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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LP시절 히트팝 모음집 (Silence Is Golden)

밥 딜런, 사이먼 앤 가펑클, 프로콜 할럼, 레너도 코헨, 도노반 등

[ 3CD / 디지팩 ]
The Animals, Simon & Garfunkel, The Moody Blues, Bob Dylan, Roy Orbison 노래 외 49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SonyMusic | 2016년 11월 21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186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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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LP시절 히트팝 모음집 (Silence Is Golden)

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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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매일 2016년 1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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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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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소개 (54명)

노래 : The Animals (애니멀스,Eric Burdon And The Animals)
애니멀스(Animals)는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 야드버즈(Yardbirds)와 함께 영국에서 건너온 가장 영향력 있는 화이트 블루스 밴드였다. 이들은 비틀즈(Beatles), 롤링 스톤스, 더 후(The Who), 킹크스(Kinks), 허맨스 허밋츠(Herman’s Hermits) 등과 손을 맞잡고 브리티시 인베이션의 물꼬를 텄고, 블루스의 원산지인 미 본토에 블루스 붐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애니멀스(Animals)는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 야드버즈(Yardbirds)와 함께 영국에서 건너온 가장 영향력 있는 화이트 블루스 밴드였다. 이들은 비틀즈(Beatles), 롤링 스톤스, 더 후(The Who), 킹크스(Kinks), 허맨스 허밋츠(Herman’s Hermits) 등과 손을 맞잡고 브리티시 인베이션의 물꼬를 텄고, 블루스의 원산지인 미 본토에 블루스 붐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밥 딜런(Bob Dylan)으로 대표되는 포크록의 탄생에 동기를 부여함으로서 1960년대 팝 음악계를 풍성하게 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한 건반 주자 알란 프라이스(Alan Price)가 흑인 음색을 소유한 에릭 버든(Eric Burdon)과 존 스틸(John Steel/드럼), 힐튼 발렌타인(Hilton Valentine/기타), 브라이언 채스 챈들러(Bryan Chas Chandler/베이스)를 만나 1964년부터 애니멀스의 웅대한 역사를 써 내려갔다. 비참한 생활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국내에서 오래 동안 금지 곡의 사슬에 묶였던 ‘House of the rising sun’은 비틀즈의 해로 기억되던 1964년 5주만에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밥 딜런이 자신의 데뷔 앨범에 수록했던 이 미국의 구전 민요를 애니멀스는 전자 기타가 울부짖는 블루스 넘버로 완벽하게 재 탄생시켰다. 이 음악을 듣고 음악 쇼크를 받은 밥 딜런은 통기타 대신 일렉트릭 기타를 부여잡고 포크록을 탄생시켰다. 원래 재즈 보컬리스트 니나 시몬(Nina Simone)이 취입한 ‘Don’t let me be misunderstood(39위)’는 애니멀스의 록 버전으로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특히 국내에서는 1970년대 후반 라틴계 디스코 밴드 산타 에스메랄다(Santa Esmeralda)의 댄스 버전(15위)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당시 디스코 클럽의 플로어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리고 이들의 노래들 중에서 가장 정통 록적인 ‘It’s my life(23위)’는 록의 고전으로 대우받고 있다. 이 외에도 히트 차트에 등록된 ‘I’m crying(19위)’와 ‘Bring it on home to me(32위)’, 싱글로 히트하진 않았지만 록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We’ve gotta get out of this place’, 시카고 블루스의 전설인 지미 리드(Jimmy Reed)의 곡을 리매이크 한 ‘Bright lights, Big city’, 그리고 같은 백인 블루스 싱어들과의 비교를 거부할 정도로 에릭 버든의 완벽한 가창 실력을 입증한 ‘For Miss Caulker’까지 영국에서 온 5명의 블루스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하지만 에릭이 자신의 목소리를 앞세운 보컬 카리스마로 알란과의 알력이 스멀스멀 피어나자 알란 프라이스는 애니멀스를 탈퇴해 나름의 활동을 시작했고, 이 쟁탈전의 승리로 밴드의 주도권을 쥔 에릭 버든은 공석으로 비어 있는 자리에 데이브 로베리(Dave Rowberry)를 앉히고 그룹의 새로운 설계도를 작성했다. 그러나 에릭은 알란의 반쪽이었고, 알란도 에릭의 절반이었다. 그 둘은 헤어지고 나서야 그들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절대적인지를 실감하게 되면서 1976년에 원년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지만 만족스런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음악의 최소주의 미학을 구현한 3인조 뉴웨이브 밴드 폴리스(Police - 스팅이 있었던)의 기타리스트 앤디 서머스(Andy Summers)는 1960년대 후반 에릭과의 친분으로 애니멀스에 몸담기도 했었다. 1970년대 들어서 에릭은 이 위대한 밴드를 접고 두 차례나 내한 공연을 가진 덴마크 출신의 하모니카 연주자 리 오스카(Lee Oskar)와 여러 흑인 뮤지션들을 규합해 소울 그룹 워(War)를 조직해 치열한 순위 경쟁에 참전해 ‘Why can’t we be friends?(6위)’를 랭크 시켰다. 이 트랙은 1997년 스카 펑크 밴드 스매시 마우스(Smash Mouth)가 재해석해 자신들의 데뷔 음반에 수록하기도 했다. 1976년과 1983년에 다시금 모여 예전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했지만 역전된 음악 환경은 ‘새로운 애니멀스’에게 호의적이지 못했고 다시 이들은 각자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만든 옛 영예의 그림자 속에서 현재의 숨결을 이어가는 것이다.
노래 : Simon & Garfunkel (사이먼 앤 가펑클)
멤버 : 폴 사이먼(Paul Simon, 보컬), 아트 가펑클(Art Garfunkel, 기타, 보컬) 멤버 : 폴 사이먼(Paul Simon, 보컬), 아트 가펑클(Art Garfunkel, 기타, 보컬)
노래 : Bob Dylan (밥 딜런 ,Robert Allen Zimmerman)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eatles) 그리고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와 함께 최정상의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이들 ‘전설의 빅 4’ 가운데에서도 딜런이 남긴 궤적은 차별화 아닌 특화(特化)되어 역사를 장식한다.

얼핏 그의 위상은 ‘실적주의’로 따질 때 매우 허약해 보인다. 엘비스, 비틀스, 롤링 스톤즈는 그 화려한 전설에 걸맞게 무수한 히트곡을 쏟아냈다. 넘버 원 히트곡만 치더라도 엘비스는 18곡(통산 2위), 비틀스는 20곡(1위), 스톤즈는 8곡(11위)이나 된다. 하지만 딜런은 그 흔한 차트 1위곡 하나가 없다. ‘Like a rolling stone’과 ‘Rainy day woman #12 & 35’ 등 두 곡이 2위에 오른 것이 고작이다. 차트 톱 10을 기록한 곡을 다 합쳐봐야 4곡에 불과할 뿐이다. 그에게 대중성이란 어휘는 어울리지 않는다. 상업적이란 말과는 아예 인연이 없다. 이렇듯 실적이 미미한 데도 록의 역사는 마치 신주 모시듯 그를 전설적 존재로 떠받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는 차트 정복 외에도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비록 그 가지는 다를지언정 ‘록의 스타일 확립’ 이라는 몸체는 유사하다는 것이다.

비틀스는 록의 예술적 지반을 확대했고, 스톤즈는 록에 헌신하며 형식미를 완성했고, 엘비스는 록의 정체성을 부여했다고들 한다. 분명히 딜런도 몸체에 자리한다. 깃털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타(他) 3인의 몸체가 외양이라면 그는 ‘내면’ 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노랫말이요, 메시지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음악은 사운드와 형식만으로 이미 메시지가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로큰롤이 폭발하여 확산되던 시점인 1950년대, 즉 엘비스가 활약하던 당시에 로큰롤은 메시지가 없었다. 1960년대 들어서 비틀스가 미국을 급습해 록의 르네상스를 일궈내고 있던 때까지도 록은 의미있는 가사와 격리된 상태였다. 그래서 의식계층으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그 때 밥 딜런이 있었다. 비틀스는 누구보다 먼저 딜런의 위력을 절감했다. 그의 포크 사운드와 메시지를 귀담아 듣고 그것을 자신들의 음악에 적극 수용한다. 1965년말 < Rubber Soul > 앨범의 수록곡인 ‘In my life’, ‘Girl’, ‘Norwegian wood’ 등에서 ‘톤 다운’ 을 드러내며 메시지를 잠복시킨 것은 전적으로 딜런의 영향 때문이었다.

밥 딜런은 실로 대중 음악의 지성사(知性史)를 이룬다. 타임(Time)지의 제이 칵스는 1989년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존 업다이크의 소설과 밥 딜런의 앨범 가운데 어느 것이 미국인들의 삶에 보다 자극을 주었는가? 존 업다이크 쪽에 표를 던진 사람이라면 이 기사를 여기까지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가사는 그러나 때론 메시지의 파악이 어려운 ‘난해한 현대시’ 와 같다. 밑줄 긋고 열심히 분석해도 도대체 명쾌하지가 않다. 1960년대 중반 < Another side of Bob Dylan >, < Bring it all black home >, < Highway 61 revisited >가 연속 발표되었을 때, 미국 각 대학의 영문과에 ‘밥 딜런 시분석’ 강좌 개설이 유행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팝팬들에게 딜런이 상대적으로 소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에게도 이 정도인데 영어의 벽에 막혀 있는 우리가 어찌 그를 쉽게 수용할 수 있었겠는가. 때문인지 음반마저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초기곡으로 알려진 것은 그나마 메시지가 확연한 ‘Blowin’ in the wind’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1970년대 중반의 금지곡 태풍으로 반전(反戰) 노래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방송과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 외 우리 팝 인구에 회자된 노래로 ‘One more cup of coffee’나 ‘Knockin’ on heaven’s door’가 있다. 그러나 그의 대표곡 반열에도 오르지 못하는 ‘One more cup of coffee’가 통한 것은 단지 낭만적 제목과 함께 친숙한 선율 때문이었을 뿐, 딜런의 음악 세계에 대한 천착의 결과물은 전혀 아니었다. ‘Knockin’ on heaven’s door’ 인기의 영예도 실은 건스 앤 로지스가 더 누렸다.

극소수의 곡을 제외하고 밥 딜런은 우리에게 인기가 없었다.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에 비한다면 엄청난 ‘부당 대우’였다. 언어 장벽과 무관한 음악 스타일 측면에서도 우리의 ‘홀대’ 는 마찬가지였다. 멜로디가 그럴싸한 곡이 있더라도 풍기는 내음이 지극히 ‘미국적’ 이었기에 우리의 청취 감성은 딜런을 꺼리곤 했다. 그의 음악 세계라 할 포크, 컨트리, 블루스는 미국 전통과 긴밀한 함수 관계를 지닌다. 선율과 사운드의 영국적인 맛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그의 음악에 잠기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사이에 우린 어느덧 딜런과 크게 멀어져버렸다. 록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꼭 딜런에서 막힌다. 신세대 가운데 더러는 우리의 팝 수용 문화에서 딜런 공백이 가져온 취약성을 맹렬히 질타하기도 한다. 우리 기준에서의 ‘팝 음악 여과’는 바람직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의역은 정확한 직역이 기초돼야 올바르다. 미국의 해석을 전제한 뒤라야 우리식 필터링의 의의가 배가된다.

그 직역의 첫 번째 대상이 바로 밥 딜런이다. 밥 딜런이 미국의 현대 음악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그의 음악몸체가 곧 시대와 세대의 흐름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딜런의 음악이 변화하는 과정과 그것을 있게 한 배경, 또한 그것을 주도해간 그의 자세는 ‘음악외적 환경’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먼저 포크 록(Folk-Rock)이다. 그가 1960년대 초반 저항적인 모던 포크로 베이비 붐 세대를 견인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통기타만으로 연주되는 단순한 구조이지만 그것의 포획력은 비틀스가 사정권에 들어올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비틀스가 베이비 붐 세대를 발현시켰다면 그는 그들의 의식화를 유도했다. 그러나 딜런은 케네디의 피살에 자극받으면서 스스로 ‘위기감’ 을 불어넣는다. 이미 비틀스가 세대의 청취 볼륨을 증폭시킨 마당에 포크의 음량 가지고 과연 세대를 관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71년 그는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그들(비틀스)은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코드는 정말 도에 지나친 것이었지만 하모니가 그것을 타당하게끔 했다. 그러나 맹세하건데 난 정말 그들에게 빠졌다. 모두들 그들이 어린 10대를 위한 광대이며 곧 사라질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내겐 명확했다. 그들이 지속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난 그들이 음악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머리 속에는 비틀스가 전부였다.” 그는 일렉트릭 기타를 잡아야 했다. 그것이 포크 록이었다. 포크의 순정파들로부터 배신자라는 질타는 불 보듯 뻔했다. 그가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알 쿠퍼(Al Kooper), 마이크 블룸필드(Mike Boomfield)가 참여한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Butterfield Blues Band)와 함께 전기 기타 연주를 했을 때 관중들은 “이건 포크 공연이야 나가!”라고 야유하며 돌과 계란 세례를 퍼부었다. 무대에서 내쫓긴 그는 통기타를 들고 되돌아왔지만 의미심장한 ‘It’s all over now’, ‘Baby blue’를 부르며 포크 관객들에게 아듀를 고했다. 껄끄러운 통과의례를 거친 뒤 밥 딜런의 포크 록은 ’Like a rolling stone’의 빅히트와 함께 만개했다. 이젠 막을 자도 없어졌다. 포크 록은 당시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존 레논과 밥 딜런을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 그룹 버즈(Byrds)는 ‘Mr. Tambourine man’으로 인기 가도를 질주했다. 그러나 그 곡은 딜런의 작품이었다.

버즈 뿐만 아니라 당시 포크 록계열 뮤지션치고 딜런의 곡을 손대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단숨에 포크 록은 1960년대 록의 주류로 부상했다. 1960년대 중.후반을 강타한 싸이키델릭 록(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도 실상 포크 록에 영향받은 흐름이었다. 그럼 어째서 포크 록은 1960년대 청춘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의식을 대변할 수 있었을까? 비틀스가 딜런에게 배우고, 딜런이 비틀스로부터 영감을 얻은 ‘포크와 록의 결합’ 은 시대성 견인을 가능케 한 절묘한 무브먼트였다. 록은 생태적으로 거리의 청춘에 의해 확립된 ‘하위문화적 표현’이다. 따라서 하이 클래스나 인텔리겐차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다. 또한 포크는 저항성을 견지하는 민중 음악이지만 음악의 주체나 주소비자층은 학생과 지식인 세력이다. 성질상 엇비슷하면서도 걸어온 길이나 ‘계급성’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밥 딜런이 포크 오리지널로부터 급격히 퇴각하여 록으로 전향한 것은 단지 추세의 편승이 아닌 완전함을 향한 ‘하층문화의 긴급 수혈’로 보인다. 이를테면 ‘위’의 고매한 문제의식과 ‘아래’의 근원적 반항을 한고리로 엮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항 영역의 지반 확대와 수요자의 확충을 기할 가능성은 올라가게 된다.

지식인만이 아닌 1960년대 젊은이들의 ‘계층포괄적 무브먼트’ 는 포크 록과 이 점에 있어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1960년대 중후반을 물들인 ‘히피보헤미안’ 물결도 딜런과 떼어낼 수 없는 흐름. 1960년대 록 역사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부분이다. ‘Like a rolling stone’은 포크 지식인의 소리라기보다 보헤미안적 정서의 노출로 파악해야 한다. 당시 딜런은 가치의 상대성을 신뢰하고 제도에 흡수되기룰 거부하는 이른바 비트(Beat) 사상에 빠져 있었다. 그가 진보적 시인인 알렌 긴스버그(Allen Ginsberg)와 교류하며 ‘개인 혁명’에 골똘해 있을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다. 비트는 이후 히피의 융기에 주요 인자가 되는데, 1960년대 중반 딜런의 음악을 가로지르는 것이 바로 이 ‘히피 보헤미안 정서’라 할 수 있다. 스스로 록 세계로 옮아가고 방랑적 지향을 설파한 것은 기존과 기성의 틀 깨기에 목말라 있던 베이비 붐 세대들에게 영도자가 제공한 ‘산교육’과 다름없었다. 따라서 밥 딜런은 그에게 등을 돌린 포크 근본주의자들의 수보다 휠씬 더 많은 록팬을 거뜬히 확보하게 된다. 음악적으로 딜런의 창작성이 이 때만큼 가공의 위력을 떨친 적도 없다. < Highway 61 Revisited >와 < Blonde On Blonde > 앨범은 포크의 엄숙주의에서 해방되어 록과의 결합으로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포획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음악은 ‘남을 위해’ 이데올로기에 봉사한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즐거움이 가져온 산물이기도 했다. 그가 포크의 프로테스트로부터 이탈한 것은 바로 ‘자유’와 등식화되는 ‘예술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는 저항성 대신 예술성을 얻었다. 개인적 경사도 겹쳤다. 사적으로 사라 로운즈와의 결혼은 그의 창작력 한층 북돋아주었으며 그 충만한 행복감은 그대로 < Blonde On Blonde > 앨범에 나타났다. 이 앨범의 탁월한 질감은 상당부분 사라와의 결혼이 낳은 것이라는 게 평자들의 일치된 시각이다. 나중 사라와의 파경 또한 그에게 또 하나의 명반 < Blood On The Tracks >를 안겨준다. 히피의 낭만적인 집단주의와 곧바로 이어진 이피(Yippie)의 전투성이 극에 달할 무렵 그가 뉴욕의 외곽 빅 핑크(Big Pink) 지하실에서 한가로이 더 밴드(The Band)의 멤버들과 자유 세션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가 가져온 행보이기도 했지만 그가 의도적으로 은둔을 택한 것은 분명했다. 세상이 소란함으로 가득할 때 그는 정반대로 정적을 취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물꼬를 터준 미국 사회의 격랑이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을 것으로 예측했는지도 모른다. 세대의 공동체 지향은 지극히 ‘비이성적’으로 비춰졌을 테고 오히려 그는 그럴수록 자신에게 돌아와 근본을 탐구하는 것이 올바른 행위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한 심저(心底)가 < John wesley Harding >과 < Nashiville Skyline >의 골간에 자리한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뜻밖에’ 재래식 컨트리 음악을 선보였다. 두 앨범은 모두 내쉬빌에서 녹음되었고 < Nashiville Skyline >의 경우 딜런은 컨트리 음악의 거성 자니 캐시(Johnny Cash)와 듀오로 ‘Girl from the north country’에서 다정히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이 앨범에서 톱 10 히트곡 ‘Lay lady lay’가 나왔다. 이 곡을 비롯해 대부분의 수록곡에서 딜런의 보컬은 예의 날카로움이 거세된 채 한결 부드러워졌고 가사도 접근이 비교적 용이해지는 등 멜로딕한 무드가 전체를 지배했다. 다시 세상은 소용돌이에서 호수의 조용함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1970년대 초반의 분위기였다. 딜런이 씨앗을 뿌린 ‘컨트리 록’ 은 1970년대 내내 주요 장르 중 하나로 맹위를 떨쳤다.

딜런은 언제나 흐름의 주역이었다. 나중 음반화된 더 밴드와의 세션 앨범 < Basement Tapes >가 록 역사에서 ‘특혜’를 받는 것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970년대 들어서 그는 ‘대중적’ 관점에서 뿌리에 대한 천착에 박차를 가했다. 예전에 그는 ‘좋은 사람만 따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이 많이 따를수록 좋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그가 1970년 < Self Portrait > 앨범에서 ‘Moon river’를 포함한 팝 스탠다드 넘버들을 노래한 것은 이러한 사고와 맥락이 닿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눈을 흘겼다. 레코드 월드(Record World)지는 이 앨범을 두고 “혁명은 끝났다. 밥 딜런이 ‘미스터 존스’에게 ‘Blue moon’을 불러주고 있다”며 혹평했다.(미스터 존스는 딜런이 < Highway 61 Revisited >의 ‘Ballad of thin man’에서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 존스 씨?”라고 했던 가공의 인물로 ‘제도권 인사’를 상징한다.) 빌보드 차트3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처럼 평단의 이해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 Self Portrait >앨범을 상업적 표현으로 볼 수는 없다. 비판의 칼을 휘두르는 비평가들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근본을 탐구하는 방법론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딜런이 1970년대 후반부에 기독교에 귀의한 것도 비슷한 문맥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사실 신(神)에의 의지가 엿보인 < Show Train Coming >, < Saved >, < Shot Of Love > 등 3장의 종교풍 음반은 ‘사고의 깊이’가 두드러졌지만 ‘변신’이라는 부정적 의미에 가치가 함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1970년대 딜런을 ‘혼미의 거듭’으로 규정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그것을 뒤집어보면 그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에 충실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아티스트의 본령이다. 밥 딜런은 언제나 음악을 통해 세상과 삶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고자 했다.

1980년대의 밥 딜런은 1970년대의 습기를 벗고 ‘열기’를 회복한다. 정치적 시각도 이입한 < Infidels >, < Empire Burlesque > 그리고 1989년에 나온 < Oh Mercy >는 이전의 앨범들과 명백한 분리선을 긋는다. 날카로운 보컬은 오히려 1960년대의 모습에 더 가깝다. 그는 1980년대 중반 라이브 에이드(Live Aid),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아티스트의 모임(Sun City) 등 일련의 자선행사에 얼굴을 내밀어 저항 전선에 복귀했다. 한 무대에서 그는 U2의 보노(Bono)와 함께 ‘Blowin’ in the wind’를 부르기도 했다. 딜런의 1980년대 앨범들에는 당시의 보수적이고 위압적 풍토를 거부하는 저항성이 숨쉰다. 그는 시대의 주류 한복판에는 없었지만 ‘시대의 공기’와 늘 함께 호흡했다. 그 공기를 어떤 때는 앞장 서 조성하고 어떤 때는 그것을 피해갔다. 밥 딜런의 한 면만을 바라보게 되면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그가 서 있던 ‘양쪽’ 자리를 다 관찰해야만 그 ‘드라마틱한 록 역사의 굴곡’ 을 읽을 수 있다. 록의 역사는 실로 위와 아래, 진보와 보수, 주류와 비주류, 기존과 대안이 끊임없이 부침을 되풀이 해왔다. 밥 딜런이 밟아온 길은 그것의 축소판이었다. 그러나 어떤 시점에서라도 - 가령 프로테스트의 깃발을 울렸을 때나, 대중성에 기웃거렸을 때나 - 딜런이 주변의 압박에 수동적으로 임한 적은 없다. 남이 시켜서 일렉트릭의 세계로 떠밀려 간 것이 아니었고, 의도적으로 신비를 축적하기 위해 은둔했던 것도 아니다. 그의 터전은 언제나 자신의 의지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비평가들이 밥 딜런을 전설로 숭앙하는 것은 그가 대중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문 ‘음악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음악인의 최고 영예인 ‘아티스트’란 소리를 들어 마땅했다. 그는 록에 언어를 불어넣었다. 포크와 컨트리를 록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시대와 맞서기도 했고 자신의 예술성에 천착하기도 했다. 그러한 업적과 성과의 편린들이 모여 그의 ‘광활한 아티스트의 세계를 축조하고 있다. 밥 딜런은 역사의 수혜와 위협 속에서 ‘인간’을 살려냈다. 음악인으로서 인간의 몸체는 다름 아닌 자유일 것이다. 밥 딜런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노래 : Roy Orbison (로이 오비슨 )
로이 오비슨(Roy "Kelton" Orbison)은 1936년 텍사스주 버논(Vernon)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기타를 연주했던 그는 10대에 ’윙크 웨스터너스(Wink Westerners)’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인기를 얻는 등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그룹명을 텐 킹스(The Ten Kings)로 바꾸고 버디 할리(Buddy Holly)의 프로듀서였던 노만 페티(Norman Pe... 로이 오비슨(Roy "Kelton" Orbison)은 1936년 텍사스주 버논(Vernon)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기타를 연주했던 그는 10대에 ’윙크 웨스터너스(Wink Westerners)’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인기를 얻는 등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그룹명을 텐 킹스(The Ten Kings)로 바꾸고 버디 할리(Buddy Holly)의 프로듀서였던 노만 페티(Norman Petty)와 함께 작업하며 첫 히트곡인 ‘Ooby dooby’를 발표한다. 하지만 1950년대 그의 주요 관심사는 작곡에 있었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인정받고 싶었던 그는 자작곡인 로크롤 넘버 ‘Only the lonely’를 당시 최고의 자리에 올라있었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와 에버리 브러더스(Everly Brothers)에게 권했지만 거절을 당하자 “내가 직접 노래하겠다”며 직접 이 곡을 녹음한다. 우수 가득하면서도 고음에서 불안한 듯한 독특한 목소리와 발군의 곡 제조로 록 역사에 길이 남게되는 로이 오비슨의 본격 가수인생은 이렇게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다. 흥겨운 후렴 구를 가지고 있었던 ’Only the lonely’는 스피드와 파워가 특징이던 당시의 로큰롤과 분리 선을 그으며 인기를 누린다. 이 곡은 1960년 전미차트 2위에 올랐고 영국 차트에선 정상을 차지했다. 이후 그의 인기는 눈부셨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훌륭한 멜로디와 서정적인 보컬은 여타 음악과는 완전 차별되면서, 1960년대 중반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히트행진을 이어간다. 1961년 ’Running scared’가 미국차트 정상을 밟았고 1964년에는 ‘Pretty woman’가 비틀매니아에 굴하지 않고 다시 차트정상에 올랐다. 1960년 ‘Blue angel’을 비롯해 1961년 ’Crying(2위)’, 1962년 ‘Dream baby’, 1963년 ‘In dreams’, ‘Mean woman blues’, 1964년 ‘It’s over(9위, 영국1위)’ 등은 모두 톱10에 진입했다. 하지만 그의 인기는 음악 외적인 면 때문에 제동이 걸려야 했다. 1966년 그의 아내 클라우데트(Claudette)가 자신의 오토바이 뒤에서 떨어져 죽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맞았고, 그 슬픔이 잊혀질 새도 없이 이듬해에는 집에 불이 나 두 아들이 화재로 죽게된다. 이 사건들이 일어난 이후 그에게는 ‘비운의 스타’라는 호칭이 계속해서 따라다니게 되다. 큰 슬픔을 여러 차례 겪은 후 활동은 암흑기에 접어들어 싱글 하나 제대로 히트하지 못했고, 라이브 공연도 가지지 않았다. 1960년대 초반을 풍미한 가수로 사라져가던 그였지만 전성기가 오로지 1960년대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우수한 곡들은 후대의 많은 아티스트들에 의해 다시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976년 그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영국 차트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1977년 린다 론스태드(Linda Ronstadt)가 ‘Blue bayou’를 리메이크해 오리지널 뮤지션으로 재조명되는 순간을 맞았다. 결국 1980년대 시작과 함께 재기한다. 그 해 늦은 봄 에밀루 해리스(Emmylou Harris)와 함께 영화 주제곡인 ‘That lovin’ you feelin’ again(55위)’를 부르며 가수활동을 재개하게 됐고 옛 명성에 걸맞게 해리스와 함께 그래미상을 거머쥔다. 오랜 공백을 깨고 재기한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힘을 실어주는데, 1980년 수잔 잭스(Susan Jacks)가 그의 곡 ‘Evergreen’을 리메이크했으며, 1981년 돈 맥클린(Don McLean)이 그의 곡 ’Crying’(88년 K.D. Lang과 듀엣으로 다시 불러 영화 ’하이딩 아웃(Hiding out)’에 삽입되었다.)을 불러 빅히트를 기록했다. 1985년에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영화 < 블루 벨벳 >(Blue velvet)에 ‘In dreams’를 삽입한 것도 로이 오비슨 재림(再臨)을 도왔다.(’In dreams’는 국내에서도 영화 음악으로 사랑 받으며 친숙한 곡으로 자리해있다.) 후배들의 협조로 그는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추대되는 영광을 누리기에 이른다. 자신감을 회복한 그는 거물들의 프로젝트 그룹인 트래블링 윌베리스(Traveling Wilburys)에 가담하게 된다. 이 그룹의 멤버는 한 명만으로도 영광스러울만한 이름인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밥 딜런(Bob Dylan), 톰 페티(Tom Petty) 그리고 이엘오(ELO)의 리더 제프 린(Jeff Lynne)으로 짜여졌고 데뷔 앨범 < Mystery Girl >에는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 유투(U2)가 참여했다. 하지만 ‘비운의 스타’ 로이 오비슨은 자신의 별명대로(?) 이 역작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988년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 Mystery Girl >은 1989년 그의 사후에 발매되었고, 비운의 스토리와 앨범 참여 면면들의 명성이 겹치면서 그의 앨범 중 가장 성공한 앨범이 된다. 이 가운데 싱글 ‘You got it’은 차트9위에 올라 정확히 25년 만에 톱10을 기록했다. 하지만 사후에도 그의 노래는 영화 삽입과 후배 아티스트들의 리메이크를 통해 부활을 계속했다. 1991년 넘버원 히트곡인 ’Pretty woman’이 동명영화에 삽입되어 오비슨 열풍을 야기했고, 같은 해 그와 함께 노래했던 동료, 후배 가수들이 그와 함께 불렀던 곡들을 모아 < A Black And White Night Live >라는 앨범을 발표했으며, 이 앨범으로 사후에 그래미상 최우수 남성 보컬상을 수상하는 이색적인 사건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영화 보이즈 온더 사이드(Boys on the Side)에 ‘You got it’이 보니 레이트(Bonnie Raitt)에 의해 리메이크 되어 히트했다. 로이 오비슨은 최고의 전성기였던 1950년대 엘비스라는 거대한 존재로 인해 정상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고, 1960년대 역시 비틀즈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날개를 펴야 할 1970년대는 자신 앞에 닥친 비극으로 좌절해야 했으며, 후배들의 도움으로 화려하게 일어선 1980년대는 어이없는 죽음으로 사라져야 했다. 비운으로 점철된 음악역정이었으나 팝 역사는 그 비운을 환대로 바꿔 기록했다. 끊임없는 역사적 재조명은 시공을 막론하고 그의 노래가 애청되는 길을 터 주었다.
< Tapestry >로 1970년대 단일 뮤지션 최다 판매 앨범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캐롤 킹(Carole King)은 팝 역사를 대표하는 최고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이다. 캐롤 킹(본명: Carole Klein)은 1942년 뉴욕의 브룩클린에서 태어났다. 4살 때 피아노를 치며 음악을 접하기 시작한 그녀는 유년시절부터 음악에 남다른 관심과 재능을 보여 고등학교 시절 ’코사인스(Co-Sines)’라는 그룹을 조직하여... < Tapestry >로 1970년대 단일 뮤지션 최다 판매 앨범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캐롤 킹(Carole King)은 팝 역사를 대표하는 최고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이다. 캐롤 킹(본명: Carole Klein)은 1942년 뉴욕의 브룩클린에서 태어났다. 4살 때 피아노를 치며 음악을 접하기 시작한 그녀는 유년시절부터 음악에 남다른 관심과 재능을 보여 고등학교 시절 ’코사인스(Co-Sines)’라는 그룹을 조직하여 멤버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활동 초기에 가수보다는 작곡가로서 활동하는데 전념했다. 록앤롤과 포크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싱어송라이터들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 50년대 말엽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그 흐름을 주도했다. 닐 세다카(Neil Sedaka), 게리 고핀(Gerry Goffin)등의 뮤지션들과 함께 작업했는데 1959년 닐 세다카는 그녀를 모델로 한 노래 ’Oh, Carol!’을 히트시켰으며 게리 고핀은 캐롤의 첫 남편이 되었다. 캐롤과 게리 고핀은 ’브릴 빌딩(Brill Building)’이라는 대중음악 작곡 클럽을 만들어 많은 노래들을 만들어 내었으며, 여기서 연유하여 당시 이들의 음악을 ’브릴 빌딩 팝(Brill Building Pop)’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들은 1961년 미국 최초의 여성 보컬그룹 ’셔를스(The Shirelles)’에게 차트 정상을 밟은 ’Will you love me tomorrow’를 만들어 주었으며, 바비 비(Bobby Vee)에게 준 ’Take care of my baby’도 정상을 밟았다. 최고의 작곡 듀오로 자리한 이들은 이후 100여 곡에 이르는 히트곡을 만들어 내었는데 리틀 에바(Little Eva)의 ’The locomotion’, 쉬퐁스(The Chiffons)의 ’One fine day’, 몽키즈(The Monkees)의 ’Pleasant valley sunday’, 드리프터스(The Drifters)의 ’Up on the roof’, 쿠키즈(The Cookies)의 ’Chains’(비틀즈에 의해 한 번 더 불리어졌다.),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의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 크리스탈스(The Crystals)의 ’He hit me (And it felt like a kiss)’와 같은 주옥같은 곡들이 모두 이들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하던 이들은 이혼과 함께 음악 활동에서도 결별을 선언하였고, 캐롤은 베이스 연주자로 활동하던 찰스 라르키(Charles Larkey)를 두 번째 남편으로 맞아들인다. 이들은 대니 코치마(Danny Kortchmar)를 끌어들여 ’더 씨티(The City)’라는 트리오를 결성하고 < Now That Everything’s Been Said >를 발표하였는데 캐롤의 무대 기피로 인해 홍보에 실패하면서 상업적으로도 실패하고 만다. ’더 씨티’ 시절의 음악은 이후 다른 뮤지션들에 의해 다시 히트했는데 버즈(The Byrds)가 ’Wasn’t born to follow’를 다시 불렀고, 블러드 스웻 앤 티어스(Blood Sweat & Tears)가 ’Hi-De-Ho’를, 제임스 테일러(James Taylor)가 ’You’ve got a friend’를 히트시켰다. 1970년 캐롤 킹은 솔로 가수로서의 활동을 시작한다. 1970년 발표한 그녀의 데뷔 앨범 < Writer >는 실패했지만 1971년 발표한 < Tapestry >는 캐롤 킹을 1970년대 최고의 여가수, 팝 사상 여성 최고의 싱어송라이터로 만들어주게 된다. 이 앨범은 당시 급작스럽게 증가한 독신자, 이혼부부들의 고독과 소외감을 달래며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는데 앨범은 1975년까지 1,500만장이 팔려 나갔으며 15주간 앨범 차트 정상을 차지했고, 무려 6년 동안 차트에 머무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앨범은 1970년대를 통틀어 세 번째로 많이 팔렸으며 솔로 뮤지션의 앨범으로는 1970년대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자리했다. 앨범 수록곡 중 ’So far away’와 ’It’s too late’가 차트 정상을 밟았으며 제임스 테일러가 먼저 불러 히트시킨 ’You’ve got a friend’, 셔를스가 히트시킨 ’Will you love me tomorrow’, 아레사 프랭클린이 히트시킨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이 작곡자인 그녀의 목소리로 다시 실려 큰사랑을 받았다. 그녀는 1971년 그래미에서 ’올해의 앨범’, ’최우수 팝 여성가수’, ’It’s too late’으로 ’올해의 레코드’, ’You’ve got a friend’로 ’올해의 노래’까지 4개 부문을 수상했다. 1970년대 싱어송라이터 붐의 선두에 자리한 그녀는 1971년작 < Music >을 다시 한 번 차트 정상에 올렸으며 ’Sweet seasons’를 히트시켰다. 1972년작 < Rhymes And Reasons >도 차트 2위까지 올랐으며 1974년작 < Wrap Around Joy >는 ’Jazzman’이 차트 정상에 오른데 힘입어 앨범도 정상을 밟았다. 1976년에는 전 남편이자 음악적 동반자였던 게리 고핀과 다시 손을 잡고 < Thoroughbred >를 발표하여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1977년 < Simple Thing >을 발표한 후 작곡 동료였던 릭 에반스(Rick Evans)를 세 번째 남편으로 맞아들이지만 릭 에반스는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결혼 1년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1980년 고핀과 작업했던 곡들을 모아서 내놓은 < Pearls >를 히트시킨 후 그녀는 산골 마을인 아이다호(Idaho)로 들어가 환경운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1983년 < Speeding Time >, 1989년 < City Streets >, 1993년 < Colour Of Your Dream >을 발표하는 등 간간이 앨범을 내어놓고 있지만 현재 가수로서보다는 뮤지컬 작곡가나 후배 뮤지션들의 작곡가, 프로듀서로 더 많은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 셀린 디욘(Celine Dion)등의 앨범에 프로듀서로 참여하기도 했던 그녀는 많은 여성 뮤지션들에게 존경의 대상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1999년에는 그녀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아레사 프랭클린, 머라이어 캐리, 샤냐 트와인(Shania Twain), 셀린 디욘, 글로리아 에스테판(Gloria Estefan) 등 쟁쟁한 여가수들이 ’You’ve got a friend’를 함께 노래하며 그녀에 대한 존경의 뜻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노래 : Nick Drake (닉 드레이크)
진실로 위대한 예술은 철저한 절망위에 기초한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닉 드레이크의 음악 세계는 바로 그 끝없는 절망 위에 존재하고 있다. 그의 음악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절망하였고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헤어짐에 절망하였던 닉. 그에게 있어서 음악은 자신의 내적 표현이었다. 하지만 닉의 음악 속에서 그의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진정한 출발임을 느껴본다. 닉의 이야기는 그의 음악만큼이나 ‘아름다운 슬픔... 진실로 위대한 예술은 철저한 절망위에 기초한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닉 드레이크의 음악 세계는 바로 그 끝없는 절망 위에 존재하고 있다. 그의 음악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절망하였고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헤어짐에 절망하였던 닉. 그에게 있어서 음악은 자신의 내적 표현이었다. 하지만 닉의 음악 속에서 그의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진정한 출발임을 느껴본다. 닉의 이야기는 그의 음악만큼이나 ‘아름다운 슬픔’을 갖고 있다. 켐브리지 대학시절, 포크계에서도 그는 잘 알려진 멜랑콜리맨으로 통했다. 밴모리슨(Van Morrison)과 랜디 뉴먼(Randy Newman), 그리고 팀 버클리(Tim berkeley)의 음악은 닉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한 그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부를 곡만 만들었다. 대학시절 그는 페어포트 컨벤션(Fairport Convention)의 애쉬리 허칭(Ashley Hutching) 눈에 띄어 프로듀서 조 보이드(Joe Boyd)를 소개받는다. 그리고 조는 드레이크의 음악에 흠뻑 매료되어 바로 앨범 준비에 들어가게 된다. 1968년 닉은 아직 20살의 어리고 수줍은 청년이었다. 1969년에 발표된 < Five Leaves Left >에는 ‘Day is gone’과 ‘Cello song’ 같은 명곡이 들어있다. 지미 헨드릭스, 롤링 스톤즈, 비틀스의 노래와 같이 록과 싸이키델릭 중심으로 흐르고 있는 1960년대 후반, 부드러운 목소리와 서정적 오케스트라 편곡으로 음악계에 등장한 닉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싸이키델릭에 취해있고 좀더 강한 것을 추구하던 그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크게 어필하지 못하여 판매실적은 부진했다. 1970년 출시된 < Bryter Layter >에서 그는 페어포트 컨벤션의 합연과 화려한 오케스트라의 편곡으로 성공의 도약을 꿈꾸지만 2집 역시 실패로 돌아가게 되고 닉은 결국 우울증 증세를 보이며 라이브 공연까지 거부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대중들의 인기를 끌지 못한 드레이크의 실패감 중 일부는 라이브 공연에 대한 병적인 회피에도 요인이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믿었던 프로듀서 조와의 헤어짐으로 정신병적 상태까지 맞는 심한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이런 불운한 상황에 그의 마지막 앨범 < Pink Moon >이 1972년 공개된다. 그에게 있어서는 외롭고 힘든 작업이었다. 템포는 빨라졌으나 그의 슬픔과 고뇌는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오히려 그의 아픔을 아름다움으로 덮으려는 듯한 그의 연주는 더욱 애처롭다. 녹내장으로 요양하면서 4곡을 녹음하기까지 하지만 그의 육체는 까뮈의 소설< 시지프스의 신화 >와 트립티졸(Tryptizol)- 흥분제와 함께 침대 위에 싸늘한 모습으로 뉘어 있었다. 1974년 그의 나이 26세였다. 꽃피는 나이에 요절한 닉이 남긴 유물은 단 3장의 정규앨범. 검시관은 그의 죽음을 자살로 최종 판결 지었지만 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일찍 저문 젊음은 늘 안타깝다. 죽은 후에서야 그가 보석인줄 알게 되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그의 빛 바랜 사진을 볼 때면 더욱 안타깝고 숙연해진다. 브리티시 포크를 일궈낸 음악가로서 벨 앤 세바스찬(Belle &Sebastian)과 같은 뮤지션들이 등장 할 수 있는 선봉장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아무리 높이 평가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노래 : Van Morrison (밴 모리슨,George Ivan Morrison)
30년 이상의 장구한 세월에 걸쳐 거의 매년 앨범을 발표하는 밴 모리슨(Van Morrison)은 상업성에 구애받지 않고 외로운 음악항해를 펼치며 독보적 음악 소우주를 구축한 록 음악계의 거장이다. 비록 인기차트를 주름잡은 바 없었지만 ‘아일랜드 음악의 대부’라는 명성과 함께 모든 아일랜드 출신 음악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떠받들어지며 밥 딜런, 브루스 스프링스틴, 엘비스 코스텔로 등 당대와 후대를 막론한 무수한 아... 30년 이상의 장구한 세월에 걸쳐 거의 매년 앨범을 발표하는 밴 모리슨(Van Morrison)은 상업성에 구애받지 않고 외로운 음악항해를 펼치며 독보적 음악 소우주를 구축한 록 음악계의 거장이다. 비록 인기차트를 주름잡은 바 없었지만 ‘아일랜드 음악의 대부’라는 명성과 함께 모든 아일랜드 출신 음악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떠받들어지며 밥 딜런, 브루스 스프링스틴, 엘비스 코스텔로 등 당대와 후대를 막론한 무수한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헌정앨범이 드물던 시절인 1992년에 누구보다 먼저 트리뷰트 앨범이 바쳐질 정도였다. 도어스의 짐 모리슨(Jim Morrison)도 밴의 무대행위를 모방한 것은 물론, 그의 명곡 ‘Gloria’를 라이브 레퍼토리로 채택했으며 ‘Have I told you lately’(로드 스튜어트) ‘Wild night’(존 멜렌캠프와 미셀 엔드제오첼로) ‘Jackie Wilson said’(덱시스 미드나이트 러너스) ‘Carrying a torch’(톰 존스) ‘Crazy love’(브라이언 맥나이트, 애론 네빌) 등 많은 곡들이 리메이크 히트된 것도 그의 드높은 음악성을 방증한다. 1945년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조지 이반 모리슨(George Ivan Morrison)이란 이름으로 태어난 그는 재즈, 블루스 음반 수집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많은 음악을 접한다. 10대의 나이에 그룹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63년 자신이 주도한 브리티스 인베이전시기의 주요 그룹 가운데 하나인 뎀(Them)에서 보컬, 색소폰, 하모니카를 맡으며 홀연히 비상한다. 뎀은 아일랜드 출신으로는 이색적으로 미국음악인 R&B와 블루스를 연주하며 1965년 ‘Baby please don’t go’와 ‘Here comes the night’을 히트차트에 올려놓으며 명성을 얻는다. 1967년 밴 모리슨은 밴드를 떠나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밴드 활동을 통해 지명도를 확보한 그는 솔로앨범 < Blowin’ Your Mind >에서 ‘Brown eyed girl’(영화 < 적과의 동침 >에 삽입되어 국내 팬들에게도 친숙한 곡이다)을 전미차트 10위에 올리며 성공적으로 데뷔한다. 이듬해 미국의 ‘워너브라더스’와 계약을 체결하고 꿈꾸어왔던 미국 시장에 진출하며 기념비적인 앨범 < Astral Weeks >를 발표한다. 1968년 발표된 이 앨범은 현재까지 세계적으로 30만장이 채 팔리지 않은 형편없는 실적을 거두었지만 지금도 록 역사에서 빠지지 않는 명반으로 찬란한 빛을 발하고있다. < Astral Weeks >는 60년대 후반의 히피즘 속에서 내면 탐구에 몰두했으며 이데올로기의 난립 속에서 예술 그 자체에 주목한 탁이(卓異)한 앨범으로 유명한 재즈 세션 맨들과의 연주로 이틀만에 완성되었다. 자신의 감정을 녹음실에서 혼자 소화해 낸 그의 녹음 과정과 앨범에 담긴 모습은 록음악에서 표현된 최초의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대중에게 외면당한 전작과 달리 1970년에 발표된 < Moondance >는 싱글 ‘Come running’과 ‘Into the mystic’, ‘Moondance’, ‘Crazy love’가 애청되면서 그에게 상업적 성공을 안겨주었다. 재즈, 블루스, 소울, R&B, 클래식 등 다양한 스타일을 록의 테두리 안에서 소화해내는 그의 탁월한 음악적 시도는 이후 30년 넘도록 줄기차게 이어진다. 1970년 < His Band And The Street Choir >, 1971년 < Tupelo Honey >, 1972년 < St. Dominic’s Preview >를 연이어 발표했고, 이 가운데 < St. Dominic’s Preview >는 다양한 보컬, 악기의 시도가 담겨 있는 이해하기 어려운 예술적 극치를 선보인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73년 발표된 < Hard Nose The Highway >는 포크송과 세사미 스트리트(Sesame Street) 음악을 수록하는 색다른 면모를 보여주었지만 일관성이 결여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후 잠시 공백기에도 라이브 활동과 더욱 다양한 예술적 탐미를 통해 음악세계를 견고히 한 그는 1977년 < A Period Of Transition >, 1978년 < Wavelength >, 1979년 < Into The Music >(국내 최초로 라이센스 앨범이 나왔다), 1980년 < Common One >을 잇따라 발표하며 건재함을 과시한다. < Common One >에 수록된 곡 ‘Somewhere in England’에선 영국의 대표적 낭만주의 시인들인 워즈워드, 코울리지를 언급하며 자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내적 탐닉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도 고삐를 늦추지 않고 < Beautiful Vision >(1982년) < Inarticulate Speech Of Heart >(1983년) < A Sense Of Wonder >(1984년) < No Guru, No Method, No Teacher >(1986년) < Poetic Champions Compose >(1987년)을 발표했다. 1988년에는 아일랜드의 민속그룹 치프턴스(Chieftains)와 함께 < Irish Heartbeat >를 발표, 자신의 뿌리인 아일랜드의 켈트족에게 그 관심을 돌린다. 이즈음 영국으로 돌아가 1989년 < Avalon Sunset >을 발표, 싱글 ‘Whenever god shines his light on me’로 영국차트 20위권에 처음으로 진입한다. 그 수많은 앨범들과 오랜 음악생활 속에서 영국 차트 첫 20위권 진출 또한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이 앨범에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가 언플러그드로 커버하여 국내 팬들에게도 친숙한 곡 ‘Have I told you lately’가 수록되어 있다. 1990년대에도 왕성한 활동을 전개해 1990년 < Enlightenment >, 1991년 < Hymns To The Silence >, 1993년 < Too Long In Exile >를 연속 발표한다. 늘 그랬듯 뚜렷한 히트 싱글 하나 없었지만 1994년 브릿 어워드(Brit Award)에서 공로상이란 예우를 받는다. 1995년 이후 베스트 음반과 쟁쟁한 후배 아티스트들의 헌정앨범이 이어졌으며 50살이 넘은 나이에도 매년 꾸준하게 정규 앨범을 발표하고 있다. 1998년 미발표곡 모음집인 < The Philosopher’s Stone >에 이어 이듬해엔 신작 < Back On Top >으로 골드를 기록했고, 2000년에도 제리 리 루이스(Jerry Lee Lewis)의 형제인 린다 게일 루이스(Linda Gail Lewis)와의 듀엣 앨범 < You Win Again >으로 다시금 그의 음악에 대한 탈속(脫俗)적 열정과 천착을 알렸다.
노래 : Andy Williams (앤디 윌리엄스)
앤디 윌리엄스는 감미로운 목소리와 편안한 음악스타일의 크루너(Crooner)창법 가수이다. 3장의 플래티넘과 17장의 골드 디스크상을 수상한 이지 리스닝 계열의 대표 주자로 최고의 스탠다드 팝 가수이자 영화주제가의 황제, TV 스타로서 ‘50~’60년대에 전성기와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앤디 윌리엄스는 1927년 12월 3일, 미국 아이오와주 월 레이크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 3명의 형과 보컬그룹을 ... 앤디 윌리엄스는 감미로운 목소리와 편안한 음악스타일의 크루너(Crooner)창법 가수이다. 3장의 플래티넘과 17장의 골드 디스크상을 수상한 이지 리스닝 계열의 대표 주자로 최고의 스탠다드 팝 가수이자 영화주제가의 황제, TV 스타로서 ‘50~’60년대에 전성기와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앤디 윌리엄스는 1927년 12월 3일, 미국 아이오와주 월 레이크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 3명의 형과 보컬그룹을 만들어 지역교회 성가대에서 함께 노래한 것이 계기가 되어 4인조 ‘윌리엄스 브라더즈(Williams Brothers)’를 결성하였다. ‘52년에 형이 결혼하자 그룹을 해산하게 되었으며, ‘53년에 솔로로 독립했다. ‘56년에 커덴스(Cadence) 레이블과 계약을 맺으면서 “Canadian Sunset”이란 곡으로 첫 성공을 거둔다. ‘61년 콜롬비아 레코드사로 이적한 후에 맡은 NBC 방송의 ‘Andy Williams Show’를 시청률 최고의 프로그램으로 만들면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게 된다. 특히 ‘61년도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주제가 “문 리버(Moon River)”를 비롯 수많은 할리우드 명작영화 주제가를 부르면서 ‘영화 주제가의 황제이자 대명사’가 되었다. ‘앤디 윌리엄스 쇼’는 ‘62년부터 ‘71년까지 방영되면서 3차례나 ‘에미상’을 수상했고, 명사회자로서 매년 크리스마스 특별 쇼를 진행했다.

또한 그래미상 후보로 5번이나 지명되었으며, 여러 해 동안 그래미상 시상식 사회를 맡았다. ‘84년에는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로 ‘Greatest Love Classics’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90년대 초 레코딩 업계를 떠나 자신의 초대형 극장인 ‘앤디 윌리암스 문 리버 극장(Andy Williams Moon River Theatre)’의 경영자로 변신하여 열정적인 문화사업을 펼쳤다. ‘81년 11월에는 국내에 내한 공연차 방문하여 국내 음악팬들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2011년 11월, 앤디 윌리엄스는 자신이 방광암을 앓고 있다고 하면서 잠정적인 활동중단을 밝혔다. 그 후 1년여 가까이 투병생활을 해오다 2012년 9월 25일 밤, 미주리 주 자택에서 향년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0세기의 음유시인’으로 불리는 레너드 코헨은 비록 미국 빌보드차트 싱글 차트에 명함을 내민 적이 없지만 영미 뮤지션들이 일제히 ’음악적 사부’로 추앙할 만큼 구미 음악계에서 절대적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영향력은 닉 케이브, 존 케일, R.E.M. 등 후배와 동료 뮤지션들이 참여한 1991년 과 돈 헨리, 엘튼 존 등이 나선 1995년 등 트리뷰트 앨범만도 두 차례였다는 것이 단적으로 증명한다.... ’20세기의 음유시인’으로 불리는 레너드 코헨은 비록 미국 빌보드차트 싱글 차트에 명함을 내민 적이 없지만 영미 뮤지션들이 일제히 ’음악적 사부’로 추앙할 만큼 구미 음악계에서 절대적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영향력은 닉 케이브, 존 케일, R.E.M. 등 후배와 동료 뮤지션들이 참여한 1991년 과 돈 헨리, 엘튼 존 등이 나선 1995년 등 트리뷰트 앨범만도 두 차례였다는 것이 단적으로 증명한다. 내면탐구와 현실참여의 메시지를 특징적인 낮은 키(low key)의 묵직한 바리톤과 어쿠스틱 사운드로 전하는 그의 음악은 듣는 사람을 탁월한 시(詩) 세계로 안내하고 깊은 사색에 잠기게 하면서 널리 애청되었다. 언제나 잔뜩 힘 빼고 처진 듯 노래하면서 도리어 강한 메시지의 설득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크 브렐의 계승자’ ’로우 키의 밥 딜런’으로도 통했다. 많은 가수들이 다투어 그의 곡을 노래했다. 1966년 주디 콜린스(Judy Collins)는 그의 빼어난 ’노래 시’인 ’Suzanne’를 불렀으며 ’Bird on the wire’는 팀 하딘(Tim Hardin), 애론 네빌(Aaron Neville) 등이 리메이크했다. 이 노래는 1990년 멜 깁슨과 골디 혼이 주연한 영화의 제목이 되기도 했다. 한때 그의 공연 팀 멤버였던 제니퍼 원스(Jennifer Warnes)는 코헨의 레퍼토리인 ’Famous blue raincoat’를 타이틀로 한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고, 2001년 드림웍스의 대박 영화 에서 호응을 얻은 루퍼스 웨인라이트(Rufus Wainwright)의 ’Hallelujah’도 코헨의 작품이었다. 국내 애청곡도 부지기수로 많다. 1968년에 발표된 첫 앨범에 수록된 ’Suzanne’ ’Sisters of mercy’ ’So long, Marianne’ 등이 잇따라 라디오전파를 탔으며 2집의 ’Bird on the wire’와 특히 ’Nancy’는 그를 잊을 수 없는 이름으로 만들었다. 1988년에 발표한 곡 ’I’m your man’은 자가용 오너들마다 구입했을 만큼 폭발적으로 애청되었고, 동명의 앨범에 수록된 또 다른 곡 ’Everybody knows’도 사랑받았다. 포크 가수 윤설하는 1991년 코헨의 곡 ’Dance me to the end of love’를 ’벙어리 바이올린’으로 번안해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1934년 캐나다의 몬트리올에서 태어난 레너드 코헨은 1966년 소설 (Beautiful Losers)를 출간, 애초 시인이자 소설가로 이름을 알렸다. 그가 가수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67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출연하면서부터였고, 이듬해 첫 앨범인 동시에 지금도 가장 유명한 앨범인 이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나왔다. 이 앨범에 수록된 곡들은 평소 시작(詩作)에서 표현된 낭만주의를 구체화하면서 구미 아티스트들에게 ’밥 딜런과 또 다른’ 언어의 충격을 던진다. 여기에는 종교적 상상력이 에로티시즘으로 나타난 곡 ’Sisters of mercy’, 절망감이 퍼진 ’So long, Marianne’, 신비주의로 채색된 ’Master song’ 그리고 코헨의 민감한 언어감수성이 드러난 ’Suzanne’이 수록되었다. 이 곡들은 1971년 로버트 알트먼(Robert Altman)의 영화 에 삽입되어 재평가를 받았다. 1969년의 앨범 은 전작과 유사한 방식이었지만 염세적 존재론을 전한 ’Bird on the wire’, 폭력과 정치문제를 취급한 멋진 코러스의 ’The partisan’ 등 문제작을 수록했고 국내 팬들은 ’Nancy’가 금지곡으로 묶였음에도 불구하고 라디오에 신청엽서를 보내기를 되풀이했다. 이듬해 ’Famous blue raincoat’가 수록된 와 1974년에 내놓은 이후 코헨은 고뇌와 사색을 축적하는 그의 고유 방식인 ’은둔’을 시작, 2년간이나 그리스 섬에 침잠했다. 하지만 그 앨범에 실린 곡들 ’Chelsea hotel #2’ ’Take this longing’ ’Who by fire’는 라디오전파를 오랫동안 탔다. 라이브 앨범으로 돌아온 뒤 1977년에는 필 스펙터(Phil Spector)의 프로듀스로 록의 색깔이 물씬한 음반 을 냈지만 반응은 아주 저조했다. 이후 1979년 와 1985년 등 10년간 겨우 2장의 앨범을 낼 만큼 과작(寡作)에 머물렀다. 이 앨범들은 초기 낮은 키의 어쿠스틱 사운드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였다. 1988년 자신이 프로듀스한 앨범 은 중년과 자신의 뿌리를 사고하는 깊이를 드러내면서, 국내에서 절대적 인기를 모은 ’I’m your man’을 비롯해 ’Everybody knows’ ’First we take Manhattans’ ’Ain’t no cure for love’ ’Take this waltz’ 그리고 ’Tower of song’ 등 전곡이 리퀘스트를 받았다. 이 앨범으로 그는 비평적 상업적 위치를 회복해, 당대 아티스트들로부터 재평가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1991년의 후배와 동료들에 의해 헌정앨범 이 발표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92년의 앨범 는 적어도 미국사회에서는 가장 널리 알려진 수작 앨범으로, 타이틀곡은 ’난 미래를 보아왔고, 형제여 그것은 살인이었지…’와 같은 메시지로 불안한 현실세계를 질타하고 ’Anthem’은 새 세계에 대한 갈망을, ’Waiting for a miracle’은 변화에 대한 기대를 묘사했다. 하지만 ’Democracy’에 의외로 미국을 찬양하는 메시지를 담은 것을 비롯해 어빙 벌린(Irving Berlin)의 것을 리메이크한 ’Always’로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적이고 재래식 정서를 노출, 감상자들에게 혼란을 초래한 점도 없지 않았다. 94년의 이후 또 다시 오랫동안 수도승으로 침잠한 그는 2001년 백업 보컬로 활동해온 여성 샤론 로빈슨(Sharon Robinson)을 프로듀서로 한 앨범 로 건재함을 알렸다.
노래 : Chris Farlowe (크리스 팔로우)
영국의 록, 블루스, 소울 가수 영국의 록, 블루스, 소울 가수
자니 캐쉬(Johnny Cash)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컨트리 음악계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영향력 있는 활동을 펼친 뮤지션 중 한명이다. 깊고 낭랑한 중음역대의 보컬과 간결한 기타와 함께 그는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만의 진보적이고 독특한 사운드를 추구했다. 컨트리뮤직의 고향인 내쉬빌사운드(Nashville), 홍키통크(Honky Tonk), 로큰롤(Rock’n’Roll), 그 어떤 것에도 치우치지 않은 자신만의 ... 자니 캐쉬(Johnny Cash)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컨트리 음악계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영향력 있는 활동을 펼친 뮤지션 중 한명이다. 깊고 낭랑한 중음역대의 보컬과 간결한 기타와 함께 그는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만의 진보적이고 독특한 사운드를 추구했다. 컨트리뮤직의 고향인 내쉬빌사운드(Nashville), 홍키통크(Honky Tonk), 로큰롤(Rock’n’Roll), 그 어떤 것에도 치우치지 않은 자신만의 서브장르를 만들고 구축했다. 감성적으로 무디고 정직한 포크(Folk)와 반항적인 로큰롤(Rock’N’Roll) 그리고 염세적인 컨트리(Country)뮤직 사이의 중간지점에서 캐쉬는 로큰롤의 탄생과 반항적 태도 그리고 다분히 록적인 간소함과 솔직한 음악적 발성법을 적절히 융화시켜냈다. 거기에는 깊은 역사적 공감대가 존재했다. 그는 음악적 사명을 다하는 그 날까지 100곡이 넘는 히트싱글을 내며 흑과 백 모두에게 인정받았고, 특히 록의 황제(King of Rock)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를 비롯해 한 시대를 풍미한 당대의 거목들(칼 퍼킨스, 제리 리 루이스, 척 베리)과 함께, 1950년~60년대를 빛낸 로커빌리(Rockabilly)음악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였다. 아칸사스 출신인 자니 캐쉬는 세 살 때에 다이에스(Dyess)로 이주했다. 열둘 어린나이에 그는 이미 자신의 노래를 쓰기 시작했다. 라디오에서 들은 컨트리 송에 음악적 영감을 얻은 그는 고등학교시절 아칸사스 라디오 방송국(KLCN)에서 노래했다. 대학을 졸업한 1950년에는 자동차회사에 취직해 디트로이트로 거처를 옮겼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그는 공군에 입대했다. 공군에 있는 동안 캐쉬는 기타를 구입해 스스로 연주를 익혔다. 그는 ‘Folsom prion blues’를 포함해 본격적으로 곡을 쓰기 시작했다. 캐쉬는 1954년 공군에서 예편해 텍스사 여성 비비안 리베르토(Vivian Leberto)와 결혼했다. 멤피스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그는 라디오 아나운서과정을 밟았다. 밤에는 기타리스트 루더 퍼킨스와 베이시스트 마샬 그랜트로 구성된 트리오의 일원으로 컨트리음악을 연주했다. 지방라디오방송국(KWEM)에서 무료로 공연을 간간히 겸하면서 안정된 연주의 기틀을 마련하던 트리오는 선 레코드사에 오디션을 볼 기회를 잡게 된다. 마침내 1955년 샘 필립스가 설립한 선 레코드사(Sun Records)에 오디션을 치르게 된 캐쉬는 처음에 자신을 가스펠싱어로 소개했다. 필립스는 자니에게 좀 더 상업적인 것을 요구했고, 그는 ‘Hey Porter’로 곧 필립스를 매료시켰다. 이를 계기로 캐쉬는 자신의 데뷔싱글 ’Cry Cry Cry’/Hey Poter’를 발매하게 된다. 필립스는 싱글레코드에 캐쉬를 “자니”라고 기입했다. 레코드 프로듀서는 또한 퍼킨스와 그랜트를 테네시 투(Tennessee Two)라고 불렀다. 1955년에는 ‘Cry Cry Cry’가 인기를 얻으며 컨트리차트 14위에 올랐다. 그리고 루이지애나 헤이라이드(Louisiana Hayride) 지역에서 거의 1년간 머물렀다. 두 번째 싱글 ’Folsom prison blues’가 1956년 초 컨트리차트 4위의 쾌거를 올렸고, 연이어 ‘I walk the line’이 6주간 1위를 차지함과 더불어 팝 차트에도 탑20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1957년에도 컨트리싱글차트 13위에 랭크된 ‘Give my love to rose’를 포함해 몇 곡의 히트곡을 내며 히트행진을 이어갔다. 캐쉬는 또한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한 타 뮤지션들과 달리 완전히 검정복장으로 그해 그랜드 올 오프리(Grand Ole Opry debut)에 데뷔했다. 이로 인해 그는 ’맨 인 블랙‘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그리고 1957년 11월에 그는 드디어 자신의 처녀작 < Johnny Cash with his hot and blue guitar >를 발매해 음반매장을 강타했다. 1958년에는 10주간 차트 정상을 지킨 ‘Ballad of a teenage queen’을 비롯해 또 다른 넘버원 싱글 ’Guess thing happen that way을 포함해 무려 8곡을 컨트리와 팝 차트 공히 상위권에 올리며 성공가도를 질주했다. 1958년에 그는 가스펠앨범을 녹음하고자 했으나 선(sun)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선 레코드는 또한 캐쉬의 음반로열티 인상에도 반대했다. 두 가지 결정적 연유로 캐쉬는 결국 1958년 콜롬비아레코드사(Columbia Records)로 레이블을 옮겨 그해 말 싱글 ‘All over again’을 내놓았다. 이 곡은 컨트리차트 4위와 팝 차트 38위에 올랐다. 1959년 초에는 콜럼비아에서 발표한 두 번째 싱글 ‘Don’t take your guns to town’ 또한 컨트리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팝 차트에도 32위까지 올라 그의 최대히트곡 중 하나가 된 이 곡과 함께 그해 내내 발매된 싱글들이 앞 다퉈 차트 정상에 등극했다. 캐쉬는 가스펠앨범을 낼 기회도 맞았다. 자니 캐쉬의 찬송가는 1970년대까지 주제앨범연작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지칠 줄 모르는 히트행진을 지속하던 그의 쾌속질주에도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1959년에, 그는 1년에 거의 300회가 넘는 공연일정을 소화하는 동안 암페타민(각성제)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1961년까지 그의 약물복용은 날로 증가했다. 그로인한 악영향은 히트 싱글과 앨범 수의 감소세로 나타났다. 1963년에 그는 가족을 떠나 뉴욕으로 이주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중 캐쉬는 술친구 칼 스미스(Carl Smith)의 아내 준 카터(June Carter)에게서 받은 ‘Ring of fire’로 컨트리차트 정상을 마크한다. 이 곡은 7주간 차트정상에 머무르며 팝 차트에도 20위에 올랐다. 1964년에는 ‘Understand your man’가 넘버원 히트를 기록했다. 그러나 약물중독의 어두운 그림자에 둘러싸여있던 캐쉬는 1965년 자신의 기타케이스로 엠페타민을 다량 밀수하다 엘 파소(El Paso)에서 체포되었다. 같은 해 그랜드 올 오프리(Grand Ole Opry)에서의 공연이 거절당했고, 그동안 각광받아온 커리어에도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1966년에는 아내 비비안이 이혼을 제소했다. 이혼 후 캐쉬는 내쉬빌로 이주했다. 거기에서 그는 칼 스미스와 이혼한 준 카터와 친밀해졌다. 카터의 조력으로 그는 약물중독에서 서서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또한 캐쉬를 기독교신자로 바꿨다. 1968년 초 ’Jackson’과 ‘Rosanna’s going wild’가 탑 텐 히트 기록하면서 재비상의 날개를 펴기 시작한 자니는 공연 중 무대 위에서 운명의 여인 준 카터에게 드라마틱한 청혼을 했고, 1968년 봄 결혼식을 올렸다. 1968년에, 자니 캐쉬는 가장 큰 인기를 끈 앨범 < Johnny Cash at Folsom Prison >을 녹음 발표했다. 교도소 공연실황을 녹음한 이 앨범에서 싱글 커트된 ‘Folsom prison blues’가 팝 차트에 걸쳐 큰 인기를 얻으며 컨트리차트 정상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연말에 레코드는 골드를 기록했다. 이듬해, 그는 후속앨범 < Johnny Cash at San Quentin >을 발표했다. ’A boy named sue’는 컨트리차트 1위와 팝 차트 2위에 오르며 히트싱글이 되었다. 캐쉬는 1969년 밥 딜런(Bob Dylan)의 컨트리앨범 < Nashville Skyline >에 게스트로 참여했다. 딜런은 ABC 가수 텔레비전프로그램 ‘자니 캐쉬 쇼’에 출연해 그에 화답했다. 자니 캐쉬쇼는 1969년과 71년, 2년에 걸쳐 방영되었다. 캐쉬는 1970년대 들어 제2의 전성기를 누린다. 자신의 텔레비전쇼와 더불어, 그는 백악관에서 리차드 닉슨(Richard Nixon)을 위해 공연한 것을 비롯해, (Gunfight)에서는 명배우 커크 더글라스(Kirk Douglas)와 함께 공연했으며,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와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했다. 다큐멘터리영화의 테마로도 주목받은 그는 ’Sunday morning coming down’과 ‘Flesh and blood’이 넘버 원 히트를 기록하며 변함없는 인기를 이어갔다. 1971년을 통해, 자니 캐쉬는 차트 3위를 기록한 ’Man in black’을 포함해 히트행진을 지속했다. 캐쉬와 카터 모두 1970년대 초 토착미국인과 죄수들의 시민권을 위한 캠페인에 참여하며 사회적 활동을 넓혀갔다. 가끔은 빌리 그래험(Billy Graham)과 함께 하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 캐쉬의 차트 등장횟수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마이너히트를 이어갔다. 그리고 1976년 ‘One piece at a time’(컨트리차트1위)를 비롯해 웨일론 제닝스(Waylon Jennings)와 듀엣으로 노래한 ’There ain’t no good chain gang’(컨트리차트 2위)와 ‘(Ghost)riders in the sky’와 같은 빅 히트싱글을 간간이 냈다. 1975년 캐쉬는 자서전 < Man in black >을 출간했다. 1980년에 그는 가장 젊은 나이에 컨트리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눈에 띄는 히트싱글을 내지 못하면서 고전했다. 콜럼비아 레코드사와도 마찰을 빚었다. 자니 캐쉬(Johnny Cash)는 1982년 선(Sun)출신의 로커빌리 명인 칼 퍼킨스(Carl Perkins), 제리 리 루이스(Jerry Lee Lewis)와 함께 팀을 이뤄 레코드 < The Survivors >를 발표했고 괜찮은 성과를 올렸다. 캐쉬, 웨일론 제닝스, 윌리 넬슨(Willie Nelson) 그리고 크리스 크리스토퍼슨(Kris Kristofferson)이 동참한 밴드 The highwaymen은 1985년 그들의 첫 앨범을 발표했다. 이 앨범 또한 적당한 성공을 거뒀다. 다음 해, 캐쉬와 콜럼비아사의 계약이 만료됐다. 그리고 그는 머큐리 내쉬빌(Mercury Nashville)과 계약했다. 새로운 레이블은 그러나 그의 성공을 입증해주지 못했고, 스타일의 방향을 둘러싼 논쟁을 해야 했다. 게다가 컨트리 라디오방송 프로는 더욱 현대적인 아티스트에게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캐쉬는 곧 자신이 차트에서 밀려날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콘서트를 통해 대중들과의 소통을 계속해 나갔다. 하이웨이멘(Highwaymen)은 1992년 두 번째 앨범을 녹음했다. 그리고 머큐리에서 낸 캐쉬의 어떤 레코드보다 상업적으로 더 큰 성공을 거뒀다. 그 즈음 머큐리와의 계약기간이 끝난 그는 1993년에 아메리칸 레코드사(American Records)에 새 둥지를 틀었다. 새 레이블에서 낸 첫 앨범 < American Recordings >는 설립자 릭 루빈(Rick Rubin)이 프로듀싱을 맡았다. 이 앨범의 전 수록곡은 어쿠스틱한 노래들이었다. 이 앨범은 대박을 터뜨리지는 못했으나, 그의 커리어를 되살리는 기폭제가 됨과 동시에 그를 록 중심의 젊은 음악팬들과 호흡할 수 있게 했다. 1995년에 하이웨이멘은 그들의 세 번째 앨범 < The Road Goes on Forever >를 발표했다. 이듬해 캐쉬는 탐 페티& 하트브레이커스가 피처링으로 참여한 그의 두 번째 앨범 < Unchained >를 발표했다. 그리고 2000년 봄 캐쉬는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 본 회고조의 앨범을 사랑, 신, 살인 세장으로 묶어 선보였다. 그 다음해에는 새로운 스튜디오앨범 < American Ⅲ: Solitary Man >이 뒤이어 발매되었다. 1990년대와 2000년에 들어 자니 캐쉬는 건강문제로 힘든 나날을 보냈지만 루빈과의 레코드작업을 지속해나갔다. 그들은 네 번째 합작품 < American Ⅳ: The man comes around >을 2002년 후반에 발매했다. 이듬해에는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의 ‘Hurt’를 커버한 뮤직비디오가 기대이상의 갈채를 받으며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MTV뮤직비디오시상식에서 ’올해의 비디오‘에 후보로 지명돼 그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수많은 화제를 뿌리며 한창 분위기에 젖어있을 때, 운명적 음악인생의 동반자(아내) 준 카터 캐쉬가 심장수술 경과 악화로 2003년 5월 15일 그의 곁을 떠나갔다. 4개월 후 자니도 당뇨 합병증으로 테네시 내쉬빌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71세였다.
노래 : Nico (니코 (크리스타 패프겐),Christa Paffgen)
영화배우, 가수 영화배우, 가수
노래 : Jose Feliciano (호세 펠리치아노,Jose Montserrate Feliciano Garcia)
1980년대를 장식한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와 그 다음의 글로리아 에스테 그리고 세기말이었던 1999년에 쏟아져 나온 미끈했던 리키 마틴, 배우활동도 겸한 제니퍼 로페즈 그리고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아들 엔리케 이글레시아스 등은 영미 음악과는 색조가 다른 라틴 팝으로 유명한 가수들이다. 이제는 흑인보다 미국에서 인종비가 높은 히스패닉 계들의 음악이라 할 중남미의 라틴 팝은 1950년대에 국내에도 번안되어 애청된 곡 ... 1980년대를 장식한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와 그 다음의 글로리아 에스테 그리고 세기말이었던 1999년에 쏟아져 나온 미끈했던 리키 마틴, 배우활동도 겸한 제니퍼 로페즈 그리고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아들 엔리케 이글레시아스 등은 영미 음악과는 색조가 다른 라틴 팝으로 유명한 가수들이다. 이제는 흑인보다 미국에서 인종비가 높은 히스패닉 계들의 음악이라 할 중남미의 라틴 팝은 1950년대에 국내에도 번안되어 애청된 곡 ‘베사메무초’ ‘키엔 세라’가 말해주듯 특유의 낭만적인 리듬과 애조 띤 멜로디를 생명으로 구미사회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부터 인기를 누려왔다. 라틴 팝 하면 상기한 이름들이 먼저 떠오르겠지만, 원조는 그들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가 1960년대 후반 미국시장을 강타한 시각장애자 가수 호세 펠리치아노(Jose Feliciano)라고 할 수 있다. 해마다 12월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길거리 스피커와 라디오 전파를 뒤덮는 곡 ‘펠리즈 나비다드(Feliz Navidad-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뜻)’를 부른 주인공이 바로 호세 펠리치아노다. 이 곡 말고도 그는 국내에서 ‘한때 사랑이 있었지(Once there was a love)’와 ‘집시(The gypsy)’, ‘레인(Rain)’, ‘케 사라(Che sara)’, ‘내추어 보이(Nature boy)와 같은 골든 팝송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상기한 노래 대부분은 국내에서는 라디오 전파를 잠식하며 절대적인 호응을 누렸지만 본고장 팝 팬들이 기억하는 곡들은 아니다. ‘레인’의 경우도 빌보드 차트에서 76위에 그쳤다. 심지어 외국에서는 전혀 싱글로 발표되지 않은 앨범의 수록곡 가운데 우리 정서에 맞는 것들을 당대의 음악다방과 라디오 디스크자키들이 골라내 인구에 회자시킨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적 팝송’이다. 디제이들이 이 곡들을 숨겨진 보물 찾듯이 발굴한데는 ‘그 애조 띤 멜로디와 낭랑한 어쿠스틱 기타 음을 분명히 우리의 팝팬들이 좋아할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했을 것이다. 그럼 미국에서는 어떤 곡들이 사랑 받았을까. 그는 음악계에 데뷔한 1968년 그때부터 딴 가수들이 부른 것을 특유의 감성으로 놀랍게 바꿔낸 ‘리메이크’ 노래들로 명성을 떨쳤다. 우선 1967년 여름에 발표되어 수 주간 전미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대중화된 록그룹 도어스(Doors)의 명곡 ‘내 불을 밝혀라(Light my fire)’를 들 수 있다. 호세 펠리치아노는 1년도 지나지 않은 이듬해 초에 이 곡을 다시 불러 내놓았다. 재해석해낸 곡의 질감은 원곡과는 영 딴판이었다. 능란한 어쿠스틱 기타연주를 바탕으로 로맨틱하면서도 클라이맥스에서 솟아오르며 사정없이 뿌려대는 보컬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넘어 기겁했을 정도였다. 도어스의 곡과 다르기로 따지면 거의 환골탈태 아니면 둔갑 수준. 사이키델릭 곡이 단숨에 라틴 팝이 되어 나온 것이다. 호세 펠리치아노의 ‘Light my fire’는 리메이크임에도 불구하고 전미차트 3위를 오르며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음악 팬들이 원작의 단순 재해석이 아닌 호세 펠리치아노 그만의 독창적 개조로 받아들인, 다시 말하면 그의 독자적 표현세계를 인정해준 덕분이었다. 지금도 호세 펠리치아노의 ‘내 불을 밝혀라’는 팝 역사상 가장 득의에 찬 리메이크 곡으로 꼽힌다. 국내 팝 팬들은 마찬가지 이유로 마마스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California dreaming)’이나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의 ‘Susie Q’ 그리고 산레모 가요제 입상곡인 ‘케 세라’ 등을 오리지널 이상으로 호세 펠리치아노의 독창적인 버전으로 즐겨들었다. 이번 예술의 전당 공연에서도 관객들은 오리지널 가수의 목소리로 이미 많은 대중들에게 익히 알려진 유명 팝송들을 -비틀스의 ‘Yesterday’, 사이먼 앤 가펑클의 ‘El condor pasa’, 바비 헵의 ‘Sunny’, 더스티 스프링필드 ‘The windmills of your mind’- 완전히 그의 것으로 새롭게 주조해내는 호세 펠리치아노의 노래에 감탄할 것이다. 호세 펠리치아노가 이처럼 상대적으로 리메이크 노래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아티스트와 뮤지션으로 융숭하게 대접하는 것은 리메이크가 새로운 창조임을 웅변해냈기 때문이다. 역사에 기록된 리메이크 사례로는 그가 떠오른 해였던 1968년 10월7일 야구 월드시리즈 5번째 게임에서 초대가수로 부른 미국 국가(Star-spangled banner)가 꼽힌다. 어쿠스틱 기타로 워낙 ‘괴상하게’ 부른 바람에 국가를 신성시하는 미국의 국수주의자들과 보수진영으로부터 거친 항의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 경기장 라이브는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인기차트에도 올라 전미 차트 50위에 오르는 히트를 쳤다. 호세 펠리치아노는 그해 그래미상의 최우수신인상을 수상했다. 1945년 푸에르토리코 생인 그의 주특기는 호소력 있는 얇은 고음의 보컬 외에 낭랑한 어쿠스틱 기타의 울림이다. 선천성 녹내장으로 앞을 볼 수 없는 불리를 타고난 재능과 하루 14시간씩 연습하는 노력을 통해 빼어난 기타연주자로 거듭났다. 이름 앞에 거물 기타리스트(virtuoso guitarist)라는 수식이 모든 공식자료에 붙을 정도. 기타전문지들에 의해 수도 없이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40년 넘게 어쿠스틱 기타분야의 전설로 숭앙받으며 지금도 라틴 음악에 관한 한 ‘일렉트릭 기타는 산타나, 어쿠스틱 기타는 호세 펠리치아노’라는 일반의 인식을 확립했다. 그의 발표 곡 가운데는 ‘Fireworks’ ‘Pegao’ 등 기타 연주곡들이 많다. 라틴 기타연주자로서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은 그의 대중적 인기가 떨어진 1980-1990년대에서도 전문가들의 존경이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는 1983년 ‘Me enamore’, 1986년 ‘Lelolai’, 1989년 ‘Cielito’, 1990년의 ‘Por que te tengo que olvidar?’로 그래미 최우수 라틴 팝 퍼포먼스 상을 무려 네 차례나 수상했다. 2000년대에도 그는 계속적인 월드투어를 통해 팬들에게 라틴 음악의 로맨티시즘을 전달하는 동시에 과거의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신보를 발표하고 있다. 그가 연주하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음악에 대한 헌신’과 ‘음악을 향한 열정과 즐거움’이 고스란히 드러나 감동이 배가된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처럼 그는 재능과 노력 그리고 낙천적인 사고로서 예술가의 전형을 확립했다. 우리가 너무도 좋아했던 곡 ‘집시’를 통해 그의 음악 하는 자세를 확인할 수 있다. ‘난 노래를 연주하고 음반을 만들어 돈을 받는 그런 집시죠/ 난 순회하는 무리의 일부예요/ 난 온 땅을 돌아다니죠/ 내 동료를 위해 곡을 만들어주고/ 슬프고 때로는 행복한 음으로 모든 곡을 쓰고 연주해요/ 어떤 곡은 사람들을 웃기고/ 어떤 곡은 사람들을 울리죠/ 왜 그렇게 되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난 끝없이 음악 여행을 계속해요/ 내 기타가 낡고 쉬 고되더라도...’ 이번 내한공연에서 팬들은 그가 남긴 무수한 추억의 골든 팝, 공연장에 울림을 가져다줄 상쾌한 보컬 그리고 라틴 기타 연주의 환상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진정한 뮤지션이 전하는 헌신과 즐거움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라틴 팝가수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호세 펠리치아노의 재능과 존재감을 넘어설 인물은 없다. 우리는 세기말에 유행을 타고 우후죽순 쏟아진 라틴 팝가수들이 아닌, 그보다 훨씬 전에 등장한 호세 펠리치아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노래 : Melanie (멜라니, Melanie Safka / Melanie Anne Safka )
포크/컨트리 팝 싱어송라이터 포크/컨트리 팝 싱어송라이터
포크-재즈 밴드 포크-재즈 밴드
1944년 10월 1일, 플로리다 주 잭슨빌에서 필립 블로드하임(Phillip Blondheim)이라는 본명으로 태어난 스코트 맥켄지(Scott McKenzie)는 히트곡이 ‘San Francisco (Be sure to wear some flowers in your hair)’ 밖에 없는 원히트원더 가수지만 이 한 곡만큼은 미국 대중음악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1960년대 후반, 히피운동의 ... 1944년 10월 1일, 플로리다 주 잭슨빌에서 필립 블로드하임(Phillip Blondheim)이라는 본명으로 태어난 스코트 맥켄지(Scott McKenzie)는 히트곡이 ‘San Francisco (Be sure to wear some flowers in your hair)’ 밖에 없는 원히트원더 가수지만 이 한 곡만큼은 미국 대중음악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1960년대 후반, 히피운동의 성지였던 샌프란시스코에 올 때는 머리에 꽃을 꽂고 오라는 히피의 찬가였기 때문이었지만 히피 시대가 허무하게 막을 내린 1970년부터 스코트 맥켄지는 다른 별 사람이 되어야 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은 스코트 맥켄지를 1960년대 히피 시대의 유물로 취급했지만 그의 이력이 1990년까지 그 수맥을 이어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스코트 맥켄지의 음악경력은 1961 저니맨(Journeymen)이라는 포크 그룹에서 시작한다. 3인조였던 이 팀에서 훗날 평생의 동지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California dreamin’’으로 유명한 마마스 & 파파스()Mamas & Papas)의 리더였던 존 필립스(John Phillips)다. 스코트 맥켄지의 유일한 히트곡 ‘San Francisco’를 작곡하고 프로듀스한 사람 역시 존 필립스. 1967년에 4위까지 오른 이 노래는 1990년대에 영화 < 포레스트 검프 > 사운드트랙에 수록되어 히피의 향수를 자극했고 국내에서는 유동근, 황신혜가 주연한 불륜 조장 드라마 < 애인 >에 삽입되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두 번째 싱글 ‘Like an old time movie’는 24위까지 오르며 선전했지만 스코트 맥켄지를 정의하는 시그니처 송은 ‘San Francisco’로 수렴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은둔하며 음악과는 거리를 둔 것처럼 보였지만 1988년에 탐 크루즈가 주연한 영화 < 칵테일 > OST에 수록된 비치 보이스의 그 유명한 여름찬가 ‘Kokomo’를 비치 보이스의 보컬리스트 마이크 러브(Mike Love), 존 필립스, 테리 멜처(Terry Melcher)와 공동으로 작곡해 수면 위로 급부상했으며 이 곡으로 스코트 맥켄지는 지금까지도 막대한 저작권료를 챙기고 있다. 1990년대 중반에 개봉된 홍콩 영화 < 중경삼림 >에 끊임없이 흘렀던 마마스 &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이 우리나라에서 초 대박 인기를 얻자 마마스 & 파파스의 또 다른 남성 멤버 데니스 도허티가 중심이 되어 급조한 마마스 & 파파스가 1996년에 내한공연을 가졌다. 이때 존 필립스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스코트 맥켄지였고 그는 내한공연에서 당연히 자신의 유일한 히트곡 ‘San Francisco’를 부르기도 했다. 1996년 내한 당시 ‘당신은 아직도 히피냐’는 질문에 ‘당연하다’라고 대답했던 스코트 맥켄지. 우리가 그렇게 사랑했던 노래가 한 사람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족쇄처럼 느껴졌다.
노래 : Donovan (도노반 ,Donovan Philips Leitch)
포크 락 보컬, 기타 포크 락 보컬, 기타
‘모타운(Motown) 가의 황태자’ 마빈 게이의 보컬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달콤한 크루닝(crooning) 창법과 샘 쿡의 호소력 짙은 가스펠의 기운을 온전히 흡수한 그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보컬로 창조해내며 청중들을 흥분시켰다. 기운이 서려있는 듯한 그의 보컬은 ’보컬 연주의 대가’라는 영광스런 칭호에 어울린다. 그의 사후 등장한 수많은 소울 팝 가수들은 모... ‘모타운(Motown) 가의 황태자’ 마빈 게이의 보컬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달콤한 크루닝(crooning) 창법과 샘 쿡의 호소력 짙은 가스펠의 기운을 온전히 흡수한 그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보컬로 창조해내며 청중들을 흥분시켰다. 기운이 서려있는 듯한 그의 보컬은 ’보컬 연주의 대가’라는 영광스런 칭호에 어울린다. 그의 사후 등장한 수많은 소울 팝 가수들은 모두 그의 보컬에 영향받았음을 인정하며 그의 음악성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은 단지 탁월한 창법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록음악 역사에 있어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아티스트의 창작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을 몸소 실천한 음악인이라는 점에서 그를 더욱 기억하게 한다. 70년대가 되기 전 만해도 밤낮으로 사랑과 낭만만을 얘기하며 소일하던 모타운식 소울 음악은 당시 대다수 흑인들이 공감해오던 ‘어두운 현실’엔 둔감했다. ‘팔리는 음악’을 원했던 회사측과의 마찰은 불가피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음악’을 위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이런 산고 끝에 록 역사를 대표하는 명반 < What’s going on >(1971)은 탄생했다 소울 음악은 60년대 그가 소속되어있던 모타운 레코드사를 통해 보다 대중적인 음악 문법으로 자리 잡은데 이어, 그는 같은 회사 소속의 스티비 원더와 함께 미국 대도시 후미진 곳에서 벌어지는 ‘게토 리얼리티를’ 자신의 노래에 담아냄으로써 소울이 ‘사회성’이란 화두를 본격적으로 끌어내는데 기여를 했다. 스티비 원더와 함께 그는 소위 후배 흑인 뮤지션들의 ‘대부’이다. 80년대 이스트 코스트 힙합의 분수령을 일군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의 프론트 맨 척 디(Chuck D)는 1988년도 명반 <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 >을 발표하며 롤링스톤지와 가졌던 인터뷰에서 ‘나는 이번 앨범에서 힙합의 < What’s going on > 버전을 내놓고 싶었다’ 라고 얘기할 정도로 마빈 게이의 유산을 이어받았다고 인정했다. 마빈 펜츠 게이 주니어라는 본명으로 1939년 4월 2일 워싱턴 디씨에서 태어난 그는 목사를 아버지로 둔 기독교 가정에서 어린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다소 억압적인 가정환경은 그로 하여금 음악에 몰입하게 해 아버지 때문에 억눌린 영혼을 달래줄 위안이 된다.(어렸을 때부터 그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공군에 입대, 제대 후 고향으로 돌아와 그는 락 앤 롤 스타 보 디들리(Bo Didely)를 만나 그의 문하생이 된다. 1958년 두왑 그룹인 레인보우에 가입, 이듬해엔 시카고로 진출해 ‘문 그로우’ 라는 두왑밴드에서 활동하며 체스(Chess) 레코드에서 그의 ct첫 싱글 ‘Mama roocie’를 녹음한다. 미국 전역 투어에 나선 문 그로우는 디트로이트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고, 당시 그의 연주를 지켜보던 모타운의 설립자 베리 고디 주니어(Berry Gordy Jr.)는 3옥타브가 넘는 그의 탁월한 테너 창법에 매료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61년 모타운과 전속 계약을 체결하며 베리 고디와 운명적인(?) 관계를 시작한다. 처음엔 세션 드러머로서 모타운의 일원이 된 그는 모타운 간판스타이자 작곡가인 스모키 로빈슨과 함께 활동한다. 1961년 그는 사장인 베리 고디의 누이인 안나와 결혼한다(무려 18살의 연상). 사장과 사돈관계가 된 덕에 회사측에 전폭적인 지원을 얻게 된 그는 이듬해 첫 싱글 ‘Stubborn kind of fellow’(1962)를 발표하고 흥겨운 댄스 팝 ’Hitch hike’(1962)로 빌보드 Top 40에 진입하는 순조로운 출발을 보인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크루닝 창법에 영향 받았던 그는 당시 격조 있는 발라드 음악을 원했지만, 회사 측은 그에게 흥겹게 흔들기 좋은 빠른 댄스 음악만을 요구했다. 큰 키에 수려한 용모를 지닌 덕에 유난히 여성 팬들이 많이 따랐던 그였지만, 무대에 올라 몸을 흔들며 청중들에게 즐거움을 줘야 한다는 것은 늘 못 마땅했다. 후에 그가 회고하길 ‘나는 무대에 나가 청중들 앞에서 내 엉덩이를 흔들어야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했을 정도이니, 얼마 후 있을 회사 측과 창작권을 두고 생긴 갈등은 이미 데뷔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1960년대 내내 그는 모타운 사를 통해 꾸준히 히트곡을 발표했다. ‘Pride & joy’(1963)로 처음 Top 10에 진출한 그는 잇달아 발표한 싱글 ’How sweet it is’(1964), ‘Aint that peculiar’(1965)을 Top 10에 진입시킨다. 솔로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져갈 무렵 그는 모타운 소속의 실력 있는 디바들과 듀엣 곡을 많이 취입했는데, 메리 웰즈(Mary Wells)과 함께 한 ’What’s the matter with you baby’(1964)을 시작으로, 킴 웨스튼(Kim Weston)과 함께 한 ’It takes two’(1966), 70년대 다이아나 로스(Diana Ross)와 함께 한 ‘My mistake is to love you’(1974)등이 대중적인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그와 가장 인상적인 호흡을 보여준 디바는 바로 타미 테렐(Tammi Terell)이었다. 그녀와 함께 했던 ‘Ain’t no mountain high enough’(1966), ’Your precious love’(1967), ’Ain’t nothing like the real thing’(1968), ’You’re all I need to get by’(1968) 모두 Top 10에 진입시키는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팝 역사상 가장 궁합이 잘 맞는 콤비’는 안타깝게도 타미 테렐의 요절로 인해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에게 첫 팝 차트 넘버원의 영광을 안겨준 ‘I heard it through grapevine’(1968)로 그의 인기전선은 절정에 다다랐다. 이듬해 ’Too busy thinking about my baby’(1969), ’That’s the way love is’(1969)를 Top 10에 진입시키며 인기는 더해갔지만, 이내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만다. 데뷔 때부터 창작권을 두고 벌어진 회사 측과의 끈질긴 줄다리기는 무려 2년이라는 시간을 그에게 투쟁의 시간으로 만들었다. 달콤한 사랑타령으로 점철된 지금까지의 음악과는 다른, 자신이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표출해보길 갈망했던 그는 ‘자신의 음악’을 얻기 위한 힘겨운 투쟁 끝에 결국 모타운 사의 백기를 받아내며 ‘음반 제작에 관한 모든 전권을 그에게 위임할 것’이라는 전리품을 얻어낸다. 흑인의 입장에서 아프로 아메리칸(Afro-America)의 비참한 현실을 늘 생각해왔던 그는 주저 없이 이런 자신의 고민을 음악 속에 녹여내는 작업을 했다. 흑인 빈곤문제, 실업, 월남전등, 70년대 초 그의 눈에 보인 흑인의 현실은 ‘참담함’이었다. 핑크빛 미래를 노래했던 발랄한 60년대의 흑인 음악은 슬라이& 페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 커티스 메이필드(Curtis Mayfield)등 기라성같은 흑인 뮤지션들에 의해 한층 진지하고 어두워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내놓은 것이 컨셉 앨범 < What’s going on >(1971)이었다. 흑인 음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내놓은 컨셉 앨범 < What’s going on >은 회사 측에 우려에도 불구, 앨범 수록 곡 중 무려 4곡(What’s going on, God is love, Mercy, mercy, me Inner city blues)이 Top 10에 진입하는 성과를 거뒀고, 앨범은 지금까지 8백만장이라는, 당시로선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스트링을 동원한 세련된 연주 편곡, 참회록을 쓰듯 스토리 텔링(Storytelling) 방식으로 진행되는 진솔한 자기 고백은 당시 소울음악에선 맛볼 수 없었던 신선한 충격이었다. 앨범 < What’s going on >은 그의 음악 경력에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이 때부터 그의 음악성에도 뚜렷한 변화가 감지된다. ’Inner city blues’(1971)에서 목격했던 퍼커션의 가열 찬 울림은 70년대 흑인 음악의 대표 트렌드인 ‘펑키 사운드’로의 변화를 예고했고, 앨범으로는 발표 안 된 저주받은 싱글 ‘You ’re the man pt. 1, 2’(1972)에선 가성, 두성, 진성 등 한층 다채로워진 그의 보컬 연기가 압권이다. 재즈에 대한 평소의 관심은 영화 음악 작곡으로도 이어져 노래보다 연주 쪽에 관심이 반영된 영화음악 앨범 < Trouble man >(1972)으로 이어진다. < What’s going on >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 그는 이전의 고뇌하는 흑인 지성임을 포기하고 이번엔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사랑의 전령사로 변신한다. 그의 두 번째 넘버원을 안겨다 준 앨범< Let’s get it on >(1973)은 ‘성 행위’를 찬미하는 노래들로 가득 찬 앨범으로 주변을 다시 한번 어리둥절하게 했다. 빌보드 No.1 곡인 ‘Let’s get it on’은 그를 단번에 섹시 스타로 변모시켰고, 그가 앨범에서 얘기했던 ’자연스러운 성의 표현 ‘은 80년대 들어 프린스나 조지 마이클같은 팝 스타들의 음악 세계로 계승된다. 하지만 그는 당시 첫 아내였던 안나와의 관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재니스라는 여인과 이미 두 집 살림을 차려 아이까지 낳았던 그의 성적 편력은 결국 아내와의 별거로 이어졌고, 한동안 그 충격에 슬럼프에 빠져 마약으로 세월을 보내게 된다. 재기의 몸부림을 친 그는 베리 고디의 주선으로 만난 레온 웨어(Leon Ware)의 곡으로 채워진 앨범 < I want you >(1976)을 발표하지만, 수록곡 ‘I want you’, ’After the dance’가 약간 주목을 받았을 뿐이었다. 히트곡에 목말라하던 그는 1977년 런던 팔라디움 구장에서의 콘서트 더블 실황 앨범< Live at the Palladium >을 발표하며, 13분이 넘는 디스코 곡 ‘Got to give up’을 수록하고, 4분대의 싱글로도 커팅, 그의 세 번째 넘버 원 싱글로 등극된다. 전형적인 댄스뮤직이었던 ’Got to give up’은 팝 차트, 앨 앤 비 차트 1위를 석권하며 그에게 가수로서 회생의 길을 열어준다. 하지만 ‘Got to give up’의 기쁨도 잠시, 결국 그는 안나와 이혼을 하게 되고 ,이혼에 대한 위자료를 다음에 발표하는 앨범 인세로 한다는 합의를 보게 된다. 앨범 < Here, my dear >(1978)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고 수록 곡 ’When did you stop loving me, When did I stop loving you’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만남과 해어짐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그의 뼈저린 고해성사는 아름다운 가사말과 편곡의 세련됨에도 불구, 이렇다할 히트 싱글 없이 앨범은 파묻히며 그의 디스코그래피 중 가장 안 알려진 앨범이 되고 말았다.(엎친데 덮친격으로 안나는 앨범 내용이 사생활 침해라며 소송을 걸기에 이른다.) 첫 번째 아내와의 이혼에 이어 다시 몇 년간은 그에게 혼란의 시기였다. 두 번째 아내였던 제니스와 급기야 파경에 이르렀고, < Love Man >(1979-발매 취소)과 < In our life time >(1981)의 흥행실패는 그를 더욱 마약으로 치닫게 했다. 급기야 그는 1981년 20년간 그에게 산전수전(?) 다 겪게 했던 모타운 사를 떠나, 하와이로 이주, 새로운 출발을 모색한다. 정확히 1년 후인 1982년, CBS 레코드와 전속 계약하며 그에겐 마지막 걸작으로 남게 된 < Midnight Love >(1982)를 발표한다. ‘Let’s get it on’에 버금갈만한 농염한 보컬이 인상적인 싱글 ‘Sexual healing’이 팝 차트 3위까지 오르며 그는 화려하게 재기한다. 공백기 동안대중들과의 소원함을 해소하기 위해 TV 출연 등 다시 활발한 활동을 벌인 그는 베리 고디와 함께 토크쇼에 출연해 둘의 악연(?)을 만회해보려고도 했고, NBA 농구 경기때 미국 국가를 소울 창법으로 불러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지미 헨드릭스가 우드스탁에서 연주했을 때 이후로 최대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재기 의지는 이내 사그러들고 있었다. 이미 코케인에 찌들 때로 찌든 그의 몸은 말을 듣질 않았고 평소에 사이가 안 좋았던 목사인 아버지와의 관계는 조금도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비극은 그의 아버지와의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되고, 1984년 4월, 그의 45회 생일을 하루 앞둔 날, 심한 다툼 끝에 화를 가누지 못한 아버지가 쏜 총에 맞아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그의 어이없는 죽음은 충격적이었다. 많은 흑인 뮤지션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이듬해인 1985년 모타운사와 CBS가 공동으로 그의 미 발표곡을 모은 < Dream of a life time >과 < Romantically Yours >를 내놓는다. 그에 대한 재평가도 활발히 이뤄져 < 롤링스톤 >을 비롯한 록 전문지들은 앞 다투어 그의 앨범 < What’s going on >을 팝 역사에 남을 명반으로 추대하기 시작했고,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그의 이름이 등재된다.
R&B, 팝 보컬 R&B, 팝 보컬
노래 : Isley Brothers (아이슬리 브라더스)
흑인 소울, 리듬 앤 블루스 그룹 아이슬리 브라더스(The Isley Brothers)의 힘은 끈질긴 생명력이다. 4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한결같은 음악여정을 걸어왔다는 점이 이를 강하게 시사한다. 보컬 팀워크와 하모니를 전면에 내세운 이들은 로맨틱한 R&B 발라드와 가스펠, 소울, 펑크(Funk)에 이르는 흑인 장르를 대중적으로 소개하는데 가장 중심에 섰던 형제그룹이다.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결성된 ... 흑인 소울, 리듬 앤 블루스 그룹 아이슬리 브라더스(The Isley Brothers)의 힘은 끈질긴 생명력이다. 4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한결같은 음악여정을 걸어왔다는 점이 이를 강하게 시사한다. 보컬 팀워크와 하모니를 전면에 내세운 이들은 로맨틱한 R&B 발라드와 가스펠, 소울, 펑크(Funk)에 이르는 흑인 장르를 대중적으로 소개하는데 가장 중심에 섰던 형제그룹이다.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결성된 아이슬리 브라더스는 원래 팀의 정신적 지주이자 리드 싱어인 로날드 아이슬리(Ronald Isley)를 중심으로 루돌프(Rudolph), 오켈리(O’Kelly), 베론(Vernon)의 가스펠 쿼텟(quartet)으로 구성된 보컬 밴드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1955년 자전거 사고로 베론이 사망하자 아이슬리 형제는 트리오 라인업으로 팝 계의 첫 출발을 내디뎠다. 데뷔 초기 고향을 등지고 뉴욕으로 이주해 두-왑(doo-wop) 레코드를 녹음하며 활동에 포문을 연 그룹은 1959년 가스펠 송 ‘Shout’가 팝 차트에서 톱 40의 놀랄만한 성과를 올리면서 서서히 이름을 알렸다. 1962년 R&B싱글 차트 2위를 기록한 ‘Twist and shout’(비틀즈가 커버한 곡), 1966년 스매시 히트 싱글 ‘This old heart of mine (Is weak for you)’(팝 차트 12위, 이듬해 영국차트 3위) 등이 성공가도의 대표적인 열쇠였다. 이후 그룹은 수많은 음반을 레코딩하면서 소울과 R&B뿐만 아니라 펑크와 록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을 넓혀나갔다.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는 바로 그룹의 혁명을 이끈 시기였다. 그 출발선상에 자리한 1969년 작품 < It’s Our Thing >(R&B앨범 차트 2위)부터 그룹은 줄 곳 히트 퍼레이드를 이어나갔다. 결국 1970년에 발표한 < Get Into Something >에서 R&B차트 톱 30에 랭크된 곡을 무려 여섯 곡이나 배출해내는 저력을 과시했고, 1971년 < Givin’ It Back >을 발표해 밥 딜런(Bob Dylan), 제임스 테일러(James Taylor), 스페판 스틸스(Stephen Stills), 빌 위더스(Bill Withers), 닐영(Neil Young)의 곡들을 리메이크하며 주류 음악시장의 성공 궤도에 안착하기 시작했다. 아이슬리 형제가 인기그룹으로 급부상한 1973년작 < 3 + 3 >(팝 앨범 차트 8위)은 제 2세대 아이슬리 브라더스를 형성한 시기였다. 지미 헨드릭스로부터 영향 받은 기타리스트 어니 아이슬리(Ernie Isley)와 베이스, 퍼커션 주자 마빈 아이슬리(Marvin Isley), 사촌 형제인 크리스 자스퍼(Chris Jasper)가 이 앨범부터 그룹에 새롭게 가입. 이때부터 아이슬리 브라더스는 6인 체제로 전성기가 끝날 무렵까지 10년 동안 멤버교체 없이 ‘가문의 영광’을 지속해나갔다. 결국 이들은 발표하는 앨범마다 골드와 플래티넘을 달성하며 장기간 대중들과 함께 호흡했다. 그룹의 진가가 발휘된 1975년 걸작 < The Heat Is On >는 아이슬리에게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라는 영광을 수여한 금자탑이었다. 더불어 1978년작 < Showdown >(팝 앨범 차트 4위)에 수록되어 R&B싱글 차트 1위를 기록한 ‘Take me to the next phase (Part 1)’의 빅 히트로 1970년대에 접어들어 그룹은 가장 화려한 시기를 맞이한다. 1976년 < Harvest for the World >(9위), 1977년 < Go for Your Guns >(6위), 1978년 < Showdown >(4위) 등의 발표하는 음반마다 그룹은 매번 R&B앨범 차트 정상을 점령했고, 여러 싱글 히트곡들로 R&B차트를 힘차게 꿰찼다. 흑인음악계의 많은 후배들이 아이슬리 브라더스를 존경하게된 결정적 배경이 바로 이 당시 축적되었다. 10여 년 간 지속적인 성공가도를 달린 그룹은 1983년 < Between the Sheets > 이후 점차 하락세에 접어들며 침체기를 맞이한다. 어스 윈 앤 파이어(Earth, Wind & Fire), 쿨 앤 더 갱(Kool & The Gang) 같은 펑키(Funky) 사운드가 조금씩 무기력해질 시점에서 로맨틱 발라드 곡조로 일대 사운드의 변화를 꽤했다. 하지만 결과는 예전만큼 순탄하지 않았다. 결국 1986년 심장마비로 오켈리가 세상을 떠난 뒤 아이슬리 브라더스는 흑인 여성아티스트 안젤라 윈부시(Angela Winbush)를 작업 동료로 맞이해 그룹 재건에 나섰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팀을 떠났던 마빈, 어니와 재결합한 그룹은 그간 30년이 넘는 꾸준한 음악활동에 대한 공적을 인정받아 1992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4년 뒤 1996년 < Mission to Please >(R&B앨범 차트 2위)는 R&B 크루너 키스 스웨트(Keith Sweat), 알 켈리(R. Kelly) 같은 후배 뮤지션들이 참여해 젊은 감각으로 앨범의 빛을 더해주었다. 현재 그룹은 로날드와 어니의 듀오 체제를 구축해 기나긴 음악여정을 꾸준히 이어오며 2001년 < Eternal >(3위)을 발표해 다시금 팝 팬들에게 회자되기도 했다. 그룹은 2003년 발매 첫 주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등극한 < Body Kiss >로 거의 30년 만에 차트 1위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동시대 여러 아티스트들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운명을 달리하거나 팀의 해체를 맛보았지만 이들은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 흑인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노장의 투혼을 아직도 십분 발휘하고 있다. 지나간 세월이 대가를 인정하는 법이다.
노래 : Edwin Hawkins Singers (에드윈 호킨스 싱어스)
노래 : 5th Dimension (피프스 디멘션,The Fifth Dimension)
미국의 보컬 그룹 미국의 보컬 그룹
피트 시거는 아마도 다른 어떤 뮤지션보다도 모던 포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일 것이다. 음악학자 찰스 시거(Charles Seeger)의 아들인 그는 십대 시절부터 밴조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곧 그의 대명사가 되는 5현 밴조를 자신의 주악기로 다뤘다. 피트는 30년대 말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와 함께 노조설립을 증진시키고 파시즘을 비난하는 몇몇 다른 포크음악가들과 함께 정치적인 그룹 알... 피트 시거는 아마도 다른 어떤 뮤지션보다도 모던 포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일 것이다. 음악학자 찰스 시거(Charles Seeger)의 아들인 그는 십대 시절부터 밴조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곧 그의 대명사가 되는 5현 밴조를 자신의 주악기로 다뤘다. 피트는 30년대 말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와 함께 노조설립을 증진시키고 파시즘을 비난하는 몇몇 다른 포크음악가들과 함께 정치적인 그룹 알마낙 싱어스(Almanac Singers)를 조직했다. 그룹의 리더인 그는 또한 People’s Song과 People’s Artists와 같은 단체의 공동 창설자였다. 1948년 그는 다시 포크그룹 위버스(The Weavers)를 만드는데, 이 그룹은 레코드 계약관련 권리를 모두 잃기 전, 즉 1950년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색깔론적 마녀사냥 기간 전 기간 동안, ‘제나, 제나, 제나’(Tzena, Tzena, Tzena), 리드벨리의 포크 고전 ‘Goodnight Irene’ 그리고 ’On top of old smokey’ 등의 엄청난 히트로 포크 뮤직계의 선봉에 나섰다. 이후 시거는 미 하원의 반미활동 조사위원회 앞에서의 증언을 거부해 의회모욕죄로 고소당하기도 했으나, 이 고소는 1962년 기각되었다. 그때까지 그는 포크웨이즈 레코드사를 위해 수많은 솔로 앨범을 만들었고, 뱅가드 레코드사를 위해서 위버스의 더 많은 음악들을 작사 작곡했다. 1961년 그는 콜롬비아레코드사와 계약, 1960년대 말까지 소속아티스트로 활동을 지속했다. 피트 시거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의 중요 인물이자 떠오르는 신인들을 섭외하기도 했다. 그의 연이은 공연은 스페인 노래, 아프리카 노래, 흑인 노동요, 새로운 저항 노래, 그리고 포크의 고전들까지 폭넓은 장르와 스타일의 곡들을 포함한 다양한 레퍼토리로 채워졌다. 가끔은 즉흥적으로 개사된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며, 다양한 화성으로 변주해 관객들과 같이 다함께 노래 부르기를 실천하기도 했다. 간혹 다른 곡의 소스를 빌어다 개작한 것을 포함해 시거의 노래는 주위 동료나 후배들이 불러 히트한 경우도 많았다. Trini Lopez와 Peter, Paul&Mary를 위한 ‘If I had a hammer’, The Byrds가 노래한 ’Turn!, Turn!, Turn!’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Malvina Reynolds가 부른 ‘Little boxes’를 위시한 ’We shall overcome’, ’Guantanamera’ 외 다수 곡들도 유명하기는 마찬가지. 1970~80년대 환경관련 이슈에 몰두하고 앞장섰던 피트는 특히 1969년에 허드슨 강의 환경개선을 위해 클리어워터 범선을 띄우는데 관심을 표명하기도 했다. 그는 이어지는 야외콘서트, 페스티벌 순회공연 등의 바쁜 일정 속에서도 노동조합에서부터 반공해 법률제정까지 다양한 사건들의 주최가 되는 사회활동을 끊임없이 이어갔다. 그는 73세 생일 며칠 후인 뉴욕 주 Sparkhillshad Festival에서 자신의 전혀 노쇠하지 않은 건장함을 과시했다. 그리고 Baptist 교회 앞에서 임시무대를 오픈했을때 그는 ‘허드슨 강이 20년 전보다 훨씬 더 깨끗해졌다’고 말했다. 1990년까지 모던 포크의 선봉장 피트 시거는 케네디 센터로부터 최고의 국가적 예술인에게 수여하는 명예 상을 수여한 것을 비롯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적, ‘Harvard Arts Medal’ 획득하는 등 다방면에서 그의 공로를 인증 받았다. 그는 또 1996년에는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고의 트레디셔널 포크 앨범‘상을 수상했을 뿐 아니라, 1999년에는 쿠바를 여행하던 중 ’Felix Varela Medal’(환경보호와 반인종주의에 입각한 인도주의적 예술 활동에 대한 공로를 치하하는 쿠바 최고의 영예)을 수여했다. 음악인으로서 그는 그야말로 진솔, 정직, 온후, 순수했으며 지구촌 모든 이들의 아버지였다.
브릿팝 밴드 브릿팝 밴드
멤버 : 올리버 골드스타인, 본 올리버 멤버 : 올리버 골드스타인, 본 올리버
노래 : Janis Joplin (제니스 조플린)
샌프란시스코 히피 시절을 수놓은 로큰롤의 화신이자 그 무렵의 ‘백인 블루스’ 열풍에 불을 댕긴 여걸이다. 1943년 텍사스 포트아더에서 출생해 히피 라이프스타일에 끌린 채 1966년에 홀연히 샌프란시스코로 올라왔다. 사이키델릭 록 밴드 빅 브라더 & 홀딩 컴퍼니(Big Brother & Holding Company)에 리드 싱어로 합류해 마치 무당 같은 광기로 무대를 평정, 관객들의 전율을 일으켰다. 한 인터뷰에... 샌프란시스코 히피 시절을 수놓은 로큰롤의 화신이자 그 무렵의 ‘백인 블루스’ 열풍에 불을 댕긴 여걸이다. 1943년 텍사스 포트아더에서 출생해 히피 라이프스타일에 끌린 채 1966년에 홀연히 샌프란시스코로 올라왔다. 사이키델릭 록 밴드 빅 브라더 & 홀딩 컴퍼니(Big Brother & Holding Company)에 리드 싱어로 합류해 마치 무당 같은 광기로 무대를 평정, 관객들의 전율을 일으켰다. 한 인터뷰에서 “언젠가 한 콘서트에서 2만5천명 관객과 섹스하고 그런 뒤 집에 홀로 가는 내용의 노래를 쓸 것”이라고 한 말은 소외와 폭발로 점철된 히피 세대정서를 축약한다. 1968년 그룹을 나온 뒤는 비교적 잔잔한 블루스로 전향했지만, 마약과용으로 27살의 꽃다운 나이인 1970년에 불운한 생을 마감했다. 사후 발표된 노래 ‘Me and Bobby McGee’는 추모열기로 빌보드 정상을 점했다. 하지만 대표작은 ‘어떻게 저런 노래가 나오나?’하는 경탄을 부르는 1967년 앨범의 ‘Ball and chain’과 ‘Summertime’.
연주 : Dave Brubeck (데이브 브루벡)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작곡가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작곡가
소울음악의 빼놓을 수 없는 신화적 존재로 한때 ‘소울의 왕(King of soul)’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멤피스의 음반사 스택스 특유의 반 박자 늦은 백비트 곡이 다른 소울가수와의 차별 점이다. 흑인 소울가수 가운데 드물게 곡을 직접 쓴 싱어송라이터였으며,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의 1967년 시그니처 송 ‘Respect’도 그가 써서 1965년에 발표한 곡(차트순위 35위)이다. 롤링 ... 소울음악의 빼놓을 수 없는 신화적 존재로 한때 ‘소울의 왕(King of soul)’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멤피스의 음반사 스택스 특유의 반 박자 늦은 백비트 곡이 다른 소울가수와의 차별 점이다. 흑인 소울가수 가운데 드물게 곡을 직접 쓴 싱어송라이터였으며,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의 1967년 시그니처 송 ‘Respect’도 그가 써서 1965년에 발표한 곡(차트순위 35위)이다.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의 ‘(I can’t get no) Satisfaction’을 리메이크하는 등 1960년대 소울과 록이 동반자 사이임을 증명했다. 실제로 그는 출연진이 백인 뮤지션 일색이었던 1967년 몬터리 페스티벌에 출연해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1941년 조지아주 도손 출신으로 샘 쿡(Sam Cooke)에 영향 받아 가수활동에 입문했다. 전성기였던 1967년 12월에 비행기추돌로 27살에 요절했다. 유작으로 1968년 전미차트 정상을 밟은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는 톤을 낮춘 소울 발라드의 수작. 이외에 ‘I’ve loving you too long (To stop now)’와 ‘Try a little tenderness’도 잊을 수 없는 레퍼토리들이다.
기타리스트 기타리스트
멤버 : Dave Munden(드럼, 보컬), Eddie Jones, Joe Gillingham(키보드, 보컬), Jeff Brown 멤버 : Dave Munden(드럼, 보컬), Eddie Jones, Joe Gillingham(키보드, 보컬), Jeff Brown
비치 보이스는, 파도타기 놀이인 서핑의 즐거움을 담은 노래로 유명한 팝 그룹이다. 이들이 60년대 초반에 발표한 노래 ‘서핑 USA’는 지금도 여름만 되면 어김없이 전파를 탄다. 이들이 ‘록 역사의 전설’로 기록되고 있는 것은 66년에 발표한 < 펫 사운즈(Pet Sounds) >가 있기 때문이다. 그룹의 리더인 브라이언 윌슨의 독집이라 해도 무방한 이 앨범은 서프 음악의 종언을 알리기라도 하듯 갖가지 새로운 시... 비치 보이스는, 파도타기 놀이인 서핑의 즐거움을 담은 노래로 유명한 팝 그룹이다. 이들이 60년대 초반에 발표한 노래 ‘서핑 USA’는 지금도 여름만 되면 어김없이 전파를 탄다. 이들이 ‘록 역사의 전설’로 기록되고 있는 것은 66년에 발표한 < 펫 사운즈(Pet Sounds) >가 있기 때문이다. 그룹의 리더인 브라이언 윌슨의 독집이라 해도 무방한 이 앨범은 서프 음악의 종언을 알리기라도 하듯 갖가지 새로운 시도를 선보여 당시 팝 음악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브라이언은 더빙 반복을 통해 이 앨범의 사운드를 놀라울 만큼 두껍게 했고 종소리, 경적소리, 외침 같은 효과음을 많이 응용했다. 사람들은 이 같은 기술적 개가를 접하고 스튜디오 음악의 실체를 알기 시작했다. 폴 매카트니가 1967년, 팝 사상 최고의 명반인 <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 >를 만든 후 “만약 < 펫 사운즈 >가 없었더라면 이 앨범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실토했을 정도다. 톰 페티, 린지 버킹햄, 그룹 소닉 유스 등도 < 펫 사운즈 >가 음악을 듣는 방식 자체를 변화시켰다고 평가했다. 비치보이스를, 얼핏 < 서핑 USA >하나로 이름을 날린 그저 그런 그룹으로 기억하는 사람들로서는 적이 의아스러울 만한 부분이다. 이 앨범은 국내에 ‘그리운 고향’(‘앞마을 옛터에 빨래하는 순이...’로 시작되는)으로 번안된 ‘슬룹 존 B’와 같은 히트곡을 내긴 했지만, 출반 당시에는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음반을 낸 캐피톨 레코드사 측도 브라이언이 쓸데없는 음반을 만들었다고 불평했었다. 그래서인지 이 앨범이 90년 CD로 나왔을 때도 골든 레코드(50만장 판매)를 기록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 앨범 가치는 상승해 ‘전설적인 걸작’으로 자리잡았다. 근착 빌보드는 < 펫 사운즈 >발매 30주년을 기념해 CD 박스 세트를 오는 5월에 출시될 예정이라고 전하고 있다. 뒤늦게 이 작품이 명반임을 깨달은 캐피톨사가 음반의 의미를 기리려는 의지를 내비침으로써 이 박스 세트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캐피톨사는 이 앨범을 ‘상품’으로서뿐 아니라 ‘역사적 다큐멘트’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원곡을 리마스터한 것들 외에, 당시의 신곡 및 실패본들이 총망라돼 실릴 것으로 알려졌다. 많은 팬이 캐피톨사 측의 이런 노력에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 로이 버크허트는 이런 말을 했다. “그와 같은 일은 마땅히 레코드회사가 해야 한다고 본다. 백년이 지나면 비틀스, 롤링 스톤스, 비치 보이스는 우리 시대의 베토벤, 브람스, 바흐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옛 음반이 거의 재발매되지 않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밴드 : Fleetwood Mac (플리트우드 맥)
플리트우드 맥(Fleetwood Mac)은 이글스(The Eagles), 비지스(Bee Gees)와 더불어 70년대 후반 음반 시장의 산업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밴드이다. 1977년작 < Rumours >는 70년대 단일 뮤지션 최다판매 앨범의 기록을 갖고 있을 만큼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1967년 영국에서 결성된 플리트우드 맥은 1970년대 후반 ‘팝화된 록’으로 절정의 인기를 누렸지만 실상 음악적 시작은 블루... 플리트우드 맥(Fleetwood Mac)은 이글스(The Eagles), 비지스(Bee Gees)와 더불어 70년대 후반 음반 시장의 산업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밴드이다. 1977년작 < Rumours >는 70년대 단일 뮤지션 최다판매 앨범의 기록을 갖고 있을 만큼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1967년 영국에서 결성된 플리트우드 맥은 1970년대 후반 ‘팝화된 록’으로 절정의 인기를 누렸지만 실상 음악적 시작은 블루스였다. 존 메이올의 블루스브레이커스(John Mayall’s Bluesbreakers) 출신의 두 아티스트 피터 그린(Peter Green, 기타), 믹 플리트우드(Mick Fleetwood, 드럼)가 제레미 스펜서(Jeremy Spencer, 세컨기타), 존 맥비(John McVie, 베이스)를 영입하여 출발했다. 밴드는 1968년 < Peter Green’s Fleetwood Mac >을 발표하여 영국차트 5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둔다. 리듬 부분이 약하다는 판단 하에 세 번째 기타리스트로 대니 커완(Danny Kirwan)을 끌어들여 이후 그의 뛰어난 작곡에 힘입어 성공 행진에 가속을 더한다. 1960년대 말 블루스 붐을 타고 많은 싱글들이 영국차트 10위 권내에 진입했으며, 1970년대 중반까지 거침없는 인기가도를 질주한다. 하지만 밴드는 잦은 멤버 교체로 블루스 그룹으로서의 정체성을 차츰 상실해갔고 게다가 1970년 그룹의 간판인 피터 그린(Peter Green)이 그룹을 떠났고, 그린의 후임으로 크리스틴 퍼펙트(Christine Perfect)를 맞아들여 < Kiln House >를 발표하지만 곧 제레미 스펜서마저 밴드를 떠난다. 새 멤버 밥 웰치(Bob Welch)를 받아들인 후 음악은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변화는 후에 있을 대성공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들은 블루스 음악에서 벗어나 선율을 보강한 팝 성향의 앨범을 연이어 발표한다. < Future Games >와 < Bare Trees >는 이전 블루스에 익숙해 있던 영국 팬들을 혼란 속에 빠지게 했지만 미국시장에서 선전하며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크리스틴 퍼펙트(존 맥비와 결혼하여 이후 Christine McVie로 활동한다.), 밥 웰치, 존 맥비, 믹 플리트우드의 라인업으로 활동하던 이들은 다시 한 번 멤버 교체를 겪는다. 웰치 대신 듀오로 활동하던 스티브 닉스(Stevie Nicks)와 린지 버킹햄(Lindsey Buckingham)을 맞아 들인 것이다. 바로 이 5명이 거대한 성공을 창출한 플리우드 맥 전성기의 주역들이다. 1975년 겨울 미국차트를 장식한 앨범 < Fleetwood Mac >은 500만장이 팔려나가는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고 첫 싱글 ‘Over my head(20위)’에 이어 ‘Rhiannon(will you ever win)’과 ‘Say you love me’는 모두 11위에 올라 확실하게 성공의 발판을 다진다. 그리고 1977년 그 유명한 < Rumours >를 발표한다. 앨범은 2,500만장이 팔려나가 마이클 잭슨의 < Thriller >가 나오기 전까지 한 아티스트의 앨범으로서는 가장 많은 판매를 기록한 앨범으로 기네스북에 올랐으며, ‘Go your own way(10위)’에 이어 ‘Dreams(1위)’, ‘Don’t stop(3위)’, ‘You make loving fun(8위)’ 등 싱글 넷이 모조리 톱10을 차지하는 괴력을 발한다. 싱글과는 별도로 ‘Songbird’와 ‘The chains’도 널리 애청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정상의 자리에 오른 순간에 그룹의 결속력은 눈에 띄게 후퇴했다. 부부였던 존 맥비(John McVie)와 크리스틴 맥비(Christine McVie)는 파경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연인 사이었던 스티브 닉스(Stevie Nicks)와 린지 버킹햄(Lindsey Buckingham) 역시 애정에 금이 가 있었다. 결국 파경 관련 루머는 사실이 되어 맥비 부부는 이혼하고 스티브와 린지도 갈라서고 만다. 하지만 이런 좋지 않은 결속력으로도 이들은 1980년대 후반까지 < Tusk >(79년), < Mirage >(82년), < Tango In The Night >(87년)에 이르는 히트를 일구어내며 ‘헤쳐 모여’로 성공하는 아이러니를 이어갔다(결속력이 약하다고 음악이 약하지는 않은 법!). 이 시절에도 < Mirage >의 ‘Gypsy(12위)’나 < Tango In The Night >의 ‘Big love(5위)’와 ‘Little lies(4위)’처럼 록이든 발라드 풍이든, 밝은 듯 우울한 이들의 독특한 매력의 곡들은 국내에서도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 이들의 음악적 특성은 기타 톤에서 잘 드러난다. 맑은 톤에 울림을 주어 고음에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유지한다. 바로 이 점이 플리트우드 맥 음악이 록에 대한 거부감을 뚫고 대중을 스며들 수 있었던 주인(主因)으로 분석된다. 1988년 새로운 멤버들로 짜여진 플리트우드 맥은 1990년대 중반까지 라이브 활동으로 일관했고 1997년 < Rumours > 발매 20주년을 맞아 성공의 주역들이 다시 모여 < The Dance >를 발표, 50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저력을 발휘했다.
밴드 : The Love Affair (더 러브 어페어)
멤버 : 스티브 엘리스(Steve Ellis, 보컬), 렉스 브레일리(Rex Brayley, 기타), 모건 피셔(Morgan Fisher, 키보드), 모리스 바콘(Maurice Bacon, 드럼), 믹 잭슨(Mick Jackson, 베이스) 멤버 : 스티브 엘리스(Steve Ellis, 보컬), 렉스 브레일리(Rex Brayley, 기타), 모건 피셔(Morgan Fisher, 키보드), 모리스 바콘(Maurice Bacon, 드럼), 믹 잭슨(Mick Jackson, 베이스)
록 밴드 록 밴드
1960~1970년대 활동한 브리티쉬 락 밴드. 1960~1970년대 활동한 브리티쉬 락 밴드.
멤버 : 랜디 캘리포니아(Randy California, 기타, 보컬), 에드 캐시디(Ed Cassidy, 드럼), 존 로크(John Locke, 키보드), 마크 안데스(Mark Andes, 베이스), 제이 퍼거슨(Jay Ferguson, 보컬, 퍼커션) 멤버 : 랜디 캘리포니아(Randy California, 기타, 보컬), 에드 캐시디(Ed Cassidy, 드럼), 존 로크(John Locke, 키보드), 마크 안데스(Mark Andes, 베이스), 제이 퍼거슨(Jay Ferguson, 보컬, 퍼커션)
밴드 : Love (러브 (록 밴드),Love Revisited)
멤버: Johnny Echols, Mike Randle, David Green, David Chapple 멤버: Johnny Echols, Mike Randle, David Green, David Chapple
게리 브루커(Gary Brooker, 피아노, 보컬), 조쉬 필립스(Josh Phillips, 오르간), 저프 던(Geoff Dunn, 드럼), 저프 화이트혼(Geoff Whitehorn, 기타, 보컬), 맷 페그(Matt Pegg, 베이스) 게리 브루커(Gary Brooker, 피아노, 보컬), 조쉬 필립스(Josh Phillips, 오르간), 저프 던(Geoff Dunn, 드럼), 저프 화이트혼(Geoff Whitehorn, 기타, 보컬), 맷 페그(Matt Pegg, 베이스)
밴드 : Velvet Underground (벨벳 언더그라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우리 나라에서는 영화 ‘접속’에 삽입됐던 ‘Pale blue eyes’로 한번 대중들에게 소개되며 대중들의 관심을 모으기는 했었지만 그야말로 잠시 잠깐이었고, 밴드에로의 조명은 거의 이루어진 적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경제적 공황에 처했던 영국의 런던에서 펑크 록의 세계를 전세계적으로 확산시킨 섹스 피스톨스 이전에 펑크의 공격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정신이 꿈틀대며 기지개를 켠 곳은 런던에서 바...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우리 나라에서는 영화 ‘접속’에 삽입됐던 ‘Pale blue eyes’로 한번 대중들에게 소개되며 대중들의 관심을 모으기는 했었지만 그야말로 잠시 잠깐이었고, 밴드에로의 조명은 거의 이루어진 적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경제적 공황에 처했던 영국의 런던에서 펑크 록의 세계를 전세계적으로 확산시킨 섹스 피스톨스 이전에 펑크의 공격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정신이 꿈틀대며 기지개를 켠 곳은 런던에서 바다 건너 있는 미국의 도시 뉴욕 - 미국에서 가장 언더그라운드 적이면서도 가장 전위적인 모든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던, 변태적인 공격성과 시적인 낭만이 공존했던 온갖 변종들의 도시 - 이었다.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던 팝 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이 있었고, 그와 함께 시작한 밴드, 그 안에 펑크와 뉴 웨이브의 응어리를 내포하고 있던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있었다. 그 오리지널 멤버 중에 단 한 명의 허튼 멤버도 없었던 (이제는 거의 196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미미한 음반 판매량과 전혀 무관한 그 컬트적인 명성과 록 음악사에서의 확고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았던 밴드다. (이후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벨벳으로 약칭) 1960년대 중반은 록에 있어서 급진적인 성장과 실험의 기간이었다. 미국의 서부에서는 평화의 사랑의 물결이 넘실대며 파도치고 있었고, 그 속에서 록이 급진적인 성장과 실험을 하고 있던 때가 바로 1960년대 중반이다. 그리고 루 리드와 존 케일의 천재적인 영감으로 점철되어 있던 벨벳의 음악은 이러한 캘리포니아의 록 르네상스에 대한 뉴욕의 언더그라운드의 화답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이미 대중적인 스타의 길을 달리던 (사랑과 평화, 애시드를 주창하던) 캘리포니아의 많은 밴드들과 달리 벨벳은 사후에 그 음악적 영향은 인정받았지만 결코 스타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벨벳은 록의 에너지와 전위적인 사운드를 뒤섞은 혁신적인 음악과, 그들의 음악 속에서 말하는 방식으로 사회 리얼리즘의 새로운 단계를 소개했다. 그들의 시대에 벨벳은 컬트적인 청중들과 몇몇 평론가들에게 거대한 찬사를 받았지만 상업적인 성공은 거의 없었으며 많은 대중들은 그들의 음악에 무관심하거나 경멸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져 버리기에 벨벳의 음악은 많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벨벳이 서거한 후에 점점 늘어나는 그들의 숭배자들은 오늘날까지 그들의 명성은 계속 확산되고 있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벨벳은 1960년대 뿐 아니라 지금까지 전 시대를 통해 가장 중요한 밴드로 알려졌다. 벨벳의 음악이 가지는 거대한 의미는 부진했던 그들의 음반 판매량으로는 측정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평론가들은 그들을 펑크와 이어지는 뉴 웨이브에 끼진 그들의 거대한 영향력으로 그들을 극찬하고 있으며 사실 벨벳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러한 움직임에 대한 열쇠의 역할을 했다.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내는 음악이라... 그것만큼 음악의 역사에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또 무엇이 있을까. 하지만 이런 기본적인 의미론적인 시각으로만 벨벳을 바라보는 것은 벨벳 이야기의 작은 한 부분이고 자칫하면 벨벳의 음악적인 매력을 놓칠 수도 있는 우려를 낳기도 한다. 벨벳은 그들의 음악과 가사에 있어서 결코 그 어느 것과도 타협하지 않는 자세를 지켰다. 그리고 다음 세대 음악 작업의 영감을 된 거칠고 황량한 침울함과 단순하고 미니멀한 원시주의를 지지하고 신봉했다. 벨벳의 음악에는 컬러풀하고 귀를 사로잡는 음악적 파노라마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잘 짜여진 노래들은 보다 인간적인 느낌도 놓치지 않았다. 벨벳의 멤버들 중에서 이러한 음악적 방향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기타리스트이자 송 라이터였던 루 리드였다. 시니컬한 듯 따뜻하며 락킹하면서 읊조리는 보컬로 청중을 압도하는 그 가사들을 쏟아내던, 그리고 지금까지도 벨벳의 요소들을 그의 솔로 작업 속에서 이어가고 있는. # 노란색 바나나가 시대의 아이콘이 되기까지 벨벳의 서거 이후 꾸준한 솔로 작업으로 어둠의 왕자(Prince Of Darkness)라는 닉네임을 얻기도 했던 루 리드는 30년이 넘는 세월을 많은 음악적 변화 속에서도 독특한 개성과 창조적 영혼을 간직하고 있는 닐 영과 그리고 팝 계의 카멜레온 데이빗 보위와 함께 록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도 개성 있는 뮤지션이다. 데이빗 보위와 비슷한 노선을 걸어왔지만 결코 메이저에 몸을 맡기지 않는 은둔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루 리드는 1942년 3월 12일 중산층 가정에서 회계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유태인 소년은 어렸을 때부터 록 음악에 관심을 보이며 롱아일랜드의 10대 소년이었던 1950년대 말에는 쉐이즈(The Shades)라는 밴드에서 두 왑 스타일의 싱글을 녹음하기도 했다. 뉴욕의 시라큐즈 대학을 졸업하면서 그는 픽 윅(Pick Wick) 레코드 회사에 취직하여 음악을 만드는 일을 한다. 비트닉 문화와 델모어 슈와츠(Delmore Schwartz)의 시, 재즈 음악에 매력을 느끼게 되면서 픽 윅 레코드에서의 일에 싫증을 느낀 루 리드는 1964년 그가 썼던 ‘The ostrich’라는 곡을 계기로 만나게 된 존 케일과 함께 벨벳으로 발전할 전위 부대를 만든다. 이 두 명의 남자가 만든 전위 부대의 멤버들은 루 리드(보컬, 기타), 존 케일(기타, 비올라, 키보드), 스털링 모리슨(베이스), 앤거스 맥라이스(Angus Maclise, 드럼)였다. 이 중 주로 봉고를 연주하던 퍼커션 주자였던 드러머 앤거스는 공연의 리허설에 나타나지 않는 등의 태도로 밴드의 신뢰를 잃어 스털링 모리슨의 친구 여동생이던 모린 터커(Maureen Tucker)로 교체된다. 이렇게 짧았던 생애를 함께 할 멤버들이 모이게 됐고, 존 케일과 루 리드는 토니 콘라드(Tony Conrad)가 쓴 < Velvet Underground >의 카피본을 발견하고 그 느낌과 어감이 좋다는 이유로 이것을 팀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음악적 통찰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루 리드와 음악적인 역량이 뛰어났던 존 케일의 탄탄한 음악적 배경에서 만들어진 혁신적인 음악을 가지고 벨벳은 그리니치 빌리지 주변의 다양한 클럽들에서 공연을 시작한다. 이 당시에 한 클럽에서는 ‘Black angels death song’을 연주한 후에 쫓겨나는 일을 당하기도 하는데, 어쨌든 벨벳은 당시 뉴욕 언더그라운드의 대표적인 클럽이던 맥스 캔사스 시티 (Max`s Cansas City) -후에 이 곳에서의 그들의 라이브를 담은 앨범을 발표하기도 한- 에 데뷔를 한다. 맥스 캔사스 시티는 많은 뉴욕 아방가르드와 언더그라운드의 명사들이 붐비는 사교의 장이었는데, 맥스에서의 데뷔 후 벨벳은 바로 이 곳의 단골이던 앤디 워홀(Andy Warhol)과 세기의 만남을 하게 된다. 앤디 워홀은 곧 벨벳의 음악에 주목을 하며, 이들의 후원자이자 매니저가 되기를 자청하며 자신이 알고 있던 아름다운 독일의 모델이자 배우였던 니코를 벨벳에 참여시켰고, 1966년 자신의 멀티 미디어 사이키델릭 쇼 ‘Exploding Plastic Inevitable Media’에 벨벳을 출연시키기도 하는데, 이 전위적인 쇼에서 벨벳은 사이키델릭한 분위기의 소음이 뒤섞인 무대를 만들었다. 또한 벨벳의 재정적 후원을 맡은 앤디 워홀은 곧 자신의 프로듀스로 당시엔 그저 찬밥 신세였고, 후대에 록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인정받게 될 벨벳의 1집 < Velvet Underground & Nico >를 제작한다. 존 케일과 루 리드는 벨벳 이후 자신의 솔로 작업을 꾸준히 하며 각각 조금은 다른 영역에서 그 음악적 입지를 굳혀갔다. 벨벳 당시 맛보지 못했던 어느 정도의 상업적 성공과 함께. 그 자신의 아티스트적인 색깔을 가지고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펼쳐나간 존 케일과는 달리 루 리드는 벨벳에서 보여주었던 음악적 요소들을 자신의 솔로 작업에서도 지속적으로 사용했다. 초창기의 벨벳 디바 니코는 루 리드, 존 케일, 브라이언 이노 등의 도움으로 < Chelsea Girl > -니코는 벨벳에 합류하기 이전 앤디 워홀의 동명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등의 앨범을 꾸준히 발표했지만 1988년 사고로 사망했다. 평론가들과 대중들의 벨벳을 재조명하며 뒤늦게 그 업적을 치하하며, 1980년대 이후의 수많은 밴드들이 그들의 음악의 빚을 벨벳에게 돌리는 분위기 속에서 1993년, ‘덕 율을 제외한’ 오리지널 멤버들이 모두의 상상을 뒤엎는 재결성을 하면서 투어를 했는데, 모르긴 몰라도 벨벳이 마지막 공연을 했을 당시 태어났을까 말까한 어린 팬들이 엄청난 환호를 던졌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존 케일과 루 리드 사이의 오래된 상처가 다시 돋기 시작했고, 이후 1996년 벨벳이 록 앤 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기 위해 모인 것 외에 더 이상의 벨벳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안타깝게도 스털링 모리슨은 이 감격스러운 일은 몇 달 앞두고 사망했다.
멤버 : 로드 아전트(Rod Argent, 보컬, 오르간), 콜린 블런스톤(Colin Blunstone, 보컬), 크리스 화이트(Chris White, 베이스기타), 휴 그런디(Hugh Grundy, 드럼), 폴 앳킨슨(Paul Atkinson, 기타) 멤버 : 로드 아전트(Rod Argent, 보컬, 오르간), 콜린 블런스톤(Colin Blunstone, 보컬), 크리스 화이트(Chris White, 베이스기타), 휴 그런디(Hugh Grundy, 드럼), 폴 앳킨슨(Paul Atkinson, 기타)
밴드 : Santana (산타나 (라틴 락 밴드))
20세기 마지막 팝 음악의 유행은 음반산업이 주조했든 아니든 정열의 라틴음악이 장악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최근에 발표된 제42회 그래미상 후보자 명단이 웅변한다. ‘Livin’ la vida loca’의 주인공 리키 마틴(Ricky Martin)을 비롯 제니퍼 로페즈(Jenifer Lopez), 마크 앤소니(Marc Anthony), 루 베가(Lou Bega) 등 지난해 라틴 열풍을 주도했던 신성(新星)들이 그... 20세기 마지막 팝 음악의 유행은 음반산업이 주조했든 아니든 정열의 라틴음악이 장악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최근에 발표된 제42회 그래미상 후보자 명단이 웅변한다. ‘Livin’ la vida loca’의 주인공 리키 마틴(Ricky Martin)을 비롯 제니퍼 로페즈(Jenifer Lopez), 마크 앤소니(Marc Anthony), 루 베가(Lou Bega) 등 지난해 라틴 열풍을 주도했던 신성(新星)들이 그래미상의 주요 부문에 공천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의 당선 가능성은 희박하다. 다름 아닌 ‘라틴 록의 거장’ 카를로스 산타나가 버티고 있어서다. 올해로 52세인 그는 1999년에 발표한 앨범 < Supernatural >로 그래미 최고의 영예인 ‘올해의 앨범’, ‘올해의 노래’, ‘올해의 레코드’ 부문을 포함, 무려 11개 부문의 후보로 지명되는 기염을 토했다. < 뉴스위크 >는 최신호에서 1998년 밥 딜런에 이어 이번 그래미 시상식은 산타나의 컴백 무대가 될 것이라며 그의 압승을 예견했다. 뉴 밀레니엄을 전후로 빌보드 차트를 장기간 점령한 빅히트 싱글 < Smooth >와 500만장이라는 가공할 음반판매량이 화려한 재기를 견인했다. 음악팬들은 10대 틴 음악의 싹쓸이 판에서 모처럼 대가의 위용을 체험하고 있다. 멕시코 태생의 기타리스트 산타나는 1966년 히피 문화의 본고장 샌프란시스코에서 ‘산타나 블루스 밴드’란 이름으로 음악 여정을 시작했다. 그는 1969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출연, 전설적인 연주곡 ‘Soul sacrifice’를 들려주어 일대 주목을 받았다. 산타나로 그룹명을 바꾼 그는 같은 해 셀프 타이틀 앨범에서 당시의 주도적 경향인 사이키델릭에 라틴 비트, 아프리카 리듬, 그리고 블루스를 이입한 음악을 연주했다. 산타나는 그러나 1970년대가 열리면서 1960년대 말을 어지러이 수놓았던 사이키델릭과 블루스가 퇴조하자 라틴 리듬과 정통 로큰롤을 뒤섞은 이른바 ‘라틴 록’으로 조정을 꾀했다. 1970년에 발표되어 지금도 명반으로 남아있는 2집 < Abraxas >가 바로 처음 라틴 록의 정체를 천하에 고한 작품이었다. 이 음반의 수록곡 ‘Black magic woman/Gypsy queen’과 ‘맘보의 왕’ 티토 푸엔테(Tito Puente)의 곡을 재해석한 ‘Oye como va’는 각각 차트 4위, 13위에 랭크되며 히트했다. 특히 그가 이 음반 수록곡 ‘Samba pa ti’에서 구사한 애절한 기타연주는 국내에서 그의 명성을 한층 드높인 계기를 마련했다. 발라드 선호의 우리 정서와 심금을 울리는 그의 라틴기타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 것이다. 이 같은 어울림은 기타에 멜로디를 집어넣은 카를로스의 연주기법 때문에 가능했다. "나의 음악 키워드는 음(音)으로 이야기하듯 말하는 것이다. 기타를 통해 나는 노래하고 있다" 라틴 록 보석 ‘Europa’가 담겨있는 1976년 앨범 < Amigos >도 앨범차트 10위에 올랐고, 그해 일본 평론가협회 제정 최우수 앨범 상을 받았다. 지금도 기타지망생들은 ‘Europa’와 산타나의 이름을 등식화한다. 이듬해 발표한 작품 < Moonflower >에서도 좀비스(Zombies)의 명곡을 라틴 사운드로 새 단장한 ‘She’s not there’로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카를로스 산타나의 ‘절충주의’ 음악은 한계를 드러냈다. 그의 맛깔스런 기타 연주는 계속해서 위용을 과시했지만, 순하게 들리는 태생적 한계를 드러내면서 뒷심은 뚝 떨어졌다. 새로운 세대의 변화무쌍한 감성을 파고드는 필살(必殺)의 포인트를 상실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시대분위기에 편승하여 팝 성향이 강화된 1979년 앨범 < Marathon >을 발표한 데 이어 1980년 재즈 록 앨범 < Swing Of Delight >, 1987년 명상 앨범 < Blues For Salvador > 등 장르를 따지지 않는 합종연횡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비록 장기외유였지만 ‘록의 경계선을 허문’ 고유업적이 빛이 바랜 건 아니었다. 1980년대 이후의 활동도 사실 ‘퓨전’이란 그의 평생 과업의 선상에 있었다. 1998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당당히 들어섰고, 같은 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도 입적되었다. 마침내 그의 ‘장르 뒤섞기’ 실험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산타나는 지난해 < Supernatural >로 역사에 안치되기를 거부하고 현실무대로 화려히 컴백했다. 아리스타 레코드사의 파워 맨 클라이브 데이비스(Clive Davis)가 직접 지휘봉을 잡고 만든 이 앨범에는 데이브 매튜스, 로린 힐, 와이클레프 진 그리고 매치박스 20의 롭 토마스 등 신세대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했다. 산타나는 평소 자신을 존경해온 이들의 도움으로 상기한 신진 라틴스타들에 못지 않은 활기를 내뿜었다. ‘신구세대의 통합’을 목표로 산타나와 데이비스 사장이 제휴하여 치밀히 계획한 전략의 결과였다. 이 작품이 구현한 절충과 타협의 미학은 젊은 층과 기성세대를 막론했다. 올해 그래미상은 그를 위한 잔치가 될 게 거의 확실해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산타나 본인은 성공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는 앨범 < Supernatural >이 자신의 계획 중 일부분이라고만 했다. 원대한 포부를 시사한다. 하지만 그의 마스터플랜은 인기나 성공이 아니라 ‘음악의 완성’이다.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에서 이미 진실함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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