종하자 리스트는 몇 년 동안이나 코지마와 연락을 하지 않았다.

1876년부터 죽기 전까지 리스트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음악을 가르쳐 바인가르트너, 실로티, 자우어 등의 명인을 배출하였다.

1886년 7월 31일 리스트는 영국을 거쳐 프랑스로 최후 연주 여행을 가던 도중에 감기에 걸렸는데 이것이 폐렴이 되어 둘째 딸 코지마의 품에 안겨 세상을 떠났다.

리스트는 별명이 많다. 최고의 기교를 가진 역사상 최고의 피아니스트로서 "피아노의 왕", "피아노의 신"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파가니니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해서 "피아노의 파가니니"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한 "교향시의 창시자"라고 불리기도 하고 일본에서는 "피아노의 마술사"라는 별명으로 자주 불리기도 한다. 이 별명들 중 가장 넓게 사용되는 별명은 "피아노의 왕"으로, 리스트가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 후 16세 쯤 파리에서 피아노 연주를 한 후 연주를 들은 사람들이 리스트에게 찬사를 보내며 붙여줬다고 한다.

그는 19세기의 대표적인 피아노 연주가로, 그의 기교는 피아노에 오케스트라의 색채를 가미해서 생기가 넘치도록 한 데에 있다. 작곡가로서 신낭만파에 속하고 교향시를 창시하여 음악에 문학적 요소를 도입하고 자유스러운 화성을 사용하여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작곡의 수는 매우 많고, 그 평가는 오늘에 있어서 각각 다르나, symphonic poem의 형식의 완성, 또 근대적 색채의 관현악법의 일면을 개척한 것은 동일하게 인정받고 있다.
작곡 : Dmitri Shostakovich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 Schostakowitsch Dmitriyevich Shostakovich )
러시아의 작곡가이다. 그는 소비에트 정부와 복잡한 관계에 있었는데, 1936년과 1948년에는 그의 두 작품이 공개적인 경고를 받기도 했으며, 종종 그의 작품에 대해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 그는 동시대의 가운데 가장 유명한 소비에트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이자, 여러 개의 표창과 상을 받기도 했으며, 소비에트 최고 회의 위원이기도 했다. 초창기의 아방가르드 시기를 제외하면, 쇼스타코비치는 주... 러시아의 작곡가이다. 그는 소비에트 정부와 복잡한 관계에 있었는데, 1936년과 1948년에는 그의 두 작품이 공개적인 경고를 받기도 했으며, 종종 그의 작품에 대해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 그는 동시대의 가운데 가장 유명한 소비에트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이자, 여러 개의 표창과 상을 받기도 했으며, 소비에트 최고 회의 위원이기도 했다.

초창기의 아방가르드 시기를 제외하면, 쇼스타코비치는 주로 낭만파의 작품을 썼으며, 특히 구스타프 말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무조주의 형식을 도입하였으며 종종 12음렬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의 음악은 강한 대조에, 그로테스크적인 요소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의 작품 가운데 교향곡과 현악 사중주 각각 열 다섯 곡씩이 유명하며, 오페라와 여섯 개의 협주곡, 그리고 여러 영화 음악도 널리 알려져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1906년 러시아 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9살 되던 해부터 피아노를 그의 어머니 소피아 바실리에프나로부터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남다른 재능 덕분에 또래 아이들보다 월등한 피아노 실력을 갖게 되었다. 그는 피아노와 함께 작곡도 배웠는데, 작곡 부문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쇼스타코비치의 어릴 때 기억은 거의 육성 회고록에 잘 나타나있다.

우리 가정은 제1차 세계대전, 2월 혁명, 10월 혁명과 연이어 터지는 사회적 사건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이 연대에 썼던 내 작품에서 이미 무언가 실생활을 담아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드러나는 것은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다. 이러한 ‘실생활을 담고 싶다’는 어린 마음으로 만든 작품에는 피아노 소곡 <병사>, <자유의 찬가>, <혁명의 희생자에게 바치는 장송 행진곡>이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회고록에서도 잘 나타나 있듯이, 그는 어린 시절부터 ‘혁명’ 같은 사회적 현상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1919년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였다. 그는 작곡과 피아노를 모두 공부하였는데, 작곡은 막시밀리안 슈테인베르크에게, 피아노는 로자노바와 레오니드 니콜라에프에게 사사하였다. 그는 음악원에서 다양한 형식과 장르의 곡을 썼다. 이 당시 썼던 곡들은 피아노를 위한 소품 시리즈, 관현악을 위한 주제와 변주곡,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트리오, 피아노를 위한 전주곡 등이 있다. 그는 음악원 졸업 작품으로 첫 번째 교향곡을 탄생시켰다. 그의 작품은 당대 최고의 지휘자였던 토스카니니, 브루노 발터 등에 의해 소개되어 젊은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쌓기 시작한다.

쇼스타코비치는 1번 교향곡(1925)를 작곡한 이후, 2번 교향곡, 10월 혁명에 바침(1927), 3번 교향곡, 메이데이]](1929), [[4번 교향곡(1936)을 작곡하였다. 그리고 1927년에는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 피아노 부문 2등을 하기도 한다. 이 무렵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뿐만 아니라 오페라, 발레음악 등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작곡하였다. 그는 오페라 귀는 1933년에,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1934년에 발표한다.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전통 오페라와 달리 상당히 전위적인 작품이었는데, 당시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비판하는 기사가 실리게 된다. 당시 "프라우다"에는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음악이 아니라 혼란(Chaos instead of Music/Sumbru vmesto muzyki)"라고 표현한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사건 때문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으나 결국 1936년 4번 교향곡을 완성했다. 하지만 <4번 교향곡>의 초연 일정이 무산되었고, 25년이 지난 1961년에 초연이 이루어졌다.

그는 1937년에서 1941년에는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1943에서 1948년에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작곡교수를 지냈다.

쇼스타코비치의 5번 교향곡은 1937년에 작곡된다. 5번 교향곡은 혁명 교향곡이라고도 불린다.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비롯한 자신의 음악이 지나치게 형식주의적이라는 비판을 깨기 위해 다음 작품에 더욱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5번 교향곡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이전의 비판과는 달리 호평을 받아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다. 그 뒤로 쇼스타코비치는 6번교향곡과 7번 교향곡을 작곡한다. 특히 7번 교향곡은 1941년 6월, 히틀러가 레닌그라드를 침공했을 때 레닌그라드에서 작곡한 작품인데, 이 때문에 7번 교향곡은 '레닌그라드 교향곡'이라고도 불린다. 레닌그라드 교향곡의 초연은 소련 내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관심이 컸다. 초연은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NBC 교향악단이 진행했는데, 이 공연은 미국 전 방송국을 통해 중계되었다.

7번 교향곡(레닌그라드)을 쓰고 난 이후, 그는 8번 교향곡을 작곡한다. 7번 교향곡은 전쟁의 고통을 가장 극적으로 반영한 교향곡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쇼스타코비치는 9번 교향곡을 작곡한다. 그는 9번 교향곡 자체를 쉽고 명쾌한 분위기에 의한 곡이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귀엽고 발랄하기만 한 9번 교향곡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스탈린은 9번 교향곡이 지니는 상징성(예를 들어, 베토벤의 9번 합창 교향곡이 갖는 상징성)과 전쟁의 종결이라는 큰 사건이 결합하여 대단한 걸작이 탄생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쇼스타코비치의 9번 교향곡은 그러한 기대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이로 인해 즈다노프 비판이 시작되었다. 즈다노프 비판은 다양한 문화 영역에서 이루어졌는데, 음악 분야의 토론은 1948년 1월에 진행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전후 서유럽에서 도입된 형식주의적 사상과의 투쟁, 광범위한 인민대중을 높은 음악성에 가까워지도록 하기 위한 음악 예술 발전의 과제가 토의되었다. 이 회의 이후, 쇼스타코비치 뿐만 아니라 프로코피예프, 하차투리안, 포포프, 세바린, 미야스코프스키 등이 형식주의자로 비난을 받게 된다. 이 즈다노프 비판으로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이 사망하는 1953년까지 교향곡을 작곡하지 않게 되고, 주로 스탈린 선전용 영화음악만을 작곡하게 된다.

스탈린이 사망(1953)하고 나서 쇼스타코비치는 같은 해 10월 10번 교향곡을 8년 만에 발표한다. 그리고 그 이후로 11번 교향곡과 12번 교향곡, 13번 교향곡, 14번 교향곡을 발표한다. 11번째 교향곡과 12번째 교향곡은 혁명을 주제로 쓴 교향곡이라고 평가받는데, 이는 표제 음악적 특징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반면 13번째 교향곡과 14번째 교향곡은 합창이 들어가기 때문에 성악 교향곡의 형태를 띠고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제 14번 교향곡을 작곡한 2년 뒤에 마지막 교향곡인 15번 교향을 작곡한다. 15번 교향곡은 앞 선 두개의 교향곡과 달리 순수 기악곡이다. 이 곡을 작곡할 때, 쇼스타코비치는 심근경색으로 병상에 있었다. 계속적인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그는 1975년에 심장 발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의 음악은 러시아 사람들의 생활이나 기분을 잘 나타냈으며 듣기 쉬운 것이 특징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은 교향곡이 대표적이며, 교향곡 뿐만 아니라 오페라, 관현악곡, 협주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성악곡으로 매우 다양하게 존재한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은 총 15개로 이루어진다.

제 1번 교향곡은 쇼스타코비치의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졸업 작품으로, 이 곡을 통해 세상에 젊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알려지기 시작한다. 곡은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당시 예술과 혁명은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서유럽의 현대음악 콘서트가 열리면서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2번 교향곡, 3번 교향곡을 작곡한다. 2,3번 교향곡에서는 대위적인 기법을 많이 사용하는데, 2번 교향곡에서는 극단적으로 27성부 모두 폴리포니를 이루기도 한다.

4번 교향곡은 표제가 없는 순수한 절대 음악이다. 또한 쇼스타코비치의 작품 중 가장 많은 인원(총 134명)이 필요한 기악곡이다. 하지만 4번 교향곡이 <프라우다>지에서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에 대한 비판 사건으로 초연이 연기된다.

5번 교향곡은 쇼스타코비치의 15개 교향곡 중 으뜸으로 뽑힐 만큼 높은 작품성을 지녔다. 그는 그 무렵 [프라우다]에 쓰인 자신에 대한 비판, 즉 지나친 형식주의자라는 평가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한 고민 끝에 탄생한 작품인 5번 교향곡은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운명과 극복-승리라는 내용으로 자주 비교되곤 한다.쇼스타코비치는 회고록을 통해 5번 교향곡의 주제가 인간성(인격)의 확립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 작품은 4악장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는 모든 악장에 일정 리듬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조성을 명확하게 표시하지 않았는데, 1악장은 d단조, 2악장은 a단조, 3악장은 f#단조, 4악장은 d단조로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하자 소련 정부는 예술에 대한 간섭을 더욱 심하게 한다. 그리고 애국적인 예술 작품을 탄생시키는데, 7번 교향곡 레닌그라드도 이러한 맥락에서 탄생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를 포위하였던 것에서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을 시작하였다. 이 작품 발표 당시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은 전쟁의 시(詩)이며, 뿌리 깊은 민족정신의 찬가이다라고 발표했지만 1악장을 제외하고는 묘사적 요소가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다.[10] 이전,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비난을 했던 <프라우다>에서도 이 곡에 대해서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곡은 훗날, 레닌그라드 시(市)에 헌정되었으며, 당시 스탈린상도 수상하게 된다. 이 곡은 표제 음악이며, 1악장은 '전쟁', 2악장은 '회상', 3악장은 '조국의 광야', 4악장은 '승리'로 알려져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9번 교향곡은 짧고 매우 경쾌한 소품 형식이다. 곡 자체는 완성도가 높은 편이었지만, 대작이 나올 것을 기대하였던 사람들에게 소규모의 경쾌하고 재치있는 곡은 실망을 안겨주었다. 쇼스타코비치는 9번 교향곡은 만든 지 8년 후에 제 10번 교향곡을 발표한다. 이 곡은 스탈린이 사망한 직후에 쓰여진 작품이었기 때문에 전 세계의 관심을 받았다. 총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을 "확대 된 타악기군을 포함하는 오케스트라"의 표준에 가까운 4악장의 교향곡이라고 설명하였다.

그의 13번 교향곡과 14번 교향곡에는 성악 부분이 들어가 있다.

쇼스타코비치가 마지막으로 쓴 교향곡은 1971년의 15번 교향곡이다. 15번 교향곡은 순수 기악 교향곡이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뿐만 아니라 관현악곡, 협주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오페라, 성악곡에 걸쳐 많은 작품을 썼다. 관현악곡은 모음곡, 서곡, 교향시가 대부분이다. 특히 모음곡에서는 발레 음악을 모은 발레 모음곡이 대표적이다. 또한 쇼스타코비치는 민족 음악에도 관심을 가져 러시아와 기르기스 민요 서곡 op.115같은 민속적 선율로 곡을 쓰기도 하였다. <10월 혁명>이라는 교향시 op.131는 1967년에 있었던 10월 혁명 50주년을 기념하여 작곡된 작품이다.

협주곡은 피아노, 바이올린, 그리고 첼로 협주곡이 대표적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는 미완성 작품까지 모두 3개이다. 그 중 코(The Nose) Op.15와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Lady Macbeth of Mtsensk District) Op.29이 대표적이다. 코는 고골리의 동명소설을 러시아로 번역한 것으로, G. 이오닌, A. 플라이스, J.자미야틴과 쇼스타코비치가 함께 공동으로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잃어버린 코를 찾아 원래 있던 자리에 붙인다는 내용의 원작을 모방하여 코믹적인 요소를 없앤 중후하고 무거운 음악이 오페라 전체에 흐른다.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1930년~1932년에 작곡되었다. 이 작품은 러시아어로 번역한 A. 플레이스와 쇼스타코비치의 공동 작품 <므첸스크의 백베스 부인>의 대본이 거의 그대로 사용되었다. 이 작품은 굉장히 규모가 큰 대작으로, 러시아 오페라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다. 즉, 이 작품은 부정적인 일들을 고발하고, 풍자하며, 극적이고, 서정적이면서 인물에 대한 심리 묘사, 성격 묘사에 대한 음악이 어우러진다. 이 작품은 1934년 초연 된 이후, <프라우다>지에서 ‘음악이 아니라 시끄러운 소리들일 뿐’이라는 비판을 받은 후, 상연이 금지되었다. 1979년에 원곡이 부활, 상연되었다.
작곡 : Johannes Brahms (요하네스 브람스)
요하네스 브람스(독일어: Johannes Brahms, 문화어: 요한네스 브람스, 1833년 5월 7일 ~ 1897년 4월 3일)는 독일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첼리스트,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이다. 함부르크 출생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주로 음악가 생활을 했으며, 당대 낭만주의 음악의 선도적 존재였다. 일생동안 그는 높은 인기와 영향력을 가졌으며, 19세기 지휘자 한스 폰 뷜로에 따르면 그를 요한 제바스티안 바... 요하네스 브람스(독일어: Johannes Brahms, 문화어: 요한네스 브람스, 1833년 5월 7일 ~ 1897년 4월 3일)는 독일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첼리스트,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이다. 함부르크 출생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주로 음악가 생활을 했으며, 당대 낭만주의 음악의 선도적 존재였다. 일생동안 그는 높은 인기와 영향력을 가졌으며, 19세기 지휘자 한스 폰 뷜로에 따르면 그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더불어 "3B"로 칭하기도 했다고 한다.

브람스는 여러 피아노곡, 실내악, 교향악, 성악, 합창곡을 작곡했다. 피아니스트로서 그는 여러 자신의 작품을 초연했으며, 비르투오조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하임과 함께 당대의 뛰어난 연주자였다. 브람스의 여러 작품은 현대 음악회에서도 자주 연주되는 레퍼토리이다. 완고한 완벽주의자였던 그는 수많은 자신의 작품을 없애거나 출판하지 않기도 했다.

브람스는 전통주의자이자 혁신자였다. 구조나 작곡 기법면에서 그는 바로크와 고전파 음악에 굳게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는 대위법의 대가였다. 이런 구조와 함께 그는 화성과 음색에 대한 대담하고도 새로운 시도로 당대 조성 음악의 개념을 바꾸어놓았다. 그의 업적과 기예는 아르놀트 쇤베르크에서 에드워드 엘가에 이르기까지 후대 여러 음악가들의 찬탄의 대상이었다. 브람스의 작품은 결국 조성을 버리게 되는 아르놀트 쇤베르크 등 한 세대의 음악가군의 시작점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

브람스의 작품은 독일 낭만파 중에서 비교적 보수적인 경향을 갖고 있다. 그의 작품은 고전파적인 양식 위에 서서, 중후하고 북독일적인 맛을 지니며, 또한 아름다운 서정성도 갖고 있다. 그가 작곡한 4개의 교향곡은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걸작으로 그 중에서 교향곡 1번은 베토벤의 제9에 이어지는 제10교향곡이라고 할 만큼 베토벤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쌓아올린 뛰어난 작품이다. 바이올린 협주곡도 놀랄 만한 완성도에서 베토벤의 곡 다음에 놓일 만한 가치가 있다. 피아노 음악에서도 피아니스틱한 화려한 기교를 배격하고 중후한 작품을 작곡하였다.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은, 피아노가 관현악과 밀접히 결합되어 있는 데에 특색이 있다. 독주곡에서는 <파가니니 변주곡>(1863), <헨델 변주곡> 등이 뛰어났고, 연탄용(連彈用)인 <헝가리 무곡>은 특히 유명하다. 실내악에도 특필할 만한 작품이 많은데, <클라리넷 5중주곡>이 많이 연주되고 있다. <대학 축전 서곡>, <비극적 서곡>도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성악곡을 작곡하는데 있어서도 뛰어난 수완을 보였다. 200여 곡의 가곡과, 중후하고 교묘한 화성은 다소 가까이하기 어렵지만, <알토 랩소디> 등 깊은 슬픔을 담은 명작이 많다. 그리고 마지막엔 심각한 종교적인 작품 <독일 레퀴엠>(1866-1869)을 들 수 있다. 그의 암담하고 우울한 깊이가, 여기에서는 다듬어진 아름다움 속에 정화(淨化)되고, 모든 사람을 감명시키는 숭고함에 이르고 있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세레나데, 교향곡 네 곡, 피아노 협주곡 두 곡, 바이올린 협주곡 한 곡, 바이올린과 첼로 이중 협주곡 한 곡, 관현악 서곡(대학축전 서곡, 비극적 서곡) 등 수많은 관현악 작품을 남겼다.

그의 합창 대작 독일 레퀴엠은 전례상의 장송 미사(Missa pro defunctis)의 내용이 아니라 브람스가 루터 성서에서 고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은 그의 일생에서 세 번에 걸쳐 작곡되었다. 2악장의 초기 판본은 로베르트 슈만이 자살한 지 얼마 안된 1854년에 작곡한 것으로, 나중에 피아노 협주곡 1번에 쓰였다. 레퀴엠의 대부분은 1865년 어머니가 죽은 뒤에 작곡하였다. 5악장은 1868년 공식 초연 이후에 덧붙인 것으로, 작품은 1869년에 출판하였다.

브람스의 변주곡 작품으로는 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 헨델 주제에 따른 변주곡과 푸가, 파가니니 변주곡(둘 다 피아노 독주), 그리고 하이든 주제에 따른 변주곡(피아노 연탄곡과 관현악용 두 판본)이 있다. 교향곡 4번의 마지막 악장은 형식적으로 파사칼리아이다.

그의 실내악곡으로는 현악 4중주 세 곡, 현악 5중주 두 곡, 현악 6중주 두 곡, 클라리넷 5중주, 클라리넷 3중주, 호른 3중주, 피아노 5중주, 피아노 4중주 세 곡, 피아노 3중주 네 곡(4번은 작품번호가 없다)이 있다. 그는 피아노가 반주하는 독주 소나타도 많이 썼는데, 바이올린 소나타 세 곡, 첼로 소나타 두 곡, 클라리넷 소나타 두 곡(이 두곡은 본인이 비올라 소나타로 편곡하였다)이 있다. 또 피아노 독주곡으로는 초기의 피아노 소나타와 발라드에서 나중의 소품 모음집 등 다양하다. 브람스는 가곡(Lied)에서도 중요한 작곡가로서 200곡이 넘는 가곡을 썼다. 그가 죽기 직전에 쓴 오르간 합창 전주곡(chorale preludes) Op.122는 오르간 주자의 중요한 연주곡목이기도 하다.

브람스는 음악에서 특정한 묘사나 이야기를 배제하는 절대 음악의 신봉자였으며, 오페라와 교향시를 전혀 쓰지 않았다.

브람스는 흔히 크고 복잡한 음악 구성을 보이는 진지한 음악가란 평을 받고 있지만, 브람스 생전에 유명해져 상업적으로 성공한 일부 작품 중에는 대중의 기호에 맞게 당대의 번성하던 음악 시장에 적합한 곡도 있다. 20세기 미국의 영향력 있는 비평가 B.H. 하긴은 브람스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를 거부하고 자신의 여러 녹음 음악 안내서에서 브람스는 그러한 작품에서 인기를 얻었지만, 규모가 더 크고 진지한 음악에서는 그에 미치지 못했다고 주장하였다. 브람스가 쓴 이런 류의 가벼운 곡으로는 춤곡집(헝가리 춤곡 왈츠 Op.39 피아노 연탄곡, 성악 4중창과 피아노의 "사랑의 노래 왈츠"(Liebeslieder Waltzes)), 몇몇 성악 작품("자장가Wiegenlied" Op.49 4번이 유명하다. 1868년 출판.) 등이 있다. 브람스의 '자장가'는 친구 베르타 파버의 아들이 태어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썼다.

브람스는 자신의 작품에 고전파의 형식과 질서를 담아내어 당대 여러 화려한 음악과 대조된다. 그리하여 브람스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들은 신독일 악파의 표제 음악과 대비하여 그를 전통 형식과 "순수 음악"의 대가로 보았다.

브람스는 베토벤을 숭상하였다. 그의 집에는 베토벤의 대리석 흉상이 그가 작곡하던 곳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그의 작품에서 일부 악절에서는 베토벤의 양식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브람스 교향곡 1번의 4악장 주요 주제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의 피날레 주제와 닮았으며, 브람스 본인도 그러한 유사성에 대해 아무리 멍청이(jeder Esel)라도 이 점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독일 레퀴엠은 어느 정도는 1865년 어머니의 죽음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한편으로 1854년에 작곡을 시작하다가 슈만이 자살을 시도한 뒤 포기한 어느 교향곡 초고에서 내용을 가져온 것이기도 하다. 그는 한때 "슈만의" 레퀴엠을 쓰기도 하였다. 그가 포기한 이 교향곡 작품의 첫 악장은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첫 악장으로 쓰였다.

브람스는 고전파 작곡가인 모차르트와 하이든도 좋아하였다. 그는 이들 작품의 친필 악보나 첫 판을 수집하였으며, 편집하기도 하였다. 또 브람스는 조반니 가브리엘리, 요한 아돌프 하세, 하인리히 쉬츠 그리고 특히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등 고전파 이전 작곡가의 음악도 연구하였다. 그의 친구로 탁월한 음악학자들도 있었는데, 프리드리히 크리산더와 함께 브람스는 프랑수아 쿠프랭의 작품 판본을 편집하기도 하였다. 그는 엄격한 대위법 기술에서 영감을 얻기 위해 옛 음악을 검토하였는데, 그의 작품 가운데 일부 주제는 바로크 음악에서 본뜬 것도 있다. 가령 브람스 첼로 소나타 1번의 푸가로 된 피날레는 바흐 작품 푸가의 기법을 참조하였으며, 브람스 교향곡 4번 4악장의 파사칼리아는 바흐의 칸타타 150번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젊은 브람스를 격려해준 슈만 등 초기 낭만파 음악가들도 브람스에 큰 영향을 주었다. 브람스는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과 종종 만나기도 하였다. 1862~63년 빈에 체제할 적에 브람스는 특히 프란츠 슈베르트의 음악에 관심을 기울였다. 슈베르트의 영향은 이 시기 브람스의 작품인 피아노 4중주 Op.25와 Op.26, 그리고 슈베르트 현악 5중주와 대 2중주가 암시된 피아노 5중주에서 드러난다. 혹자는 브람스의 작품에서 쇼팽과 멘델스존의 영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여기기도 하지만, 이들이 브람스에 영향을 주었다는증거는 거의 없다. (가령 브람스의 스케르초 Op.4는 쇼팽 스케르초 B-flat단조, 그리고 브람스 피아노 소나타 3번 F단조 Op.5는 멘델스존 피아노 3중주 C단조를 암시한다는 식이다.)

베토벤처럼 브람스도 자연을 좋아하여, 자주 빈 근처의 숲에서 산책을 했다고 한다. 그는 주머니에 사탕을 넣어둬 아이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성인 브람스는 종종 무뚝뚝하거나 냉소적이었고, 때론 다른 사람들을 멀리하기도 했다. 그의 제자 구스타프 예너는 "브람스가 불평쟁이 평판을 듣는데는 이유가 있다. 또 그를 매력적으로 보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는 빈의 그가 좋아하는 "붉은 고슴도치" 술집에 날마다 드나드는 것처럼 빈의 언론이 보도한 예상할만한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언론에서는 그가 등짐을 지고 걷는 모습을 그가 붉은 고슴도치 술집으로 걸어가는 캐리커처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로 남은 사람들은 그에게 충실했으며, 브람스도 이들에게 성실하고 관대하게 대했다.

브람스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매우 다른 유형의 작곡가였지만, 그와 평생지기였다. 그는 1897년 죽음을 앞두고 빈의 빈 극장에서 초연하는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 이성의 여신(Die Gottin der Vernunft)에 가려고 하기도 했다. 아마 브람스가 슈트라우스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슈트라우스의 푸른 도나우 왈츠를 쓰는데 무언가 도움을 주겠다고 쓴 글일 것이다. 브람스가 슈트라우스와 안면을 트게 되었을 때, 슈트라우스의 아내 아델레(Adele)가 브람스에게 팬이라며 사인을 부탁하자, 브람스는 "푸른 도나우" 왈츠의 음표 몇 개를 쓰고는, "슬프게도 (이건) 브람스의 작품이 아니다!"라고 썼다.

1860년대부터 그의 작품은 널리 팔려, 브람스는 재정적으로 크게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방 셋짜리 아파트에 하녀 한 명을 두며 검소한 생활을 좋아했다. 그는 친척들에게 많은 돈을 썼으며, 젊은 음악가들에게 이름을 숨기고 도와주기도 했다.

그는 극단적인 완벽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의 레메니나 바이올리니스트 페르디난트 다비트가 연주한 바 있는 바이올린 소나타 등 여러 초기의 작품들을 없애버렸으며, 1873년 첫 공식 현악4중주곡이 나오기 전에 20곡의 현악4중주곡을 없앴다고 이야기한 적도 있다. 수 년 동안 곡을 고친 끝에 그는 당초 D단조 교향곡으로 쓸 곡을 자신의 첫 피아노 협주곡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의 세밀함을 보여주는 다른 예로는 그의 교향곡 제1번인데, 이 곡은 약 1861년부터 1876년까지 거의 15년이 걸려서 쓴 곡이다. 이 곡을 몇번 연주한 뒤 브람스는 악보가 출판되기 전에 원래의 느린 악장을 없애고 새로 악장을 썼다.(원래의 느린 악장을 추측하여 복원한 판본을 로버트 파스칼이 출판한 바 있다) 브람스가 완벽주의자가 된 한 가지 이유로는 초기에 슈만이 그를 이르러 베토벤에 버금갈 음악가로 평가한 것 때문이기도 한데, 이 예언으로 브람스는 베토벤을 따라 잡을 수 있도록 매진하게 되었다. 슈만의 예언에 브람스는 거의 자신감을 얻지 못했으며, 아마 이 때문에 첫 교향곡 완성을 늦춘 것 같다. 그러나 클라라 슈만은 그 전부터 교향곡 1번이 그의 진짜 성격을 반영한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클라라는 초고에서 본 어둡고 맹렬한 1악장에 매료되었기 때문에, 활기찬 마지막 악장이 "너무 화려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클라라 슈만은 교향곡 2번을 인정하여 자신의 생각을 거두었는데,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자주 들을 수 있으며, 브람스의 밝은 작품이다. 하지만 당대의 다른 사람들은 1악장이 특히 어둡다고 생각했는데, 교향곡 2번을 19세기의 우수(melancholia) 감정과 연관지어 연구했던 라인홀트 브링크만가 출판한, 브람스가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빈첸츠 라히너(Vinzenz Lachner)에 보낸 편지에서 브람스는 자신의 성격에 우울한 면이 있으며, 1악장에서 그런 성격이 반영되었다고 쓴 바 있다.
작곡 : Piotr I. Tchaikovsky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Piotr Ilyich Tchaikovsky / Peter Ilyich Tchaikovsky / Peter Iljitsch Tschaikowsky)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는 러시아 제국의 작곡가이며, '러시아의 위대한 작곡가'이자 '러시아 클래식 음악의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계획에 없던 음악가로서의 인생은, 갖은 역경과 시련을 거쳐 이제는 불멸의 명성을 남겨 주었다.1840년 5월 7일 ~ 1893년 11월 6일)는 낭만주의 시대의 러시아 제국의 작곡가, 지휘자이다. 백조의 호수와 호두까기 인형, 비창 교향곡의 작곡자이다. 그의 작품은 선율적 영감과...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는 러시아 제국의 작곡가이며, '러시아의 위대한 작곡가'이자 '러시아 클래식 음악의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계획에 없던 음악가로서의 인생은, 갖은 역경과 시련을 거쳐 이제는 불멸의 명성을 남겨 주었다.1840년 5월 7일 ~ 1893년 11월 6일)는 낭만주의 시대의 러시아 제국의 작곡가, 지휘자이다. 백조의 호수와 호두까기 인형, 비창 교향곡의 작곡자이다.

그의 작품은 선율적 영감과 관현악법에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1860년대에는 러시아의 민족주의 음악파인 러시아 5인조의 지도자 밀리 발라키레프와 교제하여 국민악파 음악의 영향을 받았으나 후반에는 낭만주의 경향의 곡을 작곡하였으며 베토벤, 슈베르트의 전통을 러시아로 확산시켰다. 말년에는 유럽 순회 공연을 다녀 성공하기도 했다.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은 고전 발레 음악 중 최고의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작곡 : Sergei Prokofiev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Sergei Sergeevich Prokofiev)
1891년 러시아에서 태어났으며, 교향곡과 협주곡, 영화 음악, 오페라, 발레, 표제 음악 등 폭넓은 영역의 작품을 남겼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음악과 친숙했던 그는 5세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다. 1904년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음악 이론뿐만 아니라 피아노, 지휘 등을 배웠으며,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1918년 미국에 망명하여 미국과 유럽에서 활발한 연주활동을 하면서 피아니스트로서도 높은 평가를... 1891년 러시아에서 태어났으며, 교향곡과 협주곡, 영화 음악, 오페라, 발레, 표제 음악 등 폭넓은 영역의 작품을 남겼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음악과 친숙했던 그는 5세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다. 1904년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음악 이론뿐만 아니라 피아노, 지휘 등을 배웠으며,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1918년 미국에 망명하여 미국과 유럽에서 활발한 연주활동을 하면서 피아니스트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 후 여러 차례 귀국 요청을 받은 그는 1934년 조국으로 돌아가 당국의 비판을 받으면서도 작곡을 계속해 나갔다. 1936년 당국의 문화 방침에 의하여 음악 동화『피터와 늑대』를 발표해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1948년 쇼스타코비치, 하차투리안 등과 함께 당국으로부터 서구를 따르는 형식주의자라는 비판을 받는 등 창작에 제약을 받기도 했다. 이후 병으로 인하여 고생하다가 1953년 3월 스탈린과 같은 날 모스크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주요 작품으로 오페라 <전쟁과 평화>, <바이올린 소나타 제2번>, <교향곡 제5번> 등이 있다.
연주 : Andras Schiff (안드라스 쉬프)
1953년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 부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다섯 살에 처음 피아노를 시작했고 프란츠 리스트 아카데미에서 팔 카도사, 죄르지 쿠르탁, 페렌츠 라도스 등에게서 배웠다. 쳄발리스트 조지 말콤 또한 쉬프에게 많은 가르침과 영향을 주었다. 바흐 해석의 거장으로 명망 높은 쉬프는 이외에도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버르토크 등의 작품 해석과 연주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특히 ... 1953년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 부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다섯 살에 처음 피아노를 시작했고 프란츠 리스트 아카데미에서 팔 카도사, 죄르지 쿠르탁, 페렌츠 라도스 등에게서 배웠다. 쳄발리스트 조지 말콤 또한 쉬프에게 많은 가르침과 영향을 주었다. 바흐 해석의 거장으로 명망 높은 쉬프는 이외에도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버르토크 등의 작품 해석과 연주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특히 2004년 이후로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전곡을 연대기순으로 공연하는 프로젝트를 여러 도시에서 진행했고, 2007년에는 마르틴 마이어와의 대담집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들과 그 해석』이 본 베토벤하우스에서 출간되었다. 자신의 실내악 오케스트라인 카펠라 안드레아 바르카를 1999년에 창단, 솔리스트는 물론 지휘자로도 활약하고 있다. 그 밖에도 오스트리아의 몬트제 페스티벌(1989~1998), 스위스의 이팅엔 페스티벌(1995~2013) 등을 이끌었고 1998년 이후로 이탈리아 비첸차 테아트로 올림피코에서 팔라디오에 대한 오마주 연주회를 열고 있다.
지휘 : Dmitrij Kitajenko (드미트리 키타옌코,Dmitri Georgievich Kitayenko / Dmitri Kitajenko / Dmitri Kitaenko )
오케스트라 : Tchaikovsky Symphony Orchestra (차이코프스키 심포니 오케스트라,Moscow Radio Symphony Orchestra, USSR State Radio and Television Symphony Orchestra Tschaikowsky Symphony )
1930년에 소련 국영방송 산하 관현악단으로 창단되었으며, 초대 음악 감독으로 알렉산드르 오를로프가 임명되어 활동했다. 1936년에 이 악단을 모체로 소련 국립 교향악단이 창단되면서 동시에 조직 개편이 단행되었고, 이듬해 니콜라이 골로바노프가 음악 감독에 취임했다. 골로바노프는 1953년에 타계할 때까지 재임하면서 사실상 재창단된 악단의 연주력과 레퍼토리를 집중적으로 정비하고 확장했고, 독소전쟁 기간에도 악단의 ... 1930년에 소련 국영방송 산하 관현악단으로 창단되었으며, 초대 음악 감독으로 알렉산드르 오를로프가 임명되어 활동했다. 1936년에 이 악단을 모체로 소련 국립 교향악단이 창단되면서 동시에 조직 개편이 단행되었고, 이듬해 니콜라이 골로바노프가 음악 감독에 취임했다. 골로바노프는 1953년에 타계할 때까지 재임하면서 사실상 재창단된 악단의 연주력과 레퍼토리를 집중적으로 정비하고 확장했고, 독소전쟁 기간에도 악단의 현상 유지에 진력했다.

골로바노프의 후임으로는 알렉산드르 가우크가 임명되었고, 1961년까지 재임했다. 가우크의 후임으로는 30세의 젊은 지휘자였던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가 음악 감독으로 전격 발탁되었고, 로제스트벤스키는 1974년까지 13년간 활동하면서 러시아/소련 음악 외에도 서방 국가들의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레퍼토리에 추가시키고 적극적인 녹음 활동을 하는 등 악단의 체질 개선과 국제화에 주력했다.

로제스트벤스키의 후임으로는 당시 32세의 젊은 지휘자였던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가 임명되었으며, 현재까지 약 30여 년 동안 장기 재임하고 있다. 이외에도 데니스 로토예프와 알렉세이 샤츠키가 각각 2000년과 2005년부터 부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1993년 러시아 문화성에 의해 현재의 명칭으로 개칭되었다.


-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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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하고 정확한 포장을 위해 CCTV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 포장안내1
  • 포장안내2
  • 포장안내3
  • 포장안내4
포스터 안내
  •  구매하신 상품에 포스터 사은품이 있는 경우, 포스터는 상품 수량과 동일한 수량이 제공됩니다.
  •  포스터는 기본적으로 지관통에 포장되며, 2장 이상의 포스터도 1개의 지관통에 담겨 발송됩니다.
  •  포스터 수량이 많은 경우, 상황에 따라 지관통 추가 및 별도 박스에 포장되어 발송될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반품/교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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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직수입 음반/영상물/기프트 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 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30%를 부과할 수 있음

    단, 당일 00시~13시 사이의 주문은 취소 수수료 면제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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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문 제작되는 상품의 경우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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